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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2017년 08월 18일 20시 42분  조회:1451  추천:0  작성자: 강려

좋은 시의 조건 10가지   -박남희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1. 함축성이 있고 입체적인 시를 써라 

시와 산문이 다른 점은 시가 지니고 있는 함축성 때문이다. 시는 평면적인 글을 의미전환 시키거나 이미지화해서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해준다. 시에서 다양한 수사법(은유, 상징, 역설, 알레고리, 아이러니 등)을 사용하는 것도 평면적인 글을 입체적이고 함축적인 글로 만들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나 사회의 어떤 현상과 연결시켜서 바라보고, 그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해석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우리가 시를 쓸 때 세계 속에서 자아를 발견하고(동화-assimilation) 자아 속에서 세계를 발견하려는 것(투사-projection)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동화는 세계(사물)를 자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이를 다른 말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투사는 자아의 감정을 세계(사물)에 이입시켜서 자아를 세계와 동일화시키는 것을 말하며, 이를 요약해서 자아의 세계화라고 말한다. 동화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자아에 중점이 주어지는데 반해, 투사는 이와 반대로 자아를 대상에 상상적으로 감정이입 시켜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갖도록 하는 방법으로 세계(사물)에 중점이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하려는 것은 서정시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이다.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있다 

 

 팽이

최문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나님, 
팽이 치러 나오세요 
무명 타래 엮은 줄로 나를 챙챙 감았다가 
얼음판 위에 휙 내던지고, 괜찮아요 
심장을 퍽퍽 갈기세요 
죽었다가도 일어설게요 
뺨을 맞고 하얘진 얼굴로 
아무 기둥도 없이 서 있는 
이게, 
선 줄 알면 
다시 쓰러지는 이게 
제 사랑입니다 하나님 

2.관점과 표현이 새로워야 한다- 다르게 보기와 낯설게 하기 
좋은 시는 시인이 대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것을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미 너무나도 낯익은 것들에 길들여져 있어서 낯익은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기계적이고 관습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시인은 이처럼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것들을 일깨워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재창조해내는 자이다. 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대상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바라보고 이것을 자신의 표현법으로 낯설고 새롭게 표현해 내는데서 생겨난다. 

이처럼 시를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표현법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과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주체나 대상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상력이나 사유(생각)를 통해서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재해석해서 새롭게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문학사를 더듬어 볼 때, 실험시나 해체시가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시적 ‘새로움’에 대한 시인의 열망이 반영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의 틀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분열된 몽고의 부족을 결집하여 중국과 유럽을 정복한 징기스칸이 만약에 유목민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런 큰 역사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유목을 뜻하는 노마드(nomad/nomade)는 들뢰즈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목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서 어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일컫는 말로 정착되면서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노마드적인 정신은 시를 쓸 때도 필요하다. 좋은 시를 쓰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부수고 자아와 사물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상상력은 자유로운 정신에서 나오고,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좋은 시의 원천이 된다 


둥근 발작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억누르세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할수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거리에서

이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3.현실의 구체성과 진정성에 토대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 

좋은 시는 우선 허황되지가 않다. 집도 토대가 튼튼해야 좋은 집이 될 수 있듯이, 시도 체험의 구체성이나 진정성 위에 서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관념이나 허황된 상상만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관념도 시의 소재가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상관물로 사물화하지 못하면 독해가 불가능한 난해시나 주관적이고 피상적인 시 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연관성이 아주 없거나 너무 희박해서는 곤란하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객관적으로 독해가 불가능한 시가 종종 보이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체험이나 기억에 의존한 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는 체험과 기억과 상상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의 경험이나 감동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켜줄 수 있는 시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공감하게 되는 것은 시의 내용이나 주제가 현실과 일정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표현이나 상상력, 시적 사유 등이 현실과 연결되어있으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부분을 일깨워줄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는 시가 좋은 시이다. 우리가 좋은 시를 읽으면서 우리 안에 잠들어있던 생각이나 상상력이 새로운 충격으로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도 좋은 시 속에 들어있는 신선한 감각의 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땡볕

허수경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물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 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간통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 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4.전체적인 통일성과 내용과 형식의 조화에 유념하라 

시를 쓰다보면 처음과 끝의 발상이나 주제가 다르고 형식적인 통일성도 없이 산만하게 시가 써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과오는 초보자일수록 더욱 자주 범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신만의 시작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시에 대한 막연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처음 읽을 때는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꼼꼼히 읽어보면 낯선 표현 속에서 일정한 시적 문맥과 흐름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시들은 시 속에 텐션(긴장)이 들어있어서 시를 읽는 맛이 새로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중적 구조를 지닌 다층시와 독해 불가능한 난해시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통일성이 결여되고 내용과 형식의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는 난해시라기보다는 미숙한 시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시를 쓴 자신도 설명 불가능한 난해시도 역시 시적 숙련도가 덜된 시에 포함된다. 

