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편소설 .
가람이여, 어허널널 가람이여!
김 혁
가람:
1, (伽藍), 승려가 살면서 불도를 닦는 곳을 가리켜 말함.
2, 떡갈나무의 방언
3, 고유어로서 강이라는 순 우리말.
두만강, 1885년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강가 너부죽한 청바위에 뺨을 붙이고 엎드리였다.
팔을 뒤로 꺽이여 오라를 지고 무릎을 꿀리여 앉은것이다. 실피줄이 도드라진 눈을 지릅뜨고 얼음장판에 넘어져 허둥대는 소처럼 막무가내로 거센 코김만 내뿜고 있다.
그 사형수를 울바자 치듯 둘러싸고 꼭뒤에 붉은 술 달린 벙거지를 쓴 사병들이 살벌하게 창을 꼬나들고 서있다.
상체가 우람하고 목이 굵고 짧은 도부수(刀斧手)가 앞으로 나섰다. 볼따구니와 턱이 온통 수염으로 덮히고 눈이 왕방울 같은 도부수는 흐느적거리는 륙자배기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푸짐한 먹이라도 만난 큰 짐승처럼 사형수를 한겻이나 노려보다가 등뒤에 짊어진 대도를 쓱 뽑아들었다. 도부수의 손에 들린 선들선들한 큰 칼을 본 사형수는 진작 혼백이 구중천으로 날아올라 두 눈을 까집었다.
도부수가 큰 대접을 바위돌우에 놓고 술 항아리를 기울여 대접에 술을 부었다. 술 한 대접을 단숨에 들이켰다. 또 한 대접 부어서는 술 한 모금 입에 물었다.
푸! 하고 칼에 술을 내뿜었다. 그리고는 옷소매로 쓱 닦아내렸다. 상오(上午)의 박명(薄明)아래에서도 칼은 위협적으로 빛났다.
도부수가 웃통을 벗어젖혔다. 한 가슴 부르르한 다복솔 같은 털과 나무밑둥이 처럼 실팍한 두 팔을 드러낸채 도부수는 칼을 뿌지직 움켜잡았다.
사형수의 상투는 흐트러져 파랗게 질린 얼굴을 뒤덮고있다. 꺼수수 풀린 짚단 같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퀭한 섬 그늘 같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부수가 칼로 사형수의 정맥이 두드러진 목줄기를 견주었다.
칼 아래 놓인 목숨의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은 “월강죄”로 단두대에 오른 강 건너 사람이였다.
이 10여년간 조선땅 북녘에는 가뭄이 계속되였다. 해마다 해동머리부터 가물은 어김없이 시작되였는데 여름이 다 가도록 천하의 자린고비보다 더 린색한 하늘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군했다. 전대미문의 왕가물이 잦으니 흉작(凶作)이 겹칠수밖에 없었다. 바늘 끝도 안 들어가게 척박한 땅에서 아무리 아등바등 손톱을 박으며 일해도 씨를 뿌린만큼 거둘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충재(虫灾)도 겹쳤다. 가뭄과 벌레떼는 악마구리의 날개처럼 함경도의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흥 등 6진을 꺼수수 덮었다.
게다가 관리배들의 부패와 학정은 가뭄이나 벌레보다 무서웠다.
천재와 인재에 연거번거 지지름을 당한 굶주린 사람들은 풀 뿌리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집집마다 굶어 죽고 벌레가 묻어 나른 병에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나왔다. 길가에는 임자없는 시체가 나뒹굴기도 했지만 란장속에 거두어 들일 여력마저 없어 했다. 기사년(饥死年)이란 이때 나온 말이였다.
살길이 꽉 막혀버리고만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들이 막무가내로 선택한 길은 두만강을 건너는것이였다. 두만강을 건너 만주땅으로 도둑농사를 가곤했다.
한편 강건너 청나라 통치자들은 장백산 이북의 천리땅을 만족의 발상지라하여 "룡흥지지(龙兴之地)"라 이름했다. 그리고는 엄한 봉금책(封禁策)을 실시했다. 만족을 내놓고 타민족이 만주에 가까이 하는것을 불허했다.
이렇게 "봉금령"이 내려진후 만주땅은 수백년간 내리 잠을 잤다. 방치된 그곳은 숲이 울창하고 땅도 비옥해 그야말로 천부지토(天府之土)로 되여있었다. 어찌나 땅이 비옥한지 농사가 절로 되였다. 잡풀이 우거진 땅에 불을 질러 밭을 만든후 씨를 뿌려두면 비옥한 땅에서 곡식은 소리치며 자랐다. 그대로 두었다가 가을에 가서 추수해오면 되였다.
이로소 강을 건너는것은 북녘 사람들의 유일한 삶의 길이 되고말았다.
그러나 이 길마저 순순히 열리는것은 아니였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월강하다 잡힌 자들을 "월강죄(越江罪)"라하여 막중한 범죄로 다스렸고 마구 목을 쳤다.
강안에는 가만히 월강하는 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포막들이 몇 구간에 하나씩 섰고 “월강죄”로 목을 친 사람들의 수급을 걸어놓고 효시하는 장면을 언제든지 볼수 있었다. 수급들이 버드나무 가지에 추녀끝에 메주 달리듯 걸려 데룽거렸다. 그저 가난이 죄였다. 죽어서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지릅뜬 눈을 한 그 머리들은 한을 담고 강 건너 고향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고향에 남아있는 처자들은 강을 건넌 남정 때문에 내내 속을 졸여야 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를 지어 불렀다.
월편에 나붓기는 갈대잎가지는
애타는 내 가슴을 불러야 보건만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기러기 갈 때마다 일러야 보내며
꿈길에 그대와는 늘 같이 다녀도
이 몸이 건너면 월강죄란다.
"월강곡"이라는 노래였다. 강안 사람들이고 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를줄 알았다. 강가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들에서 흘러나오는 그 음울한 노래소리는 사람들의 골수를 쪼개고 들어갈 정도로 처량했다.
하지만 “월강곡”의 처연한 곡조속에서도 남정들은 그냥 강을 건넜다.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다. 앉아서 굶어 죽으면 어떻고 월강하다 잡혀 죽으면 어떠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인데 강부터 건너고 보자”
사형까지 불사하는 가혹한 “월강죄”가 위세를 부렸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사람들은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며 강을 건너고 있는것이였다.
밑바닥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굶주림에 대해서 거의 동물적인 두려움을 갖기 마련인데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이란 바로 굶주림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것에 다름이 아니였다.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또 다른 두려움을 불러왔다.
도부수의 칼이 하늘높이 솟았다.
바로 그때였다. 강 저쪽 얕은 여울목으로 말 몇 필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다급히 강물을 박차고 있는 말발굽아래서 튕겨오른 물방울이 꽃살을 피웠다. 말 잔등에 앉은 사람들이 손을 휘저으며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거리가 멀어서 무슨 소리인지 가려 들을수가 없었다.
도부수의 칼이 허공에서 일순 멈추었다. 그러자 사병들중 우두머리인듯한 자가 귀찮다는듯 손을 목 울대뼈 아래로 그었다. 그러면서 이 새로 짧게 내뱉었다.
- 베여라!
꺼억! 도부수가 술 트림 한번 했다.
윙! 칼이 허공에서 울었다.
피의 분수가 솟아 올랐다.
몸퉁이가 철썩 넘어졌고 머리통이 넌출 끊긴 호박처럼 떨어져 내려 모래사장에데구르르 굴렀다.
말 탄 사람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말이 강안에 닿기 바쁘게 굴러 떨어질듯이 내려 달려온 사람이 그 참상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무릎을 탁 쳤다.
- 뉘시오?
사병들속에서 맨드라미처럼 키 큰 우두머리가 나서며 거만하게 따져 물었다.
- 나 종성부사요. 길림장군 명안께서 "월강죄인불가진살(越江罪人不可塵杀)"이라는 령을 내렸는데 왜 아직도 함부로 형을 행하고있소?
봉금하고 목을 쳐도 월강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자 길림장군 명안과 오대징은 강을 건너 와 두만강지역에서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인들을 다 내쫗을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수도 없다면서 “봉금령”을 페지할것을 조정에 상주했다. 결국 청나라는 아라사(俄罗斯)의 침략에 시달리는 등 복잡한 정세속에서 조선이주민을 리용하여 두만강지역을 개간할 타산으로 1885년에 드디여 “봉금령”을 페지하는 령을 내린것이였다.
“봉금령”이 페지된지 며칠 안되여 두만강일대를 순찰하던 종성부사는 아직도 강 저쪽에서 “월강죄”로 조선사람을 주살한다는 소문을 듣고 순찰일행을 거느리고 이렇게 강건너 사형장에 까지 득달같이 뛰여온것이였다.
- 죽은 자는 뉘더냐?
종성부사가 따져 물었다.
“강 건너 사는 김씨성의 포수라 아뢰오.”
형을 집행하던 자가 알려주었다.
- 봉금해제가 내리기전에 이미 형이 내린 자라 그냥 목을 쳤을뿐이오.
우두머리가 아무렇지도 않은듯 뇌까리고는 무리를 향해 손을 저었다. 사형수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절그렁대며 쟁기들을 거두었다. 우두머리가 조소의 눈길을 흘리며 마차에 올랐고 회자수들은 표연하게 강기슭을 떠나버렸다.
강안에는 일순 정적이 깃들었다. 목에서 떨어져나간 머리와 싸늘히 식어가는 몸뚱이만이 마치도 커다란 감탄부호마냥 모래사장에 뉘여져 있을뿐이였다.
휘꿍! 휘꿍!
강 저쪽에서 날아온 새 한 마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포목찢는 소리로 울어댔다. 새소리에는 축축한 물냄새가 묻어났다.
새 소리에 잠간 귀를 기울이다 종성부사가 사무쳐 하늘을 우러렀다.
- 새와 같은 미물들도 마음대로 오가는데 그 새를 잡는 사람이 외려 “월강죄”라 이름지어 멸화(灭祸)를 자초하는구나.
조화(弔花)라도 단듯 희끗희끗 수술머리를 떠인 갈대들이 강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강기슭에 뒹구는 잘려진 머리통은 눈을 감지못하고 있었다. 지릅뜬 두눈 가득 한을 담은채 흐르는 강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란강, 1919년
뒤산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와 산새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섰다가 검은 무명치마를 거꾸로 뒤집어 쓰고 처녀는 강에 풍덩 뛰여들었다.
청국인 쑹(宋)”가네 지팡(地方)살이를 하는 김씨네 맏딸이였다.
아침에 아버지가 그녀를 “쑹”가네 집에 보내야겠다고 끝내 그 한마디를 신음처럼 내뱉았고 오후 나절에 그녀는 값없는 목숨을 버릴양으로 강물에 뛰여든것이다.
솥가마, 풍로, 냄비, 숟갈, 쪽박 따위로 살림 나부랭이라고 꾸려가지고 김씨네 일가가 눈물의 강을 건너 이곳에 이른지도 어언 10년세월을 넘겼다. “뽕밭이 바다로 변한다”는 시간이였지만 아직도 이주민들에게는 생소한 산천이요, 생소한 사람들이였다.
가난에 겨죽만 먹다가 남부녀대하고 "돈 소리가 절렁절렁 난다”는 강 건너 짚신이 닳도록 걸어서 이곳 북간도땅으로 찾아 들었는데 여기서도 그들을 맞아 준것은 여전히 지팡살이였다. “지팡살이”, 이 곳에서 머슴살이를 달리 하는 말이다. 들어오던 해는 듣던 소문대로 풍년이였으나 늦게 들어와서 적게 맡은 땅 조차 가꾸지 못했고 이듬해에는 흉년이였다. 그 이듬해로 미뤘더니 이듬해에도 흉년이 졌다. 송씨성을 가진 “지팡”에게서 소작료를 꿀수밖에 없었다. 김씨네 일가족은 등이 휘고 손톱이 벗겨지도록 일했다. 정수리가 익어 번지는 여름 불볕을 이고 밭에 나가 삯김을 매고 꼴을 베였다. 삯방아 찧었고 길쌈도 했다. 그렇게 죽을만큼 일했건만 “하루밤에 고손까지 본다”는 바퀴벌레처럼 빚짐은 늘어만 갔다. “쑹”가는 걸핏하면 서슬이 퍼래져서 빚재촉을 해댔다. 그 소작료를 못갚아 매일이고 아버지는 말가웃(一斗半)이나 되게 한숨을 내쉬군 했다.
