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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유} 전환, 하이퍼, 파괴 / 이경진 댓글:  조회:1725  추천:0  2018-05-05
{공유} 전환, 하이퍼, 파괴  / 이경진 1. 들어가는 말  *( )는 전부 주(注)이므로, 참고할 것. 이글은 2002.7월호에 발표된 글임.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듯, 2차원의 세계는 곡률(曲率)이 없으나 3차원 공간엔 곡률이 존재한다. 그래서 세 각의 합은 180°가 아니라 그 보다 커진다. 여기서 결정론의 환상이 무너진다. 지구는 3차원 공간이며 우주는 다시 4차원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곳에 가면 삼각형이나 사각형이란 형태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모든 게 휘어지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들은 지동설 시대에 교육을 받았으며, 삼각형 세 각의 합은 180°라고 배워왔다. 그들은 무슨 무슨 법칙이나 원리를 암기하며 성장해 온 세대이다. 아직도 그들은 확실성에 익숙하며, 중심과 주변, 주와 객을 따지는데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편이 아니면 남이거나 적이라는 편협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대, 질서를 무질서로 전환하는데 인색한 세대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비슷비슷한 사유의 한계, 상투적인 이념의 한계, 안일과 나태로 함몰된 철학성, 낡은 감수성, 고갈된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치열성이 사라진 자리엔 실험의식이나 새로움을 창조할 여력조차 남지 않는 법이다. 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기성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은 어떤가.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치유하고 극복할 대안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젊은 시인들을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의 기성세대처럼 비본질적인 문학의 행태에 안주하지 말고, 끝없는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실험의식으로 무장하길 바란다. 기성의 안일에 오염되지 말고, 새로운 상상력의 집을 지어주기 바란다. 그들의 선배들이 실패한 혁명가로 전락했던 원인을 제대로 읽고,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바란다. 혁신이 없는 전통주의에 물들거나 협소한 지방적 근성에 사로잡히지 말기 바란다.  이 글은 70년대에 출생하여, 현재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조망함으로써, 그들의 가능성을 진단하고, 특히 기성세대와의 변별성을 찾기 위하여 쓰여진다. 특히 상상력의 구조를 주목할 것이며, 그들만의 독특한 사유방식을 하이퍼텍스트 세대의 특징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작가 선정 및 작품 선정은 《문학과 창작》(2002. 7월호)에 의거했음을 밝힌다.  2.하이퍼 텍스트 세대의 사유  (하이퍼 텍스트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는 텍스트의 블록들(Roland Barthes는 이것을 렉시아〈lexia. 어휘소〉라고 불렀다)과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킨 전자적 연결점들로 구성된 텍스트를 나타낸다 : 조지 P 랜도우《하이퍼 텍스트 2.0》여국현 외 옮김, 문화과학사. 2001. p14.  하이퍼텍스트는 디지털 사회를 해석하는 중심개념이다. 하이퍼 텍스트는 매체와 장르를 초월한, 기존의 인쇄물 텍스트에서 한층 발전된 텍스트 형태이기 때문이다 : 류현주《하이퍼텍스트 문학》김영사. 2000. p32.)  우리는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으며, 시대의 인식소(episteme)가 변했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동요인은 디지털화와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때문이다. 이 시대는 중심과 주변, 위계질서, 그리고 선형성의 사상적 토대를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그것들을 다선형성, 결절점(nodes)  (결절점(nodes), 結節(결절)이란 살갗 위로 내민 망울이란 뜻. (nod)는 점의 머리(点頭)의 뜻. 따라서 결절점은 그물망의 매듭이나 바둑돌의 점들을 생각하면 좋다. 컴퓨터 전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듭과 점들은 좌우, 상하로의 수평적 확장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수직적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얽힌 무수한 관계의 매듭이 결절점이다.) , 링크(links), 네트워크와 같은 개념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텍스트는 기표들의 은하군이지 더 이상 기의들의 구조가 아니며, 시작과 끝이 없는 구조, 전복이 가능한 덩어리들, 어느 것이 중심이라고 명시할 수 없는 권위의 파괴를 주장한다. 따라서 텍스트는 한정되거나 결정될 수도 없다. 말하자면 작가 중심적이거나 구어적, 권위적인 글쓰기의 시대가 급격히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조는 이미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우주 탐사의 놀랄만한 성과들, 천문학과 물리학의 비약적인 발견에서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나 의 탐사 결과 태양은 태양계를 지키는 노쇠한 왕이었으며,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태양계 밖에는 다시 천만 개의 계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그런 사고야말로 유치한 ‘지방적 근성’ (칼 세어건의《창백한 푸른 점》민음사. 1996 에 근거를 둔다. 우주의 비밀이 벗겨질수록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지구가 우주의 대표성을 지니는 것 또한 아니란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세계의 보편적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중심적 독단에 빠져있거나, 세계의 중심이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고 생각하는 우매한 편견이 바로 지방적 근성이다. 동양의 고사에 요동지시(遼東之豕)란 말이 이런 상태와 흡사하다. (옛날 중국의 요동땅에 살던 농부가 돼지를 길러 새끼를 얻었는데 그중에 흰돼지 한 마리가 끼어있었다. 신기하여 황제에게 진상해야겠다고 황하를 건넜다. 그랬더니 황하 남쪽의 농가엔 흔해빠진 것이 흰돼지 아닌가) 이형기《존재하지 않는 나무》고려원. 2000. p154) 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가 정해진 전형을 요구하거나 권위나 체제에 순응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계질서를 요구하는 횡포이며, 거기서 혁명적인 상상력의 신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거울 안에 우울한 표정의 鐵男이 서 있었다  모공에서는 강철털이 솟아올라  온몸이 고통의 전율로 떨고 있었다  차고 단단한 車體와 같은 살갗 위로  꿈꾸는 달빛이 불길한 무늬를 그렸고  강철로 된 손톱이 피부를 뚫고 나왔다  그는 벨벳 커튼으로 달빛을 가려 막고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까닭 없이 배가 고팠다 견딜 수가 없었다  시계를, 핸드폰을, 라디오를,  VTR을, 텔레비전을, 컴퓨터를 먹어치운 뒤  鐵男은 꽃병 속의 도청기와  천장 속에 감춰진 몰래 카메라도 삼켜버렸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는 거리로 뛰쳐나왔다  군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 안의  怪獸들처럼 보였다 패스트 모션으로 움직이는  半人半獸들이 지나쳐 갔다  세계는 鐵男이 움직일 때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곤 했다  골목 어디에선가 외투, 중절모, 가죽 장갑이  빠져나와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킬러들의 螢光 눈빛이 벌레 소리를 내며  대기 중으로 날아올라 그를 찾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무쇠뿔이 솟아 있었다  견갑골 쪽에서도 금속성의 통증이 밀려 왔다  어디선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달렸다 거리의 모든 것들을 쓰러뜨렸고  부딪치는 모든 것들이 그의 망치 주먹에  부서졌다 네 바퀴 怪獸들의 연쇄 충돌,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13명의 兒孩들,  부서진 소화전 위로 뿜어져 나오는 물기둥,  찢어진 자동차의 앞자리에서는 용암처럼  눅진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 저지선이 설치되었다  앰뷸런스 소리, 경찰차 소리, 총 소리  人間 兵器는 자신의 벅찬 숨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견갑골 위로 통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장이지   장이지의 상상력은 하이퍼텍스트의 시대를 실감나게 구현한다. 그래서 낯익은 풍경들마저 낯설다. 저건 기성에서 보아온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선한 한 편의 디지털 영상이다. 그래서 한 컷 한 컷이 속도감 있게 흘러간다. 은 누구일까. 그건 장이지가 발굴해 낸 새로운 짜라투스트라다.  그렇다. 인류문화의 목표는 수평화된 행복에 있지 않다. 더 이상 이상국가란 부재한다. 오직 상황이 인간에게 부여한 고통과 상처를 딛고 일어설 개성의 천재, 짜라투스트라만이 필요하다. 그는 시지프스적 존재의 부조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문제적 주인공’ (루카치의 용어이다.)  이기도 하다.  때로 파괴는 창조보다 위대하다. 그러나 모두들 파괴를 두려워한다. 그것이 타성과 관습을 낳는다. 전통적이란 미명의 멍에를 씌운다. 그래서 시인은 관습의 파괴자가 되어야 한다.  현대를 규정하는 담론이 폭력이라면, 더구나 파괴가 절실해진다. 그래서 은 이 시대의 홍길동이며 장길산이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라 외로운 대중이다. 다수이면서도 동시에 혼자인 왜소한 인간이다. 현대의 공포와 저주에 맞선 불안한 인간, 그래서 그는 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이다. 이 멋진 반전을 보라. ‘자신이 왜 달리고 있는지’ 모르는 그는 소외된 현대인이며, ‘통증’을 느끼는 자다. 그는 누굴까. 무잡하고 황량한 시대의 시인, 그 슬픈 초상은 아닐까.  나는 걷는다, 명동의 벽돌로 된 육감적인  길을, 또각 소리를 내며, 그림자를  보며 걷는다, 내 침묵은 뒤뚱거린다,  “베벨 질베르토의 「탄토 템포(Tanto tempo) 있나요?”  묻고 나는 다시 침묵의 날갯죽지를 살핀다,  “만 칠천 원입니다.”, “고마워요.”  말 ‘하는’ 것보다 침묵 ‘하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랜, 아주 오랜,  나의 시는 자장가처럼 들린다, 독이 든,  나의 한국어는 모퉁이를 돈다, 나의  한국어는 외롭고 異國의 언어처럼  들리고 잿빛이고, 진짜 그렇다,  장이지 중에서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란 어휘의 작위성, (이 시대가 온갖 작위적인 것들의 결합이나 링크를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미지를 구성하기 위해 삽입된 억지스런 행위들이 그렇다.  내가 장이지의 시를 주목한 이유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 그건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낯선 상상력의 힘이다. 좀 거칠면 어떤가. 새로운 세대란 이런 발랄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개성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며, 방향 감각을 잃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는 화상 위로 떠오르는 정보들, 문자들, 그리고 다시 소실되는 화면의 구성을 시각화하고 있다. 그쪽에도 일정한 템포가 있을까. 사유의 방황이 존재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 템포란 시인의 자기투쟁을 암시한다. 자꾸만 단절되는 언어의 마디처럼 템포는 끊긴다. 끊겼다간 이어진다. 그것이 컴퓨터 화면의 속성이다. 그것은 배반의 언어에 대한 애정이며, 불구가 되어버린 모국어를 향한 연민이다. 그건 시인 내면의 ‘소리’이며 ‘그림자’다.  아니다. 그건 뒤뚱거리는 ‘침묵’이며, 사유하는 점들이다. 이 시에 빈번히 등장하는 부호들의 결집은 그래서 시각적 잔상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 잔상 효과란 무엇인가. 관습적 의미망의 해체와 중심 허물기가 그것이다.  그 겨울 내내 잠을 자도 羽化하지 못했다. 애벌레처럼 잔뜩 몸을 움츠리고 병실 창문으로 간신히 스며들던 햇살을 흰 옷소매로 털어 냈다 어머니 창문 좀 닫아주세요 다알리아 화분을 입에 물고 어머니가 병실로 들어왔다 약 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2월의 나무들, 날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만 들었다, 슬금슬금 장미 이파리 위로 기어 다니는 벌레의 뒷다리, 꿈속에서, 신경 세포와 세포 사이로 추락하는 벌레의 신음 소리. 잠자지 않았는데 간호사가 아침 밥을 은쟁반에 담아왔다 자기들끼리 키들거리는 간호사들, 어머니 제발 집에 가서 주무세요  306호 병실 사람들은 자판기 커피액처럼 한군데서 잠들었다 간호사 누나, 잠자는 주사 한 대만 놔주세요 아무 데나 쏟아져 있는 커피의 흔적, 늦게 잠자고 일찍 일어나 병원 앞마당에서 보건 체조 했다 창문 틈으로 나뭇가지가 만져졌다 새벽 이슬에 몸 적시고 있는 벌레들이 알약처럼 녹는 소리를 들었다 나무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옹이 박힌 다리로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나갈 수 없는 새벽, 철문으로 닫혀진 병동 끝에서 성장이 멈춘 나무가 되었다 곪아 가는 상처에 입을 대고 앉아 더 깊은 고름을 빨고 있는 나무가 되었다 잠자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걸 보았다  박진성   는 한없이 가벼운 세계, 곧 일상화, 획일화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 ‘나쁜 피’의 원인은 유전적 형질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 책임의 한 끝에 전통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환유인 ‘어머니’가 서있다면, 또 다른 쪽엔 생명의 연장을 위해 복용되지만 결국은 피를 오염시키고 마는 ‘약’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시의 근원적 갈등은 ‘어머니’와 ‘약’으로 수렴되는 현실, ‘병실’로 대치된 감금의 세계로부터 ‘羽化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그곳에 존재하는 세계상이란 그래서 환자의 모습이다. ‘약기운으로 버티고 있는 2월의 나무들’이나 ‘신경세포 사이로 추락한 벌레’가 그걸 대신한다.  그래서 그 현실은 불구의 모습이며, 뒤틀리거나 어긋나버린 세계다. 잠을 자도 꿈속으로 날지 못하듯 잠자지 않아도 아침이 오는 세계인 것이다. 이 시대란 전광석화같은 스피드, 광고의 유혹과 소비의 충동, 그리고 편리와 안락을 향해 문이 열려있다. 그래서 모든 게 풍족하고 화려하게 빛난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비판적 성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사회라도, 생산된 재화와 쓸 수 있는 부의 양이 어떻든 간에, 모든 사회는 구조적 과잉과 구조적 궁핍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과잉된 것은 신의 몫, 제물로 바치는 부분이 되거나 사치스런 지출, 잉여가치, 경제적 이윤 또는 위세과시용 예산이 될 수 있다. 어느 한 사회의 부와 그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것은 이처럼 미리 떼어낸 사치부분이다. 왜냐하면 그 부분은 항상 특권 있는 소수의 몫이며, 카스트나 계급특권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장보드리야르《소비의 사회》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1. p59.)  하지만 그것이 마냥 좋은 것인가. 시인 박진성의 세계관이 미더운 이유를 나는 먼저 밝혀야겠다. 그는 획일화된 욕망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 속에서 그가 발견한 건 ‘자판기 커피액처럼 한군데서 잠든’ 현대인의 모습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보편적 세계관, 객관적 질서로부터 이반된 사람이다. 객관적 질서 속에 끼어있는 상투성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같은 빛깔로 물드는 ‘커피의 흔적’이다.  시인은 누구인가. 병든 세계의 환부를 스스로 아파하며 ‘고름을 빨고 있는 나무’다. 그러므로 그는 외로운 소외자이며, 문명의 은택으로부터 버려진 ‘성장이 멈춘 나무’다. 누가 ‘벌레들이 알약처럼 녹는 소리를 들’을까. 어쩌면 그는 진심으로 이 시대를 연민하는 사람은 아닐까.  누가 젊은 세대의 사유를 가볍다고 속단하는가. 박진성은 다르다. 그는 기성세대의 문법에서 확실히 비켜선 채, 새로운 세대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티피컬한 매너리즘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시인과 오브제 사이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보라. 더구나 탄탄한 의미망의 결속력과 결구의 능력도 이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대목이다.  박진성의 빛나는 에스프리는 그 밖의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당신은 지금  유성신경정신과 창 너머에서 편지를 쓰고 있다  내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  공황장애 안내문 아래서  내 영혼의 인화지 같은 백지를  당신의 무거운 침묵으로 채워 넣고 있다  항우울제의 날들은 다 지나갔다고 쓰고 있다  거리에는 신경안정제 같은 눈발 날리고  유성신경정신과 전문의 박동희 의사는 다음 환자  박진성을 찾고 있는데  당신은 계속 편지를 쓰고 있다  항불안제의 불안함과 항우울제의 우울함 속에서  당신은 무덤을 파듯 볼펜으로  종이 위의 내 영혼을 파고 있다  한 삽 더 파면 심장, 또 한 삽 더 파면  心根… 자꾸만 깊은 곳으로  당신의 펜대를 집어넣고 있다  들어오세요 당신의 자리입니다,  좁은 여백 위에 썼다가 지운 글씨를 더듬는다  당신은 유성신경정신과 창 너머에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푸른 촛불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박진성 〈알프라졸람을 먹기 6분전, 혹은 6년전〉  의 경우를 보자. 시인에게 이 시대란 ‘공황장애’와 ‘항우울제의 날들’로 환기되는 신경질환의 세계다. 그러한 시대상황에서 마침내 시인 자신도 환자가 된다. 문맥 속에 끼어든 시인의 돌연한 출현은 ‘유성신경정신과’란 구체적 공간을 통하여 긴장이 증폭된다.  그러나 시인의 질환이 무엇인지가 밝혀진다. 애매하지만 그 질환이란 바로 시쓰기를 연상시키는 어떤 행위다. 그것이 세상과 변별성을 유지하는 시인의 진실인 셈이다. 심근경색(心筋梗塞)은 관상동맥의 통로가 막히는 병이다. 시인은 여기서 기발한 착상에 당도한다. 심근이 염통벽의 힘살이 아니라, 심근(心根), 곧 마음의 뿌리로 대치되는 것이다.  시인의 질환이란 마음의 뿌리에 이르는 통로가 막힐 때 신경정신과적 질병에 걸린다. 그러므로 그걸 치유하는 길은 ‘종이 위에 영혼을 파’거나 ‘펜대를 집어넣’는 일이며, 그곳이 환자(시인)의 자리가 된다. 그래서 수술의 흔적은 결국 ‘썼다가 지운 글씨’인 것이다.  병원은 가스관이 묻힌 사거리를 품고 있다 포크레인은 가스관을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애완견을 가슴에 품은 미망인은 신호를 기다린다 인부들의 손짓이 기사에게 세밀한 부위를 알려준다 농협 건물의 옥상엔 버리기 쉽지 않은 건축 자재들이 쌓여 미망인은 애완견의 머리를 자식처럼 어루만진다 동네 어귀 그 흔한 소문으로 나는 그녀의 치부를 동정했다 화재는 1년 전 일이다 보도블록의 잡초처럼 발길 드물게 솟는 상처들 섣부른 치기였다 관을 통해 가볍고 충동적인 가스는 땅속을 흘러 다니다 돌발적이다 담을 타고 오르는 등나무 줄기들 집요하다 나는 어제 저 사거리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나의 자학은 막다른 자괴에 있다 인부들은 낮술을 먹고 미망인은 횡단보도의 선을 밟지 않으려 엉거주춤 걷는다 가스관 위로 포크레인은 흙 한줌씩 넣는다 수술 자국 위로 돋은 실밥을 당겨보면 달빛 촘촘히 올라온다 매설은 애증이거나 욕망이다  최승철   최승철의 작품도 새롭고 낯설다. 그의 시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본다. 이것은 최승철의 바로 앞세대 시인, 박정대 시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최승철은 박정대와 구별되는 여러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과 암호를 몇 겹으로 매설하거나, 이야기를 집요하게 숨기는 은유적 전략이 그것이다. (박정대(1965~ )의 『단편들』(세계사. 1997) 속엔 〈거울 속에 빠진 양조위〉〈아비정전〉〈동사서독〉〈타락천사〉〈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등, 영화를 소재로 하거나 영화의 주변을 탐색한 작품들이 주종을 이룬다. 박정대가 기존의 영화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최승철의 이 작품은 시적 암시와 은유적 전략을 채용하여, 하나의 시나리오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시인은 왜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걸까. 그는 시적인 것의 마지노선, 시적인 상황과 비시적인 문법의 아슬한 경계를 안다. 아니다. 어쩌면 최승철은 시와 소설의 장벽을 허무는 시, 시와 영화의 틈새를 메꾸는 시, 그런 새로운 장르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반드시 최승철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양식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는 그만의 실험에 골몰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이런 방식의 시적 실험이 특히 이 시대 시인들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누가 영상미학을 거부할 것이며, 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한 영상을 간과할 수 있는가. 오히려 시와 영상은 상상력의 보완과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 시의 독특한 아름다움 또한 이런 영상 효과에 있다.  화소를 이루는 이 시의 구성방식도 특이하다.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거나 딴전을 피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거나 비약적인 연상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리게 하거나, 다양한 경로의 유추를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글을 쓰는 나 또한, 다양한 경로의 유추 가운데 한 경우를 이야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먼저 ‘가스관’은 ‘가볍고 충동적인’ ‘욕망’의 집결 장소다. 그것은 ‘등나무 줄기’와 마찬가지로 ‘돌발적’이며 ‘집요하다’ 중심 인물인 ‘미망인’은 ‘선을 밟지 않으려’고 바장이지만 위태롭고 힘겨워 보인다. ‘선’은 물론 탈선을 암시한다. 그녀는 ‘흔한 소문’으로 시달린다. 그 소문의 은유가 1년전의 ‘화재’다. 화자에겐 그녀의 치부마저 ‘동정’의 대상이다.  이제 잘 꾸며진 한 편의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여기서부터 시인의 상상력이 거침없이 빛을 발한다. ‘나’는 가스관이다. 아니 등나무 줄기다. 그래서 1년전 화재와 시적 화자는 깊은 관계를 지닌다. 그녀의 상처가 사실은 나의 ‘수술자국’이었으며, ‘포크레인’의 흔적이다. 소문의 잔해인 ‘화재’는 가스관이 묻혀있는 한 언제나 재발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화재는 ‘달빛 촘촘히 올라’오는 충동, 혹은 ‘애증’이거나 ‘욕망’인 것이다.  드라마틱하게 뒤엉킨 매설의 경로란 이처럼 상징적 인서트들, 또는 은유적 회상 화면으로 강화된다.  보이지 않는 나리, 나리, 개나리  여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아 고마운,  다음 생에서도 만나고 싶지 않은 독한 悽然  마디마디마다 곧 떠나도 될 날들  황사 속으로, 선잠 속으로 하늘이 내려와 또아리 틀면  잔가지에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열어  뭉게구름 같은 나비떼 만날 수 있으려니  나리, 나리, 개나리 속으로  당신의 혀처럼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새싹들  문득 다운 받은 봄 하늘에 봉분 쌓여  서러워진 자리, 나리, 나리, 개나리  최승철 〈개나리 입에 물고〉 중에서  이같은 최승철의 연상력은 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연상기법은 추억을 객관적 상관물에 투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잔 가지에 저장해 두었던 파일을’ 연다거나 ‘당신의 혀처럼 꿈틀거리며 피어나는 새싹들’에 에 이르면, 그의 투사능력이 얼마나 정밀한가를 눈치채게 된다. 새로운 시대의 시는 구문법이나 상상력 자체가 이처럼 새로워야 한다. 응당 최승철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1.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업고 신작로에 서 있었다. 커다란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었다. 짚가마니 썩은 냄새가 났다. 미루나무 아래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아버지 검은 뒤통수에 대고 나는 물었다. 저기,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 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셨다. 아버지는 구멍, 숭숭 뚫린 메주통, 곰팡이 포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까치집에서 달이 돋았다. 받아라 네 어미다, 아버지는 지푸라기로 여자를 엮어 내 목에 걸어주셨다, 어머니.  2. 첫사랑  나는 팔을 뻗어 달을 집어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졌고 순식간에 나는 깜깜해졌다. 나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그녀 뒤로 다가섰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어, 다시는 수음을 하지 않겠어, 나는 떨며 돌멩이를 움켜잡고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달이 내 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반짝, 꽃들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그녀가 웃었다. 내 몸 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 나는 들고있던 돌멩이를 들어 내 성기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내 몸에선 석유 냄새가 났다. 나는 흐느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게, 검게, 꽃물 드는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최금진   최금진의 신화적 상상력은 일품이다. 이란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 달이 가리워지는 자연의 신비다. 은 많이 쓰여진 소재다. 그중에서도 김명수의 (1977)이 돋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최금진의 은 그 시와도 다른 각도의 신화적 상상력을 지닌 시다. (김명수의 「월식」(1977)은 사나이인 지구가 곧 가해자이며, 여성인 달이 곧 피해자로 설정된 심리학의 전범을 보여준다. 여성은 남성에 의해 침해를 받음으로써 비로서 완성된다는 에로티즘의 차용도 볼만하다. (이경교《즐거운 식사》두남. 2002. pp45~46을 참고할 것)  이에 비하여 최금진의 「월식」(2002)은 지구의 그림자와 달의 겹침을 남녀의 성교행위로 대담하게 대치한다. 이때 성교는 남성의 죽음으로 그려지며, 성교의 유사행위로 수음이 연상되는 등, 앞의 시보다 공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최금진은 신세대적 주술을 즐겨 쓴다. 그만큼 언어운용도 구태의연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이미 독자적이다. 신세대 시인에게 요구되는 태도가 바로 이런 독자성의 구축이다.  에서 달은 어머니이며, 월식은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된 독특한 기억이다. 어머니는 과연 죽었을까. 그러나 그건 불분명하다. 달이 여성의 상징인 것은 오래된 관념이다. 그래서 월식과 여자의 죽음을 대치하였을 것이다. 그럼 죽은 여자는 어머니였을까. 그것도 애매하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성이 또한 현대시의 특징이다.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란 질문은 고도의 메타포어다. 그것은 월식의 종료와 함께 달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뜻하기도 하지만, 뜻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교 장면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박상륭이 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성교란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경교〈새로운 세기의 문학을 위하여〉위의 책. pp268~277을 참고할 것)  이러한 징후는 문맥 속에 치밀하게 삽입되어 있다.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는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건 바로 여근 속에 흡입된 남근이미지다. 달에 의해 삼켜졌던 아버지가 뱉아지는 순간은 월식의 종료 시점이며, 그것은 죽었던 어머니의 부활 시점이다. ‘받아라 네 어미다’가 그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는 지구의 대치이며, 어머니는 달과 동일시 된다. 더구나 ‘썩은 냄새, 메주, 곰팡이’의 냄새가 환기하는 성적인 무드는 으로 계속 연장된다.  에서 월식은 화자의 성적 욕망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에서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모방이며 동일시다. 그것은 달밤에 이루어진 ‘수음’에 대한 연상이다. 그 연상이란 행위하고 싶은 욕구와 수음으로 끝나버린 체험 사이에 달처럼 떠있다. 수음 순간의 몰입을 ‘깜깜해졌다’고 말한 것은 달이 곧 여성이며, 여성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그것이 월식의 어둠이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성욕이란 일종의 살해의식인 셈이다. 그러나 달과 내가 한몸이 되는, 곧 배설의 순간, 내가 그런 것처럼 달 또한 제빛을 회복한다. ‘내 몸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석유냄새’와 ‘꽃물드는 밤’이란 배설의 기억이며, 월식에 대한 뜻밖의 해석이기도 하다.  드라마적 구성과 상징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능력도 이채롭거니와, 감각적인 해석은 그의 뛰어난 자질이다. 에서 ‘모든 색의 혼합인 어둠’이라거나 ‘비릿한 석양’이라고 말한 것도 모두 이런 자질의 산물이다.  3. 주변인들  (여기서 주변은 변두리(outskirts), 변방 등을 뜻하는 말로 중심(中心)과 반대개념으로 쓰인다. 따라서 주변은 고정이 아니라, 유동적 태도이며 정신이다. 전근대적 사유의 출발이 중심 세우기에서 비롯된다면, 정보테크놀러지 사회의 특징은 중심의 해체로 정의될 수 있다. 그 출발은 로고스 중심주의를 무너뜨린 탈구조주의에서 그 전조를 찾을 수 있다. 인류의 기원이 유목민에서 출발하듯이 현대의 네티즌들이 웹써핑에 몰두하는 행위는 신유목민적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이 바로 주변인적 특성이다. 역사와 문화를 순환의 과정으로 볼 때, 문화는 중심의 옹호가 아니라, 주변의 탐색에서 그 풍요로움을 회복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시와 시의 생산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태도들이 그것들의 환경을 제공한 특정한 형식의 정보테크놀로지와 시적 기억의 테크놀로지에서 산출되었다는 걸 안다. 다만 우리는 그 시대 문화적 바탕에 기대어 읽고 쓰며 사유하는 주변인들인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한 것은 상황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감지하였으며 주변인적 숙명을 읽었던 것이다.  자기 중심적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것인지 정보의 테크놀로지는 일깨운다. 현대 물리학의 한 정점에서 타자중심적 사고, 곧 혼돈이론과 만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미래의 시가 나가야할 방향도 여기서 찾아진다. 나를 앞세울 때 시는 이야기로 전락하며, 장황한 설명으로 퇴행한다. 따라서 말만 많아진다. 그래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공허하거나 공소한 넋두리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결정론의 허울만 남게 되는 셈이다.  미래의 시는 선형성이 아니라 다선형성을 지향해야 한다. 진리란 결정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주변을 주목해야 하며, 타자중심적 세계관을 배워야 한다. 더 이상 환상은 실재의 반개념이 아니라, 실재의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자각하자. 시적 상상력은 과학이 미칠 수 없는 우주, 지하핵이나 바다밑을 향하여 뻗어나가야 한다. 시의 형식과 내용도 다채로우며 자유분방해야 한다.  과거의 어떤 유형에 종속되지 않아야 하며, 독자나 평론가의 구미에 응하지 않아야 한다. 그 근거를 밝히면 이렇다. (강한시는 상식적 삶과의 관계나 요구로부터 분리된 영역 안에 존재한다.) Rorty : Beyond Postmodern Politics. Routledge. 1994. p48.)  (독자로서의 대중이나 독자로서의 평론가들은 작품의 1차 생산자가 아니다. 더구나 대중에겐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을 뿐 창조하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경교. 앞의 책. pp298~299 참고할 것.)  가능하다면 과거와 전혀 다른 실험의식으로 충만해야 한다. 나는 분에 넘치게도,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에게 이 점을 당부하고 싶다.  사랑이란 별 게 아니더라구요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라는 세 가지의 화학물질이 분비돼 형성되는 일종의 정신 상태이죠 이 화학 물질이 분비된 뒤 2년 쯤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지요 그러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여자의 경우에는 남자보다 화학 물질 생성이 느리다고 하지요 당신 남자의 대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는 지극히 이성적이지요 2년 뒤 당신 남자의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고 있을 때 당신의 뇌에서 옥시토신, 도파민, 페니레시라민이 분비되고 있는 거예요  슬퍼하지 말아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잖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요 시간이 약이에요 2년 뒤에는 당신에게도 항체가 생성될 테니까요  박서진   박서진의 상상력은 분업화 시대, 인터넷 혁명의 시대 상상력이라 부를만 하다. 세밀한 분석, 하나의 관념을 집중적으로 분해하려는 태도가 그러하다. 이것은 모든 개념이 정밀화, 속도화된 인터넷 정보의 산물이며 소프트 웨어 시대의 반증이다. (여기서 비트(bit)와 나노세크(nano sec) 비트(bit)는 컴퓨터의 데이터 통신상 최소단위. 인간으로 비유하면 하나의 세포에 해당하며,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의 최소단위 원자와 흡사한 개념. 나노 세크(nano sec)에서 sec는 second, 즉 ‘초’의 약어. 