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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시와 시평 (2편)
2022년 04월 13일 20시 26분  조회:929  추천:0  작성자: 강려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시집『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민음사, 2005) 중에서

 

 

 

 

 

박상순 시인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91년 《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6년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와『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이 있다.
 

 

 

 

<1993년> 

 

 

 

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46)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A와 B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6이 나무이고 7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A에 혹은 B에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혹은 제도)의 감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다.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표지)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상징이라 할 만하다.

 

 

 

 

 

시평: 정끝별 시인 

 

 

 

1964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다. 1988년 「문학사상」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자무 내 인생』과 『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이 시론 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의 노래』, 산문집으로 『행복』, 『여운』, 『시가 말을 걸어요』 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조선일보  2008.02.23

 

 

 

 

 

 

 

작품 해설     

 

 

 

1960년대 후반부터 발표한 일련의 책들에서 전통적인 서양의 형이상학에 대해 중요한 비평을 가한 프랑스의 자크 데리다가 주도한 문학 비평의 유파나 그 운동을 해체(deconstruction)라 한다. 해체 이론은 `말 중심주의(logocentrism)'의 허실을 파헤침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러한 방법론에 기대어 쓴 시를 해체시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문학에서 해체시는 80년대 초 황지우, 박남철 등에 의해 씌어진 전통시의 형태를 파괴한 일련의 전위적 실험시를 가리키는 용어로 김준오의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사용되었다. 해체시는 시인의 세계관이 유보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가 아니라 표절하고 습득하고 인용하는 형태를 취한다. 언어가 더 이상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불신에서 전통 시형식의 파괴라는 해체의 충격이 가시화된 시가 바로 해체시이다.

 

 

 

무의미시란,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사용하여 대상을 잃음으로써 대상을 무화시킨 결과 자유를 얻게 되는 시를 뜻한다. 그러므로 대상이나 사물을 제거시키고 난 어떤 방심 상태, 그 자유스런 유희의 상태가 곧 무의미시라는 것이다. 무의미시란 결국 허무의 극복에서 비롯되는 시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춘수는 그의 무의미시에 대하여 대상의 새로운 의미를 부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지가 곧 대상 그것이 된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 구속이 긴장을 낳는다. 긴장이 몹시 팽팽해질 때 반 고호의 풍경들이 된다. 그것들은 물론 풍경(대상)이긴 하지만, 풍경 이상의 그 무엇이 된다. 무의미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 이론이나 의미론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한 편의 시작품 속에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여러 곳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의미에는 실지로 이론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더러 끼이고 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 반 고호처럼 무엇인가 의미를 덮어씌울 그런 대상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대상이 없으니까 그만큼 구속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 된다. 연상의 쉬임없는 파동이 있을 뿐 그것을 통제할 힘은 아무 데도 없다. 비로소 우리는 현기증 나는 자유와 만나게 된다. 현대의 무의미시는 시와 대상과의 거리가 없어지는 데서 생긴 현상이다. 현대의 무의미시는 대상을 놓친 대신 언어와 이미지를 실체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박상순 시인의 경우는 해체시와 무의미시를 넘나들며 자유자재로 언어와 이미지를 시로 표현한다. 시의 대상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 혹은 기호이다. 그는 현실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재현한 현실, 말하자면 기호의 세계를 노래하고, 다시 기호화하고, 그런 점에서 헛것, 환상, 2차 현실을 노래한다. 그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영화, 만화, 포르노, 회화, 상품 기호 등이다. 뿐만 아니라 기법의 측면에서도 그는 만화, 그림,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文字와 이미지의 경계 해체를 노린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그의 시는 이상의 시처럼 난해한 듯하면서도 결코 난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듯하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서정적이면서도 그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독창적이면서도 독보적인 문체를 구사하는 그다.

