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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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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저서 싸인회를 가져 댓글:  조회:1078  추천:43  2017-01-17
6.1 아동절을 맞아 연길시 인민공원에서  내가 집필한 청소년위인전 시리즈를 어린 독자들에게 증정하는 싸인회를 가졌다.   (2016년 6월 1일)      연변조선족자치주출판국,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조선문독서사협회의 공동 기획과 주최로 된 싸인회에서  "윤동주 코드",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주덕해의 이야기" 등 근년래 출간된 나의 저서 80여권들을  공원을 찾은 독자들에게 싸인,증정했다. 举办第十届延边读书节庆“六一”暨“2016绿书签行动”图书展 "延边日报“”:2016-06-02   本报讯(记者 陈颖慧)6月1日,由延边读书节组委会、延边读书协会、延边州文广新局联合主办的“2016第十届延边读书节庆‘六一’图书展”暨“绿书签行动”在延吉公园开幕。7家参展单位300多个品种1.5万余册图书,吸引近万名学生及家长参与活动。 当日上午9时,延吉公园广场人山人海,荷花池畔书香阵阵。延吉市新华书店、延边人民出版社文化书店、延边民族图书大厦、延吉市莘学书店、延吉市求学书店、延边青少年文化促进会、延边朝鲜文读书社将五颜六色的图书沿池畔一字排开,每个书摊前都吸引众孩子驻足观看。主办方还开展打折送书、赠送文具盒、发放书签、指导读书等活动。 众多孩子及家长在一张书案前排起长队,中国作家协会会员、延边作家协会副主席、龙井尹东柱研究会会长金革免费签名赠书活动火热进行。 他认真地询问每个孩子的名字,在他所撰写的《韩乐然的故事》、《朱德海的故事》等书的扉页上郑重地写下自己的赠言, 免费赠送读者,仅30分钟,赠书近80册。 金革被称为“中国朝鲜族第六代小说家”的代表人物之一,曾获得第七、八届全国少数民族新闻奖,第五、六届延边“金达莱”文艺奖。孩子们拿到他签名的赠书,都不由自主翻阅,认真阅读,心中埋下文学的种子。    
361    고백, 미성(美声)처럼 들려오는... 댓글:  조회:1712  추천:8  2016-10-11
. 평론 .   고백, 미성(美声)처럼 들려오는...  -주향숙의 수필 '래생에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김혁           그만 고백에 귀를 빌려주고 말았다. 긴 고백에 참다랗게 귀와 마음을 깡그리 빌려주었다. 수필은 마음속에 숨긴 일이나 생각한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고백의 문학일진대, 그 고백이 미성(美声)처럼 아름답게 들려온다.       '래생에는 시인이 되고싶다. 그리고 좀 더 아름다운 시를 쓸수 있도록 괜찮은 시인이 되고싶다.'   주향숙의 수필은 그닥 크지아니한 작은 소망을 고백하는것으로 시작된다.   시인이 되여서 '오염된 세상에서 순수한 사랑을', '메마른 세상에서 가슴 설레이는 사랑을' 할수 있기를 소망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따뜻한 사랑을' 누릴수 있게 해준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고백의 말미에 믿음을 싣는다. '세상으로부터 몰려오는 어둠과 추위와 두려움과 아픔들을 그 아름다운 사랑을 담은 시로서 충분히 막아낼수 있을것이라 믿는다.'      작가는 나지막한 고백에 이 소중한 전언을 하고싶었을것이다.     자칫 제목과 소재가 주는 상투성으로 인하여 독자의 감상이 가벼워지지는 않을가? 빤한 전개나 결론에 이르지 않을가? 념려하며 읽었지만 오히려 그 성질을 문학적으로 잘 소화시켜놓고 있어서 부질없는 기우를 해소시켜주었다.   단조로워 보이는 짧은 글이지만, 음미해 보면 그속에 산문시라도 읊는것 같은 시적인 함축의 정서를 내포하고있다. 이는 작가가 꽤 오래동안 수필과 시를 병행해 오며 벼린 붓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정서라 하겠다. 그동안 시인이 상습적으로 복용한 농도짙은 정서의 량이 작품의 행간마다에 잘 드러난다.     요즘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 모두 문학이 되리라는 소박한 인식으로 손쉽게 일기 수준의 글을 발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다른 작가, 작품과 변별성을 보여주려는 욕망에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감정의 과잉을 조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경우는 스스로 그 화려함의 과잉을 잠재운다. 그 감정에는 분식(粉飾)이 없다. 사랑이라는 가슴뛰게 하는 주체를 읊조리고있지만 작가는 평이한 심상과 안정된 붓놀림을 보여준다. 담백하게 담아낸 정서에 과장되지 않은 수사법이 접목된 필치에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평범한 체험이 특화되여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작품은 수필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세계를 무리없이 표현하였고, 그것을 담아내는 형식 또한 무난한 편이여서 비평의 대상이 될만한 특이한 사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수필이 고답적인 양식에 얽매여 있는것이 조금 안타까울뿐이다. 작가의 력량으로는 좀 더 컴퓨터 앞에 붙박혀 숙고의 키보드를 두드린다면 얼마든지 극복할수 있을것이였는데…   그럼에도 이 수필에는 그로서의 나름의 소리가 있다.   길지 않은 편폭에 난삽하지 않은 단어의 사용으로 느낌이 편안하게 다가오는데 이것은 아마도 별반 티나지 않는 형식에 일상적인 정서와 평이한 인식이 실려 생겨나는 도덕적 당위성때문일터이다. 하지만 나지막한 고백과도 같은 이런 편안함이나 잔잔한 감동이 나중에는 큰 울림통으로 다가오는것이다. 연주를 마치고 고느적히 누워있는 악기를 무심히 건드렸을 때 반응하듯 울림을 울었을 때 느끼는 놀라움과 은은한 여운… 작가의 가슴에서 되뇌이며 사색으로 빚어낸 화음들이 수필의 정서를 만들어내고 있는것이다.     작가는 '래생이 오면'이라는 용어를 도입부에 몇번이고 중복하고 있다. 단락마다 곁들인 그 추임새가 흥미롭고 아름답다. 자칫 탐미와 센티멘털로 흐를 페단은 있었지만 그 반복구에는 가슴을 휘돌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랑'이 주는 안온함에 '래세'라는 종교적 화두에서 오는 감정의 견인이 있기때문이다. 그러한 설파로 주향숙의 수필은 또 명상적이고 래세추구적인 모습이 된다.     좋은 글월이나 좋은 음악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 파장은 높고, 깊고 넓게 퍼져나가며 마침내는 세속의 온갖 잡음에 마모된 우리들의 눈을, 귀를 마음을 사로잡다. 주향숙의 이 수필이 바로 그렇게 귀와 눈과 마음을 빌려주고싶은 미성이다.   "흑룡강신문" 2016-06-20  수필   래생에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주향숙   주향숙 프로필   연길시 의란향에서 출생,  수필, 시 200여편(수)을 발표했다.  " 도라지문학상" 등  수차 수상。 수필집《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자유》를 간행 연변대학 사범분원 부속소학교에 교원.    래생에 무엇이 되여 다시 태여날지 아무도 모른다. 날개를 가진 한마리 작은 새가 될지 또 푸르게 넘실거리는 한그루 나무가 될지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하나의 돌덩이가 될지 아니면 이름 없는 나무에 이름도 없이 맺히는 한알의 열매가 될지… 또 기어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여난다고 해도 어떤 모습이 되여있을지는 역시나 아무도 모른다. 사상가가 되여있을지 화가가 되여있을지 신학자가 되여있을지 아니면 가난한 농부거나 구제불능의 알콜 중독자거나…     래생에 나는 한 사람으로 태여나고싶다. 그리고 래생에는 시인이 되고싶다. 그리고 좀 더 아름다운 시를 쓸수 있도록 괜찮은 시인이 되고싶다.   시인이 된다면 노래하고싶은것이 참 많을것이다. 땅이며 하늘이며 불이며 공기며 바다며… 꽃이며 나무며 강아지며 토끼며 고래며…웅장하고 빛나고 우아하고 고상하고 참되고… 그렇게 우리의 세상에 넘쳐흐르는 아름다움을 마음껏 시로 표현할수 있다는것은 참으로 축복받은 인생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인으로 태여날수 있다면 오로지 너와 나의 사랑만을 노래하고싶다. 이생에서 우리가 나눈 사랑을 래생에 고운 사랑시로 이야기하고싶다.     너와 나는 늘 추운 겨울에 만났었다. 기어이 그 시간을 택한것도 아니였는데 우리는 늘 한해의 끝자락에서 서로를 만나군 했다. 꼭 마치 추운 겨울을 뜨겁게 살아내고싶은 그 정열처럼. 그만큼으로 뜨거웠던 우리의 사랑은 내 살갗에 문신으로 새겨져서 너와의 기억을 나는 아주 섬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기억해낼수가 있다.   부드러운 잔디밭을 밟으며 걷던 순간 얼굴에 그려지던 설레임의 무늬이며 밤이면 이불속에서 팔다리가 섞여들고 호흡이 섞여들던 그 순간의 열락의 뜨거움이며 아침 깨여서 한 이불안에서 함께 푸르스름한 새벽을 바라볼 때의 감동이며 영화관에서 내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만져줄 때 가슴으로 소용돌이를 만들던 따뜻함이며 어느 골목길에서 뒤짐을 지고 걸어가는 너의 뒤잔등을 바라보며 웃음짓던 행복감이며 지하철역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리며 떠나야 했던 그 순간의 슬픔이며… 아무튼 나는 우리가 함께 했던 낮과 밤을 그리고 그속의 모든것들인 해살과 비와 눈과 바람과 그리고 거리와 지하철과 시장과 음식점과 층계와 그리고 밥과 반찬과 술과 그리고 목욕을 같이 하고 입맞춤을 하고 미소짓고 바라보고 서로 껴안고 사랑을 나누고…그 모두를 다 기억하고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늘 짧았다. 만나기까지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몸의 모든 세포가 갈증으로 타들어가도록 한없이 길었을뿐이다. 참을수 없는 그리움에 우울하기도 무기력해지기도 미친듯이 격해지기도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나는 아름다움이라고 그 모든것과 상관없이 부를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는 언제나 뜨거운 불꽃으로 타올랐고 그것은 오랜 시간을 지나도 종래로 고갈되거나 희미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리움은 늘 지속되였고 고조되였을뿐이다. 그 뜨겁고 화려한 색갈들은 자칫 회색빛으로 물들수 있는 우리의 외로움과 아픔의 시간들에 배여들어서는 보다 곱게 물들이고있었다. 그래서 세상은 늘 고운 빛갈로 차올랐고 늘 따뜻했고 늘 밝았다.   내 몸이 너의 몸을 찾는 그 절실함과 내 령혼 깊은 곳으로부터 너를 찾는 그 간절함 그것이 어떤것인지를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무어라 말할수 있으며 그 아픔을 무어라 말할수 있을지 나는 제대로 적을수가 없다. 나는 언어의 불충분함과 또 부적절함과 그 한계와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아름다움이라는 이 형용사외에는 다른 단어를 고르지 못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이 단어가 마음에 든다.     비록 늘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는 감히 사랑이라고 부르고싶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아픔을 변명하고 위안받고싶은것은 절대 아니다. 기쁨만이 즐거움만이 행복만이 눈부시는것만이 사랑일수는 없다.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무엇을 보다가 괜히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 무엇이 특별히 생각난것도 무엇이 불쌍해진것도 무엇이 슬픈것도 아닌데말이다. 때로는 밥을 먹는데도 길을 걷는데도 밤에 잠을 자거나 아침 깨여서 눈을 뜨는데도 다 커다란 용기가 수요된다는것을 깊이 느끼군 했다. 때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심하게 두려워지기도 했다. 문득 네가 떠나버릴가봐 문득 내가 아파질가봐 문득 세계의 종말이 올가봐…그렇게 더는 너를 볼수 없을것같은 생각이 갈마들 때면 침착하지 못하게 허둥대군 했다. 하지만 사랑은 늘 자신의 신비로운 능력으로 다시금 제대로 일상을 살아내도록 다독여주었으며 나더러 자신의 빛갈을 알게 만들어주었고 뜨거운 열정으로 세상을 껴안고 살아가게 만들어주었다. 이 오염된 세상에서 순수한 사랑을, 이 메마른 세상에서 가슴 설레이는 사랑을, 이 차거운 세상에서 따뜻한 사랑을 누린 나는 이생에 태여나게 된것을 고마와하며 너와 한 하늘아래 살게 된것을 고마와한다.     래생에 내가 전생의 사랑을 시를 읊조린다면 너 역시 나를 알아볼것이라 믿는다. 이생에서 우리가 전생에서 그리워했음을 잘 알고있었듯이 말이다. 우리는 함께 했던 순간순간을 영원히보다 더 영원히 기억하고있을것이기때문이다.   래생에 내가 다시 시로 너를 만나면 우리 더는 이생처럼 아프게 사랑하지 말고 더 행복하게 더 평화롭게 더 그윽하게 사랑했으면 좋겠다. 슬픈 사랑을 나눈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눈이 푹푹 내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깊은 시골에라도 찾아들고싶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런 일상을 보는이에게는 되려 구질구질해보일지도 모르는 그런 일상을 함께 평범하게 살아보고싶다. 아침 문을 나서느라 몸을 굽혀 신을 신는 너를 무심히 바라보며 웃어주고싶고 함께 땀흘려 일하다가 서로 마주보며 너의 이마에 돋은 땀방울을 닦아주고싶고 그냥 최저의 말만으로 때론 말도 없이 변화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아도 좋을듯하고 낡은 밥상에 마주앉아 간단히 장국에 밥을 말아먹고싶고 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우면 너의 머리칼을 만지고싶고 그러다가 너의 귀구멍을 파주고도싶고 밤이면 한 이불안에서 조용히 너의 우에 포개여져 잠들고싶고 그러다 혹 내가 먼저 깨여나면 너의 숨소리를 들으며 미소지으며 내려다보고싶고…이처럼 고요하고 밋밋하고 느릿하고 사소한 일상들이 내게 얼마나 충실하게 풍성하게 절실하게 다가오는지를 깨닫고싶다. 매일매일 같은 날이여도 리유도없이 친밀하고 소중해지는걸 깨닫고싶다. 나 혼자의 생명이 너와의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수 있다는게 아름다움이라는걸 깨닫고싶다.   래생에 내가 만약 시인이라면 나는 이렇게 이생에서 미치도록 불타올랐던 그 많은 그리움들을 시로 처절하게 읊조리고싶다. 어쩌다 만나면 허기진 령혼끼리 뜨겁게 비벼 광적인 열락을 만들던 그 절정으로 치닫던 찬란함을 시속에 라체로 드러내며 뒹굴고싶다. 비명을 지를만큼 강렬했지만 숨죽여울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스쳐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계절속에 남아서 바람으로 울어대던 오열을 시로 터뜨리고싶다. 그리고 이제 래생에 다시 만나 사랑보다 더 뜨거운것이 더 가치있는것이 더 오래가는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나누게 될 우리의 사랑의 기적과 감사함을 시로 그려내고싶다.   그리고 래생의 다음 래생에는 그 무엇이 되여 어디에서 태여나더라도 너를 담은 나의 시를 새긴채 태여나고싶다. 그 시만으로 내 몸을 감싸고 행복하게 살아낼수 있을것 같다. 세상으로부터 몰려오는 어둠과 추위와 두려움과 아픔들을 그 아름다운 사랑을 담은 시로서 충분히 막아낼수 있을것이라 믿는다.     래생에 운좋게 한 시인으로 태여날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다.    "흑룡강신문" 2016-06-07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60    봄이라는 이미지의 풍연(風鳶) 댓글:  조회:1557  추천:9  2016-10-11
. 평론 .   봄이라는 이미지의 풍연(風鳶) - 조원의 수필 “바람이 불면 연을 날리고싶다”   김 혁   (그림: "연을 날리다" 박승호)     바람, 몸, 꽃, 연…   조원의 수필은 첫 시작부터 난삽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그의 표현을 빌면 떨어지는 벚꽃처럼 “난분분 난분분” 내리는 이미지들…   현란한 그 이미지들이 다소 넘친다싶은 감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문장이 매끄럽고 속도감이 있다. 재빠르게 바뀌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통괄하여 보여주는 봄의 정경과 관찰자의 다각적인 시선들이 부담스럽지는 않고 그나마 도렷이 안겨온다.     “유독 봄이여야만 바람이 쓸어가는것과 바람에 실려오는것이 보이게 된다”라고 화자는 작품의, 봄의 들머리에서 말한다.   바람과 꽃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다. 이러한 디테일의 사실성은 수필의 내러티브적인 성격을 이끌어 낸다. 식상한 일상의 공허해 질수밖에 없는 관념적이나 추상적인것들이 작품속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적인 모습들과 포개짐으로서 봄날이라는 현실성을 획득하고 작품은 상이한 매력을 발산한다. 봄날에 새라운 시선으로 바라본 이미지는 봄의 들머리에서 그동안 동면했던 정신적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타인을 바라보는 모순된 시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꽃순처럼 현실성을 감싸 안으면서 벙그레 만개하는것은 바로 “마음의 세부들에서 고요하게 일어서는 경이로운” 치유의 힘이다.     미국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이미지란 지적, 정서적 복합체를 일순간에 보여주는것”이라 하였다. 좋은 수필의 생명력 창조는 이미지의 형상화 구축과 직결된다. 하나의 수필작품을 내놓을때  소재가 되는 사물을 단순히 묘사하거나 이야기로 풀어내서는 아니 되고 내면의 눈을 통해 일상적 사유를 뛰여넘는 자기만의 특화된 이미지를 그려내야 하기때문이다. 그런 수필이여야만 독자들의 안목에서 반듯한 이미지로 생생하게 살아 숨쉬며 “잘 쓴 작품”이라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때문에 이미지가 집중되면서 정서를 강하게 환기하는 작품이 오래 기억되는것은 당연하다.       이 작품에서 계절의 미세한 움직임을 디테일하게 묘파한 구절을 보면 마치 작가가 붓대가 아니라 초고속 촬영기로 촬영한 이미지를 보는것과도 같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결”, “말라터진 입술”, “물기를 갖고자 하는 손”…     화자의 이미지는 이렇게 신체의 일부에서 부터 가슴에 숨겨둔 상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이미지에 까지 이른다. 봄에 대한 작가의 심상을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서 감정이입을 유도하여 작가와 동일한 흠상에 다다르게 하고 있다. 그렇게 화자의 심중에 동면했던 이미지의 기원은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이 봄날의 꽃비에 떠밀려 독자에게 지각되면서 그리움의 정서를 공유하고자한다. 그리고 “외로워서 그리워서 함께 하고저 만나는 공간”인 위챗에서 “무시와 랭소, 눈치와 소외, 인맥과 허세, 질투와 의심 등등의 엇갈림”으로 곤혼스럽던 현대인의 통병을 추슬리고 “꽃의 슬픔을 사랑하듯 타인의 슬픔도 사랑”하기로 한다.     수필은 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시의적절하게 선택하여 정서적 효과를 더했다. 계절의 화사한 정경과 화자의 심리적 변화가 잘 버무려진 글이다. 서두와 내용전개도 좋지만 결미가 멋지다. 조연은 수필의 말미에 뜬금없이 연을 날린다. 그리고 비로서 날리기로 한 마음의 연의 얼레줄에 많은 이미지를 감았다가 풀어 놓는다.   글의 행간에 깊숙히 감추었던 연을 그제야 들추어낸것은 이제 차거운 시각으로만 보았던 계절이 버겁지 않고 봄바람에 편승한 새로운 비상을 꿈꾼다는 암시일것이다.      흔히 시나 수필들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정태적인것이라기보다는 동태적이며 그 약동은 하나의 주제를 위한 장치가 되는수가 많다. 조원이 실사해낸 이미지는 “머리칼을 들추는 바람”, “망울 터지는 목련”, “비속에 지는 벚꽃”, “파란 하늘을 나는 연” 등 동태적인 이미지의 련쇄적인 방영이다. 그 이미지들은 자아성찰을 통해 봄날같이 변화많은 삶의 일단(一端)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미지의 련쇄를 통해서 날리는것은 “골목골목 바람 부는” 세상의 하늘을 가로지는 산뜻한 풍연같은 희망의 메세지이다.   “흑룡강신문” 2016년 5월 6일       수필   바람이 불면 연을 날리고싶다   (목단강) 조원     작가 조원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은 봄에만 있는듯 하다. 유독 봄이여야만 바람이 쓸어가는것과 바람에 실려오는것이 보이게 된다. 그래서 봄이면 바람 탓에 바람을 탄다. 봄을 탄다.   바람이 불어오면 대개 바빠진다. 패션 감각을 살리려고 당겨서 올리지 않았던 지퍼도, 잠그지 않았던 단추도 만져볼수 있다. 잘 정돈된 머리결은 바람에 흩날리면서 손빗이 한번쯤 더 가게 된다. 입술은 그동안 잊혀져서 외면당했던 시간들을 보상받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말라가면서 터지려고 한다. 왼손과 오른손도 서로를 부비면서 알맞게 갖고저 하는 물기를 그리워한다. 이렇게 봄에 바람이 불어오면 바깥 세계에 드러난 몸의 일부들은 상처를 두려워한다. 누구든 가슴에 숨겨둔 상처 하나쯤은 있겠지만 입술에, 눈섭 사이에, 이마에, 코밑에, 손등에, 목과 가슴 사이에,종아리와 복사뼈에 내보여지는 상처는 누구든 싫어한다. 상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숨겨야 하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낯선 사람들에게조차도 례의가 있어야 할듯싶다. 그래서 은근히 봄이면 잊고 살았던 자신을 찾아가듯 마냥 바쁘기만 하다.   바람이 불어오면 길을 걷다가 멈추어 서서 물 오르는 나무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파란 하늘을 문득 보게 된다. 그런 하늘이라면 다른 누구의것도 될수 없는 온전히 자신만이 갖고있을 하늘이였었다는 만족을 느낀다. 봄나무의 가지 가지에서 막 터지려는 망울진 목련의 서두름을 보면서 천 .천 . 히. 천. 천. 히.  하고 곱씹으면서 피여나는 순간을 볼수 없음에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부피가 엷어져서 한결 가볍게 마주오는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는 몸짓과 스쳐지나는 옷자락에 집중하게 된다.  바람은 미처 몰랐던,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주위의 세부들과 자신의 몸의 세부들, 마음의 세부들에서 고요하게 일어서는 경이로움을 발견하게 한다. 여태 자신이 아닌 오로지 타인을 향해 있던 목마름을 거두어들인다.   일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삶을 절정의 한순간이다싶게, 세계 말일이 코앞이다싶게 작열하듯 매일 매 순간마다 화려하게, 집요하게, 섬뜩하게, 비루하게, 끈적하게, 비릿하게 이어진다. 티비에서의 이미지들, 컴 화면의 요란한 세상사들, 폰에서의 속속 정보들… 세상을 알대로 알게 할만큼의 세상이지만 가까이 있는듯 하면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듯, 세상의 존재의 일부가 되였던듯 이방인이 되였던듯, 현실과 부재의 공간을 거듭하면서도 마침내는 속이 빈 허수아비는 아니여서 다행이라는 아이러니도 있다. 그러면서 타인의 기쁨이든 슬픔이든간에 무감각해진다.   타인의 슬픔이란… 지진과 화산, 테러와 전쟁, 사고와 충돌의 이미지들로 가득 메워지는 아침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 아침식사와 함께 하는 고정 메뉴 따위로 된다. 멀쩡한 건물의 폭격의 장면을 보면서 할리우드 영화처럼 느껴져요 하고 쉽게 말할수 있다. 서서히 침몰해가는 선채, 추락되여 박살나버린 비행기의 잔해들을 보면서도 무심해진다. 허기와 갈증에 허덕이는 소년이 카메라를 응시하고있는 얼굴을 보면서 자신들의 얼굴을 바라볼수 있어서 련민이 생긴다. 련민의 끝에 따른는것은 다행이라는 안도감. 심지어 촬영사가 소년에게 연필이랑 사탕이랑 돈이랑 주면서 포즈를 취해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타인의 슬픔도 번복되고 재탕되면 식상해져 버린다.   식상해지기 쉽게 하는 빠른 세상이다. 세상사를 다 함께 공유하는듯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 요즘 류행하는 위챗의 모멘트도 위험한듯 하다. 외로워서 그리워서 함께 하고저 만나는 공간이지만 무시와 랭소, 눈치와 소외, 인맥과 허세, 질투와 의심 등등의 엇갈림으로 곤혼스럽게 하지만 쉽게 로그아웃 시키지 못한다. 은근히 즐겨가고있고 이미 중독되여 있다. 위챗 모멘트에 따르는 곤혹은 타인의 기쁨을 바라보는 모순된 시각이다.     이 봄에, 벚꽃이 막 지려고 하는 무렵에 마침 비가 내렸고 마침 먼데서 친구가 왔다. 간밤의 숙취에 얼떠름한 이른 아침에 남자들의 벚꽃 구경은 환상이였다. 물안개가 사라져가는 공원 거리에 벚꽃이 꽃비가 되여 내리고있었다. 그 꽃, 지는 꽃을 보면서 친구를 안아버릴번 했다. “사쿠라꽃 피면 녀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녀자 생각에 쩔쩔맨다.”(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사쿠라라는 표현은 별로이다.) 아마도 소설가가 느꼈던대로 녀자 생각이 났었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가 말하고저 하는 녀자는 단지 성적으로 구별짓는 녀자가 아닌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사람들이라고 고집해본다. 꽃에게도 슬픔이 있을가. 난분분 난분분 떨어지는 벚꽃 잎을 보면서 나무와 벚꽃이 같이 아파할거라고, 기어이 꽃의 슬픔이라고 우기고 보니 그리움이 생긴거다. 리유도 없이 상대도 없이 밀려오는 막무가내의 그리움. 꽃의 슬픔을 사랑하듯 타인의 슬픔도 사랑하기로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나서 사랑을 시작하면 실패한다. 누구든 외롭다고 생각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스치는 몸짓에서 그리움이 묻어난다면 사랑할 때인듯싶다.   봄이면, 바람이 불면 연을 날리고싶다. 바람을 등지고 하늘 높이로 연을 띄워 올리고싶다.  타인의 슬픔을 대체 알면 얼마나 알지싶지만 아픈 사람이 저기 연이 날리네 하면서 파란 하늘을 잠간이라도 볼수 있게 연을 날리고싶다. 봄이면 바람이 분다. 골목 골목에서 비집고 터져나오는 바람.   “흑룡강신문” 2016년 5월 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9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댓글:  조회:1329  추천:11  2016-10-11
. 제3회 "두만강"문학상 축사 .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김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존경하는 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님, 길림신문사 홍길남사장님,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 그리고 귀빈 여러분, 매스컴과 문학계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세상이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 6월의 복판에서, 저 역시 “두만강”문학상 수상자의 한 사람으로써 세번째로 이어지는 두만강문학상 시상식에 축사를 드리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하여 평소 책임감을 떠인 창작혼과 부단한 정진으로 오늘 영예의 상을 수상하신 수상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두만강 문학상”은 길지 않은 년륜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계의 영향력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 동안의 수상작 또한 우리시대의 삶과 정신을 결집해 낸 문학계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문학상의 짜임새나 수준이나 기획력이 문단의 그 어떤 상에 비견해도 못지않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제 권위와 품격을 자랑하는 “두만강 문학상”의 성장과 미래가 눈앞에 훤히 보인다고 해도 좋을것입니다. 조선족문단에서 해외인사들의 헌금으로 세워진 이러저러한 문학상이 적지않지만 순 우리 기업인의 쾌척으로 이루어지고 이렇게 이어져가고있는 문학상은 흔치않은줄로 알고 있습니다. 상의 위의(威儀)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열정과 로고를 바치신 리청산 리사장님과 “길림신문”이 이룬 결실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이 소중한 문학상이 우리문학의 감성에 맞는 문학적 토양을 잘 걸구어 가면서 중국조선족 문학의 한 진경(眞景)을 펼쳐보이기를 기대해봅니다. 지금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 몸부림하고있으며 또한 서글프게도 인문학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인이 몸 담근 성소(聖所)에는 그 사회적인 책임감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렬악한 상황속에서도 굳건하게 문학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문인들이야말로 민족발전의 지혜를 창출하고 그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우리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선봉장들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상하신 여러분의 작품들은 참으로 값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조광명 시인님이 보여준 탁월한 의경의 경지와 오경희 수필가님이 보여준 민족정서의 고운 결, 우상렬 교수님이 보여준 정조준의 호쾌발랄한 평문을 수상작으로 뽑으면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서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이렇듯 시대의 아픔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붙잡도록 해주는 빼여난 작품을 창작하신 수상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문학이 바로 부침과 리산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의 아픔과 고민을 도닥여 주고 지역과 세대를 하나로 이어주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것입니다.   존경하는 문인 여러분, 이러한 창조적 정신의 발현으로 우리 문학의 진흥에 적극 동참하여 앞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장하에 큰 흐름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이황의 시조 한수로 오늘의 심경을 비추어 읊고자 합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류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   감사합니다.   2016년 6월 16일     
358    영화 “밀정”과 “의열단”단원 유자명 댓글:  조회:3195  추천:15  2016-10-11
  . 역사칼럼 .   영화 “밀정”과 “의열단”단원 유자명   김혁    ▲ 영화 포스터   1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에 나섰던 “의열단”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밀정”이 최근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암살”에 이은 또 한편의 의열단소재에 대중적 관심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에 부각된 의열단의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시대, 독립지사들이 1919년에 설립한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 운동단체이다. 단체의 명칭은 “정의(正义)의 사(事)를 맹열(猛烈)히 실행한다”는 취지에서 유래됐다. 의열단은 일제 경찰서, 헌병대, 조선총독부 등 관공서를 폭파하고 친일 지주자본가, 총독부 관리등 요인의 암살로 일제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열단”은 그후 중국 상하이를 주무대로 외국인 치외 법권지역인에서 폭력 항쟁으로 일본제국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상하이의 프랑스인 보호구역을 근거지로 삼아 1919년부터 192525년에 걸쳐 약 300여 건의 테러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밀정”은 1920년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의열단의 경성 폭탄반입 사건이 그 배경이다. 의열단의 수많은 의거 중에서도 1923년 의열단이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대량으로 국내에 반입하여 벌이려던 파괴공작 계획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의열단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에 폭탄을 반입하여, 식민통치기관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 폭탄투쟁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파괴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들과 물자들을 나르는 주요 철도였고, 암살 대상은 사이토 총독 이하 조선총독부 수뇌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계획은 사전에 탄로났고, 김시현과 황옥을 비롯해 작전에 참여했던 의열단원들 전원이 검거되었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영화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황옥 ▲ 영화 속 송강호가 분한 황옥의 형상   황옥 경부(영화 속 이정출)를 비롯해 영화 속 주인공의 모델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영화 속 송강호가 주역을 맡은 주인공 이정출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황옥(黃鈺)이다. 그렇다면90 여년 전 실존했던 인물 '황옥'은 과연 독립운동가였을까? 아니면 일제 밀정이었을까? 역시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 선생의 수기 “나의 회억”, (랴오닝민족출판사.1984년)에서 황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비밀참모로도 활동했던 유자명 선생은 수기에서 "황옥은 경기도 경무국의 고급정탐으로서 독립운동가들과도 비밀한 연락을 하고 있어서 내가 경성에서 김한과 같이 활동하고 있을 때도 나도 그를 만나봤다. 그런 황옥이 천진까지 오게 된 것은 폭탄과 권총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서다."라고 적고 있다. 의열단의 폭탄과 권총을 건네받은 '황옥'은 텐진에서 만난 다른 의열단원 3명과 함께 안동(지금의 단둥)으로 향했고, 단둥에서 평소 자신과 친분이 있던 일본 외교관 김우영(당시 안동 주재 일본영사)과 만났다고 수기는 기록했다.   일제와의 항쟁을 그린 영화에서 독립운동가가 아닌 일제 총독부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 의 흥행과 함께 또 다시 역사적 조명을 받는 의열단의 이야기, 그 증언자였던 유자명의 일대기를 돌아 본다.       ▲ 젊은 시절의 유자명   2 일제강점기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빠드릴수 없는 인물인 유자명은 충청북도 충주에서3남매 중 막내로 태여났다. 호는 우근(友槿)이고 원명은 유흥식(柳兴湜), 유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충주 간이농업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맞아 학생시위를 계획한데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유자명은 임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천진 지역에서 신채호, 이회영등과 교유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특히 아나키즘 이론에 밝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한 유자명 (앞줄 맨 오른쪽)   1920년대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 유자명은 의열단의 요원으로 극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이 시기 조선 식산은행(殖产銀行)과 동양척식회사(东洋拓植会社) 폭탄투척 등 의열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의열단 참모 유자명”으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일본인과 친일파의 제거 작업에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인민을 탄압,학살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론리로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하였다. 그 후 선생이 1981년에 집필 한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은 중국 내 조선인 아나키즘 운동 및 의열단 활동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2월, 유자명은 난징에서 김규식 및 중국인 무광록,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하여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했으며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항일독립의 연합전선을 펴나가는 한편, 조선인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민족혁명의 대열에 서도록 주선했다. 유자명은 이론에 밝았으며 탁월한 어학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항일운동계의 일급 참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대에는 상하이의 농업학교 립달학원(立达学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南华)한인청년련맹”을 결성하였다.   