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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큰 가족, 세포조직, 그리고 그림의 세계...
2017년 02월 11일 13시 22분  조회:3012  추천:0  작성자: 죽림

 

 
큰가족도/ 1986/ 193x259 /캔버스에유채

 
숲의가족/ 1990/ 45x53 / 캔버스에유채

 
숲을날으는가족/ 1990 /45x53 / 캔버스에유채

 
숲속의가족/ 1990/ 73x91 / 캔버스에유채

 
소와가족/ 1986/ 194x259/ 캔버스에유채

 
어느가족의여행/ 1989/ 53x45/ 캔버스에유채

 
가족이있는전원/ 1988/ 90x116/ 캔버스에유채

 
작은가족/ 1994/ 72x60 /캔버스에유채

 
작은가족/ 1994/ 90x72 /캔버스에유채

 
작은가족/ 1994/ 73x91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5/ 73x6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5/ 72x6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1/ 73x6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5/ 72x9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4/ 72x60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60x72 /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45x53 /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60x72 /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91x73 / 캔버스에유채
 
 
 
 
출처:카틀레야의 이야기 

[출처] 황영성의 그림세계|작성자 임 산

 
====================================================

 

     

          황영성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미학적 관찰

 

     

      ▲농부의 집, 유화 97*145cm 1975 

 

 

 

 

     

     ▲시장에서, 1984 
 

    

        ▲ 황소와 가족, 1975 

 

        

 

 

 

황영성은 무조건적인 얼싸안음의 미학이다. 이것은 바로 따뜻한 인간들의 체온이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유토피아이다. 자연에 안긴 인간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내면에 이런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고 품어지는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한국적 정서를 회화적으로 승화시켜 그림을 보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이 터지게 하는 그림이다.


1990년대 그의 작품 '가족'시리즈는 아이러니컬한 절충주의가 중대한 원칙인 레퍼토리 방식으로 전개된다. 몇몇 기호들은 수평으로 기울어지거나 비스듬히 미끄러지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 상하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의 기억이나 인생과도 같이, 특이하고 기이한 구성이며, 모순과 균형의 놀이이며, 움직이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분할되어 있음에도 조각 조각으로 분열되지 않으며, 복합적이면서도 잘게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필립 다장 (미술비평가) 


황영성의 1980년대 작품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장 요긴한 성소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에 대한 정감 넘치는 애정의 표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차단 당한듯한 오늘의 산업사회에서 발견하기 힘든 친화관계를 그는 작품을 통해 설득적으로 개진한다. 그의 작품의 주소재가 농촌인 것은 그 장소야말로 마지막 남은 인간의 애정의 보루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묻지 않은 자연, 그것을 근거리에 둔 전원지대의 녹색 들판과 빛이 수직으로 수평으로 이어지면서 거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가와 토담과 황소가 동심적 시각으로 닿아온다. 요컨대 작가는 동심적 시각과 표현방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순진무구한 동심에서 조력을 구하여 그와 유사한 테두리 안에서 작업을 진행시킨다. 따라서 소재대상은 실체적으로 닿아오는 물질화된 대상이 아니라 어린이의 추상적 관념으로서만 건질 수 있는 비현실적 풍경이다.

 

- 김인환(미술평론가)


 

 

확실히 1970년대 황영성의 그림에는 전설적인 고향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다. 찌그러진 초가며, 촌부, 황소, 숲, 황톳길 같은 먼 기억 속의 고향과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앉는 정겨운 가족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조금도 낯설지가 않다. 슬픈 고향의 이야기, 가족에 대한 점액질 사랑과 그리움이 끈끈하게 담긴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 세대의 비극적이었던 과거 기억들이 모두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는 '가족과 고향'시리즈를 통해 '잃어버린 것들'을 열심히 회복시키고자 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의 뿌리는 과거 그의 아픈 삶의 체험적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족'시리즈를 통해 그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황영성은 "언젠가는 홀 맺힌 과거의 궤적을 모두 털어놓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아직도 그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 문순태(소설가)

 

 

 

 


 

황영성 - 소ㆍ고향ㆍ가족ㆍ생명의 작가

 

 

병역미필로 교사 해직…새옹지마<塞翁之馬> 될 줄이야


조선대 입학…임직순과 '운명의 만남' / "블랙ㆍ화이트로 색 표현해야" 깨달음


67년 국전출품 수상…'회색시대' 도래

 

 킬리만자로 이야기 1. 1980년대. 60.6×72.7㎝. 캔버스에 유채

 

황영성은 광주사범학교를 마치고 나주 아름다운 영산강변의 남초등학교로 부임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교사생활은 2년 만에 끝나버렸다. 5ㆍ16 직후 "병역을 마치지 않은 교사는 모두 해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반공법과 함께 병역기피는 당시 가장 가혹한 처벌대상이었다.