빚때문에 설명절에 아버지는 “쑹”가에게 철떡 철떡 목이 돌아가도록 줄 따귀를 맞았다.
- 초우, 빠피야! (扒皮啊. 네미럴, 껍질 벗겨 죽일라!)
기다란 장죽을 꽁무니에 찌르고 피발이 올올한 눈을 딜딜 굴리는 “쑹”가의 악청이 귀청을 징징 칠때면 온 집안 사람들은 공벌레처럼 몸을 옹송그리며 오소소 몸을 떨군 했다.
그러던 며칠전 “쑹”가가 김씨네 집에 나타났다. 문짝이 떨어져나가고 없는 문설주에 매단 가마니때기를 헤치며 나타난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쑹”가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가 몸을 흠칫 떨었다.
까만 서까래가 드러난 수수깡 천정에는 그을은 거미줄이 흐늘흐늘 드리우고, 빈대 죽인 자리로 얼룩진 흙벽을 둘러보며 “쑹”가가 찍-하고 이새로 침을 뱉았다. 구름깔개(참나무를 밀어서 결은 자리)를 깔아 놓은 구들에 걸터앉으며 장죽을 꺼내 물었다.
김씨가 얼른 부시돌을 쳐 담배를 붙여올렸다. “쑹”가는 아무말도 없이 느스름히 눈을 감고 담배를 빨았다. 살찐 쥐가 텃세를 하듯 거만이 하늘을 찔렀다. 연기가 작은 집안을 운무처럼 감쌌고 그속에 최면된듯 앉아 그녀는 짤막한 기침을 겁기처럼 나지막하게 내뱉았다.
이윽고 “쑹”가의 거적눈이 들려지더니 그녀를 얼핏 곁눈질해보았다. 그 눈길이 “쑹”가네 집 대문에 채필(彩笔)로 그려 붙인 삼국풍진도(三国風尘图)속 장비의 부릅뜬 눈길과도 같아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비릿한 눈길이 그녀에게는 참기 어려운 고문이였다.
담배연기를 입가로 흘리며 ”쑹가”가 아버지를 보고 입을 열었다. 왠지 평소에귀때기를 자를듯 높던 목소리가 이날 따라 낮고 은근하다.
"뽀미(苞米) 얼씨찐(20斤), 쑈미(小米) 얼씨찐(20斤), 얜(盐) 시찐(10斤) … 쩌머양(怎么样)? 꾸냥(姑娘)이 워디(我) 줬소?"
때국으로 번질거리는 소매 끝동이로 코물을 훔치면서 “쑹”가가 삭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릿하고 퀴퀴한 더운 입김이 후끈 낯을 스치자 김씨가 몸을 떨었다.
“안되우, 쑹띠팡(宋地方), 이것만은 안되우다.”
뒤미처 아버지의 입에서 비명이 새여나갔다.
“쑹”가의 낯빛이 와락 굳어졌다. 띵띵하게 살 오른 뺨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다.
“쑹”가가 입에서 장죽을 빼였다. 크악! 크악! 가래를 돋구어 퉤!하고 내뱉었다. 장죽을 신바닥에 대고 탁탁 털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쑹”가의 발목에 아버지가 매달렸다.
“올 가슬까지만 참아주. 올 가슬엔 내 꼭 갚으리다. 쑹디팡, 쑹디팡!”
“쑹”가를 그 무슨 석가모니불처럼 불러 젖히며 아버지는 또 한번 간곡한 애원을 했다. 그런 아버지를 “쑹”가가 내려다 보았다. “쑹”가의 살 오른 뺨이 성난 두꺼비 배처럼 불떡불떡 하고있었고 눈빛이 뱀의 그것처럼 파란 린불을 달고 번들거렸다.
“쑹”가가 장죽으로 아버지의 코를 삿대질했다.
"초우! 빠피야!”
그 악악거리는 소리가 그릇이 깨여져 서걱거리는 사금파리의 소리처럼 머리발이 쭈뼛 서게했다.
모진 욕설로 입가심을 하고 “쑹”가가 돌아가자 아파서 누덕이불을 머리우까지 뒤집어 쓰며 쓰고 누워 숨소리 한번 없던 어머니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눈물 없는 울음을 우는 그녀를 누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듯 품에 허겁지겁 껴안았다. 그녀의 뺨을 두손으로 자꾸만 어루쓸었다.
“애고 우리 딸, 애고 우리 딸, 이 일을 어쩌면 좋뉘! 애고 불쌍한… 애고…”
가슴이 꺽꺽 막혀 그 몇마디만 어머니는 복창하다싶이 했다. 모진 짐승이라도 만난듯 겁기에 질려 그녀의 곁에 꼭 붙어 앉았던 피죽도 못 얻어먹은 깡마른 녀동생들의 입매도 움찔움찔 울음을 품었다. 이어 울음의 끈 주머니를 풀어헤친 지어미를 따라 동생들도 울음을 터뜨렸고 온 집안이 삽시에 울음바다로 되였다.
아버지는 문가에 말뚝처럼 붙박혀 서있다. 노상 이주민들과 악착스럽게 으르렁 으르렁하는 “쑹”가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런 못된 요구를 넌짓이 내미는 “쑹”가앞에서 머리가 띵하고 속이 뉘엿거리여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고이 기른 내 딸내미를 뙤놈에게 내주라고? 마른 벼락이 내릴것 같아서 내사 죽으면 그양 굶어죽었지 차마 아이 된다.”
아버지가 가슴에 구멍이라도 낼듯 탕탕 두드렸다.
그랬던 아버지가 마른 벼락도 체념한듯 그녀를 “쑹”가에게 주기로 한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아버지가 오죽하랴 싶었지만 그녀야말로 “마른 벼락”을 맞은 기분이였다.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열살이나 더 많은, 두꺼운 겹주름이 뒤룩뒤룩 덮은 시푸르뎅뎅한 얼굴에 삭은 톱니처럼 듬성한 누런 이발을 가진, 말마디마다 추임새처럼 가래침 한 번에 “빠피야” 한 번을 넣으며 이주민들에게는 악귀의 대명사로 불리는, 되놈에게 어찌 이팔의 잉어처럼 싱싱한 몸을 내준단말인가?
생각만 해도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아 앓는 목소리를 내며 뒤걸음질치다 그녀는 도망치듯 강가로 나와버렸다.
강녘에서 그녀는 해종일 하신(河神)에게 제물로 시집가는 볼모처럼 눈물을 흘렸고 궁여지책으로 나중에는 강물에 몸을 던진것이였다.
… 강 저쪽에는 해라는 총각이 살았고 강 이쪽에는 란이라는 처녀가 살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하루, 강에 살던 도깨비가 나타나 마을사람들이 거둔 낟알을 깡그리 빼앗아 갔답니다.
해와 란이는 마을사람들을 이끌어 도깨비와 맞섰습니다. 해가 휘두른 장검에 목이 떨어진 도깨비의 머리가 다시 붙으려는 순간 란이가 치마폭에 담아온 매운 재를 확 뿌리자 도깨비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습니다.
도깨비를 물리치고 해와 란이는 잔치를 치르고 잘 살았고 그때로부터 그 처녀총각의 이름을 달아 강 이름을 해란강이라 하였답니다.
야학에서 총각선생님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지척에 들려 오는듯하여 그녀는 눈을 떴다.
정말로 야학 총각선생이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이름을 다급히 불러젖히고 있었다. 그러는 총각선생의 일신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엉?!”
강에서 건져 올린 그녀가 드디여 정신을 수습하자 야학선생이 따져 물었다. 둥그런 도수안경속의 의문스런 눈길이 그녀를 향해 찔러왔고 한 켠에 쪼그리고 앉은채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치마자락을 쥐여 짜며 그녀는 축축한 사연을 말리듯 신뢰하는 총각선생에게 털어놓았다.
맹금(猛禽)의 부리에 찢긴 듯한 처연한 모습으로 옹송그리고 앉아 말하는 그녀에게서 그치지 않은 울음이 아직도 딸국질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하소연을 들은 총각선생의 눈에서 파란 불빛이 번쩍하였다.
"허 그러게 뙤놈 (胡人)이라지! 그놈들께 인륜(人倫)이 있겠소? 없소! 딱각발이 왜놈들이나 청국 띠팡들은 꼭 같이 우리 껍질 벗기려 드는 악귀들이오."
강 기슭에는 정적이 흘렀다. 물소리와 산비둘기 같은 소리로 흐느끼는 낮은 울음소리만 깔려 있을뿐이였다.
“갑시다!”
이윽고 총각선생이 한마디 내뱉았고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사이에 깊이 고개를 묻고있던 그녀가 놀라며 후딱 머리를 쳐들었다.
“나와 함께 갑시다. 나도 뙤놈들이 득실거리는데다 왜놈들마저 득세하고있는 이 곳을 뜨기로 맘 먹은지 오래되오.”
“어디루요?”
“봉천으루 갑시다. 그 쪽은 서간도로 부른다오. 여기 북간도처럼 살길 찾아 강 건너온 사람들이 많은 곳이오. 물론 나를 믿어만 준다면 말이요.”
다소 격앙된 소리로 말하고있는 총각선생의 도수안경속 눈에는 붉은 기운이 몰려있었다.
이른 봄, 일본의 침탈에 항거해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여파를 타고 이곳 북간도에서도 일제를 규탄하는 대규모적인 집회가 일었다. 3만여명이 룡드레촌에 운집해 들어 “일제를 타도하자”, “조선독립을 성원한다”는 구호를 목청높이 웨쳤다. 집회는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당장에서 10여명이 흉탄에 쓰러졌다. 그 집회에 용약 가담했던 총각선생도 일제의 용의선상에 그 이름이 올라있었다. 그래서 당장 이곳을 뜨기로 마음먹었던 총각선생이였다.
처녀는 단정한 총각의 얼굴을 부신듯이 곁눈질해보았다. 하얀 피부. 깎은 듯한 용모. 얼굴에 어쩌면 여드름 자국 같은것도 하나 없다.
쭈뼛거리는 그녀에게 총각선생이 손을 내밀었다.
보는것만으로도 멀미기가 치밀 만치 끼끗한 용모를 가졌던 그 훤칠한 총각은 처녀의 아버지 김씨네와 같은 해에 이곳까지 당도한 리훈장의 아들이였다.
“배워라, 논밭을 팔고 집을 팔아서라도 글을 배워라! 지식만 있으면 누구나 량반이 되고 잘살 수가 있다.”
푸른빛이 돌만큼 하얗게 맑은 무명두루마기를 입은 리훈장이 마을에 야학을 차려놓고 권학(劝学)을 부르짖었다.
“배워야 합니다. 배워야 띠팡들의 종살이에서 벗어날수 있고 왜놈들의 총칼에서 벗어날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교편을 물려받은 아들도 따라서 향학(向学)을 부르짖었다.
온 마을에서는 총각선생에 대한 찬사들이 침이 마르도록 입안에서 바퀴 굴렀다.
마을처녀들 너나의 선망의 대상이였던 총각선생이 지척에서 내미는 따스한 손길앞에서 처녀는 일렁이는 눈물 보가 터질것만 같았다.
- 정말요? 저 같은 종살이집 딸년하구?
허탈한듯 무릎을 쓸면서 그녀는 쓸쓸하게 웃었다.
총각선생은 잠간 강에 눈길을 주었다.
- 이 강의 전설이 생각나누만. 악귀의 손에서 강을 지켜낸 해와 란의 전설이.
그들처럼 운명에 맞섭시다. 우리도 한번 해와 란이 되여 보는거요.
총각선생은 시선을 돌려 그녀의 자두알처럼 동그란 얼굴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기운이 흐르는 시선이였다.
