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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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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 -유승우
2020년 11월 11일 15시 00분  조회:1069  추천:0  작성자: 강려
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
                            유 승 우
 
1. 시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이며,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시에 대한 정의의 문제이며, 시에 대한 본질적 문제이다. 그런데 시의 개념과 시에 대한 정의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시, 곧 문학의 관점과 정의는, 시는 세계를 모방한 것이라는 관점(모방설-아리스토 텔레스),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초점으로 하는 관점(실용설-호라시우스), 작품을 예술가인 시인 자신의 표현으로 보는 관점(표현설-워즈 워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작품 그 자체에 초점을 두는 관점(객관설-신 비평) 등에서1) 보는 바와 같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변화할 수 없는 시에 대한 개념이나 정의가 있다. 시라는 말의 어원에 의한 개념이나 정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다. 이것이 바로 시에 대한 본질적 문제이다.
  나는, 이 글에서 어원에 의한 시의 정의를 고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시의 내용적 정의와 형식적 정의를 시도함으로써 시 창작의 이론과 실제의 문제를 밝혀보고자 한다. 시의 내용적 정의는 ‘시는 무엇을 쓰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며, 시의 형식적 정의는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제까지는 시의 정의와 같은 것은 이론의 측면이고, 시 창작 곧 시를 쓰는 것은 기능의 문제라고 하여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에 대한 이론은 시 창작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시의 이론은 오히려 시 창작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의 이론은 대학에서 연구하는 것이고,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이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된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기술자가 아니며, 또한 시를 떠난 이론의 연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의 이론이 시인의 생리가 되고,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삶 자체가 될 때, 시가 사람의 삶 속에서 생기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 곧 존재 자체가 바로 시이며, 시를 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살아가는 것이 될 때,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의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다.
 
