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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象 無意味 自由 / 金 春 洙
2019년 03월 03일 18시 56분  조회:1632  추천:0  작성자: 강려
對象 ․ 無意味 ․ 自由
                                 金 春 洙
 
* 이 글은 「韓國現代詩의 系譜」에 대한 註釋이다.
 
 
  같은 서술적 이미지라 하더라도 寫生的 素朴性이 유지되고 있을 때는 대상과의 거리를 또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는 이미지와 對象은 거리가 없어진다. 이미지가 곧 對象 그것이 된다. 現代의 無意味詩는 對象을 놓친 대신 言語와 이미지를 實體로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詩文學> 19號 p. 10.
 
   <對象과의 거리>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은 시인은 항상 자기의 인상을 대상에 덮어씌움으로써 대상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모든 寫生畫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상파의 그림에서처럼 개성이 어떻게 다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대상은 현실의 대상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나무가 개로 둔갑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 그 대상은 조금씩 달라져 있다. (나무가 어둡게도 보이고 밝게도 보인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 구속이 긴장을 낳는다. 긴장이 몹시 팽팽해질 때 반 고흐의 풍경들이 된다. 그것들은 물론 風景(대상)이긴 하지만, 풍경 이상의 무엇이다. <無意味>라고 하는 것은 記號理論이나 意味論에서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 어휘나 센텐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한 편의 詩作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편의 詩作品 속에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여러 곳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데가 한 군데도 없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無意味詩>에는 실지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더러 끼어 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無意味>라는 말의 차원을 전연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에는 반 고흐처럼 무엇인가 意味를 덮어씌울 그런 대상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대상이 없으니까 그만큼 구속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 된다. 聯想의 쉬임없는 파동이 있을 분 그것을 통제할 힘은 아무 데도 없다. 비로소 우리는 현기증나는 자유와 만나게 된다.
 
  言語가 詩를 쓰고 이미지가 詩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 하여 가능해진다. --種의 放心狀態인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상태를 僞裝이라고 해야 한다. 詩作의 진정한 方法과 단순한 技巧의 차이는 이 방심상태(自由)와 그것의 僞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上揭誌 p. 12. 
 
  대상이 없어졌으니까 그것과 씨름할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있는 것은 汪洋한 자유와 대상이 없어졌다는 불안뿐이다. 시에는 원래 대상이 있어야 했다. 풍경이라도 좋고 사회라도 좋고 神이라도 좋다. 그것들로부터 어떤 구속을 받고 있어야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는 의미가 있게 된다. 의미가 없는데도 시를 쓸 수 있을까? <無意味詩>에는 항상 이러한 의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 의문에 질려 있고, 그러고도 시를 쓰려고 할 때 우리는 자기를 위장할 수밖에는 없다. 기교가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이때의 기교는 심리적인 뜻의 그것이지 수사적인 뜻의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위장이라고 하는 기교가 수사에도 드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차르트의 「C 短調 交響曲」을 들을 때 생기는 의문은, 그는 그의 자유를 어찌하여 이렇게 다스릴 수 있었을까 하는 그것이다. 시는 음악보다는 훨씬 방종하다는 증거를 그에게서 보곤 한다. 그에게도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의 음악은 너무나 음악이다. 음의 메커니즘에 통달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우리는 언어의 속성에 너무나 오래도록 길이 들어 있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한다. 시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는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어떤 시는 언어의 속성을 전연 바꾸어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음색이나 의미의 그림자나 그것들이 암시하는 제 2의 자연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런 시도를 상징파의 유수한 시인들이 조금씩은 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대상과 의미를 잃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면, <無意味詩>는 가장 순수한 예술이 되려는 본능에서였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제동을 걸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대상(現實 ․ 社會)으로부터 심한 拘束을 받고 있다.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遊戱의 氣分(放心狀態)이 되지 못하고 매우 긴장되어 있다. 그 긴장은 根本的으로는 道德的인 긴장이긴 하나 詩의 方法論的 긴장이 서려 있기도 하여.......
                                                     --上揭誌, p. 14.
 