나노는 그와 반대로 아주 짧은 찰나에 비견될 수 있다. )  로 상징되는 단위의 축소와 시간의 축소가 가능해진다.  이 시대란 통합이 불가능하며, 전인(全人)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감성적 측면에서 사랑을 해석하는 대신, 과학적 정보방식으로 사랑을 대치한다. 느린 템포의 시적 진술은 정보를 유출하기 위해 시인이 차용한 전략인 셈이다.  말하자면 사랑을 원거리에서 조망하던 과거와 달리, 그는 세포와 분비물에 대한 감응, 그리고 시간과 항체의 상관관계로 사랑을 해부한다. 가히 현미경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사실은 디지털 사회를 해석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작품 에서 소리와 시간을 집요하게 추적한 태도도 바로 그것이다.  컴퓨팅의 특징이 모든 정보를 물질적 표면 위에 물질적 표시로 저장하기 보다 전자적 약호들로 저장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박서진의 시에서 독자가 만나는 ‘사랑’의 경로는 여러개의 블록들과 연결점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텍스트성이다. 독자들은 그의 시와 연결된 가상적 링크 속에서 자극과 반응을 나타내면 될 뿐, 어떤 결정도 유보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연은 거슬린다. ‘슬퍼하지 말아요’ ‘시간이 약이라고 그래요’에서 독자를 간섭하려는 의도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우리시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전형적인 설명이다.  열린 시의 가능성이 하이퍼텍스트 세대의 상상력이라 한다면, 더구나 그것이 디지털의 속성이라면, 그렇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는 앞의 시들과 달리, 너무나 구시대적 발상으로 일관하고 있다.  막이 오르자  한 남자가 칼을 갈고 있다  푸른 부싯돌에 달빛이 서리고  쭈그린 남자는 비장했다    남자는 아직도 칼을 가는데  수염이 허연 그의 사부가 무대에 나와  한수야, 네 원수는 이미 늙어서 죽었다  와하하하하!  칼은 난초처럼 빛나게 허공을 가르는데  방청객들은 박수를 치면서 웃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폭폭한 얼굴로 대문을 열어주려  꼬부랑 꼬부랑 걸어 나온다  박수 소리는 어디에도 없는데  적들은 구름 보다 빨리 늙고  나는 그 비운의 칼잡이처럼  중얼거리는 것이다  저것은 누구의 얼굴인가  저것은 누구의, 칼자국인가  이지현   젊은 시인들의 감각은 역시 다르다는 느낌을 이지현의 시에서 본다. TV에서 본 프로그램도 시가 된다. 이지현의 문장력, 어휘구사력은 새롭다. 그건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하는 첫 번째 자질이다.  시인에게 한맺힌 원한이란 무엇이며, 원수는 또 누구인가. 의 도입부에서 이미 그 전제가 주어진다. ‘원수’란 표적의 상실과 ‘박수’ 사이의 허탈감이야말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 사이의 ‘차연’을 떠오르게도 한다.  ‘칼은 난초처럼 빛나게 허공을 가르’다니! ‘무사’와 시인 사이엔 어떤 상관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원수’의 자리에 대치된 ‘아버지’의 등장을 기억하자. ‘적들은 구름보다 빨리 늙’는다지 않는가.  저질 코메디는 어떻게 고상한 시가 되나? 여기서 시인의 재구성 능력, 소재를 버무리는 독특한 안목과 만난다. 제2연을 날렵하게 끼워넣어 시인은 자신의 기억 속에 도사린 트라우마를 부각시킨다.  이거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다. 실존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이며 에토스에 대한 전복적 반격이다. 이 시를 새로운 충격으로 흡수하게 하는 힘은 이러한 전복에서 우러나온다.  그것은 습성화된 관습을 빗나가게 만드는 시인의 분방한 상상력 때문이다. 이것이 젊음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로 환유된 기성에 대한 적의조차도 눈부시다. 권위와 폭력에 대한 그 저항은 아름답다. 의당 젊은 시인은 그래야 한다.  그러한 신세대적 감수성은 마침내 ‘신은 발이 네 개’란 잠언을 낳는다. 하지만 은 지난 시대로 갑자기 퇴행한 느낌이다. 그것은 기형도식 우울과 감상으로 몸이 쏠린 탓이다. 시인의 모습이 갑자기 왜소해진다.  나뭇잎 아래로 여자가 지나간다.  바람이 분다.  큼지막한 잎사귀를 젖히고 간다.  여자가 지나간다.  파란 열매가 송이송이 맺혔다.  여자는 잎사귀 아래로 지나간다.  바람은 불기도 하고  안 불기도 한다.  대신 여자의 소매 없는 원피스가 하얗게 나풀거린다.  여자가 지나간다.  달콤하고 물기 가득한 열매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저 가고만 있다.  여자가 벌써 저만큼 가고 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문지방을 밟고 선 그것처럼.  자꾸 저만큼 가는 여자는 조그맣기도 하다.  윤예영   윤예영의 작품에선 미로찾기, 혹은 수수께끼적 상상력이 엿보인다. 생활양식이란 본질적으로 수수께끼의 영역이며, 삶이 미로찾기의 과정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그것은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든 풍경이란 우리 눈의 조리개를 거치는 동안 수용되거나 배제된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 자체가 이미 선택적 여과를 거친 정신적 현상이다. 이 시는 시인의 해석에 의해 새롭게 의미화된 내면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숨은 그림의 음화와 양화처럼, 의미는 담담하면서도 신비롭게 교차된다. 나뭇잎과 여자가 길 양편으로 펼쳐지고,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아니다. 길을 이루는 건 열매나 아지랑이다. 아니다. 길을 가는 건 여자다.  컴퓨터 화면 위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동영상처럼 시인은 일체의 관여를 자제한다. 시인의 판단은 유예되거나 정지된다. 이러한 에포케의 설정이란 세계에 대한 시인의 태도와 직결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긍정과 부정의 교란일까. 양가치적 심리의 착란일까. (희랍철학에서 유래된 판단중지(epoke)와 심리학에서 ‘망설임과 머뭇거림’을 뜻하는 양가치 심리(ambivalence), 그리고 혼돈(chaos) 이론의 중심개념인 비예측성 사이엔 놀라운 일치와 유사성이 엿보인다. 서로 다른 학문의 영역 안에서, 서로 이질적인 동기와 개념으로 만들어진 이 용어들이 궁극적으로 수렴하려는 의미는 인과론적 결정론과 확실성에 대한 부정이며, 실재와 법칙으로 규정되는 리얼리즘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걸까. 자연의 요소들, 모든 대상들, 이 시대를 구성하는 의미들, 그 모든 것들은 사실 확정할 수 없으며 예측불가능한 비예측성을 전제로 한다. 시인의 안목이 이런 배후를 지니고 있다면, 그의 사유는 신뢰할 만 하다.  를 보면, 나의 이런 예감은 어느 정도 근접한 것으로 보인다. 굳이 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양파를 ‘자기를 벗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대상으로 해석한 걸 보라. 이 시인이 차용한 미로와 수수께끼는 감각의 편리함을 떨쳐냄으로써, 얻어진 성찰의 산물이다. 하지만 동화적 발상이 장황한 설명과 뒤엉킨 건 이해할 수 없다. 지루하거나 공허하다는 건 깊은 고민만이 풀 수 있는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소리 하나가 나의 뒤꼍을 슬그머니 지나간다. 발길 뜸한 영선암 처마 끝에 깃들이는 풍경 소리 같은 영혼이 마음의 목젖에 고요히 내려앉는다, 깃을 턴다. 뒤돌아보니 블라인드 몇가닥 열린 문틈으로 빠져나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나부끼는 바람의 속살을 파고들고 있다. 할퀴어대는 손톱질이 격렬하다. 끌어안는 손아귀의 힘줄이 완강하다. 보지 않고 들을 때에 한없이 부드러웠던 가락, 영혼의 목젖을 부드럽게 이완시키던 소리의 배후가 서울 한복판 빌딩의 9층 창턱에서 찢겨 너덜거리고 있다. 저 소리의 참혹한 장면을 맞바라보는 순간, 이로써 관계 하나가 시작되었다.  김지혜   존재란 관계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타자의식에 대한 주문이다. 물론 관계의 양상이란 복잡하고 미묘하다. 시인이 포착한 것은 뜻밖에도 ‘소리’와의 ‘관계’다. 그리고 그 소리의 배후에 ‘바람’이 있었다는 확인이다.  바람은 남성성으로 각인된 그리움이거나 상처이며, 무의식적인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을 뒤흔드는 아니무스이거나 ‘격렬함’으로 환유된 체험이다. 김지혜는 느낌을 구상화하거나, 하찮은 장면을 전의식의 깊이로 확장하는 연상능력이 뛰어나다.  대상에 대한 세밀한 묘사야말로 이 시대의 정서에 부합된다. 현대성의 두드러진 한 징후를 성(性)으로 간주할 때, 그 미세한 감각의 세부 속엔 에로티즘이 숨어있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미지의 행간에 이야기를 삽입하는 테크닉도 수준급이다.  문제는 지나치게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이런 부류의 시들을 우리는 80년대 중반이후 많이 읽어왔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자기만의 깊은 철학성이 길러진다면, 우리 시의 미래도 얼마나 빛날 것인가.  기쁨의 하늘로 뻗은 팔만큼 슬픔의 물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반짝이는 잎새와 흩날리는 가지를 가진 나는 이따금 물 속을 응시한다 슬픔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풍성한 물이끼를 헝클어 다슬기와 버들치를 감추어주고 부드러운 진흙을 풀어 바닥을 가려 준다 슬픔은 천천히 가라앉는 그림자를 품으면서 부드러워 진다 빛은 물을 거울로 만들지만 어둠은 물을 뚫어 보는 눈을 갖는다 나는 빛과 어둠 속에 뿌리내리고, 슬픔을 길어 올려 파릇파릇한 잎새를 피워 낸다  이수정   보들레르는 교감의 특징을 매음의 상태로 풀이한 일이 있다. 이 경우 그는 대상과 시인의 영혼이 한몸인 상태를 꿈꾸었을 것이다. (보들레르(Baudelaire)는 교감(correspon dance)의 1차적 특징을 매음(prostitution)으로 정의하고 있다. 〈김붕구. 보들레에르. 문학과 지성사. 1982. p117〉)  이때 매음의 상태란 성교의 순간처럼, 자신과 상대방의 경계를 잊는 무아지경을 뜻한다. 좋은 시 속에서의 교감운동은 이처럼 시인과 오브제가 한 몸을 이루어, 감정과 감각이 온전히 교환하는 것이며, 교류하는 걸 뜻한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인가.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시인이 흘려야 하는 감각의 피는 어떻게 보상을 받을 것인가.  이수정의 시는 완벽한 교감을 보여준다. 시인과 나무는 이미 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있으면 햇빛을 향해 뻗어나가는 잎새의 꿈이 깰까 두렵다. 시인과 나무는 한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무다.  시인에게 향일성의 자리는 어디일까. 영감의 세례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자리가 그곳은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상태 또한 쉽게 오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묻는 시인의 내면은 감상의 눈부신 절제에 다다른다.  그래서 어조는 나긋나긋하며, 정서는 따스하다. ‘슬픔은 그림자를 품으면서 부드러워 진다’ 독자인 나 또한 시인과 둘이 아니란 착각에 빠진다. ‘물을 뚫어보는 눈’을 통해 ‘우는 새의 슬픔이 하늘 끝으로 가서 묻힌다’ 는 걸 보았으리라. 터질듯한 정막의 힘, 독자의 감성을 뒤흔드는 힘, 그건 이수정의 무기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혹한 부탁이 있다. 이건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나의 애정이란 걸 헤아려주면 고맙겠다. 이글의 테마는 젊은 시인들에 대한 변별성 찾기다. 지금까지 그걸 말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젊지 않다. 전대와의 차별성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전통이란 명분에서 보면 이 시는 흠잡을 데 없다. 그러나 전통은 언제나 침전과 혁신의 상호작용이란 사실을 잊지말자.  나의 방은 물이 아니랍니다.  나를 하늘가에 매달아 주세요.  동그란 나의 방도 같이 매달아 주세요.  봄이 맴도는 가지 끝  맺힌 목련 봉오리 옆에 나란히  나의 방은 물이 아니랍니다.  너무나 말개서 아무나 들여다 볼 수 있는 나의 방은  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를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높고 높은 하늘가에 매달아 주세요.  햇볕이 나의 방을 동그랗게 데우면  가장자리부터 한 숨씩 한 숨씩 날아가고  나만 가지 끝에 매달려 있겠죠.  한때 내 방이었던 투명한 잔해들이  주위를 떠돌다가 소멸되는 걸 바라보며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飛) 연습을 할거예요.  완고하게 움츠린 목련이 피어나는 날, 함께  윤지영   윤지영의 감수성은 예쁘다. 맑고 깨끗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시인의 열망은 혁명적이다. 어항을 거부하는 물고기를 통해 시인의 세계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집이 물이라고 하는 등식 또한 하나의 상투적 관습이다. 그걸 새롭게 바라보면 물은 물고기의 생존공간이 아니라, 물고기를 억압하는 감옥이다. 노자에 ‘물고기는 물에서 죽는 놈이 더 많다’고 했던가. 젊은 세대의 시를 죽이는 것이 혹시 그릇된 전통주의는 아닐까. 전통주의란 더 이상 안온한 거처가 아니다. 그래서 혁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을 죽이는 건 무얼까. 시인은 시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지만, 시 때문에 죽어가는 자들은 아닐까. 물고기가 물이라고 하는 약속의 땅을 떠날 때, 시인의 빛나는 투쟁은 새로운 상상력의 거처를 마련한다.  물고기가 나무를 그리워하거나, 목련처럼 꽃피고 싶을 때, 그건 바로 상투성의 세계로부터 이탈하려는 시인의 욕망인 셈이다.  하지만 이 시는 어떤가. 지나치게 단조롭지 않은가. 그러한 단조로움이 마음의 평화를 약속한다 하더라도, 그 평화가 더 이상 변화의 시대를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거듭 밝히거니와 새로운 세대 시인들은 낯익은 정서로부터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개성이란 바로 변화와 혁신을 의미하며, 그러한 혁신의 몸부림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 시의 미래 또한 과거의 반복만 남는다.  새로운 세대의 시인들이 유념해야 할 한가지만 더 이야기하자. 세계나 대상을 향한 포커스를 좁혀보자는 것이다. 광범위한 시야, 전인적인 태도, 느슨한 감상주의, 권위적 발상 등은 이 시대의 사유와도 크게 어긋난다.  사실은 포커스가 세부를 지향할 때만 개성적 표현과도 가까워질 수 있다. 광범위한 시선이란 보편적 테마란 말과 짝을 이루며, 축소되고 정밀한 발상은 개성적 인식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4. 주문들  우리는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과 관계없이 이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 몫은 역시 젊은 세대의 시인들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혁명 이전의 세대를 추종할 명분이 없다. 그리고 누구도 그걸 요구해선 안된다. 이미 전 세기와 구별되는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진행중인가.  모든 분야에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건만 문학만은 언제나 유유자적이다. 하지만 전대의 사유에 머물기엔 한 세기가 너무 길다. 아니다. 일 년도 너무 길다. 여러분 스스로 새시대적 이념을 창조하라. 창조적 파괴란 빠를수록 좋으며, 그것은 아름다운 파괴다.  아직도 전시대의 문턱에 안주하거나, 그 시대의 향수에 기대고 있다면 그는 진실로 새로운 세대의 시인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그들을 핍박하거나 억누를 권리가 없는 것처럼 젊은 시인들 역시 그들을 모방하거나 추종할 이유가 없다.  시는 설명과 이해의 수순이 아니라, 수용과 감응의 차원이다. 젊은 세대의 상상력이 그만큼 낯설고 생경하다 하더라도 기성세대여, 그들을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새롭지 못한 걸 나무래자. 우리에겐 신인을 제대로 알아보는 이 필요한지 모른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며 나는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형식적인 칭찬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상처를 받았다. 새 세대 시인들의 전향적 자각 여부에 우리 시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글은 명지대학교 이경진교수의 글입니다. [출처] 전환, 하이퍼, 파괴 |작성자 caea 키즈  
[스크랩] 자유로운 결합 /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글쓴이 이현숙   자유로운 결합 /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나의 아내에게는 장작불같은 머리카락이  여름 하늘의 마른 번개같은 생각들이  모래시계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범에 물린 수달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고광도 행성의 화환과 꽃리본같은 입술이  백토 위에 남겨진 흰쥐의 족적같은 이빨이  불투명 유리와 황갈색 호박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비수에 찔린 제물의 혀가  눈을 깜빡이는 인형의 혀가  전무후무한 보석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어린아이의 글씨획같은 속눈썹이  제비둥지 가장귀같은 눈썹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유리창에 서린 김과  온실 지붕의 기와같은 관자놀이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얼음 아래 돌고래의 정기를 지닌 샘과  석회질 평원같은 어깨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성냥개비같은 손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행운의 하트 에이스같은 손가락을  베어낸 건초같은 손가락들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세례 요한 축일의 밤과  쥐똥나무와 엔젤 피쉬 둥지와  담비와 너도 밤나무 열매같은 겨드랑이가 있다  밀과 방아의 혼합같은  수문과 해수 거품같은 팔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폭죽같은 다리와  시계와 절망의 몸짓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딱총나무의 목수같은 장딴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성명 이니셜 같은 발이  물 마시는 작은 참새의 발 열쇠 꾸러미같은 발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미정백의 보릿단같은 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급류 하상에서의 만남같은  황금 계곡의 목구멍이  밤의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해변의 둔덕같은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루비 항아리같은  이슬 머금은 장미의 분광같은 유방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세월의 부채살같은 아랫배  거대한 발톱같은 아랫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수직으로 도망가는 새의 등이  수은의 등이  눈부신 등이 있고  잘 세공된 보석과 젖은 백묵같은  우리가 비워버린 술잔의 추락같은 목덜미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작은 곤돌라같은 엉덩이  샹들리에와 화살깃의  섬세한 균형의  하얀 공작의 우간같은 엉덩이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사암과 석면의 볼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백조의 등짝같은 볼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봄의 볼기가  글라디올러스같은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사금 광상과 오리너구리의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오래된 봉봉사탕과 해초같은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거울의 성기가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이  보라색 갑옷과 자침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대초원의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감옥속 마실것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도끼에 패인 장작같은 눈이  물과같은 공기 대지불과같은 차원의 눈이 있다  (자유로운 결합),1931, 갈리마르 출판사  여기 내가 좋아하는 브르통의 언술을 덧 붙인다  시인은 문장 속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자신에게 신호를 보낼수 있는 의미 심장한 우연의 일치들  기묘한 유사점들을 주의 깊게 포착하는 일종의 감시병이 된다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표현 가능한것과  표현 불가능한것, 숭고함과 저속함이 상호 대립으로  인지 되기를 멈추는 한지점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주관과 객관,  꿈과 현실의 이원성을 제거할수 있다  서정성의 발현을 좌우 하는것도 다양한 효과를 지닌  어떤 풍부한 긴장이다  때때로 작가의 개성이 거세된 엄숙한 표현은  탁월한 문장의 정련과 언어가 지닌 잠재적인 힘에의  전적인 의존 사이의 교차를 통하여 자신의 노래를  변주하여 시의 골격을 진동시키는 어떠한 감정에  갑자기 순종하는 양상을 보이기도한다  그를 고찰 하면서 빠질수 없는 단어가 있다  지루할지 모르지만 간략하게 나마 몇자 발췌해 적어본다  자동기술  초현실주의 운동 속에서 자동기술의 역사는 끊임없는  불운의 역사였다 사실상 자동기술의 이론적 실천적  난점들은 너무나 많다( 어떻게 동질성을 확보 할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상이한 성격을 지닌 언술의 토막들이  아주 빈번하게 발견 될수 있는 자동기술된 언술 속에서  이 언술을 구성하는 제 부분의 이질성을 어떻게 극복  할것인가? 중복과 누락은 어떻게 할것인가? 연상되는 것을  무한정 기술할수 없다면 어디쯤에서 중단해야 할것인가?  청각적 인것에서 시각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대단히  난삽 할수있는 구절들을 어떻게 기술 할것인가? 등등)  그러나 이러한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자동기술은  그 근거가 되는 목적 때문에 여전히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전리품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초현실주의의 특징은 잠재의식의 전언 앞에서  모든 정상적인 인간들이 전적으로 동등 하다는 것을  선언했다는 것이며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이 무의식의 전언이 반드시 몇몇 사람들의 전유물로  간주 되기를 그치고 자기 몫의 요구는 오로지 각자가  책임져야할 인류의 공동 유산이 되리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은  모두에게나 각자에게 비밀스런 무의식의 세계를 밝혀주는  수단 그 자체가 될수있으며 초 자연적인 것은 조금도  갖고있지 않는 이 언어를 스스로 마음껏 이용할수 있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절대적 가능성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해 주고 싶다  죽은 놈 불알 만지듯이 너무 오래된 관념 가지고  너무 떠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브르통 이후 전세계 시단은 초현실주의로  확 덮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도 마찮가지 였고요  며칠 있다가는 엘런 식수 라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페미니즘의 이론가가 쓴 페미니즘의 이론에서  빼놓을수 없는 메두사의 웃음이라는 글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억압 되는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남성 중심적인 언어와 사상의 구조들 즉 온갖 이원론과  위계적 질서화 등에 도발적인 방식으로 의문을 던지는  글 입니다  사실 엘런식수는 너무너무 예뻣습니다  캬트린느 드뇌브 인줄 알았다니까요  캬트린느 드뇌브는 테마 창고에서 할께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 -초현실주의 운동의 영원한 맞수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서구 문명과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정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전통적인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현하려 한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정신 운동이다. 이 운동을 이념적 차원에서, 그리고 현실적 차원에서 주도한 중추적 인물이 앙드레 브르통 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924년에 발표한《쉬르레알리슴 제1차 선언》에서 초현실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쉬르레알리슴: 남성 명사. 순수한 정신의 자동현상으로서, 이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입으로 말하든 붓으로 쓰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 간에 사고의 참다운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 이것은 또 이성에 의한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받아쓰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은 이 선언문은 꿈과 무의식에 대한 일종의 권리선언이라 할 수 있다. 브르통은 아폴리네르가 처음 사용한 ‘쉬르레알리슴’이라는 용어를 빌어, 이른바 ‘자동기술’(ecriture automatique)방법에 의해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순수한 사고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다.   개인적인 삶과 무의식적인 내면세계, 그리고 시를 통한 진정한 자유의 획득에 초점을 맞추었던 이 운동은 그저 미학적이고 관념론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점차 현실적인 사회로 눈을 돌려 개인적인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개혁이 필요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심은 시의 영역을 넘어서 미술 ․ 영화 ․ 연극 등 대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르로 확산되며, 나중에는 직접적인 사회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마르크스 이념에 기초한 공산당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기까지에 이른다.   20세기의 혁명적인 정신 운동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론적 대부로서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길게 설명할 겨를이 없다. 다만 그가 1919년에 첫 시집《공설 전당포》를 출간한 이래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충실히 실천한《1920.자장》등을 비롯하여 환상적인 사랑의 신비를 그린 작품 등에 이르기까지 아주 고집스럽게 초현실주의의 원칙을 끝까지 준수한 ‘초현실주의의 산 역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은 1896년 프랑스 탱슈브레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던 중 프로이트 심리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군의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다다이즘에 이끌렸다가 쉬르레알리슴 운동을 전개, 잡지《문학》, 《초현실주의 혁명》을 창간 ․ 주재하며《쉬르레알리슴 선언》을 발표했다. ‘자동기술법’에 의한 최초의 작품《1928.나자》를 발표하고 명실공히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론적 ․ 실천적 대표자가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녹는 물고기》《자유로운 결합》《연통관(連通管)》《미친 사랑》등이 있다. [출처] [스크랩] 자유로운 결합 /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글쓴이 이현숙|작성자 옥토끼  
디지털 적 관점과 특성으로 해석한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 와(詩第十一號)                                                                                                                                                  심 상 운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 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 "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산산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3    디지털 시론의 실제 외 3편 / 이선 댓글:  조회:1432  추천:0  2018-02-03
디지털 시론의 실제 -회화 기법을 중심으로   이선     Ⅰ. 서론     1. 디지털 시의 정의     ‘디지털 시란 무엇인가?’   거부와 부정을 하면서도 디지털 시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관심주제가 되었다. 세인의 관심과 비난은 디지털 시가 기존의 시와 어떤 변별력을 갖는지 증명해보이라고 한다. 디지털 시론은 새로운 실험시의 존재증명을 위하여, 시문학 시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시인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론은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과도기적 과정에 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여러 시인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다.   오남구는 이상의 시를 디지털적으로 분석하여 ‘디지털 선언’을 하였다. ‘탈관념’과 ‘염사’ ‘접사’ ‘사진찍기’ 기법을 디지털 시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타계하기 직전, 오남구는 그의 시론이 담긴 시집 『빈자리 X 』를 디지털 실험시로 세상에 내 놓았다. 그러나 오남구의 시가 디지털 시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남구는 ‘어떻게?’라는 물음표를 던지고 떠났다.   심상운은 오남구의 디지털 선언에 컴퓨터 용어를 차용하여 새로운 디지털 시론의 정의를 정립하였다. 심상운은 디지털을 컴퓨터의 최소단위(unit)들의 ‘합성’과 ‘분리’로 인식하여 ‘모듈’ 이론을 시에 도입하였다. 또한 문덕수가 주장한 새로운 시론 ‘하이퍼텍스트 시론’에도 새 정의를 정립하였다. 인터넷의 ‘링크’의 기능과 ‘리좀’을 하이퍼 시론에 도입하여 ‘양방향성’의 ‘교환’ 이론을 정립하였다. 또한 심상운은 아날로그 시를 ‘단선구조’의 시, 하이퍼텍스트 시를 ‘다선구조’의 시로 정의하여 ‘의미 시’와 ‘무의미 시’로 차별화하였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를 동일 개념으로 파악하여 다수의 논문에서 용어사용을 혼용하고 있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론과 하이퍼 시론에 맞는 시를 실험적으로 창작하여 발표함으로써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에 객관성과 구체성을 부여하였다.    문덕수는 기존의 하이퍼 소설론을 차용하여 을 주장하였다. 문덕수의 ‘하이퍼 시론’은 포괄적이고 광범위하여 추상적이던 디지털 시론을 축소하고 보다 분명하고 명확한 범위를 설정해 주었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론에서 주장한 컴퓨터의 ‘모듈’과 ‘리좀 이론’을 하이퍼 시에도 대입하였다. 또한 새로운 ‘무의미 사물시’를 발표하여 문덕수의 ‘무의미 시론’을 증명하였다. 문덕수의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간단히 살펴보자.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가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그러나 오남구와 심상운, 문덕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시론은 아직 완전하게 정립된 것이 아니다. 하이퍼 시론이나 디지털 시론은 시론이 작품으로 완성되어 나타날 때까지라는 제한성을 갖는다.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는 새로운 구조를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적인 것이 안정되어 획일적인 포지션을 가지면 새로움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끝없는 실험정신이 요구되는 것이 디지털 시다.   문예사조는 작품이 선행하고, 작품에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디지털 시의 경우 시론이 먼저 주장되고 시가 후속으로 창작되었다. 시론에 맞는 시작품이 아직 실험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과정에 있으므로 앞으로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을 기대한다.   디지털 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정의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지금은 디지털 시 대신 하이퍼 시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디지털이란 말이 너무 광범위하고 전자적이기 때문이다. 하이퍼는 구체적이고 범위가 더 한정적이며 명시적이다. 본 장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광범위한 디지털 시에 대한 정의를 잠시 뒤로 미루고자 한다. 오히려 디지털 시의 기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으로 디지털 시에 대한 정의를 완성하고자 한다.          2. 디지털 시의 기법(방법론)     디지털 시의 정의는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의 시론을 토대로 간략하게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래도 ‘과연 어떤 시가 디지털 시란 말인가?’라는 의문점을 갖게 될 것이다. 본 논문은 예시작품을 분석하여 어떤 요소들이 디지털 시를 구성하는 조건인지 밝혀내어 새로운 디지털 시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한다. 디지털 시와 아날로그 시의 차별화된 창작 기법과 방법론을 밝혀서 분류의 기점을 세우려는 것이다. “너네 도대체 디지털 시가 뭐냐?”라는 질문에 대한 객관성을 가진 구체적인 답변자료가 되길 바란다. 본 논문에서는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미술의 회화 기법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정보화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매일 새로운 전자제품들이 사람들의 구매욕을 충동하고 있다. 디지털시계, 디지털 계산기, 디지털 사진, 디지털이란 말이 들어간 전자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디지털은 컴퓨터 시스템을 적용하여 연속적이며 분절적인 오차가 없는 정확한 시스템이다. 디지털은 무한 반복적이며 합성과 재결합이 가능하다. 자기의 기본적인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시스템과 만나 새로운 합성구성,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화할 수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이지만 조금씩 오차가 난다. 아날로그가 직선이라면 디지털은 점선이다. 