 

 영성은 징집영장을 받아놓은 상태여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연기였지 기피는 아니었다. 그러나 초등교사의 항변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내팽개쳐지듯 교사직에서 쫓겨난 그는 조선대학교 문리과 대학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평생의 스승인 임직순을 만났다. 1961년은 임직순이 서울생활을 접고 조선대 미술학과장으로 부임한 첫해였던 것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이런 상황을 이르는 말인가. 인생의 물굽이가 화업의 세계 쪽으로 급선회하는 순간이었다. 임직순은 1957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래 한국 최고의 화가로 부상해 있었다. 화단의 절정고수로 등극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스승의 실력과 인품이 영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화가의 꿈을 키우던 가난한 사범학교 미술부 시절의 열망이 불꽃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소 이야기. 1983. 72×90㎝. 캔버스에 유채.

 

그렇게 스승에 대한 감탄과 존경으로 가슴을 졸이며 미술학과 1학년을 마친 뒤 입대했고 64년에 복학했다. 군복무를 마쳤으므로 그는 교사 발령을 받아 초등학교 교사를 겸하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1년 후인 1965년, 그가 근무하던 영산포의 대흥당이라는 조그만 찻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동안의 가슴 아린 열정이 시골동네의 개인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2월이었으므로 몹시 쌀쌀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 임직순은 조교이던 진양욱ㆍ김종수 등과 함께 그곳까지 직접 찾아와 주었다. 전시작품은 주로 풍경을 소재로 한 유화 50여 점이었다. 임직순은 그 자리에서 "젊은 작가 황영성은 진실과 열정을 지닌 이 고장의 보기 드문 예술가입니다. 서정적인 정감을 바탕으로 한 학구적 구성력과 아름다운 색감의 소유자입니다."라는 평을 내려주었다.


 

 소. 1980. 130×193㎝. 캔버스에 유채

 

스승의 칭찬에 고무된 영성은 그 전시 이후 곧바로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학업과 작업에 몰두해나갔다. 1966년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조교로 근무하면서 그림세계로 정진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영성의 목표는 스승 임직순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뛰어넘기 위해서는 우선 모방을 통해 그 세계를 체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임직순의 구도는 너무나 높은 벽이었고, 색채는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었다. 임직순의 구도와 색채 앞에서 남도의 화가 지망생들은 너나없이 깊은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스승의 세계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었고, 그러나 너무 높은 벽이었다. 영성은 스승의 구도와 색채를 뛰어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무작정 모방에 매달리던 그의 정신은 벼랑에 매달린 나뭇가지 같았다. 무언가 붙잡지 않으면 벼랑 아래로 추락해버릴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작품 평가시간에 임직순은 스페인의 화가 크라베의 작품을 펼쳐놓은 채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색채의 달인이 되려면 블랙과 화이트만으로도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크라베는 검은 색과 무채색을 주조로 하는 화가였다. 그 순간 임직순의 그 말은 커다란 충격과 함께 깊은 깨달음으로 밀려왔다. 한국최고의 색채화가에게서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모든 색채를 표현하라는 말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깃들어있는 것이었다. "아, 이것이구나!" 섬광처럼 번뜩이며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영성은 그 순간 스승에게서 은밀한 비밀 하나를 순간적으로 포착해내고야 만 것이었다. 

그날부터 영성은 흰옷을 입은 모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인물을 그릴 때는 모델이 필수적이던 시절이었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죄악시 되던 때였다. 그때 흰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자신이 찾는 모델로서는 적격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때마침 친구의 부인이 전남대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영성은 친구에게 부탁을 했고 친구 부인은 전남대 병원의 간호사를 모델로 소개해주었다. 그날부터 병원을 들락거리며 날마다 드로잉을 하고 조금씩 그림을 완성해가기 시작했다. 흰색과 검은 색 사이에서 자연스레 회색톤이 배어나오기 시작했고 회색에 맞는 구도가 나타났다. 새로운 세계로의 혼신의 침잠 끝에 마침내 두 명의 간호사를 그린 '병동의 오후'라는 그림이 태어났다. 

