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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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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자치주55돐특집] 소설 조선족이민사 (1) 댓글:  조회:3423  추천:66  2007-09-02
    . 한 부의 소설로 읽는 중국조선족 이민사 .   조모의 傳說 (1)  김 혁                   ... 그때 그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고 나의 할머니는 이야기하셨다. 백세를 바라보는 세기의 로인임에도 우리는 그이를 <<쌍가매(가마)>> 할머니라 불러 버릇 했다. 할머니의 이마전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쳐 가마가 자리를 틀고 있었다했다. 년세가 든후에는 머리가 많이 빠져 이제 더는 가마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찾아볼수없는 쌍가마의 정체와 마찬가지로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는 전설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민화나 전설으로 지나 칠 한 대목 이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물에서 룡이 나왔다고 확신의 어조로 말 하군 했다. 어거지에 가까운 어조였다. 유치원 다니는 증손녀와도 아니고 누구를 보나 그렇게 말 하군 했다. 우리는 그저 로후의 로인의 망녕든 소리쯤으로 치부하고 지나치군 했다. 할머니는 이제는 틀이 끼기조차 힘들어져 체념하고 푹 패인 합죽이로 부대처럼 훌쭉한 볼을 풀럭이면서도 어눌거리는 말씨로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군 하셨다. 모시빛저고리에 검정 몸베를 받쳐입고 어깨가 시려나는지 무명실수건을 마냥 어깨에 걸치고 한쪽 무릎은 세운채 오두마니 앉아서 할머니는 형형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하셨다. 할머니가 즐겨 말하는 그 우물은 현성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곳은 고색 창연했던 이 현성에서 하나의 풍경구가 되여있다. 현성에 들리는 사람 치고 그 우물을 찾아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물주변에는 철책(鐵柵)을 두르었고 우물 아구리는 철판을 대여 커다란 자물쇠를 잠근 데서 사시장철 쌉스름한 물이 자작하게 괴여 있었다는 우물물을 볼수 없었다. 우물아구리에 놓인 용드레틀도 평소에는 보이지않았고 명절이나 유람객들이 운집하는 관광 호황기에만 그 무슨 무대세트처럼 얹었다가는 다시 떼여 내군 했다. 여하튼 그 우물에서 룡이 나왔으며 우리고장의 이름도 그 우물 그 룡을 따서 달았다는데 대해선 누구나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전설은 그 우물로부터 시작 되군 했다. 사람끼리 잡아먹었다는 기사년 대기(大飢)의 고개를 넘어 백년전 쌍가매할머니의 아버지는 이곳에 이르렀다.      * 이주민들이 건넌 눈물 젖은 두만강     봇짐을 풀던 첫날 칠척의 장한은 대동해 왔던 가족들 앞에서 땅을 치며 목울음을 울었다고 했다. 풍문에 이곳은 물고기가 논 코에 욱실거리고 꿩이 가마에 절로 날아들고 뜰에서 몽둥이로 노루를 때려잡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 했다. 허나 그들을 맞아준것은 천만년 묵은 진펄에 갈대 숲이 우거지고 야수가 출몰하는 인적기라고는 없는 고장 이였다. 천재(天災)를 입은 고향의 풍토가 거칠다고는 하지만 이곳 만주 땅에 비할 바가 아니였다. 삼을 굽는 구덩이를 파놓고 길쌈을 잘했으므로 고향에서는 그네들을 삼굽집이라 불렀다. 그들의 고향에는 3년째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있었다. 떡갈나무에 개피를 뿌리며 강우제를 지냈지만 무심한 하늘은 비한방울 내리기에 린색했다. 그리고 집에는 라병환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굶는 서러움에 <<문둥이집>>이라 사람들로부터 오는 소박에 등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리향할 생각을 뼈물러 머금었던 것이다. 떠나면서도 삼을 구워야한다며 쌍가매의 어머니가 삼씨 반 사발을 보짐에 품고 왔다. 그들 일가처럼 수효를 셀수 없는 사람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망건에 헌 삿갓, 퇴색된 휘양을 쓰고 무명두루마기를 걸치고 미투리를 신은 사람들... 너나가 다를 바없는 따라지 목숨들 이였다.     * 장사진을 이룬 이주민 행렬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왔고 갑산군에서 왔고 정성군에서 왔다. 김액 김씨, 전주 이씨, 미량 박씨들이 왔다. 삼굽는 사람도 왔고 총을 든 포수도 왔고 곡하는 사당패출신도 왔고 안경 건 훈장도 왔다. 대짝같은 보퉁이를 지고 남부녀대하고 밤도와 강을 건너 왔다. 둥지 털린 멧새처럼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저기서 날아와 이러구러 동네를 이루었다. 향수에 볼을 적시는 눈물을 뻑 문지르고는 이튿날부터 황무지개간에 나섰다. 버들과 갈을 베고 불을 달았다. 그때 실향민들이 놓은 불은 옹근 하루밤 하루낮을 타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개간의 첫 모지락괭이를 박았다. 사력을 다한 그네들의 힘으로 비탈에 밭이 일구어지고 갈대숲 무성하던 사득판에 논이 풀리였다.     * 춘경에 나선 간도 이주민의 모습 그런데 고생중의 고생은 마실 물이 없는것이였다. 리씨성을 가진 훈장 하나가 풍수를 볼줄 아는지라 물 자리를 찾아 나섰다. 풍수를 본즉 이곳은 원체 왕후지지 (王侯之地)도 못비길 명당자리라고 했다. 땅 밑에 룡이 틀고 누워있다는 것이다. 우물자리를 잡고 동네에서는 간소하나만 주과포(酒果脯)를 차려 천지신명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고나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모래와 자갈을 들어 내고 돌을 까 내니 샘줄기가 터졌다. 쌍가매의 아버지가 우물맛을 보니 쌉스름하고 이발이 쩡쩡 시려나고 배속을 시원히 찌르는 것이 틀림없는 룡수였다. 물을 마셔본 사람마다가 물맛이 좋다고 절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우물 아구리를 정성스레 쌓고 물을 긷기 좋도록 용드레를 앉혔다. 우물가에 수양버들도 한그루 옮겨다 심었다. 좁장한 마을 안자락에 숨은 듯 주저앉아 있는우물가는 한컷의 흑백수묵화를 방불케했다. 곱게 쌓은 돌가퀴우에 룡드레 틀 하나 얹혀져 있고 우물벽체를 이룬 돌틈사이엔 물이끼가 꽃처럼 피여나고... 우물자리에서 룡수가 터지던날 쌍가매 어머니의 양수도 터져올랐다. 쌍가매는 그날 타향에서 탯줄을 끊었다. 어머니는 탯줄을 노전밑에 가만히 감추었다. 언제든 고향에 돌아가면 그곳에 묻어 주려는 것이였다. 그리고 우물물에 쌍가매를 씻겨 내렸다. 찬물의 세례에 쌍가매는 영악스레 울어댔다. <<썅놈의 종간나(계집애)가 악바리질하고 울어대네.>> 덧불어난 입을 두고 아버지는 귀찮게 뱉었고 문둥이오빠는 가까이에는 오지 못하고 문 짬으로 갓난 애를 들여다보며 못나게 웃었다. 어른들의 타향살이의 애수가 쌍가매에게 옮았던지 아가는 울보가 되여 종일 울음이 그칠새 없었다. 그때마다 칭얼이는 애를 안고 어머니는 어릴적 배웠다는 노래를 흥얼이군 했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잎대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느면 월강죄란다... 썩후에야 쌍가매는 한 곡조 밖에 흥얼일줄 모르는 어머니의 그노래가 <<월강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정부는 월강하여 언감 자기들의 봉금지(封禁地)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잡았고 월강죄로 목을 쳤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사람들이 날로 불어만 났고 그네들의 한을 담아 싣고 이 노래는 널리 불리워지고 있었다. 쌍가매의 어머니가 다른 노래는 부를줄 모르고 하여 실향민들의 한이 서렸던 <<월강곡>>은 쌍가매에게서 자장가로 불려 졌다.   * 청태조 누르하치,청정부는 선조가 태여난 장백산 지역을 신성시하여 봉금령을 내렸으며 월강하여 봉금지(封禁地)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잡았고 월강죄로 목을 쳤다                                                        * 우리의 선조들이 월강하여 맨 처음 이른곳 사이섬 간도라는 이름도 이 섬에서 연유되었다. 어느 달이 휘영청 밝은 밤, 고향생각에 잠머리가 뒤숭숭해져 잠에서 깬 쌍가매의 아버지는 문을 나섰다가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글쎄 우물에서 서기가 뿜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사위는 일광단을 펼친 듯 백주처럼 환한데 뒤미처 무지개가 우물우에 비끼고 하늘땅을 뒤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무엇인가 우물속으로 부터 언뜰하고 솟아올랐다.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그것은 틀림없는 룡이아닌가?! <<룡이다!!! 우물에서 룡이 났소! 우물에서 룡이 났소!>> 아버지가 소리소리질렀고 잠에서 깬 포수네 집에서 사당패네 집에서 훈장네 집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사람들은 다투어 우물을 들여다 보았다. 우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삼굽집 서방의 꿈이 아니면 환각 이였다고 후에 사람들은 말했다. 허나 우물에서 룡이 승천하면 후세에 장수가 나고 이 고장에 행운이 트일 것이라고 동네사람들은 쌍가매아버지의 말을 믿고 룡제를 지냈다. 남에 비해 살림이 조금은 윤택했던 사당패 김씨네가 먼저 자금을 선대하여 이웃 중국동네에 가서 석공을 청해 석비(石碑)를 세웠다. 리훈장이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시에 우물가에서 룡을 보았다고 비문에 써넣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증조할머니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물에서 나온 룡을 자기가 직접 본 것으로 바뀌어져 갔다. 할머니의 확고함에 가까운 어거지 같은것에 의해 룡의 전설은 우리 가문의 전설처럼 만들고 있는것 이였다. <계속>
121    불의 제전 (3) 댓글:  조회:3356  추천:52  2007-06-29
2006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소설본상작품   불의 제전 (3)김 혁 진, 스승을 잃다   대각소리가 울렸다. 투명한 고음으로 소리는 부락을 뒤흔들었다. 족장 굉이 두 볼을 팽팽히 살리며 대각을 불었고 그  소리에 부락 사람들이 바삐바삐 적봉 기슭에 모여들었다. 화신제를 빼고 보면 오랜만에 부락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족장과 10명의 장로들이 사람들 앞에 나섰다. 저마다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살벌한 기운이 굼베굼베 적봉의 산발을 타고 서려 올랐다.    해가 뜨겁다. 등이 후끈 달아오른다. 불덩이를 담은 커다란 솥뚜껑이 등판에 얹혀 있는 것만 같다. 뙤약볕을 이고 어떤 불길한 예감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 앞에 포리들이 결박을 지운 사람 하나를 끌어냈다. 사람들의 입에서 놀란 비명이 새여 올랐다. 끌려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마을에서 가장 인끔 높은 무자- 명이였다.   사람들의 맨 앞에 줄지어 선 화신무용단 성원들은 그 누구보다도 두려움에 지지름을 당하고 있었다. 무엇이 자기의 스승님을, 온 부락에 인끔 높은 무자를 오라를 지워 끌어낸 것인지 영문을 알길 없어 했다.   족장이 크악! 크악! 가래침을 돋구어 뱉고 나서 입을 열었다.   - 명은 화신무용단을 이끄는 책임자로서 사사로이 지경(地境)을 넘어 산북에 기여 들었다.  산북 무용단의 춤을 훔쳐보다가 산북 사람들에 의해 나포 되였고 다시 반송 되였다. 이에 본 부락에서는 부락의 명성을 더럽히고 두 부락지간에 결성된 상호불침입 조약을 깨뜨린 죄로 명에게 엄벌을 가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진은 그 누구보다 높뛰는 가슴을 느꼈다.   - 명! 너 자기의 죄를 시인하느냐?   명이 머리를 쳐들었다. 까랑까랑한 소리로 대답했다.   - 그게 왜서 죄인지 알 수 없구려. 난 그저 분단돼 있으며 맥(脈)을 달리 한 우리 춤의 파생된 부분들을 찾아 다시 화합의 춤 마당을 만들어 보려 했을 뿐이요. 한 무자의 소박한 꿈이 죄라면, 만약 그것도 죄라면 같은 피들을 갈라놓고 서로의 심장에 창을 박으며 피바다를 만든 어떤 사람들의 죄 값은 어떻게 치러야 하는 거요???   - 저런 발칙한 놈 봤나? 그런 망언도 서슴없이 하다니   명의 말은 예리한 비수가 되어 족장의 정곡을 찔렀고 장로들이 기겁을 하며 염소수염을 달달 떨었다. 족장이 씹어 뱉듯 말했다.   - 투석으로 결정합세다.   원로들이 부스럭거리며 돌멩이들을 내놓았다. 홍석, 백석, 백석, 홍석... 그 돌멩이들을 헤아려 보고 나서 족장이 소리 높여 심판결과를 선포했다.   - 월경죄에 상전모욕죄로 명에게 척목형(刺目刑)을 가한다.   좌중이 놀란 소리로 들끓었다.《척목형》이란 그 형벌의 참혹함으로 부락에서 오래 동안 끊겼던, 두 눈을 찔러 멀게 하는 극형(極刑)이였다. 사람들의 소요를 족장의 다음 말이 눌렀다.   - 허나, 그 동안 명이 화신무용단을 이끌고 부락에 공헌한 점을 헤아려 쌍목형(双目刑)은 면하고  단목형(單目刑)으로 실시한다.   《단목형》은 한쪽 눈만 찌르는 형벌이다. 포리들이 우르르 덮쳐들어 명을 말뚝에 비끄러매였고 형구(刑具)들을 날라 왔다.   - 선생님!!!  무동들이 부르짖으며 뛰쳐나가려 했다. 그런 화신무용단성원들을 포리들이 창으로 윽박질러 뒤로 물러서게 했다.   포리들이 명의 이마를 쇠사슬로 감아 말뚝에 단단히 비끄러 매였고 그중 하나가 화로에 시뻘겋게 달군 부저가락을 들고 명을 향해 다가갔다. 명은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지릅뜬 눈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찌르륵거리는 부저가락을 지켜보았다. 땀으로 얼룩진 명의 얼굴은 검붉은 색이 심하게 번져 부패한 나무 잎 같다. 연기를 내뿜는 듯한 긴 숨을 토하고 나서 어금니에 힘을 주며 말했다.   - 왼 눈의 시력이 약하니 오른 눈을 보존해 주소.     상체가 우람하고 목이 굵고 짧은 포리가 볼따구니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고 나서 발로 명의 허벅지를 밟았다. 눈께 까지 흘러 내려 온 명의 긴 눈섭을 걷어올렸다. 몇 번이고 견주다가 명의 왼 눈을 푹- 들이찔렀다.   피를 문 비명이 울렸다. 사람들 속에서 염이 혼절해 넘어 갔다.       교와 진 그리고 염이 스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늘에 별은 얼음 조각인 양 차갑게 빛났다. 주위는 너무나 조용해서 별이 흐르는 소리도 들릴듯하다. 왼쪽 눈에 안대(眼帶)를 댄 명은 평상에 앉아 자기가 아껴온 제자들을 굽어보았다. 끔찍한 시달림의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뒤, 스승의 하나밖에 없는 눈은 이제 고요하다.   - 교, 받거라   명이 북채를 들어 교에게 넘겨주었다. 스승의 북채였다. 손때가 올라 반질반질한, 끝머리에 명이라는 스승의 함자가 새겨진 북채였다.   - 이제 화신무용단의 중임을 네가 맡아보거라.   교가 놀란 듯 스승을 쳐다보았다.   - 나 원체 너희들을 나를 초월한 절세의 춤꾼으로 키워 보려 꿈꾸어 왔는데... 지금의 이 모양 이 심기로는 안 되겠다. 조용히 나의 마음, 나의 리론을 정리해 볼 터이니 일 후 무용단의 대소사를 네가 챙겨 주렴아.      스승은 아무 것도 없는 빈 몸으로 《화택》을 나섰다. 창백한 별 빛을 발끝으로 차며 산을 내렸다. 진이 뒤를 따랐다. 산 기슭아래  길이 나설 때까지 스승을 바랬다.   -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진의 등을 밀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 진정한 춤꾼으로 된다는 것은 결코 록록한 일이 아니어늘 진아,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춤에 전력하거라.   아스라한 적봉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명은 길을 떠났다. 옷자락을 떨치며 떠나는 스승의 뒤 모습을 지켜보다 진은 무릎 꺾어 큰절을 올렸다.    《화택》쪽에서 불독이 짖어 대는 소리가 들린다.     진은 또 한번 적봉의 동굴 속 화신 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왜 하필이면 우리의 스승입니까? 왜 스승께서 당치않은 죄로 소중한 신체까지 바쳐야 합니까? 왜 동족을 짓밟고 올라선 사람들이 외려 정의로운 자로 둔갑해서 예술밖에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문죄를 해야 합니까? 가르쳐 주십쇼!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진의 눈에 붉은 기운이 몰려들었고 목소리는 갱엿이라도 걸린 듯 메여 있었다. 호소하듯 떨리는 소리로 말하는 진을 지켜보며 토우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 너에게 뿔 황소를 재낄만한 대력사(大力士) 같은 힘이라도 있느냐?   그 뜻 모를 질문에 진이 어리둥절해져 머리를 저었다.   - 없삽니다.  - 너에게 만전옥답을 가진 대호(大戶)처럼 금붙이라도 있느냐?  - 없삽니다.  - 너에게 남에게 죄를 내리는 족장과 같은 권세라도 있느냐?  - 없삽니다.   - 그렇다면 거대한 뿌리를 가진 이 력사의 왜곡 앞에서 네가 할 일이란 대체 뭐 갰느냐?   진이 대답을 못했다. 토우가 말에 력점을 찍었다.   - 춤(舞)이다.   진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그 한마디를 주고 나서 흙 인형은 눈을 내려 감고 있다. 진, 사랑을 잃다     명이 떠난 뒤에도 《화택》에서 북소리는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어제 날 같은 중후함과 신명을 잃고 있었다. 스승의 당부를 받은 교는 화신무용단의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모두들은 중심을 지탱해주던 철심 하나가 쑥 빠져나가는 듯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힘에 부쳤던지 교 역시 무용단 일에 더는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전처럼 닭이 첫 홰를 침과 함께 일어나 북소리를 울리는 사람은 그저 진밖에 없었다. 스승이 형(刑)을 받던 정경이 눈앞에 삼삼히 떠올라 진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스승처럼 역시 담을 넘은 자기의 행적을 누가 엿본 것 같아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스승의 상처받은 신상이나 자기의 파격적인 사랑에 대한 괘념이 들 때면 진은 북채를 잡았고 춤을 추곤 했다. 춤이 사념과 번뇌를 벗게 해주는 명약 이였다. 그만큼 진은 이제 춤의 진미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었다.      거미줄이 서리고 먼지에 묻혀 있던 곡성 곁 과수밭의 막사는 진과 유로 말하면 천국의 루각임에 다름없었다. 밤이면 타는 목마름으로 화급하게 담을 넘었고 막사로 가서 유를 만났다. 이제 진과 유는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유는 진의 반려였고 춤의 동력 이였으며 생활의 전부였다. 그들은 부락사이의 반목의 물결이 밀어낸 금기의 가장자리에서 만난 사람들 이였다.   - 언제면 우리가 남들 앞에서 떳떳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그날이 올까요?     유의 말소리가 낮게 막사에 깔렸다. 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유가 여느 때보다 감상에 젖은 소리를 했다. 모호한 슬픔, 그리고 약간의 불안기 같은 것이 유의 엷은 눈꺼풀을 스쳐 감을 진은 본다.   - 창천(蒼天)에도 눈이 있다면 우리들의 사랑을 갈라놓지 않을 거요.   깊은 밤 소반에 정안수 한 그릇을 떠놓고 달보고 절하며 가약을 맺었던 둘 이였다. 함께 있다는 현실감을 붙잡기 위해 유는 진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 눈은 언제 나처럼 사랑이 담겨져 그윽하다. 그러던 유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 이상해요.  - 뭐가?  - 오늘따라 당랑이 불을 켜지 않아요? 왠지?   유의 예감은 적중했다. 말을 마치기 바쁘게 막사 밖에서 《홍모》가 다급하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르르 발 구름소리와 함께  막사의 문설주에 걸친 가마니때기가 훌떡 젖혀지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엄청나게 밝은 홰불 빛이 밀려들었다. 그 엄청난 광량(光量)에 둘은 흠칫 몸을 떨었다.      진과 유는 가지런히 옥사의 대청에 꿇리여 앉았다.    매처럼 좁고 빛나는 눈길을 가진 산북의 족장이 포교(捕校)의 동반을 받으며 나타났다. 매 눈으로 두 사람을 한동안 쏘아보았다. 그 눈길이 참기 어려운 고문 이였다. 드디여 침묵을 깨며 족장이 포리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 남하 놈팽일 10대 치고 풀어줘라.   포리들이 어리둥절해서 족장을 쳐다보았다.   - 젊은 놈들이 혈기가 끓어올라 붙어먹은 짓이고 또 여태 두 부락사이에서 처음 있은 일이라 형을 가볍게 내렸다. 그저 이 이후로 더는 남의 부락 녀자를 넘보는 발칙한 짓을 안 저지르겠다는 다짐장만 쓰면 없는 일로 묵과하겠다. 그리 알고 대답을 올려라.   - 어서 족장 님의 너그러운 관용에 감사를 올리지 않고  뭘 해?   포교가 곁에서 윽박질렀다. 진이 머리를 가로 저었다.   - 사랑에는 지경(地境)이 없습니다. 우린 잘못한 것이 없어요.    - 이런 간뎅이가 부었나? 봐줬더니만 새 이불홑청에다 오줌싸려 드는구나.   포교와 포리들이 흘금거리며 저희들 족장의 눈치를 보았다. 시퍼렇게 돌아서는 족장의 눈에 퍼런 번개가 친다.   - 그래 다짐 안 하겠느냐?    진은 유를 건너보았다. 유도 진을 지켜보고 있다. 둘은 서로의 눈빛에서 힘을 얻었다. 진이 이를 사려 물고 머리를 가로 저었다. 포교가 몸을 으스스 떨었다.   - 넨장, 환장하겠어.   족장이 포교를 불러 귀가에 무어라고 속닥거렸다. 포교가 머리를 주억거렸다. 이어 포교가 두 사람을 향해 호령했다.   - 그렇다면 산북의 법대로 산북사람을 단죄하겠다는 족장 님의 분부 시다.   진과 유가 머리를 쳐들었다.   - 너희가 이 벌을 이겨낸다면 하늘의 뜻으로 알고 내 허락해 주리다.   족장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족장의 눈에서 서슬 퍼런 랭기가 흘렀고 그 눈빛에 대청의 사람들은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 불기와 지짐이라고 들어 봤느냐?   대령해 선 포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표정들이 크나큰 경악에 어려 일그러진다.   그 형벌에 대해 진은 어른들에게서 귀동냥해 들은 적 있었다.《불기와 지짐》이란 유부남과 간통한 녀자나 풍류방(風流房)의 기녀, 그리고 남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무당 년들에 가하는 잔학한 형벌 이였다. 발가벗겨 매여 달고 치부와 온 몸의 곳곳을 달군 기와 장으로 뜸질하는 형벌이다.   진이 주체할 길 없이 높아진 소리로 반문했다.   - 저 녀자에게 무슨 죄가 있나이까? 남의 유부남을 빼았앗나이까? 뒤 골목에서 몸을 팔았나이까? 아니면 온 마을에 마마가 돌라고 저주라도 했나이까?   유가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수정처럼 차게 빛나는 눈으로 족장을 직시했다.   - 망극하나이다. 족장 님께서 그런 형벌로라도 저희들의 사랑에 허락을 주신다면 소녀는 달갑게 받겠나이다.   - 안돼. 유!   진이 다급히 소리 질렀다.    - 후회 안 하겠느냐?   족장이 더욱 빛깔이 깊어진 매 눈을 치뜨며 유를 보았다. 살갗 깊숙이 박히는 그 시선을 받아내며 유가 한층 나직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 사랑을 위한 일이 온데 무슨 후회가 있겠사옵니까.    포리들이 쩔그럭거리며 형틀을 챙겼다. 유는 포리들에게 잡혀 몸부림치며 안 된다고 소리소리지르는 진을 바라보았다.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진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몸을 돌렸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순백의 몸뚱이를 빛내며 차가운 형틀 우에 누웠다. 포리들이 어리친 눈길로 족장을 쳐다보았다. 족장의 볼이 불끈 경련하고 있었다.  벌겋게 단 기와 장들이 차례순으로 유의 여린 살갗 우에 놓여졌다.   치직- 살 타는 냄새가 대청에 퍼졌고 그와 함께 노란 연기가 피여 올랐다. 기와 장에 살갗이 척척 묻어 났다. 그러나 대청의 사람들은 녀자의 비명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유! 유!! 유!!!   부르짖으며 진은 눈을 지 질러 감았다. 눈앞에서 수십 마리 나방 떼가 어른거린다. 눈을 감아도 한 장 한 장의 기와장이 유의 몸에 놓여지는 형상이 선명히도 떠올랐다. 때마다 진은 자기도 달군 기와장에 대인 듯 몸을 꿈틀거렸다.  랭혹한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족장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옥사를 박차고 나갔다. 말에 올라탔다. 말등자를 바로 밟지 못해 넘어질 듯 비틀거렸다. 부하들이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말고삐를 당기려다 말고 족장이 감탄인지 욕설인지 분명치 않은 소리로 내뱉었다.   - 지독헌 년        과수밭,  진은 유를 업어다  뉘였다. 맹금(猛禽)의 부리에 걸려든 듯 유는 온 몸이 찢겨져 있었다. 우박을 맞은 꽃잎처럼 유는 지치러 들어 있었다. 만개한 꽃 같은 커다란 화흔(火痕)이 온 등판에 번져나가 있었다. 유의 몸에 약초를 짓찧어 붙여주는 진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어 내렸다. 눈물에 약초를 반죽해 진은 유의 온몸에 붙여 주었다. 《홍모》가 끙끙대며 혀를 내밀어 주인의 덟어진 얼굴을 핥는다.   - 진...    언제 깨여났던지 의식이 돌아온 유가 진을 불렀다. 힘겹게 돌아누운 그녀의 퀭한 눈 그늘이 섬뜩하도록 어둡게 느껴졌다. 가까스로 눈망울을 크게 열고 유는 진을 쳐다본다. 진이 눈물을 훔쳐내며 다급히 유의 머리 전에 엎드렸다.    - 진, 날 꼭 안아주세요.   그 나지막한 소리를 귀 울림같이 들으며 진이 유를 껴안았다. 상처자리가 아파 유가 이마 살을 모았다. 진의 품속에서 그녀는 작은 공 벌레처럼 꼬부라졌다. 그런 유를 두고 진은 어쩔 바를 몰라했다. 손아귀에 힘을 주면 유의 몸이 유리잔처럼 깨여져버릴 것만 같았다.   진의 품에 안겨 유는 진을 올려다보았다. 상처 입은 산짐승의 눈처럼 개개한 눈동자로 진을 쳐다보았다. 입가에 반월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처량하게 웃었다.   - 진, 날 잊지 말아줘요.    유의 눈 기운이 혼혼해 졌다. 그리고 몸이 점점 나뭇가지처럼 딱딱해졌다. 진이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가슴을 문지르고 팔을 문지르며 손끝에서부터 발끝으로 번져 나가는 퍼런 빛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유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만 갔다. 진의 어깨에 둘려졌던 유의 팔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안돼! 날 버리지마 유. 죽지마 유! 안돼. 죽지마.   진은 눈물의 폭포를 쏟아내며 유를 불렀다.   - 날 버리면 안돼 유, 족장이 우리 사랑을 허락했는데. 하늘이 우리 사랑을 허락했는데. 죽으면 안돼 유! 유!!   과수밭에 어스름이 내린다. 막사주위에서 화당랑들이 뛰여와 더듬이에 불을 켜들었다. 불 화환이 되어 막사 주위에서 빙글빙글 맴을 돌고 있었다.                                     진, 스승을 찾아가다    두 부락을 가른 곡성의 거대한 몸체가 묵묵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우직한 선머슴 같은 성채의 무릎 아래에서 부락사람들은 갈라져 살고 있다. 세월의 더께가 청태처럼 까실까실 앉은 돌 각담은 이젠  슬픔 짙은 빛깔로 음울하게 서 있을 뿐이다.   진은 매일이고 곡성 곁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진은 까치발을 하고 담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진은 멀리 산북의 밋밋한 산등성이를 타고 펼쳐진 과수밭을 점도록 바라보곤 했다. 그 과수밭에, 밤이면 화당랑이 저마다 더듬이에 등롱을 켜들던 그 천국의 풍경 같은 과수밭에 이제 사랑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어지러운 꿈의 자락에 이끌리듯 밖으로 나와 담장 곁에 붙어선 그 눈빛에는 항상 애수와 여한이 안개처럼 젖어 있다. 그는 이 몇 달 동안 마치 다른 시간의 경계를 지나 온 것처럼 단정하던 얼굴빛을 잃어버렸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잡초처럼 어지러웠고 얼굴에는 어두운 골이 깊게 파여 있었다.   은밀하게 빚었던 사랑에 대한 향수를 이루지 못한 채 유는 갔다.   스스로 그어 돋우어진 상처를 운명인 양 받아들이며 유는 갔다.   하늘이 준 만큼 사랑이며 목숨을 건사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고 덧없음을 진에게 깨쳐주며 유는 갔다.    어디선가 바람 한 줄기 불어와 먼 곳의 향기를 묻혀 놓는다. 과수밭에는 하얀 꽃이 백사지 같이 피여 있다. 두 부락의 사람들은 곡성지경에 남북과(南北果)라는 과일을 심었다. 도작(盜作)하는 과수농들이 가만히 산북종과 남하종을 접종하여 배육해 낸 과일, 과육이 많고 그렇게 달콤했다. 가을이면 달디단 과즙의 향이 백 리 밖까지 내달렸다. 가만히 재배하지만 두 부락의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과일 이였다.   접목 되여 꽃 피우고 열매를 다는 과일처럼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꽃을 피우려 했는데, 풍성한 결실을 맺으려 했는데...   - 차라리 꿈이였더면은 … 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슬픔에 사무쳐 눈을 감았다.   그 사이 불독이 새끼를 낳았다. 산북의 《홍모》와의 사랑의 결정 이였다.   미물도 저렇게 거침없이 사랑을 나누는데...   새끼 개의 함함한 털을 쓰다듬으며 감개에 젖어 진은 또 다시 눈물을 쏟았다.   심산(心散)하기 그지없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진은 구명(求命)처럼 한 사람을 머리에 떠올렸다.    호수 위로 어둠이 성깃성깃 내리고 있다. 어둠 살이 묻어나는 호수는 극도로 붓을 아낀 수묵화 같았다. 스승 명은 깊은 산 속 호수 가에 기거하고 있었다. 속세를 떠나 깊게 은둔해 있었다.   오래 동안 보지 못했던 스승은 많이 늙어 있었다. 탈색시킨 광목 같이 노리끼리하게 파리해진 얼굴 군데군데에 앉은 검버섯, 들뜬 잇몸, 허나 하나밖에 없는 눈빛만은 귀기가 어릴 정도로 형형하게 살아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은 목 울대가 조여들고 콧등이 시큰해 난다.     호수가의 너누룩한 돌에 정좌하여 스승은 반듯한 수면을 지켜보고 있다. 독락(獨樂)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앉아 있었다.     - 스승님.    진이 가까이 다가가며 불렀지만 스승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다. 진도 스승을 불러놓고는 뒤를 이을 어떤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수없이 다가올 래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없어 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스승을 찾았던 진은 스승의 골몰한 모습에 말을 삼키고 스승의 눈길을 쫓았다.   호수의 복판에서 불이 피여 오르고 있었다. 파란 불길이 피여 오르고 있다. 오래 된 못에 침전된 가스로 생기는 불 이였다. 미약한 바람에도 불길은 춤꾼의 허리처럼 흔들거렸다. 스승이 몸을 스르륵 일으켰다. 강물 한가운데 떠서 삿대 없이 스스로 흘러가는 뗏목처럼 스승이 몸을 움직였다. 진을 방임한 채 혼자처럼 스승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런 스승의 춤사위가 이전보다 많이 바뀌어있음을 진은 느낄 수 있었다.   춤을 추며 명이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가 수면 우에 어린다. 저음의 피리소리 같다.  - 물의 흐름을 찬이 보아라.   물은 맑고 깨끗한 심상을 지녔다. 물은 풍요한 덕성을 지니고 있어서 세상 모든 것을 부드럽게 만져준다. 불의 흐름이 강한데 비해 물의 흐름은 유연하다.   불의 열정을 지니되 물처럼 행동할 것을 바란다. 불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일소해 버린 다면 물은 세상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새로운 창조를 기약할 수 있다. 거친 불 뒤의 물은 새로운 재생을 말해 준다.   불춤을 추는 우리가 물로 만나자는 의미는 불의 열기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열기를 더 크게 살리기 위함이다. 탁하고 어지러운 것이 사그러진 후의 순결한 재萱?위함이다.   네가 물의 흐름을 모를 때 불의 타오름도 다 리해할 수 없을 거다. 이것이 내가 산북의 춤과 우리 춤에서 더듬어 낸 전부다 ....   스승의 낯설면서도 익숙한 춤사위에서 진은 그 전하고자 하는 춤의 언질을 뒤미처 받아 안았다.  세상을 버리려는 듯, 세상을 안으려는 듯한 그 무아의 몸짓에서 한낱 애욕의 틈바구니에 보잘것없이 서있는 자신을 보았다.  호수에 꽃은 없었지만 진은 분명 향기를 맡았다. 시린 상처가 피워 올리는 향기였다.                        진, 동인들을 보내다     밤  늦도록 진은 석등이 타오르는 뜰에서 하나 하나의 춤사위에 땀 벌창이 된 몸을 싣고 있다.   오랜만에 스승을 뵈였다. 회한과 미련으로 삶의 갈피마다 어찌할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인간적 약점으로 부대끼면서 그런 드팀없는 스승을 대하는 진은 눈가에 슬몃 부끄러운 눈물이 맺혔다. 마음자리 마디마디에 접붙여진 스승의 말을 떠올려 보노라니 자기를 떠밀어온 모든 감정과 책무, 삶을 속박했던 육신의 욕망, 그리고 그 주기에서조차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시 북채를 잡았고 새로운 춤사위에 자신을 잡아넣었다. 스승의 언질을 들으면서 진은 단전(丹田)에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기(氣)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진으로 하여금 확실하게 북채를 잡게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진저리치도록 가슴아프게, 때로는 너무 서글프다 못해 더러 유쾌한 느낌을 주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그는 춤에 자기를 바쳤다.      춤을 추면서 한편 진은 교를 기다리고 있다. 불독이 진의 곁에서 불안하게 서성거린다. 한나절부터 불독의 새끼가 보이지 않았다. 불독을 따라 새끼를 찾아 나섰던 진은 어느 개울가에서 개의 목에 걸어주었던 액세서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개의 털을 발견했다. 언뜻 짐작이 가는 쪽이 있었고 진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눈곱이 잔뜩 끼고  진득한 콧물이 흐르는 개, 새끼 잃고 주눅들어 처량해하는 불독이 가여워 턱과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개는 진의 팔에 얼굴을 비벼댔다.   문뜩 노래 소리가 들렸고 돌계단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교였다. 턱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교가 올라 오고있다. 교는 몹시 취해 있었다. 늘 불쾌하게 취해있는  교의 그런 모습이 진의 속을  울컥 뒤집었다. 뜰에 섰는 진을 발견하자 교의 눈빛이 잠깐 굳었다.  - 왜? 너도 한잔 할려나?     교가 주기가 력력한 눈으로 앞을 막는 진을 쳐다보았다. 괴춤에 달린 술 조롱박을 내밀었다. 그 조롱박을 진이 밀쳤다. 교의 몸에서 풍기는 썩은 과일 같은 술 냄새를 참으며 진이 물었다.    - 개를 어찌한 거니?  - 몰라   시치미를 따며 지나치려는 교의 손목을 진이 감쳐 잡았다.   - 말해봐. 개를 어찌한 거냐구? 불독의 새끼를.   교가 몸을 가누며 진을 쳐다보았다. 입 귀에 야비한 웃음을 물고 자기의 배를 가리켰다.   - 이 속에 들었다. 왜?   진의 귀에 입을 가져다대며 말했다.   - 개고기 냄새를 맡으면 하늘의 신선도 내려온대.   - 뭐야?   짐작한 바였지만 그의 입으로 사실을 확인한 진은 격노를 참지 못했다. 교의 면상을 주먹으로 내 질렀다. 교가 석등 앞에 뒹굴었다. 그런 교의 멱살을 끄잡아 진이 일으켰다.   - 너 왜 이러고 있어? 선생님의 당부도 잊었어? 지금 넌 이 무용단의 유일한 책임이야.   요즈음 교의 행동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교는 완연 딴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춤에 도통 관심이 없었던 반면, 제멋대로 《화택》을 뛰쳐나갔다는 밤늦어야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얼마 전에는 무용단 애들을 끌고 족장이 첩을 맞아들이는 잔치로 가서 춤을 추어주었다. 그때 함께 가자고 잡아끄는 교를 진은 단호히 밀쳤다.   - 우리는 신을 노래하는 무용단성원이지 족장의 노리개가 아니다.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적봉의 나래 부러진 매로 살지언정 속세의 나래 성한 닭으로 살지 말라던 그 말씀이.   하지만 교는 몇몇 애들을 끌고 기어이 잔치에 참석했다. 오늘도 족장의 생일이라 보신용으로 개를 잡아 바친 것 이였다. 일전에 장에서 산 일월이 새겨져있는 도자기도 교는 족장에게 선물했다. 그렇게 권세 자들에게 비굴과 아첨을 보이는 교에게 진은 릉멸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인에 대한 굳은 믿음에 균렬이 생기고있음을 진은 느낀다.   진이 《화택》으로 들어가 벽에 걸린 북채를 벗겨들고 나왔다. 스승 명이 교에게 넘겨준 북채였다.   - 선생님의 믿음에 미안하지도 않아? 남들 앞에 본을 보여 줘야 할 네가 왜 이러는 거냐? 왜?   일심으로 춤의 길을 걷자고 맹세하던, 그렇게도 양양하던 꿈 몰이의 초반이 생각나 진이 교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 혼자서 잘난 척 말어.   교가 손사래를 쳤다.   - 나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밥되는 거 없고 돈 되는 거 없는 춤에 명줄을 달고 싶지 않다구.   교가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 이 숨막히는 곳에 나를 가둬놓고 안주하며 난 세상에 춤만이 최고라 믿어왔어. 헌데, 헌데 모두가 허상 이였어.     그 말에 자제에도 불구하고 진의 언성이 높아졌다. 북채를 쳐들며 말했다.   - 이 몽척(夢尺)에 미안하지 않아? 그래 신 앞에서 다짐한 초지(初志)를 버리겠단 말이냐? 꿈을 이루려고 맹세했던 우리가 아니였나?   교가 웃겨 하는 표정을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 맹세? 뭘 맹세해? 무자가 된답시고? 무자가 되는 길이 뭔지 너 알어? 난 이제야 알 것 같다. 무자, 그 표준의 금을 긋는 사람들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야. 너도 봤지. 춤 경색에서 춤을 잘 춰도 못 춰도 평점은 그 사람들이 내린다구. 이게 현실이야. 이 세상에 진정한 무자(舞者)란 없어.     교가 물지 똥 같은 랭소를 피식 흘리며 진의 손에서 북채를 앗아냈다. 석등의 불 집에 던져 넣었다.   - 너 미쳤냐?   진이 덴겁해 불 집에 손을 넣어 북채를 끄집어 내였다. 불붙는 북채를 훅훅 불어 불을 껐다. 타다가 반 남아  남은 북채를 들여다보며 혼자 말처럼 말했다.   - 무릎이 부스러지더라도 나는 이 길을 갈 생각이다. 달리 다른 길을 알지 못하므로.   교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아집 강하고 딱 부러진 진의 성격에 질려 버렸음이 확실했다. 술이 조금 깨인 듯한 눈으로 진을 보다 말했다.   - 나 이곳을 떠날 거야.     며칠 안 되여 교는 과연 《화택》을 떠났다. 밤중에 슬그머니 떠나버렸다. 산을 내린 교는 엉뚱한 방향에서 출세 줄을 탔다. 부락의 곡창지기라는 작은 벼슬을 가졌다. 북채를 들었던 손에 쌀 담는 되를 들었다.   교의 떠남에 유감을 보이던 염도 뒤미처 떠났다. 응집된 환상이 깨어진 뒤에 동인들은 자아를 찾아 뿔뿔이 흩어져간다.  염은 결혼을 했다. 상대는 부락의 대부호의 조카였다. 무용경색에서 돈 많은 삼촌 때문에 방에 올랐던 그 조랑말 타고 으스대던 사람, 지금은 그도 산북장사치들과의 밀수거래로 부락에서 손에 꼽는 부호로 되었다.   사인교가 화택에 까지 와서 염을 맞아갔다. 떠나면서 염은 진에게  무언가 남겨 주었었다. 북채에  다는 붉은 술 이였다.   - 지난 봄, 장거리서 산 거야. 원체 일찍 주려 했었는데...   염은 뒤 말을 흐렸다.   - 춤으로 대성하길 바란다. 못난 우릴 닮지 말고.    염이 사인교에 올랐다.   - 잘 살아 봐. 행복해야 돼.   조금 서글픈 마음을 감추며 진이 조용히 축복해 주었다. 자기를 향해 짓는 그 미소 속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힘이 느껴져서 염은 좀 무안해졌다.   사인교가 《화택》을 떠났다. 사인교의 뒤를 따라가며 불독이 컹컹 짖어 댔다. 진은 사인교를 둘러싸고 장구 치고 나팔을 불며 내려가는 혼례대오를 지켜보았다.     - 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뭘까. 세상은 얼마나 자질구레한 것들을 필요로 하는 걸까. 세상 것 가운데 욕망과 황금과 치환할 수 없는 것이 정녕 있는 걸까.    《화택》의 뜰에서 진은 초겨울 빈 들판에 홀로 꽂힌 허수아비인 양 오래도록 서있었다. 뿌리를 보이면 죽는다는 모종(苗種)을 옮기듯 반 도막남은 북채를 조심스럽게 손바닥으로 감싸쥐고 서있었다. 그러다 진이 그 누구의 지령을 받은 사람처럼 북채를 쳐들었다. 휘둘렀고 북소리를  따라 몸을 솟구었다. 마치 자신을 소진(消盡)시키듯 격렬한 춤을 추었다.   사인교가 멀리 굽이를 돌 때까지 북소리는 끊기지 아니하였다.   햇빛이 완전히 사월 때까지 북소리는 끊기지 아니하였다.   적봉에 달이 뜰 때까지 북소리는 끊기지 아니하였다.                                  진, 금기를 범하다       비의 계절 이였다.   비의 오지랖 넓은 손길에 세상 천지 젖지 않은 것이라곤 아무도 없다.   비는 벌창해진 성미로 산 홍수를 몰아왔다. 홍수는 적봉기슭의 《화택》을 무너뜨렸고 부락 사람들의 가옥이며 전답을 밀어 버렸다.   초미(焦眉)의 문제는 부락에서 불씨가 하나 둘 꺼진 것 이였다. 무심했던 사람들은 급기야 당황해 졌다. 불씨를 얻으러 백방으로 애썼다. 그러나 저장해둔 발화목(發火木)들이 비에 눅눅해진지라 나무를 비벼대도, 화도(火刀)를 극성스레 쳐대도 불을 일으켜 내는 수가 없었다. 족장이 총애하는 교를 불러 화신무도 추게 하면서 화신에게 치성을 드렸지만 종시 불을 일으켜내는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며칠째 취연(炊煙)을 볼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밤이면 집집마다 켜들던 호롱불을 볼 수 없었다.   마을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석등이 꺼진 《화택》의 뜰에서 진은 비에 갇힌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대줄기 비를 맞으며 진은 산을 내렸다. 곡성을 넘었고 무언가를 짊어지고 다시 넘어 왔다.   그의 등에 진 것은 불을 저장하는 장화통(藏火筒)이였다. 진은 담 곁의 높은 산 더기에 잠간 멈추어 서서 비안개에 뽀얗게 가려진 산북의 산을 바라보았다. 물빛 알갱이들이 허공 속을 내리긋는 게 보였다. 과수밭가에 묻고 온 유가 이 찬비에 떨고있을 것을 생각하니 목이 메였다. 한편 남하의 곤궁을 헤아려 불씨를 선선히 넘겨준 산북 사람들이 고마웠다.     적봉 동굴 속의 화신을 모신 화당에 다시 불이 피여 올랐다. 집집의 창문마다 불빛이 송이송이 피어나기 시작했고 굴뚝에는 연기가 피여 오르기 시작했다. 기쁨과 감격에 들뜬 마을사람들이 삶은 음식을 들고 《화택》에 찾아왔다. 불씨를 얻어준 진을 에워싸고 춤 마당을 펼쳤다. 진의 춤사위에는 전에 없는 활력이 묻어 있었다. 그들과 어우러지면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춤에 대한 보람을 진은 피부로 느낀다.   세상을 삼켜버릴 것처럼 성이 나 흘러 넘치던 비가 조금씩 줄기 시작했고 드디여 멎었다. 그리고 하늘 깊숙이 스민 붉은 빛이 서서히 부락의 상공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어느 아침, 누군가 적봉을 가리키며 깨지는 소리를 질렀다. 적봉의 산정에서 놀라웁게도 검은 실연기가 피여 오르고 있는 것이다. 적봉은 연기를 뿜고 있었고 달빛인지 별빛인지 모를 박명(薄明)에 서려있다. 수상쩍은 기운을 내뿜고 있는 산을 쳐다보며 말세가 오려나고 부락사람들은 저마다 불안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 경악의 불길에 기름을 부으며 대각 소리가 울렸다. 족장 굉이 두 볼을 팽팽히 살리며 대각을 불었고 그 소리에 부락 사람들이 바삐바삐 적봉기슭의 《화택》에 모여들었다. 족장을 위시하여 10명의 장로들이 앞에 나섰다. 누구의 이마에나 음습하게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사람들은 읽을 수 있었다. 살벌한 기운이 축축한 대기 속에서 굼닐었다.   포리들이 결박을 지운 사람을 끌어냈다. 진이였다.   월경(越境)하여 산북의 불씨를 훔쳤고 또 사사로이 불씨를 나누어주었다는 것이 죄였다. 불씨는 매년 초봄, 부락에서 화신제를 연 뒤 부락의 권위인물이 가가호호에 나누어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한낱 춤꾼이 족장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불씨를 나누어주었으니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장이 들 씌워진 것이다. 게다가 누군가 진이 일전에 지경을 넘어 산북의 녀자와 사랑을 나눈 일까지 들고 나왔다.   족장이 크악! 크악! 가래침을 돋구어 뱉고 나서 입을 열었다.   - 진은 이웃 산북에 넘어가 불씨를 훔쳤다. 이는 두 부락사이의 적대감정을 극화시키는 도화선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부락의 허락도 없이 아무사람에게나 나누어주었다. 여러분이 그의 죄를 낱낱이 까밝혀 문죄하기 바란다.   진은 연막 낀 눈으로 족장과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홍수에 밀린 《화택》을 수건하고 넘어진 석등도 세우며 밤을 패였던 진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피로해 보였다.    장로 하나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 진이 비록 불을 훔쳐왔다지만 일방적으로 그를 문죄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진은 마을사람들이 불을 지피지 못해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는 정경을 보고 그들을 구하자는 일념에 그 후과를 알면서도 월경했던 것이옵니다.      또 한 사람이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었다.   - 아시다시피 적봉이 이상한 기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한낱 춤쟁이가 망동한데서 산신을 노엽힌 결과라고 봅니다. 그를 중죄로 다스려 신의 감정을 무마시키는 것이 도리인가 봅니다.   - 잠깐요. 상기의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진은 화신무용단의 맥을 이어나갈 인재입니다. 그런 그에게 중형을 내리면 우리 남하족은 하나의 출중한 춤꾼을 잃게 될 겁니다. 족장 님께서 명찰하시옵소서.     진은 함구무언 머리를 숙이고만 있었다. 숙인 머리통 속의 새하얀 속살과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촘촘히 밴 땀을 보이고 있다. 그의 반발은 무력하고 막막했다. 그의 정당성의 전개를 허용할 만한 어떤 종류의 빌미도 족장은 만들어 주질 않았다. 그런 족장의 태도는 진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족장이 길어지는 변론을 무참히 끊어 버렸다.    - 투석으로 결정하세나.   장로들이 부스럭거리며 저마다 옷소매 속에서 돌멩이를 꺼내들었다. 사람들 저마다 숨을 꺽 죽이고 돌멩이를 지켜보았다. 홍석은 문죄(問罪). 백석은 사면(赦免)이였다.   홍석이 다섯 개 백석이 다섯 개가 나왔다.   투표를 다시 했다.   역시 홍석 다섯 개 백석 다섯 개가 나왔다.   - 문죄와 사면으로 의견이 각이 한데 공정을 위해 몇 사람 더 선발해 아퀴를 짓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장로하나가 제안했다. 마을에서 신분 있다는 몇 사람을 불러냈다. 그 사이에 교와 염도 끼여 있었다.   투석이 다시 되었다. 염이 선 참으로 백석을 던졌다. 그런데 교가 머뭇하고 있었다. 불안한 시선을 연신 좌우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교가 침을 소리나게 삼키고 나서 꼭 움켜 쥔 손을 펼쳤다.   홍석이였다.   염이 당혹한 눈길로 교를 쳐다보았다. 교는 염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비껴보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인 것이다. 한 무용단에서 예술의 비상을 위한 둥지를 틀었고 매일이고 나래 치는 련습을 하면서 고통과 영욕을 같이 나누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속에 족장이 소리 높여 심판결과를 알렸다.   - 결과가 나왔다. 홍석이 15개, 백석이 13개. 명의 전철을 밟은 진을 쌍목형으로 문죄한다.    - 안되오. 진이 우리에게 불씨를 주었는데 오히려 그에게 벌을 내리다니.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들었다. 두꺼운 겹 주름이 뒤룩뒤룩 덮인 시푸르뎅뎅한 얼굴로 족장이 사람들을 흘려보았다. 그리고 손짓으로 포리들을 불렀다. 족장에게 사람들의 반대의 소리는 쥐가 벽을 갉아대는 소리쯤으로 들렸다. 포리들이 형틀이며 화로, 부저가락 등으로 형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 번씩이나 중복되는 잔혹한 행태에 몸서리를 쳤다. 포리들이 진을 말뚝으로 끌어갔다. 말뚝에 머리를 얽동이려 하였다.   - 잠깐만  진이 소리질렀다.    - 청구 하나가 있나이다.   - 뭐냐?   족장이며 모두들의 눈길이 진에게 쏠려 졌다.   - 마지막으로 화신무를 한번 추고 싶습니다.   족장이 턱짓을 했다. 포리들이 결박을 풀어 주었다. 염이 눈물을 삼키며 북과 북채를 찾아 주었다. 아스라한 절망이 감돌던 진의 눈이 호수 같은 온정을 찾아 있었다. 북채, 반도막이 난 그 북채를 진이 추켜들었다.   북 소리가 울렸다. 습기를 먹은 북이 좀 틀린 듯 하나 더 웅숭깊게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골수를 쪼개고 들어갈 정도로 처량했다. 진이 덫에 치인 짐승처럼 몸을 흔들었다. 마음속 가득 찬 공포와 울화를 털어 내련 듯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춤에는 애절한 인내와 맵싸한 고통이 배여 들어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슬픈 사연을 흐느껴 하소연하기도 하고 벅찬 가슴을 감싸며 하늘을 우러러 열락(悅樂)의 몸짓을 짓기도 한다. 진은 마지막 춤으로 응어리진 정한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둘러선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한정어(限定語)가 가슴을 찔러서다.   평상 우에서 진이 춤을 마무리했다. 하나의 청동 조각처럼 굳어져 춤의 마지막 소절을 마쳤다. 진은 호흡을 고르며 눈을 들어 사위를 둘러보았다. 포악을 떠는 족장이며 형구를 갖추며 채비를 하고있는 포리들이며, 속수무책의 련민으로 쳐다보는 마을사람들이며, 그 속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염이며, 슬그머니 돌아서 사람들 틈바구니를 빠져가고 있는 교의 뒤 잔등이며, 끙끙대며 젖은 털을 혀로 핥는 불독이며, 아아 하게 솟은 적봉이며. 멀리 길게 누웠는 곡성이며...를 동공 속에 낱낱이 새겨 두었다.   - 시간이 되었다.   족장의 포효가 울렸고 포리들이 진에게 결박을 지우려 평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진이 들린 사람처럼 간간하게 웃었다. 하늘 우러러 대갈일성(大喝一聲)을 지르며 두  손가락을 곧추 세워 자신의 눈을 힘껏 들이찔렀다.                                  진, 불과 만나다     토우 앞에, 진은 꿇어앉았다. 무릎은 으깨져 피투성이였다. 더듬으며 넘어지며 찾아온 화신이 모셔졌는 동굴, 피범벅이 된 얼굴에 화당의 온기가 끼쳐왔다. 아직도 온몸 골골샅샅에 밴 채 응어리로 남아도는 통증에 정신이 가물가물해 졌다. 진은 화신이 모셔졌을 곳을 짐작으로 확인해 가까스로 자세를 바로 했다. 피를 뚝, 뚝 흘리는 듯한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앉았다.   흙 인형이 입을 열었다.   - 고통스럽느냐?  - 예,   터진 입술을 혀로 적시면서 진은 꺼져 가는 소리로 말했다. 용암으로 지져놓아 움푹 패인 듯한 몸과 마음의 깊은 고통을 술회할 길 없어 몸부림하는 그의 텅 빈 눈확으로 눈물이 배여 나왔고 그것은 이내 묽은 피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 고통에서 해탈 할 방책을 대줄 가?  - 대주옵소서.    화신이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 춤을 버려라.   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부림하는 그의 손에 옷 속에 품은 반도막의 북채가 만져졌다.   - 버릴 수 있겠느냐.   진이 말이 없자 토우가 다시 한번 물었다. 북채를 뿌지직 소리나게 잡으며 진이 또박또박 말했다.   - 못, 못 버리겠삽니다.   그런 진을 지켜보다 토우가 감개를 토했다.   - 업연소치(業緣所致)라. 모든 것은 업에 의해 이루어진다더니, 너무나도 질긴 업장이로구나.   진에게 들붙은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신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이윽고 눈도 감아버렸다.       적봉의 산정에서 피여 오르던  실연기가 굵어져 갔다.   적봉 우를 까맣게 뒤덮으며, 괴이쩍은 울음을 울며 새들이 날아갔다.   적봉으로부터 화산재가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화산재는 부락을 무채색의 전경으로 만들었다. 하늘은 재빛 모포를 뒤집어 쓴 듯 하다. 산도 집도 사람도 온통 재 빛이었고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도 먹물 이였다. 재가 날리는 바람 속에는 온통 녹슨 쇠붙이 냄새와도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그와 함께 마을사람들은 산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뢰소리를 방불케 하는 그 소리는 산 속 깊이로부터 울려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날짐승들의 불안한 소리에 뒤섞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도 있었다.   북소리였다. 북 소리는 적봉아래의 《화택》으로부터 울려오고 있었다. 《화택》은 화산재가 뒤섞인 재 빛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북소리는 운무를 비집으며 집요히 울려나오고 있었다.   - 천렬지화(天裂之火)가 닥치려나 보다.   머리에 화산재가 한 켜나 앉은 족장이 몸을 으스스 떨었다.     드디여 어느 아침, 꽈르릉! 지축을 흔드는 소리와 함께 적봉의 꼭대기로부터 화염이 뿜겨 나왔다. 잠자고 있던 적봉이 몸을 틀며 용트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은 삽시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남부녀대하고 집과 가축을 버린 채 사람들은 천방지축 마을을 뜨기 시작했다. 산의 골을 타고 진 붉은 용암이 터져 내렸다. 용암은 홍수처럼  골을 이루며 흘러 내렸다. 흘러내려 가옥들을 태웠고 나무와 풀을 핥았으며 곡성을 밀어 버렸다. 사람들은 아우성이며 불을 피해 사방으로 달아났다.    그 난장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용암이 흘러내리는 쪽을 마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진이였다. 적봉으로 난 돌계단을 톺아 더듬이며 비칠이며 진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불안한 듯 주위를 경계하며 불독이 사납게 짖어댔다. 날카로운 이빨이 불빛 속에서 번뜩인다. 불독이 진의 바지가랭이를 물어 당겼으나 주인의 확고한 발길을 돌려내는 수가 없다. 주인의 용의를 알아 개는 이젠  주인의 앞에 나섰다. 앞에서 향도를 해주었다.   용암이 터져 오르는 굉음에 귀때기가 잘려나갈 듯 했다. 날리는 화산재에 목이 메였다. 회오리를 만들며 불어온 불의 열기가 진의 얼굴을 할퀸다. 머리칼을 불불이 세운다. 그러나 진은 손톱 세우고 덤벼드는 불의 열기를 맞받아 앞으로  걸어간다. 어릴 적 불에 데였던 진의 왼편 이마 전에 동전잎 만한 흉터가 력력히 돋아난다. 북과 북채를 가슴 앞에 꼭 그러안은 채 진은 오로지 돌계단으로 오르고 있다. 그 길이 진에게는 자기가 념원하는 궁극에로 통한 회랑(回廊)을 걸어가는 것과도 같게 생각 되였다. 그는 지금 화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벌창해진 용암이 계단을 핥으며 흘러 내렸다. 불붙는 소리가 우우 귀가에 들려 왔다. 가까워지는 불을 느껴 진이 사력을 다해 북을 두다렸다. 불의 춤을 추었다. 불의 노래를 불렀다.     훨훨! 훨! 훠어얼!불이여 타올라라타올라라 불이여     캐갱! 앞에서 날아오는 불덩이들을 삼키며 길을 안내하던 불독이 비명을 질렀다. 처연하게 짖으며 용암에 묻혔다 순식간에 하얀 뼈의 몸뚱이만 남았고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그 뼈마저 용암이 녹여버렸다.  훨훨! 훨! 훠어얼!내가 불 이여라 네가 불 이여라      <끝>
120    불의 제전 (2) 댓글:  조회:2841  추천:73  2007-06-29
  .2006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소설본상작품   불의 제전 (2)김 혁     진, 세상과 부딪치다 적봉,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산은 세월가도 벌거벗은 진솔한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적봉, 그 넉넉한 산세의 품에 안겨 북소리의 주술을 타고 화동들은 서서히 자랐다. 적봉, 그 기슭에 자리잡은 《화택》에서 북소리는 가득했다. 초가집 지붕에 처마물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고 멀리 물레방아 방아공이 떨어지는 소리와도 같은 그 은은한 북소리가 매일같이 부락의 아침을 깨웠다. 춤이 좋은 사람들이 모여든 《화택》은 몽환이 뒤얽힌 또 하나의 세계였다. 거기에 박혀 고치에서 나오려는 작은 벌레처럼 날개를 털면서 진은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진에게서 삶의 즐거움이 묻어났고 그 얼굴에는 분명 천상의 기쁨이 어려있었다. 학당패가 없기에 마냥 말석의 위치가 차려졌지만 춤을 출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진은 가슴이 들떴다. 그 와중에 초동머리를 겨우 면한 나이에 무용단에 입단했던 진이 어느새 코밑이 거뭇한 청장년으로 자라있었다. 뜰의 평상에 앉아 명이 진과 교와 염을 불렀다. 그들의 작고 느린 성장을 독려해왔던 명에게 세사람은 이미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위치에 서있었다. ―이제 너희들이 한번 익힌 기량을 펴보일 때가 왔다. 남하족은 3년에 한번 꼴로 무용제를 펼치곤 했다. 다른 부락에서도 이 성대한 축제에 동참해 춤군들을 송파(送派)하곤 했다. 경색에서 방(枋)에 오른 이들을 부락에서 크게 장려했다. 부림소 한마리와 밭 세마지기를 상으로 내렸고 그 집안의 화세(火稅)를 3년간 면해주었다. 그보다도 이는 무용권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화신무용단에서의 위치의 승격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무용제는 남하족과 산북족을 가르는 지경인 곡성부근에서 거행되였다. 행사는 사흘씩 열렸다. 이는 화신제날에 못지 않은 부락의 큰 행사였다. 부락사람들이 좋은 나들이옷들을 꺼내 입고 희희락락 모여들었다. 담곁에 커다란 무대가 설치되였다. 족장과 장로들, 그리고 무용계의 권위들이 나와 평을 맡았다. 역시 투석(投石)으로 평점을 했다. 진의 어머니는 무용제가 열리기 며칠전부터 서둘렀다. 아들에게 줄 《천인병(千人餠)》을 빚었다. 한집 한집 다니며 쌀을 한줌씩 빌었다. 그렇게 빌린 쌀을 찧어 떡을 빚었다. 그 백명, 천명의 손을 거친 정성어린 떡을 먹고 진이 방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춤경색이 열리는 장소까지 나가지 못했다. 아들의 성적에 념려되여서였다. 그저 무용제가 열리기 전날 《화택》으로 찾아가 명에게 《천인병》이 들어있는 떡보자기를 넘겨줬을뿐이였다. 드디여 무용제가 열렸다. 수천의 깃털이 날아오르듯 명절의 장소는 노란 해빛으로 가득했다. 등장을 앞두고 진은 어지간히 긴장된 모습이였다. 이는 3년간 해달을 이고 뛴 고심에 대한 한차례의 검증이였다. 학당패도 없는 몸으로 온갖 수모를 삼키며 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기회였다. 혜안으로 발탁해준 무자 명에 대한, 홀몸으로 아들의 양명을 바라며 지내온 어머니에 대한 보답의 시간이기도 했다. 진의 긴장을 보아내고 스승이 먼저 교를 내보냈다. 언제 보나 자신으로 넘쳐있는 교. 교는 홍석 8개, 백석 2개의 평점을 받았다. ―잘했어! 명이 무대에서 내려온 교를 포옹해주었다. 염을 올려보냈다. 염은 홍석 6개 백석 4개의 평점을 받았다. 명이 염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허나 염은 울상이 되여 담아래 쪼그리고앉아버렸다. 맨나중에 진이 올랐다. 긴장의 너울을 뒤집어쓴채 손아귀에 흥건한 땀을 쥐고 올랐던 진은 무대에 오르자,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짜장 다른 사람이 되여버렸다. 머리우에서 빛나오르는 태양은 어머니가 빚어준 《천인병》처럼 둥글었다. 그 병을 잡으련듯 진은 팔을 길게 뻗쳤다. 태양은 뜨거운 열기의 손을 펼쳐 진의 온몸을 만져주고있었다. 그 빛의 은혜에 보답하련듯 진은 하늘을 우러르며 뛰고 솟고 굴렀다. 진이 팔다리를 저을 때마다 춤사위에 묻어오르는 해빛을 사람들은 보았다. 잘헌다아!!! 무대아래의 사람들이며 돌담에 가맣게 매달린 산북사람들마저도 갈채를 보냈다. 진의 춤사위를 면밀히 주시해보는 명의 긴 눈섭이 격동에 푸들푸들 뛰였다. 진은 홍석 9개 백석 1개의 평점을 받았다. 지금까지 제일 높은 평점이였다. 화동들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진을 우르르 에워쌌고 환성을 지르며 진을 헹가래쳐올렸다.   이튿날, 돌담에 경색결과를 알리는 방이 나붙었다. 격전뒤에 찾아드는 무기력감으로 해가 적봉꼭대기에 오를 때까지 꼬박 내리 잠을 자고난 진은 게나른해서 방을 보러 갔다. 방앞에 가맣게 모여 목을 빼들었던 사람들의 눈길이 일시에 진을 향해 몰부어졌다. 그 눈빛들을 축복처럼 받으며 진은 의기양양 돌담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의 입으로 헛비명이 새여나갔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방의 으뜸에 오른 사람은 진이 아니였다. 무용단 성원도 아닌, 집에서 사인무용도사를 모시고있는 어느 응모자가 방의 첫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조랑말을 타고 시중군을 거느리고 생색을 내며 춤경색장에 나타난 한 존재를 진은 머리에 떠올렸다. 그는 홍석 10개로 만점의 평점을 받았다. 현기증으로 눈앞이 어지러워하고있는 진을 향해 개가 뛰여왔다. 불독이 진을 바라고 다급하게 짖어댔다. 진의 바지가랭이를 물어당겼다. 불독이 그렇게 안달을 떠는 모습을 진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늦은 더듬이로 진의 머리속을 후볐다. 진은 얼른 불독의 뒤를 따라나섰다.   불독은 진의 집으로 곧추 뛰여가고있었다. 진이 헐레벌레 달려 이른 그곳에 집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큰 참화(慘禍)가 진을 기다리고있었다. 진의 집에 불이 났던것이였다. 《천인병》을 빚어 만드느라 며칠밤을 샜던 어머니가 그만 아궁이앞에서 잠에 떨어졌는데 튀여나온 불똥에 집이 타고 어머니는 불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한것이였다. 진, 가르침을 받다 그해 여름을 진은 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지냈다. 그해 여름을 진은 가슴이 내려앉는 현기증속에서 보냈다. 그해 여름을 진은 어머니를 여읜 슬픔과 방에서 떨어진 렬패(劣敗)감에 사로잡혀 보냈다. 산다는게 이처럼 불확실한것이였을가? 불운이 예고하고 닥치는것은 아니겠지만 그에게 닥친 불운은 너무나 급작스러웠고 엄청난것이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춤경색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의 백부가 부락에서 가장 큰 대호(大戶)였다. 돈으로 구워삶은것이 뻔했다. 그 내놓고 거래되는 부정에 진은 경악을 금치 못해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진은 북채를 잡지 못했다. 불앞에 나서지 못했다. 불이 무서웠다. 불은 이미 진의 생활 전체를 휘둘렀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육신을 사른 불이 그렇게 무서울수가 없었다. 진은 다시 어제날의 불을 무서워하던 아이로 돌아가있었다. 동인인 교와 염의 권고도 스승 명의 엄벌도 진을 북채를 잡지 못하게 했다.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은 무력감에 짓눌려 우두커니 누워있기만했다. 세상의 외진 곳으로 달아나고만싶었던 진은 홀로 적봉으로 오르는 계단을 톺았다. 화신상이 모셔져있는 그 동굴속으로 향했다. 타닥타닥. 장작이 튀는 소리를 내며 언제나처럼 화당에서 불이 이글거리고있다. 불이 더운 숨을 내뱉는다.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들이 알큰한 냄새를 풍기며 동굴안으로 퍼진다. 깊은 물에 잠기듯 어지러우면서도 아늑하다. 그 불의 기운에 진은 잠시 멍해지고만다. 진은 화신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화신상이라야 흙으로 빚어만든, 아이들 인형에 다름없어보이는 작은 토우(土偶)였다. 화당의 정가운데 삼발이(三脚架)를 놓았는데 그우에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정좌한 형상인 토우를 모셨다. 푸짐한 불빛이 토우의 작은 몸에 금박을 입혔다. ―불이 무섭더냐? 문뜩 동굴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메아리친다. 진이 움찔 놀라며 머리를 쳐들었다. 토우가 눈을 번쩍 치뜨고있다. 그리고 입술을 어눌하게 놀리며 묻는다. ―참말로 불이 무섭더냐? 그 조화(造化)에 놀라 멍청해있는 진에게 또 한번 물음은 날아왔다. 작은 토우의 목소리는 생각밖에 웅장하였다.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으므로 목소리는 종소리처럼 동굴을 맴돌았다. 진이 급기야 머리를 끄덕였다. 낯빛이 심한 어지러움으로 무눌져 심각한 혼돈에 자맥질하는것 같다. 절실한 두려움으로 입을 열었다. ―무섭습니다. 참말로. 무서워서 더는 가까이 하지 못하겠습니다. 더는 춤을 출수 없을거 같아요. 불구덩이의 불은 진한 선홍빛으로 물들어 진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색조 현란한 꽃잎 같은 불빛에 진은 눈이 아프다. 토우가 그런 진을 내려다보았다. ―괴로움도 좋은데 쓰면 약이 된다. 어머님을 여읜것은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고통의 벼랑인셈이다. 그러나 춤에서 락방한것은 네가 아직 완숙치 못한 신을 신고 섣불리 길을 나선 결과다. 무엇이 되겠다고 규정하는 순간 세상은 그것이 욕망임을 안다. 네 이름자 껍질에 너무 집착하지 말어라. 진은 미처 다 알지 못한 표정으로 화신을 쳐다보았다. ―저 불을 보아라. 보았느냐? ―네 보았습니다. 화끈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진은 답했다. 불의 화기에 살갗이 따끔거린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얼굴이 그 화기에 쓸려 쓰라리다. 토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신에게 불을 내려주기를 바랬더니 신은 불을 주었다. 불만 준것이 아니라 죽음도 더불어주었다. 불에는 청정(淸淨)한 불과 부정(不淨)한 불이 있다. 불은 락원에서도 빛나고 지옥에서도 탄다. 불이 따스하고 그 빛도 화려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지만 불에 닿는것은 파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은 감미로움이며 또 고통이다. 네 몸을 태우는 불은 결국은 네 자신의 손에서 인다. 큰불에도 꿈쩍 않고 버티며 살아가다가도 내부에서 튕기는 불꽃에 끝내는 마음이 타서 무너지고만다. 외부의 불보다 더 무서운 불은 언제나 너의 내부에 있다. 네 마음속의 부정한 불을 버려라. 진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말을 마친 토우는 눈을 내려 감고 입을 다물고있다. 자신의 감성을 리성의 쇠도리깨로 내려친 화신의 말 마디마디가 선명한 울림으로 진의 가슴에 꽂혔다.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는 빛이 머리를 뚫고 쏜살같이 지나가는듯하다. 질러져있던 쇠빗장이 조금 열리려고 한다.   밤, 화택의 동자들은 아닌 밤의 북소리에 잠에서 깨였다. 진이 석등을 밝혀놓고 마당에서 뛰고있었다. 진, 사랑에 눈뜨다 곡성부근에서는 간혹 장이 펼쳐지곤 했다. 칼자루를 잡은 이들에 의해 같은 족속끼리 서로 반목했지만 생계를 위해 암암리에 펼쳐지는 민간적인 교역은 막아내는수가 없었다. 돌담의 틈새로 서로 건너가고 서로 건너와서는 서로의 토산물을 바꾸곤 했다. 남하에서 나는 과일과 산북에서 나는 약재를 바꾸기도 했고 산북에서 구워만든 도자기와 남하에서 결어만든 대바구니를 바꾸기도 했다. 바람이 잦다싶으면 두 부락사람들이 슬렁슬렁 모여들었고 구석구석에 자잘한 생필품들로 난전이 펼쳐졌다. 이에 대해 부락의 족장들은 한눈은 감고 한눈은 뜨고있다. 그러다가도 지나쳤다싶으면 문뜩 장터에 뛰여들어서는 재수없이 걸려든 이들에게 벌금을 시키고 징벌로 태형(笞刑)을 가했다. 그날은 좋은 날씨였다. 날씨는 너무 맑아 해가 쨍그랑쨍그랑 명랑하게 소리내어 웃는것처럼 보인다. 진은 교와 염과 함께 장으로 나갔다. 개가 킁킁대며 뒤를 따른다. 어데 가나 진의 뒤를 묻어다니는 불독이다. 교는 떠오르는 일월이 새겨져있는 도자기를 사들였다. 선물할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진은 북채에 달았던 붉은 술이 닳아져 패물난전을 찾았다. 패물이 일매지게 늘여진 가게에서 붉은 술을 보아내고 값을 물었다. ―그냥 넣으세요. 진은 눈을 치떴다. 패물가게의 주인은 진을 보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가게의 물품으로 보아 산북의 장사치였다. 섶을 깔끔하게 여민 옷매무새의 녀자는 산수화속의 인물처럼 단아하고 고즈넉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진을 보고 녀자가 웃으며 말했다. ―화신무 추는걸 봤습니다. 저번 춤경색때… ―춤 좋아해요? 진이 물었다. ―예. 녀자가 아미를 숙이며 대답했다. 녀자의 볼에 홍조가 번졌다. 곁에서 불독이 어딘가를 바라고 컹컹 낮은 소리로 짖었다. 그러자 그쪽에서도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북종의 화견(火犬) 한마리가 조금 떨어진 돌담근처에 오줌을 지린다. 녀자가 손짓으로 개를 불렀다. 개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진이 귀엽게 개의 머리를 다독여주었다. 반들반들한 코가 손바닥에 와닿는다. ―홍모(紅毛)얘요. 우리 개. 귀엽죠. ―저, 저의 개는 불독인데요. 진도 자기 개자랑을 했다. ―전 유(柔)라고 합니다. 우린 건너말서 살아요. 어느사이 산북종과 남하종의 개는 서로 어울려 꼬랑이를 흔들며 목털을 비빈다. 그런 개들을 재미있게 지켜보다 녀자가 붉은 술을 진에게 내밀었다. ―선물하지요. 이름난 화신무용단 춤군인데… 그런 그들을 한쪽에서 염이 눈을 동그랗게 뜬채 매초롬하여 지켜보고있다. 그의 손에도 붉은 술 한개가 들려있었다. 이때 개들이 다급하게 짖어댔다. 장터에서 급작스런 소요가 일었다. 누군가의 깨지는듯한 비명이 터져올랐다. ―포리(捕吏)가 온다아! 진은 얼핏 고개를 돌렸다. 대도를 차고 창을 꼬나든 남하의 포리들이 득달같이 달려오고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흩어지면서 닭이 풍겨올랐고 개들이 짖어댔다. 남하의 사람들은 가까이 숲속으로 몸을 감추었고 산북의 사람들은 돌각담을 넘느라 허둥대였다. 서로 찾고 부르는 사람, 넘어져 비명지르는 사람, 포리들에게 잡혀 울부짖는 사람… 장거리는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였다. 분만해오르는 먼지속에 진은 담을 넘지 못해 설레발치는 녀자를 보았다. 산북의 그 녀자를 보았다. 무거운 패물이 가득든 함을 껴안은채 녀자는 담을 넘지 못해 쩔쩔매고있었다. 그러다 밀쳐 넘어졌다. 패물들이 땅에 흩어져널렸다. 포리들의 추상같은 호령을 등뒤로 하며 진은 달려가 흩어진 패물들을 주어담아주었다. 그리고는 담아래 넙죽 엎드렸다. 자기 등을 밟고 넘으라고 손짓해보였다. ―빨리 타요! 머뭇거리던 녀자는 포리들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진의 등을 밟고 담으로 올랐다. 그리고 담우에 선채로 진을 내려다보았다. 녀자의 눈에 진한 감동이 어려있음을 진은 볼수 있었다. 잠시후 녀자는 청남색 치마자락을 부풀리면서 담 저쪽으로 뛰여내렸다. 진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전에 진의 목에 쇠사슬이 철렁 걸렸다. 장을 보다가 두수없이 걸린 사람들은 태형 20대의 엄벌을 받아야 했다. 산북의 장사치를 도왔다는 죄명에 진도 태형을 받았다. 그러나 화신무용단 성원이고 무자 명의 간청이 있었기에 매는 10대로 줄었다. 하지만 엉뎅이가 흐드러져 진은 근 며칠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자리에 엎드린 자세로 진은 벽에 걸린 북과 북채를 바라보았다. 경황중에도 손에 꼭 품고 온 붉은 술이 북채에 달려있었다. 장터에서 돌아온 뒤로 산북녀자의 붉은 도화볼이 진의 눈에 어려 삼삼히 떠나지 않았다. 단지 일별만으로 그만두기엔 무언가 설명못할 미진함 같은것이 진의 마음에 걸려있었다. 발목을 잡아채는듯한 끈끈한 느낌, 그것을 일컬어 인연이라 해야 할가. 유! 마음속에서 돋아오르는 순(筍)같은것을, 참을수 없는 근지러움으로 감지하면서 진은 입속말로 녀자의 이름을 자그맣게 되뇌여보았다. 그날 이후로 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태형을 받은 사람답지 않게 볼에는 붉은 화색이 돌았고, 가끔 떠오르는 입가의 부드러운 미소는 마음속의 희열을 내비치고있었다. 그런 진을 두고 교며 염이 이상한듯 눈을 마주쳤다. 컹! 컹!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독의 소리가 아닌것 같았다. 환청인듯싶어 창을 열고 보던 진이 경희에 차 소리질렀다. ―홍모야! 어떻게 그 먼 길을 달려왔던지 산북종의 홍모가 뜰에 나타나 짖고있다. 홍모의 목에 바구니가 걸려있었고 바구니에 서찰 한통이 담겨져있었다. 적봉에 해 떨어지면 곡성곁의 과수밭으로 오세요.― 유. 진은 흥분에 몸을 떨며 홍모를 그러안았다. 붉은 털을 어루만져주었다.       진, 담을 넘다      밤, 진은 담을 넘었다.   밤, 진은 긴장과 흥분을 억누르며 곡성을 넘었다.   밤, 진은 야경순찰사들에게 잡히는 날이면 월경죄로 옥에 떨어 질 위험도 무릅쓰고 담을 넘었다.    담을 넘자 날카롭고 사나운 풀숲이 이어졌다. 바늘같이 메마른 풀 넝쿨들이 다리를 긁고 팔을 긁었다. 어느 결에 손등에 새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주술처럼 닥쳐온 사랑의 전갈은 그로 하여금 서슴지 않고 담을 넘고 숲을 가르게 했다.      오래 동안 방치해 둔 데서 무인지경인 곡성부근은 둘도 없는 옥토로 되였다. 두 부락의 과농(果農)들은 가만히 이곳에 숨어들어 과수밭을 일구었다. 점호를 앞둔 화동들처럼 종대로 나란히 렬을 지은 과수나무, 그 나무들이 천국의 풍경을 그리며 어우러져 있는 곳에서 진은 유를 만났다.     - 오셨군요.      옷에 가득 봄밤 냄새를 묻히고 나타난 진을 유가 수태를 머금고 반겼다. 그 한마디는 천년의 행복보다 길고 아름다웠다. 어둠 속 이였지만 그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온유함과 기쁨, 밝음을 진은 분명 보았다.   둘은 과수나무에 등을 붙이고 나란히 섰다. 유는 말없이 풍성한 머리다발을 손으로 만지작거린다. 손가락에 말렸다가 도르르 풀어지는 머리칼이 진에겐 싱싱한 이파리처럼 보였다. 얼핏 드러나는 어깨가 동그랗고 목선이 매끈하다. 그 모습에 진은 어질머리가 인다.     부끄러움을 잉태한 침묵이 과수밭에 흘렀다. 달은 떠오르지 않고 있다. 그것이 다행 이였다. 그렇지 않다면 유의 붉어진 볼과 진의 손 둘 바를 모르는 모습을 샅샅이 비출 것 이였다. 홀연 진의 발치에서 불덩이가 폴짝 뛰여올랐다. 어지간히 놀란 진이 그처럼 풀쩍 뛰였다. 유가 웃었다. 그 불덩이를 주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작은 몸체에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벌레였다. 벌레들은 더듬이 끝에 자그만 불을 켜 달고 있었다.     - 당랑이 얘요. 화당랑(火螳螂). 짝짓기 할 때면 정수리에 불을 켜들죠.     유가 알려 주었다. 그제야 진은 마을의 년장자들에게서 화당랑이라는 신기한 벌레에 대해  들은 생각이 났다. 화당랑은 산북에서만 나는 곤충인데 산북사람들은 화당랑을 잡아두었다가는 밥 지을 때 불을 지피면서 땔나무와 함께 아궁이에 집어넣는다고 했다. 유리 병 속에 가두어 놓고 그 불빛을 빌어 책을 읽기도 한다고 했다.     - 이 세상 당랑을 모조리 잡아죽이고 싶은 적이 있었어요.     유가 문뜩 감개에 젖은 소리를 했고 그 소리에 진은 놀라하며 유를 쳐다보았다. 유가 이야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무더웁던 유월, 산북사람들과 남하사람들은 서로에게 창부리를 들이대고 활촉을 겨누었다. 토포(土炮)까지 제작해 가지고 서로에게 포탄을 퍼부으며 상잔에 혈안이 되었다. 포에 화약을 재워 넣고 화당랑을 집어넣으면서 사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화당랑을 잘못 떨군 바람에 화약통이 폭발하면서 유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몇 명이 비명에 갔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에게서 화당랑은 보지 못한 할아버지를 죽인 원흉으로 생각 되였다. 밤만 되면 뜰에 뛰여드는 화당랑을 잡아서는 발로 짓이겨 죽였다고 한다.     - 다시 생각해보니 버러지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요. 모두다 한 혈통끼리 죽인다 살린다 원쑤를 만든 사람들의 탓이지요.     진은 사색 깊은 유의 얼굴을 새삼스레 지켜보았다. 손바닥에 쳐든 화당랑의 불빛이 유의 반 쪽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절반 얼굴만으로도 유는 예뻤다.     - 이제는 화당랑과 친구가 됐는걸요.     유가 입술을 오므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은은한 휘파람소리가 과수밭에 메아리쳤고 다음순간 진은 희한한 광경에 입을 퀭하니 벌리고 말았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 풀숲의 여기저기서 화당랑들이 폴짝 폴짝 뛰쳐나왔다. 저마다 정수리의 더듬이에 불을 켜들고 뛰여왔다. 뛰여 와서는 진과 유를 에워싸고 맴을 돌았다.      주위가 등롱을 켜든 것처럼 환해 졌다. 유의 청순한 얼굴이며 갈람한 몸매가 불빛에 드러났다. 길고 숱 많은 머리털이 흩어져 후광처럼 유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진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릴 적 불에 데였던 왼편 이마 전에 동전잎 만한 흉터가 력력히 돋아났다.     진은 유의 손을 당겨 잡았다. 진의 몸 속에 욕망의 열기가 서서히 고여 오고있었다. 여태껏 춤밖에 모르고 지내온 일심이 욕망의 건드림에 흔들렸다. 유가 수줍은 손을 뺄 듯 뺄 듯하다가 자기의 허리 전에 놓아주었다. 허리띠가 잡혀 졌다. 진이 떨리는 손으로 허리띠를 잡아 당겼다. 유가 핑그르르 맴을 돌았고 당랑의 날개 같은 옷이  스르르 벗겨져 내렸다. 유의 농익은 몸매가 드러났고 진은 넉을 잃고 바라보았다. 불빛 어린 유의 몸매는 뇌쇄(惱殺)적으로 아름다웠다. 작은 입술이 꽃잎처럼 뚜렷하다. 어깨가 좁다랗고 가슴은 높다. 엉덩이는 알밤같이 도드라졌다. 화당랑의 움직임과 함께 유의 몸매에는 수묵화 같은 그림자가 지어지고 있었다. 그 그림자들은 유의 볼에 머물렀다가는 뛰여서 목선 아래의 쇄골에 머물렀다가는 뛰여서 높은 가슴에 머물렀다. 묵직한 가슴아래 머무른 그림자가 아름다웠다. 풍요로운 배를 타고 내려 기름진 숲에까지 그림자는 머물렀다.     진이 유의 살갗에 손을 가져갔고  손길이 닿자 유는 진을 향해 전신이 무너져 내렸다. 진의 손과 혀 바닥은 불줄기가 되었다. 불줄기가 되어 유의 일신을 훑어 내렸다. 유가 신음을 흘렸다. 소리가 높아졌고 그 소리에 당랑들이 일제히 더듬이에 켜든 불을 죽였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서로의 불을 켜들었다. 두 사람의 몸 속에 내연하고있던 불들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밀어젖히며 받아 안으며 애욕의 춤사위를 벌렸다. 과수나무를 품은 산줄기도 이렁이렁 떠도는 것 같다.     적봉에 떠올랐던 달이 서천으로 콩알처럼 굴러 떨어질 때에야 진은 유와 갈라졌다. 진과 유의 사랑을 목격한 화당랑 하나가 손바닥에 놓여져 진의 밤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진은 경쾌한 몸짓으로 담을 넘었다.   이때 진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처럼 날렵하게 담을 넘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계속>  