생존때문에 남의 집 지팡살이로 짐승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나날들이, 차별 당하며 가슴 조렸던 날들이, 체한것처럼 명치끝에 얹혀 있던 울분들이 그 온유한 빛의 시선에 순간에 몽땅 녹아내리는것만 같다.
순간 강기슭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의 몸 전체로 따뜻한 해볕이 골고루 쏟아졌다. 그 따사로운 해살이 그의 갈비뼈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그의 몸안에 가득한 물기를 말려주는것 같았다.
보자기처럼 들씌워졌던 깜깜한 어둠속에서 그녀는 빛을 보았다. 그 빛이 가리키는 길이 어떤 길이든 처녀는 지금 어딘지 떠나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그 앞길에 무언가 신기루처럼 어른거리기는것이 보이는상 싶었다. 그보다도 그 길을 향도하는 사람에게서 어떤 아련한 마음의 균형을 느꼈다. 그만큼 낮은 땅에서 높은 차별 받으면서도 따뜻한 정(情)을 바라 살아가고 있었던 그녀였다.
가슴이 높뛰는 현기증속에서 구휼(救恤)같은 그 손길을 처녀는 수줍게 받았다.
이른봄, 눈석이물이 흘러내리는 강은 아직 차갑다. 하지만 다시 보니 강의 몸매는 결코 거칠지 않았다. 따스한 여름을 앞둔 봄빛이 은연중 고여있는 탓이리라.
복숭아빛 뺨을 붉히며 눈을 내리 깔고 총각에게 손을 맡긴채 처녀는 강기슭을 타고 걸었다.
과즙(果汁)처럼 청량한 강바람이 뺨을 어루만진다. 바람에는 푸르고 정결한 해란강의 숨결이 어려 있다.
강은 봄양기에 태질하듯 수줍게 몸을 뒤척이며 어디론가 흘러 간다.
송화강, 1937년
탕!
총성이 울렸다.
되알진 총소리는 지척에서 울렸다. 녀전사는 관목림사이로 강쪽을 내다보았다. 누렁옷을 입은 일본병사들과 검정옷을 입은 지방 괴뢰군들이 뒤섞여 수림을 향해 달려오고있었다. 촉각을 세우고 냄새를 맡으며 그들의 뒤를 바싹 쫓고 있는 자들은 얼핏 보아도 수십명은 잘 되였다. 두릿두릿 동정을 살피며 다가오던 놈들이 드디여 그들을 발견하고 사격을 시작한것이다.
- 놈들!
이를 사려 물며 녀전사는 소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앞장섰던 괴뢰군 한 놈이 넉장거리로 나가 거꾸러졌다. 그 기세에 총성이 잠간 멎는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이어 우박처럼 총탄이 날아들었다. 녀전사와 꼬마병사는 관목림숲에 납작 엎드렸다. 총소리에 귀때기가 잘려갈듯 했고 총탄에 잘린 나무잎들이 꺼수수 날리고 흙먼지가 자오록이 피여 올랐다.
- 우린 포위당했어.
소총을 들어 또 한방 먹이면서 녀전사가 부르짖었다. 이제 겨우 열입곱살 난 꼬마전사도 소총을 들어 놈들을 겨누어 한방 쏘았다. 그러나 비발처럼 날아드는 탄환의 세례에 두 사람은 새된 소리를 지르며 다시 그 자리에 엎드렸다.
큰 덧저고리를 입고 무릎아래로는 가뜬하게 행전을 치고 청렬한 내음의 솔향기가 그득한 숲을 누비던 동북항일련군 제2로군의 두명의 전사가 밀영에서 나와 민가로 내려갔다 오다가 그만 놈들의 포위망에 든 것이였다.
녀전사가 등에 짊어졌던 묵직한 보짐을 풀어 내렸다. 그 보짐을 꼬마전사에게 넘겨주었다.
- 이걸 꼭 껴안고 여기서 꼼짝말고 있어. 내가 놈들을 저쪽으로 유인해 갈테니.
꼬마전사가 보짐을 무겁게 받아 안았다. 보짐에 싸인 그것은 재봉틀이였다.
30대의 녀전사는 항일련군 피복공장의 주요 책임자였다. 조선을 삼키고 이어 중국 동북에 발톱을 뻗치기 시작한 일제에 항거해 일떠난 동북항일련군에는 공동의 적 일제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으로 동참한 조선인 전사들이 많았고 녀전사들도 적지않았다.
일정한 규모로 성장한 항일대오였지만 부대에는 재봉틀이 겨우 다섯대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수천명 항일련군 전사들의 옷을 짓기에는 힘에 부쳤다. 거의 전부를 수작업으로 대체했다. 때문에 피복공장의 전사들은 고된 임무에 시달려야 했다. 재봉틀 한대라도 더 있어도 그들의 많은 일손을 덜 것이였다. 그러던중 얼마전 현성으로 이사를 온 한 가족이 재봉틀을 갖추고 있더라는 말을 전해 듣고 그들은 위험도 무릅쓰고 산을 내린것이였다. 일견에도 꽤 유족하게 살고있는 그 집을 설복하여 재봉틀을 사가지고 밀영에 돌아가던중 마을에 도사리고있던 밀정의 밀고로 그만 일본놈과 괴뢰군들에게 뒤를 밟히고 만것이였다.
- 누님!
꼬마가 녀전사의 옷소매를 부여잡았다. 분명 경황에 질린 눈길이였지만 꼬마전사는 사내답게 말했다.
- 내가 나설게요. 누님이 이 마선을 지고 가세요.
- 안돼! 이곳 지형은 내가 더 잘 아니깐. 지금은 이 마선을 잘 보존해 돌아가는것도 중요한 임무야.
녀전사가 꼬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런 꼬마의 군복 어깨솔기가 따져 있는 것이 보였다.
- 이제 내가 돌아가서 잘 기워줄 테니 그런만큼 이 마선을 보존해야 돼.
탕! 탕!
나무등거리를 마구 쫗던 딱따구리가 날카로운 부리로 귀속이라도 쪼아대듯 총성이 고막을 흔들어 댔다.
- 그래도 제가 갈게요. 피복공장에 누님이 없으면 안돼요.
꼬마가 부득부득 우겼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섬광처럼 부딪혔다. 구겨진 군복우로 솟은 꼬마전사의 야윈 목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다시 한번 단호히 부르짖었다.
- 이건 명령이야!
꼬마는 비로소 녀전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앙 다문 입술, 질끈 묶어 올린 머리 아래로 야생초처럼 듬성듬성 흘러내린 잔머리… 그녀의 얼굴은 세월의 풍진을 고스란히 담아 강파르고 거칠었다. 그리고 눈빛은 깊고 강했다.
꼬마전사의 어깨죽지를 툭 쳐주고나서 녀전사는 관목림을 뛰쳐나갔다.
도담하게 달려오는 놈들의 무리를 향해 마주섰다. 총을 들어 탕탕 련발로 사격을 가했다. 닭이 풍겨대듯 뛰여오던 놈들의 대오가 흐트러졌다. 그러는 사이 녀전사는 강줄기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대에서 너나가 존경하는 누님이였다. 어려서 길쌈 잘하는 어머니 손에서 자라서 옷짓는데 막힘이 없었다. 손재주가 있어 일찍이 재봉기술을 익힌 어머니는 어렵사리 재봉틀을 마련하여 장터에다가 조그맣게 양복점을 차렸었다. 사실 양복점이라는 거창한 명칭과는 거리가 멀었고 번듯한 새 옷을 만드는것보다는 수선이나 짜깁기 따위가 전문이였다. 그런데 그 재봉틀을 고향에 까지 발톱을 뻗친 일본주둔군부대에 빼앗겼다. 그 횡포를 막아 나서다가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류치장에 갇혔고 감옥에서 받은 혹형이 빌미가 되여 류치장을 나와 며칠만에 죽고 말았다.
마을에 잠입해온 항일련군 녀전사의 고동의 연설에 그녀는 벌창해진 눈석이 물처럼 흘러내리던 서러운 눈물을 닦았다.
- 여러분! 놈들은 우리 민족의 금수강산을 빼앗고 그것도 성차지 않아 총검으로 우리의 부모와 형제들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왜놈들은 우리의 고향을 빼앗고 우리의 피땀을 짜내고 등가죽을 벗기고 뼈를 갉아먹는 원쑤입니다.
그런 왜놈들의 총칼아래 평생 우마와 같은 생활을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눈물과 한탄만으로는 빼앗긴 고향을 찾을수 없고 복된 생활을 찾을수 없습니다.
일제를, 반드시 극악한 저 일제를 쳐부셔야 우리는 진정 복된 살림을 누릴수 있을겁니다. 여러분!
단발머리 녀전사의 목소리, 그것은 그녀에게 어떤 신탁(神托)처럼 들렸다. 또한 그 소리는 그의 내면에서 용암처럼 다져져 언젠가 뿜어만 내고 싶었던 소리이기도 했다.
그녀는 홀어머니와 작별하고 분연히 항일대오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작은 체구였지만 강의한 의지와 불타는 정력을 지닌 녀성이였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미지의 힘을 마른 체구안에 감춰놓은 합격된 녀전사였다.
가혹한 전쟁속에서도 사랑은 꽃피여 그녀는 항일련군의 정치부주임과 결혼하여 딸아이 하나를 보았다. 하지만 남편은 아이가 채 돌이 잡히기도 전 일제의 소탕전과 맞서다 희생되고 말았다.
몇해전의 이른 봄, 일본관동군의 “춘기 대소탕”이 시작되였다. 씨를 말리려드는 적들의 소탕을 피하여 부대는 신속히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그녀와 여덟명의 녀전사들 앞에 가혹한 선택이 주어졌다.
부대의 대의를 위해 아이들을 당지 사람들에게 맡기고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던것이다. 그녀의 아이는 북간도에서 지주놈팽이의 강제혼인을 피해 총각선생과 함께 도망쳐 왔다는 한 조선인 녀인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소탕이 끝나 다시 그 마을을 찾았을때 마을은 이미 일제의 대토벌에 불타버리고 쑥밭이 되여있었다. 그녀는 물론 여덟명의 녀전사들도 끝내는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아이를 잃고 그녀의 가슴에 선명한 피금이 그어졌다. 곰실거리며 재롱떨던 애의 모습이, 맡기고 떠나는 그녀의 옷깃을 작은 손으로부득부득 움켜쥐고 세상이 떠나갈듯 울어대던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밟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살점을 잊고 있다는 생각에, 남편을 잃고 그 아이를 버리고도 자신이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문득 놀라곤 했다. 하지만 더 큰 책무와 사명감이 그의 그런 질정없이 떠오르는 잡념을 지우게 했다. 눈물을 닦고 그녀는 다시 총가목을 부여잡았고 송화강반을 누비며 놈들과의 처절한 사투에 뛰여들었다.
겨울로 가는 날씨는 사뭇 차가웠고 강바람은 세찼다.
힘이 풀리는 무릎을 닦아세우며 녀전사는 오로지 강줄기를 따라 달리고 달렸다. 소총을 들어 맞불질하며 한무리의 악귀들을 자기쪽으로 유인해갔다. 꼬마와 다른 방향으로 달리면서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아름드리 자작나무, 활철나무, 떡갈나무들의 우듬지가 하늘을 가리웠고 꼬마와 재봉틀을 꽁꽁 가리워주고 있었다.
놈들은 각일각 죄여왔다. 씨부렁이는 왜놈들의 말소리와 군화소리, 헐떡이는 숨소리마저 들리는듯 했다.
놈들에게 쫓겨 녀전사는 강가 산언덕으로 치달아 올랐다. 강녘에는 커다란 화강암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바위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황량했지만 그래서 아름다웠다.
- 산채로 잡아라!
놈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히면서 그녀를 생포하려고 하였다.
벼랑끝까지 몰린 그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절컥! 격침이 빈 소리를 냈다. 탄약이 떨어진것이다.
그녀는 지체없이 총을 거꾸로 들어 바위에 대고 짓찧었다. 총신이 도끼날에 패인 장작개비처럼 너덜너덜 조각이 났다. 놈들에게 쟁기 하나 남겨주지 않으려는것이였다.
