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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의 세계]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스크랩]
2018년 10월 24일 16시 43분  조회:1551  추천:0  작성자: 강려
퍼온 자료임
 
[수사학의 세계]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
 
[수사학의 세계]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 - 

[ 목 차 ] 

1. 비유 개괄..................................................30 
2.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31 
3. 은유........................................................35 
(1) 치환은유...............................................35 
(2) 병치은유와 존재의 시................................37 
(3) 비동일성의 원리......................................39 
4. 환유........................................................41 
1. 비유 개괄 

사전적 의미로 직유란 이른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마치 ~같다. 꼭 ~같다, ~과 비슷하다. ~처럼, ~인양, ~같이, ~듯 ' 등의 보조 수단을 매개로 연결되는 표현방식으로, 이 때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는 서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천사처럼 아름다운 우리아가” ,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니” 
등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며, 은유란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 연결시키는 비유 방식이다. 또한 은유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미적인 기능을 강화하거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연결이 더욱 돌발적이어서 직유에 비해 그 긴장의 정도가 훨씬 강렬하기 때문이다. 
또 은유법은 직유법에 비해 대상을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드러낸다. 논리상 직유는 유사개념이나 은유는 동일개념, 동가개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의 거울” , “마음의 거울” , “오월은 계절의 여왕” , “소녀는 인생의 봄”등과 같이“ A는 B다”는 식으로 표현 속에 비유를 숨기는 기법을 말한다. 이러한 비유의 근거는 유추, 즉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연속성에 있다. 따라서 비유는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일성의 서술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비유의 동기는 인간의 마음과 외부 세계를 결합하여 마침내 동일화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인 것이라 할 것이며 시적 세계관 즉 시정신의 본질은 세계의 동일성에 있으므로 비유적인 언어야 말로 가장 시적인 언어이며 시의 대표적인 장치가 된다. 그렇지만 이 동일성 못지않게 차이성 또한 중요하다. 비유적 언어는 연합적 언어이다. 그러나 이 연합은 서로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물의 결합이기 때문에 차이성 속의 유사성을 필요 충분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환유란 사전적 의미로 비유법의 한 가지로, 표현하려는 대상과 관련되는 다른 사물이나 속성을 대신 들어 그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을 말한다. 
수사학이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정치 연설이나 법정 변론에 효과를 올리기 위해 행해진 화법 연구에서 그 첫 번째 꽃을 피웠다. 
소피스트들이 바로 수사학의 지도를 담당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비유는 수사학의 한 부분으로 그 기능을 ‘장식성’에 두는 경우가 많았다.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에겐 이런 비유는 진리를 왜곡하고 숨기는 기술의 일종으로 보았다. 반면 드문 일이었지만 비유의 인식론적 기능을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은유에 대한 아래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논자들에게 화두가 되어 준다. 

① 은유란 유(類 : 전체)에서 종(種 : 부분)으로, 또는 종(種 : 부분)에서 유(類 : 전체)로, 또는 종(種)에서 종(種)으로, 또는 유추(類椎)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②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은유에 능한 것이다. 이것만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다. 왜냐하면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위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①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네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 유에서 종으로, 종에서 유로 대치하는 것은 종과 유의 자리바꿈이므로 제유, 또는 환유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은유’라는 용어는 다양한 비유의 갈래들을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②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유(은유)에서 서로 다른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간파해 내는 인식론적 능력을 높이 샀음을 알 수 있다. 서정시의 본질을 자아와 세계의 통일(화해와 조화)에서 찾는다면, 은유는 시적 세계의 구성원리와 일맥상통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사학적으로 말한다면 환유는 대체로 A와B 사이의 인접성이 가진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연상에 기반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서로 다른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간파해 내는 게 인식론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라면, 환유는 은유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유에는 A와B사이의 관련성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야콥슨(Roman Jakobson)의 은유와 환유 

야콥슨은 실어증 환자의 상태를 관찰한 결과 두 가지 유형의 장애를 발견하였다. 즉 일군의 사람들은 '아이가 밥을 먹는다' 고 말할 경우 '아이'에 해당하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환자들은 각각의 단어는 떠오르되 그 단어를 연결짓지 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 대상에 해당하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해서, 다시 말해서 선택의 축에 이상이 생겨서 실어증이 걸린 것이고 후자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짓는 결합의 축에 이상이 생겨서 언어 장애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은유와 환유를 두 축으로 삼는 선구적인 견해로서 문장 구성의 두 축을 선택의 축(수직축 : 계열적 관계)과 결합의 축(수평축 : 통합적 관계)으로 나누고, 전자에 은유를, 후자에 환유를 연결시켰다. 

