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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보봉사의 소식 댓글:  조회:2758  추천:39  2009-04-14
2009년 4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강서 보봉사 불학원에서는 미얀마의 마흠덕존자를 모시고 삼개월 집중수행과 아비담마강의가 있게 되였다.    4월 10일 見面會에서...가운데 분이 마흠덕존자이시고 그 왼켠의 분이 보봉사의 주지스님인 연진법사임.  수행에 참석할 수행자분들.  올해는 지난 두해보다 사람인수가 훨씬 초과하여 120여명이나 되였다. 그 중에 비구 비구니가 거이 절반이나 되였다!  남방불교가 중국땅에서도 이미 활발히 전개되고 있음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된다.    우바이  비구니  사람이 넘쳐나 큰 법당에도 안배하였다.  청신남들  한시간 좌선 그리고 한시간 경행으로 대체하면서 하루 12시간의 수행이 이어진다....  역시 미얀마에서 오신 비구 --  이번 집중수행에 다섯분의 존자가 참석.  불학원복도에서 경행을 하면서 바라본 뒷산풍경  새벽 4시에 일어나 한시간 좌선하고 30분 아침운동을 한다.  저녁에는 아비담마강의 -- 석달을 거쳐 아비담마전부를 마칠계획이다. 아비담마가 있는곳에는 邪敎가 없다고 한다. 아비담마는 그만큼 진실을 말해주고 있기때문이다.  강의를 마치고...  수행자의 세계.....
355    중국 근대의 선종의 발상지--운주산 진여사 댓글:  조회:3002  추천:54  2009-03-16
 운주산 진여사는 중국의 근대의 고승인 허운스님께서 백세가 넘어서 머물면서 일으킨 도량이다. 산 아래에서 걸어올라가자면 적어도 2시간 거리를 옛날에는 스님들이 산에서 죽대를 베어 산아래에 메고내려와서는 그것을 판 돈으로 고생스레 세운 수행처이다.  운주산 진여사는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운주산정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분지안은 평평한 넓은땅이 펼쳐진 밭이였다. 물론 수행자들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분지에 들어서기전 조주각이라는 기념문이 있었는데 옛날에 조주스님이 80세에 이르도록 참학을 끊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것으로 80세고령에 운주산 진여사를 방문한 기념이였다.  조주각에서 바라본 운주산진여사전경      때는 매화꽃이 한창이였다.    수행자들이 자체로 농사를 짓는 땅  진여사뒷울안의 고목도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진여사도 역시 1500년?의 고찰  선방에서 나오는 수행자들-- 선방은 사찰의 핵심부분이다. 선방이 없는 사찰은 어찌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찰이 아니다. 운주산 진여사의 선방은 예로부터 조사들의 엄격한 선방원칙으로 전승되여 내려온 중국에서도 보기힘든 신성한 수행도량이다. 한가지 원칙이라면 여성은 절대로 이 선방에 한 발자욱도 들여놓을수가 없다는 점이다.  선방내부--참선수행은 이렇게 선방에서 자고 먹고 수행하는 것이다.  위양종의 패말--보봉사의 패말은 이와 달리 임제종의 패말이다. 종파마다 패말의 모양이 다르다고 한다.  운주산풍경  운주산은 일년사시절 저렇게 안개로 휩싸여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로 운주산이라 명명  불호존자를 모시고 허운스님의 기념관으로...    120세에 진여사에서 입적하신 허운스님의 보귀한 사진자료들  운주산정상은 겨울이면 하도 바람이 강하여 기와를 모두 붙여놓아야만 바람에 날려가지를 않는다고 한다.  수행자들이 모아놓은 장작더미  진여사에서 우연하게 발견한 홍일대사의 필적  
354    마조의 도장--강서 보봉사 댓글:  조회:2908  추천:54  2009-03-16
강서성 보봉사는 천여년의 역사로 유서깊은 고찰이며 마조의 도장으로 이름있는 곳이다.  보봉사는 마조 도일의 수행도량  천여년의 역사의 보봉사는 옛날에는 석문고찰이라고 이름난 곳이다. 밥먹는 시간을 알리는 목어를 일곱곳에서 두드릴만큼 수행인이 몰려든 곳이라고 한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유일하게 석문으로만 사찰을 드나들었는데 일단 석문만 닫으면 누구도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한다. 물론 중국의 선풍은 예로부터 수행자들이 산속에서 자체로 땅을 일구면서 수행을 겸해 하였다.    웅장한 대웅보전  대웅보전앞뒤의 고목이 보봉사의 역사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대문밖 방생지에서 바라본 보봉사--뒤는 높은 산이 의자처럼 보봉사를 받쳐주었는데 참 풍수적으로 묘한 곳이라고 한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본 뒷산너머 풍경--여기도 자연보호구라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여 원시림이나 다름없었다.  뒷산 봉우리-- 아마 저 봉우리를 보구 보봉사라는 이름을 짓지 않았나 생각한다.  강서성에서 유일한 불학원이 보봉사에 있었다.  강서불학원전경--오른켠 2층베란다에서 경행하고 있는 스님이 바로 이번 함께 동행한 불호존자  불학원2층에서 바라본 앞산풍경  대웅보전내 불상  마조 도일스님의 사리탑  여기는 마조의 도량이였다.
353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댓글:  조회:2845  추천:65  2009-03-01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잘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실은 잘 감동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게 플러스가 되는의미를 찾을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풍부한감동으로 가득찬 마음이기 때문 입니다.하지만 감동하는 마음이란 결코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사실은 누구나 셀 수 없이 많은 감동을거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단지 자신이 감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죠.자신이 감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면 감동은 그저 감동으로끝날 뿐 풍부한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그러니까 무언가에 감동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그것이 아무리 작은 감동이더라도감동하고있는 자신을 칭찬해 주세요.칭찬받은 감동이라면 그냥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마음에머물러 작으나마 풍부한 열매를 맺습니다.작은 감동의 열매가 맺힐 때마다 당신은 더욱더많은 것에 감동할 수 있게 됩니다. 살아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입니다.감동할 것 투성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고 지내십시오.감동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이걸 아셨다면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참으로 마음이 행복해 지는 책에서- ♬ Menexedenia / Maria Parandourihttp://blog.daum.net/ab0507/13130880
352    늙은 아버지의 질문 댓글:  조회:2393  추천:49  2009-02-23
늙은 아버지의 질문 82 세의 노인이 52 세된 아들과 거실에 마주 앉아있었다. 그 때 우연히 까마귀 한마리가 창가의 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정하게 말했다. “까마귀에요.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데 조금 후 다시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시, “까마귀라니까요.”노인은 조금 뒤 또 물었다. 세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이 났다. “글쎄 까마귀라구요.” 아들의 음성엔 아버지가 느낄 만큼 분명하게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네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그만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마귀, 까마귀라구요. 그 말도 이해가 안돼요.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해 하세요?” 조금 뒤였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가 묻고 찢어진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그 일기장을 펴서 아들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말했다. 아들은 일기장을 읽었다. 거기엔 자기가 세 살짜리 애기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 하고 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23번을 똑 같이 물었다. 나는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똑같은 대답을 23 번을 하면서도 즐거웠다. 아들이 새로운 것에 관심이 있다는 거에 대해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 -
351    사람의 목숨이란 참으로 지극히 짧아.... 댓글:  조회:2676  추천:45  2009-02-09
160) 아란나경(阿蘭那經) 제 19 [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여러 비구들이 점심 공양을 마친 뒤에 강당에 모여 앉아, 이러한 일을 의논하였다. "여러분,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범행(梵行)을 행해야 합니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는 낮에 활동하는 곳에 계시면서, 사람들보다 뛰어난 청정한 천이(天耳)로써, 여러 비구들이 점심 뒤에 강당에 모여 앉아 이러한 일을 의논하는 것을 들으셨다. "여러분,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범행(梵行)을 행해야 합니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들으신 뒤에, 해질 무렵[?時] 연좌에서 일어나 강당으로 가시어, 비구들 앞에서 자리를 펴고 앉아, 여러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들은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 무엇하러 강당에 모여 앉았느냐?" 그 때 여러 비구들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 비구들은 점심 공양을 마친 뒤에 강당에 모여 앉아, 이러한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범행을 행해야 합니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 일을 의논하였고, 이 일로 강당에 모여 앉았습니다." 세존께서 찬탄해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들아, 너희들이 이런 말을 하였구나. '여러분,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합니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하여야 하고 범행(梵行)을 행하여야 합니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나도 또한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니라.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하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하여야 하고 범행을 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구나.' 무슨 까닭인가? 먼 옛날에는 중생이 있어 수명이 8만 세였다. 비구들아, 사람의 수명이 8만 세였을 때, 이 염부주는 지극히 크고 풍족하고 즐거우며, 재물과 보배가 많았고, 촌 읍들은 닭이 한 번에 날아갈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비구들아, 사람의 수명이 8만 세였던 때, 여자는 나이 5백 세가 되어야 시집갔었다. 비구들아, 사람의 수명이 8만 세였던 때, 병으로는 오직 추위 더위 대소변 욕심 굶주림 늙음이 있을 뿐 더 이상 다른 근심은 없었다. 비구들아, 사람의 수명이 8만 세였던 때에 구뢰바(拘牢婆)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전륜왕이 되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네 종류의 군사가 있어 천하를 바르게 다스렸고, 자기 자신도 자재로웠으며, 법다운 법왕으로서 7보를 성취하였었다. 그 7보란 윤보(輪寶) 상보(象寶) 마보(馬寶) 주보(珠寶) 여보(女寶) 거사보(居士寶) 주병신보(主兵臣寶)이니, 이것을 7보라 한다. 그에게는 용모가 단정하고, 용맹하며 두려움이 없는 천 명의 아들이 있어 능히 다른 무리들을 항복받았으며, 반드시 이 일체의 땅과 나아가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다스릴 만하였다. 그들은 칼이나 몽둥이를 쓰지 않고, 법으로써 가르치고 명령하여 안온을 얻게 하였다. 비구들아, 구뢰바왕에게는 범지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아란나(阿蘭那)이고 큰 장자였다. 그는 부모가 천거한 바로서, 생을 받음이 청정하고, 나아가 7대 동안 부모의 종족이 끊어지지 않고, 대대로 악이 없었으며, 널리 듣고 모두 기억해 네 가지 경전을 환히 외우며, 인(因) 연(緣) 정(正) 문(文) 희(戱), 5구설(句說)을 깊이 통달하였다. 비구들아, 범지 아란나에게는 한량없는 백천 마납마(摩納磨)6)가 있었다. 6) 팔리어 manava의 음역어이고 바라문 청년, 혹은 바라문 동자를 뜻한다. 마납(摩納) 혹은 마나바(摩那婆) 마납바(摩納婆 )로 음역하기도 한다. 범지 아란나는 한량없는 백천 마납마들을 위하여, 어떤 일 없는 곳에 머무르면서 경서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때 범지 아란나는 혼자서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편안히 앉아 깊은 사유(思惟)에 잠겨 있다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하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하여야 하고 범행을 행하여야 한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구나. 나는 차라리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자'. 이에 범지 아란나는 몇 나라의 여러 마납마 처소에 가서 말하였다. '여러 마납마들이여, 나는 혼자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편안히 앉아 깊은 사유(思惟)에 잠겨 있다가,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하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하여야 하고 범행을 행하여야 한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다. 나는 이제 차라리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자. 여러 마납들이여, 나는 이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고자 한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몇몇 나라의 마납마들이 아뢰었다. '존사(尊師)시여, 저희들이 아는 것은 모두 스승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만일 스승님께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시겠다면, 저희들도 또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겠습니다.' 이에 범지 아라나는 그 뒤에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웠다. 그 몇몇 나라의 여러 마납마들도 또한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그 스승 범지 아란나를 따라 도를 배웠다. 여기서 스승 아란나와 스승 아란나의 제자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 때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여러 마납마들이여,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하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범행을 행하여야 한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구나.' 그 때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였다. '여러 마납마들이여, 참으로 기이하고 참으로 기이하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범행을 행하여야 한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세상 사람들은 법다운 행에 대해서, 의로운 행에 대해서, 선한 행에 대해서, 묘한 행에 대해서 하는 것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구나'.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풀잎 위의 아침 이슬방울이 해가 뜨면 곧 사라져 잠깐 존재할 뿐 오래가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아침 이슬과 같아서 얻기도 매우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의미가 없으며, 큰 고통과 재환(災患)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큰비가 올 때 떨어지는 물방울에 거품이 일어나 혹은 생겼다가 혹은 사라지는 것처럼, 이와 같이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물거품과 같아서 매우 얻기도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작대기를 물 속에 던지면 들어갔다가 재빨리 다시 나오는 것처럼, 이와 같이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작대기를 물 속에 던지면 도로 나오는 시간이 너무나 빠른 것과 같아서 매우 얻기도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새로 만든 질그릇을 물에 담갔다 곧 꺼내면 바람과 열에 부딪쳐 재빨리 마르는 것과 같이,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새로 만든 질그릇을 물에 적셨을 때 재빨리 마르는 것과 같아서 매우 얻기도 어렵지만 너무도 짧아 아무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조그만 살점을 큰 가마솥 물 속에 넣고, 밑에서 불을 세게 때면 어느새 다 타 버리는 것처럼,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살점과 같아서 매우 얻기도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아무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도적을 묶어서 사형장으로 보내 죽이려고 할 때, 떼어 놓는 발길 따라 걸음걸음 죽음으로 나아가고, 걸음걸음 목숨이 줄어드는 것처럼,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도적을 묶어 사형장으로 보내 죽이는 것과 같아서, 매우 얻기도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아무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백정이 송아지를 끌고 가서 죽이려 할 때, 떼어놓는 발걸음 따라 걸음걸음 죽음으로 나아가고, 걸음걸음 목숨이 줄어드는 것처럼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소를 끌고 가서 죽이는 것과 같아서 매우 얻기도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아무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베를 짤 때에 그 오가는 씨실을 따라 베가 완성되면 곧 마치는 것처럼,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베를 짜서 마치는 것과 같아서 매우 얻기도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아무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산골짜기 물이 갑자기 불어나서 모든 것을 휩쓸고 내려갈 때 물이 빠르게 흘러 잠시도 멈추지 않는 것처럼,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빨리 달려 잠시도 머무름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재빨리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얻기도 매우 어려우며, 지극히 짧아 아무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마치 어두운 밤에 지팡이를 땅에 던지면, 혹은 거꾸로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바로 떨어지기도 하며, 혹은 다시 옆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깨끗한 곳에 떨어지기도 하며, 혹은 깨끗하지 못한 곳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마납마들이여, 중생들은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욕에 묶여 혹은 지옥에 나기도 하고, 혹은 축생에 나기도 하며, 혹은 아귀에 나기도 하고, 혹은 천상에 나기도 하며, 혹은 인간에 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마납마들이여, 사람의 목숨도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땅에 던지는 것과 같아서, 얻기도 매우 어렵지만 지극히 짧아 아무 의미가 없다. 큰 고통과 재환만 있는데 그 재환은 너무도 많으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나는 세상에서 탐욕을 끊고 마음에 다툼이 없어, 남의 재물이나 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보아도 탐욕을 일으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니, 나는 탐욕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앴다. 이와 같이 성냄과 수면(睡眠)과 들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나는 세상에서 의심을 끊고 미 혹을 막아 모든 착한 법에 대해서 망설임이 없으니, 나는 의혹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앴다. 마납마들이여, 너희들도 또한 세상에서 탐욕을 끊고 마음에 다툼이 없어, 남의 재물과 여러 가지 생활 도구를 보더라도 탐욕을 일으켜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아야 하리니, 너희들도 탐욕에 있어서 그 마음을 깨끗이 없애도록 하라. 이와 같이 성냄과 수면과 들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너희들은 세상에서 의심을 끊고 미혹을 막아, 모든 착한 법에 대해서 망설임이 없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마납마들이여, 나는 자애로운 마음[慈心]으로 1방을 가득 채워 성취하여 노닐고, 이와 같이 2 3 4방과 4유 상 하 일체를 가득 채운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잘 닦아 일체 세간을 두루 채우고 성취하여 노닌다. 이와 같이 슬픈 마음[悲心]과 기쁜 마음[喜心]도 마찬가지이며, 평정한 마음[捨心]으로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잘 닦아 일체 세간을 가득 채우고 성취하여 노닌다. 마납마들이여, 너희들도 또한 자애로운 마음으로 1방을 가득 채워 성취하여 노닐고, 이와 같이 2 3 4방과 4유 상하 일체를 가득 채우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잘 닦아 일체 세간을 가득 채우고 성취하여 노닐어야 한다. 슬픈 마음과 기쁜 마음도 마찬가지이며, 평정한 마음으로 맺힘도 없고 원망도 없으며, 성냄도 없고 다툼도 없이 지극히 넓고 매우 크며, 한량없이 잘 닦아 일체 세간을 가득 채우고 성취하여 노닐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다시 스승 아란나는 제자들을 위하여 범세법(梵世法)을 연설하였다. 스승 아란나가 범세법을 연설했을 때, 여러 제자들 중에 법을 두루 갖추고 받들어 행하지 않은 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목숨을 마친 뒤에 사왕천(四王天)에 나거나, 혹은 삼십삼천에 나며, 혹은 험마천에 나거나, 혹은 도슬다천에 나며, 혹은 화락천에 나거나, 혹은 타화락천에 태어났다. 스승 아란나가 범세법을 연설했을 때, 여러 제자들 중에 법을 두루 갖추고 받들어 행하는 자가 있으면, 4범실(梵室)7)을 닦아 탐욕을 버리고,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는 범천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스승 아란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7) 자 비 희 사의 4무량심(無量心)을 말한다. 이 네 가지를 닦으면 대범천(大梵天)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나는 제자들과 함께 뒷세상에 함께 가서 한곳에 태어나지 않으리라. 나는 이제 차라리 증상자(增上慈)를 닦으리라. 증상자를 닦으면 목숨을 마친 뒤에 황욱천(晃昱天)에 태어날 것이다.' 스승 아란나는 그 뒤에 다시 증상자를 닦았다. 증상자를 닦았으므로 목숨을 마친 뒤에 황욱천에 나게 되었다. 스승 아란나와 그 모든 제자들은 도를 배운 것이 헛되지 않아 큰 과보를 증득하였다. 비구들아, 너희들의 생각에는 어떠하냐? 옛날의 스승 아란나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생각을 말라. 왜냐 하면 비구들아,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그는 곧 지금의 나이니라. 나는 그 때 스승 아란나라고 이름하였고, 한량없는 백천의 많은 제자가 있었으며,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범세법을 연설하였다. 내가 범세법을 연설했을 때, 모든 제자들 중에 법을 두루 갖추고 받들어 행하지 않은 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목숨을 마친 뒤에 사왕천에 나기도 했고, 혹은 삼십삼천에 나기도 했으며, 혹은 험마천(摩天)에 나기도 했고, 혹은 도슬다천(兜瑟?天)에 나기도 했으며, 혹은 화락천(化樂天)에 나기도 했고, 혹은 타화락천(他化樂天)에 나기도 했다. 내가 범세법을 연설했을 때, 모든 제자들 중에 법을 두루 갖추고 받들어 행하는 자가 있으면, 4범실(梵室)을 닦아 탐욕을 버리고,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는 범천에 태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 때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제자들과 함께 뒷세상에 함께 가서 한곳에 태어나지 않으리라. 나는 이제 차라리 다시 증상자를 닦으리라. 증상자를 닦으면 목숨을 마친 뒤에는 황욱천에 태어날 수 있으리라.' 그 때 나와 제자들은 도를 배운 것이 헛되지 않아 큰 과보를 얻었느니라. 나는 그 때에 내 자신도 요익하게 하였고 남도 요익하게 하였으며, 많은 사람을 요익하게 하였다. 세간을 가엾이 여겼으며, 하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여 의(義)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였었다. 나는 그 때에는 설법하였으나 구경(究竟)에 이르지는 못하였고, 최후의 희고 깨끗한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최후의 범행에 미치지 못하였고, 최후의 범행을 마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었다. 나는 그 때에는 생 노 병 사와 울음과 근심과 슬픔을 여의지 못하였고, 또한 능히 일체의 괴로움에서도 벗어나지 못하였었다. 비구들아, 나는 이제 세상에 나와 여래(如來) 무소착(無所著) 등정각(等正覺) 명행성위(明行成爲)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도법어(道法御) 천인사(天人師)로서, 불중우(佛衆祐)라고 불린다. 나는 이제 내 자신도 요익하게 하였고 남도 요익하게 하였으며, 많은 사람을 요익하게 하였다. 세간을 가엾게 여기고, 하늘을 위하고 사람을 위하여 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였다. 나는 이제는 설법하여 구경에 이르게 되었고, 최후의 희고 깨끗한 법에 이르렀으며, 최후의 범행을 이루었고, 최후의 범행을 마쳤다. 나는 이제 이미 생 노 병 사와 울음과 근심과 슬픔을 여의었고, 나는 이제 이미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비구들아, 만일 바르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짧아 반드시 뒷세상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해야 하고 범행을 행하여야 한다.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것은 없다'고 말하리라. 비구여, 이제 이것은 바른 말이다. 왜냐 하면 이제 만일 장수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오래라 해도 백 년, 혹은 그것을 조금 넘었을 것이다. 만일 장수하는 사람이라면 3백 철을 살 것이니, 봄철 1백, 여름철 1백, 겨울철 1백이다. 이것은 1천 2백 달을 사는 것이니, 봄 4백, 여름 4백, 겨울 4백 달이다. 1천 2백 달을 사는 것은 2천 4백 번의 보름을 사는 것이니, 봄 8백, 여름 8백, 겨울 8백 보름이다. 2천 4백 번의 보름을 사는 것은 3만 6천의 밤낮이니, 봄 1만 2천, 여름 1만 2천, 겨울 1만 2천의 밤낮이다. 3만 6천 밤낮을 사는 것은 7만 2천 끼니를 먹는 것인데, 거기에는 장애와 어머니 젖이 있다. 장애가 있다는 것은 괴로워 먹지 못하고, 성이 나서 먹지 못하며, 병들어 먹지 못하고, 일이 있어 먹지 못하며, 다니느라 먹지 못하고, 왕 앞이라 먹지 못하며, 재일(齋一)이라서 먹지 못하고, 얻지 못해 먹지 못하는 것이다. 비구들아, 이것을 1백 년을 사는 동안의 1백 년의 햇수 철 수 년 수와 철 수 달 수 보름 수 달과 보름 수 낮 수 밤 수 밤과 낮 수 끼니 수 장애 수 끼니와 장애의 수라고 한다. 비구들아, 만일 스승이 제자를 위하여 큰 사랑과 불쌍히 여김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의리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한다면, 나는 이미 그것을 다하였으니, 너희도 또한 마땅히 힘쓰도록 하라. 곧 일 없는 곳이나 산속 숲 나무 밑 빈 곳이나, 편안하고 고요한 곳에 가서, 편안히 앉아 깊이 사색하되 방일하지 말고, 부지런히 힘쓰고 꾸준히 나아가 후회가 없게 하라.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요, 이것이 나의 훈계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아란나경의 경문 글자 수는 3,291자이다. 『중아함경 』 제40권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7,377자이다.]  
