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영속성(Remorse or Sunken Sphinx, 1931 )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괴짜 예술가.오만한 천재.괴팍한 광인 등 이름 앞에 언제나 따라오는 수식어 만큼이나 그의 인생은 삶 자체가 광기에 가득 찬 예술이었고 또한 평범하지 않는 초 현실이었다.
1904년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지방유지의 아들로 태어난 달리는 비교적 부유한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14세 때 부터는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방탕하고 광적이고 과격한 그는 재학중 학생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일 년간 정학처분을 받기도 하고 국기 방화 사건등으로 재판을 받으며 반정부 활동혐의로 단기간 투옥되기도 한다. 결국 1926년 미술사의 답안 제출을 거부,마드리드 미술학교에서 제적되고 만다.
하지만 이 괴팍한 청년 달리는 마드리드 미술학교 퇴학쯤으로는 눈 하나 꿈뻑하지 않았을 듯 싶다.
그는 일 년 뒤인 1927년 파리로 가서 피카소를 만나고 독창성을 나타낸 그림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드디어 그때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그외에도 큐비즘이라든가 미래파,형이상 회화파등에서 얻은 영향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그의 화풍을 이루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내란의 예감(Permonition of War,1936)
영화를 보다 보면 거물급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쏠쏠한 눈요기와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 가끔 있는데 살바도르 달리의 인생을 잘 만들어진 하나의 영화라고 한다면 이 영화에는 역시 프로이트라던가 라캉,샤넬,피카소등 당시를 주름잡던 지식인.예술가들이 단역 출연을 하며 그의 화려한 인생을 더욱 예술적으로 돋보여준다.
그중에서는 단지 단역으로 끝나지 않고 달리에게 평생을 두고 영향을 주었던 세 명의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달리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와 그토록 오만한 달리가 '내가 존경하는 당대의 두 인물은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뿐이다'라고 드러내놓고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던 프로이트.그리고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기도 했던 그의 영원한 여인 갈라-이 세 사람이다.
달리의 아버지 돈 살바도르 달리는 부유한 공증인이었는데 음악과 그림을 좋아했고,집을 멋지게 꾸미고 자신이 멋지게 꾸민 집에 예술가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며 인생을 즐기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총명했던 첫 아들이 7살에 병으로 죽자 그 아들을 잊지 못하고 그 후 삼년 뒤에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 첫 아들과 같은 이름을 지어준다.
워낙 첫 아들을 총애했던 그의 아버지는 달리를 첫 아들의 부활로 믿을만큼 첫 아들의 그늘 속에 달리를 가둬두고 매사에 그에 맞추어 교육시켰으며 예술적 재능을 일찍이부터 드러낸 달리에게'큰애였다면 더 잘 그릴 수 있었을텐데'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정도로 달리의 재능마저도 죽은 첫 아들과 비교했다.달리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아무리 잘해도 둘째아들로서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가 없었으며 반면 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난폭하게 굴어도' 큰 애짓이니까..'하면서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도 있었다.
내 아버지의 초상 ,1925
보기드문 조숙아였던 달리.아니,어쩌면 조숙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살바도르 달리.
그의 난해한 인생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심이라든가 동정심을 갖게되는 시기가 바로 그의 어린시절인데 '나는 결코 죽은 형이 아니며 살아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 '는 훗날의 그의 고백처럼 죽은 형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어린 달리가 혼자서 카다케스 바닷가를 거닐고 하얀암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 고통의 깊이가 조금은 이해되며 어떤 안쓰러운 마음마저 인다.
소녀라고 믿었던 6세의 달리,바다 그림자 안에서 잠자는 강아지를 보기 위하여 물의 표면을 듦-1950
달리는 성장하면서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자신에게서 형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아버지에게 심한 반발의식을 갖게되며 그런 아버지의 비위를 건들고 약을 올림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이러한 달리의 강요된 주체성의 혼동은 후에 그의 그림에서 이중상,혹은 다중상의 특징을 낳게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또한 달리의 초현실적 성향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달리가 1923년에 알게된 이탈리아의 화가 키리코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는데 오히려 그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누가 보더라도 달리의 작품들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마드리드 미술학교 시절 프로이트의<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읽은 21살의 달리는 일생일대의 발견이라며 그 책에 매료되었고 그때부터 프로이트에 향한 짝사랑이 시작된다.