비 오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간다 결합축(환유) 
바람부는 오후엔 극장에 간다 ( 네 어구가 모여 한 문장을 만든다. 이것을 인접성의 원리라 하며 통사적 관계에서 연속성 원리에 의해 연 결된다) 
선택축(등가성의 원리 : 은유) 
일반적인 언어생활에 있어서 '비 오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간다'는 문장의 '비 오는 '에 대치할 수 있는 많은 항목들이 나열될 수 있다. 바람 부는, 눈 오는, 달 밝은, 등 유사성을 지닌 많은 항목 중 비 오는 이라는 말이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 세로로 나열되는 이 항목들을 계열적 관계(paradigmatic relation)에 있다고 하는데 그 각각의 항목들은 유사성(similarity)의 원리에 의해 나열된다. 한편 '비 오는‘ , ’날이면‘ , ’압구정동에‘ , ’간다‘ 라는 네 어구가 모여서 한 문장을 이루는 것은 각각의 어구가 서로 인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결된 것인데 그렇게 가로로 연결되는 항목들은 통사적 관계(syntagmatic relation)에 있다고 말하며 각각의 항목들은 연속성(contiguity)의 원리에 의해 연결된다. 야콥슨은 유사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계열적 관계를 은유라고 했고 연속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통사적 관계를 환유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시의 경우는 은유, 산문의 경우는 환유가 지배적인 언어운용의 원리가 된다. 
환유는 굴뚝을 보면 연기를 연상하고 포크를 보면 나이프를 연상하듯, 어떤 기호를 그것과 인접한 다른 기호로 바꾸어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은유는 회유와 위협을 당근과 채찍으로, 남근을 고추로 바꾸어 표현하듯 어떤 기호를 그것과 유사한 다른 기호로 바꾸어 표현하는 수사학적 비유양식이다. 
이러한 선택의 축과 결합의 축은 비단 언어 현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식생활이나 의복의 착용 등 문화의 양상까지 이러한 관계에 의해 설명하려고 했다. 즉 쌀밥과 미역국과 배추김치가 있다고 할 때 이 세 항목은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는 환유적 관계의 음식이다. 즉 밥을 먹고 국을 떠먹고 김치를 반찬으로 먹는 것이 정상적인 식사법이다. 여기에 대해 쌀밥과 잡곡밥,미역국과 시금치국, 배추김치와 겉절이 등은 각각 유사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은유적 관계의 음식이다. 즉 쌀밥과 잡곡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미역국과 시금치국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물론 배추김치와 겉절이는 둘 다 선택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유사한 관계에 있는 음식인 것은 틀림없다. 우리가 옷 입는 것도 이런 관계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은유가 주로 유추를 통해 유사성을 발견한다면, 환유는 대개 연상을 통해 인접한 것들을 연결시킨다. 은유에선 보편성이 중시되는 데 비해 환유에서는 개별성이 강조된다. 은유는 본질과 필연성을 지향하지만 환유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텍스트 수용자가 은유적인 표현과 기능에 주목하여 읽으면 텍스트의 주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환원되고(보편성), 반면 환유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읽으면 텍스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맥락을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특수성) 
은유란 화자가 숨겨진, 혹은 진술되지 않은 의미를 갖고서, 이미 정해놓고서 언어 등을 소통의 수단으로서 구사한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시적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은유는 전통과 권위에 결부되어 있다. "내 마음은 호수다"는 대표적인 은유는, 호수가 갖는 이미지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로만 귀결되어 있으며, 그 의미를 독자가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또, “독수리=연세대”라는 은유가 가능한 것은 모든 사람이 독수리가 연세대학교의 상징물이라는 동의, 전제된 앎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유는 필연적으로 동일성을 우선하며 그에 기반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의 확장을 용납치 않는다. 
따라서 "일반수사학적인 전략으로서의 은유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연역해낼 수 있는 의미의 약호를 내포하고 있다. 은유는 차이의 사고보다 동일성을 선호하는 유추적인 사고를 특권화한다. 달리 말하면 한 이미지가 유추에 의해 어떤 의미와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환유는 독수리가 연세대학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둥지나 숲, 혹은 멸종될 위협을 받는 생물, 공중에서 쥐 따위를 날쌔게 낚아채는 맹금류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의미할 수도 있는 경우의 수사인 경우는 은유가 아닌 환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환유는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대비하여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동일한 수준의 지시대상과 연관시킨다." 
은유와 환유를 비교하자면, "은유가 우리의 사고를 현실로부터 끌어올려서 초물질적인 이상, 예컨대 '자유'같은 관념적인 것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현실주의적이고 구체적이며, 유물론적인 방향을 띤다. 

*야콥슨은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고 말하였다. 선택의 축은 야콥슨의 개념으로는 은유이고 결합의 축은 환유에 해당한다. 등가의 원리는 유사성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원래는 선택의 축에 해당하는 요소다. 그러면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등가의 원리가 투사될 때 시적 기능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시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가) 늙은 悲哀다. 
(나)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다)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라) 어리디 어린 純潔이다. 
三月에 
젊은 느티나무 (마) 잎새에서 이는 
(바) 연두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이 시에서 하나님은 여러 개의 매개항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 중 '늙은 비애'(가) '푸줏간에 걸린 살점'(나) '놋쇠 항아리'(다)는 부정적 이미지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부정적 이미지를 세 개 열거한 다음에는 '어리디 어린 순결'(라) '삼월의 젊은 느티나무 잎새'(마) '연두빛 바람'(바) 등의 긍정적 이미지가 제시되는데, 7행의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은 부정적 이미지에서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징표의 기능을 한다. 이 시의 문맥을 산문으로 정확히 바꿀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윤곽은, 하나님의 존재가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는 낡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고 푸줏간의 살덩이처럼 죽어버린 존재 같지만 그래도 나의 하나님은 불멸의 존재이며 어린이처럼 순결하고 봄날의 바람처럼 청신한 존재 의의를 지닌다는 의미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서 앞의 부정적 이미지는 서로 간의 유사성을 지니고 연결되었고 뒤의 긍정적 이미지 역시 유사성에 근거하여 연결되었다. 따라서 앞의 (가), (나), (다)와 뒤의 (라), (마), (바)는 각각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야콥슨의 용어)의 관계에 있고 (가) (나) (다):(라) (마) (바)는 의미상 대립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이라는 주어와 '늙은 비애다'라는 서술어는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어 한 문장을 이룬 것이므로 환유(야콥슨의 용어)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신', '주님', '창조주' 등의 말은 선택의 축에 나란히 나열될 수 있는, 다시 말해 유사성을 지닌 말들이다. 그러나 '늙은 비애'와 '하나님'은 표면적으로는 유사성이 없는, 이질적인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이질적인 두 말을 연결하여 A=B의 형식으로 붙여 놓았다.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말은 원래 선택의 축에 속해 있는 등가성을 지닌 말을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시적인 발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일상적인 진술이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는 말은 분명히 시적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는 등가가 아닌 것 같은 두 말을 등가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결합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는 말은 연속성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은 시인이 주관적으로 생각한 어떤 유사성에 의해 두 개의 어구가 결합된 것이다. 즉 형식적으로는 말과 말의 결합이므로 환유로 보이지만 사실은 주관적 유사성에 의해 폭력적으로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은유에 속한다. 시의 언술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위의 시는 이런 언어 사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야콥슨은 시에는 은유가, 산문에는 환유가 중심원리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야콥슨은 이러한 은유와 환유의 원리가 모든 담화에 다 적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야콥슨의 개념이 수사법에서 이야기하는 은유와 환유에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펴보겠다.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仙桃山 
수정그늘 
어려 보라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박목월, ‘牧丹餘情’ 전문> 

