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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5 / 정유화
2018년 11월 16일 13시 56분  조회:1340  추천:0  작성자: 강려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4
──김춘수의 시론과 시·1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 창작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혐의로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유치留置되었다가 결국 다시 서울로 송환되고 만다. 1946년 이후 통영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향, 김수돈 등과 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였다. 이후 제2시집 『늪』, 제3시집 『기旗』, 제4시집 『린인隣人』 등을 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1954년 시선집 『제1시집第一詩集』을 거쳐 1959년 『꽃의 소묘』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69년에 출간한 『타령조·기타』, 1974년에 출간한 『처용』은 문단의 큰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문단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후에도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80년대의 『처용이후』(1982)를 거쳐 90년대 말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2000년대 초의 『쉰 한 편의 비가』(2003)를 출간한 그의 시력詩歷이 이를 증명하고 남는다.
더불어 그는 시창작 이론에 대한 시론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독자와 문단으로부터 큰 이목과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감성적 차원인 시창작과 이성적 차원인 시론의 통합을 통해서 시적 차원의 폭을 넓혀가면서, 동시에 그것을 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1952년 시 비평지 『시와 시론』에 「시 스타일 시론試論」을 발표하면서 차츰 그의 독자적인 시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한 결실로 탄생한 것이 예의 1958년에 출간한 『한국현대시형태론』이다. 그는 이어서 1961년에 시론집 『시론』(시작법을 겸한)을 출간하였고, 1972년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시론』(시의 이해)를 출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의미와 무의미』를 출간했으며, 1979년에도 시론집 『시의 표정』을 출간하기도 했다. 물론 80년대 이후에도 시와 관련된 크고 작은 시론을 줄곧 피력해 왔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시는 그의 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감성)와 시론(이성)이 상호 대립과 수용 과정을 통해서 정련된 시작품을 산출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그의 시론적 영향이 짙게 배어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의 시론에는 시적 세계가 주는 영향이 짙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예의 김춘수의 시는 ‘의미의 시(비유적 이미지)→ 의미와 무의미 융합의 시(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 무의미의 시(서술적 이미지)’라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론도 ‘의미 시론→ 의미+무의미 시론→ 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시와 시론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초기 시와 초기 시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중·후기시와 시론은 다음호에서 모두 탐색하기로 한다.
2. 김춘수의 초기시론인 ‘의미의 시’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 스스로가 언술한 자기 시론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시작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과거의 나의 시작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 보려는 것이다.
구름과 장미
1947년에 낸 나의 첫시집의 이름이 『구름과 장미』다. 이 시집명은 매우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舶來語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장미도 때로는 감각으로 오는 일이 있었지만, 양과자를 먹을 때와 같은 <손님이 갖다 주는 선물>로서 왔지, 제상祭床에 놓인 시루떡처럼 오지 않았다. 장미를 노래하려고 한 나는 나의 생리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이국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반항의 자각을 지니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것은 관념에의 기갈과 함께 왔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생략…)
유추로서의 장미
나이 서른을 넘고서야 둑이 끊긴 듯 한꺼번에 관념의 무진 기갈이 휩쓸어 왔다. 그와 함께 말의 의미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비로소 청년기를 맞은 모양이다. 나의 <자기내自己內 세계>의 시절이다.
나는 나의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장미다. 이국취미가 철학하는 모습을 하고 부활한 셈이다. 나의 발상은 서구 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 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還元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딩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30대의 10년 가까이를 나는 그런 모양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하나의 사치요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겉도는 체험 끝에 사람은 또한 뭔가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김춘수전집 2-시론』, 문장, 1984. 381~383쪽.
3. ‘장미’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의 초기 시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호는 다름 아닌 ‘구름’과 ‘장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상징 기호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항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기호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감각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고, 장미는 관념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통시적인 전통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쉽게 대변할 수 있지만, 후자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공시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대변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양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김춘수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예의 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것이다. 부연하면 서술적 이미지로서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전자와 달리 관념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수밖에 없다. 부연하면 비유적 이미지로써의 시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론에 의하면, 김춘수는 비유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관념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추상적인 의미의 시를 쓰게 될 것이다. 형이하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의 의미로써 말이다. 다음의 시를 그런 차원에서 감상해 보도록 한다.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갈대 섰는 풍경」 전문