 

 

 

또한 박상순 시인의 시는 변신한다. 시의 내부에서, 시의 외부에서, 시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얼굴을 바꾼다. 그 어떤 존재의 규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한다. ‘박상순의 시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그렇지 않은 다른 것’이 된다. 그래서 박상순은 “리좀적 존재”(오형엽)다.
박상순은 공포에 대해서 대단히 잘 말할 줄 아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는 그 어떤 잔혹한 ‘엽기’보다 더 공포스럽다. 그 까닭은 박상순의 그로테스크가 서정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동원되는 많은 시들은 기괴하고 살풍경한 느낌을 준다. 거칠고 과격한 언어도 서슴지 않고 사용된다. 그리고 그들은 시를 통해 폭력적 세계 질서를 고발한다. 그런데 박상순의 경우는 좀 다르다. 박상순 시에서 고통의 상황 속에 놓인 인물들은 대부분 “소년”, “아이”, “국민학생”, “일곱 살” 어린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생의 잔혹함을 얘기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 ‘나’가 너무나 천진한 목소리로 말한다.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라는 이 시는 그의 세번째 시집의 표제시다. 마치 동시를 읽는 느낌이 들면서도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여기에서 이 시를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이승훈 시인의 해설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의미가 탈락된 상태에서 제멋대로 연결되는 무의식의 삶, 그것은 정신불열증적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시는 부르주아 문화를 지배하는 고상한 인문주의 자들,선험적 관념적 자아를 믿는 정신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미적으로 비판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부정의 극한에 남는 것은 일종의 절망의 놀이이다. 시 속에서 열 개의 장난감이 나온다. 재미 있는 것은 여기서 <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장난감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라는 시행들이 암시한다. -중략. 이 시는 이성적 사고니 의식이니 하는 것들이 사라지는 시대의 황폐한, 끔찍한, 그러나 해학적인 <나>의 초상이다.'

 

 

 

신인상 수상작 2007년 상반기 평론부문, 임영선 (기호와 變轉의 미학)  

 

 

 

 기호와 변전(變轉)의 미학

 

             -박상순의『6은 나무 7은 돌고래』를 중심으로

 

 

 

                                                                                                                 임 영 선

 

 

 

1.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전통과 정체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말한다. 그러한 세계를 추구하는 시인들은 쉽게 자기세계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으며 실험성이 강한 포스트모더니즘 적 해체경향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던한 시는 새롭고 전위적이어서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시가의 전통적 서정성이나 상징적 질서를 철저히 해체하고 부정함으로써 보편성을 뛰어넘고, 언어조차 인간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짜여진 범주에 넣을 수는 없어 보인다.

 

  한국시에 있어서 1990년대 이후 새로운 감수성의 양상은 도시문화에 대한 매혹과 반성 혹은 소외된 공간에서 파괴되는 시적자아에 대한 탐색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한 우리시의 전위성을 대표하는 선상에 시인 박상순이 있다. 그는 문단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개성이 강한 만큼 특별한 매력을 지닌 시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가 즐겨 다루는 결핍이나 단절, 소외는 자신의 체험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언어들 속에 감추어진 상처와 고뇌를 그는 시종일관 반복과 변전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한 자의식과 언어에 대한 고도의 자각은 기존의 세계나 언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이는 이상(李箱)의 유명한 “어느 시대에도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는 말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만큼 그에게 있어서 언어의 해체는 당대의 미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전위적인 시인들이 찾고자 하는 자아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적 인식이다. 적어도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던이란 의미는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이며 발전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기 때문이다.

 

  박상순의 시세계는 끊임없는 ‘자기존재의 변전(變轉)화’로 집약될 수 있다. 그의 첫 시집『6은 나무 7은 돌고래』(1993)나『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996), 세 번째 시집『Love Adagio』(2005)를 통해 쉽게 근접하기 어려운 낯선 이미지들과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기법으로 묘사한다. 그의 시편들은 판타지 시에서 나타나는 환청, 환시, 환각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말로 이해되지 않는 세계를 반복되는 기호와 숫자놀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박상순의 시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기존재의 변전(變轉)화’란 결국 세상을 뒤덮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부조리한 문제들, 가족의 해체, 자본주의에 사로잡힌 주체들, 무서운 테크놀로지와 같은 커다란 상대와 싸우는 처절한 몸부림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말 중심의 허실을 파헤침으로써 언어를 개념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을 자처한 시인이다. 즉 문자와 이미지의 경계를 해체하여 기호적 환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시대적 상황에 자연스레 동참하는 것으로도 또는 언어의 해체적 실험을 통해서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행위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한 그의 시세계를 들어가 보자.

 

 2.

