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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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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시집 1000권 읽기 94 댓글:  조회:1781  추천:0  2015-02-11
932□청풍에 살던 나무□김시천, 제3문학시선 7, 제3문학사, 1990 933□지금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것이□김시천, 온누리, 1993   처음 시를 배울 때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가지 기교와 장치를 연습하게 되는데, 그 단계가 지나서 기교가 몸에 익고 그런 장치를 통해서 감정을 자유자재로 드러내는 경지에 이르면 저절로 그 전의 기교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말해야 할 그 어떤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떠 안게 되면 기교는 먼발치로 물러서서 그러한 사상을 드러내는 데 가장 필요한 뼈대만을 남기고 나머지 잔재주는 흐믈흐믈 해진다. 시의 맛은 많이 사라지지만, 그 사상성이 갖는 무게 때문에 때로 그 맛에 집착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시로서는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목적성이 두드러지면 어쩔 수 없이 겪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 뒤에 먼발치로 물러선 장치들이 다시 드러나는 시기에는 시가 정말 해야 할 말들이 살아난다. 그때를 기다려야 할 시들이다.[4337. 12. 3.]   934□얼굴 없는 사람과의 약속□정한용, 민음의 시 28, 민음사, 1990 935□슬픈 산타 페□정한용, 세계사시인선 43, 세계사, 1994 936□나나 이야기□정한용, 민음의 시 92, 민음사, 1999   시인의 첫 출발은 다분히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형식과 의식의 실험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시집에 와서는 그런 바탕 위에서 서정성을 곁들이고 있다. 초점은 일상 속의 비어있는 어떤 것이다. 그곳에 작용하는 힘들의 방향과 의미를 추적한다. 그리고 시를 쓰는 방법이 아주 성실하다. 이 점이 사실은 시인의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모더니즘은 의식의 치열성과 그 앞서나가려는 몸부림이 두드러져야 한다. 그 계열의 시인들이 자꾸 낯설게 하기 수법을 택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이 시인의 시들은 너무 점잖다. 의식의 깊이로 본다면 시가 너무 늘어져있다. 무언가 더 단단하고 압축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으로 관성을 벗어날 만큼의 이탈이 필요하다. 시를 일관된 시각과 방법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이 시인이 짧은 100m달리기의 시인이 아니라 마라톤형 시인임을 말해준다.[4337. 12. 3.]   937□쑥의 비밀□박윤배, 전망시선 3, 전망사, 1993 938□얼룩□ 박윤배, 경계시선 18, 문학과경계사, 2002   이 시인의 특징은 이미지 사이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발랄함이다. 서로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미지들을 교묘하게 꿰면서 독자의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를 남긴다. 그리고 그런 감각들이 일상의 훈련에 잠겨있는 느슨해진 느낌을 아주 잘 건드려서 일깨운다. 그런데 그런 이미지들이 파고드는 세계가 좀 더 깊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발랄함이 무게를 갖추려면 세계의 문제와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발랄함의 감각 때문에 때로 군더더기가 생기기도 한다. 결국 세계의 깊이를 전제하지 않으면 감각은 무언가 결핍된 느낌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4337. 12. 4.]   939□검은 밥에 관한 고백□유정환, 고두미, 2004 940□붉은 눈 가족□유정환, 고두미, 2004   이 시집 두 권을 읽어보면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가 쓰여진 10년 동안의 일관된 경향과 수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상의 놓치기 쉬운 세세한 부분에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의외로 단단한 세계를 이룬다. 특별히 눈을 확 잡아끄는 표현도 없고 특별히 긴 시도 없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묘한 맛을 내는 것은 시가 건드려야 할 부분이 삶의 여러 정서 중에서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시집이 나오기 이미 10년도 전에 방법과 세계가 딱 짜여졌다는 뜻이다. 일상으로부터 어떤 것을 더 끄집어내어 세계를 깊게 하느냐 하는 것이 남은 숙제일 것이다. 그것은 시가 그러하기에 삶 스스로 깊어지는 수밖에 없다.[4337. 12. 4.]    
103    시집 1000권 읽기 93 댓글:  조회:1945  추천:0  2015-02-11
  921□낯선 금요일□문정영, 시선시인선 14, 시선사, 2004   표현에 너무 집착한 시집이다. 그래서 쉽게 쓸 수 있는 것들도 어려운 표현 뒤로 숨어버렸다. 그래서 마치 문자 해독하듯이 독자들을 훈련시킨다.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표현은 독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애써 만든 표현이 오히려 의미 전달에 거북살스럽게 작용한다면 그건 분명 칭찬 받을 수 없는 일이다. 한 행을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표현을 심으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나, 그것을 넘어서야만 정말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상상력의 어깨가 너무 긴장했다. 긴장하면 금간다. 한자도 금이다.★★☆☆☆[4337. 11. 28.]   922□열하를 향하여□이기철, 민음의 시 69, 민음사, 1995   좋은 표현과 깨달음의 말들이 아주 많다. 그런데 너무 뒤로 물러선 탓인가? 이미지들이 대상에 바짝 다가가서 붙어있지를 못하고 붕 떠있다. 이것은 표현은 눈에 잡힐 듯이 그려지는데 그것으로 나타내야 할 주제가 분명치 못하거나 자신의 내면에 너무 깊이 들어있는 관념이라서 그런 것이다. 특히 인생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결국 시가 너무 큰 것을 말하려다가 작은 것들의 뿌리가 뽑히는 바람에 모호해진 경우이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말하는 것이 시의 좋은 방법인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작용한 경우가 많다.★★☆☆☆[4337. 11. 30.]   923□본색□정진규, 시작시인선 43, 천년의시작, 2004   시에서 산문을 택한다는 것은, 시가 지닌 모든 장점을 버리겠다는 뜻이다. 행가름에서 오는 시의 장점을 버린다면 시는 특별한 부분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 존재의 방식이란 대체로 논리와 구조이다. 논리를 강화시키거나 구조의 특별한 장치를 통해서 산문이 주는 둔탁한 행보 속에 시의 긴장을 살리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방법이 너무 깊이 들어가면 긴장만 남고 시는 사라진다. 당연히 어려워진다. 그리고 이 시집의 경우는 현실을 등지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서 더욱 어려워졌다. 그것이 욕망을 제거하는 맑은 경지를 추구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미 깨달아버린 자의 세상 구경이라면 독자의 폭을 아주 좁히는 일이 된다. 읽을 사람 이외에는 읽지 않는 그런 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시는 연꽃이 아니라 연이 된다. 어디까지 날아갈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한자는 불필요한 미궁이다.★★☆☆☆[4337. 12. 1.]   924□지평선에 서서□김준태, 문학과지성시인선 234, 문학과지성사, 1999   이데올로기가 문득 증발한 곳에서 변한 세태를 바라보는 눈은 날카롭고 안타깝지만,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해 망연자실하고 있는 상태의 시집이다. 시가 짧아졌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단련된 정신의 경구화라고 할 수 있지만, 안 좋게 말하면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경구들이 너무 경직됐다. 그리고 산문투의 문장은 그 전부터 문제였던 것이지만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시와 산문을 구별하는 지점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야 할 것 같다. 한자는 아직도 청산이 안 되었는지 그게 이상하다.★★☆☆☆[4337. 12. 2.]   925□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김정원, 내일을 여는 시 36, 내일을 여는 책, 2002   건강한 정신이 적절한 표현을 만나서 아주 좋은 세계를 이루었다. 우선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이며 발견한 새로움에 일상의 진실을 담으려는 태도가 시인의 성실성을 능히 짐작케 한다. 요즘 들어서 보기 드문 일이다. 그래서 낡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 낡음을 논할 것은 못된다. 다만 표현에 비해 주제가 너무 가벼운 것들이 꽤 많이 있고, 또 너무나 자명한 것들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애써 얻은 표현들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상상력이 경직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제가 무겁더라도 좀 더 멀리 떨어져서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시에 대해서 좀더 치열한 태도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좋은 시 쓰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4337. 12. 2.]   926□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송찬호, 민음의 시 22, 민음사, 1989 927□10년 동안의 빈 의자□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148, 문학과지성사, 1994 928□붉은 눈, 동백□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239, 문학과지성사, 2000   송찬호의 시는 다른 사람들의 시와 현저히 다르다. 그 현저함은 상상력의 독특함이 만드는 것이다. 시의 내용은 크게 두드러질 것이 없다. 그러나 같은 소재라도 송찬호의 손을 통과하면 묘한 상상력의 빛깔을 입고 나타난다. 송찬호 식의 상상력이라고 할 밖에 없는 묘한 파장이 생긴다. 시에서 상상력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송찬호가 처음일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송찬호의 시는 지지부진한 한국 시의 앞날을 여는 한 척도가 될 것이다. 동원된 언어가 기존의 언어 감각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차원에서 재구성된다. 그 재구성의 방법이 상상력의 결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고, 시 안에서 언어는 전혀 다른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상징의 차원으로 넘어가 버린다. 그래서 아주 낯설게 보인다. 그렇지만 그 낯선 언어의 질서 속에는 새로운 언어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꿈틀거린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까지 시인의 언어는 가 닿는다. 그래서 앞날이 아주 궁금해지는 시이다. 한자가 꼭 필요한가 하는 것은 깊이 새겨볼 일이다.★★★★☆[4337. 12. 2.]   929□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정영상, 실천문학의 시집 65, 실천문학사, 1989 930□슬픈 눈□정영상, 제3문학시선 8, 제3문학사, 1990 931□물인 듯 불인 듯 바람인 듯□정영상 유고시집, 실천문학의 시집 97, 실천문학사, 1994   시에 그 사람의 양심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하는 것이 나타나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대개 시인은 화자의 탈을 쓰고서 시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종 이 화자와 시인 자신의 간격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시는 그의 사생활과 아주 가깝게 밀착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렇게 생활과 시가 밀착되면 그림이 정밀하기는 한데, 어딘가 시원하게 트이지 못하여 답답하다는 것이 특징이 된다. 자신의 양심이 허락지 않는 상상력을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가 그렇게 만든다. 따라서 이 경우에 시의 척도는 상상력이 아니라 생각의 순일함과 양심의 곧음이다. 이 시인의 경우가 그렇다. 상상력으로 뜨지도 못하고, 영혼의 가없는 깊이로도 닿지 못하는 곳에서 아픔이 묻어나는 현실 속에 시인의 감성이 촉수를 뻗고 있다.[4337. 12. 3.]    
102    시집 1000권 읽기 92 댓글:  조회:1851  추천:0  2015-02-11
911□사평역에서□곽재구, 창비시선 40, 창작과비평사, 1983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의 얘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대부분 관념화하기 때문이다. 그 관념화를 얼마만큼 경계하고 멀리 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시의 형상화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 시집 속의 아픔은 그런 묘한 결합이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데올로기가 너무 앞서 불거진 흠은 곳곳에서 갖고 있지만, 그것이 어설픈 관념으로 드러나는 것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것은 시인의 재주라고 할 밖에 없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닿을 듯 말 듯한 시집이다. 그리고 벌써 2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한 시대의 육성을 대변할 만한 그런 분위기가 있다. 한 글자라도 한자는 한계이다.★★★☆☆[4337. 11. 21.]   912□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최승호, 문학 판 시 1, 열림원, 2003   세상 모든 현상을 고독과 허무로 도배하는 ‘곶감 빼먹기 파’의 원조가 바로 여기 있구나. 어떤 결론을 정해놓고서 거기에 해석과 합리화를 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모든 이미지들이 뻔히 정해진 결론을 향해서 질주해간다. 상상력은 날다람쥐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아주 편하고 가볍게 뛴다. 시인의 능력을 새삼 보여주는 부분이다. 생각의 흐름도 시상 전개도 아주 자연스러워서 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드러난 결론과 그렇게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 사이의 불협화음은 어떻게 해소할까? 더 이상 말을 해서는 안 되는 자리까지 와서 말을 하려는 의지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부터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자는 답이 되지 않는다.★★★☆☆[4337. 11. 22.]   913□국토□조태일, 창비시선 2, 창작과비평사, 1975   거칠지만, 넓고 깊다. 아니, 높기도 하다. 연작은 그 사람의 능력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연작이면 충분히 능력이 드러난 셈이다. 한 주제를 갖고 이만큼 깊이 파고드는데, 일관된 관점을 갖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허황한 표현이 없이 꼭 필요한 말들만 골라내는 것도 여간한 능력이 아니다. 1970년대 초반에 이만한 작품이 나왔다는 것이 놀랍니다. 다만 한 가지 주제에 집착하면서 시선이 좀 굳어졌다는 것과, 시대의 어떤 특징을 너무 염두에 둔 나머지 상상력이 다소 얽매여서 자유롭게 뻗지 못했다는 것이 흠이다. 하지만, 사건을 다룰 때도 산문으로 떨어지지 않고, 관념이 짙은 내용도 잘 소화해냈다는 것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4337. 11. 22.]   914□강 같은 세월□김용택, 창비시선 130, 창작과비평사, 1995   시가 생활 속에서 솟는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러나 생활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시이기도 하다. 1, 2부에서는 시가 짧으면서도 깊은 말을 하는 양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뒤로 가면서 걸음걸이가 둔해졌다. 주제가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주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시는 길어진다. 그것이 시대의 탓이라고 해도 결코 칭찬 받을 일은 못 된다.★★☆☆☆[4337. 11. 25.]   915□주막에서□천상병, 오늘의 시인총서 3, 민음사, 1979   시에 허장성세가 없어 마치 청량제처럼 신선하다.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 이렇게 깔끔할 수 있고 시원할 수가 없다. 이 시원함은 읽는 자나 쓰는 자들이 모두 어떤 탐욕에 가까운 욕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탐욕 바깥의 풍경이 신선해 보일 밖에 없다. 더욱이 요즘처럼 표현 제일주의의 폐해가 그득한 세상에서는 오히려 소박한 표현이 신선한 맛을 줄 수 있다. 세월이 가도 시의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는 기교일 듯하지만, 오히려 마음의 순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좀 덜 들어갔다는 생각이 든다.★★☆☆☆[4337. 11. 26.]   916□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마종기, 문학과지성시인선 2, 문학과지성사, 1980   외국생활과 나이 들어가면서 생기는 외로움이 생활 속에서 아주 잘 살아있다. 시가 생활과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이 정도면 잘 증명해주는 셈이다. 그런데 시집 전체의 시가 고르지를 못하고 울퉁불퉁하다. 표현이 잘 된 곳은 엉뚱한 방향으로 상상이 튀고, 외로움이 잘 살아있는 곳은 너무 밋밋하다. 감정과 상상력의 작용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인가 분명한 태도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시임을 알 수 있다. 한자가 너무 많아서 어지럽다.★★☆☆☆[4337. 11. 26.]   917□여울목 비오리□김영태, 문학과지성시인선 18, 문학과지성사, 1981   특이함이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이 시는 가장 훌륭한 시가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시집은 결코 칭찬 받기 어려운 시집이다. 체험의 특수성이 독자를 만날 때 독자가 접근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 아마도 시인 자신이 아주 특수한 세계에 익숙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잘 연결이 안 되는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드러난 이미지를 통해서 그 시가 쓰여질 당시의 어떤 정신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계기를 잡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계기로 가는 길을 시가 차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위시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여러 예술 갈래를 뒤섞어놓는다고 해서 전위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쪽과 저쪽을 넘나드는 것은 탓할 것이 없지만, 계기를 주지 않고 저쪽에서 이쪽을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해서 자신의 세계가 독특해지는 것은 세월이 간다고 해서 외줄타기로 하고 건너갈 사람이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술가는 스파이더맨일 수 있지만, 독자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 착잡한 시집이다.★☆☆☆☆[4337. 11. 26.]   918□뒤란이 시끌시끌해서□조달곤, 작가정신, 2004   말투도 그렇고 세계도 그렇고 차분히 가라앉았다. 들끓던 욕망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에 헛된 욕망을 버린 뒤에 나타나는 풍경들이 아주 잘 정리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불필요한 말들이 없이 상황을 전하기 딱 알맞은 것들만 동원되어서 시가 아주 깔끔하고 산뜻하다. 시의 시간 배경이 거의가 봄인 것을 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시의 세계를 밀고 가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아주 안정된 세계이고 수준이다. 다만 발견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시에는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4337. 11. 26.]   919□배추흰나비를 보았습니다□이선관, 답게, 2002   솔직함이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이런 시집에서 본다. 이미지 뒤로 숨어서 숨바꼭질하다가 결국 외로움 이외에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는 시들보다 몇 배 낫다. 다만 수필과 거의 구별이 안 되는 것은 씻을 수 없는 단점이다.★★☆☆☆[4337. 11. 26.]   920□절정을 복사하다□이화은, 문학수첩, 2004   시가 아주 차분하고 시상 전개도 무리 없이 잘 이루어졌다. 시를 오래 많이 써본 시인이라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 만큼 기법은 원숙하다. 그런데 제1부의 빼어난 시 몇 편과 나머지 시들의 수준이 많이 차이 난다. 겉으로는 아무런 단점이 없는 듯하지만 관찰이 너무 평범하고 그것을 평범하게 묘사해나감으로써 긴장이 풀어진 시가 많다. 무엇보다도 어쩌다 얻은 표현 때문에 억지로 할말을 꿰어 넣어서 만든 시가 많다. 시집을 서둘러 냈다는 얘기다. 인생의 깊이가 갑자기 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런 시의 경우에는 좀 더 진득하게 기다려서 저절로 흘러 넘칠 때 쓰고, 엮는 것이 좋다. 한자는 넘쳐서는 안 되는 독이다.★★☆☆☆[4337. 11. 28.]    
101    시집 1000권 읽기 91 댓글:  조회:1912  추천:0  2015-02-11
    901□목숨을 걸고□이광웅, 창비시선 73, 창작과비평사, 1989   거칠지만 정신의 뼈대 같은 것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이것은 형상화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형상화 이전에 거기에 들어있는 어떤 믿음일 것이다. 그런 것이 너무 강하게 드러나서 선언 비슷한 수준까지 갔지만, 그러한 판단들이 일정한 체험의 전제 위에 서있기 때문에 시가 허황하거나 들떠있지를 않다. 다만 이런 것들을 될수록 많은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상상력의 차원인데, 그것까지 요구한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 될 것인가? 를 남겨둔 것은 무슨 의미인가?★★☆☆☆[4337. 11. 17.]   902□뿌리에게□나희덕, 창비시선 95, 창작과비평사, 1991   이렇게 건강하고 따스하던 세계가 어떻게 그런 고독 들추기로 바뀌었는지 놀랄 일이다. 이 시집에는 이웃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있고, 그들의 아픔을 감싸는 따스한 마음이 있고, 희망을 놓지 않는 굳센 의지가 서려있다. 그런데 이제는 제 안의 슬픔으로 퇴영하여 곶감 빼먹기를 반복하면서 그 단맛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스스로 날개를 떼어버리고 상처 난 누에가 되려고 하는 꼴이다. 무거운 생각에 붙잡혀있기 때문일까? 시들이 아주 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직된 상태다. 이것을 벗어나면서 정말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곳이 슬픔 각색, 절망 주연의 유치찬란한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이 세계로 돌아와야 할 것만 같다. 한자는 굴레다.★★☆☆☆[4337. 11. 18.]   903□철조망 조국□이동순, 창비시선 97, 창작과비평사, 1991   너무 큰 주제에 짓눌려서 상상력이 움츠러든 형국이다. 조금 풀릴 듯하다가도 결국엔 그 무거운 압력 때문에 움츠러들고 만다. 안쓰러운 일이다. 일이 안 풀릴수록 안 풀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일은 풀리는 법이다. 특히 시를 쓰는 일은 더더욱 그러하다. 마음이 무거우면 상상력은 움츠러드는 법이다. 움츠러든 그 상상력이 시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런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가 먼저 등을 돌린다. 시를 안 쓰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7. 11. 18.]   904□겨울 기도□정대구, 문학과지성시인선 14, 문학과지성사, 1981   시에서 군더더기 없이 할 말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상당한 성취를 보여준다. 꼭 할 말만을 선택해서 압축하는 것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왕왕 할말을 추릴 때 그것이 설명으로 전락하지나 않나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곳곳에서 그런 분계점에 시들이 닿아있다. 무엇보다도 시집 전체에서 어떤 정서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 전면으로 드러나지를 않아서 시인이 그때그때 상황에 처할 때마다 시를 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런 시들일 한 자리에 모일 때는 정서가 한 곳으로 집중되는 힘이 필요하다. 모든 역량이 드러나면서도 그런 점이 아쉬운 시집이다. 한자 역시 아쉽다.★★☆☆☆[4337. 11. 19.]   905□금빛 은빛□홍희표, 창비시선 64, 창작과비평사, 1987   ‘씻김굿’이라는 부제가 시마다 달려있다. 결국 노래의 가락에다가 할 말을 실은 것이다. 어떤 일정한 양식에 기대어 자신의 할말을 하는 것은 아주 편하고 유리한 방법이다. 그런데 아무리 어떤 형식에 기댄다고 하더라도 시는 어차피 시다. 시가 지닌 긴장과 상상력을 드러내지 못하면 어떤 양식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거대 이데올로기를 시에 끌어들이는 데는 노래가 편하지만, 노래라는 그 타성에 안주해버리면 시가 되지 못하고 넋두리가 된다. 이 시집은 그런 위험이 너무 짙다.★☆☆☆☆[4337. 11. 19.]   906□지금 그리운 사람은□이동순, 창비시선 57, 창작과비평사, 1986   풍경 뒤로 시인이 멀찌감치 물러나 있다. 이런 시에서는 시인이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시는 거추장스런 모든 장식을 떼버리고 말을 직접 건네는 방식인데, 그것을 안 하려니 고도의 작전이 필요하다. 그 작전은 묘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묘사는 선택과 상징의 문제이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냉정해져야 하고, 할 말을 최대한 숨겨서 선택된 이미지가 스스로 말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너무 성급하게 할 말을 겉으로 드러낸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멀찌감치 물러난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정밀하고 깔끔한 묘사가 이렇게 해서 효과를 반감시켰다. 1부의 농구에 대한 시는 그 의도나 방법에서 분명하지만, 그 분명함이 시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시의 감흥과 사물에 대한 인식의 선명도는 다른 것이다. 한자는 선명도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4337. 11. 20.]   907□네 눈동자□고은, 창비시선 66, 창작과비평사, 1988   이 시집은 반발력으로 쓰여진 시이다. 반발력은 저항의 힘이다. 어떤 힘을 전제로 한다. 그 힘은 기존의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이 찍어누르는 대로, 그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모든 현상을 파괴하고 비꼬는 방향으로 시심이 작용한다. 어떤 시대에는 이런 심리와 경향이 그대로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고은의 시는 그런 시대를 대변해왔고, 잘 드러냈다. 그런 점에서 성공이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시에서는 일관성이 없는 법이다. 그 일관성은 그 이전의 억압된 세계 때문에라도 이루기 어렵다. 일관성을 이루는 순간 세계는 그 일관성을 바탕으로 억압의 기제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이유를 묻지 않고서 반발하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런 영역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시다. 그러니 어떤 잣대를 가지고 측정하기는 어렵다.★★☆☆☆[4337. 11. 20.]   908□사월에서 오월로□하종오, 창비시선 43, 창작과비평사, 1984   민중시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라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시집이다. 이런 시들이 진정한 시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것은 물론 독자들이 시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다. 비유하자면 동일한 소음을 계속 반복하는 자동차 엔진소리 같아서 운전자에게 졸음을 유발한다. 막연한 관념성, 체험이 빠진 상태의 대리 발언, 무엇을 노래하려는 것인지 불투명한 애매모호함, 어느 것 하나 시로서는 건질 것이 없다. 실패한 사랑시들이 좋은 사랑시들을 외면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을 시라고 써서 발표하면 독자들만 떨어져나갈 뿐이다. 시라고 해서 시집을 사보는 독자들의 심리는 어렵고 안 어렵고를 떠나서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할 수 없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 것들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 그런 기대감을 짓밟는 묘한 힘을 발휘하는 시들이다. 그러니 시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왕에 나왔으니 어떻게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될 시집이다. 한자까지 섞여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4337. 11. 21.]   909□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이가림, 창비시선 27, 창작과비평사, 1981   이미지를 이끌어가는 문장력도 좋고, 호흡도 제법 길어서 별로 부족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딱 한 가지가 빠졌다. 주제가 너무 뒤로 후퇴했다는 점이다. 드러내야 할 부분에서 과감하게 드러내지를 못하고 자꾸 이미지 뒤로 숨는 바람에 시 전체가 맥이 풀린 그런 경우이다. 무엇보다도 전하고자 하는 분노의 감정이 시의 밑바닥에 깔려있어서 좀처럼 위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 단점이다. 터져야 할 곳에서 터지지 않고 그대로 끝나는 그런 느낌이다. 아쉬움이 느껴지는 시집이다. 한자는 더욱 아쉬운 문제이다.★★☆☆☆[4337. 11. 21.]   910□북 치는 앉은뱅이□양성우, 창비시선 23, 창작과비평사, 1980   운율이 아주 잘 살아있다. 운율이 잘 살아있다는 것은 말을 통해서 시를 쓴다는 얘기다. 그것은 무언가 전할 말이 있는데, 특별한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을 경우 가장 흔하게 택할 수 있지만, 또 가장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치열한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운율이 잘 작동하고 있다. 모호한 듯한 점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특정한 사실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크게 드러내서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거다 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시대 전체의 분위기와 개인의 내면 풍경이 잘 맞물려서 나름대로 호소력을 얻은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 그런 감정의 복판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 청산되지 않은 한자는 끝내 흠이 될 것이다.★★★☆☆[4337. 11. 21.]    
100    시집 1000권 읽기 90 댓글:  조회:2311  추천:0  2015-02-11
  891□마음의 수수밭□천양희, 창비시선 122, 창작과비평사, 1994   묘사도 얌전하고 꼼꼼한데, 그런 묘사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엷다. 이미지가 이 정도 전개되었으면 할 말이 나와야 하는데, 정작 그 할 말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 그래서 시가 밋밋하다. 애써 찾아낸 발견과 이미지들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상태로 웅크려있다. 이런 이미지들에 활달한 생기를 불어넣고 힘차게 움직이도록 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기에 정말 중요한 위치에 와있다. 한자는 버려야 할 기교이다.★★☆☆☆[4337. 11. 13.]   892□넋이야 넋이로다□하종오, 창비시선 58, 창작과비평사, 1986   정말 할말없게 하는 시집이다. 제목에 굿시집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굿시로 봐야 할 것 같고, 넓게 잡자면 극시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 같다. 행사에 동원된 것이니, 그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시와 행동이 붙어있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4337. 11. 13.]   893□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 창비시선 161, 창작과비평사, 1997   전환기에 와 있는가? 표현은 간절한데, 내용은 너무 허하다. 시가 짧아지면 잠언의 형태로 나아가는데, 여기서는 그 흉내만 내고 있다. 그러니 좀 더 깊어져야만 시의 상징이 깊은 울림을 갖게 될 것이다. 분노가 만든 사랑에서 분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인데, 그렇다면 그냥 말 그대로 사랑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마음의 강이 있다. 그것을 건너면 부처가 될 것이다.★★☆☆☆[4337. 11. 13.]   894□가장 가벼운 짐□유용주, 창비시선 117, 창작과비평사, 1993   밋밋하다. 특별히 모난 것도 없고,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도 없다. 있다면 자신의 땀에 정직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밋밋한 것은 그러한 태도가 갖는 사상성 내지는 계급의식이 희미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것은 이 시집의 한계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기법이 보여주기의 수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그런 기법으로 담기에는 거북한 감정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옥쇄를 차는 형국인데,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야 할 것이다. 감정이 격할 때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데, 너무 점잖은 방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은 시의 내용과는 달리 점잖은 시작법을 배웠다는 뜻이다. 계급의식을 강화하거나 상상력의 진폭을 넓힐 필요가 있는 시집이다.★★☆☆☆[4337. 11. 14.]   895□사진리 대설□고형렬, 창비시선 116, 창작과비평사, 1993   이게 시라면 세상의 어떤 글이든 행만 찢어놓으면 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시가 무엇을 노래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부터가 분명치를 않다. 묘사를 하고 말을 하면서도 전체의 묘사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없거나 있어도 별로 중요치 않은 시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주제가 없으니 말들이 뿌리 없는 부유물처럼 모호한 관념 위에서 둥둥 떠돌고 있다. 시 안에서 넋두리라도 이루어져야 판단을 하고 평가를 할 수 있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하여 처음부터 그런 판단이 어렵다. 무엇이 시이고,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가 하는 것부터 새로 배워야 할 일이다. 그보다 서둘 일은 한자를 버리는 것이다.★☆☆☆☆[4337. 11. 14.]   896□아름다운 손□나해철, 창비시선 110, 창작과비평사, 1993   내용 없이 시를 쓸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점도 없어 보이지만 볼수록 말들이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솜씨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내용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본디 시가 다루지 못할 것은 없지만, 시가 다룰 수 있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다. 시가 될 것 같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시를 만들면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 것이 시이다. 시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오래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11. 14.]   897□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비시선 125, 창작과비평사, 1994   1부와 4부의 몇 편은 절창이다. 다 보여주지 않아도 다 보여준 것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시의 기능을 자주 잘 활용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런 눈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다. 감정의 절정에 올라있되, 그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냉정한 시선만이 잡아낼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니 재주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스스로 그런 비극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다면 쓸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많은 시들이 맥없이 늘어져있다. 그리고 절창이 노래한 감정들은 김고독 극본, 이절망 각색, 박허무 주연의 멜로물이어서 오래 머물러 있을 만한 것이 못되는데, 그 성취도를 보아서는 한 동안 이런 감정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 시인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시의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치하지 못한 한자 또한 비극이다.★★★☆☆[4337. 11. 16.]   898□독도□고은, 창비시선 126, 창작과비평사, 1995   논리의 비약과 장황한 시상 전개는 여전하다. 그런데 이미지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이 좀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다. 그것도 시각 이미지가 전면으로 솟았다. 이것은 생각이 냉정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많이 가라앉았지만, 곳곳에서 거친 목소리가 솟아난다. 아마도 시인의 특성이리라. 그러나 그 특성이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을 듯도 한데, 자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중요한 것이 시의 뒤에 서린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일까? 전해 개의치 않겠다는 투다. 사실은 말릴 일도 없을 것 같다. 너무 큰 걸음이 때로는 허방을 짚는 수도 있지만, 그 행보의 의기만큼은 가상하다. 시원한 걸음이 역시 시원하다. 그러나 시원함으로만 친다면 시는 어쩐지 불편하다. 이 불편을 해소할 생각도 없겠지만, 해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바람’의 경우는 명작이다.★★★☆☆[4337. 11. 17.]   899□두 하늘 한 하늘□문익환, 창비시선 75, 창작과비평사, 1989   무엇보다도 시의 정서가 어떤 것이며, 어떤 것을 노래해야 시가 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시인이다. 모든 언어를 어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배치하는 저력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다만, 감정이 아주 격한 절정의 위치에서 노래를 하기 때문에 그 감정의 바탕을 이해할 수 없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자리와 때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리수를 두는 것으로 비칠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단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 법이고, 때가 있는 법이고, 곳이 있는 법이다. 그것까지 탓할 것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시대의 몫이기 때문이다.★☆☆☆☆[4337. 11. 17.]   900□어여쁜 꽃씨 하나□서홍관, 창비시선 80, 창작과비평사, 1989   시를 참 잘 쓰는 시인이다. 목청을 높여야 하는데도 목청을 높이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목청을 일부러 낮추어 조용히 얘기할 줄 아는 것은 시를 아는 냉정함은 물론 인내력까지도 갖추었다는 증거이다. 흥분할 만한 내용을 아주 조용하고 냉정한 시각으로 묘사하여 끝내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에 동감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이야말로 정말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기본 요건이다. 격동의 시대인 1980년대에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러한 냉정한 눈길 속에서도 따뜻한 아랫목처럼 따스한 가슴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 따스함은 양심에 인정을 추가해야만 하는 것인데, 사람 알기를 고기 덩어리로 여기기 쉬운 의사라는 직업인에게서 이런 따스함이 느껴진다는 것이 또한 놀랍다. 좀 아쉬운 것은 상상력이 너무 위축돼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상과 주제가 중요하더라도 상상력이 활발하게 활개쳐야 시가 생동감 있게 살아날 수 있다. 그런 단점으로도 가릴 수 없는 맑은 정신과 양심이 살아있는, 읽기에 즐거운 시집이다.★★★☆☆[4337. 11. 17.]    
99    시집 1000권 읽기 89 댓글:  조회:2079  추천:0  2015-02-11
    881□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김용락, 창비시선 148, 창작과비평사, 1996   꼼꼼하고 세밀한 묘사가 시인의 성실성과 뛰어남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방법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이렇게 묘사를 통하여 보여주기 수법으로 보여주기에는 너무나 격렬한 것이다. 이럴 때는 장시로 보여주어야 하거나 아니면 육성으로 직접 육탄전을 벌이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다. 이런 보여주기는 자칫하면 남들도 다 아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지루함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 시집은 정확히 그 지점에 서있다. 한자는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잔재 같다.★★☆☆☆[4337. 11. 10.]   882□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신경림, 창비시선 172, 창작과비평사, 1998   시에서 말을 아끼면 묘사가 되고, 묘사가 깊어지면 상징이 된다. 이 시집은 정확히 그 지점을 지나고 있다. 상징주의의 비틀린 상징과는 달리 이 묘사를 통해서 진입한 상징은 아주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이루어진다. 그래서 아주 깔끔하고, 그 깔끔함의 이면에는 시인의 냉철하고 냉정한 시각이 깔려있다. 주로 삶을 회고하는 방식의 묘사여서 달관과 통찰의 깊이도 느껴진다. 다만 추억에 의존할 때 생기는 정신의 둔화는 피할 길이 없다. 한자 역시 그런 둔함의 일종이다.★★★☆☆[4337. 11. 10.]   883□그 여자네 집□김용택, 창비시선 173, 창작과비평사, 1998   절반의 성공이랄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실패라는 뜻이다. 짧은 시들은 아주 좋은데, 긴 시들은 형편없다. 가장 큰 문제는 시에서 주제가 걱정스러울 만큼 엷어졌다는 점이다. 그 점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 사랑타령인데, 이 사랑타령이라는 것이 시집 팔아먹기에는 좋지만, 자연 속에서 삶의 통찰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내면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되면 도사가 될 테고, 현실은 증발할 것이다. 이건 염려할 만한 부분이다. 시 몇 편이 아직까지 한 낱의 희망처럼 붙잡고 있으니 그것을 믿을 일이다.   시가 구체성을 결여하면 감동의 폭은 넓어지지만 깊이는 얕아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특히 사랑시가 갖는 맹점이 이것이다. 어떻게 둘러대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연결되지만, 그럴수록 감동은 멀어진다. 사랑의 감정을 노래한 시 역시 어떤 분명한 체험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 체험이 시에 나타날 필요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시의 밑바닥에 그 체험이 깔려있어야만 감동이 온다. 시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체험이 분명하지 않기에 시는 관념화한다. 이 점 특히 다른 부분의 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경계할 일이다.★★☆☆☆[4337. 11. 10.]   884□돌아보면 그가 있다□이원규, 창비시선 166, 창작과비평사, 1997   시가 참 단단하다. 논리의 비약도 재미있다. 그런데 너무 냉정하다. 이것은 내용을 너무 감추고 압축하려는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냉정함이 어느 방향으로 흐를 것인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냉소주의의 냄새가 너무 짙다. 그러면서 뜨거운 혁명을 꿈꾸고 있다. 그러니 말은 뜨겁되 시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것이다. 언어를 단단하게 잘 다루는 능력과는 별개로 주제에 따라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파고들어야 할 것 같다.★★☆☆☆[4337. 11. 10.]   885□가시연꽃□이동순, 창비시선 192, 창작과비평사, 1999   두 가지 특징이 선명하다. 주제가 생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과 절제된 감각의 묘사가 그것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묘사는 언어감각의 뛰어남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은 웬만한 공력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묘사를 하다보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생긴다. 감정을 드러낼 경우 애써 그린 묘사가 그 효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불필요한 발언을 해서 전체의 분위기와 긴장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이 눈에 띈다. 절제된 언어감각이 뛰어난 시에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수필 투의 문장이 많이 섞여있는 것이 눈에 띈다. 게다가 한자까지 섞여서 큰 흠집을 이루고 있다.★★☆☆☆[4337. 11. 12.]   886□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김영무, 창비시선 178, 창작과비평사, 1998   언어를 다루는 솜씨도 나름대로 빼어나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독특한 개성이 있다. 그런데도 한 가지가 빠진 듯한 것은, 시로서는 내용이 함량 미달인 것을 자꾸 시로 만들려는 태도 때문이다. 그 태도가 시의 곳곳에 군더더기를 남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남기지 않는, 살을 깎아내는 결단이 더 필요한 경우이다. 시인이라는 이름과 시집이라는 것으로 만족하자면 이대로 두어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더 깊어질 필요가 있다. 한자는 깊어지지 않는 한 조건이다.★★☆☆☆[4337. 11. 12.]   887□집은 아직 따스하다□이상국, 창비시선 174, 창작과비평사, 1998   할말을 묘사로 대체하고, 그것을 적당한 호흡에 실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 넘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사물 너머의 어떤 중요한 세계를 놓치지 않고서 독자의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힘도 좋다. 특히 제1부와 제4부의 작품들이 그렇다. 그런데 시집 중간에서 많은 작품들이 긴장이 해이해졌다. 아쉬운 일이다. 아마도 현실의 문제에 상상력이 짓눌린 것 같다. 현실의 문제가 절박할수록 상상력은 가벼운 행보를 해야만 시가 좋아진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 부분만 보충한다면 정말 대단한 시인이 될 것 같다. 한자는 덫이다.★★★☆☆[4337. 11. 13.]   888□긴 사랑□나해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171, 문학과지성사, 1995   시도 진화한다는 사실을 이 시집은 잊고 있다. 옛날 같으면 이 정도의 퉁김만으로도 독자는 감동했겠지만, 지금의 독자는 그렇지 못하다. 하도 조미료를 많이 먹은 탓에 입맛마저 그렇게 변했기 때문이다. 시가 꼭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미료를 칠 필요는 없겠지만, 옛날의 맛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면, 조미료를 쳐대는 모습을 보고서 무언가 그것을 넘어설 어떤 방안을 찾는 것이 옳은 태도이다. 시가 지나치게 짧다. 짧아져야 해서 짧다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더 길어져야 할 듯한데도 짧아졌다면 그건 문제이다. 조금은 더 길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 시들이다.★★☆☆☆[4337. 11. 13.]   889□푸른빛과 싸우다□송재학, 문학과지성시인선 142, 문학과지성사, 1994   특수한 내면풍경을 드러내는 것이 시의 고유 영역이라는 고집과, 타고난 무관심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무중력 공간의 시를 낳고 있다. 마치 시장 속에 박힌 점집 같다. 절집 같기도 하다. 그런데 너무 고고한 척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손님이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다. 이래 가지고야 장사가 안 되지는 않겠지만,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 그런 부분도 시의 한 영역이기는 하나, 욕심이 너무 클 때 나오는 실수이기도 하다. 좀 더 문을 열 필요가 있는 시집이다. 문패를 한자로 달아서야 구세대 밖에 또 누가 드나들겠나?★★☆☆☆[4337. 11. 13.]   890□나의 우파니샤드, 서울□김혜순, 문학과지성시인선 140, 문학과지성사, 1994   너무 수다스럽다. 그 수다스러움이 일종의 전략일 수는 있겠지만,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사이가 너무 느슨해져서 긴장마저 떨어뜨린다면 그건 낯설게 하기도 아니고 상상의 과잉도 아니니 다른 전략을 수립해야 할 때가 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발견한 또 다른 세계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할 말을 대신하는 것 역시 지루함의 한 원인이 된다. 그러니, 하는 말에 견주어 그 말로 전해오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면 듣는 쪽에서는 잔소리로 들리는 법이고, 잔소리 앞에서는 누구나 귀를 닫고 딴 짓을 하는 법이다. 시가 잔소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비장의 카드가 필요하다. 상상력이든 언어이든 좀 절제된 어떤 몸짓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 이왕 경전을 번역하려면 한자보다는 그냥 한글이 낫지 않겠는가?★★☆☆☆[4337. 11. 13.]    