이 시에서 '~름'으로 끝나는 세 행은 음악적으로 동일한 어감의 말이 통사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것 역시 등가의 원리가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된 것으로, 일상적 어법과는 구분되는 시적 기능을 나타낸다. 각 시행에 제시된 정경은 부드러운 해조와 은은한 아름다움이라는 유사성에 의해 선택된 말들이므로 은유적 사고의 발현이다. 그리고 각각의 정경의 내적 연결은 결합될 만한 전후 관계(연속성)에 의해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환유의 원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2연의 '청모시 옷고름'은 수사법으로 보면 환유에 속한다.전통 수사법에 기대면,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키는 것을 제유라고 하고 특징이나 소유물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을 환유라고 한다. 즉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말은 청모시 옷고름을 띤 한국 여인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고의 과정에 의해 분석해 보면, 한국 여인과 그가 입는 의상은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결합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한복 의상과 옷고름 역시 연속성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국 여인'을 '청모시 옷고름'으로 대치한 것은 환유의 원리에 의거한 것이다. 여기서 수사법에서의 환유와 야콥슨의 환유의 개념이 부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만일 '그대 마음은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시구가 있다면 이것은 '그대 마음'과 '청모시 옷고름'의 유사성에 바탕을 둔 표현이기 때문에 은유의 사고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리고 수사법으로도 이것은 은유에 속한다. 결국 야콥슨의 개념이 그 나름의 독특한 시각에 의해 정립된 것이지만 그것이 전통 수사학의 개념과도 어긋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하 - 서울여대 이숭원 , ‘시 교육에 도입된 이론적 지식의 몇 가지 오류’ 중에서> 

3 은유(隱喩, metaphor) 

光化門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宗敎 
<서정주, <光化門> 중에서> 

*위의 예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은유는 명명행위이고 명명행위는 인식의 행위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未知의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것을 旣知의 것으로 바꾸어 부르는 명명의 '전이양식'으로 은유를 파악했다. 우리가 새로운 사물을 경험했을 때 이것을 기술할 새로운 언어가 없어서 이와 '유사한' 그리고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다른 사물의 이름을 여기에 부여하는 것이 은유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은유는 '전이'이고 전이는 유추, 곧 유사성이다. 시적인 것의 본질을 '옮겨 놓기', 곧 전이양식이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이름 부르기의 전이양식이라고 파악한 것은 여간 의미심장하지 않다. 은유는 시적 상상력과 수사적 장식이 고안한 것으로서 그리고 언어의 특징으로서 간주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은유 유형이 시사하듯이 은유는 문학예술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충만 되어 있으며 꼭 언어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도 충만 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그의 생각은 얕다" 또는 "그의 생각은 깊다"고 말한다. 이 두 술어는 개념(관념)에 공간적 방향을 부여한 '방향은유(orientatidnal metaphor)'다. 또 우리는 "그의 성격은 매우 싱겁다" 또는 "우리는 갖가지 폭력과 투쟁할 필요가 있다", "李箱 시를 읽으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최근 그의 정서적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런 은유들은 공간적 방향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체험이 방향은유를 낳듯이 물리적 대상(특히 우리의 신체)의 체험이 사건, 행위, 관념, 정서들을 어떤 물리적 실체로 보는 데서 발생되는 '존재론적 은유'(ontological metaphor)다. 
<*이하-백수인 교수 ‘비유의 원리’ (목포 현대시 연구회 강의 자료중에서)> 

(1) 치환은유(置煥隱喩 : epiphor) 

치환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한 사물에다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여 생기는 전통적인 은유이다. A=B 또는 A의 B라는 비유가 비유 형태가 그 기본이다.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불확실한 미지의 사물(취의 : 원관념)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구체적 사물(매재 : 보조관념) 로 전이하여 의미의 변용 혹은 확대를 가져오는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은유의 예들이 이 치환은유들 이라고 할 수 있다. 
휠라이트는 치환은유의 핵심적인 작용이 비교에 있고 보조관념(매재)과 원관념(취의) 사이에 유사성을 전제로 하지만 그렇다고 유사성이 두드러지거나 비교가 명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유사성의 포착이 미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충격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보조관념(매재)과 원관념(취의) 사이에 활기와 긴장감이 흘러야 한다. 그는 또한 치환은유의 특이한 양상으로 ‘감각적 전이’를 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따라 ‘공감각(共感覺)’을 은유의 치환에서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내 마음은 湖水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門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김동명 ‘내 마음’ 중에서> 

위의 시에서 보이는 은유는 ”A는 B이다“라는 서술형식으로 , ”마음“이라는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 ”호수“ ”나그네“등으로 전이되어 의미의 변용과 확대를 가져오고 있다.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있지만 쉽게 이시가 이해가 되는 것은 ”유사성“에 근거한 전이이기 때문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 전문> 

위 시는 눈이 내리는 겨울날, 시골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몇몇 사람들은 졸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졸고 있는 사람들(원관념 : 취의)이 ‘보름’이나 ‘초승’이 아니고 ‘그믐’(보조관념 : 매재)처럼 존다 라고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생의 쓸쓸함과 고단함 따위를 환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다는 것’에 대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이 시적 비유를 통해서 구체화 되어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다는 것(원관념 : 취의)’이 때론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보조관념 : 매재)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귀향하는 사람들의 고향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묻어 있으며 선물로 준비한 굴비 한 두름, 사과 한 광주리에는 가난과 생의 애환들이 묻어 있다. 또한 이것들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하는 이를 통해 생의 남루함과 근원적인 그리움이 환기되고, ‘산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와 질감에 도달하게 됨을 알 수 있다. 

