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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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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독서절의 의미 댓글:  조회:2912  추천:73  2007-06-29
  . 칼럼 . 독서절의 의미 김 혁   1 인류 문명의 이른 아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문자와 책으로부터 시작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5천년 전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점토판에 쐐기문자를 새겨 넣어 기록 문서를 만든 것이 책의 시초이며 그 점토판을 보관했던 서고가 바로 도서관의 시초였다. 그때로부터 인류력사는 책과 동반해 왔으며 수많은 독서가와 그 가화(佳話)를 탄생시켰다.- 알렉산더시절에는 누구나 다 큰소리로 글을 읽었다고 한다. 책이 귀했던 탓이기도 했을 것이지만 그만큼 책에 대한 존숭(尊崇)감이 그득 배여 있었기때문이리라. - 1000년경 페르시아의 수상으로서 이름난 독서가였던 압둘카셈은 려행을 하면서도 10 여만권에 달하는 책들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400마리나 되는 락타를 알파벳순으로 걷도록 훈련을 시켜 가는 곳 마다 책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그야말로 력사와 함께 움직이는 도서관, 인류의 탐구와 지혜의 효시가 아닌가? 2  로마의 학자 키케로는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로년을 즐겁게 하고 위난의 도피소가 되고 려행할 적엔 친구가 된다\"고 설파했다. 이렇게 사람은 일생을 거쳐 책을 읽음으로써 의식의 싹을 틔우고, 성장하여 꽃을 피운다. 책은 곧바로 말없는 스승이며 인격을 형성하고 지성과 상상력을 키우는 빛이며  도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혜의 빛을 충분히 접하고 있는가?한때 “축구민족”, “가무민족”으로 수칭되였고 요즘엔 외화수입이 전성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우리 민족의 독서수준은 관연 어떠한가? 길을 가다 주변을 둘러보면 식당, 노래방, 사우나, 발안마소, PC방, 각종 편의시설이나 음식점, 의류점 등은 날이 갈수록 늘어고 있지만 유독 눈에 띄이지 않는건 서점이다. 해외에서 신고한 보람으로 괴춤이 두둑해서 귀국해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판박이로 집을 사고 차를 사고 가장기물을 사들인다. 집을 리모델링(改装)해도 요란한 신식 가구들중에 서재만은 없다.  그리고 요즘 세대는 지식이 필요하면 인터넷에만 매달려 검색키를 손쉽게 누른다. 멀티미디어, 디지털, 네트워크, 영상매체에만 의존하고 있다. 이들에게 문자에 집중하라는 말은 소귀에 경 읽기일 것이다.이런 독서 수준으로는 선진민족이 못된다 독서는 사람을 변하게 하고 그리하여 그 민족, 그 나라를 변혁시킨다. 글 읽는 힘이 없는 집단에 진보나 발전은 없다. 치렬한 경쟁력이 소요되는 요즘 세상에서 위기의 우리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하고 최신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 모두 독서에 대한 열의가 뜨거워져야 한다고 본다. 어느 한 족속이 석유나 자원 등 특정한 자원의 덕택으로 부를 쌓았다고 해도 세계는 그 민족을 선진민족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일단 자양분인 자원이 고갈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자속에 담겨 켜켜이 쌓인 지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확대 재생산된다. 이렇듯 독서력이 바로 민족력이며 국력이다. “책 읽는 국민이 부국을 이룬다”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3 연변 독서절이 올해로 2회째를 맞았다. 도서세일판매, 사랑의 마음 담아 책보내기, “독서의 집”, “독서스타”, “학습형집단”평의, 중소학생 10대 독서왕평의, 독후감응모, 동시랑송, 독서주제사진작품평의, 장서와 좋은 도서추천하기, 연변독서협회 설립 등으로 일련의 활동들이 다양하고 이채롭다. 이번 독서절에서는 “전사회적으로 농후한 독서분위기를 조성하여 공공문화봉사체계를 구축하고 연변의 문화발전과 번영을 추동하여 번영하고 문명하며 조화로운 새 연변건설에 정신적동력과 지적발전의 징검다리를 놓으며 학습형모범자치주를 건설하려는데 그 취지를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의취에 걸맞게 연변독서절이 우리 사회에 짙은 독서풍토를 조성하고 민족의 자질을 제고하는 중요한 이벤트로 자리잡아 년중행사중에 빠칠수 없는 행사로 간주될수 있기를 바래본다.우리 모두가 1년 내내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의 좋은 풍토를 이루어 읽기의 즐거움, 생각의 즐거움속에 앎의 지평이 열릴 때 우리 공동체는 겪고있는 목전의 진통에서 벗아나 선진민족으로 또 한번 거듭날수 있을 것이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0097447\');
41    박경리선생님을 찾아서 댓글:  조회:3783  추천:73  2007-06-29
      2006년 6월, 한국행차를 했던 나는 공식적인 업무를 마치자 스스로 마련한 문학기행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의 향기를 찾아 나섰다. 나는 그 무슨 역마살이 끼여 엄청난 사비를 털며 진동한동 강원도의 곳곳을 밟은 것이 아니였다. 문학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 수많은 독자와 방황하고 있는 문단 후학들에게 하나의 디딤돌이자 지향점이 되고 있는 <<토지>>에서 위기 돌파의 지혜와 힘을 얻자는 것이 내가 스스로 마련한 이번 문학기행의 의취였다.   내가 회의를 가지면서도 또 그렇게 미련이 있는 글쓰기를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하고 살 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답을 구하고자 나는 화두를 품고 산사의 문을 두드리듯 토지문화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하지만 그때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이제 그 존안을 영영 뵙지 못하게 된것이다. 이국의 작은 문인으로서 무람된 일일지 모르지만 당시 썼던 기행문을 다시 올려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박경리 선생님, 부디 영면하옵소서!    장독대에선 된장이 익고 펜끝에선 글이 익는다 회촌마을의 토지문화관을 가다 김 혁    <<토지>>의 향기를 찾아 스스로 마련한 문학기행의 세번째날에 선생님이 기거해 계시는 회촌마을에 있는 토지문화관을 향했다. 진정 대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장밤 뒤척이며 무척 설렜다.원주역 남부시장앞에서 시교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혹시 지점을 놓칠가봐 차창 밖의 낯선 풍경에 취하여 두리번거리는 사이, 반시간여를 달린 뻐스는 곧 연세대 원주 분교 캠퍼스를 지났고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에 이르렀다. 곧추 가면 토지문화관이 보일거라고 기사아저씨가 알려주었다.   길녘의 파릇파릇한 벼포기,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탁 트인 산자락아래 원주에서 오는 도로는 하나뿐, 시골농촌의 전형적이라 할만큼 조용하고 인적 드문 비포장도로 나는 홀로 걸었다. 새파란 하늘과 투명하도록 맑은 물, 풋풋한 땅내음이 좋은 길가에 메꽃, 접시꽃, 패랭이꽃들이 소탈하게 피여있었다. 유월의 신록은 눈부시게 싱그럽다. 거기다가 호젓하고 고요하여 가끔 산새 소리만 들릴뿐이였다.   머리에 수건 두르고 밭에 묻혀 정성을 쏟는 농부들이 보였다. 파릇파릇한 벼포기 하나가 례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논밭 사이로 작은 저수지 하나도 눈에 들어온다.나지막한 고개마루에 장승이 서있었다. 장승이 한두개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얼굴도 늙은 로안의 장승으로 보였다. [토지]문화관을 가는 길옆의 장승 앞에서   장승고개를 넘어서니 좌측의 나지막한 산기슭쯤에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세동이 있었는데 건물하나는 짓고 있는 중이였다. 길곁에 토지문화관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진초록으로 덮인 오봉산. 덩치값을 하는 듯 강파르게 뻗쳐 내리던 산은 마을에 이르자 넉넉하게 품을 펼쳐 숨을 고르고 바로 그 들머리에 박경리선생님이 계신 토지문화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적한 숲 속의 공간을 제공해 메마른 감성을 일깨워주고 자연과 삶의 리치를 깨닫게 하여 멋진 후진을 양성하려고 이곳 매지리에 문화관을 설립하였다고 박경리선생님은 그 의중을 밝혔다. 그래서 1996년 이곳에 토지문화관을 건립하기 위해 토지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근 2년간의 공사 끝에 1999년 6월 9일, 마침내 토지문화관을 개관하게 된것이였다. 큰길좌측에서 문화관으로 난 좁은 소로를 따라 한참 올라가서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눅잦히며 문화관 본사동의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홀은 비여있었다. 홀에 딸린 숙직실에도 사람이 없었다. 머쓱한 나머지 홀을 두리번거렸다. 벽에 걸린 스크립보드(記錄計)에는 작가들의 이름이 써있었고  월~토요일까지 동그라미 표시로 식사를 들었는지 표시되여 있었다. 벽에 액자도 걸려 있었다. <<사고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박경리 선생님의 그 제언이였다. 홀 중앙에 놓인 거대한 북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후에 안데 의하면 이북은 88년 올림픽 개막식에서 두드렸던 북이였는데 대회측에서 경모의 마음으로 단 3개밖에 없는 그 중의 하나를 박경리 선생님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호기심에 그 북을 두드려보았다. 조심스레 두드렸지만 북소리는 조용한 홀에서 공명이 되여 울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북소리를 들었던지 2층에서 60대로 보이는 선생 한 분이 내려왔다. 문화관의 관리를 맡고 있는 변재봉이라고 자아소개를 했다. 중국에서 왔다는 말에 관리원은 적이 놀란 기색을 지었다. 마침 선생님은 연세대의 초청으로 산을 내려 자리를 비우고 없다며 난감한 기색을 짓다가 선생님에게로 전화를 걸어 연계해주려 했다. 나는 선생님의 스케쥴을 깨뜨릴가 저어되여 그러는 관리원을 말렸다. 그냥 이국의 한 작가가 왔다갔다고 안부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변선생에 의하면 높은 혈압 때문에 팔순의 선생님은 한쪽 눈을 못쓸 정도로 시력도 좋지 않고 의사로부터 더 이상 소설을 쓰면 안 된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일전엔 한 신문에 광복 이후를 다룬 신작장편 <<나비야 청산가자>를 련재하다가 혈압이 높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경과 생명 문제 만큼은 너무나 중요해서 간혹 환경 에세이를 집필하고 있다고 한다.   문화관의 관리자 변재봉선생과 지금 토지문화관은 선생님의 외동딸인 김영주씨가 관장을 맡고 서울과 원주를 오고가면서 돌보고 있다고 한다. <<한국미술사>> <<한국불교미술사>> 등의 저작을 펴낸 학자인 김 관장은 자매라고 생각될 정도로 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관리원이 그래도 멀리에서 모처럼 찾아왔는데 선생님에게 련계해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재차 말렸다. 사실 높은 산인 선생님앞에서 작은 키로 나서기나 감히 문학을 운운하기가 외람된  마음에서였다.농부자같이 구순한 인상을 한 변선생은 오히려 미안쩍어 하며  쉬는 점심시간이였지만 일일이 문화관을 안내해주었다.  선생님이 몸소 심으신 소나무묘하게도 나무의 이름은 나의 고향 연변의 명물인 [일송정]과 꼭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토지문화관은 대지 1천547평에 지상 4층 규모의 건축물로 연면적 8백여평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고 했다.  건물 내부는 첨단 음향시스템과 국제회의용 동시통역실 4개를 갖추고 있으며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회의실, 분과토론과 작은 학술모임을 위한 3개의 세미나실, 그리고 도서실 및 자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별채로 꾸며진 숙소동에는 세미나 참석자를 위한 26개의 침실과, 학자나 예술가들의 창작과 연구를 위한 집필실이 마련되었으며, 장기투숙이 가능한 숙소도 따로 있었다. 이밖에도 부대시설로 야외무대와 식당, 체육시설,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100여석 남짓 준비된 강연장은 늘 청중이 자리를 메워 주최측이 추가로 마련한 보조의자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아이를 품에 안은 주부에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로부부, 린근 도시에서 온 직장인과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운집해 든다고 한다. 문화관의 공간활용계획을 보면 학술문화행사의 기획 및 추진, 연구 및 창작활동 지원 , 국제학술문화교류 활동, 문화운동 및 교육활동, 문화계 네트워크 형성, 사이버공간을 활용한 문화예술활동 등으로 다양하다.선생님에게는 자연과 생명이 당하는 고통과 불행이 안스럽다. 하여 토지문화관은 내내 <<생명ㆍ환경ㆍ문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와 토론회, 출판사업을 벌이고 있는 데 이렇게 치러온 세미나며 심포지엄이 지난 몇년간 60여회에 이르렀다. 이곳이 한국 환경운동의 <<새로운 중심>>으로 불리고 있는 이유다. 이렇게 토지문화관은 이미 한국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부상해 있었다.  변선생은 특별히 박경리 선생님의 집무실까지 문을 열어 보여 주었다. 집무실은 의외로 너무나도 간단했다. 사무상에 어느 조각가 빚은 선생님의 두부상 한 점이 놓여져 있을뿐이였다.    그만큼 번화한 차림과 교제를 선생님은 꺼려한다고 했다. 본인의 작품 이야기는 물론, 인터뷰 자체를 꺼려한다. 박경리 선생의 유명세에 비해 언론에 노출된 것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다. 선생님이 단구동 자택에 계시던 시절,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서울 MBC방송의 한 PD는 선생님의 댁으로 6개월을 출퇴근 하다싶이 해 겨우 인터뷰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대중매체에 노출을 꺼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한적 있다. <<작가가 대중에 로출되는 것이 세속적인 것이다. 작가가 진정 자유를 원할 때는 스스로가 차단해야 한다. 25년간 <토지> 쓰는 동안 내 스스로 차단하는 것이 글 쓰는 일 이상으로 힘들었다.>> 한국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선생님. 그러나 정작 본인작품의 해외진출도, 노벨상 수상 여부 대해서도 달갑지 않아 한다. 전국의 문화 예술인 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열렸던 개관식 행사에서 토지문화재단의 리사장이자 이 문화관의 상징인물인 선생님은 <<이 문화관은 내 작품 을 기념하는 문화관이 절대 아니며 그런 생각들은 전적으로 오해>>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과거를 추억하는 곳이 아닌, 미래지향적 순수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더 나아가 <<내 생전에는 이곳에서 <토지> 세미나는 열 수 없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는 자유지만 만약에 산 사람을 곁에 두 고 이 공간을 내 작품과 련관시켜 활용한다면 그것은 나에 대한 욕이다>>라고 못박았다. <<작가는 얼굴이 필요 없습니다. 작품 내놓으면 그걸로 끝이죠. 문학 작품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독자들이 읽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선생님의 작가적인 신조였다.   세련되게 만든 회의실과 세미나실이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창작실이다. 이곳에는 여러 분야, 여러 곳에서 찾아온 문학가, 예술가들이 산다. 중국 상해에서 와서 반년째 머물고있는 녀류작가도 있다고 변선생이 알려주었다. 이들은 13평짜리 각방인 창작실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그 분위기는 <<고시원에 가깝다. >>고 이곳에서 체류한적 있는 어느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창작을 해야 하기 때문. 800여평의 4층건물에 한 달이면 인건비, 공과금 등 1000만원 가까운 유지비를 사재로 쏟아붓고 있는 터라 어려움이 많을 터이지만 선생님은 시골집에 내려 온 아들 딸이나 손자들을 거두듯이 문화관 창작실에 머무는 문인들을 보살피신다.  입주한 작가들이 행여 신경 쓰일까봐 일체 내려오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터밭에서 키운 유기농 채소로, 산에서 채취한 나물로 반찬을 만들어 새벽에 조용히 주방에 가져다 놓을 뿐이다. 창작실의 식사시간에 맞춰 반찬들을 내려보내는 선생님은 신나고 행복해 보인다.   사람들에 대해서 까다롭고 낯가림도 심한 편인 선생님이 후배 문인들에게 쏟는 그 무조건의 정성은 어디서 오는 걸가? 리유는 단 하나, 그들이 문학인이기 때문이다. 대하소설을 창작해 오면서 겪은 글쓰기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은 후배들의 작업을 도와주는 일을 한없는 기쁨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기에 이곳에서 집필의 나날을 보낸 박범신소설가 는 선생님에게 <<하숙집 아줌마>>라고 친절한 별명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내가 자네들을 뒤에서 살펴주는 리유는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는 뜻이야. 내가 아직 할 일이 있다는 것, 새끼에게 모이먹일 일이 있다는 것은 다 고마운 일이지.>> 선생님은 후배사랑의 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러면서 <<여기 작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니 박경리 개인에게는 라이트를 비추지 말기를 바란다>>고 매스컴에 경고하기도 했다. <<토지문화관>>은 문학에 매료된 작가들이 거장의 정기를 받고 문학정신을 고양하는 문학산실로 사랑받고 있다. 이곳은 선생님의 글에도 나오듯 정녕 오봉산에 피어 있는 글꽃산인 셈이다.     박경리선생님이 기거하는 집  선생님의 사택은 토지문화관과 울타리를 맞댄 오른쪽에 있었다. 작은 이층구조의 사택 앞에는 터밭이 일구어져 있다.  상추며 고추며 오이며 여름 한철내기엔 그만인 채소들이 하나하나 예쁘게 잘 자라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500평의 터밭을 손수 일구시고 있다고 한다. 비료를 절대 쓰지 않는 유기농업을 중히 하신다. 밭머리에 장독대가 일매지게 놓여 있는 것이 가관이였다. 얼추 세여 보아도 50개는 넘어 보였다. 70~100년 된 투박한 항아리들인데 쇼와(昭和) 년호가 새겨진 장독도 있다고 한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장독이 다 모여 있어요>>변선생이 웃으면서 이 장독은 이 문화관의 또 하나의 명물이라고 알려주었다.   오봉산에 정착한뒤 이제야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터밭의 생명을 키우고 마당의 거위를 보살피는 생활로만 돌아갈 수 있게 됐노라고 선생님은 웃었다. 원주 단구동에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닭장과 거위장 문을 연다. 손수 기른 상추에 아침을 드시고 텃밭을 일구고, 마당의 돌을 고르고, 뒷산에 올라 칡덩굴을 뽑으며 산다. 김장도 많이 담근다...   선생님이 몸소 가꾸시는 터밭과 몸소 담그신 장 박경리 선생님은 왜 이렇게까지 로동에 집착하는 것일까? 어느 산문집에서 선생님은 <<로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고 하셨다. 발이 셋 달린 그 기구에서 조리되어 나오는 것이 곧 선생님의 작품이자 삶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글과 함께 해온 로동은 이제 선생님의 일부가 된 듯 보인다. 무려 25년 동안 작품에 진력하셔야 했고 소설 속의 세계는 호흡이 길 뿐만 아니라 소우주에 가까울 정도인데,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과 긴장을 어디서 끌어오셨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동과 글쓰기는 일종의 정화 작용입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부정적이 됩니다. 잡다한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로동을 하거나 글을 쓰면 우리의 슬픔이나 이런 것이 왜 있는가에 대해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것이, 설령 되돌아올지언정 한발 나아갔다는 것이 전진이 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생존의 지속성을 위해서 <토지>를 썼다는 것이 저의 정직한 고백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옛날부터 <<글 쓴다>>라는 말을 안하고 그냥 <<일한다>>고 표현했다. 선생님은 이렇게 몸을 움직여 생산활동을 함으로써 육체와 정신의 건강과 활력을 유지한다. 생명과 자연, 로동을 중요시하는 선생님. 그에 대한 수많은 존경과 찬사는 그처럼 한평생 자연에 뿌리를 둔 실천하는 삶, 육신과 령혼이 하나 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16권의 대하소설《토지》외에도 장편소설 20부, 단편소설 42편을 발표하고, 수필집 4권 시집 3권을 발간한 선생님의 왕성한 문학세계는 무엇일가?80세의 생물학적 인간으로서의 그이가, 또 한국 현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이기도 한 대작가로서의 그이가 체득한 인생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토지문학관 정원에서 나는 스크랩해둔 선생님의 강의록, 대담록을 떠올리며 목전에서 뵙지못한 선생님과 가상인터뷰를 해보았다.한가지 선률에 심취한 매니아의 심정으로 마음의 자문을 구해 보았다.   - 선생님, 선생님의 문학의 길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와 작품은 무엇입니까.- 제임스 조이스의 작가정신을 존경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사악한 데가 있어요. 나쁜 뜻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정직하다고 볼 수 있는 거죠. 불행한 생애죠. 아픔 고난의 생애랄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훌륭한 작품이죠. 토머스 울프, 윌리엄 포크너도 좋아해요.토마슨 만의 <마의 산>도 감명 깊게 읽었어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읽었지만 별로 안 좋아해요. 너무 인간의 의식 속에서 감정적 유희를 한다고 할까요. 특별히 한 사람한테 영향을 받은 건 없어요.   - 선생님, 우리의 문단과 작가들이 갖추어 할 요건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 작가에게는 책상만이 있습니다. 작가에게는 정치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식인에게도 권력지향이 있고 그래선지 기득권에 대한 집념으로 문인들도 리념적으로 갈라졌습니다. 문학은 생존문제의 추구인데 이데올로기가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명의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문인들, 예술가들이 어떤 권력이나 집단의 시녀노릇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작가는 진실에 접근해야 합니다. 어떤 힘도 작가에게 미쳐선 안 됩니다. 완전한 자유, 그 안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악세사리 달기에 급급해 자기 장식에 치우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의 집념이 너무 서글퍼요. 그들은 권력이나 명예가 너무 초라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를가요.어느 시대나 모든 문인들은 두 가지라고 봐요. 하나는 현실을 추종하는 세력, 다른 하나는 시류를 역행하고 비판하는 세력! 우리 세대에도 있었고, 지금 세대에도 있지요. 문제는 인간과 제도가 극도로 오염됐다는 것이고 그 오염을 아무 망설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비 현상이 있다는 것이지요.   - 작가는 자기 힘의 50퍼센트를 작품에 쏟는다면 나머지 오십 퍼센트는 세속적인 욕망과 허영심과 싸우는 데 쏟아야 한다던데요. 선생님은 다 놓으셨습니까? - 다들 그렇습디다. 지식인도 마찬가지에요. 30평 아파트 사는 사람이 40평으로 늘려가야 되겠다. 이런게 지식인의 꿈이니 답답합니다. 이런 것말고 <내 생애에 이 일을 이뤄야겠다> 이런 꿈을 가져야 평생 활기와 흥분이 있고, 성취감을 느낍니다. 내가 이렇게 리기적으로 살아도 되나 내 존재 가치는 어디 있나싶어 다시 글을 쓰게 돼요.<토지>의 독자가 많다는 것이 내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걸림돌입니다. 존대 받으면 좋고 괄시 받으면 싫지만, 존대 받으려면 지불해야 할 것도 있으니 부담입니다. 다 놓아 버리면, 그것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그 되찾아 오는 것을 맞이하면 될 터인데, 그걸 몰라요. 다 놓아버리고 다시 찾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는 게 그렇습니다.   - 선생님은 언젠가 서울대에서 <지식인의 착각과 리기>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셨지요. 사회와 문단의 편 가르기가 너무 심한 오늘 그 말씀이 와 닿더군요. - 파벌과 분렬주의야말로 우리 문단을 황폐하게 만든 요인인데 난 그런 그룹에 지금까지 한 번도 끼여본 적이 없습니다. 토지문화재단 또한 편협한 정치성이 나 파벌,개인의 리익을 도모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요새 흔히들 무한경쟁이라 말합니다. 지식인도 쓰고 대통령도 써요. 무한경쟁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무한경쟁의 끝이 어디냐 하면 하나만 남는다는 얘기예요. 둘만 있어도 경쟁하는 것이죠. 하나만 남으면 종자가 없어져요. 2개가 있어야 종자가 납니다. 그러니까 무한경쟁은 멸망을 의미하는 거지요.상대방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의 원리가 절실히 필요한거죠 - 선생님의 문학관은 무엇입니까? - 문학이란 본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생존하는 이상의 진실은 없습니다인생에 대한 물음, 진실에 대한 물음은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끝이 없게 그 물음에 매달리는데 <모른다>는 그 말만이 확실한 것이죠. 제가 집념이 별로 강하지는 않지만 그 물음을 포기할 때는 작가도 포기하는 거죠. 포기할 수 없으니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선생님의 정서와 사상이 서린 곳을 속속 밟아보며 그동안 수없이 읽었던 선생님의 심오한 대담록 인터뷰들이 이 순간 머리에서 정리되는듯 했다. 이런 삶에 대한 명징한 의식들이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문학 작품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가!   비록 선생님을 목전에서 뵙지 못했지만 나는 한 가슴 들먹한 포만감을 안고 오봉산을 내렸다. 귀로에서 발길을 멈추고 돌아본 토지문학관은 다양한 초록색들에 어울려 서있다. 마치 점점 짙어지는 자연의 색상환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문화관에 서려있는 선생님의 명멸한 힘의 빛이였다.   나는 그 무슨 역마살이 끼여 엄청난 사비를 털며 진동한동 강원도의 이 작은 도시의 곳곳을 밟은 것이 아니였다. 문학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 수많은 독자와 방황하고 있는 문단 후학들에게 하나의 디딤돌이자 지향점이 되고 있는 <<토지>>에서 위기 돌파의 지혜와 힘을 얻자는 것이 내가 스스로 마련한 이번 문학기행의 의취였다. 내가 회의를 가지면서도 또 그렇게 미련이 있는 글쓰기를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하고 살 위인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답을 구하고자 나는 화두를 품고 산사의 문을 두드리듯 토지문화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자신의 모든 걸 정지시켜 놓거나 슬로모션으로 떠올려볼 수 있었다. 사실 이 3년간 나는 사랑했던 문단과 단절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한 문단이고 글쓰기였지만 글을 안 쓰고 사는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그것에 적응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선생님은 자신을 <<고독에 처단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나도 실존적 결단이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을 내내 더듬고 있었다.나뿐아니라 힘들다고 볼멘소리를 지르는 우리의 허다한 작가들의 문장에서도 조울증이나 자폐증, 게다가 현실도피의 자위의 흔적마저 보이기도 한다. 숙제를 풀려고 찾아든 토지문화관은 휴양지와 고시원과 수도원의 분위기가 묘하게 섞인 곳이였다. 그곳에서 땀으로 끈적이는 여름이지만 나는  열망으로 뜨거워진 가슴을 시원하게 식힐 수 있었다. 오감으로 체험한 문학이 가진 불멸의 힘은 세파에 흔들리는 나를 일깨우고 마음을 추스르게 했다.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구도자처럼 등장인물들을 통해 삶을 헤쳐 나간 박경리 선생님, 이 종잡을 수 없고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시대에 치렬한 작가정신으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여준 박경리선생님, 팔순의 대작가의 신변에서 느낀 모든 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토지>>를 통해 남은 삶의 려정에서 존경하는 또 한분의 선생님의 문향을 간직하게 되여 가슴 벅차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수가 문학과 예술의 꿈을 먹고사는 이들에게 곧 행복한 바이러스로 퍼질 것이다.   사색의 연속으로 깔린 귀로에서 나는 일순 꿈을 꾼것처럼 멈춰서버렸다. 청명한 기후 탓인가 논두렁에 커다란 새 한마리가 내려서있었던 것이였다. 처음 보는지라 그것이 무슨 새인지 잘 가려지지 않았다. 외다리로 선 그 도고한 모습에 나는 일단 학이라고 단정했다.    (감흥에 못이겨 산자락아래 <<토지>>라 이름한 가든에서 소머리국밥에 <<참이슬>> 한병을 거뜬히 비우며 가든 마담에게 물었더니 이곳에 학이 산다고 했다) 그 학의 자태와 겹치여 검은 마로 지은 옷에, 반백의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올리시고 밭머리에서 천착할듯한 눈길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한 로인장의 모습이 내 눈가에 머문다. 문학기행을 다녀오고 나서 그분의 고고한 생이 내 삶에 한 발짝 들어와 있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5346334\');
40    핑구어리 댓글:  조회:3723  추천:74  2007-06-29
  . 칼럼 .  핑구어리 (苹果梨) 독고혁                              1…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소문이 높아서 손님도 많소/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사과배는요/삼복철 스리 살살 녹는 꿀맛이라네.80년대 연변지역에서 불려졌던 류행가의 한구절이다. 연변의 명물하면 아마 사과배를 맨먼저 떠올릴것이다. 그다지 잘나지못한 모습으로 우리곁에 다가선 과일, 하지만 시원달콤 아삭아삭 그 맛이 일품인 소담스러운 과일.사과배는 순수한 룡정특산으로서 80여년에 달하는 재배력사를 기록하고있다. 1921년 룡정시 로투구진 소기촌의 최범두농민이 조선 함경북도에서 4그루의 사과나무묘목을 가져다가 당지의 돌배나무에 접목했는데 겨울을 나니 한그루가 죽고 두그루가 살았다. 이 두그루에는 특이한 열매가 달렸다. 추운 연변의 풍토에서는 열릴수 없는 크고 달고 시원한 배가 열렸던것이다. 그 껍질이 마치 사과처럼 반나마 붉은 빛을 띠여서 사과배라고 이름을 지었던것이다. 바로 이 두그루의 과일나무가 연변사과배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고 한다. 사과배는 크고 달뿐만 아니라 또 배 껍질이 두꺼워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추위에 잘 견디고 맛이 상긋하여 품종이 우량하다.  간총생산량이 2만여톤에 달하는데 동북3성은 물론이고 이웃나라 로씨야과 조선에 수출되는 주요과일품목으로도 명망이 높다.사과배는 일찍 1985년에 전국배류평의에서 1등상을 안았고 1990년과 2003년에 선후로 AA급록색식품으로 길림성명브랜드로 평의받았다. 설리, 래양리와 함께 중국에서 3대배제품왕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북방배제품의 왕”으로 불리운다. 따라서 일찍1995년에 룡정은 국가농업부로부터 “사과배의 고향”으로 명명되였다. 2  5월3일,  2008중국룡정사과배꽃민속문화축제가 모아산기슭의 만무과원에서 펼쳐졌다. 립하를 앞둔 초여름의 따스한 일기도 축제에 힘을 보태주어  희디흰 주단을 끝없이 펼쳐놓은듯한 만무과원은 온통 명절의 분위기로 차넘쳤다.문화제는 조선족문화를 널리 알리고 대외교류합작을 추진하여 룡정의 지명도를 높이고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취지를 두고 각종이채로운 활동으로 구성, 민속무표현, 촬영활동, 야외민속음식시식회, 풍경구관광, 문화광장등불놀이로 이어졌다.  올해부터 해마다 사과배꽃이 만발하는 5월초면 사과배꽃축제를 거행할것이라고 축제의 관계자는 밝혔다. 3 축제가 열린 과수원을 우리는 만무과원이라 지칭해 부른다. 무려 25만그루에 달하는 사과배가 이 땅의 과일동산에서 일석을 차지하고 있는것이다. 1952년초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덕해주장이 모아산기슭에 과원을 건설할 구상을 제기하면서 스타트를 떼여 오늘에 이른 만무과원은 연변화룡집단의 과수농장, 비암산자락으로부터 삼봉동을 감돌고 말바굽산을 지나 모아산을 뒤덮으며 연길비행장까지 이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과배과원이다. 봄철이면 몇 십리 이어진 과수원 산자락을 마치 대설(大雪)이 내리기라도 한 듯 사과배꽃이 뒤덮는데 이는 연변의 유명한 경관중의 하나이다.국내외의 관광객이 연인수로 13만여명에 달하면서 연변의 관광업발전에서 도 중대한 일익을 담당하고있다.사과배에 대한 우리 학자들의 감흥은 깊다. 이민민족인 우리 조선족은 중국문화의 가지를 자기 민족문화의 뿌리에 접목 시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켰는데 이런 력사적인 경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있는것이 바로 사과배라는것이다.한국에서도 일전 조선족이 이주민족으로서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좌충우돌 인생사를 그린 설날특집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그 제목을 “핑구어리(苹果梨)”라고 달았다.  세계는 바야흐로 각 민족문화의 다원공존의 장을 열고 있다. 중국조선족은 앞으로도 유구한 민족문화의 뿌리에서 부단히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접목해 우량한 민족으로 거듭나야 할것이다. 접목을 거쳐 추위를 이겨낸 품질우량의 사과배처럼. 오늘날 락관론보다는 비관론이 더 팽배하고 있는 공동체의 위기속에 사과배의 전설을 다시금 읽어본다. 중국조선족의 정체성과 우수성을 한알의 사과배에서 찾아 본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2902795\');
39    천재지변 그리고 ... 댓글:  조회:3740  추천:73  2007-06-29
. 칼럼 .  천재지변 그리고 ... 김혁 1 지진이란 낱말은 76년 맨 처음 접했다. 우리가 매일 쓰는 그릇을 만들고 있는 당산이라는 곳에서 지진이 일었다는것이다. 그리고 연변에도 지진이 인다는 풍문이 돌아 적이 겁에 떨었었다. 당시 소학생이였던 우리에게 “우상”은 요즘처럼 그무슨 탈렌트가 아니고 천문학자 장형이였다. 동한(东汉)시대 과학자인 장형(张衡)은 “후풍지동의(候风地动仪)”라는 계기를 만들어 지진의 발생을 감측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지동의는 외벽에 8마리의 룡이 부착돼 있는데 룡은 저마다 작은 구리공을 물고 있다. 그 룡두밑에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리고 있는 8마리의 개구리가 있는데 만일 어느 지역에 지진이 발생할 경우 룡입 속에 있던 구리공이 그 방향의 개구리입에 떨어지는 기계였다. 장형과 그의 지동의는 당시 교과서에도 실렸고 우리가 주문해 보는 잡지들에도 칼라로 큼직하게 소개되였다. 그 예술품을 방불케 하는 지동의를 보며 저마다 감탄을 머금었던 기억이 있다. 2 그렇게 감성적으로나마 알았던 지진이 다시 한번 우리들의 신심을 강타했다. 5월 12일 규모 8.0급의 대지진이 사천성 문천 등지를 강타해 그 지역이 초토화됐다.   풍부한 물산으로 사람들의 살림 형편이 넉넉해 “천부지국(天府之国)”으로 불렸던 곳, “삼국지”의 류비가 제갈량의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计)”에 따라 터전으로 삼았던 곳, 국보 판다가 서식하고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관광명소로 유적도 풍부한 곳, 새 세기에 들어서 매년 10% 넘는 고도성장을 이루며 “서부대개발”의 중심이자 선두 도시로 이름 난 곳, 그 곳을 지진의 마수가 덮쳤다. 주택 50만채가 붕괴됐고 학교 건물 7000여 채가 무너져 내렸으며 20여만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명의 아이들이 일조일석에 부모을 잃고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됐다.     3 중국에서 예로부터 지진에 대한 기록은 드물지 않다.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 서도 “지진이 다섯 번, 산과 봉우리가 무너지는것이 두 번, 그 밖에 재이(灾异)의 기록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고 전하고 있다. 불과 30년전인 당산대지진의 악몽을 재현하며 덮쳐든 이번 지진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 250개 이상의 위력이라 한다. 하지만 렬악한 위기속에서도 휴머니즘은 꽃을 피웠다. 정부는 식량, 생수, 옷, 텐트를 비롯한 구호품을 신속히 지원하고 있으며 호주석과 온총리는 여진이 남아있는 피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 구호활동을 선두 지휘했다. 구조대원들은 \"1프로의 희망이 보이면 100프로로 뛴다\"는 구호를 걸고 밤낮으로 뛰고 있다. 련이은 여진과 악천후속에서도 생사를 다투며 매몰 주민들을 구해냈다. 찢어진 길을 잇고 무너진 잔해들을 걷어내며 망가진 도시 기능을 하나씩 복구해 나갔다. 무너진 “천부지국”을 다시 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사천에서 매일이고 생명의 기적, 사랑의 경이가 이어지고 있다. 형제자매의 불행을 함께 헤아리고 슬퍼하는 “동병상련”의 마음은 기부활동을 촉진해 중국 전역을 무대로 성금모금, 헌혈활동이 확산되고 있다. 불운한 이들을 돕기 위해 기업가, 연예인, 일반시민으로부터 고사리손 애들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온정이 줄을 잇는다. 14억 중국인이 하나로 뭉쳐 난국을 헤쳐나가며 나눔과 베품의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와 행복이 증대되고 있다. 대지진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아픔을 아픔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떨쳐나선 우리들에게 재난극복과정은 공통의 경험이 되면서 한편으로 단결과 일체감, 위기 극복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다.수많은 과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진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류에게 지진, 해일, 홍수, 번개 등의 천재지변은 공포의 대상이 되여 왔다. 인간으로서 감당해 낼 수 없는 자연재해는 인간들이 쌓아온 물질과 능력의 한계를 철저히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재앙은 인간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천재지변이 가져다준 재앙, 하지만 그 재앙속에서 보여준 삶의 의지는 강진보다 강했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2990916\');