98    시집 1000권 읽기 88 댓글:  조회:1967  추천:0  2015-02-11
871□나는 별 아저씨□정현종, 문학과지성시인선 3, 문학과지성사, 1978   염세주의자가 유독 예술이나 표현에 대해서 대단한 열정을 보이는 것은, 시를 보면 곧 죽을 것 같이 외로운 사람들이 적당한 지위에 넙죽넙죽 올라앉아서 잘 사는 것과 같은 모순이 아닐런가? 깨달음을 얻으려면 좀 더 분명한 것이었으면 좋겠다. 깨달아 봤자라는 관념을 전제해놓고서 깨달으려 한다면 그것을 인간답다고 봐야 할지 위선이라고 봐야할지 언뜻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런 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예술이라는 이름의 뒤에 흉기처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염세주의로 살든 회의주의로 살든 독자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시 안에 내장된 모순은 걷어내는 것이 예술에 뜻밖의 집착을 보이는 염세주의의 성공을 보장할 최소한의 예비가 아닐런가? 한자는 염세의 대상이 아닌가?★★☆☆☆[4337. 11. 6.]   872□떨어져도 튀는 공처럼□정현종, 문학과지성시인선 38, 문학과지성사, 1984   자신의 생각을 시의 뒤로 숨기는 법을 많이 체득했다.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과 그 생각이 요구하는 표현의 괴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많다. 그것을 생각의 긴장으로 풀어야겠지만, 생각이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방법이 바뀔 때 그 전의 자신감을 대체할 그 어떤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시간도 깨달음도 더 필요하다. 시가 특수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믿음을 바꾸지 않는 한 이런 절름발이 행보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시는 생각의 귀퉁이에 쓰레기통처럼 몰려있다. 한자는 버려지지 않은 옴 자국이다.★★☆☆☆[4337. 11. 6.]   873□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최하림, 문학과지성시인선 218, 문학과지성사, 1998   말을 묘사로 대신하는 능력이 일정한 성과를 보인다. 그런데 묘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대신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묘사된 이미지들이 그 감정을 싣고 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미지들이 전해야 할 그 감정들이 이미지들의 확실한 묘사만큼 따라주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이미지들이 단순한 풍경 묘사와 감정 전달의 중간에 애매한 태도로 놓여있다. 결국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좀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자는 걷어야 할 이미지이다.★★☆☆☆[4337. 11. 6.]   874□자명한 산책□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281, 문학과지성사, 2003   고독의 식탁에서 쓸쓸함의 나이프로 허무의 빵조각을 씹어먹는 풍경. 이런 식이면 시가 노래할 수 있는 것은 고독과 사랑 둘로 압축하면 될 일이다. 옹달샘 앞에서 바닥에 겨우 차는 물을 자꾸 퍼낸들 거기서 무엇이 나올 것인가? 바닥만 드러내는 샘 앞에서 투정할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기다리면 거기 물이 고이고 소금쟁이가 뜨고 이끼가 끼고, 또 그러다 보면 어느 샌가는 물고기도 살기 마련이다. 그렇게 퍼내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 외로움이라면 이제 그 위에 고여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만한 나이가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꼭 필요한 말을 필요한 상황에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은 살 만하다. 그렇기에 더욱 아쉬운 일이다. 한자 역시 아쉽다.★★★☆☆[4337. 11. 7.]   875□영혼의 북쪽□박용하, 문학과지성시인선 236, 문학과지성사, 1999   과잉의 시집이다. 하고픈 말도 많고 동원된 말도 많고 담아야 할 내용도 많아서 탈이다. 많은 것을 절약하지 못하니 번거롭고 지루하다. 같은 말과 이미지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것이 어떤 전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약점을 지닌 셈이다. 무엇보다도 말들이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풀려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상황이 모호해진다. 그리고 말들만 남지 그 말들을 넘어서 뚫고 들어가는 어떤 것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 성급하게 쓸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7. 11. 7.]   876□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227, 문학과지성사, 1999   시인들한테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면이 있다. 상상력이 거침없이 자신이 겨눈 바를 향해서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냉정하고 다양한 묘사가 뒤따른다. 그러나 산문이 갖는 둔중한 행보를 걷어내지 못해서 시가 불필요하게 무거운 주제에 예속된 시들이 너무 많다. 이 무거움을 걷어내는 것이야말로 시의 가벼움으로 무거움을 소화하는 특질을 잘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4337. 11. 7.]   877□사이□이시영, 창비시선 142, 창작과비평사, 1996   짧은 묘사는 암시와 환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암시와 환기는 짧은 전체를 모아놓았을 때 전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분명하게 담고 있을 때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짧은 묘사의 뒷면에는 불가불 사상이나 철학이 버티고 있는 형국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전체를 다 조합한 뒤에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짧은 묘사는 말장난이나 덜 깨달은 땡중의 넋두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짧은 시의 완성도를 묻기 전에 그 짧은 묘사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스스로 분명한가 하는 것을 물을 수밖에 없다. 시대의 어둠을 죽음이라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애매한 관념으로 은유해가지고는 철학이나 사상이 되지를 못한다. 한자도 청산하지 못한 상황에서 시대의 어둠과 죽음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4337. 11. 8.]   878□참 맑은 물살□곽재구, 창비시선 137, 창작과비평사, 1995   수필로 써야 할 것을 시로 썼다. 시 쓰는 재주는 나무랄 것이 없겠다. 그러나 방향이 문제이다.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처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는 세계는 민요를 닮는다. 민요는 노래이다. 민요에서는 개인이 사라진다. 개인이 사라지면 관념의 덩어리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위험을 굳이 마다하지 않는 것은 시인의 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변하지 말았어야 할 그 무엇이어야 하건만 시절이 하 수상하니 안타까울 뿐이로고!★★☆☆☆[4337. 11. 8.]   879□사라지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양성우, 창비시선 159, 창작과비평사, 1997   이야기가 시의 전면으로 드러난 것은 옛날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더욱 심하다. 그런데 내용은 더 물렁해졌다. 이것은 외면의 적이 시간이라는 내면의 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전력의 약화를 가져올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인지 알 수 없다. 연애시의 어조를 많이 띠고 있어서 다소 혼돈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위기로 많이 바뀌었다. 그것이 시의 세계가 깊어지는 쪽으로 가야 하는데, 아직은 실험 중인 것 같다. 다만 이대로 남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락은 여전히 잘 살아있다.★★☆☆☆[4337. 11. 9.]   880□귀로 웃는 집□임영조, 창비시선 157, 창작과비평사, 1997   비유는 방법상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그것은 시에서 오랜 세월 동안 쓰여오면서 나름대로 시의 어법을 형성한 가장 묵은 화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낡아 보이기가 쉽다. 게다가 대상이 선정되지 않으면 쓸 수가 없고, 자신의 마음속에 든 것을 정확하게 건네줄 어떤 사물이나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단점은 어떤 대상을 선택했을 때 그 대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마치 작은 옷을 입은 사람처럼 거북하다. 이 시집에서도 그런 거북한 모습이 아주 많이 눈에 띈다. 더욱이 뒤로 가면서 심해진다. 단순 비유는 깔끔하게 보여주어야지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안 된다. 게다가 한자까지 뒤섞여서 뒤숭숭하다.★★☆☆☆[4337. 11. 10.]    
97    시집 1000권 읽기 87 댓글:  조회:2214  추천:0  2015-02-11
    861□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박찬일, 민음의 시 113, 민음사, 2002   자신만만한 태도가 시 전체를 압도한다. 자신만만함이 시에서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때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시에서 자신만만함이란 판단의 완성이기 때문에 완성된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든다. 장광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또 설명을 피하려고 하면 말장난을 하게 된다. 그리고 풍자의 태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풍자는 결국 어떤 벽에 부딪힐 때 취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만만함과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니 무언가 뚫어야 할 것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분명치 않지만, 태도만은 말할 수 있다. 그 태도란 겸손이다.★★☆☆☆[4337. 10. 25.]   862□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문정희, 민음의 시 119, 민음사, 2004   정말 시를 잘 쓰는 시인이다. 일상 속에서 소재를 찾아서 일상의 평이한 언어로 쓰는데도 시들이 빛을 발한다. 생활 속에서 빛을 찾아낼 줄 아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시인이다. 생각이 비약과 상상을 적절히 건너뛰면서 이미지를 찾아내고 그 이미지들을 잘 연결시켜서 무리 없이 반전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런 능력은 대단한 것이다. 한 번 잡힌 소재를 놓치지 않고 많은 것을 이야기할 줄 아는 시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시에 꿈이 없다는 점이다. 너무 비극 쪽으로 경사되었다는 것이 문제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꿈을 버린 시는 시의 전부를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4337. 10. 25.]   863□질 나쁜 연애□문혜진, 민음의 시 118, 민음사, 2004   젊은이의 패기가 물씬 느껴지는 시다. 펄떡펄떡 살아있는 야성도 그렇고, 남의 눈치 보지 않는 태도도 그렇다. 그러나 감정이 너무 원론에 가깝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형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좀 더 나갔으면 좋겠는데, 고만고만하다. 의도한 것은 아마도 의식의 실험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얌전하고, 단순한 서정시라고 보기에는 너무 혼란스럽다.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4337. 10. 26.]   864□나는 걷는다 물먹은 대지 위를□원재길, 민음의 시 117, 민음사, 2004   겉보기에 아무런 단점을 보이지 않는 시들이 밋밋하고 지루한 것은 어떤 정해진 관념을 풀려고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관념이란 삶에 대한 결론을 말한다. 이미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진 상태에서 말을 하려 들기 때문에 신선한 표현도 없고 뚜렷이 할 말도 없는 것이다. 이 시집은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치열함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이 인생일 뿐인가? 인생이 사라지면 무만 남는가? 그렇다면 시에서 할 말은 없다. 이런 자가당착이 애써 이룬 언어의 공력을 허무한 것으로 만든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쉽게 시를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말 많은 시인들이 그렇게 시를 쓰고 있으니, 그것이 이 시인만의 탓은 아닐 것이다.★★☆☆☆[4337. 10. 26.]   865□오동나무 안에 잠들다□길상호, 제3의 시 11, 문학세계사, 2004   나무를 잘 그리려다 숲을 놓친 경우이다. 뒷부분에 괜찮은 작품이 몇 편 보이는데, 나머지는 세부묘사에 너무 공이 들어가서 전체의 그림을 잡아내는 데 방해가 되는 그런 경우이다. 이것은 부분부분의 표현에 집착하다 보니 생기는 현상인데, 표현은 부분의 참신함도 좋지만, 시선이 부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전체의 틀과 색깔까지 눈이 넓어져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그 점만 잘 보충하면 큰 시인이 될 재목이다.★★☆☆☆[4337. 10. 28.]   866□기억들□송재학, 세계사시인선 107, 세계사, 2001   앞서 나온 시집 두 권을 읽을 때는 형편없는 시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번 시집은 아주 잘 썼다. 앞서 나온 시집에서는 형식을 통하여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고 한 의도된 욕심이 불거져서 내용을 소홀히 했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내면의 풍경에서 나오는 울림 때문에 욕심을 버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상상력이나 언어의 밀도도 단단해서 반짝반짝 빛을 낸다. 이런 긴장을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가족사와 내면에 너무 집착하는 까닭에 시가 쓸데없이 화려하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이 화려함은 자칫하면 허영끼로 발전하기 쉬운 것이다. 한자 역시 그렇다.★★★☆☆[4337. 10. 29.]   867□오래된 식탁□송복순, 동학사, 2004   시간과 싸운 성실성이 보이는 시집이다. 우선 허황한 꿈들이 없어서 좋다. 시에서 소박한 느낌이 오는 것은 여간한 장점이 아니다. 그러나 내용이든 표현이든 한 꺼풀 더 벗겨야 할 시집이다. 옛날 같으면 괜찮을 듯한 표현들이 많지만, 입맛이 까다로워진 요즘의 독자들의 입맛에는 어쩐지 밋밋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일상의 자잘한 감정만을 나열해서는 안 된다. 그런 감정들이 인간의 심성에 도사린 어떤 분명한 감정을 향해 일제히 방향성을 띠고 작동해야 한다. 부분의 묘사가 성실하고 꼼꼼해도 그것이 전체의 어떤 그림을 향해 움직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4337. 10. 29.]   868□크낙새의 비밀□허윤정, 영하, 2001   세월이 흐르면서 분화되는 것은 학문이나 사회의 구조만이 아니라 시도 역시 그러하다. 표현에서도 내용에서도 자꾸 분화하면서 다양한 세계를 드러내고 정서화한다. 시가 짧고 영원한 감정을 노래하는 데 강한 특성을 보이는 갈래라고 하더라도 이런 분화를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그런 특성을 간직하는 것과 방법과 발상에서 이미 묵은 것으로 결정된 어떤 곳에 머물러있는 것하고는 다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시는 자신이 쓰고 읽고 감상하는 자기만의 폐쇄된 영역 안에 머무르고 만다. 그 안에 갇혀있는 시다. 한자 역시 그런 폐쇄를 강화시킨다.★☆☆☆☆[4337. 10. 30.]   869□그의 집은 둥글다□이태수, 문학과지성시인선 162, 문학과지성사, 1995   방법도 내용도 혼돈이다. 제 자리에 머물러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못 찾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고, 방향성을 상실한 그 감각이 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지 못해서 표현 역시 매번 새롭지 못한 그렇고 그런 것들이 되풀이되고 있다. 특히 방 이미지 하나에 매달리고 있는데, 이 때의 방은 자신만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자신만의 것을 가두어 놓으면 안 된다. 폐쇄된 공간이란 개인의 의미만 담긴다. 그래서 누구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음이 세상과 교통하면서 그 과정의 내용과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재주 때문이 아니라 방향 때문에 시가 안 풀리는 경우이다.★★☆☆☆[4337. 11. 5.]   870□대담한 정신□양진건, 문학과지성시인선 165, 문학과지성사, 1995   패기는 좋은데 방향이 틀렸다. 어렵게 얘기해서 상황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시라는 생각이야말로 구태의연한 것이다. 그 왜곡된 생각이 시를 낯설게 만들지만, 그 낯섦은 이미지가 뭉쳐서 풀리지 않는 옥쇄로 작용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이미지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야 시는 시원해지는데, 그게 안 되고 안으로 얽혀들고 있어서 이미지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를 쓰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들이 어디에 발을 대고 있어야 할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연출되는 혼란이다. 따라서 주제를 좀 더 분명하게 확정해야 하고, 거기에 꼭 필요한 이미지가 아니면 없애주는 것이 시의 혼란을 줄이는 일이다. 그리고 비유가 너무 많이 나온다. 비유는 뜻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특히 직유는 너무 자주 사용하면 오히려 이미지의 흐름만 방해한다. 게다가 그 비유가 신선하지도 못한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이다. 한자는 낡은 방식이다.★★☆☆☆[4337. 11. 6.]    
96    시집 1000권 읽기 86 댓글:  조회:2421  추천:0  2015-02-11
851□오라, 거짓 사랑아□문정희, 민음의 시 102, 민음사, 2001   시집 한 권을 처음부터 한 호흡으로 쓰기도 어려울뿐더러, 한 호흡으로 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집은 그런 시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처럼 읽힌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시집이다. 중요한 말을 간추리고 거기에 맞는 상황을 설정하여 읽는 사람이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이도록 할 줄 아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니 방법이라기보다는 태도라는 것이 더 옳겠다. 여자들이 흔히 갖는 여성성의 함정이나 그 반발로 인한 과격함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맨눈으로 정직하게 볼 줄 아는 아주 힘있는 세계를 갖추었다.   이 시인의 저력은 제3부에서도 드러난다. 외국에 나가서 쓴 시들을 모은 듯한데, 외국의 풍물에 빠져들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 것은 여간한 능력 가지고는 되는 일이 아니다. 다만 너무 내면 성찰 쪽으로 방향이 고정된 데다가, 본래부터 있어서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모순을 많이 보는 것이 흠인데, 이것은 지식으로 뭉쳐진 세계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그 모순 너머에 서린 어떤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만 가미된다면 정말 훌륭한 시를 쓸 시인이다. 시집 제목은 그리 적절한 것 같지 않다.★★★★☆[4337. 10. 13.]   852□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허만하, 솔, 2000   오랜만에 보는 유미주의의 시다. 증발한 현실이 어렵다. 시인이 시를 절대의 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논리상 이상한 점이 전혀 없는 것 같지만, 그런 전제는 대부분 현실을 삭제하고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예술 전반에 대한 상당한 감식안이 없으면 감상하기 힘든 시가 많다. 특히 그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시가 많다. 무지한 독자를 기죽일 일이지만, 그것을 기죽는 독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자의 여유가 유미주의의 폐해이니, 최소한 경계는 해야 할 일이다. 사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성실한 태도가 시 곳곳에서 확인되는 시집이다. 그런 성실성이 체험의 특수성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작용하면 시에는 씁쓸한 맛이 남는다. 아마도 김수영이 제일 먼저 그 쓴맛을 느낄 것이다. 한자 역시 씁쓸한 맛을 낸다.★★★☆☆[4337. 10. 13.]   853□아담, 다른 얼굴□조원규, 민음의 시 106, 민음사, 2001   이런 압축에 이르기까지 들였을 공과 배움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압축을 하면 내부 공간이 졸아들어 메아리가 생기지를 않는다. 울림이 없는 시는 갑갑하다. 결론이 먼저 추려져 나오기 때문이다. 행동을 발라내고 사유만 남기면 철학이 되는데, 관념으로 기우뚱거리는 모습은 시로서는 위험한 일이다. 말랑말랑한 살의 맛에 익숙한 사람에게 뼈를 우린 곰국의 뼈는 어쩐지 아쉬운 메뉴이다.★★☆☆☆[4337. 10. 14.]   854□공놀이하는 달마□최동호, 민음의 시 108, 민음사, 2002   제목 때문에 엉망이 된 시집이다. 제목도 그렇지만 모든 시마다 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이게 문제다. 동일한 부제를 연달아 달아두면 독자는 그것을 전제로 시를 읽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굳이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거의 없는 시들이다. 그냥 그대로 두어도 한 그림이 되는 그런 괜찮은 시라는 말이다. 그런데 불필요한 부제가 이미 모든 살아있는 이미지들을 사구가 되어버린 선불교의 죽은 비유 속으로 쑤셔 넣고 있는 형국이다. 화두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언어로 나타나면 사구가 된다. 활구가 되어도 부처가 될까 말까인데, 사구가 되어서는 중생은커녕 제 한 몸 구제도 못하는 것이다. 좋은 시들이 많은데도 부분부분에서 언어를 마감하는 데 미숙한 곳이 많이 눈에 띈다. 단 한 글자라도 한자는 혹이다.★★☆☆☆[4337. 10. 15.]   855□장편 서정시 백두산□최문진, 4293   아주 특이하고 희귀한 시집이다. 서문을 보면 자신의 회갑을 맞이해서 기념으로 낸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출판사도 적혀있지 않다. 단기로 4293년이면 서기로는 1960년이다. 제목대로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쓴 기행시이다. 시라고는 하지만 운문으로 쓴 수필이라고 봐야 할 정도이다. 특정지역을 지나면서 마주치는 장면에 대한 자기 생각을 쓴 것이다. 3행을 한 연으로 해서 끝까지 같은 방식으로 썼다.   내용은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분위기가 난다.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자연을 보고 거기에다가 1960년대의 냉전논리까지 가미한 형태이다. 일제시대의 민족주의가 일본의 정치에 놀아난 것처럼 이 시대의 민족주의가 냉전의 논리에 놀아날 것인데, 그런 위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작은 단락의 제목을 보면 이 저자가 돌아다닌 곳을 알 수 있다. 단표자, 백두영봉, 천지, 십장생, 잣나무, 백웅, 정계비, 송화강, 발해, 인공위성. 1960년대는 이북을 갈 수 없는 시대인데, 만주체험이 실린 것으로 보아 해방 전에 체험한 것을 그 후에 쓴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을 거쳐서 송화강을 따라 북만주의 독립운동 지역, 발해 지역을 답사하고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보고 듣고 생각난 것을 적은 시집이다.★☆☆☆☆[4337. 10. 15.]   856□인생□이승훈, 민음의 시 109, 민음사, 2002   연기와 연기를 끊으려는 불교의 관념을 나름대로 잘 해석해서 그것을 시로 썼다. 그러나 너무 거기에 집착을 하면 시든 인생이든 남는 것은 없다. 불교가 갖는 관념체계와 불교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앞의 것은 철학의 영역이지만, 뒤의 것은 삶의 문제이다. 시는 삶의 문제 쪽이 가깝다. 시가 철학의 영역을 다루지 못할 것은 없지만, 그때는 대개 관념성을 동반한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인데, 시에서는 너무 관계와 언어의 문제에 집중된 것이 문제다. 집중력은 좋지만, 때로 특수한 집중은 독자의 관여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시인이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의도를 더욱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한자는 혹이다.★★☆☆☆[4337. 10. 16.]   857□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정철훈, 민음의 시 110, 민음사, 2002   우리 시에서 북방의 정서는 아주 드문 편인데, 이 시에는 그런 정서가 살아있어서 아주 희귀한 느낌을 준다. 시집이 모두 4부로 구성되었는데, 그 방향이 서로 달라서 산만한 느낌을 준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도 그것이 어떤 통일을 향해 달리지 않으면 시집이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상상력의 걸음이 성실하되 둔탁하다. 좀 가볍게 할 필요가 있다. 가볍게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남기지 않는 것이다. 시 전체의 흐름은 무난하지만 중간중간에 꼭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은 것들이 끼어 있어서 부산스럽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한자 역시 부산스러움의 한 원인이다.★★☆☆☆[4337. 10. 16.]   858□내 잠 속의 모래산□이장욱, 민음의 시 111, 민음사, 2002   시에 대해서 배울 것은 다 배운 시인이다. 묘사력도 관찰을 표현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어느 하나 탈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 미늘이 좀 션찮은 탓일까? 시어들이 이미지의 아가미에 정확히 꿰이지를 않아서 자꾸 빠져 달아난다. 걸릴 듯하다가도 미끈덩 하고는 빠져버린다. 묘사가 정확한 듯한데, 그 묘사들이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 흔한 것이거나 엉뚱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그럴 듯하게 얽어줄 주제도 너무 낯익은 것으로 귀착하고 있어서 애써 이룬 표현들이 낡은 빛을 낸다. 기교가 승한 시다. 그러니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정해야 하는데, 너무 분위기에 편승하다 보면 자신이 새로운 무언가를 노래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미 그런 세계는 신물나게 노래된 것들이다. 젊은 시인의 시답지 않게 패기가 없이 너무 늙었다. 한자 역시 늙음의 징표다.★★☆☆☆[4337. 10. 21.]   859□사랑은 야채 같은 것□성미정, 민음의 시 115, 민음사, 2003   시인이 시를 쓸 때 한 방법만을 고수하면 반드시 지루함이 시에 나타난다. 그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은 주제를 다양화하면서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만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상징이 시의 주요 수법으로 등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려운 말을 자꾸 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어려움은 곧 지루함으로 연결된다. 이 지루함을 극복하려는 방법으로 이 시인은 특별한 소재와 상황설정을 택하고 있는데, 이것은 잠시 신선할지는 몰라도 근본을 해결하는 방법은 못 된다. 자칫하면 시에 대한 자신감이 경망스러움으로 전락하기 쉽다. 상징이 주된 수법이 된 시집에서 소재의 특수성에 의존하는 것은 땜질에 불과하다. 좀 더 쉬워져야 하는데, 그 쉬움은 좀 더 깊어지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깊어지지 않는다면 쉬움은 경망스러움이 된다. 시집 후반부의 시들이 그런 기미를 드러낸다. 쉬움과 깊음, 그 점을 깊이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10. 23.]   860□별의 집□백미혜, 민음의 시 112, 민음사, 2002   표제로 뽑은 은 아주 빼어난 작품이다. 이 정도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고 내공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작품 전체에 들인 공도 만만찮다. 그런데도 확 와닿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은, 욕심이 과한 까닭이다. 욕심은 반드시 집착을 낳는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집착. 그러나 그것이 시인의 의식 속에서는 목숨을 걸 만큼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쩐지 배부른 탄식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없지 않다. 프랑스 산 포도주를 마시며 사는 것을 탓할 필요는 없지만, 그 향기를 맡고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개인의 절실함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절실함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고 남들의 절실함에 자신의 감정을 맞출 필요는 없지만, 남들의 눈치는 보아야 하는 것이, 그렇지 않으면 종종 시가 넋두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2만 가진 사람 앞에서 5밖에 못 가졌다고 투정부린다면 2만 가진 사람으로서는 황당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작품집 전체의 수준과 균형을 고르게 유지하는 것은 여간한 능력이 아니다.★★★☆☆[4337. 10. 25.]    
95    시집 1000권 읽기 85 댓글:  조회:1951  추천:0  2015-02-11
842□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신용목, 문학과지성시인선 290, 문학과지성사, 2004   이만 하면 사물을 보는 눈도 아주 신선하고 거기에다가 할 말을 싣는 재주도 좋다. 좋은 시인이 될 요건을 거의 다 갖추었다. 특히 남들의 보지 않은 세계를 보려는 노력은 칭찬 받을 만하다. 그런데 유미주의의 혐의가 너무 짙다. 멋을 부리려다 보니 그 멋이 주제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도 망각하는 상태까지 다가간다. 이 안 어울림은 아주 미미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시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만 경계한다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다. 좋은 시인에 되는 데 한자는 걸림돌이 된다.★★★☆☆[4337. 10. 8.]   843□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박주택, 문학과지성시인선 287, 문학과지성사, 2004   시어가 현실의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채로 공중에 떠있다. 그래서 몽롱하다. 시의 이미지는 모자이크와 같아서 낱낱의 시어들은 현실 속의 어떤 점과 분명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 점들이 모여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그때 떠오른 이미지는 높이 올라갈수록 선명해진다. 그런데 낱낱의 점들이 그럴 듯해도 그것이 연결점을 갖지 않으면 나중에 전체의 이미지가 흐릿해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점을 분명히 자각하지 않으면 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그런 상태 위에서 이미지만 둥둥 떠돈다. 그런 지점에 와있다. 따라서 묘사되는 대상을 통하여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먼저 정리하고 이미지들의 연결고리를 다시 한 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한자는 점검할 필요가 없는 쓰레기이다.★★☆☆☆[4337. 10. 8.]   844□한 잔의 붉은 거울□김혜순, 문학과지성시인선 288, 문학과지성사, 2004   자신의 체험을 다른 상황으로 바꿔 설정하여 풀어내는 아주 독특한 상상력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그런데 장황하고 수다스럽다. 이 수다스러움이 어떤 전략에서 나오는 듯한데, 그 전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깊은 곳으로 숨으려 하고 숨기려 드는 모순을 시는 갖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수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려워 보인다. 인내를 갖고 그 어려움을 통과할 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마련하는 것이 전략을 실패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종종 범하는 오류는 다들 아는 것을 어렵게 설명하면서도 다들 아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 더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오류를 위한 그 무엇이 필요한 시집이다. 한자는 오류 예방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4337. 10. 9.]   845□백년 자작나무 숲에 살자□최창균, 창비시선 236, 창비, 2004   나무에 관한 관찰이 압권인 시집이다. 시인이 시골에 살아서 그런가 자연에 대한 관찰력이 남들이 가보지 못한 경지까지 다다랐다. 다른 시인들과 구별되는 이 시인만의 장점이다. 게다가 관찰력을 잘 받아낼 수 있는 언어의 세계까지도 갖추었다. 그런데 소에 관한 시들은 그것이 이야기를 갖고 있어서 그런가 다른 시들과는 다르게 너무 무겁고 둔탁하다. 시집의 색깔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그런 듯도 한데, 시집 전체를 무겁게 하고 있다. 그리고 시집 제목이 별로 좋지 않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서 제목을 붙여야 했다.★★★☆☆[4337. 10. 12.]   846□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 창비시선 235, 창비, 2004   시가 많이 달라졌다. 에서는 이미지와 함께 풍부한 느낌이 전해졌는데, 이 시집에서는 정서가 거의 다 사라지고 인식이 시의 전면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묘사와 제시의 사이로 깨달음을 일깨우는 화두 식의 어법이 많다. 세상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얘긴데, 이걸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시가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던가, 아니면 감성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강조됨으로써 사라진 그 감성의 세계가 못내 아쉽다. 일상의 사건에서 어떤 할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게을러 보인다. 그리고 그런 시작 방법의 문제는 주제가 흩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시의 말투가 가지런해도 이 점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이 정도의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은 시인의 능력 때문이리라.★★★☆☆[4337. 10. 12.]   847□벽화□김영산, 창비시선 234, 창비, 2004   곳곳에서 백석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묘사로 일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법인데, 그런 수법의 단점은 무언가 할말을 하다가 만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시집도 이 문제점을 비켜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벽화 연작은 빼어난 묘사에도 이런 허허로움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시대가 하 수상하다보니 이렇게 선별에 의한 세계관의 제시가 답답한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제시의 수법이라도 무언가 분명한 변별점을 찾아서 개성화 시킬 필요가 있다. 특별한 깨달음도 없으면서 제시만 해놓는 것은 별로 성실해 보이지 않는다. 그건 대가들이 겨우겨우 성공할 때 빛을 보는 것이다.★★☆☆☆[4337. 10. 12.]   848□이 환장할 봄날에□박규리, 창비시선 232, 창비, 2004   부질없는 말의 시체로 산을 쌓았다. 쯧쯧! 위치는 절집인데 마음은 속세이다. 속세의 감정을 속세의 화법인 시로 설명을 했으니, 절도 집도 떠나지 못한 자의 영혼이 어디에 깃들까? 사방의 문을 모두 닫아놓았으니, 이제 어떻게 이곳을 나가서 또 어디로 갈까?★★★☆☆[4337. 10. 12.]   849□섬들이 놀다□장대송, 창비시선 231, 창비, 2003   화룡점정이란, 용 그림에 마지막 터치로 눈동자를 그려 넣는다는 얘긴데, 그 한 획 눈동자를 그려 넣지 못해서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 시집이다. 눈동자가 무엇일까? 아마도 주제가 아닐까? 아무리 숙고해보아도 내용이 허하다.★★☆☆☆[4337. 10. 12.]   850□은빛 호각□이시영, 창비시선 230, 창비, 2003   요즘 시들을 보면 과거를 회상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시가 늙었다는 얘기다. 할 말이 없을 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고,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역시 과거로 돌아간다. 그래서 시의 과거는 아주 게을러 보인다.★☆☆☆☆[4337. 10. 12.]      
94    시집 1000권 읽기 84 댓글:  조회:1906  추천:0  2015-02-11
  831□몸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35, 세계사, 1994   감성을 전달하는 법은 두 가지다. 감성을 그대로 전달하는 방법과 생각의 허를 찔러서 잃은 감성을 일깨우는 법이 그것이다. 이 시는 두 번째의 방법을 택하고 있다. 고된 사고 훈련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여 그 깨달음으로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자칫하면 그냥 지식의 전달로 그치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과장하는 것으로 그칠 염려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커지는 위험은 산문성이다. 깨달음의 내용을 전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시가 산문으로 전락하는지도 모르는 수가 생기곤 한다. 산문의 무거운 행보가 곳곳에서 걱정스러운 시집이다. 한자 역시 걱정스럽다.★★★☆☆[4337. 9. 13.]   832□탄광 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의 시집 75, 실천문학사, 1990   시가 현실을 다룬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명실상부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집이 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탄광촌 아이들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을 과장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아이들의 눈을 빌면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불거지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런 것이 전혀 없이 아주 잘 드러났다. 아이들과 숨을 함께 쉬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것이 어른들의 시집에 섞였지만, 동시집이라는 것이다. 동시집은 드러냄의 방식에서 어떤 식으로든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못내 아쉽지만, 동시집으로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좋은 시집이다. 이런 시집들이 있어야만 정말로 아이들 사이에서 시가 살아날 것이다.★★☆☆☆[4337. 10. 3.]   833□뫼비우스의 띠를 드립니다□안희두, 온누리, 1987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수학의 공식과 원리를 소재로 삼아서 시집 한 권을 채웠다. 그렇기에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시가 특정 소재에 집착하면 갑갑하다. 시의 영혼은 한없이 밖으로 뻗어나가는 성질이 있는데 특정 소재를 떠나지 않으면 소재가 주는 영역의 밖으로 시가 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정 소재는 그 소재의 지식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준비가 안 된 독자에게 지식을 강요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이해는 될지언정 그것에서 감동까지 받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게다가 수학이라니! 노력은 돋보이는 시집이나, 소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시집이기도 하다.★☆☆☆☆[4337. 10. 3.]   834□좋은 세상□이은봉, 실천문학의 시집 27, 실천문학사, 1986   시를 쓰는 자기 나름의 방법이 확고히 잡힌 시집이다. 그런데 시의 방법은 냉정한 보여주기 수법인데, 다루는 감정은 그렇지를 못해서 방법과 내용의 부조화가 이 시인이 극복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일 것 같다. 내용의 격렬함은 결국은 방법을 과격하게 하여 형식을 무시하게 될 것인데, 그런 조짐이 시집 곳곳에서 불거졌다. 한자 역시 그런 불거짐 가운데 하나이다.★★☆☆☆[4337. 10. 4.]   835□부활□고은, 오늘의 시인총서 6, 민음사, 1974   감수성이 아주 풍부해서 시집 전편에 철철 흘러 넘친다. 그런데 그것을 잡아낼 틀이 정제되지 않은 느낌이다. 막연한 감정이 막연한 이미지 묘사로 대체되어 있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나 의 경우에는 9분도 쌀처럼 아주 잘 정제된 시이다. 그렇지만 나머지는 7분도나 5분도의 수준에 머물러있다. 그리고 현학 취미가 있는 것은 탓할 것은 없지만, 그것이 독자의 접근을 저지하는 수준이면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자는 어려운 문제이다.★★☆☆☆[4337. 10. 5.]   836□인부수첩□김해화, 실천문학의 시집 35, 실천문학사, 1986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시를 쓰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생각을 해야 나오는 것이 시인데, 육체가 고달픈 가운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고달픈 육체로 생각을 하려면 특별한 감정이 아니면 안 된다. 특별한 감정이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육체가 견디지를 못한다. 그런 점을 이 시집은 아주 잘 보여준다. 인부수첩 연작은 노동의 한 가운데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런데도 흥분하지 않고 이 정도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 걸러지지 않은 육성이 흥건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성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4337. 10. 5.]   837□붉은 산 검은 피 첫째 권□오봉옥, 실천문학의 시집 63, 실천문학사, 1989 838□붉은 산 검은 피 둘째 권□오봉옥, 실천문학의 시집 64, 실천문학사, 1989   조기천의 이후 처음 보는 서사시이다. 서사시의 약점은 서술과 진술을 균형 잡하게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독자가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서 갈래를 정리해버렸기 때문이다. 서술이나 묘사는 소설로 넘어갔고, 진술은 희곡이나 수필로 넘어가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는 또 다른 방법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나갔는데, 그것은 서사성을 벗어나서 비유나 다른 동일시의 체계의 의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유체계는 길어지면 긴장이 늘어진다. 이 시집은 진술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그럴 경우 시는 지루해진다. 화자의 내면 속으로 사건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건을 겉으로 드러내면 화자의 내면 심리가 위축된다. 결국 서사시에서는 이 둘의 균형을 꾀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이 상당 부분 성공한 부분도 묘사와 구조에서 성공한 탓이다. 특히 구성이 간결하고도 여러 층을 갖고 있어서 울림이 좋았다. 그런데 이 시집은 구성은 단순한데 등장인물의 할말이 너무 드러났다. 그래서 지루한 느낌을 벗어나기 힘들다. 특정 사건을 서사시로 다루었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시간과 공간을 제시하고서 시작하는 것이 화자의 진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와 닿게 할 수 있을 법한 일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서사시인데, 여러 가지로 아쉬운 점이 많았다.★★☆☆☆[4337. 10. 5.]   839□사라진 손바닥□나희덕, 문학과지성시인선 291, 문학과지성사, 2004   이제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럴 필요가 없는 감정에 주저앉아서 꾸물거리는 것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삶의 외로움이라든지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슬픔 따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한 번쯤 정직하게 거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는데도 자꾸 보여주려고 하면 폼만 남는다. 그럴 때는 빨리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여태까지 바라 봐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다. 그러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떫은감만 남는다. 떫은 감 몇 개로 손님을 치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네댓 편을 빼고는 별로 볼 것이 없는 시집이다. 한자는 더욱 볼 것이 없게 만든다.★★☆☆☆[4337. 10. 6.]   840□붉은 담장의 커브□이수명, 민음의 시 103, 민음사, 2001 841□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이수명, 문학과지성시인선 289, 문학과지성사, 2004   존재 자체가 실험의 대상이 되는 순간 여태까지는 볼 수 없는 긴장이 거기 나타난다. 그리고 방법을 바꾸거나 정신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지 않으면 긴장은 점점 풀어진다. 처음 두 시집에서 나타난 긴장이 아주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시가 아주 세련된 논리화를 지향하고 있다. 시에서 논리화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보지 않은 상태의 자신감은 대개 덫으로 작용하기 쉽다. 그럴 듯해 보이는 순간 시의 긴장은 점점 풀어지는 것이다. 그 긴장의 강도는 시의 길이에서도 나타난다. 시가 짧아지는 것은 원숙해지는 것이거나 해이해지는 것이다. 이 시집의 징후는 뒤쪽의 것에 가깝다. 긴장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방법이든 세계관이든 바꾸어야 할 지점에 이른 것이다.★★☆☆☆[4337. 10. 7.]    
93    시집 1000권 읽기 83 댓글:  조회:1836  추천:0  2015-02-11
    821□푸른 삼각형□강유정, 청하시선 8, 도서출판 청하, 1983   단조로운 것이 흠인데, 아주 잘 쓴 시다. 죽음을 이토록 깊이 노래한다는 것도, 이토록 감미롭게 노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물의 의미를 교묘하게 바꾸어 삶의 근원에 드리운 어떤 정서를 아주 잘 퍼 올렸다. 시어가 사물을 직접 지시하기보다는 정서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기도 어렵다. 곳곳에서 김춘수의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변별성은 있고, 또 나름대로 전하고자 하는 정서가 분명해서 아주 독특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첫 번째 시의 한 자 몇 글자는 옥의 티다.★★★☆☆[4337. 8. 30.]   822□나비와 광장□김규동, 산호장, 1955   지금까지 읽은 시집 중에서 가장 오래 전에 출판된 시집이다. 1955년이면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이니, 꼭 50년이 된 셈이다. 그 동안 출판 문화는 많이 달라졌다. 세로줄로 쓰여진 첫 번째 시집이다. 시집 뒤에는 이라는 제목을 다시 붙이고 로 표시한 다음 ____ 위에 543을 찍었다. 옛날에는 시집을 내면서 각 책에도 번호를 붙인 모양이다. 아주 재미있다.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일까? 우리의 맹세라는 것도 넣어서 적개심을 고취시켰던 모양이다.   시의 내용은 별로 볼품이 없다. 무언가 특이한 분위기로 표현을 해야 하고, 서구의 냄새를 조금은 풍겨야 한다는 듯이 외국어도 많고, 표현을 아주 어렵게 했다. 겉멋이 좀 들었다고나 할까? 애상도 두드러진 정서이다. 아직 정제된 표현을 얻는 시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 어려웠던 1955년에 이만한 시집을 냈다는 것이 놀랍다. 값이 400환(圜)이다.★☆☆☆☆[4337. 8. 30.]   823□반시대적 고찰□박남철, 세계사시인선 89, 세계사, 1999   시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면 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양심을 훼손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과 그러기 위한 몸부림에서 정서가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맑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시들이다. 삶의 모순을 극대화시키고 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이다. 그 앞에서 허물어지고 구겨지는 자신의 모습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반응하는 것이 이 시집의 내용이다. 시의 형태파괴는 어느 것으로도 위안 받지 못하는 정신의 내면이고 파편이다.★★★☆☆[4337. 8. 30.]   824□슬픔에 관한 견해□전원책, 청하시선 70, 도서출판 청하, 1991   시를 쓰는 태도는 아주 성실한데, 시 전체는 좀 산만하다. 이 산만함은 전하고자 하는 정서에 비해 주제가 빈약하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좀 길어진다. 시가 길어진다는 것은 지루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제든 정서든 좀 더 벼려서 빛나는 구슬을 만들 필요가 있다. 단단한 것이 빛나는 것이다. 한자는 빛을 깎아먹는다.★★☆☆☆[4337. 8. 31.]   825□새□김동현, 청하시선 9, 도서출판 청하, 1984   앞의 시 몇 편은 정말 뛰어난 걸작이다. 인식의 꺼풀이 다른 사람은 흉낼 수 없는 독특한 맛이 있고, 그것을 통해 깊이 있는 사유를 나타내는 절묘한 감각까지 살아있다. 하지만, 뒤쪽으로 가면서 시가 그런 탄력을 잃고 흔한 시로 전락해버린 것이 끝내 아쉽다. 그렇다고는 해도 허투루 쓴 시는 없고 이미지들이 아주 견고하게 대상을 물고 있어서 모호한 구석은 없다. 시의 수련이 굉장히 깊은 시인이다. 한자는 불필요한 장비이다.★★☆☆☆[4337. 8. 31.]   826□백두산□조기천, 실천문학의 시집 59, 실천문학사, 1989   보기 드물게 성공한 서사시이다. 서사시라는 양식은 원래 사건을 서술한 시여서 시의 본질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스스로 모순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배열은 시의 특성과는 무관하달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의 능력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시 밖의 그 요인이 서사시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 이 시는 그런 예를 보여준다. 해방 전 김일성 빨치산 부대의 보천보 전투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전투장면이 주가 된 것이 아니라 보천보 전투가 일어나기 위한 여러 가지 정황과 조건을 아주 잘 배치함으로써 자칫 서사시가 갖는 사건 풀이의 지루함을 잘 비켜갔다. 이것이 이 시의 훌륭한 점이다.   원래 서사시는 그 줄거리의 주인공이 흥미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생활에서는 그런 주인공을 만나기가 힘들다. 더구나 서사시보다 더욱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양식이 이미 정착한 상황이기 때문에 서사시가 굳이 맡아야 할 부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서사시가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잃어버린 영웅을 기대하는 심리에 맞추어 해방 전후의 시기에 그런 조건을 갖춘 인물이 등장했고, 그것을 맹목에 가깝게 추종하는 단체가 성립했으며, 그것이 엄연히 살아있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마지막 서사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줄거리 전개와 절제된 묘사, 인물들의 전형성 나아가 시의 호흡까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형상화를 이루었다.★★★★★[4337. 9. 11.]   826□눈사람□최승호, 세계사시인선 66, 세계사, 1996   머리로 쓴 시이다. 시는 가슴으로 써야 한다. 판단은 머리가 하지만, 감정은 가슴으로 오기 때문이다.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은 좋은데, 그것이 너무 말장난 수준으로 떨어졌다. 죽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설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거나 수집해 가지고는 시가 되지 않는다. 그 간단한 사실을 큰 시인이 놓친다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시들이 형상화 이전의 메모 수준에 머물러있다. 자신을 위해서나 독자를 위해서나 큰 불행이다.★★☆☆☆[4337. 9. 11.]   827□여백□최승호, 솔의 시인 9, 솔, 1997   앞의 시집을 낸 지 1년만에 나온 시집이다. 그래서 그런지 얄팍하다. 얄팍해도 앞의 시집보다는 훨씬 무겁다. 시집 전체의 주제를 눈사람으로 좁혀서 그 순환성을 찾아 연관 있는 이미지들을 엮었다. 대단한 능력이다. 의식은 앞 시집의 연장선에 있지만, 앞 시집이 있지도 않은 관념에 붙잡혀 허송세월을 한 듯한 인상을 주는 반면에 이 시집은 제목처럼 여백의 의미를 눈사람이라는 한 이미지를 통해서 끊임없이 발견하고 해석했기 때문에 크게 성공했다. 있으면서도 없는 삶의 실체를 잘 나타내주는 상관물로 눈사람을 설정한 안목이 대가임을 증명한다.★★★☆☆[4337. 9. 11.]   828□완전주의자의 꿈□장석주, 청하시선 1, 청하, 1981   어수선하다. 그 어수선함은 할 말에 비해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특히 묘사가 많은 시집인데, 그 묘사들이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서 동원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채 내가 겪은 체험을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시는 몽롱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체험 중에서 내 느낌을 싣고 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해서 등장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런 걸러내기가 잘 안 됐다.★★☆☆☆[4337. 9. 12.]   829□길은 마을에 닿는다□김완하, 천년의 시 4, 천년의시작, 2003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시에서는 치명상이다. 시가 많은 말을 동원한다고 해서 느낌을 잘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만큼 그 상황에 정확한 이미지를 동원하느냐 하는 것에 대부분 성패가 달려있다. 꼭 필요한 이미지 주변에 그렇지 못한 것들이 많이 달라 붙어있다. 그래서 좀더 냉정하게 깎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제가 약간 빈약한 듯한 느낌도 이런 내용과 관련이 있다. 한 번 더 벗겨서 주제와 이미지의 연결을 견고하고 끈끈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4337. 9. 12.]   830□꿈을 비는 마음□문익환, 제3문학시선 1, 제3문학사, 1990   문익환은 워낙 정치성이 강한 행동을 해와서 이 시집을 읽기 전에 시 역시 그러하려니 하고 짐작했는데, 막상 시집의 내용은 너무 참하다. 윤동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짧은 시들은 예외 없이 윤동주의 느낌이 난다. 아마 일부로 그런 분위기로 시심을 달랜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긴 시들은 그런 분위기로는 전달할 수 없는 애절함이 있어 윤동주의 애절함이 노출된다면 아마도 이런 식으로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을 소재로 한 시들은 너무 좋다.★★☆☆☆[4337. 9. 12.]    
