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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 / 이경수
2018년 11월 01일 18시 39분  조회:964  추천:0  작성자: 강려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 / 이경수
 
 
1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린쇼핑, 베스테로스 등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로서의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이러한 시작(詩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보여준 일관된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결코 서두름 없이, 또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고요한 깊의 시 혹은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시는 50여 년에 걸쳐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 바탕에 있어서는 국내적으로 스웨덴 자연시의 토착적인 심미적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그리고 세계 문학사적으로는 모더니즘 시의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이 모더니즘의 전통의 핵심에는 파운드(Ezra Pound)의 '이미지즘(Imagism)'과 엘리엇(T.S. Eliot)의 '몰개성시론(Poetics impersonality)'등이 놓여 있다.
  트란스트뢰메르는 지금까지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중에는 독일의 페트라트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詩償), 노이슈티드 국제 문학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언젠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40개 언어 이상으로 번역되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사실이 역자로 하여금 이번 번역의 만용을 가지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역자는 스웨덴어에 문외한인바, 이러한 무지가 거꾸로 또다른 자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미국의 로버트 블라이, 메이 스윈슨, 영국이 로빈 폴턴, 아일랜드의 조 디언 등 수많은 영어권 시인들에 의하여 번역되어 영어 세계에는 이미 넓고 깊게 '태어나'있는 바, 역자는 이들 여러 개의 '영어 트란스트뢰메르'를 나름대로 대조하고 종합하여 한국어 시선을 엮어보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영어판 시집에 준거해서 한국어 번역시선을 만들어 달라는 시인의 주문에 따른 것이기고 하다.
 
2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산마디로 '홀로 깊어 열리는 시' 혹은 '심연으로 치솟기'의 시이다. 또는 '세상 뒤짚어 보기'의 시이다. 그의 수많는 '눈들'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만큼 그의 시 한편이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하다. 그의 시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첫 시집에서 이미 많은 부분 감지된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실린 시, 제목도 적절하고 붙여진 <서곡>이 무척 시사적이다.
 
서곡(序曲)
 
깨어남은 꿈으로부터 낙하산의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상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린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의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지만, 이 처녀작에서는 잠깨어남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전도되어 있다. 깨어남의 과정이 상승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낙하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상하고 있는 하강의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綠陰)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 이 짤막한 초기 시편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특징적인 시적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세상 뒤집어 보기, 또는 다양한 시점에서 세상 조감하기의 편린을 엿볼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시 전반에서 풍기는 종교적인 어떤 분위기, 혹은 신비주의의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러한 초월적 관심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시 마지막 행의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대체 다른 무엇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인가?
 
3
  세상 혹은 자연세계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깊은 사색에서 배태된 그의 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중기의 비교적 짤막한 <방을 뚫고 바라보기>를 들 수 있다.
 
흰 태양이 스모그에 젖는다
햇빛이 뚝뚝 떨어지고, 아래쪽으로 길을 더듬어
 
깊숙한 내 눈에 닿는다.
도시 아래 깊은 곳에 내려가 위를 쳐다보는,
 
밑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눈. 길거리들, 건물 기초들,
이것은 흡사 전시(戰時)의 도시를 찍은 항공사진,
 
거꾸로 찍은, 말하자면 두더지 사진.
흑백의 말없는 사각형들.
 
그곳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죽은 자의 뼈와
산 자의 뼈를 분간할 수 없다.
 
햇빛의 볼륨이 높여지고,
항공기 선실 속으로, 낚싯배 속으로 범람해 들어간다.
 
  이 시에서는 '지하의 눈'으로 지하, 지상, 천상의 세상 만물들을 겹쳐서 바라보고 있는데, 이러한 시적 방법이 좀더 포괄적인 차원을 획득할 때, 그의 시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혹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시가 된다. 이럴 때 그의 시의 자유분방함은 앞에서 언급한 기독교 신비주의의 차원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신비주의적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로는 가령 로마네스트 아치를 관광하다가 천사의 포옹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로마네스트 아치> 같은 시를 들 수 있고, 또 중국의 상하이 거리를 걸어가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군중 수만큼의 십자가를 비전의 눈으로 체험하는 <상하이 거리>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계열의 빼어난 시로 <슈베르트 연구>, <명종곡(鳴鐘曲), <슬픈 곤돌라> 등을 들 수 있지만 후기의 <황금 장수말벌>를 보기로 하자.
 
