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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 권경아
2018년 11월 06일 13시 01분  조회:1542  추천:0  작성자: 강려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권경아

 

1. 현대시와 해체

 

 

새로움은 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다주는 미학의 한 범주이다. 한국현대시사에서 1980년대는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전통시 형태를 철저하게 파괴하여 기존문법을 해체하는 양상이 새롭게 등장한다. 1980년대는 모순된 근대성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였다. 해체시는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촉발되어 현실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미학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1980년대의 해체시는 1990년대를 들어서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심의 부재라는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절대 주체로 인식되던 주체가 소멸되고, 이로 인해 텍스트 내적, 외적으로 해체의 양상이 보다 폭 넓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1980년대의 해체시에 나타나는 과격한 실험을 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은 수정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의 새로움은 아방가르드적 요소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도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할 때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것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배경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할 때 ‘해체’의 진정한 실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와 90년대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해체의 양상이 이 두 시기에 다르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해체가 근대성에 대한 저항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 주로 시 형태를 파괴하고 있다. 이와 달리 1990년대는 해체에 대한 폭 넒은 이해를 통해 시각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시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의 해체가 근대성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미학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1990년대의 해체는 사회, 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2. 1980년대 시와 아방가르드 미학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모순된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양상이 극렬하게 드러나는 시기이다. 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써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억압된 체제의 구조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해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80년대적 억압에 대한 반응으로, 형식을 해체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는 경계 해체의 전략을 구사하며 등장한다. 해체시는 정치적 전략으로 형식을 파괴하고 장르를 해체하는 반미학의 원리로,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해체시는아방가르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1) 여기서 아방가르드는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20세기 초기에 나타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세계에 유행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의미한다.2)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차이를 보이면서도 중요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며 기존의 전통에 대한 단절을 전략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모더니즘이 미적 자율성에 근거한 과도한 형식주의라는 것은 아방가르드와 변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실제 생활에서 유리되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제도로서의 예술을 부정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려는,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모더니즘보다 한결 급진적일 뿐 아니라 더욱 독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역사적·사회적 개념인 모더니티의 발전단계에 일어난 예술운동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3)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80년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 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의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근대성의 누적된 모순이 극점에 이르는 시기였다. 구모룡에 의하면 80년대는 이중의 부정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으로 파시즘의 억압에 대한 부정을 필요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 문학 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4)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할 때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관습을 거부함으로써 억압적 시대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이 단순히 형식파괴만을 노리는 것이 아닌 억압된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변별된다. 즉 예술 형식과 사회적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을 부정하고 있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와는 달리 예술 형식과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으로 드러난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를 구모룡이 ‘환멸의 자식’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해체시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식은 형태 파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기존의 시 양식을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파편화를 그대로 보여주며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이고있다. 해체시는 기존의 서정시 양식을 전면적으로 해체한다. 해체시가 서정시 양식을 파괴하는 것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시 양식에 대한 해체를 감행하는 외적 요인과, 서정시의 언어와 문법으로는 억압적 체제에 대응할 수 없다는 내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世上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 오규원, 「우리 시대의 純粹詩」 부분,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이 시대는 ‘진리란’, ‘믿음이란’과 같은 말을 점잖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누가 이와 같이 말한다 해도 현실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16세기나 17세기였다면 이 말은 인간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시대인 현실에서는 ‘하품’이 날 정도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이 시대는 모순된 현실을 그대로 보전하여지키려는 보수주의의 시대이다. 보수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 되든 안 되든’ 해체해야 한다.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든지 하는 허위의 말들을 벗겨내야 하는 것이다. 해체시가 기존의 서정시 양식이 억압의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서정시 양식의 파괴를 시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80년대의 해체시는 시각적 형태를 강조한다. 도형, 기호 등의 차용, 내용 없는 시 혹은 제목 없는 시, 그리고 활자 배열에 따른 효과를 이용한 시 등은 인쇄효과를 통해 시각적 형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내용보다 형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서정시 양식의 문장 구조를 파괴하는 형태 파괴 수법이라 할 수 있다.