 
2. 시는 언어(言語) 예술이다
 
  시는 언어(言語) 예술이다.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藝術)의 ‘藝’자를 자전에서 ‘種也’라 풀이하고, ‘種’의 뜻은 ‘씨앗’과 ‘심다’라고 했다.2) ‘씨앗’ 곧 종자란 무엇인가. 생명의 씨눈이 잠들어 있는 집이다. 이 씨앗을 심어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생명의 잠을 깨우고 자라게 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기술이 곧 예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에는 반드시 그 열매인 ‘작품’이 있어야 한다. 이 열매인 시작품에서, 언어는 시적 생명의 씨눈이 잠들어 있는 종자이다. 그러면 언어(言語)에서 씨눈에 해당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말씀(言)이다.
  이 말씀(言)은 마음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며, 글(文)은 마음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말씀(言)이 글(文)보다 먼저이다. 이 말씀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말(語)이 되기도 하고, 시(詩)가 되기도 한다. 말씀(言)이 관청(寺)에3) 바쳐지면 시(詩=言+寺=poetry)가 되고, 나(吾)를 위해 쓰여지면 말(語=言+吾=language)이 된다. 관청에서 가장 높은 곳엔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 있다. 그러므로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관청에 바쳐진다는 것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원래의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言)과 시(詩)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언어(言語)처럼 언시(言詩)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말씀은 곧 신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말씀(言)이 곧 신이며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신과 함께 있는 ‘言=神’의 모습 그대로였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이 곧 신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신(神)의 자리에 내(吾)가 끼어 들면서, 말씀은 그 본래의 생기인 신성(神性)을 잃고, 인간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도구인 말(語)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상어이며, 본래의 생기가 죽은 말인 것이다. 생기가 죽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기운이 잠들었다는 것이지, 생명이 끊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어(言語)가 된 것이다. 언어는 말씀(言)과 말(語)이 함께 사는 존재의 집이다. 그래서 언어는 시의 종자이다. 이를테면 번데기나 식물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이 번데기나 씨앗과 같은 언어에다 따뜻함 곧 사랑을 불어넣고, 다시 말해 신(神)을 불어넣으면 시가 태어난다. 예술이란 원래 생기와 신을 불어넣어 생명의 잠을 깨우는 기술이다.
  시의 종자인 말(言語)에서 생명의 씨눈은 말씀(言)이다. 이 씨눈을 싹틔우려면 이 씨눈을 잠들게 한 나(吾)를 죽여야 한다. 언어라는 집에서 나(吾)를 내쫓고 그 자리에 신의 아들(天子)을 들이면 시(詩)가 된다는 것이다. 관청은 곧 신의 아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관청은 곧 신전인 것이다. 로마에서도 주(主)라는 영어단어를 소문자로 ‘lord’라고 쓰면 노예가 자기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대문자로 쓰면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말씀을 신에게 바치면 시가 되고, 나를 위해 쓰면 말(言語)이 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대화는 시가 되며, 사람과의 대화는 언어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은 곧 신이며 마음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신과 교감하면 시가 되고, 사람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언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에서도 시는 신탁(神託)이라고 해서,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했으며,5)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해서 그냥 뜻을 받아 진술할 뿐 자기가 짓지 않는다고 했고,6) 구약성경에서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뿐 자신의 생각을 보탤 수 없었다. 그래서 서정시를 ‘신과의 대화’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천자를 섬기면 시인(詩人)이 되지만, 몸으로 천자를 섬기면 또 다른 시인(侍人)이 된다. 몸으로 천자를 섬기려면 궁중 안에 있어야 함으로 내시(內侍)가 된다. 천자도 남자이고 내시도 남자이지만, 내시는 자신의 남성을 거세해야 한다. 이것은 주(主)를 모시기 위해서는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시가 천자를 속이고 권세를 잡으면 나라가 망한다. 천자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하늘 자리에 앉으면 우상이 되고, 이 우상이 바로 용(龍)이다. 용은 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늘에 올라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은 귀머거리다. 용(龍)의 귀(耳)는 귀머거리(聾)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신의 음성, 곧 진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신은 무엇인가.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어떤 무엇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하는 것이 신의 소리다. 여기서 참고로 관청 시(寺) 자가 어떻게 절 사 자가 되었는지를 알아보면, 후한(後漢)의 명제가 백마에 불경을 싣고 인도에서 돌아온 마등과 축법란 두 스님을 귀빈 접대 관청인 홍려시에 머물게 했다가 낙양성 교외에 그들을 위한 거처를 짓고 백마시라고 했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가 되었다고 한다.7)           
  사람에게 처음 주어진 것은 마음(心)이며, 이 마음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 말씀(言)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시(詩)가 되든지 아니면 언어(言語)가 되든지 하는 것은 순전히 그 마음에 달렸다. 그래서 휠더린은 “그러므로 모든 재보(財寶) 가운데 가장 위험한 재보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이 자기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증시하기 위해---”8)라고 했다. 사람에게는 마음이 주어졌고, 그 마음의 씀인(用) 언어가 주어졌다. 이 언어가 나를 위해 봉사하면 죽음을 지향하게 되고, 신에게 바쳐지면 시가 된다고 하겠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재보인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증시(證示)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없음(無)’이며, ‘0’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없음’이 되고, ‘0’가 된 것이다.
  싸르트르는 자의식 곧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물체와 생물)를 ‘즉자(卽自․en-soi)’라 하고,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대자(對自․pour-soi)’라고 부른다. 사람은 의식 곧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없음(無․neant)’이라고 한다는 것이다.9) 이 ‘없음’에서는 ‘있음’이 되고자 하는 지향성이 있기 마련이며, 이 지향성이 곧 욕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에게는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이 주어졌다. 물론 사람에게도 본능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 사람에겐 마음이 더 주어졌기 때문에 본능의 욕구 위에 마음의 욕구가 더 있게 된 것이다. 이 마음의 욕구를 우리말로 옮기면 ‘그리다’가 될 것이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은 이 욕구를 소유(to have)에의 욕구와 존재(to be)에의 욕구로 나누고 있다.10) 소유에의 욕구는 ‘욕심(慾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에의 욕구는 ‘꿈’이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밥이나 옷을 주지 않는 즉 소유에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 시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꿈과 사랑, 즉 존재에의 욕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존재 일반의 단순한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존재 일반도 사람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가리켜 ‘존재의 목자’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런데 그 목자도 말이 없이는 그가 할 일을 다할 수 없다. 그래서 결국 말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의식되어 졌다’고 할 수 없으며, 의식되어지지 않은 것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캄캄한 어둠 속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존을 비롯하여 존재 일반에 대해서도 캄캄한 무지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의식 곧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물체나 생물처럼 어둠 속에 버려진 채로 묻혀 있을 수는 없다. 빛을 캐내어 나의 실존도 비추어 밝혀야 하고, 모든 존재 일반에 대해서도 그 모습을 밝혀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의무를 진 사람을 가리켜 ‘존재의 목자’라고 하며, 이러한 사람에게만 ‘위험한 재보(財寶)인 말’이 주어졌던 것이다.11)
  사람은 말(言語)로써만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증시(證示)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소유의 욕구’로 쓸 때엔 오히려 더욱 더 어둠 속에 묻히게 된다. 그래서 말을 위험한 재보라고 하는 것이다.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해 쓰는 수단이나 기호가 아니라 어둠에서 빛을 피워 내는 존재 그 자체가 될 때 재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본질적 언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일상적인 언어는 ‘비본질적 언어’이며, 시는 ‘본질적 언어’가 되는 것이다. ‘비본질적 언어’인 ‘외연적 의미(denotative meaning)’의 말이 시인의 가슴속에서 그 일상성이 죽고, ‘본질적 언어’인 ‘내포적 의미(connotative meaning)’의 말로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언어에서 내(吾)가 죽어야 시로 환생하는 것이다. 언어에서 말씀(言)은 곧 언어 속에 잠들어 있는 씨눈이다. 이 씨눈이 시인의 가슴에서 싹이 터서 시의 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가슴은 정서(emotion)의 도가니이기 때문에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 때문이며, ‘존재에의 향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이며, 이 욕구가 동사로 표현될 때 ‘그리다’가 되는 것이다.
  이 ‘그리다’라는 말은 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이 길을 통하지 않고는 사람은 언제나 ‘없음(無)’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0’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본질이 ‘없음’이기 때문에 ‘그리다’가 아니면 ‘0’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그리다’라는 말의 한자어는 상상(想像)이다. 상상의 뜻은 어떤 모습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아가 부모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그리다’이고, 애인이 없는 사람이 애인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그리다’이다. 그러니까 ‘그리다’라는 동사는 ‘없음’의 상태를 느꼈을 때 활동을 시작한다. 사람은 원래 ‘없음’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무언가가 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바로 ‘그리다’이다. 이 마음의 움직임이 손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습을 만들었을 때 ‘그림’이 되고,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으면 ‘그리움’이 된다.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金春洙 〈능금Ⅲ〉 전문
 
  이 작품은 시로 된 시론이면서 또한 존재의 원리를 시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존재의 본질로서 김춘수는 ‘그리움’을 제시한다. 모든 시작품은 이 ‘그리움’의 성육(成肉 : incarn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그리움을 가지고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는 사람이다. 상상력(imagination)이란 에너지가 정서의 도가니에 열을 가해 꿈과 사랑을 끓일 때 반짝이는 빛이 ‘그리움’인 것이다. ‘그리움’은 존재를 지키는 등대이며, 시인은 그 등대지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꿈과 사랑이 끓고 있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일상의 언어, 즉 때묻은 말은 허물을 벗게 되는 것이다. 허물을 벗으면서 존재는 개명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인의 가슴속에서 ‘그리움’은 존재의 목소리인 ‘빛깔과 향기’를 가진 새로운 말의 수육(受肉 : incarnate)되어 시로 탄생하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리움의 성육인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金春洙 〈꽃〉 전문
 