38    상모놀이 댓글:  조회:3541  추천:73  2007-06-29
. 칼럼 . 상모놀이 김 혁   1 무엇의 이룸인가/거친 듯 고운선 돌고있는 하얀 이여/어우러져/정겨운 음(音)이요/기꺼운 춤이네/투박한 울림에 가슴은 열리고/너울대는 나의 령혼이여…어느 한 시인이 상모춤을 보고 감회에 젖어 읊조린 시의 한구절이다. 상모춤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속무용으로 농악무중에 등장한다. 상모는 꼭지를 참대와 구슬로 꾸미고 그 꼭두에 새털이나 흰 종이오리를 단 모자로서 형태와 빛깔도 다양한 여러 종류가 있으며 상모오리의 길이에 따라 소상모, 대상모(열두발상모)로 나눈다.오랜 전통의 종교적 놀이이며 집단의식의 예능양식(艺能样式)을 지닌 농악에는 적을 물리치기 위한 군법예능(军法艺能)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특징으로농악대에게 군복이 입혀지고 전립(战笠. 무관들이 착용하던 모자)이 쓰여졌다. 전립은 농악에 사용되였을뿐만아니라 소리나는 가죽과 실을 머리에 매고 돌림으로써 군사신호를 알리거나 짐승이나 적을 현혹시키는 등 다양한 기능을 보였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농악장단에 맞추어 상모군이 춤판을 크게 차지하고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 열두발이나 되는 상모를 돌리는 장면을 보노라면 그 률동의 조화미와 가관에 혀가 절로 차진다.   2 조선족전통문화라면 농악무를 말하지 않을수 없고 또한 농악무의 최고의 기예와 신명을 일으키게하는 상모춤을 빠뜨일수 없다. 연변의 상모춤은 명절과 각종 행사, 군중문화활동장소에서 빠침없이 선을 보이고 있으며 이미 연변의 소중한 관광문화자원으로 자리를 잡고있다. 상모춤이 연변에 전해진지 는 이미 100여년여, 6대를 걸쳐 전승되고있다.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가 담겨져있는 상모춤을 지켜야 할 사명감으로 연변에서는 오래전부터 상모춤에 대한 보호와 발전을 시도해왔다. 그중 명성을 얻고있는 왕청현의 상모춤은 수차 전국성적 공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으며 전국민간무용경연, 국가문화부의 대상까지 거머쥐였다. 2005년에는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명록에 올랐고 왕청현은 국가와 길림성으로부터 “상모춤의 고향”으로 명명되였다. 따라서 왕청현에서는 상모춤예술단을 발족시켰고 특별히 2800평방메터되는 상모춤광장을 건설했다. 한편 왕청현문화관에 근무하면서 상모춤 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김명춘(51)씨는 올해초, 중국 문화부가 주최한 “국가급무형문화재 종목 대표계승인”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연변의 상모춤은 이제 연변을 벗어나서도 그 인기가 드높다. 중국전역을 상대로 해마다 성황리에 펼쳐지는 올해 중앙텔레비죤 춘절만회에서도 연변의  상모춤은 전국관중을 상대로 브라운관을 달구었다. 6월, 연길에서 개최된 2008 북방관광교역회 개막식 광장무표현에서는 1048명이 참가하는 상모춤이 선을 보여 사상 최대규모의 가관을 이루었다. 민속관광문화를 주창(主唱)하고 있는 요즘 더욱더 그 인기를 드날리고있는 상모춤이다. 3 연변의 그 상모춤이 올림픽으로 간다.왕청현문화관 상모춤예술단중에서 4명이 발탁되여 북경으로 출두, 이번 올림픽기간 국내외손님들에게 상모춤 표현을 하게 된다.이들은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기간에 우리의 전통무용을 표연할수있는데 대해 “자호감을 느낀다”며 “중국조선족문화를 홍보할수 있는 좋은 기회”로서 “향후에는 세계무대로 나아가도록 힘을 아끼지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눈앞으로 다가온 북경올림픽은 온 중국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최대 이벤트다.또한 올림픽은 스포츠를 매개로 세계인들지간의 소통과 교류를 지향하는 세계인의 문화 축제다. 이 최대의 축제에 우리의 토속적인 몸놀림과 신명이 넘치는 리듬이 울려펴지게 되는 자호감을 느끼며 열두발 상모가 지구촌을 무대로 휘날릴수 있기를 기망해 본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360425\');
37    이발과 혀 댓글:  조회:3614  추천:73  2007-06-29
. 잡 문 . 이발과 혀  김 혁 1  상용은 은(殷)나라 때의 저명한 학자였다. 상용이 운명할 때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로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가 곁에서 스승님의 마지막 길을 바랬다.     로자가 눈물을 삼키며 침대머리에서 스승에게 물었다.     -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어떤 남길 말이 있으십니까?     상용이 말했다.     - 너 나의 입안을 찬이 들여다보아라. 아직 혀가 그대로 있느냐?     - 네 있습니다.     - 그러면 이발은?     - 이발이 모두 물러나고 없네요.     상용이 로자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 이에 깃든 리치를 알겠느냐?     로자가 사색에 잠겼다가 말했다.     - 제자의 소견으로 보면 너무 강한 것은 빨리 쇠퇴하고 부드러운것만이 오래동안 지속된다는 그런 리치인 것 같군요. 상용은 가까스로 웃음 지으며 자신의 걸출한 제자를 바라보았다.    - 그래. 맞어. 천하의 모든 섭리도 바로 이와 같은 거여.    그후로 로자는 스승의 뜻을 이어 유약(柔弱)이 강강(刚强)을 이기는 리치로서 천하를 허정(虛静)으로 돌리고자 했다.    저서에서 수차 이유극강 (以柔克刚)의 리치에 대해 언급했다.    以 : 써 이 / 柔 : 부드러울 유 / 克 : 이길 극 / 剛 : 강할 강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   로자는 <<도덕경>>에서 이를 단단한 나무가지에 비유를 했다.    태풍이 불면 단단한 나무가지는 꺾여버리지만 부드러운 풀은 바람의 흐름대로 굽혀지기만 하지 손상이 없다.    겨울철이면 수림속 나무들이 많이 꺾인다. 어떤 흉맹한 동물이나 세찬 바람에 꺾이는것이 아니다.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하얀 눈에 나중에는 꺾이고 마는것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하는 자연의 법칙의 모습이다. 로자는 또한 유약의 대표적인 것을 물이라 하였다.    <<천하의 아무 것도 물을 따라 갈 것이 없다. 물보다 더 유약한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센 것을 꺾는 데는 물보다 더 뛰여난 것이 없다. 만물은 강하면 생기를 잃고, 약하면 충만하게 된다.>> 로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더구나 겉과 속으로 이를 모두 갖춘 <<외유내강(外柔內刚)>>이라면 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막상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로자는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처럼 물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도 흐른다. 그 겸손함 때문에 물은 큰 강을 만들고 거대한 바다를 만나 천하를 감싸는 최후의 승자가 된다. 내가 흘러야 할 때인지 아니면 잠시 쉬면서 력량을 길러야 할 때인지 물은 정확히 안다. 흐르다 웅덩이에 갇히면 력량도 안되면서 무리하게 그 웅덩이를 넘으려고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차서 그 웅덩이를 넘을 만한 힘이 생겼을때 비로소 물은 또다시 흐른다. 정말 순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물이다. 진퇴를 정확히 알고 처신하는 것은 물에게서 배워야 할 소중한 지혜다. 상대방이 강하면 피할 줄 알아야 한다. 병법에서 말하는 생존의 전략이다. 순응과 유연함은 결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다가오는 상황에 나를 맞추는 어쩌면 더 힘든 적극적인 삶의 방법일지 모른다. 세상과 한 호흡으로 순응하며 살라는 인생철학을 물에서 본다.  사람의 정신도 그렇다. 굳세기도 하지만 또 부드럽지 않으면 아니된다. 산전, 수전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때를 알고 기다릴줄 아는 물 같은 여유가 있다. 한가지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진득한 모습을 가지고있다. 만만한 여유 속에서 느껴지는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중국의 유명한 권법(拳法)인 태극권에는 <<유능극강>>의 리치가 잘 체현되어 있다.     태극권이 강함우에 유를 두는 리유는 대체로 로자의 <<도덕경>>에서 묘사된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는 원리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사족(蛇足)이지만 <<유능극강>>은 유도에서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 다른 리유는 실행자로 하여금 상대방과의 정면충돌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막강한 실전에서 항상 강함만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은 오류. 여기서 부드러울 유(柔)자를 찬히 뜯어보면 矛(창 모)와 木(나무 목)으로 구성되여있다. 창의 나무자루라는 뜻이다. 훌륭한 창은 모나게 벼린 쇠도 강해야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나무자루의 유연한 탄력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글자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한 창이기에 18반 병기에서 애용 받음은 물론이다.   2 <<차계기환(借鸡骑换)>>이라는 옛 이야기가 있다. 닭을 빌려 말대신 타고 간다는 이 이야기에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 선비의 지혜가 배꼽을 잡는다. 김씨라는 우수개소리를 곧잘 하는 선비가 있었다. 하루는 말을 달려 오랜만에 친구 집을 찾았는데 옹색한 친구가 술상을 내온걸 보니 안주를 차린것이 다만 푸르죽죽 소채(蔬菜)뿐이였다. 그럼에도 주인이 입막음으로 먼저 말하기를 <<시장이 멀어 갖추지 못했네. 그냥 들지 그래.>>. 그때 마침 마당에서는 살찐 닭 여러 마리가 모이를 쫓고있었다. 이를 보고 김선비가 한마디 했다. <<대장부는 친구를 위해 천금도 아까워하지 않는 법. 내 말을 잡아서 안주로 삼아야겠군!>> 이에 주인이 정색하며 되물었다.<<말을 잡으면 무엇을 타고 돌아가려고 그러는가?>>고. 그러자 선비가 벌씬 웃었다. <<자네의 닭을 빌어 타고 가지 뭘!>>이렇게 까박을 주자 주연상이 웃음으로 둥글어졌고  주인도 크게 자책을 머금으며 닭을 잡아서 친구를 대접했다고 한다. 촌철살인(寸铁杀人)의 재치가 사람들의 관계를 이렇게 부드럽게 만든다. 대결을 피하고 화해를 이끌어내는 웃음의 힘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3  이유극강 (以柔克刚)은 동방의 전매품만은 아닌것 같다. 동방이나 서구를 막론하고 현명한 선인들은 이미 이한 리치에 대해 잘 깨쳐 알고 있나보다.     미국 력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받고 있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의 일화다. 일리노이주 련방상원 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부와 지위의 상징인 민주당의 더글러스와 무려 7회에 걸쳐 라이벌로 맞붙게 되였다.     <<링컨이라는 시골뜨기에게 귀족의 맛을 보여주겠다.>>고 더글러스는 호언장담하였고 강력한 태세를 보이며 링컨을 향해 극언을 퍼부었다. 그런 더글러스에 맞서 링컨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더글러스는 체신장관, 토지장관, 내무장관을 력임한 큰 인물입니다. 이런 그에 비할 때 약소한 제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재산이 얼마인지 물어봅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저에게는 안해와 아들 하나밖에 없다고. 저에겐 비록 그들밖에 없지만 바로 그들은 나에게서 값을 매길수 없는 보배입니다. 게다가 저는 의지할 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오직 여러분들뿐입니다.>>    막강한 더글러스와 미풍약세의 링컨의 겨룸, 허나 결과 두 사람 중에 누가 승자로 되었나 하는것은 더 말치 않아도 다 아는 일이다. 론리는 강한것이였지만 웃음은 가벼운것이였다. 만약 링컨이 정적들의 공격에 분로로써 맞대응을 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오히려 웃음이라는 가벼운 전략, 부드러운 전략을 선택한 결과 링컨은 미국의 정치사에 가장 존앙받는 우뚝한 존재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어떤 개인의 처세준칙에도 좋지만 더 나아가서 민족과 사회 더 넓은 령역에까지도 이 리치는 적용된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부드러움이 거대하고 강한 것을 이기고 있다.  강력한 철을 통한 산업보다는 부드러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 일상에서 강한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부드러움이 해내고 있다.   고로 진정으로 강한 자는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스스로 깨는 고통을 의연히 마주할수 있는 자이다. 어릴 적 읽었던 우화 <<바람과 태양>>이 곁들어 떠오른다.     바람과 태양이 내기를 하였다. 길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게임. 결과 나그네는 강한 바람에는 옷을 벗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따스한 태양의 열기에 더는 참지 못하고 옷을 몽땅 벗었다. 이발과 혀의 생존리치! 다혈질이고 성미가 우직한 내게 있어서 전에 읽은 수권의 책보다 강하게 나의 뇌리를 때린, 작으나 큰 경구 한마디였다.   \"연변문학\" 2008년 8월호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6015400\');
36    백수지왕 댓글:  조회:3103  추천:73  2007-06-29
 . 칼럼 .   백수지왕   김 혁     1   어릴적 어른들을 졸라 옛말을 들을작시면 옛말속에 호랑이는 어김없이 등장하군 했다. 호랑이 옛말중에서도 오누이를 쫓던 호랑이가 썩은 동아줄 타고 하늘을 오르다 떨어져 죽었다는 옛말이 그중 굴지였다. 그 옛말을 각색한 동요 <<호랑이 호랑이 빨간 수수깡>>도 목청 깨져라 불렀었다. 수수의 밑둥이 쪽이 붉은 기운을 머금은 것은 엉덩이가 박힌 호랑이의 피가 묻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옛말을 듣고 어느 한번 추수가 끝난 뒤의 밭머리를 지나다가 호랑이가 불쌍해!하고 채 익지 못한 동심의 참월한 감개에 빠진적도 있다. 여하튼 백수지왕(百兽之王) 호랑이는 어려서부터 우리 어린 심방에 감복하면서도 두려운 경외(敬畏)의 대상으로 단단히 각인되여왔다.     2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 남다른 정서적 인연을 갖고 있다. 중국에서 룡, 인도에서 코끼리, 애급에서 사자, 로마에서 승냥이를 숭배하듯이 우리도 호랑이를 서기롭고 신성한 령물로 보고 있다. 단군유사에서 정착생활을 하는 곰토템족에 대응해 유목으로 이동생활하는 호랑이 는 토템족이 상징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호랑이에 관한 설이 총 635회나 나오는데 우리민족은 <<호담국(虎談國이)>>라 불릴 만큼 호랑이를 좋아했다.     민속에서 호랑이는 <<산군자(山君子)>>로 산신령으로 상징되고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령물로 간주되고 있다. 하여 매년 정월초 궁궐을 비롯하여 민가에서도 호랑이 그림을 대문에 내걸어 귀신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다. 지어 욕창이 생기거나 부스럼에도 호랑이를 그린 종이를 약처럼 붙였고 전염병이 돌 때면 호랑이 발톱을 주머니에 넣어 아이들의 목에 걸어주곤 했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저서에서 <<... 범이란 영특하고 문무가 겸전하고 자성이 있고 효성이 있으며 슬기롭고도 용맹이 놀랍고 장하여 천하에 적수가 없다. 세상의 큰 인물들은 범의 변화하는 재주를 본받고 제왕들은 범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자식들은 범의 효성을 법도로 삼고 장수들은 범의 위엄을 취한다.>>고 호랑이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피력했다. 호랑이를 비롯한 대형고양이과동물은 지질년대 상 3천만년전에 등장해 5백만년전에 분화되여 발달하였으며 아세아북부에서 발생해 남하하여 동남아. 서 아세아로 분포 확대되였다고 학계에서는 분석하고 있다.   3   중국야생동물보호협회에서 훈춘시에 \"중국동북범의 고향\" 칭호를 수여했다. “축구의 고향”, “가무의 고향”에 이은 자호할만한 칭호이다. 다년래 훈춘시는 야생동물보호사업에서 현저한 성과를 거두었다. 2001년 길림성인민정부에서는 훈춘에 성급동북범보호구를 비준설립했고 이 보호구는 2005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국가급동북범자연보호구로 승격되였다. 동북범의 개체수량도 점점 늘어 우리 나라에서 야생동북범 분포밀도가 가장 높은 구역으로 되였다.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 대한 습관과 심태는 모두 이렇게 나는 제왕이고 너는 노예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유의 발상과 공업시대의 신속한 도래로부터 우리는 언젠가는 도타웠던 이웃같은 동물에 대해 날로 멀리해 오고 있고 나중에는 동물의 적으로 전락되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만약 동물을 사람의 위치로 우리의 정신셰계에 받아들이면 그 의미는 전설이나 동화로 치부되며 혹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의 사유로 바뀌고 만다.  <<거꾸로 보기를 통해 신을 보면 나의 눈은 열리면서 너는 신이기를 그친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감성과 생명의 보살핌 자연이나 우주적 에너지와의 교감으로 지혜와 직관을 기르는 현대인의 눈을 가져보자. 그리고 기계의 소음이 파고드는 숲 속을 불안히 거니는 호랑이의 고독한 뒤 모습에서 생명의 진수와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감수하고 잃어버린 리성과 박애를 되찾아 보자. 지구라는 땅 덩어리우에 총 8개의 아종이였던 호랑이는 이미 3개의 아종이 멸종되였다고한다. 건국초기에만도 200여마리나 되었던 동북범도 이제는 20마리도 남지 않았다. 이는 중국의 국보로 불리는 참대 곰의 수량보다도 더 적은 수자라고 한다. 실로 놀랍고 가슴아픈 수자이다.   <<호랑이 호랑이 빨간 수수깡>> 어려서 장난기에 넘쳐 불렀던 노래가 오늘은 어쩐지 애수와 사색의 가락으로 변조되여 울려온다... □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293542\');
35    장백산 화산의 폭발 댓글:  조회:5693  추천:80  2007-06-29
  . 잡문 .   장백산 화산의 폭발   김 혁   1  재난영화라는 쟝르가 있다.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으로 인한 재난을 극복하는 인간의모습을 다룬 영화, 흔히 지진, 대화재, 화산폭발, 외계인의 침략이나 류성의 충돌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다. 재난영화 하면 선참 떠오르는 경전으로는 “타이타닉 호”이다. 지난세기초 사상 초호화 유람선이였던 “타이타닉 호”가 처녀항행에서 침몰한 비극을 다룬 영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또 한편의 재난영화경전으로는  일본영화 “일본침몰”이 있다. “일본침몰”은 일본렬도를 뒤흔든 거대한 지진과 련쇄적인 화산폭발로 일본 전역이 바다속으로 침몰한다는 내용의 재난극복 영화다. 내가 “일본침몰”을 맨처음 보았던것은 아마 초중시절로 기억된다. 요즘 눈부시게 발전한 영화의 특수효과에는 못 미치겠지만 지진으로 레루가 엿가락처럼 탈리고, 아스팔트길이 계곡처럼 갈라지는 특수효과 장면들은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어린 나의 어섯눈을 휘둥그레 키우기에는 족했다. 포스터와 영화의 한 장면  “일본침몰”은1973년에 출판되여 400만권이라는 판매기록을 올린 일본 과학환상문학의 거장 코마츠 사쿄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했다. 당시 사상최고인 4천만원이라는 제작비가 투입된 초특급 대작영화였다. 그 결과 6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3억원이라는 흥행수익을 거두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3월에 출판된 원작을 같은해 12월말에 제작, 개봉한것은 전례없이 이례적인 일로써 당시 얼마나 큰 붐이 일었는지 짐작할수 있게 한다.  “일본침몰”은 그이후로도 TV시리즈, 만화 등 각종 쟝르로 뻗어나가 일대 사회현상이 되면서 계속 거대 붐을 일으켰다. 그 영화가 요즘 다시 리메이크(예전에 있던 영화, 음악, 드라마 따위를 새롭게 다시 만듦.) 되였다. 발달된 미디어의 혜택으로 변강오지에 사는 나도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된지 얼마안되여 DVD로 구입하여 볼수 있었다. 또 음향가(音响街)들을 “이 잡듯 뒤져”1973년판본 “일본침몰”도 구입하는 영화수집광으로서의 수집 벽(癖)의 기쁨도 만끽했다. 30여년이 흐른뒤 리메이크되여 나온 “일본침몰”은 70년대의 첫상영과 마찬가지로 일본영화 력사를 뒤집을 정도의 파괴력을 갖추고 대대적인 이슈가 되고있다. 또 한번 일본영화 통틀어 최고 액수의 제작비인 1억5천여원이 투여되고 일본연예계 최고배우들이 총출동하고 일본 굴지의 특수효과팀과 전례없는 륙해공군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일본에서 개봉한뒤 12일 만에 제작비 전액을 회수했고 700만 관객을 동원하며 6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왜 재난영화에 이렇게 “편집광(偏执狂)”적인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있는걸가? “할리우드 묻어가기”로 엄청난 제작비로 쌓아올린 상업효과다, 온난화 현상으로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시점에 잘 맞추어졌다… 등등의 평정이 란무하지만 위기상황속 일본을 향한 일침을 보여준 영화라는데 그 최종 포인트가 있다.  단 대규모 재해가 발생했다는 가상 시나리오로 관객들을 대거 스크린앞으로 불러모은 영화는 무관심과 자기중심주의가 팽배하고있는 오늘날, 민족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으며 그 위기상황에 대해 급박하게 깨우쳐 주고있다. 온나라가 침몰이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배경으로 인간이 할수있는것은 무엇이고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영화는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일본인들만의 공동체의식, 위기의식을 진하게 엿볼수 있다.   2  몇해전, 서울에서 독립영화를 만드는 젊은 감독 하나가 연변행차를 했다가 내가 발족시킨 “조선족영화동호회”의 극성스러운 팬들과 마주했다. 그 감독이 만약에 블록버스터급(대규모 흥행을 목적으로 막대한 자본을 들여 제작한 영화.)영화를 만들 조건이 주어진다면 어떤 영화부터 만들겠냐고 묻자 나는 “장백산(백두산) 화산의 폭발에 관한 재난영화를 만들거다, 시나리오는 구상중이다”라고 답했었다. 술좌석에서 광적인 영화팬들끼리 기분으로 말해제낀 일인데 그 친구가 “김작가, 참 좋은 발상이다, 꼭 시나리오로 만들어 보라”며 귀국해서도 그냥 메일로 전화로 시나리오의 진척여부를 물어오는것이였다. 알콜의 작용으로 인한 호기도 있었겠지만 사실 장백산화산에 관한 자료를 읽고 어진간히 충격을 받은데서 나온 이야기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장백산은 화산폭발로 이루어진 휴화산(休火山)이다. 장백산의  폭발시기는 1668년, 1702년, 1903년경에 천지화산으로부터 분화된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보다 오래된것은 화산재속에 묻힌 탄화목의 탄소동위원소 년대를 측정하면 기원 960년에 대폭발을 하였던것으로 알수 있다. 그렇다면 장백산의 폭발 규모를 따져보면 대략 어느정도 일까? 장백산은 원래 3000메터가 넘었는데 마지막의 화산폭발로 인해 2000메터대로 낮아지게 되고 산봉우리가 통째로 날라갔다. 이는 지난 1만년동안 전 지구상에서 일어난 화산분출 규모중에서 4위안에 속한다고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산의 사례로는 폼페이 화산이 있다. 기원후 79년 로마의 휴양지 폼페이-헤르쿨라네움 일대에서 적어도 2만 명의 사람을 통째로 매몰시킨 화산. 그 화산의 폭발의 분출량은 약 5 – 8km3 정도라고 하는데 장백산은 100 - 120km3로 추정된다. 그 10배 이상이라는 거다. 그러니 당시 장백산의 분출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컸는지 짐작할수 있다. 장백산화산 폭발시, 화산재가 편서풍을 타고 멀리 울라지보스토크를 지나 일본 혹카이도-혼슈 북부까지 날려가 무려 5㎝ 두께로 덮여있을 정도였다고한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화산 폭발사진. 백두산과 같은급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것은 이 장백산 폭발로 인해 발해가 멸망했을것이라는 설(說)이다. 발해멸망은 926년으로 기록되여있으니 장백산 폭발시기와 미묘하게 맞물린다. 해동성국(海东盛国)이라 불리우면서 활발한 해외무역으로 동북아 최강의 선박인 300톤급 배까지 가지고있었던 발해가 일개 유목민족에 지나지않는 거란에게 허무하게 멸망했다는 강단사학의 추정은 아직도 많은 력사학자들의 의문을 자아낼법한데, 그러한 설이 나옴으로서 장백산 화산 폭발이 발해왕조를 단숨에 멸망시켰다는 론조가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장백산화산의 폭발은 당시 발해의 민심혼란과 국론분렬을 야기하여 이 “해동성국”의 국력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것으로 보인다는것이다. 이런 일이 설마 일어날까? 혹은 일어나도 대개 몇백년 혹은 몇천년뒤 일일터이니 나하고는 눈곱어치의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거다. 여기서 오늘의 화제- 우리 모두를 아우를 위기의식이 요청된다.   3  미국의 저명한 리서치(Research- 실천활동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연구 방법) 전문가인 죠지 바너가 펴낸 저서에는“주전자 속의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모 대학의 실험실에서 개구리의 신경반응 실험을 했다. 먼저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어 보았다. 즉각 반응으로 살기위해 개구리는 필사적으로 튀여나왔다. 이번에는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열을 가했다. 개구리는 상황 변화를 느끼지도 상황에 대응하지도 못하고 서서히 삶아져 죽어갔다. 죠지 바너는 이 같은 모습이 코앞에 닥쳐온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요즘 사람들의 현상태라 지적했다. 즉 현상유지, 안주, 편안함, 순간쾌락으로 우리의 령혼이 무너져가고 죽어간다는 경고이다.   죠지 바너의 경고는 곧바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 공동체사회에 요즘처럼 “위기”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실감나게 다가온 적도 없었던것 같다. 한세기 이전에 무어져 세월의 파고(波高)를 넘고 암초를 피해 달려온 “조선족호”라는 인끔높던 선박의 흔들림을 우리는 멀미처럼 겪고있다. 개혁개방과“코리안 드림”이 가져온 제반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조선족사회를 발전과 진통을 동반한 선택의 물길에 몰아넣고있다. 우리주변에서 엄연히 벌어지고있는 농촌집거지의 소실, 인구의 감소, 모어의 위축, 리혼률의 증가와 결손가정의 산생, 인재류실, 혼인난 등등의 현상들은 이미 상당히 위험한 수위에 도달하였다. 역설적으로 공동체사회의 해체와 민족의 동화라는 “위기”가 서서히 대두하고 있는것이다. 그럼에도 점점 뜨거워지는 물속에서 이변(异变)을 모른채 유유히 물놀이나 즐기는 개구리는 우리의 모습과도 꼭 닮은데가 있다. 배가 물속 암초에 부딛히고 선창에 구멍이 나 물이 새여들어고 선체가 기울기 시작함에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부끄러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자기가 일껏 일구어놓은 터전도 버리고 오로지 네온싸인이 분만해 오르는 도시의 광환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돈벌이에 환혹해 자식들의 절규도 버린채 서울행에만 급급한 사람들, 우리 말의 우수성도 잊고 외래어만을 공리적으로 또는 시체멋으로 구사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것보다는 보이는것을, 영원한것보다는 눈앞의것에 그 가치의 중심을 옮기고있다. 인간은 위기가 눈앞에 닥쳐야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하는 근성을 갖고 있다. 뜨거운 물이라는것을 깨닫고 빠져나오려할 때 솥은 이미 달구어졌고 내 몸은 뜨거운 물에 갇혀 있다. 이렇게 현실의 변화에 무감각한 사람들의 생각을 갈급(渴急)하게 사로잡는 메시지가 바로 위기의식이다. 거금을 부어 “일본침몰”이라는 시나리오를 루차 만든 일본에서 많은 성공사례의 회사들은 위기경영을 그 회사의 불가결의 경영준칙으로 삼고 있다. “닛산” 자동차회사가 바로 그 전범을 보여주고있다. 세계 제 1의 자동차 생산, 판매회사로 부상해 경제형 고품질의 차로 지구촌의 반을 일제차로 덮는데 성공한 자동차회사이다. 1990년대 후반 70년 력사를 자랑하던 “닛산”은 장기불황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회사의 문을 닫아야할 위기에 빠졌었다. 이에 회사는 최고경영자를 영입하는것에서 회생(回生)의 해법을 바랐다.   “닛산”에 부임한 신임사장 카를로스 곤은 곧 위기의식을 새로운 슬로건으로 내들었다. 회사가 위기의식을 유지하는것이 불가능하다면 종업원의 사기는 둔감해져 수익성있는 회사를 만드는데 중요한 요소를 놓치게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때문에 위기감을 체계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기업경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으며 이를 성장동력으로 련결시키려 했다.    카를로스 곤 사장 애초 곤 사장의 몰아붙이는 위기경영이 계속되자 사원들은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이때문에 그에게는 “랭혈동물”,  “장의사(葬仪士)같은 량반”이라는 악명이 줄줄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부진한 회사에 대한 재건기간중 “닛산”은 곤 사장의 강력한 리더십과 사원들 사이의 위기감으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풍토에  공장, 연구소, 부품업체 종사자들의 각고의 노력이 기울여졌고 이는 기술 축적과 신제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랭혈동물”사장의 취임후 1년만에 6800억엔 적자기업을 3311억엔 흑자기업으로 바꿔놓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가 180도로 바뀌였다. “없는 위기도 만들어 낸 경영자”가 진정 위대한 경영자임을 절감하며 너나가 엄지를 빼들었다. 이처럼 위기의식의 소요(所要)는 한개 회사 더 나아가 민족, 국가의 존립과 번영이라는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서 위기(危机)라는 글자를 다시한번 찬히 들여다 보자. 위(危)는 "위태로울" 위이다. 그러나 기(机)는 어떤가?  기는 "기회"를 나타내는 글자이다. 영어에서는 기회를 찬스(Chance)라고 하는데 바로 이 글자의 깊은 뜻을 분명히해 준다. 위기라는 단어는 이처럼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위기라는 이 단어가 갖고 있는이중성 즉 부정과 긍정, 마이나스와 플라스의 공존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면에서 깊은 바다속 진주조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진주를 품고있는데다 껍데기는 세공품(细工品)에 활용되여 보배덩이로 일컫는 진주조개, 이 조개에 모래가 들어갈 경우 조개는 두 가지 선택을 할수 있다. 하나는 모래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이물질인 모래의 침습으로 인해 진주조개는 병에 걸리거나 죽게된다. 다른 선택은 모래를 나카(Nacre)라는 물질로 변화시키는것이다. 이로서 수년간은 불편하지만 병에 걸리거나 죽지않고 조개는 진주라는 귀한 보석을 탄생시키는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위기의 상황을 진주와 같은 값어치로 탈바꿈시킬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가진 위기에 둔감한 스스로의 함정을 걷어내야 한다. 위기를 알아야 위기를 극복하려는 욕구가 분출될것이고 위기를 알아야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수도 있을것이다. 그러자면 우선 철저한 자아점검과 주변환경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있어야 할것이다. 위기의 발생, 진행, 해결과정에서 보인 응집력과 성과로 우리 공동체의 미래의 주가, 성장성을 재평가 받아야 한다. 21세기 중국속의, 더 나아가서 세계속의 조선족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문명사적 시각에 립각한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만 하는것이다. 이제 나도 단순한 렵기제재나 일회용 오락물이나 만드는 창작의취를 떠나 장백산화산폭발이라는 시나리오를 다른 창작스케쥴을 제치고 선참 완수해볼 예정이다.   "연변문학" 08년 9월호        
34    우 생 순 댓글:  조회:3723  추천:73  2007-06-29
. 칼럼 .    우생순   김 혁   1 우생순. 올들어 한국에서 널리 풍미되고있는 신조어(新造语)이다. 자고나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신조어 중에 “우생순”은 특히 사용빈도가 높은 신조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영화 “우리생애의 최고의 순간”의 줄임말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세계 최초로 핸드볼을 소재로 한 영화,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세계 최고의 명승부를 펼친 녀자핸드볼 선수들의 감동 실화를 그린 영화이다. 당시 한국 녀자핸드볼 대표팀은 력대 국가대표팀 중 최약체로 평가 받고있었다. 전력 보강을 위해 로장들까지 불러 모아야 하는 상황이였기에 아무도 그녀들이 결승까지 올라가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런 우려와 예상을 뒤엎고 당당히 결승까지 진출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핸드볼이 국기인 세계 최강 덴마크에 맞서 연장에, 재연장, 그리고 승부 던지기까지 마지막 1초까지 투혼을 발휘한 그녀들의 경기는 AP통신 선정 “2004 아테네올림픽 10대 명승부전”으로 선정되며, 전세계를 감동시켰다. 녀자핸드볼의 선전(宣战)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후로 사람들은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핸드볼 활성화 운동을 벌렸으며 마침내는 “우생순”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것이다. 2  이번 2008북경올림픽에서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꿈꿨던 한국녀자핸드볼은 다시한번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금메달을 따냈던 88년 서울 올림픽이나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보다 더 감동스러운 모습을 선사했다. 크고 작은 부상 때문에 정상적으로 뛸수있는 상황이 아니였지만 몇몇 선수는 진통제까지 맞아가면서 경기장에 나섰다. 극강의 순발력과 돌파력, 더불어 대세의 흐름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넓은 시야, 무서운 집중력의 발휘, 폭발적인 돌파로 그 자리를 선점하고야 마는 순발력으로 신기에 가까운 재능을 펼치며 상대의 꼴문을 한번 또 한번 헤갈랐다. 노르웨이와의 4강전에서 경기종료벨이  울리는 순간 까지도 공을 던져 꼴문을 갈랐으며 마지막 3~4위 전에서 웽그리아를 33대28로 제압하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덩치가 크고 산만한 유럽선수들에 비해 작고 여리고 힘이 부족하지만 그들에게 강한 정신력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심판의 오심속에서도 감동의 투혼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금메달 보다 값진 동메달을 한국녀자핸들볼은 끌어낸 것이다.  3  발달한 미디어 덕분에 변강의 오지인 연길에서 나도 “우리생애의 최고의 순간”을 DVD로 구해서 볼수있었다. 스포츠영화를 잘 보지않던 나에게 직접 육안으로 보는 경기보다 재미없을것이라는 선입견, 그 섣부른 편견조차 부끄러워하게 만든 영화였다. 역경을 헤치고 끝내는 1등을 한다는 그런 결론이 뻔히 보이는 식이 아니였다.세상은 오직 1등만을 기억한다는 론리로 사람을 몰아붙이고 폐기처분하는 요즘의 사회에서 인생의 정답은 최고 혹은 맨 웃자리가 아닌 최선에 있다는, 1등만이 대우받고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이 현실이지만 때로는 1등보다 더 값진 2등이 있다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 영화였다. 영화때문에 핸드볼이라는 경기를 알게되였고 이번 올림픽에서는 눈앞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각종 경기중에서 핸드볼 경기만은 빼놓지않고 모조리 관람했다. 사람들은 흔히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다. 긴장ㆍ괴로움ㆍ슬픔ㆍ기쁨 등 인간의 진솔한 감정들이 스포츠 경기 안에 농축되여 있다. 스포츠의 순간 순간이 곧 삶의 한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자리매김 되는 자리이기때문이다. 올림픽현장에서 우리들의 생에 “스카이 슛”으로 꽂던 그 섬광같은 순간은 정말로 찬란했다.        
