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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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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고원』 읽기
2019년 03월 12일 17시 05분  조회:875  추천:0  작성자: 강려
개의 고원읽기



개의 고원1, 2, 3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 이하 MP)』의 중심적인 문제는 배치(aggregation)의 문제, 특히 (나의 단견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배치의 문제이다. 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회적 배치의 논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권력 형성체(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들이 『앙띠 오이디푸스 (Anti-Oedipus : 이하 AO)』에는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나는 그것들이 욕망, 탈주, 탈영토화의 선차성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푸코의 질문이며, 그리고 이들이 그러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푸코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배웠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항상 구별을 행하면서, 혹은 심지어 예비적인 대립을 설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며,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배치의 방식의 상이한 종류들 사이에서 구별을 설정하거나 또는 상이한 다양체들(multiplicities)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이미 나는 다양체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AO에서의 다양체 개념의 사용법과 여기[MP]에서 다양체 개념의 사용법 사이의 변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O에서 다양체는 모든 것을 초월적 통일체로 묶어버리는, 질서를 갖춘 총체성들에 반대하기 위해서 요청되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다양체는 모든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사방팔방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요점은 다양체들을 구별하는 것, 그리고 각 다양체 내부에서 구성적인 측면을 훨씬 명료하게 조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체들 중 어떠한 것도 무작위적이거나 아나키적이지 않다. 다양체들은 각각 조직되어 있으나 상이하게 조직되어 있다. 리좀 대 나무, 무리 대 대중은 상이한 다양체들 혹은 상이한 배치의 논리들을 설정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혹은 실재적으로, 각 다양체에 관하여 상이한 것은 그 구성이다. 리좀과 나무의(혹은 무리와 대중의) 차이는 상이한 구성에 있다. 설령 MP에서 그렇게 사용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개념 구성이 여기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처음 두 개의 장들은 이러한 구별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직접적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상당히 친숙해 있는 주장의 논리를 제시하고 싶다. 하지만 3장에 이르게 되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서 논점의 차이를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바란다.
처음의 세 장에서 우리는 상이한 종류의 주장을 보게 된다. 제1장과 제2장은 우리가 수목적 구조와 체계보다는 리좀적 구조와 체계를, 대중보다는 무리를 더 선호한다라는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제3장은 그 제목이 이미 이 부분이 도덕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지시해주지만, 그러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3장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도덕]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서술한다. 제3장은 단지 삶이 어떻게 분절되고 구조화되고 형성되는지 등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말할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들이 AO에서 제시한 첫 번째 요점, 즉 우리는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는 바로 그 요점의 상관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장을 어떻게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제3장의 제목은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대지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다. - 역주]

상이한 종류의 장들 사이의 이러한 구별로 인해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에서 존재(무엇이 있는가)와 당위(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놀라게 된다. (나는 존재Sein와 당위Sollen의 칸트/헤겔 틀에 놀랐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물학과 정치학을 연결시킬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러한 것 뒤에는 진정성(authenticity=충전성)의 담론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진정성(=충전성)의 담론에 따르면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은 간접적으로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명령(mandate)이 되는 것은 아닌가? ― 우리는 말벌과 서양란처럼 각자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혹은 대지의 조직처럼 조직을 창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는. 이들이 도덕의 지질학으로 의미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대지와 같이 되기? 당위를 존재로 번역하기? 어쩌면 내가 여기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몰입하고 있는 챌린저 교수와 생물학적 쟁점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거기에서 명시하고 있는 논쟁들의 끝에서부터 3장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하고 싶고, 그것이 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있는지 혹은 질문을 전환시키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

제3장은 생물학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사회사상의 여러 공준들 혹은 패러다임들의 자격을 박탈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제3장의 절반 이상을 기호와 의미작용에 관해서 논의한 다음에 이들은 언어의 제국주의, 즉 모든 기호 체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따라서 언어에 대한 지시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는 해석적(interpretative) 패러다임을 공격한다. 혹은 이들은 이러한 입장을 구성한다. "비언어학적인 체계를 가진 모든 기호론은 언어라는 중개를 이용해야만 한다 … 언어는 다른 모든 언어학적, 비언어학적 체계의 해석자이다."(62-63)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명제를 주장하는 어떤 특수한 사상가를 인용하지 않지만, 이러한 관념은 다양한 구조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었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언어의 감옥(The Prison house of Language)>에서 구조주의 일반이 모든 구조의 조직화를 위한 보편적 모델로 언어의 명제를 사용한다고 규정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가 보편적인 모델이 아니며 단지 많은 기호들 중에서 하나의 기호 체제에 불과하며, 다른 것들에 대해 특권을 지니고 있지 않고 내용과 표현 관계의 한 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들이 언어학에 관해 다루고 있는 제4장과 기호체제에 관해 다루고 있는 제5장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질 논의이다. 하지만 제3장에서 이들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는 세 가지 상관적인 공격을 행하는데, 이것은 구조주의에 대한 세 가지 특정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단어와 사물의 상응,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분리.

이러한 도전 중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에 관한) 첫 번째 도전을 정립하기 위해서 이들은 푸코, 그리고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행한 감옥에 관한 분석으로 향해 간다. '감옥'이라는 단어가 그 내용의 표현, 즉 사물의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감옥이라는 사물은 '감옥'이라는 단어를 일차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사물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용의 형식이라고 부른 것, 즉 학교, 군대, 병원 등과 같은 다른 내용 형식과 함께 어떤 지층(stratum)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형식이 관련될 수 있는 표현의 적합한 형식은,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감옥'이 아니라 '범죄(delinquent)'이다. "'범죄'는 '감옥'이라는 내용의 형식을 상호전제하는 표현의 형식이다."(66) 따라서 여기에서 사물은 단어에 상응하지 않으며, 내용의 형식은 표현의 형식과 관련된다. 감옥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상태이며, 건축이며, 일련의 감금의 실천들, 권력의 형성체 등등이다. 그리고 '범죄'는 실재로 단어나 기의로서 잘 지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에서 생겨나는 진술의 집합에서 구체화되는 것으로, 기호들의 체제로 잘 이해된다. 그러므로 푸코와 들뢰즈-가타리를 섞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상호 교차하는 두 가지 다양체, 즉 내용의 비담론적 다양체(권력의 형성체)와 표현의 담론적 다양체(기호의 체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두 다양체들은 상호 교차하지만 상응하지는 않는다. 이 다양체들은 추상적 기계 혹은 다이어그램(=도표)에 동등하게 참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보다 정확하게 쓴다. "이것들은 일종의 도표로서 … 작용하는 추상적인 기계의 공유된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67) <감시와 처벌>에서 도표는, 여러분이 기억하는 대로, 판옵티콘이었으며, 이 판옵티콘은 감옥만이 아니라 훈육 사회의 모든 제도들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푸코는 이렇게 묻는다. "감옥이 공장, 학교, 군대, 병원을 닮았으며, 이 모든 것들이 감옥을 닮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DP, 228) 이것이 놀랍지 않은 까닭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동일한 다이어그램 혹은 추상적인 기계, 판옵티콘을 내포하고 있거나 이것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단어는 사물에 상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의 형식들과 내용의 형식들은 추상적인 기계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상호교차한다.

현실적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이 여전히 좀 더 복잡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용과 표현 모두가 형식뿐만 아니라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푸코가 제시한 예에 대입해 보자. 감옥이라는 비담론적 다양체와 범죄 담론이라는 담론적 다양체는 각각 형식과 실체를 갖는다. 나는 감옥, 비담론적 내용이 어떻게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가질 수 있는지를 쉽게 이해한다. 즉 그것은 벽, 건물, 틀에 박힌 일과 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담론적인 것, 표현, 범죄의 담론이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가지는지는 나에게는 별로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표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의 물질성과 같은 어떤 것인가? 나는 그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표현을 여기에서 언어 이상의 것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범죄는 실제로 담론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실천들의 집합이며, 따라서 그것은 육체적(corporeal)인 동시에 이와 동등하게 비육체적이다. 어쩌면 이러한 실천들의 신체들과 이러한 담론의 물질성은 모두 표현의 실체일 것이다.

설명해야 할 것이 더 있다. 나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 기계의 공유된 상태에서 상호교차하며, 이러한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혹은 더욱 자세하게 말해서 감옥과 범죄는 판옵티콘에서 상호교차한다. 하지만 무엇이 내용과 표현을 교차하게 하는가? 혹은 이러한 상호교차의 논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무작위적인 것, 우연한 것일까? 아니다. 이것이 기계적 배치들의 역할이다. 기계적 배치들은 각각의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의 상호교차 속에서 작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기계적 배치들은 내용과 표현을 상호 조율시키고, 내용의 절편들과 표현의 절편들이 일대일 대응관계를 맺게 한다."(71) 기계적 배치들은 내용과 표현을 이것들이 속하는 추상적인 기계로 나아가게 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내용과 표현의 지층이 추상적인 기계들로 움직이게 하는 구성적인 중개자이다. 따라서 푸코의 예에서는 어떤 것이든 기계적 배치가 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감옥은 내용이며, 범죄는 표현이고 판옵티콘은 추상적인 기계이다. 내가 보기에 재판은 내용의 절편들(감옥, 감옥 건물, 판에 박힌 일과 등등의 절편들)을 표현의 절편들 (범죄의 절편들)과 묶어버리며, 이것들을 추상적인 기계(판옵티콘)를 향해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기계적 배치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전체 장치(내용-표현-배치)는 모두 이중 분절(double articulation)이다. 나는 이 정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요소들을 끌어 모으고 싶었다. "각 지층들은 내용과 표현의 이중 분절이다. 내용과 표현 모두는 실재적으로 구분되고 상호 전제 상태에 있으며, 서로 뒤섞인다. 내용과 표현과 함께 가는 머리 둘 달린 기계적 배치들은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72) 푸코의 작업으로 번역해 보자 : 감옥과 범죄는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것들은 재판이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기계적 배치들의 기능 때문에 서로 뒤섞인다.

나는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푸코적인 예를 통해서 이러한 개념들 중 몇 가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재적으로 나는 제3장의 끝부분에서 구조주의에 대한 첫번째 도전을 펼쳐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과 사물이 상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 향하는 이중 분절을 통해서 배치된다고 말한다.

구조주의에 대한 두 번째 도전은 토대와 상부구조적 요소들(이것은 근본적으로 기의-기표 관계처럼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 사이의 사회의 분리를 향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토대-상부구조라는 틀은 경제 대신에 내용을 부여하며, 그것[내용]에 표현 혹은 상부구조에 대한 확실한 우선성과 최종 결정을 부여한다. 혹은 이들은 실제로는 세 가지 수준들[심급들]을 본다. 내용의 경제적 토대 ; 배치들에 의해 점령된 상부구조의 첫 번째 심급 (이것은 알튀세르의 RSA(억압적 국가 기구)들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 표현을 설정하는 상부구조의 상위 심급으로 알튀세르는 이것을 ISA(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사회적 은유는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다른 지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내용과 표현은 또한 이중 분절의 유사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추상적 기계를 향하여 배치된다. 경제학은 내용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들도 교회나 학교처럼 상부구조적이라고 특징지어진다. 토대/상부구조라는 틀이 지닌 문제점,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 개념이 지닌 문제점은 사물들이 단순히 그러한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사회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 오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본성을 오해한다 … 우리는 기호 체제의 본성을 오해한다. 기호 체제는 정확히 말해 권력 조직 혹은 배치들을 표현하는 것이지, 내용의 표현이라고 가정되는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 그것은 권력 조직의 본성을 오해한다 … 그것은 내용의 본성을 오해한다."(68-69)