- 산채로 잡아랏!
- 투항하면 목숨은 보존케 해주마
놈들의 위협과 권유의 너스레와 음산한 웃음소리가 강량안에 가득히 명멸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멈추어 서서 바람에 새집이 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발아래 강을 내려다보았다. 넓은 들을 가로지르며 산개하는 푸른빛으로 흐르고 있는 강, 그 언저리에 들락날락 솟은 산 봉우리, 산자락에 자리잡은 초가집들… 가녁에서 어슬렁이며 이리떼가 으르렁대고 있지만 강산은 왜 이리도 아름다울가!
바람 한줄기 불어 그녀의 숱 많은 머리카락에 먼 곳의 익숙한 향기를 묻혀 놓는다.
바늘땀으로 뚫어진 양말을 호던 어머니가 인자하게 웃는다.
딸애의 하얀 손이 나비의 날개짓처럼 나풀거린다.
새로 누빈 솜옷을 입은 전사들의 기쁨 어린 얼굴이 저마다 씩씩하다.
쏟아지는 정오의 해살을 온 몸에 받으며 푸짐한 빛속에 그녀는 뻗쳐 서었다. 여유롭기까지 한 초연함에 그의 턱밑까지 닥쳐왔던 일본병정들이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 초연함은 놈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악마구리 끓듯 극악스레 소리소리 지르며 다가오는 놈들을 지켜보다 그녀는 서슴지 않고 검푸른 강을 향해 몸을 던졌다.
볼가강, 1956년
유람선이 볼가강을 누빈다.
풍요로운 쏘련대지의 젖줄로 령토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며 누빈다는 강, 또한 고난과 착취의 강으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던 풍운의 그 강을 오늘은 대형 유람선이 여유있게 누빈다.
강으로는 강기슭의 산봉우리와 나무들이 천국의 풍경을 그리며 어우러져 흐르고 가담가담 보이는 선창작에서 흘러나오는 유람객들의 웃음소리가 습윤한 강의 대기를 후르르 휘젓는다.
류학생 김군은 기발과 꽃과 표어로 단장된 배의 란간을 두손으로 잡고 섰다. 배전에 이는 물이랑처럼 그의 가슴은 감개의 소용돌이로 설레고 있었다.
불과 몇해전만해도 김군은 자신이 조선족의 첫 류학생이 되여 쏘련으로 오게 되라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고향에서 3,40년대 혹간 일본으로 류학을 갔던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 그렇듯 큰 고통을 안겨준 일제가 광분했던 시기 적국의 나라로 류학을 갔다는것은 지금와서 보면 그 무슨 광채로운 일로 치부되지 않았다. 하기에 사회주의 강국인 쏘련에로 선발된 그야말로 고향의 진정한 첫 류학생이라 할수 있었다.
1954년 봄, 세상에 건국의 고고성을 지른지 얼마 안되여 항미원조의 전장으로 달려나가 발톱까지 무장한 미제와 싸워 이기는 등 거창한 대사를 거쳤던 중국은 거구를 떨치고 일어나 사회주의 강국에로의 활보를 꿈꾸고있었다. 사회주의 기치를 떠메고 나아갈 동량들을 배양할 취지로 전국적인 범위에서 시험을 쳐서 쏘련으로 나가는 류학생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금방 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여 이 땅의 조선민족이 자치권리를 부여받고 또 자체의 민족대학을 일떠세웠던 고향의 조선족학생들에게도 선발기회는 주어졌다. 학교에서는 각 학과에서 한,두사람씩 뽑아 이 시험에 참가시키기로 했다. 잘만하면 우리 민족대학에서도 쏘련류학생이 나올수 있다며 사생들은 모두다 흥분해 마지 않았다.
재학생들중에서 조문학교의 연구생이였던 김군과 리양이 추천되는 영광을 지녔다. 젊음에 향상심도 있으니 노력만 기울이면 선발 될 가능성도 있을거다고 학교측은 면려의 손길을 그들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명작선독과에서 쏘련작품에 대해 겨우 몇편 정도 읽은것이 전부인 김군은 처음에는 몹시 주저했다. 변강의 오지인 이 곳에서 사회주의 강대국으로서 모두들에게 천당처럼 여겨지는 쏘련으로, 레닌, 스딸린과 고리끼가 있는 그곳으로 류학을 간다는것은 엄두도 못낼 일이였던것이다.
선생들의 적극적인 권장에 힘 입어서였지만 김군이 “촌닭이 장안에 날아들기로” 도담하게 류학생 시험에 응하게 된데는 하나의 또 다른 리유가 있었다. 그 리유라면 은근한 배심에서였다.
그는 이번에 함께 추천된 리양을 은근히 사모하고 있었다. 리양도 싫은 얼굴이 아니여서 학교의 가까운 동학들게게는 그들 사이가 그 무슨 큰 비밀이 아니였다. 그런데 이를 알고 리양의 부친이 극구 반대해 나섰다. 아직은 두 사람 다 학업에 연찬해야 할 시기라며 반대표를 든것이였다. 사실 이는 리양의 아버지의 핑계였다. 연구생들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학업을 계속 연찬해나가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반대의 리유는 결국 평생 훈장 가족이였던 그의 집에서 농민 출신인 김군의 집에 대해 탐탁하지 못하게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였다. 리양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뛰여난 성적을 보이고있는 김군에 대해 모른는바가 아니였지만 피일차일 응낙은 주지 않고 미루고 있었다. 이에 한번 자기의 실력으로 가문의 영광을 떨쳐보리라는 심산에다 또 밑져야 본전이라고 한번 겨루어보는것도 괜찮겠다는 복잡한 생각으로 김군은 류학생 선발에 응시하게 된것이였다.
두 사람의 명단은 인차 교육부에 올려 보내졌고 정치심사, 신체검사등 잡다한 절차를 거쳤다. 두 사람다 신체는 무사튼튼했다. 까다로운 정치심사에서도 무난히 합격되였다. 두 가족 모두 토지개혁때 빈농으로 획분되였고 또 가문에 항일에 몸바친 렬사도 있으니 문제될것이 없었다.
정치심사, 신체검사의 관문을 넘어 난생처음 북경으로 가서 선발시험을 치렀다. 중국어문, 쏘련공산당사, 중국문학과 문학개론, 쏘련문학등등으로 수많은 과목들… 그동안 학업의 로적가리를 쌓아올린 그들의 노력여하에 대한 대점검이였다.
어쩐지 신심이 없었다. 같이 간 리양 역시 꼭 같이 풀기 죽은 모습이였다. 중국어수준이 낮아 어떤 시험문제도 잘 알아보지도 못했다는것이였다.
학교교정의 라일락이 꽃술이 피던 무렵, 드디여 소식이 왔다. 그런데 학교에서국가교육부에서 내려보낸 쏘련류학생명단을 공포하였는데 그속에 리양의 이름은 없었다. 리양은 그만 락방하고 만것이다. 리양은 퍼그나 상심해 했다. 리양의 아버지의 상심은 더구나 컸다. 결국 김군에게만이 유일하게 쏘련의 일류대학인 모스크바대학에 가서 4년간 쏘련문학을 연구할 티켓이 주어졌다.
리양은 그만이라도 합격된것에 축하를 보낸다며 그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학교에서는 이젠 류학생인 김군에게 양복 한벌을 맞추어 주었고 특제한 가죽트렁크도 내주었다. 옷깃이 가슬가슬해진 낡은 면직 중산복을 벗고 난생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보았다. 처음 입어보는 양복이라 넥타이도 한참 배워서야 맬 줄 알았다. 옷이 날개라고 양복차림에 구두까지 받쳐 신고보니 제법 대처에 사는 신사같았다. 체경속의 낯설은 자기의 모습을 지켜보며 꿈처럼 여기던 쏘련류학이 이제는 정말 실현된다고 생각하니 김군은 두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한편 은근한 생각이 다시 한번 머리를 쳐들었다. 이제 떳떳한 쏘련 류학생이 되였으니 다시한번 리양의 아버지를 찾아 두사람 사이를 두고 청을 드려볼 생각이였다.
중앙철도부에서는 류학생들을 위하여 전용렬차를 내주었다. 전용렬차에 앉아 쏘련으로 향발하는 류학생수가 1,000명이 넘었다. 오래지 않아 중국에서도 경제건설의 고조가 일어날것이니 인재준비를 위하여 국가에서는 수천명의 청년들을 쏘련이나 동구라파 사회주의국가에 보내기로 한것이다.
출발을 앞둔 역에서 렬차의 차창을 열어젖힌 그의 눈길은 붐비는 사람들속에서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리양이였다. 하지만 출발신호가 울려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 칙칙소리와 함께 김을 뿜으며 역구를 떠날때에야 역사의 기둥 저 켠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나왔다. 조신스럽게 나섰지만 그녀의 모습은 김군의 눈길에 대번에 잡혀들었다. 그녀는 남들과 동그마니 떨어진곳에서 조용히 손을 저었다.
높뛰는 가슴을 부여안은 새 중국의 첫 류학생들을 싣고 전용렬차는 북경에서 발차했다. 모스크바까지 대여 가려면 꼬박 일주일은 걸려야 한다고 했다. 만주리 건너편의 오뜨뽀르라고 하는 국경도시를 지나서 렬차는 너넓은 씨비리평원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달렸다. 풍경 좋은 바이깔호며 끝간데 없이 펼쳐진 초원, 하얀 봇나무수림, 그속에 아담하게 깃든 통나무 목조건물들, 그리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꼴호즈(집단농장) … 무연한 씨비리의 아름다운 풍경을 거느리고 기차는 달리고 달렸다.
일주일간의 기나긴 려행을 마치고 렬차는 드디여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대학은 모스크바 서남쪽, 산자락으로 모스크바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있었다. 옛날, 왕공귀족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수렵을 했다고 하는 곳이였다.
10월혁명 당시 모스크바로 진격해 온 볼쉐위크 전사들이 이 언덕에 대포들을 걸어놓고 백파세력의 대본영인 크레믈리궁전을 겨누었고 궁전안에 웅크리고있던 백파들은 혼비백산하여 곧 손을 들었다. 이로소 “10월 혁명”은 승리했고 모스크바는 쉽게 인민의 손에 넘어올수 있었다고 한다.
1775년에 로씨야의 위대한 과학자이며 시인인 미하일 로모노쏘브의 창의에 의해 세워진 모스크바대학은 쏘련에는 력사가 가장 오랜 종합대학이였다. 학생수가 2만이 훨씬 넘었는데 그중 외국류학생도 3,000명이나 되였다. 대부분이 중국이나 조선 그리고 동구라파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온 학생들이였고 아프리카나 인도같은 나라들에서 온 피부색 다른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중국은 쏘련과 가장 친한 나라여서 류학생수도 많았다. 모스크바대학에는 근 400여명의 중국류학생이 있었다.
배의 이물쪽에서 그녀가 다가왔다. 김군은 그녀와 이렇게 만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류학온지 2년만에 볼가강의 유람선우에서 꿈같은 해후상봉을 했다.
굵고 풍성한 쌍 머리태에 생기 넘치는 뿌듯한 얼굴의 리양이였다. 많은 사람들중에서도 그녀의 온몸이 고스란히 김군의 눈꺼풀안으로 들어왔다.
며칠전부터 모스크바를 무대로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축전은 말 그대로 세계청년들의 명절로 되여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이 성회에 운집해 들었다. 중국에서도 수백명의 예술단과 운동선수등 청년대표들로 조직된 방대한 대표단이 축전에 참가했다. 그중에는 반갑게도 김군의 고향에서 온 가무단의 조선족 배우 몇 명도 끼여 있었다. 모스크바주재 중국대사관에서는 모스크바에서 류학생들속에서 중국 대표단을 위해 봉사할 봉사인원과 통역을 뽑았는데 마침 방학이라 김군도 자원봉사로 이 축전에 참가했다. 그러다 여기서 조선족배우들을 위한 통역으로 함게 쏘련으로 날아온 리양을 발견하게 된것이다.