92    시집 1000권 읽기 82 댓글:  조회:2260  추천:0  2015-02-11
  811□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장경린, 민음의 시 21, 민음사, 1989   시가 시대의 요약집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시집도 없을 것 같다. 물론 그 요약은 시대 자체의 풍경이 아니라, 그 시대 속에 낑겨있는 한 사람의 내면 풍경이다. 한 사람은 단순히 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 한 사람 속에는 시대의 상처가 남아있다. 자신의 내면에 남아있는 시대의 상처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끄집어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시대 모두의 문제가 남아있는 상처가 있고, 단순히 나만의 상처가 동시에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에서 필요한 것은 시대의 울림이 있는 상처이다.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시대의 요약집이라는 시의 성격이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는 자신의 내면풍경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상처이면서 동시에 시대의 울림이 들어있는 풍경을 잘 요약했다. 같은 발상은 아주 적절한 것이다. 아마도 1980년대를 산 지식인의 내면풍경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낸 작품은 보기 힘들 것 같다. 뒤쪽에 장난스러운 몇 편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나름대로 한 세계를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한자는 지식인의 전유물일까?★★★☆☆[4337. 8. 29.]   812□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이문재, 민음의 시 15, 민음사, 1988   할말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변죽을 때리며 빙빙 돌려서 어떤 효과를 얻으려는 의도가 아주 잘 드러나는 시집이다. 그 의도라는 것은 아마도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반발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의미의 가장자리를 일부러 이렇게 빙빙 돌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의미는 역사의 몫일 것 같다. 주제가 분명해지는 것은 역사를 매개로 한 의지의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의 방향은 그쪽과 거의 정반대를 향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어느 쪽이 그 쪽과 정반대의 방향인가 하는 것이다. 의미의 가장자리로 떠돈다고 해서 의미의 세계에 대한 반발이 성취될 리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큰 숙제로 남은 시집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가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한 글자든 두 글자든 한자는 혹이다.★★☆☆☆[4337. 8. 29.]   813□푸른 비상구□이희중, 민음의 시 62, 민음사, 1994   정서가 설익은 20대 후반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분명치 않은 감정과 주제에 이미지들이 집중되고 있고, 태반이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있어서 시가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원된 이미지들이 전하고자 하는 굵은 주제가 없어서 더욱 그렇다. 시의 경향은 어떤 주제를 전하기 위해 이미지를 동원하는 수법인데, 전할 그 무엇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이미지들이 서로 긴밀한 협조를 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이 점을 극복하려면 주제부터 새롭게 벼려야 하며, 그런 뒤에 이미지를 동원시키는 원칙을 다져야 할 것 같다. 한자는 다질 필요 없는 것이다.★☆☆☆☆[4337. 8. 29.]   814□강□구광본, 민음의 시 10, 민음사, 1987   작품이 너무 소품이다. 소품이라는 것은 작품의 행수가 짧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다루는 주제도, 시의 호흡도 그렇다는 것을 말한다. 너무 주제가 빈약하다. 그리고 설익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라는 작품 정도인데, 이 작품의 발상도 어디선가 빌려온 것이기 쉽다. 그런 발상은 예술 일반에서는 그리 드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모호한 듯한 인상을 갖춘 시들이 그 시대의 어떤 문제점까지 아울러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드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지들이 너무 단순하다. 뒤쪽의 단시들은 발상에 머물러있는 것들이다. 시가 좋아지려면 주제가 더 분명해져야 하고, 거기에 걸맞은 이미지를 좀더 확실한 것으로 뽑아야 한다.★☆☆☆☆[4337. 8. 29.]   815□가끔 중세를 꿈꾼다□전대호, 민음의 시 74, 민음사, 1994   관념성이 너무 강하다. 한 편 한 편에서 보는 시의 주제는 분명한 것 같은데, 시집 전체의 방향이 분명하지를 못하다. 젊은 날의 고뇌와 생각의 실험에 해당할 그런 시도들에 머물고 있다. 시인은 개인의 체험을 쓸 수밖에 없지만, 그 특수성이 보편성을 담지하지 못하면 시는 힘이 없다. 혼자 넋두리로 그치기가 쉽다. 그런 위험에 너무 노출돼있다. 따라서 한 편의 주제들이 모여서 이루는 전체의 모양새에 크게 신경을 써야 할 단계이다. 시집을 너무 서둘러 냈다는 얘기가 된다.★☆☆☆☆[4337. 8. 29.]   816□어떤 길에 관한 기억□장석주, 청하시선 55, 도서출판 청하, 1989   시집의 제목은 시집의 절반을 차지한 연작시의 제목과 같다. 이 정도면 허무주의를 드러낸 작품으로는 손색이 없다고나 할까? 아니면 이런 시집도 한 권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무라는 것이 원래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어떤 것을 갖다 붙여도 되는 것이어서 시로 다루기는 아주 편하고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답이 많은 것은 정답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 중에도 허무를 나타낼 만한 상황과 신념을 이만큼 뽑아내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는 해도 어떤 전범이 되기에는 시의 세계가 너무 좁다. 한 50편까지 연작을 끌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4337. 8. 29.]   817□민둥산의 하룻밤□류환, 청하시선 66, 도서출판 청하, 1990   시에서 묘사는 상관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상관물을 묘사의 대상으로 정하는 것은, 자신의 관찰이 정하는데, 그 정하는 기준과 원리에 따라 시의 내용과 품격이 결정돼버린다. 따라서 자신에게 절실한 그 무엇이 상관물로 적절한 것인가 하는 것을 회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시대의 문제는 더더욱 그러하고, 그 시대 속에 속한 개인의 내면풍경이 시대를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찰과 선택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석연치 않은 상태에서 묘사가 이루어지면 시가 굉장히 지루해진다. 그리고 이미지에 이끌려서 나중에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지경에 가 닿기 일쑤이다. 선택과 관찰이 많이 풀어진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은 의외로 아주 중요한 능력이다. 한자는 불필요한 것이다.★☆☆☆☆[4337. 8. 29.]   818□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오탁번, 청하시선 13, 도서출판 청하, 1985   세상을 보는 태도가 시의 깊이를 결정해버린 아주 묘한 시집이다.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능력이나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발상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런데 시집 전체에 묘한 시각이 스며들어서 시의 인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 풍자도 닮았고, 야유도 닮았다. 냉소라는 것이 가장 가까울 듯한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더 이상 뭣을 해봤자 세상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들어갈 듯하다가 거기서 머물고 만족하는 일이 되풀이된다. 특히 이 점은 1부의 시에서 두드러진다. 들어가 보지 못한 자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곳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시이다. 시는 말이 아니고 상징이나 비유를 통해서 일상 언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곳을 건드려주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태도가 그런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면 그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 독자들이 웃을지는 몰라도 감동하지는 않는다. 한자는 버려야 할 유산이다.★★☆☆☆[4337. 8. 29.]   819□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양애경, 청하시선 47, 도서출판 청하, 1988   두 가지 방법이 한 시집 안에서 충돌한다. 이미지를 따라가면서 할말을 그 뒤로 숨기는 방법이 있고, 이것저것 다 버리고 직접 말로 써버리는 방법이 있다. 이 두 방법은 내용상 충돌할 것은 없지만, 상상력의 체계나 발상의 방법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한 공간에 배치할 경우 미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방법의 미숙이 내용의 미숙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프로로서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자 역시 미숙의 일종일 수 있다.★★☆☆☆[4337. 8. 29.]   820□서울에서 보낸 3주일□장정일, 청하시선 53, 도서출판 청하, 1988   주제가 거의 성에 집중돼있다. 성을 통해서 이 사회의 모순을 들추겠다는 발상이다. 그 전의 다른 시집에 견주면 가지런함이 많이 사라지고 산만해졌다. 아마도 보여주기보다는 말하려는 의지가 충만해진 탓일 것이다. 자신의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을 폭탄으로 하여 세계를 건드리고자 하는 시들은 전위의 모습을 띤다. 장정일의 시가 시의 문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당연해야 할 일이다. 시를 상대로 한 실험에서 시의 가장 먼 가장자리까지 나간 경우이다.★★☆☆☆[4337. 8. 30.]    
91    시집 1000권 읽기 81 댓글:  조회:1810  추천:0  2015-02-11
801□청춘□김태동, 문학과지성 시인선 224, 문학과지성사, 1999   방법이 정신을 앞서나간 경우라 하겠다. 사물과 현상간의 동일성을 찾아내는 것이 시의 오랜 전통인데, 그 전통을 깨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고, 그것은 곧 시의 외연을 넓히는 일 이외에 별다른 효과를 보기 어려운 것이 여태까지 실험을 해온 결과였다. 위치 맞바꾸기를 한다고 해서 동일성의 바깥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거나 무시이다. 위치 맞바꾸기 역시 동일성의 바탕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선 새로운 시각을 추구하는 패기가 좋다.   시집 전체에 죽음이 득시글거린다. 죽음을 이토록 깊이 파고든 경우가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확 잡아끈다. 이 죽음의 의미는 좀더 넓은 시각을 갖춘 자가 밝혀야 할 부분이지만, 은 나의 추체험에 의존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늘 관념성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친 자들은 살아남기 어렵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주인공이 그랬고, 기형도가 그랬으나, 서정주는 신라로 뺑소니쳤으니, 방법이 없지는 않은 셈이다.★★☆☆☆[4337. 8. 27.]   802□아, 입이 없는 것들□이성복,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문학과지성사, 2003   벌써 30년째 똑같은 잔소리를 하고 있다면 듣는 사람의 지겨움은 그렇다 쳐도 말하는 사람 자신도 지겨울 법도 한데, 이렇게 지치지 않는 것은 열정을 넘어 시에 대한 신념이랄 수밖에 없겠다.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을 반복하여 말하는 사람도 측은하겠지만 듣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몇 번 물을 부어 우려낸 뼈다귀국물처럼 삶의 쓸쓸함은 시의 영원한 주제여서 거기에 충실한 몇 시인들이 주변에는 있다. 애써 찾아낸 다양한 이미지들을 재편집해줄 든든한 빽으로 그 쓸쓸함을 잘 활용하는 것 역시 능력이라고 봐도 되겠다. 시집의 절반 가량이 시를 위한 초고 수준에 머물러있다. 실험시가 아니라면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성실성이 문제가 된다.★★☆☆☆[4337. 8. 27.]   803□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복거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257, 문학과지성사, 2001   시의 사유는 강렬한 집중성이다. 그것은 시가 길어져도 마찬가지이다. 긴 시가 몇 편 있는데, 소설가답게 그 전개 수법이나 호흡이 유장하고 좋다. 그런데 다루는 주제가 반복되고 있고, 화자 바꿔서 이야기하는 소설의 흔적이 아주 강하게 드러난다. 소설 같은 시가 없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상력의 색깔이 다분히 논리를 깔고 있어서 메마르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소설이 갖는 논리가 시의 짧은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는 정말 거북하다.★☆☆☆☆[4337. 8. 27.]   804□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신대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249, 문학과지성사, 2000   시가 참 단단하다. 꼭 필요한 장면만 선택해서 할 말을 대신하게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너무 자연 속으로 침잠한 탓일까?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시집 전체로 보면 자연에 대한 묘사가 압도하듯 많은데, 거기에 딸린 이야기들은 두셋으로 초점이 갈라진다. 특히 사람을 다루면서 줄거리가 끼어들어 다소 설명에 가까운 상황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고, 그럴 때 자연은 그런 설명의 배경으로 물러나게 된다. 아무래도 자연에 대한 집중이 주제의 후퇴를 가져온 것 같다. 한자는 자연스러움을 막는 장애이다.★★☆☆☆[4337. 8. 27.]   805□그늘 반 근□김영태, 문학과지성 시인선 242, 문학과지성사, 2000   이런 시들을 보면 낯설다. 동원되는 말과 체험이 전혀 내 생각의 밖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는 물론 말과 경험까지도 낯설다. 이 경우 잘만 하면 생애 자체가 시가 되는 경우이다. 단, 그것이 독자의 이해가 가능하도록 배려할 경우이다. 그러나 체험의 특수성이 일반인들에게 이해되도록 하려면 천상 설명을 하게 되고, 설명을 하면 시는 늘어지고 만다. 그것이 문제다. 설명하지 않으려다 보니 자신의 느낌을 나열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독자에게는 뜬금 없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시의 체험은 특수하지만, 그 체험을 통해서 시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특수성과 일반성이 결합된 교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수한 체험사실을 묘사하면서 그 특수성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는 판단이 든다.★★☆☆☆[4337. 8. 27.]   806□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김혜순, 문학과지성 시인선 243, 문학과지성사, 2000   시를 밀고 가는 뚝심도 좋고, 말을 하기 위한 발상도 신선하다. 그러나 너무 길다. 시는 경제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갈래이다. 그 경제성의 원칙을 벗어나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의도가, 시가 펼치고 뻗어가는 데 도움이 되어야지, 오히려 시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면 그건 결코 칭찬 받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도시의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장황한 어법을 활용하는 모양인데, 그 어법이 적절할 때가 있고 적절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많은 시들이 적절하지 못한 어법 위에 놓여있어서, 칭찬 받기 어려운 지경까지 가있다. 한자와 영어 알파벳이 뒤섞여 정신이 없다.★★☆☆☆[4337. 8. 28.]   807□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임동확, 민음의 시 31, 민음사, 1990   이성이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시가 말한다면,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을 노래하는 작품이 하나쯤 있는 것도 좋으리라. 시는 양심이 뒤척이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역사의 혹이기도 하다.★★★☆☆[4337. 8. 28.]   808□잘 가라 내 청춘□이상희, 민음의 시 25, 민음사, 1989   도대체 사춘기 정서를 못 벗어나고 있다. 이른바 여류시가 갖는 단점을 거의 다 갖추었다. 말들이 애매한 위치에서 애매한 감정을 건드리는 데 사용되고 있다. 시다운 시는 뿐이다. 시가 되려면 먼저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단단히 따져서 정한 다음에 시를 쓸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애매한 태도와 정서를 벗어나기는 힘들다.★☆☆☆☆[4337. 8. 28.]   809□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박재삼, 민음의 시 35, 민음사, 1991   나이가 들어가면 직관이 발달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랜 관찰이 얻는 우주율의 세계를 보는 것일까? 시간의 고민이 많고, 시간에 관한 관찰의 결과가 시 곳곳에서 번득이고 있다. 시가 작은 관찰에서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관찰이 독자의 심금을 퉁겨줄 때 비로소 그 감동은 성립한다. 대부분의 시들이 섬세한 관찰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주제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면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과,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무력해지는 한 개체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는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관찰이 거의 말로 진행되다 보니 시가 짧은 데도 길다는 느낌이 든다. 한자는 불편하다.★★☆☆☆[4337. 8. 29.]   810□진흙소를 타고□최승호, 민음의 시 8, 민음사, 1987   시집 전체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죽어가는 것과 죽음에 대한 관찰이 아주 섬세하고 할말 역시 적절하게 소재를 따라가면서 전개되었다. 그런데 시집 전체를 읽으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가 어딘가 좀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좀 우스운 냄새도 나고, 풍자 같은 냄새도 풍기고, 야유 같은 분위기도 서린다. 죽음을 천착하는 것은 그 대척점의 삶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소멸과 현존하는 삶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그런데 죽음에 초점을 맞추면 모든 동작이 우스꽝스러워진다. 결국 이 시집의 죽음이라는 주제는 집착이 강할수록 삶의 양상이 희화화되는 것을 면치 못한 셈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못하고 미리 설정된 어떤 관념으로 본 셈이다. 그것만이 죽음으로 빨려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임을 눈치챈 것 같다. 죽음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서 살아난 사람들은 무당들뿐이다. 시인 중에는 아직까지 그런 사람이 없다. 한자도 죽음을 구원하지 못한다.★★★☆☆[4337. 8. 29.]    
90    시집 1000권 읽기 80 댓글:  조회:2078  추천:0  2015-02-11
791□개들의 예감□연왕모, 문학과지성 시인선 202, 문학과지성사, 1997   방향 없는 묘사에 그친 시가 있고, 무언가를 암시하고자 하는 시가 있다. 실험시라면 이 두 가지는 서로 어울리기 힘든 것이다. 암시는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다. 묘사는 너무 복잡하고 언어의 기능을 스스로 저버린다. 기능을 버린 언어는 그것 자체로 생명을 지닌다. 그 생명에서는 긴장이 느껴져야 한다. 그것은 실험이 갖는, 아무런 모습도 갖지 않으려는 몸부림 때문이다. 그냥 말로만 남아버린다면, 실험의 생명인 정신이 죽어버린다. 적어도 이수명에게 한 수 배워야 할 시집이다. 한자는 실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4337. 8. 25.]   792□밤의 공중전화□채호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문학과지성사, 1997   시가 아주 거칠다. 그렇지만 남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독특한 시집이다. 발상도 그렇고 시집 한 권에 흘러 넘치는 육체와 성에 관한 사고가 그렇다. 프로이드 심리학자들이 가장 좋아할 법한 시집이다. 시 곳곳에 도착된 성에 관한 관찰과 느낌이 서려있다. 그런데 시가 아주 거칠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생각들이 가지런하지 않거니와, 가지런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자꾸 설명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생각이 정리된 뒤에 이미지를 찾은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난 뒤에 생각을 정리해서 그렇다. 그래서 실제로 필요한 말보다 장황한 이미지들이 동원됐고, 그 역시 깔끔히 정리되지 않아서 거칠게 느껴진다. 그리고 실험으로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성찰의 내면을 드러내야 할지 방향이 분명히 잡히지 않아서 그런 탓도 있다.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하는 것이 좋은 작품으로 가는 지름길이다.★★★☆☆[4337. 8. 25.]   793□그런 의미에서□임후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204, 문학과지성사, 1997   여느 시와는 다르게 시에서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시체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는 그것이 실험시이든 보통 시이든 간에 읽어가면서 이미지가 만드는, 그래서 이미지에 실려 전해지는 어떤 의미나 정서가 와 닿기 마련이다. 특히 의미를 감추어서 주제가 파악하기 어려운 시들은 그 이미지가 갖는 느낌만으로라도 와 닿는다.   그런데 이 시집의 시들은 그런 느낌조차도 없다. 그 원인을 잘 살펴보면 시를 쓰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무엇을 전하자고 쓴 것이 아니라 무작위로 선택된 어떤 상황을 아무런 생각이나 의도 없이 묘사하는 일로 그치고 있다. 말하자면 카메라를 찍을 때 아무런 생각 없이 셔터를 눌러대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실험시에서 종종 있는 일인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생긴 시들이 나름대로 무언가를 전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시인과 시의 태도가 서로 다르다. 이것을 실수라고 봐야 할지 의도라고 봐야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시가 산만하다는 것이다. 한자는 산만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4337. 8. 26.]   794□유리의 나날□이기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211, 문학과지성사, 1998   시집 한 권을 한 호흡으로 쓴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대단한 능력이다. 그 능력 위에 시집 한 권 속의 시들이 한 초점을 향해 집중해있다는 것은, 그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더욱 대단한 능력이다. 모든 시를 유리로 수렴시켰는데, 유리라는 말이 이 시집의 내용을 담기에는 좀 작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리가 나타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이 이 시집에 담겨있다. 그리고 주제가 강하게 부각되면서 언어가 거기에 혹사당하는 것이 단점이다. 이기철이라는 이름은 시어의 아름다움과 아기자기함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것은 그가 이룬 성취이고, 그것은 또 장점이기에 계속해서 살려도 좋은 그런 부분이다. 내용이 강해졌다고 해서 버릴 그런 것은 아니기에 아쉬운 것이다. 깨달음이 언어로 화할 때는 언어와 내용에 간격이 생겨서는 안 된다. 이미 선시에서 그런 경지를 아주 잘 개척했다. 성급하게 보여주려고 하다 보면 자꾸 설명하게 되고, 설명을 하게 되면 자꾸 본질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더더욱 덧칠을 하게 된다. 시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이 대체로 길다면 그것은 장점이라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작은 티끌이 보인다고 해도 이 시집이 이룬 경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4337. 8. 26.]   795□사람들 사이 꽃이 필 때□최두석, 문학과지성 시인선 207, 문학과지성사, 1997   바깥에서 주어진 자극에 반응하여 시를 쓰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닐지 몰라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자극 속에 이미 방법이 주어지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극이 강하면 강할수록 시 또한 좋아진다. 그러나 그런 자극이 없을 경우에는 방법도 같이 사라진다. 그때 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건질 것이라고는 정도이다. 단풍을 보고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것은 굳이 시인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인과 시민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4337. 8. 26.]   796□안동시편□이태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205, 문학과지성사, 1997 797□이슬방울 또는 얼음꽃□이태수, 문학과지성 시인선 285, 문학과지성사, 2004   이 시집을 관류하는 이미지는 길이다.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그것이 실제의 거리이든 마음의 거리이든 그건 상관없다. 시에서는 마음의 길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시인이 돌아다니는 것은 자신이 서있는 위치에서는 발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와는 다른 곳에 가면 보는 것이 달라진다. 그래서 새로운 자극이 생기고 그 자극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들이 종종 범하는 오류는 풍경묘사에 치중한 나머지 할말이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풍경이 준 충격이 이미지로 다가오는데 그 이미지가 가지고 갈 의미가 선뜻 결정되지 않는 경우이다. 이 시집들 역시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체로 의미가 약하다. 그리고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다. 이미지를 버리기 아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말을 정비하고 이미지 역시 꼭 필요한 것만을 놔두고 과감하게 잘라버릴 필요가 있다. 이미지는 어차피 무언가를 전하지 않으면 제 힘을 내기 힘든 법이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시는 꼭 줄거리가 생긴다.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풍경에는 그 풍경이 갖고 있는 사연이 있고, 그 풍경과 접촉하면서 생기는 나의 사연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려고 하는 속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경에 너무 집착하지도 않고 풍경을 적당히 이용하면서도 풍경이 결국은 내 이야기를 전달하도록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이 시집의 풍경은 너무 강하다.★★☆☆☆[4337. 8. 26.]   798□내 손금에서 자라나는 무지개□문충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51, 문학과지성사, 1986 799□방아깨비의 꿈□문충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94, 문학과지성사, 1990 800□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문충성, 문학과지성 시인선 206, 문학과지성사, 1997   우직하다. 이 말은 태도나 상상력 모두에 해당한다. 시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10년이 넘도록 변함이 없다. 이런 태도는 높이 살 일이지만 상상의 틀이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결코 좋은 점이 아니다. 시인은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상상력의 틀이 어떤 정형성을 갖추기 마련이지만, 그 정형성이 단순하면 금방 물린다. 억지로 다채롭고 화려할 필요는 없지만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최대한 새롭게 보여주려는 노력은 시인의 가장 좋은 덕목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이 시들은 커다란 단점을 갖고 있다. 너무 설명투로 흐르고 어수선하다. 따라서 생각을 더 단단하게 벼리든가 상상의 층을 변화시키든가 해야 할 상황에 와있다. 어떻게 하면 한 번 더 생각과 상상력이 굴절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 일이다. 한자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4337. 8. 26.]  
89    시집 1000권 읽기 79 댓글:  조회:2015  추천:0  2015-02-11
  781□아직도 낯선 길가에 서성이다□유진택, 문학과지성시인선 187, 문학과지성사, 1996   주변의 사소한 것을 버리지 않고 시로 건져 올리는 발상과 태도가 성실성을 증거한다. 그러나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그리고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결론에 이르는 주제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가 꼭 새로운 사실만을 결론으로 삼을 필요는 없지만, 그 무난함으로 인하여 시 전체가 무기력해 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인식도 상상력도 좀 더 치열해질 필요가 있다.★☆☆☆☆[4337. 8. 20.]   782□무덤을 맴도는 이유□조은, 문학과지성시인선 187, 문학과지성사, 1996   시에는 정신이 움직이는 방향이 있다. 그 방향에 따라서 이미지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해도 좋고, 사상이라고 해도 좋다. 이것이 불투명하면 좋은 표현과 적절한 구성을 가지고도 시는 불투명해진다. 시를 만들어가는 능력이나 이미지를 잡아내는 능력도 좋다. 하지만 바로 이런 불투명함을 한 꺼풀 걷어내야만 시가 힘차게 움직일 것이다. 이미지들이 선명한데도 시를 읽고 난 뒤 특별히 남는 것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런 불투명함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주제의식부터 정비할 필요가 있다. 한자를 없애는 것은 그보다 먼저 할 일이다.★★☆☆☆[4337. 8. 20.]   783□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이원, 문학과지성 시인선 180, 문학과지성사, 1996   시가 대중문화의 발빠른 움직임을 뒤따라갈 때가 있다. 서태지의 노래에서 제목을 딴 이 시집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문명에는 속도가 있고, 그 속도는 그 속도 위에서 태어나지 많은 사람에게는 멀미를 일으킨다. 그 속도의 여러 양상이 아주 잘 잡힌 시집이다. 하지만 아직 대중문화의 발빠른 움직임을 따라잡을 만한 율동은 아니다. 그리고 성급한 마음이 시의 앞쪽으로 이따금 불거져 나온다. 성급하거나 미숙하다는 증거이다. 이 점만 해소한다면 대단한 시인이 될 것이다. 한자는 속도의 걸림돌이다.★★☆☆☆[4337. 8. 20.]   784□바닷가의 장례□김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194, 문학과지성사, 1997   세월 탓인가 치열함이 많이 줄었다. 시간에 대한 인식과 세월의 뒤편을 돌아보는 회고조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김명인의 시는 그 탄탄한 구조가 늘 좋았다. 이 시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풍경 묘사를 하는 듯하면서도 내면풍경을 교묘하게 겹쳐놓아서 대부분의 이미지들이 상징으로 승화돼버리는 묘한 착상이 많았다. 이 시집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주제가 좀 약해진 것이 상징으로 건너가는 힘을 약화시킨 것 같다. 뒤쪽의 러시아 관련 시는 일정이 분명치 않고 내면 풍경이 많이 드러나서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4337. 8. 23.]   785□극에 달하다□김소연, 문학과지성 시인선 192, 문학과지성사, 1996   방향은 잘 잡았는데, 그 방향에 대한 상상력은 아직 그 방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거의 설명투다. 실험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좋지만, 내용은 거의 서정시이며, 그것은 정신의 실험이 끝나지 않은 상태임을 뜻한다. 실험은 정신이 밀고 가야하고, 정신의 번득임이 새로운 형식을 찾는 것이 실험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시집의 정신은 너무 밋밋하다. 전제된 결론을 위해서 증거 찾기에 바쁘다. 그 결론도 이미 시의 독자들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가 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시집이다.★☆☆☆☆[4337. 8. 24.]   786□이슬의 눈□마종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193, 문학과지성사, 1997   시 전편에 외로움이 절절이 배어있다. 어떤 것이든 분명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른 그 어떤 재주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그 외로움이 말을 많이 하게 하고, 급기야 일기체나 수필체로 접근하게 하지만,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외로움이 처음부터 요구한 운명이기 때문이다.★★☆☆☆[4337. 8. 24.]   787□이생이 담 안을 엿보다□이창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198, 문학과지성사, 1997   사물을 보는 시각도 독특하고 상상력도 유연하다. 시에서 자기만의 빛깔을 갖는다는 것은 생명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일인데, 그런 중요한 단계를 이미 지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세상에 대한 흔한 결론에 뒤를 대고 있어서 애써 이룬 시의 경지를 탈색시키고 있다. 게다가 장난끼가 다분해서 더욱 문제다. 장난끼가 풍자로 넘어가지 않으면 다소 경박스러워 보인다. 내 장난끼가 시에서 독자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가를 잠시 생각해볼 일이다. 장난끼가 시에서 도움이 될 때는 상상력의 걸음을 가볍게 해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 배경을 더욱 확충시켜줄 때이다. 그렇지 않고 그런 장난이 주제 전체를 가볍게 만드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한자는 불필요한 장난이다.★★☆☆☆[4337. 8. 24.]   788□불쌍한 사랑 기계□김혜순, 문학과지성 시인선 199, 문학과지성사, 1997   언어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도록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리고자 대상이 분명할수록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것은 이미지를 대신하는 시의 언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시의 이미지는 흐리멍덩해진다. 그 흐리멍덩함은 주제가 분명치 않거나,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 주제에 딱 알맞은 표현력을 얻지 못한 탓이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말하는 이의 재주이고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시집은 아직 흐리멍덩하다. 표현력의 문제이기보다는 주제의 빈약쪽이 더 가까울 것이다. 주제가 미약한 상태에서 처음 잡힌 이미지만으로 살림을 꾸려가다 보니 외화내빈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표현력의 문제까지 번져간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할 말이 분명하다는 것과 거기에 걸맞은 표현을 찾는다는 것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거의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피해야 할 도구이다.★★☆☆☆[4337. 8. 24.]   789□새벽달처럼□김형영, 문학과지성 시인선 197, 문학과지성사, 1997   특별히 재주를 부리려 하지 않고 생각을 잘 요약한 것이 장점이지만, 생각을 드러내는 시들일수록 그 생각의 가치가 돋보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치명상을 갖고 있다. 생각이 자기 한계를 드러내면 마치 풍선과 같아서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밀려나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에 관한 시는 우습기까지 하다. 한자도 우습다.★☆☆☆☆[4337. 8. 24.]   790□빠지지 않는 반지□김길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203, 문학과지성사, 1997   시에서는 관념이든 이미지든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길어진다. 그리고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꾸 반복되고 상황만 길어진다. 이것은 생각과 언어 사이의 관계 때문이다.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거기에 꼭 필요한 말들만 취하면 이미지는 선명하게 정리되면서 메시지와 언어는 아주 가깝게 밀착된다. 그렇지 못하고 생각이 덜 정리된 채 쏟아져 나온 이미지에 취하면 정작 할 이야기를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언어와 생각 사이에 묘한 틈이 생기고 그것을 메우려고 자꾸 설명하려 든다. 이 시집에 불필요하게 긴 시들이 많은 것은 그런 까닭이다. 따라서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고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다시 한 번 선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시는 자꾸만 길어질 것이고, 산만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자는 더욱 산만한 장치이다.★☆☆☆☆[4337. 8. 25.]  
88    시집 1000권 읽기 78 댓글:  조회:1958  추천:0  2015-02-11
  771□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60, 문학과지성사, 1995   역시 대작은 큰 안목과 구성력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시집이다. 생각의 규모나 발상의 크기가, 작은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이야기하는 데 익숙한 일반 시인들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아마도 소설의 구성력이 작용한 탓이리라. 라는 부제가 붙은 제1부는 53까지 나갔고, 이라는 부제가 붙은 제2부는 29까지 나갔다. 단순히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발상과 전체를 엮는 능력이 큰 안목을 깔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큰 느낌을 준다. 시집 전체의 주제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인데, 그것이 불교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치열한 정신이 시의 중심이 놓여있어서 매우 높은 경지까지 다가갔다. 촛불에 관한 연작은 시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만큼 대단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다만 시집의 뒤로 가면서 시가 수필처럼 변하고 문장 곳곳에서 산문 투의 어조가 남아서 아쉬운 경우가 되었다. 한자 역시 과제로 남아있다.★★★☆☆[4337. 8. 17.]   772□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이윤학, 문학과지성시인선 159, 문학과지성사, 1995   생각의 병을 앓는 사람의 시집이다. 생각의 병은 문명병이다. 생각에 치여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중환을 누구나 다 앓는다.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는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 못처럼 박혀있는 그 병을 정직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런 용기를 낸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는 보는 즐거움이 있다. 생각의 병을 앓는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을 설명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대로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방향이 시의 가장 중요한 특색이 되었다.   보여주기에서는 자신의 말이 시각 뒤로 숨기 때문에 때로 갑갑해서 직접 발설하고픈 충동을 느끼는 법인데, 이 시인은 그런 점에서는 끈기가 있다. 칭찬 받을 일이다. 다만 이미 결정된 세계 속에 자신을 집어넣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엄살이나 투정으로 비칠 때가 많고, 종말론 신도와도 같아서 결국 판박이 시를 양산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늙은이들이 하는 짓이다. 세계는 이미 늙을 대로 늙었다. 한자는 늙은이들이 즐겨 부리는 고집이다.★★★☆☆[4337. 8. 18.]   773□소읍에 대한 보고□엄원태, 문학과지성시인선 158, 문학과지성사, 1995   이 시집에서 볼 만한 것은 제1부에 묶인 소읍에 관한 시들이다. 대도시의 주변에 위치한 작은 읍의 내부 실정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주변부의 삶과 현실이 아주 잘 나타났다. 그리고 이 부분을 더 깊이 파고들었어야 했다. 한 권 정도로 불리고 깊어져야만 정말 좋은 시가 나올 법했는데, 중간에 그치고 말았다. 1부의 시 속에서도 방법상이 혼돈이 엿보이다. 주로 이미지 제시를 통해서 보여주기 수법을 취하고 있는데, 나중에는 직접 말을 하면서 나서는 장면이 적잖이 드러났다. 1부 이외의 시들은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하면 포즈가 좀 수다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가 선명하게 강조되는 시에서는 차분함이 감동으로 안내하는 문이다. 틈틈이 낀 한자는 감동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4337. 8. 18.]   774□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이정록, 문학과지성시인선 221, 문학과지성사, 1999   일상의 자잘한 사물과 사건에 관심을 주고 그것에서 삶의 깊은 암시를 읽으려는 태도가 돋보인다. 그리고 될수록 시를 재미있고 아름답게 만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런 노력이 시 속에 이야기를 끌어들이곤 하는데, 그 이야기들이 줄거리로만 남지 않고 시에 긴장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특이하다. 이것은 단순히 하고자 하는 말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읽도록 하려는 노력 때문이다. 다만 너무 그런 재미에 집착을 하다보면 장난끼나 말장난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시에 깊이를 더하는 것이다. 한자 역시 도움이 되질 않는 물건이다.★★★☆☆[4337. 8. 18.]   775□생명에서 물건으로□이승하, 문학과지성시인선 163, 문학과지성사, 1995   죽음에 대한 관념은 가설일 뿐이다. 그것을 설명하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그렇다. 특이하게도 죽음에 관한 소재로 시집 한 권을 꾸몄는데, 그것이 관념성이 강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죽음을 있다. 죽음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소재로 택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길이고 함정이다. 그 함정 때문에 시가 건조해졌다. 죽음을 설명한다고 해서 생명의 비밀이 저절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죽음이 관념이기 때문이다. 한자 역시 지독한 관념이다.★☆☆☆☆[4337. 8. 18.]   776□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박용하, 문학과지성시인선 164, 문학과지성사, 1995   겉모습은 서울 생활이 주는 문명비판을 지향하고 있는데, 속에 흐르는 정서는 전통 서정시의 그것이다. 결국 시인은 자신도 모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얘기다. 따라서 장황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이나 시를 불필요하게 길게 늘어뜨리는 수법은 문명비판의 시인으로 분류되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농촌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흙내 나는 감수성이 담겨있다. 서정성은 내면을 지향하는 반면, 문명비판은 외부를 향한다. 이 화합할 수 없는 모순이 시의 흐름을 종잡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에 좀 더 정직하게 귀기울이는 것이 해법이다.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농사꾼이 회사원이 되지는 않는다. 한자는 서정성을 갉아먹는다.★☆☆☆☆[4337. 8. 18.]   777□누군가 그의 잠을 빌려□심재상, 문학과지성시인선 166, 문학과지성사, 1995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이것과 저것 사이 또한 아니라는 식이다. 진리를 찾다 보면 어떤 것이 진리인지는 알 수 없어도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가 하는 것은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답으로 삼는 것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 순간 그것이 진리로 착각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영역은 예술보다는 철학쪽에 더 가까운 고민들이다. 그 고민이 그대로 예술이 된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그렇지 않으면 착각이다. 그러니까 남의 문지방을 넘어들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벗어버려야 할 신발이다.★★☆☆☆[4337. 8. 19.]   778□극장이 너무 많은 동네□성윤석, 문학과지성시인선 174, 문학과지성사, 1996   도시 문명을 노래하는 시들을 보면 한결같이 어렵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소화해내지 못한 정신의 한계가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그냥 배설해버리는 까닭이다. 이 시집에는 기존의 형식과 새로 발견한 형식이 뒤죽박죽 섞여있다. 그리고 새로운 형식은 나타나는 순간 낡은 형식이 된다. 핸드폰의 신형 발생 주기가 3개월인 것과 같다. 그러니 몇 년에 한 번 내는 시집에서, 혹은 월간이나 계간에서 보이는 시들은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것이다. 주제를 과감하게 드러내야 할 곳과 감추어야 할 곳, 그리고 그 이유가 석연치 못한 구석이 곳곳에 널려있다. 한자 역시 석연치 못한 장치이다.★★☆☆☆[4337. 8. 19.]   779□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이선영, 문학과지성시인선 173, 문학과지성사, 1996   무엇보다도 야망과 패기가 느껴지는 시집이다. 글자라는 도구에 삶의 의미를 집어넣어 새로운 발상을 전개한 수법도 새롭다. 그런데 시를 써나간 발상과 수법이 너무 구태의연하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과 글자의 행위가 갖는 상관관계를 파고들다 보면 생각은 철학의 범주로 넘어가기 쉽고, 그것은 시에서 흔히 보는 서정성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세계이다. 그런데 생각은 끊임없이 인식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데 시에서 전하고자 하는, 혹은 그리고자 하는 내용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고 겪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상과 시의 정서가 끝내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 인식과 사고는 새로운 단계를 뚫고자 하는데, 시의 형식에 너무 안주해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결국 감정보다는 인식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시를 썼어야 한다는 뜻이다.★☆☆☆☆[4337. 8. 20.]   780□남몰래 흐르는 눈물□김영태, 문학과지성시인선 167, 문학과지성사, 1995   시는 짧은 형식에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속성 때문에 낱말 하나도 중요하다. 그래서 잘 해득되지 않는 낱말 하나 때문에 시 전체가 막히는 수가 많다. 하물며 수많은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명이 등장하는 시집이야 말해 무엇하리! 미술작품을 등장시킨 시에서는 그 작품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제대로 시의 감정이 파악된다. 따라서 이런 시집의 경우, 처음부터 독자의 접근에 큰 문제가 있는 시집이다. 그러다 보니, 그림이나 예술가의 이름이 주는 울림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문장이 끌고 가는 바깥 모양의 질서에만 의지할 수 없다. 감상이 반쪽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독자의 문제인지 시인의 문제인지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눈에 띄는 것은 예술가의 이름과 작품 이름이 요구하는 체험의 사건성 때문에 시가 수필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는 잘못 편집된 화면 같다.★★☆☆☆[4337. 8. 20.]    
