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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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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심상운 시론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28>/심 상 운
2019년 07월 26일 18시 38분  조회:1168  추천:0  작성자: 강려
* 월간 <시문학>  2007년 9월호에  발표 <남진우/최문자/박유라 시인의 시>
 
남진우 시인의 시-「깊은 밤 깊은 곳에」「전갈에 물리다」
 
깊은 밤 잠자리에 누우면
차갑게 식은 몸에서 비명이 스며나온다
스며나와 방바닥을 가로 지른다
내 몸을 떠나가는 저 하루치의 쓰라림
서서히 모든 집 문지방에서
비명이 새어나온다 새어나와 피처럼 골목을 적신다
때로 웅덩이를 이루고 때로 거품을 일으키며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는 비명소리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비명은 모여 든다
모이고 모여 마침내 일어선다
일어서서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비명이 다 빠져나간 몸은
침침한 어둠 속에 가라앉고
지상은 눈부신 달빛 아래 치솟아 오르는 비명의 소용돌이
비명으로 뒤덮인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
---------「깊은 밤 깊은 곳에」전문
책을 펼치면
보인다, 지난 밤 나를 물고 사라진 전갈이 기어간 자국
사막을 가로질러 지평선까지
무수한 문장이 이동한다 낙타 등에 실려
전갈에 물린 내 발뒤꿈치에서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온 몸에 독이 퍼진 채 나는 죽어 간다
낙타 등에 미끄러져 내리면 끝장이다
곧 회오리바람이 그치고 무시무시한 정적이 찾아 올 것이다
차가운 별빛이 이마를 적실 것이다
흰구름이 떠가는 하늘에 책이 펼쳐진다
전갈이 내 몸 속을 빠져나간다
낙타 등에 실린 채 혼곤한 내가 책에서 실려나온다
눈먼 탁발승 하나
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
------------「전갈에 물리다」전문
 
 새벽 3시 쯤 주택가의 골목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집의 문틈이나 창문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연기처럼 골목길을 흘러가는 것을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통행금지가 없는, 밤새도록 자동차가 다니는 대도시의 아파트 지역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지금도 중소도시의 주택가 골목에서는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린 새벽에 접하게 되는 정경情景이다. 남진우 시인의「깊은 밤 깊은 곳에」는 그런 정경이 담겨 있어서 독자들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개성적인 영상映像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시인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중에서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끼게 하는 존재라는 말이 가장 공감을 준다. 그런 말의 이면에는 현대시의 기능이 들어있다. 그 기능의 대표적인 것이 이미지다. 이미지는 심상心象이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현대사회에서 그림, 사진, 영상, 인상, 느낌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생명의 비명’을 영상의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이 시에서 비명은 ‘하루치의 쓰라림’이 되어서 모든 집 문지방에서 새어 나와서 텅 빈 거리와 광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가고, 그 비명들은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서 마침내 소용돌이를 하며 일어선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명이 다 빠져나간 몸은/침침한 어둠 속에 가라앉고/지상은 눈부신 달빛 아래 치솟아 오르는 비명의 소용돌이/비명으로 뒤덮인 세상은 참으로 고요하다>고 한다. 시인은 ‘비명’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이 자신이 감지한 것을 그대로 영상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해석과 느낌에 따라 ‘비명’의 의미가 다양해진다. 만약 이 시에 시대적인 어떤 상황의 옷을 입히면 ‘모여서 일어서는 비명들’의 의미는 사회적 저항의 기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옷을 입히지 않고 순수한 관점에서 보면 비명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향하는 ‘생명의 본질적인 현상’으로 해석된다. 시를 사회적, 시대적 산물로만 인식할 때 시의 영토는 좁아지고 시인의 위치도 선동가의 수준에 머물게 되기 쉽다. 그래서 시의 해석은 언제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좋다.「전갈에 물리다」는 인공과 자연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진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생명의 현상’ 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이 시에서 ‘전갈’은 ‘나’의 본질적인 생명을 해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전갈은 꽁지에 독침이 있어서 쏘이면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거미류의 독충이다.) 그래서 <책을 펼치면/보인다, 지난 밤 나를 물고 사라진 전갈이 기어간 자국>이라는 이 시의 첫 연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인간이 책을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얻는 독서讀書 행위가 전갈에 물려서 죽음으로 끌려가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 너무 역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그는 <사막을 가로질러 지평선까지/무수한 문장이 이동한다 낙타 등에 실려/전갈에 물린 내 발뒤꿈치에서 쉴새없이 피가 흘러내리고/온 몸에 독이 퍼진 채 나는 죽어 간다>라고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낙타 등에 미끄러져 내리면 끝장이다/곧 회오리바람이 그치고 무시무시한 정적이 찾아 올 것이다/차가운 별빛이 이마를 적실 것이다>라고 필사적으로 독서에 매달려야 하는 자신(현대인)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 가상현실의 언어영상은 현대 지식인들의 ‘독서’에 대한 맹신을 지적하기 위한 과장된 허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식의 창고라고 하는 ‘책’은 반자연적인 인공의 산물이라는 것. 책을 이루고 있는 문자언어는 본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기호일 뿐이라는 것.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는 경구警句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과장된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흰 구름이 떠가는 하늘에 책이 펼쳐진다/전갈이 내 몸 속을 빠져나간다/낙타 등에 실린 채 혼곤한 내가 책에서 실려나온다//눈먼 탁발승 하나/문간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다>라는 자연과 시인(화자)이 만나는 장면이 시속의 문제(갈등)를 해결하는 선명한 이미지로 피어나는 까닭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이 가장 생명적인 내용을 담은 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인간이 갈 길은 어디인가? 이 시가 던지는 화두話頭다.
*남진우(南眞祐) :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 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등
 