350    汝不應爾。謂汝從呧至吠 댓글:  조회:2017  추천:46  2009-01-31
170) 앵무경(鸚鵡經)1) 제 4 [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밤이 지나고 이른 새벽이 되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에 들어가 밥을 비실 때에 앵무 마납(鸚鵡摩納)2)의 집으로 가셨다. 이 때 도제(都提)의 아들 앵무 마납은 볼 일이 있어 밖에 나가고 집에 없었다. 그 때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의 집에 있던 흰 개가 큰 평상 위에 올라가서 금쟁반에 담긴 밥을 먹고 있다가, 멀리 세존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곧 짖었다.  1) 이 경의 이역본으로 송(宋) 시대 천식재(天息災)가 한역한 『분별선악보응경(分別善惡報應經) 』 실역(失譯) 『불설도 조경(佛說兜調經) 』 유송(劉宋) 시대 구나발타라가 한역한 『불설앵무경(佛說鸚鵡經) 』 수(隋) 시대 구담범지가 한역한 『 불위수가장자설업보차별경(佛爲首迦長者說業報差別經) 』 송 시대 시호(施護)가 한역한 『불설정의우바새소문경(佛說淨意優婆 塞所問經) 』이 있다. 2) 앵무는 이름이고 마납(摩納, m nava)은 바라문 동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앵무는 바라문 도제(都提, Todeyya)의 아들이 다. 세존께서는 흰 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래서는 안 된다. 으르렁거리다가 짖기까지 하는구나." 흰 개는 그 말을 듣고 몹시 성질을 부리다가 평상에서 내려와 나무더미 주변으로 가더니 시름에 잠겨 누웠다. 조금 뒤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크게 성질을 부리고는 평상에서 내려와 나무더미 주변에 가서 시름에 잠겨 누워 있는 흰 개를 보고 집안 사람에게 물었다. "누가 우리 개를 건드렸기에 개가 몹시 성이 나서 평상에서 내려와 나무더미 주변에 가서 시름에 잠겨 누웠는가?" 집안 사람들이 대답하였다. "저희들이 저 흰 개를 건드려 몹시 성나게 하고, 평상에서 내려와 나무더미 주변에 가서 시름하면서 누워 있게 한 것이 아닙니다. 마납께서는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오늘 사문 구담(瞿曇)께서 밥을 빌러 오셨을 때 저 흰 개가 그 분을 보고 곧 쫓아가며 짖었습니다. 사문 구담께서는 흰 개를 보고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으르렁거리더니 짖기까지 하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마납이시여, 그 때문에 저 흰 개가 몹시 성이나 평상에서 내려와 나무더미 주변으로 가서 시름하며 누워 있는 것입니다."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발칵 내며 세존을 모함하고, 세존을 비방하고, 세존을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이렇게 사문 구담을 모함하고 비방하고 떨어뜨리려는 생각으로 곧 사위성을 나가 승림급고독원으로 갔다. 그 때 세존께서는 한량없는 대중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설법하고 계셨다. 세존께서는 멀리서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이 오는 것을 보고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이 오는 것이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은 이제 목숨을 마치면 팔을 굽혔다 펴는 짧은 시간 내에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내게 몹시 화를 내었기 때문이다. 어떤 중생이라도 마음으로 크게 화를 내면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지옥에 태어나게 된다." 이 때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이 부처님께 나아가 말했다. "사문 구담이여,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빌었습니까?" 세존께서는 대답하셨다. "내가 오늘 너의 집에 가서 밥을 빌었다." "구담이여, 우리 집 흰 개를 보고 무슨 말을 하였기에 우리 개가 몹시 성이 나서 평상에서 내려와 나무더미 주변에 가서 시름하며 누워 있는 겁니까?" 세존께서는 대답하셨다. "나는 오늘 이른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에 들어가 밥을 빌러 이집 저집 다니다가 너의 집에 가서 밥을 빌게 되었다. 그 때 흰 개가 멀리서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짖기에 나는 그 흰 개를 보고 말했다.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으르렁거리더니 짖기까지 하는구나.' 그랬더니, 그 흰 개가 몹시 성을 내며 평상에서 내려와 나무더미 주변으로 가서 시름하며 누웠다." 앵무 마납이 세존에게 여쭈었다. "저 흰 개는 전생에 나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마납아, 부디 내게 묻지 말라. 네가 그것을 들으면 틀림없이 언짢아 할 것이다." 앵무 마납은 두 번 세 번 세존에게 여쭈었다. "저 흰 개는 전생에 나와 어떤 관계였습니까?" 세존께서도 또한 두 번 세 번 말씀하셨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마납아, 부디 내게 묻지 말라. 네가 그것을 들으면 틀림없이 언짢아 할 것이다." 세존께서는 다시 마납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두 번 세 번 내게 묻기를 그치지 않는구나. 마납아, 마땅히 알라. 저 흰 개는 전생에 네 아버지였고 이름은 도제(都提)3)였느니라." 3) 코살라국에 살았던 유명한 바라문이다. 앵무 마납은 이 말을 듣고 몇 배나 더 화가 나서 세존을 모함하고, 세존을 비방하고, 세존을 떨어뜨리려 하였다. 이렇게 사문 구담을 모함하고 비방하고 떨어뜨리려는 생각으로 세존께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크게 보시를 행하였고, 큰 사당을 지었으니,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는 바로 범천에 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인연으로 저 하천한 개로 태어났겠습니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 도제는 증상만(增上慢) 때문에 저 하천한 개로 태어났느니라. 범지로서 증상만을 가지고서 그 생을 마치면 여섯 곳에 태어나니 닭 개 돼지 승냥이 다섯째는 나귀 여섯째는 지옥이라네. 앵무 마납아, 만일 네가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너는 돌아가 흰 개에게 '흰 개야, 만일 전생에 내 아버지였다면 저 큰 평상 위로 돌아가거라'고 말해 보라. 마납아, 그러면 그 흰 개는 반드시 평상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흰 개야, 만일 네가 전생에 내 아버지였다면 다시 저 금쟁반에 담긴 밥을 먹거라'고 말해 보라. 마납아, 그러면 그 흰 개는 반드시 또 금쟁반의 밥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또 '만일 네가 전생에 내 아버지였다면 내가 모르고 있는 금 은 수정 등의 보물을 숨겨 둔 장소를 내게 가르쳐다오'라고 말해 보라. 마납아, 그 흰 개는 반드시 그가 이전에 가졌던 금 은 수정 등의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또 그것은 네가 모르던 것이리라." 이에 앵무 마납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잘 받아 가져 외웠으며, 세존의 주위를 돌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흰 개에게 말했다. "흰 개야, 만일 네가 전생에 내 아버지였다면 저 큰 평상 위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흰 개는 곧 큰 평상 위로 돌아갔다. "흰 개야, 만일 네가 전생에 내 아버지였다면 저 금쟁반에 담긴 밥을 다시 먹거라." 그러자 흰 개는 곧 돌아가 금쟁반에 담긴 밥을 먹었다. "만일 네가 전생에 내 아버지였다면 아버지가 예전에 가졌던 금 은 수정 등의 보물이 숨겨진 내가 모르는 장소를 가르쳐다오." 흰 개는 곧 큰 평상 위에서 내려와 전생에 잠을 자던 방으로 가서 입과 발로 침상의 네 다리 밑을 파헤쳤다. 앵무 마납은 그 곳에서 많은 보물을 얻었다. 이에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은 뜻밖의 보물을 얻고, 매우 기뻐하며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는 승림급고독원을 향해 두 번 세 번 큰 소리로 세존을 찬탄하였다. "사문 구담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다. 사문 구담의 말씀은 진실이다. 사문 구담의 말씀은 참되다." 이렇게 두 번 세 번 찬탄한 뒤에 사위성을 나서 승림급고독원으로 갔다. 그 때 세존께서는 한량없는 대중에게 앞뒤로 둘러싸여 설법하고 계셨다. 세존께서는 멀리서 앵무 마납이 오는 것을 보시고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앵무 마납이 오는 것이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앵무 마납은 이제 목숨을 마치면 팔을 굽혔다 펴는 짧은 시간 내에 틀림없이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나에 대해 지극히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라도 착한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가서 하늘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 때 앵무 마납은 부처님께 나아가 문안드리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어떻더냐, 마납아. 그 흰 개가 내 말대로 하더냐?" "구담이시여, 진실로 그 말씀과 같았습니다. 구담이시여, 저는 다시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 주신다면 감히 여쭙겠습니다." "네 마음대로 물으라." "구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저 중생들은 다 같이 사람 몸을 받고도 지위에 높고 낮음이 있고, 얼굴이 묘하고 묘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구담이시여, 제가 살펴보니 단명하는 자와 장수하는 자가 있고, 병이 많은 이와 병이 적은 이가 있으며, 얼굴이 단정한 자와 얼굴이 단정하지 못한 자가 있고, 위덕이 없는 자와 위덕이 있는 자가 있으며, 비천한 종족과 존귀한 종족이 있고, 재물이 없는 자와 재물이 있는 자가 있으며, 나쁜 지혜를 가진 자와 착한 지혜를 가진 자가 있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은 자기가 행한 업으로 말미암아,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 업을 인연하고 업을 의지하여, 업에 따른 장소에서 중생은 그 업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며, 묘하고 묘하지 않은 곳에 태어난다." 앵무 마납이 세존께 여쭈었다. "사문 구담의 말씀은 너무 간략하고 자세하지 않아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사문 구담이시여, 자세히 말씀하시어 저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마납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 내가 너를 위해 자세히 분별해서 설명해 주리라." "예, 분부를 받들어 경청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수명이 지극히 짧은가? 어떤 남자나 여자는 생물을 죽인다. 그들은 지극히 흉악하여 피를 마시고 해칠 뜻을 가지며, 언제나 모질어 모든 중생과 나아가 곤충에 이르기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으로 가서 지옥에 날 것이요,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그 수명이 지극히 짧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짧은 수명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지극히 흉악하여 생물을 죽이고 피를 마셨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報]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수명이 지극히 긴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살생을 여의고 살생을 끊는다. 그들은 칼이나 막대기를 버리고, 제 자신이나 남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지며,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 모든 중생들은 물론 나아가 곤충에 이르기까지도 이익을 준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좋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그 수명이 지극히 길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긴 수명을 받나니, 그 남자나 여자는 살생을 여의고 살생을 끊었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질병이 많은가? 혹 어떤 남자 나 여자는 중생을 못살게 군다. 그들은 혹은 주먹으로, 혹은 막대기나 돌로, 혹은 칼이나 몽둥이로 중생을 못살게 군다. 그들은 이 업을 남김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슴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으로 가서 지옥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질병이 많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많은 질병을 받나니, 그 남자나 여자는 중생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니라.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질병이 없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중생을 못살게 굴지 않는다. 그들은 주먹으로, 막대기 돌이나 칼이나 몽둥이로 중생을 못살게 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좋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질병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질병 없음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중생을 못살게 굴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형체가 단정하지 못한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성질이 급하고 번민이 많다. 그들은 조금만 말을 들어도 곧 몹시 화를 내고 증오와 질투로 괴로워하며 여러 사람들과 다툰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으로 가서 지옥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형체가 단정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 길은 단정하지 못한 형체를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성질이 급하고 번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형체가 단정한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성질이 급하지 않고 번민도 많지 않다. 그들은 부드러운 말을 듣건 추악하고 나쁜 말을 듣건 몹시 화내지 않고,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걱정하지 않으며, 여러 사람들과 다투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좋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형체가 단정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단정한 형체를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성질이 급하지 않고 번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위덕(威德)이 없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속으로 질투를 품는다. 그들은 남이 공양과 공경을 받는 것을 보고는 곧 질투를 내며, 혹 남이 물건을 가진 것을 보면 곧 내 소유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으로 가서 지옥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위덕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위덕 없음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속으로 질투를 품었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큰 위덕이 있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이 공양과 공경을 받는 것을 보아도 질투를 내지 않으며, 혹 남이 물건을 가진 것을 보아도 내 소유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좋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큰 위덕이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위덕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질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비천한 종족으로 태어나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매우 방자하고 거만하다. 그들은 공경해야 할 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받들어야 할 사람을 받들지 않으며, 공양해야 할 사람을 공양하지 않고, 길을 비켜 주어야 할 사람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않으며, 자리를 내주어야 할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고, 합장하고 절하며 문안드려야 할 사람에게 합장하고 절하며 문안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으로 가서 지옥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비천한 종족으로 태어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비천한 종족에 태어남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와 여자는 매우 방자하고 거만했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존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매우 방자하거나 거만하지 않다. 그들은 공경해야 할 사람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받들어야 할 사람을 받들며, 공양해야 할 사람을 공양하고, 길을 비켜 주어야 할 사람에게는 길을 비켜 주며, 자리를 내주어야 할 사람에게는 자리를 내주고, 합장하고 절하며 문안드려야 할 사람에게는 합장하고 절하며 문안드린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좋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존귀한 종족으로 태어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존귀한 종족에 태어남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매우 방자하거나 거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재물이 없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시주가 되지 않고 보시를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문 범지 빈궁한 사람 고독한 사람 나그네 거지에게 음식 의복 꽃다발 바르는 향 집 평상 등불 급사를 보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으로 가서 지옥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재물이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많은 재물이 없음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시주가 되지 않고 보시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재물이 많은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시주가 되어 보시한다. 그는 사문 범지 빈궁한 사람 고독한 사람 나그네 거지에게 음식 의복 꽃다발 바르는 향 집 평상 등불 급사를 보시한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좋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재물이 많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많은 재물을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시주가 되어 보시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나쁜 지혜만 있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저들에게 자주 가서 일을 묻지 않는다. 그들은 혹 이름과 덕망이 있는 사문 범지가 있더라도 수시로 저들을 찾아가 이렇게 그 뜻을 묻지 않는다. '여러 존자시여, 어떤 것이 착한 것이며,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것입니까? 어떤 것이 죄가 되며, 어떤 것이 죄가 되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 묘하며, 어떤 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 백법(白法)이고 어떤 것이 흑법(黑法)입니까? 흑법과 백법은 어디서 생깁니까? 어떤 이유로 현세에 과보를 받고, 어떤 이유로 후세에 과보를 받습니까?' 또 설사 묻더라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업을 빠짐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으로 가서 지옥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나쁜 지혜가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나쁜 지혜를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나 여자는 저들에게 자주 가서 일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무슨 인연으로 어떤 남자나 여자는 착한 지혜가 있는가? 혹 어떤 남자나 여자는 저들에게 자주 가서 일을 묻는다. 그들은 혹 이름과 덕망이 있는 사문 범지가 있으면 수시로 저들에게 자주 찾아가 이렇게 그 뜻을 묻는다. '여러 존자시여, 어떤 것이 착한 것이며,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것입니까? 어떤 것이 죄가 되며, 어떤 것이 죄가 되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 묘한 것이며 어떤 것이 묘하지 않은 것입니까? 어떤 것이 백법(白法)이고 어떤 것이 흑법(黑法)입니까? 흑법과 백법은 어디서 생깁니까? 어떤 이유로 현재에 과보를 받고, 어떤 이유로 후세에 과보를 받습니까?' 이렇게 그 뜻을 물은 뒤에는 그것을 잘 실천한다. 그는 이 업을 빠짐 없이 받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가서 하늘에 날 것이요, 혹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훌륭한 지혜가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이 길은 훌륭한 지혜를 받나니, 이른바 그 남자와 여자는 저들에게 자주 가서 일을 물었기 때문이다. 마납아, 마땅히 알라. 이런 업에는 이런 갚음이 있느니라. 마납아, 마땅히 알라. 짧은 수명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수명이 짧고, 긴 수명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수명이 길며, 병이 많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병이 많고, 병이 적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병이 적으며, 단정하지 않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단정하지 않고, 단정하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단정하며, 위덕이 없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위덕이 없고, 위덕이 있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위덕이 있으며, 비천한 종족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비천한 종족으로 태어나고, 존귀한 종족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존귀한 종족으로 태어나며, 재물이 없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재물이 없고, 재물이 많기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재물이 많으며, 나쁜 지혜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나쁜 지혜를 얻고, 착한 지혜에 알맞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착한 지혜를 얻는다. 마납아, 이것이 내가 앞에서 말한 '저 중생들은 자기가 행한 업을 말미암아 그 업에 따라 과보를 얻는다. 업을 인연하고 업을 의지하여, 업에 따른 장소에서 중생은 그 업에 따라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하며, 묘하고 묘하지 않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 것이니라."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이해했습니다. 선서시여, 저는 이미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부터 부처님과 법과 비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저를 우바새로 받아 주소서. 오늘부터 몸이 마치도록 귀의하여 목숨을 다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오늘부터 도제의 집에 들어가기를 이 사위국 땅 여느 우바새 집에 들어가시듯 하시어, 도제 가문이 늘 이익과 진리를 얻게 하시고, 요익과 안온과 즐거움을 얻게 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도제의 아들 앵무 마납과 한량없는 대중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 앵무경에 수록된 경문의 글자 수는 3,465자이다.]
349    가장 행복한 사람 댓글:  조회:2745  추천:51  2009-01-17
가장 행복한 사람-우 조티카 붓다는 제자들에게 계율을  설할 때도 선정(Jhanic)상태에 있었다 붓다는 그 짧은 순간에도 마음을 평화로운 상태에 두었던 것이다.   1)모든 대상들은 마음을 피곤하게 한다.   세속의 대상,세속적 진리에 속한 것들은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그것에서 해방되려면 우리가 하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알아차리는 것이 최선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자리에 누워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고 끊어지지   않는 마음챙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걷는 동안에도 발걸음을 알아차리고 상대와 질문하고 대답 할 때도   결코 마음챙김을 놓아선 안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맑은 얼굴을 가지고 행복과 평화를 느끼게 된다.   2)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자신 안의 가장 높은 정신적인 것을 실현해 내는 사람이다.   공부나 기술로 자신의 생활 뿐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도   이익을 줄 수 있지만 이러한 능력은 오직 세속의 일에 관한 것일 뿐   가장 높고 최선의 것이 아니다.   가장 최선의 능력은 담마에 대한 고귀한 이해다.   3)자비(Metta)와 동정(Karuna)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특성이다   마음챙김(Sati)과 집중(Samadhi)도 인간적인 성질이다.   동물적인것을 추구하지 말고 인간적인 성질을 추구해라.   無常(Anicca), 無我(Anatta),苦(Dukkha)을 깨닫고  최상의 지혜를   얻을 것이다. --이것이 담마의 핵심이다.   4)마음의 평화 없이는 진정한 성공은 없다   재산은 오만을 낳고, 오만은 다시 불안정과 불행을 낳는다   성공적인 사람은 위대한 정신적인 이해를 갖고있다.   道(Magga)와 果(Phala)의 지혜를 포함한 통찰력은 최상의 지혜요   정신적인 힘이다.   ***道와 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4가지 깨달음의 각 단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道의 마음은 정신적 오염원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며,     果의 마음은 도가 만들어낸 그 경지의 해탈을 경험하는 역할을 한다.   세속의 철학이나 과학적 지식이 아무리 깊더라도  通察智의 첫 번째   단계인 區別智의 깊이와 고귀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5)지혜가 깊을 수록 마음은 평화롭다.   6)자유로운 사람은 갈망과 슬픔에 휩싸이지 않는다.   화를 내거나 화가 났다는 사실은 나 스스로가 나의 분노에 의하여   완전히 압도당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나를 화나게 만든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내가 화를 내도록 하는    것을 내가 허용한다는 뜻이다. 즉, 나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결국 상대의 손바닥에 고인 물과 같은 신세다    따라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분노나 갈망에 휘말려 든다면 더 이상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자만, 오만,질투도 마찬가지다.    명상가는 마음안에 번뇌가 있는 것이 부자유라는 것을 안다.   7)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마음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8)마음의 평화와 마음의 힘은 같은 것이다.    나 스스로 마음을 보살필 수 없을 때 사소한 것에 의해 온종일 분노를    느낄 것이다. 분노를 관찰해라, 무엇이 중요한가?    결코 마음의 평화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마음의 평화가 근본적인 자유다. 자유는 마음의 평화를 내포한다.   9)당신이 알아차리는 순간 사라진다.    강한 마음챙김과 집중으로 통찰명상의 깊은 부분에 이르면    통찰지혜(Vipassana Nana)가 일어나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본질을    꿰뚫고 들어가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은  원인과 결과의 과정을 거친    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을 非我心이라고 한다(모든 것들은 통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것)    (Dhammanupassana)-법에 대한 마음챙김    (Kayanupassana)-몸에 대한 마음챙김    (Vedananupassana)-느낌에 대한 마음챙김    (Cittanupassana)-의식에 대한 마음챙김    시간이 허락하는 한 평화 가운데 살아라. 마음의 평화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마음의 평화가 길수록 마음의 자유가 길어진다.     최상의 道와 果, 지혜(Nana)도 이 수행을 통하여 성취 할 수 있다.   10)당신이 할 수 있다면 매 순간이 명상의 시간이다.  출처: http://cafe.naver.com/sangdomeditati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542  
348    인류최초의 종족의 기원 댓글:  조회:2905  추천:65  2009-01-15
소연경(小緣經)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위(舍衛)국의 청신원림(淸信園林) 녹모강당(鹿母講堂)에서 큰 비구 무리 천 二백 五十 인을 데리고 계셨다. 그 때 두 사람의 바라문이 있어 견고한 신심으로 부처님께 나아가 집을 떠나 도를 닦았다. 한 사람의 이름은 바실타요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바라타였다. 그 때 부처님은 고요한 방에서 나와 강당 위에서 거닐고 계셨다. 때에 바실타는 부처님이 거닐고 계시는 것을 보고 곧 빨리 바라타에게 가서 말했다.“너는 아는가. 여래는 지금 고요한 방에서 나와 강당 위를 거닐고 계신다. 우리는 함께 부처님께 나아가면 혹 여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때에 바라타는 그 말을 듣고 곧 세존께 나아가 예배하고 부처님을 따라 거닐었다. 세존은 바실타에게 말씀하셨다.“너희들 둘은 바라문종(種)에서 나와 견고한 마음으로써 내 법 가운데서 집을 나와 도를 닦는가.”그들은 대답했다.“그렇습니다.”부처님은 말씀하셨다.“너희들 바라문이여, 이제 내 법 가운데서 집을 나와 도를 닦을 때 모든 바라문은 너희들을 나무라지 않는가.”그들은 대답했다.“그렇습니다. 부처님의 큰 은혜를 무릅써 집을 나와 도를 닦는데, 실은 우리들은 저 모든 바라문들의 꾸짖음을 받고 있습니다.”부처님은 말씀하셨다.“무슨 일로 너희들을 꾸짖는가.”두 사람은 부처님께 여쭈었다.“그들은 말하기를 ‘우리 바라문 종족이 제일이요 다른 종족은 비열하다. 우리 종족은 맑고 희며 다른 종족은 검고 어둡다. 우리 종족은 범천의 계통으로서 범천의 입에서 나왔다. 현재의 법 중에서 청정한 진리를 깨달아 뒷세상에서도 또 청정하다. 너희들은 왜 청정한 종족을 버리고 저 고오타마의 다른 법으로 들어갔느냐’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우리가 불법 중에서 집을 나와 도를 닦는 것을 보고 이런 말로 우리를 나무랍니다.”부처님은 바실타에게 말씀하셨다.“너는 보라. 모든 사람이 미련하고 무식하여 마치 금수와 같아 거짓으로 스스로 일컫기를 ‘바라문 종족이 제일이요 다른 것은 비열하다. 우리 종족은 맑고 희며 다른 것은 검고 어둡다. 우리 바라문 종족은 범천의 계통으로서 범천의 입에서 났다. 현재에도 청정하고 뒷세상에서도 또한 청정하다’고 일컫지마는 바실타여, 이제 나의 위없는 정진(正眞)의 도 가운데에는 종성(種姓)을 필요로 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을 믿지 않는다. 세속의 법에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마는 우리 법은 그렇지 않다. 만일 사문(沙門)이나 바라문으로서 자기의 종성을 믿고 교만한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 법 가운데서는 끝내 위없는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만일 능히 종성의 관념을 버리고 교만한 마음을 없애면 곧 우리 법 가운데서 도를 이루어 바른 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류(下流)를 미워하지마는 우리 법은 그렇지 않다.”부처님은 바실타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다.“四성(姓)의 종별이 있으니 선과 악이 섞이어 있어 지혜로운 사람의 칭찬하는 바도 되고 지혜로운 사람의 나무라는 바도 된다. 어떤 것을 四성이라 하는가. 一은 찰제리(刹利)라는 종이요, 二는 바라문 종이요, 三은 거사(居士) 종이요, 四는 수타라(首陀羅) 종이다. 바실타여, 너는 들으라. 찰제리종 중에도 살생(殺生)하는 자도 있고 도둑질하는 자도 있으며 음란한 자도 있고 속이는 자도 있으며 두말하는 자도 있으며 말을 꾸미는 자도 있고 간탐하는 자도 있으며, 질투하는 자도 있고 비뚤어진 소견을 가진 자도 있다. 바라문종, 거사종, 수타라종도 또한 그러하여 온갖 十악행이 있다. 바실타여, 대개 착하지 않은 행에는 착하지 않은 갚음이 있고 검고 어두운 행에는 곧 검고 어두운 갚음이 있다. 만일 이 갚음이 오직 찰제리, 거사, 수타라종에만 있고 바라문 종에는 없다고 한다면 곧 저 바라문종은 스스로 ‘우리 바라문종은 가장 제일이요 다른 것은 비열하다. 우리 종성은 맑고 희며 다른 것은 검고 어둡다. 우리 바라문 종은 범천의 계통으로서 범천의 입에서 났다. 현재에도 청정하고 미래도 또 청정할 것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착하지 않은 행을 행하여 착하지 않은 갚음이 있고 검고 어두운 행을 행하여 검고 어두운 갚음이 있는 것이 반드시 바라문종, 찰제리종, 거사종, 수타라종에 같이 있다면 곧 바라문종은 홀로 ‘우리 종성은 청정하여 제일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바실타여, 만일 찰제리종 가운데는 살생하지 않는 자 있고 도둑질하지 않고 음란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두말하지 않으며 욕설하지 않고 말을 꾸미지 않으며 간탐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으며 비뚤어진 소견을 가지지 않은 자도 있다. 바라문종, 거사, 수타라종도 또한 그와 같아서 다같이 十선(善)을 닦는다. 대개 선법을 닦으면 반드시 선의 갚음이 있고 청백한 행을 행하면 반드시 흰 갚음이 있다. 만일 이 갚음이 오직 바라문종에만 있고 찰제리, 거사, 수타라에는 없다면 곧 바라문종은 마땅히 ‘우리 종족은 청정하여 가장 제일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四성에 다같이 이 갚음이 있다면 곧 바라문은 홀로 ‘우리 종족은 청정하여 가장 제일이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부처님은 바실타에게 말씀하셨다.“지금 현재 바라문종을 보면 서로 결혼하여 아기를 낳은 것이 세상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거짓으로 ‘우리는 범천의 입에서 났다. 현재에 있어서도 청정하고 뒷세상도 또한 청정하다’고 일컫는다. 이제 내 제자들은 종성이 한결같지 않고 계통이 각각 달라 내 법 가운데서 집을 나와 도를 닦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묻기를 ‘너는 누구의 종성이냐’고 하거든, 마땅히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라. ‘나는 사문 석가종의 아들이다’라고. 또 스스로 말하라. ‘우리 사문종은 친히 입에서 나왔고 법화(法化)로 쫓아 났다. 현재에도 청정하고 미래에도 청정하다’고. 무슨 까닭인가. 대범(大梵)의 이름은 곧 여래의 호(號)로서 여래는 세간의 눈이요, 세간의 지혜요 세간의 법이요 세간의 범이요 세간의 법바퀴요 세간의 감로(甘露)요 세간의 법주(法主)다. 바실타여, 만일 찰제리종 가운데서 독실하게 부처님이 여래가 지진(至眞) 등정각(等正覺)의 十호의 구족한 것을 믿고 법을 독실하게 믿어 ‘여래의 법은 미묘하고 청정하여 현재에도 수행해야 하고 언제나 설할 수 있으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이고 또 그것은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으로서 범우(凡愚)들은 미칠 수 없는 가르침인 것을 믿고 또 독실하게 중을 믿어 ’중은 성질이 착하고 곧 도과(道果)를 성취하며 부처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법과 법을 성취한다. 