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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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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스케일이 큰 서사구조안에 민족의 상흔을 보듬다 댓글:  조회:2025  추천:16  2015-02-03
스케일이 큰 서사구조안에 민족의 상흔을 보듬다 ​- 여섯번째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련재하는 김혁 소설가   ■ 남경대학살 기념관에서의 저자   “력사라는 거대한 거푸집 안에 민족의 스토리와 애환을 무늬결 섬세하게 새겨넣은 력사물에 대한 작업이 요즘 내가 하는 전부의 일입니다.” 조선족문단의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이 새로운 판형으로 새해 첫기가 출간, 그 중 압권으로 김혁 소설가의 새로운 장편 “춘자의 남경”이 눈에 띄였다. 소재 또한 특이하면서도 우리 문단에서는 독보적이다. 바로 일본군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이라는 소재를 한꺼번에 다룬다고 작가는 머리말에 밝혔다. 그 소재의 방대함과 시효성있게 이 다루기 어려운 묵직한 소재의 집필에 착수한 소설가를 만나보았다. 기자를 만나자 김작가는 하쿠다 나오키라는 작가를 아느냐고 선참 물었다. 일본에서 알아주는 베스트셀러작가인데 그의 대표작인 “영원의 제로”라는 소설을 해외에서 주문해 읽었고 영화로도 보았다고 했다. 일본의 자살특공대 소재를 다룬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소설이였는데 소설이 다룬 극우적인 경향은 물론 무엇보다도 이 작가가 도처에서 “남경대학살은 없었다”, “위안부는 거짓말”이다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는데서 경악을 느꼈다고 했다. “과거사 문제로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얼어붙은 가운데 몇몇 일본 작가들의 극우적인 행보에 대한 유감과 작가로서의 책무감으로 이 소재를 다룰 생각을 갔게 됐다”고 김작가는 말머리를 열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 작가를 떠올렸다고 한다. 장순여(张纯如)라는 미국계 중국인 르포작가이다. 작가이자 사학가인 그녀는 남경대학살에 대해 저술한 르포로 유명하다. 그가 저술한 장편르포 “력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는 해외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1937년의 그 겨울, 남경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그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린 보고서였다. 저자는 섬세한 필치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력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망녕되게 시도했는지 낱낱이 밝혔다. 하지만 그의 량심적인 집필은 일본 극우세력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로부터 끈임없는 협박을 당해 왔던 그녀는 정신적 고통을 못이겨 2004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작가에 대해 중앙텔레비방송국 다큐프로에서 보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녀의 문명(文名)을 알린 이 장편르포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다고 했다.   소설쓰기와 병행해 매체에서 20여년을 기자직으로 일해온 김작가로서는 르포가 갖는 매력에 대해 십분 잘 알고있었다. 르포의 매력에 푹 빠져 한때는 수천부가 팔려 당시 이슈로 된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를  출간한적도 있었기에 아직도 애대하는 쟝르라고 했다. 그 르포를 읽으며 저도모르게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었다고 했다. 이는 문단에서 “독서광”으로 알려진 김작가의 엄청 많은 열독리력중에서도 크게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다고 했다. 그후로 cctv의 일곱시 뉴스에서 또 한번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는데 뉴스에 의하면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한다. 그날 김작가는 이미 구상을 마무리한 다른 소재를 미루고 이 소재를 장편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장편화하기로 하고 지난해 여름부터 차분하게 자료집필에 착수 했는데 뜻밖에 기성의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어요.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그런대로 적지않은데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많았지요.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습니다.” 몰아의 지경으로 하나에 몰입하는 작가로 알려져있는 김작가는 지난해 하반년을 옹근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의 사료를 뒤지고 수집하는데 시간을 바쳤다. 수십편의 문사자료집과 피해 당사자들의 진술서는 물론, 원체 영화수집에도 흥취가 있는지라 관련 다큐와 영화, 드라마도 수십편 보았다고 했다.  일본군국주의 실상을 깊이 료해하기 위해 수백만자에 달하는 대하실록소설 “태평양 전쟁”도 읽었다. 그 와중에 외려 위안부 소재의 소설작품이 일본 본토작가의 작품이 있는데 반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없는데 대해 놀라움을 느꼈고 창작의 립지를 더 굳히게 되였다고 한다. “가와다 후미코라는 일본작가의 ‘빨간 기와집’ 그리고 한국작가 윤정모의 ‘에미이름은 조선빼였다’, 미국작가 모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등 이 소재 관련 몇부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작가 엄가령의 남경대학살 소재 ‘금릉 13채’는 이미 몇해전에 읽었지요. 소설로서는 이 몇부가 작품성이 들쭉날쭉한 이 소재의 작품들중에서의 수작(秀作)이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이 작품들을 꼼꼼히 읽으면서 작가적 시각과 의무감에 대해 다시금 깊이 느꼈습니다" 새로운 장편의 창작을 위해 김혁작가는 지난 가을,  남경을 다녀오기까지도 하였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고한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300000”이라는 수자가 도처에 새겨진 기념관에서 일본군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만여점의 자료들을 둘러보면서  다시한번 이 소재 작품창작에 매진해야할 각오를 머금었다고 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있다. 불과 수십년전 중국과 한국등지의 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수십만이나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다. 하지만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위안부 배상촉구시위가 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랭랭하게 외면하고 있다.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이다”며 그 오욕의 력사에 대해 세탁하려하고있다. 이러한 “력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력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한 소설가의 창작충동을 건드렸다”고 김작가는 말한다. “력사의 질곡에 갇혔던 불운한 그녀들을 대상화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자 합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진술,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문서, 르포 등 갖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근 십년사이에 김혁작가는 다섯부의 장편소설과 한부의 장편르포와 문화시리즈 그리고 두부의 인물전기를 펴냈다. 거의 한해에 한부꼴로 펴낸 셈이다. 게다가 칼럼, 명상록, 소설, 편찬저서들도 곁들면 이 동안 그의 창작량은 그야말로 문단의 원로들이 격찬할만큼 “전무”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중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문혁에 관한 기억을, 문단 처음으로 소설화한 “시인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문학적 삶을,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흔들리고 있는 조선족공동체의 아픔속에 스러져가는 녀인들의 모습을, “완용황후”은 연변에서 숨진 청나라황후로부터 근대 동북의 근대사를 보여주고 있다. 또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앞두고 있는  “무성시대”는 중국영화황제 김염의 영화인생을 그린 장편소설로서 지난해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지지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가 평론가들이 평하다싶이 “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그외 50여만자에 달하는 “일송정 높은솔, 해란강 푸른물”은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룡정의 생성과 지금까지의 력사에 대한 완결판같은 작품이며 3년채 련재되고있는 문화 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은 스크린의 각도에서 조선족의 백여년력사에 대해 다른 텍스트로 연구한 작품이다. 김혁 소설가가 들려주는 신작장편 “춘자의 남경”의 스토리만 들어보아도 주인공의 삶의 리력이 너무나도 장대해  “파란만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사적 개념이 우렷이 드러나 보인다. 자신의 근년래의 창작성과와 금후의 과제에 대해 김혁작가는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자신의 금후의 모든 창작성향이다”고 말했다. “소설의 본령이 곧 '허구적 사실성'의 설득력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것인데” 매체기자와 소설가로서의 병행된 삶을 수십년간 이어 왔기에 그 와중에 더듬어낸 이것이 바로 남보다 차별화되는 이러한 창작성향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뢰할 만한 소설 창작 기량을 발휘해  주제와 소재의 명징성, 소설적 사건의 이미지화와 깔끔한 흐름등이 잘 조합되여 있는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것”이 그의 근년래 그리고 금후의 창작방향이라고 해석한다.  “한 민족, 한 인물의 련대기적 사건에 대한 예술적인 재현만으로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 내면을 탐사할수 있다”면서 “민족의 력사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그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립체성을 규명하는” 방대한 제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있는 김혁 작가, 그의 신작이 기대된다.   신연희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     "연변일보" 2015-1-19 "동포투데이" 2015년 1월 19일          
281    스크린에 오르는 정률성 댓글:  조회:3880  추천:11  2015-02-02
칼럼   스크린에 오르는 정률성   김혁       1   북경 “해안화청”텔레비드라마유한회사와 한국 동성제작사(사)가 지난 1월 16일 북경에서 제작인과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 “청년 정률성” 제작사인회를 가졌다. 영화는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든 정률성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다룬다. 영화에 한국과 중국의 젊은 배우들을 대거 기용, 이미 정률성 역과 부인 정설송 역을 분할 주요 배우들이 선정되였다. 영화는 3월 한국의 광주와 중국의 연안등지에서 곧 크랭크인 하게 된다. 영화의 제작측인 “해안화청” 회사는 지난해 1월 “파이판(派饭)”이라는 음식과 생활 소재의 코미디 영화로 한국에 진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얻은바 있다.   약관의 정률성   2   정률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해를 거쳐 중국 남경에 이르렀다. 남경에서 “의렬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열아홉 살의 정률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연안에 도착하였다. 연안에서 로신예술학원을 나왔고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그의 노래는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널리 유전되였다. 그후 그의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 9월 북경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바로 정률성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후날 중국 최초의 녀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다. 연안시기 정률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률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가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과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이로서 정률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1952년 정률성은 중국에 돌아와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운남, 대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률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1978년 북경음악출판사에서 “정률성가곡선”이 출판되었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였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있다. ​   3   지난해7월 초 방한한 습근평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률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률성의 위상은 높다. 정률성의 일대기는 일찍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1992년 조선의 “2.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음악가 정률성”을 전, 후편 긴 편폭으로 제작했다. 영화는 1950년대 북한으로 간 정률성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첫 단장으로 되여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려냈다. 2002년 중국에서도 정률성 관련 영화 “태양을 향하여”를 출품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였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률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연안에서 뿐만 아니라 북경, 천진, 장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였다.   한국등지에서는 아직도 겨레의 걸출한 음악가 정률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률성의 활동한 주무대가 중국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률성선생이 한국에서 태여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롭게 제작되는 또 한 부의 정률성 관련 영화가 중국 나아가 남북이 모두 애대하는 음악가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영화로 스크린을 수놓기를 바라며, 그이의 생애 그리고 그이의 음악이 하루 빨리 한국 나아가 만방에 알려 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2015년 1월 28일 “청우재”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280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댓글:  조회:4023  추천:13  2015-01-22
body { background-image:url("http://cfile270.uf.daum.net/image/255D3644520B4BB713E680" ); background-attachment: fixed; background-repeat: no-repeat; background-position: bottom right; } table { background-color: transparent; } td { background-color: transparent; } 칼럼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김혁   1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함락될 때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충절을 찬양한 변영로의 시의 한 구절이다. 임진년 왜란을 일으킨 왜적은 진주성을 여러 번 쳤으나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분기탱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진주성을 무너뜨려 사람과 짐승 씨 하나 남기지 말라 명했다. 야수떼 같은 왜군과 맞서 여러 차례 혈전에서 지켜낸 진주성은 1593년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왜적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잔치를 벌렸다. 축하연에서 왜적들은 물가의 돋은 바위에 선 한 여인의 아리따움에 홀려 버렸다. 그가 바로 임진왜란이 일자 의병장인 남편을 따라 화살이 비발치는 전장을 찾아온 논개였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주연에 참석했다.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마음”의 ‘논개’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낀 채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강낭콩보다 더 푸른” 남강으로 뛰어들었다. 한 섬약한 여인의 거사는 왜군의 기세를 꺾었고 이후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2   흑룡강성 목단강으로 가면 강녘에 “빈강”이라는 이름의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이제는 목단의 상징물처럼 된 기념비가 있다. 여덟 여인들의 군상, 일견에도 예사롭지 않은 석조물이다.  손에는 총대를 꽉 부여 잡고 뒤쫓는 적을 응시하는 모습, 여전사들의 표정은 결연하고 눈빛은 강렬하다. 그 비장하고 결연한 모습들이 살아숨쉬는 듯해 보는이들을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중 두 명의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전사가 유난히 눈에 띄인다. 이 군상 속 여전사들로는 동북항일연군 부녀퇀의 지도원 랭운을 비롯한 여덟 명인데 그중 안순복과 이봉선은 조선족이다.  “안언니”라고 친절하게 불리운  안순복은 여전사들중의 골간인물이었다. 아버지와 오빠를 왜놈에게 잃고 항일에 뛰어든 그는 항일련군의 지도인물인 박덕산과 결혼하여 딸 아이 하나를 보았다. 그후 남편은 태어 난 아이도 보지못한 채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그리고 엄동설한에 적의 소탕을 피하여 부대가 이동하던중 안순복과  여전사들은 아이들을 당지 사람들에게 맡기고 떠났는데 그후 그 아이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봉선에 대한 자료는 아주 적다. 그저 조선인이며 20세 남짓하고 림구현 사람이라는 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만주사변"이후 일본관동군은 만주지역에서 피비린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1938년 10월, 원정하여 목단강 하류에 도착하였던 항일부대는 무단장 강 기슭에 모닥불을 지피고 숙영하다 밀정의 밀고로 그만 일본괴뢰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일본괴뢰군의 수효는 엄청나 1000여명이나 되었다. 부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8명의 여전사가 나섰다.    그녀들의 유인으로 대부대는 순조롭게 적을 따 돌리고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8명의 여전사들은 삼면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립무원에 빠지고 탄약이 떨어졌지만 여전사들은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마지막 한 개의 수류탄을 뿌리고 탄약이 떨어진 총을 바위에 쳐 부수어 버렸다. 왜놈들이 각일각 조여오자 일본군의 포로가 될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손에 손잡고 강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한송이 또 한송이의 낙화처럼 꽃같은 육신을 차디찬 강물에 서슴없이 던진 것이다.   몇해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0주년을 맞아 정부가 선정한 ‘건국영웅 100인’에  재중동포  3명이 선정되었는데 그중 제1위로 “8녀투강”의 여전사들이 뽑힌 가운데 안순복과 이봉선이 방명을 올렸다.    3   할일소재의 텔레비드라마 “8녀투강”이 제작중, “8녀투강”의 이야기가 다시 사람들에게 회자(脍炙)되고있다. 지난해 11월부터 북경”강윤”영화텔레비제작사에서 항일소재의 드라마 “8녀투강”을 당시 여전사들이 몸을 던졌던 유적지인 흑룡강성 림구현에서 제작 중, 장예모 감독의 영화 "황금갑"에서 주요역을 맡았던 배우도 출연하는 등 드라마에 인력, 물력을 대거 투입해  제작하고 있다.   일전 드라마의 컷을 공개 했다. 공개된 사진 속 조선인 여전사 안순복의 역이 눈에 띄인다.   "8녀 투강"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영화, 연극, 그림책 등 다양한 쟝르로 각색되어 중국전역에서 항일경전이야기로 떠올랐다. 1950년과 1987년에 두차례 영화로 각색되어스크린에 올랐는데 1950년에 “중화의 딸들”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는 신중국이 건립된 후의 첫 전쟁영화이며 또 “카로위발리 영화절”에서 “자유투쟁상”을 수상해 중국영화사의 첫 국제수상작으로 되기도 했다.   왜적들의 강포앞에서 두려움없이 태산보다 높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여인들. “붉은 마음”을 품고 “푸른 강”에 뛰여든 여인들의 서사시는 오늘도 전해지고있다. ​ 2015년 1월 14일 "청우재"에서   "8녀투강"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 "중화의 딸" 포스터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락화/장사익      
279    아픔은 링크되여 있다 댓글:  조회:2702  추천:12  2015-01-15
  . 작가의 말 .   아픔은 링크되여 있다 ​ 김 혁​   ​ ​남경대학살 기념관에서​   1,   몇해전 조선족력사에 관심을 갖고있는 몇몇 지인들과 함께 우직한 답사를 강행한적 있었다. 경신년 대참안이 일어난 장암동으로 향한 답사였다. 룡정에서 동남쪽으로 다섯시간 가까이 수십리 산길을 톺아 목적지에 이르렀다. 장암동에서 수난자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다시 먼먼 산길을 되돌아섰다. 발에 물집까지 생겼고 힘에 부쳐 그자리에 주저앉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지나 가는 농부를 붙잡고 사정사정한 끝에 경운기를 삯내여 힘들었던 답사를 겨우 마무리할수 있었다. 그날 유적지에서 우리는 일제의 만행에 대해 피부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제는 민가와 학교와 교회를 깡그리 불사르고 남정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성차지않아 녀인네들이 눈물로 묻은 시체를 다시 파내여 소각하는 귀축같은 “이중학살”을 저질렀다.   답사를 마친뒤에도 따끔거리는 발의 통증은 길에 나서기도 힘들 정도로 며칠 련속 나를 괴롭혔다. 그보다도 일제가 장암동에서 자행한 만행에 대한 기억이 더욱더 나의 신심을 오래도록 괴롭혔다.   2,   장암동답사를 하기 몇해전에는 한부의 르포에서 심히 충격을 받은적 있었다. 소설쓰기와 병행해 매체에서 20여년을 기자직으로 일해온 필자로서는 르포가 갖는 매력에 대해 십분 잘 알고있다. 르포의 매력에 푹 빠져 한때 꽤 잘 나간 장편르포집을 집필, 출간한적도 있었다. 그 쟝르에 흥미를 가진지라 르포집이라면 통독은 물론 그 창작자에 대해 의례 주시하곤했다. 장순여(张纯如)라는 르포작가가 있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이자 사학가인 그녀는 남경대학살에 대해 저술한 르포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량심적인 집필은 일본 극우세력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로부터 끈임없는 협박을 당해 왔던 그녀는 정신적 고통을 못이겨 2004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작가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그녀의 문명(文名)을 알린 장편르포 “력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었다. 1937년의 그 겨울, 남경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그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린 보고서였다. 저자는 각종 기록과 생존자들의 인터뷰 자료등을 통해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폭력을 마치 공포소설을 보는것같은 끔찍한 문체로 세세하게 그려내였다. 희생자인 중국인의 관점에서, 미국과 유럽의 시각에서, 다각적으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력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기도(企圖)했는지 낱낱이 밝혔다. 부피가 두터운 르포를 읽으며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었다. 그 진저리는 나의 엄청 많은 열독리력중에서도 자주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다. 그후로 cctv의 일곱시 뉴스에서 나는 또 한번 그 떨림을 경험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다. 뉴스는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했다.   3,   그리고 지난 2014년 가을, 나는 저 유명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에 섰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남경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터미널 표시판과 지하철 도어의 전광판에 그리고 네 거리 곳곳에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가는 선로가 뚜렷이 표기되여 있었다. 기념관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서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나의 시망막을 모나게 찔렀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이다. “100인 참수경쟁”을 벌린 일본인 장교, 잘려져 뒹구는 중국인의 머리와 팔 다리, 산 사람을 과녁삼아 총검으로 찌르고 생매장하는 광경… 일본군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만여점의 자료들이 무거운 침묵과 간간의 흐느낌소리가 깔린 기념관내에 전시돼 있었다. 1937년 12월 13일 고도(古都) 남경은 일본군의 마수에 떨어졌고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한 이후 한달여 동안 적수공권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살륙했다. 남녀로소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고문, 강간, 생매장등으로 끔찍한 처형 방법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 잔인함이란 차마 입에 담을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버금가는 세계사적인 참극이다. 인류사에 이처럼 짧은 기간에 무차별적인 살륙전을 벌린 사례가 없다. 한개 도시의 일원(一圓)에서만 자행된 만행은 단기간에 저질렀다는 점에서 나치의 학살을 릉가한다. 전람이 거의 끝나가는 기념관의 출구쪽에는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대학살 당시 12초에 한 명씩 살해당했음을 상기시키는 소리였다. 그 숨통 죄이는듯한 시간의 소리를 한초 한초 헤며 나는 또 한번의 혹독한 떨림을 경험했다. 남경대학살은 종전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도 명백하게 확인된 참안이다. 그리고 남경대학살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꾜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량심세력만이 이를 인정할뿐 “이는 중국인의 환상이다”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있다. 그 극우세력의 대오속에는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들도 들어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있다. 불과 수십년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다. 수십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다. 위안부 배상촉구문제는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시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랭랭하게 외면하고 있다.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이다”며 그 오욕의 력사에 대해 세탁하려하고있다. 남경대학살의 부인에 이은 후안무치한 궤변의 연장이다. 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중에도 역시 중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펴낸 유명한 일본녀류작가도 있었다. 력사를 왜곡하는 그들의 역주행에 같은 소설가로서 커다란 유감을 느껴 나는 우리의 간행물들에 련이어 관련 칼럼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와중에 “력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력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한 소설가의 창작충동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영욕이 교차하는 무대인 남경, 통한이 서린 땅에서 나는 여러가지 아픔이 동시다발적으로 덮쳐드는 트라우마(재난을 겪은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적 반응)를 대신 경험할수 있었다. 장암동 참안, 위안부들의 참상, 남경대학살… 이 부동한 곳, 부동한 사람들이 꼭 같은 사람들에 의해 겪은 수난의 아픔들이 연결고리가 되여 나의 심장을 옥매듭으로 파고들었다. 급기야 나는 그 동질성의 아픔들이 올올이 링크(두개 이상으로 련결되는 물건이나 사건)되여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남경에서 돌아오는 고속렬차에서 허깨비처럼 흔들리며 그 아픔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다졌다. 어떻게 쓸가고 막연하게 그리고 환몽처럼 머금었던 생각들이 링크되여 한꺼번에 뇌리에 떠올랐다. 돌아와 서재를 뒤적여 보니 내가 소장한 작품들중에 위안부소재의 작품은 몇부 안되였다. 품을 들여 검색해봐도 뜻밖에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다.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적지않았으나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다. 영화나 드라마는 더러 있었으나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다. 그중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간직한 이들의 아픔을 위배한채 위안부 테마를 상술에 리용하는 작품도 적지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두운 우리 민족 현대사의 희생자들로서 전쟁을 통해 인간의 인권이 어떻게 유린됐는지 확인시켜주는 산 증인이다. 하지만 위안부의 몸을 노리개로 바라본 이런 작품들은 력사의 진실에 대한 재조명은 커녕 멍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다시 못질하는 행위로 볼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력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을 잊고 더욱이 그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망각과 상혼을 쫓는 세태가 부끄러웠다. 거기에서 우리 민족 작가들이 쓴 소설작품은 더구나 적었고 외려 일본이나 미국쪽에서 쓴 작품들이 몇부 있을뿐, 작품성이 들쭉날쭉해 수작(秀作)은 찾아보기 어렵다. 게다가 조선족 작가들의 이 소재에 대한 픽션작품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었다. 지성화된 기계적 감정에 길들어 있는 우리 작가와 가련할 정도로 적은 독자군은 이런 제재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실제 근년래 근대력사를 다양한 쟝르로 재조명하는 일에 빠져들어 있는 나를 두고, 나의 문학블로그에 들어와 “이 따위로 죽은 사람들만을 위해 구닥다리 냄새 나는 글을 쓰지 말라”는 악풀이 루차 달린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소설, 인물전, 칼럼, 기행수필등을 동원해 우리의 영욕이 엇갈린 력사를 조명하는 나의 작업은 이 수년간 지속되고있다. 그래서 다섯부의 장편을 펴내고 다음 소재에 대한 선택에 심려와 숙고를 거듭하던중 여섯번째 장편소설의 소재로 단연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골라잡았다. 그 력사적 대사건의 들머리에 바로 우리 신변에서 일어난 장암동 참안도 곁들어 기록하기로 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진술,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문서, 르포 등 갖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력사의 질곡에 붙매였던 그녀들을 대상화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자 한다.    통한으로 얼룩진 그 페이지를 쉬이 넘기지도 접지도 말고 계속 적어내려가려는 소명(召命)의 의지는 나의 끊임없는 창작행위와 링크되여 있다.    2014년 초동(初冬) “청우재.聽雨齋”에서 "연변문학" 2015년 1월호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진혼곡 - 모짜르트
278    일송정 푸른 솔 댓글:  조회:3256  추천:22  2015-01-09
칼럼   일송정 푸른 솔   김 혁   1,   양처럼, 수굿이 걸음을 옮겨 을미년 새해의 첫 등산을 했다. 고도(古都) 룡정에서 서남쪽방향으로 약 4키로메터쯤에서 룡정을 보듬어 안은 세전이벌과 평강벌의 복판에 분수령으로 솟았는 비암산이라는 고운 이름의 산에 올랐다. 막상 이 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것은 한 그루의 나무때문이다. 물론 산에 오르면 사처에 사철 푸른 소나무 투성이지만 이 소나무만은 그 위상이 남다르다. 1930년대에 이미 있었던 이 소나무는 흡사 큰 기둥에 청기와를 얹은 정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일송정(一松亭)”이라고 부른다.     일송정 푸른 솔은 흘러 흘러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저 유명한 “룡정의 노래”의 첫구절에 나오며 세간에 더욱 알려진 나무, 룡정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송정은 그야말로 룡정을 징표하는 “마스코드”이다. 2,   일찍 룡정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고색찬연한 일송정은 룡정을 지켜주는 “당산나무"격이였다. 결혼하여 젊은 녀인들은 "일송정”이 뿌리를 박은 바위를 기자석(祈子石.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바위)으로 삼았고 가물이 들면 농부들은 일송정을 기우제를 지내는 신주나무로 모셨다. 비암산은 언젠가부터는 반일투사들의 비밀아지트 역할도 했다. 반일지사와 학생들이 일제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멀리 산에 올라 일제를 쳐부시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기원하던 곳이 일송정나무 아래였다.    일송정이 룡정사람들의 드높은 기상을 보여주는 징표로 부상하자 불안한 일제는 나무에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잔악한 일제경찰은 일송정에 대못을 박아넣고 구멍을 내고 후추가루를 넣고 급기야는 나무에 대고 사격련습을 하는등 악랄한 수단으로 나무를 고사(枯死)시켰다. 1930년대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하면서 취재차 룡정행차를 하였던 김기림의 “간도기행” (조선일보 1930년 6월13일~26일) 에서도 당시 일송정의 모습을 찾아 볼수 있다. “평강령 남단을 가로막고 앉은 일송정 봉오리는 고절을 자랑하던 소나무도 옛이야기. 지금은 마른 거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간도에 남아있던 최후이며 유일한 소나무도 다만 일송정 이름속에 남아있는것이다.” 3,   1980년대 룡정시의 사회단체들은 그 옛날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설화가 담긴 소나무를 복원하기로 합의를 보고 복원식수를 하였다. 소나무를 떠다 심었고 나무곁에 팔각정자도 세웠다. 하늘향해 비첨이 건뜩 들리고 단청무늬가 아름다운 정자의 천정에는 가곡 “룡정의 노래”에 나오는 주요한 줄거리를 소재로 하여 우물, 말 탄 사람, 달빛 어린 해란강, 룡주사, 룡문교, 대성중학교등 룡정의 경관들을 그려넣었다. 이후 일송정이 섰는 산정에로 오르는 돌층계, 일송정 기념비, 팔각정자, 조선족 유명 작가 시인들이 지은 룡정관련 시구를 새긴 노래비등을 건립하여 한동안 인적기 드물던 산정에 제법 하나의 풍경구가 조성되였다. 지금 룡정시의 텔레비중계탑, 강경애 문학비와 함께 비암산에 자리잡은 일송정은 룡정의 빠칠수 없는 하나의 주요한 경관으로 되였고 일송정은 정녕 유서깊은 룡정과 더불어 중국조선민족의 애환과 분발을 상징하는 문화유물로 민족의 전설과 력사를 이야기 해주는 신목(神木)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였다.   지난해 말, 룡정시에서는 또 한번 일송정을 새롭게 수선하였다. 300여만원을 투입하였고 한국의 저명한 조경사를 초빙하여 일송정기념비주변을 새롭게 조경하였다. 사철 푸르른 잎새, 철갑을 두른 듯한 몸체, 소나무는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다. 혹독한 추위와 매서운 바람도 잘 견뎌내며 허연 눈발을 떠이고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는 그래서 모진 력사의 시련을 견디며 오늘에 이른 우리 민족정신과도 많이 닮았다. 새롭게 조경한 일송정은 오늘도 비암산의 창공 한 자락을 떠인채 그 전설을 읽으며 찾아드는 유람객들을 맞아 주고있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77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댓글:  조회:3783  추천:13  2015-01-05
칼럼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김혁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의 전문이다. 1942년 저 유명한 “참회록”을 읊조리고는 현애탄을 넘은 윤동주의 일본류학시절 첫번째 작품이다. 편편마다 훌륭해 “옥석”을 가리기 힘든 윤동주의 시 중에서 양띠해를 맞아 특별히 이 시를 뽑아 읊어 봤다. 시를 보면, 화자는 하루 종일 황혼이 짙어지도록 어떤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에서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인 “흰 그림자”는 즉 시인을 괴롭게 만든 수많은 고민이며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은 어두운 곳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선 상황을 은유하는듯 하다. 화자는 마음 깊숙이 이런 고민을 갈무리하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괴로워 한다. 드디여 시인은 “하루종일 시들도록 귀”를 기울인 끝에 이제 어리석지만 늦게나마 모든것을 깨닫고 오래 마음 깊은속에 괴로워하던 해결할수 없는 고민들을 하나, 둘 버리기 시작한다. 그 동안 연연하면서 사랑하기까지 했던 그 고민들을 돌려보낸 뒤에 “땅거미”를 옮길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의젓하게 풀을 뜯기시작하고 있는것이다. ​ 2015년 새해는 을미(乙未)년 양의 해다. 새로운 문턱을 넘는 섣달 그믐의 밤에 모두 밝은 꿈을 꾸었기를 바래본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 꾼 꿈은 바로 양 꿈이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꿈속에서 양을 보았는데 양의 뿔과 꼬리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놀라 잠에서 깼다. 꿈자리가 요상해서 무학대사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했더니 대사는 곧 임금에 등극할 것이라고 해몽했다. 한자의 “양(羊)”에서 뿔과 꼬리에 해당하는 획을 빼내면 “왕(王)”자만 남게 되니 곧 임금으로 등극할거라는 풀이였다. 이로서 양 꿈은 길몽, 양은 상서로움의 상징이 됐다. 여기서 상서로움의 ”상(祥)”자를 보면, 왼쪽의 보일“시(示)”자는 원래 “신(神)”을 뜻하는 글자이다. 그러니 신이 양을 만나면서 상서로움을 뜻하는 “상(祥)”이 된것이다. 음(音)으로는 밝은 양(陽)과 같아 더욱 길상의 의미가 있다.   아홉 번 굽어진 양의 창자처럼 세상이 복잡해 살아가기 어렵다는 구절양장 (九折羊腸)이라는 말이 있다. 올해의 수호신 양이 어떤 기운을 몰고 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앞길이 아홉번 굽어진 길이 주어질지라도 양처럼 깊은 생각, 인내로 그 위기를 넘어야 할것이다. 그러할진대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조용히, 서두르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조화롭게 적응하는 양의 이미지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빨리 달리기에만 급급해 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과 계시를 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속에서도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주어진 길”을 걸어갔던 윤동주님의 시를 다시 읊어 보는 을미년의 첫 아침이다. 을미년, 푸른 풀밭의 양떼처럼 모두가 행복하고 길상스러운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2015 을미년의 첫 아침 “청우재(听雨斋)”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76    달맞이 꽃(夜來香), 지다 댓글:  조회:4385  추천:15  2015-01-03
. 칼럼 .   달맞이 꽃(夜來香), 지다   김 혁   1,   남풍은 쓸쓸하게 불어오고 꾀꼬리 구슬피 우옵니다. 달아래 꽃들은 모두 꿈에 젖는데 오직 달맞이꽃만이 향기를 뿜네요. 망망한 어둠속에 꾀꼬리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그 꽃같은 꿈을 난 더더욱 사랑합니다. 꽃을 품에 안고 꽃잎에 입맞춤하며 달맞이꽃 나 그대를 위해 노래하고 그대를 그리워합니다   주옥같은 노래로 억만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중가수 등려군의 대표작 “야래향” 전문이다. 야래향(夜來香)은 밤에 피는 꽃이다. 야래향을 일명 월하향(月下香), 월견초(月见草), 기생화(妓生花)라 부른다. 낮에는 꽃술이 오므라들었다가 달뜨는 밤이 되면 활짝 벌어지기 때문에 일명 “달맞이꽃”이라고도 한다. 해외에서는 나이트자스민(night scented jasmine)이라 부르는데 역시 밤이라는 “나이트”가 따라 붙는다.   바늘꽃과에 속하는 2년생 식물로 학명은 Oenothera odorata라고 한다. 키는 50~90㎝, 꽃은 지름이 3㎝ 정도 노란색이며 7월부터 가을까지 가늘고 긴 통꽃이 피는데 남아메리카의 칠레가 원산지이며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귀화식물로 자란다. 그러면 달맞이꽃은 왜 밤에만 피여나는 것일까? 그 해답은 달맞이꽃의 수정을 도와주는 곤충에 있다. 바로 박각시나방이 그 주인공인데 이 나비는 꽃잎이 벌어지는 박꽃을 찾아가 꿀을 얻는데서  신랑인 박을 찾아온 각시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박각시 나방”이라고 불린다. 박각시 나방이 밤에만 다니며 수정을 도와주기에 달맞이꽃이 밤에만 그 수술을 벌려 나비를 맞이하는것이다. 서로 경쟁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밤을 택한 참 지혜로운 식물이요, 곤충이다. 달맞이꽃은 우리에게 유용한 식물이기도 하다. 달맞이꽃의 종자에서 짜낸 기름에는 “감마리놀린산”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여 있어 혈액순환과 콜레스테롤 개선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 천연화장품의 원료로도 리용된다고 한다. 희랍신화속에도 야래향이 나온다. 별을 사랑하는 님프들속에서 홀로 달을 사랑하던 님프가 모함을 받아 달이 없는 곳으로 추방된다. 이를 본 올림포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그를 쌍히 여겨 그 령혼을 달맞이꽃으로 환생시켜 달이 뜨는 밤이면 꽃을 피우게 해주었다고 한다.   2,   밤에만 조용히 향기를 뿜는 달맞이 꽃처럼 애타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 등려군의 “야래향”은 개혁개방을 맞은 중국에서 카세트테프로나마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또한 광동어, 일본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어, 한국어 등으로 동남아지역의 베스트 가요로 떠올랐다. 등려군 외에도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번안해 불렀다. 하지만 막상 이 노래의 원창자는 등려군이 아니다. 영화의 주제곡으로 맨 처음 이 노래를 세상에 선 보인 사람은 리향란(李香兰)이란 이름의 가수이다. 그리고 그는 이름자와는 달리 중국인이나 한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그의 본명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   요시코의 아버지는 로일전쟁후 중국 동북으로 왔고 이어 1920년 요시코가 태여났다. 요시코는 당시 중국과 일본,  로씨야인들이 모여 살고 있던 만주에서 일본어 중국어 로씨야어등 다국 언어를 자연스레 익혔다. 그후 아버지의 중국친구인 퇴역장군 리계춘이 야마구치 요시꼬를 양녀로 삼았고 향란이라는 중국이름을 붙여줬다고한다. 야마구치 요시코는 소녀 시절 폐병을 치료하려고 성악을 배웠는데 1933년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시)방송국이 중국인청중을 끌기 위해 기획한 프로- “만주 신가곡”에 발탁되여전문가수가 되었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친구가 지어준 이름인 리향란이라는 이름을 예명을 썼다. 1931년 “9.18사변”을 일으켜 위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겨우 열세살난 요시코를 방송국 전속가수를 시켜 제국주의를 선전하기 시작했다. 만주영화협회는 1937년 “위만주국”정부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满洲铁道株式会社)가 50%씩 투자하여 “만주국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에 설립했는데 만주인들에게 보여줄 영화를 만주인들이 찍는다고 표방했으나 실지로는 일본인들이 조종했고, 목적은 “오족협화”, “일만친선”을 국책으로 하는 문화정책추진이였다. 이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음악영화를 기획했는데, 중국녀배우들이 노래를 부를 줄 모르고 대역도 찾지 못해 골치를 앓던 차에 제작자가 우연히 신경방송국이 방송하는 “만주신가곡”을 듣고 리향란이라는 인물을 기용하려 마음먹었다. 섹시하고 이국적인 용모와 뛰여난 가창력. 여기에 중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구사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배우로도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리향란은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면서 영화의 주제곡으로 “야래향” “소주야곡(苏州夜曲)” 등을 불렸다. 일석에서는 이 “야래향”을 민족적 울분이 함축된 노래라고 본다. 이후 셜리 야마구치라는 이름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야마구치 요시코는 미군 장병들과 사랑에 빠진, 동양에서 온 신비한 녀인을 연기했다. 순종적이고 사랑스러운 녀인으로 분한 리향란은 대중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했고 중국과 일본 나아가 할리우드에서까지 사랑받을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중국정부는 친일, 친미 행위를 한 반역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리향란 역시 처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시킨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선동한 죄로 법정에 서게 된 리향란은 결국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과정에서 리향란의 진짜 정체가 밝혀졌다. 그녀는 자신이 일본의 선전도구로 리용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리향란이 사형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부모가  가까스로 호적등본을 찾아내 일본인임을 립증했고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그후 리향란은 중국에서 추방됐고 중국에서는 그의 영화와 노래가 금지됐다. 따라서 “야래향”이라는 노래도 40여년간 중국땅에서 사라지게 된것이다.   3,   일본인 신분을 속인 완벽한 중국인 녀배우로 격동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일본 녀배우 야마구치 요시코씨는 지난 가을, 도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향년 94세.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일전에 있은 정례브리핑에서 야마구치 씨의 사망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리향란녀사는 전후 적극적으로 중일 우호 평화사업을 추진하며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며 "우리는 그의 서거에 애도를 표시한다"고 론평했다. 야마구치씨가 비록 일제제국주의를 선전하는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 행위가 그녀의 예술적 성취등을 모두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평가를 내린것이다.   중국에서 강제 추방당한뒤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본명으로 배우 활동을 재개했다. 1950년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영화 “추문”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1950년대에는 미국 영화와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1년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와 결혼했다가 4년 뒤 헤여지고 1958년 일본인 외교관과 결혼하면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팬들의 부름에 떠밀려1969년 TV 토크쇼 진행자로 복귀했고 국민적 인기를 배경으로 1974년부터 1992년까지 근 20년동안 자민당 참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환경성 정무차관까지 지내기도 했다. 연예계 생활 은퇴 후에는 윁남전과 중동전쟁 등에 현장 취재기자로 뛰여다녔고 당시 베일에 쌓여있던 조선의 김일성 수상을 사상최초로 단독 인터뷰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김일성은 언론 로출을 꺼리는 인물이지만 리향란의 팬이라 결국 인터뷰를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야마구치는 만년에 자서전 “李香蘭私の半生”을 펴냈다. 중국인이다, 혼혈아다, 간첩이다, 뭐다 등등 끈질기게 따라붙던 여러 가지 설들을 해명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한 그 책을 길림문사(吉林文史)출판사가 1990년 4월에 번역출판했는데 자서전에서 그녀는 “리향란으로 출연했던 영화를 다시 보니 정말 부끄럽다”며 선전영화에 출연했던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스타”라는 타이틀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야마구치 요시코는 두 권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행각을 반성했다. 또 “아시아녀성기금” 부리사장을 지내며 전쟁 피해자와 종군 위안부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것을 일본정부에 촉구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 했다. 2005년에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도 반대해 나섰다.   력사의 증인 한명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그나마 안위되는것은 그가 보여준 만년의 행보가 어제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로인네의 웅숭깊고 착한 자세를 보여줬기때문이다.   “만주국”의 실력자로서 “만주오인방(滿洲五人幇)”의 하나였고 전후 일본정계를 주물렀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신죠 일본총리처럼 죄책감이 없는 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작은 무대에서 력사를 위배한 광대극을 놀고있것이 작금의 일본이다. 이러한 상황에 요시코의 반성과 노력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리향란, 아니 요시코라는 인물의 서거에 대중이 눈길을 모으며 그녀의 노래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이는 리유라면 리유다. 야래향은 이제 아름답게 졌다.   2014년 9월 18일 “청우재(听雨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75    양을 찾는 남자 댓글:  조회:2316  추천:10  2015-01-01
독서칼럼   양을 찾는 남자 김 혁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 (상해역문출판사)을 읽다   어느 중국드라마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녀자가 열심히 읽고있는 책표지를 보고 남자친구가 비아냥거린다.  《이제야 무라카미냐? 책 좀 읽고 살어!》 무라카미 하루키, 현시대를 살면서 문화적감각이 있다는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읽지 않으면 대화가 안된다는 정도로 대단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작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600만부이상 팔릴 정도로 기록적인 베스트셀러행진을 하며 오래전부터 중국, 한국, 독일 그리고 북유럽에서 많은 애독자를 낳아왔다. 중국에서도 80년대 중기로부터 진행돼온 그의 베스트셀러 행진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있다.  하루키가 책을 내면 내용을 따질 필요도 없이 사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고정독자, 하루키중독자들이 많다고 할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대렬속에는 당연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끼여있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거의 닥치는대로 다 읽었다.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댄스 댄스 댄스》, 단편집과 근작인 《해변의 카프카》까지… 하루키의 작품은 대표작으로 되는 《노르웨이의 숲》(후에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개칭)을 중문판본으로 맨 먼저 접했다가 후에 친지가 한국에서 부쳐온 삼진기획 88년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오래동안 《좌》의 철쇄에 매여 살아온 우리의 정서와 너무도 앞서간 그들의 성문화때문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었고 그래서 오히려 기어코 읽었었다. 당시 하루키의 책을 처음 읽고 나는 생각을 많이 할수 없었다. 솔직하고 감성적인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현실속에서 우리가 드러내지 못하는 숨겨진 모습이 아닐가? 하는 상당히 혼란스런 느낌을 받아안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하루키의 팬이 되여버렸노라고 고백한다. 실상 하루키에 대해 잘 알고있는 사람들은 이 책, 《노르웨이의 숲》이 가장 하루키적이지 않은 책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나에게서 이 소설은 재미는 없었지만 길게 느껴지지 않은것은 정말 신기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 독자층, 정확히 말하면 우리 조선족독자층에서 아직도 하루키는 낯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늦게나마 그의 작품을 환기시키면서 그중 한편을 뽑아본다. 오늘 함께 읽고저 하는 작품은 누구나 아는 《상실의 시대》가 아니라 그 이전에 창작한 《양을 쫓는 모험》이다. 80년대에 출간된 작품을 남해출판사의 중국판본으로 뒤늦게 읽었다. 제목 그대로 양을 찾는 이야기다. 《나》는 친구와 함께 작은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리혼남이다.  안해가 집을 나간 뒤 《나》는 새로운 녀자친구와 사귀게 된다. 그녀는 예쁜 귀를 갖고있었기에 전문적인 귀모델을 하고있다. 또한 그녀는 미지의 앞날을 미리 점칠수 있는 기이한 예지능력을 갖고있는데 그녀는 《나》에게 앞으로 양을 쫓는 모험이 시작될것이라고 예언한다. 신비로운 그녀가 예언한대로 《나》의 삶에 양이 걸어들어온다. 어느날, 《내》가 친구와 함께 경영하고있는 광고회사에 어느 우익조직의 비서가 찾아온다. 용건인즉 《내》가 어느 잡지의 화보에 사용한 한장의 사진의 출처를 밝히라는것이였다. 그 사진은 양떼와 혹가이도의 자작나무숲이 찍혀져있는 평범한 사진이였다. 《나》를 찾아온 그 우익조직의 비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에는 신비한 양 한마리가 있다. 그 양이 우익조직의 거물과 관계가 있다. 우익조직의 두목으로 승격한 해에 거물은 자주 양의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거물의 머리속으로 양이 들어간것 같다. 그리고 그 양이 거물의 탁월한 힘의 원천이 된것 같다. 이미 병상에 누워있는 거물은 의식을 잃고있으며 죽음이 림박해있는데 그가 죽기전에 그와 양 사이의 비밀을 해명하지 않으면 그가 친히 만들어낸 조직은 와해되여 힘을 잃을것이다. 양은 새하얀 털에, 등에 별모양의 갈색 털이 나있다. 그 사진에 찍혀있는 양을 발견해야 하는데 기한은 1개월이내이다.  《나》는 그 양을 찾아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협박에 가까운 압력에 《나》는 예쁜 귀를 가진 녀자친구와 함께 멀리 혹가이도로 향한다.  사실 《내》가 사진의 출처를 밝히기를 거부한데는 리유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 행방불명이 된 《쥐》로부터 《나》에게 편지가 왔기때문이다. 그 편지에 문제의 양의 사진이 동봉되여있었고, 《쥐》는 그 사진이 자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한달이란 짧은 시간내에 양을 찾아야 하지만 어디서도 몸체에 별을 가진 양은 찾아볼수 없다. 《나》와 녀자친구는 호텔에 묵으며 일주일동안은 실마리를 잡지 못한채 시간을 허비한다. 그런데 등잔밑이 어둡다고, 정작 실마리는 《내》가 머물러있는 호텔안에 있다.  호텔의 지배인의 아버지인 양박사에게서 양에 대한 풍문을 알게 된다. 양박사는 30년대에 몸속에 양이 들어갔는데 이어 그의 몰락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은 얼마후에 양박사의 몸에서 나가버렸는데, 양은 리용가치가 없어지면, 그 인간속에서 나가버리는 특성을 가지고있다고 한다. 박사의 몸에서 나간 양이, 지금은 거물이 된 당시의 우익 청년속으로 들어갔고 이어 또 그의 몸에서 나와버렸다는것이다.  《나》는 양박사의 이야기에 따라, 그 사진에 찍혀진 장소를 찾아간다. 목장의 한쪽 구석에 미국식의 시골집 2층 건물이 있었는데 한쪽방에 뜻밖에도 《쥐》의 소지품과 의복이 있었다. 하지만 《쥐》는 눈에 띄이지 않았다. 나는 《쥐》를 기다린다. 그리고 녀자친구는 두통을 앓고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예지능력이 이 목장에 들어온 뒤로부터는 작용하지 않았다. 녀자친구는 목장을 떠나가버리고, 차츰차츰 겨울이 다가온다.  눈이 내리는 날 밤에 《나》는 드디여 기다리던 《쥐》를 만난다. 사실상 《쥐》는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일주일전에 이미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었다. 그 죽은 《쥐》의 유령이 《나》를 찾아온것이다. 《나》와 《쥐》의 유령은 맥주를 마시면서 지금까지 쌓였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쥐》는 그 문제의 양이 자신의 몸속에 들어왔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자신은 양이 지시하는대로 행동하고싶지 않았고, 그래서 양을 죽이려고 결심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쥐》는 자살을 택했던것이다. 목장에서 돌아와 나는 거물의 비서를 만난다. 그는 《쥐》를 만나기 위해 혼자서 목장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쥐》가 장치해둔 폭발약이 터지는 바람에 죽어버린다…     어찌보면 황당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 하지만 책의 마지막장까지 덮고나니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듯한 느낌이다. 재미있고 스릴있는 모험, 그리고 양사내라는 초현실적 인물이 가미되여 완성된 읽을거리가 풍성한 소설이였다.  하루키의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를 갖게 되는 점은 어쩔수 없는 운명에 휩싸인 주인공이 시련을 이겨나가는 과정이다. 하루키의 작중인물들은 저마다 살아가면서 갑자기 어쩔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에 당착한다. 자칫 그대로 좌초되여버릴것만 같지만 끝내는 고해의 수면밖으로 떠오르는데 성공한다. 그들에게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과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그것이 모든 일이 해결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다는 중국식의 모식인 대단원(大團圓) 결말 같은걸 기대할수 있는 방식은 아니지만, 마지막장까지 호흡을 달구는 그 불투명함이 하루키식의 모식이라면 모식일것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별모양의 무늬가 있는 특별한 양, 이 《양》은 작가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준비된 상징물임은 쉽게 알수 있다. 따라서 《내》가 벌린 양을 찾는 모험은 일상에 봉인되였던 과거를 찾아내는, 말하자면 자아를 찾는 려행이였다고 풀이해본다. 하루키의 작품은 그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를 읽고서가 아니라 바로 이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서 비로소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많은 작품들은 실험의 씨앗이 철저하게 뿌려져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현실과 의식의 구분이 모호해지곤 한다. 즉 판타지적요소를 보이는 작품들이 많은것이다.  어느 소설에서는 《일각수》라는 현실에는 없는 외뿔동물도 나온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곳곳에 환상적인 부분을 설정함으로서 현실이 아닌 소설의 특성을 살려 다시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 양 사나이나 귀가 특수한 녀인, 자살한 쥐 등등은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미묘한 부분을 상징하는 주요한 설정이며 아울러 독자에게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다.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요소때문에 하루키의 소설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내가 늘 꿈꾸면서도 감히 행하지 못하는 꿈의 여유를 하루키의 소설에서 느낀다. 그러나 책을 내려놓고보면 하루키의 소설은 전혀 비현실적이지가 않다. 실재하기 어려운 모험적상황을 전제로 하고있지만 그렇게 설정된 상황은 또 현실주의를 뺨칠 정도로 리얼리티를 띄고있다. 현실과 직접적회로를 갖고있는것이다. 신기한 인물들과 신기한 세계를 합쳐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에 하루키만의 색이 더해져 알수 없는 소외, 허무 등 도시인의 일상을 보여주고있다. 즉 현실을 되돌아보고 낯설게하는 신비성이 그의 소설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다. 사실은 내가 살고있는 세계도 하루키의 소설에서처럼 여러가지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내가 모른채 살아가고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현실성을 가지고있다. 삶이 힘들더라도 우연을 기대하며 즐겁게 살아갈수 있게 하는 용기를 심어주는것 같다. 실제로 일본의 권위있는 문예비평가들 가운데는 하루키의 소설은 일본문학이라고 부를수 없다는 정도로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의 문체 그리고 미국문화에서나 볼수 있는, 서양문학의 영향이 마음에 안든다는것이다. 미국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대학에서 강의텍스트로 쓰이고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늘 셔츠에 청바지차림인 이 작가에게 일본 전통적인 문학의 풍요함이 결여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하루키는 전 세계를 경악시키고있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가로서 주목받고있다. 《뉴욕 타임즈》는 《독창성과 매력, 완벽한 기법으로 사로잡는 기쁨과 자극의 천재》라고 그를 격찬하고있다. 《일본소설에는 모종의 전형적인 문체 같은것이 있는데 나는 그런것들과는 전혀 다른데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때문에 내 소설을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래서 비판도 많이 받는다.》 하루키의 답변이다. 현실과 환상의 공간을 즐겨 넘나드는 하루키는 개개인의 심리묘사와 의식세계를 그만의 문체로 묘사해준다. 또한 놀라운 관조력으로 모든 작품을 통틀어 그는 현대사회 소외된 군상들의 고독을 나라는 일인칭 시점으로 집요하게 파헤쳐왔다.      그의 작품을 가리켜 《무국적성》이라든가 《가벼움의 미학》이라고도 얘기하지만, 하루키문학의 외면적인 가벼움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존재의 무거움을 견뎌내려는 몸부림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무국적성이나 가벼움때문에 변강의 오지인 이곳 사람들에게마저도 이렇게 친근하게 읽혀지고있는것이 아닐가? 순문학을 한답시는 개인적으로는 거개가 대중적이면서도 튀는 소설을 쓰는 하루키가 특별히 좋은 글을 쓴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하루키의 장점이라면 그의 글을 읽으면 위로받는 느낌을 받곤 하는것이다. 그런 그가 좋아서 그의 대부분의 책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무라카미의 소설은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끄는데가 있다. 이는 다른 외국작가들의 작품들을 읽었을 땐 느끼지 못했던 다른 느낌이다. 인물의 내면들이 놀랍도록 나와 비슷하잖은가.오래전에 쓴것이고 외국사람이 쓴것인데도 하루키란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이 우리와 완전히 같은데가 있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그들의 고독감을 그려내는 우화적 에피소드들이 꼭 서로 닮아있는것이다. 그것이 하루키의 작품에 심취되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라고 해야 할것이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74    나 홀로 집에 댓글:  조회:4054  추천:12  2014-12-25
