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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2019년 02월 01일 20시 26분  조회:1251  추천:0  작성자: 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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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은유의 바다 | 아로마
원문 http://blog.naver.com/kjsrucia/80024315123
1.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시는 예쁜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빛나는 보석이다. 고로 감춤의 미학이다. 
그러나 시는 감춤만을 본질의 특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때론 우회나 굴절 그런 다음 스팩트럼의 추상에서 즐거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시가 지각(知覺)에 의해서만 기쁨과 즐거움을 배태하기 때문이다. 
그럼 시는 지각 이외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장르는 예외다 
 
또한 예술과 관련,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모두 다 아름다우며 모두 다 가치 있는 것이냐 하는 명제의 질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만 답변할 수는 없다. 
가령, 미술에 있어 ‘로센버그’의 <침대>를 예로 들어보면 페인트칠한 침대를 벽에 걸어놓음으로써 침대는 예술작품으로 인정되는데 이때 폭신폭신한 느낌을 주는 예쁜 색깔의 침대가 우리에게 대단한 즐거움을 주는 사물임은 분명하게 인지되지만 실용성과 관련 있는 그 침대가 꼭 아름다워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결국 시는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예술에서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순으로 보면 예술의 맨 앞자리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미’는 본디 유용성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미’란 바라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천착해 보면 진정한 즐거움이란 현상적 감각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시각이나 청각에 의존한 감각적 즐거움은 순간적이며 단순하지만 지각에 의존한 즐거움은 직선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 이해되지 않는 한 쾌미음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어려운 수학문제를 한참 끙끙거리며 풀어나가다가 갑자기 해답이 전광석화처럼 눈에 들어올 때의 그 기쁨은 예상외로 크다. 그것은 노력 뒤에 오는 배가된 희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기쁨을 <재인식의 쾌감>이라고 하였는데 감춤의 껍질을 벗긴 뒤에 나타나기에 피부반응보다 더 큰 물결 같은 감동이 되는 것이다. 
시는 바로 이 <재인식의 쾌감>이라는 장르이기에 다른 예술보다 한 단계 위에 자리 매김 되어진다. 
 
예술은 신의 예지에 의해 창조된 질서정연한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는 모방이다. 따라서 예술에는 자연의 질서가 반영된다. 또 예술은 자연에서 표현수단과 방법을 빌려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술을 신의 창조와 비교한다. 신은 자연의 내적 원리에 따라 창조를 하셨지만 예술가는 자연의 외적원리에 따라 모방할 뿐이다. 예술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단지 신이 창조한 자연 속에서 형상을 인식하여 그걸 모방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신의 창조보다 저급하다. 하지만 예술은 인식활동 및 도덕적 실천 활동과 함께 인간정신 활동의 하나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시는 이런 토양 위에서 삶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행복을 가장 작은 그릇에 담아내기 위하여 비유를 통한 압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노력의 산물인 예술이 '시’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분절성, 상상의 한계성, 추상성이 전제되어 있는 정형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진정한 시문학이 탄생할 수 없다고 제창하며 추상적 기호로서의 언어를 극복하고 언어의 인습을 거부해야 한다는 낯설게 하기(포스트 모더니즘 포함)의 기법을 주장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시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데 있다’라는 이 말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시인들은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임이 분명하기에 기존의 질서와 전통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춤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의 본질을 몰각한 채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긴장감이 흘러 넘쳐야만 좋은 시가 되는 줄 알고 기상(.奇想)과 절연(絶緣)만을 일삼는 시업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란, 자아와 세계의 만남으로 인한 미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구원으로 나가야함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것은 웅변과 같은 호소나 만화 같은 표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찾아지는 감춤만이 진정한 시의 미덕이며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를 은유적으로 진술하면 여인의 한복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시=한복) 
목부터 발끝까지 몸을 완전히 가리고 덮은 옷, 성적 매력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지지 않는 여성이 제거된 상태 그러니까 머리부터 발 밑까지 내려가면서 점점 넓어지고 퍼지는 전형적인 산의 모습인 이등변 삼각형 속에 인간이 묻힌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여인에게서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가슴라인, 허리라인, 다리라인이 완벽하게 사라진 미(美)의 실종은 말할 것도 없고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날렵한 몸매인지 밥상을 다 석권한 몸매인지조차 가늠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감추고 여미는 한복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시선을 단숨에 잡아당기는 하반신과 그에 따르는 각선미를 도외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상반신의 가슴마저 치마끈으로 꽁꽁 묶어 천인단애한 상태를 만들어 놓았으니 상대적 박탈감 운운 이전에 여성은 이미 에로스의 대상에서 제외된 탈 여성의 형이상학적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한복은 앞 코가 뾰족한 버선과 꽃무늬 고무신으로 발의 본 모양을 대치시킴으로써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미를 불러 일으켰으며 반투명의 질감으로 전신의 모습을 우련의 상태로 만들어 매혹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를 해 두었던 것이다. 즉 모시 저고리 속으로 가는 어깨 끈을 보이게 함으로써 속화되기 쉬운 욕정을 천천히 눈빛으로 더듬어가게 하는 미적 배려라든지, 또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게 함으로써 미감(美感)의 살색을 극대화 시켜 노골적이며 천박해지기 쉬운 급진적 성욕을 반감시킨 다음, 여인의 섬세한 감정을 숨이 막힐 듯 흘러내리는 멋으로 승화시킨 혜안은 한복만이 가진 최대의 상징적 장점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단선적 즐거움을 배제시키고 저고리와 버선의 합일치를 통한 곡선과 몸이 움직일 적마다 사각거리는 음향을 배합한 후, 보는 이로 하여금 스팩트럼의 즐거움을 향유케 하는 고차원적 사랑의 과정을 대변하는 한복, 바로 이 한복이 시(詩)이며, 이 시가 바로 한복인 것이다. 한복은 틀림없이 시(詩)의 변형된 현시적 사물인 것이다. 
한복은 감춤의 옷이지 가림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숨김의 옷이지 막음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밝힘의 옷이지 어둠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분명 뜨거운 감성을 용해시키기 위해 걸친 것이지 음흉한 시선을 거부하기 위해 감싼 것이 아니다. 덧붙이면 신비스러운 몸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기 위해 한복을 도구로 삼았다는 뜻이다. 
한복이, 몸의 아름다움을 증대시키기 위해 전신을 감추고 숨겼다면, 시는, 느낌의 절묘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묘한 사상을 숨긴 것이다. 
한복이 은근함을 강조하는 굴절의 시선을 선호하며 상상력을 발동하여 무한한 황홀감에 접근토록 하는 감춤의 의상이라면, 시는 비유와 압축으로 깊은 맛을 숨긴 감춤의 미학인 것이다. 
 