 

 

 

  박상순의 시들은 하나의 이미지들→메시지→이상적 가치→미적가치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변전을 시도한다. 두 번째 시집인『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에서는 만화의 주인공 ‘마라나’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본다. 세 번째 시집『Love Adagio』에서는 건조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들의 유희가 토해내는 슬픈 노래이나 첫 시집이나 두 번째 시집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이미지들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은 의미론적으로 접근하면 끝내 해독하지 못한 채 헤매고 만다. 많은 연과 행이 반복적 변주를 거듭하면서 리듬감을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성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말처럼 언어를 직조하기 보다는 직조된 언어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여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박상순의 세 권의 시집 모두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공통된 코드는 기호를 통한 해체와 변전이다. 또한 억압된 욕망들이 어떤 형태로 자아를 뚫고 나오는지를 순간순간의 대리물들에 의해 ‘나’라는 존재를 계속 변전시킨다.

 

  특히 시 속에 동화나 낙서 같은 그림이 주는 난해한 요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어렵고, 말과 문장이 문맥에 닿지 않아 비문법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가 얼핏 이성과 동떨어진 듯 하지만 실제로는 완벽히 가려진 이성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그의 시를 해독하거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박상순은 자기 시론에서 “내가 하나의 시스템이라면 시는 나의 센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수없이 많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꽝’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한 번 더’를 만들 것인지는 순전히 그의 몫이다. 여기서 박상순의 굉장한 독창성과 상상력의 깊이는 분명 어떤 하나의 비전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는 수없이 많은 대중매체의 증가와 산업의 발달로 소비문화가 범람하는 20세기 후반에 들어 인간의 욕망의 문제가 이슈로 떠오른다. 또한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는 공간에서 풍요와 빈곤이 공존해 있고, 사랑과 소외가 대립되어 있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러한 문제들을 박상순은 깊이 인식하고 자기만의 언어와 기호로 시적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피묻은 내 반바지를 갈아입혔다

 

     기차가 지나갔다

 

     그들은 나를 다락으로 옮겨놓았고

 

     기차가 지나갔다

 

     

 

    첫 번째 기차가 아버지의 머리를 깨고 지나갔다

 

     두 번째 기차가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지나갔다

 

     세 번째 기차가 내 눈동자 속에서 덜컹거렸고

 

     할머니의 피묻은 손가락들이 내 반바지 위에

 

     둑둑 떨어지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나는 뒤집힌 벌레처럼 발버둥 쳤다

 

     기차가 지나갔다

 

     달리는 기차에 앉아

 

     흰구름 한 점 웃고 있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전문

 

 

 

  이 시에서 박상순은 도시적이면서도 목가적인 언어의 특징을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계속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구조 속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낳게 하고 있다. 기차가 지나가며 ‘아버지’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 그리고 ‘나’는 발버둥 쳤다는 사실이다. 시의 1연에서 3번 기차가 지나갔고, 2연에서 2번, 3연에서 3번 반복되는 동안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상황이 악화된다. 그 악화의 주범은 문명의 힘이고 그 힘의 주체가 기차라는 것이다.

 

  여기서 ‘빵공장’이란 의식주에서 먹고 사는 일의 힘겨움이고, 그 어려움이 부모의 죽음까지 몰고 온다는 명제를 말하고 있는데 ‘뒤집힌 벌레처럼 발버둥 쳤다’는 이 변전은 타율적이든 자율적이든 가족의 불행으로 인한 ‘뒤집힘’ 그 자체이다. 그의 다른 시「폐허」나「트럼펫을 불어라」와 같은 시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실에서의 생존의 의미를 뒤집어서 표현한다. 뒤집혔다는 의미는 도시적 현실이 주는 고통과 상처일 수 있고, 아무도 나를 구원해줄 수 없는 철저히 소외된 자아의 모습인 것이다. 형식면에서도 반복과 나열의 표현법은 변형을 통한 상황의 허용성으로 바뀌어 지면서 표현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이 시의 표현력은 단번에 확대되고, 그로테스크한 상황에서 마지막 연의 4~6행은 변전의 미학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

 

  그의 시적 발상과 표현은 제목 자체가 그러하듯 차분하고 조용하지만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파동은 다각적이고 자유로운 연상의 결과로 느껴진다. 특히 박상순의 시가 쉬운 듯 보이나 어려운 것은 그의 의도된 단순성에서 오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시인의 의도가 잘 나타나지 않고 내포나 상징과 같은 것들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발소의 봄」이란 시에서도 보면 거울 속에 있는 본래의 자아 역시 소외된 자아를 나타내고 있는데 시가 가지고 있는 기법과 주제가 갖고 있는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뒤통수를 맡긴 채