자신만의 색채와 구도를 화폭에 가득 채운, 그야말로 황영성 풍의 그림이었다. 가슴 졸이며 그 작품을 국전에 출품했고, 마침내 그해 특선을 차지해버렸다. 스승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은 지 2년만인 1967년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내쳐 회색조의 그림을 그려 그해 전남도전에서 서양화부 수석상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영성의 회색시대가 열린 것이다. 열정과 노력과 끊임없는 모색의 남도 천재화가가 자신의 세계를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그림 '초가집' 미국인 사로잡아… 작품 매진석양속 고향풍경 감동…화폭에 

 

해마다 국전 도전해 특선 6번

 

 작업 중인 작가

 

황영성은 1970년 부인 김유임을 맞아 결혼 했다. 전임강사로 조선대 미술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던 그 이듬해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결혼은 그의 차갑고 메마른 가슴을 감싸주는 온기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가정의 따스함은 예술가에게 영혼의 치유제이며 작품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오랜 지우인 소설가 문순태씨는 "대학시절 그의 보랏빛은 음울한 슬픈 빛깔이었다. 그때의 보랏빛은 외로움을 이야기해주는 듯 싶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된 후부터 그의 빛깔은 놀랍도록 화사해졌다. 그는 어두운 색감으로 밝음을 빚어내는 놀라운 미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원초적인 미의 빛깔이며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었다."라고 적었다. 

가정이라는 따스한 울타리가 그의 삭막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그 따스함을 연료삼아 그의 가슴에 상처처럼 각인된 그리움의 정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가족 1988. 캔버스에 유채. 129X192Cm.

 

71년도 봄, 그는 화우인 박상섭의 아버님 회갑잔치에 초대받았다. 박상섭의 집은 지금의 매곡동 전남연수원 부근에 있었다. 학교의 일과를 끝내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 무렵이었다. 마당에 멍석을 펼치고 앉았는데 지붕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었다. 석양의 지붕과 마을의 온기와 집안의 떠들썩함이 문득 그의 가슴에 안기듯 내려앉고 말았다.

 

감성의 어느 부분이 건드려진 것일까. 가슴이 마구 뛰면서 금세 눈물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았다. 처음 겪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이었다. 갈 곳 몰라 하며 가슴에 갇혀 있던 그리움의 물줄기가 석양의 고향풍경을 만나 둑을 무너뜨린 것만 같았다. 토방 아래로 북적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흥겨움이 그의 외로움을 다독거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가슴 속을 소용돌이치던 화가의 본능이 툭, 하고 튀어나와버렸다. 

'아! 이 감동을 그려서 원인 모를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가슴에 걸어주어야만 한다!'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내내 그 감동을 화폭에 옮기는 상상 속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부터 날마다 학교의 일과가 끝나면 박상섭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인자하신 그 고향의 어머니와도 사진을 찍었고, 그 아름다운 고향의 구도를 수없이 스케치 하고 또 가슴에 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집뿐만이 동네 전체를 스케치하고 기운을 들이마셨으며 조금씩 아름다운 구도를 완성시켜나갔다. 틈나는 대로 그 너머에 있는 서방면 마을까지 가서 그곳의 초가집들을 샅샅이 스케치 하곤 했다.


 

 소와 가족. 1986. 194X259Cm. 캔버스에 유채.

 

드디어 한국의 고유한 조형미를 구축해내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그해 최초의 초가집 그림 '토방'을 국전에 출품해 특선을 받았다. 120호짜리 대작이었다. 그 그림을 감상한 고향과 서울의 선배들이며 후배들의 칭찬과 감탄이 줄줄이 이어졌다. 알고 보면 너나없이 고향과 어머니 품이 그리운 미아들이었으며 아련한 그 그리움의 기준점을 영성이 화폭에 그어준 것이었다. 외로움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그리움의 기준점이 명확해졌을 때 환호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 영성은 본격적으로 초가집을 발전시켜가며 한국의 토속적 아름다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73년도에는 마루에 노인이 앉아있는 그림 '온고'를 출품해 그해 국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렇게 그는 해마다 국전에 도전해 6번 특선 차지했고, 7번 입선했다. 마침내 80년도에는 국전추천작가가 됐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다음해부터는 국전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문득 발밑이 꺼져버린 듯 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젊음을 불태우며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던 목표가 문득 꺼져버린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그는 도전해야할 목표는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끝없이 모색하고 도전해오는 동안 어느새 쌓아진 자신의 역량이 바로 딛고 일어서야 할 발판이며 목표라는 것이 깨달아졌던 것이다. 