요즘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난해시나 환상시, 해체시의 포즈를 취하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난해시로 빠져들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요즘은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지식들이 인터넷으로 공유할 수 있는 네트워크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유독 시만이 소통불가능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좋은 시는 익숙함과 새로움, 경험과 상상력, 자유로움과 질서, 모호성과 선명성, 자아와 세계가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시이다 


아름다운 수작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풍향계

이덕규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흉터 속의 새

유홍준 

새의 부리만한 
흉터가 내 허벅지에 있다 열다섯 살 저녁 때 
새가 날아와서 갇혔다 

꺼내 줄까 새야 
꺼내 줄까 새야 

혼자가 되면 
나는 흉터를 긁는다 
허벅지에 갇힌 새가, 꿈틀거린다 


5.장식적인 수사를 피하고 명징한 이미지와 행간의 미학에 유념하라 

시만큼 언어적 수사에 민감한 장르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에서 언어적 수사는 옷과 같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보이듯이, 시 또한 수사적 표현에 따라 느낌이나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화려한 옷이 모든 사람의 몸에 맞는 것이 아니듯이 불필요한 장식적인 수사법이 때로는 그 시를 망칠 때가 있다. 시에서는 화려한 수사법보다는 오히려 명징한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시에서 명징한 이미지는 그 시의 구심점이 되어서 단순한 주제를 중의적으로 전경화 시켜준다. 대부분의 좋은 시에는 명징한 중심 이미지가 존재한다. 좋은 시는 그러한 중심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체험과 상상력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키고 확장시켜나간다. 이미지는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을 간접화시켜서 보여줌으로써 설명에 갇히기 쉬운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항은 시의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산문적 진술은 화자가 대부분의 상황을 직접 진술하기 때문에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이 없다. 하지만 시는 생략과 침묵과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행간과 행간 사이의 긴장감을 높인다. 이러한 시적 긴장감은 시적 화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들이 행간 사이에 무수히 숨어있다는 것을 의미해준다. 고급 독자는 시인이 설명하지 않고 행간 사이에 감추어놓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시의 묘미를 느낀다. 압축과 생략이 시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함민복


물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꽃 먼저 와서

류인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6.계산된 논리보다는 자유로운 연상(상상력)을 활용하라 

시의 길은 쭉 뻗은 고속도로나 아스팔트길 같은 것이 아니다. 시의 길은 오히려 꾸불꾸불한 시골길이나 출렁이는 물길과 흡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눈에 빤히 보이거나 쉽게 측량되지 않는다. 현대화된 길은 이미 계획된 설계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길이지만 시골길이나 물길은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시의 길 역시 자연에 가까운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시는 친자연적이다. 우리는 종종 이미 계획된 논리를 바탕으로 시를 쓰려고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씌어진 시는 너무 논리적이어서 풍부한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이 빤한 알레고리 시에 머물거나, 머리로 쓴 작위적인 시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논리적인 시는 새로움과 놀라움이 없다. 물길은 늘 요동하면서 수시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마음도 물길과 같다. 인간의 마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어쩌면 마음은 물길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는 속담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는 계산된 논리를 버리고 시상을 자유로운 연상에 맡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자연 속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숨어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이러한 숨어있는 상상력을 캐내어 자아와 타자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고 이를 중심적인 주제나 이미지로 응집시켜나가는 것이다. 상상력이 깊고 넓은 시는 바다와 같은 심호함이 있다. 작은 냇물은 가뭄에 말라서 없어지지만 바다는 죽지 않는다. 바다 속에는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시작법을 위한 기도

박현수 

저희에게 
한 번도 성대를 거친 적이 없는 
발성법을 주옵시며 
나날이 낯선 
마을에 당도한 바람의 눈으로 
세상에 서게 하소서 
의도대로 시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옵시며 
상상력의 홀씨가 
생을 가득 떠돌게 하소서 
회고는 
노쇠의 증좌임을 믿사오니 
사물에서 과거를 
연상하지 않게 하옵시며 
밤벌레처럼 유년을 
파먹으며 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소서 
거짓 희망으로 
시를 끝내지 않게 하옵시며 
삶이란 글자 속에 
시가 이미 겹쳐 있듯이 
영원토록 
살갗처럼 시를 입게 하소서 