119    불의 제전 (1) 댓글:  조회:3721  추천:73  2007-06-29
2006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소설본상작품   불의 제전 김 혁 …… 모든 악장(樂章)은 끝났는데 그치지 않고 울리는 선률이여 착지(着地)할수 없는 다리여 멈출수 없는 팔이여 몸체에서 떨어져나간채 떠돌아다니는 팔 조약하는 자세로 뻗쳐있는 다리여… 모든 악장은 끝났는데 착지할 땅이 없어 허공에서 수직으로 거듭 꽂히기만하는 다리 없는 토슈즈(발레배우들이 신는 무용신)여 ―정한모의 《춤의 판타지아》에서      진, 불을 느끼다     진(眞)이 가장 무서워하는것이 하나 있었다. 엄동이면 홀쭉한 배로 눈빛이 매워져 부락까지 내려오는 늑대가 아니였다. 숲을 지나다 무심히 건드려도 사정없이 이마빼기를 쏘는 말벌이 아니였다. 부락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들것에 들려나가게 하던 온몸에 창이 생기는 병도 아니였다. 진이 가장 무서워하는것은… 바로… 불이였다! 초동머리적, 화덕앞에서 장난질치다가 그만 이글거리는 화덕에 엎어졌다. 어머니가 재빨리 일으켜세웠지만 얼굴 반편이 불에 데이고말았다. 지금은 왼편 이마전에 동전잎만한 흉터로 남았지만 불이 주던 강렬한 인상의 아픔은 마음속 깊은 곳에 력력히 찍혀있다. 불을 무서워하던 진이 불을 좋아하기 시작한것은 어느 봄, 부락에서 화신제(火神祭)가 있은 날부터였다. 마을의 남쪽에 우뚝 치솟은 산, 적봉(赤峰)기슭에서 화신제 잔치가 펼쳐졌다. 매양 봄이 오면 부락에서는 불을 다시 지핀다. 족장과 부락의 년장자들이 적봉의 동혈(同穴)에 모신 불로부터 집집의 아궁이의 불까지 모두 꺼버리고 새로 불을 지핀다. 불도 일년내내 같은 불을 계속해서 쓴다면 기운이 쇠진한다는 뜻에서 부락사람들은 새불을 일으켜 새봄을 맞이하곤 했다. 이날이면 부락사람들 모두가 떨쳐나 해가 떨어지도록 화당(火塘)에서 타오르는 불을 둘러싸고 광열의 춤을 추곤 했다. 그렇게 진이네 부락, 남하(南河) 사람들은 불을 숭배하는 족속이였다. 그날 명절기분에 아침부터 붕― 떠있는 사람들을 묻어서 진은 화신제가 열리는 적봉기슭으로 나왔다. 화당은 여느때보다 더 넓게 꾸며져있었고 그속에는 불땀이 좋은 잘게 팬 장작들이 가득 무져있었다. 정오가 되였다. 화신제가 열리는 시간이다. 장대한 키꼴을 가진 족장 굉(宏)이 마을 년장자들의 옹위하에 나타났다. 름름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고나서 굉이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족장을 따라 수천명의 부락사람들이 무너지듯 무릎을 꺾었다. 족장의 입에서 격앙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 땅을 굽어살피시는 천지신명이시여!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불을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춥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배를 곯지 않게 해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불처럼 따뜻하게 하소서… 부락사람들이 따라서 족장의 말을 복창하였다. ―우리에게 불을 주소서! 우리에게 불을 주소서!! 하늘 우러러 비원(悲願)을 마치고나서 족장이 무언가 머리우에 받쳐올렸다. 거울, 금박칠을 올리고 테두리에 문양을 새긴, 양경(陽鏡)이라는 이름의 불을 지피는데 사용되는 거울이였다. 족장이 양경을 들어올릴 때 그 번쩍이는 빛이 눈에 쏘여와 진은 눈시울을 좁혔다. 족장이 양경을 들어 화당의 장작개비에 대고 비추었다. 정오의 태양은 찬란했고 양경에서는 태양의 빛이 반사되여 쏟아져나오고있었다. 모두들은 숨을 죽이고 양경을 지켜보았다. 수천쌍의 눈이 오목거울이 실어낸 빛줄기가 몰부어져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고있었다. 이때, 북소리가 울렸다. 둥둥! 나지막한 북소리가 울렸다. 나지막하지만 사람들의 눈귀를 순간에 앗아가는 북소리가 울렸다. 십여명의 동자들이 저마다 손북을 두드리며 동굴부터 나오고있었다. 동자들은 저마다 머리에 빨간 천을 두르고있었고 빨간 버선을 신고있었다. 무용단의 춤추는 아이들이였다. 화신제때면 춤을 추는 아이들을 부락에서는 화동(火童)이라고 불렀다. 부락에는 화신무용단(火神舞踊團)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화신무용단 성원들은 족장 굉 다음으로 부락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였다. 화동들의 북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잦아지는 북소리와 더불어 동굴에서 짐승 한마리가 뛰쳐나왔다. 화견(火犬)이였다. 불을 먹고 사는 불개였다. 일신이 붉은 털로 덮여있는 개는 무용단에서 기르는 령물이였다. 개가 하늘을 바라고 컹컹 짖었다. 이어 동굴로부터 또 한사람이 나왔다. 백발동안의 로인이였다. 유난히도 긴 눈섭을 가진 로인은 붉은 수건으로 이마를 질끈 동이고있었다. 웃동은 벗고있었는데 해볕에 그을린 몸체는 검붉었다. 허리에는 붉은 띠를 두르고있었고 신은 동자들처럼 역시 빨간 버선이였다. 그 사람이 다름아닌 명(明)이였다. 명은 무자(舞者)였다. 화신무용단을 거느리는 최고의 무용수였다. 무자는 부락에서 뛰여난 무용수에게 주는 급별이였고 한부락에 무자는 단 한명뿐이였다. 무자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칭호는 부여된다. 부락사람들의 응시속에 무자는 두팔을 량쪽으로 뻗었다. 머리를 뒤로젖혔다. 북소리의 박자에 맞추어 무동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소리와 함께 홀연, 새가 하늘로 솟아오르듯이 몸을 훌쩍 솟구며 무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훨훨! 훨! 훠어얼! 불이여 타올라라 타올라라 불이여… 북소리가 높아져갔다. 양경에서 쏟아져나오는 빛줄기가 굵어져갔다. 자작나무에서 실연기가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컹컹! 불개가 짖어댔다. 무자의 춤사위가 거세여져갔다. 훨훨! 훨! 훠어얼! 내가 불이여라 네가 불이여라 북소리가 높아져갔다. 양경에서 쏟아져나오는 빛줄기가 점점 굵어져갔다. 자작나무에서 파란 실연기가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컹컹! 불개가 사납게 짖어댔다. 무자의 춤사위는 절정에 치달아있었다. 풋풋한 땀냄새를 떨어뜨리며 춤에 몸을 내던지고있는 무자는 꼭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 그는 부락사람 모두를 흥분하게 만드는 괴력을 지니고있었다. 드디여 자작나무에 불이 확! 댕겨졌다. ―불이다아! 사람들이 환희에 넘쳐 괴음들을 질렀다. 우르르 화당을 둘러쌌다. 따스한 불의 기운에 눈을 느스름히 감으며 만족의 신음을 토했다. 족장이 양경을 거두며 껄껄 방성대소를 하였다. 그러나 무자의 춤은 멈추지 않고있었다. 무자의 왕소금이 돋은 등어리가 화염처럼 꿈틀거렸다. 불을 둘러싸고 무자는 맴을 돌고있었다. 불을 탐하는 한마리 짐승처럼 불을 먹으려, 불을 먹으려. 북채에 달린 붉은 술이 춤사위에 맞추어 나붓기고있었다. 북소리도 끊기지 않고있었다. 노래소리도 끊기지 않고있었다. 북소리속에서 노래소리속에서 무자는 완연 타오르는 한줄기 불이 되여있었다. 훨훨! 훨! 훠어얼! 내가 불이여라 네가 불이여라 우리는 불이여라 진이 철이 들어 처음 보는 화신무(火神舞)였다. 잔뜩 키워진 동공으로 해빛과 불줄기와 사람들이 어우러져 열기로 출렁이는 춤마당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진의 기억속에서 잠자고있던 그런 풍경인것 같았다. 진은 단쇠가 걀?닿았을 때처럼 아찔한 충격을 느꼈다. 진의 작은 가슴은 금세 뜨거운 불씨 한톨을 머금은듯했다. 그 불씨는 혈관을 타고 진의 사지로 뻗어나갔으며 나중엔 명치끝에 모여 타올랐다. 그 불길은 진의 작은 육신을 태워버릴것만 같았다. 정체불명의 충동이 륵막쯤에서 솟구쳤다. 불의 장력(張力)에 끌리듯 진은 저도 모르게 량팔을 펴들고 팔죽지를 길게 뻗쳤다. 무자의 춤사위를 모방하여 머리를 뒤로 젖혀버렸다. 정오의 대공에서 태양은 빛나고있었고 진은 눈확 가득 넘쳐오르는 눈물을 주체할길 없어했다. 해가 떨어지고 달이 떠올라도 화신제의 열기는 식을줄 몰랐다. 화신제는 홰불놀이로 이어졌다. 달이 뜨면 아이들이 각자 홰불을 들고 벌판에 모여든다. 밭가운데 지경을 그어놓고 홰불싸움을 벌린다. 어른들이 불싸움이 위험하다고 아이들을 못나가게 하는 법은 없다. 오히려 홰불을 더 크게 만들어주면서 나가서 용감히 싸우라고 등을 떠민다. 예로부터 홰불싸움에 나가지 못하면 성인대접을 못받는다고 여기기때문이다. 곧 홰불싸움은 일종의 성인식(成人式)이였다. 들은 불천지였다. 함성이 일었고 서로 부딪치는 홰불에서 불찌가 꽃살처럼 튀였다. 불이 무서웠던 진이 홰불을 들고 맨앞에서 달린다. 어제날 불이 무서웠던 진이 아니였다. 목청 깨져라 소리소리지르며 홰불을 휘두르는 진은 어느결에 훌쩍 웃자라있었다. 온몸이 검댕이투성이가 되여 들어서는 진을 보고 어머니가 놀란 눈매를 지었다. ―홰불놀이에 갔어요. 얼굴이 거멓게 그을린 진이 이발을 하얗게 빛내며 말했다. 어머니가 다가가 진을 껴안아주었다. 그을음냄새가 나는 진의 머리를 꼭 껴안아주었다. ―우리 진이 다 컸구나. 어머니는 화신제날이면 집집마다 먹는, 빨간 실고추를 넣어 해처럼 둥글게 부친 전(煎)으로 저녁상을 마련해놓았다. 떡을 뜯다 말고 진이 입을 열었다. 나지막하나 힘이 실린 소리로 말했다. ―오마니 나 춤 배우고싶어. 진, 불을 찾아가다   적봉(赤峰)은 잠든 화산(休火山)이였다. 그리고 불을 숭배하는 남하(南河)족에게서 적봉은 성산(聖山)이였다. 역시 불을 숭배하는 건너부락 산북(山北)족에게도 적봉은 성산이였다. 남하족과 산북족은 본디 뿌리가 같은 족속이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지 왜서였던지 서로 창을 들이대고 화살을 쏘아대면서 반목했고 지금은 두 부락으로 나뉘여져 살고있는것이다. 두 부락사이에 지경으로 표시하는 돌각담이 쌓여져있다. 적봉의 화산돌을 주어 쌓은 담이였다. 담은, 어찌나 길었던지 그 길이를 재일수 없었다. 모두들 남하부락을 끼고 흐르는 강만큼 길거라고 했다. 담은, 어찌나 높았던지 그 높이를 재기 어려웠다. 모두들 적봉의 반높이는 될거라고 했다. 그 담을 사람들은 《곡성(哭城)》이라 부른다. 두 부락에서 상잔의 변을 일으키면서 무수히 죽어간 령혼들이 그 담부근에 묻혀 밤이면 음울한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화신무용단은 적봉기슭에 화산석으로 지은 돌집에 있었다. 불춤을 배워주는 그곳을 가리켜 부락에서는《화택(火宅)》이라 하였다. 화신제를 치른 이튿날, 진은 화산석으로 계단을 깐 산길을 치달아 《화택》으로 찾아갔다. 멀리서부터 북소리가 들려왔다. 《화택》의 볕바른 마당복판에 석등(石燈)이 세워져있었고 그 등을 둘러싸고서 화동들이 맴을 돌며 춤기량을 익히고있다. 절박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진의 앞을 개 한마리가 뛰쳐나와 막았다. 불청객인 진을 바라고 컹컹 짖어댔다. 개의 입에서 불똥이 튀였다. 화신제날 보았던 불개였다. 온몸통에 붉은 색 털이 뒤덮인것이 인상적이다. 가락맞게 울리던 북소리가 뚝 멎었다. 집앞 평상(平床)에 앉아있던 무자 명이 몸을 일으켰다. ―불독아! 명의 부름을 들은 개가 그의 발치에 가 공손하게 쪼그리고앉았다. 긴 눈섭을 날리며 명은 진을 지켜보았다. ―뭐냐 너? 진이 명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진이라고 하옵니다. 화동이 되고픔다. 거두어주십쇼. 명의 긴 눈섭이 움찔했다. 조금은 놀란듯한 얼굴로 진을 보았다. ―너 누구의 문하(門下)였더냐? ―아직 스승이 없슴다. ―그럼 학당패(學堂牌)를 내보여라. 《학당패》는 부락에서 학당을 나온 사람들에게 발급하는 징표였다. ―패가 없슴다. 공부도 못한 놈임다. 큭큭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동들의 눈길이 일제히 진을 향해 쏠려있다. 별 한심한 놈 다 보겠다는 눈길들이였다. 명이 이마살을 모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가라! 여긴 거지를 수용하는 곳도 활량이나 키우는 곳도 아니어늘. 명이 짧게 뱉고나서《화택》으로 들어가버렸다. 화동들이 북채를 잡았고 북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진이 성큼성큼 춤의 대오를 향해 다가갔다. 어느 화동의 손에서 북과 채를 앗아냈다. 애들이 진에게서 북을 되빼앗아내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뜰에서 작지 않은 소요가 일었다. 덮쳐드는 애들에게서 잽싸게 빠져나와 진이 성큼 평상우에 뛰여올랐다. ―아니 저 새끼가?! 스승만이 앉을수 있는 평상우에 흙발로 뛰여오르는 진을 보고 격노했으나 다음 순간 애들은 그 자리에 주춤 서버리고말았다. 북소리 울리며 진이 춤을 추기 시작했던것이다. 평상을 무대로 삼아 진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화동들이 일제히 눈확을 키웠다. 그네들이 일년 사계절 배워도 익히지 못한 춤사위가 진에게서 그럴듯하게 지어지고있었다. 《화택》의 문이 삐걱 열렸다. 명이 다시 나왔다. 내심 놀라워하며 물었다. ―어데서 배운 춤이냐? 숨을 고르며 진이 대답했다. ―어제 무자님이 추는 모습을 보았더랬슴다. 명의 긴 눈섭이 다시한번 움찔했다. 족장을 위시하여 마을의 장로 10명이 적봉의 동굴속 석상(石卓)을 둘러싸고 모여앉았다. 동굴에는 화신상(火神像)이 모셔져있었고 그앞의 화당에는 불이 이글거리고있다.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장로들은 불씨가 모셔져있는 동굴속에 모이곤 했고 부락의 대소사는 모두 이들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부락의 운명을 손에 쥐고있는 터주대감들의 발치에 무자 명이 두손을 모으고 서있다. 족장의 미심쩍은 눈길이 명의 얼굴에 가 머물렀다. 명이 다시한번 간청했다. ―크게 일 불은 불씨에서 알아볼수 있습니다. 나 무자의 눈썰미를 믿어주십시오. 족장이 크악! 큰소리로 가래침을 뱉고나서 입을 열었다. ―자. 투석(投石)을 시작하게나. 장로들이 부스럭거리며 저마다 옷소매속에 무언가 꺼냈다. 돌멩이였다. 적봉에서 주어온 붉은 돌멩이와 강에서 주어온 흰돌멩이였다. 붉은 돌멩이는 긍정을 표하고 흰돌멩이는 부정을 표하는 뜻이였다. 달라당! 달라당! 석상우에 돌멩이를 놓는 소리가 동굴속에서 공명이 되여 울렸다. 족장이 석상우에 놓여진 돌멩이를 헤아리고나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선포했다. ―학당패가 없는 진을 무용단에 받아들이는 문제 최종결재요. 백석(白石)이 4개, 홍석(紅石)이 6개, 채택되였소! 명의 얼굴에 미소가 피여올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이 명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명이 진에게 북 하나와 북채 하나를 넘겨주었다. 화동 하나가 다가와 북채끝에 붉은 술을 달아주었다. 명이 북채를 들어보였다. ―이곳에서 북채를 가리켜 뭐라 하는지 아느냐? 몽척(夢尺)이라 한다. 이제 이걸 잡고 네 꿈을 펼쳐보아라. 진은 북과 북채를 가슴에 꼭 품었다. 유난히 빛나는 눈으로 스승을 쳐다보았고 스승의 머리우로 솟아있는 적봉을 쳐다보았다. 적봉은 소소리 높았다. 적봉이 품고있는 들을 굽어보았다. 들은 무연하게 넓었다. 들에는 화경(火耕)이 시작이였다. 화전농들이 놓은 불이 들을 메우며 번져나가고있었다. 불길은 봄을 맞아 놀란듯 피여난 들꽃처럼 온 벌판을 수놓고있었다. 조무래기들이 떼를 지어 불을 쫓으며 연기를 쫓으며 소리지르고있었다. ―불아. 쥐를 그을러라. 불아, 쥐를 그을러라. 진은 마음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있던 짐승 한마리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키는것을 느꼈다. 한껏 충일된 가슴으로 그 아이들처럼 진도 목청 깨져라 소리 질렀다. ―내가 화동이 되였어요! ―내가 화동이 되였어요! 진, 불앞에 맹세하다 ―내 몸을 움직여서 내 몸을 도구로써 연주할수 있는 춤, 그것처럼 직접적이고 감동적인 예술이 어데 있겠느냐? 우리의 육체에 더하여 우리의 몸속에 령혼도 담고있으니 몸과 혼이 하나가 될 때까지 춤을 추어라. 스승의 급훈을 받으며 진은 장대한 래일에로 열린 길의 첫 자국을 떼였다. 진의 어머니가 화신제날에만 먹는, 마른 실고추를 넣은 전(煎)을 가득 부쳐가지고 《화택》으로 찾아왔다. 무자 명이 나와 어머니에게서 떡을 담은 그릇을 받았다. ―애가 만나지 않겠답니다. 어머니가 머리를 후딱 쳐들었다. 놀란 눈매를 지어졌다. ―3년후, 진짜 춤군으로 이름을 닦은뒤 떳떳하게 어머님을 만나겠대요. 참, 옹골찬 애를 두셨군요. 어머니가 옷소매로 뜨거워나는 눈시울을 찍어눌렀다. ―알겠습니다. 애를 잘 부탁합니다. 어떡하나 애를 선생님 같은 큰 춤군으로 만들어주십쇼. 어머니는 《화택》을 향해 눈길 한번 주고나서 돌계단을 따라 산을 내렸다. 《화택》의 창문틈으로 진은 어머니의 사라지는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묻어있는 떡그릇을 든채 배여나온 물멀기를 지우려 눈을 슴벅이였다. ―기다려주십쇼 오마니. 누군가 그런 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낮에 진의 북채에 붉은 술을 달아주던 화동이였다. 화동이 진을 향해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 교(狡)라고 해. 진도 얼른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 진.   며칠후, 진은 새로 사귄 친구 교를 따라 적봉의 동굴을 찾았다. 산중턱에 있는 동굴로 오르는 계단은 무척 좁고 가파로왔다. 그 계단을 두사람은 헐씨금거리며 올랐다. 그들의 뒤를 녀자애 하나가 바싹 쫓아왔다. 그뒤를 불독이도 따랐다. ―야 교! 교오, 어델 가는거냐? 새로 온 아이를 끌고? 무용단에서 함께 춤하는 녀자애 염(艶)이였다. 부모한테 버림받고 길에서 걸식하는걸 무자 명이 불쌍해 데려다 밥먹여주며 춤군으로 키운 애였다. 염의 부름을 듣는척도 않고 교는 진을 끌고 곧추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화당에서는 언제나와 같이 불이 타오르고있었다. 이글거리는 불이 둘이의 얼굴을 발갛게 비추었다. 불을 만난 불독이 화당을 헤집으며 한입 베여 물었다. 따가워 흥흥거리며 불덩이를 삼켰다. 진과 교는 화신상앞에 무릎을 꿇었다. 교가 입을 열었다. ―화신이시여 증명해주옵시사. 나 교와. 교가 팔꿈치로 진을 건드렸다. 진이 바삐 말을 받았다. ―나 진은… ―춤에 생을 바치기로 일심을 먹었사옵니다. 신께서 우리의 행보를 지켜주시고 축복해주시옵소서. 말을 마치고나서 교가 화당가에 흩어진 재를 모아담고 굴 천정의 종유석(鐘乳石)을 타고 흘러내리는 락수를 받았다. ―야, 니들 대체 뭐 하고있는거냐? 뒤미처 따라온 염이 그들의 짓거리를 지켜보며 물었다. 교가 재를 삭힌 물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진도 그의 본을 내여 재를 락수물에 삭혀 단숨에 들이마셨다. 가슴에 손을 얹고 이구동성으로 서약했다. ―신께서 우리의 행보를 지켜주시옵소서! 그제야 영문을 알아낸 염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머물렀다. 염도 그들 곁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가슴언저리에 얹고 따라서 서약했다. ―신께서 우리의 행보를 지켜주시옵소서!       <계속> ㅓㅎ
118    김혁 문학블로그 댓글:  조회:3051  추천:73  2007-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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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천재죽이기 (1) 댓글:  조회:4784  추천:73  2007-06-29
    . 초현실주의소설 .   천재죽이기   1998 <<도라지>>소설문학상수상작품    김 혁         박제가 돼버린 천재를 아시오? 난 유쾌하오.- 李箱   9,... ... 《라다》가 지나갔다《캐딜락》이 지나갔다자전거가 지나갔다《오디》가 지나갔다《샤리》가 지나갔다봉고차가 지나갔다《쌍타나》가 지나갔다삼륜차가 지나갔다《벤츠》가 지나갔다살수차가 지나갔다... man은 밑등을 석회로 칠갑한 가로수곁에 그렇게 서있었다. 멋을 내느라 솔로 박박 문질러 흰빛으로 돼버리다싶이 한 청바지에 짙은 색갈의 T샤쯔를 받쳐입은데서 그 자신도 하나의 전지를 금방 끝낸 가로수를 방불케 했다.대로의 저편이 바다의 피안처럼 멀게 보였다. 그는 지금 흘레하는 잠자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의 물결을 헤가를수 없어 출근시간의 많은 부분을 네거리에서 허비하고있는것이였다. -지하상가를 리용하세요.안해는 늘 이렇게 귀띔해주군 했다. 허나 man은 뒤안길의 왕거미줄같이 얼기설기 뻗은 상가의 통로에서 늘 길을 찾지 못하군 했다.-뭐가 찾기 어려워요? 국제무역청사 서대문앞 입구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휘여들면 먼저 담배난전, 과일난전들이 보이죠. 곧게 가다 또 왼쪽으로 휘면 옷난전이 보이죠. 그담 오른쪽으로 휘면 녀자들 속내의 전문이고요. 다시 왼쪽으로 휘여들면 구두난전...구두난전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휘면 CD난전, 그곳 입구로 나오면 곧바로 청년려행사이고 그 맞은켠에 마침 당신들 직장이 있잖아요. 기억력이 그렇게 비상하다는 사람이 그게 뭐예요? 요즘 세월엔 약삭빠른 놈마저 등치우고 간 빼먹히는 세월인데...풍진세상 인간들의 정감세계는 그 농도와 줄기가 천양지차로 다른 법이였다. 이렇게 마냥 안해에게서 신칙을 받는 man에게 있어서 아담과 이브의 실락원이며 쥬라기시대의 공룡이며 산정동인의 하악골이며 말탄 기사들의 연미복이며 김에 불리는 주전자뚜껑과 증기기관과 와트며 우유를 시궁창에 쏟던 불황의 년대며 히로시마에서 치솟아오르던 버섯구름이며 환형산기슭에 남긴 첫발자국이며 인터넷의 불가사의한 힘이며 복제양 돌리의 탄생이며...에 대해서는 그 초장부터 끝장까지 장절, 수자, 부호마저도 낱낱이 기억해낼수 있었지만 그에 비해 허드레인간들에게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쉬운 두부값 콩갑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추려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해의 핀잔은 그녀의 체중과 정빌례되여 나날이 불어만 갔고 man은 그에 따라 요즘 세월의 락오자로 안해의 흰청 많은 눈길에 밀리우군 했다. 그럴법도 했다. 안해의 한달수입은 그의 한달로임 3하고도 남음이 있었던것이다. 셀레리즈맨으로 인끔높던 그의 위상이 길녘난전에서 아녀자들에게 한달에 한번만 수요된다는 생리 용품을 파는 허드레장사군 안해에게 제압당해 김뽑히고 원상을 잃어가고있는것이였다. 그만큼 자신에게 안해같은 순발력의 찌꺼기쯤이라도 있으면 요즘세월에 그 누구보다도 광이 나게 영소할수 있을것이라고 그는 자꾸만 생각하고있었다. 수영이 맨처음이고 다음엔 마라손 그다음엔 자전거경기인 서구라파의 종합경기종목처럼 134대의 차량을 지나보내고 출근고봉기의 대로를 헤치고 나온 man을 그다음엔 엘레베터가 태워가지고 9층높이의 사무실에까지 대여주었다. 뭐라고 딱히 말할수 없는 냄새, 페인트칠을 한 창틀과 낡은 가죽쏘파와 색바랜 사무테불과 너나의 앞에서 곰삭고있는 서로 다른 종류의 눅거리차와 서로 다른 패의 담배와 모발에서 풍기는 샴푸냄새...흔반이 되여 굼닐고있는 묵직한 사무실 내음속에 코마루를 벌름이며 성큼 뛰여들면 긴긴 드라마의 주인공같이 익숙하다 못해 권태기를 조금 자아내는 동료들의 얼국이 어제처럼 래일처럼 맞아주었다.man의 부서에서는 사무원 셋과 부장 한명을 두고있었다. 퇴직기한이 엘레베터 타고 8층까지에 닿아오고있는 부장님은 회사와 함께 늙어오면서 공로는 없어도 그런대로 로고는 있는분이였다. 동료1은 회사에서 《미식가》로 통하고 있는터였다. 도회지의 식당, 나이트클럽,레스토랑, 부페의 음식으로부터 지하상가,밥시장의 싸구려음식, 교외의 토속맛의 음식에 이르기까지 그 맛, 작식법, 가격에 대해 거론할라치면《586》의 공능이 울고 갈 지경이다. 하여 그에게는 늘 달콤한지 시큼한지 알수 없는 덥지근한 냄새가 배여있는듯했다. 게다가 낚시질에도 역시 강태공을 뺨치는 국수라 한다. 동료2- 함경북도 토종으로부터 3년 4개월전부터 갑작스레 서울말투로 탈바꿈해 어미(語尾)에요! 자의 부착률이 그누구보다 높은 그는 8시간이후의 애호가 만수받이로 다양했다.애초에 그는 롱구를 한사코 좋아했다.하여 그의 입에서는 늘《공중비인》-맥클쵸단《마술사》-죤슨,《랭면사수》-바클리,시카고 수소팀, 휴스톤 로케트팀...등등등으로 롱구면스타며 롱구팀이며가 련줄로 튕겨나오군 했다. 그런데 나 말이예요 롱구말이예요 굉장히 좋아해여! 매일이다싶이 식(食 )기도처럼 외우던 그가 박정한 련인처럼 롱구에 등을 돌려버렸다. 원체 그들 부서의 전임부장이 롱구에 환혹되다싶이 했던것이다. 그 롱구부장이 승격하고 떠난 뒤 동료 2는 늦깎이로나마《성쌓기》에 열심하고있었다. 하여 루즈를 미장이초단자처럼 엉성히 바른 그의 입에서는 요사이 마작용어가 새로이 서렬을 지어 출두해나오고있었다. 츙후, 쫭, 즈머 ,차,안깡, 요빙, 쓰툐,빠완, 펑,후라! 《념불도 몫몫,소뿔도 각각》인 세분의 집합점이라면 셋 모두가 키가 보통키보다 한눈금 내려온 체격 그리고 도수안경을 걸고있다. 그것이였다. 세사람의《12개》의 눈길과 마주하느라면 man은 늘 초동머리적 해빛아래 추겨들었던 확대경밑의 마분지를 머리에 떠올리군했다.그 12개의 눈길이 늘 그러하듯이 오늘도 man을 바라고 조리개를 맞추었다. -어머 청바지를 입으셨네요.동료 2의 안경테가 코마루에서 집장고도를 했다. 이어 여느때와 같이 늘 하던 부언을 잊지 않았다.-잘 어울리지 않네요. 키가요 엄청나게 커놔서요.-그래도 입고서 가랭이를 두겹씩 걷어올리기보담은 괜찮을건데.man은 선선히 대꾸하며 테블앞에 마주앉았다.-불편하잖을가? 꼭 갑옷같애. 난 거치장스러워 이런 옷은 입어 못내네동료 1이 하회를 이었다.-사무원 신분으로선 그래도 정장이 격에 맞는거여 쿨룩!부장이 총화처럼 곁들었다. 이어 담배를 뻑뻑 빨아대며 신문을 벌걱거리며 차물을 후룩후룩 들이켜며 향간과 세계와 태고적과 현실에 대한 패설, 잡담, 한담, 험다므 육담이 오가며 낡은 레코드 복창하듯한 회사으 하루가 시작되였다.-햇마늘이 시장에 나왔더군요...아흐흑-엊저녁 4차까지 했더니만 지긋해죽겠구만. 설렁탕은 그래두《ㅇㅇ설렁탕》이 일품이야! 《 xxx 구복액》광고가 지천으로 깔렸데 그래. 그약이 그렇게 ...쿨룩...그렇게 효험이 있을감? ...인도에서 핵시험을 했더군요...쉿-광고부의 ㅁㅁ하구 부기과의 *** 있잖아요. 사무실서요 그짓하다가요 들켰대요. 히히...하긴요 지금 세월에요 제 기물 가지고 굿하든요 장단하든요 관계할바가 못되지요 뭘...헌데요 ㅁㅁ가요.밴대였대요.밴대가 뭐냐구요? 어유, 나원요. 샌님들이라구야. 밴대가 뭐냐, 후후훗, 그곳에요.《머리》가요 나잖은걸 두고 말하죠...낄낄낄 후하하 어흐흐흐흐...《타이닉스호》가오스카 11개 종목의 상을 받았더군요. 그 영화 봤습니까? 못봤다구요? 그럼 VCD로 봤겠지요?못봤다구요??그럼 영화주제곡《잃어버린 내 사랑》은 들어봤겠지요? 요즘 류행톱가요인데요. 못들었다구요???...《ㅇㅇ보신탕》집에서 개고기에 아편을 넣어 맛을 돋군 다더구만...헌데 이자 금방 단오인데 왜 이리 덥지? 엘니노현상이라누만... 네미럴, 같이 이런 지랄같은 날씨가 언제까지 지속되려나?...어험! 그런데 오늘이 무슨 요일이던가암? 월요일입니더!!! 8, -리자로 끝나는 말은 우리,유리, 소리, 머리, 허리, 다리, 피리, 항아리, 병아리, 머저리...딸애는 그렇듯 신명나 하고있었다. 목청도 까랑히 박수를 짝작 쳐대며 말꼬리잡길 하고 있었다. -자 담은 내 차례야, 자리, 보리,거리, 파리, 거마리, 종아리, 종다리,동심에 어우러지는 순간이 좋았다. 파시시한 초동머리와 가슴을 철렁이게끔 맑은 눈동자와 장난기 꼬질꼬질 묻은 오똑한 코마루와 천연기 가득히 볼똑하니 살아오른 볼타구니의 딸애와 함께 할 때마다 man은 맘벽에 묻은 모든 고뇌와 번민, 얼룩이 잊혀지고 사라지고 지워지는 기분이였다. 동심이라는ㄴ 탈면지로 주름진 대인세계의 갈피에 낀 청태를 순화해내면 금시 욕탕을 나와 일습을 개변하듯 심신이 거뜬해 지느것이였다. 나젊은 부부들은 흔히 결혼초기에는 완벽한 밀애에 빠졌다가 조금 권태기를 촉감했다가 둘사이의 결실인 아이를 가지면서 다시 새로운 내용물의 사랑을 감지하다가 강보에 대한 양육의 피로감을 느꼈다가 아이가 말을 번지고 예쁜짓만 골라할 시기에는 또다시 정감의 귀합을 느낀다고 했다. man은 바로 그한 묘미에 가정이라는 삽짝문을 때맞춰 열고 돌아와 그뜰에서 즐거움과 여유와 행복을 즐기군 했다. 때로 자정의 끝적구이점에서 사우나탕으로...4차5차 매진해가는 시체인들의 오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정이라는 자그만 반경속에 자신의 커다란 체구와 정감을 달무리짖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그는 사업에서 삐여나게 열심했고 가정에도 구순하게 충실했다. 그에 반해 그 원을 짓는 콤파스다리의 한쪽이 기울었다면 외려 안해쪽이였다. 아무리 《음성양쇠》의 기운 세월이라지만 근년들어 안해는 아열대식물처럼 강장해졌고 man은 그 잎사귀와 그늘에 가려 음지식물처럼 연약해진것이였다. 애초에는 난전의 장사군들끼리 되놀이를 합니다. 산보놀이 갑니다. 3.8절 쇱니다 하며 토를 달아 외박이 잦더니 요사인 한보 승격하여 최부장이 청해요, 오사장이 청해요 하면서 집을 나서군 했다. 처음엔 초저녁을 넘기 바쁘게 달려오더니 이제는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처음엔 미안감과 죄송스러움이 보이더니 이제는 찾아볼수 없고 외려 오기와 득의연한감같은것이 엿보이기까지 했다.무릎가에서 재깔이던 딸애느 어느사이 잠이 들어있었다. 자리를 펴고 아이를 눕혔다. -리자로 끝나는 말은 유리...소리...허-리...다-리...병...아...리...딸애는 잠꼬대를 하고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꿈속에서도 캐드득 웃고있었다.man의 품속에서 안전감과 행복감으로 잠이 들어있었다. 아니는 오작품 엄마를 두고 아빠한테서 이중으로 모성(母性)까지 느끼고 있는걸가? 그렇다면 나는 어데가서 모성애를 찾아야 할가? man은 한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친어머니를 생각했다. 가벼운 한숨을 짓고나서 애의 따스한 볼에 자기 볼을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기다렸다. man의 6감각은 언제나 그렇게 준확했다. 그가 전화에 생각이 미치자 바람으로 따릉 따릉 따따르릉- 전화벨이 노래했다.man은 헤덤비며 덮쳐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간지러운듯한 녀자의 음성이 들렸다. 빨 힘이 다분한 목소리였다. man은 다시한번 전률하고 흥분하는 자신을 느꼈다. -J,J양 맞죠, 나 M입니다. J라는 녀자...-여보세요? 리부장댁 맞죠? 어머 잘못 눌렀네요.죄송합니다...-여봇에요? 리부장댁... 어머 또 잘못 눌렀네요. 전화번호가 비슷해놔서요. 정말 죄송합니다아...-여보세요? 리부장...어머머 취했나봐요. 정마아알 죄송합니다아아...이렇게 시작된 통화였다.-네 리부장댁 아닙니다. 죄송할것 없어요. 우리 이젠 구면이구만요. 록음기소리 굉장히 높은데요. 음악 즐기는 모양이죠.-네에 이 노랜 제가 가장 즐겨듣는 애청곡이랍니다. 얼마나 좋은 노랜가요.-저한테도 마찬가진데요.-소일거리로 소설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하는데 이 노래가 저한테 딱 맞는쪽인가봅니다.-어떤 책 즐겨 읽지요?-추리소설을요. 전 추리소설 억수로 좋아해요.-나도 추리소설이라면 밥먹기를 제쳐놓습니다. 코난도일이라든가 아가사.크리스티. 헬렌포우,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소설들을 말입니다.-어머머, 이거 지기를 만났나봐. 이렇게 눅거리애정소설에서처럼 전화 파트너를 사귀게 된 man이였다. 노래제목을 따서 상대는 J로. 남자라는 영문자모의 첫자를 따서 자신은 m이라 통성명하고... 고독한 녀자 같았다. 누군가와 대화하고싶어하는 녀자 같았다. 하여 며칠을 사이두고 녀자는 시간맞춰 전화를 걸어왔고 그 녀자와 동병상련의 처경인 man도 가끔 그녀에게 전화를 주군 했다. 무슨 애기든 이야기거리르르 만들어서는 밑도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군 했다. 생면부지의 녀자와의 통화, 어덴가 기상천외한 느낌이 들군 했지만 수화기를 들고 피부에 와닿는 맑진 목소리를 들을때마다 까닭없는 생기를 느꼈고 통화를 마치고나면 해골머리가 개운하고 체증이 사라진것 같은 느낌을 받군 하는 man이였다. 얼마전부터 man은 전화로 녀자에게 《여섯사람의 낭떠러지》라느 추리소설을 이야기해주고있었다. 《어떤 공학박사가 있었습니다. 공학분야에서 엘리트로 꼽히는 나젊은 인재였지요. 어느 한번 박사는 동인 다섯명과 함께 등산 려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응당 즐거워야 할 려행에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어찌된 까닭인지 공학박사가 낭떠러지에서 뛰여내렸던거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했는데 통화가 길어져 전화를 끈었었다. 그리하여 녀자는 장화소설의 다음회를 기다리듯 오늘도 man에게로 전화를 넣었던것이다. -...여보시오? 전번엔 공학박사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데까지 이야기했죠? 자. 그다음 부분이 이어집니다...모두들은 그 박사가 술을 과음하고 젊은 혈기에 무모한짓을 저질렀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이들은...아니, 기침을 하시는구만요. 몸이 말짼거나 아니십니까? 괜찮다구요?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어떤이들은 그 박사가 원체부터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신질환자의 환각으로...-잠간요 BP가 오는 구만요.미안해요. 일후 다시 애기하자요. 안녕!- man은 채 먹지 못한 떡을 내려놓듯이 아쉽게 전화기를 내려놓았다.방에는 순간에 고요가 해조(海潮)같이 밀려왔다. 고요를 잠식하며 옆집에서 울리느 수런대는 소리가 차츰 또렷하게 감지되여왔다. 이어 그 수군거리던 말소리는 기묘한 소리로 바뀌여 본의 아니게 man의 귀에 잡혀왔다. ...삐걱삐걱...어머어...헉헉...김, 김사장 나죽네...아흐흑...아흑아흑...삐걱...헉...김사장...어머 ...김사장... 날 보내줄거죠...아흑... 정말 보...보내줄거죠...아흐흑...삐걱삐걱...매달마다 박봉의 절반 가깝게 잘라서 내기로 하고 맡았다는 세집이 최저한도의 은사권도 지킬수 없게, 방출되는 소화계통의 벅찬 음향마저 가려들을수 있는 달팽이집이였다.  처음 맡은 집은 연기가 나고 두번째 맡은 집은 춥고 세번째 맡은 집은 물이 잘 나오지 않고... 결혼 5년에 이사를 저그만치 여섯번 하였었다. 불찬 놈이 녀편네와 아이 엉뎅이 들여놓을 굴 하나 마련하지 못한다고 안해에게서 욕을 삼태기로 먹어가면서... 그때마다 man은 자격지심에 참깨 하나로 줄어든 기분이였다. 회사의 사장님, 부장님, 차장님들도 그사이 그 못잖게 집들이르 하였다. 사장님은 더 좋은데로 가면서 원체 좋은 집을 부장님에게, 부장님도 더 좋은 사장님네 집자리로가면서 원체 괜찮은집을 차장님에게, 차장님도 더 좋은 부장님네 집자리로 가면서... 이런 순으로 되여왔는데 사업년한이 드높은 항일전쟁+2년이나 되게 길어도 종내는 man에게까지 그 차례가 올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man은 주택분배때면 시골서 로인네를 데려다놓고 부모를 모시니 비좁은 집고생을 어서 면케 해달라 울고불거나 그제야 헐레벌레 독신자녀증을 내며 분배점수를 따려는따위의 광대극은 놀지 않았다... -동무는 해마다 선진 공작자요, 일터표병이니 방법을 대서 곤난을 해결해드리지, 허나 초년고생은 금고생이라고 조금만 참소. 조금만...동무 말고도 집고생을 하는 동무들이 얼마나 많소. 그리고 헐벗고 굶주리는 제3세계 인민들을 생각해보란 말이요. 우리가 동무나이만 할적에는... 령도님들이 송등의 무사마귀만치 례사롭게 대하며 일년 세방값의 십이분의 일되는 돈을 적선이라도 하듯이 던져줄때면 man은 그저 고소를 머금을뿐이였다. 지진이 일듯 룡권풍이 일듯 해일(海日)이 일듯하던 옆집의 운우지정의 환음은 어느결엔가 멎었다. 고요가 다시 엄습했고 man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선잠에 빠져든 그의 발부리를 누군가 툭툭 건드렸다. man은 천군무게의 눈시울을 치떴다. 야광을 빌어 거쿨진 몸매 하나가 뻗쳐 서있는것이 보였다. 그 사람은 중세기적 기사들처럼 눈가리개를 하고있었다. -누구욧! man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검은 보자기처럼 공포가 그의 일신을 휩쌌다.-쉬잇! 황야의 무법자같은 그 사람 식지로 입을 가렸다.그리고는 혁띠에서 무언가 끄집어내였다. 피스톨이였다. 탄알 한방을 꺼내였다.어둠속에 탄알의 황금빛이 온 바안에 총만해 오르고 있었다. 탄창에 꽂아넣었다. 탄창을 디그르르-돌렸다. 러시안룰렛(俄盧斯輪盤)! 잭크런던의 모험소설이나 서구 카우보이,홍콩 깽영화에서나 보았던 장면의 재현이였다. 운명있는 총으로 자기 머리를 겨누어 쏘는 생사의 겨룸, 왜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서 이래야만 하는지 man은 알길이 없엇다. 그저 수동적으로 감독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보조역을man은 엉성하게 놀고있엇다. 그 사람의 눈빛에는 살기의 태엽이 돌돌 감겨있었다. 그눈빛에 짓눌려 man은 소리쳐 구원을 바란다든가 110을 부를 생각 같은것은 할 엄두도 못냈다. -가위 바위 보! man은 진땀이 흠씬 내돋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보오오! 그런데 그쪽은 ...가위였다. 그 사람 총신을 잡아 총자루쪽을 man에게 내밀었다. man은 떨린는 손으로 피스톨을 넘겨받았다. 난생처음 쥐여보는 피스톨은 그렇듯 무거웠다. 그 사람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했고 그 딱딱함속에는 항거 못할 그 어떤 위세가 서려있었다. 이 총으로 넘겨 쏘아버릴가? 허나 man은 일상에서 종래로 규칙이나 법도에 위배되는 간활한 처사를 할줄을 몰랐다. 그래도 종구를 태양혈에 가져다 붙였다. 총신이 그렇게 차거울수가 없엇다. 얼굴로 땀방울이 팥죽처럼 흘러내리고있엇다....나의 호흡에 탄환을 쏘아넣는 놈이 있다... 별이 흔들린다. 나의 기억의 순서가 흔들리듯... 배속 뼁끼칠을 한 십자가가 날에 날마다 발돋움한다. 나에 대해 달력의 수자는 차츠차츰 줄어든다. 네온싸인은 휘파람같이 여위였다...하얀 천사가 나를 가벼이 노크한다.-리상《날개》     -어, 어무니,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를 속으로 부르며 man은 두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절컥!격침이 튀는 소리가 들렷다. 절컥!빗장을 열며 누군가 집에 들어섰다. 안해였다. 꿈에서 깬 man은 방금전의 경악을 억누르지 못한채 두눈을 커다랗게 치뜨고 밤늦은 귀가의 안해를 쳐다보았다. 태짐투성이 얼굴에 취기를 잔뜩 묻히고 불고기냄새,술냄새에 man이 가장 싫어하는 마늘냄새를 풍기며 안해는 꿈속의 야행자처럼 그앞에 뻗쳐 서있었다. 둘은 결혼후 1825번째로 되는 싸움을 벌리기 시작했다...7, 덜커덩! 육중한 괴음과 함께 엘레베터가 갑작스레 멈춰섰다. 층쑤를 나타내던 수자판의 지시등도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이거 또 고장이잖아?man은 엘레베터문의 여닫이버튼을 눌러보았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한번 열싸게 눌러댔다. 허나 문은 주문이 맞지 않는 천방야담속의 동굴문처럼 종시 열려지지 않았다. 엘레베터속에는 man말고도 위생모자를 쓰고 T형걸레와 바께쯔를 든 회사의 청소부아줌마가 합승해있었다. -어떡하지유?도회지에 몸 담그고 일보고 있지만 그 쪽빛에 물들지 못한 모양 부연 표상의 청소부아줌마가 더럭 겁기든 모습을 지었다. -밖으로 열어야지요 밖으로! 여보시오?게 누구 없소?-웬 땐티(電梯)가 사흘에 한번 꼴루 빵꾸나쥬?-국산제랍니다. 여보시오?여보시오? 국산을 선호한답시고 놓은 가격이 헐렁한 엘레베터가 그 수리비용이 원가를 훨씬 넘겼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타고 다니는 차나 양복따위는 비싼 외제로 택하는 령도분네들이였다.탕탕탕! man은 엘레베트의 문을 기승스레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마냥 시간에 쫓기고있는 그로서는 들숨날숨할 사이없이 타작이 채 못되여 튕겨나오는 씨낟알처럼 수북이 쌓이느 ㄴ일거리들을 재빨리 까고 다듬고 선정해내야 했던것이다. 그건 제쳐놓고라도 다른이들은 정오전까지라도 회사에 얼굴을 보이면 되였지만 서진공작자라는 《자》자가 새겨있는 그로서는 몇분간의 지각이라도 대서특필할 죄상이 되는수가 많앗다. 《중구는 삭금》(衆口 金)이라고 man은 그런 험구의 과녁이 되는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하여 신경질에 가깝게 문을 두드려댔다.   너는누구냐?그러나문밖에와서문을두드리며문을열라고웨치니나를찾는일심(一心)이아니고또내가너를도무지모른다고한들나는차마그대로내여버려둘수는없어서문을열어주려하나문은안으로만고리가걸린것이아니라밖으로도네가모르게잠겨있으니안에서만열어주면무엇하느냐?너는누구기에구태여닫힌문앞에서탄생하였느냐?-리상 《정식》(正式)    탕탕탕! 여보시오! 게 누구 없소? 탕탕탕! -문 좀 열어주시오! 탕탕탕.... 밖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응대도 없다 조작원에게 비상열쇠가 있을텐데...man은 그만 힘에 부쳐 체념한채로 벽체에 기대여 서버렸다. -혹시...떨어져내리진 않을가유?청소부아줌마가 T형걸레를 구명대인양 공연히 부여잡으며 공포가 가배된 모습으로 물어왔다.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정부동하게 페소(閉所)공포증과 고소(高所)공포증을 갖고있다고 햇다. 더우기 시간과 공리에 매여 스트레스를 매일이고 받는 사무원들에게는 그 증세가 더 심하다고 했다. 허나 man은 이 명에서는 남에 반해 무감각했다. 자기가 원했던바를 자기 분수에 맞게 완수해나가는데만 열중했지 주변환경이 밀페된 곳이든 드러난 곳이든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개의치 않았다.누구처럼 온 회사의 사무원들에게 제 괴춤을 털어 술사는것으로 호인역을 애써 분장해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업실적을 알콜의 농도로 무마하려 하지 않았고 또 누구처럼 웃어른들의 기호에 따라 자신의 없는 취미를 살리며 아부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여느 회사들의 사무원들끼리 흔히 있게 되는 파벌획분에도 들지 않았고 남들이 문턱다슬게 찾을 령도분네 저택의 번지수도 모르고 살아왔다. 하여 사업에서는 빼여난데 대인관계나 사교술에서는 풋바지저고리로정평이 나있었다. 그런 다른 공식의 삶을 살고있는 풋바지저고리와 회사의 허드레 청소부아줌마가 지금 엘레베터속에 통졸임처럼 함께 갇히게 된것이엿다. -떨어질 근심 같은건 그만 챙겨두세요.man은 공포의 음영속에 떨고있는 무지렁이아줌마의 마음을 무마해줘야겠다는 의무감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엘레베터가 떨어져내린 사고는 거의 한건도 없습...네? 엘레베터가 뭐냐고요?네에.땐티!우리가 지금 타고있는 이 땐티를 말하죠. 엘레베터의...아니.땐티의 줄이 끊어져도 스프링이나 유압을 리용한 안전걸쇠들이 세면의 벽에 련결되여 제자리에 서게 하는 안전장치가 되여있습니다...무료하고 갑갑한 시간의 침전속에서 헤여나오려고 녀인에게 엘레베터의 신빙성에 대해 확증케 하려고 man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끄집어냈고 아줌마는 알듯말듯한 극적인 표정으로 들어만 주고잇었다.-그러니까...기원 236년 아르키메데스에 의해 도르래에 줄을 걸어 사람이 당기는 방식으로 원시적인 엘레베터...아니 땐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네에, 옛날 사람들 정말 총명하지요?1835년에 증기기관식 화물엘레베...땐티가 나왔구요.평형추의 떨어지는 힘을 땐티의 상승력으로 활용하는 방식은...1853년이던가... 엘리사 오티스라는 미국사람에 의해 개발됐습니다.그로부터 몇십년이 지나 뉴욕에서 사람을 싣느 승객용 땐티가 처음 설치되엿습니다.1889년에 전기구동식으로 바뀌여 자동식 땐티가 만들어지구요...네에 여하튼 엘레베...아니 땐티는 고장나도 추락되지는 않습니다. 떨어지지 않는다구요... -선생님, 선생님은 9층에 계시지유? 이 회사에서 젤 깔끔한 사람으로 알구있습니다. 옷차림두 깔끔하구 사람두 깔끔하구... man의 엘레베터의 연혁사에 대한 《특강》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아줌마가 동에 닿잖은 말을 했다. 눅거리라 해야 할지 진솔하다 해야 할지 모를 그 찬사에 man은 일순간 바보에 빠졌다. 남의 잘되는 호박을 못본듯 지나쳐버리거나 넝쿨이 탈렸소 식으로 꼬집어야 직성이 풀려하고 지어 야음을 타서 손가락으로 호비작여놓는 오활한 사람들속에서 처음으로 들어보는, 찬사같지 않은 찬사였던것이다. 이때 드디여 엘레베터의 문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졸지에 들이닥친 채광에 눈시울을 좁히며 man은 아줌마에게인지 엘레베터조작원에겐지 알수 없을 감사를 소리 크게 울렸다,6,동료1: 어이, 아가씨-잉어회가 다됐소? 인제야 낚시줄 풀고 고기 낚는감? 이거 술판 다 식네. 이 식당에 그래도 잉어회가 일품이라서 택시타고 왔는데...부장: 그래! 나도 회라면 죄다 무지하게 좋아하는편이요. 잉어회뿐아니라 소처녑두 그렇구...아흐흑, 어이 졸려. 한잔 했더니만 노곤해지는구만 그래. 동료2: 엊저녁요 또 밤새웠지요?츙휼 했지요? 나 말이예요 나그네가요 찔 흘기는 바람에요 주저앉고말았지요. 요사인요 손줌이 얼매나 좋은지요! ...마작이란 물건 있잖아요 정말요 사람 싸-악 죽인다구요. 마작요 일본사람들 만들었다나요? 일본놈새끼들요 머리통 하나만요 정말 좋지요? man:그런것 같잖은데요. 마작은... 명조 삼보태감 정화가 만들어낸거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항해가 정화 말입니다. 정화가 남양으로 향행할 때 수부들이 제일 관심하는 이름을 따서 이 놀음을 만들었답니다.부장: 듣다 첫소린데? man: ...정화 신변에 한 장군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얼굴이 곰보딱지였대요. 그를 따서 마작(麻雀)이라고 이름지었답니다. 마작에서 1만부터 9만까지는 당시 돈의 수량이고 동서남북품과 매화,란초, 국화, 참대와 같은 패쪽은 날씨와 절기를 의미해주는거랍니다. 중(中)은 라침판을 말하고 발(發)은 항해자들이 천체를 관찰하는것이고 백( 百)은 배에서 올린 흰 돛을 가리켜 말하는것입니다. 그리고... 동료1: ...이제 보니 자넨 혼자 보기 참 아까운 사람이구먼, 어쩜 마작도 놀줄 모르면서 그렇게 능통하셔? 자, 부장님 회가 올라옵니다-여하튼 자네 팔뚝 굵네 굵어. 동료2:여하튼요 나 마작요...어머 시쿨어라. 이 회가 왜 이렇게 시쿨죠... 나 마작요 굉장히 좋아해요. 동료1: 헌데 자넨 이렇게 식미 돋구는 회에도 흥미가 없나? man:저...괜찮은데...마늘을... 동료2: 정말 그쪽에서 마늘을 꺼리죠. 실루참. 무인도 가서요 오두막 짓고요 혼자 살아요동료1:이제 와서 뭐 누구와 깨꿀 쏟아지게 키스할 사람이라도 있나? 사내라면 텁텁하게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잡수어줘야 사내다운거야. 그러다간 국물도 없어, 자, 한잔들고요. man:그런게 아니라... 부장:카-기실 마늘은 몸에 좋은 물건이라하데 그려. man:네 알고 있습니다. 고혈압과 암병 심장병 에방에 특효가 있다고 합니다. 염증치료에도 좋구요. 마늘의 주요성분은 알리신인데 그것이 피속의 콜레스테롤 함량을 낮추고 피를 맑게 해준답니다. 말초혈관을 넓혀주어 피가 잘 흐르니까 자연히 고혈압에나 심장병치료에 리롭지요, 그런데 간이나, 위, 방광에는 부작용이...동료1:됐네 그만, 자네 팔뚝 굵네 문자 쓰지 말구 마늘 먹는 련습이나 잘해두라구. 어이, 아가씨-여기 광천수를 좀 갖다주시오. 자, 들면서...부장:그런데 이봐 팔뚝굵은 량반...아, 그만 채를 그만 집어놓게나. 내가 뭐 식충인가 하나배. 녀자들이란 다 저렇게 살뜰한가? ... 이봐 팔뚝굵은 량반, 오늘이 무슨 요일이던감? man:수요... 동료2:오늘 말이예요 수요일!수요일이예요!부장:금요일까지 자네 리력서와 신분증 몇장을 복사해갗고오게나. man:왜요? 부장:물론 좋은 일이지. 우리 부에 국외고찰연수지표가 한장 떨어졌네. 이 자리서 누구나 박연폭포나 서울남대문구경을 한번씩을 갔다왔는데 자네만 석동이였더구만. 이번엔 지위, 년령을 따지지 않고 사업실적이 좋은 사람 우선 뽑기로 했네. 저...담배 있남?부장:힘써보지. 이번이 네번째 돌림인데 번번이 빠져서야 되겠나? 선진에 모범을 도거리하는 량반인데...동료2:어머,운세가요 무지개로 피누만요. 부장님요 자, 라이터! 아침에 볼라니요 운동화도 멋진걸로 신었던데요. man:집의 안해가 가게를 차리구 있잖구 뭡니까? 신가게 사람들과도 친숙한 사이니까 비싼것도 헐도매가로 사왔더군요《아디다스》표랍니다. 동료2: 가짜가 아닐가요?동료1:비싼거라 해서 다 좋은건 아니지부장:지금 신들은 정말 견디질 않아! 양식이 좀 낡긴해두 난 몇년전에 사둔 검정구두가 아직도 맘에 드는구먼.동료2: 그 신요 꼭 가짝거예요.동료1:운동화를 신으면 발이 편할는지는 몰라도 사람의 세련미가 적어보이지. 유치한 초중생처럼. 부장님. 자, 이 물고기눈을... 안질에 좋다는데...부장:마늘을 입에 대지 않는 이 사람에게 넘기세나. 물고기야 꺼리지 않겠지? man:그래도 시력이 덜 좋은 여러분께서 드시죠. 물고기눈은 시력뿐아니라 기억력쇠퇴나 혈압을 낮추는데도 좋은 물건이지요. 물고기눈에는 도코탄소펜올레핀산과 에이코탄소펜올레핀산과 같은 지방산이 풍부히 들어있지요. 이런 천연물질은 인체에...동료1:동료2: : 그래그래. 니 팔뚝 굵다!부장: 5,-주의, 액-션!조명이 켜졌다. 카메라들이 일시에 그를 바라고 초점을 맞추었다. 수천쌍의 관객들의 눌길도 그를 바라고 몰부어지고있었다. man은 환장하게 눈부신 조명의 빛에 눈시울을 좁혔다. 두손을 일순 어떻게 주체할 길 없어했다. 공연히 마른기침을 한번했다. -관중 여러분, 여기 나선 이분께서 여러분들에게 기상천외한 장끼를 펼쳐드리겠습니다. 기억력수준이 불가사의하게 뛰여난 이분은 동서남북 고금중외의 보고 들은 일들에 대해 그 년대, 수치, 유래를 빠짐없이 기억해두는 척척박사랍니다. 지어 우리 말 사전의 모든 단어들에 대해서도 낱낱이 기억해낼수있답니다. 자. 여기에 사전도 마련했습니다. 그럼 장끼자랑 오락프로를 이제부터 펼쳐드리겠습니다! 기대해주십시오- 언제 어디선가 신분증을 홀랑 잃고 man은TV방송국에 빈분증 분실광고를 내러 갔었다. 광고내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기다리면서 풋면목이 있는TV제작일군과 만나 한담거리를 끄집어내던중 TV에서 제작한 수십년간의 아이템들의 년도,배우, 제목에 대해 일점불차없이 이야기하는것을 보고 그 빼여난 기억력에 모두가 경악, 《주말대잔치》라는 애청프로중에 《장끼자랑》이라느느 작은 종목이 있는데 그 종목에 출두해달라고 했다. 《장끼자랑》은 기공이거나 요술.입재주표현.등 각종 장끼가 있는 항간의 재주군들이 종참하는 인기프로 종목이였다. 원체 웃으며 지나치려 했는데 프로듀서마저 나서서 보수까지 내들며 출연을 청탁했다. 게다가 안해마저 단신 남보다 못난데 어데 있어요? 돈액수도 굉장한데요! 하면서 등을 와락 미는지라 마지못해 무대에 오르게 된 그였다. 원체 자아의 표현을 극구 삼가했던 man은 무대에까지 오른 지금에 와서 머스로 한껏 멋을 낸 머리칼을 부자연스레 만지며 후회를 되뇌이고있었다. 복잡한 심기를 정리하기도전에 아나운서에게서 마이크가 넘겨져왔고 관객들속에서 질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문: 《현대조선말사전》2195페지 19번째줄에는 어떤 단어가 씌여져 있습니까? 답:...2195페지 ...여얼아홉번째...줄의 단어는 텔레비죤, 텔레비죤이라는 단어입니다.??? ??? ???-맞았습니다!!!좌중이 술렁거렸고 이어 갈채가 터져올랐다. 문:그러면 《기억》이라는 단어는 사전 몇페지에 적혀있습니까?답:...삼백...사십 아니.삼백오심일페지 우로부터 서른아홉번째줄에 씌여있습니다.-맞았습니다아!!!문:월드컵 축구경기가 당금이지요. 그러면 1978년 제 10차 세계컵경기에서는 어느 팀이 우승을 따냈습니까.답:우선 질문을 시정합시다.1978년이면 제10차가 아니라 제 11차지요. 제10차는 1973에 열렸는데 독일이 우승했죠.선생이 묻고저 하는 78년경기에서는 아르헨띠나팀이 우승을 따냈습니다. 맞죠?문:네네네.맞습니다. 맞아요. 전 춤을 즐기는편이예요. 사교무의 유래에 대해 알고있는지요?답:사교무는...오지리에서 기원되였는데 당지에서는《란드러》라고 불렀습니다. 농촌무용이란 뜻이죠. 19세기 오지리 수도 원에서 신속히 파급되면서 그 세기 30년대로부터 세계여러 나라에 전파되였습니다.저도 춤을 즐기는편인데 이 자리가 끝나면 함께 무도청으로 갈가요?문:홍콩이 희귀한지도 1년이 돼옵니다. 그러면 홍콩이란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답:홍콩이란 광동사투리발음으로서《향을 수송하는 항구》라는 뜻입니다. 그곳에서 침향(  香 )이라는 독특한 향료가 특산으로 많이 나지요. 그 지방 사람들은 그 향료로 향을 만들어서는...문:그런 문제는 향항회귀지식경연을 통해 일반일들도 많이 알것 같습니다. 좀 바쁜쪽으로 묻겠습니다. 해만 정세가 긴장해지면서 무기장비문제가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만사통인 성생께서는 전쟁에 흔히 쓰는 유도탕의 작동원리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부언하는바이지만 저는 군인 출신이랍니다.답:...유도탄...흔히 다계단구조로 되여있습니다. 대기층을 뚫고 오른 뒤 마지막 계단의 발동기는 작동을 멈춥니다. 탄두는 관성유도의 조작으로 곡선을 그리며 목표쪽으로 방향을 기울입니다. 이때 탄두의 초속은 7.9킬로메터,고도는 천킬로메터에 달하게 됩니다...문:실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믿기 어려워요.믿기 어려워...문: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현대조선말사전》제2032페지 오른쪽 첫번째줄의 단어는 무엇입니까?답:...그 단어는 천재라는 단어입니다.스튜디어홀을 가득 메우는 갈채성속에서 man은 퇴장했다. -맙시사! 실로 정채로왔습니다. 분장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프로듀서가 달려와 man을 으깨져라고 포옹했다. 그러면서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아이템을 빛내준 man에게 한턱 톡톡히 내겠다는것이였다. 술을 들면서 다음 출연계약을 맺자는 것이였다. 프로듀선느 감탄을 련발하고나서 록의홍상의 배우들을 휘동해가지고 무대로 나갔다. man한사람만 남겨진 분장실은 일순 고요를 되찾았다. 벽에 배우들이 분장용으로 쓰이는 커다란 체경이 붙어있었다. 그 체경속에서 흥분된 모습을 한 멋진 헤어스타일의 나그네가 그를 마주 보고있었다. man은 그 익숙한듯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못한듯하기도 한 우멍눈을 새삼스레 점도록 지켜보았다. 왜선지 까닭없는 한숨이 나왔다.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엇을것이요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요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왼손잡이요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거울아니였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져보기만이라도했겟소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리상 《거울》    4, -...공학박사가 낭떠러지에 뛰여내린 괴변이 일어난후 형사가 이 사건을 접했습니다. 형사는 박사이 죽음에는 타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박사와 동행한 다섯사람의 신상과 박사와의 관계에 대해서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그중 A는 박사와 동무인데 성적이 삐여나지 못해 질투하고있었고 B는 박사와 사랑의 라이벌이였으며 C는 박사에게서 거금을 빌렸으나 갑지 못하고있었고 D는... man은 또 J라는 녀자와 통화를 하고있엇다. 추리소설을 이야기하고있었다. man은 늘 J와이 통화를 갈망했다. 적어도 목적이나 질투, 조소, 의심으로 복선을 깔고 사투리나 감탄사로 친절을 위장한 동료들과의 피로한 대화보다는 편했고 순수해서 좋았다. 전화료금에 대한 근념같은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녀와 끝간데 없는 대화를 나누느라면 man은 마냥 속마음 깊이에서 태종질하던 불안과 걱정, 고민 같은것을 잠재우고 잊어버리고 덜어낼수 있었다. 또 안해의 그림자가 늘 비여있는 가정의 한 국부를 다른 녀자에게서 그것도 거짓말같이 만난 전화파트너에게서 보충받고있지 않나 하는 느낌도 가끔 들군했다.때로 man은 J를 불러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만나서 그 용모를 확인하고 그 익숙해진 목소리를 신변가까이에서 실감해보고싶어졌다. 허나 이렇게 그저 전화로 만나는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고 그 생각을 엎지르기도했다. 일단 만나서 감몽처럼 그려보던 그녀의 용모나 행위가 자기가 머리속에 정형시켰던 거푸집과는 틀릴 때.또 그녀에게서 요즘 세월 흔히 보게 되는 그런 간활함과 염세감과 욕정과 무정과 잔혹함의 심기들을 보아내게 되면 man은 그저 그녀가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철길을 넘겨주는 륙교하나가 가로놓여져있었다. man이 어릴적부터 천교는 그렇게 놓여져있었고 그 다리에는 온 도시가 다 아는 끔찍한 야화가 실려있었다. 태줄 끊어 처음으로 믿었던 남자에게서 배신을 받게 되자 그 강보의 씨를 천교에 놓아두고 투신자살한 한 녀인의 순애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페인트칠이 색바래지고 라사못이 곰삭아 널마루가 행인들의 발밑에서 삐걱삐걱 괴음을 내는 야밤의 랑하같은 이 다리를 모두들 《귀신다리》라고 불렀다. 지금은 현란한 광고판으로 그 검버섯이 앉은 속살을 가리우긴 했지만 여전히 이 도시에서는 가끔가다 톱화제로 한담순위에 올랏고 길하지 못하나 이름도 그냥 그렇게 불려지는 천교였다. 그런 천교부근에서 그녀가 살고있는것이였다. -풍수가 덜 좋은 곳에서 살고있죠?언젠가 J가 《귀신다리》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유신론을 펴들었다. -이사를 해야겠구만요.말을 이렇게 하면서도 man은 그저 좋기만 했다. 그녀가 룡담호혈속에서 살고있다 해도 man은 그녀와 대화를 나눌수 잇다는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따라서 J라는 녀자는 man에게 있어서 실재하고있으나 보이잖고 허상같지만 또렷한 영상의 과잉된 존재로 메모되여있었다.man은 그녀에 댛나 까닭없는 만족감과 지어 의존감을 가지게 되는 자신을 두고 꿈틀 놀랄때도 많았다.어데선가 모터찌클의 소리가 울렷다. man은 귀바퀴에서 수화기를 땠다. 짐승의 포효소리같은 모터찌클소리가 분명 들리고있었다. -미안합니다.man은 갑작스레 전화를 끊었다. J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로서는 처음이였다. 요사이 man은 모터찌클에 알레르기가 생긴듯하였다.심각한 알레르기였다. TV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천부를 증명하던 날 흠뻑 취한 늦은 귀가길에 man은 도로를 포악함에 가깝게 질주하는 모터찌클에 질려 그 자리에 차렷자세로 얼어붙고말았다. 그런데 무섬증을 가라앚히기 바쁘게 더 크낙한 경악이 덮쳐들었다. 오연감으로 모터찌클을 짓쳐몰고있는 핑크빛 투구의 사내. 그 허리를 잔뜩 그러안고 뒤에 밀착해앉은이는 다름 아닌 자기 안해엿던것이다. man은 순간에 술이 말갛게 깨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분명 그림자마저 익숙한 안해였다. 집에 돌아와 누군가고 캐여물었다. 안해는 가게에 화물을 전송해주는 거간군이라고 했다. 허나 man은 6감각으로 믿기 어려워했다. 아녀자들의 낯간지러운 용품이나 도매해주는 차새 거간군이 어떻게 《혼다 125》를 몰고 길바닥 좁다하게 으시댈수 있을가?그리고 바람샐 짬 없게 그 이른바 거간군을 그러안고 앉은 안해의 얼굴에는 분명 평소에는 볼수 없었던 그런 현기증 비승한 만족감이 짙게짙게 어려있엇던것이다. 그후로도 man은 가끔 《혼다 125》의 포효성을 들을수 있었고 그때마다 눈확을 키운 그의 눈동자에는 어김없이 그 모터찌클뒤에 이물질처럼 엉겨붙은 안해가 슬로모션으로 비쳐들군 햇다. 대체 누구냐 어떤 사이냐고 물을라치면 안해는 넘겨짚지 말라느니 심청좁다느니 제족에서 공처럼 튀군했다. -아직도 자지 않고 뭘 하고있어요? 넙치가 돼가지고찬바람을 몰고 들어온 안해느 제쪽에서 외려 핀잔같은것을 먼저 내들었다. 잠든 딸애ㅢ 머리맡으로 다가같다. 들고 온 비닐구럭에서 쵸콜레트며 새우깡, 음료, 깡통 팔보죽이며를 끄집어내여 서렬을 세웠다. 비싼 음식이나 놀이감따위로 안해는 평소에 애에게 소상하지 못한 사랑을 보상하려고 들었다. 허나 맛나는 사탕, 실과나 값비싼 놀이감보다 농도와 줄기가 다른 사랑을 수요하고있는 딸애는 아빠쪽에 더 도타운편이엿다. 하여 애는 달리다 넘어져도 여느 애들처럼 엄마-하고 우는것이 아니라 아빠-하며 울군 했다. 안해는 취기에 목이 마른지 애에게 사왔던 먹이중에서 음료 한병을 터치워 마시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안해는 옷차림과 얼굴가꾸기에 전에없이 신경을 썼다.목돈을 내치고 자기 몸뚱이를 뒤안길 미용사들의 메스밑에 들이밀었다. 궁극스레 모은 돈이 아까와 메니큐어도 싸구려쪽으로 쓰던 안해엿다. 그러던 안해가 눈꺼풀수술도 했고 코잔등을 높였으며 빈약한 가슴에 실리콘을 넣어 허영을 살렸다. 다시 주조된 안해의 인공미에 man은 감탄을 느끼지도 욕정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저 낯설게 변해가고 그의 곁에서 조금씩 멀어져가는 안해의 수수께끼같은 모습을 곤혹스레 지켜볼뿐이였다.둘은 비좁은 골목길에서 우연히 만난 길손처럼 아이를 사이두고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옆집에서 호풍환우하는듯한 치졸스런 소리가 또 새여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머...어머...최경리님...아흑...근력이 좋으시네...아흐흑...그 일...아흑 나죽네...그 일 부탁합니다...최경리...최경리...아흑...최경리...최 an ma 안해가 풀럭하고 웃었다.불거진 표정으로 앉았던 man도 실의에 빠진듯 따라서 웃음 비슷한것을 짓고말았다. 안해가 갑자기 그의 품에 뛰여들었다. 남자에 대한 편력기가 두툼하고 돈쌈지 불룩한 졸부님네들을 불러다 말세나 온듯 시도때도 없이 그 짓거리를 벌리는 옆집의 독신녀자를 두고 가끔 조소를 흘리던 안해가 그 음란한 소리의 유발에 감흥을 살린듯 오린만에 man에게로 감쳐들었다.man은 다족류벌레를 털어내듯 안해를 뿌리쳤다. 안해는 안면몰수하고 다시 접어들었다. 그러는 안해의 모발에서 야릇한 냄새가 확 끼쳐왔다. 술내음도 다배내음도 음식내음도 아닌...그것은 휘발유냄새였다. 아니 ,다른 남자의 냄새였다. man은 순간에 울컥 괴여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잇달아 그 분노는 이 녀자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라이벌과 싸워이겨야 한다는 자존심으로 회석되여 묽어졌고 따라서 man은 처량하게도 변형된 욕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거칠게 안해의 옷을 벗겼고 위장으로 가득차 부푼 가슴을 포악하게 움켜잡았다. 안해의 왕성한 욕념은 점점 더 긴 시간을 수요 하고있었다. man은 힘에 부친감을 느끼군 했다. 난방시설을 갖춘 아빠트,자가용,핸드폰,호화의상,고급음식...사내로서 세대주로서는 그에 응당 보상을 줘야겠는데... 안해는 그를 싣고 바다처럼 넘실거렸고 man은 땀벌창이 되여 시악을 썼다. 안해는 흥분할 때면 목구멍쪽에서 늘 가르랑이는 숨끓는 신음을 내군 했다. 그 소리가 man에게는 모터찌클의 시동음처럼 들렸다. 그 소리에 자존과 관능에 살을 맞은듯 꿈틀했다. man은 땀벌창이 되여 주저앉으려는 힘을 분노로 부추겨세웠다. 무릎이 접히느 ㄴ힘과 마음을  마하련듯 결혼지남 수책에서 보았던 구절들을 주문처럼 떠올려보았다. 마라손처럼 긴 정감의 코스선에서 벅차게 달리는 정자대군으 몇억명이나 된다. 허나 질척이고 가파로운 수란관의 소로에서 쓰러지고 살아남는이는 200명 좌우밖에 안된다. 그렇다면 내가 정녕 200명 중에 들수가 있을가? 엘리트로 선택될수 있을가? 환음을 지르며 라스트선을 충격할수 있을가? 자아, 달려라, man.힘내라! man- 몸과 마음으로 지쳐버린 man은 인차 잠에 곯아떨어졌고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이 다시 꿈의 도박장에서 러시안룰렛에 끌려들었다. 역시 낯가리개를 한 사람과 주먹내기를 하였다. man은 여느때와 같이 보를 내였고 그쪽에서는 가위를 내였다.-자네 마음보가 여리여 그저 보자기밖에 낼줄 모르는거야. 왜 돌을 내지 못해? 가위는 왜 또 내지 못하고? 돌처럼 치고 가위처럼 잘라야 하는거야! 그래야 살아남는게 요즘 세상이야! 동료들이 그의 꿈애기를 듣고 해준 엉터리 해몽이였다. 하여 꼭 돌이나 가위를 내려 뼈무르군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바보같이 내내 보만 펼치는 어수선한 꿈자리였다. 그 사람 느긋한 미소를 흘리며 man에게 총을 넘겨주었다. 그러는 그에게서 들큼한지 시큼한지 매큼한지 종잡을 길 없는 기분잡치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man은 총부리를 태양혈에 대였다. 누구더라?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도 상대에 대한 확인을 더듬는 man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구겨져있엇다.절컥! 격침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어수선한 꿈자리였지만 끝머리에 가서는 마냥 다음의 더 정채로운 꿈마당을 위해 빗장을 열어주는상싶었다. man은 안도의 숨을 덩이로 토해냈다. 진득한 이마전을 씻어내린는데 새로운 도전자가 련이어 들이닥쳤다. 녀자였다! 낯가리개를 한 틈새로 맑은 피부가 얼핏 보였다. 처음으로 부딪쳐보는 녀적수여서였던지 천치처럼 또 한번 보를 내고 man은 기계적으로 총부리를 태양혈에 대였다. -나 말이예요 이런 자극 굉장히 좋아해요녀자가 광태같은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웃어젖혔다. 그 익숙한듯한 웃음소리에 man은 몸을 흠칫 떨었고 그 경련이 식지에 닿아 방아쇠가 뒤로 밀려졌다. 절컥! man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물밑에서 금방 솟아오른 사람처럼 학학거리며 비지숨을 몰아쉬였다.인공의 품일망정 안해의 따스한 가슴이 그리웠다. 떨리는 깃을 접을 둥우리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곁자리를 더듬었다.안해의 자리느 비여있었다.   <계속>      
116    마마꽃,응달에 피다 댓글:  조회:5070  추천:73  2007-06-29