국전추천작가가 되던 80년 그해, 뉴욕에서 열리는 한국 작가 6인전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 5ㆍ18 나던 그해 9월이었다. 임직순ㆍ최영림ㆍ윤주석ㆍ홍종명ㆍ황규백 등의 기라성 같은 대가들과 함께였다. 뉴욕에 내리니 모든 건물이 아찔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너무나 현대적인 건물들이었다. 그 건물들 앞에 서는 순간 영성은 후회하고 말았다. 자신이 가지고 간 그림은 모두가 지극히 촌스러운 초가집 그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1984. 50X60Cm. 캔버스에 유채.

 

되돌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순간 앞에서 영성은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초가집 그림 6점은 최고급 빌딩의 벽면에 내걸렸고 영성은 아예 눈을 감았다. 태생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뉴욕 관객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것은 바로 영성의 초가집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이 한국작가 6인전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에서는 '서구식 현대미술 시장에 나타난 한국인들'이라는 표제로 보도했다. 그 기사 속에서 "이 가운데 황영성은 강한 조형언어로써 시선을 사로잡으며 상쾌한 색채감각에 의해 자연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며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떠들썩하게 실린 것이었다. 일거에 영성의 초가집 그림들은 뉴욕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남김없이 팔려나가 버리고 말았다. 한국 초가지붕의 아름다운 색채와 구도가 현대문명의 극점에 선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려버린 것이다.


 

'남도의 화풍' 세계에 알린 '한국화단의 총아'

뉴욕6인전 이후 유명화가로 급부상 / 회색톤 '마을'→녹색톤 '농경도'로

 

 가족. 1994. 72×60㎝. 캔버스에 유채.

 

뉴욕전시 후 황영성은 세계 속 한국화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가장 남도적인 화풍을 세계적인 화풍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뉴욕 6인전으로 영성은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뉴욕전을 계기로 그는 한국적인 그리움의 뿌리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한국 속에서는 한국적 그리움의 정체가 뚜렷해지지 않는 법. 뉴욕을 기점으로 영국ㆍ독일ㆍ프랑스ㆍ노르웨이ㆍ덴마크ㆍ스웨덴 등지를 떠도는 내내 한국의 정체성을 가슴에 새겼다. 비로소 그리고자 하는 그리움의 본질이 선명하게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고향이었고, 생명의 근본이었고, 어머니의 품안이었다. 외로움의 지향점이 확실해진 것이다.


 

 가족여행. 1990. 45x53cm. 캔버스에 유채.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서울 예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예화랑은 진양욱 등의 남도화가들이 성황리에 데뷔전을 치른 곳이었다. 예화랑의 전시는 그를 유명작가로 끌어올리는 출발선이 되어주었다. 관훈동에서 강남으로 옮기면서 영성을 대표적인 뉴스타로 내세운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정식 데뷔전인 셈이었다. 이렇게 뉴욕에 이어 그는 한국에서도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그해 세계 속에 남도를 알리는 공훈을 인정받아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조선대 미술대학의 부교수가 되었다. 영성의 존재감으로 화단의 저울바늘이 크게 휘청인 한 해였다. 

영성의 회색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결핍감을 승화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모든 그리움의 귀향점이 어머니의 품과 자궁 안이듯 그는 그리움의 기점을 완성시키는데 노력했다. 붓끝에 남도의 온기를 적셔 한 획, 한 획 그어대며 마침내 그리움의 다리를 완성시켰다. 

 

=...발췌.....

 

출처 :풍기인삼 
 

작업 중인 작가의 모습.
 

쉬시린 중국서예연구원장(왼쪽에서 두번째)이 춘화추실이라는 글을 써서 황영성 화가(세번째)에게 증정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춘화추실(春花秋實)”.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열매를 맺어 추수한다’는 뜻이다. 

쉬시린(許喜林) 중국서예연구원장은 9일 황영성(黃榮性, 71) 화가의 진르메이슈관(今日美術館) 개인전 개막식이 끝난 뒤 열린 뒤풀이 장소에서 “황영성 화가의 그림을 보고 너무 감동해서 이 글을 썼다”며 직접 쓴 붓글씨를 들고 나와 황 화가에 선물했다. 

한국 화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의 대표적 민간미술관인 진르메이슈관(今日美術館)의 제1전시실에서 10일부터 20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황영성 화가의 그림이 중국인의 화심(畵心)을 사로잡고 있다. 