또한 모자이크다.   디지털 그림은 점묘화 기법으로 여러 스타일로 합성되기도 하고 형태를 아주 바꾸기도 하고, 다른 이질적인 그림이 들어와 덮어버리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네모 박스 안에서 물고기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물풀이 돋아나 바람에 흔들린다. 그 물풀 사이로 무수히 많은 고기떼가 지나간다. 빠르게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디지털 그림의 중요한 포인트는 화면이 빠르고 운동감 있게 움직이며, 장면이 계속 전환되며, 사물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편집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즉 고정적 정물화가 아니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그림을 무한정 반복 감상할 수 있는 ‘움직이는 그림’이다.       아날로그 시를 지향하여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 곧 디지털 시를 쓰는 시인들의 감각도 디지털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 화면이 빠르게 전개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아날로그 시가 검정과 흰색. 빨강, 파랑색으로 구성된 ‘보여주기’ 위주의 정지된 단일구성의 시라면 디지털 시는 ‘다초점’ ‘다시점’으로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여러 방향의 상상력에 움직임을 가미하여 ‘상상력의 이동’을 보인다. 디지털 시는 한 마디로 ‘움직이는 그림’, 또는 ‘움직이는 영상’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이나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시인의 ‘상상력의 이동’이 생각지도 않았던 기하학 무늬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의미한 ‘단어던지기’나 ‘언어충돌‘로 우연적 미술기법처럼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단어’의 ‘결합’과 ‘분리’가 만든 ‘모자이크 이미지’가 시에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또한 사물을 각각 다른 연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병렬배치’된 사물들이 서로 다른 질서와 의미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다른 의미와 세계로 확산된 무의미하고 낯선 사물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뱉어내면서 한 폭의 ‘추상화’가 그려진다. 의도성을 가지고 쓴 의미추구의 ‘아날로그 시’보다 새로운 감각의 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다. 새로운 감각의 시는 ’시스템의 혁명’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통하여 보다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여야 한다.   아날로그 시가 ‘보여주기’ 의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디지털 시는 ‘움직이는 그림’으로 입체적이며 운동감이 있는 그림이다. ‘움직이는 그림’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 가능하다. 또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새로운 공감각적 시로 탄생한다.   공간이동은 그림의 내용물인 화면이 변화한다. 합성사진처럼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하다. 즉 ‘시간, 공간, 상상력의 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디자인은 새로운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새로운 시창작 기법의 주요 이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의미,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움은 새로운 철학이다.    본 논문에서는 디지털 시의 요소로서 새로운 시 창작 기법으로  정물화 기법, 겹쳐 그리기 기법, 움직이는 그림 기법, 옴니버스 기법, 기호시 기법, 모자이크 기법, 추상화(구성) 기법 등 입곱 가지 방법론을 소개한다.   본 논문에서는 예시된 디지털 시 작품에서 디지털 시의 요소를 집중적으로 추출해서 분류해 보고자 한다. 내용과 형식, 의미와 디자인을 모두 조명해 보기로 한다.   2. 정물화 기법- ‘탈관념’     디지털 시의 내용, 즉 의미의 영역을 먼저 살펴보자. 디지털 시 쓰기 방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탈관념이다. 아날로그 시들이 의미를 추구했던 관습에서 벗어나 시인의 관념을 배재하고 ‘사진찍기’를 하여 ‘보여주기’하는 방법이다. 아직 시에 공간이동은 없이 보여주기 한다. 정물화와 같다. 그러나 어떤 영상물도 작가의 의도성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다. 다만 의식적인 강요를 배재하고 객관적 ‘정황’을 ‘보여주기’함으로써 ‘절대상황’만 독자에게 제시할 뿐이다. ‘시적 거리’가 먼 객관적인 사물 시가 탈관념 시에 속한다. 물론 무의미 단어들의 연합인 ‘언농’도 포함한다. 탈관념 시는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독자에게 관찰하도록 한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감사하게 한다. 시는 시로서 현존할 뿐이다. 그냥 작품으로 ‘놓아둔다’. 아래 시는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이다.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사물 시’다.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빨간 저녁놀’ ‘재떨이’ ‘서 있는 사나이’ ‘유리컵’ ‘담배’ ‘육각형성냥갑’ ‘라이터’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작가는 자기의 감정을 담지 않고 냉정하게 ‘정물화’를 그리듯 탁자 주변의 상황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여기에 관념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건조하고 딱딱한 사물들의 ‘정물화’는 무념무상이다. 그냥 이발소 그림처럼 걸려있다. 주목을 받지 않아도 좋다. 위의 정물화가 시적 미의식을 갖는 것은 1연 1행의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부분이다. 빨간 유리컵은 사실적 표현이지만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은 시적 이미지다. 1행을 시적 이미지로 무르익혔기 때문에 이 그림은 '감성적인 서정화‘다.   또한 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고 돌발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사물에 ‘의식’을 넣었기 때문이다.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가고, 신사의 등이 유리컵을 ‘노려보고’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쉰다는 구절이 이 시에 ‘의미’영역을 대변한다. 시의 백미다. 무념무상의 사물에 ‘의식을 넣어’, ‘사물의 감정’을 ‘의인화’하였다. 사건을 유발시키고 있다. 정지된 ‘정물화’는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은 긴장된 정적일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감이다.   ‘사나이의 등’이 ‘노려보고’ 있는 ‘세 유리컵’은 세 사람에 대한 거부를 객관적으로 나타낸다. 독자는 순간적으로 상상할 것이다. 이혼서류를 찍기 직전의 풍경일 수도 있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합석했을 수도 있고, 어린 딸아이가 주스를 마시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약 흥정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배반의 현장일 수도 있다. 독자는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각인된 무의식의 세계와 연상작용하여 순간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 시는 작가의 지시나 의도성을 배제하고 작가의 관념을 집어넣지 않는다. 독자의 감상과 해석 영역이 넓다.   이 시에서는 최소한의 사물과 최소한의 동사와 부사만을 사용했다. ‘힐끗힐끗’이나 ‘발딱발딱’ 같은 부사어와 ‘노려본다’는 최소한의 동사를 사용하여 현장성과 긴장감을 주었다.「탁자를 중심으로 풍경」은 냉정하게 최소한의 요소만 조건적으로 ‘보여주기’하고 있는 ‘정물화’다. 그러나 이 시는 퍼포먼스에 적당한 여러 배경을 제시한다. 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어떤 사건이 ‘침묵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음모처럼 숨어 있다.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도 시적 긴장감을 갖도록 배치한 것은 작가의 저력이다. 작가의 숨은 의도는 한껏, 독자의 호기심을 부추겨놓고는 짐짓 '모르는 척' ‘시침떼기’다.   문덕수는 「탁자를 중심으로 풍경」에서 자신의 을 증명하고자 한다. 탈관념이 관념보다 설득력이 있으며 사물의 시점에서 한 ‘상상력의 이동’은 시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이퍼 시’와 ‘디지털 시’를 혼용된 개념으로 볼 때, 이 시는 새로운 실험시의 모델로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시‘라고 주장한 오남구의 시론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3. 겹쳐 그리기 기법- ‘다시점’ ‘다초점’     오남구는 염사와 접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디지털 시를 정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학적 공식과 시론은 많은 사람들이 해독하지 못하고 어려워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염사나 접사라는 남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피하려고 한다. 심상운의 다선구조와 오남구의 염사와 접사와는 달리 필자는 ‘겹쳐 그리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선구조와 염사, 접사와 비슷한 면이 있을 수도 있으나 ‘겹쳐 그리기’는 미술기법으로 ‘미술 구성’에 가깝다. 여러 개의 선과 면을 겹쳐서 새로운 구성을 ‘보여주기’ 하는 것이다. 여러 선이 될 수도 있고, 여러 면이 될 수도 있는 ‘겹쳐 그리기’는 심상운의 ‘다선구조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은 오히려 ‘옴니버스 형식’에 가깝다.    '겹쳐 그리기‘는 ’외면의 겹쳐 그리기‘와 ’내면의 겹쳐 그리기‘가 있다. 외면의 ’겹쳐 그리기‘는 피카소의 처럼 앞, 뒤, 옆, 위, 아래, 여러 방향으로 직관하고 관찰하여 한 화면 위에 펼쳐 놓은 그림이다. 또한 내면을 여러 방향에서 여러 각도로 관찰하고 직관하여 한 화면 위에 형상화하여 그려내는 것이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 창작 기법이다. 투시도를 여러 개 겹쳐 놓은 것과 같은 시창작 방법론이다.   피카소는 ’다초점, 다시점’의 그림을 그렸다. ‘다른 방향에서 여러 개의 눈으로 바라보기’이다. 단순히 ‘사실 대로 보여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하여 보여주기 하는 것이다. ‘투시도’라고 보면 된다. 여러 각도에서 투시한 그림이다. 찍는 각도와 방향, 위치에 따라서 피사체가 달라진다. 시에서 비유와 비유의 비유와 같은 개념이다. 디지털 시는 한 방향에서 본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구조의 그림이다.   한 단계 더 심연으로 느껴서 ‘투시’하여 ‘보여주기’하는 ‘무엇’이다. ‘무엇’은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방법(기법)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아날로그 시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리던 것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것을 진정성을 가지고 ‘투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여러 겹의 투시도‘라고 명명해 보면 어떨까? 그 시각은 시인의 새로운 발상이어야 한다. 누군가 시도한 헌 기법이 아닌, 새로운 시 쓰기 기법이어야 한다. 다음  오남구의 시「부드러움의 단상」전문이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로운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 오남구,「부드러움의 단상」전문     작가는 ‘신호등이 켜진’ 거리에서 아주 짧은 찰라의 시간 동안 ‘비’를 직관한다. 아날로그 시에서‘비’는 ‘슬픔’과 ‘이별’의 이미지와 관념의 동의어로 쓰여 왔다. 그러나 오남구의 ‘비’는 군더더기 없이, 직관적이다. ‘보여지는 것’그 너머 존재하는 비의 속성을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다. 그것도 여러 방향에서 관찰한 비다.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 비다. 피부로 느껴 접촉한 비다. 이렇게 여러 겹의 ‘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그린 그림 같은 비다.   팔딱팔딱 숨을 쉬는 비, 단단한 비, 날카로운 날을 세운 비, 수직으로 솟는 비, 수평으로 퍼지는 비, 팔딱팔딱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지는 비, 시인은 비를 직관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본다. 직관의 날카로움은 사물성의 비가 운동감을 가지고 변화하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디지털 시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운동성이다. 아날로그 시의 그림이 정지된 ‘정물화’라면 디지털 시의 그림은 ‘움직이는 정물화’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는 지금까지 흔히 보던 정지되고 일상적인 그림이 아니다. 움직임이 있는 특별한 그림이다. 정지된 사물의 운동감은 시에 감각적 새로움을 제공한다. 오남구의 「부드러움의 단상」은 사물을 직관하여 투시한다. 또한 사물에 운동감을 주어 감각의 새로움을 창조하여 디지털 시의 요건을 충족시켰다. ‘겹쳐 그리기 기법’의 또 다른 예를 소개한다. 위상진의 시 「사진촬영금지 구역」1연을 살펴보자.     마그리트 그림 속, 눈 하나가 방에 가득 차있다   어둠의 속눈썹을 따라 들어가면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약처럼 내 얼굴에 쏟아진다     위의 시도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다. 빛이 얼굴에 쏟아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단계의 층위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속눈썹 위에 여러 개의 성냥개비를 올려놓은 것을 상상해 보라. 몇 겹으로 ’겹쳐 그린 그림‘이 보일 것이다.������겹쳐 보여주기������다시점������������다초점������의 시다.   위의 시는 ‘마그리트 그림- 눈- 어둠의 속눈썹-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약- 내 얼굴’까지‘화살표’를 따라 층위적으로 공간이동하고 있다. ‘내 얼굴에 비치는 불빛'의 한 가지 사실을 점층적으로 ’겹쳐 그리기‘하고 있다. ‘그림- 눈- 속눈썹- 나방- 불빛-흰가루 약- 내 얼굴’까지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쳐 도달하도록 한다. 단일구성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시가 감각적인 구성기법의 그림이 된다.   이때 사물성에 기초를 두고 시를 써야 한다. 관념에 층위를 여러 개 두면 개념이 불분명한 넋두리 시가 된다. 객관화가 되지 않은 대부분의 토로시들은 관념의 층위를 여러 개 겹친 시들이다.   위의 시가‘겹쳐 그리기’를 하며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쳤지만 객관성을 가지는 것은 사물성의 힘이다. 사물성은 관념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시키는 힘이 있다. 시를 쓸 때 관념에 옷을 입혀서 사물화하는 것은 객관화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시가 디지털 시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은 현대성이다. 복잡한 여러 겹의 층위와 ‘흰 가루약’등 현대인의 아픈 뇌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현대인의 고달픔을 연상시킨다. ‘겹쳐 그리기 기법’은 새로운 구성의 시 창작 법이다. 송시월의  「물웅덩이」를 살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 송시월, 「물웅덩이」전문              이 시도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겹쳐 그리기’ 하고 있다. 물웅덩이 속에는 여러 그림자 들이 ‘겹쳐 그려져’ 있다. ‘붉은 하늘 한 조각’ ‘거꾸로 처박힌 빌딩’ ‘육교 한 토막’ ‘틈새에 끼인 나’ 맷새 한 마리‘가 ‘겹쳐 그려져’ 있다.       일상적인 정물이 아니다. 조각나고, 부서지고, 거꾸로 처박힌, 모서리진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 부조리한 사물들 ‘틈새’에 시인도 끼여 있다. 극한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압박 속에 있다. 작가가 사물 속에 뛰어들어 함께 만든 ‘정물화’다. 정지된 부조화의 그림 속에서 ‘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날아가는 새를 정물화 속에 집어넣어, 그림에 운동감을 준다. 그림에 속에 ‘새를 날림’으로써 정물화는 생동감과 현장성을 갖는다. 시가 확장된다. 따라서 이 시는 정물적인 그림에 운동감을 줌으로써 새로운 디지털적인 생동감을  갖는다. ‘겹쳐 그리기’를 하여 여러 정황을 동시에 ‘보여주기’하고 있다.    물웅덩이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그런데 거기 하늘과 나무, 빌딩, 나, 새가 끼어 있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지만, 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확장하여 ‘상상력을 이동’ 하고 있다. ‘상상력의 이동’을 한 ‘겹쳐 그리기’ 시창작 기법이다.       4.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아날로그 시에서도 ‘이미지’와 ‘시적 상상력’은 시의 중요한 필요충분 요소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에서는 ‘상상력’의 부재는 디지털 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는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상상력의 이동’이라는 복합적 요소를 동시에 실현하며 ‘어머니’라는 보통명사를 특별한 그림으로 다시 그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아래 시는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전문이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 김규화, 「한강을 읽다」전문   「한강을 읽다」는 감정을 배재한 냉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충실하게 그린 객관적 그림이다. 감정을 통제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가 힘을 갖는다. ‘그린다, 흔들어본다, 지워버린다’ 지나간다, 지운다, 가로 지른다‘는 최소한의 동사가 장면전환을 하게 한다.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지우개처럼 ‘물살’과 '돛단배‘와 ’새‘가 화면을 지운다. ’이젤을 거꾸로 세워‘ 그린 그림은 몇 번이고 장면이 바뀌며 ’공간이동‘ ’시간이동‘ ’상상력의 이동’이 진행된다. 정지된 ‘정물화’가 운동감을 가진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김규화의 시는 사물, 즉 피사체의 시점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많은 아날로그의 시들이 시인의 관점에서 시에 접근했다면 이 시는 역발상으로 사물의 시점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한강’이 ‘거꾸로 이젤’을 들고 그림을 그린다. 순행적인 시간의 시점을 거꾸로 돌려 ‘반시계 방향’으로 진입하며 시에 긴장감을 준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1행은 이 시를 시간, 공간, 지각을 모두 열고 심미적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서정적 묘사다. ‘시간’ ‘공간’ ‘지각’ 다초점, 다시점의 시적 구조를 세운다. 직선, 평면 시를 입체시가 되게 하는 요건이다.   이 시는 정지된 그림이 아니다. 여러 부분에서 운동감을 준다. 한강변에 서 있는 부동성의 ‘아파트’라는 사물을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이라는 운동성을 줌으로써 시는 생동감을 갖고 움직임을 갖는다. ‘여기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궁금하여 몸을 기웃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한강’은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물살이 ‘출렁’ 하고 움직이는 모양이 시각적으로 그려진다. 여러 번 물결이 ‘출렁거림’으로써 이 시는 딱딱한 획일성과 고정성에서 벗어난다. 정서환기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부분은 수채화의 여백의 공간처럼 시적여운을 남긴다. ‘하늘’을 ‘가슴에 클릭’하는 새로움이 감각적이다. ‘흘러내리는’이라는 미완의 동사, 어미변화가 수채화를 그릴 때의 붓놀림처럼 여유로 흐른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그렸다가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지워도’ 여러 번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어머니’의 뿌옇게 아련한 향수 속으로 끌려들게 한다.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부분에서 사용한 ‘올랑촐랑’ 의태어가 큰 역할을 한다. ‘올랑촐랑’은 살가운 모녀의 대화처럼 작고 정다운 의태어다.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라는 표현은 시적 미의식을 고조시킨다. 웅변하지 않아도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창문을 열고’ 독자들의 무의식을 깨운다.   이 시는 사실적인 표현과 정서적인 표현이 아우러져 심상에 한폭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부분은 붓으로 물을 찍어 그림을 그리듯 감각적인 표현이다. 또한 정지된 화면을 바꾸어 ‘장면전환’을 한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는 부분에서 ‘가로 지른다’는 동사를 눈여겨보자. 만약 ‘날아 간다’로 하면 어떤 시적 이미지가 생길까? 모두 떠나버린 공허와 고독한 이미지를 전할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강조되며 냉정한 현실이 부각된다. 그러나 ‘가로 지른다’는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미련과 아쉬움의 이미지다. ‘눈가에 어머니가 어른거리는’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남긴다.    ‘물새가 가로 지르며‘ 정지된 그림이 또 한 번 출렁,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감각적 운동감을 갖는다.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는 아날로그 시가 아닌 파스텔톤의 ‘움직이는 풍경화’다. 여러 번 출렁거림을 주어 ‘정물화’에 ‘움직임’을 주었다. ‘시간 이동’ ‘공간 이동’ ‘상상력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사물을 이동시켜 붓으로 지우듯 현대적 디지털 기법으로 장면전환을 하였다. 「한강을 읽다」가 현장성과 운동감, 정서환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 시가 고정된 ‘정물화’가 아닌 ‘움직이는 정물화’이기 때문이다.        5. 옴니버스 기법   심상운의 대부분의 시들은 옴니버스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맨살에 링크하기」는 아날로그 시와 디지털 시의 분기점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품이다. 단어와 제목, 내용에서 신선한 디지털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맨살에 링크하기」시 제목은 현대적이며 감각적이다. 또한 ‘맨살’의 선정적 이미지와 ‘링크하기’의 컴퓨터 용어가 낯설게 맞물려 신선한 현대적 감각을 준다. 다음 시 내용을 살펴보자.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전문         이 시는  ‘통조림’과 ‘비누’, ‘어항’ 세 가지 사물을 각 연에 배치한 옴니버스 형식의 시다. 또한 4연은 긴 ( )를 제시하여 독자에게 시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시인은 새로운 시 형식과 디자인을 실험하고 있다.   1연의 ‘ 통조림 속의 맨살의 꽁치의 검푸른 살’과  2연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는 비누’와 3연의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는 감각적이며 선정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맨살’이라는 공통된 이미지 때문이다.   4연의 긴 ( )는 새로운 시도로서 독자를 시 쓰기에 초대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여기 넣을까? 상상력을 펼치게 한다. 독자와 시인이 50%씩 시를 쓴다. 필자도 ‘아가씨 입술과 이빨 사이에 끼어서 신음하는 빨간 사과의 하얀 맨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써 본다. 감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농염한 문장이 만들어질 것 같지 않은가?   심상운은 새로운 구성과 디자인의 시 형식을 차용하여 디지털적인 요소를 이 시에서 실현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옴니버스적인 이야기는 한편의 각각 다른 시로 만들어도 좋은 소재다.   1연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이 부분에서 새로움은 없다. 사실만 적었다. 냉정한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다음 시행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부분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물에 조건적으로 의식을 집어넣었다. ‘통조림 속의 꽁치’에게 시인은 어떤 역할을 부여하려 한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은 정확하게 죽은 날짜를 명시하고 있다.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부분에서 ‘어떤 주검’이 선명하게 시인의 무의식을 잡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주검은 생생하고 감각적이다. 마지막 부분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에서 시인이 나타내려고 하는 의식이 표출된다. ‘눈감고 있던 꽁치 맨살의 꿈틀거림’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주검’이 의식 표면으로 튀어나온 순간이다. ‘꽁치’라는 대상을 통하여 시인의 무의식은 ‘어떤 주검’을 의식화하고 표출시킨 것이다. 간단한 몇 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는 것은 ‘주검’은 삶과 마찬가지로 생의 주요한 중심 단어이기 때문이다. 종결이면서 시작이다. 누구에게나 아픈 ‘주검’에 얽힌 사연들이 있다. ‘꽁치의 주검’은 승화된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맨살의 주검이다.   2연의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사물인 비누가 대상이지만, 애인의 ‘맨살’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적 쾌락을 느낀다. 다음 행의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는 부분에서는 ‘몸을 줄 듯 줄듯’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뒤로 빼버리는 여자의 모습이 병치된다. 시인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누의 포동포동한 맨살’과 ‘미끄러운 여자의 맨살’의 이미지가 겹쳐 연상작용을 한다. 독자에게 관능적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3연의 1행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화두를선문답처럼 탁, 던진다. 독자에게 ‘어??“ 정서적 환기를 시킨다. 긴장감은 다음 시행에 집중하게 한다. 마지막 행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부분은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 ‘한 쌍의 남녀’를 병치하면서 묘한 관능적 섹슈얼리즘을 풍긴다.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 ‘한 쌍의 남녀’가 간질간질한 욕망을 부추긴다.   「맨살에 링크하기」는 시의 내용과 제목, 디자인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각각 다른 내용을 담은 연들이 연상작용을 부추겨 시적 상상력을 증가시킨다. 이 시는 사물 시로서 내용과 형식에 디지털적인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6. 기호 시(詩) 기법     소쉬르는 단어를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é)가 결합하여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하는 기호라고 정의하였다. 기표는 사물의 본질이 아닌 형식이다. 가상의 무의미한 문자인 기호는 송신자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수신자의 수용 태도에 따라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기표란 단일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고 상징적 의미작용을 하기도 한다. 자연과 사물에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감정을 넣었으나 원래의 자연과 사물은 감정이 없다. 기호 시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문자를 원래의 무의미한 원상태로 돌려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시론은 무의미시론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덕수의 ‘하이퍼 시론’ 에서 추구하는 ‘무의미 시’가 바로 기호시의 원리를 차용한 시론이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 )와 ( ) 사이에」전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로   빌딩이 자란다   가로수, 긴 괄호[ ] 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먹어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갇힌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괄호( )가 화르르, 열린다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어가는       ― 이선, 「( )와 ( ) 사이에」전문     위의 시는 제목에 ( )를 사용함으로써 디지털적 감각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또한 사물과 관계성을 ( )라는 미지수로 보았다. 만약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자동차가 달리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까?라고 질문해 보았다. 사물은 단어가 아직 붙지 않았으므로 미지수 ( )가 열리고 닫히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에 갇혀서’ 무생물인 빌딩과 생물인 동물과 사람과 나무가 공존한다. 대상인 괄호( )를 열려고 집착하는 관계성을 살펴보고 자 하였다. ( )를 사물이나 관계로 인식하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소통에 장애를 갖는 것은 현대인의 ( ) 인식 때문이다.   단어와 말을 버리고 세계와 사물을 ( )라고 인식하여 본 것이다. ( )를 의미의 공간으로 해석한 것은 모든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역설이다. 사물은 그냥 ( )로 존재한다.     4연의 ‘사내의 주검’에 달라붙어 ( )를 열려고 ‘버둥대’는 ‘쇠파리’처럼 의미 없는 행동이다. 누구도 사내의 닫힌 ( )를 열고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 )는 ( )로서 존재한다. 모든 관계와 사물을 ( )로 인식한 것은 ( )로 사물화한 것이다. 소쉬르가 주장한 ‘말’, 즉 언어는 소통에 여러 장애들을 겪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무의미한  괄호( )라는 기표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소통되지 않는 ( )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 ) 기호시를 시도한 것은 무의미 기표인 ( )를 시에 도입하여 언어와 사물, 관계의 무의미를 ( )화하여 디지털적인 실험시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단어와 문장을 의미적으로 한 것은 여러 개의 의미로 분산되고 해석되는 ( )를 역으로 추적해 본 것이다. 본래의 ( )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단절되고 결합되지 못하는 의미(기의)인  ‘인간’ ‘빌딩’ ‘꽃’ ‘입맞춤’ ‘포옹’ ‘나무’를 간접적으로 ( )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7. 모자이크 기법     디지털은 ‘단절’과 ‘결합’이 작게 나누어지는 최소 단위의 조합인 ‘모자이크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디지털시계는 빨간 불을 반짝이면서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단절’과 ‘결합’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디지털 시에서도 단절과 결합을 통한 ‘추상화 미술기법’과 미술의 ‘구성’과 같은 배열, 즉 몬드리안의 그림이나 샤갈의 그림처럼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불특정하게 결합하고, 분리된 모자이크 시를 예시 작품으로 들고자 하였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언어충돌이 난무한 작품을 찾았으나 완전히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과 투척이 첨예한 미의식적 예술성을 가진 ‘언어 그림’이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양준호의「비상구」를 골라보았다. 양준호의 시는 의미해석을 하려고 하면 어렵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단절’과 ‘단절’. 절대고독의 이미지. 현대인의 위기와 부조리를 ‘극한상황’으로 느끼면 된다. 다행히 시인 자신도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여 주기를 바라며 ‘의미 추구의 시’를 쓰려고 시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바람은 비늘 흔든다 귓속에   파란 새 날아간다   꽃은 피어라 말의 콧등에도   소금은 준비되었을까   뼈들 파도처럼 춤춘다   눈알만 남아 귀만 남은   고무공 뛰어간다      ― 양준호,「비상구」전문     그럼에도 이 짧은 시가 주목받는 것은 시인의 은둔과 고독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단어’를 공기돌 던지듯 허공중에 흩트려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바람’ ‘비’ ‘파란 새’ ‘꽃’ ‘소금’ ‘뼈’ ‘파도’ ‘눈알만 남은 고무공’ ‘귀만 남은 고무공’은 「비상구」라는 제목과 부조리하게 흩어졌다가도 묘하게 단어들이 결합한다. 꽉 막힌, 비상구도 없는 곳에서 새처럼 날아보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몸부림이 감지된다. ‘절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비상구를 잃어버린 현대인. 친구가 없는 현대인. 이기주의 시인. 그리고 너. 나.   