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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2018년 03월 25일 16시 13분  조회:2029  추천:0  작성자: 강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1. 상징주의와 음악
 
 
 
클로드 드뷔시
 
 
   이론적 성향이 강한 말라르메는 미술보다 연극과 음악에 대한 의견을 더 많이 내놓았다말라르메가 주재한 화요회에는 그에 열광한 젊은 문학가화가음악가들이 몰려들었다거기에서 그는 언어 탐구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며 20년 연하인 드뷔시(1862-1918)와도 깊은 교우를 맺었고그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이때부터 드뷔시도 시를 쓰기 시작하고 그 시에 곡을 붙이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그가 노래의 가사와 '서정적 산문들'을 썼다는 일화는 언어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과의 관계시와 산문음악과 문학과의 관계를 보여준다그 글쓰기의 목적은 상징주의의 순환적인 글쓰기에 모든 형식적인 절차에서 해방된 인상주의를 대립시키고자한 것이었다그는시의 리듬과 음악의 리듬간의 피할 수 없는 갈등에서 멜로디를 해방시키고자 하였다그래서 자신이 가사를 쓰면즉 더 유연성이 있는 산문을 쓰면노래의 멜로디를 음악화했을 때 소절의 유연성과 갑작스런 비약그리고 느릿한 주문 효과들은 이미 드뷔시 특유의 것이었으나가사들은 여전히 상징주의에 대한 과도한 경도를 보여주었다그것은 순환구조데카당적인 매력신조어다소 인위적인 표현의 우회 등이었다.
   말라르메는 화요회에서 자신의 극시 <반수신의 오후속에 잠재해있는 유머와 풍자와 감각적인 생명력에 대해서 드뷔시에게 피력한다이 시에 곡을 붙인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으로 드뷔시는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세련된 울림과 몽환적 분위기아름다운 화음 등이 일찍이 이처럼 완벽한 관현악 작품의 기본 제재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희미한 현악 반주 속에 프루트와 오보에가 연주하는 변덕스럽고 난해한 멜로디는 성숙한 드뷔시 작품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통하여 브뷔시는 음악에서의 '무언가를 바꾸었고,' 새로운 운율과 새로운 미를 창조한다이러한 일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래로 없었던 일이다상징주의자들과 교유하고 있을 초기 무렵에 드뷔시는 바그너적 취향을 벗어나지 못했었다그러나 그는 결국 바그너가 물려준 소리의 유산을 확대하면서 뛰어 넘은 것이다리듬의 섬세함멜로디의 움직임장단조 특성의 폐지화음의 자유로운 확산과 연속분위기를 빚어내는 재능 등은 미적 감각을 새롭게하고 감수성과 섬세함을 증대시킨 것이었다.
   드뷔시는 말라르메의 그 외의 시 몇 편베를렌과 그외 시인들의 시 등많은 상징주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보들레르와 릴라당에서 영감을 받아 <다섯 편의 시> <연인들의 죽음>을 작곡하기도 하였다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을 자신 속에서 융해시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려는 그의 특이한 시도는 말년에까지 계속된다그 결과 그의 2집으로 된 <프렐뤼드>는 피아노의 문학을 완성하였다는 평을 얻게 된다음악으로 맺은 암시의 시학의 결실을 이제 역으로 드뷔시가 수용하는 것이다.
   드뷔시가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 애용했던 침묵기법 또한 암시의 미학을 음악적으로 해석한 것이다바그너풍의 음악을 원하던 드뷔시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상징주의 극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보고 감명 받아 오페라로 작곡한 것이다.(1902) 이 사장주의 극은 "포레쉔베르그시벨리우스등 다양한 음악가에게 영향을"(Marchal, 1993;59)을 주었다.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 <프렐뤼드>외에도 드뷔시의 <3개의 녹턴>,<바다>,<영상> 1,2피에르루이스의 시를 작곡한 가곡집 <빌리티스의 노래>등은 상징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드뷔시의 음악은 모호하게 암시하는 효과를 위하여 다채롭고 난해한 표현으로 가득 차있다. "나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스며드는 것과 어떤 풍경이나 대상과 동일시되는 것이 두 가지 목적만을 갖는다"(타임,1993;69)라고 드뷔시는 말한다그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비 내리는 정원', '안개', '달빛그의 작품 제목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물 흐르는듯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영혼의 상태을 재현하는 베를렌풍의 풍경들해석을 요구하는 난해한 이미지들의 이어짐또한 이미지들 속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다시 다른 이미지들로 넘나들기 - 이러한 드뷔시의 요소들은 상징주의를 음악의 차원에 도입한 것이었다음악에서는 드뷔시의 작품들을 상징주의라고 흔히 칭하지는 않지만문학에서는 이러한 상징주의를 '애매한 상징주의또는 '3의 상징주의'(Marchal, 1993;6)등으로 수식한다.
   일반적으로 음악의 '인상주의' 190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다인상주의 음악은 풍부하고 섬세한 음색자유로운 형식적 구성분명치 않아 보이는 선율과 리듬의 윤곽세분화되고 연상적으로 연결된 선율그리고 전통적 조성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인다회화의 인상주의적 특징과 유사하게선율이나 화성의 흐름이 유동적인 형식인 드뷔시의 음악은 인상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이 '인상주의'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가벼운 피상성과 일상성을 싫어하기도 하였거니와자신이 회화의 인상주의를 음악에 모방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또한 음악은 항상 외적 인상을 내적인 표현으로 변환시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가는 "낮이나 밤하늘과 땅의 매혹을 알아보고그 분위기를 깨울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고이 모두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음악이라고 보았다인상주의 미학의 한계점인 피상성의 재현을 피하려함으로써 그의 음악은 상징주의의 모험에까지 근접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문학을 매춘이라고 하였고 랭보는 사기라고 하였다드뷔시가 "음악은 거짓 중 가장 아름다운 거짓"이라고 하였을 때우리는 '문학은 영광스러운 거짓'이라는 말라르메의 유명한 화두를 읽게 된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2.상징주의와 미술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빛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인상주의가 약 1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던 이유는 빛과 색채가 변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의 차이 때문이었다빛과 색채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가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상주의자들도 깨닫는다르네상스 이래 이어졌던 사실주의의 추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음이 확고해졌던 그 즈음에영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상징으로 예술을 전달하려는 욕구와 꿈과 환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갔다그리고 꿈과 상징과 성의 중요성에 대한 프로이드Sigmund Freud와 앙크탱Louis Anquetin이라는 두 화가는 "사상이 회화 기법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상주의를 포기한다"(타임,1993;83)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은 1880년대 후반의 반예술 운동을 위한 상당히 중요한 결정이었다그들은 시각을 통한 분석보다는 감정의 경험에 근거한 예술을 추구했으며그림의 주제을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에서 찾았다.(타임, 1993;83).
 