  마마꽃, 응달에 피다 (발취) - 2003년 <<장백산>>장편소설상 수상작품          제4부 누나와 요지경        -<<짜그배>>누님 편                                          눈뜨는 풀      ... 이 세상에 으뜸가는 미인이 누구일가?  누군가는 혁명적 본보기극 <<홍색랑자군>>에서 나오는 오청화의 배역이라 했고 누군가는 <<두견산>>에 나오는 당대표 가상의 배역이라 했다. 그녀를 중앙의 어느 젊은 고위급간부가 좋아한다는 풍설이 항간에 돌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림부통수가 자기 아들을 위해 전국각지에서 추려뽑은 군인녀자라고 했다. 누군가 <<가장가장 붉은 태양>> 그분의 제일부인이라고 했는데 곁두리에서 한결같이 코방귀를 끼며 부인해 버렸다.   그녀를 만나기전에 내눈에 가장 아름다운 녀자는 나의 어머니였다. 그후에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속의 세라복을 입은 또냐였다. 허나 이런 내 가슴속에 현상된 영상들을  지우며 몇해전 길림지역에 세계최대의 류성이 내렸듯 녀자 하나가 빛뿌리며 내앞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짜그배>>누님이라 불렀다.   <<짜그배>>, 어떻게 생겨난 어원인지는 알수없으나 우리 고장에서 <<짜그배>>는 짝짝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부모중 어느 한쪽이 타민족이면 우리는 그 사이에서 생겨난 자식을 <<짜그배 새끼>>라 부르군 했다. 조, 한 두가지 언어로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도 우리는 <<짜그배영화관>>이라 했다. <<짜그배>>누님은 아버지가 중국사람이였다. 그의 어머니가 쏘련류학을 갔을 때 쏘련사람과 관계해 낳은 아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누님의 아름다움에는 혈연적인 단구(短軀)와 누르끼레한 피부를 가진이곳 사람들과는 달리 쭉 빠지고 희멀쑥한 것이 이방인의 냄새가 나는듯했다. 그로서 지어진 별명이겠지만 그 보다 더 비밀스러운 것은 <<짜그배>>누님이 선천적으로 한쪽 유방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가슴띠속에 양말을 움켜놓고 다닌다고 했다. 여하튼 고운꽃에 벌과 나비가 많이 모여들 듯 <<짜그배>>누님은 현성에서 구설에 가장 많이 오르는 톱인물이였다.   <<짜그배>> 누님의 원명은 최승미였다. 50년대말, 중앙에서는 강철과 기타 중요공업산품산량면에서 7년에 걸쳐 영국을, 15년에 걸쳐  미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영국을 릉가하고 미국을 따라잡자 (超英勝美)>>는 구호를 내놓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약진을 유발시킨 서곡이였다. 하여 그때 태여난 아이들중 초영이니 승미니 하는 이름들이 많았다. <<짜그배>>누님의 이름도 그렇게 지어진것이였다. <<짜그배>>누님을 내가 맨 처음 보게 된 것은 꽃샘추위가 불어치던 이른 봄이였다.  그날도 나는 여느때처럼 사진관으로 갔다. 하릴없이 휘파람으로 알바니아 영화 <<죽어도 굴하지않는다>>의 주제가를 불며 상철형님을 찾아갔다. 사진관대기실의 문을 열다가 칙칙하던 대기실이 여느때보다 훤한 기운으로 넘치고 있음을 육감으로 느꼈다. 그다음 나는 누님을 보았다. 나의 곡조는 <<산에 올라라 용사들이여 이 봄날에 우리는...>>하는 대목에 와서 뚝 멎고  말았다. 국경절이면 천안문광장에서 쏘아올리는 축포를 기록영화에서 보듯 눈앞에서는 불꽃이 란무했다.   누님은 사진찍으로 온 모양이였다. 그날따라 손님이 많아 누님은 대기실 구석쪽에 놓여진 장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찍는 엄마의 뒤를 묻어 온 계집애 하나가 칭얼이고 있어 그애를 어르느라 함께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누님은 머리를 량쪽으로 짧게 땋아내리고 있었다. 머리 한오리 흘러내릴세라 말끔히 빗어올렸는데 그렇게 반듯하고 빛나는 이마를 나는 본적이 없었다.   그때 류행의 단일색으로 국방색옷차림이였지만 분명 다시 줄인 모양 앞가슴이 조붓하고 팔소매가 맞춤한 것이 옷이 품에 꼭 맞았다.   마스크를 목에 걸고는 접어서 품에 간직했는데 하얀 마스크끈이 악세사리인양 미끈한 목을 장식해 주고 있었다.   아이가 공기돌을 받아쥘때마다 누님은 박수를 치며 거침없이 웃군 했다. 사환소를 잘못 써서 너나없이 이발이 누르께한게 그때 사람들의 모습이였는데 누님의 이발만은 옥돌처럼 희고 쪽이 고르렀다.  돼지뼈의 마디를 뽑아 빨갛고 파랗게 칠을 올린  공기돌을 누님은 곧잘 다루었다. 높이 솟았다 떨어지는 줴기와 함께 같은 색깔의 공기돌을 제꺽 골라 쥐군했는데 그때마다 유난히 높은 앞가슴이 출렁거렸다.   나는 숨을 꺽 죽이고 대기실 문가에 못박혀 홀린 듯 <<짜그배>>누님을 지켜보았다. 사유의 움직임은 일순 결박되여 버렸다. 질?게 반짝이는 내 눈길을 의식했던지 누님이 내쪽에 머리를 돌렸다. 흑란(黑蘭)의 줄기처럼 유려한 눈섭, 처마처럼 길게 뻗은 속눈섭아래 가슴이 철렁하도록 깊고 서느러운 눈매가 나를 찔러왔다. 눈동자가 포도알같이 검었고 흰 자위는 희다못해 쪽빛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덴겁히 눈길을 돌리며 대기실에 들어섰다. 그러다 문턱에 걸채이여 하마트면 넘어질번 했다. 아닌 보살을 하고 다시 휘파람을 불려 했으나 하루에도 수차씩 불어 오던 그 알바니아영화의 주제가곡조가 이순간만은 웬지 떠오르지 않았다. 벽에 걸린 상장과 모주석어록들을 감상하는체 하였다. 그러면서 상장유리에 비친 누님의 모습을 계속 도적질해보았다.   <<12번 손님입니다>>  상철형님이 촬영실에서 대기실로 머리를 내밀며 까랑까랑한 소리로 웨쳤고 <<짜그배>>누님이 일어섰다.  <<아지미차례가 됐어. 사진찍고 또 올테니 쬐끔만 기다려라>>  계집애의 볼을 도닥여주고나서 누님이 촬영실로 들어갔다. 어쩜 목소리도 탁자우에 떨어뜨린 유리알이 또그르르 굴러가듯 그렇게 명랑할 수가 없었다. 대기실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촬영실문에 걸린 문보에 쯤을 만들고 <<짜그배>>누님이 사진찍는 모습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밝은 조명등아래에서 누님은 과장되게 더욱 예뻤다. 두팔을 가슴앞에 가새지르고 의자에 풍만한 넙적다리를 다른 다리우에 포개고  앉았다. 혁명에 충성하는자세, 두주먹을 부르쥐고  팔뒤꿈치를 앞으로 쳐든채 용왕매진하는 모습을 취하는 것이 풍조였던 그때 누님의 그 선정(煽情)에 가까운 모습은 훔쳐보는 사내들의 눈뿌리를 뺏다. 내 뒤통수에 대고 어떤 사내는 화근내나는 한숨을 소리나게 쉬는것이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지 상철형님이 다가와 내 머리를 툭 쳐서야 허공에 아연하게 떠있던 나는 한동안의 바보에서 깨여날 수 있었다.   <<잠 덜깼냐? 얼빠져갖고 뭘해>>  형님이 내 심기를 엿본것같아 나는 목덜미를 붉혔다. 그러는 나를 형님이 <<짜그배>>누님에게 인사시켰다. 원체 형님과 <<짜그배누님>>은 아는 사이였다. 나는 앞이마를 긁적이며 누님앞에 나섰다.  <<음마! 눈도 또랑또랑해라. 사내애가 가시내처럼 곱게두 생겼네>>  누님이 무람없이 내 귀방울을 잡고 흔들며 연극적인 음성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얘 별명이 <가분수>랍니다. 골두 크죠?>>  형님도 내 골통을 만지며 따라 웃었다.   (이 죽일칼 따로 없는 형님아, 하필이면 처음 보는 녀자앞에서 내 별명을 쳐들고 그래.)  나는 그러는 형님이 못내 미워나 속으로 게두덜 거렸다. 누군가 언감 <<똥파리>>네 패거리성원인 이 김찬혁이를 가시내 같다던가 <가분수>라 했다면 나는 가만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바라보는 것 만큼으로도 노곤할 발군(拔群)의 미모를 가진 누님앞에서 나는 능란한 조련사의 채찍밑에 맡겨진 맹수처럼 고분고분해지는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날저녁 나는 잠을 설치고 말았다. 웃방의 <<흐르쑈브 동지>>가 요란스레 코를 굴러서도 아니였고 집안에 배였는 이약냄새때문도 아니였다. <<짜그배 누님>>은 준비없이 목격하는 꽃처럼 내 앞에 나타났고 그 꽃이 주는 아름다움에 나는 내내 사로잡혀 있었다. 그날 나는 줄곧 즐겁고 명랑한 아이로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마주앉아 화제를 만들어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이붓아버지에게 신문도 집어다 주었으며 나에게 차려진 칼치반찬을 통째로 고양이 밥그릇에 놓아주기도 했다.   자정이 되도록 전전반측하며 나는 잠을 못 이루었다.  고양이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에는  얇은 쇠조각을 매단 듯 별들이 찰강찰강 쇠소리를 내는상 싶었다.  밤이 좋은 고양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고양이를 찾지못한 내가 고양이가 되었다.   밤고양이처럼 골목길을 헤매다 나는 어느덧 사진관앞까지 와있었다.   심야에도 사진관은 문을 열고 있었다.  몽유병환자처럼 나는 사진관에 들어섰다.   현성은 오늘도 정전이였다.   나는 성냥을 켜들었다.   대기실을 지나 촬영실로 다가갔다.   촬영실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두팔을 가새지르고 한 다리를 다른 다리우에 포개 얹은채 어둠속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다가왔다.  입술을 오무려 성냥불을 훅 불어껐다.  한켠에 세워졌는 립식조명등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전구알을 만졌다.  그러자 정전이였지만 조명등이 순간에 밝아졌다.  선반우에 놓였는 라디오를 만졌다.  그러자 정전이였지만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 나왔다.  쏘련가요 <<홍매화는 피였네>>의 곡조가 흘러나왔다.   그사람이 몸을 돌려 나를 보고  웃었다.  모란이 벌어지는듯한 요염한 웃음이였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짜그배누님>>이였다.   음악소리속에 누님은 무대에 등장하는 발레선수처럼 핑그르르 맴을 돌았다.  누님은 세라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바다물처럼 파란 줄무늬가 간  눈덩이처럼 하얀 세라복을 입고 있었다.   누님이 춤을 추며 세라복단추를 벗겨내렷다.  치마도 벗었다.   내의도 벗었다.  브래지어도 벗었다.   꽃뱀이 허물을 벗듯 몸에 붙은 천쪼박들을 벗겨내렸다.  하나 하나 하나 하나 벗겨내렸다.   유방이 드러났다.  하나 뿐인, 그래서 더 커보이는 유방이 출렁 드러났다.  음악에 맞춰 유방은 흔들거리고 있었다.  <<홍매화는 피였네   들과 내가에   사랑하는 사람아 난 널 생각해   내가의 홍매화는 피여났건만   그러나 내사랑은 언제 피려나...>>   그 하나뿐인 유방을 출렁이며 누님은 춤을 추었다.   몽롱한 리듬으로 춤을 추고 또 추었다  이때 누군가 촬영실의 문을 왁살스레 열어?혔다.   개털모자를 쓴 머리 하나가 불쑥 들어왔고 그 사람이 중국말로 물었다.   <<떠우푸(豆腐)를 사겠소?>>... 새벽의 두부장사 소리에 나는 꿈에서 깨였다. <<짜그배 누님>>을 부르며 잠에서 깨여 나는 팬티와 이부자리가 질펀히 젖어 있음을 발견했다. 늦잠자는척 질질 끌고 있다가 부모가 출근하자마자 후닥닥 일어났다. 몽정(夢精)으로 어지럽혀진 이부자리를 부끄럽게 내다 널었다. 나의 소년은 이렇게 완수되였다.  <<짜그배 누님>>은 국영리발관에서 일본다고 했다. 나는 머리칼이 길어지기를 학수고대하였다. 머리가 길어지면 리발관에 갈수있을거고 리발관에 가면 <<짜그배누님>>을 볼수 있을터니깐. 허나 상고머리가 풍조였던 그때인지라 박박 깍은 머리는 도무지 자라지 않았다. 그러다 어중간히 길어진 모습을 하자 나는 불자동차처럼 리발관을 향해 뛰여갔다.  커다란 체경앞에 리발사들이 줄지어 섰는데 <<짜그배 누님>>은 맨안쪽에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누님은 예이제이없이 예뻤다. 햐얀 가운은 어찌보면 세라복같기도 했다. 그 황홀한 꿈속의 장면이 떠올라 나는 스스로 귀밑을 붉혔다. 누님은 늙수그레한 말라꽹이 령감쟁이손님의 머리를 깎고있는중이였다. 손님 두셋이 장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안면없던 손님들이 신문을 접으며 수근덕 거리기 시작했다.   <<이봅쇼. 4월 5일날 북경서 반혁명폭란이 일었다누만.>>  <<그래 천안문광장에 새까맣게 모여 반혁명구호도 부르고 불도 지르고 했다오.>>  <<주총리를 추모하는 활동을 하다 그랬다는데>>  <<그게 다 등소평이라는 땅딸보가 조작한거라우>>  <<그러게 당중앙에서 등소평의 당내외일체직무를 취소 하지 않았소.>>  <<그 사람 이번까지 떨어지면 몇번이요? 세 번인가? 두 번인가?>>  기실 이런 소식은 신문보기만은 열심하는 이붓아버지가 이약을 바르다 말고 또 혼겁을 떠는바람에 언녕 알고 있었다. 그날은 청명인지라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자전거에 삽을 처매고 내가  어머니를 자전거뒤에 앉히고 말발굽산으로 갔다. 못나게도 내가 집의 자전거를 <<투명장>>으로 바친 뒤 이붓아버지는 또 한 대의 자전거를 사들였다. 잠글쇠도 가장 비싼 것으로 샀고 날이 지기 바쁘게 자전거를 집의 봉당에 들여놓군 했다. 그러는 <<흐루쇼브 동지>>가 가소롭기도 했고 퍽 보기에 안스럽기도 했다. 자전거만 보면 <<투명장 사건>>으로 집에 미안하고 상철형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언젠가는 기회를 보아 어머니에게 자전거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어머니에게 내손으로 좋은 자건거를 사주리라 자기위안처럼 결심을 머금었다. 말발굽산까지는 꽤 멀어서 힘에 부쳤다. 내 얼굴은 땀벌창이 되었다. 어머니가 자기가 타고 나를 앉히려 했으나 나는 부득부득 우겨가며 어머니를 앉히고 산더기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고보니 자전거 때문에 미안한마음을 조금이라도 무마할수 있을것같았다. 청명제를 지내러온 사람들이 산을 덮고 있었다. 서투르게나마 삽질을 해대며 처음 봉분에 흙을 얹어 <<가토(加土)>>라는 례식을 리행해 보았다.   <<우리 찬혁이 다컸구나>>  어머니는 서투루나마 열성을 보이고 있는 나를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가토를 마치고 아버지의 무덤에 술을 부어올렸다. 무덤가에 앉아 제물로 가지고 온 음식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홍주를 비닐술잔에 절반도 못되게 부어서는 마셔보라고 했다. 부쩍 커버린 아들애에 대한 장려라고나 할가 어머니는 기묘한 감미가 섞인 모습으로 나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그잔을 마저 채워서 단모금에 굽을 냈다. 사실 어지간히 목이 말랐던것이였다. 그리고 또 한잔 부어서는 역시 밑바닥을 보였다. 또 한잔 더 부어마시려는데 놀라움에 눈을 둥실하게 키운 어머니가 내 잔등을 철썩 때리며 술잔을 앗아냈다.   과자를 씹으며 나는 봉분곁에 앉아 산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따습는 봄양기속에 레루가  산굽이를 돌며 누워있었다. 해빛에 레루장이 반짝 반짝 빛이 났다. 마침 기차가 지나고 있었다. 춘곤(春困)에 졸린 듯 기차의 기적도 나른하게 울리는 듯 했다. 나의 귀전으로 빈 탄알깍지가 내는 공명음이 이명(耳鳴)처럼 들려왔다. 아버지의 장례식때 탄알깍지나 탐내던 개구장이였던 나는 아버지의 무덤곁에서 성장을 위시하는 술을 두잔 마시고나서 무량한 감개에 빠져버렸다.     오랜만에 어머니와 두사람의 시간을 마련한데서 사물사물 좋아진 기분을 집에 돌아오기 바쁘게 <<흐루쇼브 동지>>가 깨뜨렸다. 불난 소식을 알리는 사람처럼 이붓아버지는 벌겋게 흥분해 있었다.   <<큰일났소. 큰일이야!>>  미약한 바람에도 허리꺾는 갈대처럼 시국정세에 민감한 아버지의 이런 흥감스런 모습을 한두번 보지않았지만 이번에 이붓아버지의 반응은 여느때보다 더욱 컸다. 믿을만한 골목소식에 의하면 북경에서 아마 큰 란리가 일었다고 했다. 며칠후 신문에 <<천안문광장에서의 반혁명정치사건>>이라는 제명의 대형기사가 톱자리에 나갔다. 썩후에야 진상이 밝혀 졌지만 전국을 놀래운 청명날의 천안문사태는 문화대혁명의 원흉인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 <<4인방>>에 대한 오래동안 쌓였던 인민대중의 분노와 반항정서의 폭팔이였다. <<4인방>>은 나라의 최고권력을 찬탈할 음모로 등소평 등 능력자들을 타도하려고 하였으며 지어 주은래총리에게 까지도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라는 정치모자를 씌우려 날뛰였다. 당시 항간에서 어른들사이에는 <<4인방>>에 대해 풍자하는 이야기가 많이 돌았다. 강청이 <<무측천(武測天)>>처럼 여왕이 되기위하여 어떤 너절한 술수를 꾸몄다거나 왕홍문이 무식하여 어떤 망신을 했다는 등 류행되는 와중에 더 과장되고 민담화되여 골목안방의 유머로 술안주로 되었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발로되던 <<4인방>>에 대한 증오와 불만의 정서는 3월말부터 시작된 주총리에 대한 추모활동을 계기로 4월 5일 청명에 이르러 <<4인방>>성토대회로 폭넓게 번져나갔다. 천안문광장은 영웅기념비를 중심으로 수천수만개의 화환으로 뒤덮였고 광장주위의 나무에는 애도의 흰종이꽃들이 눈내린 듯 달려 있었다. 화환이나 꽃들에 달린 제문(祭文)에는 <<4인방>>을 저주하는 시와 글들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북경시민들의 자발적인 주총리에 대한 추모와 <<4인방>>에 대한 항의는 반혁명정치사건으로 치부되여 무자비한 진압을 당했으며 등소평은 막후조종자로 몰려 당내외의 일체 직무를 철소당하고 말았다.   어른들의 시도때도없는 운동때문에 모든일에 불감증세를 보이는 우리 년소배들은 중국의 대변혁을 예감하는 이 커다란 사변에 대해서 미처 다 아지못했다. 그저 어른들의 불안에 옮아들어 또 웬 굿마당이냐? 설둥해 있을 뿐이였다. 학교와 공장들에서는 긴급회의를 늦게 까지 연터에 이붓아버지와 어머니는 련며칠을 모두 밤늦게야 돌아왔다. 네거리의 확성기에서는 <<화국봉동지를 중공중앙제일부주석, 국무원총리로 임명할데관한 결의>>와 <<등소평의 당내외일체직무를 철소할데 관한 결의>> 거듭 방송되고 있었다. 그사이 부모님들은 혼자 묵은 밥을 들추어먹고 시뿌등해 있는 나에게 관심을 돌릴사이가 없어했다. 집에 들어서서는 옷벗을 념도 없이 마주하고 낮은 소리로 무언가 수근거렸다. 그러는 그들의 온몸에 긴장과 당혹감이 배여 있음을 나는 보아낼수 있었다.   어른들이 마냥 머리를 유난히 높이 깎고다니는 부주석과 키가작달만한 우경기회주의분자에 대한 관심과는 달리 나의 관심은 온통 <<짜그배누님>>에게만 쏠려 있었다.   나는 누님이 머리를 들어 내쪽을 바라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친히 내 머리를 깎아주기를 바랬다. 허나 누님은 빗과 리발기를 들고 열심히 그 령감쟁이의 머리를 깎는데 몰입되여 있었다. 어느 한번 머리를 들었지만 기계적인 동작으로 머리칼을 털어내느라 나를 보지못한 듯 했다. 또다시 머리를 갸웃한채 가위질을 했다.   내 차례가되자 다른 리발사가 나를 불렀다. 리발사모양을 내려 그러는지 닭둥우리처럼 머리를 별스럽게 틀어올린 아낙네리발사였다. 누님에게 머리를 맡기고 싶은 나는 뒤에 온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이렇게 두 번이나 양보했지만 누님의 리발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령감쟁이가 까까머리를 요구하였기에 시간이 길엇던것이였다. 그에 비해 대충 응부하는지 닭둥우리머리를 한 리발사는 빨랐다. 또 한명을 끝내고 다시 한번 나를 점명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또 양보하려고 했지만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 더 없었다. 할수무가내로 덜 반가운 그 아낙의 리발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덜충하게 생긴 <<닭둥우리>>리발사는 <<짜그배 누님>>을 원하는 내 마음도 모르고 기어이 나를 자기 가위아래로 몰아넣는것이였다.   (죽일칼이 따로 없는 아낙네같으니라구.)  나는 리발사아낙네의 묵처럼 흐늘흐늘한 배허벅을  권투연습용모래주머니처럼 치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머리가 길지 않구만 뭘 깎는다고 그러니?>>  아낙네가 게두덜겨렸다.   <<그래도 깎아봐요>>   나는 귀찮아하며 대답했다. <<짜그배누님>>은 여전히 그 령감쟁이를 위해 복무하고 있었다. 턱면도를 하고 코털도 짜르고 귀속에 난 털까지 짤라주고 있었다. 나는 그 령감쟁이의 갈비 아릉아릉한 배가죽에도 한 대 주먹을 먹이고 싶었다. 누님의 시선이라도 끌어보려는 심사에 나는 짐짓 리발사와 트집을 걸었다.   <<리발기가 물어요. 머리가 뜯긴다니깐요>>   아낙네가 리발기를 바꾸었다.  <<이것도 물어요!>>  나의 소리는 필요이상으로 높았다.  <<그런데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낙네도 까닭없이 골통 부어하는 나에게 화를 터뜨렀다. 나의 이 전술은 령험을 보았다. <<짜그배 누님>>이 드디여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나를 유심히 뜯어보던 누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였다.   <<너! 엄상철이와 같이 있던... 그 애 맞지?>>  <<예!>>   나는 입술이 벗겨지게 웃었다.   <<서로 아는 사이요? 그럼 승미가 좀 맡아보오. 죄꾸만눔이 어찌 까다로운양 하는지 못맞춰 내겠구만>>  기분 접질린 아낙네가 <<짜그배 누님>>쪽에 나를 밀어맡겼고 그러는 아낙네가 이번에는 감사한 나머지 나는 엄마라고 불러주고 싶어졌다. 나는 소원대로 누님의 섬섬옥수에 나의 <<가분수>>머리를 맡길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누님의 면도칼에 울대뼈가 베이여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다.                                              새 꽃 붕어 그리고 빠찌      누님은 사진관으로 곧잘 찾아오군 했다. 사진도 자주 찍었고 상철형님과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군 했다. 곁에 묻어선 나에게 비싼 고량탕(高粱糖)을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부드럽고 촉촉한 누님의 손바닥으로 넘어온 고량탕은 말랑말랑하고 향긋한 것이 그렇게 맛날수가 없었다. 누님의 체취가 묻어나 그렇게 맛나는것일가?   남자애들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움에 대해 밝히는 편이다. 코밑건사를 잘못할때부터 어른들은 작난삼아 아이의 색시감을 잡아주고는 아이의 반응에 웃음보를 터치는 짓거리를 잘하군 한다. 나더러 곁집의 유난히 실팍한 계집애에게 장가들라고 했다. 그때면 나는 유명하게 큰 <<가분수>>머리를 흔들며 <<난 커서 엄마에게 장가들래>>하고 엉뚱하게 말해 사람들을 웃기군했다. 그만큼 나의 눈에 아름다운 사람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소학에 들어가서는 우리에게 병음(?音)을 배워주는 중국문 교원을 나는 색시감으로 정하고 있었다. 칠판에 꼬불꼬불한 병음자모를 곱게 써놓고 <<버 퍼 머 퍼 더 터 너 러>> 악보외우듯 신나게 배워주고 있는 살결 하얀 중국문선생이 제일 좋아보였다. 그래서 중국문공부에 유난히 열성을 내기도 했었다.   중학교에 오르자 학교에서는 남자반과 녀자반을 나누었다. 남녀유별에 눈을 밝히고 있던 세월이였다.  험악한 사회의 풍기에 마냥 괘념하고있는 부모와 교원들은 이성과의 교제에 대해서 그 어떤 준칙보다 엄하게 세웠다. 그래도 녀자반의 창가로 가서 들여다보며 는질거리기도 하고 복도에서 섰다가도 녀자애들이 지나가면 괴물같은 소리를 내여 녀자애들을 깜짝 놀래키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는 애들의 뺨이며 목언저리에는 여드름꽃이 징그럽게 피여있었다. 지금껏 단 한번 녀자반의 어떤 녀자애에 대해 의식해본적이 있었다. 피부가 하얗고 유난히 정교로운 쌍겹눈을 가진 애였다. 소학교에 내 책상곁에 앉았었고 더욱이 걔의 어머니도 교원출신이라는 동질성 때문이였다. 소학을 마치던해 녀자애는 부모를 따라 흑룡강으로 이사를 갔다. 그애네가 이사를 간단말을 듣고 나는 급급히 녀자애네 집으로 달려갔다. 부모들과 함께 자기의 짐을 챙기고 있던 애는 뜻밖에 나타난 나를 보고 놀라마지 않았다. 이어 녀자애의 하얀 볼에 감동의 빛이 번져나갔다. 기실 내가 가장 아끼는 그림책 하나를 그애가 빌려간터에 그것을 되돌려 받으러 찾았던 나였다. 그림책을 되돌려달라는 말이 목에서 턱걸이를 했지만 나는 끝내는 그말을 꺼내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떠나는 애를 바래게 되었다. 차에 앉아 떠나면서 나를 향해 손을 젓는 녀자애의 눈에 설핏 눈물기가 돌고 있었다. 그때 함께 감동하면서 크렁하게 젖은 녀자애의 눈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소년기의 설익은 감동이라 할수있었다. <<짜그배 누님>>을 보면서 나는 녀자에 대해 강렬하게 의식했고 그런 의식을 가진 자기에 대해 소스라쳐 놀라했다. <<짜그배 누님>>이 내 신변에 나타난후로 나는 시인처럼 매일 열번을 감동하고 있었다.  상철형님은 누님의 사진을 모주석초상만큼 크게 뽑았다. 보기에 퍽 좋았지만 사진을 다시 뽑고 칠을 다시 하고 세 번이나 역고를 치른뒤에야 만족의 웃음을 지었다. 그 사진을 사진관 진렬창에 내걸었다. 그러자 사진관진렬창앞에는 최신동향이 적힌 대자보를 보듯이 사내들이 바자를 이루고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똥파리>>가 진렬창앞에 나타났다. 타고온 자전거를 길가에 팽개치더니 벽돌장을 주어들고 다짜고짜로 진렬창의 유리를 깼다. 구경하던 사람들과 사진관 직원들이 아연실색하였다. <<똥파리>>가 <<짜그배 누님>>의 사진을 끄집어 내는데 상철형님이 뛰쳐 나왔다.   <<왜 그러우? 형님?>>  <<야, 이 여자가 무슨 고, 공원의 잰내비냐? 누구 여자라고 하, 함부로 사, 사아진 내 걸구 그러냐?>>  상철형님이 격해지려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되물었다.  <<그럼 승미가 형님여자유?>>  <<똥파리>>가 손등으로 형님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야 이 또, 똥꼬치가 마, 마, 말하는 모양 좀 보소. 기래 내 여자다. >>  <<똥파리>>는 모여선 사람들을 둘러보며 으르렁이였다.   <<다들 드, 들어둬라. <짜그배> 이 동팔이 여자다. 이 여자 낯반대기 좀 해, 해반주그레 하다고 엉큼한 궁리 푸, 품으면 안돼. 나 이 년과 자본적두 있어. 년의 엉덩짝에 지,지, 짐 두 개가 있지>>  다시 돌아서 <<똥파리>>는 상철형님의 턱밑에 까지 다가들며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하면서도 야비한 소리로 말했다.  <<그리구 젖통이 하, 하난지 두, 두갠지는... 알려안준다.이제 아, 알겠냐? 형수님이시다. >>  <<똥파리>>는 팽개쳤던 자전거를 일으켜 세웠다. 산산이 박산난 진렬창을 돌아다 보았다.  <<저 유리값은 네 로임 짤라 배, 배애- 상해!>>   이새로 침을 찍 뱉고는 자전거를 타고 휑하니 가버렸다. 형님은 이윽토록 그 자리에 뿌리 내려있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지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본듯한 표정이였다. <<똥파리>>네 집 창에 대고 섬광등을 치는 악동이짓을 하던 그날밤 창호지구멍으로 <<똥파리>>와 롱탕질을 쳐대는 녀자를 들여다보았을 때 형님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지어져 있었다. 나는 무언가 소스라쳐 알게 되였다.  원체 부부간의 이불안싸움도 새여나가는 작은 현성이라이 일은 인차 온 현성에 쫘악 펴졌다.  <<짜그배누님>>은 일신에 화냥기가 배였는 남자를 홀려 잡아먹는 여우같은 년이라고 사람들은 수근거리고 있었다. 지식청년으로 시골에 내려갔다가 좋은 일자리를 얻기위해 촌장과 배가 맞붙었다가 들통이 나 공청단직도 다 떼우고 쫓겨왔다고 한다. 누님의 유방도 그때 누님을 차지하지못한 촌부랑뱅이가 낫으로 베여놓아 그렇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기왕 버린 몸이니 체념하고 <<똥파리>>같은 위인에게 붙어살고 있는것이였다. 어머니마저도 그녀에 대해 방탕한 패녀라고 험구를 했지만 내 안목과 마음중에서의  <<짜그배 누님>>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간혹 찾을길 없는 나의 친어머니를 그려보면서 나는 그모습을 <<짜그배누님>>과 비슷하게 견주어 보기도 했다.   모두가 시기하고 질투하고 기피하는 <<짜그배 누님>>에게는 자색도 그렇고 남보다 뛰여난 곳이 많았다. 누님은 손부리가 매운 녀자였다. 그때는 땀받이로 목깃에 뜨개를 떠서 달리개를 받치는 차림이 류행이였는데 누님은 붉은 색으로 <<똥파리>>의 목달리개를 정성껏 떠주었다. 그 목달리개를 달고 <<똥파리>>는 여간 으시대지 않았다.  <<이 여자 누, 눈곱도 안끼는 여자다>>  시시때때 우리에게 그녀의 자랑을 해댔다. <<똥파리>>는 누님에게만은 창자까지 꺼내줄것처럼 끔직하게 굴었고 남들이 그녀와 가까이 할라치면 철조망처럼 나서 막군했다.   누님은 쓰고 버린 링게르줄로 손노리개를 결을줄도 알았다. <<똥파리>>가 병원으로 가서 숱한 링게르줄을 얻어 왔다. 한참 주사를 맞는 환자의 팔에 꽂은것을 채여 온적도 있었다. 그렇게 파쑈적으로 빼앗아온 링게르줄이 누님의 손에 들어가면 각양각색의 화사한 손노리개로 변모하군 했다. 새도 겯고 꽃도 겯고 붕어도 겯고... 거기에 우리는 자전거열쇠나 집열쇠를 달고 다니군 했다. <<똥파리>>에게는 개를 결어주고 (<<똥파리>>는 개띠였다) 나에게는 새를 결어주고 상철형님에게는 꽃을 결어주었다. 그러면서 <<똥파리>>에게 말하지말라고 백당부를 했다.   누님에게는 하나의 애호가 있었다. 모택동주석의 빠찌를 수집하는것이었다. 천안문성루에서 모자를 젓고 계시는 모주석, 장강을 건느고 손을 저으시는 모주석, 고향소산에서 아이들과 함께 계시는 모주석, 우산을 들고 안원으로 가시는 모주석, 팔각모를 쓰고 연안요동앞에 계시는 모주석, 밀짚모자를 쓰고 조이밭을 돌아보시는 모주석... 철로 만든 빠찌, 구리로 만든 빠찌, 사기로 만든 빠찌... 없는 것이 없었다. 문화대혁명기간 중국에서는 위대한 수령의 영상이 담긴 빠찌를 1만여종, 20억개나 만들었다고 한다.   그 빠찌들을 붉은 비단천에 꿰여 집의 정면벽에 걸어놓고 <<짜그배 누님>>은 옷에 따라 멋을 내군 했다. 정치성이 다분한 빠찌도 누님이 달고나서면 귀부인들이 금이나 옥으로 만든 악세사리처럼 그렇게 어울리며 미묘한 멋의 음률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이며 동학들에게서 부지런히 빠찌를 얻어 들였다. 집에 있는 빠찌들도 모두 들추어내여 누님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중에는 이붓아버지가 가져온 빠찌도 많았다.  나의 아닌 거동에 이붓아버지가 눈을 치뜨며 물었다.   <<왜?>>  <<달고 다닐려구요>>  나는 배심좋게 대답했다. 나의 느닷없는 령수에 대한 애대와 존경심에 <<흐루쇼브 동지>>는 알수없다는 듯 메밀눈을 찌프렸다. 자기것이라면 서캐도 내여주기 싫어하는 이붓아버지였지만 나의 갑작스런 정치각오에 대견한 듯 간수했던 빠찌를 모조리 내주었다. 누님에게 즐거움만 줄수있다면 나는 그 어떤 수고스러움이나 굴욕같은것도 다 참아낼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한번 길가는 사람의 옷앞섶에 달린 빠찌가 나의 시선을 당겼다. 분명 누님에게 없는 빠찌였다. 여느 어른들 같으면 달라고 칭얼대거나 아이들같으면 련환화나 유리구슬을 주고 바꿀수도 있을터이지만 이번의 상대는 좀 곤난했다. 조금이 아니라 완연 어려웠다. 내가 눈독 들이는 빠찌를 달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체조선생>>이였던 것이다. 그 정신질환자가 옷앞섶에 주렁주렁 단 빠찌속에 유독 <<짜그배>>누님에게 없는 빠찌가 달려있었던 것이다. 허나 누님을 위하여서라면 모주석의 시사에서 읊조리다싶이 <<구중천에 올라 달을 따고 오대양에 내려가 별주부를 잡으려>> 결심했던 나는 <<체조선생>>에게서 그 빠찌를 얻어내려 마음먹었다. 정신질환자이니 상논같은 것은 생략하고 기습하여 빼앗기로 하였다. 김표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김표가 못볼물건을 본듯 눈확을 키웠다. 미친 수작이라는 듯 채머리를 달달 떨었다.   <<체조선생을? 그 정신환자를? 씹할 왜? 임마 니가 정신환자다!>>  반편인 <<회충>>을 구슬려 함께 나섰다. 그 며칠을 나는 <<체조선생>>의 행동반경에 대해 자세히 정찰했다. 하루종일 왕파리처럼 질서없는 그라프를 그으며 네거리를 쏘다니다가 밤이면 <<체조선생>>은 역전광장에 솟은 령수탑아래에서 바람막이로 삼아 잠을 자군 했다. 그 시간 그 지점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현성에 어둠이 깔리자 해종일 이 현성에서 가장 분망한 사람이였던  <<체조선생>>은 넝마를 덮고 령수탑의 뒷면에서 걸레뭉치처럼 구겨져 자고 있었다. 코를 싸쥐고 우리는 <<체조선생>>에게 덮쳤다.  <<체조선생>>이 깨였고 옷감 찢어지는듯한 소리를 질렀다. 팔다리를 허우적이는 것을 <<회충>>이 두손을 잡아눌렀고 나는 무릎으로 배허벅을 눌렀다. 어둠이였기에 내가 요구했던 빠찌가 잘보이지 않았다. 나는 악취를 참으며 때국에 절은 옷앞섶을 더듬으며 빠찌를 찾았다. 기차역 역사쪽에서 비쳐오는 불빛을 받아 겨우 빠찌를 가려내였다. 문뜩 발에 밟힌 송충이처럼 꿈틀이던 <<체조선생>>이 반항을 멈추었다. 우리의 제압도 한결 느슨해졌다. 그런데 다음순간 <<체조선생>>이 우리가 어쩔사이없이 웃옷을 걷우어 올렸다. 옥수수 깜부기같이 볼품없는 때묻은 유방이 드러났다. 이어 능숙한 동작으로 바지도 벗는것이였다. 속바지도 입지않은 하체를 손쉽게 홀랑 드러냈다. 나와 <<회충>>의 어정쩡한 눈길이 맞부딤했다. <<체조선생>>이  우리를 쳐다보고 삭은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우악!>>  나와 <<회충>>은 구역질에서인지 공포에서인지 모를 비명을 지르며 뛰쳐 일어났고 내기라도 하는 듯 내빼기 시작했다. 우리는 령수탑을 멀리한 어느 건물앞에까지 와서 멈춰섰다. <<회충>>이 침을 뱉았고 나도 까닭모를 이질감으로 따라서 침을 뱉기 시작했다. 한동안 우리는 방금전의 느닷없는 경황에서 깨여나지 못해했다.  <<체조선생이 아마 널 신랑감으로 점찍어둔 것 같다>> 어쩐지 난감한 국면을 깨련 듯 나는 우스개를 했다.  <<임마. 널 찍었다. 넌 나보다 잘생기지 않았니?>>  <<회충>>이 받아 넘겼다. 우리는 마주보며 미친사람처럼 웃기시작했다.   손아귀를 긁히며 빼앗아온 그 빠찌는 모택동주석이 천안문 성루의 한백옥 란간에 팔을 얹고 홍위병맹장들을 부감(俯瞰)하는  모습이 찍혀진 빠찌였다. 그 빠찌를 치약을 묻혀 깨끗이 씻어서는 누님에게 가져갔다. 나의 로고는 헛되지 않았다.   <<어데서 얻었어? 이 빠찌 나온지 꽤 오래되는건데>>  자기에게 없는 빠찌라며 누님은 무등 기뻐했다. 내 귀방울을 잡고 다정스레 흔들어 주었다. 그 손이 부드러웠고 나는 그저 바보처럼 벌씬거리며 웃기만 했다.   허나 시럽쟁이 같은 김표의 고자질에 <<체조선생>>에게서 신고스레 얻어낸 빠찌의 출처는 드러나고야 말았다. <<짜그배>>누님의 이마전에 내 천(川)자가 그어졌다.   <<더럽지 않아요. 내가 치분 묻혀서 깨끗이 닦았다구요. 두 번 세 번 닦았는데...>>  나는 급급히 변명을 달았다.   <<더러워서 그러는게 아니다>>  누님이 자못 엄숙한 모습을 짓더니 나더러 빠찌를 돌려주라고 했다.   <<그 사람 정신병잔데요>>  나와 동안범인 <<회충>>도 한마디 끼여들었다. 나의 호의가 뒤틀린 방향으로 나가게 되자 나는 볼부은 기색을 지었다.   <<그런 환자이기에 더 돌려줘야 하는거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에게도 자기가 아끼는 것이 있다. 그걸 뺏는 것이 거지에게서 마지막 남은 동전 한잎을 빼앗아내는 것과 같지않고 뭐냐. 나 찬혁일 착한 사람으로 봤는데.>>  누님은 차분한 어조로 허나 그 때문에 더 아프게 우리를 꾸지람 했고 그제야 자신의 어처구니를 깨쳐안 듯 나는 어쩔바를 몰라했다.   <<네 안가면 내가 가서 돌려주겠다. >>  누님은 <<체조선생>>을 찾아 나섰고 나와 <<회충>>은 스적스적 누님의 뒤를 묻어나섰다.   우전국앞에서 <<체조선생>>을 찾아냈다. 굽높은 술잔같은 록색의 우체통에 기대여 <<체조선생>>은 해바라기를 하고있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것도 개의치않고 <<짜그배>>누님은 <<체조선생>>앞에 바싹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세우며 쪼크리고 앉았다. 그러는 누님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어지고 있었다. 걱정과 련민, 아픔과 면려로 혼반죽된 미소가 부채살처럼 그 아름다운 얼굴에 지어져있었고 그 때문에 누님은 여느때보다 갑절로 갑절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것은 내가 여직껏 본 가장 아름답고 인자한 미소였다. 그 미소앞에 서면 시들었던 풀도 생기를 품으며 살아오르고 그 미소앞에 서면 살인백정도 들었던 칼을 떨구게 할듯한 미소였다. 그 주술같은 미소에 <<체조선생>>은 옷감 찢어지는듯한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광기에 넘쳐 팔다리를 휘젓지도 않았다. 누님은 <<체조선생>>의 앞섶에 그 빠찌를 달아주었다. 잘못 꿴 단추도 바로 꿰여주었다. <<체조선생>>은 폭풍설이이는 밤 양우리를 찾아온 주인의  손에 맡겨진 면양처럼 누님에게 자기를 맡기고 있었다. 누님을 향해 봉두란발한 머리를 들고 낡아빠진 치륜처럼 삭은 이발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것은 분명 행복한 웃음이었다.   <<짜그배>>누님의 그 박애와 긍휼(矜恤)에 담뿍 배인 웃음은 아직 세계관이 농익지못했던 나에게 하나의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그 웃음에서 나는 이제 나도 남들에게 웃음을 주어야겠다는 착한 심성 하나를 품어보았다.     <<짜그배>>누님은 마음에 드는 새 빠찌를 보면 나처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량표와 바꾸군 했다. 전국량표 20근내지 40근이면 새로 나온 빠찌를 바꿀수 있었다. 한번은 사진관에서 량표로 빠찌를 바꾸다가 어떤 정치를 잘하는 시럽쟁이에게 걸려 들었다.   <<아니, 이 갈보년이 령수의 마크를 량표와 바꾸다니? 그래 위대한 령수님이 상품이란 말이냐?>>   다행히 곁에 상철형님이 있었다.  <<이 보시오 손님. 모주석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신이 물질로 변하고 물질이 정신으로 변한다>고 하오. 우리는 정신을 가지고 저 사람은 량표로 쌀을 사먹으니 얼매나 좋소. 모주석은 실로 우리의 대구성이지요. 그렇잖소?>>  말주변 좋은 상철형님이 둘러맞추는 말에 그 시럽쟁이는 그저 피짚먹은 소처럼 눈을 끔벅일뿐 아무 답변도 못하고 말았다. 시럽쟁이가 사라진후 누님이 배를 그러안고 웃었다. 상철형님도 웃고 나도 웃었다.   상철형님이 촬영실로 다시 들어가고 누님이 금방 바꾼 빠찌를높은 앞가슴에 달았다. 나를 보고 물었다.   <<멋있어?>>  <<예!>>  나는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곱니?>>  <<예!>>. 나는 계속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누나가 좋아?>>  <<예!>>  나는 여전히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찬혁이가 좋다.>>  누님은 나의 커다란 골통을 쓰다듬으며 눈으로만 웃었다.  <<남들이 다 싫어하는 이 못난 누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누님이 창밖을 응시하며 혼자소리처럼 되뇌이였다.                              사춘기의 산       그때 나에게는 딱 세가지 소원이 있었다. 우선 하나는 값비싼 <<짜발탕(雜拌糖)>>을 실컷 먹어보는것이였다. 고량탕과 우유사탕 알사탕을 고루 섞은것이엿는데 꾸바사탕이나 저질 밀가루로 만든 <<손가락과자>>>, <<신바닥과자>>같은 것은 그에 비할바 못되는 고급식료품이였다.   다음 하나는 내눈으로 직접 코끼리를 보는것이였다. 그때 스리랑카의 녀수상 반다라나이케가 중국을 방문하면서 우의의 선물로 아기코끼리 한 마리를 증정한적이 있었다. 그 과정을 기록편으로 본 뒤 나는 이 거대한 아열대의 동물을 친히 육안으로 보고픈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짜그배 누님>>의 아름다운 모습이 찍힌 사진한장을 얻는것이였다.   해살이 올올이 선명해지면서 봄이였다. 누님의 미소처럼 아른아른한 기운으로 충만된 봄은 왔다. 깨여나고 자라나는 물상들처럼 나도 자라나고 있었다. 뜨거운 물에 오래동안 불구어둔 면직물옷이 줄어 들어서였던지 옷마다 팔이 뎅겅 드러나고 목이 겅충하게 드러나있었다. 코밑이 매탄부(煤炭部)에서 일하는 사람들처럼 별스레 검스레 해졌고 목소리는 연마지로 쓸어놓은 듯 쉰듯한 소리여서 스스로 듣기에도 거북살스러웠다. 그리고 나의 몸도 해동을 맞고 있었다. 깨여지는 얼음장처럼 불안감이 내 속에서 파렬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꼭 어덴가 상처를 입은것처럼 여겨졌다. 어느때 어디서 어느곳인지 모르게 상한 것 같았다. 부모들이 출근하고 없는 한낮, 문을 잠그고 문보를 내리고 나는 거울앞에 마주섰다. 고양이가 지켜보는듯해 그마저 내보냈다. 그리고 옷을 벗었다. 처음으로 나의 벗은 몸매를 살펴보 았다. 은밀한 구석구석까지 살펴보앗다. 귀퉁이에 혁명적구호가 새겨졌는 체경속에서 나는 혁명하려하고 있는 내 남성을 보았다. 내 소중하면서도 흉물스레 느껴지던 부분에 한모숨의 자라고 있는 눈밑의 봄싹같은 것을 놀라웁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무가지에 봄물이 팽팽히 차오르듯 일어서는, 동면에서 깬 뱀대가리처럼  머리를 쳐드는 나같지않은 욕망의 다른 한 나를 보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흉터를 가리는 사람처럼 덴겁히 옷을 주어입었다. 체경속에 비친 내 얼굴은 내가 보기에도 야릇한 홍조로 달아올라 있었다.   내 몸과 가슴속에 나도 모르는새에 연두빛싹이 가만히 움터있었다. 밤마다 나는 싹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그것은 자라려 하고 잇었다. 눈이면 눈, 흙이면 흙, 돌이면 돌을 물리치고 봄날의 눈석이 및의 싹처럼 자라려 하고있었다. 나는 내몸속에서 야릇한 주문(?文)으로 그런 싹을 키우고 있는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괴물은 매일이고 물주고 덧거름을 주며 외로움과 불안과 충동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나는 그 괴물을 축출할 방도를 찾을길 없었다. 그 괴물을 축출하고 내 소동하는 심기를 무마해줄사람은 바로 누님이였다. 오직 그만이 곡예사처럼 괴물을 능란하게 다루어내고 시시때때없이 머리칼을 쳐드는 싹을 전지(剪枝)해 다듬어 줄수 있을 것 같았다. 명의사처럼 그누구도 알길없는 내 의난증을 대번에 진맥해 낼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냥 누님곁에 있고 싶었고 누님이 내곁에 있을수 있기를 바랬다. 될수만 있다면 보쌈하는 옛날 사람들처럼 누님을 랍치하여 내곁에 업어오고 싶었다. 사진관 진렬장에 붙혀있던 누님의 사진을 하학하는길이면 지나치면서 훔쳐보군 했는데 <<똥파리>>의 횡포에 의해 진렬장이 박살나고 지금은 그런 욕망조차 달랠수 없게 되었다. <<똥파리>>는 그사진을 가져다 자기집 웃방미닫이에 붙혔다. 미닫이를 닫으면 막을 닫듯이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죽일칼이 따로 없는 <<똥파리>>같으니라구!)  회억대비중에서 늘 성토하던 대지주처럼 누님과 누님의 사진마저 깡그리 점유해버린 <<똥파리>>가 사무치게 미워났고 사무치게 시샘이 났다. 그처럼 다만 누님의 사진이라도 내가 신변에 갖추고 싶었다.  나의 불가능할 것 같던 갈망이 어느날 드디여 출구를 찾았다. 어느 한번 <<똥파리>>네 집에서 누님의 사진필림을 발견했던것이다. 트럼프를 찾다가 찬장서랍에서 필림을 보았다. 희미한 필림 륜곽속에서도 나는 그것이 언젠가 상철형님이 현상했던 누님의 사진필림임을 대번에 알아 볼수있었다. 그 사진필림을 가만히 품속에 집어 넣었다. 아닌 보살을 하고 <<똥파리>>네와 짝을지어 트럼프를 놀았다. 내의 속에 집어넣은 필림이 껄끄러워 났다. 그리고 가슴에 불덩이를 품은 듯 좀체로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놀지않으려 해도 짝이 딱 맞았기에 누구도 좀체로 놓아주지 않았다.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겨우 몸을 뺐다. 그러는 나의 뒤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회충>>이 말했다.   <<김찬혁! 너 회충약 먹어야 겠다>>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누님의 사진을 뽑기로 마음먹었다. 내게는 상철형님에게서 얻어가진 사진종이 몇장이 있었다. 빛에 포광(曝光)되여 못쓰게 된 사진종이였다. 허나 그 사진종이로 사진을 현상하는 방법을 상철형님이 배워주었다. 포광된 사진장을 펴고 그우에 필림을 놓는다. 다음 그우에 유리장을 짓눌러놓는다.해빛에 한동안 쬐이면 거짓말처럼 사진이 나온다. 그것을 인차 책갈피같은데 끼워 어두운곳에 간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해빛을 보이면 사진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약물에 뽑은것처럼 선명하지는 못했지만 영상이 제법 똑똑이 나오군 했다. <<사진사촌>>이 될만큼 원시적인 현상작업이였다. 형님에게서 배운 이 놀이를 나는 평소에 가장 즐겼다. 누님의 사진을 내손으로 현상하여 신변에 갖춘다는 가벼운 멀미와도 같은 상념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렇게 나마라도 누님의 사진을 현상하여 내 신변에 갖추어 두고 싶었다.   허나 련며칠을 무심한 하늘은 내내 흐린 얼굴이였다. 해빛이 없이는 사진을 현상할수 없었다. 그런 하늘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앞이마를 긁적이며 나는 안절부절을 못했다. 일기예보를 명심해 들었고 <<북경의 금산에 해빛이 비추어 내리네>>라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해뜰날을 기다렸다. 음운(陰雲)이 걷히고 해가 나오기를 조갈들게 기다렸다. 따스한 해줄기가 내려와 갈망에 타는 내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고 바랐다.   그러다 며칠후 하늘이 드디여 우거지상을 걷우었다. 원체 나는 뜨락에 나가 사진을 현상하려 하였다. 허나 그날따라 곁집애가 마당을 차지하고 나앉아 있었다. 학급에서 공부를 제일잘했고 모주석의 어록을 잘 외워 <<앵무새>>라는 별호를 가진 계집애였다.  <<앵무새>>가 마당에 쪽걸상을 들고 나와 앉아 <<붉은 보서>>를 쳐들고 있었다. 얼마후엔 녀석이 또 남동생을 불러냈다. 동생더러 자기의 외우기를 시험치게 했다. 안절부절 못하다가 더는 <<앵무새>>를 기다려내지 못하고 거리로 나갔다.   거리는 전에 없이 시끌벅적했다. <<무산계급문화대혁명10주년 기념>> 대행사가 온 현성을 무대로 펼쳐 지고 있었다.   둥챵! 둥챵! 둥둥챵!    귀청이 얼얼하도록 북소리 꽹가리소리 징소리가 울렸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10주년을 열렬히 경축하자!->>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로선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자!->>  <<등소평을 타도하고 우경번안풍을 배격하자아!->>  열기 띈 구호소리가 울렸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좋다네! 좋다네! 정말 좋다네!>>  선전차에 매단 확성기에서 노래소리가 쟁쟁히 울려나오고 있었다.   붉은 꽃, 붉은 표어, 붉은 기발, 붉은 얼굴들... 거리는 온통 붉은 빛의 물결로 장관이였고 구호소리와 노래소리로 랑자하였다. 길녁의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묻혀 그 열광적인 무리를 지켜 보았다. 모두들은 뒤질세라 만세! 만세! 타도! 타도!하고 목청을 다해 구호를 웨치고 있었다. 그누구도 혁명적행동에서 남에게 뒤지지 않고 열성을 보이려 했다. 어쩌면 그때 모두는 일제히 어떤 악마의 주문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충동과 유치한 리념이 너나의 신심을 얽동이던 세월이였다. 어느 한번 학교에서 투쟁대회를 벌렸는데 반혁명학술권위를 타도하자!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를 타도하자!고 선창을 받아 웨치던중 수발실의 령감이 주석대에 앉은 교도처주임에게 전화를 전달하느라 홍주임전화!_하고 웨치자 다같이 홍주임 전화! 홍주임 전화!하고 목청껏 받아 웨치고는 뒤늦게야 소리죽여 킬킬 거린적도 있었다. 어른네들의 그 까닭없는 흥분과 격분에 애초에 우리는 곤혹스러웠으나 차츰 하루가 멀다하게 벌려지는 투쟁대회와 비판대회에서 우리는 차츰 그 도에 넘는 격앙에 습관이 되어 버렸다.    시위행렬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나는 더는 기다려내지 못하고 그 행렬속에 끼여들었다. 나는 한 마리의 송사리 새끼처럼 그 <<붉은 물결>>을 거스르고 있었다. 혼잡한 악음에 귀때기가 잘려나갈 듯 얼얼해 났다. 나는 다급한 뇨의(尿意)같은 것을 느끼며 최면된 무리같은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빠져나오려 허우적이였다. 어찌보면 요사이 나는 혼자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그렇고... 혁명적 열의로 격앙된 사람들과는 역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나의 머리속에는 그저 나와 <<짜그배 누님>>만의 장소를 마련하고픈 오렌지빛 열망으로 골똑 차있었다. 사진을 만들 합당할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매이였다.   다리를 건너 교외로 나왔다. <<붉은 물결>>은 교외로 까지 이어져 있었다. 선전차가  교외를 순찰차처럼 느릿느릿 오가며 같은 노래 같은 구호를 축음기 풀 듯 반복하고 있었다. 밭에서도 농민들이 일하다말고 둘러앉아 전간(田間)경축회의를 열고 있었다. 논두렁마다에 붉은기가 꽂혀 있었다. 그러한 무리들중에서 나는 한사람의 락오된 유목민처럼 같아보였다. <<핍박에 못이겨 량산에 오른다>>더니 나는 논두렁길을 가로질러 산으로 치달아 올랐다.  하나의 광란하던 세계를 뒤로하며  산에 올랐다. 산에는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여있었다. 봄원족으로 산에 자주 오는편, 산에 오면 흔한 것이 진달래건만 마음으로 진달래꽃을 의식하기는 처음이였다. 몸과 마음이 변화를 가져오는 계절이였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 눈을 열어주고 마음을 설레게하는 것이 단 너나의 마음을 간질이는 봄바람만 아니라는 것을! 흐드러지게 피여난 꽃이 아름다워 몇가지 꺽어들었다.   내가 오른곳은 고향의 서남켠에 있는 <<대포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였다. 산정의 삐쭈름한 바위돌이 멀리서 보면 꼭 마치 대포와 같은 형국이였다. 왜정때 일본령사관에 부임되는 령사마다 괴질에 걸려 죽은데서 이에 풍수를 본즉 대포산의 그 <<포신>>이 마침 일본령사관을 조준하고 있기에 악에 받친 왜놈들이 박격포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포신을 까버렸다는 전설로 유명해 진 산이다.   산더기에 좀 더 오르자  산그늘이 몸을 적셨고 청렬한 내음의 솔향기가 코를 푹쌍 쑤시며 덮쳐왔다. 어데선가 이름모를 새들이 포목찢는 소리로 울어댔다. 자그만 현성이 손아귀에 잡힐 듯 한눈에 안겨왔다. 붉은 인파가 백지에 엎질러진 잉크처럼 거리와 골목에 번져 나가고 있었다. 산아래의 어느 학교에서도 사생들의 경축대회가 한창이였다. 교정에 매단 스피카에서도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세계는 동무들의 것이며   또한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동무들의 것이다.>>  노래소리를 들으며 나는 품속에서 땀에 화락하니 젖은 것들을 끄집어 내였다. 너누룩한 바위돌우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널어놓았다. 따스한 해빛이 정수리에 동침을 꽂고 있었다. 이름모를 격정에 나의 작은 가슴이 손풍금의 바람통같이 풀럭이였고  얼굴은 처음 홍주를 맛보았을때처럼 달아 오르고 있었다.   바위돌우에 신문지를 펴고 사진종이를 놓았다.  사진종이위에 필림을 놓았다.  필림위에 손바닥만한 유리쪼박을 놓았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빛은 여느때보다 찬란했고 충족했고 넉근했다. 진달래 꽃가지를 손에 들고 유심히 들여다보며 사진이 현상되기를 기다렸다.   사진종이위에서 누님이, <<짜그배 누님>>이 현신을 하기 시작했다. 빛은 능란한 회화대가의 터치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우선 몸의 륜곽을 그렸고 다음엔 얼굴을 그렸다. 해빛의 붓끝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짧은 량태머리, 반듯한 이마, 상큼 쳐들린 코마루, 꽃이파리를 문듯한 입술, 투박한 질감의 옷을 쳐들며 선명하게 솟아오른 왼쪽가슴...  나는 산속에 묻힌 보물을 쑤셔내듯이 경희로움에 넘쳐 사진을 집어들었다. 누님이 그 서느러운 눈매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달래꽃을 누님의 얼굴에 대여보았다. 꽃기운에 묻혀버린 누님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웠다. 나는 아슴한 현기증까지 느꼈다. 꽃가지를 입에 물며 나는 주술에 잡힌 사람처럼 바지궤춤을 스르르 까내렸다. 산아래에서 바람을 탄 노래소리가 끊겼다 이어지며 환청처럼 들려 오고 있었다.   <<세계는... 동무들의 것이며... 또한... 우리들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동무들의 것이다...>>  나는 <<짜그배누님>>의 사진을 눈가까이에 쳐들었다. 이번에누님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꽃잎같은 입술을 열고 옥돌같은 치아를 보이며 높은 가슴을 출렁이며 웃고있었다. 수즙음으로 단을 꺽고 잠복해있던 <<포신>>은 대번에 머리를 쳐들었다. 갈망에 넘친 그것은 튼실했고 뜨거웠다. 그 <<포문>>으로 나는 광분하는 도시를 겨누었다. 손을 천천히 그러다 잽싸게 움직이며 장탄을 했다. 조준경을 맞추었다. 입에 꽃가지를 물었기에 변조된 소리로  자기도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구령처럼 말을 복창하며 한가슴 가득 루적된 열망과 곤혹과 애증의 <<포탄>>을 련발했다.  <<승미누나는 <똥파리>의 것이다. 아니, 또한 상철형님의 것이다..그러나 결국은  나의 것이다! 나의것이다!! 나의것이다나의것이다나의것이다!!!... >>  까옥!  머리우에서 청승맞게 까마귀 한마리가 울었다. 솔향기가 새삼스레 단김을 뽑는 내 코속을 휑구어 냈다. 새의 울음이 귀에 잡혀들며 숲은 다시 나의 것이 아닌 원래의 숲으로 되었다. 나의 입에서 꽃가지가 떨어져 나갔다. 나는 물우로 금방 솟아오른 사람처럼 학학 거렸다. 격한 피로와 허무를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느새 누님의 사진이 떨어져 발치에 뒹굴었다. 흥건한 욕념의 배설물이 묻은 손을 주체할길없어 하다 나는 바지전에 문지르고 사진을 주어들었다. 빛은 금세 서투른 개구쟁이 화가로 변해있었다. 남의 집 담장에 작난질치듯 먹을 풀어 재빠르게 락서하고 있었다. 누님이, <<짜그배 누님>>이 웃음기를 거두며 재빨리 장막뒤로 몸을 감추어 버렸다.   툭!  실의에 가득찬 눈물방울 하나가 사진종이우에 떨어져 내렸고 이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붉은 무용신       <<짜그배>>누님의 꿈은 문공단(文工團에) 들어가 전업무용수로 되는것이였다. 누님은 혁명적 발레극의 녀배우들처럼 발가락끝으로 직립하여 설줄도 알았고 단숨에 맴을 10여고패 돌고도 숨가빠 하지 않았다. 허나 누님은 해마다 문공단 입시에서 락방했다. 사실 자그만 현성에 누님처럼 용모예쁘고 신장이 훤칠한 녀자는 없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빼여난 누님이 소박맞게된것은 모두다 누님의 신분때문이였다.   누님의 어머니가 원체 직업 무용수였다. 50년대 쏘련에서 있은 모스크바세계청년예술축제에 선발되여 나가 독무로 은상을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후 쏘련에 류학가서 무용전수를 받고 돌아와 예술학원에서 무용교원직을 맡았다. 허나 문화혁명이 터지자 문예계에서 맨 첫사람으로 <<수정주의 분자>>로 락인되여 투쟁을 맞았다. 반란파들에게 두팔을 뒤로 틀리고 거리에 끌려나가 조림돌림을 당했다. 홍위병맹장들로 조직된 반란파들은 누님의 어머니가 쏘련에서 타온 영예의 은컵을 산산이 박산냈고 이 현성의 이름을 빛내준 최고의 무용가더러 비판석상에서 투쟁받는 동안 줄곧 발가락끝으로 직립해 서있게 강요했다. 쓰러지면 다시 끄잡아 일으켜 발가락끝으로 서게 했다. 문공단에서 트럼베트를 불었던 누님의 중국인아버지는 어머니와 계선을 갈랐다. 타격과 수모를 못이겨 누님의 어머니는 스타킹으로 목을 매였다. 자결할 때 무용가는 쏘련에서 휘황을 뽐낼 때 입었던 그 무용복을 입고 죽었다고 했다.   그런 뼈아픈 사연이 있었지만 피는 속이지 못하는법 <<짜그배>>누님은 춤에 남다른 기량을 보였다. 집체호에 내려갔을때 인민공사에 조직한 사원문예공연에서 누님이 독무한 <<양돈장의 처녀>>는 단연 일등상보좌에 올라 농민대표로부터 붉은 댕기를 맨 새 낫과 새 호미를 상으로 타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현성에 이름짜한 <<수정주의분자>>인데다 본인이 집체호에서 있은 서기와의 불정당한 관계로 쫓겨 났기에 문공단에서는 체격조건이 뛰여난 그녀를 시종 외면했다. 당시의 시체용어를 빌어보면 <<사회주의 풀을 요구할지 언정 자본주의 싹을 요구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누님은 해마다 입시를 보았고 해마다 미끄러졌다.  <<죽일칼 따로 없는 눔새끼들. 신분이고 뭐고 추, 춤만 잘추면 되지않냐.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는 말도 있잖냐? 똥꼬치같이 무, 문공단에 불을 콰악 질러 줄가부다>>   그러는 <<짜그배>>누님이 보기에 안스러웠고 현성의 소문난 건달이라도 용빼는 수가 없는 <<똥파리>>는 곁에서 그저 길길이 뛰며 악담을 퍼부을 뿐이였다. 그때마다 누님은 그저 입귀에 고소를 머금었다.      누님은 로어도 할줄 알았다.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배운것인데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서 교재로 지정한 중국어도 배우기 바쁜데 누님은 말마디마다 잡아당긴 엿가락처럼 길고 따가운 오그랑이 굴리듯 혀를 힘들게 굴려야 하는 바쁜 로어를 그렇게 류창하게 잘했다. 상철형님이 누님에게서 로어를 배웠고 곁에서 나도 얻어듣고 이국어로 풍월 몇마디를 읊조릴줄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쯔뜨랍싼드뿌이  다시 만납시다- 따스삐따냐  아버지- 아쩨쯔  어머니- 마찌  누님- 씨쓰뜨라  거울- 쩨르깔라  빗- 그레벤  혁명- 레바류우쯔야  승리- 빠베다  춤- 딴쩨에쯔...  나는 배운대로 누님을 <<씨쓰뜨라!>>하고 불렀다. 그 애칭을 누님은 몹시 종아했다.   흥만나면 누님은 발끝으로 직립해 서는 특기를 보이군 했다.  하나 둘 셋 넷 세면서 시간을 재군했다. 누님은 백개를 셀때까지 외다리로 섰는 두루미처럼 우아하게 뻗쳐서있을수 있었다. 그러다  힘들면 곁사람에게 콱 무너져내리며 까르르 웃군 했다. 아픈 발가락을 문지르며 <<이 발에 무용신을 한번이라도 신어봤음 원없겠는데>>하고 한탄하군 했다. 만약 앞부리가 뭉툭한  그 특제무용신만 있다면 누님은 백개 셀사이가 아니라 하루종일 직립해서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용에 흥취가 있었기에 누님은 남들이 싫어하는 혁명발레극 <<홍색랑자군>>을 열번이고 싫증냄이 없이 다시 보군했다. 어느한번도 또 표 두장을 끊어왔다. 현성의 문공단에서 조선말로 <<홍색랑자군>>을 무대에 올렸다는 것이였다.   <<또 그 춤추는 녀자군대냐?>>  <<이곳 문공단에서 하는건데요>>   <<영화두 재미없는데 이곳 초, 촌뜨기들이 하는거야 보나마나 더 개죽이겠지>>  <<똥파리>>가 흥취없다는듯 돌아누웠고 누님은 혼자 가면 재미없다며 마침 곁에서 김표와 군기를 놀고 있던 나를 불러 데리고 갔다. 나는 주춤하다가 따라나섰다.   <<좋겠다. <가분수>는!>>  김표가 손을 입에 물며 나의 뒤모습에 부러운 눈길을 던졌다.   사실 그 한동안 나는 <<짜그배누님>>의 가까이로 가지못했다. 누님이 내가 대포산에서 한 짓거리를 다 알고 있는것처럼 생각되였던 것이다. 풀물이 묻어 잘 지워지지않는 옷가지처럼 그날의 부끄러움은 나의 마음속 골방깊이에 짙게 배여 있었다.  가까이 앉은 누님의 몸에서는 야싸한 치분같은 좋은 냄새가 났다. 처음 누님의 신변 가까이에서 나는 흥분을 곰삭이며 극장의  어둠과 즐거움속에 묻혀버렸다. 현성의 랑자군들도 영화속의 랑자군에 못지않앗다. 씩씩한 랑자군들은 모두가 붉은 무용신을 신고 있었다. 무용신을 신고서 팽이처럼 맴을 돌기도했고 발끝으로 직립해 서기도 했다.   <<저 무용신을 봐라 멋지지!>>  어둠속에서도 누님의 눈길은 감질난 부러움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홍색랑자군>>을 보면서 나는 중대한 결의하나를 뼈물러 먹었다.   (이제 빵도 있게 될거구 우유도 있게 될거얘요. 그리구 무용신도 있게 될거얘요. 기다려요. 나의 씨쓰뜨라!)  영화대사처럼 입속말로 이런말을 되뇌이며 나는 어떻거나 내손으로 누님에게 무용신을 하나 얻어다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언감 문공단을 털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이는 <<체조선생>>에게서 빠찌 하나를 떼여내기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였다. 얼리고 닥치고 하여 김표와 같이 갔다. 남의 속곳을 훔친 전례가 있는 녀석에게서 지도를 받고 싶었다. 나 역시 중기인 자전거를 훔친 성과가 있기에 둘이 함께 나서면 신 하나를 후려내는것쯤은 약과고 육중한 발풍금이라도 메여올수 있을 것 같았다.   <<땅짚고 헤염치기다.!>>  도와달라는 말에 시틋해 하던 녀석은 녀자들의 신을 훔친다는 말에 흥취를 보이면서 외려 자기가 나를 끌고 나섰다. 문공단에 어떻게 들어서나 했는데 녀석에게 방법이 있었다. 녀석은 도담하게 전달실로 곧추 찾아갔다.   <<무용실이 어데 있어요?>>  전달실의 뙤창으로 골을 불쑥 들이밀며 수위령감을 보고 높은 소리로 물었다.      <<누굴 찾냐?>>  의자에 앉아 졸고있던 수위령감이 잠기묻은 소리로 물었다.  <<그 있잖아요. <홍색랑자군>서 오청화역을 하는 녀자. 주인공말이애요. 그 사람 우리 누난데요>>  <<오- 무용조의 홍매를 그러는구나. 홍매에게 남자동생 있다는 말 못 들었는데>>  령감은 아직도 자다 깨지못한 얼떨떨한 모습이였다.  <<아바이가 뭐 호구복사 담당 경찰이얘요. 난 둘째동생이애요. 누난 홍매구 난 동생 홍표구요.>>  녀석은 이순간만은 슴벅거리던 눈을 한번 깜짝하지도 않고 짜장 연극을 놀고 있었다. 그 당당한 모습에 눌렸던지 령감쟁이가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3층으로 올라가라. 동쪽 맨 마지막 칸이 무용실이다. 지금쯤은 공연련습을 하고 있을거다.>>  우리는 달음박질치다 싶이 하며 3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김표에게 엄지를 빼들어 보였다. 김표가 시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잖나. 땅짚고 헤염치기라고>>  문공단은 시끌벅적했다. 칸마다에서 목구멍을 쥐여비트는듯한 발성련습소리, 악기의 현을 맞추는 앵앵거리는 소리로 랑자했다. 현관의 벽에 붉은 선전문구가 붙어있었다.  <<모주석의 혁명적 예술정책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문예혁명의 창도자 강청동지에게 경례를 드린다!>>  동쪽의 맨 마지막 칸에 무용조라는 패말이 붙어있었다. 쿵당쿵당  홀을 뛰여 다니는 발구름소리에 뒤섞여 익숙한 <<홍색랑자군>>의 주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전사의 책임은 크고   녀성의 원한은 깊다...>>  나는 무용실의 문을 살며시 열어젖혔다. 벽에 거형의 체경을 달고 나무로 바닥을 깐 홀에서 무용복차림의 팔등신 무용수들이 날아오르는 새떼처럼 몸을 솟구며 뛰여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발부터 여겨 보았다. 그런데... 모두가 앞부리가 뭉툭한 무용신을 신지 않고 있었다. 무용배우하나가 뛰기를 멈추고 빠끔 열렸는 출입문쪽으로 길게 찢어진 눈을 돌렸다. 나는 덴겁히 무용실의 문을 닫았다. 다음보조는 어째야 할지 망연해 있는 나를 김표가 툭툭 건드렸다. 김표가 말없이 손끝으로 무용실곁의 칸 하나를 가리켰다. 갱의실(更衣室)이라는 패말이 붙어있는 칸이였다.  <<틀림없이 무대복장을 두는 칸일거야>>  김표가 억양을 한껏 낮춘 소리로 속살거렸다. 그리고나서 녀석은 갱의실의 문을 가벽게 노크했다.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다시 한번 노크했다. 역시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김표가 문을 조심스레 밀어제꼈다. 찌꿍! 문소리가 났고 그닥 높지않은 소리에도 우리는 와뜰 놀라 했다.   갱의실안은 혼잡했다. 아닌게 아니라 갱의실에는 무대도구며 복장들이 산처럼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아마 갱의실 겸 창고로 쓰이는것 같았다. 화장경대와 의자들이 벽에 줄느런히 놓여 있는외 구석쪽에 커다란 북 몇 개가 놓여져있었고 징이며 꽹가리며 기발들이 되는대로 뒹굴고 있었다. 벽에는 울긋불긋한 무대복장들이 현란하게 걸려 있었다. 무용복을 갈아입은 배우들의 나들이 옷도 걸려있었다. 그 무대복장이 걸렸는 아래쪽에도 못을 줄느런히 박고 소도구들을 걸어놓았다. 소도구들을 일별하는 순간 나는 흥분을 못이겨 앞이마를 긁적이여였다. 내가 보물처럼 애타게 찾고저하는 무용신이 바로 그곳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 개도 아니고 20여개가 줄느런히 걸려 있었다. 일매지게 걸린 붉은 무용신은 흡사 산자락을 에돌며 피여난 진달래꽃같았다. 나는 얼른 그중 한 개를 벗겨 손아귀에 쥐였다. 경대쪽에 다가가 배우들이 쓰는 분갑이며 립스틱을 만져 보고있는 김표를 끄당겼다.   <<찾았다! 얼른 내빼자>>  알큰한 미소를 띄고 내가 갱의실의 문을 열려는데 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갱의실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같았다. 우리는 어쩔바를 모르다가  저마끔 커다란 북뒤에 몸을 숨겼다. 운동때면 트럭에 싣고 거리를 돌리며 두드려대는 거대한 북몇개는 고맙게도 우리들의 작은 몸뚱이를 감추어주기에 맞춤했다. 문이 열렸고 경쾌한 무대동작처럼 무용수 하나가 잰걸음으로 뛰여 들어왔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김표도 긴장한지 목을 자라처럼 움추린채 입에 왼손엄지를 꽉 물고 있었다. 무용수는 경대에 마주서서 땀에 젖은 얼굴을 닦고 화장을 고쳐 했다. 경대를 향해 구홍(口紅)을 바른 입을 오무려 보더니 다시 경쾌한 동작으로 밖으로 나갔다.   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우리가 몸을 일으키는데 문이 또 한번 삐걱 열렸다. 우리는 다시한번 풀더미에 대가리를 처박는 암꿩처럼 북뒤에 몸을 옹송그렸다. 옹송그리고 앉아 잠수하는 사람처럼숨을 꺽 죽였다. 그런데 눈이 길게 찢어진 이번의 무용수는 인차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무용수는 온몸이 물자루가 되어있었다. 검은 무용복의 뒤잔등은 땀자욱으로 얼룩져 있었다. 무용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있었다. 그러다가 무용수가 아무런 주저도 없이 무용복을 훌렁 벗어내쳤다. 무용수는 순간에 브래지어 한 장만 가린 반라의 차림이 되였다. 땀에 번들거리는 가슴팍이며 겨드랑이며를 수건으로 문질러댔다. 치모를 밀어버린 겨드랑이가 눈에 부시게 말끔했다. 김표의 눈이 반짝 빛났고 하얀 낯바닥이 모주먹은 돼지처럼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녀석은 북뒤에서 머리를 슬그머니 내밀고 무용수의 반라의 몸매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땀을 닦아내던 무용수가 흠칫하며 경대에 눈을 박았다. 한참 들여보다가 우리쪽으로 머리를 홱 돌렸다. 김표가 바삐 머리를 움츠려 뜨렸다. 허나 그 순간 녀석은 그만 땅에 놓였는 꽹가리를 건드리고 말았다.   쟁그랑!   듣그런 소리가 높았다.  <<누구얏!>>  무용수가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며 소리질렀다. 무용복을 집어들고 후닥닥 밖으로 뛰쳐나갔고 급기야 현관에서 투명한 고음이 터져올랐다.   <<류망이야!>>  나와 김표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허둥거렸다.   <<뻗어라!>>  김표가 갈린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갱의실의 문을 박차고 뛰여나갔다. 우리를 본 그 무용수가 아직도 옷을 입지못한채로 서서 다시 한번 불덴 사람처럼 소리질렀다.   <<류망을 잡아요!>>  녀자의 고음은 촉이 예리한 화살처럼 우리의 등판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그 화살을 피하려는 듯 우리는 악을 써가며 뛰였다.   <<도둑도 아니고 하필이면 류망이냐?>>  녀자의 그 정평이 마음에 들지않아 뛰면서도 씨부렁이였다.  김표가 먼저 허둥거리며 층계를 달아내려 갔다. 경황중에 나는 그만 손에 움켜쥐였던 무용신 한짝을 떨구고 말았다. 그런데 층계로부터 벌써 사람들이 웅성이며 달려오르고 있었다. 김표가 되달아올라 왔다. 악기실이며 성악실로부터도 사람들이 불쑥 불쑥 나왔다 김표가 오페라가수인 듯 체구가 굉장히 거쿨진 사내한테 덜미를 잡혔다. 나는 무용신을 주으려다 말고 현관막끝으로 뛰여갔다. 그곳에 비상층계가 있을거라는 환상으로 헐떡이며 뛰여갔다. 그런데 현관의 맨끝에는 층계도 없었고 출구도 없었다. 그저 창문이 달려 있을뿐이였다.   <<서랏!>>  좋이 10여명 잘되는 사람들이 웨쳐대며 해조처럼 나를 향해 밀려왔다. 그 얼굴들에는 격노가 서려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용신을 가슴에 품고나서  나는 저도모르게 창턱에 올라섰다. 화단곁에 자전거를 줄느런히 세워둔 문공단의 뜨락이 보였다. 3층이 그렇게 높아보일수가 없었다. 현기증이 치받쳐 올랐다. 격노한 사람들이 물결이 나를 삼킬 듯 지척에 다가왔고 들숨을 한번 길게 긋고나서 영화 <<10월의 레닌>>중의 경전적인 장면을 재현하며 나는 창턱에서 뛰여내렸다.   터져오르는 경아성을 뒤로 하며 나는 죽지부러진 새처럼 추락해 내렸다. 화단곁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뒹굴면서 나는 3층의 창으로 콩나물시루속처럼 머리를 빼곡히 내민 사람들을 보았다. 전달실에서 령감쟁이가 뛰쳐나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덴겁히 몸을 일으켰다. 허나 발목이 류탄(流彈)에 관통된 듯 아파났고 몇걸음 못가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발목을 접질러먹은 아픔을 느낄새도 없이 그 련며칠을 어른들의 적대시의 눈길속에 반성을 강요당했다. 우리집까지 찾아왔던 문공단 일군들은 교원과 로동자대표출신인 아버지의 신분을 보아 나를 용서해주고 돌아갔다. 그어떤 경제손실도 없었고 우리가 한일도 그렇게 천추에 용서못할 짓거리가 아니였기때문 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녀자의 속곳을 훔친 전과가 있는 김표가 동행했기에 죄는 모두다 김표에게로 돌아갔고 나는 그애의 사촉에 따라 나선 것으로 어른들은 추정하고 있었다. 이붓아버지가 이약냄시 풍기는 몸으로 바싹 다가앉아 처음으로 나를 내놓고 질책했다. <<이는 부르죠아적 사유에 물든 파렴치하고 저속한 행위라고>> 로동자대표다운 정치술어로 일장 훈화를 했다. 나는 그저 머리를 수긋하고 심각하게 반성하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끈질긴 점액질같은 지루한 설교를 귀등으로 흘려보내며 속으로는 그 떨구어버린 한짝의 무용신에 대해 내내 아쉬움을 머금고 있었다.   발목에 냄새나는 호골고(虎骨膏)를 붙히고 련며칠을 집에 꾹 박혀 쉬였다. 덜썽거리며 <<회충>>이 병문안을 왔다. 김표가 사람들에게 맞아서 눈확이 색안경을 낀것처럼 됐다고 알려주었다. 그다음에는 <<똥파리>>와 <<짜그배>>누님이 함께 찾아 왔다. 다른 사람 아닌 <<짜그배>>누님을 보자 감옥에 갇혔는데 면회 온 친지를 보듯이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원체 그를 위해 벌린 짓거리였고 하루빨리 누님을 만나고 싶었었다. 허나 직접 누님을 만나자 내 짓거리가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여 누님을 쳐다보지못하고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앞이마만 부지런히 긁적이여 댔다.    <<왜 그랬냐? 너두 <리, 림표>처럼 여자빤쯔 도둑질하는 훌륭한 스, 습관이 있냐? 춤추는 년들은 속에다 어떤걸 입고 다니는지 보, 보고 싶었어?>>  <<똥파리>>가 나의 고약딱지를 붙힌 발목을 꽉 쥐여놓았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남들이 뭐라겠어? 이 동팔이가 녀자 속옷복장점 차, 차리나 하겠다. 이 똥꼬치들아>>  <<똥파리>>의 얼굴에 는 어의 없다는듯한 고소가 비쳐들었다. 그러다 내 머리를 툭 쥐여박으며 웃었다.   <<너 3층에서 뛰여 내렸다며? 또, 똥담 큰 새끼. 이 크다란 가분수머리가 터지잖구 무, 무사한게 모를일이다>>  짜그배누님이 사과한구럭을 내놓았다. 뼈에 금간데 좋다며 <<백보단>>이라는 가루약도 사왔다. 그 외에도 무언가 하나 더 내놓았다. 그것은 요지경이였다.   <<내 갖고 놀던건데 집에 박혀 심심할 때 돌려봐. 무척 재밌다. 이거>>  부모님이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자 <<똥파리>>와 누님이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저... 누나>>  나는 주춤이다가 <<짜그배>>누님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니?>>  누님이 기다란 속눈섭을 치켜올리며 나를 보았다. 나는 앉은걸음으로 밀고가서 장롱을 열어젖혔다. 그속에 신문지에 여러벌 싸서 숨겨두었던 것을 꺼내였다. 다시 앉은 걸음으로 밀고가 누님에게 어줍게 내밀었다.   <<날 주는거야? 뭔데?>>  의문을 쳐들며 누님이 받아 들었다. 신문지를 벗겨 내렸다. 신문지에 신주단지처럼 싸둔 것은 무용신이였다. 한짝만 남은 붉은 무용신이였다. 문공단에서 잡혀서 구박을 당하면서도 가슴깊이 갈무리해넣고 발견될가바 속을 태우며 보존해온 무용신이였다. 누님의 속눈섭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걸 가져오느라 문공단가서 그랬니?>>  나는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미안해요. 한짝은 그만 떨구어 버려서...>>  누님이 다가와 내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축축히 젖었는 소리로 말했다.   <<내가 공연한 소릴 해갖고>>  누님의 감격어린 말을 귀가까이 들으며 나는 한짝의 무용신이나마 신고 두루미처럼 외발로 오연히 섰는 누님의 고혹적인 모습을 환영으로 보고 있었다.      이제보니 누님은 나를 완연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나에게 문안오면서 하필이면 유치원생들이나 환혹할 요지경까지 가져다주었던것이다. 그래도 나는 누님이 좋았다. 될수만 있다면 정말 아이로 되어 누님의 손에 딸려 문시부(門市部. 잡화점)도 가고 극구경도 가고 싶었다. 우리 친구들중에 김표를 내놓고 모두 누나가 없었다. 더구나 나같이 외독자인 아이는 더구나 적었다. 나의 친부모는 나외에도 더 아이가 없었을가? 혹시 내게도 친누나가 있지않을가? 있다면 나의 누나도 <<짜그배>>누님처럼 저렇게 마음 착하고 저렇게 얼굴이 예쁠가? 나는 부쩍 누나비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목 때문에 집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나는 부지런히 요지경을 굴렸다. 요지경에 눈을 들이대고 보면 현란한 세계가 펼쳐지군 했다. 꽃밭에 들어선듯도 하고 궁전에 들어선 것 같기도 하고 꽃불폭죽이 터져오른 것 같기도한... 그런 기하학적 도안들은 나를 설둥하게 만들었고 작은 짓거리에서 크나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개구쟁이들처럼 나는 요지경이 좋았다. 외눈망원경을 들고 섬을 찾는 수부처럼 요지경속에서 무언가 찾아내려는 듯 굴리고 또 굴렸다. 찬란한 해빛을 빌어 굴절된 세상을 아름답게 보기시작했다.   접질린 발이 조금 나아지자 나는 집에서 배겨내지못하고 종전처럼 거리에 나섰다. 발을 살룩살룩 절면서도 사진관이며 영국더기며를 찾아 다녔다. 머리도 마침 길어져 또 누님네 리발관을 찾아갔다. 내가 3층에서 뛰여내리는 <<거사>>를 치르며 즐겁게 해주려 했던 누님을 다시 찾아보고 싶었다.   이날따라 리발소는 시끌벅적했다. 멀리서부터 리발소 문앞에 사람들이 바자를 두르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웬일이냐?고 나는 사람들 틈사리를 비집었다. 욕설을 삼태기로 먹어가며 겨우 창문께까지 비집고 다가가 까치발을 하고 유리창에 낯을 붙히고 힘겹게 들여다보았다. 리발관안에서는 란투가 벌려지고 있었다.   아낙네 몇몇이 달려들어 어떤 녀자를 짓누르고 그의 머리를 가위로 마구 자르고 있었다. 풍성한 머리칼이 흩어져 내렸고 잘린 머리칼들이 락엽처럼 흩날렸다. 리발의자에 짓눌린 녀자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시악을 썼으나 악착같이 달려드는 대여섯 잘되는 아낙네들을 당하지 못했다. 나중에 녀인은 체념한 듯 태아처럼 반항한번 하지않고 아낙네들의 짓거리에 몸을 고스란히 맡기고 있었다.   <<이 천하의 갈보년아>>  <<개같은 마우재 종자년아>>  <<헌 신짝같은 년아>>  <<가랭이 찢어죽일년아>>  녀자들은 내가 여직껏 들어본중에 가장 더러운 낱말들을 깡그리 동원하여 녀인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중에  리발관의 점원인 <<닭둥이머리>> 아낙도 보였다. 아낙네 하나가 어데서인지 헌신짝 하나를 가져다 끈을 지어 녀자의 목에 걸어놓았다. 입에 게거품을 물고 허연 목덜미들을 붉혀가며 한동안 만용을 부리고나서야 아낙들은 지친 듯 손을 멈추었다. 그네들에게 짓눌렸던 녀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쥐여뜯긴 녀자의 머리는 소낙비를 두들겨맞은 까치집처럼 꼴불견이였다. 입귀는 터져 피가 배여나왔고 얼굴도 손톱에 할퀴여 벌거죽죽 자리가 나있었다. 적삼 앞섶이 찢어져 앞가슴이 훤히 들여다보 였다.  녀자는 목에서 헌 신짝을 풀어내렸다. 초점잃은 눈길을 들어 리발관의 출입문과 창에 코를 납작하게 붙이고 모여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순간 나는 처참히 지치러든 꽃 한송이를 보았다. 나의 입으로 가느다란 비명이 새여나갔다. 난생처음 <<회충>>과 란투를 벌려보면서 단단한 일격을 받았을때처럼 멍해지고 말았다.  콩단처럼 뒹굴며 암팡진 아낙들에게 당하고 있는 녀인은 다름아닌 <<짜그배 누님>>이였던 것이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창에서 물러섰다.   (왜? 누님이 뭘 잘못햇는데?)  나는 일순 어쩔바를 몰라했다.   <<저 천하 갈보년이 이번에는 문공단 부단장과 붙었다누만>>  <<몇해고 시험에서 미끌어지더니 배우가 되고싶어 환장했나보지>>  <<배우 시험치려면 시험장에서 해야지 이불속에서 해서 되남?>>  창가에 붙어선 사람들이 잔뜩 흥미로운 눈길을 하고 윤나는 소리로 수근덕거렸다.   한동안 망연자실해 서있다가 나는 돌쳐서서 내 뛰기 시작했다. 발목의 아픔도 잊고  내뛰기 시작했다. <<영국더기>>를 향해 내뛰여 갔다.    <<똥파리>>를 불러 <<짜그배누님>>을 구할 생각이였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다시 리발관으로 찾아왔을 때 암펌같이 날치던 문공단 단장의 녀편네와 휘동해온 아낙네들은 사라지고 리발관에는 고요를 되찾고 있었다. 그곳에 <<짜그배 누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데갔느냐는 물음에 란장판을 수습하고 있던 <<닭둥이 머리>>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몰라요 또 어느 군사낼 찾아갔겠죠 뭘. >>  누님을 구박하던 녀인들속에 가세해 끼여들었던 <<닭둥이 머리>>는 한껏 야유하며 말했다.  <<쥐, 쥑일 칼 따로 없는 녀, 년들>>  <<똥파리>>가 누구에게도 모를 악담을 퍼부었다.   저녁, 나는 밥맛을 잃었다. 누님의 추연한 눈빛과 까치집처럼 된 머리가 자꾸만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그리고 강다짐으로 누님의 목에 걸어놓은 하필이면 무용신도 아닌 헌신짝이 의문스러웠다. 밥알을 모래알 씹듯하다가 나는 참지못하고 어머니에게 헌신짝이란 뭘 의미하냐고 물었다. 어머니의 놀란 눈길이 나에게 맞혀왔다.  <<흐루쑈브 동지>>의 눈빛도 어머니와 마찬가지, 못본 풍경을 보듯 나의 입을 뚫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뭐 반동언사라도 내뿜었나? 아니면 국가기밀이라도 루설했나?)  그 눈길이 싫어져  머리를 수긋하고 밥을 조겨대기 시작했다. 한가슴 가득한 의문덩이를 밥과 함께 꿀꺽 힘겹게 삼켜버렸다. 앙큼한 짓에는 능수인 김표와 물어서야 그 헌신짝이 갖는 상징의미를 알수 있었다. 중국사람들이 세상 더러운 녀인네를 비해 하는 말이라는것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짜그배 누님>>이 어떻게 되어 더러운 년이돼? 어떻게 헌 신짝이되냐 말이야! )  나는 아낙들의 횡포와 그 저주에 의문스러웠고 경악해 했다.  그 며칠동안 나는 헌신짝을 찾기에 골몰했다. 그런데 집에 흔하던 헌 신발들은 신발공장에 일하는 이붓아버지가 들어오면서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집은 남보란 듯 새 신발을 신고 다니군 했다. 나는 하필이면 신발공장에 다니는 이붓아버지가 미워나기 시작했다. 어느모로 보나 미운 <<흐루쑈브 동지>>였다.   <<왜? 폐품수구소라도 차릴 작정이냐?>>   나의 난데없는 짓거리에 김표가 의문과 야유를 보였다. 자기네 집에는 헌 신짝이 없고 정 얻고 싶으면 종발로친의 신을 얻어다 주마고 했다. 녀석에게서 재미를 잃고 나는 <<회충>>을 찾았다. 그에게서 헌신짝 몇 개를 얻을수 있었다. 또 먹을것과 바꾸었다. . 평소에 <<회충>>을 구워삶기는 쉬웠다. 먹거리만 주면 재롱을 부리는 곡예단의 원숭이처럼 만수받이로 무엇이든 다 들어주군 했다. 그런데 이번만은 녀석이 괴까다롭게 굴었다. 내가 먹고있던 <<손가락 과자>>  한웅큼을 내주었더니 녀석이 머리를 저었다.중국사람들이 만들어 파는 얼음 아가위 한꼬챙이를 사주고 바꾸려니 녀석이 머리를 저었다. 문시부로 가서 <<신바닥 과자>>를 사주려니 역시 머리를 저었다. 나중에 <<흰토끼>>표 우유사탕 한근을 사주고야 헌 신짝들을 바꿀수 있었다. 먹는데 몹시 탐하는 녀석은 내가 과자 한봉지를 다 내주었더라면 자기 어미가 지금 신고있는 신이라도 벗겨올 위인이였다. 나는 그무슨 보물함이라도 간직하듯 냄새나는 그 헌 신발짝들을 지니고 집으로 돌아왔다. 호시탐탐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밤, 나의 심기를 알아주듯이 마침 현성은 또 정전이였다. 야음을 타서 나는 <<짜그배 누님>>을 구박주었던 그 몇몇 아낙네 집을 찾아다니며 문고리마다에 헌신짝을 그 무슨 악마의 주문처럼 꽁꽁 비끄러 매 놓았다.    그때 사춘기에 갓 접어든 나에게 있어서 <<짜그배>>누님의 출현은 내장을 상하게 할만큼한 매력의 맹독을 지니고 나를 침식해 왔다. 누님은 내가 배꼽줄 자르고 나와서 처음으로 녀자를 의식하게한 녀자였다. 또 누님은 내 심성에 저장된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가리키는 그런 사람이였다. 누님이 내게 주었던 요지경속의 무늬처럼 누님은 그렇듯 불가사이했고 그렇듯 아름다웠다. 나는 처음 이상야릇한 괴질같은 상사(相思)의 병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언젠가 앓았던 홍역처럼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아프게 더 번거롭게 나를 괴롭혔다. 지금의 말을 빈다면 누님은 나의 우상이였고 꿈속의 련인이였다.