양준호의 단어들은 결합하고 분리되어 ‘모자이크 이미지’를 구성한다. 단어들의 흩뿌림이 역으로 새로운 디지털 시적 방법론을 제공한다. 디지털 시론이 나오기 훨씬 전인 80년대부터 양준호는 이미 디지털 시를 써 왔다.    8.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 바꾸기(변화)     시스템의 변화를 시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형식과 디자인, 기법, 표현기법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함의한다. 필자의 졸시「귓속말하기」는 디지털 기법의 새로운 시의 형식으로 쓰고자 고민하며 쓴 시다. 결국 디지털 시가 무의미 단어들의 조합이나 연과 연의 단절만 추구한다면 똑같은 이미지와 형식의 시들이 양산될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다 비개성적인 작품들이 만연할 수 있다. 디지털 시가 이름만 가리면 똑같아서 누구의 시인지 모를 정도로 몰개성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디지털 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다. 이 시는 각각의 독립된 다른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병렬배치하였다. 「귓속말하기」부제로 ‘-때, 장소, 시간, 그리고??’라는 제목을 붙여서 각각의 ‘현장상황’을 연상시키고자 하였다. 반복적인 ‘귓속말로’라는 똑같은 말을 넣어 언어의 디자인을 하였다. 추상화기법의 구성 기법이다. 내용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핀 그림으로 디자인하였다.   추상화 기법으로 시의 형식은 ( ) 속에 들어간 ‘귓속말로’가 포인트다. 노랑, 파랑, 빨강, 초록 등 다양한 색깔의 구성 디자인 중, ‘귓속말로’는 보라색 포인트와 같은 것이다. 연마다 똑같은 ‘보라색 포인트’ 말을 넣음으로써, ‘보라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완성하였다. 디자인과 시스템 바꾸기(변화)를 실험적으로 시도한 작품이다. ‘추상화 그림’ 기법으로 ‘몬드리안 무늬’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시다.     개미가 벌에게 엉덩이를 한방 냅다 쏘였어요   이를 악 물고,   입술이 노랗게 물들도록, 호박꽃잎 물어뜯는데   ( “꿀맛 좋니?” 귓속말로 )     오랫동안 기우뚱한 안방 벽이   너덜너덜 갈라지고 금이 간, 건넌방 벽에게 묻는다   ( “나한테 너무 오래 기대고 살지 않았니?” 귓속말로)     숫모기만 보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애~앵 앵앵, 암모기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끈질긴 구애    여자 뒤통수치기 여왕모기, 그녀   (질투도 힘이니? 귓속말로)     초생달이 허공에 밀려   헛바퀴 돌아, 돌아   거꾸로 매달려, 그믐달로 서 있네요   ( “하늘이 노랗게 보이니?” 귓속말로)     하이힐 소리 또각또각, 입술 빨간 꽃바람   피사의 탑에 미~쳐서 리포트를 못 썼다나?   빨간 하품이 강의실 앞 붉은 장미가시에 걸렸다가,   억대 소나무에 걸렸다가,   초록잔디밭 위를 떼구르르,     대학정문에 대자보가 걸렸다고요?   보석자랑? 차자랑? 구찌핸드백 자랑? 꽃바람   맨 먼저 대학교단에 선다고?   ( “쯧 공부해서 남 주니?” 귓속말로)     나뭇잎은 하늘을 한 입 베어 물고   파랗게 멍든 입술로 벙긋거린다   ( “후~욱 불어 버릴까?” 귓속말로)     가랑비, 눈썹에 내려앉아 가볍게 소곤댄다   ( “슬픔도 키스처럼 부드럽지 않니?” 귓속말로)      ― 이선, 「귓속말하기/-때, 장소, 시간, 그리고??」전문     프로이드는 문학을 사회와 화합하지 못하는 인간이 소외와 고독을 승화하여 예술작품으로 생산한 것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누구나 인생에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뒤통수를 맞은 당혹스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억울한데, 차마 반박하지도 못했던 경험. 그 비열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지켜보는 역겨움.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서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 과정으로 보았다.   이 시는 인간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속성을 ‘추상화(구성) 기법’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다. 소통을 위하여 내용은 의미추구를 디자인은 디지털적으로 시도하였다.  모든 시가 무의미만 추구한다고 개성적이며 새로운 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9. 결론      본 논문은 디지털 시론의 정의와 시창작 방법론을 재조명하여 디지털 시의 구성 요소를 미술의 회화 기법을 도입하여 논의해 보았다. 디지털 시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일곱 편의 시를 분석하여 일곱 가지 시 창작 기법을 소개하였다. “디지털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답이 되기를 바란다.   디지털을 선포한 오남구의 ‘탈관념’ ‘염사’ ‘접사’ ‘사진찍기’ 시창작 시론과 심상운의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에 대한 정의인 ‘모듈’과 ‘리좀’, ‘단선구조와 다선구조론’을 소개하고 문덕수가 최초로 주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최첨단 시창작 기법인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기법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으며 여러 시인들이 실험정신을 가지고 도전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탈관념과 염사, 접사, 사진 찍기 기법 외에 무의미 시론과 다선구조를 총체적으로 규합하여 몇 가지의 새로운 시창작 기법으로 정리해 보았다. 또한 필자가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 쓰기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구조적인 시론의 핵심 테마를 디지털 시창작 기법으로 정립하였다.   본 논문은 디지털 시가 몬드리안이나 샤갈의 그림처럼 추상화 기법을 쓰고 있으며, 피카소의 그림처럼 ‘다초점’, ‘다시점’의 관찰자 시점으로 한 공간에 여러 방향의 그림을 펼쳐 구성하고, 디자인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본 논문에 언급한 ‘다초점’과 ‘다시점’의 디지털 시론은 ‘겹쳐 그리기’와 ‘움직이는 그림’이다. 여러 방향에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그린 입체 그림’이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예로 든 것도 디지털 시가 한 방향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일곱 가지 시 창작 기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정물화 기법- 탈관념  둘째, 겹쳐 그리기- 다시점, 다초점  셋째,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버스 기법  다섯째, 기호 시 기법  여섯째, 모자이크 기법  일곱째,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 바꾸기(변화)      그 중에서도 본 논문에서 강조한 내용은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회화적 용어를 차용하여 ‘움직이는 그림’으로 정의하고 예시작품을 제시하여 분석한 점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그림’은 아날로그 시가 지향하던 표면의 ‘보여주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물을 투시하여 직관하고, ‘상상력의 이동’을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서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운동감을 준다.   직관은 사물의 내면을 투시하여 뼈 속까지 엑스레이 찍고, DNA를 분석하며 의미를 확장한다. 새로운 사물의 철학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상상력의 이동’은 독자와의 소통공간을 넓히고 참여의 폭을 넓힌다. 또한 시에 운동감과 생동감을 준다. 새로운 감각과 직관으로 사물의 내면까지 투시한다. 본 논문에서는 ‘움직이는 그림-‘상상력의 이동’에 포인트를 두었다. 필자의 새롭게 펼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의  ‘움직이는 그림’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또한 ‘겹쳐 그리기 기법’도 소개하였다.    제목과 내용, 디자인, 기법에서 실험적이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 규명하는 것이 디지털 시의 목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새로운 감각의 시 창작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소개한 일곱 가지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이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모두 소개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앞으로 내용, 기법, 형태, 등 여러 방향에서 다각적으로 연구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실험단계에 있어 ‘과정 수행 중’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시가 완성되고, 새로운 이즘으로 분류될 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디지털 시는 시인과 비평가들의 공격과 혹독한 비난과 질문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디지털 시론은 완성되지 않았고, 디지털 시를 쓰는 시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기법의 작품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과제를 숙제로 남긴다.   이선 시의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     이 선(시인)      이선의 하이퍼시의 특징은 사물시에서 출발한다. 사물시는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에 입각하여‘링크(link)- 리좀(Rhyzome)-무의미 시- 환타지 영상기법- 상상력의 공간이동 및 시간이동’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필자의 시는 단일구성보다는 복합구성을 갖고 있다.     1. 링크(link)  링크(link)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하이퍼 시의 링크 기능은 , 각 행과 연의 자립성과 독립성이다. 이선의 시에서 하이퍼시의 링크 기능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다음 시는 필자의 「북극에서 온 편지」중 일부다.     “툰드라의 아침밥상은 눈꽃 천지인 걸요…”/ 북극여우가 긴 꼬리로 허공을 흔들며, 빗줄기의 허리를 자릅니다(1연)//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미의 눈빛은/ 북극성(3연)//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수컷의 향기를 뽐내며/ 눈향나무 언덕 향해 달리는, 어린 순록의/ 맑고 유순한 눈빛을 나도 지닌 적 있는데(6연)// 보름달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까?/ 얼음을 녹이는 것은, 내 원죄를 지우는 일(8연)// 나는 퇴화한 꼬리를 치켜세우고, 어둠을 힘껏 문지릅니다/ -흰색이거나 얼룩무늬거나(9연)// 눈향나무 향기로/ 추위를 녹이며, 나의 젖은 몸을 말립니다/ 길은 추울수록, 달빛 투명하고 향기로와서(11행)   위의 시는 각 행과 연이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또한‘제목- 행- 연’은 서로 링크된다. 그러나 위의 1-11연 중‘2연, 4연, 5연, 7연, 10연’을 뺐는데도 시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시의 각 행과 연이 독립적이며 자립적이기 때문이다.  이선의 시는 하이퍼시의 주요한 요소인, 링크 기능을 실현하고 있다.      2. 리좀(Rhyzome)  리좀(Rhyzome)은 그물망처럼 얽혀, 확장되는 기능이다. 리좀의‘이질성, 다양성, 무의미적 단절’은, 하이퍼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은‘중첩 이미지’와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필자의 다음 시「소금꽃을 꺾다」 전문을 읽고‘리좀’기능을 살펴보자.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애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천 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토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4세 여중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소금꽃을 꺾다」 전문    위의 시의 배경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한 공간 안에서 거미줄처럼 합성되어 있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장치한 것이다. 현대문명 속의 부조리한 상황을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였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한 공간에 마구‘불안’한 현재를 던진다.  위의 시는 ‘신’과 ‘인간’의 ‘질문과 대답’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상투어와 일상적 문장을 거부한다. 그 대화는 혼돈스럽고, 낯설며, 단절적이다. 미성숙한 여중생이 낳은 아기는 곧 외국으로 입양되어‘알렉스’나‘미미’로 자랄 것. 위의 시는 제목에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소금’은 잎도 줄기도 없는 몸통만 있는 사물이다. ‘소금’과 ‘꽃’을 합성한 ‘소금꽃’도 꽃만 있지 줄기나 뿌리가 없다. 꽃받침도 없다. ‘소금꽃을 꺾다’라고 행위를 강조한 제목에 주목하여 보자. 제목이 아이러닉하며 역설적이다. 소금꽃은 꺾을 그‘무엇’이 없다.  ‘사막의 낙타-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도마뱀-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여중생-도둑고양이와 공원’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이동한다. 필자는 리좀 기능을 적용한 사회고발 부조리 시를 발표함으로써, 하이퍼시는 철학과 사유가 없는 말장난이라는 비난을 극복하였다.     3. 무의미 시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는 김춘수가 주장한 ‘무의미 시’이론과는 다르다.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는 ‘열린 문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시의 내용을 한정적이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지시적이거나 명령적이지도 않다. 무의미 시는 불확정적이며 무제한적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선의 다음 시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일부를 살펴보자.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1연)//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2연)//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곧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후회합니다(5연)//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6연)//   위의 시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부적절한 사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어디에도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내용을 중시하는 시 형식이 아니다. 서정시의 지시적이고 명령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이선의 하이퍼시의 문장은 확장적이며 무의미 시에 가깝다. 그러나 김춘수의 무의미시와는 전혀 다르다. 김춘수의 대표적인 무의미 시로 알려진「처용단장」2부-5는 ‘무의미 시’라기보다는, 두 개의 ‘말’과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읊조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무의미 하이퍼시는 각각 다른‘이미지’의 삽입이다. ‘이미지 충돌’로 시를 디자인하고 있다. 김춘수와 필자의 무의미 시의 차이는,‘말’과‘이미지’의 차이다.   당신이 ‘망상중독’이라고 말하는-/ 유칼립투스 꽃을 채취하던, 푸른 달빛을/ 흰 샴 고양이,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 「자서전」일부   위의 시는 몽상적이며,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한정적이거나 지정적이지 않다. 허용적 놓음의 미학이다.   4. 환타지 영상기법     이선의 하이퍼시는 ‘환타지기법’과 ‘영상기법’을 조합하고 있다. 다음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풍경」전문을 읽어보자.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다/ 나는 그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파랑색 벽을 칠한다/ 그녀 눈빛은, 비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네모난 탁자 위에선 레몬차 식어가고// 그녀의 툰드라 언덕에, 나는 야생 히아신스 꽃밭 향기를 내려놓는다/ 두꺼운 스웨터처럼, 내 몸은 그녀의 향기로 체온이 급상승 한다/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흔들며, 어둠을 자른다// 흰 망사장갑은,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조용히 빠져나간다/ 북극곰 발톱처럼 뾰족한 그녀 손가락이, 움켜 쥔 공허// 해빙기, 그녀 심장은 더 이상 얼지 않아서/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노을빛 구름을 뱉어내는/ 북극양귀비꽃 언덕을 지향하고 있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에// 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 툰드라가 녹고 있다// 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 “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          위의 시는 몽환적 ‘환타지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환타지 영상기법’은 시에 운동감을 준다.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여자 손님과 TV에서 상영하고 있는 해빙기의 ‘북극 툰드라’의 모습을 ‘오버랩 영상기법’으로 처리하였다. 낯선 ‘그녀’는 시의 환타지다.   인간의 DNA는 남의 연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호기심이 많다. ‘그녀’와 해빙기의 툰드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이질적 환경에‘적응’해야 하는 위기의 목표가 있다. 툰드라의 ‘북극양귀비꽃’과 그녀는 치환은유 관계다. 시인의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전개하여 ‘보여주기’한 것이다.  김용오 시인은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에서, 이선 시의 특징을 ‘환타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무의미한 언어유희로 전락시키지 않고, 의미화를 추구한다. 인간과 환경을 깊이있게 다룬다.    5. 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   필자가 최초로 명명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은 필자의 다른 논문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다. 이선의 하이퍼시의 한 특징은 상상력의 확장이다. 그 효과는 문장의 감각적 미의식과 운동감이다. 문장 표현이 신선하고 젊다. 이선의 하이퍼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순간이동’한다.   상상력의 ‘공간이동, 시간이동’을 통한 ‘순간이동’의 시는 ‘대비효과’가 크다. - 색상대비, 문명대비, 시적거리가 먼 것 끼리의 대비. 확장성, 연상의 폭이 넓다. 이선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머니의 눈빛은/ 북극성// ―「북극에서 온 편지」 3연 1-3행   이질적인 것들이 한 공간에서 조우한다. ‘툰드라’와 ‘북극성’은 먼 이질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친밀한 대상을 끌고 와서, 화자와 밀접하게 연결하였다. 상상력으로 먼‘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현대에 초대하였다.     바람이 꽃씨의 발화점을 외우는 동안/ 바다는 구름을 잉태하지/  늙은 토인여자의 자궁은, 그린파파야 향기// ―「탁상공론 문명일지」 부분  ‘바람과 꽃씨, 바다와 구름, 늙은 토인여자와 그린파파야 향기’는 이질적인 사물들이다. 그러나 한 문장에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친화적 관계로 만들었다.     꽃잎 문을 닫는, 저녁입니까?/ 별빛 부엉이 항문을 닦는, 저녁입니까?//  고비사막, 켜켜이 쌓인 주름살커튼을, 펼치는 저녁/ 두물머리에는, 황사비, 초미세먼지 자욱자욱,/ 물결을 지우는 데 말입니다// 맨드라미 꼬불꼬불, 꽃길에 갇혀/ 별빛에 몸을 적시며 잠들어도 좋은 저녁인데 말입니다/  -쉿,/ 꽁지 붉은 어미 새,/ 대문 우편함에, 새끼 일곱 마리를 부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녁입니까?」 1, 5, 8행    같은 저녁이지만 각각의 저녁은 의미가 다르다. 위의 시의 ‘저녁’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대비시키고 있다.‘환경파괴’와 ‘생명의 잉태’라는 이중적 메시지를 던진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환타지성과 운동감, 전이와 반전의 매력을 연출한다.     이사벨라섬 항문을 간질이며, 춘분점이 지나간다/ 축축하고 비릿한 땅거미를 삼키는/   갈라파고스 거북,// 용암(Lava)을 삼킨 ‘아술산’ 입술, 석양에 붉다// ―「갈라파고스Galάpagos 섬에서」 4행    “ 내 안의 시가 날 잠재우지 않아”/ 내 춤의 날개인, 우주의 긴 푸른 스카프에/ 소리와 빛을 담고, 나는 뜬 눈으로 그의 꿈을 지킨다// ―「이사도라 덩컨」 끝행   위의 시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미지가 확장되어 흐른다. 확장된 이미지는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하는 감각적 미의식을 갖는다.  6. 결론 ‘링크- 리좀- 무의미 시’는 하이퍼시의 기본 시론이다. 필자의 하이퍼시의 구조와 시창작 기법은 위의 기본 하이퍼 시론을 포괄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또한‘환타지 영상기법-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으며, 하이퍼시 창작기법을발전시켰다.  유미주의 시는 표현주의를 지향한다. 하이퍼시는 표현주의에 적합한 시다. 그러나 필자의 시는 표현주의가 지향하는 감각적 미의식과 사유와 철학을 동시에 추구하며 젊은 시를 생산하고자 노력하였다.      예감처럼, 꿈처럼 시는 온다. 필자는 시를 쓸 때, 꿈속 같을 때가 있다. 꿈을 꾸고 나면, 과거 언젠가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 현실의 극한 상황이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평자와 독자에게 ‘하이퍼시’가 앞으로 예리하게 조명받기를 바란다. 또한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기법도 예민하게 독창적으로 발전할 것을 확신한다.  **       하이퍼텍스트 詩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년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크로스오버시대의 몽상 시인     유한근 문학평론가 · 전 SCAU대 교수       이선 시는 난해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시는 아니다. 시의 종류에 난해시는 없다. 그러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난해시라는 종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난해시는 편의상 구분이지 그 경향의 시는 없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이해하기가 까다로울 뿐이고 낯설기뿐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이선의 시가 그러하다. 낯설고 이해하는데 까다로울 뿐이다. 이선 시인은 첫 시집을 이른바 ‘퍼포먼스 시집’이라고 명명하고, 《빨간 손바닥의자》(2012. 시문학사 간)라는 이름으로 묶어 냈다. 이 시집의 ‘시인의 시론’ 〈나의 하이퍼시 쓰기에 대한 견해〉 결론에서 이렇게 하이퍼시에 대해 언급한다. “하이퍼시는 앞으로도 많은 공격을 받을 것이다. (…) 하이퍼 시인들도, 천편일률적인 단어조합에 머물지 않고 시적 진정성과 표현의 새로움을 찾기 위해 더 고민하여야 한다. 하이퍼 시인들이 비슷한 닮은꼴 시들을 양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 하이퍼시는 예술의 필요조건인, 유일성과 창조성, 철학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하이퍼 시론에 입각한 개성적이고 변별력 있는 작품을 생산해 줄 것을 과제로 제안한다”고 마무리한다. 이는 시인의 하이퍼 시에 대한 일단의 시론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며, 이선의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에서도 ‘시인의 에스프리’로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을 묶여, 자신의 시론과 시에 대한 해설을 게재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시를 하이퍼 시의 시각에 맞추어 보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탐색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살펴야할 문제는 그의 하이퍼 시에 대한 시단의 평가이다. 문덕수는 이선의 첫 시집 서문에서, 그의 시를 “일률적으로 하이퍼시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며 “그녀의 시는 매우 다양”하다. “그녀는 하이퍼 시라는 전제로 시를 쓰지 않”는다. “모더니즘, 전통시, 낭송시, 드라마-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돋”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1)하이퍼성은 시의 본질적인 구조의 확대하는 점, 2)하이퍼시에서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거리’는 J.C. 랜슴의 ‘심미적 거리(審美的 距離 aethetic distance)’임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첫 시집의 해설을 쓴 심상운은 〈퍼포먼스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에서 그는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퍼포먼스 시집을 평가하고,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정신”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를 전제하고, 나는 다른 시각에서 이선 시에 접근하려 한다.     1. 하이퍼시 혹은 시네마 포엠   먼저 시 한 편을 보자. 이 시집의 표제시인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이다.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은 남미 에콰도르에 있는 원시적 풍광이 그대로인 휴양지이다. 이곳은 밝은 파란색 발의 새인 ‘부비’가 유명하다.     갈라파고스 섬에는 파란 발의 새가 산다 바다코끼리를 향해 활을 겨누는, 원시사내의 팔뚝에 조개를 삼킨 새가 부리를 닦는다 “달빛 잎눈이 점점 어두워가요, 초록바다에 지쳤어요” 맹그로브나무 그늘에 누워, 원시여자는 맨발로 벌거벗은 원시사내의 무성한 가슴털을 헤집으며 투정한다 “들꽃이 시들었구려, 비단뱀 옆구리에 기대어 낮잠을 청해 봐요” 원시사내는 원시여자의 조그만 발을 쓸어 당긴다 (사내의 거친 숨소리, 주술처럼 여자는 눈을 감고) (열아홉 개 작은 섬, 슬몃슬몃 눈을 뜨고)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전설’을 들려주는 바다이구아나, ―갈라파고스 거북이, 귀를 쏭긋쏭긋 다윈의 노란 손바닥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핀치 새가 베로~롱 베~롱 쫑쫑 낮잠꾸러기, 이사벨라 섬을 깨우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 전문     이 시의 표현구조는 희곡적이다. 대사와 지문의 형식을 시의 구조로 차용한다. 한때 장호, 문정희 시인이 벌였던 시극운동의 ‘시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연극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영상·영화적인 요소가 다분한 시이다. 영화의 한 신(scene)을 보듯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단순한 시의 이미지가 아닌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여러 개 모여 하나의 시퀀스(sequence)를 보여준다. 이런 구조로 시를 길게 쓰면 한 편의 단편영화의 영상을 보는 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나는 ‘영상시’라 지칭했는데, 기존의 영상시가 인터넷 상에서나 지면상에서 시와 그림이나 사진을 같이 게재하고 영상시라 불렸다는 점에서 적절한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시네마포엠, 혹은 영화시, 영상·영화시라 지칭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시는 대사와 액션, 그리고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 영상시대의 젊은이들의 구미에 맞는 ‘실험시’이다. 나는 여기에서 실험시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실험시라는 언어가 진부하고 도식적인 명칭이라 해도, 이 시는 시의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는 새로운 지평의 시 반열에 종속되기 때문에 편의상 그런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하이퍼시 혹은 퍼포먼스시도 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선은 첫 시집의 ‘시인의 시론’에서 “하이퍼시가 엘리엇보다 발전된 ‘사물시’를 쓰면서, 연과 연의 ‘낯설게 하기’를 실현하여 하이퍼시가 주장하는 ‘객관화’를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하이퍼시가 엘리엇보다 발전된 ‘새로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엘리엇보다 앞선다. 문덕수가 ‘하이퍼시론’으로 주장하는‘무의미’ 시론은, 독자에게 감각의 새로움과 새로운 미의식, 무한대의 상상과 자유를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그러나 하이퍼시 쓰기에서는 주제는 ‘드러나지 않게’, 시적 표현은 ‘강렬’하게 써야 한다. 미의식과 상상력을 증폭시킬 것, 주제보다는 ‘표현주의’를 지향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렇듯 이선은 하이퍼시에 대한 신뢰가 강렬하다. 나는 이에 대한 반론이나, 설명을 덧붙일 생각은 없다. 다만 여기에 주목해야 하는 부분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인데, 이러한 상상력의 실현은 위에서 언급한 시네마 포엠에서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에서의 시적 공간과 시간이 1연 → 2~5연 → 6연 → 7연으로 자연스럽게 구조되고 있다. 1연의 파란 발의 부비와 원시사내가 공간과 대상을 이동해서 한 신(scene)을 보여주고, 다시 이동하여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전설’을 들려주는/바다이구아나,/갈라파고스 거북이”의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핀치새와 이사벨라 섬으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의 모티프는 지쳐 있는 초록바다, 그 적요를 깨우는 것은 지문처럼 처리한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깨어, “(주술처럼 여자는 눈을 감고)”, “다윈의 노란 손바닥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핀치 새가 베로~롱 베~롱 쫑쫑/낮잠꾸러기, 이사벨라 섬을 깨우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는 상승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이다. 평화롭고 적요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을 깨우는 것은 새의 비상과 사내의 열정이다. 이렇게 설명되면 이 시의 주제는 분명해진다. 시에 있어서의 주제는 관념적인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어떤 느낌, 분위기도 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 풍경〉도 같은 맥락의 시이다.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 북극 해빙기의 TV 다큐의 장면을 보고,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재생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의 모티프는 위에서 인용한 시행이다. 해빙과 사랑이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툰드라가 녹고 있다//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시  결말 부분)가 그것이다. 한 편의 짤막한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그 영상은 TV 영상을 모사했다 하더라도, 시인의 상상력을 투과하여 나온 움직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시인의 미학이 함유되어 있다. 예컨대 북극의 흰색 이미지에서 파랑색 벽, 레몬차,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 노을빛 구름, 북극양귀비꽃 언덕, 백야의 푸른 들판으로 공간이동 되면서 색의 이미지가 변용되어 시의 미학을 빛낸다. 시 〈소금꽃을 꺾다〉에서도 이런 시학은 엿보인다.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 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에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000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 -시 〈소금꽃을 꺾다〉의 서두 부분     이 시의 질료는 위에서 보듯이 모래고양이, 낙타, 그리고 뱀이다. 이 질료의 연결은 푸른색 이미지를 통해서이다. 이 시의 공간은 사막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상공에서 서울 거리로, 서울 거리에서 파푸아뉴기니로 이동하지만, 이 시의 모티프는 ‘입양’ 문제이다. 어미낙타와 새끼낙타 이미지를 통해서 한국의 유아 입양을 비판하는 시이다.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11세 초등학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제목 ‘소금꽃을 꺾다’의 의미는 뜬금없다. ‘소금꽃’은 염전의 물기가 증발하면 남은 엉긴 소금 결정을 비유한 언어다. 그리고 땡볕에 땀을 많이 흘려 마르면 옷에 하얗게 생기는 얼룩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그것을 꺾다는 의미가 이 시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인데,의미 단절을 느끼게 한다. 아니면 터무니없지만 인천에 소재한 소금꽃 도서관에 설치된 영·유아 수면실을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 〈까미유 끌로델의 외출〉의 구성은 신(scene) 표시인 ‘#’ 표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이야기를 세 토막의 신(#)으로 구성한 것으로, 시인은 자신에게 까미유 끌로델을 투영시켜 그녀의 입장에서 극적으로 노래한다. #1에서는 “빨강, 주황, 흰색 아네모네 꽃을 내 젖가슴에/탐스럽게 그려 줄래요?”