난징이 일제에게 함락되자 연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무한에서 유자명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 이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선생은 자신이 쓴 조선민족전선련맹 창립선언문에서 “한•중련합을 통한 항일투쟁역량의 집중,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련대”를 강조하였다. 또 난징, 상하이, 천주(泉州) 등지를 무대로 중국의 “이상촌(理想村) 건설활동”에 몰두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1941년 중국 푸젠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유자명을 주목하게 되었고 여러곳에서 초청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도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유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원봉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임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농립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이후 복안(福安)현 계병(溪柄) 농장에서 일개 농부같은 생활을 하면서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늘 성실하였으며, 인도주의 정신으로 중국을 사랑하였고, 선생 또한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부터 후난성 창사에서 후난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유자명은 농학교수로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농학사, 원림 화훼, 채소재배, 벼의 기원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자명은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의 특수벼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으며 한나라 묘지인 마왕퇴에서 출토된 씨앗과 종자 분석에 참여하여 볍씨의 품종과 형태 등을 판별해 냈다. 유자명은 원예면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았다.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던 후난에서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또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1995년 중국농업출판사에서는 전기물 “훈장을 단 원예학자-유자명전”을 출간했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 농예사로 지낸 만년의 유자명   1985년 4월 17일 후난성 창사에서 타계했다. 1978년 북한, 1991년 한국 정부에서 훈장을 받았고 2002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2003년부터 농학자, 교육자로서의 유자명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중국과 그의 고향 한국 충주에서 수차 열렸으며2004년에는 그의 평전이 발간되기도 했다. 2009년 후난농업대학에서는 그의 거소를 문물 명록에 신청하여 복구하고 실내에 유자명 사적 진열관을 꾸며 놓았으며 교정내에 그이의 동상을 세웠다.   ▲ 호남농업대학 교정에 세워진 유자명의 동상   3 “다음번엔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밀정”에서 황옥을 모티브로 했던 주인공 이정출이 읊은 대사다. 친일이냐? 항일이냐? 그런 경계 위에서 선택의 줄타기를 해야 했던 여러 부류 인간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에 반하여 유자명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흔들림없이 항쟁해오면서 민족사의 갈피에 그 족적을 도렷이 남겼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7    로신의 어깨 댓글:  조회:2309  추천:17  2016-09-13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7]   로신의 어깨       올해는 로신의 80주기가 되는 해이다. 1918년 절강성 소흥의 주씨가문에서 태여나 첫 작품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달았던 필명 로신은 지금껏 여뢰관이(如雷贯耳)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그의 작품은 시대를 뛰여넘었고 그는 이미 인류의 고전이 되였다. 그 없이 중국의 현대혁명사와 문학사, 학술사를 론할수 없다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로신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 바쳐 살았던 인물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여나 전통교육을 받고 일본 류학길에 올랐던 로신은 “우매하고 연약한” 중국인의 렬근을 진맥하기 위해 의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문학의 힘으로 절망에 빠진 중국의 혼과 희망을 일깨우고자 했던 로신은 문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자신을 바쳤고 드디여 “근대문학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한몸에 받으며 20세기 중국 문단의 정상에 우뚝 섰다.  신과 구의 갈등, 동과 서의 문명충돌의 격랑속에서 사상문화운동의 홰불을 선두에서 추켜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근대이행기의 려명전의 암흑을 헤쳐나갔다. 그의 소설과 잡문은 낡은것을 뒤엎고자한 신민주주의 청년들에게 전률과 영향을 주었고 그 전파가 사후에도 지속되였다.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선생이 극찬했던 그의 “촌철살인”의 강인한 명문들은 사회에 대한 엄격한 비판, 인간에 대한 예리한 성찰로 읽는 이의 정신을 확 흔들어 깨운다. 로신은 “현실과 동떨어진 문학”, “예술만을 위한 예술”을 경멸했다. 문학이 무엇을 할수있는가를 항상 고민했고 그 흥건한 사상에 붓자루를 담갔다. 그리하여 로신의 문학과 사상에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모난 사고가 뚜렷이 음각되여 있다. 아큐, 공을기, 상림아주머니 등 중국문학 나아가 세계문학사에서도 개성 도렷한 인물들이 그의 필끝에서 줄인형처럼 발랄한 춤을 추었다.    최근 변혁기의 소용돌이에 당착한 우리 공동체와 그 민족작가들이 겪고있는 고민에 대입해도 유의미하게 읽힐수 있는 로신의 글들은 그래서 조화석습(朝花夕拾), 즉 “아침꽃을 저녁에 줏는” 여유로움으로 오늘 날에도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신록이 짙어가는 지난  6월 11일, 로신문학원 문학창작 강습반이 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처음으로 개강했다.  1950년에 대문호의 이름을 떠이고 출범된 로신문학원은 젊은 문인들을 양성하는 중국작가협회 산하의 전문양성기구이다. 로신문학원은 10여년전부터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무려 29차례의 강습반을 열고 1000여명의 중청년작가, 평론가, 편집들에게 충전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변강의 오지인 연변에까지 찾아든것이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일어서라!” 이 말은 바로 로신이 청년들을 향해 던졌던 대표적인 문장의 인용구이다.  문학원의 문학도들이 “청출어람”의 기상으로 대문호의 선험(先验)을 자양분으로 부여받고 깨금발하여 침체기의 우리 문학에 한줄기 짙푸른 생력소를 주입하기를 기대해 본다.      “연변일보” 2016년 6월 23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6    즐거운 축구 패러디 댓글:  조회:2557  추천:13  2016-09-13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8]   즐거운 축구 패러디         붉은 망토를 걸친 하태균, 마천루우에서 거미줄을 타는 지문일, 별이 새겨진 방패막이를 든 최민… 얼핏 보면 할리우드 환상영화의 한 장면들, 하지만 그 화려하고 기이한 복색을 걸친 이들은 전부다 익숙한 우리의 축구선수들이다.    영화 “슈퍼맨”, “스파이더맨”, “캡틴 아메리카”를 패러디한 재치만점 축구만화가 연변의 어느한 사이트에 등장했다. 그림마다 선수들의 포지선을 정확하게 짚어 내였고 그 결연한 의지를 머금은 얼굴들은 보는이들로 하여금 존대와 애대를 자아내게 한다.      패러디는 특정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해학적으로 변형하는것을 말한다.  패러디(Parody)의 어원은 희랍어인데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장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단어는 두 텍스트들 사이의 “대조” 또는 “상반”을 뜻하는것.    패러디는 한마디로 흉내내기의 일종이다. 어떤 유명 작가나 화가, 작곡가의 작품의 문체나 률격을 모방하여 그것을 풍자적으로 또는 조롱삼아 꾸민 익살스러운 글로 희화화하는 비틀기의 한 수법으로 많이 씌인다. 널리 알려진 작품의 자구(字句)를 변경시키거나 과장하며 익숙한 캐릭터를 비틀어 익살 또는 풍자의 효과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 시와 소설, 음악과 미술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외국에는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영화등 많은 분야에서 유명한 패러디 작품들이 나왔다.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비교적 유명한 페러디들로는 그림에서는 저 유명한 “몬나리자”의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여러 동물들에 대체되고, 음악에서는 “에스빠냐 투우곡”이 쫓고 쫓기는 활극에서 자주 삽입되는 경우들이다.    우리 민족의 선인들도 오래전에 이미 패러디를 활용해 왔다. 민요 “아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노래 가운데 가장 많이 패러디 된 작품으로 봐야할것이다. “강원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이처럼 패러디는 음악부문에서는 한 음률에 다른 가사를 붙이는 경우, 풍자나 익살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경의를 표명하기 위한것으로 씌이기도 한다.          패러디가 다양하게 이루어지면 문학과 예술의 저변도 그만큼 넓어질수 있다. 보다싶이 우리 선수들의 패러디 그림은 체육에까지 그 재미와 의미가 확장된 용례(用例)이다.   치솟는 여름의 열기와 더불어 연변팀이 몰고 온 축구의 열풍으로 온 조선족 사회가 도가니로 달아오르고 있다. 모두가 연변팀의 경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다양한 이벤트로 축제를 즐기고있다. 그 축제의 주인공들인 지문일, 하태균, 최민등 그라운드를 날아예는 선수들은 우리에게서 판타지 영화가 만들어낸 영웅에 못지않은 최고의 슈퍼맨들이다.      오늘날 우리 공동체는 축구로 인해 모두가 하나가 되였다. 이미 축구는 조선족의 지역 정체성의 하나로 작용하고있는것이다. 이 와중에 문화의 힘을 무시할수 없다. 작게는 패러디로부터 크게는 축구장을 뒤흔드는 응원의 행위까지 바로 문화가 빚어내고 보여주는 힘이다. 모두가 합심해 더욱 큰 에너지를 창출하고 진정으로 빛나는 축구문화를 만들어갔으면하는 바램이다.     기발하게 희화화(戱畵化)된 축구 패러디물이 선수 본인이나 그림을 보는 팬이나 다 같이 즐겁게 한다.      "연변일보" 2016년 7월1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5    꿈과 사다리 댓글:  조회:2345  추천:10  2016-06-29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6] 꿈과 사다리 한발 한발 차근차근 오르렴 나는 괜찮으니 마음 놓고 오르렴 키다리가 되여 높은 벽에 이마라도 잇대여 사다리가 되여주고 싶은 아버지 사다리는/ 우리들 아버지같다… 한 아동작가의 “사다리”라는 동시의 절록이다.     일전 어린이 독서대잔치에서 무수한 “사다리”의 투영을 볼수 있었다. 연변독서절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연변독서협회, 연변조선문독서사협회,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룡정윤동주연구회가 주관한 “엄마랑 함께 하는 독후감쓰기 잔치”와 “중국조선족인물전기 민족문화지식경연 시상식”이 더불어 열린 가운데 200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상패와 더불어 상물로 책들을 아름벌게 받아 안았다. 색동옷 민족복차림으로 책을 껴안은 아이들의 모습은 총기와 해맑음으로 빛났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손을 이끌고 왔고 함께 시상대에도 오른 학부모들은 아이들 수발에 땀동이가 된 얼굴들이 감개로 흠뻑 물젖어 있었다. 일상에서 책으로 어우러진 가족의 모습을 보일것이라고 모두들 소회를 밝혔다. 사실 애초 어른과 아이들의 독서물은 그 경계가 모호했었다. 아동문학관련 리론서를 읽다가 접한 충격적인 진실, 17세기중엽까지는 특별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책을 빌어 읽으며 만족할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요 역시 어른들의 짧은 노래정도, 대개 술집에서의 해학, 풍자, 멜로 등 성인용 이야기로 가득찬 노래였다. 아이들이 접한 동화도 어른들의 생활에 얇은 베일을 씌운것이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아름답게 읽고있는 “백설공주”나, “빨간 모자”,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원본은 지금보다 아주 다르다. 랭혹한 현실이 그대로 씌여져 무섭고 잔혹하며 지어 외설적이기까지 하다. 그 와중에 희랍인의 손에서 “이소프의 이야기”가 나와 만만다행이였다. 이 획기적이라 할만한 책은 민화를 모아 그림이 주가 되게 하고 그림에 짤막한 설명문을 붙인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아이들에게 걸맞는 책이 드디여 탄생된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악몽을 유발하는 어른들의 무서운 책이 아니라 미몽을 선사하는 자신들의 감미로운 책이 있게 되였다.   독서교육의 중요성은 어제, 오늘 회자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소질이나 특기, 장래희망등을 고려해 좋은 책을 선정, 권장해 주는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프랑스의 지성적인 비평가 레미 구르몽은 “책은 어느 사람에게는 울타리가 되고 어느 사람에게는 사다리가 된다.”고 했다. 지속적인 독서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지식습득과 꿈을 향해 오르는 사다리를 놓아주는 작업은 그래서 십분 중요하다.    독서의 사다리,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시나브로 꿈을 향해 뻗어 있다.   “연변일보” 2016년 6월 1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4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댓글:  조회:2433  추천:10  2016-06-18
. 제3회 "두만강"문학상 축사 .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김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존경하는 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님, 길림신문사 홍길남사장님,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 그리고 귀빈 여러분, 매스컴과 문학계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세상이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 6월의 복판에서, 저 역시 “두만강”문학상 수상자의 한 사람으로써 세번째로 이어지는 두만강문학상 시상식에 축사를 드리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하여 평소 책임감을 떠인 창작혼과 부단한 정진으로 오늘 영예의 상을 수상하신 수상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두만강 문학상”은 길지 않은 년륜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계의 영향력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 동안의 수상작 또한 우리시대의 삶과 정신을 결집해 낸 문학계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문학상의 짜임새나 수준이나 기획력이 문단의 그 어떤 상에 비견해도 못지않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제 권위와 품격을 자랑하는 “두만강 문학상”의 성장과 미래가 눈앞에 훤히 보인다고 해도 좋을것입니다. 이 소중한 문학상이 우리문학의 감성에 맞는 문학적 토양을 잘 걸구어 가면서 중국조선족 문학의 한 진경(眞景)을 펼쳐보이기를 기대해봅니다. 조선족문단에서 해외인사들의 헌금으로 세워진 이러저러한 문학상이 적지않지만 순 우리 기업인의 쾌척으로 이루어지고 이렇게 이어져가고있는 문학상은 흔치않은줄로 알고 있습니다. 상의 위의(威儀)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열정과 로고를 바치신 리청산 리사장님과 “길림신문”이 이룬 결실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지금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 몸부림하고있으며 또한 서글프게도 인문학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인이 몸 담근 성소(聖所)에는 그 사회적인 책임감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렬악한 상황속에서도 굳건하게 문학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문인들이야말로 민족발전의 지혜를 창출하고 그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우리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선봉장들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상하신 여러분의 작품들은 참으로 값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조광명 시인님이 보여준 탁월한 의경의 경지와 오경희 수필가님이 보여준 민족정서의 고운 결, 우상렬 교수님이 보여준 정조준의 호쾌발랄한 평문을 수상작으로 뽑으면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서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이렇듯 시대의 아픔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붙잡도록 해주는 빼여난 작품을 창작하신 수상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문학이 바로 부침과 리산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의 아픔과 고민을 도닥여 주고 지역과 세대를 하나로 이어주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것입니다.   존경하는 문인 여러분, 이러한 창조적 정신의 발현으로 우리 문학의 진흥에 적극 동참하여 앞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장하에 큰 흐름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이황의 시조 한수로 오늘의 심경을 비추어 읊고자 합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류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   감사합니다.   2016년 6월 1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3    소울메이트 댓글:  조회:2255  추천:14  2016-06-18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5]   소울메이트     소울메이트는 령혼 (soul)과 동료 (mate)의 합성어로 서로 뜻이 잘맞는 사이를 지칭한다. 문학,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흔히 도타운 솔메이트의 존재가 있다.     그 일례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괴테와 실러를 들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한 자극과 격려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갔다.    두 예술가의 우정은 베토벤과도 이어졌다. 두 문호를 존경했고, 이들의 작품에 큰 령감을 받은 베토벤은 두 사람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소울메이트들끼리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예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을 유발시킨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또 한쌍의 유명한 소울메이트이다.    동생 테오는 괴퍅한 성격을 가진 형의 재능을 알았고 힘들게 번 돈으로 형을 위해 생계비를 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흐가 자살한 뒤, 애달픈 나머지 테오는 여섯달만에 형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형제의 묘는 함께 나란히 놓여 있다.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에게도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바로 송몽규이다. 둘이는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 석달을 차이 두고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명동학교도,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함께 다녔다. 송몽규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자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여 자신의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둘은 또 경성의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했고 학교에서 함께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당시 “문우”에 실었던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그의 룡정자택 장례식에서 랑송되였다.   두 사람은 또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제경찰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가족에서는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송몽규의 시신도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고 “청년문사(文士) 송몽규” 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 윤동주의 묘쇼곁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둘이는 묻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오늘날 윤동주는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되였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오래전에 등단한 문사이자, 철저한 반일지사인 송몽규에 대해 아는이는 적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였으니깐.   “연변일보” 2015년 5월 20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2    구순(九旬)의 박물관 댓글:  조회:2392  추천:11  2016-05-29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4]   구순(九旬)의 박물관         지난 년말과 년초, 룡정에서는 구순(九旬)의 로인장 두분이 련이어 “가학서거 (架鹤西去)”하셨다.   한분은 “룡정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최근갑옹, 또 다른 한분은 민족시인 심련수의 동생 심호수옹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서 리직휴양한 후 달갑게 민족의 뿌리를 찾는 “심마니”가 되여 온 최근갑옹은 유서깊은 룡정에 3.13반일의사릉, 서전서숙옛터, 명동학교 등 민족의 발자취를 기념하는 9개의 유적비를 세우고 성역화하는데 만추를 불태워왔다. 모두들 즐겨 부른 그의 호는 “룡정력사의 산증인”, “비석아바이”였다.       최근갑옹과 필자     “윤동주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추앙받고있는 심련수시인의 동생 심호수는 룡정의 시교에서 형님의 소중한 육필 원고를 항아리속에 담아 무려 55년간이나 보존해왔다.    루루 파란의 세월, 목숨으로 보존해온 이 작품들은 “일제암흑기의 한민족문학사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것”으로 정평되고있으며 그로서 심련수라는 연변이 낳은 또 하나의 걸출한 민족시인의 존재를 존립시켰다.   지난해 심연수의 동생 심호수선생(가운데)의 자택을 찾은 필자 (왼쪽 윤동주의 조카 오인경 여사)     사실 현대인간들은 자연의 보물이든 인공의 유물이든 소중한것을 보존하는데 태만하기가 일쑤이다. 그리하여 금쪽같은 문화재들은 세월의 류수에 파이고 깎이고 바래진다. 게다가 인간의 망각이란 무책임때문에 감감 잊혀지기도 한다. 이런 보물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은 뻔하지만 이를 실천할 의지나 재원이 없는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문화재의 가치는 끊임없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고 향유될때 제 의미를 갖는다. 세월의 더께에 쌓여 처박힌 서류더미속 력사나 문화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일상속에 스며들어 존재할때 우리 문화는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민족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온 몸을 던진 선각자들의 치렬한 몸짓과 웅숭깊은 소리, 그 헌신의 성과는 기록되고 보존되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선인들이 남긴 우렷한 력사와 비범한 지식과 장인의 기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우리는 충분한 노력을 하고 있는걸가? 이들을 승계해 나가는데 얼마만큼 신경을 쓰고 있는걸가?      이제 구순의 지킴이들을 우리는 홀연히 보냈다. “로인 한분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불탄것과 같다”던 외국속담이 흥감스럽지 않은 절실함으로 이 시각 떠오른다.     구순의 지킴이들은 평생을 걸고 우리의 보물들을 보존해왔다. 이제 보전은 우리들의 몫이다. 그네들의 타계가 한 력사와 문화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도록 그들의 통찰을 기록하고 그 노력의 결실을 보존해야 한다.     룡정의 력사와 문화를 위해 로구를 투신해온 구순의 지킴이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그들의 타계를 애닲아 한다.   "연변일보" 2016-5-6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1    리얼리즘과 문학비 댓글:  조회:2038  추천:17  2016-05-04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2]   리얼리즘과 문학비     2015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렉시예비치     그녀의 “작품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기록한 기념비적 문학”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지난해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를 선정하면서 밝힌 리유이다. 열네번째로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한 녀성작가의 문학과 작품을 읽으면서 다른 한 녀성작가를 떠올렸다. 그리고 고향 룡정의 비암산 자락에 호젓이 서있는 하얀 기념비를 떠올렸다. 바로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였다.   두 사람의 작품은 닮은데가 있다.  알렉시예비치는 기자출신의 저널리즘 작가이다. 2차대전 참전 녀성들, 체르노빌 핵발전소사고 피해자들, 붕괴된 쏘련의 사회상… 커다란 력사적 사건속에서 심신의 상처를 입고 소외된자들의 고통의 목소리를 부각시켰다. 강경애 역시 저널리즘에 종사한적 있다. 룡정에서 조선일보 간도지국장까지 지낸것이다. 강경애는 핍진한 리얼리즘적 기록으로 어두웠던 일제강점기에 억압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들의 고난의 삶을 그려내였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로서는 흔치 않게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이 녀류작가들은 모두가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고난속 인간이 당착한 냄새와 색갈과 소소한 일상을 보고 듣고 말한다     간도체험을 수작으로 펴낸 강경애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지만 이들의 작품이 요즘의 우리 문학에 시사하는바는 크다. 사회참여에 있어서 문학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있다. 따라서 당위의 문학으로 위세를 떨쳐온 리얼리즘도 이제는 낡투로 색바래졌다고 어떤이들은 말한다. 시장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 문학은 자칫 그렇지 않아도 적은 독자까지 잃을수 있다. 상업주의 문학체제에 순응한다면 우리 문학의 이념은 결국 감각적인것이나 실험적인 론리에만 부박하게 꺼둘리고말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력사와 사회와 관련된 공동체 인간들의 삶을 다루는 그런 문학을 격려하고 가꾸어야 하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선행되여야 한다고 본다. 여러 쟝르, 여러 문체의 작품을 통해 시대의 진실을 전파하는 일을 소홀히 할수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에게는 철이 지난 명제로 비쳐질수도 있겠지만 과감하게 시장의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오늘날 공동체의 깊숙한 아픔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성찰할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문학이 아닐가! 어제날의 강경애가 그러했고 오늘날의 알렉시예비치도 그러했다. 하기에 그들은 모두 주어진 소명을 하얗게 불태우며 작품의 행간에 민족과 시대를 위한 오롯한 기념비를 세울수 있었다.     며칠전 기념행사를 기획하여 소설가들과 함께 강경애 문학비에 헌화를 하고 돌아왔다. 간밤에 내린 작달비에 말쑥하게 씻겨진 햐얀 기념비, 산행에서 몇번이고 무심히 지나쳤던 문학비가 다시 심중에 커다랗게 안겨온다.    “연변일보" 2016-4-21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50    “백세” 김학철 댓글:  조회:2558  추천:30  2016-04-23
[소설가 김혁의 문화시론- 1]     "백세" 김학철       올해는 조선족문단의 거목 김학철 탄생 100돐이 되는 해이다. 파란많은 경력과 뜨겁고 강렬한 문체로 작가의 량심을 화인처럼 새겨낸 그이의 문학은 여전히 우뚝하다. 그이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류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김학철과 더불어 100년이라는 상수(上壽)로 기억되는 문화명인들이 적지 않다. 올해는 또 사재를 털어 화림신인문학상을 제정하여 문학후대들을 길러낸 항일녀걸 리화림이 탄생한 10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연변에 오래동안 체류하면서 그 체험을 치렬하게 엮어낸 한민족 사실주의 녀성작가 강경애는 탄생 11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명년이면 곧 온 겨레가 애대하는 윤동주 시인도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영원한 청춘” 윤동주가 100세 로인으로 우리곁에 다가오는것이다.    해외에는 사후 백주년을 맞는 문호들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가, 미국에서는  “야성의 부름”의 작가인 소설가 잭 런던이 올해로 사후 100주기를 맞는다.   탄생 혹은 타계가 백주년으로 그 의미가 다시 돋을새김 된다. 인고와 질곡의 긴 시간을 척각으로 헤쳐온 김학철처럼 치렬한 시대를 헤쳐 나가면서 우리 문학사의 주역으로 우뚝 선 이들은 응분의 역할로 그 선각자적 위상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민족의 찬란한 성좌요,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다. 그들이 지내온 시간과 일구어낸 작품의 업적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자리에 많은 후배, 제자들이 있고 오늘의 조선족 문단이 있다. 백년이란 시간은 이들이 겪어야 했던 문학사적 세월이 어떤것이였던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본다.   그닥 길지않은 문단사에서 처음 백주년을 맞는 문인들이 등장한 우리 조선족문단은 서둘러 거목들을 기릴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이 우리의 문학 나아가 민족사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피는 일은 사뭇 중요하다.  후대가 선대의 루루세월 경유해 온 문학생애와 공적을 알아가는 이러한 기념과 조명은 변혁기 고전하고있는 우리문단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수 있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는 계시로도 될수 있을것이다.   올해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쉐익스피어는 무려 서거 400주년을 맞는다. 100주년, 200주년을 넘어 설 우리의 문학을 꿈꾸어 본다.       “연변일보” 2016년 4월 14일    [출처] “백세” 김학철|작성자 김 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49    강경애: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댓글:  조회:3143  추천:18  2016-04-18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   룡두레 우물가에 족적을 남긴 녀류작가 강경애 리얼리즘문학 최고의 녀성작가 강경애   소학시절, 내가 다니던 신안학교(지금의 북안소학, 그 전신이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학교이다)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그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가 호젓이 서있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자 당시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강경애 특집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姜敬愛)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얼마 안되는 녀성작가 가운데서 여느 작가들과는 흔치않게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억업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을 대변한 작품과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가들의 고난의 삶을그려내여 근대문학의 대표적 녀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보지 못했던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학계는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이다.”고 그의 문학적 공적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는 또 한동안 룡정에 체류해 활동하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글로 펴내기도 했다.   우표에 오른 강경애    하지만 지난 2005년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떠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장춘식, 리광인등 평론가들과 함께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은 진상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결국 강경애는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화인물 선정"에서 비여 있었고 보류되였던 강경애는 마침내 루명을 씻고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에 오른것이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성일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황해도에서 태여나다   강경애는1906년 4월, 서해 바다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명승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이곳은 유명 녀류시인 로천명(盧天命)이 태여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나던 해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세는 기울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강경애가 다섯살이 되였을때 병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후구지책으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재가했다.