 


거리

문태준 

오늘 풀뱀이 배를 스쳐 여린 풀잎을 눕힌 자리같이 
거위가 울며 울며 우리로 되돌아가는 저 저녁의 깊이와 같이 
거위를 따라 걷다 문득 뒤돌아볼 때 내가 좀 전에 서 있었던 곳까지 
한 계절 전 눈보라 올 때 한 채의 상여가 산 밑까지 밀고 간 들길같이 
그보다 더 오래 전, 죽은 지 사흘 된 숙부의 종아리가 장맛비처럼 아직 물렁물렁할 때 
누구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리 距離 


이동식 화장실에서

이대흠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 
불경 같다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7.어떤 것을 위한 도구인 시 보다는 스스로가 존재인 시를 쓰라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것들은 자신만의 모습과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들은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식물이건 동물이건 간에 자신만의 존재방식이 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시는 시인이 창조해낸 새로운 언어적 피조물이다. 이는 1930년대 박용철로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는 유기체시론의 맥락에서 시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한 것이지만, 에이브람스가 말한 문학의 효용론과 존재론의 범주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효용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교훈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격동기나 시대적 전형기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 속의 시들은 교훈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종교시와 연시(연애시), 행사시 등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이런 시들은 시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어떤 것을 위한 도구로 시가 사용되기 때문에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비본질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시들은 시대적 상황이나 시간적 흐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문학의 영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시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론적인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존재론적인 시란 어떤 관념이나 생각도 배제하고 오직 시 자체의 존재성만 추구한 김춘수류의 무의미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의미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 의미하는 바가 문학 외적인 목적성에 치우친 시는 순수한 의미의 존재론적인 시라고 말할 수 없다. 문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물론 문학 속에도 종교나 철학이 들어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문학은 문학성이 주가 되어야 한다. 문학의 본령은 아름다움과 새로움에 있다. 그런데 문학에서의 아름다움은 형태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언어적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시 속에 창조된 새로운 언어적 공간을 통해서 시적인 전율을 느낀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낯선 아름다움이다. 현대시의 낯선 아름다움은 감각으로 느끼기 보다는 직관으로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그 사물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유추해내는 직관의 힘이야말로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시학

매클리시 

시는 감촉할 수 있고 묵묵해야 한다 
구형의 사과처럼 
무언(無言)이어야 한다 
엄지손가락에 닿는 낡은 훈장처럼 
조용해야 한다 
이끼 자란 창턱의 소맷자락에 붙은 돌처럼 
시는 말이 없어야 한다 
새들의 비약처럼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 
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마치 달이 떠오를 때처럼 
시는 비등해야 하며 
진실을 나타내지 않는다 
슬픔의 모든 역사를 표현함에 
텅 빈 문간과 단풍잎 하나 
사랑엔 
기운 풀과 바다 위의 등대불들 
시는 의미해선 안 되며 
존재해야 한다 

(부분인용) 

 

갈대는 배후가 없다

임영조 

청량한 가을볕에 
피를 말린다 
소슬한 바람으로 
살을 말린다 

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 
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 
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 
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 
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 
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 

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 
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 
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 
저 꼿꼿한 老後여! 

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 
배후가 없다, 다만 
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 
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 
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 
갈대는 갈 데도 없다 

그리하여 이 가을 
볕으로 바람으로 
피를 말린다 
몸을 말린다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8.남의 것을 모방하지 말고 자연을 잘 활용하라 

자연은 생명의 터전이고 원천이다. 모든 것은 자연 속에서 순환하고 생멸한다. 그러면서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서로 닮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의 여러 사물들이 둥근 것이나, 부서져서 다른 것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답고 싶어 하는 것이나,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몸에도 둥근 것이 있고 부서지기 쉬운 것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으며,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처럼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닮아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자연을 등장시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연과의 친연성(親緣性)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시 역시 자연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시는 비유적 언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비유의 원천인 자연을 배제하고는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근원이며 시적 소재의 보고이다. 시를 쓰는 초보자들이 종종 남의 시를 모방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 속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말의 광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면 인간이 보인다. 이와 반대로 인간을 보면 자연이 보인다. 자연을 통해서 인간을 보든, 그 반대이든 그것은 시인의 몫이다. 남의 것을 모방하는 것은 표절이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것은 창조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강은교 

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울음이 타는 가을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 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나면서 못 만나는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 
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신神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지평선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달북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10.개성적인 문체와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시를 쓰라 

