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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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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인의 시모음
2022년 04월 13일 19시 25분  조회:607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 eun540900님의 블로그 | eun540900
원문 https://blog.naver.com/eun540900/80011667320

[박상순 시인 시모음]

 

나에게 길이 있었다 1                                      


 나에게 길이 있었다. 낮은 언덕을 넘어온 길이었다. 길가엔 언제나 몇 대의

승용차가 세워져 있다. 작은 길이다. 큰 길이 열리는 곳엔 유리문과 유리벽

을 가진 옷가게가 있다.


 지금 옷가게 앞은 저녁이다. 텔레비젼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촬영이 벌어

지고 있다. 여배우가 뛰어간다. 내게는 뒷모습만 보인다. 나는 잠시 기다려

야 한다. 그들이 길을 막고 있다.


 촬영이 끝나자 길이 다시 열렸다. 나는 길을 따라 간다. 2층.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문. 은빛 손잡이를 돌린다. 문이 열린다. 나는 안으로 들어간다.


 팩스밀리의 수신음이 울린다. 끊긴다. 또 울린다. 다시 끊긴다. 팩시밀리

앞. 안락의자 에 앉는다. 내 등 뒤로 시냇물이 흐른다. 의자에 씌워놓은, 넓

고도 얇은 천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린다.

 

 

 

 

나에게 길이 있었다 2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가방을 든 사람

눈이 큰 사람


그 길에 서 있는 키가 큰 사람

허리띠 대신 멜빵을 멘 사람

구두를 쭈구려 신은 사람


그 사람들이 뭉쳐서 하나가 된 사람

길 끝에서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던 사람


내가 달려갔을 때, 다시 그 길에 서 있는 모자 쓴 사람

그 길에 서있는 가방을 든 사람

그 길에 서있는 눈이 큰 사람


키가 큰 사람

멜빵을 멘 사람

구두를 쭈그려 신은 사람


그러한 사람들로 다시 흩어져

갈래갈래 작은 길을 따라

흘러가던 사람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길 위에

또 보이는 사람


그 길에 서있는 모자 쓴 사람

그 길에 서있는 가방을 든 사람

그 길에 서있는 눈이 큰 사람


길끝에 동그랗게 말아놓고 사라지던

멜빵을 멘 사람

 

 

 

 

나는 시간을 만든다                                    
 

 나는 시간을 만든다. 허리를 만들고 앞가슴을 만들고, 머리를 만든다. 나는

그녀를 만들었다. 진흙으로 뭉쳐진 그녀를 다 만든 뒤 두 손을 털며 문 밖으

로 나온다. 그녀는 흙반죽 어지러이 흩어진 작업대 위에서 쉬임없이 허둥댄

다. 

 

 그녀는 내가 두고 온 크림빵을 먹으려고 애쓴다. 받침대에 붙박인 한쪽 발

을 떼어내려 한다. 그사이, 내가 작업대 밑에 놓고 온 사진들, 내 사진들을

내려다보며, 사진 속에 앉아 있는 나를 부른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나를 본다. 바다를 본다. 들길을 보고, 황혼을 확인하

고, 내가 빠져나온 작업실에서 마침내 빠져나와 내 그림자를 앞질러 간다. 

 

 나는 시간의 꿈 밖에 앉아, 작업실 밖 빈터에 앉아, 짐차를 기다린다. 멀리

갔던 그녀가 짐차를 타고 내게로 온다. 내 작업실을 싣는다. 작업대를 싣고

간다. 그녀의 차바퀴가 픽픽댄다. 바람이 샌다. 

 

 나만 홀로 짐차에서 내린다. 바람 빠진 그녀의 짐차가 내 작업대만 싣고 간

다. 나는 사진을 찍는다. 시간을 기록한다. 뿌리뽑힌 집터에 앉아 지붕을 생

각한다. 별을 만든다. 작업대를 만든다. 별 속에 만든다. 진흙을 만든다. 작

업대가 진흙으로 나를 만든다. 

 

 

 

 

낱말                                                     


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아침마다 햇살이 내 발목에 고리를 달아

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화분이었다.


너는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노래

약속을 품에 안고

꿈밖으로 난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꿈으로 다시 돌아올 너를

빛의 소음(騷音)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는

환몽의 정거장에 선

유령이 된다

 

 

 

 

내 머리 위에서 지구가 돈다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녀는 단지 책꽃이들을 바라보며

꽂힌 책들의 제목을 소리내어 읽을 뿐이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녀가 내게 물었고

내가 선택했고

내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에 앉았지만

일어서지 못한다

그녀가 내 주위를 한 바퀴 다 돈 뒤에도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녀는 마침내 의자에 올라

올가미에 목을 맨다

의자를 발로 차고

달나라로 떠난다

그래도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햇빛이 따가운 5월의 피렌체 공항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 하나가

내 옆에서 담배불을 붙인다.