여기서 짝사랑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21살의 달리가 34살이 될때까지 프로이트를 만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는데 그때마다 프로이트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번번히 헛탕을 칠 때마다 오만한 성격의 그가 얼마나 비위가 상했는지,또 그 상처가 얼마나 컷었을까에 대해서는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 34살의 달리는 프로이트와의 첫 약속이 정해졌을 때 프로이트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프로이트의 집에 방문한다.
하지만 실제 프로이트와의 만남의 자리에서 그가 원했던 것과는 정 반대로 두 사람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초조해지고 흥분한 달리는 자신의 논문을 가져가 제발 좀 읽어주십사하고 여러번 청하지만 프로이트는 논문에는 눈도 주지않고 달리만 계속 노려보듯 쳐다보았다.싸늘한 무관심과 냉대에 달리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가는 방문 직후에 그린(죽음의 그늘이 너무나 명백하게도 드리워진)프로이트의 초상화에 잘 나타나있다.
1938년 달리가 그린 프로이트 초상
하지만 프로이트는 사실 그 반대였다.
프로이트가 다음 날 그들의 만남을 주선했던 작가 스테판 쯔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보호자겸 성자로 모시는 초현실주의 멍청이들을 보았었지요.하지만 어제 본 그 스페인 청년은 솔직하고 열렬하며 뛰어난 솜씨로 내 판단을 바꾸어 놓았습니다.그가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가를 분석적으로 조사해볼만 하군요'
달리에게 있어서 그의 아버지와 프로이트. 어떻게보면 이 두 사람은 그의 인생과 작품에(동류의)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긴 했지만 달리가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 유일한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의 영원한 여인-갈라가 달리에게 끼친 영향은 앞의 두 사람과는 그 의미를 달리한다.
“한 번의 입맞춤이 나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했다. 갈라는 내 인생의 소금이며 내 인격을 강하게 해주는 목욕, 나와 꼭 닮은 사람, 바로 나이다.”
1929년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만났을 때 달리는 안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1934년 달리와 결혼한 갈라는 그의 열정대로 평생동안 '달리의 모든 것'이 된다.
Portrait of Gala with a Lobster (Portrait of Gala with Aeroplane Nose), circa 1934
갈라는 달리 그림의 가장 탁월한 해설자였고, 초현실주의의 뮤즈로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최고의 모델이었다. 달리의 수 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출현하게 되고 심지어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성이 갈라로 변신되었다.그녀는 달리의 정신 분열증적 광기를 다스리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또 그의 모든 것을 전담했던 활달하고 영리한 매니져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경제문제까지 전담했던 그녀는 달리가 주문받은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작업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그기까지 했다고 한다.또한 달리보다 12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늙어감의 공포를 잊기위해 미소년들과의 성관계에 병적으로 집착하기까지 했는데 갈라의 성적 방종을 채워주기 위해 달리는 쉴 새 없이 작업해서 돈을 벌었다.
갈라는 1982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가 사망한 후 달리는 그녀에게 선사했던 카탈루냐 푸볼성의 지하 납골당에 유해를 안치한후 모든 창작활동을 멈추고 그곳에서 7년동안 칩거하며 양분주사를 맞아가며 인공적으로 생을 연명하다가 1989년 결국 갈라의 뒤를 따라갔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것들이 달리에게 가면 일반적이 되는걸까.달리와 갈라,이 두사람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정말 달리는 사랑도 달리답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달리자체를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상식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때로는 달리의 초 현실적 작품들이 그의 오만과 광기를 넘어선 걷잡을 수 없는 열정의 하나의 발산에 지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의 인생자체가 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보고 겪었던 것 들을 추억하며 그것은 진짜로 진짜이고 나 자신의 이미지를 이루는 속살,나의 자화상을 이루는 석회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달리 말고 또 누가 있을까.