87    시집 1000권 읽기 77 댓글:  조회:2030  추천:0  2015-02-11
761□조국의 별□고은, 창비시선 41, 창작과비평사, 1984   시는 말로 하는 노래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시집이다. 격정의 끝에서 나오는 말은 모든 것이 노래가 된다.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격한 감정으로 내뱉는 말은 노래가 된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그 목표를 방해하는 모든 조건들에 부딪히면서 느끼는 뜨거운 분노를 노래하는 데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생각나는 대로 토하고 소리지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 격정의 순간 속에 자신을 올려놓고 거기서 소리를 질러대는데 시가 나오지 않을 턱이 없다. 감정의 절정에서 조금만 비켜서면 그대로 죽음이 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몇 권 읽은 고은의 시 중에서 이런 방법론이 가장 잘 살아있는 시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절정의 정상에서 단 한 발짝도 비켜서지 않고 신들린 무당처럼 작두를 타고 있다. 이 시집을 보면 같은 운동권 시를 쓰면서도 어째서 다른 시인들이 대부분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정에서 한 발 비켜선 까닭이다. 그것은 시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시의 문법을 지켜서 감동을 전달하겠다는 선의의 이 시인들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쓰면서 표현을 살피고 감정의 흐름을 계산하고 기승전결의 구도를 따라가려 애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구조에 어쩐지 어긋나는 감정들은 시의 밖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걸러진 익숙한 감정들만이 시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러니 걸러진 감정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고은의 이 시집에서는 그러한 방법론을 몽땅 버렸다. 오로지 절정에 올라있는 뜨거운 감정만을 가지고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입에서 터져 나오는 대로 소리 지르고, 닥치는 대로 받아쓴 것이다. 이런 시인들은 즉흥시를 쓰나 시간을 갖고 꼼꼼하게 쓰나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한 순간에 휘갈겨놓은 즉흥시라고 봐야 한다. 전근대의 언어, 자본의 언어인 한자를 버리지 못한 것은 무슨 뜻인가?★★★☆☆[4337. 8. 11.]   762□고두미 마을에서□도종환, 창비시선 48, 창작과비평사, 1985   흥분하지 않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재주이고, 그 재주는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재주라기보다는 자세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흥분할 곳에서 흥분하지 않는 것은 단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단련이 곳곳에서 시를 냉정하고 침착하게 만든다. 다만 할 말의 무게 때문에 시들이 단순해진 것이 문제인데, 표제작인 처럼 역동성이 넘치는 작품을 쓰는 것이 동일한 세계를 반복할 때 오는 지루함을 극복하는 길이다. 할 말의 방향과 그 할 말을 할 말처럼 들리게 하기 위하여 어떤 자리에서 말을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시집이다. 한자는 지울 수 없는 잡티다.★★★☆☆[4337. 8. 11.]   763□벽을 문으로□임동확, 문학과지성시인선 149, 문학과지성사, 1994   내면의 성찰이 아주 돋보이는 시집이다. 시각을 자신의 내부로 돌렸을 때 나타나는 심리와 삶의 깨달음을 서술한 시집이다. 심경(心經)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은 이런 의도를 스스로 나타낸 것이리라. 표현 여부를 떠나서 마음의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간 역량이 놀랍다. 대부분 현실을 다루던 시인들이 마음속으로 물러나면 과거에 대한 추억이나 신세타령으로 똥칠을 하기 쉬운데, 이 시인은 과거를 다루면서도 그 상처와 상처를 낸 현실에 대한 자기각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기실은 현실 문제의 연장이다.   시집에서 굵직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이미지가 물이다. 시인 자신이 의식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바다, 강, 냇물, 습기 같은 이미지들이 시집 전체의 사상을 떠받치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은 생명의 상징이니, 과거를 반추하고 현실을 돌아보는 소재와 딱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런데 시의 정서가 격렬한데, 그래서 그런가 아직 거칠다는 느낌이 든다. 한자가 너무 많고 잘못 쓴 낱말도 있다. 그리고 선이나 불이니 하는 불교쪽의 이미지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설령 꼭 필요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도피의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4337. 8. 12.]   764□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147, 문학과지성사, 1994   시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 늙은 시인의 사고와 감수성을 10대의 사춘기에 잡아두고 있다. 사춘기는 인생의 봄이고, 봄은 싹이 나오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싹이 어떤 모양으로 자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야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사춘기의 감정이 들쭉날쭉에 오리무중인 것은 아직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혼돈이고 그 혼돈은 그 이전의 사람들이 겪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창조성이 깃든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거기 머물러서 그때 느끼는 그 혼돈과 어지러운 감성이 세계의 전부이며, 그 전부를 보는 눈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망발이다. 그것이 성숙해가는 인간성의 한 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거기에 안착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창구 노릇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사춘기를 지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바다.   인생에 원래 들어있는 절망이라든가 외로움 같은 것이 강고하고 견디기 힘들다고 해서 스스로 자라기를 두려워하거나 뻔히 보이는 그곳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치기 어린 투정이고, 투정은 10대에나 하는 짓이다. 투정은 처음엔 들어줄 만하지만, 자꾸 들으면 짜증난다. 투정은 끝내 제 욕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정 중에 가장 쓸 만한 것이 자살이다. 그것은 그의 삶을 숭고하게라도 해주기 때문이다.★☆☆☆☆[4337. 8. 12.]   765□강 깊은 당신 편지□김윤배, 문학과지성시인선 109, 문학과지성사, 1991 766□굴욕은 아름답다□김윤배, 문학과지성시인선 141, 문학과지성사, 1994 767□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있다□김윤배, 문학과지성시인선 195, 문학과지성사, 1997   뱃대를 꽉 조이지 않은 황소처럼 말들이 헐거운 채로 수레를 끌고 있다. 한 꺼풀을 벗지 못해서 그저 묘사로 머물고 마는 시가 태반이다. 앞에서 제시된 상황을 그냥 좀 더 보태고 부풀려주는 정도로 이미지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앞서 제시된 상황을 한 치 오차 없이 다음 장면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결구력(結構力)과 복선을 집어넣어서 다음 이미지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짧은 양식으로 주제를 전해야 하는 시의 특성상 장황해진다. 정곡을 찌르지 못하기 때문에 주제를 좀 더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비슷한 이미지를 다시 반복하여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시가 길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더 긴 시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각 시에서 주제를 분명히 정하지 못하고 막연히 이미지만 설정한 상태에서 시를 쓰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미지가 잡혔더라도 주제를 한 번 더 확인해야 하고, 그 주제에 맞는 이미지가 아닌 경우에는 단호하게 잘라서 시 한 편의 이미지 흐름을 필연성으로만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도 성공할까 말까 한 것이 시이다. 시를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시의 방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필요한 상황이다. 한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4337. 8. 12.]   768□약쑥 개쑥□박태일, 문학과지성시인선 155, 문학과지성사, 1995   시는 언어에 개의치 않는다.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야 하는 갈래이기 때문이다. 언어로 자신의 뜻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그 틀의 아귀를 어긋나게 하여 의미가 아닌 정서를 전달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소설을 쓴다면 크게 빛을 볼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시에서도 언어가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미지의 흐름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언어들은 죽은 언어이다. 때로 이미 지난 시절의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말들이 제대로 쓰이는 데도 시에서 악재로 작용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물론 그 반대로 옛말이 쓰여서 오히려 빛을 내는 시들도 있다. 그것은 방법상의 문제겠지만, 시 안에서 언어의 낯선 환경 때문에 의미가 혼돈을 일으키고, 그 언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희미해져서 줄거리만이 남는다면, 애써 시도하는 아름다운 말 지키기 역시 수단을 위해 목적을 버린 경우에 해당한다.★★☆☆☆[4337. 8. 13.]   769□슬픈 게이□채호기, 문학과지성시인선 150, 문학과지성사, 1994   모색의 시랄까? 정신은 치열한데, 그 정신의 방향이 아직 분명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여러 방향으로 모색을 시도하는 중이다. 그래서 언어 역시 분명한 방향을 지닌 것보다는 상상의 내면에 집착하여 상상의 빛깔을 보여주는 단계에 머물러있다. 실은 모색의 시대에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성취를 보이는 시집이다. 그 머무름 때문에 시가 정체된 듯한 느낌을 받고, 이미지들 역시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고요하다. 상상력에도 방향이 있다. 그 방향을 설정해주지 않으면 이런 정체감은 벗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문제겠지만, 그런 방향이 잡히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갈 이미지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 속도감이 실려야 제대로 된 시가 나올 것이다. 한자는 정체의 한 부분이다.★★☆☆☆[4337. 8. 14.]   770□네 속의 나 같은 칼날□강유정, 문학과지성시인선 154, 문학과지성사, 1995   시는 될수록 숨겨서 수수께끼 풀 듯이 해야 한다는 이상한 고정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색깔 감각이나 대상 인식의 흔적에서 미술 전공자의 냄새가 물씬 난다. 그런데 짧은 시들에서 볼 수 있는 제시의 방법은 그런 제시의 투가 어떤 세계관을 전제로 할 때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예컨대 당시의 간략한 풍경묘사법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묘사 속에서 다시 더 한 번 감추는 기법을 택하는 것은 어려 모로 위험한 일이고,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것은 의식이 시의 실험에 가 닿아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제를 말하는 대신 색깔로 나타내는 미술의 특성이 시에서 실험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간다.   라는 15편짜리 연작시 역시 아주 특이한 시집이다.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기법을 토대로 쓰여진 시 같다. 주제는 관음증의 사회학과 인간학에 관한 영역일 듯한데, 그것을 그림 여러 장을 겹쳐놓은 듯한 몽환 기법으로 풀어간 것은 신선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시에서 주제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면 그것 역시 위험한 실험이고, 실험은 실험이 갖는 사회사의 맥락이 중요한 까닭에 언급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시를 수수께끼처럼 제시해야 한다고 하는 믿음은 시의 본래 성질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이다.★☆☆☆☆[4337. 8. 15.]    
86    시집 1000권 읽기 76 댓글:  조회:2023  추천:0  2015-02-11
  751□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장경린, 문학과지성시인선 135, 문학과지성사, 1993   할말을 숨기고 냉정하게 현상을 포착하여 제시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같은 시를 보면 상상력의 순도 또한 높고 화려하다. 그런데 이자가 문제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이자로 대체했는데, 그것이 한 언어로 교체됨으로써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오는 상상력을 많이 삭감시킨 경우이다. 어떤 일관된 원리를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을 것 같은데, 그것을 특정한 말로 대체한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 말이 시 안에서 풀리는 수가 있고 풀리지 않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잘 풀리면 좋지만, 제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억지 같은 인상을 주거나 상상력을 차단하는 역효과를 낸다. 차라리 숫자로 대체한 것이 더 좋았다.   그리고 전골과 찌개 연작은 역작이기는 하지만 애써 냉정하게 유지했던 것을 함부로 드러낸 꼴이 되었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여서 그랬을 것 같은데, 어쩐지 그런 식으로 뒤섞어놓는 것은 통쾌할지는 몰라도 깊이 파고드는 효과는 적다. 한번 냉정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은 세계를 가꿀 수 있는 능력이자 비결이다.★★☆☆☆[4337. 8. 8.]   752□신성한 숲□조정권, 문학과지성시인선 145, 문학과지성사, 1994   말로 전하기 어려운 커다란 주제에 오래 집착을 하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말하는 방법을 잃어버린다. 그럴 때는 이렇게 떠들어도 마뜩찮고, 저렇게 지껄여도 못마땅하다. 정확하지 않아도 말은 나와서 표현은 그럴 듯한데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빠져있다. 그리고 그것이 시의 형식을 빌면 틀림없이 상상의 단계를 한두 차례 뛰어넘어서 상징 비슷한 분위기를 내면서 의미가 뒤엉킨다. 당연히 시가 어려워진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발상은 규모가 큰데, 정작 본질을 찌르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이미지들이 자꾸 떠돈다. 특히나 독일 시편들은 출발할 때부터 너무 큰 부담을 갖고 쓴 시들이다. 그래서 알고 있는 지식을 소화하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도 잘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뾰족한 상징의 수법을 명징하게 보여준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럴 때는 억지로 말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말이 저절로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자는 어쨌거나 불필요한 것이다.★★☆☆☆[4337. 8. 8.]   753□개밥풀□이동순, 창비시선 24, 창작과비평사, 1980   은 다시 보아도 걸작이다.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는 높이 나는 갈매기가 멀리 본다는 것인데, 너무 낮게 날아서 자세히 봤지만 멀리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미지에 대한 묘사력이 아주 뛰어난데도 세세한 부분에 너무 집착해서 보여줌으로써 전체의 주제를 전하는 데 상당한 장애를 받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이런 태도가 사물에 대한 해석을 무리한 단계까지 끌고 나가게 한다는 점이다. 사물과 사건에는 그것이 갖는 고유한 이미지와 메시지의 영역이 있다. 그 영역 바깥까지 벗어나면 그럴 듯할지는 몰라도, 읽는 사람은 거의 본능에 가깝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고개가 외로 틀어지는 순간 감동은 사라진다. 이런 것은 대상에 대해 너무 무리한 해석을 가해서 생기는 일이다. 좀 더 멀찌감치 멀어져서 멀리서 볼 필요가 있다. 한자는 불필요한 도구이다.★★☆☆☆[4337. 8. 9.]   754□봄의 소리□김창범, 창비시선 31, 창작과비평사, 1981   남들과는 다른 묘한 기품이 시에 흐른다. 쉽게 말하려 하지 않고 아껴서 세세하게 말하려고 하는 태도도 돋보인다. 그런데 주제가 뚜렷한 시들은 너무 조급하고, 주제가 흐릿한 시들은 너무 물렁하다. 대체로 두 계열로 나뉘는데, 시대의 탓인지 너무 에둘러 말한 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주제가 분명한데도 답답한 맛이 남아있다. 직접 뼈를 드러내야 할 것들도 살로 덮어버린 까닭이다. 한자는 한계이다.★★☆☆☆[4337. 8. 10.]   755□이 가슴 북이 되어□이운룡, 창비시선 35, 창작과비평사, 1982   사상성이 시를 밀고 가는 형국이다. 세계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관점이 좋다. 확고히 선 사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시의 형식을 희생시키는 면이 아주 많다. 우선 불필요한 반복이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시가 너무 길어졌다. 중언부언 말을 하면 독자는 중간에서 읽기를 마친다. 더 읽어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복들이 시의 형식을 이완시킨다. 특히 앞부분의 시들이 그렇다. 좋은 사상이라고 해서 함부로 드러내 가지고는 시가 되지 않는다. 한자는 이래저래 장애물이다.★☆☆☆☆[4337. 8. 10.]   756□아도□송수권, 창비시선 52, 창작과비평사, 1985   남도의 정서가 잘 살아있는 시집이다. 무엇보다도 할 말이 뚜렷하게 들어있는 것이 이 시집의 장점이다. 많은 시집들이 할 말은 뚜렷한데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답답한 경우가 많은데 이 시집은 할 말도 뚜렷하고 그것이 시에 잘 실렸다. 그것은 시인이 말을 해야 할 곳에서 할 말을 과감하게 할 줄 하는 방법을 안다는 뜻이다. 다만 할 말이 너무 강하다 보니 자꾸 사건이 등장하고 시가 길어진다. 말을 자꾸 만들자니 그렇게 된 것이다. 호남의 가락도 잘 살아있지만, 그 위로 툭 불거진 말들이 시를 거칠게 한다. 한자도 거친 부분의 하나이다.★★☆☆☆[4337. 8. 10.]   757□끝끝내 너는□나종영, 창비시선 53, 창작과비평사, 1985   바둑에 우주류가 있고, 거문고에 신쾌동류가 있듯이, 시에도 민중류라는 것이 있어 100권을 읽어도 같은 어조, 같은 세계, 같은 구조, 같은 상상을 보여주는 시들이 있다. 말하자면 그 민중류의 전형인 시집이다. 민중류에서는 개인이 소멸한다.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이고, 정신대로 끌려간 여자는 내 이모이고 공장에 다니는 여자는 내 누이다. 화자가 시공을 초월하여 내 안에 있는 것인데, 그런 발상은 근대시 이전의 민요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현대판 민요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인식이 독창성을 보이기는 거의 힘들다. 같은 말에 분노를 실으면 그것으로 박수를 받는다. 개인이 공공의 목적 뒤로 숨어버린 시이다. 하지만 그 시를 읽는 자는 늘 개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실이 시 전체를 관념 덩어리로 만든다. 그곳에 머물러 있는 한, 어쩔 수 없는 단점이다. 그러나 한자는 어쩔 수 있는 대상이다.★☆☆☆☆[4337. 8. 11.]   758□겨울의 꿈□조재훈, 창비시선 42, 창작과비평사, 1984   시에 아주 독특한 맛이 있다. 우선 허영끼가 거의 없다. 그리고 사물을 보는 눈과 그것을 노래하는 어조가 아주 차분하면서도 과장되지 않아서 여리디 여린 감성까지도 자라 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 한 편 한 편에 공을 들이는 태도가 시 전편에 살아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시집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시에서 추구하는 주제가 아직 뚜렷이 이것이다 라는 정도까지 나아가지를 못해서 특별한 하자가 없는데도 시들이 좀 흐리멍덩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시집 후반부의 부여 관련 시들은 일관된 흐름과 어조를 담고 있어서 한 방향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과 주제의 확보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그것이 확보되지 않으면 애써 이룬 시에 화룡점정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 사상의 몫이어서 쉽게 해결될 것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4337. 8. 11.]   759□가거도□조태일, 창비시선 37, 창작과비평사, 1983   험한 시대에는 늘 필화라는 것이 있어서 글쓰는 사람들 자신이 그것을 피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시에서는 돌려말하기를 택하는데, 이 시집 속의 시들도 그런 시대 상황 때문일까? 본질을 찌르지 못하고 가장자리로만 돌고 있다. 그리고 끝내 에도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모색에서 그쳤다. 같은 작품에서는 그 방법의 일단이 엿보이기도 하는데, 다른 작품에서는 너무 돌고 있어서 방법상의 자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뒤쪽의, 신문에 실린 시들이 굵은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라고 봐야 할 것 같다.★★☆☆☆[4337. 8. 11.]   760□하급반 교과서□김명수, 창비시선 39, 창작과비평사, 1983   방법론은 확실한데, 너무 원칙 지키기에 급급하여 좀 답답해 보이는 시집이다. 사물에서 어떤 조짐을 읽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노래하는 것은 서정시의 오랜 전통이다. 그리고 그런 발상의 계기가 되는 것이 없으면 노래하기 힘든 것이 서정시이기도 하다. 그런 원칙에 입각하여 마주치는 사물의 성격을 크게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적당히 잘 집어넣고 있다. 바로 그 성실한 친절 때문에 시가 길어지고, 이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의 격렬한 감정이 시의 장치에 붙잡혀서 화끈하게 분출하지 못하고 있다. 추구하는 세계가 변혁을 노래하는 것이면 시에는 격정이 들끓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시의 상상력으로 걸러내기 위해 어떤 장치를 스스로 마련하는 것은 좋지만, 그 장치가 너무 전통에 기대어 있어 새로운 그 격정을 담아내기 어려운 것이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것을 그대로 지킬 경우 성실해 보일지언정 새로운 세계를 담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청산하지 못한 한자 역시 그렇다.★★☆☆☆[4337. 8. 11.]  
85    시집 1000권 읽기 75 댓글:  조회:2161  추천:0  2015-02-11
    741□속이 보이는 심연으로□최하림, 문학과지성시인선 107, 문학과지성사, 1991   시에 불필요한 이미지가 거의 없고 군더더기 역시 거의 없어서 시를 쓰는 역량이 대단한 시인임을 알 수 있는 시집이다. 적당히 부푼 몸집과 주제를 뼈로 제시하지 않고 살에 담아서 제시하는 풍만함도 갖추었다. 다만 제1부에서 보이는 상실감과 고독에 반하는 정서들이 그 뒷부분에 드문드문 나타나 애써 이룬 균형감을 깨는 것이 흠이다. 이것은 다양한 삶의 정서 가운데 일부러 어느 하나를 고집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 방법상의 선택과 선별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만 온전한 시집이 될 것이다. 게다가 개인의 내력을 다룬 뒷부분의 시들은 아주 잘 쓴 시들이지만, 체험에 매몰되어 객관성을 잃은 부분도 적지 않다. 전체의 주제에 매달려 표현이 좀 밋밋해진 것이, 단점은 아니지만, 좋은 시를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한자는 버려야 할 것이다.★★☆☆☆[4337. 8. 5.]   742□서울 세노야□곽재구, 문학과지성시인선 95, 문학과지성사, 1990   1980년대의 시가 어떤 것이며, 그것이 10년밖에 안 된 지금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졌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다. 광주를 원죄로 한 지식인의 시 쓰기와 그러한 행위의 절정과 몰락의 기미를 몽땅 보여주는 1980년대 시의 한 전범이다. 요컨대 삶이 없다. 이 시집 안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1980년대라는 정치이념으로 재구성한 허구이다. 허구가 실제로 느껴지던 때가 1980년대이다.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환상의 시대가 1980년대였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나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던 시대의 시를 이보다 더 잘 대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독자로부터 왕따 당하는 시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까지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관념은 유행 같은 것이어서 그 유행에 빠져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 늘 최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철만 지나면 우스워지는 것이 유행이다. 그 유행의 절정에서 한 시대를 울린 이념의 맹랑함과 시인의 진정한 리얼리티를 잃어버린 시의 운명을 본다. 시에서 개인의 삶이 빠지면 그것은 만담이거나 연설문일 뿐이다.★★☆☆☆[4337. 8. 6.]   743□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문학과지성시인선 118, 문학과지성사, 1992   시간에 대한 과격한 판단과 무모한 반발이 시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시집이다. 그래서 시에는 늙음, 울음, 병, 상처 같은 것으로 가득 차게 된다. 과격하다는 건 자신의 좌절을 중심으로 시간을 재구성했다는 뜻이고, 무모한 반발이라는 건 모순을 용납할 만한 곳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형식을 제대로 갖추는 것조차 귀찮아하게 된 것이다. 송곳처럼 예민해진 자신의 감성과 판단으로 세계를 읽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예리함만 살아있다면 다른 어설픈 수사보다 훨씬 더 좋은 효과를 낸다. 그렇기 때문에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라는 시집을 낸 시인에게서 이런 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둘 중의 하나는 가짜일 텐데, 그럴 만큼 처세에 능란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 세월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이웃에 눈을 돌렸다고 보아야 할까? 이제는 떠나도 되는 세계일까? 그렇기 때문에 그 과격한 판단조차도 믿음이 가질 않는다. 언제든지 버리고 돌아설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논조를 지닌 시인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반응은 자살이다. 절망도 한자로 한다는 것이 우습다.★★★☆☆[4337. 8. 6.]   744□두만강 여울 소리□연변교포시인 시선집, 문학과지성시인선 113, 문학과지성사, 1991   외국에서 언어의 정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뻔히 보이는 장애를 넘기 위해서 스스로 택하는 길이라면 그것은 시 이전에 정신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4337. 8. 6.]   745□서울 1992년 겨울□이세방, 문학과지성시인선 120, 문학과지성사, 1992   불필요한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마주치고 느끼는 것들을 세심하게 그려낸 것이 아주 돋보이는 시집이다. 외국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한국에서는 놓치기 쉬운 큰 문제, 예컨대 통일이라든지 민족이라든지 하는 것들까지 무리 없이 들어왔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설명 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에서는 설명이 들어가면 긴장이 떨어지고 함축성이 줄어든다. 수필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설명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판단을 잘 해야 한다. 마음이 급하면 설명하기 마련이다. 설명해도 안 될 것은 없지만, 설명을 하면 시는 길어진다. 길어지면 호흡이 흩어진다. 호흡이 흩어진 시는 긴장을 잃고, 긴장을 잃은 시는 늙은이의 주름살 같다.★☆☆☆☆[4337. 8. 6.]   746□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이준관, 문학과지성시인선 122, 문학과지성사, 1992   남들이 보지 못하는 아주 희귀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갖추었다. 보통 시인들한테서 보기 힘든 희귀한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시가 거칠다. 세세한 부분에서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 그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지 못하는 흠을 갖고 있다. 먼저 불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다. 생략해도 좋을 그런 부분들이 거의 없는 곳이 없다. 이것은 시인이 직관한 아름다움이 기존의 세계와 너무 달라서 시인 스스로 자신만의 독창성을 언어화시키는 데 필요한 화법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것을 시인만의 어눌함이라고 강변하려 하면 스스로 대화를 중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좋은 이미지를 감탄형으로 말해버림으로써 이미지와 주제의 불필요한 중복이 많이 빚어진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옛 풍경을 뜽금없이 등장시키는 경우가 잦다. 그런 세계 속에서 발견한 아름다움 때문이겠지만, 그런 풍경이 단순히 소재로 등장하는 것과, 그런 배경으로 작용하여 시 전체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시집 전체에서 시들을 좀 더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남은 숙제가 되겠다. 한자는 불필요한 숙제이다.★★★☆☆[4337. 8. 7.]   747□운주사 가는 길□임동확, 문학과지성시인선 123, 문학과지성사, 1992   정신의 순결주의라고나 할까? 지켜야 할 것과 지켜지지 않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러나 역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마음에 큰 짐이 되어 상상력이 짓눌린 경우에 해당한다. 너무나 큰 짐의 무게에 주제가 상상력을 딱딱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로부터 마음의 짐을 부려놓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지만, 그 짐에 짓눌려 할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것 역시 역사의 몫이라고 해도, 시인으로서는 큰 단점이다. 오히려 억눌린 상상력을 구원해서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역사의 그 아픔을 더욱 잘 드러내어 독자를 그리로 안내하는 것이 역사의 짐을 벗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아픔을 끌어안고 삭기를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때로 멀리 솟아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자는 빨리 벗어야 할 짐이다.★★☆☆☆[4337. 8. 7.]   748□내 무덤, 푸르고□최승자, 문학과지성시인선 133, 문학과지성사, 1993   세계를 정의한다는 것은 개념화하는 일이고, 개념은 사고의 추리과정이라는 점에서 시에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에서 꼭 필요한 것은 개념화 과정에서 덧들어나는 감정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를 개념화하고 그것을 공격하고자 할 때는 이런 감정들이 뒤쪽으로 물러서서 시가 자칫하면 공허해진다. 1980년대의 노동시가 범한 오류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대에 이른바 문명비판을 기치로 내건 시들 역시 이런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시집은 상상력의 울림이 없다. 주제가 겉으로 너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이미지들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복종하고 있다. 그래서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을 일이지만, 시를 삶의 거울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북살스럽고 어색하다. 한자 역시 어색하다.★★☆☆☆[4337. 8. 7.]   749□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박형준, 문학과지성시인선 144, 문학과지성사, 1994   이미지를 처리하는 능력도 좋고 시를 매끄럽게 다듬는 재주도 제법인데, 주제 빈약이다. 동원되는 이미지나 시어의 양에 견줄 때 주제가 너무 약하다. 주제 빈약은 어떤 능력으로도 대체 못할 결정타이다. 그리고 세부를 묘사하는 능력은 뛰어난데, 전체를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 경우라 하겠다. 따라서 동원된 이미지나 시어들이 시 안에서 크게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과감하게 잘라버려서 시가 가볍지 않게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게다가 시집 뒤쪽에는 습작기의 탈을 벗지 못한 시들이 꽤 실려있다. 한자는 습작기 때 버렸어야 할 물건이다.★☆☆☆☆[4337. 8. 7.]   750□무늬□이시영, 문학과지성시인선 137, 문학과지성사, 1994   시가 짧은 양식이고, 짧아도 큰 울림을 전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는 시집이다. 짧을 수 있는 것은 인식이 깊고 그 만큼 안으로 응축되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부분 삶의 이력에서 오는 것이어서 더욱 값지다. 젊은 시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깊은 맛이 시 곳곳에 들어있다. 다만 시의 절반 가량이 더 풀어냈으면 하는 아쉬운 수준에 머물렀다. 짧게만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요, 길게 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만, 짧은 호흡의 관성에 밀려 풀어야 할 곳을 덜 푼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구성력 여하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풀 곳에서는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시이다. 한자는 풀리지 않는 군더더기이다.★★☆☆☆[4337. 8. 7.]    
84    시집 1000권 읽기 74 댓글:  조회:1965  추천:0  2015-02-11
731□달넘세□신경림, 창비시선 51, 창작과비평사, 1985   관심이나 논조가 와 비슷한데, 는 냉정하게 보여주는 수법이 주를 이루었는데, 여기서는 말하는 이가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그 말하는 이의 자격과 관심이 남들로부터 무리한 발설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어떤 선이 시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는데, 격렬한 발언이 판을 치던 당시에는 차분했을 어조가 지금 보니 성급한 부분이 적지 않고 관념성에도 약간 경도된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런 논조에 일조하는 것이 민요의 가락 속으로 들어간 신념이다. 민요는 지루한 맛이 있고 그 노래의 당사자들이 보는 세계관을 싣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장을 새롭게 담기가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락이 주제를 밀어붙여서 몽롱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바로 이 단점이 주제의 불투명성을 초래하고 있다. 여러 모로 의 뒷심을 넘어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4337. 8. 3.]   732□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9, 문학과지성사, 1981   아마도 한국에서 이상의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시인일 것 같다. 이상이 타고난 바가 많다면 오규원은 일부러 택한 것이기가 쉽다. 사물과 세상의 한 측면만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그 시각의 확고함은 동일하다. 색은 공과 다르지만 색이 곧 공이기도 해서 그 중 어느 하나를 천착하면 나머지가 저절로 드러나는 이치를 둘 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움직임보다는 움직이는 것들을 못 움직이게 만드는 세계의 경직성과 거기에 매몰되어 가는 자아와 세계의 모습을 잘 포착해내는 것이다.   다만 그런 시각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만행이 시작된다는 점을 말한다면 그것은 시인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일까? 만행은 관념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없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만행 직전까지 가까스로 이른 공의 세계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세계는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깨달음을 구현하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의연히 있을 따름이다. 그것에서 허무와 죽음을 읽고 경직성을 읽는 것은 인간의 운명일 뿐이다. 이 시집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가? 그냥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뿐인가? 하지만 말하는 태도는 그것을, 그리고 인간을 경멸하는 색깔을 지니고 있다. 여러 가지 장치 뒤로 숨으려고 하고 있지만, 풍자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풍자는 날카롭기는 하지만 그 바탕이 무기력에 있다. 뛰어난 개인의 면벽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면벽 저 뒤쪽에서 꿈틀거리는 삶의 약동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서도 일부러 모른 체한다면 마주한 것은 그냥 벽일 뿐이다. 한자 역시 캄캄절벽이다.★★★★☆[4337. 8. 3.]   733□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동천사, 1987   바다에 관한 시로는 이만 한 작품을 쓰기가 쉽지 않겠다. 그 만큼 바다가 주는 풍경과 내면의 의식이 아주 잘 어울려서 한 세계를 이루었다. 바다에 대한 수사보다는 바다와 어울린 시인의 사고와 삶이 잘 드러났다. 그리고 성산포라는 한 지역에서 바다를 바라본 시각 또한 높이 살 만하다. 다만, 시의 주제가 개인의 내면으로 고정되면서, 성산포라는 지명이 갖는 신화의 세계라든가 환경, 나아가 그곳 사람들의 삶이 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쉽다. 그렇기는 해도 바다가 일으키는 무한한 상상력과 그것이 영혼에 어떤 울림을 주어 삶의 깨달음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4337. 8. 4.]   734□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 문학과지성시인선 46, 문학과지성사, 1985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미지들이 설정된 주제를 풀어내면서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음질치는 역동성이 잘 살아있는 시집이다. 이미지란 모름지기 이렇게 풀어져야만 한 오리 의혹도 없이 독자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시집 전체의 주제가 악마주의랄까? 아니면 해골주의랄까? 비참주의랄까? 비참한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삶을 요소요소에서 잘 비추었다. 그런데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는 좀 인색한 편이다. 아마도 이것은 이끌어야 한다는 어떤 자부심 내지는 선민의식 때문이다. 그리고 보여주기 수법을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우회의 방법이 때로 갑갑함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파헤치고자 하는 공격성을 제공하는 삶의 근원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했을 법도 한데, 그 부분을 도외시하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문학이 삶이 아니기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4337. 8. 4.]   735□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이재무, 문학과지성시인선 89, 문학과지성사, 1990   세부 묘사에 대한 성실성이라든지, 함부로 말하지 않고 표현으로 대체하려는 태도가 아주 좋은데, 아쉬운 점이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마음이 너무 앞선 시집이다. 그래서 이미지를 잘 끌어가다가도 끝내 참지 못하고 할말을 해버리고 만다. 할말을 해야 할 곳에서 해야 이미지도 살고 시도 산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 말을 하면 그건 그냥 말일 뿐이다. 시에서 말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리한 연상과 비유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길로 걸어나온다든가 하는 것은, 하자면 안 될 것은 없지만, 해도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시접 전체에서 걸러버렸으면 하는 시들이 많다. 개인의 체험을 시 속에 끌어들일 때는 자신의 감정이 지나치지 않은가 하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동의 근원을 독자보다 먼저 내가 토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다양한 표현력을 갖추었는데도 여러 가지로 아쉬운 시집이다.★★☆☆☆[4337. 8. 4.]   736□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박라연, 문학과지성시인선 98, 문학과지성사, 1990   시를 쓰는 방법의 확고함에 눈에 띈다. 비유를 바탕으로 한 동일시의 기법이다. 이 기법은 가장 구태의연한 방법이면서도 시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굳이 모험을 할 필요도 없고 실험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세계를 조심스럽게 드러내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도 찾기 어렵다. 다만 비유의 찾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기 어렵다는 점에서 좀 게을러지기 쉽고, 또 다작을 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자신의 말을 자유자재로 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방법의 한계이다. 드러내고자 하는 원관념이 보조관념과 무리 없이 만나서 한 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개인의 체험이 특수하므로 그 특수함을 어떻게 보편화시켜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 좀 소홀하여 자서전 비슷한 시들이 많다. 나에게 절실하다고 해서 독자들까지 그러리라고 추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앞부분의 몇 편이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고 해서 너무 빨리 시집을 낸 경우이다. 뒷부분의 습작기 시들은 없느니만 못하다.★★☆☆☆[4337. 8. 4.]   737□시집□정남식, 문학과지성시인선 99, 문학과지성사, 1990   사람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명멸한다. 그런 명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을 이해하는 한 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혼자 이해하고 마는 것이라면 몰라도 어떤 예술의 형태로 드러날 때는 그런 명멸의 흔적들을 재배치하게 된다. 그것은 곧 질서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생각도 질서의 흐름을 타지 않고서는 예술로 올라서기가 어렵다.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게 하는 시집이다. 왜 이런 시를 썼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이미 박남철 같은 훌륭한 전위를 체험한 사람에게 이 시집은 너무나 박약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앞의 시 몇 편은 그저 말장난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지경이다. 시 같은 않은 시를 체험하게 하려 한 의도라면 지금 나와있는 수많은 시집에서도 그런 체험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같잖은 시집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박남철의 경우, 시에서 정신의 절실함이 절절하게 우러난다. 형식이 일그러진 시들의 대부분은 그런 절실함이 무언가를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집에서는 그런 절실함 대신 장난끼가 너무 많이 느껴진다. 시에서도 장난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장난을 위한 장난 같은 장난은 파괴력이 둔해진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것도 시에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피차 할말이 없는 일이다. 전위에 한자가 꼭 필요한가 역시 생각해볼 일이다.★☆☆☆☆[4337. 8. 5.]   738□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이태수, 문학과지성시인선 92, 문학과지성사, 1990   내 안에 또 다른 를 설정하여 그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내 안에 누적된 체험과 사고를 풀어내는 방법을 택한 것만으로도 이 시인의 경륜과 방법의 확고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들이 모두 고른 화법과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비결을 얻게 된다. 다만 의 범주가 너무 좁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일이다. 사실 이 는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시 세계 역시 무한하게 풍부한 울림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체험의 극히 제한된 부분만을 묘사함으로써 라는 말의 상징성이 갖는 풍부한 함량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가 특별히 처지는 것이 없으면서도 천편일률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따라서 의 내용을 넓히고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이 좋은 시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에 대한 집착이 좁고 강하기 때문에 시들이 를 전달하는 데 급급해서 정작 세부에서 재미를 줄 수 있는 표현의 신선함 같은 것이 다소 미흡한 형편이다. 한자는 어찌됐든 칭찬 받을 일이 못 된다.★★☆☆☆[4337. 8. 5.]   739□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김광규, 문학과지성시인선 214, 문학과지성사, 1998   이제야 읽을 만한 수준까지 왔다. 불필요한 말이 많이 없어지고, 제시한 것에 울림을 만들어서 독자가 주제를 유추하여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시의 영역에 아주 많이 접근했다. 그러나 시가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불필요하게 집착하는 것이나 더 말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말해서 애써 이룬 맛을 깎아먹는 버릇은 여전하다. 필요한 것들만 남아서 할 말만 하는 시의 절제력이 더 필요하다.★★☆☆☆[4337. 8. 5.]   740□그 나라 하늘빛□마종기, 문학과지성시인선 106, 문학과지성사, 1991   시의 세계가 허황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찾아낸 소재를 꼼꼼하게 기록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성실성이 한 눈에 드러난다. 같은 작품은 오래 기억할 만한 좋은 작품이다. 게다가 시인이 한국에 살지 않고 오래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참고하면 한국에서 시를 쓰는 사람의 몇 곱절에 해당하는 노력을 들였을 것으로 보아, 시로 혼자서 이 정도의 수준을 이룬 것에 대해서는 큰 박수를 쳐줄 일이다. 다만 시들이 대부분 소품에 머물러 있다는 점과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아서 시가 장황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한자 역시 흠이 된다.★★☆☆☆[4337. 8. 5.]    