 

     거울 속에 허옇게 앉아 있었다

 

 

 

            ―「이발소의 봄」 전문

 

  

 

   과연 시 속의 화자가 이발소의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거울 속의 영상과 원상과의 관계가 분열된 자아 속에 존재하는 이상과 현실의 모습에 대응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여기서 이상(李箱)의 거울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상(李箱)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드러내며 거울의 상징성으로 자신의 성향을 시에 반영했다. 거울이미지는 상징적 기법이지만 ‘거울’이라는 것은 자신을 비춰주는 매체로 작용한다. 즉 화자가 자아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물이 되는 것이 ‘거울이미지’인 것이고 거기에 자아인식이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화자가 ‘나’는 뒤통수를 맡긴 채 거울을 보며 허옇게 앉아있다. 왜 하필이면 뒤통수가 허옇게 일까를 생각해보면 머리를 깎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아있는 ‘나’를 방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뒤통수를 맡긴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어감처럼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도 허옇게 앉아있다는 것은 나를 텅 비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마음→공(空)→거울이미지인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비추는 ‘거울’앞에서 박상순의 시가 갖는 미적 감수성으로서의 변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여섯 개의 다리로 움직였다. 나는 언덕에서  

 

     그를 기다렸다. 은사시나무에 그는 여섯 개의 다리를

 

     걸고 있었다. 그의 다리가 은박의 나무를 열고 내 얼

 

     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곤충처럼 움직였다.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책상 앞에 곤충처럼 앉았다. 백열등이 켜졌다. 터널

 

     의 끝에서 흘러나온 습기가 내 어깨 위에 완전히 가

 

     라앉을 때까지 나는 서랍을 열지 않았다.

 

           

 

                 ― ( 중   략 ) ―

 

 

 

     나는 두 팔을 휘저었다. 금새 두 팔이 다리가 되고

 

     두 다리가 다시 여섯이 되고, 딱딱해진 내 얼굴은 모

 

     자가 되고, 모자는 다시 황혼이 되고, 황혼은 다시

 

     잠자리로 변하고 …… 나는 나에게로부터 도망쳤다

 

     더 깊은 가을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곤충의 가을」부분

 

 

 

  이 시는 카프카의『변신』이란 소설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게 한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 그레고르가 자신이 벌레로 변해있음을 깨닫고 경악한다. 이 작품에서 카프카는 실존의 차원과 부조리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현대인의 유폐된 삶을 그리는 소설이다.

 

  물론 이 시와『변신』이 장르적으로 다르지만 현대인의 소외를 다룬 측면에서는 매우 흡사한 느낌을 받는다. 다리를 통해 남의 몸  속으로 들어간 ‘나’는 어느 날 곤충이었다. 박상순의 다른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는 어느 날은 쥐(「나는 더럽게 존재한다」)였다가 어느 날은 아이(「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년 뒤」)였다가 수시로 바뀐다. 이 모든 ‘나’는 나의 대리물로써 나의 변전의 결과물이지만 한편 인간 상호간의 소통과 단절의 소외상황을 암시한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나는 나에게로부터 도망쳤고, 더 깊은 가을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로 끝난다. 이 시 뿐 아니라 박상순 시들에서의 주체는 기표와 기의가 서로 위치를 바꾸어가며 뛰어다니는 그곳에 현대적 사유의 문제가 변주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라캉의 이론을 빌린다면 라캉의 상징계는 언어의 질서를 받아들인 인간의 세계를 말한다. 박상순 시에서의 주체는 그런 인간의 질서를 거부하고 언어를 거부하며 상징계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주체인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을 뒤집어보고, 무의식과 언어 사이를 오가며 자아를 해체하고 있다. 그렇게 또 다른 언어로 인간 내면세계를 해부하고 있으나 어떠한 설명과 이론을 끌어온다 해도 그의 내적세계를 관통할 수는 없어 보인다. 도시문명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 서정과 만나는 지점에 그의 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경로를 찾아가보는 과정은 박상순의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집에는 무덤이 다섯 개 있다