33    개고기 소고(小考) 댓글:  조회:3520  추천:73  2007-06-29
. 칼럼 .  개고기 소고(小考)  김 혁  연변의 미식거리(개거리)와 개고기 료리 1 연변에서 특색음식을 론할라치면 뭐니뭐니해도 개고기가 장가락으로 꼽힌다. 귀한 손님을 대접할때 혹은 경사가 있을때 조선족은 흔히 개를 잡아 푸짐한 상을 차리고 륭숭(隆崇)함을 표시한다. 현재는 가정에서 들볶으며 만들기보다는 전문 개고기집을 찾아 개고기료리를 원껏 맛볼수 있다. 자치주수부 연길시에 “개거리”로 불리는 미식거리가 있다. 연길시 해란로 중부구간에 위치, 300메터 정도의 거리는 량켠이 모두 개고기집으로 조성되여 있는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며 실내 인테리어도 호화스럽다. 한마디로 연변의 개고기료리 맛은 환상적이다. 고기, 내장, 갈비, 껍질 등을 부위별로 보얀 국물에 곁들어 기호에 맞게 맛볼수 있다. 그리고 먹을때엔 개내장과 갖은 양념을 다져서 만든 \"개즙\"이라는 소스를 곁들여서 먹는다. 독특한 맛과 특수한 재료 및 독특한 제조공예를 갖고 있는 개고기는 이미 연변에 가면 꼭 맛봐야 하는 진미로 연변을 징표하는 대표음식의 하나로 떠올랐다.   2 인류의 력사 이래로 개고기는 농경사회의 주된 음식이었다. 문화인류학자 마빈 헤리스는 “농경사회에서 소는 중요한 로동 제공수단이기에 서민이 식용할수 없는 가축이였고 대신 개가 육식의 섭취원이 되여왔다”고 개식용에 관해 언급한바 있다. 개는 인간이 사육한 최초의 가축이며 “본초강목”에 의하면 소, 말, 양, 돼지, 닭과 함께 6축(畜)의 하나로 선사시대부터 길러서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사마천의 “사기”가 개 식용의 최초 기록이다.    개고기는 남북에서 이미 하나의 음식문화로 성장했다. 한국의 개 식용에 관한 최초의 외국의 소개는 1847년 프랑스 선교사 달렌이 쓴 “조선 교회사” 첫머리에 “조선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는 개고기다”라고 씌여있어 예로부터 조상들은 개고기를 즐겨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궁중 수라상의 식단에는 구증(狗蒸)이라는 음식이 있고, 민간에서는 “구장”을 더위를 쫓는 최고의 음식으로 쳤다.  “동국세시기”에는 “개를 삶아 파를 넣고 푹 끓인 것을 구장(狗醬)이라고 한다. 구장에 고추가루를 타서 밥을 말아 시절음식으로 먹는다.”고 적혀 있다. 개고기가 임금님부터 서민들까지 모두에게 동물성 단백질의 중요한 공급원이였다.조선에서는 현재 개고기를 단고기라 하여 각종 메뉴를 만들어 부페식으로 판매하고있는데 단고기 료리만 해도 40여 가지가 넘는다고한다. 중국에서는 광동성의 개고기 료리가 유명하다. “황육”이라 하여 개의 부위에 따라 여러 가지 료리가 있고 그 재료로 누렁개를 최고로 친다. 일본에서도 예부터 즐겨왔다고한다. 일본인은 소고기보다 개고기를 더 앞순위에 놓는다. 이로 미루어볼때 중국•한국•일본의 개식용의 력사는 아주 오래 되여있음을 알수 있다.  한국의 보신탕    평양 단고기   “개고기 국물은 발잔등에 떨어지기만 해도 보약이 된다”는 민간속담이 있다. 일상에서 보양식으로는 단연 닭으로 만든 삼계탕과 개고기로 만든 보신탕을 꼽는다. 허준이 쓴 동의보감을 보면 “개고기는 성(性)이 온(溫)하고 미(味)는 산(酸)하고 무독(無毒)하다. 오장(五臟)을 편안하게 하고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여 기력을 증진시킨다. 또한, 양기를 도와서 양물(陽物)을 강하게 한다”고 적혀있다. 의사들도 수술후 환자에게 개고기를 권하는 것만 봐도 병후 회복식으로는 가장 좋기 때문일것이다. 요즘은 개고기료리메뉴가 점점 다양해져 개고기에 두부, 농마국수, 물만두,  부추, 깻잎, 고추, 파, 마늘, 들깨 등과 함께 곁들어 다양하게 먹으니 당연 몸에 좋은 보양음식일수밖에. 개는 예로부터 약용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개의 털, 뼈, 이빨, 발족, 뇌, 심장, 간장, 쓸개, 신장, 고기, 피, 유즙, 위결석, 누렁개의 생식기 및 백구시(白拘屎)라 하여 흰개의 똥까지 약으로 사용되여 왔다. 개고기의 식용은 단 아시아권만이 아니다.폴리네시아에서는 개고기를 신과 나누어 먹을 정도로 좋은 음식이라 여긴다. 폴리네시아의 타히티와 하와이 군도에서 사제들은 중요한 공식 행사에 개를 많이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3 일전에 펼쳐진 제4기 중국.길림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에서 조선족 특색음식인 개고기 계렬제품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개엿, 보신탕, 개고기 조미료 등 개고기 계렬제품들이 선을 보여 연변식품 전시구역은 특색음식을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장춘, 청도, 북경 등  국내 조선족 집거지에서 대리점 운영의사를 밝혀오기도 했다. 또한 중국식품공업협회, 중국소수민족일용품협회가 주최하고 연길시인민정부가 주관한 소식공개회가 일전 신화통신사, 인민일보, 중앙텔레비죤, 경제일보 시나닷컴 등 유명매체에서 참가한 가운데 수도 북경인민대회당에서 펼쳐졌고 연길시는 영예롭게도 중국조선족식품기지로 선정되였다.  연변에서 출품한 개고기 계렬 제품 이러한 훈풍에 편승하여 우리의 음식문화를 징표하는 개고기가 상품화, 규범화, 과학화의 일로를 활보했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정부, 기업, 전문가 손잡고 브랜드를 창출해 내며 상품화개발진척을 추동한다면 개고기를 비롯 우리민족의 빼어난 음식들이 신형의 산업으로 부상할수있을것이며 그 전망도 밝을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식들을 민족적이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음식문화의 한 표본으로 가꾸어 다양한 음식문화를 꽃피울수 있기를 바라본다.   \"종합신문\" 08년 9월 15일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23135\');
32    악플과 선플 댓글:  조회:3159  추천:73  2007-06-29
칼럼  악플과 선플  김혁     1 긴 국경련휴를 맞아 들뜬 우리들의 명절기분을 강타하며 하나의 충격적인 비보가 해외에서 전해왔다. 한국 톱스타 최진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팬들을 울리는 소식이였다. 최진실은 비단 한국에서 “국민배우”로 통할뿐더러 아시아권에서도 인정받는 월드스타이다. 80년대 중기, 연변에도 인입되여 상영되였던 한국드라마 “질투”와 “그대 그리고 나”에서 조선족관중들은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이 녀배우에 대해 알게되였고 한국드라마가 주는 묘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직 “한류”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않았던 그 당시, 중국관중들에게 있어서 최진실은 명실공히 “한류”를 이끌어낸 “한류스타”의 1인자였었다. 2 최진실을 죽음으로 내몬 요인 중의 하나가 인터넷상의 악플이라고 한다. 인터넷 등에 떠도는 자신에 대한 루머(风说), 괴담과 악플에 대한 심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매여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시다싶이 여기서 댓글은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 바로 밑에 즉시 남길수 있는 짧은 글을 말한다. 덧글, 코멘트(comment), 리플(reply)이라고도 한다. 흔히 동감의 글이나 론리적인 반박글 그리고 짦은 감상평등이 위주이다. 인터넷 댓글은 네티즌으로 하여금 기성언론이 제공해주는것을 받기만 하던 립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자유롭게 여론을 조성할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불거졌다. 댓글은 컴퓨터를 마주하고 키보드만 두드리면 임의로 올릴수 있다. 이렇게 쓴 글이 려과장치 없이 바로 인터넷에 오른다. 한데서 그중 적지않게는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쓴 허위ㆍ비방의 글들도 섞여 오른다. 따라서 지독한 감정의 배설물들이 인터넷의 바다를 오염시키고있는것이다.이런 글을 가리켜 악성댓글 즉 악플(악성+reply) 이라고 한다. 악의적인 소문처럼 무서운것이 없다. 인터넷의 첨단기능을 타고 발없이 순식간에 퍼진 소문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더욱 과장되고 악화되여 멀쩡한 사람을 들볶으며 종내는 당사자의 명예와 인격까지 매장하고 만다. 악플이 가진 영향력 내지 파괴력은 상상을 넘어선다. 악플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악마성에 대해 치를 떤다. 익명성이라는 방패를 앞세워 상대를 단정적으로 비난하고 저주하는 악플의 행태는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새로운 악을 드러내 보인것이다. 3 평범한 가정의 “배고픈 소녀”로부터 일약 스타덤에 올라 “최진실신드롬”을 일으키며 한국대중문화의 우상으로까지 떠올랐던 한 나라의 국민배우가 40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사건은 가히 충격적 이다. 뉴욕 “타임”스며 중국의 소후닷컴 등도 이례적으로 최진실의 죽음을 대서특필하며 악성댓글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최진실의 죽음은 욕설과 비방, 저주가 다반사로 범람하는 인터넷 공간을 돌아보게 한다. 멀티미디어시대에 동조하여 중국조선족도 인터넷대렬에 적극 합류, 여론, 기업계, 상업계, 민간단체는 물론 개인들까지 사이트, 까페, 블로그, 미니홈피 등을 통해 업체를 홍보하거나 활동을 펼치고 일상에서 자신의 감성의 마당을 꾸리기도 하면서 인터넷의 막강한 힘을 활용하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터넷도 여느곳과 마찬가지로 악풀의 폐해는 엄연히 존재하고있다.우리지역만의 감성과 말투와 격식으로된 악의적인 댓글이 수없이 올라오고 있고 이로 인한 피해자는 변명조차 할 기회도 없이 고통속에 신음하고있다. 악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악플을 근절하기위한 인터넷 실명제, 사이버 모욕죄 신설 등 현실적인 방안이 해내외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제도 장치가 아직 근본적인 실효성을 보지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들어 국민배우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악플을 없애고 선플달기 운동을 벌이고있다. 선플(善+reply) 즉 선하고 긍정적인 의미의 댓글이다악플을 차단하려는 도덕적 장치로서 네티즌 스스로 각성하고 정화하겠다는 움직임, 인터넷의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모습들이 참 보기에 좋다. 우리의 네티즌들 저마다 글이나 사진, 동영상을 올릴 때 잠간 마우스를 멈추고 한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내 글이 사실에 기반한 것일까, 내 글로 인해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아야한다.치렬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너무 고달프다. 그렇게 짧은 인생인데 우리는 비난하고 질투하고 부정하는것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랑비하고 있는것은 아닐가.인터넷을 사랑하는 우리의 네티즌들이 이제부터라도 찬물 끼얹는 악플보다는 따뜻한 격려의 선플을 남기며 함께 인터넷의 무대를 활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합신문\" 08/10/13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23144\');
31    인간의 렬전 댓글:  조회:4140  추천:73  2007-06-29
  . 잡문 . 인간의 렬전 (列傳) 김 혁   1 나의 서재에 꽂힌 책들중에 인물전기와 평전들이 적지않다. “카프카 전”, “풍월의 수재- 서지마 전”, “나의 련인- 마그리트 뒤라스” “윤동주평전”, “로신평전” 등 명작가들로부터 “반 고흐전”, “프리다 칼로” 등 비운의 화가들, “스티븐 호킹스의 과학생애”, “사랑으로 가는 녀인- 마더 테레사 수녀’,등 과학계와 종교계 인사들, 그리고 영국기자 필리프 쇼트의 “모택동 전”, “완미한 사람- 체게바라” 등 혁명가들의 전기물도 있다. 내가 맨 처음 읽은 전기물은 어쩌구려 소학생의 나이와는 걸맞지않게 공자의 전기였다. “상가집개 공자(丧家犬 孔子)”라는 제목의 공자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다룬 전기, 하지만 다행인것은 그 야유와 비속어(卑俗语)로 점철된 문투중에도 공자의 생애는 그런대로 일괄적으로나마 그려져 있었다. 당시는 공자를 봉건적 루습의 근원이라 공격하여 중국 전역에서”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 즉 공자와 림표를 비판하는 운동이 거세차게 일던때 였으니 올바로 된 위인의 전기 한권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형국이였다. 요사이 경전 “론어”의 대중적 해독독법이 십분 류행되면서 다시 공자에 관한 전기를 찾아 읽었다. 화동사범대학 교수 진위평의 “공자평전”을 한국 미다스북스의 2005년판으로 구해 읽었다. 70년대에는 한낱 몰락한 노예주계급의 리익을 대변하는 유심론 사상가에 불과해져 “상가집 개”로 혹평받던  유교의 개조(开祖). 중국 문화의 구심점으로서 동양 2천5백년 력사와 문화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쳐온 공자를 제대로 읽으면서 감개를 머금지 않을수 없었다.  어려서 피폐했던 당시의 독서풍토에서도 재미있게 읽은 인물전기로는 또 춘추전국시대 법가의 대표인물인 “상앙 (商鞅)의 이야기”가 있다. 번역서로 읽었는데 통일국가 진(秦)을 세우는데 공헌을 바친 한 사상가의 삶을 알고 읽은것 아니라 유생들의 코를 베고  말에 매달아 거렬형(车裂刑)에 처하는 끔찍하면서도 생광스러운 이야기에 끌려 읽은것이였다. 근년들어 진짜 전기다운 전기를 읽은것은 “체 게바라 평전”이다. 아르헨띠나의 한낱 의학도로부터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것보다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는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 판단하고 혁명가로 거듭나 파란의 삶을 살다간 그의 생애에 감동한 나머지 편역본으로 된 평전을 읽은뒤 다시 포토로 엮은 그의 화전(画传)도 또한번 사들였다.    검은 베레모에 덥수룩한 수염, 랭소적으로 입가에 물린 려송연, 비쩍 말랐지만 형형한 눈빛… 이젠 세계적으로 캐릭터화 된 그 형상에 깊이 매료되였고 불굴의 투쟁의지와 만난을 헤쳐나가는 추진력과 결단력, 그 열정적인 자세에 존경을 머금었었다. 요즘에는 직업적인 연고로 문학, 예술계 명인들의 전기를 주로 읽는다. 로신과 동시대인물인 조취인이 쓴 “로신평전”, 송우혜의 “윤동주평전” 등을 세세히 정독했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읽으면서 우리 조선족작가들에게는 왜 여태 인물전기 쟝르가 소외되고 있는지에 커다란 유감을 가졌었다. 2뒤미처 우리문단에서도 인물전기서들의 “봇물”이 터진듯 하다. 우선 연변대 김호웅 교수와 김학철옹의 자제분인 김해양의 공저로 된 “김학철 평전”이 중후한 모습으로 나왔다.평전은 김학철옹의 문체를 그대로 닮았다. 조선족문학의 거목이며 비운의 작가인 김학철옹의 삶이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비장하게 손에 잡힐듯 그려져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초창기지도자의 한분인 “조룡호 전기”도 나왔다.  전기는 자치주 주장직을 력임했던 조룡호의 항미원조시기로부터 자치주창립, 문화대혁명, 개혁개방시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많은 려정을 비교적 완정하게 기록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발전력사를 료해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평판을 받고있다. 장편인물전기 “중한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도 출간되였다. 40만자에 달하는 작품은 중한수교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한 한 애국화교의 노력을 진실하고도 감동적으로 기록했다. 연변대학 전 총장 림만호 평전도 최근 발간됐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라는 부제가 붙은  평전에서는 연변대학교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한 교육자의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자치주 부주장을 지냈던 최채에 대한 인물전기 “불멸의 영령”도 올해부터 대형문학지 “장백산”에서 인기리에 련재중이다. 문학적 감동과 학술적 객관성을 함께 지닌 묵직한 분량의 인물전기들은 근년래 침체화, 단일화 경향을 보이던 우리 문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입해 주고 있다.   3 앞선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기술하고 있는 인물전기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쟝르로 우리가 새로이 주목할 만한 령역이다. 인물의 전기를 읽는것은 그속의 사람들을 흉내 내거나 비판하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군(群)에 싸여있는  나의 존재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지도 역할을 할수가 있을 때 더 보람이 된다. 즉 시대와 력사를 따라가야 한다는 초조함이나 렬등감의 상쇄가 아니라 당대의 전체 지형속에서 나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어떤 메시지나 교훈을 얻는데 유용할것이다. 어쨌거나 타인은 우리의 거울이다. 나의 주변에 얼마나 훌륭한 인물들이 많은가를 알면 살맛이 나고 그것을 력사를 통해 알면 용기며 신뢰도 더 해진다. 많은 인물들에 자신을 비출수록 자신이 자랄수 있는 토양이 풍요로워지는것이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볼수 있다.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 옛날부터 초상그리기를 진영(真影)이나 영정(影幀), 화상(画像)이라 불렀다. 얼굴 그림은 내면적 정신세계를 담아야 그 진가가 인정되였다. 마음까지 아우른다는 뜻에서 초상화그리기를 사심(写心)이라고도 했다.따라서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리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기는 빈틈없는 론리와 현실에 대한 탁월한 리해력을 바탕으로 한다. 작중인물의 생애와 사상의 얼개를 짜 맞추는 과정에 그 정신과 마음을 온전히 기술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인 것이다. 살펴보면 우리 문단에서 인물전기서들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다. 주로 상업인이나 기업인에 대한 인물전기가 나오긴 했으나 대개 기업인 자신들의 요청에 따라 2류, 3류 작가들이 필봉을 허비하여 쓴것이였다. 문인들은 흔히 랑만주의 세계관을 가져 물질적 성과를 중시하는 상계, 기업계의 특성을 싫어한다. 때문에 기업인들을 위한 전기물을 쓰는것은 그닥 광채롭지못한 일로 간주되여 못마땅해하는 일각의 풍조가 한때 있었다. 작가들이 잠깐 인터뷰하고 나서 글 솜씨를 발휘하거나 기업인들이 건네 준 일방적인 자료로 꾸며쓴 쪽이 많아 많아 작품성의 “함량 미달”이라는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또 지나치게 미화된 내용으로 일관하여 왜곡이 많은데서 기업인 창업자의 발자취를 조명하려는 애초의 본뜻과는 달리 독자들의 반감을 초래해 이 좋은 쟝르를 폄하(貶下)의 시선으로 보았던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인물전기들은 자료가 빈약하기도 하거니와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거나 부정으로 일관 짓는다. 또 쓰고자 하는 사람의 삶의 론리가 어긋나 있고, 협소한 안목과 어수룩한 필재가 혼재할때 진정한 인물전기의 품격과 괴리될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감이나 질시가 있긴했지만 그렇다고 인물전기 집필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적어도 특정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남긴 위인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역할 모델”로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후세에 빛으로 남을 인물이 어디 한두사람뿐이겠는가. 흔치는 않을지라도 그런 위인은 각 분야에 있게 마련이다. 나라, 민족마다 예술가는 물론 학자, 종교인, 기업인, 군인, 정치 지도자 중에서 위인으로 내세울 만한 인물이 적지 않다. 사회가 거대하고 복잡해질수록 불확실성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잇는 현대인들은 한 시대를 놀래웠던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는것 같다. 그 시대를 온몸으로 껴안아 력사와 하나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네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우리 현대사의 간난(艰难)과 궤를 같이하고있는것이다. 인간의 가능성이 극대화된 그런 력동을, 그런 격정을, 그런 총체성을 이 사회가 어찌 잊을수 있겠는가! 그러고보니 우리는 위인들의 생애와 그들이 남긴 유,무형의 유산 등을 사회적 자산으로 삼아 재창출하는 일에 소홀해 왔다. 이처럼 작가들의 내공이 배여 있는, 쓰고저하는 인물의 공(功)과 과(過)를 엄밀히 평가하고 진실을 바라보는 랭정과 온유와 절제의 품격이 두드러진 인물전기수작(秀作)을 읽을수 있기를 우리의 독자들은 바라고 있다. 변혁기 흔들리고있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할 때다. 작가들의 필끝에 누가 선정되느냐에 따라 그 영향과 함의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에 따라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들을 새롭게 투영하여 만방에 자랑스럽게 과시해야 한다. 그것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 것이다. \"연변문학\" 2008/11월호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6481716\');
30    위험한 도피 댓글:  조회:4049  추천:73  2007-06-29
 . 잡 문 . 위험한 도피 김 혁   하나  꽃은 지고 가을은 어느새 내곁으로 다가와쓸쓸한 거리를 바라보네. 이대로 영원히 잠이 들었으면빨간 장미꽃잎은 시들어 하나둘 떨어지네내가 좋아하는 이 노래는 한국드라마 “장미빛 인생”의 주제곡이다.프랑스의 대중적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가 맨처음 불렀던 샹송. 심금을 울리는 애끓는 목소리의 가창력을 가진 그녀의 이 노래는 창작되여 수십년동안 여러 영화에서 불려지다 한국드라마 “장미빛 인생”에서도 영화의 애절한 줄거리와 꼭 사개맞게 번안(翻案)되여 불려진것이다. “장미빛 인생”은 남편에게 리혼맞고 암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 억척아줌마의 생을 그린 드라마, 주역 최진실이가 온몸을 던져 연기인생에 진정성을 불어넣어 준 화제작이다. 에디프 피아프의 노래도 좋아하지만 드라마의 주역 최진실도 참 좋아하는 배우이다. 최진실은 비단 한국에서 “국민배우”로 통할뿐더러 아시아권에서도 인정받는 월드스타. 80년대 중기, 연변에도 수입되여 상영되였던 한국드라마 “질투”, “그대 그리고 나”에서 조선족관중들은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이 녀배우에 대해 알게되였고 한국드라마가 주는 묘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직 “한류”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않았던 그 당시, 중국관중들에게 있어서 최진실은 명실공히 “한류”를 이끌어낸 “한류스타”의 1인자였었다.    그런 최진실이가… 죽었단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긴 국경련휴를 맞아 어딘가 들떠있는 명절기분을 강타하며 날아든 하나의 충격적인 비보. 최진실에 이어 한국에서는 한달사이에 연예인 4명이 련이어 자살한 소식이 연예정보지와 사이트들을 도배하다 싶이 하고있다. 을씨년스러운 가을, 자국 나아가서 아시아권에서인기를 누리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기라성같은 유명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 비보는 남의 일 같지않게 환절기의 쓸쓸한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둘 똘스또이의 장편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안나는 새로운 사랑을 지향하지만 귀족사회의 지탄을 받고 철길에 몸을 던져 애젊은 목숨을 끊는다.괴테의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사랑을 얻지못한 자기 삶을 권총자살로 결속짓는다. 문학작품에서 자살은 이렇게 랑만적인 죽음으로 그려진다. 흐린 마음으로 구차하게 자료를 더듬어보니 문인들중 스스로 목숨을 끊는극단적인 방법으로 문학사의 행간에 혈흔(血痕)을 남겨놓은 이들이 적지않음을 발견하게 되였다. “무기야 잘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불후의 명작을 썼고 “로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는 렵총자살을 했고 영국의 녀류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코트주머니에 돌을 가득 주어넣고 즐겨 거닐었던 고향의 강에 빠져 죽었다.  “설국”, “이즈의 무녀” 등 눈빛같이 아름다운 감성의 작품으로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근대 일본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하였던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가스관을 입에 물고 죽었고 그에 앞서 그의 제자인 소설“금각사”의 저자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술잔들어 달을 읊조리며 천고의 절구를 남겼던 리백은 달빛 어린 호수에 빠져 죽었고 시에서 리상향을 노래했지만 결국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김소월은 젊은 나이에 음독자살을 했다.    헤밍웨이 버지니아 울프 가와바다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코  리백 김소월 문인들뿐 아니다. 인류력사의 여러 분야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중에는 자살자 대오에 끼여든 사람들이 많다. 고대 애급의 녀왕 클레오파트라, 비운의 화가 고흐, 천재적인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나일론의 발명자 캐러더즈,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몬로, 홍콩배우 장국영… 외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도 있고.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같은 위인도 한때 자살충동으로 고뇌했으며 29살 때에 한 주간지에 “자살의 독백”이란 자살에 관한 시까지 쓴것으로 알려졌다. 인류의 력사와 동반해 온 자살의 음달진 력사를 더듬어 보면-중세 유럽에서는 자살을 신에 대한 모독으로 해석하고 자살을 터부시(꺼리여 피하다. 금기시하다)해 왔다. 이를 범죄시해 자살한자의 시체훼손이나 재산몰수를 통해 자살을 막으려고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에서는 자살기도자의 재산을 몰수하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서 “햄릿”의 애인 오필리어는 자살했기 때문에 인부들이 무덤 만드는 일을 거부하는가하면 단테의 “신곡”에서 마루투스 카토는 자살 리유 때문에 련옥(炼狱)의 문지기로 되고만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자살하여 죽으면 후날 다시 태여나 그가 자살했던 그 한계 상황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고 설파한다. 그의 앞에 놓여있는 한계 상황은 도저히 회피할수 없는것이며 아울러 반드시 극복해 넘어가야지 자살이나 그 어떤 수단으로도 회피할수 없게 되여있다. 그래서 불교적으로 봐도 자살은 부질없는 짓이다. 과거 동양사회에서 남자는 충신이 되기 위해 녀자는 렬부(烈妇)로 남기 위해 종종 자살을 택했다. 충성과 정절은 유교의 미덕으로 렬녀나 충신이 되기 위한 자살은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유교에서 자살이 찬양된것은 아니였다. 유교경전 례기(礼記)에는 자살을 금기시하는 조항이 들어있다. 사람이 죽었을때 조상하지 않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는데 포함된것의 하나가 자살이였다. 중국에서 청조(淸朝)때에는 과부들이 자결하는 의례를 금지하는 법이 공포되기도 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은 관가로 가서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그 상황에 대해 조정에 청원하고 기다려야만 한다”고 법에 적혀있다. 철학자들의 자살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칸트는 자살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의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헤겔도 자살을 “절대정신에 헌신해야 하는 개인의 의무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자살은 삶의 종말이라고 간주될수 없다. 자살은 내 삶의 행위이기에 스스로 의미를 요구하는데 그러한 의미는 미래만이 줄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내 삶의 마지막이기에 미래를 부정한다.  자살은 내 삶을 부조리 속에서 몰락하게 만드는 부조리이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도 자살에 대해 흉한 죽음으로 보았다.“자살하는데 있어 취할것이 뭐가 있나? 자살하려면 의(义)에 합당해야 한다. 례컨대 남편이 맹수나 도적따위에 당해 죽었을때 안해가 호위하다가 함께 죽었다면 렬부다. 그러나 남편이 천수(天寿)를 누리고 죽었는 데도 안해가 따라 죽으면 제 목숨을 끊는것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죽음이 의에 합당한 것이냐? 천부당만부당이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것이 천하에서 제일 흉한 일이라고 여긴다.”다산 정약용의 “렬부론”의 한 대목이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도 “자기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맞서 싸워야할 악과 두려움을 감당해 낼 용기가 부족하다는것을 뜻한다. 살아만 있으면 상황은 어떻게든 개선되고 호전될터지만 죽음은 상황을 전혀 개선시키지도 못하고 새로운 악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다.” 고 말했다. 하지만 인류의 지속적인 두절(杜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사연과 방식이 다양하고 기구하게 자살은 우리가 살고있는 이 터전에서 오늘도 자행되고있다.   셋  세계보건기구와 국제자살방지협회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자살은 교통사고와 각종 재난, 질병에 이어 13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사인(死因)에 속한다. 통계상으로 자살률이 높은 지역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쪽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자살자가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불명예나 량심의 상처 또는 의리나 신념을 리유로 한 자살을 은연중 미화하고 원인행위를 용인해주는 관습이 있는것 같다. 그래서 “셋부꾸”- 즉 할복(割腹)같은 타민족에게 볼수없는 자살의 류형도 엄연히 전해오고 있는지 모른다. 중국에서도 상황은 심각하다. 중국심리위기 연구 및 예방센터에 의하면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25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특히 15-34세 년령층에서는 압도적인 사인이 되고 있다. 또 매년 200만명이 자살하려다 실패한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폐암과 교통사고가 사망원인 제 1위, 자살로 인한 사망이 사망원인은 제 5위에 이른다. 이렇게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세상 살아갈 리유도 재미도 없고 힘들고 지쳐서, 하려고 하는 일들이 뜻대로 안돼서 등의 여러가지 리유로 목숨을 끓는다. 학자들은 자살적 태도의 발생 리론을 크게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리론으로 나뉜다. 심리학가들은 “가장 두드러진 경제, 사회적 변동, 즉 고도의 도시산업화가 현대인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어차피 한정된 세상을 살고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를 살인함으로써 주어진 삶에 허락되지 않았던 마침표를 긋는 행위- 자살은 인간만이 저지를수 있는 “범죄행위”일 것이다. 자살은 자기존재와 역할에 대한 전면 부정이다. 자살은 자기 존재를 소멸시키는 행위이므로 절대적 정체성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폐기하는것이다.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사자가 느끼는 절망감은 엄청났겠지만 자살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더구나 탈출구가 될수 없다. 죽음의 의미는 당사자보다도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므로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짐을 친지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남은 자들은 그 공백감을 힘들게 채우지 않을수 없다.  때론 삶이 죽음보다 더 힘들다.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자살이 행해지곤 한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을 향해 부단히 도전하는것이 죽음에 대한 최선의 방어라고 할수 있다. 잘못된 인식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는 노력으로 얼마든지 개선시킬수 있다. 자기 파괴의 다른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모른척하고 홀로 떠나는것만큼 리기적이고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사람에 따라 그 끝이 언제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 앞에 누구나 동등한 립장이라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다.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행보에서 누구나 안정된 삶끝에 자연스런 운명(殞命)을 기대해 보지만 죽음은 인간의 의지를 잘 따라주지 않는것 같다.  종종 영예로운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보기도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연고로 스스로 우리 곁을 훌쩍 떠나버리는 이들을 보는 마음이 석연치 않다. 바람도 한결 차가워지는 이 가을, 한국작가 리외수의 따뜻한 시 “자살을 꿈꾸는 그대에게”를 특별히 뽑아 읊어본다. 그대여 인생은 서러운데 별은 저리도 눈부셔 눈물만 나는구나. 이 뜨거운 삶의 담벼락에 기대앉아 서로의 이를 솎아주듯 나는 그대와 얘기하고 싶다 희망은 과연 없는것일까? 과연 세상은 눈곱만큼도 살가치가 없는것일까? 나는 지금 그대 눈물이 마른자리 눈곱을 떼여주며 눈곱만큼 작은 세상의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   \"연변문학\" 2008년 11월호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6481697\');