황지우의 無等은 내용자체가 산이 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다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희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 황지우, 「無等」 전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이 시는 일종의 상형시의 형태로 그림으로 시를 구성한다. 산 정상으로부터 묘사된 모습은 ‘절망, 분노, 죽음, 피투성이’ 등과 같이 어둡고, 격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산이다. 그러나 대지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온화하고, 넉넉하고, 따뜻한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대지는 모성을 상징한다. 뾰족한 정상이 절망과 분노, 숨가쁜 현실을 표상하고 있다면, 넓은 대지는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 현실과 꿈, 그 모든 격정을 감싸주는 평등을 표상하고 있다. 이러한 격정적인 산의 이미지와 넉넉한 대지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상징적 의미는 산의 형태에 따라 변화되고 있다. 산 정상으로부터 대지에 가까이 갈수록 대지의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변화되는 이미지를 산의 형태에 따라 배열시킴으로써 시각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한 삼각형이라는 형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시각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인다. 결국 산의 형태에 따라 삼각형으로 시를 배열하고 있는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의 시들에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단순히 시 형태를 파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초기의 해체시는 기사, 벽보, TV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삶을 시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며 예술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 83. 4. 1.~지: 83. 5. 31.

 

- 황지우, 「벽1」 전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위의 시는 예비군 편성과 훈련 기피자를 대상으로 자진 신고기간을 알리는 벽보의 내용을 옮겨 놓고 있다. 이 벽보 내용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벽보가 말하는 기피자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행여 내가 그 대상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 자진해서 무언가를 신고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 일제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 사회는 나를 불안하게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과의 불신을 조장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기피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나도록 나는 불안하다.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가 불안하고,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사회가 불안한 것이다.

1980년대는 영상매체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신문이나 벽보가 인간의 삶에 가깝게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이제 매체는 인간의 삶에 밀착되어 그 힘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해체시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린 TV나 CF의 내용까지도 차용하기 이른다. 김정란의 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는 “어디 갔었어, 전화해도 없대”라는 TV의 유행어를 이용하여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는 현실의 실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를 차용하고 있는 장정일의 시 산 위에서 내려온 바보(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정도로 거대한 광고의 유혹을 그리고 있다. 또한 박남철은 텔레비전I과 텔레비전Ⅱ(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직사각형의 도형만을 그리고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직사각형만을 그려놓음으로 시인은 독자에게 이에 대한 무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텔레비전은 아무 의미도 없는 빈 상자일뿐일 수도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일 수도 있으며, 텔레비전에 얽힌 독자들의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무수히 많은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열린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

퍼킨스는 1950년대 이후에 나타난 영미시의 새로운 특성으로 자발성, 개성, 자연성, 개방성 등 네 가지를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의 해체시가 개방성이란 특성과 연관된다. 개방성이란 신비평의 원리가 강조하는 폐쇄적 형식에 대한 미적 부정을 일컫는 말로 탈구성을 강조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문학/비문학의 경계 해체, 작품/독자 경계 해체 그리고 패러디 등은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개방 형식의 지향은 곧 포스트모더니즘시의 특성이 되는데 80년대 해체시의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 이후에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3. 1990년대 시와 포스트모더니즘

 

 

90년대 이후의 현대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의 아방가르드적 요소는 90년대 전후의 사회·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아래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아방가르드는 주변을 둘러싼 문화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이라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이기도 하지만 아방가르드 미학이 가진 자기파괴적인 자살이라는 내적모순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는 ‘완성된 것에 걸맞기보다는 준비단계에 걸맞는 것’5)으로써 상징적으로 파괴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아방가르드는 그 자신의 일관성의 감각에 의해 자살로 추동된다. 칼리니스쿠는 이러한 특징을 ‘미학적인 죽음 애호증(thanatophilia)’으로 설명하고 있다.6)

