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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전집 4. 수필 외,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2022년 08월 31일 20시 42분  조회:856  추천:0  작성자: 강려

4이상 전집 4. 수필 외, 권영민 엮음, 문학에디션 뿔, 2009
 
1부
 
문학과 정치
 
: 문학자는 그 생활하는 성격상 생활이 다른 어떤 종류의 부문의 생활양식에 비교하여도 정신적인 고뇌가 훨씬 더 많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래서 그들은 생활의 물질적인 고뇌에 다른 어떤 부문의 누구보다도 강인한 인내력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만약 한 문학자가 생활 혹은 그것에 유사한 보통 원인으로 하야 그 자신의 일명(一命)을 스스로 끊었다면 이 비극성이야말로 절대(絶大)하다.
 문학자가 문학해 놓은 문학이 상품화하고 상품화하는 그런 조직(組織)이 문학자의 생활의 직접의 보장(保障)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대라는 정세가 이러면서도 문학자ㅡ가장 유능한ㅡ의 양심을 건드리지 않아도 꺼림칙한 일은 조금도 없는 그런 적절한 시대는 불행히도 아직 아닌가 보다.
 이런 데서 문학자와 그의 생활 사이에 수습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기고 모순으로 하여 위와 같은 끔찍끔찍한 비극도 일어난다.
 보면 사회, 아니 문학 한다는 이들까지가 이 비극에 대하기를 '냉담' 한마디에 다한다는 것은 한심하고 참괴(慚愧) 참아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생활난 때문에 일가(一家) 구몰(俱沒)의 보도를 조석으로 듣고 상을 찌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세월에 하나 정신 패배자의 죽음쯤이야 사회적 현상으로 내려다볼 때에 혹은 너무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르나 그 패배의 모양이 정신적인 점, 우리 문학하는 사람들과 친근자인 경우에 좀 더 절실한 무엇이 우리 흉리(胸裏)에 절박하는 것을 아니 느끼고 족히 베길까.
X X X
문학자가 제 문학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제 생활을 기피하였다는 당대의 비극이 있다.
 흔히 있는 또 있어야 할 유서(遺書) 한 장 없으니 더 슬프다.
 고 매운 눈초리를 나는 눈에 선-하니 잠시 잊을 수도 없었다.
...
 문학도 결국은 투기사업(投機事業)일 것이다. 되든지 안 되든지 둘 중의 하나, 이 냄세나는 '악취미 자극'을 나는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고 어디까지든지 버틸 결심이다.
 
실낙원(失樂圓) - 월상(月傷)
 
: 나는 엄동(嚴冬)과 같은 천문(天文)과 싸워야 한다. 빙하와 설산 가운데 동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나는 달에 대한 일은 모두 잊어버려야만 한다ㅡ. 새로운 달을 발견하기 위하여ㅡ
 
병상(病床) 이후
 
: 그동안 수개월! 그는 극도의 절망 속에 살아왔다.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죽어왔다'는 것이 더 적확하겠다.) 
...
 '참을 가지고 나를 대하여 주는 이 순한 인간에게 대하여 어째 나는 거짓을 가지고만 밖에는 대할 수 없는 것은 이 무슨 슬퍼할 만한 일이냐.' ...
 '그렇다. 나는 확실히 거짓에 살아왔다ㅡ. 그때에 나에게는 체험을 반려(伴侶)한 무서운 동요(動搖)가 왔다ㅡ.
 
편지
 
<1>
기림(起林) 형
...
빌어먹을 거ㅡ세상이 귀찮구려!
불행이 아니면 하로도 살 수 없는 '그런 인간'에게 행복이 오면 큰일나오. 아마 즉사할 것이오. 협심증(狹心症)으로ㅡ.
'一切誓ふな(일체 맹서치 마라.)', '一切を信じないと誓へ'(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맹서하라.) 의 두 마디 말이 발휘하는 다채(多彩)한 파라독스를 농락하면서 혼자 미고소(微苦笑)를 하여보오.
형은 어디 한번 크게 되어보시오. 인생이 또한 즐거우리다.
사실 전(前)에 FUA '장미신방(薔薇新房)' 이란 영화를 보았소. 충분히 좋습디다. 'ききやかなる幸福' (소소한 행복)이 진정의 황금(黃金)이란 タイトル(주제)는 ア-ノルド  フアンダ(아르놀트 판크의) 영화에서 보았고 'ききやかなる幸福' (소소한 행복)이 인생을 썩혀 버린다는 タイトル(주제)는 장미(薔薇)의 침상(寢床)에서 보았소. 아ㅡ '哲學の限りなき無駄よ' (철학의 끝없는 헛됨이었소.) 그랬오.
 '一切の法則を嗤へ?' 'それも誓ふな.' (일체의 법칙을 비웃어라? 그것도 맹서하지 마라.)
...
退屈で、退屈ならない(따분하고 따분해서 견디기 어려운) 그따위 일생도 또한 사(死)보다는 그래도 좀 자미가 있지 않겠소?
 연애라도 할까? 싱거워서? 심심해서? 스스로워서?
...
 여보 편지나 하구려! 내 고독과 울적(鬱寂)을 동정하고 싶지는 않소? 자ㅡ운명에 순종하는 수밖에! 꾿빠-이
 
<2>
...구인회는 인간 최대의 태만(怠慢)에서 부침(浮沈)중이오. ...
 