115    천재죽이기 (2) 댓글:  조회:4379  추천:73  2007-06-29
    . 초현실주의소설 .     천재죽이기     김 혁           3, ...세계환경보호일은 어느날입니까? 고양이수염은 무슨 작용이 있을가요? 두부는 어느때 세상에 나왔음둥? 데안나왕비의 신장은 몇센치예요? 무좀은 왜서 생깁니까?UFO는 어떻게 작동할가요?... 별의별 해괴한 물음들이 그침없이 올라왔다. man은 집중광속에 조그맣게 응축되여 서서 보험자문 일군들처럼 기계적인 답복을 해주고 있駭? 내가 왜 이럴가? 왜 이래야만 할가? 하고 언녕부터 스스로를 묻군 했던 그였다. 쇠돈을 집어넣으면 수요되는 물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 같은 무절제하고 짜증나는 이 짓거리를 이젠 그만 집어치우고 싶어졌다. 일보, 석간지, 잡지,방송국들에서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과학기술협회 특이공능연구소조도 그를 찾아왔다. 혈압도 재고 피도 뽑고 설문조사도 하였다. 매체에서는 그를 보기드문 특이공능의 소유자로 신격화하기도 했고 골목길 강호랑중과 같이 허드레잔재간으로 쇠돈을 챙기는 기편군으로 타매하기도 했다. 네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다른 시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을 구경하듯이 몰려들었다. 어느 과학잡지에서는 그를 고문으로 초빙했고 어느 학교 과외써클소조에서는 그를 보도원으로 청했다. 점을 쳐달라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바리를 잃어버렸소, 려권을 잃었습네다 하면서 찾아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뉴스인물이 됐구만 그래, 접때두 말했지만 자넨 참 혼자 두고 보긴 아까운 사람일세. 하늘이 내린 신이여. 그러게 마작도 모르고 마늘도 잡숴주질 않지.-그런 상식문제쯤은요 죽어라고요 외워두면요 다른 사람도요 그만큼은요 할지도 몰라요.-소소한 특기가 있다 해서 자네 업무에 태만한거나 아니여?회사에서도 이렇게 신기해하고 반신반의해하고 질투하고 시까스르군 했다. man은 원래의 조용하고 버릇되였던 생활환경을 되찾고싶어졌다. 시간 맞춰 회사에 나가고 업무를 조금씩 넘쳐하는 재미 를 맛보고 돌아와서는 딸애와 말꼬리잡기를 하고...허나 그만 두겠다고 하니 안해가 극구 반대표를 들었다. 우선 남들보기에 광채가 나고 다음 매주 한번씩만 무대에 나서도 평소의 로임은 부끄러워 자라목이 될만큼 수입도 짭짤하니 누이좋고 매부 좋은 노릇 왜 기어코 하지 않으려 드냐고 했다. 그래도 계속 거부의향을 보이자 안해는 거럼 그 재간 날 주고 네가 나가서 생리대나 팔아라! 고 필요이상으로 기서을 질렀다. 취미로 나섰던 애초에 man은 그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것도 아니였다. 묵직한 출연료를 호기스레 안해앞에 내치고 딸애에게 비싼 꼬까옷, 놀이감을 안겨주고 셋이 한께 호화레스트랑으로 가서 외식도 하고...허나 시간이 길어지고 출연이 잦아짐에 따라 권태감보다도 자기가 이렇게 하고있는 동기의 근원에 대한 의혹이 무양하던 표피를 가르고 돌기해오르는것이였다. 그 의혹은 나날이 커가며 종양처럼 그를 괴롭히고있었다. 관중들이 내게서 바라는 건 무얼가? 내가 정말 과학기술협회에서 재고뜨고하는 것처럼 가치가 잇는 일을 하고있는걸가? man은 던져준 사탕이나 실과를 받아먹고 재주넘기를 하던 동물원 쇠그물속의 잔나비를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관중들의 물음도 이제는 자연법칙이나 상식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렵기적이고 지어 저속한쪽으로 고부라지고있었다. 콘돔의 발명자는 누구지요? 공룡은 어떻게 흘레를 했을가유?따위의 물음에 접할 때면 man은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끼군 했다. 이에 거부의향을 보이자 프로듀서는 분위기를 깨지 말라. 방송될 땐 몬따쥬로 나가니 신경쓰지 말라. 오락성이 가미돼야지 않겠느냐고 man을 주저앉히군 했다. man은 이 모든것이,권태를 이기며 물의를 이기며 접욕을 이기며 나서는 이 모든것이 종국에는 그 퍼런 지페장을 위해 서임을 절감했다. 빈대도 낯짝있다고 청고한 지성인으로서의 그에게 이는 더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그의 이러한 심기를 모르고 안해는 한수 더 떴다.TV로 나가면 매주 한번씩밖에 기회가 없는데 아예 나이트클럽쇼로 나가라는것이였다.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보수도 TV에서보다 곱배로 더 주고 장기 합동을 하겠다는것이였다. 좀 피로하긴 하지만도 참고 견디느라면 우리 집도 태깔 벗을게 아니냐고 넌지시 들이댔다. 손님들을 끌기 위해 지체장애자인 난징이들을 뽀이로 써먹는 그런 나이트클럽이였다. man은 다시 한번 거부를 했다. 하여 목청을 한옥타브씩 높이던중 끝간데 없던 싸움중에서도 초중량급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당신 반편이예요. 남보다 좋은 장기를 갖고있으면서도 쓸줄 모르는 얼간이 같으니라구야.-너무 과욕부리지 마오. 그러게 몸매가 자꾸만 삐여지지. 콤플렉스는 신체에 해로와-당신땜에 내가 이렇게 무사튼튼해요. 남들은 남정이랍시면 핸드폰 들고 모터찌클 타고 살맛나게 어깨살리는데...당신은 그게 뭐예요? 집구석에 박혀 책장만 번지면 락천가만 불어대니.-핸드폰따위가 그렇게 붑소? 핸드폰 든 사람 부귀한 사람으로 알던 때는 이미 지났소. 그리고 핸드폰은... 전자기파를 내보내는데 미크로파를 위주로 하는 전자기파는 암증, 뇌종양, 백혈병, 기형과 같은 신체질병을 초래할수 있다오. 핸드폰을 자주 쓰면 대뇌에 열집중점을 형성할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뇌종양을 형성하는 원인...-문자쓰지 말아요. 넌덜머리가 나요. 그게 다 포도를 딸수 없으니 다람쥐보고 시쿨다는 똥개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튼소리예요. 거꾸로 잡고 털어봤자 달랑소리밖에 없는주제에 입만은 살아서...-그래 임잔 괴춤은 불룩해도 머리는 텅 빈 사람들의 오토바이뒤에나 앉아 다니는게 전부의 취미요?-그게 어때요? 사회관계로 보나 인끔으로 보나 당신 그사람에 비하면 명함도 못내놓을거예요.-옳지! 이제 실토정이 나오는구나. 그 자식 대체 누구냐? 너하고 어떤 관계냐?-친구면 어떻고 정부면 어때요? 그 사람은 적어도 천지분간 못하는 당신처럼 날 고생시키진 않을거예요. 결혼 5년넘도록 엉뎅이 놓을 집 한채라도 있었나요? 남들같이 현대가구들을 챙기고 집을 가꾸는 재미 같은건 생각할 여지도 없이...텔레비마저 흑백으로 증조할머니구식이고요, 철 맞춰 옷 한벌 입자 해도 옹이속을 먹어야 하고 명절때면 외식 한번 하자 해도 손을 꼽아야 하고...네편네에게 반지 하나 못사 주면 서...우리 가게 다른 아낙들은 두개,세개씩 끼고 다녀요. 눈이 무서워 가짤 끼고 다니는 내 신세와 심정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봤나요?...그건 제쳐놓고라도 다른 집들에선 애에게 피아노 사주고 컴퓨터 사주고 수입제옷 차려입혀 내놓는데...우리 앨 좀 봐요. 우리앨...나도 인젠 악이 나요. 지긋해서 더는 이렇게 못살겠어요... man은 마냥 달변이였던 언어에 제동이 걸리고 지어 향변할 말마디 하나 찾지 못하는 자신을 느꼈다. 박살난 자존의 쪼각을 찾아맞추려고 허둥댔다. 힘아리없이 돼버린 목줄기를 간신히 버티며 책잡을만한것을 골라내려 했다.-그래 전번에 돈을 꿔 샀다는 반지가 원래는 그 놈팽이가 사준거였지?안해는 머릴를 쳐들고 man의 초첨을 맞추지 못하고있는 눈길을 정시하였다. 후회근처에도 가지 않는 그 눈빛이 전에없이 조소와 도발적으로 빛나고있는데서 man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요! 그런덴 또 어쩔거죠?-이런 걸레같은 년.man은 폭발하듯 소리지르며 안해의 귀뺨을 후려갈겼다. -뭐 걸레?그래요. 내가 걸레예요. 그럼 멀쩡한 수건이 걸레로 구겨질 때까지 넌 뭣하고있었냐? 이 씹하다 좆부러질 쌔끼야!조악한 언사가 마구 튕겨나왔고 둘은 치고박고하였다. ... man은 여전히 덤덤한 기색으로 관중들의 질문에 대한 풀이작업을 하고있었다. 집중광속에 그의 모습이 미랍인형처럼 메마르고 생기없어보였다. 안해는 싸움끝에 아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친정집으로 패주해버렸다. 일전엔 사흘도 못되여 기신기신 다시 찾아들군 했다. 짐짓 말도 건네지 않고 밥도 짓지 않으면서 뒤탈린 모습을 하고있다가 인차 표정을 풀며 하하거리군했다. 그런데 이번엔 보름이 지나도록 안해는 여전히 머리를 내밀지 않고있는것이였다. 사회자는 자꾸만 랭각되여가는 man의 기분을 살리려는듯 대사에도 없는 이야기를 자꾸만 곁들었고 무대아래에서 프로듀서도 일전보다 판 다른 모습인 man을 곤혹스레 지켜보며 번들이마에 배인 땀을 연신 훔쳐냈다. man의 상태와 분위기를 망가먹는것은 단지 안해가 늦도록 귀가하지 않고있다는 그 불화때문이 아니였다. 이런 짓거리를 이제 그만 끝을 보려 했는데 어느 회사에서 《주말대잔치》프로에 굉장한 협찬을 햇는데 프로에서 인기의 절정인 man이 빠져서는 안된다고 프로듀서며 전체 제작진이 간청해왔다. 그 애걸에 가까운 청에 밀려 무대에 올랐던 man이였다. 무대에 올라 조명의 반사광뒤에 거뭇하게 보이는 관중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man은 그만 동공을 키우고말았다. 표정이 일순에 무너졌다. 오늘의 무대를 위해 거금을 협찬했다는 회사의 총경리가 다름아닌 자기들 가정에 부로하의 파문으로 던져진 돌멩이의 임자, 안해를 뒤에 싣고 네거리를 뻔뻔스레 달리던 《혼다 125》였던것이다. 그 여드름투성이의 진화가 덜된 원숭이 같은 상판을 man은 대번에 보아냈다. -다음은 《금도유한회사》의 총경리님께서 질문이 있으시겠습니다.여러분 큰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사회자가 방금전보다 변형된 어조로 억양을 살렸다. 유난히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후원자를 광이 나게 내세웠다. man의 신분에 대해 알고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척하는지 《혼다 125》는 능청스런 꼴로 몸을 일으켰다. man은 쓴 약을 삼키듯 체념을 삼키며 뿌지적소리가 나도록 마이크를 두손으로 움켜 잡았다.집중광의 빛이 수천만개의 혁편이 되고 동침이 되여 자기를 찌르고 후려치는듯한 마음의 고통을 감내하며 man은 무대우에 버텨섰다. -어험, 그럼 묻겠소. 《현대조선말사전》1334페지 15번째 줄에는 무슨 단어가 씌여있소? 1334페지 15번째줄...그단어는...사랑이란 두 글자였다.사랑?사랑?그래 사랑이란 두글자지! 그런데 돈밖에 다른것 아무것도 없는 졸부놈새끼가 왜 하필이면 꼭 이 물음을 꼬나들어? 네가 사랑이 뭔지나 알고있어?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알고나 있냐 말이야? 네가 어찌 비새는 세방집에서도 넘쳐나는 웃음을 알며 네가 어찌 박봉을 잘라 귀한 음식 조금씩 맛보며 행복해하던 진미를 알며 네가 어찌 폭양아래 가게에 나선 안해에게 넘겨주던 자그만 얼음과자 한대의 감격을 알며 네가 어찌 청빈한 집에서 셈먼저 든 땔애를 두고 경이로움을 짓던 희망찬 기쁨을 알수 있겠느냐? 좌중이 술렁거렸다. 위조품을 보는듯한 미심적은 눈길들이 man 을 향해 찔러왔다.《혼다 125》도 수렵물의 정곡을 맞힌듯 흥미로운 눈길로 난국에 빠진 man을 지켜보고있엇다.-그럼 다른 방식으로 묻겠소. 딸라란 단어는 사전 몇페지에 씌여있소?관중석의 수런거리는 소리와 사금파리 긋는듯 거북살스러운 《혼다 125》의 물음소리에 man은 정상상태로 환원할수 있었다. 이번에는 던져오는 질문을 받았다. 받아서 야구공처럼 도로 내쳤다.-미안하군요, 경리나으리. 그 단어는 사정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사전을 편찬할 때에는 지금처럼 딸라에 미쳐 광분하던 시대가 아니였나 봅니다.랭소적으로 자르듯 내뱉고는 집중광의 집요한 포획속에서 벗어나 퇴장해버렸다.다금한 뇨의(尿意) 를 느꼈다. 흥분할 때마다 있게 되는 습관이엿다.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의 뒤를 묻어 누군가가 곁으로 다가와 변기에 마주섰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그는 다름아닌 《혼다 125》였다. 여드름투성이 얼굴을 실룩이며《혼다 125》는 질금질금 오줌을 싸대고잇엇다. man은 그러는 그자의 뒤덜미를 잡아 변기통에 거꾸로 처박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한 충동에 man의 온몸이 떨려오르고있었다.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였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 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리상 《오감도》시 제 3호  -네가 나보다 얼마나 잘났기에?man은 격심한 염오를 입귀에 물고 곁눈질로 《혼다 125》이 물견을 째려보았다. 고산지역의 수도물오듯 질금이는것을 보며 자존을 기살려키워 한가슴 체중되였던것을 벅차게 뿜어냈다.2,...뻐스가 지나갔다.《캐딜락》이 지나갔다.자전거가 지나갔다.봉고차가 지나갔다.《쌍타나》가 지나갔다.《벤츠》가 지나갔다. 《라다》가 지나갔다.모터찌클이 지나갔다.령구차가 지나갔다...man은 차량의 호수를 물끄러미 지켜보며 구조선을 체념한 무인도의 사람처럼 길녘에 뿌리내려있었다. 안해가 친정에서 돌아왓다. 그 안해와 가두판사처로 가서 리혼협의서에 도장을 찍었다.-더는 이렇게 들볶으며 멀미나게 살지 말자요.표정에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눈앞을 얼굴 정도로 차겁게 내뱉는 안해앞에서 man은 더는 항변을 못했다. 리혼증에 박힌 지문의 파문이 일렁이는 호수처럼 보였다. 애정의 균렬로 흘러서 이루어진 피의 호수같은...리혼수속료 51원씩 냈다. -하필이면 1원을 덧붙일건 뭐람?백지장처럼 지워진 머리에 무엇을 써넣을지 몰라 해도 안해도 좋을 괜한 소리를 되뇌이였다. 살인적으로 무더운 날씨엿다. 마지막성찬으로 랭면옥으로 갔다. 일에 부딪혔을 때 남자보다 은정을 찾는 녀인의 특유의 심리라 할가, 큰일을 치르고난 뒤 이상하게 찾아드는 기아감이라 할가 안해는 국수를 잘고 먹어주고있었다. 후룩후룩 소리까지 내면서 국수발을 끊었다. 비정한 안해의 그한 모습을 지켜보며 결국 너와 나는 마음의 번지수가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다. 둘사이에 끼인 딸애도 가정의 이변을 느끼지 못한채 엄마처럼 맛나게 먹어주고있었다. 허나 man은 도무지 수저를 들수가 없었다. 연약해지는 심기를 감춰보련듯 공연히 딸애의 국수 그릇을 휘저으며 자꾸만 국수발을 끊어주었다...방학을 맞은 운동장 같은 방에서 재떨이가 포식하도록 담배꽁초를 수북히 담다가 man은 쫓기듯 몸을 일으켰다. 안해가 가지고 떠난, 기물을 놓았던 벽체의 거뭇한 자리와 자기 사진만 뽑아내여 치아빠진듯 불썽사나운 사진액틀, 여기저기에 다 가져가지 못하고 흘려버린 딸애의 미니 장난감들... 그것들이 man에게는 뭉근한 시각적 괴로움이였고 천성으로 연약한 그의 마음을 칼끝처럼 에이고있었다. J에게로 전화를 넣었다. 아무하고라도 아무런 내용이 대화라도 나누고싶었다. 허나 뚜-뚜-하는 발신음만 들려올뿐이였다. 더 이상 있다가는 질식할것만 같아 할일없이 네거리로 뛰쳐나와버렸던것이다.멀리 천교가 보였다. 귀신다리! man은 다시 한번 시디신 전률을 느꼈다. 며칠전 과학기술협회 연구일군들이 그를 찾아왔다. -선생의 대뇌는 1368.3그람이였습니다. 이는 일반 사람들의 대뇌의 평군치를 30그람정도 초과한것으로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뇌도 1330그람. 레닌의 뇌도 1350그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된뇌 피질충에는 적어도 150억개의 세포가 있는데 그 기억용량은 당대 가장 완벽한 컴퓨터계기를 훨씬 초월하고 있지요. 사람들이 기억을 더듬을 때 대뇌가운데서 산생된 전류가 시각신경, 청각신경,추각신경 및 촉각신경 구역을 자극하여 그 내용을 떠오르게 하지요. 그 정보를 수송하는 기관을 신경원 (神經元)이라고 합니다. 그 신경원과 뇌세포의 발달차이에 따라 천재와 백치가 결정되는거죠. 선새으이 신경원의 능동비례는 정상인데 비해 13배나 높았습니다. 선생,선생은 천재입니다... 다음은 유전학쪽으로의 연구였다. man 역시 자신의 IQ의 높낮이보다 이쪽에 흥취가 더 컸다. 부모라는 낱말의 함의에 대해서 전혀 모른채 복리원에서 딱딱한 병영생활처럼 자라온 그에게 있어서 피를 넣어주고 골육을 세워준 친부모에 대한 확인만큼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격동하지 마시고 들어주십시오. 선생의 모친은 이미...사망한지 오래됩니다. ...자연사(自然死)가 아니였습니다... 부친은 찾을 길 없습니다... 왜냐 하면 선생의 어머니는 결혼전에 선생을 배게 된후 선생의 부친으로부터 배신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선생의 모친은...다름아닌 그... 그 천교에서 뛰여내렸던것입니다... 천교, 아니 그 《귀신다리》가 가까와지고있었다. 도회지의 려관을 위해 그 고풍스런 다리를 철수하고 신축하기로 하였다. 헬멧을 쓴 일군들이 벌딱지처럼 붙어 교량에 붙었던 광고판들을 떼내고있었다. 그 화려한 가림판들을 떼내자 다리의 시르죽은 원색이 보였다. 풍진세월에 찌든 로모(老母)와 같은 다리가 강바람에 떨고있었다. -내가 바로 이 도시에서 유명한 귀신다리 일화중의 한 배역이였군요. 왜 그렇게 총망히 가시였습니까? 왜 하필이면 그런 길로 가시여야만 했습니까? 왜 나를 남기셨습니까? 홀로 남아서 이 세상 모든 고단함을 홀로 받게 만들었습니까? 어무니, 어무니이- 어덴가 어머니가 뛰여내리기전에 섰을 곳을, 자기를 내려 놓았을 곳을 더듬으며, 그 체온을 감지하련듯 man은 다리우에 점도록 서있엇다. 자신은 곧바로 어머니의 비극의 속편이고 그 연장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을 망가뜨리면서라도 돈많은 속물의 궁둥이뒤에 묻어앉기를 원했던 자기 신변의 녀자나 하루가 멀다하게 상대를 바꾸면서 말세나 온듯 육욕의 향연을 벌리는 옆집녀자에게는 쥐벼룩만큼도 안될 그 무엇을 지키고 저 어머니는 한몸을 살라버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한몸으로 지킨 그 무엇을 혈연으로 이어받고 고수해왔기에 자신도 가정을 잃었고 직장에서 신빙성을 잃었으며 서러운 시대 어느 뒤안길의 락오자로 내동댕이쳐졌다. 왜, 왜서? 다리는 시공안일군들과 교량 철수직전의 기념을 남기려고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행객들로 시끌벅적했다. 그 란무속에서 빠져나왔다. 박살난 유리처럼 해빛이 잘그랑 잘그랑 쏟아져내리고있었다. 허나 그한 땡볕에서도 man은 까닭없는 한기를 느꼈다. 죽음처럼 엎드린 신작로 복판에서 행위의 좌표를 정할 길 없어 허둥대고 있었다. -어무니, 난 어떡하면 좋아유???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를 골목이 적당하오.)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4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5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6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7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8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9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10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11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1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것이 차라리 나았소.)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그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그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리상《오감도》시 제1호  1,...상우에 차거운 빛을 뿜는 피스톨이 놓여있다. man은 비겁하게 낯가리개를 한 그 사람의 작은 눈을 쏘아보고있엇다. 낯가리개를 들추며 솟아오른 더덕더덕한 여드름에 구토감을 느꼈다. 도박장밖에는 틀림없이 이 도박자가 타고 온 모터찌클이 세워져있을것이고 그 모터찌클은 틀림없이 《혼다 125》일것이며 그 안장우에 언젠가는 자기와 도타왔으나 지금은 이 사람과 눈맞고 배맞은 한 녀인이 앉아 금반지를 네개 낀 손을 초조히 맞비비며 기다리고있을거라고 man은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꼬옥 이자를 쏘아넘겨버려야 하는거다!즉물형타입의 상대는 살벌한 미소를 짓고있었고 man은 선혈처럼 솟아오르는 통한을 느끼고있었다. 두사람 천천히 손을 쳐들었다. -이번엔 꼭 주먹을 내야 하는거야. 주먹을 내여 내 사랑과 내 가정을 부숴뜨리고 내 자존의 목을 자르고 왕소금을 뿌린 놈을 작살내야 하는거야!땀으로 화락하니 젖은 man의 주먹이 윙-울었다. 주먹, 드디여 주먹을 내였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꿈속에서마저 마냥 지녀야 했던 자격지심을 강잉히 누르며 마침내는 주먹을 내였다. 그런데... 상대가 낸것은 보,보였다. 자기한테서 간활하게 활용되여 항거할수 없는 위세로 자기를 흔적도 없이 덮어버린것이였다. 상대가 낄낄하고 음습하게 웃었다. -그러면 움명의 도박장에서 나느 영원한 실패작이란 말인가?man은 체념처럼 피스톨을 잡았다. 태양혈에 가져다 붙였다.-이렇게 허무하게 당할수 없다. 그래도 끝머리에 가서는 마냥 내게 새롱누 꿈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던가? 난 거꾸러지지 않을거다. 난 살아남아야 한다!man은 일루의 희망으로 처량하나마 웃음을 입귀에 담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요란한 총성과 함께 화염이 슉-뿜겨나왔다... 사무상우에 포개져 잠이 들었던 man 소스라쳐 꿈의 독아에서 푸렬났다. 식음담으로 온몸이 물자루가 되여있었다. 언제 보아도 어수선한 꿈에 기력을 탈진한듯 man은 쏘파로 가서 몸을 던졌다.요사이 man의 부서에서는 새로운 극이 개봉됐다. 체제개혁의 강압에 부장님이 마지못해 병퇴를 했다.-난 아직도 식보가 좋은편이요. 기관지가 좀 나쁘고 심근 경색이 있어 그렇지 큰 병증같은것도 없다우. 그래 전렬선으로 좀 고생하오만 그건 나이 들면 누구나 의례 가지게 되는 집체병 아닌감?그리구 한달에 한번 꼴씩은 로친네를 잠 못자게 들볶을만도 하구... 부장님은 자꾸만 주해를 달고있었다. 그 주해를 읽을 사이도 없이 동료 1이 부장자리로 승격했다. 이 동무는 동료들과 단결이 좋습니다. 회사의 각종각향 규률을 엄수합니다...승격추천리유는 간단했다. 부장후선인의 사업실적보고서는 한문으로 써야 했다. 그 보고서는 《팔뚝굵은 사람》이 마늘을 두지 않은 료리쪽으로 한끼니 청을 받고 써주었다. 그 료리를 곰삭일 사이도 없이 게를 잡는데 바위돌 들었던 사람은 원 부서에서 자료실로 배치되여 내려갔다. 회사에서 자료실은 로년한쪽이거나 사무원 가족들이 맡아하고있었다. man은 지금 작은 마누라가 들어오니 소박받고 뒤채로 밀려난 본댁의 처경이 돼버린것이였다. 세상을 문자돌림으로 파악하는 책상물림인 man으로선느 자신의 파면에 대한 까닭을 도무지 알길이 없었다. -아니, 이 동문 공작을 잘하고있지 않소? 유력한 뒤받침이 될텐데...모두들 의아쩍은 낯빛을 지었다. 허나 새로운 내각을 꾸미기에 나선 신임부장은 손을 저으며 NO!를 불렀다. 첫째: 자료실 역시 회사의 중요한 부서로서 유생력량을 보충하기 위해서입니다.둘째:이 동무는 군중기초가 박약합니다.셋째: 업무에 안착하지 않고 사사로운 일에 집착합니다.넷째:가정무순이 있습니다....로부장과 man의 환송식을 한꺼번에 햇다. 비닐 안경테를 금속테르 바꾸어낀 신임부장이 시큼한 냄새가 배인 웃음을 휘뿌리며 권주를 했다. -부장님 환갑때 부르십쇼. 그리구 자료실량반, 일터가 바뀌였다고 정서파동하지 말고 계속 그 본새로 착실히 해나가게나. 자료실이 얼매나 좋은덴가. 한가하지 ,볼거리가 풍성하지, 변상적인 료양소일세그려,자넨 참 복있는 사람이야. 이제 그곳에서 자네 팔뚝 더 꿁어지면 야단인데.후핫핫.-종종 마작놀러 오게나. (부장은 여전히 허전한 기색을 고쳐짓지 못하고있엇다.)그런데오늘이무쓴요일이던가?...그래 목요일이지...그럼 래일 주말이니깐 래일부터라도 오라구 사람이 늙어지면 금수저로 성찬을 먹여줘도 섦고 허전한 법이야.-아유,아바이두요 이젠요 그 마작두요 삼가해서요 노시라구요. 이제 보니요 신체에두요 덜 좋은 놀음이였어요. 도박 성질을 띠지 않았는가요. 고상한 취미쪽으로요 생각해보시라구요. 낚시질에요 취미를요 붙인다던가요.부장님과 어우러져 낚시협회 신임회원으로 발탁된 동료2는 강가의 돌에 걸채여 발목을 삐여먹고있었다. 통증으로 낯살 찡그리면서도 그녀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죽많은 음성으로 고유의 그 감탄사를 련발했다.-나 말이예요,낚시 말이예요.굉장히 좋아한다구요.그리고 얼마 못되여 갓 배운 낚시재간으로 출국연수지표 한장을 낚아올렸다. 그것은 적절히 말해서 man이 먼저 맡아놓은 호수에서 그의 미끼를 훔쳐 밤낚시로 낚아올린것이였다.-부장님요. 나 돌아올 때요.낚시대 사가지고 올게요. 그곳 낚시대요 참 질량 좋다 그래요. 나 말이예요, 낚시 말이예요,굉장히 좋아하잖아요. man은 이렇게 그들의 막간극같은 빈번한 연기를 그저 보조역조차 맡지 못한채 지켜만 볼뿐이였다. 그들앞에만 나서면 웬지 기름독에 바진 날곤충 같은 무기력을 느끼군했다.자료실의 늙수그레한 일군은 치질이 도져서. 아줌마일군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두번째 임신을 해서 나오지 않고 자료실에는 man혼자뿐이였다. 집에 가도 혼자, 회사에 나와도 혼자였다. 일전처럼 말추렴에 들지 않아 좋은 점도 없지 않았지만 벼처럼 앞을 차단한 책장사이에서 때지난 책들이 내뿜는 매큼한 냄새가 눈이며 코를 폭폭 쑤실 때마다man은 물밑에 처박힌 조약돌처럼 질식하고 닳아져가고있는 자신을 느꼈다. man은 다시 한번 밖으로 나왔다. 화단에 코스모스가 기장차게 피여있었다. 다른 꽃들에 비해 높아 어덴가 싱겁게 보였다. 그리고 다른꽃에 비해 미약하고 엉망한 꽃내음이지만 그 내음마저 기꺼이 맡으면서 man은 화단의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정오였지만 하늘은 해를 잃고있엇다. 그리고 회사의 뜰은 여느때보다도 시끌벅적했다. 회사 빌딩의 이마우에 걸었던 구호판을 떼내고 광고판을 올리고있는중이였다. 원 구호판에는 《차세기의 인재를 발굴 육성하자!》라는 글발이 주홍글자로 씌여있었다. 새로 올리는 고아고판에는 《회춘령!당신의 남성을 지켜줍니다.》라고 네온싸인이 둘레를 친 속에 즉물적인 내용이 아름다운 미술체로 박혀있었다. 호르륵-마천루에서 호르래기소리가 울렸다. 누군가의 구령소리도 울렸다. 문뜩 그 무양하던 소리의 질서를 깨뜨리며 경황한 웨침소리가 울렸고 그와 함께 마파람소리가 휙-울렸다. 끌어당기던 동아줄이 끊어지며 광고판이 떨어져내렸던것이다. 광고판은 꺼시시 나래를 편 독수리마냥 추락해내리며 코스모스 피여있는 화단을 덮어버렸다...0, ...?????? ...? ...! ... ... ...ㅁㅁㅁ ...《... ...?》...ㅇㅇㅇ...2653550...127-1305761...222405650909061...1.68cm ...65Kg...????!...<...>... v=v/g...4 5/3... <<...000?>>... 2568705... 127- 1316553...×××... ( ... ) ... a+b=c... !...??... m... dm... mm... mu... ! ... ???... h2o!... o2! ... sos... sos!... sos!!... sos!!!.. sos!!!... sos!!... sos!... sos...-1,...《환자의 뇌부는 엄중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애초엔 식물인으로 될가 걱정을 했더랬는데 지금 저만침 개복한것도 기적이 아니라 할수없습니다. 환자의 대부분 기억력은 이미 상실 되였습니다. 마치...지워버린 카세트록음대 같다고나 할가요. 그리고 타격으로 말미암아 대뇌공능이 크게 쇠퇴되였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 환자의 지력상수는...다섯살짜리 어린애 정도밖에 되지 않고있는겁니다.》 뇌과병원 주치의사는 위생모에 때지난 곤색옷차림을 하고 엉성하니 앚아있는 한 데데한 아줌마에게 man의 병세에 대해 자상히 설명해주고있었다. 병세가 엄중한데 반해 man에게로는 문병오는 손님이 전무하다싶이 되고있었다. 환자가 근무하는 직장에서 령도같아뵈는 사람 한둘이 얼굴 한번씩 보이더니 이제 와서는 발길이 완연히 끊기다싶이 하였다. 달포에 한번꼴로 직장의 재회일군이 공비값의 70프로쯤 되는 액수를 가져오군했다. -우리 단위서 혹덩이를 만났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뒤씻개를 받쳐줘야겠나요?재무과 아낙이 내놓고 배배탈린 소리를 했다. 다음으로는 유한한 모습을 지은 녀자 하나가 보러왔다. 모터찌클뒤에 앉아왔는데 웬 영문인지 그 모터찌클임자는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까닭없이 미간에 찬바람이 일고있는 녀자는 면회를 거절했다. -환자에게 영양품이나 사주세요. 주치의사에게 적선하듯 300원을 뿌려주었다. 누군가고 캐여물으니 그저 그렇게 되는 사람이예요.하고는 온역이나 피하듯 병동을 뛰쳐나갔다. -언제 봐도 흑싸리같이 거북살이라니깐.낮으나 짜증기에 젖어 흘리는 소리를 병실의 문이 닫힌는 사이에 주치의사는 분명 들을수 있었다.주치의사는 man이라는 이 환자에 대해 다소 알고있었다. TV에서 장끼표현프로에 자주 나타나 천부적인 기억력을 과시하던이였다. 의학분야에 몸담고있는 신분으로서 또한 무신론자였지만 그의 신이 내린듯한 기억력에 감복이 가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하여 이 불운한 환자에 대해 여느 환자보다 손길을 많이 돌리군 했다. 대뇌에 손상을 입고 그 기는이 쇠퇴된 환자들은 가끔가다 하나의 물체. 한마디의 소리 등 일상의 한소절에서 충격을 받고 그 기능이 다소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다. 의사는 환자가 불운을 당하기전에 쓰던 물건들을 그앞에 난전처럼 벌려보엿다. 환자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골라쥐였다. 책이였다. 《여섯사람의 낭떠러지》라는 추리 소설이였다. 소설은 마지막 장절에 가서 접혀져있었다. 그리고 그 갈피에 《 J》라는 영문자모가 씌여있었다. 일곱자리수자도 적혀있었다. 영문자모뒤에 이음표를 긋고 적은걸 보아선 《 J》라는 그 불명의 대호에 상응한 전화번호 같았다.주치의사는 그 번호를 눌러보았다. 화사한 목소리의 임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전화를 걸기까지의 경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녀자는 잠자코 들어주고있엇다. 그런데 나중에 동을 단 녀자의 말이 애매하고 무여지했다. -그렇긴 한데요. 헌데 그것이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주치의사는 인도주의각도로부터 환자의 회복을 위해 많은 협조를 달라고 세세히 그 의도를 규명했다. 허나 녀자는 채 듣지도 않고 전화를 절컥 끊어버렸다. 환자는 그 추리소설을 종일 쳐들고 식자본을 떼는 아이들처럼 또박또박 읽군했다. 꼭 그 책에 관련된 사연이 있을거라고 의사는 다시 한번 그 J라는 녀자에게로 전화를 넣었다. 이번에는 화사한 목소리의 임자에게서 나온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투명한 고음이 튀여나왔다.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요. 나 그런 사람 몰라욧! 주치 의사는 그 몰풍스런 태도에 격노했으나 다른 용빼는 수는 없었다. 의사는 대체 웬 감투끈이냐고 《여섯사람의 낭떠러지》라는 제명의 소설을 마지막까지 거듭 읽었다. 공학박사 하나가 있었는데 그 재능을 질투하고 그 사랑과 돈에 련관되는 일련의 욕념으로 동료 다섯이 함께 살인을 모의,뛰여내려라 낮은 낭떠러지다!뛰여내려라. 그만한 용기도 없어?뛰여내려라. 넌 모든 면에서 팔뚝 굵잖아?뛰여내려라. 네가 못하면 우리라도 할수있다...고 술마신 이를 합세하여 들볶은데서 멀쩡한 사람이 천지분간 못하고 뛰여내렸다는 그런 심경 추리소설이였다. 읽고나서도 의사는 환자의 심태를 엿보아낼 그 무엇을 찾아내지 못했다. -왜서 이 소설을 이렇게 즐겼을가? 이 소설과 J라는 녀자와는 어떤 관련의 끈이 있을가?man이라는 환자를 받은 뒤 그 환자의 처경으로부터 여느 환자와는 달리 자꾸만 그 무엇을 더듬게 되는 의사였다.그런 환자에게로 오늘 요행 면회를 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덴가 조촐하고 어수룩하기까지 보이는 아줌마였지만 의사는 반가움을 느끼며 알듯말듯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에게 환자의 병세에 대해 소상하게 이야기해주었던것이다. -환자를 한번 보시겠습니까?주치의사는 여전히 진지한 태도로 man의 회사에서 청소부 노릇을 하고있다는 그 아줌마에게 물었다. -네에...아줌마가 무춤 몸을 일으켰다. -그저 밖에서 조용히 보고 돌아가십시오. 새로운 자극을 주어선 안되지요. ...살창을 댄 뙤창으로 까치발을 하고 아줌마는 병실을 들여다보았다. 독실이였는데 침대에 올방자를 틀고 앉은 표나게 수척해진 man의 모습이 보였다. 치료의 편리를 위해 까까머리를 하고있었다.아래턱이 길어보였고 어덴가 괴기스럽게 보이기까지했다. 종일 실내에 갇혀있은탓인지 표상은 몹시 해갈했다. 어제날의 발랄하고 예지와 정력으로 빛나오르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나비가 훌쩍 날아가버려 빈 고치만 댕그러니 남은 경상을 아줌마는 놀랍게 실감하고잇었다. 나무인형처럼 무표정한 기색으로 man은 열심히 손벽을 마주치고있엇다. -가엾은 사람...련민의 빛이 어린 아줌마의 눈확으로 물빛이 그들먹이 고여올랏다. 위생모를 벗어 추연해진 눈언저리를 닦으며 의사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불쌍한 사람인데...의사선생님...잘 부탁합니다.아줌마는 진득한 한숨을 짓고나서 병동을 나섰다. 그뒤로 짝짝하는 박수소리와 더불어 유아들같이 목청을 한껏 살린 환자의 야릇한 소리가 병동에 공명이 되여 울려나왔다. -리자로 끝나는 말은 우리,유리,소리,보리,머리,허리,다리,파리,거마리,병아리,머저리...-리자로 끝나는 말은 우리,유리,소리,보리,머리,허리,다리,파리,거마리,병아리,머저리...        1998 [도라지]문학상 수상작    
114    닭과 함께 춤을 댓글:  조회:3132  추천:73  2007-06-29
닭울음소리 한 가닥 들을작시면- 을유(乙酉)년 잡감(3)닭과 함께 춤을김혁|소설가닭은 흔히 다섯 가지 덕(德)을 지녔다고 칭송된다.머리에 있는 볏(冠)은 문(文)을 상징하고, 삼지창 같은 발은 내치기를 잘 한다 하여 무(武)로 여겼으며, 적과 용감히 싸우므로 용(勇)이 있다고 하였고, 먹이가 있으면 자식과 무리를 불러 먹인다 하여 인(仁)이 있다 하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간을 알려주니 신(信)이 있다 하였다. 게다가 우리 인간에게 알과 고기를 주니 그보다 더한 익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조상들의 생각이었다.닭은 다른 가축에 비해 취소(就巢, 알을 품음)성이 강하다. 몸은 작지만 한꺼번에 20알 정도를 품어 부화시킬 수 있다. 알을 품으면 매우 열심인데 식음을 끊고 뜨거운 가슴으로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새매 따위의 육식 새들이 병아리를 낚아채려 들면 급하게 새끼들을 불러 품안으로 모으고 만약 병아리가 새들의 발톱에 걸려들면 어디에 그런 힘과 용기가 숨어 있었던지 날개를 푸드득 이며 크게 싸움을 벌인다.《암탉이 제 새끼를 품안에 모으듯 한다》는 말은 바로 지극한 모성애를 상징하는 말이다.다산 정약용은 닭의 그런 모성에 감격하여 《어미 닭과 병아리》라는 시를 지은 적 있다.제 새끼를 건드리면/목털은 곤두서서/ 고슴도치를 닮았네/ 낟알을 찾아내면/ 쪼는 체만 하고/ 새끼 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네사실 닭처럼 부지런한 동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모이를 쪼지 않고 멍하니 있는 닭을 본 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알을 품을 때와 홰를 치며 울 때 정도만 빼 놓고는 하루 종일 먹이를 먹으러 고개를 조아리며 다닌다.또한 수탉은 그 자부심과 사나움,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점을 닭싸움이라는 일종의 스포츠에 활용해왔다. 볏을 곤두세우고 상대에게 용감하게 달려드는 모습에서 닭의 강인함과 용맹성을 찾을 수 있다.또 수탉이라는 이름은 남성의 성적 능력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수탉은 남성이 갖춰야 할 조건인 가정을 지키려는 용기와 시간의 변화를 판단하는 현명함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리상적인 남성 상을 상징한다는 것이다.영국의 유명한 생태학자인 데스먼드 모리스는 닭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닭은 자연상태에서는 고도로 사회적인 동물로서 농장이나 야생지, 모이통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흔히 《쫓기서렬》로 알려진 사회적 위계(位階)질서를 발전시킨다. 자기보다 우인 닭에게는 복종하고, 아래인 닭은 거느리는 것이다. 개개 닭들이 무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는데, 많게는 90마리의 무리에서도 그 서렬이 유지된다고 한다. 닭은 한낱 흙 속을 헤집고 뒤져 벌레와 풀 따위를 알아서 찾아 먹는 놓아먹이는 새이다. 하지만 그들은 해와 바람과 별을 알았다. 이는 자연순환에 깊이 조률돼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이들에 비추어 볼 때 혼란에 허둥대는 우리의 사회적 위계와 질서는 극히 중요하다.해가 바뀔 때마다 누구나 다음은 무슨 띠의 해인가 살피고 그 띠 동물에서 새해의 운수를 예점(豫占) 하려 한다. 새로운 띠 동물을 대하면서 그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어떤 새로운 기대를 걸어 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올해에는 을유년 닭의 해, 우리모두 시간을 알리는 닭처럼 새끼를 품는 닭처럼 새매와 싸우는 닭처럼, 자부심을 지니고 사랑을 알며 신의를 지키는 강인한 인간으로 자신을 가꾸어 봄이 어떨가!불교에서는 닭을 깨달음의 주체를 지닌 동물로 여기고 있다. 닭울음소리에 귀기울인 서산대사의 일화가 그 일례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70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 데 공을 세운 승려. 큰 의문에 부닥쳐 울증(鬱症)에 빠져 있던 서산대사가 하루는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낮닭이 홰를 치며 크게 울었다.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대사는 의문이 풀리면서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대사는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홀연히 본래의 내 집을 얻고 보니(忽得自家底)/모든 것이 다 이러할 뿐(頭頭只此爾)천만금의 보배도(萬千金寶藏) 본래 한 장의 빈 종이일 뿐이로다. (元是一空紙)이제 외마디 닭 울음소리 들을작시면 (今聽一聲鷄)/장부의 할일 모두 마쳤어라(丈夫能事畢)대사의 이 시구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바라나니 을유년 닭 해를 맞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짧은 닭 울음이 깨달음의 기연(機緣)이 될진저.
113    해장탕의 지혜 댓글:  조회:2973  추천:73  2007-06-29
. 칼럼 .해장탕의 지혜 김혁몇해전 어느 한 주간지의 청탁으로 그 부간에 태조 리성계의 왕조창업을 내용으로 한 력사소설을 련재한적 있었다. 그런데 기성작품을 련재한 것이 아니라 일면 창작하면서 일면 련재했기에 신고가 작지 않았다. 편집의 재촉성화도 있었거니와 본인의 필재의 미달, 그리고 오래동안의 기자생활에서 버릇된 습작습관 때문이였다. 신문의 발간을 턱 앞에 앞두고 현장에서 <<일필휘지>>하여 원고를 바치던 습성대로 작품의 한기 분량을 원고교부를 하루 앞두고 하루 저녁새에 써서 바치곤 했다. 고약한 버릇인줄 알면서도 체질화된 창작습관을 고치기가 어려웠다. 50 여회의 련재를 그렇게 써냈다. 련재가 끝나는 동안 내내 채무자를 밖에 둔 빚짐에 눌린 사람처럼 지내왔다.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해소해 준 것이 곧바로 술이였다. 한기 분량의 련재를 끝내고 나면 나 때문에 늘 주필께 신칙받는 편집을 끌고 맥주 집으로 가곤 했다. 억벽으로 술을 마시곤 했고 따라서 숙취에 이튿날이면 난산에 당착한 아낙네들처럼 다른 신고에 시달려야 했다. 위약을 한웅큼씩 집어먹어도 보고 <<박카스>>도 들이켜 보고 알로에 줄기를 으적으적 씹어도 보고... 오만상이 죽상이 되어 타작마당 콩단처럼 굴러봐야 허사. 그러다 체증이 어린 내 가슴을 염천의 소나기처럼 후련하게 씻어준 것이 있었다. 바로 해장탕이였다. 그때 나는 실로 해장탕의 진한 맛과 신묘한 힘에 새삼스레 그리고 내심 감복을 했었다. 력사소설창작이니 당시의 지리, 풍토는 물론 자질구레한 복장 음식에까지 해당자료를 훑어보며 세세히 고증해 봐야 했다. 그러다 자료더미에서 재미나는 일화 하나를 뽑아내게 되었다. 글쎄 그 맛갈스런 해장탕의 발명이 글쎄 태조 리성계와 끈끈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였다. 리성계는 즉위한 다음,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기로 했다. 초옥 한채를 짓는데도 온갖 길흉을 따지는 경향이 심하던 때이므로 리태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유지 선정에 무등 신경을 썼다. 그러던 중 드디여 도읍의 명지를 찾아내고는 심히 기뻐 촌부락에서 소를 잡고 백관과 더불어 축하연을 펼쳤다. 그렇게 축하잔치가 사흘 낮 사흘 밤 펼쳐졌는데 사흘째 되던 날 음식제작을 맡은 내시들이 난감한 기색을 짓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원체 대동한 인수가 많아 소고기를 다 발라내 먹어버리고 뼈만 남은지라 임금님에게 변변한 음식상을 갖추어 드릴수없은 연고였다. 이를 전해들은 리태조는 남은 음식으로라도 활용하여 대충 응부할 음식을 만들라고 헌활(軒豁)하게 분부했다. 이에 내시들이 고기가 붙지 않은 소뼈라도 우려내고 콩나물이며 무, 파를 넣고 마침 쇠 선지도 남은지라 그것도 함께 넣어서는 국도 아니고 반찬도 아닌 언감 <<잡음식>>을 안쓰러운 기색으로 임금상에 조심조심 올렸다. 모두가 임금님의 반응을 곁눈질로 훔쳐보는데 한 모금 떠서 맛보던 태조가 무릎을 탁 치는 것이였다. <<조화로다!>>그 맛도 별미려니와 숙취에 트짓하던 속을 쏴악 씻어주어 그 맛이 일품이라는 것 이였다. 그 후로 해장탕은 궁중음식으로 까지 지목되였다고 한다. 항간에서 전해진 야담설화일터지만 해장탕이 우리 왕조의 건국설로부터 유래되였다는 것은 처음 듣는일, 이는 주벽(酒癖)이 심한 애주가인 나로 말하면 작품창작 중에서 거둔 하나의 수확이였다. 이방인들의 풍속례습에 대해 힐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타 민족들의 숙취를 푸는 비법은 우리들에 비해 엉성한데가 많은 것 같다. - 몽골사람들의 해장방법은 기상천외하기 그지없는바 데운 일년감 즙속에 식초에 절인 양의 눈알을 넣어 숙취자가 한꺼번에 삼켜야 한다.- 독일사람들은 절인 청어토막과 양파를 함께 삶은 다음 맥주를 뜨끈뜨끈하게 데워서는 함께 먹는다고 한다. - 아이띠 사람들의 해장법은 어딘가 미신적 색채까지 띠고 있다. 숙취자가 마셔버린 술병을 찾은 후 술 마개에 13개의 머리핀을 꽂아 넣으면 취한 사람이 깬다고 믿는 것이다. - 이렇게 불가사의한, 지어 해괴하기까지 한 방법들에 비해 인체에 필요한 원소들을 대량 포함하고 있는 소뼈, 콩나물, 무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만들어진 우리의 해장법은 그야말로 맛나고 만들기 쉽고 일상화 된 자랑할만한 음식이라고 격찬하고 싶다. 여느 때보다도 주연이 둥글어지는 설 명절이 겹 띄운 요즘, 우리의 고유한 맛과 멋이 담겨진 해장탕 한 숟가락이 어쩐지 가볍게 안겨오지 않는다.
112    우리들의 딜레마 댓글:  조회:3999  추천:73  2007-06-29
칼럼 우리들의 딜레마 김 혁 애니메이션(動畵) 를 오락물이 아닌 시각으로 열심히 본적 있다. ... 거대한 섬이 있었는데 그곳엔 장대한 산맥과 온갖 동물들이 번성하는 푸른 벌판이 있고, 또 아름답고 신기 한 과일들이 많이 난다. 비옥한 땅 속에는 무지개 빛 귀금속과 보석이 묻혀 있었다. 섬의 한가운데에는 돌로 지은 아름다운 공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으며, 도시들은 항만과 운하로 연결되어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인 플라톤이 아틀란티스에 대해서 적어놓은 글의 일부이다. 기원전 347년에 이러한 기록들을 남긴 채 지상의 락원 아틀란티스는 이 땅 우에서 사라져 버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 관련 자료를 새삼스레 찾아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있는 중국조선족사회도 언젠가는 이렇게 사라지지 않을가? 하는 로파심 아닌 걱정에 잠겨들었다. 민족이란 사회, 력사적으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운명공동체이다. 민족이라는 공고한 사람들의 집단을 형성케 하는 기본징표는 핏줄, 언어, 지역의 공통성이며 민족성원 자신의 힘과 지혜로 자신의 운명을 지키면서 발전하는 것이 민족사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우리민족은 이민, 정착, 형성, 발전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100여 년을 경유해 왔다. 이 과정에 이주현장에서 우리는 청나라 봉건통치계급, 군벌정권, 일본제국주의의 착취와 유린을 겪으면서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목숨 바쳐 반일, 반봉건투쟁에 가입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 민족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였다. 또한 해방 후 50년 력사에 우리 민족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해 앞서가는 민족으로 자리 매김 되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피와 땀을 바쳐 애지중지하면서 만들고 발전시켜온 형태의 집이, 다수가 하나와 같이 일사불란한 동질성을 이룬 이 집이 지금 미증유의 충격을 받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발달국가들이 일전에 겪어온 보편적인 과정을 우리는 지금 겪고 있다. 10여 년래 우리의 농촌인구는 해마다 5프로의 속도로 감소 되여 경작지가 묵어나고 촌 부락이 소실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녀성들이 섭외혼인으로 외국에 나가는 류실때문에 인구가 마이너스 장성을 기록하고 조선족 학교가 련이어 페교되고 있다. 도시화의 물결, 출국바람에 의해 농촌을 중심으로 하던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으며 따라서 조선족 소실설,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의 불확정성은 우리가 직면한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 시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바로 자아확립과 주체성확립이다. 그것은 곧바로 민족적 자각과 의지이다. 민족운명의 주인이라는 높은 자각과 민족자신의 힘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민족의 소실이 아닌 민족의 생존과 부강을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기본 정신자세와 신념으로 되어야 한다. 초기의 민족주의 사상가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공동체를 문화공동체로서 받아들인 뒤,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핵심 요소로서 민간전승과 민족적 전통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민족의지를 형성하는 구성원 전체의 협력을 강조하고 일반 대중을 진정한 문명의 주체로 간주함으로써 프랑스 민족주의에 리론적 바탕을 제공했다. 참된 정신으로 흔들리는 민족의 중심을 잡고 우리 민족이 재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도록 할 때이다. 우리 민족작가들의 출두와 동참이 수요되는 시점이다. 민족작가는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 태어나며 민족의 뉴대 속에서 커 가는 존재이다. 민족의 품안에서 살면서 개인의 외모와 육체적 특성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적 교육을 받고 그 사고와 행동양식, 사상과 감정, 도덕과 풍습을 익혀 민족작가로 된다.하기에 매 작가에게서 풍기는 멋과 품위와 슬기, 정서, 지향, 사고방식 등이 모두 민족적인 것으로 된다. 따라서 우리의 작품은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으며 민족과 동고동락하는 인연으로 얽혀 있다. 변화하는 우리 문화내용의 성격을 규제하고 조절하며 방향을 제시하면서 보존 계승해 나감은 우리 지성인들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민족작가로서의 존재가치가 있다고 본다. 우리 앞에 초미(焦眉)로 다가 온 아픔을 직시하며 현실적인 절박성으로 나는 근년래 , , , , , , 등 소설들을 펴냈다. 작품들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의 정착과 형성, 조선족공동체의 흔들림, 도시에 진출한 민초들의 삶, 출국자녀 문제, 조선족의 진로와 대안에 대한 화제들을 펼쳐보았었다. 이번 작품부터는 이라는 부제를 붙여 본격적으로 창작하면서 나의 창작자세를 극명히 표현하려 한다. 지금 지구상에는 2천여 개의 민족이 2백 개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들의 운명의 공동체이며 생활의 기본단위인 민족의 존립과 발전을 이룩하는 중에는 간거한 난제들이 란마(亂麻)처럼 꼬여 있고 미해결의 상태로 각 민족에게 부하 되어있다. 우리들의 딜레마(진퇴량난의 극악한 상황)는 여실하다. 따라서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이어 민족의 총명과 슬기를 되살리며 목전의 진통을 이겨내고 다시 세인 앞에 나설 그날의 밝은 조선족의 군체 형상을 기대하는 나의 이한 작업도 지속적으로 될 것이다.              