  꽃은 시인이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었다. 시인의 그리움에 성육된 말을 통하여 살아 있는 눈짓이 되는 것이다. ‘나’도 어는 누구의 그리움에 성육이 되기 전까지는 보통명사인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길 기다린다. 그리하여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마음으로 해서 그리움이라는 의식의 병을 앓고 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생각 있음의 존재이며 그리움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가슴속에서 꿈과 사랑이 뜨겁게 끓고 있는 정서의 도가니가 있기 때문에 시에서 떠날 수도 없고 시를 버릴 수도 없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이라기보다 ‘정서의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람은 ‘정서의 동물’이기 때문에 시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를 떠난다는 것은 사람임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서의 동물’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시의 나라의 백성일 수밖에 없다. 정(情)이란 무엇인가. 정(情)은 마음(忄)이 푸르게(靑) 살아 있는 것이다. 육체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동물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살아야 사람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은 영혼의 다른 표현이며, 영혼은 사람 속에 자리한 신(神)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살면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영혼이 신과 교감하는 것을 영감(靈感)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영혼과 육체를 갈라서 말하는 이원론은 아니다. 육체나 영혼이나 살아 있는 것은 느낌(感)이 있어야 한다. 육체의 느낌은 육감(肉感)이며, 영혼의 느낌은 영감(靈感)이다. 마음이 살아 있는 것으로 표현하면 정감(情感)이지만, 영혼이 살아 있는 것으로 표현하면 영감이다. 그러니까 정감이나 영감은 ‘그리다’라는 동사가 활동하는 단서가 된다. ‘그리다’가 활동을 시작하면 나(吾)는 죽게 되고, 내가 있던 자리에 신(神)이 자리해서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때부터 시의 나라가 건설된다. 육체가 죽는 것은 죽을 사(死) 자로 표현하고, 영혼이 죽는 것은 망할 망(亡) 자로 표현한다. 육체가 사는 것은 살 생(生) 자로 표현하지만 영혼이 사는 것은 흥할 흥(興) 자로 표현한다. 그런데 영혼이 살 수 있는 길은 시의 나라에만 있다.12) 시의 나라는 신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이곳에서만은 신과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신과의 교감이 시(詩)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에서 영혼이 살고, 영혼이 살면 영혼의 감각이 살게 되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시는 곧 신과 만나는 길이며, 신과 통하는 길인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관청에는 신이 없다. 인간만이 살아서 서로 다투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관청은 그 사회의 중심이다. 이 관청을 중심으로 사회는 활성화된다. 여기서 활성화의 활(活)은 육체의 삶인 생(生)과 영혼의 삶인 흥(興)이 합작해서 만들어 가는 삶이다. 그러니까 활(活)은 곧 ‘몸’의 삶이다. 인간의 사회에는 특히 관청에는 영혼의 삶인 시와 나의 삶인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시는 없고 언어만 있다는 말이다. 육체는 죽으면 썩는다. 영혼도 죽으면 썩는다. 그것을 부패라고 한다. 오늘의 관청이나 사회가 부패한 것은 시가 없고 언어만 있기 때문이다. 시가 살아야 관청이 살고 사회가 산다는 말이다. 
 
 
3. 시는 신화이다
 
  ‘시는 神話이다’라는 말은 시의 내용적 정의이다. 시의 내용, 즉 시는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러니까 시의 내용은 ‘神話’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神話의 의미를 밝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면 신화는 무엇인가. 신화는 글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 혹은 ‘신과의 대화’이다. 그런데, “지금은 ‘신들의 황혼’도 훨씬 지난 신들의 밤의 시대, 신들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세기(世紀).”13)라는 인간들의 세기에 신들의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이 인간들의 세기에 대해 토마스 만은, “합리주의란 현대인이 행하는 자기 억제의 속물적 표현이다.”라고 했다.14) 그리고 이어서 토마스 만은, 자신의 신화에 쏠리는 관심을 ‘흔들리는 배의 균형 잡기’에다 비유했다. 신화적 세계가 대표하는 초 합리와 과학이 대표하는 합리 사이에 형평을 유지하려는 것을 인간들이 지닌 충동 내지 본능이 빚은 결과로 보는 것이 토마스 만의 ‘균형의 이론’이라는 것이다.15) 그렇다. 현대는 아무리 봐도 신(神)들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시대다. 균형이 맞지 않는 시대다. 땅의 시대이며, 육체의 시대이며, 물질의 시대이다. 육체는 죽었다가 살아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은 죽지 않고 잠든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깨울 수 있다. 현대는 신이 죽은 시대가 아니라 잠든 시대다. 신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 언어 속에 말씀(言)으로 잠들어 있다. 이 말씀을, 이 시의 씨앗을 싹틔우면 신이 깨어나 신화의 세계가 열린다. 그러면 신화(神話)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화 연구가들에 의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풀이된다.
 
  ① 신들의 이야기  ② 신과의 대화  ③ 신의 말씀
 
  위의 세 가지 신화의 의미 중에서 시의 내용이 되는 것은 ②번의 ‘신과의 대화’이다. 오늘날에는 시라고 하면 서정시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므로 ‘신과의 대화’는 곧 서정시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①번의 ‘신들의 이야기’는 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펼치는 이야기로서 그리스․로마 신화 같은 것을 말한다. 이것도 시의 내용이긴 하지만 서사시와 극시의 내용인 것이다. 오늘날의 소설과 희곡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들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들의 마음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도 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③번의 ‘신의 말씀’은 종교적 차원의 의미이다. 그러니까 시는 다시 말해서 서정시는 ‘신과의 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신과의 대화’가 시의 내용이라면, 시인은 신을 만나서 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시인과 종교인은 같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인은 신의 말씀을 듣고, 신의 뜻에 순종하고, 신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시인(詩人)이 아니라 시인(侍人)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시인(詩人)은 신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니까 시인의 표현은 신에게 보내는 회답이다. 그래서 시를 ‘신과의 대화’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신과의 대화’를 가리켜 시적 영감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시를 신탁(神託)이라고도 했다. 신이 사람을 매개로 해서 그의 뜻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신과 대화하는 사람인 것이다.
 