(2) *병치은유와 존재의 시 

휠라이트는 "군중 속의 얼굴들의 모습/ 촉촉이 젖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잎들"이라는 파운드(E. Pound)의 시구를 병치은유의 예로 든다. 이것은 병렬과 종합을 통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은유의 한 형태다. 여기서 의미론적 운동은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시인이 자기체험의 어떤 특수한 면들을 통해서 병렬되는 요소와 그 요소의 종합으로 이룩된다. 휠라이트는 이 은유형태에 조합(combi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합이란 치환은유처럼 사물들 사이에 유사 · 등식 같은 상호 모방적 인자가 있는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됨으로써 빚어지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다. 사실 병치은유는 휠라이트의 독창적 몫이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던진 것처럼 이질적 사물들의 '병치' 형태가 어째서 은유가 되는가 하는 질문이 야기되고 또 그가 병치은유를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는 만큼 모호해서 논란의 여지를 배제할 수 없다. 전이(또는 치환)가 아닌 병치(또는 조합)가 은유가 되는 근거, 곧 병치은유도 은유의 한 형태로 성립되는 근거는 그가 은유를 어디까지나 의미론적 변용작용으로 본 데 있다. 
그는 병치은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가상적 자연현상을 예로 든다. 곧 수소원자와 산소원자가 합치되기 이전 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우주사의 어느 시기에 이 두 원자가 결합하여 비로소 물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계의 요소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자질을 생성하듯이 시에 있어서도 이전에 없었던 방법으로 언어와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병치도 치환과 더불어 은유의 한 원리가 된다. 말하자만 치환은유가 전통은유라면 병치은유는 새로운 은유형태가 된다. 특히 "얼굴들의 모습"과 "꽃잎들"의 양자가 같은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 판단이 유보된 점에서 병치은유는 해체주의적 관심까지 불러일으킨다. 

男子와 女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김춘수, ‘눈물’> 

이 작품에서도 치환은유적 요소가 있다. 왜냐하면 "男子와 女子"의 이미지와 "오갈피나무"의 이미지가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는 공통성과 유사성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미지의 연결은 느닷없는 통합의 이질감을 준다. 더구나 5행 이하의 장면은 그 앞의 장면과 이질적이다. 이런 이질적 이미지들과 장면들의 통합이 이 작품의 시적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작품 <눈물>은 일상적 의미나 논리적 의미의 공백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사실 과거에 시도된 적이 없는, 요소들의 새로운 결합작용으로 새로운 의미와 자질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할 때, 새로운 결합작용이란 이미지나 장면의 당돌한 통합일 수밖에 없고 여기서 탄생 가능한 그 새로운 의미와 자질도 일상적 의미나 논리적 의미와 무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휠라이트가 순수한 병치는 비모방적 음악이나 추상화에서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병치는 예술을 독자적이게 하는 원리임을, 다시 말하면 일상적이고 논리적 의미를 배제하는 원리임을 시사한 것이다. 자연과 현실의 모방이든 관념의 묘사든 또는 선행 예술의 모방이든 모든 모방적 요소가 있을 때는 치환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치환은 의미의 예술이게 하지만 병치는 무의미의 예술이 되게 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①, 비대상시(이승훈)②, 또는 절대시는 비모방음악과 추상화처럼 병치은유가 그 구성원리가 된다. 조향의 <바다의 層階>를 다시 예로 들어 새로운 결합으로서 병치은유를 분석해 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 작품에서 장면과 장면,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벗어나고 있다. 이질적인 너무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비논리적으로 병치되어 현실이나 관념의 모방적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 현실을 해체하여 인위적으로 조립한, 아주 난해한 추상화와 같다. 첫 연에서 병치된 네 개의 이미지는 같은 자리와 같은 시간에 놓일 수 없는 사물들의 결합이며, 마지막 연의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 있음으로써 원래의 장소에서(나비가 있을 곳은 꽃이기에) 추방되어 있다. 이런 병치는 모더니즘시의 주된 기법이 되어 있다. 치환은유의 시는 '의미의 시'가 되고 병치은유의 시는 '존재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휠라이트는 의미심장한 은유에서는 이 두 요소가 요청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치환과 병치가 이미지들의 결합방식이고 양자가 다같이 의미론적 변용작용의 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은유로 처리한 것은 독창적 은유론으로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질적 이미지들의 돌연한 결합이나 장면의 급격한 전환을 병치은유적 요소로 기술한 것은 현대시의 은유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많은 현대시들의 은유는 동일성이 아니라 '비동일성의 원리'(휠라이트의 용어로 병치은유적 성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동일성의 원리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絶頂> 전문 

위 예문의 마지막 행은 형식상으로 치환은유임에도 불구하고 병치은유적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다. 왜냐하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매우 엉뚱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육사의 <絶頂>의 이 마지막 행은 작품 전체로 볼 때 하나의 일대 전환이며 이 전환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병치은유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쟁반같이 둥근 달"이나 "인생은 일장춘몽이다"와 같은 비유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너무 크거나 관습적이어서 우리는 시적 긴장을 느낄 수 없다.더욱이 현대시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아예 없는 것을 선택하여 억지로 결합시키는 경향을 띠어 간다. 
이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는 일종의 '힘의 긴장'이 흘러야 하는데, 이 긴장은 두 사물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고조되게 마련이다.테이트(A. Tate)에 의하면 긴장(tention)이란 외연(extention)과 내포(intention)의 접두사 ex와 in을 제거한 조어로서 이 외연과 내포가 먼 거리에 있을수록 서로 잡아당기는 팽팽한 힘이 고조되어 긴장이 탄생된다. 여기서 외연은 보조관념을, 내포는 원관념을 가리킨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人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중에서> 