라고. “오, 나의 어여쁜 신神이여”라고 부르는 시적인 ‘당신’에서 구어체로 노래한다. “북두칠성 자리에 둥둥 떠 있어요/나는 그 별을 ‘나의 거북이별’이라고 불러요/나는 ‘나의 별’에 천년 동안 등뼈를 문질러댔죠”라고 노래하는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북두칠성을 거북이별로 인식하는 것은 시인의 주관정신에 의한 것이라 해도 그 별을 천년 동안 등뼈를 문질러댄다는 의미는 동질성에 대한 희구 혹은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열리는, 돌의 입술/오, 돌의 처녀성”라고 인식한 것은 까미유의 침묵을 시적 화자와 동일화하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다. 그리고 #2에서는 ““아~악, 난 미치지 않았어요!”/점점 야위어가는, 수백만 년 풍화된 흰 돌의 갈비뼈/내 천재를 염탐질하는, 당신/차가운 회색 눈,/달그락, 누군가 내 전두엽 뚜껑을 열어요//로댕의 길고 하얀 손톱이 돌의 입술을 찢어요”라고 까미유의 천재성을 시기했다는 로댕과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다. 그리고 #3에서는 “로댕, 당신 눈동자가 어두워요/나의 미소로,/당신 눈동자를 반짝반짝 닦아 드릴게요//별똥별 우르르 쏟아지는, 봄밤/아직, 아기별은 등불을 끄지 않았나요?//1억 만년 뒤에도,/로댕, 나는 당신의 초록별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라고 로댕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 시의 제목 ‘까미유 끌로델의 외출’의 의미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구절 1억만 년 뒤에도 당신이 초록별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외출일지도 모른다.     2. 해체와 융합시대의 실험시   하이퍼시에 대한 실험 이외에 이선 시인이 실험하고 있는 시는 종교와 신화와의 크로스오버적 해체와 융합이다. 그리고 이에 덧보태 문화역사적 인물에 대한 자신 나름의 인식을, 한편에서는 혹은 하이퍼시에서 실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가 우리 시단에 없던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이 시대에 적절한 시적 실험이다. 시 〈붓다를 찾아가는 길〉을 먼저 보자.     기원문 AUM 오~옴 aapyaayantu mamaaN^gaani vaakpraaNashchakshuH 아피아얀투 마만가니 박프라나샥슈흐 shrotram atho balam indriyaaNi cha sarvaaNi 슈로트람 아토바람 인디야니 차 샤르바니 오움 나의 팔 다리와 내가 하는 말, 호흡 눈, 귀를 강하게 해 주소서, 나의 감각들이 활력을 얻도록 해 주소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다가 네가 잠들었느냐, 네가 무지개에 두 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누워 온 세상을 측은히 내려다보느냐, 네가 곤히 잠들었으나, 정신은 청량하더냐, 머리가 땅에 닿아, 세상이 답답하더냐, 불면과 편두통에 시달렸더냐, 두 팔이 자꾸 길어져 온 땅을 네가 감싸 안는구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안에 부처가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네 입이 세상 허물 다 받아들여, 완도 앞바다가 되었구나, 반야산, 수효사 안고 우주의 심지가 되었구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안에 부처가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시 〈붓다를 찾아가는 길〉 전문     위 인용시에서의 “AUM 오~옴”은 불교의 진언眞言인 산스크리트어 ‘옴’일 것이다. 이 음절은 헤브라이어의 ‘아멘’과도 같은 것으로, 이 언어의 의미는 태초의 소리,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으로 본다. 부처에게 귀의하는 자세를 상징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고대 인도에서는 종교적인 의식 전후에 암송하던 신성한 음이었다고 한다. 그 “오움”을 시인은 “나의 팔 다리와 내가 하는 말, 호흡”으로 인식하고, “눈, 귀를 강하게 해 주소서, 나의 감각들이 활력을 얻도록 해 주소서”라는 기원문으로 대신하는 음절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을 이 시에서는 전문前文 혹은 전연前聯으로 서두에 놓는다. 이 시에서의 ‘너’는 시인의 특정 사람일 수도 있지만, 불특정한 사람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다가 네가 잠들었느냐,/네가 무지개에 두 다리를 걸치고/거꾸로 누워 온 세상을 측은히 내려다보느냐”을 보면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기 전 선혜보살로 보인다. 천상계에서 미륵보살과 함께 수행을 하다가, 지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에서 미륵보살보다 먼저 천상에서 내려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난 선혜보살로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되는 시행을 볼 때, ‘너’는‘깨달음을 얻기 위한 사람’, 깨달아 부처가 된 사람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이 ‘붓다를 찾아가는 길’에서 붓다의 의미가 석가모니라기보다는 ‘깨달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특징은 3행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네 안에 부처가 있다/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반복이다. ‘옴’의 반복처럼 반복한다. “울지 마라. 네 안에 깨달음이 있다. 가자. 가자.피안彼岸으로 가자. 우리 함께. 아 깨달음이여. 영원永遠하라”라고 반복한다. 진언으로 지속적인 기원을 하듯이 음을 반복하면서 운율을 통해 무의미공간에 이르는 시적 트릭도 이선 시의 특성이다.     주여, 내 몸의 마디는 부끄러움과 죄로 뚱뚱합니다 마조히즘으로 뭉쳐진, 내 관절의 혹들 겨울밤, 가난한 초록별들은 지독한 마디의 아픔에 〈보라색 형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만, 학자들은 〈밤나무혹벌〉이라 분류하여 명명합니다 내 마디의 벌레혹들, 초봄에 비밀리에 잉태하여 보리밭에 종달새 알을 낳을 때쯤, 무성하게 자랍니다 눈의 조직들, 3-6개씩 무더기로 산란하고 유충을 부화시켜 원죄의 잎사귀 왕국을 번식시킵니다 (…) -시 〈저녁에 드리는 기도〉 첫 연에서     시 〈저녁에 드리는 기도〉는 위에서 보듯이 가운데정렬로 시행을 모아 놓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 모양이 의미하는 바 형벌과 종교적 상징인 십자가의 중앙 집중을 염두에 둔 배열로 보인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기 때문에 시의 모티프와 일치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첫 행 “주여, 내 몸의 마디는 부끄러움과 죄로 뚱뚱합니다”라는 속죄의 고해만 보아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종교적 상상력이 시적 화자의 몸의 마디인 관절의 혹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밤나무혹벌’로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밤나무를 자기화하여 죄의 표상인 관절의 혹을 밤나무혹벌로 연결시켜 나가는 발칙한 상상력이 춤추는 꿀벌로 그것을 “반전과 아이러니의 원”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벌레들이 탐내는 유충으로 그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그런 뒤 이 시의 결말부분에서 기도한다. “주여, 벌레들이 갉아먹다 남긴 부끄러움으로/겨울 별꽃 밭에, 하얗게 한 줄 시를 쓰게 하소서”라고. 이렇듯 이선의 종교적 상상력은 〈붓다를 찾아가는 길〉와 〈저녁에 드리는 기도〉에서처럼 신앙고백적인 기원의 의미보다는 시를 발상하는 모티브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아이러니적 표현구조로 시를 차용하여 종교신앙시로서의 가치를 거부한다. 시 〈성덕대왕신종〉과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는 《삼국유사》를 모티프로 한다. 《삼국유사》를 원형으로 하여 시로 형상화한 작품은 대표적으로 미당의 많은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미당의 시가 변용된 소재로 불교적 상상력을 통해서 불교사상을 함유한 시를 쓰는데 비해, 이선의 시는 질료와 차용할 뿐 그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변형시킨다는 점이 다르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에밀레, 에밀레 어느 잃어버린 왕조의 꿈에 좌표를 긋고 달려오신, 당신 불국사 다보탑, 돌사자 머리에 접혀져 -에밀레, 에밀레 4월, 벼이삭 돋아나는 함성 6월, 보리이삭 익히는 바람소리 삼국유사 13페이지부터 소리의 굴절은 시작되었다 탑돌이 하는 신라 처녀, 하얀 버선목 살결 소리 -에밀레, 에밀레 해당화 꽃잎 위로 별빛,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 청동곰팡이에 섞인 미나리아재비 냄새   비천상 선녀여, 역사의 꽃뿌리 더듬고 있더냐 한반도 긴 맥박 소리, 함성으로 뭉쳐 한라에서 백두까지 힘차게 뻗어 천년 동안 숨죽인 소리의 뿌리 “어허 둥둥∽, 에밀레∽ 에밀∽레∽∽” 소리의 투명한 관을 열고, 맨드라미꽃 낮잠을 깨운다 -시 〈성덕대왕신종〉 전문     위의 〈성덕대왕신종〉은 “에밀레, 에밀레”라는 신종 소리가 “4월, 벼이삭 돋아나는 함성” 소리로, “6월,보리이삭 익히는 바람소리”로, “삼국유사 13페이지부터 소리의 굴절” 소리로, “탑돌이 하는 신라 처녀,하얀 버선목 살결 소리”로, “해당화 꽃잎 위로/별빛,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로, 급기야는 “청동곰팡이에 섞인 미나리아재비 냄새”로 도도한 역사의 물결처럼 내려와 “한반도 긴 맥박 소리, 함성으로 뭉쳐/한라에서 백두까지 힘차게 뻗어” “천년 동안 숨죽인 소리의 뿌리”로 남아 “‘어허 둥둥∽, 에밀레∽ 에밀∽레∽∽’/소리의 투명한 관을 열고, 맨드라미꽃 낮잠을 깨운다”고 성덕대왕 신종을 인식하고 쓴 시이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의 꽃뿌리를 더듬”는 “비천상 선녀”로도 인식한다. 신화를 원형으로 하여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쓰는 시나, 또는 신화를 화소로 하여 제재전통에 맥을 같이하는 시는 우리 현대시에서 소중한 자산이다. 이에 시에 대한 가능지평을 이선의 시는 열어 놓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강가에 서성거리는 사슴을 잡아먹고 황색 암구렁이, 한 마리 여러 마리 수컷과 둥글게 한데 엉키어 구애를 하네 물속나라에도 꽃 피고, 잎이 돋네 몸을 휘말고 황색얼룩무늬를 잉태하네 ―대지의 어머니, 고구려 유화   백 번, 죄가 허물을 벗네 -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 전반부     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는 위의 예시에서 보듯이 유화와 주몽을 모티프로 한 시이다. 국보 제259호인 ‘분청사기 구름용무늬 항아리’는 회청색 바탕흙의 몸체에다 상감 장식의 역동적인 용을 조형한 분청사기다. 황색 바탕의 사기가 아니다. 이 시의 화소가 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가 있는지는 몰라도,국보 제259호를 상상력으로 변용하여 쓴 시로 보인다. 그 무늬를 시인은 위의 시에서 보듯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신화를 시적 상상력으로 황색 암구렁이가 수컷의 구애로, 황색얼룩무늬를 잉태하는 것으로 신화를 새롭게 창조한다. 그리고 이 시에서 “대지의 아들, 주몽” 신화는 “하늘과 땅이 껍질을 벗고/꽃물 흘러, 흘러 유화의 자궁 속”에서 잉태하여 “천둥 번개 타고 구름 속으로, 용이 승천하”는 것으로 표현하다. 그리고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를 “함지박만한 달이/황색구렁이 몸통에 올라앉아 힘을 주”어 “광활한 우주가 알을 낳는” 것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이미지로 그려낸다.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 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   바다뱀이 S자로 리드미컬하게 헤엄칩니다 파란 발광체를 발사하는, 등줄기 깊은 바다에는 도로가 따로 없습니다 천지사방 어느 방향으로든 새 도로가 납니다 물고기는 부리로 초고속 도로를 내며 헤엄칩니다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 달빛은 어둑어둑 춥습니다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에서 두-둥 빈 소리가 납니다 젖은 낙엽 어디쯤에선가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 밤 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당신은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곧 후회합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 -시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 전문     랭보와 베를렌느는 프랑스의 동시대 시인이다. 십대의 나이로 파격적인 시를 쓴 랭보의 천재성에 매료된 베를렌느. 그들의 열정과 광기를 그린 영화가 〈토탈 이클립스〉(1995년)이다. 이 영화를 모티프로 삼아 쓴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 랭보와 베를렌느의 나이 차이는 10살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베를렌느가 랭보보다 다섯 해를 더 산다. 랭보는 조숙하고 반항적인 천재시인이며 방랑시인이다. 이 둘이 만난 해는 랭보가 16살일 때이다. 랭보는 ‘견자(見者, voyant)의 편지’에서 베를렌느를 칭송함으로써 그와 만나게 되고 끝내는 베를렌느를 아내와 자신 사이에서 방황하게 한다. 이러한 이들의 광기와 열정을 위의 시〈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는 그들의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 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들의 실제 관계를 비유한 것인가. ‘푸른 침대’는 베를렌느의 아내이고, ‘흰 구름’은 랭보의 천재성과 영혼이며, 부러진 연필심은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한 베를렌느의 총이거나, 그로 인해 일찍 절필하게 되는 랭보의 시 창작일까? 이러한 배경을 1연에 깔고, 2연에서는 깊은 바다의 바다뱀, 물고기의 해로海路, 사랑의 면허증,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의 빈 소리,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당신으로 이미지를 단절적으로 연결되어 진행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이 하이퍼시의 기법인지에 대한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시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시적 화자의 이미지가 구축된 마지막연이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곧 후회합니다/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도 ‘당신’이라는 시어가 두 번 노출된다. 마지막에서의 ‘당신’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떠난 바다뱀이라고 할 때, 그 바다뱀이 의미하는 바는 불확정적이다. 다음 행의 미장원과 관계된 객관적 상관물로 머리카락 혹은 머리의 가르마라는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이 또한 불투명하다. 그래서 그의 시가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는 셈이다. 행과 행,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비약적이고 단절적이라는 점에서이다. 그리고 마지막행인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된다는 표현은 수미상관법에 의해 장치미학이기는 해도 이 천재시인들의 열정과 광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해와 달과 별이 내/줄기세포를 키우는가 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동자, 예민한 입맛/가는 목소리, 위의 크기와 창자길이,/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페이지가 접혀,/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토스토에프스키,/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나의 詩도 파랑색이다./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나무들 밑둥 잡고, 오늘도 땅에다 부지런히 글씨를 쓴다/제 생각을 뿌리 채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내/내 할딱이는 심장에 마저 붙여주고 갔듯이,//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시 의 전문     위의 시의 제목인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는 주에 의하면 “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선 시인의 다른 시보다 이 시는 비교적 쉽게 자신을 드러낸 시, 혹은 자기 고백시라는 판단이 든다. 이 시는 굳이 설명이나 해설이 요하는 시는 아니다. 그냥 읽으면서 이해해도 좋을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선은 좋은 시, 새로운 시, 독자들에게 충격 혹은 전율을 주는 시를 쓰려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관련서적을 뒤져봐야 한다.그의 상상력은 어떤 때는 지적이고 정적일 때도 있지만 대범하고 발칙하다. 앞서 개진했지만, 이미지 연결의 비약성과 예기하지 못한 이미지의 증폭 등은 낯설게 하기가 아닌 그의 시의 참신성과 독창성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니체, 보들레르, 토스토에프스키,/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등에 대한 흠모와 그들 작가들의 문학혼에 대한 탐색은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 시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공부해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나의 詩도 파랑색이다”의 키워드인 파랑색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 젊은 시를 쓰는 감성적인 시인이며 판타지를 몽상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정신사와 역사에 한 발을 디뎌놓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통시적으로 시간이동과 공시적으로 공간이동이 가능한 크로스오버시대의 첨단을 몽상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하이퍼시와 포스트구조주의                                             심 상 운     1, 롤랑 바르트의 이상적 텍스트와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해체 비평으로 넘어가는 접점에 위치한『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 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langue)를 말하면서‘저자(著者)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記意)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의 이론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 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가 아닌‘기표(記標)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단위(unit)들로 형성된‘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이미지들은  ‘의식의 링크(link)’에 의해 연결된다. 이 링크는 하이퍼텍스트의 용어이지만 하이퍼시에서도 사용된다. 그 단위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단위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땅속줄기들의 연결과 같은 개념으로도 인식되는 이 흐름은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想像)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공간도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구조(경계)를 고수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이퍼시 구조의 특성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전통적인 시에서 중요시하는 메시지(주제, 관념)의 전달보다 상상이나 공상(空想) 속의 현상(現象)에 대한 감지(感知)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고정된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이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에서 찾게 된다.   이러한‘무경계(無境界)의 기법’은 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경계를 만드는 분절선(分節線)들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층(層)이나 영토(領土)를 만드는 선(線)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은 인간의 전통적 의식에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無意識)의 사고(思考)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자연(自然)에 더 가깝게 접근된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위계적(位階的)이고 계층화, 영토화된 철학적 사고를 수평적 사고의 구조로 개혁하기 위해서『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이다.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탈-경계의 상상과 사유의 이미지로서 땅속줄기 즉 리좀(Rhizome)의 이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수평으로,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위로 솟아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곁뿌리나 잔뿌리들이 모이는 중심이 없는 덩이줄기들은 가지 또는 줄기는 서로 만나고 흩어지는 방식으로 접속하고 분기(分岐)하며 우발적, 역동적으로 뻗어나가는 생명력을 지닌다. 들뤄즈와 가타리는『천 개의 고원』에서 이런 리좀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책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서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리좀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제시하는『천 개의 고원』은 현대 철학의 한 복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영토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로 인식된다. 이 책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het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 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며 수평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단위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고정된 틀의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사물성),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다양한 이미지들의 결합을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영토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기표의 이미지 덩어리로 인식된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0세기 중엽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Anna Freud)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나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이가 이성에 환상을 개입시키는 작용을 함으로써 인간은 현실적인 면과 비현실적인 면을 공유하게 된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이런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랑그, 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의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에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월간 시문학 2011년 12월호 발표 재료 2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中)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構造主義, structuralism] 이론   좌장: 심 상 운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는 문학에서도 작가들은 기존의 글들을 혼합하는 능력, 재조립하거나 재배치하는 능력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미 씌어진”언어와 문화의 방대한 사전에 의존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존 베일리는 구조주의 문학론이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삶의 산물이며 작가의 본질적 자아를 표현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거부한다는 것, 소설이나 희곡이 ‘사물을 있는 대로 말해’주려 한다는 종래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 ‘작가는 죽었으며’ 문학 담론은 어떤 진리의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론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호학의 죄는 픽션에서 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파괴 한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에서 진실은 허구보다 앞서고 허구와 분리될 수 있다”는 반구조주의의 이론을 펼친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문학에서도 철학과 같이 ’반인본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1. 언어학적 배경 언어는 그 자체 안에 독립된 상관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은 글이나 말 속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끌어낸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스위스 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구조주의 형성의 토대를 만들었다. 소쉬르는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체계의 개념’을 언어학에 도입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구조주의적 사유방식의 기초가 만들어졌으며 그의 언어학적 모델은 다양한 사회 문화 현상들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에서 그는 ‘언어학 연구의 대상은 무엇인가’와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의 이론으로 내놓았다. 그 첫째가 언어의 체계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별한 것이다. 랑그는 한 언어의 발화들의 기저를 이루는 형성 규칙들과 패턴들의 총체이며, 빠롤은 실제적인 발화들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랑그는 언어의 사회적 측면으로서 우리가 화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공유체계인데, 반해서 빠롤은 이 체계가 언어의 실제 용례를 통해 개별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랑그와 빠롤은 그의 언어학에서 기본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둘째는 언어학에서 언어의 통시태보다 공시태를 강조한 것이다. 공시태는 정해진 시점에서 작동하는 동시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며, 통시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언어 체계와 그 요소들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소쉬르는 통시태보다 공시태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여 언어가 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시점의 언어 구성요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빠롤에 대한 랑그의 강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곡이 다른 기회에 다른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어도 같은 곡으로 인정되듯이, 빠롤은 같은 형식이 다른 실체로 실현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그는 개인적인 화자가 처한 사회적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호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런 랑그에 대한 논의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한 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즉, 소쉬르는 언어 상태가 변한다는 사실도 언어가 공시적인 체계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셋째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본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이다. 여기서 기호란 개념을 의미하는 시니피에(signifie')와 청각 이미지를 의미하는 시니피앙(signifiant)이 결합된 것이다. 즉,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의 결합은 어떠한 필연성 없이 결합한 것으로 단지 그 언어집단의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자의적(恣意的)으로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호의 의미는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기호가 속해 있는 체계 안의 다른 가치들과 맺는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므로 기호의 의미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그 기호가 언어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에 대해서 갖는 ‘차이’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래의 ‘기호=사물’의 모델이 ‘기호=기표/기의’의 모델로 바뀐 것이다. 이 모델에는 사물의 자리가 없다. 언어의 요소들은 낱말과 사물 사이의 결속의 결과로서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체계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다.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의 독자성은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교통신호체계에서 신호가 ‘빨강-노랑-파랑’ 세 가지일 때, 기표(빨강)/기의(서시오), 기표(파랑)/기의(가시오), 기표(노랑)/기의 (기다리시오)의 약속체계를 갖는 것과 같다. 이때 체계는 일종의 임의적 약속으로 빨강과 서시오 사이에 고유의 절대적인 의미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색깔의 차이에 의해서 생길 뿐이다. 그것은 파랑과 노랑도 같다. 여기서 차이란 대립 및 대조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이다. 예컨대, 신호등 빨강은 파랑이 아님이며 파랑은 빨강이 아니라는 뜻이다. 음성언어도 소리의 차이로 형성된다. 음성언어의 최하위단위인 음소(音素)는 유의미한 음 즉 언어 사용자(발화자, 청취자)에게 인지·지각되는 음이다. 음성언어의 체계는 음들의 관계 즉 대립항들이 짝을 이룬 이항대립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음소의 차원에서 보면 이 대립항은 ‘비음/비(非)비음, 모음/비(非)모음, 유성음/무성음, 긴장음/이완음 등이 있다. 이런 언어관의 요점은 언어 사용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하나의 ’체계‘ 즉 구조라는 점이다. 이런 구조는 화자들이 내재화하고 있는 언어능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은 동일한 이론적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1    이오장 시론 외 1편 [한국] 댓글:  조회:1130  추천:0  2017-10-02
