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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그 은유의 불빛들 / 김수우
2019년 03월 07일 13시 45분  조회:1506  추천:0  작성자: 강려
소통, 그 은유의 불빛들
 
 
 
김수우
 
 
1
 
눈, 그것은 눈이었다. 아니, 눈빛이었다. 빈 나뭇가지에 꽃이삭처럼 조롱조롱 눈들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눈빛들이 나를 보고 있고, 그 깊은 눈동자마다 내가 서 있었다. 거미줄에 갇힌 듯 나는 꼼짝없이 서서 그 우물 속의 내 모습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단풍잎 한 장이 날아왔다. 그 바람결에 수많은 내가 흔들렸다. 무수한 내 영혼이 모두 출렁였다. 와르르, 어디선가 쏟아지는 웃음소리.
꿈이었다. 그 날은 종일 안개가 깊었고, 은회색 들길을 걷다가, 온몸에 물방울이 피어난 빈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나뭇가지를 타고 송송히 열린 물방울이 유난히 투명하더니, 그런 꿈을 꾸었다. 어쨌건 내 몸이 몽땅 젖어버린 느낌. 내가 만난 한 세계가 내 속에서 또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경이로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나무도 나를 오래 바라보았음이 틀림없으리라. 작은 나무가 보여준 그 은유의 세계. 결국 꿈은 소통으로 가는 긴 터널이던가.
왜 태어나, 왜 늙으며, 왜 아프며, 왜 죽을까. 그 다음의 싯달타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어떻게 말할까'가 아닐까. 아니, 싯달타의 모든 고뇌 자체가 자신과의 소통을 향한 의지였으리라. 소통이 될 때 우리는 삶도 죽음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야 희망을 낳을 수 있으니까. 바벨탑이 무너진 후, 인간이 추구해온 것은 소통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눌한대로 대답을 하자. 답은 없다고, 모든 대답은 자의적인 것이라고 미루어두기에는 우린 참 슬픈 족속이므로. 세상의 모든 답은 바로 '그대'이다. 그대는 '희망' 자체니까. 그리고 희망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2
 