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데다 장애인이라 어머니는 거의 몸종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워낙 총명하여 여덟살나던 무렵부터 한글을 깨친   강경애는 “춘향전”, “삼국지”, “옥루몽”, “숙향전” 등 구소설을 거의다 읽고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영특하고 총명함이 파다하게 알려져 이에 동네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데려다 사탕을 사먹이고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도토리 소설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한다.   의붓형제들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열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동안 월사금, 학용품값 등을 마련할수 없어 옆 친구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라고 했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에 입학했다. 숭의녀학교에 입학한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된 친목회 “독서조” 등에서 활동하던 강경애는 추석성묘를 미신이라고 규제하는 미국인 교장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연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역시 황해도 출신 일본 류학생인 양주동이였다. 서양의 자유로운 사상에 물들어 련애 결혼, 리혼의 자유, 특히 련애지상주의를 크게 외치고있던 양주동에게 빠져든 강경애는 엉뚱하게도 어두운 저녁에 비를 철철 맞으며 찾아와서는 양주동에게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문학적 소질은 충분히 있으니 좀 길러주세요.”라고 말했다. 당돌함과 랑만적 성격을 가진 강경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동거라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녀자의 남편이였고 이를 안 가족과 이웃의 비난으로 그녀는 무산과 간도 등지를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강경애는 원체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강가마로 아명을 불리웠는데 이를 필명으로 적용한것이였다.     강경애의 문학스승이자 련인이었던 양주동 박사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함께 서울로 가서 동덕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했지만 1924년 가을,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경애의 학비를 대주던 형부가 련이은 중퇴와 련애사건에 실망하여 질책하며 뺨을 때린다고 한것이 잘못 되여 이후 강경애는 늘 귀병을 앓고 청력도 나빠졌다고 한다.   1924년 "책 한권", 1925년 "가을", 1926년 "다림불"과 같은 습작수준의 시를 발표한뒤 3년간의 공백을 거친후,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렴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2년 뒤 같은 신문에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써서 옛 애인을 비판했다. 애증이였든 분노였든 결과적으로 양주동은 그녀의 필을 움직이게 만든 시작점이 된 남자였다.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다   고향에서 작가수업에 빠져들던 강경애는 수원 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하일은 조혼한 부인은 멀리 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연으로 와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다 강경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1년 6월, 둘은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내다가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여왔다.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간도풍경” “신녀성” 1932년 1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 “두만강례찬”. ”신동아” 1934년 7월호)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것이다.”(“고향의 창공”.1935년 5월 “신가정”)   강경애의 상기 작품들에서 살펴 보면 강경애가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것은 1931년 봄이였다.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은1932년 9월 "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에서도 나온다. 룡정에서 남편 장하일은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 취직했다. 동흥중학은1940년경의 통계만 봐도 졸업생이 애초의 9명으로부터 211명이 나 됐다. 이런 급증한 학생수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간도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유난한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고있다.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이 근무했던 동흥중학, 바로 지금의 룡중제3중학이다.    동흥중학 옛터에서의 필자.  강경애는 이주 초기, 이 학교의 사택에서 살았다고한다.   “기존의 한국문학사는 일본의 폭압이 점점 가혹해졌던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으로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지역엔 학생수가 급증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한국 중앙대 교수) 동흥중학에서 교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고 조언해 주는 독자였으며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장하일은 항일무장대오와도 련계가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였던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였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장하일은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총편집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였다. 반일정신이 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였던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룡정에 이주한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하소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당시 룡정에서 그녀의 이웃에 살았었다. 안수길의 수기에 따르면 강경애는 “물동이 몇개씩 깨드리면서까지 우물에 물 길러 다니고 양재물에 손끝이 빨갛게 벗겨지면서까지 빨래를 하여”, “수수한 품이 어느 부인네들과 같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등 이웃에서도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2년 룡정에서 강경애를 만났던이는 다음과 같이 강경애에 대한 인상을 적었다. “아주 되는대로 차리고있는 옷모양, 물동이 이고, 밥 짓고, 나무 사들이고 하는 것이 보석반지, 피아노, 문화주택, 털 침대를 동경하는 현대 여학생들과 달라서 더욱 유쾌한 기분을 주었다.” (김경재 “최근의 북만정세- 동란의 간도에서” “삼천리” 1932.7.1)   강경애의 문단 진출은 잡지 “혜성”의 1931년 8월호에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것이 계기가 되였다. “어머니와 딸”은 봉건적 억압아래 비참하게 살아간 어머니에 비해 딸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서 봉건적 인습과 성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에서 찾고자 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강경애는 이미 시대정신을 주제로 삼았고 그 표현과 기법도 상당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켜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웠고 "치안숙청"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아비규환의 수라장에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이때 그 심정을 토로한것이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있거라"에 세세히 적혀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왔다. 그동안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체험했으며 룡정 일대에서 항일대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문학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폭압과 그에 대항해 나선 간도의 시대상을 증언하는것을 자기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근대문학사상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작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간도 체험에서 나온것이다. 간도 방랑을 통해 얻은 이러한 입장과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워가면 그는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검열을 피해 가며 세상 독자에게 알리는것을 작가로서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광명중학교 교원 리주복등의 발기로 민간문인단체인 “북향회”가 설립되였다. “북향회”는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 동포대중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는 취지로 설립되였다. “북향회”가 발간한 간행물 “북향”은 강렬한 민족사명감으로 민족문학의 수호와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 간도지역의 작가와 문학을 애호하는 청년문인들의 중요한 진지로 부상했다. 강경애는 박계주, 안수길, 윤영춘 등 당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북향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근대 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와 장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빈궁의 극한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1936)으로 꼽는다. 특히 “인간문제”는 식민지 친일지주와 농민, 식민지 자본가와 로동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작품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풍경,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그것을 빼앗길 때의 쓰라린 마음, 인천 부두 로동자의 세계, 식민지 대자본이 들어와 설립한 대규모 방적 공장의 내부 모습과 운영 방식, 그 당시 로동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정확한 세부로써 묘사하는데 큰 성과를 내였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통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로동자의 힘든 생활과 그 변혁의 노력을 장편소설의 형식에 담아낸 식민지시대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소중한 성과로서 리기영의 “고향”과 비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련재당시 소설 “소금”의 삽화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소금(1934), 역시 그의 대표작품이다. “소금”은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과 그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경애는 일제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한반도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그의 허다한 작품들은 검열 때문에 시커멓게 붓질을 당하는 수난을 겪곤 했다. 집안문제, 연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등이다.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조선의 동명영화 “소금”의 포스터   간도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주부로 자처하면서도 노력하는 작가인 강경애는 작품을 쓸 때 원고지에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는 찢고 하여 엄청난 파지를 내면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소재를 구하여 직접 답사를 해가면서 글을  썼다고한다. 룡정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간도지역 문학단체인 "북향"회의 고문을 담당하는 한편 한때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다년간 강경애 연구에서 개척적인 실적을 쌓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리상경 론문 “녀성의 대변자 강경애”에서 강경애의 룡정체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어졌다. 1931년 간도로 가서 1939년까지 8년 정도의 길지않는 기간이였지만 첫 작품을 제외한 전 작품이 모두 이 기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작품의 특성과 한계 모두가 간도라는 땅과 밀접하게 련결되여있다고 볼수있다.   강경애보다 앞서서는 최서해나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로서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당대의 다른 녀성 작가들 대부분이 조선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며 창작한것과 달리 서울을 멀리한 문단의 변두리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인 간도에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 작품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 그러한 피부로 겪은 체험때문에 당대 어느 작가보다도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수 있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고향에서 영면하다   1939년 경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1940년 짤막한 수필 2편을 끝으로 붓을 놓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44년 4월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강경애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한민족 문단에서 뒤늦게 그리고 아직 도 불충분하게 인정받고있는 녀성 소설가이다. 가난한 가문의 녀성이라는 탓으로,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던 탓으로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지닌 저항적 성격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받으며 제대로 알려지지못한 탓에, 그녀가 30년대의 대부분을 간도지방에서 살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가 있은 탓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발굴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장하일이였다. 강경애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 장하일은 해방전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안해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상재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을 구현했다.   그후로 강경애는 남북문단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녀류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1961년,  조선에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되였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 (신상옥감독, 최은희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작품을 실었다 한국문단에서는 70년대 들어서 그녀의 문학적 성과가 평가되기 시작해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지만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련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것은 1992년이였다. 한국에서 리화녀대 리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것은 1974년, 서울대 리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론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리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리상경엮음)이 해빛을 보았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 지워진 강경애의 대표 단편 “소금”결말부의 260자가 2006년 복원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따라서 2007년엔 남북 첫 공동 론문집인 “강경애, 시대와 문학”이 출간되기도 했다. 연변에서도 룡정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이 일찍 출판되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그의 대표작 “인간문제”를 출판했고 또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 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재차 출판했다.   1999년 8월 8일, 뒤미처 룡정의 비암산에 그녀의 문학비를 세워 룡정 체험을 수작(秀作)으로 남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그 날, 연변의 문인, 교수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함께 비암산 소나무숲에서 강경애 문학비 제막식을 가졌고 뒤이어 연변대학에서 강경애문학연구학술발표회를 가졌다. 학술발표회의에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채미화교수의 "강경애 소설창작의 미학적특징"이라는 표제의 론문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의 리상경씨의 론문 "강경애와 간도체험"이 발표되였다.…     룡정의 비암산 자락에 건립된 강경애 문학비   비암산은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곳 이다. 머리에 두개의 가마를 가진 강경애의 어릴적 별명이 “쌍가매”이다. “쌍가마"라는 그 이역의 녀류작가는 “가마산”이라는 산에 그 문학혼을 묻었고 “가마산”아래의 뭇사람들이 기리고 있다. 그녀의 빼여난 문학업적때문이다. 그녀만큼 그녀처럼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서 공동으로 이의가 없이 높이 평가하는 문인도 드물다. 높이 2.6m의 강경애문학비는 오늘도 비암산 중턱에 외홀로 서있다. 관광기이면 일송정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발을 잇지만 관광뻐스들은 바로 일송정을 향하는 길녘 산중턱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문학비를 지나치기가 일쑤다.   늘 소복차림이였다는 강경애처럼 하얗게 선 문학비에는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 … "라고 새겨져 있다.   "장백산" 2014년 2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    ☞ 웹진.중국조선족문학: http://cafe.daum.net/wpd99 ☜ 아  
348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 댓글:  조회:1634  추천:17  2016-04-11
. 평론 .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 - 김금희의 수필 “터널”   김 혁     김금희 소설가    “여느 터널들보다 더 좁고 깊고 어두운 터널”, “들쑥날쑥 터널안벽을 쌓아올린 오래된 돌들, 두껍게 얹혀있는 먼지와 푸른 이끼…” 작가가 보여준 터널의 어둠과 습도가 너무 생동하여 수필을 읽는동안 내 자신이 지나 온 터널이 바로 김금희 작가가 지나온 똑같은 그 터널이 아닌가 착각해 버렸다.    작가는 먼 려행지에서 돌아온 피곤한 행자처럼 누구나 한두번 겪어보았을 인생의 블랙홀같은 터널로 우리를 인도한다. 서사 중심,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작가는 우선 화자를 둘러싼 터널속 경관이나 미물을 보여주며 고단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다. “돌”, “이끼”는 물론 “비대한 몸집의 쥐”등이 그것이다. 어둠에 적응되면 모든 사물이 외려 명징하게 보인다. 어두운 터널속에서 작가는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몰두”하고, 그 내면의 응시를 통해 “속모습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 괜찮다고, 정직한 편이라고 자위했던 내 외양의 심면에 그렇게 많은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생긴 부패와 온갖 쓰레기와 지어 추악한 욕망들이 곳곳에 도사려 있는것”을 보아내게 된다. 터널밖에서의 타자에 대한 인식이 터널안에서의 자아안에 존재하는 내적 타자의 발견으로 어둠속에서 이어진다. 핍진한 체험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작가의 고뇌가 서사의 호흡을 거칠게 하고 독자들의 심중을 터널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객체를 대상으로 던져두지 않고 주체에게 끌어들여 자아화하는 서사적인 양식을 작가는 미구에 보여준다.   간명한 내용이라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을뿐 사실상 소설의 양식을 그대로 가져온 느낌을 준다. 다름아닌 소설가의 수필이기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소설쟝르에서 볼수있는 긴장과 이완이 고루 균형을 이룬 탄탄한 수필이 태여난것이다. 소설쓰기에 주력해왔고 근년들어 볼만한 성적을 내고있는 작가는 어느 누구보다  묘사력에  강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수필작품에서도 형상적인 리얼리티를 보게 된다.    “적막한 터널안에서 들리는것이란 자신의 외로운 발자국 소리뿐. 내 발자국 소리가 저랬던가싶을 정도로 그것은 터널안의 특이한 구조에 힘입어 전에 없이 크고 뚜렷하게 들린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느라면 청진기를 페 세포에 댄듯 헉헉후욱ㅡ 헉헉후욱ㅡ 들숨과 날숨이 정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확인할수 있다.”   이렇게 대체로 회색 이미지로 끌고 가던 수필은 다음 단락에 이르러 감정의 기복을 일으킨다. 무겁게 흘러온 긴장을 깨뜨리고 작품 분위기를 터널을 나선자와도 같은 밝은 분위기로 인도한다. 곧 화자중심에서 다시 객관의 시선으로 넘어가서 화자가 전달하고 싶은 심중을 서술하는것이다.    “내 속의 집에 또다시 다른 류형의 쓰레기가 몰래 쌓여가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나이에 아직도 비좁고 낡은 집에서 근근득식 거짓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알기 위해 자성(自省)의 터널을 다시 한 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모든 변화의 시작, 긍정적인 결단은”, “내속 가장 안쪽 깊이에 있는 능동의 나로부터 발생”된다. 터널을 지날때 체감하게 되는 까닭모를 두려움이 자아성찰이라는 “스스로의 점검”속에서 봄날의 “여유만만”한 통로를 찾아 화음을 낸다. 그로서 어둠을 헤쳐나온 작가는 “참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터널로 향하여 “내면의 려행”을 떠난다.    이처럼 터널이라는 이미지의 련상에 의한 문학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며 “아픔과 원망, 분노, 자책, 수치와 두려움들을” 떨쳐온 생의 철학적 의미를 공포, 진통, 고민, 경외, 설렘, 환희 등의 정서로 등가물(等價物)하고있다.  다만, 어둠을 극복해나가는 지난한 과정이 생략된 그 과도부분의 어색한 련결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품은 일상에서 당착한 터널이라는 풍경을 다루면서, 인생살이에서의 통과의례와 같은 고난과 그 어둠을 이겨나가는 과정에서의 고민 또 그것이 갖는 존재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하고, 타개해야 하고, 닿아야할것에 대한 추구와 고뇌가 작은 수필속에 그득하다.    "흑룡강신문" 2016년 4월 7일   한국에서 출간된 김금희의 소설집     수필 터 널              김금희     지금 있는 세집으로부터 도보로 십분 남짓의 거리에 짧은 터널이 하나 있다. 장춘역을 지나는 기차길과 전차길을 나란히 머리우에 이고 있는 터널이다. 따듯한 봄이나 나른한 여름날의 오후, 시간적 여유가 있다 싶을 때 나는 장춘역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는 그 터널을 지나 세집으로 걸어가군 한다. 터널들이 대개 그렇듯 그 짧은 터널의 안도 오랜 시간 직사광선을 받지 못한 탓에 늘 어둡고 습했다. 인행보도가 따로 있지만 쌩쌩 지나치는 차들의 경적소리가 너무 가까이 들리기때문으로 깜짝깜짝 놀라는 수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터널을 통과하는것에서 얻는 어떤 독특한 체험은 다른 어떤 곳을 지나면서도 경험할수 없는 색다른 것임이 내게는 분명하다.   입구가 있고 출구도 있지만 일단 터널안에 들어서면 외계와 격리된 기분이다. 훤화하는 세계의 소리는 그치고 밝은 해빛도, 그 해빛아래 분주히 돌아치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일순간에 사라진다. 어둠이 갑자기 엄습하는 바람에 시야는 찰나 좁고 흐려지며 그에 따르는 불안감때문에 분명히 있을 출구에 대한 확신마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또각또각. 적막한 터널안에서 들리는것이란 자신의 외로운 발자국 소리뿐. 내 발자국 소리가 저랬던가싶을 정도로 그것은 터널안의 특이한 구조에 힘입어 전에 없이 크고 뚜렷하게 들린다.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느라면 청진기를 페 세포에 댄듯 헉헉후욱 ㅡ 헉헉후욱ㅡ 들숨과 날숨이 정확히 구분되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확인할수 있다. 그 소리들이 너무 생동하여 나는 가끔 자신이 지나고 있는 터널안이 바로 내 속인가 착각할 때도 있다. 들쑥날쑥 터널안벽을 쌓아올린 오래된 돌들, 두껍게 얹혀있는 먼지와 푸른 이끼, 간혹 쓰레기더미속에서 스멀스멀 기여나오는 비대한 몸집의 쥐…  혹시 오래동안 청소 한번 않고 방치해둔 내 속이 저런 모습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 사뭇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누구나 한두번 겪어보았을 인생의 터널이 내게도 있었다. 다른 여느 터널들보다 더 좁고 깊고 어두운 터널이였다. 손으로 벽을 더듬거리며 한발 한발 나갔지만 출구의 빛이 도무지 보이질 않아 막힌 동굴이려니 락담하고 주저앉기도 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채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만 몰두할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속모습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스스로 괜찮다고, 정직한 편이라고 자위했던 내 외양의 심면에 그렇게 많은 상처와 그 상처로 인해 생긴 부패와 온갖 쓰레기와 지어 추악한 욕망들이 곳곳에 도사려 있는것을 보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15절) 혹간에서 말하는 인간의 탐욕, 또는 죄성때문에 내 마음속의 집이 그리 훼손되고 무질서하게 어지러워져서 내가 이토록 아프고 힘들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 날 이후, 나는 나의 모든 정직함과 선함을 버리기로 하였다. ‘회칠한 무덤’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새겨 들었고 십자가 앞에서의 죽음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버리는것도, 소제하는것도, 다시 일어나 가는것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죽음의 유혹에 버금가는 참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자신을 포함한 세상사람들을 두려워 않는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였다. 어렵사리 일어서서 벽을 더듬거리며 걸어 나갈 때, 내 발밑으로 여러가지 모습의 아픔과 원망, 분노, 자책, 수치와 두려움들이 하나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이 끔찍한 터널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내 앞에 무작정 펼쳐졌던것처럼 출구의 빛도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왔다. 다른 많은 사람들의 터널 통과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 시절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함으로 그 속에서부터 빠져 나오게 되였던것인지 잘 알수 없다. 그저 나는 이미 헤쳐나온 터널을 뒤돌아보며 신에게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표할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현실의 나를 강하게 만드는것일가. 또한 무엇때문에 삶속에서 나는 힘들고 아프고 약해 있는가. 그 끔찍한 터널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것이 있다면, 결코 외계의 환경과 타인들의 행동이 근본의 원인으로 군림할수 없다는것이다. 모든 객관의 요소들은 문제의 참고사항이 될뿐 주관적인 나의 세계에서 나 자신의 동의없이 주인 노릇을 할수 없고 따라서 그것들에게 나는 최종적인 책임을 물을수 없었다. 나의 속세계가 얼마나 질서있고 탄탄하고 포용력이 있는지, 얼마만큼 상처를 복구시키고 세상의 악을 해독할수 있는지, 얼마나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현실에 대처하는 나의 모습이 달라질수 있는것이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오늘, 내 속의 집에 또다시 다른 류형의 쓰레기가 몰래 쌓여가고 있지는 않는지, 혹은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나이에 아직도 비좁고 낡은 집에서 근근득식 거짓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알기 위해 자성(自省)의 터널을 다시 한 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육체를 위해 정기검진을 받듯 마음의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내면려행을 떠나보는 일도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의 시작, 긍정적인 결단은 내 속 가장 안쪽 깊이에 있는 능동의 나로부터 발생되는것이니까.   바야흐로 겨울이 지나고 있다. 두꺼운 의복에 웬만큼 질리고 힘들었던 계절이였다. 의복의 부피도 줄이고 불필요하게 증가된 몸무게도 빼고 이 참에 마음까지 새로이 보수해야 할가부다. 비물이 새는 곳이라든가 세상고초때문에 내려앉은 구석 모퉁이, 혹은 비우지 않은 쓰레기통에서 썩어가고 있는 음식물이나 처마밑에 몰래 기여든 능구렁이 따위들이 어디 없는지 한번쯤 스스로 점검해볼 일이다.   따뜻한 봄, 어느 여유만만한 오후나절이 되여서 혼자 그 적막한 터널을 찾아 다시 한 번 그 속을 또각또각 걸어보고싶다.     2016. 3. 장춘에서     [출처] 어둠속, 삶의 통과의례|작성자 김 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47    춘사(春史) 나운규 댓글:  조회:2331  추천:16  2016-04-11