구조주의가 지닌 문제점은 그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오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격하게 실재성(reality)의 본성에 관한 과학적 질문, 즉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우위성도 어떠한 결정도 없으며, 또한 내용과 표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우위성이나 결정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우위성은 추상적인 기계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은 이미 전제된 두 가지 평행한 형식화 작용과 결부되어 있다. 그 두 형식이 끊임없이 자신의 절편들을 교차시키고 서로에게 전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두 형식이 파생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서, 그 두 형식의 관계를 조정하는 기계적 배치들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그런데도 만일 이러한 평행론을 피라미드 이미지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내용(그것의 형식을 포함해서)을 가지고 생산의 경제적 하부구조를 만들게 된다. 추상적인 것으로 점철된 하부구조를 말이다."(68)
두 가지 형식들은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되며, 피라미드적 이미지는 경제적 토대에 추상적인 것의 특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그 최종심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AO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추상적인 기계는 내용과 표현에 대해 어떤 우위성을 부여받는다. 내용과 표현은 사실 추상적인 기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더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푸코의 틀과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은 생산적이고 일차적이다. 나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푸코의 주장과 매우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AO와는 반대로) 이 책에서 사회를 사고하려는, 그리고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사고하려는, 사회적 질서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사고하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력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에게 열려진 문제로 남은 것은 내가 지난 번에 설정했던 질문의 일종이다.[하트의 AO 읽기를 참조 역자] 즉 욕망하는 기계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중에서 어떤 것이 우위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생산하고 있는가?[욕망하는 기계가 추상적인 기계를 생산하는가, 혹은 추상적인 기계가 욕망하는 기계를 생산하는가?] (나는 내가 얼마 전에 인용했던 이러한 파생의 개념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나는 실재로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맥락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을 제기하기 되면 더욱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질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사회적 배치이론에 우리가 대면했을 때 답해져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제3장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되어 있는 구조주의에 대한 첫 번째 두 가지 도전들이었다. 말과 사물의 상응, 그리고 경제적 토대에 의한 사회적 상부구조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도전은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구별과 관련되어 있는 세 번째 도전을 제공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이제 다시 구조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전의 틀을 생각하면서 제3장의 앞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검토하고 싶다. 구조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전들이 문제라고 한다면, 3장의 앞부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러한 도전들을 어떻게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장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물학적 담론의 틀 내부에서 생명은 세포 화학에서부터 지질적 형성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이중 분절을 통해서 조직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 생물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본성의 차이도 없으며 모든 생명(광물, 동물, 식물)은 똑 같은 선들을 따라 기능한다는 AO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사회 역시 이중 분절에 따라서 조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그것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생물학적인 용어로 이중 분절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권위가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존재(Sein)와 당위(Sollen)에 관한 질문,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만 하는 것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제3장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혹은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회복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는 도덕의 지질학이라는 제목을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행한 것처럼) 이해해야 할까? 지질학은 계보학을 대신하며 기원전 1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변화의 과정, 계보학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도처에서 항상 존재하는 고정되고 영원한 틀인 이중 분절에 대한 것이다. 이중 분절은 생명의 논리이며, 동등하게 대지와 사회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대지는 도덕을 되찾게 되며, 존재(Sein) 즉 존재하는 것은 당위(Sollen) 즉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되찾게 된다.


개의 고원4, 5, 6


들뢰즈와 가타리는 MP의 서문에서 다양한 장 혹은 다양한 고원들이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어떤 순서로든 읽힐 수 있다고 썼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는 그렇게 되면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은 AO처럼 완고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AO에서 각 부분의 결과는 다음에서 체계적으로 수용되어 발전된다. 하지만 MP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좀이나 이중 분절 같은) 개념들이 하나의 고원에서 정립되고 나서 이후 다음 고원에서는 이렇게 정립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주장이 진보적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고원은 실재로는 충분하거나 자기 충족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 책 전체에서 제시된 좀 더 일반적인 논점을 지시한다. 물론 그 책에는 상이한 어떤 것이 있지만, 각각의 고원은 그 자체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그 어떤 고원도 책 전체를 읽기 전에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지난 주에 제3장인 도덕의 지질학을 읽으면서 겪었던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물학적인 담론 때문에 좌절을 맛보았다. 이 생물학적 담론에서는 어떠한 윤리적인 개입 지점도 없으며, 정치나 화용론이 들어설 공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제3장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에는 정치적 개입의 지점들이 있다. 하지만 제3장에서는 아닐 것이고, 기원전 1만년에도 아닐 것이다. 나는 다른 고원들에서 정치적 계기를 발견해야 했으며, 다른 고원들의 관점에서 제3장을 읽어야만 했다. 생물학에서 실험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물학에서 어떻게 변주, 이행, 탈영토화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사물들이 우리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존재하게 만드는 실험일 것이다 ― 아마도 발견이 아니라 따라서 발명일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예는 스텔락(Stelarc)같은 현대의 신체 예술가들이다. 스텔락(Stelarc)은 자신의 실체를 성형외과 수술로 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혹은 내부적으로는 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정치적인지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간에 다룰 문제이다.



정치


제4장, 5장, 6장은 모두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영역에서 작동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어떤 방식으로 이 부문들이 정치적이며, 정치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싶다. 전제조건 중의 하나이자, 이러한 장들 중 처음 두 개의 장에서 언어학과 기호론(semiology)에 관한 질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구조주의나 몇 가지 구조주의적 조류가 지적하고 있듯이) 언어가 모든 구조들과 조직들의 모델이 아니며, 오히려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기호체제라는 더 큰 질문, 기호계(semiotics)의 문제의 부분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기호체제가 무엇인지 혹은 기호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방식이 언어에서 출발해서 그 다음으로 확장하거나 여기에 무엇인가를 외삽하는(extrapolate)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히 상이한 궤적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최초의 근접점으로서 기호체제는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하고 있는, 사원의 파괴 시기 즈음의 고대 유태인 사회를 생각해 보자. "즉각적으로 기호계에서 긍정되고 있는 유대적인 특정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 못지 않게 혼합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 기호계는 유목민들의 반-기표작용적 기호계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p.122) 유태인들은 방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기표작용적 기호계 그 자체와 본질적으로 관계되어 있다."(pp. 122-123) 이것에 의해 유태인은 제국적 사회를 꿈꾸거나 재건하며, 마침내,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은 특정한 후-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제 이러한 혼합된 기호 체제는, 이러한 혼합된 기호계는 고대 유태인 사회에 다름 아니게 된다.

(라보프와 같은 사회언어학자들이 언어가 또한 사회적이라고, 혹은 언어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이 [언어적] 기호 체제가 또한 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기호체제도 사회 그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사회는 이러한 기호들의 체제에 다름 아니다. (혹은 사회는 또한 신체들의 체제라고, 기호체계와 구별되는 물리적 체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잠시 옆으로 젖혀두자.) 일단 우리가 기호체제의 좀 더 거대하고 적합한 틀에서 언어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그리고 우리가 기호들의 체제를 사회라고 인식하게 되면, 이것이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 즉 모든 질문들이 즉각적으로 폴리스의 문제, 사회적 장의 문제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분명하다. "언어는 그것이 언어학의 사태이기에 앞서서 정치적 사태이다. 심지어 문자성의 수준에 관한 가치평가는 정치적인 문제이다."(139-140).

하지만 단순히 사회적 결과를 지시하거나 사회적 결과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문제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내가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주에 나는 대안들과 행동의 가능성을 지시하기 위해서 윤리학에 관해 다소 모호하게 말했다. 아마도 나는 윤리학보다는 화용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행동을 향한 이 장들의 첫머리(opening)이다. "화용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82)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화용론은 기호계(semiotics)의 정치학이다. 여기서 이들이 정치적이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정치를 행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실천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제일 처음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여러분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제 정치행동에 대한 기준을 제안하고 있는지, 이들이 사용법에 관해서 혹은 어떤 것에 관한 특수하고 두 개의 상이한 특수한 사용법에 관해서 언제 말하기 시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수와 소수의 차이가 아마도 우리가 이들 장에서 얻는 가장 분명한 기준들이다. "<다수>와 <소수>는 두개의 상이한 언어들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두 가지 사용법 혹은 기능들을 부르는 말이다."(104) 언어의 다수적 용법은 언어의 통일성과 균일성을, 언어의 상수들의 고정성을 주장한다. 소수적 용법은 상수의 축소를 작동시키며 언어의 변주를 증식시킨다. "다수적 양태와 소수적 양태는 언어에 관한 두 가지 상이한 취급법이며, 이 중 하나는 다른 하나로부터 상수를 추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연속적인 변주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106)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다수파(majority) 용법, 즉 지배적인 표준과 언어의 소수파(minority) 용법, 즉 표준을 설정하지만 또한 종속적인 표준을 설정하는 것, 고정된 게토의 언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수자(minoritarian) 용법, 즉 어떠한 표준도 설정하지 않으며 단지 변주만, 즉 다수적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변주만을 생산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저자들은 소수적 언어를 발명했다. 혹은 보다 적합하게 말해서, 이들은 언어의 소수자 용법을 만들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인용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아름다운 표현에서는, 모든 위대한 책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졌다. 이러한 소수적 언어 혹은 소수적 문학이 다소간 카프카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책자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차이를 보다 거대한 구도에 투사해야 한다. 언어의 두 가지 용법, 말하거나 글쓰기의 두 가지 방식 뿐만 아니라 사회의 용법, 생활의 두 가지 방식에도 말이다. 삶의 다수적 혹은 다수파 방식은 사회의 표준을, "성인-백인-이성애자-유럽-남성"(105)을 지칭한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소수적 혹은 소수파는 따라서 비표준적인 삶의 방식을 지칭한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차이는 수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사실 소수파들은 대부분 수에 있어서 다수파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차이는 수의 차이가 아니라 역량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즉 다수파와 소수파의 차이는 역량 차이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다수파의 표식으로서 사회적 표준 혹은 상수를 지칭한다. 따라서 소수파적 삶의 방식은 종속된 체계, 혹은 하위체계를 지칭한다 ―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표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하위 문화에 관한 우리의 통념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영국 문화연구에서 발전된 하위문화에 관한 질문을 이런 맥락에 위치지우는 것도 흥미롭다 ― 특히 나는 딕 헤디지 Dick Hebdige의 책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수자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다음을 구별해야만 한다. 상수이자 동질적인 체계로서의 다수파, 하위체계로서의 소수파들, 그리고 잠재력있고 창조적이며 창조된 생성으로서의 소수자."(105-106) 하위체계 혹은 하위문화로서의 소수파가 지배적인 표준에 접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소수자 되기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나는 이 점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독일어로 글을 쓴 체코계 유태인으로서의 카프카는 어쩌면 독일어를 탈영토화하는데 있어서, 독일어를 외국어로서 발명하는데 있어서 괴테보다 더 나은 입장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어떤 지점에서 이것이 하위문화, 그리고 하위문화의 창조성에 관한 헤디지의 개념과 연결되는가이다.

따라서 소수자적 용법은 종속된 주민들에게 적합한 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창조성에 의해 정의된다. 사실 소수자는 이러한 세 가지 중에서 창조성 혹은 생산의 유일한 원천이다. 다수파 용법은 단지 지배적인 표준만을 되풀이할 뿐이며, 소수파 용법은 종속된 표준을 반복한다. 다수파가 되기나 심지어 소수파가 되기도 없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동질적인 반복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소수자적 용법만이 생성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생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명령어(order-words)의 맥락으로 되돌아가자. 명령어의 두가지 용법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들 중에서 다수적 용법은 지령 혹은 명령이다 ― "너는 이것을 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들 각각은 거의 죽은 문장이다. 명령어의 다수적 용법은 항상 평결이다. 물론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용법은 아니다. "명령어는 항상 그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놀람의 외침이나 도주하라는 메시지와 같은 것이다."(107) 명령어의 소수자적 용법은 탈주선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탈주선들이 정치적인 대안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탈주 혹은 도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명령어 속에서 삶은 항상 죽음의 대답에 응답해야만 한다. 탈주함으로써가 아니라 탈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즉 명령의 구성물을 이행[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킴으로써."(110) 탈주는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다수적 용법, 표준, 규범, 법에 대한 거부여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대안의 창조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탈주는 단순히 탈주―부정적이고 공허한 것일지 모르는―일 수는 없다. 탈주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즉 구성적 탈주. 이제, 내가 구성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규범, 새로운 다수파의 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인용한 구절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그것은 "질서의 조성을 이행의 구성요소로" 변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행이란 내가 구성적 탈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새로운 질서, 새로운 표준이 아니라 새로운 용법, 어쩌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가장 요약적인 형식으로 여기에서 정치학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즉 대안적인 용법, 이행, 구성적 탈주.