  詩神의 詩觀은 詩를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詩로써 神(Muses)과 인간은 通話를 한다고 보았다. 그 通話의 通路가 바로 靈感(inspiration)이었다. 詩神에게 靈感은 시인을 부르는 것이었고 詩人에게 靈感은 부름에 응함이었다. 詩神의 부름과 詩人의 응함을 가능하게 했던 靈感은 神의 목소리를 듣는 귀였고 읊는 입이었던 셈이다.16)
 
   이것은 그리스 시대의 ‘詩神의 詩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해, 오늘날 예술(Art)로 번역되는 그리스의 용어인 Techne를 ‘황홀함의 양식(a mode of ecstasis)’ 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는 양태(a pattern of looking beyond whatever is already given at any time)’로 보기도 한다.17) 이것은 신화의 신비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적인 견해이다. 신이 사람 속에 들어오면 영혼이 되고, 이 영혼의 작용이 마음으로 나타난다. 어쨌든 언어가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言語)에서 내(吾)가 죽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죽어야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다시 말해서 신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입신의 경지를 의미한다. 입신의 경지가 바로 황홀함이며, 한자로는 흥(興)이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신의 소리를 듣는 데까지는 시인이나 종교인이나 같다. 그런데 종교인은 신의 말씀에 대한 회답을 몸으로 하고, 시인은 언어로 한다. 신의 말씀에 대한 회답으로서의 언어, 이것이 곧 언어 예술이다. 신의 말씀은 지식이 아니다. 느낌으로 전해 오는 살아 있는 말씀이다. 이 살아 있는 말씀에 대한 회답도 살아 있는 언어라야 한다. 살아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이 곧 언어 예술이다. 예술이란 생명(藝)을 살리는 기술(術)이란 뜻이라고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시인이란 뜻의 영어인 ‘poet’은 만드는 사람(maker)이란 뜻이다. 살아 있는 언어를 만드는 사람 곧 창조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고 시를 우리말로는 노래라고 하는데, 노래는 ‘놀+애’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놀이도 원래 ‘놀+이’의 구조라고 한다. 그런데 ‘놀’이라는 말이 ‘神’의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노래는 ‘神樂’의 의미이며, 놀이는 ‘神遊’의 의미라고 한다.18) 서정시는 원래 시가(詩歌)이다. 그러니까 시와 노래는 사람의 영혼이나 마음, 곧 사람 속에 있는 신(神)이 살아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워즈워드는 강한 느낌(powerful feeling)의 자발적 유로(spontaneous overflow)라고 했으며, 한자로는 흥(興)이라고 하고, 그리스의 ‘techne’에서 말하는 ‘황홀함’이라 하는 것이다. 마음은 영혼의 나타남이며, 영혼은 곧 사람 속에 있는 신이다. 이 마음이 신과 만나서 교감(交感)할 때 이를 영감이라 하며, 영감에 의해 시가 탄생하고, 거기서 마음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러한 상태를 ‘神난다’라고 한다.
  사는 것의 반대는 죽는 것이다. 땅에서 온 물질인 육체가 물질의 모체인 자연과의 교통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듯이, 영인 마음도 영의 모체인 神과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과의 교감, 마음과 마음과의 교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떤 사람이 시를 낳게 되며 어떤 사람이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흔히 시를 가리켜 체험이라고 한다. 그런데, 체험을 정의해서, ‘남은 못 보는 것을 나만이 보고, 남은 못 듣는 것을 나만이 듣는 것’이라 하고, 또는 ‘경험+사랑=체험’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체험을 하려면 누구보다도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 뜨거운 사랑이 없이는 경험에 그치고 말며, 체험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이 많아야 한다.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은 ‘그리움’이며, ‘사랑’인 것이다. 문학적 용어로는 ‘상상(想像)’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상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어떤 모습(像)을 생각한다(想)’이다. 그러니까 상상을 우리말로는 ‘그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리다’의 작용은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의 대상이 없을 때 작동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성을 하늘로부터 명부 받았다고 한다.19) 그런데 남성은 남성만을, 여성은 여성만을 하늘로부터 명부 받았기 때문에 남성에겐 여성이 없고, 여성에겐 남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다’의 원리이며, 시 창작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상상력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다시 말해서 가슴이 뜨거울 때, 사람은 신을 만나서 교감하게 되고, 남은 못 보는 것을 보게 되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신과의 대화’라고 하는 것이다. 신의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이며,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시인은 뜨거운 가슴으로 모든 사물 속에 숨어 있는 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 음성을 듣는 시적 체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체험만으로는 시인이 될 수 없다. 이 체험을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어서 회답을 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특권이며 또한 시인에게 주어진 십자가이기도 하다. 시를 낳지 못하는 시인은 그 영혼이 죽은 망(亡)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신을 위해 떠오를 해가 없는 시대라고 한다. 불균형의 시대라고 한다. 하늘과 땅, 영혼과 육체, 빛과 그늘, 아버지와 어머니, 이것이 균형을 이루어 잘 어울릴 때,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이 말은 불균형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땅에 산다. 그래서 하늘을 그려야 하고, 영혼의 삶을 그려야 하고, 빛과 아버지를 그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교감, 곧 영감에 의한 시를 써야 한다. 영감은 신의 소리를 듣기 위한 귀의 열림이다. 이 귀가 열려야 신탁이 이루어진다. 한국 민속에서는 이것을 ‘공수’라고 한다. 신에 접한 무당이 신의 말을 듣고 이를 옮기는 것이 ‘공수’이다. 시베리아의 샤먼은 그의 입무식(入巫式) 동안의 탈혼 상태에서 즉흥적인 시작(詩作)을 한다고 한다. 입신하여 있는 경지가 바로 창작하고 시작(詩作)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20) 그러니까 시를 쓰고 있는 동안에는 신과 교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시인이나 무당은 신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제 멋대로 조작하거나 거역할 수 없었다. 종교성이 특히 강한 기독교의 예언자들은 더욱 그랬다.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절대이면서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할 일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시나 써야지 하는 생각에서 시인이 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이름은 사명 그 자체이며, 입무(入巫)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지도자가 따로 있고, 시인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누구나 입무를 해야한다. 모두가 신화를 창조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옛날에는 황제만 신의 아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황제만 주(主)였지만 지금은 모두가 주(民主)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정신이다. 시를 쓰는 기술자로서의 시인이 아니라 시정신의 소유자로서의 시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한다. 진리의 소리에 귀를 열 수 있어야 한다.
  개체 생명도 늙으면 다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한다.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한다. 신과의 대화를 할 수 있으려면 신과 같아야 한다. 등신(等神)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 생명인 사회도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시시대는 신화 시대다.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는 때다. 내가 없는 말씀(言)만의 시대다. 시정신이란, 언어(言語)의 말(語)에서 내(吾)가 죽고 그 자리에 절대적인 공간(寺)인 신전을 세워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마음가짐이다. T. 만의 말대로 불균형의 황무지에서 에덴을 꿈꾸는 마음과 노력이다. 황무지는 영적 죽음의 풍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황무지에서 시의 나라에 대한 동경이나 에덴에 대한 향수가 곧 시정신이라는 것이다. 시정신은 곧 신과의 교감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자세는 종교를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원시 종합예술 시대에는 종교와 예술이 한 자리에 있었으나, 예술이 분화되어 따로 나왔을 때에는 종교의 자리를 이성(reason)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 사회는 결국 종교의 멸종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21) 그러면 인간 존재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다시 말해서 황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이에 대해 조셉 캠블은, “신학처럼 권위의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 경험에 충실한 능력 있는 통찰, 감성, 사고, 비젼에서” 나오는 창작 신화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했다.22) 창작 신화란 시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이제 해답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창작 신화 곧 시작품을 통해 시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리움’ 곧 사랑이란 에너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문학의 3요소 중 첫째와 둘째인 정서와 상상력의 의미가 확실해진다. 정서는 살아 있는 마음의 덩어리로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상태이며, 상상력은 무언가의 모습을 그려 줄 수 있는 힘이다. 이 두 가지는 다 마음이 행할 수 있는 기능이다. 마음은 영혼에서 오고, 영혼은 신에게서 왔다. 살아 있는 마음을 통해 영감이 살아나고, 영감을 통해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통해 영혼으로, 영혼을 통해 신(神)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그 과정은 어떠한가. 그 과정이란 신의 나라, 곧 신화의 마을인 시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마음이 하는 일은 ‘생각하다’인데, 이 ‘생각하다’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그 첫째가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思考)’이며, 둘째가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상상(想像)’이다. 흔히 사고는 머리로 하고, 상상은 가슴으로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음의 주된 기능은 ‘상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슴이 곧 마음이며 심장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고력은 분석하는 힘이고,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상상력은 종합하는 힘이라고 한다. 상상력을 통해 마음에서 영혼으로, 다시 영혼에서 신화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을 재구하여, 처음 신화의 나라에서 쫓겨나 황무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창작 신화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캠블은 상상력으로 종합하여, “생성되는 것은 사물(死物)이 아니라 생명이다. 될 것이나 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또 되었던 것이나 전혀 되지 않을 것이 아니라, 안과 밖에, 지금 여기에, 깊음 속에,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23)라고 한 것이다.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고력에 의해 과학이 발달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실험적 진실만이 진리이며, 인간 체험이라는 공통 분모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적 혹은 시적 진리는 허구나 착각이라고 무시되어버렸다. 과학은 이렇게 하여 종교나 시의 정신적 공화국의 위대한 독재자가 되었다.