  . 칼럼 .   나 홀로 집에   김혁   1,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꼭 나오는 영화가 있다. 크리스마스 특선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각지의 여러 영화채널에서 방영한다. “나 홀로 집에 (小鬼当家)”라는 영화이다. 1990년 미국에서 제작된 코미디 영화이다. 8살난 아이 케빈은 부모들이 휴가차로 프랑스로 떠나면서 홀로 집에 남겨진다. 성탄절날 아이가 혼자 있는 집에 두 명의 도둑이 들이닥치고 아이는 홀로 도둑들을 맞서 나간다. “나 홀로 집에”는 개봉한지 얼마 안되여 미국내에서 흥행률 1위를, 전 세계에서는 흥행률 3위를 기록했다. 결과 세계적으로 흥행수입 4억 7천만 딸라라는  기록을 올렸다. 그에 힘입어 시리즈로 몇부 더 제작되여 그냥 신화같은 흥행가도를 달렸다. 그후로 이 영화는 반드시 크리스마스 황금 시간대에 편성되곤했다. 2011년에는 5백만이 넘는 가구가 시청하여 력대 크리스마스 최고 시청률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어제저녁, 중앙텔레비방송 영화채널에서도 황금시간대인 9시에 이 영화를 상영했다.   2,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뜬금없이 홀로 집에 남겨진 우리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에 청승맞은 하소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부모없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 아이들, 이 아이들을 우리는 “류수아동(留守儿童)”, “편부모 가족”, "결손가정“이라 부른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 조선족사회의 최대의 문제점으로 부상되였다. 리산(離散)으로 인한 조선족 가정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편부모 가족은 조선족의 도시진출, 출국로무열과 더불어 날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학교 결손가정자녀교양연구모임”에서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연변의 결손가정이 60%, 일부 학교의 학급은 지어 87%를 차지했다.   과반수이상의 우리의 아이들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것이다.   또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길림지역 7개중소학교에서도 편부모거나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가 재교생총수의 60.65%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중에 부모가 리혼했거나 사망한 학생의 비례수는 12.3%인 반면 해외 로무송출로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는 67.4%나 달했다. 그중 량부모가 다 없는 학생비례수도 34.1프로, 적지않은 수자이다.    료녕성 심양에서도 시내 5개 조선족 소학교와 2개 조선족 중학교 학생 1천641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은 35%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65%가 결손 가정의 자녀였다. 조사 대상 가운데 부모가 리혼했다는 응답은 13.9%였으며 부모 가운데 한 명만 있다는 응답이 27%, 부모 모두 없어 조부모 등 친척과 함께 생활한다는 응답도 24.1%에 달했다. 이러한 집계자료에 따르면 결손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부모 쌍방 혹은 일방의 출국이였고 다음 부모의 리혼이였는데 사실상 부모 일방의 출국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리혼 및 외국인과의 결혼 등)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현대판 “리산가족”의 비운을 겪고있는지,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동강나고 비여진 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삭막한 가정환경에서 생활면에서, 학업에서 다각적으로 좌절과 갈등을 겪고있다. 부모와 장기간 리별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가야만 하는 아이들의 증후(症候)는 심각하다. 강보의 아이들을 품에서 떼놓고 해외로 나가서는 5년, 6년 지어 20년까지 보내면서 지어 자기 아이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사례는 한 집 건너 주변에 수두룩하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부모란 그저 한국에서 몇달에 한번씩 걸려오는 전화속의 목소리로 달마다 부쳐보내는 돈의 액면으로만 기억되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낯익으면서도 낯설은 존재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공부에 골몰할수가 없고 학업이 뒤떨어지면 곁에서 부축여주는 보호자도 없이 결국 학교생활을 쉽게 포기하고 사회로 나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리고 비여진 자신의 책무를 돈으로 상환하려는 부모들에 의해 어려서부터 돈에 맛을 들인 아이들은 그 금전관에도 문제가 생기기 일쑤다. 아이들은 너무나도 일찍이 금전만능, 한탕주의에 환혹되고 있다. 학교의 문제생들 대부분이 이런 가정에서 속출되고 있다는것이 사례와 집계로 증명되고있다. 아이들의 성격 형성과 사회적 관계는 많이는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되는데 가정의 부재로 인한 “나 홀로” 아이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비여지고 관계가 차단될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와 금쪽같은 자식들에게 쏟는다고는 하다지만 그 과정이 외려 가족간의 그리움과 애정에 목 말라가고 있는 자식들의 어린 가슴에 멍이 들게 하고있다. 부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한 아이들에 대한 소외가 자녀들의 성장과 꿈과 미래에 상처를 덧나게 하고있는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줄어들고 비여 있는만큼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대상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외로움 지어 원망까지 키우며 살아가고있다. 이 문제를 절감하고 보호와 지원 시스템 마련 등 사회적인 거동이 일고는 있지만 날로 속출하고있는 이 군체에 대한 노력의 손길은 아직도 판부족이고 미비하다.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결손가정으로 인한 사회적인 증후가 더욱 심하게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한 처방전의 마련이 화급하다…   3,  영화에서 주인공 캐빈이 두볼을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래서 영화의 포스터에도 올랐고 많은 배우들이 그 모습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 아롱다롱 성탄수가 불밝혀져있는 따뜻한 방안에서 부모와 풍성한 식탁에 오순도순 마주앉아 캐럴송을 부르며 재롱을 떨어야할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홀로 텅 빈 방에서 마음의 비명을 지르고 있지않을런지 모른다.   2014 12월 25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73    잔혹 "흑백 스토리" 댓글:  조회:4076  추천:12  2014-12-18
. 칼럼 .   잔혹 “흑백 스토리”   김 혁   1,   타란티노라는 할리우드 감독이 있다. 바나나처럼 길숨한 얼굴을 가진, “악동”이라는 불미한 별명을 가진 감독이다. 1992년 영화데뷔해 “저수지의 개들(落水狗)”, 저속한 소설(低俗小说), “킬빌(杀死比尔)”, 등 내놓는 영화마다 히트작을 연출했다. 영화광인 나지만 타라니티노 감독의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않는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것은 시각과 청각에 대한 고문이다. 킬러, 변태, 게이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나오며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사에 무엇보다도 영화 전편은 선혈로 얼룩진 지나친 폭력이 관통된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전부의 영화를 DVD로 갖추고있는것은 비순차적인 서사구조, 다중 플롯, 허를 찌르는 반전 등 분명 그만의 색갈있는 문체와 쟝르를 다루는 솜씨가 나의 소설창작 탐구에도 은근한 영향을 주었기때문이다. 그의 근작 영화 "해방된 장고(被解救的姜戈)”는 이 바나나같이 길숨한 얼굴의 B급감독에 대한 색안경을 벗게 했다. 미국에서 련이어 인 인종차별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고 맨 처음 이 영화를 떠올렸다. 번중한 창작 여가에 이 영화를 다시 들추어내여 보았다. “장고”는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몇해전인 1859년, 폭발직전의 “화산구”에 거의 다다른 시점에 선 흑인 노예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 남부. 노예로서 삶을 전전하던 장고는 악질 무법자들을 죽이고 현상금을 받는 닥터 슐츠를 만나게 되고 그와 손잡는 대가로 자유를 얻는다. 둘은 함께 손을 잡고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들을 쫓는다. 일명 “현상금 사냥군”으로 활약하며 최고의 파트너가 되여 미국 곳곳을 누빈다. 사라진 안해의 행방을 추적하던 장고는 그녀가 악명 높은 마스터 캔디에게 팔려간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장고와 슐츠는 캔디의 농장을 찾아간다.  농장주 캔디는 자신의 흑인노예가 개에게 물어뜯기는 모습을 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한이다. 장고와 닥터 킹은 그의 사업 투자를 빌미로 거액의 거래를 제안하며 안해를 구출하려 한다. 노예농장에서 한차례 피로 얼룩진 복수전이 벌어진다. 타란티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노예제도 이야기를 하기 원했다. 또 그 이야기를 통해 미국이 제대로 대처하기를 원한다"라고 전에없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영화에서는 노예 학대에 대한 잔혹한 묘사와 함께 흑인을 비하하는 깜둥이(Niger)라는 대사를 110번이나 등장시켜 미국 노예 제도에 대한 비판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영화에는 "타이타닉 호”의 주역으로 중국관객들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긴 할리우드의 톱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출생애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한다. “만민의 련인”으로 준수한 용모를 가진 그가 악역으로 변신해 뇌까리는 얼토당토않는 리론이 그냥 인상에 남는다. 영화에서 그는 흑인노예의 백골을 쳐들고 골상학(phrenology)리론을 펴면서 “대체 왜 노예들은 총을 들고 우리와 싸우지 않을까?", “노예들이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흑인의 뇌 속에 노예 근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이비 과학을 장황설로 풀어낸다. 영화는 흑인노예제도가 가장 극심화 됐던 미국 남장을 배경으로 택해 미국 력사상 어두운 부분을 조명한다. 감독은 재미위주의 전형적인 서부영화가 아닌 노흑인예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영화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장고는 안해가 팔려간 백인의 거대한 농장에서 노예들을 학대하는 모든 백인을 사살한다. 그리고 백인의 대저택을 폭발하여 그의 복수를 완성시킨다. 미국 노예제를 상징하는 백인 캔디의 저택이 무너지는 건 노예제의 붕괴를 의미하는듯 하다. 영화는 흑인을 주인공으로 한 호쾌한 서부극을 통해 인종 차별이라는 미국의 “원죄”의 책임을 다시 묻고있다. 타란티노는 할리우드에서 "악동"으로 불린다. 그 악동의 영화는 화끈하지만 력사와 인권문제에 대한 그의 립장은 차갑다. 백인임에도 흑인 문화를 자신의 작품 세계로 승화시킨 타란티노는 역시나 기대 이상의 멋진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스타일과 작품성, 상업적 흥행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것이다. 영화는 2013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 했다.   타란티노 감독 2   미국에서는 타란티노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잔혹한 “흑백의 스토리”가 현실에서도 마냥 재현되고있다. 지난 8월 10일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18세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관의 총을 맞아 숨졌다. 머리와 팔 등에 최소 여섯발을 맞았으며 숨진 뒤에도 4시간 동안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였다. 브라운이 비무장 상태에서 무고하게 사살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11월25일, 브라운을 총으로 쏴 사망케 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 대해 대배심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에 유색인종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대의 화염병과 경찰의 최루탄 공방이 이어졌다. 사건은 미국 사회의 뿌리깊은 인종 갈등 문제까지 련계되면서 항의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이런 가운데 뉴욕 거리에서 담배를 팔던 흑인 에릭 가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백인 경관에 대해서도 뉴욕시 대배심이 12월 3일 불기소 결정을 내리자 사태는 더욱 격화했다. 주요도시에서 경찰 공권력을 규탄하고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폭력시위가 이어지면서 미국 사회 전체가 크게 요동쳤다. 지난 9월에는 백인인 남편에게 키스를 하던 다니엘르 왓츠라는 흑인녀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매춘녀로 오인 받은 그녀는 즉각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다”라고 항변했으나 매춘부가 아니고 남편이 그녀의 고객이 아니라는것을 경찰이 인정할때까지 수갑을 찬 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체포당하며 그녀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에게 키스하는 흑인녀성은 매춘부라고 봐야 하느냐"며 사건은 또 한번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이러니 적인것은 그녀가 바로 인종차별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영화 “해방된 장고”에서 흑인 노예로 출연했던 녀배우였다. 오늘날에도 백주에 미국의 네거리에서 꺼리낌없이 자행되는 인종차별 현상을 보노라니 타란티노 감독의 "미국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미국의 원죄 중 하나다. 아직도 그 죄를 씻지 못했고 여전히 흑인과 백인이 서로를 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던 갈파가 다시 떠오른다.                                                                                                                                                    종족기시에 항의하는 시위자들   3   흑인노예제도는 미국 근현대사의 지울수 없는 상흔이다. 링컨의 남북전쟁 승리는 노예해방선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백인들의 마음 속에서 노예제의 그림자와 인종차별 의식이 분해되기까지에는 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버락 오바마가 흑인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인종차별을 초월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무지개빛 환상이 떠올랐지만 “퍼거슨 사태”와 련달아 이어지는 종족차별 사건들로 그 환상은 아연(俄然) 바래지고 있고, 무참히 깨지고 있다. 미국은 스크린 아닌 현실에서 “잔혹한 흑백스토리”를 연출했고 미국 력사 200년 동안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한복판에 다시 서게 됐다. “해방된 장고”는 재미도 있고 나름 묵직한 주제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흑인 노예해방이 선언되고 15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종에 근거한 차별은 알게 모르게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에 상업흥행위주의 할리우드에서 “장고”와 같은 영화가 등장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꽤 크다.     사족(蛇足): 뜬금없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해외에서 차별받으며 3D업종에 혹사하는 수십만에 달하는 우리 족속들의 이야기들이 그물그물 떠올랐다. 이는 비단 먼 서구나 영화에서만 자행되는 일이 아니다. 피부색이나 나라를 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은 우리가 고국이이라는 감동과 민족적 동질감에 대한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그곳에서도 낯익은 소재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의 인종차별 사건에 더 분노하고, 한부의 영화에 남다른 감흥을 머금는 또 다른 리유다.    “청우재(聽齋雨)”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영화 "장고" 예고편
272    유미리:가족과 정체성에로의 강박 댓글:  조회:2293  추천:11  2014-12-14
  내가 소장한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 중국판 표지 ​민족서점 곁 '장우 고서점'에서  좀 오래되여 가위가 나달나달한 유미리의 '가족 시네마'를 샀다  '가족 시네마'는 중문으로 언녕 갖추었으나 우리말 판본이기에 다시 사들었다. 1997년 판본이니 낡을법도 했다. 그래도 여느 신간 못잖게 마음이 "므흣"하다. 일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작품.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이 영화 촬영을 계기로 수년 만에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건조하고 우울한 리듬으로 풀어내면서 가족구성원들의 단절된 소통에 대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있다. 동명으로 각색된 영화에는 뜻밖에도 역시 내가 좋아하는 재일교포 작가인 양석일(梁石日)이 출연한다. 유미리의 동생 유애리도 나온다.​ ​ 유미리 ​ 유미리,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같은 재외동포라는 타이틀을 띈 작가로서 그의 작품 속에는 재외라는 굴레에 운명적으로 매인 배달의 피를 가진자들의 동질성이 보인다. 사적인 치부를 조명이 찬란한 무대 전면에 드러내놓은듯한 문체, 그 부분이 꺼림칙하면서도 다 읽고나면 그 용기에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필봉의 권한을 쥔 작가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합리화시키거나 미화시키지 않고 나약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점이 좋았다.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가 무언지 유미리는 몸으로 부딪히며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어나가다보면 역시 천생 작가였어! 하는 감탄과 함께 작품 곳곳에서 작가의 풍부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습윤하게 느낄수 있었다.  “지옥에 떨어졌다고해도 정확히 그걸 써내고 알뜰하게 뒤수습을 하는 유미리는 대단한 작가"라고 일본문단은 그에 대해 평하고 있다. 불우했던 어린시절을 자양분삼아 랭정한 시선으로 삶의 부분을 극도로 솔직하게 드러내보이는 것이 유미리 소설의 특징이다 . 재일교포 2세로 태여난 유미리는 집단 따돌림과 부모의 학대와 폭력속에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로 실어증, 부모와의 별거, 자살기도, 퇴학 등으로 힘들고 비정상적인 어린시절을 보냈던 유미리는 학교에 다니면서 특별한 문학수업을 받은적이 한번도 없었다. 가벼운 자폐증을 보일 정도로 온통 동물 기르기, 책 읽기 등 혼자 하는 취미에만 빠져 있었던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도록 구구단조차 잘 외우지 못했다. 퇴학후 집에서 2년여 동안 칩거하면서 동서양의 고전 읽기에 빠졌으며 그렇게 쌓은 문학수양으로 어느날인가 필을 들었다. 1997년”가족시네마”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일생 혼자이고 싶으며 소설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왔으나 2000년 미혼모로 아들을 낳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작가들의 작품을 읽다보면 저도모르게 유미리의 존재감을 떠올리게 된다. 동포2세, 녀류작가라는 딱지를 떼놓고 일본 본토작가들속에 나란히 세워놓고 보아도 그의 작품은 분명 대단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그의 소설은 일본사회와 충돌하고 교류하여 형성된 정서로 씌이긴하지만 일본의 다른 작가들과 농도와 줄기가 많이 다르다. 그의 작품에서는 일본소설에서는 좀체 볼수없는 가족에 대한 강박, 민족적인 정체성이 끝없이 로출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이 역시 재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인 우리에게서도 정서와 공감을 얻어내는것이 아닌가 싶다.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가족시네마" DVD   雪が降る(눈이 내리네)  
271    나를 울린 소설 "철도원" 댓글:  조회:2394  추천:10  2014-12-09
  나를 울린 소설 "철도원"   ( 내가 소장한 "철도원" 중국판 표지)​ ​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쿠라 겐의 타계소식을 듣고 다시 들추어내 본 책이다. 호흡이 짧은 단편이지만, 웬만한 장편소설보다 더 큰 울림과 여운을 준다. ​홋카이도의 자그마한 역에서 안해와 딸을 잃고도 홀홀단신 의무만을 지켜 최선을 다하다가 눈 덮인 플랫폼에서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깃발을 쥔 채 주검으로 발견된 늙은 역장의 이야기이다 작가를 굳이 정평하라면 탁월한 이야기 꾼이라기보다 "소박한 이야기꾼"이라는 쪽이 더 걸맞을것 같다. 하지만 그 소박한 이야기가 일본렬도를 울음바다에 잠기게 했다. 불행속에서도 사람들이 가진 선의(善意)를 믿는 따스한 시선이 행간마다에 배여있는 따뜻한 소설이었기때문이다.   ​ (영화 "철도원" DVD)​ ​ 소설은 140만부나 팔려 당시로서는 초대형 베스트 셀러가 됐다. 1999년년에는 다카쿠라 겐의 주연으로 스크린에 올랐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거듭 눈물을 흘렸던 작품이다. 때로 화려한 문체나 치밀한 구성보다는, 꾸밈없는 소박함이 더 독자를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 ​ (저자 아사다 지로) ​저자 아사다 지로의 리력이 흥미롭다. 야쿠자 생활을하다가 접고 91년 등단했다고 한다. "철도원"에서 주인공이 돈을 빌려주었던 접대부출신 여자도 그렇고 그의 작품중에 중국인이 많이 나온다. 홍콩배우 장백지가 열연한 영화  "파이란" 역시 아사다 지로의 작품이 원작이다.  ​​ 중국의 인민문학출판사에서 일찍 2002년에 펴낸 이 단편집에는 "철도원"외에도 6편의 단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장백지 주연의 "파이란"의 원작인 "러브 레터"도 수록되어있다.​ 편편마다 내용도 알차고 뒷끝이 깔끔하다. 무엇보다도 짧은 편폭으로 긴 여운을 남기게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영화 "철도원"ost ☞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   ​
270    유령들의 전당 댓글:  조회:2289  추천:6  2014-12-03
유령들의 전당 - 다큐 '야스쿠니'   영화 '야스쿠니'는  일본 거주의 중국인 감독  리잉씨가 97년부터 10년간 공들인 작품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관한 영상을 모아 2007년에 만들어진 중일합작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작품은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고, 32회 홍콩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일본 내에서 상영과 철회, 재상영, 감독에 대한 살해 위협까지 몸살을 앓고 있다.  “나의 영화들은 인간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직면하는가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을 위해 죽어가고 희생한 사람들을 사당에 모시기 위한 거대한 무대이지만 나의 눈에는 전쟁에 대한 망각과 여러 가지 기억들 그리고 전쟁을 위한 거대한 가면으로 비쳐집니다. 전쟁의 유령은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에서 나는 그 유령을 찾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리잉 감독이 밝힌 연출의 의취이다. 영화감독 리잉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에서 숨진 군인들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이곳에는 인간어뢰를 비롯해 자살특공대가 사용했던 각종 무기 등이 전시돼 있다. 심지어 침략전쟁의 말 그대로 주구였던 군견과 군마를 애도하는 추모비마저 서 있다. 신사는 1869년에 도쿄에 세워졌다. 그리고 1879년에 야스쿠니 신사라고 새로 이름이 붙여졌다. 야스쿠니 신사는 원래 천황과 내전에서 죽은 사람들과 일본 평화를 위해 그들의 삶을 희생한 사람들을 숭배하고 애도하기 위해 세워졌다. (아이로니적인것은 야스쿠니는 평화로운 나라를 의미한다.) 서남전쟁과 같은 국내갈등, 청일전쟁, 로일전쟁, 1차 세계대전, 9.18사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천황을 위해 죽은 약 250만 명의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과 출신, 그리고 죽은 날짜와 장소가 새겨진 기록과 함께 모두 사당에 모셔졌다.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싼 큰 정치적 론쟁은 1978년 이후부터 되여왔다. A급 전범이 야스쿠니에 안치된 250만 명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5년 이래로 행해진 몇몇 일본 총리의 신사 방문은 헌법상의 정교분리와 관련,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영화는 야스쿠니 신사를 종신하고 있는 전쟁세대를 비롯해 그들과 그들의 영향권아래에서 보고 듣고한 젊은이들의 행태를 여과없이 비쳐준다. ​영화는 하늘에서 바라본 야스쿠니의 전경으로 끝난다. 신의 눈에 비친 유령들의 전당(戰黨). 야스쿠니를 통해 본 일본 정신의 실체는 바로 그 가면 뒤에 숨겨져 있다.     ☞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    
269    다카쿠라 겐, 천국의 강을 건너다 댓글:  조회:6299  추천:46  2014-11-19
  . 칼 럼 .   다카쿠라 겐(高仓健), 천국의 강을 건너다   김혁  1,​ 80년대 최고의 우상으로 몇세대 중국인들에 두꺼운 팬층을 확보했던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쿠라 켄이 타계했다. 지난 10일 오전 악성 림파암으로 도꾜의 한 병원에서 숨졌으며, 이 같은 사실을 아사히신문이 뒤늦게 보도했다. 향년 83세. 아사히신문은 이례적으로 호외까지 발행하며 그의 죽음을 기렸고 관방장관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계 대스타였다며 하나의 큰 시대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고 애도했다. "가는 길은 정진하고, 끝나면 후회는 없다."고 하면서 천명을 완수한 편안한 미소를 띄고 가셨다고한다. 이 말은 어느 사찰의 유명 주지스님이 일찍 다카쿠라 켄에게 보내온것으로 다카쿠라 씨의 평생의 좌우명이였다. 불과 몇달전 일본의 전설적인 톱스타 야마구찌 모모에의 아버지역을 맡아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따도모(大岛茂)”-유키티나리의 타계소식을 접하고 비감에 잠겨 추모수필을 썼었는데 또 한분의 영화거장의 타계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서재의 일본영화코너에서 골라보니 내가 소장한 다카쿠라 켄의 영화 DVD가 십여장도 더 되였다. 창작스케줄이 빼곡하고 편집부의 청탁재촉이 아우성이였지만 해조처럼 밀려드는 비감함에 집필을 해나갈수 없었다. 컴퓨터를 끄고 스크린앞에 마주앉아 하루 종일 그가 열연한 영화들을 하나하나 다시 보아 내려 갔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 “철도원”, “역”, “먼산의 부름”, “추격” 어쩌면 하나같이 정직과 진지함과 의리의 화신같은 남성상을 보여준 외골수 캐릭터로 열연한 영화들이였다.​ 내가 소장한 다카쿠라 켄의 영화들 중국의 유명한 장예모감독 역시 다카쿠라 켄의 열성 팬이라 몇해전 굳이 고령의 그를 중국의 스크린으로 불러내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를 제작, 영화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주인공과 그 아들간의 갈등과 부자애를 감동적으로 다루었다. 다카쿠라 켄은 지난 2008년에는 북경올림픽 총감독을 맡았던 장예모에게 일본 전통의 무사도를 선물하는 등 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영화인생을 다시 돌이켜 보았다. 다카쿠라 켄은 1931년 2월 16일 후쿠오카에서 태여났다. 메이지대학 상학과(商学科)를 다녔다. 졸업하고 가업을 돕다가 1955년 상경, 예능 프로 제작에 관심이 있어 면접을 봤는데 그 자리에 있던 영화사 “도에이”의 간부에게 스카웃 돼 배우로 활동하게 됐다. 1955년 배우 모집에 합격하면서 영화계에 입문, 1956년 “전광공수치기 电光空手打”에서 주연을 맡아 스크린에 데뷔했다. 애초에는 ”미야모토 무사시 (宮本武藏)”, “일본협객전” 등의 무협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 ​1970년 다카쿠라 겐 프로모션을 설립했고1976년 제22회 아시아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1977년 “행복의 노란 손수건”과 “핫코다산(八甲田山)”으로 제51회 키네마 준보 주연남우상, 제32회 마이니치 콩클 남우연기상, 제1회 일본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두번째로 제24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또 1999년 몬트리올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지난해엔 상기 영화제로부터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이후 “철도원”으로 제23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일본아카데미 최우수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2006년 영화배우로는 처음으로 정부 주관 문화공로자에 선정됐으며, 작년에는 문화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문화훈장까지 받았다. 2012년 마지막 영화 “당신에게”로 그해 일본 호치(報知)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생애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뛰였다. 이번에도 차기작 준비 도중 갑자기 입원했던것으로 전해졌다. 데뷔 이후 총 200여 편의 영화에서 구김없는 그 모습 그대로 열연, 뛰여난 연기력과 인품을 갖춰 일본 팬들에게 “겐싱”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2, 다카쿠라 켄의 타계에 대해 중국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각 사이트와 개인 블로그가 그의 타계소식으로 메인을 장식했고 중국의 톱스타들이 분분히 그의 사망을 애도하는 한편, 정부차원에서도 즉각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홍뢰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어제 정례회견에서 "다카쿠라 겐 선생은 중국 인민에게 널리 알려진 예술가라며, 중·일 량국 문화 교류 추진에 중요한 공헌을 했던 그의 별세에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중일 관계가 외교적으로 껄끄러운 상황에서 일본 배우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애도 성명을 발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다카쿠라 켄을 중국에 알린 영화는 바로 “추격”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그대여 비분의 강을 건느라”이며 사실 다카쿠라 켄의 영화생애에서 그닥 중요한 위치를 갖지 못하는 영화이다. 지어 다카쿠라 켄의 영화출연목록에서 이 영화를 찾아 보기 힘들며, 지금 영화의 전성시대를 펼치고있는 한국에서는 이 영화가 상영되지조차 않았다고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흥행가도를 달렸다. 당시 중국의 영화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박진감 넘치는 스릴러물이라는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주역 다카쿠라 켄의 공로가 과반으로 컸다. 의리와 과묵함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선 굵은 연기를 펼친 다카쿠라 켄의 이미지는 대번에 당시 중국인들의 심성을 사로잡았다. 거리와 골목에서는 이 영화의 주제가가 스피카로 싫증을 모르고 반복되여 울려퍼졌다. 가사는 단 한마디도 없이 “라야, 라” 하는 후렴구같은 두마디만 복창하는 그 주제가의 중독성있는 선률이 어쩌면 당시 모든이들의 마음과 귀를 그렇듯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늘 바바리 코트의 옷깃을 세우고 다니는 영화 주인공 모리오카(杜丘)의 형상때문에 중국에서는 바바리 코트 복장이 기하급수적으로 류행되였다. 당시 젊은이고 보면 너나가 코트 한벌 갖추기를 원했다. 거리에 나서면 모두가 꼭 같은 형태의 코트를 입고 바람도 없는 날에도 하필이면 옷깃을 세우고 어깨를 살리고 다녔다. “다카쿠라 켄”효과였다.​ ​ 문혁이라는 십년동란을 거친 중국은 오래동안 좌적인 멍에와 교리(敎理)의 가쇄(枷鎖)에 옥죄여 있었다. 그러다 80년대 초, 조금 원활해진 풍토에 힘입어 엄격한 검열의 관문을 뚫고 간신히 대륙에 상륙한 해외의 문화는 영화로부터 시작, 그중에서도 일본영화가 압권이였다. 야마구치 모모에가 출연한 드라마 “의심스러운 혈형”이 안방극장을 사로잡았고 다카쿠라 겐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추격”, “먼산의 부름”, “행복의 노란 손수건”등이 영화관의 모든 객석을 점하면서 상상 그 이상의 인기몰이를 하였다. 그 와중에 다카쿠라 겐은 중국 관객들의 최고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중국 여러 계층의 관객들은 천편일률적인 “본보기극”이라는 몇종의 경극으로만 간신히 문화욕구를 해결해야 했던 암울한 시기를 지내왔었다. 문화 콘텐츠의 공백을 허무한 눈으로 장장 십여년간 봐야했고 수억명을 헤아리는 신세대들의 다양한 문화 욕구는 분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맨 처음 외부 세계에 눈뜨기 시작한것이 일본영화였고, 다카쿠라 켄이였다. 때문에 그 화약같은 강렬한 인상은 오랜시간이 흘러도 그 세대의 심방 깊은곳에 깊숙히 각인되여 있는것이였다. 옹근 80년대 중국은 일종의 일본문화의 돌풍을 경험하고있었다. 콘텐츠의 빈한함에 질려있는 상태였던 당시 상황속에서 들어왔던 일본 영화들이 중국사회에 던진 파문은 결코 가벼운것이 아니였다. 이러한 문화적 쇼크는 그동안 “정치적 이데아(인간이 감각하는 현실적 사물의 원형으로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것)에 갇혀졌던 중국문화의 틀을 조금씩 깨는데 이바지하게 되여서 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되고있다.   3, 다카쿠라 겐은 그 화려한 정평중에서도 “일본의 잃어버린 전통적 남성상을 보여준 스타”로 평가되고 있다. 옛부터 군자를 리상적인 남성상으로 삼아 온 우리 민족에게는 대범함, 강직함, 신중함, 과묵함 등이 남성다움의 덕목이라는 의식이 깊이 뿌리 내려 있다. 하지만 근년들어 세상은 어쩌구려 남성상실의 시대를 맞아왔다. 가부장적인 남성스러움을 잃어버린 현대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남성들은 자신의 위치에 대해 회의를 가진지 오래다. 하여 기존의 남성다움을 어필하지 않고 녀성화 된 남성들이 최근 사회에서 버젓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여있는 현실이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남성들은 홀로 선술집의 구석쪽에서 독한 자조의 술을 마시며 자기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있다. 강한 남성에 대한 향수는 남성으로서 원초적인 본능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강한 남자, 시대를 이끌어가고 가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중심추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남자에 대한 환상은 남성들이 공유하고저하는, 어쩌면 이 시대가 잃어버린 향수 일듯하다. 우리가 수십년전 80년대에 우리에게 다가왔던 일본의 한 배우를 내내 잊지못하고 그의 타계에 대해 남다르게 애닯아 하는 또 다른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가?   2014년 11월 19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68    틱(Tic) 댓글:  조회:2511  추천:12  2014-11-17
. 미니소설 .   틱(Tic)   김 혁 * 흠!하고 녀석이 코방구 뀌는것같은 소리를 냈다. “웃었어? 네가 지금 웃었어” 최형사는 단단히 화가나서 녀석을 노려 보았다. 생각같아서는 녀석에게 귀싸대기를 한대 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이마빡에 솜털이 뽀송뽀송한 십대의 미성년자였다. 또PC에서 일어난 사건이였다. 가해자는 곁자리 또래 아이의 머리에 뜨거운 라면을 끼얹었다. 그리고도 성차지 않아 라면 포크로 아이의 얼굴을 훑었다. 피해자의 얼굴에는 상처자국이 이마로 부터 볼을 거쳐 턱밑까지 쌍줄기 레루처럼 그어져 있었다. 눈을 다치지 않은것만도 다행이였다. 원인은 간단했다. 아이들은PC방에 온종일 붙박혀 있다가 점심때가 되면 라면을 끓여먹곤 하는데 자신은 눅거리를 먹고있는데 곁의 애가 비싼 “오뚜기” 라면을 먹기에 아니꼬운 생각이 발동해 싸움을 걸었고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것이였다. “네같은 놈은 ‘오뚜기’라면이 아니라 콩밥 먹어야 돼” 취조실을 나오는데 흠!하고 애가 또 코방구를 끼였다. 최형사의 인내심은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취조실을 나오며 그의 손은 줄창 이마를 벅벅 긁어 대고 있었다.   ** 퇴근길, 아들애를 맞으러 차를 몰고 유치원을 향해 달리면서도 최형사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요즘의 애들이란 참” 최형사의 탄식이 차창 한자락에 하얗게 서려들었다. 와이퍼(刮水器)버튼을 눌렀다. 흔들 흔들 부지런한 손길처럼 좌우로 오가며 와이퍼가 차창을 닦는다. 요즘의 아이들이 이 우왕좌왕하는 와이퍼 같다고 최형사는 생각했다. 유치원 문가에서 배웅하는 선생님에게 배꼽인사를 올리고 나서 아들애가 덤벙이며 뒤좌석에 뛰여 올랐다. “오늘 재밌었어 아들” 최형사는 아들애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안해와 갈라지고 부양권을 넘겨 받은뒤 엄마 노릇까지 맡아하는 최형사다. 아들애는 아무말도 없이 아비를 향해 눈만 깜박이였다. 커다랗게 쌍겹진 눈시울을 자꾸만 깜박인다. 백미러로 아들애의 기색을 살피던 최형사는 뒤로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눈에 티라도 들었나. 왜 자꾸 눈을 깜박 거려? “아니요.” 아들애는 시들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또 눈을 깜박인다.   ***  “틱장애입니다.” 일요일, 요행 시간을 내여 아들애를 데리고 병원을 찾은 최형사에게 의사가 말했다. 아들애의 눈 끔벅임 증상이 심했다. 처음에는 그 거동이 앙증맞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기승스레 눈시울을 끔벅거렸다. 잘 때를 빼고는 온 종일 마치 눈첩첩이처럼 눈시울을 끔벅거리는것였다. 유치원 선생도 아이가 웬지 자꾸 눈을 슴벅인다고 귀뜸을 주었다. 그래서 급기야 병원을 찾은것이다. “틱이라니요?” 최경형사는 무슨 말인지 오리무중에 빠져 의사의 입매만 바라 보았다. “틱 (Tic) . 비정상적인 움직임, 이상한 소리를 내는 증상을 말합니다.” “중한 병인지요?” 최형사가 다잡아 물었다. 놀래는 최를 안정 시키련듯 중년의 녀의사가 미소를 지었다.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충동조절장애와 같은 정신 및 행동 장애로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그 증상들을 보면 얼굴을 찡그린다더거나 입맛을 다신다더거나 코를 킁킁거린다더거나 눈을 깜빡인다던거나, 목에서 '흠' 하는 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형사의 뇌리로 하나의 형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의사가 설명을 이었다. “틱장애는 스트레스나 긴장, 신경전달물질 이상 등이 주원인입니다. 보통 긴장하거나 정서적으로 불안한 상황이면 일어나지요.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같은것을 자주 하는데 그렇게 어떤 상황에 흥분하는 상태에서 증상이 악화됩니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을 보면 흔히 심리적인 영향도 크게 작용할것이라 생각됩니다.    긴장감에 안색이 구겨지는 최에게 의사가 말했다. “그렇게 심한 병은 아니니 너무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관심이나 야단을 치는 경우 증상이 더욱 악화되기도 합니다. 요즘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경우 상당수가 이런 저런 틱을 가지고 있거나 과거에 틱을 가지고 있었다는 집계가 있습니다. 심리조절능력이 낮은 아이들은 생각밖에 스트레스가 많아 틱환자가 많습니다.” 간단한 약처방을 떼주면서 의사가 덧붙였다. “아이들에게 틱 장애가 생기는 주요 원인은 흔히 어른들로 인해 인기된 경우가 많답니다. 어른들이 문젭니다” 처방전을 받아드는 최형사의 손이 강심장의 형사답지않게 저으기 떨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길, 아이는 뒤좌석에서 그냥 눈만 슴벅거리고 있고 최형사는 말을 잃고있었다. 밤의 풍경을 담고 달리는 차창은 하나의 스크린인양 어제의 화면을 불러냈다. 이마를 긁고 있는 소년 “손 내려! 너 그 손 내리지 못해” 투명한 고음이 귀청을 찢는다. 소리의 임자는 아이의 이모다. 이모는 때때로 그렇게 사이렌 소리같은 고음을 지르며 자그만 일에도 아이를 신칙했고 그럴수록 당황한 아이의 손은 버릇처럼 이마로 올라간다. 주체하지 못하고 자꾸 이마를 긁적거린다. “어디 니 맘대로 해봐.” 아이의 손을 잡아떼던 이모가 아이의 얼굴에 입을 바찍 갖다대고 감때 사납게 소리 지른다. 아이의 손이 더욱 빨리 움직인다. 미구에 아이의 이마에 선명한 손자국이 생기고 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이 미친놈아, 내가 무슨 죄를 만나서 지 어미가 버리고 달아난 조카를 거두고 이런 신세가 됐노” 이모가 울음 섞인 소리로 악청을 지른다. 빵! 빵! 곁을 스치는 차의 경적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그제야 최형사는 소스라쳐 깨면서 핸들을 단단히 부여 잡았다. 백미러로 아들애를 건너다 보았다. 비쩍 마른 아들애는 언제보나 피기없는 얼굴에 심드렁함을 애가 좋아하는 변형금강 가면처럼 쓰고 있다. 무뚝뚝하던 말투를 고쳐 교환수처럼 상냥한 소리를 내며 물었다. “아들 랠이 생일인데 젤 큰 소원이 뭐야? 뭐 사줄가? 변형금강 인형 사줄가? 아님 놀이동산 갈가? 아니면 피자 먹고 싶어? 아빠가 사줄게.” 아이가 아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촉촉히 젖은 눈시울을 슴벅거리면서 힘아리 없이 중얼거렸다. “엄만 언제 와? 이번 생일엔 엄마가 왔음 좋겠어” 칙- 차가 급정거를 했다. 최형사는 운전석에서 내려 뒷좌석문을 열고 올랐다. 아들애를 꼭 껴안아 주었다.   **** PC방 사건에 대한 취조는 생각밖에 길게 이어졌다. 일을 저지른 가해자의 보호자를 불렀지만 며칠 지나도 오는 이가 없다. 드디여 애가 열쇠를 잃은 문처럼 봉하고만 있던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리혼한뒤 해외로, 내지로 싹 다 가버리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전번달 그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운명했다고 했다. 거두어 줄 사람이 없어 그동안 PC방에서 먹고자면서 나날을 보냈다는 아이다. 처음 아이의 계집애같이 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최형사의 손이 자주 이마로 올라갔다. 점심시간이 되였다. 최형사가 아이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오뚜기” 라면이였다. 흠! 하고 아이의 입으로부터 신음같은 소리가 새여 나왔다.     “장백산” 2014년 1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7    잃어버린 어두운 시간들 댓글:  조회:2460  추천:11  2014-11-12
  ​​ ​ 상하이 복단대학 책가게에서 사든 2014 노벨문학상 수상자 파트릭 모디아노의 장편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신비하고 몽상적 언어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억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이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행을 그려냈다. 흥신소의 퇴역 탐정인 작중 화자는 조악한 단서 몇 가지에 의지해 마치 다른 인물의 뒤를 밟듯 낯선 자신의 과거를 추적한다. 유일한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뿐이다. 그것을 단서로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만나면서 점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퍼즐처럼 하나씩 짜 맞춰진 그 기억 속에서 그는 한편으로는 뚜렷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불확실해지는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과 대면하게 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퇴역 탐정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가는 모험을 따라가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친 프랑스의 비극적 현대사를 반추해보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붕괴시켜나가는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만나게 된다. 어두운 상점의 거리는 기억을 매개로 한 자아의 탐색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관통한다고 리해하면 된다. 중국에서는 일찍 1990년대에 모디아노의 여러부의 작품을 번역 출판, 노벨상 수상이 알려지자 곧 대표작외에도 "한 밤의 사고"등 작품들을 세트로 출판해 냈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일지라도 벌서 대학가에서 반값으로 세일 해 팔고 있었다.책값 원가가 25원인데 세일하고 나니 12원 25전. 세일하는 명작이라... "책버러지"에게는 빠른 시간에 그것도 헐값으로 명저를 접할수 있다는 것이 행운인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뒷맛이 씁쓸하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6    무한경쟁시대 성패의 변증법 댓글:  조회:1766  추천:10  2014-11-09
. 평론 .​ 무한경쟁시대 성패의 변증법 - 김혁의 련작수필 “월드컵수감록” ​장춘식 ​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삶은 성공과 실패의 끊임없는 반복이라 말할수 있다. 요즘같이 무서운 무한경쟁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생의 가치를 경쟁에서의 성공과 실패로 그 결과를 판가름하는 풍조가 팽배해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실 보는 시각에 따라 이런 무한경쟁에서 얻어지는 성공의 리면에는 패배의 요소가 포함될수도 있고 또 실패의 리면에는 성공의 요소가 포함될 수도 있다. 이것을 우리는 승패 혹은 성패의 변증법이라 부를수 있지 않을까 한다.​ 중진작가 김혁이 선보이고있는 련작수필 “월드컵수감록”은 올 여름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었던 브라질월드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런 성패의 변증법을 제시하고있다. ​ 첫편인 “자책꼴”에서는 축구경기에서 흔히 볼수 있는 자책꼴을 들어 이번 월드컵의 한 측면을 분석하고있다. 작가는 먼저 이번 월드컵의 첫 꼴이 자책꼴로 시작된 극적인 경과를 제시하고는 력대 월드컵에서 발생한 자책꼴과 그 당사자의 운명을 곁들여 론의하면서 자책꼴과 인간이 살아가면서 흔히 범하게 되는 실수를 련관시키고있다. 사실 자책꼴도 일종의 실수이다. 그러니 인간이 살아가면서 실수를 범하는것이 피할수 없는 현상인것처럼 자책꼴도 축구경기에서는 그리 희소한 일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관객들 특히 광적인 축구팬들은 선수의 이런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심지어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꼴롬비아축구선수 안드레스 살다리아가 자책꼴을 넣었다고 며칠후 총격으로 살해당하는 비극까지 발생하는것은 무엇때문일까? 광팬의 광적인 우발행위와 같이 원인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핵심은 역시 무한경쟁의 이 시대 잘못된 가치관이 빚은 악과가 아닌가 한다. 작가가 자책꼴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보이고있는것도 바로 이런 사회악에 대한 우려나 반감에서 비롯된것이리라. 작가는 물론 그냥 우려나 반감의 표시에 그치지는 않는다. 저 유명한 월드컵응원가인 “위아 더 원We Are The One”의 노래말을 들어 축구에서나 일상적인 삶에서 실수하고 자책에 빠진 이들에게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도록 격려하고있다. ​ 두번째편인 “월드컵을 보며 로자(老子)를 생각하다”에서는 이번 월드컵의 또 하나 극적인 에피소드였던 우루과이선수 수아레스의 렵기적인 행위를 문제삼고있다. 상대팀선수와 몸싸움을 하다가 상대선수의 어깨를 물어뜯은 행위는 아무리 경쟁이 심한 스포츠경기라고 해도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그래서 렵기적이라는 표현을 하고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록 렵기적이기는 하나 이것 또한 따지고보면 일종의 실수에 속한다. 흥미를 끄는것은 작가가 이 에피소드에 이어 곁들여놓은것이 엉뚱하게도 로자와 그의 스승인 상용의 문답이야기라는 점이다. “동에 닿지 않을 련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달고있지만 역시 엉뚱하다는 느낌은 여전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매력적인 점은 그 엉뚱한 련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바이다. 로자와 상용의 문답에서 앞의 월드컵경기에서의 렵기적인 에피소드와 관련을 가지는 내용은 이빨이다. 인생은 때로 강한 이빨보다 부드러운 “이빨”이 더 유용할 때도 있다는 이 고사는 쇠도 씹어먹을수 있는 이빨을 가져야만 생존할수 있다는 현대인들의 생각을 전복하고있는것이다. 이것 또한 현대인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주는 삶의 지혜가 될것이다.​ ​세번째편인 “패자만가(敗者輓歌)”는 좌절을 겪은 세계 축구강팀들에 대한 얘기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전통적인 강팀들이 일찌감치 경기장을 떠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지난번 월드컵의 우승이였던 에스빠냐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잉글랜드도 같은 고배를 마셨다. 브라질은 그리 어이없지는 않았으나 8강전에서 독일에 1:7참패라는 수치를 당하고말았다. 당사자들에 대해 말하면 이런 이변은 혹독한 징벌이 되겠지만 관객의 립장에서는 오히려 흥미거리가 될수 있다. 지나치게 예측이 가능한 경기는 재미가 없기때문이다. 우승을 다투는 경기란 워낙 그런것이니까. 문제는 이 패자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승자에 환호하고 승자에게서 뭔가를 배우려하는 반면에 패자에 대해서는 조소하고 심지어 타매하는 사회의 풍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작가는 한번 패자는 영원한 패자가 아니며 실패를 딛고 일어설 때 성공이 이루어진다는 리치를 제시한다. 그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자만이 진정한 승자라는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패의 변증법이 아닐까?​ 4년마다 한번 열리는 월드컵경기는 온 지구촌이 환호하는 축제이다. 따라서 월드컵의 화제 특히 자책꼴이나 상대선수의 어깨를 물어뜯는 렵기적인 행위, 그리고 강팀들의 무력한 패배와 같은 이변들은 항간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관심거리라 할수 있고 작가 김혁이 이에 대한 관심을 문학적으로 표현한것 역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주목이 필요한것은 월드컵이슈 혹은 에피소드 자체에만 있는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 우리 시대의 문제에 천착했다는데 좀 더 가치가 있는것이다.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패의 변증법은 유익하다.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심어주고있기때문이다.​ "장백산" 2014년 6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5    닳아지는 “뼈”들의 이야기 댓글:  조회:2094  추천:12  2014-11-02
. 평론 .   닳아지는 “뼈”들의 이야기 ―김혁의 중편소설 “뼈”를 두고  장하도   1. 문제제기 《연변문학》 지난 5호에 실린 김혁의 중편소설 “뼈”는 당대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고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진지한 작가적사고와 깊은 사명감에 의한 주제의식으로 잘 그려낸, 심각한 사회적의미를 지닌 소설이다. 따라서 우리 조선족의 삶이 갈수록 많은 문제점을 산출하고있는 요즘,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대담한 표현수단으로 주목을 받고있는 김혁의 이번 작품을 진지하게 의론하는것은 작가뿐만아니라 조선족소설의 전반적인 변화를 위해서라도 아주 가치 있는 작업이 아닐가 생각한다. 아래에 구조적인 측면에서부터 착수하여 “뼈”에 내재된 작가의식을 중점적으로 분석해보자. 2. “랭면”―음식에서 령혼까지 중편소설 “뼈”는 관속에 누운 “뼈”에 관한 시로부터 시작된다. 즉 이 소설은 제목과 함께 작품의 시작부터 “뼈”에 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할것임을 암시하고있는데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주된 이야기는 “뼈”를 둘러싼 여러가지 사건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뼈”의 이야기는 여러개의 작은 이야기로 무어져있고 요일의 전개에 따라 펼쳐지는 일종의 순차적이면서도 단계적인 구조를 취하고있다. 작품에서 주인공이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랭면집이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먹는 랭면을 앞에 두고 주인공은 눈물을 쏟아내지만 어이없게도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의 트렁크가 도적맞힌다. 어렵게 도적을 잡기는 했으나 트렁크속에 든 “뼈”는 경찰의 의심을 잔뜩 자아내는 오해의 소지가 되기도 한다. 부모님의 “뼈”였던것이다. ... 트렁크안에 두개의 비닐주머니가 들어있었는데 그 비닐주머니에 나뉘여 담겨져있는것은 뼈였다. 텅 빈 눈구멍이 선연하고 이발이 들쭉날쭉한 해골바가지며 굽이 나간 접시 같은 골반, 길다란 정갱이뼈… 분명 사람의 뼈였다. 랭면이 조선족의 대표음식중 하나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있는 사실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귀국해서 랭면부터 찾고 랭면을 먹으면서 눈물을 쏟는다는것은 고향에 대한 뿌리의식이 아직 남아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랭면집은 주인공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장소로 되는데 이러한 사건의 발단과 함께 랭면집이 헐리고 공터만 남았다는 소설의 결말은 그러한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인할 장소나 기회마저 상실되는 현실적인 문제점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랭면은 단순한 음식문화뿐만아닌 민족의 정체성과 이어진 령혼의 존재감과도 직결된다 하겠다. 3. “묘소”―사람마저 매몰되다 원래 “묘소”란 죽은자를 묻는 장소이다. 그곳에 묻힌 사람은 산자에 의해 기리게 되고 정신적으로 보이지 않는 대화를 통해 일종의 문화적인 전통이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 “묘소”가 헐리고 두번다시 매몰된다면 어떤 상황이겠는가? 중편소설 “뼈”에서 주인공이 부모님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해 찾아간 고향은 사람들이 거의다 떠나고난 텅 빈 마을이다. 원래 백여호가 넘던 동네에는 겨우 여섯호만 남아있고 그마저도 다섯호는 관내에서 온 한족들이다. 게다가 도시의 수원을 위한 저수지확장공사때문에 마을 전체가 수몰지(水没地)로 물에 잠기게 될 운명에 처해있다.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묘소조차 임자를 잃게 되였는데 이처럼 묘소의 부재는 곧 그 마을의 력사와 뿌리가 사라지게 됨을 의미한다. 작품에서 조막령감의 말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게 와닿는 가시와 같은 충격을 준다. ...그런데 요쌔(요즘)는 모두 로문(늙은)한 어시고 이쁜 처자고 막 버리고 훌훌 떠나버리니 나 원 참, 돈이 좋아 그런다마는 사실은 그 돈이 웬쑤(원쑤)인게다, 웬쑤! 조막령감은 이 마을을 대표하는 세대이다. 따라서 수근이와 병태 등 몇몇이서만 조용히 이장을 하는 모습은 조막령감이 말하는 그 옛날 “온 동네가 다 나와서 제 집 일처럼 애고대고 울어줬던” 때와는 너무나 달라 마을이 피페 그 자체로 화하고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람도 그전의 사람들이 아닌데 설상가상으로 마을마저 수몰지가 되여 묘소까지 위태롭게 된 고향, 고향은 말 그대로 황페하고 버려진 삶의 공간이요,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삶의 자취라 하겠다. 4. “명월”―이지러진 사랑 주인공 수근이가 이장에 이어 찾고싶은 사람은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전처와 아들이였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전처는 “사윈 초승달 같이 뺨이 훌쩍 패였고 풍만하던 몸매의 곡선도 허물어져보였다”. 한마디로 그 이름에 걸맞는 “명월”이 아니라 난데없는 초승달을 마주하게 된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초승달은 그가 일하는 명태가공소의 한족인 경리와 새살림을 꾸린터였다. 보름달이 초승달이 되고 초승달이 민족을 달리하는 가정을 꾸렸다는 사건은 주인공의 전처의 일이라 해도 민족적인 삶의 피페화뿐만아니라 이질화가 가속화되고있는 현실적인 모순을 잘 드러낸다 하겠다. 좀더 잘살아보려고 외국에 가는것이라고 한다. 그것때문에 “가짜리혼”을 하면서까지 모험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모험의 대가는 너무나 처참한것이였다. 조선족들의 경우 이런 일들은 이제 비일비재하다싶이 되여 거의 오래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타민족들한테는 충격 그 자체일수 밖에 없다. “명월”의 두번째남편의 아래와 같은 말은 그래서 우리의 정곡을 따끔하게 찌른다. ...내 생각엔 당신들 정말이 꽈이(怪)하다 했쏘. (중략) 뭐가 그리 쪼우지해서 밭이 뿌요(不要), 집이 뿌요, 애들이 뿌요, 푸무(父母) 뿌요하고 가뻐리고 했쏘? 돈이 잘 벌어오오 좋쏘. 돈이 좋긴 했쏘. 그런데 그렇게 돈이 마니 벌어쏘. 그담엔 쩐머빤(怎么办)? 팡즈(房子) 메이라(沒了), 밭이 메이라, 로우퍼(老婆) 메이라, 위쓰왕퍼(鱼死网破) 그리 됐쏘 했는데. 당연히 경리의 말은 수근이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고 부상을 입은 옆구리를 더욱 아프게 한다. 물론 이 장면에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독자라면 민족적인 삶의 위기나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자책감 비슷한것을 느낄것이다. 5. “스케트보드”―아이마저 잃다 주인공 수근이는 전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렵사리 하나뿐인 아들애 욱이와 상봉한다. 하지만 오래된 나날을 두고 부자간에는 이름 못할 차디찬 강물이 벽처럼 가로막혀있고 이들은 제대로 된 대화를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다. 오히려 아이의 요구에 의해 세트로 사준 스케트보드는 아이를 순식간에 학교앞에서 사라지게 만들뿐이다. ...“왜 인제야 왔어요? 어디서 뭘 하다가요?” “엄마와는 왜 갈라졌죠? 둘 다 좋은 사람 같은데?” 아들애는 아버지의 확답 같은것을 기다리지 않고 물음을 던진듯했다. 수근이가 대답할 사이도 없이 나래 펼친 새처럼 두팔을 휘저으며 저만치 미끄러져갔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아들에게 아버지의 감회가 얼마나 컸으랴마는, 그것도 돈벌이하느라 제대로 사랑을 주지 못한 자책감 또한 얼마나 컸으랴마는 아들애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깊고깊은 상처자욱으로 남았고 그 자욱을 메우기 위한 기회는 더 이상 아버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흔히 아버지의 형상으로부터 아들은 남성으로서의 초기 모델을 형성하는데 그 모델의 성격여하는 곧바로 장차 아들애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그러한 모델을 상실한 아들애가 아버지와의 상봉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아들과의 그러한 소통장애는 주인공의 미래를 더욱 불확실하게 한다는데 있다. 즉 주인공의 삶의 미래적인 추이는 아들과의 그러한 장애때문에 매우 암울하게 비쳐진다는것이다. 6. 수장의 뒤끝은 상실 부모를 수장한 주인공은 다시 기약 없는 출국길에 올랐다가 아들 욱이가 크게 다쳤다는 련락을 받게 된다. 그가 사준 스케트보드를 타다가 아들이 크게 골절상을 입은것이다. 아버지가 어쩌다 사준 선물때문에 아들의 생명이 위험할번했다는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가? 이는 아래의 한 단락에서 찾아볼수 있다. 코날이 왈칵 시큰해지며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뚤렁뚤렁 아이의 얼굴에 떨어져내렸다. 부모님의 유골을 고향의 강에 안치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아직도 뭔가 묘연하고 암담하기만 한 응어리가 발걸음을 자꾸 옥죄였는데 그 응어리가 바로 아이였음을 수근이는 다시금 느낄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어렵지만 어쩔수 없는 한국행을 해야 하는 주인공의 발을 굳게 묶어두는 아들의 부상은 바로 주인공의 삶의 뿌리가 어디에 있고 삶의 의미와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금 일깨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하나의 장치였을것이다. 또한 마감을 장식하는 “월요일: 상실”이라는 부분은 그렇기때문에 뿌리를 잃고 헤매이는 수많은 조선족들의 현재적인 삶의 이모저모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사색을 엿보이게 한다. 지금의 시대광장 동쪽에 위치한 랭면집―복무청사가 사라지고 텅 빈 공터만이 남았다는것은 랭면에 담그다싶이 했던 마음들이 모조리 공터에 버려졌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즉 랭면집의 부재는 이 소설의 경우 주인공의 특수한 삶의 경험과 더불어 랭면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던 수근이네들―우리의 삶의 공간이 일시적이나마 사라졌음을 상징하며 뿌리를 잃어가는 우리의 삶의 모순된 현장을 상징적으로 꼬집는것이라 할수 있다. 이처럼 김혁의 중편소설 “뼈”는 우리한테 마땅히 있어야 할 “뼈”가 도대체 어떤것이여야 하는지를 흥미로우면서도 상징적인 여러가지 소설적장치로 잘 보여준 훌륭한 작품이라 하겠다. 앞으로 보다 더 가치 있는 작품을 기대해마지않는다. “연변문학” 2013년 10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4    제33회 "연변문학"상 수상작품- "뼈" 댓글:  조회:3081  추천:11  2014-10-23