‘기호의 비밀(符號的秘密)’이란 주제로 열리고 있는 이번 황 화가 개인전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9일 오후 열린 개막식에 200여명이 몰린 인파로 느낄 수 있었다. 황영성 개인전을 기획한 황두(黃篤) 큐레이터는 “마을 소 닭 달 호랑이 숫자 등의 물상(物像)에서 아동적이고 질박함 정취를 추출하고 재해석한 뒤 추상성과 장식성 및 상징과 기하학적 기호들을 화면에 재구성한 것이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로 154cm, 세로 77cm의 '가족이야기' 작품 9개를 이어붙여 전시한 작품. 7억~8억원으로 팔릴 예정이다.

황영성 작가는 “자연과 사람은 함께 사는 가족”이라며 “함께 어울려 사는 과정을 축약해서 표현하다 보니 기호처럼 느껴지지만 그 기호를 보면 따듯한 한국의 자연과 함께 하는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황영성 화가의 ‘기호의 비밀전’을 여는데 기여한 김성현 커번광뎬(科本光電) 회장은 “황 화가의 작품은 100호 기준으로 5000만원 정도로 판매될 것”이라며 “중국 화가에 비해 한국 화가가 중국 시장에서 저평가돼 있는데 황 화가의 이번 개인전을 계기로 한국 화가가 중국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고 밝혔다. 

황영성 화가는 조선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국전에서 특선(1973년)상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제25호 몬테카를로 국제회화제 특별상을 수상했다. 1993년에는 금호미술상, 2004년에는 이인성 미술상을, 2006년에는 황조근조훈장을 받았다. 

한편 진르메이슈관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지 1년 뒤인 2002년에 진르그룹이 만든 민간미술관으로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사립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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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 - 잭슨 폴락 2017-11-10 0 3649
442 [이런저런] - 200만원짜리 그림 = 1800억짜리 그림 2017-11-10 0 2605
441 화가는 갔어도 미술계의 그의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2017-11-09 0 1731
440 [쉼터] - 가위질 몇번에 검은색 종이는 살아난다... 2017-11-07 0 1913
439 "누구가가 내 작품을 즐겼다는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끝! 2017-11-07 0 1330
438 [쉼터] - "길림시 호랑이왕" 화가 = "동북호랑이왕" 화가 2017-11-07 0 1598
437 "봄을 그리려면 봄의 느낌이 나야"... 2017-11-06 0 2349
436 가장 서민적인것, 가장 거룩한 세계, 가장 현대적인것... 2017-11-04 0 1689
435 화가들도 컴퓨터의 노예가 되고 있더라구ㅠ... 후ㅠ... 2017-11-03 0 2408
434 [쉼터] - 세상은 넓디넓고 세상은 불공평하다... 2017-11-02 0 1242
433 [쉼터] - 세상은 넓디넓고 세상은 매력적이다... 2017-10-31 0 1877
432 시작할 때 기하학적 립체도 수용할줄 알아야... 2017-10-31 0 2033
431 시도 "4분의 3"의 립상이 좋을 듯... 2017-10-25 0 2272
430 예술창작은 자연과 인간의 결정(結晶)에의 충동이다... 2017-10-24 0 2268
429 거꾸로 볼가ㅠ... 삐딱하게 볼가ㅠ... 2017-10-23 0 2270
428 바로 볼가ㅠ... 뒤집어 볼가ㅠ... 2017-10-23 0 4092
427 "봄, 여름, 가을, 겨울 - 사계"로 형상화한 신비로운 인물화 2017-10-23 0 3369
426 화가 다빈치가 자전거를 최초로 발상했다?... 아니다!... 2017-10-23 0 2018
425 유명한 본 종가집 그림은 새끼에 새끼를 낳는걸 알가 모를가... 2017-10-23 0 2305
424 "나는 한번도 뚱보를 그린적이 없다"... 2017-10-23 0 3473
423 7만 = 1억 2017-10-22 0 2504
422 세계 3대 박물관 하나인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보다... 2017-10-22 0 1381
421 미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초현실주의 화가... 2017-10-22 0 3632
420 [쟁명] = 세상은 넓고 그림세계는 요지경이다... 2017-10-22 0 2109
419 {쟁명} = "모나리자"는 말이 없다?... 말이 많다!... 2017-10-22 0 2366
418 {쟁명} = 칭찬 일색이던 사회 분위기를 대담하게 뒤번지다... 2017-10-22 0 2864
417 {쟁명} = 아방가르드적 락서 행위도 예술일까???... 2017-10-22 0 1906
416 {쟁명" = "수염 난 모나리자" 시집 잘 가다... 2017-10-22 0 2324
415 꽃은 그 언제나 말이 필요 없다... 2017-10-22 0 1761
414 세상에 버려질 물건이란 있다?... 없다!... 2017-10-22 0 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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