쏘련과 연변의 대표들사이에서 거침없이 통역하고 있는 그녀를 김군은 한켠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드디여 김군의 시선과 맞부딤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삽시에 호동그래졌다. 그것은 잠시 해바라기처럼 그녀의 얼굴에 활짝 웃음꽃이 피여올랐다. 타향에서 그리던 련인을 만난 그녀의 얼굴에도 분명 천상의 기쁨이 어려 있었다.
김군은 지난 가을, 학교강당에서 류학생들과 함께 쏘련혁명승리를 기념행사에 모처럼 방문 온 모택동주석에게서 영접을 받고 그의 손을 잡았을때처럼 또 한번 가슴이 크게 벌렁거림을 느꼈다. 그동안 그녀를 향한 사념은 비 온뒤의 제비쑥처럼 매일이고 소리치며 자라 이제는 주체할수 없을만큼 아름벌게 자라올랐는데 이곳 볼가강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것이였다.
- 강이 크지요.
다가와 김군과 나란히 배의 란간을 짚고 서며 그녀가 말했다. 귀전에 와 닿는 목소리가 사각거리는 풀잎처럼 달콤했다. 예기치 않은 그녀의 등장이 아직도 놀라웠고 현실감을 붙잡기 위해 김군은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았다. 피곤한 일정에 돌아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은 상쾌한 물방울처럼 톡톡 튀고있었다.
- 쏘련의 강들도 아름다고 넓지만 고향의 강이 나름 생각 날때도 많지. 저 강기슭에 황소가 풀 뜯고 강변에서는 아줌마들이 방치질하며 빨래질 하는 그런 몽상에 사로잡힐때도 있다오.
그녀에게 들붙은 시선이 거둬지지 않아 하며 김군은 대답했다.
강기슭으로 야금공장, 전차공장, 뜨락또르 공장의 건물들이 흘러 지났다.
- 정말 이곳에도 조선인들이 있다오.
우즈베크나 까자흐스딴에 적지 않게 살고있지. 조선인 꼴호즈(집단농장)도 여러개 되오. 30년대에 원동 연해주에서 중앙아세아로 강제이주되여 온 사람들이라고 하오. 강을 건너 이주해온 우리 조선족과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지.
저번에 한반 친구들과 함께 조선인 꼴호즈에 놀러갔었는데 글쎄 거기에는 아직도 상투를 틀고있는 조선 로인이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곳에서 나는 잠시 시간과 공간 감각을 잃어버렸지. 마치 고향에 돌아오기라도 한듯한 착각에 빠졌더랬소.
그들도 벼농사를 짓고있었소. 우리들 처럼.,, 다행이 이곳은 땅이 흔하고 또 여름에는 해빛이 잘 들기때문에 벼가 제법 잘된다오. 더군다나 우리 민족은 워낙 근면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정부에서 주는 로력훈장같은것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하데. “레닌기치”라고하는 조선말신문도 자체로 발행하고. 이 신문은 조선인생활을 주로 보도하는 신문이라오.
독립군의 홍범도장군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범도장군만은 쏘련의 조선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구만. 홍범도에 관한 연극도 만들어 공연한적 있다오. 내가 홍범도 장군이 왜놈들과 섬멸전을 펼친 옛 간도땅에서 왔다고 하니 모두들 반가워 포옹하고 키스하고 야단법석이더구만. 술은 어찌도 권하는지 꼴호즈에 있는 며칠동안 내내 술독에 빠져 살았다오.
둘의 웃음소리가 배우에서 얽혔다.
- 학위론문은 거의 끝나가요?
- 아직도 통과해야할 과목들이 많소. 맑스주의철학, 문학리론, 로씨야문학에다가 외국어 과목까지. 외국어는 로어로 대체할수 있다고하는데 류학생 시험치면서 로어를 죽기내기로 배웠으니 조금 시름은 덜었고…
-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겠네요. 원체 책읽기 좋아하잖아요 오빠는…
- 그래. 그중에서도 숄로호브의 소설이 가장 인상에 남소. “뿌리우다”신문에 실린”인간의 운명”이 라는 소설이지. 숄로호브는 지금 쏘련에서 명망이 가장 높은 작가요.
전쟁시기 안드레이 쏘꼴로브라는 한 병사가 겪은 불운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요.
모스크바방송국에서도 여러 번 소설을 랑독하였는데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 부모세대들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소. 가난에 쫓겨 강을 건넜고 강을 건너서는 청나라 사람들의 수탈에 시달리고 또 왜놈들과 맞서 총을 들었던 우리 부모님들, 그들의 기구한 운명을 이야기한다면 숄로호브에 못잖을 우리식 “인간의 운명”이 되지 않을가하는…
강바람에 머리칼 휘날리며 달변을 토하는 김군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녀는 선망 가득한 눈길로 그의 말을 씨토하나 빠짐없이 경청하고있었다.
그녀의 수즙은듯한 손이 김군의 손우에 놓였다. 하지만 김군은 감전된 사람처럼 손을 움직일수가 없다.
- 이제 이곳에서 까츄사, 또냐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있으려니 고향의 개나리처녀를 잊고 있겠지요?
그녀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녀의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묻어났다. 그녀는 차분한가 싶으면 열정적이고 도발적이다 싶으면 순정적이였다. 롱반진반으로 말하며 픽하고 웃는 그 입매가 싱그러웠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배전의 강물을 굽어보는 목선이 티없이 고왔다.
김군이 머리를 저었다. 아무말도 없이 양복 호주머니에 꽂았던 만년필을 뽑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 쏘련까지 온 사람한테 좋은 기념선물을 주어야 하겠는데 미처 마련할 시간이 없네.
김군이 그녀의 조붓한 앞섶에 만년필을 꽂아주었다.
- 하지만 내게는 나름 소중한 물건이요. 이 만년필로 난 류학생 시험에 입시되였거든.
그녀의 사랑에 달뜬 높은 가슴이 감동에 오르내렸다.
배의 저켠에서 행복한 사람들이 와와 웃었다. 유람선 한쪽에서 세계각지에서 모여온 젊은 배우들이 오락마당을 펼쳐지고있었다. 주최측인 쏘련의 배우들이 지방민요 “볼가강 배 끄는 인부들의 노래”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둘은 손을 잡고 맑고 고아한 성가같은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줄을 단단히 묶어라
태양을 향해 노래를 부르세
아이다다, 아이다다
아이다다, 아이다다
볼가강은 어머니의 강
넓고도 깊구나
아이다다, 아이다다
아이다다, 아이다다
노래소리에 귀를 빌려주고있는 그녀의 하얀 손에 힘이 들었는 손을 덧놓으며 김군은 속삭이듯 말했다.
- 기다려주오. 나 이제 고향에 돌아가리다.
홍기하, 1976년
아이 둘이 강기슭에 섰다.
강기슭에 표어판처럼 꼿꼿이 서서 뿔 난 짐승처럼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둘 다 웃동은 벗어내치고 있고 아래도리는 국방색 팬티 바람이다. 금방 강을 헤염처 넘어온 아이들의 머리칼은 찰싹 붙어있고 몸에서 물이 이랑을 지어 또랑또랑 흘러내리고 있다. 아이들은 힘에 부친듯 헐떡이고 있지만 눈빛만은 아직도 서로에게 호적수이며 강적이다.
그 뒤에 국방색 모자를 눌러 쓴 한 아이가 기 죽은 모습으로 서있다.
- 문혁아, 문화야 이제 그만해라.
아이가 말리려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혀아래 소리였고 아이는 두 꼬마맹장의 만용에 기죽은 모습이다.
- 안돼!
둘은 이구동성으로 삑하고 소리 질렀다.
- 오늘이 어떤 날인데
문혁이라는 애가 물이랑 흐르는 얼굴을 쓱 훔치며 까랑까랑한 소리로 말했다.
- 주석님께서 장강을 헤염쳐 건넌 십주년 되는 날이 아니더냐!
- 그래 주석님께서 장강을 헤엄쳐 건넌 십주년 되는 날이지!
문화라는 애가 앵무새처럼 그 말을 꼭 같이 복창했다.
10전의 여름, 모택동주석께서 73세의 고령에 바다처럼 넓은 장강을 가로질러 헤염쳐 건넜다.
아이들의 부모가 모두가 주문해 읽고있는 “인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모택동주석은 30리 구간을 1시간5분 만에 헤염쳐 건넜다고 한다. 그리고 모주석은 장강을 혀염쳐 건넌 소감으로 “수조가두 유영”이라는 시구를 남겼다.
이는 색맹처럼 오로지 단 하나의 붉은 색조에만 사로잡혔던 당시의 전국인민들에게서 인심을 격동시키는 거대한 고무와 힘이 아닐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모주석의 장강횡단을 기념하는 수영대회가 열리곤했다.
이날, 변강오지의 이곳에서도 “모주석의 장강도하 10주년을경축”하는 수영대회는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붉은 인파가 백지에 엎질러진 잉크처럼 강기슭에 번져나가고있었다. 강기슭 방파제에는 붉은 기가 밀집하게 꽂혀져 있었고 강기슭의 버드나무가지마다는 붉은 꽃으로 단장되여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불러왔던 푸근한 이름의 고향의 강을 붉은기의 강이라 하여 “홍기하(紅旗河)”라고 고쳐 불렀다.
북소리, 징소리 요란하고 강가 버드나무에 처맨 확성기에서 혁명가곡이 귀가 멍멍하게 울려나오는 가운데 열기 띤 구호소리가 목청 깨져라 터져오르는 강기슭은 시끌벅적했다. 일전의 무양하던 강은 고요를 잃었다.
둥챵! 둥챵! 둥둥챵!
둥챵! 둥챵! 둥둥챵!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좋다네! 좋다네! 정말 좋다네!”
“모주석의 무산계급혁명로선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자!-”
붉은 기발, 붉은 꽃, 붉은 표어, 붉은 얼굴들… 강가는 온통 붉은 빛의 물결로 장관이였고 구호소리와 노래소리로 랑자하였다. 같은 노래, 같은 구호가 낡은 축음기 풀듯 싫증 모르고 반복되고있었다. 밭에서도 농민들이 일하다 말고 둘러앉아 전간(田间)경축회의를 열고있었다. 논두렁마다에도 붉은기가 꽂혀있었다.
- 붉은해 솟았네 천리변강 비추네. 모두들은 뒤질세라 쉼 모르고 혁명가곡을 련창으로 불렀고 만세! 만세! 하고 목줄기에 지렁이가 서도록 사력을 다해 구호를 웨치고있었다. 혼잡한 악음에 귀때기가 잘려나갈듯 얼얼해났지만 그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려 하지 않았다. 혁명적 행동에서 남한테 뒤지지 않고 최고의 열성을 보이려 들었다.
한 여름의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뜨겁디 뜨거운 해빛이 정수리에 날카로운 동침을 꽂고있었다. 그 지나친 열기속에서 아이들의 작은 가슴들이 손풍금의 바람통같이 펄럭이였고 얼굴은 처음 홍주를 맛보았을 때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강의 무법자인 한떼의 송사리새끼들처럼 그 “붉은 물결”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최면된 무리같은 어른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아이들도 터무니없이 즐거워 하고있었다.
모주석께서 당년에 위용을 떨쳤던 무한에서는 이날을 맞아 5천여명이 장강을 가로지르는 수영 경기를 펼쳤다고 했다. 그중에는 200여명의 소학생들로 조직된 수영대오도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안전을 고려하여 이곳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수영은 조직하지 않았다. 이에 수영이 끝난 저녁나절에 아이들이 강을 찾았고 급기야 두 아이가 홍기하를 건너는 내기를 펼친것이였다.
수영실력이 괜찮은 두 아이였지만 두번이나 홍기하를 건너왔음에도 속도가 어금버금 비슷했고 드디여 내기는 서로에 대한 질시와 타매로 이어졌다.
두손을 허리춤에 척 올려붙인 문화라는 아이가 물었다.
- 그럼 너 위대한 수령 모주석의 광휘롭고 호매로운 “수조가두 (水调歌头) 수영(游泳)을 외울줄 아니?
- 아, 알지.
- 그럼 한번 외워봐라
- 자, 장강물을 마시고…
문혁이가 어물댔다.