 
 
   그리하여 고갱과 고호등은 상징주의를 예술의 아방가르드로 부상시킨다이러한 1880년대 후반의 반反예술운동은 정신적종교적 가치에 대한 상실감과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와의 구조적 충돌 속에서두 세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한 것이다상징주의 화가들은 부르주와의 물신주의와 대중주의에 혐오를 느끼고 그들의 관습이 예술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그들은 과학에 대한 맹신에서 시작된 기계적 삶에서 해방되고자 하여감정과 욕망과 꿈과 신화를 표현하였다인상주의의 한계인 일상성과 피상적 재현을 버리고정신세계와 감정을 시각화하였다.
   보들레르에게 향기소리색채는 영혼의 상태까지 전달하는 것이다상상력으로 재현되는 환기력 있는 시각 예술은 그에게 내재적 관념과 본질적 실재를 알려주는 것이었다이러한 생각을 따라 상징주의 화가들은 자연에 대한 모방주의에서 해방되어 색채형태로써 내적인 아름다움을 고양시키고자 하였다또한 이집트원시미술중세 근동민족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그들의 다양성과 직관과 감각을 추구하였다원시미술에는 본능무의식꿈이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었다미술은 이렇게 비물질적 세계와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며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섰고탐미적으로 흐르거나 '데카당'하게 되었다.
   한편 상징주의 문학운동은 스스로를 정당화시켜줄 화가들을 찾게 되었는데위스망스는 모로와 르동을 발견하여 이들을 1884년에 발표한 자신의 소설 <거꾸로>에 몇 페이지씩 언급한다모로는 상징주의를 풍요하게 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여 상징주의 문학의 확립에 기여한다.르동은 상징주의 이론을 미술에 실현시켜 상징주의 미술의 전형을 만들었고그의 작품은 다시 상징주의 문학에 전파되어 문학에서 많은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2. 상징주의와 미술(2)
 
 
귀스타브 모로
 
 
  모로(1826-1898) 1856년부터 4년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원시 화가들과 고대의 예술모자이크와 비잔틴의 에나멜화에 매력을 느낀다이렇게 시작된 그의 그림은 괴이함과 환상성 등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1880년경 유행한 신비로운 동양문화에 대한 동경의 결과사람들은 불화(佛畵)와 이탈리아 미술이 결합된 것 같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는 그의 그림에 열광한다.
  그는 그림의 기초를 문학철학고고학신지학 등에 두어 신화와 소설에서 주제를 얻었다데카당스 문인들은 그의 정교한 그림에서 전설신화복잡한 상징 팽창적인 배경과 색조 등을 읽어내고 경탄해 마지 않는다. "인도신전의 이미지에서 잔혹하고 엄숙하며 남녀양성으로 보일 만큼 모호하게 그려진 여성들과 지나치게 화려한 실내장식들은 세기말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쟝티,2002;59) 문예화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분개하며미술과 본질과 의미에 대해 다음처럼 한다.
 
 
 
      물질의 외피와 피상적인 육체미 밑을 흐르는 영혼의정신의마음의그리고 상상의 움직임을 반영하고시간을 초월하여 인류가 느끼는 이들 신성한 욕구에 응답하는 저 미술은 얼마나 감탄할 만한 것인가이것은 신의 언어이다. (---) 나는 선과당초무늬(아라베스크등 조형예술에 허용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상을 환기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이것이 나의 목적이었다.(루시-스미드, 1990;68-71)
 
 
 