최문자 시인의 시-「닿고 싶은 곳」「달맞이꽃을 먹다니」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
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
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
새들도 마지막엔 땅으로 내려온다.
죽을 줄 아는 새들은 땅으로 내려온다.
새처럼 죽기 위하여 내려온다.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온다.
종종거리다가
입술을 대고 싶은 슬픈 땅을 찾는다.
죽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서 있다.
아름다운 듯 서 있다.
참을 수 없는 무게를 들고
정신의 땀을 흘리고 있다.
-------「닿고 싶은 곳」전문
감마리놀렌산이 혈행에 좋다고
그렇다고
그 꽃을 으깨다니
그 꽃 종자를 부수고 때리고 찢어서
캡슐 안에 처넣다니
그 피범벅 꽃을 먹고
혈관의 피가 잘 돌아 가다니
욕심껏 부풀린 콜레스테롤이 그 꽃에 놀아나다니
그렇다고 나까지
하루 두 번 두 알 씩 그걸 삼키다니
머지않아 꽃향기로 가득 찰 혈관
그렇다고
하필 그 환한 꽃을 죽이다니
밤마다 달을 바라보던 그 꽃을
꽃 심장에 가득 찼을 달빛을
그 달빛으로 기름을 짜다니
노오란 꽃에 앉았던 나비의 기억까지
모두 모두 으깨다니
부서진 달빛, 꽃잎, 나비,
두 알씩 삼키고 내 피가 평안해지다니
생수 한 컵으로 넘긴 감마리놀렌산 두 알
혈관에 달맞이꽃 몇 송이 둥둥 떠다닌다
-----「달맞이꽃을 먹다니」전문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문제는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에서 주제가 되는 문제다. 불교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명제를 내세워 생과 멸을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서 이 근본적인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반야심경) 여기서 말하는 생멸은 현상現象이 아닌 본질本質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창발과 환원의 원리라는 물질세계의 사이클로 해명하려고 한다.(승계호의 ‘마음과 물질의 신비’) 이것도 대상을 본질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현상現狀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관념과 감성에 물들어 있는 언어로 표상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적으로 본질을 표현하려고 한다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서의 세계에서 완전한 이탈’이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최문자 시인의「닿고 싶은 곳」은 비록 본질과는 거리가 먼 주관적인 사유와 감성의 표출이지만, 죽음을 포용하고 넘어서는 ‘슬픔의 세계’가 은은한 울림을 준다. 슬픔 속에는 삶의 아름다운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객관적인 논리도 종교의 명상도 닿을 수 없는 삶의 따뜻한 체온과 호흡과 꿈이 서려있다. 그래서 <나무는 죽을 때 슬픈 쪽으로 쓰러진다/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그쪽으로 죽음의 방향을 정하고서야/꽉 움켜잡았던 흙을 놓는다.>는 구절은 독자들에게 죽음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다. 나무가 늘 비어서 슬픔의 하중을 받던 곳은 새들이 허공에 떴던 삶을 다 데리고 내려와서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 슬픈 땅을 찾는 새의 이미지는 철학이나 종교가 들어갈 수 없는 시인의 감성영역에 속한다. 독자들은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 자기 삶의 이면을 성찰하게 된다. 이것이 시적사유와 감성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이고 신비한 기능이다.「달맞이꽃을 먹다니」에서는 시인이 안고 있는 연민憐憫의 감정이 물에 흠뻑 젖은 수건처럼 축축하게 감지된다. 그 연민의 감정은 인간의 탐욕스러움과 자연과 인간의 동화同化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그는 혈액 순환 약 감마리놀렌산을 매일 두 번 두 알씩 먹으며 산다. 그런데 그 약이 달맞이꽃을 으깨서 만든 약이라는 것을 알고, <감마리놀렌산이 혈행에 좋다고/그렇다고/그 꽃을 으깨다니/그 꽃 종자를 부수고 때리고 찢어서 캡슐 안에 처넣다니/그 피범벅 꽃을 먹고/혈관의 피가 잘 돌아 가다니/욕심껏 부풀린 콜레스테롤이 그 꽃에 놀아나다니/그렇다고 나까지/하루 두 번 두 알 씩 그걸 삼키다니>라고, 자기성찰의 고뇌에 빠진다. 현대문명은 인간위주의 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것을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한다. 이 휴머니즘을 자연에 대입시키면 자연은 인간의 존재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휴머니즘이 품고 있는 독소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깨달아야 자연과 화합을 이룰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의 주류를 이루는 연민의 감정, 시인의 자기성찰과 내적갈등은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자신의 행위지만) 달맞이꽃의 피범벅으로 이루어진 알약을 하루에 두 번 두 알씩 먹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상상을 자극해서 달맞이꽃에 담겨 있는 달빛, 나비에 대한 기억까지 모두 으깨서 기름을 짜서 먹는 인간의 철저한 강탈행위로 확대된다. 따라서 그의 내적갈등과 연민의 언어는 그런 행위를 당연시하고 무신경하게 처리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과 경종警鐘이 된다. 휴머니즘은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탐욕과 편견에 사로잡힌 반자연적인 사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과 종교, 각종 문화도 인간위주의 관념이나 휴머니즘의 맥락과 연결될 때 반자연적인 것이 된다. 인간을 위해서 실험실의 흰 쥐들이 오늘도 무서운 독이 들어 있는 주사를 맞고 있다. 이것이 휴머니즘의 현실이다. 이 시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반자연의 무서운 현실을 상기시키면서 독자들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를 던지고 있다. 21세기 문학은 ‘휴머니즘의 굴레에서의 해방’이라는 무겁고 큰 과제를 지고 있다.
*최문자(崔文子):198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사막일기> < 울음소리 작아지다> <나무 고아원> 등
 