이른 바 중(衆)은 계중(戒衆)을 성취하고 정중(定衆), 혜중(慧衆), 해탈중(解脫衆), 해탈지견중(解脫智見衆)을 성취한다. 수다원(須陀洹)을 향해서는 수다원을 얻고 사다함(斯陀含)을 향해서는 사다함을 얻으며 아나함(阿那含)을 향해서는 아나함을 얻고 아라한을 향해서는 아라한을 얻는 四쌍(雙) 八배(輩)는 바로 여래의 제자 중이다. 공경할 만하고 높일 만한 세상의 복밭이 되어 마땅히 사람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믿고 또 계(戒)를 독실히 믿어 거룩한 계는 구족하여 이지러지거나 샘[漏]이 없고 모든 흠이나 틈이 없으며 또 더러운 점이 없어 지혜로운 이의 칭찬하는 바로서 선적(善寂)을 구족할 것이라고 믿는 자 있다면 바실타여, 모든 바라문, 거사, 수타라종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독실히 부처님을 믿고 법을 믿고 중성취와 성계(聖戒)성취를 믿을 것이다. 바실타여, 찰제리종 가운데 아라한을 공양하고 공경 예배하는 자가 있다면 바라문, 거사, 수타라도 또한 다 아라한을 공양하고 공경 예배한다.”부처님은 바실타에게 말씀하셨다.“이제 내 친족의 석가종은 또한 파사닉(波斯匿)왕을 받들고 섬기고 예경한다. 파사닉왕은 또 와서 나를 공양하고 예경한다. 그는, ‘사문 고오타마는 호족(豪族)의 출생인데 내성은 낮다. 사문 고오타마는 큰 부자요 큰 위덕이 있는 집에서 났는데 나는 낮고 궁하고 비루한 작은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여래를 공양하고 예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사닉왕은 법에서 법을 관찰하여 진실과 거짓을 밝게 분별하기 때문에 깨끗한 신심을 내어 여래를 공경하는 것이다. 바실타여, 이제 나는 너를 위하여 四성(姓)의 본연(本然)을 설명하리라. 천지의 마지막 겁(劫)이 다해 무너질 때에 중생은 목숨을 마치고 다 광음천(光音天)에 났는데 자연히 화생(化生)하여 생각의 기쁨으로써 먹이를 삼고 광명은 스스로 비치고 신족(神足)으로써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 뒤에 이 땅은 다 변해 물이 되어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때에는 해나 달이나 별도 없었고, 밤이나 낮이나 해[年]나 달[月]도 없고 다만 큰 어둠이 있을 뿐이었다. 그 뒤에는 이 물이 변해 천지가 되었고 모든 광음천은 복이 다해 목숨을 마치고는 다시 땅에 태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생각을 먹고살았다. 신족으로 날아다니고 몸의 광명은 스스로 비치면서 여기서 오랫동안 살았다. 각각 스스로 일컫기를 <중생 중생>이라고 했다. 그 뒤에는 이 땅에서 단샘이 솟아나 그것은 마치 타락이나 꿀 같았다. 저 처음으로 온 천신으로서 성질이 경솔한 자는 이 샘을 보고 잠자코 스스로 생각했다. ‘저것은 무엇인가 시험해 맛보리라’고. 곧 손가락을 물에 넣어 시험해 맛보았다. 이렇게 하기를 두 세 번 점점 그 맛남을 깨닫고 드디어 손으로 움켜쥐어 마음껏 그것을 먹었다. 이렇게 애착하여 끝내 만족할 줄 몰랐다. 그 밖의 중생들도 또 그것을 본받아 먹어 보았다. 두 세 번 되풀이하는 동안에 그 맛남을 깨달았다. 그것 먹기를 계속하자 그들의 몸은 점점 추하게 되고 살결은 굳어져 하늘의 묘한 법을 잃어버렸다. 또 신족은 없어져 땅을 밟고 다니게 되고 몸의 광명은 갈수록 멸해 천지는 깜깜해졌다. 바실타여, 마땅히 천지의 떳떳한 법칙은 큰 어둠이 있는 뒤에는 반드시 일월과 성상(星像)이 있어 허공에 나타난 뒤에야 곧 밤과 낮과 어둠과 밝음과 연월(年月)의 수(數)가 있는 것이다. 그 때의 중생은 다만 땅맛(단샘)을 먹으면서 오랫동안 세간에 살았다. 그것을 많이 먹은 자는 얼굴빛이 추하고 더러우며 그것을 적게 먹은 자는 얼굴빛이 오히려 즐겁고 윤기가 있었다. 곱다 밉다 단정하다는 것은 여기서 처음 있었던 것이다.그 단정한 자는 교만한 마음으로 누추한 자를 업신여기고 그 누추한 자는 질투하는 마음으로 단정한 자를 미워했다. 중생들은 여기서 각각 서로 성내고 다투게 되었다. 이 때 단샘은 저절로 말라 버렸다. 그 뒤에 이 땅에는 저절로 지비(地肥)가 나서 빛깔과 맛이 갖추어 향기롭고 조촐하여 먹을 만했다. 이 때 중생들은 다시 그것을 먹으면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것을 많이 먹은 자는 얼굴빛이 초췌하고 그것을 적게 먹은 자는 오히려 얼굴빛이 즐겁고 윤이 났다. 그 단정한 자는 교만한 마음으로 누추한 자를 업신여기고 그 누추한 자는 질투하는 마음으로 단정한 자를 미워했다. 중생들은 여기서 각각 서로 다투고 꾸짖게 되었다. 이 때에 지비는 다시 나지 않았다. 그 뒤에 다시 추한 지비가 났다. 향기롭고 맛나 먹을 만은 했지마는 먼저 것보다는 못했다. 이때 중생들은 다시 이것을 먹으면서 오랫동안 세간에 살았다. 그것을 많이 먹은 자는 얼굴빛이 갈수록 누추하고 그것을 적게 먹은 자는 얼굴빛이 오히려 즐겁고 윤기가 났다. 단정과 누추의 서로 갈마드는 지비는 드디어 다투고 꾸짖는 일을 만들어 내었다. 지비는 드디어 다시 나지 않았다. 그 뒤에 이 땅에는 저절로 멥쌀이 났다. 그것은 등겨가 없으며 빛깔과 맛이 구족하고 향기롭고 조촐하여 먹을 만했다. 이 때 중생들은 다시 그것으로 오랫동안 세상에 살았다. 곧 남녀는 서로 보게 되고 점점 정욕이 생겨 갈수록 서로 친근하게 되었다. 그 밖의 중생들은 이것을 보고 서로 말했다. ‘너의 하는 짓은 그르다. 너의 하는 짓은 그르다’하고 곧 배척하고 몰아내어 대중밖에 있게 하여 三개월이 지난 뒤에 돌아오게 하였다.”부처님은 바실타에게 말씀하셨다.“전일에는 그르다고 생각한 것을 지금은 옳다고 생각했다. 그 때 중생들은 법이 아닌 것을 익혀 정욕을 마음껏 즐기면서 끝없이 계속하여 때도 철도 없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생겨 드디어 집을 지었다. 이때부터 세간에는 방이 있게 되어 법답지 않은 것을 즐겨 익혀 음욕을 갈수록 더해 갔다. 곧 포태(胞胎)가 있게 된 것은 부정(不淨)으로 생겼으니 세간의 포태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때에 저 중생들은 저절로 난 멥쌀을 먹었다. 취하는데 따라 연달아 나서 다함이 없었다. 저 중생 중에 어떤 게으른 자가 있어 가만히 스스로 생각했다. ‘아침에 먹을 것은 아침에 취하고 저녁에 먹을 것은 저녁에 취하는 것은 내게 있어서 수고로운 일이다. 이제 하루 먹을 것을 한꺼번에 취하자.’ 그래서 곧 한꺼번에 취하였다. 뒤에 그 친구가 그를 불러 함께 가서 쌀을 취하자 하였다.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나는 이미 하루 먹을 것을 한꺼번에 가졌다. 너는 취하고자 하거든 네 마음대로 취하라’고 했다. 저 사람도 또 혼자 생각했다. ‘이 사람은 영리해서 남 먼저 쌀을 저축했다. 나도 이제 三일분의 쌀을 저축하리라.’ 그 사람은 곧 三일분의 양식을 저축했다. 다른 중생들이 또 와서 ‘함께 쌀을 가지러 가자’고 말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이미 먼저 三일분의 양식을 저축했다. 너는 취하려거든 혼자 가서 가지라’고 했다. 그 사람도 또 생각했다. ‘이 사람은 영리해서 먼저 三일분의 양식을 취하였다. 나는 또 저를 본받아 五일분의 양식을 저축하리라.’ 그는 곧 가서 가졌다. 때에 저 중생들은 서로 다투어 저축했다. 그러자 멥쌀은 거칠고 더러워지며 또 겨가 생겼다. 그리고 벤 뒤에는 나지 않았다.때에 저 중생들은 이것을 보고 낭패하여 드디어 어쩔 줄도 모르고 각각 가만히 생각했다. ‘우리가 본래 처음 났을 때에는 생각을 먹이로 삼고 신족으로 허공을 나르며 몸의 광명을 스스로 비치면서 세상에 오랫동안 살았다. 그 뒤에는 이 땅에 단샘이 솟아났고 그것은 마치 타락 꿀과 같아서 향기롭고 맛나 먹을 만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함께 먹었다. 그것을 먹은 지 오래 되자 그것을 많이 먹은 자는 얼굴빛이 누추하고 그것을 적게 먹은 자는 얼굴빛이 오히려 즐겁고 윤이 났었다. 이 음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얼굴빛은 달라졌다. 이에 중생은 각각 지비를 가지고 서로 미워하게 되었다. 이 때에 단샘은 저절로 말랐다. 그 뒤에 이 땅은 지비를 내었다. 빛깔과 향기를 구족하고 향기롭고 맛나 먹을 만했다. 때에 우리들은 또 그것을 다투어 먹었다.그것을 많이 먹은 자는 안색이 초췌하고 그것을 적게 먹은 자는 안색이 즐겁고 광택이 났다. 중생은 여기서 또 시비를 가지고 서로 미워했다. 이 때에 지비는 다시 나지 않았다. 그 뒤에는 다시 거칠은 지비가 났다. 또한 향기롭고 맛나 먹을 만했다. 때에 우리들은 다시 그것을 다투어 먹었다. 많이 먹으면 빛이 추하고 적게 먹으면 빛이 즐거웠다. 또 지비를 가지어 서로 미워했다. 이 때에 지비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저절로 멥쌀이 났다. 그것은 겨도 없었다. 때에 우리들은 다시 그것을 먹으면서 오랫동안 세상에 살 때에 저 게으른 자들은 서로 다투어 저축했다.그래서 멥쌀은 거칠고 더러워지고 또 겨를 내었다. 그리고 벤 뒤에는 다시 나지 않는다. 이것을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그들은 다시 서로 말했다. ‘우리는 마땅히 땅을 갈라 따로 따로 표지(標識)를 세우자’ 곧 땅을 갈라 따로 따로 표지를 세웠다. 바실타여,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전지(田地)의 이름이 생겼다. 그 때의 중생은 따로 전지를 차지하고 경계를 정하자 점점 도둑질할 마음을 내어 남의 벼를 훔쳤다. 다른 중생들은 그것을 보고 말했다. ‘네가 하는 짓은 그르다. 네가 하는 짓은 그르다. 자기도 전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물건을 가진다. 지금부터는 다시 그런 짓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중생은 오히려 도둑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다른 중생들도 그를 꾸짖기를 그치지 않았다. 곧 손으로 그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자기 전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물건을 훔친다.’ 그 사람도 또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나를 친다.’ 때에 저 여러 사람들은 두 사람의 다투는 것을 보고 걱정하고 시름하여 또 번민하면서 말했다. ‘중생은 갈수록 악해져서 이 세상에는 이런 착하지 않은 것이 있고 더럽고 부정(不淨)함이 생겼다. 이것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원인으로서 번뇌의 고통의 갚음은 三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이다. 전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다툼이 생겼다. 이제 차라리 한 사람을 세워 주인으로 삼아 이것을 다스리게 해야 하겠다. 보호해야 할 자는 보호하고 꾸짖어야 할 자는 꾸짖게 하자. 우리가 각각 쓰는 쌀을 줄여 그것을 그에게 대어 주어 모든 송사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였다. 때에 그들 중에서 몸이 크고 얼굴이 단정하여 위덕이 있는 한 사람을 뽑아 그에게 말했다.‘너는 이제 우리들을 위해 평등한 주인이 되어 마땅히 보호할 자는 보호하고 꾸짖을 자는 꾸짖고 쫓을 자는 쫓아라. 우리는 쌀을 모아 공급하여 주리라.’ 그 한 사람은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임금이 되어 다툼을 판결해 다스리고 여러 사람들은 쌀을 모아 공급했다.그 한 사람은 또 착한 말로 여러 사람을 위로했다. 여러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다 매우 기뻐해 칭찬하면서 서로 말했다. ‘좋습니다 대왕이여, 좋습니다 대왕이여.’ 이에 새간에는 곧 임금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바른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기 때문에 찰제리라고 이름했다. 그래서 세간에는 찰제리라는 이름이 생겼다.때에 그 무리들 중에 어떤 사람은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집이란 큰 걱정거리다. 집이란 독한 가시다. 나는 이제 이 사는 집을 버리고 혼자 산림(山林) 속에 들어가 고요히 도를 닦으리라.’ 곧 집을 버리고 산림에 들어가 고요히 깊은 생각에 들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그릇을 가지고 마을로 들어가 밥을 빌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다 즐거이 공양하고 기뻐하며 ‘착하다, 이 사람은 능히 사는 집을 버리고 혼자 산중에 살면서 고요히 도를 닦아 모든 악을 버리어 여읜다’고 칭찬했다. 여기서 세간에는 비로소 바라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바라문 중에는 고요히 앉아 참선(參禪)하고 명상하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곧 속세로 들어가 글을 외우고 익히기를 업으로 삼아 또 스스로 일컫기를 ‘나는 참선하지 않는 사람’이라 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은 그를 ‘참선하지 않는 바라문’이라 불렀다. 인간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를 또 인간 바라문이라 이름했다. 이에 세간에는 바라문 종족이 있게 되었다. 저 중생 중에는 어떤 사람이 있어 즐거이 살림을 경영해 많은 재보(財寶)를 저축했다. 그로써 여러 사람은 그를 거사(居士)라 이름했다. 저 중생 중에는 기교가 많아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었다. 바실타여, 이제 이것이 세간에 있는 四종의 이름이다.제 五에는 사문의 무리라는 이름이 있다. 그 까닭은 바실타여, 찰제리 무리 가운데 어느 때 어떤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법을 싫어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옷을 입고 도를 닦았다. 여기서 비로소 사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바라문종, 거사종, 수타라종 중에서 어느 때 어떤 사람이 있어 스스로 자기들의 법을 싫어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옷을 입고 도를 닦았다. 그것을 사문이라 이름했다. 바실타여, 찰제리 종족 가운데서 몸으로 착하지 않음을 행하고 입으로 착하지 않음을 행하고 뜻으로 착하지 않음을 행하는 자는 그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괴로운 갚음을 받는다. 바라문종, 거사종, 수타라종 몸으로 불선(不善)을 행하고 입으로 불선을 행하고 뜻으로 불선을 행하는 자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괴로운 갚음을 받는다. 바실타여, 찰제리 종족 가운데서 몸의 행이 착하고 입과 뜻의 행이 착한 사람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즐거운 갚음을 받는다. 바라문, 거사, 수타라종 중에서 몸의 행이 착하고 입과 뜻의 행이 착한 자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반드시 즐거운 갚음을 받는다. 바실타여, 찰제리 종족 가운데서 몸으로 두 가지를 행하고 입과 뜻으로 두 가지를 행하는 자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괴로움과 즐거움의 갚음을 받는다. 바라문종, 거사종, 수타라종으로서 몸으로 두 가지를 행하고 입과 뜻으로 두 가지를 행하는 자는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면 괴로움과 즐거움의 갚음을 받는다. 바실타여, 찰제리 종족 가운데서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옷을 입고 도를 닦는 자 있어 七각의(覺意)를 닦으면 오래지 않아 도를 이룰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저 족성(族姓) 아들이 법옷을 입고 집을 나와 위없는 범행을 닦아 현재의 법 가운데서 몸소 진리를 체험한 끝에 남과 죽음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다해 마쳐 다시 뒷세상의 목숨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바라문, 거사, 수타라종 가운데서도 수염과 머리를 깍지 않고 법옷을 입고 도를 닦아 七각의를 닦으면 오래지 않아 도를 이룰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저 족성 아들이 법옷을 입고 집을 나와 위없는 범행을 닦아 현재의 법 중에서 몸소 진리를 체험한 끝에 나고 죽음이 이미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서고 할 일을 다해 마쳐 다시는 뒷세상의 목숨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바실타여, 이 四종 가운데서 지혜와 소행(所行)을 완성하여 아라한을 성취한 것을 五종 중에서 가장 제일이라 한다.”부처님은 바실타에게 말씀하셨다. 범천왕은 게송으로 말했다.중생 중에서는 찰제리가 훌륭하다능히 종성을 버리고 떠나명행(明行)을 성취한 사람세간에서 가장 제일이니라.부처님은 바실타에게 말씀하셨다.“이 범천왕은 착하게 말하는 것이요, 착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이 범천왕은 착하게 받는 것이요, 착하게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때에 곧 그 말을 인가(印可)했다. 무슨 까닭인가. 이제 나 여래 지진(至眞)도 또한 이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중생 중에서 찰제리가 훌륭하다능히 종성을 버리고 떠나명행을 성취한 사람세간에서 가장 제일이니라.그 때 세존은 이 법을 연설해 마치셨다. 바실타와 바라타는 번뇌를 벗어나고 마음이 해탈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했다.  
347    彌勒 댓글:  조회:2393  추천:42  2009-01-08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의 제타 숲<외로운 이 돕는 동산>에서 五백의 큰 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에 아아난다는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는 세존님께 사뢰었다. "여래께서는 지극히 밝으시고 살피지 못하는 일이 없나이다. 미래, 과거, 현재 三세를 모두 밝게 알으시고 과거 모든 부처님의 성과 이름과 그 제자, 보살들의 시중군의 많고 적음을 모두 알으시며 一 겁, 백 겁 혹은 무수한 겁을 다 관찰하여 알으시고 또 국왕, 대신, 인민들의 성과 이름을 능히 분별하시며 지금 현재의 여러 나라들도 모두 밝게 아시나이다. 먼 장래에 미륵 아라한, 다 옳게 깨달은 이께서 세상에 나오실 때에 그 제자들의 많고 적음과 그 부처님의 풍성함과 즐거움은 얼마나 계속되겠사온지 그 사정을 듣고자 하나이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네 자리로 돌아가 앉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고 미륵이 세상에 나오실 때 그 나라의 풍성함과 즐거움과 그 제자의 많고 적음을 잘 듣고 기억하여 마음에 새겨두라." 때에 아아난다는 부처님 분부를 듣고 곧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아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먼 장래에 이 나라에 계두(鷄頭)라는 성곽(城郭)이 있어 동서는 十二 요오자나요, 남북은 七 요오자나로서 토지는 풍성하고 인민은 번성하며 거리는 줄을 이룰 것이다. 그 때에 그 성안에는 수광(水光)이라는 용왕이 있어 밤이면 비를 내려 향기롭고 낮은 맑고 환할 것이다. 이 때에 계두성 안에 나찰 귀신이 있어 이름을 엽화(葉華)라 할 것이다. 그는 법을 따라 행하고 바른 법을 어기지 않으며 늘 인민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온갖 나쁘고 더러운 것을 치우고 또 향수를 땅에 부려 매우 향기롭고 깨끗할 것이다. 아아난다야, 알라. 그 때에 남섬부주는 동, 서, 남, 북 十만 요오자나요 모든 산하와 석벽을 다 저절로 없어질 것이요, 네 바다의 물은 모두 한쪽에 모일 것이다. 또 그 때의 남섬부주는 매우 편편하며 거울처럼 맑고 밝을 것이다. 온 남섬부주 안에는 곡식이 풍성하고 인민이 번성하며 온갖 보배가 많고 마을들은 서로 가까워 닭 우는 소리가 잇달을 것이다. 또 그 때에는 더러운 꽃과 과일들은 모두 말라지고 나쁘고 더러운 물건은 스스로 없어지며 그 밖의 달고 아름다우며 매우 향기로운 과수가 땅에서 날 것이다. 그 때에는 기후는 화창하고 네 철은 때를 맞추며 사람 몸에는 백 여덟 가지 근심이 없을 것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은 고르고 모두 그 뜻이 같아서, 서로 보면 기뻐하고 좋은 말로 대하며 말씨는 같아 차별이 없기는 저 북구로주 사람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크고 작기가 꼭 같아서 여러 가지 차별이 없을 것이다. 또 그 때의 남녀들이 대소변이 보고 싶으면 땅은 스스로 갈라졌다가 일을 마치면 도로 합쳐질 것이다. 그 때에 남섬부주 안에는 멥쌀이 저절로 나는데 껍질이 없으며 매우 향기롭고 맛나며 그것을 먹으면 괴로움이 없어질 것이다. 또 이른바 금, 은의 보배와 자거, 마노, 진주, 호박 등이 땅에 흩어져 있어도 그것을 살피고 기록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 보배를 손에 들고 저희끼리 말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 보배 때문에 서로 해치고 감옥에 가두며 무수히 고통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 보배들은 기와 쪽이나 돌과 같아서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 때에 법왕이 나타나 이름을 양카라 할 것이다. 그는 바른 법으로 인민을 다스리고 일곱 가지 보배를 성취할 것이니 일곱 가지 보배란, 바퀴, 코끼리, 말, 구슬, 미녀, 장군, 창고지기이니 이것을 일곱 가지 보배라 한다. 그는 이 남섬부주를 통치할 때에 칼이나 몸뚱이를 쓰지 않아도 항복하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거기는 지금과 같은 네 보배 창고가 있을 것이다. 건타월국의 이라발 보배 창고에는 온갖 보배롭고 이상한 물건이 많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둘째는 이제라국의 반주 큰 창고인데 거기도 보배가 많다. 셋째는 수뢰타국에 있는 큰 보배 창고인데 거기도 보배가 많다. 넷째는 바라나양카에 있는 큰 창고인데 온갖 보배가 많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 네 개 큰 창고가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여러 창고지기는 모두 그 왕에게 가서 아뢸 것이다. '원컨대 대왕은 이 보배 창고의 물건을 빈궁한 사람들에게 보시하소서.' 그 때에 양카왕은 그 보배를 얻고도 살피고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뜻에 재물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니라. 때에 남섬부주 안에는 나무 뒤에 옷이 저절로 열릴 것이다. 그것은 매우 곱고 보드라워 사람들은 그것을 가져다 입을 것이다. 마치 지금 북구로주 땅의 나무 위에 옷이 저절로 열리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 때에 그 왕에게는 대신이 있어 이름을 수범마라 할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왕과 친하여 왕은 그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다. 또 그는 얼굴이 단정하고 키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살찌지도 않고 여위지도 않으며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으며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을 것이다. 또 그 수범마에게는 아내가 있어 이름을 범마월이라 할 것이다. 그는 미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묘하여 천제(天帝)의 왕비 같을 것이다. 입에서는 우트팔라 연꽃 향기가 나고 몸에서는 챤다나 향기가 날 것이다. 그래서 여러 여자들의 마흔 여덟 가지 맵시도 그 앞에서는 아주 무색하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는 병도 없고 어지러운 생각도 없으리라. 그 때에 미륵 보살은 도솔천에서 그 부모의 늙지도 젊지도 않는 것을 관찰하고 곧 신(神)을 내려 아래로 응하여 오른 옆구리로 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오른 옆구리로 난 것처럼 미륵보살도 그러할 것이다. 때에 도솔천의 여러 하늘들은 각기 외칠 것이다. '미륵 보살은 이미 신을 내려 내려가셨다.' 그 때에 수범마는 곧 그 아들을 위하여 이름을 지어 '미륵'이라 할 것이다. 그는 서른 두 가지 거룩한 모습과 八十 가지 뛰어난 모양으로 그 몸을 장엄하고 그 몸은 황금빛일 것이다. 그 때의 사람 수명은 매우 길어 모두 八만 四천 세요, 또 아무 병도 없을 것이다. 또 여자는 나이 五백 세가 되어야 시집갈 것이다. 그 때에 미륵 보살은 얼마 동안 집에 있다가 곧 집을 떠나 도를 배울 것이다. 그 계두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용화(龍華)라는 도수(道樹)가 있다. 높이는 一 요오자나요, 넓이는 五백 보다. 미륵 보살은 그 나무 밑에 앉아 위없는 도를 이루려 하여, 그날 밤중에 집을 떠나 그 밤으로 곧 위없는 도를 이룰 것이다. 때에 三천 대천 세계는 여섯 번 진동하고 지신(地神)들은 각각 저희들끼리 말할 것이다. '지금 미륵은 성불하셨다.' 그 소리는 사천왕 궁전에까지 들릴 것이다. '미륵은 성불하셨다.' 그리하여 三十三천, 야아마천, 도솔천, 화재천, 타화자재천에까지 들리고 더 나아가 범천에까지 들릴 것이다. '미륵은 불도를 이루었다.' 그 때에 대장(大將)이라는 마왕은 법으로 그 세계를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는 여래의 명성을 듣고 못내 기뻐해 어쩔 줄을 모르면서 이레낮, 이레 밤을 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욕심 세계의 수없는 하늘 사람들을 데리고 미륵 부처님께 나아가 공경하고 예배할 것이다. 미륵 부처님은 그 하늘들을 위하여 미묘한 논(論)을 설명할 것이다. 이른바 그 논이란 보시와 계율과 천상에 나는데 대한 논이요, 욕심은 더러운 것이므로 그것을 뛰어 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때에 미륵 부처님은 그 사람들이 마음을 내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모든 부처 세존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법, 즉 괴로움과 그 원인과 그것의 사라짐과 그 사라지는 길의 이치를 그 하늘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해설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八만 四천 천자들은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눈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마왕 대장은 그 세계 인민들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집을 나오라. 왜냐하면 미륵님이 오늘 저쪽 언덕으로 건너셨다. 그리고 너희들도 이끌어 저쪽 언덕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계두성 안에 장자가 있어 이름을 선재(善財)라 한다. 그는 마왕의 분부와 또 부처라는 말을 듣고는 八만 四천 무리를 데리고 미륵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발아래 예배하고 한쪽에 앉는다. 미륵 부처님은 그를 위해 미묘한 논을 말씀하실 것이다. 이른바 논이란, 보시와 계율과 천상에 나는데 대한 논이요, 욕심은 더러운 것이므로 그것을 뛰어 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때에 미륵 부처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린 것을 보시고, 여러 부처 세존님이 항상 말씀하시는 법, 즉 괴로움과 그 원인과 그것의 사라짐과 그 사라지는 길의 이치를, 그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분별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八만 四천 인은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눈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때에 선재와 八만 四천 인들은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사뢸 것이다. '집을 떠나 범행을 잘 닦아서 모두 아라한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미륵 부처님의 첫 번째 모임은 八만 四천 아라한이 될 것이다. 이 때에 양카왕은 미륵님이 이미 불도를 이루셨다는 말을 듣고 곧 그 부처님께 나아가 법을 듣고자 할 것이다. 때에 미륵 부처님은 그를 위하여 설법하실 것이다. 그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마지막도 좋고 뜻은 매우 깊고 그윽할 것이다. 왕은 그 뒤에 태자를 세우고는 이발사에게 보물을 주고 또 여러 범지들에게는 잡보물을 줄 것이다. 그리고 八만 四천 범지들을 데리고 그 부처님께 나아가 사문이 되기를 원하여 아라한이 될 것이다. 오직 수범마만은 세 가지 번뇌를 끊고 기필코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이다. 때에 부처님 어머니 범마월도 八만 四천 궁녀들을 데리고 부처님께 나아가 사문이 되기를 원하여 모두 아라한이 될 것이다. 오직 범마월만은 세 가지 번뇌를 끊고 수다원을 이룰 것이다. 또 크샤트리야 부녀들도 미륵 여래님이 세상에 나와 부처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수천만 무리들은 부처님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발아래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 각기 사문이 될 마음을 내어 집을 나와 도를 배울 것이다. 그래서 차례를 뛰어 넘어 깨달음을 증득하는 이도 있고 혹은 증득하지 못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아아난다야, 그 때에 차례를 뛰어 넘어, 증득하지 못하는 이는 모두 법을 받드는 사람으로서 일체 세상은 즐겨 할 것이 못 된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싫어할 것이다. 그 때에 미륵 부처님은 세 가지 교법을 말씀하실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제자 중의 저 카아샤파 같은 이는 열 두 가지 두우타행을 행할 것이다. 그는 과거의 여러 부처님 밑에서 범행을 잘 닦은 이로서 항상 미륵 부처님을 도와 인민들을 교화할 것이다." 그 때에 카아샤파는 여래님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가부하고 앉아, 몸과 뜻을 바루고 생각을 매어 앞에 두고 있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 카아샤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늙어 나이 八十이 넘었다. 그런데 내게는 큰 성문 네 사람이 있어 능히 세상을 교화한다. 그들은 모두 지혜가 끝이 없고 온갖 덕을 두루 갖추었다. 그 네 사람이란 이른바, 큰 카아샤파 비구, 군도발한 비구, 빈두로 비구, 라아훌라 비구이니라. 너희들 네 큰 성문들은 결코 반열반하지 말라. 내 법이 아주 멸한 뒤에 열반에 들라. 큰 카아샤파도 열반에 들지 말고 미륵님이 세상에 나오시기를 기다리라. 왜 그러냐 하면 미륵님이 교화할 제자는 다 석가 부처의 제자로서, 내가 끼친 교화로 말미암아 번뇌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카아샤파는 저 마가다국의 비제촌의 산중에 있으리라. 때에 미륵 여래는 수천 인에게 앞, 뒤로 둘러싸이어 그 산중으로 갈 것이다.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여러 귀신들은 미륵 부처님을 위하여 문을 열고 카아샤파의 좌선하는 굴을 보도록 할 것이다. 그 때에 미륵 부처님은 오른 손을 펴서 카아샤파를 가리키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은 먼 옛날 석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이름을 카아샤파라 한다. 지금까지도 두우타의 고행으로서 제일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처음 보는 일이라고 찬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수없는 백천 중생들은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눈이 깨끗하게 될 것이요, 또 어떤 중생은 카아샤파의 몸을 자세히 볼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모임으로서 九十六억 인민들은 모두 아라한이 될 것이다. 그들은 다 내 제자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다 내 교훈을 받았고 또 보시, 사랑, 이익 같은 행동의 네 가지 인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그 때에 미륵 부처님은 카아샤파의 상가리이를 받아 입을 것이니 그 때에 카아샤파의 몸은 갑자기 별처럼 흩어질 것이다. 그러면 미륵 부처님은 또 갖가지 향과 꽃으로 카아샤파를 공양할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 세존은 바른 법을 공경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요, 미륵도 또 내게서 바른 법의 교화를 받아 위없는 바르고 참된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니라. 아아난다야, 알라. 미륵 부처님의 두 번째 모임에는 九十四억 인인데 그들은 다 아라한이다. 그들도 과거에 내가 가르친 제자로서 네 가지 공양을 행하였기 때문이니라. 또 미륵 부처님의 세 번째 모임에는 九十二억 인인데 그들도 다 아라한으로서 내가 과거에 가르친 제자이니라. 그 때의 비구들의 성명은 다 자씨(慈氏) 제자라 할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내 성문들이 모두 석가 제자라고 일컫는 것과 같느니라. 그 때에 미륵 부처님은 제자들을 위해 설법할 것이다. 즉 '너희 비구들은 덧없다는 생각, 진실로 괴롭다는 생각, 내가 없다는 생각, 진실로 공하다는 생각, 색은 변한다는 생각, 푸르딩딩하다는 생각, 퉁퉁 부었다는 생각, 밥이 소화되지 않았다는 생각, 피라는 생각, 일체 세상은 즐겨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닦아야 하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비구들이여, 알라. 이 열 가지 생각은 다 과거 석가모니 부처님이 너희들을 위해 말씀하시어 번뇌를 없애고 마음의 해탈을 얻게 하셨기 때문이니라. 만일 이 대중 가운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가 있으면 그는 과거에 범행을 닦고 내게 온 것이다.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그 법을 받들어 가져다가 내게 온 것이요,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세 가지 보배를 공양하고 내게 온 것이니라.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잠깐 동안 선의 근본을 닦고 내게 온 것이요,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네 가지 평등한 마음을 닦고 내게 온 것이다.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다섯 가지 계율을 받들어 지니고 세 분에게 귀의하고 내게 온 것이요,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절이나 탑을 세우고 내게 온 것이니라.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헌 절을 수리하고 내게 온 것이요,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 밑에서 여덟 가지 재법을 지니고 내게 온 것이다.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향과 꽃을 공양하고 내게 온 것이요, 혹은 그에게 부처의 법을 듣고는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고 내게 온 것이니라. 혹은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전일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내게 온 것이요, 또는 목숨을 마칠 때까지 범행을 닦다가 내게 온 것이다. 혹은 쓸고 읽고 외우다가 내게 온 것이요,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다가 내게 온 사람이다.'하리라. 그리고 미륵 부처님은 곧 다음 게송을 읊을 것이다. 계율을 가지며 많이 듣는 덕 선정과 생각하는 업을 늘이고 깨끗한 범행을 잘 닦던 이 거기서 내게로 와서 났구나 보시를 권하고 기쁜 마음을 내어서 마음의 근본을 닦아 행하고 뜻에는 여러 가지 생각 없나니 그러다가 모두 다 내게로 왔네 혹은 평등한 마음을 내어 모든 부처님 받들어 섬기고 성스런 무리들께 공양하던 이 모두 다 내게로 와서 났다네 혹은 계율과 경전을 외우고 잘 익혀 남을 위해 설명해 주며 일심으로 법의 근본 생각했나니 그러다가 지금 다 내게로 왔네 석가 종족은 잘 교화하여서 온갖 사리에게 공양하였고 법을 받들어 섬겨 공양했나니 그러다가 지금 다 내게로 왔네 혹 어떤 이는 경전을 베껴 쓰고 흰 비단 위에 게송을 읊어 쓰며 그 온갖 경전을 공양하나니 그러다가 모두 다 내게로 왔네 채색 비단과 온갖 물건을 절에 가져가 공양하면서 스스로 '나무불' 일컬었나니 그러다가 모두 다 내게로 왔네 현재의 부처님과 또 과거의 그 모든 부처님께 공양 드리고 선정은 바르고 또 평등하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과 또 그 법과 성스런 그 중들을 섬겨 받들라 알뜰한 마음으로 세 보배 섬기면 반드시 하염없는 곳에 이르리.   아아난다야, 미륵 부처님은 그 대중 가운데 이 게송을 읊을 것이다. 그 때에 대중 가운데의 여러 하늘과 사람들은 그 열 가지 생각을 깊이 생각하고 열 한 사람의 여자는 온갖 번뇌가 없어지고 법눈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미륵 부처님 때에는 천년 동안 계율을 범하는 중이 없을 것이다. 그는 항상 한 게송으로 계율을 삼을 것이다. 입과 뜻으로 악을 행하지 말고 몸으로도 또한 범하지 말라 이 세 가지의 나쁜 행 버리면 생, 사의 깊은 바다 벗어나리라. 천 년을 지낸 뒤에 계율을 범하는 이가 있어 다시 계율을 정할 것이다. 미륵 부처님의 수명은 八만 四천 세일 것이요, 그가 반열반한 뒤에 그 끼친 법도 八만 四천 년 보존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때의 중생들은 모두 그 근기가 지혜롭기 때문이니라. 만일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미륵 부처님과 세 번 모임의 성문들과 또 계두성과 양카왕을 보고, 네 개의 큰 보배 창고를 보고 싶어하거나, 또 저절로 난 멥쌀을 먹고 저절로 된 옷을 입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천상에 나기를 바라는 이는 부디 부지런히 정진하여 게으르지 말랴. 그리고 법사(法師)들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되 이름 난 꽃과 찧은 향 등 갖가지로 공양하여 빠뜨림이 없게 하라. 아아난다야, 이와 같이 공부하여야 하느니라." 그 때에 아아난다와 대중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三) 聞如是 一時。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與大比丘眾五百人俱 爾時。阿難偏露右肩。右膝著地。白世尊言。如來玄鑒。無事不察。當來.過去.現在三世皆悉明了。諸過去諸佛姓字.名號。弟子菩薩翼從多少。皆悉知之。一劫.百劫.若無數劫。悉觀察知。亦復知國王.大臣.人民姓字。斯能分別。如今現在國界若干。亦復明了。 將來久遠彌勒出現。至真.等正覺。欲聞其變。弟子翼從佛境豐樂。為經幾時 佛告阿難。汝還就座。聽我所說。彌勒出現。國土豐樂。弟子多少。善思念之。執在心懷。 是時。阿難從佛受教。即還就座 爾時。世尊告阿難曰。將來久遠於此國界。當有城郭名曰雞頭。東西十二由旬。南北七由旬。土地豐熟。人民熾盛。街巷成行。爾時。城中有龍王名曰水光。夜雨澤香。晝則清和。是時。雞頭城中有羅剎鬼名曰葉華。所行順法。不違正教。伺人民寢寐之後。除去穢惡諸不淨者。又以香汁而灑其地。極為香淨。阿難當知。爾時。閻浮地東.西.南.北十萬由旬。諸山河石壁皆自消滅。四大海水各據一方 時。閻浮地極為平整。如鏡清明。舉閻浮地內。穀食豐賤。人民熾盛。多諸珍寶。諸村落相近。雞鳴相接。是時。弊花果樹枯竭。穢惡亦自消滅。其餘甘美果樹。香氣殊好者。皆生乎地。爾時。時氣和適。四時順節。人身之中無有百八之患。貪欲.瞋恚.愚癡不大殷勤。人心平均皆同一意。相見歡悅。善言相向。言辭一類。無有差別。如彼鬱單曰人。而無有異。是時。閻浮地內人民大小皆同一嚮。無若干之差別也。彼時男女之類意欲大小便。地自然開。事訖之後。地復還合。爾時。閻浮地內自然生粳米。亦無皮裹。極為香美。食無患苦。所謂金銀.珍寶.車磲.瑪瑙.真珠.虎珀。各散在地。無人省錄。是時。人民手執此寶。自相謂言。昔者之人由此寶故。各相傷害。繫閉牢獄。更無數苦惱。如今此寶與瓦石同流。無人守護 爾時。法王出現。名曰蠰佉。正法治化。七寶成就。所謂七寶者。輪寶.象寶.馬寶.珠寶.玉女寶.典兵寶.守藏之寶。是謂七寶。領此閻浮地內。不以刀杖。自然靡伏。如今。阿難。四珍之藏。乾陀越國伊羅鉢寶藏。多諸珍琦異物。不可稱計。第二彌梯羅國般綢大藏。亦多珍寶。第三須賴吒大國有寶藏。亦多珍寶。第四婆羅奈蠰佉有大藏。多諸珍寶。不可稱計。此四大藏自然應現。諸守藏人各來白王。唯願大王以此寶藏之物。惠施貧窮。爾時。蠰佉大王得此寶已。亦復不省祿之。意無財物之想。時。閻浮地內自然樹上生衣。極細柔軟。人取著之。如今鬱單曰人自然樹上生衣。而無有異 爾時。彼王有大臣。名曰修梵摩。是王少小同好。王甚愛敬。又且顏貌端正。不長.不短。不肥.不瘦。不白.不黑。不老.不少。是時。修梵摩有妻。名曰梵摩越。玉女中最極為殊妙。如天帝妃。口作優鉢蓮花香。身作栴檀香。諸婦人八十四態。永無復有。亦無疾病亂想之念。爾時。彌勒菩薩於兜率天。觀察父母不老.不少。便降神下應。從右脅生。如我今日右脅生無異。彌勒菩薩亦復如是。兜率諸天各各唱令。彌勒菩薩已降神下。是時。修梵摩即與子立字。名曰彌勒。有三十二相.八十種好。莊嚴其身。身黃金色。爾時。人壽極長。無有諸患。皆壽八萬四千歲。女人年五百歲然後出適。爾時。彌勒在家未經幾時。便當出家學道 爾時。去雞頭城不遠。有道樹名曰龍華。高一由旬。廣五百步。時。彌勒菩薩坐彼樹下。成無上道果。當其夜半。彌勒出家。即其夜成無上道。時。三千大千剎土。六變震動。地神各各相告曰。今彌勒已成佛。轉至聞四天王宮。彌勒已成佛道。轉轉聞徹三十三天.焰天.兜率天.化自在天.他化自在天。聲展轉乃至梵天。彌勒已成佛道。爾時。魔名大將以法治化。聞如來名教音響之聲。歡喜踊躍。不能自勝。七日七夜不眠不寐。是時。魔王將欲界無數天人。至彌勒佛所。恭敬禮拜 彌勒聖尊與諸天漸漸說法微妙之論。所謂論者。施論.戒論.生天之論。欲不淨想。出要為妙。爾時。彌勒見諸人民已發心歡喜。諸佛世尊常所說法。苦.習.盡.道。悉與諸天人廣分別其義。爾時。座上八萬四千天子諸塵垢盡。得法眼淨。爾時。大將魔王告彼界人民之類曰。汝等速出家。所以然者。彌勒今日已度彼岸。亦當度汝等使至彼岸 爾時。雞頭城中長者。名曰善財。聞魔王教令。又聞佛音響。將八萬四千眾。至彌勒佛所。頭面禮足。在一面坐。爾時。彌勒漸與說法微妙之論。所謂論者。施論.戒論.生天之論。欲不淨想。出要為妙。爾時。彌勒見諸人民心開意解。如諸佛世尊常所說法。苦.習.盡.道。與諸人民廣分別義。爾時。座上八萬四千人。諸塵垢盡。得法眼淨。是時。善財與八萬四千人等。即前白佛。求索出家。善修梵行。盡成阿羅漢道。爾時。彌勒初會八萬四千阿羅漢 是時。蠰佉王聞彌勒已成佛道。便往至佛所。欲得聞法。時。彌勒與說法。初善.中善.竟善。義理深邃。爾時。大王復於異時立太子。賜剃頭師珍寶。復以雜寶與諸梵志。將八萬四千眾生。往至佛所。求作沙門。盡成道果。得阿羅漢 是時。修梵摩大長者聞彌勒已成佛道。將八萬四千梵志之眾。往至佛所。求作沙門。得阿羅漢。唯修梵摩一人。斷三結使。必盡苦際 是時。佛母梵摩越復將八萬四千婇女之眾。往至佛所。求作沙門。是時。諸女人盡得羅漢。唯有梵摩越一人。斷三結使。成須陀洹 爾時。諸剎利婦聞彌勒如來出現世間。成等正覺。數千萬眾往至佛所。頭面禮足。在一面坐。各各生心。求作沙門。出家學道。或有越次取證。或有不取證者。爾時。阿難。其不越次取證者。盡是奉法之人。患厭一切世間不可樂想。爾時。彌勒當說三乘之教。如我今日弟子之中。大迦葉者行十二頭陀。過去諸佛所善修梵行。此人常佐彌勒。勸化人民 爾時。迦葉去如來不遠。結加趺坐。正身正意。繫念在前。爾時。世尊告迦葉曰。吾今年已衰耗。年向八十餘。然今如來有四大聲聞。堪任遊化。智慧無盡。眾德具足。云何為四。所謂大迦葉比丘.君屠鉢漢比丘.賓頭盧比丘.羅云比丘。汝等四大聲聞要不般涅槃。須吾法沒盡。然後乃當般涅槃。大迦葉亦不應般涅槃。要須彌勒出現世間。所以然者。彌勒所化弟子。盡是釋迦文佛弟子。由我遺化得盡有漏。摩竭國界毘提村中。大迦葉於彼山中住。又彌勒如來將無數千人眾。前後圍遶。往至此山中。遂蒙佛恩。諸鬼神當與開門。使得見迦葉禪窟 是時。彌勒伸右手指示迦葉。告諸人民。過去久遠釋迦文佛弟子。名曰迦葉。今日現在。頭陀苦行最為第一。是時。諸人民見已。歎未曾有。無數百千眾生。諸塵垢盡。得法眼淨。或復有眾生。見迦葉身已。此名為最初之會。九十六億人。皆得阿羅漢。斯等之人皆是我弟子。所以然者。悉由受我教訓之所致也。亦由四事因緣。惠施.仁愛.利人.等利。爾時。阿難。彌勒如來當取迦葉僧伽梨著之。是時。迦葉身體奄然星散。是時。彌勒復取種種香華。供養迦葉。所以然者。諸佛世尊有恭敬心於正法故。彌勒亦由我所受正法化。得成無上正真之道 阿難當知。彌勒佛第二會時。有九十四億人。皆是阿羅漢。亦復是我遺教弟子。行四事供養之所致也。又彌勒第三之會九十二億人。皆是阿羅漢。亦復是我遺教弟子 爾時。比丘姓號皆名慈氏弟子。如我今日諸聲聞皆稱釋迦弟子。爾時。彌勒與諸弟子說法。汝等比丘。當思惟無常之想.樂有苦想.計我無我想.實有空想.色變之想.青瘀之想.腹脹之想.食不消想.血想.一切世間不可樂想。所以然者。比丘當知。此十想者。皆是過去釋迦文佛與汝等說。令得盡有漏.心得解脫 若復此眾中釋迦文佛弟子。 過去時修於梵行。來至我所。 或於釋迦文佛所。奉持其法。來至我所。 或復於釋迦文佛所。供養三寶。來至我所。 或於釋迦文佛所。彈指之頃。修於善本。來至此間。 或於釋迦文佛所。行四等心。來至此者。 或於釋迦文佛所。受持五戒.三自歸。來至我所。 或於釋迦文佛所。起神寺廟。來至我所。 或於釋迦文佛所。補治故寺。來至我所。 或於釋迦文佛所。受八關齋法。來至我所。 或於釋迦文佛所。香花供養。來至此者。 或復於彼聞佛法。悲泣墮淚。來至我所。 或復於釋迦文佛。專意聽法。來至我所。 復盡形壽善修梵行。來至我所。 或復書讀諷誦。來至我所者。承事供養。來至我所者 是時。彌勒便說此偈  增益戒聞德  禪及思惟業 善修於梵行  而來至我所 勸施發歡心  修行心原本 意無若干想  皆來至我所 或發平等心  承事於諸佛 飯食與聖眾  皆來至我所 或誦戒契經  善習與人說 熾然於法本  今來至我所 釋種善能化  供養諸舍利 承事法供養  今來至我所 若有書寫經  頌宣於素上 其有供養經  皆來至我所 繒綵及眾物  供養於神寺 自稱南無佛  皆來至我所 供養於現在  諸佛過去者 禪定正平等  亦無有增減 是故於佛法  承事於聖眾 專心事三寶  必至無為處  阿難當知。彌勒如來在彼眾中當說此偈。 爾時。眾中諸天.人民思惟此十想。十一垓人諸塵垢盡。得法眼淨 彌勒如來千歲之中。眾僧無有瑕穢。爾時恒以一偈。以為禁戒  口意不行惡  身亦無所犯 當除此三行  速脫生死淵  過千歲之後。當有犯戒之人。遂復立戒 彌勒如來當壽八萬四千歲。般涅槃後。遺法當存八萬四千歲。所以然者。爾時眾生皆是利根。 其有善男子.善女人。欲得見彌勒佛。及三會聲聞眾。及雞頭城。及見蠰佉王。并四大藏珍寶者。 欲食自然粳米。并著自然衣裳。身壞命終生天上者。彼善男子.善女人。當勤加精進。無生懈怠。 亦當供養諸法師承事。名華.擣香種種供養無令有失。如是。阿難。當作是學 爾時。阿難及諸大會聞佛所說。歡喜奉行 增壹阿含經卷第四十四 //