<3>
...해변에도 우울 밖에는 없소. 어디를 가나 이 영혼은 즐거워할 줄을 모르니 딱하구려! 전원(田園)도 우리들의 병원(病院)이 아니라고 형은 그랬지만 바다가 또한 우리들의 약국(藥局)이 아닙디다.
 독서(讀書)하오? 나는 독서도 안 되오. ...
 고황(膏肓)에 든, 이 문학병(文學病)을ㅡ 이 익애(溺愛)의 이 도취(陶醉)의......이 굴레를 제발 좀 벗고 표연(飄然)할 수 있는 제법 근량(斤量) 나가는 인간이 되고 싶소. ...
 세상 사람들이 다ㅡ제각기의 흥분, 도취에서 사는 판이니까 타인의 용훼(容喙)는 불허하나 봅디다. 즉 연애, 여행, 시, 횡재, 명성ㅡ이렇게 제 것만이 세상에 제일인 줄들 아나 봅디다. 자ㅡ기림 형은 나하고나 악수합시다. 하, 하.
 
<6>
암만해도 나는 19세기와 20세기 틈사구니에 끼워 졸도하려 드는 무뢰한인 모양이오. 완전히 20세기 사람이 되기에는 내 혈관에 너무도 많은 19세기의 엄숙한 도덕성의 피가 위협하듯이 흐르고 있소그려. ...
 그들은 이상(李箱)도 역시 20세기의 スポーツマン(스포츠맨)이거니 하고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들에게 낙망을(아니 환멸)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과 만날 때 오직 20세기를 근근히 ポーズ(포즈)를 써 유지해 보일 수 있을 따름이구려! 아! 이 마음의 아픈 갈등이어.
 생(生)ㅡ 그 가운데만 오직 무한한 기쁨이 있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이미 ヌキサツナラヌ程(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전락하고 만 자신을 굽어살피면서
 생에 대한 용기, 호기심 이런 것이 날로 희박하여 가는 것을 자각하오.
 이것은 참 제도(濟度)할 수 없는 비극이오! ... 환멸이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일장(一場)의 ナンセンス(넌센스)입니다. ...
 오직 가령 자전(字典)을 만들어냈다거나 일생을 철(鐵) 연구에 바쳤다거나 하는 사람들만이 エライヒト(위인)인가 싶소.
 가끔 진짜 예술가들이 더러 있는 모양인데 이 생활 거세(去勢) 씨들은 당장에 ドロ礻ズミ(시궁창의 생쥐)가 되어서 한 2,3년 만에 노사(老死)하는 모양입디다.
 
<7>
한화(閑話) 휴제(休題)ㅡ 차차 마음이 즉 생각하는 것이 변해 가오. 역시 내가 고집하고 있던 것은 회피(回避)였나 보오. 흉리(胸裏)에 거래(去來)하는 잡다한 문제 때문에 극도의 불면증으로 고생 중이오. 2,3일씩 이불을 쓰고 문외(門外) 불출(不出)하는 수도 있소. 자꾸 자신을 잃으면서도 양심 양심 이렇게 부르짖어도 보오. 비참한 일이오.
 한화 휴제ㅡ 삼월에는 부디 만납시다. 나는 지금 쩔쩔매는 중이오. 생활보다도 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모르겠소. 논의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만나서 결국 아무 이야기도 못하고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저 만나기라도 합시다. ... 이러다가는 정말 자살할 것 같소.
... 여기 와보니 조선 청년들이란 참 한심합디다. 이거 참 썩은 새끼조차도 주위에는 없구려!
 진보적인 청년도 몇 있기는 있소. 그러나 그들 역 늘 그저 무엇인지 부절히 겁을 내고 지내는 모양이 불민(不憫)하기 짝이 없습디다. ...
조금 어른이 되었다고 자신하오. (중략)
망언(妄言) 망언. 엽서라도 주기 바라오.
 