김춘수 시인은 감각을 버리고 관념에 도취하여 비유적 이미지로써 시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비유적 이미지는 추상적인 의미의 세계를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이성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의 세계, 지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김춘수는 시를 통하여 인식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텍스트에서 “푸른 달빛”은 감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다보니 텍스트 내에서 시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예의 부차적인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들판이 저처럼 울고 있다”라는 비유적 이미지이다. “푸른 달빛”은 그 “들판”을 위해 주변부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쏘대던 바람”도 ‘들판’과 만나면서 비유적(유추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만다. 마지막 연에 가면 들판을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 것으로 비유하여 그 관념적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들판이 왜 그렇게 울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시인 스스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불가지론’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시를 통한 의미론적 탐구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우리는 비유된 짐승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인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과 대립한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들판은 원초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꽃을 위한 서시序詩」 전문
김춘수 시에서 관념의 세계 곧 의미론의 세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는 아마도 「꽃을 위한 서시序詩」일 것이다. 성공적이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얘기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학적인 시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성에 의해 텍스트가 지향하는 의미론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구성은 이항대립적인 체계로 되어 있다. 바로 ‘나-너’의 이항대립적인 구성이다. ‘나-너’의 코드는 대립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낸다. 가령 제1연에서 ‘나/너’는 “위험한 짐승인 나/ 까마득한 어둠인 너”로 대립한다. 우리는 이 대립에서 상호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승의 층위와 자연(어둠)의 층위로 변별되니까 말이다. 제2연에서는 “한밤내 우는 나/ 피었다 지는 너”로 대립한다. 이 대립에서도 상호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분리된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1,2연을 통합해 보면 나와 너는 결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나는 너를 알기를 원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된 ‘나/너’이지만, 이항대립 체계를 통하여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제3연과 제4연이 이항대립하게 된다. “돌 속에 있는 금金(나)/ 얼굴을 가린 신부(너)”로서 말이다. 이 대립 역시 상호 개별적으로 작용한다. ‘금’이라는 광물성의 층위와 ‘신부’라는 인간적인 층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나-너’가 결합할 수 없는 상태인 셈이다. 이 결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의미의 심연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 의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각을 배제하고 이러한 관념, 즉 비유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그 언어가 비유로 쓰일 때에는 그 의미가 언어의 배후로 숨겨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적어도 그런 관념의 상태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비유적 세계가 ‘금’과 ‘신부’라는 감각적인 대상으로 수렴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해석적 차원으로 보면 ‘금’은 울음의 광물화로 영원한 침묵의 존재자를 의미할 것이고, 신부는 그러한 존재, 즉 광물화된 존재를 다시 인간적 존재로 불러내려고 하는 숨겨진 얼굴을 의미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시인이 광물성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세계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의미론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의미’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로 갈 것이다. 그 무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은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김춘수의 시론과 시·1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 창작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혐의로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유치留置되었다가 결국 다시 서울로 송환되고 만다. 1946년 이후 통영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향, 김수돈 등과 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였다. 이후 제2시집 『늪』, 제3시집 『기旗』, 제4시집 『린인隣人』 등을 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1954년 시선집 『제1시집第一詩集』을 거쳐 1959년 『꽃의 소묘』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69년에 출간한 『타령조·기타』, 1974년에 출간한 『처용』은 문단의 큰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문단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후에도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80년대의 『처용이후』(1982)를 거쳐 90년대 말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2000년대 초의 『쉰 한 편의 비가』(2003)를 출간한 그의 시력詩歷이 이를 증명하고 남는다.
더불어 그는 시창작 이론에 대한 시론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독자와 문단으로부터 큰 이목과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감성적 차원인 시창작과 이성적 차원인 시론의 통합을 통해서 시적 차원의 폭을 넓혀가면서, 동시에 그것을 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1952년 시 비평지 『시와 시론』에 「시 스타일 시론試論」을 발표하면서 차츰 그의 독자적인 시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한 결실로 탄생한 것이 예의 1958년에 출간한 『한국현대시형태론』이다. 그는 이어서 1961년에 시론집 『시론』(시작법을 겸한)을 출간하였고, 1972년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시론』(시의 이해)를 출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의미와 무의미』를 출간했으며, 1979년에도 시론집 『시의 표정』을 출간하기도 했다. 물론 80년대 이후에도 시와 관련된 크고 작은 시론을 줄곧 피력해 왔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시는 그의 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감성)와 시론(이성)이 상호 대립과 수용 과정을 통해서 정련된 시작품을 산출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그의 시론적 영향이 짙게 배어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의 시론에는 시적 세계가 주는 영향이 짙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예의 김춘수의 시는 ‘의미의 시(비유적 이미지)→ 의미와 무의미 융합의 시(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 무의미의 시(서술적 이미지)’라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론도 ‘의미 시론→ 의미+무의미 시론→ 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시와 시론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초기 시와 초기 시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중·후기시와 시론은 다음호에서 모두 탐색하기로 한다.
2. 김춘수의 초기시론인 ‘의미의 시’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 스스로가 언술한 자기 시론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시작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과거의 나의 시작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 보려는 것이다.
구름과 장미
1947년에 낸 나의 첫시집의 이름이 『구름과 장미』다. 이 시집명은 매우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舶來語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장미도 때로는 감각으로 오는 일이 있었지만, 양과자를 먹을 때와 같은 <손님이 갖다 주는 선물>로서 왔지, 제상祭床에 놓인 시루떡처럼 오지 않았다. 장미를 노래하려고 한 나는 나의 생리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이국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반항의 자각을 지니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것은 관념에의 기갈과 함께 왔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생략…)