111    봄날의 마라손 댓글:  조회:3055  추천:73  2007-06-29
봄날의 마라손 ... 150여년전의 3월8일 미국 뉴욕의 방직녀공들이 비인도적인 공작환경과 12시간 장 로동과 낮은 로임등 악렬한 환경에 항거해 나서 파공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3.8절이 국제녀성절로 자리매김 되였고 변강의 오지인 여기(연변-편자주)에서도 큰 명절로 떠오르게 되였다. 사실 발렌타인데이(情人節)이요, 크리스마스요하면서 서양의 명절까지 당겨 와 즐기는 요즘세태에 매일매일을 우리는 명절 같은 기분으로 지내고 있다. 때문에 잡다한 명절은 이전처럼 그렇게 커다란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덴가 대장부주의적 마른 호기에 물 젖어있는 나는 하필이면 여자들의 명절에 땀을 뚝뚝 떨구며 열성을 보이는 사내들을 좀 그런 눈길로 뇌꼴스레 흘려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안해와 그럴듯한 3.8절을 보낸 기억이 별루다. 미안한 고백이지만 재작년 녀성절은 안해와 큰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보냈다. 그날이 녀성들의 명절이였다는 것은 출근해서 직장녀동료들의 까닭없는 우월감 어린 모습들에서 느끼고 되었고 그런 무감각함에 안해는 어지간히 배알머리가 꼬였던 모양이였다. 그날 밤, 명절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안해는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나는 조용한 기회에 쓰고있던 작품을 마무리해보려고 컴퓨터를 열었다. 그런데 컴을 열자 모니터의 초기화면에 현시되는 커다란 글발- “녀편네들 명절도 몰라주는 린색한 량반, 리기적인 량반, 당신 남편자격 없어요!!!”어쩐지 그 글발들이 찜찜해서 화면의 글발을 지우려 했지만 뜻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지금은 자기 홈피도 설계할수 있는 어중간한 수준의 컴광(狂)이가 되었지만 그때 나는 안해에 비해 컴에 대해 숙맥이였다. 화면의 글을 지우려다 그만 어떻게 다쳐놓았던지 컴이 도스상태로 들어가고 말았다. 컴컴한 화면에 알고도 모를 영문자모만이 비 온뒤에 찍혀 진 닭발자욱같이 괴발개발 오려진 화면을 볼려니 까닭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고 나는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안해의 핸드폰을 눌렀다. 노래방에 있던 안해의 목소리가 커졌고 따라서 나의 목소리도 높아 갔다. 결국 그 3.8절은 싸움으로 한단락 짓고 말았다. 그 일이 은근히 속에 걸려 다음 3.8은 좀 잘 보상하리라 마음먹었다. 하다못해 안해에게 라면이라도 손수 끓여주리라 생각했다. 가정이 파렬의 번개를 맞은 뒤 오랜 시간 독신생활을 해온 나에게서 다른 것보다는 라면 끓이는 솜씨 하나만은 만만치 않다. 나에게는 남다른 라면작식법이 있다. 우선 라면국물은 맹물로 하지 않고 쌀을 우려낸 쌀물로 한다. 그래야 국물맛을 낼수 있다. 다음 라면양념은 다 넣지 않고 절반가량 갈라 넣는다. 느끼하지 않도록, 다음 김치 국물도 부어 넣고, 양파도 사각으로 보기좋게 썰어 넣고 마늘도 다져 넣는다. 그리고 나만의 비밀인데... 중국전통음식인 붉은 썩두부(紅方)도 좀 떼여 넣는다. 그렇게 한식도 중국식도 아니게 끓인 죽탕같은 라면이지만 맛보면 누구하나 엄지를 빼들지 않는 사람이 없다. 허나 그3.8의 아침, 전날 산재지역에서 온 작가들을 배동하느라 제야가 넘도록 술 마시고 숙취에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분명 입 양태가 곱지 않게 변형되여 출근했을 안해에게 전화를 넣어 사탕먹은 꾀꼴새같은 목소리로 저녁에 맛있는걸 많이 사주마고 량해를 구했다. 안해는 점심은 회사에서 굉장히 회식이 있으니 저녁에 남편이 손수 끓인 천하일미의 라면이라도 맛보겠다고 했다. ok! 나는 흔쾌히 답복했다. 그런데 오후 나절에 얼음채찍처럼 나의 신심을 강타하며 날아든 까닭 없는 흉보(凶報)의 전화! 안해가 교통사고로 하남병원에 들려 갔으니 당장 오라는 호출이였다. 천방지축 병원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자기들의 명절에 교통사고에 당착했다. 몇 명이 당했는데 왜 서였던지 그중 뒤 좌석에 앉았던 안해의 상처가 가장 심했다. 안해는 머리를 열다섯코나 꿰매고 탈진한 듯 누워있었다. 녀성절이라 직근담당외의 간호원들 대부분이 명절 쇠러 나가고 그 3.8절을 우리는 썰렁한 병원의 구급실에서 보냈다. 침대곁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오랜만에 안해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원체 요란스레 치장할줄 모르는 소박한 모습이다가 명절이라 사 입은 새 털세타는 피자욱으로 칠갑이 되어있었다. 가슴을 에이는 아픔을 이겨내며 살을 꿰맨 안해는 이제 조금 통증이 잊혀지는지 금방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 안해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눈을 지질러 감고 누운 안해를 보노라니 왠지 회한의 감정에 가슴이 뭉클해 났다.하필이면 글밭을 뚜지는 남자에게 환혹해 안해는 온갖 비난조소를 이겨내고 처녀의 몸으로 아이까지 딸린 나에게로 시집왔다. 일가혈육 한사람 없이 외홀로 셋방집에서 책과 술과만 벗해 자포자기하고있는 나에게 새 아침의 창을 열어 주었다. 여덟 살 난 내 딸애와도 거리를 좁히려고 무등 애를 썼다. 철부지 딸애는 안해를 언니라고 불렀다. 내가 여러번 닥닥질해서야 겨우 아지미로 호칭이 정해 졌다. 결혼 전날, 안해는 머리를 얹으러 미발청을 찾았다. 아지미가 좋은 딸애가 나의 눈총에도 부득부득 안해의 뒤를 묻어 나섰다. 머리를 얹어주던 미발사가 축하의 말을 하며 신랑이 무얼 하는가 자상히 물었다. 안해는 나의 신랑은 작가얘요, 좋은 책도 많이 펴냈구요 하면서 남편에 대한 자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뒤에 앉았던 원체 종알거리기 좋아하던 딸애가 불쑥 끼여들어 까랑까랑한 소리로 웨쳤다. “그 사람 울 아버지애요!”온 미발청의 직원과 고객들의 눈길이 졸지에 안해에게로 몰부어졌고 안해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안해는 조용히 나의 뒤를 묻어 섰고 달가이 글 외에는 또 글밖에 모르는 가난한 문인의 안해로 되었다. 그의 내조가 없었더라면 원체 불우하기 짝없는 인생력정를 밟고 있는 나는 그 험지를 다 헤쳐나가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안해에게 금곡밥, 은곡밥을 못해 드릴망정, 명절에 홀대까지 하다니! 미안해! 를 속으로 련발하며 나는 그저 안해의 머리발에 엉겨붙은 피딱지들을 샅샅이 훑어 냈다. 지난해 3.8절 이렇게 나는 내 생애의 잊을수 없는 명절을 지냈다. 아르헨띠나의 한 사회학가는 “근년래 사회결구의 급변과 더불어 전통적인 가정결구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는바 단친가정, 재혼가정들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새 코스달리기로 새로운 정(情)의 문화에 적응되여야 한다”고 피력했다. 3.8이라는 명절을 세계화시킨 150년전 녀공들이 그때 제기한 구호는 "빵과 장미"였다. 여기서 빵은 생활보장이요 장미는 생활질량을 징표해 말한다. 이제 안해와 나에게서 빵도 만들고 장미도 키우는 새로운 생활만들기가, 새로운 코스 익히기가 시작되였다. 서로 보듬고 서로 이끌며 우리는 마라손선수처럼 끊임없이 달려 가야한다. 그것이 무양(無恙)한 탄탄대로이든 질척이는 험난한 소로이든... 예로부터 제 녀편네 자랑을 하는 놈은 “팔불출”이라 했다. 허나 올해 3.8만은 좀 “팔불출”이 한번 돼 봐야겠다. 남자의 성숙치 못한 호기를 달가이 버리고 안해에게 사랑의 표시를 해야겠다. 하다못해 나의 특기인 라면이라도 손수 끓여 올려야겠다. 쌀을 우려낸 물로 라면국물을 만들고 라면양념을 조금 갈라 넣고, 김치 국물도 조금 부어 넣고 양파도 사각으로 썰어 넣고, 마늘도 다져 넣고, 붉은 썩두부(紅方)도 좀 떼여 넣고, 그리고 나의 마음도 큼적히 떼여 넣어서. 
110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댓글:  조회:3000  추천:73  2007-06-29
애니메이션을 보다가평소엔 창작에 쫓기다보니 딸애와는 식탁에서만 손님처럼 만나고 휴일이나 명절 때면 딸애와 함께 어우러지는 시간을 만들곤 한다. 그 시간이면 자연 딸애의 의도대로 그가 즐기는 애니메이션영화를 본다. 그러다보니 차츰 애니메이션을 보는 차수가 잦아 졌다. 환상 많은 나이인 딸애를 위해 짬짬이 사들인 애니메이션 영화테잎이 이젠 100여 편을 넘겼다. 물론 나 역시 환상과 치기를 버리지 못한 <<큰 아이>> 인지라 애니메이션만 나오면 딸애와 더불어 박장대소하며 무척 즐겨 보군 한다. 며칠 전에는 <<오스카 걸작 애니메이션>>을 사들여 보았다. 거개가 5분도 못되는 짧은 단편묶음이었지만 주는 감수는 컸다. 그중 <<평형>>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다섯 명의 인간이 어떻게 되어 하늘공중에 높이 뜬 평면 널판지우에 숙명으로(?)서게 되였다. 누구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널판지가 평형을 잃고 기운다. 다섯 사람은 서로 마음과 지혜를 맞춰 한 사람이 움직이면 다른 사람도 움직여 그 평형을 이루며 살아간다. 어느 하루, 널판지우에 작은 함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하나의 뮤직 박스였다. 서로는 돌려가며 뮤직 박스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을 듣는다. 그러던 중 어느 한 인간이 남 보다 더 오랜 시간 뮤직 박스를 점유하고 혼자서 듣는다. 이에 배알머리가 꼬인 한 사람이 빼앗으려 들고 다른 사람들도 뒤질세라 가세한데서 일장 뮤직 박스 쟁탈전이 벌어진다. 결과, 널 판지는 평형을 잃게 되여 모두가 떨어져 내린다. 그런 와중에 맨 처음 뮤직 박스를 점유했던 사람만이 요행 살아남는다. 허나 그 인간은 일전과도 같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널판지가 평형을 잃어 그 자신도 떨어져 내리게 되기 때문... 세상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평형의 눈금자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사회란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존재하는 공동체다. 우리는 사회라는 하나의 평면위에 서로가 나란히 서있다. 그렇게 함께하고 있는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점이다. 동물은 상대방 입장에 대한 고려 없이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에 반응한다. 동물의 행위는 자극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고 인간의 행위는 상대방의 입장을 해석하고 그 결과에 반응하는 상호 작용의 행위이다. 우리의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우러나온 협동과 협력이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들 지간의 필요조건이다. 협동과 협력으로 이루어진 그 평형을 딛고 우리는 무난히 인생의 길을 간다. 만약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생각만 한다면 갈등을 초래하고 나중에는 평형을 잃은 추락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그 평형을 외면하는 수가 많다.요즘의 사람들의 마음은 욕망이 원하는 곳으로만 쏠리고 있다. 이기와 과욕에 눈이 멀어 가끔 평형의 중요함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 평형을 파괴할 때도 많다.그들이 기울려고 하고 있는 는 작은 지대에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아픈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본성의 비열함과 추악함이 깃들어있다.지금은 순간적인 안일에 중독되어 일신이 편한들, 그 기움은 다시 평형을 찾아 고통으로 자신을 되찾아 올 것인데. 결국은 후에 자신이 모두 가슴으로 안아야 할 무게인데...섭리와도 같은 그 평형을 잃게 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기울게 되며 나중에는 추락해 내리기 십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짧은 애니메이션 한편이 주는 감개, 유흥을 넘어 참말로 깊다.
109    이발과 혀 댓글:  조회:2992  추천:73  2007-06-29
상용은 은나라 때의 저명한 학자였다.상용이 운명할 때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로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가 곁에서 스승님의 마지막 길을 바랬다.로자가 눈물을 삼키며 침대머리에서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어떤 남길 말이 있으십니까?상용이 말했다.- 너 나의 입안을 찬이 들여다보아라. 아직 혀가 그대로 있느냐?- 네 있습니다.- 그러면 이발은?- 이발이 모두 물러나고 없네요.상용이 로자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 이에 깃든 리치를 알겠느냐?로자가 사색에 잠겼다가 말했다.- 제자의 소견으로 보면 너무 강한 것은 빨리 쇠퇴하고 부드러운 것만이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런 리치인것 같군요.상용은 가까스로 웃음 지으며 자신의 걸출한 제자를 바라보았다. - 그래. 맞어. 천하의 모든 섭리도 바로 이와 같은 거여. 로자는 스승의 뜻을 이어 유약(柔弱)이 강강(剛强)을 이기는 리치로서 천하를 허정(虛靜)으로 돌리고자 했다. 로자는 저서에서 수차 이유극강 (以柔克剛)의 리치에 대해 언급했다. 以 : 써 이 / 柔 : 부드러울 유 / 克 : 이길 극 / 剛 : 강할 강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유약이 반드시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가 깊은 못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천하에서 가장 유약한 것, 즉 물은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것, 금석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무형의 물은 틈이 없는 것, 즉 유형의 금석 속에 파고 들어갈 수 있다. ""천하의 아무 것도 물을 따라 갈 것이 없다... 물보다 더 유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센 것을 꺾는 데는 물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다... 만물은 강하면 생기를 잃고, 약하면 충만하게 된다. "로자는 유약의 대표적인 것을 물이라 하였다. 이처럼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막상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로자는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중국의 유명한 권법(拳法)인 태극권에서도 "유가 강을 제압한다"는 이한 리치가 잘 체현되여 있다. 태극권이 강함 우에 유를 두는 리유는 대체로 로자의 "도덕경"에서 묘사된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는 원리에 그 근본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리유는 실행자로 하여금 상대방과의 정면충돌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막강한 실전에서 항상 강함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은 오류. 동방이나 서구를 막론하고 현명한 선인들은 이미 이한 리치에 대해 잘 깨쳐 알고 있는 것 같다. 미국 력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받고 있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의 일화다. 일리노이주 련방상원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부와 지위의 상징인 민주당의 더글러스와 무려 7회에 걸쳐 라이벌로 맞붙게 되였다. “링컨이라는 시골뜨기에게 귀족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더글러스는 호언장담하였고 강력한 태세를 보이며 링컨을 향해 극언을 퍼부었다. 그런 더글러스에 맞서 링컨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더글러스는 체신장관, 토지장관, 내무장관 등을 력임한 큰 인물입니다. 이런 그에 비할 때 약소한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재산이 얼마인지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저에게는 안해와 아들 하나밖에 없다고. 저에겐 비록 그들밖에 없지만, 바로 그들은 나에게서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입니다. 게다가 저는 의지할 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오직 여러분들뿐입니다.” 막강한 더글러스와 미풍약세의 링컨의 겨룸, 허나 결과 두 사람 중에 누가 승자로 되었나 하는 것은 더 말치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어떤 개인의 처세준칙에도 좋지만 더 나아가서 민족과 사회 더 넓은 령역에까지도 이한 리치는 적용된다. 일상에서 강한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부드러움이 해 내고 있다.섬세하고 감성적인 부드러움이 거대하고 강한 것을 이기고 있다. 강력한 철을 통한 산업보다는 부드러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이다. 진정으로 강한 자는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스스로 깨는 고통을 의연히 마주할 수 있는 자이다. 어릴 적 읽었던 우화 '바람과 태양'의 이야기가 곁들어 떠오른다. 바람과 태양이 내기를 하였다. 길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게임.결과 나그네는 강한 바람에는 옷을 벗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따스한 태양의 열기에 더는 참지 못하고 옷을 몽땅 벗었다.이발과 혀의 생존리치! 다혈질이고 성미가 우직한 내게 있어서 전에 읽은 수십 권의 책보다 강하게 나의 뇌리를 때린 작으나 큰 성어 한마디였다.
108    남자의 목젖 댓글:  조회:4510  추천:73  2007-06-29
. 칼럼 . 남자의 목젖 김 혁   오랜만에 동창회를 갔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녀동창생들은 (어느덧 눈 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줌마 티 나는 녀동창생들은) 십여 명 잘되는데 남자는 나까지 해서 고작 두 명뿐 이였다. 식사를 마친 뒤 의례 노래방에 갔는데 술에 약한 그 남 동창생 님께서 쓰러지는 바람에 남자란 나 하나만 남은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렸다. 녀성중대를 거느린 당대표의 심정이 되여 흥취 거나한 녀성분들을 맞추어 주었다. 그들에게 끌려 일당백으로 일일이 대창을 하고 나니  나중엔 목소리가 쉬여 나가주질 않았다. (잔 등과 이마 전은 땀으로 질펀했고) 솔직히 즐거워야 할 동창회가 힘들어 죽을 뻔한 기억으로 남았다.      오랜 기자생활에 버릇이 되였던지 나는 가끔 시장거리의 음식가게에 끼여들어 아무나 (초 두부요 순대요 옥수수 죽이요 하는 음식들을) 잘 먹어준다. 그러면서 볼라니 음식을 만들어 파는 아낙네들의 배후엔 나그네들이 있었다. (한결같이) 그 나그네들이 한결같이 하는 일이란 쌀도 사오고 간장도 사오고 기름도 사오는 일, 헌헌대장부들이 아낙네들의 뒤치닥거리를 도와 허드레 일을 도맡아 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다 손님이 뜸한 주말 같은 때면 그 나그네들끼리 모여 술잔도 기울인다. 어느 한번 귀 도적질하여 들은 나그네들의 말이 례사롭지 않았다. 녀편네 쪽을 흘깃거리다 감개하여 내뱉는 나그네들의 말을 요약해 보면  “요즘 같은 세월에 남자구실 하기가 정말 힘들어 죽겠구만이라!”였다.         몇 해전인가 한국의 어느 댄스그룹이 이곳에 와서 음악회를 연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장마비가 내렸다. 음악회 신문발표회에서 어느 지도자 님의 기인 연설을 듣느라 우리 기자 수십 명은 그만 시간을 늦추게 되었다. 헐레벌레 체육관으로 달려가 보니 음악회가 당장 시작될 기미였지만 체육장 출입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팬들의 소란이 무서워 큰 대문은 열지 못한 채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작은 문만 열고 있었다. 주최측의 전갈을 받고 대문을 지켜나선 경찰들이 기자들을 우선 들여 보내주었다.   그런데 팬들까지 우르르 합세하는 바람에 장내는 그만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음악회는 시작되여 음악소리가 쿵쾅거리는데 아직도 대문 밖에 내쳐진 기자들을 보고 어느 경찰 분이 방법을(사뭇 엉뚱한 아이디어를) 댔다.    “녀 기자들은 우선 문으로 들여보내고 남자 기자들은 대문을 뛰여 넘으시오!”   체육장의 대문은 엄청 높았다. 하지만 취재임무를 위해 우리는(남자기자 분들만은)울며 겨자 먹기로 철창에 매달렸다. 정수리를 쫓는 비속에 미끈거리는 쇠창살을 한사코 부여잡고 (어떤 령장류 동물처럼)아득바득 넘는데 누군가 탄식을 뿜는 소리가 비속에 들렸다.    “허이고! 하필이면 남자가 돼갔고”...      요즘 세월에 남성으로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남성은 과연 강한 존재인가?    인류의 진화에 대해 천명한 다윈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생물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실은 허상이었음을 밝혀주었다. 혼자서는 자손을 만들 수 없는 생식계의 부수적인 존재, 암컷과 유전자를 이어 쉽게 멸종되지 않는 종으로 거듭나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퇴화의 위기에 처한 제2의 성. 그것이 남자의 진면목이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연구결론에 의하면 남자는 뭐 “자연의 유일한 실수"라나?!" (맙시사!)        이제 남자는 심지어 새끼가 태어날 때 필요조차 없게 될지도 모른다. 몇 해전 정자 없이  란자의 복제만으로 태어나는 데 성공한 복제 양 “돌리”는 우리 남성들에게 과학성취의 경이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대신 어떤 자격지심을 유발하는 소식이였을지도 모른다. (과학환상소설을 읽기 좋아  해 라는 잡지를 내내 주문해 보고있는 나에게서도 돌리의 존재는 별루다. 더욱이 얼마 전 그 “돌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느끼게 된 어떤 야릇한(?) 자아위안의 감정.)      유명한 동물학자들은 원체“녀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진화했다"라고 설명한다. 그 지론을 구구히 펴보면-   뇌 단층의 연구로 보면 녀자는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말을 잘한다.   후각, 청각, 촉각 등 오감 역시 녀자는 남자보다 민감하다.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녀자는 남자보다 커서 오래 생존하고 넉넉한 지방 덕에 (녀자 25% 남자 12.5%) 배고픔에도 잘 견딘다.   또한 대표적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면역력을 억제해 남자는 녀자에 비해 가난과 질병, 독신생활, 위험에 견뎌내는 능력이 훨씬 떨어진다      태어난 후에도 남자는 녀자와 달리 색맹과 같은 X염색체의 결함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교통사고로 죽을 통계적 확률도 남자가 녀자에 비해 훨씬 높다나?        요약하자면 남성의 육체는 녀성에 비해 구조적으로 불완전한 유전자 조합을 가진 취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녀자가 남자보다 우세라는(어느 모로 보나) 이야기다.    이렇게 인간의 성별에 대한 의식이 점차 성숙돼 가고 있긴 하지만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인 시행착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선 실존의 차원에서 본다면 남성에게서 그 특징은 의지력, 대담성, 목표지향성, 독립성, 등으로 요약돼 왔다. 녀성의 특징은 그 반대쪽에 선다. 허약함, 겸손함, 관용, 순종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량극적인 성 모델은 일종의 사회적 강령처럼 우리는 내내 받아들여 왔다.      사내아이는 사춘기를 전후해 남자라는 혹독한 부여를 (억다지로) 받는다. 그를 통해 그때까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고독과 고립무원의 감정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하는 부담을 갖게 된다. 우리는 갓난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 아이가 속한 성에 모든 것을 맞춰나가려 한다. 아직 성 정체성이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남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윽박지른다. 특히 남아선호사상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민족일수록 더욱 그렇다. 유달리 강한 우리 사회의 가부장성이 남성들에게 강력한 자기 최면과 집단적이고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답습시킨 데서 온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남자는 끊임없이 사회적인 요인들에 좌우지 될 수밖에 없는 압력을 갖고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도태돼야 하는 불행한 숙명을 안고 있다. 결과 남성은 스스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조되여 눈물을 감추고 진솔한 감정을 억제하도록 길들여진 “씩씩한” 인공물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녀성의 사회무대로의 등장이였다. 금세기 들어 녀성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고 그 자각의 결과들이 사회에 꽃펴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흐름을 조소하고 저항하던 남성들도 이젠 이를 대세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강하고 지배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는 남자에 대한 통념이  뒤집혀 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페미니즘(女性主義)의 한 조류로서 남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이제 페미니즘은 녀성만의 화두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모든 남성의 화두이기도 하다.      남성의 기존 권위는 (소리내며) 무너지고 있다. 약한 남성이 기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정에서 발언권이 줄어들고 가무 일이며 육아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는 대신, 사회에선 여전히 강한 남성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로서 남성들의 위기는 자신에 대한 위기, 사회의 위기로 직결된다. 즉 남성들이 위기에 처했다면 이 사회 또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총체적 위기를 제대로 바라보고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남성의 주체적 자각과 남성성에 대한 올바른 리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지금의 남성사는 백지상태에서 다시 씌어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녀자의 손에서?)     이 사회에 팽배해 있는 폭력적인 남성 문화 속에서 녀성들이 살아나기가 어렵지만 물론 남성 또한 살아나가기가 (심히) 어렵다. 지나친 성별 고정 관념에 의하여 받침 되고있는 현재와 같은 사회구조 내에서 지나친 경쟁, 권위주의에 매달려 끊임없이 더 높은 효률과 생산을 위해 무작정 뛰기만 하는 과정에서 남자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결국 남성도 남성 지배문화의 피해자로 전락되는 것이다.     이 글을 짓는 순간도 우리 남성들은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쓰린 가슴을 달랜다. 직장에서는 넘쳐나는 업무와 경쟁력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정에서는 갈수록 사나워지는 녀편네와 철없는 자식들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다. 밀려난 삶의 변경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고자 미로를 헤매인다. (불쌍할 손 남자들이여!)      남자의 성대는 18mm로서 녀자(13mm)보다 길다고 한다. 녀자의 후두도 남자의 7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남자는 큰 목젖을 흔들며 거센 시원(始原)의 음성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어떻게 남자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남자다운 호기에 젖은 쩌렁쩌렁한 소리를 다시 낼 수 있을가?     동창회 그날 노래방에서 쉰 소리를 짜 내여 (짐짓 뜻 있는 가사를 골라) 불렀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 말을 다시 적어 본다.      남자는 너무 피곤해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이 피곤해    남자는 도움도 받을 수 없고 혼자 버티기도 힘들어    남자도 울고 싶지만 늘 화장실에 숨어 울어야만 하지    남자는 너무 힘들어    사랑하는 것도 힘들어    건강해야 하고    용감해야 하고     유머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취미도 있어야 하고     랑만도 있어야 하지.     나는 아무 것도 없는데    저기 저 아름다운 아가씨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데...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07    닭 울음소리 한가닥 들을작시면 댓글:  조회:3577  추천:73  2007-06-29
닭울음소리 한 가닥 들을작시면 - 을유(乙酉)년 잡감 김 혁 이 세상 닭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싶었던 때가 있었다. 소학시절 《밤중에 우는 닭》이란 소책자를 보고서였다. 빈하중농들의 고열을 더 짜내기 위해 지주 놈이 신 새벽에 닭장으로 기여 들어 자는 닭을 들쑤시면서 닭울음소리를 내게 하다 들통이 났다는 아동이야기. 문화대혁명의 여파에 국민모두가 환혹(幻惑)에서 깨지 못한 풍토에서 그 이야기는 붉은 홍소병 이였던 나에게 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본격적인 기자로 발탁되기 전까지 내가 하고있던 일이 양계장부란공이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적다. 연길의 동광양계장에서 1년 남짓이 달걀을 깨웠었다. 밤잠을 바로 자지 못하면서 부란기 속의 달걀들이 열을 고루 받도록 반시간에 한번 꼴로 달걀을 번져놓는 따분한 짓거리, 몹시 힘들었던 나는 달걀이 깨나는 시간이 21 일 이여서 망정이지 인간처럼 열 달이 아님에 안도를 머금었었다. 그러나 그런 경력 때문에 닭과 나 사이는 여느 때보다도 그 누구보다 도타워 졌다. 지금도 혹시 슈퍼에서 들렸다가도 가금 알 매장에서 나는 달걀을 손에 올려놓은 채 멍청하니 회심의 미소를 짓기가 일쑤다. 올해는 닭의 해 닭이 사람들과 친해진 지는 약 5 천년쯤 된다고 한다. 닭은 야계(野鷄)가 원래 종자였다. 인도나 동남아지방에서 맨 처음 야생 멧닭을 잡아다 사육 개량한 것으로, 우리민족에게는 6,7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문헌은 전하고 있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도 꼬리 긴 닭이 등장하는데 삼국시대 이전부터 길러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삼국지 동이전》이나 《후한서》《해동력사》에는 조선에서는 꼬리 긴 장미계(長尾鷄)를 키운다는 기록이 있으며 닭을 부를 때 《구구 라고 한다》고 씌여있다. 고대 인도사람들은 고구려를 《쿠쿠테 에스바라》라고 불렀던 바, 범어(梵語)로 쿠쿠테는 닭, 에스바라는 귀(貴)함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닭을 서조(瑞鳥)로 여겼다. 어둠 속에서 려명을 알리고 빛의 도래를 예고하기에 천조이고, 태양의 상징으로도 인식되어 왔다.《주역》에서 봐도 그렇다. 닭은 팔괘(八卦)에서 손(巽)에 해당하고, 손의 방위는 남동쪽으로, 려명이 시작되는 곳이다. 중국의 《회남자(淮南子)》에서도 《해 뜰 때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따라서 운다》고 하여 닭이 새벽을 알리는 령물임을 밝히고 있다.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닭의 울음소리로 시각을 알곤 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면 닭의 울음소리를 기준으로 하여 뫼를 짓고 제사를 거행했다. 고려시대에는 시보용(時報用)으로 궁중에서 닭을 길렀고 또 먼길을 떠날 때 시간을 알기 위해 몸집이 작은 당닭을 갖고 갔다는 기록도 있다. 침계(枕鷄)라고 하는 아주 작은 닭이 있어서 속이 빈 베개 속에 이 닭을 넣고 자면 자명종처럼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려 준다고 했다. 닭이 벽사( 邪)의 능력을 갖는다는 속신(俗信)도 그에서 발상 된 것이다. 사람들은 동이 틀 때 횃돼에 올라가 새날이 옴을 예고하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어둠이 끝나 밤을 지배하던 마귀나 유령도 물러간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액막이나 재앙 쫓기에 닭이 많이 등장했다. 새해를 맞은 가정에서는 닭이나 룡, 범을 그린 세화(歲畵)를 벽에 붙여 잡귀를 쫓고 액이 물러나기를 빈다. 닭 머리를 문설주에 매달거나 닭 피를 집 주위에 뿌리기도 했다. 한편 복날 닭을 먹는 것도 삼복의 류행병을 막자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새벽에 닭의 울음이 열 번이 넘으면 풍년이 든다고 하였고 닭이 제때에 울지 않으면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닭은 출세와 공명(功名)을 상징하는 그림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학문과 벼슬에 뜻을 둔 사람은 서재에 닭의 그림을 높이 걸었다. 닭이 이고 있는 볏은 관(冠)과도 흡사한데 관을 쓴다는 것은 바로 벼슬한다는 뜻, 그리고 수탉, 즉 공계(公鷄)의 公과 功의 음이, 울음 운다는 鳴과 名의 음이 같은 데에 착안해서 서로 련상시킨 것이다. 결혼식 초례상에는 반드시 닭이 필요하다. 혼인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평생 의례인데 이때에 닭이 등장하는 것은 처자를 잘 보살피는 수탉의 도리와 알을 잘 낳고 병아리를 잘 키우는 암탉의 도리를 부부가 되는 이들에게 인지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본다. 닭은 사람과 늘 함께 하는 가축이므로 그와 관련된 속담도 많다. 닭에 관한 속담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있다. 《소 닭 보듯 한다 》《닭 싸우듯 한다》《닭도 제 앞 모이는 긁어먹는다》《닭의 볏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마라》... 외에도 닭대가리라는 말은 사려가 깊지 못하고 지혜가 얕은 사람을 비꼬는 말이요, 닭 고집이라는 말은 하찮은 일에 고집을 부리는 사람을 가리킨다. 가고 옴을 상징하는 닭의 울음소리는 인간에게 온갖 희비를 엇갈리게 하면서, 우리의 민속과 문학 작품에서 많이 형상화되고 있다. 닭아, 닭아 우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 죽기는 섧지 않으나/ 의지 없는 우리 부친 어찌 잊고 간단 말인가 ! 고전소설 《심청전》에서 공량미 300석에 팔려 가는 심청이가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자탄하는 장면이다. 고기가 귀했던 옛날, 따로 먹이를 주지 않아도 지렁이 메뚜기 따위의 벌레와 갖가지 식물의 씨앗들을 주워 먹으며 자라서 살이 오지게 붙은 닭은 가난한 서민들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고기 밑천이었다. 약효도 우수하여 명나라의 본초학자 리시진은 《본초강목》에서 《중국사람들은 조선 닭이 좋다 하여 이를 구하러 조선으로 나들이를 간다》고 적었다. 《동의보감》에서는《닭고기는 허한 것을 보 하는데 매우 좋아서 음식으로 병을 치료하는 처방에 많이 사용된다.》고 하였다. 그중 일미가 삼계탕이 아닌가 싶다. 우리 조상들은 지친 몸을 보 해주고 내장을 따뜻하게 하여 기운을 끌어올리는 좋은 음식인 삼계탕으로 삼복더위에 떨어진 원기를 되살렸다. 펄펄 끓는 뚝배기 속에 보얀 국물, 인삼과 찹쌀, 밤, 대추를 닭의 밑에 넣고 푹 고아 우러난 삼계탕, 그 맛에 매료된 사람들이 많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류는 어느 소설에서 삼계탕을 최고의 음식이라 극찬하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젓가락을 갖다대면 껍질이 벗겨지고, 살이 뼈에서 떨어져 나와 쫀득하고 하 얀 덩어리로 변한 찹쌀과 함께 수프 속에 녹아든다. 봄에 녹아 내리는 빙 산처럼...》 아무튼 닭은 약용으로나 고기 맛으로나 그 가치가 뛰여날 만큼 우리한테만 주어진 소중한 보물이다. 요즈음에 와서 시골이나 유원지 같은 곳에 토종닭으로 곰을 해주는 음식점을 흔히 볼 수 있다. 연길에서도 북쪽으로 교외를 벗어나 대성이라는 촌마을에 이르면 닭곰을 해주는 집이 저 그만치 50여 집, 《닭 미식 촌》으로 불리고 있다. 닭에 대한 기문취담 세상에서 가장 알찬 사업은? - 알(계란)장사 세상에서 가장 야한 닭은? - 홀딱(닭) 닭은 닭인데 먹지 못하는 닭은? - 까닭 세상에서 가장 급한 닭은? - 후다닥(닭)숨이 넘어가는 닭은? - 꼴까닥(닭)병아리가 제일 잘 먹는 약은? - 삐약 딸애가 재밌다며 내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올렸던 유머이다. 여느 짐승처럼 닭에 대한 기문과 취담은 많고도 많다. 닭에 대한 애착은 다만 우리 민족만이 있는 것 아닌 것 같다. 닭에 대한 끈끈한 인연을 가진 나라가 있다. 프랑스다. 프랑스 인은 원래 골 족이라고 하는 프랑크족의 한 부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여기서 골(Gallus)이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닭이라는 뜻이다. 중세 시대, 골의 닭은 종교적인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고 집정내각에서 사용한 식기와 국새(國璽)에서도 닭은 새겨져있었다. 그것은 희망과 믿음을 상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집정하면서 닭은 홀대를 받았다. 그는 닭보다 독수리를 즐겼다.《닭에게 무슨 힘이 있겠소. 그런 작은 미물이 프랑스와 같은 제국을 상징할 수 없소.》이것이 나폴레옹님의 지론이다. 나폴레옹에게 멸시 당하던 닭은 제3공화국에 이르러 거의 공식적인 상징으로 되였다. 국민 근위대의 깃발과 의복 단추에도, 19세기말에 건설된 엘리제궁의 철책에도, 20프랑 짜리 금화에도 모두 닭의 모습이 주조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는 4년간에 걸친 독일군의 점령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당시 닭의 용기를 빌어 항독운동에 나선 프랑스인의 담을 북돋기도 했다. 닭이 나치스의 독수리와 맞서 싸운 것이다. 근래에는 특히 스포츠 행사를 위시하여 해외에서 프랑스를 환기시킬 때 주로 사용된다. 일본과 우리 민족사이에도 닭을 두고 벌린 력사적인 암투가 있었다. 한일합방 직전에 조선에서는 일본에 보급되던 백색종자 닭을 들여와 민간에 나누어주고 기르도록 장려했다. 그러나 곧 나라가 일본의 마수에 떨어지자 뜻 있는 우국지사들은 《본디 흰 닭은 귀신으로 둔갑을 잘 한다》는 말을 퍼뜨렸다. 울긋불긋한 조선 닭을 기르던 사람들은 흰털의 일본 종을《왜 닭》이라고 부르며 일본 사람을 보듯이 싫어했다. 몇 해전 중앙TV에서 보았던 기사 하나가 떠오른다. 서북부 신강일대가 메뚜기 떼의 습격을 당했다. 하늘땅을 가맣게 메우며 덮친 메뚜기 떼는 평방 당 4,000마리나 되었다. 예산이 부족해 항공방제를 하지 못하게 되자 지혜로운 사람들은 닭을 풀었다. 1만 마리나 되는 닭 장군들이 메뚜기 소탕전에 나서 인간과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지켜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즘의 취담을 들어보면, 미국에서는 해마다 기발하고 다소 황당하기까지 한 연구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이그 노벨상》이라는 패러디 노벨상이 있다. 뉴욕의 과학유머잡지에서 선정하는《이그 노벨상》은 품위가 없이 천하다는 단어와 노벨이라는 단어를 합친 신조어. 이 잡지의 편집인은 《과학자들 가운데 노벨상을 결코 수상하지 못할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며《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과학적 흥미를 유발하고 과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데 도움이 되었기에 이 상을 설립했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올해의 《이그 노벨상》은 《닭은 멋진 외모의 남성과 녀성을 좋아한다》는 연구를 수행한 스웨덴 스톡홀름대의 매그너스 연구팀이 차지했다. 이들이 닭들에게 많은 인물사진을 보여준 결과 닭은 건장하고 잘 생긴 남성과 긴 머리에 도톰한 입술을 가진 잘 생긴 녀성만을 쫓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리상형을 보는 눈에서 사람과 닭이 비슷한 기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게 이 연구팀의 연구결과. 닭과 함께 춤을 닭은 흔히 다섯 가지 덕(德)을 지녔다고 칭송된다. 머리에 있는 볏(冠)은 문(文)을 상징하고, 삼지창 같은 발은 내치기를 잘 한다 하여 무(武)로 여겼으며, 적과 용감히 싸우므로 용(勇)이 있다고 하였고, 먹이가 있으면 자식과 무리를 불러 먹인다 하여 인(仁)이 있다 하였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간을 알려주니 신(信)이 있다 하였다. 게다가 우리 인간에게 알과 고기를 주니 그보다 더한 익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조상들의 생각이었다. 닭은 다른 가축에 비해 취소(就巢, 알을 품음)성이 강하다. 몸은 작지만 한꺼번에 20알 정도를 품어 부화시킬 수 있다. 알을 품으면 매우 열심인데 식음을 끊고 뜨거운 가슴으로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새매 따위의 육식 새들이 병아리를 낚아채려 들면 급하게 새끼들을 불러 품안으로 모으고 만약 병아리가 새들의 발톱에 걸려들면 어디에 그런 힘과 용기가 숨어 있었던지 날개를 푸드득 이며 크게 싸움을 벌인다.《암탉이 제 새끼를 품안에 모으듯 한다》는 말은 바로 지극한 모성애를 상징하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은 닭의 그런 모성에 감격하여 《어미 닭과 병아리》라는 시를 지은 적 있다. 제 새끼를 건드리면/목털은 곤두서서/ 고슴도치를 닮았네/ 낟알을 찾아내면/ 쪼는 체만 하고/ 새끼 위한 마음으로/ 배고픔을 참네 사실 닭처럼 부지런한 동물도 흔치 않을 것이다. 모이를 쪼지 않고 멍하니 있는 닭을 본 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알을 품을 때와 홰를 치며 울 때 정도만 빼 놓고는 하루 종일 먹이를 먹으러 고개를 조아리며 다닌다. 또한 수탉은 그 자부심과 사나움,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점을 닭싸움이라는 일종의 스포츠에 활용해왔다. 볏을 곤두세우고 상대에게 용감하게 달려드는 모습에서 닭의 강인함과 용맹성을 찾을 수 있다. 또 수탉이라는 이름은 남성의 성적 능력을 상징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수탉은 남성이 갖춰야 할 조건인 가정을 지키려는 용기와 시간의 변화를 판단하는 현명함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리상적인 남성 상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생태학자인 데스먼드 모리스는 닭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닭은 자연상태에서는 고도로 사회적인 동물로서 농장이나 야생지, 모이통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흔히 《쫓기서렬》로 알려진 사회적 위계(位階)질서를 발전시킨다. 자기보다 우인 닭에게는 복종하고, 아래인 닭은 거느리는 것이다. 개개 닭들이 무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는데, 많게는 90마리의 무리에서도 그 서렬이 유지된다고 한다. 닭은 한낱 흙 속을 헤집고 뒤져 벌레와 풀 따위를 알아서 찾아 먹는 놓아먹이는 새이다. 하지만 그들은 해와 바람과 별을 알았다. 이는 자연순환에 깊이 조률돼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다. 이들에 비추어 볼 때 혼란에 허둥대는 우리의 사회적 위계와 질서는 극히 중요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누구나 다음은 무슨 띠의 해인가 살피고 그 띠 동물에서 새해의 운수를 예점(豫占) 하려 한다. 새로운 띠 동물을 대하면서 그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어떤 새로운 기대를 걸어 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올해에는 을유년 닭의 해, 우리모두 시간을 알리는 닭처럼 새끼를 품는 닭처럼 새매와 싸우는 닭처럼, 자부심을 지니고 사랑을 알며 신의를 지키는 강인한 인간으로 자신을 가꾸어 봄이 어떨가! 불교에서는 닭을 깨달음의 주체를 지닌 동물로 여기고 있다. 닭울음소리에 귀기울인 서산대사의 일화가 그 일례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70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 데 공을 세운 승려. 큰 의문에 부닥쳐 울증(鬱症)에 빠져 있던 서산대사가 하루는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낮닭이 홰를 치며 크게 울었다. 닭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대사는 의문이 풀리면서 확연히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대사는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홀연히 본래의 내 집을 얻고 보니(忽得自家底)/모든 것이 다 이러할 뿐(頭頭只此爾)천만금의 보배도(萬千金寶藏) 본래 한 장의 빈 종이일 뿐이로다. (元是一空紙) 이제 외마디 닭 울음소리 들을작시면 (今聽一聲鷄)/장부의 할일 모두 마쳤어라(丈夫能事畢) 대사의 이 시구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바라나니 을유년 닭 해를 맞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짧은 닭 울음이 깨달음의 기연(機緣)이 될진저. 원숭이해를 보내면서 - 허강재(虛崗齋)에서
106    공룡과 춤을 댓글:  조회:4032  추천:73  2007-06-29
. 수필 . 공룡과 춤을 김 혁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의 주변은 공룡이 전성시대를 누리던 먼먼 쥬라기로 돌아간 듯 하다. 아이들의 놀이감은 물론 음식에도 공룡의 캐릭터가 새겨져 있고 공룡관련 백과전서와 그림책도 수두룩하다. 아동채널에서도 공룡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애니메이션이 제일 인기다. 그런가하면 광고에서도 공룡이 곧잘 나온다. 딸애는 녀자애임에도 수공공작용 진흙을 가지고 장난할 때면 공룡을 즐겨 빚는다. 나도 가세하여 함께 공룡을 빚어 만들곤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만들어 낸 공룡이 서가의 책꽂이에 컴퓨터책상에 침실의 침대머리에 지어 주방의 싱크대우에 까지 놓여져 우리 집은 삽시간에 쥬라기와 현시대가 교차된 기묘한 풍경으로 변하였다. 그일 때문에 안해에게 집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경고를 듣기도 했고 몇몇 공룡은 결벽에 가까운 안해에게 의해 형체 없이 짓이겨져 휴지통에 버려지기도 했다. 머리를 쉬어볼 겸 대화방에 채팅 하러 들어서면 나는 공룡이란 ID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자 채팅 열성 자들이 한결같이 워매! 별 괴상한 ID 다 있네.하고 놀려주기도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서 공룡을 재현한 영화는 둘도 없는 유흥의 성찬이였다. 할리우드의 거물급 명감독 스필버그가 만든 공룡영화 , 등과 일본에서 만든 계렬, 한국에서 만든 , 조선에서 만든 등으로 공룡관련 영화는 디스크로 빠침없이 나에게 수장 되여 있다. 지난해에는 할리우드에서 2억 딸라를 투입, 3년간의 시간을 들여 제작한 컴퓨터디지털(數碼)영화 이 영화 가를 놀래웠다. 그 예고소식을 영화잡지에서 본 뒤 나는 이처럼 일일이 여삼추로 영화의 개봉을 기다렸다. 해적판(盜版)이 나오자 남 먼저 사보았고 공개 상영되자 영화관을 찾아 시원한 광폭으로 다시 보았다. 요사이 DVD 정식 판이 나오자 또 한 개를 사들였다. 3D동화제작으로 된 핍진(逼眞)하기 그지없는 공룡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나오자 나는 세상에! 하고 딸애와 동조하여 환성을 질렀고 공룡이 혜성의 추락으로부터 황페해진 고향을 떠나 나중에 꿈속의 오아시스를 찾은 장면에 가서는 저도 모르게 눈확을 습윤하게 적시기도 했다. 나의 공룡에 대한 편집광(偏執狂)에 가까운 집착에 공룡을 덜 좋아하는 안해는 리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중에는 못말려!하고 풀럭 웃어주고 말았다. 그러했던 안해도 나중에는 우리의 취미에 옮아들어 우리와 함께 공룡영화를 경탄하면 보았고 함께 공룡 만들기 작업에 기꺼이 착수하기도 했다. 어디에서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면 그것이 이발 하나든 뼈 한 조각이든 나는 심히 격동되여 출근해서는 동료들과 한 옥타브 높은 소리로 이 위대한 발견에 대해 알리군 했다. 허나 그에 동감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날저녁 3차 4차 곤죽이 되게 술 마신 휘황한 전과. 하다못해 항간의 아무개와 아무개가 눈맞고 배맞았다는 소식이 그네들에게는 귀 구멍 보슴털이 바짝 일어설 솔깃한 소식일 뿐... 다행히 죽이 잘 맞는 시우인 Z군이 나처럼 공룡에 큰 취미를 보여 둘이 만나면 화제 거리를 만들곤 했고 공룡관련 영화디스크를 서로 빌려주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동북의 한 박물관이 곁집 나이트클럽으로 인기된 화재를 입은 적 있다. 그 중에서 경악케 한 소식은 바로 그 박물관에 소장되였던 아세아 최대의 공룡전신화석이 몽땅 타버려 발 하나만 남았다는 것 이였다. 이름할 수 없는 애석함이 나의 가슴을 매운 겨울바람처럼 베며 스쳤다. 그 일을 두고 Z와 나는 술을 마셨고 몇 겁을 지나온 공룡의 또 한번의 죽음을 두고 애도의 잔을 들었다. 공룡에 관한 만화 한 폭을 보고 감흥만이 아닌 사색에 잠긴 적 있다. 인간처럼 배낭도 메고 도수안경도 걸고 한, 아마 발굴대원 같아보이 는 공룡들이 삽을 들고 어떤 화석을 발굴해 냈는데 골격으로 보아 틀림없이 인간의 화석이였다. 그 인간 화석을 공룡들이 잔뜩 사색 어린 얼굴을 하고 확대경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는 그런 만화였다. 인류가 생성하기전의 이 방대한 거물이 인류와 함께 마천루 숲에 어우러진 요즘의 진풍경은 또 하나의 사색을 우리게게 불러 준다. 왜 사람들은 그 누구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공룡에게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걸 가? 놀이 감으로 만들고 영화인물로 내세우고 마른 화석 한 쪼박으로 감성 풍부한 가상도(假象圖)를 그려내고 지어 DNA기술로 진짜 공룡을 만들어 내려 시도까지 하는가? 공룡은 이미 6500만 년전에 이 땅덩어리에서 소실 되였다. 세계각지에서 심심찮게 나타나는 공룡화석을 두고 사람들은 간거하고도 위대한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또 놀이 감으로 책자로 영화로 만들어 우리신변에 재현 시키고 있다. 그 한 구 또 한 구의 창백한 공룡화석은 하나의 생동한 실체로 부활되여 우리의 생활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바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회구(懷舊)의 심리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추구가 아닐 가? 공룡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정신기탁으로 까지 승화 되였다. 공룡은 크다 공룡은 무섭다 공룡은 강대하다 이런 발상으로부터 인류가 생성하기 전에 먼저 지구를 제패했던 공룡에게 우리는 은연중 기탁을 가지게 되었고 공룡의 부활과 함께 우리의 정신기탁도 따라서 부활을 가져온 것이다. 더욱이 정신적 우상이 액틀 식으로 되었고 상투적이 되었던 우매에서 금방 깨여나 급속히 들이닥친 사회전환기의 홍수 앞에 어딘가 설둥해져 행동반경을 구하기 어려워하는 우리 앞에 리념이 강하고 교조적인 것보다는 쉽게 지어 유흥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기탁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는 괴물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나는 오늘도 감흥에 넘쳐 공룡의 족속의 이름을 줄줄 외워낼 수 있다. 패왕룡, 익룡, 완룡, 검룡... 나에게 무진한 감흥과 환상과 사색을 주었던 사전(史前)의 동물을, 쥬라기와 백악기에 온 누리에서 혼자 살다 혼자간 의젓한 령물을... 언젠가 공룡을 두고 습작한 시 한 수가 있다. 내 시재(詩材)로는 이 세기의 령물에 대한 감회를 이루다 말할수 없어 로천명님의 유명한 을 패러디한 시, 그 한 수의 시를 내가 좋아하는, 그대들이 좋아하는 공룡에게 드린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어제를 살다간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였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쥬라기의 화산을 바라본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영화 "쥬라기 공원" 동영상  
105    [수필]달마도 그리기 댓글:  조회:3172  추천:73  2007-06-29
. 수필 .달마도 그리기                    김 혁어릴적 나의 꿈은 화가였다. 베레모를 쓰고 색조판을 들고 현란한 색감을 붓에 듬뿍 묻혀서는 진한 붓 터치로 캔버스우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화가들이 그렇게 우러러보일수가 없었다.네거리의 선전화나 영화포스터가 새로 바뀌면 정신없이 달려나가보군 했다. 그림을 좋아했기에 련환화(連環畵)에 넋을 홀딱 바쳤다. 련환화보기는 내 동년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내용의 그림책에도 판본이 다르면 사들여 그 그림기법에 대해 비교해보았다. 그렇게 련환화를 저그만치 2천 여권을 사들였다. 그때 나는 룡정에서 책이 제일 많은 아이로 통했다. 그 그림책들이 지금껏 내 서재의 깊숙한 곳에 색바랜채 꽂혀져 있다. 중학교적에는 세계명화에 심취되여 잡지의 뒤면에 곧잘 실리곤 하는 명화들을 오려내여 스스로 마련한 앨범에 붙이곤 했다. 신문사에 입사한 뒤 기거했던 숙소 벽은 내가 그린 50여폭의 그림이 붙어있었다. 액자도 없이 회화련습본에 그렸던 그림들을 찢어내여 붙인 그림은 비록 엉성할망정 짜장 한차례의 화전을 방불케하였다. 80년대 초창기의 “길림신문”에는 내가 그린 몇 폭의 만화와 삽화도 실려있다. 나의 시 창작노트는 아예 그림 습작본이라는 쪽이 더 적합할것 같다. 시 먼저 그림이 떠올라 그림여백에 시를 써넣군 했던 것이다. 몇해전에 출판되였던 나의 에세이집과 중편소설집의 겉봉도 나의 창의에 쫓아 내가 선택한 그림으로 디자이너들이 완수한 것이다. 언젠가 나의 창작집에 나절로 삽화를 그려넣어 펴내는 것이 나의 제일 큰 소망이다.다빈치요, 피카소요, 반 고흐요, 레노아요, 포비즘이요, 다다니즘이요 하고 미술가들의 이름과 미술류파들을 지금도 곧잘 외워 낼수 있지만 허나 나는 끝내 화가의 길을 걷지 못하고 말았다. 그저 2천여권의 련환화와 스스로 마련한 수 백장의 명화와 응접실에 걸려있는 세계명화모조품이 이루지 못한 나의 화가의 꿈을 달래주고 있다.그렇게 화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 해서였던지 올곧게 직시하는 와중에도 비뚤어져나가는 세상사에 대해 곤혹을 느낄때가 많다. 공백지우에 그저 점과 선을 잘 조합시키면 될수 있겠다고 믿었던 세상사가 때론 인상파처럼 선명하게 안겨오다가도 때론 추상파처럼 몽롱하게 안겨 왔도 때론 다다니즘처럼 변형되여 때론 포비즘처럼 흉측스레 안겨 오기도하였다. 그 변화다단한 세상사를 아마추어화가로는 그 양상을 다 그려내는수가 없었다. 또 캔버스우에 기본을 무시하고 틀리게 그어지는 금과 란폭하게 칠갑되는 어두운 색채에 당혹해하기도 했다. 그런 엉성한 그림들이 도금칠한 액자에 들어 버젓이 걸리는 것을 경악하며 보기도 했다.또 금전의 권력에 힘입어 조야한 자기그림으로 명리를 얻는 모습도 보았다. 그에 당혹하고 그에 고뇌하고 그에 분개하기도 했지만 내 아마추어의 작은 붓 자루로는 그러한 것들을 시정해주기에는 너무 힘에 부쳤다. 따라서 나의 붓은 그러한 화풍속에 더불어 더러워지고 모지라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붓 자루를 구석에 처박고 말았다.그러다 아마추어일망정 다시 그림에 생각이 미친것은 어느 날 헌책가게에서 “달마흠상백도(達摩欣賞百圖)”라는 서법입문서를 골라 쥔 뒤로부터였다.달마에 대해서는 면벽구년(面壁九年)의 법력이 뛰여난 진인(眞人)으로 알쏭달쏭 알고있었다. 허나 천태만상의 달마도가 담겨져 있는 책자를 들고 나는 그만 그 어떤 보이지 않는 법력의 힘에 빠져들었던가? 입가에 웃음을 문 달마, 졸린 듯 반쯤 눈을 감은 달마, 화가 난 듯 눈을 딱 부릅뜬 달마, 천태만상의 달마의 모습은 나의 고단하고 얄팍한 심성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나는 순간에 그 그림 장들이 주는 신묘한 힘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헌책가게의 책치고는 엄청 비싼 책을 나는 주저없이 사들었다.그 리고 그날로 집구석에 처박았던 붓과 먹통을 찾아 내였다.이렇게 많은 초상 중에서 대체 어느 것이 달마의 진짜배기 얼굴일가? 붓을 잡고 나는 오래도록 망설이였다. 모든 고난을 거치고 이기고 사대개공(四大皆空)의 경지를 이른 달마의 얼굴은 예술의 구체화와 평면의 립체화를 통해 오묘하게 표현되고 또 속인들의 마음속깊이에 있는 성정과 합치여 끝없는 모양을 이루고있었다. 나의 속안에 보이는 달마는 대체로 대머리에 부릅뜬 눈 우뚝한 코, 한 일자로 다물린 입과 통통한 볼 그리고 무성한 수염과 펄럭이는 도포가 전부였다. 달마도에 흥취를 가지면서 달마의 생평을 기록한 불교전서를 다시 찾아 자세히 읽었고 내심 자괴를 금치 못했다. 달마는 40여 년간 반야다라를 스승으로 삼아 일점의 게으름이 없이 수양을 쌓았고 60세에도 로구를 끌고 바다와 산을 넘어 중국에 와서 마침내 천고불멸의 종파를 세웠고 금강불괴(金剛不魁)의 정신을 기록하였다. 그 거룩한 뜻을 나 같은 그림의 아마추어가, 생활의 아마추어가 어찌 그림에 불어 넣을수가 있을가?전문가들은 그림중에서 종교화를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예수를 그리거나 석가모니를 그리거나 관음보살을 그리거나 응당 그들의 뜻, 사상, 감정 등을 리해하고 그려야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호랑이를 그렸는데 고양이가 되고 백조를 그렸는데 집오리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달마도입문서는 비록 모범을 알아도 필법을 소홀히 할 수 없는바 진짜 달마를 그리려는 사람은 가부좌하고 앉아 오룍오욕(五六五慾)의 마음을 몰아내고 붓을 잡기 바란다고 글머리에 씌여져있었다. 붓, 먹, 종이, 벼루는 단지 죽은 물체이고 눈과 손은 자신의 노예임으로 이러한 것이 하나로 되었을때에야만 비로소 좋은 달마도를 그려낼수있다고 한다.입문서의 가르침에 따라 한 장 또 한 장의 달마도를 그리면서 나는 달마의 얼굴의 무궁한 변화를 더듬는 중에 기쁨을 찾고 차분해지는 심성을 느꼈고 그런 마음의 변화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나는 불화 (佛畵)를 그려 구도하는 이들의 성심을 본받아 매일 한 장씩 천장의 달마도를 그리기로 크게 마음먹었다.습작기이기에 지금껏 나는 달마도를 신문지우에 그린다. 불공스러운 처사인지 모르지만 .화선지우에 그리는 사치를 부릴만한 자격도 없는 나임을 자각하여 그런 불공스러운 시작을 떼였다. 훌륭한 화가는 내가 어떤 것을 그려낼수 있다는 자부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려낼수 없다는 렬등감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렇게 자격지심을 누르며 나는 매일같이 달마도를 열심히 그렸다. 매일 내가 그리는 그림은 하나의 달마이지만 너나가 다르다. 내 그림의 수준의 변화로 인해서가 아니다. 때로 마음이 번거로워, 때로 되게 기분 좋은 일이 있어, 때로 까닭 없이 울적하여, 때로 술에 만취하여... 그때마다 내가 그린 달마도는 나의 속된 심경을 그렇게도 신통히 비쳐준다. 한번은 취중에 붓을 잡고 그린 달마도가 이튿날 숙취에서 께여 보니 그렇게 엉망일수가 없어 자신을 심히 꾸짖은 적이 있다. 이렇게 달마도는 내 일상을 가계부처럼 기록한다. 내 마음의 무늬를 년륜처럼 새긴다.때론 나는 달마도 그리기를 시작한 것을 볼썽사납고 고단한 자신의 삶 살이를 도피하기 위한 자기 최면이 아닌가 자문도 해보았다. 허나 어지럽고 무모하고 고통스런 세상에서 자기 최면도 괜찮은 극복방법일 것이다. 종이우에 문질러대는 수많은 점과 선, 한없는 공간, 그에 대한 추구, 시도, 실패와 극복,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의 인생련습을 회화라는 측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내게는 아직 여느 화가들처럼 그럴듯한 호도 없고 락관(落款)도 없다. 허나 그 어느 날인가 깨끗한 화선지우에 지대지강(至大至剛)의 달마의 참모습이 커다랗게 그려지고 그 곁에 나의 호와 락관이 숙명처럼 새겨질 때를 몽상하는 나다.하여 나는 오늘도 나의 마음을 다잡는다.종이를 편다.먹을 간다.붓을 잡는다.달마도를 그린다...
104    상생의 빛 댓글:  조회:3422  추천:73  2007-06-29
반 고흐의 《해바라기》 나의 서재- 《허강재(虛崗齋》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으니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이다. 미대 지망생 이였던 나에게서 물론 반 고흐는 익숙하다. 짧은 생애동안 1천 2백여 점의 유화와 1천 점 이상의 소묘를 제작한 광열의 화가, 살아서는 한 점의 작품밖에 싸구려 헐값으로 팔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그 작품이 최 상류층만이 소장할 수 있을 만큼 세계최고의 비싼 액수에 거래되고있는 기인... 전기적인 색채로 가득한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미술사에서 신화의 반렬에 오르고 있다. 반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황금빛으로 늠실거리는 《해바라기》가 압권이다. 그 그림이 미술품 경매의 기적을 탄생시켜서만이 아니다.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예술적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붓끝에 쏟아낸 그의 에너지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화폭 위에서 살아 생생하게 꿈틀거리기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의 열정과 작열하는 태양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그림들, 풍경 속에 태양이 보이지는 않지만 화폭 가득 그 빛은 담겨져 있다.반 고흐의《해바라기》를 좋아하다 보니 우연히 손에 잡은 총서에서 해바라기에 관련된 과학문장을 진지하게 읽게 되였다. 해바라기 씨앗의 배렬은 시계 방향과 반 시계 방향의 라선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해바라기의 라선수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이렇게 배렬 할 때 좁은 공간에 많은 씨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꽃잎 또한 이리저리 겹치면서 효률적인 모양으로 암술과 수술을 감싸있다. 잎을 배렬할 때도 맨 우의 잎에 가리지 않고 햇빛을 최대한 받을 수 있도록 엇갈리면서 잎을 배치한다. 이러한 잎의 배렬은 결코 한 장의 잎의 립장만이 아닌, 전체 잎의 립장을 고려한 것이다. 결국 해바라기는 생존에서 최적의 수학적 해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총합으로서 최적을 추구하는 자연계의《상생의 지혜》다. 과학총서를 읽으며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화두 하나를 잡아 보았다. 그 화두가 곧바로 바로 상생(相生)!이다. 오늘의 화두 상생! 오행설(五行說)에서는 상생을 가리켜 《쇠는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다시 쇠를 생(生)하여 줌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 자연의 리치로 생각해 보면, 목은 식물 또는 생물을 의미한다. 목은 태우면 화가 되고 화는 타고나면 재가되어 땅으로 돌아와 흙이 된다. 흙이나 바위 속에서 금속이 채취된다. 금속은 보기에는 단단하지만 불로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어 물이 된다. 수는 식물의 중요한 영양분이 되어 나무를 자라게 한다. 문자 그대로 상생이란 서로 相자, 살릴 生자로서 서로 도와 가고 살아가는 관계,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감을 뜻한다.또한 상생은 상극에 대립되는 말이다. 상극적 관계, 불과 물의 관계를 비롯하여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 곡선과 직선 등과 같은 대립적 요소를 융화, 조화시키는 것이 상생의 본질적 특성이다. 순 우리말로는 《어우름》이란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벌레들의 합창 자연계에서 상생 즉 어우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해바라기뿐이 아니다. 우리의 자연은 사계절이 가고 오는 순리와 먹이사슬에 따른 생태계의 질서를 섭리처럼 간직하고 있다. 산과 들, 강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언제고 《상생의 합창》을 그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 하면 흔히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이다 하는 표현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식물학자 다비드 애틴 볼은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저서에서 식물들은 경쟁이나 투쟁보다는 상호의존을 통하여 번식과 번영을 추구한다고 밝혔다.이 지구생태계에서 생물중량 면에서 제일 으뜸은 식물들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동물들을 다 한데 모아도 식물의 무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생태계에서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은? 바로 곤충들이라 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움직여 다닐 수 없는 식물을 위해 곤충은 대신 꽃가루를 날라준다. 그 대가로 식물은 곤충에게 달콤한 꿀을 제공하여 배를 불리게 한다. 이처럼 파리나 벌 등이 가루받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식물은 멸종에 직면해야 할 판이다. 만약 열심히 땅을 파고 사체를 먹어대는 개미가 없다면 토양의 영양소는 순환할 수 없을 것이고 땅에는 죽은 동물만 쌓여갈 것이다.생태계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암벽 우의 잡목과 풀이 손을 잡듯이 서로가 협력해 상생한다. 자연계의 생물들에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일찍이 터득했다. 수와 무게에서 가장 막강한 생태계의 두 생물집단이 서로 물고 뜯는 상잔관계가 아니라 함께 손을 잡아 번창한 사실은 우리네 삶에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자연을 둘러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삶의 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의 문제들을 반추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무모한 전면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생물들보다 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한 생물들이 우리 곁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바 자연철학의 핵심내용은 곧바로 상생(相生)이다.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질서와 륜리, 그리고 욕망에서 벗어난 공존의 드라마를 자연은 겸허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왜가리가 이른 봄 일껏 튼 둥지를 가을백로에게 넘겨주는 양보에서 꽃을 다치거나 다투지 않고 꿀을 얻는 벌, 나비의 춤사위에서 만물의 령장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얼굴 붉히며 배워야할 덕목이 보인다. 즉 상생의 덕목을 키워 오늘을 지키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인간의 지혜가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화가들이 그린 의자 다시 《해바라기》를 즐겨한 반 고흐로 돌아와 보자. 반 고흐는 의자를 주제로 해서도 그림 두 점을 남겼는데 바로 《반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이다. 여기서 고갱은 19세기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인물 폴 고갱을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이 의자를 그린 두 개의 그림을 잘 살핀다면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반 고흐의 의자》는 짚으로 엮고 소나무로 만든 수수하고 투박한 의자이다. 방 한 귀퉁이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의자에는 파이프 하나와 잎담배 쌈지 하나가 놓여 있다. 《고갱의 의자》는 반 고흐의 의자보다 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의 의자에는 소설책 두 권과 촛불이 놓여있으며 의자는 화려한 주단 우에 놓여 있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일석(一席)의 위치를 남긴 반 고흐와 고갱은 매우 특별한 관계였다. 1887년 프랑스 아를르에 있는 고흐의 작업실을 방문한 고갱은 고흐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함께 작업했다. 이 기간은 두 대가에게서 예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그러나 또한 매우 비극적인 시기였다. 고갱과 고흐는 서로의 교류를 통해서 각자의 예술세계를 풍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배후에서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갈등과 더불어 서로 성격이 부딪치면서 드디여 그 유명한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최근 독일의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고흐의 《귀 절단사건》에 대한 새로운 설이 나와 미술계를 놀래 우고 있다. 지금까지는 반 고흐가 고갱과 싸우다가 격분해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보는 것이 정설 이였다. 허나 사학자들이 1888년 당시의 경찰 보고서와 사고 무렵의 상황을 분석한 결과, 유일한 목격자였던 고갱의 행동에 미심쩍은 데가 너무 많았다. 고갱은 사고가 난 다음 서둘러 빠리로 떠났고 경찰들이 조사한 그의 소지품 목록에 펜싱 장갑은 있었으나 펜싱 검만은 빠져 있었다. 따라서 고갱이 서두른 나머지 펜싱 검만 챙겨 달아났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말하자면 고갱이 펜싱 검을 휘둘러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펜싱 검이란 유럽의 검술에 쓰이던 가늘고 긴 검의 일종. 반 고흐가 그린 두개의 의자그림은 두 화가의 역학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반 고흐 자신의 실상과 고갱의 이미지와의 대비로서 그들 지간의 라이벌 의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작품인 것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 속의 의자가 놓였는 집에서 고갱과 한집살림을 하며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고 급기야 유명한 반 고흐의 《귀 절단사건》을 유발시켰으며 그 뒤 반 고흐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의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 의자들은 대화를 하고 있다. 두 의자의 주인도 그렇게 대화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결과는... 사대부들의 풍경조선 후기 실학자로 리중환(李重煥)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기 위하여 세상천지를 떠돌아다닌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저서 《택리지(擇里志)- 인심》조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무릇 사대부가 사는 곳 치고 인심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리유는 사대부들이 당파를 만들어서 일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권세와 리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리중환은 사대부들이 《자신의 행실을 잘 닦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자기를 론하는 것을 싫어하며…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과는 한 곳에서 살지 못한다.》라고 엄연하게 비판했다. 몇 백년전에 남긴 글이지만 그의 글을 보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리유는 오늘날 우리의 풍토가 그때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반 고흐와 고갱의 이야기처럼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례가 우리 주변 《사대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재현되고 있다. 너나가 그 소용돌이 속에 있으면서도 꺼내기 싫어하는 화제이지만 짚고 보면 《문인상경(文人相敬)》이 아니라《문인상경(文人相輕)》의 부박한 바람에 문단이 썰렁한 한기를 느낀 지가 오라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고 수년 여 동안 내내 불어 치고 있으며 갈수록 그 부조리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어제 날 함께 문학도의 길을 걸으며 정차고 벅찬 눈빛을 주고받던 이들이 하나 둘 서로 반목해 버렸다. 세대는 세대끼리, 장르는 장르끼리, 녀류는 녀류끼리... 간혹 가다 맞 띄우면 소 닭 보듯 혹은 먼 산 보기를 하는가 하면 아예 고개를 탈아 버린다. 문학관련 달변들을 토하고 작품을 읊조리던 입으로 상대에 대한 험구를, 독설을 뿜는다. 서로에게 아주 못질을 해 댄다. 지어 문학행사가 펼쳐진 장소에서조차 팽팽한 기분으로 서로의 파벌을 찾아 짝지어 앉는 모습들이 눈꼴에 시리다. 환란이 끝임 없던 춘추전국시대면 오죽할 가 싶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인들은 상대방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자신만이 문단의 일인자요 자신의 작품만이 력작이라고 역설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모든 문제는 나를 중심으로 한 본위적 생각에서 비롯한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밀어붙이는 편협한 자세, 스스로의 힘만을 믿는 자세 때문에 오만과 방자함에 빠져든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정의로움이요 진리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너야 어떻게 되든 나만의 효용극대화를 추구하겠다는 독선과 대립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문인집단과 문인리더의 위상상실과 그에 동반한 인간소외, 왕따, 금전만능주의, 집단리기주의... 등등으로 파생된 현상들은 진정한 문인의 존재가 왜곡되고 부정되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문단전체로서의 최대 리익보다는 개인이나 개인을 둘러싼 작은 집단의 리익을 최대로 하는 경우가 많고 지독한 개인 리기주의가 팽배해 있어 전체적인 조화와 총합으로서의 최선을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로서 사회에 존경받는 이미지로 남아야 할 문인들이 오히려 남에게 베푸는데 린색한 사람, 맡은 바 일에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 자기 자랑 많이 하는 사람, 남을 헐뜯기를 잘 하는 사람으로 각인 되여 버렸다. 이러한 풍조의 다년간의 루적은 문단 인심을 그만큼 메마른 불모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언제 함께 공멸(攻滅)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형의 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으스스 들곤 한다. 부끄러움의 부재,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문인들의 초상이다.처절한 싸움판으로 변해가고 있는 오늘의 문단상황을 보면 인간에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잘된 것으로 생각을 하는 속성이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문학을 알건 모르건, 상대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건 말건, 오직 상대와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지금 아귀다툼의 주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싸워서 얻는 행복이 타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악에 지나지 않는 바, 타인을 짓밟고 행복을 소유하게 되면 그들의 원망과 저주를 받아 점점 그 독성에 물들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인데... 이는 문학에 심취 되여 문단에서 양명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이 아니라 개개인의 치사하고 야비한 속물적 근성이 발휘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되어 우리는 마음속에 서로를 구분 짓고 생활 속에 차별을 두며 너무 오랫동안을 대항 론리 속에서 살아오게 된 것 일가???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될 경우에는 그 어느 쪽도 리득을 얻기는커녕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마음속에 갉아져 있는 오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의 잔인성과 시기심에 근거를 둔 이러한 악취미를 계속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결투문화를 정착시켰던 로마인들은 크게 지은 원형경기장에서 노예끼리 서로 참살하는 장면을 보고는 흥분하고 열광했었다. 그러한 결과 끝내 로마제국에서 사랑과 양보의 미덕을 몰아내고 내분을 일으켜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면 이러한 비극은 옛날 얘기만은 아닌 듯 하다.인간관계에선 서로의 격려와 사랑 속에 생의 에너지가 창조됨은 물론이요, 미완의 존재인 인간의 결점을 서로 보완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대결구도를 취하게 되면 발산되던 에너지마저 줄어들게 되고 인간의 결점은 상대의 시기와 공격을 받아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점을 저마다 똑 부러지게 나오는 우리의 《사대부》들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이러한 섣부르고 설익은 몰지각한 행태는 상생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상생. 인간사에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이 언제 중요하지 않을까 마는 요즘 우리 문단만큼 절실할까 싶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지금까지의 인류력사는 대립과 경쟁 그리고 투쟁의 력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의간의 태생적 갈등관계와 불협화음, 그 속에서 수많은 인간이 깊은 원과 한의 질곡 속에서 피와 눈물을 흘렸고 죽어갔다. 그 력사의 장하(長河)속에 우리의 민족도 참으로 오랫동안 싸우며 살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사고 방식은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적대론리와 투쟁론리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왔다. 옳은 내 편과 틀린 네 편을 갈라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의 적대적 관계를 열심히 만들어 왔다.《싸워야 잘 큰다》는 속담까지 만들어내다시피 타자의 소멸을 전제로 하는 극과 극의 생짜 개념에 버릇 되여 왔다. 부패무능 한 지배 계층으로 인한 탈향(脫鄕)이 그 한 양상이며, 일제하 왜적에 대한 항거가 그러했으며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이 그러했으며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더욱 그러하였다. 《계급투쟁을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날마다 말해야한다. (年年講,月月講, 日日講》란 표어가 네거리에 붙여있는 환경에서 저마다 투계 닭처럼 목 볏 살리듯 하고 지내왔다. 이외에도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에 대한 한국 브로커들의 사기행각과 그로 인한 서로의 거부와 반발 역시 또한 그러한 양상의 부류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달라져야만 한다. 이제 우리의 력사, 우리의 삶은 적개심과 대항의 구도가 아니라 리해심과 사랑으로 서로 더불어 껴안고 서로 생명을 살려 나아가는 상생의 구도와 철학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설문기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필요한 가치관으로 20대-50대가 한결같이 《공동체의식》을 1위로 꼽았다고 한다. 21세기는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 다 함께 잘 살자는 우리 동양 고유의 상생의 문화가 세계를 이끌어 가는 가치관으로 자리잡아야 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을 위해 필수불가결 한 륜리인 동시에 크게는 지구촌 사회 생존의 륜리인 것이다. 전문가들이 분석하다시피《지금까지 인류의 선택지는 대륙이냐 해양이냐, 독립이냐 종속이냐의 이항 대립적 택일(擇一)이었다. 하지만 21세기의 세계는 상호의존관계라는 제3의 선택지가 생겨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랭전(冷戰)이데올로기의 종식과 함께 공생공존의 전략적 제휴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 서로 전쟁을 하던 적대국들이, 종교적 색깔이 다른 나라들이 유럽연합(EU)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이 그 좋은 사례다. 경제적으로는 경제주체들의 상호의존성이 높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통한 지속가능 한 성장을 모색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사회적으로는 사회적 련결망의 구축과 행위주최의 상호의존성에 기존한 정보화 사회가 정착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지역적 문화의 탈피와 문화의 국제화, 사상적으로는 이원론(二元論)의 붕괴와 상생원리가 지구촌을 시시각각 변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서로 독립돼 있으면서도 문화적 동질성과 지리적 린접성을 토대로 지배. 피지배관계가 아닌 네트워크를 만든다. 》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에서 벗어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전략과 상생의 철학이 시나브로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 아는 《순망치한》 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먹여 보자.脣 : 입술 순 亡 : 잃을 망 齒 : 이발 치 寒 : 차가울 한.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함께 지내던 사람이 망하면 다른 한쪽 사람도 위험하다는 뜻. 춘추시대 말엽, 우(虞)와 괵은 린접한 형제 국으로 우는 강국 진(晋)에 이웃해 있었다. 진나라는 진작부터 두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형제 국인 만큼 그 중 한 나라가 도울까 두려워 주저하고 있었다.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진나라는 건널목인 우나라 왕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재보를 주겠다고 구슬렸다. 우나라의 궁지기(宮之寄)라는 현인이 진나라의 속셈을 간파하고 우왕에게 간언 했다.《괵나라와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옵니다. 만약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했습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왕은 충신의 간언도 무시한 채 진나라에 길을 내주었다.우나라가 길을 내준 터에 진나라는 괵나라를 정벌했고 궁지기의 예견대로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포로로 잡았다. 우나라 왕은 궁지기의 《순망치한》의 충고를 무시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專)》에 수록된 이야기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주는 것만 같다. 입술과 이발처럼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보다 중시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 미덕이었다. 우리 민족의 지명편람을 보면 약수동이요 청수동이요 하는 지명이 많고도 많다. 동은 물(水)을 함께(同) 쓴다는 의미로 선조들은 마을이 물을 공유하는 공동체임을 리해하고 한 우물 한 강을 쓰며 오순도순 살아 왔다. 허나 오늘날 그러한 공공적 가치나 공동선은 제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 지축을 뒤흔드는 극적인 변화 속에 빠져들어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은연중 흔들리는 민족이 되어 버렸다. 조선족위기설이 나올 지경으로 그 현안은 여실하다. 이러한 급변 속에서도 내부의 갈등과 분렬에 빠져있다는 암매가 두렵다. 개개인의 아픔에 사로잡혀 과거의 상흔에 안주하고 반목과 불평만 하는 것은 인과의 진리를 모르는 소치(所致)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안은 누가 누구를 밟고 얼마를 버는가 하는 소아적 리기심을 충족시키는 싸움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개인의 명분에 얽매어 입술을 잃고 이를 앓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정으로 상생의 묘수가 필요한 때이다. 급변하는 세상을 상대로, 미래를 책임질 상생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존속과 발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로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상생의 해법을 찾아 나아가는 성숙한 모습을 모여줄 필요가 있다. 강하고 힘있는 민족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가능해 진다. 갈등과 분렬을 극복해낼 줄 아는 상생을 통해서만이 작지만 힘있는 민족을 이룩해 나아갈 수가 있다고 본다. 반목과 질시가 풍조로 되고있는 속에서는 힘있는 민족으로 남을 수가 없다. 반목과 질시를 극복하고 선진민족의 양상을 마음속에 새기며 손에 손잡고 목전의 진통을 이겨 나아가야 한다. 상생만이 우리의 불안한 불면을 잠재워 주고 고난의 암초를 피해 가는 주문을 열어 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삶의 무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으로 이어진 세계임을 의미함에 다름 아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상극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생의 원리를 깨달을 때 우리의 문단은, 나아가서 우리의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렇듯 상생은 우리의 미래의 비전과 직결 되여 있다. 일상 곳곳에서부터 서로가 어우러지는 세상이다. 양장을 한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이 함께 팔 겯고 걸어도, 햄버거 집에서 콜라 마시면서 김밥을 우겨먹어도, 오페라와 판소리가 한 무대에서 만나도 어우러질 수 있는 조화와 상생의 시대다. 서로가 정면대응으로 시퍼런 펜싱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의자를 마주하고 무릎을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을 열며, 발맞추어 박자에 맞추어 상생의 군무(群舞)를 추는 것이 바람직한 세상이다. 진부한 살풍경의 의식에 채찍을 날리면서 한 가닥 기대를 가져본다. 모두가 우리 안의 염치를 되살리면서 오래 동안 굳어빠진 관행을 떨쳐버리고 욕망의 크기를 조금씩만 줄이고 상반된 립장을 잘 조화시키면서 흔쾌히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때, 또 이를 아름답게 받아들일 때 진정한 상생의 기운이 넘칠 터이니 빛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전후좌우 둘레둘레 어우러진 따사로운 풍경을 치유와 공생을 담은 량자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을가! 새해에는 상생을 좌우명으로 삼고 청정한 넓은 가슴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함께 하는 세상,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만드는 주인공으로 거듭나기를 약속해 봄이 어떨가? 찬바람이 부는 계절, 봄바람처럼 훈훈한 우리 공동체를 살려 가는 진정한 상생의 화두를 던져 본다.