등에 있는 점을 벌레로 생각하여 그것을 떼어내기 위해 면도기로 살갗을 베어 내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가파른 돌 계단 위에서 곧장 뛰어내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허공으로 몸을 날리고 마는 광기.자신의 전시회에 수영복 차림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엉뚱함과 거울이 달린 인조 손톱 이라던가 등에 다는 보충 유방등 그가 만들어 낸 기괴한 발명품들.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1941
40m짜리 빵으로 세계를 뒤엎을 생각을 했던 자유로운 상상가 이기도 한 달리는 또한 자아도취의 전범이라고도 할 수있다. 22살때 자신의 재능을'각별히 출중한 내 실력'이라고 떠들어대고 자신을 곧 세계의 배꼽이라는 나폴레옹식 선언을 한다.
이 오만한 예술가 달리는 1942년 38세의 나이로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 출간 역시 파격적이다.'작가들은 보통 일생을 다 산 다음에 말년에 가서 회고록을 쓴다.모든 사람들과 반대로 가는 나는 회고록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사는 것이 더 지적인 것으로 보였다.산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인생의 반을 다 청산할 줄 알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어떤것이 지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보면 그는 그의 말대로 인생의 반을 청산할 줄 아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달리는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 고전주의로 복귀하려했고 초현실주의 화가모임에서 제명당했으며 미국에 귀화한 후 작품 활동을 왕성히 전개해 왔기 때문이다.그런 달리를 두고 이미 획득한 명성에 기대어 미국식의 자본주의적 예술형태에 매몰돼 예술성을 달러와 맞 바꾸었다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그 부분에선 아마 그러한 비난도 달리에게는 라디오 채널을 돌릴 때 주파수 사이에서 생기는 잡음보다도 더 하찮게 들리지 않았 을까.
현대 화가 중에 달리만큼 광범위하고 왕성한 예술 활동을 했던 사람도 드물 것이다.달리의 창작에 대한 광적인 열망은 그의 생애를 통해 회화에 그치지 않고 소설을 출판하고 발레의 대본을 쓰며 영화 제작이라던가 연극이나 발레의 무대장치 디자인,조각등 다양하게 전개된다.심지어는 백화점의 디스플레이, 가구와 보석세공등 창작에 대한 달리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돈 밝히는 화가였지만 그만큼 돈 잘버는 화가이기도 했던 달리.그의 생활은 화려했고 그리고 그는 그 생활을 충분히 즐기며 살았다.
달리의 인생과 그가 추구했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는 정말로 시대를 잘 타고 난 몇몇 안되는 예술가 중의 한 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만약 달리가 20세기가 아닌 19세기나 18세기에 태어났더라면,또 그가 성장하며 느끼던 환경이 석양이 불타고 바닷물이 바위사이를 넘나드는 유럽의 아름다운 카타퀘스 해안이 아니라 황량하고 먼지이는 중동의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못 말리는 꼴통 아니면 세상에 둘 도없는 미친놈쯤으로 전락해서 그의 주위의 몇 몇 만이 그를 기억하고 그나마 그를 기억한다는 것도 마침 안주가 떨어진 선술집의 어둑한 술자리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되어버리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다행히 그는 20세기에 태어났고 현 시대에 와서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린 그를 두고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히려 사람들은 현대인의 지성과 이성으로 포장된 억압된 현실 속에서 본성에 대한 무의식의 세계를 끌어내어 유감없이 표현해낸 달리의 그림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그의 자유스러움을 더 이상 방종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의 오만은 배짱으로 이해되며 또한 그 앞에서 유머와 여유를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그가 그리는 것은 결국 통상적인 상식과 경험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의식의 위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순결을 뿔로 범하게 될 젊은 처녀 '(Young virgin Autosodomized by her own chastity,1954)
현실속의 무의식의 세계-그것은 때로는 꿈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잠결이나 술 기운이 도는 몽롱한 상태에서 쉽게 의식의 범위를 침범한다.그리고 누구나 경험하는 것 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어떤 악몽을 꿀 때 가위에 눌린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어렸을 때 부터 유난히 가위에 잘 눌리곤 했다.사실 어린 시절의 현실에 내포되어있는 내 무의식 속의 공포라는 것은 티브이에서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나 남량특집 수사반장의 여운 따위 정도였었을 것이다.