29    노벨의 잔치, 그리고… 댓글:  조회:3947  추천:73  2007-06-29
. 잡문 .  노벨의 잔치, 그리고…  김 혁     Ⅰ  황금의 10월, 해마다 이맘때면 기다려지는것이 있다. (“몽룡의 알성급제를 바라 기다리는 춘향의 심정”이랄가). 은근히 기다려지게 되는 그것은 바로 세계인의 문학잔치 노벨문학상의 발표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장 마리 르 클레지오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여난 업적을 남긴 작가로 새로운 출발과 서정적 모험, 관능적 황홀감, 인간애 탐험등에 몰두한 작가”라고 그 선정리유를 밝혔다.  르클레지오  9일 저녁 8시, 수상자가 밝혀지자 곧 웹에 떠오른 소식을 서둘러 나의 문학 블로그(http://blog.daum.net/ckkh99)에 담았다. 수상자의 략력이며 작품해제며 사진들을 정성껏 퍼서 소식은 종합해서, 조금 작아보이는 인물사진은 포샵처리를 해서 큼직하게 올렸다. (올해 수상자는 프랑스 배우 알랜들롱과 어딘가 비슷한 반듯한 얼굴이다. 지성과 미모가 빛나는 모습.) 이튿날도 사이트들마다의 문학코너를 메우며 쏟아지는 르 클레지오에 대한 평문들을 뽑아 블로그에 올렸고 내가 꾸리고있는 신문의 문화면에도 대서특필해 실었다. 마냥 문학적 행위에 걸신들려있는 나에게서 그 과정이 그렇듯 신날수가 없다. 이제 남은건 내가 읽을수 있는 어종(语种)으로 번역돼 나오는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들을 읽는 작업이다. (솔직히 변강의 오지인 이곳에서 국내국외의 이슈작이나 문학상 수상작들을 시효성있게 접해 읽기란 쉽지않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我的名字叫红)”은 상해인민출판사의 판본으로 2006년 11월에 출판되였지만 이곳까지 책이 당도하고나니 2007년 4월께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고,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의 작품도 “고양이는 정말 별나(特别的猫)”를 겨우 구했는데 절강문예출판사에서 2008년 3월에 출간된 판본을 올해 7월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읽자면 아마 명년 봄께 정도까지는 기다려야 할것같다. (그의 작품소개를 보노라니 “혁명”이라는 작품이 읽고싶어 진다. 태생지인 프랑스를 떠나 섬나라 모리셔스로 이민, 그 섬에 정착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장장 5대에 걸쳐 묘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자서전적인 소설, 그 력사와 애환이 우리 조선족들이 겪은 삶의 질곡과 사뭇 흡사하니깐.)  Ⅱ  올들어 노벨문학상 “잔치”를 기다리고 “주객”, “하객”으로의 참석을 목마르게 기다렸던 한국은 또 한번 그 문턱에 가닿지 못하고 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해외언론 등에서 유력후보로 거론돼 기대를 모아왔으나 시인 고은에게서 올해도 노벨문학상은 비껴갔다. 4해째 반복되는 일이다. 잔뜩 부푼 기대로 수상후보로 거론된 고은이나 황석영의 집앞에 죽치고 앉아 발표를 기다렸던 기자들이 아쉬움을 씹으며 되돌아 갔다. 고은 문학인들의 비원(悲愿)이 결과를 보지못한것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현대 일본문학의 대명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을 기다렸지만 탈락되고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4명이 한꺼번에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렬도전체가 다른 환희로 들끓었다. 그야말로 일가환희 일가우(一家欢喜 一家忧) 의 형국이다.   중국에서도 막언(莫言), 한소공(韩少攻), 소동(苏童) 등이 후보로 거론되였지만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1997년 석가장에서 열린 전국청년작가창작좌담회에 참가했던 필자는 회의기간 내내 소동의 곁좌석이였다. 소동은 63년생으로 나보다 겨우 두세살 많은 나이, 하지만 짧은 시간에 크게 거듭나며 이룩해낸 그의 거족적인 성취와 작가적 변모는 나 그리고 우리세대 작가들에게 많은 귀감을 보여주고있다.) 동양권 작가들에게서 노벨문학상의 “벽”은 아직도 높다. 동양권에서는 지체높은 신분으로 “잔치”에 갔다가도 “문전박대”를 받기가 일쑤다.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동양인은 인도 시인 타고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타리,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극작가 고행건 등 고작 4명에 불과하다. 1901년 노벨문학상이 시행된 이후로 106명의 력대 수상자들 가운데 서구작가들이 90명에 육박할 만큼 노벨문학상은 서구중심으로 운영되여 왔다. 근 10년 동안에도 이번에 수상한 르 클레지오를 포함해서 무려 9명이나 되는 유럽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타고르 가와바다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 고행건 또 하나의 병폐가 있다. 유럽중심주의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은 소설이 중심이기도 하다. 1996년 필란드의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 이후로 어느 시인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다고 한 나라 한 민족 문학의 존재유무가 정해지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동양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다른데로 돌리는 행위는 그만두는것이 명지한 처사일것이다. 한 세기동안이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되여 있는 그 황금의 문을 두드리기에는 우리가 지닌 한계점은 분명해 보인다. 노벨문학상이 또 한번 한국을 비껴간 소식이 터지기 바쁘게 한국문학의 수준미달과 그릇된 문단풍토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고언(苦言), 한국문학의 발전방향과 대안에 대한 (高言)들이 쏟아져 나왔다. 종합해 보면-뽀르뚜갈어 번역가는 \"한국문학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며 섬세하다. 반면 중남미 문학은 지성적이고 랭철하다. 한국문학작품을 번역해 놓으면 순수와 서정, 섬세함 같은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얼핏 유치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문학은 지성적 측면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에스빠냐어 번역가의 판단도 비슷하다. \"중남미 독자들은 수준높은 작가를 원한다.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은 무턱대고 높은 상만 꿈꿀 게 아니라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영어권 번역가는  또다른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국 소설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외국문단에 발 붙히려면 몇명의 우수한 작가에 집중해서 장편을 번역해 내놓아야 한다.\" 우선 동양권, 더우기는 한글문학이 너무 민족주의적인 패러다임(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리론적인 틀이나 체계.)에만 갇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짚어 낸다. 한국적인 미학 자체만을 추구함으로서 너무 “한국적”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세계성이나 보편성보다는 개별성, 특정성이 두르러지고 있어 한국이란 령역을 벗어나서 느낄수 있는 문학사적인 가치가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고 모두들은 입을 모은다. 그 특정성 자체가 오히려 주제의 다양한 파생과 변환을 막아왔다는것이다. 자기만의 력사적, 정치적 배경과 너무 밀착돼 있어서 이 배경을 충분히 알고있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는 쉽게 리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것이 작품에 대한 흫미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것이다. 이처럼 한글문학은 정서적, 환경적으로는 매우 복잡하고 론리로는 취약점을 안고있다. 서구 작가들의 수상작이나 유명한 작품을 보면 자신의 국가나 민족에 머물지 않고 인도주의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는데 앞장서고있다. (올해의 수상자 르 클레지오 역시 그러하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라는 조국을 가졌으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유와 작품의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는 한민족의 김치와 설렁탕을 아주 좋아해 지한파(知韩派)라는 별호도 갖고있다. ) Ⅲ 우리 조선족작가들에게도 이들의 경험은 적용된다. 중국문단과의 접목, 한국문단에로의 진출을 갈망하고 있는 우리문단의 고충은 글로벌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한국문단의 몸부림과 닮은데가 있다. 전세계 문학인들의 “대향연”을 지켜보며 내내 우리 조선족문학의 중국문학 내지 세계문학과의 접근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사색을 더듬어 보았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문학중의 하나의 작지않은 지류(支流)이다. 여기에 중국조선족문학의 이중성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의 하나라는 조선족문학의 기본성격 그리고 넓은 의미의 한글문학으로서 한국문학과 무관한 존재일수 없다는것이 조선족 문학이 갖는 이중성인것이다. (우리의 조선족 문인들이 작품의 독자층으로 한국의 독자를 념두에 두라는 제안도 한국전문가들에 의해 나왔다. 이러한 발상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있어서 좀 미묘한 문제이다.) 우리들만이 가진 이 이중성은 분명 조선족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수 있을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어느 민족 못지않게 다채롭고 치렬하며 력동적인 시대를 살아왔다. 이민, 전쟁과 혁명, 개혁, 리산(离散)의 굵직한 사건들을 피부로 겪으면서 그 현장을 낱낱이 펜에 담았다. 민족은 불행했지만 그만큼 문학적 소재는 풍부했다. 그런데 감히 말하거니와 그 파란만장한 력사에 어필할 대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연변안이라는 공간적 제한성과 시간적 한정성에서 작품을 썼고 쓰고있다. 따라서 단순히 우리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아집은 이제 타당하지 않다고 봐야할것이다. 우리 작가들의 필끝에서 주조된 어딘가 고루하고 과장된 우리만의 정서가 타민족, 그리고 타지역인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힘들것이다. (일밭에서도 부엌에서도 무대복장처럼 때깔고운 한복을 떨쳐입고 랭면이나 찰떡같은 특색 음식만 먹으며 틈만 나면 장구치고 퉁소불며 춤추고 노래하는 연극무대위같은 과장된 모습들. 대외홍보용으로 쓰이는 우리의 이미지는 향용 이렇다.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억지스럽고 면구스러운데 타민족들은 공감해 줄런지?) 우리의 작품들은 창작적 기량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틀안에 대부분 잠겨 있다. 하기에 세공(细工)이 훌륭할지라도 동네 사당에 놓인 토우(土偶)에 그치고 도회지 번화대가에 놓인 거대한 청동의 조각에는 못 미치는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국에 정착해 살면서도 대륙적 나아가 동아시아의 횡단성이 아니라 연변식 진부한 사유체계에 내내 갇혀 있는것이다. 조선족문학이 같은 언어를 쓰고있는 한국에서의 출판이 어렵고 또 번역출판된후에도 중국문단과 시장에서 판매가 부진한 리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조선족 문학이 본령을 잡으려면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그 교차의 흐름속에서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들을 길러내고 그러한 작품을 출품해 내는 일일것이다. 다음 “개구리가 우물속의 풍경을 노래”하듯이 자화자찬에만 머물지말고 이러한 우리만의 울타리에서의 부글부글 괴여오르고있는 활력을 어떻게 국내, 국제화하느냐에 더 큰 과제가 있다.우리의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저마다 이구동성으로 한목청 높이는 “어떻게 자체의 문학적 정체성을 보증하고 써내느냐” 하는 주제론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어떻게 세상과 만나느냐”는 방법론도 함께 연구되여야 한다고본다. 그렇지않으면 “깊은 골목의 술이 잘 팔리지않는” 형국, “규방처녀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형국이 될터이니. 물론 그동안 우리 문학계가 나서서 “조선족문학 알리기”를 힘써오지 않은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문단과 세계화에로의 접목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닌만큼 장기간에 걸쳐 조선족문학 자체가 스스로 조성한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 조선족문학의 좌표와 위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것이다. 여기서 첫보조로 번역문제가 제기된다. 수준높은 번역을 통해 우리의 작품을 중국문단에 소개하는 번역작업이 꾸준히 시행되여야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많게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명이나 배출한 일본의 경우, 지난 45년부터 국가가 번역사업을 지원해 다른 나라에 2만여 종의 문학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의 작품들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그것이 노벨문학상과 같은 큰 성과로 이어지는것이다.)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온 식으로 중국문단에서 소수민족을 배려하여 제정한 상의 시상에 맞추어 한두편 선정해 그때 그때에 맞추는 성급한 번역작업같은 방식은 이제 바뀌여야 한다. 이런 수동(受动)적인 작업은 오히려 작품의 원색과 질을 떨어뜨리고 우리문학에 대한 중국문단의 혼란을 가중시키게 될것이다. 우리문단에서 해마다 수백권의 책이 쏟아지데 번역작품집이 나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해마다 잡지사 별, 민간단체별로 적지않은 상을 세우고 시상하고있지만 각종 쟝르중에 번역작품에 대한 시상은 없다. 번역에 있어서 번역유능자가 많지않고 젊은 일대가 단절을 보이는것도 큰 문제이다. 아직도 작가의 길을 꿈꾸는 작가지망생들은 있지만 번역지망생은 보이지않는다. 지망생들을 상대로 펼치는 각종 문학강습에서도 번역강습은 결여되여 있거나 그 비중이 아주 적다고 봐야할것이다. 번역가에 대한 대우를 높이는것도 필요하다. 조선족을 세상에 알리는 방대하고 번중한 번역작업은 개인의 취미나 사명감으로만 강요하는것은 무리이기에 작가협회 등 관련부서에서 나서야하며 여기서 연변을 “춤과 노래의 고향”으로육성한적 있는 우리 정부의 관심이 요청된다. 우수한 우리 문학을 조선족의 하나의 브랜드로 중국무대에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번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바래본다. 번역을 앞두고 꼭 우리 시각과 입맛만이 아닌 어떤 작품들이 중국, 세계출판시장에 어필할수 있는지?  그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다음 연변작가협회를 비롯한 우리의 문학지, 언론지는 번역을 마친 좋은 작품이 중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출간될수 있도록 작가와 출판사를 련결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것은 중국, 외국문학을 우리 조선족작가들이꾸준히 접하여 우리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우리의 작가들이 책 안읽고 자체의 독선에 빠져있는 풍토에서 이러한 기대는 과연 너무 큰것일가?) 우리의 작가들은 마땅히 그러한 변화를 알고 세계작가들과 인식을 같이하며 공통의 주제의식에 동참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호보완이 있어야 우리의 문학이 제자리 답보에서 벗어나 더 큰 족적을 남길수 있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지에 갇힌채 아직도 웃기는 독선에 사로잡혀  붕당(朋党)끼리 비생산적인 싸움에만 정력을 허비하지고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부단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새로운 문예리론을 게으름없이 공부하며 오로지 창작에만 전력투구해야 한다. 하여야만 범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갖는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될것이며 바로 그럴 때, 중국문단은 자연히 우리를 인정할것이고 세계문학은 우리를 포옹해 줄것이다. -------------------------------------------------------- 옛날, 마을에서 큰 잔치가 치러질적이면 담모퉁이에서 이쁜 색시를 내내 훔쳐보거나 틈을 타서 잔치고물을 훔쳐 먹는 “악동”들이 있었다. 이 시각 나도 들뜬 “악동”이 된 기분이다. 변강의 오지에서라도 세계 최대의 문학잔치를 지켜보면서 그 향기를 맡노라니 “배고프던” 마음은 나름 풍성하다.  \"연변문학\" 2008년 11월호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6481731\');
28    내 청춘의 《탈무드》 댓글:  조회:4158  추천:73  2007-06-29
  . 수기 . 내 청춘의 《탈무드》   김 혁 (1)  행자 하나가 길을 떠났다. 나귀 한마리, 개 한마리, 등잔 하나와 책 한권과 동반하여… 어느 한 동네에 이르러 행자는 려장을 풀고 빈집에 잠자리를 청했다. 등잔불빛을 빌어 책장을 뒤적이며 밤의 고적함을 달랬다. 그런데 고삐에서 벗어난 나귀가 도망가버렸고 개는 늑대에게 먹혀버리고말았다. 책에 깊이 빠진 행자는 이를 감감 모르고있었다. 나중에  기름이 떨어져 등잔이 꺼져서야 행자는 잠이 들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니 더 엄청난 변고가 행자의 눈앞에 펼쳐져있었다. 떼강도가 들이닥쳐 마을의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모조리 앗아가고 마을사람들을 깡그리 주살(诛杀)했던것이다. 행자는 나귀며 개며 유일한 재산들을 모두 잃고말았다. 지어 기름마저 떨어져 불조차 켤수 없게 되였다. 허나 바로 그렇기때문에 강도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고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행자는 모든것을 잃었다. 허나 또한 모든것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귀중한 생명과 그 생명을 탐탁하게 가꿔줄 책이 남아있지 않는가! 유태인들의 법전(法典)《탈무드》에서 읽은 토막이야기이다. 역경과 좌절, 무원조한 삶에서 구원받고 그것을 이겨나갈 호신부가 바로 책이라면 이한 탈무드의 가르침이 내게도 적용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서를 내 삶과 일상의 가장 비중 큰 분동으로 다루고있는 내게 있어서, 욕심보 넓게 이 세상 모든 책에 현혹되여있지만 그중에서도 혹애하는 책이 있다면 (간행물류쪽에서) 바로 내 청춘의 입문과 끈끈한 관련의 동아줄을 잇고있는 《청년생활》일것이다. (2)  나는 어릴적부터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리웠다. 《전례없던 시기》의 고생을 빌미로 중환에 계시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터에 우리 가정살림은 그닥 유족치 못한편이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가 책 사는 용돈만은 어김없이 내주었다. 그것도 하루건너 한번씩 나오는 새 책에 감질난 눈빛으로 어머니에게 어줍게 손바닥을  내밀면 어머니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개눈깔》사탕이나 《신바닥》과자에 신경줄을 매달지 않고 책에 혼줄를 매단 아들녀석이 대견한  모양 선선히 돈을 내주군 했다. 그저 서점문가로 다가가도 나는 이슬람교도들이 가장 신성하시는 성지-메카로 들어선것처럼 경건해지고 그 어떤 아집(我执)에 자기를 잃군 했다. 사들인 책이 종이상자에 넘쳐나게 되자 어머니는 나에게 책장을 마련해주셨다. 책장이라야 다름아닌 집에서 쓰던 신발장이였다. 그 세층 높이의 신발장에 아니, 《책장》에 나는 몇백권에 달하는 그림이야기책들을 빼곡이 챙겨곶았다. 그것도 잠시, 그 《책장》마저 넘쳐나게 되자 어머니는 쓰던 찬장에 또 한번 색을 먹여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책장》에 바로 우리 말 《청년생활》이 종속국을 멸시하는 종주국처럼 버젓이 자리틀고있는것이였다. 나는 잡지를 많이 읽는편이다. 허나 15년 가까이 꼬박 한호도 빼놓지 않고 읽은 잡지는 단 다섯가지뿐-《소설월보》《독자》《이야기모임》(故事会),《오묘한 비밀》(奥秘) 그리고 유일한 조선말로 된 《청년생활》지뿐이다. 나는 《청년생활》지를 창간호로부터 읽었다. 우리  언어로 된 그리고 나의 첫 독서욕에 첫 키스같은, 화약같은 인상을 남긴 《청년생활》지에 대해 나는 종시 편애를 감추지 못하고있다. 《청년생활》지를 통해 나는 안중근, 홍범도 같은 우리의 영웅지사들에 대해 알게 되였고 《몽떼 크리스또백작》,《돈 끼호떼》같은 명작들을 접하게 되였다. 간추린 명작이였지만 그 매력만은 무진한 힘으로 나의 문학에 대한 홍심을 위발시켰고 세계문학의 진수에 대해 깨치게 했다.《청년생활》지에 상재한 아가샤 크리스티나 에도가와 람뽀의 추리소설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을 격발시켰고 구쏘련 당대소설 《보내지 않은 편지》등은 나를 열루에 젖게 했으며 뿌쉬낀이나 뻬떼피의 시구들은 청춘의 격정과 사색을 머금게 하였다. 밀로의 비너스로부터 우리 민속에서 동지죽을 먹는 유래에 이르기까지 맥주마시기 상식에서부터 장기 수풀이에 이르기까지 《청년생활》지는 우리에게서 생활의 세세한 구석구석까지를 어루만져주는 지침서로 간주되였다. 번쇄한 생활의 일상사로부터 깨도의 어섯눈과 지혜의 마음눈을 틔여주는 유태법전 《탈무드》처럼…  (3)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중학시절부터 나는 학교나 사회적으로 《문제아》였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엄청난 비밀이 깨여지면서 오는 타격과 나에게는 우호적이 못되였던 의부아버지가 이 원체 복잡한 가정에 들어오면서 나의 무양하던 심기는 정을 잘못 맞은 못처럼 외곬으로 고부라지기 시작했다. 과대표로 지내면서 공부, 더우기는 글짓기에서 큰 기량을 보였던 나는 고중 2학년때 무리싸움으로 퇴학처분을 받고말았다. 본의 아니게 사회에 덜렁 버려진 뒤 석달도 못되여 내가 학교 다닐 때 쓴 작문이 콩클상에 입선되여 상금과 상장이 학교에 내려왔다. 학교지도부에서 사람을 보내여 다시 등교하라는 의향을 보였으나 나는 고리끼처럼 사회대학 나와 큰 작가가 되련다는 오기로 큰소리로 호의를 품고 찾아온 학교선생님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 대가로 열일곱살의 나이에 룡정원예농장의 스팀관과 하수도덮개를 만드는 공장으로 출근해야 했다. 삽질이나 메 휘두르기가 힘에 버거웠고 자전거로 반시간푼 걸려야 하는 먼 공장길이 힘들어 속눈물을 떨군적이 한두번 아니였다. 허나 나는 학교교원들앞에서 한 호언장담을 더우기는 나를 《속곳의 가시처럼 미워하》는 의부아비앞에서 한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쉼없이 읽고 쉼없이 썼다. 미구에 주물공장 청년종업원들의 생활을 반영한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의 집필을 끝냈다. 실말이지만 나는 어쩐지 첫 작품에 대해 신심이 컸다. 그때 《범 무서운줄 모르는 하루강아지》였던 나는 연변 나아가서는 전국에 내놓아도 인기를 끌 작품이라 스스로 만족의 미주를 기울였다. 당연히 내가 혹애하는 《청년생활》지에 투고해보냈다.  원고지도 변변치 않아 어머님의 교수용 교수안지 뒤면에 쓴 그 글을 읽고 《청년생활》지에서 신씨성을 가진 편집 하나가 룡정으로 찾아왔다. 련계주소를 어머님이 근무하는 룡정신안소학교로 했는데 나를 이 학교의 로교원으로 알았고 이름도 필명인것으로 알고있었다. 어머님의 대동하에 집까지 찾아와서 애숭이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의 나를 본 그 편집이 헛밟은듯 움찔했다. 그리고 입가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저 한번 편집부로 왔다가라는 말만 남기도 두수없는 행차를 한듯 가버렸다. 일주일후 신문지를 넣어 운두를 잔뜩 높인 국방색모자를 눌러쓰고 나는  《청년생활》편집부를 찾았다. 편집선생들이 위조품을 보는듯한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에워쌌다. 토끼를 품은듯 높뛰는 가슴을 엎누르며 나는 표절 혹은 번역작품으로 미심쩍어하지만 그 의사를 완곡적으로 표현하고있는 편집원들에기 미덥지 못하면 내가 또 하편의 작품을 새로 써서 가져올터라고 배심 두둑히 여쭈었다. 친지를 볼모로 둔 심정으로 돌아와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다른 작품을 썼다. 《단꼬와 백설공주》라는 제명의 좋은 일한 하여 《백치》로 몰리는 남편과 그를 사람하는 안해의 밀월기간에 일어난 사연을 소재로 엮었다. 결혼은 둘째, 녀자 손끝도 건드려 못본 애숭이로 밀월을 어떻게 썼던지 기억 안나지만 그 작품마저 읽은뒤 편집원들은 내 어깨에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었고 대견의 눈길을 보내주었다. 한번 소설의 뒤머리에 짤막한 략력까지 달아주었다. 1985년 8월호 《청년생활》지에 드디여 나의 첫 소설(처녀작)《피그미의 후손》이 실리게 되였다. 지금 보면 가위의 장정 설계도 조야하기 그지없고 잡지값도 겨우 45전…허나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듯했다. 대번에 잡지 여섯부를 사서 친지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아들의 외곬행위에 대해 당혹에 쳐들린 눈매를 하고있던 어머니는 나의 작품을 받아들고 눈시울을 붉혔다. 소학시절의 담임교원이 실과를 사들고 축하를 보내왔고 친지들도 모여 술상을 벌리고 그 며칠간 우리 가정은 숫제 명절기분이였다. 소설원고료 170원이 나왔다. 한달동안 꼬박 용광로앞에서 살갗이 익어번지게 일해도 한달로임이 고작 37원인 내게있어서 굉장한 액수의 거금이 아닐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 돈의 일부를 잘라 내게 양복을 해주었다. 내가 일생에서 처음으로 입어본 양복이였다. 처녀작이 발표되여 일주일만에  《연변일보》에 두번째 소설 《맥주 두병》이 발표되였고 그로부터 일년이 못되는 사이에 《북두성》잡지에 《까막골 박아Q전기》,《개간지》잡지에 《노아의 방주》가 발표되였다. 《피그미의 후손》으로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킨 뒤 나는 그 자매편으로 《모함메드의 후손》을 썼는데 후에 《은하수》잡지에 발표되였다. 처녀작의 발표는 내 인생의 궤적을 바꾸어주었다. 창사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길림신문사》의 요청으로 나는, 고중도 채 졸업하지 못한 《문제아》였던 나는, 당시 연길 동광에서 부란공으로 닭알깨우기를 하고있는 허드레 림시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청년으로 인정받고 신문사기자로 단연 발탁이 되였다. 그때 내 나이는 만 스무살이였다. (4)  이러구려 시간은 10여년 흘러 애초 편집원들이 미심쩍은 눈길로 흘려보던 나도 편집기자생활에서 초단수를 넘겼고 선배들의 본을 내여 애숭이문학도들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꽂은 어중간한 나이로 박두했다. 97년께, 나는 온 사회에 콜레라처럼 만연되고있는 출국열과 그 진통에 잇따른 사기피해문제를 두고 큰 글을 쓰려 뼈물고있었다. 한국인사기행각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추적해보면서 《코리안드림(한국환상)》에 흔들리고있는 우리 사회를 진맥해보고저 기자의 사명감, 작가의 필재로 나섰던것이였다.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라고 제명을 달고 특종기사집필에 착수하게 되자 나는 또 한번 내가 혹애하는 《청년생활》지에 맨처음으로 투고를 했다. 한편 취재하고 한편 집필하면서 한편 련재를 했다. 기성작품 아니고 사건발생과 동조하여 언제 어떻게 끝낼지 모른 련재였기에 신고가 적지 않았다.  그보다 나의 작품을 조갈들게 기다리고있는 임철씨를 비롯한 편집원들의 로고가 컸다. 때론 인쇄공장에 반납할 시간이 코앞에 박두했는데 나의 련재만은 그만큼 자리를 비운채로 간작을 기다리는 논밭처럼 휑그레 비여있군 했다. 그때 나의 BP호출기에 열에 열은 모두다 편집원들의 호출이였다. 그네들의 진지한 청탁과 성원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장편기사를 채 마무리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청년생활》지에 1년 가까이 련재되면서 조선족사회의 최대열점을 건드린 아 장편특종기사는 그해 《청년생활》화연문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흑룡강신문사 《한얼》표 실화문학 1등상을 거듭 수상했다. 잇달아 단행본으로 묶어져나왔다. 그러고보니 나의 첫 창작집 역시《청년생활》지와 인연을  맥(脉)으로 출산된 셈이다. 누가 말했는지 세상사는 원자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진것임이 틀림없다. 나와 《청년생활》의 인연담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천국의 꿈》을 집필하던 당시, 문학에 현혹된 나머지 가정생활에는 빵점이였던 나는 가정파탄의 고배를 마시고 심신을 앓던 중이였다. 게다가 어머니와 녀동생의 출국으로 혈혈단신으로 남은 나는 어느 한 극성스런 문학팬과 의지하여 북대의 달팽이세방집에 들어박혀 나의 붕괴된 인생의 좌표계를 정하지 못해 술로 자탄하고만 있던중이였다. 오직 필을 들어야만이, 필을 들고 원고지우를 광분하는 들말처럼 달려야만이 내 신상에 부착해오는 행복의 깨심을 잠시나마 잊을수 있었고 저그만 원고료였지만 그 원고료로 로임마저 체불받는 불우한 문인의 주린 위와 빈혈증세를 보이고있는 머리를 달랠수 있었다. 그러던중《청년생활》지에 실린 련재를 읽고 문학이 소박맞는 세월에 하필이면 문학에, 문학인에 심취된 처녀 하나가 나를 문의해왔고 《청년생활》의 주선으로 나는 부진을 씻고 새로운 코스를 달리는 선수마양 젊음과 활기의 희망과 활력소를 주입받게 되였다. 그야말로 문학은 나의 구원의 녀신이였고 《청년생활》지와 같은 원지들은 참담한 이 세계에 남아있는 한뙈기의 록빛 흥건한 오아시스임이 틀림없다. 원체 새 천년을 맞아 역시 당당한 모습으로 뛰고있는 《청년생활》지에 대한 덕담을 념두로 시작한 글이였는데 자기 신세담만 넉두리한듯 필이 안스러움에 주춤인다. 여기서 이 글을 서둘러 마무리하면서 죤 웨이 쉴레터의 서적에 대한 찬미사 전문을 빌어 《청년생활》에 축복을 보낸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혼자라고 느끼거나 외롭다고 생각될 때 그대를 찾습니다 나의 마음이 의심으로 흔들리고 자신감은 먼 기억처럼 사라질 때 당신의 빛을 발견했습니다 내 삶에서 무엇인가 혼란스러울 때 당신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나의 몸이 아플 때 어머니가 따뜻한 죽을 끓여주시군 했던것처럼 내 령혼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당신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과 사랑에 대한 당신의 따뜻한 이야기가 나를 고독한 동구에서 걸어나오게 했습니다 용기와 참을성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가 나에게 생의 의지를 갖게 했습니다 당신의 처방전에는 지혜와 령감을 주는 강한 약재가 포함돼있습니다 도전의 산이 앞을 가로막을 때 그우로 올라 구름과 별사이에 선 용기있는 사람들이 제공한 약제들입니다 나의 생이 유머를 잃었을 때 그리고 나의 재능을 세상과 나눌 기회를 잃었을 때 이 약으로 나의 존재는 새로운 에네르기와 기운으로 채워집니다 진정한 사람을 산 사람을 인생에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의 발걸음에 가벼움을 주고 나의 꿈에 활기를 불어넣습니다 지혜로운 령혼을 가진이들의 생각이 나를 구속하고있는 두려움을 한순간에 날려보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나에게 미래를 볼줄 아는 영양제를 주었습니다 기쁨과 행복과 승리 건강과 충만함과 사랑으로 가득찬 미래를… “청년생활” 2000년 3월호         ..........Sundancer
27    솔제니친과 김학철 댓글:  조회:5093  추천:75  2007-06-29