  인간이라는 의식이 성숙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그 언어 자체가 시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시인이다. 원시언어는 다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주고받은 말이나 그들이 하나님과 대화한 것도 그 자체가 다 시라는 것이다. 원시언어는 리듬과 은유를 동시에 사용하는 신비의 측면이 있기 때문이며, 세려된 언어보다는 집단심성(community mind)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24) 따라서 원시언어는 주술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술적 기능이란 신과의 교감을 의미한다. 영혼이 살아야 신과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신과의 교감은 곧 집단심성의 표현이라면, 영혼의 죽음을 한자로 망할 망(亡)자로 쓰는 것이 타당하다. 망한다는 것은 집단 곧 공동체 생명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생명의 첫 단계는 가정이고, 아직까지는 그 끝 단계가 국가이다. N. 프라이는, “신화는 심오한 공공의식의 표현이다. 이 때 공공의식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문제되는 것처럼 지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느낌과 행위와 삶의 전체의 일체감이다.”라고 했다.25) 
  이 가정과 국가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그것에 소속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까 집단심성의 표현인 원시언어란 나의 뜻인 내 마음이 생기기 이전의 언어다. 이 원시언어의 세계가 곧 신화의 세계이며 시의 나라인 것이다. 나(自我)라는 자의식이 눈뜨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신화의 세계에는 공동체의식의 발로에서 일체감이 양식화되었으며, 이렇게 양식화된 일체감은 제의(祭儀)나 기도, 춤, 그리고 노래 등의 리듬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이 신화세계에서는 종교적 의식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있어서 신비감이 모든 인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이러한 신비감은 신과 악마들이라는 다신교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의 위대한 유일신으로 집중되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26) 그런데 신화 시대에는 이 신비가 주로 외형적인 리듬으로 나타났는데, 현대에는 외형적인 운율의 정형시가 없어지고 내재율의 자유시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재율이란 무엇인가.
   나는 내재율을 글자 그대로 풀고 싶다. 그렇다면 내재율이란 ‘안에 있는 가락’이다. 이 ‘안’이 바로 마음이다. 가락 곧 리듬은 ‘살아 있음’을 뜻한다. 살아 있는 마음에서만 마음의 가락인 내재율이 울리게 되어 있다. 이것이 곧 영혼의 가락이며, 이 영혼의 리듬이 바로 신과의 교감이며, 한자로는 영혼의 삶을 뜻하는 흥(興)이 되는 것이다. 이 흥은 곧 신(神)이 살아나는 것이며, 신이 살아나는 것 곧 신이 날 때 노래와 춤이 나오는 것이다. 내재율은 오히려 시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시 곧 현대시는 외형률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내재율 곧 마음의 가락으로 쓴다. 다시 말해서 신과의 교감으로 쓰는 것이다. 신과의 교감이란, ‘남은 못 보는 것을 보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듣는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없는 ‘우리의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칼 마르크스는 이 ‘우리의 상태’를 ‘원시공산사회’라고 했다.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는 사회 곧 에덴동산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분명히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기 때문에 물질의 생산을 공유한다는 공산(共産)에다 초점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이 노예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공산주의 사회가 와야한다고 했다. 논리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곧 물질의 생산과 소유의 구조로만 본 것이다. 개체생명도 노인이 되면 다시 어린애가 되는 것과 같이 ‘원시공산사회’에서 시작하여 ‘현대공산사회’로 끝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27) 그들은 자본주의 다음에, “그러나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공산주의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되지만 보다 높은 차원에서 돌아가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원시적인 생산력에 원시공산주의 자리에 극단적으로 발전된 생산력에 근거하며, 자체 내에 거대한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공산주의가 오게 된다.”라고 했다.28) 그러나 역사는 물질의 생산과 소유에 관한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서 영혼, 영혼에서 다시 신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사회는 물질의 공산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공유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한 사회가 형성되는 것은 그 시대의 마음들의 모음인 시대정신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원시공산사회’가 아니라 신과의 대화가 가능한  그 시대의 마음들이 형성한 ‘신화시대’인 것이며, ‘현대공산사회’가 아니라 현대인의 마음들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민주시대’가 되어야 한다. 역사의 흐름이 마지막으로 다다라야 할 곳은 ‘민주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아래로 흐르는 물이 가장 낮은 자리에 이르러 머문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하늘과 닿아 있다. 하늘과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마음과 영혼을 상징하는 것이다. 낮아지는 마음과 영혼의 안에는 하늘이 들어오게 마련이다. 겉으로 보면 하늘과 바다는 맞닿아 있는 것 같지만 하늘은 바다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의 빛깔이 하늘보다 더 푸른 것이다. 더 푸르다는 것은 더욱 생명력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민(民)은 가장 낮은 사람이다. 이 가장 낮은 사람이 임금이며 주인인(主) 시대가 ‘민주시대’이다. 이것은 순전히 마음의 문제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영혼이나 정신을 배제한 유물론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출발에서부터 영혼이 죽은 것이므로 망(亡)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사실 공산주의는 망했으며, 망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성 어거스티누스의 <세계의 대주간, 신으로부터 신에 이르는 인간의 여정 혹은 지상의 낙원으로부터 천상의 낙원에 이르는 인간의 여정>이라는 대 순환론의 영향이라고 한다. 헤겔과 토인비도 마찬가지며, 유태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 그리고 이슬람까지 순환론적 역사관이다. 동양에서는 힌두교, 불교, 그리고 스리 오르빈도와 라다크리쉬난에 이르기까지 모두 순환론적 역사관이다. 이들의 순환론적 역사관이 모두 신에서 출발해서 신으로 귀착하는 순환론이다. 오직 마르크스만이 공산에서 출발하여 공산으로 귀착하는 것이다. 오르빈도의 경우, 사람을 무한자로 보고, 이 무한자의 퇴화는 가장 저급한 수준의 존재인 물질로의 하행이며, 물질은 비 의식적인 차원이므로 여기서부터 진화가 시작되어 의식적인 차원에 도달한 다음 정신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진화 과정의 최종 목표인 영지(靈知)적인 차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29) 어쨌든 인간의 문제는 마음에서 영혼으로, 거기서 다시 신으로 이어져야 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환론적 역사관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숨어 있다. 역사는 절대로 순환하지 않는다. 순환론의 뿌리는 인도에 있다. 역사는 시간과 영혼이 만드는 것이다. 시간과 역사는 원이 아니며, 만다라가 아니다. 하루는 아침에서 출발해서 다시 아침으로 돌아오지만 오늘 아침이 어제의 아침은 아니다.     
  역사는 시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는 물의 흐름에 비유한다. 에덴동산 곧 신화시대에서 나(吾라)는 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나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 씨족이다. 시간은 흐를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자연이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모인 작은 냇물과 같은 것이 ‘씨족시대’라는 흐름이다. 이 시대가 열리면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노예제도가 탄생한다. 한 씨족이 다른 씨족을 정복한 다음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연의 물은 저절로 합류하지만 인간 공동체의 흐름은 싸우면서 큰 집단이 된다. 작은 냇물이 여럿이 만나면 큰 냇물이 되듯이 몇 개의 씨족이 서로 싸워서 합병해 부족을 이룬다. 여기서 탄생한 것이 봉건제도다. 큰 냇물이 모여서 강이 되듯이 강한 부족이 약한 부족을 합병하여 민족국가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 과학의 발달과 함께 산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이라고 하는 돈의 힘이 부각되고, 권력이 돈의 힘인 자본과 합작하면서 만들어진 게 자본주의사회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마음은 물질로 향하게 되고 영감은 돈을 버는 경제감각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물신시대가 오고, 영적 황무지가 된 것이 현대다. 오늘날은 공산주의자만 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유물론자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만 좌익이 아니라 모두가 좌익이 되었다.
 