 
박유라 시인의 시-「흘러가는 아침」「점멸하는 겨울 오전 10 15분」
 
간밤 태풍 지나고 출렁, 산들이 내려앉은 식탁 위
2004 6 28일 아침 필루자에서 부산까지 비행기가 흘러
간다
된장찌개 김치 미나리 꽈리고추 오이무침 구이김 버섯볶음
디지털 풍경이 빠르게 흐르고
소화하기엔 너무 아픈 육질들 훈제오리, 삼겹살, 삼치토막......
냉장고 문을 도로 닫는다
흘러가는 풍경 사이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지고
오늘다라 유난히 뜨거운 잡곡밥을 아이에게 먹여 매운
바람 속으로 보낸 뒤 나는
어금니 사이로 질긴 마늘쫑 장아찌를 오래 씹다가 푸성
귀들 남은 반찬을 다독거린다
음악 검색 창에 ‘Climbing up the walls' 무한반복 흐를 동안
설거지를 끝내고 씻어 둔 현미에서 쌀눈 뜨는 소리
싸르륵 싸르륵 다시 비가 내린다
흘러가는 아침
문득 돌아서면 자꾸만 어두워지는 손
행주와 도마와 칼을 함께 소독제에 담그고
눈물 한 방울 출렁, 대기권을 흔들며 간다
--------「흘러가는 아침」전문
햇빛을 탁탁 털어 청소한다. 락스를 뿌려대면 무균의
햇살 알갱이들이 비수처럼 반짝인다. 텔레비전에서는
‘히말라야 동산’이 디지털 시험방송 중이고 강아지는 제
그림자를 보며 엎드려 있다. 눈부신 방의 한 순간,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장면들이 잘게 떨린다. 1000분의 1초쯤,
화면 속 티벳의 흰 돌집과 화면 밖 강아지 숨소리, 그 아
리아리한 것들을 포를 뜨듯 살짝 저며 낸다면, 30도 각도
로 칼집을 넣는 소리는 나지 않게, 피 한 방울도 나지 않게,
겨울 오전 10시 15분의 적막이 난자당한다. 소리 없이 점
멸하는 나날들.
날 선 햇살이 눈물 나게 한다.
------「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전문
 