원관념 "하나님"에 이를 해명하는 보조관념 "늙은 悲哀"와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과 "놋쇠 항아리"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조관념들은 아무런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원관념으로부터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그리하여 돌연한 결합에서 우리는 '놀람'의 시적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의미 차원과는 다른 매우 모호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기이한 것으로 변용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보조관념들과의 결합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결합 속에서 보조관념들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비유는 두 사물의 결합으로 새로운 문맥을 만들어 내는 형식이다. 테이트가 내포와 외연의 접두사를 제거했다는 것은 일상적 차원에서 보면 대립 ·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 먼 거리에 있는 두 사물을 파괴하여 새로운 제3의 의미차원으로 변용 · 융합시켰다는 것이며, 그 결과는 시적 긴장이 되는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시의 은유에서 도피의 원리를 가져왔다면 이 도피의 다른 한 양상은 대결이 된다. 현대시는 의도상으로 보면 현실과의 '대결의 시'가 된다.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가 자아와 타인간의, 자아와 물리적 환경간의 사랑과 적개심, 본능적 충동과 이성적 사고가 내리는 결정간의, 생의 충동과 죽음의 열망 사이의 여러 긴장 속에 나타나는 투쟁이라고 보고 언어도 살아 있는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긴장적 언어(tensive language)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현대시의 은유는 과거와는 달리 도피 또는 대결의 원리 속에서 성립한다.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열두 시에 나는 죽어, 
나는 가을 
비에 젖어 펄럭이는 疾患이 되고 
한없이 깊은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昆蟲의 눈에 비친 暗黑이 된다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이승훈, ‘寫眞’ 중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하리만큼 이 작품의 화자는 죽어서 "비에 젖어 펄럭이는 疾患"이 되고,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昆蟲의 눈에 비친 暗黑"이 되고, 또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동양적 인연관이 은유형식으로 나타나 있는 이 작품에서, 원관념인 화자(나)와 보조관념인 疾患 · 暗黑 · 칼자국 등 사이에는 동일성의 화해가 아니라 대립 · 갈등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보조관념들과 만날수록 원관념인 '나'는 점점 현실의 인간과는 다른 익명의 존재로 추상화된다. 말하자면 그만큼 현실의 모습이 지워진다. 앞에서 인용한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에 있어서도 원관념인 "하나님"과 보조관념인 "푸줏간에 걸린 살점", "놋쇠 항아리" 사이의 그 당돌한 결합만큼 대립 · 갈등의 이질성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은유의 형태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시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적 질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절대시 또는 순수시)① 그리고 이승훈의 비대상시②란 '세계상실의 시'다. 외부세계를 상실한 상황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 곧 자신의 내면세계다. 이 내면세계는 외부세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진 만큼 순수한 추상적 세계다. 세계 상실은 언어붕괴와 등가 된다. 다시 말하면 세계상실의 추상시에서 은유는 화자를 포함해서 사물들의 현실적 모습을 지우며 사물들 사이의 연관성도 해체시키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추상시의 은유는 참조할 수 없는 은유, 곧 '절대은유'다. 그러니까 추상시의 이미지들은 언어와 지시적 기능이 무화된, 시 속에만 존재하는 절대적 심상이다. 이런 추상시가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우세한 리얼리즘시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됨은 물론이다. 
이처럼 현대시의 은유는 현저하게 동일성의 원리에서 비동일성의 원리, 곧 도피 또는 대결의 원리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 이하 - 백수인 교수 ‘비유의 원리’에서 인용(김준오, 詩論, 삼지원, 1996. 174~191에서 발췌한 것임)> 

4. 환유(換喩, metonymy) 

환유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개념의 명칭 대신 표현하고자 하는 원래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거나 그 대상이 시사하는 말을 사용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 왕' 대신 '왕관'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왕관의 권위는 치명적으로 약해졌다') 어떤 작가의 작품 대신 그 작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나는 셰익스피어를 공부하고 있다")이 그 보기이다. 
야콥슨은 시의 원리에 은유를, 산문의 원리에 환유를 연결시켰으며, 환유는 인접성을 바탕으로 배열된다고 했다. 은유가 서로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상이한 것들 사이에 구심점을 구축해내는 데 반해 환유에는 발견의 힘이나 통일성을 부여하는 구심력이 별로 없다. 대부분 환유적 연결에는 이미 인접성과 관련성이 관습적으로 인정되므로, 그 연결 자체가 인식론적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식론적 가치로 따지자면 환유는 은유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어쨌든, 문제는 근래에 들어 왜 환유적인 원리가 새삼스럽게 부각되고 조명되고 있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여기 박진, 김행숙 지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256쪽~259쪽)를 참조하여 설명을 덧붙이기로 한다. 
*어떤 학생이 방과 후에 혼자 남아서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녀석의 마음엔 문득 ‘반성’이란 게 무얼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반성’이란 단어를 엣센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반성 : ①자기의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그 선악. 가부를 고찰함.②[심] 주체가 자기 자신을 관찰함 ③[논]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을 고찰함.” 녀석에겐 ‘선악’ , ‘가부’라는 단어가 맘에 걸린다. 나는 선한가. 악한가. 옳은가. 그른가. 녀석은 자못 철학적이 된다. 그래서 내친 김에 ‘선악’이란 단어의 뜻도 알아보기로 한다. ‘선악’이란 단어 근처에 ‘선악과’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선악과 : [기] 선악을 알게 된다는 나무 열매(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따먹었다는 열매).” 나무열매라고? 이쯤 되면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다. 반성-선악-선악과-나무-열매-자방(子房)-주머니-돈-엽전...... 
이렇게 환유적인 고리들은 의미를 모으지 않고 이미지를 미끄러지게 하고 흩어지게 한다. 하나 하나의 고리들은 인접해 있지만, 그 연결은 필연적인 게 아니고 우연에 기대어 있다.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끝도 알 수 없고, 끝이란 건 있지도 않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의미는 해체된다. 
어떤 환유적인 시들은 우연과 불확정성(발산, 흩어짐, 이탈, 미완성, 미숙함)에서 미학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신나는 자유 혹은 불안한 자유에 의해 이끌린다. 은유적인 에너지가 구심력으로 작용하는데 반해 환유적인 에너지가 원심력으로 작동한다. 또한 어떤 경우엔 환유적인 원리나 방법을 전략적으로 사용하여 현실의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표 나게 드러내고 환기시킨다. 나아가 은유적으로 봉합된(통합된) 세계란 허상일 뿐이라고 폭로 한다. 
따라서 환유적인 원리와 방법은 포스트모던한 시대와 그 감수성에 잇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 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 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 
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황지우 ‘활로를 찾아서’> 부분에서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로 지루하게 나열된 동작들은 시간적인 인접성에 의해 연결된 것들이다. 그리고 ’나갔다‘와 ’들어온다‘ 사이엔 거리를 걸으며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 행위가 끼여 있다. ’거리의 모든 것‘은 공간적인 인접성에 따라 읽힌다. 이 시가 보여주는 환유적인 연결 고리에는 어떠한 놀랄 만한 사건이나 관찰도 꿰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어쩐지, 어쩐지 황당하지 않는가. 특히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 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으로 이루어진 5층짜리 건물은 길러리 어디서라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한 건물일 뿐인데, 지하. 1층. 2층. 3층. 4층. 5층의 간판들 그리고 옥상의 광고탑까지 그냥 그대로 쭉 열거해 놓고 보니 어쩐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공간적인 인접성의 정도로 따지자면 매우 밀접하지만, 이 배치 이 연결 어디에서도 유사성과 필연성은 찾을 수 없다. 이렇듯 기괴한 연결을 우리가 지극히 심상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바로 이점이 삶의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환기시킨다. 이 한 채의 건물이 그럴진대, 제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거리를 걷는 것은, 우리 자본, 우리 기술과 같은 슬로건과 수많은 간판들 그리고 벽보들까지, 즉 ’거리의 모든 것‘을 또박또박 읽으면서 그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환기시키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자질구레한 경험들도 감정과 해석을 빼고 이렇듯 건조하게 한번 환유적으로 진술해 보면, 그로테스크하지만 평범한 5층짜리 건물과 같은 인상에 닿게 될지도 모른다. 
<* 이이하 - 박진, 김행숙 지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에서 인용> 