한 어둠이 또 다른 어둠에게
캄캄한 제 속뜻을 전한다.
다른 어둠이 빨리 알아듣고
둘은 서로 캄캄하게 껴안는다.
덩달아 모여드는 어둠들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
어둠들이 한데 뭉쳐서 캄캄한 대권을 거머쥔다.
눈을 떠도 캄캄하고 눈을 감아도 캄캄하다.
빛을 모두 잡아먹고 캄캄하게 살이 오른
거대한 야행성 동물의 뱃속이다.
나도 그 뱃속에서 캄캄하게 소화된 지 오래다.
어둠공화국의 충실한 백성이 된지 오래다.
                   -유승우, <어둠공화국> 전문.
 
  현대의 영적 황무지를 상징한 작품이다. 모든 사람이 시정신을 떠나서 산문정신으로 무장되었다. 현대야말로 시가 탄생해야 할 때다. 그래야 영혼이 살아서 흥(興)이 나고, 신(神)이 나서, 남은 못 보는 것을 보고, 남은 못 듣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흥이 나고 신이 나는 것은 바다의 물결이다. 물이 흘러서 바다에 이르듯이 역사는 흘러서 민주로 가야한다. 바다는 민주를 상징한다. 바다는 평등하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제 멋에 겨워 흥이 나고 신이 나는 것이 물결이다. 바다는 편을 가르지 않는다. 압록강에서 흘러온 물이나 섬진강에서 흘러온 물이, 낙동강에서 흘러온 물이나 두만강에서 흘러온 물이, 서로의 근원을 따져 지역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모두가 민주(民主) 곧 임금이며 주인이기 때문이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갈 때
그 가슴속에 키우던 민물고기들은
다 두고 간다.
바다의 가슴속 어디에서도
강물의 추억이나 기억을
찾아볼 수 없다.
송사리 새끼 한 마리도
그 품속에 숨겨두지 않는다.
이토록 깨끗한 몸 바꿈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지만, 나는
송사리나 미꾸라지처럼,
아니면 산골의 가재처럼
민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유승우, <강물이 바다로> 전문.
 