보충해서 말하자면, 소수자 정치학에 관한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성-되기"라는 용어를 귀찮을 정도로 쉽사리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싶다. (여성-되기라는 용어는 이미 AO에서, 슈레버 판사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슈레버 판사는 여성이 되어가던 사람이었다.) 이 용어는 여기에서 원칙적으로 소수자적 용법은 창조적이지만 다수자적 용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 혹은 다시 말해서 소수자적 용법은 생성들이라는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수자-되기란 없다. 다수파는 결코 되기(=생성)가 아니다. 모든 되기는 소수자이다. 여성은, 그 수와는 무관하게, 소수파이며, 하나의 상태 혹은 하위집단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인간 전체와 관련해서 여성-되기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생성을 가능케 할 때 뿐이다. 여성이 이 생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자기 자신이 이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 남성과 여성 모두를 변용시키는 여성-되기이다."(106) 남성은 다수파이며 여성은 소수파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많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표준은 남성을 통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여성/소수파는 따라서 하나의 상태 혹은 하나의 하위 집단이며, 이것은 그 자체로는 창조적이지도, 전복적이지도 않다. 창조적인 것은 소수파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소수자적 용법, 되기이다. 여성-되기는 과정이며, 이 되기는 여성을 그 궁극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더 여성적으로 되는 과정이 아니며, 또한 종국적인 이상적 정체성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슈레버 판사의 여성-되기는 단순히 그가 성별만을 변화시키는 한에선 여전히 오도된 것이다.) 여성-되기는 그 궁극점으로서 정체성을 지니지 않으며 또한 실제로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궁극점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안, 이행을 창조해내는 것은 남성이라는 표준으로부터 일탈하거나 혹은 탈주하는 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페미니스트적 실천, 페미니스트적 용법을 명명하는 방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여성-되기"라는 이 용어를 둘러싼 여러 흥미로운 논쟁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앨리스 자딘과 로지 브레도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카밀라 그리거는 그것을 유용한 페미스트적 개념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여성 되기에 관해서 내가 인용했던 구절에서 생겨나는 소수자 정치학에 관해서 또 다른 첨언을 하고 싶다. 이러한 여성-되기는 모든 인류, 남성과 여성을 마찬가지로 변용시킨다고 이들은 말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처음부터 다수파는 좀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고 소수파는 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수와 소수가 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일단 우리가 다수와 소수를 두 개의 정치적 용법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다수자와 소수자는 역전된 방식으로, 절대적 방식으로 수와 관련을 맺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은 역전된다. 다수파는 추상적인 표준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한은 결코 그 누구도 아니며, 그것은 항상 <아무도 아닌 자>이다 … 반면 소수파는 그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 한에서 모든 사람 되기이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이다. 다수자라는 '사실'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아닌 자>의 분석적 사실이며 모든 사람의 소수자-되기에 대립되는 것이다."(105) "연속적인 변주는 모든 사람의 소수자-되기를 구성하며, 이것은 <아무도 아닌 자>의 다수자적 <사실>과 대립한다. 의식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소수자-되기는 자율이라고 불려진다."(106) 나는 이 설명의 집단적 차원에 흥미를 느낀다. 이 설명은 때로 탈주에 관한 개체주의적 통념과 아주 비슷한 것을 비준한다. 하지만 소수자적 정치학은 집합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보편적이다. 혹은 적어도 잠재적으로 보편적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만인의 정치학이다.



추상화


나는 여전히 추상화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을 개괄하려고 한다. 이것은 대부분 추상적인 기계들에 대한 이들의 분석을 에워싸고 있다. 공통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빈번히 너무 추상적이라고, 특히 정치적 논의에 있어서는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나는 종종 이런 반응을 접한다. 그 이유는 추상적이라는 것이 관념적 영역에 속해 있다고 가정되는 반면, 실천적인 것은 항상 추상화의 최소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구체적이라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실천적 정치학에서 추상적인 것의 역할을 주장한다. 이를 위한 설명의 첫 번째 수준은 이들이 추상적인 것을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변동이 우리에게 중요한 까닭은 실재와 관련해서 이 두 가지 개념들이 가지는 위치이다. 관념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만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에 대립하지만 그것은 또한 완전히 실재적이다. (맑스에게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실재적 추상화"에 관한 맑스의 논의가 이것에 아주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틀 안에서 말하는 것은, 이러한 잠재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현실적인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혹은 프랑스어의 의미에서 현실적(actuel)이 아닌 것은 공간적으로 현재적이지도 시간적으로 현재적이지도 않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실재적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가 가장 좋아하는 예는 프루스트의 기억(회상)이다. 기억은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따라서, 추상 기계 혹은 다이어그램은 그것이 비록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잠재적이며 완벽히 실재적이다. (판옵티콘에 관한 푸코의 이해가 하나의 다이어그램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판옵티콘은 잠재적,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추상화의 수준에서 그것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이 잠재적이고 추상적인 기계가 현실적인 것, 여기 지금 있는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도표장치(diagrammatic)에 의해 정의되는 추상적인 기계는 최종심급에서 결정하는 하부구조도 아니고 최상 심급에서 결정하는 초월적(transcendental) 이념도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인 기계는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도표적인 기계 혹은 추상적인 기계는 어떤 것(심지어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을 재현(=표상)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으나 도래할 실재적인 것, 새로운 유형의 실재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것이 창조의 점들 혹은 잠재성(potentiality)의 점들을 구성할 때마다, 그것은 역사의 외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역사'에 선행'한다. 모든 것은 도주하며, 모든 것은 창조한다. 하지만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강렬함의 연속체들, 탈영토화의 연접들(conjunctions), 표현과 내용의 추출물들을 산출해내는 추상적인 기계와 더불어."(142) 그러므로 정치 토론에서 당신더러 너무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결코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치행동은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혹은 추상적인 기계를 통해서 흘러나온다. 다시 말해서 내가 몇 주전에 주장했듯이 추상적인 기계는 선행하며, 또한 그것은 생산적이다. 나는 이러한 "선도적인" 역할에 관해서, 혹은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실행되는 결정의 종류에 관해서 아주 많이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얼마 후에는 더 명료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조히스트


나는 추상화와 정치에 관한 이러한 물음이 스스로를 기관들 없는 신체로 만들려는 기획에 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추상적인 기계, 정합면(plane of consistency),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제 우리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추상적인" 혹은 "잠재적인" 기획에 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것은 어떻게 행하며, 무엇보다도 왜 그것을 행하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왜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이며, 욕망에 고유한 정합면이다. (욕망은 그것을 부셔버릴 있는 결핍(=결여lack), 혹은 욕망을 끝낼 수 있는 쾌락(pleasure) 같은 어떤 외재적 심급도 지시하지 않는, 생산의 과정으로 정의된다.) (몇 주전의 편지에서 들뢰즈가 푸코와 푸코가 쾌락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기에서, 그리고 각주에서 문자 그대로 또다시 받아들여진다는 것에 주의하라.) 따라서 BwO는 욕망이 아무런 목적 없이 자유롭게 산출할 수 있는 장이다. 우리는 또한 BwO가 장이라고, 강렬도들이 가장 잘 나타나고 성장하는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BwO는 강렬도=0 자체이지만 강렬도를 위한 적합한 매개(=환경medium)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즉 우리 자신의 행위역량과 사유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변용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기관들 없는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두 번째 절반부분에만, 변용될 수 있는 역량에만, 즉 가장 고조된 강렬도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BwO의 마조히스트적 구성은 우리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의 증가에 관한 훌륭한 예이다. 마조히스트는 실제로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 고통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마조히스트는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로 구성해서 욕망의 정합면을 뽑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통을 이용하는 것이다."(155) "마조히스트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을 이끌면서 동시에 채우는 전체적 배치를 구성한다. 그는 자신과 말과 여주인을 이용해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정합면을 구성한다."(156)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 사례 속에서 마조히스트는 자신의 신체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강렬함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자기 파트너가 자신 위에 올라타서 승마용 구두로 자신을 차게 할 수 있을까를 계획한다. "다리들은 여전히 기관들이다. 하지만 승마용 구두는 BwO 위의 하나의 자국, 또는 지대로서 강렬도의 지대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156) 마조히스트는 그/녀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강렬도의 지대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BwO를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이것은 완전히 무정치적(unpolitical)이고 개별적인 실천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프로그램을 정치적 실천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들이 강조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 즉 변용될 수 있는 우리 역량의 증가에 상응하여 우리의 행위 역량과 사유 역량에서의 증가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마조히스트에 관한 예로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르다 그래서 나는 보다 적합한 것으로 보충하고 싶다. 우리는 BwO 만들기라는 이러한 개념을 이들이 언어학에 관한 장에서 제출했던 소수자적 생성이라는 통념의 보편성 및 창조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방식에 관해서 사고해야만 한다.


개의 고원7, 8, 9



얼굴성


얼굴성은 쉽게 파악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란 이 개념을 정체성과 정체성 형성체에 관한 변증법적 개념과 대조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얼굴성에 대한 배경으로서 인종 및 인종적 정체성을 변증법적으로 개념화한 사르트르와 파농의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사르트르/파농의 변증법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첫째, 지배적인 주체 (백인 유럽인)는 피지배 주체를 일관된 정체성으로 창조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유태인을 만든 것은 바로 반-유태인들이다. 혹은 파농의 경우, 아프리카 "원주민"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창조한 것은 바로 유럽 식민지 지배자들이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사이드의 작업은 거칠게 말해서 똑 같은 노선을 따라 간다. 즉 "오리엔탈"은 유럽의 학제에서, 유럽 예술, 여행일지 등에서 창조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문제로 되고 있는 하층민들(유태인, 아프리카인, 동양인)이 지배적인 유럽의 상상계에 의해서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한 정체성, 즉 현존하는 주체성들을 과잉결정하는 이러한 정체성이 식민 권력에 의해 창조되고 강제로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Jews)은 존재했지만 반-유태인들이 "유태인"(the jew)을 창조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존재했지만 식민지 권력이 "원주민"을 창조했으며, 이것은 "동양인"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 지배자와 인종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정체성을 창조했으며, 타자(Other)를 발명하고 세계의 중간을 통해서 배제의 견고한 경계선을 설정하면서 이타성(alterity=異他性)을 극단으로 밀어 부쳤다. 파농이 말하듯이, 식민지 도시는 두 개, 즉 유럽이라는 자아와 원주민이라는 타자로 나뉘어진 세계이다. 하지만 변증법적 개념화는 이러한 최초의 창조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 그리고 이것이 사르트르와 파농의 걸출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인 유럽의 자아는 이러한 창조적 마주침, 이러한 타자의 발명 이전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적 자아는 오히려 그 과정의 마지막 결과이다. 백인 유럽 자아는 타자에 대한 그 대립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으며, 유태인, 원주민, 동양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부정적 정체성, 즉 타자를 창조한 이후에 자아는 그러한 부정의 부정으로서 생겨났으며, 따라서 변증법적 구조로서 생겨났다. 백인 유럽 자아는 그 부정적 타자에 의존한다. 그러한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백인 유럽의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명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체성에 관한 이러한 변증법적 이론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얼굴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얼굴성은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비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얼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종주의 이론이지만, 그것은 인종적 타자의 이론이 아니다. "만약 얼굴이 크리스트, 즉 어떤 보통의 <백색인>이라면 최초의 일탈, 최초의 유형별 격차는 인종적이다. 황인종, 흑인종, 두번째나 세번째 범주의 인종들. 그들 역시 벽 위에 기입되어 있고 구멍에 의해 분포되어 있다. 백인의 자만인 유럽의 인종주의는 배제한다든가 누군가를 타자로 지적함으로써 진행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인종주의는 점점 더 특이해지고 지체되는 파동 속에서 적합하지 않은 특징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백색인의 얼굴에 의해 일탈의 격차들을 결정함으로써 작동되었다(...).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외부는 없다, 바깥의 사람은 없다."(178) 따라서 인종주의에 관한 이처럼 비변증법적 개념에서는 타자들은 없으며, 그 누구도 외부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인종적 차이 혹은 이타성은 타자, 극적인 차이를 통해서 배열(configure)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색인 얼굴의 표준으로부터 일탈의 수준에 따라 배열되는 것이다. 실제로 더욱 적합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배제도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유럽의 인종주의는 모든 이들을 백색의 스크린 위와 검은 구멍 속에 포함함으로써 기능한다 ― 지배적인 표준으로부터의 일탈의 수준에 의해 정의되는 위계 속에 그들을 포함하고 정렬시킴으로써. 그러므로 이것이 얼굴성에 대해 이해해야할 첫 번째의 것이다. 이것은 정체성들에 관한 부정적 변증법이 아니라 일탈의 수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배제를 통해서 기능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유형들의 위계를 정립한다. (얼굴성은 정체성과 무관한가? 얼굴은 정체성인가?)