  . 칼럼.      춘사(春史) 나운규       ■ 김혁         ▲ 룡정 명동학교 출신의 한국 영화의 거장 라운규 1,   한국영화의 개척자인 춘사 나운규 선생을 기리는 춘사영화상이 지난 5일 저녁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이 개최됐다.   2016 춘사영화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은 상해에서의 친일파 척결을 다룬 을 연출한 최동훈 감독에게 돌아갔고 의 김혜수와 의 유아인이 남녀주연상을, 임권택 감독이 공로상을 수상했다. 위안부 소재를 다룬 영화 은 관객이 뽑은 최고 인기영화상으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지난해 6개 부문에서 올해는 10개 부문으로 시상 규모가 커진 가운데 진행됐다.  춘사 영화상은 한 때 위상이 추락하며 개최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2014년 영화상 시상이 재개된지 3년이 지나면서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한편 “춘사 영화상”은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인 춘사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투혼을 기리고자 개최되는 영화제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 제정, 지난 1990년 12월 24일 제1회 춘사영화예술상 시상식을 개최하면서 출범했다.   신인남우상은 의 강하늘이 수상했다. 지난 2월 나운규의 후배로, 같은 명동학교 출신인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에서 윤동주로 열연했던 그가 트로피를 거머쥔데에 대하여 각별한 의미를 부여해 본다.   2,   북간도 명동학교의 수업시간. 모두다 산수풀이에 열중하고있는데 맨 뒤에서 키득키득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수학선생이 이상하여 슬그머니 다가와 보니 맨 뒤에 앉은 학생이 책뒤에 거울을 숨겨놓고 비춰보며 벙긋벙긋 웃음을 웃고 있다. 그 모습이 한심하여 선생은 학교의 김약연교장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다. 이에 김교장은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 녀석이 장차 뭔가 되기는 될 거야”.   수학시간에 표정 연기에 열중하던 명동학교의 그 아이. 교장선생이 뭔가는 될 듯 하다고 “될성부른 떡잎”으로 예견한 그 아이가 바로 그후 불멸의 명화 “아리랑”을 제작한 한국영화계의 선두주자 나운규이다.        ▲ 용정 명동학교 시절의 나운규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한말의 풍운기에 태여난 나운규는 일제의 발길에 짓밟혀가는 한반도의 북녘 끝 회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 한국군 부교(副校)로 지내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전신(轉身),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웠다. 그는 아들 셋과 딸 셋 여섯 남매를 두었는 데 그중 셋째가 나운규었다.   나운규가 회령에서 신흥학교에 다니던 1915년 무렵은 개화기 신문화 류입의 한 물결인 신파극(新派劇) 운동이 한창 번져가고 있을때였다. 때때로 회령 읍내에도 이따금씩 신파극단이 찾아와 순회 공연을 했는데 나운규는 공연을 빠침없이 찾아 보며 이 신파극단에 흥미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를 며칠씩 두고 흉내를 냈다. 나운규의 연기 재질은 아마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916년 8월, 14살의 나운규는 윤봉춘 등 죽이 맞는 친구들과 더불어 회령 읍내 유일의 극장 만년좌에서 최초의 자작극 “2전 5리(二錢五厘)”를 공연하려했다.   공연허가 신청을 받은 일본 헌병대에서는 미성년자들이라고 집에 가서 부친의 도장을 받아 오라고 퇴짜를 놓았다. 이에 나운규는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찍고 다른 허가를 받아냈다.   그런 다음 가두 선전을 한답시고 울긋불긋한 차림의 무대 분장을 하고 회령 읍내 번화가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렸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은 막을 올렸다. 한창 신나게 공연중인데 갑자기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나운규와 동인의 부형들이 달려 들었다. 집안 망신시키는 놈들이라며 매타작을 퍼부으니 극장 안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연극이고 뭐고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나운규 대본  연출  주연의 최초의 자작극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운규는 15살에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녀인과의 사이에서 이듬해 아들 종익을 낳았고 19세가 되던 해에는 딸 행자를 낳았다.   예고도 없이 학교가던 길에 붙잡혀 말잔등에 태워져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 혼인이 싫어져 나운규는 무단 가출을 했다.   고향을 떠난 나운규가 직행한 곳은 북간도였다. 1918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명동학교에 입학했다.   북간도에서의 나운규의 행적은 동인들에 의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북간도에서 나운규는 조선인들이 무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북간도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고향인 회령으로 배달하는 책임을 맡고 한 달에 몇 번씩 두만강을 은밀히 건너곤 했다.   그러다 도판부사건(圖判部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에 휘말려 든다. 도판부 사건이라는 것은 북간도에 있던 반일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 있던 경찰서와 수비대를 습격한 사건이다. 그 때에 나운규와 윤봉춘은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과 청진 사이에 있는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고 전신, 전화 시설을 끊는 일을 맡았다.    1919년 4월 초 나운규는 지인들과 함께  북간도 한인교회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격문 수천장을 두만강을 넘나들며 회령을 비롯한 여러 고을에 잠입하여 나누어 주고 거사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예정시간을 눈앞에 두고 거사는 왜경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며 반일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왜경의 총칼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피를 뿌리며 죽고 부상당하고 붙잡혀갔다.   나운규의 절친 윤봉춘은 이때 붙잡혀 치안유지죄 위반이라는 죄명을 쓰고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하게 되였는데 민첩한 나운규는 용케도 왜경의 추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나운규의 정처없고 고달픈 방황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운규는 국자가(지금의 연길시), 두도구등지를 헤매다가 시베리아 연해주, 해삼위, 노령(露領)으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다 겪어가며 돌다가 풍문이 가라앉고 거지꼴이 되어서 나운규는 다시 로령에 가까운 훈춘으로 건너왔다. 훈춘으로 온 운규는 친구 김용국과 함께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소속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쇄물 운반,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던중1920년 10월, 나운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접전해 3천 여 명을 사살하는 대첩을 거두였다는 승전보를 들었다. 또 서로군정서 사관양성소에서 생도 298명을 북간도 왕청현의 부대에서 배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운규의 가슴은 북치듯 뜨겁게 울었다. 나운규는 김용국과 함께 신흥무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으면 광복군 소위로 임관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출발했다.   용정에서 약 200리 떨어진 명월구(明月構)에 다달았을 무렵 여로에 지친 두 사람은 다 지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이 많은 독립군 선배는 “젊은이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고 배운 지식을 이후의 독립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게 좋겠네”하고 타일렀다.   나운규는 선배들의 충고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회령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돌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딸 행자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1921년 봄 중동학교 고등예비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영화의 전성시기였다. 단성사니 장안사니 연흥사니 하는 극장들이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세워졌고 “팔딱팔딱 뛰는 활동사진”이라 불리는 영화는 숱한 젊은 남녀들을 그 마력으로 현혹시켰다.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 나운규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날보다도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 보는 시간이 더 많았으며 길을 가다가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을 흉내 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몇 년후 영화계의 혜성으로 등장할 나운규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는 방에 붙박혀 감상문을 쓰고 각본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에 심취되여있던 나운규에게 1922년 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회령경찰서에서 파견된 형사에게 친구 윤봉춘과 함께 지명수배자로 체포되였던 것이다. 북간도에서 면목이 있는 사람 하나가 순사 시험에 응시하면서 “도판부사건”의 연루자로 나운규와 윤봉춘 등 옛동지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었다.   21살의 나운규는 윤봉춘과 함께 1년 6개월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형무소에 함께 수감 된 이춘성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춘사(春史)라는 호를 지어 받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치른 옥고는 북간도와 시베리아 벌판을 류랑하던 쓰라린 체험과 함께 그의 반일사상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하였고 저항의식을 더욱 북돋아주어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도 이 극기의 고통은 여실히 반영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지칭되는 “아리랑”,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이 모두가 그 소산이었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조차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련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롱중조(笼中鸟)”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제작했다. 자신이 감독하면서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영화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 기념식이 있은 뒤 같은날 오후 5시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객석은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정신을 놓아버린 청년, 그의 녀동생, 그녀를 사랑하는 오빠의 친구가 친일파의 횡포에 저항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식민의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수 이정숙은 울먹이며 아리랑을 불렀고 관객들 모두가 따라불렀다. 노래가 울려퍼지자 순경이 호각을 불어 상영을 중지시켰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슬픔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터져나왔다.     ▲ 영화 "아리랑" 포스터   이렇게 해서 민족의 영화 “아리랑”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상영되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울로 아리랑 구경을 가자”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을 부른 가수 리정숙은 이 노래로써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이때로부터 온 민족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리랑”은 말 그대로 활동사진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한국영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이전까지 신파물이나 외국 번안물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아리랑”은 영화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였다.   “아리랑”이 상영되는 곳은 “의열단 단원이 폭탄을 던진것과 같은 열기가 감돌았다”는 등의 평가는 문헌이나 증언들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아리랑”은 일제시대 전 시기의 문화예술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생산물이 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의 성공으로 조선 키네마는 계속하여 나운규에게 각색과 감독과 주연을 아울러 맡겨서 1926년에는 “풍운아”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영화도 또한 조선 극장에서 13일 동안이나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나운규의 영화 재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1927년 나운규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수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이후 나운규는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다.   1931년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루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였다. 일제 강점기 배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영화는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나운규는 여러 편의 영화를 자신이 감독하고 직접 출연하면서 만들어 내며 내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오래동안의 생활고와 작업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약관35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3,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만약 력사서술에 가정이 허락된다면 나운규가 빠진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 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출처] 춘사(春史) 나운규|작성자 김 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
346    “별”의 기호를 풀이하다 댓글:  조회:1895  추천:17  2016-03-09
. 후기 .   “별”의 기호를 풀이하다 김 혁   1. 출판계와 서점가를 강타한 “다빈치 코드”라는 초베스트셀러가 있다. 추리소설과 비슷한 쟝르적특성으로 미스터리함과 긴장감을 유지시킨 특징이 그 작품을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게 한 원인이였지만 무엇보다도 압권은 작품에 새삼스럽게 기호학을 잉용(仍用)해 작품의 골조를 이룬것이였다. 기호라는것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수 있고 인지하고있는것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 없이 받아들였던것이다. 교통표지판, 상표, 간판, 영화포스터, 시, 그림, 핸드폰속 이모티콘 등등 다양한 기호학적문화읽기는 사실 은연중 우리의 일상 가까이에 사처에 널려있다. 하지만 “다빈치 코드”의 작가는 기호를 통해 그 단순함 리면에는 뭔가 특별한것이 있다는 기대를 독자들에게 던져주어 다양한 독자층의 관심을 끌고 작품에 나름 깊숙한 의미를 부여했다. “다빈치 코드”의 흥행은 광범위한 범위에서 “코드열풍”을 일으켰다. 이어 쉐익스피어, 단떼, 피카소, 모짜르트 등문화, 예술 분야 인물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책자들이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그 일례로 중국에서의 “병마용코드”, “진시황 코드”, “청명상하도 코드” 등 일련의 관련 연구서들을 들수 있다. 이처럼 근년 들어 기호학은 단순히 언어학적분석의 패러다임에 머물지 않고 문화콘텐츠의 해석을 통해 일반문화의령역으로 폭넓게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다.   2.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이다. 학계에서는 그이를 리욱, 김학철 등과 더불어 중국조선족문학의 으뜸가는 우수한 대표로 꼽는다. 또한 올해는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돐 기념일이자 “저항시인” 윤동주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본 후꾸오까감옥에서 숨진지 꼭 70주기 되는 해이다.   외국에서 윤동주연구 관련 석사, 박사가 50여명이나 배출되고 그 연구물이 수백편에 이르는 방흥미애(方兴未艾)의열조에 비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는 윤동주 관련 연구물이 몇손가락 꼽을 정도로 미비하고 그 기림의 열조 또한 미온적인것은 세계가 자호하는 고향의 시인에 대한 “홀대”이며 자라나는 새 세대에 그의 문학적재부를 승계해주지못한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필자는 10여년전부터 윤동주연구에 몰두하여왔고 언론사시절에는 관련 추모, 연구 행사들을 빠짐없이 보도했으며이미 2010년에 윤동주의 생애를 문단 최초로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에 일년간 련재하였고 또 윤동주 관련 연구 시리즈물들을 여러 간행물들에 평론, 칼럼, 수필 등 여러 쟝르를 동원하여 수십편 창작,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의 시인에 대한 추모와 선양이 외려 다른 지역들에 비해 미온적인데 대해 늘 가슴 깊은 곳에 체증 같은것을 담고있었다. 그러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으며 새로운 격식, 새로운 시각의 윤동주연구물을 내놓으려 나름 시도해보았다.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여러가지 텍스트로 나왔지만 새로운 격식과 문체, 다각적인 시각으로 나름 조명하고싶었다. 몇해전 대학가의 청탁을 받고 연변대학의 문학도들에게 윤동주 관련 문학특강을 한적 있었는데 그때 어린 문학도들이 윤동주의 보편적이면서도 심대한 문학생애를 비교적 알기 쉽게 접하도록 열개의 편린으로 나누어 이야기했었다. 평론가의 말투나 난해한 해설이 아니라 독자와 공감할수 있는 언어로 특히 삶의 의미와 관련해 스토리텔링으로전해주고싶은 마음에서였다. 그후 연변작가협회 문학강습반에서도 이런 형식으로 강의했고 몇번의 윤동주 생몰일 기념모임에서도 그 뼈대를 계속 보완해 이야기했다. 그 연구물을 지난 2012년경에는 문화종합지 《문화시대》에 근 1년간 련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본 책자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론문이나 특강, 칼럼, 기행 형식으로 써놓았던 글들을 련작칼럼으로 다시다듬었다.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해보았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아 문학생애에 대한 료해와 더불어 그의 시집을 접하는것과도 같은 다중효과를 거두기로 꾀했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자료들을 곁들어 해설함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도록 노력했다. 비록 타이틀을 련작칼럼이라 달고 몇배로 되게 크게 보완하고보니 련작칼럼이 내용도 충실해지고 부피도 묵직하니짜장 인물연구서처럼 되였다.   집필의 과정은 그야말로 고된 작업이였다. 적지 않은 작품을 량산(量产)했지만 막상 집필에 앞서 윤동주라는 이 우리 민족 모두가 애대하는 걸물을 나의 졸필로 그려낼수 있을가 하는 부담감에 지독한 창작슬럼프에 시달렸다. 출판사에서 청탁한 시간이 거의 만료되도록 한 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이는 그 이전에 작가협회 계약작가로 선정되여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집필할 때와 꼭같이 겪게 된 슬럼프였다. 그 슬럼프를 이겨내게 해준것이 또 다름아닌 그 슬럼프를 안겨준 윤동주의 삶이였고 윤동주의 시였다. 송우혜작가의 윤동주연구의 결정판이요 평전문학의 진수인 《윤동주 평전》이라는 경전이 이미 앞서 있지만 “외계에서 들여다본 윤동주”가 아닌, “고향에서 내다본 윤동주”로 시각의 차이를 바꾸고 윤동주가 오래동안 생활해온룡정지역이라는 이 유서깊은 곳의 지역특색의 문화풍토를 덧입히려는 나름의 시도가 슬럼프로 흔들리려는 나의 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고향 시인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의 승계를 위한 나의 작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이 기회에 다시한번천명하고싶다. 장편소설은 련재가 끝난지 몇해가 지난 오늘도 계속 탁마에 탁마를 거듭하고있고 인물평전은 유명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했으며 청소년전기물도 곧 출시될 예정이다.   3. “민족시인”, “저항시인”, “별의 시인” 등으로 윤동주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오늘날 윤동주라는 코드는그저 시인이라는 수식과 호칭을 뛰여넘는 풀이를 우리앞에 숙제처럼 남기고있다. 오늘도 우리가 윤동주라는 코드를 굳이 여러 각도로 풀이하는것은 그이의 아름다운 생각, 맑은 령혼, 진리를 향한열정, 인간을 향한 순수함 그리고 민족이나 나라를 뛰여넘는 우주적, 보편적 량심이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때문이다. 윤동주의 소꿉친구 문익환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이를 “떠올리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짐”을 우리는경험한다. 오늘날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를 되뇌이는 일은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고 비전을 위해 뛰고있는이들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체험과 계시로 될것이다. 전대의 력사는 후대의 전성기에 쓴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라는 말이 있다. 그 민족과 민족의 시인이라는 깊은 명제의 코드를 풀이해내는 벅찬 작업을 나름 완수할수 있어 마음은 뿌듯하다. 한편 걱정 또한 갈마든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의 생애를 연구,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한적 있다. “천한 사람의입으로는 찬양하는것조차도 그를 모욕하는것이다.” 이처럼 내 작은 둔필로 그이를 찬양하는것이 오히려 시인의 고매한 생애에 흠결(欠缺)을 주는것이 아닐가 내심 조심스러워진다. 관련 연구를 선행한 작가, 학자들에게 경의를 드리며 많은 연구가와 윤동주를 사랑하는이들의 동참과 편달을 바란다.   2015년, 백로(白露) - 청우재(听雨斋)에서   "윤동주 코드 - 29개의 코드로 풀어 보는 스물아홉 살 시인의 삶과 문학" 김혁 지음  출판 연변인민출판사  20015년 12월  페이지 수 324  정가 30원 목차 코드 1. 파평 윤씨 코드 2. 월강곡 코드 3. 선바위 코드 4. 공덕비 코드 5. 생가 코드 6. 명동학교 코드 7. “3.13” 코드 8. 15만원 코드 9. 우물 코드 10. 영국더기 코드 11. 은진중학 코드 12. 청년문사 코드 13. 처녀작 코드 14. 신사참배 코드 15. 늦봄  코드 16. 낭인(浪人) 코드 17. 카톨릭소년 코드 18. 연희전문 코드 19. 순이 코드 20. 자필시집 코드 21. 창씨개명 코드 22. 육첩방 코드 23. 구름다리 코드 24. 판결문 코드 25. 의문사(疑问死) 코드 26. 장례식 코드 27. 오오무라교수  코드 28. 아우 코드 29. 시비(诗碑) 책 소개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인 김혁작가의 인물연구서. 스물아홉해의 짧은 인생을 보낸 윤동주의 생과 문학에 대해 29개의 코드로 풀이 해 보았다. 특히 윤동주가 대부분의 시간을 지냈던 북간도 용정과 명동의 풍토에 대해 더욱 많은 편폭을 들여 세세하게 조명했다.  29개의 코드에 윤동주의 중요한 대표시들을 빠짐없이 선정해 싣고 해제를 달았다. 윤동의 생애와 직결되는 인물, 사건에 대해 사진 자료들을 곁듦으로써 당시 시대상의 면면을 살펴볼수 있다. 저자소개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출생했다.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를 나와 베이징 루쉰문학원을 수료했다.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조선족의 주요 매체에서 20여년간 언론인으로 근무했다. 현재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직을 담임하고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후신인 북안소학교, 은진중학의 후신인 용정중학을 나온 학연(學緣)을 자각하고 10여년간 윤동주 연구에 매진했다.  중국조선족 최초로 2010년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한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창작, 발표하여 이슈가 됐고, 현재 조선족 권위간행물에 "윤동주 평전"을 2년째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난장 속에 스러져간 청춘의 군상을 그려낸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조선족 최초로 되는 위안부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만주국 황후 완룽의 생애를 그려낸 "완룽 황후"등 장편소설 7부,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등이 있다. "중국의 피카소 한낙연 평전",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 등 인물전 다부가 있으며  논픽션물로는 북간도 용정의 백년역사를 조명한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한국 초청사기행각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등이 있다.  “윤동주”문학상을 비롯하여 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학상, "연변문학"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길림신문 "두만강"문학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등 조선족문단의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했으며 2004년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 청년상을 수상한바 있다.  저자 메일: ckkh99@hanmail.net  (출처:동포투데이)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45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댓글:  조회:2447  추천:12  2016-02-24
룡정지역 반일유적지 순람 9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김 혁     ​▲ 화가의 고향 룡정에 그의 이름으로 조성 된 락연공원. (사진 리련화 기자) ​ 유서깊은 룡정시에 또 하나의 명소로는 락연공원을 꼽아야 할것이다. 락연공원은 룡정이 낳은 걸출한 조선족 정치활동가이며 인민예술가인 한락연의 이름을 본따서 명명한것이다. 총투자가 3백만원, 부지면적이 2천여평방메로 조성된 락연공원은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 위치해있다. 원 국가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덕수의 친필이 새겨진 표지석을 지나 공원에 들어서면 교목과 관목이 어우러진 가운데 한락연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3층 높이의 락연정이 우뚝 서있다. 락연정 주변에는 정교하게 만든 6개의 경관등이 세워져있는데 경관등에는 리백, 두보, 백거이등의 시편들이 새겨져있다. 락연공원은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터이자 연변의 또 하나의 홍색관광명소로 부상되고있다. ​ 한락연은1898년, 중국 길림성 룡정촌 토성포의 한 중산계급의 가정에서 맏이로 태여났다. 원명은 광우(光宇)이며 자는 락연(乐然)이다.  한락연은 그림에 대해 천부를 갖고있었다. 매번 학기 시험때마다 그의 미술성적은 만점이였다. 한락연이 9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문의 맏이로서 가문의 생계를 위해 한락연은 손에 잡히는 대로 잡일을 하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한편 그림만은 손에 놓지않았다. 비록 겨우 소학교를 졸업한 한락연이였지만 총명과 순발력으로 어려서부터 조선말과 중국말은 물론 일어와 영어도 배워 상당한 회화실력을 갖고있었다. 그 회화능력에 힘입어 한락연은 세관 직원 시험에 무난히 통과되였다.  이 시기에 한락연은 룡정에서 최신애라는 녀성과 결혼했다. 그뒤 그들 사이에는 딸 인숙이가 태여났다.  ​ 1919년 3월, 룡정의 반일지사들은 조선의 3. 1운동을 성원하는 성대한 반일시위를 벌리기로 결정했다. 3월 13일, 각지의 군중들은 노도와같이 룡정으로 밀려들었다. 3만여명 시위자들과 함께 한락연은 조선독립과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반대하는 구호를 소리 높이 웨치며 연변땅에 항일의 불길을 지폈다.  시위를 하려면 프랑카드도 있어야 하고 태극기도 있어야 했다. 이렇게 되여 프랑카드와 태극기를 만드는 임무는 이미 “그림쟁이”로 소문 짜한 한락연에게 맡겨졌다.  한락연의 조선족 부인인인 최신애의 조카 최순희씨는 “고모부 한락연의 룡정에서의 나날을 회억하여”라는 추모문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더듬었다.  “나의 고모부는 영국해관사무서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흰 천 몇 필을 사다가 영조계지세무사집에서 밤새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태극기를 여러 학교에 나누어주어 시위때 사용하게 하였다.” 따라서 일제의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시작됐다. 한락연은 당연히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명되여 있었다. 한락연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그 해 12월 중국인 복장을 갈아입고 조용히 룡정을 떠났다.    1920년 22세의 한락연은 동방의 제1도회지 상해로 갔다.  한락연은 그의 천부적인 기질로 상해미술전과학교에 단연 입학하였다. 상해미술전과학교 중국근대 대표적인 화가이며 교육가인 류해속(刘海粟)이 설립한 학교였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되였다.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향도”를 통하여 혁명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며 점차 중국공산당에 접근했고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조선족가운데서 제일 먼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다.  1924년 1월, 상해미술전과학교(上海美術專科學校)에서 주경야독하며 생활고를 엎누르고 그는 뛰여난 성적으로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후의 그의 행보는 봉천(奉天.지금의 심양)으로 이어졌다. 상해기독교청년회의 명의로 심양 봉천기독회청년회에 가 미술전람을 하러갔지만 사실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화가의 신분을 걸고 새로운 혁명활동에 펼치기 위한것이였다. 봉천 기독교청년회의 간사 염보항(閻寶航)의 도움으로 청년회관에서 “상해미술전문학교졸업생 한락연의 유화전람회”를 열었다. 개인유화전시를 마친뒤 소남관 풍우대(小南關風雨臺)부근에 사립미술전과학교를 창설하였다. 로소비(鲁少飞)、허소생, 륙의 등 이름 쟁쟁한 화가들을 모셔와 교원진을 무었고 본인은 교무사업을 맡았다.   1925년 겨울, 한락연은 당에서 파견한 임국정(任國禎), 오려석(吳麗石)과 함께 심양의 최초로 되는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한락연이 심양에 있는 기간 배양한 청년들과 여려 진보적 단체의 성원들 대부분이 첫기의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이렇듯 한락연은 심양의 건당사업에 정초를 다지는데 큰 기여를 바쳤다.    1925년, 7월 중공북방구위(中共北方区委)의 파견을 받고 할빈으로 왔다.  할빈에서 한락연은 보육학교에서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지하당사업에 종사하였다.  교수를 하는 한편 초도남, 조상지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들과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전수하였고 반군벌투쟁을 벌려나갔다. 1926년 4월 중공북방국의 지시에 따라 할빈특별지부를 “중국공산당북만지방위원회”로 다시 조직하였다. 오려실이 서기로 한락연도 지위령도성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할빈에서의 한락연의 행동은 주의를 불러일이켰고 그의 신변에 위험이 닥침을 예감한 당조직은 그에게 할빈을 떠나도록 지시를 주었다. 한락연은 치치할로 향했고 치치할 룡사공원의 감리(监理)로 취직하게 되였다. ​ ​"연변일보" 2015-8-18 한락연은 공원내의 정자며 루각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청나라건물들의 고전풍격을 띄고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공원내의 단일화를 깨고 독특한 개성을 띤 구라파식 정자 하나를 설계해냈다. 높이 10메터가량 되는 정자는 백옥같은 8개의 원주형 기둥이 떠받치고 있고 삼각형의 루각우에 시계 하나를 떠이고 있다. 8개의 원주형 기둥에는 흠상하고있는 사람들의 신심을 정화시켜주는 격언들이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이름을 “격언정”이라고 하였다. 지금까지도 “격언정”은 룡사공원의 하나의 경관으로 되여있다. 이시기 한락연은 룡사공원 감리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치치할 뿐아니라 수분하(绥芬河)에도 중국공산당 련락소를 건립했다. 할빈에서 마수를 피해 치치할로 왔던 한락연은 또 다시 신분이 로출되여  군벌당국의 체포대상이 되였다. 이러한 백색테러속에 암울한 북국의 도시를 주름잡으며 당조직사업에 충성하고 기여했던 한락연은 그해 가을 치치할을 떠났다.  이번에 그가 행한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시대에 따른 미술사조의 흐름을 느낄수 있는 창작과 예술의 무대였다. 전세계 천재예술가들의 집합소인 이곳에서 르누아르, 반 고흐, 피카소와 같은 거장들도 모여들어 예술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동안 “백색테러”속에 피와 불의 세례를 거치면서 화필 한번 잡을 틈조차 없었던 그는 세계 예술의 전당에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고있었다. 이역만리 먼 땅에 도착한 한락연은 놀라운 의력으로 짧은 시간내에 프랑스어를 배워 냈다. 한편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지 않으면 안되였다. 귀국하기전인 1937년까지 그는 스케치북을 지니고 유럽각지를 순회했고 무려 10여회나 되는 개인전을 가졌다.   ▲빠리의 거리에서 사생하고 있는 한락연   몸은 중국을 떠나 번화한 프랑스에 있었으나 한락연의 미술가의 시선을 초월한 “태풍의 눈”은 언제나 중국대륙을 면밀히 주시하고있었다. 그는 중국 동북출신 류학생들과 공동으로 일본의 동북에 대한 침략과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회유를 규탄하는 “중국동북4성프랑스류학생선언”을 발표했다. 1936년 여름 한락연은 빠리에서 유럽 거주 화교들의 대표자대회인 화교항일구망단체(华侨抗日救亡团体)에 가입하여 교무부(侨务部)의 사업을 맡고 항일을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단체 제2차 대회때에는   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한락연은 《빠리시보(巴黎时报)》에 사진기자로 취업했다. 빠리에서 언론인의 신분으로 한락연은 반파쑈 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몸은 유럽의 “예술의 전당”에 있었지만 항일의 불길이 중국땅에서 세차게 번져나가는 이때에 한적하게 외국에만 머물러있을수 없다는 결단아래 그는 드디여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1937년 초겨울 귀국한 한락연은 그 행선지를 무한으로 잡고 동북항일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이 조직은 중공중앙장강국에 속했는데 주은래의 령도하에 있었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항일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동북항일구망총회는 중국 관내 동북민들을 항일의 대렬에 동참시키기 위해 “반공(反攻)”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다. 이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이 시기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은 인민들은 일떠나 일본제국주의를 소멸하자!”라는 거폭의 유화가 한구(汉口)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란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걸렸다. 1938년 10월말 동북항일구국총회는 동필무의 지시로 새로운 당조를 세웠는데 한락연은 그 중 한사람이였다. 번중한 사업에 몸을 혹사하면서도 한락연은 화가의 본분을 잊지않고 9월에 중경에서 개인 그림전을 가지기도 했다. 이 해 11월 주은래, 곽말약이 령도하는 중국국민혁명군 정치부 제3청에서 활동하던 작가와 예술가로 구성된 연안참관단이 연안을 방문했다. 참관단에는 한락연도 있었다. 그는 연안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전쟁속의 민족문화예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모택동동지가 친히 그들이 들어있는 땅굴막에 찾아와 국민당지구에서 활약하고있는 진보적인사들을 친절하게 접견하였다.   무한에서 한락연은 두번째 사랑을 만나게 된다. 바로 무한녀청년회 향촌부 주임간사를 맡고있던 류옥하(刘玉霞)였다.  그후 한락연과 류옥하는 딸 한건립과 장남 한건행 남매를 보았다.  이 시기부터 한락연은 공산당원의 신분을 감추고 애국지사, 미술가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당의 통일전선사업에 정력을 다하였다.   ▲ 한락연과 그의 중국인 부인 류옥하   1940년 6월, 서안에 있는 팔로군 대표사무소를 들렀다가 다시 보계(宝鸡)를 거쳐 중경으로 가던중 한락연은 보계 기독교청년회숙소에서 국민당의 특수 정보요원들이 동원한 경비사령부 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특무들은 한락연을 공산당으로 의심하였지만 사실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었었다. 감옥에서 한락연은 혹독한 고문도 이겨내고 태연자약하게 응전하면서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다. 한락연이 체포된 소식을 접한 당조직에서는 백방으로 구조에 나섰다.  그들의 노력과 담보로 1943년초에 한락연은 겨우 가석방되였다. 석방된후, 한락연은 화가의 신분으로 서북지구를 전전하면서 국민당 군정상층인물을 상대로 통일전선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제3집단군총사령 조수산(赵寿山), 배위, 곽령야 등 많은  국민당장령들과 래왕하며 중국공산당의 내전을 반대하고 새 중국을 세우려는 주장을 선전했다. 한락연의 강렬한 애국주의 정신, 숭고한 품성과 풍부한 학식은 도치악과 일부 고급장령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감숙성 주천(酒泉)시에서 경비책임을 맡은 하서(河西) 경비구 총사령 도치악장군이 국민당과 결렬하고 기의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도치악은 일제의 패망후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9년 9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중국공산당 쪽으로 귀순하였다. 이 배경에는 한락연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렇게 한락연은 서안, 란주, 신강 일대에서 국민당특무들과 우회하면서 국민당고급장령들을 교육하고 쟁취하는 사업을 대담하고 폭넓게 벌리였다.   글 김혁, 사진 리련화 기자  연변일보 2015-8-25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44    민중의 소리- 《민성보》 댓글:  조회:1913  추천:11  2016-02-04