  물이 강물일 때까지는 흘러야 한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늪이 되어 썩는다. 그러나 바다는 흐르지 않아도 썩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나(吾=私)는 죽고, 우리(公共)만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신화가 탄생하는 것이며, 신화가 탄생한다는 것은 영혼이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살면 영감이 발달하여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린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의 귀로 듣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이미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현대시를 쓰는 것은 외형률로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정신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4. 시는 이미지이다
 
  ‘시는 이미지이다’라는 말은 시의 형식적인 정의다. 신(神)의 체험을 어떻게 형상화하여 보여주느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신의 체험은 지식이나 사상이 아니다. 지식이나 사상이라면 설명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나 예술은 이해가 아니라 느낌이며 체험이다. 종교의 교리를 이해함으로써 종교적 체험을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미술이나 시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감동이며 교감이다. 시인은 시를 음악처럼 느끼게 하기 위하여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고, 미술처럼 느끼게 하기 위하여 시각적 이미지를 만든다. 시인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들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된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이라고 한다. 시인은 이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체험들을 살려서 이미지로 만든다. 그래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지각이 결합하는 것이 바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poet'이란 말이 만드는 사람(maker)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신과의 대화’라든지 ‘신의 말씀’이란 것은 추상적 관념이다. 자기만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타인에게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만든다. 신과의 대화란 정신적 혹은 영적 교감이다. 쉽게 말해서 마음의 느낌이다. 마음의 느낌은 그 느낌의 당사자인 시인에겐 생동하는 감각이다. 이 생동하는 감각을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는 없다. 보여줘야 하고, 들려줘야 한다. 그래서 이미지를 만든다. 이해시키는 언어는 과학적 언어이며, 보여주고, 들려주어서 느끼게 하는 언어는 시적 언어이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시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C. D. 루이스는 이미지를 말로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보여주는 언어, 곧 ‘언어로 구성된 회화’라고 할 수 있다.30)
  과학적 언어는 이해하는 언어이며, 논리적 언어이다. 과학적 언어의 가장 훌륭한 표본은 수식이다. 모든 과학의 법칙은 수식으로 요약되고, 이해된다.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 ah/2라는 수식으로 요약된다. 이 명쾌한 요약을 사람들은 이해한다. 그러나 이해된 지식은 추상적 관념이다. 사실 숫자보다 추상적인 것은 없다. 숫자는 이미지가 없다. 1이나 2가 어떻게 생겼는가. 1이나 2는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산수 책에서는 3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과 세 개나 병아리 세 마리를 보여준다. 추상적 관념을 이해하게 되면 과학이나 철학을 지식으로 갖게 된다. 그러면 시를 느낄 수가 없다. 어린이의 마음을 지녀야 시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시심은 동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인과 어린이는 모든 것을 이미지로 감각한다.
  나는 앞에서 상상(想像)을 우리말로 ‘그리다’라고 했다. 이 ‘그리다’를 다른 말로는 ‘묘사’라고 한다. 묘사라는 말은 수사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수사학에서는 글을 쓰는 형식을 ‘설명, 논증. 묘사, 서사’로 나눈다. 이 중에서 ‘묘사’는 시를 쓰는 형식이다. 그러니까 시를 쓰는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며, 느낌을 말로 그리는 것이다. 윤재근은 상상에 대해, “마음속에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입이 있고 코가 있으며 온 몸의 觸角이 있음을 想像은 확인한다. 想像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마음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한다. 이처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 妙하므로 옛부터 想像을 강조하여 神思라고 하였다.”31)에서 보듯이, 劉勰의 ‘文心雕龍’에 나오는 ‘神思’를 상상으로 풀이한다.32) 상상은 마음의 기능이며, 마음은 영혼의 다른 이름이고, 영혼은 神과 교감할 수 있는 신적 요소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나 신을 빼놓고는 논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상상(想像)’을 특히 ‘神思’라고 한 것은 마음이 그리는(想) 모습(像)이 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상상이란 말 대신에 신사(神思)를 쓴 것이다. 노래를 ‘神樂’이라 했고, 놀이도 ‘神遊’라고 한 것을 보면 동양적 신(神)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E. 파운드는 이미지를 ‘지적 정서적 무의식의 일시적 발현(presents an intellectual and emotional complex in an instant of time)'이라고 했다.33) 나는 여기서 ’complex'를 ‘무의식’이라고 번역했다. 원래 콤플렉스는 종합이나 합성물이란 뜻이다. 심리학에서는 무의식을 모든 경험이 녹아든 기억의 창고라고 한다. 그리고 빙산의 물 속에 잠긴 부분을 무의식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물 밖에 나와 있는 부분은 의식이다. 이 빙산이 바다 위에서 떠도는 것은 밖에 나와 있는 부분이 바람에 밀려서가 아니라 물 속에 잠긴 부분이 물결에 밀려서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이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상은 마음의 행동인 ‘그리다’인데, 이 상상이 그려낸 이미지가 바로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시적(in an instant of time)인 발현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무의식이 왜 일시에 튀어나오느냐 하는 것이다. 무의식이 일시에 발현되려면 의식이 사라져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이 바로 나(吾)라는 자아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은 신과의 교감을 위해서 내(吾)가 죽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면 어떤 때 의식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일상적으로는 충격을 받았을 때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여기서의 충격은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이다. 정신적인 충격은 사랑하는 심장을 가진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의식이 곧 생각이나 마음이라면 여기서는 내 생각이나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이나 내 마음이 죽어야 사물 자체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심장을 가진 사람은 내 생각이나 내 마음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대상만 있고 나는 사라지게 된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시인의 영혼이 신(神)과 교감하는 상태인 것이다.
  신과 교감하는 상태에서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 때의 말은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신과의 교감은 느낌일 뿐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순수 예술은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이미지를 만들뿐이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다. 소리를 살리는 것이 음악이다. 소리는 느낌일 뿐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높은 소리로 아버지를 발음하나 낮은 소리로 발음하나 그 의미는 다르지 않고 느낌만 다르다. 미술도 순수 예술이다. 미술의 재료인 색채도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빨강이나 파랑은 느낌이 다를 뿐 어떤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음악이나 미술은 번역이나 통역이 필요 없다. 시는 언어 예술이다. 그런데 언어는 소리와 의미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이 두 요소 중 사람과 대화할 때는 의미가 중요하지만 신과의 대화에서는 느낌이 중요하다. 말의 요소 중 소리로는 듣는 이로 하여금 느끼게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형시의  율격이다. 그러나 현대시는 자유시다. 귀로 듣는 율격이 아니라 눈으로 보아서 소리도 느끼게 하고 의미도 느끼게 하는 것이 이미지이다. 여기서 눈으로 본다는 것은 듣는 시가 아니라 읽는 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를 ‘말로 그린 그림’이라고 정의한 의미이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 ‘외인촌’에서)
 
