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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옥타비오파스 시론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2019년 03월 09일 20시 41분  조회:1267  추천:0  작성자: 강려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옥따비오 빠스
(멕시코, 1914~)
옥따비오 빠스와 보르헤스를 읽지 않는 한 한국 시는 여전히 세계의 시와 거리가 있다. 물론 외국문학을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란 독자가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진대 많은 세계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우리 문학을 키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세계 여러 나라 시인과 독자들이 감탄하고 모방하는 빠스의 시는 1990년 노벨문학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표를 달고 우리 땅에 도착했어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소개하고 설명했지만 반향이 없었다. 이것은 물론 나의 번역과 소개의 미흡함도 한 이유이겠으나, 감상적이고 사회적인 시를 주로 보아온 우리에게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가진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 낯설게 보인 것도 한 이유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보르헤스나 빠스를 이해하려면 우선 낭만주의의 위선을 벗어나야 한다. 말하자면, 내가 쓴 시 속의 ‘사랑’이 내가 실제로 겪은 사랑과 똑같아야 한다는 편견이다. 아니면, 나는 내가 느낀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와 싸운다는 식의 변명이다. 시속의 ‘나’는 어차피 글자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다. 그것이 아무리 나의 느낌이나 나의 모습에 가깝다 할지라도 나 자신은 아니다.


확실한 것

지금 이 램프가 실제 있는 것이고
이 하얀 불빛이 실제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손이 실제 있다면,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
말과 말 사이
내가 하는 말은 사라진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뿐
두 괄호 사이에서

구태여 불교의 ‘만물무상(萬物無常)’이나 플라톤의 “현실세계는 가상이다(즉 이데아의 모방이다)”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문득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램프가 정말 여기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이 램프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를 의심해본다. 나의 눈은 나의 눈을 직접 본 일이 없다. 항상 거울을 통하거나 무엇에 비추어서 본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말들 하지만(“Seeing is believing"), 실제 본다는 것만큼 불확실한 건 없다. 그 보는 주체인 눈이란 존재가 불확실할 뿐,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살아 있다“라는 믿음만은, 증명할 수 없어도 물러설 수 없는 존재의 확실성이다. 확실성이라기보다 확실해야만 하는 실존의 보루이다.
  
철학은 시가 아니다. 사고나 관조의 깊이가 곧 시는 아니다. 삶에 대한 느낌과 영혼의 파동을 넘어 존재의 불확실성, 그 가벼움에 대한 관조가 오히려 진정한 시취로 육박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보르헤스나 옥따비오 빠스를 만난다.


말과 시인

참을 깨우치는 구도의 길에서 선불교는 “말을 세우지 말라”를 가장 큰 가르침으로 삼는다. 사물의 실상을 깨우치는 데에는 앞생각과 뒷생각을 버리라는 말이다. 참모습을 그 순간 그 실상으로 포착하려 하지 않고, 말이나 생각이 앞서고 뒤서면 우리 손에 남는 것은 항상 빈 껍질이다. 그러나 말을 떠나 사물의 실상을 포착할 수 있는가. 사물의 참모습과 등가치이며 동시적인 말이 있을 수 있는가. 선승의 대답은 “무!”이다. 한 수도승이 참선 끝에 갑작스러운 깨달음(돈오)에 이르렀다. 다른 스님이 그 깨달음을 배우려고 그 수도승에게 물었다. “스님, 깨달음의 경지가 어떻습니까?” 무상과 차별과 허상이 얼룩진 세상을 차고 올라, 가까스로 절벽 위 참의 풀뿌리 하나를 물고 있는 수도승이 어찌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말이 많아진 것은 선불교에 대한 그의 지식이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서양문학 속의 동양>이나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그는 동양철학이나 동양종교에 조예가 깊다. 특히 탄드라 불교나 선불교에 심취한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의 하이꾸를 품격 높은 문학장르로 발전시킨 17세기의 선승 마쯔오 바쇼오의 시와 여행기 <오꾸의 오솔길>을 1957년에 에이끼찌 하야시야와 함께 스페인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던 그는 여러 면에서 동양시와 불교정신에 정통한 시인이다. 빠스 스스로 바쇼오의 하이꾸와 선불교를 설명하기도 했다.

낭만주의가 말로서의 표현 불가능성을 가장 강조한 문학이었다고 한다면, 말라르메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시는 ‘주사위놀이’하듯 말에 시의 모든 운명을 거는 겸손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말이 시를 쓴다”라고 한 말라르메의 말은 유명하다. 낭만주의는 나만의 내적 체험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절절한 느낌을 표현할 때 말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현대시는 시인의 존재 이유인 말에 인간과 시인의 숙명을 맡긴다. 노발리스(Novalis)의 "사람은 이미지다“는 가장 현대시적 인식을 제시한 말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의 이 말은 ”사람은 말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말은 모든 의미체계의 모델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 또한 시각적 말일 수밖에 없다.
소위 무의미한 말, 무의미의 시로부터 시인은 다시 새로운 길,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선다. 나의 느낌을 표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백지 위에 나의 말이 뛰노는 것을 가장 겸손하고 성실하게 지켜보는 눈을 키운다. 여기에 옥따비오 빠스가 있다.