제33회 "연변문학"상 수상작품 . 중편소설 .   뼈 - “중국조선족테마소설” 계렬   김 혁   [그림: 미국화가 조지아 오키스의  "붉은 산과 뼈" ]     수요일: 랭면과 도적   주문한 국수가 나왔다. 그윽한 육수물에 반쯤 담겨진 찰진 국수발, 그우에  소고기 육편, 닭고기 완자, 절반 베인 삶은 달걀, 사과배 조각으로 곱게 고명을 얹은 국수가 나왔다. 국수는 그 무슨 음식이 아니라 한점의 정교한 조각품을 방불케 했다. 그 국수를 수근은 멀거니 내려다 보았다. 임금님전에 올리는 수라상을 먼저 점검하는 내시처럼 조심스레 면발을 입에 넣었고 잣과 깨가 동동 뜨는 육수물 한모금 떠서 맛보았다. 쫄깃했고 시원달콤했다. 몇해만에 먹어보는 고향 랭면인가! 입안 그득 고여드는 흥그러운 이 맛… 국수 한 그릇이 순간에 굽이 났다. 멸치를 우려 양파를 넣고 계란을 풀어 만든 육수물에 부추와 호박나물을 잔뜩 넣은 물국수며, 썬 김치와 참기름, 고추장으로 비빔한 비빔국수도 고향의 랭면맛보다 못했다. 또 한그릇 주문했다. 풍성한 면발을 다시 한번 허겁지겁 입에 넣던 수근은 국수발을 입에 가득 문 채 그만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먹고픈 국수를 마음대로 먹던 나날들과 국수를 함께 먹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수근은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야 만것이다. 눈물의 육수를 밑굽까지 비우고 수근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유명세를 떨쳐 온 랭면집이 신축공사중이여서 림시 개설한 분점임에도 화장실에까지 사람들로 붐비였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작심하고 랭면만 먹으러 모여 온듯했다. 하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한철이라 그럴법도 했다. 수근이네 마을 사람들도 한때는 시내행차를 하면 남정네고 아낙네고 할것없이 랭면부를 찾아서는 기어이 랭면 한그릇씩 맛보군 했다. 랭면 맛보기는 시골사람들이 시내구경에서의 그무슨 통과의례처럼 되여 있었다.    화장실에 걸린 대형 거울앞에서 저마다 포장수저에 딸려 온 이쑤시개를 꼬나든 사람들이 허연 이를 드러내고 이발청소를 하고 옷무새와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그들처럼 화장실 거울앞에 마주서던 수근은 홀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짧은 비명을 흘리며 후다닥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금방 앉았던 자리, 국수 두 그릇을 허겁지겁 비웠던 그 식탁곁에 놓았던 트렁크가 보이지 않았다. 쥐색 바탕에 긴 손잡이와 바퀴달린 트렁크가 보이지 않았다. 수근은 툭툭 주먹으로 제 이마를 때렸다. 흥분할때나 급할때면 저도모르게 나오는 반사적인 습관이다. 트렁크, 여게 놨던 트, 트렁트를 못봤나요? 급한나머지 수근은 말까지 더듬었다. 지진이라도 인듯 비명을 동반한 수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입에 문 국수발을 끊치도 못한채 곁자리의 아낙이 머리를 저었다. 선머슴아이의 서투른 빗질처럼 주위를 마구 훑던 수근의 눈길이 랭면집의 창문밖을 향했다. 랭면부 맞은켠의 뻐스정류소에서 막 떠나려는 공공뻐스가 보였다. 또 한번 기급한 비명을 지르면서 수근은 랭면부를 뛰쳐나갔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죽기살기로 뻐스를 쫓아갔다. 금방 출발한 뻐스라 속도를 내지않았기에 수근은 단박에 뻐스를 추월할수 있었다. 뻐스앞에서 두손을 쫘악 벌리며 차를 가로막았다. 끼익! 쇠갈기소리를 내며 뻐스가 멈춰섰고 운전기사에게서 앙칼진 욕설이 터져나왔다. 뻐스문을 원쑤처럼 쿵쾅 두드려대는 얼나간 사람같은 그에게 대체 무슨 영문이냐고 기사는 욕설과 함께 문을 열어주었다. 뻐스기사가 퍼붓는 욕설에도 술렁이는 차객들의 소리에도 개의치않고 수근은 땀냄새와 열기로 랑자한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들어가 대번에 쥐색 트렁크를 끌고있는 20대의 남자를 짚어냈다. 깡마른 몸에 메밀눈을 한 그 남자의 멱살을 와락 잡아쥐면서 감때 사납게 웨쳤다. 도둑이야! 이 놈이 내 가방을 훔쳤소. 도적으로 지명된 사내가 몸부림치며 항변했다. 그런데 사내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말은 하지않고 가을밭 참새라도 쫓는듯 으아! 으아!하고 새된 고음을 지르며 손발을 휘저었다. 아마 벙어리인가보오. 설마 벙어리가 그런짓 했을까! 한편의 단막극이라도 보듯 호기심에 흥미를 동반한 눈길들이 수근이와 도적사이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파출소로 갑시다! 운전사량반 파출소로 가주시오! 수근이가 운전석쪽을 바라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처럼 웨쳤다. 그 소리에 차객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가뜩이나 더워서 귀찮은 날씨에 재수없는 일에 휘말려 시간을 빼앗긴다며 불평불만들이 터져나왔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서로 확인해 보면 될거 아니오. 맞추는 사람이 임자고 못맞추는 사람이 도적인게 확실하지. 기사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와 제안했다. 사람들중에서 중년남자 하나가 원주필을 뽑아 내밀었다. 벙어리가 말을 못하니 안에 뭐가 들었는지 자기 오른 손바닥에 쓰라고 했다. 수근이는 자기 왼 손바닥에 쓰라고 했다. 억울하다는듯한 표정만 짓고있던 벙어리가 손짓발짓 해가며 차에서 내리겠다고 괴성을 질러댔다. 그러는 그의 손목을 중년남자의 우악진 손이 단단히 감쳐쥐였다. 마지못해 벙어리가 그 중년사내의 손에 뭔가 적었다. 기사가 손바닥을 펴들고 들여다 보았다. 벙어리가 쓴것은 “의복”이라는 두 글자였다. 원주필을 받아들고 수근이도 적었다. 힘주어 커다랗게 적었다. 손바닥에 적혀진 글자를 헤아려 보던 중년사내의 두눈이 휘둥그래 졌다. 땀에 흥건한 사내의 손바닥에 적혀진 글자는 한 글자였다. 그 글자를 운전기사며 차객들에게 보여줬다. 그들의 눈동자 역시 순간에 영화감독의 큐!사인을 받은 어설픈 엑스트라의 과장된 연기처럼 일제히 휘둥그래졌다. 땀에 젖어 글자의 획들이 이니셜 대문자처럼 굵어진 글자가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에 넘쳐날듯 씌여져 있었다. 뼈. 당신 정신 온전한 사람 맞소? 정신을 한국에 두고 왔나? 선진국 가서 11년이나 구을다왔다는 사람이 이 정도밖에 안되오?  아니 무슨 사람이 벌건 대낮에 사람 뼈덩이를 싸들고 시내 복판을 활주하는가 말이요? 엉! 파출소에서 수근은 당직 경찰에게 보리쌀 닦이듯 하고있었다. 경찰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못볼 괴물이라도 보듯 수근이를 지켜보았다. 수근은 툭툭 주먹으로 제 이마를 때리며 무어라 적당한 변명의 말을 찾지 못해 했다. 벙어리 도적과 어딘가 심상치않는 도적맞힌 사람을 싣고 뻐스는 부근의 파출소로 왔다. 경찰들이 대번에 그 벙어리 도적을 알아보았다. 전과범인데 그 말고도 무리를 지어 소매치기를 다니는 벙어리도적들이 더 있어 수사망을 펼치고 있는 중이였다. 그런데 도적맞혔다는 물건을 확인하며 트렁크를 여는 순간 담당 경찰은 매일 흉악범을 상대로 하는 경찰답지않게 초풍할지경으로 놀라했다. 트렁크안에 두개의 비닐주머니가 들어 있었는데 그 비닐 주머니에 나뉘여 담겨져있는것은 뼈였다. 텅 빈 눈구멍이 선연하고 이발이 들쭉날쭉한 해골바가지며, 굽이 나간 접시같은 골반, 길다란 정갱이 뼈… 분명 사람의 뼈였다. 내 아부지 어무니 뼙니다. 수근이가 서둘러 설명했다. 한국에서 일하다가 부모님의 산소가 모셔져있는 산소의 이장통지를 접하고 서둘러 귀국했다고 했다. 왕복티켓을 끊었는데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서둘러 화장하려다가 그 뼈를 하마트면 도적맞힐뻔했다는것이다. 묘를 이장하고 뼈를 화장할려면 민정국 사무소의 증명서류가 있어얀다는것도 모르오? 이 사람이 이거 크게 경을 칠 사람이구만. 별의별 사건을 다 겪지만 이런 해괴한 일은 처음이라는듯 담당경찰은 부아통이 터져있었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해서야 수근은 파출소에서 놓여 나왔다. 수근의 신분증이며 려권 그리고 연고자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등 신상명세며 장황한 설명, 그리고 뼈들의 오래 된 상태를 보아 상황파악은 되였다. 반양머리에 흙빛 피부, 황소처럼 둥글고 구순한 눈길을 한 그의 목소리에서, 표정에서 그리고 온몸에서는 진솔한 사람의 냄새가 났다. 더욱이 수근이네 고향의 묘지 이장통지도 신문사에 물어 확인했다. 그제야 경찰은 수근이를 믿는 눈치였다. 온 오후를 닥달질 당하고 나니 울컥 야속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럴법도 했다. 백주에 다른 물건도 아닌 사람의 뼈를 들고 시가지 곳곳을 쏘다녔으니 오해를 살만도 했다. 고향마을으로 가는 마지막 뻐스가 있으려나 생각하며 트렁크를 달달 끌고 어스름이 내리는 도로변을 따라 수근은 뻐스역으로 향했다. 그런 수근의 어깨를 누군가 가볍게 건드렸다. 누구냐고 돌아서는 순간 코잔등에 주먹 하나가 날아 들었다. 두손으로 코를 부여잡는데 이번에는 옆구리에 발길이 날아들었다. 얼굴이며 잔등에도 주먹과 발길질의 란타가 날아들었다. 한 두사람이 아니였다. 느닷없는 타작매에 수근은 도로변 하수구에 뒹굴었다. 폭행을 감행한 괴한들은 재빨리 어둠에 스며들듯 도망쳐버렸다. 수근은 몸부림치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는 수백개의 불나방이 날아다니는듯하고 코에서는 뜨거운것이 쏟아져 내렸다. 괜찮아요? 채소구럭을 든 할머니 하나가 다가와 코피를 쏟고있는 그에게 휴지를 내밀었다. 휴지를 돌돌 말아 코속에 쑤셔넣으며 경황속에서도 수근은 트렁크를 찾았다. 다행이 트렁크는 있었다. 트렁크도 온하루 불운함에 치대고있는 주인장처럼 길녘에 뒹굴고 있었다. 트렁크를 끌고 도로변의 화단에 걸터앉아 엉망이 된 몸과 마음을 수습했다.   그들이 누군지 알것같았다. 시가지에 벙어리도적떼들이 출몰한다던 파출소 경찰의 말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그들이라고 수근은 단정했다. 무작정 구타를 날리는 그들은 한결같이 수근이가 한낮 뻐스우에서 들었던 그 벙어리도적과도 같은 으아으아하는 특유의 괴음을 지르고 있었던것이다. 그야말로 수선하기 그지없는 하루였다. 고향가는 막차를 놓칠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던 수근이가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옆구리에 송곳으로 쑤시는듯한 통증이 왔다. 트렁크의 손잡이에 의지한채 수근은 아픔을 삭이느라 몸부림쳤다. 아마 뼈라도 다친 모양이다.   화요일: 수몰지(水沒地)의 사람들   오랜만에 귀국한 수근은 바로 고향마을을 찾았다. 부모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튿날 아직도 마을에서 맨 마지막 사람으로 거짓말처럼 살아있는 팔순의 조막령감을 등에 업고 고향의 뒤산으로 올랐다. 뒤로는 11년만에 만나는 소꿉친구 병태가 다리를 잘숙잘숙 절며 따라섰다. 어쩌면 이제 겨우 40대중반의 나이에 풍을 맞아 손이 곱아들고 다리를 끌었다. 그런 성찮은 몸으로도 병태는 친구를 돕겠다며 기어이 따라 나선것이다.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고향사람들도 모두 마을을 떠나버렸다. 백여호를 웃돌던 동네에 겨우 여섯호가 남았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다섯호는 관내에서 온 한족들, 마을 원주민이라고는 병태와 그의 할아버지뿐이였다. 말(마을)에 남은 사람이라곤 벵신(병신) 꼬라지된 나와 꼬부랗게 늙은 우리 할배밖에 없다. 못생긴 낭기(나무) 선산 지킨다더니… 병태는 십여년만에 나타난 친구를 향해 씁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주름이 찾아든 얼굴에서 세월여류(岁月如流)를 확인하면서 서글프게 웃었다. 지난 한밤을 간소한 술상이라도 벌려놓고 잔에 잔을 비우며 얘기 꼭지를 거듭 틀었다. 수근의 등에 업힌 조막령감은 다름아닌 병태의 할아버지다. 그 뒤로 쟁기를 챙겨들고 마을의 장씨성을 가진 한족나그네가 묻어 섰다. 병태가 “장보톨”이라 칭하는 그는 수근이가 한국으로 로무를 나간뒤 마을에 들어온데서 처음 보는 사람이다. 묘 이장을 위해 하루삯 300원을 주기로 하고 데리고 나섰다. 이장을 전문 하는 사람을 찾아 쓸려니 천원돈 아니면 안한다고 배포를 부렸다. 요즘 세월에 이장과 같은 장례절차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적었고 또 일 자체가 부정타는 일이라며 “겨울 딸기”격으로 부르는것이 값이였다. 그래서 생각다못해 년로한 병태 할아버지를 모시고 나선것이다. 난장이를 겨우 면한듯 작고 왜소해서 조막령감이라 불리는 병태할아버지는 마을의 년장자격이다. 왜정때 글도 읽었고 마을에서 회계노릇도 오래 해오면서 일찍부터 마을의 대소사에 빠지지 않았던 몸이였다. 그러니 이장도 할줄 안다고 했다. 더우기 수근의 아버지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몸소 참가했던 령감이였다. 이장도 이장이려거니와 수근은 부모의 묘소를 어디에 모셨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수근이가 네살적엔가 세상떴으니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형님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쩌면 수근이가 한국으로 나간지 두달만에 갑작스레 세상떴다. 어머니의 비보를 듣고도 금방 출국한 몸이라 돌아와 장례에도 참가하지 못했던 수근이였다. 마른 사과처럼 쪼글쪼글 늙은 조막령감은 이제 죽기전에 고향의 뒤산에 한번 오르고 싶다며 뜨락에도 겨우 나서던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도 오래전에 중풍에 쓰러졌던 몸이다. 병태네 가족병력사에서 풍이 래력이다. 아버지도 풍을 맞고 돌아가셨다. 그나마 할아버지가 산수의 나이를 넘긴 몸이지만 많은 차도를 보여 다행이였다. 마을의 고샅길을 가로질러 뒤산으로 올랐다. 산은 옆구리를 조금 틔워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온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다. 지질한 잡목과 잡풀이 발에 채였다.처음에 업고보니 령감은 바짝 여위여 빈 벼가마니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팔막진 산길을 업고 오르려니 점점 더해지는 무게가 수근의 등짝을 압박해 왔다. 게다가 더위가 만만치 않았다. 정수리가 잉걸불을 인듯 뜨거웠다. 직수굿이 입 다물고 걷는데 땀이 등판을 적셨다. 그렇다고 몸이 온전치 못한 병태와 바꿀수도 없는 일이였다. 도시의 수원(水源)과 발전(发电)을 위한 저수지 확장공사를 하면서 묘지는 물론 수근이네 마을 전체는 이제 수몰지(收沒地)로 물에 잠기게 된다. 그러면 부모의 분골을 두만강에 뿌리기로 수근은 마음먹었다. 원체 마을 뒤산에는 묘들이 수십 기가 있었지만 고향을 뜨면서 이장해 나가고 또 방치해두어 찾는이가 거의 없는 마을묘지는 버려진거나 다름없었다. 소식을 접하고 한국에서 헐레벌레 찾아왔는데 그 묘소들을 이장할 시간이 이제 겨우 하루가 남았다.  산자락에서는 벌써 불도젤이며 포크레인들이 부릉부릉 쇠이빨을 맹렬하게 갈아대듯 굉음을 울리며 작업이 시작이다. 무쇠팔로 나무들을 중둥을 쳐 쓰러뜨리고 바위돌을 밀어내고 흙을 깎아낸다. 거대한 쇠스랑에 찍혀 청청한 솔이 흰뼈를 드러내며 툭툭 분질러지고 있었다. 불도젤은 납작 엎드렸으나 미처 몸을 다 숨기지 못한 임자없는 봉분들을 마구 밀어제끼고 있다. 불도젤이며 포크레인, 트럭들이 뿜어내는 성마른 소음과 매콤한 연기가 산마루의 새소리와 풀냄새를 뒤덮어버리고 있었다. 산이 낮아지고 숲이 사라져가고 있다. 조(저)기 조(저)쪽 같아 뵈는데… 조기 늘근(늙은) 솔낭기 지(제) 혼자 서있는데, 응, 조기 조쪽으로 가보지무… 내 짐작이 틀림없을게다 조막령감의 조막손이 느릅나무, 가문비나무, 사시나무숲을 지나 홀로 허허롭게 섰는 늙은 소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산등성이의 확 트인 양지 바른 곳, 그 곳에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봉분이 하나보였다. 비석도 상석도 없고 묵은 풀이 우묵한 봉분은 조금 내려앉아 보였다. 무덤앞에 령감을 내려놓자 령감이 조그많고 험한 손으로 봉분을 투덕투덕 두드렸다. 맞따! 이 뫼짜리(자리) 맞따. 여기서 조기 렬사비 아래쪽으로 꼳꼬지(곧게) 내려다 봐라. 과수밭 아래쪽 조기가 딸내미 셋이 몽땅 싸이판 나간 양봉재(쟁이) 강서방네 집이고 강서방네 곁집이 쏘련 나갔다 죽은 박서방네 집, 그 집 곁이 바루 수근이 너네 집이 아니고 뭐냐. 령감의 조막손이 가리키며 확인하는 산자락아래에 수근의 집 그리고 강서방네 집, 박서방네 집은 꿈 꾼듯이 사라지고 없다. 살던이들이 죽거나 떠나버린데서 언녕 주저앉아 오간데 형체조차 없고 빈 집터에는 쑥부쟁이, 능쟁이같은 잡초의 춤만이 무성하다. 그 거뭇한 빈자리들이 수근의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용하게 찾아낸 오래된 봉분앞에 신문 몇장을 펴고 고량주와 명태포, 사과배 그리고 소시지나 과자들로 간략하게나마 제상을 차렸다. 조막령감이 시키는대로 배워가며 례를 치렀다. 종이컵에 술을 부어 무덤에 올렸다. 무릎꿇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아부지 어무이! 더 좋은데 모실려고 집을 허무니  놀라지 맙소! 따른 술을 봉분우에 끼얹었다. 묘주위를 돌며 세번 크게 웨쳤다. 파묘(破墓)! 파묘! 파묘! 그제야 드디여 봉분에 삽을 박았다. 시간이 오래된 봉분이다. 아버지는 40여년전에 어머니도 11년전에 돌아가신지라 봉분은 풀뿌리로 얽혀 무척 단단했다. 곡괭이를 꽂고 앞뒤로 몇번씩 흔들어야 겨우 촘촘하게 쩔은 떼장을 한 뼘씩 벗겨낼수 있었다. 겉흙을 한꺼풀 벗겨내고 삽날을 힘들게 박아넣으면서 수근은 일이 쉽지않음을 알아챘다. 흙이 생각보다 단단했고 거치적거리는 돌멩이들도 심심찮게 나왔다.   굳은 흙이 삽날끝을 구부러뜨리자 “장보톨”은 씨부렁거리며 쭈그리고 앉아 돌멩이로 상한 날끝을 두드려 폈다. 철겅철겅 삽질소리가 황량한 산의 정적을 깼다. 쟁기소리와 더불어 조근조근 조막령감의 이야기도 끼여들었다. -원래는 이 축축한 땅에 내 먼저 묻힌 조상량반들께 때맞춰 공양을 드려야 그게사람 된 도리가 아니겠냐? 그리구 저 고향땅에서 쌀이고 풀이고 그만큼 뜯어먹고 훑어먹었음 묌(몸)이라두 죽어 저 땅에 묻혀 비료(거름)돼서 그 값이라도 하는게 옳이 된 도리지. 그런데 요쌔(요즘)는 모두 로문 (늙은) 한 어시고 이뿐 처자고 막 버리고 훌훌 떠나버리니 나 원참, 돈이 좋아 그런다마는 사실은 그 돈이 웬쑤(원쑤)인게다. 웬쑤! 조막령감이 한가슴 가득한 울기(鬱气)를 토해내며 짐짐하게 짓무른 눈꼬리로 수근이를 쳐다보았다. 자기에게 채문하고 확답을 구하는듯한 그 눈길에 수근은 눈길을 돌렸다. 고개를 수긋하고 그저 부지런히 일에만 몰두했다. 한국에서 일에 절은 몸이라지만 삼복염천에 땅을 파자니 쉽지가 않았다. 얼굴에는 땀이 비오듯 흐르는건 물론 허리가 아프고 오랜 막일에서 얻은 관절통에 손목 인대가 끊어질듯 했다. “장보톨”도 힘겨웠던지 중국말로 무어라 욕을 섞어가며 거칠게 곡괭이질을 해댄다. 수근은 한숨 쉬고 하자며 호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병태에게 뿌려주었다. 이거 한국담배꾸마 병태가 담배 한개비를 할아버지 입에 물려주었다. 남조선 골련(권연)이라니 어디 한대 먹어보자. 한국꺼라해서 다 조은건 아니겠지우. 담배하문 그래도 여기 화건종 담배가 최곱지 장보톨”에게도 권했다. “장보톨”은 담배를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불을 붙여물고는 그늘을 찾아 쪼그리고 앉았다. 엄지와 검지로 끝을 잡고 필터밑까지 알뜰히 태워댔다. 금방 붙여 물었던 담배의 불똥을 끊어내며 이번에는 병태가 그로서의 울기를 뿜어댔다. 그쪽은 뭐 달도 여기보다 더 크다 그러덤둥? 더 밝다 그러덤둥? 그래서 다 말벌에 쐰 사람처럼 달아나 거기로 가버린담둥? 담배연기가 몽환처럼 묘소주위에 굼닐었다. 신코에 속흙을 잔뜩 묻힌채 삽자루에 손을 걸치고 수근은 산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농익고 꽉찬 여름이 들에서 일렁이고 있다. 풍성한 여름은 왔건만 마을은 텅 비여 보였다. 대부분 밭은 중국사람들에게 헐값으로 양도해 버렸고 더 많이는 버려졌다. 논의 한 가운데 그동안 보이지 않던 고압선 송전탑이 우뚝우뚝 마을을 침노(侵擄)한 괴물처럼 서있다. 집과 집의 노란 이영들끼리 접붙어 있던 다정한 모습은 오간데 없고 모두가 떠나버려 주저앉았거나 주저앉으려는 집들은 괴물에 쫓겨 비여진 흉가를 방불케했다. 왕년에 정답기만 하던 마을길도 형언하기 어렵게 더러웠다. 길복판에 말똥이며 버려진 농기계의 내연기관 부속품이 뒹굴었고 죽어서 털인형처럼 된 강아지 시체도 보였다. 뒤산 자락에는 과수밭이 펼쳐졌는데 과수에 경험이 적은 외지사람들이 되는대로 다루었던지 사과배가 불다 만 풍선처럼 조그많게 달려 있다. 원체 곡창이라 불리던 마을이였다. 과수가 잘되고 자식농사가 잘되는 곳이라 린근에 소문이 자자한 마을이였다. 하지만 오늘의 고향의 풍경은 장수가 맞지않아 버려진 낡은 화투장같이 진부하고 초라했다. 그 진부한 풍경도 이제 물에 수장되여 말끔히 사라져버릴 판이다. 선조들이 이 곳에 터를 마련하면서 심은 벼와 사과배나무, 그 척박하던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픈 간절한 념원과 종내는 주렁주렁 열매를 달았던 나날들에 대한 기원을 망가뜨린건 수근이만이 아니였다. 과수밭 언덕배기에 세워진 렬사비가 유독 눈을 찌른다. 비바람에 지워지고 오래동안 먹을 넣지않아 비명이며 렬사들의 이름조차 말끔히 지워지고 하얀 몸체만 남았다. 항일에 몸을 던져 마을을 지켰던 사람들의 기념비는 이제는 괴괴한 무덤같은 마을을 위해 세워진 커다란 비석처럼 보인다.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며 넋놓고 섰는 수근이를 보고 병태가 말했다.  뭘 볼게 있다고 자꾸만 내려다 보고 그러냐. 없다, 싹 다 가버리고 아무도 없어. 그래도 수근이 니는 지금 이렇게 면례(이장)라도 하니 다 꽃이라 생각해라. 이제 말(마을)이 물에 잠기면 부모님 효도해 묻을 곳도 없다. 후유, 처박혔다 물밑에서 밖으로 솟아나온 사람처럼 수근은 거칠게 한모금 한숨을 내뿜었다. 두자 반 정도 파 내려가자 흙 색깔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흘러 드디여 관이 드러났다. 관널은 아직도 형태 그대로 보존되여 있었다. 홍송으로 만든 관은 십여년 잘가고 백송으로 잘 만들어진 관은 50년까지도 간다고 조막령감이 말했다. 관덮개사이에 삽날을 끼워넣고 힘주어 제꼈다. 덮개가 부서졌다. 관덮개가 생각보다 너무 싱겁게 열렸다. 벌건 황토속에 허연 뼈들이 드러났고 시지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왔꼬나. 뻬(뼈), 뻬 나왔다아!" 조막령감이 울음같은  환성을 질렀다. 오랜 시간이 흐른지라 육탈이 된 뼈는 비교적 완정하게 남아있었다. 색깔이 누렇고 새까맣게 변색한 뼈들이 수근이를 올려보고 있었다. 좌남우녀로 합장한다니 왼켠의 더 시커멓게 삭은 유골이 아버지, 오른켠의 아직도 흰빛을 잃지않고 있는 유골이 어머니임이 틀림없다. 수근은 툭툭 주먹으로 제 이마를 때렸다. 수근의 눈시울이 자우룩히 젖어들었다. 조막령감이 일렀다. 호미깽이 가져왔냐? 이제부턴 광차이(삽) 치우고 호미깽이로 긁어라. 살살 긁어얀다. “장보톨”을 묘혈에서 내보내고 수근은 혼자서 유골을 수습했다. 호미를 들고 조심조심 바닥을 긁었다. 수근이 니 아부지 상새날때(세상뜰때) 니들 지끔 나이보다도 더 아랠땐데  니 아부지가 하필이문 해토머리에 상새났거든. 뫼짜리를 잡겠는데 땅이 안 풀려서 쇠처럼 땅땅한게 당최 팔수 있어야지. 그래서 막 빵포(남포)질 해서 언땅 파헤치고 그랬지. 그래도 그때는 온 동네가 다 나와서 제집일처럼 애고대고 울어주는데 제사 한번 제대로 했지. 령감은 망자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꺼내들었다. 수근이 호미로 굵은 흙알갱이를 헤치고 흙속에서 뽑아낸 뼈들을 몽당비자루로 흙을 말끔히 털어내고는 또 술로 씻어 신문지우에 하나 하나 펴놓았다. 에궁, 귀하신 뻬를 모시는데 신문찌라니. 요짐(즈음)은 참 벱(법)도 업는 세월이다. 처음부터 소나무아래 잔디둔덕을 등판 삼아 비스듬히 기대여 앉아서 조막령감은 끝간데없이 잔소리를 했다. 그만큼 수근이가 서툴렀던것도 사실이다. 원체는 한지(韩紙) 나 삼베를 페(펴) 재이문 하다못해 봇낭기 껍질이라두 쫘악 벳겨서 그우에다가 뻬를 올려 놓는게 벱인데 담배때문에 기침이 터져나와 멈추었다가 그것도 잠간, 령감의 사설은 계속되였다. 수근이 급히 오다보니 한지를 살 새가 없어 그랬소꼬마. 또 요쌔는 어디가서 베천같은거 구할데두 없구. 그래두 서울에서 이렇게 한번 온다는게 간단치 않스꼬마, 남들은 뫼를 막 밀어버려두 모르는체 하는 판인데… 병태가 친구랍시고 수근이 편을 들었다. 하지만 조막령감은 유감천만을 감추지못해 했다. 원체는 한지에 뻬를 모셔 놓는고 말고도 죽은 사람 명정(銘旌)도 쓰는게 벱이다. 이장도 장례인데 명정을 써야지. 칠성판에 뻬를 다 주어놓고 마지막에 뻬에 명정을 덮어 내가는게지. 글고(그리고) 옛날엔 멜레(면례)하기 하루전에 미리 파묘할 뫼짜리에 가서 술과 과실을 차려놓코 멜레한다는 축문을 외운다. 요쌔는 뉘기두 축문같은거 쓸줄을 모르지만. 하기사(물론) 옛날 벱이 너무 다사(번잡)한것도 탈이겠지만 또 낡았다고 그 벱을 넘 안지케(켜)도 탈 난다. 낡았다고 함부로 막 던지고 그러는데 사실 낡은 겔(것일)수록 금처럼 빛이 더 난다는 고 간단한 도리를 요쌔 사람들은 왜 모르는지... 요쌔 젊은이들은 너무 벱을 모르는게 탈이다. 하기사 사람이라 생겨 먹은것은 몽땅 혼궁기(구멍) 열렸는지 밖으로 나가지 못해 매삼질(안절부절 못하다) 해대니. 집안 꼴, 동네 꼴이 초상난 집처럼 저 줏쌀(꼴)이지… 축문에다 쓰는 그게 무슨 뜻임둥? 곁에서 삽에 묻은 흙을 모난돌로 긁어내며 잔일일망정 도와주던 병태가 물었다. 꼬치꼬치 묻긴 어째 묻냐? 네가 후날 멜레라도 하겠다는게냐? 이 말(마을) 당장 물에 잠길건데… 하면서도 조막령감은 오늘의 제주(祭主)인 수근에게는 이장절차를 소상하게 계수(继受)해 주었다. 유세차(维岁次) 감소고우(敢昭告于)… 그 축문이 무너 뜻인고 하니 오늘 뫼를 열어 옮겨 갈게니 토지신 아바이 좀 도와줍쏘사!하는 그런 말이지 수근은 밭은 기침소리에 뒤섞인 조막령감의 민속특강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우로 쏟아지는 령감의지청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뼈들을 열심히 줏고있었다. 호미로 긁고 비질을 하고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유골에 묻은 흙과 달라붙는 벌레들을 제거하고 뼈조각들을 퍼즐이라도 맞추듯 빠치지않고 맞추었다. 이장 하재코(하지않고) 불에 태워 날릴게면 뻬를 한데 막 모아놔도 일(상관)없다. 다시 매장을 하게꺼든 손가락뻬 발가락뻬 한 도막이래두 섞지말구 순서있게 맞춰야지. 뿌서졌거나 토막이 난 뻬는 흩어지지 않게스리 가는 낭기 가지에 실로 묶어둬야고… 조막령감이 그렇게 말했지만 수근은 뼈 한조각 흘릴세라 낱낱이 주어 맞추어놓았다. 뼈를 들어내는 수근의 손이 저으기 떨렸다. 하나씩 들어낼 때마다 흙바닥에 숨 죽여있던 오래된 먼지와 냄새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하나같이 해빛을 싣고 바람에 실려 가벼운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그것은 선친들이 흘린 삶의 비늘이였고 숨결이였다. 하긴 그렇키도 하다. 세상 어데없는 길지를 골라 왕릉 부럽잖케 꾸메(며)본들 어쩌겠노? 썩어 문드러진 묌이 이승에 구불러 댕기는 개똥보다 못하이 다시 생각해 봄(보면) 후날 이러케 멜레고 뭐고 하누라 애 먹지 말고 뻬를 싹 태워서 날레(려) 보내는것도 옳타. 뫼짜리 만들어 논들 또 어쩌겠냐. 선산을 모시긴 고사하고(커녕) 싹 다 달아나 버려 한식이나 추석이 돼도 흙 덮어줄 사람, 풀 베줄 사람도 없는데. 앙가슴에 걸린 기침을 삭이느라 쌔근거리며 말하는 조막령감의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다 줏고 이제 어머니가 남았다. 어마이 내 왔소꼬마, 수근이 인제사 왔소꼬마 중얼거리며 수근은 두개골을 두손에 받쳐들고 찬히 뜯어보았다. 마을 목재가공소에서 함부로 기계를 만지다가 사고로 요절한 형님때문에 수근이는 늦둥이로 이 세상에 올수 있었다. 하지만 늦자식을 본 기쁨도 잠시, 아버지도 가슴에 묻었던 자식을 잊지못한듯 인차 뒤따라 갔다. 시름시름 앓다가 병명도 모른채 어느 날 숨을 놓아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형님은 물론 아버지의 형상은 수근에게 있어서 어디에 흘렸던지 떠오르지않는 가족사진앨범처럼 흐릿한 기억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실때 슬픔보다는 죽은 아버지때문에 잘 차려진 제밥이 더 신나고 탐난 철부지 나이였던 수근이였다. 모두들은 형님보다도 수근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 스스로도 등그런 턱뼈 부근이 어머니의 턱선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다. 햇감자색의 얼굴에 얼굴모양도 감자처럼 둥글은 감자장을 잘 끓여주던 어머니, 한국으로 떠나는 그의 손을 잡고 꼭 떠나야만 하겠냐며 눈시울을 확 붉히던 어머니, 미처 제사에도 오지 못해 제주 한잔 올리지못한 불효를 떠올리니 속에서 왈칵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한낮의 열기를 받아 안은 두개골은 따듯했다. 두 손으로 보듬은 그 두개골에 낯을 붙이고 수근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어무이, 어무이… 철 모르고 울어대는 뻐꾹의 소리같이 울음소리가 느닷없었고 그 느닷없는 오열은 깊었다. 병태가 묘혈속으로 손을 뻗쳐 수근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놔 둬라, 실컷 울게 놔 둬… 울고나면 명치끝에 박혔던 어열이 쑥 빠져 시원할게다. 그렇게 말하는 조막령감의 목소리도 축축히 젖어있다. 령감이 백태가 낀 눈동자를 조막손으로 훔치더니 간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로회한 안면근을 실룩거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제 오늘 성튼 몸이 북망산이 웬 말이오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초록같은 우리 인생 장생불사를 어이하리 새빠지게 일만하다 그냥 가니 너무 섧네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우리부모 날 낳고서 애간장을 녹였는데 천지신명 몰라보고 부모은공 내 몰랐네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가도가도 끝도 없네 한이 없네 인생살이 너도가고 나도 가고 저승에서 반기세나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여가는 오래된 김치처럼 삭아 있었다. 느지럭 느지럭한 소리가 여름 새벽 달팽이 기여가듯 하면서 나오다가 후렴구에 가서는 소(沼)를 만난 폭포처럼 빨라진다, 시름 한숨과 설음이 한 움큼 담긴 상여가는 수근의 울음과 함께 했다. 내 어릴적에 말(마을)서 죽은 사람 상디(상여) 나갈때 하던 소리(곡)인데 원래는 이 보다 더 길다. 오랜만에 할라이(려니) 가사가 당최 기억이 나질 않네. 령감이 이 하나 없는 합죽한 입을 벌리며 처량하게 웃었다. 노래의 울림에 붙들려있던 수근은 눈물을 닦고 묘혈에서 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골은 한지나 삼베가 아닐망정  신문지 넉장우에 나란히, 고히 모셔졌다.     목요일: 명태포 그리고 사랑   병태가 가물가물 알려준 회사는 시가지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명태포를 만드는 회사라고 했다. 이름은 유한회사라고 달았지만 실은 페교된 학교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철제대문우에 떠인 간판이 제법 컸다. 제품의 자호와 가공소의 전화번호가 아이들 머리통보다 더 커다랗게 씌여져있다. 회사의 경기는 그런대로 괜찮은듯 했다. 마당에는 제품 운수용으로 쓰이는듯한,차체에 제품 자호를 새긴 봉고차가 주차되여 있고 건물벽에는 제품의 자호가 새겨진 포장박스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는 술안주로 명태포가 류행이였다. 생맥주에 곁들이면 그 맛이 일품이였다. 옛적에는 골목길의 작은 잡화점들에서 생맥주와 명태포를 곁들어 팔았는데 그 맛이 지금까지 전해내려와 다방, 차집, 까페, 지어 레스토랑에서 까지도 아직도 명태포는 맥주안주 일순위로 나가고 있다. 그래서 명태포 가공소들의 운영경기가 좋았다. 한국에서는 왠지 명태로 국을 끓여먹지 포를 뜨는 경우가 적었다. 그래서 주말에 간혹 한잔으로 일독을 풀때면 고향의 명태포생각이 간절해지곤했다. 그 수요를 헤아려 가리봉동의 어느 연변에서 온 사람이 차린 식당에서 명태포를 들여다 팔고 있다지만 그곳까지 찾아가 비싼쪽으로 찾아 먹을 게제가 못되여 그동안 고향의 맛을 잊고 살아온 수근이였다. 통증이 호주머니속 이물질처럼 그냥 의식되는 옆구리를 지긋이 누르고 수근은 이곳까지 찾아왔다.  고향에서만 볼수있는 고약딱지 “호골고”를 옆구리에 붙혔다. 애초에 한국으로 보따리장사를 나갔던 사람들은 우환청심환이며 “호골고”따위를 들고 나갔었다. 하지만 이런 약은 지금 출국뿐만아니라 시중에서도 판매가 금지되여있었다. 병태가 집구석에 고히 감추어두었던 그렇게 효험있는 고약을 찾아내 붙여 주었지만 통증은 막을수 없었다. 아마 뼈를 다친것 같으니 한번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 보라고 병태가 권했다. 하지만 수근은 그럴 기분이 없었고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저 운나쁘게 당한 자신을 원망할뿐이였다. 한국에서 일하다 다쳐도 웬만한 상처는 견디며 악착같이 일해 온 그 관습이 못 견딜 아픔을 견디게 해주고있었다. 마치 듬성듬성한 징검다리를 건너듯 수근은 조심스럽게 회사마당으로 들어섰다. 가공소라고 패말이 달린 곳에서 인기척이 났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유리창너머로 들여다본 가공소안의 풍경은 분주했다. 작업대에 마주앉아 수십명의 녀공들이 마른 명태의 대가리며 지느러미며 꼬리들을 가위로 자르고 비닐 포장지에 담고 있다. 머리에 위생모자를 얹고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팔에 토시를 두른채 가위며 손칼로 명태의 몸퉁이를 분리하는 녀공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쭈볏거리다가 용기를 내여 가공소의 문을 노크했다. 노크소리가 낮았던지 동정이 없다. 다시 한번 힘주어 노크를 했다. 이번에야 들었던지 녀공 하나가 나왔다. 혹시 여기 명월이라고 있습니까? 과수마을에서 온… 그말에 일본새대로 나왔던 녀자가 수근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스크속 녀자의 안면 근육이 얇게 일그러졌다. 녀자가 휘청거리는듯 벽에 어깨를 기대며 섰다. 다가오는 정오의 해빛을 수직으로 받아서였던지 녀자는 몹시 지친듯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다듬다가 만 마른 명태가 그대로 쥐여져 있었다. 야윈 몸체에 비해 손마디가 부은 듯 굵어보였다. 녀자가 위생모자를 쓴 이마 아래로 야생초처럼 듬성듬성 흘러내린 잔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피로에 쌍꺼풀 진듯한 눈우로 순간에 흘러 넘치는 눈물을 수근은 놀랍게 지켜보았다. 귀바퀴의 연골을 타고 흘러 내린 머리를 헤치며 녀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수근의 입으로 헛바람같은 비명이 새여나왔다. 눈앞에 선 녀공이 다름아닌 수근이가 찾고저하는 명월이, 바로 그의 전처 명월이였다. 꼭 11년만에 보는 명월이는 보름달같던 어제의 얼굴을 잃고 있었다. 사위인 초승달같이 뺨이 훌쩍 패였고 풍만하던 몸매의 곡선도 허물어져 보였다. 더우기 푹꺼지고 언저리가 거뭇해진 우묵눈이 그 어떤 고충을 보여주는듯 했다. 명월은 아무말도 없이 우묵눈을 들어 수근이를 쳐다만 보았다. 눈동자는 깊었다. 그것은 마른 우물처럼 한없이 텅 비여 보였다. 녀자의 말없는 입술이 움찔움찔 울음을 품고있었다. 그 눈길의 고문이 두려워 수근이는 다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아들애를 한번 보고싶다고 했다. 혀아래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욱이, 우리 욱이를 한번만 보고싶어서… 순간 녀자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솟아올랐고 손이 수근이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뭐? 욱이? 그 드센 손길에 수근은 볼을 감싼채 어정쩡해 있었다. 명태로 후려갈긴지라 수근의 뺨에 벌거죽죽한 얼룩이 지나갔다. 명월의 안면이 우그러지더기 급기야 울음이 터져나왔다. 명월이는 무너지듯 그자리에 쭈그리고 앉더니 두팔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톱질하듯 어깨를 들썩이며서럽게 서럽게 울었다. 서러운 울음에 한마디만 잘라내 복창하싶이 담아냈다. 당신이 욱이를 볼 면목이 있어? 당신이 욱이를 볼 면목이 있냐고, 당신이… 깊은 오열이였다. 그 오열이 너무 깊어서 수근은 그녀를 달래지도 못했다 울음소리에 녀공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일부는 명월이를 달래고 일부는 수근이를 에워쌌다. 누굽니까? 당신? 녀공들이 세괃게 따져 물었다. 불량배 보듯한 수십쌍의 눈길들이 수근의 전신을 더듬었다. 그녀들의 눈길에 어려있는 적의에 수근은 어쩔바를 몰라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밝힐지 몰라 땀을 흘렸다. 내가 저 울고있는 녀자의 전남편이요.하고 밝히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이때 녀공들의 틈새를 비집고 남정네 하나가 나왔다. 됐쏘. 쭝우(中午) 다 됐쏘, 모두 들가서 밥이 먹쏘. 거쿨진 몸매에 목소리가 우렁찬, 매우 적극적인 인상을 한 그 남자의 말에 모두가 수근이를 에워쌌던 울바자를 풀었다. 녀공들의 부축임을 받으며 명월이도 가공소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는 그녀의 어깨가 아직도 딸국질하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 여기 책임이 맡은 경리라 했쏘. 어째 밍웨(明月) 찾았쏘? 밍웨 찾아 무슨 일이 있어 했쏘? 웃자란 보리밭처럼 무성한 구레나룻 사이에서 내비치는 치아가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한족남자는 조선말을 제법 구사하고 있었다. 수근은 뭐라고 운두를 뗄지 여전히 머뭇거렸다. 옷깃을 매만지며 머뭇거리는데 호주머니속 담배가 만지워 졌다. 담배를 꺼내 경리라는 그 사람에게 권했다. 남자가 머리를 젓더니 호주머니에서 자기 담배를 꺼냈다. 벌건 포장지의 담배갑에서 한대 뽑아 수근에게 권했다. 수근이 그 담배를 받아 들었다. 쩔꺽하고 라이터가 코앞에 다가왔다. 불을 붙여 몇모금 련이어 빨았다. 그러다 독한 담배연기에 수근이 밭은 기침을 토해냈다. 두 사람은 봉고차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유난히도 거쿨진 몸매를 한 사내는 용건이 뭐냐고 자꾸 따져 물었고 하필이면 이 한족사람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수근은 허둥거렸다. 자신이 뱉어낸 담배연기가 허공에서 묽어지고 희박해지더니 정오의 해살속으로 사라지는것을 수근은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 십년세월 허위단심 헤쳐온 연무같이 앞길이 보이지않던 나날들은 수근에게는 다시 떠올리기에도 힘든 시간이였다. 애초에는 안해 명월이가 먼저 가짜결혼으로 출국하기로 했다. 지금보다는 더 광분에 넘쳐, 출국이라는 좁은 소로에서 농약먹은 송사리떼처럼 몸부림쳤던 당시 가짜결혼을 빙자한 출국은 흔히 볼수있는 놀랄것 없는 풍경이였다. 그런데 리혼수속까지 하면서 감행했던 출국은 브로커에게 돈만 떼운채 무산되고 말았고 대신 크게 기대를 안했던 수근이 쪽이 먼저 그 어려운 출국의 겹대문을 열어젖혔다. 내라도 먼저 들어갈께 인차 따라오오. 하면서 먼저 나갔지만 안해는 또 한번의 출국시도에서 가짜 비자가 들통나 인천공항에서 발목 묶였고 그렇게 문전에도 못가 닿고 여러번의 축객령을 받고나니 종시 출국의 대문을 열어젖히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근이는 수근이 대로 한국에서의 고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막상 서울땅을 밟고나면 무릎아래 지페장이 지천으로 널려있으려니 했지만 막상 무릎팍만 멍들고 깨졌을뿐 그들의 앞길에는 가시밭길만이 펼쳐져 있었다. 나도 그렇게 무지개 꽃밭만은 아니였다오! 아까 명월이의 울음섞인 타매에 이렇게 목울대를 타고 넘어오는 말을 수근은 꿀꺽 삼켰었다. 친지들 눈에 수근은 이미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왜곡되여 있었다. 그들은 수근이를 마치 비극의 원흉이기나 한듯이 끔찍하게 바라보고있었다. 서울에서의 나날은 수근에게서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두 얼굴의 시간대였다. 11 년 여를 보낸 꽉 막혀 있던 세월. 춥고 배고프고, 고달팠던 극한의 나날들이여다. 애초 일을 시작했을무렵에는 고된 일은 그런대로 견딜수 있었지만 참기 어려운건 동족지간에도 꺼리낌없이 행해지는 몰리해와 멸시였다. 공사장에서 사장님은 물론 다같이 노가다에 혹사하는 같은 직종일지라도 한국이들은 고국을 찾아 허위단심 찾아온 그들에게 “똥포”놈들이라 폭언을 퍼부었다. 마흔살 되도록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온갖 욕설을 삼태기로 퍼부으면서도 사장님은 나의 욕이 니들 시골닭들에게는 인생에서 비타민이 될거야!라고 비죽거리며 말했다. 그 비굴과 모멸의 “비타민”을 매일처럼 삼키며 오로지 고향에 남겨둔 가족을 위해 일했다. 불도가니속에서 세멘트포대를 숙명처럼 짐져나르고 벽돌과 타일을 희망처럼 쌓고 붙혔다. 그러던 어느날, 십여층 높이에 결어 만든 비계우에서 스파이더맨처럼 매달려 타일을 붙이던 중국에서 온 로무자 둘이 추락사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비극이 일자“비타민”사장이 그날밤으로 잠적해 버렸다.  동포모임과 서울의 교회들에서 적극 나서 해결하려 했지만 시간만 끌다가 미해결, 결국은 그동안 손톱 벗겨지게 일해온 로임은 한강에 띄워보낸격이 되고 말았다. 몰지각한 한국 사장님들에 의해 로임체불은 그후로도 여러번 되풀이 되였다.   왜 유독 나만 바라고 번개치고 소낙비는 쏟아지냐! 개탄하며 수근은 술독에 자맥질해 들었다. 막판 뒤집기로 목돈 한번 뽑아볼양으로 여기저기서 꾸어대여 스크린 경마도박에 붙었다가 그만 감당못할 천문수자같은 빚에 깔렸다. 빚재촉을 피해 강원도 치악산자락에까지 숨어 들기도 했다. 그동안 알콜중독 기미를 보였고 교회에서 꾸리는 자선단체에서 하루이틀 연명하다가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슬리고 다시 일에 열심을 보인것도 겨우 몇해전, 그렇게 걸채이고, 넘어지고, 기고, 일어나기까지 십여년 세월이 경마장의 종자말처럼 눈깜짝 할사이에 눈앞에서 달려지나갔다. 밭문서, 집문서 들이대고 여기저기 꾸어서는 빚짐 내여 로무의 길을 열었던 집에서는 통화할때마다 빚에 졸려 울상이였지만 그 동안 수근은 어쩌면 땡전 한푼 집에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조금만 기다려! 일자리 바꿨는데 이번엔 자리 잘 잡은거 같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 하고 판에 박은 말만을 낡은 축음기처럼 되풀이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그 락언이 번마다 거짓말로 끝나버리곤 했다. 들들 볶던 소리는 나중에는 원망으로 번졌고 절규로 이어졌다. 매번 전화저쪽에서 찌르륵거리는 교신음에 섞여 터져나오는 안해의 목갈린 절규가 무서웠고 귀찮아져 나중에는 전화를 받지조차 않았다. 그러다 종내는 가짜 리혼이 진짜 리혼이 되여버렸다. 안해와 련계가 끊긴지 7년째 되던 해, 로무차로 한국에 나온 고향사람에게서 안해가 개가를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것이다. 비록 련계를 끊은건 그 자기쪽이였지만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수근은 자다가 찬물을 뒤집어 쓴 사람처럼 얼빠져 버렸다.  좌절과 렬패감같은것에 사로잡혀 포장마차를 찾았고 날이 새도록 알콜로 몸과 맘을 마취시켰다. 어쩌면 잡을 만한 지푸라기 한 오라기도 없이 끝 모를 절망의 물너울에서 허우적거렸던 나날들, 그 나날들을 누가 알아줄가! 그렇게 입밖에 내기조차 싫었던 그동안의 힘겨운 나날에 대해 수근은 처음보는 한족사내에게 낱낱이 털어놓았다. 하고싶지않은 이야기였지만 변명처럼 하고나니 외려 속이 후련했다. 수근의 말을 들어주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말도 없이 가공소로 들어갔다. 이어 다시 나온 그의 손에 고량주 한병과 명태포 두개가 쥐여져 있었다. 사내가 건네는 명태포를 받아들었다. 부욱 찍어 입에 넣었다. 구수했고 들척지근했다. 역시 고향의 음식은 설명으로는 불가한 그런 맛이 있었다. 사내가 유리컵에 술을 반쯤 부어 수근에게 권했다. 코생이 많이 했쏘. 수근은 그 반컵의 술을 단숨에 비웠다. 명태포를 안주로 수근은 연신 잔을 비웠다. 몇잔을 더 거치자 독한 술에 저릿하던 속이 가라앉고 포근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구레나룻을 한번 쓸어내리며 한족사내가 수근이를 찬히 지켜보았다. 내 한마디 말이 하까? 스스로 컵에 술을 부어 한모금 마시고나서 한족사내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당신들 정말이 꽈이(怪)하다 했쏘. 우리 중국말 속담에 “급하면 따뜻한 두부는 먹을수 없다”는 말이 있쏘. 당신들은 어째 누구나 다 그리 쪼우지(着急)해 했쏘? 뭐가 그리 쪼우지해서 밭이 뿌요(不要), 집이 뿌요, 애들이 뿌요, 푸무(父母) 뿌요하고  가뻐리고 해쏘? 써울(首尔)이다 르을번(日本)이다 가고 그리 했쏘. 돈이 잘 벌어오오 좋쏘. 돈이 좋긴 했쏘. 그런데 그렇게 돈이 마니 벌어쏘 그담엔 쩐머빤(怎么办)? 팡즈(房子) 메이라(沒了), 밭이 메이라, 로우퍼(老波) 메이라, 푸무 쓰(死)라, 위쓰왕퍼(鱼死网破) 그리 됐쏘 했는데. 우리 중국말 속담에  “새는 먹이에 죽고 사람은 돈에 죽는다”는 말이 있쏘. 요즘부터 산이 밭이 카이파(开发)하면서 보상이 많이 해주는데 조선족들이 눅거리해서 밭이 다 넘겨주구 이제 와서 땅 치며 후회해쏘. 후회 한들 소용없다 해쏘. 완라(晩了). 세상에는 후회약이라는거 없다 해쏘. 난 당신들이 “호로박에 무슨 약이 담갔는지(葫芦里装什么药)?” 부즈또(不知道)해쏘. 정말 부즈또 해쏘… 수근이는 술때문에 아닌 다른 갈증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어쩐지 할말이 몽땅 증발된것 같았다. 한족사내의 일장 훈화를 들으며 수근은 아무런 항변도 할수없는 자신을 의식했다. 그의 말처럼 스스로도 호로박에 무슨 약을 담그어 왔는지 담그려는지 알수 없을때가 있었다. 고된 로무에 혹사하는 와중에 자신도 시시때때 생각했던 문제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누구도 그에 명쾌한 확답을 줄수 없어 했다. 눈앞의 리익에만 근시안이 충혈되여 아예 답 같은것을 생각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아무말도 못하고 수근은 그저 명태포만 체념처럼 울근울근 씹어 댔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밍웨는 지금 헌씽푸(很幸福), 헌씽푸하니까 근심이 아니해도 됐쏘. 수근이 멍하니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런 수근의 눈길을 마주보며 사내가 말했고 그 입에서 튀여나온 말의 파편이 수근의 귀속을 아프게 관통했다. 밍웨는 지금 내 로우퍼(老波)니까! 머리속에서 하얀 새떼가 화르르 날개를 펴며 날아갔다. 잠간동안이나마 수근은 아득해질수 밖에 없었다. 금방 마신 소주의 취기가 그제서야 뭉게뭉게 올라왔다.   톱니바퀴처럼 세상은 여전히 이가 물려 돌아가는데 자신을 감고 도는 피대줄은 이미 제거되고 없었다. 왠지 아주 오래 전에 앓았던 치통처럼 불쑥 치밀어 오른 통증이 수근의 가슴을 훒었고 부지중 비명을 흘리며 수근은 고약딱지를 잔뜩 붙인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금요일: 스케트 보드   조붓한 수로를 비집는 물고기떼처럼 교문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밀려나왔다. 학교 문앞은 삽시에 시끌벅적해 졌다. 갑작스레 비좁아진 학교 앞길로 자동차들과 사람들이 곡예를 하듯 서로 비켜갔다. 교문을 나선 아이들은 곧장 학교 근처에 올망졸망 들어앉은 문방구에 들어가거나 김밥집, 운남 쌀국수집, 오징어 꼬치집으로 들어갔다. 더러는 핫도그나 오징어 꼬치, 붕어빵을 입에 물고 길거리에서 먹는 아이들도 있다. 교문곁에서 수근은 수위아저씨마냥 두눈을 지릅뜨고 많은 수효의 아이들을 낱낱이 헤아렸다. 수근은 지금 오전내내 아들애를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중간체조 시간에 아이를 잠간 만났었다. 아침 첫뻐스로 시가지로 나와 명태가공소의 한족경리가 일러준대로 학교를 찾았고 학교수위에게 애의 이름과 반급을 댔다. 수위가 안된다고 잡아뗐다. 한국에서 십여년만에 돌아와 아이를 찾는다고 간곡히 요청을 들었다. 그의 간청이 통했던지 수위는 지금은 수업중이니 기다리라고했다. 그렇게 두어시간 꼬박 기다려 중간체조시간이 되였다. 수위가 반급 선생에게 일렀고 반급 녀선생이 아이 하나를 렬을 지은 아이들속에서 점명해 내더니 교문쪽을 향해 어깨를 떠밀었다. 아이가 쭈볏거리며 다가왔다. 니가 욱이구나. 아이를 반기는 수근의 목소리가 마른 저수지처럼 갈라졌다. 누가 구태여 알려주지 않아도 단박에 가려볼수 있을만큼 아이는 수근을 판박이로 꼭 떼닮고 있었다. 반양머리에 얼굴 구멍새가 큼직큼직했다. 게다가 피부도 수근이를 닮아 옻칠을 한것처럼 검었다. 네살때 두고 떠난 녀석은 가을 맨드라미처럼 키도 훌쩍 자라 수근이의 머리높이를 넘었다. 턱아래 울대뼈가 도발적으로 도드라졌고 코밑도 제법 감실했다. 어쩌면 애비없이도 잘 자라준 아들이 고마웠고 한편 그동안 아비로서 빈자리를 보여준 자괴감으로 수근은 숙제못하고 선생앞에 불리워 나간 학생처럼 어깨가 숙어졌다.    안해의 이름은 달이고 아들의 이름은 욱(旭)이, 솟는 해였다. 하지만 그 달과 해의 궤적에 수근은 자신의 행보를 맞추지 못했다. 누구져? 애가 이마살을 모으며 물어왔다. 내가, 내가 니 애비다. 부끄러워 뱉을수도, 그렇다고 넘길수도 없는 수박씨의 딱딱한 감촉처럼  입안에 따글따글 굴러다니던 말을 수근은 한 옥타브 낮은 소리로 내뱉았다. 급기야 말까지 더듬으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을때 아이의 주먹이 자기 이마로 올라갔다. 어쩌면 제수체어도 수근이와 꼭 같았다. 아이는 이마를 자근자근 두드리며 휴일의 단맛을 깨뜨리며 함부로 남의 집 초인종을 울리고 낡은 신문 있소?하고 묻는 페품수거꾼을 보듯이 수근이를 쳐다보았다. 명월이가 집에 돌아가 얘기하지 않았던지 아이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예기치 않은 아버지의 등장이 놀라웠고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것인지하는 뜨악한 기색이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이마에 주먹을 얹은채 아무말도 못했다. 굳게 닫힌 입매로 인해 둘의 분위기는 어정쩡했다. 아이가 불현듯 몸을 휙 돌렸다. 체조해야죠. 체조시간인데… 아이는 한마디 뱉고는 체조대오를 향해 뛰여갔다. 중간체조가 끝났지만 아이는 아버지앞에 나타나지않았다. 그래서 수근은 점심시간까지 꼬박 교문앞에서 기다린것이다. 아이들속에서도 훌쩍 큰 키로 맨드라미 홀씨처럼 홀홀히 떠가는 아이를 수근은 보았다. 수근이 다급히 달려가 애의 애의 손을 잡았다. 정오의 해볕이 머물러 반짝이던 애의 얼굴이 금세 흐려졌다. 왜요? 여기서 뭘하세요? 아직도 가지 않고? 애가 짜증을 드러내며 물었다. 널 기다렸다! 애가 또 왜요?고 물었다. 어쩌면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애의 어투는 감격어린 느낌표가 아니라 도전적인 물음표뿐이였다. 아들애를 만나면 하고픈, 생각해둔 말이 많았지만 막상에 애가 반문하자 순간에 잊어져 그저 점심이라도 맛있는 쪽으로 사주고 싶다고 했다. 나 친구들과 먹을건데요. 아들은 한켠에서 기다리고있는 애들을 턱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말을 뱉기와 바쁘게 몸을 돌리는 아들의 손을 수근이 다시 한번 잡았다. 애가 손을 뿌리쳤다. 그 뿌리침이 생각보다 드세여 수근은 잠간동안 멍해졌다. 애의 거부는 드세였고 그 눈에서 적의같은것이 번쩍이는것을 수근은 놀라웁게 볼수 있었다. 손을 빼려고 몸을 틀려는 애의 손을 수근이가 부득부득 잡았다. 그 무슨 몸싸움이라도 하듯 빨판처럼 잡은 그 손을 잡아떼던 애가 몸부림을 멈추었다. 막무가내라는듯 한 표정이 애의 볼에 머물렀다. 입술을 욱신거리며 씹어대던 애가 물음 하나 꺼내들었다. 점심은 됐고… 나 뭘 하나 사줄수 있어요? 그말이 수근에게는 복음처럼 들렸다. 수근이 바짝 마른 입술을 벌려 웃으며 말했다. 그래그래 사줄게! 하나가 아니라 열개라도 말해봐. 사고픈게 뭔데 아들애가 학교앞 광장에서 놀고있는 애들쪽을 가리켰다. 챙 모자에 통 넓은 바지 차림의 애들 몇몇이 로라스케이트인지 발구인지 같은것을 밟고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애들은 얼음강판을 지치듯 날렵하게 맴을 돌거나 비상하는 새처럼 훌쩍 몸을 날리며 반공중에 뜨기도 했다. 나도 저런거 하나 사줘요. 스케트 보드(滑板)요. 학교부근에 대형체육용품전문점도 있었다. 애의 뒤를 묻어 그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애는 단박에 스케트 보드 매장으로 다가갔다. 요즘 애들중에서 스케트 보드놀이가 가장 류행이라고했다. 좀 위험해 보이는데… 수근이가 매장의 광고판에서 하늘향해 날고 있는 진짜 사람만한 크기의 스케트보드맨을 보면서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애는 듣는둥 마는둥 온통 스케트 보드에 정신 팔려 있었다. 요즘 이런거 류행인데 부모가 한국 간 애들은 사고 못 간 애들은 못사요. 이거 꽤 비싸거든요. 애가 동문서답을 했다. 수근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안 사줄래요? 아니 뭐 그런뜻이 아니고… 수근은 급히 지갑을 꺼냈다. 애가 원하는것을 위해 아낌없이 지갑을 털었다. 출국한 부모가 한국서 돈 잘 부쳐주는 애들은 수입제 쪽으로 사고 그렇지 못한 애들은 그저 국산제를 사요. 아이가 여러가지 가격대의 보드를 들고 점원보다 더 상세하게 그 성능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그 알둥말둥한 보드에 대한 설명보다 출국한 부모와 출국하지 못한 부모로 등급이 지어지는 아이들의 판단방식에 놀라웠다. 가격이 저렴한 국산이 아니라 수입산쪽으로 사주었고 애가 만만치 않은 가격에 차마 입을 떼지못하는 보드 헬멧, 보드 의복, 장갑까지 세트로 큰 돈을 깨서 사주었다. 팔꿈치며 무릎보호대를 사는것도 잊지않았다. 아들애에게 난생 처음 뭔가 사주는 아버지였다. 수백,수천이 아니라 그동안 벌어온 뼈돈 모두를 통째로 달라고 손을 내밀어도 수근은 껌값 내주듯이 선뜻 아들애에게 내줄수 있을것 같았다. 아버지가 맞긴 맞나 보네요. 이렇게 사달라는 걸 다 사주는걸 보니. 그제야 아들녀석의 얼굴에 그늘이 벗겨져 있었지만 잇달아 내뱉는 말은 맹랑하기 그지없는것이였다.  나 니애비 맞다! 조심스레 그말을 뱉으면서 또다시 커다란 회한에 사로잡혀 수근은 아들애를 껴안으려 했다. 아들애가 몸을 훌쩍 피했다. 선물을 아름벌게 안고 체육용품전문점을 나서던 아들애의 입에서 또 한번 물음이 흘러나왔다. 왜 인제야 왔어요.? 어디서? 뭘 하다가요? 반양머리우에 헬멧을 얹은 애는 락하산을 타고 핼리곱터에서 날아내려 현상범 앞에 총부리를 겨눈 특공전사같은 모습으로 수근에게 따져 물었다. 아이는 보드에 몸을 실었다. 저만치 미끄러져 갔다가 카메라줌으로 끌어당긴듯 순식간에 다시 수근이 앞으로 돌아와 물었다. 엄마와는 왜 갈라졌죠? 둘 다 좋은 사람 같은데? 아들애는 아버지의 확답같은것을 기다리지 않고 물음을 던진듯 했다. 수근이가대답할 사이도 없이 나래 펼친 새처럼 두 팔 휘저으며 저만치 미끄러져 갔다. 새로 산 스케트 보드는 애의 발에 접착테프로 붙인듯 했다. 눈앞이 현란하도록 몇가지 묘기를 보이고나서 애는 학교앞 골목길로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욱아! 수근은 터져나오는 부름소리를 입안에서 갈무리했다. 아들애가 련속 던진 몇개의 물음덩이가 돌팔매처럼 그의 신상 곳곳을 강타했다. 그리고 그 물음들에 신빙성있는 확답을 주지못하는 자신이 놀라웠고 스스로 야속하기까지 했다. 가슴 한복판으로 쏴르르르, 한 줄기 찬 바람이 소리를 내며 스쳐간다. 서울의 어느 재한조선족 모임이 꾸리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고향의 이장통지뉴스를 보고 수근은귀향을 생각했다. 여태껏 고향을 잊고있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왠지 출처불명의 다금침이 수근이를 흔들어댔다. 망설임은 드디여 결심으로 굳어지고 일종의 의무감으로 번졌다. 그래서 강산도 한번 돌아눕는다는 10여년만에 잊고있던 고향으로 왔다. 하지만 고향이란 가슴에 품고있을때는 따뜻하지만 실제 대하는 순간 그 온기가 식어갔다. 그 온도는 시간의 길이와 정비례하나 싶었다. 더불어 살과 웃음과 땀을 나눈 인물과 풍경들이 알량하고 뜨악하게 인멸되고 개조된것이 탓일가? 아니면 돈에만 매여 그 따뜻함을 잊고 찬피로 살아 온 무심함이 탓일가? 주먹을 이마에 올린채 수근은 학교앞에서 폭염에 달구어진 아스팔트길우에 당혹에 잠긴 모습으로 그렇게 서있었다.     토요일: 수장(水葬)   온 몸을 끌어당길듯 잠잠하게 하지만 두터운 몸짓으로 유영하는 저 푸른 강줄기, 예나 지금이나 고향의 그 강은 그곳에서 그렇게 흐르고있다. 고향산의 아래도리를 완만하게 감싸안으며 흐르는 강은 무심한 세월의 속내를 알아버린듯 무심하게 떠났다가 잠간 돌아온 사람에게도 젖은 몸을 오롯이 내맡긴채 무심한척 흐르고있다. 수근은 강녘의 너누룩한 돌바위를 마주하고 앉았다. 화장터에 가서 2차화장을 하련다면 인차 뼈들을 화장해 준다지만 이틀채 찾은 화장터는 천국행의 티켓을 먼저 끊은 망자들로 초만원이였다. 어쩌면 우리가 무심히 대했던 그렇게 많은 죽음에 대해 장의관 홀에 서서 수근은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아마 월요일쯤 돼야 순번이 차례질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래일 일요일이면 수근이가 돌아가야할 시간이다. 장의사에게 매달리며 사정이야기를 거듭했지만 무가내였다. 세멘트독이 오른 손바닥을 맞부비며 초조함에 몸을 떨던 수근은 드디여 하나의 용단을 내렸다. 그리고 출국을 하루 앞두고 고향의 강으로, 두만강가로 나온것이다. 우선 물을 끼얹어 너누룩한 바위를 깨끗이 닦았다. 이 며칠을 분신처럼 함께 했던 트렁크를 열었다. 뼈들을 꺼내 깨끗해진 바위우에 하나 하나 올려 놓았다. 뼈들은 은근히 깊어가는 오전나절의 해빛에 옥양목처럼 하얗게 빛났다. 그 뼈들을 한겻이나 지켜보다 수근은 손아귀에 품을만한 돌멩이 하나 골라들었다. 들숨 한번 긋고나서 수근은 돌멩이로 뼈들을 짓찧기 시작했다. 어떤 제물을 빻는 사람처럼 열심히 뼈들을 가루내였다. 강가에는 조화(弔花)라도 단듯 하얀 억새꽃들의 춤이 무성하다. 가끔 물새의 울음소리가 강가의 고요에 작은 구멍을 낼뿐 강가는 적연했다. 물새소리에는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면서 구슬피 두드리는 각별한 정조가 깃들어있다. 그 소리때문이였던지 수근은 당금 울음이 터질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에 통증을 느껴 왼손으로 하다보니 오전나절을 수근은 강의 흐름을 마주하고 있었다. 열심히 육탈된 뼈를 빻았고 축축한 슬픔을 널어 말렸다. 가루가 된 그 뼈들을 손아귀에 담았다. 한웅큼 모래나 자갈돌보다 묵직한, 허망한 질감이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그 뼈가루를 지켜보노라니 가슴이 각진 소금을 뿌린것 같이 따갑고 쓰라렸다. 쓰라림은 뼈를 다친 옆구리의 통증보다 더 진한 아픔으로 수근이의 전신을 휩쓸었다. 짜디짠 눈물을 촛농처럼 뜨겁게 흘리며 한 웅큼 가득 움켜쥔 손을 스르르 풀었다. 뼈의 조각들이 별찌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슬픔과 추억과 허무로 화석질이 된 덩어리들을 한 웅큼 한 웅큼 물에 흘려 보냈다. 물살에 휩쓸리는 뼈의 파편들은 직사하는 해볓을 받아 물속에서 조가비처럼 빛났다. 그 뼈들이, 빛쪼가리들이 물살에 빨려드는것을 수근은 낱낱이 지켜보았다. 수천, 수만개의 물비늘이 산란하게 시야를 어지럽히며 흘러가고있는 그 와중에도 수근의 눈길은 침점하면서 물과 한몸이 되는 뼈들의 마지막 길을 뒤쫓고 있다.    잊어버린것들, 잃어버린것들, 버림받은것들, 상처 받은것들, 용서를 바라는것들… 세상만사 모든것들이 저 강물처럼 흘러간다. 수근의 마음속에 응어리졌던것들이 강물의 흐름에 실려 뭉텅 뭉텅 흘러갔다. 옆구리를 잡고 수근은 몸을 일으켰다. 물새 한마리가 강가까지 나와 물에 부리를 박다말고 푸르르 갈대속으로 도망쳐갔다. 강의 흐름을 쫓던 눈길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시근시근한 눈을 씀벅거렸다. 하늘 모퉁이를 나풀나풀하게 장식한 하얀 깃털구름을 바람이 밀어내고 있었다. 구름은 비좁은 마을길을 빠져나가는 상여처럼 느릿느릿 떠가고 있었다. 며칠전 조막령감이 부르던 상여가가 생각났다. 사무치던 그 가사말이 또렷이 생각 나 수근은 나지막이 상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초록같은 우리 인생 장생불사를 어이하리 새빠지게 일만하다 그냥 가니 너무 섧네 우리부모 날 낳고서 애간장을 녹였는데 천지신명 몰라보고 부모은공 내 몰랐네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일요일: 뼈와 뼈끼리   공항 터미널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씨줄이 마르건만 오늘도 공항에는 여전히 고향을 뜨는 사람들로 초만원이다. 그들의 얼굴마다는 그 어떤 기대감, 불안감으로 혼효(混淆)되여 설레임의 파장이 홍조처럼 머물고 있었다. 수근이도 떠날 시간이 되였다. 그날 이장을 마치고 텅빈 묘혈을 내려다 보면서 수근은 이장하는것은 죽음을 수습하는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 두니 또 한번 떠나는 자신에 대해 용서가 되는듯 했다.  병태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불편한 몸으로 나오지 말라고 만류해도 이제 보고 언제 또 보려나 하면서 소경 매질하듯 후둘거리며 굳이 나왔다. 텅 빈 들판에 버려진 허수아비같은 몸으로 고향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가는것을 혼자서 지켜보았을 친구가 수근은 안쓰럽기만 했다. 수근은 맨 웃쪽 단추를 잃어버리고 실밥만 남아 깃이 벌어진 친구의 와이셔츠 앞섶을 자꾸만 여며주었다. 명월이 고깝게 생각하지 마라, 그래도 네 어머니의 병간수를 도맡아 했고 세상뜬 다음 장례도 명월이가 혼자 손으로 다 치렀다. 물론 욱이도 명월이 혼자 힘으로 키운거지. 궁여지책으로 한족남자에게 얹혔다만 잘 살고있으니 그나마 잘 된 일이 아니겠냐. 친구의 위안의 말에 오히려 수삽해 나는 기분을 주체할수 없어 수근은 말머리를 돌렸다 확장공사는 언제부터 시작하는감? 그 저수지… 기성 사실로 다가왔지만 이제 곧 물에 잠길 마을이 수근은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 물음에는 나는 이대로 또 떠난다만 넌 어쩔거니 하는 괘념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걱정이 가시지않은 눈길로 수근은 친구를 지켜보았다. 괜찮타, 우리집 논이 그대로 있어 개발이 시작되면 꽤 보상받을거니 그 돈으로 흥떵거리며 잘 살거다. 모른다 수근이 니보다 내가 더 잘 살지도. 그래 제발 잘 살아라. 친구야. 그러지뭐, 그 돈으로 좋은약도 쓰고 그래그래. 시내가까이 자그만 집도 한채 마련하고 그래그래 몽달귀신이 되기전 늦으막 이 몸이 처녀장가갈지도 모르지 그래그래. 세상물정 밝으신 우리 조막할배 모시고 오래오래 살거다 그래그래 두사람은 짛고 박고 말장난을 주고받았다. 서로 자꾸만 위로의 말을 갖다붙였지만 스스로 듣기에도 어딘가 시원치 않았다. 때지난 구닥다리 유모어같은 말에 서로가 객적은 웃음을 짓고말았다. 갑자기 병태의 핸드폰이 울며 두사람의 석연찮은 리별을 깨뜨렸다. 핸드폰을 받는 병태의 얼굴이 어두워 졌다. 핸드폰을 다급히 수근에게 넘기며 병태가 말했다. 어떡하니 수근아? 욱이가 크게 다쳤대. 골과병원의 병실에 아이는 링게를 꽂은채 누워 있었다. 목에 깁스를 하고 미동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다. 공항에서 헐레벌레 달려 온 수근이를 명월이가 놀란 눈길로 쳐다보았다. 수근이는 고향에 있는동안 련계를 위해 가공소 경리에게 남긴 병태의 전화로 아들애의 부상소식을 접한것이다. 수근은 병상으로 덮치듯 다가가 아이를 들여다 보았다. 링게를 맞으며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통증이 느껴지는듯 잠결에도 끙끙 신음소리를 냈다. 오늘이 떠나는 날 아니던가요? 아무말도 없었지만 침대가에 걸터앉은 명월이의 표정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어떻게 된거요. 어딜 다쳤는데? 명월은 말없이 엑스레이 필림과 처방지를 내밀었다. 목뼈와 갈비뼈에 골절상을 입었는데 목뼈에 금이 가고 갈비 석대가 골절되였다고 적혀 있었다. 타지말라는 보드인지 뭔지 하는거 기예 타다가 저렇게 된거죠. 명월이가 원망조로 말했다. 수근은 잠시나마 정신이 아득해 질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자기가 처음 사준 선물때문에 아이가 크게 락상(落伤)을 당한것이다. 아이를 마주한채 두 사람은 그렇게 침대를 사이두고 앉아 있었다. 명월이는무슨 말인가 하려다 입술을 달싹였다가 결국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각자 자신의 생각 속을 헤매는 표정이다. 견고한 침묵이 어색해 수근은 엑스레이 필림을 쳐들고 다시 들여다 보았다. 필림에는 앙상한 겨울나무와도 같은 뼈들이 목판화처럼 각인되여 있었다. 그 겨울나무사이로 명월의 얼굴이 보였다. 필림너머로 본 명월의 얼굴은 흑백으로 바래져 있었다. 수근은 새삼 색바랜 어제를 돌이켜 보았다. 그때는 가난했으되 얼마나 행복했던가. 서로를 껴안고 보듬으며 더 나은 래일을 깊이깊이 희구(希求)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 어제는 마치 감광제(感光剂)가 고루 발리지 않은 필림과도 같다. 어느 부분은 환히 빛나며 뚜렷이 떠오르고 어느 부분은 아주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날 지칫지칫 가공소를 나서면서 수근은 저도모르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그냥 그렇게 돌아나오기엔 무언가 설명 못할 미진함 같은것이 발목을 잡아채는 끈끈한 느낌때문이였다.    명월이가 마당에 나와있었다 수근이를 눈바램하는 명월이는 벽에 기대여 상체의 자세를 놓아버린 모습이였다. 그 모습은  슬픔같은 물컹거리는것들을 딛고 있는듯 휘청이여 보였다. 모든 파탄 나버린 관계들의 복원과 재가동은 이제 불가능했다. 이제는 과거형을 쓰게 된, 한 때라는 시간으로 한정지어야 하는 전처라는 관계에 새삼스런 서글픔이 느껴졌다. 어제는 함께 키워왔으나 이제는 너무도 멀리 사라져버린 꿈과 그것의 실현 불가능에 대한 인식때문에 수근은 갑작스레 고향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오래전에 떠나버린 고향을 다시 찾는다는것은 고향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또한 도전이였다. 어차피 그곳에 남겨놓은 막연한 시간과 심상들을 구체적으로 만나야하기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에 가 있든 고향의 비릿한 살 냄새가 그를 괴롭게 했다. 도무지 정이 다시  붙을것 같지 않던 가난한 고향은 그 냄새로 인해 때때로 그리웠다. 그래서 역마살을 달래듯 고향으로 돌아왔고 회귀성 어류처럼 그 옛날 자신이 걸었던 삶을 되짚어서 나가며 그 망각속 깊이에 묻었던 추억의 뼈를 기어이 파내여 뼈를 줏고 뼈를 나르고 뼈를 다시 영영 수장(水葬)했는지도 모른다.  명월의 가르마에 벌써 새치가 희끗희끗하다. 수근은 다만 지난한 삶의 마지막 고샅에 선 그녀에게 더 이상의 불행이 없기를 빌고 빌었다. 아이가 뒤척이더니 잠에서 깨였다. 몽롱한듯 수근이를 쳐다보던 아이가 비죽비죽 울기시작했다. 아파? 아이의 땀방울이 돋은 이마전을 쓸어주며 수근이가 물었다. 아이가 더욱 크게 울음소리를 냈다. 울면서 말했다. 다 당신때문이야. 당신때문… 수근이는 흠칫 몸을 떨었다. 깁스를 하여 미동도 할수 없는 몸이지만 아이의 얼굴표정만은 살아 있었다. 그 표정이 보여주는 아이의 원망은 깊었다. 그렇게 자식에게 미움을 주고 원망을 키운 자신의 어제가 통감되였다. 미안하다. 이 애비가 미안하다. 어눌하게, 그렇게 수근은 말했다. 이 일주일간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이 이 말이였다.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로는 설명이 모자랐지만 또 그말밖에 할말이 따로 없어 이 생애 다 해야할 말을 미리 당겨다 쓰듯 그 말만을 복창에 복창을 거듭했다. 미안하다미안하다미안하다미안하다…. 콧날이 왈칵 시큰해지며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뚤렁뚤렁 아이의 얼굴에 떨어져내렸다. 이장도 끝내 부모님의 육골을 고향의 강에 안치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아직도 뭔가 묘연하고 암담하기만 한 응어리가 발걸음을 자꾸 옥죄였는데 그 응어리가 바로 아이였음을 수근은 다시금 느낄수 있었다.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몸을 숙이자 가슴이 구겨진 은박지같이 조여 왔고 통증이 송곳처럼 옆구리를 쑤셨다.  아픔을 참으며 수근은 아이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옆구리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형언길없는 아픔이 수근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몸 한 귀퉁이가 이지러지는것 같은 통렬한 아픔이 전신을 휩쌌다. 하지만 놓칠세라 수근은 아이를 꼭 보듬어 안았다. 뼈아픈 사람들끼리 뼈 아픈 몸을 껴안고 뼈 아픈 울음을 울었다.   월요일: 상 실   비행기는 두시간만에 떠난지 11년이 되여 고향생각에 멀미하는 사람을 고향역에까지 실어다 주었다. 아직 스모그에 오염되지 않은 고향의 공기를 수근은 걸탐스레 들이마셨다. 공항에서 44선뻐스를 타고 장도뻐스역으로 향하던 수근은 생각을 고쳐 신문사역에서 내렸다. 허위단심 달려온 고향, 겨불내나는 가슴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던것이다. 바로 랭면이였다. 그저 복무청사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 하나, 알뜰한 상표가 없이도 이곳 사람들에게는 랭면이라는 대명사로 자리매김 된 그 청사의 랭면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복무청사 랭면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는 수근은 건너마을의 만월처럼 둥근 얼굴의 처녀와 첫 대면도 랭면집에서 가졌었다. 첫 대면에서 두 사람은 렴치를 내려놓고 국수그릇을 깡그리 비웠다. 어쩌면 식성도 맞았다. 아이를 배였을때 남들은 시쿤것이 먹고싶다했지만 그녀는 시원한 랭면이 먹고푸다고 했다. 그래서 무거운 배를 안고 뻐스를 타고 와서 곱배기로 먹었던 그들이였다.  한국으로 나가면서도 마지막 날 랭면을 먹었다. 이제 이렇게 맛나는 고향의 음식을 언제면 먹어보랴는 심정에서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면서부터 수근은 왠지 참을수 없는 공복을 느꼈다. 기내식을 먹었지만 왠지 소리치며 달려드는 공복감을 달랠수 없었다. 고향에 당금 닿게 된다는 달 뜬 상념에 고향의 음식이 못견디게 그리워 졌다. 타향에서 내내 마음의 공복을 키운 탓이리라. 고향으로 돌아와서 첫 일과를 무엇부터 시작할가 생각이 많았던 그는 이제야 행동반경을 구한듯 랭면집으로 찾아나선것이였다. 마치 길 잃은 강아지 밟아 온 자기 냄새를 맡듯 수근은 익숙한듯 낯설은 이 시가지를 기억으로 헤맸다. 트렁크를 끌면서 묻고 찾고한끝에 도심의 광장에까지 대여 왔다. 광장 동쪽켠에 오래 된 랭면집이 있었다. 광장에서 동녘을 향한 순간 수근의 입에서 헛비명이 새여나갔다. 수근은 망창한 기색으로 그 자리에 얼어 붙었다. 수근이가 찾고저 하는 랭면집이 보이지 않았다. 랭면집으로 이름높던 그 건물이 오간데 없었다. 마술사의 주술에 걸린듯 건물은 사라져 보이지않고 아픈 몸체의 내장에 생긴 공동(空洞)처럼 텅 빈 공터만이 그를 맞아주었다. 공터는 새로운 기초를 다지느라 성마른 기계들의 소음만이 무성할뿐이였다. 수근은 공터를 마주하고 얼음기둥처럼 그렇게 서버렸다…     “연변문학” 2013년 5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3    뼈아픈 몸으로 쓴 뼈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댓글:  조회:2654  추천:20  2014-10-23
​ . 수상소감 . ​ 뼈아픈 몸으로 쓴 뼈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 김혁   어제밤 상해에서 날아왔습니다. 중국작가협회에서 조직한 로신문학원 강습반에서 늦깍이로 공부하고있던차 수상소식을 접하고 밤도와 날아온것이였습니다. 공항터미널에는 늦은밤에도 돌아오는 사람들 그리고 떠나려는 사람들로 붐비였습니다. 꼭 마치 금번에 수상한 저의 소설속 고향을 찾아온 주인공의 경우와 같은 경상들이였습니다.   모든 작가들의 모든 작품에는 잊을수 없는 그 창작동기와 과정이 있겠지만 금번의 수상 소설은 유달리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태여났습니다. 지난해 봄, 수상한 문학후배를 축하해 술을 사주었다가 넘어져 갈비뼈 다섯대를 분질러 먹는 엄중한 락상(落傷)을 당했습니다. 뼈를 고정하기 위한 가죽조끼로 몸을 동이고 꼬박 두달 가까이 미동도 하지 못하고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와중에도 무엇보다 글을 쓸수 없다는 고통이 컸습니다. 처녀작을 발표해 30년 가까이 글밭을 경운해 오면서 어느 하루도 글을 그적거리지 않은 날이 없었던것 같네요. 이제는 내 생활의 골골샅샅에 체질화 된 그 창작행위를 할수 없다는 괴로움이 육신을 으깨는 아픔보다 더욱 컸습니다. 두달후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키게 되자 절박하게 노트북을 무릎우에 펼쳐들었고  그동안 누워서 뼈물러 왔던 이야기를 써내려갔습니다. 그 글이 바로 금번의 수상작인 “뼈”입니다. 지난 90년대 말부터 나는 “개인의 아픔이라는 유리파편우를 걷기보다는 대중의 아픔을 대변해 주는 그런 작가가 되여 달라” 한 원로작가의 당부에 깨도를 머금고 그동안 불운한 내 운명에 대해 기술해 왔던 작품들에서 탈피하여 우리 공동체의 아픔을 다루는 작품의 창작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조선족테마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그런 주제의 작품들을 수십편 창작해 왔습니다. 한결같이 민족의 생명과 령혼안에서 하나 된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면서 그런 글월들을 써내려  둔필을 부지런히 놀리며 땀과 눈물을 바쳐왔습니다. 금번의 수상작도 그 일환으로 써낸 작품중의 한 부입니다. 떠나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비여가는 둥지… 뼈를 다친 한 주인공의 육신의 아픔을 공동체 전반사회의 아픔으로 승화시키려 꾀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옆구리를 송곳끝처럼 쑤시는 간헐적인 아픔의 여운때문에 주인공의 아픔을 그나마 핍진하게 재현할수 있었던것같습니다. 오늘 이 영예의 자리에서 또 한분을 떠올리고자 합니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몸담그고있던 장하도씨입니다. 30년전 룡정에서 저와 함께 “보름회”라는 문학동아리에 가입하여 문학의 꿈을 키워왔던 친구입니다. 그동안 잠시 문학을 멀리했던 그는 지난해 부터 접었던 꿈을 펴겠다고 다시 필을 들었고 평론가를 꿈꾸며 처음으로 써낸  작품이 바로 저의 금번 수상작 “뼈”였습니다. 너무나 오랜만의 출현이라 그 평론을 보면서 저는 고향에서 함께 문학가를 꿈꾸었던 그이가 옳은가 반문할 지경이였습니다. 그이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술한잔이라도 마시려 찾았는데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문학에로의 출발을 결심했던 그는 암진단을 받았고 그렇게도 빨리 이승과의 인연을 놓아버렸습니다. 저의 수상작에 대한 평론작품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여 버렸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오늘의 영예를 갈라 드리며 고인의 명복을 삼가 빌어 봅니다.   문학이란 인간의 감성과 령혼이 얽혀 있는 정신세계입니다. 때문에 그 감성과 령혼을 노래하는 한편의 글에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과 력사적 진실이 함께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글 속에 있는 사회성과 력사성은 바로 그 시대의 고뇌와 애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인은 사회와 함께 할 때에야 비로서 그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좋은 문학은 시대를 증언하고 시대와 함께 영원히 살아 있게 됩니다. 그렇게 나온 글월이야 말로 작가 자신에게 자아 창조를 위한 영원한 기쁨을 주게 되며 그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문학의 장엄하고 아름다움 앞에서 갈채를 올리게 할수 있는것입니다. 모든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력사와 함께 문학으로서 기록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뜨겁고 치렬한 작가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이 시간과 공간을 뛰여 넘어 영원히 살아남을수 있는 작품을 써낼수 있습니다. 어느 한 석학은 작가의 정의에 대해 “고달픈 아름다움을 먹으면서 찬란한 은실을 뽑아내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내는 려정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뼈 아픈 육신의 고통을 감내하며 집필해 왔던 그 봄날의 엑스터시의 과정을 잊을수 없습니다. 그러한 고통의 파종과 관개가 있었기에 오늘 이 수확의 계절을 맞이 할수 있은것 같네요. 2005년에 이어 두번째로 “연변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습니다. 누구보다 힘들었던 이 십년간에도 한사코 필만은 놓지않았던 저의 문학의 궤적에 대한 진단이요, 치하라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군요. 값진 문학상을 내려주신 편집, 평심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래일이면 전 다시 떠나야 합니다. 세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서른세개의 지하철역을 지나야 다달을수 있는 로신문학원의 거처에는 49명의 소수민족작가들이 자신이 처한 민족의 운명에 대해 갈파하는 좋은 작품을 쓰려고 배우며 고심하고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민족작가라는 명운을 지닌 글쟁이로서 응당 민족을 위한 일에 필을 그루박아야하는줄로 압니다. 역마살처럼 오가는 인생이라지만 그 와중에 왜서 떠나고 왜서 돌아와야하는줄을 아는 “행자”의 길을 걷는다면 그 로정이 아무리 힘들고 거칠어도 값지고 행복한거겠지요. 그냥 필대를 휘젓는 짓시늉이 아닌 뼈를 깎는 장인의 노력을 글의 매 매 단락, 행간, 매 글자에 바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4년 10월 22일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2    리화동(梨花洞) 1937 댓글:  조회:3485  추천:36  2014-10-13