그렇다면 얼굴성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단지 그것이 위계 혹은 지배에 관한 비변증법적 기계라는 것만을 알았다. "이러한 기계는 얼굴성 기계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 기계는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기 때문이며, 모든 신체와 그 윤곽들과 그 대상들의 얼굴화를, 전 세계와 모든 환경의 풍경화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181) 기계는 신체에 얼굴을, 혹은 세계에 풍경을 강제적으로 부여한다. 우선 얼굴 혹은 풍경이 신체나 세계에 각인된 정체성이라고, 그리고 정체성-생산 기계로서의 얼굴화라는 개념이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른 방향을 취한다. 이러한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은 하얀 벽이나 스크린과 검은 구멍의 조합이다. 하얀 스크린은 의미가 나타나는 표면이다. 그것은 의미작용의 체계이다. 다른 한편, 검은 구멍은 정념과 주체화(subjectification)의 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몇 장을 거슬러 올라가서,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미작용을 둘러싸고 중심화된 네 가지 체제에 대해 묘사한 것을 기억해 내야 한다. 원시적 전-기표작용적 체제, 반-기표작용적 체제, 기표작용적 체제, 그리고 후-기표작용적 체제. 이것들은 또한 주체적이고 정념적인 체제이다. 그러므로 얼굴은 이러한 마지막 두 가지 체제, 즉 의미작용과 주체화의 조율된 배열(coordinated arrangement)이다.

특히 이들은 이 장에서 다시 얼굴성은 표현의 실체라고 말한다. 얼굴성은 의미작용과 주체화를 위한 물질적인 장소(locus)이다. "얼굴성은 의미작용들과 해석들의 집합 위에 물질적으로 군림한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의 얼굴과 아기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을 썼으며, 사회학자들은 매스미디어 또는 광고에서 얼굴의 역할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전제군주-신은 자신의 얼굴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하나 또는 여러 얼굴을 한다."(115)

따라서 얼굴은 의미작용이나 주체화가 발생할 수 있는 장 혹은 환경이다. 하지만 얼굴은 중립적인 장이나 환경이 아니다. 얼굴은 특정한 의미와 주체성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구성된다. 어머니의 얼굴에 대한 아이의 관계는 흥미로운 예이며, 아마도 이러한 얼굴을 부를 수 있는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보통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얼굴 일반은 가능한 의미작용과 주체화를 결정하는 구성된 장이나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드보르가 스펙타클이라고 불렀던 것이 얼굴과 더 가깝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스펙타클처럼 얼굴은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지, 어떤 의미일지, 어떤 주체성들일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스펙타클처럼 얼굴은 지배형식에 상응하거나 지배형식을 결정한다. "얼굴은 정치이다."(181) 전제적인 얼굴 기계는 하얀 벽과 의미작용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반면 권위주의적 얼굴 기계는 검은 구멍과 주체화에 우위성을 부여한다. 물론 두 가지는 서로 혼합되어서 기능한다. 모든 얼굴은 전제적 체제와 권위주의적 체제, 의미작용과 주체화의 혼합이다. 이것에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혁명적 정치학은 따라서 모든 선차적인, 전-얼굴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정체성(나는 이것이 새로운 얼굴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안하는 과정은 얼굴을 망가뜨리는(unmake) 것이다.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을 와해하는 것 역시 실재적 생성들, 전적인 잠행자-되기를 포함하는 정치이다. 얼굴을 와해하는 것은 기표의 벽을 관통하기, 주체화의 검은 구멍을 빠져나오기와 같은 것이다. 분열분석의 프로그램, 슬로건은 이렇게 된다 : 당신의 검은 구멍들과 하얀 벽들을 찾아라, 그것들을 알라, 당신 얼굴들을 알라 ; 이것이 당신이 그것을 와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당신의 탈주선들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188)

나는 여기에서 얼굴과 스펙타클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드보르에게 스페타클은 항상 우리에게 외재적인 어떤 것이자 우리에게 투사되는 어떤 것, 극한에서 우리에게 투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다른 한편 얼굴들은 우리들이다. 얼굴들은 우리를, 우리의 검은 구멍들과 흰 벽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얼굴을 와해하는 것은 엄청난 규모로 우리 자신을 와해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탈주선에서 우리의 얼굴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사랑


얼굴을 와해하는 이 문제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탈주선들의 문제는 또 다시 이러한 탈주가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오인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와해라는 용어가 분명히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와해가 실제적 생성을 포함한다고,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와해가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탈주―내가 지난 주에 구성적 탈주라고 부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긍정적 측면이 항상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긍정적 측면, 이러한 창조적인 탈주가 이 책의 이 부분에서, 특히「세 개의 단편소설」이라는 고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초점을 얼굴의 정치학에서 사랑으로 바꿀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서 사랑에 대한 몇 가지 기술들을 제시한다. 나는 이것이 상당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사랑, 그것은 정확하게 구성적 탈주이다.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것에서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 보자.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을 와해하기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흰 벽과 검은 구멍) 얼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거기에서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주체적 의식과 주체적 열정의 검은 구멍 안에서만 우리는 변형되고 뜨거워지고 포획된 입자들을, 주체적이지 않은, 살아 있는 사랑을 위해 다시 활력을 주어야만 하는 입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랑 안에서 각자는 타인의 미지의 공간들로 들어가거나 그것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접속되며, 이 사랑 안에서 선들은 깨진 선들처럼 구성된다."(189)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사랑은 부부의 죽어버린 사랑과 대립된다고, 혹은 그것은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참조(reference)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얼굴을 와해하는 과정에서만, 얼굴의 하얀 벽과 단절하고 얼굴의 검은 구멍들로부터 도주하는 과정들에서만 살아 있는 사랑은 도달한다. 그것이 이러한 사랑의 첫 번째 단계이며, 얼굴로부터의 탈주, 혹은 실제적인 포기이다. "나는 사랑과 자아를 포기함으로써 (...) 사랑할 수 있게 되어간다."(199)

얼굴의 와해하기를 작동시키는 탈주선들은 여기에서 자아의 포기이며, 자아를 비워버리는 것이며, 사랑은 이것과 결합된다. 이러한 자아의 비워버림을 나는 노출(exposure)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노출은 은폐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라거나 아무도 보지 못한 실제적인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도 남겨두지 않는, 드러내야 할 어떤 비밀도 남아 있지 않는 탈은폐(revelation)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더 이상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감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지각할 수 없게 되기,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사랑을 와해해 버리기. 자기 자신의 자아를 와해해 버리기 …"(197).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얼굴을 와해하기, 자신을 비워버리기, 노출 ― 이러한 것들이 사랑의 조건이다. 드러내야 할 비밀도 없으며, 사랑해야 할 자아도 더 이상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첫 번째 조건, 전제조건일 뿐이다. 사랑하기의 첫 번째 단계는 탈주, 자신을 포기하기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는 합성(composition) 혹은 구성이다 ― 선들 혹은 공간들은 서로 구성되며, 혹은 내가 앞에서 읽었던 구절에서 인용하면 "각자는 타인의 미지의 공간들로 들어가거나 그것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접속되며, 이 사랑 안에서 선들은 깨진 선들처럼 구성된다". 따라서 얼굴의 조직화를 벗어난 요소들은 사랑 속에서 접촉하게 된다. 여기에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자아도, 혹은 자아들도, 자아와 타자도 없다. 오히려 얼굴과 자아를 벗어났던 선들과 공간의 이러함 마주침은 새로운 합성, 새로운 관계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얼굴에서 벗어난, 자아에서 벗어난 요소들의 이러한 새로운 합성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관한 질문은 이러한 요소들의 양립가능성(compatability), 들뢰즈와 가타리가 합성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다. 즉 이것들이 어떻게 새로운 합성, 새로운 구성을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것. 이러한 새로운 구성은 창조성, 즉 탈주선들의 긍정성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선들, 와해하기, 포기는 단지 부정적이지 않다는 훌륭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위험 혹은 우려가 있다. 하지만 위험은 과정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서조차도 누군가의 창조적인 선이 다른 이에겐 감옥에 가둬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같은 유형의 두 가지 선들에 있어서도 선들의 합성, 한 선과 다른 선의 합성은 문제이다. 두 개의 탈주선들이 양립가능하고 공존 가능한지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기관들 없는 신체가 용이하게 합성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랑이 그것을 견뎌낼지도, 정치가 그것을 견뎌낼지도 확실치 않다."(205)

탈주선들은 만나야만 하며, 마주침에 있어서 새로운 관계를 서로 합성해야 한다. 이러한 마주침과 이러한 합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확실성도 없다). 이것은 오히려 사랑의 과제이다. 양립가능하고 합성가능한 선들을 발견하라.

마지막으로 그것은 사랑에서도 그러하듯이 정치에서도 그러하다. 탈주선들과 함께 혹은 그 이후에 도래하는 긍정적, 창조적 정치적 접근방법이야말로 사랑을 통해서 작동한다. 혹은 오히려 사랑에 의해서 정의되는 마주침과 합성의 동일한 논리를 통해서 작동한다. 그것은 분명히 더 나아가야만 하는 도약이다. (사랑에서 정치로). 하지만 그러한 경로는 「세 개의 단편 소설」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고 있다고 내가 보고 있는 전략이다.



국가


국가는 필연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무엇보다 국가는 일련의 상이한 신체들 혹은 기능들―전통적으로는 적어도 경찰, 군대, 입법, 사법, 행정부 등―의 합체(coalescence) 혹은 상응(coincidence)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국가 개념은 이러한 신체 혹은 기능들의 통일을 상상한다. 실제로 국가에 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던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유명한 구절에서 국가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집행위원회라고 규정했다. 또는 엥겔스는 국가를 이상적인 집합적 자본가라고 불렀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무기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국가는 단일한(unitary) 무기이다. 국가는 지배적인 기능들의 다양한 대오로부터 추상되고 묶여지는 이상적인 점들이다. 국가는 정치권력의 잠재적 점이다. 이러한 통일성, 그리고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이러한 관계 때문에, 혁명은 맑스주의적 틀 안에서는 국가의 폐지로 간주될 수 있었다. 20세기에 맑스주의적 국가 이론의 일차적인 관심과 논쟁은 두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집중된다. 첫째, 지배계급에 대한 국가의 관계의 문제. (어떤 의미에서, 혹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부르주아지는 국가를 실제로 통제하는가, 혹은 국가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상응하는가). 둘째, 국가와 국가권력의 통일성 혹은 중심성 문제.

나는 이 중 두번째 문제를 들뢰즈와 가타리의 국가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배경으로 생각하며, 나는 이들이 알튀세르에서 푸코로 움직이는 일련의 논점들을 제기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했듯이, 국가를 권력의 단일한 원천 혹은 자리(locus)라고 간주하는 것은 명백히 추상화이다. 국가의 모든 행동을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단일한 개인이나 사무실은 없다. 국가의 중심은 실제로 대통령, 의회, 경찰서장, 장군의 사무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국가 장치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개념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결국 알튀세르는 국가 자체를 중심적인 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단지 다양한 국가 장치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이처럼 다양한 장치들은 분석 대상들 뒤에 있거나 그 위에 있을 수 있는 단일한 추상적 점이라기보다는 권력의 거점으로서의 적합한 분석 대상들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를 권력의 단일한 거점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장치들를 다양한 거점들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위치들, 장치들은 군대에서 학교, 교회에 이르기까지 공적인 동시에 사적이며, 억압적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다.

푸코는 권력의 어떤 거점도, 어떤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알튀세르의] 이 움직임을 한 발짝 더 내딛었다. "합리성을 관장하는 합리성의 사령부는 존재하지 않는다."(HS 95) 심지어 제도들의 다양한 중심들도 없다. 푸코에게서 권력의 중심들은 사회적 장 전체로 뻗어나간 권력의 다양한 응용 지점들이다. 푸코가 국가는 존재한다고 말하든 말하지 않았든 간에 그는 국가가 권력 분석을 위한 적합한 대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국가 개념은 맑스/엥겔스의 문제틀로의 복귀를 대변한다. 이 속에서 또 다시 국가는 잠재적인 단일한 점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분석의 대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국가의 중심화된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원시적인 국가 없는 사회들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분석에서부터 우선 출발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원시 사회들이 몇 개의 탈-중심화된 권위의 절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근대 사회는 그러한 절편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대신 국가 속에서 하나의 중심화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류학적 통념에 도전하면서 시작한다. 이들은 대신 절편적인 것과 중심화된 것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다고 주장했다. 즉 절편적인 것과 중심화된 것은 근대 국가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함께 작동한다. 원시 사회와 근대 사회에서 권력의 차이는 중심화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중심화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절편화의 매끈함 혹은 견고성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견고한 절편성과 중심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화가 내가 알튀세르/푸코의 경향에서 맑스/엥겔스로의 복귀라고 설정한 바로 그 점이다.)