룡정지역반일유적지 순람 7 민중의 소리- 《민성보》 김 혁 ▲ "민성보" 신문사의 20년대 모습. 룡정에는 민성가라는 거리가 있다. 지난 세기 20년대에 그 거리에 민성보라는 신문을 꾸리는 신문사가 있었고 거리의 이름은 그에서 연유되였다. 그 신문사 옛터는 조선말로 된 간행물의 탄생지로서만이 아니라 “중공룡정촌지부”유적지로도 유서가 깊다. 1919년 중국 5·4운동은 문화운동의 영향하에 연변의 진보인사들은 반일무장투쟁을 배합하여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많은 간행물을 꾸렸다. 1919년 3월, 연변지역에서 발행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일민보》, 《신국보》, 《중외통신》, 《구국일보》, 《조선민보》가 있었다. 그러던중 1928년 1월, 《민성보》가 룡정에서 고고성을 올렸다. 신문사는 룡정촌 신안거리(현 민성거리)에 세워졌다. 《민성보》의 최고지도기구는 40명으로 구성된 “보무위원회”였다. 강위청(연길 현상회 회장)이 위원장으로, 관준언(화룡현교육국 국장)이 신문사 사장으로, 방지함(룡정촌 전화국 국장)이 경리로 추대되였다. 《민성보》는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 4절지 4개 면으로 된 일간신문이였다. 그중 1, 2면과 3면의 전반부는 한문판이고 3면 후반부와 4면은 조선문판이였다. 한문판 총편집은 안회음이 겸했고 조선문판 총편집은 윤화수였다. 일발행량은 2000부, 연변에서 그 영향이 컸다. 신문은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취지에서 《민성보》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 취지에 걸맞게 《민성보》는 신학제, 신문풍, 백화문을 구사하였으며 혼인자유, 남녀평등을 제창하는 등 진보적인 언론의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1928년 2월 주동교가 신문사 편집일군으로 초빙되여 왔다. 주동교는 겉으로는 편집일군의 명색을 띠였으나 실제로는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민중의 토대와 혁명적극성이 높은 연변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러 온것이였다. 하여 1928년 2월 연변에서의 첫 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1928년 여름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를 기회라 생각한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증파해줄것을 요구했다. 곧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 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 《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 필을 잡게 되였고 《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보루로 되였다. 중공룡정촌지부가 건립된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 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 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불과 몇달이 못되여 그해 7,8월에 국자가, 동불사,로투구, 광개욕, 팔도하자, 옹성라자, 삼도구, 화룡, 훈춘 등 9개 지역에 당지부가 설립되였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다. 이들은 《민성보》를 하나의 선전도구로 삼고 용감하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 규탄하였으며 피압박자들이 일떠나 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우라고 호소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말았다. 국공합작의 분렬, 국민당의 간섭, 지방관원들의 무능 등 원인으로 1931년 “9.18”사변후 민성보는 부득불 정간되였다. 지금 룡정시연수학교 정원에는 기념석 하나가 세워져있다. 2010년 룡정시 당위와 정부에서 건립한 기념석에는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룡정촌당지부 건립상황이 주홍빛 글자로 음각되여있다. 기념석의 건립을 주도했던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은 “민성보는 푸른 벽돌로 지은 불과 240여평방메터 되는 단층집이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룡정촌의 당지부가 들어서면서 이로써 항일투쟁은 새로운 단계에로 들어서게 되였고 연변의 당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적어내려갔습니다”고 말했다. 또 “《민성보》의 옛터는 이곳에서 남으로 수십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으나 그곳에 민가가 밀집하기에 룡정시연수학교내에 세우게 되였다”고 소개했다. 《민성보》는 20세기 20년대 동북에서 중문과 조선문으로 꾸린 유일한 신문이였다. 또한 《민성보》는 예봉을 직접 일제와 국내통치계급에 돌렸고 인민대중들에게 각성하고 단합하여 다같이 대적하며 외환을 막아나서라고 호소한 진보적 신문이였다. "연변일보" 2015-8-5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43    피로 물든 장암촌 댓글:  조회:1894  추천:11  2016-01-20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6) 피로 물든 장암촌  김혁   "장암동참안유적" 표지석 (사진 리련화 기자) 세전이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있는 오붓한 마을 하나가 있다. 지금은 동명촌 제2촌민소조라 불리지만 옛적에는 장암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노루골이라는 이름의 마을, 초가집과 벽돌 기와집이 어우러져 섞인 작은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 이지만 수십년전 이곳에서는 일제의 몸서리치는 만행이 자행된 참변의 현장이였다.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일제는1920년10월부터 3개월여에 걸쳐 조선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였다. 그중에 장암동 마을이 당한 참화가 가장 컸다. 마을 마을 앞쪽 언덕을 따라 오르니 기념석 하나가 유표히 보였다. 철책에 둘러쌓인 석비정면에 “장암동참안유적(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뒤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유적비에는 몇글자로 응축된 그날 장암동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일었던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혈안이 되였다 조선인들이 독립군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뻗친데 대한 분풀이였다. 이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이대첩을 이룰수 있었던것은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군을 쫓아 씨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변에서 조선인 마을만 보면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녀성들을 간음하며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삼광전략(三光戰略)” 즉 모조리죽이고, 략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 작전이였다. 1920년 참안을 앞둔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 있었다. 마을에능 영신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3,13”반일시위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원들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한다. 이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룡정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였다.(일본 제19사단사령부, )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리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속에 던져넣었다. 가슴치며 절규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그런데 며칠후,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강요했다. 유족들이 위협에 못이겨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조짚단우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귀축같은 만행을 지르고도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을 축하했다. 그후 이중학살된 참혹한 시체가 누구의것인지도 가릴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일제는 장암촌에서 류례가 없는 잔악한 행위을 우리 동포에게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장암촌은 폐허가 되고말았다. 이를 목격한 룡정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기시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와 “로이터 통신사”등에 보도되였다. 사책들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해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참변”과 함께 우리 민족이 동북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였다. 유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마을 동쪽골짜기에 자리잡고있는 노루바위를 찾아보았다. 마을의 주병근(79세) 할아버지에 의하면 “노루바위는 원래는 제법 운치가 있는 바위였는데 한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바위 일부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하지만 답사 내내 노루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처연히 들려오는 꿩 우는 소리만이 어제날의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픈 수난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연변일보" 2015년 7월 21일
342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댓글:  조회:2491  추천:13  2016-01-15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5)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상) 김 혁​ ▲ 의거를 주도한 6명의 반일지사들   몇해전, 한국 영화계에서 한 편의 영화가 극장가를 열광의 도가니로 달구었다.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칸국제영화제 초청, 한화 200억원이라는 억대의제작비 등으로 “놈놈놈”은 갖가지 화제를 모으다가 개봉한지 불과 한 달도 못되여관객 600여만 명을 불러 모으며 당년 한국영화의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 올랐다. 여기서 놀라운것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다름 아닌 지난세기 20년대 룡정에서 벌어진 “15만원 탈취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룡정에서 일었던 “3.13” 반일집회가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된뒤 반일지사들은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바로 이 당시 로시야에서는 홍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군단이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였다. 이에1915년전후 북간도와 로씨야 연해주 반일열혈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조직인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책략을 모았다. 거사를 기획한 사람들로는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준, 박웅세, 최봉설등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전홍섭(全洪燮)이조선은행 룡정 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들은 전홍섭에게독립무장을 위한 행동에 참여하자고 건의 했다. 이에 일본기관에서 일보고 있지만 역시 일제괴수들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있던 전홍섭은 인차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전홍섭은 자기는 놈들의 은행권수송에 몇번 참가한적 있다면서 “왜놈들이 회령에서 룡정 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구체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해결할수 있지 않을가”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았다. 이에 영웅들은 일제의 수송자금을 중도에서 탈환하기로 하였다. 전홍섭은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련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1919년 12월 그믐 날 전홍섭은 룡정 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에게서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30만원의 현금을 수송해 오게 된다는 비빌을 알아내였다. 전홍섭은 즉각 철혈광복단에게 이 비밀행동에 대해 쪽지로 전달했다. 쪽지에는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수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고 씌여 있었다. 4,5일이면 시간이 이틀밖에 없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등 6명은 명동에 집결하여 면밀하게 습격계획을 짰다. 거액의 현금을 운송하는 일이니 놈들은 전신무장한 순사들로 호위로 경비가 삼엄할것이다. 인적이 적고 산발이 험하고 나무가 무성한 오랑캐령이나 선바위밑에서는 더욱 경각성을 높힐것이다. 그러나 등잔밑이 어둡다고 총령사관이 있는 룡정촌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경비가 느슨해 질수도 있다. 드디여 그들은 습격지점을 동량리 어구(지금의 승지촌으로부터 100여메터 상거한 길)로 정했다.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여섯 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였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 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일제를 향한 증오의 총칼을 서슬푸르게 벼르고 있던 철혈광복단은 즉각 행동에 들어 갔다.  1920년 1월 4일,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여섯명의 철혈광복단 대원들은 결전의 길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림속을 꿰질렀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가르며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 어구에 도착하게 되였다. 동량리 어구는 룡정시 남쪽으로 흐르는 륙도하를 따라 동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좌안의 도로를 따라 약 4㎞ 가량을 가면 닿게 된다. 동량리 어구에서 그들은 큰 길옆 버들방천에 숨어서는 오로지 수송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여 적들의 수송대가 나타났다. 수송대는 느릿느릿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행렬의 륜곽이 점점 똑똑히 알렸다. ​▲ 15만원 군자금 운송지점인 조선은행 룡정 출장소 옛터 (사진 리련화 기자). (계속) "연변일보" 2015년 7월 7일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5)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하) 김 혁​ ▲ 동량리 어구에 세워 진 의거 기념비 (사진: 리련화 기자)     “땅!” 어스름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다. 그 신호와 같이하여 대원들은 일제히 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가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세웠다. 그런데 이때 총소리에 놀란 맨 앞장 선 말이 네굽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말을 붙들라!” 윤준희와 최봉설은 15리나 쫓아가서 어느 산중턱에서 간신히 말을 멈춰세웠다. 말에 실은 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는 환성이 터져 올랐다. 주머니속에는 도합 15만원의 새 지폐가 꽉 차있었던것이다. 그들은 돈을 나누어 지니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휴식을 취한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출발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두 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울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로씨야 모구위(毛口崴)에서 배를 타고 울지보스또크로 향발, 23일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신한촌에서 그들은 당지의 반일지사인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사건이 일자 온 간도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인 1월 5일, 룡정 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수백명의 중일경찰들을 동원해 평강일대에서 조선인들은 검거체포했다.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반일지사들을 잡으려고 악에 바쳐 광분하고있을때 무기구입을 책임진 임국정은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론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임국정이 찾았던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일제의 끄나불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울라지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까지 숨어들어 온 엄인섭은 무기를 사는 일을 근심말라고 호언장담하면서 황급히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본헌병대를 찾아가 상황을 밀고해버렸다. 헌병대의 정보를 받은 일제는 즉각 출동했다. 조선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까지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할 정도로 신속한 대응을 벌렸다. 1월 31일 밤 신한촌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대검거가 시작됐다. 꿈나라에서 무기교섭의 성공을 꿈꾸던 그들은 한밤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자 잠을 털고 일어났다. 바깥동정을 느끼고 서둘렀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던것이다.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뒤방 문곁에서 자고있던 최봉설이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맨발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일본군헌병을 발길로 걷어차 넘어 뜨리고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헌병들이 최봉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최봉설은 상처를 한손으로 감싸면서 계속 앞으로 뛰였다. 얼마 못뛰여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총알을 맞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추슬리며 최봉설은 단말마로 뛰고 또 뛰였다. 일제의 검거로 단원들이 목숨걸고 탈취했던 15만원중에서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다. 아울러 울라지보스또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는 대가를 치렀다. 1921년 8월 25일 윤준희 등 세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에 언도되였다. 윤준희는 30살, 임국정은 27살, 한상호는 23살의 애젊은 나이였다. 당시 최신 소총 한 정이 30원 이였다고 하니 15만원은 반일독립군 5000명을 단번에 중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였다. 간발의 차이로 비장하게 마무리 된15만원 탈취사건이 있은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련이어 일었다. 15만원 탈취거사가 무기구입 성사로 마무리 되였더라다면 전반 조선민족 항일무장투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것은 물론일것이다. 일제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전설처럼 살아남은 최봉설(崔鳳卨)은 상처를 치료한후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로씨야 백파군과 맞서 싸웠다. “15만원탈취사건”이 발생한지도 이젠 90여년 세월을 경과했다. 그동안 사건경위에 대해 각이한 기술이 있지만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씨의 증언과 관련자료들이 아직도 그냥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은 진실에 한걸음 가까와졌다. 지금 룡정지역에는 “15만원탈취사건”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년 일제의 군자금 조달지점이였던 조선은행건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원모습 그대로 보존되여 있다. 지금의 룡정 시정부 서쪽문, 신화서점 사거리에서 룡정 서시장쪽으로 빠지는 골목 바로 오른편의 회색 2층건물이 바로 그 곳이다. 한때 룡정시 공상은행 영업청으로 사용되였다다. “15만원 탈취사건”의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유적지로는 탈취사건 지점에 세워진 거사 기념비이다. 룡정 시에서 동남쪽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승지촌, 바로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의 고향 마을이 있는 그 부근에 거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포장도로 오른편 륙도하가 흐르는 강언덕, 돌로 3메터 가량 쌓은 축대언덕주변은 세멘트로 단을 쌓고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탈취십오만원사건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15만원탈취사건은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장을 장식하면서 아주 큰 력사 적 의미를 가진다.” 학계는 15만원 탈취사건은 룡정 3•13 만세운동으로 대표되던 비폭력 항일운동에서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거사라고 정평하고 있다. "연변일보" 2015년 7월 14일  
341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댓글:  조회:2287  추천:15  2016-01-04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4)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상)   김 혁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룡정 반일시위 당시의 광경​   룡정시가지에서 남녘 삼합 방향으로 버드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의사릉에는 그 젯날 반일의 호성을 목청껏 울리다 순직한 13인렬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 1919년, 경성의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여 연변지역에까지 미쳤다. 그 무렵 연변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지사들은 협의를 거듭하여 룡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룡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룡정촌이 당시“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룡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로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3월 13일로 정했다.   드디여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아침부터 연변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룡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룡정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렬을 지어 룡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룡정을 향해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의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하지만 당지 군경들이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메터 되는 곳으로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뒤쪽(지금의 룡정제1유치원마당) 부근이였다. 지금 유치원 정원에 반일시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룡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였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였고 우리 집은 바로 룡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룡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랑독되였다. ​ (계속)​ ​ "연변일보" 2015년 6월 24일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4)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하)     김 혁 ​ [출처] 봄날의 함성|작성자 김 혁 룡정시 외곽에 조성 된 3.13반일의사릉.​ (사진 리련화 기자)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였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령사관을 향하였다.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였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련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여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였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였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였다. 또 이날 시위에서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90여명이 체포된것으로 이 수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여 실렸다.   3월 17일,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다시 룡정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룡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룡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1989년 룡정 3.13사업위원회 초대회장 최근갑옹등은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룡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였다. 반일의사들의 묘역의 조성에 큰 힘을 바쳤던 최근갑옹은 “이 날의 반일시위운동은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습니다. 이 성세호대한 시위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그젯날의 연변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습니다. 이는 연변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였습니다.”고 말했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룡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한것이다.   반일지사들의 충혼이 잠들어 있는 묘역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연변일보" 2015년 6월 30일   [출처] 봄날의 함성- 룡정 3.13 반일시위운동 (하)|작성자 김 혁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40    [수필] 빱까 댓글:  조회:2864  추천:18  2016-01-04
. 수필 .     빱 까  - 고양이를 위한 랩소디    김 혁     고양이 '빱까'와 함께 한 여덟 살 적 나의 모습. 이 사진을 수필과 함께 기고하면서 잃어버렸다가 20년만에 어느 고마운 편집에 의해 편집부의 원고더미 속에서 되찾았다.  감회에 넘쳐 수필과 사진을 다시 올려 본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털에 고운 봄의 향기 어리우도다   금방울같이 호 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 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시 공부를 하던 때 습작 본에 베껴두었던 고월 이장희의 의 전문이다.    매양 고양이와 봄에 대해 감각적으로 체득한 이 탁월한 연상의 시를 읊조릴 때면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환영(幻影)으로 본다. 그리고 그 고양이는 어제의 커튼을 북- 찢고 뛰쳐나와 내 가슴에 덥석 안긴다. 나와 함께 울고 웃고 뒹굴고 뛰놀며 동년의 능선을 넘었던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암울했던 70년대의 중기에 나는 용정의 한 소학교의 3학년생 이였다.    검찰기관에서 사업하시던 아버지가 로 낙인 되어 악명 높은 간부학교(중국의 문화혁명시기 불온분자들을 개조하던 감옥)에서 치른 역고를 빌미로 몇 년이고 병원에서 붙박이로 계셔 화기를 잃은 집안은 건조했고 어두웠으며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학교 일에 바쁜 몸이라 아버지의 병시중을 위해 어머니는 도문에 있는 외할머니를 모셔 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 고리끼의 중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인자하디 인자하신 외할머니가 오면서 왕골로 결은 들 가방에 무언가 넣어 가지 고왔다.    그것은... 고양이였다.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귀가 세모지고 눈매가 날카롭고 동침처럼 빳빳한 수염아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온몸은 오목처럼 까맸으나 발만은 운동화를 신은 듯 하얀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체념한 듯 들 가방 모서리에 턱을 얹고 생소한 환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 고양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고양이가 낮으나 모가 실린 소리로 인사처럼 울었다. 나도 고양이를 보고 반가움에 말(馬)처럼 힝- 하니 웃었다.    앙증맞게 귀여운 작은 몸체의 고양이는 참담한 기운이 돌던 우리 집안에 작지 않은 생기를 가져다주었고 나는 그만 그 고양이에 깜빡 환혹(幻惑)되어 버렸다.      우선 고양이의 이름을 짓노라 잔 속을 끙끙 앓았다. 그때까지 만도 게딱지같은 초옥(草屋)들이 한 움큼 속에 들어앉은 듯한 현 소재지였던 용정에는 시골마을과 진배없이 짐승을 치는 집들이 적지 않았고 고양이의 이름이래야 《미미》,《묘묘》따위가 고작이었다.    자기 집 아이의 이름을 따서 고양이의 이름을 《철호》라 툽상스럽게 지은 집까지도 있었다.    열 개도 더 되는 이름을 놓고 좋은 과일 고르듯 퉁긴 끝에 나는 고양이의 이름을 《빱까》라고 지었다. 그것은 당시 십분 유행되었던 러시아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였는가》중의 주인공의 아명을 본 딴 것 이였다. (썩 후에야 알게 되였지만 러시아 소설 속의 강직한 주인공의 이름을 시사 받은 나의 고양이는 원체 한 마리의 암코양이였다.)   《역시 교원 집 자녀가 다르긴 달라.》    고양이의 이름을 듣고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골 살을 찡그린 건 외할머니 한 분뿐이었다.    《애가 코냥이 이름을 웨 이렇게 바쁘게두 지었누?》   외할매는 《빱까》라는 이름을 번지지 못해 고양이를 《바가》,《바가》하고 불렀다.      그때 현 소재지의 아이들에게서는 이산한 괴질(怪疾)이 돌았다. 임파(淋巴) 염증으로 저마다 턱 아래와 목 부위가 찐빵처럼 부어 올랐는데 항간에서는 그 병을 《돼지 병》이라 하였다. 민간 토방 법으로 병을 치료한답시고 목에 돼지고기의 비곗살을 가제를 대여 붙이곤 했다. 병이 남에게 전염 되였기에 병에 걸린 아이들은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나도 그 병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출근하고 할머니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하느라 병원에 붙박여 있었기에 빈집에서 패잔병처럼 턱을 동이고 낭패 상이 된 나를 동반해 준 것은 《빱까》뿐이었다.    함께 고무공을 굴리기도 했고 수염이 뺨에 대여 간질간질해 나도록 고양이와 머리를 맞대고 알고도 모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배고프면 나는 밥상에서 고양이는 문가에서 옥수수밥이라도 맛나게 먹었고 졸리면 따스한 가마 목 위쪽에 활처럼 꼬부리고 다정한 형제처럼 누워 자기도 했다.    《빱까》가 동무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지겨운 홀로의 시간을 나는 어떻게 지냈을는지 모른다. 《빱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는 목에 붙였던 비계덩이를 《빱까》의 점심 한끼로 내 주었다가 어머님한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당시는 옥수수밥과 옥수수떡이 주식 이였고 고기붙이는 일년 치고 설 명절이면 겨우 맛볼 수 있었던 시국, 그렇게 돈냥을 부셔 《약》대용으로 사온 고기를 고양이밥으로 홀랑 대접했으니 꾸지람을 받을 법도 했다.       《빱까》에 대한 나의 정은 날로 도타워만 갔다.  오밤중에 밖에 나갔던《빱까》의 미약한 울음소리도 오직 나만이 헤아려 듣고 문을 열어 주군 했고《빱까》는 어김없이 나의 잠자리 곁에 방석과 내 털모자로 꾸며준 준 잠자리에 기여 들어 자군 했다. 《빱까》는 추우면 나의 이불 속에 곧잘 기여 들곤 했다.  설 명절에 일가친척이 한 구들 미여 지게 모였을 때도 어김없이 내 품만을 찾아 드는《빱까》를 보고 모두들은 고양이와 참으로 자 별난 사이라고 혀를 차군 했다.       피폐했던 당시의 문화환경에서 중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 영화 한 부가 있었다.    북한예술영화 《꽃 파는 처녀》였다. 영화를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보았던 나는 이렇게 좋은 영화를 《빱까》에게도 보여야지 하고《빱까》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갔다. 새끼를 품은 캥거루처럼《빱까》를 외투 속에 품고 갔다.    영화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여 주인공의 불우한 운명을 두고 사처에서 훌쩍이는 흐느낌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에 섞여 간간이 고양이 울음소리도 새여 나왔다. 