꽃처럼 붉은 울음에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에서)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정한모 ‘가을에’에서)
 
음악이 혈액처럼 흐르는 이 밤(김종한 ‘살구꽃’에서)
 
“요한복음 삼장 십육절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고 있다.“ (유승우 ‘섣달에 내리는 눈’에서)
 
  위에 인용한 것들이 감각적 이미지들이다. 감각적 이미지의 이상적인 방법은 여러 종류의 이미지들이 결합해서 정서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이것을 공감각적 이미지라고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만드는 원동력은 상상력이다. 위대한 시인은 위대한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위대한 상상력은 참으로 살아 있는 듯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상상력의 소유자는 또한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이다. 남은 못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이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듣는 사람이다. ‘푸른 종소리’에서처럼 종소리의 빛깔도 보며, ‘붉은 울음’에서처럼 울음의 빛깔도 보는 것이다. ‘음악이 혈액처럼 흐르는’ 것도 볼 수 있으며, ‘요한복음 3장 16절이’ 눈처럼 내리고 있는 것도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시인인 것이다.
  감각적 이미지는 마음으로 그려보는 그림이다. 사실은 없는 것을 그렇게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종소리와 울음에 무슨 색깔이 있으며, 음악이나 요한 복음이 어떻게 피처럼 흐르며 눈처럼 내릴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정신적인 관념을 육체의 오관을 통해 느끼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감각적 인식이라고 하며, 정신적 이미지라고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을 체험이라고 한다.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은 경험이며, 없는 것을 시인만이 보는 것을 체험이라고 한다. 시인은 어떻게 남은 못 보는 것을 볼 수가 있으며, 남은 못 듣는 것을 볼 수가 있을까. 그것은 시인의 살아 있는 마음이 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마음은 곧 영감(靈感)이며, 영감은 신과 교감하기 때문이다.
 
 
5. 마무리-시는 몸이다
 
  사람을 가리켜 작은 우주라고 한다. 우주란 무엇인가. 무한 공간인 우(宇)와 무한 시간인 주(宙)가 만나서 우주가 된 것이다. 그런데 끝이 없는 무한(無限)에는 결코 사이(間)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무한 공간’이나 ‘무한 시간’이란 말을 쓴다. 여기서 쓰는 공간이란 말은 땅(地球)이 있음으로 해서 성립된 낱말임을 알 수 있다. 지구가 없다면 그냥 빈 하늘일 것이다. 그래서 빌 공(空) 자는 하늘 공자도 된다. 지구가 있음으로 해서, 이 쪽 하늘과 저 쪽 하늘 사이에 땅이 있다는 공간 개념이 성립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땅이 있음으로 해서 하늘도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땅이 기준이다. 땅으로 해서 공간개념이 있게 된 것이다. 땅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땅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이다. 이 땅의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들었다. 땅과 같이 눈에 보이는 물질로 된 부분이 육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람의 모형일 뿐 사람이 아니다. 여기에 생명이 들어가야 하고, 마음이 들어가야 한다. 이것들은 형체가 없으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종합해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우주는 공간과 시간의 모음인 몸이고, 작은 우주인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모은 몸이다. 그러니까 우주는 몸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는 몸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1) 문덕수, ꡔ시론ꡕ(서울, 1993, 시문학사), p.36.2) 김언종, ꡔ한자의 뿌리ꡕ(서울, 문학동네, 2001), p.636.3) ‘寺’자는 원래 관청이란 뜻과 ‘시’의 음을 가진 글자이다. 제정 일치 시대에는 관청이 곧 신전이다. 그러므로 관청에 바쳐진다는 것은 곧 신에게 바쳐진다는 뜻이다.4)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말씀 참조.5) 윤재근,ꡔ詩論ꡕ(서울, 둥지, 1990), p.259.6) 論語, 述而篇, ‘述而不作 信而好古’7) 김언종, 앞의 책, pp.400-401.8) 하이데거, 소광희 옮김, 「시와 철학」(서울, 박영사,1978). p.43.9) 박이문, 「현상학과 분석철학」(서울, 이조각. 1982). p.114.10) 에리히 프롬, 김진홍 옮김, 「소유냐 삶이냐」(서울, 홍성사, 1978). p.30.11) 박이문, 앞의 책, pp96-98.12) 論語, 泰伯篇,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13) 김열규 외, 「우리 民俗文學의 이해」(서울, 1984, 개문사). p.11.14) 위의 책, 같은 곳.15) 위의 책, p.12.16) 윤재근, 「詩論」(서울, 둥지, 1990), p.259.17) 위의 책, p.258.18) 서정범, 「어원별곡」(서울, 1991, 범조사) p.158.19) 中庸, 제1장, 天命之謂性.20) 김열규, 앞의 책, p.21.21) 지라르, 김진식 옮김,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서울, 2004, 문학과 지성). p.7.22) 캠블, 정영목 옮김, 「창작 신화」(서우, 2002, 까치), p.15.23) 캠블, 위의 책, p.16.24) 김병욱 외 편역, 「문학과 신화」(서울, 1981, 대람). p.138.25) 김병욱 외 편역, 「문학과 신화」(서울, 1981, 대람). p.137.26) 위의 책, p.137.27) E. 케언즈, 이성기 옮김, 「역사철학」(서울, 대원사, 1990). p.267.28) 위의 책, p.290.29) 위의 책, pp.244-317.30) 문덕수, 「詩論」(서울, 1993, 시문학사). p. 215.31) 윤재근, 「詩論」. p.721.32) 崔信浩 譯註 「文心雕龍」(서울, 1975 재판, 현암사)에서는 券六, ‘信思二六’을 ‘想像力의 陶冶’라고 했다.33) Handy and Westbrook, Twentieth century criticism, LIGHT & LIFE, p.18.
[출처] 시와 예술, 그리고 신화|작성자 최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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