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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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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저 너머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4) 김철교(시인, 평론가
2019년 06월 20일 21시 17분  조회:2041  추천:0  작성자: 강려
현상 저 너머
- 예술 융·복합을 활용한 시 창작(4)
 
 
 
김철교(시인, 평론가)
 
 
 
 
7. <살아있는 것의 이미지 –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읽기
 
 
 
문덕수는 시가 ‘소리의 시’와 ‘의미의 시’를 거쳐 이제 ‘이미지의 시’의 단계에 도달하여 ‘이미지의 지적 주권’ 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시인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문덕수, 『현실과 초월』, 시문학사, 2014, 13-22쪽).
 
 
 
문학비평용어사전에 의하면, 시의 이미지는 표현상에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고, 시적 상황을 암시하여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엘리엇(T.S Eliot)의 ‘객관적 상관물’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녁노을을 통해 독자는 죽음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영섭에 의하면, ‘이미지는 철학에서는 실체의 환영, 심리학에서는 심리적 체험을 단순히 재생하는 심리적 작용, 시에서는 마음속에 언어로 그린 그림으로 운율과 더불어 시를 구성하는 원리로서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감각화하는 역할을 한다’(이영섭, 「이미지의 유형과 실제」, 『시창작 이론과 실제』,(오세영 외 편) 시와시학사, 1998, 252-276쪽).
 
 
 
미술용어 사전에서는 ‘자연주의 미술에서는 대상을 직접 갖다 놓을 수 없으므로 그 이미지를 그렸던 것인데, 반자연주의적인 현대미술에서는 마음속에 잠재하는 환각이나 형상을 그리게 되고 여러 가지 사물을 변형시키고 조립함으로써 독특한 이미지를 표현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월간미술편, 『세계미술용어사전』, 369쪽).
 
 
 
어떤 정의를 인용하든 이미지는 實在(the real) 자체가 아니라 그림자다.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인간이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말하는 것은 모두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다. 마그리트는 캔버스에 파이프를 그리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써넣었다. 그림의 제목을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이라고 붙여 놓은 것은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미지)이지 진짜 파이프가 아니란 뜻도 담겨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는 파이프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어떤 나무로 되어 있고, 얼마나 낡았는지, 그리고 실물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 지 등 어떤 특성도 파악할 수 없다.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파이프’라는 단어는 파이프의 참된 성질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파이프’라고 부르자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약속한 것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 멋있는 단어인 ‘곰방대’가 있다.
 
 
 
사물을 지시하는 언어와 이미지(눈에 보이지 않는 완벽한 원본은 인간인 이상 누구도 볼 수 없다) 사이의 정확한 의미 전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시각에 의존하여, ‘이것은 천국이다’, ‘이것은 죽음이다’라고 파이프가 그려진 그림 아래에 써놓는다고 해서 거짓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단순하게 생각하여, 애연가의 경우 파이프 담배를 피움으로써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고, 담배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현존 너머의 원본의 세상을 보고자 하는 예술가에게는, 특히 시인에게는 언어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자신의 이미지로 무한히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기에 행복한 것이다. 물론 언어의 한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시인도 적지 않다.
 
 
 
 
 
*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이미지의 배반 (The Treachery of Images)>,
 
1929, 캔버스에 유채, 60×81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캘리포니아.
 
 
 
 
바짝 마른 장미꽃 다발에서
앵앵거리는 꿀벌의 날갯짓 들리나요?
닳아빠진 촛불에서
넓디넓은 꿈을 읽을 수 있나요?
장맛비에 휩쓸려온 뼛조각에서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나요?
 
 
 
지금 우리 자리는
죽은 자들 이미지의 묘지가 아닌가요?
우리 삶은 또 다른 복제물
복제물, 복제물이 아닌가요?
원본의 기억은 살아있나요?
원본은 있기는 있나요?
 
 
 
우리는 어디에
둥지를 마련할 수 있나요?
내가 눈을 감은 후에도
저 바다는 저 산은
감히 저기 저 자리에
버티고 있을 건가요?
아니 내가 있는 이곳은
도대체 어딘가요?
 
- 김철교 <살아있는 것의 이미지 –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시인은 촛불이 다 닳아빠져 흔들리고 있는 서재에서 마른 장미꽃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전 산보하다 길가에서 마른 뼛조각을 발견했던 것을 문득 떠올린다.
지금-여기 내가 있는 것은, 오래 전에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이라는 이미지와 언어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진정한 모습’, ‘사물의 실재(the real)’와는 먼 시뮬라크르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죄를 짓기 이전의 하나님 형상(Imago Dei)을 닮은 아담과 이브가 살던 낙원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와 불가능하다는 좌절감에 젖어 있는 것이다. 시인의 먼 미래, 사후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존재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질문형을 반복하며 대위법적 기교를 활용함으로써, 그 질문의 절실함을 담아내고 있다.
 