  무엇이든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전연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그 불안과 함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소외된다는 그 불안이 겹친다. 이러한 불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치관의 공백기에 생기는 불안이다. 회의를 모르는 소박한 사람들이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때, 예민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성실하다고 한다면 이 허무 쪽으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다. 허무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돌린다. 나무가 있지만 없는 거나 같고, 사회가 있지만 그것도 없는 거나 같다. 물론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실지의 나무와 실지의 사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의식 속에서는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즉 허무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 된다. 그 대신 그에게는 보다 넓은 시야가 갑자기 펼쳐진다. 이렇게 해서 <無意味詩> 는 탄생한다. 그는 바로 허무의 아들이다. 시인이 성실하다면 그는 그 자신 앞에 펼쳐진 허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개성의 가치관이 모두 편견이 되었으니 그는 그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뭔가를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다른 또 하나의 편견이 되더라도 그가 참으로 성실하다면 허무는 언젠가는 초극되어져야 한다. 성실이야말로 허무가 되기도 하고, 허무에 대한 제동이 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새로운 의미(對象), 아니 의미가 새로 소생하고 대상이 새로 소생할 것이다. <도덕적인 긴장>이 진실로 그때 나타난다. 
  여기서의 <유희의 기분>이란 칸트의 유희설과 근본적으로는 같을 것이지만, 약간 부연할 것이 있다. 노동의 여가에 사람은 그 남은 정력을 유희에 쏟는다고 칸트는 말하고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가 않을는지도 모른다. 노동의 여가가 없고, 남아있는 정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노동 그것을 유희로 만들어 버릴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노동이 그대로 유희라는 환상을 만들어 낼는지 모른다. 유희는 그 자체 하나의 해방(자유)이기 때문이다. 유희야말로 대상이 없는 유일한 인간적 행위가 아닌가? 유희에 대상이 끼어들 때, 그때 유희는 유희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국가의 명예라는 대상이 경주자의 자유를 구속한다. 국가의 명예가 경주자를 긴장케 한다. 그것이 바로 100미터 경주라는 것의 의미가 되겠지만, 우리는 그런 대상과 그런 의미로부터 자기를 구하고자 한다. 유희의 긍정적인 뜻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희를 끝내 감당할 만큼 우리는 용감하지도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화투놀이에 돈이 끼여들고, 우리는 곧 돈의 구속을 받아 자유를 잃게 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유희의 경지를 또한 허무로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능력은 한정돼 있고, 구속을 자초해야만 안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유희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에 겁을 먹기도 한다. 유희는 우리에게 영원한 실낙원이기 때문에 이 오욕의 땅위에서의 유희(허무)는 초극되어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영역을 사람이 침범할 수는 없지 않은가? 
 
   韓國의 現代詩가 50年代 이래로 비로소 詩에서 자유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비교적 자유에 점근해 간 경우가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자유를 僞裝해서라도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어하는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上揭誌, p. 14.
 
  李箱의 시를 보면 내던진 듯한 방심상태에서 씌어지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분명히 치밀한 계산 아래 씌어지고 있는 것도 있다. 유희 ․ 선택 ․ 방심상태 등의 낱말들은 방법론적으로는 자동기술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자동기술이란 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무의식이란 전연 감추어진 세계고, 그것이 어떻게든 말로써 기록되는 이상은 의식의 힘을 입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이 밝혀 준 상식이다. (물론 우리는 과학이고자 하는 정신분석학 자체의 그동안의 성과에도 의심을 품을 수가 있긴 하지만) 우선 이 상식에 따라 말을 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자동기술이란 없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李箱을 드는 것은 이 땅에서는 그래도 그가 처음으로 시를 하나의 유희로서 써보려고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는 그 점에서다. 그의 소설 「날개」에는 <아내>라는 대상을 놓친 <나>가 그녀가 없는 그녀의 방에서 휴지를 돋보기 광선으로 태운다든가, 화장품 냄새를 맡는다든가, 벽에 걸린 치마를 보고 그녀의 肢體를 연상하다든가 하는 따위 장면이 나온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것을 대상행위라고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욕망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 그러니까 대상행위도 있을 수가 없다. 대상을 놓친 <나>가 그냥 그러고 있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부닥쳐 온 자유에 압도되고 있을 뿐이다. 李箱의 시의 어느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李箱과 같은 시기에 <三四文學> 동인들이 시를 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창작심리가 어느 정도로 李箱을 닮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李箱은 다행히도 소설과 수필, 특히 그의 활동을 통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창작심리의 비밀을 보여 주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고 한다. 시의 혁명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혁명을 위한 시(또는 藝術)를 수단으로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시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되자 냉철한 사람들은 그것(초현실주의)을 하나의 교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으로서는 초현실주의와는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시의 입장으로서만 초현실주의자가 된 시인이 세계의 도처에서 생겨난 것이다. 매우 아이러니컬하지만 이리하여 자동기술이 하나의 기교로서 유행을 보게 된다. 30年代 이래로 한국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詩 지상주의적 초현실주의자들을 낳게 했다고 보아진다. 시를 위하여는 그러나 많은 것들을 읽히게 했고, 특히 기교의 새로운 방면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僞裝된 自由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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