- 너 모르는구나. 어디 한번 들어봐라.
금방 장강물을 마셨는데
또 무창어를 맛보누나
만리장강을 가로 건너서
눈 들어 초나라 하늘 바라보네.
문화가 얼음에 박밀듯 모주석의 시사를 일점불차없이 외웠다.
도도록한 정수리를 한 문혁이라는 애의 얼굴이 홍주를 마신것 처럼 달아올랐다. 더듬이다가 급기야 독설을 내뿜었다.
- 잘 외면 뭣하냐? 반혁명분자의 새끼가?
- 너 뭐래? 누가 반혁명이냐?
- 니 애비는 마우재들 쏘련땅에 류학갔다 온 검은 학술권위가 아니냐!
- 그럼 니 애빈 뭐냐?
격노한듯 이번에는 문화라는 애가 더듬거렸다.
- 니 애빈 그물에서 빠진 우경기회주의분자다!
설전은 독한 욕설로 번져졌고 나중에 두 아이는 서로의 머리칼을 부여잡고 모래톱에서 뒹굴었다. 애들보다 키 하나는 작아 초라니 같아뵈는 “국방색 모자”는 피짚먹다 눈 찔린 망아지처럼 커다란 눈을 슴벅거리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 쌈하지마, 쌈하지마! 힘으로 하지 말고 말로 하라!(不要武斗要文斗)고 모주석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냐! 그러니 쌈하지마
이윽고 얼굴에 생채기 하나씩 훈장처럼 달고 두 아이는 다시 강가에 섰다.
붉은 저녁노을이 들고 있는 강은 흡사 현성의 광장에서 펄럭이는 혁명구호가 새겨진 붉은 프랑카드를 방불케 했다. 온 하루의 여름열기와 사람열기에 달아오른 강이 헐떡이며 뿜어내는 희뿌연 공기, 달착지근한 단내 같은것이 울컥 아이들의 코속을 파고 들었고 붉은 색을 본 송아지와 같은 숨가쁜 충동이 아이들의 머리속을 파고들었다.
한동안 강을 지켜보다 한 애가 콱 박아두듯 한 마디 했다.
- 다시 하자
- 그래 다시 하자
두 아이는 그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또 한번 첨벙 강에 뛰여 들었다.
아이들이 강을 누비는 속도는 눈에 띄이게 늦어졌다. 이제 완연 힘에 부친것이였다. 가까스로 강심에 까지 이르자 두 아이는 그만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흡사 “홍위병” 형님누나들이 “충성무”를 추듯 두손이 허공에서 단말마적으로 허우적거렸다. 두 아이의 모습은 현성의 담벽에 붙어 비바람속에 바래지고있는 구호속의 느낌표처럼 희미해지다가 나중에는 보이지 않았다.
기슭에 섰던 “궁방색 모자”는 다급한 뇨의(尿意)같은것을 느꼈다. 강물에 빨려드는 친구들을 보며 그저 강심을 바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 뒤미처 집쪽을 향해 어른들을 부르려 허둥지둥 달려갔다.
문혁아~
문화야~
비보를 듣고 달려온 교원과 부모들이 강안을 미친 사람들처럼 헤맸다.
피를 내뿜는듯한 절규가 강기슭에서 터져올랐다. 하지만 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다. 방파제에 꽂혀진 붉은기만이 바람에 펄럭이고 일뿐. 붉게 피멍 든 강은 아무 말도 없다.
황해, 1996년
해양 외사수사대의 형사 10명이 항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 새벽이였다.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얼굴들이다.
낮게 드리워진 운무속에서 수평선은 거무스름할뿐 선명하지 않다. 뿌연 아침 안개를 헤치며 항구로 들어오는 배들이 선창에 켜든 불빛 몇 가닥만이 가물가물 부서지는것이 보였다.
제보를 받은 문제의 화물선은 항구에 대기중이다.
화물이 다 내려오기를 기다려 형사들은 급히 화물선에 뛰여올랐다. 후레시를비추며 배의 고물쪽 이물쪽 이곳 저곳을 뒤졌다. 곤충의 더듬이질처럼 긴 형광봉을 들고 배의 이곳저곳을 쑤셔대고 있다.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냄새나는 그곳까지 전부 뒤졌지만 밀입국자들은 없다.
형사들은 긴 한숨을 내쉰다. 이번에도 허탕을 쳤나보네하는 눈길들이다.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이 더 섞여있다. 그러잖아도 불황에다 갑갑한 정치. 경제가 풀리지 않는 일로 우울할 일이 많은데…
- 분명 제보는 들어 왔는데...
수사대 로반장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몇해전부터 조그만 목선에 목숨을 건 밀입국이 서남해안에서 시작되였다. 10톤 안팎의 목선이나 정기화물선을 리용하고있는 밀입국자들 대부분은 “코리안 드림”을 쫓아 나선 중국조선족들이다.
항해도중에 폭풍을 만나 목숨을 잃거나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표류하는 일도 비일비재였지만 이들의 모험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있다.
밀입국은 지난 94년에 처음 적발되였다. 당시는 한해에 4건정도 밀입국자는 95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 96년엔 벌써 18건, 7백67명으로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때문에 로반장네와 같은 수사대들은 밀입국자들에 대한 감시망이 어수룩하지 않냐는 여론의 질타에 시달리기도 했다.
목숨을 건 항해길에 오른 밀입국자들의 경로를 살펴보면 중국 단동의 압록강에서 출발하여 공해상으로 빠져나오면 선명(船名) 미상의 고기잡이 어선단 등에 끼여있다가 한국에서 나온 배를 바꿔 타거나 야간이나 기상악화를 기다려 한국 령해로 잠입한다. 위해, 대련항 쪽으로 나오는 등 경로도 여러 갈래이다. 밀입국자들은 주로 중국의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에 사는 조선족들이다. 이 가운데는 농민들뿐만아니라 교원, 회사원등 계층들까지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 경과를 보면 밀입국자들은 모집책들의 안내로 일단 해안가와 린접한 도시의 려관등에 집단 투숙해서는 통보를 기다린다. 밀입국 모집책, 브로커들을 당지에서는 중국말로 “사두(蛇头)”라 부른다. “사두”에게 주는 사례비는 통상 1인당 인민페로 5만원이다. 한국 해양경찰청은 이런 밀입국 알선조직이 100개는 넘을것으로 보고있다.
이렇게 일, 여덟명으로 이루어진 알선책이 이제는 점조직 형태로 발전하고있고 전에는 10톤급 소형 목선을 리용했는데 요즘은 중형으로 바뀌였고 또 한 척당 밀입자수도 20여명에서 80명으로 늘어나고있다. 예상항로에 경비정을 증가배치하고 취약시간대에 지어 함정 및 헬기를 리용해 순찰활동을 강화하고 있지만 그 수단이 점점 창궐해져 바다속 바위틈에 숨어 웅크린 낙지 발판을 떼내듯 두절하기가 쉽지 않다.
밀입국 과정을 로반장은 검거 된 밀입국자들에게서 상세하게 들은적 있다. 그야말로 스릴러 영화의 한장면 같다.
밀입국자들은 야음을 타서 알선책들이 지점해 준 배의 밑창에 웅크리고 들어 앉는다. 각자 깡통 하나씩 배부 받는다. 그 작은 깡통을 급한 배설을 해결하기 위한 화장실격으로 사용한다고한다. 배가 출항하면 빛을 감추기 위해 손전등을 끈다. 새까만 어둠이다. 내내 이 어둠으로 가야 한다. 배밑창에서 나는 매캐한 기름냄새, 비릿하게 삭은 생선냄새가 코를 찌르고 털털거리는 배의 발동기 소리가 귀전에 대고 돌리듯 고막을 때린다. 좁은 밑창에서 처음 보는 남녀일지라도 코 닿을듯 비비고 앉는데 마주보는 눈동자는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캄캄한 어둠만 있을 뿐이다. 장소가 비좁으니 드러누워 잘 수도 없고 그냥 두 무릎속에 머리를 파묻고 자야한다.
시간의 흐름을 알수가 없다. 낮인지 밤인지도 알수없는 배 밑창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발동기소리, 파도소리와 너나의 긴장으로 헐떡이는 숨소리뿐이다.
그러다 닫혀진 천장을 두드리는 신호가 세번정도 울리면, 굳게 닫힌 천정문이 열린다. 음식을 담은 바구니가 내려오고 밥속에 깨소금을 섞은 주먹밥을 배급받는다. 네번 두드리는 신호가 울리면 검문경비정이 지나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이기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긴장과 공포에 서려 높뛰는 심장소리마저 서로 가려들을듯 하다.
거개가 평소 바다를 멀리한 사람들이라 흔들리는 배 밑창에서 멀미에 시달린다. 한사람, 두사람 토악질을 해대고 그 악취속에 욕지거리와 한탄소리가 절로 터져오른다.
밤이 되면 배 밑창 뚜껑을 열어 공기를 좀 마시게 하면서 날이 좋으면 항해를 하고, 날이 나쁘면 이름도 모르는 어느 섬 주변에서 풍랑을 피하면서 며칠간을 헤맨 끝에 끝내 뭍에 다다른다.
해상밀입국자를 상대하고 있는 로반장이지만 어느 때부터 그들에 대해 농도와 줄기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골 사는 동생이 국제장가를 들어 조선족 처녀를 색시로 데려 왔다. 함경북도 억양이 센 투박스러운 말투이나 늘 선한 얼굴로 때묻지 않은 웃음을 짓는 그녀에게서 로반장은 중국조선족에 대해 차츰 알게 되였다.
왜 본토의 총각들 떼여놓고 한국으로 시집오냐? 왜 하필이면 도둑 삵괭이같은밀입국이냐?고 어느 한번 동생네 집에서 술 한잔 걸치고 로반장은 외사과 성원 답지않게 철없는 물음을 그녀에게 따져 물은적 있다. 그렇게 묻는 취기 오른 그의 낯빛이 심한 혼돈으로 무눌져 심각한 어지러움에 자맥질하는것 같았다. 그만큼 부모님을 떠나 자식을 떼놓고, 련인을 버리고 위장결혼, 밀입국에 환장하다싶이 된 서로 다른 이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혔던 바다 저쪽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다.
조선족 제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형언하기 어려운 눈길을 들어 푸른 제복의 시형을 얼핏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또 얼굴을 숙인다.
남의 집 장독대를 깨고 훈장앞에 끌려나온 초등생 같이 두려움과 어줍음이 혼반된 시르죽은 눈길이다. 결국 말 한마디 안 했지만 많은 말을 품은 그 그늘진 눈길이 처연하다 못해 가슴 한자락을 아련하게 했다.
밀입국의 경우, 한국의 높은 고용임금과 그에 따른 조선족들의 코리안 드림에 대한 기대, 한국내 영세 중소기업체들의 저임금 외국인 고용 선호등이 그 주되는 원인이라는것을 로반장은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가족의 일원에 까지 다가온 조선족, 그들의 고뇌와 아픔을 껴안기 까지는 한국사회에서 아직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여야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허탕을 친 형사들이 하나 둘 허탈하게 갑판우의 로반장곁으로 몰려드는데 수사대의 나이 지긋한 형사가 로반장의 귀에 대고 수군댔다.
- 저 기름탱크에서 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늙은 형사와 함께 기름저장탱크로 다가갔다. 탱크에 올라가 철제덮개를 열어젖혔다. 비린내가 귀뺨을 후려치듯 훅 끼쳐 올라온다. 탱크안은 깊은 우물속 같이 깜깜했다. 그런데 그 칙칙한 어둠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것이 있었다. 쌍으로 대칭이 되여 무수히 반짝이는 그것은 직감적으로 사람의 눈이였다. 탱크속에 후레시를 들이 비추었다.
- 여깄다아!
늙은 형사가 감때사납게 소리 질렀다.
형사들이 우르르 기름탱크로 몰려왔다.
달팽이처럼 작게 웅크린채 탱크밑바닥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밀입국자들은 강렬한 조명에 로출되자 가엾게 몸을 떨었다. 불빛아래 그 얼굴들이 꼭 두억시니의 그것 같다고 로반장은 일순 생각했다.