 
 
김유중은 “시인은 여기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가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이미지의 묘지’는 아닌지,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또 다른 복제물’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원본은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추방되고 지워져버렸으며, 따라서 이 시대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창조적인 활동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삶의 원형으로서의 원본, 예술가의 절대적인 이상으로서의 원본은 벌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그것을 되찾기에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실물로서의 원본이 사라진 시대, 그리하여 그것이 남긴 이미지만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 현재, 우리 시대인 것이다”라고 평설에서 언급하고 있다(김유중, 김철교의 시집 『무제2018』평설, 2018, 시와시학, 141쪽).
 
 
 
8. <보이는 것 저 너머 –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읽기
 
 
 
예술작품은 좋은 시뮬라크르다. ‘좋은 시뮬라크르’라 함은, 현상 저 너머에 대한 꿈을 머금고 있는 시뮬라크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엄밀한 의미의 시뮬라크르는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플라톤의 에이콘의 개념에 가까울 수도 있다.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개념은, 가상, 모조품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시뮬라크룸(simulacrum)에서 유래한 말로, 원본의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즉 원본을 알 수 없는 복제물을 뜻하는 개념이다.
 
 
 
넓은 의미의 이미지, 보통명사로서의 이미지는 복사물(플라톤의 eidolon의 개념)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에이돌론(eidolon)을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으며, 에이콘은 원본이 반영된 복사물이라는 이미지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의 복사물로 원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만 시뮬라크르다. 플라톤은 이 시뮬라르크를 악마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에이콘은 실재를 닮은 것이지만 시뮬라크르는 에이콘을 복사한 것으로 원본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원본(이데아 + 실재)을 반영하지 않은 복사물은 저급한 것이다. 여기서 ‘이데아’는 지성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머리로서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실재’는 감각의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 즉 오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들뢰즈는 원본이 반영되지 않은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 이데아를 중심으로 하지 않는 탈중심의 세상, 이데아를 재현하지 않는, 이데아를 바라보지 않는 재현파괴의 세상, 카오스적 다양성을 가진 개인중심의 세상, 다분히 ‘디오니소스적’이어서 유희적인 유목성을 가진 개인 중심의 세상, 무질서를 내포한 질서를 중시했다. 시뮬라크르 세계는 원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플라톤의 시각에서는 버려야할 악마적인 것이지만 들뢰즈에 의하면 시뮬라크르가 탈중심화된 체계의 중심을 여는 새로운 사유매체이자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박치완, 『이데아로부터 시뮬라크르까지』, 한국외국대학교 지식출판원, 2016, 60~79쪽).
 
 
 
그러나 시뮬라크르에도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지 않을까? 복사의 복사를 반복하다보면 차이가 누적되게 되고 결국 원본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지는 몰라도 원본의 그림자는 남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뮬라크르인 것이지, 원본의 그림자조차도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창조’와 다름 아니다.
시인이 한편의 시를 써서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읽힐 때, 그 시가 원본이냐? 시뮬라크르냐? 시인은 그것이 ‘원본’이라고, ‘실재’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독창적이어서), 그러나 그 시가 이 사회에 존재하고 수용된다는 것은, 환경과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복사한)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의미한다(김철교, 『예술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시와시학, 2018, 21-26쪽).
 
 
 
 
시인은 신에 가깝다고?
에라이, 시뮬라크르
너는 어떤 모습으로 복제된 거지?
어느 것도 원본은 없고
그저 차이만 반복된다면서?
 
 
 
y = ax + b, 변수들의
변치 않는 정의는 무엇일까?
y = 나
x = 너 아니 하나님
a와 b는?
그림 속 텍스트도
텍스트를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은 양
두툼한 책을 서슴없이 써내지만
행간에는 그저
황무지만이 널따랗고
위안을 주는
작은 풀꽃 하나 찾을 수 없다
 
 
 
인식 저 너며
이성 저 너머
감성 저 너머
거기엔 아무 것도 없는데
용량이 부족한 두뇌로 열심히
삶의 프로그램을 짜서 돌려본들
루핑이 걸려
평생 그칠 줄 모르고
쳇바퀴를 돌릴 뿐이다
 
- 김철교 <보이는 것 저 너머 –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무제2018』,시와시학,2018) 전문
 
 
 