흔히 문체라고 하면 소설의 문체를 떠올리지만 시에서도 엄연히 문체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7?5조의 운율을 보여주는 김소월의 시나, 평북 방언을 중심으로 정감어린 산문시적 회고체의 시형을 보여주는 백석의 시는 물론, 서정적 울림이 큰 반복적인 운율을 바탕으로 체험적 진정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문태준이나, 주로 개인적인 의식 세계를 분열적이고 도착적인 어법으로 유니크하게 보여주는 황병승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그들 나름의 문체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시의 문체들을 유형화시켜서 종류별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문체는 언어적 산물이면서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의 문체는 산문의 문체와는 달리 시 문맥의 일차적인 의미에 기여하기보다는 그 뒤에 숨어있는 의미나 상상력을 다층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문체는 시인의 어법이나 운율만으로는 그 윤곽이 쉽게 잡히지 않는다. 시의 문체는 상상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는데 기여한다. 그것이 서정적 공간인지, 아니면 분열적이거나 해체적 공간인지, 환상적 공간인지, 현실적 공간인지는 시인의 문체와 상상력의 유기적 결합의 양상에 따라 달라진다. 시의 문체는 시인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정한 윤곽을 드러낸다. 

하지만 시인의 문체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서는 안된다. 옥타비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스타일(문체)은 모든 창조적 의도의 출발점”이지만 “시인이 스타일을 획득하면 시인이기를 그만두고 문학적 인공물을 세우는 자로 변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시인의 스타일이 관습화되면 더 이상 그것은 톡특한 스타일이 될 수 없다는 경계의 말로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시세계를 창조해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우리가 유의할 점은 개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시적 개성을 강조하다보면 보편성이 약해져서 자칫 난해 시에 빠질 우려가 있고, 반대로 보편성에 치우치다보면 통속성과 대중성에 영합하는 몰개성적인 시가 되기 쉽다. 시적 언어는 산문적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산문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별처럼 빛난다. 그곳은 시인 각자의 상상적 공간이다. 산문이 낮의 공간에 적합한 것이라면 시는 밤의 공간에 더 어울린다. 밤은 그 속에 무궁무진한 빛을 숨기고 있다. 밤하늘에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주위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묽다

문태준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사산(死産)된 두 마음

황병승 

땅속에 거꾸로 처박힌 광대처럼 
열 두 살, 사탕을 너무 먹어서 
두 발은 계속 허공을 걷는다 

시간은 좀도둑처럼 죽어가고 
딸꾹 딸꾹 조금씩 죽어가고 
참새들은 그것을 재밌어 한다 

서른 여섯 살의 악마가 다가와 열두 살의 나를 지목할 때까지 
(딸꾹거리며) 

검은 칼을 든 악마가 열두 살의 내 목을 내리칠 때까지 
(딸꾹, 딸꾹거리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 땅속의 자식아! 
흙 속에 처박힌 열두 살, 
귓속의 매미는 잠들지 못한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쓰기 (문광영문창6)[ 스크랩 ]

 

  사람에게 영혼(靈魂)과 육체(肉體)가 있듯이 시(詩)의 구조(構造)에도 형식상의 구조와 내용상의 구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커피를 좋아하시지요?

  저는 아침 커피로 시작하여 온종일 커피를 마시며 삽니다. 맑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느끼며, 바이올린 곡이나 첼로 한 곡 곁들여 틀어 놓고 커피 한두 모금 마시며 원고를 쓰거나 책을 봅니다.

  커피를 마시려면 먼저 커피 잔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커피잔의 모양, 색깔에 아주 민감합니다. 집에서 마실 때에는 연한 챠콜색의 울퉁불퉁한 머그잔을 씁니다. 깡통 찌그러진 것처럼 아주 제멋대로 생긴 놈인데, 커피를 마시면서 자유분망한 상상에 빠지도록 해줍니다. 문협 사무실에서는 프러시안 블루의 큰 커피잔을 사용합니다. 바다를 연상하며 커피를 마신답니다. 여기 커피 잔의 선택은 시의 형식에 해당합니다.