. 중편소설 .   리화동(梨花洞) 1937   김 혁   겨울강 강은 철판처럼 단단히 얼어붙어 있다. 헐벗은 강언덕에는 하늘 향해 메마른 가지를 뻗쳐든 돌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간밤 내린 눈이 앙상한 가지에 얹혀 꽃이라도 피운듯 하다. 조밀한 아침안개의 품에서 금방 벗어난 돌배나무를 강바람이 아츠러운 소리로 건드리며 지난다. 언덕배기 어스레한 배나무숲사이로 무언가 어슬렁 거리는것이 보인다. 언덕아래에서 후미진 곳에서도 무언가 어슬렁 거리며 나타난다. 들개다. 산에서 내리는 들개와 산에 오르려는 들개, 두패의 들개떼가 돌배나무가 있는 언덕에서 조우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십여마리는 실히 되여 보이는 개떼들은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돌처럼 경직돼 버린다.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발톱을 사린채 상대를 뚫어져라 쏘아 본다. 목덜미의 가시털을 몽당비처럼 세운다. 충혈된 눈깔을 호동그라니 치뜬다. 입귀를 한쪽으로 치켜올려 강렬한 렬육치(裂肉齿)를 드러내 보인다. 목구멍으로는 으르르~ 맹수의 울음을 끌어올려 이빨 사이로 뿜어낸다. 대치의 숨가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다 대치의 꼭지점에 다달은듯 팽팽한 기운을 찢으며 들개 하나가 반공중에 솟아 올랐고 그를 마주해 개때들이 일제히 솟아 올랐다. 허공에서 떨어짐과 함께 개들은 순간에 한데 섞였다. 으르릉, 깨갱 포효와 신음이 한데 섞여 강가는 악마구리 끓듯하다. 눈밭을 무대로 덮치고 뒹굴고 물고 뜯고 씹고 허비고 그야말로 한바탕의 혈전을 치른다. 저마다의 털들이 원색을 알아볼수 없게 흙과 피로 뒤범벅이 되여서야 싸움은 겨우 끝났다. 그누가 승자라 할것 없이 상처를 입은 개들이 혀를 빼물고 헐떡인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를 싸움 한번 거창하게 치르고나서 개떼들은 신음을 갈무리하며 언덕우로 오르고 언덕을 내린다.   얼어든 강의 복판에 아이들이 서있다. 과수원 돌배나무처럼 렬을 짓고 죽 늘어 서있는 아이들의 눈길은 일제히 강가의 언덕을 향해 몰부어져 있다. 퀭해진 눈길로 개떼들의 피터지는 싸움을 지켜본다. 경악으로 휑하니 벌린 입귀로 입김이 솥김처럼 무성하게 피여 오른다. “무섭땅!” 어지러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진 애 하나가 쭝얼거렸다. 한결 매운 강가의 매서운 추위보다는 눈앞에서 사투를 목도한 공포에 아이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상처를 핥던 개떼들이 언덕너머로, 강굽이로 사라져서야 애들은 다시 애초에 강을 찾았던 리유를 생각해 낸다. 이른 아침부터 밥술 떨어지기 바쁘게 팽이치기를 나온 개구장이들이다. “됐다. 이제 우리 팽이놀이하자” “맞다! 팽이놀이 하자” 방금전 본의 아니게 목도한 혈전의 공포에서 벗어나련듯 아이들은 극구 신나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필요이상의 환성을 지른다. 아침나절의 미지근한 겨울해빛에도 강은 은박지처럼 빛을 튕겨내고 있다. 그 박명(薄明)의 차거운 빛살우로 팽이가 돌아 간다. 박달나무로 만든 팽이는 얼음장을 파고들듯 무섭게 돌아간다. 평평한 머리의 중심을 오목하게 파고 몸체에 줄무늬를 낸 원뿔형의 팽이는 강이 비좁다하게 잘도 돌아 간다. 좌충우돌 하며 팽이를 후려치는 아이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강은 아이들이 지르는 투명한 고음으로 가득했다. 그 소리에 얼음장이 깨지기라도 할듯하다. 아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팽이채가 들려 있다.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의 나무가지를 다듬은 뒤 무명실을 꼬아서 달아주면 제법 그럴듯한 팽이채가 된다. 아이들의 몸과 숨소리와 피여오르는 입김이 한데 얽힌다. 팽이채의 끈과 끈이 서로 얽혔다. 확 잡아채도 끈은 끈끈이주걱풀처럼 단단히 얽혀 도무지 떨어지지를 않는다. 큰 개똥이와 작은 개똥의 팽이채가 얽혔다. “씨!” 작은 개똥이가 볼부어 하며 다시 한번 팽이채를 확 잡아챈다. 하지만 끈은 오래된 칡넝쿨처럼 단단히 얽혀 있다. 작은 개똥이는 벙어리 장갑을 벗어들고 얽힌 끈을 풀기 시작했다. 덩치가 더 커보이는 큰 개똥은 끈을 푸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러는 아이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하나는 하늘을, 하나는 땅을 본다. 추위에 코물이 벌창해져 엿가락처럼 줄줄 흘러내린다. “헛방 치지말구 팽이를 쳐라, 이 사팔뜨기” 작은 개똥이 한편 끈을 풀면서 한편 단단히 타이른다. “그래 헛방 치지말구 팽이를 쳐라, 이 사팔뜨기야” 다른 애들도 작은 개똥이와 합세하여 중구난방 떠들어 댄다. 동네북이 되여도 개이치 않고 큰 개똥이는 하하거리기만 한다. 후룩! 하고 요란하게 코를 치걷자 떨어질듯 위태롭던 코물이 굶은 걸신(乞神)의 입에 들어가는 국수발처럼 벌름한 코구멍으로 쑤욱 들어가 버린다. 작은 개똥이가 얼어드는 손가락을 호호 불어가며 겨우 끈을 풀어냈다.  “다시하자, 다시” 작은 개똥이 팽이채의 끈을 팽이 허리에 돌돌 감고는 팽이를 얼음우에 대였다.  팽이채를 옆으로 확 잡아채자 팽이가 총알처럼 튕겨 나가며 핑그르르 돌기 시작한다. 애들이 우루루 달려 들었다. 팽이가 도는 방향을 따라 무작정 때린다. 팽이를 따라 아이들이, 강이,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또 한번 끈과 끈이 얽혔다. 작은 개똥이의 팽이채에 얽힌 팽이채의 임자는 또 큰 개똥이다. “네 절로 풀어라” 작은 개똥이가 체증에 넘쳐 팽이채를 큰 개똥에게 내민다. 큰 개똥이 비실비실 웃기만 한다. 웃입술까지 흘러내린 코물을 핥으며 말한다. “모른다. 내는, 못 푼다 내는…” “저 사팔뜨기는 아무것두 모룬다, 셈도 열개까지 못 세는데” 이름은 같은 개똥이여서 키 차이를 보고 “큰 개똥”, “작은 개똥”이라 불리지만 막상 덩치 큰것이 작은것에 비해 굼뜨고 우통한 편이다. “내는 셀줄 안다, 셈…” 큰 개똥이 “빈대도 낯짝이 있다”는 양” 뿌루퉁해 우겼다. “그럼 어디 세봐라 열개까지. 내 그럼 저 팽이 널 주마” 팽이의 임자가 얄기죽거리며 말했다. 강판에서 빙그르르 잘도 돌아가는 팽이를 지켜보며 큰 개똥이 거위춤을 꿀꺽 삼켰다. 팽이의 유혹에 빠졌던지 큰 개똥이 얼어든 손을 꼽으며 셈을 세기 시작한다. “한나, 둘, 서, 야들, 아후, 열” 아이들이 일제히 푸하 웃음보를 터뜨렸다. “다 틀렸잖아. 다시 세봐 다시” “한나, 둘, 야들 열…” 애들의 웃음에 당황했던지 큰 개똥이의 셈세기는 점점 더 엉망이다. 작은 개똥이가 못말린다는듯 웃으며 장갑끝을 입으로 벗겨 물고 또 한번 힘들게 끈을 풀어 냈다. 그러나 이번에 작은 개똥이의 팽이채는 팽이를 후려치지 않았다. 짜증으로 가득한 작은 개똥이의 팽이채는 마파람으로 울며 큰 개똥의 볼을 향해 철썩 날아 들었다. 가뜩이나 터실터실한 큰 개똥의 볼에 채찍 자국이 입녘으로부터 귀전까지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죽 지나갔다. 후루룩 치걷어 올라가던 코물이 뚤렁 떨어져 내렸고 급기야 큰 개똥이 우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골안을 내리는 곰 울음같은 소리가 강안을 흔들었다. 그러건 말건 아이들은 어리석고 미련한 뒤틈바리를 내쳐둔채 저희들끼리만 어울려 팽이치기에 여념없다. 목놓아 울던 큰 개똥이가 옷소매로 코밑을 쓰윽 닦았다. 분에 못이겨 강똥 싸듯 끙끙 거리다던 큰 개똥이 엉큼엉큼 달려가 팽이채로 작은 개똥의 등짝을 철썩 후려갈겼다. 작은 개똥이 흠칫하며 돌아 섰다. 두 아이는 서로를 향해 팽이채를 휘둘렀다. 끈이 얽혀버리자 팽이채를 버리고 서로 붙안고 강바닥에 뒹굴었다. “죄꼬만 개또이 이겨라” “큰 개또이 져라” 팽이치기 보다 쌈박질이 더 신난듯 애들이 얼음판우에 뒹구는 두 애를 에워싸고 소리소리 지른다. 버려진 팽이가 그냥 돌아간다. 쌈박질 하는 애들이 싫은듯 돌고 돌아 강녘에 이른다. 돌고돌다 지친듯 왜틀비틀 하는 그 팽이를 느닷없는 신발하나가 사정없이 짓밟았다. 앞 코숭이가 뭉툭하고 위협적으로 빛나는 커다란 군화발이다.   우물가 잘그랑!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우물가를 흔들었다. 강파르게 얼어 든 우물가로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던 아낙이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 서슬에 물도 긷지못한채 물동이를  떨구어 깨고 만것이다. 뒹구는 똬리를 주어든 북산댁이 비명인지 욕설인지 분간 못할 욕을 체증과 함께 내퍼부었다.     “에궁, ‘아까운 고기국 쏟고 거기 덴다’더니 올 동삼에만 물똥이 벌써 몇개채 깨먹누” 오만상이 되여 엉덩이를 툭툭 털며 몸을 일으키는데 우물가를 지나는 아낙 하나가 보였다. 광대줄이라도 타는듯 둥싯둥싯 뒤똥거리며 걷는 그 아낙의 부른 배가 남산만하다. 해토머리 쯤이면 둘째를 출산하게 될 남산댁이다. 그 아낙을 지켜보는 북산댁의 메밀눈이 호동그랗게 커졌고 감파랗게 빛났다. “에궁 내 아침부터 어째 ‘배꼽에 옴이 붙나’했더니 어떤 밉상이를 보자고 그랬고나” 좁고 동그란 남산댁의 어깨가 흠칫했다. 허나 그것은 잠시, 남산댁은 자기를 향해 쏟아지는 야유를 들은척 마는척 여전히 늦은 보법으로 미끄러운 우물가를 조심조심 지나고 있다. 툭 불거진 광대뼈를 가진 북산댁의 야유가 광대뼈처럼 높다랗게 수위를 높혔다. “에궁 ‘눈 구멍에 식초가 들었나’ 눈 시려 못 보겠다. 퉤” 하지만 남산댁은 여전히 응답조차 없다. 터진 꽈리 보듯하며 매끈한 이마를 수긋하고 갈길을 간다. “에궁, 빤드럽기를 여시 저리 가라 할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는실난실 걷던 남산댁의 발걸음이 드디여 난딱 멈추었다. “뉘기냐? 뜨슨 밥 먹구 찬 소리만 골라 하는 년이?” 남산댁이 보얗게 눈을 흘겼다. 북산댁이 물동이 파편을 걷어찼다. “아침부터 물똥이 깨먹고 재수 없어 그런다 왜?” 남산댁이 닷발쯤 입을 빼물고 퉁퉁대는 북산댁을 흘려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꼭 저같이 생겨먹은 말만 하는구나. 물똥이를 걷어차다 못생긴 상통 다 깨겠네” “뭐 못 생긴 상통?” 북산댁의 얼굴이 온통 달구어진 철판처럼 달아올랐고 어조가 사금파리 긋듯 고음으로 삐여져 올랐다. “넌 대체 얼마나 잘 생긴 상통이게? 낯값하느라 남의 나그네를 야스락 야스락 꼬셔먹냐?” “누가 누굴 꼬셔?” 북산댁이 힝 하고 말처럼 웃었다. “에궁, 벽에도 귀가 있소. 지들이 한 짓거리 지들이 잘 알터지” 북산댁의 눈길이 두터운 털등거리를 밀고 불러오른 남산댁의 둥시런 배를 아래우로 훑었다. “그 속에 든것이 누구 씨 종자인지 알턱이 뭐야?” “아무리 터진 입이라구 함부로 놀리지 마라. 네 눈에는 지아비가 하늘처럼 뵈일지 모르지만 다른 아낙들 눈에는 그저 퉁소쟁이, 풍각쟁이에 지나지 않을뿐,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에궁, 되똑 쳐든 코대가 금강산 비로봉만큼이나 높구마이.” 북산댁은 그저 꽹가리 울듯한 높은 악청만을 무기로 삼는다. 남산댁이 야유조로 내뱉았다. “조신해야 할 상중(喪中)에 나덤벙이질 마라. 그렇게 분수를 모르니 온 마을서 천박둥이 신셀 면하지 못하지” “이런 썅 참아줬더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북산댁이 덫에 치인듯 울부짖었다. 몇달전에 남편을 잃은 북산댁이였다. 아래 마을 친지의 환갑잔치에 장끼인 대금 불어주러 갔던 남편이 밤늦도록 돌아오지않았다. 술 마시고 늦은 밤에 기어이 집으로 돌아가얀다며 과수원길에 들어섰다는 남편의 시신은 며칠후 배나무숲에서 발견되였다. 시신은 처참하게 찢겨 있었다. 어떤 맹수의 이빨과 발톱에 찢긴것 같다고 했다. 늙은 촌장과 김생원은 들개를 흉수로 지목했다. 마을 변두리에서 어슬렁거리던 들개떼가 날이 갈수록 점점 야수성을 보이고 있었던것이다. 울고싶은데 얼뺨 맞은 격으로 남산댁의 말에 정곡이 찔린 북산댁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북산댁이 오늘따라 집요하게 달려들자 그동안 북산댁의 뒤손가락질과 흠구덕에 시달려왔던 남산댁은 부른 몸이라는 체신도 잊고 판가리를 할양으로 북산댁을 향해 달려 들었다. 서로 얼굴에 침방울이 튀길 거리에서 얼굴을 딱 마주대고 두 아낙은 우물터가 떠나도록 입싸움을 해댔다. “됐소. 적당히들 하우. 꼭두 새벽부터 무슨 분탕질이우?” 이때 남정네의 석쉠한 목소리 하나가 싸움의 복판을 가로 질렀다. 박씨였다. 뒤짐지고 어디론가 곰바지런히 걸음을 옮기던 박씨가 아낙네들의 백열화되는 싸움을 보고 한마디 한것이다. “왜가리를 삶아먹나? 동네가 떠나겠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박씨네 이웃 김씨다. 우물가를 지나던 그 역시 싸움의 자초지종을 목격한것이다. 버럭 소리 한번 지르고 지나치려던 김씨가 한마디를 덧붙혔다. “앵무새들 곱새춤에 왜가리춤은 또 뭣이고? 구경났네 구경났어” “건 또 어느 장단에 붙혀 하는 말이우?” 박씨가 아니꼽게 물었다. “미친 굿판에 미친 장단이다 왜?” 김씨의 말에 뼈가 들었다. “어째 무작정 투정질이우? 간밤에 잠이라도 설쳤수?” “그래 이 나이에 아직도 잠투정이다. 오늘 제대로 투정 한번 해보자”  “어째 말이 짧다?” “내가 워낙 혀가 짧다. 혀짤배기다 왜?” 김씨가 별렀던 말을 덧붙혔다. “내 혀가 짧아 누구네 손 처럼 길지를 못하지. 남의 집 살림 파고드는 손처럼 ” “건 또 어느 장단이우? 또 그 돌배 타령이우?” 박씨가 체증기에 넘쳐 소리 질렀다. 김씨네와 박씨네는 집도 서로 이웃, 과수원도 서로 이웃해 있었다. 지난 가을 김씨네 밭의 돌배가 표나게 도적맞혔고 김씨는 그것이 박씨의 소행이라고 믿고 시시때때 따지고 든다. “나 박씨가 곁집 세간에 손 댈 정도로 그렇게 치졸스런 인간이 아니우.” “그래도 켕기고 꿀리는데가 있나보지. 꼬박꼬박 말대답 하는걸 보면” 변명을 이어대던 박씨가 울컥해나며 김씨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가던 길 곱사리 갈거지 왜 아침 부터 걸고들고 지랄이우? 사팔뜨기가 나불대니 두눈이 멀쩡한자가 병신취급당하는구먼.” “뭐라고?” 김씨가 급소를 찔린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김씨와 그의 아들애까지 모두 사팔눈을 가지고 있었던것이다. 코앞에 까지 다가온 손가락을 쳐던졌고 그 서슬에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번졌다. 두 사람은 엉겨붙어 치고박고 하였다. 아낙들의 비명이 우물가에서 터져 올랐다. 졸지에 아낙들의 입싸움이 남정들의 피튀는 몸싸움으로 바통을 넘겼다. “’시앗 싸움에 요강 장사’라더니 이건 또 뭐얘요?” 남산댁이 서로 멱살 잡고 치고박고하는 남정들을 뇌꼴쓰레 쏘아보며 낯꽃을 흐렸다. “에궁, 이 년이 끝까지 잘난척 하네. 오늘 어디 잘난 년과 못난년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 북산댁이 남산댁의 머리채를 끄잡았고 남산댁이 북산댁의 저고리 고름을 옴켜잡았다.   촌장의 집. 마을 사람들이 온돌이 비좁다하게 모여 있다. 며칠후면 꼭 백세 천수를 맞이하게 될 마을 어르신의 백세연을 어떻게 치를것인가? 토의 한번 해볼양으로 촌장이 불러 마을의 체면깨나 있다는 남정들이 모두 모인것이다. 그속에 눈두덩이가 퍼렇게 물들고 코구멍에 솜을 틀어 막은 박씨와 김씨도 보인다. 집안은 저마끔의 소견과 함께 뻐끔뻐금 피워대며 내뱉은 담배연기로 산자락의 운무처럼 자욱하다. 턱수염 한모숨이를 기른 김생원이 붓대를 고누잡고 주련을 쓰고 있다. 붓놀림에 따라 염소수염이 한드랑거린다. 모두가 말없이 현란한 붓놀림을 지켜보고있는데 쥐오줌 자국으로 얼룩덜룩 습기를 머금은 천정우에서 찍찍거리는 쥐들의 다툼 소리가 났다. 천장을 빤히 쳐다보다 또 한명의 생원이 느닷없이 시 한수 읊었다.   “이본무가의아옥(而本无家依我屋)               기의호내반천위 (旣依胡乃反穿为)   고지이역무장려 (固知而亦无长虑)   아옥전시이실의 (我屋颠时而失依)”   역시 김씨성을 가진 생원, 주련을 쓰고있는 김생원이 턱수염을 기르고 있다면 시구를 읊는 김생원은 팔자수염을 기르고있다. 턱수염 김생원이 뿔테 도수 안경을 걸고 있다면 팔자수염 김생원은 백동물부리 대통을 잡고 있다. “무슨 말이온지?” 촌장이 팔자수염 김생원을 보고 황공스러운 낯빛으로 물었다. “어흠” 건가래 한번 떼고나서 팔자수염 김생원이 시구의 뜻을 해석해 주었다.   “너는 집도 없어 내 집에 사는데  네가 사는 집에 구멍은 왜 뚫나. 너 정말이지 생각이 짧구나. 내 집 무너지면 너도 살 곳 없는데.”   “아” 사람들이 귀신경문읽듯 괴까다로운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았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김생원일세” 찬탄들이 자지러졌고 그 일매진 찬탄성에 어깨가 오른 팔자수염 김생원이 불도 없는 대통을 소리나게 뻑뻑 빨았다. 팔자수염을 비비꼬며 또 한번 “어흠” 하고 건가래를 뗐다. “어험” 이때 한쪽에서도 누군가 건가래 한번 요란하게 뗐다. 주련을 쓰고있던 턱수염 김생원이였다. “조서(嘲鼠), ‘쥐를 비웃다’의 한 구절이로구먼. 조선 영조때 권구라는 재상의 시였소.” 팔자수염 김생원의 미간에 내 천(川)자가 지어졌다. 자기의 시구에 하필이면 주석을 다는 턱수염 김생원이 팔자수염 김생원은 밉살머리스럽다. 턱수염 김생원이 쓴 글발을 지켜보는 팔자수염 김생원의 표정이 또 한번 심상치 않다. “틀렸네. 틀렸구랴” “백세수연(寿筵)”이라고 쓴 글발중의 “연” 자를 대통으로 그루박았다. “수연의 연자는 잔치 연(宴)자로 써야지.” 팔자수염 김생원이 그무슨 금맥이라도 짚어낸 사람의 표정으로 소리를 높혔다.  “’갈고리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한테 주련은 왜 맡기셨소?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데 그러다 마을 어르신의 백세연을 망치겠소. ” 턱수염 김생원이 코등까지 흘러내린 안경너머로 팔자수염 김생원을 쏘아 보았다. “어험!”하고 헛기침 한번 요란하게 했다. “엑끼 이 사람아, ‘시거든 떫지나 말든가’. 내가 잔치 연자를 몰라서 그렇게 쓴줄 아는가 여기서 수연의 연자는 잔치 연(宴)을 써도 되지만 댓자리 연(筵)자를 써도 되네.” 팔자수염 김생원이 얼른 말을 받았다. “좋은 날 (日), 집 면(宀)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녀식(女)들이 춤을 추는 잔치날이라고 해서 잔치 연(宴)일세 어흠!” “빈 수레 한번 요란하군. 대자리를 펴고 그 우에 음식을 차리지 않나. 그래서 자리 연(筵)을 쓴거지. 옛날부터 왕과 신하가 대자리우에 마주 앉아 나라일을 담론하던 자리라 하여 ‘연석 (筵席)’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는가 어험!” 턱수염 김생원은 잡고있는 붓자루를 허공에 마구 저으며 거오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지에 묻혀 사는 골샌님들이라도 고분고분한 성격들이 아니다. “고담웅변경사연(高谈雄辩惊四筵)이라 즉 ‘뛰여난 말솜씨가 사방에 대자리 깔고앉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네’라는 시구가 있네. 두보의 음중팔선가(饮中八仙歌)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거기에 나오는 자리 연(筵)이 아니던가 어험!” “시성 두보를 읊는다 그말이지. 그럼 두보와 쌍벽을 이루는 시선 태백님의 시가 있소. ‘춘야연(春夜宴) 도리원(桃李园)’에 나오는 춘야연의 그 ‘연(宴)’자가 아니던가 어흠!” “지지기일 부지기이(只知其一不知其二)라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르시누먼. 그 ‘춘야연 도리원’이라는 시에 바로 ‘개경연이좌화(开琼筵以坐花)’라 즉 ‘옥같은 자리를 열어서 꽃을 향해 앉고’라는 구절이 있소. 그에 나오는 연(筵)자가 아니던가 어험!” 턱수염 김생원이 붓자루를 저어대며 고담준언을 토하는 바람에 먹방울이 팔자수염 김생원의 얼굴에 튀였다. 그 먹방울을 훔친다는것이 팔자수염 김생원의 얼굴이 온통 비온뒤 마당에서 쥐 달아다닌 꼴이 되였다. 찍찍 천정우에서 쥐들의 다툼 소리가 났고 사람들속에서 킥킥 웃음이 새 여나갔다. “에라 이 쫌생원아” 바작바작 신경을 긁는 턱수염의 소리에 팔자수염이 문뜩 부끄러움이 치밀었던지 소반을 와락 뒤엎었다. 소반우에 놓았던 붓이며, 벼루며 먹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이런 선무당같은 쫄망구가 어디서 패악질이냐?” 짧고 빤 아래턱을 가린 턱수염을 파르르 떨던 김생원이 붓으로 팔자수염 김생원의 얼굴에 대고 장님 지팽이 휘두르듯 마구 저었다. 원체 먹자국이 튀였던 팔자수염 김생원의 얼굴이 이제는 지우다 만 광대의 분장처럼 얼럭덜럭했다. 팔자수염 김생원이 벼루를 들어 턱수염 김생원의 얼굴에 와락 끼얹었다. 먹물을 뒤집어 쓴 턱수염 김생원의 얼굴도 순간에 저승사자의 상통을 닮은꼴이다. “뭣하고 있는겁니까? 지금? 점잖은 사람들끼리” 촌장이 참다못해 버럭 소리 질렀다. “뭣들하고 있소 지금? 유식깨나 떨던 사람들이” 지난해 금방 자리를 낸 로촌장도 뒤질세라 소리를 높혔다. “어르신의 백수연은 우리 마을의 둘도 없는 경삽니다. 그런 경사를 두고 기꺼울망정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촌장이 당위(当为)를 과시하며 야발스러운 책상물림들을 향해 훈계의 말을 했다. “누구보다 앞서 기꺼워해 줄 사람들이 그러면 쓰겠소. 더구나 먹물깨나 드셨다는 분들이” 로촌장이 젊은 촌장의 말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젊은 촌장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자잘하게 구겨졌다. “았따, 형은 좀 가만있소. 남의 말 잘라 먹지 말고” 젊은 촌장이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로촌장이 아니꼬운듯 말했다. 사실 두 사람은 친 형제, 장형(长兄)과 말제(末弟)사이다. “왜 자리를 냈다고 이젠 성쌓고 남은 돌 취급이냐?” 로촌장이 섧은듯 젊은 촌장을 향해 어성을 높였다. “분주살 스럽소, 좀 헤적헤적 나부대지 마오.” “뭐? 나부댄다고? 그래 내가 틀린 말을 했냐?” “옳은 말이던 틀린 말이던 날을 가려 하오. 자리를 내고도 아직도 맘보는 파래서 사사건건 대사소사에 삐쳐드니 주책바가지라 남들이 웃소.” “뭐? 주책 바가지? 이놈이 날 아주 깨진 바가지 취급하는구나” 젊은 촌장의 야멸스러운 말에 로촌장이 본통이 터진듯 시근거렸다. “그래도 익은 밥 설은 밥 이 바가지에 담아 먹고 그 바가지덕에 이만큼 살아들왔잖아?” 젊은 촌장은 늙은 촌장의 푸념을 듣는척도 않고 한구들 널린 붓이며 벼루들을 챙겼다. 그러던 젊은 촌장의 손길이 후딱 멈추었다. 손바닥을 펴들고 들여다 보았다. 벼루가 금이 가 손바닥에 먹이 흥건히 묻어 들었던것이였다. 젊은 촌장이 손에 든 벼루를 바닥에 내쳤다. “에익 더러워 못해 먹겠네. 헌 벼루가 새 벼루를 치는구만” 야유가 담긴 그 말을 가려듣고 로촌장이 다시 화통이 터져 소리를 질렀다. “뭐라? 애송이놈 한테 자리를 내줬더니 네가 지금 제 형을 ‘말하는 허수아비, 밥먹는 장승 도깨비’ 취급을 하냐?” 분기탱천해 하는 로촌장이였지만 젊은 촌장의 염장질은 끝나지 않았다. “집안 두엄을 남들앞에서 들추지 마오. 냄새 나오.” 동생에게 자리를 내놓았지만 마을의 애경사(哀庆事)에서 여전히 촌장 행세를 하며 동생을 안중에도 넣지않던 형이였고 그런 형이 저으기 못마땅했던 동생이였다.  “아무리 동생이고 후임이라고 내가 손아귀에 쥐인 계란인양 굴리는대로 구를줄 알았소?” 젊은 촌장이 때라도 만난듯 심중을 와락 발설했다. 그만큼 형제사이의 시샘과 원망의 앙금이 깊었다. 마을의 지경을 다져 왔고 또 다지고 있는 신구 촌장이고 또한 형제간의 싸움이라 젊은 촌장의 무례하고 압핍(狎逼)한 거동에도 사람들은 아무말도 못했다. 뚱하니 그저 기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젊은 녀석이 에둘러서도 아니고 곧장 코앞에서 들이지르니 분기가 치받쳐 로촌장이 앙가슴을 줴지르기만 했다. 분김에 손에 잡히는 대로 나뒹구는 팔자수염 김생원의 대통을 쥐여 뿌렸다. 젊은 촌장이 어깨를 숙이자 대통이 곧추 박씨의 이마빡에 날아들었다. 박씨가 이마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데 김씨가 깨고소하니 웃었다. “눈먼 돌에 개구리 상통 깨눈구나.” “깨를 볶냐. 고소해죽는구나 이 자식이” 박씨가 쌤통이라는듯 키득거리고 있는 김씨의 머리통을 몽당 비자루를 쥐여들고 후려쳤다. 김씨가 대통을 잡아들고 맞섰다. 대통의 중등이 분질러 나갔고 몽당치마의 살이 죄다 빠져버렸다. 둘이는 다시 멱을 잡았다. 온돌이 좁다하게 뒹굴었다.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랬다고 뭣들하고 섰냐?” 늙은 촌장이 집안의 그릇이라도 깨질가 찬장쪽으로 밀리는 사람들을 밀쳐대며 젊은 촌장을 향해 또 한번 분통을 터뜨렸다. “말리려거든 형이 직접 말리시우. 두집의 과수분배는 형님이 맡아 하지 않았소.” 젊은 촌장이 상관없는 사람처럼 두 팔을 가새지르고 서서 코방구를 뀌였다. “불은 누가 놓고 이제와서 물은 누가 부으라고 해. 마을을 이꼴로 만든 사람이 누군데” 말리는 사람도 있었고 그 틈바구니에서 평소에 고까웠던 박씨나 김씨를 향해 슬그머니 발길질을 넣는 사람도 있었다. 천정에서 검붉은 먼지가 떨어져 내렸고 놀란 쥐떼들이 찍찍 거리며 천정이 무너질듯 달아 다녔다. 좁은 집안은 오해와 질시와 서로의 리익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복닥복닥 빚은 연기와 열기와 분진으로 매캐했다. 자지레한 사람들이 일구어내는 는지럭는지럭하는 열기가 사위스러웠다. 이때 무작스러운 발길에 사립문이 덜컹 떨어져 나갔다. 채찍처럼 후려치는 한기를 안고 한떼의 사람들이 집에 들이 닥쳤다. 거쿨진 몸퉁이를 가진 사람들이였다. 한결같이 누런 빛깔의 제복을 차려입고 장총을 꼬나들고 있다. 험악한 인상에 총대의 맨 끝에는 또 뾰죽한 창날을 서슬푸르게 세우고 있다. 집안이 좁다하게 마구발방 들뛰던 사람들이 순간 고자누룩해졌다. 움쑥한 눈을 휘등그레 뜨고 들어선 사람들을 퀭하니 바라보았다. 맨 앞장에서 군화를 신은 자가 흙투성이 된 발로 가마목에 뛰여 올랐다. 가증맞은 쪼막수염이 코밑에 붙어있는 자였다. 가증한 쪼막수염아래 입술이 매섭게 앙다물려 있다. 시푸르뎅뎅한 얼굴로 아웅다웅에 신들려 있는 사람들을 노려 본다. 지옥의 문지기처럼 쫙 찢어진 눈초리로 노려 본다.   과수원. 사람들은 총박죽에 어깨를 떠박질려 과수원 앞 공터에 모였다. 농한기면 돛자리 깔고 소주잔과 시시풍뎅한 소리와 홍소가 오가던 과수원 공터는 엄슬한 분위기로 때글때글 얼어 있다. 등등하게 차려입은 두꺼운 군복과 번뜩이는 칼날을 세워든 사병들은 대적이라도 만난듯 표정들이 굳어있다. 세워든 칼이 마치 맹수의 발톱처럼 날카롭고 쳐든 총구가 마치 맹수의 눈처럼 번뜩인다. 기죽은 사람들은 태덩이처럼 미동도 크게 못하고 추위속에 옹그리고있다. 모두들 숨을 꺽 죽이고 있는데 사람들의 뒤를 묻어 온 황둥개 한마리가 어쩐지 례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던지 컹컹 짖어 댔다. 위협적으로 빛나는 군화를 신은 쪼막수염이 또 한번 매눈처럼 찢어진 눈매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 눈이 먹이감을 보아내고 활강(滑降)하는 매의 눈처럼 살기에 반짝인다. 동공은 눈앞 사람들의 멱이라도 움켜 잡을듯이 또렷하고 팽팽하다. 쪼막수염이 식지를 까닥했다. “어이 통역관” 기장을 뗀 군모를 쓴 사람 하나가 구을듯이 그 앞에 대령했다. 목을 움츠리고 거듭 굴신하는데 벋짱다리인듯 한다리를 질질 끌고 있다. 쪼막수염이 뭐라 씨부렁이는 말을 귀바퀴에 손바닥 대고 토씨 하나 빠침없이 담는다. 기장을 뗀 군모를 쓴 벋짱다리가 사람들앞에 나섰다. 행주 비틀듯 목청 다 짜내여 소리소리 질렀다. 한 손은 허리에 한손은 허리춤에 달려 데룽거리고있는 군도자루에 얹은 쪼막수염을 두 손으로 받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이제부터 이지역을 관장하게 된 주둔군 731지대 이또 소좌님이시다.” 컹컹 한켠에서 황둥개가 짖었다. 쪼막수염이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하더니 입을 열었다. “언감 대일본제국에 불온한 마음을 품고있는 후테이 센징(不逞鲜人)들을 색출하려 임무를 받고 나섰다가 이 마을을 지나게 됐다.” 통역관이라 불리운 자가 번역하기 좋도록 쪼막수염은 한자 한자 끊어서 발음했다. 목소리가 리도(利刀)라도 휘두르는듯 날이 서있다. ”지금부터 당신들은 우리들의 행동에 공조해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주길 바란다.” 컹컹 개가 그냥 짖었다. “곱다랗게 공조하는 사람들에게는 포상할것이요, 거부하는 사람들은…” 쪼막수염이 말끝을 흐리더니 혁대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짖어대는 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땅! 되알진 총소리와 함께 개가 훌쩍 솟다가 피를 휘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총소리는 고막을 찢을듯 했다.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어미의 바지춤에 매달린 아이들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녀인들이 덴겁히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연기가 피여 오르는 권총을 꼬나든채 쪼막수염이 사람들을 째려보았다. “거부하는 사람들은 저 이느노꼬(개새끼)와 같은 꼴이 될것이다” 사람들은 황황한 눈길로 머리통이 묵사발이 되여 뒹구는 개를 곁눈질해보았다. “묻겠다. 부라끄(부락) 이름이 뭐더냐?” 벋짱다리 통역관이 사람들중에서 털 귀마개를 한 젊은 남자 한 사람 불러내여 마을 이름을 물었다. “마,마을 이,이,이름은 리리리리리이화아아아도,동임다” 귀마개를 한 남자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뭐라고?” “리리이이이이화도,도오옹” 킥, 맨앞에서 누군가 웃었다. 털모자도 없이 귀가 벌겋게 얼어든 나그네가 옷소매에 량손을 집어넣은채 참지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 사람 더듬뱅이요. 하필이면 더듬뱅일” 땅! 실소가 멈추기도전에 총성이 울었고 말더듬이가 푹 고꾸라졌다. 웃음을 흘리던 나그네가 경악한 나머지 불침에라도 찔린듯 펄쩍 뛰였다. 쪼막수염이 총구에서 연기가 몰몰 피여오르는 권총을 들고 다가왔다. 총아구리로 웃고섰던 나그네의 턱을 올리받쳤다. 총아구리가 따가워 나그네가 으으으 비명을 질렀다. 쪼막수염이 갱엿이라도 씹듯 질겅질겅거리며 말했다. “그럼 니가 말해봐 부라끄(부락) 메이쇼(명칭)가 뭔지” “리,리화동입니더” 이번에는 나그네가 말을 더듬었다. “사라니 기나사이(다시 말해봐)!” 쪼막수염이 감때 사납게 소리질렀다. “다시 말해봐 미친개 좆 떨듯 떨지말고” 곁에서 통역관이 가세해 소리질렀다. “리화동입니더” 나그네가 겨우 그 한마디를 뱉어내였고 말을 마무리함과 함께 땅 총소리가 울렸다. 옷소매에 량손을 집어넣은채 나그네가 넘어갔다. 말더듬이의 사체우에 덧놓이며 쓰러졌다. 끌려 온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눈알을 까집었다. 뜨물이라도 뜨스하게 덥혀먹여 키우던 개도 아까운데 이건 개처럼 사람도 함부로 마구 잡아죽이고있는것이다. 두렷한 공포가 거적을 확 씌우듯 덮쳐 들었다. 살을 에이는 한기보다 더 한 공포에 들리여 사람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쪼막수염이 통역관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통역관이 벋짱다리를 질질 끌고 다가가 귀전에 손바닥을 착 붙혔다. 쪼막수염이 씨나락 까는듯한 소리로 통역관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쑤근거렸다. 알았다는듯 머리를 연신 주억거리고나서 통역관이 우묵한 옴팡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몽툭한 손가락으로 사람들중에서 박씨를 지목해 냈다. “어이, 저 수염 텁수룩한 넘 나와바라” 다음에는 김씨를 짚었다. “저 텁수룩이도 나와” 두 사람을 마주 세웠다. 통역관이 물었다. “배꼽 뒤집어지게 밥 잔뜩 처 먹고 배꺼지라고 싸움질들이냐?” 옴팡눈을 희번득거리며 물었다. “왜 싸웠냐? 용건이 뭐냐?” 김씨가 때라도 만난듯 하소연을 터뜨렸다. “저 각다귀같은 놈이 우리 집 돌배를 훔쳤소” “아니올시다. 없는 일이우.” 박씨가 손 사래를 치며 급변명했다. 아침부터 있은 드잡이에 박씨의 오른쪽 앞니 귀퉁이가 부서져 나가 말이 샌다. “우리집 과수가 잘 되니 김씨가 샘이 나서 지어낸 말이우.” “그럼 그렇게 많은 돌배를 쥐라도 올라가 후렸단 말인가? 꼭 같게 쉰그루씩 나눈 배가 우린 그냥 쌀과 바꾸어 먹고도 모자란데 니는 무엇이 그리 흔해서 과실주까지 담궈 마시고 있잖나? 훔친게 분명하이.” “새 까먹은 소리 하지마우. 할아버지가 천식이 있어 아껴 먹던 배로 기관지에 좋다는 배 술을 담갔던것뿐이우. 그래 내가 언턱거리 잡힐 일이라도 한게 있수?” 두 사람이 다시 언성을 높혔다. 한 옥타브 두 옥타브 언성을 높여가며 자기의 생각들을 발괄하였다. 사실 박씨네 배는 김씨네 배를 분양받은것이였다. 남보다 먼저 과수농사를 시작한 김씨는 혼자서 그 많은 배밭을 다루어내기 버겁고 하니 이웃인 박씨더러 함께 하자고 들쑤셨다. 마침 그 전해에 여느때보다 배가 잘 열림을 보아온지라 박씨는 귀가 솔깃하여 김씨네 돌배나무의 상당수를 분양받았다. 원체 약삭빠른데다 부지런한 박씨라 이웃 김씨의 어깨너머로 배운 재배기술을 빨리도 익혔다. 그렇게 몇해후부터는 박씨네 과수원이 김씨네에 비해 더 반듯했고 같은 땅에서 과일도 어쩌면 더 많이 달렸다.  이에 자기가 원조라 배를 내밀던 김씨의 안색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더욱 그의 심술딱지를 자극한것은 현성에서 있은 농사장원표창회에서 먼저 시작한 그도 아닌 박씨가 과수부분 장원을 따낸것이다. 이는 김씨의 불타는 시샘에 불쏘시개를 덧놓았다. 그날부터 박씨를 향한 김씨의 강샘은 시작되였고 나중에는 의심벽에 까지 이르게 된것이였다. “배 고픈건 참아도 배 아픈건 못 참는” 성미가 습벽을 넘어 체질이 돼 버린 사람들의 모습은 이 마을에서 별로 희귀한 경상이 아니였다. “집에 ‘오노’가 있나?” 두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쪼막수염이 물었다. 생경하나마 조선말을 몇마디 씩 사이사이 끼워넣어 지껄인다. “’오노’라니요?” 두 사람이 어안이 벙벙해 졌다. “도끼 말이다. 도끼” 통역관이 설명했다. 김씨가 얼른 답했다. “물론 있읍죠” “가서 가져와라” 김씨가 털레털레 집으로 달려가 큼지막한 도끼를 들고 달려왔다. “과수가 어데 있는데?” 김씨가 통역관의 등뒤 언덕우를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지경을 표시하며 말했다. “저쪽이 박씨네 꺼, 이쪽이 우리 껍니다.” “기르!” 이또가 한마디 내 뱉았다. “네?” “찍어라” 통역관가 번역했다. 김씨가 되물었다. “네? 무엇을 찍는뎁쇼?” “배나무를 찍어 넘기란 말이야. 화근을 모조리 찍어버리면 이제 다툴 일 없게 되잖겠냐” 통역관이 시끄럽다는듯 말했다., 김씨의 입가에 얼핏 야릇한 미소가 얼비쳤다. “박씨네 과수를 모조리 찍어 넘기란 말입니껴? 쉰그루 몽땅 말입니껴?” 통역관이 피식 물찌똥같은 웃음을 웃었다. “왜 박씨네껄 찍어. 당신네 과수를 찍으란 말이야. 의심은 그쪽에서 시작되지 않았소. 이제 찍어서 불이나 한구들 뜨습게 때시오. 한겨울 불소시개로는 과람할거요.” 김씨의 얼굴이 납빛으로 물들었다. “어이구, 이게 웬 마른 벼락입니껴? 과수를 다 베넘기면 우린 무얼 먹고 살란 말입니껴?” 사병 하나가 총박죽으로 김씨의 잔등을 윽박질렀다. “하야꾸 (냉큼)” 박씨가 곁에서 들릴듯 말듯 모기소리로 한마디 했다. “자업자득이우” 이윽고 언덕우에서 도끼질 소리가 들려왔다. 김씨의 넋두리도 섞여 들려 왔다. “망했다. 망했어”     총창에 떠밀려 석대째 찍어 넘기고 나서 김씨가 더는 못하겠다고 나누웠다. “다 찍어넘기면 무얼 먹고 살란 말입니껴? 이제 그만 찍읍시다. 제발 제발 빕니다용.” 그런 김씨의 가슴패기를 향해 사병의 군화가 날아들었다. 빨리 찍으라고 총박죽으로 어깨를 윽박질렀다. 김씨가 다시 도끼를 집어 들었다. 터진 입가장이 실룩실룩 경련을 일으켰다. “이 배나무는 내 목숨과도 같은거여. 그런걸 찍으라니 차라리 내 목숨과 바꿔 볼테여” 증오의 광염이 푸들푸들 타오르는 눈길로 김씨가 도끼를 들고 사병을 향해 달려 들었다. 탕! 총소리가 울렸고 베인 과수나무처럼 김씨가 넘어갔다. 어깨에 총을 맞은 김씨는 눈밭에서 괴롭게 뒹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였고 발포한 사병이 장관의 눈치를 보았다. 쪼막수염이 다가가 온몸이 벌레처럼 꼬부라져 신음하고있는 김씨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스스로 저승길을 재촉하는구나” 이또가 혁대에서 권총을 빼내여 박씨의 머리통에 대고 쏘았다.   피 묻은 도끼가 이번에는 박씨의 손으로 넘어갔다. “기르(찍어라)!” 도끼를 받는 박씨의 손이 곱아들어 있었다. 덜렁. 제대로 받지 못해 도끼를 떨구어 버렸다. 추위때문이 아니였다. 김씨의 참화에 넋이 빠져버린 박씨였다. 하루가 멀다하게 드잡이를 하며 천하의 저주를 골라 퍼붓던 구인(仇人)이였지만 막상 눈앞에서 피를 물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처량맞기 그지없었다. 총을 든 사병이 박씨의 뱃구레를 발로 걷어 찼다. “모조리 찍어 넘겨! 꾸물거리다간 저 자식처럼 되고 말거다” 통역관이 위협조로 말했다. 도끼를 주으려 허리를 굽히던 박씨가 오금이 풀려 주르르 주저앉았다. 얼굴이 걸레처럼 구겨져 울부짖었다. “우리가 왜 요 모양 요 꼴이 되였수?” 박씨가 곱아든 손으로 도끼를 쥐여들었다. 굿소리에 들린 무당처럼 쟁기를 쥔 손이 춤추듯 덜덜 떨렸다. 홀연 천둥같이 고함지르며 박씨가 도끼등으로 자기 이마를 사정없이 올리 박았다. 피의 분수가 터져 올랐다. 이마빡이 온통 피칠갑이 되여 김씨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통역관이 대자로 넘어진 김씨를 들여다보았다. “나 원, 도끼로 제 발등 찍는다더니만 도끼로 제 이마를 까는 놈 첨 봤네”   다음에는 북산댁과 남산댁이 마주 섰다. 북산댁에게 호비운 남산댁의 하얀 볼에 붉은 빗금이 사납게 번져있다. 쪼막수염의 찢어진 눈이 흥미롭게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코밑 물집을 긁다가 생채기가 덧난 피딱지처럼 가증스러운 쪼막수염이 옴찔거린다. 마을 변두리로부터 마을어구에로 마을 어구에서 마을 복판까지 연줄로 이어지는 그 이악한 싸움의 내용들에 대해 금방 이 지역을 관장하게 된 이또는 알고싶어 했다. 알고싶었다. “저년이 어떤 년입네까? 여시같은 년, 천하 내숭 혼자 떠는 년입죠” 북산댁이 눈물코물 흘려가며 남산댁과 자기 남편이 눈 맞고 배맞은 사연을 양념 듬뿍 쳐가며 이야기 했다. 코앞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참화를 잠간 잊은듯 사람들 저마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북산댁과 남산댁의 싸움은 온 마을이 눈 돌리고 귀 기울이는 가십거리였다. 그것은 온 마을 남정들의 가슴을 할랑이게 만든 남산댁의 월등한 미모로부터 기인된것이였다. 어쩌면 거무튀튀한 돌같은 마을 녀자들중에서 그녀 혼자만이 물에 씻긴 조약돌처럼 해반드르르했다. 이 배꽃마을이 서서 그 이름에 걸맞게 그렇듯 배꽃처럼 화사한 녀자는 처음이였다. 북산댁은 그에 비하면 명함도 내놓지 못했다. 남산댁이 배꽃이라면 그녀는 감자꽃이라고나 할가? 아니 감자꽃도 아니고 그냥 우둘투둘 툽상스럽게 생긴 토스레 감자 그 자체였다. 게다가 남산댁은 남편도 잘 만났다. 그보다 몇살 손아래인 “아기 신랑” 남편은 골이 깊고 길이 외진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경성의 고등학부에 붙은 수재였다. 마을훈장의 자제로서 촌티나 빈티를 전혀 찾아볼수 없는 그 남편은 아직도 경성에서 학업에 매진하고있다. 방학때면 머리에 얹은 학모에서는 모표가 번쩍이고 웃저고리에서는 일매진 단추가 번쩍이는 교복을 차려입고 그야말로 금의환향으로 돌아오는 남편을 맞아 때맞추어 새물내 나는 색동 한복을 떨쳐입고 남산댁은 동구밖 우물가로 마중나가곤했다. 그때마다 남편의 손에서 트렁크를 받아드는 남산댁의 얼굴은 도화색으로 화사하게 물들었고 그들먹한 자호감으로 매끈한 광채를 머금곤 했다. “성춘향 리몽롱이 저리 가라 하겠소. 남재녀모라더니 실루 천생배필이오.” 마루문을 빼꼼히 열고 그림같은 그 풍경을 훔쳐보며 마을 사람들은 쯧쯧 소리나게 혀를 차며 찬탄을 혹은 시샘을 금치못해 했다. 아무리 눈씻고 봐도 북산댁은 남산댁과 아무쪽에도 비하지 못했다. 박색인 북산댁이라도 그나마 남편은 잘 얻어 걸려든 편이였다. 경성까지는 못되여도 현성의 학교라도 나온 남편이였고 대금같은 악기도 다룰줄 알았다. 그 남편과 남산댁의 남편은 마을에서 유일한 친구였었다. 문제는 북산댁의 남편과 남산댁의 남편이 동시에 남산댁을 향해 동네가 떠나게 구애를 펼쳤는데 북산댁의 남편이 그만 녀신같은 그녀의 “간택”을 받지못하고 만것이다. 그것은 말그대로 버덕과 골안, 현성의 남자(县城男)와 경성의 남자(京城男)의 차이였다. 하늘같은 실의를 머금은 현성의 남자는 남산댁네가 마을이 떠나가게 결혼식을 치른 며칠후 “꿩 대신 닭”이라는듯 북산댁과 벼락결혼을 해버렸다. 하필이면 북산댁과 결합한것은 “현성남(县城男)”의 집안이 북산댁네 집 신세를 무던히 진 과거가 있은터였다.   춘궁기에 쪼들려 구들목 가득 잔밥들이 배고프다고 악바리처럼 울다가 쓰러져 울음소리도 내지못하고있는 “현성남”의 집에 북산댁네 아버지가 토스레 감자를 한가마나 통째로 지고와 건네준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강을 건너 이 마을에 정착하기 전까지 떠나 온 옛 고향마을에서 두 집안은 서로 이웃이였다. 이미 두 집안끼리 “지복위혼(指腹为婚. 임신부가 있는 두 집안에서 아이들이 태여나기전에 혼약을 맺는 일)”을 맺은터였다. 그래서 심약한 “현성남”은 부모의 의지대로 토스레감자같은 북산댁과 “지복위혼”을 이어나가기로 했던것이다. 지지리 못난 마누라가 싫었던 “현성남”은 결혼후로 술을 입에 대였고 늦게 배운 술에 절어들어 마을과 린근 마을의 술도가들을 모조리 소탕할 지경이였다. 현성에서 온 남자는 어느덧 마을에서 두번째 가면 섧다할 고주랑망태로 변해 버렸다. 그런 남편과 남산댁 사이를 얽혀 생각하게된것은 현성에서 있은 농사장원표창대회에서 박씨가 과수장원으로 뽑히면서 그날저녁 마을에서 벌어진 축하연때부터였다.  누구보다 술을 많이 마시고 취기가 도도해진 남편이 불쑥 장농에 넣어두었던 대금을 꺼내가지고 왔다. 주흥으로 불어댈망정 대금소리가 제법 구성졌다. 하소하는듯 떨리는듯 구곡간장 들쑤시는 그 소리에 남산댁이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대금산조에 맞추어 남산댁이 자청으로 타령 한소절을 뽑았다.   아아니이  아니 노오지는 못하아리라 차앙문을 닫아도 스으며드는 다알빛 마아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아랑 사아랑이 다알빛인가 다알빛이 사아랑인가 보일 듯 아아니 보오이고 잡힐듯 허어다가 놓쳤으니 아아니이 아니 노오지는 못하아리라   불고 뽑고하는 품이 어쩌면 두 사람은 죽이 그렇게도 잘 맞았다. 구석에 죽치고 앉아 둘이 난짝 어울려 돌아가는 꼴을 보는 북산댁의 광대뼈 도드라진 안면이 면풍에라도 들린듯 푸들푸들 뛰였다. 축하연이 끝나고 산끝자락 남산댁네 집에서 온 마을이 요동질치도록 부부싸움이 거하게 펼쳐졌지만 그날 이후로 마을에 희사가 있을때면 두 사람의 대금산조와 “사랑가”는 꼭 대미를 장식하는 보류절목이 되여 버렸다. 그후로 북산댁집안의 싸움화제에는 꼭 남산댁이 거론되곤했다. 남편이 그저 춤노래의 음절을 맞추는 사이지, 눈 맞추는 일은 결코 없다고 맹세를 거듭했지만 부아살이 꼭두로 뻗친 북산댁은 남편의 대금을 돌절구로 쳐서 박산내기까지 했다. 무작스러운 녀편네를 둔 “경성남”은 그저 술로 마음을 달랬다. 천지분간 못하도록 술에 취해 마루건 측간이든 자빠져서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타령을 했다. 동네가 떠나갈듯 악청을 뽑았다.   아아니이  아니 노오지는 못하아리라   마을에서 대금소리를 더는 들을수 없었고 북산댁의 시샘도 아이들의 짗궇은 돌멩이에 흐렸던 샘물 가라앉듯 슬몃 가라앉았다. 그러다 어느날인가부터 남산댁의 몸피가 굵어지며 임신의 조짐을 보였고 그 몸매를 뚫어져라 눈박아 보던 북산댁의 의심이 다시 도가집에 모인 사람들의 귀처럼 바짝 쳐들렸다. 남산댁의 그 “경성남(京城男)”은 학업이 딸린다면서 지난 겨울방학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남산댁의 배가 되박처럼 불러있는것이다. 사실은 남산댁이 자랑을 입에 달고 다니는 그 “경성남”남편이 서울에서 이름 번드르르한 유지의 딸과 눈맞아 돌아가며 이쁜 고향 마누라를 외면한다는 소문도 흘러든지 오래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쉬쉬대며 찧어대는 입방아 소리가 높아갔다. 그럴수록 그 찧어대는 돌확속에 든것이 백옥미같은 남산댁 그리고 보리쌀같은 자기라고 북산댁은 생각되였다. “가루받이를 하지않은 배나무에 꽃이 필 턱 있나?” “필시 슬그머니 수분해준 수펄이 있다 그말일세.” “꽃이 흐드러지게 피여있는데, 그것도 혼자서 살랑살랑 요분질하고 있는데 어느 수펄인들 홀따닥 홀리지 않겠나?”  “아무렴 홀리고 말고.” “산 높고 물이 막힌 천리길을 경성의 수펄이 날아들수는 없을거고” “맞네. 맞아. 필시 골안의 수펄일세” 시럽쟁들의 이죽거리는 패담에 북산댁의 높은 광대뼈가 험상궃게 씰긋거렸다. 밤이면 과수밭에 기여들어 난딱 끌어안고 뒹구는 남편과 남산댁의 허연 궁둥이가 환시처럼 눈앞에 어른거렸고 뼈를 삭이는 농탕질 소리가 귀전에 환청으로 들려왔다. 남산댁은 “토끼가 고기 씹고 호랑이 풀 뜯었다”는 식의 전혀 기성화되지 않은 일을 철석같이 믿어버렸다. 문제는 아무리 북산댁이 난동을 피우며 배속 아이의 임자를 대라해도 남산댁이 그냥 함구하고 있는것이다. 그럴수록 쉬쉬하는 소문은 떡고물 뭍이듯 점점 더 두터워 갔고 나중에는 쉬쉬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북산댁이 울꺽 설음에 치받쳐 악다구니를 쳤지만 남산댁은 여전히 그 모양 그 본새로 아무말도 없다. 통역관에게서 간추린 사연을 듣고난 쪼막수염이 허리춤에서 데룽거리는 칼집에서 군도를 쑥 뽑아 그에게 넘져주었다. 그리고는 턱짓을 했다. 알았다는듯 군도를 받아들고 통역관이 남산댁을 향해 벋짱다리를 끌며 다가 갔다. “뉘길까? 이 함함한 배를 둥시렇게 불려준 사람이” 통역관이 이죽거리며 물었다. 남산댁이 기다란 눈초리를 들어 통역관을 한번 보고는 깔낏하게 눈길을 돌렸다. 통역관이 칼등으로 남산댁의 배를 쓱 문질렀다. 남산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배를 감싸안았다. “뉘기냐고? 그 씨도둑놈이?” 통역관이 궁금해 미치겠다는듯 또 한번 채근해 물었다. 남산댁이 또 한번 깔낏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대답을 단념한듯한 표정이다. 예쁘게 그러나 깊이 닫힌 눈꼬리를 홀린듯 쳐다보던 통역관이 칼을 쳐든채 이번에는 북산댁쪽으로 다가갔다. 군도를 거꾸로 잡고 북산댁에게 칼자루쪽을 내밀었다. 그 용의를 몰라 북산댁이 통역관쪽을 벙하니 쳐다보았다. 통역관이 잔인하게 웃었다. “속시원히 갈라봐. 저 안에 든것이 네 남편의 씨종잔지 아닌지. 갈라보면 알거 아니냐?” 북산댁이 얼떨결에 군도를 받았다. 작대기처럼 뵈이는 칼이 정작 무거웠다. 군도의 무게가 두 손 가득 느껴지자 북산댁의 얼굴에 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광대뼈를 들추며 지어지는 그 표정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의 본색은 원체 궃은날 궃은 자리에서 비로서 확연히 드러나는것이였다. 북산댁이 가치작거리는 치마를 단단히 추슬려 입었다. 곧추 남산댁을 향해 다가갔다. 두 눈에 암상이 닥지닥지한 북산댁이 두손으로 으득부득 칼을 꼬누어 들고 남산댁을 향해 일보일보 죄여 간다. “너,너 미쳤구나” 남산댁이 배를 부등켜 안은채 뒤걸음 쳤다. 보기에 자닝스러운 그 걸음이 어랜애처럼 지적지적 위태로웠다. 오로지 칼을 부여잡고 덜퍽스러운 젖두덩이를 덜렁대며 남산댁을 향해 죄여 간 북산댁이 문제의 부푼배를 향해 무작정 찌르려 했다. 탕! 후터분한 공기를 찢으며 총성이 울었고 북산댁의 손에서 군도가 떨어져 나갔다. 북산댁이 콩단처럼 뒹굴었고 그와 함께 남산댁도 얼음땅에 주저 앉아버렸다. “미친년. 찌르는 짓시늉을 하라했더니 정말로 쑤셔박으려 드네” 통역관이 씨부렁대며 흙묻은 군도를 집어들어 바지단에 쓰윽 문댔다. 굴신하고 두 손으로 공손하게 쪼막수염에게 올려 받쳤다. 다음순간 총알이 잔등을 관통하며 쓰러졌던 북산댁이 후딱 머리를 쳐들었다. 선불맞은 짐승처럼 피를 흘리며 지척에 있는 북산댁을 향해 기여갔다. 피 발린 두 손을 오무려 남산댁의 얼굴을 호비려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꾸역꾸역 신음을 자아올리며 단말마의 모지름을 쓰던 북산댁이 마침내 끝내는 풀지못한 그 문제의 부푼 배우에 쓰러지고 말았다. 자기 배우에 덩그렇게 놓인 북산댁의 머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남산댁이 쩔쩔 맸다. 구원을 청하는듯한 그의 눈길이 잠깐 어느쪽인가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시울이 질크러지도록 두눈을 딱 내려 감은채 그저 생광목 찢는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퍼더리고 앉은 두 다리 새로 붉은 피가 새여나와 눈밭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두 김생원이 호명되여 나왔다. 턱수염 김생원의 도수 안경은 란투중에 깨져 거미줄인양 금이 갔고 팔자수염 김생원의 대통 물주리는 백동이 벗겨져 나가고 중등 부르져 맨 나무자루 한 토막만 볼썽사납게 남았다. 그래도 그 물주리를 버릇처럼 쥐고 있는 김생원이다. 두 사람의 옷에 서로 흩뿌린 먹자욱이 아직도 력력하다. 공자를 판독하고 맹자를 완독하고 순자를 다독했다는 두 사람은 만나면 서렬싸움을 벌리고 있었다. 마치 조정의 사대당들의 싸움같은것이 골 깊은 오지에서도 벌어지고 있는것이다. 그렇다고 개화당같은 조금이나마 개운할 론리도 없었다. 그저 수구파와 수구파끼리 고리타분한 문자놀이와 말싸움을 사계절 내내 싫증모르고 되풀이하고 있는것이다. 턱수염 김생원이 한숨 한번 짓고나서 입을 열었다. “어리석음이 화를 부르는구료.” 나름 감개에 넘쳐 말을 이었다. “미워하는 일, 시기하는 일, 원망하는 일… 모두다 내가 스스로 만드는 일일세. 정작 저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데 내가 저사람을 미워하면 내가 괴로울뿐. 어리석은 사람들이 사는 모양은 다 이러하이. 세상 탓을 하지 말고 나를 들여다 볼 일일세. 다 내가 만든 일로 내가 불행하게 되는게 아니겠나. 보게나. 그따위 짜부라지게 못생긴 돌배 한 두개를 두고 다투다 지 목숨까지 잃누만. 공연히 의심하다 엄마 잃고 배속 태덩이까지 잃고.” 팔자수염 김생원이 말을 받았다.” “그렇다고 온 마을 사람들 죄다 싸잡아 백안시 하지 말게. 잔치’연(宴)’자도 쓸즐 모르는 위인이.” 팔자수염 김생원은 여전히 전의 화제를 집요하게 움켜잡고 퉁겨댔다. “뭐 내가 백안시를 한다고? 백안시를 하면 자네같은 청맹과니가 했을거지. ‘맹자단청(盲者丹靑)’이란 말이 있네. 그렇게 먼눈으로 청홍황흑백 오색단청을 쳐다 봤자 무슨 소용일가? 어험!”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 하는구먼 어흠!” 팔자수염이 퉁겨대든 말든 턱수염 김생원은 혼자에게 하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삼국시대 조식(曹植)의 ‘칠보지시(七步之诗)’가 생각나누만. 자두연두(煮豆燃豆)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이라.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거늘 골육상잔이 웬 말인고하는 그 천하 절구말일세.” 공포가 슴배여 어딘가 떨리는 음조였지만 턱수염 김생원은 꼬박꼬박 긴 말을 늘여 놓았다. 습관처럼 턱수염을 엄지와 검지로 비비꼬는것도 잊지 않았다. “당나귀 귀치례라더니 거북털 처럼 없는 수염 내리 쓸고 있군.” 팔자수염이 턱수염을 비웃고는 말했다. “서재에 붙박혀 고스란히 학문을 연찬하는 진유(真儒)보다 집집의 기둥에 춘련이나 써 붙여주며 잔 재주 떠벌리는 처세에 능한 세유(世儒)가 칭송받으니 이 마을이 날이 갈수록 잡음으로 들끓을수 밖에 어험!”     턱수염이 바람에 모필 한가닥 살랑이듯 가볍게 웃으며 따졌다. “그럼 자네가 진유고 내가 세유란 말이오? 입으로는 천하의 가언을 지껄이고 있다만 떡고물 떨어지는 일에 얌치도 없이 달려들 사람이 바로 자네 아니겠나 이 바닥에서 사실 누가 량유(良莠. 벼와 가라지) 인지 누가 훈유(薰蕕) 향기나는 풀과 냄새나는 나쁜 풀)인지 종당에는 알게 될걸세 어흠!”    한켠에서 피가 튀고 시체가 뒹구는 참극에 무섬증이 일었지만 이런 형국이 오히려 두 생원의 승부사 기질을 더 짜릿하게 자극하고있었다. 두 생원은 위태로운 칼끝우에서 번드르르한 말타령을 늘여놓으며 넌덜머리나는 춤사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켠에서 들어주던 통역관이 버럭 소리질렀다.     “뭐라 지껄여치고 있냐? 귀신축문 외우냐? 말끝마다 꼴랑꼴랑한 문자만 골라 쓰고 있네”     통역관이 벋짱다리를 들어 두 사람을 걷어차며 사이를 갈랐다. 하지만 두 유생의 싸움은 끝날줄 모른다. 서로 입이라도 맞출양 코맞대고 마주서서 허연 입김을 피워 올리며 뜨슨 침을 서로의 낯에 튕기며 유식한 말마디를 극구 골라 서로를 험담하고있다.    쪼막수염의 인내가 한계를 넘었다. 여전히 긴장태세를 풀지않고 총창을 가슴패기까지 받쳐든 사병을 향해 쪼막수염이 손을 홱 저었다. 병사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나왔다. 와락 달려들어 다짜고짜 총검으로 먹물 자국이 번진 김씨의 잔등을 푹 들이 찔렀다. 호박살 찌르듯 깊숙히 들어간 날창이 마주서 대거리를 하던 두 사람을 한데 꿰였다. 팔자수염 김생원의 손에서 허세처럼 늘 잡고 있던 대통이 떨어져 나갔다. 두 생원의 눈이 심지를 돋군 화등잔처럼 동시에 커졌다. 명태두름처럼 한데 꿰인 두 사람이 극통으로 몸부림쳤다. 순식간에 얼음물에 빠진 자처럼 경련 일으키며 입으로 꿀럭꿀럭 피를 쏟았다. 턱수염 김생원이 코앞에 닿아있는 팔자수염 김생원의 일그러진 얼굴을 처량하게 지켜보았다. 금 실린 안경너머로 그 얼굴이 더없이 추레해 보였다. “함혈분인(含血喷人)이라더니 우리 마지막 까지 서로를 매도하며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는구만” 팔자수염 김생원이 꺼져드는 소리로 말을 받았다. “선오기구(先汚其口)라. 그러자면 먼저 제 입이 피로 더러워질뿐” 턱수염 김생원이 입술을 짓씹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上争何事. 달팽이뿔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팔자수염 김생원도 간신히 입귀를 비틀어 자조같은것을 만들며 아래구를 받았다.  “석화광중기차신(石火光中寄此身. 부시돌 불속에 이 몸을 붙였네)” 사병이 와락 창을 빼자 등짝에서 먹물처럼 검붉은 피가 솟구쳐 흘렀다. 두 사람은 바람에 불리는 허수아비인양 왜틀비틀거리다가 동시에 넘어갔다. 두 사람은 엇누워 죽었다. 피를 본 이또가 흥분하며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은 마치 수렵에 열광하는 렵사와도 같다. “다음은 손쬬(촌장) 나와라!”   사람들의 눈길은 가장 오래된 돌배나무를 향해 얼빠진듯 고정되여 있다. 오래된 나무를 배경으로 늙은 촌장과 젊은 촌장이 섰다. 손을 뒤로 결박당한 늙은 촌장은 젊은 촌장의 어깨를 밟고 섰다. 젊은 촌장은 그 아래서 늙은 촌장의 발을 받치고 섰다. 늙은 촌장의 목에 동아줄이 걸려 있다. 과수나무에 그네를 매달았던 굵은 동아줄이다. 젊은 촌장이 맥이 진해 주저앉기라도 하면 늙은 촌장은 영락없이 목이 졸려 교수(绞首)를 면치못한다.    사병들은 총대를 거꾸로 땅에 박고 총박죽에 두 팔을 얹은채 흥미진진하게 하회를 기다린다.     지독한 형벌을 고안해 낸 통역관은 더구나 흥분한 모습이다.     “애썼다, 동생. 이제 그만 끝내자.”    늙은 촌장이 절벽에 매달린 자같이 기를 쓰며 연신 처져 내리는 몸을 추슬려 올리는 젊은 촌장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되오. 밉던 곱던 우린 한 피줄 한 혈통이오.”     “미안하다.” 늙은 촌장이 목메여 말했다. “미안하다, 모든것이. 내가 완력과 재주가 없어 구멍 숭숭난 마을을 그대로 네게 넘겼구나. 미안하다.” 헐떡이며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동생은 아득바득 형의 발목을 한사코 부여잡고 발끝에 힘을 괴인다. “그런 처경에서도 네가 칠삭둥이로 보여 사사건건 너만 탓해댔지” 늙은 촌장이 한숨에 섞어 어제를 반추했다. “’서울 남대문에 문턱이 없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문턱이 있다’고 우겨댔구나. 미안하다.” 형의 굵은 눈물이 뒤미처 동생의 뒤통수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오. 난 또 하필이면 그 ‘문’에 기어이 문턱을 놓으며 엇서댔소. 젊은 혈기를 믿고 만용을 부린 내가 잘못이오.” 형의 뜨거운 눈물이 느껴지자 동생도 마음속에 맺혔던 옭매듭을 풀려했다. 형이 또 한번 하늘 우러르며 탄식을 뿜어 냈다. “마을이 곤액 한번 단단히 치르는구나. 어디 란마(乱麻)에 든 이 마을을 구해줄 사람이라도 없소???”  “장님이 장님을 업고 썩은 나무다리를 건느려 했으니 강에 빠지는 길밖에 안 남았소” 이번에는 동생이 한숨을 토해냈다. 형의 한숨이 그 한숨에 덧놓였다. 두 사람의 눈섭은 한숨이 피여올린 입김으로 하얗게 성에가 매달렸다. 절벽에 매달려 잡을 옹두리 하나 없는 형국이 되여서야 두 사람은 뒤늦은 리해와 깊은 회오에 빠져 든것이다. 늙은 촌장의 벌창해진 눈물샘에서 눈석이같은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눈물은 볼의 살갗에 흘러내리기 바쁘게 얼어붙었고 그 얼음길 우로 새로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홀연 늙은 촌장이 언덕배기 아래를 굽어보며 대함을 질러댔다. “미안하이, 남산댁” 남산댁이 쓰러졌다 들려나간 자리에는 아직도 하혈한 피가 괴여 시커먼 룡탕 하나가 동그마니 얼어든 자국을 남기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늙은 촌장을 향해 몰부어졌다. 쉬쉬하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늙은 촌장의 눈길이 이번에는 볼썽사납게 쓰러져 있는 북산댁의 사체에 머물렀다. “그리고 미안하이 북산댁” 늙은 촌장이 대롱거리며 오열을 뿜어냈다. 그리고는 동생을 향해 말했다. “나 이렇게 못난 놈이니 그만 내버려둬.” 동생은 아무런 화답도 없었다. 발끝을 세워 얼어든 흙속에 박아넣으려 허비적거리며 극구 앙버텼다.  “애썼다. 동생, 이제 그만 끝내자. 동생” 젊은 촌장은 힘에 부쳐 후들거리며 그저 숨 모자란 물짐승처럼 입만 뻥긋댄다. 풀리는 삭신에 힘을 주느라 목줄기에 퍼렇게 지렁이가 섰다. “오모 시로이~(재미 없잖아!)” 쪼막수염이 체증을 뿜으며 총을 빼들고 두 사람을 겨누었다. 총소리와 함께 쓰러진쪽은 젊은 촌장이였다. 그와 함께 늙은 촌장의 발이 허방치듯 들렸다. 늙은 촌장이 눈알을 까집으며 발버둥을 쳤다. 돌배나무가지가 끊어질듯이 요동쳤다. 이윽고 나무의 요동질이 멈추었다. 장형과 말제는 하나는 나무에 달려 하나는 나무 그루터기에 쓰러져 죽었다.   “이 귀축같은 놈들아!” 이때 등뒤에서 소리 하나가 터져 올랐다. 가래가 그렁이는 소리일망정 필사의 힘을 다해 지르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의 년장자어르신이였다. 이제 곧 백세연을 치르게 될 바로 그 로인장이다. 허리가 곱꺾인 로인장은 털등거리도 입지 않고 아래는 속곳, 우에는 맨 저고리 차림으로 과수원에까지 나왔다. 웬체 잔시비 큰 싸움으로 매일이고 수런거리던 마을이였지만 오늘따라 그 소요로움은 커서 로인장이 웬일이냐고 비척걸음으로 밖으로 나왔고 그러다 돌연한 장면들을 목도하게 된것이다. 아래턱을 달달 떨며, 목갈린 소리를 드높이며 비척비척 다가오던 로인장은 끝내 저만치에서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덴겁히 달려가 로인장을 안아들었다. 로인장은 이미 마시는 숨조차 버거워 하고있었다. 로인장이 혼탁해진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잎을 모조리 떨구어낸 돌배나무는 하늘향해 앙상하게 가지를 쳐들고 있다. 그 겨울에 꺼둘린 돌배나무를 로인장이 멀거니 쳐다보았다. 이 마을에서 맨 처음 강을 건넜왔던 로인장이였다. 조롱박처럼 달린 아이들을 업고 안고 둘러메고 강을 건너와 볼모지에 괭이를 박고 맨처음 심은 것이 바로 돌배나무였다. 떠나온 고향마을에서 배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이곳의 돌배나무에 접목을 했다. 버려진 우물을 가시고 그 우물을 자아올려 한지게 두지게 길어올려서는 나무뿌리를 적셨다. 태를 묻었던 고향보다 맹추위가 깊은 이 곳에서 나무가 얼어튈가 창호지를 하려던 천쪼박까지 다 떼내여 나무둥치를 감쌌다. 그렇게 지극정성을 바친 돌배나무는 봄이 되자 하얀꽃을 피워 올리다 하얀 꽃이 떨어지자 짙은 초록색 이다가  다 익어지자 노란빛에 가까운 연두색꽃이 되였다. 그리고는 황금색의 납작한 열매를 선물했다. 강 건너 그것보다 더 크고 더 때깔고운 돌배가 나무가 휘도록 주렁주렁 달렸다. 여느 돌배의 떨떠름함이 가시고 단물이  새록새록 배여 나오는 신종 돌배였다. 이렇게 애지중지 키운 돌배나무가 리화동마을이 린근에 유명한 과수촌으로 이름을 날리게 까지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은것이였다. 한대 두대 심어 이제는 숲을 이룬 돌배나무숲은 마을에 절경을 수놓았다. 보듬은 산더기는 서기롭게 하얀 빛을 떠이였고 기름지게 가꾼 들판은 정다운 취록(翠绿)으로 빛났다. 크고 너른 배나무 그늘 아래 마을사람들은 새곰달콤한 풍요를 즐겼다. 그로서 리화동이라는 마을이름도 생겨났다. 하지만 그 풍요로운 경상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심을 잃고 더는 애초의 바지런한 손길이 가지않은 돌배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지탱하듯 위태롭게 뻗치고있다. 그 어설피 뻗은 앙상함에 마을이 떠인 하늘이 조각조각 쪼각나 있다. 로인장이 모지름하며 머리를 쳐들었다. 백세연을 앞두고 로촌장이 “바리깡”에 새로 기름을 쳐서는 들고 찾아가 로인장의 파뿌리 같이 하얗게 센 머리를 파르라니 깎아주었고 수염도 가위로 단정하게 다듬어주었다. 로인장이 단정한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워낙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마을이였었는데…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데 사람들만이 어지러이 들노는구나” 눈이 화등잔같이 우묵해진 어르신은 가슬가슬하게 들뜬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을 이었다.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다더니... 이 모두 업보로다” 비리비리하게 깡마른 로인장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던지 짱짱한 소리로 한마디를 단말마로 내질렀다. “업보로구나!” 머리우에서 대롱거리는 마른 나무잎을 만지기라도 할듯 데거친 손이 허공을 향해 쳐들렸다. 그러다 로인장의 삭정이 같은 팔이 툭 떨어져 내렸다.  로인장은 짤각눈조차 감지 못하고 멀거니 뜨고 있었다. “아이고, 어르신”  “아이고, 래일모레면 백세 상수(上寿)를 채우실 분이신데” 지자러진 곡성이 터져 올랐다. “아이고, 축수연이 초상연으로 돼버렸구만이라” “아이고, 어르신” 코물눈물 찍어내던 중 누군가 흐느낌을 섞어 물었다. “그나저나 시신을 어데로 모셔야 하는감?” “어데 모시겠수? 강 건너 고향마을의 장지에 모셔야지” “강 건너 온 사람을 하필 강 건너에 다시 모시겠수?” “이 마을에 모셔야지” “마을 배나무숲 언덕배기에 모심이 좋을듯 하이.” “고향에 처자의 뫼가 있지않나. 그러니 강건너에 모셔야지” “앗따 말이 많네, 평생 이 마을에 수고로움을 바치신 분이니 이 마을에 모심이 마땅하이” “강 건너에 모셔야해” “과수원에 모셔야해” 시신을 사이두고 의견이 두패로 갈렸다. 떠들썩하던 소동이 얼마쯤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나 했더니 다시 싸움이 시작되였다. 서로는 어르신의 죽음과 마을의 참화도 잊은채 심한 맞대거리에 빠져있었다. 듣고보면 허황하고 시시풍덩한 일조차 저마다 내가 옳다고 피대를 세우고 내가 이겨야 한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름밤 개구리들처럼 시끄럽게 째깍거리기만 하더니 이어 돌주먹 쇠주먹이 마구잡이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서로의 멱살을 잡고 머리채를 꺼두르며 뒹굴었다. 그 뼛센 싸움짓거리에 관망하는 사람들이 그만 모골이 송연해 질 지경이였다. 아무런 소득도 없는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가칠한 어투에 뻐센 억양의 사투리로 격조없는 불뚝성들이 서로 판가리를 하고 있다. 독선에 사로잡혀 한사코 상대를 파괴시키는 가운데 파괴된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을은 무참히 망그러지고 서서히 바서지고 있었다. 도우시데 (왜? 어째서?) 이또의 미간이 의문을 품고 일그러졌다. 이마살을 모은채 왠지 동족상쟁의 광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활동사진 찍듯 하나하나 동공에 찍어보았다. 불개미처럼 모여 버글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이또가 더는 참을수 없다는듯 소리질렀다. 솟또! (조용히 해) 화딱지가 난듯 그 소리가 발작적이였다. 통역관이 냉큼 그 말을 받아서 소리소리 질렀다. “그만들 하랍신다. 송장 빼고 장사 치르겄냐?” 하지만 사람들은 주체못하고 있었고 란투는 계속 되고있었다. “칙쇼! 그만들 두지 못해?” 이또가 또 한번 소리 지르며 사병들을 돌아다 보았다. 철컥 철컥 철컥 이또의 눈동자에서 귀린(鬼燐)같은 푸른 불꽃이 퍼르르 타올랐고 그 눈짓에 밀린 사병들이 총을 장전했다. 하지만 그 소리도 듣지못한채, 듣는척도 않고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또의 쪼막수염이 씰룩했다. 이또가 손을 홱 저었다. “고로스! (죽여라)” 탕! 탕! 탕! 탕! 탕! 탕! 총성이 울렸다. 돌배나무의 몸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마른 돌배나무 잎들이 찢겨져 우수수 날렸다. 밑동을 잘린 배나무처럼 사람들이 하나둘 넘어 갔다. 돌배나무가지에 쌓였던 눈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악마구리 끓듯 하던 마을은 괴괴한 정적속에 잠겨버렸다.   강가. 아이가 팽이를 치고있다. 군화발에 짓밟혀 짜부라진 팽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이는 부지런히 팽이채를 휘두른다. 마을에서 어떤 천재지변이 이는지도 모르고 혼자서 넓은 강과 팽이의 향연을 향수하는것이 아이는 즐거운듯 하다. 강기슭 악귀들이 지른 불에 불길이 훨훨 솟는 마을은 꼭 마치 가위 눌린 몽매(梦寐)속 세상과도 같이 끔찍하다. 불란리 물란리의 아수라장에도 세상천지 혼자서 놀음에 탐해 있는 그 아이를 지켜보던 통역관의 입가에 씰룩 야릇한 웃음이 새겨졌다 사라진다. 뻗장다리를 끌며 다가가 통역관이 무언가 아이에게 넘겨준다. 철덩이에 나무자루가 달린, 방망이를 신통히 닮은 물건이다. 수류탄이다. 통역관이  수류탄의 심지를 애의 식지에 돌돌 말아주었다. “좀 있다 이걸 당겨봐라” “우째요?” 아이가 맹한 눈길로 되묻는다. 그런 아이의 한쪽 눈알이 통역관의 상판을 올려다 보고 한쪽 눈알은 수류탄을 내려다 본다. “당기면 이 속에서 보물이 나올끼다” “보물이요?” 퍼렇게 얼어들었던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비껴들었다. “그래 보물이지. 암 보물이고 말고. 니가 이 염병할 마을에서 마지막 보물이다.” 통역관은 또 하나의 볼거리를 연출해낸듯 크그극 웃었다. 잔인하게 웃으면서 히끗 쪼막수염을 쳐다본다. 아이를 둘러 싼 쪼막수염과 사병들이 낄낄 음습한 웃음을 웃었다. “그래 당겨봐라.” 통역관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간활한 어조로 말했다. “천천히 열까지 세고 그담에 당겨봐. 천천히, 꼭 열까지 세얀다. 열까지” 통역관이 아이를 꾀이며 얼른 피하라고 사병들에게 손을 저었다. 그와함께 아이의 셈이 시작되고 셈은 순간에 끝났다. “한나 둘 여덜 아홉 열” 쾅! 굉음이 일었다. 뿌연 흙먼지가 만장처럼 펄럭이였다. 이윽고 고요가 흘렀다. 어디선가 승냥이의 그것을 닮아 가는 들개의 울음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 올뿐이였다. 하천과 산맥이 뒤바뀌는 괴멸의 란리를 겪은 마을은 언제 그런일 있었냐는듯이 정적의 얼음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그 고요는 기괴하기 까지 했다. 까악 까악 돌배나무우에서 새청맞은 비명을 지르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그 정적사이를 비집었다. 까마귀떼는 비명같은 울음소리를 지르고는 음음한 하늘로 빠르게 빠르게 날아가 버렸다. 구물구물 지평까지 밀고 내려온 구름 사이로 희끗희끗한 눈송이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조화(弔花)처럼 어지러이 나붓기며 내렸다. 내려서 마을을 하얗게 봉분처럼 뒤덮어버렸다.   … … … …   “연변문학” 2014년 10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ny No 4 in c minor D.417 tragic 1,2,3,4.......순으로 연속듣기
261    김혁장편소설《마마꽃, 응달에 피다》 재판 댓글:  조회:2325  추천:10  2014-10-10
“지리멸렬한 진혼곡을 다시 울리며...”  김혁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재판  ​ ​   문화대혁명이라는 특수한 년대를 배경으로 10여명 청춘들의 부동한 운명을 그려낸, 김혁의 자서전적 색채가 짙은 《마마꽃 응달에 피다》가 재판됐다. 소설은 제5기 연변작가협회 계약작가작품으로 선정됐고 중편원작이 《도라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후에 장편으로 재창작되여 단행본으로 출간, 《장백산》문학상과 제6회 “진달래”문예상 창작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김혁작가는 10년사이에 도합 네부의 장편을 펴냈고 인물전기, 력사기행 등 중후한 작품들을 선보였지만 자신의 첫 장편인 《마마꽃, 응달에 피다》가 주는 엑스터시를 잊을수 없다고 한다.  일찍 1998년에 “설태를 내보여라, 어제라는 거울에”라는 제목으로 중편소설로 발표됐었고 이를 다시 장편화한 작품은 단행본으로 발표되여서 독자와 평단의 많은 사랑을 받았었다. 이 작품에 대한 평문도 적지 않게 나와 그중 한편은 이 작품에 대한 론문으로 석사학위를 따냈고 또 다른 한편은 한국방송대학 평론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55회짜리 라지오소설로 제작, 방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초판본이 수상자들에 대한 특혜로 출간해준 작품이기에 그 출간수량이 극히 적어 서점가에 오르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대해 제목만 들어보았지 읽지는 못했다.하여 이번에 새롭게 중판본을 내기로 마음먹은것이다.    소설은 자서전적 요소를 띄였고 우리 문단의 장편분야에서 흔치 않은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했으며 중국조선족문화의 발상지이자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룡정을 배경으로 했다. 김혁작가는 이 장편이 자신의 창작성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시간이 검증해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현대 중국인들에게 문화대혁명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암흑기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안해가 남편을 학생이 선생을 단죄대에 올리고 주먹질하고 침을 뱉아야 했던 그 시대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때문이라고 김혁작가는 말한다. 혹은 흥건하던 상처의 아픔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딱지가 앉고 딱지가 떨어지고 흉터가 아물어가자 사람들은 그 상처를 잊었을수도 있다고 말한다.    현재 물질의 풍요에 노곤해져 모두들 일종의 카르텔(동일 업종의 사람들이 리윤의 증대를 노리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아 형성되는 안일한 형태)같은 침묵과 회피의 완충지대에서 안일만을 즐기고 있는것은 아닌지 반문하며 이렇게 침중한 과거에 대한 평이와 미온적인 태도, 그리고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에 비해 우리 문단에 한심할 정도로 미미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다른 펴낼 작품이 많음에도 기어이 십년전 작품을 뒤적여 다시 중판본을 내는 리유라고 밝혔다.    “혹자는 하필이면 그 아픈 상처를 들쑤셔야 하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력사란 달력처럼 찢어던지면 그만인 일회용의 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전제입니다.”    문혁에 아버지를 잃고 이름자조차에 그 시대의 각인을 아프게 받아야했던 문혁시기 태생의 필자로서는 이 제재를 간과할수 없었다고 한다.    김혁작가는 이 장편이 자신의 첫 장편작품이라 설익은 작품일망정 력사라는 이름의 호랑이 등에 본의아니게 올라타 들썩임을 당해야만 했던 젊은 청춘들, 세상의 폭력과 반인륜적 관습, 그 형극의 틈바구니에서도 유토피아로의 열망과 생존본능으로 몸부림치던 모든 문혁경력자들을 위한 진혼곡으로 읽혀지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리련화 기자  ​ "연변일보" 2014-9-26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60    별의 고향에서 바치는 헌사(獻辭) 댓글:  조회:3242  추천:16  2014-09-28
별의 고향에서 바치는 헌사(獻辭) “룡정윤동주연구회” 설립 경과보고   김 혁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의 저자,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존경하는 지도자 여러분, 존경하는 학계인사 여러분, 그리고 문인들과 교직원 여러분, 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존경하는 윤동주의 유가족 오인경 녀사님 오늘 저희들은 유서깊은 룡정땅에서 룡정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를 위한 정규적인 단체의 발족을 기꺼이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윤동주가 태여난 이곳, 가까이 고향집을 굽어보며 선바위가 우람하게 솟고, 그 앞으로 시인이 어릴적 물장구를 쳤던 륙도하가 유유히 감돌아 흐르고, 시인이 즐겨 톺았던 더기우의 골목길이 아직도 고불고불 몽롱히 남아있고, 시인이 한줌의 뼈아픈 하얀 재로 돌아와 고향의 동산마루에서 보람처럼 무성한 풀떨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이곳에서 저희들은 근 한세기전 어느 추운 겨울에 태여나 룡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뜨겁게 영생하고있는 한 민족시인을 절절히 그리게 됩니다. 따라서 윤동주에 깊숙히 심취되고 지극히 애대하는 한 소설가의 뚝심과 정열 하나로 시작되여 연구회가 오늘 고고성을 터뜨리기 까지 짧지만 지극히 어려웠던 행보를 돌이켜 보게 되는군요. 고문단의 꼭지점에 굳건히 서주신 김병민 연변대 교장님, 주관단위로서의 겹대문을 흔쾌히 열어주신 문체국 박인철 국장님 그리고 똘똘 뭉쳐 보조를 맞추어준 연구회 임원진 그들의 정성으로 보듬은 두손에 받들려 “룡정윤동주연구회”가 드디여 고고성을 울릴수 있은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북경조선족 화가동맹의 리산호 화백에 대해 말하고저합니다. 원체 저의 윤동주 장편소설의 표지를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숙고하며 그려왔던 리화백은 이번의 설립식에 현수막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밤을 패며 그 그림을 거폭의 초상화로 수개해 보내주었습니다. 어릴적 사고로 한손을 잃고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온 그는 민족의 걸출한 시성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온 몸이 붓자루가 되여 몸을 던졌다고 감개를 표했습니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에 대한 숭모사업은 그의 고향에서 내내 이어져 왔습니다. 권위간행물의 “윤동주문학상”이 제정되였고 청소년을 위한 “중학생문학상”도 이어져 왔으며 또 몇몇 민간단체의 가상스러운 노력에 의해 그이를 위한 동시비가 서고 그이를 위한 론문집이 출간되면서 우리는 고향이 낳은 윤동주를 때때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부의 폭넓은 지원으로 근년들어 윤동주 생가가 크게 보수 되고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학교가 복원되고 윤동주 생가가 국가3a관광지역으로 지정되고 윤동주 묘소가 룡정시 문물보호관리구역으로 지정되는등 반가운 거동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탄생된 저희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향후 윤동주를 위한 일련의 사업들을 차분하고 성실하게 펼쳐나가고저  합니다. 우선 시인이 태여난 생몰일 즉 태여난 날과 서거하신 날을 꼭 챙겨 기념하려 합니다. 명년 윤동주 서거 70주기를 맞이해 연구회총서의 첫 문집으로 되는 “윤동주 추모문집”을 펴내고 그이의 서거일 2월16일에 때맞추어 출간기념회를 치르려 합니다. 청명을 맞으며 가족의 동의를 거쳐 윤동주 묘소를 정성으로 가토하여 수건하려 합니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아 명년 상반년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윤동주 청소년 인물전기를 펴내 학교들에 나누어주려 합니다. 그외에도 해마다 윤동주 관련 연구론문, 회원작품집으로 정기 회원총서를 한기씩 정기적으로 간행하려 합니다. 윤동주 관련 백일장, 윤동주 아카데미, 학술회등을 펼쳐나가려 합니다. 해외의 윤동주 언덕길,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 조성, 윤동주 축제, 윤동주 관련 책자의 출간, 윤동주 뮤지컬과 연극의 개봉등 내내 이어지는 방흥미애 (方兴未艾)의 열기에 비해 그이의 고향인 연변에서 아직도 그 기념사업이 활약상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해야할일이 많고도 많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저희 “룡정윤동주연구회”는 회원들의 정성과 아이디어를 알알이 모아 정부와 고문단의 지도아래 더 폭넓고 더 걸맞는 사업들을 꾸준히 펼쳐나가고저 합니다. 우리의 저명한 김호웅 교수님은 다른곳도 아닌 바로 윤동주의 고향인 룡정에서 꾸리는 연구회니만큼  “종가”의 경건과 의무의 자세를 지니고 연구회를 밀고나가라고 독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정말로 가슴 한자락에 들먹히 와닿습니다. 제기(祭器)를 반짝반짝 닦고 갖가지 알뜰정성 마련한 음식을 골막하지않게 그득 차려 올리며 우리를 있게 한 선친을 기리는 종가집의 자세로 저희들은 우리들의 민족정신을 닦고 닦고 또 닦아 오래도록 고양해가는 일에 온 몸을 게으름없이 바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9월 27일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259    "룡정.윤동주연구회"설립식 이모저모 댓글:  조회:3086  추천:22  2014-09-28
사진으로 보는 "룡정.윤동주연구회"설립식  축하공연: 사물놀이(연변대학예술학원 "불사조"풍물패) ​​ 설립식대회장​ ​설립식 주석단에 모신 래빈들​ (시계바늘 방향으로) 연변문화발전추진회 한석윤 회장, "중학생잡지사"윤동주문학상운영회 회장 로철호 주필, "연변문학잡지사" 채운산 주필​,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부주석, 연구회 고문 리태수 소설가, 고문회 고문 전광하 작가, 연구회 고문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 연구회 고문 연변대학 김병민 전임총장, 윤동주의 유가족 대표 윤동주의 조카 오인경, 연구회 김혁 회장, ​룡정시문체국 당위위원 원정일, 윤동주 유가족 중국대리 허춘희 ​ 사회자: 최국호(연변텔레비방송국아나운서) 윤동주의 대표작"서시" 랑독(룡정시북안소학교) ​ "룡정윤동주 연구회" 설립 경위보고를 하는 김혁 초대회장 시랑송 "별헤는 밤"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 신금철) 기조발언을 하는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 김병민,김호웅,리태수,전광하등 고문단에 회장단이 위임장 발급 축사를 드리는 연변대학전임총장 김병민 축사를 드리는 연변대학조문학부 학부장 우상렬 교수 축사를 드리는 연변청소년문화발전추진회 한석윤회장 시랑송 "쉽게 씌여진 시" (윤동주 장학금수혜자 류설화) 축하공연: 가야금 독주 "아리랑" (룡정시 예술단) 윤동주유족 중국측 대리가 김혁회장에게 윤동주관련 도서증정 시 랑송 "새로운 길"(룡정시북안소학교) 룡정시예술단의 축하 가무공연 하객들의 합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58    로총각 증후군 댓글:  조회:2707  추천:11  2014-09-16
. 칼럼 .   로총각 증후군   김 혁   1, 총각의 어원을 살펴보면 총(總)은 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 등으로 쓰였다. 은 물론 이고. 옛날 머리양식을 보면 년소자들은 머리를 량쪽으로 갈라 뿔 모양으로 상투를 틀었는데 그 머리를 가리켜 이라고 했다. 이런 머리를 한 사람은 대개 장가가기 전의 남자였다. 총각은 여기에 연유해 생긴 말이다, 우리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총각김치는 손가락 굵기만한 어린 무우를 무우청 째로 양념에 버무려 담은 김치인데, 그것이 마치 총각의 머리와 같은 모습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2, 로총각증후군(症候群)은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한지 오래다. 변혁기를 맞아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농촌 처녀들은 모두 도회지로 해외로 떠나 갔다. 도시의 삶에 익숙해 지고 그 편의성에 심취된 처녀들이 떠난 고향으로 다시 돌아 오지 않았고 거기에 국제결혼까지 겹치면서 농촌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된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연변주 모 시 농촌의 31세부터 40세사이 남성들중 미혼남성이 864명이나 되였는데 그중에서도 조선족이 769명으로 거의 90%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것은 41세부터 45세까지 장가가지 못한 261명 고령남성중 조선족이 93.5%차지한다는 사실이다. 기타 현, 시의 정황도 매일반이였다. 주인구및계획생육위원회 인구발전전략처의 관련책임자는 고 분석했다. 로총각들의 혼인문제는 이제 개인의 사생활 령역의 자유나 소관으로 맡겨 두고 구경만 하고 있을 지경이 아닌 것이다. 3, 요즘들어 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연변주에서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로총각인구에 대한 구체적 정황을 조사하고 상응한 당안을 만들어 인터넷, 신문, TV, 방송 등 매체를 통해 사회에 그 정보를 공개한다. 도문시 인구계획생육국에서는 로총각 구혼 홈페이지를 만들어 아주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 여러 계획생육부문에서 적극적으로 남녀청년련합회를 뭇고 로총각들의 중매인으로 나서고 고있다. 화룡시 두도진에서만 해도 진과 촌의 100여명 계획생육간부들이 100여명 로총각들의 중매인으로 되였는데 이미 8쌍이 인연을 맺고 결혼등록을 하였다. 로총각들에게 치부정보를 제공해주고 소액담보대부금을 내주어 창업, 치부의 길로 이끌었다. 올해 연변주 인구계획생육위원회에서 내준  소액담보대부금은  120여호, 110만원에 달한다.  그외에도 로동부문과 손잡고 로총각들에게 취업강습을 시키고 로무송출 기회도 마련해주었으며 감숙, 사천, 운남, 흑룡강 등지와 련계하여 그들에게 배우자를 알선해주도록 힘쓰고있다. 엄연한 사회문제의 복판에 서있는 로총각들이 하나둘 가족단위를 이루어 사회와 영농에 매진할 수 있는 풍토가 이룩되기를 바래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57    천재지변 그리고 ... 댓글:  조회:2880  추천:10  2014-09-16
. 칼럼 .    천재지변 그리고 ... 김 혁     1 지진이란 낱말은 76년 맨 처음 접했다. 우리가 매일 쓰는 그릇을 만들고 있는 당산이라는 곳에서 지진이 일었다는것이다. 그리고 연변에도 지진이 인다는 풍문이 돌아 적이 겁에 떨었었다. 당시 소학생이였던 우리에게 “우상”은 요즘처럼 그무슨 탈렌트가 아니고 천문학자 장형이였다.   동한(东汉)시대 과학자인 장형(张衡)은 “후풍지동의(候风地动仪)”라는 계기를 만들어 지진의 발생을 감측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지동의는 외벽에 8마리의 룡이 부착돼 있는데 룡은 저마다 작은 구리공을 물고 있다. 그 룡두밑에 머리를 쳐들고 입을 벌리고 있는 8마리의 개구리가 있는데 만일 어느 지역에 지진이 발생할 경우 룡입 속에 있던 구리공이 그 방향의 개구리입에 떨어지는 기계였다. 장형과 그의 지동의는 당시 교과서에도 실렸고 우리가 주문해 보는 잡지들에도 칼라로 큼직하게 소개되였다. 그 예술품을 방불케 하는 지동의를 보며 저마다 감탄을 머금었던 기억이 있다. 2 그렇게 감성적으로나마 알았던 지진이 다시 한번 우리들의 신심을 강타했다. 2008년 5월 12일 규모 8.0급의 대지진이 사천성 문천 등지를 강타해 그 지역이 초토화됐다.  풍부한 물산으로 사람들의 살림 형편이 넉넉해 “천부지국(天府之国)”으로 불렸던 곳, “삼국지”의 류비가 제갈량의 “천하 삼분지계(三分之计)”에 따라 터전으로 삼았던 곳, 국보 판다가 서식하고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관광명소로 유적도 풍부한 곳, 새 세기에 들어서 매년 10% 넘는 고도성장을 이루며 “서부대개발”의 중심이자 선두 도시로 이름 난 곳, 그 곳을 지진의 마수가 덮쳤다. 주택 50만채가 붕괴됐고 학교 건물 7000여 채가 무너져 내렸으며 20여만의 사상자를 내고 수천명의 아이들이 일조일석에 부모을 잃고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됐다.  3 중국에서 예로부터 지진에 대한 기록은 드물지 않다. 공자(孔子)의 “춘추(春秋)”에 서도 “지진이 다섯 번, 산과 봉우리가 무너지는것이 두 번, 그 밖에 재이(灾异)의 기록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고 전하고 있다. 불과 30년전인 당산대지진의 악몽을 재현하며 덮쳐든 이번 지진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 250개 이상의 위력이라 한다. 하지만 렬악한 위기속에서도 휴머니즘은 꽃을 피웠다. 정부는 식량, 생수, 옷, 텐트를 비롯한 구호품을 신속히 지원하고 있으며 호주석과 온총리는 여진이 남아있는 피해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 구호활동을 선두 지휘했다. 구조대원들은 "1프로의 희망이 보이면 100프로로 뛴다"는 구호를 걸고 밤낮으로 뛰고 있다. 련이은 여진과 악천후속에서도 생사를 다투며 매몰 주민들을 구해냈다. 찢어진 길을 잇고 무너진 잔해들을 걷어내며 망가진 도시 기능을 하나씩 복구해 나갔다. 무너진 “천부지국”을 다시 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사천에서 매일이고 생명의 기적, 사랑의 경이가 이어지고 있다.  형제자매의 불행을 함께 헤아리고 슬퍼하는 “동병상련”의 마음은 기부활동을 촉진해 중국 전역을 무대로 성금모금, 헌혈활동이 확산되고 있다. 불운한 이들을 돕기 위해 기업가, 연예인, 일반시민으로부터 고사리손 애들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온정이 줄을 잇는다.   14억 중국인이 하나로 뭉쳐 난국을 헤쳐나가며 나눔과 베품의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와 행복이 증대되고 있다. 대지진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아픔을 아픔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떨쳐나선 우리들에게 재난극복과정은 공통의 경험이 되면서 한편으로 단결과 일체감, 위기 극복에 대한 자신감이라는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진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인류에게 지진, 해일, 홍수, 번개 등의 천재지변은 공포의 대상이 되여 왔다. 인간으로서 감당해 낼 수 없는 자연재해는 인간들이 쌓아온 물질과 능력의 한계를 철저히 느끼게 만든다. 이처럼 재앙은 인간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천재지변이 가져다준 재앙, 하지만 그 재앙속에서 보여준 삶의 의지는 강진보다 강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삼각 버튼을 누르세요)