그녀의 목에 걸린 동그란 목걸이가 빛난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그녀가 돈다

내 머리 위에서 지구가 돈다

 

 

 

 

마라나 ;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 1              
 

 언제부터인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한 사람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리고 또 언제부턴가 비가 수평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수직으로 흐르

고 지붕은 쓸모없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에 마라나는 누웠다. 시간에 눕고 먹구

름 속에 눕고 봄빛과 가을빛에 누웠다. 나는 그녀를 통해 사라지는 세계를

본다. 사라져가는 세계의 폭풍에 취해 그녀가, 흰 천 위에 나뒹굴 때

 

 나는 피를 뽑는다. 그녀의 옷가지를 허리에 둘둘 감고 오후 2시에서 3시를

넘기며 이 세계의 끝에 쓰러진 그녀의 피를 뽑는다. 어느날 강변에서 그녀

가 내 허리에 규산硅酸을 바르던 그때처럼.
 

  나 ; 오고
  마라나 ; 가고
 

  나 ; 가고
  마라나 ; 오고
 

  문여는 소리
  문닫는 소리
 

  마지막 전람회가
  끝나는 소리
 

  마라나 ; 가고
  나 ; 오고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                              

 

 머리가 크고 배가 불룩 튀어나온 소년들이 오래된 야마하 피아노 한대를

공중으로 옮기고 있다. 공중의 풀밭에 피아노가 옮겨진다. 나와 같은 또래

로 보이는 소녀가 키 큰 화초 위에 앉는다. 피아노의 페달을 밟으며 어깨의

힘을 이용해 건반을 누른다.

 

 나는 한편에 앉아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머리가 크고 배가 불룩 나온 소년

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만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피아노를 치는 그녀

는 한 소절이 다할 때마다 한번씩 옆으로 고래를 돌린다. 소년들은 반대편

에 서 있다.

 

 정원 아래. 허공 밖으로 내려가는 길이 어둠 속에 잠긴다.

 

 

 

 

밤의 버스                                               
   

정류장마다 얼굴들

통로 끝에서 솟아나

굴러오고

굴러가는

밤의 버스

내가 찍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어깨와 어깨들 사이로

통로를 굴러

덜커덕

어둠의 정류장에 내린다

 

 

 

 

변전소의 엘리베이터에서 가까운 곳              

 

목 쉰 연주자가 있었다.

손풍금이 있었다.


목 쉰 연주자가 졸고 있을 때

검은 옷의 아이들이 걸레처럼 칼질한

샛노란 커튼이 유령처럼 있었다.


귀 떨어진 손풍금과

목 쉰 연주자,양말 속에 칼을 숨긴

아이들이 있었다.


높다란 철탑 아래 변전소가 있었다.

목 매달고 죽어버릴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봄밤                                                      
 
어두운 골목길에 떨어져

끝까지 움직이는

한 쪽 팔

 

 

 

 

비오는 날의 도쿄                                     

 

붉은 구름이 내 머리에 내려 앉았다

나는 고양이를 머리에 쓰고

서둘러 강을 건넜다


간판 하나를 발견하고 그 아래로 들어갔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차가 출발했다

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치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계란 한 알이 들려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벌거벗은 여자가 웃고 있었다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왜 커피가 다 식었냐고 따졌다

계란과 치약을 바닥에 내던졌다


발가벗은 여자는 갑자기

옷을 입은 여자가 되고

엘리베이터는 커피집이 되고

비는 아직도 내리는지

붉은 구름이 무거운 돌덩이처럼

내 어깨를 누른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4년 뒤           


그날 아침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우체국 뒷길을 맴돌다.

수채구멍 속에서 나온

개구리 한 마리를 밟아 죽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미는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점심은 먹었는지,

저녁은 어떻게 먹고 무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눈을 감기 전에

내 귀여운 방에게 말했습니다.

- 나는 거미가 되고

너는 거대한 개구리가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우체국처럼 커다란 불자동차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의 머리통을 물동이에 처넣고

발길질하였습니다.