관중들의 경아(驚訝)와 불만에 찬 눈길 속에 영화관 관리일군에게 귀를 잡혀 나는 문밖으로 《축출》당하고 말았다.      이와 유사한 일은 후에도 있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그 사이 훌쩍 웃자란  《빱까》를 구경시키러 갔다가 간호원의 사이렌 같은 비명 속에 허겁지겁 병동을 뛰쳐나온 적도 있다. 나는 그 무슨 남의 장독대를 깨뜨린다던가 길가는 계집애들 머리 태를 쥐여 당기는 그런 악동이가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도 본지가 무척 오래된 《빱까》를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었을 뿐 이였다.       어느 해 여름, 우리가 쓰고있는 사기그릇을 만들어 내는 당산(唐山) 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놀래 운 대 지진이 일었다. 그 지진의 여파로 우리 이곳에서도  《대지진 설(說)》이 떠돌아 모두들은 공포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 즈음 소조공부를 하면서 주제모임으로《지진이 나면 누구부터 구하겠는가?》하는 대 토론이 벌어 지였다.    누구는 열사 유가족 할머니를, 누구는 영예군인 아저씨를, 누구는 모택동 주석의 초상을 맨 처음 구하겠다고 격앙된 목청들이었다. 그런데 나만은 고양이 《빱까》를 구하겠다고 말해 《계급입장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학급 간부들에게서 질책을 받았다.    초동머리 애들에게서까지도 정치와 불신의 분위기를 짙게 체취 할 수 있었던 그 기형의 세월에 남의 집 양자로 자라면서 내성적이고 섬약한 기질을 가졌던 나에게서《빱까》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친구였으며 나에게 있어서 둘도 없는 값진 보물이었다. 하여 동네의  코 북데기 하나가 당시 유행되던 본보기 극(樣 戱)《홍등기》음악이 든 축음기판 한 장, 용감한 팔레스티나유격대어린이의 사적을 그린 그림책 한 권, 요지경 하나, 그리고 살구 씨 백 알로《빱까》를 바꾸려 했을 때 그 풍성한 조건 앞에서도 나는 왜놈들의 조건을 물리치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중국영화중의 혁명자들 마냥 단연 그 유혹의 《물물교환》을 거절해 버렸다. 그때 나는 동네에서 《책이 많은 아이》혹은《고양이가 있는 집 아이》로 불렸다.    《빱까》의 그 자그만 몸집이 봄 들어 신속하게 붇기 시작했다.《빱까》의 배를 만져보더니 할머니는 고양이가 임신했다고 했다.   《임신이라니요?》   경아의 빛을 띄고있는 나의 볼을 다독여 주며 외할머니는《빱까》가 곧 새끼를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맙소사! 《빱까》하나만도 용용 귀여워 죽겠는데《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가 몇 마리 또 생겨난단 말인가! 지나친 기쁨에 나는 삭신이 막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빱까》를 꼭 안고 집안을 맴돌며 열 뜬 사람처럼 당시의 유행가를 목청 깨져라 불렀다.     《북경의 금산에 금빛해살 비추네    모주석 그이는 금빛의 태양》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 따라 까닭 모를 기묘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자 윗방에는 난데없는 종이박스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속에 맙소사!《빱까》를 꼭 닮은 고양이 네 마리가 눈도 뜨지 못한 채 가지런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양이들은 꽃잎 같은 입술을 열며 미약한 소리로《애웅, 애웅!》울어 댔다. 외할머니는 병원의 아버지에게 보낼 명태 국에서 많이 덜어 밥을 말아《빱까》에게 내 주었다.    그 무렵 우리 집은 경사가 난 집 같았고 숫제 명절기분 이였다. 동네에서도 희한해 하며 구경을 왔고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나는 동네아이들에게서 살구 씨 열 알 씩 예물로 받고서야 새끼 고양이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일주일 가량 되자 제법 구들에서 뛰어 놀기 시작했다. 고양이들이 책상다리며 이불장 모서리를 긁어 자리를 내도 누구하나 탓하지 않았다.     병상에 있던 아버지도《빱까》가 《4태자》를 낳은걸 축하해 병원의 링게르 주사 줄을 결어 만든《금붕어》손 노리개를 나에게 보내 왔다. 그《금붕어》에 줄을 매여 책상모서리에 달아 놓으니 새끼고양이들은 물고기 사냥이라도 하는 듯 《금붕어》를 툭툭 건드리며 재롱을 부렸다. 그 귀여운 새끼 고양이들이 다치면 부서질라 나는 감히 시름 놓고 품에 안아 보지조차 못했다.      그러다 스무날, 꼭 스무날만 이였다. 새끼고양이에게 온 정신을 앗겨있는 나의 애련한 마음에 강타를 안겨준 변고가 있었다.    하교하여 돌아와 보니 새끼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가고 따져 물으니 외할머니가 어쩔 바를 모르며 더듬이며 말했다. 새끼고양이가 잃어 졌다는 것 이였다. 나의 눈앞에서 진짜배기로 그 풍문의 지진이 이는 듯 했다. 나는 책가방을 멘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황소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점심 녘에 햇볕 쪼임을 시키느라 내놓았던 고양이들이 뒤 바자 틈새로 사라진 것 이였다.       새끼를 잃은 《빱까》는 지붕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밤이고 낮이고 가슴 긁는 소리로 울어댔다. 《빱까》는 지붕 위에서 목청 짜내 울고, 나는 지붕아래서 코를 훌쩍이며 울었다.       우리 집 뒤 바자와 인접된 곳은 거울 틀이며 상장 틀을 생산하는 공예미술공장이었다. 그곳 노동자들이 고양이를 채여 간 것 같다고 단정하고 할머니는 공장장을 찾아가 따졌다. 매일이고 울음을 달고있는 나의 지청 구에 밀려 할머니는 여러 번 공장지도부를 찾았고 새끼고양이를 찾을 길 없는 공장 측에서는 그 성화에 못 이겨 적당한 배상금을 내 주었다. 새끼고양이 한 마리에 50전씩 쳐서 도합 2원을 내 주었다.    그래 고작 이것이 새끼를 잃은《빱까》의 아린 상처와 눈물에 대한 보상이란 말인가? 나는 코 잔등이 시큰해 나서 울먹울먹하며 그 돈을 받았다. 그 돈을 특별히 아껴 보관해 두었다가 당시의 아동명작 《밤중에 우는 닭》을 샀다. 그 나의 동년의 정감이 배인 책이 지금도 나의 서가의 안쪽 깊숙이 꽂혀져 있다.     내가 소학을 마칠 무렵, 지긋지긋한 투병생활4년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버렸다.    아주 훌륭한 공무원 이였던 아버지인지라 용정 뿐 아니라 외지에서까지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2백여 명을 넘겼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변고와 그렇게 많이 몰려 든 사람들, 슬픔에 자기를 던지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놀란 나머지 나는 울음조차 울지 못했다. 그저 현관 구석 쪽에서《빱까》를 품에 안고 고양이와 사람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서 옹송그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고향의 말발굽산 기슭에 묻었다.    장례식을 치르던 날, 나는《빱까》을 품에 안고 차에 올랐다. 외할머니가 꾸짖었지만 왜였던지 부득부득 우겨가며 《빱까》를 산에까지 데리고 갔다.    붉은 흙을 헤치고 아버지를 묻었다. 봉분(封墳)을 쌓은 뒤 검찰계통의 아버지의 옛 친우들이 권총을 빼들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랐던지《빱까》가 내 품에서 후닥닥 빠져 나와 산자락 아래로 내 뛰기 시작했다.     《빱까, 빱까!-》    갈린 소리를 지르며 나는 덴겁해《빱까》의 뒤를 쫓아갔다. 나무그루에 걸려 자빠지고 풀대 가지에 손을 긁히면서도《빱까》를 쫓아갔다.    그러다 어느 한 커다란 무덤 앞에서《빱까》가 멈춰 섰다. 멈춰 서서는 숨이 턱에 닿아 달려오는 나를 말똥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때는 늦가을이었고 추위 때문 이였는지 아니면 놀라움 때문이었던지《빱까》는 몹시도 떨고 있었다. 나는 덮쳐 가《빱까》를 품에 안았다. 그제야 하늘같은 슬픔이 감지되었고 나는 못나게도 남의 무덤을 바람막이로 삼고 앉아 《빱까》와 함께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새끼를 잃은 뒤《빱까》는 몹시 수척해 졌다. 일전과는 달리 사람 곁에 오기도 싫어했고 고기 국에 밥을 말아 주어도 잘 먹지를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 며칠 안 되어《빱까》는 집을 나가 버렸다.    하루가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도 《빱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로《빱까》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기재에 의하면 고양이가 사람 집에 살고 길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5천년 이상 된다고 한다. 이면에서 개에 비해서는 4만 5천년이나 늦다고 한다. 성경에도 고양이를 언급한 구절만은 없다.    그러나 동년의 이 한 단락의 정감의 경력 때문인지 나는 동물들 중에서 고양이를 가장 편애하는 쪽이다.    인간과 가장 도타운 신변의 또 다른 동물인 개에 비해서도 그렇다. 어찌 보면 고양이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한 두 마디의 호령에도 엎디고 기고 혀를 빼무는 개에 비해볼 때 고양이의 자존은 더 높은 것이다. 고양이와《사촌지간》인 호랑이며, 치타며, 사자들만 봐도 고양이 가문의 위용이 엿보인다. 아직도 그들과 비슷한 《야성》을 고양이는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야성》은 인간이 그들에게 들 씌운 정의이고 그들 쪽의 정의를 보면 그것은 곧바로 인간이면 너나가 갈구하는 자유인 것이다.    흔히들 사람의 성격을 동물에 빗댈 때 사회 친화적 인간형을 《개 과(科)》로 분류하고 홀로 서기 인간형을《고양이 과》로 분류한다. 하여서인지 전설이나 이야기, 지어 아이들의 그림영화에서 까지 고양이는 주인공 역을 놀지 못한다. 어느 시공간, 어느 짐승의 집단에까지도 인간들과 꼭 같은 사회질서와 선악대립을 부여하고《개 과》의 영웅을 선호해야 직성이 풀려하는 사회의 진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보면 고양이에게는 다른 동물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개성과 매력, 더 많은 낭만과 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유아적인 발상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던 동년에서 멀리 지나온 내가 의연히, 그리고 다시금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다.      촬영에 애호가 있었던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갈매기》표 사진기로 나와《빱까》가 함께 있는 장면을 남겼다. 사진 속의 여덟 살둥이인 나와 《빱까》는 유난히 반짝이는 눈매를 하고 앞쪽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 색 바랜 사진조차 지금은 잃어버려 없다. 모 잡지사에서 《인간과 동물》기획특집을 꾸리면서 나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적은 글을 실으면서 그 사진을 그만 분실해 버렸던 것이다.    《빱까》는 이제 그저 잡지 속에 흐릿한 영상으로만 남았다.    매양 그 잡지를 뒤적여 낼 때마다 나는 천지에 자취도 없이 사라진《빱까》의 이름을 되 뇌여 보군 한다.    내 동년의 꿈과 내 동년의 정감을 지니고, 부식된 기억의 어둠 속을 홀로 바람처럼 가버린 한 마리의 영물(靈物)을...   오, 나의 사랑 나의《빱까》!   "청년생활" 1995년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39    아픔을 클릭하다 댓글:  조회:2152  추천:15  2015-12-25
평론 .   아픔을 클릭하다   ― 김혁의 중편소설“www.아픔.com”에서 본 우리 공동체의 아픔   김춘택     소설가로서 자신의 좋은 소설을 쓴다는 것보다 선배 소설가의 좋은 소설을 만난다는 것 흔열(欣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김혁작가의 까마득히 먼 후배소설가로서 김혁 작가의 소설기량을 흠모하며, 그의 우수한 소설들을 애염(爱染)한다. 그런 나에게『도라지』편집부로터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을 선독(先读)하고 촌평(寸评)을 써달라는 청탁이 와서 선감(先感)할 기회를 가졌으니 나로서는 여간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경외지심(敬畏之心)을 가지고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을 열독하고 자격미달의 촌평을 쓰고 있지만 이의 동기는 본시 전문적인 문학평론가가 아닌 후배소설가의 신분으로서 선배소설가인 김혁작가의 우수한 소설을 독해(读解)하고 금후 자신의 소설창작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보감으로 삼기 위한데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나는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을 통해 김혁작가를“우리 중국조선족 삶의 뼛속 깊이까지 내려가서 우리 중국조선족 삶의 내면진통까지 깊이 파헤치는 예리한 작가”라고 경탄하고 싶다. 왜냐하면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은 급속히 한국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국조선족의 병폐적인사회에서 한국화에 익숙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한국화의 이질적인 의식체계와 갈등하여 아픔을 겪고 있는 두 주인공의 엇갈리고 비참한 운명을 세세히 파헤쳐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이 진통하는 아픔을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김혁작가는 굳이 오늘날 우리 중국조선족이 진통하는 아픔에 대한 그 치유와 극복의 대안(代案)을 따로 내놓지 않고 있는데 이는 우리 독자들(평자도 예외가 아니다) 스스로가 사색하여 찾아내야 할 몫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본고에서 독자(读者)의 신분으로서 평자는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에 대해 나름대로 독자(独自)적인 분석과 이해를 가져보기로 한다.     스토리 먼저 읽기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은 한국에서 아내를 잃고, 단짝친구를 잃고, 자신도 공상(公伤)을 입어 팔을 다친 행복이 헤어진 지 16년이 되는 딸을 찾기 위해, 친구의 골회를 묻어주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그는 갈 곳이 따로 없다.    강보에 쌓인 딸애를 처녀인 처제에게 맡겨버리고 16년 만에 찾아오니 아빠의 얼굴을 모르는 딸애는 그를 만나기를 거부하고, 처제 역시 언니를 데리고 한국에 나가 이혼을 하고 희귀병으로 죽게 한 그를“불량배”를 피하듯 무시하고, 외면한다.    그리고 친구의 골회를 묻어주기 위해 고향마을인 과수4대에 가지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과수마을 대신 넓은 골프장이 펼쳐져 그를 외계인처럼 대한다. 별수 없게 된 행복은 박제품으로 유일하게 남은“선조사과배나무”밑에 단짝친구 배씨의 골회를 뿌려줄 수밖에 없다.    고향을 등지고 한국에 나가 행복을 찾으려 했다가 가족의 파산으로 상처를 입고 오도가도 할 곳이 없는 행복은 결국“황금족도”라는 안마원에서 요행 임시거처를 마련하지만 그곳에서마저 자신과 동병상련의 안마원주인장여자를 만나게 되어 그에게 아픔과 슬픔을 더해줄 뿐이다. 행복은 안마원주인장여자가 키우는 강아지“지노”의 장례를 통해 안마원주인장여자도 한국에게 나갔다가 다리 하나를 잃고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여 아들까지 빼앗긴 아픔과 슬픔을 알게 되고, 서로의 슬픔을 합성하지만“지접”이 잘 되어주지 않고 있다. 아들을 빼앗긴 안마원주인장여자와 딸을 만날 수 없는 행복은 서로의 아픔과 슬픔으로 보듬을 수 없다.    나중에 행복은 딸애의 용서로 딸애를 만나지만 딸애는 바로 그 자신이 아픔의 고독을 달랠 때“애폴”이란 사이트에서 화상으로 만났던 이성친구“쌍화점”이었음을 알게 되고 정신적으로 붕괴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이 소설의 스토리는 바로“우리 중국조선족들이 행복을 얻으려는 삶의 뼛속 깊이에서 상처를 입고 내면진통을 겪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중국조선족에게 한국은“코리안 드림”을 마련해줄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한국이 중국조선족에게 줄 수 있는“코리안 드림”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극소수의 중국조선족에게만 차례질 수 있는 기약할 수 없는 공상(空想)에 불과하다. 반대로 한국의“코리안 드림”을 바라고 한국으로 나간 중국조선족들은 파산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의 스토리가 말해주다시피“코리안 드림”을 바라고 나갔던 행복은 한국에서 아내를 잃고 파산되어 중국으로 돌아오지만 젖먹이로 시집을 가지 않은 처제의 손에서 자란 딸애의 버림까지 받는다. 그리고 그가 버리고 간 고향도 골프장으로 변해 단짝친구 배씨의 뼛가루 한 줌도 받아주기를 거부한다. 이런 현실은 현재 우리 중국조선족농경사회의 진모이다. 중국조선족이 땅을 버리고 한국에 가서 돈벌이를 하는 동안 그들의 고향은 이방인들에게 흡수되어 중국조선족이 나중에 돈을 벌어 다시 고향에 돌아와도 고향에는 발 디딜 자리조차 없다. 때문에 중국조선족은“멧돼지 잡으러 갔다가 집돼지를 잃는 셈”이 되는데 중국조선족은 모종의“행복”을 찾던 와중에 모종의“아픔”을 먼저 겪게 되는 것이다. 중국조선족이 모종의“행복”을 찾기 위해 먼저 모종의“아픔”을 겪는 것은 당연지사이기도 하다.    행복의 아픔 VS 주인장여자의 아픔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에서 행복과 안마원주인장여자는 각자 뼈저린 아픔을 가지고 있는데 어설픈 맞대결을 펼치고 있다. 행복은 한국에서 공상으로 팔 하나를 잃고, 안마원주인장여자는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발 하나를 잃는데 이는 그들의 첫 번째 대결로“행복은 주인장여자가 한 다리를 쩔룩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발을 옮길 때마다 행복은 왠지 다친 팔에 따끔따끔 통증이 도져오는 느낌이었다.”는 동병상련으로 무승부를 내리고 서로 보듬게 된다. 행복은“희귀병에 의한 이혼 후 한 달도 못된 죽음”으로 아내를 잃고, 안마원주인장여자는“한국에서 들려와서 입원수속을 하면서 이혼수속도 함께 하는 것”으로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는데 이는 그들의 두 번째 대결로 행복이 서글픈 승부를 살짝 거두고 만다. 행복은“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의 몸인 처제에게 강보의 딸을 맡기고 16년 만에 나타났기”에 처제로부터“강보의 애가 처녀꼴이 잡히도록 여직 뭘 하다 이제야 나타났냐?”는 매도를 받으며 딸을 만날 수 없고, 안마원주인장여자는“애가 돌도 못 되어 돈에 환장해 집을 뛰쳐나간 년이니 볼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으로부터 아들애를 빼앗겼는데 이는 그들의 세 번째 대결로 안마원주인장여자가 승부운세를 타고 있다. 그러나 행복과 안마원주인장여자는 자신들의 뼈저린 아픔을“슬픔합성”으로 서로 보듬기로 하는데“지접(止接)이 잘못된 괴상한 과수의 가지처럼 왜곡된 형상으로 한데 얽혔다. 그리고는 부서진 뼈가 잇기 듯 찢겨진 피부가 아물어 붙듯 서로에게 들붙는 것”으로 어설픈 대결을 마무리하고 있다.    배씨의 장례 VS 지노의 장례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에는 두 가지 이색적인 장례를 상당히 많은 편폭을 들여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행복의 단짝친구 배씨의 장례와 안마원주인장여자가 키우던 강아지 지노의 장례이다.     행복은 한국에서 객사한 단짝친구 배씨의 유골을“술만 마시면 유난히도 고향타령을 하던 친구이기에 차마 타향 땅에 뿌릴 수 없어 반드시 고향에 가져다 안치하기”로 마음먹고 온갖 불편을 다 겪으며 끌고 다니다가 요행 고향에 가져다 뿌리는데 그 풍경은“배꽃가루 같이 뼛가루가 하얗게 날리고”있다. 장례란 참으로 암담한 풍경이지만 작가는 뛰어난 필치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는데 작가는 아마도 죽음의 아픔을 모종의“행복”으로 바꾸는 듯하다. 행복은 선조사과배나무 곁에 단짝친구 배씨의 골회를 뿌리면서“최할아바이 배씨가 왔습니다. 성이 배씨라서인지 배 농사를 그렇게 잘하던 배씨가 왔습니다. 배 농사를 그렇게 참하게 하던 친구라서 이제 아바이 곁에 모시니 같이 말동무를 하세요.”라고 고해성사를 하는데 이는 배씨의 안식처가 사과배의 고향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과배는 바로 중국조선족의 기원전설이고, 중국조선족의 문화형상이다. 때문에 작가는“성이 배씨(인간)여서 배씨(과일) 곁으로 가야 한다.”는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배씨가 중국조선족으로 중국조선족의 고향에 묻혀야 한다는“낙엽귀근의식”이다.     안마원주인장여자가 6년째 함께 살던“아이”지노의 장례도 이 소설에서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현재 중국조선족사회는 한국출국으로 인해 견우직녀가정이 많은데 강아지는 서로 떨어져 있는“견우”혹은“직녀”의 양쪽 역할을 충분히 잘하고 있다. 안마원주인장여자에게 자신이 6년이나 함께 살았던 지노는 바로“만날 수 없는 아들”인 셈으로 지노의 죽음은 또 다른 아픔이 된다. 그리하여 안마원주인장여자의 마음에는“얼핏 보면 그냥 흙더미로 보일 앙증맞게 작은 봉분”이 또다시 생겨나게 된다.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VS 중국조선족의 고독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은“중국조선족의 고독”에 대해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이는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자신의 노벨상수상연설문인「라틴아메리카의 고독」에서 유럽의 우월주의와 맹동적인 당위성에 대해 예리하게 칼질한“항해술의 진보로 인해 아메리카와 유럽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우리들의 문화는 이와 반대로 더욱 먼 곳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강조된 듯한 느낌이다.”와 다름 아니다.    때문에 우리 중국조선족도 자신의 모국인 한국의 우월주의와 맹동적인 당위성에 대해“중한수교이후, 중국조선족과 한국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우리들의 문화는 이와 반대로 더욱 먼 곳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엄연히 가슴 아프게 한다.”고 예리하게 칼질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한 술 더 떠서“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방식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면 우리는 한층 더 자유롭지 못한, 한층 더 고독한 존재가 되어버릴 뿐이다.”고 스스로 라틴아메리카를 비난하면서 자아반성의 가시를 뽑고 있는데 우리도“우리 중국조선족의 것이 아닌 방식을 통하여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면 우리는 한층 더 자유롭지 못한, 한층 더 고독한 존재가 되어버릴 뿐이다.”고 스스로 자신을 비난하면서 자아반성의 가시를 뽑아야 할 것이다.    과수원 VS 골프장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에서는 노스탤지어의 의식도 과수원 VS 골프장의 대결형식으로 첨예하게 반영되고 있는데“최로인이 백여 년 전에 이 마을로 이사 오면서 함경남도에서 가지고 온 사과나무가지에 이곳의 배나무가지를 지접했다. 혹독하게 추운 이곳의 기후에도 나무는 용케도 살아남아 이듬해부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았다.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닌 그것은 어른들의 주먹만큼 크고 살이 많았고 당도가 높았다. 맛본 사람들마다 천도(天桃) 못지않다고 감흥스럽게 엄지를 빼들었다.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지접해 갔고 어느 때부터인가 마을은 과수원으로 변모해 갔다. 한때 이 마을의 사과배는 관내 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까지 수출되어 마을이 인방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던 과수4대는“사라지고 없었다. 토네이도에 날아갔던지, 아니면 쓰나미에 밀려갔던지… 공상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을은 말끔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산등성이에 사과배나무를 배경으로 그 아래 앉았던 노란지붕 회벽집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연한 녹음이 눈 뿌리 모자라게 펼쳐져 있다. 시원한 녹음이 이렇게 공포로 안겨오기는 처음이었다. 마을의 진산(鎭山)격이었던 산이 이제는 더는 과일을 달지 못하는 산, 콘크리트로 뒤덮인 산으로 돼”버린 골프장으로 행복의 앞에 나타난다. 과수원 VS 골프장의 대결에서 골프장이 강세로 승부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 중국조선족사회의 여기저기에서 연출되고 있다.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마을에 대한 행복의 그리움은 곧바로 중국조선족의 노스탤지어(nostalgia)의 반영이기도 하다.    아픔의 극복 VS 먼 행복의 대안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에서 독자들에게 깊은 사색을 남겨주는 앙금(沈淀物)이 있는데 그것은 행복과 안마원주인장여자가 어떻게 아픔을 극복하고 먼 행복의 대안을 찾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소설의 마무리를 볼 때 행복과 안마원주인장여자가 아픔을 극복할 희망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아픔이 더 첨가되었을 뿐이다. 행복이 요행 딸애의 용서를 받고 딸애를 만나는데 그의 딸애는 바로 행복이 고독을 달랠 때 드나들던“애폴”이란 사이트의 화상공간에서 이성친구로 사귀었던“쌍화점”이었다. 화상공간의 이성친구“쌍화점”이 자신의 딸임을 알았을 때 행복의 아픔은 완전히 극점에 다다라 정신적으로 붕괴상태에 이르고 만다. 안마원주인장여자도 자신의“애인”인 강아지 지노를 잃고 행복과의 하룻밤정사“슬픔합성”을 통해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기에는 너무 묘연하다. 때문에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에는 행복과 안마원주인장여자가 극복해야 할 아픔과 대결할“먼 행복의 대안”은 없다. 적어도 행복의 딸과 안마원주인장여자의 아들의 대에서나 묘연한 희망을 가져볼“먼 행복의 대안”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두 남녀 주인공의 아픔은 이미 행복을 잉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아프고 난 뒤에 얻는 것은 결국 행복이 아니라 반성인 것이다.       이상으로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을 읽고 평자의 나름대로 독자(独自)적인 분석과 이해를 가져보았지만 나 자신의 편파적인 독해로 인해 작가의 창작의도를 많이 왜곡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나는 소설을 쓰는 초학자로서 오늘 김혁작가의 우수한 신작소설 한편을 작가다음, 편집다음 세 번째로 읽으면서 내 소설창작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좋은 기회를 가져 무엇보다 기쁜 심정이다. 순수한 독자든, 작가이든, 문학비평가이든 한편의 좋은 소설을 만나 재미나게 읽거나 반성하면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김혁작가의 중편소설「www.아픔.com」을 읽을 때 중국조선족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주인공 행복과 안마원주인장여자가 겪고 있는 아픔을 함께 겪게 되고, 공감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역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얼마간 씩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고로 나는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 행복 찾으려면“www.아픔.com”에 들어가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곳에는 아픈 자가 행복을 찾는 반성의 뼈저림이 있기 때문이다.   "도라지" 2015년 6호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38    민족교육의 효시- 명동학교 댓글:  조회:2040  추천:11  2015-12-21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3)   민족교육의 효시- 명동학교 ​ 김 혁 ​   명동학교의 창립당시의 모습 ​ 민족의 교육사와 반일운동사에서 단초를 열어젖힌 리상설의 "서전서숙"은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폐숙 (废塾)되였지만 그와 더불어 룡정에서 수십리 떨어진 명동이라는 마을에서는 큰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 구한말 일제의 횡포로 나라를 읽고 고향을 잃은것을 통탄했던 김약연 등 회령의 학자들은 1899년 가족과 10여 가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명동지역(지금의 룡정시 지신향 명동촌)정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차렸던 몇 개의 서재를 합쳐 사립 명동서숙을 세우고 룡정 서전서숙의 정신을 이어 받기로 의기투합되였다. 그리하여 "명동서숙"이 1908년 4월 27일에 창립되였다. 초대숙장으로는 김약연이 맡게 되였다. 숙장부터 교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피 끓는 조선의 반일애국지사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였다. "명동서숙"은 창립된 첫해부터 잘 꾸려져 이듬해 4월에 현대 멋이 물씬 풍기는 명동학교로 개창 되였다. 1911년 3월 김약연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명동학교에 녀학부를 세웠다. 이 역시 중국조선족 이주사에서 처음으로 있은 녀성교육으로 된다. ​ 김약연은 학과목의 중심을 조선민족의 말과 글을 가르치고 조선의 유구한 력사와 지리를 가르치는데 두고 학생들에게 민족자부심과 반일의식을 키워주기에 힘썼다. 후에 일제침략자들이 사립학교들에서 조선어와 조선력사, 조선지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던 시기에도 김약연은 여전히 가르치게 하였다. 명동학교는 갈수록 생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져 뜻있는 청년들은 연변 각지와 남북만, 조선, 로씨야의 연해주 등지에서 륙속 이주민들의 “리상향”인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조선에서 피신해 온 독립지사들은 교원으로 되여 강단에 서서 수많은 반일지사들을 길러냈고 이들은 후날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 1914년 5월 28일자 “신한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간도에 있는 명동예수교학교는 설립한 지 4년에 교무가 날로 진흥하며 학생 수가 더욱 증가하여 150여 명에 달하였으므로 장차 학교를 크게 건축하고 교육을 더욱 확장하고자 하는 중이라 하더라” ​ 명동학교는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운영되였다. 당시 선생들에게는 월급이 따로 없었다. 독신으로 와 있는 선생님은 돌림 차례로 학부모네 집에서 한 달씩 주숙 하거나 한집을 정해놓고 주숙하게 되면 그 땔나무와 쌀을 학부모들로부터 거두어 하숙집에 들여놓았다. 가족이 있는 선생은 학전(學田)을 적당히 부치게 하였다. 이렇듯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명동학교의 여러 가지 사업은 정연하게 잘 진행되였다. 수업이 눈에 뜨이게 성과적으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외활동과 사회활동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여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반일민족의식과 독립사상으로 학생들을 각성시켰다. 명동학교후원회에서는 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10여년간 열심히 노력하여 모은 의연금 800여원으로 1917년에 13개월이란 시공을 하여 드디여 현대식 교사를 짓게 되였다. 철저한 교육운동, 치렬한 항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었던 명동촌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들이 즐겨 찾는 아지트가 되였다.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안중근도 명동촌의 뒤산의 명암골을 찾아 들어 권총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곳에 두달 가량 체류하면서 김약연 등 지사들과 항일구국의 장구책을 론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부대와 김좌진 부대 그리고 1920년 1월 3일 명동과 불과 10여리 리 떨어진 동량리어구에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선 회령으로부터 룡정으로 보내는 일화 15만원을 "철혈광복단"에서 탈취한 의거에는 명동학교 출신이거나 명동과 관련된 독립군 용사들이 적지 않았다. ​ 명동촌은 당연히 일제의 눈에 든 가시”로 되였다. 일제는 명동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더욱 엄밀히 감시하였다. 1920년 10월 북간도지역을 피바다로 만든 "경신년 대토벌"이 일제에 의해 일어났다. 김약연은 반일시위의 주모자로 관헌에 체포되였고 일제는 명동에 덮쳐 들어 수백명 군중을 명동학교운동장에 몰아다 놓고 독립운동자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일제토벌대의 위협공갈앞에서도 명동사람들은 의연했다. 헛물만 켜게 된 극악무도한 일제는 명동학교에 불을 질러 명동사람들이 터를 닦고 세운 명동학교를 재더미로 만들었다. ​ 1922년 가을, 민국관청에서 석방되여 명동에 돌아온 김약연은 또다시 명동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1924년 갑자년 특대 흉년이 덮쳐왔다. 명동학교는 운영난에 시달렸고 왕년의 생기를 잃어갔다. 로령에도 불구하고 명동을 지켜내려는 김약연의 노력은 외롭고 처절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중학부가 취소되고 중학부의 교원들과 일부 학생들이 룡정의 여러 중학교로 옮겨지자 명동학교도 교회에서 경영하는, 남녀공학학교로 바뀌였다. ​ 1928년 환갑연의 김약연은 솔가하여 룡정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창설한 명동학교는 력사의 갈피에 그 존재를 또렷이 적었다. 명동학교가 창설되여서부터 중학부가 1925년에 페지 될 때까지 18년간 학교는 무려 1천명의 애국청년들을 양성하여 졸업시켰다. 이 졸업생들은 모두가 항일투쟁에 나섰거나 민족교육사업 그리고 문학가와 저명한 예술가로 청사에 길이 빛날 업적들을 쌓았다. 그중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읊조렸던 윤동주는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아들이자 명동학교 학생으로서 김약연이 가르친 제자였다. 그리고 영화 “아리랑”을 만든 춘사 라운규, “통일의 아버지” 문익환,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등 기라성 같은 명사들이 이곳에서 자라면서 신앙을 물려받았고, 근대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 ​ 새로 복원된 명동학교 (사진, 리련화 기자)​   ​ 이후8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채 담배밭으로 변했으며 “명동학교 옛터”라고 쓰인 표지석만이 외로이 남아 과거 민족운동의 산실이였음을 알려왔다.   그러던 지난 2010년 력사의 뒤안길에 사라졌던 명동학교가 사람들의 주목속에 드디여 복원되였다. 룡정시에서는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룡정을 중국조선족 민족문화도시로 건설하려는 취지로130만원을 투입, 근 일년간의 시간을 거쳐 원 명동학교 자리에다 사연많은 명동학교를 복원하였던것이다. 명동학교 옛 터에 복원된 학교는 당시 평면도에 따라4채의 단층 벽돌 건물로 이뤄졌던1920년대 초의 명동학교 모습을 그대로 재현, 건축면적은265평방메터이고 4개 교실에2개의 사무실로 구성되였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효시이자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던 명동학교는 옛터에 다시 일떠서 당년의 위용을 자랑하고있다.   ​ "연변일보" 2015년 6월 17일   ​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337    【暝想시리즈-12】인연 댓글:  조회:1565  추천:5  20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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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    【暝想시리즈-11】혼자라는 말은 댓글:  조회:1275  추천:11  20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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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暝想시리즈-10】놓다 댓글:  조회:1274  추천:7  20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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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    “드래곤” 신채호 댓글:  조회:1761  추천:11  2015-12-09