수많은 질문을 이미지로 열며 내게 다가온 시. 그건 항상 어느 순간, 강렬한 빛으로 내 뒤통수에 닿았다가 돌아보면 청보라빛 노을로 가뭇없이 서산을 넘는 중이었다. 그 이미지들을 언어로 살려야 하는 시인들의 절박함을 나는 사랑했던가. 문득 곁으로 달려온 존재들의 눈빛들과 부딪친다는 건 하나의 희열이고 절망이고, 절망이면서 희망이었다. 사진도 그랬다.
렌즈를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진과 영화는 여러 면에서 시와 닮았다. 표현에 앞서 더 본질적으로 사진과 영화의 문법은 시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방치된 대상에게 언어로 그 존재의미를 회복시키는 작업과, 렌즈를 통해 포착한 대상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의미부여 작업은 동일하다. 표현도구는 다르지만 표현양식은 결국 이미지라는 점도 그렇다. 때문에 시인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매우 유사하다. 둘다 섬세하고 자유롭게 무한한 내포를 담아 삶의 중층성을 그려내는 눈동자들이다. 버려진 나무토막이 언어나 렌즈를 통해, 갑자기 살아 푸른 숨을 내쉬는 은유가 되어 세상을 건너가는 다리로 놓이는, 그 놀라움. 
브레쏭의 사진에서 보이는 도심의 뒷골목, 고양이와 한 부랑자의 소통과 소외. 그것은 꿈의 통로처럼 보인다. 쓸쓸하면서도 내밀한 언어가 들린다. 사방으로 이어진 골목, 그래, 우린 어딘가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아주 조심스런 아우라에 붙들린다. 한 장 종이에 인화된 그 시간의 명암과 질감이 전달하는 삶의 강한 실체. 무심한 일상은 파인더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실루엣을 확연히 드러내며 말을 건넨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과 절망과 구원이 은유의 세계로 확장되어 드러나는가. 
카메라 파인더 속에서 어떤 대상과 부딪칠 때 나는 면회를 신청한 한 수감자의 애인처럼 서글프면서도 그리웁고 고마운 마음이 된다. 소통에서 오는 다행스러움 때문인지 삶이 더 간절해진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대상이 건네는 눈빛을 따라가다가, 숨겨진 원시의 늪에 닿은 듯 가슴떨리는 신비다. 영화도 마찬가지, 카메라 앵글 속에 있는 거대한 눈동자들에 비친 세상은 분명 일상이면서, 일상이 아닌,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은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꿈이야기를 해보자. 꿈이 가진 무의식적 이미지는 상상계의 큰 바탕이며, 수많은 소통의 음성이며, 눈부신 은유의 창고이다.
어떤 함축이 무한한 내포를 지니거나, 어떤 여백이 낭만적인 서정으로 넘칠 때 우리는 '시적'이라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8개의 에피소드로 나뉜 꿈의 파편들로 매우 시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여든에 만든 구로사와의 마지막 작품인 {꿈}은 매우 일본적이며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비현실적 이미지로 구성된다. 유년의 동화적인 이미지부터 묵시론적 악몽이 포함되어 있는 이 작품은 경이로운 이미지와 상징들로 가득하다. 현실원칙과는 다른 논리의 지배를 받는 꿈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가 두렵고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인 <여우비>와 <복숭아밭>, 고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금빛 보리밭 위로 날으는 까마귀떼를 보는 <까마귀>는 시각적 이미지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극적 구조를 초월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구성된, 자연주의 세계관은 슬프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은유 속에 작용하는 동일화도 있지만 비논리적으로 뒤섞인 은유를 통해, {꿈}은 일상이 삼킨 우리의 본래를 드러냄과 동시에 인식의 한 영역을 흔들어대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인간이란 꿈을 꿀 때 천재가 된다고 말한다. 꿈은 과감하고 대담무쌍하게, 천재적인 기술로 희망을 표현해낸다. 한 사람의 꿈은 사실 사람들 모두의 꿈이 된다. 그것이 꿈의 힘이며, 마음 밑바닥에 있는 세계의 무한함일 것이다. 결국 꿈이란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나의 암시이며, 인간은 그 상상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명시적이든 잠재적이든 상상계를 구성하는 꿈은 일상을 개별성의 세계로, 다시 진정한 보편적 우주를 획득하는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삶의 이미지는 더 깊어진다.
 
바람의 길 위에서, 떠도는 푸른 깃털들을 만났습니다. 길 떠나기 전 그대들의 옛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하나같이 대답하더군요. 죽은 청호반새가 우리들 옛집이었다고.
―최승호, [떠도는 깃털들]
 
방안의 쥐구멍으로 들어갔더니 어릴 때 놀던 학교운동장이 나온다던가, 큰 구렁이와 엉겨 놀다가 책꽂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어릴 적 꿈은 위 시의 푸른 깃털을 보는 시인의 자연적 깨달음에도 연결될 수 있으리라. 내가 출발한 곳은 어디일까. 죽은 청호반새가 깃털의 실체이듯, 깃털 같은 나의 실체는 청호반새 같은 꿈이 아닐까. 꿈, 그 무한대 상상력의 장은 언제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한다. 말하지 못한 것이 꿈으로 나타나듯, 꿈을 통해서 나의 숨은 세계를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먼 지평. 나의 옛집은 어디일까. 위의 깃털들처럼 나의 옛집도 죽은 청호반새임이 분명할 듯.
 