밀입국자들이 갑판으로 끌어 올려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 스물…
흙에서 파낸 넝쿨에 열매가 달려 나오듯이 련줄로 끌려 나온다.
겨우 10여평방가량 되는 물탱크에 20여명을 잠복시켰다. 알선자들은 해경의 적발을 피하기 위해 탱크에 밀입국자들을 상자 포개듯 밀어 넣고 문을 닫고 그물을 씌워 위장하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저마다 옷차림은 두껍고 칙칙했고 꼭 같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불안한 시선을 연신 좌우로 날려보내고 있다.
며칠이나 들까부는 바다에서 시달려 왔던지 얼굴은 탈색시킨 광목같이 누리끼리하고 파리해진 입술들은 까칠하다 못해 허물같은 살갗을 드러내고 있다. 저마다 잠을 그 동안 못잔듯 눈자위가 움푹 꺼져 있어 무덤에나 누워 있으면 딱 알맞을 송장 꼴을 해 가지고 나온다.
가차없이 끌려나 온 밀입국자들이 점호를 앞둔 학생들처럼 이렬 종대로 나란히 갑판에 섰는 가운데 그들중에서 간간이 흐느낌 소리가 새여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아예 그 자리에다 드러눕더니 상처 입은 짐승처럼 사지를 축 늘어뜨린채 고통스럽게 울기 시작하였다.
- 일어나요! 일어나!
자제에도 불구하고 형사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로반장은 형사들을 휘동하여 밀입국자들에게 형광조끼를 입히고 수갑을 채우고 경찰서로 련행하기 위해 경광등을 매단 차에 실었다. 실의에 빠진 탓일까! 형사의 손아귀에 딸려가는 그 커다란 덩치들이 맥없이 밀려났다. 이들은 이제 외국인 보호소에 수용한뒤 벌금을 부과하고 려권과 려비를 줘서 돌려보낸다. 다시는 한국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공항등에 입국금지 조치를 내린다.
한국인 선장도 수갑을 채워 차로 떠밀었다.
- 돈 얼마 받았어?
수갑 채우던 형사가 체증기에 넘쳐 따져 물었다. 하지만 선장은 예상했다는듯 입을 꼭 다문채 누구의 물음에도 쌩한 침묵으로만 맞선다. 그런 선장의 밀랍처럼 딱딱한 얼굴에도 역시 피곤과 졸음기같은것이 는적는적 묻어났다. 아무리 어깃장을 놓아도 현재 밀입국을 알선하거나 밀입국자를 고용할 경우 고용기간에 따라 범칙금 500만원부터 5년이하 징역을 감수해야 한다.
갑자기 이물쪽에서 비명소리가 터져올랐다.
늙은 형사가 다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말했다.
- 사체가 발견됐습니다.
- 엉! 무엇이?
로반장은 서둘러 달려갔다.
밀입국자의 시신 하나가 맨 나중에 끌려져 나왔다. 시신은 갑판우에 방수포로 몸이 덮여 그 무슨 커다란 어물처럼 놓였다.
사인은 보이는 바와 같이 간단했다. 비좁은 공간에서 수십명이 뒤엉켜 오랜 시간 배를 탄 탓에 너나가 불편을 호소했고 그러다 그중 한명이 질식해 숨진 것이다. 코리안 드림을 위해 밀입국하려던 그의 꿈은 망망대해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시신곁에 함께 온 친지인듯한 녀자가 다리를 뻗고 목놓아 울고있었다. 아뜩한 절망의 충격을 털어 내지 못해 그저 목청 다 짜내 울고만 있다. 비명인지 욕설인지 분명치 않은 소리를 넋두리처럼 내뱉고있다.
경찰차에 실린 이들이 차창을 통해 이 광경을 내다보고 있다. 우두망찰해 넋을 놓고 휑- 하니 풀린 눈빛을 허공에 두고 있는 이도 있다. 초점이 풀어진, 탁하게 충혈 된 눈, 거의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텅 빈 짐승의 눈을 들여다보는것 같아서 로반장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 아주 돌아버렸어요. 돈에 환장을 한 거지요”
짜증이 섞인 소리였지만 형사들의 목소리에는 윤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새벽부터 단잠에서 깨여 투덜거리며 당장에 요절이라도 낼듯 달려왔지만 형사들도 눈앞의 참극에 그만 아연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일전 전남 여수에서도 중국 절강성 녕파항에서 20톤급 어선을 타고 밀입국을 기도했던 밀입국자들 중 25명이나 운반어선에서 질식사하는 참사가 일었었다.
로반장은 허탈하다는듯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끈끈한 느낌이 드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 내렸다. 가슴에 각진 소금을 뿌린것 같이 따갑고 쓰라렸다. 차에 오르다말고 로반장은 세상을 삼켜버릴것처럼 성이 나 흘러 넘치는 항구 앞바다를 바라보았다.
중국 조선족들에게 한국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밀입국은 중국 조선족내에서 번져가고 있는 “코리안 드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모든것은 한국에만 가면 한 밑천 잡는다는 허황된 기대감 때문이였다. 한국에서 2∼3년간 일을 하면 중국에서 평생동안 일해야 벌수 있는 거액을 만질수 있다는 유혹에 전답을 팔고 빚을 내여 비싼 알선비용을 대면서까지 밀항선에 몸을 싣는다.
그 부에 대한 성급한 집착때문에 조선족이 같은 조선족 또는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 몇 년간 조선족 사기 피해자가 1만7,000여명에 이르고 피해액이 600억여원에 이를것으로 추정된다.
한탕심리에 이끌린 허황된 꿈, 부에 대한 집착으로 현실 탈출을 위한 처절한 위험한 활극, 이 활극은 언제 가면 끝날것인가?
항구에 들어서는 배를 보고 갈매기떼가 날아들었다. 마치 물풀이 흔들리듯 나래짓하며 날아드는 갈매기들. 그 새떼들의 질서없는 군무에서 로반장은 소리없는 아우성을 보았다. 새들은 다른 새들을 추월하려고 퍼드득 거리며 허공에 온통 어지러운 부호를 수놓는다. 무리지어 내려서는 불안한듯 주위를 경계하며 항구에 널린 먹이를 쪼아댔고 그러다 다른 먹이를 찾아 다시 푸드득 날아오른다.
한차례 큰 비를 뿌릴것처럼 날씨가 끄무레해진다. 안개가 밀렵꾼처럼 밀려와 항구를 둘러싸고 있다. 바다는 끝간데가 보이지 않도록 사방으로 펼쳐져 있고 그 우로 재빛 하늘이 오래된 비극을 연기하는 극장가의 스크린처럼 묵직하게 걸려 있다…
갠지스 강, 2010년
나마스떼 (안녕하세요?)
가이드가 두손을 합장하고 아침인사를 했다. 나도 겨우 한 마디 배운 인도어로 화답을 했다.
- 나마스떼!
아침 5시로 모닝콜을 맞추었는데 가이드가 먼저 와 초인종을 울려주었다.
갠지스 강의 일출과 순례행사를 보기 위해 강행되는 려행기간의 피로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난것이였다.
굳이 인도로 려행을 오려 작심한것은 한국의 유명대에서 공부하던 내가 박사론문의 테마를 잡으면서 부터였다. 나의 론문테마가 “한룡운과 타고르의 시문학 비교”였던것이다.
사력을 다해 공부에 전념한끝에 드디여 거짓말처럼 박사론문이 통과되였다. 이 몇주일간 우리 일가족은 숫제 명절분위기였다. 한국의 유명대 류학에 입시된후로 우리 가족은 나로하여 또 한번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가문에서 훈장을 한 이도 있고 항일에 투신한 렬사도 있지만 박사가 나기는 처음이라고 모두들은 온 세상을 얻기라도한듯 기뻐마지않고 있었다. 출국열에 환혹돼 밀입국을 하다 친지가 비명횡사한 아픔도 있는 이 가족에서 나의 립신양명은 그 무엇보다 가문의 영광을 떨친것으로 그 박사모의 값어치는 무거운것이였다.
고향의 신문매체에서도 전화, 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조선족 하면 한국에서 노가다나 아저씨나 식당아줌마로 칭하던 시대가 나와 같은 젊은 엘리트 세대들의 출현으로 이제 끝난다고 여론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일가족이 나에 대한 장려턱으로 마련한 려행코스에서 나는 단연 인도를 선택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를 연구테마로 삼고있는 동안 그의 깊은 학문에 매료되였었다. 더욱이 20년대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써서 일제의 마수아래 놓여진 우리 민족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학과 생에 대한 애착이 컸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예언가적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무한한 격려를 주었던 시구를 노트에 적었고 시를 외워 문학도들의 모임에서 읊조리기도 했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종로구 대학로에 세워진 타고르 흉상앞을 지나면서 꼭 한번 인도행차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뼈물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이가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였다는 갠지스 강을 보고싶었다. 나는 흡사 누구의 부름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서둘러 신비의 국도 인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인디라 간디 공항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갠지스 강이 흐르는 도시 바라나시로 날아 왔다.
지글지글 끓는 해가 정수리 가까이에 걸려 온 세상이 한껏 예열해 둔 가마솥 같은 바라나시. 불더위에 혼겁하기는 했지만 가장 인도다운 도시, 진짜 인도와 인도사람을 볼수있는 도시가 바로 바라나시라고 했다. 이곳은 년간 100만 이상의 순례객들이 찾아드는 유명한 힌두교 성지였다.
중국 운남성 곤명에서 인도로 류학 온 중국인 학생이 공항에 나와 나를 맞아주었다. 인터넷으로 알게 된 그녀는 아르바이트 삼아 중국인 유람객들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고있었다. 아버지가 곤명에서 특색 음식점을 차렸는데 인도의 카레음식을 특별 메뉴로 개발했고 거기에서 인도에 대해 흥취를 느꼈다고 했다.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얼굴이 가무스레하여 인도녀자들을 사뭇 닮은 그녀의 인도명은 “리따”였다. 아버지세대가 즐겨보았던 인도영화 “류랑자”에서 나오는 녀주인공의 이름을 본땄다고 했다. 리따는 물이라는 뜻, 인도사람들이 녀자애에게 즐겨 붙이는 이름으로 거리에서 리따!하고 부르면 누군가는 꼭 뒤돌아 볼 지경으로 넘쳐난다고 했다.
그녀 “리따”는 바라나시에서 두번째로 좋다는 라딧선 호텔에 나더러 려장을 풀게 했다. 이곳에서 갠지스 강까지는 아주 가깝다고 했다.
호텔에서 나와 릭샤에 올랐다. “릭샤”란 자전거에 련결된 2인승 수레, 인력거 비슷한것이였다.
이른 아침인데도 거리는 벌써 인파로 흘러 넘쳐난다. 인구 강국임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이. 바라나시는 인구가 400만 되는 도시로 인도에서 인구밀도가 기장 높다고 한다.
- 여기서 북동쪽으로 200킬로메터가량 더 가면 히말라야산의 줄기도 볼수 있답니다.
“리따”가 가이드답게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나름 흔들리는 릭샤에서 혼돈을 경험하고있었다. 여기저기서 자동차,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가 란무하고 차가 역주행하며 달려 와 식겁하기도 하는데 무리지어 나타난 소떼들 때문에 릭샤가 급정거를 하기도 한다.
릭샤를 타기전 왜 “리따”가 마스크를 내주었는지 이제야 리해가 간다. 오래된 아스팔트길은 여기저기 깨져 흙먼지가 날렸다. 고향 시골마을의 비포장 농로에 다름 아니다. 매연과 흙먼지 둘러쓸것을 미리 알고 차근한 가이드가 마스크를 준비해둔것이였다.
소뿐만 아니라 돼지도 어그적 거리며 느림보로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골목 에서 마음대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들과 소가 실례한 변도 보였다.
- 이곳 사람들은 소를 신성시 한답니다. 소똥을 말려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하지요.
가이드가 알려주었다.
-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소는 없어서는 안될 가족의 일원이였습니다.