칼럼   “드래곤” 신채호   김혁     ​   1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가 제7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 한번 드래곤 소재가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어필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며칠전 드래곤을 소재로 한3D 애니메이션 “드래곤네스트 (龍之谷)” 가 개봉, 흥행을 보이고있다. 드래곤 소설도 다시 강세를 보여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의 해외 인세 수입이 5억원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98년 출간돼 한국 판타지 문학 붐을 주도, 지금까지 모두 130만부 이상 팔려나간 이 드래곤 소설 은2005년 일본에서 출간돼 50만부, 2007년 타이완에 출간돼 30만부가 팔렸으며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과 함께 “올해의 해외 인기작가 20인”에 선정되였다. 게임, 만화,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된 데 이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 드래곤은 소설과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용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쉽다는 특징으로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에까지도 단골소재로 등장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2 80여 년전에 이미 우리 작가가 쓴 드래곤 소설이 있다.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제목의 신채호(申采浩)의 장편소설, 1928년에 창작되었다. 신채호가 베이징에서 망명 생활 말기에 유고로 남긴 이 작품은 우화형태의 혁명소설로아나키즘(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의 교본(敎本)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의 드래곤과 서양의 드래곤이 격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민중의 편에서 동양의 용 미리와 맞서 싸우는 서양의 용 드래곤. 미리가 끊임없이 민중을 억누르는 봉건주의 압제자의 대표라면, 드래곤은 지상의 민중혁명을 구현해 가는 지도자로 상징된다. ​ 조선 말기의 무력한 봉건왕조와 사대부에 실망한 단재 선생은 룡의 꿈틀임에 빗대어 민족의 활로를 소망하였던 듯하다.   ​ 3 단재 신채호 선생 탄생 135주년 기념식이 일전 한국 청주 충청북도교육청 화합관에서 열렸다.  단재문화예술제추진위원회와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날 기념식에서 충북지사, 충북도교육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해 단재 선생의 약력보고,  헌시 랑송, 단재 시 랑송 등의 형식으로 아버지의 고향인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에서 유년기를 보낸 신채호선생을 기리였다.    탄생일을 맞아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인 등 팔방에서 이름을 떨친 단재 신채호선생의 일대기를 반추해 보았다. ​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단재(丹齋), 한놈, 연시몽인 등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19세에 나던 해인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이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과 전기를 다수 출판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칭다오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 체류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다. 1922년 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의 역사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3년 신채호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1928년 4월 그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가지러 5월 8일 대만의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갈파하였다. ​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고 사흘 뒤 사망하였다.   용띠로 태어나 평생 민족을 위한 용틀임을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 그의 행동과 오래된 판타지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 우리가 나아가야 할 한 방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도 전  
333    【暝想시리즈-9】술이 고프다 댓글:  조회:1407  추천:5  201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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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暝想시리즈-8】속도 댓글:  조회:1295  추천:9  201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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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www.아픔.com 댓글:  조회:3061  추천:20  2015-12-04
     . 중편소설 .   www.아픔.com   김 혁     황금의 발   발이 보였다. 무작스럽게 큰 발이였다. 발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 무슨 구름장우에서 날아내린 요괴가 발로 지상을 내려 밟듯이 발모양의 아크릴 간판은 옥상의 허공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스스 빛을 뿜고 있었다. “황금족도”  남자는 간판이름을 소리내여 또박또박 읽었다.  “’황금의 발’이라, 이름 한번 거창한데” 거창한 이름을 가진 발안마원앞에서 한손은 트렁크를 끈채, 석고를 댄 다른 한손은 목에 붕대로 감아 걸어 가슴앞에 데룽데룽 드리운채 서서, 행복은 간판이름을 읽었다.  황금이라는 용어가 안마원의 높은 소비급별을 말해주는듯해서 그더러 한참이나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그러기를 한참, 한번 들어가보기로 했다. 사실 이 시간대에 이곳 말고는 주변에 불밝힌 려인숙이 없었던것이다. 스적스적 안마원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막상 들어서보니 조도가 낮은 핑크빛 벽등이 밝혀져 있는 안마원은 휑뎅그레했다.  컹, 컹 소리를 앞세우며 구석 어디선가 강아지 한마리가 튀여 나왔다.  베개통만한, 길게 늘어뜨린 털이 눈을 가린 장모의 강아지였다. 작은 강아지는 대적이라도 만난듯 두눈을 호동그랗게 뜨고 행복을 향해 맹렬하게 짖어댔다. 벽등의 빛을 담은 눈망울이 핑크색이다.  부드러운 핑크빛을 따라 반가운 마음에 들어섰는데 맞아주는이는 없고 외려 죄꼬만 강아지가 들어서기도 전에 축객령을 내린다. 다시 나갈가 몸을 돌리려는데 인기척이 났다.  “지노야, 지노” 헐렁한 마고자를 걸친 녀자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정수리에서 핑크빛이 부서져 내렸다. 강아지가 소리를 멈추고 녀자의 다리에 감겨들었다. 녀자가 강아지를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좀 마른편, 40대초반으로 보이는 녀자는 커다란 눈을 들어 행복을 핼금 쳐다보며 말했다. “안마사가 없는데요” 손님의 답을 기다리지않고 또 한마디했다.  “제가 해드려도 될가요” 그 한마디를 눈을 내리 깔며 말했다. 눈초리가 처마처럼 내리덮혔다.  “아니, 안마는 됐구요.” 늦은밤에 안마원을 찾아 그냥 투숙이나 하려던 행복은 문칮거리며 말했다.  “그냥 방 하나 들면 안될가요” “그러세요. 방이 많아요” 번거로워 할줄로 알았는데 녀자가 쉽게 답이 나왔다. 녀자가 강아지를 내려놓고 앞에서 방으로 안내했다. 강아지가 녀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찌걱 찌걱, 조립식 나무바닥이 신음소리를 냈다.  4호방으로 안내한 녀자가 문켠에 서서 말했다.  “계산은 나갈때 하면 되구요. 그럼...” 간단한 안내를 마치고 녀자와 강아지는 핑크빛 너울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녀자의 뒤를 바싹 따른 치켜 올린 강아지의 꼬리가 핑크빛 야광봉처럼 보였다.  찌걱 찌걱, 조립식 나무바닥이 신음소리를 냈다.  좁은 방이였다. 형광막이 작은 텔레비죤이 바람벽에 걸려 있었고 그곁에 분명 포샵을 받았을 거대한 가슴을 가진 수영복차림의 녀자가 모래톱에 선정적으로 드러 누운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방에 창문이 없었다.  방에서 야릇한 냄새도 났다. 방향제냄새였다. 그냥 방향제이면 좋으련만 화장실용 방향제를 뿌린것 같았다. 컴퓨터도 없었다.  창문이 없는 방을 둘러보노라니 불현듯 숨막히는 압박감이 가슴을 조여왔다.  행복은 침대가녁에 걸터앉으려다 말고 방을 나왔다.  안마원은 물밑속처럼 괴잠잠하다.  어두운 복도에서 주춤거리다가 불이 새여나오는 방을 향해 다가갔다. “저기요…” 주인장을 불렀다. 컹!하고 또 강아지가 짖었다. “지노야!” 녀자의 소리가 들렸다. 이어 나무바닥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리며 주인장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세요?” 핑크빛을 머리에 떠인채 녀자가 물었다.  “저, 인터넷이 되는 방이 없어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혔다. “돈은 더 드릴테니깐요.” 녀자가 잠간 동을 두더니 말했다. “따라오세요” 조립식 나무바닥이 다시 찌걱찌걱 신음소리를 냈다.  그제야 행복은 주인장 녀자가 한 다리를 쩔룩이고 있음을 알아차릴수 있었다. 그녀가 발을 옮길때마다 행복은 왠지 다친 팔에 따끔따끔 통증이 도져오는 느낌이였다.  방금보다는 좀더 큰 방이였다.  침대, 탁자, 텔레비죤같은 시설 외에도 욕조가 딸린 화장실도 있었다. 창문도 있었다. 커튼을 열어 보았다.  멀리 네온사인이 분만해오르는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무엇보다 창문아래의 탁자에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제법 신형으로 보이는, 스크린이 큼지막한 컴퓨터였다.  “계산은 나갈때 하면 되구요. 그럼...” 녀자가 또 한번 나무바닥을 울림통삼아 연주하듯이 절주맞은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행복의 시선이 탁자우에 놓인 사진틀에 머물렀다. 액자속에는 사춘기 소년으로 보이는, 계집애처럼 얼굴이 하얀 남자애와 엄마인듯한 녀인이 목을 얼싸 안고 있었다. 남자애와 엄마는 행복감으로 입매에 웃음을 가득 물고 있다.  그 엄마가 바로 주인장이였다. 커다란 눈망울에 웃는 입매가 시원한, 밉지 아니한 얼굴이였다.  아크릴 간판이 내리쏟는 불빛이 창문의 커튼에 어룽거렸다.  씻기도 귀찮아 행복은 그대로 침대에 벌렁 드러 누워 버렸다.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다시 일어나 트렁크를 열었다.  왼손으로 서툴게 트렁크의 지퍼를 열고 무언가 조심스레 꺼냈다. 한손은 석고를 대여 한손으로 하기에 행동이 서툴었지만 조심스럽게 그 물건을 꺼내 탁자우에 올려 놓았다.  탁자우에 정히 올려 놓은 그것은… 납골함이였다.  납골함을 멀끄러미 한겻이나 지켜보았다.  가벼운 한숨 한번 짓고나서 남자는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다.   사라진 과원   “싫담다, 아이 만나겠담다” 상대는 딱 잘라 말했다.  “처제, 그래도 처제가 좀 설복해 보오” “싫담다. 애가 만나기 싫담다”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염천의 마른 저수지바닥처럼 건조했다. 칼로 베듯 단호하게 그 한마디만 복창했다.  “애가 아이 만나겠다고, 죽어도 아이 만나겠다고 잡아떼는데 낸들 무슨 수가 있슴까?” 행복은 높은 말벽에 부딛쳐 있었다.  건조한 고성이 수화기속 구멍을 타고 귀구멍을 후볐다.  행복은 전화부스앞에 멍하니 서버렸다.  상대가 전화를 놓았던지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뚜뚜…하는 통화 단절음이 들려 왔다. 그제야 행복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픈 팔을 부여잡고 돌아섰다.  “돈은 내고 가야지, 돈” 전화부스속 아낙이 앙칼지게 소리 질렀다.  바삐 지폐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건 또 무슨 귀신딱지람니까?” 아낙이 염소수염 령감이 그려진 퍼런 지폐장을 받아들고 뜨악한 기색을 지었다.  행복은 앗차하고 소리를 지를번했다. 그가 내놓은것은 천원짜리 한화였던것이다.  호주머니를 뒤집어봐도 인민폐가 없었다. 나올리가 없었다.  “어쩌지요. 어제밤 금방 귀국해서 환전할새가 없었네요.” 행복이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거스름돈 안 받을게요. 기념으로다가 받아두세요” 행복이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말했다.  “움마 별꼴이다. 정말” 아낙이 그냥 가라는듯 턱짓을 해보았다.  “감사합니다” 행복이 몇걸음 가다가 뒤돌아 보았다. 아낙이 전화부스에서 몸을 반쯤 내민채 돈을 쳐들고 해빛에 비추어보고있었다.  어디로 갈가 멍하니 행동방경을 구하다 무엇이 생각났던지 행복은  종종걸음을 다우쳤다.    행복은 또 한번 그 자리에 얼빠져 버렸다. 번지수를 잘못찾고 축문을 한참 외운 무덤앞에서 어찌할바를 모르는 묵은 문상객의 심경이면 이럴가?   이 놀라움, 이 난감함…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토네이도에 날아갔던지, 아니면 쓰나미에 밀려 갔던지… 행복이네 마을 과수4대는 사라지고 없었다. 공상영화의 한장면처럼 마을은 말끔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산등성이에 무성한 사과배나무숲을 배경으로 그 아래 앉았던 노란지붕 회벽집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연한 록음이 눈뿌리 모자라게 펼쳐져 있다. 시원한 록음이 이렇게 공포로 안겨오기는 처음이였다.  산과 언덕이 바뀌는 이변을 행복은 실감하고 있었다. 하긴 16년만에 밟아보는 고향이였다. “십년이면 뽕밭이 바다로 변한다”는데 십년하고도 반십년만에 찾았으니 바뀔법도 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하도 심해 행복은 현실감을 잡지못해 허우적거렸다.  록음을 가르며 무언가 휙 날아 지났다. 그 물체에 눈길을 주었다.  하얀 그것이 새려니 했는데 아니였다. 그것은 공이였다.  공이 날으고 있었다.  금방 티샷을 날린 골프모자를 쓴 이가 그 공을 쫓아가고 있다.  콩나물대가리를 한껏 확대해 놓은것같은 골프채를 메고 종종 걸음으로 삼각기발을 세운 홀쪽으로 가고 있다. 뒤로 앙증맞은 전동차가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졸졸 뒤따른다. 마을은 사라지고 대신 골프장이 들어 서 있었다.  골프장은 마을의 초가를 밀어내고 과수원을 밀어내고 산등성이를 타고 멀리까지 뻗었다. 휙 공이 가까이 까지 날아와 떨어졌다.  유니폼차림의 아가씨 하나가 말총머리를 찰랑 거리며 달아와 공을 주어들었다.  “여기 과수4대 자리가 맞지요?” 아가씨는 외계인을 보기라도 하듯 행복을 빤히 쳐다보다가 모른다는둥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나서 뛰여 가버렸다.  아가씨의 도도록한 엉덩이를 멍하니 지켜보는데 클럽하우스에서 누군가 나와서 행복을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올수록 제복차림을 가려볼수 있었다. 경비원으로 보이는 30대의 남자는 약지로 코구멍을 후비며 다가와서는 행복을 향해 물었다.  “용건이 뭡니까? 여기 막 들오면 안되는데…” “아, 이 마을 살던 사람인데, 여기 과수4대자리 맞지요?” 경비원이 풀럭 실소를 터뜨렸다. “골프장이 선지도 8년째인데…” 경비원이 눈시울을 좁히며 행복의 일신을 훑어보았다. 식지 약지를 바꾸어가며 코구멍을 열심히 후볐다. 3등배처럼 못생긴 큼믹한 코를 가진 경비원이 말했다.  “과수4대 없어요. 4대가 아니라 7대 8대 13대 다 없어요. 싹 다 이사가고 밀어버렸지요.” “그럼 여기 과수나무도 다 베여버렸답니까? 그 많던 배나무를” “그럼요” 경비원이 코에서 후벼낸 이물질을 탁 튕겨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휙익, 공이 하얀 새처럼 머리우를 날았고 행복은 탄환이 없는 총을 작대기처럼 든 사냥군처럼 멍한 시선으로 그 공의 비상을 쫓았다. “아저씨! 그만 나가세요. 이젠” 이번에는 약지로 귀구명을 후비면서 경비원이 재촉했다.       “애폴”이라는 이름의 사이트였다.  술취한 나그네가 허우적이며 재를 넘다가 우연히 만난 주막같이 또 한번 걸치려 들리게 된 채팅 사이트… 사과라는 이름이 좋아서 들려보았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그렇고 그런”사이트였다. 녀자 욕탕에 잘못 들어왔나 움찔하기까지 했다. 온통 로출이 심한 녀자들이 선정적인 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행복은 그전에는 “그렇고 그런” 사이트에 한번도 들어가 본적이 없는 백지같은 순둥이였다. 컴퓨터를 켜고 유희실에 들어가 트럼프장이나 번지는 정도의 그였지만 그런던 어느 날 배너광고가 깜박거리며 뜨는지라 무심하게 누르고 들어갔더니 눈이 휘둥그레해질 장면이 펼쳐졌다.  몸매도 좋고 말씨도 상냥한 아가씨들이 홀딱 벗은 알몸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천국이 따로 없나 싶었다. “무료 체험”은 몇분도 안돼서 끝났고 아쉬운 감각이 들었다. 자리에 누웠으나 아가씨들의 환장하게 눈부신 몸매가 눈앞에 아른 거렸다. 잠을 깡그리 반납해야 했다.  새벽녘에 일어나 다시 컴퓨터를 켰다. 결국 돈을 결제하고 화상채팅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동포 인부들을 개떡주물듯이 하대하는 건설현장의 십장을 뻰찌로 머리통을 갈겨 쓰러뜨리고는, 몇달이고 허접한 모텔에 숨어 살때 들어가게 된 사이트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쌍화점”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아가씨였다.  멀미날듯 하얀 피부를 가지고 늘 토끼귀 머리띠를 하고있는, 그녀의 코의 왼편 언저리에 아래우로 두개의 짐이 가지런히 있었다. 그녀와 나눈 대화들, 그녀의 웃음 한 조각, 눈빛 하나, 관능적인 몸짓조차도 행복은 기억하고 있다.  “왜 해피맨이죠? 닉네임이?” 어느날 그녀가 행복의 닉네임의 의미를 물어왔다.  행복은 자신의 옅은 영어수준으로 그냥 이름자를 번역해 지은것이라고 차마 말 못했다. 간단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냥” 두 글자가 대화창에 떴다. “글쎄 그냥 단거 맞죠. 그냥 넘 평범해서요. 닉네임이…” 코를 찡긋하며 그녀가 웃었다. 웃음을 타고 벗은 가슴이 흔들거렸다.     “사실 제 얼굴에 점이 두개 있어요, 찾을수 있어요?” 행복이가 고정상대로 되자 어느날엔가 그녀가 비밀을 드러내 보였다. “여기 채팅하는 애들 모두다 화장빨, 조명빨, 각도빨 그리고 성형빨이더군요. 오늘 제가 저의 진모를 보여드릴게요. 서비스로다가요” 그녀가 민낯을 드러냈다. 화장을 지운 아가씨의 코언저리에 점이 두개 있었다.  “이쁘네요.” “뭐가요? 제가요?”  “점이요” 행복의 말에 아가씨가 간지러움을 당한듯 쿡쿡 웃었다. 가슴이 더 크게 흔들거린다.  명주실같은 웃음소리가 이어폰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귀전에 훈풍이 이는듯 하다.  “사실 미인들은 모두 짐이 있대요. 코에 있는 점 미인점이라 하죠.” 말해놓고 나서 아가씨가 또 쿡쿡 웃었다. 토끼귀 머리띠가 흔들거렸다.  “한국 배우들 봐요. 녀자들 다 얼굴에 짐이 있던데… 한가인, 전지현 그리고 장동건의 녀자도 모두 코에 점 있어요, 아 정말 배용준의 녀자도 코에 점이 있네요. 그래서 제 닉네임을 ‘쌍화점’이라 달았죠 뭘. 괜찬잖아요 닉네임이, ‘수호천사’, ‘꿀벅지’ 이런 닉네임에 비하면…아 정말 ‘박살공주’라 단 애도 다 있어요” 또 쿡쿡 웃는다.  눈밑의 애교살이 예쁜, 잘 웃는 애다.  눈밑에 애교살이 있는 얼굴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사실 코 옆에 점이 있다면 심성이 착해 사람들에게 리용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그래요. 뜻하지 않는 상황으로 손해를 많이 보는 사람이라나뭐라나. 관상쟁이들 말이얘요. 그래서 화장으로 가리고 있는거죠.” 그녀가 혼자말처럼 종알거렸다.  “아저씨, 맞죠” 어느날 쌍화점이 물었다. “왜 날 아저씨라 단정하남? 그쪽에서 보여? 내가?” 행복이가 허를 찔린듯 바삐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니 요즘은 모두다 핸드폰에 채팅앱을 깔고 해요. 컴퓨터로 하는건 나이가 많은 이들이 대부분이죠.” “나이가, 죄끔 많지” 행복이 넉살을 떨었다.  “여하튼 좋아보여요. 아저씬…” 말하면서 아가씨가 브래지어를 풀었다. 묵직한 가슴이 출렁 드러났다. “내가 보이나 그쪽에서” “아니요. 그냥 감각으로다가…” 그러던 아가씨가 팔로 가슴을 쓸어안으며 또 한번 물어 왔다. “아저씨 조선족 맞죠?” 행복은 알몸으로 마주한것이 그녀가 아니라 자기이기라도 한듯 순간 당황해 했다. 쿡쿡 상대가 웃었다. 흔들거리는 가슴… “아뇨, 농담이얘요. 그냥”   그렇게 살갑던 “쌍화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창은 그냥 꺼져있다.  귀향하기 전날도 “애플”에 들어갔다.  하지만 애타게 찾는 그녀는 없었다.  떠나면서 그녀에게 자신이 조선족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그동안 즐거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제도 오늘도 그녀의 창은 그냥 이사를 떠 난 빈집 마냥 비여져 있다.  서운한 마음에 다른 창을 눌렀다. 한참 다른 사람들과 채팅중이던 아가씨가 반겨 맞았다. “반갑습니다. 해피맨님” 그녀의 방에는 채팅하는 남자들은 많았다.  그녀는 서슴없이 얇은 잠자리같은 원피스를 벗어 던졌다.  브라자도 하지않은 가슴이 출렁 드러났다. 분명 보정물을 넣은듯 비현실적으로 큰 가슴이였다. 팬티도 벗어버렸다. 검은 숲이 보였다.  수박덩이만한 가슴을 쓸어안고 아가씨가 류행가요에 맞추어 몸을 비꼬며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위 아래 위 위 아래 위 아래 위 위 아래   빙글 빙글 빙글 돌리지 말고 넌  아슬 아슬하게 스치지 말고 넌 그만 좀 건드려 애매하게 건드려 넌 자꾸 위 아래로 흔들리는 나   위 아래 위 위 아래 위 아래 위 위 아래   행복은 덴겁히 볼륨을 낮추며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밖에서 컹,컹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들린듯 했다. “지노야 지노!” 주인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찌걱찌걱 조립식 나무바닥이 신음소리를 냈고 쾅하고 문닫는 소리가 들렸다. 안마원은 또다시 괴잠잠해졌다.    십장생(十長生)   행복은 다시 골프장을 찾았다.     수화기 저쪽에서는 그냥 기계음을 다시 풀듯이 “싫담다 아이 만나겠담다”그 한마디뿐이였다. 그때마다 무가내로 돌아서곤했다.  이제는 전화부스의 아낙도 일면식이 있다는듯 행복이을 보고 고개를 까땍해보였다.     며칠이고 안마원에 박혀있었다.  전화를 하려 안마원 앞 사거리의 전화부스를 몇번 찾았고 은행을 찾아 출입문앞에서 먹이를 찾아 서성이는 시라소니같은 아낙네들에게서 한화를 인민폐로 환전한것이 그 몇번의 외출이였다. 그러다 행복은 문득 할일을 찾은듯 다시 몸을 일으켜 골프장을 찾아온것이였다. 이제 말끔히 사라진 고향의 기억은 산마루를 눈금으로 더듬어 찾아야만 했다.  산이라야 봉분처럼 밋밋한 완만한 산이였다.  산세라고는 운운할수도 없는 밍밍한 산이였지만 그 이름없는 산을 서기로운 춤사위같이 저마다 가지를 뻗치고 잎을 단 사과배나무들이 운치를 더해 주었었다.   봄이면 사과배꽃이 백사지처럼 하얗게 피여 온 산마루를 덮었고 가을이면 탐스러운 사과배들이 주렁져 향기가 백리를 달렸다.  그러던 산이, 마을의 진산(鎭山)격이였던 산이 이제는 더는 과일을 달지못하는 산, 콩크리트로 뒤덮인 산으로 돼버렸다.  산정을 향해 오르는 길은 모두 아스팔트길로 닦여져 있었다.  붕대에 감은 한손은 그냥 가슴앞에 드리고 흰 보자기에 감싼 무언가를 들고 행복은 허위단심 산정을 향해 올랐다. 아스팔트길이 끝나고 황토길이 이어졌고 먼지를 차며 한참 오르다 행복은 길녘에 멈춰서 버렸다.  다행이 그가 찾고저 하는것이 남아 있었다.  이 산마루에서 가장 수령이 많은 사과배나무였다. 이 산마루의 사과배는 모두 이 사과배나무로 부터 접종해 나온것이라할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일찍 사과배나무곁에 “사과배모수(母樹)기념비”라는 키높이의 표지석을 세워 선조사과배나무를 기념했다.  그사이 표지석은 철책에 둘러져 있었고 철대문에는 1등사과배만큼 큼지막한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철창을 부여잡고 들여다 보았다.  나무는 이제는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행복이가 떠나기전에도 앙상한 가지에 나마 꽃을 달고 사과배도 달았던 나무였다.  표지석도 그 모서리가 닳아 떯어져 있고 주위는 잡풀로 무성하여 살풍경이였다. 사과배나무는 이제는 고인이 된 마을의 최로인의 달작(達作)의 결과물이였다.  최로인이 백여년전에 이 마을로 이사오면서 함경남도에서 가지고 온 사과나무가지에 이곳의 배나무가지를 지접했다.  혹독하게 추운 이곳의 기후에도 나무는 용케도 살아남아 이듬해부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았다.  사과도 아니고 배도 아닌 그것은 어른들의 주먹만큼 크고 살이 많았고 당도가 높았다. 맛본 사람들마다 천도(天桃)못지않다고 감흥스럽게 엄지를 빼들었다.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 지접해 갔고 어느때부터인가 마을은 과수원으로 변모해 갔다. 한때 이 마을의 사과배는 관내뿐아니라 일본, 로씨야까지 수출되여 마을이 린방에 이름을 떨치게 되였다.    그런 사과배나무가 어떤 강력한 주문에 사라지듯이 말끔히 사라지고 없다. 그저 한그루의 나무만이 남아 그젯날의 영욕을 말해주는듯 했다.  한손에 깁스를 한지라 보자기의 매듭을 입에 물고 다른 한손으로 철창을 잡은채 행복은 키높이의 쇠울짱에 매달렸다.  바지아래단이 쇠울짱의 끝머리에 걸려 찌익 파렬음을 냈다. 바지를 째여가며 겨우 뛰여 넘었다.  사과배나무아래에서 헐떡이며 보자기를 풀었다.  납골함이 드러났다.  봉안했던 납골함을 열었다.  3년만에 빛을 보는 유골이였다.  곱게 빻은 쌀가루같은 뼈가루가 보였다.  뼈가루를 움켜쥐였다. 퍼석퍼석한 뼈가루를 나무주위에 흩뿌렸다.  나무를 마주하고 고개를 숙인채 고해성사를 하는사람처럼 말했다. “최할아바이 배씨가 왔습니다. 성이 배씨라서인지 배농사를 그렇게 잘하던 배씨가 왔습니다. 배농사를 그렇게 참하게 하던 친구라서 이제 아바이 곁에 모시니 같이 말동무를 하세요.”   바람이 일었다. 배꽃가루 같이 뼈가루가 하얗게 날렸다.  문뜩 나무가지에 인공수분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은 수분용총으로 나무에 대고 쏘면 되지만 그때는 작은 링게르병에 넣은 꽃가루를 면봉으로 찍어서는 꽃술에 하나하나 묻혀주곤 했다. 머리에 꽃수건을 두른 안해는 행복의 곁에서 조근조근 끝간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수분했곤했다.  눈밑의 애교살이 예쁜 안해는 무엇이 그리 우수운지 행복이의 변변찮은 우수개에도 황조롱이처럼 까르르 웃곤했다.  곁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외톨이 배씨는 “그림이 따로 없구마이”하고 부러운 눈길로 지켜보곤 했다.  배씨네 과원은 행복이네와 이웃해 있었다. 꽃가루 알레르기에 연거번거 재채기를 하면서도 친구는 자기집 수분을 마치고는 행복이네 사과배수분을 도와주곤했다. 성이 배씨여서인지 배농사를 제법 잘 짓던 단짝친구였다. 뼈가루가 하얗게 배인 손바닥을 멀거니 내려다 보며 되뇌였다. “여보게 배씨. 집에 왔네. 포근한 배나무밑에서 시름놓고 쉬게나. 고향고향하더니… 그렇게 집에 오고싶어 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니”  그만 울컥해나는 심정을 주체하지못해 행복은 나무앞에 쭈크리고 앉았다. 석고를 댄 팔을 어루쓸며 혼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납골함을 주체할길 없어 다시 보자기에 싸들고 다시한번 힘겹게 쇠울짱을 뛰여넘었다.  황토길을 따라 산을 내리다 아스팔트길로 들어서는 접합점에서 행복은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같이가세나” 친구가 부르는듯 해 다시 뒤돌아보았다.  철책에 둘러쌓인채 앙상한 가지를 뻗쳐든 사과배가지가 음울하게 보였다.    털레털레 산을 내려 강가에 이르렀다.  지친듯 돌서덜 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강이 에돌아나가는 산언저리가 모두 골프장으로 닦여 있다. 잘 정돈된 잔디밭이 눈뿌리 모자라게 안겨왔으나 감상할 흥심이 일지 않았다.  보자기를 헤치고 비여버린 납골함을 꺼냈다. 나무아래 그대로 내쳐두고 올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데 버릴수도 없었던 납골함이였다.  친구가 3년넘어 들었던 “유택”인데 허접한 물건버리듯 할수 없었던것이다. 납골함을 들여다 보았다.  “실로 잘 맹글었구만” 납골함을 새삼스럽게 들여다 보았다.  밤빛 옻칠을 올린, 원통형의 나무 납골함이였다. “라전(螺鈿)기법으로 만든거여. 자네네 중국에서 당나라때에 나온 작법인데 한국까지 전해졌고 우리가 더 때깔곱게 만들었지.” 늙은 장의사가 이 납골함을 추천했다. “중국에선 야광패(夜光貝)를 사용했지만 우리는 전복껍데기를 많이 사용했지. 야광패는 두꺼울테지만 우린 전복껍데기를 종이장같이 얇게 갈아서 붙였지.   패각(貝殼)이 알록달록 청록빛깔을 띤것이 화려하지 않은가. 이런 박패법(薄貝法)은 중국에서도 한때는 없었던것이여” 얇게 간 조개껍질을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서 납골함의 겉면에 박아 넣거나 붙여 장식하는 알둥말둥한 칠공예기법을 장황하게 소개하면서 장의사는 극구 비싼 납골함을 팔려고 했다.  행복은 두말없이 40만을 내주고 납골함을 사서는 친구를 모셨다. 불쌍하게 간 친구를 좋은 함에 모시고 싶었던것이였다. 납골함에는 십장생(十長生) 자개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해, 구름, 산, 바위,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불로초 등등 예로부터 오래 산다고 믿어 왔던 소재 열가지를 한데 모아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는뜻으로, 자개무늬로 새겨넣은 십장생이였다.  하지만 친구는 불로장생은 커녕, 마흔으로 가는 서른아홉 문턱에서 죽었다.  부두에서 야간작업을 하다가 배씨는 사고로 비명에 갔다. 그것도 집채만한 랭동 컨테이너에 깔려 처참하게 숨졌다.  컨테이너 하역이나 운반작업은 수십톤에 이르는 중량물을 취급하는데 하물이 락하하며 작업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자주 발생하곤했다. 원체 혈붙이가 없는 고아이고 또 타향에서 당한 횡사인지라 시체를 거두어 줄 이도, 울어줄이도 없었다. 친구 행복이가 혼자서 상주로 되여주었고 조문객으로 되여주었다.  홀로 친구의 장을 치르고 행복은 익숙하던 부두를 떠났다. 정육점의 다져진 고기모양으로 질크러진 친구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삼삼거려 더는 이곳에서 일할수가 없었던것이였다.  그리고 조건이 더 나쁜 건설업체를 전전했다. 흔히 말하는 노가다를 뛰였다.  그러면서도 그 무슨 값비싼것만 챙겨넣은 패물함처럼 납골함만은 지니고 다녔다.  친구의 유골을 차마 타향땅에 뿌릴수 없었다. 술만 마시면 유난히도 고향타령을 하던 친구를 꼭 고향에 가져다 안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중 성질머리가 더럽기로 삼국지의 장비 뺨 칠 공사장의 십장에게 납골함이 발각되고 말았다. 숙소 침대밑에 간직했는데 짐을 움직이다 딸려나왔고 십장의 씰룩한 눈길에 띄웠던것이다.  “이거 뭐꼬? 이거 사람 뼉다구 부수어 넣는 함 아닝교? 허벌라게 놀래뿌려꾸마 잉... 이거 무슨 신주단지라고 숙소에까지 모셔갖고 왔다냐?  이런 썩을 놈의 짱꼴라 조선족새끼들땜에 나가 환장해불겄구만… 왐마 너 죽을텨?” 평소 함께 일하는 동포 인부들을 향해 야유와 폭언을 오물쏟듯 쏟아내여 “욕쟁이 십장”으로 불리는 자였다.  조금만 일을 잘못 해도, 혹여 숨을 돌리려 쪼그리고 앉아 쉬다가 발각돼도 욕의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눈깔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나이는 똥구멍으로 처 묵냐”, “확 척추를 접어뿔랑께”, “창자를 쑥 뽑아 순대 만들어 줄까부다”… 온갖 팔도 방언을 다 동원해 욕설에 욕설을 물동이로 정수박이에 퍼붓듯 하곤했다.  십장이 온갖 폭언을 동원해 욕을 삼태기로 퍼부으며 발로 납골함을 툭툭 걷어 찼다.  행복이가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판난 목면장갑을 낀 손에는 도라이바가 들려 있었다.  “내 친구요. 불쌍하게 죽은 내 친군데… 욕보이게 하면 네 죽고 내 죽고 해볼테요” 사이즈가 무지 큰 도라이바가 십장의 정수리를 겨누고 있었고 행복의 얼굴은 평소의 그것같지 않게 험악하게 변조되여 있었다. 늘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 십장의 폭언에도 대꾸 한마디 없던, 양순해보이는 그에게서 이런 완악한 표정이 나올수 있다는데서 동료인부들도 십장도 그만 못박혀 버렸다.  “눈구멍에 띄지않는데 잘 간직해 둬라.” 십장이 스르르 꼬리를 내리며 돌아섰다. 그러면서 구시렁댔다.  “왓따! 미련 바부탱이 짱꼴라 조선족놈들땜에 나가 환장해 불겠구만…”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간직해 온 납골함이였다.  10여년간 불법체류자 딱지를 달고 지내온 터라 귀국수속이 어려웠지만 더욱 어려운것은 친구의 납골함을 지니고 나오는 문제였다. 사망증명서 서류를 지니고 령사관등 부서들을 몇번이고 들락거려서야 겨우 유골을 지니고 귀향할수 있었다.     행복은 납골함의 덮개를 열었다.  텅빈 납골함이 친구의 우묵한 눈처럼 행복이를 올려다 본다.  납골함에 반근들이 고량주 한병을 넣었다. 한근들이는 술병이 너무커 넣을수 없어 반근들이를 넣은것이였다.  한국술은 도수가 너무 낮아 물맛이고 도수 높은 매운 고향술을 마음놓고 마셨으면 좋겠다고 술마실때마다 입술을 감빨던 친구가 생각나서였다. 고향술을 담은 납골함을 두만강 강물에 띄워보냈다.  함은 수면우에서 빙그르르 맴을 돌다가 넘어질듯 기우뚱거리면서 강심으로 떠갔다.  그 모습이 마치 술 한잔 걸치고 왜틀비틀 숙소로 향하던 친구의 뒤모습 같아 보였다. 복도 징그럽게 없는 친구놈…  행복은 손등으로 눈굽을 찍어 누르며 되녀였다.  “한잔 드시게. 그리고 잘 가시게”   안마원에는 오늘도 눈씻고 봐도 손님이라곤 없다. 조도가 낮은 벽등이 켜진 복도에 들어서며 행복은 주인장을 불렀다.  “저기요” 대답이 없다. 주춤거리다가 불이 새여나오는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다음 순간, 행복의 입으로 헛비명이 새여 나왔다. 현실감을 다잡기위하여 두눈을 부릅떴다.  편한 내의 바람으로 쏘파에 앉아 졸고있던 녀인, “돌아오셨어요”하고 천연스레 큰 눈망울을 들어 묻는 주인장의 한쪽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와 놀란 가슴을 안추렸다. 무서운 몽매(夢寐)에 꺼둘린듯한 마음이였다.  행복은 소리나게 자기 머리를 툭 쥐여박았다.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어젖힌 자신을 후회했다. 그리하여 못볼 광경을 본것이 아닌가… 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한 노크소리였지만 행복은 깜짝 놀라했다.  문을 열자 랑하에 서있는 주인장이 보였다. 통너른 훌렁한 몸뻬를 입은 그녀의 다리쪽에 눈길이 갔다. 다리는 멀쩡했다.  “무슨 일인데요?” “저, 바, 바느실이 없나해서요.” 행복은 급기야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뭐 따진것이라도 있나요? 주세요. 제가 꿰매 드리지요” 행복은 쭈뼛거리다가 쇠울짱에 걸려 째여진 바지를 곱다라니 내놓았다. “그럼…” 주인장이 바지들 받아들고 돌아섰다. 찌걱찌걱… 나무바닥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절미   “콩 고물 달람까? 팥 고물 달람까?” 음식난전에서 부지런히 떡을 네모지게 썰면서 떡가게 주인은 고개도 들지않은채 묻는다.  오래된 솜씨인듯 손놀림이 나비의 날개짓처럼 현란하다.  안해는 돈벌고 돌아와서는 복떡방 하나 차리는것이 소원이였다.  생전에 장모가 떡을 잘 만들었다. 그 무슨 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이 아니여도 여러 종류의 떡을 빚고 쳐서는 한보따리 딸집으로 가져다 주곤했다. 그런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물려 받았던 안해였다.  “인절미가 왜 인절미인지 아세요?” 어느 한번 안해가 떡에 관한 화제를 꺼내들었다.  “옛날 임금님이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을 피해 한양을 떠났는데 피난길에서 녀인 하나가 한 광주리 가득 떡을 푸짐하게 담아 왕께 진상하였다합니다. 그 떡이 너무나 맛나서 왕은 ‘떡은 떡인데 대체 떡 이름이 무엇이오?라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녀인은 떡이름을 대답하지 못했답니다. 그러자 임금은 이 떡을 어느 집에서 만들어왔느냐고 물었고 녀인은 근처 임씨 집에서 만들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임씨가 만든 기막히게 맛있는 절미(絶味)의 떡이라, 임절미(任絶味)라 하는게 어떻겠소?’하면서 웃었고 그때로부터 떡을 ‘임절미’라고 부르게 되였고, 나중에 부르기쉽도록 ‘임’자를 ‘인’으로 바뀌어 ‘인절미’라고 부르게 되였다나 뭐라나… 여튼 우리 집안은 떡과 인연이 있나 봐요” 안해의 성은 임씨였다.  그렇게 떡 만들기를 좋아했던 안해는 출국해서도 줄곧 복떡방에서 일했다.  이곳에서는 명절뿐만 아니라 백일, 첫돌, 혼례, 회갑까지 떡이 필수였고 직장인은 아침 식사대용으로, 녀성들은 다이어트 식품으로 떡을 찾기도 해서 명절이 아니여도 밀려드는 주문량으로 24시간이 모자랄때가 많았다.  인절미, 시루떡, 송편등 일반적인 떡으로부터 주인장이 직접 개발한 이색적인 떡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그만큼 허리 펼사이없이 온 하루 오금에 비파소리가 나도록 돌아쳐도 일은 진득진득 도무지 끝이 없었다. 섬약한 안해였지만 일만 접하면 몸을 던졌다. 눈앞이 안보일 정도로 부연 수증기가 자욱한 떡방에서 멥쌀을 일고 불려서는 기계에 넣어 가루를 냈다.  종일 수증기속에서 일하다보니 가슴이 답답하다면서 앙가슴을 종주먹으로 두드려대였다. 그런 안해의 가슴패기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힘든 일이였지만 강보의 애를 동생에게 맡기고 떠나온 그로서는 힘들고 심란한 심기를 무마할수 있는것이 또 일이였다.  행복은 인천 연안부두에 있었고 안해는 서울에 있었다. 불법체류를 쌍으로 달고있는 부부가 함께 마땅한 일자리를 찾는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래서 요행 찾은 일자리를 두사람은 아꼈다.  밭은 거리였지만 두 사람은 일년가도 한두번 만나기 어려웠다. 요행 만나서는 식사 한번 하고는 다시 헤여져 각자 달려가곤했다.  