   모로는 여러 가지 조형수단을 통하여 상징과 암시의 예술을 지향한 것이다그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의 본질을 그림을 통하여 느끼게 하고자 하였다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그는 보이지 않는것,느끼는 것을 믿고 그것으로 특유의 내면 풍경을 창조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풍경이 환기시키는 꿈과 환상이었다그의 인물들이 환기시키는 생각들은 개인의 내적인 섬광들을 촉발시키는 것이다그의 환상은 단순한 환상의 재현이 아니라 치밀한 생각과 계획의 결과였다는 점에서도 상징주의적이었다르동은 "모로는 생각들의 비약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형식을 다듬어내는 작가와 같았다그는 자신의 상상력의 나아감을 놀라운 이성으로써 인도한다(르동,1961;65)"라고 말하고 있다.
   모로는 말라르메로부터 높이 평가받아 상징주의 시운동과 관련되며 상징주의 운동에 중요한 몫을 하였다그는"위대한 신비는 그 스스로를 완성시키고 자연 전체는 이상과 신성함으로 채워져 모든 것이 변형된다"(루시-스미드,1990;71)라고 하며보다 높은 세계를 향한 고양(高揚)을 꿈꾸었고그 실현을 위하여 상징주의자들처럼 정교한 계획을 따라 작품을 완성하였다.
   사물을 변형시키는 힘과 상상을 촉발시키는 그의 놀라운 능력은 문학을 또 다른 길로 안내하는 지침이 되기도 하였다후에 그가 사람들에게 잊혀졌을 때 초현실 주의자들은 그를 망각에서 불러낸다.<신비의 꽃>등에서 그가 형상화내었던 무의식의 세계에 초현실주의자 브르통은 크게 매료된다그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였으며 20세기 회화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는 오리엔탈리즘과 기독교와 유대주의와 비교주의를 교묘히 융합하고몽상의 동물들과 모세프로메테우스양성의 존재 등으로 다양한 꿈들을 전한다인간의 내적 감각에 대한 절대적 감수성과 문학적 소양으로 상상력을 촉발시켰던 모로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졸라는 모로의 상징주의에 대해 다음처럼 요약한다.
 
 
   모로는 사실주의에 대한 증오로 독창성을 찾고자 하는 예술가가 빠질 수 있는 최고도의 기상천외함을 가장 놀랍게 드러낸다. (---) 현대의 자연주의는자연을 연구하려는 예술의 노력은 분명 반작용을 초래할 터이었고 이상주의적 예술가들을 산출하게 되어있었다상상력 영역에서의 이 역행적인 움직임은 귀스타브 모로에게서 아주 흥미로운 특질을 지니게 된다그는 낭만적 정열과 안이한 배색을 경멸하였고 그림자와 빛의 대비로 화폭을 뒤덮기 위해 영감이 떠오르길 기다려 눈을 현혹시키는 붓의 뒤엉킴 따위를 경멸하였다그게 아니었다귀스타브 모로는 상징주의에 헌신한 것이다그는 수수께기 놀이들로 이루어진 조각그림들을 그렸고 태초의 원초적인 형태들을 다시 찾아내었으며 (---)그의 꿈들은 더 기교적이고 복잡하며 수수께끼 같다 (---)(<1876년 살롱전>).
 
 
   모로의 상징주의에 대한 헌신은 자연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자연주의자 졸라 자신도 그 반작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모로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면서 상징주의를 풍부하게 한 것이다그리하여 세기말의 예술과 데카당스의 한 지침이 되었고초현실주의를 촉발하는데 한 몫을 하였다이처럼 모로는 많은 사조들의 중심되는 경계선 위에 서서다양한 예술 사조의 프리즘 역활을 하였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2. 상징주의와 미술
 
 
오딜롱 르동
 
 
 
  르동(1840-1916) 1879년 석판화집 <꿈 속에서연작으로 화단에 데뷔하는데위스망스는 자기 소설에서 주인공이 숭배하는 예술가로 르동을 그린다르동은 1885년 위스망스의 소개로 말라르메와 말게 되어 급속히 친해졌으며시인의 사망 때까지 오랜 기간 교유한다말라르메는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시가 주는 기쁨의 4부의 3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의 꿈이다.(말라르메, 1974;869)라고 한 바 있다르동은 인상주의를 강하게 부정하였으며그의 목판화와 석판화는 암시적 기법을 충실히 실현하게 된다.
   그는 "나의 데생들은 '영감을 불러이르키는것이지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그것들은 아무 것도 결정짓지 않는다그것들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미결정의 모호한 세계 속에 있게 한다" (르동,1961;27-28)라고 말한다.
   말라르메는 르동에게화가는 시인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나 화가의 상상력과 시인의 환상은 결국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음악 애호가였던 르동은 상징주의자들이 문학에서 음악을 사용하였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미술에 음악을 사용하여 상상적인 것들에 논리를 부여하였다.
   그의 미학은 그리하여 "시각의 미학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미학에"(장티, 2002;53)에 가까워지게 된다그는 말한다.
 
 
 
       암시적 예술은 음악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속에 더 자유롭게빛나게전적으로 존재한다(르동, 1961;26).  암시적인 기법은 음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는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는 예술은 현실이 아니라 신비이기를혼의 상태와 생각을 자유로이 반영하는 것이기를 희망하였다그리하여 르동은 자신의 판화들을 유례없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의 판화들은 다양한 장면들이 덧입혀져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표현되어 있다이미지 안에 이미지가 내포됨으로신비와 모호함으로 가득하다따라서 감상자의 의식과 무의식의 움직임을 촉발한다그것은 암시의 미학을 따르는 예술작품은 적극적인 감상을 요구한다르동의 감사에 있어서는 감상자의 해석이따라서 그의 내면의식이 아주 중요하다감상자들은 찬탄하거나 보는 것만으로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화가는 말한다.
 