이제 국가는 중심화된 권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사회 전체를 통해서 권력의 다양한 절편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명령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의 합리성을 관장하는 사령본부"라는 의미도 아니다. 나는 대신 맑스/엥겔스에게서 이미 국가는 잠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들은 국가의 중심화된 권력을 "마치 ∼처럼(as if)" 작동한다고 정식화한다 ― 국가는 마치 이상적인 집합적 자본가인 것처럼 작동한다, 혹은 더 낫게 말해서, 권력은 사회 속에서 마치 사회를 지휘하는(orchestrate) 이상적 집합적 자본가처럼 기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에 실재성과 잠재성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국가는 다양한 사회적 권력들이 서로 반향하는 공명 상자의 일종이다. "모든 중심들이 공명하고 모든 검은 구멍들이 눈들 뒤의 어떤 교차점과도 같은 단 하나의 축적점으로 모여드는 한에서 절편성은 견고하게 된다. 아버지의 얼굴, 교사의 얼굴, 연대장의 얼굴, 사장의 얼굴은 잉여를 만들어 내며, 다양한 원들을 가로지르고 모든 절편들을 다시 지나가는 의미작용의 중심과 결부된다."(211)

국가 자체는 이러한 잠재적인 잉여 지점 혹은 공명 지점으로 구성된다. 이제 실제로 이것만으로는 푸코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내가 몇 주 전에 인용했던 『감시와 처벌』의 한 구절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이 구절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학교가 군대를 닮았고, 군대는 공장을 닮았고 이 모든 것이 감옥을 닮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훈육 사회의 모든 제도들 사이에는 잉여 혹은 공명이 있으며, 이러한 잠재적 중심성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바로 국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편적 부분들 (교회, 학교, 군대)과 중심화된 장치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의 공명 상자이다."(224) 다음 단계로 설명하려는 것은 국가와 전쟁기계의 차이, 전체주의적 국가와 파시스트적 국가의 차이이다.


개의 고원10, 11


어떤 차이가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가? 나는 여전히 세 번째 챌린저 교수 고원과 씨름하고 있으며, 이 책의 생물학에 관한 부문과 정치학에 관한 부문을 독해하는 나의 접근방법상의 차이와 씨름하고 있다. Rick이 이번 주에 이메일로 물어봤듯이, 나 혹은 우리는 생물학의 문제보다는 파시즘의 문제에 관해서 왜 그렇게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가? 아니 나는 이런 질문을 공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한편으로는 세포, 바위 혹은 새들의 배치와 홈패임(striation), 이것들의 조직화와 탈주의 대안을 다루는 구절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배치들과 홈패임, 인간의 조직화와 탈주의 대안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을 그토록 상이하게 다루는 것일까?

충분하게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배치와 홈패임, 이러한 조직화의 대안들은 실제로는 같은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인간주의이며, 나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반-인간주의란 인간 본성의 법칙이 자연 전체의 법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이에 관해서 스피노자를 또 다시 인용해 보자. 스피노자야말로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언급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변용태(=정서)에 대해서, 인간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들을 공통적인 자연법칙을 따르는 자연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바깥에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들은 자연 속의 인간을 왕국 속의 왕국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 마치 인간 본성이 자연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듯이.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에 상응하여 모든 것들이 일어나게 되고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하게 되는 자연의 법칙과 규칙들이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똑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어떤 것,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은 똑같아야만 한다 (...) 그러므로 ... 나는 인간의 행동과 욕구(appetites)가 선들, 면들, 신체들의 문제라는 듯이 이러한 것들을 사고할 것이다."({윤리학} 제3부 서문)

자연의 모든 것(인간, 세포, 바위, 새, 나무)은 똑 같은 법칙에 따라 작동하며, 따라서 똑 같은 홈패임, 배치들, 조직 대안들 등등을 통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식물의 성장이나 새의 교미, 혹은 지질 형성에서 다양체들에 대해 분석을 할 때,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양체와 은유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아주 똑 같은 다양체들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들은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똑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속의 어느 곳에서든 그러한 다양체들이 작동하는 방식, 이중 분절이 작동하는 방식, 배치들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서 어떠한 대안들이 존재하는가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치적 조직화의 법칙을 이해하고 싶다면, 세포 생물학이나 식물 재생산을 연구해도 무방하다.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자연법칙에 관한 분석의 수준을 나는 반-인간주의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분석적 수준에 덧붙여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에는 또 다른 수준들이 또한 있으며, 나는 이것이 인간을 필연적으로 특권화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말한 바대로 (적어도 매번) 그 텍스트를 자연법칙에 대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또한 행동이나 실천에의 권고로 읽는다. 그것은 우리가 바위, 식물이나 새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갑각류의 분절과 새의 리토르넬로에 관해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작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것들을 인간 조직화와 인간 사회에 관한 문제와 대안으로 번역한다. 바위와 식물도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실천의 대안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틀 안에서 이것들은 확실히 탈주선을 가지고 있다. 릭(Rick)에게 보내는 이메일 답신에서 욘(Jon)이 잘 지적했듯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퀴비에 보다는 제프리(Geoffrey)에게서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일부는 그가 자연 세계에서 현존하는 대안들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텍스트가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며,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비인간적 자연에서의 대안들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작용할 수 있는 대안들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권고한다. 다시 말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참새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유형의 다양체에 비해 한 가지 유형의 다양체를 선호해야 한다고 새들에게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나무가 풀의 잎새들과 같아야 한다고 나무에게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야말로 우리가 이러한 윤리학 혹은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의 한계설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한계설정과 관계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설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이다. (스피노자가 말하기를 무한한 속성들이 있지만, 우리는 단지 사유와 연장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즉 그것은 세계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한계설정에 관한 진술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왜 우리가 생물학이나 지질학을 다루고 있는 논의와 (파시즘과 같은) 인간 사회 및 조직화를 다루고 있는 논의에 관해서 그렇게 상이하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이것을 하나의 시도로서 제안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에 관한 연구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이것들을 똑 같이 다루어야 한다. 텍스트의 이런 측면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윤리학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사고하는 한 우리는 이것들을 상이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나 인간 활동의 문제만이 우리에게 실천의 장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인간을 상이하게 만든다.



-미메시스(Anti-mimesis)


마침내 나는 이 장에서야 AO의 첫 페이지 이후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끌어온 은유에 대한 공격을 보다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유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방(mimesis)에 대한 공격이라고 이해하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주장, 이 반-모방을 들뢰즈가 플라톤주의를 전복하기 위해서 오래 전에 선언했던 기획의 일부분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동안 미학 이론에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서 반-모방이라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닮음(resemblance), 무엇보다도 자연의 조직화의 논리로서 그 닮음을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물학자(=자연학 연구자)의 기억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한다. 자연사의 원리 문제 중 하나는 상이한 동물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것이 이해되어 왔던 원리적 방법의 하나는 계열들의 관계로서, 즉 동물과 그 기능들이 유비에 의해서 각자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물고기의 아가미는 포유동물의 폐와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융의 원형을 사회적 혹은 문화적 관점에서 이러한 종류의 계열 닮음의 예로 든다.) 동물들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어온 다른 원리적 방식은 구조의 관점에서였다. 여기에서 각각의 동물이나 기능은 (또 다시 유비에 의해) 초월적인 것과 관련되며, 예시들 사이의 내적인 동질성들을 통해서 구조를 정의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사회적 분석에서 이러한 두 번째 대안의 예로서 계열을 이룬다.)

"… 두 가지 경우 모두 자연은 거대한 모방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자연은 단계적인 닮음에 의해 계열의 모델과 근거로서 존재자들 모두가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신이라는 최고항을 향해 나아가면서 진보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는 존재자들의 사슬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이번엔 질서 잡힌 차이에 의해. 모든 것이 모방하는 모델 자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모방해야 할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거울 속의 모방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234-235)

여기에서 일반적인 주장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가 세계를 내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 그리고 모방을 통해서 닮음의 토대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 혹은 거대한 은유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연이 조직화된 것도, 모방을 통해 기능하는 것도 아니며, 생성을 통해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생성은 결코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305) 생성은 어떤 특정한 귀결점이나 모델에 도달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은 운동의 일종 혹은 스타일이다. 예를 들어 쥐-되기는 쥐와 닮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쥐-되기는 쥐가 기능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 쥐의 무리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쥐는 또한 쥐-되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성이라는 것이 박물학자들의 질문, 즉 동물과 식물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며 이것들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생성을 통해서 서로 관련되며 진화한다.

이제 생성들은 항상 다수파 혹은 표준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항상 소수자이다. 다시 말해서 패러다임은 계열적 혹은 구조적 닮음과 차이에서 표준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질문으로 변동한다. 생성은 항상 다수파로부터의 일탈이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특히 인간의 생성들을 사고할 때,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어째서 남성-되기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성은 특히 다수자인 반면, 생성은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다."(291) 남성은 일차적인 표준이기 때문에, (심지어 여성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도) 모든 생성은 (표준으로서의) 남성이라는 점을 벗어나며, 나아가 여성-되기는 일차적인 생성으로서의 특권화된 역할을 지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성은 여성-되기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남성의 여성-되기 속에서 그래야 한다"(292)와 같은 진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표준적인 남성이 출발점이며, 여성-되기는 일차적인 생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똑 같은 정식화가 모든 다른 소수자적 생성들, 즉 유대인-되기, 흑인-되기 등등에서 유지된다. 이러한 모든 소수자-되기는, 적어도 인간에 관해서 생각할 때에는, 정치적이다. "소수자-되기는 정치적 사태이며, 역량의 작업 전체에, 작용적인 미시정치학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거시정치학의 대립물이며, 심지어 역사의 대립물이다. 사실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다수파를 정복하고 수중에 넣을지를 아는 일이다. 포크너가 말했듯이,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흑인-되기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292)

이제 여기서 정치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 구절을 살펴보자. 내게 권력은 두 가지 요소들을, 즉 역량과 선택, 혹은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역량과 대안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되거나 되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을, 표준으로 남아 있거나 표준으로부터 일탈하는 대안을 가지고 있다. 좋다. 이제 내가 출발했던 곳, 즉 생성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닮음과 모방에 대한 대안으로서 자리매김되었던 곳으로, 자연, 종, 인간 사회의 조직과 변동에 관한 대안적 설명으로 자리매김되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생성은 이러한 분석에서 일차적이다. 왜냐하면 생성은 (계열이나 닮음의 구조가 아니라) 자연의 조직화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모방은 미학적 영역에서도 또한 작동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자연사와 인간 사회에서 작동하는 것과 다르다기 보다는 똑같다고 느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모방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정확히 말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자명한 세계의 복사로 이해하는 한에서, 그리고 다시 자명한 세계를 이데아적 형상들의 복사로 이해하는 한에서.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또한 예술의 영역에서, 그것은 흉내내기, 모방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의 문제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어떠한 예술도 모방적이지 않으며, 모방적이거나 구상적일 수 없다. 어떤 화가가 새를 '재현'한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새-되기로, 새 자신이 다른 어떤 것, 즉 순수한 선과 순수한 색으로 되어가는 중일 때야만 비로소 행해질 수 있다."(304)

그러므로 예술은 결코 재생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술을 재생산으로 생각하는 것, 즉 자연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예술의 경우에는 복사들인데, 이것은 자연과 예술 양자의 역동적인 성격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려진 새는 새가 또한 선과 색으로 되어가는 한에 있어서만 새-되기이다. 예술은 생산이며, 이는 모든 자연이 생산인 것과 같다. 혹은 오히려 예술은 생성이며, 이것은 모든 자연이 생성인 것과 같다. "먼 옛날부터 회화는 언제나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시적으로 만들려고 해왔으며, 음악도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음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 왔다."(346) 이 구절에서 나는 은유에 대한 반대 명령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려진 새는 새와 같은 것이 아니며, 재현도 아니다. 그것은 새의 새 되기, 혹은 새의 색과 선 되기와 같은 똑 같은 지위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새-되기인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가시적으로 만들어진다.



