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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 / 칼 하인츠 보러 최문규
2018년 03월 25일 16시 04분  조회:1839  추천:0  작성자: 강려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



칼 하인츠 보러   최문규
 


I. 현대성과 심미성

(……) 보들레르가 현대성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하버마스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보들레르의 글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현대성은 지나가는 것, 일시적인 것, 우연적인 것으로서 이것이 예술의 절반이며, 또다른 예술의 절반은 바로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예술가에게는 현대성이 있었으며,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보들레르)
현대성에 대한 보들레르의 정의는 무엇을 꾀하는 것일까? 분명한 점은 바로 ‘일시적인 것’이라는 특성을 취하는 매시대의 현대 예술에서 소위 전통적인 본질인 영원성을 구원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보들레르는 현대적인 현재의 조건하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에피파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된 문장의 의도는 분명 그 글의 서두에 나오는 문장을 통해 부연 설명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현대성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그에게 중요한 점은 지나가는 것에서도 유행이 예술적인 것을 취하게 되는 것, 그것을 유행으로부터 획득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을 끌어들이는 것이다.”(보들레르) ‘영원한 것’이 기능하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이 포기될 수 없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일시적인 것’은 단지 기능으로 남을 뿐이다. 이러한 ‘일시적인 것’의 순수한 기능 특성은 보들레르의 텍스트에서 두 차례나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그 하나는 『현대적 삶의 화가』의 첫번째 장이며, 거기서 ‘시대’ ‘유행’ ‘도덕’ ‘열정’의 의미를 지닌 ‘상대적인 요소’로서 일시적인 것은 미의 ‘불변하는 요소’, 즉 ‘영원한 것’을 향유하도록 만든다고 언급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제4장이며, 거기서 미의 ‘영원한 것’은 ‘일시적인 것’ 없이는 ‘아무 쓸모도 없는 추상적인 미의 공허함’에 빠진다고 언급되고 있다. 보들레르의 에세이에서 강조되고 있는 점은 따라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정이며, 그 아름다움은 고대의 전형적인 모범에서 연역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현재 시간에서 생산된다. 이것은(하버마스 혹은 야우스가 생각하는 것처럼―옮긴이) 현대 혹은 묵시적인 미래에 대한 이론적 명제가 보들레르의 텍스트에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하진 않는다. 오히려 바로 고대의 고유한 ‘비밀스런 미’에 도달하는 일이 현대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들레르는 일시성과 영원성이라는 두 가지 양극적인 요소의 이중성 속에서 그 비밀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기능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예술적 요소―이 두 가지 간과될 수 없는 패러다임이 ‘영원한 것’으로 남게 되는데―의 법칙에서 말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실상을 야우스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으며, 하버마스는 그러한 야우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오랜 전통 속에서 고대 혹은 고전적인 것이 지니고 있던 그 위치를 바로 영원한 것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적인 것의 정반대인 영원한 것이 보들레르에게서는 지나간 과거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야우스, 『도전으로서의 문학사』)
역사철학적인 관심사에서 보들레르를 읽고 있는 야우스는 ‘미에 대한 이성적이고도 역사적인 이론’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과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이론을 서로 대립시키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잘못 유도된 해석이다. 따라서 야우스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을 역사철학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처럼 여기서도 보들레르의 순수미학적인 이론, 즉 현대의 일시성과 우발성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이론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즉 그는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의 보들레르의 이론을 현재를 열정적으로 경험하는 역사적인 이론이라고 뒤집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 또한 보들레르의 ‘미학적 프로젝트’를 약화시키고 있는 야우스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목적은 소위 지배적인 ‘현재의 이론’을 구성하는 데 있다. 이것은 고대의 패러다임과 궁극적으로 결별하려 했던 보들레르의 ‘자기 정립’이라는 타탕성 있는 관점을 헤겔 식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즉 하버마스는 미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념을 오로지 ‘시대 성찰’이라는 범주에서만 유도해내고 있을 뿐 그 본래의 정반대적인 근본 특징, 즉 ‘비밀로 가득 찬 것’ ‘극도로 어렵게 규정될 수 있는 것’을 간직하려 했던 보들레르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하버마스에 의하면, “현대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것을 꾀하고 있다. 즉 일시적인 순간은 미래적인 현재의 진정한 과거로서 확인될 것이라는 점이다”.