*은유적 언어체계로부터 환유적 언어체계로 변화하고 있는 현상은 요즈음 우리 시단에 유통되고 있는 작품의, 혹은 시 쓰기의 주요 특성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창작의 방법론과 시 쓰기의 자의식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현대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는 시인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세상에는 등에 거울을 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단다 

경없이 가는 길, 
그것이 문자의 운명인데도 

너희, 거북이 아저씨 알지?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드는 사람, 
우리 동네 시인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런 거울 백 개를 
모을 수 있다면 
산경을 두루 비출 수 있단다 
<송찬호, ‘山經을 비추어 말하다’전문> 

경없이 가는 길이 문자의 운명이자 시인의 운명일 때, 산경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그런 거울 백 개를 모으는 것이, 달리 말하여 사물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시인의 꿈일 때, (그것은 환유적 사유체계의 몫이다. 은유적 사유란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드는 동사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워진 문자를 활용하는 명사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땡볕 아래 좌선하는 
거미 
처럼 
내부를 향해 무한 증식되던 이 몸께서 
어느 날 대낮, 대책 없이 몸밖으로 쏟아졌을 때 
자기가 자기를 숙주로 삼아 드디어 몽땅 죽는 
처럼 
조심해, 사랑을 받아주는구나 감격해서 끌어안으면 와지끈 손가락까지 삼켜버릴걸. 몸통이 먹혀 버리는 
날도 있을걸. 내장이 주렁주렁 몸 밖에 달린, 그래, 시를 생산 중이시래. 인도네시아, 이 땡볕의 정원, 냄새나는 눈물 저 혼자 삼키는 처럼 
<김혜순, ‘시인’ 부분> 

여성의, 여성적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김혜순이 몸, 그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위의 시에서와 같이 탈중심적 해체의식을 강하게 보여줄 때, 

잎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는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 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날고 
<오규원, ‘후박나무 아래’ 전문> 

대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후박나무/어미 개/새끼/싸락눈/태반/선혈’ 등이 어미 개를 중심으로 한 시간과 공간의 인접성 사물들로서의 환유적 언어체계를 보여줄 때, 우리는 은유적 사유체계로부터 환유적 사유체계로 이행해 온 한국 현대시의 한 모습을 본다. 
<* 이하 - 대구교육대학논문제37집 2002 27~41 강현국에서 인용> 

앙상한 생각들이 바람에 떤다. 
묵은 시간의 잎사귀가 발 밑에 쌓이고, 
죽어간 폭양(曝陽)의 빈 거리에서 
나마저 들것에 실려나가고, 
대낮을 사납게 헐뜯는 열 개의 손, 
저 집념의 끌. 부서져내리는 
눈발 속에 눈 드는 이마. 
나는 들것에 실려 
회상의 먼 부둣가에 잠든다. 
잠든 파도의 주름살 너머 
여윈 시간들이 헐떡인다. 
긴 항해의 짧은 일몰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눈물을, 
축축히 젖어드는 체험의 지평선에서 
이윽고 불붙는 파도여 달려 오라. 
<오세영, 음악회 전문> 