256    滿洲 무지개 댓글:  조회:3229  추천:10  2014-09-12
[김혁 서점가 산책] 무지개빛 트로츠키 지난 5월 연변행차를 한 한국의 지인에게 부탁해 구입한 책이다. 그런데 책을 지니고 온 지인이 하는 말 "애개, 이거 만화책이 아닙니껴?" 만화책 맞다. 이 나이에 만화라니? 자조를 머금지만 서재에 소장해둔 만화책이 적지 않다. 일전 한국행차에서 어릴때 채 소장하지 못한 만화 "은하철도 999"를 찾으려 서울과 부산의 책가게들을 헤맨적도 있다. 애니메이션 좋아하는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선 없는 일을 2d세계에서 욕망하는 대리만족자라는 말을 들은적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역사소재에 편향하고 지독하게 작품성을 운운하며 탈덕한지도 오래다. 일본 만화는 폭이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룬다. 정치, sf,  개그,  성 풍속 지어 난센스,에 이르기까지 통제 없이 자유롭게 그린다. 그 다양함때문에 일본만화를 좋아하는 나다. 물론 역사를 다룬 만화중에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 있어 골살이 찡그려지지만 더우기 아세아의 근대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소설을 연재, 또 다음 작품으로도 기획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 관련물들을 닥치는대로 읽고있는 편이다. 3권본으로 되여있는 "무지개빛 트로츠키"가 동북아의 근대사 더우기 지난 세기 30년대의 중국 장춘에 세워진 괴뢰정권 만주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에 단연 골라 들었던 것이다. 잘 짜여진 사극영화의 컷을 방불케하는 만화가 주는 경희로움은 컸다.   중국판 표지 일제의 사촉에 만든 괴뢰정부 만주국. 일본인 아버지와 몽골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주인공 움보르트는 반일운동을 하며 성장했으나 체포되어 관동군의 밀명을 받고 만주 건국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만주국에 소속되는 입장이면서도 만주국을 부정하고 있는 철저한 이방인인 주인공, 건국 대학에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를 초빙하는 사건과 함께 곧 국제 모략의 막이 열리며 일본, 중국, 러시아, 한국 등등 다양한 민족이 얽힌 대서사시의 막이 열린다 만화라지만 여느 대하소설에 못지않은 웅장한 스케일의 대서사시이다. 등장인물도 다양해 우리의 동북항일련군도 나오고 러시아 혁명가 토로츠키도 나오고 여간첩 천도방자(川島芳子)도 나오고 대화에서 지어 김일성도 나온다 30년대의 장춘의 거리와 골목이 그렇듯 핍진하게 그려진데 대해 장춘을 잘 알고있는 나로서도 화가의 그 로고와 치밀한 붓놀림이 놀라울뿐이다. 저자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대표하는 캐릭터 디자이너이자 만화가인데 ‘역사 속의 현재’를 묻는 수많은 역작만화를 발표했다고 한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저자는 일본이 역사의 행간에 남긴 과오에 대한 반성을 보이기도 했다. “옛날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더욱 현명하게, 한눈파는 일 없이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던 나라, 일본은 과오를 저질렀다… 언제부터 일그러져 일본을 패권주의 국가로, 온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로 만들었을까?” 이 작가의 전작으로 "왕도의 개"라는 작품이 있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더불어 조선과 청나라를 연결시켜 당시 동북아 정세를 그려낸 작품이다. 역시 지인에게 부탁했는데 아마 이 달 말께에 도착할가보다.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도나우강의 잔물결 / 이바노비치    
255    횡단보도 풍경 댓글:  조회:3406  추천:11  2014-09-12
. 칼럼 . 횡단보도 풍경 김 혁   △ 횡단보도, 중국어로는 얼룩말선(斑馬線)이라 부른다. 횡단보도의 표지가 얼룩말의 무늬를 꼭 닮은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얼룩말은 주로 아프리카에 분포하여 서식한다. 얼룩말하면 아름다운 무늬로 유명할뿐더러 조화로운 단체 생활로도 이름있다.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데 많이는 그 수효가 수천 마리의 큰 무리를 이룬다고 한다.   령양이나 기린들과 곧잘 어우러지는 온순파인 그들은 이른 아침과 해질녘이면 물을 찾아 먹는데 그렇게 많은 수효임에도 늙은 수컷이 이끄는대로 줄을 지어 물을 먹는다고 한다. 참으로 동물계의 위계질서에 감탄이 절로 나게하는  가관이다.   △  연변에 가면 횡단보도가 필요 없슴돠.     그냥 냅다 뛰여가면 자동차가 느려가지고     사고가 나더라도 상처가 안남돠.    해외인터넷에서 류행되고 있는 연변개그다. 그저 개그로만 웃어 넘길수 없는 대목이다. 해외에서도 거론될만큼 사거리에 나서면 붉은 등을 무시한채 무단횡단을 하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횡단보도가 마치 자기 집 뒤뜰인양 지축자축 노량으로 지나는 아저씨, 붉은 등을 그 무슨 모델쇼의 조명등으로 아는지 무시한채 교태를 흘리며 지나는 아가씨, 혼자서는 직성이 풀리지않는양 어깨동무 하고 무리지어 지나는 이들... 하기에 순경들이 목청깨져라 소리 지르고 곤봉을 내저으며 질서바로잡기에 마냥 드바쁘다. 그야말로 부끄럽기짝이없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보행자와 자전거의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교통사고 및 교통체증을 유발시킬뿐더러 한개 도시와 도시인들의 위상에도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교통부문에서 교통질서 확립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횡단보도 무단횡단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 줄을 긋는다는 것은 방향을 정해주고 기호로 만들어 조직화하는 행위이다. 줄무늬는 자연의 무질서를 질서 있게 정돈해서 정화시키고 재정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을 접하는 횡단보도의 풍경은 줄지은 얼룩말들이 찾은 못가와도 같은 미경이 아니다. 가장 지능화 된 동물로 군림하여 만물의 질서를 규제한 인간들이 스스로 그 기본적인 질서를 흩트리고 있는것이다.   이로볼때 줄무늬도 구도적으로 잘 새겨진 얼룩말의 행동반경은 인간에게 많은것을 시사해 준다.   질서 바로잡기라는 화두는 다만 교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모두에게 부여된 구체화되고 인성화 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다. 너나가 이 공덕의 대시험장에서 참다운 응시자의 자세를 보일때 이는 량호한 사회품질 및 개인수양의 발현으로 자리잡게 될것이다.   횡단보도, 눈과 발로 걷던 그곳을 마음으로 건너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54    아하! 헤밍웨이 댓글:  조회:3133  추천:15  2014-09-12
. 칼럼 .   아하! 헤밍웨이 김 혁       1   헤밍웨이의 경전 “로인과 바다”를 맨 처음 접하게된것은 1980년대 중기,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한 “세계문학”총서에서였다. 비정기적으로 20권 가량 간행되다 나중엔 정간되였지만 문학도 시절 나는 그 작은 총서에서 세계문학의 진수를 대량 접할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또 다른 경전작품들인 “킬리만자로의 눈”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90년대초 모두 영화로 먼저 접했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주인공 그리고리 팩은 멜로영화 “로마의 휴가일”에서 오드리 햅번과의 열연을 펼쳤던, 남자가 봐도 멋있는 끼끗한 스타로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만은 히치콕크의 추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로서, 좋아한데서 두 작품을 접하게 되였다. 사실 애초의 헤밍웨이의 작품은 이렇게 어린 문학도인 나에게 있어서는 좋아하는 영상물의  주인공에 대한 팬의 시각으로 다가왔던것이다. 그후 헤밍웨이의 작품들을 제대로 다시 읽게된것은 본격적인 문학창작에 매진한 다음의 일이다. 그 명저들을 단지 열성 팬의 스크린속 우상에 대한 유흥의 시각으로서가 아니라 문학창작인의 신분으로 다시금 가슴에 새기며 읽었다.     “미국문학의 대부”로 불리고있는 헤밍웨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사후 50년인 올해말로 만료된다고한다. 하여 세계적인 헤밍웨이 작품 출간붐이 다시 일고있다. 중국에서도 헤밍웨이의 전집이 상해역문출판사(上海译文出版社)에 의해 다시 출간, 변강오지인 이곳 서점가에도 올랐다. 따라서 헤밍웨이가 또 한번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고있다. 강하고 힘찬 문필과 대담하고 공개된 생활로 유명한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는 사냥과 낚시를 좋아한 의사인 아버지와 미술에 관심 있던 어머니의 맏아들로 시카코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17년 중학교를 졸업하자 대학에 가는 대신 캔자스시티로 가서 당지주요한 신문이였던 “스타”지의 기자로 활약했다. 눈병으로 계속 군입대를 거절당하다가제1차 세계대전때 가까스로 미국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사로 참전, 이딸리아 전선에서 부상을 입었고 그 위훈으로 19세도 채안된 나이에 훈장을 수여받았다. 건강을 찾은뒤 다시 집필을 시작, 1925년 최초의 단편집인 “우리 시대에”를 뉴욕에서 출간했다. 이듬해에 전쟁후의 “잃어 버린 세대”를 다룬 장편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발표, 비관적이지만 활기 넘치는 이 소설 작품으로 그는 처음으로 출판계와 독자들에게 문명(文名)을 알렸다. 그동안 아들 존을 얻고 첫번째 결혼은 실패했으며 그뒤 다른 녀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았다. 그는 빠리에 살면서 스키· 투우, 낚시, 사냥과 려행에 빠져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많은 글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는 많은 모험을 기초로 책을 썼는데 문학적인 경험을 위해서도 그러한 모험을 열렬히 추구했다. 에스빠냐에 대한 사랑과 투우에 대한 열정으로1932년 “오후의 죽음”을 창작, 펴냈는데 이것은 그가 투우를 스포츠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의식으로 보고 깊이 있게 연구해서 쓴 작품이였다. 그무렵 에스빠냐는 내전이 한창이였다. 행동파 작가로서의 헤밍웨이는 군사 독재자에 맞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돈을 모았으며 포위된 마드리드를 배경으로 한 희곡 “제5렬”(1938년)을 창작했다. 에스빠냐 내전뒤 그는 꾸바의 아바나 교외에 농장을 구입했으며 안해와 함께 또 다른 전쟁, 일본의 중국침략을 취재하러 중국으로 오기도 했다. 1940년 에스빠냐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 이 소설은 판매부수면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였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꾸바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으며8년 년상의 녀인과의3번째 결혼 역시 파탄에 이르자 4번째로 런던에서 만난 통신원 메리 웰시와 결혼해 여생을 함께 보냈다. 1952년에 늙은 어부의 고독한 싸움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려낸 작품 “로인과 바다”를 발표했다. 소설은 전세계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열광적인 애대를 받았다. 이 작품은 1953년에 플리처상 소설부문상을, 그 이듬해인1954년에 드디여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극적인것은 그 생애의 최고의 해에 헤밍웨이는 두번이나 항공기 사고를 당한다. 두 번 다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중상을 입고 시상식에도 나가지 못했다. 그 두번의 사고로 이후 그의 특징이였던 강인한 신체와 활동적인 생활을 돌려받을수 없었다. 호탕하고 개방적이고 헌신적이였던 그는 타고난 스포츠맨으로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복잡한 생활을 했다. 만년에 사고의 후유증에 인해 우울증에 시달리고, 집필활동도 점차 막히기 시작하자 결국 1961년 아이다호주에서 렵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문학관은 전쟁과 폭력이 란무하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지독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실존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인간 실존의 부조리한 상황을 수긍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최고 덕목으로 치면서 희망을 념원하는 인물들”을 그려내고있다. 20세기의 미국 작가들중 헤밍웨이가 얻은 명성을 뛰어넘은 사람은 몇명 되지 않는다.   2   그러나 헤밍웨이가 재다시 회자되면서 동시기 활동했던 작가들과의 불협화음이 뒤늦게 공개되여 충격적이다.   헤밍웨이는1920년대 미국문학의 제2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인물로 정평받고있는데 그와 함께 이 제2의 부흥시기를 주도한 인물이 또 있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이다. 피츠제럴드    피츠제럴드하면 이곳 문학풍토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어쩌면 우리 조선족문단에 그의 작품이 단 한편도 소개되지 않았기때문이다. 굳이 그에 대해 환기시키려면 최근 나온 영화 “벤자멘트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本杰明·巴顿奇事)”를 말하면 될것이다. 할리우드의 꽃미남 브래드 피터의 주연으로 크게 흥행을 본  영화, 이 영화가 바로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개편한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유명 작품으로는 또 20세기 가장 뛰여난 미국 소설로 꼽히는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1920년대 미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이 소설은 “20세기 미국 현대 문학의 최고봉”, “미 대학생 선정 “20세기 100대 영문 소설” 1위라는 눈부신 찬사를 받고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른뒤의 미국은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는데 “위대한 개츠비”는 이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신의 풍경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보여 주고있어 미국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할 작품”으로까지 꼽힌다.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두 작가는 프랑스 빠리에서 처음으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헤밍웨이는 이름없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무명 작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문단과 독자들이 알아주는 유명작가였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 작품을 읽고 감명받아 그에게 싸인을 받으러 찾아가면서 처음 면목을 익히게 된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신진이였던 헤밍웨이의 문학적 재능을 혜안으로 알아보았다. 이후 그는 헤밍웨이를 등단시키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해 끊임없이 조언했고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그의 작품 출판을 도왔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 소설이며 헤밍웨이의 작품중에서도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력작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였다. 헤밍웨이는 책의 부제에 "스콧 피츠제럴드의 우정으로 쓰인 작품"이라고 특별히 밝혀 실으며 둘 사이의 우정을 과시했다. 당시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 데뷔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다보니 정작 자신의 작품을 쓰는데는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를 만난것은 작가로서 나의 행운이였다”고 거듭 감사를 드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피츠제럴드의 생활에 금이 가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랑비벽이 심한 부인때문에 경제적 파국을 맞게 되였으며 나중에 그 부인이 정신병까지 앓게 되자 피츠제럴드의 생활고는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록 (薄祿)의 원고비라도 벌어 생활고에서 벗어나기위해 피츠제럴드는 닥치는 대로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쓴 작품이 무려 160편에 달했다. 벼랑에 선 피츠제럴드와는 반대로 그 사이 피츠제럴드의 사심없는 도움을 발판으로 헤밍웨이는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등을 발표하며 헤밍웨이는 하루밤새에 미국 출판업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어제날 피츠제럴드의 싸인을 받으러 찾아갔던 올챙이 문학도 헤밍웨이는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어찌보면 은인격인 피츠제럴드에게 감사나 동정의 손길대신 조소와 야유의 비틀려진 입꼬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피츠제럴드가 돈을 벌기 위해 되지도 않는 작품을 쓴다고 내놓고 폄하(貶下)를 했다. 9년 만의 신고끝에 탄생한 피츠제럴드의 장편 “밤은 부드러워”에 대해서도 혹평을 서슴치 않았다. 비록 상업적으로도 실패했지만 피츠제럴드의 소설 중 가장 감명을 주는 이 소설에 대해 헤밍웨이는 “번지르한 문장으로서 세상을 리해하지 못하며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혹평했다. 지어 자신의 그 유명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피츠제럴드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둘 사이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작품의 실패와 친구와의 반목으로 절망에 빠진 피츠제럴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 알콜중독에 시달렸다. 그후로 내내 병고에 시달렸던 피츠제럴드는 결국44세의 나이에 요절하고말았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죽은 피츠제럴드를 “꽃가루 떨어진 나비”로 까지 비하했다. 비록 피츠제럴드가 유감을 품고 사망했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끊기지 않았다. 피츠제럴드의 사망후 그의 작품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고 헤밍웨이와 두사람은 끊임없는 비교를 당해야 했다. 헤밍웨이 역시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62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유명한 작가들의 정신과 작품과는 다른, 실제의 숨겨진 삶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위대성을 탈신화하는 작업은 찬반론란속에 계속되고있다. 명성으로 가려지고 분장된 위인들에게서 허울을 벗기고 어두운 곳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야누스적인 얼굴(Janus. 로마 신화에 나오는 성이나 집따위의 문을 수호하는 신,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전쟁과 평화를 나타내기도 한다)에 대해 연구가들은 가차없이 동전의 량면처럼 뒤짚어 보이고있는것이다. 아무리 뛰여난 작품을 내놓은 이름난 작가라 할지라도 그 역시 인간임에는 분명하다. 우리가 감탄했던것은 우선 그의 사상이며 작품이지 그의 인품과 인격이 먼저가 아닐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려낸 세계의 서술과 그가 살고있는 삶의 실제는 같은것일수가 없다. 저 위대한 똘스도이도 젊은 시절에는 도박에 깊이 빠져있었고 성병에 걸릴만큼 녀자관계가 문란했으며 로년에는 갖가지 주제로 책을 쓰고 설교를 하며 성자적인 면모를 보였지만 그 내용은 상투적이고 고리타분할 뿐이라는 인간평도 있다. 영국의 대문호 쉐익스피어는 호색한에 량성애자라는 론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쉐익스피어 는 유부녀를 임신시킨 난봉군이였다. 바이런은 자신에게 진정한 영양분은 섹스라며 베니스에서 1년동안 자그마치 녀자 250명과 잠자리를 했다. “선량한 회색 시인”이라고 불렸던 월트 휘트먼은 섹스에 대한 로골적인 찬미로, 평론가로부터 “그 시대의 가장 불결한 짐승”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매우 도덕적인 작품 “작은 아씨들”을 쓴 올컷은 평생을 약물에 중독돼 살았다. 건전한 아동소설보다 에로틱하고 저속한 작품 쓰기를 즐겼던 그녀다.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톨킨은 세금 내기를 거부한 지독한 구두쇠였다. 윌리엄 포크너는 우체국장으로 일하다 다른 사람들의 우편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모습이 종종 목격돼 직장을 잃은적 있다. 언감 몇몇 대가들의 이름을 언급하고있지만 이는 적지않은  작가들의 사례중의 한두 경우일뿐이다. 여기서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만을 들추어 심리 (审理)하면서 세속의 자대로 그들의 전존재를 부정하려는것은 아니다. 우리의 소설사를 위대하게 만들고 몇세대 독자들에게 끊임없는 감동을 주고 있는 이들의 문학적 성과를 무의미한것으로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자는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존재가 그림자를 가져야 하듯이 그 위인들도 그림자를 숨기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이룩해낸 위대한 사상적, 문학적 세계와 그것이 세상에 끼친 거대한 영향은 절대 폄하하지도 못한다. 다만 그들의 문학생애중에 왜 그런 배리적 모습도 보였는지  우리의 학자들이 심입되게 더 연구하고 우리 독자들이 숙고할바이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헤밍웨이 닮은꼴 찾기 선발대회”가 열린다고한다. 이 선발대회는 헤밍웨이 탄생일인 7월 21일을 기념해 매년 7월 이면 열리는 “헤밍웨이의 날” 축제의 하이라이트이다. 번마다 100여명이 되는 참가자들은 헤밍웨이가 생전 즐겨 찾던 “슬로피 조바”라고 하는 술집에서 선발 경쟁을 벌린다. 이 술집에서 헤밍웨이가 “무기야 잘 있거라”를 집필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가자들은 그처럼 다복솔같은 수염을 기르고 그가 생전에 즐겨 입던 옷차림을 하고 낚시대를 든채, 혹은 렵총을 든채 닮은 꼴에 도전한다. 참가자들은 지어 지글지글 끓는 한여름에도 그가 겨울이면 즐겨입던 굵은 실 스웨터를 입고 땀을 벌벌 흘려가면서까지 자신들이 애대를 하는 위인의 모습에 한결 다가가자고 한다. 느닷없는 비화(秘話)로 우리들을 혼란케하는 헤밍웨이, 그런 헤밍웨이가 아닌, 진정 우리들의 머리와 마음을 선점(先占)했던 그 엘리트적인 모습의 헤밍웨이의 닮은꼴에 다가가고 싶다.   “도라지” 2012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헤밍웨이의 작푸을 각색한 영화 "로인과 바다"주제곡  
253    나의 루실명 <陋室銘> 댓글:  조회:1978  추천:11  2014-09-09
  나의 루실명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는 이렇게 노래했다. '충만한 삶인가? 완벽한 작품인가? 만약 두번째를 선택했다면 어둠 속을 가며 천국을 포기해야 하리라!'   하필이면? 왜? 내가? 천형같은 이 책무를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으로 문학가의 직업륜리를 심각하게 고민한적있다.   그러다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휘둘리우며, 코피를 쏟으며 그와 필로 대치하려는 가상스러운 각오를 은연중 머금게되었다.   이제 단순한 애호와 취미의 발로를 넘어서 세상의 돌팔매질에도 불구하고 외길을 포기하지 않는 구도자의 자세를 몸으로 익혀야 할때다.   김 혁     "도라지" 2008년 3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52    슬로우모션으로 넘는 삶의 릉선 댓글:  조회:3033  추천:11  2014-09-02
​ . 영화평 .   슬로우모션으로 넘는 삶의 릉선 장률의 신작 “경주”   김 혁 (소설가, 영화수집가) ​ 영화 포스터   장률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슬로우 모션이라는 단어를 배우게 됐다. 슬로우 모션(slow motion), 촬영에서 영상의 효과를 실제보다 느린 속도로 재생하는 기법을 말한다. 장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는 그야말로 슬로우 모션을 보는듯한 느림과 여유가 있다. 이번의 신작 “경주”에서도 그 “느림”의 미학은 계속된다. 천천히 우려내는 차, 주인공이 진지하게 한수 펼치는 태극권, 밤길을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 지어 비가 내려 마당에 널어 말리던 차잎을 거두어 들이는 녀주인공의 동작마저 느리다. 그만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신작들속에서 속도를 거부한 감독만의 여유와 개성이 보인다. “경주”는 중국조선족 출신 장률감독의 열번째 작품이다. 서른여덟 살의 데뷔작 단편 “11세”부터, 장편 “당시(唐詩)”, “망종”, “경계”, “중경”, “이리”, “두만강”, “풍경”까지 그는 경계에 선 사람들의 모습을 특유의 영상언어로 그려냈다. 시대와 지역을 관통하는 통찰력과 그만의 영상언어는 세계 3대 영화제를 비롯하여 전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속되는 주목속에 그가 내놓은 이번의 신작 “경주”는 충동적으로 떠난 짧은 경주 려행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인연과 사연들에 대해 보여준 영화이다.       영화의 한 장면   북경대학에서 동북아 정치학을 가르치는 교수 최현은 절친한 선배의 장례식에 참가하려 한국을 찾는다. 장례식을 마친 그는 7년 전 그 죽은 선배와 함께 갔던 차집이 생각나 충동적으로 경주로 향한다. 차집을 찾은 최현은 차집의 주인 공윤희를 만나게 된다. 최현은 자전거를 한 대 빌려서는 경주의 곳곳을 돌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제날 아련한 추억을 다시 불러낸다. 추억을 담고 있는 하나의 매개체 때문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되였고 그 일로 경주에서 뜻깊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영화는 최현의 시선을 통해 흡사 관광가이드처럼 경주를 관광한다. 관객들은 그의 여정을 2시간이 넘게 따라가며 그가 겪게 되는 모든 일에 동참 한다. 영화에는 신민아나 박해일과 같은 한국의 유명 톱스타들이 대거 출연했다. 신민아는 상큼한 이미지로 신세대가 좋아하는 배우요, 박해일은 소설로 알려진 “국화꽃 향기”에서 년상녀와 죽음을 넘어선 열애로 중국인들에게도 익숙한 배우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남선녀같은 배우들을 기용했다고 하여도 영화 “경주”는 관객들이 기대했던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그저 추상적이면서도 평범한 일상의 공간을 담담한 영상언어로 이야기해 나가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번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인연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장감독은 느리고 절제된 시각으로 우리들의 삶을 정의하고 일상의 발견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박한 색조를 지니고 있는 신작을 우리앞에 선물했다.      영화 포스터   절주가 빠르고 컴퓨터그래픽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출연하는 상업영화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에게 있어서 “경주”는 마냥 지겹기만 한 영화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시간30분이라는 단편영화로는 굉장히 긴 시간 내내 느릿느릿 여유로운 호흡으로 진행되는 “경주”, 영화속 주인공의 려정은 1박 2일이라는 짧은 시간임에도 그속에 담겨있는 이야기가 상당히 느린 템포로 전개되기 때문에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정적인 화면, 느린 화면을 통한 관찰자적 시점에서 려행지를 바라보는 과정은 장르적 재미를 원했던 일반 관객들에게는 지루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작품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메타포(은유와 상징)들을 발견해 내고 시시콜콜 보여주는 이러한 정적인 순간을 우리의 익숙한 일상과 대입해서 본다면 신선한 재미를 발견할수 있을것이다   서두름을 삼가하고 감상해 본다면 영화 “경주”의 매력은 다양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에피소트, 우연같지만 자연스러운 상황설정, 순간순간에서 삽입해 넣은 코믹함, 인물들의 작은 심경변화도 놓치지 않는 섬세한 감성 묘사, 절제되고 여백이 풍부한 대사, 아름다운 도시의 경관을 누비면서 보여주는 영상미… 그속에서 짙게 배여나오는 장률감독의 삶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영화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에피소트들로 다양한 관중을 향해 작품을 열어놓았다. 때문에 다양한 추론이 가능할것이다.      1박2일 동안 주인공의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인연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인간의 원초적인 본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 개그로 양념해 펼쳐내고 있는 영화 “경주”는 어찌보면 한 지식인의 일탈이다. 일탈이란 흔히급박한법인데 그 일탈마저도 잔잔하게 담아낸다. 커다란 일탈은 없지만 아슬아슬 일탈을 꿈꾸는 사람의 심리를 담았다고 할까. 북경에서 온 주인공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처럼 특이하고 유별난 행동으로 사람들로부터 핀잔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영화의 전반 흐름처럼 주인공도 역시 그 특유의 느림을 보인다. 선하면서 살짝 멍한 외모에 소처럼 느릿느릿움직이면서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많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주인공의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복잡하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한 캐릭터가 장감독의 메가폰아래에서 립체적으로 그려진것이다.   상당히 느슨한 영화이자 은유가 가득한 영화로서 “경주”는 삶의 불확실성, 인연의 신비함과 소중함, 사랑과 욕정, 분노와 그리움 인간의 본성등에대해 세세하게 렬거하며 다양한 메시지들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 속에 흐르는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의 기류들을 놀랍도록 세밀하게 담아내고 있다.   또한 “경주”는 과거와 현재, 추억과 현실, 오해와 사실등을 버무리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와중에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가미해 영화에 웃음을 준다. 동북아정세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교수에게 똥이라 답변하는 주인공, 주인공을 한국영화 스타로 생각하는 일본아줌마 관광객들, 어설픈 태극권 시범을 보이는 남자, 차집벽에 붙어있는 해학적인 춘화. 여러 개의 비유적 코드를 숨겨두고있지만 장감독은 그속에서 무엇보다 기억과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성기게 엮어서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느린 분위기속에서도 끝없이 자살을 비롯한 죽음을 급박하게 거론한다. 영화는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친한 선배의 죽음, 이어 옛 사랑이 말해주는 락태, 공항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 귀띔을 주던 모녀의 자살, 오토바이를 타고 주인공의 앞을 스치던 폭주족들이 사고, 녀주인공 남편의 자살, 언젠가 찾았던 길녘 점쟁이 할아버지도 죽고 없다... 또 천년도 훨씬 지난 옛 신라 왕족들이 잠들어 있는 왕릉이 이곳 저곳에 널려있는데 영화에서는 그 거대한 무덤 옆에서 련인들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또 그 곁에서 천진란만한 꼬마들과 견학 온 아이들이 즐겁게 그 무슨 유원지처럼 뛰여 놀고 있다. 그들과 왕릉을 배치시키면서 삶과 죽음이 그렇게 언제나 맞닿아 있는 것임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영화는 이렇게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공간 경주에서 엇갈리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열번째 작품을 내놓은 장률감독   “중경”, “두만강”, “이리”, 그리고 “경주”까지 장률 감독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만한 이 네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지명을 작품의 제목으로 정해 달았다. 장률 감독은 어느한 인터뷰에서 "나는 공간에 어떤 느낌이 있어야 이야기가 나온다. 더불어 그 공간에 어울리는 인물도 떠올리게 된다" 라고 이야기를 한적 있다. 그런 의미에서 촬영공간을 경주를 선택한것은 현명해 보인다. 경주는 천년의 력사를 지닌 신라의 수도로 유서깊은 력사적 공간이다. 경주는 도심 한 가운데 왕릉이 있고 그 옆에는 고분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온 도시에 도합 155개의 거대한 릉이 자리잡고 있다고한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 다시 말해 경주를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독특한 공간으로 감독은 설정하고있는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들은 속도를 거부하는 공간, 고대의 흔적이 도시를 점령한 경주라는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여 그에 걸맞는 이야기들을 펼채내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   녀주인공 공윤희의 집은 창을 열면 눈앞에 초록색의 거대한 릉이 보인다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릉이 보여요”라는 녀주인공의 대사는 그녀 역시 죽음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취한 녀주인공은 그 무덤에 엎드려 말한다. "나 들어가도 돼요"  윤희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면서 사는 녀자이다. 홀로 작은 차집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리별의 아픔과 그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은 바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경주와 닮아있다. 창문을 열면 바로 거대한 왕릉이라는 무덤이 보이는 곳에 사는 윤희에게는 죽음이 바로 곁에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것이다. 영화의 곳곳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장감독은 그렇다고 그 죽음을 어둡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그 무슨 하나의 안식처인듯 무덤우에 편하게 엎드리고 무덤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무덤을 가까이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죽음을 좀 더 관조적이고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죽음의 일상화와 성찰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분의 부드러운 릉선처럼 커다란 명제를 절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참 부드럽다.   장률감독의 해학과 영화 도입부의 계기를 보여준 영화속 춘화   “경주”는 호불호가 크게 갈릴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정말 천천히 가는 영화인데 그때문에 이런 스타일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무척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고 상당한 이질감을 느낄수도 있을것이다. 반면 작품속에 담겨져 있는 은유와 상징들을 읽고 해석할수 있는 영화적 년륜과 안목을 지닌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영화가 끝난후에도 진한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작품으로 될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혹자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그저 그런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될 수도 있고 혹자는 한편의 아름다운 영화를 보았다며 훈훈해 질수도 있는 극과 극의 반응을 기대할수 있는 영화, 유려한 영상, 배우들의 호연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가운데 느린 호흡속에 삶에 대한 짙은 련민을 부드럽게 보여준 “경주”이다. "예술세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51    화 두 (話頭) 댓글:  조회:2450  추천:14  2014-08-27
                . 대화체소설 .  話頭 김 혁    우문(愚問): 우리는 누구입니까? 현답(賢答): 구름이 너더냐? 산이 너더냐? 빗줄기가 너더냐? 그것들이 너더냐? 우문: 우리는 누구입니까? 현답: 나는 누구더냐? 내 안에 있는 너가 나더냐? 이 소리를 듣는 너가 나더냐? 우문: ??? ??? ??? ×  ×  ×  ×  ×  ×  ×  ×  ×  ×  ×  ×  ×  ×  ×  ×        햄거거 집- - 우와! 사람이 많네 - 주말도 아닌데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 우리 식보가 언제부터 이렇게 바꼈나. 쌀밥에 된장국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 난 이 햄버거집이 싫은데... - 야 ! 헌데 넌 왜 햄버거하면 왜 이집 밖에 모르냐. 도 있고 도 있고 햄버거 집 쌔고 버렸는데 - 도 있잖아. - 후훗, 너 혹시 이곳 마담네 딸 은근히 좋아하고 있는거나 아냐? - 아니면 손님 소개해주고 수수료 받아 챙기남? - ! 무슨 그렇게 좆나게 삐딱한 소릴 하고 그래. 이 팀장이 고작 그럴 위인으로 보이냐? - 촌뜨기처럼 그저 한곳 밖에 모르니 하는 소리야 - 앤 항상 그래.  pc방 가도 그저 가던 곳밖에 몰라. - 야  우리 가자, 로 가. - 갈려면 니들 끼리 가! 난 그냥 이곳서 먹을래. 솔직히 나 좆나게 지쳐죽겠다. 이제 한발자국도 못가겠어. 그래도 가고프면 니들이 날 업고 가라 - 이구구, 명색이 사내라는게 우리 녀자들보다 못하네 - 야 이눔 지지배들아, 오늘 점심은 내가 쏘는거야. 받아먹는 주제에 웬 불평들이 그리 많어. - 복잡한대로 먹고 보자. 님이 어쩌다 한방 터뜨리는데 - 그럼 그렇게 하지뭐. 이러다 입에 들어온 고기점 놓칠라. - 언녕 그래야지. 엿가락도 길게 빼면 미워지는 법. 자, 그럼 주문들 하시지. 넘 비싼건 빼고. 너부터 말해봐. - 난... 소고기 버거에 치킨에 고구마깡에 야채샐러드에 콜라. 팹시 콜라 아니고 코카콜라 아, 그리고 딸기 아이스크림. - 이 눔 지지배야! 우리가 뭐 좆나게 돈 많은 니들 집처럼 한때먹는데도 진수성찬 차려가며 먹는줄 아냐? 간단히 해. - 워머! 어쩌다 청하면서 이 정도는 돼야지 뭘. - 그래 수준은 돼야지. - 좋아하네. 여자라면 여자시늉이라도 내야지. 남자이상으로 식욕이 좆나게 왕성해 갖고. - 아침 컵라면만 먹었더니만 배가 고파 그런다 왜? - 먹는데라면 꼭 진공청소기 같다니깐. - 안 사줄려면 말어. 우리 끼리 가 먹을래 - 됐다. 거기 앉어. 어쩌겠냐 내가 덫에 치인것으로 생각하고 잡수어줍시사 할테니 마니마니 잡숴봐. - 음 이제 팀장 모습이 보이네. - 넌?  - 난 떡볶이 하나면 돼. 마음 쓸려면 쥬스나 한 컵 더 줘. 당근쥬스! - 이 돈 절약하게 됐다. - 이제 됐지? 나 주문하는 사이 니들은 자리나 찾아봐. - 그래 빨리 가서 많이 챙겨와. - 헌데 사람 정말 많다. 얘. 오늘 프로축구하는 날도 아닌데... - 야 저쪽에 자리 나는거 같다. - 어데? - 저기 봐라 저기. 지금 막 일어서고 있잖니. 보여? - 워매, 거긴 화장실쪽이잖아. - 그렇다고 서서 먹을래? 얼른 따라와 봐. 그렇게 요탈조탈하다간 떡볶이 아니라 죽물도 없다. - 참. 화장실 곁 식사는 나서 처음이다. - 야, 이 지지배들아. 기껏 맡아놨다는 자리가 좆나게 화장실과 이웃이냐? - 말도 마 이런 자리라도 땀나게 겨우 찾은거다. 냄새도 안나는데 뭘. - 그래도 여하튼 화장실 곁이 잖아. 어쩐지 찜찜해 - 아 이 눔 지지배들아. 음식 받지 않고 뭐해? 팔 떨어져. 내가 무슨 니들 사환군 이냐? 좆나게 무거운데 -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다. 소리는 왜 지르구 그래 - 야 조용히 해. 남들이 보는데... - 야 너 말버릇 세탁해야 겠다. 너 그걸 입에 물고 사냐? 말끝마다 좆나게가 뭐냐? - 쟤가 한국드라마 넘 봐서 그래. - 니들 보다 낫다. 좆나게 안되는 서울말에 함경북도 사투리 막 짜장면처럼 비비는 니들보담은 - 워머, 남을 많이 먹는다 불평해 놓고선 앨 좀봐 무슨 햄버거 두개씩이나 먹냐? - 남자잖아 - 어때 맛이 괜찮냐? -응. 덕분에 목구멍 때 벗긴다. - 이곳 떡볶인 넘 매워. 쪽은 달곰새곰 맛있는데. - 헌데 이 눔 지지배들아 다음달 부턴 어쩐다냐? - 뭘? - 우리 춤 련습장하는곳 자리 내라는데 - 왜? 세값 꼭 꼭 내고 했는데 - 그곳 이제 술집 만든다나 - 또 술집이냐. 두집 건너 술집인데 - 이곳 사람들 술집 말고 뭘 차릴줄 아는거 있냐? - 이제 어데가서 그만큼 좋은 자릴 얻남? - 나 몇곳 알아봤는데 다 지금 이곳보다 값이 좆나게 비싸 - 학교자리도 가봤어 - 어느 학교? - 그 전번에 페교된 학교 있잖아. 조선족소학교 - 야 근데 우리 조선족 학교들 왜 그냥 페교가 된다냐? - 야 팀장님이 말씀하시는데 말 가지치지 말어 - 네 잘못했어요. 그냥 말씀하세요 팀장님 - 조선족학교가 자꾸만 페교되는건 머리굵은 어른들 문제고... 헌데 그냥 비워둔 페교라면서 세값은 세값대로 받을려 그러데 - 위치가 좀 좋은곳은 세값이 엄청 비싸고. 그런데다 난 요사이 주머니 사정도 좀... - 야 너 또 나더러 세값 선대하라는건 아니지? 울 아부지도 요사인 장사가 잘 안돼. - 난 더구나 어려워. 전번 돈도 전학하는데 드는 비용이라고 아빠하고 거짓말 했는데. - 너 아버지가 교육자라면서 - 근데는 왜? 그저 교육자가 아니고 박사시다 - 넘 뻐기지마. 나도 교원하는 삼촌 있다. - 옳다 니들 팔뚝 굵다. 울 아부진 개잡는 백정이야. - 개잡든 돼지잡든 돈만 잘 벌면 되지 요즘 세월에 - 보신탕 매일 먹고 좀 좋아서 그러냐 - 그래두 니들이 그럴때면 난 부러워. 박사아빠 아무나 있냐   - 그럼 그 박사아버지가 거짓말박사를 키워냈냐? - 자꾸 토를 달지마. 그거야 다 우리 댄스팀을 위해 그런거지 - 아냐 롱담. 물론 팀장인 내가 나서 해야할 일이지만... 어제 편지가 왔는데 우리 아버지 다쳤대. 고기잡다 허리 다쳤어. 꾼 돈 갚지 못해 배에서 내리지도 못해. 그런 허리로 그냥 잔일이라도 찾아 하셔. 엄마가 번돈도 다 약값으로 들어가는거야... 그리고 고기배 탄 사람들 얼마나 어려운지 니들 모를거야. 그곳 사람들 여기서 나간 사람들을 발샅의 때처럼 알고 행패질 한 대. 사건 니들도 알지? 이곳 사람들 그쪽 사람들 사시미 칼로 막 찔러 죽인거. 그일도 우리 이곳 사람들 좆나게 못살게 구니 막부득이 일어난 거야. 아버진 어쩌는지? 성질 되게 급하신 분이신데. 그 성질 죽이며 비위 맞추려니 오죽하겠냐. - 참 우린 모두 왜 이렇냐? 울 아빠 박사라지만 엄마도 출국해서 돈 벌잖아. 서울 어느 갈비집서 사발씻어 돈 벌어. - 울엄만 어떻고. 니들 엄마 서울이면 울 엄만 대구다. 정말 니 엄마도 대구 쪽이였지. - 그래 아부지구 엄마구 한꺼번에 나갔지. 아버지는 배타고 엄마는 대구에서 일자리 찾구. - 대구 나가는 판이야 대구! 어른들은. - 그래도 넌 돈 부쳐보내는 엄마에 이곳서 보신탕집 차려놓구 돈 잘 버는 아빠에 좋잖냐. 니들집에선 보모까지 두었다면서. - 보모? 흥! - 흥이라니? 왜 그래? 넘 편해서 그러냐 - 솔직히 나 그 여자 죽이고 싶어. 아빠도 죽이고 싶고. - 얘가 왜 이래? - 넘 많이 걷어 먹고 체했냐. - 아빤 엄마한테 미안해. 넘 미안해! - 됐다. 그만 고정해. - 니들은 몰라. 내 맘 어떤지. 내게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는지. - 됐다. 슬픈 얘기라면 그만 스톱. 공연히 앨 울리겠다.  - 니 엄만 나간지 얼마 됐냐? - 6년째다. 6년! - 넌? 니 엄만 더 오래되지? - 비슷해 7년 - 우리 집도 7년. 아부지며 엄마며가 함께 나간지. 내가 유치원 대반 다닐적에 나갔다. 어쩌지? 이제 부모가 어떻게 생겨 먹었던지 가물가물 잊어질가 하는데.  고아가 따로 있냐? 이런게 바로 고아지. - 그래. 나도 전화로 아는 엄만 그저  목소리만 익숙해 - 이제 그만 와달라고 전화로 애걸해도 안 와. 몇해만 더 기다려라. 엄마가 떼돈 벌어가지고 가서 그때 우리 잘살자 그러면서 - 떼돈 벌어오면 또 어쩔건데. 있어야 할때 없는 엄마가 그때가면 소용없을지도 모르는데 - 여하튼 부모들 우리들과 마음의 번지수가 달라 - 그래. 알고도 모를게 우리 부모 맘이야. 세모돌인지? 네모돌인지? - 우리 부모들 모두가 정오표를 내야 돼 - 그러고 보니 우린 다리 부러진 노루 한자리에 모인 거구나 - 재미없어 모든게. 그저 댄스 하나만 빼고. 그왼 아무런 취미도 없네 - 그렇게 좋은 댄스기에 우리 기어이 해 나가야 잖냐 - 그럼 애초처럼 우리 또 강가로 나가 련습해야 하남? - 강은 싫어. 우리가 뭐 잔나비냐? 사람들 구경거리만 돼갖고 - 그럼 어떡해? 댄스콩클도 당금인데 - 좆나게 시끄럽다. - 근데 다른 팀은 어떤 쪽으로 준비한대? - 뭐 또 사랑 아니면 리별이겠지. - 우리가 선제한 춤노래도 그저 그렇잖아 결국 사랑이지 - 야 근데 니들 그 팀 얘기 들어 봤냐? - 무슨 얘기?? - 팀 팀장하고 한 팀 애 좋아하는거 - 그 새침데기 같은 애하고 - 그래 - 하필이면 그애하고 좋아해? 팀장이야 홀리우드의 톰 클로즈처럼 잘 생겼잖아 - 문제는 그게 아니고 - 그게 아니고 뭔데? - 극 비밀인데 니들만이 알어. 나가서 말하면 절대 안돼 - 뭔데? 신비한척하며 그러니?  - 고 새침데기가... - 고 새침데기가? - 톰 클로즈의 애기를 밴거야! - 어머머, 그게 정말이니 - 어른들 말에 얌전한 개 골로 빠진다더니 - 확실해. 둘이 세방까지 맡고 살았다는데 뭐 - 건 나도 알아 - 근데 한심하다. 걔가 몇살인데? 울 하고 동갑아니야 - 아냐 울보다 한살 많을가. - 걔들 부몬 뭘 한대? 애들한테 관심도 없다냐? - 부모 같은 소리 하고 있어 - 출국한지 언젠데 - 어휴 이제 어쩐다냐? 걔들은? - 학교 그만뒀 잖아. 원인은 그거야. - 가도 한참 갔구나. 너무 갔다. 애 - 간거야 그애들 부모지 기실은 - 됐다. 아무리 밑천 안드는 말이라고 남 소리 그만해. 걔들도 우리하고 같은 처지야 - 그래 겨울개구리처럼 이제 입다물어. - 사실 난 걔들이 부러워. - 애개개. 야 넌 또 왜 이래? - 나도 걔들처럼 세집 나와버렸음 좋겠다. - 왜? 너 삼촌 잘 해주잖아. - 잘해는 준다만 아무리 잘한들 부모만큼만 하겠냐. 명색이 교원이랍시고 말끝마다 그저 훈계야. 훈계. 것도 출국한 부모들 들먹이면서. 기실 삼촌네 쓰고사는 집 울 엄마 부쳐보낸 돈으로 산 집이야. 그 덕에 불때는 집 스팀 집으로 바꾸고 신세 고쳤지. 그래도 날 은근히 시끄러워하는 눈치가 보이데. 내가 엄마하고 삼촌 사이에서 비빔밥처럼 비비 우며 살아야할 리유가 뭐야? 엉? 집 들어가기가 정말 좆나게  싫어. 아예 pc방 전세 내고 거기서 살가 보다. 야, 니들중 나하고 함께 세방 맡을애 없냐? - 어머머 세방같은 소리하고 있네 - 어떤 앨 또 미혼모 만들어 볼려고 - 됐다. 시시껄렁한 소리 그만하고 본제로 돌아가   - 그래. 다른 팀 보다 더 나은 곡 선제하자 그게 화제였지. - 그래 우리 춤노래 한 번 바꿔 볼가? - 이제와서? 넘 늦지않을가? - 어떤쪽으로? - 여하튼 좆나게 신나거나 새로운 것이 보이는 쪽으로. 사랑은 이젠 신물나 - 리별은 더 싫은거구 - 야 헌데 . 네가 리별이라도 맞았냐. 왜 그래? 새침깔고 - 아까부터 왜 그렇게 기분이 저기압이냐? 아직도 떡볶이가 맵냐? - 아냐. 기분 깼다면 미안해. 좀 골치거리가 있어 그래 - 무슨 일인데 이 언니가 좀 들어주자. - 그래 같은 팀인데 곤난이 있으면 말하고 살아야지 - 나더러 전학하래 - 누가? - 울 아빠가 - 왜? 원인이 뭔데? - 어디로 전학하는데? - 돈만 대면 좋은 학교 어데라도 갈순 있지만  문제는... - 문제는? - 나더러 한족학교 가래? - 뭐? 박사님이? - 왜 그런다니? 박사님이? - 요즘에야 한족학교 가는 애들 푸술하지 않냐? 뭐 이상한 일이 아니지 - 그래도 민족교육을 한다는 박사님마저 그럼 안되지 - 그래 안되지 - 니들도 나 한어못하는거 알지. 한어 하면 음조 다 틀리는거 - 그래 완전히 음치지 음치(砲調). - 야 접때 중국료리집에 갔을때 일 기억나냐? - 전번 댄스콩클 결전에 올라 한턱 쐈을때 그러냐? - 응 그때 얘가 그 한족 복무원보고 하고 한바탕 한어로 주문했는데 복무원이 뭐랬어? 분명 한어말로 주문했는데 복무원이 알아못듣고 그랬지. - 푸하하하하 - 오호호호호 - 그만해 남은 골치 아파 죽겠는데 니들은 골려나 주고 그러니 - 됐다 됐어. 부모님들 그렇게 잡아 끌면야 별수 없지. 그 문젠 잠시 건너 뛰자. 다시 본제로 돌아가 - 맞아. 본편을 계속 이어보자. 그럼 사랑이나 리별 주제를 빼고 어떤 주제로 춤을 만들어 보겠니 - 그렇찮아도 귀찮아 죽겠는데 사랑이요 리별이요 이런 노랜 관두자. 관둬 - 그래. 지금 사람들 머리 싸매고 덤벼야 하는 주제는 싫어해 - 그럼? - 그 노래 어때? - 어느 노래? 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조금씩 우리를 갈라놓는데 어디서부터인지 무엇 때문인지 작은 너의 손을 잡기도 난 두려워 사랑보다는 먼 우정 보다는 가까운 날 보는 너의 그마음을 이젠 떠나리 - 야 결국은 또 사랑이잖아 - 아냐 우정도 들었어. 요사인 우정에 관한 노래 적어. - 그래 우정이 있어야지. 우정이 있기에 우리 팀 맴버들도 이렇게 똘 똘 뭉쳐 있잖아 - 근데 후훗... 왜 우리 사인 우정만 있고 사랑은 없다냐 - 그야 니들 지지배들이 관중보기 미안하게 생겨서지 - !!! 너 죽을래? - 됐다 고만. 이자 그 말 취소다 취소. 본제로 가자 - 우정이 좋긴한데 새삼스레 걸 쳐드니 좀 촌스러워 보이잖냐 - 그래 좀 그렇다. - 그럼 이건 어떠냐?     지금도 리해할수 없는 얘기로   넌 핑계를 대고 있어 - 아이고 넘 낡은 노래 잖아 - 아냐 가사를 바꿔 하는거야. 출국만 하면 우리 자식같은건 감감 잊어버리는 우리 엄마들께 하는 노래야. 노래말서 라는 단어를 로 바꿔 불러봐 -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마 립장 바꿔 생각을 해봐 엄마가 지금 나라면은 웃을수 있니 혼자 남는 법을 내게 가르쳐 준다며 롱담처럼 진담인듯 건넨 그 한마디 이렇게 쉽게 날 떠날줄은 몰랐어 아무런 준비도 없는 내게 슬픈 사랑을 가르쳐준다며 엄마는 핑계를 대고 있어 - 어때 괜찮지? 이렇게 부르면 공감있을거야. 모든 애들한테 - 괜찮은건 같은데... - 문제는 판권이야 - 그러다 작사 작곡가가 걸고 들면 어쩔래 - 그래. 자기 노래를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혼돈탕으로 만들었다고 - 아, 있다! - 왜 자꾸 소리는 지르구 그래? 간 떨어지겠다. - 입에 묻은 기름이나 씻고 말해요. 팀장님 - ! 어때? 내용도 좋고 요즘 시국에도 딱 맞고 하지 않니? - 맞다. 그 노래 좋을거 같아 태여났지 넌 피곤한 세상에 난 찾았어 또 느꼈어 이대로 세상을 살겠는가 배워야 하는것 꿈, 부모의 꿈을 들어봐 아이들은 웨치고 있어 태양을 찌를듯이 솟은 빌딩 앞만 보고 뛰여가는 아이들 숨가빠 난 지쳤어 세상을 흔들어 TV를 꺼 관심을 꺼 포장된 인생으로 날 관심하는척 하지마 또 다른 꿈에 난 지쳤어 난 나 생긴대로 살아가 남보다 잘 되라 내게 강요하지마 누구나 나름대로 꿈은 소중해 부모들의 꿈을 대신 살아가야 하나 돌아보지마 앞만 보며 가 넘어져도 손 내밀 사람은 없어 메마른 세상 담의 문을 열어 높은 하늘로 날아가 봐 너도 할수 있어 다른 세상을 열어봐 - 좋았어, 이 노래로 하자!!! - 아 배불러 - 어떻게 맛있게들 잡수셨나? 우리 맴버들 - 응. 덕분에 - 잘먹었다 나도. 떡볶이가 좀 매워서 그렇지. - 그럼 오늘은 이만 헤여지자. 랠 또 반급 활동이 있으깐 - 정말 래일 반급 주제활동 있다면서. - 그래 야외로 나간다 그러던데 - 강으로 간대 - 강에 가서 뭐하게? - 야, 넌 우리 반 아니고 물밑천국에서 살았니? 얘는 포치할땐 뭘하고 그래? - 랠이 세계환경일이래. 두만강가에 가서 쓰레기 줏고 그런단다. - 아, 김샌다. 우리가 무슨 환경미화원이냐? - 여하튼 오랜만에 강으로 나가니 기분 과히 나쁘진 않아. - 그럼 랠에 다시 만나. - 굳바이! - 바이!    호텔 로비- "안녕하십니까?" "아 - 금방 론문 발표하신 선생님이시구만요" "네. 론문 이라기 보담은 걱정담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 참 좋은 테마를 쥐셨습니다." "하, 글쎄 시골서 살다보니 느낀바를 그대로 적어 봤을 뿐이지요. "아니요. 정곡을 찌르는 좋은 견해였습니다." "선생님도 론문 준비하셨겠지요" "네 전 이제 두 사람 뒤에 배치 됐어요" "어떤 테마를..." "전 출국자녀문제에 대해 다루어 봤슴다." "그것도 좋은 론문이라 생각되는 데요." "저... 여기서 담배 피워도 괜찮을가요?" "괜찮을거애요. 로비인데요 뭘" "자 그럼 담배 피십쇼." "운남담배네요. 좋은건데... 하지만 전 이런 시골 골연쪽으로 핍니다." "표요? 하, 민족문제를 관심하는 선생이 다르긴 다르네요. 담배도 지방산을 선호합니다그려." "네. 그것 보담은 관내담배는 슴슴해 놔서." "진짜 담배군이시네요" "떼볼려구 여러번 애써봤는데 뜻대로 안되네요" "그럼 저도 한대 빌려 봅시다." "담배맛이 괜찮을겁니다. 그래도 골연맛은 독초쪽으로 피워야" "쿨룩쿨룩... 어허, 것 참 매운데요" "하하 그멋에 피 는것 아니 겠습니까?" "이곳서 담배 하나만은 잘 만든다니깐요." "담배뿐 아니죠. 술도 잘 만들죠" "맞습니다. 술이 참 유해요. 이곳 술이" "담배와 술공장이 이곳 기둥 산업이 아닙니까" "헌데 고작 기둥산업이라는것이 먹고 피우는걸 만드는 것뿐이니" "하, 글쎄 그리고 또 한다는건 유흥업소 뿐이지요" "형세가 준엄해도 술담배에만 빠져 락천가만 불러대니 문제네요. 이것도" "참, 쎄미나에 참가해서 생각되는바가 많슴다." "선생님은 조사도 까근히 하셨더군요." "네 그 조사표에 집계된 수자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구만요" "확실히 문제입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보세요. 요 몇년사이 통계만 봐도 우리 자치주에서 조선족 유치원은 48프로 줄고 완전 소학교수는 29프로 줄고 조선족 재학생수는 42프로나 줄어 들었습니다. 지난 한해에 만도 전국적으로 조선족 학생수가 4만명, 학교가 221개소가 줄었답니다. 이제 이대로 몇해만 지나면 현유의 121개의 조선족학교의 평군학생인수는 30명가량밖에 안된다 그래요. 참으로 곰곰히 생각해보면 우려되는 수자지요. 정말 다리에서 힘이 빠질때가 많습니다. 그뿐입니까 한족학교로 전학하는 애들이 날마다 불고 있지요. 이 일던때 그영향으로 한족학교 가는애들이 많다가 그 후엔 즘즘해 졌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그때보다 엄청 많아 졌습니다. 자치주 수부에서만도 우리 말 버리고 한족학교에 다니는 조선족학생수가 2000명을 넘긴다고 그래요. 산재지역도 아니고 국내유일의 조선족자치주에서도 상당한 수의 사람들가운데서 조선어경시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실로 중시를 일으키지 않을수 없다고 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언어를 경시하니 학교들이 문을 닫을수 밖에 없지않습니까?” "네. 하, 글쎄 저희 모교도 반년전에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자그만 운동장 둘레에 백양이 우거지고 하얀 곱돌(滑石)이 박힌 화단에 백일홍이 곱게 피던 정말 정이 붙는 학교였었는데" "그 시골마다의 아담한 학교들이 이젠 옛말로 사라지네요." "어느 일요일엔가 휴식삼아 자전거타고 찾아가 보니 하, 글쎄 이런 변이라구야. 학교가, 제 모교가 고기 개 사양기지로 변해 버렸더군요. 내가 동년을 보낸 곳이 그렇게 허무하게 변한 꼴을 보니 기분이 참, 뭐라 형언하기 어렵더군요." "학부형들 마다 출국바람에 들떠있고 개인 안일만 생각해 아이 하나만 낳으려 하니 우리 인구가 줄고 따라서 학생인구도 고갈 되고 있지요." "운동대회를 열거나 원족 가보면 알리지요. 일전엔 량부모 모두 등장해서 야단법석이더니 이제 나타나는건 하, 글쎄 쪼그랑 할배 할머니들 밖에 없데요." "많은 부모들은 부모처자를 위하여 자기 한몸을 혹사하는 것으로 가정의 행복을 바꾸어 오지요. 허나 유감스런 것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러한 리산의 삶 때문에 가정파괴, 자녀포기와 같은 가슴아픈 후과도 낳고 있다 그것입니다." "네. 그 무책임한 부모들이 버리는건 단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며 인륜의 가치며를 다 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기에 출국자녀들 문제가 엄중합니다. 출국가족자녀들이 성적이 보편적으로 내려가고 도덕품성이 하강된 것은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요. 부모들은 해외 나가있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자책감을 돈이나 열심히 부쳐 보내는것으로 미봉하려 하지요. 그런데 애들은 애대로 부모고생을 모릅니다. 꿀먹은 뒤 사탕을 먹으니 달지 않은 것처럼 그 행복이 어떻게 오는 건지를 모르는거지요. 그리고 부모가 없는 실락감을 느끼는 애들이 바라는건 단지 돈 뿐이 아니지요. 부모사랑이 결핍된 아이들은 외곬으로 나가기 십상입니다. 부모가 보낸 돈 겁 없이 쓰면서 유희청 아니면 pc방 출입에 나 넋을 잃고 다니지요. 매일 한번씩 다른 골칫거리문제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전번에 어느 학교 애들은 pc방에서 채팅한 돈을 물수 없게 되자 하, 글쎄 돈많은 집 애를 갇우어 놓고 그 집에 돈 내라 인질극까지 벌렸더군요. 그래서 교화소 까지 들어 갔다면서요. 나원 참" "우리 학교 애들입니다. 부끄런 실토정이지만" "거 담배 한번 더 빌립시다. 요" "허허 독해서 피워 내기 어렵다면서요?" "네 웬지 독초생각이 금방 나네요" "저도 형님이 로무를 가고 조카놈 한놈을 대신 맡고 있는데... 사실 말이지 그 놈 다루기가 제 새끼 보다도 어렵습니다. 소경 밥 먹이듯 이건 국이다 이건 나물이다 처처에서 아껴줘도 잘 안되네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매일이고 댄스춤 에만 미쳐 다녀요. 약되라고 말 좀 할라치면 부모없는 자기를 괄시한다고 서러워하고. 참, 속수무책입니다." "하, 글쎄 교육자라 일컫는 우리들이 이러하니 다른 집들이야 여북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이번 연구 쎄미나는 참으로 잘 열린 회의라고 봅니다." "네 참으로 오랜만이죠 이런 쎄미나" "이런 쎄미나는 하루 이틀에 그치지 말고 한 일주일쯤 시간을 푼푼히 잡고서 해결책을 쭈욱- 연구해봐야 하는건데" "이렇게 큰 규모로 조직할려니 주최측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래일엔 머리도 쉬울겸 야외 답사도 조직한다 던데요" "네 명동으로 간다고 일정표에 씌여 있더군요." "좋습니다. 윤동주의 고향. 몇번 가봐도 감회가 그냥 새롭네요. 선생님도 가봤겠지요 물론" "네. 반급 주제모임을 가지면서 학생들 데리고 갔더랬습니다." "시인도 시인이지만 그곳에 가면 요즘엔 또 새로운 감수가 들고 그래요. 그 명동학교의 연혁사를 보면서 말이애요" "규암 김약연 선생이 거의 백년전에 세운 서숙이였지요" "네 맞슴다." "경신년 대토벌때 일본놈들이 불 질러 페허로 만든것을 사생의 힘으로 다시 복구 했다잖아요." "당시 그런 상황에서도 학교에서는 천여명의 애국청년들을 배양해 냈지요" "부끄럽습니다. 선인들에 비하면." "그렇게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식을줄 몰랐던 교육열이,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키는 미풍으로 알려 졌던 우리 민족의 교육열이 왜 이런 쇠퇴일로를 걷게 되였는지??" "명색이 교육자들이라 맡은 소임은 해야겠는데... 요즘 상황으로 보면 이거 하늘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아니라 만점 부끄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 이제 그만 들어가지요. 선생님의 론문차례도 다 되여 오는것 같은데" "론문도 론문이거니와 어떤 실제적인 해결책이 중요합니다. 명확히 못을 쳐야지요." "그럼요!" "후일 다시 만나서 속타는 얘기 나눠 봅시다." "네. 오늘 얘기 좋았습니다. 담배도 잘 피웠구요." "속이 타 들어가는데 그놈 담배라도 피워야 죠"              사우나 안마실-     방송국 스튜디오- 아나운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말마다 여러분과 만나는 프로 시간입니다.         오늘은 민족문제연구실에서 우리 중국조선족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고 계시는 박사님 한분을 모시고 라는 테마를 가지고 대담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열선 전화가 열려 있으니 시청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자 그럼 박사님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박사: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아나운서: 지난 한 세기는 중국조선족에게 있어서 실로 자랑찬 한세기, 빛나는 한세기 였습니다. 하다면 세기교차의 시점에서 새롭게 다가온 한세기 21세기에 우리 민족은 세인앞에 어떤 양상을 펼쳐 보일것인가? 이는 당면 우리 조선족사회의 커다란 관심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우리의 지성인들이 이 문제를 에워싸고 폭넓은 사색과 깊이 있는 연구를 해왔습니다. 실제적인 연구를 해오신 박사님께서도 이면에서 내놓을 고안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 조선족 군체의 형성과정으로부터 이야기해 주십시요. 박사: 네. 우리 조선족 사회에 대한 평가와 그 향후의 진로에 대해 우리 민족이고 보면 저저마다 심려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은 이민, 정착, 형성, 발전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100여년의 시간을 경유하게 되였습니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있어서 엄청난 시련의 극복과정 이였습니다. 이주현장에서 우리는 청나라 봉건통치계급, 군벌정권, 일본제국주의의 착취와 유린을 겪으면서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목숨을 바쳐 반일, 반봉건투쟁에 가입하였고 때문에 중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국 민족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였습니다. 또한 해방후 50년 력사를 통해 우리 민족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하였지요. 이는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는 거지요.  아나운서: 허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진부했던 관념을 타파함과 아울러 우리 중국선족사회는 미증유의 충격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런 변혁의 와중에 불협화음(不協和音)도 뚜렷이 들리게 되는군요. 박사: 네.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발달국가들이 일전에 겪어온 보편적인 과정을 우리는 지금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산업화 초기에 처해 있습니다. 아직은 발전도상의 나라이므로 가난에서 벗어나려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거죠. 따라서 이 와중에 파생되는 부면현상도 크게 눈에 안겨 오는 겁니다. 도시화의 물결, 출국바람에 의해 농촌을 중심으로 하던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10여년전 부터 우리의 농촌인구는 해마다 5프로의 속도로 감소되여 왔는바 동북에서 이미 20여만명이 산해관이남의 도시로 나가 버렸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녀성들이 도시로 나가고  섭외혼인으로 외국에 나가는 류실때문에 총각들이 결혼할수 없는 악상황이 초래 되여 결과 농촌의 인구가 줄어들고 따라서 경작지가 묵어나고 학교가 페교되고 있습니다. 보다싶이 우리는 지금  제2차 실향의 시대라는 무거운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제1차 실향의 시대는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에 있었지요. 그때는 일제의 등살에 견디지 못하여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이국 타향까지 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2세, 3세가 겪는 실향에는 어떤 합리적인 해석을 붙일수 있을가요? 어느 한 학자는 고향을 떠나는데서 현대문명이 시작된다는 주장을 펼친적 있습니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 주장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의 부름에 응하여 고향을 탈출한 것이 한 집단의 문화조락을 초래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민족교육상황의 삭막함이 그 조락을 보여주는 실증입니다. 교육의 실종은 종당에 문화의 소실로 이어지는것입니다. 조그마한 빌미만 있어도 사람들은 도회로, 국외로 머리를 두고 고향을 떠납니다. 이로써 밀항, 위장결혼 같은 불장난이 례상사로 일어나는거죠. 동양전통문화에 물젖어 온 우리들은 고향의식이 굳어질대로 굳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서 고향을 떠나는것처럼 슬픈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정든 땅과 함께 정든 목소리, 정든 웃음들을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정을 인생의 전부처럼 믿고 살아온 소박한 우리들에겐 땅을 떠난다는 것은 인생자체를 잃어버린다는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로무진출상황을 꼼꼼히 검토해 보면 어딘가 편향이 있음을 보아낼수 있어요.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한국 인력시장 진출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니 국내진출에 대한 주의력이 부족하였다는 점입니다. 사실 세계서 가장 큰 로무시장은 바로 중국에 있는것입니다. 건축공사장에서 일하는 건축공과 실내 장식공, 식당과 대형슈퍼, 백화점, 3자기업의 종업원, 가정부... 돈벌이 업종이 맣고도 맣지요. 통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이미 2억이 이러한 제2, 제3산업에로 이전하였는데 장차 1억 8000만이 계속 이런 이전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실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듯 엄청난 신변의 로무시장은 외면하고 어렵고 모험이 뒤따르는 한국나들이에만 열성을 올려왔을가요? 우리의 의식에서 그 뿌리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적은 돈이라도 꾸준히 벌어보려는 인내심이 부족하고 대신 쉽게 단숨에 떼돈만 벌어보려는 허황하고 팽창된 욕망을 랭철하게 반성해보아야 할것입니다. 국내 로무시장으로 진출하는데는 사증발급 등 까다로운 수속도 필요없고 큰 투자도 필요없으며 또 큰 모험도 없습니다. 여기서 수요되는 것은 오직 하나 즉 능력입니다. 상당수의 조선족  로력들은 한국로무길이 막히거나 연해도시의 한국인 회사만 떠나면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합니다. 바로 능력문제입니다. 언어와 식견과 표달능력이 안되고 일을 해제끼는 능력이 안되고 이를 악물고 고생하는 정신이 안되지요. 그들의 우세란 고작 한국어뿐이니 계속 한국로무나 한국기업이라는 테두리속에서 맴돌기 마련이지요. 오늘의 로무시장은 경쟁이 날로 가심화되고 있습니다. 뚝힘만 파는 단순한 렴가 로동력은 필연코 경쟁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선 자신의 의식과 사고방식을 점검해 보면고 자신의 자질을 한층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너넓은 국내국외의 로무시장에서 더 넓은 출로를 개척해 나갈수 있을 것입니다. 아나운서: 이 몇년간 줄곧 열점화제를 빚고 있는 출국붐에 대해서 박사님은 어떻게 보시는 지요? 박사: 랭전시대의 종식(終熄)과 더불어 주변나라들과의 관계의 개선으로 우리는 전보다 국외에 갈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였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 싶이 우리는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행정에 있습니다. 가난하기에 부에 대한 애착이 더 깊습니다. 이는 리해할만한 일입니다. 본토에서의 수입의 몇배, 재간없이도 품팔이로 얼마든지 돈을 벌수 있다는 그 에 부자의 꿈이 현실로 될 가능성이 주어졌습니다. 그러자 모두 그 유혹의 블랙홀(黑洞에) 빠져 든 것입니다. 출국을 위해 계산도 없이 3푼, 5푼 리자를 맡아 가지고 나섭니다. 그렇게 나섰다가 한국사기군의 가짜 려권에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일엽편주에 운명을 걸고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들통이 나 가 되기도 합니다.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겁니다. 이러한 오도된 출국열조가 전염병처럼 우리 민족사회에 만연되여 질서가 파괴되고 온갖 비리가 생출되고 있습니다. 60년대, 70년대에 한국 사람들에게도 우리와 꼭같은 환상이 있었습니다. 이였지요. 끝없이 미국행을 꿈꾸었던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먹는 것만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농촌에서는 도시로 모여들었고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이제 국민소득 1만딸라를 이루어 을 창조해 온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60년대 경제화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제가 보여주다 싶이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왜 돈을 벌며 누구를 위해 돈을 버는가의 문제입니다. 물질적인 부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가족과 가정의 희생 위에서라면 과연 코리안 드림은 의미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아나운서: 잠간만요. 박사님! 여기 시청자로부터 열선전화 한통이 걸려 왔습니다. 받아 보시죠. 시청자: 박사님임둥? 수고하꾸마.         난 농촌에서 소궁둥이나 두드리던 순 농사꾼이꾸마. 이태전에 남들이 하는대루 나두 어선 타고 돈 좀 벌어 볼까해서 로무수속 넣었다가 가짜 송출회사한테 사기 당했으꾸마. 5만소시나 당했단 말임당.         그게 다 5푼 변리로 맡은건데... 지금 정말 물 방법이 없으꾸마. 빚군은 맬 죽인다 살린다지 한국은 나갈 뱅법이 없지... 정말 살 생각이 없슴다.         우린 어쩌문 좋슴둥? 예?? 아나운서: 네. 또 한번 듣게 되는 딱한 사연이구만요.      박사: 모두가 아시다싶이 근년래 대량의 중국조선족공민들이 몰지각한 한국인들에게 거액을 사기 당했습니다.      이 침통한 교훈은 가치판단의 혼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첫단추를 잘못 끼운거와 같지요. 그러니 따라서 문제가 속출하는 겁니다.     이를 우리는 금전만능, 극단적 리기주의 풍조의 필연적인 결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국외에서 로동력이 부족해 외국인력이 수요되는 이상, 인력송출이 우리 조선족의 일대 산업으로 자리를 굳힌 이상, 외국과 우리사이에 엄청난 소득격차가 유지되는 이상 그 유혹은 계속 될 것 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큰 희망사항이라면 정부가 나서서 더 성숙된 정책화 , 제도화로 로무송출문제를 완전히 오픈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초미(焦眉)의 문제는 돈에 대한 집착에 따르는 정신적 피해를 줄이고 나중에는 정신적 가난뱅이로 전락하는 비극을 두절하자는 것입니다. 이에 뒤따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확립과 주체성확립이지요. 주지하다싶이 우리 민족은 강을 건너 온 천입민족 입니다. 하기에 보따리족의 의민의식은 소실되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정책의 혜택으로 주인대접을 받으면서도 심저(心底)에는 과객심리가 무시로 작용하군 하는 것입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오고 날아가고 하는 하루살이 심리가 말이죠. 이러한 이민의식은 중국조선족 사회가 정치 경제 문화 제 분야에서 새롭게 발전하는데 큰 장애 인소로 되고 있습니다. 이민의식과 정착의식의 이중성에서 우왕좌왕하고 잇는 오늘의 우리 민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망향가만 부르고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한국품팔이에 명줄을 달고 있겠습니까? 출국꿈의 부작용은 자기꿈을 잃는다는 데서 깊이 찾을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운명을 기탁한다는것은 바로 자기를 잃는다는 것입니다. 아나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신의 이미지를 창출해 내야 할가요? 박사: 네 좋은 물음입니다.       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좌표를 설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어 하는 말이지요. 우리의 삶의 터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근대사 이후를 봐도 농장지 개척, 항일투쟁, 해방투쟁,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거쳐 우리는 자기의 눈물겨운 희생과 노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고 민족자치구역을 만들고 민족공동체를 영위하여 왔습니다. 이를 쉽게 버린다는 것은 제 눈을 제 손가락으로 찌르는 것이라 말할수 있지요. 우리는 어디까지 왔으며 어데로 가야하는가? 자아확인과 주체성확립의 재정립이 필요한 오늘입니다. 이러한 재 확립으로 새로운 차원에로 자신을 이끌어야 합니다. 미국 이 예측 보도한데 의하면 이제 10여년후면 중국의 국민총생산액은 한국이나 일본을 초월하고 미국을 따라 갈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단지 너무나 락관적인 예측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템포로도 알수 있다싶이 이제 얼마 안 되여 중국의 경제는 일취월장할 것입니다. 그때의 우리가 살고 있을 이 땅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요. 우리 주변이 점차 고소득으로 발전해 외국품팔이가 격에 맞지 않을때 그제야 이곳에 돌아와 뭔가 이룩할려 든다면 남의 꽁무늬를 따르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겁니다. 이제 10년 20년후의 밝은 전망, 이 앞날을 위해서도 우리는 지금을 허타이 버릴수 없는 것입니다. 뜀틀을 넘기 위해 준비하는 선수 같은 벼린 자세가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입니다. 아나운서: 네.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우리 조선족문제 연구에 주력하고 게시는 박사님을 모시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확립과 향후 나아갈 길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나누어 봤습니다. 박사님이 피력하시다 싶이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우리 민족의 총명과 슬기를 되살리며 목전의 진통을 이겨내고 세인 앞에 뿌듯이 나설 그날의 밝은 조선족의 군체형상을 기대해 보면서 오늘 프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좋은 말씀 주신 박사님 감사합니다.                강 가 -   ×  ×  ×  ×  ×  ×  ×  ×  ×  ×  ×  ×  ×  ×  ×  × 우문: 우리는 누구입니까? 현답: 구름이 너더냐? 산이 너더냐? 빗줄기가 너더냐? 그것들이 너더냐? 우문: 우리는 누구입니까? 현답: 나는 누구더냐? 내 안에 있는 너가 나더냐? 이 소리를 듣는 너가 나더냐? 우문: 우리는 누구입니까? 현답: 계속 정진해라. 갈 길이 멀고나 ... ... ...  ♡    "장백산" 1998년 5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50    스크린, 안중근을 이야기하다 댓글:  조회:4280  추천:13  2014-08-22