유추로서의 장미
나이 서른을 넘고서야 둑이 끊긴 듯 한꺼번에 관념의 무진 기갈이 휩쓸어 왔다. 그와 함께 말의 의미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비로소 청년기를 맞은 모양이다. 나의 <자기내自己內 세계>의 시절이다.
나는 나의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장미다. 이국취미가 철학하는 모습을 하고 부활한 셈이다. 나의 발상은 서구 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 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還元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딩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30대의 10년 가까이를 나는 그런 모양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하나의 사치요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겉도는 체험 끝에 사람은 또한 뭔가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김춘수전집 2-시론』, 문장, 1984. 381~383쪽.
3. ‘장미’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의 초기 시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호는 다름 아닌 ‘구름’과 ‘장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상징 기호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항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기호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감각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고, 장미는 관념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통시적인 전통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쉽게 대변할 수 있지만, 후자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공시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대변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양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김춘수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예의 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것이다. 부연하면 서술적 이미지로서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전자와 달리 관념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수밖에 없다. 부연하면 비유적 이미지로써의 시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론에 의하면, 김춘수는 비유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관념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추상적인 의미의 시를 쓰게 될 것이다. 형이하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의 의미로써 말이다. 다음의 시를 그런 차원에서 감상해 보도록 한다.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갈대 섰는 풍경」 전문
김춘수 시인은 감각을 버리고 관념에 도취하여 비유적 이미지로써 시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비유적 이미지는 추상적인 의미의 세계를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이성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의 세계, 지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김춘수는 시를 통하여 인식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텍스트에서 “푸른 달빛”은 감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다보니 텍스트 내에서 시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예의 부차적인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들판이 저처럼 울고 있다”라는 비유적 이미지이다. “푸른 달빛”은 그 “들판”을 위해 주변부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쏘대던 바람”도 ‘들판’과 만나면서 비유적(유추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만다. 마지막 연에 가면 들판을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 것으로 비유하여 그 관념적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들판이 왜 그렇게 울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시인 스스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불가지론’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시를 통한 의미론적 탐구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우리는 비유된 짐승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인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과 대립한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들판은 원초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꽃을 위한 서시序詩」 전문
김춘수 시에서 관념의 세계 곧 의미론의 세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는 아마도 「꽃을 위한 서시序詩」일 것이다. 성공적이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얘기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학적인 시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성에 의해 텍스트가 지향하는 의미론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구성은 이항대립적인 체계로 되어 있다. 바로 ‘나-너’의 이항대립적인 구성이다. ‘나-너’의 코드는 대립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낸다. 가령 제1연에서 ‘나/너’는 “위험한 짐승인 나/ 까마득한 어둠인 너”로 대립한다. 우리는 이 대립에서 상호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승의 층위와 자연(어둠)의 층위로 변별되니까 말이다. 제2연에서는 “한밤내 우는 나/ 피었다 지는 너”로 대립한다. 이 대립에서도 상호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분리된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1,2연을 통합해 보면 나와 너는 결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나는 너를 알기를 원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된 ‘나/너’이지만, 이항대립 체계를 통하여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제3연과 제4연이 이항대립하게 된다. “돌 속에 있는 금金(나)/ 얼굴을 가린 신부(너)”로서 말이다. 이 대립 역시 상호 개별적으로 작용한다. ‘금’이라는 광물성의 층위와 ‘신부’라는 인간적인 층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나-너’가 결합할 수 없는 상태인 셈이다. 이 결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의미의 심연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 의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각을 배제하고 이러한 관념, 즉 비유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그 언어가 비유로 쓰일 때에는 그 의미가 언어의 배후로 숨겨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적어도 그런 관념의 상태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비유적 세계가 ‘금’과 ‘신부’라는 감각적인 대상으로 수렴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해석적 차원으로 보면 ‘금’은 울음의 광물화로 영원한 침묵의 존재자를 의미할 것이고, 신부는 그러한 존재, 즉 광물화된 존재를 다시 인간적 존재로 불러내려고 하는 숨겨진 얼굴을 의미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시인이 광물성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세계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의미론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의미’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로 갈 것이다. 그 무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은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5
 