. 잡문 .    솔제니친과 김학철  김 혁     솔제니친의 경우    지난 여름, 말복더위에 서재에서 머리맡 가까이에 선풍기를 돌리면서 요즘 회자(膾炙)되는 신간을 읽다가 버릇처럼 컴을 열었는데 그 부음을 접했다. 쏘련이 낳은 문학의 거장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서거한 소식이였다. 세계적 지성- 솔제니친은 8월 3일 오전 11시, 향년 89세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네티즌들이 올린 도편자료와 동영상에서 솔제니친의 모습을 다시 한번 찬히 뜯어보았다. 수난과 고집, 지성을 말해주듯 깊고 형형한 눈길과 몹시 벗겨진 머리와 수북하고 흰 수염은 일견에도 지성적인 어떤 현자(贤者)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넷에 널려있는 그이의 생애와 문학업적에 대한 편린(片鱗)들을 뽑고 정리하여 나의 문학블로그에 올리면서 한 지성의 인생궤적을 따라 가보는 시간을 가졌다. 화려한 문학사적 명성과는 달리 솔제니친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려정이였다. 알렉산드르 이싸예비치 솔제니친은 1918년 12월 11일 북깝까즈의 도시 끼슬로보드스끄에서 태여난다. 태여나기 6달 앞서 그의 부친인 세묘노비치 솔제니친은 불의의 사고로 당금 태여날 아들을 보지못한채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 따이샤 자하로브나는 속기사(速记师)였다. 교양있는 어머니의 교육으로 솔제니친은 일찍부터 문학에 눈을 뜨며 장래 희망이 작가였던 소년은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한다. 로스토프대학에서 물리수학을 전공하면서 한면 모스크바대학 통신학생이 되여 력사, 철학, 문학을 배운다. 배우수업도 했지만 발성에 문제가 있어 배우의 꿈을 접는다. 대학을 나와 평범한 수학교사로 지내던중 2차대전이 발발(勃发), 1941년 히틀러가 쏘련을 침공하자 조국을 위하여 분연히 전장에 나선다. 로씨야군 포병장교로 용감하게 싸워 무공훈장을 두번이나 받는다. 그러나 1945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속에 불온한 대목이 있다는 죄장으로 무공훈장을 단 젊은 장교는 인생의 일대 전환을 맞고 일조일석에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정치범으로 투옥되여 10년 동안 동토(冻土)의 수용소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광부, 벽돌공, 주물공으로 육체를 혹사하며 게다가 불치의 종양 수술까지 받는다.   솔제니친은 흐루쇼브 시대인 1962년 해빙기를 틈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며 문명(文名)을 알리기 시작한다. 문학지 “노비미르”지에 발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절제된 문체와 심리적 깊이로 수용소에서의 한 평범한 개인의 일상을 충격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잡지의 편집장은 작가의 수감시절 겪었던 시련을 바탕으로 한 이 원고의 출판여부를 결정하지 못해 공산당 총서기였던 흐루쇼브에게 보여줬는데 흐루쇼브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출판을 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 흐루쇼브가 실각하고 브레쥐네브가 취임한후 문화활동의 리념적 규제가 심해지면서 그는 반체제 인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 병동”, 그리고 “수용소 군도” 와 같은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다 그가 실제로 체험한 무서운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10년여의 수용소 생활은 “억압에 대한 저항”을 주제로 하는 그의 작품세계의 기본적 질료(质料)가 됐으며 그때가 바로 그의 저항정신과 문학의 시발점이 됐다. 그의 작품활동은 쏘련의 이른바 “수용소 문학”을 개척한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전체주의의 억압에 대한 고발이라는 주제의식뿐아니라 수용소 죄수들의 은어를 사실감 있게 사용하고, 참혹한 수용소 생활과 죄수들의 유머를 대비하는 등 구성과 문체 면에서도 탁월한 수작으로 꼽힌다. 당국의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솔제니친은 불굴의 창작의욕을 고시(告示)한다. 그의 작가적 량심은 드디여 “수용소 군도”라는 대작을 이끌어낸다. 솔제니친은 원고지 1만장이 넘는 대작 “수용소 군도”를 통해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채 기아와 폭력에 시달리며 정치범 수용소에서 중로동을 해야 했던 류형자들의 삶을 그려낸다. 수용소에서 자행된 불법적 재판과 고문, 탈주, 폭동, 수형자들간의 갈등, 미성년자들의 타락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그 누구보다도 적라라하게 당시 쏘련의 체제가 전통, 인격, 도덕 등 정신세계를 얼마나 파괴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72년 파리에서 출간된 “수용소 군도”는 발표직후 쏘련을 넘어 유럽 전체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킨다. 그 방대한 리얼리티(真实感)에 담긴 핍진하고도 정확한 력사의 증언은 문학작품의 경계를 확장시켰다는 호평을 받는다. 작품 활동에 방해를 받게 되면서 더이상 쏘련에서는 공식적으로 출판이 어려워지자 결국 그는 국외에서 활동을 전개해나간다. “암병동”을 비롯한 주요 작품들은 해외에서 먼저 출간된다. 따라서 세계문단은 똘스또이를 이을 거장의 출현을 반겼고 그의 용기에 주목한다.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 병동”등 작품들은 1970년 솔제니친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반렬에 오르게 한다. 1970년 그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지만 당국의 불허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 참석조차 못한다. 망명의 길에 올랐던 1974년에야 그는 자신의 노벨상을 수거(收去)한다. 빠리에서 최우수 소설상을, 스톡홀름에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사람이 모스크바 작가동맹으로부터는 제명당한다. 시민권까지 박탈당하고 차디찬 시베리아에 류배된다. 1974년 쏘련으로부터 추방되며 그때로부터 20여년에 거친 망명생활에 들어간다. 이후 독일ㆍ스위스ㆍ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 2부와 3부를 펴내는 등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친다. 한 작가를 포용(包容)하는 그릇이 되지못했던 정부때문에 추방되였지만 그를 맞아준 서구사회 역시 그가 원하는 대안은 아니였다. 쏘련에 대한 미국의 이데올로기 선전전(宣传战)의 전위(前位)를 맡는 일을 그는 거부한다. 서방세계에 안주했다면 가능했을 안락한 삶을 또다시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서방세계는 그가 쏘련을 비난하고 서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를 바랐지만 솔제니친은 늘 자기를 버린 조국을 마음에 품고 산다. 1974년 망명의 길에 올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그는 "작가는 조국을 떠나서는 존재할수 없다"고 감회를 토로한다. 그만큼 “나는 글 한 줄을 쓰는 데 1년이 걸린다”라고 말한것처럼 모어의 낱말 하나, 장절 하나하나에 깊은 사랑을 바친 작가였다. 1978년 하버드대 졸업식 연사로 초대되였던 솔제니친은 미국등 서구의 정치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물질문명의 오염과 황금만능풍조가 만연한 미국에 대해서도 비난했고 구미의 도덕적 타락과 방종, 물신숭배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도덕성과 정신의 파괴에 맞먹는 서구 자유주의 기본개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서구가 쏘련의 대안적 모델이 될수없다"고 선언한다. 이에 반체제에 주목했던 서방은 자신들의 병리(病理)를 지적하는 “망명객” 솔제니친에게서 흥미를 잃어갔고 그를 반쏘 지성인의 상징으로 칭송하던 서구의 우파지식그룹은 그를 반자유주의자로 락인찍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소외시켰고 그의 망명 생활을 더욱 외롭게 한다. 인고의 망명생활중에서 그는 내내 조국을 그리워한다. 1990년 마침내 로씨야 시민권이 회복되여 1994년 “언젠가는 되돌아 갈것”이라고 되뇌였던 고국으로 돌아온다.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예리친의 로씨야는 령토가 축소되고 민주주의와 시장주의의 이름하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신적으로 파괴된 조국일뿐이였다. 몰락해가는 조국의 참담한 실상에 작가는 또한번 장탄식과 함께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의 80회 생일을 맞아 펴낸 시사평론집 “이 잔혹한 시대의 내 마지막 대화”는 분리독립 등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기막힌 현실에 대해 "로씨야는 과연 진정한 로씨야로 존재할수 있는가"라고 통절하게 부르짖는다. 우여곡절 고국의 품에 안긴 뒤에도 그는 여전히 비판의 칼날을 차갑게 세운다. 비판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그를 일각에서는 “욕쟁이 할아버지”라고까지 비난한다. 하지만 그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전통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로 돌아갈것을 촉구한다. 그가 비판한것은 로씨야의 물질주의에로의 경도(倾倒) 였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것은 물질문명에 훼손되지 않는 로씨야, 바로 민족적인 가치였다. 로씨야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은 예리친대통령과도 극심한 불화를 보인다. 1998년 예리친이 80회 생일을 맞은 그에게 로씨야 최고권위의 “성 안드레이 피르보조반니사도” 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제의해오나 로씨야를 파국으로 이끈 정권이 주는 상은 받지 않겠다며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부해버린다. 그는 "로씨야에 세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17세기, 1917년 볼쉐위크 혁명 그리고 예리친의 취임"이라고 예리친을 통렬하게 비꼰다. 따라서 그는 공인(公人)들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며 교외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2007년 6월 푸틴대통령은 솔제니친에게 로씨야 예술가들의 최고 명예로 꼽히는 국가공로상을 수여한다. 수상식에 불참한 솔제니친은 영상을 통해 이렇게 답사를 보낸다. “나는 생의 마지막날까지 력사가 우리의 기억뿐아니라 량심을 되살린다는것을 믿는다.” 2006년 그의 작품 전집이 발간에 들어가 2010년 완간될 예정, 하지만 끝을 보지 못하고 알렉산드르 이싸예비치 솔제니친은 세상을 천착(穿鑿)했던 눈을 감는다. 솔제니친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주요 언론사들은 그의 타계 소식을 주요뉴스로 내보내고 문학과 생애를 자세히 소개하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뉴욕타임스, AP통신 등은 “솔제니친은 20세기 로씨야의 가장 위대한 량심이였다”, “솔제니친의 량심에 대한 신념, 그리고 불굴의 저항정신은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초월해 세계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유럽의 좌파 지식인에게 경종을 울린 작가"이며 "서구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등 평생 지식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가 남긴 작품 중 일부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문학적 업적"이라고 보도했다. 평론가와 사학가들은 "그는 인간가치의 문제를 모럴(도덕,륜리)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철저한 사실주의적 기법을 사용하는 등 똘스또이와 도스도예프스끼의 리얼리즘의 계보를 잇는 작가"라며 " 20세기 로씨야 문학의 정점에 있는 작가"라고 말한다. “대문호 똘스또이와 도스도예프스끼가 19세기 로씨야 문학을 대표한다면 20세기 로씨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바로 솔제니친이라고 할수 있는바 솔제니친은 전세계를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있는 작가중 대표적인 작가라고 할수 있다.”고 정평한다. 이렇듯 세계가 그의 죽음을 각별히 경건하게 애도하는 리유는 그가 어두운 철의 장막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위해 펜 하나로 거대한 체제와 외롭게 싸우면서 투옥-추방-귀환”으로 이어지는 굴곡진 삶에서도 꼿꼿하게 자신의 철학을 지키는 위엄있는 일생을 보냈기때문이다.      김학철의 경우  다투어 솔제니친의 부음을 전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눈에 확 띄는 제목이 있었다. “로씨야의 가치 지키려 시대와의 불화로 살다”라는 제목이였다.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한 그의 인생을 퍽 잘 압축한 느낌의 글이였다. 부음과 그의 생평을 읽노라니 또 하나의 인물이 나의 뇌리를 선점(先占)하며 나타났다. 바로 우리문단의 거장 김학철옹이였다.   조선족 문인이라면 애대를 머금고 익숙하게 알고있겠지만 우리가 때때로 범문이나 사전을 찾아 판독(判读)하듯이 다시 한번 그이의 생애를 반추해 보기로 하자.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난다. 서울에서 보성고에 다니던 시절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거사에 충격받고 리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감동받아 1932년 17세에 포부를 품고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교복을 입은채 무작정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의렬단과 조선민족혁명당을 거쳐 1937년 장개석이 교장을 담임한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 1938년 7월에 졸업한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에 참가한다 조선의용군 하북지대 제2대 분대장이 되여 용맹히 싸우다 1941년 12월 10일 호가장전투에서 일본군 총탄에 왼쪽다리를 맞고 생포된다.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되여 징역 10년을 언도 받는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않고 전향서 쓰기를 거부한데서 3년 6개월 동안 상처를 치료 못받아 결국 다리를 잘라내고 만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소,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하며 그후 륙속 “담배국”, “균렬” 등 작품을 발표한다. 1946년 조선에서 로동신문 기자로, 인민군신문 주필로 돌다가 조선전쟁이 터지자 1950년 10월 다시 중국으로 건너온다. 저명한 녀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연구원으로 몇년 있으면서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등을 중문으로 출판한다. 1952년 12월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연합회 준비위원 주임사업을 맡아하다가 반년후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활동한다. 이동안 소설 “새집 드는 날”, “번영”, 소설집 “고민”,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 부를 창작 출간,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한다. 1957년 반우파투쟁확대화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된다. 공직도 없고 로임도 없고 글을 발표할 자격도 박탈당한다. 1964년부터 개인숭배와 극좌교조주의를 비판한 27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한다. 1966년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 원고가 발견되어 기소, 감금 되며 징역 10년형을 받고 당적을 박탈당한다. 1980년 복권, 65살의 나이에 빼앗겼던 필을 찾아들고 창작활동을 재개한다. 문전에 “한인막고문 (闲人莫敲门. 한가한 사람은 문을 두드리지 마시오)”라고 써붙이고 잃은 시간을 벌충하듯 20년간 문학창작에만 일로매진한다. 2001년 9월, 풍진세월 외다리로 버텨온 몸이 더는 가망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85살의 김학철은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는 유서를 써놓고 곡기(谷气)를 끊어 21일간 단식끝에 세상을 뜬다. 유언에 따라 그의 골회는 두만강에 뿌려진다. 그 파란만장한 생애에 “항전별곡”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태항산록” “최후의 분대장”, “20세기의 신화”…등 작품을 출간, 몸속에 체화된 력사의 진실을 문학으로 뿜어낸다. 그야말로 드물디 드문 반골(反骨)기질이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맛보아온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정치박해의 철쇄에 묶인 인고의 중년시절, 65세의 나이에 다시 붓을 들어 창작의 왕성기를 맞이한 충만한 만년. 연연을 버린 깨끗한 마지막 길…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도 드물것이다. 로신을 사표(師表)로 삼아 자신을 엄격히 규률한 그는 권력과 불의에 맞서 사투를 벌렸으며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에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고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항거했다. 그냥 보기에는 량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낀 척각의 볼썽사나운 로인일지모르지만 력사와 후세의 눈에 비친 그는 분명 거인이다. 왜놈들에 의해 떨어져 뒹구는 외짝다리를 랭철하게 바라보면서 인간적 슬픔을 초월한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고, 동란시기 비인간적인 숙청대회에서 아갈잡이를 당하면서도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고 인간의 존엄이 무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던 그는 척각으로 서 있어도 이 땅에서 가장 꿋꿋이 서있었다. 우리들의 경우  문학과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을 불태웠던 사람들이 있다. 한때 부당했던 체제는 그들에게서 소중한 필을 앗아갔고 지지리한 옥살이를 시켰으며 망명의 서러움도 지니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문학은 정신의 올곧은 길이였으며 그 길에서 타협이란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꼭같게도 민족의 운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사회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고발했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그 텍스트를 력사라는 큰 줄기에서 육골을 바친 삶으로 초연하게 써내려갔다. 그러한 근원적인 명제에 천착했고 삶과 문학이 그처럼 요약되는 작가였다는 점에서 문필가로서의 김학철과 솔제니친은 같은 길을 걸었다고 할수 있다. 아는 바처럼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의 삶과 문학은 꼬장꼬장함 그 자체다. 주의와 정의를 위해 “천자도 손가락질”하고 “룡의 수염도 건드린” 대바름을 보여주었고 긴긴 투옥과 비인간적인 학대, 암과 상처와의 사투에서 초인간적인 경지를 보여줬다. 생애 전반에 거쳐 들이닥친 역경을 인고로 견뎌내며 암흑속에 사자후(师子吼)같은 작품을 토해냈다. 솔제니친과 우리의 김학철은 정말 여러모로 많이 닮았다. 솔제니친의 문화코드(符号)가 가장 투철한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불의에 대한 저항 및 존재인식을 통한 시대정신과의 소통이라면 김학철의 창작모토(座右铭)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비극적 정서를 통해 민족의 고통과 비극적 력사에 대해 사유하면서 현실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 특징지어는 사실주의로 점철되여 있는 점에서도 서로 문화적 맥은 통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인 장 프랑수아 칸은 그의 저서 “NO!”에서 삶의 권태와 시대의 반력사성에 NO라고 외친 인물들의 리스트(名单)를 실어 그들의 생애를 조명했다. “인류 력사를 진전시킨 신념과 용기의 외침”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에는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다 간 200여명의 “NO 맨”들이 등장한다. 그중에는 당연 솔제니친도 포함돼 있다. 이 서방에서 명성 자자한 언론인이 동방사회에 대한 료해가 어느정도일지 모르지만 아마 우리의 김학철을 알았다면 역시 그 리스트에 당연한 일석을 내주었을것이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문뜩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바로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모순된 사회에 비판적 량심의 역할을 하면서 일관성있는 대안을 제시하는것을 의미한다. 즉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끊임없는 도전과 자기혁신을 일삼는 행위와 사유를 말하는것이다.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이 바로 이러한 비판적 지성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라는 점에 감히 NO!를 웨치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초지일관하게 시대의 모순에 대해 발언을 했던 “비판적 지성인의 전형”으로 그이들을 평가할수 있다. 솔제니친의 비판에서 얻을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로씨야적인것의 재발견과 유지라할 때 그의 민족정신에 대한 집착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전통의 련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것들을 환기시켜주고 있다. 지금 중국조선족은 격변기의 물굽이에서 흔들리고있다. 비록 솔제니친과 김학철이 살아왔던 시대와는 그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중국조선족이란 공동체는 지금 또다른 절체절명의 위기에 시달리고있다. 이대로 침몰되느냐 아니면 순항을 계속 하느냐 하는 판가름의 중요한 력사시기, 바로 이 시기에 우리의 작가들은 문학의 펜을 들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공간이 위축되고 문단의 위상이 위축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격변하는 세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줄도 모르고 대안에 대한 연구에 주목할줄도 모른채 공리적인 작은 욕망이나 웃기는 독선을 부담없이 드러내고 편안해 하는 요즘 문인들의 부화뢰동(附和雷同)의 행보는 결코 미덥지 못한 모습이다. 편협하고 비생산적인 소제(小題)에 그야말로 신명을 걸고 영원히 마를줄 모르는 침샘으로 질퍽한 설왕설래(舌往舌來)의 설전(舌战), 몇해고 그냥 피페하기만한 문인상경(文人相轻)의 풍토에서 돌이켜보면 김학철이나 솔제니친의 문학과 사상의 핵심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라고 할때 우리는 그 일그러진 자화상에 참괴(惭愧)를 가져야 할것이다. 대서사시를 읊조리듯 장대한 느낌구조로서 루루세월속의 어마어마한 사태를 모조리 내포한 그들의 생애를 매개 작자들의 몸속에다 체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삶을 그냥 스토리가 강한 소설보듯이 하면서 비바람 세찬 현장으로의 출두를 거부한채 일껏 꾸민 으늑한 보금자리에서 키보드를 악기건반처럼 한가롭게 두다리며 음풍영월의 가벼운 미문(美文)만 량산하는 작태에 빠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결코 솔제니친이나 김학철이 바라는 이 시대 작가들의 진정한 모습은 아닐것이다. 주어진 자리에 안주하며 자사리기주의에 빠진 우리의 작가들에게 솔제니친, 김학철의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문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작가가 있다는데서 때때로 큰 자호감을 머금게 된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솔제니친과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문학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수 있는 계시로도 될수을것이다.  거장의 서거를 계기로 이제 우리문단의 지적력량(知的力量)에 얼마만한 여유 공간이 있는지 점검하는 자성(自省)의 시간을 가져봄이 좋을듯 하다.  "연변문학" 2008년 12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    거장들의 죽음 댓글:  조회:4189  추천:74  2007-06-29
 . 칼럼 .    거장들의 죽음    김 혁   지난 한해 세계문학계의 핫이슈를 살펴보면 많은 유명한 거장들이 유명을 달리한 해이기도 하다. 우선 한글 문학의 거목, 소설가 박경리가 5월, 폐암으로 타계했다. 박경리는 1969년 대하소설 “토지”의 련재를 시작, 장장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장 분량으로 탈고해 한국 현대문학에 금자탑을 세웠다. 그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속에 새겨진 개인의 일생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짚어낸데서 “한국문학의 어머니”로 불리고있다. 세계적 지성,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8월,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구쏘련 반체제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병동” 등의 작품으로 70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73년 체제의 불의에 대항한 “수용소 군도´ 를 내놓으면서 반역죄로 강제추방당했다. 그는 16년 만에야 로씨야 시민권을 회복해 귀국한뒤에도 서방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조국과 민족의 부활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평생 불굴의 저항 정신을 문학 작품에 담아내여 로씨야의 “살아있는 량심”으로 불리웠다.   이외 유명한 과학환상작가 아서 클라크도 3월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작품은 중국출판계에서 과학환상문학이 십분 풍미하던 80년대 조선말로도 번역되여 우리에게 읽힌적 있다. 그는 단순한 과학환상작가의 령역을 초월한 인물이였다. 1945년 그는 통신위성이란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실제로 통신위성이 출현한때보다 수십년을 앞선 획기적인 발상이였다. 또 우주왕복선과 슈퍼컴퓨터, 광커뮤니케이션 등을 너무도 정밀하고 자세하게 묘사한 그는 과학소설을 눈앞의 현실로 바꾸는 데 공헌한 인물이란 평가를 받았다. ------------------------------------------------- 한 시대를 풍미하며 세월의 행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풍운아들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우리 문단에서도 이 몇해간 1세대 2세대 원로작가들이 한분, 두분 유명을 달리하셔 문단을 슬픔에 빠뜨리고있다. 작가는 갔지만 작품은 남고, 올곧은 삶 역시 모든이들의 가슴에 남았다. 그들이 가는 길을 지켜보는 이들은 세상 방방곡곡에 참으로 많다. 묵도로 추념(追念)하는 정은 모두 그들이 뿌린 정신의 씨앗일터. 낡은것과 새것이 바통 터치로 임무를 교대하는 시점, 떠남과 도착이 한 정거장에서 조우하는 순간이다. 원로들은 떠나시며 젊은 후배들에게 세속을 벗어난 고독속에 창작을 신앙같이 여길것을 한결같이 당부한다. 도식적인 재단을 삼가하고 독자와 세월이 공감할수 있는 작품을 찾아 령혼의 울림을 이끌어내라고 조언한다. 하나 둘 큰별이 질때마다 풍운의 세월속에 자신의 존재 모두를 오로지 글쓰기에 투신한 진지한 정신과 품위있는 삶들을 이제는 더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그이들의 영정앞에 처연히 고개가 더 숙어지는걸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몫이란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여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그들이 남긴 문학적유산을 소중히 챙기는 일, 그들이 보여준 장인정신과 도저한 작가적 품위를 고스란히 이어받는 길이다.   큰 별의 빛으로 우리들이 나아갈 길을 비추어보며 위기의 우리 문학을 살리는 길에 소명을 다하고저 기축년 벽두에 각오 하나 머금어 본다.  "종합신문" 2009년 1월 5일      
25    우보천리 댓글:  조회:6358  추천:74  2007-06-29
. 칼럼 . 우 보 천 리  - 기축년 잡설      1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소만큼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물은 흔치 않다. 하늘을 담을듯 어진 눈,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듯한 든든한 뿔, 산이라도 옮길 힘이 있어보이는 넉넉한 체대…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우리조상들에게 소는 가장 도타운 친구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기도 했다. 논을 갈고, 우차를 끌고 연자방아도 돌리면서 인간의 힘으로 부족한것을 보충해 주던 귀한 짐승이였다.   시골에서 제1호 재산목록으로서 소가 있고없는것이 바로 그 집안의 경제력을 징표하군 했다. 따라서 한식구라는 뜻으로 소를 생구(生口)라 부르며 배려도 각별했다. 외양간을 부엌가까이에 지어 음식 대접을 했고 날씨가 추워지면 짚으로 짠 덕석(추울때 소의 등을 덮어주는 멍석)을 입혀 주고 봄이 오면 외양간을 맨 먼저 깨끗이 치우기도 했다. 소는 풍요와 힘을 상징한다. 그래서 풍수지리설은 고인의 산소를 택할때 “소의 형국을 택하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라고 했으며 “꿈에 황소가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고 길몽으로 해몽했다. 여기서 소꿈은 조상, 자식, 재물, 사업체를 상징한다고 한다.   때문에 소에 관련된 속담, 격언 사자성어 등 언어적 표현도 여느 동물보다 많다. “소 웃음”, “황소고집”, “소처럼 일한다”,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써라”, “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녀자에게 한 말은 난다”와 같은 속담… 사자성어로는 “돌밭을 갈아 옥답을 만든다”는 의미의 석전경우(石田耕牛), 쉬지않고 꾸준히 간다는 뜻의 우보천리(牛步千里), “범처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소처럼 우직하게 살아간다”는 호시우보(虎视牛步)”등이 있다. 교훈담으로 “교각살우(矫角殺牛)”라는 말도있다. “뿔을 고치려다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작은 일에 집착해 큰 일을 망치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권고하는 말. 이와 같은 표현들은 소처럼 순박하게 근면하게 충직하게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서구에서도 소는 오래전부터 숭배의 대상이였다. 고대 애급에선 소를 태양신의 자손이라 여겼다. 소가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 신전(神殿)에 매장할 정도로 신성시했다. 소는 때로 미련하고 멍청한 대명사로 비유되기도 한다. “소귀에 경읽기”, “소 제 이불 뜯어먹기” 란 속담이 그렇고 영어로 “우둔하다”는“보바인(bovine)”도 소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는 성실하고 온순하고 끈질긴 소의 무한미덕에 비하면 “옥의 티”와도 같다.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게 없다."라고 했다. 사계절 열심히 일하고, 팔려갈 때는 부(富)를 남겨주고, 우유와  고기로 영양을 공급해 주고, 가죽은 북으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식용외에 소는 각 부위별로 공업용, 약용. 미술품의 재료로 쓰인다. 례컨대 뿔은 활과 같은 무기, 우산, 칼, 담배 물부리, 도장재료 등 세공품의 재료로 쓰이고 발굽은 단추, 제유 등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소가죽은 물론 털도 담요, 띠, 솔 등의 제조원료로 쓰인다. 또 뼈와 힘줄로는 아교와 젤라틴을 만들고 창자는 테니스나 바드민톤의 채나 악기의 줄, 수술용 봉합사의 실로 쓰이는 등 어느 하나 버릴것이 없다. 이렇게 소처럼 인간에게 리로움을 주는 동물이 또 있을가? 모든것을 베풀며 주기만 하였지 욕심을 채우지 않는 동물 역시 소가 아닐가?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소는 말이 없어도 열두가지 덕이 있다”고 여겼고 로신과 같은 대문호도 “소는 풀을 먹지만 우유를 남긴다”고 “소 례찬론”을 펼쳤다. 2  연변특산 하면 곧바로 황소를 그중의 굴지로 꼽는다. 연변황소의 양육력사는 이미 100여년을 줄잡는데 한온대산구에서 양식이 적합한 역육(力肉)겸용의 소이다. 중국5대 지방우량소중의 하나로 뽑혀 그 명성이 높다. 연변황소는 적응성이 강하고 내한성이 좋으며 거친 사료도 잘 먹는 특점이 있어 기나긴 세월동안 줄곧 농촌의 주요 농경 동력과 비료 원천으로 되였다. 국가농업부는 연변황소를 국가품종자원 보호목록에 편입시켜 중점보호를 실시하고있다. 최근에 개량을 통하여 연변황소는 체구가 크고 견실하며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좋은 독특한 풍미의 고기소로 부상되여 일본의 화우, 한국의 한우와 나란히 어깨를 겨루게 되였다. 소띠해를 맞아 흥감이 아닌 자부감 어린 눈으로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우리의 연변황소다.  3  12간지중 가장 느리게 걷는 동물이 소다. 뱀은 기고 룡은 날고 쥐, 닭, 토끼는 방정맞고 돼지는 뒤뚱거리고 개와 원숭이는 천방지축이고 호랑이와 말은 날쌔지만 다급하다. 어느 순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들이다. 하지만 소의 걸음걸이에는 듬직함과 우직함이 담겨있다. 마치 숙고(熟考)끝에 중대사를 결재하듯 한발 두발 신중하게 자국을 남긴다. 그래서 “우보천리”라는 명속담도 생겨났다. 느릿하지만 꾸준히 천리를 가고 우직하지만 실족(失足)이 없는것이 황소걸음이다. 요즘은 매사에 속도가 강요되는 시대이지만 어찌보면 속도가 능사(能事)는 아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재빠르기보다는 우직함이 잔꾀보다는 성실함이 결국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것은 바로 이러한 “느림의 미학”이다. 용의주도한 관찰과 적확한 선택, 듬직한 결단과 우직한 실행으로 세상만사를 놓치지 않고 곱씹어 볼수 있는것이 우보의 기품이요 지혜다. 근년래 중국조선족은 변혁기의 갈림길에서 새롭게 거듭나기위한 산고와 같은 진통을 앓고 있다. 이 갈림길에서 작금의 시기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스스로 갈길이라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마다하지않는 소의 그 우직함이 필요하다. 힘들다고 주저앉지 않으며 갈길이 멀다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도전이야말로 우리 민족 모두가 소띠의 해에 다잡아 나가야 할 자세일것이다. 은근과 끈기, 여유로움을 지닌 소의 천성을 배워 신중하게 결단하고 듬직하게 행동한다면 곤경, 고통, 시련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을 다 떨쳐내고 우리는 또 한번 우수한 민족이라는 방명(芳名)으로 거듭날수 있을것이다.      