 형식과 내용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형식을 그릇에 내용은 그릇에 담긴 물질(내용물)로 비유하여 구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비유에 불과할 뿐이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과 내용의 구분은 칼로 무를 썰 듯이 그렇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시에서 현대시와 근대시를 구분하는 기준도 내용이 아닌 형식에서 찾게 된다. 그 형식은 언어의 표현방법이다. 박유라의 시「흘러가는 아침」은 형식이 내용(의미)을 만들어 내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매우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을 중심 소재로 하고 있다. 아침에 주부가 식탁을 차리고, 아이에게 밥을 먹여 학교로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하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어쩌면 권태로울 그 일상이 이 시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옷을 입고 독자들에게 다가 온다. 시인은 한 편의 시에 두 개의 장면을 겹치게 하여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어떤 의미로부터 벗어나서 현상의 흐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현상은 그가 지각하는 현실의 선명한 모습이다. 그는 그것을 <간밤 태풍 지나고 출렁, 산들이 내려앉은 식탁 위// 2004 6 28일 아침 필루자에서 부산까지 비행기가 흘러간다// 된장찌개 김치 미나리 꽈리고추 오이무침 구이김 버섯볶음//디지털 풍경이 빠르게 흐르고// 소화하기엔 너무 아픈 육질들 훈제오리, 삼겹살, 삼치토막......냉장고 문을 도로 닫는다// 흘러가는 풍경 사이 어떤 꽃은 피고 어떤 꽃은 지고>라고, 공간 속을 ‘흘러가는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미지 속에는 관념의 요소(의미)가 제거된 사실(사물)의 나열과 집합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의 나열과 집합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존재의 공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다시점과 입체적인 현실인식이 만들어 내는 세계다.「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에서도 그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의 감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시의 내용도 일상적인 생활의 모습이다. 아침에 집안 청소를 하면서 텔레비전에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히말라야의 풍경과 티벳의 흰 돌집(사이버의 현실)과 화면 밖의 강아지 숨소리를 있는 그대로 살짝 포를 뜨듯 자신의 의식 속에 인화印畵하려고 한다. 그것은 사진 찍기의 방법이다.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현실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그는 그 순간의 장면을 <무균의 햇살 알갱이들이 비수처럼 반짝인다. 텔레비전에서는 ‘히말라야 동산’이 디지털 시험방송 중이고 강아지는 제 그림자를 보며 엎드려 있다. 눈부신 방의 한 순간,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장면들이 잘게 떨린다. 1000분의 1초쯤, 화면 속 티벳의 흰 돌집과 화면 밖 강아지 숨소리, 그 아리아리한 것들을 포를 뜨듯 살짝 저며 낸다면, 30도 각도로 칼집을 넣는 소리는 나지 않게, 피 한 방울도 나지 않게, 겨울 오전 10시 15분의 적막이 난자당한다. 소리 없이 점멸하는 나날들.>이라고 언어의 기표로 옮겨 놓고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관념이나 감상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에 들어온 현실의 영상을 그대로 포를 뜨듯 찍어내려고 한다. 그 현실은 시인자신의 투명한 의식에 투영된 현실이다. 이러한 그의 시적 방법은 탈-관념의 직관直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이 내용을 창조하는 용기라고 한다면 그의 시적 방법은 21세기 사이버 시대에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를 여는 새로운 창조적인 용기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 박유라 : 1987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야간병동> <갈릴레이를 생각하며> <푸른 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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