 
 
       (---) 감상자의 정신 속에 파생될 효과는 그를 허구세계로 이끌어준다이 허구세계의 의미는 감상자의 감수성과 모든 것을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는 그의 상상 능력에 따라커지거나 작아진다(르동,1961;27)
 
 
 
   이러한 예술의 수용 문제를 문학에서 다루고자  하였던 말라르메의 시도를 떠올린다말라르메는 또한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사물을 '보는 법'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강조하였고이 점에 있어서도 그들은 서로 통하였을 것이다르동은 "본다는 것은 사물들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것이다"(르동,1961;48,62)라고 하였다.
   그의 그림들이 감상자들에게 자아내는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가 지니고 있던 신비에 대한 감각에 의한 것이었고그것은 상징주의 문학에서와 유사한 차원을 가리키고 있었다르동이 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상징주의 문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평자도 있을 정도였다모리스 드니도 지적했듯이르동이 영혼의 상태나 감정의 깊이내면적인 비전을 일러주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상징주의 문학에서 신비를 표현하는 방식을 더욱 상상력 쪽으로 밀고 나아간다그는 사물에 대한 표현에 그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신비까지를 감상자에게 촉발하고자 하여모호성을 극대화시킨다그에게 신비란 관찰자의 '마음상태'에 따라 형성될 어떤 형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의 상상력은 조형적 실현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나의 독자성은 보이는 것의 논리를 보이지 않는 것에 가능한 한 적용시켜있음직한 것이 법칙을 따라 있음직하지 않은 존재들을 인간처럼 살아있게 만드는 데 있다"(르동,1961;28) 라는 그의 우명한 주장은그를 초현실주의이 시작으로 보는 시각에 수긍하게 한다.
   르동의 조형적 실현은 무의식이 심연에까지 가닿는 특징이 있다이 점에서도 그는 초현실성과 잘 연결된다그러나 그의 환상과 몽환의 세계는 뿌리 없는 것이 아니며 그 뿌리는 면밀히 관찰된 현실에 있다자연의 대상을 섬세히 포착한 후에 상상적인 것의 재현이 스스로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다자연은 그의 예술의 원천이었다.그러므로 그는 말한다,
 
 
 
       나는 나 자신을 따라서 예술을 하였다나는 가시적 세계의 경이를 향하여 눈을 뜨고 예술에 임하였으며또 그것은 누가 무어라 하였건자연적인 것과 삶의 법칙에 순응하겠다는 지속적인 관심에 의한 것이었다.(르동, 1961;9)
 
 
 
   자연과 삶의 법칙에 순응하며 예술을 통하여 우주적 상징으로 나아가는 것은 르동의 자연스런 여정이었다그는 "'부호(Code)'는 그것이 우주적 의식의 진지한 표현이 될 때 복음서를 대신할 수 있을 것"(르동, 1961;26)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상징주의 문인들의 궁극적 지향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부분이다..
   신비와 불안과 환상적 분위기를 담고 있는 그의 그림들은 자주 문학화 되었다또한 르동은 '에드가 포우에게'라는 제목으로이 시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6점으로 된 판화집을 발행하고(1882), 바그너를 다룬 판화를 여러 점 제작하기도 한다말라르메에게는 석판화집<고야예찬>을 헌정하고, <주사위 던지기>의 판화를 제작한다.
상징주의와 예술의 다른 장르 / 김경란
 
 
3. 상징주의 
 
 
   상징주의 소설에 비교했을 때상징주의 극은 상징주의의 면모를 상대적으로 더욱 화려하게 구현하였다상징주의 극은 바그너와 말라르메 없이는 생각할 수 없도록 그들의 기여가 크다말라르메는 연극의 모든 장치를 배제하고 순수한 이상주의 연극을 제안한다이것은 어떻게 보면 글쓰기를 단순히 무대 위로 옮겨놓은 것이다이러한, '극 자체에 대한 부정혹은 '문학적 반연극(反演劇)' 1890년 이후의 연극에 대단히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90년에는 릴라당의 유작 <악셀>이 공연된다이 극은 상징주의낭만주의이상주의바그너 등 모든 기법을 동원한다나아가 일부 상징주의 극은 공감각을 무대에서 시험하기도 한다.  "<지고의 송가>라는 극에서는 공연장에 향수가 뿌려지기도 한다."(Marchal,1993;127).
   말라르메의 이상주의 연극 미학은 이러한 과도한 시도를 거부하였다무대장치는 순수 허구를 그려내려는 목적만을 지녔다즉 색깔과 선들에 의한 유추적 효과만을 노려무대는 배경과 몇 개의 유동적인 휘장들로 되어 있었을 뿐이다.
   메테롤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정신적 연극과 시적 연극을 보여주었다여기서는 가스를 나오게하거나 조명의 기술 등을 도입함으로써 물질적 배경들을 부정하였다배경은 없거나 있어도 암시적인 것이었다극단적인 절제로써 진실주의나 자연주의에 반대되고자 하였다그리하여 무대는 거의 부호들로 이뤄내고자 하였다즉 책의 형태를 닮아가려한 것이다.
   폴 클로델의 연극은 상징주의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정통적 상징주의는 아니었다그는 시를 해방시켜서 시적 연극을 펼쳐내고자 하였다거기서 그는 내적 탐색을 보여주거나 종교적 신비를 드러내려 하였다.
 
 
통합예술
 
 
   바그너는통합 예술작품의 시대가 장차 도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통합적 작품이란 그리스 연극을 모델로 연극과 음악을 결합시켜 하나로 통일된 작품이다.
 