 
3
 
상상한다.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꿈을 꾼다. 꿈이 꽃이라면 상상력은 꽃받침이다. 아니 그 반대일까. 어쨌든 인간은 꿈을 꾸기 때문에 소통한다. 소통은 희망이다. 다시 희망은 길이며, 구원이다. 가짜 희망일지라도 필요한 건 희망이 우리를 역동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며, 다시 꿈을 꾸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희망은 모든 이유가 되어준다.
롤랑바르트는 이 시대를 '한 마디로 육체가 없는, 눈만 가진 인간의 사회'라고 정의했다. 이 영상의 세기, 상상력의 그림자는 무수히 분열된다. 끊임없이 확장된 이미지들은 이제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까지 닿는다. 이미지의 지대는 갈수록 확장되고, 우리는 그 지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탄생과 성장, 죽음까지 이미지로 형성되어 이미지를 통하여 진행된다. 사랑도 희망도 이젠 이미지를 통해 풍경의 몸을 입고서야 우리에게 길도 열리는 것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 풍경}도 서정적인 한 편의 영상시이다. 대사를 가능한한 응축시킨, 영상미학이 뛰어난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가슴 속에 아주 투명한 슬픔 하나가 남는다. 그리스. 아버지를 찾아 독일행 열차를 무임승차로 탄 어린 남매.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여행하는 두 아이는 수많은 사건과 풍경에 부딪친다. 눈에 비친 세상은 매우 서정적인 은유로 가득한 장면들로, 느리게 진행된다. 틈틈이 여자아이는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마음의 편지를 보낸다. "우린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을까요.", "정말 멀리 계시네요. 우리는 여행을 계속해요."
두 아이가 무임승차에 걸려 경찰서로 붙들려갔을 때 눈이 오기 시작한다. '눈이 오네' 중얼거리며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정물처럼 서서 눈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기다려온 것일까. 마술에 걸린 듯 모두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는 거리를 두 아이는 자유를 찾아 뛰쳐나온다.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게 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리하여 다시 상상 속의 그리움을 향한 여행은 이어진다.
주운 필림조각에서 안개 뒤 멀리에 나무가 있는 풍경을 읽는 유랑극단의 오레스테스.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필림조각. 그 풀향기 같은 상상력, 그것은 아름다운 은유이다. 꿈과 환상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간에게 구원의 이미지를 선사하고 싶었던 걸까. 한 군인의 적선으로 남매는 다시 기차를 타고, 마침내 국경에 닿는다. 어둠 속에서 국경의 강을 건너는 아이들. 수비대의 불빛, 울리는 총성. 아침이 오고 아이들은 안개 풍경 속에 있는 나무를 발견한다. 동생이 말한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그러다 빛이 생기고……". 
남매가 죽었으리라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남매가 달려가는 안개 속 나무밑. 그곳은 결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상상 속의 그리움, 역설적 희망의 세계이다. 고통스러운 진실을 아름다움으로 간주하려는 것이 비극의 힘이라면, 이는 곧 인간에게 희망을 남겨놓으려는 의지이리라. 그것은 마치 오래 기다린 어둠의 창가에 마침내 오렌지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순간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것. 
이러한 영상미의 추구는 결국 상상력에 대한 가치 부여에 연결된다. 상상력은 곧 자유와 혁명이며, 탈현실적 상상은 바로 자아의 경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상상력이 인간의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예술에서 나온다. 백일몽이라고 정의되었던 예술 자체가 이미지의 왕국이라는 말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인간의 역사는 상상력의 역사인 것을. 수많은 비행기처럼, 수많은 신데렐라처럼 상상 속 꿈들이 현실로 나타난 게 오늘의 문명인 것을. 
자연사 박물관에서 찍은 케르테츠의 사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한다. 묵언. 존재의 내면을 비추듯 숙연한 분위기. 고개 돌린 박제된 새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는 무엇을 생각할까. 다시 소통을 꿈꾸는지 모른다. 잃어버린 자기를 박제된 새로부터 보고 있는 걸까. 새가 날던 숲을, 태초의 어떤 언약을 기억하는 걸까. 언어든 영상이든 이미지엔 삶의 직접적인 체험과 내면의 어떤 원형적인 상상력이 작용한다. 일차적 영역을 벗어나 그것의 상징을 해독하려는 노력은 결국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깨닫고, 삶을 사랑하려는 의지이리라. 여기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만큼이나 긴, 새로운 시간이 다시 놓인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1]
 