(하버마스) 그러나 보들레르는 현대로부터 그 본래의 비밀스런 미를 끌어내려는 심미적인 충동에 주된 관심사를 갖고 있었다. 즉 보들레르의 텍스트는 ‘시대’의 모티브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매우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심미적인 충동에 일방적으로 ‘역사이론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하버마스의 시각은 조심스럽게 파악되어야 한다. 미의 두 가지 특성에 대해서 보들레르는 미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모습을 지닌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각각의 현재’에 해당된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의 모든 화가에게 현대는 이미 주어져 있었다. 이전 시대에도 유지되었던 아름다운 그림의 대부분을 보면 거기에 서술된 것은 바로 그 시대적 의상을 입고 있다.”(보들레르) 이제 분명한 점은 시대성과 영원성의 활성화에 대한 보들레르의 변증법적 형상은 결코 ‘현재’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의 이론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보들레르는 일시적인 것 혹은 현재의 모습 속에서 예술의 영원성을 구출하고자 했다. 특히 현재의 모습이 예술의 영원성을 가능케 할 경우 그것은 더욱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와 관련된 일시성의 주장은 아름다운 것에 명상적으로 집중하는 일을 위해 단지 기능적으로만 주어지고 있을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학적인 차원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예술의 이중성은 인간의 분열에서 나온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는 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서, 변화하는 요소를 예술의 육체로서 파악하게 된다.”(보들레르) 아름다움을 ‘행복의 약속’이라고 목적론적으로 정의하였던 스탕달을 보들레르가 비판하였다는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특히 미의 ‘귀족주의적인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들레르는 ‘행복의 변화하는 이상’을 기준으로 삼았던 사유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미적 현대의 개념을 내세운 보들레르가 무엇을 목표로 삼았는지를 더이상 간과할 수 없다. 즉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토대는 역사적으로 파악된 ‘현재’라는 지시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름아닌 ‘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미학에서 아름다움은 ‘무한성’이라는 개념과 ‘전율’이라는 범주와 밀접한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철학적인 매개는 진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롱기노스의 『장엄함에 관하여』를 끌어들였던 쿠르티우스(Curtius)에 대한 야우스의 비판 또한 잘못된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현대성은 바로 롱기노스의 글에서 이론적으로 최초로 주어졌던 장엄함의 상상력을 통해서 조명되며, 현대적인 미에 대한 보들레르의 생각이 바로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와 야우스는 이러한 점을 오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역사철학적인 진보 도식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야우스는 한편으로 비초월적인 시대성을 지닌 스탕달 및 청년 독일파의 낭만주의 성향과 다른 한편으로 시대적인 것을 수수께끼처럼 경험했던 보들레르 사이에 놓여 있는 미묘한 차이점을 매끈하게 무화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아무런 차이점을 제시하지 못한 채 단지 하나의 역사적인 단계, 즉 그 자체 이미 동일한 모양의 역사적인 단계만을 형성해내고 있다. 이러한 분석 시각이 바로 게르비누스(Gervinus) 이후의 문학사에서 엿볼 수 있는 전형적인 특징, 즉 심미성의 결핍인 것이다.
여기서 발전된 심미적 이론의 전망에 대해 하버마스가 못마땅해할 것이라는 점은 시간을 지양시킨 바 있던 셸링의 동일성 철학을 비판하였던 그의 초기 글에서 이미 읽어낼 수 있다. 반역사적인 셸링을 명백하게 비판하며 실러, 헤겔, 마르크스, 청년 독일파에 의존하여 역사적인 주장을 제시하는 하버마스는 보들레르에 의해 상상화된 미와 관련하여 그 미를 은밀히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려는 필연적인 결단 상태에 빠지고 만다. 즉 하버마스는 예술을 유물론적이고도 역사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보들레르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낙관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을 내세운 니체 이후의 ‘심미적 이론’을 마침내 비판할 수 있는 토대로서 하버마스는 보들레르의 이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하버마스는 니체의 눈으로 보들레르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헤겔에 의해 변질된 눈으로 보들레르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니체의 시각으로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니체를 현대성의 프로젝트가 본궤도에서 이탈하도록 만든 본래의 죄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니체를 역사철학과 예술의 보편주의적 철학을 심미적 이론으로 대체시키려 했던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II. 시간의 지양:미학적 범주의 형상화로서의 「마주친 여자에게」

마주친 여자에게

귀 따가운 길거리가 내 둘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상복 차림의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여자 하나가,
장중한 비통의 얼굴로 지나갔다, 화사로운 한 손으로
꽃무늬 장식의 옷단을 치켜들고 흔들어대면서;

조각상과도 같은 종아리로 날쌔고도 고상하게.
실성한 사람처럼 움찔해진 나는 마시고 있었다,
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
사람 호리는 상냥함과 사람 말려 죽이는 즐거움을.