하이퍼시의 이해와 창작                                 이 오장 시인                                                   1. 현대시의 원리   17세기 폴란드의 미학자 사르비에브스키(K.M.sarbiewski)는 “모든 예술의 창조개념은 자연이나 사물을 모방할 뿐이지만 시인의 예술 행위만은 새롭게 창조(de novocrat)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미술이나 조각 등 기타 예술 행위는 자연과 사물 등의 대상을 모방하지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끝없이 펼쳐져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으로 시가 모든 예술의 정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시의 발생이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함께 존재했다는 학설은 시가 예술의 근원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가졌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에 비해 너무나 나약함을 깨달은 인간이 구원의 행동으로 언어가 발생하기 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었고 언어를 습득한 이후 리듬이 발생하여 이것이 시로 발전했다는 학설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시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다. 순간의 전시성에 그치는 미술이나 청각적 예술은 인간의 정서를 다듬어주는 데 그치지만, 정신적 감동을 전달하는 시는 인간이 만든 역사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단 몇 줄의 시가 수많은 전쟁사를 기록으로 남겨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실도 있다. 인간 생활은 끝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연속적으로 구성되었다가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나 안정이다. 그 안정은 변화 속에서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물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직 영적인, 즉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하다. 시는 인류의 발전과 더불어 정신세계를 다듬어 왔다.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부터 선택적 지각으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자연에 한정된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다. 시가 자연 속에서 발생하였지만 꾸준히 자연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 인간이 원하는 시의 형태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현상이다. 일찍이 조지훈 시인은 시의 원리에서 "시인은 자연이 능히 나타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시에서 창조함으로서 한갓 자연의 모방에만 멈추지 않고 자연의 연장으로서 자연의 뜻을 현현하게 하는 대자연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인이 자연을 소재로 하여 다시 완미한 결정을 이룬 제2의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에 더 많이 통할수록 우수한 시며 실제에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은 하나의 자연으로 남는 것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를 모두 수용한다는 것은 착오다. 인간이 발전하는 속도에 뒤처지는 시라면 가치가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가 끝이 없다는 것을 가정할 때 과연 사실과  실재성 즉 현실성만 가지고 시를 쓴다면 꾸준하게 발전되어온 시가 정체되고 말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쫒으려는 새로운 형태의 모더니즘(modernism)이 발생하여 전통주의와 사상에 대립하여 문명적 주관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파가 등장하였고 근대 시인들이 꾸준하게 이를 발전시켜 많은 유파를 남겼다.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보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극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유로 필요한 자극만 받아 그것만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창조적인 존재로서 남들이 지나치는 자극을 잡아들이는 능력을 갖췄다. 이것이 낯설게하기다. 시 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똑같은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낯설게하기가 기본임을 감안할 때 방법을 달리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시 창작의 원칙이다. 이 같은 낯설게 하기의 기본이 시의 방향을 새롭게 만든다.시는 미학이 아니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무엇도 아니다. 미학에 빠져있는 창조는 막힌 길이다. 예술의 창조는 시만이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새로운 시학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시학을 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하이퍼시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한마디로 이미지의 탑 쌓기다. 여러 가지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각각의 이미지로 그린 후 하나의 탑으로 쌓는 것이 하이퍼시다. 기존의 시가 하나의 이미지로 시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하이퍼시는 다수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하여 더 확장된 시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넘어 시의 표현력을 끝이 없게 상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시만을 고집한다면 모더니즘의 공간에서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춰야 한다. 시는 인류의 발전에 앞장서야지 발전을 따라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개 시인은 하나의 사물만을 관찰하고 거기에서 시의 모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즉 관념에 갇힌 시작법을 고수하는 것이다. 심리학계의 저명한 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는 인간의 맹시현상을 실험하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결과는 인간의 시선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본다는 것이다. 어떠한 연극이나 경기를 보게 한 뒤 극 중이나 경기와는 관계없는 움직이는 사물을 지나게 하면 대개의 사람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연구결과이다. 자기가 보고 있는 사물의 움직임만 보게 되지 그 밖의 사물은 관심 없다는 맹시현상은 시인의 시 쓰기에도 동일하다. 어떠한 사물에서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오직 하나의 이미지만을 떠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미지는 관심 밖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다. 하이퍼시는 맹시현상의 허점에서 출발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며 거기서 파생된 다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면 하이퍼시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파생된 이미지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편집이다. 사물은 끝없이 구성되고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는 성질을 가졌다. 이미지는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유동성 상상이다. 하이퍼시는 변하는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변화하는 각각의 사물마다의 이미지를 편집하여 하나로 융합시키는 것이 하이퍼시의 완성이라 할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천재적인 재능이 필요하지는 않다. 천재는 한없는 상상을 하다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능력을 가졌다. 이에 반하여 둔재는 끝없이 상상하기만 한다. 시를 쓰는 시인은 누구나 천재라고 자평한다.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다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무엇인가 자신도 모르는 것을 생각하며 끝없이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때의 상상은 생각의 흐름을 놓칠 때까지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에 멈추게 되는데 그 멈춤에서 흐름을 찾아내는 사람이 시인이고 찾아내지 못하고 놓치는 게 보통 사람이다. 이러한 상상은 시인들에게는 일상이다. 이럴 때의 생각은 그림 곧 심상이 되고 시인은 이를 문장으로 옮겨 시를 쓰게 된다. 이때 그림을 설명하는 글이 관념적인 문장이고 객관적으로 묘사를 강조한다면 사물시가 되어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론을 보면 하이퍼시는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고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구조를 이룬다고 했다.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들어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다. 사물에서 받은 자극을 상상으로 끌고 간 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의 그림을 최소 단위로 세분화하고 각 부분을 사물화하여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결국, 하이퍼시는 보고 느낀 것에 대한 관념의 그림을 세분화하여 사물에서 파생되는 연결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처음의 이미지와 융합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퍼시의 단계   1) 1단계   안개는 피어서 강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박목월  전문   위의 시는 목월의 초창기 작품으로 한편의 그림을 추억 저편의 꿈으로 그려낸 시다. 강가에 핀 안개가 밑바탕을 이루고 잠들어야 할 밤에 울어대는 비둘기가 그리움을 재촉한다. 그런 밤엔 저절로 고향 이웃에 살던 처녀가 떠올라  잠을 못 이룬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고향이고 봄의 풍경이다. 단 한마디도 고향의 이야기는 없으나 유년시절의 향수가 읽는 이의 내면을 흔들어 놓는다. 환상적인 그림을 강가의 안개 밤에 우는 비둘기 갑사댕기를 맨 처녀 등, 사물로 대비한 목월의 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이퍼적인 기질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것이 하이퍼시의 1단계라고 볼 수 있다.  . 2) 2단계   봄은 차 한 잔의 향기가 난다 귀 가까이 은박지를 밟고 와 똑똑똑 여보세요 아침 하얀 풋잠을 깨운다 울타리의 장미가 새순을 뻗고 기어가 바람 일렁이는 꽃불을 켜고 있는 가슴 신록을 꼭 누르면 깜박 깜박 디지털 숫자가 찍히고 싱그러운 손전화 푸른 벨소리가 난다 감전되는 떨림으로 여보세요 신록의 첫 목소리가 울려온다 울타리에 멧새 한 마리가 날아 앉아 도록또록 눈망울을 굴린다                          오진현 ‘푸른 벨소리’ 전문   오진현 시인은 일찍부터 탈관념의 시론을 주창하며 관념을 모두 깨트리려 직관적인 수학적 존재증명이라는 시론을 발표하고 누구보다 앞서 하이퍼적인 시 쓰기를 주장하였다. 모든 시어를 사물로 대체하며 이미지의 연결과 확장을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새로운 시 쓰기를 실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생을 일찍 마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하이퍼시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리는 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하이퍼시의 초기 단계로 당시에는 디지털시라고 명명했던 시로서 이미지의 단순함을 빼고 나면 하이퍼적인 요건을 갖췄다. 하이퍼시가 여러 개의 이미지를 펼쳐내고 다시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여 상상 속에서 캐낸 더욱 더 큰 이미지의 집합체라면 이 작품 속에 나타낸 이미지는 봄 그림 하나에 불과하다. 여기까지가 하이퍼시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3) 3단계   까만 머리통에 볼펜으로 두 눈동자를 찍은 손톱만한 몸뚱이. 반짝이는 갑옷 앞다리 갈퀴와 뒷다리 톱니로 쇠똥더미에 올라 곰상곰상 쇠똥을 굴려 금방 구워낸 똥경단 핑크 냄새나는 달덩이 빵 달은 없고 고공 철탑농성 2백일 비정규직 B씨의 눈에는 별없는 칠흑 밤하늘이 두 아이와 아내를 위한 더 큰 빵만 하였다   쇠똥구리 작은 눈을 화등잔만큼 키우고 말랑한 똥경단 밟고 오른 무대에서 팔을 비틀고 다리를 꼬아 깨끼춤을 춘다 하늘을 조아 은하수 등불을 찾는다 은하사다리가 감마선 광목을 펼쳐 미끄럼 타고 내려오면 똥경단을 탈없이 집으로 가져가기 달덩이 방을 빼앗기지 않기   하늘 공중에 떠서 굶고 사는 B씨가 은하 젖줄에 더 가까이 가려고 양 어깨를 들썩인다 똥 굴려 똥경단 먹고 똥경단 틈새에 새끼 낳고 똥 구워서 쇠똥찜 한다              김규화 ‘쇠똥구리의 춤’ 전문   하이퍼시가 이미지의 탑 쌓기라고 정의한다면 쇠똥구리의 춤은 하이퍼시가 분명하다. 생존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먹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한다. 더럽고 작고 뜨겁고 차갑고를 떠나서 각자의 현실에 맞게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똥을 먹는 쇠똥구리, 아이와 아내의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철탑에 올라 농성하는 근로자. 작은 일당을 얻기 위하여 관객도 없는 무대에 오른 곡예사,모두가 먹기 위한 행동으로 움직인다. 그 방법이 모두 달라도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은 같다. 굴러가고 높이 오르고 춤을 추고 빼앗기지 않기 위해 움츠리다가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하나의 작품 속에 모두 배열하고 전체적으로 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 작품은 하이퍼시만이 가진 표현 방식이다. 김규화 시인의 시는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췄으면서도 읽기가 편하고 이해하기가 빠르다. 너무 난해하여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운 하이퍼시 속에서 하이퍼시의 완성도를 갖췄다.        4. 하이퍼시의 배제요소   1) 주관의 배제      모든 시는 시인의 주관으로 시작되고 주관으로 끝나는 게 보편적이다. 화자의 감정 몰입으로 얻은 이미지가 끝날 때까지 일직선으로 움직여 주제를 벗어난다면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독자의 감동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많다. 이는 화자의 울타리에 독자의 감동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기보다는 화자가 창작한 작품이 화자의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다. 하이퍼시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하이퍼시가 된다. 새로운 시운동은 실험이다. 그 결과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주관을 빼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둘째 반복하여 써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셋째 나타내고자 한 이미지가 뚜렷해야 한다. 넷째이미지의 결과가 표준화 및 일반화되어야 한다. 어느 것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하이퍼시의 최대 쟁점은 주관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속에서 화자인 ‘나’가 있고 없고는 시작법에 있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보편적으로 볼 때 화자의 존재는 표시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밖에 없으므로 배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케스트라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지휘자밖에 없다.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고 감동의 결과는 연주가 끝나지 않아도 발출된다. 시에서 화자는 지휘자에 속한다. 그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보여주는 몸짓을 한다면 객관적이지 못하여 감동의 결과는 끝내 발출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발표되는 많은 하이퍼시가 하이퍼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지만, 화자인 ‘나는’을 나타내어 객관을 벗어나는 듯한 작품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국 하이퍼시클럽 2집을 보면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나는’의 주관적인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하이퍼시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시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시 속의 화자 즉 ‘나’와 ‘나는’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존재를 나타내고 ‘나는’은 존재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은 은연중 움직이려는 의도성 즉 주관성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갖고 있어 ‘나’와 ‘나는’을 굳이 나타내고자 한다면 ‘나는’ 보다는 ‘나’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화자의 울타리 밖에서 인정받는다. 화자가 만든 울타리에 독자를 들여놓을 수 없으며 처음부터 울타리 없는 시를 창작하여 읽는 이에게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야 한다.   2) 직유법의 배제    직유는 본의와 유의의 관계가 지표에 의하여 분명히 나타나는 비유로서 ‘넓은 의미의 은유의 한 종류다’라고 문덕수 시인의 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고 그동안 많은 평론에서 직유가 논의가 되었다. 시에서 직접적인 비유가 필요한가는 시작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인 개개인의 표현방법이라 할 수 있다. 미당 서정주시인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도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직유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과연 직유가 필요한가는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찾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하이퍼시의 이론을 따른다면 직유는 옳지 않을 것이다. 예로 효도를 나타내는 시를 쓴다면 “나는 심청이처럼 아버지를 모셨다“ "나는 이순신 장군처럼 국가를 위해 싸웠다" "나는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등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을 한다면 과연 그 밖에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처럼’ ‘같이’ 등 직유를 쓰게 되면 단 한 구절로 시를 완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하이퍼 시에서는 직유는 피해야 한다고 본다. 하이퍼시클럽 2집에서 예시를 본다면 "물계자의 노래“ 1연 첫 행부터 "나는 어느덧 지렁이처럼 거미처럼 무엇보다 지네처럼” 등 무려3번의 직유가 있고 그 밖의 시에서도 많은 직유가 유행처럼 보인다. 하이퍼시를 쓴다면 직접적인 비유가 하이퍼시의 최고 지향점인 사물의 객관화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가 된다.   3) 항등성의 배제   대부분 사람은 사물을 대할 때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그 사물의 본질을 이미 인식된 대로 바라보게 된다. 사물은 거리와 환경에 따라 그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데 인간의 두뇌는 이미 각인된 인식을 거의 바꾸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사물의 본질대로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사물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현실에 맞게 그리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인 기술 방식이다. 커다란 소나무를 매일 본 사람이라면 멀리 있을 때도 소나무의 크기를 원래의 크기대로 인식하고 그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하이퍼시는 그것을 배제하고 현재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그려야 한다. 하이퍼시가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자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사물의 크기나 모양을 주위의 환경과 움직임에 맞춰 이미지의 상상력을 확대해야 한다. 사물에 대한 본질보다는 허상과 허구의 상태를 그려 여러 각도의 방향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야 한다. 이것이 항등성 곧 관념의 배제이다   88올림픽자동차전용도로에 철가방이 갈지자로 흔들며 휙휙 달려간다 소나기 지나가고 63빌딩이 부르르 떤다 흩어진 물방울이 여의도병원 성모마리아상에 내려앉는다 임종실에 들어갔다는 예수의 소식이 가슴 적신 이탈리아 아드리아 연안의 보라(bora)가 2000cc의 배기량에 우아한 보디라인과 넓은 트랙, 차체 둘러싸고 있는 탄탄한 범퍼를 자랑하며 지중해 상쾌한 바람 몰고 한남대교 나들목을 빠져나간다 내 두 바퀴 무겁다   오후 2시 네팔 카투만두 시장을 지나 한차례 쏟아진 비에 발이 묶인 바이크족이 더위를 피해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다가 청평 75번국도를 물고 찰나에 달아난다 지름길이 훤하다   질척이던 길 지우고 집으로 들어선다 아들이 남겨둔 하루가 냄비 속에 바싹 말라 있다       김해빈 시인  전문   김해빈 시인은 사실적인 묘사로 하이퍼시를 전개한다. 자동차 전용도로를 불법으로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 뒤따라 한바탕 내리는 소나기, 스콜이 지나간 것처럼 활짝 갠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의 죽음 등 도무지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보인 그대로 전개되고 불황 속에서도 사치한 모습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외국산 자동차, 네팔 카투만두는 스콜이 잦은 곳인데 그곳에 바이크족이 갑자기 청평 75번 국도를 달리는 오토바이 부대로 전환된다. 평소 흔히 마주하는 장면 중의 하나인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을 끌어와 상습 정체구간임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다. 반복되는 혼란과 불안의 연속선상에서 겪게 되는 하루가 전개되다가 안주할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어지러운 상황과 연계시켜 하루를 마무리하며 갈등과 사회적인 격차를 그려냈다. 기존에 굳어진 이미지 대신 항등성을 배제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끌어들여 하나의 이미지로 묶은 것이다   4) 제목의 사물화 및 관념 배제   하이퍼시의 최대 목표는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로써 객관적으로 이미지를 넓혀가는 데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제목 곧 주제부터 관념어가 쓰여 진다면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기존의 관념시가 되고 말 것이다. 하이퍼클럽 2집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해부학 교실. 환각제 복용. 생존 본능. 노란 불꽃. 인연론. 냉동된 자유. 삶과 죽음의 시편. 희고 붉은 시. 환상여행. 미궁. 원앙생가, 돋아나는 서녘. 사이에 대한 소고. 나의 고독은. 겨울 여행. 세한도. 등 제목만 보면 하이퍼시라 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많다. 이는 사물이나 형상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의 제목을 붙일 수가 있는데 이것을 잊고 하이퍼시를 쓴다. 또한 제목이나 내용에 알 수 없는 외래어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 또한, 배제해야 할 요소들이다.  5. 하이퍼시의 구성 요소   1) 몽타주 기법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 소비에트의 쿨레쇼프(kuleshov)는 A장면과 B장면의 합은 A더하기 B가 아니라 C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라는 게슈탈트 심리학의 명제와 같다. 시에서도 각각의 이미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물 이미지의 합과 합은 완결성의 법칙에 의해 불완전한 자극을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로 전환된다는 뜻이고 서로 모순되거나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제시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적극적 해석을 유도하는 상호작용적 방법론이다. 하이퍼시는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잡은 화면을 이어 붙여 하나의 연속적인 화면으로 편집하는 시작법이다. 희극적인 사실을 묘사하고 칼 든 사람을 보여주면 비겁한 내용이 되지만 우울한 사실이 먼저 나오고 칼 든 장면이 나온 뒤 웃는 사실을 묘사하면 전혀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이퍼시는 문장 편집의 몽타주기법에서 완성여부를 결정짓는다. 서로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하나의 그림에 담아 새로운 정서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시작법이다.   비행기가 지나자 물보라가 일었다 반딧불과 어우러져 은어 떼처럼 별들이 유영하는 밤하늘 달의 목선을 타고 심해로 떠나는 항해를 꿈꿨다 턱시도를 입고 구름과 파도에 휩쓸리던 밤바다엔 용암이 흘러 넘쳤다 꽃밭의 별들이 숯불을 피워 이글이글 타올랐다 해저에 닻을 내리고 은사의 투망을 던지는 초신성의 바다 달의 나침판은 지상을 가리켰다 아버지의 이마에서 남자의 등에서 말의 엉덩이에서 새의 날개에서 나뭇잎의 푸른 잎맥에서 신의 성경책에서 마주보던 거울 속에서 출렁이는 바다 달의 뒷편에서 어둠은 바다를 잊고 살았다 문득 발견한 빛, 둥실 허공에 뜬 몸에서 엔진소리가 들렸다 밀물로 차오른 보름달 망망대해엔 북극성의 부표가 떠올랐다 온 세상 밤의 물결로 차오른 중수감 손안에서 바다가 출렁이고 바람에 깃발처럼 달력이 찢어진다 시간의 속력에 찌그러진 유선형의 그믐달, 화살이 날아간다                                김기덕 시인 전문   김기덕 시인의 "달의 항해"는 직유와 관념이 부분적으로 보이는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하이퍼시가 갖춰야 할 몽타주기법이 살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넘실대고 아버지, 남자, 말과 새, 나뭇잎 등 온갖 이미지가 난무한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은 하나로 묶여 읽는 독자의 시선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빛과 엔진소리 화살로 빠르고 정확하다는 집합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위의 시처럼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의 집합을 낯설게 하기의 특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이퍼시는 각기 다른 이미지를 서로 연결해 완전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시작연구의 결과물이다. 중간마다 떨어져 있는 불안전한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안전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연속 제시하여 혼란을 가증시켜서는 안 된다.   2) 서사성   모든 동물은 영역이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하여 싸움하고 자기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자신만의 성을 쌓고 산다. 모든 학문도 마찬가지로 영역을 가진다. 특히 시인들의 영역은 확고하다. 자신이 주장하는 시창작 방법에 도전을 받게 되면 참지 못한다. 뚜렷한 학설을 제시하지도 않고 무조건 다른 이론은 배척하는 경향은 시인들이 가진 특권처럼 되어있다.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발상은 은연 중에 나타내야지 갑자기 돌발하면 폭력적이라고 비난을 받기 마련이다. 하이퍼시는 어느 날 뚝 떨어진 이론이 아니다. 인간의 발달에 따라가기 위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시창작방법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혁명적인 요소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하이퍼적인 기법을 동원하더라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독자의 이해를 돕고 하이퍼시의 발전을 위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인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우선은 서사성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을 나는 제시한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드리리다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 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   붉은 바윗가에 잡은 손의 암소 놓고 날 아니 부끄리시면 꽃을 꺾어 드리리다   햇빛이 포근한 날  그러니까 봄날 진달래꽃 고운 낭떨어지 아래서 그이 암소를 데리고 서 있던 머리 흰 늙은이가 문득 그의 앞을 지나는 어떤 남의 안사람보고 한바탕 건네인 수작이다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버렸던 것일까   물론 다아 잊어버렸다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버렸었다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밖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었다                           미당 서정주  일부   일찍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신라초에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실에 맞도록 풀어내어 주목을 받았다. 인연 설화조. 수로부인의 얼굴. 신부 등 많은 시를 설화조로 표현하여 하이퍼적인 요소가 깃든 시를 썼다. 오늘날의 하이퍼와는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찍부터 과거와 현실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것이다. 서사로 시작되는 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하게 와 닿아 이미지의 전개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시선을 잡아두는 효과를 본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이퍼에서 이러한 시도는 새로운 시창작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강영은 시인은 이러한 효과적인 방법을 미당의 시와 더불어 서사가 있는 하이퍼시로 발표하고 있다.   아부오름, 움푹 파인 굼부리가 아버지 무릎 같다 좌정한 무릎 아래 빙 둘러 심은 삼나무들, 연하장에서 막 빠져나온 푸른 미간이다   아부지, 여기가 정토인가요   뾰족한 잠이 돋아 있는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번득이는 붉은 돔 눈깔, 가본 적 없는 시간의 미늘이어서   잔물결 이는 생각 속으로 핏빛 물기 스미는 지상의 한 시간은 먼 거리 한 시간 후에 닿아보지 않은 발자국이 벌써 촉촉하다   눈 아래 방목장에는 푸른 지붕을 가진 축사   달맞이꽃이 평생 걸어야 닿는 저 곳에도 무릎 구부린 아비소가 갓난 송아지의 등을 핥아주고 있을 거라고 그 무릎에 가만히 지상을 얹어보는데        강영은 시인 일부   제주도의 풍경이 둘러쳐지고 삼나무 울타리에 펼쳐진 아버지의 기억이 한 편의 영상으로 전개된다. 불교에서 원하는 서방정토에 아버지가 이미 갔으나 달맞이꽃 되어 바라보기만 하는 화자는 따라가지 못하여 한 마리 송아지가 되어 등을 핥아줄 아버지의 혀를 기다리며 지상에 전개된 목장에 촉촉한 발자국을 찍으며 배회한다.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듯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는 시도는 돌아간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 서녘에 목멘 목젖을 필사한다. "원왕생가"의 전설을 모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통하지 않고 여러 가지의 사물로 적절한 비유를 하여 하이퍼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작품이다.    수학자 폴리아(G.polya)는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는데. 곰 한 마리가 a지점에서 출발하여 1킬로미터를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1킬로미터를 간다. 그러다보니 출발점인 a지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곰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하는 실험이다. 답은 흰색의 북극곰이다. 문제는 곰의 색깔이 아니다. 남쪽으로 1키로 동쪽으로 1키로 북쪽으로 1킬로미터로 갔는데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지구가 둥근 입체가 아니라 평면이라고 생각하는 맹점을 말하는 문제다. 습관적으로 새로운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시는 무조건 어렵고 외우기가 불편하다는 선입감을 더 느끼고 시를 대한다. 더구나 하이퍼시라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으며 시인들조차 하이퍼시가 무슨 시인가 하고 의문을 갖는다. 문제는 이야기 즉 서사에 있다.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쉬운 이야기를 이미지에 맞춰 풀어간다면 하이퍼시의 성공은 분명하다고 본다. 폴리아의 문제처럼 시선을 끌어들여야 하이퍼의 공간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6. 하이퍼시의 방향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발표 이후 많은 시인이 참여하여 현재까지 발표된 하이퍼시는 시단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이론과 맞게 발표된 작품이 과연 몇 편이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주관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의 이미지를 찾지 못하고 제목부터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과 국적 모를 외래어의 남발, 이어가지 못하는 이미지의 확장을 위한 과도한 직유, 상상 보다 허구의 조합이 많고, 과도한 낯설기작법 등, 독자들이 외면하기 좋은 충분한 요소를 가진 것이 사실이다. 평론가 이성혁은 "시문학" 8월호에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란 시론에서 이상의 시 "광녀의 고백"을 들어 현란한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흐르면서 하이퍼하게 결합하고 벌거숭이인 채로 달리고 있는 푸른 불꽃 탄환은 모순적인 색채이미지가 결합하고 있어 진정한 하이퍼적 요소를 갖춘 시라고 극찬하며 현재의 하이퍼시를 일부 폄하하는 듯한 글을 발표하였는데 또한 하이퍼텍스트가 시에 내장된 어떤 특성을 활성화하여 개발된 것이라면 하이퍼텍스트는 테크롤리지에서 시를 예속시키려하는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시도는 진보적이라기보다 퇴보적이기에 실패하게 된다고 비평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은 일부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하이퍼시가 문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꾸준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이퍼 시이론에 맞게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자신의 시창작에 한계를 느껴 유행을 따르듯 하이퍼시에 동참하고 시의 낯설게 하기가 낱말의 낯설기가 아니라 이미지의 낯설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오장 시담론   시인은 물가의 등불이다   빛은 물속에 들어가지만 등불은 물속에 들어가지 못하듯 빛은 어디든 훤하게 밝혀주고 자신은 밖에서 자신의 그림을 방관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능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느낌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느낌에 기반을 둔 모든 생각은 멀리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주관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면 공감을 얻지 못한다는 말로 어떠한 대상을 만났을 때 느낌만 갖고 표현해서는 안 된다. 