83    시집 1000권 읽기 73 댓글:  조회:2170  추천:0  2015-02-11
  721□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하종오, 창비시선 32, 창작과비평사, 1981   소설에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신처럼 등장인물의 심리를 다 꿰뚫어본 듯한 태도로 소설을 이끌어가는 시점이다. 이 시집의 화자가 바로 소설로 치면 그런 관점에 해당한다. 그런데 전지적 작가시점의 특징은 화자가 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설픈 광대로 전락하고 만다. 사물은 그 사물이 갖는 특징이 있고, 그 특징은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해석이 정도를 넘어서면 사물의 존재를 해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주장을 살릴 수는 있지만, 시를 살리지는 못한다. 시집 속의 시들 거의가 동일시의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각기 사물이 되어서 본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무리한 요구를 하면 사물은 내 생각으로부터 이반된다. 그럴 때 시는 관념성이 짙은 넋두리로 변한다. 죽음이 중요한 상징이었던 시대에 다양한 죽음을 노래했으면서도 그것이 시대의 의미를 담지 못하고 죽음에 대한 넋두리로 끝난 것은 그러한 오류를 보여주는 예이다. 무리한 해석이 시를 끝내 시답지 못하게 한 시집이다. 다만 운율을 살리려고 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시의 관념성을 보완하기 위한 땜질이었다면 그건 자충수이다. 한자는 청산해야 할 악습이다.★★☆☆☆[4337. 7. 22.]   722□전야□이성부, 창비시선 30, 창작과비평사, 1981   한 시인의 정신이 그 시대의 정신을 대신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고통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영광의 순간이 되기도 한다. 1970년대가 갖는 막막한 절망의 정서를 시인의 시에서 살피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를 통해 말을 하는 시인들의 입을 정권이 닫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답답함은 굴절되어 나타난다. 그 굴절의 모습이 이 시집의 1부에 잘 나타난다. 단단히 정제된 정신이 시 전체의 긴장을 만들고 있다. 2부로 넘어가면서부터 다소 그 긴장이 풀리지만, 그리고 4부에서는 개인의 삶 때문에 시대 전체의 문제가 묽어졌지만, 이 긴장을 낳은 정신이 시에서 영롱하게 빛난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이 시인만의 몫이다. 이미지들이 큰 것을 말하기 위해서 제 자리에서 은은히 빛을 내는 그런 절제력은 시 쓰는 재주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한자는 갈수록 오점이 될 것이다.★★★☆☆[4337. 7. 23.]   723□새재□신경림, 창비시선 18, 창작과비평사, 1979   감정을 묘사로 대신하는 노력이 돋보이지만, 곳곳에서 불거진 감정들은 이미 무언가 말을 하기로 하고 나선 자의 태도이다. 그 말은 장시 에 와서 활짝 핀다. 서사시의 어려움은 와 라는 어울릴 수 없는 조립에서 온다. 서사는 사건의 양식이지만, 시는 시간의 절단면인 순간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서사시를 쓰는 시인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조화는 대부분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이 시집의 장시는 아름다운 묘사가 뛰어나지만 결국 사건을 제시하는 방법이 너무 밋밋한 것이 흠이다. 그리고 내용 역시 진부하다. 사건을 시로 다루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증거가 되겠다. 가 갖는 상징성을 두루 살렸으면 좋겠는데, 그 사건이 일어난 근거지라는 것 이외에는 이 시에서 상징하는 바가 없다. 그리고 사건의 정황을 알아볼 수 있는 시대문제를 제시했어야 하는데, 사건만이 등장하다 보니 모든 상황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몫이 되고 말았다. 서사시에서 그것은 결점이다. 한자는 버릴 수 없는 업보인가?★★★☆☆[4337. 7. 23.]   724□소리집□강은교, 창비시선 34, 창작과비평사, 1982   파도가 없는 바다랄까? 어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고른 투를 보여주는 시집도 없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밋밋해 보인다. 이 밋밋함은 감정의 모호함과 주제의 관념성 때문에 더하다. 이런 특징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이 정해지지 않은 것과 그나마 하고자 하는 것도 관념성이 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언어가 늘 더 많이 동원된다. 경제성에 민감한 시에서는 단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것은 일상의 사물을 다루는 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시인이 갖는 어조에서 발생하는 것이니, 그런 밋밋함 하나 정도는 있어도 서운치 않으리라. 한자를 청산하지 못한 것 역시 단점이다.★★☆☆☆[4337. 7. 24.]   725□명궁□윤후명, 문학과지성시인선 5, 문학과지성사, 1979   허무주의와 결벽주의가 교묘하게 결합된 시집이다. 삶은 이런 것이라는 전제와, 시는 이러 해야 한다는 일정한 선이 만나서 다른 관점을 허용치 않는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가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혹독한 모순과 상처로 점철된 삶의 양상들을 나타내는 데 이미지들이 동원되고 있고, 그 부분은 다른 평범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눈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 세계여서 이미지의 배열이 아주 독특한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설정한 내용이 어려워 이미지가 어려워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시의 방향성이 불필요하게 특별해서 시가 어려워진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가 많고, 그런 이미지들이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삶의 어떤 전제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에 주제가 선명하게 부각되지를 않는 것이다.   표제작인 의 경우 뛰어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이런 태도 때문이다. 죽음의 서슬만을 느끼기에는 활이라고 하는 장비가 갖는 상징성이 너무 확연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태도는 삶을 비극과 종말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을 굳이 말릴 필요가 없다면 이런 시집 하나 정도는 있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싶다. 한자는 끝내 부담으로 남는다.★★☆☆☆[4337. 8. 2.]   726□아니리□김광규, 문학과지성시인선 93, 문학과지성사, 1990 727□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김광규, 문학과지성시인선 10, 문학과지성사, 1979 728□크낙산의 마음□김광규, 문학과지성시인선 50, 문학과지성사, 1986   독일 시인 브레히트 시선 을 읽으면서 시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한 적이 있다. 번역자를 보니 김광규였다. 오늘날 김광규의 시가 그런 꼴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는 이유였다. 누구나 흉내는 낸다. 그리고 그 흉내가 그대로 그 사람의 한계가 되는 수가 있다. 김광규의 시가 그런 경우이다. 브레히트의 시는 길고 연작이 많다. 시가 길면 어려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긴 호흡을 이용해야 하는 시인의 고육책이다. 그리고 이런 쉬운 어법은 대신에 세계를 보는 명징한 시각으로 보완된다. 세계를 보는 시각이 고르고 새로울 때 쉬운 어법은 그 세계를 드러내는 방법이 된다.   김광규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와 브레히트가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는 거의 같은 점이 없다. 규모 면에서 특히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히트의 방법이 김광규의 방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될 수 없는 방법을 자꾸 되는 것으로 하려고 하다 보니 수필체의 어법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시의 2할 정도만 추려서 선집을 만든다면 그럭저럭 읽을 만한 시집이 될까, 지금 상태로는 시로 보기 어렵다. 내용이 늘어진 데다가 상징성 또한 약하기 때문이다. 좀 더 응축되어야만 할 시들이다. 쉽게 쓰기 위해 몸부림 친 시에서 한자가 용납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4337. 8. 2.]   729□몰운대 행□황동규, 문학과지성 시인선 101, 문학과지성사, 1991 730□미시령 큰바람□황동규, 문학과지성 시인선 131, 문학과지성사, 1993   김광규 시집 세 권을 거쳐 황동규 시집을 두 권이나 이어 읽으면서 보니 수필과 시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김광규의 시는 수필과 시의 관계를, 황동규의 시는 일기와 시의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한다. 일기는 개개 사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부분 부분의 사실성이 중요하다. 그 사실성을 통하여 일상을 반추하고 거기서 삶의 교훈을 추론해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체의 주제도 주제지만 각 절의 묘사가 지향하는 사실 관계와 진실성이 작품의 형상성에 중요한 기능을 맡는다. 그러나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교훈에 가까운 관념이 아니라 그 개념에 대한 암시이나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 사실의 실제성이나 사실성보다는 그것이 갖는 함축성의 확산 가능성을 중요시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개되는 이미지에서 그 이미지 자체에 독자의 생각이 머물게 하면 효과가 반감된다. 낱낱의 생각에 붙잡혀서 전체의 상징성이나 감수성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일기가 해낼 수 없는 시만의 장점이다.   따라서 낱낱의 이미지가 스스로 의미의 장을 형성하면서 독립하면 안 된다. 전달하고자 하는 감성, 또는 느낌을 그 의미가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이미지에서 다음 이미지로 넘어갈 때 그런 덜컹거림이 있으면 일기로서는 성공일지 모르되 시에서는 실패이다. 바로 이 점을 황동규는 해결하지 못한 채 여행을 다니고 있다. 여행 이미지는 사건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대부분 특별한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사건에 대한 보고서의 성격을 띤다. 그 보고서는 다름 아닌 일기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시로서는 거의 치명상이다.★★☆☆☆[4337. 8. 2.]    
82    시집 1000권 읽기 72 댓글:  조회:1767  추천:0  2015-02-11
711□청록집□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1946)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시집이다. 허투루 쓰인 시어가 하나도 없이 모두 제가 있어야 할 곳에서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다. 더욱이 세 명이 낸 합동시집인데도 한 호흡으로 읽힌다는 것이 특이하다. 세 세계가 각기 조금씩 다른 차이를 보이면서도 자연을 바라보는 전통의 어떤 맥락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묘한 조화를 이룬다. 어떤 의도가 작용한 탓이겠지만, 박목월의 경우 자연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서 현실마저 제거돼버렸다. 이 점은 조지훈도 마찬가지이다. 절과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삶의 한 영역이 잘 살아났다.   여기에는 한시의 작법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전통 계승의 또 다른 국면을 엿볼 수도 있다. 전통을 파내고서 그 자리에 들어앉아 뿌리내린 것이 현대시의 운명이자 경향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면이다.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그 속에 숨긴 의도가 가장 많이 드러난 것이 박두진인데, 어둠과 밝음을 대비시킨 구도가 민족 해방이라는 관념을 시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법이라는 것을 첫눈에도 눈치챌 수 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설익은 듯한 느낌마저 들지만, 강점기하의 양심이 어떻게 시의 장식 아래 은폐되었는가 하는 한 전범을 보는 것 같아 오히려 가슴 아프다. 해방 후 작고할 때까지 현실에 대한 비판을 감추지 않았던 노시인의 정신은 이 은폐물 속에 숨어있었던 셈이다.★★★★☆[4337. 7. 20.]   712□와사등□김광균,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4)   방법상의 의도가 너무 돌출하는 바람에 ‘설야’를 빼고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다. 한시의 전통으로 보면 이미지만 남아있는 이런 류의 시는 일종의 퇴영이라고 할 밖에 없다. 이미 있는 훌륭한 전통을 무시하고 생경한 이론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 이렇듯 허무한 것이다. 극히 절제된 묘사가 뛰어나다. 하지만 한시의 묘사가 마음의 어떤 정황을 드러내기 위해 상징의 차원까지 승화된 반면에 묘사만이 남은 이런 시의 심상은 공허할 따름이다. 다만 이미지즘을 염두에 두고 썼으면서도 그 방법의 투철함에서는 김기림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 김기림이 큰 구도를 갖고 시를 꾸미는 능력이 탁월했다면, 김광균은 극세밀 묘사에 뛰어났던 셈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진 데에다가 그것이 그러내고자 하는 세계까지 갖추어야 제대로 된 시가 될 것이니, 생각하면 한 방법이 완전히 정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제가 해결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통의 단절과 도외시가 어떤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런 시집에서 본다. 유행, 유행 하지만, 뿌리 없는 유행은 공허할 따름이다.★★☆☆☆[4337. 7. 21.]   71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함민복, 창비시선 156, 창작과비평사, 1996   격렬한 인식과 사고만으로 시가 될 수 있는가? 앞부분의 시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시의 감동은 생각의 질서에서 오지만, 격식을 버리고 사고의 뼈대만 추려서 보여주면 당황하게 되는 것이 독자다. 그것은 독자의 몫일 뿐, 시인의 탓은 아니라고 한다면 왕왕 우리가 논하는 시의 형식성은 무엇이 될 것인가? 뒷부분의 시들과 앞부분의 시들은 서로 방향이 달랐어야 한다. 같은 방향으로 서로 다른 감정을 배열했기에 뒷부분의 발랄함이 앞부분의 진중함을 짓눌러버린 결과가 되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관념성이 짙다. 죽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을 대하는 바탕에는 그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반발력이 만드는 상상력은 탄력이 있어 좋지만, 그 상상력을 모든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시키는 것은 시에 여러 가지로 불협화음을 일으킬 소지가 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아이는 아이처럼 대하고 어른은 어른처럼 대하며, 여자는 여자처럼 대할 일이다. 원리는 같더라도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달라야 하는 것이 시다. 한자는 시급히 없애야 할 불협화음이다.★★☆☆☆[4337. 7. 21.]   714□세기말 블루스□신현림, 창비시선 149, 창작과비평사, 1996   멈추지 않는 것이 젊음의 특징이자 권리라면 이 시집은 충분히 젊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의식을 실험하여 이 세계의 비밀을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는 높이 살 만하다. 그리고 뻗어가는 의식의 촉수를 충분히 받아낼 언어의 세계가 확보되어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시어가 시상을 끊지 않고 일관된 천체를 보여줄 줄 아는 것은 젊은 시인치고는 갖추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집에서 노래하는 세계는 언어 안에만 갇혀있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래서 그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림 때문이 아니라 언어가 가둘 수 있는 세계는 그림과 달리 어떤 결론이다. 그 결론이 없기에 활달하지만 언어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어떤 방향을 향해 시의 의미가 수렴되지 않으면 시에 오래도록 정착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성급하게 결론을 낼 필요는 없지만 어떤 결론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이 시에 머무는 한 방법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일은 이런 시에서는 위험한 일이다. 독자가 애써 일군 상상력의 세계가 불필요한 친절로 인하여 바람 빠진 풍선이 되면 좋을 리 없기 때문이다.★★★☆☆[4337. 7. 21.]   715□조벽암 시 전집□이동순 김석영 편, 소명출판, 2004   시가 정치를 만날 때 어떤 모습을 갖게 되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말하자면 선전 선동의 한 도구로 자리매김하여 실용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쓰임의 효용성이 중요한 것이지 작품이 갖는 상상력의 진폭이나 감동의 요인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침식을 견디지 못하고, 효용성을 지닌 그 시기만 지나면 무덤덤해지고 마는 한계를 지닌다. 시가 역사의 평가대상이라면 지난 시기의 한 가치를 드러내는 존재로 역사의 뒤안길에서 은은히 존재한다. 하지만 작품의 가치는 영원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이런 부류의 작품이 갖는 단점은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주제를 드러내는 데 급급해서 작품의 긴밀성이 떨어지고 상상력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노래된 세계에 열광하는 광신도가 아니라면 독자가 개입할 틈은 별로 없다.★☆☆☆☆[4337. 7. 22.]   716□고척동의 밤□유종순, 창비시선 71, 창작과비평사, 1988   용수철의 탄력으로 쓴 시이다. 용수철은 스스로는 튀지 않는다. 누군가 누르면 그 반동으로 탄력을 내면서 튄다. 시집 대부분이 외부에서 가해진 충격에 대한 반동 내지는 반발로 이루어진 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발력으로 인한 주제가 시의 전면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구체성을 유지할 때는 정신이 단단하게 드러나지만, 구체성이 조금만 결여되면 시가 모호해진다. 사물에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그들의 영역과 양상이 있다. 시가 대상을 가장 심하게 일그러뜨리는 양식이기는 하지만, 사물의 모습을 너무 심하게 일그러뜨리면 현실성을 잃게 된다. 시에서 현실성을 잃는 것은 주제를 전달해줄 수 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감동으로 연결되기는 퍽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 말이 많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미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인내는 노동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인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물과 사태에 대한 억지해석이 시의 전편에 흐르고 있다. 감옥 체험 시편을 뺀 나머지는 거의 다 그렇다. 말투는 강하면서도 정작 전하고자 하는 정서는 모호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사상이 건전하다고 해서 그것이 시의 정서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상가나 철학자의 몫이다. 시인은 시인으로 머물러야 하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기다리는 여유를 가질 때 드러난다. 한자에 매달리는 것은 자유 이상의 질곡이 된다.★☆☆☆☆[4337. 7. 22.]   717□바다의 눈□김명수, 창비시선 136, 창작과비평사, 1995   깔끔한 이미지를 만들 줄 아는 시인인데, 아직도 써야 할 부분과 써서는 안 되는 부분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미지는 상징으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제시의 기능이 강하다. 독자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여 시인의 메시지를 해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이미지로 제시된 것들에 대해서는 다시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 이미지들이 깔끔하게 잘 전달되도록 처리했는데도 중간중간에 영탄조로 발언을 해버리고 말아 애써 가꾼 이미지들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그리고 주제를 한 가지로 좁혀서 각 시들이 지향하는 초점을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두세 개로 흩어져서 시집 전체는 산만하다. 이미지와, 시집 전체의 조율법을 깊이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7. 22.]   718□꽃산 가는 길□김용택, 창비시선 70, 창작과비평사, 1988   애써 이룬 공을 무기력한 반복으로 까먹은 시집이다. 앞부분의 꽃산 이미지는 대단한 성취를 이룬 시이다. 거기에다가 사랑을 결부시키고, 이후 나타나는 모든 이미지의 중심에 꽃산을 놓음으로써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주 잘 드러냈다. 이렇게 상징화한 꽃산은 민중의 염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될 만하다. 시에서 이만큼 선명한 싱징을 이루면서 그 상징이 시집에 굵은 눈을 형성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기교만으로도 어려운 일이기에 그 성과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뒷부분의 무기력한 반복 때문에 이런 성취를 절반은 깎아먹은 꼴이 되었다. 무기력한 반복은 조절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가 모자라서 전체를 완성하지 못하는 어떤 운명이 이 시인의 시에는 있다. 안타까운 일이로고!★★★☆☆[4337. 7. 22.]   719□새벽길□고은,  창비시선 15, 창작과비평사, 1978   시를 가장 편하게 쓰는 방법은 비유니, 상징이니, 이미지니 하는 자잘한 기교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그런 방법조차 거추장스러울 만큼 할 말이 가슴속 가득히 차야 하고 가슴속 가득히 들어찬 그것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되어 어떤 상황에 처해도 그것을 토해낼 만큼 절실한 상황에 자신을 놓으면 된다. 말하자면 전쟁터에서 자신이 어떻게 몸놀림을 하는지도 모르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만들면 된다. 그런 상황이면 자신이 뱉는 모든 말은 시가 된다.   이 시인이 지금 이런 경지에서 시를 쓴다. 엉뚱한 것 같지만,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어떤 전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시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시 앞에서 멀미가 나고 재미가 없다. 게다가 동일한 반복이 만드는 지루함을 운율로 넘어가려고 하는 땜질 처방을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시집 뒤쪽의 장시는 그런 혐의를 벗기 힘들다. 문제는 시 천 편을 써도, 만 편을 써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질을 직접 언급하는 연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속의 그 거대한 것을 에둘러 말하되, 언어가 작기 때문에 그것을 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본 세계를 잘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을 오래도록 탐구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시인의 마음이 너무 바쁘다. 그 와중에 들려오는 칭찬에 취하고 만다. 박수소리 들으며 아무도 말리지 않는 제 갈 길을 갈 뿐.★★☆☆☆[4337. 7. 22.]   720□별들은 따뜻하다□정호승, 창비시선 88, 창작과비평사, 1990   시집 안에 ‘박정만’이라는 시가 있는데, 전체의 율격이나 시의 격조가 박정만의 시와 많이 닮았다. 아마도 운율이 잘 살아있는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운율은 가락에서도 오지만 시의 행 가름에서도 온다. 박정만의 시에서도 그렇지만 운율을 살리려는 시들은 행가름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호흡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1970년대라는 시대는 단순한 색깔을 지닌 시대였다. 바라볼 곳이 이쪽 아니면 저쪽이었다. 따라서 이쪽을 노래하면 저쪽은 당연히 드러나는 시대였다. 바로 그런 특징 때문에 정호승은 1970년대의 암울한 시기를 같은 걸작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런 색깔이 흐려지거나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이쪽을 노래해도 저쪽이 잘 드러나지 않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 이 시집이 있다. 어조나 창작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으로부터 적당한 높이로 떠서 묘사하는 수법이나 대상을 환기시킬 수 있는 상관물을 이미지로 차용함으로써 전체를 그려내는 수법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런데 절실함이 덜한 것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좀 무뎌진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낱낱의 의미를 버리고 상관물을 더욱 추상화해서 전체를 노래하는 방법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시들은 소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한자는 꼭 빼야 할 그 무엇이다.★★☆☆☆[4337. 7. 22.]    
81    시집 1000권 읽기 71 댓글:  조회:1851  추천:0  2015-02-11
  701□정선 아리랑□박세현, 문학과지성시인선 103, 문학과지성사, 1991   “농무”를 읽는 기분이다. 꼭 필요한 말들만 쓰일 곳에 쓰여 더하기도 어렵고 덜 하기도 어려운, 딱 그 만큼만 그려진 풍경화다. 한 지역을 소재로 하여 이만큼 고르고 다양하게 형상화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선의 풍경과 그 풍경 속에 스며있는 정서까지도 아주 잘 표현되었다. 시인의 저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시집이다. 다만 묘사로 그치고 말았어야 할 곳에서 미처 감추지 못하고 드러나는 감정의 골이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그런 단점은 큰 것이 아니어서 정선을 한국 문학의 한 복판으로 끌어들이는 데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시인이 노래한 것은 정선이지만, 시에서 노래된 것은 대한민국 전체이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시의 심오한 원리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시집도 보기 드물 것이다. 한자는 영원한 흠이 될 것이다.★★★☆☆[4337. 7. 7.]   702□성 타즈마할□함성호, 문학과지성 시인선 208, 문학과지성사, 1998   시에서 실험은 외부를 향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내부를 향한다. 세계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세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변화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험은 어떤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추구하고자 한다. 자신의 내면에서 변화된 어떤 것이 그 사회 안에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의 내면에 울림이 올 때 이 실험은 성공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반응 여부에 따라 실험은 자칫 장난으로 그치고 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험하는 자가 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실험하는 순간 의식의 플러그가 이 세계의 어느 곳에 꽂혀있는 것이며, 꽂혀있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함성호 표 플러그는 어느 곳에 꽂혀있는가?   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것은 거의 구도의 방향으로 시가 가고 있다. 그 접근법을 형식의 문제로 환치하고 있는데, 구원과 형식은 본질의 문제이기보다는 때로 표현상의 간단한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방향 설정의 어려움이 된다. 그것은 때로 근본을 묻는 형식의 날카로움이자 장벽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일정한 성취를 볼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시의 본질은 깨달음이 아니라 감성의 일깨움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설령 말을 할 상황이 오더라도 아낀다. 선시가 지극히 짧아진 이유는 그런 까닭이다.★★☆☆☆[4337. 7. 12.]   703□해파리의 노래□김억,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대정 16)   참고할 전례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틀을 새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선구자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고, 그 실패 때문에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성공이 보장된다. 1923년에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출판된 개인시집이라는 이력을 가진 이 시집이 그런 전형에 해당한다. 시가 대부분 분명한 형식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리고 한 눈에 감정의 과잉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김억이 참고한 외국 시인들의 시에서 받은 영향이겠지만, 그 전까지 극도로 절제된 감정을 보여주던 한시의 관행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옛 형식인 한시의 관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시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관행이 지닌 장점까지 버리고 전혀 새로운 틀을 만든 것은 그 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이 시집 전체가 감정 조절을 위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넘치는 감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진정한 자유시의 출현은 결국 다음 세대를 기다려야 했던 셈이다.★★☆☆☆[4337. 7. 14.]   704□카프 시인집□김창술 권환 임화 박세영 안막,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6)   역사는 나선형이어서 비슷한 일들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반복된다는 이론이 언뜻 떠오른다. 1920년대에 나온 이 시집 속의 표정이 1980년대를 휩쓸고 간 시대 분위기와 너무나 흡사함에 놀란다. 분명 역사는 나선형으로 돈다는 사실을 이런 표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시대를 꿰뚫는 것은 자각의 정신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위치에 있고, 그 위치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가 강렬하게 부각되며 이 때 형식의 거칢이나 무질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 상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에서 어떤 절제된 형식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에서 피지배층이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여 자신을 사회 변혁의 중심으로 설정한 것은 해방 전 공산주의 운동이 유일하다. 이 시집은 그러한 운동의 중심에 선 작가들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논리화한 책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1980년대에 일어났던 노동시의 원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전통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시 정신사의 한 획을 긋는 시집이다.   처음 나온 시집이기에 전례 없이 출발한 시가 갖는 모든 한계를 다 갖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한계는 현실에 대한 저항에 관심이 집중되어 자신들이 열고자 하는 세계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에서 사상은 확립되었을지언정 방법론이 아직 서지 않았다는 뜻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일이겠는데, 그때는 이미 이 시집을 낸 조직인 카프가 해산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이후 반세기 동안 역사의 어두운 지층 밑으로 가라앉는다.★★☆☆☆[4337. 7. 14.]   705□영랑 시집□김영랑,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0)   1935년에 발간된 시집인데,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시에 제목이 붙지 않고 1부터 53까지 번호를 붙인 것이다. 낱낱의 작품을 모아서 한 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한 권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의도가 시에서 잘 살아있어서 시들이 한 호흡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제일 먼저 두드러진 것이 가락이다. 운율이 아주 잘 살아있다. 비슷한 음보가 반복되고 있지만, 반복되는 가락은 음보만이 아니라 주제, 이미지 같은 것들도 일정한 범주 안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 시에서 정형성을 추구한 노력이 나름대로 성과를 보인 몇 안 되는 성공사례일 것 같다. 대신에 율격이 현저히 살아나기 때문에 다른 요소, 즉 주제라든가 구조의 단단함 같은 것은 많이 후퇴했다. 특히 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주제인데, 이 부분이 취약해진 것이 크게 눈에 띈다. 그리고 좋은 시를 쓸 때는 감정의 집중이 이루어지는데, 시의 구성요소인 율격에 생각을 집중하다 보니 바로 이런 감정의 집중이 잘 안 이루어진 것이 흠이다. 45번이 붙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같은 작품이 더 나오지 않은 것이 끝내 아쉽다. 좋은 가락이 흔치 않은 우리 시에서 운율을 잘 살리려고 했고, 또 일정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전범을 보인 작품이다. 하지만 안이하고 지루한 반복은 오히려 실패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 시집이다.★★☆☆☆[4337. 7. 15.]   706□망향□김상용,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4)   1939년에 낸 시집인데,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빼면 별로 보잘 것이 없다. 대부분 발상의 차원에 머물러 있고, 시어들이 너무 장황하게 분산되고 있어서 정작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전달하는 데 제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시가 차분한 느낌이 들지 않고 어딘가 미숙한 느낌이 나고 들떠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자연을 소재로 한 시들이 많은데, 자연에 빗댈 삶의 내용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제가 엷어질 수밖에 없고 단순한 제시 정도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미 자연을 성리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해석한 그 이전의 방법과는 다른 시각이 확보되어야 이런 문제가 해결될 것인데, 그것이 안 된 상태에서 언어화 됐기 때문에 생긴 문제로 보인다. 자연을 자연으로 보는 것도 중요한 한 관점이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도 아니기에 문제이다. 방향을 잡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흠의 원인이 된 시집이다.★☆☆☆☆[4337. 7. 15.]   707□현해탄□임화,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3)   를 읽으며 그 논리 정연함에 소름이 끼칠 만큼 감동했던 10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번에 읽은 시집에서도 그 이상의 감동이 밀려든다. 1938년에 이런 시집이 나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역시 임화다! 연구자들이 인용하는 대부분의 시는 ‘네 거리의 순이’ 같은 초기 시들인데, 그런 것들은 문학사상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몰라도 임화의 시를 평가하는 데는 헛다리짚은 것이다. 임화 시의 절정은 바다에 관한 시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들이 갖는 장점은, 대부분의 카프 계열 시인들이 갖는 발언의 직접성을 버리고 돌려 말할 줄 아는 저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카프 시인들의 시는 형상성이 한결같이 결여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관점에서 시는 노동자의 감성을 충동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격렬한 노동현장에서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능력이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시가 격렬한 현장의 그 정서에 맞추어서 쓰여진다. 그리고 그것을 책상머리에 앉아서 읽는 자들의 눈에는 상상력의 결여로 결판나는 것이다. 단편 서사시라는 이름을 얻는 임화의 초기 시 역시 이런 판단으로부터 멀리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바다와 관련한 시들에서는 카프가 해체된 뒤의 사색이랄까 하는 것들이 그런 한계를 벗어나서 아주 잘 극복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아마도 격렬한 현장에서 뛰던 자신을 조금 거리를 두고 돌아볼 여유가 생긴 탓일 것이고, 나아가 사상투쟁의 휴지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전환기의 여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문학 특유의 돌려 말하기를 아주 잘 구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 혁명과 실천에 대한 믿음에는 전혀 변화가 없이 자신의 신념을 시의 뒤쪽에 갖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상황은 변했을지언정 사상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바다 이미지는 당시의 조선 현실과 어울려 한국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광막한 바다에 떠있는 배의 존재가 당시의 조선 아니던가? 그 출렁이는 대지 위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혁명가의 존재와 정확히 일치한다. 임화는 바로 이와 같이 시 전체를 밑받침하고 있는 전제를 간파할 줄 안, 우리 나라 문학사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시인 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해방 전의 시인들이 지리멸렬하여 자신의 내부로 퇴영하거나 시의 아름다움 속으로 도망치던 시절에 캄캄한 민족의 현실을 이만큼 여유 있고 크게 그려낸 시인이 없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시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이 굉장히 굵고 길다. 이것은 할 말이 많다는 뜻이고, 그 할 말을 걸러낼 어떤 형식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주제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시는 지루해진다. 이런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시 속에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꾀를 부렸다. 아마도 이것을 ‘단편 서사시’라고 불렀을 것인데, 시에서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는 결코 좋은 방법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주제가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의 고뇌는 나름대로 성과를 본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아무도 개척하지 못한 한 시의 영역을 열어 젖힌 것이니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다만 후반부에 와서도 이렇게 길게 쓰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바다의 이미지로 들어간 것은 안이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시다운 것은 전반부의 시가 아니라 후반부의 시이다. 거기서는 전반부에 쓰인 시들처럼 직접 주제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는 세계가 분명히 있고, 그럼으로써 더욱 그 해석의 넓이와 깊이가 풍부해졌기 때문이다. 박노해의 이상으로 시의 한 경지를 열어 젖힌 시집이다. 오히려 사상성이나 방법 면에서는 임화의 시가 훨씬 더 앞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카프, 카프 하지만 카프가 그냥 카프가 아닌 것이 임화 같은 인물 때문이라는 것임을 이런 작품에서 확인한다. 후세의 시인들이 뛰어넘기 어려운 곳까지 시를 밀어 올렸다. 그리고 그런 절대절명의 전환점에 선 자의 몫이기도 하다.★★★☆☆[4337. 7. 16.]   708□태양의 풍속□김기림,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4)   1939년에 발간된 시집인데, 시에서 이미지의 노릇을 오래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무엇보다도 시집 전체를 한 구도 안에 넣어서 꾸민 기획력이 놀랍다. 물론 서구 이미지즘의 모방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단숨에 그런 모방을 할 수 있는 것은 웬만한 뚝심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시들이 전체의 부분을 이루면서 전체가 달리는 방향으로 함께 작동하도록 배치되었다는 것은 큰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이미지들이 어떤 전제된 관념을 나타내기에 급급하고, 그 전제된 관념이 현실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미지들은 공허함이나 황당함을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다.   이미지가 이미지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어떤 것을 나타내는 환기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림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그 환기의 대상이라는 것은 삶과 사회의 축도이다. 그렇다면 그 축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관점과 철학이 필요한가 하는 좀 더 큰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 문명비판이라는 큰 관점 이외에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현실과 철학이 없기 때문에 시 전체가 허황한 몸짓으로 끝난 셈이 되었다. 일제하의 식민지 현실을 비켜놓고서 전달할 문명이란 바나나 껍질일 뿐이다. 대작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작가였는데, 이 점이 끝내 아쉬운 점이다.★★☆☆☆[4337. 7. 19.]   709□초롱불□박남수,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5)   절제된 묘사가 주를 이루면서 할 말이 풍경의 뒷편으로 물러났다. 이럴 경우에는 동원되는 언어가 시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이 된다. 의미는 이미지의 주변에서 독자가 추론할 수 있을 정도의 암시만으로 존재한다. 앞부분의 시들은 대개 자연에 둘러싸인 마을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루고 뒷부분에서는 자신의 경험이 등장함으로써 좀 더 상세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발간된 다른 시집들과 다른 것은 시어 선택과 시에 대한 생각에서 시인의 주관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변혁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미지 실험에 기울어버린 것도 아니어서 묘사 중심의 시이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언어세계를 열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일제강점기 말이라는 시대의 몫도 없지 않겠지만, 아쉬운 것은 묘사의 시가 흔히 갖는 것처럼 주제의 빈약을 피할 길이 없고, 시에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후의 박남수 시가 갖는 절제된 언어 감각이 엿보이는 작품임은 분명하다.★★☆☆☆[4337. 7. 19.]   710□청마 시초□유치환,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 열린책들, 2004(초간 소화 14)   아주 독특한 시 세계이다. 어려운 한자 투성이가 흠이기는 하지만, 시에서 추구하는 바와 노래하는 것이 자신만의 철학과 세계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당시의 다른 시인들한테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독특한 맛이 있다. 종교 냄새도 풍기는데, 단순한 신도의 그것이 아니라 어떤 계시를 읽고자 몸부림치는 구도자의 그것이고, 아마도 이것은 유교의 잔상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선비들이 갖는 고결함 같은 것이 스며있다. 청마 자신도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는 분명히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숭고한 그 어떤 세계를 상정하고 그것에 반하는 것들을 박쥐나 까마귀 같은 시들에서 드러냄으로써 그 반대편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고, 그런 세계를 특별한 장식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노래하는 방식으로 썼기 때문에 정신이 직접 드러나는 효과를 낸 것이다. 그렇지만 시의 바탕에는 한시의 작법이 많이 깔려있다.★★★☆☆[4337. 7. 19.]    
80    시집 1000권 읽기 70 댓글:  조회:2174  추천:0  2015-02-11
  691□세상의 나무들□정현종, 문학과지성시인선 161, 문학과지성사, 1995   종심소욕에도 불유구라더니, 이렇게 말해도 시, 저렇게 말해도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인가? 똥을 눠도 시 코를 풀어도 시인 것만 나온다면야 세상엔 온통 천재시인들로 꽉 들어찰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풀어놓은 것들이 모두 시가 아니라는 것은 시인들 자신이 알 것이고, 그것을 시인이 모른다면 그것은 시인의 무지이거나 그를 무지의 상태에 머물게 해주는 주변의 눈먼 칭찬일 것이다. 역사는 공범까지 비판할 겨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화살은 시인 자신이 감당할 몫이니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 것은 시인 자신이다.   ‘그림자’ 같은 시를 보면 시에 전혀 무지한 것은 아닌데, 어째서 태반의 시를 그저 발상의 차원에 머물러두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 시인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우주율인데, 우주율을 인식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는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 어느 곳에서 발현되며, 그것이 어떤 절차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은 발상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한자 역시 말장난이다.★★☆☆☆[4337. 7. 1.]   692□시인의 바깥에서□김연신, 문학과지성시인선 225, 문학과지성사, 1995   시가 다른 예술의 양식을 빌려서 자신의 외연을 확장하고 형식을 실험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특히 그림에 의지할 경우, 대부분 의미의 빈혈을 겪는다. 그림을 글씨로 베껴놓은들 거기서 의미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보여주기 방법의 극단이 초래된 결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형식에 의존할 때는 그 형식이 시에 반영될 때 시에서 볼 수 있는 효과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계산하고 차용해야 한다. 이 시집의 시들 역시 이런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시를 그림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에 의미 파악이 쉽지 않고, 그것을 형식 실험의 부산물이라고 강변한다고 해도, 시각 이미지가 강화될수록 의미가 뒤따르지 않으면 뜻 없는 이미지만이 남게 된다. 이런 건 말장난처럼 보이기 쉽다. 형식이 새롭거나 실험하려는 의도이면 그것이 그렇게 된 불가피한 사연이 있어야 하는데, 시의 형식을 어렵게 풀어본 것 이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윤회의 상상력으로 접근한 어패류에 관한 시는 그 난해도에 견줄 때 정작 그 난해함을 뚫고서 잡아낸 결론은 허망할 지경이다. 정선의 그림에 관한 시 역시 그림을 글로 베꼈다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그때 어떤 의미가 시로 살아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언어가 여전히 그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도 즐길 만한 것이지만, 이런 시도는 이미 많은 시에서 본 것이다. 요컨대 그런 형식 실험에서 시의 긴장을 어떻게 퉁겨줄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퉁겨줌이 반응을 일으키는 지점은 형식만이 아니라 의미까지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실험은 늘 어려운 것이다. 한자는 성공하기 어려운 장비이다.★★☆☆☆[4337. 7. 1.]   693□렌의 애가□모윤숙, 영인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7   소화 12년, 즉 1937년에 이런 시집이 나왔다는 것은 문학사에서 볼 때 묘한 울림을 갖는다. 일제의 통치가 강화되어 국내에는 저항세력들이 거의 소멸되어 가던 시기이니, 그런 영향일까? 문제의 초점이 현실을 부정하고 지상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해 넋두리로 일관하고 있다. 시대의 우울한 정황이 이러한 일탈된 세계를 만들어냈을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조선의 여인이고, 이미 결혼한 남자를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이국 땅에서 삶을 마감하는 듯한 분위기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당시 통용되던 도덕관념을 염두에 두고 쓴 듯하다. 그런데 산문시의 전통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정도의 호흡으로 긴 시를 썼다는 것이 놀랍다. 그리고 시 전체에 걸쳐서 격정이 넘치고 있다. 전체의 구조는 밋밋한 것이 흠이지만, 감정이 시를 밀고 가는 그런 형국이다. 그런 점에서 일정한 줄거리를 갖고 있지만 서정시에 가깝다. 섬세한 감수성이 곳곳에서 돋보이기까지 하여 실패한 사랑에 대해 노래한 시로는 특별히 손꼽을 만하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라든가 통념에 대한 내용들이 시에서 굴절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서 좀 아쉽다. 호흡이 긴 시를 쓸 때는 현실을 시에서 어느 정도 드러내주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에 대한 고려가 거의 안 되었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제목이 “렌의 애가”이니, 등장하는 이라는 인물은 의 연인이겠다. 렌이니 시몬이니 하는 것은 서구 취향이어서 당시 이 시인의 감성이 어떤 방향으로 흘렀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토착화되지 못한 정서는 기름방울처럼 물위에 떠있다. 그것을 선구자의 그것으로 만드는 것은 책상머리 이론가들일 것이다.★★☆☆☆[4337. 7. 5.]   694□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268, 문학과지성사, 2003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의미를 끌고 다니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설명해버리고 나면 의미를 파악하는 것과 이미지가 함축하는 바를 찾는 일이 중첩되어 오히려 시의 주제를 파악하는데 방해가 된다. 특히 장소를 변경해가며 쓰는 시들은 자신이 왜 거기 와있는가 하는 것까지 설명하려 들면 시가 늘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의 많은 부분이 삶의 깨달음에 대한 번민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로도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표현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말하는 자신 안에 어떤 답을 갖고 있는 것이 시에 활력을 준다. 단순히 의문을 던져서 무언가에 궁금증을 갖고 있다는 정도에 머물다가는 맥풀린 시가 되고 만다. 그것은 이미 종교에 다가가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던지고 끝내는 풀지 못한 암호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집 전체를 읽어보면 그렇게 동경하는 그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 어딘지 모르고 방황하는 것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그것을 어떤 깨달음의 체계에 빗대어 아는 체하는 것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아는 것, 그래서 입을 여는 것조차도 편견이요 착각인 것이 그 세계인데,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것은 우매함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상상력은 아름답지만 도착지점도 아닌 곳에서 상상을 끊는 것은 참혹할 따름이다. 시든 도든 설명하려 들면 안 되는 법이다. 화두는 그 세계를 아는 자들이 쓰는 말이지 최소한의 성실성도 갖추지 않은 자들이 만지는 장난감이 아니다. 이 경우 최소한의 성실성이란 침묵이다.★★☆☆☆[4337. 7. 5.]   695□풀나라□박태일, 문학과지성시인선 263, 문학과지성사, 2002   시를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이다. 운율, 이미지, 시어, 상징……. 이 중에서 특정 요소에 집착할 때 생기기 쉬운 것은 불균형이다. 어떤 것은 다리가 너무 길고 어떤 것은 대가리가 너무 크다. 그렇게 돼 가지고는 제대로 된 시가 못 된다. 물론 특정 요소에 집착하는 것은 다 사연이 있다. 음악성을 추구하겠다던가, 민족어를 빛내겠다던가 하는 그런 사연들 말이다. 그러나 시는 시인 만큼 민족어든 운율이든 그것이 시를 일단 빛내는 방향으로 작용해야지, 그것이 시의 전체 균형을 허물면 좋은 시가 되기 어렵다. 이 시집의 시들은 시어와 운율에 크게 집착했다. 운율이야 탓할 것은 못되지만, 시어에 대한 집착은 의미의 결핍을 낳는다. 의미가 물러나면 시는 모호해진다.★★☆☆☆[4337. 7. 5.]   696□박목월 시 전집□이남호 엮음, 민음사, 2003   900쪽이 훨씬 넘는 두꺼운 시집이다. “청록집”의 시들을 빼놓고는 별로 보잘 것이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을 만큼 큰 이름의 시인치고는 작품의 양이나 수준이나 너무 소품이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우선 눈에 띄는 결함은 시에서 현실이 거의 증발하고 없다는 점이다. 개인의 소심한 생활을 쓴 것들이 간간이 있을 뿐,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정서가 거의 없다. 바로 이 점은 주제의 빈약과 맞물려있다. 중반 이후 주제가 제법 뚜렷해지면서 시로서 알찬 수확을 보여주는 부분은 “크고 부드러운 손”인데, 이 부분의 시들은 찬송가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깨달음이 그때 와서 그랬을 것인데, 시로서는 너무 늦은 셈이다. 시가 다루어야 할 것은 생활 저 너머의 어떤 것이라는 강한 신념이 평생의 시작 경향을 결정한 듯하다. 다만 시어를 고를 때 함부로 생각을 담아내지 않고,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선택한 태도는 거의 연금술사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4337. 7. 6.]   697□타오르는 책□남진우, 문학과지성시인선 244, 문학과지성사, 2000   시각 이미지를 주된 방법으로 활용하는 시들은 짧은 구도 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작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시각 이미지들이 주로 보여주기만 할 뿐 직접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란 시인이 제시를 하면 독자들이 그것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여 그 의미를 해독하는 기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짤막한 제시로 끝나고 나면 독자들에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전달되다 만다.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자꾸 시가 길어지는 것이고, 마침내 대작의 충동에 빠져서 결국은 성공한 시인은 ‘황무지’ 같은 대작을 쓰게 된다.   이 시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나온 시집이다. 할 말을 직접 못하기 때문에 맥풀린 제시로 끝나는 시들이 대부분이다. 짧은 시에서 시각 이미지의 제시로 성공하려면 그것이 상징성까지 아울러 동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의미를 동반하지 않은 채 이미지만 제시되고 있고, 그 이미지를 조합해 보아야 풍경 묘사에 그치고 마는 수가 많다. ‘족장의 가을’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에 해당하고, 절반 이상의 시들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 따라서 대작을 쓰던가 상징으로 건너가던가 해야 할 단계에 와있다. 지금 상태 가지고는 주제의 빈곤을 극복하기 어렵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미지의 조립이 너무 논리에 따르고 있어서 독자가 해석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한 단위로 풍경이 제시되는데, 그 풍경이 담아낼 내면 풍경이 독자의 마음속에서 확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풍경화로 머물고 만다. 말하자면 벽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마음속의 그림은 읽는 사람의 정서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뒤를 짜 맞추는 논리성이 시에서 어떤 효과를 주는가 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명징한 이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어떤 효과를 위해 종사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4337. 7. 6.]   698□시를 쓰기 위하여□김연신, 문학과지성시인선 177, 문학과지성사, 1996   사물을 보는 눈이 독특하다. 그러나 그 독특함이 시의 본령이라고 믿는 것은 시를 일그러뜨리는 원인이 된다. 형식에 집착하면 자칫 눈이 세 개가 생길 수가 있다. 괴상하다는 측면에서는 구경할 만하지만, 그런 얼굴 가지고 살기는 참 피곤한 일이다. 시가 독특한 것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 때이다. 무조건 그래야 한다는 믿음이 시집 전체를 밀고 가는 중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렇게 할 필요란 내용의 호응을 말한다. 독특한 방법이 지배하더라도 어차피 보여주어야 할 그 무엇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된다. 한자는 네 번째 눈이다.★★☆☆☆[4337. 7. 6.]   699□한없는 밑바닥에서□장영수, 문학과지성시인선 246, 문학과지성사, 2000   방법 없음도 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이다. 혼돈을 지향하는 어떤 세계를 노래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은 중년이 현실과 과거를 돌이켜보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방법 없음은 방법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생각 덩어리를 떠오르는 대로 행을 갈라 나열해 놓는다면 그것을 제대로 된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햇빛이 얼굴에 정면으로 쏟아진 순간’ 같은, 그럭저럭 읽을 만한 작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다. 한자는 그 함량마저 줄인다.★☆☆☆☆[4337. 7. 7.]   700□허공□문충성, 문학과지성시인선 252, 문학과지성사, 2001   의욕이 앞서서 소화되지 않은 채로 이미지들이 쏟아졌다. 특히 제주의 역사와 관련된 사건들과 제주의 자연을 시 속에 끌어들이려고 애쓴 표정이 역력히 보이는데, 거기에다가 어떤 이야기와 주제를 넣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아직 분명치 않아서 소재를 제공하는 데 급급했다. 특정 사건이나 사물은 그것이 시로 승화되는 계기가 꼭 있어야 한다. 그냥 제시만 해 가지고는 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인 체험이든 사고이든 그것과 연관이 되어 정서를 자극할 수 있는 부분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않고 낱말이나 이미지만 제시되면 그것이 결국은 시를 이루지 못하고 물에 뜬 기름처럼 감정의 위쪽에서 둥둥 떠다닐 뿐이다. 어떤 부분에서 접근해야 시 안으로 이미지가 들어오는가 하는 것을 좀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 한자는 빼야 할 이미지이다.★★☆☆☆[4337. 7. 7.]    