한 가닥 번개…… 그러고는 밤!―그 눈매로
나를 별안간 되살려놓고는 도망치는 미녀여,
이젠 저승에서밖엔 너를 다시는 못 보겠지?

머나먼 딴 곳에서! 너무 늦어! 어쩌면 영영!
네가 가는 곳 내가 모르고, 내가 가는 곳 네가 모르니,
오, 내가 사랑했을 너, 오, 그걸 알고 있던 너!

이 시에서는 미와 존재라는 범주와 관계하여 잃어버린 시대를 강조하는 독특한 감정이 표출되고 있다고 발터 벤야민은 밝힌 바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읽어낼 수 있다. “이 시에서 영원한 이별은 도취의 순간과 일치하고 있다.” 벤야민은 그 순간을 ‘충격의 이미지’ ‘파국의 이미지’라고 명명하고 있다. 벤야민 특유의 ‘충격’ 개념이 지닌 문제점과 그러한 논의에 깔려 있는 사회심리학적인 근거를 재차 상술할 필요 없이 우리는 그 순간이라는 시간의 동인이 어떻게 전이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충격이란 무엇일까? 『악의 꽃들』에 실려 있는 「우울과 이상」이라는 연작시에서 엿볼 수 있는 화자의 상황과 비교해볼 때 우선 지각하는 자의 상황이 확인될 수 있다. 끊임없는 움직임―이것은 이미 시간적인 요소를 지시하는 것인데―에 의해 사로잡힌 이는 예기치 않게 그 어떤 것을 지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여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는 이중적인 방식으로 구분되는 지각이다. 즉 그 지각 자체가 속해 있는 범속한 장면 내에서 그녀는 범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엄하다. 또한 설혹 스쳐 지나가는 여인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느 만남과는 다르게 움직이는데, 즉 조각상처럼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그녀는―간접 증거로 작용하는 여타 다른 의미들을 제외하고 오로지 시간 자체의 메타포에 집중한다면―사라지는 것의 정반대, 즉 영원성을 대변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여성 모습의 상징화 내지는 알레고리화는 다각적이며 또한 심리분석적이고도 정치학적인 차원에서는 다양한 의미를 띨 수 있다. 예컨대 그 여인의 모습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이마고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견해나 혹은 공화국에 대한 영웅적인 이념 내지는 자유 이념이 알레고리로 표현되어 있다는 등의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 시간 양식에 관한 질문과 관계해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인 점은 시간의 지각에 엄격하게 제한된 추론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이데올로기적이며 정치적인 고통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슬픔이 제2제정 시대에서 잃어버린 자유를 뜻한다고 해석될 경우, 공화국에 대한 상은 그러한 해석을 포함하게 되며 결국은 믿을 만한 해석이 되지 못한다. 그럴 경우, 그것은 이전 시대에 대한 체념적인 시각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정치적이고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의도가 무엇을 내세울지라도 그러한 해석과 상이하게 대치되는 점이 나타나게 되는데, 즉 보들레르 텍스트에서는 역사적인 시대가 아니라 시간 단계로서 파악되는 시간의 느낌에 대한 성찰 양식이 우선적인 위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악의 꽃들』 전체의 구조 요소인 시간의 의미론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슬픔에 젖어 있는 여인과 재빨리 사라진 여인이라는 두 가지 확인될 수 있는 범주를 디테일하게 기술하는 보들레르의 수법을 염두에 두면, 이 시와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2) 간의 연관성이 형성된다. 그중 산문시 「군중Les Foules」에는 소네트 「마주친 여자에게」의 상황에서도 읽어낼 수 있는 고독한 산책자로서의 시인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그 산책자는 ‘군중 속에서의 남자’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다수’에 대한 그의 일면적인 사회적 경험과도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군중 개념의 정반대인 고립(solitude)을 경험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군중 속에서 ‘혼자’인 셈이다. 이와 같은 혼자 있는 존재 상태로 인해 시인은 다른 이들과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도취’를 경험한다. 군중 내에서의 고독은 ‘방황하는’ 영혼에 대한 매력을 결코 상실하지 않으며, 그러한 고독은 비밀(mysterie)과도 같다.