24    싸이코 패스 댓글:  조회:3641  추천:73  2007-06-29
    . 칼럼 .   싸이코패스  김 혁 1  80년대 서점가를 강타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양들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다. FBi미모의 녀요원과 련쇄살인범지간의 각축전(角逐战)을 다룬 범죄스릴러 작품이다. 신고끝에 검거된 흉수는 다름아닌 한니발이라는 이름의 법의학 박사, 잔인하게도 녀인들을 련쇄살해하고 인육을 먹기까지 한다.  중국판 \"양들의 침묵\"  미국작가 토마스 하리스의 출세작인 소설은 영화로도 각색되여 미국 개봉 당시 1억딸라이상의 수익을 거뒀으며 199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남녀 주연, 각본 등 주요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최고의 련쇄 살인범 영화”라는 극찬을 받으며 그후에도 시리즈로 도합 세편이 제작되였다.  영화 \"양들의 침묵\"시리즈 영화포스터  “양들의 침묵”은 우리 조선족독자들에게도 료녕성 심양시에서 꾸리는 조선말 문학지 “송화강”에 의해 번역련재되여 소개된적있다. 작품속의 한니발과 같은 이들을 가리켜 “싸이코패스”라고 부른다. “싸이코패스(psychopath)” 는 독일학자들이 정의한 개념으로서 “성격탓으로 인해 자신. 타인이나 자기가 속한 사회를 괴롭히는 정신질환자를 말한다. 싸이코패스는 자제심, 량심, 도덕성 등 통제기제가 미약해 순간적인 충동으로 반도덕적, 반사회적 행위를 저지른다. 싸이코패스들은 사회적 략탈자이다. 자신의 본능에만 사로잡혀 과대망상적이며 비륜리적,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죄책감이나 량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무고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들의 인생을 부숴버린다 놀라운것은 싸이코패스의 특성상 주변 사람들, 심지어 가족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것이다. 평상시에는 일반인처럼 생활하지만 가면속에 섬뜩한 범죄 본능이 움츠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치명적인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정장을 입은 뱀”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흔히들 싸이코패스를 현대인이 만들어낸 “악마” 혹은 “돌연변이 괴물”이라고 표현한다.   2  요즘들어 한 련쇄살인범의 검거로 한국 전역이 충격에 빠졌다. 강호순(38)이라는 범죄혐의자가 나포되였는데 이 유순한 용모의 “악마”는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간 한국 경기서남부지역에서 부녀자 7명을 살해해 암매장한것으로 드러났다. 련쇄살인범 강호순은 피해녀성들에게 성폭행의 목적으로 접근하여 대부분 스타킹으로 목 졸라 살해한뒤 암매장한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2005년 화재로 부인이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방황하다가 녀자들을 보면 살인충동을 느꼈고 그런 와중에 1차 범행을 한 다음부터는 충동을 자제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련쇄살인범 강호순  피해녀성가운데는 회사원, 노래방도우미 그리고 녀대생도 있다. 7명 가운데 3명은 노래방에 손님으로 찾아가 유인해 데리고 나온뒤 살해하고 4명은 정류장에서 뻐스를 기다리는 녀성을 태워주겠다고 유인해 강간 또는 강도후 살해했다. 강씨의 범행수법은 치밀했다. 피해자들의 카드로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을때 가발을 쓰고 지문을 남기지 않은 점, 범죄에 사용된 차량을 모두 불태운 점,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피해자의 손톱을 자른 점 등은 곧바로 “싸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수법이였다. 3 싸이코패스의 마수는 재한 조선족에게까지 미쳤다. 련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의 네번째 희생자 김모씨는 연길사람으로서 환갑년의 홀어머니와 학업중인 딸을 두고있다. 3년전에 한국땅을 밟은뒤 힘겹게 번돈을 열심히 집으로 송금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가족에 안부전화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련락이 끊겼다.  2007년 1월 6일 하필이면 강호순의 마수에 걸려든것이다. 김씨 유족은 그의 딸에게는 아직도 “엄마가 살인마에게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있다. 김씨의 유일한 희망은 그 딸이 명문대에 들어가는것, 때문에 유족들은 딸이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되도록 이 청천벽력의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숨진 김씨의 어머니는 언젠가 손녀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진다고 한다. 그런데 김모씨의 시신 발굴은 다른 희생자보다 난항을 겪고있다. 련쇄살인범 강호순이 김씨를 암매장했다고 진술한 화성시 마도면 고모리 야산에 지난해 골프장이 들어섰던것이다. 경찰은 굴착기 등 설비를 동원하여 이틀째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뼈조각 몇점을 수습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식 결과 동물뼈로 확인됐다. 유력한 매장 지역에서 시신이 발견되지 않음에 따라 골프장 조성 과정에서 시신이 류실됐을것으로 추정하고있다.  련쇄살인범 강호순이  중국동포 김모씨 시신을 암매장했다고 밝힌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고모리 골프장에서  발굴작업을 벌렸으나  결국 성과 없이 끝났다 변호사는 \"형사소송에서는 자백과 함께 보강증거가 중요해 시신을 찾았는지가 중요하지만 손해배상소송과 같은 민사소송은 피의자가 범행을 인정하는것만으로도 불법행위가 성립한다\"며 \"김씨의 유가족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면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특히 한국의 민법은 자국내 령토 안에 있는 모든 외국인에게도 적용하는 속지법주의(属地法主义)원칙을 따르고있어 국내에서 민사상 손해를 입었다면 국적과 무관하게 관련 법의 보호받을수 있다. 그러니 김씨의 국적이나 시신 발굴 여부에 관계없이 강호순에게 민사소송을 통해 책임을 물을수 있다는 이야기다.한편 피해자 유가족들은 련쇄살인범 강호순을 상대로 11억여원(한화)을 배상하라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일전 한국의 한 싸이트에는 살인마의 손에 죽어간 동포를 추모하는 시 한수가 떠올랐다. 오호, 하늘이여 마지막 숨을 쉬면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던가.고향 연변, 혹은 흑룡강의 맑은 봄 하늘이 흰자위만 남은 그 눈위로 내려 앉았을까.삶과 죽음 사이, 그 찰나 그리운 사람들의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그 눈위에 스쳐 지나갔을까. 오호라, 당신은 E.A Poe 단편소설의 그녀처럼시멘트 벽을 관을 삼아 밀폐된 그녀처럼,자~랑스런 선진국, S. Korea 어느 컨츄리 클럽에 외로이 묻혔는가 모를 일이다, 썩어가든 말라가든 형체는 유지되고 있는지혹 포크레인에 찍히고 불도저에 너덜너덜 해진 당신의 육신은구더기, 지렁이, 초파리를 친구삼아이미 골프장 페어웨이 옆 이름모를 꽃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그리하여 그 홀씨는 바람타고 연변으로, 흑룡강으로 돌아갔는지모를 일이다 당신에겐 검정고양이도 없는가당신의 헤어진 시신을 찾는 데 10억이니, 100억이니영업이 어떠니, 계산에 바쁜 저 Homo Economicus들 외당신을 위해 울어줄 외눈박이 검정고양이도 없던가 하늘이여, 탐욕과 죄악으로 얼룩진 이 스산한 대지위에 한 자락 소낙비라도 뿌려줍시사.  단 하나, 잘 살아보자는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행을 했던 한 조선족녀인의 꿈이 싸이코패스의 마수에 산산이 부서져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떠돌고있다. 참으로 소설속이나 영화에서나 읽을법한 처연한 사연이 아닐수 없다. \"종합신문\" 2009년 2월 16일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23215\');
23    거짓말 탐지기 댓글:  조회:3881  추천:73  2007-06-29
  . 칼럼 .  거짓말 탐지기  김 혁   1 어릴적 칼로 콜로디의 유명동화 “피노키오의 모험”을 읽고 나도 거짓말했다가 자칫하면 저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지면 어쩔가 무척이나 걱정했던적이 있다.   내가 소장한 중국판 \"피노키오의 모험\" 그후 거짓말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할수있는 년령단계가 되여 성추문사건에 휘말려든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이 위증을 하면서 자신의 코를 자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며 위선자들의 곤궁스런 모습에 잘코사니야!하고 조소를 흘리기도 했었다.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인식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면서부터 거짓말을 배우기 시작하며 자신의 리익을 위하여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 버러지같은 단세포 생명체건, 인간같은 고등동물이건 그들의 거짓말이나 기만과 위장은 수십억년의 진화가 만들어 놓은 생존술의 일부였다. 각 민족별로 태고적의 신화나 설화에서 보아도 인간의 이런 생존술이 잘 반영되여 있다. 그리스신화의 제우스는 녀자들을 꼬여 자손을 퍼뜨리기위해 거짓말을 사용했고 구약성서에서 야곱의 아들은 동생 요셉을 장사꾼들에게 팔아먹고 와서는 천연덕스레 아비앞에서 거짓말을 한다. 우리민족의 유명한 설화 “별주부전”에서도 토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장황한 거짓말을 늘여놓는다. 인류가 정확히 어느때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였는지 그 기원에 대하여 서는 고증할바가 없지만 사람이 상호간 접촉이 있게 되는 집단생활을 하면서부터 거짓말도 생기게 되였다고 추정한다. 그에 따라 거짓말을 간파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시작되였다. 2 인류는 기계적인 장치를 리용해서 거짓말을 가려내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해왔다. 마침내 1885년에 이딸리아의 생리학자 롬브로소가 사람 몸의 움직임, 호흡, 땀, 혈압과 심장박동의 변화를 그래프로 보여주는 거짓말탐지기를 고안(考案), 그러다가 1921년 미국의 존 라손이 혈압, 맥박, 호흡을 기록할수 있는 거짓말 탐지기를 발명했다. 거짓말 탐지기는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신체에 반응을 일으키는 스트레스가 가해진다는 리론에 기초하여 개발됐다.  불안과 초조는 혈압, 호흡, 피부에 흐르는 전기의 량 등에 변화를 주며 탐지기는 이를 측정해 거짓말 여부를 판단한다. 가슴, 손가락, 팔 등에 여러 가지 센서를 부착해 호흡, 맥박, 혈압 그리고 혈류량 등을 측정하고 그 반응을 기록하는 것이다. 거짓말 탐지기는 그동안 수없는 개진을 거쳐 50년대 초반부터 범죄 수사에 적극 활용되여왔다. 당사자의 진술외에 객관적 증거를 찾을수 없는 사건수사에서 거짓말탐지기만큼 유용한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미국등 선진국에서 거짓말탐지기에 대한 연구는 활발한 진행형, 다양한 종류의 거짓말 탐지기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을 리용한 기기, 뇌파 감지기, 눈동자나 표정의 미세한 움직임을 읽는 장치 등…그중 뇌파 측정 거짓말탐지기는 진실과 거짓말을 할 경우 진실만을 말하는 경우보다 0.04∼0.06초 정도 더 시간이 걸리는 미세한 차이를 포착한다. 이밖에 눈동자의 움직임과 눈의 미세혈관의 온도를 이용해 거짓말을 감지하는 것과 1만가지 표정 변화를 읽어내는 장치도 있다. 3  연변에서 처음으로 거짓말탐지기가 범죄수사에 적용되였다. 2월 13일 연길시의 모 금은 가공점에서 백금가락지가 모조품 가락지로 바뀐 사건이 발생, 이에 업주는 경찰에 제보했다. 하지만 금은 가공점에 가설한 감시카메라가 고장났고 사건발생시간을 확정할수 없었기에 사건해명은 난국에 부딛쳤다.경찰은 금은 가공점의 직원들을 불러다 거짓말탐지기로 측정, 결과 이 가공점의 직원인 가씨가 경찰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 거짓말탐지기에 이상현상이 포착됐다. 가씨는 출국수속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저 금은 가공점의 금제품을 모조품으로 바꾸어 장춘에 가서  가치가 7만원에 달하는 장물을 처리했다고 탄백했다. 일전에  범죄해결의 가장 기초적 방법은 그저 현장에 남겨진 지문이나 모발, 타액 등의 각종 증거물을 옳바로 분석해서 범인을 잡는 것이였다. 하지만 현재의 경찰들은 과학수사에 립각하여 지문자동검색시스템(AFIS) 도입, 컴퓨터 거짓말  탐지기의 활용, 폐쇄회로TV, 영상사진 판독시스템, 유전자 분석, 음성분석 등 다양한 과학수사기법을 활용하여 신속히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범죄수단이 날로 창궐해지고 지능화 추세를 보이고있는 오늘날, 소설이나 영화속에서나 보아왔던 거짓말탐지기가 범죄수사에 적극 활용되여 안전 사회구축에서 “천리안, 순풍이 (千里眼 顺风耳)”의 위력을 떨칠수있기를 기대해 본다. \"종합신문\" 2009년 3월 2일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423229\');
22    매란방과 최승희 댓글:  조회:5649  추천:75  2007-06-29
                  . 칼럼 .   매란방과 최승희          김 혁       1 영화 “매란방”이 개봉되면서 세계적으로 다시 중국의 국수(国粹)인 경극에 관심이 모이고있다. “매란방”은 “신도 뛰여 넘을수 없다”는 재능을 가진 전설의 경극배우  매란방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중국제5대감독의 대표주자인 진개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과 향항의 톱스타들인 려명, 장자이 등이 열연을 펼쳤다. 영화 "매란방" 포스터 개봉과 동시에 2주 련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관련 드라마, 도서가 제작되며 전국전역에 다시한번 “매란방 열풍”을 일으켰다. 제 59회 베를린 영화제 주요경쟁부문에도 출품되여 베를린에서 유럽지역 개봉식을 가지며 반응이 좋아 영화표가 몽땅 매진되는 등 경극의 매력을 만방에 자랑하고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중국의 경극200년사에서 최고로 지칭되는 천재 경극배우 매란방. 경극에서 녀자역할을 맡는 남자 배우 화단(花旦)연기의 일인자로 중국대륙은 물론 미국 브로드웨이에 까지 진출하며 전세계에 경극의 아름다움을 알린 신화적 존재이다. 매란방은 1894년 강소성 양주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모두가 경극계의 명배우들인 경극세가(世家)에서 태여났다. 1934년경 두각을 나타내였고 그후 20여 년 간 북경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경극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매란방은 새로운 형식의 녀장남우를 연기하면서 형식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고전극에 일대전환을 가져왔는데, 극의 내용과 연출법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19, 1924, 1956년의 3회에 걸친 일본 공연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또 그동안 미국, 쏘련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순회공연을 통해 경극의 존재와 그 진가를 세계에 널리 인식시켰다.  매란방과 세계적인 희극대가 채플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후에도 경극의 전통적 체계를 보전하면서 그 개혁과 발전에 힘썼다. 배우로 활약하는 한편, 중국 희곡연구원 원장을 맡아 후배 육성에 힘쓰고 많은 배우를 배출했다. 나아가 전국인민대표, 중화전국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 등 요직에 있으면서 문화적정치적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모택동 주석의 접견을 받는 매란방 (우로부터 두번째) 대표작으로는 “천녀산화(天女散花),”백사전(白蛇传)”, ”귀비취주 (贵妃醉酒)”, ”패왕별희 覇王別姬”, ”대옥장화 (黛玉葬花)”등이 있다.  중국 우표에 오른 매란방  매란방을 경극계의 공전절후한 왕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그의 인기를 실감하는 작은 일화를 곁들어 본다. 매란방의 출연료는 금괴 10개에 상당했다고 한다. 해방후 부자가 사라진 중국, 당시 최고 로임을 받는 사람이 바로 매란방이였다. 50년대 국가 주석 모택동의 로임은 408.8원(인민폐), 매란방은 자유직업자인만큼 출연료가 순 수입이었는데 1956년 매란방이 주동적으로 월급을 낮춘 후의 로임이 2100원(인민폐)에 이르렀다. 당시 청화대학의 교수는 매달 식사비 8원(인민폐)으로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었다는 상황에 대비해 매란방의 로임 2100원은 어떤 개념인지 가히 가늠할 수 있다. 때문에 항미원조때 대포도 아닌 비행기를 직접 기증할 수 있었다는 매란방의 경제력이 더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여기 또 한분의 춤의 대가가 있다. 바로 민족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이다. 강원도에서 태여나 서울에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최승희는 1926년 일본에 류학하여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서 춤을 배웠다. 1929년 귀국하여 서울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였다. 두차례 일본 류학 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을 출간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193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전미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며 '동양의 진주' '금강산의 화신'이란 갈채를 받았으며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을 반하게 했다.  1947년 조선으로 건너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조선춤을 체계화하며 무용극 창작에 힘쓰다가1969년 타계했다.   조선 최초의 월드스타였던 최승희, 최승희의 삶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를 관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얼음과도 같은 시대에 그는 오로지 춤만 고집하면서 험난한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세계로 발돋움하여 우리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헌신했다. 그녀의 작품세계에는 민족주의적, 국제주의적 성향이 짙게 배여있으며 그가 민족 무용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쉼없는 춤사위를 통해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당시 춤작품의 류통구조에 신기원을 열었으며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과 함께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신화적 존재로 각인되였다. 3  연변대학 예술학원 리애순교수는 최근 발표한 론문 “중국무용의 현대화와 최승희의 역할” 에서 최승희가 중국에 예술무용을 전파하며 중국무용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승희는 세계 공연을 마치고 중국으로 와서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차원높은 예술무용을 공연하여 중국예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44년 북경의 북해부근에 “동방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중국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중국 예술전통을 익혀나갔다. 바로 이 시기 매란방과 최승희는 력사적인 조우를 가진다. 매란방등 경극계의 명배우들은 최승희를 수차 방문했고 그와 함께 무대예술방법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최승희의 높은 무용예술표현, 견해는 매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중국의 “화경일보”는 “노래를 위주로 하는 옛 경극은 최승희 무용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국에 가서 변혁을 일으킬것 같다”는 소식까지 실으며 최승희의 실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중국경극에 출연한 매란방과 최승희  (좌, 우) 중국 병영의 문예일군들에게 무용 강의를 하고있는 최승희. 경극대사 매란방과 교류하면서 최승희는 경극을 토대로 한 무용 창작론과 기본 동작을 모형화하고 교수체계를 정립해 중국 무용을 현대화하는데 기여했다. 한편 자신의 무용세계를 살찌우는데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는 실제 중국무용의 실험적 창작에도 참여해 여러 류형의 창작물을 탄생시켰다. 그중 중국의 고전문학과 경극의 검무를 소재로 만든 “패왕별희”와 당나라 양귀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양귀비연무지도”가 대표적이다. 퓨전(서로 다른 두종류 이상의것이 합해져 새로운것이 됨)의 시대로 불리는 요즘이다. 모든것의 경계가 소멸되고 다양한것들이 서로 뒤섞이는 탈중심시대, 새로운 퓨전문화가 우리주변을 노크하고 깃들고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읽어나가야 하는지를 대가들의 앞선 행보는 보여주고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조명되고있는 예술대가들의 모습들, 다시한번 경모를 머금고 보고 듣고 읽어본다.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21    곡돌사신 (曲突徙薪) 댓글:  조회:3132  추천:73  2007-06-29
  . 칼럼 .  곡돌사신 (曲突徙薪) 김 혁    1 어쩌구려 기축년 새해의 들머리는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난 화재소식으로 장식되였다.2월 초 동시다발적인 산불이 바람을 타고 호주 남부 빅토리아주 전역을 휘감았다. 사망자만 210명, 실종자는 80여명에 달했다.한국에서는 정월대보름날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 정상에서 열린 억새태우기 행사에서 산불로 인해 사망 7명과 중,경상 82명이라는 사상자를 냈다. 중국에서는2월 9일, 중앙TV가 북경에 신축중인 사옥에 린접한 북쪽 건물에 화재가 발생, 무리하게 불꽃놀이를 벌이다 발생한 화재에서 소방관 1명이 숨지고 7명이 부상당했다. 올해 문을 열 예정이던 30층짜리 호텔이 피해를 입었으며 CCTV 신축사옥 건물 일부가 불에 훼손됐다.   2 석연치 못한 마음으로 연거번거 발생하는 화재소식을 접하노라니 전한(前漢)시기 한서(漢書)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곡돌사신”이라는 고사이다. 여기서 곡은 (曲:굽을 곡). 돌은 (突:굴뚝 돌). 사는 (徙:옮길 사). 신은 (薪:땔나무 신)을 뜻한다. “굴뚝을 구부리고 굴뚝 가까이에 있는 땔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는 성구로 화근을 미리 치움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다는 뜻을 가지고있다. 이야기에 의하면 길 가던 어떤 나그네가 려염집을 찾아들어 하루밤 신세를 지게 되였다. 나그네는 그 집의 굴뚝이 너무 곧게 세워져 있어 이따금 불길이 새여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였다. 게다가 굴뚝 바로 옆에 땔 나무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걸 보고 그냥 지나칠수 없어 나그네는 주인에게 충고해 주었다.“이러다 큰일 나겠소이다.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도 멀리 옮겨 놓으시오. 그렇지 않다간 큰 화재를 입을지도 모르오”그러나 주인장은 “별 오지랖 넓은 나그네 다 보겠네”하고 고깝게 생각하며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뒤 그 집에는 큰불이나 전재산을 태워버리고 말았다.   3 지난해 연변에서 발생한 화재사고는 390건이나 되며 직접적 경제손실은 660여만원에 달한다. 불과 춘절을 며칠 앞둔 1월 24일에도 번화가 서시장 뒤골목에서 화재가 일었고 29일에는 민속촌부근에서, 3월 30일에는 연길시 모아산국가삼림공원광장부근에서 련이어 2차의 화재가 발생했다.  이처럼 화재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예고없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하기에 철저한 예방만이 최선이라 할것이다. 봄이 오면 화재가 유난히 많이 발생한다. 봄철에는 습도가 낮아 주위의 물체들이 매우 건조한 상태로 놓이게 되는 까닭이다. 뒤죽박죽 부는 봄바람 탓도 있다. 이 또한 화재를 재촉하는 기상요인이다. 따라서 봄철이면 조그마한 불씨라도 삽시간에 큰 불로 확대될수 있는 위험한 연소조건을 형성한다는것이다.이러한 연소조건과 더불어 화기취급상의 부주의, 태만, 관리소홀, 만성화된 안전불감증이 화재의 주된 원인이 되고있다. 불은 우리가 잘 다루면 득이 되지만 잘못 다루면 무서운 화를 가져다준다는것을 새삼스럽게 가슴에 깊이 새겨둘바가 있다. “오지랖 넓은 나그네”의 귀뜸처럼 깐깐하게 예방하고 확인하는 “곡돌사신”을 실천하는 길만이 바람잦은 이 계절 화재나 재앙을 막는 최선의 지름길이다. \"종합신문\" 2009년 4월 6일  
20    령혼의 방 댓글:  조회:4360  추천:78  2007-06-29
  . 칼럼 . 령혼의 방 김혁 고대 애급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무세이온”이라는 도서관이 있었다. “무세이온 (mouseion)”은 신성한 사원이라는 뜻이다. 이 도서관은7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알레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와 같은 쟁쟁한 석학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전란을 겪으면서 무세이온이 그만 불타버렸다. 고대 이집트의 녀왕 클레오파트라는 미모만 빼여난것이 아니라 학문과 책을 사랑했던 지성적 녀인이기도 했다. 그는 분소(焚燒)된 장서를 몹시 애통해했다. 하여 즉위하자 도서관 재건부터 팔을 걷어부쳤다. 그의 로고에 인차 20만권의 두루마리 장서로 새 도서관을 채울수있었고 그 덕에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학문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5세기까지 문화와 과학이 륭성한 도시로 번창할수 있었다. 사실 요즘만큼 책읽기가 운위(云谓)되는때도 없는듯하다. 해마다 봄이면 의례적으로 기관, 언론사•시민단체 등이 잇따라 독서캠페인을 벌린다. 좋은 일이다. “개권유익(开卷有益. 책은 펼치기만 해도 리익이 된다)”이라 하지 않았던가. 독서 캠페인으로 책읽는 풍토가 확산되고 나아가 위기에 처한 민족문화까지 일으켜 세운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조용히 살펴보면 작금의 우리의 독서풍토는 사실 심히 부끄러운 수준이다. 지식정보가 가속적으로 팽창하고 출판 도서도 늘어나고있는데 숨가쁘게 돌아가는 오늘의 절주는 외려 책과 담 쌓는 세태를 만들고있다. 출국, 도시진출로 인한 독서인구의 급락, 인터넷이 발달로 인한 활자매체의 소외가 이러한 풍토를 만들고있고 독서 문화의 부재를 실감케 한다. 각종 캠페인과 홍보활동을 벌리고 있지만 여전히 형식적이고 의례적이기 일쑤여서 전반 민족을 통한 독서의 저변 확대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공공도서관의 인력과 장서수도 부족해 정보화, 개방화시대에 필수적인 다양하고 신속한 정보를 시의적절하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도 안고있다. 정보의 보고로서의 독서공간이 기능을 다하도록 하고 대중들이 손쉽게 독서할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이 이루워져야 전 민족을 아우르는 독서풍토의 형성을 기대할수 있을것이다. 학습형사회, 독서형사회구축에 관한 정부의 바램이 사회성원들의 행동으로 되게 하자면 바로 이 운동을 이끌어갈 전문시스템이 구전해야 하는것이다. 이면에서 조권옥 사장이 휘동하고있는 연변조선문독서사의 노력의 행보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있고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있다. 옛날 서구사람들은 독서실을 “령혼의 방” 혹은 “령혼의 료양실”이라고 불렀다. 또 “책이 없는 방은 령혼이 없는 방과도 같다”는 속담, 경구도 만들어냈다. 클레오파트라처럼 전민독서의 중요를 깨쳐알고 피폐해진 토양우에 도서관 하나, 독서실 하나를 조성하는 절박함을 우리는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처처에서 볼수있는 유흥장소가 아닌 “령혼의 방”에서 좋은 책과 만나다 보면 우리는 아름답고 윤택한 인생의 길을 찾을수 있을것이다. 또한 개인의 발전속에  요즘 흔들리고있는 우리의 공동체 역시 선진민족으로 발돋음하고 세계속에 확실하게 뿌리 내릴수 있을것이다.   "종합신문" 2009년 4월 13일  
19    사라지는 전통농가 댓글:  조회:4010  추천:73  2007-06-29
   . 칼럼 .   사라지는 전통농가   김 혁     1 저기저기 저달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짓고/ 량친부모 모셔다가/ 천년만년 살고지고… 누구나 어릴적에 불러봤을 구전민요 “달노래”의 한구절이다. “옥도끼 금도끼로 찍고 다듬어 짓고 천면만년 살고지고”저하던 집, 그 집이 사라지고 있다. 조선족전통가옥이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선족 밀집구역이였던 룡정이나 화룡 지역에서 루루세월 기록해온 조선족농가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자치주수부인 연길시 교외의 소영진 하룡촌에 서도 100년세월 버텨온 전통가옥 한 채도 불과 몇해전에 소실됐다. 현재 룡정시 지신진 장재촌과 개산툰진 북흥촌, 훈춘시 경신진 회룡봉촌에 부분적으로 몇채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나마 언제 스러질지 몰라 그 모습이 곤궁스럽다. 조선족 전통가옥은 이땅에 정착한 조선족 이주민들의 애환을 담은 1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다. 이미 세계에 그 우수성을 알린 한옥의 계승과 발전으로서의 연변의 전통농가는 온돌방과 마루가 균형있게 결합되고 외양간이 딸린 륙간집, 팔간집이 그 형태인데 북방의 추위와 더위를 해결해주고 가족제도에 맞게 남녀와 장유(長幼)관계에 따라 공간 배치 또한 적절한 구조를 이루고있다. 연변주 건축설계심사쎈터의 김광택교수는 전통가옥의 소실에 대해 “옛집을 지어온 장인들이 타계해서 그 기량을 지닌 이들을 찾아볼수 없고 또한 조선족전통가옥 항목을 신청하는 보호단위가 없기때문.”이라고 분석한다.   2 해외에서 꾸준히 펼쳐오는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라는 캠페인이 있다. 산업혁명의 개발 바람이 자연과 문화유산을 거침없이 날려버리던 1895년 영국에서 발기된 자연신탁국민운동. 시민들의 자발적인 헌금과 기부를 통해 보전할 가치가 있는 자연과 문화유산을 사들여 영구적으로 관리하는공익적인 운동이다. 3인의 민간독지가에 의하여 설립, 파급된 이 캠페인으로 민간단체들은 총 연장 4백마일에 이르는 자연해안을 보유하거나 보전하고 있으며 2백개 이상의 력사적인 건물과 40만 에이커(영국에서 주로 쓰이는 면적단위) 정도의 토지를 사들여 보존을 목적으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이 단체는 46만명 이상의 자연애호가들을 규합하게 되었으며 자연미를 지키자고 하는 국민운동의 핵심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1907년에는 법률의 뒷받침을 받기에 이르렀다. 1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이 활동은 미국을 비롯하여 오스트랄리아, 일본 등 약 30여개 국가에서 추진되고 있다.  산업화과정에서 겪게되는 자연환경 및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자원의 파괴는 인간 본연의 상태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강조하면서 자연으로의 복귀 내지는 환경보전을 주장하는 사상은 우리에게도 곧바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3 우리의 전통과 맥줄기중에는 다양한 형태나 요소가 많은데 그중 전통농가는 의식주를 지켜준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에게 사뭇 중요한 생활경관의 하나이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도래와 함께 “개발”이란 이름아래 아빠트가 도시에서 농촌까지 들어서고 도로가 뚫리고 각종 산업시설, 공장, 유흥업소들이 들어서다 보니 오래된 집도 헐리게 되고 편리를 추구하다 보니 옛날 전통가옥은 세월의 뒤안길로 밀리게 되였다. 앞으로의 세기는 문화세기라고 일컫는다. 문화에는 우렬이 없다. 그 민족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 문화자체는 독자적이고 전통적인것이어서 비교의 개념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개념이기때문이다. 때문에 전통의 파괴와 무분별한 타의추종은 무엇보다도 자기것을 업신여기는 렬등감에서 나온 부끄러운 행위이다.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의 경물, 우리의 가락, 우리의 말들이 이미 “명소”, “명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지만 우리의 보존과 활용은 여전히 미약하다. 너나 할것없이 부동산, 아파트를 투기, 투자의 대상으로 삼는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나 전통농가들로 조성된 마을이나 특별한 단지의 구축에 한번 눈길을 돌림은 어떨까? 우리 스스로가 보호와 활용방법을 개발하고 또한 이를 타민족과 외국인들에게 개방, 제공한다면 외부인은 우리만의 문화를 체험, 공유하고 우리는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유조하리라고 본다. 해외에서 좋은 본을 보여준 내셔널트러스트의 경험을 적용해 전통농가를 지원자들에게 분양하는것도 하나의 좋은 방식이 아닐가? 견고한 콩크리트가 아닌 부드러운 결이 선 목재의 퇴마루,  얼레빗으로 곱게 다듬은듯한 노란지붕, 이마를 마주하듯 처마와 처마가 맞대여 있던 낮은 농가들, 보는 눈이 정겨워 보이게하고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전통가옥이 이제 당금 사라져 영상이나 박물관에서나 찾아볼수 있을것 같아 마음이 석연치 못하다. 우리는 언제쯤 우리들의 힘으로 지역의 문화유산과 환경자산을 보전하고 가꾸며 미래에 보답할 관리자로서의 사명을 다할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종합신문" 2009년 4월 20일        
18    조선족 트랜스젠더 댓글:  조회:4509  추천:73  2007-06-29
  . 칼럼 .  조선족 트랜스젠더 김 혁 1 트랜스젠더, (Transsexualism) 성전환(性转換) 치료를 거쳐 태어날 때와 다른 성별로 바뀐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다. 현대 정신의학은 트랜스젠더를 “성 정체성 장애”로 본다. 흔히들 동성애와 혼동하는 경향이 많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동성애나 이성애는 성적 지향성인 반면, 트랜스젠더는 후천적으로 습득된 성의식이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엇바뀐 성적경향에 대한 기재가 있다.명대 리여진(李汝珍)의 저서 “경화원(《镜花缘》)”에서는 꽃치마를 입고 전족을 하고는 “녀아국(女儿国)”에서 왔다고 자처하는 남자가 나온다. 청나라의 광양잡기(《广阳杂记》)에서도 출가한 동방화촉의 밤에 그만 신부가 남자임이 밝혀졌다는 기재가 있다. 서구에서는 서기 200년경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가 의사에게 녀성성기를 만드는 수술을 받은뒤 총애하던 남자 노예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실제로 1952년 미국의 한 남자가 수술을 받고 녀자로 다시 태여났다. 유전자가 결정한 성을 인간이 바꾼 최초의 근대적 성전환 수술이였다. 2최근 52세의 한 조선족 남자가 성전환수술을 받고 녀자로 다시 태여나 화제다. 길림성 도문시의 일반 가정에서 태여난 춘화(가명)는 어릴때부터 자신이 녀자이길 바랬다. 부모들은 그의 변화를 발견하고 의식적으로 그의 행동을 통제했지만 이럴수록 역심리가 더욱 강했다. 그는 늘 누나의 옷을 가만히 몸에 입어보고 머리를 기르려 했으며 반급에 있는 남자애를 좋아하기까지 했다.   조선족 첫 트렌스젠더- 춘화  27살때 부모들의 의사에 따라 결혼하게 되였지만 줄곧 아이가 없이 15년간 생활하다가 리혼하고 말았다. 리혼후 그는 성전환수술에 대해 생각했다. 수술비용을 벌기위해 그는 한국으로 출국 했다. 올해 년초 귀국한후 할빈의학대학 부속제4병원을 찾아 드디여  성전환수술을 받게 되였다. 10여시간의 복잡한 수술을 통해 춘화는 드디여 바라던 새로운 몸으로 거듭날수 있었다. 수술을 마친 춘화는 \"다년간의 꿈을 이루게 되여 너무 기쁘다. 자신이 이제 완전히 녀자로 되였다는 사실이 수술의 아픔을 초과한다.”고 격동된 심정을 표했다. 3 중국에서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트렌스젠더와 같은 성적소수자는 적지않은 수로 예산되며 주변국인 한국내에만 3~ 4천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사실상 사회적, 법적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한국의 유명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     중국의 유명 트랜스젠더- 진리리 한때 남성이였던 이들이 녀성으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사회는 아직 그들을 받아들일 아량이 부족하다. 사회, 력사, 문화적인 배경과 분위기, 그리고 소수자는 다수와 다르다는 리유로 이들을 우리 사회의 동일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해외에서는 트랜스젠더, 호르몬치료, 성형수술 등 우리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몸의 인식론적 지도를 어떻게 그려야할지에 대한 론쟁의 장이 그냥 펼쳐지고있다. 미국의 인류학과 교수인 힐러리 크레인은 \"트랜스젠더들은 ‘제3의 성’이라면서 남성과 녀성외에 다른 성이 있을수 있다는것은 문화의 차원에서 허용할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제 우리 조선족에도 트랜스젠더가 나타났다. 이들 성적소수자의 행복과 인권을 위한 사회적 수용이 불가피할 때가 다가왔다.  “종합신문” 2009년 4월 27일  
17    신종 바이러스 댓글:  조회:3900  추천:73  2007-06-29