대나무 이미지가 아름답다. 굵고 푸른 대나무 마디에서 끌어낸, 깊은 밤을 달리는 기차. 그 기차는 꿈의 고향인 대꽃 피는 마을로 간다. 이 아름다운 은유를 읽으며 영혼의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어두운 현실이 달려가는 곳은 곧 희망 속의 고향. 기차 이미지는 마치 삽화 같은 현실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면서 백년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푸르다. 
자기 마음을 이미지로 드러내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이미지와 말은 서로 교환작용을 하며 더욱 풍부해진다. 이미지는 부단한 움직임으로 언어를 낳고, 언어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낳으며 상상력의 바다를 깊게 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은 은유를 통해 사유의 장을 확장시키고, 아름다운 내적 언술을 풀어낸다. 이미지의 언어적 보완성은 우리를 그만큼 자유롭게 하는 것. 
결국 소통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떤 서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우리의 내면 속에 던지는 어떤 울림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 속에서 또 다른 우리를 찾아나서게 되는 표지목이 되고, 그 이미지가 낳는 다른 이미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사막을 여행하는 한 마리 낙타를 닮은 탐험가로 만드는 것이리라.
 
4
 
은유,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끌여들여, 현실의 거친 벽을 넘어선다. 언어는 오히려 솟아나는 새싹 같은 푸른 마력으로 드러나,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어주는 매듭이 된다. 진실은 더 선명해진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의 본질을 이루는, 논리 이전의 언어인 은유는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는 열린 사유이다. 언어적 논리를 넘어서서 현실을 더욱 풍요로운 상상력의 세계로 변환시켰다가 다시 창조된 현실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마이클 레드포드의 {일 포스티노} 또한 시적 상상력이 넘치는 한 편의 영상시로 평가된다. 시적인 리듬, 시적인 영상, 시적인 대사 등 시적 표현 양상을 모두 담고 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건 은유지만 더 우리를 찡하게 하는 것은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 네루다와 마리오의 우정과 소통이다. 시에 문외한이었던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나면서 삶의 보이지 않는 곳을 응시하는 시적 은유의 세계를 발견한다. 은유가 세계의 또다른 모습, 또다른 환幻의 수많은 단면을 투사하는 무한한 언어의 세계임을 깨달은 것이다. 마치 파도의 포말 하나하나에 비치는 세계처럼 말이다. 
마리오의 이러한 시적 체험의 과정은 곧 시가 무엇인지,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극적인 질문을 보여준다. '……기타 등등'이 이 세상 다른 것의 은유라면 이 세계는 온통 은유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마리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섬, 작은 파도와 큰 파도, 절벽 위의 바람,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신부님이 울리는 교회의 종,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소리 등등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큰 은유의 세계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은유의 눈으로 세상의 진실을 읽으려 했던 마리오는 진정 아름다운 시인의 삶을 살아낸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임시직 우체부였던 마리오는 한편의 시도 쓰지 않았지만 진정한 시인이다. 그는 은유 속에 있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않았던가. 마리오가 죽고난 다음에야 네루다는 소식이 끊긴 자신에게 보내고자 마리오가 녹음했던 섬의 소리들을 듣는다. 마리오를 생각하며 쓴 한 편의 시는 시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가였는지
언제, 어떻게인지 난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는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네루다는 마리오를 시인으로 인정했다. 아니, 그는 마리오로부터 새로운 은유의 세계를 읽어내었으리라. 
이처럼 은유는 언어적 이미지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긴밀한 마음의 움직임을 만든다. 결국 시적 사유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욕망이며 아름다움에 대한 개혁의지가 될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은유를 통해 무의식의 세계에서 빛으로 건져낸 서정의 이미지. 그래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부분
 