이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은 마음의 두 가지 근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첫째는 인상을 받아들이는 능력, 둘째는 인상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인데 첫째 능력에 의하여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둘째 능력에 의하여 주어진 대상과 인상을 연관 지어 생각한다. 그러므로 직관과 개념은 인식의 모든 요소이며 개념이 없다면 직관도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리는 감성 즉 오감을 통하여 사물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파생되는 감동을 지식과 연관하여 모두가 공감하는 시를 쓰게 된다. 그러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가 어떤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다. 감성이 무분별하게 수용한 정보를 지성이 판단하고 추론하여 범주에 맞게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향은 모두 다르다. 사물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성향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상을 포함하여 배경까지 전체를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대상이나 배경의 세부 사항에 초점을 맞춰 느낌을 그린다. 여기서 사람마다 능력이 구분되고 표현의 느낌이 다르게 된다. 즉 개개인의 능력이다. 어떤 시인이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하여 그것을 모방하여 시를 쓴다면 외면당하는 것이다. 물가의 등불이 물속을 아름답게 비추지만, 물속에는 들어가지 못하듯 시인은 대상을 꾸며주는 빛으로 밖에서 안을 비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의 모양과 크기만을 그리지 말고 사물의 내부 사항과 배경을 찾아내는 자기만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시인정신에 의한 체험적 창조     사람의 정신은 과학적인 해석이 불가하다. 정신으로 발생한 모든 결과는 체험에서 이뤄지고 정신적인 체험은 주관적이어서 내면의 신비를 밝히는데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생생한 의식의 흐름, 생각에서 얻어지는 생각과 충동. 기분. 감각과 기억. 몽상이 쉬지 않고 흘러간다. 언어를 사용하여 다른 이의 마음에 이미지를 전달하고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힘을 가진 사람이 곧 시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존 브로더스 왓슨(John Broadus Watson)은 ‘인간의 학습 방식은 고전적 조건화’라고 했는데 이는 보통 사람이 시인으로 변하는 과정은 환경에 존재하는 유발인자가 학습으로 인하여 자동적인 신체적 반응이나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체험과 거기에서 얻은 지식만큼 시를 쓸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1938년대의 스키너(B.F Skinner)의 조작적 조건화라는 학습에 대한 연구발표로 모든 학습은 자기가 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그것을 배우는 것이라 했다. 어떠한 행동의 결과에 따라 그 행동을 되풀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사고방식은 긍정적 강화와 부정적 강화 그리고 그 결과에 따른 표현으로 일반인과는 다른 유형을 가졌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 외부세계와 몸 안에서 발생하는 정보를 받아드린다. 감각수용체 세포는 물리적인 변화를 감지하고 그 정보를 뇌로 전달한다. 시인은 한발 더 나아가서 오감을 통해 얻은 정보를 더 큰 폭으로 확대하여 상상을 결부하여 거기서 발생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항상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이 시인이 창조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창조행위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과 문학의 본질은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에게 모방행위가 불가능했다면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미메시스론의 핵심이다. 어떤 대상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자신의 경험처럼 느낄 수 있는 심리적 모방행위가 없다면 새로운 창조가 없다는 것이다. 남을 이해하는 능력의 기초로 여기는 공감능력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에서 유래 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로베르트 피셔(Robert Vischer)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미학적 체험을 감정이입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했다. 감정이입이란 그 전에는 없던 개념이었다.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느낀다.’라는 말은 영어권에서는 공감이라고 표현되었고 현재는 일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타인의 감정은 그 사람의 정서표현을 그대로 모방했을 때 제대로 이해가 된다. 공감 능력이란 바로 이러한 정서의 모방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발달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는 모방이 창조적 능력으로 진화하는 것은 지연모방(Aufgeschobene Nachahmung)이 가능하면서부터다. 사람이 두 살 무렵부터 며칠 전 본 것을 기억하여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 행위를 머릿속에 상징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 지연모방과 같은 상징으로 매개된 행위가 창조성의 원천이다. 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인간의 두뇌는 창조적으로 치달아 여러 가지 상상력으로 문학이나 과학 또는 생활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다. 시 창작에 있어 모방행위는 기초적인 것으로 자연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에서 발견된 사물의 변화를 읽게 되는 것이 문학 즉, 시 창작의 기본이다. 그러나 모방이 아니라 표절이 된다면 창조적인 예술이 아니라 감정이나 사상이 전혀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시를 쓰면서 가장 기초적인 기술은 자연과 사물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떠한 경치나 새로운 사물을 대했을 때 거기서 얻은 영감이나 정적인 감동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시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   시는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의 감정적 변화의 그림이다. 어떠한 대상이든 시인의 눈에는 연관된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며 그것을 글로 표현하여 독자와 공유한다. 한마디로 사물에서 느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고 그릴 줄 아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느끼고 표현하지 않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되고 이미지의 연상을 다른 사물과 비유하여 자신만의 세계로 읽는 이의 감정을 끌어모은다. 그것이 시인 개개인의 능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껴야 많은 독자가 자신과 같은 감동을 하게 되는지는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다. 시를 쓰는 순간에 자신의 감동을 그리게 되지만 시의 완성이 이뤄졌을 때는 독자를 찾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떠한 대상을 보든 인간의 두뇌는 기하학적 원리를 따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시각정보를 해석하는 인간의 두뇌는 자신만이 갖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눈과 대상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그 대상의 크기는 당연히 반으로 작아져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100m 앞의 사물의 크기와 100m 높이에서 바라보는 사물의 크기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내려다볼 때가 훨씬 작아 보인다. 수직으로는 기하학적 원리가 작동하지만, 수평으로 볼 때는 작동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등성이라는 지각 심리학적 원리 때문이다.항등성이란 주위의 환경이 바뀌어도 사물을 일정한 방식으로 계속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둥근 접시를 옆에서 봐도 타원이 아니라 여전히 둥근 원으로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변하는 상황과 관계없이 사물의 본질을 본다는 뜻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의 심리학적 구성원리다. 시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항등성이 작동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멀리 떨어진 나무가 작은 묘목으로 보인다면 허상이다. 대상의 본질을 알고 있다면 큰 나무가 묘목으로 보일 리가 없다. 거리는 같지만 위에서 보는 크기와 거리를 두고 보는 크기를 다르게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인간의 생활이 대부분 수평 공간에서 이뤄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항등성을 잊고 산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쓸 때 그러한 원리를 모르고 감동만을 앞세워 본능적인 감각으로만 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세계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모른다면 시의 구성에서 사물과의 연결이 끊어져 읽는 이의 감정을 훼손시킬 뿐이다. 한 편의 시가 혐오스럽고 감정을 격하게 한다면 이미 시의 근본 목적을 잃는 것이다. 여려가지 학설과 실험에 의하면 인간이 중요한 순간에 한쪽 눈을 감게 된 것은 원근법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에 정확히 재현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은 양쪽으로 보이는 세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원근법은 눈이 하나일 때에만 가능했다. 렌즈가 하나인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러한 현상은 두드러졌다. 그것은 항등성과 같은 두뇌의 작용을 제거하고 눈을 두뇌로 부터 단절시켜 기계적인 정보만을 얻겠다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와 본질적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시인들에게서 먼저 나타났다. 서양의 인상파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파괴하기 전부터 시에서는 항등성 제로의 원근법 강박에서 벗어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부터 시의 주류는 본질적 세계의 이상을 그려나가 인류는 객관적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현시대의 사람들은 기계문명에 완전히 물들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등의 화면 세상에 빠져 두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카메라가 잡은 세상만을 믿고 산다. 본질의 통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으니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있는 줄을 모른다. 이것이 시가 독자를 잃은 이유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 찾기다. 항등성의 원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해도 사물에서 파생된 감정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느껴야 시를 쓸 수 있다. 카메라가 잡는 객관적 정확성만을 가진다면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카메라 눈을 버리고 두 개의 눈을 넘어 세 번째의 눈인 본능적 감성에 충실하여 사물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 시는 창조행위다. 시인은 창조자로서의 요건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 창조적 사고에 대한 선구적 연구자인 월러스는 창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로부터 몸과 마음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시의 대상인 사물을 대했을 때 확연한 상상(이미지)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잠시 떨어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불현듯 어떠한 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상상의 존재란 항상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을 지각할 때 사물의 각 부분을 따로 인식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형태 즉 게슈탈트로 파악한다. 이때 중요한 부분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되어 시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인물만 뚜렷이 나오게 하는 아웃포커싱과 같은 원리다. 문제는 시에서 이와 같은 전경과 배경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물의 어떤 부분이 관심의 초점이 되어 전경이 되면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맥락이 바뀌면 전경이 배경이 되고 배경이 전경이 된다. 문제는 전경과 배경의 전환이 매끄럽지 않을 때다. 배경으로 물러나야 할 전경을 바꾸지 못하고 사물의 고정된 존재만 바라본다면 시의 구성이 한정되게 되어 형성이 뒤엉켜버리면 화자만이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독자들도 이해를 못 하고 시를 외면하게 된다. 시에 전경과 배경을 바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몇 가지를 든다면 첫째. 고정된 관념을 버리는 것이다. 항상 같은 단어를 고집하고 누구나 보는 것만을 본다면 창조적인 작품이 되지 못해 제자리에 머물고 말 것이다. 둘째. 사물의 움직임을 봐야 한다. 즉 자신이 새로운 사물을 찾아내어 그 움직이는 모습을 자신에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한다면 자신이 움직여 사물의 움직이는 모습을 찾는 것이다. 셋째. 관심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까지 몰랐던 세상에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사실을 깨치고 경험해야 한다.    현상을 바라보기가 시의 시작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다’라는 천동설은 과학이 발달한 근대에 이르기까지 정설로 통했다. 이와는 달리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을 도는 위성에 불과하다는 지동설이 확실하게 굳어진 것은 과학적인 실험과 그것을 확인한 여러 가지 작업으로 우리는 모두 지동설을 믿는다. 과학은 객관적인 진리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험을 통하여 사실을 믿게 하는데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확실한 근거에 의한 불변의 현상이라 하여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사실이라도 사람의 주관에 의하여 주관적인 주장도 가능한 것이다. 한 시대에 사는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 그러한 이유로 과학자들도 그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한 현실에서 그 시대에 풀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면 그것을 풀기 위한 새로운 눈이 등장한다. 천동설로 이해하지 못한 현상을 지동설로 명쾌하게 설명한 것 같이 언제나 시대에 맞는 학설은 대두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새로운 사실을 대부분 사람이 받아들이는 현상을 패러다임이라고 하며 그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을 과학의 혁명이라고 한다. 시문학에서도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패러다임은 형성되었고 그 패러다임은 시대에 맞추어 문학의 혁명을 이뤄냈다. 시는 과학을 초월하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패러다임 현상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과학보다 먼저 앞서게 한다. 시의 목적은 사물의 숨겨진 원인이나 작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서 이뤄지는 정신적 현상을 가장 진실한 방법으로 찾아내어 인간 개개인의 영혼을 무한대의 상상으로 몰입하게 하여 진정한 인간 정신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맞게 사물을 그리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차와 도구는 필요 없다. 오직 바른 정신과 사물을 관통하는 통찰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인이 사물의 현상과 자신이 체험한 직관적인 사실만을 형상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된다. 순간적으로 다가온 사물과의 만남에서 얻은 자신의 심적 변화를 크게 확대하여 대중에게 노출하려는 의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예술작품은 누구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술을 위한 예술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 완성된 작품이 예술적 가치를 가졌다면 서두르지 않아도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인정받게 되는 것이   시는 세상의 기운을 읽는다   문학은 인간생활의 편리함을 찾기 위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활로를 찾기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했다. 자연속의 인간은 나약하기 그지없고 자연을 뛰어넘었다 해도 내면의 슬픔이나 외면의 아픔을 감내하지 못한다. 육체가 강할수록 내면의 갈등은 더욱 커지고 무엇인가를 얻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한 희로애락을 극복하고 빈 곳을 채우기 위하여 문학은 탄생했다. 소설은 설명으로 채워주고 희곡은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이 지니고도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느끼게 한다. 이와 반면 시는 의문을 깨어나게 하여 스스로 채워주게 하는 역할로 인간의 숨겨진 감각을 일으킨다. 다시 말해 시는 답을 주는 게 아니고 답을 찾아내는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학을 떠나 인간의 최대 목표는 완성이다.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삶의 만족도를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다. 그렇다면 완성은 과연 무엇인가. 외면적이든 내면적이든 인간이 완성을 보는 것은 꽃이다. 꽃은 완성이다.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은 꽃을 피우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이 지고 열매를 맺기 전에는 완성이라 할 수 없다고 할지 모르나 일단은 꽃을 피워낼 수 있다면 그것이 완성이다. 그러나 문학 중에 시는 완성이 없다. 수많은 봉오리를 만들어 활짝 피어나기를 기다리며 영원히 멈추지 않고 나아갈 뿐 시를 완성했다고 하는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시의 완성을 봤다고 하는 시인이 있다면 당장 성인이라고 추대 받아 마땅하지만 아쉽게도 그러한 시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완성이 없는 시를 왜 쓰는가. 그것은 완성을 이룰 때까지 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끝을 보기 위하여 전력으로 매진하는 게 시인이다. 그러나 완성을 보지 못한다고 아무렇게나 시를 쓴다면 시인의 자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시는 오감과 체험을 통하여 얻게 된 물상의 움직임과 내부에서 발생한 고뇌와 이념이 상충작용으로 부딪쳐 발생한 감정으로 쓰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 감각기관에서 청각이 가장 중요하다. 감각에서 청각의 깊이가 깊기 때문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다. 귀를 틀어막아도 희미하게 들리는 기관이 청각이다. 완전히 막았다 해도 울림으로 들린다. 시인의 기능은 세상의 기운을 감지하는 데 있다. 활력이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삶의 기운과 죽음의 기운을 감지하는 역할은 시인의 몫이다. 귀가 소리를 듣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시인이 세상의 기운을 감지하는 기능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 시인이 전하는 희로애락의 전달이 또렷할수록 생명의 기운도 뚜렷하다. 이것이 시의 역할이다. 이러한 시의 역할을 시인이 외면한다면 시를 쓰기를 그만둬야 할 것이다. 시인은 착각하지 않는다. 생명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고 이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하나는 둘이 아니고 둘은 하나가 아니다. 여기에 착각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기만 한다면 옳은 것일까. 여기에서 시의 고민이 시작된다. 전달은 하되 변형이 있어야 한다. 큰 느낌을 작게 한다거나 어떠한 장치를 가미해서 다르게 느끼도록 변형을 주는 것이 좋은 시의 출발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사물이나 감동의 변형을 읽는 이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형을 그만두지 못하는 게 시다. 한마디로 현대시는 이미지의 변형이다. 시인이 쓰고 읽는 이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귀에 들리는 울림을 이미지는 놓치지 않고 큰 것을 작게 작은 것을 크게 높은 것을 낮게 또는 더 높이는 것이 시의 기본 틀이다. 객관적 이미지와 주관적 이미지     모든 사물에는 겉과 속이 있다. 그러나 겉과 속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는 명백한 규정이 없다. 나무의 껍질을 겉이라 하고 껍질 속에서부터 속이라 규정한다면 그것은 주관적인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고 껍질부터 겉이고 보이지 않는 껍질 안쪽부터 속이라 하는 것도 객관적이지는 않다. 보이는 것에 따라서 얼마든지 겉과 속이 나뉘어 질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겉과 속을 구분할 수 있는 선은 어디인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규정의 잣대로 본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어디가 겉이고 어디가 속이냐고 확정지으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지의 변형이다. 자신의 주장대로 이미지를 규정했다하더라도 독자는 얼마든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꽃의 이미지는 변형이 없다. 누구나 알고 있고 느끼는 감정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갖는 언어가 관념이다. 현대시에 있어서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미지를 새롭게 찾아내어 시를 쓴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새로운 이미지를 구상하였다고 자기 뜻을 관철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이미지가 되어 독자에게 혼란만 주게 된다. 이것을 피하고자 객관적인 이미지를 찾게 되는데 하나의 창조적인 언어가 탄생하여 모두에게 공감이 되는 이미지로 규정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이유가 필요하다. 사물은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 관념이 된다. 새롭게 탄생한 물질도 모두가 부르는 이름을 갖게 되면 고정된 물체로써 관념이 되는 것이다. 시에서도 새로운 언어를 찾아 썼다 해도 모두가 공감하고 따라 부르게 된다면 굳어버린 관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쓰기가 쉽지 않고 언어로 만들어내는 이미지 찾기는 쉽지 않다. 시는 끝없이 변화하는 언어의 용광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아내는 이미지가 객관적인 새로운 언어가 되는가. 그것은 감각에서 찾아야 한다.감각은 느끼고 깨달아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외부적으로 받는 자극이 있어야만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이 생기고 거기에 반응하는 자극으로 새로운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감각은 여러 가지의 종류가 있으나 어느 한 가지도 빼놓는다면 시 쓰기의 자극은 발생하지 않는다. 발생한다 해도 한정된 주관적인 이미지만 갖게 된다. 미각. 촉각. 후각. 시각 등 모든 감각 기능은 항상 열려 있어야하고 모든 감각이 하나의 연결체로 뇌파에 전달되어 넓혀진 상상이 하나의 언어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상징,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상징     단단하고 올곧은 나무를 고른다. ‘껍질을 천천히 벗겨/칼질할 곳을 그린다/꽃 모양을 떠올려/한 꺼풀 한 꺼풀 떠내려가다가/망가지기도 한다/곡선을 파내려다 직선이/직선을 긋다 칼 놓칠 때도 있다/한 잎 두 잎 꽃잎 모양 보일 때면/모란 인지 작약 인지 분간 못 하고/색칠부터 하려 물감 찾는다/무지개 색깔 칠하다 먹칠이 되고/머릿속 지우개는 색을 잃어버려/장미로 해당화로 국화가 되었다가/회양목 울타리에 꽂아두면/꽃잎 숫자가 적고/색깔이 부족하단 말 듣는다/귀를 막는다/새김칼을 놓고 텅 빈 마당에 던진다/누구는 꽃이라 말하고 누구는 막대라 하지만/어떻게 깎았던/머릿속에 들었던 그림은 꽃이 된다’ 위의 시는 “시 부수기”라는 제목의 연재시 중 ‘시 깎기’다. 시가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꽃이라는 가정 아래 쓴 일종의 시론 시로써 어떻게 깎든 꽃이 된다는 의미로 쓴 시작법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정답이 있다. 사물과 사물의 혼합에도, 색깔이나 모양 그리고 변형의 이미지 등 모든 것에는 답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정신세계에서 발원되는 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사물에서 발견된 것이나 내면에 잠재했던 것이나 상상으로 이뤄지는 인위적인 언어에는 제약이 없으며 시작과 끝의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것은 시의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오답을 찾는가에 있다. 무지개와 비교해본다면 이해가 된다. 무지개는 분명히 원형이다. 태양의 모양대로 빛을 받아 반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지개의 반쪽만 볼 수 있다. 지구의 반쪽이 태양빛을 가린 이유로 항상 반쪽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은 무지개의 원형을 찾지 않는다. 그냥 보이는 대로만 그린다. 시는 그런 무지개의 원리를 일부 갖고 있다. 하지만 무지개는 우주선 위에서 본다면 원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는 무지개와는 다르다. 완전하게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쓰던 각자의 모양을 찾아 시의 틀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만의 꽃을 깎아 꽂는다면 시가 되는 것이다. 시는 자신의 체험과 정신이 부딪쳐 일어나는 감동의 꽃그림이다. 그러나 혼자서 가진 감동이라면 시가 아니고 혼자만의 독백일 뿐이다. 독자와의 만남에서 발생한 감동이 화자와 통했을 때 시의 시작인 것이다. 시의 정답이 없다고 해도 시인은 시의 답을 찾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한다.그래서 시인이면 어떻게 해야 독자와 통하는 시가 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말한다면 상징성이다. 상징은 눈에 보이거나 마음속에 느껴지는 형이상적 형상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만든 상상을 깃발로 만들어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가 있는 그대로의 상징을 세워 참된 가치를 떨어트리고 있어 문제다. 비둘기는 평화, 소나무는 절개, 태풍은 포악성, 구름은 어둠 등 상징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어 함축성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상징은 우리의 이성으로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한 평범한 일상용어에 불과하다, 시 속의 상징은 의식을 초월한 어떤 내용에 대한 이미지다.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면과 더불어 비합리적이고 무의식적인 면이 공존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에른스튼 카시러(Cassirer, 1874-1945)는 사람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면서 인간의 지식 자체 즉 인간의 사고와 문화의 다양한 영역 속에 있는 도덕적 위기의 문제를 연구하였다. 인간 외의 동물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극을 받아들이는 수용계통을 사람은 의외의 상징계통이라는 제3의 연결물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상징은 시에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요소다. 시인은 사람 속의 또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용어로만 자신의 감동을 그린다면 평범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체험에서 얻은 심덕을 사물에 옮겨 새로운 기호와 신호로 상징을 만들어 낸다는 건 쉽지 않다. 어떻게 깎든 꽃이라 부르면 꽃이겠지만 독자의 손으로 옮겨진 꽃이 화자가 만든 상징을 피워 냈을 때 또 하나의 답이 찾아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 쓰기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넓은 의미의 비유, 좁은 의미의 비유   언어는 소리의 값과 의미의 대상을 드러내고 표현하며 지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한정되어 있는데 나타내고 표현하며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사물)은 한계가 없어 전부를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사물에서부터 왔지만, 사물의 한계는 무궁무진하여 각각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실로 방대하기 때문이다. 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언어는 사물에서 왔으나 사물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것을 언어의 가동성 즉 시라고 한다. 시는 언어의 유한적 한계를 극복 표현의 무한한 가능성을 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비유나 상징이 발생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는 동시에 시가 창조되는 발상도 언어의 가동성에서부터 시작한다. 비유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비유는 넓은 의미의 비유와 좁은 의미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넓은 의미로는 문체와 수사의 뜻으로 쓰고 있으며 읽는 이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문장의 변화와 정체를 더하기위한 수사형식을 말한다. 좁은 의미의 비유는 구상적 회화적 표현 특히 은유와 같은 뜻으로 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의미를 다른 사물이나 의미에 유추하여 표현하는 직유, 은유, 환유 등을 포함한다. 시를 쓰는 화자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본래의 것을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사물이나 의미. 즉 관념을 끌어들여 자신이 느낀 감동을 표현하는 것을 비유라 하며 이것을 비유의 성립조건에서는 본래의 것을 원관념,동원된 것을 보조관념이라 하는데 원관념을 본의, 보조관념을 유의라고 말한다. 비유는 두 개의 사물과 두 가지 의미의 비교가 있어야 한다. 흔하게 장미꽃은 허공에 수놓아져 있고,포도송이는 가을과 함께 익어간다, 등 장미와 허공 포도송이와 가을 두 개의 사물이 동원되었을 때 장미와 포도송이는 원관념 허공과 가을은 보조관념인 유의가 된다. 이러한 비유를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본의와 유의가 이질적인 것으로 되어야 하며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은 유사성이 있어야 성립이 되는데 여기에서부터 시의 본질이 훼손되기 시작하여 문제가 된다.   비유에는 크게 직유, 은유, 환유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직유는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관념을 직접 비유하는 것이고 은유는 암유라고도하며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조사를 넣지 않고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동일하게 보는 비유로 메타포 즉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에 따라 사물이나 관념의 대체를 외연하는 비유라 한다. 이는 초월 및 벗어난다는 뜻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나 관념,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란 어떤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 전이는 속에서 종으로 종에서 속으로 혹은 종으로 또는 유추를 토대로 이뤄진다고 시학에서 말하고 있다. 환유는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 체험을 통하여 그것과 관련된 것에 사용되는 비유법으로 명칭의 변경을 의미한다. 즉 근접성을 말한다. 이처럼 시창작에서 비유는 절대적인 것으로 비유가 없는 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 시인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언어의 가동성에 의한 비유를 하며 시창작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되는 것은 직유의 남발에 있다. 우리는 시인 2만명 시대에 살고 있고 인터넷이나 그 밖의 매체에서 수많은 시를 대하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길이길이 남아 있을 명시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히 아니다. 