 
       각각의 예술은 자신의 힘이 한계에 도달하자마자 인접한 예술의 도음을 청하게 된다. (---) 각 예술 속에 깃들어있는 이러한 특이한 성향 (---) 그것을 나는 음악과 시의 관계 속에서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 이렇게 개별적인 모든 예술들을 포용하며그들은 또 각자 개별적으로 완성되게 하면서 그 예술들이 저체를 결합하는 예술작품을 나는 나 스스로에게 제시하려 애썼다.(<음악에 대한 편지>1860:Marchal,1993;159).
 
 
 
    예술의 통합을 계획한다는 것은 연극과 음악이 분리되지 않았던 원시 시절의 예술형식을 되찾겠다는 생각이기도 하다후에 <바그너평론>의 공저자가 되는 에두아르 쉬레는 미래의 예술에 대해 예측한다.(1875) '박카스리라'라는 제하의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태초의 세 자매인 시음악은 함께 태어났지만 오늘 날에는 분열되었다새로은 결합이 이룩된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의 확실한 기호가 될 것이고그 속에서는 육체영혼생각이 조화되며 스스로를 되찾을 것이라는 것이다그러면서 그 마지막 통합의 수단이자 목표로, "책은 우리 시대의 주된목표이자 변별 기호가 되지 않았는가그것이야말로 이제 모든 것을 표상하고 흡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쉬레의 글에서 나타나는 통합예술의 모습은 말라르메의 예술론 이해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그의 통합예술론은 의도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다극시 <반수신> <에로디아드>를 쓸 때그는 극에 대한 야심은 덮어두고 몇몇 장면들에 대한 초안으로 만족하려 하였다그러나 극은 그 본질적 특성상 결국 미학적 차원을 넘어서 거의 종교에 닿아있는 현상으로 시인에게 다가오고시인은 극시의 완성에 전념하게 된다.
    말라르메의 연극 미학은 신화에 기초하며또 그는 고전주의의 근원에서  자신의 꿈을 되찾고자 한다그 꿈은 쉬레의 글에서 나타난 생각과 많은 부분 유사하다고전주의는 넓은 의미의 고전주의였으며따라서 그는 바그너에 만족하지 않았다바그너의 통합예술은 태초의 근원의 언어에 가닿지 못하는 것으로 시인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그는 바그너가 그리스 신화가 아니라 게르만 신화의 영웅들즉 죽은 인물들에서 동기를 찾는 점이 불만이었다.
 
 
비인칭 극
 
 
    말라르메의 극에 대한 개념은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를 넘어선다소품과 장치들로 가득 찬 사실적전통적 무대를 그는 거부한다무대는 장치들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무대가 '중성적 공간'이 되어야 관객의 정신이 자유롭게 투영될 수 있는 것이다그는 중성적 공간에서 추상적 인물의 전형을 그려내고자 한다따라서 영웅주의적인 바그너극과 통속극을 거부한다그것들의 일상적 틀은 환기적이고 암시적인 효과를 죽이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비인칭 극'을 지향한 것이다무대 장식을 없앤 중성적 공간에는 본질만이 재현된다그는 <햄릿>을 모델로 삼는다거기서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는냐'하는 본질적 문제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그는 연출과 모든 조역들과 단역들이 사라지고 주인공의 환영들만 등장하는 극으로 <햄릿>을 읽는다이 모노드라마야말로 그가 추구하는 정신의 극이다그러므로 <햄릿>을 제외하고는 어떤 연극도 시인의 생각에 맞지 않았다.
    일부 상징주의자들은 말라르메의 생각을 따라 연출의 힘보다는 텍스트에 무게를 두고자 하여, "읽혀지는 희곡이 상연되는 연극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배우들의 역할은 "종종 내레이터 정도로 축소되었고 꼭두각시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장티,2002;96-97)". 이상주의 극에 대한 이러한 경도는 결국은 극에 대한 거부즉 반연극이었다.
    극의 물질성을 확실하게 덜어주는 장르는 발레였다발레는 모든 장치를 버린 것으로말라르메는 그것을 '육체의 글쓰기'라고 하였다발레는 백지와 같이 중성인 무대 위에서 행해지는 '간결한 글쓰기'였다.
    연극을 정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무언극'이었다무언극은 순수 허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그것은 중성의 공간고 무명의 배우를 결합시킨 '최초의 연극'이었다.

4. ''과 문자예술
 
 
 
  문자예술
 
         
           [그것이]                          수라면
              별에서 나온
 
 
 
                            
 
                                                     그것이 존재한다면
                                                   
                                                    빈사의 산란스러운 환시와는 다르게
 
 
 
                                                  그것이 시작한다면 멈춘다면
                                          
                                            부정되었을 때 솟아나오며 나타났을 때 폐쇠되나
                                                                  마침내
                                                              희귀하게 퍼트려진 어떤 과잉에 의해
                                                                              그것이 밝혀진다면
 
 
                                                                           하나일지라도 합이 자명함을
                                                                        그것이 비춰준다면
 
 
 
 
                            [그것은]
 
                                                         우연
 
 
 
 
  말라르메는 24페이지로 된 『주사위던지기』라는 시에서 여러 실험을 행하는데그 중 하나는 페이지의 개념을 깨고 있다는 점이다페이지를 '(feuillet)'의 개념으로 대치시키면서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이어지는 글쓰기를 한다여기에 여덟 가지 다른 활자를 배치한다백지는 가장 큰 캔버스가 된다위의 시는 아무 부분이나 옮겨본 것이다(좌우 페이지 상단 부분).
 