──김춘수의 시론과 시·2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 시인은 ‘의미의 시론’으로 시적 출발을 하였다. ‘의미의 시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의 시보다 관념적 이미지의 시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서술적 이미지보다 비유적 이미지를 주된 시적 방법론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의 비유적 이미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의미나 관념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요컨대 의미에 봉사하는 도구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로 구성된 비유적 이미지가 대상이 지닌 불가시적인 의미를 명료하게 모두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기호로써의 언어가 그런 한계를 지닌 만큼 비유적 이미지로 구성된 언어적 이미지 또한 그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김춘수는 이러한 한계를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그는 대상에 대한 의미론적 탐구 작업에 끝내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의미의 시’ 곧, 비유적 이미지로 시를 건축하려던 욕망을 청산하고 무의미시를 향한 시적 세계를 욕망하고 만다. 달리 표현하면 서술적 이미지로 시를 건축하려는 욕망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욕망의 과정이 단순하지는 않다. ‘의미’와 ‘무의미’ 시론이 대립·갈등하는 시적 단계(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를 거쳐 독자적 단계인 ‘무의미시론(서술적 이미지)’에 안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미+무의미 시론’→‘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본고에서는 무의미시론에 이르는 단계적 과정을 핵심적으로 언급한 다음, 이러한 시론으로써 그의 시 텍스트를 독자들과 가볍게 감상하고자 한다.
 