황금 장수말벌
 
  도마뱀 저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벌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하고 위엄 있게, 다만 크기가 다를 뿐.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이런 날이다.
 
  오늘 아침 내 사랑하는 여자가 악령들을 쫓아버렸다.
  마침 남쪽 어딘가에 있는 어두운 헛간의 문을 우리가 열었을 때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퀴벌레들이 구석으로 돌진하고 벽 위로 올라가고
  그리고 사라지듯이, 이때 우리는 바퀴벌레들을 보았고 또한  보
지 않았는데,
  그렇게 내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바퀴들을 달아나게
했다.
 
  마귀들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리라.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신경(神經)의 구식 전화교환국 속에 있는
전화선들을 넘어서.
 
  7월 5일이다. 루핀1)들이 바다가 보고 싶은 듯 위로 뻗고 있다.
  우리는 아무 문자도 따르지 않는 침묵 지키기의 교회, 경건의 교
회 속에 있다.
  마치 고위 성직자들의 저 용서없는 얼굴들과
  몸에 잘못 새겨진 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돈을 비축해놓은, 축자적(逐字的)으로 문자에 충실한 TV 설교가
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힘이 없었고 경호원의 부축이 필요했다.
  경호원은 재갈처럼 딱딱한 미소를 짓는 잘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비명을 질식시키는 미소.
  부모가 떠날 때 병상에 홀로 남은 아이의 비명.
 
  신성(神性)이 인간을 스쳐가며 불꽃을 밝혀놓고,
  그러고서는 물러난다.
  왜?
  불꽃이 그림자들을 끌어당기고, 그림자들이 바스락거리며 날아
들어 불꽃에 합류하고.
  불꽃이 치솟으며 검어지고, 검은 질식의 연기가 뻗어나간다.
  마침내 검은 연기뿐, 마침내 경건한 사형집행관뿐.
  경건한 사형집행관이 장터와 군중들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장터와 군중들은 사형집행관이 자신을 볼 수 있는
  흐린 거울이 된다.
 
  최대의 광신자는 최대의 불신자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광신자는, 하나는 백 퍼센트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
지 않는 곳에서
  둘 간의 계약이다.
  '백 퍼센트'라는 표현을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정면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자들
  멍한 마음이 결코 될 수 없는 자들
  문을 잘못 열어 '정체 불명자'를 얼핏 보게 되는 일이 결코 없는
자들.
  이들을 지나가라!
 
  7월 5일이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발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
하고 위엄 있게.
  발 없는 도마뱀은 관료주의가 없는 듯하다.
  황금 장수말벌은 우상숭배가 없는 듯하다.
  루핀들은 '백 퍼센트'가 없는 듯하다.
 
  페르세포네2) 우리가 포로인 동시에 통치자인 그런 심연을 나
는 알고 있다.
  나는 자주 그곳 뻣뻣한 풀 속에 누워
  땅이 내 위에 아치를,
  둥근 천장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자주,
  그것이 내 삶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응시가 나를 떠났다.
  나의 눈멂이 사라졌다.
  검은 박쥐가 내 얼굴을 떠나 여름의 밝은 공간을 가위질하며 돌
아다니고 있다.
 