봉숭아 씨앗을 심고, 그 싹 위에 조심조심 물을 뿌리는 마음, 그건 생명을 향한, 아름다움을 향한 시인의 의지이다. 언어로 그려진 이 그림을 통해서 푸르고 따뜻한 진실의 한 풍경에 닿는다. 어떤 마음의 울림이 이미지를 통해 만드는 파문. 여기서 우리는 그 존재조건만으로 주어진 현실을 건너, 샛강이라는 은유에 들어갔다가, 새로운 현실을 경험한다. 하나의 언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는 은유를 통해 그 의미가 확장되어 시인 자신만의 구체적 진리를 형성해낸다. 그것이 서정의 위력을 만든다. 이렇듯 어떤 대상들의 뒷모습을 새롭고도 섬세하게 읽어가는 은유의 불빛이 시의 세계고, 사진의 세계이며 영화의 세계이다. 
쿠델카의 손목이 보여주고 있는 시간의 은유는 무엇일까. {안개 속 풍경}, 바다에서 건져올린 거대한 동상의 부러진 손목과 비교해 볼만하다. 그 뒤로 펼쳐진 도심의 풍경은 시간 속을 걷는 우리의 기억일 것이다. 기억은 과거와 그 과거를 향하는 현재의식의 결합으로 창조된다. 사진 이미지가 주는 은유는 흔적, 시간, 죽음 같은 것들로 현재 속 과거이다. 사진은 포착한 순간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통해 꿈과 픽션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사진의 미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인 힘이 된다. 거기서 작가는 새로운 진실을 캐어내고, 대상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스모크}라는 영화에서 담배가게 주인은 가게 앞 같은 한 장소를 매일 같은 시간에 십 년 이상을 계속 찍는다. 매일 같아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는 그 시간이 얼마나 유일한 순간인지를 알았던 것. 그 시간의 고유성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것이 무엇일까. 찍는 사람과 찍힌 대상이 만나는 찰나적이며 유일한 순간, 그것은 과거의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풍경 속을 걸어왔고, 걸어가는 중이기에 사진은 지난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이 지시하는 현실을 묻는다. 사진엔 이미 사라진 시간과 존재, 즉 끊임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담겨 있지만, 현재에 이르러 그것은 존재를 재발견하게 의식의 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진을 찍는다.
 