 
 
2. 김춘수의 중후기 시론인 ‘무의미시론’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이 자술한 무의미시에 대한 시론이다.
 
 
늦은 트레이닝
 
아이들이 장난을 익히듯 나는 말을 새로 익힐 생각이었다. 50년대의 말에서부터 60년대의 전반에 걸쳐 나는 의식적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데상시기時期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타령조」라고 하는 시가 두 달에 한 편 정도로 쓰여지게 되었다. 일종의 언롱言弄이다. 의미를 일부러 붙여 보기도 하고 그러고 싶을 때에 의미를 빼버리기도 하는 그런 수련이다. 이 시기의 부산물로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등이 있다.(…생략…).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관념공포증은 필연적으로 관념 도피에로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사생寫生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여기서 나는 시詩의 일종 순수한 상태를 만들어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나의 의도상의 기대를 글로써 공개하기도 하고, 작품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 처음 나타난 결과는 실패였다.(…생략…)(→그 예로 김춘수는 「인동忍冬 잎」을 들고 있다.)
 
사생이라고 하지만,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은 버리고, 다른 어느 부분은 과장한다.(…생략…)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연상이 끼이게 된다. 논리와 자유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개입하게 되면 대상의 형태는 부숴지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한다. 무의미의 시詩가 이리하여 탄생한다.
 
타성[無意識]은 매우 힘든 일이기는 하나 그 내용을 바꿔갈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을 아주 관념적으로 비유적으로 쓰던 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즉물적으로 서술적으로 써보겠다는 의도적 노력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또 하나 새로운 타성이 되어 낡은 타성을 압도할 수가 있게 된다는 그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새로운 타성은 새로운 무의식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것을 나는 전의식前意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60년대 후반쯤에서 나는 이 전의식을 풀어놓아 보았다. 이런 행위는 물론 내 의도, 즉 내 의식의 명령 하에서 생긴 일이다. 무의미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 다음에 내 의도(의식)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 관계에서 시는 완성된다. 그리고 나의 자유연상은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非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旗手가 된다.
 
「처용단장」 제1부는 나의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쓰여진 연작連作이다. 여기서 나는 인상학파印象學派의 사생寫生과 세잔느풍의 추상과 액션 페인팅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싶었으나 내 뜻대로 되어졌는지는 의문이다.(…생략…)
 
자각을 못 가지고 시를 쓰다 보니 남은 것은 토운 뿐이었다. 이럴 때 나에게 불어닥친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관념에의 기갈이라고 하는 강풍이었다. 그 기세에 한동안 휩쓸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허무를 앓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허무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 허무의 빛깔을 나는 어떻게든 똑똑히 보아야 한다. 보고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意味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는 그것이 보여지지 않았다. 나는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粉末을 어디론가 날려버려야 했다. 말에 의미가 없고 보니 거기 구멍이 하나 뚫리게 된다. 그 구멍으로 나는 요즘 허무의 빛깔이 어떤 것인가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보일 듯 보일 듯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처용단장 제2부」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허무가 있을 뿐이다.(…생략…)
 
나에게 이미지가 없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행行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行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그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연 다른 활로를 제시한다.(…생략…) 한 행이나 두 행이 어울려 이미지로 응고되려는 순간, 소리(리듬)로 그것을 처단하는 수도 있다. 소리가 또 이미지로 응고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처단하기도 한다. 연작連作에 있어서는 한 편의 시가 다른 한 편의 시에 대하여 그런 관계에 있다. 이것이 내가 본 허무의 빛깔이요 내가 만드는 무의미의 시詩다.
 
──김춘수, 『김춘수전집2 시론』, 문장, 1984, pp.385~389
 
3. ‘무의미시론’으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 시인이 의미의 세계, 곧 비유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 곧, 서술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첫 번째 특징은 다름 아닌 ‘데생dessin’적 시론이다. 일종의 실험 시론이라 할 수 있는 데생 시론은 완성된 시를 쓰기 전에 미리 그것을 위해 이리저리 가볍게 시를 구상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데생시론에 의해 건축된 시작품은 시인이 욕망하는 최종의 작품은 아니다. 요컨대 과정 중에 있는 작품이다.  김춘수는 그의 데생시론에서 시의 의미를 덧붙여 보기도 하고 의미를 빼보기도 하는 상반된 실험을 해보고 있다. 이것이 데생시론의 중요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직 그의 시론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데생시론의 대표적인 작품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다. 감상해 보도록 한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數千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이 텍스트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시적 이미지가 주는 인상이 감각적이고 생생하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해주는 시적 기법은 다름 아닌 묘사이다. 주지하다시피 묘사는 비유적 이미지보다는 서술적 이미지를 위해 존재한다. 관념을 배제하고 감각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때 감각적 이미지는 의미를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 물론 이미지가 존재하기에 거기에서도 의미지향성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다만 추상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 곧 감각으로 감지된다는 점이 변별적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비유적 이미지)인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김춘수의 시의 목적은 의미보다는 데생 그 자체, 곧 묘사 그 자체이다. 이에 따라 묘사에서 의도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데생시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에서는 묘사 자체의 서술적 이미지보다는 그 이미지가 산출해내는 의미가 전경화前景化되고 있다.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셈이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건축하는 묘사적 이미지가 이항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의 이항대립은 의미를 산출하는 발판이 된다.
 