따라서 한복이 노출을 거부하듯 시도 직설적 표현을 거부해야 한다. 한복이 은근함을 좋아하듯 시도 은근한 비유의 표현을 좋아해야 한다. 
한복이 보는 이에 의하여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는 효과를 감춤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게했다면, 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곰씹는 맛의 효과를 극도로 절제된 단어와 문장 속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감춰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 부연하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 <모나리자>의 그 미소의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이 질문은 미술에서도 감춤의 미학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춤의 미학은 이렇게 예술 전반에 펼쳐져 있는데 시에서 이것을 소홀히 하고 있어 화룡(畵龍)에 점정(點睛)이 빠진 것이나 진 배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모나리자의 비밀이요? 그건 눈 꼬리와 입가에 있습니다. 살짝 그림자로 덮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감춤의 미학의 진수를 보았을 것입니다. 즐겁지 않습니까? 
<재인식의 기쁨>을 위한 한복의 감춤, 시도 그래야 할 것 아닙니까 
역시 시는 예쁜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빛나는 보석이며 감춤의 미학입니다. 
 
2. 시(詩)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美學)이다 
 
시는 작지만 깨닫고 나면 커지고 미약하지만 터득하고 나면 강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특수성이기에 그 원리는 꽃씨에도 적용되고 불씨에도 적용되고 꿈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시는 별스럽게 작다. 사람으로 말하면 그저 꿈만 지닌 어린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서사과정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고 행간에 의미를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행간과 끝 구절 다음에는 뒷맛이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분명 시는 긴 감동의 여운을 주는 여백의 미학이다. 
시의 본질은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의 결합이다. 이때 정서와 사상은 교직된 직물처럼 서로 녹아 있어야 한다. 
 
사상은 지각(知覺) 지식(知識) 신념(信念) 의견(意見)의 종합물이고 정서는 감화적 요소로서 유기체의 전신적 감각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은 궁극적으로 감동과 쾌락에 있기 때문에 사상이 정서를 앞설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시의 정서가 한없이 약하다는 점이다. 어떤 형태의 정서라 할지라도 시라는 근원적 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전무하리 만큼 미미한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반응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쁨, 두려움, 슬픔, 근심, 노여움 등을 유발하는 매체는 시각과 청각이 주를 이룬다. 이때 시각의 예술이 미술이고 청각의 예술이 음악이다. 연극과 영화는 시청각을 다 합친 것이다. 
 