 

 

 

     무덤 1: 머리 없고 다리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A, B, C,

 

             큰아버지 X, Y, Z, 아버지,

 

             어머니 A, B, C,

 

             작은아버지 X, 작은아버지 Y, Z가

 

             쇠막대기에 걸려 있고

 

     무덤 2: 첫번째 무덤에서 떼어낸 허벅지와

 

             무릎과 발목과 발가락들이

 

     무덤 3: 잘려진 손가락들 비닐봉지 속에서

 

             A, B, C

 

     무덤 4: 눈알 뽑힌 머리통들   

 

               

 

                ― (중 략) ―

 

             

 

     그래도 우리집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녹색 머리를 가진 소년」부분

 

 

 

  이 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죽은 뒤 무덤에서까지 진행되는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시에 나오는 남자는 단수로 되어있고, 여자는 복수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덤에 묻힌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아버지와 어머니들이다. 이 시에서 ‘녹색머리를 가진 소년’으로 표기되는 화자는 떼어낸 허벅지와 잘려진 신체의 부분들, 눈알 뽑힌 머리통들을 지켜본다. 결국 이 시에서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결핍된 공간에서의 소외된 사람들의 운명을 통해서 자아의 의지를 발현시키려는 욕망을 말함이다.

 

  이 시에서는 현실에 없는 주체의 소멸을 말하고 주체의 죽음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의문스러운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둘이나 된다는 점이다. 그런 부분을 가정해 본다면 하나는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자아(시인 자신), 또 하나는 관찰자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또 다른 자아일 수 있다. 시적 분위기는 공포스럽고 말이 안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지만 냉정하리만큼 담담한 어조는 분명 거친 해체가 아니고 그 해체로 인하여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형태의 힘으로 작용한다. 특히 시의 낯설음, 독특함의 부각이 그의 서정적 이미지와 묘한 매력으로 섞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여기에서 현대시의 양가성과 해체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양가성이란 인간가치의 이중적 양상이나 대립적 체계를 일컫는 말이며, 이분법적 도식의 틀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양가성은 이분법적 행위체 도식을 해체적으로 와해시켜버린 것을 의미한다.1) 이러한 양가성의 인식은 데리다의 해체이론의 출발이 모든 이분법적 대립을 없애려는 시도라 할 수 있으므로,2) 역사적으로 볼 때 해체론의 등장과 보조를 같이 한다. 양가성은 단일성, 통일성에 대한 비판과 전복을 의미하고 전통적 인식 속의 가치관이나 관념을 다원적 가치체계로 전환하려는 의도인 만큼 해체론의 방향과 일치한다.

 

  80년대 해체시의 출발은 오규원과 황지우, 박남철 등으로 시작되어 기존의 전통시에 대한 거부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례로 황지우의 시「도대체 시란 무엇인가」는 전통서정시에 익숙한 독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식의 틀을 전복함으로써 당대의 미적 가치관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실제적 삶과 무관해진 제도로서의 예술을 부정하는 것이란 점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렇게 볼 때 박상순의 시세계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은 ‘소외된 자아로부터의 탈출’과 ‘이분법적 도식의 틀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과 꿈꾸는 것은 결국 기존의 권력적 공간이나 결핍된 공간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시에서 찾아보자.

 

 

 

       아내가 그린 그림 속에서 외눈박이 금붕어가 튀어

 

     나온다. 나는 금붕어를 두 손에 받쳐들고 그림 속으

 

     로 들어간다. 그림 속에는 눈이 내리고 붉은 표지판

 

     들이 눈발에 묻히고 있다. 나는 표지판을 따라 들녘

 

     을 가로지른다. 외눈박이 금붕어가 꿈틀거린다.

 

 

 

       외눈을 껌벅인다. 내 눈꺼풀 위로 눈발이 자꾸 달

 

     라붙는다. 나는 계속 표지판을 따라 눈 덮인 들판을

 

     간다. 바람이 눈보라를 밀치며 금붕어에게 묻는다.

 

       ― 저 사람 누구니?

 

                  

 

                  ― ( 중   략 ) ―

 

       

 

       나의 한쪽 눈이 지워진 눈보라에 묻힌다. 반 토막

 

     의 내가 외눈을 뜨고 눈덮인 들판을 간다. 아내가 다

 

     시 반 토막의 나를 지운다.  들판의 눈을 지운다. 아

 

     내의 발 밑에서 외눈박이 금붕어가 꿈틀거린다.