 다음으로는  커피의 내용물을  조제하는 일입니다. ‘다비도프’라는 인스탄트 커피를 마실 것인가, 케냐AA 원두커피를 내려 마실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저는 프림이나 설탕을 넣어 마시지 않습니다. 우유를 섞어 넣은 라테커피를 선호하는 편이지요. 바로 시의 내용상의 구조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커피 맛을 내는 데는 원두의 분쇄도나 우유의 온도, 비율 등이 중요하듯, 좋은 시(詩)가 되기 위해서는 시(詩)의 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쓸 때에 어떤 방식, 어떤 형태의 시들을 쓰시나요? 시 창작을 하려면 일정 방식의 틀을 놓고 이를 변형시켜 나가고 발전, 비약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초보자들에게는 기본적인 형태의 시 쓰기를 알아두고, 이를 응용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동백이 활짝

                                                       송찬호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참, 순간의 착상, 상상력이 대단하지요?  시는 순간의 예술이란 걸 보여줍니다. 나아가 시가 꼭 길어야 될 필

 

요는 없는 것이지요. 짧아도 장치만  잘하면 얼마든지 형상화에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반부(4행)는 묘

 

사시로서 외면풍경의 ‘보여주기’로 이루어지지만, 후반부(3행)는 화자 내면풍경의  ‘진술’로 서로 다른 방식

 

겹쳐서 이루어진 시입니다.  

 

 전 시간에는 경험시에 이어 묘사시, 사물시, 이미지시 중심의 시 쓰기를 공부했지요. 경험시는 시인이나 화자

 

가 시적 언술에 참여하여 특수한 인간경험의 극적인 세계와 그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묘사시는 시인이

 

나 화자의 관념보다 대상의 구체성에 비중을 두는 유형이었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시의 내용과 형식 가운데 형식상의 그릇, 시의 내용을 어떤 형태의 그릇에 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지난 시간에 이어 설명시와 논증시라는 유형을 놓고 창작 논의를 펼쳐가려고 합니다.

    

        

 

 

                                설명시, 논증시 유형의 시 쓰기

                                                                 

 

 

1. 설명시 유형의 시 구성     

 

 

1) ‘설명문’과 ‘설명시’ 의 차이

 

○ ‘설명문’의 개념과 ‘설명시’ 형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혼돈해서는 안 된다. 한 마디로 설명문은 일반적 문장 형식으로, 정보(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이해력을 요구하는 글이라 한다면, 설명시는 내용상에서는 시적 상상이 들어가고 그 표현의 문장 형식, 곧 기술상의, 언술(utterance)상의 문맥적 형태를 말한다.

 

○ ‘설명문’은 어떤 사건에 대해 발생 원인과 경과를, 어떤 기계의 구조와 원리, 성능이나 취급 방법 따위를, 사전적 개념이나 해설을, 자세히 해명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그러니까 설명법(exposition)이 사물에 관해서 “무엇이냐”, “어떤 뜻이냐” “어떤 성질이냐”에 대해 그 답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는 문장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설명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활용되는 기술 방식에는 정의법, 비교․대조법, 분류법, 분석법, 인용과 예시법이 있다. 

 설명의 기술방법에서 설명시와 연관되는 것이 '정의'의 형식이다. 정의는 'A(주어)는 B(서술어)이다'가 아닌가. 바로  피정의항과 정의항으로 이루어지는 바, 여기에서  피정의항이 주어가 되고, 정의항은 서술어가 되는 셈이다.    

       

 

 

2) 주어 + 서술어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시의 예

 

○ 맥로그린(MacLauglin)이, 말하듯이 말하는 이가 선택한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시적 관념을 서술하고자 할 때 이 방식을 쓴다. 이때 시적 설명은 ‘주어 +서술어’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 소위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이 그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이때 소재에는 특수한 것으로 ‘장소’, ‘사건’, ‘대상’, ‘인물’ 혹은 자신의 특성을 들 수 있고, 일반적인 것으로는 ‘관념’이나 ‘진리’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아래의 시는 ‘고드름’이란 소재가 채택된 시이다.

   

 

 

                  고드름

                                                                     박정원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의 아끼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고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소리

*

 

결국엔 물이었다

한잔 먹지 않겠는가                                  전문(《시문학》2006년 4월호)

 

 

 

○ 먼저, 시 <고드름>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자. 1연은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

고드름은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

고드름은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

고드름은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

고드름은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

 

 

 

  와 같이, 고드름에 대한 시인의 시적 관념, 곧 의미부여된 화자 자신의 내면적 상상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고드름’이 갖고 있는 속성, 성질, 모양 등에 몰입하여 ‘오기’, ‘휘초리’, ‘송곳’, ‘회한’, ‘절규’로 치환시켜 나간다. 그러다가 2,3,4연부터는 현실 상황을 제시하는 부가적 묘사와 진술로서, 고드름의 지닌 물의 속성, 허무의 결구 처리를 보여준다.