<8>
...
저에게 주신 형의 충고의 가지가지가 저의 골수에 맺혀 고마웠습니다. 돌아와서 인간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의 옳은 도리를 가지고 선처하라 하신 말씀은 참 등에서 땀이 날 만치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 노릇을 못하고 있습니다. 계집은 가두(街頭)에다 방매(放賣)하고 부모로 하여금 기갈(飢渴)케 하고 있으니 어찌 족히 사람이라 일컬으리까. 그러나 저는 지식의 걸인은 아닙니다. ... 살아야겠어서, 다시 살아야겠어서 저는 여기를 왔습니다. 당분ㄱ단은 모든 죄와 악을 의식적으로 묵살하는 도리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친구, 가정, 소주, 그리고 치사스러운 의리 때문에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전연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분간 어떤 고난과라도 싸우면서 생각하는 생활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편의 작품을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말라 비틀어져서 아사(餓死)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지금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도저히 '커피' 한 잔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
 정직하게 살겠습니다. 고독과 싸우면서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있습니다. ...
 가끔 글을 주시기 바랍니다. 고독합니다. 이곳에는 친구 삼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3부. 단상 또는 창작 노트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손가락 같은 여인이 입술로 지문(指紋)을 찍으며 간다. 불쌍한 수인(囚人)은 영원(永遠)의 낙인(烙印)을 받고 건강을 해쳐 간다.
*
같은 사람이 같은 문으로 속속 들어간다. 이집에는 뒷문이 있기 때문이다.
*
대리석(大理石)의 여인이 포오즈를 바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살을 깎아내지 않으면 아니된다.
*
한 마리의 뱀은 한 마리의 뱀의 꼬리와 같다. 또는 한 사람의 나는 한 사람의 나의 부친(父親)과 같다.
*
피는 뼈에는 스며들지 않으니까 뼈는 언제까지나 희고 체온이 없다.
*
안구(眼球)에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은 안구뿐이다.
*
고향(故鄕)의 산(山)은 털과 같다. 문지르면 언제나 빨갛게 된다.
(<現代文學>, 1960, 11, 164쪽, 김수영 역.)
 
얼마 안 되는 변해(辨解) (혹은 일년이라는 제목)
ㅡ몇 구우(舊友)에게 보내는ㅡ
 
 한 개의 임금(林檎)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배로 되었기 때문에 그 배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석류(石榴)로 되었기 때문에 그 석류의 껍질을 벗기자 한 개의 네이블로 되었기 때문에 그 네이블의 껍질을 벗기자 이번에는 한 개의 무화과로 되었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는 포학(暴虐)한 질서가 그로 하여금 그의 손에 있던 나이프를 내동댕이쳐 버리게 하였다.
 내동댕이쳐진 소도(小刀)는 다시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낳고 그 소도가 또 소도를 분만(分娩)하고 그 소도가 또......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오전 4시와 제 1초(秒). 지상의 나변(那邊)에도 나는 있지 않았다.' ...
'나는 유모차에 태워진 채로 추락하였다. 기억의 심연 속으로' 
 
무제
(원문에 제목이 없음)
 
생사의 초월ㅡ존재한다는 것은 생사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인가.
 
무제
 
만사는 나에게 더욱 냉담한 사념(思念)이 되어간다.
 신(神)을 엄습하는 가을의 사색(思索), 그럴 때마다 느끼는 생존의 적막과 울고(鬱苦)에 견뎌낼 수 없다. 나의 전방에 선명한 문자처럼 전개하는 자살에의 유혹.
 그러나ㅡ
 나의 냉각(冷却)한 피는 이 경(磬)쇠처럼 꽃다운 맥박 속에서 포옹처럼 따뜻해지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석반(夕飯)
 
별이 나왔다. 일찍이 아무도 촌사람에게, 하늘에서 별이 나온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은 별이란 걸 모른다. 그것은 별이 송두리째 하느님에 틀림없다. 더구나 일등성(一等星) 이등성(二等星) 하고 구별하는 사람의 번쇄(煩鎖)야말로, 가히 짐작할 수 있도다. 불행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
무슨 일이건 다 불쾌하다는 걸 계속해서 생각는 것은 불쾌하다. 그러자 이번은 이웃 방 사람들의 식사하는 소리가 들리어온다. 꼭 개가 죽(粥) 먹을 때의 그 소리다. 인간이 식사하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들을 때, 개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함은 일대(一大)의 쾌사(快事)라 하겠다. ...
 이렇게 오고 가는 방향이 서로 어긋나는 생리 상태와 심리 상태는 도대체 어쩌자는 셈일까. 심리 상태가 뭣이든 사사건건마다 생리 상태에 대하여 몹시 노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면 그 반대일 것이다. 오로지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수습할 수 없는 상태며 난국이다. 나는 건강한지 불건강한지, 판단조차 할 수 없다. 건강하다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건강한 사람의 그 누구와도 (조금도) 닮지 않았다. 불건강하다면 이건 얼마나 처치 곤란하리만큼 뻔뻔스러운 그렇게 약해 빠진 몰골인가.
...
암담할 뿐이다. 그러나 개도 개지, 글쎄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열심히 몇 번씩이나 냄세를 맡는 것은 얼마나 우열한 일이뇨.개는 개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하다. ㅡ역시 이런 걸 생각하는 자체부터가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냄세 맡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도 가버렸다. 나는 이제 무엇을 관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
 그러나 구름이 있다. ... 구름의 존재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가 된다고? 나는 아직 한 번도 구름이 비가 된다는 것을 믿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저건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완전히 부운(浮雲)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아침의 이 세상의 어느 나라의 지도와도 닮지 않은 백운(白雲)을 망연히 바라보며 인생의 무한한 무료함에 하품을 하였다.
 