 

 

 

                                  ―「지워진 사람」부분

 

 

 

  위의 시「지워진 사람」을 읽다보면 아내가 그린 금붕어 그림 속에 시적 자아가 들어간다. 눈 덮인 들판에서 표지판을 따라 헤매는데 아내가 표지판 그림을 지우고 따라서 ‘나’도 지워진다. 제목에서 말하는 ‘지워진 사람’은 바로 시인 자신을 말하고 있음이다. 그러나 금붕어는 아직 살아남아 ‘아내의 발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시적 자아가 그림의 ‘밖’에서 그림의 ‘안’으로 들어갔다가 지워져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금붕어가 ‘저 사람 누구니?’ 라고 물었지만 그것은 자아를 확인하는 일일 뿐이다. 이제 영원히 지워진 그림 속에서 다시 재생 불가능하고 존재하지 않는다. 박상순의 시에서는 ‘묻는다 / 말했다’ 라는 표현도 거듭 나오는데 그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안으로 감겨드는 소통의 단절과 같이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 시에서의 권력은 기존의 고정된 관념에서 온 것이지만 유년 속에서 억압된 기억이나 육체 등을 해체를 통해서 뒤집기 하는 것이다.

 

  이승훈은 박상순의 시「통 속의 아이」를 무의식 운동이라 하고 라캉의 개념을 빌려 의미가 타락된 상태, 말하자면 시니피에가 탈락된 상태에서 제멋대로 연결되는 시니피앙의 운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단순히 ‘시니피앙의 운동’이라고 하기에는 박상순의 언어는 그 의미가 매우 심리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기법 면으로는 그렇게 보일수도 있지만 박상순의 시세계는 보다 자의적이지 않고 심리적 언어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녹색의 내가 차례를 기다릴 동안                  8) 녹색의 나를 닮은 우표가 붙은

 

                                                           내 마지막 편지를 우체국에 전한다

 

           (그림 삽입)                                   9) 여덟 번째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들의 어머니가 죽다

 

                                                       10) 통 밖의 마을에서 너희들의 아버지

 

        첫 번째 아이는 나를 기다린다           

 

     2) 내가 앞으로 나아갈 동안                                 (그림 삽입)

 

 

 

           (그림 삽입)                                        

 

                                                           통이 되어 쓰러지고  

 

        

 

        두번째 아이는 통 속에서 운다                   11) 녹색의 나는 화가가 되어        

 

     3) 녹색의 내가 우체국에서 말할 때                     녹색의 내 얼굴을 페인트로 칠하며

 

                                                       12) 너희들을 버린다

 

           (그림 삽입)                                      아직 어린 너희들을 버린다

 

                                                            

 

        

 

       세 번째 아이는 통 속에서 달린다

 

       

 

               ― ( 중  략 ) ―                                      

 

 

 

                                                                      ―「녹색의 소년」부분

 

  

 

  이 시에서는 ‘녹색의 나’와 ‘통 속의 아이’의 관계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 속에 여덟 명의 아이가 등장하는데 ‘녹색의 나’는 의식 속에 있는 거울 밖의 자아, 통 속의 아이는 무의식 속에 있는 거울 속의 자아로 이해되며 녹색의 ‘나’의 이미지는 ‘그’에 대한 반기라고 생각한다. 박상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짧은 몇 줄의 시구와 동화 같은 그림으로 인간의 현실적 모습을 기호로 표현하고 있으며, 난해하고도 단순한 그림을 통해 인간들의 고독과 공포, 죄과를 적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3년 뒤」나「가짜 데미안」에서의 그림 역시 분명한 형태나 기호를 하고 있으나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확실성이라든가 그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시 속에는 여러 명의 사람이 나와 각자 다른 말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의도된 이미지 속에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존재하는 ‘무’가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수용하거나 알아채지 못하는 시인만의 장치일 수 있다. 단지 현실 속에서 전혀 소통되지 못하는 상호부재와 소외된 자아에 대한 슬픔이 남을 뿐이다.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첫 번째의 내가

 

     열 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 번째는 나

 