만날때마다 다투어 버렸다. 힘든 투정에, 고향에 두고 온 딸 걱정담에 다투기가 일쑤였다. 고향서 싸움한번 안해본 잉꼬부부로 소문나 있던 두 사람은 어쩐 영문으로 타향에 와서 털 세우고 볏 세운 투계닭처럼 만나기만 하면 싸우고 또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 행복이가 부두의 일자리를 때려치우고 증발되듯 사라진뒤에는 4년이 되도록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의 맨 끝자락 전남에 숨어있는 그녀를 안해가 용케도 찾아왔다. 그리고 피짚먹는 소처럼 눈만 껌벅이며 얼뜬해 있는 행복이 앞에 안해는 리혼이라는 막장 카드를 내밀었다…  떡장수의 손짓이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 사이 처제는 어느덧 30대를 훌쩍 넘긴 중년이 되여 있었다. 물러버린 떡처럼 어제의 풋풋하던 생기를 잃고 있었다.  시집도 가지않은 처녀의 몸으로 강보의 조카를 맡아 친딸맞잡이로 키우고 있는 처제였다. 그 처제가 시장거리에서 떡가게를 차리고있다는 소문만 들었던 행복은 며칠간 시가지 사방 시장의 음식가게를 참빗질해서 용케도 처제를 찾아낼수 있었다.  전화로 매몰차게 거절의사를 전하던 처제가 전화마저 받지않자 막무가내로 찾아 나선것이였다.  하늘에서 바늘 찾기로 헤매다가 막상 찾아내여 앞에 서고보니 무슨 말부터 건넬지 몰라 행복은 문칮거렸다. “장사는 잘되시오? 처제” 지극히 공식적인 인사를 건네고나니 자신이 시러배처럼 생각되였다.  처제는 아무말도 없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리고 떡을 썰었다.  역증이 들어간 손놀림이 빨라졌다. 잔뜩 힘이 들어간 팔뚝에 퍼렇게 지렁이가 섰다.  칼이 도마에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냥 서있기도 무엇해 또 한마디 했다.  “처제, 배씨가 죽었네” 칼놀림이 뚝 멈추었다가 다시 빨라졌다. 도마를 쫓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렸다.  한때 처제를 무척 쫓아다녔던 배씨였다. 무혈무친 고아로서 마을에서도 윤이 나지못한 사림을 하고있는 배씨가 처제의 눈에 뵈일리 없었다. 하지만 바탕은 꺼슬꺼슬 무명이여도 마음씨만은 부드러운 비단같은 배씨여서 처제는 오빠맞잡이로 한때 절친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떼돈 벌어와서는 처제와 결혼하고 친구 행복이와는 동서지간이 되고말겠다던 배씨의 꿈은 타향에서 그렇게 처참하게 으깨졌고 박살나버렸다.  처제는 그냥 아무말도 없다. 힐긋 곁눈길로 팔에 석고를 댄 행복의 팔뚝을 훔쳐보고는 다시 고개를 수긋하고는 떡을 썬다.  “콩고물 팥고물 몫몫으로 싸주오.” 뻘쭘해서 처제와의 대화거리를 찾으려 허둥이던 행복은 그냥 떡에로 화제를 돌리고 말았다.  일매지게 썬 떡을 콩고물과 팥고물을 듬뿍 무쳐 각각 싸주었다.  떡구럭을 받으며 행복이 슬쩍 말을 끼여 넣었다. “5월5일이면 애 생일이 아니오. 그러니 꼭 한번 만나보고 싶소. 만나서…” 처제의 흰청많은 눈동자가 질러오는 바람에 핸복은 말끝을 흐렸다. 그 눈길은 이제와서 어떻게 애 생일은 기억하고있냐는듯한 눈길이였다.  사실 한국에 와서 행복은 고향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아동절이 6월1일이 아니라 5월5일임을 알게 되였다. 그에서 딸애의 생일이 얼추 떠올랐고 그렇게 기억해 둔것이였다.  “애가 여기 없어요.” 떡을 썰어 근을 달아서는 종류별로 포장지에 싸면서 처제가 말했다. 머리를 수긋하고 혼자말처럼 말했다.  “일자리를 찾아 관내로 들어간지 오래요. 이제 걔도 열여덟이니 이모 말이 귀에 안잡혀들어요. 자립하겠다고 설쳐대는데...막을수가 있어야지요. 황차 친엄마도 아닌것이…” 처제가 후딱 고개를 쳐들었다. 다시 흰청이 많이 드러난 눈으로 행복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강보의 애가 처녀꼴이 잡히도록 여직 뭘하다 이제야 나타났냐? 눈길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사실은 처제…” 행복은 무언가 변명거리라도 찾으려 허둥댔다. 그동안 자신이 헤쳐왔던 가시밭길을 몇마디로 응축해 뱉어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해석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처제가 칼등으로 도마를 탕 내리쳤다.   “자꾸 처제처제 하지 말아요. 이제 와서 처제는 무슨 말라빠진…” 목소리가 얼음채찍이 되여 남자를 후려쳤다. 떡구럭을 든채 휘적휘적 돌아서 나오는데 처제, 아니 옛 처제의 고음이 행복의 발목을 부여 잡았다. “여봐요” 행복이 일루의 희망을 품고 입귀를 말아올려 웃음을 지어보이며 돌아섰다.  처제가 플라스틱 가면같은 얼굴로 말했다. “떡값은 내고 가야지요”   어떤 장례   떡구럭을 들고 지척지척 안마원으로 다가가는데 주인장이 무언가 들고 나오는것이 보였다.  종이박스를 두손으로 받쳐든 주인장은 행복이를 보자 기다리던 친지에게 하소하듯 말했다. “지노가 죽었어요.” 오리무중에 빠진듯한 표정의 행복이를 보고 덧붙였다. “강아지가요.” 아침나절에도 안마원을 나서는 자신을 졸졸 따라나서는지라 동그란 머리통을 다독여주고 털을 쓸어주었던 강아지였다.  며칠전 한밤중에 안마원에 들어서는 자신을 향해 새되게 짖어대던 장모의 강아지는 그사이 익숙해진듯 행복의 다리에 감겨들곤했다. 하는짓이 이뻐서 맥주병과 함께 사들고 들어서던 북어를 찢어 입에 물려도 주었었다.  축 쳐진 어깨로 서있는 녀자가 받쳐든 종이박스우에는 자그만 꽃삽이 놓여져 있었다. 아마 강아지를 묻으러 가는것 같았다. “도와 드릴가요” 녀자가 거부를 보이지않았다. 요행 택시를 불러세웠다. 안마원이 비행장부근 시가지 외곽에 위치해 있었지만 택시는 외곽에서도 더 깊숙히 산쪽을 향해 달렸다.  뒤좌석에 올라 타서는 두사람은 아무말도 없었고 그런 두사람을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훔쳐 보았다. 말 한마디도 없고 그냥 행선지도 없이 산쪽으로 가자는 두사람의 모습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던 모양이였다.  차안에서는 거북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을 깨련듯 기사가 라디오를 틀었다. 디이얼을 돌려 FM 주파수를 맞추자 점심뉴스가 흘러나왔다. - 지속되는 저온랭해로 하여 왕년에 비해 사과배꽃이 만개하지 못한 연고로 올해 “사과배꽃축제”가 원 지정된 날자보다 지연될 예정입니다…  - 어제 오전, “해외귀국자창업좌담회”가 열렸습니다. 귀국한 해외로무업자들은 해당 부문에서 귀향하여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보편적 특혜성이 강한 창업우대정책들을 출시할것을 한결같이 건의 했습니다… - 성인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을 협박해 금품을 뜯은 이들이 검거됐다고 외신이 전혔습니다.  한국 인천 서부경찰서는 인터넷 성인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들을 협박해 현금을 받아 낸 조선족 A씨를 공갈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이들은 중국 현지에까지 컴퓨터시스템을 들여놓고 신원을 알수없는 녀성들을 고용해 다시 한국의 고객들과 화상채팅으로 접속하도록 유도한 뒤 라체쇼를 보여주며 함께 음란한 행위를 하는 모습을 록화해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 현금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뉴스를 듣는 행복의 뒤덜미가 붉어져 있었다. 다행이 주인장은 뉴스를 듣는둥 마는둥 하고있었다. 가는내내 고개를 숙인채 종이박스에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정오뉴스가 끝날무렵에 택시가 어느 산더기앞까지 와서 멈추어 섰다. 둘은 부시럭거리며 종이박스와 삽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절기는 초여름이였지만 막상 숲에 들어서니 바람이 셌다. 숲바람이 우수수 소리내며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화분통을 호비작이던 꽃삽이라 땅파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한손을 상한터라 작은 종이박스 하나를 묻을 땅을 한참이나 파야했다. 여름이 성큼 가까와졌음에도 땅은 아직도 채 풀리지 않은것 같았다. 겉흙을 치우기까지는 쉬워도 정작 깊게 파려니 힘이 들었다. 잠간새에 뒤덜미가 흥건해졌고 이어 줄지은 땀방울이 벌건 흙속으로 뚤렁뚤렁 떨어져 내렸다. 그동안 녀자는 종이박스를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때때로 종이박스에 볼을 대기도 했다. 구덩이에 내려놓기에 앞서 녀자가 종이박스에 입을 맞추었다. 하관이라도하듯 천천히 구덩이에 박스를 내려놓았다. 흙을 덮었다. 흙덩이가 부실부실 떨어져 쌓이자 녀자가 목멘소리로 부르짖었다. “지노야 잘가!” 앙증맞게 작은 봉분이 생겨났다. 얼핏 보면 그냥 흙더미로 보일, 하지만 봉분을 삽등으로 두드리고 공글어 정성스럽게 작은 “유택”을 만들었다.  행복은 삽을 던지며 봉분앞에 주저앉았다.  멀거니 서있던 녀자도 그냥 서있기가 힘들었던지 봉분곁에 한쪽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았다. 산속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새가 울음을 토하고있었다. 새 울음소리가 저리도 애닮고 청명하고 요란하다. 너무나 애닯아 괴이쩍게 들리기 까지했다. 거기에 훌쩍거리는 녀자의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겹쳐들었다.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눈언저리를 훔쳐내고 녀자가 새의 투명한 고음에 귀를 기울였다. 붉어진 눈시울로 녀자가 입을 열었다. “트럭에 치였어요. ‘해방패’, 그 덤턱스럽게 큰 차에 치였으니 살아남겠어요. 차들이 고속으로 오가는 시교 길곁집이라 그렇게 조심했건만… 차는 뺑소니쳤고” 오전나절에 강아지가 차에 치이던 경상에 대해 말했다.  “나와 육년째 같이 살던 애였는데…” 녀자가 또 훌쩍 코를 치걷었다. “어쩜 우리 집안은 차와 전생에 무슨 원쑤관계를 졌던지. 저도 차에 치여 이 모양 이꼴이 됐죠. 그것도 한국서 말입니다.” 녀자가 엊저녁 행복에게 들켜버린 자신의 몰골을 해석하련듯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남보다 일찍 서울로 나갔어요.  잘 나가다가 불체자 단속반에 맞띄웠죠. 단속반을 피해 겁모르고 3층에서 뛰여 내렸죠.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까진 좋았죠. 그런데 일어나서 길을 뛰여 건느다 차에 치인거죠… 돈 벌러 나갔다 다리 한짝을 내주었습니다.”  녀자가 행복이를 건너보았다. 녀자의 시선이 행복이의 깁스를 한 팔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된 상처냐고 묻는듯 했다. “일하다가 10층 발판우에서 쇠파이프 한가닥이 떨어지는 바람에…” 마른 침 한번 삼키고나서 행복이도 입을 열었다. “뼈를 다쳤죠. 락하방지그물이 펴져 있다지만 빈 구석이 많습니다. 팔에 맞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해 둬야죠. 머리나 어깨나에 맞았더라면…” “저도 다행이라 생각해 둡니다.” 녀자가 자조처럼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서울 연지동에서는 단속반을 피해 층집에서 뛰여내렸다 죽기까지 했습니다. 쉰넘은 흑룡강 녀자가 말이얘요. 요즘은  많이 느슨해졌지요. 불체자가 업체주인의 귀뜸을 받고 단속을 피해 달아나다 다쳤는데 이런걸 산업재해로 봐야한다는 판결까지 나온적 있답디다.”  후유~ 주르르 제 설음많은 사연을 토해놓고 나서 녀자가 직성이 풀린듯 하얗게 한숨을 내쉬였다.  호주머니에서 물컹거리는것이 맞혀오자 행복은 그것을 끄집어 냈다. 정오도 지난지라 배가 허출해 났다. 녀자를 향해 내밀었다. “드세요.” 녀자의 눈이 빛났다. “움마 떡이네요” “네 떡입니다. 잠시만요” 막상 떡을 앞에 두고 수저가 없어 쩔쩔 매다가 행복이가 몸을 일으켰다. 다박솔의 가지를 꽃삽으로 툭 쳐서 꺾어 들었다. 껍질을 벗겨서 저가락을 만들어 녀자에게 넘겨주었다. 녀자가 배시시 웃었다. 웃는 입매가 고왔다.  녀자가 떡하나 집기를 기다려 행복은 흙묻은 손을 앞섶에 쓱쓱 문지르고나서 집게손을 해들고 떡을 집어 입에 넣었다.  녀자가 애모쁘게 봉분의 흙을 어루만졌다. 떡을 우물거리며 분명치 않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 지노는 이제 아픔도 배고픔도 없는 좋은 곳으로 갔을터지요” 다시 새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리도 애닮고 청명하고도 요란한… 순간 행복은 목이 꺽 메였다. 떡이 한덩이의 설음으로 되여 목에 떡 걸려버렸다. 무지근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지름을 썼다.  “움마. 걸렸네요” 녀자가 종주먹을 해갖고 행복이의 등짝을 학교운동대회때 응원북을 치듯 사납게 두드려댔다.  겨우 떡이 넘어갔고 눈물이 쑥 나왔다.    슬픔의 합성   물밑속처럼 괴잠잠한 고요만이 감돌던 안마원에서 소요가 인것은 자정이 넘은 늦은 밤이 였다. “게 서욧! 이봐요 아저씨” 행복은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밖에서 주인장이 달려나가며 지르는 고성이 들려왔다. 행복은 아픈 팔을 붕대를 감아 목에 걸 사이도 없이 방을 뛰쳐나왔다. 안마원 문전에서 주인장이 분명 손님으로 보이는 나그네와 실랑이를 벌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행복이가 따져 물었다. “발안마 받고 돈 안내고 그냥 튀려잖아요” 주인장이 흑기사라도 만난듯 행복을 향해 하소했다.  덤턱스럽게 키가 크고 목덜미가 굵은 사내였다. 손님은 몹시 취해 있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있었고 발은 허방을 밟으며 휘청거리고 있었다. 행복을 향해 삿대질하며 혀꼬부라진 소리를 냈다.  “당신 뭐야” 행복에게 바싹 다가선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서는 아직도 술냄새가 천지를 지동했다. 사내가 휘청거리며 행복이의 어깨를 떠밀었다.    그 덩치에 조금은 겁이 났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돈 내고 곱다라니 가시오” “당신 누구냐고” “취했구만 빨리 집에 가시오. 결산은 제대로 하시고.” “나 결산 안할란다 왜?” “왜 안해유. 봉사 받았으면 돈은 제대로 내야지. 남자로 생겨서” 손님이 피식 물찌똥같은 웃음을 갈겼다. 주인장녀자를 돌아다 보았다. “안마사가 너무 박색이잖아.” 팔짱을 가새지르고 섰던 주인장이 격분과 탄식을 한꺼번에 뿜었다.  “나 원, 살다살다, 별꼴 다보갰네” 찌르릉 통증같은 흥분이 행복이의 팔을 거쳐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커다랗게 다가온 사내의 낯짝에 행복이 얼굴을 바짝 가져다 붙혔다. 썩은 과일같이 문뱃내 나는 그 얼굴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 “나가 원 환장해 뿔겄네, 이런 미련 바부탱이 썩을놈들이 남자 망신 다 시키누만, 좋은건 입으로 처묵고 나이는 똥구멍으로 처묵냐, 확 척추를 접어뿔랑께, 창자를 쑥 뽑아 순대 만들어 줄까부다, 왐마 너 죽을텨?”     취한도, 주인장 녀자도 경악함에 지릅뜬 눈으로 행복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50원짜리 지폐 한장이 쑤욱 행복의 손으로 넘겨져 왔다.     그리고 사내는 꽁지에 불달린듯 쥐처럼 어둠의 구멍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깨에 힘을 주며 행복은 지폐장을 주인장에게 넘겨주고는 안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돌아서서 웃음을 참으려는듯 주먹을 말아 입에 대였다 그의 어깨가 겉잡지 못하고 오르내렸다.    똑똑  노크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자 주인장이 족탕기를 들고 서있다. “금방은 고마웠어요. 이젠 지노도 없고 아무도 없는데… ” 녀자는 안마원 유니폼 차림이였다.  “발안마 해드릴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행복이가 덴겁히 밀막았다.  “공짜로 해드릴게요. 피곤이 풀릴거얘요.” 녀자가 문을 밀고 들어섰다. 행복은 덴겁히 컴퓨터를 껐다.  나무로 만든 족탕기에 발을 담갔다.  물은 따뜻했고 녀자의 손은 부드러웠다.  “어제는 째진 바지도 꿰매주고… 페만 끼치네요” 행복이 쑥스러워 하며 말했다.  그날 저녁 비행장과 가까운 이곳에 투숙하게 된것이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터미널 앞의 택시들이 귀국하는 사람들에게 바가지료금을 덮어씌운다기에 택시를 거부하고 시가지쪽을 향해 무작정 걸어가다가 들리게 된곳이 바로 이곳, 짜장 이름 그대로인 “황금”의 쉼터였다.  녀자는 나지막한 미소로 화답했다. 미소를 머금은채 실습기의 초보안마사처럼 열심히 발을 주물고 있다.  “한국에서 들려와서 입원수속을 하면서 리혼수속도 함께 했어요.” 발을 주무르다 녀자가 또 묻지도 않은 이야기의 하편을 이어나갔다.  “아이는 남편쪽에 넘어갔구요. 그동안 엄마 얼골도 모르고 자란 애가 기어이 아버지와 함께 하려 했지요.  다리를 잃고 가족까지 잃어야하는 녀자에게 시댁쪽은 아무런 측은지심도 없어 했어요. 원체 극구 나가지 말라는것을 제가 부득부득 우겨 나갔으니깐요.” 이야기하면서 녀자는 발을 누르고 주무르고 쓸어주었다.  “집만은 제게 남겨주었어요. 남편도 그사이 살려고 애썼나봐요. 숭어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이렇게 떼돈 번답시고 발안마원도 차려놓고있었더군요. 제가 보낸 돈으로요. 그런데 잘 안됐나봐요. 그냥 제게 리혼합의금 삼아 넘겨줬죠. 다시 영업구조로 만든 집을 고치기도 싫고 그래서 사주에도 없는 발안마사가 돼버렸죠.  하필이면 발이 없는 녀자가 발안마원을…” 녀자가 처량하게 웃었다.  하나의 얼굴이 행복의 뇌리에 그물그물 떠올랐다. 마지막 리혼카드를 들고 자신을 찾아 남도끝까지 왔던 안해였다. 그날도 모텔방 문켠에 서서 안해는 이렇게 처량하게 웃었다. “이렇게 두더지처럼 숨어버리면 내가 못찾을줄 알았지” 그리고 한달도 못되여 안해는 비명에 갔다.  희귀병이라고했다.  “원발성폐고혈압”이라는 듣도보도 못했던 병으로 판명되였다.  중환자실 입원 20여일 만에 타향에서 삶의 의지로 강건했던 맥을 그만 놓아버렸다.  그냥 숨차다며 앙가슴을 두드려왔는데 그제야 폐질병을 잠재우고 있었음을 알수 있었다.  리혼후 한달도 못된 죽음이였기에 처제는 형부를 몹시도 원망하고 있는것이였다. “보시다싶이 안마원 잘 안돼요. 안마원 이름은 한번 거창하다만…” 녀자쪽 설음은 계속되였다. “위치도 나쁘고… 무엇보다 다른 곳에선 젊고 이쁜 애들 쓰니깐요. 요정같은 애들이 손님 발도 주물고 다른곳도 주물러주니깐” 녀자가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런거 까지 하면서 치사한 돈 벌고는 싶지않고… 그러니 뉘라서 이런 쉬여빠진 아낙네를 찾겠어요, 더구나 병신 아낙을, 그래서 요행 손님 있으면 받고 없으면 그냥 살림집처럼 쓰고 있죠.”  족탕기에서 발을 들어올려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발크림을 미끌미끌 발라 구석구석 문질러주었다. 미끄러지듯 녀자의 말도 흘렀다.  “상처가 아물고, 의족도 습관이 되고… 다른건 다 참을만 했어요. 그런데 제일 어려운건… 아들애를 못보는것이였어요. 남편은 아들애를 못만나게 했어요. 애가 돌도 못되여 돈에 환장해 집을 뛰쳐나간 년이니 볼 자격이 없다는것이였죠.” 행복은 부지중 소리나게 한숨을 뿜고 말았다. 어쩌면 다리 부러진 노루 한자리에 모이듯 꼭 같은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무엇보다 애에게 이런 병신엄마가 있다는걸 속이고 싶었던거겠죠” 녀자가 서글프게, 독백하듯 말했다. 긴 연극대본 같은 이야기를 쉼표없이 하고 또 했다. 그동안 말동무가 그리웠나보다. 더욱이 애견까지 잃은 날이라 더욱 허전해버린 그 마음을 행복은 알것 같았다.  녀자의 매끄럽던 손길이 또 한번 멈추었다.  주인장의 눈길이 그윽히 향한 곳에 사진액자가 있었다. 엄마와 애가 목을 얼싸 그러안고 환하게 웃는… “저 사진 합성이얘요” 행복이가 적이 놀라했다.  “심통하죠” 녀자가 다시 손을 놀리며 말했다.  “어럽게 애가 있는 학교를 찾아냈어요. 애원했더니 선생님이 애가 박혀있는 단체사진 한장 주더군요. 사진관가서 돈 엄청 퍼주고 다른 사람들 사진에 머리만 합성해 바꿔넣은거얘요. 심통하죠.” 행복은 다시 새삼스럽게 사진을 보았다. 신통한듯 신통하지도 않은듯 두 사람의 웃음이 액자에 포박된듯 보였다.   “애는 그냥 학교 담넘어 체육시간에 봤어요. 이름은 진호라고 바뀌여 있었구요. 내가 지은 이름은 복이였는데 행복이라는 복. 리복이…” 행복이가 움찔했다. 다리 부러진 노루들이 힘겹게 산등성이를 넘고있는 환영을 행복은 보고 있다.  “아프나요?”  녀자가 발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행복이가 머리를 저었다.  “계속해요. 이야기를” 이야기에 은연중 빠져들어가고있는 자신을 느꼈다. “이제 초중생이 되였네요. 에미 없이도 그렇게 밝게 이뿌게 큰 애가 고마웠어요. 그런데 며칠후 또 찾아가보니 애가 전학해 갔더군요.”  녀자가 훌쩍 코를 치걷었다.  “여기가 내 아들애를 위해 꾸며놓은 방이랍니다. 혹시 언젠가는 찾아올가 해서요. 그날 손님이 인터넷 되는 방에 들려니 처음 내줬지요.” 녀자는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원체 손님들이 그냥 발안마만 받고 밤을 지내지 못하게 했어요. 그런데 손님은 왠지… 인상이 참 좋아보이더군요.” 녀자가 수삽한 빛을 감추려는듯 문뜩 발안마를 끝냈다. 부시럭거리며 발크림과 수건들을 챙겼다.  족탕기를 들고 나가려던 녀인이 행복을 향해 물었다. 너무 낮게 말했기에 행복이 다시한번 되물었다.  “무어라구요?” 녀자가 혀아래 소리로 말했다. “혹시… 다른 안마는 안받으시겠어요” 행복은 녀자의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조도낮은 탁상등의 음음한 빛속에서 빛나오르는 녀자의 눈동자를 느낄수 있었다. 그 눈동자는 채 꺼지지않은 콕스불처럼 은근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 은근한 빛은 모르고 대이면 손이라도 델것 같았다.  녀자가 또 한번 혀아래 소리로 말했다. “공짜로 해드릴게요” 무거운 족탕기를 들고서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보였다.  행복은 일어나서 녀자의 손에서 족탕기를 받아 구석에 놓았다.  녀자는 탁자로 다가갔다. 아들애와의 합성사진을 손으로 쓸어 넘겨뜨렸다.  그리고는 유니폼을 머리우로 확 벗어버렸다.  세월의 중하를 못이겨 축 처진 유방이 참담하게 드러났다.  행복은 못나게도 슬몃 부끄럽게 일어서는 자신을 느꼈다. 녀자의 향그러운 육향을 느껴본지도 몇년이나 되였던지 생각나지 않았다. 헤아릴수도 없었다. 그저 컴을 마주하고 기계적이고 변형적인 만족을 얻은것이 다였다. 말라버린, 하지만 봄을 맞아 수분을 기다리는 늙은 과수같은 그 몸뚱아리를 향해 다가갔다.   녀자가 깁스를 한 행복의 손을 들어 가슴에 얹어주었다. 어줍게 가슴을 만졌다. 건과(乾果)같은 녀자의 유두가 손에 들어왔다.  본능에 넘쳐 그 가슴을 와락 옴켜잡았다. 그러다 팔에 통증을 느끼며 나지막히 신음을 뿜었다.  녀자가 옷을 벗었고 의족도 벗었다. 행복은 짚이영에 튕긴 불씨를 치우듯 후딱 탁상등을 꺼버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두 사람은 안타깝게 허둥거렸다.  어둠에 익숙하지 못해서가 아니였다.  한 사람은 오른 팔, 한 사람은 왼 다리,  상처입어 갈가리 해체된 몸뚱아리를 어떻게 맞추어야할지 몰라 헤맸다.  두 사람은 지접(止接)이 잘못된 괴상한 과수의 가지처럼 왜곡된 형상으로 한데 얽혔다.  그리고는 부서진 뼈가 잇기듯, 찢겨진 피부가 아물어 붙듯 서로에게 들붙었다. 오늘만 있고 래일이 없는 곤충처럼, 단말마로 서로를 탐했다.  등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로 얼룩진 녀자의 얼굴이 척척했다. 그 척척한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붙여 대였다. 다른 하나의 눈물이 마르려는 그 눈물자국우에 길을 만들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얽혔다.  서로는 서로의 눈물을 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녀자는 간호원 여러명이 달라붙어 분쇄성골절을 입은 팔에 딱딱한 석고를 마구 댈때처럼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안마원 아크릴간판의 네온사인은 꺼져있었고 두꺼운 커튼을 뚫고 새벽의 빛이 간신히 스며들고 있었다.    해피 투게더   “해피 투게더”라는 커피점이라고 했다.   그집에서 뜨거운 우유를 곁들인 카페라떼를 잘 만들었고 그래서 딸애가 잘 다닌다고 했다.  행복은 그야말로 칡넝쿨 한가닥에 의지해 낭떠러지에 간신히 붙어있다가 구원의 큼지막한 손을 부여잡은듯한 심경이였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넣어보려 했는데 처제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딸애가 외지에서 돌아왔는데 만나겠다는것이였다.  기쁨에 겨워 손을 휘젓다가 찔러오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기뻐서 하늘로 박차오를듯 하는 그녀를 전화부스속의 아낙이 못볼것을 본듯한 눈길로 내다 보았다. 안마원의 “황금의 발” 네온사인이 꺼지고 날이 밝을때까지 온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막상 아침이 오자 깜박 잠이 들었고 파아란 교복을 입고 귀가에 단발머리 찰랑이는 딸애가 멀리서부터 뛰여오자 홍소를 터뜨리며 맞아 달려가는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였다. 이번에는 또 점심때가기다려졌다. 딸애를 만날수 있다는 복음을 듣고 시가지로 나가서 리발을 하고 면도를 했다.  새 점퍼 하나를 사입고 구두도 새로 사 신었다.  두살배기, 입가에 밥풀 가득 묻힌 채 숟가락을 허공에 휘저으며 밥상앞에서 그날따라 신나하던 애를 처제의 집에 두고 집을 나서서는 16년만에 처음 보는 딸애, 그 딸애앞에 정갈하고 멋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깁스를 한 팔을 얼굴을 찡그려가며 겨우 소매에 밀어  넣었다. 목에 붕대를 해 걸지 않았다.  “행복하세요” 안마원 주인장이 문밖까지 따라나오며 어제까지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유난히 행복해 보이는 행복을 향해 손을 저어주었다.  그래 행복해야지… 짐짓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커피점에 들어섰다.  어쩌면 커피점 이름도 “해피 투게더”인 커피점은 도시복판 건물의 13층에 있었다.  엘레베이트에서 내려 연신 머리를 매만지며 “해피투게더”라는 상호가 새겨진 유리문앞에서 행복은 마주섰다. 쌍방망이질 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유리문에는 예쁜 손글씨로 쓴 커피메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만 그 사이로 커피점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앉은 처제가 보였다. 그러면 처제와 마주 앉아 문쪽으로 등을 돌린 쪽이 딸애일것이다.    행복은 심호흡을 길게하고나서 액세사리로 꾸민 문손잡이를 잡고 안으로 밀었다.  향긋하면서도 알싸한 커피향이 훅 끼쳐왔다.  이때 딸애가 일어섰다. 카운터쪽으로 가서 금방 내린 커피를 손수 받아왔다.  처제가 문가에서 문칮거리고있는 행복을 보아내고 손짓했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커피잔을 내려놓는 애를 향해 말했다. “왔다. 저기 네 아빠가 왔어” 이모가 턱짓을 했고 딸애가 머리를 돌렸다. 드디여 딸애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쪽을 향해 디밀던 행복이의 발길이 난딱 멈추어졌다.  얼음채찍에 맞은듯 순식간에 얼어붙은 표정으로 남자는 무엇을 보았던가! 장발에. 흑옥같은 눈동자에, 멀미날듯 하얀 피부를 가진 열예닐곱살 딸애, 웃음을 지을가 말가 주저하는 그애의 코의 왼편 언저리에 아래우로 박혀있는 두개의 짐을 그는 분명 보았다.  어떻게 13층 높이에서 비상구 계단으로 단숨에 달아내렸던지 행복은 몰랐다. 계단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깊은 수면속에서 헤여나온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공사현장에서 전동드릴을 처음 잡았을때처럼 전신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올올이 잡아뽑을듯 머리칼을 으득부득 부여잡았다. 으으윽,  목구멍에서 괴상한 신음이 새여 나왔다. 이어 그 신음은 그악한 악성(惡聲)으로 변조되여 갔다.  아아악,  피를 뽑는듯한 절규를 뽑으며 남자는 깁스를 한 팔을 들어 사정없이 벽을 후려쳤다.  석고의 파편이 튀였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다시 부러져 너덜거리는 팔을 부여잡으며 그자리에 주르르 주저앉아버렸다. 통증이, 쓰나미같은 거대한 통증이 팔에서부터 심장으로 서서히 번져 나갔다. … … ... ...   “도라지" 2015년 6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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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暝想시리즈-3】문 댓글:  조회:1300  추천:5  201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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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暝想시리즈-1】얼굴 댓글:  조회:1247  추천:10  201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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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영화를 통해 반일운동을 한 김염 댓글:  조회:2958  추천:16  2015-11-03
  . 칼럼 .      영화를 통해 반일운동을 한 김염    김 혁            1,    11월1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그 남자의 진실' 편이 방송되였다.  영화에 빠진 한 젊은 청년이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일본 첩자에 의해 암살되자 왜경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넘어간 후 40여편의 항일 영화에 출연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방송되였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이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홍콩, 베이징, 대만이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하이 영화에 두고있다. 1930년대의 상하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바로 그 당시 상하이 영화계에 혜성 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다. 바로 김염이였다.    2,    김염(金焰)의 본명은 김덕린이다. 김염은 상하이에서 영화에 출연할 때 바꾼 예명(藝名)으로서 불꽃 ‘염(焰)’자는 루쉰의 산문시 “사화(死火)” 혹은 볼셰비키 기관지 “이스크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 김염의 아버지, 반일,독립운동가 김필순   김염은 1910년 4월 7일 서울의 명문 의사집안에서 태여났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아버지 김필순은 중국 치치하얼로 망명했고 이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고모의 집에 의탁되었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감출수없는 끼를 보였던 김염은 1927년 열일곱 살 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로 단돈 7원을 갖고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상하이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손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어 꿈을 펼치게 되였다.  손유감독은 콧날이 오뚝하고 눈매가 시원시원한 발군(拔郡)의 풍모를 금세 알아 보고는 그를 무성영화 “풍류검객”에 주연으로 내세웠다. 영화 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후로 김염은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년) 등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내용은 대부분 중국 봉건시대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그의 뛰여난 연기력과 용모를 연거번거 확인해 주었다.  1932년 김염은 서생과 건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을 그려낸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에서 열연을 보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34년 김염은 손유감독과 손잡고 대표적 항일영화경전인 “대로(大路)”를 제작했다. 영화, 특히 영화의 주제곡은 관중들 속에서 강렬한 반응과 공명을 일으켰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작곡가로 된 저명한 음악가인 섭이(聶耳)가 영화의 주제곡인 "대로가(大路歌)"를 작곡했고 김염이 직접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인민들 속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애국가곡으로 되었으며 많은 청년들을 항일열조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되였다. 이렇듯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 김염의 대표작, 중국의 경전 반일영화 "대로"   김염은 또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을 다룬 “애국혼'과 항일영화 “장공만리' 등에 출연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반일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항일 영화인 “장지릉운'(1936년)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필림을 찾아 없애버린 영화이기도 하다.  김염은 "9.18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을 담은 브로마이드(肖像)를 판매 해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영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김염이였다.    중일 전쟁이 터졌고 상하이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곧 “영화황제”에게 눈독을 들였다. 군부인사가 직접 나서서 김염더러 일본군국주의를 선양하는 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김염은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홍콩으로 피신했다.    1947년 녀배우 진이(秦怡)와 재혼했다.  주은래 총리가 “중국의 공주”라 격찬할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진 진이는 “녀자농구선수 5번” 등 영화에 출연하며 “일급 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몇해전 중국정부가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했던 력대 10대 남녀배우에 두 사람은 모두 포함됐다.  현재 구순(九旬)의 고령에도 간간히 스크린에 얼굴을 뵈이고 영화감독까지 맡아 해 “중국영화계의 산증인, 기적”으로 불리는 그는 "남편은 주로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고 회고했다.    ▲ 김염과 마지막까지 함께 한 부인 진이, 그는 중국영화계의 유명한 원로 여배우로서 "여자농구선수" 등 경전영화에 출연했다.   1962년 은퇴 할 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신중국이 성립된후 김염은 상하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여느 거장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리혼의 아픔에다 재혼한 진이와의 사이에 태여난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되는 불행을 겪었으며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때는 농촌으로 하방되고 안해와 함께 수용소에 갖히는 비운을 경험했다.  장기간의 고역에서 얻은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로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현재 상하이시내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베이징영화박물관에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 돼 있다.    3,    김염에 대해 조명한 인물전은 적지 않게 나왔다.    중국에서는 2008년에 “김염과 진이 화전(金焰与秦怡画传)”이, 2011년에 “영화황제 김염전”이 출간되였고, 한국에서는 김염의 외손녀인 박규원이 쓴 김염 평전- “상하이 올드 데이스”가 나와 제1회 “올해의 논픽션상”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붐에 편승하여 연변인민출판사에서도 김창석 저로 된 “중국영화황제 김염”을 출간했다.   기자, 작가, 친지들이 앞다투어 영화계의 “황제”, 겨레의 인걸을 다루는 그 행렬에 필자도 합류했다.      필자의 차기 장편소설은 “영화황제”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 한 “수은등(水银灯)의 황제”이다. 작품의 기획은 지난해  전국소수민족문학중점작품지지항목에 선정됐다.  이 항목은 중국작가협회가 소수민족작가들의 작품창작을 지지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으로, 선정된 작품에는 창작기금을 지원하고 출판, 중문번역, 영화, 드라마로의 개편등 혜택을 제공한다.     집필을 다그치면서 제목을 “무성시대(无声时代)”로 고쳐 달았다.  수천권의 영화CD를 소장하고있고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등 장편시리즈를 창작, 련재하면서 영화에 편집광적인 애호를 갖고있는 열혈 매니아로서, 또 근년래 겨레의 인걸들을 픽션과 논픽션으로 번갈아 다루는 작업에 골몰하고있는 필자로서는 우리의 배우 김염은 빠칠수 없는 소재였다.     김염의 영화작품중 대부분은 흑백영화이고, 무성영화이다. 당시 색채도 소리도 없는 어딘가 툽상스러운 영상기술이였지만 한 조선인의 끼끗한 외모와 불타는 열연은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무성영화에 소리와 색채를 압도하는 이채로움을 보태주었다.     수난많은 민족사와 중국영화사에 커다랗게 클로즈업된 우리민족의 걸출한 예술가- 김염, 그의 모습은 퇴색하지않는 한 컷의 필림으로 지금도 스크린을 빛내이고 있다.    2015-11-1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아도 전편을 다시보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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