가령, “3월”은 2월(겨울, 죽음)과 4월(봄, 삶)이라는 대립항을 매개하는 매개적 이미지이다. 이에 따라 내리는 “눈”은 ‘끝남의 겨울’과 ‘시작의 ‘봄’을 매개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곧 두 대립적인 의미를 동시에 통합하는 의미작용을 한다. 그래서 산뜻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생명의 에너지를 표상한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새로 돋은 정맥”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도 그래서 가능해지고 있다. 그 다음에는 동양과 서양의 대립적인 항목들을 통합하는 이미지이다. 예컨대 ‘샤갈, 올리브, (숙녀), (난대성)’ 등의 서구지향성의 이미지·기후와 ‘지붕과 굴뚝, 아낙, 아궁이, 겨울(온대성)’이라는 동양지향성의 이미지·기후가 통합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로 인하여 동양의 전통서정과 서구의 (전통)정서가 신선하게 결합되는 이미지를 산출하게 만든다. 요컨대 모순의 통합적 이미지가 우리의 감각을 신선하게 자극한다. 동시에 그 자극이 곧 의미로 전환된다. 그래서 김춘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시론에 완전히 부합하지 못하는 실험용 작품이 된다. 텍스트가 의미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실험용 텍스트를 통하여 비로소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서술적 이미지에 대한 철저한 훈련 덕분이다. 그래서 언어 자체가 이미지만을 지향하려는 시 텍스트를 산출하기에 이른다. 김춘수는 이러한 시를 일종의 순수시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런 의도로 쓴 작품이 바로 『인동忍冬 잎』이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인동忍冬 잎」 전문  
 
 
김춘수는 묘사적 기법을 동원하여 서술적 이미지로 텍스트를 구조화하고 있다. 묘사적 기법으로 본다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의 작동 기능은 달리 나타난다. 이 텍스트에서의 이미지는 의미보다는 이미지 자체를 지향하려는 강한 성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성된 이미지들이 하나하나의 장면만을 연출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흰 눈’과 ‘붉은 열매’의 감각적인 대립이 어떤 의미를 지향하기보다는 하나의 장면 자체를 지향한다. ‘붉은 열매’와 ‘하얀 새’의 감각적인 대립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이미지 자체를 지향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김춘수는 이 시를 실패작으로 단언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6,7행의 “이루지 못한”, “더욱 슬프다”의 언술이 관념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미지향의 언술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춘수는 사생, 곧 묘사에 대한 더욱 철저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묘사는 감각적인 대상의 재구성이다. 지금까지는 그 재구성을 할 때에 적어도 이미지와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장면들을 제시해주었고, 그리고 그 연계성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완전히 의미론적 세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장면들을 통하여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묘사 기법을 초월하고 만다. 김춘수는 감각적인 대상을 재구성할 때, 거기에 논리와 자유연상을 개입시켜 작동하게 한다. 이에 따라 대상의 형태는 부서지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각기 층위가 다른 이미지들이 상호 충돌·결합하기도 한다. 물론 충돌·결합한 그 장면이 연출하는 의미를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무의미시론이다. 그는 이렇게 논리를 초월하는 자유연상 의식을 전의식이라고 명명한다. 예의 자유연상(무의식)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늘 현실을 지배하는 현실 의식의 간섭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연상(무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처용단장」 제1부이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처용단장 제1부」 Ⅰ의 Ⅳ
 