정합성과 합성(Consistency and Composition)


몇 주 동안 나는 MP의 일차적인 목표가 사회의 문제, 즉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제기하는 것이었다고 말해 왔다. 혹은 실제로, 나는 그것을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설정해야했다. 자연은 어떻게 함께 유지되는가, 자연은 왜 그렇게 근본적으로 다질적이거나 파편화되지 않은 채 있는가? "이것은 정합성의 문제이다. 다질적인 요소들의 '동시적인 성립'.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퍼지 집합이나 이산 집합을 이루고 말지만 마침내 정합성을 획득하게 된다."(323)

이제 정합성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다소 수동적인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합면 또한 일종의 배경막 혹은 공통성 혹은 교차점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를 생각하자. "정합면은 모든 구체적인 형태들의 교차점이다."(251) 하지만 나는 대신 우리가 정합성을 요소들이 동시적으로 성립되게 하는 어떤 작용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합성은 공고화(consolidation=다짐)와 같은 것으로, 계기적인 것이나 공존하는 것의 공고화된 응집체를 산출하는 행위이다 …"(300). 그러므로 정합성은 요소들의 공통적인 상태, 동질적 요소들의 집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질적인 요소들을 일관되게 만드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합성은 필연적으로 다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미분화의 산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질적인 것들이 그 공존과 계기들의 '공고화(=다짐)'를 통해서 서로 묶여지기 때문이다."(330) 따라서 정합성과 정합면은 동질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정합성은 오히려 다질적 요소들의 공고화(=다짐)의 과정이다. 이 때문에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정합성에서 합성으로서의 변동을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정합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합성이 보다 분명하게 다질적인 요소들을 조직하거나 합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과정들을 설정한다. 이 과정은 스피노자에 관한 부문의 두 가지 기억들의 주제이다. 이러한 합성과정의 한가지 결과에 있는 것이 바로 개체원리(=이것임haecceities)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개체원리들은 다소간 원재료이며, 합성 과정으로 진입하는 다질적인 요소들이다. 개체원리라는 용어는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14세기?)의 책에서 나오는 것이며, 특히 개별화에 관한 그의 책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개체원리가 특이성(=단독성, 독자성singularity)이라는 용어와 함께, 스콜라 철학의 맥락에서는 적어도 교환가능한 것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개체원리는 개인, 주체, 사물, 혹은 실체와는 아주 다른 개별화의 양식이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설명한다. 개체원리는 오히려 계절, 하루의 시간, 바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시간의 낮, 혹은 그 색깔은 특이하다. 그것은 어떤 것과의 차이에서 포획될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의 이것임(thisness)에서만 정의된다. ('이것임'에 대한 의존, 혹은 '지금 당장'에의 의존은 종종 둔스 스코투스의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다소 상이하게 설명한다.

"이것들은 분자들이나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모두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개체원리들이다.(261) 혹은, 이들의 용어에 따르면, 이것들은 경도(운동과 정지의 관계)와 위도(변용의 역량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경도와 위도라는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가를 알지 못한다.) 개성원리들을 경도와 위도로 이처럼 정의하는 것은 이것들이 어떻게 합성 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가 혹은 합성과정을 쉽게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그리고 <윤리학>에서 개별자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러한 정의를 따라서, 하나의 개별자는 운동과 정지의 공통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신체들로 합성되어 있다. (운동과 정지는 경도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또 이제는 위도의 관점에서) 각 신체의 변용은 자신의 작용 역량과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모두 포함하여, 합성의 상이한 축을 결정한다. 이것은 들뢰즈가 그토록 좋아했던 스피노자적 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어떻게 합성될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일이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즉 신체의 변용들이 무엇이며 신체들이 어떻게 그러한 신체를 파괴하거나 그러한 신체에 의해서 파괴될 수도 있는 다른 변용들, 다른 신체의 변용들과 합성관계로 들어설 수 있거나 들어설 수 없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신체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257) 이러한 두 가지 축, 즉 경도와 위도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합성과정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를 그것들이 명료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러한 똑 같은 스피노자적 논리를 확장하고 리토르넬로를 일종의 합성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실제로 합성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특히 나는 리토르넬로를 시간을 다루고 있는 합성 과정으로 이해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리토르넬로는 프리즘, 시간-공간의 결정체이다. 그것은 시간을 만든다. "시간은 아프리오리한(=선험적)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리토르넬로가 시간의 아프리오리한(=선험적) 형식이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시간을 만들어 낸다."(349) 리토르넬로는 일종의 구성, 시간적 구성이다.


개의 고원12, 13


이 두 개의 고원은 (문제 및 공리와 더불어서) 명제로서 조직화되어 있다. 나는 명제의 세 가지 집합을 본다. 첫 번째 집합(네 가지 명제, 유목론의 첫 번째 절반 부분)은 국가와 전쟁기계의 차이를 주장하며,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듯이, 국가에 대한 전쟁 기계의 외재성을 주장한다. 명제의 두 번째 집합(네 개 이상의 명제, 유목론의 두 번째 절반 부분)은 유목적 운동에 대한 전쟁기계의 관계에, 혹은 오히려 유목주의에서 전쟁기계가 출현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명제의 마지막 세 번째 가장 큰 집합(포획이라는 고원의 전체 장치)은 전쟁기계가 국가 장치에 의해서 전유되거나 포획되는 수단에 대해 다룬다.



국가와 전쟁 기계


국가와 전쟁기계는 서로 대비해서 정의된다. 하지만 우선 국가 자체에서부터 출발하자. "국가는 주권이다."(360) 그리고 정치적 주권 자체는 두 가지 극들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제적인 극과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자의 극이, 혹은 오히려 한편으로는 권력(혹은 강권might)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리(혹은 법)를. 이것들은 우리가 사유학(noology)에 관한 부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국가에 관한 두 가지 주된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주권의 두 극에 상응하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참된 사유의 제국. 이것은 마법적 포획, 장악 내지 속박에 의해 작동하며, 근거의 효용성을 구성한다(뮈토스 mythos).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들의 공화국. 이것은 맹약 내지 계약에 의해 진행되며, 입법 조직과 법률 조직을 구성하며 근거를 정당화해준다(로고스)."(374-375)

보통 주권의 이러한 두 극, 즉 제국과 그 권력, 그리고 공화국과 그 권리(혹은 사법적 형성체)는 국가의 대안적 가능성들로 간주된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형태가 이러한 두 극들을 제한하거나 오히려 배분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국가는 제국과 공화국, 권력과 권리의 이중 분절이다. 이러한 이중 분절은 국가 장치들을 지층(stratum)으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 장치의 공간은 따라서 항상 홈패인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주권의 이러한 두 극들의 배분에 의해서 홈패인 공간이다. 정치적 주권(권위와 규칙)은 지층들 안에 위치 지어진다.

이제 우리는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 관한 고원에서 이미 언급했던 국가에 관한 정의를 기억해야만 한다. 거기에서 국가는 사회적 절편성의 (유연성이 아니라) 견고함에 의해서, 그리고 권력의 (분산이 아니라) 집중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견고한 절편성과 중심화는 국가를 다양한 사회적 역량들과 절편들이 서로 반향하는 공명상자의 일종으로 설정함으로써 인식된다. 따라서 국가 자체는 우리가 (판옵티콘과 같은) 공통적 다이어그램의 반복을 통해서, 학교, 감옥, 병영, 공장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제도들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잉여점 혹은 공명점이었다.

국가에 관한 이러한 두 가지 정의는 합쳐져야 마땅하다. 주권의 두 개의 머리의 배분을 통해서 작동하는 홈패임은 똑 같은 것이어야만 하거나 적어도 공명 상자의 중심화와 견고한 절편성과 일관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다음 세 가지 요소로 국가를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가는 (국지적이 아니라) 전면적인 통합[중심화]이며, (빈도가 아니라) 공명의 잉여 작용이며, (환경의 양극화가 아니라) 영토의 홈패임의 작동이다."(433) 따라서 나는 국가에 관한 이처럼 상이한 정의를 하나 이상의 완전한 정의의 협력적 요소라고 이해한다. 국가의 중심화 혹은 전면적 통합은 잉여작용에 의해서, 혹은 다양한 견고한 사회적 절편들에서 공통적인 다이어그램의 반복에 의해서 성취된다. 그리고 특히 권력의 중심부 각각(감옥, 병영, 학교)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공간의 공통적인 성층작용, 주권의 두 극들인 권력과 권리 사이의 공통적인 이중 분절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제 다시 뒤로 돌아가서, 성층작용, 잉여작용, 중심화이다. 중심화는 지층들의 반복에 의해서 성취된다. 이것은 서로 반복되거나 서로 잉여적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사회적 공간을 통해 작동하며 주권을 배분하는 이러한 지층들은 무엇인가? 음, 나는 지층들을 제도들 자체라고 읽고 있다. 즉 학교는 사회의 성층작용이며, 감옥도 성층작용이다 등등. 사실 나는 제도를 사회적 흐름들을 조직하고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성층들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주권을 사회적 장에서 분리된 권력의 심급으로, 사회에 대해 초월적인 권력의 심급으로 이해한다 ― 예를 들어, 홉스는 주권이란 사회의 가교를 이루는 권력이라고 말했다. 성층작용은 그러므로 주권이다. 지층들이 사회의 표면 위에서 자라나는 한에서는 말이다. 이러한 지층들로 이해될 수 있는 제도들의 벽들은 사회적 장에 대해 초월적이다. (벽들의 높이는 그것들의 초월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제도들의 지층들은 국가의 중심적인 (아니면 잠재적인) 방 안에서 공명하는 주권의 잉여적 심급들이다. 하지만 전쟁기계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며, 유목론에 관한 고원의 첫 번째 절반 부분의 주요 논점은 바로 이러한 차이이다.

"… 전쟁기계는 유목민이 발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쟁기계는 그 본질에 있어서, 매끈한 공간의 구성요소이며, 이러한 공간의 점거, 이 공간 안에서의 대체, 그리고 이 공간에 대응하는 인간의 합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전쟁기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적극적인 목표이다."(417) 따라서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을 가로지는 운동과 이 공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배분을 모두 포함하는, 매끈한 공간의 구성으로 정의된다. 전쟁기계는 국가와 다르며, 심지어 전쟁기계의 매끈한 공간이 국가의 홈패인 공간에 반대되는 한에서는 국가에 반대된다. 그러므로 '전쟁 기계'는 실제로는 오도된 용어이다. 왜냐하면 전쟁기계의 본질은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 혹은 유목적 기계라고 불려지는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우리가 이러한 정의로부터 출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러 번 주장하듯이, 전쟁기계는 전쟁을 그 목표로 삼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초래된다면 그것은 전쟁기계가 이 기계의 적극적 목적에 대립하는 (홈을 파는) 세력으로서의 국가와 도시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전쟁기계는 전쟁이 되어간다."(417)

전쟁기계는 홈이 패인 공간과 접촉하게 될 때에만, 즉 국가와 접촉하게 될 때에만 전쟁에 대한 관계를 발전시킨다. (이것은 전쟁기계의 본질적 관계가 아니라 우연한 관계이다.) 전쟁기계가 이후 전쟁에 도달할 때라도, 국가의 폭력은 항상 이미 있는 것이다. 전사들의 폭력이 아니라 경찰과 교도관들의 폭력인 국가의 폭력은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기 어렵다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이것은 국가의 폭력이 항상 스스로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이미 행해진 것으로, 마치 매일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제시하기 때문이다. "국가 경찰 또는 법의 폭력은 … [권리를] 포획할 수 있는 권리를 구성하는 동시에 [권력을] 포획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통합되고 구조적인 폭력으로 모든 종류의 직접적인 폭력과는 구별된다."(448)

국가의 이러한 간접적, 구조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두 계급들을 만들어낸, 맑스가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계급 분할을 재창조하는 폭력이 항상 매일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항상 이미 프롤레타리아트화되었다. 나는 홈패임 자체는 이처럼 항상 이미-존재하는 폭력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와 일치한다고 말하고 싶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감옥과 학교의 벽 자체는 권력과 권리를 결합시키는 폭력이며, 국가 사회의 관점 안에서 보았을 때에는 항상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국가(그리고 국가의 홈패임)는 폭력과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기계(와 전쟁기계의 매끈한 공간)는 어떤 특정한, 우연한 조건 하에서만, 전쟁기계가 홈패임으로 달려갈 때에만 폭력적이 된다.

국가와 전쟁기계가 이토록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이 서로에 대해 그토록 외재적이라고 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고 어떻게 서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전쟁기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통합될 수 없다. 전쟁기계가 국가와 접촉하게 될 때, 혹은 어떤 홈패인 공간과 접촉하게 될 때, 전쟁기계의 유일한 목표는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기계는 결코 국가를 사용하지 않는다. 반대로 국가가 전쟁기계와 접촉하게 될 때, 국가는 전쟁기계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쟁기계를 전유해서 작동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포획의 과정이며, 국가가 전쟁기계를 전유하는 과정이다.