*위의 시에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규범이 모두 파괴되고 해체되어 있다. 서정적 질서란 주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그 주체가 이미 죽어 있다. 주체의 죽음은 중심의 상실을 가져오고, 그 중심의 상실은 질서의 붕괴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 질서의 붕괴는 시간의 파괴를 가져온다. 시간이란 질서의 다른 이름이고, 논리의 다른 이름이다. 위의 시에서 모든 사물들은 논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병치되고 있다. 병치란 결국 선조적 시간의 죽음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묵은 시간의 잎사귀가 발 밑에 쌓이고' 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발 밑에 쌓이는 잎사귀란 낙엽을 의미하고, 낙엽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묵은' 시간이란 것 자체가 부정되어야할, 극복되어야 할 근대적 시간임을 나타낸다. 
근대적 시간이란 선조적으로 나아가는 직선적 시간이다. 이 직선적 시간이란 합리적 주체, 곧 이성적 주체의 산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는 이미 들것에 실려나가 부둣가에 묻혀졌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세계에다 총체적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중심이 사라진 것이다. 이처럼 중심이 사라진 해체시에는 자아도 세계도 모두 다 병들거나 죽은 상태로 나타난다. '죽어간 폭양'이 그러하다. 태양은 자연,우주의 중심으로서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런 상징적 존재인 태양이 죽었다는 것은 모든 만물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反생명적인 해체시는 환유적인 사유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환유란 기표와 기의의 분리를 지향한다. 일상화된 삶에 총체적 질서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원래 언어의 고유 기능이다. 기의는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언어적 질서란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모방한 것이다. 이러한 질서 상태를 지향하는 사유구조를 우리는 은유라 부른다. 은유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꿈이다. 특히 근대체험 이후 은유는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파괴하는 힘에 대한저항 이데올로기이다. 그에 비해 환유는 그렇게 파괴된 사물들의 정황을 폭로하는 양식이다. 환유도 하나의 저항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환유에는 생명이 없다. 모든 사물들은 죽어 있는것으로 나타난다. 죽음으로써 그 죽음을 초래하는 것들에게 저항하는 방식이다. 사물의 생명, 곧 사물의 생명적 본질이 다름 아닌 기의이다. 그러나 후기산업사회로 들어오면 사물의 선험적 기의는 부정된다. 환유에서 기표는 죽은 사물의 표면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앙상한 눈들이 내린다. 
헌 외투의 승려가 지나가고 
식어버린 어휘들이 굴러다닌다. 
현상의 미끄런 빙판 위로 
여윈 발들이 달린다. 
내벽엔 겨울 신앙이 
못 박힌다. 
로마인이 서너 명 해머를 들고 
얼어붙은 시간을 깨고 있다. 
사납게 외치면서 미래가 
들창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갈릴리 내해에 잠드는 바람 
갈릴리 내해에 눈은 내리고,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갈앉고, 
차고 매운 발자국들이 수런대면서 
황폐한 의식 위로 몰려간다. 
모든 것은 닫히고 나는 서 있고 
아득한 곳에서 기계가 울고 있다. 
나는 꿈꾼다. 
떨리는 귀에 들려오는 복음을, 
깨어진 공간 위에 식어내린 햇빛을, 
엷은 꿈들 위에 눈은 내리고 
나는 소리치면서 
어리석은 신앙으로 얼고 있다. 
<‘반란’ 전문> 

기의와 분리된 기표, 더 나아가 기의를 부정해버린 기표는 죽음에 이른다. 언어의 죽음을 오세영은 '식어버린 어휘'가 굴러다닌다고, '현상의 미끄런 빙판' 위를 '여윈 발들'이 달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가 행복하게 만나지 못하는 곳에 대화는 단절된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황폐해진다. 모든 사물은 내 앞에서 문을 굳게 닫고 있고, 나는 그 밖에 서서 얼고 있다. 서정적 언어란 본질적 언어이고,본질적 언어란 대화적 언어이다. 기의를 부정해 버리고 나면 대화는 죽고 없어진다. 환유란 곧 대화의 죽음을 의미한다. 대화가 죽고 없어진 곳에 바로 이미지의 불연속성이 나타난다. 위의 시에 나타나는 해체적인 국면, 이미지의 파편성은 바로 환유의 실체이다. 사납게 외치면서 미래가 들창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갈릴리 내해에 바람이 잠든다는 것과 침울한 내장에 세계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내적인 연속성이 없다. 눈이 내리는 것과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가라앉는다는 것도 의미의 연속성이 없다. 이것들은 유사성이 아니라 인접성으로 연결될 뿐이다. 인접성이란 우연성의 산물이다. 필연이 없는 우연의 연발이란 무의미의 나열이고, 무의미란 바로 '어리석은 신앙'이라서 병든 주체는 모든 사물의 문 밖에서 얼고 있을 뿐이다. 
<최승호, 오세영 서정시의 미메스적 읽기 논문 중에서> 





[ 참 고 ] 
① 무의미시(순수시 또는 절대시)김춘수의 '무의미시(nonsenspoetry)'는 '순수시', 또는 '절대시'라고도 불린다. 벤의 '절대시'라는 명칭 역시 벤 자신의 창의적 조어가 아니라 폴 발레리(Paul Valery)류의 '순수시'를 비롯한 기존의 서구 '절대예술'의 개념에서 빌어온 것이다.그러나 벤의 '절대시'는 벤 자신의 작명을 따라서 '정시 靜詩 statische Gedichte'라 불리기도 한다. 이 명칭 속에는 같은 범주의 서구의 다른 시인들과는 구별되는 벤의 시론과 세계인식의 고유성이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의 포괄적 별칭인 '순수시',또는 '절대시' 역시 한국문학 내의 자생적 개념이 아니라, 기존의 서구 근대예술의 명의들에서 차용된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무의미시'가 "허무의 아들"이라는 진술은 곧 무의미시의 탄생배경에는 세계에 대한 허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된다. 가치관의 공백,회의, 허무를 대체하거나, 초극하는 한 방식으로서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존재한다. 이와 같은 사유구조는 김춘수의 특허품이 아니라,독일낭만주의와 프랑스 상징주의, 그리고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서구 근대 예술사가 오랜 기간에 걸쳐 체현한 것의 복제품이거나 유사품일 수 있다. 니체의 예술지상주의 적인 교의는 이러한 범유럽적 현상에 대한 포괄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김춘수의 초기 무의미시론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3가지 요소는 이미지, 대상, 의미이다. 그리고 이 3가지 요소의 상관관계를 통해 그는 그의 무의미시의 성격을 규정한다. 우선 시를 이미지의 구성물로 파악함과 동시에, 그것을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二分하는 데 그는 매우 익숙해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근본적으로 순수한 서술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념의 도구 또는 수단"이 아닌, "이미지 그 자체가 목적인 이미지", 즉 절대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무의미시는 대상(현실적 의미 또는 관념의 매체)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순수 서술적 이미지들의 구성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의 해체는 의미에 의한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새로운 자유를 획득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항은 무의미시의 구성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실제의 풍경과는 다른 풍경의 재구성, 즉 무의미시의 구성에는 논리와 자유연상이 필연적인 방법론으로 동원된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아울러 대상의 해체, 또는 소멸은 이 양자의 개입과정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논리는 통제되지 않은 자유연상이 가져다줄 어떤 시적인 혼돈상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의식의 통제기능을 말한다. 양자의 상호작용을 그는 "무의미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쳐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의 草稿에 시인의 의도가 개입하는 상황, 또는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관계"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자유연상은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서구의 초현실주의 시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다음으로 방법론에 있어서의 양자의 유사성은 우선 절대시가 "매혹적으로 짜 맞추는 언어들로 이루어진 시"라는 위의 인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짜 맞춘다'는 독일어 'montieren'(몽타쥬하다)의 번역이다. 그런데 벤의 이 몽타쥬기법은 김춘수의 방법론인 "풍경, 또는 대상의 재구성", '논리성의 개입'과 흡사한 측면을 지닌다. 왜냐하면 무의미시나 절대시를 위하여 양자는 예술의 '인공적 구성'이라는 작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가 의미의 확정을 차단하기 위해 애용하는 독립적인 이미지의 병치나, 대상의 재구성, 그리고 논리성의 개입은 벤의 몽타주 적인 구성원리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일차적으로 얻어진 원재료에 대한 작가의 인위적인 구성의지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벤과 일치하는 것이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궁극적으로 의미불확정의 상태, 즉 판단유보의 상태를 지향하는 반면에, 벤의 절대시들의 배후에는 모종의 거대한 관념, 즉 자아와 세계의 분열을 넘어서는 어떤 통합세계를 향한 꿈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② 비대상시 