346    해후-- 아침의 명상 댓글:  조회:2594  추천:61  2009-01-04
아침의 명상 ♤ 벽(癖) ♤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화불가이무접, 산불가이무천, 석불가이무태,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無癖. 수불가이무조, 교목불가이무등라, 인불가이무벽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쿨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癖)이 없어서는 안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癖)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박제가는 힘주어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벽이다. function showSideViewForScrapInfo(curObj, userid, planetUserid, targetNick) { var sideView = new SideView('nameContextMenu', curObj, userid, planetUserid, '\uBA85\uC0C1', targetNick, '15yIn', '', '\u6CD5\u6B78(\uBC95\uC758 \uADC0\uC758\uCC98)', "unknown"); sideView.hideRow("member"); sideView.hideRow("planet"); sideView.showLayer(); } function winPopup() { window.open('http://cafe.daum.net/_service/home?grpid=UqR0', 'DaumPlanet', 'width=936,height=672,resizable=yes,scrollbars=yes'); return; }
345    명상의 열매 댓글:  조회:1942  추천:61  2008-12-30
  명상의 열매 붓다다싸 스님 ․ 지음      서 형 석 ․ 옮김 The Fruit or meditation Buddhadasa Bhikkhu Bodhi Leaves No. B.33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 Sri Lanka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나나위라 스님 ․ 지음   강 대 자 행 ․ 옮김 Mindfulness & Awareness Nānavira Thera Bodhi Leaves No. B.60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 Sri Lanka 명상의 열매    명상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첫째 열매는 우리가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새로운 종류의 행복이다. 이 행복은 감각대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대상에 기인한 행복은 감정상의 행복일 뿐 진정한 행복은 아니며, 잠재적인 고(苦) 이상의 별것이 아니다. 명상을 통해 얻는 행복감은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된 열반의 경지를 미리 맛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열반을 이루지 못한 채 그 맛을 미리 논할 수는 없지만, 추측컨대 이 명상에서 오는 즐거운 체험은 열반 증득의 맛에 배견할 수 있는 것이며 다만 얼마나 미묘하고 굳건하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명상의 이 첫째 열매를 전문적인 술어로는 현법이익(現法利益, dattha-dhammikattha), 즉 바로 누릴 수 있는 이득이라 부른다. 가령 이 단계에 이르러서 힘이 다해 명상수행이 더 나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다. 이만큼으로도 이미 얻은 바가 크니까.  명상수행의 둘째 열매는 우리 마음이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출 바탕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수행이란 마치 칼을 갈아 잘 들게 하는 것과도 같고 창을 잘 닦아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잘 닦은 마음은 잘 길든 원숭이나 코끼리와 같다. 이 마음은 활기차고 굳건해서 열정이나 분노․증오․질투 따위의 충동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잘 닦은 마음이 이런 번뇌에 굴복할 리가 없다. 설사 삿된 세력이 일어나 마음을 흔들려고 할지라도 여유롭게 미소로 대할 수 있다. 잘 닦은 마음은 나쁜 세력들이 결코 흔들어내지 못한다.  명상의 이 두 가지 열매, 즉 현법이익과 통찰력을 다 얻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어떤 사물도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를 들쑤시지 못한다. 어떤 것도 우리의 눈을, 귀를, 코를, 혀를, 또는 몸을 미혹시킬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모든 유혹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사람의 마음을 매혹하는 어떤 것도 미소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그냥 웃어넘길 수 있다. 세상을 실상(實相) 그대로 마음의 눈으로 보는 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온 세상이 통째 한줌거리로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음이 이런 경지에 들어, 어떤 처소에서 어떤 자세로 있거나 마음의 눈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커다란 평정심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충분히 숙련되지 못했다. 우리의 내관(內觀) 또는 직관력은 갓 자라기 시작했을 뿐 성숙하지 않아 쉽게 퇴전해버릴 수 있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그것을 지켜야 한다. 경전의 말씀처럼, 전륜성왕이 될 아이를 밴 왕후가 유산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듯 갓 자라기 시작한 통찰력은 그것이 굳건해질 때까지 부지런히 힘써 지켜내야 한다. 그러려면 마치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듯 세속적 권익을 버려야 한다. 병든 사람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피하듯 꼭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맞지 않는 사람이나 처소를 피하고 명상에 알맞은 환경 속에 살도록 해야 한다.  또 반드시 알아야 할 점은, 이런 식으로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한다고 해서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거나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걷고 서고 잠자는 등 일상생활을 유별나고 이상하게 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어디엘 가든 항상 명상을 하고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명상에 한번 숙달되기만 하면 명상은 자신과 하나가 되어 뗄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난생 처음 참선을 해보거나 수련 중에 있다하더라도 주의력이 흩어지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은 참선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꽤 긴 시간 동안 젖어들 수 있다. 격정 ․ 미혹 ․ 분노 ․ 증오 ․ 질투와 같은 더럼들이 좀체 당신을 오염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정치가라면 주의 깊게. 참을성 있게, 설득력을 발하며 논의할 수 있다. 당신이 포교자라면 불신자들의 강력한 반발이나 조롱을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다. 생업이나 직종이 무엇이든 당신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으며 자부심도 느낄 것이다. d어떤 장소에나 스스럼없이 그 누구와도 어울릴 수 있을 것이며, 평상심이랄까 균형 잡힌 마음상태랄까를 일상화시켜 챙기고 있게 될 것이다. 명상수행을 잘 닦기만 하면 정신적 향상은 물론 세속적인 면에서도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요컨대 마음을 잘 다룸으로써 궁극적 행복과 직접적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더 높은 경지를 성취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물을 본성 그대로 본다고할까 불법(Buddha Dhamma)을 깨닫는다고 할까, 그러기 위해선 마음을 한 곳에 모을 필요가 있다. 집중력이 r아하면 그만큼 쉽고 빠르게 불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바로 법을 깨닫는데는 실패한다 할지라도 오래지 않아 그것을 얻도록 조처를 할 수 있으니, 그 법을 당신의 삶의 방식으로 만들고 그래서 죽는 날까지 그 모든 나날을 수행하는데 바치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그 날은 빨라질 것이다.  불법을 깨닫기 위해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길이 있다. 그것은 남들에게 베푸는 일이다. 베풂이란 불법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치거나 보여줌으로써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감정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마음을 닦았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 얻는 경험만큼 남을 가르치거나 안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선 자기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가르치려드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자기가 진실로 행할 수 있는 일은 남에게도 가르쳐주도록 권장하셨다. 이런 면에서도 부처님은 인류의 모범이 되신다. 남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이로운 일이다. 불법을 가르치다 보면 자기에게도 깨달음은 물론 자비심이 생겨나고, 무엇보다도 지혜의 뿌리가 자라날 수 있게 스스로를 가르치게 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지도방침을 가장 이상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권고하노니 자비심을 발휘하여 너희 자신들이 자유로워진 그 범위만큼 남들을 안내함으로써 해탈의 길로 향하도록 도와줄지니라.”  남들을 이끌어 가는 동안 솟아나는 자비심은 자심의 마음을 집중시키고 계발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갖가지 질문을 받다보면 누구나 그 쟁점을 보다 주의 깊게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답을 하기 위해선 문제를 철저히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 남을 돕는 사이에 어느덧 자기 자신의 공부도 더욱 더 진척되게 마련이다. 『해탈처경』(Vimuttāyatana Sutta)에는 열반이라는 최고선(最高善)을 남들에게 설명해주려 애쓰는 사이에 자신이 그 경지를 깨닫게 된 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세상에는 남을 가르치거나 충고할 때야말로 생각이 훨씬 더 잘 돌아가고 즐거움도 만끽하는 독특한 심성(心性)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되면 새로운 발상들이 머리에 번쩍번쩍 떠오르면서 동시에 적절한 표현이 입에서 줄줄 나온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항상 신바람을 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오청에 부응해서 남들을 이끌어주려 머리를 짜내는 것은 남을 깨우쳐줄 뿐 아니라 자신도 깨우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런 타인교화 노력은 바람직한 일이며 실천에 봄직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위에서 말한 지도방침은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며, 더욱이 남에게 봉사하는 행위는 불법을 깨닫는 데도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 또한 자명하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불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감각대상이거나 견해들이거나 자기 스스로 지어낸 ‘자아’이거나 간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집착의 감정을 품지 않아야 한다. 모든 문제는 집착에서 기인한다. 집착의 어머니는 무명(無明)이다. 집착의 감정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모든 중생에 공통되는 본능이며, 특히 집착은 밖을 향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강해진다. 사유력 때문에 감각대상들의 그 다양한 맛들을 더욱더 즐기게끔 된다. 그리고 맛에 착(着)할수록 집착의 굴레도 더 강해진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은 그가 가진 사유능력을 높은 가치를 위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주장과 생각이 많을수록 그와 비례하여 자기기만으로부터 자유롭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으로 지어낸 것이 상전으로 군림하게 놔두지 말고 종으로 부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안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마음이 지어낸 것들이 당신을 속이게 두어서는 안 된다. 사유능력을 적절히 그리고 건설적으로 쓸 때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 할 것이다. 지식이 파멸을 초래하게 놓아두어선 안 된다. 선과 악, 정과 사를 분명히 가리는 지혜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무명을 몰아내는 지혜를 얻는 것을 말한다. 집착이나 끌리는 마음을 갖지 않았을 때 형상 ․ 소리 등 여섯 경계가 사람을 속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통찰력 앞에 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엎드려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바르게 다룰 수 있게 된다. 바꿔 말하면, 형상 ․ 소리 등 여섯 경계가 더는 격정 ․ 비애 등등의 모습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협조적이며 교육적으로도 도움도 되어 심신의 건강상태 즉 고요함을 증진시키게 된다. 마음에서 집착의 감정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우리 내면에 불법이 광명을 발할 것이다.  위대하신 부처님께서 발견하고 가르치셨던 것을 이제 우리도 비로소 발견하게, 다시 말해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그 법을 증득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성숙됨을 나타내는 기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이상이자 고결한 삶의 목표이다. 우리는 이 목표를 향해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세계를, 그리고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뛰어 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떤 세속사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고 그래서 일체의 세상사를 초월하게 된다. 이제 당신은 비구도 비구니도 우바새도 우바이도 아니고, 남자도 여자도 젊은이도 노인도 아니다. 그런 존재상태는 한낱 장애가 될 뿐이다. 또 이 인간계나 삼계의 다른 어느 세상에도 형상 ․ 소리 ․ 냄새 ․ 맛 ․ 감촉 같은 대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로 그대의 그 왕자다운 고요함을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생로병사가 끊어진, 부동의 확고한 상태뿐이다. 이 상태야말로 위대한 부처님, 대각자, 완성자께 귀의한 우리 불자들의 희구하고 열망하는 바, 생의 제(諸)가치의 완성 바로 그것이다. *나가세나 스님이 영역한 『불법을 향하여』에서 발췌함.*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알아차림’은 빠알리어(Pāli語)인 삼빠잔냐(sampajaῇῇa)의 역어이다. 경에서는 이 말을 ‘마음챙김’[正念, sati]과 한데 묶어 사띠-삼빠잔냐 즉, ‘정념-정지’라는 복합어로 쓰는 경우가 많다. 『염처경』 (Satipatthāna Sutta)에 몸으로 짓는 행위에 대한 알아차림이 몸에 대한 마음챙김 부분에 들어있는 걸로 미루어 보아, ‘알아차림’은 ‘마음챙김’과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며 다만 보다 국한된 특별한 의미를 지닐 뿐이라고 결론지어도 무방하겠다. 마음챙김은 정신이 산만하지 않은 상태, 즉 일반적 의미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음을 뜻하는데 반해, 알아차림은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을 계속 관찰하고 있음을, 자신의 행동들을(또는 생각들이나 느낌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려 하고 있음을 뜻한다.  얘기를 전개하기에 앞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알아차림’ 수행의 범위를 밝혀놓으신 세 경을 먼저 소개해둘 필요가 있겠다.  (1)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알아차리고 있는가? 비구는 왔다갔다 걷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앞을 보고 옆을 보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몸을 굽히고 펴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가사와 발우를 쓰고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대변을 보고 소변을 보고 있는 중에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하고 있는 중에 비구는 알아차리는 공부를 짓는다.                                                              -『상응부』․Ⅳ,211 -  (2) 어떤 것이 집중의 개발인가? 이에, 비구들이여, 느낌(vedanā)이 일어날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느낌이 지속되고 있을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느낌이 사라질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지각 ․ 인식(saῇῇā)이 일어날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지각 ․ 인식이 사라질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생각(vitakka)이 일어날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생각이 지속되고 있을 때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으며, 생각이 사라질 때 또한 그러한 대로 알아차리고 있다.           - 『증지부』․ Ⅱ,45 -  (3) 이에, 아난다여, 비구는 걸어가면서 마음을 챙기고 있고 , 돌아오면서 마음을 챙기고 있고, 서 있으면서도 마음을 챙기고 있으며, 자리에 누우면서도 마음을 챙기고 있으며, 열심히 일하면서도 마음을 챙기고 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은 명상을 이런 식으로 개발하고 소중히 지키면 정념정지가 계발된다.                             - 『증지부』 ․ Ⅲ, 325 -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언어의 혼란을 수습하는 일이다. 우리의 행동들은 습관적인 것이 되면 생각 없이 그것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그 행동들은 ‘자동적’ 내지는 ‘본능적’인 것이 된다. 머리를 긁거나 눈을 깜박이는 것처럼. 이것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의식적 행동’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무의식적 행동’이란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은 ‘행동’[kamma]은 ‘의도’(cetana)라고 규정지으신다. 그리고 의식[viῇῇāṇa]이 없이는 어떤 의도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무의식적 행동이라면 행동이 전연 없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고 순전히 ‘움직임’이 될 따름이다. 예를 들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거나 바위가 빗물에 밀려 산비탈을 굴러내려 기차를 탈선시킨 경우와 같다. 이런 경우 서양의 법률계에서는 묘하게도 신의 행위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행위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바위의 움직임만 있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느 sahems 식(識)은 행(行)이다. 식은 유위법이고 따라서 행에 든다. 이 행은 신 ․ 구 ․ 심 삼행(三行)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모든 행에는 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모든 행동이 똑똑히 알아차리는 가운데 행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보통 무의식적 행동이라 부르는 것은 다만 일부러 하지 않은, 부지불식간에 행해진 의식적 행동인 것이다. 또 우리가 보통 의식적 행동이라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일부러 한 행동, 가령 이전에 해본 적이 없거나 자주 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하려들 때처럼 그 일을 하기 위해 어느 정도 생각을 요하는 그러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을 할 때에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수를 범할지 모르므로. 사실 ‘알아차림’을 짓는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 그것이다. 살펴봄 없이 행하는 행동은 무의식적 행동이 아니라 알아차리지 못하고 한 행동인 것이다.  졸지 않고 분명하게 깨어있는 동안은 늘 어느 정도의 알아차림이 일어나 있는 게 사실이다. 크고 작은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단지 한 두 순간만이라도 그에 대해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알아차림마저도 멈춰버린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꿈과 깨어있을 때의 차이이다. 깨어있을 때 우리는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꿈을 꿀 때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 실제로 악몽을 꾸면서 깨어나려고 애쓸 때,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내기 위해, 즉 알아차리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일뿐이며, 그 노력이 성공하면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이다.  깨어있을 때는 잠잘 때와 달리 어느 정도의 알아차림이 항상 작용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알아차림은 보통 예기치 못한 상황을 그 상황이 전개되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고, 그 밖의 경우에는 자신이 하고있는 일에 온통 매몰되어 정신이 팔려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생계비를 버는 일상적 의무이건 또는 애정 ․ 혐오 ․ 분노 ․ 욕망 ․ 권태 같은 타인에 대한 정서적 태도가 끼여드는 인간사이건 상관없이 사정은 똑같다. 규칙적인 일상사라 할지라도 서둘러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거리를 두고 대하는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또 그런 일들은 우리가 남들과 맺는 인간적 관계에서도 정서적 만족감을 죄다 앗아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최소한의 손해만 보고 그 일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애쓰며, 그리하여 감정의 늪에 빠져들어 진훍탕 속의 몰소처럼 뒹굴고 싶어한다. 자기가 하고있는 일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어차피 일종의 노력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이런 종류의 노력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알아차림을 전적으로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예기치 않은 문제에 대처하자면 알아차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료의 알아차림도 공부이기는 할 테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그래서 삶을 한갓 사업처럼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해 버리려는 그런 공부밖에 안 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서 알아차림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진다. 여기선 삶에서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이다. 이들 두 가지의 상이한 목적들은 서로 정면 대치하여 적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협력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이 둘은 서로 직각으로 엇갈리는 관계에 있다. 어느 한 순간에 공부할 수 있는 알아차림의 양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양쪽 목적은 알아차림을 서로 쓰려고 경쟁을 벌인다. 가령 이 글을 쓸 때와 같이 단지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많은 알아차림을 필요로 하는 행위는 해탈을 향한 알아차림을 닦을 여지를 그다지 많이 남겨두지 않는다. 실제로 그럴 수는 없겠지만 가령 지금 쓰고있는 이 글자들을 똑같이 하루에 두 번씩 베껴 쓰기를 습관화해서 수년간  계속 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보다 많은 알아차림을 해탈 목적에 바칠 수 있게 되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여시어경』 (Itivuttaka)에서 유학(有學, sekha bhikkhu: 道에 이르렀으나 아직 아라한과는 이루지 못한 수행자)의 공부 발전을 해치는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일하기(집짓기, 옷 꿰매기, 자질구레한 허드렛일 하기 등)를 좋아하는 것,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건을 만들건 법을 설하건, 그런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많은 알아차림을 기울여야 하고, 잠잘 때에는 알아차림이 아예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알아차림은, 앞서 인용한 경에서 분명해지듯, 습관적이고 특별히 많은 생각을 요하지 않는 행동들을 대상으로 할 때, 즉 걷고 서고 앉고 눕고, 육체적 요청에 부응하는 갖가지 일을 할 때 가장 잘 닦을 수 있다. 인용문 (1)에서 ‘잠’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잠깰 시간을 마음에 새기면서 알아차림을 유지한 채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얘기지, 실제로 잠을 자면서 알아차림을 닦으라는 뜻은 아니다. 비구가 살다보면 아무리 피하려 해도 완전히 일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도 부득이 해야만 할 경우가 있게 마련인데, 이런 때에도 역시 마음챙김을 잃지 않고 가능한 한 알아차리면서 해야 할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말하자면 ‘마음챙겨 일에 임한다’, ‘말하거나 침묵하는 가운데 그는 알아차림을 닦는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도 말했듯 보통 사람은, 꼭 필요하지 않을 경우, 다시 말해 습관적 행동을 할 경우에는 알아차림 공부를 닦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는 이런 습관적 행동을 할 때에도 알아차리면서 하도록 가르침을 받으며,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자신의 행동을 이런 습관적 행동에 국한시키도록 배운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거나 밀어붙이는 등의 행위는 실업계나 실무처리에선 극구 찬양 받겠지만 해탈을 구하는 사람에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러면 해탈을 목적으로 알아차림을 닦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간다하다. 모든 행동은 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남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하고 일부러 물어 확인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태도를 조금만 바꾸면 된다. 주의를 조금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너무 정신없이 몰두하지 말고, 행동하는 자신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다. 물론 행동을 중단할 필요는 없다. 단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하고 자신에게 묻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행동은 일단 의식적인 것이 아닐 수 없으므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선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래서 단지 질문만 하면 그 답은 저절로 나오게 된다. 즉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스스로 물으면 그 즉시로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또는 ‘내가 지금 침대 위에 앉아 있다’, ‘다리를 긁고 있다’등등 끝없는 대답이 나온다.  알아차림 공부를 하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계속 던지고 그리고 그것에 답하기를  계속해나가야 하며, 마침내는 질문을 생략하고도 자동적으로 습관적으로 대답하기까지에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알아차림 공부는 성공적이며, 이젠 이런 상태를 발전시키는 일과 게으름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 후퇴하지 않도록 하는 일만 남게 된다. 물론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지각에 대한 알아차림, 생각에 대한 알아차림에도 동일한 고려가 적용된다(인용문(2) 참조). 여기서도 ‘내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또는 ‘무엇을 지각하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고 자신에게 물어야 하며 그 대답 또한 어김없이 곧바로 나올 것이다.  혹시 한 순간에 두 가지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떤 행위를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식(識)의 성질 또는 경험의 성질에 대해 그릇된 관념을 가진데서 오는 편견에 불과하다. 우리는 몇 가지 행위를 동시에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 나는 숨도 쉬고 있다. 한 행위를 위해 다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물론 같은 순간에 그 모든 행위들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다. 두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있듯이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도 동시에 행해질 수 있다. 이 사실은 쉽게 증명된다. 걷기 시작해 보라. 그리고 걷고 있으면서 자신에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물어보라. 그러면 걸음을 멈추지 않고도 ‘나는 걷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답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 대답을 위해 걸음을 멈칫하거나 냅다 달리거나 넘어지거나 할 필요는 전연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알아차림 공부를 해야만 하는가?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선 세 가지 중요한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첫째,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사람은 계를 지키기가 한결 쉬워진다. 가령 옆집 아낙네에게 정신이 팔린 사람이 ‘내가 지금 남의 아내를 탐하고 있구나’하고 알게되면 부처님께서 지키라고 하신 세 번째 계를 어기려 하는 자신을 깨닫게 됨으로써, 남의 아내를 탐하면서도 전혀 자각이 없는 사람에 비해 정신 차리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요컨대 알아차림은 일종의 자기비판으로 이끈 다음 자기 시정을 하게끔 도와준다.  둘째, 알아차림은 ‘식힘’에 해당되며, 욕망이나 미움같은 ‘끊임’에 해당되는 격정들과는 정반대 관계에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격정을 누를 수 있는 제어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알아차림의 공부를 계속해나가면 격정이 일어났을 때 이를 억누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격정의 빈도 또한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셋째, 알아차림의 수행은 불법의 핵심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선생조건이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불법은 일반적으로 어느 한 경험(의식, 느낌 등)과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통과 같은 가벼운 것에서 불치의 암에 이르기까지 어떤 한 특정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부처님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든 경험에서 헤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다. 자, 이제 살펴보자. 우리가 어떤 일에 정신이 팔려 알아차림이 없이 행동하고 있는 보통 상태에서는 오직 이런저런 경험(‘저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 ‘저 여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이나 특정한 상황과만 관련될 뿐이지, 보편적 경험(‘사랑의 감정의 본질은 무엇인가’)과는 결코 관계없는 상태로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있는지 어떤 느낌을 갖고있는지 알아차리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여전히 우리는 행동하거나 느끼고 있지만 그 행동이나 느낌을 어느 정도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그럴 때 행동과 느낌의 보편적 성질이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그런 경우 지금 내가 봉착하고 있는 특정 행동과 경험은 보편적 행동과 느낌의 한 예로 나타난 것이 될 뿐이다. 이렇게 모든 사물의 보편적 성질이 보여질 때 우리는 비로소 부처님의 안내에 힘입어 무상 ․ 고 ․ 무아라는 모든 존재에 고루 편만한 특성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얘기가 이런 식으로 접어들게 되면 너무 깊이 들어가게 된다. 이 정도로 논하는 것만 해도 벌써 쉬운 얘기는 아닌데 여기서 더 이상 난해한 논의로 나아갈 필요는 없겠다. 마지막으로 방금 말한 알아차림 공부의 세 가지 소득은 각기 계 ․ 정 ․ 혜 삼학에 배대(配對)된다는 점만 밝혀두고 여기서 얘기를 끝낼까 한다. 출처: 보리수 잎 ․서른 넷