79    시집 1000권 읽기 69 댓글:  조회:1733  추천:0  2015-02-11
  681□폐차장 근처□박남희, 경계시선 11, 문학과경계사, 2002   시에서 논리를 즐기는 시인이다. 논리는 일종의 관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관념의 전후 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시는 길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념을 풀기 위한 이미지들이 난폭하게 동원된다. 그래서 시가 단단하고 야무지지만, 포근하게 와 닿지 않고 딱딱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다. 큰 주제를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무리한 이미지 동원으로 인하여 세세한 부분이 계속 전체 주제와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둘이 절묘하게 부합하면 다행이지만, 웬만큼 높은 수련에 이르지 않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관념의 덩어리를 잘게 나눌 필요가 있다. 그러면 작아진 그 만큼 그것을 실어줄 이미지 역시 작은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주제와 이미지는 어렵지 않게 맞아떨어진다. 이미지가 작다고 해서 큰 주제를 전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시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바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음이 크다고 해서 시까지 커지는 것은 아니니, 시에서 논리가 갖는 한계를 오래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 시에 논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 때문에 이미지가 다치면 논리 역시 온전하기 어렵다. 시의 호흡이 굵직굵직하고 잘 썼으되 거칠다는 느낌이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4337. 6. 21.]   682□곡비□이명주, 경계시선 12, 문학과경계사, 2002   시가 장식을 버리면 순금처럼 정신이 빛난다. 빛나는 그 정시는 별다른 장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체계도 단순해지며, 단순함이 바로 시의 가장 빛나는 무기가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 단련되어야 하고, 그것은 더 이상 단련하기 힘들 만큼 내부로 응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짧음이 갖는 긴장의 강도를 감당하기 힘들다. 그게 안 되면 시가 맥이 풀린다. 이 시집은 그런 방법과 발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 만큼 단련되지 못한 것들의 단점이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짧게 써야 할 것은 짧게 써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좀 더 살을 붙여서 섬세한 감수성을 담아낼 일이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러너 긴장이 풀어진다.★☆☆☆☆[4337. 6. 21.]   683□길 위에서 길을 찾는다□전길자, 경계시선 16, 문학과경계사, 2002   주변의 사물을 꼼꼼하게 관찰하여 그것을 시로 옮기는 태도는 성실성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시는 내 안의 의미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좀 깊이 생각해야 할 듯하다. 만약에 의식이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내 안의 어떤 것만을 말하려고 하면 시는 진부해진다.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의지만이 작동할 뿐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정신은 정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고정된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끌어들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보는 한 방편으로 이미지를 향해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4337. 6. 21.]   684□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최영철, 경계시선 2, 문학과경계사, 2001   사물에 함의된 비의를 읽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보는 시각이 확립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데, 발견은 그렇다 쳐도 그 발견을 통해 어떤 세상을 노래할 것인가 하는 것이 다소 불투명하기 때문에 애써 얻은 이미지가 장난으로 흐를 수도 있고, 그냥 발견에 대한 예찬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런 발견들이 담아내야 하는 어떤 세계를 확립하는 일에 집중해야 함을 뜻한다. 시집의 초점이 하나로 모이지 않고 흩어진 것도 단점으로 작용한다.★★☆☆☆[4337. 6. 21.]   685□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경계시선 8, 문학과경계사, 2002   서정시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사물을 보는 눈이 이미 아주 독특하게 갖추어졌다. 자신만의 시각을 갖춘다는 것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좋은 덕목이다. 사물이 갖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순수하게 시인의 의식을 반영하는 일이어서 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겠다. 설명 쪽으로 흘러가는 것만 경계한다면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시를 쓰는 방법에 대한 태도이다. 시를 쓸 때 이미지를 마주쳐서 거기에다가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 있고, 그 반대로 이미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갖추고 있다가 거기에 맞는 이미지를 찾는 방법이 있다. 좀 더 큰 시를 쓰기 위해서는 앞의 방법에는 많은 한계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찾아오기를 기다려서 쓰는 방법은 게으른 방법이다.★★★☆☆[4337. 6. 21.]   686□재즈가 흐르는 창 너머 비행기 한 대가□강수정, 경계시선 10, 문학과경계사, 2002   아주 독특한 시인이다. 상상력도 독특하고, 그 상상력을 펼치는 시어의 짜임새도 독특하며, 갖춘 세계도 독특하다. 그러니까 남들과 구별되는 시인만의 전매특허는 확보된 셈이고, 그것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갚진 덕목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전개되는 중간중간에 계속해서 덜컹거리는 것은, 시인 자신의 어눌함이라는 중요한 특색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이미지들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시집이다. 대체로 자신의 체험을 다양한 방과 층을 갖춘 구조로 전달하려는 노력과 그 상상력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재빠르게 건너가야 할 곳에서 머뭇거리고, 빨리 달려야 할 곳에서 덜컹거리는 것을 자신의 특색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사소한 부분만 보완한다면 아주 독특한 시세계를 꾸며갈 능력 있는 시인이다.★★☆☆☆[4337. 6. 21.]   687□퍽 환한 하늘□이진영, 경계시선 3, 문학과경계사, 2001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애써 잡은 비유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의미를 부여하려는 재주는 부족함이 없지만, 이 시인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한 비유체계를 잡아내는 마음의 집중도와 열정이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지가 시의 표면으로 떠오르면 시가 좀 서툴더라도 그 뜨거운 감정에 감동을 하는 법이다. 그러나 비유가 그럴 듯해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시의 분위기가 너무 냉랭하면 감동이 오지 않는 법이다. 마음이 시를 밀고 가는 것이지, 마음이 비유를 뒤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맥이 풀린 시가 된다. 무엇을 노래하고 어떤 열정으로 삶을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한 번 점검해야 할 시집이다.★★☆☆☆[4337. 6. 22.]   688□붉은 악보□김경, 경계시선 19, 문학과경계사, 2002   시는 개인의 체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만, 너무 깊이 자신 속으로 들어가 있으면 감정이 때로 모호해진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을 이룬 사건들이 그 개인의 감정을 형성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시에서 끌어내야 할 것은 결국 사건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만 더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짧은 시는 자신의 반짝이는 상상력을 드러내는 데 아주 위력을 발휘하지만 거기에 너무 재미를 느끼면 그것이 불성실하다는 느낌을 주기가 쉽다. 대개 발견으로 그치고 말 경우이다. 자신의 전 생애를 걸 만한 대단한 것이 아니면 해도 되는 설명을 함부로 생략해서는 안 된다. 한자는 큰 장애이다.★★☆☆☆[4337. 6. 22.]   689□파천무□송수권, 경계시선 1, 문학과경계사, 2001   물풀들이 뿌린 내린 바닥이 아주 견고하다. 거기서 올라오는 상상의 줄기도 다양하고 나름대로 확보된 세계가 밑바닥을 커다랗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런 크고 넓은 바닥에는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말들이 이따금 섞여 있어 그것이 흠이다. 못 마땅한 것들이 때로 문학에 좋은 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구별할 줄 아는 것 역시 대가의 조건이기도 하다.★★★☆☆[4337. 6. 22.]   690□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이선관, 실천문학의 시집 127, 실천문학사, 2000   할 말이 절실할 때는 표현을 생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어설픈 표현으로 우회시키는 것보다 훨씬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따라서 직접 말하기를 선택했다면 그때의 말은 체험의 절실성에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 그리고 그 절실함에서 뒷받침되지 않으면 시는 안 쓰느니만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집에서는 할 말이 우선하는 시집이다. 그런 만큼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시의 전면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그것을 우회시키는 방법인 비유가 곳곳에서 끼어서 오히려 불편한 느낌을 준다. 차라리 직접 말을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또 마주친 대상과 싸울 때 대상이 너무 크면 그 싸움의 방식은 풍자가 되기 일쑤이다. 그러나 풍자는 복잡한 양식이다. 따라서 전략이 필요하다. 이 시집의 주 내용들은 비판은 비판이지만 풍자 쪽으로 조금 기울어있어서 약간 애매모호한 태도를 갖고 있다.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다. 칼을 뽑으려면 섬뜩한 것을 뽑아야 한다. 풍자의 태도는 기왕에 뽑은 날까지도 무디게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4337. 6. 29.]    
78    시집 1000권 읽기 68 댓글:  조회:2226  추천:0  2015-02-11
  671□세상의 빈 집□이동재, 경계시선 21, 문학과경계사, 2003   한 곳에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발랄한 정신이 돋보인다. 그런데 그런 발랄함은 근원에 대한 고민을 놓는 순간 말장난이 되는 수가 많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 머물러 있는 시들이 적지 않다. 한 번 잡은 이미지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시로 만들어내는 것은 정신의 맷집이다. 그런 뚝심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것은 이미 재주를 넘어서서 무언가 시에서 할 말을 찾는 자의 태도이다. 따라서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점이 이 시인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다만 시가 장광설로 흘러가지 않도록 마음의 고삐를 죄고 거기에다가 세상을 더 넓게 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이 기백을 제 방향으로 이끄는 방책이 될 것이다.★★☆☆☆[4337. 6. 18.]   672□쟈끄린느 뒤프레와 함께□박몽구, 경계시선 27, 문학과경계사, 2004   할 말의 내용과 견줄 때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다 보니 꼭 수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이 있고, 그 사건에 대한 느낌이 있으며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조리정연한 수필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시의 문장을 기대하고 읽는 사람으로선 끝까지 다 읽어주기 곤란한 것들이 태반이다. 시의 문장이 수필의 문장과 다른 것은 그 긴장 때문이다. 대상을 직접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우회해서 독자가 그 우회함의 진의를 알아차리게 해서 감동의 절정과 그 절정의 말을 한 순간에 깨닫게 하는 것이 시의 언어이자 배치이다. 이렇게 수필 쓰듯이 길게 해서 쓰면 한 순간에 감동이 몰려올 까닭이 없다. 이런 식이라면 굳이 시라는 양식을 빌릴 것도 없다. 수필을 쓰면 된다. 무언가 시라는 양식에 대해서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시집이다.★☆☆☆☆[4337. 6. 18.]   673□석류꽃엔 눈물샘이 있다□박백남, 경계시선 5, 문학과경계사, 2001   생각의 독특함만으로 시를 쓴다면 철학자들이 가장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은 그런 생각을 드러내는 ‘방법’이 주는 관성 때문이다. 그 방법을 벗어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에는 벗어난 그것이 새로운 관성을 유도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이 시집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삶의 깨달음이 아주 독특하고 신선한 면이 많다. 그러나 그런 독특한 시각이 시라는 형식으로 들어갈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주 많은 시들이 수필에서 보는 산문의 그 투를 많이 끌어안고 있어서 시가 지닌 그 묘한 긴장을 건네주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이 참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그런 부분을 시인의 특징이라고 인정해주면 그만이겠지만, 그 특징이 시 형식의 관성을 허무는 쪽이라면 시의 개념을 바꾸는 수밖에 없고, 예나 지금이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는 산문 말고 시의 갈 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부를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는 이왕이면 생각을 드러내는 발상의 신선함도 고려했다면 더 좋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소한 것 같지만, 발상 자체가 시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4337. 6. 19.]   674□해변주점□이상인, 경계시선 6, 문학과경계사, 2001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읽는 사람의 감정까지 차분하게 해주는 시집이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나름대로 독특한 시각을 갖고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무리 없이 설득하는 재주가 있다. 다만, 아직도 비유라든가 해석 면에서 다소 억지스런 부분이 남아있고, 불필요하게 설명을 하려는 부분이 눈에 띄어서 아쉽다. 그리고 시집 전체로 묶었을 때 그 세계가 어떤 곳을 지향하는가 하는 것이 조금 엷다는 점 역시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시들이 많은 분위기에서 이 정도로 차분한 시각과 목소리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이 시집이 지닌 아주 훌륭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4337. 6. 19.]   675□지독한 갈등□최종수, 경계시선 17, 문학과경계사, 2002   단단하게 벼려놓은 칼 같다. 칼의 쓰임은 베는 것인데, 거기에 장식이 많으면 오히려 불편할 뿐이다. 모든 장식을 떼어버리고 빛나는 검광만을 드러낼 줄 아는 것도 대단한 실력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의 장식을 의식하지 않은 깔끔한 결론이 일관하고 있다. 이른바 운동권 시가 전멸한 가운데 독특한 빛을 발하는 시집이다.★★☆☆☆[4337. 6. 19.]   676□소리 깊은 집□최춘희, 경계시선 25, 문학과경계사, 2003   묘사를 통하여 보여주기 수법을 전개하는 시들은 감정을 직접 전하는 말들의 시와 성격이 달라서 때로 이 둘이 섞이면 효과가 반감되는 수가 있다. 이 시집은 보여주기가 주를 이르면서 거기에 말하기를 곁들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두 가지 방법이 서로를 견제하는 수가 생겨서 어느 곳에서는 생각으로 와 닿고 어느 곳에서는 느낌으로 와 닿는다. 이 두 가지가 한 시집 안에서 서로 뒤엉키면 읽는 사람은 다소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시집은 아주 분명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이런 부분 때문에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남는다. 그리고 너무 자세하게 파고들어서 오히려 감정을 전달하는 데 효과가 반감되는 경우도 곳곳에 있다. 이런 사소한 부분만 보충한다면 좋은 시를 쓸 시인이다. 한자는 경계해야 할 일이다.★★☆☆☆[4337. 6. 19.]   677□푸르른 소멸□박제영, 경계시선 26, 문학과경계사, 2003   욕망을 해체하기 위하여 다양한 실험을 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고, 그것이 나름대로 묘한 성공을 이루고 있다. 묘한 성공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본 세계를 분해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터득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경우에 간과하기 쉬운 것은 인식의 깊이이다.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려 드는 통에 그 인식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하던 것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잦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특별히 신선할 것도 없는 표현에 빠져들게 된다. 말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에 치여서 표현을 소홀하게 되고, 그것을 형식의 파괴 내지는 실험으로 대치하려는 뜻하지 않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다. 이 시집의 시들도 많은 부분 그런 우려에 다가가 있다. 따라서 욕망을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와 그것을 담아낼 변화된 어떤 형식을 좀 더 천착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한자는 여전히 장애이다.★★☆☆☆[4337. 6. 19.]   678□수렵도□이진영, 경계시선 13, 문학과경계사, 2002   적절한 이미지를 끌어들이며 시를 힘차게 전개시키는 방법을 잘 터득한 시인이다. 잔 돌부리에 걸리지 않고 거침없이 달리는 기백이 좋다. 그런데 너무 장황하다. 할 말보다 더 많은 이미지나 언어를 동원시키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전하고자 하는 말에 아주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자꾸 장황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시집이 지향하는 주제가 분명한 방향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장황한 느낌을 부추기는 점이다. 칠갑산 풍이면 칠갑산 풍으로, 수렵도 풍이면 수렵도 풍으로 초점을 몰아갈 필요가 있다. 이것저것 시집에 다 담아두면 낱낱의 시를 잘 써도 산만함으로 비치기 마련이다.★★☆☆☆[4337. 6. 19.]   679□세상 뜨는 일이 저렇게 기쁠 수 있구나□서애숙, 경계시선 15, 문학과경계사, 2002   눈에 잡힌 이미지를 선명하게 제시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시인이다. 다만 이미지를 선택할 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잘 판단해야 할 것과, 어느 선까지 이미지를 제시해야만 독자가 마음속에 제대로 된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남았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시인이 넘어야 할 가장 어려운 고비이기도 하다. 지금 단계에서는 짧은 시를 쓸 때가 아니다. 짧은 시는 묘한 경륜이 실려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선명하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제시만 하고 마는 짧은 시보다는 짧게 요약한 그 이미지가 상징하는 바를 더 정밀하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4337. 6. 21.]   680□서른 살의 박봉 씨□성선경, 경계시선 14, 문학과경계사, 2002   생활 주변의 사건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다만, 시인이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사소한 삶의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정신은 그 뒤에 서린 어떤 희망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여주기만으로도 훌륭한 전망이 될 수 있지만, 이미 많아 봐온 대상 안에서 특별히 다른 전망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도 새로워야 하거니와 그렇게 묘사한 대상이 어떤 식으로 재구성되어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까지도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자는 굳이 재구성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4337. 6. 21.]    
77    시집 1000권 읽기 67 댓글:  조회:2182  추천:0  2015-02-11
661□서울에서 다시 사랑을□이흔복, 실천문학의 시집 120, 실천문학사, 1998   시 한 편이 쓰인 상황을 그 시 스스로 설명해주지 못할 것 같으면 시집 안의 다른 시에서 그 시의 상황을 추상하여 읽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시집 안에서도 그런 연관을 찾기 힘들고, 그런 어조를 낳은 심정의 바탕도 역시 짚어내기 힘들다면 그것은 시를 쓴 사람의 탓이다. 시들이 짧은데, 시는 짧을수록 긴장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긴장은 독자가 긴장을 유발시키는 기제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파악하기 힘들다면 그것은 시를 못 쓴 것이다.   이 시집은 시에서 가장 중요한 그것을 빠뜨렸다. 결국 시를 어디서 풀어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아직 체득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시가 무엇을 얘기해야 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가 어디서 시작되고 언어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기초부터 다시 파고들 필요가 있다. 간간이 섞인 한자는 없느니만 못하다.★☆☆☆☆[4337. 6. 17.]   662□나는 부리 세운 딱따구리였다□백창일, 실천문학의 시집 119, 실천문학사, 1998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끝내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 시집이다. 시상을 전개해나가는 수법이나 시를 다듬어가는 모양은 부족함이 없는 듯한데, 직접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에두르는 것이라든지, 내용이 희박해지는데도 묘사가 계속 길게 이어지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은 큰 결점이다. 십우도 연작의 경우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라서 이미지의 연결은 매끄럽고 좋은데, 당신으로 치환된 절대자의 모습이 너무 추상성이 짙어서 언뜻 와 닿지 않는다. 십우도라는 제목과 시의 실제 내용 사이에 좀 더 긴밀한 연관을 넣어야만 살아날 시이다. 이와 같은 아쉬움이 시집 전편에 관철되고 있어서 무언가 분명한 방법을 더 찾아내기 전에는 시의 모호함이 잘 가시지 않을 듯한 시집이다. 그 모호함을 걷어내는 것이 숙제일 것이다. 한자는 모호함을 더욱 모호하게 만든다.★★☆☆☆[4337. 6. 17.]   663□그리운 막차□송종찬, 실천문학의 시집 126, 실천문학사, 1999   묘사력이 아주 뛰어나고 거기에다가 감정을 싣는 방법까지도 잘 아는 시인이다. 그런데 시집 전체에 보면 시들이 그려주는 배경 위에 우울함이랄까 절망이 지나간 뒤의 썰렁함이랄까 하는 정서가 스며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어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따라서 낱낱의 시로 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가 있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것이 선뜻 잡히지 않는 것은, 주제의 흐림도 있겠지만, 방법론상의 문제 때문이다. 즉, 그런 정서를 전달할 상황을 정확하게 설정하지 못한 탓이다. 물론 어떤 상황을 설정해서 착실하게 묘사하면 그 상황이 전하고자 하는 정서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좋은 시를 쓰려면 막연한 상황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체험 중에서 시가 될 만한 상황과 그렇지 못한 상황을 구별해야 하고, 그 중에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줄 수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잘 판단한 다음에 시를 써야 한다. 이 시집들의 세부 묘사는 아주 빼어난데도 시가 어쩐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은 그런 데서 오는 것이다. 한자는 꼭 빼야 할 충치 같은 것이다.★★☆☆☆[4337. 6. 18.]   664□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오도엽, 실천문학의 시집 124, 실천문학사, 1999   생활이 시가 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게다가 땀 나는 삶이 시가 될 수 있다는 건 땀 나는 사람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도 축복이다. 그러나 그 축복이 감동을 주려면 그냥 드러내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일종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 법칙을 어느 정도는 지켜주어야만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는 것이다. 축구 규칙을 모르고서 어찌 축구를 즐기겠는가? 말하자면 그런 생각을 깊이 해야 할 시집이다.★☆☆☆☆[4337. 6. 18.]   665□안동소주□안상학, 실천문학의 시집 125, 실천문학사, 1999   많은 말들 가운데 시에 적절한 이미지를 찾아서 그것을 완성하려고 끝까지 다듬는 모습은 여러 모로 보기 좋다. 군더더기 없이 자신이 의도한 주제를 형상화할 이미지들이 곳곳에 잘 배치되었다. 다만 전망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이미지만 깔끔하면 그것이 어쩐지 허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그것은 형식이기보다는 내용의 문제여서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전망이 없을 때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면 그건 정직한 것이다. 그런 정직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뒤이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어져 결국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일종의 퇴영인데, 그것이 퇴영으로 끝나고 만다면 시를 위해서나 시인을 위해서나 큰 불행이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한자는 걸림돌일 뿐이다.★★☆☆☆[4337. 6. 18.]   666□무궁화, 너는 좋겠다□나혜경, 경계시선 22, 문학과경계사, 2003   사물을 보는 능력도 시를 꾸려가는 힘도, 이미지를 전개하는 재주도 다 괜찮은데, 무언가 될 듯 될 듯하면서도 마지막 그 고개를 못 넘어가서 안타까운 시집이다. 그것은 너무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너무 자세히 보다 보니 동원되는 말이 많고,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시시콜콜 다 말해주다 보니 독자는 시어머니 잔소리 듣는 며느리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많아서 탈인 경우이니, 많은 것을 덜어내는 것을 익혀야 할 시집이다. 한자는 어떤 경우에도 도움이 안 된다.★☆☆☆☆[4337. 6. 18.]   667□저, 쉼표들□이종암, 경계시선 23, 문학과경계사, 2003   시에서 묘사는 실제에 대한 요약일 수밖에 없고, 그런 요약은 그 뒤에 정서를 거느리고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의 완결도 중요하지만, 어떤 이미지를 시에 그릴 것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애매하게 그려놓고 그것을 토대로 독자가 알아서 꾸며주겠지 하는 기대는 처음부터 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되면 독자의 눈에는 그것이 미숙함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언어는 대상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어떤 것을 환기해주지만 그것이 시안에서 한 초점을 중심으로 조율되지 않으면 긴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시에서 의도되지 않은 그런 이완은 치명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어떤 이미지를 쓸 것인가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담을 것이냐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한자는 고민할 것도 없이 버리면 된다.★☆☆☆☆[4337. 6. 18.]   668□인적 드문 숲길은 시작되었네□함진원, 경계시선 24, 문학과경계사, 2003   사전은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이 시에는 있다. 그것은 한 낱말이 거느릴 수 있는 다른 낱말의 관계이다. 따라서 시에서는 명사와 동사가 한 몸뚱이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문법에는 이상이 없을지 몰라도 의미전달에는 문제가 생긴다. 특히 그것이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말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명사와 동사의 관계를 흔들어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말 재미나 표현의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표현으로서는 그럴 듯해 보일지 몰라도 시로서는 감점 요인이다. 그런 감점 요인이 아주 많이 드러난다.   또 시로 써서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을 생각했어야 할 시들이 적지 않다. 많은 낱말들이 한 이미지, 한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 한 장면을 그리는데 불필요하거나 불거져 나오는 것들은 과감하게 잘라낼 필요가 있다. 시집 전체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잘라야 할 물건이다.★☆☆☆☆[4337. 6. 18.]   669□연어의 말□임동윤, 경계시선 7, 문학과경계사, 2001   시를 대하는 태도랄까, 성실성이랄까? 그것이 너무 진지하고 정직해서 문제인 시집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라든지, 애써 얻은 주제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살을 입히고 꾸며서 보여주려는 노력이 일관되게 드러나는 시 세계인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가 무거워진 형국이다. 생각과 이미지가 활달하게 치닫고, 멈출 곳에서 멎고 해야 하는데, 늘 고만고만한 어조와 발상법이 일관되게 나타나서 졸음을 불러온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발상의 격식을 과감하게 바꿔볼 필요가 있다. 문제를 드러내는 방법이나 접근하는 방향을 과감하게 뒤집거나 바꾸어서 이 단조로움을 벗어볼 필요가 있는 시집이다.★★☆☆☆[4337. 6. 18.]   670□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뜻하다□주용일, 경계시선 20, 문학과경계사, 2003   시가 작은 이야기를 해도 큰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시인이다. 큰 이야기를 다루려 하지 않고, 작은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큰 이야기를 할 줄 알며, 말에 빨려들지 않고 말의 맛을 낼 줄도 아는,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잘 다루는 시인이다. 다만, 시들이 너무 소품에 머물러 있다는 것과, 대부분 애써 다룬 것들도 남들이 벌써 한 번씩 훑고 간 것들이라는 것이 끝내 아쉬운 부분이다. 방법상으로도 아쉬운 구석이 있다. 언어가 관념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해서 겉도는 묘사가 간간이 눈에 띈다.   그리고 가장 큰 아쉬움은 시에 비전이 없다는 점이다. 큰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 속으로 침몰하면서도 끝내 놓칠 수 없는 꿈이 있어야 한다. 그 꿈이 너무 희박하거나 잘 드러나지 않아서 일상의 무의미한 의미들을 반복하고 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리고 시집 전체에서 초점이 서너 가지로 나뉘는 것도 큰 단점이다. 따라서 시집 전체의 주제를 한 곳으로 모는 것과, 새로운 것을 꿈꾸는 의지만 조금 살아난다면 앞으로 좋은 작품을 쓸 시인이다. 한자는 빨리 버려야 할 걸림돌이다.★★★☆☆[4337. 6. 18.]    
76    시집 1000권 읽기 66 댓글:  조회:2008  추천:0  2015-02-11
  651□통영 바다□최정규, 실천문학의 시집 113, 실천문학사, 1997   문학은 이데올로기를 표현하는 양식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양식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시집도 보기 힘들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몰골부터 전면으로 드러나는 많은 운동권 시집들하고는 전혀 다른 시집이다. 통영이라고 하는 한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거기 뿌리 내린 사람들의 표정을 아주 자세하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그려냈다. 문학이 삶에 뿌리내리기는 쉬워도 한 지역에 뿌리내리기는 어려운 법인데, 자신의 삶이 드리운 한 지역을 이만큼 고집스럽게 그리는 것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중요한 미학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다만 너무 설명조로 흐른 것 때문에 시가 곳곳에서 지루해지고 그 부분들이 그릴 전체의 모습이 선뜻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진정한 명작이 되기 위해서는 세부를 넘어선 어떤 전망까지 담아야 한다.★★☆☆☆[4337. 6. 16.]   652□먼 길을 움직인다□맹문재, 실천문학의 시집 112, 실천문학사, 1996   시를 많이 써본 솜씨인데, 내용 때문에 시의 겉모습이 많이 일그러져 있다. 할 말이 이미지의 전체 모습을 흔들면서 생기는 일이다. 맹렬한 주제는 때로 시의 전체 균형을 허문다. 그리고 의도한 것이겠지만, 주변의 사물과 인물이 자기 중심으로 해석되어 좀 무리수를 둔다 싶은 구석도 있다. 시집 뒷부분의 회고조는 다른 부분과도 잘 안 어울린다. 그러나 서정성으로 사건을 끌어들이고 시의 관성 안에 주제를 묶어두는 능력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어느 쪽이든 너무 경직되면 시가 볼품이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게 하는 시집이다.★★☆☆☆[4337. 6. 16.]   653□사과 향기가 만드는 길□이양희, 실천문학의 시집 111, 실천문학사, 1996   섬세한 관찰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양식이 시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시집이다. 여린 감수성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시에서 도외시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엉뚱한 전통이 서는 바람에 그런 세상이 시의 본래 영역이라는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혀진 이 시점에 이런 빼어난 시집이 나온다는 것은 한국시의 한 반성이자 거울이 될 법도 하다. 전혀 꾸밈이 없고, 정직한 감수성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한 아름다운 정신세계가 이론이나 논리가 아닌 감성으로 발견된다. 이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서정시의 한 절정을 보여주는 시집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설명조의 시상 전개와 군더더기를 끝내 청산하지 못한 미숙함이 단점으로 작용하지만, 그런 단점마저 덮어버릴 만큼 시의 영혼이 맑고 순결하다. 이 자세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 점만 유지된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뛰어난 서정시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한자는 불필요한 장식이다.★★☆☆☆[4337. 6. 16.]   654□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오봉옥, 실천문학의 시집 116, 실천문학사, 1997   전망을 잃고 영각 켜는 소리가 들리는 시집이다. 전망을 잃으면 주변을 돌아볼 수밖에 없고, 전망 없이 돌아보는 주변의 풍경들이 시집으로 형상화되었다. 특별한 방법이 있다기보다는 주로 생각의 간절한 부분을 수사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절실성 때문에 긴장이 느껴진다. 그러나 절실함만으로 쓰는 시는 한계가 있다. 체험에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 한 체험을 공공의 체험으로 만드는 것이 상상력이고, 그 상상력을 가볍게 보면 절대로 큰 시인이 될 수 없다. 한자는 몸에 박힌 가시이다.★★☆☆☆[4337. 6. 16.]   655□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이강산, 실천문학의 시집 105, 실천문학사, 1996   어조도 단조롭고 시상 전개 수법도 밋밋한 것이 흠이지만, 주제가 뿌리내린 대지가 든든한 것이 강점이다. 생활 주변에 꼼꼼한 관찰을 준 것이며, 이제는 한물 간 것처럼 여기지지만, 인류가 도외시할 수 없는 중요한 역사의 의미를 거기서 읽어내려는 노력은 아주 값진 것이다.   그러나 고민의 방향이 너무 전망을 잃고 자신의 내부로 침잠한다는 것이 중요한 단점이다. 이런 시의 경우 사소한 것에서 모순의 한 극점을 보아야 하지, 주변의 절망에 잠겨서 그 감성을 곱씹을 때가 아니다. 역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시의 전망을 위해서도 그런 침잠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굳이 이쪽에서 하지 않더라도 슬픔과 절망을 곶감 빼먹듯 울궈먹으며 명성을 떨치고 돈을 버는 시인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좀 더 냉정하게 역사와 현실을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 이 시인이 나아갈 방향인 셈이다. 한자는 그 길을 가로막은 장애이다.★★☆☆☆[4337. 6. 17.]   656□메나리 아리랑□안용산, 실천문학의 시집 102, 실천문학사, 1995   말로 이끌어가는 시는 이미지가 만드는 상호연관성의 긴장이 없기 때문에 주제의 선명도가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된다. 따라서 시가 어떤 의미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하는 것이 시의 수준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할 말이 또렷해야 하고 그 또렷함이 시 전체를 이끄는 방향타의 구실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 시집의 경우에는 같은 말들이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고 어조까지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기 때문에 시가 지루하다. 따라서 그 지루함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가 가장 중요한 난제이다. 한자는 어떤 면으로도 도움이 안 된다.★☆☆☆☆[4337. 6. 17.]   657□몽유 속을 걷다□김신용, 실천문학의 시집 118, 실천문학사, 1998   특이한 체험이 시에 무리 없이 아주 잘 녹아들어서 한 독특한 세계를 이루는데 성공한 시집이다. 문학에서 체험의 다양성은 중요한 재산인데, 유독 시에서는 그것이 명작으로 승화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시가 워낙 단순한 양식인 데다가 굳이 특별한 체험을 통하지 않더라도 시가 전할 수 있는 내용이 어떤 전제된 가정 위에 서있어서 그 가정만 받아들여진다면 특수한 체험으로도 전달할 수 있는 내용들이 얼마든지 잘 소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선문답처럼 이미 어떤 전제된 긴장 위에서 진행되는 화법이기 때문에 시에는 굳이 특별한 체험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면 그 변한 모습이 새로운 전제가 되어야만 전할 수 있는 내용이 생긴다. 그것이 근대의 사회 구조이고, 그 구조 속에 깃든 인간의 영혼이다. 이 부분을 전하려는 노력이 많은 시인들에게서 나타났고, 그런 노력의 역사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데, 그런데도 아쉬운 부분이 남는 것은 그런 다양한 변화를 시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구석이 여전히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특별한 체험은 자칫 일반이 공유할 수 있는 감성의 체계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특수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시집의 경우는 바로 이 특수함이 시를 살리고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미 이런 화법이 통할 만큼 우리 사회가 변했고, 그 변화 위에서 특수함이 받아들여질 만큼 필요한 어떤 전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한 극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이기에 이 시집은 시의 한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만 불필요한 한자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동원된 장황한 이미지들이 문제가 된다. 좀 더 단정하고 날카롭게 될 수 있을 법한데, 다변으로 하여 산만해졌다.★★★☆☆[4337. 6. 17.]   658□정신은 아프다□이용한, 실천문학의 시집 107, 실천문학사, 1996   주제를 싣고 거침없이 상상력을 펼치는 패기가 아주 좋다. 시들이 이리저리 빠지는 듯하면서도 할 말을 향해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솔해서 끌고 가는 것이 활달하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다소 경솔해 보이고, 그 경솔함은 주제의 흐름을 두어 가지로 갈라버리기 때문에 시집 전체로는 약점이 된다. 상상력이 활달하면 그 활달함 때문에 진지한 주제를 다루기 어렵다. 그래서 정작 진지해져야 할 곳에서도 톡톡 튀는 경향은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큰 단점이다. 한자는 그런 경향과 상관없이 장애이다.★★☆☆☆[4337. 6. 17.]   659□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조용미, 실천문학의 시집 106, 실천문학사, 1996   시집의 앞부분 절반이 습작의 냄새를 못 벗어났다. 전체를 꾸미는 재주는 있는 것 같은데, 시각이 너무 작은 것에 집착을 하고 있어서 정작 큰 것을 볼 때 방해가 되는 이미지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모든 이미지나 구조가 시의 주제를 향해 달려가는 가운데 그런 방향을 방해하는 것들부터 걷어내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의 양과 일정 정도 비례한다는 사실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시집 뒷부분으로 가면서 시가 아주 안정된 어조와 구조를 보이고 있지만, 앞부분의 단점은 안타깝고 아쉬운 것이다. 한자는 백해무익이다. 실천문학사에서 이런 시집을 낸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4337. 6. 17.]   660□어떤 청혼□정기복, 실천문학의 시집 123, 실천문학사, 1999   시에서 묘사는 아주 중요하고, 그 위치에 따라 시의 질을 좌우하는 중요한 작용을 하지만, 자칫 잘못 쓰이면 묘사로 끝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묘사는 아주 냉정한 방법이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듯하면서 내면의 감정을 일거에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묘사다. 그런 만큼 그 방법도 내용도 철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넋두리만도 못한 방법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묘사가 절실한 방법이 되어서 성공하도록 하려면 묘사되는 그 그림의 밑바닥에 맨틀처럼 꿈틀거리는 거대한 감정이 고여있어야 한다. 그것은 한이라고 할 수 있는 뿌리깊은 것일수록 좋다. 어쩌다 발견하는 조그만 감정 가지고는 실패하기 딱 좋은 것이 묘사라는 방법이다.   이 시집에서는 묘사가 그럴듯하게 잘 된 것 같은데 그 묘사가 드러낼 내용물이 너무 얕다. 그렇기 때문에 애써 공들인 것들도 그냥 겉돌고 만다. 게다가 앞부분에서는 상황에 적절치 못한 이미지들까지 등장해서 흠을 더욱 키우고 있다. 요컨대 너무 서둘러서 시집을 낸 것이다. 그리고 실천문학사에서 나올 시집도 아닌 것이다.★☆☆☆☆[4337. 6. 17.]    
75    시집 1000권 읽기 65 댓글:  조회:1982  추천:0  2015-02-11
  641□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김수열, 실천문학의 시집 131, 실천문학사, 2001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웃에 애정 어린 관심을 두는 태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돋보이는 작품이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의미의 지휘에 조용히 복종하면서 시를 통일된 상으로 이끌어 가는 양상이 볼 만하다. 그러나 전망의 결핍과 불필요한 반복, 무의미한 탄식이 곳곳에서 시를 흠집 내고 있다. 게다가 중간에 이유 없이 섞인 한자는 이러한 흠을 더욱 크게 만든다.★★☆☆☆[4337. 6. 15.]   642□나는 상처를 사랑했네□나종영, 실천문학의 시집 130, 실천문학사, 2001   갈팡질팡이다. 대들보가 무너져버린 집의 몰골을 드러낸 셈인데, 이야기하는 것들이 너무 다양해서 통일이 안 될 정도이니, 시집 한 권으로서는 치명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나가면서 그것을 채울 길 없는 시선이 주변의 자잘한 일상과 자연물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언어를 다루는 능력은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그 어떤 것을 채워도 그것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때는 그 중요한 것이 솟아오를 때까지 무한정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아예 절필에 이르더라도 말이다. 그런 가운데 한자는 정말 대책 없는 허영심이다.★★☆☆☆[4337. 6. 15.]   643□당몰샘□박두규, 실천문학의 시집 134, 실천문학사, 2001   민중문학의 모색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집이다. 이 시집만이 아니라 실천문학사의 시집들이 대체로 그런 고민에 빠져있다. 눈앞의 적과 싸워야 하는데, 아무도 지원해주지 않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시의 고민을 만든다. 이 시집의 대부분도 그런 어이없는 상황에 대한 모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장보다는 관찰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다만 그 관찰이 자신의 내부로 향하지를 않고 밖으로 향하기 때문에 답을 찾기는 어렵다. 아마도 민중문학의 문제는 이것일 것이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변한다는 사실. 어떻게 변해야 할지 막막한 감정이 이 시집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밖을 보아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자신의 내부를 보아야 한다. 답은 안에 있다. 한자는 어이없다.★★☆☆☆[4337. 6. 15.]   644□오래 휘어진 기억□김만수, 실천문학의 시집 133, 실천문학사, 2001   서로 화합하기 힘든 세계가 잘 형상화될수록 일은 더 글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죽음은 불교의 윤회설로 돌아가고, 불교는 현실을 등지는 좋은 도구가 되며, 그 도구 뒤에 남은 현실은 다시 죽음을 앓고 있다. 이 시집은 이런 모순을 곳곳에서 그리고 있다. 애초부터 그것이 조율되어 시인의 인식이 그런 모순을 담아내는 큰 틀을 갖고 있어 형상으로 승화되면 상관없지만, 이 시집의 시인은 그런 인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집착을 버린 곳에서 인식이 깊어지기 마련인데, 아직 집착을 버린 것도 아니고 인식이 아주 깊이 들어간 것도 아니어서 다소 어정쩡하다. 지금의 민중문학이 놓여있는 상황에서는 인식으로 아주 깊이 들어가서 현실로 돌아 나오는 방법이 유일할 듯하다. 한자라는 봉건세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4337. 6. 15.]   645□무화과는 없다□김해자, 실천문학의 시집 135, 실천문학사, 2001   민중문학의 출발점은 시인 자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일이다.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또는 서 있어도 그것을 정확히 논리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고, 바로 그 공허 때문에 사람들이 공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웃의 아픔을 노래한 시들이 살아남으려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짚고 그 위치에서 이웃의 아픔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받아들임의 자세가 사람을 감동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이 시인은 바로 그 점을 정확히 시에 실현하고 있다. 시인이 이런 원리를 아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으로 바로 그 난제를 해결하고 있다.   따라서 침체에 빠진 민중시의 한 활로를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민중시의 한 구원일 수 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과 그것이 자본의 지배 하에서 어떤 질곡으로 자신과 이웃을 조여오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굳이 페미니즘을 논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체제하의 최대 피해자인 여성노동자의 감성은 민중시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은 그 마지막 지점을 은은히 비추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한자만 빼면. 어찌 되었거나 낙타도 코뚜레를 하던가?★★★☆☆[4337. 6. 15.]   646□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양문규, 실천문학의 시집 138, 실천문학사, 2002   한 풍경을 깔끔하게 보여주는 솜씨는 아주 뛰어나다. 군살을 붙이지 않고 한 풍경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것은 여간한 수련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시에서 풍경 묘사는 반드시 그것이 전하고자 하는 어떤 세계를 전제로 한다. 세계의 한 끝을 끄집어내는 그런 묘사이어야 한다. 아무리 풍경이 깔끔하게 묘사되어도 그 풍경이 일구고자 하는 세계가 희박하거나 이미 있는 구태의연한 세계이면 그냥 풍경으로 그칠 뿐이다.   풍경의 현장을 절간으로 돌린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절간으로 가면 절간에 그 전에 갔던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그대로 반복하면 안 된다. 그런 반복은 안 본 것과 같다. 이 시집의 전반부는 거의 절을 배경으로 하는데, 거기서 하는 얘기가 앞사람들의 얘기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뒷부분의 시들은 그나마 배경으로 하는 곳이 속세여서 절간이 거느리던 신선미도 떨어진다. 한자는 정말 봐주기 힘든 배경이다. 그러고 저러고 이런 시집이 어찌하여 실천문학사에서 나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말로 싸움이 끝났다는 건가?★★☆☆☆[4337. 6. 15.]   647□황토 마당의 집□김태수, 실천문학의 시집 138, 실천문학사, 2003   호흡이 긴 시들인데도 긴장이 늘어지지 않게 잘 이끌어 간 능력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이야기가 시에 들어오면 시는 늘어질 수밖에 없다. 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특별한 구조를 지녔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대부분 줄거리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결국 시속으로 이야기를 끌어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이 시집 역시 그런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야기의 단위를 작게 나눔으로써 한없이 늘어지는 것을 겨우 막아냈다. 제1부의 시들이 추억 속의 사건들을 불러내어서 추억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했다.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제3부 장시 ‘그 골짜기의 진달래’는 거창양민학살 사건을 다룬 것인데, 역시 사건의 무게에 눌려서 시가 밋밋해진 것이 흠이다.★★☆☆☆[4337. 6. 15.]   648□늙은 산□장용철, 실천문학의 시집 110, 실천문학사, 1996   사물에 대한 해석을 해석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도 좋고, 포착된 이미지를 끝까지 완결하려는 집중력도 대단하다. 다만 제1부의 시들 중에는 필요 이상으로 독특한 시각을 드러내는 것이 시의 신선미를 좋게 한다는 불필요한 믿음이 서려있고, 뒤로 가면서 추억에 너무 매몰되어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띈다. 이런 특징은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시를 이끌며 그것이 때로는 부분에 관심을 묶어두어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큰 시각에서 인지하도록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잘한 발견들을 무시하고 큰 인식의 결과만으로 시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배려이다.★★☆☆☆[4337. 6. 15.]   649□지독한 불륜□공광규, 실천문학의 시집 109, 실천문학사, 1996   무엇보다도 할 말이 분명하다는 것이 장점이고, 시가 그 말을 중심으로 모든 이미지와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틀마저도 깨면서 주제가 툭툭 불거지나 그것 역시 생각을 드러내는 한 모습으로 볼 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할 말이라는 것이 자조, 자탄, 절망 같은 것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절망을 뚫고 일어서는 어떤 조짐을 읽는 눈이 시인의 진짜 눈이다. 자본의 번화한 모습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자본의 생리가 불러올 수밖에 없는 인간 해방의 한 구멍을 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다음 시대를 여는 정직한 절망일 것이다. 한자는 제일 먼저 청산해야 할 봉건의 유산이다.★★☆☆☆[4337. 6. 16.]   650□무엇이 너를 키우니□이은봉, 실천문학의 시집 108, 실천문학사, 1996   할 말이 없을 때는 침묵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집이다. 우선 이야기를 꾸며가는 능력이 좋아서 시가 무리 없이 잘 전개되고 있고, 그것은 시를 많이 써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방향을 잃으면 때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시들이 있다. 그럴 때는 차라리 절필을 하거나 잠시 쉬는 것이 정답일 경우가 많다. 이 시집의 시들도 대부분 무의미한 시들이다. 일상사의 자잘한 풍경 속에서 어떤 희망을 읽어내자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절망을 정직하게 말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부로 침잠하여 수양하자는 것도 아니니, 그럼 뭔가? 정답을 모를 때는 컨닝보다는 백지로 내는 것이 자신에게 더 당당하다. 한자는 오점이다.★★☆☆☆[4337. 6. 16.]    