 
죄 짓기 이전의 아담과 이브가 인류의 원본(Imago Dei)이라면 지금의 시인 역시 시뮬라크르인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원본의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 이어진 복제과정을 반복되어 온 ‘지금의 나’이지만, 창조주의 존재를 잊지 않고 복락원의 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이다.
y = ax + b가 간단한 삶의 방정식이라고 한다면, 나(y)는 하나님(x) 혹은 이웃(x)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a와 b는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위치 혹은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만약 x가 하나님일 때 a가 0인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겠고, -인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이 삶의 공식이 참인가? 여기서는 단순하게 1차방정식으로 표시했지만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기에 무한대의 다차원방정식일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그림 속 텍스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의미도,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글씨그림’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이미지로 볼 수 있다.
이 세상은 들뢰즈의 시각에 의지하면, 온갖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마치 원본을 찾은 양, 실재(實在)를 찾은 양, 사람들은 많은 책을 써내지만 그 글 중에서 진실의 양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신 직후 죄짓기 이전의 모습을, 온갖 이성과 감성을 동원해 찾으려 해도 여전히 죄악과 욕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에 루핑(looping)이 걸리면, 프로그램 속에서 동일한 명령이나 처리과정을 반복하여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뇌세포의 10%도 가동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언제 우리는 원본, 실재, 이마고데이를 찾아내어, 저절로 의인으로 살아질 날이 온단 말인가?
 
 
 
9. <무제 3 – 호안 미로 ‘무제, 1978’> 읽기
 
 
 
예술의 본령은 현상 저 너머의 탐구라 하겠다. “다른 상징주의 작가들이 그러하듯 랭보에게도, 현실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외관을 지닌 모든 사물들은 단지 본질을 나타내고 투영하는 일부분일 뿐이지, 결코 본질 그 자체이거나 또는 본질을 충분히 투영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 파괴와 해체를 통해 현실적인 외관을 제거하고, 그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전혀 다른 ‘실체’를 ‘재건축’, ‘재창조’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랭보에 의하면 진정한 시인이란 ‘투시자’가 되어, 의식과 이성으로 느끼기보다는 현상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궁극적 본질을 ‘무의식’과 ‘상상력’에 의해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곽민석 역, 『랭보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148-154쪽).
 
 
* 미로(Joan Miro, 1893~1983), ,
 
1978, 캔버스에 유채, 92x73Cm, 마르요카 호안 미로 재단. 스페인.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
그 안에는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
천국의 지도를 완성하러
별나라에서 온 그가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는
그림과 음악으로 외우는
 
 
 
함께 가자
함께 가자
함께 가자
 
 
 
- 김철교 <무제 3 – 호안 미로 ‘무제, 1978’>(『무제2018』,시와시학, 2018) 전문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왜 자기 작품에 구체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고, 특히 미술가들은, 즐겨 「무제」라는 제목을 쓸까. 작곡가들도 대부분 작품의 제목대신 일련번호를 즐겨 쓴다. 베토벤 <교향곡 5번>도 작곡 당시「운명」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아니다. 베토벤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가 붙인 이름이다.
특정 제목이 붙지 않은 예술작품은 수용자에게 무한자유를 허용한다. 호안 미로의 「무제 1978」라는 그림을 보고, 어떤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 그림을 보고 <무제 3>이라는 시를 쓴 시인은 미지의 별에서 온 우주선을 떠올렸다.
 
 
이성은 착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감성은 자주 우리를 욕심에 휘둘리게 한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모두 천사일 수 없는가?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기 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는가? 내 멋대로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우리가 선하게 살도록 자동프로그램화 될 수 없는가? 모든 인간이 선하게 남을 배려하도록 프로그램된 칩을 머릿속에 심을 수 없을까?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주기도문’에서 외우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이 시에 대한 이덕주의 평설을 인용해보자. 시인은 이 그림을 보면서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을 연상해낸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쩌면, “원죄로 인해 잊어버렸던/ 우리의 원본이 있을까?”라며 삶의 근본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려 한다. 화자는 호안 미로에게, 타고난 “천진난만한 언어로/ 꿈을 길어 올리는 환쟁이”라고 신뢰를 보낸다. 예술가에게는 “천국의 지도를 완성”할 수 있는 상상력이 있기에 긍정적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별나라에서 온 그”이기 때문에 자신이 희원하는 근원적 해답을 반드시 줄 것이라고 “날마다 주문으로 외우”며 기대치를 높여보는 것이다. 반복적인 “함께 가자”라는 구호는 후안 미로가 상상해내는 “천국에서 보내온 우주선”에 동승하려는 화자의 기원이 내포되어 있는 주문이기도 하다(이덕주, 「화가의 영혼과 교류하는 심미안」, 한국시문학아카데미 발표원고, ).
 
 
 
예술세계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끊임없이 해본다. 호안 미로가 초대하는, 천국에서 온 우주선이 초대하는, 예술세계에서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하기 전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원본(Imago Dei)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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