344    띠사 스님과의 대화 댓글:  조회:1609  추천:64  2008-12-21
열하나 띠사 스님과의 대화(불교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시다) Bhikkhu Tissa Dispels Some Doubts   레오나드 프라이스 지음이 경 숙 옮김 Leonard Price(Bodhi Leaves No. 102)BUDDHIST PUBLICATION SOCIETYKANDY, SRI LANKA 지은이에 대하여 지은이 레오나드 프라이스는 캔터키 주 루이즈빌에서 태어나 다모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배우이며 작가이기도 한 그는 여가를 독서와 선(禪)수행 그리고 불교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BPS와 관련된 그의 저서로는 이 밖에도 'Radical Buddhism(Bodhi Leaves B 92)', 'To The Cemetery And Back(Bodhi Leaves B 96)' 등이 있다.     띠싸 스님과의 대화(불교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시다)   (찌는 듯 더운 어느 여름날의 해질 무렵, 띠싸라는 법명을 가진 한 스님이 나무 그늘 아래서 고요히 선정에 들어있다. 이때 신도 프랜티스 씨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연방 문질러 가며 길을 올라오고 있다. 스님의 모습을 발견한 그는 그쪽으로 다가간다.) 프랜티스 : 아, 띠싸 스님, 안녕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여기 계시면 좋겠다 생각하며 올라오는 중이었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안녕하십니까? 프랜티스 :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군요. 전 뭐랄까, 순전히 호기심에서 이따금씩 절을 찾기는 했지만 제 이름까지 기억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스님: 그럼 당신을 지금 이 곳에 오게 한 것도 그 호기심이겠군요? 프랜티스 : 아유,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헌데 날씨가 퍽 덥습니다. 스님 : 앉으시지요. 잔디가 좋으니…. 프랜티스 : 고맙습니다.(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스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는다.)여기까지 오느라 한참을 걸었더니, 다리가 좀 아프네요. 스님께 불교에 관해 몇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데 시간이 있으신지요? 스님 : 말씀해보시지요. 그래 어떤 의문을 갖고 계십니까? 프랜티스 : 간단히 말하자면 불교 그 자체입니다. 스님 : 호오, 불교의 모든 것이 다 수긍이 안간다는 말씀이십니까? 프랜티스 : 글쎄요, 저는 사실 그 동안 불교에 관한 책도 좀 읽어보았고 여기저기 다니며 강연도 들어보았는데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불교가 대단히 매력있는 종교라고 인정합니다.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이 매우 냉철하고 이치에 맞고 과학적이거든요. 스스로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자부하는 저에겐 불교가 아주 잘 맞는 것 같습니다.불교에서 마음과 물질을 분석하는 방법이 제겐 아주 과학적으로 보이더군요. 그러나 불교의 또다른 면, 다시 말해 종교적인 측면은 제게 혼란을 일으킵니다. 스님 : 당신은 열렬한 과학 예찬자이시군요. 안 그렇습니까? 프랜티스 : 네, 그렇구말구요. 스님 : 그러니까 당신은 과학을 닮은 만큼만 불교를 인정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프랜티스 :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님 : 그러시다면 실제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나 탐구하시면 될 일이지 구태여 불교를 알아보려고 고생하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프랜티스 : 저 뭐랄까, 과학만으로는 좀 …. 스님 : 종교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말씀이겠지요? (프랜티스 씨는 반갑다는 듯이…) 프랜티스 : 바로 그렇습니다. 스님, 사실상 저의 문제점은 제가 불교에 대해 알만큼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저의 이성으로는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불교에 귀의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의심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지요. 저는 불교 사상에 감탄은 하면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실행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 : 진지한 실천적 자세는 바로 종교와 철학의 차이입니다. 철학가는 허다한 이론들을 다루면서 시간을 보내지만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의 삶을 몽땅 겁니다. 프랜티스 : 바로 그것이 제게 부족한 점입니다. 스님 : 실은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프랜티스 씨프랜티스 : 헌데 제가 내심 바라는 건 그런 자세입니다. 진지한 실천의 자세 말입니다. 모든 삶을 거는 그런 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게는 꼭 그래야 겠다는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댁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프랜티스 : 네? 아, 그건 약 2,3킬로미터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스님 : 그러니까 이 여름날 찌는 듯한 무더위 속을 마음이 부족하다는 말을 하려고 그 먼 길을 걸어오셨단 말입니까? 프랜티스 : 아, 그렇게 되나요? 참 잘 지적해주셨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제가 좀 말씀드려 볼까요? 불교 수행은 말입니다. 자기 성찰로 시작해서 자기 성찰로 끝나는 공부입니다. 모든 불교사상이나 이론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기 성찰의 방법과 그에 따르는 결과를 가르쳐 줄 뿐입니다. 불교사상을 알고 싶어 책을 많이 읽고 배우기도 합니다만,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마치 약 처방만 알고 약은 먹지 않을 때처럼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프랜티스 씨, 불교에 대해 꽤나 읽기도 했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하셨지요? 특히 어떤 점이 그러하던가요? 프랜티스 : 어떤 점이 꼭 그렇다기보다는 스님 말씀처럼 저로 하여금 선뜻 약을 먹지 못하게 하는…, 의심이랄까…, 아니 아예 터놓고 말씀드리지요.제가 무엇 때문에 혹독한 고행이 따라야 하는 선(禪)수행과 엄한 계율을 지켜야 하겠습니까? 거기서 제가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지요? (따지는 듯한 어조에 스님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다. 그런 다음 조용히 입을 연다.) 스님 : 프랜티스 씨, 무엇보다도 우선 `혹독한 고행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점을 알아두십시오. 프랜티스 :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고요? 스님 : 그리고 무언가를 돌려받을 셈으로 노력을 투자한다는 식의 생각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프랜티스 :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스님. 스님 : 우리는 말입니다, 이미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다름 아닌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라든가 해탈 같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요. 프랜티스 :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지혜와 해탈 같은 것에 관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들이야말로 가치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스님 : 물론 그렇지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원하면 아무 때고 움켜쥘 수 있는 물건처럼 그렇게 구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고(至高)의 진리는 전리품이 아니지요. 진리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 수행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는 겁니다. 수행자는 물론 정진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뭔가를 `얻을' 생각으로 노력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프랜티스 : 제가 듣기엔 스님 말씀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스님 : 세속적인 삶의 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에겐 그렇게 생각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 같지는 않군요. 프랜티스 :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저는 불교사상을 이해하고 수긍할 수는 있지만 진실로 실행해보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스님, 왜 불교를 믿으려면 무조건 빠져야만 되는 겁니까? 스님 : (담담한 어조로) 어떤 경우에도 무조건 빠져서는 안됩니다. 프랜티스 : 그렇지만 불교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닙니까?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빠져보는 것 말입니다. 스님 : 아니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무턱대고 빌거나 믿는 것은 당신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그러면 무슨 이유로 불교를 믿는단 말입니까? 스님 : 그 `이유'라는 말을 잘 하셨습니다. 프린티스 씨, 불교의 수행자에게는 직관을 바탕으로 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이유와 직관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소원 때문에 믿지는 마십시오. 관념적인 이론에 끌려 믿어서도 안되지요. 당신 스스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만을 믿으십시오. 프랜티스 : 그러나 제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님. 깨달음이 무엇인지, 열반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지 않습니까? 스님 : 프랜티스 씨, 그렇다면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프랜티스 : (한참 궁리하다가) 제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혼란… 불확실성… 그리고 불행하다는 느낌…, 적어도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스님 : 그래서요? 프랜티스 :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적어도 나의 고통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듯 싶습니다.(스님 침묵한다. 프랜티스는 더듬거리며 마음을 털어놓는다.)제가 무슨 사물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안목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세상사가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점점 늙어가고 있는데 나이를 먹는다고 더 지혜로워지지도 않는다는 것. 세상이 잘못되었든지 내가 잘못되었든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괴로운 현실에 대해 어떻게든 해보고 싶습니다. 이 엉망진창이랄까, 뭐랄까, 아무튼 괴로움이라는 말로밖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이 상태로부터 도망가고 싶습니다. 아, 이제서야 겨우 제가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군요. 불교는 고통을 말하고 또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저는 꼭 해내고 싶습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이제야 비로소 당신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셨군요. 프랜티스 : (조금 흥분된 어조로) 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태까지 저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은 의심하는 마음이랄까, 아니면 두려움이었던가 봅니다. 스님께선 조금 전에 자기 성찰에 관해서 말씀해주셨죠. 저 역시 우선 제 마음부터 들여다보면서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스님 :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당신은 이미 자기 성찰을 시작하신 겁니다. 깨달음의 길로 접어든 구도자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는 어둠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며 지금 내딛는 걸음걸음에 주의를 집중하며 지금 바로 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는 미래를 가지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울로 삼아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어떤 것이 나와 남에게 이익이 되고 어떤 것이 이익되지 않는가를 비추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찰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알아진 것이 있다면 그는 거기에 따라 행동합니다. 나와 남에게 이롭지 못한 행위와 뜻을 삼가고 이로운 생각과 말과 행위를 닦아나가며, 이해를 차차 깊게 하고 청정하게 하여 가르침을 법다이 행동에 옮깁니다. 프랜티스 : 하지만 스님, 그러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스님 : 아니지요. 깨달음의 길은 엄격한 계율이나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길은 단지 바른 삶입니다. 가장 편안하고 좋은 삶의 길입니다. 우리가 고통과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릇된 삶의 방식에 너무 오랫동안 젖어 있다보니 인생을 사는 다른 길도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것이지요. 프랜티스 : 스님께서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시는…, 스님 : 그렇습니다. 불법(Dhamma),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기 고행과 자기 방종의 양극단이 아닌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육체와 정신을 괴롭히면 악이 소멸되고 지혜롭게 될까 하여 몸과 마음을 학대하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또 욕구를 좇아 쾌락에 내맡겨서도 안됩니다. 부처님께서 제시한 중도는 어리석은 양극단을 버린, 잘 조화되고 지각있는 바른 삶입니다. 프랜티스 : 네, 그 점은 불교를 처음 알았을 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불법은 지성적 측면에서 볼 때는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수행에 옮기는 것은 겁이 난다고 할까, 하여간 감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스님 :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푸툿자나(puthujjana)' 즉 속인의 마음은 번뇌에 좌우되어 사실을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마음은 거칠고 고통에 시달림을 받으며 미망에 빠져 있습니다. 정열에 휩쓸려 여기저기 헤맵니다. 그 마음은 탐욕과 증오에 끄달린 나머지 억제당하거나 길들여지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이를테면 번뇌에 물든 마음은 법의 위력을 두려워해서, 법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고 계속 노예로 부리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지요. 오랜 세월을 두고 이런 마음에 익숙해졌지 때문에 이 마음을 좀 바꿔보겠다는 생각만 해도 처음엔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프랜티스 : 그런데 우리 마음은 왜 이처럼 번뇌에 짓눌려 있을까요? 스님 : 한마디로 무지 때문입니다.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상태에서 우리는 번뇌에 끄달리기 십상이며, 어리석은 행위가 가져오는 해가 어떤 것인가를 모르는 채 우리 마음은 이리저리 어리석게 내닫습니다. 무지야말로 우리가 지혜롭고 밝게 행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참으로 무서운 짐입니다. 법(Dhamma)을 수행하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고통을 `버리기' 위한 것이란 점을 명심하십시오. 이 세상과 자신을 법에 따라 살필 때 통찰하는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 지혜가 드러나면 무지는 자연히 소멸됩니다. 무지가 사라지면 갈애는 정복되고 고통 또한 사라집니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지요. 프랜티스 : 스님께서는 그런 일들이 마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스님 : 어떤 의미로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우리 삶의 고통을 억지로 뽑아버리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보다는 근원으로 들어가 그 뿌리를 제거해서 저절로 시들게 해야 합니다. 이는 인과에 관한 문제입니다. 프랜티스 : 아, 그런 법칙이 있어서 고통을 소멸시켜 나가는 모든 과정이 거기에 따라 이루어지는군요. 그러나 그 일을 성취하자면 개개인의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스님 : 물론, 그렇습니다. 자, 그럼 이렇게 설명을 드려보지요. 어두운 방으로 불켜진 램프를 들고 들어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온 방안이 불빛으로 환해집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워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명확해집니다. 이때 램프는 곧 법입니다. 전에는 깜깜했던 것이 이제는 명료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어두움에 법이라는 램프를 가져다 비추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일러주신 방법입니다. 프랜티스 : 그 방법이 곧 선수행 아닙니까? 스님 : 반드시 선수행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요. 프랜티스 : 선수행은 불교 수행의 근본이 아닙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 핵심인 것 같던데요. 스님 :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만을 고르고 다른 나머지는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완전한 해탈을 이루는 데에 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곧 바른 견해[正見]의 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많은 측면이 있습니다만. 프랜티스 : 그러니까 바른 견해가 완전히 서야 하겠군요. 스님 : 팔정도의 모든 요소들이 충분히 닦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프랜티스 : 그렇군요. 그러니까 바른 견해를 다 닦은 후에는 바른 생각을, 다음에는 바른 말 그리고 바른 행위, 바른 생활수단,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 이렇게 차례로 닦아나가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스님 : 아니,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은 사다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프랜티스 : 그러면 팔정도는 하나하나 닦아 올라가는 길이 아니란 뜻입니까? 스님 :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팔정도의 모든 길은 함께 수행되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여덟 가지 바른 길이 따로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함으로써 수행자를 받쳐줍니다. 전통적으로 알려진 팔정도의 순서는 팔정도를 실제로 닦아가는 과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안심이 됩니다. 사실 저는 팔정도의 첫 관문조차 통과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거든요. 스님 : 아, 당신은 아직도 무언가를 `통과'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꼭 밟아나가야만 하는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길은 해탈을 향한 자기 계발에 필요한 모든 중요한 측면들을 수반하고 있는 여덟 갈래의 수행프로그램입니다.그 첫걸음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본성과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할 임무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 여덟 가지 요소의 수행을 통해 자신을 차츰 정화시켜가는 작업은 우리가 하기에 달린 것입니다.또 다르게는 팔정도의 수행을 세 가지로 구분해 설명하기도 하지요. 계[戒, siila], 정[定, samaadhi], 혜[慧, pa~n~naa], 즉 도덕적 계율, 선정 그리고 지혜로 나누고 있습니다. 도덕적 계율은 전체 수행과정의 토대입니다 계율을 잘 지키면 선정수행의 지주가 되고, 선정이 잘 이루어지면 지혜의 토대가 됩니다. 도덕적 계율이 따르지 않을 때 수행자는 알맹이 있는 것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지요. 그렇다고 이 말이, 먼저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된 다음에 선정과 지혜로 옮겨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수행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기에 함께 닦아야만 비로소 완성과 해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어리석은 탓이겠지만 제게는 그 셋 가운데 지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솔직히 말해서 계율과 선정에 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요. 스님 : 그건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지혜란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수행의 목적은 아닙니다. 지혜의 힘으로 우리는 사물의 본성을 식별하여 해로운 생각들을 근절하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스님, 저는 지금까지 혼동을 일으켜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혜와 지혜를 토한 수행에서 얻어지는 깨달음을 혼동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시 불교 수행에는 단계를 밟지 않고 보다 높은 경지로 단숨에 뛰어넘는 일종의 비약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스님 : 아, 그런 비약 말씀입니까? 프랜티스 씨, 그럼 한번 물어봅시다. 여기 오시는 길에 과수원을 지나오셨겠지요? 프랜티스 : 과수원이요? 네, 그랬었지요. 스님 : 그 과수원에서 가을철에 사과를 수확하는 것도 보신 적이 있나요? 프랜티스 : 물론입니다. 스님 : 사람들이 사과를 따려고 할 때 나무 아래에 서 있다가 공중으로 냅다 뛰어올라 사과를 잡아채던가요? 프랜티스 : 원, 천만에요. 아!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스님 : 그럼 그들이 사과를 어떻게 따던가요? 프랜티스 : 그거야 사다리를 가져다가 나무에 걸쳐놓고 올라가서….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단계가 있다는 말씀이지요. 밑 사다리를 밟지 않고서는 위 사다리에 오를 수 없다… 물론 그렇습니다. 띠싸 스님, 수행에 대해 지금까지 이해해 왔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봐야만 할 것 같습니다. 스님 :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사과를 따려는 열을 올리며 빨리 사과를 따겠다고 덤벼 나무 위로 뛰어오르다가 땅으로 떨어지곤 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딱하게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종교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숭고한 해탈과 같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만 잘못된 방법으로 찾아 헤매는 셈이지요. 반드시 밟아 나아가야 할 단계를 준비하지는 않고 말입니다. 프랜티스 : 실은 저 역시 그런 사람의 하나인 듯해서 부끄러워집니다. 스님 : 그렇습니까? 하하! 프랜티스 :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수행을 위해 계율과 선정에 대해 좀더 여쭤보겠습니다. 선정이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동요없음과 안정이 아닙니까? 스님 :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선정이란 어떤 대상에 정신이 하나로 모아진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대상에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고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정의 힘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까지는 이 힘을 갖고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아주 사소한 일조차도 하기 어려우니까요. 예를 들면 밥을 먹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편지를 쓰거나 자전거를 타는 일도 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을 닦는다는 것은 이처럼 누구나가 갖고 있는 이상적인 능력을 강화시키고 계발시켜 진리를 깨닫는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도구로 전환시키는 일이지요. 이 세상 모든 일이 원인과 조건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듯이 지혜 또한 난데없이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선정은 지혜의 발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의 마음은 초점이나 목적이 없이 산만하고 나약해서 사물을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을 만큼 한곳에 집중하지를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지혜가 생기는데 필수적인 고요함과 한결같음이 부족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한결같지 않으면 지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선정을 닦는 것은 지혜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고 지혜가 드러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는 작업입니다. 마치 정원사가 나무에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고 잔가지를 쳐서 정성껏 나무를 돌보면 수확의 계절에 열리지 말라고 해도 가지마다 탐스런 열매가 저절로 주렁주렁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프랜티스 씨, 선정이란 당신이 알고 있듯이 선수행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선정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적용되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프랜티스 :  저는 이제껏 선정이 특수한 정신훈련에만 필요한 것이라고 알았는데, 이제보니 지혜를 얻는데 필수적이라고 해야만 하겠습니다. 사소한 일을 할 때에도 어느 정도의 선정과 성찰이 필요한데, 하물며 인간의 괴로움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경우라면 얼마나 깊은 선정의 힘이 필요할까요!그런데 계율은 어떻습니까? 계율에 관해선 뭔가 석연치 못한 점이 있는데…, 어째서 계율이 선정이나 지혜처럼 꼭 필요한 것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덕적인 계행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다른 면에서는 탐구방법이 그처럼 과학적인 불교가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한 계율을 왜 중요하게 여길까요? 스님 : 당신은 계율이 왜 과학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랜티스 : 그야,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계율을 모독하려는 것은 아니고 또 분명히 높이 사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계율이 어떻게 해서 스님께서 이제껏 설명하신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수행방법과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프랜티스 씨, 부처님께서는 도덕적 계율이 지혜라는 밥에 잘 어울리는 반찬이기 때문에 계행을 찬양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수행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기 때문이지요. 구도의 길을 걷고자 하는 초발심자들, 곧 당신 같은 분들이 처음엔 흔히 불교 사상의 합리성이나 `과학적'인 측면에 감명을 받지만 그 본질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불교에 있어서 도덕적 계율도 다름없이 합리적인 것이란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도덕적 계율을 지키는 이유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거나 혹은 인습에 얽매어서가 아니고 우리의 정신 계발과 행복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조금이라도 향상하고자 한다면 바른 이해가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극복해야만 한다는 점을!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온갖 번뇌들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말이지요. 프랜티스 씨,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도 단속하지 못하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프랜티스 : 그럴 수는 없겠지요. 스님 :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선이라고 부르고 어떤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말하지요. 예를 들어, 자선을 하는 것은 선에 해당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악이라고 할 것이고 프라이팬을 닦는 것은 선도 악도 아니겠지요. 프랜티스 : 그거야 상식 아닙니까? 스님 : 상식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선악의 구별을 인정해야 할까요? 그건 아마도 어떤 행동은 고통과 비애와 불행을 가져오는 반면에 어떤 행동은 행복과 안락과 평화를 가져오기 때문일 겁니다. 선은 나와 남의 이익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악은 그 행위자와 피해자에게 고통을 낳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프랜티스 : 맞습니다, 스님. 어떤 행위가 불행을 초래하고 어떤 행위가 행복을 가져오는지는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스님 : 프랜티스 씨, 그러므로 도덕은 수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고 본질적으로 선정의 토대가 됩니다. 비도덕적이고 무절제한 사람은 결코 선정의 힘을 계발시킬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이 항상 분출하는 감정에 따라 휩쓸리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은 늘 망상으로 산만하고 들떠있으며 어디에도 안착을 하지 못하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성찰할 힘이 없습니다. 도덕적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티없고 떳떳한 마음을 갖추게 되고 탐구하는 마음을 방해하는 번뇌들의 위세를 꺾을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도덕적 계율에 맞는 행동을 함으로써, 헐떡이는 마음에 자신을 그대로 내맡기는 삶이 아니라 고결한 가치를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을 절제할수록 오히려 더 자유로워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무아(無我)의 교설이 단지 요원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체험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정수행을 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는 거지요. 프랜티스 : 그렇군요. 부끄럽게도 전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스님 : 뭐, 부끄러워하실 것까지야…, 누구나 책을 읽고 질문을 하고 법문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입니다. 처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문제는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 가운데 혹시 잘못 이해될 수도 있는 내용을 계속 고수하는 데 있습니다. 프랜티스 : 그런데 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에서 특히 놀라운 것은 불교의 성격이 매우 명확하다는 사실입니다. 제 머릿속에서 불교는 어딘가 신비하고 이 속세와는 동떨어진, 마치 두루미 한 마리가 가을 달밤을 날아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비현실적인 종교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불교는 전혀 막연하거나 애매하지 않고 매우 정확하며 현실에 적합한 종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신비주의는 찾아볼 수가 없군요. 