74    시집 1000권 읽기 64 댓글:  조회:1756  추천:0  2015-02-11
  631□착란의 돌□함기석, 시작시인선 9, 천년의시작, 2002   시라는 인형극에서 이미지라는 인형들을 조종하는 끈은 의미와 주제라는 것인데, 이 끈이 끊어지면 현란한 이미지들의 부침만 남는다. 그것의 연결을 최소한으로 남겨두는 것이라면 난해라고 하겠지만, 최소한으로도 남겨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위나 실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 최소한의 경계 안팎에 걸쳐있는 시집이어서 딱히 어떻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시집만 가지고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으로 본다면 또 다른 조명 방법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다만 치열한 정신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면 그것은 절반 이상의 성공이라고 봐야 한다.★★☆☆☆[4337. 6. 12.]   632□달이 뜨면 나무는 오르가즘이다□변의수, 시작시인선 11, 천년의시작, 2002   이미지 순결주의라고나 할까? 의미의 체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영역에서 이미지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스스로 연결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 독특하다. 특별한 의미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틀림없이 당황하게 될 그런 시집인데, 이미지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 나름대로 어떤 질서를 형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주제를 이미지로만 대체한다고 해서 시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에 대해 너무 정직한 나머지 시의 형식에 고착화되는 답답한 느낌이 있기에 하는 소리다. 그리고 시각 이미지에만 집착하면 자칫 시가 그림으로 전락하는 수가 있다. 한자는 순결한 이미지가 되지 못한다.★★☆☆☆[4337. 6. 12.]   633□슬픔도 진화한다□김왕노, 시작시인선 12, 천년의시작, 2002   주제도 그렇고, 시를 이끌어가는 힘도 그렇고, 이미지 전개 능력도 그렇고,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시가 어쩐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단 한 가지 문제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시는 무언가 그럴듯한 방법으로 그럴듯한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쉽게 말해 시는 좀 그럴듯해야 한다는 엉뚱한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해도 되는 것이 무언가 그럴듯한 표현에 실려야 한다고 믿는 것 때문에 일상 밖의 백과사전처럼 광범위한 지식이나 학문에 의존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내 시가 담고 있는 그럴 듯한 내용에 상대가 공감해야 하므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태도가 시를 길게 만든다. 따라서 주제를 분명히 정하되 그것을 어떻게 전하는 것이 좋은 효과를 낼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4337. 6. 14.]   634□꿈꾸는 자는 유죄다□류외향, 시작시인선 13, 천년의시작, 2002   자세한 묘사를 통해 정서를 전달하려는 의지는 자칫하면 자세한 그 관찰력 때문에 전체의 주제를 놓치거나, 전달이 잘 안 될 만큼 독자의 시선을 세부에 묶어두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이 시집의 시들은 아주 자세하게 자신의 일상을 소재로 해서 시로 승화되었다. 그런데 시의 장점은 그런 소소한 관찰에서 우주 전체의 흐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묘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서도, 그런 시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경우이다.   대상에 접근하고 그것을 생각의 틀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너무 밋밋하다. 시가 일부러 복잡하려고 할 것은 없지만, 독자가 읽을 때 다양한 울림을 줄 수 있도록 구조의 다층성을 갖추는 것이 좋다. 작은 대상을 노래할 때 그것을 계기로 큰 것으로 메아리쳐 가는 그런 어떤 방법이 시에는 있으니, 그것을 찾는 것이 이 시인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한자는 굳이 풀 필요가 없는 숙제이다.★★☆☆☆[4337. 6. 14.]   635□상처가 스민다는 것□강미정, 시작시인선 15, 천년의시작, 2003   시가 한 곳에 오래 머물러있다는 것과 그 오램이 집중된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다른 것인데, 그것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시의 진정한 힘이고, 이 시집의 시들은 바로 그런 시의 힘을 아주 잘 보여준다. 시간, 상처, 아픔, 길 같은, 이미 더 이상 다룰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진부한 주제들이 시인의 독특한 시각에 의해 재구성되면서 아름다운 세계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소중한, 그것’을 볼 정도로 시인의 사고는 성숙된 상태다. 그것은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생을 바라보는 시각의 성숙도와도 관련이 있는 깊은 세계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끝없이 사고하고 이미지를 찾아내기에 이런 놀라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남들이 다 가본 세계에서 남들이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는 곳에 도달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시인은 그런 지점에 가 닿았다. 놀라운 일이다.   다만 시집 뒤쪽의 몇 편은, 위험하게도, 남을 너무 의식한 상태에서 씌어졌다. 남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답습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게다가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한자는 애써 이룬 자신의 세계를 깎아먹는 일이다.★★★☆☆[4337. 6. 14.]   636□내 눈앞의 전선□이향지, 시작시인선 14, 천년의시작, 2003   시의 상징을 아주 잘 이해하고 쓴 시집이다. 상징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아주 깊고 간단하게 전달하는 방식인데, 그것을 잘 활용한다는 점에서 능력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그런데도 시집 전체가 어수선해 보이는 것은 작품의 수준이 똑 고르지 않은 데다가 시들이 지향하는 초점이 한 군데로 쏠리지 않고 흩어졌기 때문이다. 상징으로 파고들다가도 회고조가 되기도 하고, 회고조로 갔다가 예언을 하기도 해서 방법상으로 상징이라는 한 자리가 형성되었는데도 태도가 일관되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전체의 호흡을 고려하지 못한 결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구조만의 한 호흡이 아니라 시각과 어조의 한 호흡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한자는 깨달음에도 어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4337. 6. 14.]   637□청산을 부른다□윤중호, 실천문학의 시집 117, 실천문학사, 1998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인의 의식이 현실의 어디에 닿아 있냐 하는 것이다. 어디에 닿아있는지 분명치 않을 때를 일러 시가 관념화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시의 관념성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집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간 것 같지만, 말만 자연일 뿐 현실의 어느 지점과 그 자연이 만나는 지 전혀 드러나지를 않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모호해졌다. 자연의 지명은 대개 연고를 갖고 있는데, 그런 연고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붕 떠있다. 따라서 어떤 시각으로 자연을 노래해야 하며 어디서부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부터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시집이다. 한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길이다.★☆☆☆☆[4337. 6. 14.]   638□환한 저녁□고증식, 실천문학의 시집 129, 실천문학사, 2000   검게 탄 얼굴 속에서 더욱 빛나는 흰자위처럼, 시들이 현실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뿌릴 박은 채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왕왕 현실의 아픔에 들떠 관념으로 비화하기 일쑤인 주제들도 일제히 현실 속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이 아주 큰 장점이다. 그리고 이런 차분함은 삶의 종말인 죽음을 바라보는 어떤 일정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현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남은 숙제이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다. 또 시가 되기 어려운 것들까지 시로 만들려는 과욕이 곳곳에 있다. 게다가 현실의 아픔을 바라보는 시인에게 미래의 전망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이 시집의 가장 큰 결함일 것이다. 그것이 꼭 시인만의 탓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시인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시는 전후 결사가 완벽하더라도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4337. 6. 15.]   639□누워서 부르는 사랑노래□김해화, 실천문학의 시집 128, 실천문학사, 2000   삶이 시에 우선한다는 믿음은 한 굵은 전통이지만, 세월이 흘러간 뒤에 남는 것은 삶이 아니라 시다. 그러기 위해서 시가 지닌 긴장과 비유, 상징의 수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런 것을 배워서 스스로의 삶을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시인이다. 격정 때문에, 혹은 여러 여건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말릴 필요가 없지만, 없애되 되는 군더더기를 끌어안고 있다면 그것은 삶에 진실할지언정 시에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시가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는가 하는, 형식상의 문제를 좀 더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박노해는 내용 때문에만 박노해인 것이 아니다.★☆☆☆☆[4337. 6. 15.]   640□총알택시 안에서의 명상□이승철, 실천문학의 시집 132, 실천문학사, 2001   참!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시집이다. 사람이 아프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프다고 엑스레이 사진을 한 장 붙여놓고서 그것을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한다면 보는 사람은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엑스레이 사진이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나타난 증상에 대한 전후 사정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데는 사람들이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인식하는 일정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 준비란, 꼭 어떤 형식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태도를 말한다. 그러니 아픈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데, 그것이 울림을 주려면 그 울림을 위한 어떤 통로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좀 더 아프게 채찍질하는 데서 온다. 적이 돌아보아야 싸움이 되는 것이지, 보지도 않는 적을 향해 도전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떼쓰는 것이다. 통증의 원인을 좀 더 자세히 말해줄 필요가 있다.★☆☆☆☆[4337. 6. 15.]    
73    시집 1000권 읽기 63 댓글:  조회:2106  추천:0  2015-02-11
  621□오래된 엽서□안상학, 시작시인선 33, 천년의시작, 2003   가던 길이 막히면 물은 고인다. 그냥 고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위를 높이면서 그 맨 밑바닥에는 수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장전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새로운 길이 뚫리면 무서운 힘으로 돌진하며 거침없이 내닫는다. 말하자면 이 시집은 그런 모색의 장이다.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감정들이 발견과 인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해 더듬거리는 더듬이가 곳곳에 내장돼있다. 주변 사람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도 그런 것이고, 자신이 딛고 있는 자연 환경을 친절하게 묘사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너무 많은 정력을 묘사에 소비하고 있다. 한자도 그런 소비 중의 하나이다. ‘하지정맥류’ 같은, 큰 시야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수압을 추가해야 한다.★★☆☆☆[4337. 6. 10.]   622□나비의 침대□김형술, 시작시인선 2, 천년의시작, 2002   사물을 보는 독특한 시선이 확립돼있고, 그것을 집요하게 풀어내는 노력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장황하달까? 내용에 너무 많은 수사나 이미지들이 동원되고 있어서 시의 경제성을 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듯하다. 시가 풀어져서 안 될 것은 없지만, 그렇기 위해서는 시 이전의 어떤 논리가 필요하다. 시는 긴장과 압축을 생리로 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의 내용이 긴장과 압축으로 해도 좋고 그래야만 빛을 더 발할 수 있는데 그 반대로 풀어진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말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거추장스런 군더더기를 한 꺼풀 더 걷어내야만 할 것 같다.★★☆☆☆[4337. 6. 11.]   623□나무 비린내□김영준, 시작시인선 28, 천년의시작, 2003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것처럼 말한다는 점에서 시는 일종의 거짓말이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을 하는 시인은 거짓말쟁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에서 쓰는 그런 거짓은 일종의 방법이고, 그 방법은 심중에 품은 어떤 것을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악의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좀 거짓말을 잘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시집의 시인은 너무 정직하다. 자신의 할 말만을 꾸밈없이 전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의 거짓성이 만드는 풍부한 울림이 거의 없다. 이렇게 거짓을 이용할 뜻이 없을 경우에는 그대로 독자의 가슴을 섬뜩하게 베어버릴 수 있는 날카로움과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불교의 이미지들이 그런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좀 더 깊어지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하겠다. 한자는 탈출구를 가로막은 빗장에 지나지 않는다.★☆☆☆☆[4337. 6. 11.]   624□지나가나 슬픔□조항록, 시작시인선 5, 천년의시작, 2002   심리를 묘사로 대체하는 것이라든지, 비유체계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을 보면 시에서 필요한 기법을 다 배운 것 같은데, 정작 자신의 육성이 없다. 이것은 시의 기법 쪽의 문제라기보다는 내용 쪽에서 오는 문제이기 쉽다. 시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의 이미지가 보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따라서 이미지를 따라가면서 시를 쓰지 말고, 먼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분명히 한 다음에 거기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처럼’으로 연결되는 표현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그 표현들이 너무 밋밋하고 새로운 맛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처럼’은 연결사지만 그것이 그냥 표현을 위한 표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직유라고 하더라도 내용을 강하게 환기해서 상징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작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참신해서 눈을 확 잡아끄는 것이던가 해야 한다. 한자는 불필요한 비유이다.★☆☆☆☆[4337. 6. 11.]   625□일개의 인간□주종환, 시작시인선 3, 천년의시작, 2002   물신화한 자본과 그 종속자들을 야유하고 풍자하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나는 시집이다. 너무 솔직하다고 할까? 우직하다고 할까? 다른 시집들이 현란한 기교와 복잡한 상징을 써서 공격하는 데 견주면 이 시집의 방법은 너무나 단순하다. 그냥 논리로써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욕하는 것이다. 일종의 장광설 전법이랄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시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생각의 뼈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의 뼈를 직접 드러내서 쓰는 시들은 그 깊이와 날카로움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의 문제와 이어지지 않으면 공염불로 전락하기 쉬운, 허약한 위치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장판교의 장비도 꾀를 썼기 때문에 조조의 백만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장판교에서 혼자 서있기에는 대군의 기가 너무 세다. 한자는 부실한 무기이다.★★☆☆☆[4337. 6. 11.]   626□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정병근, 시작시인선 6, 천년의시작, 2002   사물의 존재 근거와 방식을 인식하고 그것을 시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보통의 능력과 노력 가지고는 되지 않는 일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조금씩 그런 행위를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이 시집의 시인은 이런 점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인식의 밝기가 자신의 앞길을 환히 비추고 있어서 시인의 눈 속에서 사물들은 전혀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며 살아난다. 이 점 그 누구도 쉽게 따를 수 없는 이 시인만의 독특한 점이 있다.   아쉬운 것은 그 인식을 잘 드러내는 방법에 좀 서툴다는 점이다. 많은 시들에서 생각이 조금만 더 뻗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쉬운 그 자리에서 멈추고 있다. 이것은 인식 훈련의 깊이와도 관련이 있다. 아직 성숙한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그런 것인데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큰 시인이 될 여러 가지 가능성이 엿보인다. 한자는 쓸수록 장애가 될 것이다.★★☆☆☆[4337. 6. 11.]   627□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한혜영, 시작시인선 4, 천년의시작, 2002   습작을 착실하게 배운 시인이다. 적당히 살을 입힐 줄도 알고, 에둘러 말할 줄도 안다. 그런데 습작은 건너가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기법을 그대로 간직하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가 대체로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쓰였고 곳곳에서 등단용 시 쓰기의 흔적이 아주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단단한 껍질에 갇혀서 좀 답답하다. 애써 판독해서 읽어내도 그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내용이라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쉬운 내용은 쉽게 써야 하고 어려운 내용이라서 어려운 형식에 담아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꾸 옷을 껴 입힐 필요가 없다. 적당한 두께로 옷을 입히는 것도 아주 중요한 기법인데, 대체로 옷이 너무 두껍다. 한자는 불필요한 장식이다.★★☆☆☆[4337. 6. 11.]   628□나는 안경을 벗었다 썼다 한다□이영수, 시작시인선 7, 천년의시작, 2002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암시하는 방법이 일관되게 적용된 시집이다. 묘사이기 때문에 할 말이 그림 뒤로 숨고 읽은 자가 거기서 어떤 결론을 유추하도록 시가 이루어졌다. 그러니 방법상으로는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런 로 요약되는 이런 시도는, 실험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시가 아니라 수수께끼에 가깝다. 시와 수수께끼는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근본이 다르다. 시는 정서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수수께끼는 일부만을 보여줌으로써 낸 사람과 맞추는 사람 사이에 이미 합의된 어떤 내용을 풀어가는 오락의 일종이다. 이런 오락으로 시의 방법론을 삼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런 시도를 굳이 폄하할 것은 없지만, 쾌락화한 유미주의 취향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4337. 6. 12.]   629□미로 여행□김참, 시작시인선 8, 천년의시작, 2002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거울, 그림, 눈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만큼 이것이 시작의 원리를 이루고 있다. 결국 보는 방법과 방향을 바꾸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각각의 묘사는 거의 완벽에 가까워 시인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지 뒤에 숨어있다. 그런데 그것이 기억의 굴절에 의해 묘하게 뒤섞여있다. 일종의 무의식 영상 짜깁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 한쪽은 자신의 과거와 밀접하게 연관돼있고, 한 편은 자유로운 상상에 닿아있어서 정신의 어떤 해방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예감만 느껴질 뿐이다. 무의식의 빛깔은 검정이다. 과거의 빛깔도 그렇다. 검다는 말이 한 줄 건너 한 번씩 나오는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시를 보는데는 특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 같다.★★☆☆☆[4337. 6. 12.]   630□두 번 쓸쓸한 전화□한명희, 시작시인선 10, 천년의시작, 2002   시의 힘은 정직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그것을 노래하는 방법도 정직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굳게 다져진 할 말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온다. 기교로 자신을 가리는 데 익숙한 시집들 사이에서 이런 정직함은 용기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좀 더 주제를 단조해서 단단하게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넋두리와 자조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 정직의 힘이 반감된다. 울림의 깊이를 깊게 하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4337. 6. 12.]    
72    시집 1000권 읽기 62 댓글:  조회:1975  추천:0  2015-02-11
611□구멍의 크기□정익진, 시작시인선 19, 천년의시작, 2003   이 정도의 이미지 운용이면 가히 실험이라고 할 만하다. 이미지들이 스스로의 동력으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드러내주는 단순한 이미지하고는 다르다.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 변용되는 진폭의 크기가 뒤쫓아가기 버거울 만큼 간격이 크기 때문에 이것은 실험의식의 소산으로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가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가 무엇을 전하기 위해 옷만 바꿔 입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의식은 실험을 향해 치닫는데, 이미지는 무엇을 나타내주기 위해 교체 당하고 있기 때문에 뛰어난 상상력이 시라는 고정된 틀 속에 갇혀있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 경우는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하는 것이 시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분명치 않은 태도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세계를 낳는다. 실험을 더 강하게 추진할 것이냐 이미지를 살릴 것이냐 하는 선택의 갈랫길에 놓인 시집이다. 한자나 낯선 이름을 너무 자주 기용하는 것은 독특한 세계를 조성하는 데 일조할지 몰라도 실험의식을 오히려 깎는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4337. 6. 9.]   612□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조하혜, 시작시인선 23, 천년의시작, 2003   시에서 큰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런 만큼 관심이 큰 것에 가 있어 자칫 시가 설명으로 늘어지기 쉽다. 이럴 때 사고가 이미지를 압도한다. 그렇게 되면 이미지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소품으로 전락하기 쉽고, 이런 관행이 시 안에서 굳으면 이미지는 도구화된다. 도구화된 이미지는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한다. 시어가 설명으로 흘러가면 길어지기 쉽고, 시가 길어지면 독자는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가 만든 논리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건조해지기 쉽다. 따라서 시를 짧게 쓰는 훈련이 필요한 시집이다. 한자는 짧든 길든 불필요한 장비이다.★★☆☆☆[4337. 6. 9.]   613□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정유화, 시작시인선 24, 천년의시작, 2003   소품의 진가를 드러낸 작품이다. 작고 섬세한 관찰이 시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그리고 자연이 여태까지 존재해온 방식과는 다르게 시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면 독특하고 특이하다면 특이한 시집이다. 다들 문명 속으로 들어가서 각개전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렇게 자연의 속살을 살살 덜어내는 시인도 있다. 자연은 시가 버릴 수 없는 영역인데 돌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새로운 길을 뚫었다는 느낌이다. 다만 시가 너무 소품이라는 것과, 내용이 차라리 동시로 다루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동시로 쓰면 더욱 빛날 부분들이 많아서 아쉬운 시집이다. 한자는 단 한 자라도 순수한 세계에 누가 되는 법이다.★★★☆☆[4337. 6. 9.]   614□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박완호, 시작시인선 26, 천년의시작, 2003   시를 많이 다듬어서 만드는 성실한 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싸운 흔적도 많이 보인다. 시들이 대체로 무난하다. 무리를 하지 않고 떠오른 착상을 끝까지 풀어가려는 의지가 아주 좋다. 그런데 조금 더 풀려야 할 이미지들이 곳곳에서 뭉쳐있어서 읽는 흐름을 방해한다. 급작스런 제시가 필요한 곳에서는 그렇게 해야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곳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미숙이라고 봐야 한다. 더 풀어야 할 곳과 굳이 풀지 않아도 되는 곳이 있어서 완급 조절이 다소 필요한 시집이다.★★☆☆☆[4337. 6. 9.]   615□샤롯데 모텔에서 달과 자고 싶다□김재석, 시작시인선 25, 천년의시작, 2003   재주가 화를 부른 경우이다. 현란한 기법이 쓰여졌으면서도 시가 코미디가 되었다. 특히나 불교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부분인 1부에서는 그 코미디가 더 심해서 경망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태도는 시가 어느 한 곳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안주의 터가 굳이 말투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말투를 우스개의 말투로 하고 나면 그 우스개가 담을 수 있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다. 많은 부분 길들지 않는 어떤 발랄함이 담고자 하는 세계에 머물러 있지만, 결코 그래서는 안 될 세계조차도 그렇게 담기고 말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비유가 비유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비유는 그 자체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지향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좋은 비유도 태도 때문에 그냥 비유로 끝난 경우가 많다. 한자는 역시 코미디의 일종이다.★☆☆☆☆[4337. 6. 9.]   616□잡히지 않는 나비□김상미, 시작시인선 27, 천년의시작, 2003   어떤 전제된 관념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꾸 설명하려 든다. 그 설명에는 독자가 내 생각을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하는 기우도 들어있다. 그래서 시가 길어지고, 길어진 시에는 저절로 줄거리도 생기며, 시답지 못한 수사도 끼어들기 마련이다. 무엇을 만들려고 하기 전에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이 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버리지 못해서 장광설이 된다. 주제가 뚜렷한 것은 분명한 장점이지만, 그것을 시의 조리개로 맞추지 못하는 것은 큰 단점이다. 최소한 ‘사랑’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한다. 한자부터 버려야 할 일이다.★☆☆☆☆[4337. 6. 9.]   617□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우대식, 시작시인선 31, 천년의시작, 2003   한시에서 느껴지는 묘사의 절제미가 보인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묘사로 할말을 대신하는 능력이 갖추어졌다. 시집에 죽음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어서 분위기가 아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곳에 불교의 이미지를 많이 깔았는데, 그것들이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고 있어서 아쉬움이 든다. 가족사와 주변에 관심이 머물러있고, 거기서 생의 근본에 대한 질문이 더 치열해져야 할 단계에 와있다. 이런 시는 정신을 얼마나 단련하느냐 하는 것에 성패가 달려있다. 가혹한 일이지만, 이미 선택한 일이니, 돌이킬 수 없다.★★☆☆☆[4337. 6. 9.]   618□치자꽃 심장을 그대에게 주었네□유수연, 시작시인선 32, 천년의시작, 2003   정교한 이미지 배치와 치밀한 짜임새로 시가 아주 단단한데, 이미지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이미지의 본래 기능은 보여주어서 그것이 독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울림을 만들도록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끊임없이 설명하려고 든다. 설명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짜임새나 연결에 허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독자를 설득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려는 욕구이고, 그 욕구는 시에 놀랄 만큼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시에 특별한 지식이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그것이 감정의 접근을 가로막는 자세를 취한다면 그건 좋은 점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논리상 앞 뒤 연결이 문제가 없더라도 어렵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모든 설득의 태도는 강요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시가 지향하는 동감의 감동과 약간 어긋나는 바가 있다. 이 시에 울림이 깊이 오지 않는다면 그런 까닭이다. 할 말을 이미지로 대신할 것이라면 울림을 갖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자는 굳이 해줄 필요가 없는 배려이다.★★☆☆☆[4337. 6. 10.]   619□벌어진 입에 대한 명상□김경삼, 시작시인선 30, 천년의시작, 2003   7, 80년대에 유행하던 이른바 신춘문예 응모용 시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묘사를 위한 묘사가 많다는 뜻이다. 묘사를 위한 묘사라는 것은 말이 갖는 배치에 따라 나름대로 질서도 있고, 그럴 듯한 표현도 있지만, 그것이 전해주고자 하는 내용 내지는 실물의 실체가 너무 빈약하거나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를 말한다. 많은 시들이 표현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줄 뿐, 시나 독자를 위해서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다. 특히 1부와 2부의 시들이 그렇다. 재빨리 그런 단계를 지나야 독자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 시를 쓸 수 있다.★☆☆☆☆[4337. 6. 10.]   620□저리도 붉은 기억□이태관, 시작시인선 34, 천년의시작, 2003   내가 가진 체험이 절실하고 절망의 깊이가 깊을수록 상상은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올라야 한다. 날아올라야 할 상상력이 내용의 절실함 때문에 딱딱해지면 시가 되지를 않는다. 내용이 주는 중량의 압박감 때문에 상상력이 짓눌려서 짜부라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들이 정지해 보일지언정 활달하지 않고, 진지해 보일지언정 답답하다.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사와 수몰된 고향의 아픔을 노래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수준에 그치면 안 된다. 그런 아픔이 독자의 어디를 건드릴 것인가를 먼저 파악한 다음에 시를 써야 한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독자들까지 따라 아프지는 않는 것이 시의 세계이다. 한자는 무거운 추로 작용할 따름이다.★☆☆☆☆[4337. 6. 10.]    
71    시집 1000권 읽기 61 댓글:  조회:2006  추천:0  2015-02-11
601□노섹스데이□강경주, 시작시인선 38, 천년의시작, 2004   시가 복잡한 내용만을 노래할 필요는 없지만, 쉬운 내용을 노래한다고 해서 짜임새나 이미지, 또는 주제까지도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쉬운 시가 쓰기에는 더 어려운 수가 많다. 그것은 고민을 압축하고 할 말을 거기에 꼭 맞는 이미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시들은 대체로 읽기 편하고 쉽다. 그러나 그것이 오랜 단련을 거쳐서 정제된 것이라는 느낌보다는 쉽게쉽게 쓰려는 태도에서 나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독자의 마음속에 울림을 남기는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4337. 6. 7.]   602□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조정인, 시작시인선 37, 천년의시작, 2004   상상력이 독특하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르고, 그것이 감성의 어떤 측면을 일깨워 여태까지 시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까지 뿌리를 드리우는 묘한 재주가 있다. 이것이 외국시의 흉내가 아니라면 이런 시도는 틀림없이 새로운 시의 경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읽기가 쉽지 않아서 곳곳에서 이미지들이 불편한 분열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그런 귀찮음을 극복하고 들여다보면 시인만이 본 세계의 무늬가 세밀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미지와 실재 사이에서 모험에 가까운 실험을 하고 있는 것과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너무 많이 동원되는 말들은 이 시집의 큰 단점이다. 그리고 유미주의 경향이 너무 짙어 안으로 폐쇄된 구조를 갖는 것도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시들이 드리우고 있는 세계가 아주 독특하고 참신한 곳이기에 이러한 단점만 보충하면 아주 독특한 시의 세계를 이룰 시인이다. 한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4337. 6. 7.]   603□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이나명, 시작시인선 36, 천년의시작, 2004   시인의 성실함과 꼼꼼함이 돋보이는 시집이다. 그러나 역시 너무 성실한 점이 문제가 되는 시집이다. 그만 하면 됐는데도 자꾸 더 설명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그런 성실성에서 나온 것이다. 한 군데라도 흠집이 있으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 비슷한 고집이 그런 점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너무 자세하게 보여줘도 재미가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다. 홀딱 벗은 여인의 몸보다 살짝 가려진 몸이 훨씬 더 오래 눈길을 끈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은 시인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너무 많이 간과되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인의 덕목이다.★★☆☆☆[4337. 6. 8.]   604□염소좌 아래 잠들다□전명숙, 시작시인선 39, 천년의시작, 2004   무릇 시인이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야 한다. 아무리 보편성에 그의 사고와 사상이 뿌리박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남달라서 인식을 새로운 감각으로 체험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능력 있는 시인이고 재주 있는 시인이다. 그런데 그런 재주는 배워서 되는 수가 있고 배워도 안 되는 수가 있다. 그런데 배워도 안 되는 재주를 갖고 있는데 여기다가 배워도 되는 것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시집이 그렇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만의 독특한 시각이 확립돼있다. 그리고 일정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꼼꼼히 읽은 생각을 말하고 있다. 아주 독특한 시각이다.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여태까지 별로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계다. 이런 세계를 발견하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라고 할 밖에 없다.   다만, 애써 발견된 이미지에 어떻게 주제를 실어서 이미지가 헛돌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면서 할 말을 하게 하는가 하는 점이 조금 서툴다. 이미지들이 아무런 의미나 정서를 환기하지 못하고 이미지 혼자서 따로 도는 경우가 많다. 이 점만 보충된다면 아주 특별한 시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문장부호를 정확히 표시해줄 필요가 있다. 이 시들은 아주 특별한 방식의 인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때로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다시 읽어야 되는 곳이 많다. 문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의 표현을 글이 따라가지 못해서 독자에게 생기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문장부호를 잘 표기해주는 것이 좋다. 독자들이 쓸데없는 곳에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한자야말로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의 원인이다.★★★☆☆[4337. 6. 8.]   605□함부로 성호를 긋다□강경호, 시작시인선 40, 천년의시작, 2004   시가 단단하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 시를 많이 써본 시인이다. 그런데 너무 자신의 체험에만 의존해서 시를 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사 중심의 시가 되고, 그 가족사가 특별한 의미를 띠지 않는 것이라면 시 역시 특별한 의미를 띠지 못하게 된다. 시의 경향으로 보아 상상력의 색깔을 통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물의 배후로 더욱 깊이 들어 가든가, 아니면 더욱 치열하게 사색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한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4337. 6. 8.]   606□아름다운 소멸□김은숙, 시작시인선 35, 천년의시작, 2003   시의 언어에는 사실 묘사를 지향하는 언어가 있고 정서 묘사를 지향하는 언어가 있다. 사실 묘사를 지향하는 언어는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고자 하지만, 정서 묘사를 지향하는 언어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구별하여 써야만 효과를 내는 곳이 따로 있다. 이 두 가지가 뒤섞이면 시가 산만해 보이고, 지름길을 가지 않고 에둘러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시집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다. 무언가 한 겹이 덜 벗겨져서 흐릿한 느낌이 든다. 이런 문제는 주제의식의 치열성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래서 먼저 주제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 주제를 드러내는데 가장 적합한 이미지를 고르는 일이 필요하다. 주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에 매달리고 이미지에 매달리다 보면 주제는 점점 흐려진다. 이미지는 스스로 주제를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한 번 더 거를 수 있도록 상상력의 틀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4337. 6. 8.]   607□숨쉬는 무덤□김언, 시작시인선 18, 천년의시작, 2003   참 피곤한 전투를 하는 시인이다. 대부분의 시들은 한 편에서 모든 기교가 다 드러나는데, 이 시집의 시들은 시집 전체가 어떤 대상을 토막토막 잘라서 보여준다. 그것이 일상의 어떤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또렷한 모습을 그리지 않는 것은 낱낱의 작품이 너무 고집스런 어떤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골탕 먹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골탕을 먹고서도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이 세상이기도 해서 과연 이런 싸움이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효과를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는 시인의 싸움이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건드려야 할 부분을 좀 더 정확히 설정하고 달려드는 것이 좀 더 좋은 효과를 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내용의 치열성으로 보면 형식도 거추장스러울 텐데, 시의 형식을 정직하게 지키는 것도 의문이다.★★☆☆☆[4337. 6. 8.]   608□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김혜영, 시작시인선 41, 천년의시작, 2004   산의 전체 모양을 그리다보면 그 산 안에 들어있는 자잘한 것들, 예컨대, 나무의 종류와 풀,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사는 개구리, 새 같은 것들을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시집이 그렇다. 생각이 현실을 앞서가느라고 현실의 어느 곳에서 이미지를 끌어올리고 맺어주어야 할지 그것이 애매모호해진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현실을 보는 어떤 시각을 전제로 해놓고서 거기에 맞는 이미지만을 골랐기 때문이다. 관념성을 면할 길이 없다.   시는 현실의 한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출발점이 너무 멀어져 잘 안 보이더라도 출발점을 놓치지 않으면 이미지는 거기에 젖줄을 대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데 그 출발점을 아예 놔 버리면 이미지는 자신의 움직임으로만 말을 하게 된다. 그런 말들은 그럴 듯하지만 가슴에 와 닿지를 않는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도 화법도 노혜경의 것을 많이 닮아있지만, 노혜경보다 더 높이 솟는 바람에 느낌은 그만큼 까마득해졌다. 좀 더 낮게 내릴 일이다.★★☆☆☆[4337. 6. 8.]   609□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김충규, 시작시인선 1001, 천년의시작, 2002   복잡하게 말하는 방법을 즐기는 시인이다. 이 시가 가야 할 곳은 상징이다. 그런데 상징은 이미지가 선명해야 한다. 선명해야 한다는 것은 주제를 어떤 이미지 뒤로 자꾸 숨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자꾸 숨기면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애써 만든 이미지들의 조합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는다. 어떤 전제된 관념을 바탕으로 해서 해석을 하는 방법을 시라는 갈래의 역사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줄거리를 다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이미지들이 서로 얽혀있다. 그것이 의식의 실험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형식사의 관점에서 용인될 수 있겠지만, 이미지가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면 불필요하게 번잡한 것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특별한 의미라기보다는 표현을 위해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곳곳에서 많이 발견되는 까닭이다. 의미의 맥락을 벗어나려는 이런 식의 현란한 이미지들은 자칫 공허해지기 쉬운데, 그 공허함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상징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실험의식 근처의 몸짓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공허해진다는 뜻이다.★★☆☆☆[4337. 6. 8.]   610□즐거운 사진사□차승호, 시작시인선 20, 천년의시작, 2003   사물에 애정을 갖고 접근하려는 성실한 태도가 돋보이는 시집이다. 그런데 밋밋한 것이 흠이다. 상상력도 너무 밋밋하고 사물에 접근하는 방법도 너무 밋밋하다. 그렇다고 짜릿한 자극을 주려는 시들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농촌 문제라든가 추억의 문제는 이미 많이 다룬 내용들이어서 자신이 갖는 색깔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자세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밋밋한 상상력은 무난할지 몰라도 때로는 그것이 큰 한계로 작용할 때가 있다. 그 한계를 바꾸는 방법은 인식 대상을 잘 선정하는 것 한 가지가 있고, 상상력의 진폭을 넓히는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어느 경우에도 한자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4337. 6. 9.]    
70    시집 1000권 읽기 60 댓글:  조회:1884  추천:0  2015-02-11
591□배고픈 웃음□박상률, 시와시학 시인선 18, 시와시학사, 2002   감정이 과잉됐다. 지나친 감정이 순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 그런 까닭에 이미지들이 차분하게 가라앉지 못하고 들떠서 서로 긴밀한 연결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하달 것도 없는 주제에 아둥바둥 매달려있는 시들이 적지 않다. 이것은 시가 될 만한 주제와 그렇지 못한 주제를 분별하는 힘이 적은 탓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시가 될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한 다음에 시를 쓰는 훈련이 필요하다. 시가 되지도 않을 것을 붙잡고 다듬어 봤자, 시 비슷한 모양만 내지 정작 시가 되지는 않는다. 많이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일이다.★☆☆☆☆[4337. 6. 5.]   592□우포 늪 왁새□배한봉, 시와시학 시인선 17, 시와시학사, 2002   시가 한 곳을 향해 집중된다는 것은 여러 모로 보기 좋은 일이다. 시인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고, 한 세계를 가지런히 갖추고 있어서 좋고, 이미지들이 흩어지지 않아서 좋다. 이 시집은 그런 시집의 전범을 보여준다. 굳이 생태의 문제를 들지 않더라도 한 지역의 자연 환경과 시가 만나서 시인이 읽은 한 독특한 세계를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즐거운 일이다. 다만 중간을 넘어가면서부터 긴장이 풀려 타성에 젖은 표현들이 곳곳에 나타난다는 것이 좀 아쉽다.★★★☆☆[4337. 6. 5.]   593□봄은 소주를 마신다□이은채, 푸른 시떼 9, 시와시학사, 2004   곳곳에 공들인 흔적이 여실한데도 깨끗이 정리되지 못한 느낌이 온다. 그 느낌은 이미지와 말을 혼용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기껏 묘사로 잘 끌어가다가도 할 말을 쏟아놓고 마는 상황에 이르기 때문에 애써 가꾼 이미지가 혼선을 일으킨다. 그리고 주제가 다소 빈약하다는 약점도 있다. 할말을 좀 더 분명히 정하고 거기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되려면 인식과 생각이 대상의 뒤쪽으로 한 겹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4337. 6. 5.]   594□탱자가시로 묻다□송희, 푸른 시떼 8, 시와시학사, 2003   일상 속에서 소재를 찾아내어 시로 만드는 능력은 좋다. 하지만 너무 세세한 묘사에 치중하면서 표현하는 맛에 취하다 보면 나중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른다. 작은 것을 보다가 큰 것을 놓치는 수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시 한 편의 완성도 중요하지만 시집으로 꾸몄을 때 시집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놓여있는가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남들도 다 아는 내용을 시로 옮길 때는 상상력의 빛깔이 드러나야 시가 아름다워진다. 따라서 내용이나 형식 모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당이 안 되는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7. 6. 5.]   595□나의 키로 건너는 강□정채원, 푸른 시떼 5, 시와시학사, 2002   착상도 묘사도 아주 좋다. 시에서 이미지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아주 잘 아는 시인이다. 그런데 너무 자세한 묘사가 때로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한 번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나름대로 상황과 이미지를 재구성해서 읽는다. 그런데 독자가 재구성할 그 그림이 너무 선명하면 오히려 독자의 상상력을 고정시켜 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틈을 주어서 독자의 상상력이 파고들어야 할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는 나그네가 되고 만다. 너무 자세하게 묘사를 하면 독자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진다. 그 틈을 남기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확고함과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이다. 그리고 시집 전체에서 말하는 주제의 방향을 조금 더 신중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애써 얻은 귀한 이미지들이 그저 그런 결론으로 그치고 만다면 아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자는 그보다 먼저 버릴 일이다.★★☆☆☆[4337. 6. 5.]   596□눈물은 푸르다□최종천, 푸른 시떼 4, 시와시학사, 2002   2002년도에 이런 시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이 기적 같다. 이미 한물 간 추억으로 치부되던 노동자의 눈물과 한이 이렇게 시집으로 나온다는 것이 어쩐지 가슴 설레게 한다. 아직도 노동시를 쓰는 사람을 받아들일 여유가 한국 시에 남아있다는 증거인가? 아니면 생색내기인가? 적을 앞에 두고 쓰여지는 시는 모든 것이 명확하다. 명확한 대상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묘사나 주제, 이미지 역시 확실한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느 만큼 깊이 추려내는가 하는 것은 시인 개인이 감당할 몫이다. 이 시집은 아주 잘 쓴 작품들인데도 박노해나 백무산의 아류로 오인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 다만 선언성 발언보다 인식성 이미지가 주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 가지 방향이 엿보인다. 안타깝지만 시의 본래 형식과 존재 근거에 좀 더 충실하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 그것만이 노동시가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부르주아지 냄새가 풀풀 나는 한자부터 버릴 일이다.★★☆☆☆[4337. 6. 7.]   597□그늘을 밀어내지 않는다□이진수, 푸른 시떼 6, 시와시학사, 2002   관찰력과 사고의 깊이가 대단한 시인이다. 쉽게 놓칠 수 있는 것을 잡고 있는 것은 노력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고, 그것을 시로 만드는 것은 능력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인데, 그런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 최대한 적은 양의 말을 동원하여 깊은 의미를 퍼올리는 재주가 있다. 시들이 그만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다만 제1부의 탄력과 긴장이 뒤로 가면서 풀어진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시를 쓴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시간만 조금 더 투자한다면 큰 시인이 될 것이다. 시는 인식도 중요하지만 형상도 중요하다. 인식에 너무 경도되면 애써 얻은 깨달음이 자칫 설명으로 떨어지기 쉽다. 그런 아쉬움이 곳곳에서 보인다.★★☆☆☆[4337. 6. 7.]   598□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반칠환, 푸른 시떼 3, 시와시학사, 2001   앞부분의 시에는 신화와도 같은 환상의 세계를 잘 정리해놓았다. 젊은 시인이 자신의 과거를 이만큼 정확하고 풍부하게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군더더기도 별로 없고 묘사와 취사도 절제를 아주 잘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뒤쪽의 시들은 발랄한 상상력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마치 말장난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인식의 개념이 시의 전면으로 불거지면 시가 관념화된다. 이럴 경우에는 그것을 체험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속도에 대한 명상’ 같은 경우는 그런 우려를 많이 담고 있다. 인식이 깊으면 그것이 장광설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일이다.★★☆☆☆[4337. 6. 7.]   599□노랑나비 베란다 창틀에 앉다□주영만, 푸른 시떼 2, 시와시학사, 2001   이미지는 실제의 사실과는 다르게 스스로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실 세계로부터 조금만 떠오르면 자칫 이미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 기능하게 된다. 그러면 시가 사실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환상이나 몽환 비슷한 분위기로 다가간다. 그것이 무의식과 연결되어 인간의 정신 밑바닥에 드리운 세계를 퍼 올리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칫 허황한 것으로 오인될 수가 있다. 이 시집의 시들이 그러하다. 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해 많은 이미지들이 등장하고, 그 이미지들이 이성의 적절한 통제를 받지 않은 채 떠올라서 퍼덕이고 있다. 언뜻 보면 자유로운 상상력 같지만, 자칫하면 기율이 없어 보인다. 이런 모습은 앞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점에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시에 스스로 절망하게 된다.★★☆☆☆[4337. 6. 7.]   600□그리움이 때로 힘이 된다면□염창권, 푸른 시떼 2, 시와시학사, 2001   시가 아주 단단하다. 한 이미지가 다음 이미지를 물고 가는 것도 그렇고, 그 이미지들이 모여서 전하고자 하는 전체의 그림도 짜임새가 좋다. 그래서 기교가 월등한 시이다. 시 한 편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말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기 위하여 많은 이미지를 동원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전체의 구도에 집착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시가 단단해 보인다. 그런데 그 단단한 결구 안을 채우고 있어야 할 것들이 알차지 못하다. 바로 이 때문에 기교가 승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가 주축을 이루는 시는 함부로 감탄을 하면 안 된다. 시 곳곳에서 넋두리 투의 말투가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미지와 상반된 성격이기 때문에 결국 시 전체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 된다. 시집이 깔끔한 이미지로 가득 차있으므로 끝까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4337. 6. 7.]    