비대상의 시란 노래하는 대상이 분명치 않다는 의미와, 자연세계나 일상세계를 노래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이승훈)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외부세계를 묘사하거나 분명한 대상을 형상화하기보다 자신의 깊숙하고도 은밀한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컨대, <사물 A>는 목이 달아난 채 한 마리의 흰 닭이 뒤뚱거리며 마당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실재하는 외적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시인의 황량하고도 불안정한 내면의식을 표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작 경향은 이승훈이 참가하였던 <<현대시>> 동인들의 성향과도 유사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내면세계 혹은 내면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동기술법, 자유연상기법 등과 같은 현대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후에 그는 이런 방법들을 통하여 시인이란 자기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고, 따라서 시는 독백의 양식이라는 극단적인 견해에까지 나아가기도 하였다. 

③ 복습(2005.가을) : 시와 언어에서 

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시와 비시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의 언어적 특징을 밝히려고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들은 시가 일상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의 언어와 일상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시는 일상언어를 재료로 하고 일상언어의 문법에 구속되기는 하지만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언어이며 표면적인 의미와 시적 의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앰비규이티(ambiguity : 모호성), 역설, 아이러니 등 각기 다른 용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의 언어가 다의성을 지닌 언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 역시 시와 비(非)시, 문학과 비문학적 담화 사이의 차이를 밝히고 문학 연구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들은 문학연구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문학을 문학답게 만들어주는 특징, 즉 문학성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문학이 언어를 사용하는 형식적 특징에서 찾았다. 그 결과 그들은 문학은 다른 발화 양식과 달리 일상적인 언어 용법을 왜곡하고 비틀어서 낯설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낯설게 하기라고 명명하였다.즉 문학은 다른 발화양식과는 달리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형식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내용을 새롭게 인지시킨다는 것이다. 일상적 발화에서는 내용만 인지되면 형식은 버려지고 잊혀진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기계적 지각을 막고 지각을 탈자동화시켜 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형식은 기존의 내용/형식의 이분법을 떠난다. 과거의 내용/형식 이분법에서 형식은 포도주와 포도주 잔의 관계처럼 내용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포도주지 용기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형식은 생명체와 그 내용인 생명의 관계처럼 내용과 분리될 수 없고 내용이 그것을 통해 실현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인식은 일상언어와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왜곡된, 낯설게 된 언어이며 시를 일상언어처럼 읽으려고 할 때 비문법적인 언어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신비평가들이 밝혀낸 일상언어와 시어 사이의 차이는 현대 기호학자들에게 와서는 시의 언어와 일상언어는 동일한 언어가 아니라 다른 문법을 가진 또 다른 종류의 언어라는 견해로 발전한다. 
러시아의 유리 로트만은 문학이 일상언어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재료로서의 언어와 예술로서의 문학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문학을 다른 예술과 달리 예술로 생각되는 것을 어렵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언어를 세가지로 구분하여 자연언어, 인공언어, 2차모델링체계로 나누고 시는 자연언어를 재료로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결합원리를 가진 또다른 언어로 자연언어가 기호들을 결합 세계를 모델화하는 것처럼 시 역시 하나의 기호로서 세계를 모델화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말한다. 자연언어가 세계를 모델화하는 1차언어라면 시는 1차언어 위에 나름의 2차적인 질서를 덧붙여 세계를 모델화하는 2차언어라는 것이다. 그는 2차적인 질서를 덧붙임으로써 시에서는 모든 성분들, 심지어 일상적 발화에서는 형식적인 요소까지 의미론화 되며, 일상언어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것들을 2차적인 질서화에 의해 강제로 결합시킴으로써 시는 일상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정보량을 지니게 되고 보다 현실감 있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시의 이러한 2차적 질서화를 야콥슨은 "시는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시킨다"는 말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일상언어의 결합규칙은 계열체 내에서 단어를 선택하여 그것들을 계기적 사슬로 결합하는 인접성의 원리에 의한 것임에 비해 시는 이와 반대로 등가의 원리를 결합의 원리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문법적 특징은 시로 하여금 일상언어의 문법적 규칙을 위반하게 하고 시를 일상적인 담화로 읽으려고 할 적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 비문법적인 담화로 만들어 놓는다. 

<시와 언어 : 유재천>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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