미술은 원초적 반응을 유발시키고 음악은 몸을 흔들어 춤을 추게 한다. 연극과 영화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나 시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도 눈물을 흘리게 하지도 못한다. 시는 율동을 하게 할 신명의 청각적 요소도 없고 미추를 구별케 할 시각적 요소도 없다. 
이처럼 시는 다른 장르의 예술에 비하면 초라하다 할 만큼 내 세울 것이 없다. 동물로 말하면 날카로운 이빨도,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도, 빨리 달리 수 있는 다리도 없는 하등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하등동물이 인간인 것처럼 미미한 정서를 수반하는 시 또한 굴절의 예각 같은 지각의 촉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차원적인 시청각과는 다른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건데 시는 사물의 순간적 파악을 속성으로 하는 상상력의 산물이기에 작고 가볍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암기할 수 있다. 일단 시를 외워 몸의 살붙이가 되도록 만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수없이 반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경험이나 비전이 집중되는 결정의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시의 특성상 인간을 취하게 하고 인간을 변모하게 하는데 있어 더 이상 좋은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시는 예술 중에서도 명약임이 분명하다 
시는 바로 이런 강점을 지닌 탁월한 정서를 지닌 문학인 것이다. 강한 충격 한 방으로 인생을 전환시키는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도 상당히 효과 있는 장르이긴 하지만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아무리 거대한 철옹성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시를 외워 암송하기만 하면 그 시의 정서는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 드디어 한 인간을 참 사람으로 바뀌어 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시는 참으로 작지만 매력적인 장르임이 분명한 것이다. 
 
전쟁이 한참 치열하던 어는 날, 
석양 녘 적탄의 총을 맞은 국군 병사 하나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끌며 민가에 찾아든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생사기로에 처해 있는 위급한 상황이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러다간 죽고 말겠구나’ 절망이 엄습할 때 주인집 딸로 여겨지는 젊은 여자가 툇간 옆 은폐된 지하곳간으로 병사를 숨겨준다. 병사는 그만 안도감과 함께 의식을 잃는다. 
한참 뒤 의식을 차린 병사는 아름다운 처자를 바라보며 고마움의 표시로 씩 웃음을 짓는다. 고맙다는 말은 목 속에 잠겨 혀 밑에 숨고 만다. 젊은 처자는 전쟁의 비극 속에 희생되고 있는 꽃다운 젊은이의 부상이 안쓰러워 울먹 울먹거린다. 젊은이도 눈물이 맺힌다. 
“걸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 - - - -- - -” 
“저어 - - - - - ” 
“저도 최대한 지혈을 하고 치료를 했습니다만 특별히 준비된 약이 없어 죄송하군요” 
젊은 처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죄인 듯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뜻이 아니고- - - - - ” 
“ - - - - - - - ” 
병사는 젊은 처자의 방울진 눈동자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잠시 두려움이 없어진다 
 
부상당한 군인병사와 산골 젊은 처자와의 만남, 그것도 전쟁터에서 피아간의 교전 중에 일어난 불행이 주선한 가교, 별난 조우, 숨막히는 치료,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 목숨을 건지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궁금증, 절박한 상황의 눈빛과 눈빛, 그리고 짧은 대화, 바로 여기에 슬픔과 연민의 정이 교차하면서 희망이라는 거대한 생의 좌표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한편의 시이며 아름다운 정서의 채색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상황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겠다고 꾸역꾸역 자꾸 말을 건넨다면 이것이 어찌 전쟁터의 긴박한 상황의 분위기라 할 수 있으며 처음 만난 남녀의 떨림과 애처로움이 섞인 모습이라 하겠는가. 무언의 눈빛에 담겨진 수줍은 슬픔, 이미 서로의 마음이 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시는 이처럼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여인의 작은 손길의 정서, 순박한 정서, 애절한 정서, 말을 다 삼켜버린 아픔의 정서- - - 그런 다음 처자의 가슴에 짙게 배어있는 고혹적인 정서, 그리고 한 움큼의 피와 출렁이는 긴 머리, 숨죽인 산 그림자, 이 모든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자연, 그 침묵의 여백 
 
우리는 이들의 다음 대화를 더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뒤의 상황을 작가가 책임을 지면 소설이 되고 눈에 보이게 만들면 연극이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시는 짧은 대화로 형식적 소임을 다한 것이다. 비록 주인공이 치료 불능으로 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난다 해도 불구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는 비극적 결말보다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며 유추할 것이다. 그 유추가 여백이다 
 
시는 꽃씨이기 때문에 착지하기만 하면 꽃을 피울 것이고 
시는 불씨이기 때문에 눈빛과 만나기만 하면 생의 불을 지필 것이다 
시는 꿈이기 때문에 한 발자국 내딛기만 하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상상의 날개 속에서 형용키 어려운 감격을 느낀다면--- 
생각만 해도 시의 여백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시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작은 것이 
시(詩)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美學)이다. 
 
 
 
작자미상
 
[출처] [공유]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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