. 칼럼 .   스크린, 안중근을 이야기하다 김 혁 1 할빈역에서 민족침탈의 괴수 이또 히로부미를 응징한 민족영웅 안중근에 대해서 우리는 지난 1970년대말 조선영화를 통해서 비로서 접했다. 1979년에 나온 조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백인준이 씨나리오를 쓰고 인민배우 출신의 엄길선이 연출, 조선영화촬영소에서 만든 2부작 항일혁명예술영화이다.         영화는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재연하면서 한개인의 문제와 력사적 사건을 따로 떼여놓지 않고, 주인공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현실문제까지 련관지어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조선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유명배우가 총출연하고 막대한 제작비와 수천명의 조연배우들이 동원, 특히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력사의 현장인 중국 할빈에서 촬영해 사실성이 뛰여나는 등 조선영화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에서 근자에 내놓은 안중근 관련영화로는 “도마 안중근”이다. 안중근의 세례명 “도마”로 이름한 영화는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 감옥에 수감된 뒤 수사과정에서 검찰관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안중근이 왼손 약지를 잘라 “단지동맹”을 뭇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된 과정을 년대순으로 보여주면서 의협심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안중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낸다. 한국 개그맨 출신 MC인 서세원이 씨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을 맡았고 유오성, 고두심등 유명배우들이 출연, 역시 중국에서 현지 촬영을 했다.   민족독립운동의 화신격인 안중근의 력사적인 의거를 스크린에 올리는 작업은 그 오랜 이전부터 시작됐다. 일찍 1928년에 벌써 안중근을 소재로 한 영화 “애국혼”이 제작되였다. “한국 항일영화의 효시”로 지칭되는 영화 “애국혼”은 한국 영화인들이 중국에서 제작, 상영했다. 당시 일제의 영화 검열이 강화되자 정기탁등 한국의 영화인들이 중국의 상해로 이주해 영화운동을 전개했는데 “애국혼”이 그 작품 가운데의 하나다. 전창근이 각본을 쓰고 정기탁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안의사의 민족혼을 생생하게 묘사해 반일감정이 높아가던 당시 중국 관객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1946년 안중근의 일대기를 서술한 전기영화 “안중근 사기”가 상영되였다. 한국이 국권을 회복한 뒤 처음 선보인 영화는 애국지사 안중근의 의거를 소재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우리 민족이 그의 독립정신을 회상하며 민족재건의 동력을 얻고자 했다. 그 뒤로도1959년에는 “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 1972년에는 “의사 안중근” 을 제작, 대아의 삶을 살다 간 민족영웅의 일대기는 영화인들이 다투어 제작한 소재였다. 2 하지만 안중근 소재의 영화들은 그 애초의 훌륭한 시도에 반하여 관객들의 실망을 자아낸 경우가 많다. 조선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경우 영화의 진행은 설명이 많고 평면적이다. 중요한 대목에서 반드시 주인공의 대사나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육과 선전의 효과를 강조하고 극대화하고있는데 이는 영화의 전반 흐름을 흐트러뜨리고 몰입도를 방애한다.     조선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우), 한국영화 "도마 안중근"(아래)의 안중근 의거장면   한국의 “도마 안중근”은 더구나 관객들로부터 물의를 빚었다. 영웅 안중근을 그려내려 했으나 안중근의 인간적인 고민이나 풍모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오로지 인물의 신화화에만 골몰한다. 게다가 독립투사가 쌍권총을 쏘며 애써 쿨한 모습을 짓는 향항 갱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안중근을 인격적인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액션 영웅처럼 천박하게 부각한데서 실존 인물의 사실감과 영화의 격은 휘발되고 말았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민족이 애대하는 영웅을 소재로한 작품이라 그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라 할가? 상기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로서는 락공 (落空)의 실패작으로 보면서 커다란 유감을 토파하고 있다.   3 중국의 장예모 감독이 안중근 의사를 조명하는 한·중합작영화의 메가폰을 잡는다고한다. 한·중 친선협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장감독이 메가폰을 잡게 될 영화의 대본은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단국대 석좌교수 김영호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쓰고 한·중 량국의 톱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하는 합작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한다. 세계 무대에서 지명도가 높은 장감독에 의해 영화가 만들어지면 안중근 의사의 삶과 의거의 정당성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될 전망이라고 한국의 매체는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지난 1월 안의사의 의거 장소인 할빈역에 표지석을 설치해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대일 력사투쟁에 한국의 공조를 희망하는 중국이 재빨리 안중근 기념관 개관으로 화답한 시점에서 영화는 “안중근 의사의 민족애와 동양평화 사상을 전해가며”, 영화를 통해 “한·중 우호 협력을 강화하하는데 한몫 할것이라”고 매체들은 분석하고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5세대 감독인 장예모는 소개가 필요없는 영화계의 거장이다.  장감독은 동방문화의 진수와 정서를 깨쳐 알고 자신의 모든 작품에 거쳐 늘 소재로 삼아왔다. 지난 1998년 중국 자금성에서 “서구문화가 낳은 무대예술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오페라“투란도트”를 무대에 올려 그 특유의 감수성과 해석으로 격찬을 받았듯이 해외와 손잡은 풍부한 경험도 갖고있다. 만약 장예모가 메가폰을 잡는다면 거장의 손끝에서 한민족 영웅의 양상이 어떻게 부각될지 찬반의 론란가운데 관객들의 기대치는 증폭되고 있다. 한·중·일 삼국의 역학관계에 안중근 의사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있는 시점에서 그를 소재로 중국과 한국 나아가 아시아가 공감, 공조의 뉴대로 삼을수 있는 좋은 영화가 나오기를 바란다.     2014년 3월 30일 “청우재”에서    "문화시대" 2014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49    북간도의 하늘에 비낀 “반달” 댓글:  조회:4958  추천:13  2014-08-18
  . 장편력사기행  .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물 (련재15)   김 혁    ​ 북간도의 하늘에 비낀 “반달”   ​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 반짝 비추이는 건 새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   “반달”, 우리 겨레들이 너무나 익숙히 알고있고 몇 세대를 거쳐 동년시절의 1순위로 자리매김되였던 명동요이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해마다 새해의 벽두가 열리면 집들마다에서 울려나오는 “설날” 역시 이름난 동요이다. 이러한 귀에 쟁쟁한 명곡을 작사, 작곡한 이가 윤극영이다. 윤극영   겨레의 아동음악가 윤극영선생은 룡정과 떼여 놓을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윤극영은1903년 9월 6일 서울 소격동에서 아버지 윤정구(尹政求)와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 沈氏)사이에 1남 3녀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4살 때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며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웠다. 관아의 하급관리였던 아버지 뜻에 따라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1921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류학을 떠났다. 도꾜음악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 시절 친척 아저씨 댁인 하숙집에서 작곡가 홍난파를 만나기도 했다. 그가 동요에 관심을 두게 된데는 일화가 있다. 1923년 어느 날,  윤극영의 도꾜 하숙집으로 체격이 건장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가 바로 유명 아동문학가 방정환이였다. “이보게 미래의 작곡가 윤극영님, 장차 민족을 이끌어 갈 우리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노래가 없네. 자신만을 위해 음악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드세나”라고 방정환은 열기에 넘쳐 권장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1일 방정환과 윤극영 등 지기들은 “색동회”를 발족시켰다. “색동회”는 어린이들에게 순 우리말과 노래로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일깨워주려는 취지의 동호회였다. 그후로 윤극영은 조선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 노래뿐인 시대에서 적극적으로 우리말 동요 창작을 시도하였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민족동요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는 “반달”에 따른 일화가 많다. 1923년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었고 그 란장에 동포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 당하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본에서 더 이상 배길수 없게 된 윤극영은 귀국을 했다. 아버지는 윤극영이 귀가하자 뒤뜰에 음악을 할수 있는 자그마한 별채를 지어주었다.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이름의 그곳에서 집에 모여드는 어린이들을 모아 윤극영은 “달리아회”라는 합창단을 만들었다.  “달리아회”는 착실하게 동요 보급단체의 구실을 했다. 그 “달리아회”를 위해 처음으로 지은 곡이 바로 “설날”이라는 노래였다. 1924년 9월 타향으로 출가한 윤극영의 맏누이가 별세해 집안이 슬픔에 쌓여 있었다. 윤극영이 5살 때 시집간 맏누이는 고생만 하다 30대의 젊음에 세상을 등졌다.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니 하얀 조각달이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대낮에 달을 보니 더 슬퍼져 시상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낮에 뜬 외로운 반달이 죽은 누이의 슬픔에 우리 민족이 처한 슬픔까지 떠올려 주었다. 그렇게 지은 곡이 바로 명동요 “반달”이였다. “반달”은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동경과 그것을 념원하는 조선민족의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고있다. 노래말중의 “새별의 등대”, “길을 찾아라”등 구절들은 일제의 시선을 피해 토로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며 부정인 동시에 행복한 생활에 대한 절절한 갈망이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창가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이런 시기에 윤극영을 비롯한 민족 음악가들은 창가와 동요라는 새로운 음악쟝르의 창작을 통하여 애국, 애족 사상을 반영하였으며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과 동경을 걸었다. 윤극영은 등사판을 구해 지은 노래를 몰래 찍어 학교 선생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설날” “반달”과 함께 뒤에 나온 “할미꽃” “따오기” “고드름”, “소금쟁이” 등을 비밀리에 보급했는데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우리말 노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했지만 ‘설날”, “반달”과 같은 노래들이 한반도를 넘어 일본, 중국에까지 알려지자 총독부에서도하는수없이 해제령을 내리고 부르도록 했다. 윤극영이 중국으로 건너와 할빈에 있을때 일이다. 할빈에서 아시아 전역의 일본화를 지원키 위한 일본 연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일본의 한 가수가 “반달”을 부르고는 무대우에서 "이 곡은 조선인이 작곡했다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일본인의 작곡이요."라고 어처구니없는 설명을 했다.  마침 이 자리에 있던 윤극영과 그의 동료들이 벌떡 일어나 항의를 했다. 그날 밤 일본인은 몰래 윤극영의 집으로 찾아와 "작곡자가 이런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하며 사과를 했다고한다. 1926년 윤극영은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동요집과 레코드 집을 펴냈다. 동요집에는 “반달”·”설날”·”꾀꼬리”·”귀뚜라미”·”두루미”·”꼬부랑할머니”·”흐르는 시내”·”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 등 모두 10편의 동요가 실렸다. 이는 한국의 “최초의 창작동요곡집”으로 된다. “반달”은 또 윤극영의 최초의 동요극 “파랑새를 찾아서”의 주제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반달”은 또 조선에서 최초로 방송전파를 타기도 했다. 1924년 12월 17일 오후 1시. 영화를 상영하기엔 한참 이른 시각인데도 경성 관철동의 영화관 “우미관(優美館)”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무선전화 공개방송시험, 즉 라디오 시험방송을 들어보려고 온 사람들이였다. 수표동 조선일보사의 기와집 사옥에서 쏘아 올린 전파가 우미관 무대 대형수신기의 나팔에서 흘러나왔다.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조선말이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것 자체가 처음이였다. 3일간 이어진 시험방송의 프로그램은 다채로웠다. 이동백(李東伯) 송만갑, 박녹주등 판소리 명창들의 노래와 리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국립국악원의 전신) 명수들의 거문고, 퉁소, 해금 등 연주가 방송됐다. 동요 작곡작사가이자 성악가였던 21세 청년음악가 윤극영이 마이크 앞에서 “반달”을 불렀고, 26세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도 조선일보 전파를 탔다. (김명환.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조선일보” 2011년 3월 8일) ​ 1926년 발간된 뒤 동요집 “반달”은 류실되여 그 원본을 찾을길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 근대서지학회가 2012년에 일본에서 그 원본을 찾았다. 가로 19센티메터 세로 26센치메터 크기로 22쪽으로 돼있는 그 동요집은 가위에 쪽배를 타고 나팔을 부는 날개 달린 천사가 그려져있고 속지 첫 장에는 “도라간(돌아간) 누이동생 덕윤이 영전에”라고 적혀 있었다. 학자들은 “동요곡집이 일본에서 발견된것은 출간 당시 일본내에서도 ‘반달’이 인기가 높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 일본에서 발견된 “반달”의 원본 동요집   윤극영의  룡정행차는 친척 윤익선의 영향이 컸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을 지낸 윤익선은 룡정에서 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육인으로 활동하였다. 간도교육협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당시 간도 지역 교육계의 중심 인물이였다. 그가 윤극영의 간도행의 차비도 대주었다. 한편 윤극영의 룡정행차의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드라마틱한 로맨스와 관련되여 있다. 윤극영은16살에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해 딸까지 두었다. 1925년에 “달리아회”에서 그가 작곡한 창가극 “파랑새를 찾아서”를 공연할 때 피아노 반주를 맡은 오인경과 처음 만났다. 녀 피아니스트와 함께 서울 공연을 하고 개성에등지를 돌며 공연할 때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였다. 그녀와 함께 간도 룡정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던것이다.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가서 다시 청진에서 회령까지 기차를 타고 이틀만에 국경지대인 상상봉에 도착했다. 둘은 걸어서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추위를 가르며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도착했을때 어느 려염집에서인가 윤극영의 “반달”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아, 간도땅에서도 ‘반달’을 들을수 있다니. 노래는 나보다 먼저 여기에 왔구나” 무량한 감개가 끓어올라 두사람은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 윤극영은 룡정의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녀고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윤익선의 소개로 윤극영은 룡정동흥중학교(지금의 룡정3중학)를 찾았다. 교장이 반갑게 맞으며 교사자리를 내주었다. ​ ​ 광명학교 옛터 표지석앞에서의 필자  첫날 동흥중학의 교단에 섰을때 윤극영은 학생들에게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불러 주었다. 그러자 누군가 “선생님, 그거 말고 ‘반달’을 불러주세요”하고 소리질렀다. 박수소리가 터져오르며 학생들은 한결같이 “반달”을 주문했다. “반달”은 이미 간도지역에서도 익숙히 알려지고 널리 불려진 노래였던것이다. 그렇게 윤극영의 룡정생활은 시작되였다. 하지만 며칠후의 어느날 새벽 경찰이 윤극영의 거처에 들이닥쳤다. 윤극영은 룡정의 경찰서에 련행되였다. 오인경이 집에 알리지않고 가만히 서울을 떠났기에 그의 가족은 윤극영이 그녀를 랍치한것으로 알고 신고했던것이다. 오인경의 해석으로 경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에서 온 인경의 오빠가 그녀를 서울로 끌고 가버렸다. 홀로 간도땅에 남은 윤극영이였지만 그는 음악을 버리지 않았다. 1927년에 윤극영은 룡정에서 음악교학을 하는 한편 음악에 뜻이 많는 이들과 손잡고”예우사(艺友社)”를 창립했다. “예우사”는 중소학교 음악교원들을 묶어서 음악창작과 평론활동도 벌리였으며 잡지 “예우(艺友)“도 등사본으로 발간하여 민족음악과 가요창작에서의 넓은 길을 열어놓았다. 이시기에”제비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외나무다리” 등 많은 동요를 작곡하였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3- “예술사”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편. 민족출판사 1994년)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룡정풍경가”도 바로”예우사”의 영향으로 창작되였다. 그 무렵 오인경이 서울에서 다시 윤극영을 찾아왔다. 룡정 광명유치원의 보모로 일자리를 찾고 윤극영의 음악활동을 위해 내조를 해주었다. ​ ​ 20년대 음악수업을 보고있는 룡정의 녀학생들 ​ 1936년1월 윤극영은 룡정을 떠나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뮤지컬 연출가로 활동했다. 도꾜의 “무랑루즈”라는 극장에서 가수로도 활동했다. 멀리 룡정에 있는 안해 오인경을 생각하며 “두만강의 노래”라는 련가를 지어 불렀는데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요미우리”신문에서도 “한국 예술인의 동경진출”이라는 제목아래 그와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특집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친지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얼마후 윤극영은 곧 무원조한 처경이 되고 말았다. 어느날 히비야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곁에 있던 쓰레기통으로부터 신문 한 장이 바람에 말려 튀여나왔다. 무심하게 그 신문을 보았는데 “조선의 대표적인 민요를 경성에서 중계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읽어보니 그 민요속에는 “반달”등 자신의 작품이 다섯곡 들어 있었다. 윤극영은 그 길로 방송국으로 달려가 자신이 작곡자라며 이름을 밝히고 15원의 곡 사용료를 받았다. 그 돈으로 당장 급박한 처지를 해결했다. 1940년 윤극영은 더 큰 음악의 꿈을 이루기 위해 흑룡강성 할빈으로 향했다. 할빈 중심가의 건물의 2층을 빌리고 10여명의 로씨야 예인들과 통역, 매니저등을 모집했다. 이렇게 “할빈 예술단”이 탄생되였다. 윤극영은 예술단을 거느리고 중국의 동북지역을 돌며 공연한다음 다시 서울에 가서 공연할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일년도 못되여 예술단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윤극영은 그동안 때가 묻은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간장, 된장을 만드는 공장을 차리기도 했고 역마차 몇대를 사서 운수업에도 종사하였다. 풍운의 조화는 가늠할수 없었다. 생계를 위해 일본이 관여하는 협회에 가입해 아쉬운 얼룩을 남겼던 윤극영은1946년 룡정에서 투쟁을 받고 사형에 언도되였다. 사형직전까지 갔던 고비에 그가 유명한 작곡가임을 알아본 한 공산당간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그가 바로 당시 중공 연길현위원회 부서기, 연길현 현장이였던 문정일(文正一) 이였다.   사형수들 명단을 하나하나 체크하여 싸인을 하던 중 문정일은 윤극영이라는 이름 석자에 놀란 기색을 지었다.  “이 사람은 음악가가 아니요?” 문정일은 그가 바로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이 맞음을 확인하고 나서 한동안 생각을 더듬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죽이지 마시오. 그 음악재질이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소. 이러한 인재들은 머리를 개조해서 유용하게 써야 하오.”라고 하였다. 문정일의 그 한마디에 윤극영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헤여 나올수 있었다. “윤극영의 친일”에 대한 론의는 그동안 갑론을박으로 오래동안 이어졌다. 룡정에서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에 가입·활동한 전력 때문에 문인과 연구자들로부터 “친일파”로 지목되기도 했고 “불충분한 고증과 일방적인 시각에 의해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매도당한 면이 없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잠시 침략전쟁의 부역자로 동원됐지만 일제와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각도 있다. 오족협화회에 들어가 일했던것은 윤극영에게는 평생의 상처와 고통으로 남아있었음이 틀림없다. 지금도 겨레들은 윤극영의 력사적 오점을 감안해내면서 그가  창작한 “반달”, ”설날”, “할미꽃”과 같은 동요를 애창하고 있고 거의 거부감 없이 그를 아동음악의 대가로, 유명음악가로 추앙함은 그의 음악에 대한 공적과 기여이기 때문일것이다. 3년형 선고를 받고 연길감옥에서 복역했다. 마침 감옥의 한 간수가 동흥학교의 제자였는데 그의 도움으로 보석되였고1947년서울로 돌아갔다. 3.8선을 넘다가 또 한번 붙잡혔다 도망하는구사일생의 고비를 겪으면서 도착한 한국에서는 또”6.25”전쟁을 겪었다. 부산으로 피난한 윤극영은 당금 입에 풀칠할 돈이 없어 은행에 찾아가 돈을 빌었다. 키는 크지만 피골이 상접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빈 털털이 윤극영이 누구인지 모른 은행지점장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락망하여 은행문을 나서던 윤극영은 다시 은행 문을 열고 지점장을 찾아갔다. "지점장님! 혹시 반달을 아십니까?" "반달이라니요?" "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라는 반달이라는 동요가 있지 않소?" "네, 알지요." "바로 내가 ‘반달’을 만든 윤극영이라는 사람이요." "아, 선생님!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야 무엇이 있겠오. 그런데 지점장! 나 한푼도 없으니, 그 '반달'을 저당 잡혀 돈 좀 꾸어 주시요." 윤극영은 이렇게 자신의 작품때문에 생활의 질고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리재철. “동요 ‘반달’에 숨어있는 시대적 의미”) 친구의 도움으로 포목점을 차려 안정을 되찾은 뒤 다시 동요 작곡에 매달렸다. 윤석중 작사로 된 “어린이날 노래”를 작곡하는 등 2년여 동안 에 무려 1백곡의 동요를 지었다. 그후 윤극영은 색동회를 다시 만들고 방정환 선생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며 여생을 어린이를 위한 사업에 바쳤다. ​ ​ ​만년의 윤극영 ​ 경기 양평 학곡마을에 건립된 “반달” 동요비   ​ 언제나 해맑고 순수해 수줍은 아이 같은 동심으로 6백여 편이 넘는 동요를 남긴 윤극영은1988년 11월 15일 향년 86세의 나이로 “하얀 쪽배기”를 타고 “서쪽나라’로 떠났다. 일제 암흑기에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어린문화 보급에 평생을 바쳤던 그는 한국에서 “홍난파 박태준과 함께 어린이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 받고 있다”. 1968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어린이대공원에 섰다. 모든 동심을 부드럽게 사로잡은 “반달”은 중국에서도 큰 애대를 받았다. 1950년대 초 북경에서 김정평과 김철남 부자간이“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하여 레코드로 취입하였다. “반달”은 그후 중국전역에서 수차 재판된 “외국가요 200수”에 수록되였다. 1979년 “반달”은 “하얀쪽배 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윤극영은 룡정에서 선후로 15년의 시간을 지냈다. 그동안의 음악적공적에 대해 음악계는 높이 긍정하고있다. 1926년 윤극영의 중국이주는 중국조선족의 동요창작을 시작해 놓은데 그 음악사적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때로부터 조선민족학교들의 노래교재는 학생들의 심리특점에 부합되는 방향에로 나갔는바 저급학년 어린이들에게는 “짝짜꿍’(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산토끼”(리일래 작곡), “봄나들이”(윤석중 작사, 권태호 작곡)등을, 중급학년과 상금학년 학생들에게는 “고향의 봄”(리원수 작사, 홍란파 작곡), “고드름”(유지영 작사, 윤극영 작곡)등을 교재의 노래로 선택하였다.” (김덕균 외 “조선민족예술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2년 제42~43페지) “전후 15년이나 중국에 있으면서 그는 조선민족 음악교육에 심형을 기울이였고 많은 동요곡을 작곡하여 조선민족아동음악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20세기 중국조선족 음악문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편. 민족출판사 2005년) 이즈러졌다 둥글어지며 그 빛을 이루어 가는 달처럼 “반달”은 영욕과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룡정사람들이 애창하고 전 민족이 애창하는 동요로 불려지고있다.   "장백산" 2014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48    환형산(環形山)에 내리는 비 댓글:  조회:2468  추천:10  2014-08-17
  . 중편소설 . 환형산(環形山)에 내리는 비                       김 혁        옥탑방(閣樓)에서는 아파트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높은 곳에서 보이는 인간들은 모두 바닥에 납작하게 눌려서, 마치 게처럼 땅 우를 기여 다니고 있다.   광장의 모습은 컴퓨터를 뜯어보면 뒷면에 부착 된 전자기판의 회로처럼 오밀조밀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공터는 블록타일로 깔려 있고 변두리 네 귀에 나트륨 등이 초병처럼 서있다.   광장 가녁에 벤치가 놓여 있고 그 뒤에 단을 지어 만든 화단에는 그냥 탈없이 자라는 코스모스 다리아 따위를 심었다. 때로 바람이 바뀌면 환기용 창으로 아릿한 꽃 냄새가 흘러든다.        한쪽 구석의 놀이터에는 철봉대 몇 개가 부설 되여 있고 그네도 매여 있다.   옥탑방은 흡사 대극장의 2층에 설치된 호화좌석과도 같다. 좋은 가시도(可視度)의 위치에서 아파트광장의 구석구석을 부감(俯瞰)할 수 있는 것이다.                                            커트  (鏡 頭): 1   소년은 초롱 속의 한 마리 부리 붉은 새처럼 옥탑방에만 붙박여 있다.   아니, 갇혀있다.   기다리던 여름방학 이였지만 소년은 들큼한 환상으로 기다렸던 방학을 나름대로 지내지 못하고 있다. 죄다 이모 때문이다. 소년의 학습성적이 추락하는 승강기 꼴이니 이 방학엔 옴쭉 말고 죽쳐 앉아 성적제고에 전념하란다. 그러니 실제 소년은 본의 아니게 감금 된 셈이다. 옥탑방에서 텔레비전은 아예 볼 수 없고  컴퓨터를 놀려해도 이모가 굳이 우체국으로 찾아가 인터넷접속을 끊어 버렸다. 친 엄마는 출국해 버리고 이모에게 얹혀 사는 신세니 소년은 응석 같은 것은 물론 거부 같은 것은 더구나 몰랐다. 감금이 싫어진 소년이 하는 짓거리란, 옥탑방의 창으로 아파트 광장을 내려다보는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엔 가부터 갑작스레 소년은 옥탑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옥사(獄舍)같아 뵈던 옥탑방이 사물사물 좋아진 것은 소년이 이불장 위에서 소학시절 심취 되였던 그것을 뒤져 낸 다음부터였다.   그것은 천문망원경 이였다. 《매 눈(鷹眼)》이라는 상표딱지가 붙여진 천문망원경. 배률이 아주 높아 별자리들을 확인해  볼 수 있고 달 표면에 웅기중기 솟은 환형 산까지도 볼 수 있는 망원경이다. 소학시절 소년은 학교 천문애호가서클의 책임 이였고  천문망원경의 사용권과 보관은 소년에게 주어 졌었다. 그러다 소년이 다니던 조선족 소학교는 어느 날엔 가 번개라도 맞은 듯이 갑작스레 폐교 되였고 그 아수라장에서 누가 천문망원경에 대해 구태여 따져 묻지도 않았기에 망원경은 소년에게 문을 닫은 모교에 대한 아픈 기억과 함께 남아 있게 되였다.   ... 달에는 지구와 달리 대기가 없다. 공기 층이 없기 때문에 우주에서 떠돌던 암석이나 먼지들이 떨어지게 되면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크고 작은 분화구들이 많이 생기며 환형 산(環形山)이 형성되게 된다. 달에서 매우 흔한 지형은 환형 산일 것이다. 달은 아주 오래 전에 류성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류성이 달 속으로 파고들면서 표면을 파헤치고 구덩이를 만들어내었다. 실제로 반반한 모래에 돌멩이를 세게 던지면 이와 비슷한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원리와 같다. 이렇게 생성된 분화구들은 평평한 바닥과 뾰족하고 둥근 테두리를 갖고 있으며 중앙에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달 표면에는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가 수십 개나 들어갈 수 있는 크기(60-300km)의 분화구들이 234개나 있다고 한다...   맨 처음 망원경으로 무대 배경처럼 코앞에 다가온 환형 산을 보면서 가슴 벌렁 이였던 그 날의 감수를 소년은 내내 잊지 못해 한다. 그날의 격정은 그의 동년의 메모장에 커다란 획을 그으며 남아 있다. 그후로 천문서클에 누구보다 열성을 보였고 하면서 알둥말둥한 천문상식을 죽어라 외우기도 했다.   허나 요즘 들어 소년은 천문망원경으로 달을 보지 않는다.   하늘을 보지 않는다.   천문망원경으로 소년은 ...   사람을 본다.   《매 눈》표 천문망원경으로 보면 멀리 산의 꼭뒤, 건물들의 이마, 안테나들의 촉수들이 손에 잡힐 듯이 잡혀 온다. 그러니 가까이 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더 극명하게 보인다.   광장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은 몇 명 안 된다. 일요일마다 광장에서 롱구를 치고있는 23번 유니폼(先手服)을 입은 자기또래의 사내애며, 저녁 무렵이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발을 간댕이는 소녀며...   그리고... 아파트 광장 건너 4동6층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샅샅이 드러난다. 매 호의 창문마다는 하나의 텔레비전 형광 막으로 되여 자신들의 모습을 리허설(試演)을 앞둔 극단 마냥 소년 앞에 펼쳐 보인다.    4동1단원6층에는 지지리 늙은 할망구가 살고 있다.   몸이 불편 한 할망구는 휠체어에 앉아 있다.  낯빛이 노란 할머니는 베란다에 앉아 매일이고 그렇게 하염없이 밖을 내다본다. 그런 할머니의 품에는 늘 고양이가 안겨져 있다. 포만감 서린 고양이의 얼굴과 주름이 자글자글 한 무표정한 할머니의 얼굴이 사뭇 대조적이다.    4동2단원6층에서는 매일이고 마작 판이 벌어진다.   술 먹은 터에 얼굴이 잘 구운 찐빵처럼 불그레해진, 만족스런 표정의 나그네들이 저 저마다 담배 대를 입 귀에 지긋이 물고 피여 오르는 연기에 실눈을 좁힌 채 부지런히 마작 쪽을 쌓고 헤치고 섞는다.   4동3단원6층에는 렵기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떤 녀자가 홀로 살고 있다.   소년에게 망원경으로 천체가 아닌 사람을 보려는 념두가 생긴 것은 모두다 이 녀자 때문이다.   달빛이 은으로 칠한 풍경을 토하던 어느 밤이였다.   그날 밤, 아래층에서 울리는 드라마의 주제곡 소리를 듣다말고 소년은 망원경으로 화단의 꽃을 보고 있었다. 광장에 불 밝혀 진 나트륨 등의 빛을 받아 꽃은 부옇게 빛나고 있다. 지나치게 클로즈업(特習) 된 꽃의 색조에 잠시 어지럼을 느껴 렌즈를 돌리던 소년의 렌즈 속에 풍경 하나가 잡혀 들었다. 자석에 끌리는 쇠 가루 마냥 소년은 렌즈를 그쪽에 맞췄다. 망원경의 조리개를 돌리자 4동3단원6층의 광경이 무대처럼 드러났다.   녀자는 금방 머리를 감고 나서 드라이어(吹風器)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훈풍에 날리듯 머리카락이 표표히 날리고 있었다. 간편한 속옷차림 이여서 많이 드러난 피부들이 환장하게 눈에 시였다.   드라이어를 흔들 때마다 녀자의 위태롭게 엷은 속옷을 들추고 솟은 지극히 풍만한 가슴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입에서 단내가 났고 눈앞에 엄청 밝은 전구가 켜진 듯하다. 가슴이 부서질 듯 쿵쾅거린다. 푸른 목초지 에서 양이 뛰노는 듯한 심장의 박동을 스스로도 들을 수 있었다.   녀자가  드라이어를 내려놓았다. 낚아채듯 속옷을 뒤집어 벗는다. 물 속에 거꾸로 처박히듯 소년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켠다. 녀자가 백양의 가지처럼 두 팔을 우로 한껏 뻗으며 겨드랑이의 치모가 보이게 기지개를 켠다. 하품을 하고 나서 녀자가 벗은 몸으로 창가로 다가온다. 소년은 덴겁해 창가에서 몸을 사렸다. 가슴은 상사 말을 품은 높이 뛴다. 소년은 네발  짐승처럼 헐레벌레 기여 가 침대 전에 놓여진 탁상 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불을 꺼버렸다.   이윽고 소년은 용기를 내여 다시 창으로 머리를 반쯤 내밀었다. 3단원6층을 내다보았다. 창에 두터운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소년은 벽에 등을 댄 채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소년의 몸은 간단없이 떨리고 있었다.     의구심에 사로잡혀 황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문손잡이를 트는 소리가 들린다. 소년은 덴겁해 하며 망원경을 침대우의 이불 밑에 밀어 넣었다. 이모는 시시 때때 그의 방에 뛰여들곤 한다. 뛰여들어서는 소년이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지 공부에 몰두하는지를 확인하군 했다. 마치 나치스 집중 영의 살벌한 순경처럼. 이모의 눈이 무서워 소년은 천문망원경의 삼각 틀도 세우지 못한 채 그저 렌즈의 경통(經筒)만 창턱에 얹어 놓고 밖을 보군 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이모가 들어섰다. 딸깍 불이 들어 왔다. 그런데... 들어 선 사람은 이모가 아니였다. 이모가 칠삭둥이로 낳았다는 철없는 아들녀석도 아니였다. 들어 선 사람은 뜻밖에도 4동3단원6층의 그 녀자였다.   《잘, 잘못했어요》   《나 처음이 애요. 오늘 딱 한 번이 애요》   《제발, 제발 우리 이모에게 이르지 말아 주세요》    죄의식에 쫓겨  더듬이며 소년은 자기의 행위를 반성했다. 녀자가 소년을 향해 다가 왔다. 소년은 죽치고 앉은 채로 뒤로 비실비실 물러섰다.   그런데 녀자의 얼굴에는 그다지 격노하는 기색이 없었다. 녀자가 불현듯 블라우스를 낚아채듯 벗어 버렸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이 출렁 튕겨나왔다.   그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소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아. 만져 봐》   녀자가 떨리고 있는 소년의 손을 가슴에 얹어 주었다. 보드라운 살갗의 감촉이 느껴지자 소년은 불에 닿은 듯 손을 옴츠렸다. 붉은 입술 속 하얀 옥치를 보이며 녀자가 웃었다. 이번에 소년의 머리를 거대한 가슴사이에 감싸안았다. 지극히 포근했다. 그리고 지극히 숨이 막혔다.    그냥 내리누르는 묵직한 중압감에 몸부림치다 소년이 깨여 나 보니 외사촌동생이 베개로 자기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일어나! 몇 신데 아직도 꿈 밭이냐.》   일어나 밥 먹으라고 녀석이 쥐여 당겼지만 소년은 한사코 이불을 잔뜩 껴안으며 몸을 옹송그렸다. 잔뜩 부풀려져 있는 자기의 신심을  녀석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해 서였다. 미몽을 깨뜨린 덤벙이녀석이 잡아죽이도록 미워졌다.   그날 이후로 소년은 다시 열성스런 천문서클의 그때로 돌아간 듯 했다. 초조히 밤을 기다렸고 어둠이 내리기 바쁘게 천문망원경을 집어들었다.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                           커트 (鏡 頭): 2   소년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하나는 4동의 4층엔 가에 살고 있는 나그네이다.   할리우드 영화중의 변태 광처럼 생긴 온몸이 깡마른 나그네.   어느 밤, 맞은 켠 아파트의 창을 향해 망원경의 조리개를 신나게 돌리 던 소년의 눈에 뜻밖의 광경이 잡혀 들었다. 4동 4층인가의 방에서 펼쳐지고 있는 즉물적인 광경이 본의 아니게 잡혀 들었다. 그 할리우드 영화중의 변태 광처럼 생긴 온몸이 깡마른 나그네가 텔레비전에 충혈 된 눈을 박은 채 팬티를 까고 막 물 오른 가지처럼 부풀어 오른 그것을 열심히 주물러대는 광경이다. 나그네가 뚫어져라 눈 박고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금발머리에 가슴이 거대한 녀자가 그를 향해 자기의 치부를 벌려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함께 살고있는 이모이다. 두 사람 다 판에 박은 듯 한 일면이 있다. 항용 풀 먹인 옷 같은 엄숙성으로 굳어있는 얼굴이 싫었고 미이라를 방불케 하는, 몸 안의 물기를 몽땅 쏟아낸 듯  비쩍 마른 몸매가 싫었고 음절과 음절사이의 곡선을 무시해 버리고 그저 직선으로 솟구치기만 하는 목소리가 싫었다.   그보다도 이모의 자기와 외사촌동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촘촘히 규제하는 강요가 싫었다. 조그만 일이 있어도, 례하면 반 급의 녀학생들에게서 전화가 오거나 남녀의 키스장면이 나오는 조금 그런 비디오를 보거나... 하는 날이면 하늘이 두 쪽 날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직살 나게  야단치 군 한다.   《부모들은 지들을 위해 타향서 쌍 코피 터지도록 일하는데》   이는 말 사이에 양념처럼 튀여나오는 이모의 관용구(慣用句)다.   영악한 후각으로 우리가 담배를 피워 낸 냄새나 알콜이 조금 섞여있는 음료를 마신 냄새를 맡아내곤 한다. 그러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지도자동지들처럼 더  쓰잘데없고 긴긴 일장 훈화가 시작된다. 그것이 인생설교를 빗댄 어른들의 자기 발설임을 소년은 안다. 컴퓨터를 할라치면 시시각각 그들 쪽을 흘깃거리다 모니터 앞에 머리를 불쑥 들이밀기도 한다 들기도 한다. 소년이 그런 사이트에 들지 않나 해서. 기실 외사촌끼리 그런 그림들을 다운로드(下載)하여 D판에 감추고 시시때때 들여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 접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오래 하면 바이러스 옮는다! 꺼라! 고 어처구니를 벌리기도 한다.   부엌에서 이불거죽을 삶으며 늙어 온 세대지만 그 앞에서 컴세대인 소년과 외사촌동생은 용빼는 수가 없다. 고집도 어찌나 센지 그가 지구가 네모다 면 옛! 맞슴다! 하고 답해야 한다. 소년뿐 아니라 외사촌동생도 지어미에게서 심연처럼 가로놓인 불투명한 기류를 느낀다. 어른들의 관심이 간섭으로 여겨지는 사춘기이다.     이모는 시가지의 중점학교에서 한어교원 노릇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만둔 게 아니고 밀려났다. 년령도 년령이려니와 요즘 들어 엄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강위(崗位) 시험에서 합격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 콤플렉스가 있어서인지 이모의 성깔은 나날이 가시를 닮아 가는 모양이다. 교원자리에서 밀려나 이모는 학교 문방구에서 일했다. 그러다 남세스럽다고 나와 지금은 전화박스 하나를 세 맡고 수금원 노릇을 한다.   이모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여 조선족 학교들에서 이중언어 교학을 실시하면서 한족교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많은 조선족교원들이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제야 이모의 콤플렉스는 조금 풀린 듯 했다. 학교에서 밀려 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런 시국을 미리 보아내고 원견성이 있어 학교에서 나온 것처럼 이모는 남들과 말하곤 했다. 그런 이모의 얼굴에 평소에 보기 힘든 웃음 살이 어리광치는 것을 소년은 놀랍게 본적 있다. 또한 전화박스에서의 수입도 짭짤한 모양.   외사촌동생은 칠삭둥이여서 육아상자에 몇 달 있다 세상에 나온 녀석이다. 그래서인지 녀석이 하는 행위는 언제 봐도 유치의 최고봉이다. 매운 구석이라곤 어디에도 없는 녀석은 매일 평균 세 번씩 지 엄마의 욕을 먹어야 자기의 인생을 진행해 나갈 수 있다. 조카인 소년과는 할 수 없으니 번마다 그가 어른들의 스트레스 해소의 제물(祭物)이 되는 지도 모른다.   그런 녀석이 하필이면 댄스에 맛을 들였다. 밥을 먹으면서 까지도 이어폰(耳機)을 끼고 발 많은 문어처럼 손발을 허우적이며  댄스음악을 듣는다. 그러다 지어미한테 철썩 소리가 나도록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한다. 지랄도 자꾸 하면 요령이 생기는 법인지 녀석은 댄스를 제법 추었다. 고난도 동작을 하다 손목뼈를 상하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이는 당연히 이모에게는 하늘이 세 쪽 날 일 이였다. 번마다 련습장을 찾아가 녀석을 연행해오곤 했다. 하고싶은 일을 못하게 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이 녀석의  배속에 오글오글 숨어 있다. 그래서인지 집에만 들어서면 녀석의 입 륜곽은 마냥  하현달처럼 아래로 쳐져 있다.   그 인상이 요즘 들어서는 더더욱 구겨져 아예 걸레로 되였다. 외사촌동생의 그 감정의 파장을 소년은 안다.   오토바이에 약수 병을 처매 달고 집집에 약수를 날라주던 나그네가 있다. 어쩌면 전문 흙 밭을 들추며 개미를 잡아먹는 식의 수(食蟻獸)같이 입이 앞으로 유난히 튀여나온 나그네다.   그런데 어쩌면 이모가 그 《식의 수》와 별로 좋아하는 눈치다.   어느 날인가 이모의 방에서 울려나오는 다른 음색과 가락으로 랑자한 코고는 소리를 듣고 소년도 외사촌동생도 잠에서 깨였고 그 이튿날부터 약수 나르는 나그네는 자연스레 그들의 아침상이나 저녁상에 합석하곤 했다.   밖에서 오토바이소리만 나도 외사촌동생은 안절부절을 못한다. 마치 올 곳에 온 듯이 태연하게 그들의 저녁상에 끼여들어 나그네가 개미처럼 이 반찬 저 반찬을 들추는 것을  원쑤처럼 지켜보다 외사촌은 문을 박차고 나가곤 했다.   《하필이면 광천수 나르는 나그네냐?? 명색이 교원이라는 엄마가》   한 살 어리지만 소년보다 머리 하나는 큰 녀석은 변성기에 접어든 컬컬한 고함 질로 소년에게 성토한다.   《그렇게 단칼에 베지 마라. 니 엄마도 고충이 있을 거다.》   형이랍시고 어르지만 소년이 보기에도 덜 좋은 풍경이다. 녀석의 아버지, 소년의 이모부는 인력송출대오에 끼여 리비아의 노가다판으로 나갔다. 이제 4년쯤 될 거다.   소년에게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몽롱하다.   어릴 적 한 달에 한번 정도 아버지가 집에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면 양고기 뀀을 먹는 날 이여서 소년은 좋았다. 그렇게 양고기 뀀과 같기 부호를 그었던 아버지는 언젠 가부터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그때 겨우 식자 본을 떼고있던 소년을 동생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나갔다.   이제 어머니의 얼굴 역시 소년에게 몽롱해 진다.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소임을 하련 듯 한 달에 한번 꼴로 전화가 왔고 또 돈도 우송하곤 했다. 그날이면 이모네 온 집 식구가 또 나가서 뀀을 먹는 날이다. 한국 경주에서 일하고 있다는 엄마가 어느 한번  사진을 보내왔다. 요행 차려진 휴가 일에 유람을 나가 찍은 사진이란다. 그 이름난 전설의 에밀레종 앞에서 찍은 사진 이였다. 오랜만에 더듬어 보는 낯설은 엄마의 모습보다 엄마가 배경으로 한 그 종에 깃 든 옛말이  주는 흥미가 소년에게는 더 컸다. 그래서 종에 새겨 진 문양을 유심히 더듬어 보았던 소년이였다.   엄마는 소년에게 그저 한 컷의 사진으로만 남았고 전화 속의 목소리로만 남았다. 돈 많이 벌어 가지고 온 다지만  소년의 코밑이 가무스레해 지고 울대뼈가 복숭아씨 삼킨 듯 도드라진 나이가 되여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커트 (鏡 頭): 3      공격적으로 치켜 든 군더더기 없는 턱에 머리를 솔잎처럼 세운 그 애는 일요일마다 광장에 등장한다. 4동4단원인가에 살고있는 것 같다. 애는 23번 유니폼을 입고 있다. NBA를 주름잡는 롱구 거성 맥클, 쵸단의 번호이다.    《매 눈》표의 렌즈 속에 잡혀 든 롱구 공이 지구처럼 커다랗게 보인다. 말쑥한 새 공이다. 롱구 틀도 없는 광장에서 《23번》은 뛰고 솟고 구울 고 한다. 공 튀는 소리가 광장에 가득하다.   소년은 그 애를 안다. 소년과 한 학급에 있던 애. 학교 축구팀의 중앙공격수로 이름이 있는 애다. 마냥 짧게 치 깎고 다니는 머리 때문에 키가 한결 더 커 보이는 그 애의 별명은  《안정환》이다. 성이 안씨인데다 공 다루는 수준이 한국의 축구스타 안정환 이처럼 신기에 가깝기 때문. 그리고 그 애만 나서면 우리 팀은 안정환(安定丸)을 먹는다. 그 애는 학교축구팀의 령혼 인물이다. 소년의 학교축구팀이 전주의 학교들에서 해마다 펼치는 리그전에서 번번이 보좌에 오를 수 있은 것은 모두다 그 애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서였다. 애가 수면을 헤 가르는 숭어처럼 몸을 솟구며 헤딩으로 꼴 문을 터뜨릴 때 소년은 곁에 선 계집애들과 함께 자기를 잃고 새된 환성을 지르기곤 했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왜소한 체구와 벋장이 발에 대해 처음으로 자비를 느껴 거울 앞에서 구구히 살폈던 소년 이였다.  그런 《안정환》이가 축구 공 대신 롱구 공을 안고 23번 유니폼을 입고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소년의 마음은 빼여 난 스타가 이적해 간 뒤의 축구팀을 지켜보는 팬과도 같은 심경이다.  얼마 전에 애는 한족학교로 전학을 해 갔다. 그 애처럼 한족학교로 전학을 가는 것이 요즘 풍조다.   이모도 외사촌동생에 한족학교로 전학을 하라고 구구히 권장한 적 있었다.   요즘 세월엔 한어를 잘 해얀다! 한어 잘해야 좋은 직장 얻을 수 있다!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수 있고!   그때마다 녀석은 안가! 죽어도 안가! 하고 필요이상으로 악청을 지르곤 했다.   공부가 반 급의 평균을 깎아먹는 수준인 녀석에게서 또 가장 약한 고리가 한어이기도 했다. 그런 체신에 이질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무리에 묻히는 것이 그에게는 공포감 자체 그 것 이였다. 이모가 집요하게 달려들자 녀석은 손을 칼처럼 세워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엄마가 자꾸 이러면 나 쓱- 할거야.》   녀석이 하도 심각한 표정으로 진저리를 치는 바람에 이모는 한숨을 한번 짓고 나서 더는 그 일을 꺼내지 않았다. 허나 그로서 이모의 속셈이 수그러든 건 아니였다. 어느 하루 옥탑방으로 올라 온 이모가 전에 없이 험상을 풀고 푸근함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넌짓이 소년과 물었다.   《넌 기본도 못 되는 우리 녀석과는 달라.. 공부도 잘 하고 총기도 있고. 그럼 넌 어떻게 생각하니? 한족학교 가는 거?》   소년도 덴겁해 손을 칼처럼 세워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안정환》의 부모가 어떻게 그를 전학의 길에 오르게 했는지 누구도 알 바가 없다. 그가 떠나던 날, 환송파티에 온 애들이 많았다. 애에게 아름 벌게 선물이 안겨졌다. 그 애가 좋았던 학교의 몇몇 녀자 애들은 입을 감싸쥐며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까지 했다. 체육선생이 조선말로 학교축구팀의 로고가 찍혀 진 스포츠모자를 그에게 씌워 주었다.   《가서 잘 해라. 글구.. 조선말 잊지 말고》   그 어조는 평소에 면도날 같던 체육선생의 소리답지 않게 어쩐지 음울했다.   《안정환》이 떠난 뒤로 학교의 축구팀은 생기를 잃었다.   한족학교로 전학 해 간 뒤 그의 체육기질을 보아 내여  학교 롱구팀에 편입 되였다고 했다. 그 학교에서는 축구보다 롱구 쪽을 선호하고 있었다. 이제 《안정환》이 아니라 23번《맥클 쵸단》인 그 애에게서 소년은 어제 날의 벽파 속에 자유자재로 요동하던 물고기 같은 정열을 보아낼 수 없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23번》은 롱구 공을 손으로 다루는 것 아니라 발로 차고 있었다. 소경 매질하듯 되는대로 찬다. 광장 변두리에 일매지게 축조된 차고(車庫)의 벽에 대고 차고 있었다. 둔 중한 공은 힘겨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벽을 부수 어라도 뜰 일듯이  탕탕 부딪힌다.   《야, 지금 롱구 하냐? 축구 하냐? 제대로 못해?》   4동 4층인 가에서 아버지인 듯 한 나그네가 창을 열고 소리소리 지른다.   그러나 《23번》은 아랑곳 않고 공을 찬다. 롱구 공을 찬다. 렌즈 속에 잡힌 《23번》의 표정은 무슨 힘에 붙잡힌 듯 필사적이다. 어스름이 내릴 때 보아서인지 마냥 맑고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이던 그 애에게서 어떤 음영이 느껴진다.   공처럼 둥글고 커다란 열 엿새 만월이 옥상 우에 떠오른다.   탕! 탕! 공 부딪는 소리가 그때까지도 광장에 가득하다.   잘그랑! 문뜩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파렬음이 울린다.                        커트 (鏡 頭): 4   이제 어둠이 내리면   혼자 남는 게 너무 싫어   불빛 거리로 헤매다   지쳐버리면 잠이 드네   그대는 인디안 인형처럼 멀리 떠나갔지만   나의 마음은 인디안 인형처럼   워 워 워 워 워 ~   오늘밤에도 꿈결에 찾아 헤매네     ... 《인디안 인형》이라는 노래에 맞추어 댄스를 추었던 녀자애였다.   오관이 무척 귀엽게 생긴 애, 눈이 커서 얼굴 전체가 불안해 보이는 애였다.   그리고 피아노를 잘 치는 녀자애였다.   중학생을 위한 텔레비전 프로에 나와 피아노곡조를 선보인적 있었고 그후에도 학교에서 조직하는 문예활동에서 마냥 보류 종목으로 녀자애가 나와서 피아노를 치곤 했다. 흰 면 티에 짧은 스커트를 입고 매끈한 종아리 밑에서 복사뼈까지 목이 올라오는 흰 운동화를 신은, 너무 깨끗해서 눈에 뜨이는 애다. 녀자애는 수채화 같은 맑은 인상으로 소년에게 남아있다.   허나 진정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녀자애가 피아노 치는 모습이 아니다. 어느 날, 학급의 짱이 몇몇을 청했다. 한국 갔던 아버지가 드디어 돌아와 열기 띈 모습인 그 며칠, 짱은 내내 돈 쌈지가 불룩해 있었다. 노래방으로 갔다. 《미성년출입금지》라는 표말이 붙어있는 큰방에서 밤을 패며 놀았다.   그 모임에서 녀자애를 보았다. 《인디안 인형》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다음절로 넘는 간이 곡이 나오는 사이 머리 흔들고 엉덩이 흔들며 춤을 추기도 했다. 그 노래가 좋았던지 다음에도 차례가 돌아오자 또 그 노래를 불렀다. 엄격하게 양육되고있는 양순한  녀학생으로만 알았는데 그녀에게 이런 파격이 있는 줄을 소년은 몰랐다.   풍향이 바뀌면 건너 아파트에서 울려나오는 피아노소리가 소년의 귀에까지 잡혀 오기도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 온, 여하튼 무슨 명곡일거라고 소년은 판정했다. 녀자애가 치는 피아노 우에는 석고상 하나가 놓여 있다. 봉두란발에 험한 인상을 가진 사람의 흉상(胸像),  역시 어떤 유명한 음악가의 초상일거라고 소년은 판정했다.   집에 붙박여 피아노를 두드려 대다가도 저녁 무렵이면 애는 광장으로 나온다. 흔들거리는 그네에 몸을 싣고는 꿈결처럼 몽롱한 눈길을 하고 멍해 있기가 일쑤다. 그런 역삼각형의 얼굴에 물 그림자 같은 수심기가 스쳐 지나고있음이 렌즈 속에 잡혀 온다. 노래방의 샹들리에 불빛 속에서 봄물 오른 꽃가지처럼 발육이 잘 된 몸을 흔들며 춤에 빠져있던 모습과는 판 다른 얼굴이다.   그 애가 자기와 한 구역 내에 살고있고 또 다름 아닌 마작 패들이 운집해 드는 그 4동2단원6층에 산다는 것을 소년이 알게 된 것은 잊혀졌던 천문망원경을 더듬어 낸 다음의 일.   한쪽 방에서는 나그네들이 모여 마작 쪽을 번지고 녀자애는 자기 방에서 피아노를 두드려 댄다. 때로 나그네들에게 라면을 삶아 마작 상에  까지 날라  주고 꽁초로 그득 찬 담배재떨이를 털어 주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부유(浮游)하는 먼지처럼 일렁이는 담배연기 속에서 녀자애의 모습은 무대의 인공 운무 속에 선 듯 보였다. 담배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울어서였던지 빨갛게 짓무른 눈을 하고 있다.    저녁으스름이 내려 광장은 흑백수묵화처럼 흐려졌다. 종일 피아노 앞에만 앉아있던 녀자애는 또 광장으로 나왔고 예전처럼 그네에 몸을 실었다.   그 모습을《매 눈》으로 쫓던 소년은 옥탑방에서 나와 광장으로 내려갔다. 미루적거리던 소년의 발길은 놀이터로 향한다. 소년이 용기를 살려 놀이터에까지  다가갔을 때 녀자애는 막 몸을 일으키고있다. 무심하고 메마른 표정으로 소년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소년을 쳐다보지 조차 않는다.    《야!》   녀자애가 가버리려 하자 소년이 덴겁해 녀자애를 부른다. 녀자애는 그냥 가고 있다.        《야, 인디안 인형!》   어떻게 호칭을 달아 야할지 몰라 망설이던 소년에게서 이런 부름이 퉁겨 나간다. 필요이상으로 소리가 높다. 녀자애가 머리를 돌린다. 둥실하게 키워 진 눈길로 소년을 쳐다본다. 녀자애의 밝은 흰자위가 희다못해 쪽빛이다. 그 맑은 눈빛이 찔러 오는 순간, 다 자라 남 같아진 오누이처럼 소년은 내숭 기를 느낀다. 겨우 한 마디 짜낸다.    《너 2반이지? 나 4반.》   《그런데는?》    녀자애가 짧게 반문한다.   《너 피아노 잘 하지. 이란 노래 좋아 하구》   《그래서 방금 날 그렇게 불렀어?》   소년이 그렇다고 바삐 머리를 끄덕여 보인다.   《너 매일 치는 곡이름 뭐냐?》   녀자애가 훌쩍 떠나 버릴 가봐 소년은 연신 말을 주어 댄다.   《쇼팽의 . 너 음악에 관심 있니?》    《아니. 그저 음악 하는 사람 보면 존경스러!》   소년은 진심의 말을 한다. 녀자애의 입가에 애 잎사귀 같은 미소가 매달린다. 그 작은 미소가 소년의 긴장을 적절히 이완시켜 준다. 그리고 반가운 것은 얼굴로 내려오는 생 머리를 간간이 귓바퀴로 걷어올리며 녀자애는 자리를 뜰념을 않는다. 아마 그도 말동무가 그리웠나 보다.   소년은 호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낸다. 한 개비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녀자애 앞에서 좀 로련된 모습을 보이기 위한 거동이다. 입을 오므리며 담배연기를 동그랗게 만들어 내뿜는다. 동그라미가 잘 돼주지 않는다.     《엄마 출국했냐?》    목구멍을 간질이는 연기에 작은 기침 한번  하고 나서 소년이 묻는다. 학교에서 태반의 학생들이 출국자녀였기에 이런 물음은 아이들끼리 편지문안처럼 의례 있는 것이다. 녀자애가 머리를 까딱인다.   《일본? 한국?》   《한국》   《울 엄마도 한국》   《몇 년째냐?》   《5년》   《울 엄만 7년》   소년의 입으로 부지중 한숨이 새여 나온다.   《너 음악 전공할래?》   《아냐. 엄마가 돈 부치면서 꼭 피아노 사얀대서 아빠가 사준 것 뿐》   《잘 하던데... 음악 아니면 뭐 할래? 그냥 공부만 할래?》   《몰라 이제 엄마가 돌아오면 다시 보지 뭐》   《엄마가 안 오면?》   《몰라...》   이번에는 녀자애가 한숨을 쉰다.    밤, 풍향이 바뀌자 피아노소리가 들려 온다. 그 소리를 향해 소년은 《매 눈》의 초점을 맞춘다. 흰건반 검은건반 사이를 뛰어다니는  녀자애의 가는 손가락들이 보인다.   《부모들은 이제 우릴 잊은 거 같애. 이사할 때 낡은 인형을 흘리고 가듯이》   놀이터에서 녀자애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돌아올 줄 모르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송금 한 돈으로 허구한날 마작 놀이에만 빠져있는 가정에서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두드려 대는 녀자애, 그의 얼굴에 주근깨처럼 뒤덮인 체념의 그림자를 소년은 어둔 밤이지만 가려 볼 수 있었다.    문손잡이 트는 소리가 들려 온다. 소년은 잽싸게 망원경을 이불 속에 밀어 넣는다. 덤벙이며 들어선 놈은 이모가 아니라 외사촌 동생.   《형, 빨리 내려와 전화 받어. 큰 엄마한테서 온 전화야》   녀석이 복음을 전달하듯이 윤나는 소리를 지르지만 왠지 소년은 전화 받기조차 귀찮아 진다. 전하는 소식은 또 판에 박은 듯 타향에서 고생하는 어머니의 우울할 고행 담일 것이고 잘해라! 버텨라! 는 그 단말마의 비명 같은 것일 거였다.   《내가 잔다고 그래.》    벌렁 침대 우에 누워 버린다.   《이그, 부모들은 지들을 위해 타향서 쌍 코피 터지도록 일하건만》   아래층에서 분명 소년을 들으라는 듯 한 옥타브 높아 진 이모의 푸념소리가 들려 온다.   소년은 침대에 누운 채로 책상우의 목조사진틀 속에 들어있는 어머니를 말끄러미 건너다본다.   커다란 구리 종 앞에서 포즈를 취한 40대의 낯선 녀인이 렌즈를 의식하고 애써 웃음을 만들고 있다.   엄마와 그 사이는 이제 지구에서 달, 아니 지구에서 명왕성만큼 한 궤도를 도는 사이가 되었다. 소년은 엄마의 치마꼬리를 잃어버린 미아(迷兒)가 된지 오래다.   무관심만큼 사람을 황페하게 만드는 횡포는 없다. 그래서 소년 또래의 출국자녀들은 너나가 일정량의 우울함을 누군가에게서 배급받은 것 같은 모습들이다. 기분이 아주 들떴다간 금세 죽어 드는 불온정한 상태로 나날을 보낸다. 밝은 곳에 있어도 늘 그늘이 진 듯한 표정이다.    돈 많이 벌어 갖고 갈게! 그때까지만 기다려! 전화에서 마다 엄마는 물먹은 소리로 이 한 가지 내용을 복창하곤 했다.   그러나 소년들의 또래에게 있어서 엄마들의 미래는 핑계이고 두통거리이다.   돈을 많이 벌어 갖고 와서는 어쩔 건데? 있어야 될 때 없어준 엄마는 아이들 맘속에 진정한 엄마가 아닌데. 부모의 다스운 손길 없이 자란 사랑에 굶주린 애들이 굽이진 외길을 너무 나가 되돌아 올 수 없는 곳에까지 갔는데...   엄마가 시주로 종속에 처넣은 그 설화 속의 아이처럼 소년의 마음도 밤마다 에밀레! 에밀레! 울고있는 줄 엄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피아노 소리도 끊기고 광장은 어항 속처럼 조용하다.   누가 잃어버린 눈섭같이 애잔하고 매운 달이 홀로 떠있다.                       커트 (鏡 頭): 5    4동1단원6층의 할망구는 언제 보나 불가사의다.   애초에 소년은 할머니가 한 점의 조각 물이 아닌 가로 착각했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꼭 마치 숨 없는 밀랍인형 같다.   아침, 출근 무렵이면 할망구는 누군가에 밀려 베란다에 나타난다. 맥도널드(麥當勞)전문 앞에 개장과 함께 나타나는 광대처럼.  출근시간에 맞춰 어김없이 나타난다. 베란다로 나타나서는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말없이 계속 그 본새로 앉아만 있다. 단단한 핀에 고정 된 박제 표본인양 내내 그 모양 그 상태다.   할망구의 무릎에는 엷은 양탄자가 씌워져 있고 품에는 고양이가 안겨져 있다. 일신이 오목같이 까만 고양이는 집안에서 팽이 치듯 돌다가도 할머니의 무릎에 곧잘 찾아 든다. 찾아 들어서는 할머니의 품에 골을 박고 나른히 존다. 고양이가 움죽거리면 할머니가 손으로 쓰다듬는다. 그럴 때면 할망구가 그 무슨 조각 물이 아니라 생생한 살아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지켜보는 소년으로 하여금 꿈틀 놀라게 한다.    고양이도 할망구의 정서에 옮았던지 움직이기를 싫어하고 내내 그의 품에 안겨 있다. 다스운 한낮의 해살 아래 할머니도 고양이도 조는 듯 마는 듯 앉아 있다.   때로 하릴없는 소년은  렌즈 속에 들어 온 할망구 얼굴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세기도 한다. 할망구 얼굴의 주름은 많기도 하여 소년은 다 세여 내는 수가 없었다. 시든 상추같이 쪼그라든 얼굴이었지만 할망구는 눈만은 의안(義眼)처럼 부조화스럽게 홀로 말똥말똥하다. 그 말똥말똥한 눈길로 할망구는 광장의 모든 것을 주시하고 있다.   그렇게 움직일 줄 모르는 조각상 같던 할망구가 어느 날인가 광장에 나타났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소년은 조리개를 돌려 렌즈의 초점을 맞추었다. 가두의 아줌마 몇몇이 6층에서부터 휠체어에 앉은 할망구를 들어 내렸다. 할망구를 소풍시키려는 것인가. 륜번으로 휠체어를 밀고 광장주위를 맴돈다. 화단 앞에 휠체어를 세우고 할머니를 옹위하여 무슨 이야기인가 신나게 나눈다. 그 중에는 소년의 이모도 끼여 있다. 할망구가 앉은 휠체어를 조심스레 밀며 광장을 도는 그를 지켜보며 소년은 여태 몰랐던 다른 한 이모에 마음의 초점을 맞춘다.   할망구의 우는 듯 웃는 듯 하는 얼굴이 렌즈를 메우며 커다랗게 보여온다. 부대처럼 빈   볼을 풀럭이며 치아가 몽땅 물러나 마치 빗 틀 같은 이 몸을 드러내고 할망구는 어떤 분명치 않는 표정을 짓는다. 그것이 꼭 웃음일거라고 소년은 판정한다.   홀로 지내는 할망구라 했다. 중풍으로 쓰러진지 2년 채. 6층에서 꼭 2년만에 밖으로 나와 본다고 했다. 자식 셋이 모두다 출국했는데 돌아올 념을 않고 그저 얄팍한 돈 깍지만 우송해 온다고 했다. 그 돈으로 시간보모를 두고 살아간다고 했다. 손자손녀도 있는데 지 부모들을 닮아 몰인정해서 좀처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밥상에서 할망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모는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눈물도 몇 방울 떨군다.   할망구의 품에 내내 안겨져 있던 고양이가 어느 날 문뜩 보이지 않았다. 일신이 오목같이 까만 그 고양이가.   그리고 그날, 이모네 집에 난데없는 이변(異變)이 일었다. 약수 나르는 그 나그네가 여느 때와 같이 어흠! 어흠! 헛 목청을 가다듬으며 저녁식사 시간 맞추어 들어왔다. 그런데 이날 따라 마냥 사람 좋은 얼굴이던 《식의 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어떤 새끼가 죽은 고양이 피를 내 오토바이에 뿌렸어》   약수 나르는 나그네의 작업복 앞섶에 피가 묻어 있다. 차체에 피를 게 발라 놓고 오토바이 앞 바구니 속에 죽은 고양이도 처넣었다고 했다.   《누가 그렇게 못된 짓 한다나요? 왜요?》   이모가 서둘러 작업복을 벗겨 비누 물에 담근다. 나그네는 식의 수처럼 튀여 나온 입에 담배를 꽂아 물고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데데한 나그네로 만 여겼던 그가 이런 심각한 표정도 지울 수 있다는 것이 소년에겐 경이롭다.    느닷없는 활극에 어쩐지 께름칙한 느낌이 들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나서 소년은 외사촌동생의 방문을 떼고 들어간다. 방안에 술렁이는 어떤 음모의 냄새를 소년은 육감으로 맡는다. 용변을 참는 아이처럼 갑자 지르다 밥을 대충 먹고 일어 선 동생과 기습하듯 따져 묻는다.   《너지?》   《뭐? 》   《고양이 잡아 피 뿌린 눔》   뚱한 표정을 짓고있던 동생의 얼굴이 극적인 표정으로 변하며 목구멍에서 웃음이 기여 나왔다. 녀석은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킬킬댄다.   《왜 그랬냐? 주제가 뭐냐?》   《외국 공포영화에서 봤는데 덜 좋은 사람에게 고양이 피 뿌리면 그 사람 저주받는대 까만 고양이 피! 》   평소엔 쥐 죽은 듯 잠잠하다가 엉뚱한 괴력을 발휘한 녀석은 딴에는 장한 거사라도 치른 듯 길게 찢어진 입을 들썩이며 웃음을 멈추지 못한다.   《에이, 못 배워먹은 녀석》   소년은 동생의 울퉁불퉁한 머리통을 쥐여 박는다. 그래도 웃음은 고장난 발동기처럼 제어가 되지 않는다. 무뇌(无腦)적이고 행동파 적인 그 모습이 밉살스러워 또 한번 쥐여 박는다. 단단히 쥐여 박는다.   《왜 때려?》   동생이 후딱 몸을 일으킨다. 키만 허청 컸지 심보가 여려 겨우 한 살 위인 소년과 접고만 들던 동생이 소년의 손목을 부여잡는다. 손이 축축하고 악력이 느껴진다. 화가 난 짐승처럼 형을 노려본다. 메밀 눈 눈자위엔 몇 올 선연한 핏줄기가 실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다른 애들이 날 보고 니들 집에선 광천수 돈 안내고 먹지하고 놀려 댈 때면 내 기분 어떤지 알어?   저 사람이 누군데? 저 사람이 누군데? 왜 내 아부지 샤쯔 입고 내 아부지 치솔 통 쓰고 내 아부지 면도 기 써? 누군데 내 아부지 베개 베고 자냐 말이야?》   쏟아 붓듯이 말하고 난 녀석이 손을 스르르 놓는다. 얼굴구조가 조합을 바꾸더니 입 귀가 하현달처럼 처진다. 방금 전의 만용을 잃고 삐질  삐질 울음을 짜낸다.   피해의식이 가득한 얼굴을 쳐들어 녀석이 형을 쳐다본다.     《형은 몰라 내가 왜 이러는 지. 몰라. 누구도 몰라. 》   소년은 할말을 잃는다. 원체 할망구의 고양이를 죽인 죄에 대해 단죄하려 했는데 엉뚱한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녀석과 비슷한 내용, 비슷한 부피로 감동을 먹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녀석의 어처구니 짓거리가 일순 리해가 되는 듯도 했다.   장면을 수습할 길 없어 소년은 방을 나선다. 문을 떼던 소년이 엉거주춤 멈춰 선다. 문가에 이모가 서있다. 한 손으로 얼굴을 싸 쥔 이모의 얼굴이 금시 울음을 터뜨릴 듯 잔뜩 구겨 져 있다.   그 궁상을 피해 소년은 옥탑방으로 올라간다. 이모네 집에 얹혀 살지만 옥탑방이라는 자그만 자기의 공간이라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소년은 생각한 적 있다. 방에 들어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로  다가간다. 창가에 팔을 얹고 밖을 내다본다.   맞은 켠 옥상의 물 탑 뒤로 펼쳐진 서쪽 하늘에 조각 달 하나가 도끼 날처럼 섬뜩하게 박혀 있다.                        커트 (鏡 頭): 6    그녀는 소년이 준비 없이 목격한 꽃 이였다. 소년의 상상 속에 저장된 이미지가 가리키는 녀자였다.   그날 본의 아니게 렌즈 속에 그 녀자를 집어넣은 후로 소년은 야생화의 독향(毒香)에 취한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그 녀자의 얼굴이며 라신(裸身)이 눈앞에서 어른거렸고 이모 몰래 컴퓨터 속에 가만히 업로드해 놓은 서양녀자 누드사진처럼 가슴깊이에 박혀 꺼내보고 싶은 충동을 시시 때때 없이 유발시킨다.   소년은 그녀를 누님이라 지칭(指稱)했다. 누나가 없는 사내애들이면 다 그러하듯 자상한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는 년령대가 있는 것이다.   책장을 펼쳐도 공부는 좀처럼 소년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밤이 깊어도 잠은 좀처럼 소년을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때면 망원경을 끄집어내곤 한다. 배률(倍率)높은 《매 눈》 의 힘을 빌어 소년은 누님의 일상사를 클로즈업해 본다.   아침잠에서 깨여 커튼을 여는 누님을 본다.   화장을 벗은 얼굴이지만 그냥 아릿답기만 하다. 겨드랑이의 소담한 치모가 보이게 기지개를 켜고는 하품을 해서 맑아 진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본다. 때로 누님의 이마 전에 생겨나는 여드름조차 소년에겐 벅찬 발견이다.    칫솔질을 하는 누님을 본다.   한입 가득 치약거품을 물고 누님은 거울을 향해 악동이 같이 웃는다.   고른 치아가 옥돌 같다   화장을 하는 누님을 본다.    머리를 간편하게 뒤로 묶어  반듯한 이마를 드러낸 채 누님은 채광이 좋은 창가에서 화장을 한다. 화장 발이 좋은 얼굴이 점차 색 먹은 수채화처럼 생동해 질 때 소년은 눈이 부셔 찡긋거리다.   전화를 받는 누님을 본다.   전화에서 반가운 소식을 전해들은 양 누님이 웃는다. 모란이 벌어지는 듯 한 아름다운 웃음이다.     