어린시절.그런 드라마들을 보고 난 날이면 어김없이 그것이 꿈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나에겐 그건 꿈이 아니라 반 무의식 상태.즉,옆에서 잠들어있는 언니의 얼굴이 창을 뚫고 들어 온 달빛에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라던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려오는 그런 상태에서 어느 순간 그날 저녁 전설의 고향에 나왔던 그 무시무시한 구미호가 내 머리맡에서 소리를 죽이며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다.
숨막혀오는 공포.그리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순간.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환상이라고 하기엔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위눌림은 지금도 계속된다.물론 더 이상 꿈 속의 등장 인물이 구미호라든가 수사반장에 나왔던 최면술 걸린 장미희는 아니지만 몸이 엿 가락처럼 늘어지며 내 몸의 한 부분이 이상하게 변해간다던가 누군가로 부터 목이 졸리워지는 듯한 느낌들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꿈
그렇다고 내가 꾸는 비 현실적 이지만 분명히 의식하게 되는 꿈들이 전부 공포스러운 꿈만인 것은 아니다.때로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이가 없을만큼 격렬한 쾌감으로 몸 전체가 나른해지는 꿈을 꾸기도 하고 또는 가슴 언저리를 붙잡아야 할 만큼 물리적인 아픔까지 느끼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그리고 밤 새 시달렸던 어떤 꿈이 그 이미지는 생생한데 그것을 확실한 존재로 붙잡을 수가 없을 때도 있는데 그 때는 영락없이 하루 종일 제 이름을 까먹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답답하게 지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환상과 현실의 중간 지점에서 헤메이는 것 같은 느낌은 꿈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일상 속에서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령 예를들면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가 보았을리도 없는 어떤 장소가 마치 전생에 어느 한 순간 내가 그곳에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거리의 돌맹이 하나까지 아주 익숙한 분위기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또는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때 들려오는 음악이나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그런 것들이 전에 한번 똑같이 경험했던 것 처럼 느껴져 어떤 당혹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던 일들.-물론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반대로 늘 다니던 길목이 어느 순간 아주 낯설게 느껴져 나 혼자만이 세상과 동떨어진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어느 날 문득 집안의 한 가운데 서서 나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생소하고 바뀔리가 없는 방의 크기마저 제 멋대로 줄어들어 보이거나 아니면 너무 황량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앞 서 말했 듯 이 모든 경험은 누구나 했을법한 경험일 것이다.
하프의 명상 1932-33년
내가 달리의 그림을 좋아하고 그의 그림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은 달리의 그림을 보고있노라면 나에게 있어서 어느 한 순간 꿈이나 잠시의 환상으로 표출되던 공포와 절망,슬픔,고민,쾌락 같은 것이 그의 비현실적인 그림 앞에서 오히려 논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달리는 회화의 목적은'의식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내적세계와 외적세계 사이의 육체적 장벽을 동시에 제거하고,현실과 비현실 및 영상과 행위를 서로 합하여 혼합되어 전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달리의 창작수법에 대해서 비평가들은 '편집광적.비판적방법' 이라던가 나름대로 그의 그림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달리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누가 그의 그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던 달리 자신도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림이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지 않았았을지도.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며 어머니 뱃속의 태아 적의 이야기하는 달리를 두고 어느 누구도 그 말에 대한 진실성의 여부를 거론하지 않 듯 그의 그림은 그냥 눈으로 보여지는 것을 느끼고 즐기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그의 그림을 두고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그림보다 초 현실적인 그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벅찬 일이 되지 않을까.