1) 루핀(lupin): 콩과 르피너스 속의 식물
2) 페르세포네: 제우스와 농업의 여신 테메테르의 딸이며
                     지하세계의 왕 히데스의 아내이다. 호메로
                     스의 <테메테르에게 바치는 찬가>에는 페
                     르세포네가 어떻게 니사의 계곡에서 꽃을
                     꺽다가 히데스에게 붙잡혀 지하세계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마귀들을 쫓아버렸다니? 속인(俗人)들의 감수성으로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나신(裸身)이 악령들을 쫓아버렸다는 말인가? 여자의 눈부신 나신이 일종의 '신성'이 되어 마귀들을 달아나게 했다? 아무래도 이것은 종교의 영역이요 신비주의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갑작스런 빛이 쏟아져 들어와 '어둠의 자식들'인 바퀴벌레들을 달아나게 하듯이, 사랑하는 여인의 빛나는 육체적, 정신적, '적나라함'은 시인의 정신 속의 악령들을 쫓아버린다는 것이다. 여인의 눈부신 적나라함은 바로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의 시인의 정신 속에 쏟아져 내리는 천국의 눈부신 빛의 순간적인 육화(肉化)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신성'이 잠시 스쳐 지나면서 영혼의 불을 지펴놓은 자의 비전적 체험을 순간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시인은 자주 '지하'의 깊은 심연 속, "뻣뻣한 풀속에 누워/땅이 내 위에 아치를,/둥근 천장을그리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점이 한때 그가 많은 비판을 받은 까닭이 된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종교적 경사가 심하여 반대로 정치사회적 맥락이 거세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눈앞의 정치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 핵심인데,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시의 길을 꿋꿋이 걸어왔으며, '침묵과 심연의 시'의 흐름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그의 시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정치사회적 발언을 시적으로 전혀 내비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예컨대 <역사에 대하여>라는 시의 일부를 보자.
 
급진과 반동은 불행한 결혼 속에 동거한다.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하지만 자식들인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
 
  정치적으로 굽진도 반동도 아닌 제3의 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의 전반적인 중용의 인생관, 혹은 '침묵과 깊이의 인생관'에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00퍼센트'라는 표현을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진실은 100퍼센트와 0퍼센트 사이의 어느 지점에 신비롭게 숨어 있으며, 그 신비스런 진리의 길을 올곧게 따라가는 것이 '똑바로 선 인생'의 길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 일기 중에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자면,
 
학생들이 밤중에 책을 읽는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읽고 또 읽는다.
시험이 끝나면 학생은 다음 사람을 위한 계단이 된다.
힌든 길.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세상의 신비의 책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한 목표지점에 도달한 순간 또 다른 길이 '힘들게' 열린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신비롭게,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4
  이러한 시적 특성이 스웨덴에서 그에게 '말똥가리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져다주었는지 모른다. 그의 시는 말똥가리처럼 세상을 높은 지점에서 일종의 신비주의적 차원에서 바라보되, 지상의 자연세계의 자질구레한 세목들에 날타로운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꼼꼼한 거시주의' 혹은 '거시적 미시주의'가 그의 특징적인 시의 방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방법이 심리상담사로서의 그의 직업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 시인은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한다. 이러한 종류의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거꾸로 질문을 던진다. "나의 시가 심리상담사로서의 나의 일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를 물어달라"고. 그 차원을 넘어선 문제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의 영역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스웨덴의 '국민시인'으로 사랑받고 있는 시인은 10여 년 전 뇌졸증으로 쓰러진 적이 있고, 지금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몸의 상태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의 시로 올수록 죽음에 대한 경사가 두드러진다. 이 시선집에 마지막으로 실린 시 <서명(署名)>을 보자.
 
서명(署名)
 
어두운 문턱을
넘어가야 한다.
홀이 하나.
하얀 서류가 빛난다.
여러 그림자들이 움직인다.
모두 서명을 원한다.
 
빛이 나를 덮쳐
시간을 접어 올릴 때까지.
 
 빛이 시인을 덮쳐 '시간을 접어 올리기' 이전에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그리하여 열두 번째 시집을 '하얀 서류'에 '서명'하기 이전에 출간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순간에 대한 강렬한 집중을 통하여 신비와 경이의 시적 공간을 구축하면서 우리들의 비루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또 우리들 공유의 인간조건에 대한 깊이 있는 비전을 성취하면서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인생의 빛나는 종합을 성취한 시인의 아름다운 대미(大尾)를 위하여, 그리고 시인처럼 자연과 초월과 음악과 시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또 시인처럼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이 열리는 시를 살고 싶은 우리 모두들 위하여. / 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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