스님 : (웃으며) 어디 그런 구석이 남아있는지 좀더 찾아보시지요. 프랜티스 : 불교는 특별한 교리체계를 가진 종교인 줄 알았습니다만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대단히 실제적인 가르침이라 여겨집니다. 스님께선 불교를 취미로 하려는 사람들에겐 아예 설자리를 주지 않으십니다. 스님 :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신중하게 탐구하고 사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수박 겉 핥기 식의 불교애호가를 면하게 되지요. 그중 어떤 사람들은 남달리 더 열심히 그 길에 전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말대로 불교를 막연히 취미로 하는 사람은 불교에 설 땅이 없습니다.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론으로 짜맞춘 교설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법(Dhamma), 다시 말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일반 철학에서는 이런저런 사상을 맛보거나 다양한 가설들을 마음내키는 대로 즐길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자세는 어리석어서 우리에게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부처님 법은 숭배하라고 베풀어진 것이 아니라 실천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지요. 박물관 안에 전시하라고 만들어 놓은 골동품이 아닙니다. 또한 법은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간에 그대로 법입니다. 말하자면 사물의 본 모습은 우리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법은 우리들의 변덕에 따라 이렇게 변했다, 저렇게 변했다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리저리 갈라놓고 입맛에 맞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도 법을 새로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라 다만 이를 발견하여 중생의 이익을 위해 널리 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법에 대해 이를 받아들인다느니 안 받아들인다느니, 혹은 인정한다느니 안 한다느니 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법 전체를 혹은 일부분을 자시의 구미에 맞게 고치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불교를 취미로 하는 구경꾼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들은 오락 삼아 또는 자기의 편견을 굳히기 위해 불교를 구경다닙니다. 어떤 것에 무작정 뛰어들거나 뛰쳐나오는 것은 똑같은 행위입니다. 무턱대고 의심하는 것은 무조건 믿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편견없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전제 조건이나 구실을 붙이지 않으며 이런저런 이론에 한눈 팔지 않고 종교를 취미로 삼지도 않으며 오로지 부처님이 제시해주신 길을 따라 묵묵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성실이야말로 참으로 큰 장애입니다. 프랜티스 : 스님 말씀을 듣자니 제가 애당초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불교를 대하게 되었는지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어쩐지 닫힌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불성실한 자세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도 단순한 불교 구경꾼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님 : 참 다행한 일입니다. 모쪼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음미하셔서 몸소 실천해보도록 하십시오. 프랜티스 : (다시 정색을 하며) 스님께서는 아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성찰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셨지요? 스님 :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공부할 마음이라면 그 성찰하는 방법이 보다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당신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물어왔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꼭 이런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런 의문들은 기껏해야 예비 단계의 성찰일 뿐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이제는 체계적인 방법에 따라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자, 이제 일단 이 세상에서 당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떠하다는 것과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았으니,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안 취하고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교신자를 자처한다고 해서 깨달음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프랜티스 : 띠싸 스님, 저는 부처님이 제시하신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는 그 길을 실제로 닦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저도 나름대로 수행 같은 것을 해오긴 했는데 법에 맞게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오리무중입니다. 어떤 것이 바른 선수행이며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시오. 스님 : 아무리 급해도 수레를 말 앞에 묶으면 끌고 갈 수가 없겠지요. 프랜티스 씨, 당신은 일정한 자세를 취하는 좌선에 대해 물으시는가 본데 우선 선수행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프랜티스 : 알 듯도 합니다만…, 분명 잘못 알고 있겠지요. 스님 : 자, 그럼 우리 아주 기초부터 이야기를 해봅시다. 흔히, 선수행(meditation)이라 번역되는 말은 빠알리어로는 봐와나(bhaavanaa)인데 그 뜻은 정신 수양(mental cultivation), 혹은 자기 계발(self-development)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어의 meditation이란 말보다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지녔지요. 이 점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교의 선수행이라고 하면 어두침침한 곳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난해한 주제를 숙고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저도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해왔었지요. 스님 : 그런 생각에서 불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신비니 뭐니 하는 얘기가 나온 것이지요. 올바른 선수행은 환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유별난 자세나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에 국한되지도 않습니다. 선수행의 골자는 `마음을 챙기는 일', 빠알리어로는 사띠(sati)라고 하는 작업입니다. 마음챙김(mindfulness, 正念)이란,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고 또렷이 깨어있어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놓치지 않고 주의하는 마음상태를 뜻합니다. 그것은 치우침없이 주시하며 다잡고 있는 마음입니다. `선수행한다'는 말은 당신이 무엇을 하거나 어떤 장소에 있거나 상관없이 마음을 챙기고 선정의 힘으로 그 상태를 지속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하면서도 선수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스님 : `함께'가 아니지요. 선수행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상생활 그 자체를 놓치지 않고 마음을 챙기는 수행입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선수행과 일상생활이 같은 것입니까? 그건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요. 스님 : 거기에 아무런 차이도 구별도 없어야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참선하는 시간 따로 있고, 마음 편히 지내는 일상생활이 따로 있는 줄로 압니다. 그들은 하루 한두 시간씩 방석에 앉아 좌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요.프랜티스 :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루 온종일을 선수행에 모두 바칠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상관없습니다. 시간을 꼭 정할 필요는 없지요. 무엇보다도 우선 수행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행위인지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만일 피아노 연습 정도로 생각한다면 이미 당신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인간의 완성인 이상 무엇 때문에 우리의 노력을 특별한 행위나 제한된 시간에만 국한시키겠습니까? 세상을 전체로서 온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세상을 `보아야만' 합니다. 또 마음챙김의 수행은 항상, 쉬지 말고 이어져야 합니다. 프랜티스 :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한순간에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바쁜 일과 속에서 어떻게 순간순간을 마음챙기는 일에 전념할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사띠(sati)는 원래 단지 `잊지 않는다(memory)'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마음챙김의 의미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도 잊지 않고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하고 또렷이 깨어있으며,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한 번에 한 가지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오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때라야 마음챙김의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마음챙기는 일은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인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일을 하고 있다면 일 자체에 당신의 주의를 온통 기울이십시오. 생각이 여기저기 떠돌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먹고 있음을 또렷이 알아차리십시오. 목욕을 할 때는 목욕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이와 같이 현재 당신의 감각에 와닿는 것이 곧 당신이 행하는 선수행의 주제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단지 보고 알아차리고는 그대로 놓아버려야 합니다. 프랜티스 :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어렵군요. 그런 마음은 일상의 우리 마음과 어떻게 다른가요? 스님 : 사람들은 대개가 지금 이 순간의 일에 마음을 챙겨 임하지를 못합니다. 현재 이 순간을 알아차리고 있지 못해요. 우리의 마음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갈갈이 흩어져 끊임없이 여기저기 헤매며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궁리하느라 아주 바쁩니다. 그 마음은 갈망과 증오로 끊임없이 헐떡거리고 여기서 서둘러 저기로 달려갑니다. 그러느라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알아차릴 틈이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프랜티스 씨 자신의 마음도 또한 챙겨져 있지 못하고 바로 앞에 있는 일에서 멀리 도망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마음챙김을 수행하여 쓸데없는 마음의 동요를 막고 현재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 여기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고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입니다.프랜티스 : 그러니까 선수행은 참으로 마음을 훈련시키는 일이군요. 스님 :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도덕적 계율을 지킴으로써 다스리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은 선정 수행으로 다스립니다. 프랜티스 : 지금 이 순간에 머물도록 마음을 챙기기만 하면 그것이 곧 선수행입니까? 스님 : 그건 아니지요. 마음챙김과 더불어 한편으로 선정(samaadhi, concentration)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음챙김이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관찰, 탐구, 알아차림이라면 선정은 우리의 마음을 일정한 어떤 대상에 지속적으로 붙잡아두는 것입니다. 선정과 어울려 마음챙김은 더욱 발전하여 정지(正知, sampajaana)를 성취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주의를 고정시키고 그 상태를 지속하며[禪定]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바라보게 되면서[正念] 이 정지(正知)가 드러납니다. 이 정지에 의해 대상이 어떤 것인지, 또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며 그 대상이 어떤 이익을 주고 어떻게 위험한 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를 정지에 의해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릇됨과 참됨, 비천함과 고상함을 제대로 가려보게 됩니다. 이 같은 수행이 궁극에 이르게 되면 이상생활과 선(禪)의 차이가 없어집니다. 프랜티스 : 스님께선 좀전에 `대상'을 말씀하셨는데 선수행에 특별히 어떤 대상이 필요한 건가요? 스님  : 어떤 물체나 정신적 현상이나 모두 선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지요.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 또는 마음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 선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프랜티스 : 무엇이나 다 될 수 있단 말씀이죠? 일상생활 자체가 선수행이 되어야만 한다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었군요! 그렇지만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관(觀)할 주제를 특별히 선정해주지 않습니까? 스님 :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서 사념처(四念處)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프랜티스 : 들어본 듯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스님 : 『대념처경(大念處經, mahaasatipa.t.thaana-sutta)』 에 보면 마음챙김에 관한 저 유명한 부처님의 법문이 실려 있습니다. 마음챙김의 네 가지 토대[四念處]에 관한 가르침 말입니다.첫째는 몸에 대한 관(觀)입니다[身念處). 이것은 우리의 몸에 일어나는 모든 신체적 현상을 남김없이 지켜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각(知覺)하고 사고하는 이 여섯 자 몸안에 세계의 시작이 있고 세계의 끝이 있으며 세계의 끝으로 가는 길이 있도다." 이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해탈하기 위해 찾아내고 깨달아야 할 모든 현상이 바로 이 몸 안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거기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마음을 챙기고 관하는 것은 특히 수승한 열매를 맺는 공부입니다.마음챙김의 두 번째 토대는 느낌에 대한 관입니다[受念處]. 프랜티스 : 느낌이라니요? 감정을 말하는 것인가요? 스님 : 여기서 말하는 `느낌'이란 유쾌한 느낌, 불쾌한 느낌, 또는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느낌을 말합니다. 우리가 대하게 되는 모든 대상은 우리 마음속에 유쾌하거나 불쾌하거나, 혹은 그저 그런 느낌을 일으켜줍니다. 수념처관(受念處觀)이란 이러한 느낌들의 성질을 주의깊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느낌들을 지켜보되 유쾌한 느낌에 애착하거나 불유쾌한 느낌을 싫어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종류의 선수행이든간에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편파적이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프랜티스 : 아무래도 어렵게 들리네요. 유쾌한 느낌을 불쾌한 느낌보다 더 좋아하지 말라니요. 아무튼 좋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스님 : 마음챙김의 세 번째 토대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관입니다[心念處]. 이는 순간순간의 마음상태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행복한가, 불행한가, 괴로운가, 의기양양한가, 태만한가, 힘이 있는가, 집중돼 있는가, 흩어져 있는가 등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지켜본단 말입니까? 스님, 그건 좀 억지소리 같습니다. 스님 : 실제는 그렇지 않지요. 그것은 표현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다만 편의에 따라 마음이란 말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엄밀히 말해 끊임없이 흐르는 정신현상의 과정들이 모여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마음을 지켜본다는 말은 마음을 챙겨서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매순간순간에 그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주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프랜티스 :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상태를 관한다는 것은 마음 안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지켜본다는 뜻이군요? 스님 : 그게 아닙니다. 심념처관(心念處觀)이란 매순간의 마음상태나 마음의 성질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마음을 이루는 내용, 혹은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특정한 현상은 네 번째인 법념처(法念處), 즉 정신적 대상에 대한 관에서 이야기됩니다. 이 법념처관(法念處觀)에서는 마음챙김의 방향은 마음의 대상이 되는 여러 정신 현상들 쪽으로 향해집니다. 그 현상들이란 어떤 사상이나 기억이나 개념이나 희망이나 공포 등 모든 사고(思考) 형태를 말합니다. 프랜티스 : 왜 염처(念處)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스님 : 사실 마음챙김 자체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달라질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 마음챙김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를 배우기 위해, 대상을 분류하고 그 중의 어떤 대상으로 마음챙김을 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념처란 어떤 특정한 경험을 토대로 수행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몸을 관함에 있어 우리는 우주의 주의력을 몸으로 돌려 몸으로부터 일어나는 경험을 주시해 놓치지 않고 지켜봅니다. 좌선수행에서 스승은 흔히 제자들에게 호흡의 들숨과 날숨, 혹은 복부의 오르내림과 같은 한 가지 신체적 현상에만 집중할 것을 권하지요. 이 경우 마음챙김은 몸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느낌[受], 마음의 상태[心] 그리고 마음의 대상[법]에 관해서도 역시 그 과정은 마찬가지입니다. 프랜티스 : 그렇다면 이 사념처란 네 가지 분류는 아무렇게나 편의에 따라 분류된 것일까요? 스님 : 천만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념처는 우리가 평소에 구별하지 못하는, 경험의 한 특정한 측면을 주시하는 것입니다.불교에서는 자기 성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주십시오. 사념처관을 수행해가는 동안 차츰 우리는 여태까지 우리 자신이라고 알아왔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몸뚱이는 어디까지나 몸뚱이일 뿐, 나 자신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지요. 우리의 느낌들 역시 그냥 느낌일 뿐이고 마음의 상태는 단지 마음의 상태일 뿐이며 마음의 대상 또한 그대로 마음의 상태일 뿐입니다. 프랜티스 : 아, 그렇군요. 스님 : (프랜티스를 유심히 바라본다.) 프랜티스 씨, 선생께선 내가 한 말을 이해하신 것 같군요. 그러나 여기서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참다운 이해는 스스로의 힘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프랜티스 : 네, 그렇게 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또 여쭤봅니다. 아까 수념처관(受念處處)을 설명하시면서 스님께서는 유쾌한 느낌을 불쾌한 느낌보다 더 좋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 이 사념처관을 수행할 때 수행자는 오로지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 마음을 챙기는 일에만 전념할 뿐입니다. 예컨대, 어떤 종류의 느낌을 경험하게 되면 그는 있는 그대로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 경험이 유쾌한 것이면 유쾌한 것으로, 불쾌한 느낌이면 불쾌한 느낌으로, 그저 그런 느낌이면 그저 그런 느낌이라고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프랜티스 : 그렇지만 스님, 사람들은 유쾌한 것을 불쾌한 것보다 더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스님 :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불쾌한 것을 참아가며 좋아하고 유쾌한 것을 억지로 싫어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느낌이란 유쾌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기 마련입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좋다, 싫다는 생각을 제쳐놓고 다만 그 느낌이 어떤 것인가를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 속에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얻으려고 애쓰지도 말고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멀리 하려고 부득부득 밀어내서도 안됩니다. 자신이 놓여있는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서 오직 평등한 마음가짐으로 무엇이 일어나든 간에 다만 지켜보기만 해야 합니다.프랜티스 : 그러니까 스님 말씀은 어떤 불쾌한 느낌이 일더라도 그 느낌에 대해 어찌 해보겠다는 생각은 그만두고 그대로 참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스님 : 아닙니다. 부처님이 제시한 길은 고통의 완전한 소멸을 위한 길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불법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은 분명 그의 생활 속에서 고통이나 불쾌가 줄어드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물론 상당한 경지에 이른 분들도 때로 불쾌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는 모든 현상이 덧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헛되이 집착하거나 혐오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는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을 닦음으로써 좋아함과 싫어함의 아귀다툼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고통들에서 벗어납니다. 집착을 버린 것이지요.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일들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그대로를 지켜볼 뿐 거기에 대해 기뻐 날뛰거나 비탄에 빠지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그렇게 되려면 상당히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겠군요. 스님 : 아무리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도 한때는 거칠고 어리석은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성실히 수행하려면 우선 당신의 마음을 닦으십시오. 그리고 덧없는 현상을 믿고 의지하던 마음을 거두십시오. 마음챙김을 닦아나가면 당신의 내면과 바깥 경계가 다 무상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현상은 참으로 믿을 수 없이 빠르게 변해가고 생멸하며 계속 흘러갑니다. 이 점을 사실대로 보게 되면 다신은 더이상 어딘가에 집착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프랜티스 : 모든 집착의 근본은 헐떡이는 욕망, 즉 갈애(渴愛)가 아니겠습니까? 스님 : 갈애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우리 마음에 뿌리 박혀 있습니다. 불법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더욱 잘 파악하게 되어 마침내는 갈애의 뿌리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갈애는 어리석음이라는 자양분을 받아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수행의 길에서 게으르고 방일하는 일상생활로 되돌아간다면 갈애는 분명 우리의 인생에 고통의 새끼를 치고 또 칠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수레바퀴는 돌고 또 돕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다면 갈애는 틀림없이 그 뿌리를 내릴 토양을 잃고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그에 따라 고통 또한 소멸될 거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을 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프랜티스 : 만일 안한다면? (걱정스런 표정으로) 똑같은 삶의 되풀이? 스님 :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똑같은 삶의 되풀이지요. 프랜티스 : 그러니까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군요. 행복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스님 : 세속의 즐거움이란 찾아왔다간 떠나 버립니다. 변치 않는 행복은 결코 우연히 찾아오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불멸의 행복을 얻는 것이 정말 가능합니까? 스님 : 가능하지 않습니다. 프랜티스 : 가능하지 않다구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표정이 밝아진다) 아, 네. 그러한 행복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때 행복의 성취가 가능하겠군요. 스님 : (미소지으면) 그렇지요. 가능합니다. 프랜티스 : 아, 알겠습니다. 이제야 알 듯합니다. 스님 : 불법에 관한 책을 읽거나 설법을 듣고 배우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프랜티스 : (불쑥) 띠싸 스님, 만일 누군가 수행의 길로 나선다면 아니, 제가 나선다면 과연 해낼 수 있을까요? (스님, 침묵한다. 프랜티스 씨는 조바심을 내며 스님의 대답을 기다린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주위는 향기로운 꽃내음과 함께 적막함이 깃든다. 아직도 스님으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윽고 프랜티스 씨는 스님께서 대답을 안할 작정인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당황해서 혼잣말을 한다.) 프랜티스 : 아, 네. 물론입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스님의 법문을 듣고나니 뭐랄까,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것이지요. (잠시 후 스님의 목소리가 적막을 가른다.) 스님 : 마음을 편히 하시지요. 프랜티스 씨,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의 마음을 머물게 하십시오. 잔디를 꽉 움켜쥐고 계시군요. 그걸 놓으시지요. 프랜티스 : 알겠습니다. 스님 : 자, 이제 계속 놓으십시오. 프랜티스 : 계속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스님!(잠시 후 일어나며) 벌써 어두워졌는데요.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스님 : 살펴 가십시오, 프랜티스 씨. 프랜티스 : 좋은 말씀 고마웠습니다. 이제 저의 의심은 말끔히 가셨습니다.(깊숙이 허리 굽혀 절한다) 편히 계십시오. (프랜티스, 잔디밭을 건너간다. 스님이 그를 불러 세운다.) 스님 : 프랜티스 씨. 프랜티스 : 네? 스님 : 마음을 챙기십시오. 프랜티스 : 노력하겠습니다. (프랜티스, 잔디밭을 지나 사라진다. 밤의 적막과 어두움이 깔리는데 띠싸 스님은 그대로 앉아 있다. 풀과 나무와 스님의 모습이 차차 시야에서 사라지고 시간은 흘러간다.)    출처: 보리수잎
343    함정에 빠지지 마라 댓글:  조회:2502  추천:68  2008-12-08
하루도 경전 책을 놓지 않고 삼십여 년을 부처님 공부를 해 왔지만… www.borisu.or.kr  이 여래심   하루도 경전 책을 놓지 않고 부처님 공부를 해 온 지도 삼십여 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문을 찾지 못해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했고, 나중에는 문이 너무 많아 헤매어야 했던 날이 얼마이었던가! 그러나 나름대로 배운 부처님법을 안다고 자부하며, 또 실천하며 살아왔다. 한 번은 묘법연화경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6년에 걸쳐 1자 1배하다 「일대사 인연법」을 깨닫고, 그 순간 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희의 감동과 함께 3일 밤낮을 온몸에서는 진득진득한 땀과 같은 액체가 쏟아져 나오는 경험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고개 숙였고, 또 한번은 「대행큰스님」의 법어집에서 많은 의문의 실타래들이 속속 풀어지는, 산채로 크게 두 번을 태어나는 경험을 하면서 부처님의 법에 하염없는 찬탄을 하였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처님의 최고의 보배를 얻었기에, 남들에게도 이 훌륭한 부처님법을 전하기 위해 법사로서의 활동을 하면서 마음 가득 행복감을 갖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30여 년 넘게 해왔던 그 공부가 진정한 법(Dhamma)이 아니었다고 깨닫게 되는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아는 보살님의 소개로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하기에, 참선수행을 몇 십년 해 온 터라 자신도 있고, 어떤 수행인지 궁금도 해서 참여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로 인해 30년 이상이나 잘못 배워 왔던 부처님의 법을 다시 시작해야하는 서글픈(?) 운명에 놓이고 말았다. 처음부터 다시…,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그러나 난 다시 태어났다. 지난 30여 년 공부해 온 시간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하루가 더 행복함을 느낀다. 그것은 나의 잘못 길들여 진 훈습, 사견들, 질기고 질긴 불선업의 종자를 뿌리 채 뽑아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을 통해 너무 깊게 자리잡고 있는 번뇌망상과 나를 내 세우려는 아집과 편견, 시기, 질투, 미워하는 마음, 지나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등 항상 갖고 있으면서도 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차림 하게 되었고, 특히 ‘나’라는 고정관념의 망집통을 꼭 깨고야 말겠다는 다짐으로 집중수행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 번뇌의 덩어리가, ‘나’라고 하는 아집의 덩어리가, 어떻게나 두텁고 큰지 실감하였다. 아니, 그것을 모르고 살아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말일 것 같다. 스님의 지도에 따라 배가 일어나고, 꺼짐을 관찰한다. 또 한 생겼다 없어지는 수많은 대상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집중한다. 이 별것 아닌 듯한 작은 동작들을 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든지… 좌선 시 몇 시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 있는 몸이지만 그러나 언제나 오는 육체적 통증에는 반갑지가 않다. 그러나 이 통증 역시도 훌륭한 관찰의 대상일 뿐 그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수행 역시도 그러하다. 음식을 먹을 때 ―밥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을 때― 도 이렇게 수많은 단계가 있다니! 위아래 입술이 열리고, 음식을 받아 혀가 밀어 넣고, 이가 씹고, 혀의 힘과 침의 역할, 목젖의 움직임, 음식이 넘어가는 움직임 등등… 항상 나와 함께 있는 행동들이었지만 난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이 법을 알게 됨에, 맛과 식탐으로 대하던 음식에서 나를 하나 버린다. 이런 하나 하나의 수행을 통하여 변해 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전에는 실수를 해도 그것을 못 느끼거나 혹은 그냥 넘어가 버리는 일이 허다했고, 혹은 화가 난 일에는 화가 풀린 며칠 뒤에서나 사과하는 일이 많았지만, 내가 말을 하거나, 화를 내는 동시에 그것을 알아차리게 됨에 괴로움, 성냄의 성품과 무상함의 성질을 알고, 일체만물이 변해간다는 마음챙김을 하므로 어느 정도는 내 스스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 수행을 하다보면 신비한 경험도 하기도 한다. 나의 몸이 허공으로 걷기도 하고, 산이 되었다 물이 되었다하고, 시커먼 것이 몸에서 나오기도 하고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이 느껴지기도 하고, 은빛 그물망, 금빛 그물망 등 오색 찬란한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내 마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탐심 때문이므로 여기에 좋다, 싫다는 마음을 내지 말라고 스님께서는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신다. 나라고 집착하는 일체 모든 것들을 사성제와 팔정도의 진리법을 통한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삼법인(무상, 고, 무아) 이 나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 지면을 통하여 부족한 저희들에게 참된 수행을 배울 수 있도록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시느라 애쓰시는 보리수선원 붓다락키타 스님께 진심으로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엎드려 삼배올립니다. 스님 진심으로 공경합니다.  출처: 보리수선원
342    현대인과 불교 명상 댓글:  조회:2900  추천:58  2008-12-05