  이 시혹은 극시는 파선의 풍경만을 보여준다난파선의 선장은 절망의 상황에서 주사위를 던질 것인가 말 것인가를 햄릿처럼 망설인다는 이야기며그밖에 아무런 행동도 이뤄지지 않는다. '시와 산문의 종합'(Bernard, 1988:311)이라고도 하는 이 시에서활자들은 감각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명상의 깊이에 따라음악의 강약이 표기되듯 크기와 배치가 달라진다시행들도 생각과 함께 움직이며때로 이탤릭체로 때로 로만체로 변한다.
 
  잔잔한 물결이 흐르듯 작은 글자들로 어느 정도 규칙성을 띠던 시행들은 홀연 사라지고 백지 위에 커다란 단어 하나만 남기도 한다단어의 주변은 커다란 침묵이다크고 작은 글자들은 문자의 심포니를 만들어내지만 난파 뒤에 계속되는 정적과 침묵 또한 말을 한다한 페이지가 완전한 공백이 되기도 한다.
 
  모든 장마다 시구 주변으로 여백이 둘러싼다행간에도 다양하게 여백들이 배치되어클로델의 말대로 '여백에 의한 생각의 분리법'(Bernard, 1988:319)을 보여준다침몰이라는 절망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활자들은 페이지 밑바닥에 파선 조각처럼 침전된 모습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치밀한 계산 하에 사용된 여백의 기법과 다양한 행간두기 등은 시집 전체가 가장 정교하고 창조적인 건축물혹은 하나의 미술작품이나 악보집으로 빚어지게 한다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람 Calligrammes』은 이러한 방식을 차용한다누보로망에서의 여백두기도 이 방식을 따른 것이다해석은 아직 많은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서구 문학사상 가장 혁명적이며 난해한 문헌이다.
 
  "한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폐지하지 못하리라" 라는 시의 대명제는 가장 굵은 글씨로 시집의 처음과 끝 장 모두를 관통하여 지나간다그 주변으로 부속 문장들이 나무의 잔가지처럼물결무늬처럼거미줄이나 레이스처럼악보의 음표처럼 종속된다대명제 주변으로 산재한 각각의 문장들은 연계되어 통합적 역동성을 보여주고때로 침묵을 때로 폭풍을 그린다.
 
  이 시의 중요함은 시가 닫힌 채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도 있다시집의 123장은 펼쳤다 닫았다 할 수 있는 부채를 상기시키는 구조이다대명제가 시집 전체를 가장 큰 문자들로써 관통한 후시의 마지막에는 작은 문자로 "모든 생각은 주사위 던지기를 발한다"라는 문장이 이전의 시행 전부를 요약한다.
 
  시집 전체는 이렇게 단 두 개 문장으로 이뤄지며시집은 닫힌다그러나 마치 보들레르가 「저녁의 조화」에서 마지막 행을 통하여 순환구조를 만들어내었듯이마지막 문장을 통하여 시는 순환구조를 이뤄낸다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끝날 수가 없는 것이다책도 결코 닫힐 수가 없다생각은 다시 계속되는 것이며따라서 시에서 구두점은 사라진다. 언어는 확산이 될 수 잇는 가능성을 이렇게 지니게 된다닫아도 그 속에 바람의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쥘부채와 같이.
 
 
 ''과 극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 권의 ''에 도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랭보가 자청한 모험은 태초의 모어가 지닌 환기력을 확보하기 위한 가파른 재난이었다면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여정을 생각하게 된다말라르메의 언어는 마지막에야 ''과 극에 도달한다우연이 아닌 언어의 순수역학을 따르는 책대문자의 (Livre)이다.
 
  시인은 이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을 꿈 꾸었다. ''이라는 의미의 불어는 대문자로 쓰이면 성서를 뜻하기도 한다시인은 ''이라는 '대작(大作)'을 구워내는 가마에 불을 때기 위하여 '연금술사처럼 인내하며', 모든 삶의 노력을 경주하였다고 베를렌에게 고백한다. ''은 관념상의 책이 아니었다성서도 존재하는 책이듯이.
 
  '대작'이라는 꿈은 완전한 언어에 대한 꿈으로서언어 연금술을 전제한다불어로 '대작'이라는 말은 비천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사의 화금석(化金石)을 의미하기도 한다『주사위던지기』는 많은 점에서 화금석에 닿아있다화금석의 탄생에 의하여 진정한 모어가 우주에 확산될 수 있기를 시인은 꿈 꾸었던 것이다.
 
  ''의 계획은 ''의 읽기 계획까지 포함한다시인은 시 낭독회에 대하여서도 대단히 특이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은 고정되게 제본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낱장의 페이지들로 되어있다낭독자는 책을 낱장별로 따로 읽으며낭독한 후에 묶거나 정리함에 넣으면 또 다른 책이 된다낱장들은 여러 방식으로 결합된다책장들의 무한한 조합을 가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은 이렇게 쓰기와 인쇄에 그치지 않고 읽기까지 포함하는 커다란 계획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글은 쓰는 자의 차원을 넘어선다쓰기는 더 이상 닫힌 공간에서 자족하지 않는다읽기의 확대이자 독자의 공간의 확대이제 수용의 문제가 주요 이슈로 대두된 것이다.
 