80년대 우리의 해체시 또한 역사화 과정을 겪는다. 해체시가 보여주던 극단적인 형태 파괴와 현실물을 차용한 콜라주 기법은 복제와 재생산의 일반화로 받아들여지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더불어 기법적인 차원에서 더 이상 전위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 것이다. 8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적 해체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으로 해체적 양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90년대를 전후로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을 일부 수용하고 일부는 단절을 꾀하며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제도권 예술로 흡수된 아방가르드 운동의 계승이며 논리적 발전이 동시에 이 운동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초기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초기 해체시가 신문기사, 만화, 사진, 벽보, 광고, 그 밖의 인쇄물 등을 콜라주 기법으로 차용하고 있다면, 90년대 이후의 시들에서는 기존의 시들을 대상으로 함은 물론 자기시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적인 메타시가 나타나고, 비문학 텍스트마저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장르혼합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미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아방가르드의 미학을 심화,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와 라캉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동일성에 근거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더 이상의 권위는 없다. 데리다는 차연 이론으로 형이상학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동일성을 부정하며 진리의 불확정성, 결정불가능성을 증명한다. 이러한 차연 이론은 텍스트에까지 적용되어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닌 다른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관계일 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주체 또한 절대 주체가 아닌 차연의 결과일 뿐이다. 주체는 ‘과정 중의 주체’일 뿐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기표로 인식된다. 통합체로 오인되고 있는 주체의 의미는 무의식적 욕망으로 포착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1990년대는 우리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 뉴미디어 사회로 서서히 진입하는 시기이다. 문화에 있어 기술복제에 의한 문화나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복제와 재생산은 낭만주의 이래로 강조되어 온 주체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있던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집 밖으로 걸어나온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얼굴을 찡그리며 나무 그늘에 앉아 날아가는 나비를 본다.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들판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나비들이 흩어질 때 마네킹을 든 남자 언덕 너머에서 걸어온다. 노래를 부르며,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옆을 지나간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고 마네킹을 든 남자 기침을 한다. 바구니를 든 여자 들판 너머에서 걸어온다. 검은 머리칼이 긴 그 여자, 두 남자 옆을 지나가며 흔들리는 들꽃과 흩어지는 나비떼를 본다. 들판 너머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검은 옷의여자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바구니를 든 여자를 스쳐 지나간다. 들판과 언덕 사이의 좁은 길을 통해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의 집 옆을 지나간다. 바구니를 들고 지나간 여자 어느새 들판을 넘어가 검은 색 파이프 오르간을 커다랗게 연주한다. 검은 머리칼의 여자와 마네킹을 든 남자 팔짱을 끼고 언덕을 넘어간다. 혼자 남은 수염이 지저분한 사람 천천히 일어나 어두운 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들판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 그가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풍경들이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들판과 언덕이 사라지고 그 사람의 쓸쓸한 집도 그사람의 길고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 김참, 「지워지다」 전문,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이 시에서 각 인물들은 서로를 지나치며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의 존재가 확인된다. 즉 ‘마네킹을 든 남자’가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 곁을 지나감으로써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마네킹을 든 남자’가 아닌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되고, ‘마네킹을 든 남자’는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아닌 ‘마네킹을 든 남자’가 되는 것이다.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주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 외부, 곧 ‘마네킹을 든 남자’에 의해서라는 것은 주체 소외를 불러오게 된다. 타자에 의해 인식되던 주체는 ‘바구니를 든 여자’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나타남으로써 존재 인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바구니를 든 여자’와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서로를 지나침으로 다른 타자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시되며 ‘타자’라는 인식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존재를 확인하던 주체는 타인들의 존재가 미끄러지며 존재 인식이 지연됨에 따라 주체의 존재마저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주체 외부에서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체 소외 그리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멀어지고 마는 주체 소외는