현대인과 불교 명상 명상의 단계적 수행을 위한 지침 What Meditation Implies Āchārya Buddharakkhita 아차리야 붓다락키따 지음 이 경 숙 옮김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1981. Bodhi Leaves No. 74)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PTS)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주요 술어는 빠알리어 음을 취했으며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 본문의 주는 원주(原住)이며 역주(譯註)일 경우 따로 [역주]라고 표기하였음. ▶ 차 례 ․현대 생활에서의 명상 6    명상이란 무엇인가 13 ․명상 수행과 마음의 제어 21 ․명상과 재가자 41 현대 생활에서의 명상 현대의 특징은 대중문화이고, 거기에서 집단 히스테리, 세뇌, 규격화 그리고 개성말살을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물질적 발전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나머지 날로 비인간화해 가고 있다. 이제 사람은 한낱 복잡한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전문화 추세를 열렬히 추구한 결과 시야는 좁아질 대로 좁아져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들에 대해 쓸데없이  많이 알게 되었다. 획일화 경향은 판에 박은 사고를 하게 만들어 이제는 생산품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마저 규격화되었다. 그 결과, 개성 있는 자기표현이 사라져 버렸다. 한 집단의 구성원이 되고자 애쓰는 과정에서 개개인이 원래 지니고 있는 전일성(全一性)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일관조립식(一貫組立式) 생산기술이 사생활에까지 침투하여 그 대가로 고유한 인간성을 앗아가 버렸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가치의 붕괴다. 인간에 내재해 있는 더 높은 가능성의 씨앗을 현실로 꽃피워내는 내면의 율동인 도덕성이 첫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실제로 나타난 결과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형편에서는 아무리 고상한 동기도, 계산하고 재려드는 의식구조, 즉 심화되어 가는 상업화 추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사소한  적선마저도 이웃돕기 운동이라고 광고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버렸다. 이렇듯 무미건조한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이제 유일한 희망은 마음밭을 갈아 그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서 찾는 수밖에 없다. 교육의 상황은 어떤가. 고상한 가치 수단으로서의 교육 본래의 면목은 사라져버리고 교육 그 자체가 목적처럼 되어버려 현실적 이윤동기에 의해서만 사고파는 풍토로 변했다. 교육은 이미 나무 위에 주렁주렁 달린 푸짐한 과일을 딸 수 있도록 딛고 올라설 사다리가 아닌데다가 그 과일 역시 쓴맛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으나 그 흥정 와중에 지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힘은 획득했지만 막상 그 힘을 쓸 지혜가 없다. 인간이 자연의 보고(寶庫)를 노획했지만 그 보물을 쓸 재주는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우울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중차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려 하고 있을 뿐이다. 기술의 발달이 물질적 번영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상응하는 문화와 인성(人性)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는 없다. 기술적으로 앞선 사회에서 일고 있는 온갖 대립과 부패 그리고 갈등이 바로 그 증거이다. 세상이 이런 비극적 상황에 직면한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심령과학의 초심리학(超心理學) 연구나 천안통(天眼通)과 같은 초자연적 지혜에 의하면 과거에도 비슷한 상황전개가 있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아득히 먼 옛날, 지금은 대서양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지만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아틀란티스라는 대륙이 있었다고 한다. 이 대륙에서 이루어졌던 놀라울 정도로 높은 문명의 실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재 가장 까다로운 과학자들마저도 진지한 검토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 급격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우주과학 분야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자료에 의하면 아틀란티스 대륙은 순전히 물질적인 면으로만 발전하였고, 그 결과로 쾌락을 탐하는 문명에 빠져들어 결국 자멸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자체에서 생겨난 녹 때문에 쇠 조각 전체가 녹슬어버리고만 경우와 같다 하겠다. 부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고 있는 현재의 우리를 위해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긴 두 단어를 이미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냥 보기(sight)’와 ‘꿰뚫어 보기(insight)’1)이다. 꿰뚫는 눈으로 보는 것, 그것이 지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실재에 연결시켜 주는 교량이다. 꿰뚫어 봄이 의미하는 지혜란, 사물을 간파하여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볼 수 있는 날카로운 이해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옳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판별하는 능력이며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름, 거짓, 악을 누르고 옳음, 진실, 선의 편에 서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사물의 겉모습 이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상황의 노예가 아니라 그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는 것에만 만족하여 겉보기에만 그럴듯하면 넋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언제나 바쁘고 소란하고 인위적이고 기계화된 삶을 살고 있어서 내면적으로 불안하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적․경제적․도덕적 혼란의 와중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그냥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아내는 것’이 참으로 필요하다. 썩어빠진 물질만능주의 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하루빨리 깨달아야만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명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명상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며, 그 지혜가 우리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고 우리 시대의 과학과 기술의 탐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이란 말은 너무나 다양한 정신활동 ― 그것도 때로는 서로 상반되는 활동들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명상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한 후 그것을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명상은 실제적 체험이며, 이 점에서 지적 관념과 구별된다. 부처님께서는 명상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셨다. 1) 바와나(Bhāvanā) : 정신적 계발 또는 마음 밭 갈기[耕]. 2) 심청정(心淸淨 Citta Visuddhi) : 마음의 정화. 3) 사마타[止 Samatha] : 마음을 진정시킴 또는 가라앉힘. 4) 심일경성(心一境性 Ekaggatā) : 마음과 제반 정신적 기능을 한 곳에 집중시킴. 5) 사마디[三昧, 定 Samādhi] : 제각각인 정신적 힘들을 통일시키는 것, 그러면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제 위에서 열거한 용어들을 하나하나 풀어 명상의 정확한 의미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바와나(bhāvānā) ‘마음을 갈다, 마음을 계발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를 토지에 비유해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여기 얼마간의 땅이 있다. 만일 그 땅을 경작하지 않고 불모지로 내버려둔다면 쓸모가 없어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땅은 황폐해지고 잡초가 무성하여 뱀이나 전갈 같은 해충들이 서식하기 좋은 위험한 곳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발되지 않은 마음은 정신적으로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위협이 된다. 왜냐하면 탐욕과 증오와 미혹이라는 독사․전갈들이 그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바와나(bhāvanā)는 ‘되다’란 뜻을 지닌 빠알리어 ‘bhu’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명상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실상, 또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창조적 과정에 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되어가는’ 것이며, 그것도 업에서 점점 헤어나게 되는 ‘됨’이 되는 것이다. 심청정(citta visuddhi) 연못물을 예로 들어 ‘심청정’을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열정과 이기심과 증오로 흐리고 탁해진 마음의 연못이 있다면 그 물에는 자신의 모습도 또 세상 사물의 모습도 바르게 비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을 수행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자신의 참 모습뿐 아니라 주변 세상의 실상에 대한 통찰까지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마타(samatha)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 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행위이다. 규칙적인 명상은 내면의 고요와 평온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의 지각과 판별력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그래서 인생은 정말로 경이로운 경험으로 가득 찬 멋진 탐험 길이 된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부딪쳐야 하는 갖가지 갈래길에 당황하지 않고 이를 태연히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잃음과 얻음,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 등 삶이 몰고 오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마음은 동요되지 않고 평온하다. 이는 깊이 있는 제어력을 성취한 것을 뜻한다. 방파제를 비유로 들어보자. 바다에 방파제를 만들어 놓으면 아무리 거센 파도라도 그 벽에 부딪쳐 잘게 부서지므로 항구는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명상을 수행한다는 것은 마음의 바다에 방파제를 쌓는 일이다. 그리하여 삶의 파도로부터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끝없이 성난 파도가 밀려드는 이 세상에서 든든한 마음의 방파제보다 더 유익한 것이 또 있을까. 심일경성(ekaggatā) 지적인 집중과 명상의 집중은 같지 않다. 지적 집중이 부분적인 것이라면 명상의 집중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전체적인 집중이다. 뉴턴의 일화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아이작 뉴턴은 연구에 몰두할 때면 다른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하숙집 주인이 삶아서 아침 식사로 먹으라고 두 개의 달걀을 놓고 가자 그는 달걀대신 그의 회중시계를 끓는 물에 넣어버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명상수행의 집중상태에서는 그와 같은 상궤를 벗어난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명상 상태에서는 깨어있는 마음이 모든 감각 기능을 통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초세간의 저 높은 세계로까지 이끌어주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집중은 분명히 힘이다. 하지만 명상의 집중은 탁월한 힘이다. 사마디(samādhi) 삼매 또는 몰입(沒入)은 제각기 다른 그 모든 마음의 기능들을 종합한 상태를 말한다. ‘통일’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가지고 전혀 새로운 하나의 존재를 창조해낸다는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역어라 하겠다. 명상은 잠자고 있는 일체의 잠재력을 활성화해서 우리를 새로운 경지로 들게 함으로써 자기 변혁을 이루어내게끔 해준다. 명상 수행은 어디까지나 자기 변혁을 이루어내는 자기 계발의 방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도 대단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자기 계발은 매우 특이한 돌파 작업을 완수해내는 바, 그것은 지성의 겉껍질을 돌파하여 우리의 마음이 지혜의 빛 앞에 활짝 열리도록 만드는 작업을 말한다. 지혜의 빛이 흘러 들어와야만 우리의 인격은 비로소 향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명상 수행과 마음의 제어 나아갈 것인가, 뒷걸음 칠 것인가 인격의 전반, 즉 지적, 윤리적, 정신적 제 방면의 발전에 끼치는 명상의 작용에 대해 저 유명한 세계적 고전인 󰡔법구경󰡕은 명쾌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를 풀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직관의 기능은 마음이 명상에 매여 있을 때에만 작용하네. 명상에 의해 마음이 계발되지 않으면 직관의 기능도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위축되네.  나아갈 것인가, 뒷걸음질 칠 것인가,  이 두 길이 있을 뿐이니 이 점 분명히 깨달아서 직관의 지혜가 무르익도록 길을 잘 택하여 나아가라.                        [게송 282] 부처님은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한 중립적이라든가 혹은 두 발을 걸치는 식의 제3의 길은 없다는 것을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뒷걸음질 치게 된다. 세속주의자들이 취하는 것과 같은 엉거주춤한 태도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소극적인 것이다. 불모지건 경작되지 않은 땅이건 둘 다 생산능력의 부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듯이 어정쩡한 태도도 적극적인 정신적 결실을 맺지 못하는 점에서는 똑같다. 명상만이 인간의 잠재력을 활성화시켜 주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명상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위대한 스승께서는 한 조각의 불모지가 초목으로 우거진 정원으로 바뀌는 그림과 같은 정경을 그려 보여주며 명상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고 계신다. 마음갈기 명상 수행은 마음을 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갈다’라는 이 말을 농사에서 사용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밭을 경작하여 그 마음이 가진 모든 가능성들을 초월적 완성이라는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계발한다는 뜻이다. 한편, 마음의 제어(mind control)는 명상 과정을 구성하는 필수적 부분 중 하나이다. 그것은 마치 농사를 짓자면 김을 매고 해충을 쫓는 등 갖가지 제어조치가 불가피한 것과 같다. 마음은 밭과 같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밭을 경작하지 않고 방치해둔다면 땅은 메말라서 척박해질 뿐 아니라 잡초만 무성한 가운데 독사와 전갈 등이 끼어들어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다. 똑같은 상황이 마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의 마음 또한 갈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사악하고 그릇된 망념의 잡초가 무성해 질 것이다. 탐욕과 증오, 미혹으로 가득 찬 마음은 위험하다. 반대로 체계적인 방법으로 잘 갈아 나간다면 마음은 계발되고 본래 갖추고 있던 힘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음을 간다는 것은 하루 한두 시간씩 명상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을 챙기려 애쓰는 것만을 말한다기보다는 종일 깨어있는 시간 내내 일정한 속도로 내면적 진보를 지속하고 있는 그러한 발전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명상을 하다보면 다양한 관법(觀法)으로 마음을 훈련시키게 된다. 신체를 단련시킬 때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정신적인 단련 역시 마음챙김과 정신집중 그리고 통찰을 계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법으로 마음을 훈련시킨다. 신체단련을 통해 힘을 계발하고 허약함을 극복하고 인격과 건강을 증장(增長)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단련을 통해서는 정신적인 허약함과 한계를 극복하고, 악과 유혹에 맞설 수 있는 적극적 자질을 강화시켜 정신적 향상을 한층 더 높여줌으로써 마침내는 세상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든다. 마음의 제어 마음의 제어는 결코 그 어떠한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스런 정신적 욕망을 억제 또는 억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초극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라도 마음의 제어를 하지 않고는 인생사를 감당해내기가 결코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못 박아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제어되지 않은 마음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제어되지 않은 마음은 참으로 몰아가기 어렵다.” “비구들이여, 잘 제어된 마음보다 더 다루기 쉬운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제어된 마음은 참으로 몰아갈만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제어되지 않은 마음보다 더 손해를 주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길들지 않은 마음은 참으로 큰 손해를 입힌다.” “비구들이여, 길들여지지 않고 제어되지 않고 지켜지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마음보다 더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준다.” “비구들이여, 길들여지고 제어되고 지켜지고 참는 마음보다 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하노라. 그러한 마음은 참으로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준다.” 단번에가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기 초극은 지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면보다는 인격 전반에 걸쳐 새로이 태어나는 결과로 이루어지는 측면이 더 크다. 즉 견해와 태도, 정서와 의지 그리고 인생살이 전반에서 거듭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인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점진적인 도정이며 순차적인 발전이다. 신체적 습관에 대한 훈련, 삶을 보는 안목의 변화, 지적(知的)․의지적 활동유형의 재정립,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자기정화는 반드시 정확하고 미더운 방법론에 입각해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 당시 유명한 수학자, 가나까 목갈라아나가 세존께 와서 여쭈었다.2) “존귀한 분이시여, 세속적인 직업의 경우, 어떤 직업에서건 으레 점차적인 배움과 점차적인 익힘 그리고 점차적인 훈련 과정이 있습니다. 고따마시여, 정신적인 삶을 닦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그와 같이 점차적인 훈련과 점진적인 발전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방법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능하오. 배움 많은 청신사(淸信士)여, 정신적인 삶에도 점차적인 훈련단계를 설정하는 것이 가능하오. 능숙한 조련사가 말을 길들일 때 갖가지 방식의 훈련에 말이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과 같이 진리의 발견자인 여래도 사람을 정신적으로 순화시켜 나가는 데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쓰는 것이오.” 도덕적인 몸가짐 그 제자는 우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오라, 제자여. 청정한 계율을 통해 도덕적 습성을 몸에 익혀라. 도덕적 의무를 자발적으로 준수하여 절제된 삶을 살라. 바른 행을 재산으로 알고 계율의 밭을 떠나지 말고 잘 지켜라. 계를 지킴에 있어 때를 묻히거나 타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살펴라. 그리고 계율에 따라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라.” 감각의 제어 제자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닦으면 세존께서는 그를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자, 이젠 감각기관을 잘 지키도록 하라. 감각기관의 주인이 되라.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았을 때 그 드러나는 겉모습에 취해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자제력을 견지하라. 그대 만일 감각을 제어하지 않으면 감각적 매력뿐만 아니라 욕구불만과 온갖 좋지 못한 마음상태가 그대 속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그대의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음을 잘 제어하고 지키면서 길을 나아가라.” 음식 절제 제자가 자신의 마음과 함께 감각기관을 잘 제어해 나가면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지시하신다. “음식은 절제하도록 하라. 음식을 먹을 때는 그 목적이 맛을 즐기거나 식탐에 빠지는 데 있지 않으며 신체적 미모나 매력을 얻는 데에도 있지 않고 다만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음식은 정신적인 삶을 도와서 우리가 안락하고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명심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방심하지 않음 세존께서는 다시 그를 더 나아가도록 훈련시킨다. “이제 방심하지 않도록[不放逸], 열심히 노력해서 마음챙김[正念]과 분명한 이해[正知]를 계발하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행위를 명상 훈련의 기회로 전환시킴으로써 항상 챙겨진 마음상태를 유지하는 가운데 몸과 느낌과 생각과 모든 심리적 충동을 빈틈없이 분명하게 지켜볼[隨觀] 수 있도록 하라. 그리하여 너의 마음에서 장애가 되는 요소를 불식시켜라.” 장애를 극복하라 제자가 깨어있는 동안은 언제나 걷고 있건 앉아있건, 서 있건 누워있건 또 어떤 일을 하고 있건 간에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잘 챙긴 채로 예리한 식별력을 유지하여 잃지 않게 되면 세존께서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되도록 다음과 같이 훈련시킨다. “자, 이제는 너의 마음을 제어되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모든 그릇된 생각들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욕망과 악의(惡意)라는 때를 씻어내고 너그럽고 관대하고 동정적인 마음으로 머물러라. 나태와 해이함을 쫓아내버리고 활발하고 확고하고 원기 왕성한 상태에 머물러라. 들뜸과 회한을 떨쳐 버리고 내면의 평온(平穩)에 머물러 고요해져라. 의심과 당혹을 떨쳐 버리고 신뢰와 확신에 찬 마음으로 머물라.” 제자가 마음을 능히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그는 다시 여러 가지 명상법을 지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사마디(samādhi)라는 더 높은 단계들, 즉 명상 몰입에서 오는 더 높은 식(識)에로 인도된다. 사마디(samādhi) 사마디는 정신적 면에서 특히 수승(殊勝)한 몇몇 가지의 상태를 한데 묶어 완전한 통일‧통합을 이루는 일종의 변증법적 종합을 가져온다. 이 종합은 단순히 마음을 완전하게 정화시키고 또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잔의 불꽃처럼 마음이 한 점에 모인 상태로 지속되게 할 뿐만 아니라 소위 지혜라고 하는 내면의 조명(照明)을 생겨나게 만든다. 이 지혜는 일체의 미망과 어리석음, 무지 그리고 자기 기만을 사라지게 만들어 우리가 실상(實相)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직관력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정신적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 밝혀지고 열려지는 것이다. 인도가 낳은 위대한 조어장부(調御丈夫)3) 부처님께서는 향상의 추구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도전이라고 선언하셨다. 자기 초극이란 바로 이 향상의 추구를 뜻한다. 우리들의 시대는 지식의 추구에만 모든 마음을 쏟아왔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고양된 덕목은 될 수 없고 단지 힘이 될 수 있을 뿐인데 때때로 파괴적 힘이 되어서 탈이다. 이에 반해 향상은 사람을 자제할 줄 아는 인격으로 새롭게 태어나도록 만듦으로써 진정한 행복과 안녕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더 높은 덕이자 내면적 빛이다. 현대사회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역설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지식이 몇 배로 많아지는 가  했더니 문제도 똑같이 많아진 것이다. 현대 사회의 악은 지식의 증가에 정비례하여 늘어나는 것 같다. 오늘날 인류의 지식 축적은 가히 엄청나지만 인류의 굴레 역시 그러하다. 체계적인 계율 “길들여진 유순한 마음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체계를 갖춘 도덕률을 따르는 것이 꼭 필요하며, 이때 그 도덕률은 마음과 견해와 행동을 점차적으로 더욱 더 깊이 순화시켜 나가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부처님이 체계를 세운 오계(五戒)는 폭력, 부정직, 불륜, 거짓의 네 가지 행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또 일체의 술이나 약물 중독을 멀리 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계율들을 음미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매우 적극적으로 인간애, 자선, 순결, 만족 그리고 정직으로 충만한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을 그렇게 영위할 수 있다면 굳이 부와 권력의 획득이나 관능, 약물, 술 따위에 탐닉하는 식으로 표출되는 어떤 형태의 현실 도피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계율 체계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범죄를 피할 뿐 아니라, 매우 고상한 인성(人性)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고상한 인성이 되려면 향상의 필요성이야말로 가장 절대적이다. 오늘날 급속히 바뀌고 있는 인성이 안고 있는 문제는 비단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불안과 불확실성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이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면 키 없는 배와 같이 된다. 위없이 높은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마음 닦는 법은 병든 인성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다.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비구니 단띠까는 부처님의 이 마음 닦는 법을 실제로 수행한 후 그 체험담을 다음과 같이 남기고 있다. “영축산에서 한낮의 휴식을 취한 후 내려오다  코끼리가 강어귀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네. 조련사가 막대기를 들고 그 큰 짐승에게 명령하였네. ‘자 다리를 내밀어요.’ 코끼리가 순종하니 그 몰이꾼은 냉큼 목 위로 올라탔네. 나 분명 제멋대로 굴던 놈이 길들여진 것 보았네. 코끼리가 주인의 뜻에 복종하는 모습을. 그 광경 가슴에 새긴 채 나는 숲속 깊이 들어갔네. 확신에 차서 정진 끝에 거기서 나의 마음 마침내 모두 조복(調伏)받을 수 있었네.            [ 장로니게』3장 4, 게송 48〜50] 명상과 재가자 재가 생활인에게 명상이란 당치도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까닭인즉 명상을 하면 사람이 초연하고 무감각하고 제반 의무에 대해 냉담해지기 마련인데, 세속생활은 원래 삶에 대한 열정과 따뜻한 온기를 그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명상과 세속생활은 결국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재가자가 떠맡고 있는 의무가 얼마나 많은지 역설한다. 자신을 돌보아야 하고 가족과 공동체,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도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명상을 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의무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쉽다면 어떻게 명상을 재가자의 생활에 알맞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만일 명상이란 말이 ‘현실 도피(escapism)'를 뜻한다면 그들 말이 맞다. 그러나 ‘벗어남(escape)’을 뜻한다면 그들의 말은 틀렸다. 현실 도피는 그릇된, 건전치 못한 자세이다. 그것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현실을 직면하기를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타조가 제 머리를 땅에 박고는 ‘나는 없소’ 하는 것과 같이 자기 기만에 뿌리를 둔 자세라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벗어남’은 건전한 접근 방식이다.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정신적 갈등과 한계성을 넘어서고 격정이라든가 여타의 갖가지 정신적 타락을 극복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만들어 놓은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명상 수행을 한다는 명분 아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이기심과 아만(我慢)으로 사방 벽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숨어 버린다면 명상은 한낱 자기중심적 성향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하므로 분명히 그것은 현실 도피이며 따라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명상이 만일 탐욕과 증오와 미혹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하며 실제로 격정과 미움 그리고 무지에 갇혀 있는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이라면 이야말로 바람직한 일일 뿐 아니라 재가자를 줄곧 괴롭히고 있는 그 모든 병을 고쳐주는 유일한 만병통치약이 아닐 수 없다. 현실적으로 재가자는 두 가지 의무를 지고 있다. 하나는 이기심이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여야 하는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타심이 내리는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기심은 자기 이익을 도모할 때 생기고, 이타심은 타인의 이익을 도모할 때 생긴다. 자기 이익이라 해서 꼭 자기 자신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그것은 사회 전체 또는 국가까지 확대될 수 있다. 요컨대 여기서 ‘자기’란 각자의 경험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또 ‘타인의 이익’이란 정신적 요구와 책임을 염두에 둔 말이다. 현명한 재가자라면 이 두 가지 의무를 균형있게 잘 이행할 것이다. 그런데 경험적 의무와 정신적 의무 사이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은 이른바 ‘현명함’이라는 놀라운 정신적 재능에서 온다. 이 자질을 계발시키는 것이 바로 명상 수행의 유일한 목적이라 할 수도 있다. 명상은 정신적 긴장과 오염을 제거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안정시키며, 마음의 갖가지 기능을 통합시키고, 마음이 갖추고 있는 잠재력을 계발시킨다. 마음은 하나의 광산이니, 우리가 이 내적 부의 보고를 파내는 방법만 안다면 얻지 못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 무진장한 보고의 자물쇠를 여는 데에 명상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명상은 현실 도피이기는커녕 자유와 완성, 미(美)와 지(知), 지혜와 자비를 향해 내딛는 가장 적극적인 발걸음인 것이다. 현실적 이해를 정신적 수행과 융합시키는 일은 옛 사람들에게 커다란 문제였던 것 같다. 성스러운 빠알리경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시 사회 지도층에 속했던 디가자누(Dīghajānu)라는 사람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고 있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저희는 세속의 즐거움을 누리는 속인입니다. 저희는 처와 자식들에게 매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까아시(Kāsi)에서 가져 온 백단향으로 물들인 옷을 입고, 화관과 향수와 머릿기름으로  치장하고, 금․은 장식품으로 몸을 감쌉니다. 비록 이런 형편의 우리들이지만 고귀하신 분으로부터, 금생 동안 안락과 행복에로 이끌어 주고 또 다가올 생에서도 안락과 행복으로 이끌어줄 법을 가르침 받고 싶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디가자누여, 선남자(善男子)가 바로 이 생에서 안락과 행복을 누리려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 네 가지란 무엇인가? 줄기찬 노력, 잘 보살핌,4) 좋은 친구와 사귐, 분수에 맞는 생활, 이 네가지의 구족(具足)이 그것이다. 디가자누여, 선남자가 다음 생에서 안락과 행복을 누리려면 다시 네 가지 조건을 더 갖추어야 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신심, 계행, 자비, 지혜 이 넷을 구족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족’이란 단어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정감과 충족감의 토대를 형성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전히 물질적 사회적 의미에서의 부, 재산, 명성, 권력뿐 아니라 지성적 및 정신적 차원에서의 성취를 돕는 도덕적 자질과 정신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의미로건 그것은 ‘성취’, 즉 안정감과 충족감의 토대를 의미한다. 위에서 말한 이른바 구족함의 두 가지 방향성, 즉 당장의 현실과 관련 있는 경험적 구족함과 그리고 차후와 관련 있는 정신적 구족함의 두 방향도 결국은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일종의 정신적 수확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명상은 정신의 밭갈이이므로 명상을 통한 마음의 계발은 방금 말한 정신의 수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줄기찬 노력을 구족한다는 것은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 ― 그것이 직업적인 일이든 자발적인 근로든 또 이해관계가 있든 순전한 취미든 간에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 기울이는 지칠 줄 모르는 정신력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소위 세속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딱 잘라 양분해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직업이라 해서 반드시 생계 수단에 그쳐야 할 이유는 없고 정신적 발전의 수단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사무원이든, 사업가든, 주부든, 의사든, 농부든, 판사든 간에 바로 그 직업을 정신적 자질을 계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히 전심전력을 기울일 때 그 직업은 이미 넌더리나는 귀찮은 짐거리가 아니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경이에 찬 경험의 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일에 그처럼 전심전력하는데 어찌 숙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디가자누여, 여기에 한 선남자가 어떤 일, 그것이 농사일이든, 장사든, 가축 사육이든, 무사든, 왕을 섬기든 아니면 다른 어떤 재주로든 간에 생계를 꾸미다 보면 그 일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싫증낼 줄 모르게 된다. 그는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의무를 계획성 있게 채비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을 일러 줄기찬 노력을 구족했다고 한다.” 이를 다시 정신적 맥락에서 표현한다면 모든 한계를 극복해 내어 정신적 자유로 충만한 저 무한대의 세계를 향해 뻗쳐나가도록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의 구족인 ‘잘 살펴 지켜냄’은 정신차려 마음 기울이는 일을 말하는데, 이는 전생업(前生業)에 의해 타고 났거나 금생에 노력해서 얻었거나 간에 일단 자기 것이 된 훌륭한 재물과 자질을 잘 보존해 낼 수 있도록 해준다. 사실 인간은 어떤 것을 지니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무지와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탓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근면하게 마음을 기울이면 자신이 이미 얻은 것을 잘 보존할 수 있어 자신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디가자누여, 여기에 한 선남자가 열심히 일해서 벌고, 팔뚝 힘이나 이마의 땀으로 모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정당하게 얻은 재산을 지니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왕이 그것을 수탈해가지 못하도록, 도둑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화재로 불타 버리거나 수마가 할퀴어 없어지지 않도록, 악에 기울기 쉬운 상속자가 탕진하지 않도록 지키고 살피어 그 재산을 잘 관리할 것이다. 