. 칼럼 . 신종 바이러스 김 혁 180년대 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했던 “카산드라 철교”라는 이딸리아 영화가 있다. 전염병에 감염된 괴한이 국제렬차에 탑승하고 이를 알게된 당국의 한 무지막지한 장관이 전염병의 확산을 제어하려고 렬차 승객 전체를 헐망한 카산드라 철교로 강압적으로 몰고가 전멸시키려 하는데 렬차의 승객들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 전염병을 치료하고 정부군과 대결을 벌리는 이야기다. 영화 \"카산드라 철교\" 포스터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에 세계적인 섹시심벌 소피아 로렌의 주연으로 더욱 빛났던 영화. 그 영화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전염병의 위해와 공포를 생생하게 접할수 있었다. 2초여름의 열기와 더불어 느닷없이 닥쳐온 메히꼬발 신종 인플루엔자(H1N1)가 전 세계를 공포에로 몰아넣고 있다. 발생하자마자 미국과 유럽, 남미로 퍼졌고 불과 보름만에 세계로 확산됐다. 5월 13일까지 세계보건기구가 집계하는 인플루엔자 감염자 수는 메히꼬와 미국을 비롯한 33개국에서 5천728명으로 증가, 사망자는 무려 61명이나 된다.흉흉한 괴소문은 세계를 실시간으로 련결해주는 인터넷을 타고 지구촌에 번졌고 따라서 려행산업과 류통업 등이 대대적으로 위축되였다. 세계은행 보고서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세계로 퍼지면 경제적 손실이 3조∼4조4000억딸라에 이를것으로 예측했다.인플루엔자의 력사를 살펴보면 공포감이 몰려올만도 하다. 1918년 에스빠냐 독감 이후 1957년 아시아 독감으로 100만명, 1968년 향항 독감으로 75만명 이상 사망했다는 끔찍한 기록이 있다.이번에 무섭게 퍼지고 있는 신종 독감이 인류사상 가장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혔던 에스빠냐 독감의 “직계자손”이라는 설(说)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였던 1918년 3월 느닷없이 미국 캔자스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40여명이 신열이 나며 나흘만에 모두 사망했다. 전쟁시국이라 병원체(病源体)나 다름없던 그 부대의 남은 전사들은 계속 전선에 투입되였고 병균은 그만 유럽 각지로 걷잡을수없이 전파되고 말았다. 결과 무려 2천만 내지 5천만명이나 사망하는 대참사를 유발하고 말았다. 이는 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수보다 3배나 많은 수자이다. 3인류 력사상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빈번한 유전자 변이를 통해 다양한 유전자형을 나타내면서 류행성 독감을 일으켜왔다. 병명도 까다로운 조류 인플루엔자,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코로나 바이러스 등등…신종 바이러스의 등장을 조장하는 위험요소는 바로 인간중심의 과학기술이라고 과학자들은 경고한다.물질문명의 혜택을 향수하고있는 현대사회의 발달된 교통망과 인구가 과도하게 밀집된 대도시 환경은 급속한 전염병 확산에 유조한 온상을 만들고있다. 그리고 대량소비를 위한 가축의 렬악한 집단사육 환경은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신종 바이러스의 등장을 가속화하고 있다. 신종 바이러스가 지속적으로 확산될 경우 조류 인플루엔자나 계절성 인플루엔자와 결합해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출몰하면서전 세계로 번질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예방과 퇴치를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중심의 공리적인 시각을 버리고 생태계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간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또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신변에 밀착해 인류를 공포와 추락의 변두리로 몰아갈것이다. \"종합신문\" 2009년 5월 18일
16    귀소본능 댓글:  조회:3793  추천:73  2007-06-29
  . 칼럼 .   귀소본능   김 혁   1   CCTV “동물세계”프로에서 “연어의 회귀”라는 특집방송을 보고 감개에 젖은적 있다. 연어는 한반도의 동해, 일본, 오호츠크 해,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사는 회유어로서 머리는 원추형이며 주둥이는 뾰족하고 몸은 약간 가늘고 긴 편이다. 연어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태여난 하천으로 되돌아오는것이다.   연어는 민물에서 태여난뒤 바다로 나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다시 자기가 태여났던 하천으로 다시 되돌아와 산란하고 사망한다. 연어들은 아주 예민한 후각을 리용하여 고향의 강 즉 모천(母川)의 냄새를 감지한다고한다. 흔히 여름이나 가을에 산란하는데 원양에서 몇달동안 수천수백리나 헤염쳐서 산란지인 강에 도착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며 높이가 3m나 되는 폭포도 몸부림치며 뛰여넘는다. 그와중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오로지 고향의 강으로 되돌아가는데 전력한다. 떼를 지어 이동중에 죽음의 위험도 감수한다. 곰이나 가마우지같은 동물들의 먹이로 되고 인간 낚시꾼들에게 잡히고 공장에서 배출한 오염 물질에 희생된다. 연어는 그 길고 고통스런 려행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산란과 죽음속에서 그 의미를 완성한다. 고향을 향한 연어들의 력동적인 몸부림, 그 처절하면서도 장엄한 순환은 방송을 보는 내내 커다란 충격과 전률을 주었다.   2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및 생식을 위한 본능 못지않게 중요한 본질적 행동요소가 있다. 집으로 향하는 본능 즉 귀소본능(归巢本能)이다. 바다의 넓이를 헤가르고 강물의 급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의 험난한 려정은 흡사 우리의 인생과도 같다. 인간에게도 그 회귀본능은 적용되며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정감어린 귀소의 종착역이 바로 고향이다.   고향은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일상에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마음의 안식처다. 고향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사람의 생각을 이끄는 힘도 있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도 있다. 급변하는 시대, 경쟁이 소요되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회귀본능의 연어처럼 근원적인 존재확인에 목말라하면서 본능적으로 각인된 고향의 내음을 찾아 귀향길에 오르고 있는것이다.     3   “연변, 떠났던 농민이 돌아온다”는 신문기사를 반갑게 접했다.  “땅을 버리고 떠났던 허다한 농민들이 다시 농촌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향후 정부의 경작지 우대 정책이 속출할것에 대비하면 땅은 이제 농민들에게 있어서 큰 자산이다. 과거 땅을 버리고 타향벌이에 나섰던 많은 조선족 농민들이 경제침체 여파로 륙속 귀국하면서 다시금 땅을 찾는 붐이 연변에서 한동안 일어날 전망이다.”고 기사는 전하고있다. 땅을 버리고 처자 리별하고 고향을 떠나 타지방과 외국의 로무수출에 생계를 걸었던 이들이 이제 타향이나 외국에 가서 하는 고생만큼 고향에서 열심을 보이면 땅은 한번 믿어볼만한 장사라는 계산때문에 이한 귀소의 현상이 일고있는것이였다. 한편 “돌아온 조선족 모친”이라는 보도에서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들의 일례를 들고있다. 장춘시 조선족중학교 학생 1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부모가 귀국한 학생이 46.6%인것으로 나타났다.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은 어머니들은 "애들이 어딘가가 많이 달라졌다. 성적도 떨어지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아이를 위해 돈을 벌러 갔지만 실상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하는것은 엄마, 아빠의 사랑이라는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가 힘들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아들을 지켜줄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감수를 토했다.   현대인들에게서 생계를 위한 리소(离巢)적 압박은 아주 큰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귀소야 말로 일상의 압박을 극복할수 있는 힘의 원천이 아닐가. 연어에게 자신이 태여난 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게 하는 모천은 인생살이 고리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고향에 돌아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삶에 감사하고 재충전을 할 시간은 필요하다.   단지 욕망이 가리키는 양지만을 찾아 갈지(之)자 행보를 하던 행태에서 벗어난 고향에로의 회귀, 이러한 리향과 귀향의 아픔들이 우리 공동체사회가 직면한 진통의 현실에서 벗어나 한 단계 성숙을 위한 성장통이 되기를 바란다.    종합신문" 2009.5.25      
15    백수 증후군 댓글:  조회:3717  추천:73  2007-06-29
. 칼럼 .백수 증후군 김 혁 1, 있는것은 체력이요/ 없는것은 능력이니/ 들리는것은 구박이요/ 느끼는것은 허탈감이다/ 먹는것은 나이요/ 남는것은 시간이니/지키는것은 집이요/ 곁에있는 것은 개로구나어느 유머코너에서 본 “백수의 신세 타령”이다. 백수의 어원을 보면 “백수건달(白手乾达)”의 준말에서 유래한다. “건달”이라면 흔히들 깡패로 알고 있으나 그보다는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짓. 또는 그런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수건달”은 옛날 량반 자제들 가운데 과거를 보지않거나 락방한뒤 저자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무위도식하는 이들을 비하하는 말이였다. 오늘날에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나 미취업 청년들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이 되였다.외국에서도 백수건달은 사회적문제로 대두한지 오라다. 백수건달에 대한 그들의 지칭은 우려, 타매, 야유의 뜻으로 다양하다. 한국에서는 백수건달을 “목사”라고 유모아적으로 부르는데 이는 “목적없이 사는 사람”의 준말이다. 학교를 나온후 일자리를 찾지않고 부모에게만 의존하는 젊은이들은 “캉가루족”이라고 한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활을 누린다고하여 이들을 가리켜 “누에고치 족”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방에 틀어박히다” 라는 의미의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족”이라고도 부른다. 2, 연변에 백수가 늘어나고있다는 매스컴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부모, 혹은 안해나 남편이 타지나 해외로 나간뒤 남겨진 “단친(单亲)가정”들을 한두집 건너씩은 볼수있는것이 요즘의 풍토다.  대외개방의 물고가 트고 로무송출이 활기를 띠면서 해외로무의 길에 오른 이들은 자신의 뼈를 갉는 신고로 외화를 벌어들여 고향의 쾌속적인 경제발전에 기여를 하고 가족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있다. 한편 이에 반해 집에서 송금봉투나 기다리며 사는 백수증후군(症候群)이 눈에 띄이게 보이고있는 실정이다. 이들이 고향에 남아서 하는 일이란 매일이고 마작방, PC방, 맥주집을 전전하는 짓거리다.  송금해온 생활비가 바닥이 나면 친지의 집을 찾아다니며 이제 곧 돈봉투가 온다며 꾸어서는 써버린다. 친지들은 “고아”나 “짝없는 이”로 된 그들이 안쓰러워 달라는대로 내준다. 연길시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미국에 간 부모로부터 송금해온 만여원에 달하는 돈을 한 두달새에 탕진해버린 사례도 있고 안해가 일자리를 찾으라고 마련해준 차를 팔아서 녀자와 도박에 밀어넣은 사례도 있다. 3, 백수는 사회에서 이미 지적, 비평의 대상으로 규정되여 있다. 비평가들의 “백수론”을 살펴보면 \"백수는 사회부적응자로 일할 생각이 없는 집단이며 그에 따르는 욕망의 분출구를 손쉬운 방법으로 확보하려는 머리만 큰 기형아들에 불과하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백수는 타의건 자의건 사회나 대중과 어울리기 어려워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흔히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독선과 오만을 껴안고 있기때문에 스스로의 위치확인과 자기개발이 중단되고 행동이 정체된 극단의 상황에 다달은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도 괴로움은 크다. 그들은 현실적 괴리감에 고달퍼한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지탄받는 구박덩어리이자 천덕꾸러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백수들을 봉양해야하는 주변인들 즉 친지나 친우들의 괴로움은 그들에 못지않게 크다는것이다. 무위도식하며 사는 이들에게는 저저마다의 그럴듯한 핑계가 있다. 몸이 따라가주지 못한다는 핑계, 자기 직성에 맞지않다는 핑계, 무식한자는 가방끈이 짧다는 핑계, 대학을 나온자는 능력이 있으니 허드레일 따위는 못하겠다는 핑계도 있다.하지만 현실은 핑계나 자조나 체념이 아니다. 허접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다양성을 가지기를 권하고 싶다. 다양함에서 또 다른 질서를 찾고 기존의 응고된 질서를 깨고 살아갈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한다. 꿈과 현실을 합리적으로 접목시켜나갈 새로운 길을 찾는것이다. 거창하게 생각할것이 없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당신이 백수면 당신에게는 임의로 쓸수있는 남보다 많은 시간이 있다. 그러니 그 시간의 일부를 기꺼이 떼여 작은 일부터 주변일부터 시작해 볼수있다. 광고지전달을 하든 약수배달을 하든 꼬치집 화부일을 하든  일손이 요구되는 일자리에서 자기 일을 찾아 부지런히 뛰는 실천인이 되여야 할것이다. 흔들리고있는 우리 공동체의 요즘은 그런 실천인을 수요한다고 말하고 싶다.여기에서 백수건달의 “건”자의 의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역에 따르면 “건”은 “하늘”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이다. 또한 “건”은 “강건하고 진취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백수건달에 이런뜻도 포함하고있음을 인지하기 바란다. 정부와 기업은 늘 무직업자들의 고용창출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중이며 우리 주위에는 직업학교, 전문기술학교 등 기능을 키워주는 곳들이 항상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있다. 안방에 들어박혀 자탄하던 백수들이 오명을 벗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하늘을 날아오를 날을 기대해 본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09년 7월 20일
14    개기일식 댓글:  조회:3726  추천:73  2007-06-29
. 칼럼 . 개기일식   김 혁    1,   옛날 어둠나라의 왕이 빛을 갖기를 원했다. 왕은 용맹한 불개(火犬)를 시켜 해를 훔쳐오게 했다. 불개가 어명을 받고 해를 덥석 물었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 도로 뱉고 말았다. 이에 어둠나라 왕은 이번에는 빛이 조금 약한 달을 훔치기로 했다. 그런데 불개가 달을 물었더니 이번에는 너무 차가워서 도로 뱉고 말았다. 미련을 못버린 불개는 어명을 지키고자 지금도 해와 달을 물었다 놓았다 하고… 일식과 월식이 되풀이 되는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옛사람들이 흥감스럽게 이야기하는 일식에 관한 신화 전설이다. 사실 신화나 전설에 반영된 일식은 두려움에 물들어 있다. 예로부터 일식이 생기면 재앙의 전조라 여겨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기근이 닥친다고 했고 지진과 해일이 덮친다고도 했다. 또는 임금의 신변에 불길한 일이 생길거라고도 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사람들은 일식을 “포악한 승냥이”에 비했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굶은 악귀”에 비했다. 윁남사람들은 개구리로 아르헨띠나 사람들은 “표범”으로 시비리아사람들은 지어 “흡혈귀”로 비했다. 힌두교 신화에서도 일식은 액운을 상징하기에 일전, 개기일식이 처음으로 목격될 인도에서는 당일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이 일식을 피하느라 분만촉진제 등의 힘을 빌려 예정일보다 빨리 몸을 푸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중국에서도 고대에는 일식을 경외시했다. 당조때의 장시 “월식 (月蚀诗)”에서 보면 “달을 먹는 개구리 귀신이 있어 커다란 입으로 달을 삼킨다”고 했다. 송나라시인 매성우(梅圣俞)의 시에서도 “세발가진 붉은 깃털의 새가 달을 쫓는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조상들도 마찬가지다. 일식현상을 흉조로 여겨 고려, 조선시대에는 일식이 일어나면 재앙을 막기 위해 왕과 신하들이 검은 관에 소복을 입고 궁중에서 구식의(救蚀仪)를 행했다고 한다.   2, 요즘사람들에게는 일식이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이나 유흥의 대상이다. 22일, 21세기 들어 최장의 개기일식이 지구촌을 무대로 펼쳐졌고 해와 달이 연출하는 우주쇼에 아시아 각국이 환호했다. 일식은 태양과 달, 지구가 일직선을 이룰때 달그림자가 지구에 드리워 생기는 자연스러운 천문현상이지만 달이 태양을 다 “삼키는” 개기일식을 자신이 사는 곳에서 보는 일은 일생에 한두번 있을까말까 한 드문 경험이다. 때문에 중국,인도, 일본, 네팔, 방글라데시아 등의 도시들에서는 흥분에 들뜬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 육안들을 맞추었다. 개기일식은 인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고 뒤이어 방글라데시와 네팔을 거쳐 중국으로 옮겨갔다. 중국에서는 대국답게 11개성 40개 도시에서 3억명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일식을 관찰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일식은 서부 서장을 시작으로 사천성, 중경시, 호북성 북부, 강서성 북부, 절강성 북부, 상해등 장강 일대를 따라 잇따라 진행됐다.  따라서 사람들은 망원경, 색안경, 맥주병, 필림, 용접안경,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해 일식을 관측하며 경이로움에 환성을 올렸다. 이번 일식은 중국에서 지난 1814년 발생이후 최장기간 발생하며 오는 2309년까지도 발생하지 않을 500년 만의 가장 긴 일식이 될것으로 보인다. 이번 일식을 “금세기 최장시간 개기일식”으로 보는 리유는 해·달·지구의 거리가 변하기 때문에 일식이 진행되는 속도와 일식의 모양도 달라지기때문이다. 현재 천문관측 기술로는 일식등 천문현상을 100년후의 미래까지 정확하게 예측할수 있다. 다음 일식은 2010년 1월15일(부분일식), 2012년 5월21일(부분일식), 2030년 6월1일(부분일식), 2035년 9월2일(개기일식), 2041년 10월25일(금환일식)에 펼쳐진다고 한다.   3  올해는 천문애호가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를 한해로 됐다. 이딸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어 미지의 천체에 대한 관측을 시작한지 400년이 된 해이며 “아폴로” 유인우주선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여 인류가 처음 달에 발자국을 남긴 40주년, 미국 천문학자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지 80주년, 외계 지성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50주년, 그리고 우주공간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전파 메시지를 보낸지 35주년이 되는 해로 천문 우주와 관련해 의미 부여할것이 참으로 많은 해이다. 그리하여 2009년은 유엔이 결의하고 국제천문연맹과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됐다. “나는 해를 삼켰도다/ 나는 달을 삼켰도다/ 나는 우주를 삼켰도다/ 아, 나는 나이로소이다” 중국의 석학(硕学)이며 저명한 시인인 곽말약은 시 “하늘 개(天狗)”에서 일식에 대해 이렇게 읊으면서 자아와 우주와의 교감에 대해 노래했다. 이처럼 “세계 천문의 해”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들지간에 공간과 공간사이에 새로운 교감의 장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우주, 문화, 예술 등을 화두로 온 지구촌이 함께 우주의 신비와 경이를 나누고 그 미지를 탐색하면서 발견의 기쁨과 함께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보는 넓은 시야를 갖추는 등 500년에 한번씩 갖게되는 천재(千载)의 기회를 얻기를 희망한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09/7/27  
13    잃어버린 세대 댓글:  조회:5656  추천:73  2007-06-29
. 칼럼 .   잃어버린 세대   김 혁     1,   요즘의 신새대들은 “상산하향(上山下乡)”이라는 낱말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소학시절이였던 70년대에는 중국 전역에서 “상산하향” 운동은 거세차게 불어쳤다. “상산하향”이란 도시의 “지식청년”들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 정주하며 농업. 목축업 등 생산로동에 참가한 운동이다. 당시 연변 각지에서는 대도시 상해에서 온 지식청년들을 처처에서 찾아볼수있었다. 당시 시골이나 진배없는 변강오지에 살고있던 우리는 지식청년들이 가져다 준 나일론 양말이나 츄잉껌을 받아안고 세상 둘도 없는 진품을 선사받은듯 그렇게 좋아했었다. 지금도 연변지역에서는 당시의 형용어를 빌어 깔끔하거나 잘 생긴 사람들을 보면 “상해사람 같다”는 말이 류행되고있다. “상산하향”운동은1956년 정부가 지식청년들이 시골로 가서 농업생산 및 사회주의 건설에 참가하도록 호소하여 이후 매년 100만 명 규모의 지식청년이 농촌 및 산골로 내려가서 정주하기 시작한것이 시초이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홍위병운동으로 일시 중지되지만 1968년 “인민일보”가 “지식청년이 농촌으로 내려가 빈하중농으로부터 배우는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모택동주석의 최고지시를 전달하자 대규모의 “상산하향”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1968년부터 1978년까지 10년간 1600만명의 지식청년들이 북으로는 흑룡강성, 서로는섬북, 운남성과 청해성, 신강 등 변방지역의 농촌으로 파견되였다. 그중 흑룡강성 북대황에만도 50만명이상의 지식청년들이 운집해 들었다.   1976년 “4인방”이 거꾸러지고 1978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이후에 대부분의 지식청년들이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2,   “상해지식청년 연변하향 40돐기념활동  및 환영대회”가 8월18일 연변예술극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40년전 이땅에 하향했던 1만8천여명 상해지식청년가운데서  1200여명이 연변을 다시 찾아 회포의 정을 흠뻑 나눴다. 연변주당위  서기가 연변인민들을 대표해 이들에게 축사를 드렸다. 그는 수많은 상해지식청년들이 동북지역에 하향해 당지 여러 민족 인민들과 함께 어깨겯고 로동하고 생활하면서 변강소수민족지구의 번영, 발전을 위해 적극 기여를 한 데 대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조국은 하향지식청년들을 잊지 않을것이고 력사 또한 저버리지 않을것이며 연변인민들은 더우기 이러한 정을 잊지 않을것이라고 지적했다. 연변에 내려와 물 설고 낯설은 곳에서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 연변은 “제2고향”으로 다름없었다. 이들 중에서 어제의 역경과 아픔을 딛고 오늘날까지 매진하여 현임 국가 국토자원부 부장, 중국공상은행 행장, 상해복단대학부교장 등 고위급 간부와  지명인사들도 배출되였다. 40년만에 연변을 찾은 그들은 감개에 넘쳐 연변과 상해간의 거리를 더욱 까갑게 하여 서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교류와 합작을 추진하면서 공동으로 더욱 아름다운 미래의 장을 펼쳐나가기 위하여 연변의 발전을 지속적으로 관심하고 지지할것이라고 표했다. 3,   미국의 1920년대. 력사는 이 시기를 “광란의 년대”라고 부른다. 1차대전이 끝나 온정을 찾고 물질적 풍요가 찾아왔지만 정신적 허기는 점점 깊어 갔으니 이 시대 젊은이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20세기 미국소설의 걸작으로 불리는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伟大的盖茨比)”는 바로 그 시대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린 작품으로 그들의 상실감과 환멸을 잘 보여준다. 이들처럼 문화대혁명시기의 지식청년들을 중국의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른다.  40년전, 조국의 부름을 받은 수천만의 피끓는 젊은이들이 군복을 입고 완장을 끼고 배지를 달고 변경으로 농촌으로 떠나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사고, 영양실조, 천재지변 등으로 희생되였다. 배움의 기회를 상실하였고 도시에 돌아와 보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것은 실업이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들의 얼굴에도 시간의 주름은 력력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과거를 물으면 “지식청년이였지” 라고 기피하지않고 대답한다. 렬악했던 오지의 환경과 아직 여린 몸에 주어졌던 단련은 그들에게 그어떤 고난도 타개해나갈 고험의 장을 펼쳐주었고 아울러 중국의 더 광활한 지역 문화의 무한한 원천을 몸으로 느끼는 소중한 경험을 제공했다. 때문에 “상산하향”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실의에서 벗어나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요력랑으로 재빨리 부상할수 있었던것이였다. 한때 항거할수 없는 운명의 그늘에서 몸부림쳤던 그들, “잃어버린 세대”로 지칭되지만 그들은 많은것을 잃은 반면 또한 많은 것을 얻었다. 지금 10년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온 명암으로 굴곡진 그들의 얼굴이 력사의 착오적인 시행과 그를 무마해나가는 시간과 인간의 힘을 말해주는상 싶다.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9- 8- 24    
12    송이버섯 댓글:  조회:3314  추천:73  2007-06-29
  . 칼럼 . 송이버섯    김 혁 1,   1945년 8월 9일, 일본 항구도시 나가사키 상공에2만 피트 크기의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여났다. 일본인들로서는 며칠사이에 두번째로 보는 거형의 “버섯”, 그 “버섯구름”의 출현은 전쟁이 인류력사에 가져다준 참극이였다. 미국 공군 B-29기가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7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즉사하고 그후 수만명이 방사능의 영향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가사끼는 그후로 풀 한포기 자라지않는 염마전(阎魔 殿)으로 초토화되였다. 하지만 일본과학자들은 그 아비규환의 수라장속에 꿋꿋이 핵폭탄의 음위(淫威)를 이겨낸 하나의 식물을 보았다. 경의로움에 넘친 일본사람들은 이 식물을 신균(神菌)이라 불러 지칭하였다. 그 식물이 바로 송이 버섯이다.   모두가 즐겨 시청했던 한국드라마 “대장금”에서도 송이버섯은 주요 메뉴로 나온다.   한상궁과 최상궁이 상궁자리를 놓고 펼치는 각축전에서 한상국이 창조의 극치를 발휘하여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중에 바로 송이불고기가 있다.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 조선의 김정일 위원장이 추석선물로 한국의 고위 인사들에게 송이버섯3톤을을 선물로 보내 화제가 된적이 있다. 이처럼 송이는 귀한 손님들에게 선물하는 소중한 물품으로 각인되여 있다.       2,   가을철이 되면 송이버섯이 회자되며 인기를 끈다. 송이는 9월 말 10월초가 제철, 바로 요즘이다.   예부터 버섯은 진귀한 식품으로 여겨졌고 식용은 물론 약용으로까지 널리 활용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버섯을 “신(神)의 식품”이라고 불렀고 중국에서는  불로장생의 영약(灵药)으로 생각했다. 그 가운데서도 송이는 능이, 표고와 더불어 “버섯 중의 버섯”으로 손꼽힌다.    송이버섯은 독특한 맛과 향기로 인해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로 손꼽힌다. “동의보감”에 송이는 나무에서 나는 버섯가운데 으뜸이요, 설사. 마마 (천연두) 그리고 산후의 후유증에 좋다는 등 기록과 구전이 있다. 또한 소화 기능을 돕고 혈액순환을 좋게 하는 성분이 있어 동맥경화, 심장병, 당뇨, 고지혈증 등에도 효과가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이버섯은 특히 인후암, 뇌암, 갑상선암, 식도암 같은 웃몸쪽의 암에 효과가 높다고 한다.   송이버섯으로 송이구이, 송이전골, 송이 쇠고기볶음, 송이산적 등 료리를 만들수 있고 송이음료, 송이술로도 빚어 마실수 있으며 또한 생으로 먹어도 아주 좋다.   항간에 널리 떠도는 가요에서도 송이는 긍정적으로 등장한다. 쌀.보리는 그 열매로 치고 매화.국화는 그 꽃으로 치는데, 송이는 열매도 꽃도 아닌것이 깊은 산중 안개속에 솔잎으로 몸을 가려 드러내지 않고도 그 향은 수십리 밖에 떨친다 했고 먹으면 그 향이 살갗으로 스며 나오고 그 살결은 선녀의 속살처럼 희여 먹으면 청렴결백 마음까지 희여진다고 했다.   송이에 대해 옛 거사들은 속세를 등진 은둔자의 표식으로 삼기도 했으니 송이는 고고한 정신철학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3,     룡정에서 송이축제가 열린다. 중공 룡정시 시위, 시정부의 주최로“중국 룡정 천불지산송이 문화 관광절”이라는 타이틀로 된 축제는 오는 9월9일부터 12일까지 펼치게 된다.   현재 중국에는 운남성 등지에 송이버섯이 분포되여 있지만 장백산맥의 기를 이어받은 룡정 송이버섯은 독특한 기온, 토양 등 자연조건으로 그 인끔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룡정의 송이는 적시적으로 채취 집하(集荷)되여 전국은 물론 아직도 “바다에는 청어, 땅에는 송이”라고 송이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않는 일본으로 많이 수출되는데 현재 룡정에서 송이버섯의 년간채취량은 50여톤이 나 된다.   이번 축제에는 송이버섯 먹거리 전시, 송이왕 선정, 송이 경매, 송이 홍보대사 선발, 등 송이버섯을 위주로 다양한 활동이 선보이게 된다.   이제 송이버섯은 지역이 자랑할수 있는 특산물이자 문화 및 관광상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입쌀의 고향”, “황소의 고향”, “사과배 고향”으로 불리고있는 룡정시에서 이 같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송이버섯의 고향”으로 또 한번 당년의 위용을 만방에 알리기를 기대해 본다.     기자 블로그: http://blog.hani.co.kr/kh99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9- 7  \"흑룡강신문\" 2009- 9-12  
11    위장결혼 그리고 사랑 댓글:  조회:4427  추천:73  2007-06-29
. 칼럼 . 위장결혼 그리고 사랑   김 혁   영화 "댄서의 순정" 포스터 1 “댄서의 순정”이라는 한국영화가 있다. 한국의 “국민 녀동생”으로 불리는 문근영의 주연으로 흥행한 멜로영화이다.      영화 "댄서의 순정"의 한 장면   언니 대신 돈을 벌기 위해 연변에서 한국을 찾은 채린(문근영 분)은 왕년에 잘 나가던 댄스 스포츠 선수 영새(박건형 분)와 위장결혼을 한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는 위장결혼자를 검거하려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든다. 위장결혼으로 들어온 조선족 처녀를 한국 무용가가 만나 설레고 좌절하고 헤여지고 그리워하다 결국 사랑을 이뤄간다는 내용의 무공해 청정(淸淨)멜로에 룸바, 쌈바 등 경쾌한 스포츠 댄스를 버무려 코끝 진한 감동으로 담은 영화. 연변처녀답게 등려군의 노래를 부르는 문근영, 촌스러운 곤색 운동복 바지에 “연변3중학”이라 쓰인 하얀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문근영은 한 위장결혼자가 한국에서 댄스 무용가로 거듭나기까지의 가슴 아린 감동을 맑은 수채화처럼 풀어냈다.  영화 "파이란"의 한 장면   위장결혼을 소재로 한 또 한편의 영화가 있다. 칸 국제영화수상으로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린 “올드보이”의 주연 최민식과 향항의 톱스타 장백지가 열연을 펼친2001년 작 “파이란”. “파이란”은 영화속 녀주인공 백란(白蘭)의 중국식 발음이다.    강재(최민식 분)는 인천바닥에서 3류 양아치로 전전하는 위인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강재의 집에 경찰들이 찾아와 강재의 부인인 파이란(장백지 분)이 죽었다고 전한다. 파이란은 유일한 친척을 찾아 인천에 온 중국 녀인. 그러나 그 친척은 카나다로 이민을 떠난 상태였다. 혈혈단신이 된 파이란은 한국에 머물러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위장결혼을 선택한다. 이에 강재는 돈을 받고 파이란과 결혼한다. 파이란의 장례를 치르러 떠나는 기차속에서 강재는 그녀가 남긴 편지를 읽는다. 그리고 그 편지에서 그녀의 행적과 아픔을 알고는 눈물을 흘린다.   “파이란”은 최근년 또 다시 화제 아닌 화제가 됐다. 한국 고등학교 국어 문법 교과서에 “파이란”의 홍보문구인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녀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가 홑문장과 겹문장의 실례로 영화 포스터와 함께 실렸던것이다.   누드사진 류출사고로 큰 곤욕을 치렀지만 당시 장백지는 제법 위장결혼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한 비운의 중국녀인을 근사하게 연기해 냈다. 두 영화의 쟝르는 모두가 멜로영화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조선족관객들에게는 단순한 멜로영화를 뛰여넘어 위장결혼자들의 아픔과 신산(辛酸)스러움에 눈굽을 적시게 하는 농도와 줄기가 다른 영화였다. 영화에서는 행복한 위장결혼으로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서글픈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한면을 보여주는 아픔이기때문이였다. 2  멜로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위장결혼자들의 가슴 시린 사랑이야기가 한국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 위장결혼을 의도로 해 결혼했다고 해도 동거와중에 사랑이 싹터 안정적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다문화가정에 대해 대법원이 관용을 베풀어 무죄판결을 한것이다. 일전 한국 서울동부지법은 위장결혼을 목적으로 허위 혼인신고를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모(53)씨와 부인 최모(46)씨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위장결혼을 위해서는 위장결혼 상대자가 있는 국가에 한 번만 가는것이 보통인데 박씨는 두번이나 찾아갔고 브로커에게도 최씨와 실제 결혼생활을 꾸리고싶다고 말한점 등으로 볼 때 위장결혼으로 볼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위장결혼 브로커로부터 400만원(한화)을 받기로 하고 조선족 녀자와 위장결혼해 줄것을 권유 받은 박씨는 2004년 3월 위장결혼 상대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박씨는 최씨를 직접 만난뒤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 같은 해 6월 박씨는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두 사람은 2005년 1월부터 경기도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해 사랑을 키웠다. 부인 최씨는 박씨와 그의 전처 사이에 태여난 딸의 돌잔치에도 엄마 자격으로 참석하는 등 실제 부부로서 생활을 하며 량쪽 집안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비단 박씨의 경우만이 아니다. 한국 수원지법 역시 위장결혼 혐의로 기소된 한모(53)씨 부부에게 무죄를, 부산지법은 같은 혐의로 기소된 박모(58)씨 부부에게 무죄를 각각 선고했다. 한국 대법원 관계자는 “위장결혼이라도 실제 결혼 생활이 인정되면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하는 경우도 있어 법원도 위장결혼 정황에 대한 립증과 증거를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다” 며 “하지만결혼을 대가로 한국측 배우자가 돈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는 등명백하게 위장결혼 의사가 립증될 경우에는 실제 결혼생활이 인정되더라도 유죄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3   자유로운 이동으로 삶의 모든 령역이 새롭게 재편되는 글로벌시대에 국제결혼은 불가피적이다. 특히 한국내에서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남성과 국제결혼 하는 외국녀성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그중 대다수가 중국, 윁남 등 아시아 녀성들, 조선족의 수가 압도적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제는 코시안(한국인과 아시아인 사이에 태여난 2세)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만큼 국제결혼에 대한 거부감, 순수혈통에에 대한 집착도 약화되고 있다.   한국의 국제결혼광고 그런데 문제는 결혼의 동기와 내용이다. 국제결혼의 상당수가 “사랑과 책임”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원리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때문이다. 사실상 물건 고르듯 배우자를 택하는 “매매혼”, 돈을 벌기 위해 위장, 사기 결혼을 하는 사례도 허다하다. 이들중 대부분은 결혼을 리용해 한국에 들어온후 곧바로 가출해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아 또 다른 사회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다. 결혼이주녀성은 결혼후 2년을 경과해야 한국 국적을 취득할수 있다. 그러나 그 기간을 채우지 못한채 리혼, 가출을 감행하고 있기때문이다. 한국 법무부가 제출한 “결혼이민자 불법체류 및 출국 현황”에 따르면 한국내에 거주하는 결혼이주녀성 10만4290명 중 7.8%에 달하는 8137명이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이는 2004년 3249명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치라고한다. 이들은 어찌보면 한국경제의 저변을 받치는 필수인력이 되여있음에도 한국내의 합법적인 근로자를 밀어내고 임금구조를 왜곡하면서 고용시장의 혼란을 초래한다는등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으며 그 처지때문에 스스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진정한 사랑과 결혼을 통해 한국사회로 출가하는 녀성들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면서 보다 보다 풍부한 삶의 경험과 보다 섬세한 삶의 결을 느끼며 살수 있기를 우리는 바란다. 단순한 실용주의적 경제론리나 왜곡된 혼인관을 넘어서는 좀더 륜리적인 삶의 지평이 열리기를 바란다. 위의 사례와 같은 이야기들이 아직도 위장결혼이 성행하고있는 우리 사회에 깨도가 될가? 아니면 위안이 될가? 대략난감이다.    기자 블로그: http://blog.hani.co.kr/kh99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9- 14   영화 파이란ost 스치듯 안녕    
10    조선족 “야인시대” 댓글:  조회:4436  추천:74  2007-06-29