103    락타 한 마리 다운해 놓고 댓글:  조회:3520  추천:73  2007-06-29
  당신은 락타를 길러본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1 다마고찌(電子玩具)라는 놀이감이 있다. 몇해전에 류행되였던 애들의 흥심을 깡그리 앗아가는 놀이감이였다. 성냥갑 크기와 맞먹을 플라스틱함에 작은 스크린(螢光幕)이 달려있는데 그 아래 배렬된 팥알만한 버튼중에서 ON을 누르면 스크린속에 어떤 동물의 형체가 나타난다. 흑백만화 그리기 기법처럼 그저 간단한 형태만 짓고있지만 허나 그것을 애송이의 원시적인 장난감으로 치부해선 절대 안된다. 동물처럼 신통한 소리로 울줄도 알고 배고픔과 추위, 밝음과 어둠에 대해 표현할줄도 안다. 울음소리와 함께 hungru(배고프다) dark(어둡다)는 표시가 나오면 버튼을 눌러 먹이를 주고 물을 주고 불을 밝혀주어야 한다. 뿐만아니라 놀이감이 배설한 《용변》까지도 쳐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보채는 아이처럼 끝없이 울어댈것이고 소홀하면 나중에 《죽》어버릴수도 있다. 그러면 놀이감치고 꽤 비싼 그것은 던져버리게 되는것이다.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오락제품. 소, 말, 양, 개, 돼지, 캉가루… 벼라별 동물이 다 있었다. 딸애에게서 이런 신기한 놀이감도 있다는것을 알고 함께 백화점으로 갔다. 딸애는 공룡을 골랐다. 그리고 아빠도 하나 사라고 했다. 둘이서 함께 사서 누가 더 잘 키우나 내기를 하잔다. 잘 나가는 놀이감이라 다 팔리고 종류가 몇개 없었다. 손 가는대로 락타를 골라 들었다. 딸애는 그 놀이감에 깊이 빠져들었다. 하루종일 다마고찌를 손에 품고 다녔다. 잘 때에도 다마고찌를 머리맡에 꼭 놓아두곤 했다. 밤에 깨여나서는 스크린속에 켜지는 파란 야광불빛을 빌어 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뒤질세라 나도 열심을 보였다. 물을 주고 먹이를 주고 불을 밝혀주고 잠을 재워주고 용변을 쳐내주었다. 놀이방법에 익숙해감에 따라 락타는 나의 손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한번, 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나를 보고 딸애가 퍽 상심한듯한 어조로 말했다. 《락타가 죽었어.》 2 요즘 들어 감명 깊게 읽은 시 한수는 라는 제명의 시. 그림속 락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락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섭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속에 박제가 되여있어야할 락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앞으로 걸어나올것이다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을 락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것이다 당신은 락타가 말한다 내 몸속의 물을 꺼내 마셔 바람이 불어와 락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속을 걸어나온다 문을 열면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륵골속, 기억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락타 한마리 따라서 사막을 건넌다 그림속의 락타는 눈섭이 길다 시를 읽고 감흥을 못이겨 락타가 무변의 사막을 가는 사진 한장을 다운로드(下載)하여 내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았다.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때, 나는 자주 락타와 만나곤 했다. 신문사부근의 호수가에 사진사들이 촬영용으로 락타 한마리를 끌어다놓았다. 사람들은 희한해마지 않으며 이곳에서는 볼수 없는 락타를 배경으로 하거나 혹은 락타 등에 올라타서 사진들을 찍었다. 저녁이면 사진사들은 락타를 어디론가 끌고가곤 했다. 퇴근하여 신문사앞 로터리(轉盤道)를 돌아 집으로 가다 나는 락타와 자주 마주쳤다. 묵묵히 로터리를 도는 락타를 발길 멈추고 지켜보며 그때마다《넌 어떻게 되여 여기까지 왔냐?》하는 물음이 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지금도 로터리를 돌 때면 나는 가끔 그 락타를 생각하곤 한다. 락타를 위한 시를 읽고 다운해놓은 락타의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니 락타 한마리가 책에서, 모니터에서 걸어나온다. 태양은 머리우에서 무섭게 이글거리는데 머리를 수굿하고 터벅터벅 사막을 가는 락타. 산봉우리 같은 쌍봉(雙峰), 성큼성큼 내딛는 긴 다리, 끔벅거리는 방울눈에 어진 속눈섭. 무엇을 이야기하는듯 새김질을 머금는 입… 언제 보아도 불평 한마디 없고 권태 어린 표정도 없다.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믿고 삶을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는 락타이다. 모래바람 물리치며 갈증을 참으며 인내를 새김질하며 락타는 간다. 사막 어딘가에 자리잡고있을 오아시스를 찾아 길을 간다. 신기루를 찾아 길을 간다.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는 사막 저만치에서 누군가 부른다. 신기루이다. 그 신기루속에는 짙푸른 수풀이 있고 거울처럼 빛나는 호수도 보인다. 그 신기루 같은 꿈을 잡기 위해 락타는 간다. 의혹의 사막에서 방황하는이도 있으리라. 잔혹한 사막에서 몸부림치는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쫓아야할 길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고 락타는 묵묵히 간다. 아무리 목이 마르고 힘이 들어도 눈앞에 보이는 저 등성이만 넘어가면 신기루에 다달을수 있다는 그 믿음, 그 곧은 믿음이 락타의 고단한 삶에 활력소를 준다. 락타를 보면 자연히 등 굽은 로인이 련상된다. 풍상고초, 산전수전을 겪어온 로인네가 어쩌면 락타는 길가는 체험을 생을 확인하는 방편으로 생각하고있는듯하다. 나서부터 길을 가야 하는 역마살(驛馬煞)이 숙명처럼 끼쳐있나보다. 역마살에 대해 떠돌아다니도록 끼쳐진 액운으로 불길하게만 보면 안된다. 그런 락타를 웃는이들에게 있어서 삶이란 소극적으로 살아가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편협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세계에로 가닿고자 하는 적극적 본연에서 우러나온 갈망과 충동으로 해석하는것이 더 낫지 않을가. 락타는 십리밖 물냄새도 맡는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락타는 삶의 풍경을 가장 멀리 보는 동물이며 궁극적인 존재의 리유를 보는 동물이런듯. 그래서 락타는 간다. 삭막한 사막을 묵묵히 헤쳐나가는 락타의 길은 구도의 길, 열반의 길에 가깝다. 다운해놓은 락타를 보며 길 가고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요즘처럼 길 떠나고싶은 의욕이 불붙듯한적이 없다. 복잡한 머리와 마음속을 비우고 어디로든 길을 떠날수 있다면 좋겠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풍광을 눈으로 마음으로 스케치하며 세속에 막힌 나의 숨통을 다른 호흡으로 고르고 트이며 일탈의 자유로움, 모험의 유혹을 만끽하면서… 그와 함께 내 인생도 새롭게 스케치할수 있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고 기회이겠는가! 《내 마음을 해방하고 내 혼을 창달하기 위해 낯선 고장으로 가려고 한다. 가면서 눈과 귀를 다시 열고 혼을 넓게 펴는것이다. 내 령혼을 진정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수의 힘을 빌었다.》 유명한 화상 도륭(陶隆)의 필기에서 본 필적할만한 려행관이다. 우리에게는 이따금 백지상태로 몸과 마음을 비우고 에너지와 기를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길에서 얻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길가기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미래를 관조하게 하는 여유를 갖게 해준다. 뿐만아니라 자신의 위치나 인생행로에 대해서 반추해볼수 있는 보다 소중한 기회를 준다. 평소 자신과 익숙한것들로부터 결별하여 다른 곳에서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살펴본다는것은 마치 영화속 주인공이였던 자신이 밖으로 나와 관중석에서 관찰자적인 립장이 된것과 같다. 그를 통해 새로운 나를 찾는 기회를 갖게 되는것이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길 가기를 통해 수행되고있는 자아탐색과 정체성의 실체를 추적하는것은 아마 길을 잃은이들에게 가장 화급한 처방으로 돼줄것이다. 어떤 길을 잃었으며 어떤 길을 찾아야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방황해야 하는 류형의 우리들에게 락타는 우리자신의 존재값을 되묻게 하고 길을 가르치고있다. 인터넷에서 《길》을 검색해보면 백여개의 사이트와 수만개의 웹 페이지가 와르르 쏟아져나온다. 길에 대한 정의는 우리가 매일을 밟고 오가는 길의 의미에서부터 미래, 전망 등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의미까지 그야말로 다양하다. 어찌 보면 산다는것은 길을 간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길은 우리의 인생이고, 궁극이다. 길우에는 바쁘게 달려온 지난 우리의 애달픈 력사가 새겨져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 묻어있고 이제 가야할 래일의 목표가 기다리고있다. 길을 가다보면 희망을 만난다. 그 희망을 바라고 가는것이 길가기의 본연의 목적일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락타는 우리에게 길이라는 화두를 풀고 길의 확장된 의미를 보여준다고 할수 있다. 길을 가볼가? 락타처럼. 사막을 건너가는 락타가 죽음과 맞서는 힘을 얻는것은 바로 자기 자신속에서이다. 락타의 혹안에는 굳은 기름 지방덩어리가 들어있는데 몸의 수분이 극도로 부족해지면 물로 바뀐다고 한다. 그런 락타처럼 혼자서 가고싶다. 둘이면 복잡하다. 홀로 가며 외로움을 즐기고싶다. 홀로 있음을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관념의 노예들이 지껄이는 소리가 아닐가. 홀로 누리는 자유는 오로지 개인이 누릴수 있는 체험과 영광이다. 홀로 있음에 저절로 주어지는 자유가 아름답다. 혼자서 외로이 조용한 시간을 가지게 되면 나와 내 주변의 모습이 다시 보이게 된다. 사무치는 외로움이 때로는 깊은 깨달음과 새로운 발견을 안겨준다. 그렇게 홀로 자신을 연소하며 가고싶다. 길을 가야겠다. 락타처럼. 길가기를 통해 삶의 지리책을 만들어보련다. 어느 곳에 험산준령이 있고 어느 곳에 넘기 어려운 여울목이 있으며 어느 길을 택하는것이 가장 평탄한 바른 길인가를 알려주는 정보들을 알아서 낱낱이 적고싶다. 그러면 내 길가기는 주어지는 삶의 숙제를 풀기 위한 값있는 공부의 길이 될것이다. 가는 길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거대한 자연앞에서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느끼고 좀 더 겸허해지는 마음을 갖고싶다. 시행착오투성이였던 자신을 반성하고 근신의 마음을 가지며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려정을 만들고싶다. 그렇게 오만과 협애, 탐욕을 벗어버리고 마지막에 닳고닳은 뼈와 질긴 가죽 하나만 남기고 숱한 정신적고투를 거쳐서 잘 빚어진 정신만 가지고 돌아오고싶다. 길을 떠난다! 락타처럼. 두눈엔 가득 의욕과 희망을 담고 등우엔 잔뜩 인내와 그리움을 짊어지고 오아시스를 찾아 길을 떠난다. 사랑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거나에 깊이 빠지는 일, 그리하여 송두리째 나를 버리고 그 대상에 몰입하는 일, 급기야는 몰아지경에서 내가 그 대상이 되여버리는 경지를 락타에게서 배우며 길을 떠난다. 경문(經文)에서 이르듯 《세상의 온갖 애착에서 벗어나 혼탁과 미혹을 버리며 마음의 안일을 물리치고 수행에 게으르지 않으며 속이지 말고 꾸밈없이 진실을 말하며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세상을 저버림없이.》 사막의 락타가 물냄새를 쫓아 세찬 모래바람을 뚫고 가듯 길을 떠난다. 그리하여 보다 명징해진 내 눈동자가 락타의 검은 눈망울을 닮고 마음속에 짊어진 고통과 그리움의 무게가 길을 마친 락타처럼 가벼워질 때 나는 진정 삶과 령혼의 오아시스를 찾을수 있으리라. 3 이제 내 마음속에 락타 한마리 길러야 하겠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02    엘리베이터 타기 댓글:  조회:2954  추천:73  2007-06-29
. 잡문 .엘레베이트 타기김 혁...엘리베이터에 대해 구태여 인상을 가지게 된 것은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난 다음부터였다.신문사에서는 국산용으로 가격이 저렴하고 외관도 툽상스러운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였는데 쩍하면 고장이 생기군 했다. 몇몇인가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얘기를 귀전으로 흘려보낸 적 있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당착하게 될 줄을 몰랐다. 그것도 오전에 채 마치지 못한 일을 마저 끝내려 점심시간에 남 먼저 식사를 대충 필하고 달려왔는데 그만 오도가도 못하는 짜장 <<령어(囹圄)>>의 몸이 되고만 것 이였다.소경매질하기로 엘리베이터 속에 배렬 된 버튼을 열싸게 눌러 보았다. 허나 엘리베이터는 작동을 딱 멈추었고 문은 옛말 속의 마적이 잠자고있는 동굴의 문처럼 주문이 맞지 않았던지 도무지 열릴줄 몰랐다. 수리공은 물론 회사직원들의 기척조차 없었다. 그래도 본능 적으로 <<게 누가 없나요? 엘리베이터 고장입니다!>> 하고 소리질러보았고 조바심이 난 나머지 문을 쾅쾅 두드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반시간 푼 갇혔다가 일찍 출근한 청소부아주머니에 의해 수리공이 달려왔고 그제야 나는 감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얼마나 혼났던지 이 과정이 나의 어느 한 중편소설에서 큰 편 폭으로 적혀있다.변강의 오지인 자그만 시가지인지라 엘리베이터는 호텔이나 상업청사의 전용물, 한때는 우리처럼 엘리베이터가 부설되여 있는 사무실도 흔치 않았었다. 하여 11층에 사무실을 정하고있는 나를 보고 <<거기 땐티(電梯)엘리베이터)있나?>> 하고 묻는 이들도 많다. <<주인집아낙이 담살이군 총각 속옷 걱정>>하듯 싱거운 물음이지만 그 소리가 웬지 싫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현대 샐러리맨답게 매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를 본다는 소시민적 우월감에 저도 모르게 젖어든 것이다. 그래서 흥감스럽게 엘리베이터를 두고 시를 지은 적도 있다.마천루공간을 누에처럼 누비다단조로운 그래프 쉬임없이 긋다삶에 지쳐 파김치 된 사람들을삼키고 토하고 또 삼키다.어, 인생도 엘리베이터 그것처럼끝없는 오감 속에 해진 신발 바꾸다실 빠진 붓 들어 굵은 연장선 긋다어느 문예지에 실린 이 시를 보고 평론가 한 분이 <<기계문명에 의해 이화되고있는 존재현실에 대해 비평의 미학을 견지로 보여준 시>> 라고 나름대로 평을 했고 그로 해서 엘리베이터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한 생각을 머금기도 했었다.엘리베이터는 우리 삶에서의 하나의 특수한 공간이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본의 아니게 그 속에서 만날수 있다. 으늑한 공간에서 동료들과 아침에 새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기란 그야말로 감미로운 일이다. 지지콜콜한 가정얘기도 좋고 린근에서 일어난 깜짝쇼얘기도 좋고 전날 있은 축구경기의 결과도 좋고.수염터기들의 세계만 이루어졌을 땐 조금 치졸스러우나 유머 적인 상소리도 슬그머니 오간다. 짧은 상봉이지만 아마 그로 하여 엘리베이터 속에서 주고받는 모든 얘기들이 그렇게 감칠맛 나는 것일가? 때로 자기의 적수, 혹은 만나기 꺼리는 사람과 공교롭게 엘리베이터 속에서 맞부딪칠 때도 있다. 그래도 무가내로 견뎌내야만 한다. 차암, 이럴 때면 얄밉기 짝이 없는 엘리베이터다.우리가 타는 엘리베이터는 보통 정원 13명정도, 1000 킬로를 용납하게 되어있다. 중량초월만 되면 누구든 편가름이 없이 귀따가운 벨소리와 함께 붉은 등을 번쩍이며 축객령을 내린다. 그 사람이 과장님이든 말단 사원이든.엘리베이터는 그렇듯 공정하고 사심없다. 이런 엘리베이터를 나는 팥떡처럼 안팎이 다름없는 정인군자와 같기 부호를 그어보기도 한다. 비록 너무나 동 닿을 비유가 아닐수도 있지만. 그러면 엘리베이터를 인생의 려객렬차와 비해보는 것이 아마 제일 걸 맞는 비유일 듯도 하다. 너나가 서로 다른 행선지를 향해 오르내리고 간혹 놓칠 수도 있고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이 꼭 려객렬차를 닮은 데가 있지 않는가?이렇게 날로 도타운 정분이 깊어가고 있는 엘리베이터 속에 가담가담 파리 가 날아들어 눈꼴 시려날 때도 있다. 겨우 2층을 오르면서도 10층 높이를 오르지 못해 조갈들게 섰는 이들을 못 본체 허공을 쳐다보는 이들, 늙은이들을 밀치고 제 먼저 오르는 이들, 술과 담배에 절은 몸으로 작은 공간의 순후한 공기를 삽시간에 흐려놓는 이들....이런 이들만 보면 공리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도 말없이 보듬어안고 힘을 바쳐주는 엘리베이터에 미안하지 않은가 힐문을 하고싶은 생각이 굴뚝처럼 치솟곤 한다. 이렇게 엘리베이터는 인간의 고귀한 상정이며 알량한 소행이며를 남김없이 엿볼 수 있는 하나의 농축된 세계이다. 깨끗한 몸가짐과 맑진 속마음으로 인생렬차나 진배없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새로운 하루를 어떻게 참답게 이어나갈가 속구구를 뼈무는 것이야말로 진짜 엘리베이터를 활용하는 샐러리맨의 참 자세가 아닐가?인류는 기원전 2천 5백년 전에 벌써 애급의 피라미트 구축현장에 엘리베이터의 추형(雛形)을 등장시켰다. 오늘에 와서 엘리베이터는 현대생활의 필수도구로 됐지만 여기에는 높은 곳에 오르는데 소모되는 시간을 수직운동을 통해 단축하려는 인류의 수많은 노력이 슴배여있다. 도회지마다에서 하늘을 우습게 삿대질을 하며 치솟는 마천루와 그에 부착된 엘리베이터들, 이는 그 지역 도회지의 발전의 징표이고 고신 과학기술의 표현일뿐더러 인류의 문명이 더 높은 곳을 향해 뻗어 오르려는 상징이 아닐까?날에 날 따라 높이 오르고있는 마천루와 그것을 톺는 엘리베이터는 고소(高所)공포증과 페소(閉所)공포증을 동시에 지니고있다고 했다. 그리고 현대인들이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병증에 시달리고있다고 했다. 허나 경쟁과 승자를 기대하는 시대에 우리는 그 공포를 억누르고 그 자비감을 씻어야한다. 보다 차원 높고 보다 황홀한 희망의 상아탑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뛰쳐나오고 끊임없이 올라야 한다. 하여 마냥 엘리베이터 앞에 마주서면 청운(靑雲)을 꿈꾸는 나는 주문처럼 좌우명 하나를 맘속으로 되뇌여보곤 한다.--- 열려라, 그리고 올라라!
101    [수필]아빠의 하늘 댓글:  조회:3535  추천:73  2007-06-29
어느날인가 소학에 다니는 딸애가 느닷없이 내게 선물꾸러미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웬일이냐 따져물으니 오늘이 곧바로 부친절이란다. 그런 명절도 있었나 설둥해하며 무척 감격한 기분으로 딸애의 선물꾸러미를 헤쳤다. 색종이로 곱벌로 감싼 그것은 영화디스크 한 장이였다. 영화에 편집광(偏執狂 )적인 애착을 가지고있는 나의 기호를 헤아려 딸애는 선물도 꼭 내 흥심에 사개맞게 사온것이였다. 영화 또한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명감독 기다노.다께(北野 武)의 작품 <<불꽃>>이였다.기실 나는 이 영화디스크를 언녕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딸애가 사온 것은 시장의 불법장사군들이 자작한 해적판이였다. 거듭 보았었고 영상도 씨원치못한 그것을 나는 VCD에 밀어넣었다. 부친절에 딸애가 열심히 마련한 선물이라는 감회에 쌓여 다시한번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라는 호칭을 조금은 부끄럽고 서먹서먹하면서도 벅차게 듣던때가 어제같은데 어언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딸애가 태여난지 며칠안되던날 애의 기관지에 이상이 있으니 한번 검진을 하라는 의사들의 권장이 있었다.나는 사뭇 긴장해지는 마음을 안추리며 딸애를 투시계기아래 눕혔다.의사가 주먹보다 조금 더 작은 모래주머니를 딸애의 양손목에 지눌러놓자 딸애는 포박된 어린 양처럼 팔다리 한번 바동이지 못한채 꼼짝 못하고 누워있었다. 그 모습이 내게는 그저 애모쁘기만 하였다. 의사들이 나에게 병력지를 내밀었다. 아이 이름을 짓지못했으면 그저 번호라도 달라고 했다. 허나 애가 태여나기전에 벌써 10여개의 이름중에서 사금일 듯 지은 이름이 있었다. 딸애의 이름은 소정, 작은 정자라는 뜻이다. 호젓한 명소에 작고 아담한 정자하나, 그곁에 애솔도 자라고 풀과 꽃도 어우러져 있고 개여울도 에돌아 흐르는 작은 정자, 딸애에게 몰부어지는 나의 애모쁜 정감을 담은 이름이였다. 그리고 성명을 적는 란곁에 년령을 적는 란이 있었다. 나의 펜은 그만 주춤 멈추어서고 말았다. 딸애는 이제 겨우 태여난지 여덟날밖에 되지않았던 것이다. 몇세라는 세(歲)자를 지우고 그란에 여덟날이라고 딸애의 나이를 적으며 나는 내곁에 살며시 다가온 하나의 작은 생명을 피부로 실감했고 이 여리디여린 생명을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바쳐야겠다는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무언중에 머금게 되었다. 그것이 아빠라는 명분으로 처음 내가 가져보는 상념이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훌륭한 아빠의 의무를 리행해 나가지못한것같다. 청빈한 문인으로 내내 생활에 쪼들렸고 엉덩이 붙일 달팽이집조차 마련치못했던 나는 한달도 못된 강보의 딸애를 안고 또 이사길에 올라야했다. 들추는 운전실에서 엔징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우는 딸애를 조심스레 받쳐안고 나는 <<미안해 정아, 미안해 정아>> 하고 몇번이고 속으로 되뇌였다. 일곱 번째로 이사했다는 집이 겨우 8평방, 명색이 작가랍시고 지고이고다니던 수천권에 달하는 책짐을 한쪽벽에 담벽마냥 쌓아놓으니 집에는 누울 자리조차 변변치못했다. 다리가 책상밑으로 들어가고 머리가 가마쪽에 바싹 다가붙은 불썽 사나운 형국이였다. 그집에서 딸애는 돌생일까지 자랐다. 아무런 탈도 없던 애들이 너나가 기다리는 생일이면 탈이 생긴다고하던 늙은네들의 말이 그른데 없었다. 돌생일을 나흘 앞두고 딸애가 평가마에 손을 데이였던 것이다. 원체 다람이굴같이 작은집이라 딸애의 안전을 두고 밤을 설치며 걱정했지만 사달은 그만 나고야말았다. 손에 붕대를 칭칭 동이고 딸애는 생일을 맞았다. 생일상우에 차려진 풍성한 먹거리를 덥석 잡아쥐다 손이 아파 딸애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붕대를 동인 손이 생일 비디오에 그대로 찍혀 나왔다. 지금도 간혹 생일 테프를 다시 돌려볼때면 그 모습이 내게는 살촉같이 에이는 시각의 아픔으로 도져온다. 그날저녁 붕대를 동인 딸애의 조갑지같은 손을 보듬어쥐며 나는 못나게도 잠든 딸애의 볼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기다려 이제 아빠가...>>하고 자기도 모를 말을 되뇌이고 또 되뇌이였다. 허나 궁핍하기 짝이없는 문인생활과 불우한 가정배경의 응달에 내쳐졌던 나는 여전히 훌륭한 아빠역을 연역해 나가지 못했다. 부모들의 혼인의 파렬로 딸애는 다시한번 애어린 나이에 신심을 혹사당해야 했다. 매양 어미집에서 주일에 한번꼴로 아이를 나의 셋방집에 데려오면 둘이서 쓸쓸한 주말을 보내군 했다. 나는 밤늦도록 아이와 동무하여 점토로 각종 동물을 만들어 창턱에 줄느런히 놓군했다. 허나 나의 전부의 시간을 할당해 아이와 즐겨도 아이의 눈망울에 스치는 엷은 애수같은 것을 나는 느낄수 있었다. 놀이터로 가서 애가 즐기는 뜀뛰기(蹦蹦床)를 하기도 했다. 두팔을 나래처럼 펼치고 한 마리의 새처럼 반공중으로 치솟으며 훌쩍 훌쩍 딸애는 뜀을 잘도 뛰였다.그런 딸애를 지켜보며 나는 (어서 나래를 굳혀서 저렇게 훨훨 날아야겠는데)하고 자괴와 기대에 어린 착잡한 눈길로 딸애를 지켜보군 했다...언젠가 TV의 동물세계프로에서 남극의 펭귄이 새끼낳이하는 장면을 보고 심히 감동을 받은적이 있다. 그 지옥같은 혹한속에서 펭귄은 알이 얼어터질가 저어되여 두발우에 놓고 깨운다고 했다. 장장 60여일을 한자리에 못박힌 듯 붙박혀 알을 두발우에 보듬어놓고 새끼가 시련많은 세상에로 얼골을 내밀기까지의 그 엄혹한 과정을 다름아닌 숫펭귄이, 아빠펭귄이 완수해 나가는 것이다. 아, 일개 미물같은 동물도 이러할진대 우리가 무엇이 모자라서 무엇이 두려워서 아빠라는 그 이름의 성스러움을 지키지못하고 그 의무를 잘 감당해 나가지못하는걸가?요즘 한국에서 수백만 독자들을 열루에 젖게했고 연변독자들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온 소설 <<가시고기>>는 불치에 걸린 자식을 위해 자신을 바쳐가는 아버지를 그린 감동소설이다. 몇해전 역시 한국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던 소설 <<아버지>> 역시 아버지의 바다같은 다함없는 사랑을 다룬 동일부류의 작품이였다. 일전 <<아버지>>의 작가 김현정씨가 연변 행차를 했을 때 연회석에서 곁자리에 동석을 했던 나는 어떻게 되어 이 작품이 그렇게 히트할수 있었는가 비결을 물은적이 있다. 그러자 김현정씨가 요즘의 우리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의 명분과 역활을 잘 지켜나가지못하고 있고 IMF와같은 엄혹한 시련앞에서 한 가정이나 한 개 사회는 아버지의 넓은 정감과 든든한 어깨를 수요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중들의 심태에 <<아버지>>라는 작품이 꼭 걸맞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고 그말에 동감으로 고개를 주억인적있었다. 아빠의 지혜와 힘이 수요되는 사회, 아빠의 위치가 터를 잡아햐하는 가정에서 아빠라는 명분을 지니고있는 나 그리고 당신들은 할 일이 너무나 많음을 책을 읽은 감흥보다 더 크게 느끼게 되였다. 문예기자 10여년에 오락권에 대해 도타운 정감을 가지고 있지만 원체 그닥 좋아하지 않던 녀가수 하나가 있었다. 미안한 토파이지만 그의 이름은 한홍(韓紅), 실팍하기 그지없는 몸매와 지지리 못생긴 용모로 팔등신 미녀들이 란무하는 중국의 거대한 가요계에 비집고 나서는 그녀에게서 미감대신 반감을 느꼈고 괴물을 보는듯한 눈길로 그녀를 지켜보거나 그녀가 등장하면 TV의 채널을 다른곳으로 돌려버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번 그녀가 작사작곡하고 친히 부른 노래 한수와 그 노래에 깃든 사연을 듣고 온몸으로 전율하고 말았다. 남방의 모 도회지에서 있은 진실한 사연, 젊은 아버지 하나가 네 살잡이 아들애를 데리고 놀이터로 가서 공중삭도를 탔는데 사고로 그 삭도가 추락하게 되었다. 삭도우에 탔던 전원 10여명이 모두 죽음을 당했는데 그중에서 딱 그 네 살잡이 아들애만 살아남았다. 삭도가 땅에 꼰지는 순간 아버지가 두손으로 아들애를 받쳐올려 삭도 밖으로 밀어냈던것이였다. 사고현장으로 달려왔던 구조대원들은 눈앞의 광경에 그만 목이메여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애의 아버지는 여전히 창밖으로 두손을 쳐들어 애를 받쳐올린 모양으로 숨졌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크낙한 감동을 받고 그 지지리못났으나 마음만은 고왔던 한홍이, 아직 처녀 가수였던 한홍이 애의 부양을 맡아나섰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위해 즉흥으로 노래 한수를 지었다. 그 노래는 지금 한홍의 대표작으로 불리고 있다. 한수의 아름다운 서정시같은 그 노래 제목은 <<날이 밝았습니다 아버지>>이다. <<그날은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던 날이였습니다아름다움이 동반한 어느 풍경구에서 나는 무원조한 사람들의 눈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슬한 바람이 불던 그날 아버지는 내곁을 떠났습니다아버지는 두손으로 나의 새로운 탄생을 만들었습니다 날 떠나지 말아주세요 아버지이 낯설은 세계를 나혼자 어찌 걸어갈수 있으오리까 그날은 유난히도 별이밝은 밤이였습니다오랜만에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습니다아버지는 내손을 잡아주시며 희망은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날 떠나지 말아주세요 아버지 나 이제 아버질 위해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야겠는데요나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웃었습니다그리고 날이 밝았습니다>>지금 나는 색안경을 끼고 대했던 한홍의 팬으로 후딱 전변을 하고 말았을뿐더러 이 노래를 곧잘 부르군한다. 구절구절 정감을 허비는 가사를 되뇌일때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참뜻을 감흥만이 아닌 무거운 음조로 느끼군한다. 우리는 여직껏 모성에 대해서는 소리높이 찬미해왔지만 역시 사랑의 큰 줄기인 부성에 대해서는 그저 무심히 대해 온것같다. 모성과 부성은 서로 농도와 줄기가 다른 양상을 지니고 우리 모두를 보듬고 있다. 모성의 원리는 좋건 나쁘건 모든 것을 포옹하는 <<감싸는 기능>>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에 비해 부성의 원리는 주체와 객체, 선과 악, 상과 하를 분류하고 절단하는 <<끊는 기능>>으로 나타난다. 하여 아버지의 사랑은 언제나 세절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나중에 정체적으로 진하게 느낄수 있는 크고 근엄한 무언의 사랑으로 표현되여 왔던 것이다. 이 세상의 민족이나 문화권에 따라 이한 원리들은 우세하고 잠재되는 차이를 보이고있는데 우리 조선족의 경우는 모성원리가 압도적이고 부성의 원리는 잠재되여 있는 전형적인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다. 동방에서 관음사상이 모성원리를, 서방에서 기독교사상이 부성원리를 잇게 했다고 전문가들은 그 근원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기쁠 때 터치는 감탄성이나 긴요한 관두면 내뿜는 구원성에서 본능적으로 어머니를 부르지 아버지를 부르지 않는다. 이렇게 일상에서 체질화로 분류된 사회구조와 정감으로 볼때 우리의 아이들이 아버지보다 어머니을 더 따르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국의 어느 조사통계표가 보여준데 의하면 대중가요에서 즐겨 쓰는 낱말의 빈도 가운데 최고로 많은 낱말의 1위가 <<어머니>>, 허나 아버지는 겨우 108위에 처해있다고 한다. 우리 조선족 가요계에서 한때 가사는 툽상스럽기 그지없으나 십분 류행되였던 <<어머니 노래는 많고많지만 아버지 노래는 적었답니다>>는 노래가 그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재미나는 일례라 하겠다. 그만큼 이한 의식구조의 그늘아래 아버지대역을 잘 연역해 나간다는 것은 실로 쉬운일이 아니다. 영국의 가정문제 전문가인 차리드박사에 의하면 현대 아버지들이고보면 너나가 억압적인 배역속에 살아간다고 했다. <<오늘의 문명사회에서 아버지들은 무가내로 몽유병과같은 병태적인 역을 놀고 있다. 안해나 자식들에게는 부유한 상인, 수입높은 골프선수와 형형색색의 플레이보이들이 선망의 상대가 되어있다. 그들은 자기의 남편 자기의 부친이 지위와 금전을 모두 소유한 절대적인 능력자로 될수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나 가정이 지어준 모식에 따라 우리의 아버지들은 자기의 배역을 놀려 애쓰는바 그 모습이 곧바로 어떤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몽유병 환자를 방불케 하는 것이다.>> 그 무형의 억압은 아버지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실한 감정을 잃게하고 있고 영욕심을 훼멸시키고 있으며 자기의 신체를 혹사하게 하고 정신을 위축시키고 있다. 사내들은 흔히 자기는 생명의 원천이며 번식의 근본이며 경제생활의 지배자로 여기고 있고 그 의무때문에 뛰고있기에 남자들의 억압감은 날로 커만 가고있는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다싶이 류체와 자유락체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회전속도가 크면 클수록 락하속도도 큰바 훌륭한 아버지로 거듭나려하면 할수록 그 기망했던바를 이루기가 더욱 쉽지않은 것이다. 딸애가 선물한 기다노.다께의 영화 <<불꽃>>은 베니스영화제 수상작이다. 기다노. 다께가 감독과 주역을 동시에 맡은 영화는 일심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해왔던 한 경관이 사회의 비리와 몰리해속에 서서히 죽어가는 슬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세대주로서 총몫을 떠메지못하여 빈한한 가정과 불치의 병에 걸린 안해때문에 마냥 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사건해명중에 죽어간 동료의 미망인과 불구가 된 동료를 위해 수모를 무릅쓰고 사회 깡패들에게서 돈을 꾼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주인공은 나중에 경관으로서 은행을 털어 가족과 친구들에게 잠시나마의 위안을 남긴다. 그리고 해변가에서 꽃불폭죽을 터치는 안해와 아이를 지켜보며 권총으로 자결한다. 그 찬연한 웃음을 선지피와 함께 흘리며 쓰러지는 이다노 다께의 형상은 내내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이다노. 다께는 작품마다 사나이들의 정감세계를 세세히 그려내여 국제 영화계의 주목을 받고 있고 영화광인 나역시 이다노의 영화라면 사죽을 못쓴다. 기다노.다께의 영화에는 그 어떤 공식같은 것이 있다. 배우로서는 한눈금 내려온 용모로 너무나 수수하여 어덴가 데데한 보통나그네를 닮은 꼴인 그 자신이 감독과 주역을 동시에 맡는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거의 모두가 중년의 보통시민, 말단사원, 깡패소인물 등 사회변두리 인물이며 모두다 주인공이 죽는 것으로 결말을 맽는다. 영화에 녀성인물이 거의 없다싶이 되어있고 영화마다 시작과 결말부분에 하늘이 나오군 한다. 파아랗고 너넓은 하늘... 영화평론가들은 이다노. 다께에게 <<하늘 콤플렉스>>가 있다고 분석한다. 그에대해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이다노. 다께는 그것이 바로 사회와 가정에서 성숙을 보이고 있는 아버지의 심태를 보여주는 징표라 확답한다.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낱말은 여러 가지 색채로 나의 감성사전속에 오버랩되여 있다. 매양 내가 비관하고 우울에 빠졌을 때 매양 처세중에서 자기의 심리상의 엄중한 결함을 느낄 때 작가며 기자라는 명색으로 자기의 성장도로에 대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각도로 해부해 볼때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나에게 미쳐온 영향을 떼쳐버릴수가 없다. 남들과는 달리 특수한 환경속에서 자란 나에겐 아버지가 셋이다. 강보의 나를 무정히 버렸던 친아버지와 나를 부양해주신 양아버지 그리고 양아버지가 세상뜬후 다시 들어온 이붓아버지 이렇게 셋이다. 피덩이를 무정히 버렸던 친아비는 36년만에 <<내가 니아비다>>고 인제야 문뜩 나타났다. 근엄했지만 나에게만은 언젠나 사근사근했고 친자식없는 유감을 외려 사랑으로 바꿔 나에게 깡그리 몰부었던 양부는 <<문화대혁명>>에서 치른 고생을 빌미로 내가 소학 4학년때 세상을 버렸다. 그후 우리 양모를 네 번째 여자로 맞아들인 얼굴마저 추악했던 양부는 우리가정에 끝없는 불화만 안겨주다가 환갑년을 훨씬 넘긴 나이에 망령되게 또 한번의 리혼을 하고 다섯 번째 로친을 찾아갔다. 이들은 여러 가지 양상의 아버지를 내앞에 펼쳐주었다. 근엄하면서도 깊은 사랑을 가진 아버지, 무정하고 랭혹하기 짝이없는 아버지, 공리와 허영으로 골똑 찬 아버지의 모습을 연극아닌 실생활로 나의 가슴에 락인찍어 주었다. 그렇게 자라오다가 수염터기가 깊어져 이젠 나도 아버지이다. 아버지란 그 이름 의 진정한 함의는 대체 무얼가? 나의 많은 아버지들은 결국 나에게 그렇다할 확답을 주지못했다. 이는 이제부터 내가 주해를 달아나가야할 과제이다. 기다노.다께의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창을 열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언제봐도 그저 그렇고 그렇던 하늘이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새삼스레 높다.그리고 너넓다. 스모그(매연, 안개)가 짙어가는 요즘세월일지라도 마냥 흐릴줄모르는 하늘을 만들어 가야겠는데, 화초가 우거지고 개여울이 에돌아흐르는 작은 정자의 아름다운 풍경을 무양히 지켜나가기 위해선 맑고 티없는 그리고 너넓은 하늘같은 모습으로 거듭나야겠는데...요즘따라 되새겨보는 아버지라는 이름이 웬지 가슴에 무겁다…
100    고양이를 위한 랩소디 댓글:  조회:3824  추천:73  2007-06-29
수필 고양이를 위한 랩소디 김 혁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털에 고운 봄의 향기 어리우도다 금방울같이 호 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 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시 공부를 하던 때 습작 본에 베껴두었던 고월 리장희의 의 전문이다. 매양 고양이와 봄에 대해 감각적으로 체득한 이 탁월한 련상의 시를 읊조릴 때면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환영(幻影)으로 본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어제의 카텐을 북- 찢고 뛰쳐나와 내 가슴에 덥석 안긴다. 나와 함께 울고 웃고 뒹굴고 뛰놀며 동년의 릉선을 넘었던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암울했던 70년대의 중기에 나는 룡정의 어느 한 소학교의 3학년생 이였다. 검찰기관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가 악명 높은 간부학교에서 치른 역고를 빌미로 몇 년이고 병원에서 지눕이를 하고 계셔 화기를 잃은 집안은 건조했고 어두웠으며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교원사업에 바쁜 몸이라 아버지의 병시중을 위해 어머니는 도문에 있는 외할머니를 모셔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고리끼의 중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인자하디 인자하신 외할머니가 오면서 왕골로 결은 들 가방에 무언가 넣어 가지 고왔다. 그것은... 고양이였다.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귀가 세모지고 눈매가 날카롭고 동침처럼 빳빳한 수염아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온몸은 오목처럼 까맸으나 발만은 운동화를 신은 듯 하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체념한 듯 들 가방 모서리에 턱을 얹고 생소한 환경을 두릿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고양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고양이가 낮으나 모가 실린 소리로 인사처럼 울었다. 나도 고양이를 보고 반가움에 말처럼 힝- 하니 웃었다. 작은 몸체의 고양이는 참담한 기운이 돌던 우리 집안에 작지 않은 생기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만 그 고양이에 깜빡 환혹해 버렸다. 우선 고양이의 이름을 짓노라 잔 속을 끙끙 앓았다. 그때까지 만도 게딱지같은 초옥들이 한웅큼 속에 들어앉은 듯한 현 소재지였던 룡정에는 촌마을과 진배없이 짐승을 치는 집들이 적지 않았고 고양이의 이름이래야 《미미》,《묘묘》따위가 고작이였다. 자기 집 아이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의 이름을 《철호》라 툽상스럽게 지은 집까지도 있었다. 열 개도 더 되는 이름을 놓고 참외 고르듯 튕긴 끝에 나는 고양이의 이름을 《빱까》라고 지었다. 그것은 당시 십분 류행되였던 이야기그림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였는가》중의 주인공의 애명을 본따 온 것 이였다. (썩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강직한 주인공사내의 이름을 시사 받은 나의 고양이는 원체 한 마리의 암코양이였다.) 《역시 교원 집 자녀가 다르긴 달라.》 고양이의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골 살을 찡그린건 외할머니 한 분 뿐이였다. 《애가 코양이 이름을 웨 이렇게 바쁘게두 지었누?》외할매는 《빱까》라는 이름을 번지지 못해 고양이를 《바가》하고 불렀다. 그때 현 소재지의 아이들에게서는 이산한 괴질이 돌았다. 림파선염으로 턱 아래와 목 부위가 찐빵처럼 부어 올랐는데 향간에서는 그 병을 《돼지 병》이라 하였다. 민간 토방법으로 병을 치료한답시고 목에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가제를 대여 붙이곤 했다. 병이 전염 되였기에 보름 넘게 학교에 나가지도 못했다. 나도 그 병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교학하러 나가고 할머니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느라 병원에 붙박혀 있었기에 빈집에서 패잔병처럼 턱을 동이고 랑패상이 된 나를 동반해 준 것은 《빱까》뿐이였다. 함께 고무공을 굴리기도 했고 수염이 뺨에 닿이여 간질간질해 나도록 고양이와 머리를 맞대고 알고도 모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배고프면 나는 밥상에서 고양이는 문가에서 옥수수밥이라도 맛나게 먹었고 졸리면 따스한 가마 목 웃 쪽에 활등처럼 꼬부리고 다정한 형제처럼 누워 자기도 했다. 《빱까》가 동무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지겨운 홀로의 시간을 나는 어떻게 지냈을는지 모른다. 《빱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는 목에 붙였던 비곗덩이를 《빱까》의 점심 한끼로 내 주었다가 어머님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당시는 옥수수밥과 옥수수떡이 주식 이였고 고기붙이는 일년 치고 설 명절이면 겨우 맛볼수 있었던 시국, 그렇게 돈냥을 부셔 《약》대용으로 사온 고기를 고양이밥으로 홀랑 대접했으니 꾸지람을 받을 법도 했다. 여하튼《빱까》에 대한 나의 정은 날로 도타워만 갔다. 오밤중에 밖에 나갔던《빱까》의 미약한 울음소리도 오직 나만이 헤아려 듣고 문을 열어 주군 했고《빱까》는 어김없이 나의 요자리 곁에 방석과 내 털모자로 일껏 만들어 준 잠자리에 기여 들어 자군 했다. 추우면 나의 이불 속에 곧잘 기여 들곤 했다. 설 명절에 일가친척이 한 구들 미여 지게 모였을 때도 어김없이 내 품만을 찾아 드는《빱까》를 보고 모두들은 고양이와 참으로 자별난 사이라고 혀를 차군 했다. 피페했던 당시의 문화환경에서 가장 히트를 친 영화 한 부가 있었다.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였다. 영화를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보았던 나는 이렇게 좋은 영화를 《빱까》에게도 보여야지 하고《빱까》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갔다. 새끼를 품은 캥거루처럼《빱까》를 외투 속에 품고 갔다. 영화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여 주인공의 불우한 운명을 두고 사처에서 훌쩍이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에 섞여 간간이 고양이 울음소리도 새여 나왔다. 관중들의 경아와 불만에 찬 눈길 속에 영화관 관리일군에게 귀를 잡혀 나는 문밖으로 축출 당하고 말았다. 이와 류사한 일은 후에도 있었다. 병상에 누웠는 아버지에게 그 사이 훌쩍 웃자란 《빱까》를 구경시키러 갔다가 간호원의 사이렌 같은 비명 속에 허겁지겁 병동을 뛰쳐나온 적도 있다. 나는 그 무슨 남의 장독대를 깨뜨린다던가 길가는 계집애들 머리 태를 쥐여 당기는 그런 악동이가 아니였다. 그저 아버지도 본지가 무척 오래된 《빱까》를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었을 뿐 이였다. 어느 해 여름, 우리가 쓰고있는 사기그릇을 만들어 내는 당산(唐山) 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놀래 운 대 지진이 일었다. 그 지진의 여파로 우리 이곳에서도 《대지진 설(說)》이 떠돌아 모두들은 공포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 즈음 소조공부를 하면서 주제모임으로《지진이 나면 선참 누구를 구하겠는가?》하는 대 토론이 벌어 지였다. 누구는 오보호 할머니를, 누구는 영예군인 아저씨를, 누구는 모주석 초상을 선참 구하겠다고 격앙된 목청들이였는데 나만은 선참 《빱까》를 구하겠다고 말해 《계급립장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학급 간부들에게서 질책을 받았다. 초동머리 애들에게서까지도 정치와 불신의 분위기를 짙게 체취할수 있었던 그 기형의 세월에 남의 집 양자로 자라면서 내성적이고 섬약한 기질을 가졌던 나에게서《빱까》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친구였으며 나에게 있어서 가자 값진 보물이였다. 하여 동네의 코북데기 하나가 본보기 극(樣 戱)《홍등기》음악이 든 축음기판 한 장, 영용한 팔레스티나유격대어린이의 사적을 그린 그림책 한권, 요지경 하나, 그리고 살구 씨 백 알로《빱까》를 바꾸려 했을 때 그 풍성한 조건 앞에서도 나는 하도야마의 조건을 물리치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홍등기》중의 혁명자 리옥화마냥 단연 그 유혹의 《물물교환》을 단연 거절해 버렸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책이 많은 아이》혹은《고양이가 있는 집 아이》로 불리 웠다. 《빱까》의 그 자그만 몸집이 봄 들어 신속하게 붇기 시작했다.《빱까》의 배를 만져보고 나서 할머니는 고양이가 임신했다고 했다. 《임신이라니요?》 경아의 빛을 띄고있는 나의 볼을 다독여 주며 외할머니는《빱까》가 곧 새끼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맙시사! 《빱까》하나만도 용용 귀여워 죽겠는데《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가 몇 마리 또 생겨난단 말인가! 지나친 기쁨에 나는 삭신이 막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빱까》를 꼭 안고 집안을 맴돌며 열뜬 사람처럼 당시의 류행가를 목청 깨져라 불렀다. 《북경의 금산에 금빛해살 비추네 모주석 그이는 금빛의 태양》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 따라 까닭 모를 기묘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자 웃방에는 난데없는 종이박스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속에 맙시사!《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 네 마리가 눈도 뜨지 못한 채 가지런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양이들은 꽃잎 같은 입술을 열며 미약한 소리로《애웅, 애웅!》울어 댔다. 외할머니는 병원의 아버지에게 보낼 명태 국에서 많이 덜어 밥을 말아《빱까》에게 내 주었다. 우리 집은 경사가 난 집 같았고 숫제 명절기분 이였다. 동네에서도 희한해 하며 구경을 왔고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나는 동네아이들에게서 살구 씨 열 알 씩 례물로 받고서야 새끼 고양이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일주일 가량 되자 제법 구들에서 뛰여 놀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책상다리며 이불장 모서리며를 긁어 자리를 내여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았다. 병상에 있던 아버지도《빱까》가 《4태자》를 낳은걸 축하해 병원의 링게르 주사 줄을 결어 만든《금붕어》손 노리개를 나에게 보내 왔다. 그《금붕어》에 줄을 매여 책상모서리에 달아 놓으니 새끼고양이들은 물고기 사냥이라도 하는 듯 《금붕어》를 툭툭 건드리며 재롱을 부렸다. 그 귀여운 새끼 고양이들이 다치면 부서질라 나는 감히 시름 놓고 품에 안아 보지조차 못했다. 그러다 한달, 꼭 한 달만 이였다. 새끼고양이에게 깜박 환혹(幻惑)되여 있는 나의 애련한 마음에 강타를 안겨준 변고가 있었다. 하학하여 돌아와 보니 새끼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고 따져 물으니 외할머니가 어쩔 바를 모르며 더듬이며 말했다. 새끼고양이가 잃어 졌다는 것 이였다. 나의 눈앞에서 진짜배기로 그 풍문의 지진이 이는 듯 했다. 나는 책가방을 멘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황소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점심 녘에 햇볕 쪼임을 시키느라 내놓았던 고양이들이 뒤 바자 틈새로 사라진 것 이였다. 새끼를 잃은 《빱까》는 지붕우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가슴 긁는 소리로 울어댔다. 《빱까》는 지붕 우에서 목청 짜내 울고《나는 지붕아래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우리 집 뒤 바자와 린접된곳은 거울 틀이며 상장 틀을 생산하는 공예미술공장이였다. 그곳 로동자들이 고양이를 채여 간 것 같다고 단정하고 할머니는 공장장을 찾아가 따졌다. 매일이고 울음을 달고있는 나의 지청구에 밀려 할머니는 여러 번 공장지도부를 찾았고 새끼고양이를 찾을 길 없는 공장 측에서는 그 성화에 못 이겨 적당한 배상금을 내 주었다. 새끼고양이 한 마리에 50전씩 쳐서 도합 2원을 내 주었다. 그래 고작 이것이 새끼를 잃은《빱까》의 아린 상처와 눈물에 대한 보상이란 말인가? 나는 코 잔등이 시큰해 나서 울먹울먹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 돈을 특별히 아껴 보관해 두었다가 당시의 아동명작 이였던 《고옥보》의 편단을 뽑아 묶은 소책자 《밤중에 우는 닭》을 샀다. 그 나의 동년의 정감이 배인 책이 지금도 나의 서가의 안쪽 깊숙이 꽂혀져 있다. 내가 소학을 마칠 무렵, 지긋지긋한 투병생활4년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아주 훌륭한 공무원 이였던 아버지인지라 룡정뿐만 아니라 대소, 의란, 백금, 등지에서까지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백여 명을 넘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변고와 그렇게 많이 몰려 든 사람들, 슬픔에 자기를 던지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놀란 나머지 나는 울음조차 울지 못했다. 그저 현관 구석 쪽에서《빱까》를 품에 안고 고양이과 사람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서 옹송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고향의 말발굽산 기슭에 묻었다.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빱까》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외할머니가 꾸짖었지만 왜였던지 부득부득 우겨가며 《빱까》를 산에까지 데리고 갔다. 붉은 흙을 헤치고 아버지를 묻었다. 봉분을 쌓은 뒤 검찰계통의 아버지의 옛 친우들이 권총을 빼들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랐던지《빱까》가 내 품에서 후닥닥 빠져 나와 산더기 아래로 내 뛰기 시작했다. 《빱까야, 빱까!-》 갈린 소리를 지르며 나는 덴겁히《빱까》의 뒤를 쫓아갔다. 나무그루에 걸려 자빠지고 풀대 가지에 손을 긁히면서도《빱까》를 쫓아갔다. 그러다 어느 한 커다란 봉분앞에서《빱까》가 멈춰 섰다. 멈춰 서서는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오는 나를 말똥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때는 늦가을이였고 추위 때문 이였는지 아니면 경황때문 이였던지《빱까》는 몹시도 떨고 있었다. 나는 덮쳐 가《빱까》를 품에 안았다. 그제야 하늘같은 슬픔이 감지되었고 나는 못나게도 남의 봉분을 바람막이로 삼고 앉아 《빱까》와 함께 가냘프게 울기 시작했다. 새끼를 잃은 뒤《빱까》는 퍽 수척해 진 듯 했다. 일전과는 달리 사람 곁에 오기도 싫어했고 고기 국에 밥을 말아 주어도 잘 먹지를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며칠 안 되어《빱까》는 집을 나가 버렸다. 하루가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빱까》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기재에 의하면 고양이가 사람 집에 살고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5천년 이상 된다고 한다. 이면에서 개에 비해서는 4만 5천년이나 늦다고 한다. 성경에도 고양이를 언급한 구절만은 없다. 허나 동년의 이 한 단락의 정감의 경력 때문인지 나는 동물들 중에서 고양이를 가장 편애하는 쪽이다. 인간과 가장 도타운 신변의 또 다른 동물인 개에 비해서도 그렇다. 어찌 보면 고양이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한 두 마디의 호령에도 엎디고 기고 혀를 빼무는 개에 비해볼 때 고양이의 자존은 더 높은 것이다. 고양이와《사촌지간》인 호랑이며, 치타며, 사자들만 봐도 고양이 가문의 위용이 엿보인다. 아직도 그들과 비슷한 《야성》을 고양이는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야성》은 인간이 그들에게 들 씌운 정의이고 그들 쪽의 정의를 보면 그것은 곧바로 인간이면 너나가 갈구하는 자유인 것이다. 흔히들 사람의 성격을 동물에 빗댈 때 사회 친화적 인간형을 《개 과(科)》로 분류하고 홀로 서기 인간형을《고양이 과》로 분류한다. 하여서인지 전설이나 이야기, 지어 아이들의 그림영화에서 까지 고양이는 주인공 역을 놀지 못한다. 어느 시공간, 어느 짐승의 집단에까지도 인간들과 꼭 같은 사회질서와 선악대립을 부여하고《개 과》의 영웅을 선호해야 직성이 풀려하는 사회의 진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보면 고양이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개성과 매력, 더 많은 랑만과 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유아적인 발상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던 동년에서 멀리 지나온 내가 의연히, 그리고 다시금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는 리유다. 촬영에 애호가 있었던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갈매기》표 사진기로 나와《빱까》가 함께 있는 장면을 남겼다. 사진 속의 열살 둥이 인 나와 《빱까》는 유난히 반짝이는 눈매를 하고 앞쪽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색 바랜 사진조차 지금은 잃어버려 없다. 모 잡지사에서 "인간과 동물" 란에 나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적은 글을 실으면서 분실해 버려《빱까》는 그저 잡지 속에 부잇한 영상으로 찍혀서 남았다. 매양 그 잡지를 뒤적여 낼 때마다 나는 천지에 자치도 없이 사라진《빱까》의 이름을 되 뇌여 보군 한다. 내 동년의 꿈과 내 동년의 정감을 지니고 부식된 기억의 어둠 속을 홀로 바람처럼 가버린 한 마리의 령물(靈物)을... 오, 나의 사랑 나의《빱까》!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99    영화, 그 현란한 중독 댓글:  조회:3664  추천:75  2007-06-29
                                          이렇게 광언(狂言)할 정도로 나는 극성스런 영화광이다. 개구쟁이 시절부터 나는 영화에 사로잡힌 아이였었다. 술래잡이, 유리알 치기, 썰매타기 등등으로 그 놀음거리들이 많았지만 스크린(銀幕)처럼 무진한 흥심을 포박(捕縛)해 가는 유혹은 더 없었다.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는 나는 짬만 나면 영화관으로 달려가곤 했고 그 무슨 일과를 완수하듯이 새로 개봉된 영화들을 낱낱이 빠짐없이 보곤 했다. 내가 동년을 보낸 70년대는 영화의 전성시대였다. 고색 창연한 자그만 현 소재지였던 나의 고향 룡정에서 겨우 세 곳밖에 없는 영화관은 뭇 사람들의 신심을 가장 사로잡는 곳 이였다. 영화관옥상의 이마 전에 떠인 영화포스터는 달마다 새것으로 바뀌곤 했는데 달 초가 되여 영화포스터를 바꿀 때면 사람들은 영화관 앞에 웅기중기 모여들곤 했다. 명절 맞는 기분 같은 얼굴들을 하고 새로 걸린 영화포스타를 목덜미 시큰하게 쳐다보며 새 영화의 상영일시를 깐깐히 읽곤 했다. 너나가 영화를 좋아하는 지라 아침 7시 반에 첫 영화가 있었고 9시 반, 11시 반, 2시 반, 5시 반, 7시 반, 다시 9시 반으로 영화방영이 하루종일 빼곡이 배치되여 있었다. 좋은 영화가 나오면 아침 5시 반과 저녁 11시 반으로 상영차수를 증가하기도 했다. 그래도 영화관은 언제 보나 초 만원이였다. 영화관에서의 관람표 구입은 한차례의 전투나 다름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영화관 매표구 앞에는 해바라기 씨 기름 받으러 량점(糧店)에 몰려들듯이 사람들이 떼지어 기다린다. 그렇게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족히 100여명은 넘겼다. 그러다 매표구의 창에 드리워졌던 문발이 걷히면 그것을 신호로 하듯이 줄은 삽시간에 흩어지고 모두들은 크레물리궁을 점령하는 쏘련 전사들처럼 매표구를 향해 덮쳐간다. 비집고 밀고 헤치고 사람우에 사람이 덮치기도 한다. 손 하나만 들어가게 만든 비좁은 매표구입구로 승벽내기로 손을 밀어 넣는다. 그러다 손을 빼지 못해 비명을 지르고 서로 낯을 붉히고 싸움질도 벌어진다. 하여 그때 영화관의 매표구마다는 부역하는 죄수들의 감방처럼 쇠 살이 대여져 있었다. 표를 사든 사람은 복 받은 사람처럼 밝은 표정을 짓고 표를 수기처럼 흔들며 사람 숲을 헤치고 나온다. 표가 다 팔려 미처 사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영화관으로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때면 꼭 마치 귀향하는 막차의 차표를 사지 못한 사람 같은 초조한 얼굴들이다. 그 박절함과 열정은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 표를 미처 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림시표를 팔기도 했다. 림시표는 말 그대로 림시로 발급하기에 자리가 없다. 맨 뒤 켠 아니면 량 켠의 인도에 서서 영화를 봐야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맥풀려 오금이 접힐 듯 했지만 그런 대가라도 치러가며 영화를 보는 것이 너 나의 소원이였다. 림시표라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리카난민같이 불쌍한 표정으로 영화가 반 남아 상영되도록 영화관 앞을 뜨지 못해 한다. 영화관에 들어서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로 들어선듯 열뜬 기분을 감추지 못해한다. 소리쳐 서로를 부르고 영화 표를 쳐들고 번호를 소리내여 읽으며 자기자리를 찾아 앉는다. 영화관에서는 상영 종을 두 번 울리곤 했다. 예고종이 먼저 울리고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것이다. 그사이를 10분의 간격을 두었다. 그러나 그 10분의 시간이 나에게는 10년 맞잡이로 기다려 내기가 바쁘다. 드디여 영화관 천장에 달린 무리 등이 꺼지고 영사기의 빛 보라가 물줄기처럼 하얀 영사 막을 향해 쏟아질 때면 사람들은 흥분해서 갈채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곤 했다. 어둠 속에서 혹간 뒤돌아보면 수백 쌍의 유난히도 빛나는 눈동자들이 일제히 영사 막 쪽을 향해 있다. 그 어둠 속에 반짝이는 격조(格調)는 그 시기를 지나온 사람이 아니면 감득(感得)해 내는 수가 없을 것이다. 암울했던 70년대, 중국의 영화관들에서는 모택동의 부인 강청이 만들어낸 등 이른바 만을 상영했다. 영화에 앞서 기록영화를 꼭꼭 끼워 넣곤 했다. 당의 지도자들이 외국지도자들을 접견하는 영화가 아니면 와 같은 과학기록편이였다. 그 세월에는 새로 개봉하는 영화가 많지 못했다. 주로 혁명적 본보기 극영화들 뿐 이였다. 언제 봐도 , , , ... 등 8부의 영화를 낡은 레코드 풀 듯이 되풀이했고 쏘련영화 과 을 그 사이사이에 방영하곤 했다. 그런 영화라도 우리는 싫증을 몰랐다. 독실한 신자가 경서를 되새겨 읽듯이 보고보고 또 보았다. 당시 프로테리아사상으로 철저히 무장 되였던 사람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도사 레닌의 영화만큼 우리들의 심성을 매료시킨 영화는 없었다. 레닌 시리즈영화 속에 나오는 레닌의 신변 근위병 와씰리를 우리는 제일 좋아했다. 이 와씰리의 대사는 우리가 가장 즐겨 외우는 구절이였다. 영화 속에서 마뜨예브가 레닌을 암살하려는 적들의 음모를 알리려 총탄을 맞으며 하고 외치며 창문으로 뛰여 내리는 장면은 당시 우리가 뽑은 제1위 경전장면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장면을 재현해 층집이나 다리우에서 겁 없이 뛰여내리곤 했다. 그 장면을 모방하다 우리 학교의 한 애는 다리뼈를 분질러 먹고 한 학기 휴학한 일도 있었다. 또 어느 한번, 보이니치의 동명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를 보고 주인공의 오금 꺾을 줄 모르는 강직한 성미에 나는 깜박 심취되여 버렸다. 지어 주인공의 얼굴에 생긴 기다란 칼자국 흉터마저도 사나이의 그 어떤 강의를 대변해주는 징표처럼 멋지게 안겨왔다. 그래서 미술도료로 얼굴에 인공칼자국을 열심히 새겼다. 그 모양을 보고 멋지다며 반 급의 애들이 자기 얼굴에도 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이렇게 서로가 네 얼골 내 얼골에 을 새기는 해괴한 짓거리가 벌어졌다. 저마다 선명한 을 달고 학교로 등교했다. 첫 수업시간은 한어시간, 교실로 들어섰던 한어과 교원의 입으로 맙시사!하는 가는 비명이 새여나갔고 코마루에서 안경이 껑충 막대 잡고 뛰기를 하였다. 반 급 남자애들은 정원 28명, 그중 반장 하나만 빼놓고 모두의 얼굴에 선명한 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반주임이 달려왔고 교장선생이 달려왔다. 요란하게 신칙을 당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영화 속의 혁명자의 본을 내였다는 말에 교장선생도 막무가내라는 듯 웃으면서 그에 그치고 말았다. 이렇게 외국영화가 나오면, 알바니아 영화나 루마니아영화만 나오면 우리는 금세 붉은 색을 본 투우처럼 더 흥분해했다. 그것은 맨 날 옥수수떡을 먹다가 허연 쌀밥을 먹는 듯한 감미로운 맛의 느낌이였다. 그 이방인들의 멋진 체격과 이색적인 모습, 호방한 성격과 유머적인 대사들을 나는 좋아했다. 루마니아 영화 를 보고는 침착하게 해바라기 씨를 까며 륙혈포로 적수를 쏴 넘기는 독특한 제슈체어(行爲)에 홀딱 반해 입안에 구창이 생길 때까지 해바라기를 까기도 하였고 프랑스영화 를 보고는 주인공의 본을 내여 남의 집 바람벽이나 담에 졸로의 징표인 Z를 커다랗게 써놓기도 하였다. 현 시가지에서는 때때로 로천영화도 돌리곤 했다. 그날이 우리에겐 명절이였다. 체육장이나 학교마당에서 커다란 향연이 펼쳐지군 했다. 어둘 녘에 방영원들이 마당에 하얀 영사 막을 칠 때부터 우리는 좋은 자리를 지키느라 찬 땅에 앉아있군 했다. 모두들 엉덩이에 깔 쪽 걸상이나 신문지들을 들고 그렇게 많이 몰려들곤 했다. 보았던 영화일지라도 쪼그리고 앉거나 엉거주춤 선 불편한 자세로 마지막까지 보군 했다. 그 즈음 조선영화 한 부가 현 시가지는 물론 온 중국을 들썩케 했다. , 지주에게 가혹한 억압을 받던 한 가정의 오누이가 나중에는 혁명의 길에 오르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의 주제가는 그후로 장장 10년 동안 모두가 가장 즐겨 부르는 톱 가요로 떠올랐다. 광폭영화였는데 아직 룡정이나 화룡과 같은 현의 영화관들에는 광폭렌즈와 광폭영사막 설비가 마련되지 못했던지라 모두들 뻐스를 타고 연길로 가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 기간 연길로 오는 뻐스는 마냥 초만원 이였고 식당, 려관이 관람객들로 넘쳐 났으며 영화관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썩 후에 집계에서 본데 의하면 연변지역에서 이 영화를 4천 여차 방영하였고 관람객이 연인수로 258만 7천 여명에 달하여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흥행기록을 올리고 있었다. 중국관중들의 눈물샘을 무던히도 자극하였던 감정색채가 짙은 영화는 10년간 줄곧 정치운동에만 매여 경직 되였던 사람들의 정감을 폭팔 하듯 건드렸던 것이다. 요즘 같은 호(好)세월에 우리는 구태여 영화관을 찾지 않고도 안방에서도 비디오로, VCD로 DVD로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 컴퓨터의 동영상으로도 지어 핸드폰의 윈도우로도 무선인터넷서비스에 힘입어 신작영화예고편을 볼 수 있는 살맛 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영화관이라는 어제 날의 질박한 향수의 장소는 나의 심방에 색 바랜 사진처럼 클로즈업(特寫)되여 있다. 그 애틋한 감수를 못 이겨 문예지에 라는 산문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영화를 테잎들을 본격적으로 수장하기 시작한 것 은 6, 7년 전부터였다. 불운한 운명을 지니고 태여난 내게서 행복은 극장의 맨 뒤끝에서 본 영화처럼 거리가 멀었다. 청빈한 문인신세로 가정이 깨여진 뒤로 수천 권의 책과 비디오 하나만 달랑 지니고 북대의 작은 셋방 집에서 몇 해를 홀로 지냈다. 그때 나의 외로움을 크게 달래준 것이 바로 영화였다. 홀로 만의 지지리 한 밤을 이겨내려고 비디오 대여 점에서 매일이고 테잎을 3개씩 빌려다 보았다. 97년 한해 여름사이에 만도 나는 무려 300여부의 영화를 빌려 보았다. 세계영화사의 경전은 물론 할리우드의 흥행작이며 인도의 가무영화이며 홍콩의 깽 영화며 지어 애니메이션영화까지도 걸탐스레 보았다. 북대부근의 비디오대여 점을 다 돌고는 지어 철남 멀리의 대여 점에까지 뻐스를 타고 가서 테잎을 빌려다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 그저 이렇게 시간 죽이기로 좋은 영화들을 감흥으로 흘려보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영화들을 본격적으로 소장하기 시작했다. 먼저 세계명작개편영화로부터 소장했다. 세익스피어의 이며 살론 브론데의 며 마거릿 미첼의 며 유고의 이며... 문자로만 읽었던 그 명작들이 아름다운 화면과 정감 어린 육성으로 내 눈앞에 펼쳐졌고 나는 새로운 련인과 일견종정(一見鐘情)에 빠지듯 영화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세계영화사의 경전들을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영화천국인 할리우드의 대작들을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중국신예감독들의 전위적인 영화를 사들였고 그 다음에는 요즘 폭발 적인 흥행 세를 보이고있는 한국영화들을 사들였다. 지어 영화평론가들이 라고 지칭하는 홍콩 무협영화나 깽 영화도 선택해 보면서 그 폭력미학이 주는 류다른 감수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박봉을 깨서는 사들여 소장한 영화가 테잎으로, DVD디스크로 저그만치 3천 여부, 우리 집은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다. 영화를 즐기다나니 영화간행물도 많이 사본다. , , 와도 같은 잡지도 달마다 빠짐없이 사들여서는 새로운 개봉 작을 주시해보고 톱스타들의 최근 동향을 알고 경전에 대한 해석을 까근하게 읽어보기도 한다. 중앙TV제8채널의 , 북경TV의 , 길림TV문체채널의 같은 프로들을 나는 다른 프로들을 제쳐놓고 본다. 집의 침실이며 주방 지어 화장실 문에까지 영화잡지에 끼여온 영화포스터가 붙어있고 나의 핸드폰 벨소리도 쏘련 영화 의 주제곡으로 설정되여 흘러나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주제곡이다. 10여년 동안 문예기자로 뛰면서 문화전란을 꾸리는 와중에 영화동태들을 열심히 편집소개, 많은 문화부 기자들 중에서 나만이 영화동태분석을 능수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하여 영화발행공사로부터 영화 평론원증을 지급 받았고 년 말이면 영화발행공사 선전과로부터 장려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아편의 원액이 주는 것과도 같은 영화의 궁극적인 맛에 나는 차츰차츰 빠져들고 말았다. 시와 노래, 가무, 회화, 조각과 건축에 이어 인류는 영화라는 쟝르를 탄생시켰다. 각 쟝르의 예술은 모두 인류가 세계를 관찰하는 하나 또 하나의 눈이다. 때문에 영화는 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유희적 욕망을 충족시켜줌과 동시에 사람들의 지적 수요에 응분의 감수를 안겨주는 영화는 좋은 발명임에 틀림없다. 영화를 보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라면 영화 속의 기복다단한 스토리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취미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삶 그 자체라고 볼수 있지 않을가! , 의 메가폰을 잡은 내가 좋아하는 중국제5대감독 진개가는 베니스영화제의 기자초대회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이 말은 나 같은 편집광 적인 영화애호가들의 심성에 꼭 맞는 말이라 하겠다. 이렇게 내 삶을 충족히 해주는 또 하나의 친구-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무지무지 좋아한다. □        
98    춤추는 엔돌핀 댓글:  조회:3054  추천:73  2007-06-29
. 수필 . 춤추는 엔돌핀 김 혁 안해가 점 보러 갔다왔다. 가탈만 자꾸 지는 운수 사나운 팔자인 나를 위한답시고 외지에까지 가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점을 보고 왔다. 저녁 무렵에야 들어 선 안해의 표정은 썩 개운치 못했다. 점괘가 좋지 못하다고 했다. 이렇게 나쁜 점괘는 처음 본다며 점쟁이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다. 뭐 내 인생이 같은 팔자라나... 무감각한 채 책을 펼쳐들고 있는 나를 나무람하며 무언가 나에게 내밀었다. 붉은팥을 골 막하니 채워 넣은 작은 주머니. 를 한답시고 그것을 저녁마다 베개 밑에 깔고 자란다. 내내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해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안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다. 미국병사 몇 명이 찦차를 몰고 경축회장으로 가다가 차 사고를 내고 죽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충돌에 머리가 묵사발이 된 그들이 웬일인지 대단히 행복한 표정,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흥미를 가지고 과학자들이 죽음, 나아가서 행복의 의미, 쾌락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대에서 신경학을 강의하고 있는 포스터 올리브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이에 대한 연구를 장기간 진행해 왔다. 그들은 실험용 쥐들에게 알콜, 코카인, 암페타민, 니코틴, 식염수 등을 투여해 보았다. 그 결과 알콜, 코카인, 암 세포 등을 투여했을 때 쥐의 뇌 부위에서 어떤 물질의 분비 량이 급격히 증가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돌로 죽은 그 미국병사들의 뇌 속에도 이러한 물질이 대량 분비되어 있었다. 그 물질을 엔돌핀(endorphin)이라 부른다. 엔돌핀은 사실 단어 자체만 놓고 보면 체내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진정제, 즉 '몸속의 아편'을 뜻하는 말이다. 몸에 통증자극이 가해질 때 뇌는 상처를 입었다고 판단해 자연진통제인 엔돌핀을 분비하는데 통증이 심할수록 엔돌핀 분비가 최고도에 달하여 극단 상황에 대처하게 되는 것이다. 엔돌핀은 마약 모르핀보다 100배정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엔돌핀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에 대항해 통증, 불안 등을 경감시켜 즐거움과 진통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아주 고마운 물질이다. 인간의 린색한 뇌는 일생동안 그 엔돌핀을 이쑤시개 끝으로 찍어 맛볼 정도로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100번의 구애(求愛)끝에 사랑의 승낙을 받았을 때, 자식을 보지 못해 내내 고생하다 중년의 나이에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생각지도 않던 먼 친척에게서 거액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 달랑 한 장만 쥔 복권이 거액으로 당첨됐을 때... 이런 환희에도 엔돌핀은 좁쌀눈만큼 나온다. 그런데 죽음에 림박하면 엔돌핀이 마지막 축복처럼 샤워라도 하듯이 뿌려 진다고 한다. 어깨가 처져있는 안해에게 그 무슨 의대교수처럼 인체호르몬에 대해 신나게 강의하며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엔돌핀 분비 량이 많은 사람이라고 웃어 보였다. . 안해가 받아 온 점괘를 되여보며 나는 지지부진한 한 자기의 인생을 은연중 되새김질 해 보았다.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정말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 왔다. 어떻게 되다보니 내가 걸어 온 길은 다른 사람들이 여유 작작 노량으로 걷고 있는 탄탄대로가 아닌 뒤안길, 아니면 국도를 벗어난 진창 길이 아닌가 싶다. 삶의 길이 너무나 울퉁불퉁했다. 연거번거 들이닥치는 불상사가 호된 일격처럼 육신을 강타했고 무릎이 탁탁 접히는 것 같은 고통이 정신을 촛농처럼 만들어버리곤 했다. 세상살이의 올곧지 못함에 부대껴온 나날 이였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것 과 내 인생은 거리가 멀었다. 그저 구질구질하고 고달픈 것의 련속이였다. 장애물경주에 나선 사람처럼 그런 것들을 나는 회피할 수 없었다. 때로 운이 좋아 작은 휴식과 성취를 맛볼 수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굽이 우에 떠올랐다 꺼지고 마는 거품과도 같은 것 이였다. 그리고 세상은 한번도 나에게 출구를 내여 주지 않았다. 설사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조금 보였다하더라도 언제나 개구멍을 지나는 것 같은 주눅들림과 비굴함으로 그것을 통과하게 했을 뿐. 허나 나는 중력에 굴복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였다. 세상의 불쾌한 먼지와 소음의 기류를 덮어쓰고 나는 절망감의 정체와 아득바득 싸웠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어둠에 적응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나를 고통의 류황불에서 빠져 나오게 한 구원의 빛이 바로 문학 이였다. 절망의 정체를 저울질하게 하는 도구, 말 못 할 사정과 가슴 터질 슬픔을 상쇠 해 주는 엔돌핀이 바로 문학 이였다. 문학, 그 비 실제적인 효응에 대한 매혹을 기르며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탐미해 들었다.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환금성이 중요시되는 세월에 하필이면 이 세상 가장 열렬한 문학 광으로 등장했다. 현학적인 표현이 넘치는 왕성한 실험으로 현실과 환상사이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자신의 령역을 만들었다. 내 작품의 제재는 모두가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의 구도 속에서의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그 개체가 어떻게 부서져 가는지를 갈파한 작품들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가 상식, 륜리, 가정, 법의 규정된 테두리 속에서 숨 막혀 죽어 가는 인물들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내장을 상하게 하는 맹독(猛毒)의 절실한 아픔이 남에게는 풀잎에 손 베는 아픔처럼 일편의 동정도 자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픔을 웃음 속에 삭이고있는 내가 어데 가나 귀를 열어야 하는 것은 똑같은 화제인 집을 산 얘기, 자가용을 갖춘 얘기, 승진한 얘기, 돈 번 얘기, 애인을 사귄 얘기... 들 이였다. 그런 항간의 귀 맛 도는 얘기들은 마냥 나와 무관한 것 들 이다. 자기보다 잘 난 녀자를 추구해 결혼하고 승진하고 집 늘이는 거에 목숨걸고 사는 사람들, 어쩌면 내가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세계가 그들의 인생 속에서 그렇게 순탄하게 그렇게 찬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돈, 권력, 출세, 류행... 모두들은 한사람같이 남들이 택한 욕심의 가치를 숭배하고 그 길에 합류해 한몫보려 뒤질세라 달려간다. 하나의 자대로 몰아대는 똑 같은 삶의 형태를 추구하며 그 대오에서 탈락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 같아 진다. 똑 같은 말을 하고 똑 같은 복장을 하고 ... 사회가 만들어 낸 그런 실용적인 관계의 체계에 나는 도무지 호흡을 맞추지 못해 했다. 세속의 요령에 젖어있는 능수 능란한 그들과 나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을 느낀다. 나는 그들과 엉겨붙고 싶어하면서도 밥의 뉘처럼 단호하게 고립된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누군가 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타협이 무언지 몰랐다. 낮은 처마 밑에 머리 수그리고싶지 않았다. 무리가 규정하고 무리가 인정하는 확실하다는 가치에 무언의 반항을 보여 왔다. 그래서 마냥 내가 제물(祭物)이 되었고 보이지 않는 횡포의 주먹에 매맞고 코피를 흘리곤 했다. 금전과 권력의 오만이 나의 성한 육신을 격리시키는 것을 보았고 내가 일껏 만들어 낸 가치가 다른 가치에 종속되거나 수단화되는 것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어찔할 바를 몰라했다. 내 몸 우로 쏟아지는 부조리의 폭우를 막을 우산이 없어 그냥 맞기만 해 왔다. 그래서 나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이 시대에서 멀어지는 련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기실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줄곧 예술적인 요구와 현실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의 률법대로 살아가는 실성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유페된 자아를 지니고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생의 어느 시기 블랙홀에 잘못 빠져 들어가 중력을 상실해 버린 사람일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 진 운명을 속여 비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나는 혼자서 달리는데 익숙해 있다. 내 서재에 스스로 붙인 이름은 이다. 빈 언덕, 몸과 마음을 비운 곳이라는 뜻. 그 가 나의 소우주(小宇宙)다. 그 속에 쌓여있는 5천여권의 책과 2천여부의 영화 테잎이 나의 전부다. 신간 잡지와 서적들을 미친 듯이 사 읽고 새로 개봉되는 영화 테잎들을 대량 소장하고는 보고 읽고, 읽고 본다. 그리고 쓴다. 그 피스톤의 작동 같은 따분한 동작이 여태껏 내가 해 온, 그리고 하고 있는 짓거리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원 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사이에 3천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 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프점에서 나를 모르는 보스가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본다. 열심히 영화지를 사들여 새 영화의 개봉일시를 알아내고 련인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새로운 개봉 작을 기다린다. 어느 음향점의 구석에서 남들이 내쳐 둔 흑백의 경전을 찾아내도 나는 그 테잎 한 장에서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한다. 좋은 작품 한 권에, 좋은 영화 한 부에서 나는 법열(法悅)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전률한다.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고난을 이겨 나가는 주문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순수한 심안(心眼)으로 보고 읽는 그것이 내 인생에 보탬이 될 황금의 열쇠인줄을 나는 안다. 그것은 내 불운을 해 줄 팥 한 주머니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그런 아름다움에 집요히 천착(穿鑿)하며 나는 불운한 내 신세를 잊는다. 어쩌면 나는 문학과 예술을 위해 태여 나고 내내 그에 목말라 하며 홀로 서성이는 우주적인 짐승 한 마리 일가! 그래서 치명적인 아픔을 껴안고도 남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언 제보나 여유있는 모습이다. 마냥 정장을 거부하는 편한 캐주얼(休閑)차림으로 어깨를 솟구고 다니며 입만 열면 유머가 폭포로 쏟아져 나오고 맥주 집 가서는 맥주 반 박스쯤은 거뜬히 재끼며 남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온갖 화제를 터뜨리고 둥글게 만드는... 주체하지 못할 감성으로 팽배해 있고 터무니없이 행복해 하는 남자. 어찌 보면 산다는 건 객기이다. 삶은 그저 도취이며 마술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숙을 꿈꾸는 자는 늘 미숙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처지를 최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여유와 달관이 보인다. 그런 긍정적 자세와 행동은 엔돌핀의 분비를 촉진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인체 내의 호르몬 체계와 세포의 활성도가 달라진다고 한다. 엔돌핀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기분이 좋을 때 많이 분비된다. 그러나 반대로, 걸핏하면 재수 타령을 하면서 짜증을 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라는 우리를 불안하고 긴장하게 하며 피곤하게 하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목표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측면만 캐고 드는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물질만능의 사고에 젖어 호사스런 여유를 보이는 유한인, 시대의 명제에 응분의 힘을 주지 못하고 시간의 전부를 외형의 보전에 소비시키는 무책임한 권력인,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작은 것에 탐하는 소인, 큰 것에 질려 아부하는 겁쟁이, 자기의 일신만을 위해 양심의 벽을 무너뜨리는 자, 이들에게 엔돌핀은 없다. 엔돌핀은 오늘에 머물지 않으려는 자의 육신 속에 저장된 무진한 에너지,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자의 마음속에 고여진 진 다홍빛 희망이 아닐가! 스스로의 무드를 만들고 그로서 생성되는 엔돌핀에 도취되는 나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씻김굿의 휘모리에 신들려 있다. 그래서 의 짓눌림 밑에서도 싹을 쳐드는 이 되어 있다. 죽음 같은 유혹의 감미로움으로 그 엔돌핀의 생성을 위해 나는 계속 꿈꾸어야 할 가보다. 계속 뛰여야 할 가보다. 샌프란시스코의 연구팀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내인성 호르몬이라는 뜻에서 발견해 낸 성과에 엔돌핀이라는 학명을 붙였다. 내가 추출해 낸 엔돌핀에도 이름을 지어본다. 나를 나 이게 하는 엔돌핀의 학명은- 문학이라 부른다. 예술이라 부른다. 그리고 아집(我執)이라 부른다...  "연변문학" 2004년 7월호      