주체 소멸로 이어진다. 결국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천천히 지워지기시작’한다. 그와 함께 ‘들판’, ‘언덕’, ‘집’ 그리고 그의 ‘비명소리’ 등 그에게 인식되던 ‘풍경’ 또한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자기 동일적 주체의 소멸은 텍스트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며 확정되지 않는다. 의미마저 소멸된 후 남는 것은 언어이며, 언어의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법칙인 것이다. 90년대 현대시에 언어유희,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혼란, 시니피앙만이 나열되는 시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차연의 결과로 절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주체는 상대적 개념이 된다. ‘나’의 존재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만 일시적으로 파악될 뿐인 것이다. 여기서 ‘나’와 ‘너’와 관계 또한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닌 사회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주체는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언어는 단일한 시니피에를 지시하지 못하고 시니피앙에 의해 끊

임없이 미끄러지므로 언어는 곧, 시니피앙에 의해 지배받는 시니피앙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저 황폐한 정원에서

인류가 언제 이 지상으로 옮겨와 살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말을 씹을 때

희미한 풀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말은 먹고 싶은

욕망의 대용이었을 것이다

말은 이제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구조 속에서!)

 

 

- 송찬호, 「옆에서 본 저 달은」 부분,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언어를 구사함과 동시에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욕구는 억압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 남겨진 억압이 무의식적 욕망으로 환원된다. 이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실현불가능을 의미한다. 말을 하는 것으로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욕망으로 남겨져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만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므로 욕망이 쌓여가더라도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말은 ‘욕망의 대용’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인간이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언어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무의식적 욕망도 언어적으로 형성되고 언어적 규칙에 따라 표출된다. 욕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듯이, ‘욕망의 대용’인 말은 바로 언어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주체와 의미의 소멸과 더불어 텍스트의 자율성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하나의 텍스트는 자신만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는 결정불가능성이라는 특성을 갖는 것이다. 90년대의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가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에 의한 탈장르화나 장르혼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르혼합은 시, 소설, 희곡과 시나리오 등 같은 문학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화, TV, CF등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에 의한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문화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로 떠오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물론 90년대를 들어서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삶과 예술의 경계 해체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텍스트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준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벽보, 기사, 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일상의 삶을 그대로 이어 붙이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이것은 90년의 시가 소설, 희곡, 시나리오, 영화, TV, 광고 등의 장르 형식을 시의 양식에 도입하는 장르혼합 뿐만이 아니라, 시라는 텍스트 자신마저 불확정성으로 인식하고 시 자체를 대상으로 자율성을 해체하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를 시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90년대 시들의 텍스트 자율성 해체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텍스트의 개방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90년대의 시들은 기존의 시 장르에 대한 인식을 해체한다. 그 동안 문학은 현실에 대한 관념, 상상을 언어로 표현하는 현실의 반영으로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는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가 소멸함에 따라 현실마저도 사라지기에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문학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 텍스트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반영하거나 재현하기보다 텍스트 그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90년대에 시라는 텍스트 자체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가 부각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메타시는 시 자체를 글쓰기 대상으로 하는 자기반영적인 시로 정의할수 있다. 여기에는 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론시, 시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인론시, 시쓰기의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시, 그리고 다른 시 텍스트와의 관계성이 드러난 메타텍스트시가 포함된다. 메타시는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반성적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7)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그 동안 많은 시인들의 관심이 되어 오다가 시론시, 시인론시 등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되는 메타시의 유형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이다.8)