"국가의 근본적인 임무 중의 하나는 국가가 통치하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 혹은 매끈한 공간을 홈패인 공간을 위한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있다. 단순히 유목민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이주를 통제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사활적인 관심사이다 … 국가가 이것을 할 수 있다면, 국가는 온갖 종류의 흐름을, 즉 인구, 상품 또는 상업, 자금 또는 자본 등의 흐름을 어디서라도 포획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385-386)

따라서 국가는 단순히 매끈한 공간을 파괴하고 매끈한 공간을 홈패이게 하는 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매끈한 공간을 교통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국가는 유목민을 정착민으로 만들고자 할 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경로를 국가의 권력에 봉사하는 이주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국가는 흐름들의 포획에 의해 작동한다. 이 때의 포획은 흐름들의 운동을 보존하지만 규정된 경로에서 그 운동들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보기에 국가는 국가에 종속되는 매끈한 공간과 유목주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국가의 홈패임은 그 자체로 정적이며 고립되어 있다. 홈들 사이의 운동과 교통은 이것들 사이에 놓여 있고 이것들에 종속되어 있는 매끈한 공간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아마 똑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정착민의 국가 생산이 노동 이주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종의 포획된 유목주의로서의 노동 이주)



포획과 노동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획의 세 가지 장치들을 제시한다. 하나는 토지로부터 도출되는 지대이며,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 도출되는 이윤이며, 세번째는 화폐로부터 도출되는 이자 혹은 세금이다. 이 모든 포획 장치들은 축적(stock)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 지주는 땅의 축적을 통해 지대를 얻는다. 더 분명하게 말해서, 기업가는 노동의 축적 혹은 잉여 노동을 통해서 이윤을 얻는다. 이제 나는 이러한 축적이 실제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축적은 흐름이 멎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름이 바뀌는 것이며, 예를 들어 유목적 운동은 이주로 흘러가게 되는 방식이다. 국가는 방향이 바뀐(channeled) 역동주의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역동주의에 의존한다. [역주 ; channeled라는 표현은 channel(수로, 해협)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해낼 수 있듯이, (수로를 만들기 위해) 홈을 파다, (수로를 만들어서 강물의) 흐름을 바꾸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흐름, 혹은 방향이 바뀐의 표현으로 통일했지만, 두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포획 장치들 중에서 단지 하나에만, 즉 노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만 초첨을 맞추고 싶다. 하지만 우선 나는 AO의 네 번째 장에서, 내가 상이한 방식으로 여기 저기에서 또 다시 제기하고 반박하고 있는 노동(labor)에 관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AO의 해당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동을 직접적으로 욕망과 연결시켰다. "욕망과 노동의 동일성은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하는 생산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아주 탁월한 작용적 유토피아이다."(AO 302) 따라서 욕망과 노동은 적어도 동형적(isomorphic)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것은 아니다. 욕망과 노동은 모두 흐름들에 의해 정의된다. 게다가 이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상화와 재현에 의해서 똑 같은 방식으로 포획된다. "주체적인 추상적 노동은 사적 소유에서 재현되며, 그 상관자로서 주체적인 추상적 욕망은 사유화된 가정에서 재현된다. 정치경제학이 사적 소유를 분석하듯이 정신분석학은 두 번째 항목에 대한 분석에 착수한다."(303-304) 따라서 노동은 욕망과 똑 같은 종류의 생산적, 창조적 힘들이다. 하지만 욕망이 오이디푸스에 의해 통치되듯이 노동은 자본주의에 의해 통치된다. 분명히 AO에서 언급되고 있는 노동은 임금노동이 아니다 ― 임금 노동은 형태에서 통치 당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에 일치시키는) 이 노동은 맑스가 살아 있는 노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노동은 살아 있는 것, 불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사물들의 임시성, 그 시간성이며, 살아 있는 시간에 의한 형성체와 같은 것이다."(<그륀트리세> 361) 살아 있는 노동은 자본의 죽은 노동으로 변형된다. 혹은 실제로 아직 죽지 않은 노동, 좀비의 노동으로 변형된다.

하지만 MP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에서 이와 똑 같은 노동의 포획을 서술하기 위해서 이들의 용어를 변동시킨다. 이제 "자유로운 활동"이 살아 있는 노동을 대체하며, "노동"이 임금노동을 대체한다. 그리고 AO에서 재현(표상)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던 과정은 축적하기를 통해서 규정된다. "'자유로운 행위' 같은 유형의 활동들은 … 축적 덕분에 노동이라 불리는 동질적이고 공통적인 양과 비교되고, 연결되고 종속되어 가는 것이다. (...) 노동 자체는 축적된 인간 활동이다."(442)

여기에서 축적하기가 의미하는 바는 활동에 반복을 강제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노동과는 이질적인 자유로운 활동을 동질적인 것으로 변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활동의 포획 장치이다. 반복과 동질화 과정을 통해서 노동[포획장치]은 살아 있는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변형시키거나 자유로운 활동을 살아있는-죽은 활동으로 만든다. 이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좀비의 신화는 노동의 신화이며,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425) 여기에서 자유로운 활동은 그 무제한적인 흐름이 임금 노동이라는 홈에 의해서 방향이 바뀌어 왔다는 의미에서 홈이 패어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의한 노동자(worker)의 포획은 노동(work)에서 활동의 동질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노동자 운동의 방향 바꾸기나 제약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근본적으로 유목적이다. 혹은 심지어 "유목민화의 힘"이다. 그리고 자본은 그 흐름들을 차단하거나 방향을 바꾸어야만 한다. "맑스는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를 소외된 (노동labor)뿐 아니라, 탈영토화된 (노동)에 의해서 정의했다. [맑스가 원시적 축적에 대해서, 토지로부터 농민들을 청소하는 과정을 통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과 나중에 새로운 공장에서 노동하는데 이용되었던 방랑자 계급의 창출에 대해서 쓴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두 번째 관점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서구 사회에서 유목민의 상속인으로 나타난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동방에서 기원하는 유목민이라는 주체들에게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유목민을 재빨리 등치시켰으며, 빠리를 유목민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와 비교했다."(558 n. 61)

그러므로 첫 번째 경우, 자유로운 활동은 이질적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활동은 노동 속에서 동질화되어야만 한다. 둘째, 프롤레타리아트는 탈영토화되었으며, 정주민으로 만들어져야만 하거나 노동을 통해 이주민이 되어야만 하는 유목민화의 힘이다. 중력은 속도에 부과되어야만 한다. 이것들은 포획 장치로서 노동이 갖는 두 가지 측면들이다. 즉 활동과 통제의 동질화 혹은 운동의 방향 바꾸기. 포획으로서의 자본주의적 노동의 이러한 측면들 모두는 매끈한 공간의 성층화(=홈패임)을 포함한다.



지구적 전쟁기계의 공리계들


이러한 고원들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국가에 의한 전쟁기계의 전유이며, 따라서 매끈한 공간의 홈패임이다. (혹은 오히려 홈패임들 사이에서 매끈한 공간의 활용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현재의 상황을 생각할 때, 즉 세계가 주권을 지닌 국민-국가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지구적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다양한 국민-국가들 위에 서 있는 일종의 지구적 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즉각 거부한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세계 규모의 초정부를 상정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461) 다양한 국가들은 따라서 내가 매끈한 지구 제국(global Empire)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의해 대체된다.

"전쟁기계는 전체 대지를 통제하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매끈한 공간을 개혁한다. 총력전 자체를 초월해 훨씬 무시무시한 형태의 평화로 나아가고 있다. 전쟁기계는 목적, 즉 세계 질서를 스스로 받아들이며, 이제 국가들은 이 새로운 전쟁기계의 목표나 수단 밖에 갖고 있지 않게 된다. (...) [적은] 더 이상 국가나 심지어 또 다른 체제가 아니라 '임의의 적' [l'ennemi quelconque]이다."(421-422)

임의의 적 ― 카다피, 노리에가, 사담 후세인 등 어느 것이나. 나는 이것이 현대의 지구적 질서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텍스트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를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국가로부터 [역으로] 전쟁기계가 국가들을 자신의 질서 속에 종속시키는 상황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창조 및 자유로운 활동과 결합되어 왔던 전쟁기계와 그 자유로운 공간이 이제 어떻게 그 목표를 위해 지구적 질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혹은 내가 보기에 질문은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더 분명하게 제기되는 것 같다. 우리가 주권을 사회적 장에 초월적인 권력의 심급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특히 국가 공간의 홈패임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의상 매끄러운 공간에서 있는) 이러한 지구적 전쟁기계가 어떻게 주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전쟁기계는 어떻게 지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AO에서 처음 보았고 이 고원들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공리계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기억하겠지만, 공리계는 자본주의의 내재성과 그 통제된 분열증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도입되었다. 현재의 상황에서, 공리계와 정치의 관계는 훨씬 더 긴밀해진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공리계는 실험과 직관에 대립하는 초월적, 자율적, 의사-결정적 역량이 결코 아니다."(461) 공리계는 때로 결정불가능한 명제들에 반대하게 되는 미결정적 변수들의 조합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임의의 적"이라는 체계는 하나의 공리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작업했던 것보다 냉전 이후의 세계를 훨씬 더 잘 서술해 준다.) 임의의 적이라는 것은 다른 해결책을 내놓는 다른 다양한 항들에 의해 만들어진 등식 속에서만 매꾸어질 수 있는 하나의 변수이다. 지구적 전쟁기계는 고정된 관계도, 초월적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홈패인 공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내재적 법칙을 통해서 그 다양한 조형(configurations)을 다룰 수 있다. 지구적 전쟁기계가 자본이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자본이 공리계에 의해서 구성되듯이 전반적인 전쟁기계도 공리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주권. 자본주의적 주권.


개의 고원14, 15



내재성,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2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재성에 관한 물음이며, 그 최초의 기획은 내재성의 평면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틀을 초월적인 것에 대해 내재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 플라톤주의의 전복, 존재의 내재성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 (들뢰즈가 영화에 관한 두 번째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혹은 사회적, 정치적 용어로 말하자면, 이러한 지도그리기는 주체와 에고의 초월에 대해 욕망의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며, 더 분명하게는 국가의 초월에 대해 사회적 배치들의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출발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주 빠르게 훨씬 복잡해진다.

내재성 개념은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가치평가도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고, 이 개념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 난제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자격을 부여하기. 들뢰즈는 그가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발간된 글, 아주 간략하고 촘촘한 문장으로 쓰여진 글에서, 내재성이라는 문제틀로 다시 돌아간다. (<내재성: 삶 Immanence: une vie>, Philosophie, no. 47, 1995) 이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직접적으로 내재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장(transcendental field)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즉시 초월적과 선험적을 구별한다. (이것은 기억하고 있다면 AO에서 나온 주장이다.) 경험에서 초월적인 것은 주체와 대상이다. 선험적 장은 어떤 대상도 지칭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과 구별되거나 경험적 재현과 구별된다. 오히려 그것은 순수한 비주체적 흐름이다. (나는 가타리가 바로 이 지점에서 선험적 장은 그러므로 기계적이라고 덧붙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이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기계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다 ― 어떤 대상도 지칭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 것.) 따라서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순수 평면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모든 초월로부터 도주하기 때문이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내재성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초월적인 것에 반대하여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체와 대상의 초월에 반대하여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내재성 자체에 대해 물을 수 있었다. 내재성은 어떤 것 안에(in) 내재적인 존재를 지칭하지도, 어떤 것에 대해(to) 내재적인 존재도 지칭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대상에 의존하지도,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 들뢰즈는 세계에 대해 내재적인 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으며, 언어에 대해 내재적인 것, 심지어 삶에 대해 내재적인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이러한 순수 내재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내재성을 하나의 삶으로 설명한다. "순수 내재성은 하나의 삶이라고,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며, 내재성은 어떤 것 속에 있지도 않다. 순수 내재성은 이미 그 자체로 삶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그것은 완전한 역량, 완전한 지복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 내재성인 삶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이 글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AO의 첫 부분에서 보았던 발생적 삶과 결합시켜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모든 종류의 삶(la vie quelconque = 임의의 삶)에 관한 통념과 결합시켜야 하는 것일까? 들뢰즈는 <우리의 공통의 친구>라는 디킨스의 소설에서 따온, 삶에 관한 예를 제공한다. 이 소설에서 모든 사람들이 욕하는 건달은 죽음의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그를 염려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 공감을 느끼며, 그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다. 하지만 그가 회복되었을 때, 이들은 또 다시 왜 자신들이 그를 경멸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주인공은 단지 하나의 삶으로만 드러난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그 개인의 삶은 내적 삶과 외적 삶의 사건들로부터, 즉 발생한 것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사건을 방출하는 비인격적이고, 특이한 삶에 그것의 자리를 내어준다. 모든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지복에 도달하는 지점에 이른 '유일한 인간(Homo tantum ; only man)' 그것은 더 이상 개별화가 아니라 특이화(=단독화)인 이것임(=개체원리haecceity)이다. 순수 내재성의 삶, 중성적인 삶, 선과 악을 넘어선 삶. 왜냐하면 사물들 사이에서 이것을 구현한 주체만이 삶을 좋음(good)이나 나쁨(bad)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별성의 삶은 사라지며, 더 이상 이름을 갖지 않는 사람의 특이한(singular) 내재적 삶에 자리를 내어준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이한 본질, 하나의 삶…"