97    [칼럼]잠수함과 토끼 댓글:  조회:2816  추천:73  2007-06-29
. 칼럼 .잠수함과 토끼깊은 바다 속을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잠수함에 심취되였던 때가 있었다. 과학환상소설의 대부- 쥘 베르느의《바다 밑 2만리》를 읽고 서였다. 잠수함이 나오기 130년 전에 그 출현을 예측하고 씌여진 환상소설, 신비한 잠수함 《노틸러스》호가 펼쳐내는 박진감 넘치는 모험은 당시 꿈 많은 초중생이였던 나를 흥분시키기에 족했다.《노틸러스》호는 그후로도 오랜 시간동안 나의 뇌리속을 떠나지 않고 잠항(潛航)했다. 지금도 그 흥심을 떨치지 못해 할리우드의 환상영화 DVD라면 모두 사들이는 나다. 잠수함은 1624년 네덜란드인 드레벨에 의해 발명, 당시는 고작해야 3메터 정도의 깊이에서 노를 저어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다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잠수함은 최초로 그 군사적인 가치를 드러냈고 19세기말 디젤기관과 어뢰 장비를 갖추면서 빠르고 위협적인 해상의 무기로 등장했다. 지금의 잠수함은 원자력의 힘을 입어 보다 우람한 몸체로 보다 신속하게 심해를 누비고 있다. 잠수시간이 오래되면 잠수함 속의 산소가 부족해지고 이산화탄소의 량이 증가되며 나중에 승무원들은 생사의 고비에까지 처할 수 있다. 초기의 잠수함은 이산화탄소를 측정하는 장비의 미달로 그 대용으로 토끼를 실었고 한다. 토끼는 후각이 민감해서 공기의 변화에 대해 재빠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였다. 보통 인간이 이산화탄소의 영향에 대해 알기 7시간 전에 토끼는 이미 심각한 반응을 느낀다고 한다. 잠수함 속의 승무원들은 토끼의 상태를 보고 공기오염도를 가늠, 잠수함이 언제 떠올라야 하는지를 파악하곤 했던 것이다. 오늘의 잠수함은 이산화탄소 량이 위험수위를 넘지 않도록 통풍관 속에 필터를 장치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 보았다. 약소민족의 고난과 운명을 묘사한 문제작 《25시》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렬에 오른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한 적이 있다. 토끼가 남보다 먼저 잠수함 속의 산소결핍을 감지하듯이, 작가는 그가 소속해 있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남 먼저 감지할수 있어야 한다는 금언(金言).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그렇다면 우리의 작가들은 이 시대 산소함량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걸가?우리는 과연 어떤 함량의 문학을 소지하고 있으며 또 요구하고 있는걸가? 문학상품화의 탁류에 휘말리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론의는 이제 진부한 말씨름처럼 들린다. 그리고 문학이 인간과 삶의 여러 양상에 대해 그 동안 진지하게 제기해온 질문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우리 작가들의 문학에 대한 우환의식, 사명감 같은 것은 점점 증발해가고 있는 것 같다. 어제 날 순수문학의 외줄타기를 선언했던 그 일사불란하던 행보가 하나 둘씩 흐트러지고 있는 것이다. 치렬했던 문학혼, 고심하던 자세는 오간데 없고 헐어버린 리념, 변질된 가치가 볼썽사납게 드러나 보인다. 기문종상(棄文從商), 기성문인의 동면, 필봉(筆鋒)의 자리바꿈, 량산되고 있는 작품질의 저하 등등의 현상들... 작가들의 시각 또한 흐릿하고 애매하다. 령혼도 정열도 석화되여 오로지 낡은 명성에 기댄 채 수준미달의 작품을 부끄럼없이 뽑아내는 이들, 글의 가치보다도 그것으로 교환되는 금전의 수치에 대해 매끄럽게 연구하면서 돈벌이 글에만 눈 박는 이들, 대다수인간들의 희로애락과는 관계없는 순 개인적 세계에만 침잠하여 제멋에 겨워 잠꼬대 같은 독백만 중얼거리는 이들, 우리 곁에 엄존하고 있는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눈을 감고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는 이들.... 문학을 명예나 날리고 고독이나 달래는 소일거리로 대하며 섣부른 안주에 빠지는가 하면 작가들이 상업주의와 영합하여 싸구려 시정배 꼴이 돼 버리기도 한다. 구경 이제 몇몇이 남아서 상업적 발상이나 자본의 론리에 휘둘리지 않고 문학본연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는가에 더럭 걱정이 가게 하는 거동들이다. 대체로 이런 작가, 이런 작품들은 가벼운 재치에 의존한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내용이나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요설(饒舌)적인 말놀이, 현실기피와 삶에 대한 상투화적인 환멸의 표출 등에 소제(小題)를 걸고 경박한 직설적 토로를 보여주는데 그치고 만다. 자기 의존적 가치추구에만 몰두한 나머지 현실과 괴리되여 바라만 보는 관조미학의 온상 속에서 자기 소모적인 글쓰기에 정력을 허비하는 것이다. 이런 글들은 아무리 많이 써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아도취의 알량한 표현에 불과한 지저분한 것으로서 언어의 공해, 시간의 랑비만 조성할 뿐이다. 이런 경우 문학적 심상은 표면에서 겉돌 뿐, 작자의 문학적 존재는 망각되어 다만 저속한 잡 문학, 특히 문체에 있어서 극히 조악한 비 예술품으로 남게된다. 이러한 부박한 현상이 우리 문학의 주류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시나 소설을 읽고 거기에서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들이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은 문학이 삶의 반영이고 창조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문학은 작가가 생존했던 동시대인들의 삶의 모습, 가치관과 시대의 소망을 담고 있다. 그 창조와 향유의 과정에서 작가와 독자는 자신의 주체를 확인하거나 또는 발견하면서 남다른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삶을 형상화하고 그 삶에 가치와 빛을 부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문학의 역할과 소명이라고 할 때 탁월한 소명의식을 지닌 작품, 작가들을 독자들은 경모의 마음으로 접하게 된다. 《조선고전문학의 꽃》이라 격찬 받고있는 연암 박지원, 박지원이 그처럼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은 그의 작품에 시종 강렬한 민중의식이 관통되여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허생전》,《량반전》과 같은 명저에서 그는 당시 량반계급의 부패한 현실에 대한 통분과 야유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동시에 하층민의 순진한 인간미와 비천한 생활 속에서도 의리와 덕행을 지키는 인간상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실학사상이 크게 대두되었던 당시, 문학인들은 민중생활과는 거리가 먼 공허한 토론만을 일삼아 왔던 도학자들의 성리학을 배격하고 이제까지의 풍류문학 같은 것에 맞서 상류계급의 향락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을 풍자하고 시민 생활의 애환을 적극적으로 노래하였던 것이다. 뛰여난 사실주의작가 최서해. 그의 체험문학은 가난한 민중의 굴욕, 체념과 반항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최서해의 작품은 《쫓겨난 조선, 고민하는 조선, 굶어죽는 조선》 즉 일제식민지에서 설움을 받는 민중의 현실을 누구보다 더 극명하게 표현한 문학으로서 그 깊이와 무게가 있다. 우리 조선족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로씨아문학을 살펴봐도 그렇다. 로씨아문학은 재래로 사회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그들의 문학은《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문제와 철학, 종교, 륜리 도덕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민중들이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현실을 보고 로씨아작가들은 량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괴로워했다. 작가들은 민중이 가지고 있는 강인함과 정신적 아름다움을 인정하였으며 그 풍부함을 찬미하고, 문학 속에서 그리려고 노력했다. 로씨아문학만큼 진지한 휴머니즘으로 그때 그때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강하게 반영해온 문학은 없다. 그리하여 로씨아에서는 작가들을 실존의 수수께끼를 해명해 줄 현인, 항상 진실탐구에 힘쓰는 현자로 기대했으며 높이 선망했다. 인류 력사에서 볼 때, 많은 우수한 문학작품은 새로운 사회지평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해왔다.《홍길동전》은 조선조 서자차별의 불합리한 사회적 관습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고, 《춘향전》은 녀성들이 자기 존엄성을 지키는 본보기를 보였으며, 로신의 작품들은 중국인의 고질화된 렬근을 해부하면서 사회계몽의 역할을 했고, 《톰아저씨의 작은 집》은 흑인노예를 위해 해방의 장을 여는데 기여했다. 이렇듯 좋은 작품일수록 그 작품이 주어진 력사적 시대나 력사적 현실에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말해 준다. 따라서 작품에 묘출(描出)되어 있는 인생의 모습이 영구히 숨쉬면서 비록 지나가 버린 시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시간의 제약이 없이 길이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시대정신과 민족적인 문화의식이 뚜렷하게 결합되면서 생성된 문학적 가치가 그들을 명가로 그들의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진부한 말씨름이 아닌 진지한 자세로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문학이냐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검토해볼 때 현실과 유리된 곳에서 문학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는 지극히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조선족사회는 후기산업사회의 여러가지 특징적 징후가 <<잠수함 속의 이산화탄소처럼 루적>>되여 몸살을 앓고 있으며 미증유의 충격에 부침(浮沈)을 겪고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의 문학이 과연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 반성과 모색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무병신음이나 음풍영월 식으로 작가 개인의 탐미나 작은 고뇌나 읊조리는 문학은 우리에게 그닥 필요하지 않다. 적어도 지금처럼 사회적 현안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시점에서 말이다. 문학작품은 작가라는 개인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에 반영되는 모습은 작가들의 시각(視角)에 따라 저마끔 다르다. 따라서 각자의 문학이 도달한 높이도 결과적으로 다르다. 문학의식이나 창작기법, 세계인식 등에서 각자의 기호에 따라 그리고 문학의 배경이 되는 력사와 환경에 대한 희원(希願)을 달리한 까닭에서 나온 결과다. 진정한 작가는 시대와 력사의 이방인이 되여서는 안 된다. 너나가 다 가지고있는 것이 아닌 창조적인 감성과 혜안으로 력사적인 현장에서 그 현실과 의미에 마땅히 관여하면서 문학이 우리 삶의 경험이 되도록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코드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공동체의 운명 속에 몸을 던지고 우리의 삶과 인생에 따뜻한 시선을 주면서 우리 사회가 겪고있는 각종 문제들을 아우를수 있어야 한다. 여러 가지 문학적인 기법과 장치를 리용하여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그러한 삶의 의지, 혹은 소망을 다각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작가들은 우리 삶의 체험과 고뇌를 작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그것과 동화하고 일체가 되는 작업을 문학의 가장 선차적인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시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올바른 생각을 글에 담는 사람들이 많아야 우리의 문학이 살고 우리의 개개인의 문학이 세월의 시련을 이겨내고 불후에로의 접근을 시도할수 있게 될 것이다. 갈수록 복잡화 되여가는 사회의 메커니즘속에서 우리의 작가와 작품이 그 존재의 리유를 획득하는 길은 창작자세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부박한 시대의 통증을 견제하며 밝은 미래상을 여는 길과 통할 것이니,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진지한 예술양식으로서의 문학을 우리는 정녕 소지(所持)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시련 속의 토끼처럼 마냥 령민한 후각을 벼려가면서... ♥
96    후생가외(後生可畏) 댓글:  조회:3985  추천:73  2007-06-29
 . 칼럼 . 후생가외(後生可畏) 김 혁 몇 해전, 지의 요청으로 30대 중견작가 몇몇과 어우러져 문학신세대의 단층문제를 두고 대담취재를 받은 적 있다. 그때 우리와 아래세대의 문학인구의 감소에 대해 짙은 우려를 표했었다. 그러던 우리로서는 내내 끊기지 않는 문학의 맥락을 지켜보면서 지나친 로파심에 앙감질하지 않았나 자조를 머금게 된다. 라는 리언이 있다. 요즘의 우리 문단에서 창작자의 저령화(低齡化)가 모두들의 경희의 눈길 속에 어떤 추세를 보이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소년작가라면 10대에 작품집 을 내놓은 김영옥 하나를 겨우 손에 꼽을 뿐이였다. 허나 세기의 문턱을 넘음과 함께 변혁과 조약의 미묘한 기대감으로 부풀어있는 우리 앞에 새로운 문학인구가 련줄로 고고성을 지르고 있다. 요즘도 5월 호 에 대학생문학특집이, 2월 호 (격월간)에는 이 실려 푸른 5월을 장식해 주었다. 또 한번 거론되는 에 5월바람 같은 청신함으로 그 걱정기 어린 마음들을 씻어주었다. 이를 두고 고 기획자들은 말했다. 이번 를 장식한 리진화, 박미옥 등 외에도 홍예화. 강천사 등이 신진들이 문학지에 심심찮게 이름을 보이고 있으며 그중 몇몇은 비중 있는 상까지 수상하여 문단의 시선을 끌기 시작하고 있다. 일찍 10대 중반에 장편소설 을 내놓은 석현 소녀를 위시로 하여 작문 집일망정 자신의 창작집을 낸 소학과 초중생이 10여명이나 된다. 비록 미흡한 구석이 보일지라도 문단엘리트들만이 운집해드는 정규문학지에서 그 풋풋한 변성기의 목소리를 나름대로 내고 있다. 중국문단에서는 문단의 저령화 창작추세를 두고 이들에게 라 시체스런 호칭을 달아 주었다. 이 세대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인문관심 속에서 성장했는바 단일문화권속에서 보내온 로 세대들과는 달리 다종(多種)문화의 융합과 충돌을 만끽하고 있다. 사회정보량의 날로 되는 증장과 참조계의 다양성은 이 한 문학 신 인류의 발육과 성장에 비옥한 밑거름으로 되고 있다. 평론가들은 신 인류의 작품들은 소년작가들이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현시로서 성장기소년들의 단순하면서도 구속을 모르는 사유와 그들만의 번뇌에 대한 묘술을 성인작가로서는 도저히 흉내낼수 없는바 이는 그들 세대의 독자 군을 재빨리 이룰 수 있는 우세라고 분석하고 있다. 10여 년간 우리의 고등학부들에서 다른 류 인재들의 속출에 반해 작가만은 거의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병페로 보아도 우리문단의 문학 신 인류의 출현에서 우리는 단층 잇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의 위상이 전에 없이 저락된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현황에서 저령화 창작에 대한 시야비야를 떠나 우리는 우선 문단에 신선한 활력소를 주입하고 있는 이들 신생대의 작은 몸짓에 대해 돌장이들의 이쁜 짓거리처럼 받아들이고 그들의 서툰 걸음마 타기라도 갈채를 주고 손목을 잡아주어야 할 것이다.   연변일보" 1997년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95    바람부는 날이면 충무로로 가야한다 댓글:  조회:3342  추천:73  2007-06-29
바람부는 날이면 충무로로 가야한다 - 한국 영상물의 흥행과 중국영화계의 전망에 대한 문화적 시각 김  혁   한국영화의 산실- 충무로에서의 필자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들을 중국의 음반가게들에서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친구(朋友)", "쉬리(生死諜變)", "공동경비구역", "엽기적인 그녀(我的野蠻女友)", "무사(武士)", "태극기 휘날리며(太極旗飄揚)"... 한국의 흥행영화들을 죄다 찾아 볼수 있다. 중국 변강의 오지인 연길에도 10여개 소의 음악, 영상소프트점(音響店)이 있는데 이 소프트점들마다에는 한국영화매장 전문코너가 설치돼 있다. 게다가 컴퓨터판매업체들마다 끼여서 팔고있는 것도 함께 넣어 추산해보면 50여 개도 넘는 곳에서 한국영상제품이 팔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전에는 비디오로 간혹 한두 편의 한국영화가 카세트음악테이프 매장에서 선보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VCD, DVD로 하루가 멀다하게 시장에 출시되고있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어느 곳에서나 수시로 접할 수 있는 영상제품은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붐을 일으키게 한다. 전형적인 사례로 "엽기적인 그녀"가 일으킨 열풍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화는 중국에서 한 해 동안에 해적판을 포함해 4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그야말로 엽기적이다. "태극기 휘날린" 한국영화 한국영화는 근년 들어 장족(長足)의 발전을 해오고 있다. 고품격 고품질의 작품으로 아세아 내지 세계의 주목을 받고있고 현란한 영화권내에서 일석(一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영화가 부흥의 조짐을 보인 것은 불과 6. 7년 사이의 일이다. 1999년 한국 감독 강제규는 영화에 한국영화계에서는 천문수자인 350만 딸라라는 거액을 투입하여 남북간첩전을 다룬 영화 “쉬리”를 만들었다. 운명을 건 영화는 매표와 비디오테프 판매에서 3500만 딸라를 수입하는 거대한 흥행을 보았다. 또한 한국유사이래 최고의 관객률을 기록해 1997년 할리우드의 “타이타닉호(泰坦尼克)”가 거둔 417만 명의 관객 수를 누르고 660만 명의 관객을 유치했다. 이는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할리우드영화를 격파한 사례로 된다. 그후 리창동 감독이 “오아시스(綠洲)”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醉畵仙)”으로, 김기덕 감독이 “빈방(空房間)”으로 칸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등 국제영화제에서 연이어 수상하는 첩보를 올렸다. 한국감독들의 세계영화무대에서의 련이은 쾌거에 한국관객들은 환호했고 세계는 한국영화에 괄목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년도별로 몇 부의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따져보면 전성기를 맞은 한국영화의 현황을 읽을 수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太極旗飄揚)” 2004년, 1150만명 “실미도(實尾島)” 2004년, 1110만명 “친구(朋友)” 2001년, 820만명 “공동경비구역(共同警備區域)” 2000년, 580만명 “쉬리(生死諜變)” 1999년, 620만명 그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하다. 한국영화산업은 이제는 년 수입5.8억 딸라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이는 아세아에서 일본(19.3억 딸라)과 인도(8.2억 딸라) 다음으로 가는 위치이다. 우리는 한국의 인구가 일본의 3분의 1, 인도의 20분의 1밖에 안 됨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세계의 언론은 "한국의 영화와 TV극은 이미 아세아시장개척에 성공을 거두었고 한국오락산업에 큰 자산이 되였다"고 격찬하고 있다. 안방드라마의 위력 중국에서 한국 영상물(物)은 영화보다 드라마가 먼저 전파를 탔다. 중국에 처음 상륙한 한국드라마는 연변의 한 문화인의 연줄로 97년 들여온 "사랑이 뭐 길래"이다. CCTV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중국TV프로그램 사상 3위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에 CCTV는 "목욕탕 집 남자들", "별은 내 가슴에(星夢奇緣)", "해바라기(妙手情天)"등도 수입해 연이어 방영했다. 각 지역방송들도 그에 가세했다. 잇달아 "안녕 내 사랑(泡沫靑春)", "청춘의 덫(靑春的陷穽)", "모델(靑春風雲)","초대(最愛是誰)"."도시남녀(都市男女)","이브의 모든 것(女主播故事)" 등 한국드라마들이 대거 등장, 중국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중 KBS TV드라마 "가을동화 (중국명- 藍色生死戀)"는 중국의 안방들을 강타하면서 히트를 했다. 이 드라마가 성공하면서 중국어로 번역된 소설 역시 대박을 터뜨려 이미 5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한국 드라마는 이젠 중국인들의 생활 곳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중국에 드라마채널은 수도 없이 많은데 이런 방송국들이 근 8년째 한국 드라마를 계속 수입 방영하고 있다. 한국드라마들은 본국에서 끝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온다. 불과 얼마 전 한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대장금(大長金)도 지금 한참 중국가정들의 브라운관을 달구고 있다. 드라마 한 편이 끝나면 재방송하고, 재방송이 끝나면 다른 채널로 옮겨서 재 재방송까지 한다. 따라서 매일 저녁 같은 시간대에 이 채널 저 채널에서 꼭 같은 드라마들이 동시에 방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흥행요소 ABC 한국의 영화, 드라마의 이 같은 공전의 휘황(輝煌)에 대해 아래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1, 정부차원에서 영화에 대해 관심의 눈길을 주고 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는 한국영화에 대한 정책, 제도, 인재육성 등 방면에서 성원을 아끼지 않는다. 우선 한국정부는 민족보호주의 색채를 띈 “영화배액제(電映配額制)”를 실행했다. 모든 영화관들에서 해마다 146일은 국산영화를 상영해야 하며 전국의 TV방송도 일정한 비례의 국산영화를 방영해야 한다고 규정지었다. 민주화 진척과 더불어 영화심사제도에서 동였던 "수족"을 풀어놓았다. 심사제도의 원활함은 영화인들의 창작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다. 따라서 창작에서 다원화가 나타나고 심각한 시대적 내용을 가지고 력사를 반성하는 영화들이 생산 되였다 지금도 한국정부는 외국영화를 포함한 매표수입중의 30프로를 떼 내여 국산영화의 지지에 돌리고 있다. 이에 한국영화계의 "대부" 임권택 감독은 “정부의 일련의 영화우대정책은 문화에 대한 보호일뿐더러 민족에 대한 애대로서 이런 작법은 한국의 전통을 영화라는 형식으로 세계에 알리게 했다”고 격찬하고 있다. 2, 그들만의 독특한 서사문법에 있다. 한국 영화, 드라마는 자신들의 창의력과 자체의 독특한 이미지로 아세아 관중들의 심금을 울려 준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작품마다에서 "한국 특유의 이미지"를 각인 하고자 한다. 반도문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외형적인 포장은 미국과 일본의 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지만 내형으로는 자신만의 정서적 조률을 잘 해나간다. 이들은 외국영화의 답습에 그치지 않고 동방인의 함축되고도 감칠맛 나는 정감과 격조를 어떻게 반영하는가 하는 것에 시종 머리를 써왔다. 바로 류행문화에 깊은 뜻을 담은 창의력, 특히 한민족의 자신감과 진취적인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지식인들은 한국 드라마의 기본 바탕은 유교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들은“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동남아에서 큰 인기를 끄는 비결은 그 속에 동양적인 유교문화가 대단히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3, 조화를 이룬 상업과 예술이 정신과 시각의 향연을 마련해 준다. 한국영화계에서 근 현대사의 굴곡 어린 시선으로 현실에 천착해 들어가는 영화들이 많이 나왔다. 흥행수입이 가장 높은 몇 부의 영화는 모두 남북문제에 관한 정치적 소재의 영화이다. 이 영화들은 모두 상업영화 모식(模式)으로 만들었는데 이로서 관중들로 하여금 영화관을 찾게 만들었다. 이런 영화들의 내용은 대중의 사상, 정감과 직접련계가 있는 문제를 다루었지만 영화의 창작모식은 모두 상업적인 틀을 빌려왔다. 관념상에서 한국의 영화인들과 관중들은 영화가 상업활동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사업이라는 공감을 갖고 있다. 4, 할리우드의 운영방식을 적극 따라 배우고 있다. 오래동안 루적해 온 경험에서 한국의 영화인들은 배급과 홍보가 제작에 못지 않게 중요함을 보아내고 제작후의 공작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이는 할리우드를 닮은꼴이다. "할리우드라는 황새를 쫓는 뱁새'라는 혹평도 있지만 그 답습의 과정에 한국영화는 자신들의 직성에 맞는 시장운영경험과 선진적인 기술수단을 소유하게 되였는데 이로서 한국 영화는 국내외시장에서 활개칠수 있었다. 5, 영화를 죽도록 사랑하는 팬들과 갈라놓을 수 없다. 한국에는 자질이 높고 민족자부심이 강한 관객들이 얼마든지 있다. 90년대 이후 2천여만 명의 관객들이 영화관에 흘러들어 국산영화를 관람했다. 한국인구의 반수이상이 자신들의 영화에 심취해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국에서 견학하고 돌아온 중국의 영화제작인들은 한국관객들의 높은 감상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보통관중일지라도 전업인사들이 토론할 문제를 내들고 진지하게 담론하는 것이다. 이런 영화애호가들로 보면 그들이 그 누구보다 영화라는 이 쟝르를 애착하는데도 있지만 그 배후에는 일종의 애국적인 정서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본토영화의 궐기를 한국문화, 내지 민족의 궐기로 자부하고 있다. 중국이 한국 영상물에 열광하는 리유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중국사람들에게 청신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청신한 나머지 이제는 화끈한 느낌까지 갖게 한다. 마치 한국특산의 불고기에 시원한 한국의 명 소주 "진로(眞露)"를 거나하게 마신 듯한 느낌이다. 중국에 한국영화가 소개된 것은 불과 몇년 전, 2000년 5월 북경영화대학 한국류학생회의 주도하에 한국영화 12편이 처음으로 상영됐다. 일주일간 열린 이 영화제는 중국 언론과 영화계의 큰 관심을 모았다. 중국 감독중의 선두주자 장예모(張藝謨)를 비롯해 중국관객들이 관람했고 한국영화에 놀라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 영화제가 한국영화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중국 등지에서의 빅히트 원인을 분석해면- 우선, "한류"라는 거대한 선풍에 편승했기 때문이라는 시선을 깔고 있다. 언제인가부터 중국과 대만, 홍콩, 윁남, 몽골 등지에서 한국의 대중문화 선풍이 일고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한류(韓流)"라 일컫는다. "한류"는 대중음악, 드라마, 영화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화산업의 전 령역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하면 벌써 7∼8년째다.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 관련행사에 참가하고, 한국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한국패션을 선호하고 있다. 한국식 식사를 즐기고,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그들의 둘도 없는 선택이다. 물론 "한류"의 공로에만 밀어붙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주춧돌로 크게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 우리와 심정적 공감대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류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사람들은 한국문화에서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중국인들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고 외려 자신과 비슷한 기질을 발견했다. “한국 드라마는 인물 성격이나 가치관이 우리와 비슷해서 젊은이들은 물론 나이든 층에서도 인기 있다”고 모두들은 말한다.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서적 친밀감"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는 현대생활에서 겪는 정신적 압력과 사소한 사건들은 자신들도 경험하고있는 일들이라 "동병상련"의 느낌을 준다. 하여 한국에서 건너온 "낯선 듯 하면서도 낯익은" 드라마를 발견하고 중국인들은 반가워 마지않는 것이다. 한국인의 생활방식은 서양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한국의 영상작품들은 서양문화를 동양적으로 변형시켰기 때문에 동양정서를 가진 이들은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서양 드라마와 달리 한국 드라마에 동양적 도덕률이 담겨있는 것도 중국인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요소라 볼수 있다. 다음,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시대로부터 소외됐던 시청자들이라는 "틈새시장"을 파고든 것이다. 오래동안 변형되고 폐쇄적인 문화환경에서 중국인에게는 다양한 문화를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실제로 중국의 중, 장년 층이 청춘시절을 보낸 60, 70년대는 정감을 운운할수 없었던 시대였다. 그 시절 시대적 흐름 속에서 억압됐던 중, 장년 층이 한국의 영화, 드라마에서 소외된 정신적 의지를 찾은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개방적이고 쾌활한 개성, 창조적 생활 등에 흥취와 함께 동경을 느낀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자유분방함과 윤택한 문화생활에 대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중국의 한 영화제작인은 “한국드라마가 대체로 감성을 축으로 갈등과 반전을 거듭하는 진부한 구조로 되여있지만 소외된 시대를 살아온 중국의 중장년 세대에게는 의연히 신선감을 주고, 그들의 아픔을 무마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은 지금 급격한 현대화과정을 겪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기존문화 대신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상상력을 만족시킬 수 있는 통속문화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한국 영화, 드라마의 독특한 예술성 특히 그의 화려함은 중국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한국 대중문화의 친근감이 인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네티즌들 은 중국드라마와 한국 드라마를 비교하면서 그 우렬을 이렇게 가리고 있다. 한 네티즌은“중국 드라마는 매일 치고 박고 죽이고 체포하고 갑자기 일확천금을 버는 갱영화나 무협드라마뿐 현실적인 드라마는 적다”고 말했고 또 다른 네티즌은 “한국영화의 주제는 중국영화보다 광범위하고 한국 드라마는 현실감 있어 좋고 드라마에서 풍기는 사람냄새가 너무 좋다”며 “사람들의 삶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중국 드라마는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유감을 표했다. 현대인들의 생활을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한국 영화 특히 드라마는 재미난 이야기 선을 끌고 나가면서 그 기저에 가족 가치관을 깔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의 큰 동감을 얻어내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잡고 섬세하게 터치하며 점입가경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허다한 드라마의 갈등요소가 거의 "금전"인 데 비해 한국 드라마는 순수한 사랑과 정염을 보여주는 것이 많다. 아름다운 사랑, 이상적인 사랑, 고난을 이겨내는 사랑... 사람들은 특히 그 부분에 매료되는 것 같다. 중국 어느 한 신문은 한국 드라마를 "평화와 중용의 생활내용 위에 서양 잼을 얹은 한 조각 빵"으로 비유하고 있다. 참으로 걸 맞는 비유이다. 대체로 력사물이거나 주선률 제재의 작품에 열성 올리고 있는 중국 드라마들 사이에서 세련되고 생활적인 한국 드라마들이 중국의 거칠거칠한 것과는 다른 매끄러운 감각이 묘한 친근감을 주었고 호감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 다음 또 하나는 한국인들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복해서이다 안재욱 송승헌 송혜교 김남주 김희선 장동건 원빈 이나영 차인표… 지금 중국에서 이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영화, 드라마에 노래, 전 방위로 물량공세를 펼치니 한국 연예인들이 인기가 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것이다. 그들은 중국 언론이 일거수일투족을 소개할 정도로 젊은 팬들의 우상이 됐다. 사이트마다는 한국 인기배우들의 뉴스가 넘치고 있다. 인터넷을 매개로 국제적인 팬클럽이 생기는가 하면 한국 배우들 뒷이야기가 매일 연예신문 면을 뒤덮는다. 그중 김희선 열풍은 "김희선 성형"으로 이어질 정도다. 중국 청도(靑島)의 한 병원은 ‘김희선처럼 만들어달라’는 중국 젊은이들을 상대로 16건의 성형수술을 해줬다고 신화통신이 최근 전했다. 전례없던 문화대혁명을 경험했던 중국에는 오랜 시간동안 요즘처럼 대중적 우상이 없었다. 그때의 우상이라면 모두가 정치인물들뿐 이였다. 그러했던 그들은 세련된 이미지에 정서적 스타일을 갖춘 한국의 스타들의 등장에서 가히 환혹(幻惑)할만도 했다. 중국의 많은 남자들은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녀성들의 순수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에 홀딱 반해 버린다. 특히 중국과는 완연 다르게 녀자들이 남자에 대한 공경태도에 감탄한다. 반면에 중국 녀자들은 한국 녀성들의 자기 감정을 대담하게 표현하고 자기 운명에 도전하는 정신을 부러워하고 공감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극중 인물의 멋진 모습이 큰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는다. 그들의 말을 빌면 "예쁘면서도 모던한 배우들, 섬세하고 풍부한 스토리, 화려하고 자극적인 구조로 잘 포장된 극을 누가 싫어하겠는가"이다. 또 서양 연예인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반면, 한국 연예인들은 도시의 평범한 남녀와 다를 바 없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고 평했다. 한국 연예인들은 진실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밥도 스스로 해먹고, 화장실도 가는, 생활적인 모습도 보여주기 때문에 중국 팬들은 친근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영상물은 중국에서의 일본문화의 위치를 밀어 내였다. 80년대 중국의 문화소비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준 것은 일본대중문화였다. 영화 "추격(追捕)" "그리운 고향(望鄕)", "생사련(生死戀)" 드라마 "의심스러운 혈형", '오싱'을 비롯해 한동안 일본 영상물들이 중국에서 오랫동안 강세를 보여왔다. 야마구찌 모모에와 다까구라 겐 등 영화배우들은 지금의 장동건, 김희선에 못지 않게 중국에서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는 중국의 가정들에 가전제품이 갓 보급되던 시대였는데 일본 드라마를 보기 위해 중국전역에서 가전제품을 다투어 사들이는 전례 없던 구매열조가 일어나기까지 했다. 그런 특수한 상황에서 인 일본문화열풍은 몇 년 지나지 못해 곰삭고 말았다. 일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중국에 미국 한국 문화가 새롭게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영상작품에서의 다원화 경향을 보이며 먼저 홀리우드가 등장, 단순하던 중국인들의 "맛 망울"을 강타했다. 그리고 한국이 등장해 일본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짚고 넘어갈 다른 한가지가 있다. 중국인들의 시야에서 일본은 아세아에서 가장 서구화되고 현대화된 앞선 나라이지만, 호감의 대상은 아니였다. 중국관객들이 한국문화를 수용하는 데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하지만 일본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는 정서적 장애가 있다. 왜냐면 과거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고 이루다 말할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 력사를 모든 중국인이 가슴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을 욕하는 "왜놈"이라는 말은 가장 악독하고 무서운 존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여 있다. 물론 일본 경제의 불황과 극우 세력에 대한 혐오감, 등 여러 가지 원인도 있다. 마지막 원인의 하나는 기존에 중국의 조류를 선도하던 홍콩과 대만의 문화가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데도 있다고 본다. 대중 문화는 새로움과 다양함이 없으면 금세 식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중국영화 정보로 갓! 빠른 시일 내에 아세아 나아가 세계적으로 주목할만한 성적가리를 쌓아올리면서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고있는 한국영화는 관객률이 가련할 정도로 낮고 국제시장으로 나가는 길에서 오금 꺾기를 거듭하는 중국영화와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중국영화와 같은 경륜을 기록하고 있지만 앞서 달리고 있는 한국영화의 궐기는 강렬한 충격파로 되여 같은 동방민족으로서 그 문화배경도 아주 비슷한 중국영화인들이 연구해야할 숙제를 내주고 있다. 중국영화는 올해로 백년탄신을 맞는다. 중국영화협회 오이궁(吳貽弓)주석은 “목전의 중국영화는 아직도 험난일로를 걷고 있다.”고 감개를 토하고 있다. 진부한 중국영화에 대해 소급해 보면- 우리는 줄곧 영화를 정치선전도구로 간주 해왔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영화관념이 우리로 하여금 고배를 마시게 하고 있는 것이다. “좌익영화(左翼電影)”가 나타났던 지난 세기말로부터 중국영화계는 줄곧 영화의 교화작용만 강조해 왔고 오락공능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중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쇄락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아직도 중국에서 상업과 오락은 많은 감독들에 의해 "허드레"로 치부되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고상한 분위기"에 천착하면서 "좋은 영화", "큰 영화"만 만들려 상상의 로적가리를 쌓고 있다. 영화를 단 순 예술품으로만 간주하는 편협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이 근본적으로 관중들의 수요와 통하는 다리를 끊어버렸고 .영화산업화와 공업화를 저애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영화인들은 영화의 시장과 그 배급의 규률에 대해 세세하게 따지는 면에서 한국 영화인들에 비해 차이가 많다. 한국에서는 영화와 드라마가 숱한 대중문화 코드와 경향을 생성하면서 이미 대중소비문화의 중심축으로 편입되고 있다. 영화, 드라마를 "문화상품" 이라고 부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만 리해하려는 사람은 이제 없다. 한때 영화가가 정치의 도구로 전락되였여 그 효용(效用)에만 에워 넣었던 시절을 우리는 경유해 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소비의 대중화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영화와 드라마는 더 이상 관객들의 감성적 범위에서만 안주하지 않는다.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만 자족했던 영화 드라마에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의 "또 다른 잠재가치와 력량"이 다양하게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중국에는 연예기획사가 많지만 정예하지는 못하고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한국은 그 관리가 훨씬 체계적인 것 같다. 중국 영화는 관중의 수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한국영화인들은 한편의 영화제작에 앞서 상세한 시장조사를 진행하는데 극본, 배우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많이는 관중의 심리를 연구한다고 한다. 그들처럼 관중을 연구하고 시장을 연구하며 영화제작인과 창작인, 발행인이 관중을 관심하는 기풍이 형성돼야 중국영화가 진정으로 시장화에로 나아갈수 있는 것이다. 주류상업영화로 시장을 개척하고 자기 민족의 문화적 내함을 깊이 발굴하며 자질이 높고 본토영화를 지지하는 관객들을 육성해야 하는데 이런 것은 중국영화에서 아직 부족한 면이다 영화기제와 체재개혁의 심입과 더불어 중국의 영화산업의 보폭도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루빨리 중국영화에 씌워진 이런 녹 쓴 "굴레"를 벗어버려야 한다. 중국영화의 잠재시장과 문화소비량이 엄청 크다는 것은 세인이 아는 바다. 중국은 말 그대로 대륙이다. 땅이 한국의 40배가 넘고 그 문화도 다양하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어우러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이들은 2억 7천만대의 텔레비를 갖추고 있다. 중국의 영상시장에 대해 외신이 평론했듯이“이는 영화인들로 말하면 하나의 거대한 케익이 아닐수 없다." 따라서 중국관중들은 재미있고 자신들의 정감수요에 만족 줄 대량의 영화와 드라마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감안해 볼 때 중국영화의 전망은 밝고 비전은 있다. 서울에 가면 충무로 라는 거리가 있다. 한국 영화계의 정영(精英)들이 운집한 이곳은 한국영화의 중심지대로 불린다. 아직도 거센 맞바람에 맞서며 가고 있는 중국영화인들, 한국 영화계의 성공에서 유익한 경험을 얻고자 사고를 거듭하는 그들에게 바람 부는 날이면 충무로로 가보라고 권장해 본다.  "문학과 예술"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서울야곡"    중국조선족영화동호회 블로그: http://blog.daum.net/kh6699  
94    [잡문]호랑이 호랑이 빨간 수수깡 댓글:  조회:3649  추천:73  2007-06-29
임오년 호랑이 임오년을 맞는 새해벽두에 들어 황금의 금삼각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던 변강도시 훈춘지역에 느닷없이 옛말 속에서나 감지해왔던 호랑이가 련속부절 나타나 톱뉴스를 만들고 또 그 호랑이가 밀렵군에 의해 생죽음을 당해 장안의 화제를 빚고있다. 뉴스 1: 1월 29일, 훈춘시 춘화진 관도구촌의 농민 곡쌍희는 본촌의 농민 윤씨와 함께 스키를 타고 외지로 일보러 갔었다. 오는 길에 곡쌍희가 문뜩 스키를 멈추었다. 눈깔린 길에서 이상한 발자국을 발견했던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범의 발자국이였다. 이어 길녘의 초막부근에서 두사람은 금방 먹다만 말사슴고기도 발견했다. <<견물생심>>이라 둘은 범이 먹다남은 그 말사슴고기를 가지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관도촌부근의 한 산모퉁이에 다달았을 때 불현 듯 등뒤에서 찬바람이 일었고 이어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범의 울부짖음소리가 울렸다. 범이 쫓아왔음을 직감하고 둘은 불로 범을 쫓으려는 생각에 옷을 벗어 불을 달려 서둘렀으나 너무 긴장한 탓인지 불을 붙여내는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어디서 솟아났던지 범이 곡쌍희에게 와락 덮쳐들었다. 곡쌍희가 범에게 깔리자 윤씨가 덴겁히 스키판을 벗어 범을 후려쳤으나 범은 끔쩍도 않았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방도가 없음을 느낀 윤씨는 구원을 청하러 마을로 달려 내려갔다. 산에 묻혀 살면서 산짐승의 습성에 대해 알고있는 곡쌍희는 두 눈을 꼭 감고 숨을 딱 죽인 채 눈 우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범은 앞발로 곡쌍희를 툭툭 건드려 보며 반시간이나 주위를 빙빙 돌다가 상대가 죽은 줄로 알고 수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훈춘림업국 삼도구림산작업소 종업원들의 도움으로 곡쌍희는 병원에 호송되였다. 곡쌍희는 오른팔이 골절되였고 온몸의 여러곳에 상처를 입고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에 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옛 속담대로 곡씨는 인생에 두 번 없는 험난을 경험하고 기적적으로 범 아가리에서 살아났으나 범의 먹이를 탐낸 일시적인 욕심 때문에 커다란 봉변을 자초하게 된 것이였다. 뉴스 2: 2월 2일 훈춘시 자연보호구 서북구지역에서 녀 민공 하나가 호환(虎患)을 당했다. 양춘연이라 부르는 녀민공은 올해 27세, 삼도구림장의 종업원이였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양씨는 3명의 종업원들과 함께 퇴근길에 올랐다가 호랑이와 조우, 모두가 아우성치며 도망쳤으나 제일 늦게 뛰였기에 불행하게 범에게 먹힌 것 이였다. 양씨를 습격한 그 호랑이는 인차 사건 발생현장에서 발견, 어느 불법분자의 덫에 치이여 쓰러져있었다. 야생동물들은 일반적인 경우에 주동적으로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 범이 덫에 치인다음 사람들에 대한 보복심리가 생긴 후과라고 모두들은 분석하고 있다. 훈춘자연보호구 관리국에서는 사건제보를 받고 피해자가족을 찾아 위문하고 무휼금 10만원을 내주었다. 뉴스 3: 동북범이 사람을 습격한 사건을 처리하던 중 자연보호국의 관리인원들과 텔레비죤방송국의 촬영기자들은 상처를 입은 범 한 마리를 발견하였다. 범은 불법분자가 놓은 덫에 치이여 이미 야외생존능력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밤도와 범을 가둘 쇠초롱을 만들었고 불도젤을 삯 내여 눈을 치면서 산길을 내였다. 연길인민공원의 고급수의사의 협조하에 그들은 범을 마취시킨 후 수의소로 호송하였다. 훈춘시 병원과 강복중심, 수의소의 전문가들은 동북범구급소조를 뭇고 다투어 사경에 처한 범을 구급하였다. 범의 목 부근은 엄중하게 상처를 입어 피부가 찢겼고 기관과 식도가 파렬된 상태였다. 상처를 입은 동북범에 관한 소식은 전국의 동물애호가들을 놀래웠다. 국가림업국에서는 인차 북경 할빈 등지의 4명의 고양이과전문가들을 조직하여 훈춘에 가서 동북범을 구하는 행동에 참가하게 하였다.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동원하여 두 차례의 대형수술을 거쳤으나 상처가 엄중한데서 패혈증으로 설을 앞둔 2월 10일, 동북범은 눈을 감고 말았다. 비록 아쉽게도 범을 살려내지 못했으나 이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중상을 입은 동북범에 대한 대형의 구급행동이였다. 뉴스 4: 훈동북범의 애닯은 죽음을 두고 훈춘림업공안국에서는 동북호랑이를 비법밀렵한 사건을 사출해 냈다. 그 밀렵자들은 다름 아닌 1월 29일호랑이에게 당했던 곡쌍희와 윤씨였다. 둘은 춘화림산작업소의 리수구로부터 삼도구림산작업소의 대마구사이에 덫을 놓고 야생동물을 비법 적으로 사냥했던 것이다. 밀렵자들은 이미 공안기관에 나포되였다. 잡귀를 물리고 복을 부르는 령물 호랑이는 우리 민족에서 으뜸으로 돋보는 동물로서 우리와 남다른 정서적 인연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 룡, 인도에서 코끼리, 애급에서 사자, 로마에서 승냥이를 숭배하듯이 우리도 호랑이를 서기롭고 신성한 령물로 보고 있다. 우리는 고대 예맥인의 후예, 그 예맥인들의 토템이 바로 다름 아닌 호랑이였다.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는 <<예는... 늘 시월에 하늘제사를 지내는데... 호랑이를 신으로 모시고 제사지냈다고 밝혀있다.>> 단군유사에서도 정착생활을 하는 곰토템족에 대응해 유목으로 이동생활하는 호랑이 토템족이 상징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호랑이에 관한 설이 총 635회나 나오는데 우리민족은 <<호담국(虎談國이)>>라 불릴 만큼 호랑이를 좋아했다. 신라 지덕왕때 알천공이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재가 있고 고려태조 왕건의 선조 호경은 일찍 사경세 처했을 때 산신인 호랑이 아씨로 부처 구출되여 그녀와 결혼하였다고 하며 백제의 견훤은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하며 고려의 강감찬장군은 그의 어머니가 내가에 빨래하러 갔다가 호랑이 발자국을 밟은 후 잉태하여 그를 보았다고 한다. 우리민속에서 호랑이는 <<산군자(山君子)>>로 산신령으로 상징되고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령물로 간주되고 있다. 하여 세시(歲時)와 놀이에서 호랑이가 그 어느 동물보다 많이 등장한다. 길상 적 의미에서 소나무가 장수를, 까치가 기쁨을 상징한다면 호랑이는 보은(報恩)을 상징한다. 하여 매년 정월초 궁궐을 비롯하여 민가에서도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내걸어 귀신의 침입을 막는다는 풍속이 있었다. 지어 욕창이 생기거나 부스럼에도 호랑이를 그린 종이를 약처럼 붙였고 전염병이 돌 때면 호랑이 발톱을 주머니에 넣어 아이들의 목에 걸어주곤 했다. 이렇게 문화에 도입된 호랑이 숭배는 많은 민간전설과 속담 성어를 낳고 있다. 너나가 잘알고 있는 <<장화홍련전>>에서 호랑이가 악독한 계모의 아들을 징벌하고 <<범의 꾸중>>에서는 인간들의 허위적인 작태를 호되게 꾸중한다. 많은 민담이나 전설고전작품들에서 호랑이는 권선징악의 대변인으로 도덕규범을 수호하는 위도사로 나타나고 있다. 속담, 성어에서도 유명한 <<호사류피 인사류명 (虎死留皮 人死留名>>외에도 <<호랑이 담배필적의 얘기>>, <<호미난방>>, <<호랑이 제소리하면 온다>>, <<범 가는데 바람 간다>>, <<범의 어금이>>, <<호랑이 새끼는 산에서 사람새끼는 글방에서>> 등등등으로 우리민족의 성심에 꼭 맞는 호랑이 관련속담들이 기수부지이다. 하여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저서에서 <<... 범이란 영특하고 문무가 겸전하고 자성이 있고 효성이 있으며 슬기롭고도 용맹이 놀랍고 장하여 천하에 적수가 없다. 세상의 큰 인물들은 범의 변화하는 재주를 본받고 제왕들은 범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자식들은 범의 효성을 법도로 삼고 장수들은 범의 위엄을 취한다.>>고 호랑이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피력했던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호랑이를 토템신앙의 상대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장백산맥으로부터 조선반도의 남단에까지 뻗은 험산준령에서 호랑이는 그네들과 함께 보금자리를 틀고 서식해 왔던 것이다. 조선의 흑우리 구석기시대 유적에서는 일찍 지금으로부터 60- 40만년전이전의 호랑이화석이 발견되였다. 호랑이를 비롯한 대형고양이과동물은 지질년대 상 3천만년전에 등장해 5백만년전에 분화되여 발달하였으며 아세아북부에서 발생해 남하하여 동남아. 서 아세아로 분포 확대되였다고 학계에서는 분석하고 있다. 원명이 시베리아호랑이인 동북호랑이는 바이칼호에서 연해주 일대와 중국 동북부 그리고 조선과 한국에 분포되여 있는데 많아야 250마리, 그중 대부분은 로씨아의 생물보호권에 있고 중국에는 겨우 20마리에 못 미치게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 져있다. 동북호랑이는 우선 모든 호랑이 종족 중에서 몸집이 큰 특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까지 가장 크게 보고된 것은 그 길이가 390센치이다. 수마트라 등지에 사는 남방계호랑이에 비해 털이 짙고 길다. 모든 호랑이 이마에는 왕 무늬가 있고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아래에 클 대(大)자 무늬가 있는 것을 가려볼수 있는데 이를 두고 백수의 왕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동북범은 원체 무늬가 더 뚜렷해 대왕무늬도 다른 범에 비해 더 선명히 볼수가 있다고 한다. 동북호랑이는 주로 길림성의 장백산구와 흑룡강성의 소흥안령일대에 분포되여있다. 1998년 중국 로씨아 미국 등지의 전문가들은 훈춘자연보호구에서의 고찰을 거쳐 이 보호구의 야생동북범의 수량은 3마리 내지 5마리 정도로 우리 나라에서 야생동북범의 밀도가 가장 밀집한 구역으로 인정하였다. 생령들의 합창 어릴 적 호랑이에 관한 옛말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고 <<무서운 얘기 해 줄가 호랑이 호랑이 빨간 수수깡>>이란 노래도 배워 목청 깨져라 불렀었다. 수수의 밑둥이 쪽이 붉은 기운을 머금은 것은 엉덩이가 박힌 호랑이의 피가 묻어 그렇게 된 것이 라는 옛말을 듣고 어느 한번 추수가 끝난 뒤의 밭머리를 지나다가 호랑이가 불쌍해!하고 채 익지 못한 동심의 참월한 감개에 빠진 적도 있었다. 일전 또 그한 감개가 다시 한번 나의 가슴을 헤집고 든 적 있다. 한쪽에서는 공포분자들이 뉴욕의 무역청사를 비행기로 들이박고 한쪽에서는 보복에 나서서 첨단무기로 아프가니스탄을 불바다로 만들고 셰계가 불안과 흔들림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그 경악뒤에 나에게 또 한번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준 것은 바로, 전쟁 때문에 돌볼수가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동물원의 호랑이였다. 일개 백수지왕이 개 만큼하게 여위여 있었다. 피골이 상접한 두다리를 후들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는 호랑이의 철창 밖을 향한 그 무원조한 눈길을 뉴스프로로 접하고 나는 며칠을 내내 잊을 수 없었고 내내 마음이 개운치 못해 있었다. 그에 뒤따라 또 한번 접하게되는 우리 신변에서의 동북호랑이의 밀렵자에 의한 참혹한 죽음... 일찍 기원 2세기에 로마의 소피스트 아일리아노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 기담집>>에서 <<언어와 리성을 가진 인간은 신을 경애하고 어버이를 존대하며 자식을 사랑하는 인륜을 알고 있으나 말이 없고 리성을 가지지 않은 동물에게도 천성의 미덕은 가추어야 한다.>>고 천명한바가 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신변의 생령들을 통하여 자연과 인생, 유한한 생명 중에서의 만물의 생기 및 우주의 영원을 감오하였다. 즉 자연의 모든 것 즉 나무, 돌, 짐승, 바람, 강물들이 주는 상호교환의 기호를 읽고 판독하는 것이 지혜이며 삶의 틀이였던 것이다. 동물이나 곤충은 단 풍요로운 저녁식탁우의 만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음계와 자연의 위대함과의 화합으로 인류에게 무한한 정신적 계발을 주고 있다. 허나 물질적 풍요를 생명최대의 본질로 생각하게 된 이 사회는 불행하게도 인간의 기본적 생존마저도 위협하는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장자도 자신의 자연관을 천명하는 글에서 <<하늘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만물의 본성을 거역하면 현묘한 하늘의 조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짐승은 무리에서 떠나고 새들은 모두 밤에 울며 재앙은 풀과 나무에 미치고 화는 벌레에까지 미칠 것이다. >>고 말했다. 자연파괴현상이 극심화되는 오늘의 상황을 2천년전의 장자가 예언한 것처럼 들린다. 오늘날 인간우위, 인간중심에 의한 자아팽창은 탐욕, 리기, 권력의지 등등 반 자연적 자아의 팽창을 낳고 있으며 자연파괴, 자연자원의 독점과 수탈, 그로 인한 인권침해 등의 온갖 부조리를 자행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보면 장자의 자연관은 나름대로 현대적 의미와 련결되는 것이다. 너나가 알다싶이 인간은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편입되여 있다. 인간은 생태계로부터 신세를 지지않으면 생존을 유지할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심각한 지구의 환경파괴와 인간생존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서는 인간은 자연의 평등 공생, 그리고 자연으로 열린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생태주의적 자연관이 요청되는 것이다. 할진대 허황한 욕구와 인위적인 필요때문에 우리와 공생해야할 자연계의 생명권에 총부리를 서슴치않고 들이대는 무제한의 욕념의 한계를 깨닫고 멈추어야 할것이다. 거의 모든 사전류나 동물에 관한 소개책자들을 보면 꼭 동물의 작용에 대한 소개가 적혀있다. 그 일례로 서우(犀牛)하면 고기는 먹을수 있고 가죽은 피혁제품을 만들 수 있고 뿌리는 약으로 쓰며 심장을 돕고 열을 제하며 해독과 피를 멎게 하는 작용을 갖고 있다...운운... 범도 례외가 아니다. 모피는 장식용으로 쓰이고 살과 뼈는 약으로 쓰임... 외에 존귀하신 그 호변마저도 최고의 강장제로 과대되고 있으니 범의 경우는 더 처참하다 해야할 것이다. 인간은 이제 백수의 왕이 아닌 만물의 왕으로 군림한 것이다.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 대한 습관과 심태는 모두 이렇게 나는 제왕이고 너는 노예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유의 발상과 공업시대의 신속한 도래로부터 우리는 언젠가는 도타웠던 이웃같은 동물에 대해 날로 멀리해 오고 있고 나중에는 동물의 적으로 전락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만약 동물을 사람의 위치로 우리의 정신셰계에 받아들이면 그 의미는 전설이나 동화로 치부되며 혹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의 사유로 바뀌고 만다. 허나 짐바부웨, 탄자니아와 같은 나라들에는 특수한 동물원이 있다고 한다. 모두다 동물구경을 하는 의미에서는 꼭 같지만 방법이 다른바 사람이 쇠초롱안에 들어가고 동물들이 밖에서 사람을 구경한다고 한다. 동물애호가들의 건의에 좇아 만들어진 특수동물원, 이제 우리모두 이처럼 주관과 객관의 위치변화, 흠상의 위치가 바뀐 역전심리뿐이 아닌 자괴와 우환과 련민에 배인 눈으로 동물들을 대하는 심성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가?<<거꾸로 보기를 통해 신을 보면 나의 눈은 열리면서 너는 신이기를 그친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감성과 생명의 보살핌 자연이나 우주적 에너지와의 교감으로 지혜와 직관을 기르는 현대인의 눈을 가져보자. 그리고 기계의 소음이 파고드는 숲 속을 불안히 거니는 호랑이의 고독한 뒤 모습에서 당신이 무심코 밟아만든 발자국도 산등성이 맞 잡이로 힘겨이 타고 넘는 개미 한 마리의 부지런한 움직임에서 생명의 진수와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감수하고 잃어버린 리성과 박애를 되찾아 보자. 지구라는 땅 덩어리우에 총 8개의 아종이였던 호랑이는 이미 3개의 아종이 멸종되였다. 그중 발리호랑이는 40년대에 카스피호랑이는 70년대에 자바호랑이는 80년대에 멸종되였다. 건국초기에만도 200여마리나 되었던 동북범도 이제는 20마리도 남지 않고 말았다. 이는 중국의 국보로 불리는 참대 곰의 수량보다도 더 적은 수자라고 한다. 실로 놀랍고 가슴아픈 수자이다. 이제 우리의 정서를 담고 우리의 산맥을 넘나들며 호기와 현시의 울음을 우리의 가락처럼 울던 동북호랑이도 정녕 그 위용의 자취를 감추고 말것인가? <<호랑이 호랑이 빨간 수수깡>> 어려서 장난기에 넘쳐 불렀던 노래가 오늘은 어쩐지 애수와 사색의 가락으로 변조되여 울려온다... □
93    [수필]채플린과 다시 만나다 댓글:  조회:3083  추천:73  2007-06-29
채플린과 다시 만나다   김 혁주말, 버릇처럼 음향점 DVD매장에서 나만의 취미의 시간에 빠져 있는데 매장 구석 쪽에 "채플린 영화 전집"이 보였다. 오래 전에 비디오로 갖추긴 했지만 빌려간 친구들이 내내 돌려주지 않아 몇 부가 이 빠져있었다, 또 한번 전집을 몽땅 사 들었다.     채플린의 영화를 접한 것은 초중1학년 때, 그 무렵, 나는 병환으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내내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내가 한달 되도록 영화관 문전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다 동네 친구들의 강권에 끌려 어머니 몰래 영화관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 채플린의 "모던시대"였다. 처음 접하는 채플린이라는 캐릭터와 그 발에 발을 잇는 코미디의 드라마, 어둠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웃음을 찾았다. 내가 좀 크게 웃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친구들의 눈길이 나에게 몰부어 졌다. 나는 덴겁해 웃음을 삼켰다. 영화가 끝나 나올 때엔 애들의 눈이 새삼 의식되여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채플린은 투명한 감수성의 소년이였던 나에게 이렇게 특유의 농도와 줄기로 다가왔다.     홀리우드 대작영화들, 신작 개봉 영화들에 밀려 먼지를 들쓰고 있는 채플린의 영화를 사들고 돌아와 그 중 몇 부를 다시 보면서 그가 얼마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작은 중절모, 무릎이 나온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모닝코트,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엔 지팡이... "미키 마우스(米老鼠)와 함께 20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미국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채플린. 눈물과 웃음, 유머의 대명사- 찰리 채플린이다.     째질 듯 한 가난 속에 다섯 살 때 어머니 대역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예술생애를 시작한 그, <<모던시대>>, <<도금기(淘金記)>>, <<도시의 빛>>, <<곡마단(馬戱團)>>, <<대 독재자>> 같은 영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계영화사의 걸작들이다. 요즘 잊혀져간. 또한 뒤뚱거리는 찰리 채플린의 걸음걸이를 떠올리면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의 모든 것은 늘..코믹하게만 표현되여 채플린..하면 가볍게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탁월한 아이디어로 넘치는 그의 영화에는 사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이 깔려있다. 그의 영화 속에 깊이 숨겨진 얘기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들의 얘기, 하고싶은 얘기들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너나가 무가내한 삶을 살지만 눈 망울속에 절망은 없다. 그들은 저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가졌다. 그들은 저마다 평화와 진실을 사랑한다. 배반하지 않고 뒤 돌아서지 않으며 마음이 찡할 정도의 순수와 맑음을 지녔다. 이것은 또한 채플린이 살아온 삶이기도 했다.     "내가 맛보았던 불행, 불운이 무엇이었든 원래가 인간의 행운, 불운은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아서 결국은 바람 따라 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불행에도 그다지 심한 충격을 받지 않았으며 행운에는 오히려 순수하게 놀라는 게 보통이었다. 나에게는 인생의 설계도 없으며 철학도 없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인간이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 중에서 뽑아본 말이다. 그가 영상에 던진 언질은 “인간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불행을 맛보았던 채플린이, 기쁨을 향유하는 사람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어 냈으니 어찌 감동이 없을까.       웃기자고 작정하고 드는 영화보다 삶의 신산함이 곁들인 이런 류의 코미디에 더 웃음이 난다. 웃고 나면 가슴 한구석 애잔함이 남는다. 채플린이 주는 웃음이 바로 이 종류의 것이다. 사람들이 몸짓으로 단순하게 웃기는 코미디만 좋아할 때 그는 코미디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깊이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인간의 삶에 대한 위대한 성찰과 따뜻한 연민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채플린은 웃음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발언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진 무척 진지한 감독이였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영상 스타일이나 개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발언해 왔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산업화와 기계화,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는 빈곤과 굶주림, 방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였으며 항상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 주었다. 이런 채플린 특유의 유머와 련민의 결합은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리유인 것이다. 바로 그 진지함이 가볍고 즐거운 웃음을 공중에 흩어버리지 않고 관객의 가슴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로 지탱해왔던 힘이였다. 그가 20세기에서 첫 손꼽히는 대중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것은 각본, 음악, 제작 등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소화해 내는 다재다능함과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에도 있겠지만, 코미디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진지한 휴머니즘적 접근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물질 만능 주의이고, 우수한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 진정 따듯한 마음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내가 소장한 채플린의 영화들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리해하면서 살아갈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을까?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채플린이 어느 시상식장에서 한 수상소감의 한 구 절이다. 채플린처럼 비록 불행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왔지만 모든 이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한 노력은 정말이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채플린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란 코미디를 보고 그저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웃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채플린 영화를 아직 집에 소장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중 몇 부라도 갖추어 두라고 권장하고 싶다. 이른바 명작의 서렬에 든 좋은 소설이나 위대한 음악을 집에 챙겨두고 다시 보고 들으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듯이 채플린의 영화도 바로 그러하게 여러분들의 서가를 빛낼 수 있는 목록이 되기에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웃음 한 마당 속에 흑백의 영상을 가슴에 담는 것만으로도 큰 거 하나를 건진 것 같은 뿌듯함으로 가득하다.