 
5
 
아이가 물통을 들고와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 황량한 들판, 홀로 선 앙상한 나무에 물을 준다. 별다른 이유 없이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 물은 준 아이가 나무 아래 눕는다. 기다리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의 이 마지막 장면은 유명한 상징으로 알려져 있고, 강한 이미지로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닿았다. 우리 현실 속 불안과 황무지와 상실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과 구원의 이미지가 강하게 맞물려 굵은 수레바퀴자국을 남겼다고나 할까.
아이는 기억한다. 매일 물을 주어 3년 후에 꽃이 온통 만발했다는 죽은 나무이야기를, 끝없이 노력하면 세상을 변하게 한다는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믿는다. 유일한 소통자는 말을 못하던 아들뿐이었던 알렉산더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뒤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는 {희생}의 마지막 자막은 [안개 속 풍경]의 결말과 비슷하다. 이는 무엇을 암시하는 말일까. 새로운 소통? 새로운 희망?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장면들은 매우 시적이다. 이 영화에서 우체부인 오토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기다리죠. 무엇인가를." 알렉산더도 말한다. "내 삶은 긴 기다림에 불과했지." 평생 기차역에 서서 기다리는 느낌, 그것이 인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마술사인 타르코프스키는 다양하게 변주되는 환상적인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 내밀한 언어는 절망 속의 희망일 터이다. {희생}은 불안과 단절이라는 구조 속에 있는, 소통과 희망의 한 길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리라. 
황량한 길. 몸뚱이만 남은 나무들이 길을 만들고 있다. 그 길을 두 여인이 서로 기대어 걷는다. 고립되고 단절된 시간과 공간을 '함께' 걷는다. 그래서 사진은 전혀 황량하지 않다. 모순된 충동들 사이로 어떤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 작은 믿음을 만들고 있다. 소통은 내 안으로 난 길이고, 또한 함께 가는 길이다. 결국 우리가 찾고자 했던 것은 '함께 걸을 길'이었고, '함께 걸을 그대'였던가. 이렇게 이 사진의 은유는 우리에게 존재의 각성을 가져오고, 또 스스로 위로하는 법을 제시한다. 살아왔고, 살아갈 모든 이유는 '함께'라는 길이었던 것.
이처럼 세계는 카메라의 파인더 속에서 숨겨진 목소리를 낸다. 주변사물과 우리를 이어줌으로 형성되는 수많은 관계와 소통.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전달하고 전달받으며, 삶을 견디는 방법을 알게 된다. 시나 사진이나 영화에 관한 욕망은 바로 이런 은유의 세계를 통해 한 그리움에 닿고자하는 열망과도 같은 것. 이러한 강렬한 존재를 체험하고자 하는 의지가, 의식보다 원래 시적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통과해 이미지로 전개되는 것이리라. 
서정적이며 순수한 예술 영화로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은 소박하면서도, 가슴 밑바닥을 뒤흔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199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체리 향기}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접근한다. 영화 속의 절제된 영상과 단순한 서사구조는 근원적 울림으로 가득하다. 자살을 결심한 40대의 남자가 자신을 묻어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과정 속에 불거지는 삶의 아름다움. 주인공은 수면제를 먹고 나무구덩이 속에 누워 있을 자신의 시신 위로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사람은 세 번째에 만난, 박물관에서 박제를 만드는 노인이다. 제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노인은 자신이 본 다양한 삶의 아름다움과 살아 있음에 대한 축복을 가르쳐 준다. 노인은 늘 죽음 곁에 사람이라는 것도 하나의 은유이다. 주인공은 결국 삶을 선택한다. 고독과 방황과 기다림은 결국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희망을 위하여 있다. 존재의 바닥을 탐구하려는 키아로스타미의 집요한 정신이 내는 커다란 울림. 일상에 숨겨진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은유의 풀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오마르 카이얌의 4행시에서 더욱 향기로워진다.
 
인간이여
삶을 즐기려면
죽음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체리 향기를 맡아보아라
 
 
6
 
다시 상상한다. 씨앗 위에 흙을 덮는다. 솜털 투명한 떡잎, 줄기에서 벋어나는 가지, 가지에 부푸는 망울들, 경이에 눈을 치뜨는 꽃술, 잎새를 말갛게 통과하는 햇살, 꽃부리에 유희하는 바람, 다시 씨방 안에 맺히는 씨앗들, 그 씨앗을 받는 그대, 그대 앞에 놓인 길. 그리고 잎보라. 눈부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진실에 대한 어떤 가치와 순수. 무엇보다 우리는 우주 속에 있는 무한한 은유의 세계를 상실하고 있다. 부단히 반복되는 삶. 이제 어디에서 그 비밀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모든 답은 '그대'이다. 그대는 '희망' 자체니까. 그대와의 소통이 삶의 이유이다. 모든 풍경의 이유이다. 시를 쓰는, 사진을 찍는, 영화를 보는, 아름다운 이유이다.
소통이 씨앗을 뿌리는 일이고 희망이 꽃을 피우는 일이라면 여기엔 기다림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기다림이라는 열에너지. 수많은 이미지가 피고 진다. 결론적으로 꿈이란 소통에의 의지. 그 꿈은 상상력으로 우리의 삶을 교직하고 채색한다. 이 상상력의 무늬들은 새로운 세계와 인식을 열면서 세상의 풍경을 만든다. 은유의 눈동자들이 만들어낸 이 무늬 속에 희망은 이미 예비되어 있을 것. 사람과 사람들이 이 길목에 선다. 그리고 기다린다. 
사유를 제시하는 어떤 이미지들 속에서 오늘도 우리는 울림을 듣는다. 북소리 같은 울림이 아니라, 깊은 동굴 속 어둠 어디선가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 같은, 맑은 울림이다. 
출처 : e 시인회의 | 글쓴이 : 풀꽃향기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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