 

○ 그러니까, 박정원의 <고드름>은 절간에 거꾸로 매달린 고드름에 대해 남다른 사유를 시로 형상화한 것, ‘고드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보인다. 고드름에 대한 상상력, 고드름과 같은 하찮은 사물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존재 의미, 삶과의 비유 등 소재에 대한 다양한 시적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 어찌 보면 시는 삶의 세계에 대한 남다른 해석이다. 이때 시의 힘은 의미부여의 상상력에서 온다. 곧 ‘고드름’이라는 외면풍경의 소재에 대해 ‘시안’에 의해 반응된 작가의 내면풍경이 얼마나 새롭고, 의미가 깊고, 통찰을 보여주는가에 달려 있다.

 

○ 독자는 시인이 제시한 작품의 ‘상상력의 등가성’이란 자장(磁場) 속에서 의미를 탐색해 간다. 물론 이때 시인의 연이나 행간의 설정은 중요하며, 독자는 유능한 독자, 슈퍼 리더가 되어 경험을 되살려 의미를 확장해나가도록 장치해야 한다. 곧 위에서 보듯, 시인은 고드름에 대한 시적 설명에서 다 말하지 않는다. 행간의 빈자리를 독자로 하여금 읽어나가면서 ‘빈자리 메꾸기’를, 곧 의미 있게 채워가도록 배려한다. 그것이 노련미이다.

 

○ 위에서 독자들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의 고드름,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드름,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로서의 고드름,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던 날카로운 송곳”의 고드름,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의 고드름,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에서 삶의 아우라를 읽게 된다. 그러나 결국 고드름은 물의 변신일 수 밖에 없다. 시인이 적은 것처럼, 절 마당 노스님이 아끼는 동백꽃잎처럼 ‘투욱’ 지고 나면 고드름은 낙숫물에 불과한 것이고, 그 거리라는 시․ 공간의 차이도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 밖에 안 되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 대개 설명시에서는 소재, 곧 사물에 대한 정신의 해석적 의미로 깨달음이나 통찰, 새로운 의미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놓는 것들이 많다. ‘고드름’에서의 절규는 이승의 속세에 사는 우리들의 평상심이다. 타자를 향한 회초리나 송곳 같은 마음은 결국 복수의 화살로 자신에게 꽂히는 법, 문제는 우리의 삶이란 무명(無明)의 혼돈 속에서 내 탓임을 알고 물이 지닌 섭리대로 돌아가는 유연성이다. 갈증을 아는 고드름의 원천인 물, 그 낫숫물 소리가 떨어지는 수직적 삶의 깨달음이 감동을 주지 않는가.

 

 

 

3) 설명시 유형의 시 쓰기 방법                  (이승훈 , 시작법, 문학과 비평사, PP.70-74참조)

 

 

 

(1) 특수한 소재( 장소, 사건, 사물)를 시적 설명 : 유치환의 <깃발>

 

○ 시적 언술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 시인이나 시 속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직접 독자에게 알려주는 방법이다. 대체로 그것은 시인이나 화자가 자신의 관념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설명시와 논증시의 범주에 든다.

 

○ 설명시는 시인이나 화자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논증시의 경우에 그러한 서술의 논리적 타당성이 드러난다. 설명시는 화자의 주장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설명시는 주어(S)+서술어(P.V)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때 주어에 해당되는 것이 소재이며, 서술어에 해당하는 것은 소재에 대한 시인의 관념이다. 특수한 대상을 소재로 한 설명시 유치환의 <깃발>을 살펴보자.

 

 

                깃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깃발                                    깃발은   - 소리없는 아우성 (P.V1)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깃발                             깃발은  - 노스탈쟈의 손수건 (P.V2)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깃발                        깃발은   - 순정 ( P.V3)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깃발                             깃발은   - 애수 (P.V3)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깃발                           깃발은  -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 (P.V4)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다 아시다시피 이 시의 소재는 “깃발”이다. 언어적 형식으로는 “깃발”이 주어에 해당된다. 시인은 이 “깃발”을 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시의 언어적 형식이 계속 ‘주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서술내용이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고 있다.

 

○ 위의 시구조를 보면 “주어(S)는 서술어(p.v)” 형식이 반복되는 구성 양식으로 드러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무엇이고, 무엇이며, 무엇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상을 설명을 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깃발’이라는 대상을 일상적이거나 과학적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 필자가 1학년 학생들에게 시를 써오라고 숙제를 낸 적이 있다. 물론 사전에 설명시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여학생은 완벽한 설명시 형태의 시를 써왔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개

                                        고유미

 

긴 밤

그 적막한 터널 속을 걸어와

늘어선 회색빛 빌딩 사이를

휘휘 도는

소리 없는 몸짓입니다.

 

 

하늘 위를 촉촉히 적셔놓고

창공 속에 피어 오른

꿈에 보았던

그 소녀의 미소입니다.