무제
 
(2)
꽃이 매춘부의 거리를 이루고 있다.
...
......죽음을 각오하느냐, 이 삶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느니라...... 이런 값 떨어지는 말까지 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개의 눈은 마르는 법이 없다, 턱은 나날이 길어져 가기만 했다.
 
(3)
가엾은 개는 저 미웁기 짝 없는 문패(門牌) 이면(裏面) 밖에 보지 못한다. 개는 언제나 그 문패 이면만을 바라보고는 분만(憤懣)과 염세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회한(悔恨)의 장(章)
 
가장 무력(無力)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였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나의 나태(懶怠)는 안심(安心)하다
(이 대목에서 '안심(安心)'이라는 말은 '근심 걱정 없이 마음을 편안히 가짐.'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안심(安心)의 경지' 즉, '불법을 굳게 믿어 어떤 충동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경지에 이른 상태.'를 인유(引喩)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나의 나태는 어떤 충동에도 고칠 수 없고 변화가 없음.' 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원문 주-)
 
양팔을 자르고 나의 직무를 회피한다 더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支配)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歷史)는 지겨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 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글자들을 가둬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젠 세상에 맞지 않는 입성이다 봉분(封墳)보다도 나의 의무는 많지 않다
(여기서 '봉분'은 '죽은 자'에 해당함.)
나에게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깡그리 없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는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아무것에게도 또한 보이진 않을 게다
비로소 나는 완전히 비겁해지기에 성공한 셈이다
 
단장(斷章)
 
죽음은 알몸뚱이 엽서나처럼 나에게 배달된다 나는 그 제한된 답신밖엔 쓰지 못한다.
...
헌 레코드 같은 기억 슬픔조차 또렷하지 않다.
 
첫번째 방랑
 
- 출발
 
나의 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여행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나로선 괴로운 일이다. 나는 기차 칸에서도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
나는 왜 이렇게 피로해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어제는 엊그제 같기도 하고, 또한 내일 같기조차 하다. 나에겐 나의 기억을 정리할 만한 끈기가 없어졌다. 나는 이젠 입을 다물고 있는 수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바위 같은 불안이 공기와 호흡의 중압이 되어 마구 짓눌렀다. ...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 자신을 암살하고 온 나처럼, 내가 나답게 행동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
책을 덮었다. 활자는 상(箱)에게서 흘러 떨어졌다. 나는 엄격한 자세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이제 혼자뿐이니까.
 
-차창(車窓)
...
나는 나의 기억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정신에선 이상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
 적토 언덕 기슭에서 한 마리의 뱀처럼 말라 죽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름다운ㅡ꺾으면 피가 묻는 고대(古代)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다.
 이제 모든 사정이 나를 두렵게 하고 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는 그것이, 승천하려는 상념 그것이, 그리고 사람들의 치매증(癡呆症) 그것 마저가.
 그러한 온갖 위협을 나는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의 침범으로 정신의 입구를 공허하게 해서는 안 된다.
...
 
아주 딴 방향으로부터 저 하현달이 다시금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다른 것으로 보아 그것은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약간 따스함조차 띠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사치(奢侈)로 해서 참을 수 없이 빛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나에게 표정을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나는 기꺼이 표정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떄, 내가 해야 할 표정은 어떤 것이 제일 좋을까? 어떤 것이 제일 달의 자랑에 알맞은 것이 될까?
 나는 잠시 망설인다.
 
-산촌(山村)
...
그들은 도대체 나한테서 무엇을 탐지하려는 것일까? 내 악(惡)의 충동에 대해 똑똑히 알고 싶은 것이리라ㅡ. 나는 위구(危懼)를 느껴 마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누구를 보고도 싱글벙글했다. 무턱대고 싱글벙글 함으로써 나의 그러한 위구감(危懼感)을 얼버무리는 수밖엔 없었다. ...
 하지만 이제 나는 귀뚜리를 향해 어찌 싱글벙글할 수 있겠는가? 너의 혜안은 나의 위에 별처럼 빛난다. ...
 귀뚜리여, 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너는 능히 나의 이 모자란 글을 읽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정녕 선지자 같은 정돈된 그 이지적인 모습을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되니 말이다. 그러나 어떠냐, 나는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얄미운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요사한 놈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너만은 알 것이다. 보다 속 깊이 싹트고 있는 나의 악에 대한 충동을, 그리고 염치도 없는 나의 욕망을, 그리고 대해 같은 나의 절망까지도. 그리고 너만이 나를 용서할 것이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러나 귀뚜리는 다시 흰 벽으로 옮아앉았다. 그것이 내가 필설로서 호소할 수가 전혀 없는 수많은 깊은 악과 고통마저 알고 있다는 꼭 그런 얼굴인 것이다. 나는 나의 무능함이 폭로되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던 것이다. 나는 더욱 깊이 절망할 수밖에 없다.
 