The Sick Child (Self-portrait in Cadaquйs), circa 1923
Remorse or Sunken Sphinx, 1931
Automatic Beginning of a Portrait of Gala (unfinished), 1932
Necrophilic Fountain Flowing from a Grand Piano, 1933
The Phantom Cart, 1933
Portrait of Gala with Two Lamb Chops Balanced on Her Shoulder, 1933
Apparition of My Cousin Carolinetta on the Beach at Rosas, 1934
Masochistic Instrument, circa 1934
The Tower, 1934
Archaeological Reminiscence of Millet's Angelus, 1935
Face of Mae West Which May Be Used as an Apartment, circa 1935
The Anthropomorphic Cabinet, 1936
Sleep, 1937
Composition - Portrait of Mrs. Eva Kolsman, 1946
The Madonna of Port Lligat (detail), 1950
The Queen of the Butterflies, 1951
dalн Nude, 1954
Soft Watch at the Moment of First Explosion, 1954
The Grand Opera, 1957
Modern Rhapsody - The Seven Arts, 1957
The Ascension of Christ, 1958
Birth of a Divinity, 1960
Meditative Rose, 1958
The Hallucinogenic Toreador, 1968-70
Dalн Lifting the Skin of the Mediterranean Sea to Show Gala the Birth of Venus
(stereoscopic work, right component), 1977
■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1904.5.11~1989.1.23)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라고 정의한 달리. 그는 자신의 그림 만큼이나 비합리적인 삶을 살고, 지나치게 상업적인 모습으로 누구보다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아 생전 많은 비난과 칭송을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달리는 성공한 화가로서의 화려한 이면 뒤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림과 그의 연인 갈라가 없었다면 아마도 달리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강철로 만들어 붙인 듯한 콧수염, 검은 정장에 빨간 넥타이, 황금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 살기 번득이는 눈빛 등 독특한 생김새와 옷차림, 행동 그리고 말로 인하여 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자극했던 화가, 달리는 그 자체가 초현실주의적 설치 작품으로 보여졌다. “나는 성적 쾌감을 위해 어머니 초상화에 침을 뱉는다” 라는 등의 거침없는 괴변들과 같은 화가, 예술가들에게 퍼붓는 욕설과 같은 비난은 그의 곁에서 사람들이 떠나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그린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다른 화가들의 영감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달리 만의 독창적 상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진실과 거짓, 현실과 상상,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예술
스페인의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동북부 지방으로 프랑스, 지중해와 접해 있어 활발한 교역과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다. 그 지방 만의 언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독특한 지방 문화를 가지고 있는 카탈루냐였기에 개성넘치는 화가들도 많이 배출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화가 호앙 미로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 이들도 태어나고 자라면서 개성과 자부심이 강한 고향의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달리 또한 자신을 스페인 화가이기 보다는 카탈루냐 화가인 점을 늘 강조했다.
달리는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화를 시작했을 만큼 미술에 대한 천재성을 보였고,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25살이 되어 숙명의 여인 '갈라'를 만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청년 화가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달라지는 지 알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결정된 운명은 인생을 결국 종착점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 1929년 파리로 갔던 달리는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던 다다이즘-우연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지는 무의미함의 의미를 중시한 예술-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결국 초현실주의로 이끌어 내게 되었다.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후, 그는 피카소, 미로 등과 같은 화가들과 교류하였는 데, 달리 미술의 결정적 영향은 한 여인으로부터였다.
파리 초현실주의 그룹의 선구자인 시인 '폴 엘뤼아르'를 만난 달리는 그의 부인, 갈라와 사랑에 빠져 도피 행각을 벌이게 된다. 결국 갈라는 달리 곁에 머물며 어느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달리를 아기처럼 다루면서, 인생의 반려자이자 예술혼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갈라는 <갈라의 삼종 기도>등, 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 주인공으로 그려졌으며, 달리는 <보이는 여인>이라는 책을 지어 그녀에게 헌정했다. 또한, 1930년 이후에 제작된 그의 그림 속 사인에는 ‘살바도르 달리’ 앞에 '갈라'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지독히 상업적인 모습으로 예술 활동을 했던 달리이기에 그는 살아 생전에 고향인 피게라스에 “달리 미술관”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미술관이 건립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유명해졌다. 심지어 거짓말로 가득찬 그의 자서전 <살바도르 달리의 숨겨진 생애>조차도 책으로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자신의 예술을 위해 고민하였고,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권위적인 순수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보고 분노를 느끼며 혹평과 비판을 가했지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간의 영속>이나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내란의 예감>등 그의 창조적인 작품들을 보면서 억압되었던 상상력의 해방을 느꼈다.
“언제나 가장 진짜처럼 보이고 가장 빛나는 것이 가짜이게 마련 아닌가!”라는 그의 고백처럼 달리의 그림은 실제 속에 녹아드는 상상, 허위 속에 묻혀 있는 진실을 엿보게 한다. 잠시라도 힘든 현실을 잊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의 진실 같은 거짓의 세계는 또다른 휴식이 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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