외출하는 누님을 본다.   해 빛이 밝은 날이면 차양이 너른 모자를 쓰고 누님은 밖에 나선다. 모자에 쌓인 누님의 얼굴이 맑고 현명해 보인다.    귀가하여 샤워준비를 하는 누님을 본다.   낚아채듯 블라우스를 벗어 던지고 스타킹을 손으로 훑어 내린다. 잘 뻗은 눈부신 흰 다리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벗은 몸이 빛을 뿌린다. 그때면 소년의 몸은 파렬 직전의 고무풍선처럼 팽팽해진다.   때로 누님은 창턱에 마주 앉아 밖을 내다보곤 한다.   파마세트로 머리를 만 채  매우 밝은 목덜미를 내놓고 손으로 얄팍한 턱을 괴이고 밖을 내다본다. 앞자락이 갸웃이 열려 있었고 깊숙한 유방의 륜곽이 드러나 보인다. 밝은 채광에 흑란(黑蘭)의 줄기처럼 유려한 눈섭을 찡긋 이며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밖을 빤히 내다본다. 누님이 자기를 보아낼 가 주저하면서도 소년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조리개를 부지런히 돌리며 누님과의 거리를 한껏 좁히려 애쓴다. 누님의 눈을 가까이 에서 들여다본다. 하늘이 비치도록 시린 눈이다.    창가에 누님의 영상이 흘깃하다 사라져도 소년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는  미열로 달아오른다. 누님의 모습, 하다못해 뒤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소년은 내내 창가에서 망원경을 겨누고 대기해 있다. 렌즈를 눈확에 붙이고 조리개를 틀어잡고 어깨를 솟군 채... 마냥 그 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어깨가 뻐근하다.   온몸이 땀으로 미끄덩거린다. 땀이 흘러 바지 단이 맨살이 들어 붙는다.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한 옷에서 마른 건어물 냄새 같은 것이 난다. 허나 혹서의 더위 속에서도 소년은 수렵 자처럼 대기해 있다. 이제는 하루라도 누님을 보지 못하면 안 되였고 누님의 모습만 보이면 가슴은 형언할 길 없는 기쁨과 야릇한 만족감으로 차 오른다.   애초에는 호기심이 증폭 되여 시작한 짓거리이지만 이제 소년은 자신을 주체할 길 없어 했다. 훔쳐보고 싶은 충동은 소년의 신심을 괴롭히며 종양처럼 자라고 있다. 무슨 악취미 같아서 소년은 그만두리라 마음을 뼈 물기도 했다.   망원경 속에 본의 아니게 안겨 온 멀리 교회당의 뾰족지붕과 그 우에 솟은 십자가를 보며 어떤 속죄감에 그을 줄도 모르는 성호(聖號)십자를 긋기도 했다.   이모며 사촌동생을 보기도 어색해 졌다. 그들이 자기가 하는 짓거리를 꼭 눈치 챈 듯 느껴졌다. 마냥 남의 결점에 머물러 있기 좋아하는 그들의 시선이 형체를 뚫고 소년의 내부를 응시하는 듯 했다. 그래서 눈길을 느낄 적마다 어색하게 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리곤 했다.   그날은 이 여름 들어 기온이 치솟을 대로 치솟아 징그럽게도 더운 날 이였다. 진한 어둠이 내려도 한낮의 열기를 삭히지 못해 했다.   누님의 창을 향해 조리개를 돌리던 소년의 손목에서 경쾌함이 바수어졌다. 신경 줄이 올올이 직립 함을 소년은 느낀다. 누님의 집에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구름우의 천사처럼 혼자 사는 줄 여겼는데, 옛말 속의 공주처럼 높은 성채에서 혼자 사는 줄로 여겼는데...   그리고 나타난 사람은 나이가 어중간한 신사였다. 누님이 달려가 깨끔 발로 한쪽을 딛고 신사에게 안긴다. 그의 목에 팔을 친친 동여매고 발을 간댕거려본다.   누님의 아버지일가?   허나 다음 순간 소년은 머리 속에 피가 꽉 차 오름을 느꼈다. 신사, 누님의 아버지 벌로 돼 보이는 신사의 손이 누님의 앞섶을 들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속옷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 가 누님의 부픈 가슴을 탐욕스럽게 움켜잡는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는다. 벌건 입술로 누님의 목 줄기를 부비여 대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서둘러 배추 잎을 벗기듯 누님의 옷 견지를 하나하나 벗겨 내린다. 누님이 몸을 배틀며 그의 품에서 벗어난다.  덴겁해하며 커튼을 친다.   커튼이 소년의 시선을 가리워 버렸다. 소년의 눈앞에 아릿한 어둠이 잠시 어린다. 허나 막을 길 없던 련상작용 그리고 상상력들이 소년의 눈앞에서 그냥 진행되고 있다. 의관이 버젓한 그 령감태기가 누님의 온몸을 주물러 대는 모습이. 주린 듯 핥아 대는 모습이. 소년은 사막에 불길이 치솟아 모래가 불타고 그 아비규환의 복판에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달무리 진 달이 불그스름했다. 비라도 쏟아질 듯이 뭉뭉한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한번 얼굴을 보인 뒤로 령감태기는 자주 나타났다.   그런데 소년을 괴롭히는 것은 누님이 그 령감태기를 아주 좋아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령감태기를 보면 웃음기에 함함하게 벌어지는 누님의 입 모양새를 보아도 그런 정서는 알린다. 령감태기가 무어라고 말하면 한 문제만 틀린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웃기도 한다. 매우 재미있는 유머를 들은 사람들 마냥 거침없이 웃어젖히기도 한다. 때로 누님은 와이셔츠와 속옷 나부랭이를 빨아 베란다에 놓인 간이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호수가 큰 그 옷가지들은 일견에도 남자의 것, 분명 그 령감태기의 것 일거다.  그런 날이면 소년은 비를 앞둔 구름처럼 방향을 걷잡을 수 없는 심기를 느낀다.   《왜 그렇게 저기압이야? 형?》하며 아이스크림을 넘겨주는 외사촌동생을 발길로 밀어 던지는가하면 밥 먹으러 내려 오라 이모가 불러도 듣는 둥 마는 둥 옥탑방에서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한낮, 또 그 령감태기가 유령처럼 나타나자 소년은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옥탑방을 달아 내렸다.   《불 끄러 가냐? 왜 그리 급해 쌌냐?》    외사촌 동생이 불러도 응대조차 않고,   《밥은 안 먹냐? 당금 점심 시간인데 또 어디로 가냐? 쟤 요사인 밥도 잘 안 먹고 왜 저런 다냐? 돌멩이도 삭힐 땐데》   의중(意中)을 알 수 없어하는 이모의 걱정 어린 푸념을 뒤로 던지며 소년은 4동3단원을 향해 달려갔다. 달리며 소년은 고슴도치처럼 바싹 털이 솟는 자신을 느낀다.   4동3단원6층.   그 앞에서 소년은 턱 끝까지 말려 오른 호흡을 가다듬는다.   분명 누님의 집 앞까지 와서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버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문가에 묶인 듯 서있는 소년을 소스라쳐 놀라게 하며 문에서 쇠 소리가 난다. 소년은 급히 몸을 돌려 층계에서 달아 내린다.   령감태기가 나온다. 이마에 번드르르하게 배인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기름 낀 배를 불룩 내밀고 령감태기는 층계를 내린다. 직사각형의 멋진 가죽 가방을 든 령감태기는 계단을 하나하나 세듯 천천히 걸어 내린다. 단원의 출입 문가에서 자기를 빤히 지켜보고 있는 소년을 시큰둥하게 쳐다본다.   령감태기에게서 향수냄새가 난다. 솔잎 향기 같은.  송곳처럼 코 점막을 후비는 향수냄새에서 소년은 그가 한국사람임을 판정한다. 이곳 남자들은 좀처럼 화장품을 쓰지 않는다. 전번 학기 학교에 컴퓨터를 기증한 한국상공인에게서도 이런 향수냄새가 났고 한국에서 로무를 마치고 돌아 온 학교 짱의 아버지 몸에서도 이런 향수 냄새가 났다.   느려 터진 팔자걸음으로 아파트 구역 내에서 령감태기는 사라진다. 소년은 무슨 대결이라도 한 듯이 몸이 피로해짐을 느낀다. 광장의 놀이터로 간다. 그네에 몸을 싣고 멍청한 꼴이 되어 허깨비처럼 몸을 흔든다.                       커트 (鏡 頭): 7    어디선가 울음소리 들린다.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내는 울음소리다. 구역 내에서 공명이 되어 울리는 울음소리는 사뭇 괴기스럽기 까지 하다.   《무슨 일일 생겼나본데요.》   심란해진 눈길로 외사촌동생이 묻는다.   《엊저녁 그 할매가 세상 떴다 누나. 4동에 살던 그 할매. 외롭게 두 지내드니만. 이제야 친척들이 모여와 우는 시늉이라도 한다. 남의 눈이 무서운 게지.》   이모가 코를 훌쩍 치 걷으며 말한다. 아침밥은 절 로들 챙겨먹어라 하고는 가두사람들과 함께 장례에 참가 해얀다며 부랴부랴 집을 나선다.   철저히 홀로 이였던 할망구가 세상 뜨자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소년에겐  경이롭기까지 하다. 광장에는 차 앞머리에 검은 꽃을 단 령구차가 대기해 섰고 나그네들의 어깨에 실려 관 하나가 층계로 내려왔다. 죽어서 그저 불에만 넣지 말아 달라는 것이 할망구의 마지막 소원이란다.   뜻밖에도 관을 메고 나선 이들은 4동2단원6층에서는 매일이고 마작의 향연을 펼치던 나그네들 이였다. 어쩜 너나가 한결 같이 마누라들이 출국해서 부쳐 보낸 뼈 돈을 까먹으면서 놀이에나 빠져 있다는 나그네들에게도 이렇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경이로운 풍경이다.   소년으로서는 처음 보는 관이다. 흥미를 느껴 소년은 조리개를 돌린다. 망원경으로 상여행렬을 쫓는다. 굵어지는 아침 해 빛에 옻칠을 먹이지 않은 하얀 관은 야릇한 빛을 발하고 있다.   장례행렬이 떠나자 광장에는 다시 고요가 깃 든다.   구역 내를 빠져나가는 령구차를 마지막까지 쫓다가 소년은 망원경을 내린다. 다시 망원경을 쳐든다. 누님의 창에는 두툼한 커튼이 내려져 있다.   느닷없이 신산(辛酸)해 진  기분을 소년은 떨칠 수 없어 한다. 아이공 대공 괴음(怪音)으로 울어대던 통곡소리가 계속 귀전에 끈끈히 남아 있다.   그 잡친 기분을 무마하련 듯 소년은 망원경에만 매 달려 있다. 어떤 동정을 기대 하는 수렵 자처럼.   점심 무렵이 되여서야 누님 방의 커튼이 걷혀졌다.   그와 함께 소년은 또 한번 눈동자를 키운다.   누님의 집에 또 사내 하나가 나타난 것이다.   늘 찾아오던 그 령감태기가 아니였다. 이번에는 좀 어수룩한 입성의 사내다. 나이는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지만, 시골에서 일에 절어 온 듯 흙빛이 나는 피부가 나이를 좀 얹어 보이게 만든다. 찜통더위에 땀을 벌벌 흘리면서도 소매 긴 와이셔츠를 입고 있다. 색이 천박해 보이는 와이셔츠는 구지레하게 땀에 절어 있다. 사내는 전쟁 피난을 가는 사람처럼 보퉁이 하나를 들고 문가에 서있다.   누님이 랭장고에서 음료수 한 병을 가져다준다. 목 울대를 울리며 사내는 급박하게 음료수를 들이켠다. 다 마시고 나서 빈 병을 어찌할지 몰라 주춤거린다. 누님이 빈 병을 받아 휴지통에 던져 넣는다. 사내는 여전히 방 한복판에 어색하게 서있다. 누님이 앉으라는 시늉을 하는 것 같다. 사내는 쏘파에 앉지 않고 맨 바닥에 벌렁 주저앉아 버린다. 누님이 쏘파에 앉으라고 권하는 듯 하다. 그러자 사내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겸연쩍게 웃는다. 계속 맨 땅에 앉아 있다.   《파이내플 이요! 파이내플 이요!》   광장에서 과일 장사치가 메가폰에 대고 외치는 싸구려 소리가 공명으로 들린다.   마냥 웃비가 걷힌 하늘처럼 명랑하던 누님의 얼굴이 이날 따라 다르다. 누님의 입 모양새는 그렇게 함함하게 벌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는 듯 하다.   한 사람은 쏘파우에 한 사람은 바닥에 그냥 그렇게 앉아만 있다. 누님은 매니큐어를 바른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고 사내는 머리를 수굿하고 장판지의 문양을 들여다본다.   가려는지 사내가 몸을 일으킨다. 누님이 문가까지 바랜다. 돈 잎 몇 장을 구겨 사내의 손에 쥐여 주나 사내는 한사코 뿌리친다. 그러면서 사내는 또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억지로 입술을 비틀어 만드는 웃음 같다.   이윽고 사내가 광장에 나타난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사내는 벤취로 다가간다. 벤취에 앉지 않고 하필이면 벤취 뒤의 화단 가에 쪼그리고 앉는다.   누군가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화분 통을 들여간다.   잔인한 뙤약볕아래 사내는 그냥 쪼그리고 앉아 있다.     누군가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홑이불을 턴다.   오목렌즈로 내리 비추는 듯한 끔찍한 해살 아래 사내는 내내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다.    캄캄한 얼굴을 하고 무엇을 씹듯 입술을 일그러뜨린 채.   더운 한낮 이여서 광장에는 사람 하나 없다.   사내가 나간 뒤로 누님은 다시 쏘파에 앉아 버린다. 멍하니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들여다본다. 누님의 몸가짐이 평소보다 좀 산란해 보인다.   소일거리가 생각났던지 누님이 사내가 가져 온 보퉁이를 푼다. 법랑그릇에 그득 넘쳐 나게 담은 것은 껍질 채로 삶은 옥수수다. 무슨 곤충의 날개 같은 껍질을 벗기자 황옥(黃玉)같이 노란 알이 박힌 옥수수가 드러난다. 희귀한 얼굴로 그 옥수수를 들여다 보다 누님이 옥수수를 한입 떼 문다. 누님의 입 모양새가 그제야 함함하게 벌어진다.   한 개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나서 누님이 두 번째 옥수수의 껍질을 벗긴다. 그 옥수수도 순식간에 하얀 고갱이만 남는다. 세 번째로 집어든다. 탐식(貪食)하는 그 모양을 지켜보는 소년의 입가에 웃음이 감돈다. 누님이 한입 떼여 문 세 번째 옥수수를 내려놓는다. 목이 메게 한입 그득한 옥수수를 넘긴다. 그런 누님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급기야 누님의 눈확에서 이슬이 넘쳐난다. 옥수수 알보다 큰 눈물방울이 누님의 볼을 타고 뚤렁 뚤렁 떨어져 내린다. 누님이 울고 있음을 뒤늦게 야 보아내고 소년은 잠시 어리둥절해 진다.   손바닥으로 눈물 젖은 볼을 이리저리 훔쳐내고 나서 누님은 베란다로 달려나온다. 머리를 내밀고 광장을 굽어본다.  광장에는 아무도 없다.   해 빛이 박살난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내린다. 부서져 내려서는 광장의 블록타일 우에서 탱글탱글 튀여 오른다.   해 빛은 세상중심을 관통할 듯 투명하다.                                   커트 (鏡 頭): 8   광장은 그냥 그 모습 그대로이다.   아침이면 너나가 바삐 광장을 질러 출근길에 오르고, 한 낮이면 잡상인들이 광장 변두리를 돌며 메가폰으로 각자의 매물에 대한 홍보의 소리를 지르고, 저녁이면 부지런한 가두의 아낙들이 나와 화단의 꽃 포기를 손봐주고... 낡은 필림 되감듯이 비슷한 내용 비슷한 모습들이다.   허나 소년에게 보이는, 소년의 《매 눈》에 잡혀 오는 광장은 다르다.    일요일마다 광장에서 울리던 공 다루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23번 유니폼(先手服)을 볼 수가 없다.   대신 어디서 온 애들인지 왁작거리며 배드민턴을 치곤 한다.   쇼팡의 야상곡도 들리지 않는다.   소년이 알 수 없는 다른 곡이 울린다. 아직 손에 익지 못한 듯 중복을 거듭하는 곡조는 가락 맞는 곡조라기보다 심란한 아낙이 국자로 솥전을 두드려대는 소리 같다.   저녁 무렵이면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발을 간댕이는 인디안 인형을 볼 수도 없다. 그네 줄이 끊어져 버렸는데 누가 나서 이어주는 사람도 없다.    4동1단원6층에는 빈 휠체어만 뎅그러니 놓여있다.    4동2단원6층 마작 판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가세해 들었다.    4동 4층인 가에 사는 할리우드 영화중의 변태 광처럼 생긴 온몸이 깡마른 나그네, 그리고 이모가 사이가 좋은 약수를 날라주는 《식의 수》도 끼여 있다.    술 먹은 터에 얼굴이 잘 구운 찐빵처럼 불그레해진, 만족스런 표정의 나그네들은 저 저마다 담배 대를 입 귀에 지긋이 물고 피여 오르는 담배연기에 실눈을 좁힌 채 부지런히 마작 쪽을 쌓고 헤치고 섞는다.   그리고 4동3단원6층. 좋아하는 배우 때문에 편애하는 영화처럼 자기의 옹근 정감과 옹근 시간을 잡아먹는 누님을 보면서 요사이 소년은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자기의 행위가 드러날 가 늘 두려움에 의식의 목을 짓눌리고 있지만 요즘의 두려움은 그런 두려움이 아니다.   이제 누님의 아파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직사각형의 멋진 가죽가방을 든 신사타입의 령감태기도, 삶은 옥수수를 그릇 넘쳐나게 들고 왔던 얼굴이 흙빛이던 그 시골총각도...     누님만의 일인 극을 보게 되였지만 소년은 일전 같은 신명이 솟지 않는다.   어느날인가부터 누님이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집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분류하여 종이박스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누님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 중국식당의 료리들을 청해 놓고 온 저녁을 술판을 벌렸다. 누님은 술에 취한 듯 했다.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다. 시간이 자정으로 흘러서야 탕진한 듯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가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누님과 포옹을 했다.   짐들을 처리한데서 갑절 커 보이는 집에 누님만 남았다.   한 상 가득 널린 음식상을 치울념 않고 누님은 쏘파에 앉아만 있다. 두 손으로 무릎에 처박을 듯 숙인 머리칼을 싸쥐고 어깨를 흔든다. 이리저리 아무 생각도 없이 흔든다.   무슨 생각이 났던지 일어나 핸드백을 뒤진다. 핸드백에서 무언가 꺼낸다. 란발을 한 채 그것을 들여다본다. 소년의《매 눈》이 누님의 손에 들려진 그것에 초점을 맞춘다. 조리개를 틀고 있는 손이 사뭇 팽팽하게 떨고 있다. 렌즈 속에 클로즈업된 그것이  총탄처럼 소년의 동공에 와 박힌다.   그것은 비행기 표이다.    누님이 어딘가 가려나 보다?    누님이 어딘가 가려나 보다.    누님이 어딘가 가려나 보다!   소년의 손에서 망원경이 미끄러져 내린다. 불을 켜두지 않은 옥탑방의 눅신한 어둠 속에 소년은 묶인 듯 서버린다.   《비행기는 몇 시에 뜨나요?》   객실로 내려가서 지글대는 텔레비전을 방임한 채 끄덕 끄덕 졸고있는 이모와 소년은 묻는다. 부러 심상한 투로 묻지만 소년의 목청은 필요이상으로 높았고 자기가 듣기에도 파장이 맞지 않다. 이모가 흠칫 놀라며 깨여 난다.   《어디... 행인데?》   이모가 코잔등에서 흘러내린 안경을 벗으며 묻는다. 그 물음에 소년은 할말이 궁색해 진다. 사실 누님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는 그.   《국내 행은 낮에 있고 한국 행은 보통 아침 일곱 시와 저녁 네 시에 있는 거 같드라. 니 엄마가 갈 땐 비행기도 못타보고 그저 기차로 가서 다시 배타고 갔는데》   소년이 오랜만에 먼저 이모와 말을 건네였고 하도 진지한 태도로 물어왔기에 이모도 정확한 답을 주려 애썼다.  《헌데 너 왜 그러냐?》   소년은 아무 말도 없이 다시 태엽 준 인형처럼 옥탑방으로 올라간다.   망원경을 주어 든다.   누님이 쏘파 등걸 이에  두 팔을 얹고 그 팔 우에 볼을 얹은 채 잠들어 있다.   소년은 창가에 무릎을 꿇는다. 누님의 얼굴을 표나게 바라본다. 달의 환형 산까지 보이는 천문망원경이지만 망원경의 배률이 더 높지 않은 것이 소년에겐 한스럽다. 누님의 모든 것, 얼굴이며 몸매며 지어 누님의 발톱 하나까지 동공에 아로새기고 싶다.   그리고 누님이 래일 이른 새벽이 아닌 한 낮에 외출하기를 소년은 바라고 바랐다.   어떤 독실한 신도처럼 창가에 무릎을 꿇고 소년은 밤을 새운다.    거대한 밤의 망토 뒤에서 한 겹씩 엷어지는 어둠 속에 섬세하게 깃 드는 새벽을 소년은 눈으로 피부로 느낀다.   새벽, 건너편 아파트 4동3단원6층. 그 방에서 드디여 소년이 바라지 않던 일이 일고 있다.   숙취에 일어나지 못할 것 같던 누님이 일찍이도 깨여난다. 시계추처럼 부지런을 떤다. 화사한 옷가지를 챙겨 입는다. 바퀴가 달린 커다란 트렁크를 밀고 집을 나선다. 문을 나서다 말고 집안을 한바퀴 돌아본다. 그리고 문이 닫힌다. 멀리 아파트지만 쾅! 하고 쇠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소리를 소년은 분명 듣는다. 그 소리는 소년의 신심을 란타하며 환청으로 울린다.   누님이 가는구나. 저렇게 가는구나. 끝내는 가는구나.   낮 행이 아니고 새벽 행으로 가는 걸 보니 분명 한국으로 가는구나.   소년은 옥탑방을 달아 내린다. 6층에서 달아 내린다.   너무 일찍 해서 광장에는 조깅을 나온 사람조차 없다.   저 앞에 누님이 보인다. 몸에 꼭 끼이는 청바지를 입고 바퀴가 달린 트렁크를 끌고 아파트 구역 내를 빠져나간다. 새벽대기 속에 트렁크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선명히 울린다. 피리소리의 주술에 걸린 뱀처럼 소년은 그 소리를 따라 간다.   대로 가에서 누님이 멈춰 선다. 택시를 대절해 기다린다. 잎새에서 아침 이슬이 떨어져 내리는 가로수에 몸을 감추고 소년도 멈추어 선다.   택시가 오지 말았으면   아직 새벽인데 택시가 오지 말았으면   누님을 훔쳐보며 두서없는 소년의 마음은 이렇게 되뇌고 있다. 측면에서 봐도 누님은 까닭 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새벽안개를 헤 가르며 택시가 온다.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주문을 외워도 택시는 온다. 누님 앞에 와 칙 멈춰 선다. 모범택시라는 자호가 찍혀진 그 택시에 이 순간 소년도 고양이 피를 뿌리고 싶다.   이른 아침에 미모의 녀자를 승객으로 맞는 택시 기사는 기분이 좋은 듯 경쾌한 동작으로 누님의 트렁크를 받아 차체의 뒤 함에 싣는다.     《누나! 누나!_》   소년이 가로수 뒤에서 뛰쳐나온다. 누님을 부른다. 허나 목구멍에서 소리는 움츠러든다. 가슴으로만 부른다. 누님의 길을 가로막고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공중에 흩어진다. 소년의 볼로 주체할 길 없는 눈물이 도랑을 지어 흘러내린다.   차 문을 열다말고 누님이 소년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야릇한 눈초리로 아침부터 길가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고있는 아이를 본다. 누님의 얼굴이 가수(假睡)상태에서 본 정물처럼 륜곽이 흐릿했다.   탕! 택시 문이 닫히고 갈개는 말처럼 몸을 한번 뒤로 당겼다가 택시가 떠난다.   소년의 그렁하게 젖은 동공 속에서 택시는 굽이를 돌았고 멀리로 사라져 버린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광장은 행락객(行樂客)들이 떠난 유원지처럼 텅 비여 있다.   솨 아! 낮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화단의 꽃들이 힘에 겨운 듯 봉오리를 가누고 있다.   비바람에 놀이터의 그네도 흔들거리고 있다.   유리에 툭툭 빗방울이 듣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텔레비전이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옥탑방의 창가에 서서 소년은 광장을 내다본다.   어느 류역의 이방인(異邦人)인 양 서글피 내다본다.   천문망원경이 발치에 뒹굴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달이 뜨지 않는다. 때문에 소년은 환형 산을 볼 수 없다.   이날 따라 달이 몹시도 보고픈 데.   ... 달에서 매우 흔한 지형은 환형 산일 것이다. 달은 아주 오래 전에 류성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류성이 달 속으로 파고들면서 표면을 파헤치고 구덩이를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생성된 분화구들은 평평한 바닥과 뾰족하고 둥근 테두리를 갖고 있으며 중앙에 봉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달 표면에는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가 수십 개나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분화구들이 234개나 있다고 한다...   문뜩 소년이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비 내리는 광장을 내다보며 소년은 언젠가 천문애호가 서클시간에 외워두었던 천체지식에 대해 외워 본다. 비 소리가 소년의 소리를 잘라먹는다. 허나 소년은 그냥 왼다. 무아에 빠진 사람처럼 소리 높이 왼다.   비 내리는 광장은 종영되는 영화처럼 저물어 간다. ♤ "도라지" 2003년 5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47    문학의 중심에서 쟝르를 웨치다 댓글:  조회:2467  추천:10  2014-08-11
. 대담 . 문학의 중심에서 쟝르를 웨치다 - 우리문학에서 소박맞고있는 쟝르문학에 대하여     대담자: 김혁&장춘식   김 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리사, 소설분과 주임   장춘식 평론가,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교수     김혁: 장춘식 평론가님 안녕하세요? 짜증나는 무더위에도 대담에 응해주셔 감사합니다. 북경은 지금 몹시 더웁지요. 장춘식: 네. 안녕하세요? 말그대로 불볕더위입니다.고향 연변도 무척 더울테지요? 김혁: 네. 어딜 가나 더위때문에 아우성이군요. "누가 이 찜통 더위를 벗어날수 있을가/더위 식힐 좋은 음식도, 피서 도구도 없으니/조용히 앉아 책 읽는게 최고로구나"하고 조선 숙종때 윤증이라는 학자가 읊었다고 합니다. 에어콘도, 랭장고도 없던 옛사람들에게 독서는 최상의 피서법이였다고 하네요. 책읽기를 뜻하는 한자말에는 독서말고도 “간서(看書)”, 그리고 “피서(披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피서(披書)”와 더위를 피한다는 “피서(避暑)”는 음이 꼭 닮았네요. 짜증나는 더위에는 심오한 저서들보다는 쉽게 그리고 재밌게 읽을수 있는 추리나 멜로물이 좋을겁니다. 그래서 전 요즘 읽은 책이 할빈출판사 출판으로 된 일본추리소설 “고백”입니다. 일본에서 추리소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신인작가 미나토 가나에(凑佳苗)의 첫 장편인데 데뷔작치고는 너무나 훌륭해 그토록 치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탄하며 읽은 책이였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씨때문에 더위를 잊고자 든 책인데 외려 인간의 본성을 깊숙히 파헤친 책의 묵직한 내용에 저으기 심각해지고 말았네요. 책은 중학생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행각과 자기가 가르친 학생에 의해 딸을 잃은 반주임 녀교사의 복수라는 충격적인 소재때문에 일본에서 거대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우리문단에서도 추리소설은 찬반양론이 심하게 엇갈리는 쟝르이지요. 그러면 오늘은 추리소설과 같은 쟝르문학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지요. 평론가님은 요사이 어떤 책이나 영상물을 보았는지요. 쟝르문학쪽으로 굳이 뽑으라면? 장춘식: 최근에 본 국산 드라마중에 “정탐 적인걸(神探狄仁杰)”이 추리적인 축면에서 상당히 정교한 구성으로 짜여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에도 력사적으로 유명한 탐정 적인걸의 전기적인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옛날의 드라마는 공안소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김혁: 한때는 포공(包公)에 대한 공안(公案)소설을 각색한 드라마가 많더니 요즘은 적인걸이 대세인것 같습니다.적인걸은 당나라 무측천 시절에 거란(契丹)의 내습을 평정하여 공을 세운 실존했던 력사인물입니다. 적인걸에 관한 소재는 요사이 류덕화가 주연한 영화(狄仁杰之通天帝国)로도 한편 나왔습니다. 유명한 무협감독 서극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서 무협과 추리를 버무린 퓨전식의 오락물로서 아주 큰 흥행을 보였지요. 이처럼 요즘의 독자와 관객들에게는 무협과 추리 그리고 멜로와 같은 쟝르들이 각광받고 있네요. 장춘식: 네. 저는 사실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 판타지소설은 최근에 별로 읽은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저도 추리소설에 심취해있던 시기가 있었지요.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구해볼 수 있는 추리소설류 작품들, 일본의 추리소설, 한국작가 김성종의 추리소설, 그리고 특히 미국작가 시드니 쉴던의 추리소설들을 즐겨 읽었습니다. 거리 난전에서 팔고있는 해적판도 꽤 많이 사서 읽었지요. 해적판은 오역에 오자투성이지만 그래도 내용은 대충 알 수 있었으니까요. 김혁: 더 일찍 80년대에 이미 이러한 쟝르소설 열독붐이 일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중기에 연길에 헌책가게 하나를 차린적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무협과 추리 멜로물들의 열독상황에 대해 매우 익숙합니다. 당시 일본작가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 한국작가로는 김성종 그리고 미국작가로는 시드니 쉴던(西德尼 . ·谢尔顿)의 작품들이 거의 서점가를 독점하다 싶이 했지요.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阿加莎·克里斯蒂)의 추리소설을 각색한 영화 “나일강 살인사건(尼罗河上的惨案)”과 “동방특급렬차 살인사건(东方快车谋杀案)”이 중국말로 더빙되여 나와 인기를 끌었지요. 인상에 남는 문학작품들로는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인간의 증명”, 김성종의“피아노 살인”, “제5의 사나이”, 시드니 쉘던의 “가령 래일이 오면”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않았다면 “가령 래일이 오면”은 당시 “천지”문학지에서 꾸리던 문학애호가들의 통신간물 “개간지”에 련재된적있습니다. 무협과 멜로쪽으로는 김용과 경요의 작품이 압권이였구요. 김성종의 추리소설은 그후로도 거의 20년가까이 서점가를 강타했고 모든 간행물들에서 그의 소설들을 다투어 련재했었지요. 우리의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많은 소설들이 중문으로 번역되였는데 지난해까지만도 진설홍, 윤금단등 번역가들에 의해 김성종의 소설이 중문으로 번역되여 서점가에 올랐습니다. 저도 연변일보 문예부에서 기자로 뛰던 시절 경요의 멜로물 “불타는 천당(失火的天堂)”을 우리말로 번역한적 있습니다. 장춘식: 그시대 사람들로말하면 인상깊은 열독추억이지요. 그때는 저도 아직 소설을 쓰고있었고 뭔가 팔릴 수 있는 소설이 없을까 생각던 끝에 추리소설을 나 자신의 소설에 접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코난도일의 추리소설은 매우 정교하지만, 그래서 학계에서 추리소설의 전형으로, 고전으로 인정받고있지만 시대적 차이가 느껴지고 조금 따분한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일본의 추리소설이나 한국의 추리소설들이 우리의 구미에 잘 맞는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시드니 쉘던의 소설을 읽고는 왜 이 작가의 작품이 늘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리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구요. 시드니 쉘던의 너무 정교한 추리와 기발하고 풍부한 상상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혁: 시드니 쉘던은 기네스북에 오를만큼 량산의 작가였고 탁월한 이야기 군이였지요. 그의 작품은 “가령 래일이 오면”을 완정하게 읽었습니다. 그외 “벌거벗은 얼굴”과 “천사의 분노”는 련환화로 보았지만 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야기에 흠뻑 매료되였더랬습니다. 시종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사건의 진상과 결과에 대한 독자의궁금증을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작가의 필력이 당시 문학도였던  저에게는 거의 “신필”의 경지로 읽혔지요. 요즘 다시 읽어도 의학, 법학, 심리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스릴감 강한 이야기로 요즘의 독자군에도 어필이 될만한 작품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때는 단지 추리소설이라고 정의되여 나왔지만 지금 다시보면 의학소설,심리소설 등 여러가지 타이틀을 띈 작품, 쟝르문학의 범주에 드는 작품이였지요. 여기서 쟝르문학에 대해 다시한번 환기해보도록 합시다. 평론가들의 정의에 따르면 이른바 쟝르문학이란 추리, 공포, 력사, 련애소설 등으로 순수문학과 대비되는 매니아적 성격의 대중문학 혹은 상업문학을 뜻하지요. 특정 쟝르만의 규칙, 기호, 취향을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고 그것을 전제로 글쓰기와 글읽기가 이뤄지는 문학을 말하는데 순문학작품과 대비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오래전에 추리소설과같은 쟝르문학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지요. 70년대에 이미 계급투쟁주제의 탐정소설이 등장되였다고 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 력사 배경과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 평론가님께서 분석해 주시지요. 장춘식: 네. 우리 문단에서 1970년대에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이 인물설정과 플롯구성에서 탐정소설화 현상이 나타났다는 주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문화대혁명 직전인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계급투쟁의 주제가 우리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숨은 계급의 적, 채 개조되지 않은 지주, 부농, 계급이색분자 등이 부정적인 인물로 등장하면서 이들을 수색하고 반동적인 음모를 밝혀내는 과정이 소설의 플롯을 형성한 것이지요. 수색 수사 과정은 추리가 필요하고 따라서 탐정적인 요소가 가마되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전까지는 아직 추리적, 혹은 탐정적인 요소가 뚜렷하지는 않았습니다. 문화대혁명 후기, 다시 말하면 1970년대 초, 중반에 한동안 중단되였던 문학창작이 다시 시작되면서 이제 계급투쟁은 우리 소설의 기본적인 주제가 되고 작가들의 플롯구성이 점차 탐정적, 추리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김지훈의 단편 “첫 근무”(1976)에서는 녀 공인민병(工人民兵, 당시 비전문적인 치안요원) 봉순이가 주과부와 채무재라는 사람이 싸운 일때문에 조사를 가서 자초지종을 파악하고는 그것을 실마리로 주과부의 아들을 꼬드겨 기계부품을 훔쳐내다가 지하고물점을 통하여 팔아먹는 숨은 범죄자 송칠보를 검거해내는 과정을 그리고있는데 이야기 자체가 범죄사건의 수사로 되여있어서 당시로서는 전형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김청송, 황하성의 “철벽”(1976)은 더구나 상당히 정교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습니다. 공안분야의 간첩수사과정을 다루고있고 그 과정이 상당히 탐정적 혹은 추리적인 형식으로 진행되고있기때문입니다. 이 두 작품은 플롯구성이 기본적으로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어 어느 정도 전형성을 띤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그러나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이와 류사한 탐정구조를 갖춘 작품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리고 재미있는것은 이처럼 본격적인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 아닌,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소설에 속하는 작품들이 탐정소설의 구조를 갖추고있다는 점입니다. 김희철의 중편소설 “전우의 딸”(1976)과 “림해의 풍파”(1977)가 대표적이지요.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고 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두편 모두 중편소설의 형식을 취하고있구요. 김혁: 당시는 이른바 “3돌출원칙”이라는 좌적인 철쇄에 매여 모든 작품들이 소재나 구성면에서 천편일률적인 자유롭지못한 상황이 아니였나요? 그러면 왜서 이런 창작경향이 일어났을까요? 장춘식: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현상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는 소설 플롯구성의 중요한 방식으로 존재했던 련애이야기가 금기시되는 등 플롯구성과 인물설정의 측면에서 수많은 금지구역이 존재하였기때문에 작가들이 리용할 수 있는 플롯구성의 방식에 별로 여지가 없었던 사정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전에 우리글로 번역소개되었던 쏘련의 탐정소설(“구리단추” 등)이나 70년대 중반 중국에서 방영되었던 조선의 탐정영화 등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것입니다. 탐정소설이나 탐정영화, 당시에는 흔히 “반특”영화라 불렀던것 같군요. 김혁: 맞습니다. 조선영화로는 “숨길수 없는 정체”, 쏘련영화로는 “발자욱”, 그외 알바니아와 루마니아의 반특 영화들이 있었지요. 몇편 안되는 혁명적 본보기극 영화들만이 란무하던 그시절에 몇번이고 다시보았던 영화들이였습니다. 그나마 단일한 제재의 반복에 식상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생활에 이채를 보태여준 작품들이라 볼수 있겠지요. 장춘식: 네 이러한 영화나 소설들의 기법을 습득할 수 있는 여건이 존재했고 마침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 숨어있는 반동분자가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때문에 이를 수사하는 과정을 탐정적인 방법, 혹은 추리적인 방법으로 처리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는 점, 이런 상황이 서로 접합점을 찾아 탐정소설화 현상이 일어난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계급투쟁주제의 소설은 점차 자취를 감추는데, 소설 플롯구성에서의 이와 같은 탐정,혹은 추리적인 수법의 관성은 그후 김경련의 중편소설 “흉수는 누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있습니다. 김혁: “흉수는 누구”는 “아리랑”총서에 몇회에 나뉘어 련재되였던것으로 기억됩니다. 그이후로 리만호의 “국장과 나리꽃”등 몇부의 소설들이 통속소설의 형태를 띄고 창작되여 당시로는 작지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지요. 그외도 추리소설에 대한 창작시도를 보여준 분들이 몇분 있었습니다.  연변 로투구출신의 윤송이라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경찰계통에서 사업했던 룡정의 전강이라는 작가가 추리소설을 몇부 내놓았지만 량적으로 적었고 수작을 내놓지못했기에 쟝르문학 창작군을 뭇기에는 그 기세가 판부족이였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도 80년대에 추리소설을 발표하려 고심한적 있었습니다. “꿈의 변두리”라는 제목으로 4만자되는 꽤 큰 편폭으로 창작했는데 여러 문예지들에서 퇴짜를 맞고 나중에는 당시 번역작품들을 전문 싣다가 페간된 “갈피리”라는 잡지에 그나마 실려 추리소설 창작에 대한 감질난 창작욕구를 무마한적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서도 강하게 느낀바이지만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에 대한 수용태도는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추리소설외에도 쟝르소설의 주류를 이루고있는 무협이나 과학환상소설, 판타지같은것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지요. 과학환상은 아이들을 상대로 한 환상동화가 그런대로 몇편 나왔지만 성인을 상대로 한 것은 리태학선생이 “아리랑”지에 발표한 겨우 한두부로 알고있습니다. 무협형태의 작품역시 80년대 내부간행물인 “개간지”에 당시 문학통신원출신의 젊은 작가였던 류순호씨에 의해 겨우 한편이 나온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장춘식:    쟝르소설의 부진은 결국 우리 소설의 쟝르가 다양하지 않다는 말로 리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쟝르의 다양화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문학교육에서의 다양한 쟝르 설정이 그 하나가 되겠고 다양한 쟝르의 접촉이 또 하나의 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소설시장의 규모와 다양화가 중요한 여건이 될 것입니다. 문학교육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지요. 우리의 문학교육은 소설의 경우 전통적으로 사회소설 혹은 예술소설을 모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대학교육도 그렇고 관련 리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수호전이나 삼국연의 같이 상당정도 무협적인 요소가 있는 소설을 가르칠 때도 무협적인 요소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거기에 함유된 사회적 혹은 력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있지요. 초중등교육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대학교육에서도 이 점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소설에도 여러가지 다양한 쟝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지요. 김혁: 네, 그리고 또 거부와 폄하가 또 이러한 쟝르문학의 정체를 빚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의 일부 주류문학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추천하고 언급하고 연구하는 것만을 배타적으로 문학으로 간주하"며"쟝르문학같은 것은 순수문학으로부터 배제된 "상업주의 문학”, 지어 “하위문학”이라고 락인을 찍고 있습니다.이러한 쟝르가 우리가 흔히 접해 온 근대소설의 외양과 다르다고 해서 쉽게 배척하는 것은 변조하고있는 문학을 대체하는 게으름과 무지의 소산이기에 쉽다고 감히 말해 봅니다. 이렇게 쟝르문학을 “수준 낮은 문학”으로 치부하는 시선들이 있기때문에 쟝르문학에 아예 근접해보지도 못하고 너나가 이른바 순수문학쪽으로 몰려가는 것도 쟝르문학이 정체되는 리유 중 하나가 아닐가요? 우리 문단의 작가들과 독서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쟝르문학의 최고봉으로 꼽는 조앤 롤링의“해리 포터”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읽은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을 정도여서 그 독서량의 편식에 놀란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국외의 쟝르문학작품들을 대량 사들여 소장하고 읽으면서 나름 쟝르문학창작에서 시도를 많이 해보았습니다. 아동력사소설에 미스터리와 무협요소를 가미한 “거북구술”과 “신라의 검”을 “별나라”에 발표했고 “문학과 예술지”에 “환을 말하다” 라는 평론을 게재하여 판타지문학의 추세에 대해 분석도 해보았고 “도라지”에서 호러작품 몇편도 발표하여 평론가들의 찬반의 평론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연변문학”지에 판타지 “불의 제전”을 발표하여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당시 문단의 첫 판타지였음에도 그 새로운 쟝르를 존중해 큰상에 뽑아준 심사위원들에 감사를 느꼈지만 거의 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판타지작품은 아직도 거의 한편도 보이지 않아 갑갑한 마음입니다. 쟝르문학의 결여에 대한 그 일례로 개인에 대한 사례가 많이 들어가 미안하지만 그만큼 이렇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새로운 매체나 틀이 등장하였을때 관습적인 서사형태로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던 우리 작가들과 평론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소위 “문학성 혹은 예술성이 없다”는 론리로 이러한 신생사물들을 몰아붙였지요. 쟝르문학은 순수문학에 비해 문학성이 뒤처진다는 “편견”이 따라붙지만 독자들의 수요를 외면한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라고 봅니다. 국외의 경우 쟝르문학은 대중깊이 침투되여 있습니다. 누구나 즐겨 읽고 명인들도 자신의 독서성향에서 쟝르소설을 우선 꼽고 있습니다. 미국의 클린톤 대통령이 취임하던 당시 기자들이 즐겨읽는 책을 소개하라고 하자 서슴없이 “추리소설을 매일밤마다 읽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의 유명작가들이나 령도분들이 공중장소에서 이런 말을 했더라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가요? 사실 오래전부터 유럽의  명사들은 자신이 지적이고 품위있으며 교양이 넘치는 신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가지 취미를 내 세우는데 그 세가지인즉 첫째- 사냥, 둘째- 승마, 셋째- 추리소설 읽기라고 합니다. 이는 백여년전부터 귀족이나 상류사회의 신사들이 즐기던 일이였지요. 클린톤 이전에도 링컨도 추리문학을 좋아했고 루즈벨트는 독자의 한계를 넘어 작품을 직접 구사하고 작가들에게 부탁해 쓰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작가들중에서 쟝르문학에 심취한 이들로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 “인간의 굴레”의 저자인 영국소설가 서머셋 모옴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합니다. 특히 서머셋 모옴은 “미래에 살아남는 문학은 추리소 설뿐이다. 책방에도 도서관에도 추리가 넘쳐날것이다”고 예견하기도 했지요.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도 그렇고 수학가 화라경도 무협지의 충실한 독자였습니다. 김용의 무협지 “련성결(連城訣)”은 등소평이 가장 즐겨 읽은 소설이라고 합니다. 추리소설이 단순한 추리가 아니고 “소설”의 체제를 갖춘 추리요, 추리를 위한 “소설”인만큼 문학의 쟝르임에 틀림없으며 문학의 쟝르인한 문학상을 부정할수는 없습니다. 만약 문학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전히 추리에 대한 문제의 제시와 해답만을 기술한다면 그것은 소설은 커녕 원고지 몇장이면 충분한 퀴즈풀이에 지나지 않을것입니다. 우리문단에서의 쟝르문학의 정체는 흥미로움과 경박함이 문학의 외피를 쓰고 범람하는 풍조에 대한 거부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판단은 이러한 문학을 향유하는 독자의 몫이기도 하겠지요. 장춘식: 네. 그러면 우리 독자들의 독서환경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독서환경의 경우 문학교육의 경우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라 하겠는데요, 그래도 일반적인 사회소설에 비하면 다양한 쟝르의 소설들은 양적으로 너무 보잘것 없지요. 이 두가지 여건에서 우리의 작가지망생들은 소설을 공부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다양한 쟝르의 소설공부를 할 기회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을것입니다. 그래도 마음 먹고 다양한 쟝르의 소설을 공부하고자 하면 할 수는 있겠지요.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옛날보다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혁: 그렇지요. 인터넷을 통해 또 새 세기에 들어 거족적으로 발달된 중국의 출판, 도서시장을 통해 세계각지의 우수한 쟝르작품들을 시효성있게 접할수있습니다. 요즘은 서구의 판타지와 일본의 추리가 대세인데 그러한 베스트셀러들을 중국에서도 불과 일년안에 번역본을 접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작을 개작한 영상물과 같은 다양한 참조계를 통하는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할수 있지요. 장춘식: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요소, 즉 작가들이 다양한 쟝르에 손댈 수 있는 욕구가 필요한데 이것이 너무 미약하다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쟝르의 창작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욕구는 독서시장의 요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베스트셀러라는 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 판타지소설은 이 잘 팔리는 책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그런데 우리 독서시장은 워낙 규모가 작기때문에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을 쓰더라도 소설을 써서 돈을 번다는것이 비현실적이지요. 김혁: 네. 우리 작가들이 그것도 자비로 출판한 책들이 겨우 300부를 소화하기도 버거운 우리말 출판시장의 침체는 말할것도 없고 중국이나 외국의 영화나 텔레비죤과 같은 영상매체 및 컴퓨터 사이버 매체에 경도된 조선족독자들에 의해 점차 소멸해가는 장르의 하나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나 위기의식에 작가들은 시달리고있습니다. 하기에 더욱더 생존의 길을 뚫어야겠지요. 생존화하려면 다양화, 그리고 분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쟝르문학을 바로 분화. 다양화의 한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봐도 무방하겠지요. 전 세계 수천만의 독자들의 검증으로 쟝르문학의 최고의 반렬에 오른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은 자신의 작품에서 문학적 정교함이 떨어진다는 비난에 “나는 노벨문학상이 아닌 수백 수천만 명의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다”라고 호언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대중이 문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대중에 의해 문화가 창조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이러한 정론은 쟝르문학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게 합니다. 독자들의 흥미를 무시하고 독자를 외면하며쓰여진 작품은 비록 작품성이 뛰여나다 할 지라도 “읽히지 않은 소설”이라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을겁니다.때문에 우리의 문단은 편협한 변두리 사유에서 벗어나 첨단 다매체 시대에 걸맞게 활용 매체에 부합되고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 전략을 필요로 해야 할것입니다. 작은 시장, 엷은 독자층을 가진 우리 문단, 우리 작가로서는 그런것이 하루아침에 되진 않겠지만 서서히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우리 문학의 다양화와 정체의 극복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장춘식: 조선이나 한국을 포함시킨다면 물론 작은 시장은 아닙니다만 이들의 독서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수련과 적응과 연구가 필요한데 선천적으로 우리는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상황이지요. 김혁: 중국조선족이라는 우리만의 특유의 정서와 소재로 한번 승부사를 던져본다면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을가요? 외려 한국에서 우리의 소재를 활용하여 책도 내고 영화도 만들고 있던데요. 그와중에 상업효과만 쫓아가고 조선족에 대한 진정한 리해의 결핍때문에 조선족 독자와 관객들의 불평의 소리도 때때로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 조선족 작가들이 해외에서 사뭇 선호하는 쟝르문학에 대한 연구와 동참의식에 대해 한번 호출해보는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우리문단에서 나름 시도가 없는것도 아니였습니다. 일전에 문단에서는 참으로 반갑게 전문 인터넷 문학상이 공모되였는데 그 문학상에 오른 작품들을 읽으면서 생각되는바가 많았습니다. 인터넷 문학이라는 쟝르문학의 요소에 거의 근접하지도 못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였기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심사위원 모두가 우리의 인터넷 작가들의 문학 전반에 대한 리해와 예술적 안목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정평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참여의식과 열기는 보였지만 우리의 인터넷소설이  문단에서 하나의 새로운 력랑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아직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해외에서도 학자들이 인터넷 소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는 “기존의 소설 양식이 가지고 있는 구성의 치밀성과 예술성이 떨어지고, 언어에 대한 투철한 자각이 결여되여 있어 민족어의 상실과 그로 인한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지적”이 나오고있는데 우리의 인터넷 문학에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장춘식: 저도 이번 인터넷문학 문학상 행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만 얼마간 실망하기도 했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것 또한 문단의 선배로서 저에게도 책임이 없을 수 없지요. 가장 절실한 느낌은 우리 문학청년들이 아직 인터넷문학에 대한 인식이 피상적이라는 점이였습니다. 문학작품을 새로운 미디어인 인터넷 공간에 올려놓으면 곧바로 인터넷문학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하기야 종이신문이나 잡지에 게재했던 작품을 인터넷에 올려놓기만 해도 어느 정도 인터넷문학의 기능을 하기는 하지요. 쌍방향의 소통이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이것을 인터넷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나도 인터넷을 단순하게 보는 편협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형의 미디어로서 인터넷은 종이신문이나 잡지, 서적, 영화나 텔레비죤 등 전통적인 미디어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있습니다. 김혁: 네. 인터넷문학을 비롯한 쟝르문학 작품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소설에 대한 정의와 가치 기준으로 보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기존의 문학이나 소설에 대한 정의, 역할등 면에서 현격한 관점의 차이를 보이면서 기존의 양식과 구분되고있지요. 요즘의 인터넷 문학을 보면 인터넷 작가들만의 환상작인 소재, 파격적인 구성방식, 그들만이 오가는 은어,전용어 즉 축약되거나 변용된 부호의 인용, 마치 삽화처럼 사용되고 있는 이모티콘등으로 그들만의 창작방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터넷 문학작품들에서는 그러한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에 오른다고 해서 그것이 인터넷문학인 것은 아니지요. 장춘식: 그런만큼 인터넷문학 또한 인터넷이라는 미디어의 장점을 최대한 리용할 수 있는 형태의 문학이여야 하겠지요. 아직 많이는 개발되지 않았습니다만, 가령 이미지나 음향, 음악 등을 동반한 시문학, 하이퍼링크식의 소설구성 등은 쉽게 생각할수 있는 인터넷문학만의 특징이 되겠지요. 하이퍼링크라는 개념은 쉽게 말하면 인터넷사용자들이 자주 접촉하게 되는것인데요, 하나의 링크를 클릭하면 새로운 화면이 뜨는 현상을 말하지요. 례를 들면 이런것입니다. 전통적인 소설과 꼭 같은 형태의 스토리가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클릭을 필요로 하도록 설정합니다. 하나 이상, 가령 2개나 3개의 링크를 설정하여 원하는 링크를 클릭하였을 때 이어서 스토리가 진행되게 하는겁니다. 링크마다 스토리의 진행상황이 달라지고 특히 결말부분에서 몇개의 서로 다른 링크를 걸어놓으면 독자의 궁금증을 배가시키게 되지요. 그러니까 시작이 같은 소설이 중간에서 스토리의 방향이 몇개로 나뉘여질수도 있고 또 몇개의 서로 다른 결말이 설정될수도 있다는 말이 되지요. 이런 형태는 종이미디어에서는 불가능하니까 인터넷만의 특징이 되는겁니다. 이외에도 인터넷의 끊임없는 발전과 더불어 인터넷의 특징과 개성을 리용한 수많은 새로운 문학창작양식이 개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혁: 우리 문단에서 쟝르문학이 언제면 제 명성을 찾을수 있을 것인지? 안타깝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입니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도 보이기도 합니다. 요즘의 신진들은 선배들의 고답적 문학 형식을 거부하는 한편, 작품들이저마다의 개성과 작품성을 보이면서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맞서는 창조적 글쓰기의 순발력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작품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작품들과는 언어와 플롯면에서 완연 분별되는 쟝르물의 문법을 끌어들이면서 독자층을 사로잡는 깜찍발랄한 작품들, 감히 수작이라고 부를수 있는 작품들이 씨앗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 소설이나 신예들을 발견하면 반가움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찾아옵니다. 소설이 더는 사람들에게 진지한 쟝르로 인정받지 못하게 된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소설의 인문학적 가치를 고려하는 습작생이기에 반갑고 또한 그 습작생을 어떤 문체방식으로 이끌어야 할지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들은 언제쯤 싹을 틔울수 있을까. 쟝르문학의 황무지 같은 이 곳에서, 조금은 간절하게 그 순간을 기다려봅니다. 그들에 의해 우리의 쟝르문학도 꽃을 피워 우리만의 특색의 “적인걸”이 나오고 “홈즈”가 등장할 날이 있겠지요. 장춘식: 소설쟝르의 다양화 혹은 쟝르소설의 발달은 문학교육, 독서환경, 시장요청 등 세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수 있겠는데, 알수 있듯이 어느 한 측면에서도 우리 문단은 소설쟝르의 다양화나 쟝르소설의 발달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지 않고있습니다. 김혁: 이에 반해 해외의 경우는 “순수문학”과 “쟝르문학” 사이의 경계조차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이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게 벌써 십년 저쪽의 일입니다. 추리와 과학환상판타지, 로맨스, 무협 같은쟝르소설들이 본격문학의 령역안으로 대거 밀고 들어오는 한편, 순수문학 쪽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지요. 이른바 순문학 작가들은 쟝르소설적 틀과 장치를 적극 활용한 작품들을 다투어 내놓고 있습니다. 이들은 “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독자와 정면승부하자는게 취지”라고 창작의취에 대해 설명하고있습니다. 일종의 세를 형성하면서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는 요즘 우수한 쟝르작품들은 쟝르작품들이 갖는 특유의 기계적 장치를 크게 차용하고 의지하면서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통찰을 담고 현실에 대해발언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작품들에서 추리적인 것이나 무협적인 것 환상적인 것은 배경에 불과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혹은 인간의 어떤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적극적인 소재이자 계기에 불과하기도합니다. 상상력은 보조에 불과할뿐 결국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그리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소설로써의“이야기”, 문학으로써의 완성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태고적에 칼날을 휘두르고 은하계밖에서 날아예고 피투성이의 복수극을 펼치던 쟝르문학이 이제는 사회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있습니다. 쟝르문학 전문작가들은 그 시대의사회문제를 포착하고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대중들도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한국의 경우에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그들의 문학 풍토에서 쟝르문학 시장이 활성화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하위쟝르로 폄하되던 쟝르소설들이 미래의 문학을 이끌어갈지도 모른다고 문단과 학계가 조심스레 점치기도 합니다. 쟝르문학이 가지고 있는 오락성은 분명 순수문학의 엄숙성과는 구분지어질 특징이라 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쟝르문학의 가치 전부가 부정적으로 판단될 성격의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교훈적이기보다는 오락적인 재미를 얻기 위해 소설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른바 순수문학이 추구하는 목적 달성의 “일석이조”의 효과도 줄수 있다면 쟝르문학의 가치를 작지않게 매길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몇해전에 “도라지”에 내였던 호러작품에서 저는 단지 공포물이라는 취미로 쟝르문학에 접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변혁기 농촌사회의 붕괴와 그 와중에 겪게되는 농촌총각들의 실의와 아픔에 대해 다루려 했습니다.그리고 판타지 “불의 제전”에서는 민족의 렬근과 분단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 꾀했구요. 오래동안 엄숙한 자세로 소설창작에 림해온 작가로서 저는 기존의 본격소설은 쟝르문학과 같은 다양한 자양분을 수용해야 그 지평을 넓힐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독자들을 섭렵하고있는 쟝르문학의 흥미가 종국에는 순문학으로 이끄는 힘이 되길 바라마지 않고있습니다. 장춘식: 이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면 가령 문학교육에서 다양한 소설쟝르를 가르치고 다양한 쟝르의 소설들이 독자에게 배급되고 마지막으로 조선과 한국을 포함한 한글문화권을 대상으로 시장개척을 시도해보아야 하겠지요. 한어로의 창작도 생각해볼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사실상 우리 조선족문학이라는 개념과는 점차 멀어질수밖에 없습니다. 문학선배로서 책임감을 통감하며 함께 노력해야겠다는 말밖에는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김혁: “호불호”가 엇갈릴지라도 현재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양식과 감각은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의양상을 결정지운다는 점에서 쟝르문학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중요한 령역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순수문학이 지금 당장 그동안의 중국이나 구쏘련등의 주류문학을 고스란히 접해오고 중국조선족이라는 락인이 찍히게끔 노력해왔던 전통과 결별하고 오로지 가벼운 상업주의와 내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학의 위기론이 매일이고 들려오는 오늘, 해원의 길을 모색해나가고 있는 또 한 방편으로 쟝르문학의 부재에 대해 질호해 봤던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의 쟝르문학에 대한 새삼스러운 환기와 구구한 담론은 산업화시기에 맞닥뜨려 어딘가 무력해진 우리 문학의 현황과 하지만 그 문학의 생존을 갈망하는 열정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이 문화 전체의 구조속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재조정될것이고 탈변에 탈변을 거듭할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더욱 문학답게 정련될 것이며 그것만의 절대적인 기능을 갖게 될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문단의 빈 구석을 찾아보며 대중문화담론을 구구히 늘여놓는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과 무관하지 않을것입니다. 무더위를 잊게 한 좋은 대담 감사합니다. 장춘식: 감사합니다.     “도라지” 2011년 4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46    계률을 뛰여넘은 사랑 댓글:  조회:2927  추천:15  2014-08-07
[김혁 독서칼럼 9] 계률을 뛰여넘은 사랑 장애령의 단편소설 “색계” ​ ​ 일전 메가톤급 소식 하나가 영화팬들의 신심을 강타했다. 중국의 톱스타 탕유가 함께 영화작업을 했던 한국영화감독과 결혼한다는 소식이였다. 중국의 최대 포털사이트인 “시나닷컴”은 즉각 탕유의 결혼 소식을 메인에 걸었고 여기에 누리군들이 단 댓글만도 무려20만 개가 넘는등 이들의 결혼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다. 탕유라는 톱스타를 세상에 알린 작품은 바로 “색계”였다. 한 화려한 용모의 녀배우의 신변잡기에 대해 수천수만의 팬들이 열광하고있지만 또 다른한 출중한 재기(才气)의 녀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바로 “색계”의 원저자 장애령(张爱玲)이다.  “색계”는 1930~40년대 상해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중국의 현대문학사에서 “필적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여난 재주를 지닌 녀자(旷世才女)”로 불리는 장애령의 단편소설이다. 장애령 항일전쟁시기, 대학가에서 항일연극에 투신했던 왕가지(王佳芝)는 애국적 열정에 불타는 청년 광유민(邝裕民)이 주도하는 항일단체에 가입한다. 광유민에 호감을 느낀 왕가지는 그가 주도한 상해의 친일파의 주요인물 “역선생 (易先生)” 암살계획에 동참한다.그녀의 임무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역선생의 마누라에게 접근하여 신뢰를 쌓은후 역선생에게 다가가는것이다. 몸을 던져 역선생의 마음을 얻은 왕가지는 연기가 아닌 실제 사랑을 느끼게 되며 곧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사랑때문에 시대와 력사라는 보다 큰 무대로 뛰여든 주인공은 처음에는 욕망의 기운을 전해오는 강력한 상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나중에는 그러한 자신을 주체할수없어 신들린 연기에 매달린다.   “색계”는 상해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장애령 스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였다고한다. 1950년대에 초고가 완성되였으나 30년가까이 탁마를 거쳐 1978년에 “망연기(惘然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였다. 작가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작가 장애령의 삶은 불행했다. 그녀는 좋은 집안에서 태여났다. 그의 조모는 바로 청나라 말기 양무운동을 주도한 리홍장의 딸이였다. 그러나 두살때 어머니의 유럽류학을 시작으로 부모의 리혼, 계모와 불화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8년에 런던대에 1등으로 합격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류학을 포기하고 향항대에 입학했는데 그마저도 1941년 일본군이 향항을 점령하자 공부를 중단하고 상해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첫번째 향로(第一香炉)”,”경성지련(傾城之恋)”, “붉은 장미와 흰 장미(红玫瑰与白玫瑰)”등 많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쏟아내 큰 명성을 얻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불과 20대 초반이였다. 당시의 상해는 근대적인 서양문물과 전근대적인 봉건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작가인 그녀에게 풍부한 작품의 소재를 제공했다. “색계” 역시 상해라는 지역적 특징이 작품 전체를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24세 때에 괴뢰정부의 관리였던 매국노 호란성(胡兰成)과 신분을 알면서도 그와 결혼을 하면서 많은 비판적인 논란에 휩쓸리기도 했다. 그후 남편에게 다른 녀자가 있음을 알고 1년 6개월 만에 리혼했다. 1940년대에는 상해의 천재작가로 평가받았지만 1945년 항전에서 승리한후 친일파 남편때문에 만인의 지탄을 받았다. 문학활동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공론화돼 비난받기가 일쑤였다. 1955년 미국으로 갔고 뉴욕에서 30살 년상인 미국 작가 페르디난드 레이어와 두번째 결혼을 했다.미국에서의 생활도 순탄치만은 않아서 그녀는 지독한 가난과 고독과 싸우게 되며 남편의 딸과 불화로 고통을 겪었다. 생계를 위해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결혼 11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이후 줄곧 혼자서 쓸쓸한 황혼을 보냈다.  1995년 9월 미국 LA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금은 가장 뛰여난 중국현대녀류작가로 추앙받고있지만 "문학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무산계급의 투쟁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한때 장애령의 귀족적이고 사치스런 사랑과 가족에 대한 작품들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1970년대 대만과 향항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이른바 “장애령 열풍”은 개혁개방이후에야 비로서 중국문단에서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부분 력사와 관습과 남권이 우세한 사회에서 비극적인 선택을 해야 했던 중국 녀인들의 질곡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는 좌의 질곡에서 벗어나 개인의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자극과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것이다. '장애령 열풍'은 문학적 력량이 담보된 조건 하에서 중국사회가 확대된 문화적 포용력을 준비하고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지점에 위치한다고도 리해할수 있다. 모든 것을 정치적인 기준으로 재단하는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개인의 사소하지만 절박한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였다는 점이다. 장애령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상해가 서구적 근대문명과 전통적인 봉건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지점이었다면 현대 중국의 대도시들은 기존의 사회주의적 가치와 개혁 개방 이후 물 밀들이 들이닥친 자본주의적인 상업문명이 소용돌이치는 공간이었다. 그 가치관의 혼란속에서 방황하는 중국인들에게 섬세한 필치로 감수성을 자극하며 인간내면의 문제를 다룬 장애령의 작품은 커다란 매력이 아닐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 "색계" 포스터​ ​ 장애령의 소설은 영화화된 작품이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쪽과 완성도가 높은 쪽으로 뽑으라면 중국인으로서 오스카상을 연거번거 수상한 명감독 리안의 “색계”일것이다. 소설은 단편소설로서 단숨에 읽을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짧지만 영화”색, 계”는 무려 2시간 반이 넘는 긴 편폭으로 원작의 정수를 세세하게 재해석해냈다. 리안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색.계”의 원작 소설을 읽으며 녀주인공이 다른 정체성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인 철학과 동일하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끼고 작품을 스크린에 올릴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막상 이 작품을 히트시킨것은 바로 영화에서 나오는 파격적인 정사씬때문이다. 리안은 영화에서 제목처럼 지독히도 리안스러운 색을 관객들에게 뿌렸다. 영화는 파격적이였으나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하염없이 지독하여 보는 이의 리성을 혼미하게 만들었다.영화는 상영이 되자 곧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색계”를 그저 19금 영화로만 생각했고 평단에서는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놓고 언쟁이 높았다. 수위를 넘는 정사씬은 혹여 영화를 멜로나, 에로수준으로 가볍게 생각한 이들에게는 흥미거리로 되겠지만 사실 영화가 보여주고자하는것은 상업효과를 노린 싸구려 멜로물이 아니였다. 영화에서의 정사씬은 가혹한 시대가 만들어준 성적 긴장감으로 대단히 폭력적인 퍼포먼스의 느낌을 전하하면서 인물의 심리에 단단히 밀착되여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정사씬으로 하여 원작이 전하고저 하는 메세지를 더 그윽하게, 농밀하게 담아낼수 있었다. 그리고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이 영화때문에 이변이 일어났다. 한 감독이 2년 간격으로 같은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것이다.  2005년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후 2007년 “색, 계”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촬영상 2개 부문을 석권한것이였다. 여태껏 리안만이 이루어낸 기록이였다. 막상 소설에서는 정사씬이 전혀 없다.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시대의 굴곡에서 녀성의 시각으로 시대상이나 삶의 욕망등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암살 대상을, 자기의 적을 사랑하게 된 녀자. 결국 그를 죽음에서 탈출 시키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비뚠 사랑에서 탈출하지 못하고마는 녀자,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연기하던 캐릭터에 자아가 녹아들며 욕망과 책무가 역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른 정체성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가혹한 시대와 맞물리며 그녀 스스로를 비극 속에 몰아넣은 것이다. 여기서 “색(色)”은 “계(戒)”를 넘어설수 있지만 다음순으로 “계(戒)”를 넘는다는것은 곧 존재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 제목이 보여주듯이 소설은 경계를 넘어선 사랑과 그 파국을 그려냈다. 사랑에 대한 관념과 금지된 사랑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였다.   “길림신문” 2014년 8월 6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영화 "색계" 삽곡 ​  