  . 칼럼 .   조선족 “야인시대” 김 혁   1, 조폭하면 드라마 “야인시대”가 얼핏 떠오른다. 서울 종로일대에서 끗발을 날리며 주먹하나로 세상을 평정했던 김두한과 그의 의리로 똘똘 뭉친 사나이들… 사실 세상의 암흑가를 지배해온 조직폭력배는 그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다. 이딸리아  마피아, 미국 마피아, 일본의 야꾸자, 대만의 삼합회 등 력사깊은 대표적 범죄조직이 아직도 법률의 사각지대에서 활개치고있다. 미국에서는19세기 아일랜드 갱단이 미국의 조직범죄를 장악했고1880년부터 200여만 명의 이딸리아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시칠리아에서 온 마피아들이 주류 밀거래를 통해 날개를 달고 성장했다. 일본의 경우 사회가 거부한 사람들을 자신들의 범죄조직으로 받아들이는 야꾸자 전통은 일본 조직범죄의 가장 오래된 유산중 하나였다. 야꾸자가 1910년 한일합병을 위한 정치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했고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도 야꾸자의 짓이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최근 경제 불황의 원인이 야꾸자들의 금융 불법대출에서 비롯된데서 “야꾸자 경기후퇴”라는 경제용어까지 생겨났다. 한국의 주먹계보는 1970년대 김두한, 시라소니 등으로 대표된 무리의 맥이 완전히 끊겼지만 조폭출신 건설업자, 조폭출신 정치가, 조폭출신 벤처기업가 등이 등장해 부와 권력을 등에 업고 민생을 고달프게 했다. 지금에 이르러 전 세계 조직범죄 사업 규모는 무려 1조 딸라에 이르는바 그들이 사회에 드리운 음달은 무성하기 그지없다.    2, 중국•윁남•로씨야 등 14개국 65개의 외국인 폭력조직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국의 매체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그중 조선족 조폭들이 한국내의 외국인 최대 폭력조직인것으로 확인됐다. 강남•가리봉•대림 등 서울 지역과 경기 안산, 인천, 울산, 경남 창원 등 20여곳의 조선족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한국내 폭력조직과도 대등한 관계로 련대할 만큼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1998년부터 방문취업비자로 대거 입국, 공단 밀집지역인 ‘가리봉동’에 정착하면서 중국 지명을 딴 조직들이 생겨났다. 초기에는 불법체류자 등 자국민들을 상대로 월급을 갈취하거나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는 수준이였으나 지금은 자국 녀성들을 유흥업소에 공급하는 인신매매, 마약밀매, 중국산 식품 밀수, 전화금융사기, 카드 위변조 등으로 사업 령역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에서 외국인 폭력조직이 급성장하면서 관련 범죄도 해마다 늘고 있다고 집계가 나왔다. 한국경찰청 외국인 범죄현황에 따르면 2007년 1만 4524건에서 2008년 2만 523건으로 41.3% 증가했다. 올해 상반년에는 1만 5466건에 달했다. 따라서 한국경찰은 자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강력범죄를 막기 위한 수사전담팀을 만들고 외국인 범죄와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경찰 관계자는 “일부 국가 출신의 폭력배들이 조직성 폭력형태로 자국민을 갈취하거나 각종 리권에 개입하는 사건이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면서 “아울러 국제결혼한 녀성과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피해가 확산되는것을 막고 이들의 편안하고 안전한 국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전담수사대를 설치했다.”고 강력한 대응책의 의지를 보였다.    3, 영화나 소설은 주먹 세계의 의리를 멋지게 포장하면서 죽음까지도 초로처럼 여기는 열혈 사나이들을 부각한다. 하지만 “폭력은 정당화 될수도 없고 미화될 수도 없다, 시청률에만 급급해 비판의식이 배제되였다”는 조폭영화마다에 따라붙는 평과 같이 그건 어디까지나 논픽션(虚构)이다. 현실에서의 조직폭력배는 흥행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속의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사기, 공갈, 폭력, 강탈을 밥먹듯 하는 건달일뿐이다. 그들에게 해피엔딩은 절대 없다. 모든 조폭영화가 그러하듯이 그들 모두는 불안속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중국조선족은 바람부는 만주땅에서 가렬처절한 항일운동을 벌렸던 애족지사들의 후예들이며 중국의 거대한 사회변천과 맥락을 함께 한 중국소수민족중의 당당한 일원으로 높은 위상을 가지고있다. 국문이 열리면서 중국조선족은 고국과의 활발한 인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중한지간의 경제, 문화의 교류와 협력에도 커다란 중개작용을 놀았다. 저저마다 한국 로무의 길에 오른 그들은 이 십여년동안 불협화음속에서도 지긋이 자신을 정리하고 신근한 땅방울로 각 분야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해마다 자지방에서의 외화수입 1위라는 기록을 내면서 커다란 부를 일구어냈고 유족한 생활터전을 다지여 민족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 하지만 조폭1위라는 오명(汚名)이 우리들이 일껏 쌓아온 그 위상에 어둡고 무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 일어혼전천(一魚混全川), 즉 “미꾸라지 한마리가 내를 흐리우듯”이 그 소수의 왜곡된 형상은 한국에 진출해있는 수십만 재한 조선족들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무양하던 존립관계에 커다란 악과까지 초래할수 있다. 중한 두나라의 개혁개방정책과 동포정책의 큰 수혜자로서의 조선족의 보다 성숙된  모습과 자세가 요청된다. 따라서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국경을 넘어선 조직범죄에 대한 대책과 엄단이 필요되는 시점이다.   김혁 기자  기자 블로그:http://blog.hani.co.kr/kh99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10- 12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9    연길대교 댓글:  조회:4290  추천:73  2007-06-29
  . 칼럼 .   연길대교 김 혁      1,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현대시의 시발자로 불리는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의 한구절이다. 프랑스의 상징인 미라보 다리는 아폴리네르의 이 시로 갑절 유명해 졌다. 이처럼 뭇시인들이 시상을 떠올리는 풍경이 흔히 다리이고 많은 그림과 영화의 소재도 다리를 삼는 경우가 많다. 건축물의 분야별로 따지면 가장 인상에 남는 건축물이 다리라고 대답하는 유람객들 그리고 토목기술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어릴적 나에게는 보고픈 다리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았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우리나라의 다리라는 자호감에 장강대교를 가보고싶었고 항일의 첫 총성이 울린 다리라 로구교를 가보고싶었다. 그 로구교가 원나라때 북경을 찾은 려행자 마르코 폴로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불리게 된 사연을 알게 되자 갑절 더 가보고싶었다.   그후로 가보고싶은 다리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였다. 단 사흘간의 격정적인 사랑을 가슴에 묻고 가정과 륜리를 지켜내는 중년 남녀의 애절한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린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소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37주 동안이나 지켰고 내가 좋아하는 정통 연기파 배우 메릴 스트립의 주연으로 영화화도 된 작품. 그 작품에 나오는 다리가 감질나도록 가보고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 어느 다리도 가보지 못하고 글에서나마 그 호기심과 정감을 무마하고있다.   2, 다리의 력사는 인류의 진화와 호흡을 같이한다. 무릇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길이 생기고 또한 다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농사짓기나 고기잡이의 편리를 위해 강이나 바다가에 모여 살았다. 이렇게 모여 살다보니 자주 다니는곳은 길이 되였고 길을 가로막는 호수나 강에는 통나무를 걸치거나 너부죽한 돌을 띄엄띄엄 놓아 다닐수 있도록 한 징검다리가 다리의 원초의 모습이였다.   6,70년대의 연길교   철거직전의 연길교 그리고 다리에는 다양한 전설과 민속과 사화가 깃들어있다.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에도 까치들이 만들어준 오작교가 있고 “이 몸이 골백번 죽고죽어”라고 충정을 읊조렸던 정몽주의 전설에도 선혈이 슴배인 선죽교가 있다.   이처럼 우리의 조상들은 다리를 통행수단으로 리용하였을 뿐만아니라 생활문화로 흡수했다. 그래서 단순한 교통소통이라는 기능을 뛰여넘어 다리마다에는 사람들의 정감 어린 삶과 추억이 담겨있다.   3, 지난 12일 아침부터 연길교(하남교)가 본격적인 철거를 시작, 이로써 70여년간 부르하통하의 흐름과 그 연안 사람들의 운명과 맥을 같이해온 연길교가 력사의 갈피에 색바랜 한 페지로 남게 됐다. 부르하통하에 가로놓인 연길다리는 청조 선통원년(1909년) 2월에 축조되였는데 목조물구조로 길이가 240메터, 너비가 6메터였으며 애초의 명칭은 연평교(延平桥)였다. 30년대에 일제의 연변침탈의 전략적수요로부터 콩크리트구조로 재건되였었고 해방후 홍수에 의해 훼손되여 한차례의 보수를 거쳤다가1986년에 확장공사를 실시, 그후 재보수를 거쳐 오늘날의 연길교가 완성된것이다. 연길교는 연길시구역 교통운수량의 40%를 감당할만큼 그동안 도시의 남북을 잇는 교통중추역활을 해왔다. 연길교의 주체부분은 이미 70여년의 시간을 경유한만큼 다리의 적재감당능력이 쇠잔해졌고 더우기 최근년간 경제발전과 더불은 차량의 증가로 만부하의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제 보수로서는 다리의 안정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상황임이 검측됨에 따라 정부는 년륜이 묻어있는 연길다리를 철거하기로 최종 결정한것이다.   새로 축조될 연길대교의 가상도   새로 축조되는 연길대교는 총투자액이 1억 1000만원, 교량 4개와 주제광장 및 량측 교두(引路)로 구성된다. 총길이는 240메터이고 너비는 51메터, 그중 기동차도가 24메터로서 쌍방향 6차선이며 량측 인도는 각각 6메터이다. 다리의 가상도를 보니 민족문화특색을 살렸고 교량주체 웃부분 구조가 꼭 나래펼친 학을 닮았다. 한편 연길시에서는 사회에 향해 신축할 연길교명칭을 공개징집하고있다. 징집공고는 중국조선족의 특유한 력사, 문화, 경제, 사회, 지리 등 방면의 내포를 반영하고 적극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구비하면서 지역특징과 자치주수부 연길시의 인문내용을 구현할것을 요구했다. 다리는 흔히 지역 일대의 중요한 기념물로 되군한다. 이제 시공간을 뛰여넘어 생활과 문명을 이어주는 다리는 더 이상 교통을 위한 구조물만이 아니다. 자치주 수부 연길로 들어서는 길목에 가설되는 연길대교, 그저 길고 웅장한 다리나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다리가 아니라 미학과 문화가 꿈틀거리는 다리로 우리 민족의 어제의 력사와 래일의 웅비를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연길시의 표지성 명건축물로 축조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10- 1-18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8    유월, 누리의 축제 댓글:  조회:4639  추천:78  2007-06-29
. 칼럼 . 유월, 누리의 축제 “남아공 월드컵” 우감(偶感) - 1  김혁   1 드디여 축제는 시작되였다. 무대는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희망봉이다. 희망봉에서 솟아오른 축구공은 이 한달동안 지구와 함께 공전하며 온 누리를 행복한 멀미로 뜨겁게 달굴것이다. 월드컵은 쓰나미(海啸)나 토네이도(龙卷风)처럼4년마다 주기적으로 한번씩 일어나는 사변이며 기적이다. 따라서 6월이면 지구는 거대한 축구공이 된다. 지구촌 60억 인구는 저마다 그 축구공을 아름벌려 가슴에 품는다. 월드컵은 32개국 축구의 신들이 벌이는 한판의 쇼이다. 브라질, 아르헨띠나, 독일, 영국, 아프리카, 한국의 축국용장들은 날따라 업그레이드 된 기술과 감각으로 축구를 더 높은 차원에로 승격시켰다. 때로 탱고처럼 우아하면서 정교한 기량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 들판을 누비는 치타처럼 용맹하고 빠르고 유연하다. 팀원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정신력과 체력의 극치를 자랑하면서 펼치는 90분 내내 박진감으로 흥건한  률동의 축구… 축구는 기하학처럼 창의적이고 시처럼 압축적이며 축구장에서 정열과 힘을 바쳐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뛰는 선수들의 모습은 또한 감동적이다. 그야말로 눈뿌리가 아찔하도록 풍성한 볼거리는 축구만이  보여줄수있는 지상 최대의 쇼이다.   2 70년대 병마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인들을 도웁기 위한 중국의료진의 감동스토리를 다룬 련환화에서 나는 맨 처음 아프라키에 대해 알게되였다. 사실 우리에겐 너무나 먼 그곳에 대해서 아는것도 많지 않았다. 기껏 안다고 해야 인류의 조상을 생성시킨 곳, 우거진 밀림속 맹수들이 뛰노는 곳, 세상에서 가장 작은 키의 피그미족이 살고있는 곳이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처녀작으로  “피그미의 후손”이라는 단편소설을 내였던 내게서 아프리카는 신비의 국도로 여느 사람들과는 농도와 줄기가 짙은 감성으로 다가왔다. 월드컵이 처음 열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북쪽은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와, 북동쪽은 모잠비크, 스와질란드와 접해 있다. 4천 480만 인구를 가지고있으며 다양한 문화, 언어와 신앙을 갖고있다. 남아공은 풍부한 자연환경으로 축복받은 나라이다. 8개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 유적지를 소유하고 있다. 농목업이 발달되여있어 밀이 많이 생산되며 포도, 오렌지, 설탕 등이 산출되기도 한다. 지하자원으로 금, 다이아몬드, 우라늄, 백금, 망간, 석탄 등이 산출되는데 금은 세계 전체 생산량의 60% 정도가 산출되고 다이아몬드도 세계 전체 생산량의 약 20%를 차지한다. 무한한 창의성과 의연함을 가진 남아공 사람들은 또한 노벨상 수상자를 7명 이나 배출했다. 전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우리는 축구를 통해 저항과 단결을 배웠다"고 감개를 표했다.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아프리카는 적어도 축구에서만큼은 더 이상 아프리카가 세계의 변방이 아님을 널리 알릴것이며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다시한번 전세계에 각인시키게 될것이다.   3 축구는 스포츠 중에서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이다. 그래서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깨우며 전 세계인을 환호와 열광속으로 몰아넣는 힘을 가졌다. 얼핏 보면 멀쩡한 이들이 가죽으로 만든 물건 하나를 놓고 빼앗기를 거듭하며 90분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우습강스러울수도 있다. 남자들이 정신없이 축구에 빠져드는 리유는 원시 수렵시절 사냥감을 쫓던 버릇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며 뇌속에 각인돼 있기 때문이고 규칙도 잘 모르는 녀자들이 기꺼이 응원에 나서는데는 사냥을 잘하라는 격려의 뜻이 담겼다는 재미난 해석도 있다. 축구, 작은 공이 만들어내는 그 커다란 마력은 많은 사람들을 끄당기고 어우러지게 한다. 거리의 로점상이든 마천루우의 공무원이든, 수염터기 남자든 치마두른 녀자든 당신의 지위와 성별 나이에 관계없이 축구로 인해 어우러질수 있다. 현대 축구의 전술을 속속들이 연구한 전문가가 아니여도 축구를 오래동안 즐겨 본 골수팬이 아니여도 맥주집에서 벌컥벅컬 맥주를 마시며 카운터쪽에 매단 텔레비에서, 출근뻐스에서 시루속처럼 부대끼면서도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방송에서  경기동향을 경청하며  옆자리에 앉은 생판 모르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도 있으리. 그러니 이처럼 막강한 파워를 갖게 된 축구의 제전이 펼쳐지는 유월을 맨송맨송 지나가면 무지무지 서운할터이다. 이제 축구는 단지 축구라는 단일 스포츠는만이 아니다. 축구는 이제 단순히 스포츠를 넘어서 세계인을 묶어주는 글로벌 네트워크이자 돈이고 산업이며 국력과 민족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저널리스트 프랭클린 포어는 “축구야말로 어느 경제기구보다 앞서서 세계화를 이끈 주역이다”고 단정한다. 또한 이 세상의 이데올로기와 정치학에 맞추어 보면 축구경기는 또한 격이 다른 관전이 될거다. “무지개 아래 우리는 자랑스럽게 하나가 됐다”를 슬로건으로 내건 남아공 월드컵, 이처럼 축구공 하나에 우리는 피부색과 국경ㆍ종교ㆍ리념을 초월해 하나가 된다. 축구는 사람들을 화합시키고 열정ㆍ기쁨을 함께 나누고 적대감을 해소할수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영국 시인 월터 스콧은 “인생 그 자체가 축구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매일 힘든 삶살이에 발목묶여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월드컵은 그 골치거리를 잠재워 주는 처방전이 되여줄것이다. 리기와 경쟁과 불신으로 가득찬 요즘 세월에 통용되지 않는 무한한 자유와 화합을 축구경기는 우리에게 선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현상에 타당성을 부여할수 있는 가장 큰 근거도 이때문이 아닐가. 지구촌의 가장 매혹적인 축제인 월드컵, 이제 가족, 친구, 동료와 어우러져 함성 울리고 장단맞추며 신명나는 굿판처럼 농익어가는 유월의 향연에 빠져보자. “종합신문” 2010년 6월 14일    
7    부부젤라 댓글:  조회:4394  추천:73  2007-06-29
. 칼럼 .   부부젤라  “남아공 월드컵” 우감(偶感) - 2 김혁 1 월드컵이 열리던 날, 흥분을 머금고 남아공과 메히꼬의 개막전을 보려고 TV앞에 앉았다가 그만 당혹을 금치못했었다. 화면 가득 메우며 뿜겨져나오는 소음에 해설에 집중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중계방송에 차질이 빚어졌나 하여 채널을 돌리며 보았으나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뒤미처 알게되였지만 중계음 사이로 비집고 든 그 소리는 남아공 특유의 악기- 부부젤라의 소리였다. 2부~ 부~ 코끼리 우는 소리같기도, 둥지 털린 벌들이 우는 소리같기도 한 부부젤라(Vuvuzela)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축구경기의 응원도구로 사용되는 나팔 모양의 전통악기이다.길이가 60~150㎝ 정도밖에 안되는 이 자그만 취악기가 120데시벨이나 되는 엄청난 소리를 빚어낸다. 이는 사격장에서의 총성(115), 기차가 내달리는 소리(110), 벌목장 전기톱의 소음(100), 정원에서 잔디깎는 기계(90)의 소리보다 더 높은 수준이라한다.당지 토속어로 \"시끄러운 부부 소리를 만든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혹은 소나기를 뜻하는 비속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도 한다. 부부젤라는 기원이 분명하지 않다. 아프리카 부족들이 사람을 불러모을때 불었다는 양뿔나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열혈축구팬이 맨처름 만들어 불면서 대중화됐다는 설도 존재한다. 1965년경, 프레디 사담 마케라고 하는 남아고의 한 열혈 축구팬이 알루미늄제 부부젤라를 만든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전거 벨에서 검정 고무를 제거하여  입으로 불기 좋게 만들었다. 이후 마케는 자신이 만든 부부젤라가 너무 짧다고 생각하여 파이프를 련결하여 길게 만들었다. 마케는 1970년부터1980년대 남아공 축구경기뿐 아니라 1990년대의 국제 축구 경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알루미늄 부부젤라를 들고 있는 사진을 보이면서 자신이 이 악기의 비조(鼻祖)라고 증명한다.2001년 남아공의 한 기업체가 플라스틱 부부젤라를 대량 생산하면서 폭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부부젤라는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전세계에 더욱 알려졌다.  7만명을 수용하게끔 신축된 더반스타디움 대형 경기장은 부부젤라의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울려대는 부부젤라의 굉음은 관객들의 정신을 쏙 빼놓곤 한다. 그 독특한 시끄러운 소리로 불만의 대상이 되였다. 주위 사람들이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이고 그래서 경기장밖에서는 귀마개가 엄청나게 팔려 나간다고 한다 경기장을 뛰는 선수들에게도 “부부젤라의 소음을 이겨내라”는 감독들의 특명이 내려지기도 했다. 국제축구련맹은 부부젤라의 경기장 반입을 허용하느냐 마냐에 대해 고민했으나 결국 \"부부젤라를 아프리카의 전통으로 인정한다. 사용을 막을 리유가 없다.\"라고 결정을 내렸다.전문가들은 \"선수와 관중을 괴롭히는 응원은 로마시대 검투장이래 모든 경기장에 존재해왔다\"며 \"내겐 성가신 소음이라도 어떤 이에겐 소중한 문화일 수도 있다\"며 \"자신들의 응원 방식을 아낀다면 부부젤라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부부젤라의 대부분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또한 화제다. “중국넷” 사이트에 따르면 부부젤라의 90%는 중국 절강성과 광동성 일대 플라스틱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고한다. 절강성의 한 플라스틱 공장 공장장은 \"올해 초부터 지난 4월까지100만개가 넘는 부부젤라를 만들어내 무척 바빴다\"\"며 \"이곳에 4~5개의 부부젤라 생산 공장들이 있다\"고 밝혔다. 광동의 “굉대” 플라스틱 장난감공장 관리자도 \"20가지 종류의 월드컵 부부젤라를 생산해 화란, 한국, 남아공, 브라질 등 해외시장에 팔고 있다”고 말했다. 여하튼 부부젤라가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아이콘이 된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 요즘 월드컵 열기와 각약각색의 응원문화를 목도(目睹)하면서 우리 연변팀과 연변축구팬들을 되돌아 보았다. 부부젤라의 소리에서 매양 경기장 저변에서 굼닐던 우리의 장구소리, 꽹가리소리, 징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부부젤라처럼 그렇게 높은 소리나 그렇게 모나게 삐여진 소리가 아니여도 절주맞은 가락에는 분명 우리의 분위기가 있고 우리의 기품이 있고 우리의 모습이 있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자의던 타의던 여러가지 소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분명 자기만의 소리를 갖고있다. “귀에 쏙쏙, 입에 착착” 감기는 친숙한 우리의 소리는있는 음색으로 들으면 감동을 느끼게 되고 희망을 갖게 된다. 그 소리는 우리의 민족적 정서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고 희로애락을 가장 심도있게 표현해주고있다. 이러다보면 축구 경기는 단지 구기 경기가 아닌 민족의 응집력과 향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되며 경기장을 감도는 응원의 소리도 단 음악이라는 쟝르를 넘어선 웅숭깊은 울림으로 된다. 이제 마음속에 자기만의 “부부젤라”하나씩 간직하고 싶다.  \"종합신문\" 2010년 6월 21일  
6    “레블레” 군단의 몰락 댓글:  조회:3334  추천:73  2007-06-29
  . 칼럼 .   “레블레” 군단의 몰락   “월드컵” 우감(偶感) - 3   김혁       1   “월드컵”에 참전한 모든 팀마다 특유의 애칭을 갖고있다. 브라질팀은  “카나리아 군단”, 대표팀의 유니폼이 카나리아 꽃을 연상하기때문이다. 독일팀은 “전차군단”, 2차대전 당시 독일명장 롬멜의 부대와 흡사하기에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에스빠냐는 “무적함대”, 16세기 에스빠냐의 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던 함대의 이름을 따왔다고한다. 프랑스는 “레블레군단”, 그 리유는 프랑스팀의 유니폼이 파란색이고 프랑스어로 레블레가 파란색을 뜻하기때문이라고한다.   프랑스는1998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과 유로 2000에서 우승을 따냈으며 2006 독일월드컵에서는 준우승에 따내는 등 화려한 전적으로“뢰불레 군단”의 기염을 토하던 명실상관 세계축구 최강국으로 군림한 팀이였다.         2   하지만 그동안 칭송받던 “레블레 군단”의 영광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완전히 빛바래고 말았다. “레블레 군단”은 22일 조별리그 최종전에서1대2로 남아공에 패했다. 조별 예선의 최종 성적은 1무 2패.  A조 꼴찌라는 믿기힘든 결과로 일찌감치 짐을 싸야하는 수모를 겪었다.   “레블레 군단”은 조별리그 첫경기 우루과이전에서 득점없이 경기를 마쳤, 두번째 경기 멕헤꼬전에서 0대2의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탈락하지않으려면 3차전 남아공전에서 무조건 큰 점수 차이로 승리를 거두고 우루과이와 메히꼬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남아공에게 덜미를 잡히며 급기야는 탈락하고야 말았다. “레불레 군단”은 이번 대회에서 경기력과 경기 외적인 측면 모두에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였다. 대회전부터 지적되던 선수기용 문제가 불거지면서 선수들이 감독응 향해 반기를 들었고 우루과이전에서 패한 뒤에는 선수 아넬카가 도메네크감독에게 모욕적인 발언을해 퇴출 당하는 광경까지 연출했다. 감독과 선수의 충돌은 선수단 전체로 이어졌고 반발한 선수들이 훈련참가를 거부하고 아예 경기 자체를 보이콧 하려는 정서까지 보이면서 결국은 명문팀이 월드컵에서 부전승을 보게 된것이다.   “레불레” 군단의 참패는 온갖 입방아를 낳았다. 그 추태와 추락은 급기야 프랑스정부와 사르코지 대통령에게까지 불똥이 튕기게했다. 야당인 사회당의 한 의원은 “사르코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확산한 개인주의, 리기주의, 배금주의 문화가 축구팀을 지배하고 있다”면서 대통령을 들먹였고 “나라 전체가 축구팀을 닮아간다”고 우려를 표했다. 사분오렬된 팀웍과 내분으로 무기력한 경기를 선보이다가 결국 축구팀의 자멸으로 월드컵을 일찌감치 마감한 “뢰불레 군단”은 결국 2010남아공월드컵에서는 최악의 팀으로 평가되게끔 전락되고 만것이.다.      3   누군가 \"축구는 전술의 결실이며 팀웍의 웅변이다.\"고 말했다. A조 꼴찌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은 “레블레 군단”의 부진은 어느정도 예고된 것으로 그것은 바로 팀웍이 사라진 부끄러운 모습때문이였다.   팀웍, 하나의 팀이 몸과 마음을 합하여 행하는 동작. 또는 그들 상호간의 연대작용으로서 즉 “협동(協同)”을 가리켜 말한다.   팀웍은 나 자신은 물론 집단에 속해 있는 팀원 개개인 모두에게도 의욕과 용기를 불어넣어 줄수있는 활력제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가 한번씩은 느끼는 것이겠지만 경기중에서 나와 동료간의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협동은 그야말로 즐겁고 보람된 일이 아닐수 없다. 개인 한사람의 실력은 그렇게 크지는 않을터이지만 동료와 호흡이 맞았을때 발휘되는 성적은 주위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러한 팀웍은 일상 생활에서도 적용된다. 집안과 회사의 팀웍이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 지에 따라 그 번창과 저조가 결정되게 된다. 소위 잘되는 회사일수록 그 팀웍이 성과에 정비례하는것이다. 팀웍은 조화로움이며 자연의 률법이다. 여기 조화로움의 기반우에서 분쟁이나 다툼 시기따위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아름다운 조화로움앞에 그만큼 이물질은 그만큼 작아지기 때문이다.   팀웍이 결여된 심각한 내홍을 겪더니 결국 몰락한 “레불레 군단”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경종을 울려주고있다. 저조한 성적으로 16강 진출 여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외려 불화가 일어났고 모든 팀웍을 집중해 승리하고 반전을 일으키기에도 부족한 상황에서 내분 발생의 련속은 팀의 사기와 의욕을 꺾어버리고 만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날로 변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있다. 그 변화다단한 질서에 적응하려면 답이 보이지 않는 진흙탕 싸움을 거두고 조화로움의 길을 찾는것이다. 옳고 바른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선 팀웍을 가강하면서 화해와 상생의 기치를 들고 창조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것이다. 팀웍이라는 조화로운 원칙과 명분속에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가 서로의 팔을 결을때 그 어울림속에 따슨 체온이 느껴지고 사람 냄새가 살아나면서 세상이 더욱더 아름다워 보일것이다.     \"종합신문\" 2010년 6월 28일          
5    “월드컵” 우감(偶感) - 4 댓글:  조회:3381  추천:73  2007-06-29
. 칼럼   축구를 모르는 리더    “월드컵” 우감(偶感) - 4   김혁     1   월드컵축제로 매일이 명절같은 기분인 요즘, 만약 직장상사가 축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닥 즐겁지 못할것이다. 밤을 패며 리그전을 관람한뒤 직장에 나와서도 그 감흥을 못이겨 동료들과 경기의 엄청난 반전이며, 심판의 오심이며 경기의 하이라이트이며에 대해 격앙된 소리로 나누고 싶지만, 상사는 무감각한 얼굴로  아침부터 오직 직장규률이며 사업수치에 대해 지지콜콜 따질것이다. 또한 밤을 새며 소진한 체력때문에 효률추구를 채찍질하는 상사의 신칙도 받을 것이다. 참, 대략난감한 형국이다.   2   여기 축구를 사뭇 좋아한 리더 한분이 있다.   1977년 7월 30일, 북경로동자체육장에서 <<장성컵>> 국제축국요청경기가 펼쳐졌다. 경기를 앞두고 경기장 좌석에 키가 작달만한 인물 하나가 나타났다. 조용한 출현이였지만 그의 모습은 경기장의 모든 관람자들을 놀래웠다. 너나가 기립하여 박수와 갈채를 올렸다. <<등어른이요! 등어른이 왔소!>> 일개 관람자의 신분으로 나타난 그는 다름아닌 등소평이였다.       국제사회에서도 이 순간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경기장에서의 등소평의 오랜만의 현신은 중국에서의 등소평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력사적인 한 장면이였다. 축구를 혹애(酷愛)했던 등소평은 이렇게 자신의 정치생애에서의 세번째 출마를 보여줬다.   일찍 프랑스로 류학했을때 자기 단벌 옷을 전당잡히고 국제축구경기를 관람할 정도로 등소평은 축구에 깊은 애착을 가졌다. 5,60년대 북경청년축구팀에 많은 배려를 돌려 늘 선농단 경기장으로 갔고 선수들이 체력훈련을 위한 경기마저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고 한다. 로후에 중임을 젊은 지도층에게 맡긴뒤 평생을 로심초사했던 그는 충분한 여가시간을축구에 돌릴수 있었다. 1990년 월드컵경기때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경기를 52차생방송했는데 그는 50차를 보았고 빠친 경기는 비디오로 녹화해 놓고 다시 보았다고 한다. 해바라기씨 한접시, 차 한컵과 담배 한갑을 준비하고 경기장이나 텔레비죤앞에 앉아 그는 자신을 잊고 축구의 신묘한 매력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중국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우러러 지칭(指称)되는 등소평, 그는 정녕 풍운이 감도는 경기장에서 진부한 팀을 인솔하여 첩첩한 리그전에서 벗어나 높은 순위에 오르게 한 감독같은 안목과 제슈체어로 <<컨디션이 좋지못하던>> 중국의 위상을 개변시켰던 것이였다.   3   외국의 대기업들에서는 직원 채용 기준으로 운동이나 예술쪽에 기량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같은 조건이면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대체로 건강한 사람이 많으며 축구 같은 단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나름대로의 리유이다. 태생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여러사람들이 같이 모여 경기를 하고는중 몸을 부딪치면서 친해지고, 단합의 힘이 다져지고, 뭔가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 질것이며 물론 그것이 업무의 성과로 련결된 다는것이다. 운동 경기와 경영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경기에서는 이기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력량이 출중해야 하고, 그것을 팀웍(협동작업)을 통해 성과로 련결해야 한다. 축구와 같은 단체 경기에서 팀웍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개인기는 뛰어나지만 팀웍이 약해 무너지는 팀이 얼마나 많은가? 회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뛰여난 개인이 많아도 리더가 이들을 팀웍으로 묶지 못한다면 각자가 알량한 개인기만 부리다 마는 오합지졸의 굿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리더라면 우선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의 욕구와 관심거리를 리해 하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경영지침서들은 적고 있다. 함께 일하는 부하들에 대해 무심하거나 감각적이지 못한 경우,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례는 많다. 마냥 회사의 체계적인 수칙에 경직된 얼굴만 고수하고있는 무감각한 리더의 운영 메커니즘이 그만큼 시대에 맞지 않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과 끈끈한 뉴대관계를 갖고 부하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리해력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원칙을 많은 리더들은 흔히 잊어버리는것 같다. 우리의 리더들이 꼭 갖추어야 할 <<필수사항>>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매너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직원들을 움직이고자 하는 리기적이고 일방적인 <<카리스마 리더십>>보다는 직원 개개인의 고충과 취미를 알고 숨은 능력을 일깨우고 발전시켜 적재적소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할수 있도록 해야한다.   축구의 축제가 열리는 이 여름철, 월드컵을 통해서 회사일군의 반쯤은 축구전문가가 되는걸 지켜보자. 우리가 좋아하는 팀이 어디가 강하고 어디가 약한지, 어느 선수는 뭐가 문제인지, 상대팀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전략을 제시하듯이 경기장 밖에서도 회사에서도 그런 사고방식과 자세를 기르도록 기대해 봄도 좋을듯하다. 더우기 출국, 리향, 산재의 삶을 살고 있는 요즘 풍토에서, 줄어들고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각 분야에서의 훌륭한 리더가 가지는 작용은 막강하며 또한 중요하다. 리더의 가장 큰 임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리더십이란 사기를 진작시키는 창조적이고도 직접적인 힘이다.   민심을 움직일 수 있고 휘동해 나갈수 있는 큰 리더, 급변하는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융통과 원활한 힘을 발휘시키는 리더, 만민이 지켜보는 경기장의 풍운대세를 휘잡을수 있는 감독같은 그런 리더가 우리에겐 절박하게 필요하다.      \"종합신문\" 2010년 7월 5일        
4    “월드컵” 우감(偶感) - 5 댓글:  조회:3574  추천:73  2007-06-29
. 칼럼 .   인저리타임 “월드컵” 우감(偶感) - 5   김 혁             1   축구경기를 관람하면서 우리는 경기가 종료되는 시점에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수자판을 추켜드는 모습을 볼수 있다.   축구는 롱구등 경기와는 달리 부상이나 선수 교체 등의 상황이 발생해도 전광판의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정규 경기 시간인 45분을 넘어서 경기가 진행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경기에서 잃어버린 시간만큼 경기가 재개, 지속되는 것이다.   45분씩의 정규시간이 끝난이후 적용되는 이 시간을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이리고 한다. 보통 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거나 선수교체 및 부상으로 인한 경기지연, 반칙·코너킥·프리킥·페널티킥 등으로 허비한 시간랑비를 보충하기 위해 주심의 재량(裁量)으로 그 시간을 결정한다. 주심은 이를 계산하기 위해 경기진행을 위한 시계 이외에 별도의 시계를 차고 나온다고 한다.   2   “인저리 타임”은 보통 2~3분의 짧은 시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흔히 기적은 이 짧은 시간에 터진다. 인저리타임에서의 선수들의 집중력에 따라 각 팀의 명암이 갈리고 있다.   지난 독일월드컵때에는 인저리타임에서 무려 12꼴이나 터져나와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리는 “인저리 타임”의 기적을 심장이 터지는듯한 흥분속에 접할수 있었다.   비록 8강 진출에서 좌초됐지만 16강 진출이라는 예기했던 목적을 달성하고 아시아 축구의 숨은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한국팀, 17일에 열린 남아공월드컵 B조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와의 2차전에서 한국은 전반 16분에 자책꼴을 내줬고 전반 30분 또다시 추가꼴을 허용했다. 하지만 지칠줄 모르고 역습을 시도해 1분이 주어진 인저리타임에서 골을 넣었다. F조 본선리그 1차전에서는 동유럽의 강호 슬로바키아가 뉴질랜드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며 다잡았던 승리를 놓쳤다. 슬로바키아의 승리로 끝이 날것같던 경기는 경기종료 직전 원점으로 돌아갔다. 인저리 타임 3분때 막판 공세에 나선 뉴질랜드가 슬로바키아 수비진을 제치고 솟구쳐 올라 천금의 헤딩골을 터뜨린것이다. 24일  C조 잉글랜드- 슬로베니아의 최종에서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 반전의 결과가 펼쳐졌다. 이미 승점 4점을 챙겨놓은 슬로베니아는 축구종가(宗家)를 상대로 0-1로 뒤진채 경기를 마쳤다. 비록 경기에는 졌지만 같은 시간 벌어지고 있던 미국(승점2)과 알제리(승점1)의 경기가 막판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해, 그대로 무승부로 끝날 경우 조 2위로 16강에 올라가는 상태였기때문에 슬로베니아 선수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하지만 드라마는 바로 미국- 알제리전의 인저리 타임에서 일어났다. 추가 3분을 알리는 인저리타임 메시지가 화면에 등장하고 후반 46분에 바로 터진 결승골은 미국에게 기적과도같은 승점 3점과 16강행 티켓 선물을 안겼다.기쁨에 겨워 잉글랜드 선수들과 유니폼을 교환하던 슬로베니아 선수들은 뒤미처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처럼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막판 “인저리 타임”에 포기하지 않고 얼마나 집중력을 잘 유지하느냐가 승부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축구 해설가들은 종종 시작하고 5분, 끝나기 전 5분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경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충고도 들린다. 경기 막판 “인저리 타임”에 터지는 골은 끝까지 노력을 잃지 않고 꼴문을 두드리는 팀이 얻는 응분의 결실이며 수확이다.   3   어찌보면 우리네 삶의 력정도 한판의 축구게임과도 같다. 우리는 태여나서 너나없이 주어진 삶의 그라운드에서 달려야 한다. 그 너넓은 생의 그라운드에서 지리한 공방전이 이어질때가 많다 방향을 알수없는 쪽에서 걸어오는 상대방의 란폭한 태클에 쓰러지고 권위를 악용하는 편파적인 심판의 야비한 판결에 당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찬스라고 뼈물러 날린 공이 빗나가는 어이없는 실축도 겪는다. 이처럼 우리 삶에... 완벽이란 없다. 때문에 오직 최고를 향해 가는 최선만이 존재한다.   막판이 가까워 올수록 방심을 하다가는 자칫 평생의 유감을 남길수 있는 일. 경기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릴때까지 끝까지 노력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축구는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축구선수들이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도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두는것것은 “인저리 타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것은 “인저리 타임”에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만든다.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지게 되는 안일함과 라태, 도덕적 해이, 긴장감의 실종을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인저리타임에 숨어있지 않나 싶다.   “종합신문” 2010년 7월 12일      
3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 룡정자택을 찾아서 댓글:  조회:4498  추천:75  2007-06-29
. 역사기행 .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 룡정자택을 찾아서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에서의 필자   지난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     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서대숙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년11월22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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