이제 디킨스의 죽어가는 건달의 예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이한 내재성, 하나의 삶은 결코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도처에 있으며, 그 모든 순간에 이러저러한 살아있는 주체와 이러저러하게 살았던 대상에 의해 경험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내재성의 평면에 대한 이러한 성찰을 선험적 장에 대한 기술에서 시작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단순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과 주체들의 총합이 아니다. 반대로 순수 내재성 자체, 삶은 완전히 잠재적이다. "그것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재성의 평면과 선험적 장 사이의 개념적 통일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것들은 모두 주체들과 대상들의 경험과는 판이하다. 삶, 순수한 잠재성은 이것들이 현실화되는 삶들과는 판이하다. 그 잠재성에 있어서 삶은 현실적인 삶들과 마주보고 있으며(subtend), 따라서 현실적인 삶들을 통해서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내재성의 평면과 선험적인 장을 초월적 주체들 및 대상들과 대립시키는 애초의 지점으로 다시 오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대조는 우선성, 생산성을 통해서 정의된다. "우리는 항상 내재성의 평면 외부에 속하게 되는 초월적인 것을 요청할 수 있다. 혹은 초월적인 것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귀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초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면에 적합한 내재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계속해서 구성된다. 초월은 항상 내재성의 산물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모든 초월을 생산하는 것, 특히 여기에서는 모든 주체나 객체를 생산하는 것과 마주할 뿐 아니라, 이것에 선행한다. 따라서 나는 내재성 개념의 정립을 세 가지 단계에서 바라본다.

첫째, 내재성은 플라톤적 형성이나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신의 초월에 대립되는 이-세계임이다. 두 번째 순간에, 우리는 이 세계의 현실성들(이 세계에 거주하는 개별적 주체들과 대상들, 그 자체로 초월적인 심급들)을 그 잠재성들로부터 구별해야만 한다. 순수한 내재성은 정확히 말해서 이 세계의 잠재성이며, 특이성으로서, 사건으로서의 이 세계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정립의 계기인데, 이 순수 내재성은 창조적인 핵심(core)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산적 동력으로서 설정된다. 우리는 왜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내재성은 모든 창조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산성의 관점에서 우선한다.



사회의 내재성


유럽 철학사에서, 내재성/초월 문제틀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영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이와 똑같이 정치적인 영역에도 속한다. 그리고 내재성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정립의 이 세 가지 요소들 혹은 단계들은 정확하게 정치적인 영역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 근대 철학에서는, 적어도 홉스 이후로, 국가는 사회적 평면에 대한 그 초월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 ― 그리고 사회적 평면에 대한 국가의 초월과 자연의 평면에 대한 신의 초월 사이의 동종성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초월적 주권은 초월적 신과 똑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국가를 우월성에 대한 이러한 공간적 은유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그 고전적 정의 중에서, 국가를 "분명히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이라고 규정한다(<가족의 기원>).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 그리고 심지어 근대 자본주의 국가도 이것들이 초월적인 한에서, 즉 이것들이 사회 위에 서 있는 한에서 모두 주권적이다. 그러므로 내재성을 정치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국가에 반대하여 사회를 긍정하는 것이며,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사회 내부에서조차도 여전히 초월의 요소들이 있다. 혹은 국가의 요소들이 있다. 이러한 정립의 두 번째 계기는 사회의 이-세계임 내부에서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매끈한 것과 홈패인 것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가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홈패임은 사회적 장 자체에 속하는, 사회적 장을 구조화하는 초월의 요소들이다. 내재성의 매끈한 평면은 순수한 비주체적 흐름이다. 반면 홈패임은 흐름들을 수로화하는 운하를 형성한다. 내가 감옥, 학교, 가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제도와 연결시키고 싶어하는 홈패임은 예속과 주체화의 메커니즘이다. 주체들은 이러한 홈패임 내부에서 존재하며, 홈패임 내부에서 우리는 주체로서 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정립의 세 번째 계기인데, 내재성의 평면, 혹은 매끈한 공간은 생산과 창조성의 자리(locus)이다.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들뢰즈가 모든 초월은 내재성의 산물이라고 말했듯이, 또한 이러한 정치적인 논쟁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끈한 공간이 모든 홈패인 공간에 연료를 제공하는 생산적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생산의 관점에서 또 다시 우월성은 내재성의 측면에 있게 된다. 매끈한 공간, 자유로운 활동, 그리고 다양하게 상관되어 있는 요소들이 초월과 홈패임에 대해 더 가치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창조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산의 관점에서는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홈패임은 단지 산물일 뿐이다.



공리계들


내재성에 관한 이러한 정립의 뉘앙스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초월과 내재성의 구별, 그리고 초월에 대한 내재성의 우선성은 바로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직선적이며 비문제적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각 지점에서 내재성이 초월에 비해 선호할만한 것으로, 창조성과 생산성의 관점에서도 우선적인 것으로 가치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계기에서 내재성은 창조성 혹은 생산성과 자유에 결합되어 있는 반면, 초월은 그 종속과 통제를 산출하는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초월에 대한 내재성의 가치평가를, 들뢰즈가 가치평가의 기준으로서 니체의 작용적 힘과 반작용적 힘들을 분석했던 것과 쉽게 상호관련시킬 수 있다. 내재성은 항상 작용적, 창조적, 생산적이다. 반면 초월(국가, 홈패임, 주체, 객체)은 항상 반작용적, 억압적, 타성적이다. 따라서 내가 말했듯이, 내재성을 정의하는 것은 어쩌면 복잡한 일이지만, 그것을 가치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히 명백하다. 사실 나는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의 모든 정치학에 작동하는 기준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반작용적 힘들에 대해 작용적인 힘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모든 심급에서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가치있게 평가하는 것. 하지만 <자본주의와 분열증>에서 이처럼 명확한 가치평가는 일차적인 방해물인 자본주의에 의해 아마도 또한 파시즘에 의해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나는 여기서 파시즘의 문제를 옆으로 젖혀 두고 싶다. 어떤 경우에 문제는, 파시즘이 과연 지배의 내재적 형식인가이며,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구별되는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이러한 가치평가의 기준에 대한 방해물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자본은 맑스가 말했듯이 내재적 법칙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일반적인 탈영토화와 흐름의 탈코드화를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방해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종속과 통제의 가장 엄격한 형태를 전개한다. 내재성의 그러한 기계가 그토록 억압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내재성이 중심적인 정치적 기준이라고 하는 개념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발전하는 혹은 실제로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 남아 있는 억압 기계로서의 자본주의의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리계를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설정한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일반적인 공리계이다. 나는 여기에서 공리계를 변수들 사이의 고정된 관계를 설정하는 개방된 등식들의 집합이라고 하는 수학적 정의를 통해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한 공리는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이다.) 공리계는 새로운 공리가 끊임없이 덧붙여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방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공리계가]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의 공리에 맞서기 위해서는 핵심 경제의 특정 부문들, 예를 들어 중공업을 주변 경제로 이전하는 것이 덧붙여져야만 할 것이다.) 공리계의 개방성과 다원적 성격은 공리계가 매번 어떠한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다거나,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부딪히고 그것을 처리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 중 어떠한 것도 공리계에 재앙적이지 않다. 공리계는 그 등식에 대해 부분적이고, 시험적이며, 심지어 과잉결정된 해결책을 통해 기능하는 데 익숙해있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본주의는 그 몰락을 통해서 기능한다고 말했을 때 의미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요점은 내재성에 관한 것이다. 공리계는 고정된 진술의 계열들이 아니라 변수들의 등식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정확하게 내재적이다. 변수들은 임의의(le quelconque) 요소들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가치실현의 등식으로 접속되는 노동을 맑스는 추상적 노동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을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travail quelconque)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 재단사의 노동, 직물공의 노동, 목수의 노동,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 변수들은 공리계를 매끈하고 내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공리계 자체에는 어떤 주체들도 객체들도 없다. 오히려 변수들만이 있으며, 이 변수들을 위해 주체들과 객체들은 자본주의의 각 전개 속에서 대체될 수 있을 뿐이다. 공리계의 변수들은 임의의 주체성들, 임의의 객체성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리계는 내재성의 평면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모든 초월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국가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공리계가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자본주의가 국가와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홈패임의 모든 상관된 힘들과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이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항상 국가 홈패임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석에서 관계의 두 가지 국면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을 본다. 첫 번째 국면 속에서 자본주의는 국가-형태, 국가-형태의 홈패임을 사용하며, 두 번째 국면 속에서 자본주의는 국가를 넘어서는 매끈한 지배 형태를 발견한다. (이러한 국면들은 그들이 의도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의도일 것이다.) 일(Work)을 홈패임으로 기술하는 들뢰즈와 가타리 속에서 첫 번째 국면의 관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리-사회적 일 모델은 두 가지 이유에서 국가 장치의 발명품으로서 이 장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둘째, 노동은 시간-공간의 홈패임이라는 일반화된 작동, 자유로운 행위의 예속, 매끈한 공간들의 소멸(=무화) 등을 수행하는데, 바로 국가의 핵심적인 기획 즉 전쟁 기계를 정복하려는 기획은 노동의 기원과 수단도 되기 때문이다."(490-491)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에 대한 엄격한 통제(regimentation)를 공간-시간의 홈패임으로 인식하는 것은 쉽다. 예를 들어 공장의 구성에서, 그리고 그 공간의 코드화(예를 들어 일괄생산 라인을 따라 이루어지는 노동의 과제들과 더불어)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하루를 일(work)과 여가로 분리하는 것으로, 또 노동일의 시간들에 대한 정교한 코드화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 이 국면은 또한 자본주의의 작동을 위한 지배적 구조로서 국민-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되어야 하지만 나는 좀 더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서 이것을 생략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홈패임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 아니며, 홈패인 자본이 자본의 유일한 형태인 것도 아니다. 매끈한 자본 또한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 국면들로 설정하고 싶으며, 오늘은 홈패인 국면에서 매끈한 국면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늘날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자본 유통의 형태들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별, 심지어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조차 점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홈패인 자본과 매끈한 자본간의 구별이며, 심지어 홈패인 자본이 매끈한 자본을 생겨나게 하는 방법이다 …"(492) 전자는 후자에 길을 내주고 있다, 즉 홈패인 자본은 매끈한 자본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핵심에 있어서 공리계이며, 그러므로 내재성의 평면, 매끈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매끈한 국면으로의 이행은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의 실현이며, 자본주의의 매끈한 본질의 실현이다.

이제 이렇게 실현된 매끈한 자본의 지배의 형태는 국가-형태도, 어떠한 종류의 초월도 아니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는 국가가 아니라 지구적 전쟁기계에 상응해야 한다. 지구적 전쟁기계는 그 어떤 전쟁보다 무시무시한 평화와 더불어 매끈한 공간을 지배한다 ― 그리고 여기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확하게 공리계를 통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구적 전쟁기계가 임의의 적(l'ennemi quelconque)을 통해 기능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만, 이 지구적 전쟁기계의 공리계에 대해 암시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아주 단순 명확하다. 즉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국가가 아니라 이 지구적 전쟁기계가 자본주의에 실제로 적합한 지배 형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지구적 전쟁기계는 공리계를 통해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주의와 지구적 전쟁기계 양자의 공리계들에 관한 이 모든 논의가 제기하는 문제는, 공리계들이 내재성과 억압을 조합하는 것이 실제로 중심적인 정치적 기준으로서의 내재성 범주의 효용성을 탈선시키는 것일까?하는 것이다. (공리계가 그런 식으로 기능한다고 나는 주장했었다.) 아니면 이 양자의 공리계가 내재성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이 공리계들의 내재성은 어떤 방식으로 판이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 공리계는 실제로는 일종의 가짜 내재성, 억제되고 제한된 내재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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