불행한 계승(繼承)
 
한여름 대낮 거리에 나를 배반하여 사람 하나 없다.
패배에 이른 패배의 이행(履行), 그 고통은 절대한 것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ㅡ. 자살마저 허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래 그렇기에ㅡ
나는 곧 다시 즐거운 산 즐거운 바다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ㅡ달뜬 친절한 말씨와 눈길ㅡ그리고 나는 슬퍼하기보다는 우선 괴로워하기부터 실천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한여름 대낮 거리 사람들 모두 날 배반하여 허허(虛虛)롭고야.
...
 
2
...
피해자를 낼 만한 농담은 금해야 할 것이다. 그의 뇌리에 첫째로 떠오르는 금제(禁制)의 소리는 몽롱하나마 그것은 피해자에의 경계(警戒)인 것 같았다. 그렇다, 상의 앞에 피해자는 육안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상을 위협하는 포즈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괴롭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 저 언짢은 그림자의 사나이가 나중에 무엇이라고 나무라든지 아랑곳할 것이 뭐냐.
 옳지, 하고 그는 후회보다도 더욱 냉정한 푼돈을 집어 던지고 오뎅집 콘크리트 바닥을 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가을바람처럼 비틀거리면서ㅡ노(路)ㅡ
 차압(差押)이다. 특히 네놈이 이번엔 지명당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 기세로 상의 속도(速度)에는 시뻘거니 발홍(發紅)한 노여움이 충만해 있었다.
 
3
불길한 예감에는 그는 무섭도록 민감했다. 불길한 사건 앞에선 반드시 무슨 일에나 불길한 조짐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항상 전전긍긍하여 겁을 먹고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
이젠 더 내 평생엔 사랑을 한다든가 하는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단다. 설령 어느 경우 이쪽에서 연연한 연정을 느낀다손 치더라도, 결국은 바닷가 조가비의 짝사랑이 되고 말 것이라고 굳게 체념하고 있었단다. 불긋불긋 녹슨 들판만 아득한 천(千) 리(里)란다.
 사귀면 손해 본다. 허나 되레 반갑다. 두세 친구 이외에 내 자살을 만류해 줄 이유의 근원이 있을 턱이 없다.
 자넨 혹은, 하필이면 네가 그러느냐 그럴지도 모른다. 허나 난 정당방위 그것마저 준비하고 있었단다ㅡ. 아니지, 어느 경우이건 놀림받기는 싫단 말이야. 그래서 그 손쉬운, 즉 조그마한 희생을 택했던 게야. 이러한 점에서 내가 하수인이라는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서만 말하자면 난 굳이 그 책임을 회피하라곤 하지 않을 작정이다.
 아니, 자넨 아주 무관심한 것 같군. 하나의 조소 거리를 얻을 것 같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런 날에도 어쩌다 떠오르는 추억의 조각 한강(漢江)물 반짝이는 여름 햇살 보누나
 
4
...
피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 피해서 안전한 것을 어째서 피하지 아니하였느냐 말이다. 한 줄기의 백금선을 백일(白日)에 드러냈던 때의 후회ㅡ. 아니다ㅡ.
그래 그것은 나중이야, 아니면 정녕 먼저냐? 예감이라니 정말이냐.
 허나 분명 얻은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송두리째 잃은 것만은 사실이다. 속일 순 없다. 이건 또 치명적인 결석(缺席)이었다.
 무엇일까. 누이인 줄 알고 있던 두 가지의 성격을 두 가지의 방법으로 생각했던 그것일까. 아니면, 한꺼번에 십 년 후로 후퇴해 버린 자신의 위치일까. 아니면, 십 년이란 먼 곳에 미소짓는 해변의 소운ㅡ그 친구일까.
 아니면,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일까.
 
5
...
자아, 가자구. 그러지 말고 가자구. 고집부리지 말고. 멋꼬라지 없게, 새삼스레, 자아, 자아.
그렇지, 상은 결국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ㅡ전연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 그래,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대체 그는 어떻게 하고 있으면 좋단 말인가. 결국 가만히 있는 것.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거든.
 가만히 있기는커녕, 정녕 가만히 있진 못하겠다. 이건 또 불가사의한 처지인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있지 못한단 말인가?
 소운은 집에 가겠노라 했던 것이다. 집에 가서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슬픈 심정을 주체스러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괴로워해 하겠노라고ㅡ.
 괴로워해?
 그 괴로움이야말로 사람들이 원해도 쉬이 얻을 수 없는, 말하자면 괴로움 같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닌, 어떤 그 무엇이지 않을까.
 조용한 시간만큼 적어도 두 사람에게 있어서 싫은 것은 없을 터이다. 설상 상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외톨이로 남게 되어ㅡ상은 소운의 팔을 잡아끎변서, 절일 만큼의 서러움을 몸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이 자리를 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아니다, 소운으로 하여금 이 '눈물의 장(場)'에서 달아나게 해선 안 된단 말이다.
 억지로, 오기(傲氣)로도ㅡ. (혹은 있고 싶지 않단 말이다. 혼자 있는 건 무서워.)
 혼자서? 혼자서 있는 것일까 그것이? 그리고 그런 내용을 가지고서의 혼자서 있는 것. 그것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
 숫자는 3이다. 2와 1이라는 짝 맞춤밖에는 전혀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엇을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냐? 얌전하게 단념해야지ㅡ.
 그러고 싶어. 사실은 그래도 좋다곤 생각해. 허나 그저 가만히 있지는 못하겠다 그런 소리일 따름이야. 이걸 달래주는 법은 없을까.
...
절망의 새끼줄을 붙잡고ㅡ이 무슨 멋꼬라지 없는 하룻밤이었던가. 이미 분리된 것을 끌어당긴다는 것은 적어도 비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밤이 밝아온다. 절망은 절망인 채, 밤이 사라져 없어지듯 놓아주지 아니하면 아니 될 성질의 것이다. 날뛰는 망념(妄念) 위에, 광기 어린 야유(揶揄) 위에, 그야말로 희디흰 새벽빛 베일이 덮쳐 오는 것이었다.
 