여기서 고독의 발견자는 아닐지라도 고독을 이론화하였던 루소와의 구분이 불가피하며, 항상 보들레르는 고독에 대한 루소의 확신에 대해 의심을 품은 바 있다. 그 차이점은 처음부터 다음과 같은 측면, 즉 보들레르는 ‘자연’이라는 매개물로 정의된 루소의 고독을 단호하게 배제하였다는 사실에서 읽어낼 수 있다. 스위스 숲을 거닐던 고독한 산책자인 루소는 파리에 있는 메닐몽탕 언덕에서의 과거 체험을 상기한다. 여기서 고독한 루소의 명상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내향화된 고독 속에서 명상하는 루소는 곧 자신을 모든 사물의 주인으로 해석한다. “고독 속에서의 명상, 자연 탐구, 세계 관찰을 통해 고독한 사람은 자신을 부단하게 사물의 주인으로 만들게 되며 달콤한 불안감으로 모든 사물의 목적과 자신의 모든 느낌의 원천을 탐지하게 된다.”(루소, 「세번째 산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이와는 반대로 보들레르의 ‘고독’ 개념은 도시적인 삶 그리고 자아가 대면하게 되는 사물의 지각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그는 루소의 자연관 및 고독에 대해서 늘 성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우울』의 또다른 산문시 「고독La Solitude」에서 보들레르는 루소보다는 오히려 라 브뤼예르(La Bruy뢳e)와 파스칼(Pascal)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이전 시기의 자기 도취(루소)와―17세기의 두 사상가가 언급했던―‘혼자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차가운 에토스를 서로 대비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보들레르가 라 브뤼예르나 파스칼 같은 현대 이전의 보수적인 모랄리스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보들레르는 ‘고독’에 대한 사유를 성찰적이고도 주관적인 차원에서 혁신시켰던 루소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능한 한 루소의 사유를 넘어서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루소 극복은 다름아닌 ‘고독’을 상상력의 생산지로 파악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파리의 화려한 거리라는 외적인 세계와 다수의 군중은 단순히 다채로운 사회적인 현상 자체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풍속극의 무대, 즉 희극(Kom쉊ie)으로 향유되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군중」에서 볼 수 있듯이 ‘미지의 것’으로서 파악된 ‘무한성’의 차원이 열리고 있으며, 이것이 보들레르 미학의 핵심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을 배회자로 파악하는 이론적인 구상은 하나의 정신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그 정신 상태는 수동적으로 현상과 마주치는 상태가 아니라 현상을 스스로 생산해내는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학적인 지각 범주는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 해결 차원에서 1860년 처음으로 출간된 「마주친 여자에게」가 반드시 ‘미지의 것(사람)’이라는 범주에 완전한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 읽혀질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 어떤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 점이 입증되고 있다. 더욱이 「군중」에서 언급된 다음과 같은 정신 상태는 「마주친 여자에게」와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들이 사랑이라고 가리키는 것은 매우 무의미하고, 제한적이며 미약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 형용할 수 없는 향연, 그 신성한 영혼의 매음은 다르다. 시적이며 또한 연민의 정을 내보이는 이 영혼의 매음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것, 지나가는 미지의 것에 자신을 바친다.”
미지의 지나가는 여인과 마주친 사람의 시선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시각은 수정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향연’이 다름아닌 ‘예기치 않은 미지의 것’을 시적으로 창작하는 이의 ‘향연’(시인의 글쓰기 상태―옮긴이)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충격 개념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방식도 문제의 핵심, 즉 보들레르 텍스트는 미지의 것을 능동적이고도 미학적으로 구성해내는 텍스트라는 점을 놓치게 된다. 「마주친 여자에게」서 화자의 반응을 묘사하는 구절(“실성한 사람처럼 움찔해진 나는 마시고 있었다,/회오리바람이 싹트는 납빛 하늘 같은 그녀 눈에서/사람 호리는 상냥함과 사람 말려 죽이는 즐거움을”)도 개념적인 차원에서는 바로 「군중」에서 아이러니컬하게 묘사된 시인의 도취된 정신 상태와 부합하고 있다. 따라서 지나간 미지의 여인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인 것이다. 그렇다면 향연에 젖은 시인은 무엇을 감지하고 있는 것일까? 어두운 슬픔의 고통에 잠긴 고상한 여인은 일종의 정신적 자극으로서 멜랑콜리한 기호의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고독한 배회자로서의 시인이 갖고 있는 비밀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들레르 미학의 핵심 개념인 ‘무한성’의 두 가지 요소가 주어지며, 그것들은 ‘애매함’의 범주와 부합된다. 