245    도시인들의 곤혹과 방황을 재현한 소설들 댓글:  조회:1894  추천:15  2014-08-02
평론 도시인들의 곤혹과 방황을 재현한 소설들 (발취)   김혁의 중편소설 “바다에서 건진 바이올린”   김관웅       190년대에 들어서서 도시에서의 경제체제의 개혁이 대면적으로 확산되여감에 따라 특히 중국경제의 제일 변둘리에 있는 중국조선족도시사회에서 실업은 더욱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였다. (중략)   무명시대에 있어서의 다원적인 도덕관, 가치관의 공존은 필연적으로 도시인들로 하여금 선택의 곤혹과 불안에 빠지게 하며 아울러 이에 따르는 침륜(沉沦)과 타락이 뒤따르게 된다. 특히 정치본위시대에서 경제본위시대에로 들어서면서 날로 팽배해진 인간들의 물욕은 사회상에 배금주의가 만연하게 하였고 적잖은 사람들은 배금주의가치관의 포로가 되여갔다. 우리의 작가들은 이런 사회현상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소설롤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김혁의 중편소설 “바다에서 건진 바이올린” (“도라지” 1996년 제5호)은 한 천부적인 음악재능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금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 조강지처와 자식마저 버리고 돈많은 녀 기업인의 치마폭에 안겨든 도덕적인 타락과정을 보여주었다. 녀기업인의 사촉하에 예술을 포기하고 술공장을 경영하나 미구에 부도가 나는 바람에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음악에도 다시 돌아갈수 없는 상황에서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방황하게 된다. 방황하던 그는 대자연 바다의 유혹에 빠져듦으로서 음악의 신성함을 되찾으려 했으나 결국은 죽은 인어로 되고만다. ‘ 소설은 아름다운 리상과 랭혹한 현실사이에서 생겨나는 불협화음을 부조리극단적인 수법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금전의 부식을 받아 예술가가 시정배로 변질되여가는 인생의 비극을 보여준 작품이다. 1990년대초까지만해도 김혁의 “바다에서 건진 바이올린”처럼 지식인의 타락을 묘사한 작품들보다는 경제본위, 금전만능의 시대에 있어서의 지식인들이 겪게 되는 부당한 대웅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를 전달한 작품이 더 낳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이시기까지만해도 중국에서는 “뇌력로동자보다 체력로동자의 경제수입이 더 많은 (脑体倒挂)”의 현상이 여전히 개변되지않고있던 상황과 관련되는것 같다. 변리돈을 꾸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연구성과도 돈때문에 발표하지못하는 지식인의 처량한 모습을 보여준 장춘식의 “최선생의 걸음걸이”, 지식인들의 경제수입이 무식쟁이보다 못한 현실과 지식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이웃들을 두고 고뇌하는 대학교수의 심리를 그린 김재국의 “우리 이웃들”, 동부인하고 유흥장에 갔다가 돈이 모자라서 수모를 받아야만했던 작가의 처지를 그린 김혁의 “겨울 유흥장”(“천지” 1991년 제5호”), 30여년 교원생활을 한 우수교원이 돈 3만원을 구하지 못하여 아빠트도 분양받지 못하는 지식인의 궁상을 그린 리선희의 “세상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등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 “중국조선족문학통사” 하권. 제4편 4장 개혁개방 후기 1990- 2010년의 소설문학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244    바다에서 건진 바이올린 댓글:  조회:2478  추천:19  2014-08-02
. 중편소설 .   바다에서 건진 바이올린                   김 혁         “만물의 변화란 실제에 있어서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허나 바로 형식의 내면에 항구불변의 생존의 의지가 잠자고 있다.”  - 쇼펜하우어 “생존공허설”중에서    “우리의 정신세계 및 리념의 구축은 언제나 현실세계의 경험에서 비롯하여 다시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되여 전개되며 나중에 우리는 그 한 형식의 내용으로 과제를 해결하군 한다.” - 야마다까 가이요 “인간의 심층심리분석”중에서    “무릇 변형은 모두 그 자체로서의 리유가 있다.” -저자     이변(異變)의 바다    …관광기를 보낸 바다의 모래사장은 짜장 려객선을 고동에 실어보낸 뒤의 항만 그 모습이였다. 보이잖는 신의 채찍질에 쫓기는듯 줄달음쳐와 백사장을 처절썩 때리고는 뒤걸음쳐가는 멍든 빛깔의 모습과 낡은 태엽으로 풀어내리는 시계처럼 단조로운 음향, 시끌벅적하던 관광기에는 자취없던 바다새들이 사장에 찍어놓은 상형문과도 같은 죄꼬만 발자국, 그 스스로 각인해놓은 자취를 굽어보며 뿜어내는 새들의 괴이쩍은 목울음이 바다가의 고적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그러한 사장의 한 귀퉁이에서 소요가 일었다. 바다의 거품속에서 태여난 비너스인양 어데선가 불쑥 솟아난 조무래기 몇몇이 쫓거니 앞서거니 하면서 백사장을 달리고 있었다. 윤택하지 못하여 린색함에 가까웠고 바다바람도 훈풍을 제쳐놓은 한산한 바람이였지만 조무래기들은 저마다 알몸이였다. 바다새보다는 퍽 아름다운 홍소를 지르며 추위를 모르고 달려가는 조무래기들뒤로 새들의 발자국보다 조금 큰 귀여운 자국들이 꿈을 홈파고 있었다. 하얗고 조그만 몸뚱이들, 그리고 저마다의 사타구니에서 우습강스럽게 달싹이고 있는 고추들, 바다의 꼬마요정 같은 그 귀여운 모습들에 바다가는 금시 생기를 되찾은듯하였다.  홀연 맨 앞에서 톱상어처럼 본때스레 내달리고 있던 애가 우뚝 멈춰 섰다. 급촉한 멈춤이였기에 애의 작은 발이 모래속으로 움푹 빠져들어갔다. 애는 쳐들린 눈매를 하고 앞을 지켜보았다. 뒤따라 섰던 애들도 그 애의 모습을 되풀이하며 하나 둘 그 자리에 급정거를 해버렸다. 잔 돌멩이 하나 없이 혹여 작은 조갑지들만이 달그락거리던 사장에 거밋한 물체 하나가 탄성한계로 늘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보통장년의 키만한 그 실체는 조무래기들에겐 엄청 큰 괴물로 안겨왔다. 애들은 눈에 버팀목을 한채 식지를 입에 물고 숨을 꺽 죽였다. 맨 앞장선 애의 넌들넌들 흘러내리던 코물이 커다란 기포로 되여 부풀어오르다가 빵 소리를 내며 터졌다. 와악! 하고 애가 고함을 질렀고 그 소리를 폭발물로 하여 조무래기들은 혼겁한 소리들을 련발하며 돌아서서 내뛰기 시작했다.    사장의 웃쪽으로부터 한 나그네가 내려오고 있었다. 소일거리를 찾는 유한자인듯 살집 좋은 나그네는 구름과 같은 보법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는 나그네의 풍성한 아래배를 달려오던 애가 골받이 하고 말았다. 그 서슬에 애와 나그네가 뒤로 벌렁 나가 넘어졌다.    “저기… 사람이… 사람이 죽었심더…”   호젓한 바다가를 찾아 소풍하려던 나그네는 아닌밤중에 웬 홍두깨냐는듯 으깨진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의 너무도 진지한 표정에 밀려 나그네는 애의 식지가 가리킨 곳을 향해 스적스적 걸어갔다. 반신반의에 절은 나그네의 눈길에 아닌게아니라 시체 하나가 비쳐들었다. 마구 엎딘 자세인 그것은 분명 여름철에 흔히 보게 되는 익사자(溺死者)의 모습이였다.     맨먼저 사내의 눈길을 포박한 것은 익사자의 앞으로 뻗친 손이였다. 손마디가 기름하여 여느 사람들의 손보다 훨씬 큰 손, 허나 결코 거쿨지지 않고 보기 좋은 손이였다. 그 무슨 의욕에서였던지 손마디는 무언가 움켜잡는 동작을 하고있었다. 머리칼은 유난히 작아 보이는 머리통에 찰싹 붙어있었는데 꼭 마치 바위에 엉겨붙은 청태처럼 보였다. 그런데… 익사자의 전신을 훑어내리던 나그네의 눈길이 다리부분에 와서 뚝 멎어버렸다. 나그네는 두눈을 슴벅거리며 불뚝 불거진 눈매를 하고 다시 익사자의 아래몸뚱이에 시선을 주었다.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맙소사… 물고기의 꼬리가, 물고기의 꼬리가 두가닥 지느러미를 축 늘어뜨린채 응당 다리가 있어야 할 부분에  붙어있는 것이 아닌가! 나그네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그네는 익사자의 알몸뚱이 전신에 정교한 문신마냥 촘촘히 박혀있는 비늘을 보아낼수 있었다. 나그네는 꿈을 꾸고있는 기분이였다.    “이크크…” 나그네의 입으로 헛바람 섞인 괴상한 소리가 새여나왔다. 느닷없는 공포가 신상에 까맣게 밀착해왔다. 조무래기들 앞에 선 년장자라는 체신도 잊고 공포의 그물에서 벗어나련듯 허우적거리며 나그네는 내뛰기 시작했고 그 거동에 다시 겁기를 되살린 조무래기들도 괴성을 지르며 함께 내뛰였다. 비대한 몸집을 놀리며 굴러갈듯이 달리는 나그네와 그 뒤를 바싹 쫓아선 알몸의 개구장이들. 그것은 바다속 말향고래와 그 뒤를 바싹 따라선 새끼 흡반어를 련상케 하는 기이한 광경이였다.   어떤 외출       … 발바닥이 괴로웠다. 어느 짬에 어떤 알맹이가 들어갔는지 그 자그만 이물질이 내내 그의 발바닥을 괴롭히고 있는겄이였다. 그렇다고 숱한 사회지명인사들이 둘러앉은 회의장소에서 신발을 벗고 그 속의 이물질을 털어내는 불미한 거동을 할수도 없었다. “일요석간지” ㄷ시 주재기자 철인(哲人)씨는 지금 엉뚱한 곳에서 취재수첩을 펼쳐들고있었다. 여느때와는 달리 정열의 개미들처럼 보도할 수치들이 우글거려야 할 취재수첩은 하얀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 필을 장신구처럼 만지작이며 그는 한 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하고있었다. 며칠전 ㄷ시 해변료양소 부근에서 괴상한 익사체 하나가 발견되였다. 웃통은 분명 중년남자의 몸체인데 아래도리는 물고기꼬리가 달려진 괴상한 생명체라는것이였다. 소문은 불과 며칠도 못되여 이 해변도시의 구석구석에까지 촉수를 뻗쳤다. 조무래기들, 조무래기 반급의 동학들, 부모들, 부모들의 직장동료들, 직장동료들의 안해들 남편들… 이런 순으로 소문은 열에 십, 십에 백, 백에 천으로 해일마냥 온 도시를 삼켜버렸다. 이에  과학기술대학과 의학원의 몇몇 교직원들이 커다란 홍미를 갖고 그 기이한 생명체를 소장했고 소식간담회까지 가진것이였다. 맨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철인은 애들의 못된 장난으로 여기고 웃고 지나가려 했다. 한 사람 건너 두 사람 건너 그 기문이 륜곽 크게 자리잡혔을 때도 강호곡예단의 돈벌이를 위한 조야한 짓거리, 혹은 피서지들의 신기한 광고수단쯤으로 생각해두었었다. 과학기술대학에서 그 “장난 혹은 돈벌이나 광고”를 위한 이른바 “기이한 생명체”를 위해 소식간담회까지 연다고 회의통지가 오자 “미친 수작이야.”하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극력 큰 신문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해 몸서리를 하고있는 신문사 본부에 어떤 이들이 련락주었던지 주필께서 친히 장거리전화를 걸러 그에게 주말판 톱감으로 쓸 터이니 꼭 사진까지 곁들여 보도를 해내라고 분부를 내렸다. 하여 철인은 마지못해 간담회에 출석했고 맹활약을 보이던 여느때의 기자답지 않게 한쪽구석에 자리지킴만 하고 있었던것이였다. “,,, 이 괴상한 불명체의 정체에 대해 우리는 한 두마디로  억단을 내릴수 없습니다. 이 생명체가 항간에서 늘 말하는 미인어인지? 아니면 약물의 부작용, 혹은 근친결혼으로 초래된 기형아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과학환상영화에서 늘 보게 되는 별나라사람인지? 여하튼 기상천외한 일이라 해야겠습니다…”    간담회 참가자들이 필요이상 격동된 낯빛을 하고 너나없이 목청을 한 옥타브씩 살리고있었다. 그러나 그에 무감각한듯 철인은 도수안경너머로 이물질이 잠복해있는 신발을 멀거니 내려다볼뿐이였다. “아디다스표”신발, 기자의 한달 로임과 맞먹을 엄청난 값의 신발이였다. “명월”표 딸기술공장 ㄷ시 도매경영부의 방경리, 즉 그의 소꿉친구 방황씨의 적선이 있었기에 철인은 난생처음 그렇게 값진 신발을 신어 보는것이였다. 어느 변강의 시골에서 한 달을 사이 두고 이웃에서 둘은 태여났다. 발가벗고 고향의 강에서 무법자처럼 물장난도 쳤고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한학급에서 지내면서 시험답안 보고쓰기에서 “내조”를 해주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부시험에서 방황은 음악계를, 철인은 신문계를 택했다. 그 후로 방씨는 고향소재지의 예술단에서 수석바이올린수, 국가1급 악사로 부상했고 철인은 “일요석간지”에 취직해 지금은 ㄷ시 주재기자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그러던 방씨가 생명으로 아끼던 바이올린을 버렸다. 음악계와 고향사람들의 경아의 눈총속에 ㄷ시 “명월”표 술도매부 경영부 경리로 탈바꿈해 둘이는 다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친구의 그루바꿈에 둘이는 다시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되였던것이다. 친구의 그루바꿈에 그 누구보다도 반감을 보였던 철인이였지만 여하튼 배달족이 몇몇 없는 산재지역에서 도타운 친구와의 만남인지라 기쁘기만 하였다. 그런 친구 방황이가 어느 날인가 행적을 감추어버렸다. 그렇게 증발되듯한지가 어언 넉달째 잡혀온다. 간담회의 연막탄 같은 담배연기속에서 철인은 자기를 내내 괴롭히고 있는 것이 신발속의 이물질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이물질, 곧바로 그 “아디다스”를 사준 친구의 실종에 대한 불안임을 문뜩 느낄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질서없이 떠올리는 사이 간담회는 어느새 끝났고 회의 책임자의 안내하에 모두는 의학원의 랭동실로 향했다.    … 랭기가  훅- 끼쳐왔다. 타일을 깐 바닥은 앙금진 랭기로 하여 유난히도 번들거렸다. 카드가 붙여진 커다란 서랍이 일매지게 서렬을 짓고있었다. 모두들 책임자가 건네주는 대로 마스크를 걸고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바꾸어 신었다. 긴장이 서린 거친 호흡소리와 자박자박 슬리퍼 끄는 소리, 공연한 마른기침소리가 랭동실의 농도짙은 정적을 흔들었다. 랭동서랍을 지켜보며 철인은 은연중 약방의 각종 약재가 들어있는 서랍을 머리에 떠올렸다. 저 서랍속에 생명을 박제당한 하나 또 하나의 불우한 인간들이 들어있겠지? 개구리표본처럼… 하고 생각하니 부르르 진저리가 쳐졌다. 인솔자가 조심스레 그 중의 한 랭동서랍을 당겨 뽑았다.  “오???”  “정-말-이-네-에-?”  “입은 왜 저렇게 부죽히 나왔노?”  “머리칼을 좀 봐. 고수머리같군 그래.”   경아성속에 마그네슘섬광이 요란스레 번쩍이였다. 철인이만은 침체된 모습으로 맨 뒤에 동그마니 서있었다. 도수안경에 불려앉는 물방울을 닦아내며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 친구 어데로 갔을가?”   불감증의 도시   …친구의 점적에 대한 철인이의 불안은 간담회가 끝나 의학원대문을 나설 때까지 계속되고있었다. 제품구입외출이나 무역상담회를 위한 행차는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 그런 행사가 있다해도 열흘, 혹은 보름을 넘기는 때가 적었고 돌아오면 역에 내리기 바쁘게 철인이한테로 핸드폰을 쳐주군 하였다. 그리고는 둘이 함께 맥주집으로 흘러들어 억병으로 마셔대군 하였다. 그런데 이번 걸음은 장장 넉달을 잡았고 도타운 친구는 여전히 얼굴을 내밀지 않고있다. 더욱이 방황이가 맨 마지막으로 걸어온 전화가 철인을 불안케 하고있는것이였다. 핸드폰은 분명 달리는 차속에서 치고있었다. 어미가 흐릿한 말을 뭉그려 내뱉는 핸드폰의 임자는 만취한 상태였다.    “철인아야? 나 황이야. 황이란 말이야! ‘명월’경영부 방경리를 몰라?”    곁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여들어왔다. 분명 녀자의 웃음소리였다. 차의 오디오를 한껏 틀어놓아 무엇인가 지끈지끈 란타하는 것 같은 음악소리가 수화기의 벽을 쿵쿵 울리며 전해 오고있었다. 그 시끌벅적함속에서도 철인은 분명 그 음악의 곡조를 헤아려들을수 있었다.  베이료츠-“어떤 예술가의 생애”의 음조였다. 한 예술가의 흥망성쇠를 희곡적인 정절로 지은 17세기의 교항곡ㅡ 이 음악을 친구 방황이는 가장 즐겨 들었다. 더우기 하는 일이 여의치 못하거나 번뇌에 잠겼을 때, 만취했을 때면 꼭 이 곡을 틀군 하였다. 때문에 곁에서 곡조를 함께 익히게 된 철인이였다. 하지만 이 곡조만 나오면 철인은 또한 골살을 찡그리군 했다. 침울하기 그지없고 어덴가 염세적인 분위기가 저층에 짙게 깔린 음악이였던것이다. 지금 곡은 4악장에서 조약하고 있었다. 4악장의 제명은 “단두대에로”, 교향곡속의 화자가 사랑도 잃고 리상도 잃게 되자 련인을 죽이고 단두대로 오르는 바로 그 부분이였다. 원체 침울한 곡조는 핸드폰의 맑지 못한 전달과, 승용차의 엔진소리, 방황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괴성에 혼반되여있었고 그 음부마다 야릇한 불안의 덩이가 되여 철인의 고막이며 가슴이며를 울리고있었다.    “취한거요? 지금 뭣 하고있는거요?”  철인은 불안감을 곰삭이며 소리 높여 채문했다.    “나 지금 좋은 곳으루 가고있네. 엄마품으루, 그 따스하고 포근한 양수속으로 가고있네. 후핫하하하.”    용의를 알수 없는 허튼소리끝에 발작적인 웃음소리가 터져 올랐다. 등줄기를 서늘히 파 내리는 괴상한 웃음소리였다. 웃음소리를 중등내며 핸드폰도 끊겼다. 덴겁하여 방황의 핸드폰넘버를 눌렀다.    “용호가 전화기를 열지 않았습니다.”  기계적인 교환의 말소리만 들려올뿐이였다. 다시 방황의 저택에 전화를 걸었으나 받는 사람이 없었다. 장거리전화로 본 공장에 있는 그의 안해에게 련락하려 했으나 외출중이였다. 그날 저녁 철인은 잠을 잃고말았다. 가장 도타운 친구의 여태껏 밟아온 려정에 대해 새삼스레 반추해보게 되였다.    방황은 분명 전생에 음악과 인연의 끈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개구쟁이시절 강녘에서 버들피리 꺾어 불때부터 그는 그 간단하고 조야하기 그지없는 원시적인 도구로 여느 애들이 도저히 불어낼수 없는 곡조를 지어내군 했었다. 학교적 바이올린에 현혹했던 그는 숙소동학들에게서 소란스럽다는 리유로 곧잘 소박만군 했다. 그때면 그는 바이올린을 들고 조용히 자리를 뜨군 했다. 어느 겨울날 오밤중에 기숙사 화장실출입을 했던 학교사감은 그만 화장실 문곁에 뿌리내리고말았다. 매큼한 냄새가 충천하는 화장실 창문쪽에서 방황이가 몽유병환자마냥 두 눈 지그시 감고 바이올린에 신들려있었고 그 광경에 버릇된듯한 모양, 학생 하나가 한 켠에서 무감각하여 자기 “사무”를 보고 있는것이였다. 동학들은 누구나 그를 두고 못말려! 하는 태도들이였고 어떤이는 차분한 바이올린곡조를 들으면서 일을 치르면 리뇨가 잘된다고 악의없는 조롱을 하기도 했다. 음악학원응시시험에서 방황은 여느 응시생들과는 달리 간단한 기법연주를 보인 것이 아니라 수준급 바이올린스트들도 연주하기 어려워하는 “파그니니 24수 수상곡”을 켰다. 그 나이에 비해 더없이 탁마된 모습에 시험관들이 경아로 입을 딱 벌렸고 주감독은 격동된 나머지 “강압령”두 알을 삼키고나서 방황의 그 천부적인 손을 으스러져라 하고 부여잡았다. 그의 결혼 역시 음악을 전제로 한것이였다. 예술단 분조배우들과 함께 시골에 온돌공연을 갔다가 “베틀가”를 곧잘 부르는 시골학교의 음악교원과 호흡이 맞았던것이였다. 항시 천부적인 이들에게서만 볼수 있는 특유의 격정과 불온정감을 담을 듯 구부구불 온곱지 못하게 흘러내린 고수머리, 까닭 없이 그러나 지적인 기품이 어려 오만스레 들려진 유난히 운두높은 코와 그 코끝에 위태롭게 걸려진 도수안경, 쉼없이 맞비비거나 박자쳐주군 하면서 정서미를 환기시켜주는 기름진 손마디… 이 친구를 대할 때마다 철인은 곧 “사물놀이”의 곡조를 머리에 떠올리군 했다. 필사로 음조의 한계에까지 치닫다가도 돌처럼 추락해내려 음조를 껌벅 죽이기도 하면서 사람들을 무아의 경지에로 환혹해가는 그런 부풀디 부푼 정감의 덩어리로 주물된 존재로 방황에 대한 인상을 각인하게 된것이다…     갑자기 터져오른 경적이 철인의 친구에 대한 련민의 추적을 중둥 잘랐다. 의학원 정문곁에 벤츠600 한대가 정차해있었고 그 차의 경적은 분명 철인을 바라고 울려지고 있는것이였다. 철인은 차를 향해 미적미적 다가갔다. 도어의 커피색유리가 스르륵 내려졌고 안으로부터 낯익으나 그닥 반갑지 않고, 그러나 요사이 꼭 찾고만싶었던 얼굴 하나가 불쑥 나왔다. 방황의 안해, 적절히 말하면 후실- 황금전(黃金錢)이였다.    “오래간만이네요, 철인씨.’    황금전이 입귀로 웃었다. 허연 차아가, 허옇다 못해 어덴가 푸른 기운이 감돌고있는 가짜 치아가(방황은 안해가 이발미용을 하고 유방확대수술까지 받았다는것조차 철인한테 털어놓는 시럽쟁이 친구였다) 유난히 철인의 시선을 자극했다. 이 녀자만 만나면 마냥 까닭모를 한기를 느끼군 했다. 푸른 칠갑을 올린 눈두덩, 허연 이발, 자주빛 루즈를 진하게 바른 입술, 그리고 목이며 손목이며 손가락에서 현시하고있는 금은장신구들이 그 랭의를 더 해주는상싶었다. 어쩌다 친구지간에 술잔을 기울이려고 방황의 저택을 찾을 때도 녀자의 손맛이 배인 맛갈스런 김치나 국 대신 포장식품들을 가위로 썩둑썩둑 잘라 부어놓는 그녀가 철인에게는 방황의 애젊은 후처이기보다는 “명월”표 딸기술공장 황금전공장장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안겨들군 했다. 방황의 첫혼인이 보뚝에 물이 새는 것을 막아보려 애도 써봤던 철인이였다. 그보다도 음악의 드넓은 대륙에서 활보하는 방황이를 물에서 화페의 바다로 끌어들이고 행복했던 가정을 쑥밭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이 녀자라는데서 오는 거부감은 컸다.    “그러잖아도 찾으려던 참이였습니다.”    철인이 반갑다는듯한 기색을 만들어 보이면서 본제를 꺼냈다.    “용건이 뭔데요?”    “제 친구 말입니다. 방황씨가 여태 소식 없어서… 그러다 형수은 그 멋진 남편을 덜컥 잃기라도 하면 어쩔려구요.”    “웃기시네-“    웃음의 홍수가 차창사이로 터져 나왔다. 어덴가 과장된 웃음을 계속하면서 황금전이 외려 반문을 내들었다.    “철인씨는 뭐 우리 주정뱅이나그네의 파출부라도 되나봐. 돌장이도 아닌 사람 제집 찾지 못할 가봐서요.”    “그저 웃고만 있을 일 같지 않은데요. 한 두달도 아니고 넉달이나 소식 한 장 없으니…”    심각한 낯빛의 철인이 승용차 지붕을 손으로 짚으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여하튼 고마워요. 걱정해주셔서. 피서지를 찾았거나 마작친구들과 밤새기를 하고있는 것쯤으로 생각해두세요. 자, 김기사 이젠 고만 가보지요.”    황금전은 떠올릴감이 못 된다는듯 청량제 같은 어투로 철인의 걱정을 무질러버렸다.     “의학원 제약공장서 요사이 뭐 인체태반으로 미용보건품을 만들었다나요. 몇갑 써볼가 해서요. 자, 그럼… 놀러 오세요.”    유리가 철판처럼 사이를 가로막으며 올려졌고 부귀, 우월감, 오만과 휘발유냄새를 뒤로 던지며 차는 철인의 앞을 휘익- 스쳐지나버렸다. 철인은 한동안 망연한 기색이 되여 그 자리에 뿌리내려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와 살밭은 사람에 대한 저런 불감스런 자세가 그의 불만의 면적을 크게 해 주고있었다. 하면 자기가 괜스런 걱정을 키우고 있지 않나 하는 자문이 들었다. 발바닥의 괴로움이 다시 한번 감지되여왔다. 철인은 신을 벗어들고 체증기어려 동작으로 털어댔다. 번거롭다는듯 털어댔다. 그러나 마음속에 덩어리진 이물질은 종시 털어낼수 없었다.   낯선 자를 위한 족보      ᅀㄷ시 해변료양소 구역에서 발견된 불명의 생명체에 대한 가설A—  “미국의 일부 과학자들은 해양심처이 어떤 곳에 지력이 고도로 발달한 생명체 해저인이 있을수 있다고 인정하고있다.    그 사례로 보면: 1973년 4월 단니 데르모니라고 하는 화물선 선장이 버무다삼각주 부근의 스트리움 항만에서 려송연처럼 길죽한 머리를 가진 해저인을 발견했다.  미국의 UFO전문가 이반, 쌍드센도 1963년 버우더거 동남부의 바다에서 수상괴물을 발견했다. 해군기지에서도 이를 발견하고 한 척의 구축함과 잠수정을 내여 500해리를 수색해냈으나 끝내 잡지 못하고말았다.    수중괴물을 발견한 사례는 이뿐만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널리 전해 지고있다. 미국 북부의 쎈푸른호, 카나다의 웬니버거시스호, 일본의 오까다호, 뿐만 아니라 스위스, 뉴질랜드, 오스트랄리아 등지에서도 련이어 수중괴물이 나타 나고있다. 근자에 멀리도 아닌 우리 주변의 장백산천지에서도 수중괴물이 나타나 과학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있다. 이러한 사례와 이 불명체의 형태에 대한 수치로 비해볼 때 새로운 종류의 수중괴물로 우리는 가설해볼수 있다…”    ᅀㄷ시 해변료양소 구역에서 발견된 불명의 생명체에 대한 가설 B-    추산에 의하면 은하계에는 태양계와 비슷한 성계가 400억개나 있다. 그중 10분의 1은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다. 지구와 비슷한 물질결구조건을 가지고있으면 생명을 온양하고 발전시킬수 있다. 이로써 우주인의 가설이 설립되는것이다. 지혜가 우리보다 앞선것으로 추정되고있는 그들의 지구방문사례도 세계 각지에서 전설같이 전해지고있다. 이로 볼 때…”    ᅀㄷ시 해변료양소 구역에서 발견된 불명의 생명체에 대한 가설 C-    “프랑스의 과학자 미께르 오덴은 인류의 선조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내놓았다. 학설에 의하면 인류의 어떤 행위는 원숭이와 비슷하지만 포유동물들의 온화함과 민감성, 우애의 본성은 인류와 더 근사한 점이 많다는것이다. 원숭이는 눈물을 흘릴줄 모르지만 바다고래와 같은 기타 해양포유동물들은 눈물을 흘린다. 인류는 유일하게 염분을 함유한 눈물을 흘리는 령장류 동물이다. 이는 일찍 해양생활을 한데서 기인된것일수 있다. 사람과 바다포유동물에게는 피하지방이 있지만 원숭이에게는 없다… 이런 허다한 연구로부터 인류의 선조는 수중이 모종 령장동물로 가능성연구를 할수 있다. 우리 시에서 발견한 기이한 생물체가 이 가설을 증명해줄 유력한 사체표본일는지 모른다….”    … 얼마전 그 문제의 기이한 생명체에 대한 연구회가 발족되였고 따라서 연구학가들이 각종 가설을 들고 나와서 갑론을박의 쟁명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철인은 또 한번 수동적인 자세가 되여 연구회 회장 한구석에 자리지킴을 하고있었다. 생명체 발견에 대한 보도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데서 주필로부터 단단히 신칙을 받았던 그였다. 연구회는 시적으로도 손꼽히게 호화의 극으로 달리고있는 료리집에서 열리고있었다. 식탁우에서 과학적 가설과 그에 따른 수치가 여태 먹어 못본 료리처럼 오르내리고있는것이다. 몇몇이 점액질 같이 끈적한 가설을 지루하게 늘여놓는 외 모두는 감질난 눈매로 하회— 풍성한 만찬을 기다리고있었다. 연구회 후원인과 곁을 묻어선 허드레들이 진짜 연구원들보다 더 많았던것이다. 로임족들이 들어서기엔 이슬람교도들의 메카의 성지로 들어서기처럼 어마어마한 이곳 행차를 철인은 해본 적 있었다.    바로 몇 달전 방황이와 함께였다. 한 구석에서 소형악대가 울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음식의 맛보다 호화로움과 마른 호기를 맛보았었다. 친구를 대동해왔던 방황은 얼마안되여 흠뻑 취해버렸다. 손이 떨리면 바이올린 켜는데 지장이 된다며 술을 끊었던 방황이가 요사이 술을 다시 붙였고 또한 평소와는 달리 빨리 취하군 했다. 마냥 진한 독백같던 소리도 햇내기 배우가 대사외우듯 더듬거렸고 그 억양도 시르죽어있었다. 게 다리 한짝을 입에 물고 그 속의 들큼한 속살을 빨아내느라 량볼에 기승스레 홈을 파던 방황이가 느닷없이 악대쪽을 바라고 식혜먹은 상을 지었다. 요염하나 내용 없게 생긴 얼굴을 한 녀가수가 까닭없는 애수를 쥐여짜며 류행가요를 부르고있었다.    “그만 집어쳐!”     방황이가 필요이상으로 격동돼 하며 그쪽을 바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 괴성에 가까운 소리에 곡이 뚝 멎었다. 식객들의 눈길이 한결같이 그를 바라고 몰부어졌다.    “왜 이래? 취했나.”    철인이 덴겁하여 친구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그 손을 뿌려치고 방황은 비칠거리며 악대쪽으로 다가갔다. 쟈즈북, 쌕스폰, 기타, 바이올린… 악사들을 하나하나 참빗질하면서 눈꼴 사납게 내려다보았다.    “쇠통 이렇게 염소 감기앓는 소리밖에 없어?”    방황이 방게 다리로 쟈즈북에 달린 쟁쟁이를 후려갈겼다. 때애앵- 듣그럽고 아츠러운 소리가 울렸다. 정장차림의 악사들은 눈앞의 이 주정뱅이를 일순 어떻게 주체할 길 없어 멍하나 당하고만 있었다. 젊은 식객 하나가 기분 잡친듯 씩씩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철인이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허리를 굽석여보였다.  “죄송합니다. 이거 대단히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취한것같구만요.”  철인의 진실에 사죄에 막힌듯 그 사람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한면 방황의 취기는 여전히 곰삭을줄 모르고 외려 충천해있었다. 바이올린수앞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나무통을 켜고있는거야 지금?”  사람좋아보이는 바이올린수는 방황의 실태에 그저 웃어주고만 있었다. 방황은 그에게서 바이올린을 앗아들었다.  “나 가르쳐줄 테니 어디 좀 봐라.”  방황이 바이올린 활로 흘러내리는 안경테를 추어올렸다.  “바이올린연주가란 투우사의 진정, 나이트클럽 마담의 활력, 불교도의 경건함을 갖추어야 하는거야.”  방황이 바이올린을 턱에 가져다대고 활대를 추켜들었다. 주정뱅이의 손에서 흘러나온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차분하고 음악감있는 곡조가 울려나왔다. 식객들의 아니꼬움에 비틀렸던 눈길이 풀리고 점점 흠상의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웬 변고냐며 주방으로부터 달려나왔던 마담이 걱정을 해소한듯 한켠에 서버렸고 악사들도 저마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취기에 자기를 주체할길 없어하던 방황은 곡상에 빠져버린듯했다.  그때 수석바이올린수였던 그에게는 그렇다 할만한 바이올린조차 없었다. 도회지의 경기가 불황에 처한 조그마한 악기공장에서 대강 만들어낸 그런 바이올린밖에 없었다. 질좋은 수입제 바이올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안면을 몰수하고 퇴근하면 유치원생들의 가정음악교사를 맡아보았었다. 돈후한 성정미의 안해 역시 그를 도와 학교에서 퇴근하며 부업거리를 맡아했다. 부근의 술공장을 찾아 술상표를 붙여주는 일이였다. 경기가 호황이였던 “명월”표 딸기술공장에는 림시공들이 많이 수요되였고 하여 포장직장의 흐름식작업대곁에는 8시간외 부업거리를 찾아나선 도회지의 소시민들이 많았다. 그러는 안해를 맞으러 방황이가 녀공장장 황금전의 눈에 들었다. 우리 민족타입의 용모와는 이색적인데가 있는 고수머리, 운두높은 코와 음악가의 독특한 제슈체어가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방황은 인차 TV광고화면에 올랐다. 슈베르트의 곡 한곡조를 연주해보이고나서 황금빛의 술이 담긴 굽높은 술잔을 들어보이면서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표딸기술에서 당신은 음악과 같은 차분함과 격정을 맛보게 될것입니다.” 그저 그런 한대목이였다. 그런데 “그저 내린 한대목”에서 방황은 자기가 목청 쉬게 가정교사를 맡아본 보수와 안해가 손금 다슬게 벌어온 푼돈보다 곱으로 되는 광고비를 받을수 있었다. 여느 녀사업가들의 이미지가 그러하듯 가정의 비운을 여러 차례 겪고 단신으로 지내던 녀공장장과 도회지 음악권내에서 큰 기침을 할만했던 방황은 재빨리 의기투합이 되였다. 조강지처와 아홉살난 아들애를 버렸다는 자격지심이 한동안 방황이를 못견디게 괴롭혔으나 새로운 세계가 주는 유혹에 인차 그한 자책을 잊어버린듯 했다. 진짜바이올린의 꿈을, 음악대가의 기품에 맞는 생활을 인제야 이루게 되였다고 그는 생각는듯 했다.…  곡이 끝나자 악사와 식객들은 넓은 아량으로 주정뱅이에게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방금전까지도 술량이 많은 것 같다고 막던 철인은 술컵에 맥주를 가득 따라 내밀었다.  “멋졌어! 정말이야. 이 알코올량반.”  안경을 벗어들고 넥타이끝으로 안경알을 닦아내는 방황이의 손이 사뭇 떨리였다.  “4년말이야. 꼭 4년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만져보는것이였어. 그런데…”  철인의 술을 받아 단숨에 굽내고는 방황은 탈진한듯한 눈길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염세, 권태와 소외가 혼반죽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지어지고있었다.  “그런데… 너희들 음악떨거지들 듣기엔 비슷한 것 같애도 엉망이였다. 그저 흉내에 지나지 않아. 이 손으로…”  방황이 술기운에 떨리는 손을 쳐들어 눈가까이에 대였다.  “이 천재의 손으로 이제는 누룩이나 주무르고 술집녀자나 주무를수밖에 없게 됐단 말이요.”  탕갈된 자존을 찾을길 없어하며 방황은 주먹으로 식탁을 탕! 내리쳤다. 빈 접시들이 반자 높이로 떴고 금방 온화함을 찾았던 식객들에 다시 의문과 적의가 서려들었다…….  기이한 생명체 연구회에서 철인은 내내 아교풀처럼 뇌리속에 끈끈히 도배된 친구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방황이의 행적에 대한 여러가지 방정식을 풀고있었다.  외로운자의 침실  초인종의 버튼이 시한탄의 점화단추처럼 보였다. 허나 철인은 그 단추를 누르고야말았다. 둔중한 방문이 열리며 집주인이 몸을 반쯤 내밀었다.  “어머? 철인씨 아니세요? 한밤중에 어찌된 행차죠?”  황금전이 문고리를 잡은채 물었다.  “긴히… 여쭐 말 있어서요.”  “무슨 급한 일이기에 이렇게 오밤중에 찾아요셨죠? 래일로 미루든지 하실걸… 나… 사무에 바쁜 몸인데…”  황금전은 마지못해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기미를 보였다. 덜 반가운 눈매였다. 집안에서 질식할듯한 담배연기가 운무처럼 떠돌고있었다. 안방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일었다. 마작쪽 벌걱이는 소리였다.  (원체 사무를 보고있었군!)  철인은 의미있는 눈길로 황금전을 건너다보았다. 황금전은 손에 든 마작쪽을 만지작거리며 막무가내라는듯 웃어보였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지금 막 끝내는 중이얘요. 공상은행서 친구들이 오는 바람에 …”  철인은 객실의 쏘파에 눌러앉아버렸고 황금전은 안방으로 휑하니 사라져버렸다. 마작 씻는 소리가 다시 듣그럽게 울려왔다. 불명체연구회끝에 친구의 행적에 대한 념과로 수삽해나는 마음을 무마하련듯 술을 많이 마셨고 지나치던 걸음에 술기운을 빌어 황금전을 찾은것이였다.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되여버린 철인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마작 씻는 소리의 회수만 세고있었다.  “요빙(一瓶)”… “빠완(八万)”…”펑(风)”…”차(叉)”…얼완(二万)…”후라(胡라)”… 좌르륵- 좌르륵 지금 마작에 여념없는 녀공장장은 철인이와 방황이네 촌마을을 끼고있는 도회지의 사람이였다. 철인이네 마을은 린근에 소문난 딸기촌이였다. 120호에서 90여호나 딸기재배를 하고 있었다. 비닐하우스에 영양단지모까지 했으며 지면비닐박막피복재배를 도입해 마을사람들의 수입이 짭짤했다. 그러던중 이 순발력 있고 손탁이 세기로 소문난 녀인이 마을에 나타났다. 술공장의 원료로 이 마을의 딸기를 독점해 사들였다. 번거롭게 뙤약볕에 나앉아 싸구려를 부르던 절차를 생략해버린 마을의 딸기재배호들은 모두 그에게 쏠렸다. 새로 내놓은 술품종에 마을이름을 따서 “명월표”라 하였다. 그런데 조선족을 포함한 동북지역사람들의 호방한 성격에는 과일술보다 배갈쪽이 더 도타운편이였다. 하여 연해지구로 진출했고 공장장의 새남편 방황이가 ㄷ시 도매부의 경리라는 생광스러운 직을 가지고 출두하게 되였다. 그런데 이것이 호황이였던 술공장이 불황의 습지로 향해 내디딘 첫발자욱일줄은 그들도 생각지 못했다. 황금전이 배후에서 법도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원격조종을 하고 방황이 열심히 뛰였지만 무지랭이의 샘처럼 일은 꼬여만 갔다. 소비수준이 껑충 높은 연해도시에서 루이십삼이요, 나뽈레옹코냑이요, 인두마요, 금돛배요, 훤니스요 하고 명표술에 익숙해지는 그들에게서 “명월”표는 봉황발치의 촌닭이나 다름없었다. 포장에도 신경쓰고 광고전략에도 땀을 빼보이며 방황이는 진동한동 달아다녔으나 원체 아름다운 음부로 채워져야 할 예술가의 머리에 금전의 수치가 오르내리니 기량발휘가 뜻대로 되여주지 않았다. 제품이 적치된데다가 딸기재배호들의 적극성과 후사를 고려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사들인 그 딸기마저 썩어나가다보니 “명월표”술공장은 완연 병사(病死)직전의 상태에서 대들보가 무너지는듯한 퇴력감을 느끼고있었다. 그한 상계의 풍진변화에 동조하지 못한 책임이 방황으로 해서 인기되기나 한듯 녀공장장은 모든 체증을 방황에게 내뿜었다. 그제야 방황은 “명월”표가 음악같이 차분하고 정감에 배인 미주인 것이 아니라 쓰디쓴 고배임을 감득할수 있었다…  “사무”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철인은 용케도 그때까지 눌러앉아있었다. 친구에 대한 근념과 감정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주고있었다.  “방황씨의 일 때문에 왔죠. 맞죠?”  마작상대들을 바래고나서 황금전이 객실로 들어와 팔짱을 끼고 섰다. 워낙 그런 녀자여서 례절을 기대할 게제가 못된다고 철인은 생각해왔었다. 황금전은 탁자우에 담배갑을 집어들고 한개비 뽑아 내밀었다.  “알고있겠지만 전 원체 담배를 대지 않습니다.”  “언제보나 철인씬 고정하셔… 지푸래기 같은 친구에 대해 이렇게 걱정하는것 봐도 그렇고.”  황금전은 담배에 불을 당겨 입에 물었다.  “그런 얘긴 삼가해주십쇼. 그녘에서 남편되는분이라면 저한텐 둘도 없는 소꿉친구의 립장이니깐.”  철인의 인내가 스프링처럼 조약하며 목청이 한옥타브 올랐다.  황금전은 담배연기를 훅 내뿜었다. 겨우 두어모금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틀어박았다. 철인은 또다시 랭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죄다 털어놓아야겠어요. 언제든 다른 사람은 아닌 가까운 친구한테는 말하려던 참이였어요. 우리는…”  황금전은 손끝에 묻은 담뱃재를 뽀드득 소리나게 문질렀다.  “우린 일년째나 별거한 사이였어요.”  철인은 고개를 번쩍 쳐들며 그녀의 입을 지켜보았다. 그 놀라움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은채 황금전은 말을 계속했다.  “이번에 내가 이곳으로 온것도 그 사람 찾으러 온 것이 아니예요. 이곳 도매부가 파국이 돼버리니 수습해보려고 온 참이였죠.”  “그렇다고 해서 어디 박혀있는지 행적조차 묻지 않아 될일입니까?”  철인은 또 한번 격해지며 물었다. 황금전이 침실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보세요. 보면 알게 될거예요.”  침실, 방황의 침실이라 일컫는 그곳에 들어선 철인은 다른 시대의 다른 곳에 온듯한 표정을 짓고말았다. 수족관에 잘못 들어서지 않았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일전에 함께 잠자군 했던 친구의 침실은 엉뚱하게 변모되여있었다. 온 벽에는 수위의 깊이로 본 해양동물분포도가 붙어있었고 침실바닥에는 어물가게점의 그것처럼 네모지고 둥근 어항들이 가득 놓여져있었다. 창의 카텐에는 풍어기의 도안이 찍혀있었고 창턱에는 조가비며 바다돌들이 무둑히 쌓여있었다. 책궤속의 악보책이며 음악리론저서들은 사라지고 대신 줄느베르의 “바다송”, “해양생물학”, “잠수기법”, “돌고래의 이야기”… 등으로 죄다 해양과 관련된 서적들이 빼곡히 꽂혀져있었다. 침대우에 소책자 하나가 펼쳐져있었다. 안데르쎈의 동화 “인어공주”였다. 벽에는 또 락서처럼 무언가 씌여져 있었다. 근자에 문예지에 심심찮게 글을 퍼내고있는 어느 한 청년시인의 “바다의 환상”이라는 제명의 시였다.  “손바닥을 펴들고  이랑짓는 실파도 같은 손금을 본다.  창을 뚫고 금시 갯내음의 향이 풍겨오는듯  때로 나는 찬란한 어족이 되여  무양히 굼닐 바다를 환상해본다.”  어덴가 불안한 충동감으로 갈긴듯 글체는 매우 란잡했다.  “그 사람… 변태얘요.”  황금전은 침을 뱉듯 입가로 내뱉었다.  “종일 목욕통에서 그짓하려고 들어요.”  황금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사마저 꺼내들었다.  “제가 물고기료리 좋아한다구 손찌검까지 하려 들어요. 물고기가 우리 선조요 뭐요 미친 사람 같은 소릴 하면서. 또 잠자기전 나보구 꼭 라는 동화를 읽어달라구 해요. 몇십번이나 읽어줘도 계속 그 본새얘요. 꼭마치 유치원신입생같아요. 예술가들의 개성이 독특해서 그런지는 알수 없지만 전 참을수 없어요.ㅇ”  철인은 일순 자기를 어떻게 주체했으면 좋을지 몰라했다. 어느때인가 맥주를 마시다가 방황이 건명태를 맛나게 뜯고있는 자기를 보고 “너희들은 지금 생명을 참살하고있어!” 하고 버럭 소리지르며 명태를 앗아내던 일이 문뜩 떠올랐다. 그때 취한줄로만 알고 그런대로 방치해두었던 철인이였다.  (그러면 이 친구가 정신질환을 앓고있었단 말인가?)  황금전이 광고팜플렛 하나를 안색이 어두워지고있는 철인앞에 내밀었다.  “언젠가부턴 이 계집년하고 놀아나고있어요. KTV녀자라나요. 이번에도 아마 이 년을 끼고 어데론가 꺼져버린 것 같아야ㅛ.”  팜플렛 겉가위에는 “명월표”술병을 들고 선정적인 웃음을 짓고있는 광고모델 하나가 찍혀있었다. 어데선가 꼭 본듯한 모습이였다. 팜플렛속의 녀자  언젠가 와본적 있는 KTV를 철인은 어렵게 찾아내였다. 문전에서 한동안 멈칫거리다가 흔들이문을 들이밀었다. 채광이 들어올수 없게 밀페식으로 만든 안은 어두웠다. 한낮에도 색등을 켜고있있었다. 일순 들이닥친 어둠 때문에 철인은 눈시울을 좁혔다. 카운터에서 복부원하나가 뒤늦게 철인을 보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오셨어요.” 하면서 귀에서 무언가 끄집어내였다. 레시바였다. 잘칵하고 휴대폰록음기를 끄면서 그녀는 또 한번 물음을 던져왔다.  “노래하러 오셨어요? 몇분이죠?”  철인은 어데서부터 착수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호주머니에서 광고팜플렛을 꺼내들었다. 겉가위의 모델을 식지로 그루박았다. “이 아가씰 찾아보려고 합니다.”  카운터속 그녀의 눈꼬리가 이상하다는듯 쳐들리고있었다. 팜플렛을 받아들던 그녀가 저도 모르게 경아성을 질렀다.  “어머- 얘가 이런데 다 나왔어. 인물값을 하긴 하는가봐. 그런데…”  아가씨는 철인이한테로 다시한번 의문에 쳐들린 눈매를 보내왔다.  “예하곤 어떻게 되는 사이죠?”  “잘 아는 사이입니다. 요긴한 일 있어 그러니 불러주십시오.”  도수안경의 점잖은 타입과 박진하게 청구하는 진솔한 철인의 태도에 아가씨는 경계의 눈빛을 거두고있는듯했다.  “금방 손님들과 노래하러 들어갔어요. 좀 기다려주실래요.”  철인은 카운터 맞은켠의 쏘파에 눌러앉았다. 그 아가씨가 해바라기 한접시를 가져다주었다. 심심찮게 까라며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귀에 레시바를 걸었다. 음악에 맞춰 가볍게 머리를 저어댔다.  이곳으로 철인은 방황과 같이 온적 있었다. 이전과 달리 시간에 매이고 공리에 매여있는 방황에게는 철인이를 만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시간인듯했다. 하여 스트레스를 풀 곳을 찾을 때면 어김없이 철인을 동반하군 했다. 많은 유흥업소들의 경쟁중에서 일부 KTV들은 술좌석배동녀들을 두고 그로써 손님을 끌었기에 이런 곳은 양지를 멀리한 뒤안길로 사람들의 인상속에 메모되여있는터였다. 그런 행렬속에 조선족아가씨들이 많이 끼인데서 가슴아픈 나머지 철인은 “연해도시의 조선족 탈선녀”들이라는 보도를 쓴 일도 있었다. 그날 방황은 글쓰는 사람이면 체험이 많아얀다며 안면 가려워하는 그를 부득부득 KTV로 잡아끌었다. 한꺼번에 아가씨 넷을 불러들였다. 방황의 경리신분을 알고있는듯 넷은 살이라도 베여줄 듯 다가들며 간친스레 해롱거렸다. 한증막같이 더운 밀페식방, 노래반주기로 흐르는 애상적인 곡조, 팔굽에 물컹 맞혀오는 아가씨의 거대한 젖가슴… 철인은 자꾸만 부자연스러워지는 자신을 주체할길 없어하였다. 허나 방황은 이런 곳에 절어온듯한 모습이였다. 악기다루듯 그녀들을 능숙하게 다루어냈다. 부어주는 술도 쭉쭉 굽을 내고 까서 디밀어주는 해바라기도 넙적넙적 받아먹고나서는 아가씨의 궁둥이를 잔뜩 그러안고 볼과 볼을 딱 붙인채 춤을 추기도 했다. 잠간사이 방황은 취기가 력력했다. 그한 은밀한 짓거리에도 생증이 났던지 지갑에서 벌건 지페 한묶음을 꺼내들었다. 꽤 큰 수목의 돈이였다. 돈을 본 아가씨들의 눈이 맹수의 그것처럼 빛났다.  “오늘 저녁 이 종이장이 엷어질 때까지 해보는거야.”  그 액수의 부피감에 정비례되여 아가씨들은 환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만큼 우리 열싸게 노는거야. 자, 우리 수수께끼 풀이를 해볼가? 우선 저 반주기 끄고 …”  필경은 예술에 투혼했던 피는 속일수 없는법, 방황은 격에 틀리게 그네들과 명곡 알아맞추기 유희를 벌려나갔다. 작곡가 이름이나 주어내면 상으로 지페 한장 뽑아 아가씨의 앞가슴에 쑤셔박아주고 맞추지 못할 때엔 가차없이 궁둥이를 철썩 갈기고 벌주를 들이대기도 했다.  “모자라트 운명교향곡도 몰라!” 철썩!  “뭐 넌 그래도 베토벤님은 알고있구나. 옜다!”  “야, 넌 그저 한국노래밖에 몰라. 부옇게 남자한테 떼우고 징징 우는 소리밖에 없는거. 너 이란 사랑의 교향곡 못들어봤니?”  철인은 그러는 방황의 짓거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도 몰래 무대우에서 열련하던 그전날의 모습과 오늘날 KTV방에서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고있는 방황의 모습을 견주어보았다. 다른 공식의 삶을 살고있는 지금의 방황에게서 철인은 한마리의 화려한 나비가 남기고 떠나버린 빈 고치나 다름없는 허무를 느끼고있었다. 철인은 그 어떤 반감과 실의에 빠진듯한 눈길로 한동안 그를 건너다보고있었다. 그 내내 고쳐짓지 못한 랭철한 눈빛이 방황의 눈과 맞부딤 했다. 방황은 질린듯 시선을 거두었다.  “왜 그래? 선생은? 술도 마시잖고.”  낯꽃을 붉히며 방황이 물었다.  “나 지금 웬 소년 하날 생각코있는중이요.”  철인은 여전히 사색에서 빠져나오지 못한채 혼자말처럼 말했다.  “뉜데?”  “화장실에서도 바이올린련습을 해왔던 어떤 남자앨.”  녀급을 조여안았던 방황의 팔이 스스르 풀렸다. 덫을 맞은듯 방금전의 안색을 험상궂게 바꾸며 곁에 바싹 다가앉은 아가씨의 어깨를 데퉁스레 밀어냈다.  “받쳐주는 녀자도 못따먹고 너 왜 그런 말만 하고 앉았어? 에익, 김 샌다- 술이나 따라아!”  순간 빙점으로 내려간 기분전환에 시끌벅적하던 방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암울해진 표정으로 거품이 느긋이 흘러내리는 맥주 한컵을 단숨에 굽낸 방황은 그때까지 한손에 잔뜩 거머쥔 지페한장을 수습할 길 없어하다가 허공에 홱 내쳐버렸다. 돈나비가 너울너울 란무했다. 방황은 맥죽거품이 게발려진 안경너머로 그 돈의 란무를 바보처럼 지켜보았다. 그러다 곁에 앉은 아가씨의 무릎에 무너져내렸다. 피난처를 찾는 장꿩처럼 그 무릎에 머리를 한껏 처박았다. 그러는 그의 두어깨가 톱질하고있었다. 나중에 그는 괴상한 곡성으로 울기 시작했다….  드디여 저쪽 밀페식방의 문이 열리며 취기에 불깃불깃 색을 먹은 남정 몇몇이 나오고 그뒤에 농염한 술좌석 배동녀들이 줄레줄레 나와 손님을 문께까지 바래주었다.  “춘매, 손님 오셨다- “  카운터의 아가씨가 손님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나른히 돌아서는 아가씨들중의 하나를 불렀다. “나한테로? 손님이?”  달달 볶은 머리를 한, 눈이 유난히 큰 아가씨가 반문하며 다가왔다. 철인 식지로 안경테를 추어올렸다. 춘매. 그날 방황이 낸 명곡제목을 많이 맞추어 팁을 제일 많이 탔던 그녀를, 팜플렛속에 찍혀진 그녀를 철인은 대번에 알아낼수 있었다.  “뉘신데요?”  기억에 없다는듯 아가씨는 철인을 바라고 눈갓을 치켜올렸다. 매일마다 기계적으로 손님을 치러내는지라 모를법도 했다.  “모르겠어요? 그럼 나를 알아 못본다쳐도 명월술 도매부의 방경리는 알고있겠지요.”  철인 다급함을  참지 못해 본문을 내들었다. 순간, 아가씨의 안색이 해갈하게 질리고있음을 철인은 희미한 불빛에서도 보아낼수 있었다. 아가씨의 포만한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있었다. 그 입술을 옥물며 춘매아가씨는 고개를 틀었다.  “나 그런 사람 몰라요.”  “왜 회피하려 드는겁니까?”  “나 그런 사람 몰라욧!”  발작적인 투명한 고음을 내지르며 그녀는 몸을 홱 돌려 휴게실로 들어가려 하였다.  “춘매아가씨!”  그러는 그녀의 발목을 철인이 저력감있는 부름이 휘감아 당겼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죠?”  철인은 팜플렛을 그녀앞에 펼쳐들었다. 그녀는 질린듯 그 자리에 멈춰서버렸다. 철인은 그녀의 경계의 마음을 해소하련듯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난 이런 사람입니다. 방겨일와 가까운 사이면 혹시 이 이름을 들어본적 있을겁니다.’  … 둘은 KTV의 빈방에 마주앉았다. 잠자버린 TV화면과 희미한 불빛아래에 가라앉은 주홍빛주단이 방안의 괴적함을 더해주고있었다. 철인은 방황과의 도타운 관계사며 그의 실종이며에 대해 우선 간추려 이야기해주었다.  “담배 있나요?”  여직 곰상히 들어주고만 있던 춘매가 물어왔다.  “사내란 놈이 담배를 몰라놔서. 저 한갑 요구하지요. 내가 한턱 내는 세치고.”  카운터의 아가씨가 “힐톤” 한갑을 가져왔다. 수상쩍은듯한 눈으로 둘이를 훔쳐보았다.  “그 사람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많은 애들중에 날 특별히 좋아했어요. 내가 다른 애들보다 노래기량이 좀 삐여난편이였거든요.”  담배를 몇모금 맛나게 빨고나서 실눈을 지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리구, 돈 많다고 녀자와 지분거리는걸 업으루 삼고있는 그런 사람 같지도 않았어요. 여직 제 몸 한번 만져보지 않았더랬어요.”  아치를 틀며 피여오르는 담배연기를 지켜보며 느릿한 어투로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갔다.  “광고사진을 찍고 돈도 많이 줬어요. 그리구… 내가 고향에 돌아가 유치원 꾸리는걸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그네도 있고 회전목마도 있는 유아원 … 유치원교양원이 되는 것이 저에게는 둘도 없는 소원이였어요. 지금 이런 일을 하게까지 되였습니다만…”  자조의 그늘이 드리운 어조로 말하며 그녀는 씁쓸하니 웃었다.  “그러다 그 집 사람한테 들통이 나버렸지요. 그 녀공장장… 사람잡게 생긴 광대뼈를 가진 녀자 있잖아요. 우린 한동안 사이가 뜸해졌댔어요. 그러다 어느날 … 넉달전이니깐… 6월중순쯤이였죠? 그 사람이 문득 찾아왔어요. 몸도 쉬울 겸 마음도 쉬울 겸 멀리 놀러 가자는것이였어요. 바이올린 하나만 달랑 들고서 말이예요. 우린 해변료양소로 내려갔더랬어요.”  “네에??? 해변료양소로요?”  철인 몸을 후딱 일으키며 웨지다싶이 물었다. 왜서 그렇게 온몸으로 경악했는지 자신도 알길 없었다. 그저 순간 무언가 뇌리에서 번개처럼 번쩍 톱날을 긋는 것이 있었다. 그의 반응을 느끼지 못한채 낡은 레코드처럼 춘매는 추억의 연장작업에 열심하고있었다.  “그날 밤, 주숙을 잡고서 시종 들뜬 마음이였어요. 비록 버려진 몸이지마는 그렇게 신분있고 인격좋은 사람한테 모든걸 주고싶었어요. 그런데… 목욕실에 들어간 그 사람이 … 종내… 나올줄을 몰랐어요…”  그녀의 어조가 흐릿하게 변조되여갔다.  “…나는 더는 기다려내지 못하고…목욕실 문틈으로… 아!’  당시처럼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새여나갔다.  “그런 피부를 가진 사람 처음 봤어요. 신다리로부터 온통 고기비늘같은 것이… 모든게… 모든게… 악몽이였어요… 대체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어요.”  두손에 얼굴을 묻으며 그녀는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울기 시작했다. 철인은 느닷없이 부르르 진저리가 쳐짐을 금할수 없었다. 이어 그녀는 산발한 머리를 쳐들었다. 코물을 흡 들이마시고나서 축축히 젖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윽해서야… 목욕수건으로 몸을 꽁꽁 여미고 그 사람은 침실로 나왔어요… 그 사람 아무 말 없이 나를 오래도록 쏘아보다가… 창가에 앉아 술응ㄹ 마시기 시작했어요. 나란 사람이 있다는걸 잊기라도 한것처럼… 난 한구석에 쪼크리고 앉아 떨고만 있었구요…”  그녀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집어삼키며 이야기를 꼬아내려가고있었다. 그에 따라 철인의 신경말초는 튀도록 만궁이 되여있었다.  “한밤중에 그 사람은… 바다가로 나갔어요… 바이올린을 안고서… 그날 밤, 료양소의 사람들은 장밤내내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을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후로… 그 사람은 돌아오지를 않았어요…”  철인은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곰삭이였다. 놀라운 충격이 달군 인두처럼 그의 가슴을 지지고있었다. 땀에 흥건해진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문지르며 다시 담배갑을 집어들고있는 그녀를 바라고 한마디 했다.  “나 담배 한대 주십시오.”  토템의 그늘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이야기하는 사람, 까닭없이 홍소를 터뜨리는 사람… 못봤던 그림책을 보는 설동한 눈매를 하고 철인은 혼돈의 이상세계를 찾아왔었다. 정신병원 정원의벤취우에 철인은 원장님과 마주앉았다. 조선족으로서 이방족들 못잖게 정신학연구계에서 권위인물로 지목되고있는 원장을 취재하려 온것이였다. 그들은 벤치에서 해바라기하러 나온 정신질환환자들의 군상을 이윽토록 지켜보고있었다.  “아름다운 에스빠냐 아가씨  사람들은 모두다 그녀를 좋아한다네.”  화단곁에서 온 얼굴에 덕지덕지 연지곤지를 바른 녀환자가 두손을 사려잡고 목청 깨져라고 노래부르고있었다.  “뛰뛰- 빵빵- “하얀 장갑을 낀 젊은 총각환자가 입으로 연신 자동차 경적소리를 내며 화단을 에워싸고 달리고있었다.  “… 통계로 보면 전국의 정신질환환자는 해마다 붇고 있는 급증세를 보이고있습니다. 그 발병률은 11.7프로입니다. 말하자면 1억이나 넘는 사람이 이러저러한 정신질환을 가지고있다는 겁니다. 놀라웁지요. 이는 10년전에 비해…”  배가 불룩한 녀환자 하나가 다가왔다. 원장을 바라보고 못나게 웃었다.  “원장선생님, 구토가 나고 시쿤 음식이 당겨요. 나 아마 임신한 것 같아요.”  “정말… 그 사람 어릴적 엉뎅이를 개에게 물린적 있습니다.”  물빛고인 눈으로 철인은 쳐다보고나서 단심이 다른 교실로 걸어들어갔다. 둔중한 손풍금에 눌려진 갸냘픈 어깨, 허나 불행을 디딤돌로 삼고 그 어떤 결의에 각인된듯 높이 솟은 그 어깨를  철인은 한동안 지켜보았다. 이어 교실에서 다시 싱그러운 악기소리 울리기 시작했다. “도- 레- 미- 화- 쏠- 라-씨- 도- ” “도- 씨- 라- 쏠- 화- 미- 레- 도- ”   찬란한 미지수    △ㄷ시 해변료양소 구역에서 발견된 불명의 생명체에 대한 가설 D---  “… 우리는 이를 극비밀적인 새로운 령역의 연구제품이 류기된것으로 볼수 있다. 근년래 유전학에 대한 연구는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단단한 유전정보를 다른 동물의 수정란에 주입하여 개량품종을 얻을수 있다. 즉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낼수 있는것이다. 이는 드 무슨 과학환상영화나 소설책에서만 보아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닭의 성숙된 란세포내에 정보핵산을 분리시킨 다음 그것을 게사니의 수정란에 주입시켜 게사니닭이란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낸적 있다… “  이른바 불명체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있었다. 그에 따라 관광국 려행사들에서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불명체의 이름으로 유람선명을 명명하고 불명체의 이름으로 청량제품의 상표를 달고 불명체가 발견된 곳을 관광명소로 지정하고… 모든것은 돈벌이를 위해 용뇌하고있는 이들에 의해 이런저런 해괴한 제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오고있었다. 고향에서 돌아온 철인은 한동안 무슨 일엔가 열심하더니 이어 불명체연구장소를 찾았다. 어느 한 발언자의 흥감스런 가설이 끝나기 바쁘게 연단으로 뛰여올랐다. 연구회 주최인이 발언목록을 쳐들고 순서표에 명단 없는 철인을 제지시키려 했지만 그러는 그를 밀치다싶이 하고 연단으로 올랐다. 철인은 잠시동안 번들거리는 이마와 번뜩이는 안경들을 휘둘러보았다. 달력에는 언녕 가을이 깃들었고 회의실엔 에어컨까지 켜놓았지만 그는 까닭없는 열기를 느끼고있었다. “… 제 친구 방황이는 원체 수석바이올린수였습니다.”  철인이 잠겨드는 목청을 살리며 입을 열었다.  “… 파크니니만큼은 못되여도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쓰던 바이올린수였습니다. 그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였습니다. 겨울날 학교 화장실에서마저 기량련습을 해오며 성장했던 그에게는 예술이 꿈이였고 전부였으며 희망이였습니다.”  모두들 의문에 눈확을 지릅뜨고 철인을 올려다보았다. “무덤앞에서 유세차. ”하고 축문을 읽지 않나. 처가집 번지수를 잘못 찾지나 않았나 하는듯한 눈길이였다. 연구회 장소에서 외곬으로 나가고 아주 틀리게 나간 웬 동닿잖는 소리나는듯 얼빠진 눈매를 하고있었다. 그러건말건 철인은 제나름대로의 격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 물론 그는 천부적인 이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불안하고 가난한 예술가였습니다. 수석바이올린수에게 변변한 바이올린 하나 없었습니다.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해 그는 가정교사역도 해봤고 그의 안해는 퇴근길이면 술공장을 찾아 잡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상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목숨으로 여겼던 바이올린을 버린거지요.”  모두들 저도 모르게 그 “동닿지 않은 이야기”에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최인도 최면된듯 한켠에서 잠자코 들어주기만 했다.  “바이올린을 다루었던 손으로 그는 누룩을 주물러야 했습니다. 술공장을 경영하게 되였던것이죠. 허나 세상돌림을 아름다운 곡조로만 파악해왔던 그에게 있어서 상계란 너무나 생소한 곳이였으며 지어 가혹한 곳이였습니다. 권세욕, 물욕, 명예욕, 도전, 암투, 질투, 음모… 리상과 괴리된 풍진세상에서 오도된 심리로 하여 그는 무서운 대가를 자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영의 실책으로 빚어낸 거액의 손실이 큰 대가였지만 그보다도 더 큰 것은 처자의 사랑을 잃었고 나아가서는 음악을 잃은 것이였습니다. 곤혹스러운 나머지 그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였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에서 실패한 몸과 마음으로 진정한 바다를 찾아가게 되였습니다. 우리 시의 해변료양소앞바다에 몸을 던지고말았지요. 바이올린을… 안고서 말입니다.”  장내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터져나오려는 오열을 삼키려 철인은 한동안 뜸을 들었다.  “그 친구의 왼손 약지에 파렬상이 생긴 허물이 있습니다. 왼편 귀쪽에는 무사마귀 하나가 있구요. 그리고 오른쪽 치골에서 웃쪽 방향으로 부채형이 되게 개에게 물린 이발자욱이 있습니다. 문치 두대는 5년전에 해넣은것인데 당시 썩 선진적이 못되는 비닐재료로 만든것이여서 지금은 도태품종입니다.”  철인은 문건가방에서 증실재료 한묶음을 꺼내여 무겁게 쳐들었다. “이것은 의학원의 몇몇 사생들과 제가 이런저런 가설로 그 정체를 해명코저 하는 불명생명체의 몸에서 증실해낸 상처자욱, 사마귀와 인공이에 대한 도편자료들입니다.”  장내는 비등점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럴수 없어!- ”  누군가 웨치다싶이 말했고 누군가는 눈알을 꼬집었다. 철인은 장내의 반응를 완연 무시한채 여태껏 사색해왔던 문제를 연구제안처럼 내들었다.  “물질문명의 전성시대는 장기간 응고되였던 사화결구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있습니다. 그 기존질서가 허물어지면서부터 사람들의 가치관, 도덕관 지어 인생관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가 모든이들에게 준 곤혹은 컸지요. 더욱이 그 변화에 당착한이들이 남보다 감성이 빼여난 지성인들이라할 때 그 곤혹의 중하는 더욱더 무거운것이였습니다.  제 친구 방황이는 그 중하에 부대끼면서 방황해온 허다한 사람들중의 하나였습니다. 시대가 배태한 둘도 없는 희생품으로 되고말았지요… 친구는 라는 비극적인 교향악을 가장 즐겨들었더랬습니다. 지금 보면 그의 숙명적인 예감은 적중한것이였습니다…”  철인은 단숨에 오랫동안 체중되였던 것을 뿜어내버렸다. 폭넓은 달변을 쏟아내고는 그 자리를 뛰여나오고말았다. 엘레베터도 타지 않고 27층의 과학기술청사마천루의 계단을 달아내렸다. 그러는 그의 볼로 땀과 주체할길 없는 눈물이 발을 잇고있었다.   열반의 바이올린    … 억겁으로 마냥 그러하듯이 바다는 설레임을 그칠줄 모르고있었다. 오성(悟性)을 깨치려는 독실한 신교자와도 같이 끊임없는 번민과 방황속에 거구를 뒤척이고있는것이다.  철인은 해변료양소앞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서있었다. 잠망경을 끼고 고무발을 한 잠수인 2명이 잠수작업을 거듭하고있었다. 바다는 연신 두사람을 삼켰다가 토해내군 한다. 신비한 무저동같이 그 깊이와 내용을 알길 없는 바다를 철안은 착잡한 심경으로 지쳐보았다. 여러 번 수확없이 숨돌리러 나온 잠수인들은 바람이 세다느니 물이 차다느니 게두덜거리면서도 철인의 진지한 청구의 눈매에 밀려 다시 바다에 자맥질해들어가군 했다. 흡수되듯 잠겼다가는 튕겨나듯 솟구쳐 나온는 단조로움만 거듭하던중에 잠수인 하나가 숭어마냥 풀떡 몸을 솟구치더니 환음을 질렀다.  “건졌다!- ”  잠수인의 손끝에 걸려나온 것은 와이샤쯔였다. 방황이가 선호해입던 “한립표”와이샤쯔였다. 다른 한 잠수인은 도수안경하나를 쳐들고 나왔다. 철인은 그 안경을 받아 물기를 닦아내였다. 분명 방황의 호기스럽고 운두높은 코끝에 위태스레 걸려있던 도수안경, 자기와 꼭 같은 도수의 450도짜리 안경이였다.  “건졌다아!- ”  또 한번 환음이 터져나왔다. 허나 이번의 소리는 방금전보다 훨씬 더 높고 배가 된 기쁨에 부풀어있었다. 바이올린이였다. 잠수인의 물에 잠긴 몸우로 불쑥 쳐들린 황금의 바이올린이였다. 잠수인의 물에 잠긴 몸우로 불쑥 쳐들린 황금의 바이올린은 검푸른 바다빛에 대조되여 무척이나 정감적인 색채를 발산하고있었다. 철인은 엎어지듯 달려가 빼앗다싶이 그 바이올린을 받아안았다. 바이올린의 선에는 푸른 해초가 추억처럼 엉켜붙어있었다. 철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 풀들을 말끔히 뜯어냈다. 바이올린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바이올린의 공명함은 말없이 우멍눈 같은 외눈으로 철인은 바이올린이 뿜어내고저 하는 곡조를 분명 들을수 있었다. 베이료쯔의 “어느 예술가의 생애”며 파그니니의 “24수 수상곡”이며 언제나 진한 독백 같던 친구의 한옥타브 높은 말소리며… 환청같이 울리는 그 주술적인 음악소리에 철인은 참월한 감개에 빠져들었다. 철인은 바이올린에 볼을 꼭 대였다. 백사장에 무릎을 털썩 꿇고는 소리죽여 울었다.  어느새인가 모두들은 가버리고 노호하고있는 바다가에는 철인이 혼자뿐이였다. 철인은 호주머니에서 무언가 끄집어냈다. 책이였다. 방황이가 가장 즐겨듣던 안데르쎈 동화 “인어공주”였다. 철인은 책을 펼쳐들고 바다와 마주한채 조용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상대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듯 열심히 읽고 있는 그의 어깨너머 황혼의 잔영이 슬프게 보였다.  “… 깊음 바다속의 물은 아릿다운 수레국화의 꽃잎마냥 푸르고 환히 꿰뚫어보이는 수정구마냥 맑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깊고도 깊어 닻줄을 아무리 길게 풀어놓아도 닿지 못한답니다. 바다밑에서 바다우까지 닿자면 수없이 많은 교회당의 높은 뾰족탑을 하나 또 하나 올리쌓아야 합니다. 그렇게 깊숙한 바다밑에 인어들이 살고있었습니다…”  안주하지 못한 바다혼들의 마음을 무마해주었던지 차분한 이야기에 바다는 셀레임을 멈추기 시작했다. 철인은 무아경에 빠진채 계속 동화를 읽어내려갔다.  “… 해가 바다우에 떠올랐습니다. 해빛이 부드럽고 따사롭게 차디찬 바다의 거품우에 비쳤으므로 인어공주는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보았고 머리우로 아름답고 투명한 생물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배의 흰 돛과 구름들을 보았습니다.    인어공주가 물었습니다.    다른 목소리가 대답하였습니다.    인어공주는 팔을 쳐들고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았습니다. 눈물은 눈에 가득히 넘쳐나고있었습니다… “  신들린듯했던 책읽기가 끝났다. 철인은 책을 바다멀리로 힘껏 뿌리쳤다. 친구 방황의 호흡이 서린 바다에 전해보냈다. 책은 긴 호를 긋다가 바다의 품에 떨어져안겼다. 바이올린을 꼭 껴안고 썰물에 몸을 싣고 가는 “인어공주”를 친구에게 보내는 진지한 명복을 철인은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아스라한 허허바다 청자빛 그 한끝을 충혈시키며 비장한 오페라극의 종장에 막이 내리듯 주홍빛 저녁노을이 내리고있었다…     “도라지” 1996년 5월호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4. 산들 바람 Op.30 No.5-휴베이   ♪
243    “둔감”이라는 화두 댓글:  조회:2794  추천:14  2014-07-22
[김혁 독서칼럼 8]   “둔감”이라는 화두 와타나베 준이치의 에세이집 “둔감력(鈍感力)”       영화 "실락원" 포스터    지난 세기 90년대초, 조심스레 서점가에 오른 와타나베 준이치(渡辺淳一)의 장편소설 “실락원”은 우리 독자들로 말하면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50대 공무원과 30대의 정숙한 부인의 결코 허락받을수 없는 사랑과 죽음까지 함께 한 불륜 이야기는 그 작품이 일본에서는 1970년대의 작품이고 3만여자나 가위질한 삭제본이였음에도 말이다. 당시의 아직도 윤활하지 못했던 문화풍토에서 출판계와 독자들은 그 실사적인 내용 모두를 필터없이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가위질 투성이로 원전의 의미를 온전하게 볼수 없었던 와다나베의 “실락원”은 출판13년 만에야 결국 온전한 모습 그대로 중국에서 재출판됐다. “삭제된 부분으로하여 원작이 가지고 있는 주제의 풍부성, 줄거리의 완전성 및 작가의 심도 높은 문학 사상에는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았기때문이였다. 사실 와타나베의 작품은 그 어떤 에로물처럼 유흥으로 읽을 작품이 아니다. 일본인의 섬세한 정서에 남녀의 사랑과 성을 다루고있는 그의 작품들은 성에 대해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천박하지 않다. 또 세세한 심리묘사로 그 안에 한 사회와 긴밀하게 련관된 인간의 욕망과 존재의 의미까지 담고 있어 통속과 순문학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여러계층의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있다. 때문에 “실락원”은 발간 즉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으며 “실락원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로맨스 소설의 황제” 와타나베 준이치   1933년 삿포로에서 태여난 저자는 의과대학을 졸업한후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하였고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하였다. 1970년이후 의사의 길을 접고 의학 소재 소설, 력사 소설, 로맨스 소설 등 다채로운 작품에서 삶과 죽음의 다양성과 남녀의 사랑을 다루며 정력적인 창작 활동을 해왔다. 주로 의학적인 시각에서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탐미주의적인 미학이 돋보이는 현대 소설을 써왔다. 저자의 고향에 문학관이 개관되였고 그간의 성과를 24권의 문학 전집으로도 간행한바 있다.   어쩌구려 와타나베 준이치의 작품을 우리 조선족 작가들에게 맨 먼저 알린 사람은 내가 되였다. 지난세기90년대초, 그의 대표작 “실락원”을 먼저    VCD로 보았었고 후에 소설로 출간되자 선참  사들여 읽었다. “실락원”의 계보를 잇는 와타나베의 중요한 작품 “사랑의 류형지” 역시 소설과 영화 DVD로 읽고 보았다. 그리고 독서칼럼을 써서 문학지에 실었고 문인들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실락원”의 재판 소식도 역시 내가 신문의 문예부간에 번역 소개했다.   파격적이고 탐미적인 소설로 신드롬까지 일으키며 화제를 몰고 다녔던 와타나베 준이치가 지난 5월 집요하게 탐미해 들었던 세상과의 인연을 놓았다. 고인에 대한 추모 분위기속에 그의 작품이 다시 조명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회자되고 있는 작품은 대표작 “실락원”이 아니라 와타나베 준이치가 2007년에 펴낸 에세이집이다.  그의 주특기인 멜로물이 아니였지만 “둔감력(鈍感力)”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은 출간돼 100만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고 그동안 정치인과 기업 CEO들의 열독서로 꾸준히 회자됐다. 부정적 의미로 사용돼 온 단어 “둔감하다”에 “힘(力)”을 붙인 “둔감력”이라는 단어는 책이 출간된 2007년 일본에서 “올해의 류행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의대 출신인 그는 이 책에서 하얀 가운을 입었던 의사시절의 에피소드와 더불어 일생의 다양한 경험을 언급하며 이른바 “둔감” 례찬론을 펼친다. 수술 때마다 교수에게 혼나던 한 초짜의사가 후날 대형 병원의 원장이 된 이야기, 지나치게 예민했던 동료가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몰락한 이야기… 이 에세이집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둔감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련애와 결혼은 물론 직장 생활에서도 성공한다"는 지론이다. 따라서 저자는 "둔감력이야말로 인생에서 성공할수 있는 최고의 재능"이라고 력설하며 “둔감력”을 재능의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와타나베는 멜로소설이 아니라 이 에세이집을 집필한 리유로 "요즘 세상은 예민함과 신경질로 가득한데 이 때문에 생기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문제가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공통점이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의 바탕에는 둔감력이 있다”라고 갈파했다. 여기서 둔감력은 바로 “일에 실패하거나 남에게 질책을 듣고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힘”이라는 얘기다.       둔감함은 게으름, 우둔함이라는 부정적 이미지의 단어이다. 그리고 이 단어의 반대편에는 예민함, 민감함이란 긍정적인 이미지의 단어가 있다. 그만큼 둔감하다는 말이 미련하다는 말과 오버랩되며 좋지 않은 이미지로 사용되였던 우리 사회의 풍토였다. 민첩하고 눈치빠른것이 미덕이라 여겨지는 현대사회에서 마냥 신경의 안테나를 곧추 세우고  예민하게 반응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옥죄이고있다.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오늘날 세상은 온통 경쟁주의와 리기주의로 가득 차 있고 그 틈바구니에 치대는 사람들은 여유롭지 못하다.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민감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것처럼 아우성이다. 세상살이가 모두 내 마음같이 않고 록록치 않고 때문에 저도모르게 자라난 예민함이 당신을 더없이 힘든 수렁속으로 몰고 가는수가 많은것이다. 그 속박에서 수렁속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해주는 우직한 힘이 바로 “둔감력”이다. 둔감한 사람은 흔히 게으르고 리유없이 락천적인 골빈 사람처럼 생각될수 있겠으나 바꾸어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경쟁력을 갖추고 건강도 지킬수 있으며 지혜로운 생활 태도를 가진 자라고도 볼수도 있다. 좋은 의미의 둔감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야만 오히려 치렬한 사회생활에서 건강하게 살아남을수 있음을 깨쳐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해결할수 없는 민감한 문제들에 골머리를 썩이기보다는 그저 놓아버릴 줄 아는 여유로움을 가짐이 좋을듯 하다. 동료의 자질구레한 루습도, 상사의 지지콜콜한 질책도, 부하의 안쓰러운 잘못도, 안해의 가끔의 실수도 크게 하하하하 웃어넘기는 대범함으로, 둔감력이라는 술수로 뭉때버리는것이 좋을듯 하다. 나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도 둔감함을  시의적절하게 적용하는것. 그야말로 오늘 하루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새로운 인생 메세지이다. 어찌보면 둔감력이라는 그 능력은 누구나 쉽게 얻을수 있는것이 아닌것 같다. 이는 그저 눈 감고 귀 막고 안 본척 안 들은척해서 얻을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다 보고 다 듣고 다 알고서도 느긋하게 감내할수 있는 힘,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가질수 있는 힘이요, 능력이다. 그러고 보면 둔감력은 도(道)의 다른 이름이다. 둔감이라는 화두는 성인 공자의 일화에도 나온다. 공자는 “론어(论语)”에서 이르기를 “柴也愚,参也魯,师也辟,由也喭”, 즉 “시(柴)는 어리석고, 삼(参)은 둔하고 사(師)는 형식적이고 유(由)는 거칠다.”고 하였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에 대해 일일이 평가한 말이다. 공자는 제자 안연(颜淵)에 대해 가장 만족해 했다. 제자 증삼(曾参)에 대해서는 다소 둔(鈍)하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뛰여난 순발력을 지닌 안연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 둔한 증삼이 천수(天寿)를 누리면서 스승의 의지를 이어 나갔다. 증삼 즉 증자(曾子)가 결국은 공자의 사후에 유가사상을 계승한 인물로 부상한것이다. 공자는 증삼을 둔하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증자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증자는 유가의 최고 덕목인 인(仁)의 실현을 자신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과제로 여겼기 때문에 평상시에도 아주 근신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였으며 결코 자기가 취해야 할 활동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증자는 특히 효행으로 이름났다. 그는 효의 전형으로서 어리석을 정도로 몸소 효도를 실천하였는데”효경”은 바로 증자가 지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둔”한 덕목이 그를 위대한 사상가의 반렬에 올려 세웠던것이다.   와타나베의 “둔감력”은 재미있는 스토리와 화려한 언어로 가득한 여느 멜로물이나 미사려구의 에세이집들과는 달리 현대인들의 마음과 생활 스타일에 좋은 조언을 해주는 값진 책이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지혜를 와타나베 준이치의 상식을 뒤엎는 발상과 현명한 삶의 힌트에서  배운다. 이는 의사출신의 작가가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질병에 대한 통렬한 진단이라 볼수 있다. 우직한듯하나 지혜로운 “둔감력”이 바로 그 처방전이다.   “길림신문” 2014- 7- 22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와타나베의 대표작 영화 "실락원"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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