 

 

이내 깨어나지 않은

내 창에 내려앉은

해맑은 눈빛입니다.

 

 

잡으려해도 잡히지 않는

가슴에 단

하얀 설레임입니다.

 

 

 

○ 김소월의 <山有花>, 이상의 <거울>, <오감도 시 제1호>는 모두 설명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어+서술어 형식은 설명 방식의 하나인 ‘정의’(definition)에 해당한다. 곧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같은 국어사전식의 정의에서, 피정의항은 '인간', 정의항은 '이성적 동물'로 나눠지는 바, 이 때 피정의항이 주어에 해당하고 정의항이 술어에 해당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비유체계에서 ‘A는 B다’ 식으로 시인들이 매우 즐겨 쓰는 방식이어서 설명시적 언술은 확장과 응용, 변이의 형태로 다양하게 도출된다.

 

○ 다음의 짧은 시도 설명시 형태가 확장, 발동된 것으로 봐야 한다.

 

 

 

    성선설

                                                    함민복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2) 일반적 관념이나 진리의 시적 설명 : 김현승의 <견고한 고독>

 

 

○ 일반적인 관념이나 진리를 소재로 하는 시를 보기로 하자.

 

 

 

견고한 고독

 

                                        김현승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견고한 고독은   - 흰 얼굴 (P.V1)

 

 

그늘에 빗지지 않고

어느 햇빛에도 기대지 않는

또 하나의 손발                                                                견고한 고독은 -단하나의 손발 (P.V2)

 

 

거대한 신들의 정의 앞엔

이 가는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는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제 살과 같이 떼어주며

결정된 빛의 눈물                                                            견고한  고독은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피와 살 

                                                                                           견고한 고독은  - 피와 살 (P.V3)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도

더 휘지 못한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견고한 고독은 - 굳은 열매 (P.V4)

 

 

 

쌉슬한 자양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견고한 고독 은-제 생명에 마지막 남은 맛 (P.V5)

 

                                

 

○ 소재는 ‘견고한 고독’이 관념이다. 다시 말하면 고독의 견고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주어는 ‘견고한 고독’이며 주어에 대한 서술은 3연을 빼고 각 연을 형성한다. 서술어(p.v)를 형성하는 각 연의 중심낱말은 1연: 흰 얼굴. 2연: 단 하나의 손발. 4연: 피와 살. 5연: 굳은 열매. 6연 : 제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등이다.

 

○ 주어 +서술어 형식의 진술은 곧 'A는 B다‘의 형식이기에 하나의 비유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처럼, 원관념이 보조관념으로 ’의미론적 이동‘(sementic movement)을 하는 셈이다. 

 

○ 주어 +서술어의 결합방식에서 문득 피천득의 <수필>을 들 수 있다. 수필이라기보다는 이 하나의 수필이란 ‘정의놀이’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포도가 될 수도 있다.

 

  

 

 

(3) 주어 + 서술어 시 형식에서의 구상과 추상의 문제

 

 

○ 시의 제목(주어, 소재)이 추상일 때 본분은 추상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내용이 추상으로 흐르는 것이 좋은가? 한 마디로 여기에서는 상반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 또 본분에서도 추상 일변도라든가, 구상 일변도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곧 시(詩)의 내용상의 구조를 이루는 요소로는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들 수 있는데, 이 구상(具象)과 추상(抽象)을 시에서 어떻게 배합하여 표현하느냐에 따라 시의 내용 구조는 다음의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① 구상(具象) + 추상(抽象)           ☞ 산은 꿈이다.

② 추상(抽象) + 구상(具象)           ☞ 시(詩)는 꽃이다.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 물은 물이다.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 마음은 무(無)다.

 

 

○ 이러한 시의 내용상의 구조들은 일반적으로 시의 내용 전체에 걸쳐 사용되지만, 부분적으로는 시의 제목과 내용, 한 행, 한 연의 내부에서도 서로가 긴밀하게 작용하며 나타난다.

 

대개 환기력을 위하여 시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①과 ②의 내용 구조처럼 추상은 구상과 어울리고, 구상은 추상과 어울리게 사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 그러니까 추상어 ③ 구상(具象) + 구상(具象) 이나, ④ 추상(抽象) + 추상(抽象) 의 형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에서 다룬 시들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드름은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구상어 + 추상어)

  

 

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           (구상어 + 추상어) 

 

  

견고한 고독은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히 마른 흰 얼굴         (추상어 + 구상어)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추상어 + 구상어)

 

 

 

 

2. 논증시 유형의 시 구성

 

 

 

1) ‘논증’과 ‘논증시’ 의 차이

 

○ ‘논증’(論證, argument)은 자신의 관념이나 주장을 설득시키고 동조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설정되어야 한다. 명제(命題, proposition) 란 대상에 대한 자신의 관념이나 판단을 서술한 문장을 뜻한다. 주어진 명제는 하나의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이 공감을 얻으려면 충분한 뒷받침이 필요하게 된다.