6
...
모든 것은 현관 신발장 께에 구두와 함꼐 벗어던져져 있다. 이제 이 지폐 냄새 물씬거리는 실내엔 고독이란 찾아볼 수가 없다.
....
ㅡ그래 웃지 않기는 커녕 입을 열지 않는다구. 그런 아주 색다른, 어쩌면 내일 당장 자살해 버리지나 않을까 싶은 염세형(厭世型)인데,
 그러면서도 개성이 강해서 남의 말은 쉬이 들어먹지 않거든.
 
황(獚)의 기(記)ㅡ작품 제 2번
ㅡ황은 나의 목장을 사수하는 개의 이름입니다.
(1931년 11월 3일 명명)
...
기(記) 2
...
지식과 함께 나의 병(病)집은 깊어질 뿐이었다
...시간의 습관이 식사처럼 나에게 안약을 무난히 넣게 했다
병집이 지식과 중화(中和)했다ㅡ세상에 교묘하기 짝이 없는 치료법ㅡ그 후 지식은 급기야 좌우를 겸비하게끔 되었다
 
기(記) 3
복화술이란 결국 언어의 저장 창고의 경영일 것이다
한 마리의 축생은 인간 이외의 모든 뇌수일 것이다
 
기(記) 4
...
언제나 나는 나의 조상ㅡ육친을 위조하고픈 못된 충동에 끌렸다
치욕의 계보(系譜)를 짊어진 채 내가 해부대의 이슬로 사라질 날은 그 어느 날에 올 것인가?
...
그래 나는 나의 신분에 걸맞게시리 나의 표정을 절약하고 겸손하고 하는 것이었다
...
나의 사상의 레터 나의 사상의 흔적 너는 알 수 있을까?
나는 죽는 것일까 나는 이냥 죽어가는 것일까
나의 사상은 네가 내 머리 위에 있지 아니하듯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모자 나의 사상을 엄호해 주려무나
나의 데스마스크엔 모자는 필요 없게 된단 말이다!
...
별들은 흩날리고 하늘은 나의 쓰러져 객사(客死)할 광장
보이지 않는 별들의 조소
...
한 줄기 길이 산을 뚫고 있다
나는 불 꺼진 탄환처럼 그 길을 탄다
...
화살처럼 빠른 것을 이 길에 태우고 나도 나의 불행을 말해 버릴까 한다
한 줄 기 길에 못이 서너 개ㅡ 땅을 파면 나긋나긋한 풀의 준비(準備)ㅡ 봄은 갈갈이 찢기고 만다
 
작품 제3번
 
2
...
신(神)은 사람에게 자살을 암시하고 있다......
...
나의 눈은 둘 있는데 별은 하나밖에 없다 폐허(廢墟)에 선 눈ㅁ불ㅡ눈물마저 하오(下午)의 것인가 불행한 나무들과 함께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폐허는 봄 봄은 나의 고독을 쫓아버린다
나는 어디로 갈까? 나의 희망은 과거분사가 되어 사라져버린다
 
폐허에서 나는 나의 고독을 주워 모았다
봄은 나의 추억을 무지(無地)로 만든다 나머지를 눈물이 씻어버린다
낮 지난 별은 이제 곧 사라진다
낮 지난 별은 사라져야만 한다
나는 이제 발을 떼어놓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것이다
바람은 봄을 뒤흔든다 그럴 때마다 겨울이 겨울에 포개진다
바람 사이사이로 녹색 바람이 새어 나온다 그것은 바람 아닌 향기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묻어버리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나는 흙을 판다
 
 흙 속에는 봄의 식자(植字)가 있다
 
지상에서 봄이 만재(滿載)될 때 내가 묻은 것은 광맥(鑛脈)이 되는 것이다
이미 바람이 아니 불게 될 때 나는 나의 행복만을 파내게 된다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
(츠키하라 도이치로[原橙一郞]. 1930년대 활동했던 일본 시인.)
 
나의 마음이 죽었다고 느끼자 나의 육체는 움직일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달이 둥그래지는 내 잔등을 흡사 묘분(墓墳)을 비추듯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참살당한 현장의 광경이었다.
 