시인의 숙명

말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말들 속에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그러다가 어느 입술에 감도는 대기이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빠스의 이 시를 옮기고 나니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말이 생각난다.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이미 영원불멸의 ‘빛’은 기대할 수 없다. 시인의 숙명은 말을 통하여 살아나고 말을 통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쓰는 말, 혹은 시인이 읊조리는 시는 공기다. 빈 공간, 빈 공간의 바람, 그 바람의 무늬, 바람은 더러 모양을 짓지만 그러나 다시 보면 형상이 없는 바람이다. 나의 말, 시의 말 또한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시를 쓰면서 나의 살아 있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고 싶다. 그러나 이미 적고 보면 그것은 과거이다. 그때 그 순간의 나의 생명성, 생기, 느낌과는 상관이 없는 이상한 흔적일 뿐이다. 결국 공허한 흔적, 겉껍질만 남는 게 시인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말들, 이 공허한 흔적들, 그 빈 공간 속의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내가 나를 버리고 바람이 되는 날, 그 바람은 때로는 예쁜 소녀의 입술에 감도는 대기가 될 수도 있겠지. 내 시를 외우고 다니는 예쁜 소녀의 숨결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헛된 나의 희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 우주 속에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무형의 힘을 더한다. "빛도 스스로 빛 속에 사라지나니."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 고드름
글로 일으킨 기둥
글자 글자마다 하나씩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은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말의 정확한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가 길을 잃는 곳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 - 말하지 않은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인지도 몰라
 
외침 한마디
사위어간 통 속 -
다른 천체에서는
'천체'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한다
앞뒤를 생각한다
마음은 마음아프고
미친 마음 때문에 -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빠스의 시를 읽으려면 말을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말을 쓰다보면(쉬르리얼리즘의 '자동필기법'에 따라 아무렇게나 써보면) 말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의미가 꿈틀거린다. 아무렇게나 아무 말을 써놓아도 가만히 있는 말은 없다. 의미를 가지고 눈앞에 육박한다. 아니면 "이게 무슨 뜻이야?" 하고 묻는다.
 
말은 나 이전이다. 혹은 나 이후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나와는 상관없다. 돌이다. 돌이니까 '돌 고드름'이나 될까. 내가 쓴 말은 나의 영혼을 전달하지 못한다. 내가 쓴 말은 쓸데없는 의미로 메아리치다가 제풀에 얼어붙는다. 나의 영혼이란 것도 모를 일, 그냥 하얗다. 나는 말을 한다. 영혼을 표현하려는 절규......나는 칼날처럼 말을 벼린다. 그러나 그런 말도 사람의 귀에 이르면 사라질 뿐이다.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즉, 나의 영혼을 전달하기는커녕 말 스스로의 연결도 당위성이 없다. 오직 소리와 소리의 속삭임 속에서 말라르메가 말하듯 이상한 '교감'만을 암시할 뿐인 것이다. "곰녀는 곰보" "마음은 마음아픔"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세상은 어지러운 의성어의 안개.
 
"다른 천체에서는 / '천체'를 무어라 할까?" 그렇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이 세상의 관습에 의하여 부단히 그렇게 불린 것에 불과하다. 우주가 있는데 좁은 지상에서 관습의 언어로, 논리로, 이미지로 일부러 '돌 고드름'을 세워 뜻을 이룸은 또한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불립문자(不立文字)나 화두 같은 빠스의 진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가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재판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이 글은 누구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빠스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아파하지 않는다. 붓이 글을 쓰고, 말이 글을 쓴다. 이 붓도 이 말도 이 글도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또 씌어진 이 글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쓰는 열정은 있다.
배도 의미도 들어올 수 없는 항만이 있다. 세상을 반영할 글도 말도 없다. 차라리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빠스는 '나'라는 존재가 복수임을 안다.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관습....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의 나에 참여하고 있다. 보르헤스 또한 "나는 복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쓰기는 알 수 없는 자신과 또 알 수 없는 자신의 재판관, 이 모두가 뜨겁게 참여하여 열심히 열심히 사라져가는, 스스로를 잃어가는 작업이다. 막상 씌어진 시는 이들  열심스러운 작업의 거뭇거뭇한 잿더미이고 나와는 전연 다른 생의 주검들이다. 그러나 그 허물이나 잿더미 속을 후비다가 혹시 손끝을 태우는 불씨가 있거든, 거기에 내가 살고 있음을 알라.
 
 
<믿음의 편지(Carta de creencia)>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수사학 (Retorica)>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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