○ 논증시에서의 화자는 전지적 시점이거나 보고자로서의 관찰자 시점이 된다.

 

○ 명제의 유형으로는 사실명제, 가치명제, 당위명제가 있다. 사실명제는 ‘한글은 훌륭한 문자이다’처럼 어떤 사실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한 것, 가치명제는 ‘진달래는 아름답다’처럼 제도, 사물, 사상에 대해 판단한 것, 당위명제는 ‘세월호 법안은 통과되어야 한다.’처럼 정책이나 어떤 시사적 대상에 대한 당위성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명제를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크게 연역적 방법, 귀납적 방법, 유추적 방법이 있다.

 

○ 따라서 논증은 명제로써 자신의 주장(사상, 판단)이나 관념을 드러내는 서술로, 그 서술상의 인과율과 같은 논리적 뒷받침을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

 

○ 논증이란 그런 점에서 설명과는 다른 서술양식이다. 설명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논증시에서는 서술방법이 어느 정도 논리적 형식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 그러니까 논증시는 어떤 사실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인과율에 논리를 따른다. 그러니까 시에서는 어디까지나 시적인과율로 나타난다. 시적 인과율이란 일상적으로 수용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면서 시적 공간을 빚는다. 형식의 측면에서는 원인→결과 혹은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 여기에서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그러한 논리를 말한다.

 

 

2) 사실명제의 논증시 : <국화 옆에서>의 경우

 

○ 시적 인과율에 따라 구성된 논증시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보자.

 

연               원인                           결과

 

1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2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        국화가 피었다

4         간 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       국화가 피었다

          에겐 잠이 오지 않았다

 

 

○ 이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실명제이다. 원인이 되는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고, 천둥이 쳤고,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에게는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에 국화가 피었다는 명제이다. 국화가 피었다는 상상적 사실에 대한 시인의 판단에 시 속에서 결과→원인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 시적 인과율 혹은 시적 논리란, 비록 언어형식 또는 언어구조라는 면에서는 일상적 논리의 틀을 따르지만 그 내용은 상상력의 세계로 드러나는 논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가치명제의 논증시 : <꽃>의 경우

 

○ 가치명제를 노래하면서 유추에 의해 이루어지는 논증시로 김춘수의 <꽃>을 들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명명이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명명이후의 세계를 노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1,2연을 미루어 판단하는 유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꽃 : 이름 = 나 : 이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나 : 이름 = 우리 : 이름

 

 

 

 시에서 노래되는 것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가치 판단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국화가 핀다는 사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음에 비해, 이 시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가치판단이 가치명제로 노래된다. 이 시의 논리에 따르면 ‘이름 부르는 것’, 곧 명명행위와 관계된다. 이 시가 암시하는 가치판단은 ‘언어에 대해 명명될 때 사물은 존재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꽃’은 이 시에서 사물의 세계를 표상한다. 연애시로도 읽히는 이 시는 사물 존재라는 것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철학시로 보아야 깊은 해석을 내릴 수 있다.

 

○ 이렇듯 논증시의 내용은 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한 관념이 하나의 명제로 드러나는데, 이때 명제는 일상적 합리적 차원을 벗어난 상상의 내용으로 일상적으로 수용하는 자연법칙을 낯설게 만들어 내는 시적 의미를 지닌다.

 

 

 

3)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의 논리에 의한 시

 

○ 초등교과서의 시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이나 박용재의 <사랑하지 않으면>도 하나의 조건절(가정법)과 종속절에 의한 논증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으면

 

                                                   박용재

 

사랑하지 않으면

산도

계곡도

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싱그런 가슴도

팽팽한 엉덩이도

애인들의 이빨도

눈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네가 아끼던

자동응답기도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죽음의 예감도 보이지 않는다

 

 

 

3박 4일간

시골에 간다던 사람

그렇게

지구의 하오를

산책하러 갔던 사람

 

 

그대의

자동응답기는

앵무새처럼

3박 4일만을

되풀이하고 있구나.

 

 

사랑하지 않으면

너의 목소리도

쓴 웃음도

지리산의 몸도

눈물도

너의 우연한 죽음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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