일반적으로 발표되는 시 중에 그나마 읽히는 시는 품격이 갖춰진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이것조차 명시에 속하기에는 어렵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직유의 남발이 가장 큰 이유다.   관찰력과 지식 그리고 응용력     시인이나 기타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분야에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기를 기대하며 글을 쓴다.그러나 좋은 평가를 받고 영원히 남길 작품을 쓰기란 쉽지않다.그렇지만 그러한 바램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쓸수 있다.시를 쓰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 무엇일까.시인이라면 누구나 갖게되는 고민이다.천부적인 소질이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어떠한 시상이 떠올랐다 하여도 거기에 따르는 지식이 없다면 한행도 써내려가지 못하는게 시다.우리는 흔히 무슨일이든 막힘없이 실행하고 남보다 빠른 결과를 내놓는 사람을 아이큐가 높다고 말한다.하지만 그 아이큐는 지식이 없다면 측정하지 못한다.천부적인 머리를 갖고있다는 사실은 교육으로 인한 지식의 습득으로 알수 있는 것이다.눈앞에 보이는 정경이 감탄을 금치못하게 하여 시를 쓴다고 가정한다면 그 광경에 적합한 지식을 갖고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눈으로 들어온 정보와 안에서 발현하는 지식이 합쳐지지 못한 시는 그냥 하나의 정경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감탄사 일 뿐이다.그렇다고 지식만으로 시를 쓴다면 하나의 교과서에 불과하다.시는 남에게 자신의 지식을 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받은 감동을 지식과 합친 추상적인 그림으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시는 관찰력과 지식 그리고 응용력이 중요하다.그중에서 가장 앞서는 것이 관찰력이다.시인은 남보다 먼저 관찰하는 사람이고 관찰의 결과를 감정으로 순화시켜 함께 감동하는 독자를 찾는 사람이다.관찰의 대상은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끝을 모르는 우주,그리고 한계가 없는 상상까지 사람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관찰한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이끌어 내고 자신이 쌓은 지식과 응용력이 발현 되었을 때 비로소 시를 쓸 수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력은 무엇인가.말 그대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사물을 만나고 그때 마다 움직임과 부딛침에서 느낌을 얻는다.나무가지에서 바람을 보고 바람의 흐름에서 방향을 알게되고 자신이 처한 심적동요에서 상상을 얻게된다.그런데 어떤 사물을 대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자신도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 고정체가 되어버려 상상의 나래를 펴지 못하고 언어의 꼬리를 따라가지 못한다.산봉우리를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그냥 지나치고 달밤에 우는 개구리의 울음에도 듣기만 한다면 시 쓰기의 기초는 없다.평상시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관찰력만이 시상의 첫문이다.그러나 무엇인가를 깊이있게 봤다고 시가 써지는 것은 아니다.거기에 따르는 지식이 있어야 새로운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산 위의 구름이 어떻게 형성되어 무슨 이유로 흘러가게 되는지.또는 달밤에 개구리가 우는 자연의 생태를 알아야 사물과의 만남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또한 관찰과 지식에서 얻은 시상이 언어의 길로 바로 들어서지는 않는다.자신의 내면과 표면에서 파생된 어떤 감정이 관찰과 지식에서 얻은 상상과 합쳐지는 응용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편의 시가 된다.응용력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지만 이는 개개인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써 가르침을 받고 공부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수많은 작품을 써보고 좌절을 겪은 사람만이 시의 목표에 도달하게된다. 작품의 평가는 독자 몫이다   예술의 모든 작품은 평가를 받는다.시와 소설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 창조적인 작품의 결과는 받아드리는 대상 즉 독자들로 부터 평가를 받고 그 수준 여하를 판가름한다.그것이 형식에 맞지 않고 의외적인 요소를 지녔다 해도 어떠한 결론에 다다르게 되고 잘됐던 못됐던 혹은 그자리에서 사장 되던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예술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오는 결과다.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감동과 의지로 창조되지만 시각과 청각 느낌으로 독자를 가지게 된다.작가 혼자만의 감동으로 결과물을 만들고 혼자서 가지려고 창조를 했다면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자연속 이름없는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작품.즉 창조는 독자를 대상으로 발현되고 독자의 판단으로 살아남는 것이다.특히 문학은 언어로 시작되기 때문에 독자의 관심과 평가는 냉혹하다.그 중 시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비판을 받게 되는 데 그 이유는 시가 언어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그렇게 때문에 한 편의 시를 쓰는데 있어 심혈을 기울려야 하고 신중하게 발표해야 된다. 현재 대한민국은 2만 명의 시인 시대를 맞고있다.단체에 등록 되지않는 시인까지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다는게 중론이다.그 많은 시인 중에 과연 독자들로부터 시인이라고 인정 받는 시인이 몇이나 될까.대중적으로 알려진 인물을 제외하고 순수문학을 이해하는 독자들로 부터 그나마 인정받는 시인은 2만명의 10%도 안된다고 단정한다.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을까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이유는 독자를 무시하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혼자만의 감동으로 만족하여 아무런 여과없이 발표하고 자기의 만족도에 따라 저절로 독자가 형성될것이라는 만용 때문에 빚은 결과다. 매월 수많은 문학지에서 발표되는 시 작품은 통계조차 내기 힘들만큼 많다.그 많은 작품 중에 독자들의 안목에서 살아남는 작품은 0.1%에도 못 미친다.이러한 결과는 작가 혼자만의 만족으로 독자의 주목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화자와 독자는 떨어져있는 관계가 아니다.호홉을 함께하고 작품 속의 길을 동시에 바라보는 관계다.어떠한 사물을 대하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현상이나 상상 등 모든 것을 망라하여 작품을 창조했다 하여도 그 평가는 독자 몫이다.화자는 평가를 두려워해야 한다.그 두려움이 없다면 한 편의 작품도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모든 작품은 화자의 만족이 없다면 창조되지 않는다.먼저 자신의 만족으로 작품이 써진다.이것이 과하여 자신의 만족을 독자의 만족으로 오판하여 그것을 믿고 마구잡이로 발표하게 되어 외면을 받게되고 곧바로 사장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그렇다면 어덯게 해야 제대로 자신의 작품을 판단 할 수있는가.사람의 마음과 행동은 대부분 일치한다.자신의 생각은 동시에 다른 사람도 같게되도 느끼는 감동도 공유한다.그것을 인지 해야만 독자에게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그럴려면 다른 사람의 작품.특히 인정받는 작품을 먼저 알아야한다.수많은 독서와 체험만이 좋은 작품의 소재가 되고 독자와의 호홉이 일치하는 것이다.쓰는데 서두르지 않고 발표하는데 망설이고 자신의작품을 남의 작품과 비교할줄 알아야 살아남는다 시단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지도자의 길을 걷는 분들도 순간적인 감흥으로 발표하여 미흡한 부분이 많다.시는 대중적인 지지도가 필요하지만 대중가요는 아니다.한 소절의 직감적인 감동으로 발표한다면 대중가요와 무엇이 다르겠는가.이같은 상황은 모두 칭찬에서 온다고 본다.익히 아는 얼굴에 또는 가르치는 관계나 친분으로 여과 없이 좋다고 칭찬하는 것은 발전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인사치례다.그것이 익숙해진다면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것이 분명하다.바르게 익히고 바르게 정리된 작품을 쓴다는 것은 작가의 의무다   분석 된 이미지에 의한 객관적인 시     문학은 인간의 행동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를 아우르고 사물이 가진 특성을 새롭게 이미지화하는 창조행위다.1913년 심리학자 존 왓슨은 의식적인 경험은 과학으로 연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이말은 오직 예술의 창조성에서만 인간을 이해 할 수있다는 것으로 문학을 알지 못하면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과학으로 분석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자기가 아닌 타인 즉 사물이나 그 밖의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게 인간이다.삶 속에는 이러한 관심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발전하여 물질이 아닌 정신적 창조행위 곧 문학이 계승된 것이다.문학의 여러가지 장르 중에 시를 쓰는 시인은 인간과 사물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 영향을 예측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 시를 쓰는 이유도 자신이 아닌 타인 마음을 이해하려고  창작에 열중한다.시가 인간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우리가 사물과 타인에 대해 알고있는 여러가지 상식은 지식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고 정신적인 상상이 필요하다.인간은 왜 사는가.인간은 왜 사랑 하는가.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왜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 등 등,인간은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일에 부딛쳐 고민한다.인간의 삶에서 이같이 기본적인 의문에 누구나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다.인간의 이같은 직관적인 심리는 문학을 탄생 시켰고 그 문학중 처음으로 발생한 장르가 시다.한마디로 시는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해도 정신적으로 일부를 해결할 수있는 정신적 양식이다.따라서 시를 쓰는 시인의 책임도 그만큼 클수 밖에 없다.그러한 이유로 시는 객관적이어야 한다.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시를 쓸수가 없는 것이문제다.주관이 없다면 일단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게 시다.시인이 처음 시를 대하는 순간은 발광이라 할수 있다.사물이나 인간의 어떤 행동에서 발견된 시의 발현은 사소한 것이라도 빛이나고 감동하게 된다.그때는 주관적이지 않을 수 없어 그대로 시속에 빠져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시란 모두가 객관적이며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한 다는 것이다.여기에서 시 쓰기의 문제가 발생한다.쓸 때는 주관적인데 발표후에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모순에 빠져 그만큼 시 쓰기 어렵다.그렇다면 좋은 시,다시말해 누구나 공감하고 소중하게 품을 수 있는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장 쉬운 방법이 선명한 이미지다.사물이나 정신적 형태의 사상의 이미지를 누구나 알 수있는 상상으로 펼친다면 우선 쓰기가 어렵지 않고 그만큼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든다.어떤 사물이든 이름을 얻기 전에는 하나의 물체일 뿐이다.처음 발견하였거나 발견후의 논의에서 이름이 지어지고 거기에 맞는 이미지가 형성되는데 자기만이 아는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고 혼자만의 상상을 펼친다면 독자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게 되는 데 남보다 앞서가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되 거기에 합당해야 한다.현시대는 과학이 정신보다 앞서가는 같지만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여도 인간의 정신세계는 따라가지 못한다.그러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시문학이 과학보다 뒤쳐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우선은 이미지의 분석이 필요하고 분석된 이미지를 활용하면 말 그대로 화자와 독자간의 공감은 이뤄질수 있다고 본다.아무리 쉬운 언어를 동원하여 시를 쓴다해도 그것이 자신만의 의도대로 썼다면 이미지의 분석이 되지 않는다.과학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분석이 필요한데 정신적인 분석은 개개인의 능력이고 시인 또는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겪게되는 고민이고 풀어야 할 숙제다   무엇을 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요점이다   현대시에 있어 사물을 배제한다면 시의 요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한다.이미지는 사물에서 발생하고 그것의 전달도 사물로 하는 것이 시적 역량을 넓히기 때문이다.사물의 발견이 곧 시의 시작이다.그러나 화자의 내면에 잠재된 의식이 새로운 사물과 만나서 새로운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게 아니다.순간적으로 찾아오는 시적 발현은 곧 잊혀지고 그것을 기억하여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시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게 되는 일상이다.새로운 사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이 지닌 기질을 받아드린다는 것이다.사물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늘 마주치는 것이고 어느날 갑자기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정신이 받아드린 순간의 착상은 얼마나 크게 얼마나 정확히 받아드리느냐에 따라서 성취도는 달라진다.모든 사물은 제 각기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항상 마주치는 출입문도 모양과 재질 여닫는 방법 등이 모두 다르고 빼놓지 않고 찾아먹는 밥도 재질과 그릇에 따라 영양과 형상이 다르다.심지어 같은 사람이라도 말과 행동에 따라 달리보인다.사람은 똑 같아도 그때의 상황변화에 따라 달리 보이게 된다.그러한 사물의 특성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간직한 의구심과 고민 또는 고난의 연민이 새롭게 부딛친 사물의 특성과 마주쳐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시다.그러한 과정은 얼마나 많은 상상과 노력을 해야되는 지는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한다.그렇다고 오랜동안 고민하고 상상 했다고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가.그것은 아니다.사물의 새로움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신과 육체에 자연스럽게 조화시킨다는 것은 상당한 숙달이 필요하다.언제나 받아드리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시를 쓰겠다는 구도자적 자세를 한시라도 허물어트리면 되지 않는 게 시다.물론 억지로 쓸수는 있겠으나 그 작품의 질은 현저히 떨어질수 밖에 없다.십중 팔구는 도태되고 만다.그렇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한마디로 무엇을 쓸 것인가를 찾지말고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사물은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뉜다.또한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사물도 이에 속한다.시는 이러한 사물에서 발현하여 내형과 외형을 갖춰 새로운 이미지로 형성되는데 사물의 모양만을 그린다면 반 쪽 짜리 시가 되는 것이다.비행기를 보고 날아가는 모습과 화자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감흥만 그린다면 시의 가치가 떨어진다.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 뿐 아니라 날아가는 이유, 날아가는 힘과 기체를 이루는 형질 등을 볼 줄 알아야 하고 그러한 이유를 들어 자신의 심경변화와 조합을 이룬다면 사물을 이용한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이러한 시도는 목월의 시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사물의 이름만 가지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있는 서정시를 남겼다.필자의 어머니 아버지를 그린 사물시를 예를 들어보자.잿간 오줌 구멍/노을 물들어 지게 위에 얹힌 산/독새풀 돋은 쟁깃밥/미농지에 말린 쌈지 담배/새벽 깨우는 헛기침/내 이마에 얹힌 뜨거운 손/모악산 아버지[시 부수기 키우기 전문]스무동이 물항아리/두말 반 가마솥에 쌀밥/무명베 행주치마/열두고랑 콩밭 앉은 자리/호롱불 아래 바느질 그림자/정안수에 담긴 나의 길/지평선 어머니[시부수기 넓히기 전문] 이같이 사물만을 그려 아버지 어머니의 크기와 넓이를 그려내어 독자들이 읽을 때도 공감 할 수있게 할수 있는 것이다.사물은 언제나 변한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라 할지라도 잎이 돋고 지는 등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그런 사물에서 이미지를 그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끊임없는 관찰과 놓치지 않으려는 그릇이 준비되어야 한다.대체로 무엇인가를 쓰려는 노력은 하지만 사물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한 편의 시를 쓰는데도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모두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시는 인간의 거울로 자신의 이해가 재현된 표상이다   우리는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려 한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얼굴에 관심이 많아 맑은 물이나 번쩍거리는 쇠붙이 판에 비춰봤다. 다른 사람을 바라봤을 때의 호감도를 자신의 얼굴로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비춰본 것이다.언어 이전의 시대에도 원시인들은 물가에 앉아 자신을 비춰보며 상대방과 비교하였다. 소리가 의미를 더하여 언어가 되었을 때 거울의 역할은 더 커졌다. 언어를 건네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바라보고 기대한 대답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언어는 소통이다. 그러나 약속에 의한 소통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학습이 필요하고 서로의 믿음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이유로 지역에 따라 언어는 다르게 생성되고 유통되었다. 그런 언어가 확장되어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되었을 때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희·노·애·락을 표시하게 되고 더욱 아름답게 가꿔 노래, 즉 시가 탄생하였다. 오늘날의 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여 언어 너머의 언어로 비약적인 확대가 이뤄졌고 현대시를 쓰기란 쉽지 않게 되었다. 시는 우리의 인간다움을 비춰준다. 그것은 나를 나로 보여주는 거울이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해하게 하는 거울이다. 시가 거울이라고 표현될 때 소유격인 "인간의"는 목적어임과 동시에 주어이다. 시에 비친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의미에서는 목적어이지만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규정하는 자신의 거울이란 점에서는 시가 인간의 거울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시는 주어 적이다. 그 어떤 경우에든 시는 인간이 자기 이해를 밝혀내는 도구이므로 인간 존재의 얼굴인 것이다. 따라서 시는 존재의 얼굴을 비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장한 얼굴을 비치기도 한다. 때로는 허무의 거울이기도 하고 자신의 실존에 가슴 떨려하는 흔들림을 비추기도 하며 자신을 자기도취에 빠트리는 욕망의 늪일 때도 있다. 또한 성찰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하거나 자신을 이해하는 모습이 시를 통하여 드러나기도 한다. 시는 한마디로 인간의 자기 이해가 재현된 표상이다. 시는 자신의 마음을 비치는 얼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에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왜곡되어 보이기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마음이고 자신을 비추는 성찰의 도구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같이 시가 가진 의미는 매우 커 인간의 범주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을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시의 발생은 어디에서부터였을까. 하는 문제는 언어의 발생 이전과 이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문제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시에 비친 나의 모습과 나의 이해, 나 자신이 본 나의 얼굴임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자신의 한계와 욕망 무지의 어둠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간의 존재를 깨치기도 하여 오히려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시 쓰는 작업은 인간 본연의 자세로 임하여야 하고 언어의 확장, 해석, 높이와 넓이, 소멸로부터 찾아내기 등 다방면의 방법을 찾아야 하고 시 속에 비친 얼굴들을 새롭게 꾸민 이미지로 나타내야 한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모든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시인들이 가장 크다. 그래서 봄의 문턱에서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이번호의 특징은 계절의 영향으로 봄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이 작년의 작품이 그대로 다시 게재 된 듯 느낌을 준다. 시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시 쓰기의 걸음걸이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서는 발등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시는 인간이라는 것을 가장 밝게 비춰주는 거울   시를 써 오면서 흔하게 듣는 말이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시를 왜 쓰는지를 모르겠다는 말이다. 시는 정말 돈이 되지 않는 것인가.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그렇다. 시는 돈이 되지 않는다. 만약 시가 돈이 되어 생활비를 충당한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생필품이 아닌 정신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최고의 정점이고 최후의 보루다. 육체가 소멸한다 해도 영원히 남아 전해지는 것이 정신이며 그 정신이 시다. 그래서 시는 돈이 되지 않지만 돈을 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다. 이 땅에는 많은 시인이 활동하지만 생활을 위하여 시를 쓰는 시인이 몇 명이나 될까. 극히 적은 수의 시인이 전업 작가로 활동하지만 그것은 이미 시를 넘어 생필품이 된 보편적 예술인이 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대중적 인기를 얻어야 하는 대중가수가 된 것이다. 시는 정신이다.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간 편에서 철저히 비춰주는 가장 밝은 거울이다. 인간이 당면하여 고민하는 것을 풀어주고 삶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으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의 예술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행위와 거기에 따르는 고민과 의구심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인간이 가진 성찰적 작업 전부를 풀어내는 것은 예술 전부를 통틀어 시밖에 없다. 화가 소설가 작곡가 무용가 등 모든 예술인은 일가를 이뤘다는 ‘가’자를 붙이지만 시인에게는 영원히 ‘가’자가 붙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에 경탄하기도 한다.이러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묻기 시작하였다. 자연은 무엇이며 왜 두려워하는 존재인가. 예술은 자연에 대한 놀라움과 자연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일상의 삶에서 놀라움이 사라지고 아무런 느낌을 못하는 사람은 절대 묻지 않는다. 오직 의문과 고민을 한 사람만이 묻고 예술인이 된다. 화가는 자연 그대로를 그린다. 무용가는 자연의 움직임을 따라 한다. 작곡가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옮긴다. 시인은 자연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인간의 삶에 비유하여 거울을 보듯 이해와 해석을 통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예술 중에 가장 중심적인 것이 시라는 것은 여기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는 결코 돈이 될 수 없고 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인을 제외한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보면서 그런 변화는 인간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억측에 불과 한다는 인식을 하지만 시인은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 생각, 그 생각하는 능력인 인간의 이성만이 참되다는 인식을 한다. 변화의 환상에 잠겨 들고 생성과 소멸의 근원을 찾아 모든 감각과 이성을 동원한다. 인도 철학에서 나타나는 변화의 환상이나 불교에서 보는 모든 것은 공하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같은 면에서 사유하는 반야심경과 같은 생각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시인이 추구하는 의식은 생필품이 아닌 오직 정신적 해탈이나 무너지는 삶에 대한 기둥 역할이 된다. 따라서 시를 쓰는 데 있어 자기만의 확고부동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시는 인간이 가진 지성에 따라 사실과 의미를 밝히려는 노력의 과정이자 그 결실이다. 인간이 접하는 여러 사건과 현상은 물론 내면적 상태와 삶과 관계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자신의 해명과 해답이다. 그래서 자기만이 가진 이해와 해명이 있어야 시다운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과거의 유명 싯귀를 모방하여 유행적인 결과를 낳는 시를 중점적으로 한다면 자신의 정신이 깃든 작품은 단 한 편도 쓸 수 없다. 모든 예술 중에서 시인은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는 존재다. 그만큼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것이다. 따라서 자부심만큼의 수준의 시를 써야 누구나 우러러보는 예술인, 시인이다.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과 원인을 알아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시를 어떻게 하면 잘 쓰는가의 문제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갖는 고민이다. 시의 본질이 다른 예술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자연의 모방과 상상의 언어만 가지고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틀을 벗어나서는 시가 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창조일 뿐 아무도 따라주지 않는다. 실제로 지구상의 언어는 많은 수가 사라지고 그만큼의 새로운 언어가 발생한다. 거기에 따라 언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시인들도 얼마든지 창조는 가능하다. 하지만 언어의 활용과 변화유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로서의 언어창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는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한 이유로 시인의 감각은 살아가는 시대의 사물의 움직임과 그것에 맞춰 펼쳐지는 상상에 집중된다. 오늘날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 즉 이름은 물질의 발견에 따라 나타난다. 발명이나 발견한 사물에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고 그 활용도에 맞춰 언어가 탄생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대의 대변자라 불리는 이유는 이렇게 탄생한 언어의 활용도를 널리 퍼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본래의 모습인 이데아 즉 관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그림자에 불과한 그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념을 만들어야 하고 그 관념에서 다시 떨어져야 하는 아이러니한 존재다. 언제나 고정된 관념을 이탈하여 언어의 창의성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원형적 세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만 감각의 끈에 묶여 그 사실을 잊고 지낸다. 시는 원형의 기억 찾기이다. 따라서 시인은 잠시의 틈이 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는 작업에 몰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으로 시를 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각자의 노력 여하에 따라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보면, 첫째 낚시로 잡는 방법 둘째 그물로 잡는 방법 셋째 물을 막고 퍼내는 방법 등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중 어떠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던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잡는 물고기의 상태는 모두 다르다. 낚시는 깨끗하지만 양이 적고 그물은 많이 잡을 수 있으나 고기가 상하기 쉽다. 물을 막아 퍼내고 잡는 것은 양과 질이 좋으나 힘들고 번거롭다. 시를 쓰는데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를 시에 비교한다면 낚시는 명상으로 얻어지지만 상상의 한계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그물은 여기저기 설치하는 관계로 시행착오가 많다. 물 퍼내기는 체험의 육체노동이 수반되지만 확실하다. 어느 방법으로 쓰든지 장단점이 있다. 그중 물을 퍼내어 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어떻게 퍼내어야 할까. 시 쓰기의 물 퍼내기는 체험이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체험이 없이 쓴 시는 독자의 감성을 끌어내지 못한다. 사물의 존재는 형상과 질료,목적과 운동이다. 구체적인 사물의 원인과 형상을 알아야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정의 아래 그것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체험밖에 없다.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천체학, 기상학과 자연과학은 물론 정치학, 시학, 논리학, 윤리학 등 시대에 맞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로 언어의 끝을 바라볼 수 있다. 요즘 발표되는 작품 대부분은 체험에서 얻은 원인과 형상으로 이미지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릇이 크기보다 너무 작다. 그것은 체험은 있으나 거기에서 얻은 상상의 한계가 좁기 때문이다. 체험은 하되 하나에 극한 시키지 말고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이뤄내야 한다. 더 높게, 더 넓게 시야를 넓히는 훈련을 해야 누구나 인정하는 그런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시라고 모두 시가 아니고 시인이라고 모두 시인이 아니다   시는 체득하는 방법, 탐구하는 방법,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고 사상과 체험에 따라 그 형식을 달리한다. 남에게서 얻은 지식이나 이념이 아닌, 자신 속에서 무르익은 사상, 인격, 취미, 감정 등을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나타나 읽는 이와 함께 공유하는 감동이야말로 누구나가 인정하는 좋은 시다. 어떤 시도 자연과 동떨어져 분리된다거나 기본적인 감정을 외면할 수 없다.   시는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속의 인간은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라고 모두 시는 아니고 시인이라고 다 시인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과 감동으로 시가 되지 않고 시에도 구성의 품격과 감동의 절제와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은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고 자연 속에서 또는 생활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언어의 음률적 조형을 문자로 형상화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나가 시인이 될 수 있으나 모두가 시인이 아니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체험과 상상은 기본적인 요소다. 오감을 동원한 직접적인 체험이나 책이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얻은 간접적인 체험 등 시를 쓰는 동기는 모두가 체험을 통해 나오고 체험을 기초로 한 상상에서 시의 감정은 살아난다.   체험을 겪은 후 상상을 결부시켜 쓴 시는 체험으로 얻은 언어의 공간이 무한대로 펼쳐져 무궁무진한 감동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간다. 반대로 상상을 먼저 하고 체험을 통해 얻은 시는 체험과 상상의 상충한 벽을 넘지 못해 감동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체험으로 얻은 감동이 상상의 날개를 달아 연이어 펼쳐갈 수 있지만 상상으로는 직접적인 경험을 얻지 못해 그것이 체험을 통해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는 체험과 상상의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과 독서량 또는 인간사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겪은 사람이 시를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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