     열 번째는 전화기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전문

 

 

 

  이 시 속에는 열 개의 장난감이 나오고 1부터 10까지 숫자를 붙이고 있다. 박상순은 ‘숫자놀이 장난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장난감에 화자인 ‘나’도 포함된다는 말이 성립된다. 특히 첫 번째 ‘나’와 열 번째의 ‘전화기’는 이 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로 작용하고 있다. ‘전화기’는 ‘나’와 다른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반복과 전환을 통해서 그가 동경하는 세계를 상징적 기호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는 거의 ‘내가 없고, 내가 있고’의 싸움의 연속이다. 그것은 박상순이 가지고 있는 아이와 같은 눈으로 본 사물 또는 사람을 기호로 표시하고 있다는 단서가 된다. 첫 번째 ‘나’로 시작하여 자동차와 잠수함, 비행기라는 문명의 산물 다음으로 식물과 동물의 나열을 거쳐 마지막은 ‘나’와 ‘전화기’로 끝을 맺는다. 이는 결국 세계의 해체에서 ‘나’의 해체로 나아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논리적 의미를 규명하고 억지로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이성과 의식이 사라지는 시대의 황폐한 ‘나’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굳이 싫거나 좋은 사람이거나 물건, 사물의 이름을 대지 않고 표시하는 그러면서 그 속에서 잃어가고 있는 자아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 방법으로 분석해보고, 자신을 해체시켜 보고, 비틀어보면서 박상순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3.

 

 

 

  박상순의 경우 시의 대상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 혹은 기호이다. 그는 현실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재현한 현실, 즉 기호의 세계를 노래하고 다시 기호화하고, 그런 점에서 또 다른 2차적인 현실을 말하고 있다.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는 당시 독자들의 항의로 인해 신문연재가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연작과 그가 제창한 ‘모더니즘’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우리 문학에 중요한 자산의 하나로 인정되었고 그에 대한 연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어느 시대건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난과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누가 어떤 소재로 시를 쓰건 대부분 수용되어지는 시대를 산다. 박상순의 경우 그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영화, 만화, 회화, 상품, 기호 등이다. 다만 문학도 사회적 생산물이라는 사실을 수긍할 때, 현재 사회적 상황을 흡수하여 반영할 것이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요소들이 박상순과 같은 시인의 기법적인 그물망에서 문자와 이미지의 경계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게 한다.

 

  박상순의 시들은 실험적 전위시로 일관해 온 시인답게 단순하면서도 특별한 자기만의 스타일을 냉정하게 시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러나 거칠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서정성에 대한 가치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이 시대의 헛된 욕망과 상투성 속에 있는 난폭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박상순에게 있어 시 쓰기는 자신의 공간에서 철저하게 고통을 억누르며 초현실적으로 역전시키는 조작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해체된 언어는 주체를 부정하게 되는데 주체가 부정된 시에서는 허무와 욕망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시적 특징인 반리얼리즘, 기호와 변전, 의미의 관계혼란 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언어의 해체적 실험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가 해체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긴장과 조화 사이에 놓인 자신의 시에 장치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메시지와 이미지라는 비실재적 대상이 현실적 존재로 인식되어 통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상순의 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는 시어나 문장의 표현들이 다소 어렵고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의 시편들이 워낙 실험성이 강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해소되지 못하고 시종일관 ‘나’의 정체성만을 찾다가 끝났다는 점이다. 그러한 문제들을 독자에게 툭툭 던지는 것 또한 그 만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해체시의 꼭짓점에 있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상순의 시적 수용의 폭이 넓은 것은 도시인들의 상처, 자아와 세계로부터의 소외, 자기부정과 같은 이미지들을 감각적 기법으로 살려내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속에서 끊임없는 자아의 변전, 그런 변전의 뿌리에 자리하고 있는 서정성을 이해하는 것이 박상순 시의 해석의 열쇠이다.

 

  그런 면에서 리얼리즘적 풍토가 지배적인 우리 시단에 일단 파란을 일으킨 언어의 실험은 확실한 그의 시세계를 보여주고 형식적으로도 열려있는 공간을 연출한다. 이러한 기법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작업인 만큼, 세 번째 시집『Love Adagio』에서는 좀 더 의미가 명료해졌고 확장된 것처럼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시적 행보가 주목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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