  나아가 시인은 극의 요소를 ''에 도입하고자 한다음악미술춤 등 여러 예술 범주들을 융합해낼 수 잇는 극처럼진정한 시언어는 여러 범주들이 교감과 통합을 이뤄내며 원시예술처럼 무대 위에 펼쳐져야 한다시의 낭독회는 이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오랜 세월 분업화로 고착된 분열의 예술이 아니라 통합을 시도한 것이다분열된 바벨의 언어가 아니라제례(祭禮)와 예술의 통합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읽기는 이제 정신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해내는 작업이 된다시적 공간이 재창조되는 작업인 읽기읽기는 내면화된 극이다쓰기에서 읽기로 나아가는 것은내면의 시를 극적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일이다읽기는 하나의 의식(儀式)이 된다. ''은 그리하여 '정신의 도구'이자 '정신적 연극의 장소'로 완성된다여기에 시인이 말하는 '문자 속의 신비'가 빚어지는 것이다.
 
  언어는 더 이상 자족적이지 않게 된다독자에 대한 의식이 전환되고 그 몫은 무한 확대된다독자는 이제 「알바트로스」나 낭만주의에서처럼 야유하는 자가 아니다독자는 참여자가 된다무한한 교감이 약속된다시인은 저주당하거나 추방당한 자가 아니다진정 시인은 사회적 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의 핵심과 주변을 탐사하고 설명하고자 하였다그 꽃과 열매는 어떠하였는지개화와 결실 후의 역풍은 무엇이었는지어떻게 시들어갔는지열매 맺음이 문학과 예술이라는 드넓은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시든 후에도 열매에 열매를 이어주고 있는지간략하게나마 상징주의의 큰 길과 소로들을 따라 가보았다.
 
  우리는 상징주의 시의 계보에서 출발하여다른 사조로의 전이 양상즉 데카당스에서 초현실주의현대시 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상징주의의 맥락을 살펴보았는데상징주의 문학의 구체적 양상은 무엇보다 시 분야에서 두드러졌다상징주의 시에서는 우선 자유화시자유시새로운 활자배치법구두점의 제거페이지 개념의 변모 등다양한 시 형식의 실험에 주목하게 된다그 실험은 시와 산문의 통합이랄 수도 있는 산문시장르 간의 경계 넘기통합예술 등 여러 형식의 발명들로도 이어졌다이처럼 시를 기존의 기능과 형식에서 최대한 해방시키고자 하여오늘날의 시의 모습이 있게 한 것은 상징주의의 가장 현대적인 기여의 하나이다상징주의는 언어의 해방과 동의어였다.
 
  상징주의는 다양한 예술 방법의 도입과 철학의 영향으로 자신의 영역을 이토록 풍부하게 확충시켜갔지만상징주의에 고유한 언어의 완성은 무엇보다 교감암시상징 등의 방법을 통한 감각과 시선의 해방에서 출발한다.
 
  우선 보들레르의 교감 이론은 상징주의 시학을 주도하면서향후 시인들의 사물 읽기에 획기적인 전기를 제공하였다랭보의 자유로운 상상과 감각과 환상의 힘은 현대시를 향한 우상파괴적 시선에서 나온 것이었다그의 지옥으로의 하강은 초현실주의의 세계를 선구적으로 보여주었으며그의 심연은 또 다른 오르페우스를 그려내었다그의 화려하고 고통에 찬 하강의 그늘에는저주와 자학 속에 완성되는 베를렌의 겸손한 선율이 있었으며감각과 음악과 언어의 융해와 교감이 있었다말라르메는 언어와 사물과 상징과 신비 등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섬세히 시로 구현하고자 하였다감각과 언어의 재정립을 통한 이러한 길찾기들에 비하여 발레리의 길은 조금 달랐다그는 말라르메의 언어철학을 토대로 순수시를 더 밀고 나아가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빚어진 관념시를 제시한다상징 시인들의 구도의 여정들을 발레리는 지중해적 명증의 시학으로 다시 빚어냄으로써 서구 상징주의의 골격은 완성된다랭보의 우상파괴발레리의 순수시 등으로 현대시의 세계는 더욱 열리게 된 것이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이처럼 자신의 방법 자체를 끝 없이 넘어서려 하였다그리하여 음악은 상징주의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으며 미술은 그 확산에 기여하였고상징주의는 다시 음악과 미술로 구현된다또한 상징주의자들은 특정 예술 장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징주의의 추구는 그러나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추구였다말라르메는 언어의 완성을 절대의 ''에서 보여주려 하였다거기서는 문자와 그림과 음악과 철학이 절묘하게 만난다그것은 통합언어를 향한 노력의 일환으로서문자예술은 그림문자를 지향하였고 활자법의 혁명을 보여주었다전통적 외양의 순수시로 자족하지 않고 일탈과 변모를 통하여 형식의 새로운 열림을 꿈 꾸는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통합예술이고자 하였다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창조이면서 동시에 예술 스스로의 초월이고자 하였다랭보의 파괴가 재창조를 빠르게 그려내려 하였다면말라르메는 거기서 인내심의 부족을 읽어내었다그가 이끈 시형식의 혁명은 현대의 시와 산문들 속에서 다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의미와 색채가 어떠하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의 언어의 풍경이다사람은 '상징의 숲'을 걸어가고 숲은 친숙한 눈길로 그것을 지켜본다인간은 언제나 상징을 필요로 하고 빚어내며상징은 또 해독되기를 기다린다상징주의는 그러므로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늦게는 중반까지 성행하였던 일시적 조류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상징주의는 역사적으로 폐기되었음에도 부정할 수 없도록 존재하는 문학의 태도로서 언제나 의미 있다상징은 비록 여러 겹으로 두터워져도엘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기만 하면 많은 것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징주의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었다우리는 효용적 의미에서의 상징주의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적어도 표현의 한 기술이라는 측면에서도 상징주의는 살아있다.
 