장정일의 시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시인의 시 쓰는 과정이 그대로 시로 표현되고 있다. 시를 썼다가 지우고 또 다시 쓰는 등 시인이 시를 쓰면서 거치게 되는 많은 습작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작 과정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메타시의 전형이 된다. 장정일은 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시집에서 해체시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장정일이 80년대와 90년대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집들은 80년대 후반에 출판되어 80년대적 해체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시는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과 경계를 허무는 장르혼합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참의 미로여행, 성미정의 동화 연작은 소설의 양식을 시에 도입하고 있으며 장정일은 잔혹한 실내극과 자동차에서 희곡과 시나리오 형식을 실험하며 장르혼합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문학과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 발전에 의한 영상매체의 발달로 영화, TV, 광고, 대중음악 등이 현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중심의 부재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대중문화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영향은 문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TV, 광고 등에서 일부를 취하여 시에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 이러한 대중문화에서 얻은 시적 상상력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영화 감독 지망생 영규는 지난번에 산 8밀리 무비 카메라가 쓸모 없어지는 바람에 그걸 팔러 외출한다 매일 똥을 싸고 요강에 지저분한 꽁초 따위를 넣는 병든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영규는 집 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방학 때지만 매일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충무로 중부경찰서 부근의 카메라 가게로 가보았지만 무비 카메라는 취급을 안 한다고 하여 가격이라도 알아보러 옛날에 자주 다니던 청계천 8가 황학동의 장물 시장에 가기로 맘을 먹은 영규는 황학동 시장에 도착하고 적지 않이 놀라는데 옛날과 완전 딴판으로 서울에 스며든 동남아 네팔 파키스탄 러시아 계통의 수많은 외국인들이 떼지어 물건을 사러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층 사람들의 동물 냄새나는 활기에 새로운 삶의 의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영규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데…(p. 76에 계속)

 

 

- 성기완, 「볼 만한 티브이 프로 1」 전문,

 

 

 

쇼핑 갔다 오십니까?

 

TV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들어서며 인간의 삶에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TV는 이제 인간의 삶에 그대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성기완은 연작시 형태로 4편의 시를 쓰고 있다. 영규라는 인물의 평범한 일상이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다 끝 부분에 이르면 (p.76에 계속)이라는 말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말에 시집을 넘겨 76페이지를 읽게 되고 다시 97, 123페이지를 읽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방영되는 TV드라마의 형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다가 (p. 76에 계속)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기심에 다시 그 페이지를 찾는다. 한번 시청하게 되면 눈을 떼지 못하는 드라마의 중독성이 시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는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일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며 새로움을 추구하고,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미학으로 나타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경계 해체는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로 들어서며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우리시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논리적 발전인 동시에 비판적 반작용으로서 나타난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시켜 상호텍스트성과 탈장르화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이 보여주던 현실의 파편화, 사물화 현상과 그로 인한 주체의 소외에 대한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이어받아 주체의 해체, 탈중심주의로 나아가며 파편화된 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원래 특공대의 ‘전위’나 ‘선봉’ 또는 ‘첨병’을 가리키는 군대 용어에서 비롯되어 프랑스 혁명 이후 정치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쓰이다가 본래의 군사적 의미는 사라지고 정치적 사상이나 사회 사상에서 보이는 급진주의를 의미하게 된다. 19세기 유토피아적 사회 개혁가들이나 사회주의자들, 급진적 저널리스들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심미적 아방가르드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하나의 예술적 관념으로 과거를 거부하고 새로움 추구하는 모든 새로운 유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된다.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1992, pp. 133-138.

2)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다다이즘과 초기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이탈리아의 미래파나 독일의 표현주의를 지칭한다. - 페터 뷔르거, 『前衛藝術의 새로운 이해』, 심설당, 1986, p. 24.

3) 김욱동

4) 구모룡, 「억압된 타자들의 목소리」, 『현대시사상』, 1995, 가을호.

, 위의 책, p. 143.

5) A. 하우저, 『예술의 사회학』, 한길사, 1983, p. 370.

6) M. 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 언어, 1993, p. 151~155.

7) 고현철, 「메타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현대시의 쟁점과 시각」, 전망, 1998, p. 32.

8) 80년대 후반, 오규원은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에서 「詩人 久甫氏의 一日」연작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시론시를 선 보이고 있다. 박상배는 시집 『모자 속의 詩들』(1988)에서 IV장에 14편의 시론시를 선보이기 시작하여 『잠언집』(1994)에서도 「풀잎頌」연작으로 14편의 시론시를 쓰고 있다. 이승훈 또한 박상배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메타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밝은 방』)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시인론와, 시론시, 시작 과정이 드러나는 시 등 이승훈은 메타시를 쓰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권경아

2003년 『시와 세계』 등단.

현 : 한양대 강사. 『시현실』, 『리토피아』 편집위원.

 

계간 시와 표현 201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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