이를 두고 신중성의 구족이라고 한다.” 정신적 맥락에서 말하자면 이는 의미있는 목적을 지향하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정신적 역량을 말한다고 하겠다.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그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따라서 의미있는 목표를 놓치지 않을 때 의미있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커다란 즐거움 중의 하나가 현명한 사람과 사귀는 일이다. 훌륭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 않고서는 성공도 기대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 비린내 나는 생선을 꾸사 잎으로 싸맨다고 하자 그 풀잎도 비린내가 배고 말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 사귀는 것도 그와 같으리. 이번엔 누군가 향기로운 따가라 꽃5)을 나뭇잎에다 싸면 그 잎도 향내를 풍길 것이다 현명한 사람과 사귀는 것도 그와 같으리.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영기(靈氣)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남들의 선한 영기를 쏘이면 쏘인 그만큼 그 사람도 선하고 고상해질 수 있다.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설한 「망갈라경」6)에서 부처님께서는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전진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하셨다. “나쁜 친구를 갖지 않고 현명한 이와의 사귐을 돈독히 하며,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하는 것, 이런 일들이 최상의 복을 이룬다.” 따라서 좋은 사귐이야말로 그것 없이는 지금에도 나중에도 아무런 성취가 있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구족’인 것이다. “디가자누여, 여기 한 선남자가 어떤 마을이나 읍내에 살고 있으면서, 신심이 견고하고 덕성이 고매하며 자비심이 충만하고 지혜가 수승한 선남자 또는 그 자제들,  젊었지만 수행이 높거나 또는 나이나 수행이 모두 높은 이들과 교류하고 담화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신심있는 이의 신심을, 덕성있는 이의 덕성을, 자비로운 이의 자비를, 현명한 이의 지혜를 본받으려 애쓴다고 하자. 이런 것을 두고 좋은 우정이라고 한다.”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건전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활력이 북돋아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네 번째 구족해야 할 요소인 균형있는 생활은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낭비와 인색 사이에, 또한 분수를 넘어선 생활과 자신에게 필요치 않은 것도 도무지 남에게는 주지 않으려는 성미 사이에 중용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분수 이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예상외로 빨리 파국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재산을 물 쓰듯 하는 심리는 그 원인이 대개 강력한 욕망이나 허영심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만, 또는 망상 탓이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인색한 태도 역시 위축된 마음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사실 너무 인색하다 보면 스스로 생의 보람을 누리지 못하고 말뿐 아니라 남의 행복마저 앗아버리게 된다. 균형있는 생활을 함으로써 비로소 이러한 함정을 뛰어넘어 복된 생을 유지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며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다. “디가자누여, 여기 한 선남자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잘 알고 있어 낭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은 가운데 자신의 수입이 지출을 웃돌도록, 그러나 지출이 수입을 웃도는 일은 없도록 균형 잡힌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마치 금세공인 또는 그 도제(徒弟)가 저울질을 할 때 어느 분량만큼 저울이 아래로 기울었는지 혹은 어느 분량만큼 위로 기울었는지 잘 아는 것과 같다. 그처럼 선남자는 자기의 수입과 지출을 잘 알아서 낭비하지도 인색하지도 않게 균형 있는 살림을 꾸민다.” 이를 정신적으로 말하자면 그 모든 상반관계의 대칭, 즉 좋고 싫음, 칭찬과 비난, 일어남과 스러짐, 지혜와 무지, 빈곤과 풍요, 젊음과 늙음, 사랑과 미움 등등을 초연할 수 있을 정도로 치우침을 벗어난 균형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마음이 되면 다음 단계의 네 가지 구족, 즉 정신적 발전을 돕는 심신, 덕성, 자비 그리고 지혜를 생각해 볼 채비가 된 셈이다. 신심은 더 높은 가치를 향해 마음의 창을 계속 열고 있음으로써 진리의 빛살을 맞아들이는 일종의 수용 태세를 말한다. 신심은 씨앗에 비유되어 왔으니, 이 씨앗이 싹이 트면 해탈이란 열매를 맺는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다. 신심은 재산이니 여기 인간에겐 가장 값진 것. 윤회의 바다 건너려면 신심부터 갖춰야 하리. 계행은 도덕적 정화를 이루어 주며 또한 자칫하면 유혹에 빠지거나 본의 아니게 분쟁에 휘말려들 위험이 많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온갖 위험과 곤경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도 한다. 계행은 자발적으로 행하는 자기 훈련에서 우러나온다. 계행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일련의 행동규범이다. 자비심은 복을 담는 그릇으로 여겨왔다. 빈곤과 풍요, 행복과 불행, 출생 신분의 높고 낮음, 이 모두는 수행의 결과이기 때문에 자비심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자비심은 도덕적으로 우리를 고양시켜줄 뿐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으로도 향상시켜 준다. 자비로운 그만큼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복락을 누리고 또 내생에 가서도 복락을 누린다. 지혜는 태양처럼 마음의 어두움을 모두 쫓아 버린다. 우리가 모든 악을 뿌리 뽑고, 마음을 깨끗이 닦아 이를 깨달음을 이루는 도구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혜 덕분이다. 인생은 윤회의 황야를 끝없이 구르는 바퀴처럼 끊임없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으로 묘사된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다. 그래서 생이라 불리는 여행을 끝없이 계속한다. 이 무의미한 편력은 업(業)이라는 의지적 행위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업력을 해탈 지향의 원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혜뿐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대장부가 구족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것이다. 자기 일에 활기차고 주의 깊으며 자신의 재산을 현명하게 관리하여 균형 잡힌 생을 사는 사람은 모은 재산 잘 지켜내네. 신심과 계행마저 갖춘 그는 허욕에서 벗어나 도량도 크구나. 길을 닦기 위해 언제나 힘쓰니 내생의 행복이 보장되는구나. 그렇듯 신심 넘치는 재가자에게 그분, 이름 그대로 ‘깨달으신 분’께서 이와 같이 여덟 가지 조건 말씀하셨나니 그것은 금생에도 내생에도 행복으로 이끌어준다네. 자, 그럼 이 모든 구족함을 최상으로 완성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명함’7)에 의해서라고 부처님은 저 유명한 ‘가없는 사랑의 찬가’8)에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현명함은 명상 수행을 통해 갖추어지는 마음의 성숙이다. 그러므로 명상 수행은 재가 생활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상 수행을 하면 재가 생활 역시 더욱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1) [역주] 꿰뚫어보기 : insight(통찰)은 vipassanā(觀)의 역어이다. 2) [역주]『중부』107경, Ⅲ권 2~4쪽. 3) [역주] 조어장부(調御丈夫) :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의 하나. 중생을 잘 길들여 향상을 성취케 해주시는 분이란 뜻. 4) [역주] 잘 보살핌 : 보살핌의 구족, ārakkhasampadā. 한역은 수호구족(守護具足), 영역어는 여러 가지로 시도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부지런히 공들인다는 뜻에서 diligence로 옮기고 있다. 5) 미나리아재비 같은 향기로운 흰 꽃. 6) [역주]「망갈라경」: 『소송경(小誦經)』 제5 길상경(吉祥經)과 『숫따니빠따』의 4 대길상경(大吉祥經)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복을 가져오는 서른일곱 가지의 공덕행을 들고 있다. 7) [역주] 현명함 : 본문에는 nepakka로 나오는데 저자는 이를 sagacity로 영역하고 있다. 보리수잎․여섯에서 prudent로 영역된 것을 ‘빈틈없고’로 옮겼었다. 8) [역주] 가없는 사랑의 찬가 : 『소송경(小誦經)』의 제오 길상경(吉祥經)과 『숫따니빠다』의 Ⅱ. 4, 대길상경(大吉祥經)에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복을 가져오는 서른일곱 가지의 공덕행을 들고 있다.  출처: 고요한 소리
341    다시 걷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댓글:  조회:2436  추천:77  2008-12-04
한두 살 때 우리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이제 다시 걷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천천히, 기쁘게, 편안하게 걷는 것입니다.며칠만 해보면 그렇게 걸을 수 있게 됩니다.그대가 깊은 편안함과 평화 속에 걷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발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 마음다함의 씨앗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대개 그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행복이란   미래에만 집을 사고 나면, 차를 사고 나면, 혹은 박사 학위를 받고 나면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과 몸을 다해 몸부림치며,   지금 당장 얻을 수 있는   평화와 기쁨, 파란 하늘, 푸른 잎사귀,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합격하고, 집을, 또 차를 샀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행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를 찾아내어 그것을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 우선 평화롭게 걷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모든 것이 그대 발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틱낫한의 "미소짓는 발걸음" 중에서>
340    이 땅을 걷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댓글:  조회:2387  추천:71  2008-12-04
<틱낫한님의 말씀중에서>行禪은 걸으면서 하는 冥想이다. 천천히 느긋하게 걸으며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띈다. 이렇게 할 때 편안함은 깊어지고 우리의 걸음은 지상에서 가장 안정된 사람의 걸음이 된다.모든 슬픔과 불안이 사라지고 평화와 환희가 우리 가슴에 차오른다.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약간의 시간, 깨어있는 마음, 행복하고 싶다는 소망만 있으면 된다.항상 폐의 리듬에 따르라. 숨을 조절한다거나 걸음을 통제하려고 하지말라. 그냥 숨과 걸음을 깊이 바라보라.걷다가 푸른 하늘, 언덕, 나무, 새같이 마음으로 접하고 싶은 것이 있거든 멈추어라. 멈춘 순간에도 깨어 있는 마음으로 숨쉬는 걸 잊어서는 아니된다. 다음과 같은 시구를 이용해 행선을 이용할 수도 있다. 선불교에서는 시와 수행이 항상 함께 한다.나 도착했네, 고향에 왔네.나 여기 있네, 지금 있네.나 굳건하네, 자유롭네.나 궁극의 진리에 머무르리.부처님은 탄생하셨을 때 일곱걸음을 걸으셨고,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 우리가 행선을 할 때에도 꽃은 필 수 있다. 우리의 발이 땅과 접하는 순간 연꽃, 튤립, 장미 같은 꽃이 발 밑에 피어 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런 방법으로 아름답게 수행한다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꽃밭이 생기는 것을 우리 친구들은 보게 될 것이다.    '이 땅을 걷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임제선사가 한 말씀이다.물위를 걷거나 공중을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바로 이 땅을 걷는 게 기적이다. 땅은 너무나 아름답다. 우리 역시 아름답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걸어보라.
339    틱낫한의 걷기 명상 댓글:  조회:2899  추천:64  2008-12-04
-  걷기 명상   -걸으면서 명상하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 가능하면 아름다운 장소에서 친구와 함께 아니면 홀로 걸어본다. 걷기 명상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걷는 것을 즐기는 것이다. 걷기 명상의 목적은 현재 순간에 존재하며 걸음걸음을 즐기면서 숨쉬기와 걷기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걱정 근심을 떨쳐버리고 미래나 과거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말고 단지 존재하는그 순간만을 향유하는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같은 발걸음으로 걸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걷고 있지만 그 걸음은 보통 달리기와 같다. 그렇게 걸으면서 세상에 근심과 슬픔의 발자국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평화와 평정의 발자국을 찍듯 걸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원한다면 어린아이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한 걸음을 평화롭게 내디딜수 있으면 두 걸음 세 걸음...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평화롭고 행복하게 한 걸음을내딛는 것은  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이다. 걷기 명상은 훌륭한 수련 방법이다. 밖에서 걷기 명상을 할 때는 보통 때보다 좀 더 느리게 걸으면서 숨쉬기와 발걸음을 조화시킨다. 예를 들면 세 걸음 걸으면서 세 번 들이쉬기 호흡, 또 세 걸음 걸으면서 세 번 내쉬기 호흡을 한다. "들이쉬기, 들이쉬기, 들이쉬기, 내쉬기, 내쉬기, 내쉬기"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들이쉬기"는 우리가 숨을 들이쉬는것을 확인하게 해 준다. 우리가 무엇이든 그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그것은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폐활량이 다르므로 무리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세 걸음 대신 두 걸음이나 네 걸음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 들이쉬기와 내쉬기 호흡의 길이가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 걸음에 세 번 들이쉬기 호흡을 네 널음에 네 번 내쉬기 호흡을 할 수도 있다. 당신이 걷는 동안 행복하고 평화롭고 즐겁다면 올바르게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발과 땅이 맞닿는 느낌을 알아차려라. 발이 땅에 입맞춤하듯이 걸어라. 우리는 땅에 많은 해로움을 끼쳤고 지금은 땅을 잘 돌봐야 할 시간이다. 땅의 표면에 평화와 고요를 가져와서 사랑의 교훈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 정신으로 걸어야 한다. 때로 나무나 꽃, 아이들이 노는 모습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멈추어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경우라도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걷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바라보면서도 호흡을 계속 따라가야 한다. 그러면 다시 걷고 싶어질 때 그냥 발걸음만 내딛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채며 걷는 걸음걸음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연연해하지 않는다면 삶은 현재 순간에만 존재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명상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깨어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누군가를 미워할 때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한 몸이 불현함이  느껴질 때 불현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몸과 마음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생각이나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지금 현재에서 고요하게 쉬는 것 그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을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후회, 현재에 대한 절망이나 화,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 마음이 따라가는 것을 멈추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멈추는 방법을 수련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을 멈추고 쉴 것인가 아니면 계속 걱정할 것인가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행복할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일단 멈추는 것을 선택하고 나면 모든 것들이 다 괜찮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음챙김 호흡의 씨앗을 뿌리고 매일 매일 물을 주다 보면,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순간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분주하기 때문에 처음 명상을 할 때는 고요함과 휴식을 느끼면서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기 어려울수 있습니다. 분주하게 떠돌아 다니는 마음을 멈추려고 애쓸수록 마음은 더 크게 저항합니다.   마음챙김 명상은 떠돌아 다니는 마음을 억누르거나 분주한 생각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우선 멈추지 않고 산만하게 움직이는 생각의 흐름이 강력한 습관으로 자리잡아 왔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습관을 벋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앉은 자세에서 짧은 시간동안 5번이나 10번 호흡하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지금 여기'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과거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수련자는 안정과 자유 속에 산다."     불교에는 '無願(apranihita)'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바라는 것도 없고 목표하는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곧 우리 앞에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을 뒤쫓아 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특정한 목표나 목적지 없이 걷는 것 그 자체를 즐깁니다. 우리의 걸음은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는 걷는 것 자체를 위해서 걷습니다.     현재의 순간에 온전하게 머물게 되면 당신의 감각들은 힘을 부여받게 되고 그러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보다 선명히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당신은 보다 더 고요하고 선명하며 통찰력 있고 연민을 지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챙김 걷기를 수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과 더 잘 연결되면서 감정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마음챙김 걷기를 합니다. 당신이 겪는 고통은 당신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당신의 일부이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전부도 아닙니다.   고통은 항상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애씁니다. 당신이 고통의 소리를 듣고 돌봐 주는 방법을 모른다면, 고통에 점령되어 버리거나 고통을 부정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나 감정을 억제하려고 하면, 당신의 정신에서 정체된 부분이 만들어집니다.   강렬한 감정은 올라온 후 한동안 머물다 사라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강렬한 감정이나 고통이 올라올 때마다 미음챙김 호흡과 걷기를 통해서 마음챙김 에너지로 그것들을 안아 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부처님이 가르치신 첫 번째 숭고한 진리는 고통은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자각하는 것은 연민을 낳고 연민은 수행을 할 뜻을 낳습니다.     걷기명상을 하는 목적은 휴식을 얻고 멈춤을 수련하며 치유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338    미소짓는 발걸음 댓글:  조회:2988  추천:66  2008-12-03
미소짓는 발걸음 (틱낫한의 걷기명상)   책소개 발걸음마다 서늘한 바람이 일고, 발걸음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네" 프랑스 남부의 한적한 시골, 플럼빌리지로 들어서는 오솔길 입구에는 이런 시구가 씌어있다. 틱낫한 스님이 세운 명상 수행 공동체 플럼빌리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수행은 '걷기 명상'이다. 틱낫한은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삶이고, 미소 지으며 걷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가 된다고 말한다.이 책에서는 미소짓는 발걸음을 위한 짧고 아름다운 에세이와 시가 담겨 있다. 또 틱낫한은 우는 아기 돌보기 명상, 고통과 사귀기 명상, 산처럼 앉아 있기 명상, 한 가지만 잘하기 명상 등 소박하고 깊은 깨달음을 주는 '미소짓는 명상법'들을 소개한다. 틱낫한과 자두 마을 사람들이 평화롭게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도 20여 편의 흑백 사진을 통해 직접 볼 수 있다. 책 표지 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고 천천히, 편안하게 걸어보세요. 그러면 깊은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우리의 발걸음은 세상에서 가장 안정된 이의 발걸음이 됩니다. 모든 슬픔과 불안이 사라지고 평화와 기쁨이 가슴 속에 차오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약간의 시간, 약간의 마음다함, 그리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바람만 있으면 됩니다. - 본문중에서   ★매체별 추천. 걷기 명상은 조화로움, 그리고 평화를 가져다준다. - 워킹 매거진 이 작은 책을 당신이 가는 어디든 가지도 다니라 - 뉴 에이지 저널   단지 해보라. 걸음걸음마다 똑같은 발걸음은 단 한 걸음도 없다. - 요가 저널     독자리뷰   틱낫한의 글은 고요한 수면과도 같다. 거칠고 험한 풍파에 시달리다가 한순간 마음의 평화가 퍼지는 그런 느낌이다. 책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그에게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글자를 통해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강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방황이나 고민 될 것이 없다. 하나의 진리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고 있음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도 하나의 소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세상이 변하듯 사람도 변한다고 생각했는데 기본적인 마음은 모두 한 곳으로 흐르고 있다. 내가 나로서 존중받기에 힘쓰기 보다는 자연인 그 자체로 살라는 그의 말이 뇌리에 오래 남는다. 실천의 중요성은 굳이 말 안 해도 아는 것이고.. 좀 더 발전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 본다. -지춘선님.     ꂐ 의식적으로 발걸음 수를 셉니다. 걸을 때에는 발걸음 수를 세어서 의식적인 호흡을 하세요. 호흡 하나하나를 자각하고, 숨을 들이쉬는 동안 또 내쉬는 동안 걷는 걸음 수를 셉니다. 숨을 들이쉬는 동안 세 걸음을 걷는다면 조용히 “하나, 둘, 셋” 혹은 “안, 안, 안” 하고 한 걸음에 한 마디씩 말합니다. 숨을 내쉬는 동안 세 걸음을 걷는다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밖, 밖, 밖” 하고 말합니다. 들이쉬는 동안 세 걸음 걷고, 내쉬는 동안 네 걸음 걷는다면 “안, 안, 안. 밖, 밖, 밖, 밖” 혹은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넷” 하고 말해 보세요.  ꂐ 그저 깊이 바라보면 됩니다. 호흡을 조절하려고 하지 마세요. 폐가 원하는 만큼 시간과 공기를 허락하면서, 그저 자신의 호흡과 발걸음 양쪽에 마음을 다하면서, 폐가 차오르는 동안 몇 걸음 걷는지 또 폐가 비는 동안 몇 걸음 걷는지를 깨달으면 됩니다. 숫자를 셈으로써 양쪽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을 갈 때에는 한 호흡에 걷는 발걸음 수가 달라질 것입니다. 항상 폐가 필요로 하는 대로 따르세요. 호흡이나 발걸음을 조절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깊이 바라보세요.   ꂐ 숨을 내쉴 때 한 걸음을 더해 봅니다. 며칠 동안 수행을 하고 나서는 숨을 내쉴 때 한 걸음을 더해 봅니다. 예를 들어 평소의 호흡이 두 걸음-두 걸음이었다면, 걸음은 더 빨리 하지 않은 채로 내쉬는 호흡을 길게 하여 두 걸음-세 걸음으로 해봅니다. 그렇게 네다섯 번 반복한 후 다시 두 걸음-두 걸음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ꂐ 한 걸음만큼씩 신선한 공기를 마십니다. 평소의 호흡으로는 폐에 있는 공기를 결코 모두 내보내지 못합니다. 항상 얼마 정도 남아 있지요. 내쉬는 호흡에 한 걸음을 보태면 묵은 공기를 더욱 많이 밀어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과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네다섯 번으로 충분합니다. (그보다 더 하면 지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네다섯 번 호흡한 후에는 다시 평소대로 호흡합니다. 그러고 나서 5분 내지 10분이 지난 후에는 과정을 되풀이해도 좋습니다. 한 걸음 더하는 것이 숨을 들이쉴 때가 아니라 내쉴 때임을 기억하세요.  ꂐ 어느 날 다른 방식으로 숨쉽니다. 이렇게 며칠 더 수행하고 나면 스스로 “두 걸음-세 걸음 대신에, 세 걸음-세 걸음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메시지가 확실하다면 그렇게 해보세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네다섯 번만 하고 나서 두 걸음-두 걸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5분 내지 10분이 지나면 두 걸음-세 걸음을 시작하고, 다시 세 걸음-세 걸음을 합니다. 몇 달이 지나면 폐가 더욱 건강해지고 혈액순환이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 방식 또한 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ꂐ 나는 푸른, 지구, 별, 위를 걷습니다. 걷기 명상을 할 때 걸음 수를 세는 대신에 말을 해도 됩니다. 예를 들어 호흡 리듬이 세 걸음-세걸음이라면, 걸으면서 조용히 “연, 꽃이, 핀다 / 연, 꽃이, 핀다” 라든지 “푸른, 지구, 별 / 푸른, 지구, 별.”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리듬이 두 걸음-세 걸음이라면 “연, 꽃. 연, 꽃이, 핀다” 라고 말합니다. 다섯 걸음-다섯 걸음이라면 “푸른, 지구, 별, 위를, 걷는다. 푸른, 지구, 별, 위를, 걷는다”  ꂐ 가장 순수한 대기의 에너지를 받습니다. 공기가 가장 깨끗할 때는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입니다. 그때가 걷기 명상을 즐기기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그 순수한 공기의 에너지를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세요. 아침에 걷기 명상을 하면 동작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깨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을 보다 명확하게 자각하게 되지요. 결정을 내릴 때 보다 큰 통찰력과 연민을 가지고 보다 침착하게, 명료하게 결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37    아난다존자의 깨달음 -- 경행(經行) 댓글:  조회:2575  추천:65  2008-12-03
[제6장] 아난존자와 경행(걷기) 정진 ..................................................................................................................................[거해스님 著] 수행인의 좌선 중 허리를 펴고 눕고 싶을 때에도 역시 우선 심경의 변화부터(눕고 싶다는 생각을 망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관찰함으로서 생각의 뿌리 없이 움직이는 모습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깨닫게 해주는 또 다른 형태의 수행의 主題가 되는 것이라 함) 관찰하여 '눕고 싶다, 눕고 싶다, 눕고 싶다.'를 관찰 인식하고 거기에 따라 관계되어 일어나는 모든 몸의 행동, 즉 다리를 펼 때 천천히 몸을 움직이면서 다리 근육의 이완과 팽창 현상을 피부로 느끼며, 마음으로 '다리를 폄, 다리를 폄, 다리를 폄' 하며, 팔을 펴서 뒤로 돌릴때도 역시 다리의 동작을 살피듯 한다. 또 손이 방바닥에 닿았을 때는 '손이 닿음, 손이 닿음, 손이 닿음' , 허리를 펴고 누울 때는 '눕는다, 눕는다, 눕는다.' 몸이 완전히 닿아서 누웠을 때는 '누웠음, 누웠음, 누웠음'이라고 하여 몸의 모든 동작이 마음과 함께 끝난 다음에는 마음을 다시 아랫배의 일어남·사라짐에 집중시키되 만약에 누운 자세에서 아랫배의 운동 작용이 분명치 않아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아랫배의 배꼽 주위에 조용히 놓으면서 손의 동작을 관찰한 다음 손바닥으로 아랫배의 가벼운 진동 작용을 느끼도록 한다. 이와 같이 해서 맑은 정신으로 분명히 관찰하여 졸음에 떨어지거나 잠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서 1시간 정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수행인들에게는 가급적 누워서 정진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으며 다만 취침 전에 와선(臥禪)을 하도록 하는 것은 누우면 쉽게 잠이 들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오랜 시자였던 아난존자는 부처님 생존 당시 오직 수다원과(Soatapanna) - 성문 4과 중의 하나로서 부동지(不動地)에 처음 든 지위 - 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 가섭 존자에 의해서 오백(五百) 아라한을 모아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난존자는 경전의 결집 전날 까지 아라한이 아니었기에 결집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난이 참석하지 못하면 경전의 외워냄이 불가능하여 경전이 결집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아난은 아라한과(Arahatta phala) - 4과(果) 중의 최상위로서 멸적(滅賊) 혹은 번뇌가 다한 해탈자, 깨달은 자의 지위 - 의 성취를 결심하고 정진 노력 중이었으나 경전 결집 전날 밤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경행 정진인 까야같따사띠(Kayaghattasati:일정한 장소에서 마음을 걷는데 집중시키며 왔다 갔다 하는 것) - Kaya 몸, Ghatta 가고 옴, Sati 집중 -를 계속하는 데 경전 결집 날의 먼동이 터오고, 이때 스스로 느끼기를 '정진에는 행·주·좌·와에 균형을 지켜야 하는데 나는 너무 걷기만 했구나, 이제 처소에 들어가 누워서 허리를 쉬며 정진하겠다.'라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며 마음 집중시켜 자리에 들었다. 그가 몸의 동작을 예리하게 정확히 관찰하면서 눕기 시작하여 머리가 베게에 채 닿기 전에 자신이 다리가 완전히 침상 바닥에 닿기 전 몸의 균형 잃은 진동의 변화 순간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부담과 무거웠던 집을 일시에 내려버린 듯 가벼운 몸이 되고,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됐으며 법에 대해 의심이 없어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하는 데 참석했던 것이다. 아난존자는 사실상 일반적 수행자세인 행·주·좌·와 사위의(行·住·坐·臥 四威儀)에 속하지 않은 자세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유일(唯一)한 분인 것이다. 누워서 정진을 1시간 정도 행하고, 다시 일어설 때도 누울 때처럼 모든 행동을 관찰, 마음을 집중시키며, 다음으로 걷기 내지 좌선으로 옮기면서 몸의 움직임에 마음이 함께 하였기 때문에 간단이 없고 흐트러짐이 없어서 적정(寂靜)해졌을 때, 삼매가 굳고 깊어지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은 아주 미세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마음 집중력은 응축되어 그 힘이 마치 수소가 응축 극점에 달하여 조그만 충격에도 가공스러운 폭발력을 내듯이, 모든 번뇌를 처리하는 무서운 힘을 갖게 된다. 동시에 깊은 내관을 이루게 될 때, 큰 깨달음은 일순간에 나타나게 되고, 그것이 어느 때, 어느 곳일지 예측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인들이 적은 쉬임과 번뇌의 침입을 가벼이 여기고 마음집중을 간단(間斷)히 하게 한다면 삼매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은 자꾸만 지연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나무와 나무의 마찰로 불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자주 쉼으로 해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충분한 열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수행인의 마음집중수행에 조그만 간격이라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인내로써 어려움을 극복하며, 큰 용기로써 하나의 현상도 놓치지 않으며 용맹스럽게 관찰하며, 굳은 결정심으로 정진하며, 깨달음에 대한 확신과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대해 신심을 가지고 수행해 나간다면 모든 정진적 장애가 제거되고 마음집중이 깊어지므로 삼매를 이루게 된다. 공부 즉 수행을 신심있게 바르게 성실하게 지어가면 수행에 진전 있음을 하루가 다르게 본인 자신이 느끼게 된다. 그 예로서 마음의 견고한 집중상태와 졸음의 적음, 망상이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실 등 본인 자신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잠을 잘 때에도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계속 관찰하게 되고 또는 잠이 들었다가 깨어날 때에도 잠시의 공간 없이 곧바로 일어남과 사라짐을 역력히 하게 되기도 하며 더러는 잠을 자기 위해 누웠다가 2시간, 3시간 정도를 정진으로 보내게되는 경우도 있으며, 정신이 더욱 맑아지며, 이러한 때에는 육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너무도 선명하여,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오히려 잠을 자고 난 다음보다 더 상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와 같이 극히 작은 행동 하나라도 놓침 없이 하나하나의 현상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관찰하여 그 현상의 실체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하나의 현상도 놓침 없이 관찰해가는 것은 마치 바다 속에 돌을 던져 쌓으려는 노력과 똑같은 것이다. 돌을 물 속에 던져 넣을 때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중단하면 돌을 쌓을 수 없게 되나 계속 쉬임없이 던져 넣었을 때 돌 하나하나가 각기 자리 메움의 역할을 하여 어느 날 수면위로 차오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폴로네이즈/ 산속 물소리 / 나이팅게일 ..........................................................................생활불교 : http://cafe.daum.net/mercy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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