69    시집 1000권 읽기 59 댓글:  조회:1749  추천:0  2015-02-11
581□지상의 중심이 되어□유재영, 시와시학 시인선 8, 시와시학사, 2000   식물의 상상력이라고 할 만큼 식물 중심의 이미지가 시집을 가득 채웠다. 그런 만큼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맑고 고결한 정서가 시집의 주된 정조를 이룬다. 할 말을 줄이고 자연 이미지로 대체하는 수법은 상당한 실력이 아니고는 해내기 어려운 절제력이다. 그런데 이미지에 너무 집착을 하다 보면 주제가 빈약해지기 마련이다. 이 시집은 그런 위험을 많이 안고 있다. 그리고 식물 이미지에 매달리다보면 너무 많은 식물들을 동원해서 읽는 사람이 그 말에 갇혀 주제나 정서를 따라가기 어렵게 된다. 또 자연물에 대해 기대하기 어려운 해석을 갖다 붙이기도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4337. 6. 4.]   582□내 마음의 협궤열차□이가림, 시와시학 시인선 7, 시와시학사, 2000   시가 구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영혼을 향해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 바깥의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문을 닫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고, 그 주제 빈약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체험 그 바깥의 객관화된 세상을 향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완결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시이기 때문에 상상력이 밋밋하다. 시안에서는 완결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밖으로 드러날 때 다양한 울림을 주지 못하는 흠이 있다.★★☆☆☆[4337. 6. 4.]   583□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이수익, 시와시학 시인선 6, 시와시학사, 2000   시가 쓰여지는 계기는 새로운 발견이다. 어떤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각 속에 자리잡으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시가 나타난다. 이 시집의 시들 대부분이 그런 문법에 충실하다. 그런데 인식에 너무 집착하면 그 인식의 과정만 드러나서 그 인식이 독자에게 다양한 반응으로 울림으로 주지 않고 인식 그 자체만을 드러내고 마는 경우가 있다. 이 시집들의 인식이 나름대로 새로운 것들인데, 너무 그 인식에만 묘사가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그런 인식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효과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다. 좀 더 넓게 독자가 그 인식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4337. 6. 4.]   584□나는 거기 없었다□김영석, 시와시학 시인선 5, 시와시학사, 2000   시가 살도 적당하고, 뼈대도 곧고 이미지도 산뜻하다. 갖춰야 할 것을 다 갖추어서 읽는 사람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시이다. 그런데 마지막 한 층이 뚫리지 않아 물이 솟지 않는 샘의 형국이다. 한 삽만 더 깊이 들어가면 시원한 물줄기가 솟을 텐데 그 한 삽이 안 들어가고 있다. 아마도 암반을 만난 듯한데, 그 암반은 표현 쪽이기보다는 내용 쪽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2부에서는 짤막한 소설 몇 편이 들었는데, 그것을 시로 풀어야만 되지 않겠는가?★★☆☆☆[4337. 6. 4.]   585□산시□이성선, 시와시학 시인선 4, 시와시학사, 2000   “초암에서” 같은 작품은 다시 보기 어려운 절창이다. 살을 다 빼버리고서도 곱게 빠진 몸매를 보여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시집 전체가 선시를 닮았다. 선시를 닮았다는 것은 선시와는 다른 자연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과 선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두 가지를 함께 의미한다. 자연을 보는 시각이 나름대로 확립되었으나, 그 전부터 이어온 선시의 관행을 털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자연을 이만큼 소화한 시인이 없다는 점에서 그 역량은 높이 살 만하다. 그리고 시가 너무 짧다. 짧아야 하는데 짧으면 상관없지만, 짧아서는 안 되는 경우에도 짧은 시가 많다.★★★☆☆[4337. 6. 4.]   586□벼랑의 꿈□오세영, 시와시학 시인선 2, 시와시학사, 1999   시집 한 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어조를 유지하면서 시를 이끌어 가는 일은 보통 능력이 아니다. 이미 안정된 어조가 시 전체를 이끌고 가는 힘이 된다. 다만 그것이 단조로운 느낌을 주지 않으려면 내용이 새로운 면면을 드러내야 하는데 고만고만한 느낌들이 잔 봉우리처럼 나열되어 있어서 졸린 느낌을 준다. 사미라든가 하는 호칭과 산문 같은 이미지들이 이미 있어온 이미지들의 관행이기 때문에 이런 느낌의 연장선상에서 작용한다.★★☆☆☆[4337. 6. 4.]   587□1미터의 사랑□오탁번, 시와시학 시인선 1, 시와시학사, 1999   시가 좀 수다스럽다는 느낌이 먼저 온다. 이 느낌은 두 가지 뜻을 갖는다. 하나는 멈추지 않는 발랄한 상상력이라는 좋은 쪽과 또 다른 하나는 진지성의 결여라는 안 좋은 쪽이 그것이다. 발랄한 상상력은 시인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상상력은 어느 한 곳에도 매임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사고의 발랄성은 생각이 그쪽으로 열려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발랄함 뒤에는 반드시 10미리 철판을 뚫을 수 있는 날카로움이 있어야 한다. 이 날카로움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그 의문이 뚫고자 하는 대상이 대립할 때 생긴다. 여기서는 의문의 강도나 대립의 절실함이 많이 수그러졌다. 그렇기 때문에 발랄한 상상력에 재치와 재미를 느끼지만, 한 발짝 더 들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끝내 가시지 않는 것이다. 한자의 남용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4337. 6. 4.]   588□뼈아픈 별을 찾아서□이승하, 시와시학 시인선 16, 시와시학사, 2001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단단한 문장이 거침없이 생각을 담아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앞 뒤 연결이 단단하고 긴밀하여 어느 한 구석 허술하지 않다. 시각 이미지가 없는 대신 사고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의 질서들이 단단하게 시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그런 만큼 시로서는 아주 낯선 형식처럼 느껴진다. 문장의 특성만을 보면 어쩌면 시의 경계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불거진 형식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형식은 사색이 시를 압도하는 형국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생각이 밀도를 높이면 시는 이미지를 스스로 버린다. 편집도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세 가지 표제를 갖고 이루어졌다. 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분명하다. 영원의 시간과 공간 위에 놓인 인간의 운명을 노래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시가 너무 사고에 의존할 때 관념화는 불가피한 일이며 그것은 설명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4337. 6. 4.]   589□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백창일, 시와시학 시인선 20, 시와시학사, 2002   특별히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빼어난 것도 아닌 시집이다. 사랑이 시집 전체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는데, 정확히 연시의 그것도 아니고 삶의 깨달음을 전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냥 편히 읽을 수 있는 사랑시로는 선이 너무 굵고 거칠다. 시가 무난하지만 특출나지도 않은 것은 정신이 해이하거나 방향을 잘못 잡은 탓이다. 주제나 이미지가 움직이는 방향을 좀더 선명하게 하는 것이 급선무일 듯하다.★★☆☆☆[4337. 6. 4.]   590□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김수우, 시와시학 시인선 19, 시와시학사, 2002   사물을 어떻게 건드리면 그것이 감성을 일깨우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아는 시인이다.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이미지를 동원하는 수법이 능수능란하다. 그것도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오랜 숙련을 거친 능력임을 알아볼 수 있다. 다만 중간을 넘어서면서부터 그런 긴장이 느슨해지려고 하는 부분이 언뜻언뜻 눈에 띄는데, 이것은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다루는 데서 생기는 문제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방향만 조금 더 분명해진다면 큰 시인이 될 것이다.★★★☆☆[4337. 6. 4.]    
68    시집 1000권 읽기 58 댓글:  조회:1776  추천:0  2015-02-11
  571□낡은 기계□조기조, 실천문학의 시집 115, 실천문학사, 1997   앞부분의 시들이 보인 성취는 놀랄 만한 것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할 말로 뼈대를 만들고 정신의 긴장으로 밀고 가는 수법은 대가들도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시집을 냈다. 중간에 산문시들은 너무 풀어져서 시와 산문의 어중간한 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시가 주제가 분명하다는 것보다 더 유리한 것도 없다. 이 시집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이미 내용물이 준비되었으니, 그것을 담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한자는 전혀 그릇이 돼주지를 못한다.★★☆☆☆[4337. 5. 31.]   572□시간이 지나간 시간□이사라, 문학동네 시집 64, 문학동네, 2002   사물을 보는 독특한 시각이 확립돼 있고, 그것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능력도 갖추었다. 남들이 보기 어려운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고 능력이라면 그런 점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싶을 정도로 곳곳에서 번뜩이는 바가 있다. 그런데 전체의 논조가 문명을 비판하자는 것인지 찬양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세월에 따라 흘러가는 삶의 모습을 노래하자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태도가 큰 결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자는 그런 결점을 더욱 크게 한다.★★☆☆☆[4337. 6. 1.]   573□쉬잇, 나의 세컨드는□김경미, 문학동네 시집 60, 문학동네, 2001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다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 시집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범벅이니, 손수건이라도 사들고서 책을 펼치라는 광고를 넣어야 할 판이다. 슬픔과 허무와 눈물이 시의 중요한 주제이기는 하나, 그렇게 쥐어짜는 까닭이랄까 내지는 그런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거의 없이 눈물로 도배하는 것은 흔하디 흔한 무명시인들이 쏟아내는 사랑 시집과 무엇이 다른가?★★☆☆☆[4337. 6. 1.]   574□경주 남산□정일근, 문학동네, 2004 개정판   생각이 가는 곳으로 삶을 끌고 가고 그곳에서 시를 걷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쓰는 말을 그대로 쓰면서 그 분위기로 시를 만드는 것은 한 경지를 이루지 않으면 어려운 일인데 일기처럼 쓴 것들이 모두 시가 된다. 생각과 언어가 거의 틈을 보이지 않고 시로 나타났다. 특히 불교쪽의 사고체계를 시로 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것이 별 무리 없이 삶의 느낌과 만나서 잘 융화하고 있다. 한자를 청산하지 않으면 애써 이룬 세계에 오점을 남긴다.★★★★☆[4337. 6. 1.]   575□적□윤석산, 시와시학 시인선 14, 시와시학사, 2000   시가 무엇을 노래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시로 얘기해야 별 효과도 없고 가치도 없는 내용들이 시집의 거의 다 메우고 있다. 개인의 삶이 여과 없이 전해진다면 그건 시라고 하기 어렵다. 시에는 형식 면에서도 내용 면에서도 시 나름대로 걸러야 할 것들이 있다. 그 여과지가 전혀 작동을 안 한 시집이다.★☆☆☆☆[4337. 6. 1.]   576□새에 대한 반성문□복효근, 시와시학 시인선 13, 시와시학사, 2000   시를 만드는 방법도 확립되었고 사물을 보는 눈도 갖추었는데, 시가 무겁다. 그 무거움은 말과 이미지가 서로 뒤섞인 것에서 생긴다. 이미지로 처리해도 되는데 굳이 말로 설명을 하려고 한 부분이 곳곳에 끼어있어서 시가 무거워졌다. 이 상태를 지속하면 자칫 넋두리로 전락하기가 쉽다. 이럴 경우엔 시를 만든 다음에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서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상태까지 깎아내는 훈련이 필요한 시집이다.★★☆☆☆[4337. 6. 1.]   577□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고재종, 시와시학 시인선 12, 시와시학사, 2000   농사꾼이 갑자기 화이트칼라가 되었는가? 삶이 시의 먼 지평선 너머로 물러섰다. 시가 산만하다. 시가 산만한 것은 시가 노래할 내용이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용이 선명하지 않은 것은 주제의식이 흐리멍덩하기 때문이다. 주제는 그렇다 쳐도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미지의 운용이 혼란스럽다. 애써 의미의 줄기를 찾아내면 불필요한 이미지들이 많고, 이미지가 선명하면 주제가 빈약이다. 주제를 한 번 더 정리한 다음에 그것과 상관없는 군더더기들을 잘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자는 가장 먼저 잘라내야 할 군더더기이다.★★☆☆☆[4337. 6. 1.]   578□보물찾기□서종택, 시와시학 시인선 11, 시와시학사, 2000   시 한 편 한 편에 들인 공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시집이다. 그런 만큼 많은 시들이 흠집 하나 없이 잘 다듬어졌다. 그런데 제2부 같은 시들이 거의 말장난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현실 인식이 치열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준다. 처음부터 잘못 선택된 내용에다가 공을 들였다는 말도 된다. 많은 시들이 따스한 서정으로 이루어졌지만, 제외시켰으면 좋을 시들이 뒤섞여서 아쉬운 시집이다. 그런 아쉬움 속에는 한자도 들어있다.★★☆☆☆[4337. 6. 1.]   579□슬픔에 손목 잡혀□나태주, 시와시학 시인선 10, 시와시학사, 2000   인생을 관조하는 시각이 확연하다. 너무 타성에 젖지도 않고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성찰하는 태도가 잘 살아있는 시집이다. 억지 형식을 찾지 않고 느낌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탄력을 내며 빛난다. 그런데 많은 시들이 좋은 깨달음을 담으면서도 시답지 않은 설명으로 이루어져서 형식의 타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드러난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4337. 6. 1.]   580□석탄 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이건청, 시와시학 시인선 9, 시와시학사, 2000   말에 매몰되지 않고 시를 지키려는 노력이 한 눈에 보이는 시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을 철저히 객관화하여 이미지 묘사로 대신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한 가지 방법을 고수한 태도가 돋보인다. 그런데 표현의 효율성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시집이다. 내가 그리는 이미지의 조합들이 전체 모여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 말이다. 이미지는 모자이크와도 같아서 어차피 세계의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전체의 모자이크가 만드는 그림이 하나여도 그것이 담는 그림의 내용이 중요한 법인데, 두세 개의 내용을 담으려 한다면 그건 무리일 수밖에 없다. 시 한 편 한 편이 완성되어도 완성된 그 이미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난시처럼 여럿으로 일그러진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시집이다. 한자는 그 초점을 흐리는 문자이다.★★☆☆☆[4337. 6. 1.]    
67    시집 1000권 읽기 57 댓글:  조회:1877  추천:0  2015-02-11
  561□가상현실□김영무, 문학동네 시집 53, 문학동네, 2001  고통은 그것이 몸의 것이든 마음의 것이든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이 시집 속에는 고통이 가득 차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만드는 시각의 깊이도 들어있다. 많은 시들이 군더더기를 달고 있지만, 그런 군더더기 안에 세상을 보는 일정한 시각이 담겨있다는 것은 그런 군더더기를 사소한 것으로 만든다. 많은 시들이 안이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무나 갖기 힘든 것이다. 주제를 자꾸 우회시키는 군더더기를 깎아내는 노력이 필요한 시집이다.★★☆☆☆[4337. 5. 28.]   562□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박철, 문학동네 시집 50, 문학동네, 2001   많은 시들이 자신의 비애를 돌아보면서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시집 역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빠져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그 측은함 내지는 성찰이 절절하게 잘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감상과 감동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런데 측은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처지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가 하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의 전망을 잃은 것에서 오는 것인지, 문명의 맹목성과 냉혹성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의 허무에서 오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방향도 없이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선 것 같은 지루함을 준다. 한자는 혹이다.★★☆☆☆[4337. 5. 28.]   563□빈 나무 밑을 지나가다□김강태, 문학동네 시집 73, 문학동네, 2003   시가 일상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현실 감각을 갖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전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자잘한 체험이 시가 되려면 그것이 분명한 이미지를 타고 시의 수면위로 떠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의미망이 독자와 같은 지평 위에 있어야 한다. 그저 내 체험의 진정성만 강조된다면 시가 될지언정 독자의 공감을 얻는 좋은 시가 되기는 어렵다. 이 시집의 아주 많은 시들이 체험의 특수성에 그대로 묶여서 공감을 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에 매달려서 의미를 강제로 짜 맞추었기 때문이다. 생각 속에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가 시가 된다고 믿는 것은 어찌 보면 시인의 부지런함일 수 있지만, 그것이 그대로 모두 시가 된다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한자는 곳곳에서 덜그럭거린다.★☆☆☆☆[4337. 5. 28.]   564□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김충규, 문학동네 시집 70, 문학동네, 2003   시상도 좋고 구성력도 좋은데, 어떤 한 가지가 시에 흠집을 내고 있다. 그것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껏 역기를 들어올린 선수에게는 먼지 하나가 한계일 수 있듯이 그 사소함이 전체의 균형을 허무는 법이다.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과 시각이 아주 독특하다. 그것이 시를 빛나게 한다.   그러나 이미지를 해석하는 영역이나 범위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한 이미지가 갖고 있는 영역을 벗어나면 어쩐지 무리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될수록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연결고리를 보여주거나 그것의 관계를 보는 방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시집의 앞부분에서 많은 시들이 그러한 무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이 시집의 단점이다. 그 다음에는 세계의 해석에 대한 문제로 가겠지만, 그 후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독특한 상상력의 작용이 갖는 그 무리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이다. 한자는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4337. 5. 28.]   565□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이병률, 문학동네 시집 71, 문학동네, 2003   티 하나 없이 문장을 다듬는 솜씨는 아주 뛰어나다. 상황에 걸맞은 말을 골라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재주도 좋다. 그런데 시집을 통독하고 나면 정서가 꽤 모호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이것은 체험의 특수성에 묘사력을 집중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경험의 특수성이 있고, 그것을 시로 쓸 때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시로 써서 그 특수성이 개성으로 승화되는 수가 있고, 특수성이 그대로 특수한 감정으로 남는 수가 있다. 이 경우에는 개성이 곳곳에서 돋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특수성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불편하게 한다. 문장이 말할 나위 없이 매끄러운데도 계속 몽롱한 기분이 남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을 좀 더 분명히 정리해서 그것에 알맞은 이미지를 묘사하는 데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자는 그런 모호함을 부채질하기도 한다.★★☆☆☆[4337. 5. 31.]   566□이서국으로 들어가다□서림, 문학동네 시집 8, 문학동네, 1995   한 지역의 역사가 시와 만나는 일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라는 점에서 지역과 지역사를 시로 담으려는 노력은 가히 칭찬 받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역사라는 어떤 관념과 사실의 조합이 시속으로 들어올 때 과연 어떤 형태이어야 하며 어떤 정서로 살아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을 하지 않으면 왕왕 역사는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내가 사는 지역의 오래 전 역사를 현실의 삶 속에서 읽어내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현실의 어떤 모습을 역사상의 사실로 확정하는 것은 역사 해석의 문제에서도 민감한 것이지만, 어쩐지 억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시는 정서를 전달해야 하는 갈래이기 때문에 사실에서 이런 틈을 만들어놓으면 그 정서조차도 애매하게 되는 수가 많다. 역사가 한자에 의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시에서 그럴 필요는 없다.★★☆☆☆[4337. 5. 31.]   567□그리운 남풍□도광의, 문학동네 시집 74, 문학동네, 2003   시에서 치열함이란 삶의 진리에 대한 탐구와 연관이 있다. 그 절실성과 그치지 않는 의문에서 시는 반짝임을 드러낸다. 그런 치열함이 사라지면 긴장 역사 사라져 세상을 보는 안이한 눈만이 남는다. 그때 나오는 시는 이미지가 만들어가는 일종의 관성만 있을 뿐 이미지의 신선함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꼭 새로운 것을 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든 뒤에도 그 나이가 깨달은 내용은 치열함 뒤로 숨지만, 숨은 그 느낌이 치열함의 마그마가 되어 시의 밑바닥에서 돌아다닌다. 이 마그마가 없으면 그야말로 늙은 시다. 이 시집은 그런 늙음의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인의 나이 문제가 아니다.★☆☆☆☆[4337. 5. 31.]   568□딸기□원재훈, 문학동네 시집 75, 문학동네, 2003   시를 참 깔끔하게 잘 쓰는 시인이다. 펴야 할 곳에서 펴고 오므려야 할 곳에서 오므리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재주가 시의 전체 수준을 고르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는 버릇이 시를 풀어지게 하고 있고, 풀어진 긴장 때문에 시가 길어지고, 그런 까닭에 마치 수필처럼 되었다. 이것은 필요한 말에 비해 너무 많은 말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뜻이다.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놓는 것도 시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긴장이 풀어지는 단계까지 나가면 안 된다.★★☆☆☆[4337. 5. 31.]   569□고인돌과 함께 놀았다□윤희상, 문학동네 시집 43, 문학동네, 2000   시가 아주 깔끔하다. 그 깔끔함은 시가 짧은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법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징은 다른 시에서 볼 수 없는 이 시인만의 특징이다. 자신만의 특징을 갖추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시인이 될 자질을 갖춘 셈이다. 사물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묘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잘 아는 시인이다.   그런데 순간의 긴장이 조금만 늦춰지면 이런 시들은 말장난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감수성을 면도칼처럼 날카롭게 세워놓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평생을 살다가는 미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런 속성 때문에 시집의 절반은 상투화된 묘사에 그친다. 어차피 할 말을 절제할 것이면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의식한 것이 아니라면 너무 일찍 나온 시집이다. 한자 역시 의식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다.★★☆☆☆[4337. 5. 31.]   570□먼지 속 이슬□박찬, 문학동네 시집 47, 문학동네, 2000   묵은 세월이 새 세월을 당하여 빛을 발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불교의 주제는 이미 조선시대 내내 선사나 선비들이 한 마디씩 다 한 것이다. 이것이 하필 이 시대에 시의 옷을 입고 나타나려면 그럴 수밖에 없는 내면의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런 성숙된 고민 없이 내던지는 화두는 사구일 뿐이다. 활구가 아닌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것이 사구가 아니겠는가? 한자까지 등장한 깨달음의 세계는, 그렇게 보겠다면 말릴 필요는 없겠지만, 오늘 필요한 세계라고 보기 어렵다. 시는 오늘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4337. 5. 31.]    
66    시집 1000권 읽기 56 댓글:  조회:1757  추천:0  2015-02-11
551□아메리카 시편□오세영, 문학동네 시집 21, 문학동네, 1997   강렬한 체험이 시의 주제가 되면 표현은 2선으로 후퇴한다. 그 체험의 내용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경우는 미국 체험이 시의 주제이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한 공간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해 시들이 혹사당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더더기 하나 없이 시가 간결하면서도 내용을 전달하기 좋은 방향으로 초점이 움직이고 있다. 내용이 시를 이끌고 가는데도 그나마 늘어지지 않는 것은 간결하게 주제만을 취할 줄 아는 시인의 안목 때문이다. 수필로 써야 할 내용을 시로 씀으로 해서 초래된 희생이 적지 않다.★★☆☆☆[4337. 5. 25.]   552□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이윤학, 문학동네 시집 22, 문학동네, 1997   냉정한 관찰과 인식의 승리를 보여주는 시집이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이미지를 처리하는 재주는 오랜 숙련 끝에 나오는 것이고,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은 오랜 사색의 끝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의 시인은 남들이 갖추기 힘든 두 가지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아쉬운 것은 인식은 그 자체로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방향을 갖지 않는 인식은 말장난으로 전락하기 쉬운데 그런 유혹이 곳곳에서 보인다. 이것은 인식과 의식의 방향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 시집의 인식도 그 방향성이 보이지만, 그것은 이미 있는 어떤 아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반의 성공에 머무르고 만다. 9부 능선에서 되돌아오고서 등산했다는 소리를 한다면 어쩐지 우습지 않겠는가?  시에서 9부 능선은 때로 아예 안 올라간 것과 같은 때가 있는 법이다. 한자는 옥에 티다. 시가 옥새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면 라고 쓸 이유가 없다.★★★☆☆[4337. 5. 25.]   553□시간의 그물□이재무, 문학동네 시집 23, 문학동네, 1997   자신이 발견한 참신한 이미지가 아까운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애써 찾았다고 거기에 집착하여 너무 많은 것을 집어넣으면 이미지는 마치 푸대와도 같아서 찢어지기도 한다. 찢어질 정도는 아니지만 내용물이 너무 많아서 툭툭 불거지거나 조금씩 비지기 시작하는 그런 단계에 시들이 와있다. 시들이 짧고 선명한 것은 그런 탓이다.   이렇듯 선명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시인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너무 선명하면 울림이 없는 법이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기 힘든 것처럼. 그리고 내용이 거의 과거에 집중되어 있어서 정체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현재를 노래할 때도 반드시 과거의 우울한 체험과 연결되어있어 그 정체감을 더한다. 이 정체감이 꼭 나이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4337. 5. 25.]   554□게임 테이블□윤효, 문학동네 시집 24, 문학동네, 1997   이런 시집은 읽기가 부담스럽다. 개인의 체험과 시에서 묘사되는 사회의 실상이 어지럽게 뒤섞여 혼돈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 쪽으로 주제가 집중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내면을 노래하려는 것인지 사회와 문명의 질곡을 노래하고자 하는 것인지 언뜻 잡히지 않는다. 그것을 아울러 노래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지들은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미지는 어떤 전체를 노래하기 위해 움직이는데, 곳곳에서 개인의 체험과 삶에 대한 결론을 증명하는 데 바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절실할 때가 많다. 그리고 시의 설정 상황과 구도가 복잡하고 규모가 큰 편이다. 이것은 시인이 무언가 큰 세계를 노래할 자질이 충분히 갖추어졌다는 점에서 큰 장점으로 보인다. 당연히 시는 복잡한 모양을 띠는데, 그 복잡성이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뒤따르지 않으면 시는 허황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4337. 5. 27.]   555□아주 오래된 동네□이명찬, 문학동네 시집 26, 문학동네, 1997   시가 군더더기 없이 아주 단단하다. 이것은 주제가 시를 이끌어가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현란한 이미지가 만드는 잔재미는 없다. 이 경우에는 주제가 시대의 문제 혹은 개인의 문제를 얼마만큼 많이 담아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라는 괴물의 손위에 답을 올려놓게 된다. 하지만 자괴감은 자신을 돌아보는 명징한 계기이기는 하지만, 전망의 부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쓰는 자도 읽는 자도 괴롭다.★★☆☆☆[4337. 5. 27.]   556□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정우영, 문학동네 시집 28, 문학동네, 1998   실천을 지향하는 시들은 시인의 인식이 건드릴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이 두터울수록 감동을 준다. 그런데 이미 자명한 사실인데도 독자가 거기에 대해 감동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 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 시인을 포함하여 그런 관행을 만든 세력과 그 세력이 노래했던 역사를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어떤 힘들의 합작이다. 그렇다고 하여 변화된 세계 속에서 그런 관행 속에 그대로 앉아있는 사람을 탓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많은 오류를 갖고 있다. 그러한 오류를 공격하는 일이 더 이상 감동의 영역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공격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된 어떤 감각 속에서 새로운 타격법을 찾는 것이 좌절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갈수록 더할 것이다.★★☆☆☆[4337. 5. 27.]   557□강릉, 프라하, 함흥□이홍섭, 문학동네 시집 29, 문학동네, 1998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고 이미지로 말하는 방법을 잘 터득한 시인이다. 주어진 상을 최대한 요약하여 그 뒤의 세계를 비추는 능력을 갖추었다. 다만, 미리 결론을 정해놓고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미지를 마련하는 것은, 나의 결론이 나왔더라도 그것을 확정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드러내주기만 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이든 결론을 먼저 맺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성급한 결론은 오류로 가는 지름길이다.★★★☆☆[4337. 5. 27.]   558□천국의 난민□윤의섭, 문학동네 시집 49, 문학동네, 2000   시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현상에서 자신만의 상상이 빚은 광경을 보고 그것을 아닌 척하고 능청스럽게 묘사해버리면 거기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상상력의 빛깔이 나타난다. 그러한 상상력에 자신을 갖기까지는 꽤 오랜 숙련이 필요하다.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법이 상상력이어서 다른 어떤 시들보다도 시간에 대한 고민을 한 흔적이 많다. 인간은 결국 시간 속에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 같지만, 그 시간의 색깔을 자신의 기억과 상상력으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다.   평범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다만, 그런 것들이 미리 설정된 단순한 결론을 향해 가거나, 그런 상상력에만 재미를 느껴서 진지성이 결여되면 치기가 되기 쉽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듯하다. 그런 치기가 세상을 초월한 듯한 태도로 비약하면 그때는 역겨워진다. 그러므로 계속된 긴장이 필요한 세계이다. 한자는 뜻하지 않은 치기로 작동하기 쉽다.★★★☆☆[4337. 5. 28.]   559□개리 카를 들으며□박몽구, 문학동네 시집 52, 문학동네, 2001   무언가 강한 주제를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 전체를 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시에서 이미지들이 말에 떠다밀려 표류하고 있다.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기 일쑤고, 자신만의 주장에 취하기 쉽다. 말이 시의 전면으로 나서면 이미지는 그 말을 위해서 동원된 일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때 이미지는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말의 광채 뒤에 가려있기 때문에 대부분 생기를 잃는다. 주제가 이렇게 강할 경우에는 이미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냥 말로 직접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효과가 좋다. 이 시집은 말과 이미지가 서로 충돌하고 있어서 이 둘을 갈라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시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4337. 5. 28.]   560□피보다 붉은 오후□조창환, 문학동네 시집 55, 문학동네, 2001   말을 최대한 아끼고 묘사로 말을 대신하려고 하는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났고, 이런 태도는 시집 전체에 일관되고 있어서 이미 시인의 창작방법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묘사는 단순한 묘사로 그쳐서는 안 되고, 거기에 감정이나 의미가 말없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앞부분에서는 많은 시들이 단순히 묘사로 그치는 수가 많고 뒷부분에서는 묘사를 참지 못하여 말을 해버리는 수가 많았다. 이 점은 시집 전체로 볼 때 큰 결점이다.   묘사의 시는 선택되는 낱말들이 시인의 의식을 반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낱말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해서 독자의 시선이 그 말을 따라가면서 느낌이 함께 일어나도록 배치해야 한다. 내가 본 것이 신기하다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 이미지는 어떤 의미나 느낌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가지를 못하고 이미지나 묘사 그 자체로 남고 만다. 그런 곳들이 많다. 한자는 불필요한 이미지이다.★★☆☆☆[4337. 5. 28.]    
65    시집 1000권 읽기 55 댓글:  조회:1844  추천:0  2015-02-11
  541□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박주택, 문학동네 시집 12, 문학동네, 1996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묘사는 실로 감탄할 만한 경지이다. 그런데 방법상의 문제가 하나 발견된다. 시집 전체를 읽고 났을 때도 묘사의 그 엄정성 때문에 낱낱의 묘사가 만든 구도의 전체 배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카메라처럼 들이대기만 했지 카메라에 담겨 움직이는 화면이 전체의 어떤 구도에서 배치되었는가 하는 것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이미지로만 쓰는 시들이 갖는 한계일 수 있다. 주제가 이미지 뒤로 숨는 순간에도 이미지는 주제를 보여주도록 배치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이미지는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 시인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결국 무언가 말을 통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점이 묘사로만 쓰는 시에는 있다. 그리고 시가 꼭 이미지에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생각도 해보아야 한다. 이미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답으로 생각하는 순간 시라고 하는 갈래가 갖는 많은 장점을 놓치기 쉽다. 이런 점을 오래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그런데 한자는 좋은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정말 불편한 물건이다.★★☆☆☆[4337. 5. 22.]   542□꿈에 오신 그대□이동순, 문학동네 시집 10, 문학동네, 1995   답이 많다는 것은 정답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경우에는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 하는 것이 거의 보는 자의 손에 맡겨져 있고, 그에 따라서 방향과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에 딱히 어떻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라는 주제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시집 한 권에서 어조가 같고, 내용이 비슷하며, 세계까지 같다면 그것은 시인의 의식이 많이 정화되고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많은 시인들이 몇 가지 뒤섞인 세계와 방법으로 시집 한 권을 엮는데, 이 시집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것이 안정되게 한 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다. 이것은 어떤 한 주제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그것을 순식간에 한 호흡으로 정리한 경우이다. 이런 것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여기서는 사랑이 주제가 되었다. 인간 보편의 감정이기에 삶의 모든 행위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고, 그렇게 한 것은 시인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하지만 시가 너무 차분하여 사랑의 격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겠지만, 순수한 사랑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시인의 영혼은 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왕에 사랑에 관한 시집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런 시집들과 어떤 점에서 변별성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 사랑시의 숙제이다.★★☆☆☆[4337. 5. 24.]   543□아름다운 지옥□안찬수, 문학동네 시집 11, 문학동네, 1996   의식이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격렬하게 그것과 싸움을 할 때 상상력은 기괴한 모습으로 작동하고 그것은 나름대로 한 세계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의식의 변화 내지는 작동들이 어떤 세계로 연결되어 그것을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직전의 상태라면 다소 혼란스럽고 특수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실험하는 데 필요한 어떤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의 실험에만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치기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그런 위험이 이 시집의 절반을 채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팔과 다리에서는 무언가 동작을 하고 있지만, 몸 전체에서 그 동작이 어떤 의미를 향하여 움직이는가 하는 가장 중요한 물음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작은 부분에 집착하면 큰 부분의 모습이 어지러워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시집이다. 한자는 가시 같은 존재이다.★☆☆☆☆[4337. 5. 24.]   544□저물 무렵□신동호, 문학동네 시집 13, 문학동네, 1996   어디까지 말해야 시가 되고 어디까지 말하면 시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집이다. 하는 고민에 비해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미지 훈련을 많이 했으되 깎아서 다듬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앞부분의 절반은 자신의 체험에 너무 빠져있어서 그것을 시로 쓸 때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일까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뒤의 절반은 하고자 하는 말이 너무 강렬해서 이미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서 시가 너무 길게 풀어진 경우이다. 어느 경우이든 자기 절제가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제부터는 꾸미거나 붙이는 훈련이 아니라 깎아내야 하는 훈련을 할 때이다. 한자는 붙이는 데도 깎는 데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4337. 5. 24.]   545□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손진은, 문학동네 시집 14, 문학동네, 1996   새로운 사물에서 새로운 관념을 읽어내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다. 그러한 능력이 시집 전체에서 돋보인다. 그런데 너무 자세하게 보려고 하면 그 자세한 인식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잘 안 보이는 수가 있다. 부분 묘사가 장황해져 전체의 주제 전달을 방해하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전혀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꼭 그렇지 않은 데도 묘사의 관성 때문에 그런 일이 반복되면 시가 빡빡해진다. 자칫하면 그냥 묘사로 그치는 수도 생긴다. 그리고 새로 발견한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일이 생긴다. 그런 위험들이 여기저기 많이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읽으려는 노력은 큰 시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한자는 애써 가꾼 세계를 깎아먹는 노릇을 한다.★★☆☆☆[4337. 5. 24.]   546□불태운 시집□유강희, 문학동네 시집 15, 문학동네, 1996   세월이 쌓이고 삶의 경륜이 익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상상력이다. 이것은 현재의 모습이 상징이나 의미전달보다는 묘사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이 묘사력이 뜻을 싣고 가는 경지에 이르면 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빛깔의 상상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한 삶의 통찰을 담지 않을 경우 자칫하면 말장난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그것은 현재의 깨달음이 삶의 절정이라고 믿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여 그것이 주제 밖으로 벗어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한다. 군더더기 없이 이미지들이 한 초점을 이루면서 전체의 주제를 전달하는 능력이 좋은 시인이다. 한자는 그러한 능력을 깎는 오점이다.★★☆☆☆[4337. 6. 24.]   547□야성은 빛나다□최영철, 문학동네 시집 16, 문학동네, 1997   시를 단단하고 야물게 잘 쓰는 시인이다. 한 번 잡힌 상에 자신의 생각을 실어서 전달하는 재주가 능수능란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더더기가 거의 없게 시를 완성한다는 것은 보통 시인들이 갖기 힘든 장점이다. 다만 그런 만큼 그런 능력으로 빚은 시들이 모여서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시집이다. 자잘한 일상의 그 뒤쪽을 한 발 더 들어가야 시가 힘을 얻는데, 그 한 꺼풀이 뚫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기교가 승한 작품에서는 그 기교 때문에 이미지가 스스로를 불려나가는 상황도 나온다. 그런 것들은 대개 내용이 빈약하게 마련이다. 특히 뒤쪽으로 갈수록 이런 조짐이 뚜렷하다. 한두 가지 무시할 수 없는 점만 보완한다면 좋은 작품이 나올 상상력이다.★★☆☆☆[4337. 5. 24.]   548□우주로의 초대□문복주, 문학동네 시집 17, 문학동네, 1997   시가 특별한 소재를 취급하는 것은 독자에게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특수한 소재는 특수한 그 만큼 그 특수성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명을 해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예비지식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시는 불가피하게 설명을 하게 되고, 설명을 하면 시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특수한 지식을 소재로 한 시가 성공을 이루기는 극히 어렵다. 그리고 시는 특수한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 감성에 호소하는 갈래라는 점에서 특수함 그 자체가 시의 활동성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을 아주 잘 보여주는 시집이다.   시집 전체가 우주에 관한 지식을 가득 차있고 그러한 지식을 전제로 해서 일상의 감정을 싣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지식이 그렇고 그런 흔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에 비유체계는 신선할지언정 그 비유체계가 갖는 신선함의 의도는 그 신선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에서 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비유가 화려한데도 대부분 생경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노력에 비해 결과가 따라주지 못하는 셈이다.★☆☆☆☆[4337. 5. 25.]   549□여수일지□권오표, 문학동네 시집 18, 문학동네, 1997   요즘 시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옛 시대의 정서에 맥을 대고 있다. 이 점이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된다. 잊혀진 정서를 오롯이 살려놓는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만, 바로 그래서 이미 낡아버린 비유체계와 정서에 파묻혀 시인의 새로운 시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단점이다. 특히 198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누이’라든가 ‘그녀’ 같은 모호한 대상을 향해서 영탄을 하는 것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개인의 특수함으로 끝날 수 있는 체험과 개인의 특수함이 남들과 공유될 수 있는 체험이 있다는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감정의 모호성을 제거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4337. 5. 25.]   550□사물의 운명□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19, 문학동네, 1997   ‘세기말에 제자백가를 다시 읽다’ 같은 작품은 다시없는 절창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절창이 시집 곳곳에 숨어있다.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같은 작품을 썼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말하자면 인식의 갈피가 자연과 만나서 이전까지는 보여준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이루었는데, 그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드러남의 양상이 문제이다. 이것이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인식으로 그려내고 있어서 사물에 촉발되는 언어의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시들이 관찰에 머물러 있어서 한 세계를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시라는 갈래가 갖는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역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곳곳에서 어법의 혼란스런 착종이 있고, 낱말 선택에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듯한 곳도 꽤 눈에 띄어서 아쉬움을 준다. 기초가 부실할 때는 대작에서조차 흠집을 남길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주는 시집이다.★★★☆☆[4337.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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