92    모니터속의 달 댓글:  조회:4499  추천:73  2007-06-29
  수필   모니터속의 달   김 혁           추석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하늘은 청청 맑고 소소히 높다. 무심코 이고 다니던 도시의 대공이 이렇게 맑고 높아 뵈기는 처음이다. 청량한 과즙(果汁)같은 바람이 뺨을 쓸어주어 기분이 호쾌하고 추석을 맞느라 열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오가는 이들의 손마다에 들린 월병구럭이 눈맛에 즐겁다.   허나 올 추석은 잡지사의 청탁에 밀린 빼곡한 창작스케쥴 때문에 안해를 친정집에 보내고 홀로 맞게 되었다. 컴을 마주하고 옹근 사흘을 보냈다. 모두가 뻐근히 즐기는 명절에도 홀로 남아 죽어라 자판기를 두드려 대야하는 이 껄렁한 문인신세, 환절기의 날씨처럼 마음은 감개무량하다.   홀로 맞은 추석날 아침에는 한국 MBC방송 프로로부터 생방송 취재를 받았다. 중국 조선족들의 추석을 쇠는 모습을 자상히 소개해 드렸다. 대담중에 재미나는것은 한국측의 PD나 아나운서가 중국의 월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것이였다. 송편과 같은 음식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담의 많은 부분을 할당해서 월병의 형태며 맛에 대한 소개를 해드렸다. 요사이 문우들과 함께 만든 인터넷 문학동호회 게시판에도 해외문인들로부터 월병에 관한 질문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또 열심히 해답을 주었다. 음식문화의 차이와 그 비교로부터 배우고 교류를 나눈 즐거운 시간이였다.      조선족의 전통추석음식으로는 송편 시루떡 인절미 등등으로 각양각색인데 그중 송편을 대표음식으로 꼽는다. 송편속에 꿀 밤 깨 콩 등속을 넣어서는 가마에 솔잎을 깔고 쪄낸다. 송편을 보기좋게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하여 처녀들이 예쁜 손자욱을 내며 알뜰히 빚는다. 이렇게 단 미각뿐이 아닌 후각과 시각의 맛과 멋을 골고루 내는 송편이다. 만월(滿月)이 뜨는 추석에 반달형의 송편을 빚는것은 반월이 일일성(日日盛)하므로 발전의 상징에서 너와 내가 모두 빚어 꽉 찬 달이 아니라도 하루하루 채워간다는 공동체의식의 표현이라고 민속학가들은 운운.   그처럼 중국의 월병만들기도 무척 재미있다. 이라는 시구가 있듯이 월병은 중국의 추석명절에서 빠칠수 없는 주요 음식이다.      중국의 전통추석음식-월병     달제를 지내며 달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호두 땅콩 팥을 넣고 빚어만드는 과자등속, 달의 형태를 따온것도 있겠지만 일가족이 둥글게 모이고 해나가는 일이 원만하라는 길상의 의미가 부여되여 둥글게 빚어 만든다.   월병은 일찍 은나라와 주나라때에 강소 절강 일대에서 발상되여 애초에는 태사병(太師餠), 호병(胡餠)으로 불려져 왔다. 당나라때에 이르러 당태종과 함께 달을 감상하며 호병을 맛보던 그 유명한 양귀비가 호병이라는 말이 속되니 달의 형태와 비슷한 이 맛나는 과자를 월병이라 부르자 하여 지어진 이름.   요즘의 월병은 단 맛보기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 친우끼리 서로 명절례물로 선물하면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 해나가는 매개물로 되고 있다. 월병의 포장도 더 아치하고 운치있게 변하여 포장곽에 달을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구나 경구 리언들을 새겨넣거나 중국 4대고전의 유명 인물상도 계렬로 그려넣어 다 먹고도 던지기 아까울 정도, 작년에 먹고난 월병포장지를 나는 지금도 소장해 두고 있다. 올해는 록색식품을 선호하는 세계적인풍조에 맞추어 월병포장의 디자인에서도 록색이 주류라고 한다.   이렇게 유래도 많은 월병을 홀로 씹으며 그 멋과 맛을 새삼스레 음미해 보다 머리도 쉬울겸 메일을 열어보니 고마웁게도 친구들이 보내온 명절축복의 메일카드도 넘쳐나게 들어 차 있었다.  모두가 추석맞이를 내용으로 한 메일카드였다.   황금빛 풍요로운 가을밭에 악동이처럼 섰는 허수아비와 그 코끝에 앉은 잠자리가 그려진 카드, 딩동!하는 초인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 정교롭게 포장한 월병 선물꾸러미가 나타나는 카드도 있었고 광야에 떠있는 달아래 면면한 우수를 자아내게 하는 얼후(二胡)명곡 이 흘러나오는 음성메일도 있었다. 대접에 들먹히 담겨진 먹음직한 송편이 그려져있고 그 여백에 라는 글발이 씌였는 카드는 안해가 홀로 쇠는 명절이 마음에 안스러워 추석날에 기어이 PC방을 찾아 도문에서 내게로 보낸 카드였다.   그중에도 나의 이목을 끄는 메일은 옛도읍의 밤경치를 그린 수묵화카드였다. 교교한 달빛아래 옛장안의 루각들마다에는 등불이 휘황했고 그림 위로 너나가 애송하는 리백의 천고절구 이 운치있는 붓글씨로 떠오르고 있었다.       시성 리백     보내온 카드중에서 달밤에 하얀 저고리입고 껌정고무신을 신은 개구장이 오누이가 두눈이 올롱해 달을 쳐다보며 과일을 따는 그림을 택해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았다.      그러한 메일의 축복속에 나는 홀로이지만 명절의 기분을 짙게 체취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축복과 면려에 힘을 입어 짧은 시간에 편집부의 청탁을 맡은 4편의 작품을 쳐냈다. 흡족한 기분으로 월병을 안주로 하여 홀로 할빈맥주 세병을 거뜬히 축냈다. 추석무렵이면 곡식이 익어가고 햇과일이 나오고 계절도 춥지도 덥지도 않아 즐길만한데서 이라는 말이 있더니 글 타작을 끝내고 유유자적하면서 그 기분을 알것 같다.   이렇게 명절때마다 나는 친지와 친우들로부터 많은 축복과 문안을 받군한다. 그 축복들을 나는 삭제해 버리지않고 메일보관함에 저장해 두곤 한다. 그렇게 보관함에 저그만치 60여쪽의 축복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절친한 문우가 보낸 내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이 있는가 있는가 하면, 창작에 애면글면하는 나의 신체를 걱정하며 머리 좀 쉬우라고 금방 출간한 도색잡지 가위의 발가벗은 모델의 누드사진을 업로드(下載)해 보내는 달작(達作)스러운 선배님도 있고, 어느 장난기 짙은 문학도가 보낸 코밑에 왕방울만한 코방울을 달고 개구쟁이가 요란한 소리로 재채기를 하는 라는 애니메이션메일도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충격속에 우리의 생활양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서로의 문안방식도 재래의 길고 격정에 넘치는 서한문안으로부터 육성을 가려들을수 있는 전화문안, 이제는 아무곳에서도 시시때때 보내고 받을수 있는 컴문안에 까지 이르렀다. 급변하는 생활양식속에 당혹감을 머금으면서도 그 양식을 어차피 받아들이는 오늘의 현대인들이다.    이 며칠간의 중앙TV뉴스에서 볼라니 개인 컴퓨터의 비주얼베이직(可視圖像)을 통해 추석문안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시간에 매여 스케쥴에 매여 하루하루를 매끈하게 꾸며나가는 현대인들에게서 명절이면 술빚고 떡치고하던 생활양식은 돈후한 어제에 대한 추억을 안고 색바랜 앨범속에 간직되고 있다. 조련찮게 모두가 함께 모여 어제를 추억하며 화끈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을테지만 복받은 현대화한 통신계기들을 충분히 리용하여 서로의 따뜻한 문안과 격려를 나누는것도 오늘의 시체멋나는 좋은 방식이라 보여진다.    물질의 향상과 더불어 매일이고 되풀이되는 명절같은 나날에 더 문명하고 더 실용적인 명절맞이방식이 우리에게 소기(所期)된다. 이는 현대생활양식은 구경 어떤 양상이여야 하는가? 하는 숙제로 우리 모두에게 부과되여 있다.     스모그(매연, 안개)에 오염된 요즘의 세태에서도 추석달은 예이제이없이 떠오른다. 는 렬양세시기(冽陽歲時記)중의 속담 한구절이 생각난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91    고도를 기다리며 댓글:  조회:4274  추천:73  2007-06-29
. 잡 문 . 고도를 기다리며 김 혁 하나 . 더러는 엉뚱하지만 더러는 진지한, 여하튼 유명짜한 극이다. 문학도 시절에 서에서 처음 극에 대해 짤막한 줄거리로 접하고 커다란 호기심을 가졌다가 후에 완정한 극본을 찾아 읽었다. 극장가에 앉아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지만 변강의 오지에 살고있는 지라 그런 사치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몇해전 한국행차를 했을 때 서초구 에서 극작가의 탄신일을 기념해 공연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귀국날자와 겹치여 아쉬움을 씹으며 돌아선적 있다. 4만원의 표값이라도 내치고 볼려 작심했었는데… 그러다 작년 봄 이라는 DVD물을 사들여 화면으로나마 드디여 이 명극을 보게 되였다. 작자 베케트 탄생 100주년만에 드디여. 그로서 다년간의 감질난 욕구를 달랠수 있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일명 라고 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길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 듯하다. 라는 인물이 딱히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 조차 분명치가 않다. 이제는 습관이 되여버린 지루한 기다림을 과제처럼 수행해가며 지칠 대로 지쳐있지만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본다. 고도의 사자(使者)인듯한 남자애 하나가 나타나 하고 알려주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튿날 고도는 오지 않는다. 사흗날에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 다음 그 다음 날에도 고도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소망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사뮈엘 베케트   아일랜드 출신의 괴재스러운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에 의해 1952년 발표된 극작품, 1953년1월3일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됐다. 초연당시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몰려 극의 엉뚱함에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 기다림의 상대인 에 대해 관객과 평론가들은 그 의미를 깨치려 애쓰며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왔다. 혹자는 자동차 운전수라고 혹자는 빵이라고, 혹자는 명배우라고 혹자는 신이라고 혹자는 사람이 하니라 희망이나 동경, 자유라고... 로 인해 베케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극은 20여종의 언어로 번역되여 구 유럽 무대를 휩쓸었고 새로운 연극운동의 한 방향을 제시하는 부조리 연극이라 칭송되여 1961년에는 국제출판 대상을, 1969년에는 실존주의 시대의 부조리극을 이끈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감옥 공연까지 허락되어 수천 여명의 죄범들을 열루(熱漏)에 젖게 했다.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나길 바라는 시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화 했다고 한다. 기다림이라는 근본적인 내재적 삶을 끌어들여서 말이다. 하지만 베케트는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누군가 집요하게 물을라치면 라고, 그자신도 기다리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면 의 정체에 대한 정답은 없는 셈이다. 기다림의 상대에 대한 정의는 관객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다. 각자의 바램에 따라 그 기다림의 대상이 변할수 있는거고… 우리의 일상, 그리고 일생이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라고 보면 되지않을까. 실제로 극중인물들은 하릴없어 보이긴 해도 기다림이라는 것에는 충실히 리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거나 혹은 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마음 가운데 고도가 올거라는 희망이 잠재되여 있기에 그렇게 느긋한지도 모른다. 고도는 그렇게 지금까지 기다림을 던져주고 있다. 무대우에서도 무대아래에서도 기다림의 활극은 계속된다. 둘 기다림에 대해 너나가 다른 각자의 체험을 갖고 있으련마는 돌이켜보면 나 역시 기다림에 남다른 체념적인 역고를 치러 왔었다. 결혼초기, 부평초 같은 셋방살이 신세에 부대끼다 못해 시교를 멀리 떨어진y향의 장모님 집에 얹혀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길까지 차로 대어오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려야 했다. 출근 시간을 지키기 위해 아침6시를 좀 넘겨 정류소로 나와야 했다. 추위에 발을 구르며 차를 기다리기가 십상이었다. 연길 역에 내려서는 또다시 공공 버스를 갈아 타야했다. 발을 잇는 또 한 번의 기다림... 저녁에 돌아올 때도 마냥 한 본새였다. 목을 빼들고 굽이 길목을 바라 조갈 들게 차를 기다리는 그것, 그것이 그때 내 일상의 전부였다. 그 때 안해는 임신7개월, 허나 생활의 부하에 못 이겨 박봉이라도 바라면서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그 숨 가쁜 몸으로 정류소의 일각에서 추위에 몸 떨며 피곤한 모습으로 기다려 서있는 아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살같이 아픈 시각의 밀착이었다. 어느 한번, 막차를 놓치고 요행 개체운수를 하는 소형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운전수는 사람이 다 차서 오를 수 없다며 나와 안해의 간절한 애청을 매정히 물리쳐 버렸다. 사위는 어스름이 이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차만 놓치면 친척집에 가서 군색스럽게 한밤을 지내지 않으면 려관방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얼굴에 두툼히 철판을 깔고 달리기 시작한 차를 따라 달리며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차가 멈춰 섰다. 안해가 일루의 희망을 품고 무거운 몸을 숨 가삐 놀리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차가 엔진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맥을 놓으며 서 버렸는데 차가 또 멈춰서는 것이었다. 또다시 숨이 턱에 닿아 차를 따라잡았는데 차는 또 한 번 우리를 코앞에 두고 내빼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를 조롱하고 있었다. 격노한 나는 광분하는 사자처럼 달려갔다. 주먹으로 차 유리를 내질렀다. 옆쪽 차 우리가 산산 조각이 났고 나와 그 덕성이 무여지한 운전수 사이에 드잡이가 오갔다. 결국 서로가 코가 깨지고 눈 두덩이가 참대 곰을 꼭 닮은 모습으로 단락을 맺고 말았다. 터진 입술을 감빨고 섰던 내가 결김에 친척집에서 한밤을 지내자고 애원하는 안해의 청을 무질러 버리고 우둔한 짓거리를 벌이고 말았다. 30여리 밤길, 금방 눈 온 뒤의 길을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걷기만 하였다. t촌 부근까지 왔을 때 앞서서 분기를 곰 삭이며 씨엉씨엉 걷기만 하던 내가 머리를 돌렸다. 힘겹게 뒤를 따르고 있는 안해, 안해는 분명 울고 있었다. 깃을 세워 올린 외투 속에 목을 잔뜩 움 추리고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입김에 서리가 하야니 불린 앞 머리칼, 달빛에 번뜩이는 안해의 추연한 눈물을 본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사내의 소중한 눈물이 주체할 길 없이 송진처럼 눈귀로 꾸역꾸역 배어 나왔다. 코를 훅 들이마시며 나는 어금니를 사려 물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매일을 기다려왔고 지겨운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셋 국제 만화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일본만화 한 폭을 감개에 젖어 본적이 있다. 이란 표제의 만화. 전통의상차림의 중년 녀인 하나가 나들이 행색으로 철길 곁에 다소곳이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조용한 맵시로 기다리고 있는 그녀 앞에 놓인 철길은 앞뒤가 단절된 토막 난 짧은 레일. 그 어떤 교통도구도 실어낼 수 없는 짧다란 레일 토막이였다. 이 만화 한 폭이 내게 준 감회는 컸다. 이 녀인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멀리 고향 계신 친정어머니의 일 년에도 몇 번씩 속구구를 뼈 물러야 이룰 수 있는 딸집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도회지에서 재교 중인 대학생 아드님의 방학 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세대주의 중임을 떠메고 타향에서 땀 동이 흘리다 돌아오는 막벌이꾼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읊조리게 하며 무정하고 랭혹한 현실처럼 안타까이 눈앞에 놓여 진 짧은 레일, 아무도 올 수 없고 갈수 없는 그 레일 앞에서 인고(忍苦)에 각인된 듯 한 뒷모습으로 녀인은 그렇듯 조용히, 그렇듯 온 곱게 기다려 서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인의 기다림은 어차피 영겁(永劫)의 기다림이리라!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기다림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시각 시각마다 변용되어 일상에 숨어 있는 기다림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이란 기다림의 련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은 모두 다 다르다. 벤치 곁에서 땀에 흥건한 손으로 생화송이를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선 련인, 창가에 고착된 듯 정물처럼 박혀 자식의 귀환을 기다리는 머리 발 센 어머님, 가물철에 감농군들마다가 조갈 든 입술을 감빨며 기다리는 단비, 조국을 잃고 천하에 집도 없이 광복의 날을 기원하는 지사의 일념, 술 사환을 멀리 주막에 보내고 목이 타는 애주가의 고민, 진통 끝에 다듬어낸 글발을 투고한 뒤 채용을 기다리는 문학도의 잠재울 수 없는 마음. 패전에 당착하여 응원 병의 도착을 기다리는 장병의 눈물...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추구, 동경, 환락, 리상, 목표는 언제나 멀리에 있다. 그 긴 추구의 려정을 통하여 우리는 완성의 막바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 막바지로 이르는 과정이 바로 기다림이다. 위수 가에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유한자로 꾀한 채 기다리고 기다리다 주문왕을 기다려내어 력사의 한 획을 그은 강태공의 일화도, 고역에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으로 굳어져 버린 맹강녀의 전설도 모두 다 기다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긴긴 기다림 속에 세월의 이랑에 씨 뿌리고 퇴비 주고 물주며 달디 단 열매를 맞아온 인간의 끈질긴 인고의 상정이 그 기저에 깔려있음으로 해서, 이한 이야기들이 널리 전해지고 경전적인 신화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요사이 시교와 린접된 우리 동네에는 로무의 선풍이 불어치고 있다. 연이 아버지도 선호 아버지도 란이 아버지도 너나없이 싸이판으로 리비아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나갔다. 2년이고3년이고 희망을 약조한 채... 그와 함께 눈물겨운 기다림도 막을 열었다. 남편이 탄 선박이 해풍을 만나지나 않을는지? 그 곳의 폭양이 너무 뜨겁지 않을는지? 그 고역을 남편이 견디여 낼만할는지?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일 매일을 일일이 여삼추같이 기다리고 있는 그네들, 자식 양육의 중임과 부모공경의 의무를 달가이 묵묵히 리행해 가고 있는 그네들, 그네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정녕 가정이란 소중한 진주를 빚기 위해 아픔을 참는 조개의 몸부림이었고 기다림이였다. 대나무를 심으면 첫 해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둘째 해에도 역시 보이는 것은 없다. 셋째, 넷째 해에도 똑같다. 그러나5년 째 무렵에는 대나무 뿌리가 이미 땅 밑으로 쫘악 퍼져 있다. 그리고 작은 죽순들이 땅을 뚫고 조금씩 올라온다. 그리고6주 정도 기다리면 온 산을 푸르고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버린다 대나무의 성장과도 같은 그들의 올곧은 삶을 지켜보며 나는 인내에 대해 생각했다. 기다리며 관망하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기의 삶을 가꿔가는 연이 어머니, 선호 어머니, 란이 어머니... 데데한 그 시골 아낙들이 요사이 어쩐지 범연히 안겨 오질 않는다. 기다림이란 바로 이런 거다. 기다림에 당착하여 지치면서도 어차피 그 기다림의 양상을 무양히 보존해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진세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진실한 모습이다. 우리의 소망에는 곧바로 이루어지는 소망도 있지만 시일이 오래 걸리는 소망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기다림에는 행복에 대한 바람과 설렘이 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다. 기다리는 동안 홀로 피 흘리는 아픔과 외로움을 경험한다. 그 살을 으깨는 고통을 거쳐 마침내 새살이 돋는다. 유가(儒家)에서는 라고 했다. 진정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하는 일상을 누릴 줄 알며 래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안으로 끌어안고 현재에 살면서 래일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본능적, 지향적 추구의 배불림을 위해 우리는 울고 있는 것이다, 웃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음악같이 아름다운 시로 기다림에 대해 갈파한 시인 김영랑의 천고절창(天古絶唱)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난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사족(蛇足): 그 유명한 가 일전에 중국의 국수(國粹)인 경극과 만났다고 한다. 서양의 고전을 동양적 경극과 결합해 주목받고 있는 대만의 당대전기극장이 출품, 6월말에는 한국으로 까지 출두하여 공연했다고 한다. 경극으로 분칠 다시 하고 나온 는 베케트의 연극을 경극의 과장된 몸짓과 분장으로 표현했고 중국의 전통시가를 삽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실로 명작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90    봄은 메일을 타고 댓글:  조회:3442  추천:73  2007-06-29
수필 봄은 메일을 타고 김 혁 1, 절친한 문우들이 보내온 메일카드를 열어보고 봄이 왔음을 소스라쳐 감지하게 되였다. 아직 창 너머 보이는 맞은 켠 옥상의 눈이 녹아내리지도 않았고 길을 나서면 매운바람이 목덜미를 채찍질하건만 메일카드가 담긴 보관함 속은 봄기운으로 그득 차있다. 《봄을 느끼세요.》, 《봄나들이》, 《봄날의 구두수리장이 아저씨》... 제목만 봐도 봄기운을 짙게 체취할 수 있는 정교롭고 아치(雅致)한 카드들이 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회답을 줄 양으로 나도 메일카드를 골라보니 그러한 봄을 주제로 한 카드가 10여개나 되였고 이달의 추천카드도 거의 모두가 봄에 관련된 카드였다. 그중 몇 개를 정성스레 골라 메일에 띄우며 나는 금세 봄을 배달하는 즐거운 우편배달원 같은 감흥에 흠뻑 잠겨버렸다. 지난겨울은 근년 들어 진짜 겨울답게 반세기동안 보기 드문 큰 눈도 내리고 하였다. 내 좋은 사람끼리 눈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모여 달콤한 술잔도 나누고 얼룩 없는 우정도 나누고 지성 배인 대화도 나누면서 눈이 주는 부피만큼 두터운 감흥에 내내 사로잡혀 지냈었다. 그런데 어느새 봄이 막간극에 등장하는 배우처럼 막 뒤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고 나를 놀래고 있는 것이다. 메일카드를 읽으며 급변하는 세월의 조화에 나는 그만 마우스에 손을 얹은 채 천치처럼 정체불명의 감개에 잠겨버렸다. 겨우내 추위에 지지름을 당했던 박제된 마음을 풀어주는 봄은 왔다. 번요한 일상의 소요 속에서도 봄은 소리 없이 왔다. 잠들었던 모든 것들이 눈을 부비며 일어나고 온갖 물상들이 저마다의 몸짓, 저마다의 소리를 얹어 생기를 부여하는 그런 봄이 빨리도 다가왔다. 솔로몬왕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봄으로 구애(求愛)했다고 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눈도 그쳤고 땅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되었는데…》 사랑에 빠진 왕처럼 두 팔 벌리고 하늘 우러러 감동하며 대기의 중간을 청량한 기운으로 채우는 봄 양기를 더듬어본다. 계절의 은밀한 변화와 함께 한겨울 신고를 치르던 비염도 많이 나아져 한결 개운해진 몸과 마음이다. 그래서 언젠가 읽었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어느 시인의 《겨울속의 봄 이야기》를 소리 내어 읊어본다. 아침 한때, 순금의 부리로 새들은 남은 잔설을 쪼아 대고 무어라고 읽고 가는 바람의 전언 눈 뜨는 나무 눈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 수피의 깊은 안쪽에서는 몇 개의 새순이 자라나고 있고 사랑의 품사로 점점이 물들어가는 나의 눈과 목소리처럼 비쭉비쭉 푸른 혈관이 일어서면 홀연 눈썹위에 내려앉는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 겨울 냉기는 땅강아지 발목 앞에서 바쁘게 무너지고 있다. 일습을 개변하여 한결 홀가분해진 여인네들의 봄단장이 한결 눈에 다습다. 전신의 우울을 벗어버리고 겨우내 아름다운 몸매를 지겹게 포박했던 솜붙이를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고도 여흥적인 모습이 된 여인들, 현란한 디자인과 색조의 의상으로 원체 아름다운 모습에 더 밝고 화사한 이미지를 부여한 여인들, 봄과 그네들 사이에 기다란 두 줄기 같기 부호를 그어본다. 2, 봄이라 제명을 밝히면 언제나 햇빛, 꽃, 향기, 여인 이런 순으로 우리의 뇌리에 버릇처럼 서열을 지어 다가온다. 봄은 꽃을 분만하는 계절이요, 여인은 또한 꽃처럼 아름답다는 투박하나마 본능적인 연상의 조합인가 보다. 항간에서 애창가요로 내내 불리는 《여성은 꽃이라네.》라는 노래가 그런 연상을 한층 더 유발시키는듯하다. 하기에 봄이 오면 누님같이 친절하고 애인같이 사랑스럽고 이웃집마누라같이 후덕해 보이는 그런 여자를 찾아 자꾸만 무언가 입담거리를 만들어 주근주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일군 한다. 좋은 입담거리 하나 만들어보면, 요즘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변조된 포즈가 놀랍다. 단지 감상적으로 한 두 송이의 계절 꽃과만 어울려볼 요즘의 여인들이 아니다. 꽃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에 어제의 감상가치가 있다면 또한 마음껏 열고 마음껏 자기존재를 현시하는 것이 오늘날 꽃의 다른 한 양상이다. 가혹함에 가까운 상품화시대, 경쟁이 소기되는 시대에도 남정네들과 동조하여 참여의식을 키우고 있는 여인들, 여기저기에서 그만의 지혜와 정열과 운치와 기품을 보이고 있는 여성들, 이것이 곧바로 규방을 멀리한 오늘날 여성들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까? 《내면의 무(无)에 대해 여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어릴 적 무섭게 들은 옛말속의 귀신보다 소녀 적 밤길에서 만난 악한보다 더 두려워한다. 하기에 여자는 자신의 무로부터 탈주를 하게 된다. 즉 그녀들은 자기 혼자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망을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할일 없다는 것은 자기 혼자서 무한한 암흑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플랑크는 이렇게 분석한바 있다. 이는 전통에서 탈주하고 전통의 이미지를 파격하고 있는 현시대 여성들의 심태에 대한 정론이며 분석이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엄동의 추위와 같은 긴긴 터널을 여인들은 경유해왔다. 역사의 장하를 거슬러보면 거의 모든 민족, 거의 모든 종교, 고대거나 근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여성은 남성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왔다. 권력의 척도는 언제나 남성이 우월하다는 학설 쪽으로 기울여져왔다. 지어 명지하다는 철학가들마저도 여성들에 대해 색안경을 걸고 이단에 가깝게 대해왔다. 고대희랍의 저명한 객관적 관념론 철학가인 플라톤도 여인은 그저 남편의 재산의 일부분으로서 말, 소, 개와 같은 사유물이라고 인정했다고 한다. 성(性)선택 진화론에서도 일전까지는 성유전자 중에서 남성의 우월성을 전제로 해왔었다. 이 공정치 못한 관점은 《양성은 생리학의 의의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과학적인 검증에 의해 뒤늦게야 바로잡혀졌다. 이렇게 우리의 여성들은 장장 몇 세기를 무지하고 고루한 전통적인 인습과 편견의 저애에 본능, 자유, 실존을 여지없이 짓눌리고 종속적인 위치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강력한 유교적,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하여 여성은 사회참여는 제쳐놓고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되어왔으며 여성에게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란 그저 혈통계승의 도구대역일 뿐이었다. 그렇게 지겨운 불운의 그늘 속에서 지내왔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소외와 불이익을 자각하게 되였고 보조자의 대역만이 아닌 주체 적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부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복종과 희생이 더 이상의 미덕이 아님을 알아차렸고 뛰어 일어나 사회적으로 조장하는 뿌리 깊은 남성중심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으며 여성의 인간화와 해방의 궁극적 명제를 위하여 몸을 바쳐왔다. 그렇게 높은 벽을 넘어 드디어 지금은 자유스레 자기에게 주어진 시공(時空)을 처리하는 주체적인 실존자로 탈바꿈하기에 이르렀다. 그네들은 진정 삭막한 환경에도 닻을 내리우고 끈질긴 인고로 완강하게 피어나는 무수한 꽃송이이다. 더욱이 멱을 바싹 죄는 듯한 혹심한 경쟁이 주어진 오늘날 기계문명이 빚어낸 잡다한 소음과 스모그 오염 속에서도 꽃은 완강하게 피어나고 있으며 그 꽃처럼 어여쁨과 성숙의 관능미를 지닌 여성들이 날로 붇고 있다. 《음성양쇠(陰盛陽衰)》의 풍조를 두고 혹자는 조소하고 우려하고 힐난하고 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역시 기꺼운 풍조가 아닐까 모계사회를 거쳐 온 우리 인류는 기실 심성바탕에 언제나 여성에 기탁하는 근성의 일면을 은연중 깔고 있다. 허다한 종족의 신앙계를 살펴보면 화신(火神)은 에누리 없이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태고 적 한개 부락에서 그 명맥을 이어주는 필수품인 불씨를 보존하는 중임은 부락에서 가장 지혜롭고 존경받는 여성에 돌려졌으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가 우러르는 인끔 높은 존재로 우상화 되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설화를 펼쳐 봐도 여성숭배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진맥해 낼 수 있다. 《후한서 옥저전(後漢書 沃沮傳)》의 기재에 의하면 옛날 함경도 지방에 생존해왔던 동옥저의 동쪽바다가운데 섬 하나가 있는데 그 섬은 사내라고는 한사람도 없이 말짱 여인네들만이 어우러져 사는 여인국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시조인 석탈해의 어머니도 원체 《적녀국》이라는 여인국의 여자였다는 설이 있다. 이 설화의 전래 때문이었던지 중세기 서양 사람들의 우리 민족에 관한 견문가운데서 조선에는 여자만 사는 여인국이 있다는 대목이 어김없이 들어있다. 자기 씨족의 시조를 신성화해야 할 소박한 심경으로부터 그네들은 단지 흥감스러움이 아닌 경건함으로 신기루 같은 여인국을 설정, 그로부터 여인을 우상화하는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할진대 오늘날 여성들의 새로운 부상과 그 존재의 과시를 두고 온 곱지 못한 눈길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봄의 자체는 창조적의미를 품고 있다. 그만큼 봄과 꽃과 동일시되고 있는 여성들의 창조적 이미지에서 짙은 봄 양기와 함께 우리는 경이로움에 앞선 기쁨과 동감과 자부를 느껴야 할 것이다. 남다른 순발력으로 시대와 접속하고 있는 여성들의 양상을, 메일을 타고 온 봄은 진한 메시지로 나에게 남겨주었다. 그래서 내 사색의 컴퓨터자판기도 봄 양기의 율동으로 가락 맞는 봄꽃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나보다.   "연변녀성" 2001년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89    [독서만필]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 댓글:  조회:3066  추천:73  2007-06-29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어느 중국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녀자가 열심히 읽고있는 책표지를 보고 남자친구가 비아냥거린다. <<이제야 무라카미냐? 책 좀 읽고 살어!>>무라카미 하루키, 현시대를 살면서 문화적감각이 있다는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읽지 않으면 대화가 안 된다는 정도로 대단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작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600만 부 이상 팔릴 정도로 기록적인 베스트셀러 행진을 하며 오래전부터 중국, 한국, 독일 그리고 북유럽에서 많은 애독자를 낳아왔다. 중국에서도80년대 중기로부터 진행돼온 그의 베스트셀러 행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하루키가 책을 내면 내용을 따질 필요도 없이 사는 사람이 많다. 그 만큼 고정독자, 하루키 중독자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대열 속에는 당연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끼어있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거의 닥치는대로 다 읽었다.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댄스 댄스 댄스>>, 단편집과 근작인 <<해변의 카프카>>까지...하루키의 작품은 대표작으로 되는 <<노르웨이의 숲>>(후에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개칭)을 중문판본으로 맨 먼저 접했다가 후에 친지가 한국에서 부쳐온 삼진기획 88년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오래동안 <<좌>>의 철쇄에 매여 살아온 우리의 정서와 너무도 앞서 간 그들의 성문화때문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었고 그래서 오히려 기어코 읽었었다. 당시 하루키의 책을 처음 읽고 나는 생각을 많이 할 수 없었다. 솔직하고 감성적인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현실속에서 우리가 드러내지 못하는 숨겨진 모습이 아닐가?하는 상당히 혼란스런 느낌을 받아 안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하루키의 팬이 되어버렸노라고 고백한다. 실상 하루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하루키적이지 않은 책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나에게서 이 소설은 재미는 없었지만 길게 느껴지지않은것은 정말 신기했다. 우리 독자층, 정확히 말하면 우리 조선족독자층에서 아직도 하루키는 낯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늦게나마 그의 작품을 환기시키면서 그중 한편을 뽑아본다.오늘 함께 읽고저 하는 작품은 누구나 아는 <<상실의 시대>>가 아니라 그 이전에 창작한 <<양을 쫓는 모험>>이다. 80년대에 출간된 작품을 2001년 상해역문출판사의 중국판본으로 뒤늦게 읽었다. 제목 그대로 양을 찾는 이야기다. <<나>>는 친구와 함께 작은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리혼남이다. 안해가 집을 나간 뒤<<나>>는 새로운 녀자 친구와 사귀게 된다. 그녀는 예쁜 귀를 갖고 있었기에 전문적인 귀 모델을 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미지의 앞날을 미리 점 칠 수 있는 기이한 예지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녀는 <<나>> 에게 앞으로 양을 쫓는 모험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신비로운 그녀가 예언한 대로 <<나>>의 삶에 양이 걸어들어 온다.어느 날, <<내>>가 친구와 함께 경영하고 있는 광고 회사가 어느 우익 조직의 비서가 찾아온다. 용건인즉 <<내>>가 어느 잡지의 화보에 사용한 한 장의 사진의 출처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그 사진은 양떼와 혹가이도의 자작나무 숲이 찍혀져 있는 평범한 사진이었다.<<나>>를 찾아온 그 우익조직의 비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는 신비한 양 한 마리가 있다. 그 양이 우익조직의 거물과 관계가 있다. 우익조직의 두목으로 승격한 해에 거물은 자주 양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거물의 머리 속으로 양이 들어간 것 같다. 그리고 그 양이 거물의 탁월한 힘의 원천이 된 것 같다.이미 병상에 누워 있는 거물은 의식을 잃고 있으며 죽음이 림박해 있는데 그가 죽기 전에 그와 양 사이의 비밀을 해명하지 않으면 그가 친히 만들어 낸 조직은 와해되어 힘을 잃을 것이다.양은 새하얀 털에, 등에 별 모양의 갈색 털 이 나 있다, 그 사진에 찍혀 있는 양을 발견해야 하는데 기한은 1개월 이내이다, <<나>>는 그 양을 찾아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협박에 가까운 압력에 <<나>>는 예쁜귀를 가진 녀자친구와 함께 멀리 혹가이도로 향한다. 사실 <<내>>가 사진의 출처를 밝히기를 거부한 데는 리유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 행방불명이 된 <<쥐>>로부터 <<나>>에게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그 편지에 문제의 양의 사진이 동봉되여 있었고, <<쥐>>는 그 사진이 자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인다.한 달이란 짧은 시간 내에 양을 찾아야 하지만 어디서도 몸체에 별을 가진 양은 찾아 볼수 없다. <<나>>와 녀자 친구는 호텔'에 묵으며 일주일 동안은 실마리를 잡지 못 한 채 시간을 허비한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실마리는 <<내>>가 머 물러 있는 호텔 안에 있다. 호텔의 지배인의 아버지인 양박사에게서 양에 대한 풍문을 알게 된다. 양 박사는 30년대에 몸 속에 양이 들어 갔는데 이어 그의 몰락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은 얼마 후에 양 박사의 몸에서 나가 버렸는데, 양은 리용 가치가 없어지면, 그 인간 속에서 나가 버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박사의 몸에서 나간 양이, 지금은 거물이 된 당시의 우익 청년 속으로 들어갔고 이어 또 그의 몸에서 나와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양 박사의 이야기에 따라, 그 사진에 찍혀진 장소를 찾아간다.목장의 한 쪽 구석에 미국식의 시골집 2층 건물이 있었는데 한쪽 방에 뜻밖에도 <<쥐>>의 소지품과 의복이 있었다. 하지만 <<쥐>>는 눈에 띄지 않았다.나는 <<쥐>>를 기다린다. 그리고 녀자 친구는 두통을 앓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예지 능력이 이 목장에 들어온 뒤로부터는 작용하지 않았다. 녀자 친구는 목장을 떠나가 버리고, 차츰차츰 겨울이 다가온다. 눈이 내리는 날 밤에 <<나>>는 드디어 기다리던 <<쥐>>를 만난다.사실상 <<쥐>>는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에 이미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었다. 그 죽은 <<쥐>>의 유령이 <<나>>를 찾아 온것이다. <<나>>와 <<쥐>>의 유령은 맥주를 마 시면서 지금까지 쌓였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쥐>>는 그 문제의 양이 자 신의 몸속에 들어왔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자신은 양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양을 죽이 려고 결심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쥐>>는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목장에서 돌아와 나는 거물의 비서를 만난다. 그는 <<쥐>>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목장으로 찾아 간다. 그러나 <<쥐>>가 장치해 둔 폭발약이 터지는 바람에 죽어 버린다…어찌보면 황당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까지 덮고 나니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듯한 느낌이다. 재미있고 스릴있는 모험, 그리고 양사내라는 초현실적 인물이 가미되여 완성된 읽을거리가 풍성한 소설이였다. 하루키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를 갖게되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휩싸인 주인공이 시련을 이겨나가는 과정이다. 하루키의 작중 인물들은 저마다 살아가면서 갑자기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에 당착한다. 자칫 그대로 좌초되어 버릴 것만 같지만 끝내는 고해의 수면 밖으로 떠오르는 데 성공한다. 그들에게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과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것이 모든 일이 해결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다는 중국식의 모식인 대단원(大團圓) 결말 같은 걸 기대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지만, 마지막 장까지 호흡을 달구는 그 불투명함이 하루키 식의 모식이라면 모식일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별 모양의 무늬가 있는 특별한 양, 이 <<양>>은 작가에 의해 용의 주도하게 준비된 상징물임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내가 벌린 양을 찾는 모험은 일상에 봉인되였던 과거를 찾아내는, 말하자면 자아를 찾는 려행이었다고 풀이해 본다.하루키의 작품은 그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를 읽고서가 아니라 바로 이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서 비로서 재미를 붙히기 시작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많은 작품들은 실험의 씨앗이 철저하게 뿌려져 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현실과 의식의 구분이 모호해 지곤 한다. 즉 판타지적 요소를 보이는 작품들이 많은 것이다. 어느 소설에서는 <<일각수>>라는 현실에는 없는 외뿔동물도 나온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곳곳에 환상적인 부분을 설정함으로서 현실이 아닌 소설의 특성을 살려 다시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양 사나이나 귀가 특수한 여인, 자살한 쥐 등등은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미묘한 부분을 상징하는 주요한 설정이며 아울러 독자에게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요소 때문에 하루키의 소설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내가 늘 꿈꾸면서도 감히 행하지 못하는 꿈의 여유를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낀다.그러나 책을 내려놓고 보면 하루키의 소설은 전혀 비현실적이지가 않다. 실재하기 어려운 모험적 상황을 전제로 하고있지만 그렇게 설정된 상황은 또 현실주의를 뺨칠 정도로 리얼리티를 띄고 있다. 현실과 직접적 회로를 갖고있는 것이다.신기한 인물들과 신기한 세계를 합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에 하루키만의 색이 더해져 알수없는 소외, 허무 등 도시인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즉 현실을 되돌아보고 낯설게 하는 신비성이 그의 소설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다. 사실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도 하루키의 소설에서처럼 여러 가지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내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현실성을 가지고 있다. 삶이 힘들더라도 우연을 기대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 같다. 실제로 일본의 권위있는 문예비평가들 가운데는 하루키의 소설은 일본문학이라고 부를수 없다는 정도로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의 문체 그리고 미국문화에서나 볼 수 있는, 서양문학의 영향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대학에서 강의 텍스트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늘 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이 작가에게 일본 전통적인 문학의 풍요함이 결여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하루키는 전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가로서 주목받고 있다.<<뉴욕 타임즈>>는 <<독창성과 매력, 완벽한 기법으로 사로잡는 기쁨과 자극의 천재>>라고 그를 격찬하고 있다.<<일본 소설에는 모종의 전형적인 문체 같은 것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데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때문에 내 소설을 받아 들이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래서 비판도 많이 받는다> >하루키의 답변이다.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즐겨 넘나드는 하루키는 개개인의 심리묘사와 의식세계를 그만의 문체로 묘사해준다. 또한 놀라운 관조력으로 모든 작품을 통틀어 그는 현대사회 소외된 군상들의 고독을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집요하게 파헤쳐왔다. 그의 작품을 가리켜 <<무국적성>>이라든가 <<가벼움의 미학>>이라고도 얘기하지만, 하루키 문학의 외면적인 가벼움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존재의 무거움을 견뎌내려는 몸부림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무국적 성이나 가벼움 때문에 변강의 오지인 이곳 사람들에게 마저도 이렇게 친근하게 읽혀지고 있는 것이 아닐가?순문학을 한답시는 개인적으로는 거개가 대중적이면서도 튀는 소설을 쓰는 하루키가 특별히 좋은 글을 쓴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하루키의 장점이라면 그의 글을 읽으면 위로 받는 느낌을 받곤 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좋아서 그의 대부분의 책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무라카미의 소설은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끄는 데가 있다. 이는 다른 외국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었을 땐 느끼지 못했던 다른 느낌이다. 인물의 내면들이 놀랍도록 나와 비슷하잖은가, 오래전에 쓴 것이고 외국사람이 쓴 것인데도, 하루키란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와 완전히 같은 데가 있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그들의 고독감을 그려내는 우화적 에피소드들이 꼭 서로 닮아있는것이다.그것이 하루키의 작품에 심취되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라고 해야할 것이다.
88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댓글:  조회:3613  추천:73  2007-06-29
리얼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 강경애탄신 100주년을 맞으며                        김 혁  1     소학시절, 학교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그 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가 호젓이 서있다. 작가 강경애를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문학전통으로 삼으려는 취지하에 조선족문인들이 비암산 기슭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를 세운 것이다. 비석의 뒤면에는 강경애에 대한 간력소개와 함께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작가이다. 강경애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고자 한국 녀성문인들의 사랑과 지원에 힘입어 이 문학비를 세우는 바이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경립되던 당시 <<연변일보>>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뉴스도 싣고 강경애 특집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심취되여 있는 나에게서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왔다.   2  강경애는 일제식민지시대의 <<간도>>- 룡정에 건너와  살면서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 기대어 궁핍한 민중의 삶과 항일운동의 현실을 진실하게 그려내고 그 시기 <<시대정신의 최대치를 구현한>> 우리 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강경애는 1906년 4월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부자의 딸로 태여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린 딸을 데리고 생활 대책이 막연했던 어머니는 장연에 사는 남자와 재혼을 하여 강경애는 장연에서 성장하게 된다. 일곱 살 때 벌써 집안에 굴러 다니는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치고 고전소설을 독파하자 동네에서 다투어 데려다 먹을것을 사주며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도토리 소설장이>>라는 별명도 얻는다. 1915년 열 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소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수업료, 학용품 값 등을 제때에 마련하지 못해 눈치 공부를 하며 학업을 쌓는다.    1921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한 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되었던 친목회 독서조 등에 망라되어 교양을 쌓던 강경애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동맹휴학에 관련하여 1923년 10월 퇴학당한다. 이후 강경애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한다. 똑 부러지던 녀학생 강경애가 아무 성취한 것 없이 돌아온 것에 대한 주위의 비난에 심신의 고통을 겪으며 강경애는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한때는 야학교를 열어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1929년 10월《조선일보》에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 사이에서 절충주의 문학리론으로 성가를 올리는 이들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 그가 전공한 쟝르도 처음의 피상적인 서정시에서 특정된 정치적 립장과 비평적 시각에 근거한 리론을 담은 평론과 소설로 바뀐다.   또한 집안 문제, 련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 지역 항일무장 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을 발표한다. 그런가 하면 봉건적 인습과 성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으로부터 찾고자 시도한 최초의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1931-1932)도 집필한다. 한동안의 습작기간을 거쳐 강경애는 감상적인 문학소녀로부터 철저히 계급의식에 립각하여 글을 쓰는 작가로 변신한다.    이무렵 강경애는 수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만난다. 장연으로 발령을 받은 장하일은 장연에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되였고 곧 친구들을 모아놓고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로 장하일은 강경애의 문학세계를 리해하고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어주고 서로 토론하고 조언을 하는 좋은 독자였으며, 강경애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그런데 장하일의 조혼했던 안해가 나타나면서 두 사람은 장연에서 더이상 살기가 곤란하게 된다.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은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지내기도 하다가 1931년 6월 경 간도로 이주한다.   1932년 1월 <<신녀성>>에 수필 <<간도 풍경>>을 발표하는데 이는 강경애가두만강을 건너서 간도로 들어서는 감회를 피력한 글이다.  강경애는 이후 중간에 간혹 서울이나 장연을 왕래하지만 주로 간도에 거주하면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한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여졌다. 체험의 현장인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는 체험을 한다.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으로 강경애는 1932년 9월《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을 발표한다.   룡정시절의 강경애는 남들한테 녀류작가로가 아니라 한낱 평범한 아낙네로 보이기가 일쑤였다. 문학동인이고 그녀의 이웃에 살았던 작가 안수길의 회고에 따르면 강경애는 《수수한 품이 여느 부인네들과 다를 것이 없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인상, 《살림살이에 열심인 가난한 주부작가》의 모습이였다고 한다.    여기서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꼭 짚고 넘어가야할 인물이다. 장하일은 투철한 반일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일제가 완전한 노예화교육을 실시하자 룡정 동흥중학교 교도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장하일은 학교 교장과 더불어 사직서를 냄으로써 지대한 분노와 항의를 표시했다. 장하일이 사직할 때 전교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제에 항거하여<<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면서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건실한 반일사상을 지니고 작품창작에 림 (臨)했으며 룡정에서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30년 《5.30》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항일무장투쟁이 발랄하게 전개되자 일본간도총령사관에서는 미친듯이 탄압, 검거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2,000명을 돌파했고 그 가운데《유죄》가 되는 사람이 무려 350명에 달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 3월에는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우면서 《치안숙청》공작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했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 19사단을 《간도 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고 또한 지병(持病)인 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난다. 8월과 10월의 <<동광>>지에 발표된 수필<<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에 이때 간도를 떠나는 감회가 세세히 적혀 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안수길 등과 함께 조선족들의 문학단체인《북향》회 동인이면서도 고문격으로 또 가정주부로 창작에 몰두, 1939년에는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담당한다. 1938년 무렵부터 신병이 악화되어 1939년에는 고향인 장연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으나 병이 악화되여 귀가 먹고 앞조차 보지 못하게 된다. 결국 1944년 4월 26일 한달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면서 영면한다. 1949년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자신이 부주필로 있던 로동신문사에서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강경애는 치렬한 문학생애에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련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인간문제>>(1934), <<소금>>(1934), <<지하촌>>(1936), <<어둠>>(1937)등을 들수 있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소금》,《축구전》등 많은 작품들이 간도체험과 갈라 놓을수 없기에 룡정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이다.   조선과 한국에서 출간한 강경애의 <<인간문제>>    강경애가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30년대는 일제의 파쑈적 탄압이 전에없이 기승부린 시기였다.  민족의식, 반일사상이 구현된 작품은 출판이 불허되였고 자그마한 요소도 수정이 강요되고 삭제당하였으며 신문련재가 중단되고 문예지, 종합지들이 결간, 페간되였다..이런 렬악한 상황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개인의 안락을 찾아 민족을 등진 문인들, 매문가들도 나왔다. 그러나 강경애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시종 가난하고 천대받는 민중, 수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편에 서서 그들의 운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을 형상화하는데 커다란 필봉을 기울였고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였다. 강경애는 많은 녀류작가들중 드물게 하층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였다.  일개 가정주부로 더우기 신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진보적인 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릴수 있은 것은 당시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간도지역에서 살면서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에 기초하여 글을 쓴데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간도에서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 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그러한 긴장감에서 당대 어느 작가보다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일람해보면 그 뚜렷한 구현이 료연하게 알린다. <<유무>>는 1934년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을 묘사한 작품이다. <<소금>>은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의 참혹한 삶과 그에 저항하는 무장투쟁 부대를 묘사한 중편소설이다. <<어둠>>은 제4차 간도 공산당사건으로 사형 당한 항일혁명운동가의 가족의 고난과 과거 운동가의 전향을 그린 소설이다. <<모자(母子)>>, (1935), <<번뇌>>와 같은 작품들은 1930년대 초의 항일무장조직이 패퇴하면서 전향해 가는 사람들과 남겨진 가족들의 고난 그러면서도 억눌리지 않는 기상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이다. 이와 같이 가렬처절한 현장에 직접 서서 강경애는 항일 무장 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면모를 목격하고 그들의 혈투와 정당성을 기록으로 증언하고 그것을 일제의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지 조선에 전할 수 있었던 작가로 시대정신의 최대치를 구현했다. 강경애보다 앞에는 최서해가, 이후에는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자신들의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의 경우에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강경애의 육필원고   3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강경애를 잘 알지 못한다. 한국의 문인이나 관광객들을 가이드해주면서 보면 <<별세는>> 윤동주를 알았지 <<소금>> 같은 강경애가 누군지 몰라했다. 지어 <<선구자>> 노래로 유명한 일송정을 둘러보면서 그 너무나도 가까이에 서있는 강경애 문학비앞에서 그제야 강경애가 누구냐고 묻는다. 소모적인 쟁론만 횡행하는 풍토에서 응당 올라야 할 문화인물선정에서도 구설수에 올랐다가 신고끝에 락방을 면하는 등 저승에서도 그의 운명은 편치 못하다.강경애의 간도에서의 처절한 삶과 고투, 어둠의 시대에 남긴 빛나는 업적으로 하여 우리 조선족문인들은 오랫동안 현대녀성문학의 기초이며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이 녀류소설가를 경모해 왔으며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다행인 것은 강경애가 차츰 대학원들의 학위 론문에서 자주 연구 대상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식민지 시대에 산출된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로 평가받고 있으며 또한 비평 담론의 주류로 등장한 페미니즘 비평의 제 측면을 감당할 수 있는 폭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아 생전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작품집 한 권 가지지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쓸쓸하게 눈을 감은, 하지만 리얼하고도 치렬하게 주어진 삶을 사아온 녀성작가 강경애가 탄생한지도 어언 100주년을 넘겼다. 그의 작품을 더 널리 읽고 깊게 읽음으로써 바람세찬 오늘을 이기고 밝은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우리의 정신적량식으로, 문학발전의 계기가 될수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87    은둔하는 령혼 댓글:  조회:2789  추천:73  2007-06-29
  . 수 필 . 은둔(隱遁)하는 령혼   김 혁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집필하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 작품은 J D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이였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년대를 조명하려 시도했던 나에게서 역시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미국사회상을 다룬 샐린저의 작품이 좋은 보기로 되었기 때문 이였다.     50년대 초에 발표된 후 전세계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떠오르며 사랑 받는 고전자리를 지켜온 《호밀 밭의 파수꾼》의 저자  샐린저는 언론에 로출되길 꺼리면서 일체 인터뷰를 거부하는 은둔자적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십 년째 미국의 한 시골에 칩거하고 있다. 책을 낼 때마다 샐린저는 작품에 해설 문을 붙이지 않고 작가 사진도 싣지 않는다. 이는 그가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이다.     지난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존 맥스웰 쿳시, 10여 년간 해마다 노벨 문학상후보로 지명돼 온 쿳시는 한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도 두 차례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아 온 작가다.   그 역시 철저한 은둔자로 유명하다. 두 차례에 걸친 부커상 시상식에 불참했으며, 노벨 문학상 발표 뒤에도 작가와 직접 련락이 닿지 않아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 소식을 직접 알리지 도 못했다.      올해에도 일본문단에서 또 한 명의 은둔작가가 나타났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 중 한 명이 일체의 신상정보를 거부하고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이 순수하게 읽혀지길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평의원들에게 전해 온 작가의 짤막한 메시지에서 수상이라는 명예 대신 작품만이 기억되길 바라는 작가의 은둔자적인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허명(虛名)에 창작력을 랑비하는 이들이 보이는 요즘의 문단풍토이다. 고작 몇 편의 작품을 내고는 좀 뜬다 싶으면 유명한 작가요 시인임을 자처한다. 수식이 요란한 명함을 찍고 화려한 필명부터 지으며 자비로 출판한 책에도 자기의 조야한 얼굴들을 문지광(窓門)처럼 크게 싣는다. 해외에 나가서도 서로 남을 폄하(貶下)하면서 자기만이 《조선족문단의 기수》니 뭐니 망언한다. 나르시시즘(自愛)의 거울을 마련해 놓고 해 종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붙인 화려한 수식에 자아만족의 미주를 기울인다. 나가는 글은 멋지고 고상해 보여도 한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자기만 봐달라고 앙탈하는 애들 같다.     굳이 자기를 내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그 배후엔 명리(名利)라는 흑심이 뱀처럼 커다란 똬리를 틀고있다. 명리의 론리는 겸손을 뒤 전으로 한다. 명리는 일단 화려한 외양과 자극적인 목소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 없이 몸을 뒤채고 경박하게 떠들어댄다. 문학도 시절, 홀로의 공간에서 부지런히 창작궤적을 남기던 행태에서 벗어나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는 무대우의 주인공이 되려고 뒤질세라 요란하게 치장하고 남보다 한 목청 높은 소리를 내느라 분주살스럽다. 그 모든 가증스럽고 천박한 행동거지, 자기 현시욕과 극도의 리기주의, 독선, 그리고 꼴같잖은 오만으로 점철된 저렬한 의식구조에 문단이 병들어 있으며 따라서 문인상경(文人相輕)의 아수라장의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경박한 충동에 자신을 위탁해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명리를 앞세우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 이 욕심이 란무하는 시대에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가는 작가들은 분명 어딘 가에는 있을 것인데...   사실 거슬러 보면 문학과 예술의 뿌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닿아 있다. 개인으로서의 작가. 예술가는 근대의 산물이다. 중국의 옛 선비들은  세속의 영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아나가는 은둔자를 현인으로 여겼고, 깊이 은거할수록 명성의 높이는 그에 비례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각 조대를 살펴보면 학문과 자기 수련에 혼신을 던지면서 세속적인 영달에는 초연한 선비들이 수없이  은거하고 있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무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았다. 또 그러한 은둔을 통해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별개의 독자적 세계인》이 되고 《오직 스스로 결정하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얽매여 있지 않는 자유를 찾아나 설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어떤 자아 적인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심으로 정신세계를 심화, 확장해 가려는 순수 문학정신의 표출이다. 그들에게는 그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고, 속기(俗氣)를 버림으로써 명징(明澄)을 얻는 지혜를 터득했음이 남들과 달랐다. 그리고 그 고고함을 고독으로 안고 사는 삶의 경지가 실은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를 일찍이 깨달았던 명철함이 있었다. 그런 고독의 세계에서도 작품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재능과 용기를 가진 그들에게는 진정 《위대함 》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세월도 거스르는 명작의 감동과 그 진가의 리유는 과연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자신의 명성에 자족하지도 않고 편승하지도 않으며 명리를 따지지 않는 작가의 자세와 그에서 우러나온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의 작품이 만고류방(萬古留芳)으로 매우 지적이지만 그것이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외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의 전략에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수도 있겠다.      《범인(凡人)작가는 로동자이고, 뛰어난 작가는 감독 (監督)이며, 대작가는 건축가이다. 소설의 보통독자는 신자이고 참다운 의미의 정독자(精讀者)는 승려이면, 그 중에서도 위대한 정독자는 스스로 승좌(僧座)에 앉아서 근행(勤行)하는 수도승이다.》     어느 평론가가 남긴 말이다. 결국 이 말은 작품의 창작에 림하는 작가의 자세와 정신적 풍모 그리고 그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들의 요구를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정신에 의해 문학의 사상성을 형상화하여 예술성으로 결정(結晶)된다. 때문에 여기에는 작품에 몰두하는 창작의 자세가 중요하다. 세속적인 욕망의 거품이 걷혀 지지 않은 채 글쓰는 사람 모두를 작가라고 부르는 것은 혼돈이다. 시간의 응축된 에너지가 없이는 누구나 이 명예를 가질 수 없다. 속된  현시 욕으로 단지 공리에 매여 글을 짓는 것은 문학적 흐름을 간과한 어리석은 짓이며 그러한 작품 그러한 작가가 오래 가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다.     스위스나 독일에는 지금도 수공으로 칼과 가위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며, 명장(名匠)이 만들었던 오래 된 칼과 가위는 엄청 높은 값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현대산업사회에서는 기계로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 생산하기 때문에 옛날과 같은 장인과 제도도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장인들이 가지고 있는 철저한 직업정신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하는 일과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직업에 림(臨)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경제적, 사회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장인들이 후세에 경모를 받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조용히 세월의 행간을 메워 나가며  인간존재를 해명하고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모습이 그 무엇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가(家)라면 그렇게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을 저버리고 고절(高絶)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지 않을까! 우리가 명작과 대가에 근접할 수 없음은 은둔한 장인들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고독을 고고함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급급한 현시 욕 적인 속물 근성의 잠재의식 때문이 아닐가?      지금 우리의 문단에서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러한 은둔자들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와 끈기, 오랜 시간 동안의 잊혀짐을 감수하면서도 단 한편의 작품을 위해 생의 모든 것을 거는 장인정신이 요청된다. 최근에는 작품들이 너무나 쉽게 량산되고 글 짓는 이들에게 너무나 쉽게 명예가 부여되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작가와 작품들이 좀 더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시대와 력사에 한 획을 긋는 그런 작품으로 그런 예술적 주인공으로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취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작가들이 부박(浮薄)한 문단풍토에서 벗어나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서재에 묻히는 자세가  아닐가!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명상음악 "영혼의 피리"  
86    천년의 향기 댓글:  조회:3372  추천:73  2007-06-29
잡문천년의 향기 김 혁     1망백(望百)의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금강산에 다녀온 한국의 “지게효자”의 사연이 요즘 중국 전역에 보도됐다. 한국 인천의 리군익(41)씨는 고령의 아버지에게 금강산을 구경시키고저 특수지게를 만들기로 했다. 등받이를 부착하고 의자와 발판이 달린 알루미늄지게를 만들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효자지게"를 만든 것이다.한국효자의 사연을 접한 산동성 곡부에서 리씨 가족을 초대했다. 곡부는 효를 인륜의 근본으로 가르친 공자가 잠든 곳.안개가 짙게 드리운 태산에서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오르는 리씨의 모습에 중국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은 "한국의 효자가 저기 있다"며 앞다퉈 인사를 건넸고 곡부 시인협회 회장은 "한국의 효자가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 대륙을 울렸다"며 리군익 씨에게 7언시를 증정했다.                孔子故里傳佳話(공자의 옛 고향에 아름다운 이야기 전하니)              中國韓國同此心(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효심은 모두 같구나)늙은 부모를 지게에 업어 버리는 고려장 루습이 없어지게 된 효의 옛설화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가슴 따뜻한 현대설화이다.  2 문우들과 함께 유수촌으로 낚시를 갔다. 낚시질끝에 본토박이 문학도의 요청으로 그 집에서 물고기 탕 향연을 마련했다. 뤄페어(羅非魚)라는, 뼈가 연하고 살이 많은 환장하게 구수한 물고기 탕에 맛나게 술잔들을 비웠다. 우럭의 일종으로 산지가 아프리카인 뤄페어는 온수에서 서식하고 있는데 이곳의 발전소에서 낚시에 환혹된 이들을 위하여 전문 못을 만들고 뤄퍼어를 사육하고 있었다. 슈퍼 낚시군들로 좌석이 어우러진지라 온통 물고기와 그 낚시기법에 대한 이야기들로 주연 상은 둥글어 졌다. 낚시를 화제로 한 기문취담중에서도 뤄페어에 깃든 작은 일화 하나가 나에게 준 충격이 가장 컸다. 검실검실한 몸체에 보기에 툽상스러운 뤄페어에게는 심히 감동적인 육아방식이 있었다. 새끼 기르기에 애면글면하는 어미 뤄페어는 인기척이 나고 위험이 느껴지면 새끼를 보호하려 다급히 입속에 새끼들을 품는다고 한다. 낚시군들이 뤄페어를 낚아올려 땅에 태를 쳤는데 입속에서 숱한 새끼들이 뿜겨져 나오는지라 섬찍하면서도 은은한 감동을 느낀적이 한 두번 아니라고 한다. 단 취담으로만 들을수없는 그 일화가 주는 감동에 젖어 나는 술잔을 더 크게 비웠다. 동물계의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담을 가슴 한자락 뭉클하게 들은 그날이 또한 바로 어버이날이라는 것을 뒤미처 깨닫고 돌아오는 뻐스에서도 내내 감개에 빠져들어 있었다. 새끼에로 향한 동물의 본능적인 사랑은 뤄페어뿐만이 아닌 많은 동물들에게서 찾아 볼수있다. 수렁이나 논바닥에서 흙 감탕에 묻혀 사는 하잘것없어 뵈는 우렁이, 그 우렁이의 새끼에 대한 사랑은 처절함에 가깝다. 우렁이는 몸 속의 알이 깨이면 제 몸을 먹여 기른다. 제 살 파 먹이기를 다한 어미 우렁이는 껍질만 남아 물에 둥둥 뜬다. 우기 때면 비물에 벌창해진 보도랑으로 어미우렁이의 껍질이 하얗게 떠내려가는 모습을 볼수있다. 우렁이는 처절한 부모의 최후를 그렇게 보낸다. 포경선(捕鯨船)의 어부들은 어미 고래를 발견하는 것보다 새끼고래를 발견하면 더 좋아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새끼고래를 추적하면 그 인근에 부모 고래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두 세마리를 잡을수 있기때문이다. 어시 고래의 새끼에 대한 사랑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물 권에서도 우리는 어렵잖게 우리 인간들의 삶을 닮은 모습을 조감해 볼수 있다. 새라 새라웁게 느껴보면 피와 살을 갈라 자식을 낳고 젖 물려 키우고 소팔아 품삯팔아 공부까지 시키고 자식이 나이 들어도 마음에 미덥지 못해 하는 부모의 정성과 은혜는 실로 필설로는 이루다 말할길 바이없다. 희생으로만 사시는 부모님,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고독, 회한, 비통, 인고를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 앙금을 속으로만 삭이시는 부모님,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시고 무한한 사랑을 다 주시고도 더 줄게 없어서 서럽다는 부모님, 쓴것은 삼키고 단것은 되 뱉아 먹인다는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의 그 은혜를 자식된 우리가 어이 다 알리오! 그래서 <<묻지를 말어라 래일날에/ 내가 부모되여 알아보리라>>는 그런 노래도 있나보다. 그 부모된이들의 다함없는 사랑을 기리고저 해마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은 어머니절, 6월의 세번째 일요일은 부친절로 세계적인 효도의 날을 만들었다.   예로부터 한민족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충효의 실천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효도할줄 아는 민족으로 이방민족들중에 이름이 있다. 따뜻한 웃목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밥도 웃밥으로 떠 드리는 일상의 세세한 구석으로부터 효도의 빛을 진하게 보여 드리였다. 따라서 우리들의 풍부한 민담설화고(庫)중에는 효도에 관련된 설화들이 많고도 많다.   리조 제 9대 임금 성종대왕때의 설화 한편 읽어본다. 만백성의 질고를 제 아픔처럼 여기여 현명한 군주로 수칭되던 성종대왕은 밤이면 늘 평복차림으로 수하 한 두 사람만 거느리고 항간을 두루 밟아 보군 했다. 어느 날 저녁 여느때와 같이 밤행차로 가난한 선비들이 집거해 있는 서울 남산골에 까지 닿았는데 웬 오막살이초가에서 느닷없이 사내의 노래소리와 로파의 울음소리가 혼반이 되여 흘러나오고 있는것이였다. 심히 괴이쩍어 창으로 들여다보니 상제 한사람이 저가락 장단을 치며 노래부르고 그 곡조에 맞추어 머리를 파랗게 깎은 비구니가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는데 그 곁에서 술상을 마주한 파파 늙은 안로인이 치마자락으로 홍안을 가린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필유곡절이라고 성종대왕이 문을 떼고 들어가 물으니 안로인이 눈물을 씹으며 화답하는즉 궁핍하기 짝이없는 살림일망정 어머니의 회갑상을 차려드리고저 며느리가 채좋은 머리칼을 깎아 판돈으로 상을 차리고 춤노래를 벌렸는데 그 경상이 가슴에 뼈맞혀 로인이 울음을 운다는것이였다.   <<아, 과시 효자는 효자렸다!>> 한자락 습윤히 젖어든 가슴으로 감개를 토하며 성종대왕 자리에서 물러 났다. 며칠후, 나라적으로 성대한 과거 시험이 펼쳐 지게 되였는데 남산골의 그 가난한 선비도 과거장에 나서게 되였다. 그런데 이해 과거의 글제는 전에없이 괴상하였다. 그 글제를 봅시면 <<상가승무로인곡(喪歌僧舞老人哭)>>. 즉 <<상제는 노래하고 중은 춤을 추는데 늙인이는 통곡한다>>는 뜻이였다. 모든 선비들이 어리친 기색으로 붓방아만 찧고 있는데 그 선비는 자신의 사연을 두고 일필휘지하여 맨처음 답안을 바쳤고 드디여 정시에서 급제하게 되였다. 그후 대왕은 선비를 불러들여 나라의 중책을 맡기였고 그의 안해도 효부로 나라의 후한 상을 받게 되였다. 우리민족의 하많은 효도설담중에서 굴지로 뽑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는 비록 설화에 그친다 하겠지만 력사적 기재에 의하면 성종때 효도에 대해 여느때보다 중히 여긴 사례들이 많다. 현명했던 성종은 효자와 절부(節婦)를 골라 정표(旌表)를 하고 (갸륵한 행실을 칭송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들에게는 나라에서 부과하는 요역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었으며 그들의 행적을 기록해 두었고 전국의 80세 이상되는 로인들에게는 다구(茶具)등 물품을 하사하는 우대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태고적으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요즘 젊은 세대로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극성의 효도방식이 그렇게도 많았다.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드리고 아침이면 안부를 묻는 <<혼정선성(昏定晨省)효도>>, 부모가 세상 뜨면 묘소곁에 움막을 짙고 몇 년간 치상하는 <<려묘(廬墓)살이효도>>, 고향떠나 류랑하면서도 부모님의 신주(神主)와 제기(祭器)만은 꼭 짊어지고 다니면서 류랑제사를 잊지않은 <<신주효도>>... 그중 가장 높은 효도로 부모가 앓을때 그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효도를 하는 습속으로 <<소지기도(燒指祈禱)>>가 서민들사이에 널리 보편화 되기도 했다.   부모가 병고로 시달리면 약왕관음(藥王觀音)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병의 완쾌를 빌면서 자기 손가락을 태우는것이다. 즉 신령앞에서 정좌한다음 들기름을 손가락에 듬뿍 묻히고 그곳에 불을 단다. 인위적으로 손가락에 화상을 입힘으로써 그 타오르는 손가락의 아픔으로 부모의 병고를 공감하는 효도다. 이 소지효행도 <<일지소 (一指燒)>>, <<이지소>>, <<삼지소>>, <<오지소>>, <<십지소 (十指燒)>> 등으로 태우는 손가락의 수효에 따라 그 효심의 크기를 평가했기에 이 평가기준에 영합하기 위해 보다 많은 손가락에 불을 댕기곤 했다.   당시 대개 동네마다 신목에 새긴 <<효자목>>, <<효녀목>>이란 표방이 붙은 것은 이 소지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이와같이 잔혹한 육체적 가학습속은 아픔을 혈족끼리 나눌수 있으며 내가 아프면 남의 아픔이 덜 해진다는 원시적인 사고방식이 효도라는 문명적 요소와 야합해서 형성된것으로 보이며 이 자학 효도는 단 조선족뿐인 효행의 류형을 이루고 있는것이다. 또 옛날부터 효자로 정표를 받은 집터에서 살면 효자효손이 난다하여 그 집터는 다른 집보다 세곱네곱 비쌌고 그 집에 든 사람들은 효맥(孝脈)이 력력하여 너나가 정표를 받는 효자효손이 되였다고 한다. 이 시대 늙으신 부모의 위상은 어떠한가.   3,허나 오늘날 가슴아피 진맥해 보면 동방례의민족이라 높이 선망되였던 우리 민족에게서 그 인습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가족의 형성, 서구적인 개인주의, 폭팔적인 물질문명의 증대와 더불어 이 한 미풍량속의 인습이 날로 담박해 지고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려묘살이>>나 <<소지>>같은 극단에 가까운 전례는 낡투로 치더라도 자식으로서의 부모부양의 최저의 의무마저 짐처럼 생각되여 감당하려하지 않는 철면피자식들이 늘어나고 있다. 피를 주고 살을 주신 부모를 모시기 실어 형제들끼리 부양문제를 놓고 제비뽑기 추태를 벌린 다던가 그렇게 모시게 된 어머니를 언감 구박까지 주는 짓거리들을 우리는 신변가까이에서 자주 보군한다. 애젊은 나이에 수절하여 자식들을 인끔높은 신분으로 조물시켜놓은뒤 만년의 외로움을 못이겨 재가의 뜻을 보였다가 자식들의 타매를 받고 오동지에 한지로 겨난 례도 처연함에 잠겨 읽은적 있다. 지나간 삶을 보상받기는커녕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사회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외면 받고 버림은채 신산(辛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행이 결여된 부박한 음지를 우리는 근년래 항간의 여러구석에서 어렵잖게 볼수가 있고 들을수가 있다. 일전 어느 소학교에서 과외 활동시간에 퀴즈놀음으로 어머니 생일 알아 맞추기를 내였는데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공백지를 내였다고 한다. 또 어느 한 야회에서 사회자가 야회 분위기를 돋굴 양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온분 앞자리에 초대하겠습니다>>고 열기띈 어조로 말했는데 한 분도 나서는 이가 없어 난감을 금치 못해 했다고 한다. 몇해전 연변에서는 전국에서도 맨 처음으로 극악범인을 향한 총기사형을 페지하고 주사사형법을 실시했다. 허나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그 새로운 법률조치의 생신감보다도 맨 처음 주사사형극형을 받은 범죄자의 범죄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더 컸다. 화룡에 거주하고있는 이 조선족범인은 사소한 가정사로 부모와 분기가 있게되자 불효막심하게도 절구공으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때려죽였던것이다. 자고로 시부모(弑父母)나 구부모(毆父母)죄는 륜상십악(倫常十惡)의 대죄이기에 그 장본인은 릉지처참하고 가문의 족보에서 삭제, 파문을 시키고 그 가족들을 변강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지어 그런 사건이 난 고을의 읍호(邑號)를 부나 군에서 현으로 강등시키기 까지 했다. 어제날에는 이렇듯 엄격한 륜상규제와 륜리풍토가 있었다. 그에 비해 볼때 오늘의 인륜이 왜 이 지경에 까지 땅바닥에 내쳐졌나 하는것은 너나가 심사숙고해야 할 일인것이다. 효는 인간사회의 다른 도덕적인 관념과같이 인간문명의 산물이다. 효는 인간 본연의 자세이며 바른 삶의 길이다. 효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아가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라는 어른이 자기와 안해 또 형제자매들을 낳아서 기르고 가르치고 한 인간으로 독립해 살수있게 해주었으며 형제와 친지간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협조적인 삶의 중심이자 또한 그 기둥이 되여주는 사람이 바로 그 어른이라는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례의 범절이다. 특히 이것은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내에서 사회의 질서를 튼튼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조된 필수의 덕목이다. 서양사람들에게서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친애감이 있지만 동방에서처럼 관념화 형식화로 되여 있지않아서 동방의 효도를 서방인에게 설명할때면 아주 힘이 들 정도이다. 어느 한 어학자는 수십년간의 연찬중에 유럽계의 언어에서 효에 들어맞는 말을 찾아볼수도 없음을 발견하고 이는 동방민족의 전매특허이며 동방민족의 자랑이라 천명한 적이 있다.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0세이상의 로령인구가 그 총인구의 10프로 이상을 점하는 지역이나 나라를 로년형지역 또는 로령화 나라라고 한다. 삶의 질의 향상과 더불어 우리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도 로년인구가 나날이 붇고 있는 실정이다. 집계가 밝힌 데 의하면 전주적으로 이미 60세이상의 로인이 17만명으로서 총인구의 8.02프로를 점하고 있다. 이제 7, 8년후에는 60세이상의 로년인구가 24만명으로 불어나 총인구의 10프로를 넘길것이라 추산된다. 우리 이곳도 서서히 로령화지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전사회가 로령화사회에 대비할 준비를 해야 할줄로 안다. 부양담보, 건강문제, 빈곤해탈, 배울곳과 즐길장소의 마련, 고독한 환경개선 등등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단 로인들을 위한 물질방면의 향상보다는 정신면의 리해와 지지이며 효를 알고 효를 펴는 사회적 분위기의 이룩이다. 다시 동물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어딘가 천대하고있는 미욱해 보이는 까마귀는 기실 효도할줄 아는 동물이다. 까마귀는 갓 낳아서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여 살리고 자란후에는 60일동안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했다. 하여 우리 선조들은 보은할줄 아는 까마귀를 가리켜 효조(孝鳥) 또는 자조(慈鳥)라고 불러 왔다. 일개 미천한 동물도 이럴진대 우리 인간들이 그 무엇이 모자라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게을리 할수가 있으랴? 불전(佛典)에서는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가죽이 닳아서 뼈에 이르고 뼈가 떨어져 골수에 이르도록 수미산(須彌山)을 백천번 돌아도 부모의 은혜를 다 갚을수 있으리오>>라고 감개했다. 동방례의 민족으로서 만방에 알려졌던 우리 민족에게서 태초부터 꽃 펴온 그 향기는 천년만년 무양히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것이다. 갑골문에서 늙을 로(老)자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모습이고 효(孝)자는 <<로>>자에서 지팽이가 없어지고 아들 자(子)자가 보태여진 형상이다. 자식이 부모를 부축하여 함께 가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공자의 <<풍수지탄(風樹之歎)>>을 읊어보며 효도에도 때가 있는 법임을 옛사람들로부터 배운다.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樹欲靜而 風不止)자식이 봉양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질 않는다(子欲養而 親不待)  공자의 제자들 중 이<<풍수지탄>>을 듣고 부모봉양을 위해 귀향한 자가 열에 세 명은 됐다 한다.  새삼스레 떠올리는 효도! 낡은 화제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풀려버린 치사랑의 현을 조여본다.   
85    월드컵단상(1) 엔돌핀 제조기- 축구 댓글:  조회:3406  추천:74  2007-06-29
    월드컵 단상 –1 엔돌핀 제조기- 축구   . 하나 . 치솟는 여름 날씨에 열기를 더해 주며 2006독일월드컵이 시작되였다. 도가니 같은 그 광환의 소용돌이 속에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축구에만 몰부어져 있다. 모든 메스컴에서 월드컵 소식과 이야기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상가 쇼 윈도안의 텔레비에서도 경기실황이 방송되고 길거리의 가판대는 온통 축구관련 간행물로 메우고 있다. 학교에서도 식당에서도 거리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는 공동화장실에서까지도 축구가 최대의 관심사와 이야기거리다. 변강의 오지인 연변에서 요사이 유선텔레비 가설호가 급증하고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새집에 든 사용호들이 월드컵경기전을 보기위해 설비를 가설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기 때문이다.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네트워크회사는 2만여호의 사용호를 확보하고있는데 이 회사의 설비가설조에서는 평소에 하루에 5-6차씩 설비점검보수에 나가지만 요새는 하루에 40여차씩 나간다고 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축구에 이렇게 목숨을 걸고 살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축구는 모든 사람들의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러한 유월, 사람들의 몸에서는 엔돌핀이 시원한 분수처럼 샘솟는다. . 둘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일이다. 미국병사 몇 명이 찦차를 몰고 경축회장으로 가다가 차 사고를 내고 죽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충돌에 머리가 묵사발이 된 그들이 웬일인지 대단히 행복한 표정,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흥미를 가지고 과학자들이 죽음, 나아가서 쾌락의 의미, 행복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대에서 이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들은 실험용 쥐들에게 각종 물질을 투여해 보았다. 그 결과 알콜, 코카인, 암 세포 등을 투여했을 때 쥐의 뇌 부위에서 어떤 물질의 분비 량이 급격히 증가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돌로 죽은 그 미국병사들의 뇌 속에도 이러한 물질이 대량 분비되어 있었다. 그 물질을 엔돌핀(endorphin)이라 부른다. 엔돌핀은 체내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진정제, 즉 '몸속의 아편'을 뜻하는 말이다. 엔돌핀은 마약 모르핀보다 100배정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엔돌핀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그에 대항해 통증, 불안 등을 경감시켜 즐거움과 진통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아주 고마운 물질이다. 인간의 린색한 뇌는 일생동안 그 엔돌핀을 자주 내보내지는 않는다고 한다. 100번의 구애(求愛)끝에 사랑의 승낙을 받았을 때, 자식을 보지 못해 내내 고생하다 중년의 나이에 첫 아이를 보았을 때. 달랑 한 장만 쥔 복권이 거액으로 당첨됐을 때... 이런 환희에 엔돌핀이 분비된다. 요즘같은 광환의 나날에는 엔돌핀이 매일이고 샤워라도 하듯이 뿌려 지는 것 같다. . 셋 .   영국의 소설가 닉,호비는 수만 관중들의 틈바구니에 끼여앉아 록색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순간의 감흥을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으로 묘사하며 감탄했다. 다양한 인종과 대륙이 작은 축구장에 모여 하나의 공을 응시하며 축구로 하나되는 인류를 제시한다 축구의 매혹은 이러한 대단위 스펙테클(壮观)에서 비롯된다. 축구가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압도적인 스펙테클이 주는 중독성 때문이다. 혹자는 축구를 전쟁에 비유하기도 한다. 전쟁에서 병사들의 개인적 력량과 명장의 신출귀몰한 전술이 승리를 결정하는 것이 축구와 절묘하게 들어맞는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축구를 지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세계를 하나로 묶는 평화와 화합의 이벤트’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자유, 평등, 박애, 아름다움과 다양성이 넘쳐 흐르는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고상하게 말하기도 한다. 축구는 다른 스포츠가 갖지 못하고 흉내낼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가장 원시적이고 본능적이지만 축구는 또한 민족성이 가장 강하게 부각되는 스포츠이다. 우리가 본능에 종교에 가깝게 축구에 열광하는 또 다른 커다란 리유는 축구가 각 집단 고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하나의 가장 표현적인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 민족의 뜨거운 피와 실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에서 비롯된 브라질 축구 력사적 전통과 관련된수비지향성에 기인된 이탈리아 축구 훈련에 의한 물샐틈없는 조직력이 강조되는 경향을 보이는 독일 축구 보수적인 습성으로 변화를 꺼려온듯하지만 일관적인 끈기를 보이고 있는 잉글랜드 축구 이러한 축구브랜드의 양상에서 알아볼수 있다싶이 축구는 하나의 가시적인 행위 속에 그들의 문화, 정서, 전통을 담아낸 좋은 보기라 할수 있다. 축구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축구는 시방 진화 중이다. 개인의 전술은 점진적으로 진화하며 팀의 전술은 급진적으로 진화한다. 우리는 앞으로 더욱더 발전되여가는 축구의 모습을 보며 가배로 되는 즐거움을 만낄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한다. 축구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씩 미쳐가는 것 같다. 이제 축구는 만국의 공통어가 되어버렸다. 그 재미와 그 감격과 온 인류가 하나 된 뜨거운 마음들을 다시 한 번 더 생생히 느끼면서 날에 날마다 새라새라웁게 엔돌핀이 샘솟는 이 6월을 즐기고자 한다.  
84    월드컵단상(2) 인저리 타임 댓글:  조회:2791  추천:73  2007-06-29
월드컵단상-2 인저리 타임 . 하나 . 축구경기를 관람하면서 우리는 경기가 종료되는 시점에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숫자판을 추켜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축구는 롱구 등 경기와는 달리 부상이나 선수 교체 등의 상황이 발생해도 전광판의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그래서 정규 경기 시간인 45분을 넘어서 경기가 진행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경기에서 잃어버린 시간만큼 경기가 재개, 지속되는 것이다.45분씩의 정규시간이 끝난 이후 적용되는 이 시간을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이리고 한다. 보통 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거나 선수교체 및 부상으로 인한 경기지연, 반칙·코너킥·프리킥·페널티킥 등으로 曠?시간 랑비를 보충하기 위해 주심의 재량으로 그 시간을 결정한다. 주심은 이를 계산하기 위해 경기진행을 위한 시계 이외에 별도의 시계를 차고 나온다고 한다. 하여 근래엔 <<인저리 타임>>을 재는 <<축구경기 타이머>>란 이색적인 직업까지도 나왔다. . 둘 .<<인저리 타임>>은 보통 2~3분의 짧은 시간으로 이어지지만 흔히 기적은 이 짧은 시간에 터진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리는 <<인저리 타임>>의 기적을 심장이 터지는듯한 흥분속에 접할수 있었다. 인저리타임의 집중력에 따라 각 팀의 명암이 갈리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호주팀은 F조 조별리그 일본과의 맞대결에서 3대1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이로써 호주는 32년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게 되였다 . 이는 << 인저리 타임>>이 적용된 후반 47분 에 쐐기골을 성공시켜 마무리지은 경기였다. - 90분간의 지루한 혈투가 이어지던 독일과 폴란드전.승리의 녀신은 <<인저리 타임>>의 마지막 순간에 독일에 미소를 보냈다.개최국인 독일은 A조 예선 두번째 경기에서 후반 인저리타임에 터진 올리버 뇌빌의 천금같은 결승골로 인해 1-0 승리를 거뒀다. 폴란드는 90분 내내 독일의 거센 공격을 막아냈으나 결국 2분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가 북아프리카의 강호 튀니지와의 H조 조별리그 경기에서 2대1로 앞서 첫승을 눈앞에 뒀던 사우디아라비아는 후반 <<인저리 타임>>에서 동점골을 허용해 2-2 무승부가 됐다.사우디아라비아가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친 한 판이었다.- 또 에콰도르와 코스타리카와의 경기에서도 후반 46분에 쐐기골이 터졌고, 잉글랜드 제라드의 후반에 기록한 골까지 합치면 무려 5골이 <<인저리 타임>>에 나왔다.이처럼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막판 인저리타임에 포기하지 않고 얼마나 집중력을 잘 유지하느냐가 승부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경기 막판 <<인저리 타임>>에 터지는 골은 끝까지 노력을 잃지 않고 골문을 두드리는 팀이 얻는 응분의 결실이며 수확이다. . 셋 . 어찌보면 우리네 삶의 력정도 한판의 축구게임과도 같은것이다. 우리는 태여나서 너나없이 주어진 삶의 그라운드에서 달려야 한다.그 너넓은 생의 그라운드에서 지리한 공방전이 이어질때가 많다방향을 알수 없는 쪽에서 걸어오는 상대방의 란폭한 태클에 쓰러지고권위를 악용하는 편파적인 심판의 야비한 판결에 당하기도 하고결정적인 찬스라고 뼈물러 날린 공이 빗나가는 어이없는 실축도 겪는다. 이처럼 우리 삶에... 완벽이란 없다.때문에 오직 최고를 향해 가는 최선만이 존재한다.막판이 가까워 올수록 방심을 하다가는 자칫 평생의 유감을 남길 수 있는 일. 경기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호루라기가 울릴 때까지 끝까지 노력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축구는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축구선수들이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도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두는것 것은 <<인저리 타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역경속에서도 담금질을 멈추지 마라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저리 타임>>에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만든다
83    월드컵단상(3) 축구를 모르는 리더 댓글:  조회:2865  추천:73  2007-06-29
. 월드컵 단상 3 . 축구를 모르는 리더   하나 월드컵축제로 매일이 명절같은 기분인 요즘, 만약 직장상사가 축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닥 즐겁지 못할 것이다. 밤을 패며 리그전을 관람한뒤 직장에 나와서도 그 감흥을 못이겨 동료들과 경기의 엄청난 반전이며, 심판의 오심이며 경기의 하이라이트이며에 대해 격앙된 소리로 나누고 싶지만, 상사는 무감각한 얼굴로  아침부터 오직 직장규률이며 사업수치에 대해 지지콜콜 따질 것이다. 또한 밤을 새며 소진한 체력때문에 효률추구를 채찍질하는 상사의 신칙도 받을 것이다. 참, 대략난감한 형국이다.                                                          둘   여기 축구를 사뭇 좋아한 리더 한분이 있다      1977년 7월 30일, 북경로동자체육장에서 <<장성컵>> 국제축국요청경기가 펼쳐졌다. 경기를 앞두고 경기장 좌석에 키가 작달만한 인물 하나가 나타났다. 조용한 출현이였지만 그의 모습은 경기장의 모든 관람자들을 놀래웠다. 너나가 기립하여 박수와 갈채를 올렸다. <<등어른이요! 등어른이 왔소!>> 일개 관람자의 신분으로 나타난 그는 다름아닌 등소평이였다. 국제사회에서도 이 순간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경기장에서의 등소평의 현신은 중국에서의 등소평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한 장면이였다. 축구를 혹애했던 등소평은 이렇게 자신의 정치생애에서의 세번째 출마를 보여줬다. 일찍 프랑스에 류학했을때 자기 단벌 옷을 전당잡히고 국제축구경기를 관람할 정도로 등소평은 축구에 깊은 애착을 가졌다. 5,60년대 북경청년축구팀에 많은 배려를 돌려 늘 선농단 경기장으로 갔고 선수들이 체력훈련을 위한 경기마저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고 한다. 로후에 중임을 젊은 지도층에게 맡긴뒤 평생을 로심초사했던 그는 충분한 여가시간을축구에 돌릴수 있었다. 1990년 월드컵경기때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경기를 52차생방송했는데 그는 50차를 보았고 빠친 경기는 비디오로 녹화해 놓고 다시 보았다고 한다. 해바라기씨 한접시, 차 한컵과 담배 한갑을 준비하고 경기장이나 텔레비죤앞에 앉아 그는 자신을 잊고 축구의 신묘한 매력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중국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우러러 지칭되는 등소평, 그는 정녕 풍운이 감도는 경기장에서 진부한 팀을 인솔하여 첩첩한 리그전에서 벗어나 높은 순위에 오르게 한 감독같은 안목과 제슈체어로 <<컨디션이 좋지못하던>> 중국의 위상을 개변시켰던 것이였다.                                                                  셋   외국의 대기업들에서는 직원 채용 기준으로 운동이나 예술쪽에 기량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같은 조건이면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대체로 건강한 사람이 많으며 축구 같은 단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나름대로의 리유이다. 태생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여러사람들이 같이 모여 경기를 하고는중 몸을 부딪치면서 친해지고, 단합의 힘이 다져지고, 뭔가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 질것이며 물론 그것이 업무의 성과로 련결된 다는것이다. 운동 경기와 경영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경기에서는 이기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력량이 출중해야 하고, 그것을 팀웍(협동작업)을 통해 성과로 련결해야 한다. 축구와 같은 단체 경기에서 팀웍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개인기는 뛰어나지만 팀웍이 약해 무너지는 팀이 얼마나 많은가? 회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뛰여난 개인이 많아도 리더가 이들을 팀웍으로 묶지 못한다면 각자가 알량한 개인기만 부리다 마는 오합지졸의 굿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리더라면 우선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욕구와 관심거리를 리해 하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경영지침서들은 적고 있다. 함께 일하는 부하들에 대해 무심하거나 감각적이지 못한 경우,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례는 많다. 마냥 회사의 체계적인 수칙에 경직된 얼굴만 고수하고있는 무감각한 리더의 운영 메커니즘이 그만큼 시대에 맞지 않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그들과 끈끈한 뉴대관계를 갖고 부하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리해력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원칙을 많은 리더들은 흔히 잊어버리는것 같다. 우리의 리더들이 꼭 갖추어야 할 <<필수사항>>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매너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직원들을 움직이고자 하는 리기적이고 일방적인 <<카리스마 리더십>>보다는 직원 개개인의 고충과 취미를 알고 숨은 능력을 일깨우고 발전시켜 적재적소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할수 있도록 해야한다. 축구의 축제가 열리는 이 여름철, 월드컵을 통해서 회사일군의 반쯤은 축구전문가가 되는 걸 지켜보자. 우리가 좋아하는 팀이 어디가 강하고 어디가 약한지, 어느 선수는 뭐가 문제인지, 상대팀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전략을 제시하듯이 경기장 밖에서도 회사에서도 그런 사고방식과 자세를 기르도록 기대해 봄도 좋을듯하다. 더우기 출국, 리향, 산재의 삶을 살고 있는 요즘 풍토에서, 줄어들고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각 분야에서의 훌륭한 리더가 가지는 작용은 막강하며 또한 중요하다. 리더의 가장 큰 임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리더십이란 사기를 진작시키는 창조적이고도 직접적인 힘이다. 민심을 움직일 수 있고 휘동해 나갈수 있는 큰 리더, 급변하는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융통과 원활한 힘을 발휘시키는 리더, 만민이 지켜보는 경기장의 풍운대세를 휘잡을수 있는 감독같은 그런 리더가우리에겐 절박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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