공포의 기록(서장)
 
...
아, 피곤하다. 그에게 아방궁을 준다 해도 더는 움직일 수 없다. 그는 그렇도록 피곤한 것이다. ...
ㅡ자아, 나르자! 저 악취에 싸여 있는 육친의 한 뭉치를 그는 낡은 짐수레에 싣고 날라와야 한다.
노동이다. 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한다든지 하는 일 따위는 엄두도 못낼 지경이었다.
성격 파산ㅡ무엇 때문에?
그의 교양은 그의 겉모양새와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남루. 수염도 텁수룩하다. 거리. 땀.
...
공복ㅡ절망적인 공허가 그를 조소하는 듯했다. 초조하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왔는가.
적빈.
쓸 만한 넝마는 남의 손에 의해 모두 팔려 나갔다. 그리하여 보다 더 남루한 넝마들이 병균처럼 남아 있다.
...
 
 밤이 되자 그는 유령처럼 흥분한 채 거리를 누볐다. 이제 그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다. 오로지 한 가닥 공복을 메꾸기 위해 행동할 뿐이었다.
 성격의 파편, 그는 그런 것은 돌아볼 생각도 않는다. 공허에서 공허로 그는 역마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술이 시작되었다. 술은 그의 앞에서 향수처럼 빛났다.
 왼팔이 오른팔을 오른팔이 왼팔을 자꾸만 가혹하게 구타한다. 날개가 부러져서 흔적이 시퍼렇다.
 소량의 구조 깃발은 이미 효력이 없다.
 
공포의 성채
 
 사랑받은 기억이 없다. 즉 애완용 가축처럼 귀여움을 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다.
 
 무서운 실지(實地)ㅡ특기해야 할 사항이 없는 흐린 날씨와 같은 일기(日記)ㅡ긴 일기다.
 
 버려도 상관없다. 주저할 것 없다. 주저할 필요는 없다.
 
 ...
 그것도 정말일까. 모두를 미워하는 것과 개과천선하는 일이 양립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개과한다는 것은 바로 교활해 간다는 것의 다른 뜻이다. 그래서 그는 순수하게 미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때는 민족마저 의심했다. 어쩌면 이렇게도 번쩍임도 여유도 없는 빈상스런 전통일까 하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가족을 미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는 또 민족을 얼마나 미워했는가. 그것은 어찌 보면 '대중'의 근사치였나 보다.
 사람들을 미워하고ㅡ반대로 민족을 그리워하라, 동경하라고 말하고자 한다.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의 그늘 속에 불행을 되씹으며 웅크리고 있는 그는 민족에게서 신비한 개화를 기대하며
 그는 '레프라'와 같은 화려한 밀탁승의 불화(佛畵)를 꿈꾸고 있다.
(lepra. 나병(癩病). 문둥병.) (밀타승[密陀僧]. 일산화연[一酸化鉛]의 별칭. 색상의 농도에 따라서 금[金] 밀타, 은[銀] 밀타 등의 명칭이 있음.)
 새털처럼 따뜻하고 또한 사향처럼 향기 짙다. 그리고 또 배양균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다.
...
성은 재채기가 날 만큼 불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창들의 세월은 길고 짧고 깊고 얕고 가지각색이다.
 시계 같은 것도 엉터리다.
 성은 움직이고 있다. 못쓰게 된 전자처럼. 아무도 그 몸뚱이에 달라붙은 땟자국을 지울 수는 없다.
 스스로 부패에 몸을 맡긴다.
 그는 한난계처럼 이러한 부패의 세월이 집행되는 요소요소를 그러한 문을 통해 들락거리는 것이다.
 들락거리면서 변모해 가는 것이다.
 나와서 토사(吐瀉) 들어가서 토사. 나날이 그는 아주 작은 활자를 잘못 찍어놓은 것처럼 걸음새가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것이 간단하게 끝나 버릴 아리송한 새벽이 올 때까지만이다.
 
야색(夜色)
 
한꺼번에 이처럼 많은 별을 본 적은 없다. 어쩐지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달 없는 밤하늘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귀기마저 서린 채 마치 커다란 음향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느낌이다. ...
 과연 이 한 몸은 광대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만 한 가치도 없다. 그런데도 이 야망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 불안은 뭔가. 이 악에의 충동은 또 뭔가. 신은 이 순간에 있어서 건강체인 나의 앞에선 단연 무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 신을 이길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신에 대해 저주의 마음 같은 것은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 신을 이기겠다는 의욕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이 불안감은 끝없는 환희 속에서 신의 의지, 신의 제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곻 나의 이 바윗덩이 같은 우울의 근거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전혀 불명이다. 그 원천이 내 자신의 내부에 있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나 자신에 의해 고통을 받는 것일까? 그건 우스운 이야기다.
 