경우에 따라서 그 수수께끼와 같은 여인은 슬픈 모습으로 인해 어느 미망인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조건하에서만 의미가 있다. 즉 그것이 보들레르 미학의 상징적인 문맥에서 읽혀질 때, 다시 말하면 묘사된 파리의 사회적 현상을 사회학적이고도 사회심리학적인 차원에서 당시 1850년대에 대한 지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현실을 멜랑콜리하게 구조화하는 기호의 창살로 읽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국 여인이라는 기호를 중심으로 지나간 미지의 여인, 『파리의 우울』에 실려 있는 「미망인들Les Veuves」의 여인, 그리고 슬픔에 젖어 있는 안드로마케(『악의 꽃들』 중 대표적인 시 「백조」에 나오는 신화적 미망인―옮긴이)는 서로 결합되어 있다. 특히 「미망인들」에서는 귀족다운 기품을 통해 자신의 주변 환경의 저속성과 대조를 이루는 어느 미망인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그녀는 키가 크고 장엄하게 보이는 여인이었다. 지난날의 귀족 미인들의 초상화 콜렉션에서도 그녀와 비교될 정도의 여인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자태는 너무나 고상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미망인의 모습에는 무엇보다도 배회자로서의 시인이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는 특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녀는 완전히 혼자(absolute solitude)이고 거만한 듯한 냉엄한 스토이즘적 자세(une fierte de sto뷵ienne)를 보이며 또한 고통스런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설혹 시선을 주고받는 테마가 결코 연출되지 않았을지라도, 또한 에로틱한 함축 의미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을지라도, 어쨌든 미지의 미망인과 미지의 지나간 여인 간의 친화성은 이 시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이다. 즉 두 여인은 다름아닌 미학적이고도 정신적인 색의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두 여인의 모습에는 다가가기 어려운 현상의 품위가 강조되고 있으며, 특히 중요한 점은 미망인은 멜랑콜리에 젖어 있는 시인의 내적인 상태를 장식해주는 중심 기호라는 것이다. 그녀는 희망을 포기한 이들, 그럼에도 “그들 내부에서는 아직도 천둥의 마지막 탄식 소리가 노호하고 근심 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사람들의 파렴치한 시선으로부터 멀리 물러나 있는” 패배자들을 대변해준다.(「미망인들」) 이미 지나간 감정의 순간이 아직도 시간적으로 여전히 현존해 있다는 것은 바로 ‘노호하는’ 상태로 표시되어 있다. 「미망인들」에서 사용된 ‘천둥(orage)’이라는 단어가 「마주친 여자에게」에서 사용된 ‘회오리바람이 싹트는(ouragan)’이라는 단어와 서로 교감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마침내 우연처럼 두 여인간의 은밀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미망인들」에는 시선 교환이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결국 시인의 의도적인 시선 포착에 관한 언급으로 변화되고 있다. 또한 「미망인들」에서는 미망인이 그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녀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마주친 여자에게」와는 달리 그 산문시에서는 수수께끼가 풀려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상의 구조를 완성시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수수께끼’이다. 특히 멜랑콜리에 젖어 있는 시인을 표현하는 핵심 코드 기호인 ‘고독한 번뇌(Douleurs solitaires)’에서 그러한 수수께끼가 발견될 때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은 ‘미망인’이라는 형상에 바로 슬픔에 대한 보들레르의 이마고가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며, 다시 말하면 그것은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시인의 상태를 나타내는 기호인 셈이다. 이처럼 시인의 특성은 관찰된 대상에 함축되어 있다. 슬픔에 젖어 있는 고독한 여인은 결국 사회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보들레르 미학의 범주인 것이다. 산문시에 나타나는 미지의 것이라는 범주와 슬픔이라는 범주는 결국 소네트 「마주친 여자에게」에서의 여성 모습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녀를 지각하는 시인도 마찬가지로 심미적인 지각 단위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주친 여자에게」의 장면에서 그려진 것은 단순히 즉흥시에서 엿볼 수 있는 어떤 개인들간의 조우가 아니라 보들레르 미학을 세련되게 구성하고 있는 두 범주간의 조우인 것이다.[출처] 보들레르와 영원한 예술미|작성자 최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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