  상징주의에 대한 부정론은 상징주의의 발생 속에 배태되어있던 것이다현실과 관념 사이에서 관념을 현실화한다는 문제는 시작부터 수용할 수 없는하나의 수수께끼 놀이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더구나 관념의 외적 형식에 무의미하게 집착할 때마침내는 무용한 언어 놀이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부정적이든 긍정적 의미이든상징주의는 내용상 그리고 형식상 이미 대중과 유리라는 전제조건 하에 출발한 것이었다.
 
  상징주의 선언을 기점으로 전개되었던 협의의 상징주의는 시작한지 불과 몇 년 만에 끝나버린 운동이다상징주의는 언어에 대한 위선적 조작에 이를 수 있는 허구적 행위로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시 언어 혁명의 맥을 놓치지 않고 따라 가보면상징주의는 끝없이 스스로를 부정수정완성시켜가려한 언어 행위였고상징주의가 보여주었던 형식의 실험은 오늘날의 문학 행위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현실과 이상현실과 초현실 간의 대립 속에 오히려 안주하려 하였던 행위로 상징주의를 읽는다면 그것은 상징주의를 다 읽은 것이 아닐 것이다이러한 안주가 지속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통합의 언어로 나아가고자 하면서도 상징주의는 그 의도 자체로 인하여 오히려 시인과 대중과의 유리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이는 이미 상징주의의 본질적인 한계일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이 타기(打棄)한 것은 허위로 끝난 상징주의였다하겠다진정한 상징주의는 언어의 혁명 혹은 점진적 수정행위와 더불어 언제나 진행형일 것이다발레리의 말대로 상징주의는 어떤 한 '유파'가 아닌 것이다.
 
  상징주의는 또 모레아스의 「선언」에서와 같은 소문자의 상징주의와 넓은 의미의 상징주의전기 상징주의후기 상징주의 등여러 분류가 가능하다그러나 진정한 상징주의는 이러한 분류를 넘어서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예술 분야와 통합되기도 하면서 확대될 수 있었고있어야 하였다모든 상징주의는 빨리 오건 늦게 오건 다시 대해에서 합류하는 것이다
 
 
  상징주의가 퇴조하였음에도 그것에 대한 믿음이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해온 것은 언어통합의 욕구 때문이었다오랜 세월 분업의 양상이었던 언어의 장르들을 넘어설 언어가 요구되어왔던 것이다상징주의가 대통합을 궁극에 그리는 것은 분화된 바벨의 언어를 극복하려는 의지에서였다우리는 대문자의 ''에서 언어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읽을 수 있었다상징주의가 남긴 긍정적 몫의 하나이다.
 
  상징주의는 그 진행과정에 필연적으로 반동적 움직임들그리고 감각과 언어의 유희 속에 스스로를 한정시키는 내재적 오류들과 부딪히기도 하였다의미 없는 신비 추구현실에서의 변화와 변혁의 욕구를 거의 도외시한 비현실적인 세계 속의 침잠(沈潛), 지적인 메시지들에 대한 지나친 경도 등은 상징주의 스스로를 이미 새로운 글쓰기를 막는 낡은 굴레로 전환시켜 놓았던 것이다그리하여 이 새로운 형식주의를 버리고순수성이나 모호성이 아니라이상과 관념이 아니라생황의 본연과 실상으로 돌아오고자 한 문인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상징주의의 원래 추구하였던 목표는 허구적 조작에 의한 상징의 창조가 아니었다베르렌도 말라르메도 발레리도 모로도 르동도 모두 대상에 대한그리고 대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출발함을 우리는 보았다그들 스스로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하였으며관찰 과정은 작품들 속에 섬세히 구현되었다.
 
  더불어 기억할 것은 신비나 통합예술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더라도 상징주의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탐구라는 사실이다춤과 노래와 제례의식이 분리되지 않았던 태고(太古)의 하늘그 언어를 지표로 한다바로 그런 까닭에 상징주의는 문학에서의 어떤 변형의 기술로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말라르메가 "아름다움이 꽃 피는 이전의 하늘"을 그리며문제는 "변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 것"(Mallarme, 1974:880)이라고 말하였듯이상징주의에서의 언어탐구는 언어의 변형이 아니라 언어의 창안이고자 하였다.
 
  그 탐구는 한 마디로 모성언어로 회귀하려는 언어의 지향성이다언어와 음악이제례와 축제가 하나이며기표와 기의의 분리를 원하지 않았던상징이 꽃 피던 시간그것에 대한 믿음과 향수이들이 상징주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주술적 언어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언어 주변을 떠돌고 있으므로 시 언어는 상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상징주의는 불어로 전개되었으나 코스모폴리탄적인 운동"(Richard, 1978:395)인 것이다.
 
  큰 의미의 상징주의는 사조를 넘어선다잊지 말 것은 상징주의의 언어 화해와 대통합의 작업은 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시대에 따라사람 마음에 따라겉과 속의 모습을 달리하며 상징주의는 언제고 전개될 것이며인간의 상징 또한 영속할 것이다이간의 상징은 과거나 미래의 현상이나 희망이나 절망과는 거리를 둔 채빠르게 느리게섬세하게 때로 거칠게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거대한 페르소나를 바꾸고 또 굴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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