 인간 세상이 온통 제멋대로인 것처럼 자꾸만 생각된다. 그것은 사실 신이 관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한 몸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고 간섭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지녔다. 자살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수단, 시기. 유서에 대한 것 등 세세히 냉정하게 생각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가 자살하지 않고 있는 것도 역시 자유다. 모든 곤란과 치욕을 견더내며 아랫배에 힘을 주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자살자들은 모두 자살하는 것의 자유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며 더 큰 고난과 치욕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 것도 또한 자유라는 데 대한 인식을 얻은 사람들이다.
 ...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하지 않는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자살을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의 토인처럼 검게 탄 얼굴 모습을 일별하면 그들은 결코 단 한 번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데 나는 뭔가. 자살하는 일 자살하지 않는 일 등을 번갈아 가며 생각하는 데 몰두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연히 정신 상태를 어지럽게 해서 그 때문에 몹시 비관하거나 실망하는 등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불행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나의 일생은 끝나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산다는 것이 이 얼마나 불쾌와 고통의 연속인가 하는 것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야색은 권태로운 경치를 한층 더 권태롭고 혼연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방대한 공포의 광경마저 내장한 채 버티고 있다. 이러한 우매한 자연에 대해서 나는 언제까지나 털끝만 한 친밀감도 발견할 수 없다.
 
단상(斷想)
 
(1)
 
나의 생활은 나의 생활에서 1을 뺀 것이다.
나는 회중전등을 켠다.
나의 생활은 1을 뺀 나의 생활에서 다시 하나 1을 뺀다.
나는 회중전등을 끈다.
감산이 회복된다ㅡ그러나 나는 그것 때문에 또 다른 하나의 생활을 잃어버린다.
나는 회중전등을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다.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빈둥빈둥ㅡ나의 사상마저 빈둥거리게 하기 위해 회중전등이 포켓 속에서 켜졌다.
나는 서둘러야 한다. 무엇을?
나는 죽을 것인가? 그게 아니면 나는 비명의 횡사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내게는 나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다.
나의 생활의 국부를 나는 나의 회중전등으로 비추어본다.
1이 빼어져 나가는 것을 목전에 똑똑히 보면서ㅡ나는 나에게도 생활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2)
병자가 약을 먹고 있다.
병자는 약을 먹지 않아도 죽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강한 사람은 약을 먹어도 건강하기 때문이다.
 
(3)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ㅡ이 편지 읽는 대로 곧 답장을 보내 주세요ㅡ
단지 이 한마디만을 써서ㅡ
그러자 답장이 왔다.
ㅡNo, 이것을 Yes로 생각하세요ㅡ
No 이것을 번역하면 '아니다'
Yes 이것을 번역하면 '맞다'
'아니다'를 '맞다'로 한다면 아무리 '맞다', '맞다'라고 해본들 이 '맞다'는 '아니다'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니다'나 '맞다'나 매한가지다. 어느 쪽이든 '아니다'인 것이다.
결국 No는 Yes가 있어서 비로소 No가 되며 Yes는 No가 되는 것이다.
...
 
(9)
여자의 손은 하얗다. 그리고 파란 줄이 잔뜩 있다.
여자는 그 파란 줄 하나를 선택한다. 앞으로 간다 갈라진다.
여자는 그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앞으로 간다. 또 갈라진다.
여자는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앞으로 간다. 역시 갈라진다.
ㅡ지팡이로 해봐야지ㅡ
물론 지팡이라도 쓰러뜨려 보지 않는 이상 어떤 지식으로 어떤 감정으로 어떤 의지로 길을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No와 Yes 두 통의 편지를 써서 지팡이를 쓰러뜨려 봉함에 넣는다.
그리고 또 지팡이를 쓰러뜨려 주소를 쓴다. 그리고 또 지팡이를 쓰러뜨려ㅡ
ㅡ당신은 Yes라고 말했군요. 고맙습니다ㅡ
ㅡ그치만 그게 정말 Yes인지 아닌지는 이걸 쓰러뜨려 봐야 알지요ㅡ
아ㅡ아무리 쓰러뜨려 본들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을까?
 
(10)
누군가가 밥을 먹고 있다. 몹시 더러운 꼴이다.
그렇다. 분명히 밥을 먹는다는 것은 더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라고 하는 작자가 바로 내 자신이라면 이걸 어쩐다?
 
(11)
나는 매일 아침 양치질을 한다.
나는 또 손톱을 깎아 마당 가운데 버린다.
나는 폐의 파편을 토한다.
나는 또 몸뚱이의 도처가 욱신거린다.
나는 서서 오줌을 갈기면 눈이 녹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또 내가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소리를 질러본다.
내일이 오늘이 될 수 없는 이상 불안하다.
내일이야말로 정말 미쳐버릴거다 ㅡ나는 항상 생각하며 마음을 들볶기 때문이다.
 
나는 왜 한쪽 장갑을 잃어버렸을까?
나는 나머지 장갑도 마치 잃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내 마음대로 그것을 없앨 수가 있을까?
나는 욕을 먹는다. 한쪽 장갑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내일은 내게 편지가 오려나
내일은 좀 풍성해지려나
내일 아침 몇시쯤 나의 최초의 소변을 볼 것인가.

출처: https://hichy.tistory.com/entry/이상-전집-4-수필-외?category=478796 [히키의 상상 공간: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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