나는 어제날 고향 시가지의 모습과 비슷한 광경을 둘러보며 동감을 표했다.
길이 고르지 않은 탓에 젊은 기사는 많이 힘들어했다. 그렇게 20분간 가량 달려 드디여 갠지스 강에 도착했다. 릭샤에 앉아 허깨비처럼 흔들리운지라 수레에서 내리니 발이 허공을 밟은듯 휘청거렸다.
기사분이 헉헉거리며 팁은 1딸라씩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리따”가 1인당 1딸라씩 팁으로 줘야한다고 귀뜸을 했었다. 릭샤를 타는 동안 힘들어하는 기사분을 보면서 팁을 더 드려야겠구나 생각했던 차라 두 사람분에 1딸라를 더 얹어서 3딸라를 주었다.
- 쑥그리아 (고맙습니다)”
두손을 합장하며 기사는 많이 고마워 했다.
나름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강가는 인산인해였다.
비수기였는데도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갠지스 강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행해진다는 힌두교 종교의식 “아르띠 뿌자”를 보러 세계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강기슭을 메우고있었다.
강기슭에 축조된 힌두사원들에도 사람들은 넘쳐날듯 했다.
강가에는 체육장의 좌석처럼 가트가 주욱 펼쳐져 있었는데 앞서 온 사람들로 비빌틈이 없었다. 약삭빠른 “리따”덕분에 겨우 가트에서 빈자리를 찾아내여 다행히 엉덩이를 붙일수 있었다. 이곳 말로 계단을 “가트” 라고 부른다. 힌두교 사원에서는 갠지스강을 따라 길다란 강둑과 가트를 만들고 그 강가에서 신을 향해 드리는 최고의 경배라는 “아르띠 뿌자”를 거행한다.
힌두사원의 스피커에서 랑랑한 랑독소리가 울려나왔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절에서 스님이 불경을 읽는것과 비슷한 억양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설법이라고 “리따”가 알려주었다.
이어 스피카에서는 신을 향한 최고의 경배의 마음을 담은 노래라는 “아르티송”이 흘러나왔다.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든 사제들이 갠지스강과 련결되는 가트에 서서 아르티송에 맞춰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것이 보였다.
- “아르띠”는 불을 뜻하고 “뿌자”는 힌두교의 제식을 뜻합니다.
“리따”가 또 알려주었다.
신과 대화를 하며 음악에 맞춰 불을 돌리며 행하는 사제들의 몸 동작과 음악, 그 분위기가 성스러운 종교 의식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경쾌한 퍼포먼스처럼 느껴졌다. 인도인들에게 종교는 “삶” 그 자체인것 처럼.
사제들의 주위에는 인도각지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빼곡하게 서서 경건한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리고 소원을 담은 나무잎 배를 강물에 띄운다. 꽃과 양초와 각자의 소원들을 실은 나무잎 배들이 넘실거리는 강물에 실려 저 멀리로 동동 떠간다.
“소원의 배”를 만들어 파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빨갛고 노란 꽃과 작은 초를 큰 나무잎에 담아 놓고는 사달라며 끈질기게 청구한다. 그 청구에 못이겨 나도 그 “배” 한척 사들었다.
가이드가 어느새 짜이(인도차) 한잔을 사들고 와 건네 주었다.
인도인들처럼 뜨거운 짜이 한잔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동안 이곳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지만 차는 마실만 했다. 성지순례지라 이곳은 고기는 물론 술도 안되는 절대 채식(菜食)의 도시였다.
가트에 앉아 짜이를 훌훌 불며 마셨다. 홍차와 우유, 인도식 향신료가 재료이고 설탕이 많이 들어가 엄청 달달한 맛이였다.
짜이를 마시며 발아래로 흐르고있는 갠지스강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성스러운 물이 흐른다는 인도인들의 어머니 강 갠지스.
힌두교 신자인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갠지스강은 성산 히말라야 산맥에서부터 발원한다. 인도의 생명과도 같은 강이며 힌두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강이다. 힌두어로 강 기슭라는 뜻으로 불렸는데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을때 영어식 발음인 갠지스라고 불리게 되였다고한다.
몇달간의 우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이 지역에서도 갠지스강은 유일하게 마르지 않는 강이다. 장장 2천여키로메터를 유피주와 비하르주를 가로지르며 달려 뱅골만으로 흘러드는 강은 전세계적으로는 의례적으로 강 자체가 신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유명세를 떨치는 이름임에도 갠지스 강은 사실 완전 흙탕물이다. 물살이 아주 거친데다가 아침나절 히말라야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여서인지 너무 차가워서 손이 시릴 정도였다.
하지만 서슴없이 강에 몸을 담그는 사람들이 강 절반을 덮다시피하고 있었다. 웃통을 다 벗고 아예 강으로 들어앉아 목욕을 하는 남자들, 가트에서 내려와 손만 담구고 강물을 찍어 바르고 있는 베일 쓴 녀자들,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나와 강물에 얼굴을 씻기는 어머니들… 그들은 흙탕물도 찬 물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 이 강에 몸을 적시는것 자체가 신을 만나는것이라 생각한답니다. 인도사람들은…
“리따”가 곁에서 내레이션처럼 그냥 해설을 붙여주었다.
인도사람들은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는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한다. 뿐만아니라 죽어서도 자신의 골회가 이 강에 뿌려지기를 소원한다. 이 갠지스강을 그냥 강물로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 물”, “성스러운 물”로 여기기때문이다. 흔히 목욕이 몸의 때를 벗기는 과정이라면 갠지스강에서 인도인들의 목욕은 마음의 때를 벗기는 과정이였다.
플라스틱 통에 강물을 담는 사람들도 보였다. 성수라 하여 물통에 갠지스강의 물을 받아 집으로 가져가 가족끼리 마시고 집 앞에 그 강물을 뿌리면 자신의 집앞에도 갠지스강이 흐른다고 믿는다고 한다.
배탈이 날까 념려되기도 했지만 그 열심한 모습에 저도모르게 숙연한 마음 한귀퉁이에서 일었다.
가트 저쪽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여 올랐다.
- 저쪽은 화장을 하는 곳입니다.
난데없는 웬 연기냐하고 뜨악해 하는 나의 표정을 보아내고 “리따”가 알려주었다.
화장하는곳은 망자의 가족외에 외인이 출입할수 없다고 했다.
우리민족의 장례관습과는 달리 렴(殮)이나 입관을 하지 않은 상태로 시신을 강녘 땅바닥에 그냥 뉘여 놓고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입을 맞춘다. 모두와의 작별 인사가 끝나면 강옆에 단을 쌓고 화장을 한다. 시신은 화장하기전에 먼저 강물에 한번 적시고 준비한 나무를 태워 화장을 시작한다고했다.
부자는 향나무로, 일반인은 일반 나무를 사용하는데 한줌 재가 될때까지 완벽히 태울 많은 량의 나무를 준비하는 부자가 있는가 하면 적은 량의 나무밖에 준비하지 못해 시신을 미처 다 태우지 못하고 강에 던져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또 비싼 화장 비용을 마련하지 못하는 빈민들은 시신을 그대로 갠지스에 수장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햐얀 연기가 갠지스의 한 자락을 휘덮고 시신은 재로 변해간다. 가족들은 가트에 조용히 앉아 친인이 재로 사그러드는 과정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그리고는 햐얀 뼈가루를 두 손으로 움켜 강물에 휘뿌린다.
죽은 후에 뼈가루를 강물에 흘려보내면 극락세계를 갈수 있다고 믿고있는 힌두교인들이다. 화장한 재를 갠지스강에 뿌리면 일생에서 지은 죄가 모두 정화되여 다음 생에서도 편하게 살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망자를 보낸다. 그래서 인도의 최고의 효자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부모님을 갠지스 강으로 모셔와 갠지스 강 물로 목욕을 시키고 돌아가시면 화장하여 이 강에 그 재를 뿌려주는 자녀라고 한다.
땅의 품을 떠난 망자의 운명은 이제 신의 것이다. 이렇게 힌두교의 삶은 태여나 갠지스강에서 세례를 받는데서 시작해 숨을 거둔 뒤에 화장돼 이 강에 뿌려지는것으로 끝난다.
갠지스강은 또 한 사람의 력사를 넓은 품에 품어 주었고 장례의식은 마친 사람들이 렬을 지어 내 곁을 스쳐지났다. 슬픔과 아픔을 신에게 맡겨보낸 그 얼굴들은 체념처럼 맑고 평온했다.
사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것을 가트 저쪽에서 피여오르는 하얀 연기를 보며 생각했다.
누구는 목욕을 하고, 누구는 잠을 자고, 누구는 빨래를 하고, 누구는 그 옆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고, 누구는 소원을 빌고, 누구는 물건을 팔고, 누구는 친인을 불태우는 의식을 하고 있는 곳. 인도인들은 이렇게 이 신의 강에서 대대로 살아가고있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튀여나온것처럼 유난히 커다랗고 둥근 아침해가 갠지스강 상류쪽에서 떠올랐다. 아침의 온유한 해살에 강은 금세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내내 자리를 뜰념을 앉고 빈 짜이잔을 손에 든채 나는 가트에 점도록 앉아 있었다. 달디단 짜이같은 감흥이 온몸을 뜨겁게 훑어내렸다. 강에 몸을 적시지 않아도 몸 구석구석이 깨끗해 지고 머리속이 명징해지는 느낌이였다.
강은 어쩌면 아주 오래 전부터 나의 기억속에서 잠자고 있던 그런 풍경인 것 같았다. 망막에 들어오는 타국의 낯설은 풍경을 나는 낯설지 않게 오래동안 바라보았다.
갠지스 강에 와서야 삶이 버거워 보이는 이곳 사람들이 행복속에 여유있게 살고있음을 알것 같았다. 그들은 강의 규칙과 리듬에 자신의 리듬을 맞추면서 살고있었다. 계속 흐르고 흘러야만하는 힘든 삶, 하지만 지금보다 나은 래세를 바라고 강과 함께 흐르고있는것이였다.
나를 이 땅에 존재할수 있게 해준 그 시초를 만날수 있는 곳. 갠지스강. 이곳 사람들에게 갠지스강은 그냥 흐름만이 있는 강이 아니라 력사가 흐르고 그 력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그런 불멸의 공간이였다.
- 김선생네 고향에도 강은 있겠지요?
역시 어떤 정서에 젖어드는듯 떠오르는 해를 빤히 쳐다보다가 “리따”가 감상적으로 물었다. 인도에 까지 오면서도 연변에는 못 가봤다는 “리따”는 인도의 갠지스 강까지 찾아 든 조선족인 나에 대해 많은 호기심을 갖고있었다.
- 물론이지요.
나는 감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 어떤 강이죠? 강의 이름은 어떻게 부르나요?
고향의 강을 떠올리니 저도모르게 코잔등이 매콤해진다.
나의 뇌리속에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였는 산과 들, 그 들의 둘레를 감싸며 산줄기의 아래도리를 품은 채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가는 세상 그 어느 강보다도 유순한 강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대를 지나온 강의 궤적이 눈물겨웁다. 나는 타향의 강가에서 그제야 고향의 강이 여태까지 연출해낸 풍경의 언어를 다시금 읽어 내려갔다.
고향잃은 이주민들이 허위단심 넘은 눈물의 강, 우리 족속의 얼을 말살하려 혈안이 된 일제에 맞서 피로 적신 강, 자치권리를 부여받고 기름지게 가꿔 가던 강, 또 다시 변혁의 바람에 물줄기가 마르려는 강,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고 그래서 소중하고 그래서 성스러운 강…
강의 풍경은 흘러와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 진풍경속에 녹아있던 강의 실체, 우리 족속의 삶의 위상이 차츰 내 가슴속에서 큰 물이랑을 만들며 출렁이기 시작한다.
루루 수천년을 흐르다 흐르다 신이 되여버렸다는 갠지스강, 어쩌면 고향의 강은 이와 꼭 닮지 아니한가!
강의 흐름에 눈과 마음을 맡긴채 나는 꿈꾸듯이 말했다.
- 그 강의 이름은 두만강이랍니다!
… …
"도라지" 201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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