 
‘무의식’과 ‘의식’이 투쟁하는 무의미시 텍스트라고 해서 그 안에 묘사적 이미지가 부재하다는 말은 아니다. 묘사적 이미지가 있지만, 그 이미지가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소멸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미지와 대상 사이에 거리가 없어지게 되고, 이미지 자체가 그 실존으로 남게 된다. 시에서 대상이 소멸했다는 것은 그 의미론적 세계가 소멸했다는 뜻이다. 결국 남은 것은 비실재하는 이미지 조합의 장면들뿐이다. 좀더 부연하면 의식이 지배하는 언어적 현실(이미지)을 소멸시켜버리고 무의식이 지배하는 언어적 현실(이미지)을 새롭게 창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을 분류해보면 그러한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의식적인 언술을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의 반복적 언술,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라는 언술,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라는 언술이다. 이 언술 속에 있는 이미지는 객관적인 현실을 반영해 주고 있다. 달리 말해서 의미론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세계이다. 다음으로 무의식적인 언술을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척 내리고 있었다.”라는 언술,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라는 언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이라는 언술,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라는 언술 등이다. 물론 의미론적 파악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언술 속에 있는 이미지들이 실제의 현실을 해체하고 시인의 내면에 있는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를 건축하고 있는 ‘겨울비, 바다, 군함, 물새, 사나이’ 등의 이미지들은 ‘의식/무의식’, ‘현실/내면’, ‘객관/주관’의 대립적 세계를 통합하면서 자기만의 시적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김춘수는 ‘의식/무의식’의 대립적 언술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직 현실의 잔영, 다시 말해서 현실을 지시해주는 언어의 의미 잔영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김춘수는 극단적으로 무의미시론을 전개해 나간다. 그 극단은 바로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자면 이미지까지 처단하여 그 이미지까지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이어 이미지까지 사라졌을 때, 시 텍스트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에 의하면 바로 시적 허무이다. 이런 점에서 무의미시의 절정은 허무의 세계를 최고조로 나타낸 것이 된다.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그대가 바람이라면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처용단장 제2부」 Ⅱ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을 지시해줄 이미지조차 해체되어버리고 남아있는 것이라곤 ‘소리에 가까운’ 언어의 배열뿐이다. 여기에서 ‘소리에 가깝다’라는 것은 시적 언어가 지시해줄 대상이나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빈껍데기만 현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빈껍데기의 언어를 읽으면 그냥 소리만 나게 된다. 가령, “발바닥”, “겨드랑이”는 신체언어로써 그 의미를 지시해주는 정상적인 기능을 한다. 부연하면 의미의 분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체언어인 “발바닥”, “겨드랑이”가 비신체기호인 “구름”, “풀”, “별”과 결합되면서 그 의미기능은 상실되어버리고 만다. 곧 정상적인 문법의 틀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언어는 그 의미의 틀을 버리게 된다. “구름”, “풀”, “별”은 자연기호에 속한다. 예의 신체기호와 자연기호의 결합은 비정상적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이기에 우리의 시선을 끌 수가 있다. 그 결합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의인화된 “구름 발바닥”, “풀 발바닥”, “별 겨드랑이”는 신선한 이미지로 전경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 의미들은 모두 분말로 흩어지고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리의 반복이다. 곧 소리의 울림뿐이다. 명사적 층위인 “구름 발바닥”, “풀 발바닥”, “별 겨드랑이”의 반복적 시행과 서술어 층위인 “보여다오”의 반복적 시행이 결합된 반복적 리듬뿐이다. 즉, 의미는 사라졌지만 반복적 리듬은 더욱 크게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반복적 구조는 그 언어가 어떠하든지 간에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텅 빈 언어의 껍데기에서 ‘허무(소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의미’를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천상적인 요소인 ‘구름, 별’과 지상적 요소인 ‘풀’, 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매개해주는 ‘바람’과의 연관관계, 곧 공간적 관계를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탐색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반복적 시행 속에 드러난 그 공간적 의미로써 말이다. 이렇게 보면,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언어로써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존의 시적 문법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문법의 틀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새로운 문법의 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장면을 부수고 해체하여 그것 자체를 전경화하는 일이다. 그와 동시에 반복적 어구, 어절, 시행을 구조화한 반복적 리듬을 후경화하는 일이다. 결국 그의 무의미시는 전경화, 후경화에 의하여 역설적으로 의미의 세계로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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