 

거미는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처음 본 젊은 여자 하나가

나의 뺨을 때린 뒤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커튼 뒤에 놓여진 오래된 기타가 쓰러졌다

울림통 속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내 가슴 속에서

갈비뼈 하나가 기타줄처럼 흔들렸다

경찰관 A가 들어와 내게 말했다

소설가 B가 들어와 내게 말했다

생선장수 C가 석유통을 들고

나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어젯밤 계단 위에서

소설가 B의 막내딸을 밀쳤습니다

B의 막내딸이 넘어지며

경찰관 A의 둘재 딸이 넘어지고

계단 위에 서 있던

A,B,C의 딸들이

다리가 부러지고 목뼈가 부러지고

코뼈가 주저앉았습니다

내 어머니가 경찰관 A에게 말했다

저 녀석은 어젯밤

할머니댁 다락에 갇혀 있었습니다

낮 동안엔 창고에 가둬 놓았고

아침에는 손발을 묶어 두었습니다

소설가 B가 경찰관 A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어제 오후 저 녀석은

계단 아래 골목에서

하수구 뚜껑을 열고 있었습니다

하수구 속에서 커다란 쇠구슬을 꺼낸 뒤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쇠구슬을 핥고 있었습니다

경찰관 A가 생선장수 C에게 물었다

어젯밤 계단 위에

또, 누가 있었습니까

생선장수 C는 석유통을 내려놓고

소설가 B를 쳐다보았다

소설가 B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경찰관 A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저 아이는 당신의 아들입니까

어머니가 생선장수 C를 바라보며

경찰관 A에게 말했다

내 아들은 아닙니다

생선장수 C가 말했다

내 아들은 아닙니다

소설가 B가 말했다

내 아들도 아닙니다

경찰관 A가 나를 향해 말했다

나의 아들 또한 너는 아니다 

 

 

 

 

소쩍새는 폭발한다                                   

 

꿈 많은 소쩍새는 푹발한다. 내가 수풀 속에 누운 뒤,

풀숲 밖에 버려 둔 자동차, 자주색 코팅 위에서,

쫓겨난 숲의 날개, 밤의 얼굴은 폭발한다.

나는 숲에 누워 꿈꾼다. 내가 폭발하는 꿈,

폭발하는 꿈 때문에 내가 폭파되는 꿈, 그런 꿈은

꾸지 않는다. “나는 왜 꿈을 꾸지 않는가?”라고

고민하는 꿈을 꾼다.

하지만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밤마다 숲이,

나를 불러 꿈을 꾼다. 소쩍새가 폭발하는 꿈,

나는 숲의 꿈이 등장시킨 내 꿈 밖의 운전사다.

밤이 가면 나는 지워진다. 운전석에 앉는다.

폭파된 꿈이 자주색, 밤의 자주색 살갗을 지붕에 얹고,

아침을 따라간다. 태양 아래 멈춘다. 신호등이 켜진다.

라디오 안테나를 올린다. 창 밖에 보이는 건 꿈 같은,

꿈속에 보이는 창 밖 같은, 라디오 소리 속에 들어앉은

꿈 같은, 라디오 속에 들어앉은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말해 주는 꿈 이야기 같은,

그런 것, 그런 것 같은…… 한 소녀가 걷는다.

소녀의 손가방이 폭파된다. 찢어진 소녀,

찢어진 옷자락이 차창 위에 날린다. 사람들이 폭발한다.

내 밖의 모든 사람들이 폭파된다.

“안테나가 흔들린다. 내가 흔들린다”

라고 생각하는 동안, 소쩍 …… 소쩍 …… 주둥이로,

아침의 길 위에서 나는, 밤의 꿈속에서 밀려난,

아침으로 나는, 꿈 많은 소쩍새가 되어 나는,

폭발한다.

 

 

 

 

스모그                                                   

 

 그것은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것은 내 손에 있고, 두

개의 구멍이 있고 튀어나온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

트가 있는 그것은 한낱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그런데, 고등어가 내게 말하길, 낙엽들이 내게 말하길, 지하철 翩瑛揚?내

게 말하길, 그 속에는 길이 있고, 내가 걸었고,그 속에는 네가 있고 너를 향

해 내가 있고, 그 속에는 고등어가 있고 낙엽이 있고 공사장이 있고, 눈썹

아래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올리던 내 손이, 손가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커넥터가 되었다. 나와는 정말 관계가 없는, 멍청한, 바보같

은,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정말 커넥터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네

게 말하길, 나는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리하여 나는 내

손에 있고 두 개의 눈이 있고,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트가 있는,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길이 말하길, 그 속에서 네가 말하길, 내 손가락이 내 손

에게 말하길, 그것은 한낱 기구일 뿐이다. 300볼트용 연결기. 그것은 내 손

에 있고, 두 개의 구멍이 있고 튀어나온 두 개의 금속 막대가 있고, 몸체를

조여주는 볼트가 있는 그것은 한낱 300볼트용 커넥터일 뿐이다.

 

 

 

 

스모그                                                   
─ 말죽거리를 지나던 소녀  


 그녀의 손목에서는 연기가 났다.

 

 그녀는 한때 응원단원이었다. 무슨 경기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

는 다른 응원단원들처럼 똑같은 차림의 옷을 입고 깔깔거렸다.

 

 경기가 끝나던 날, 그녀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날 그녀의 팔에서는 붉은

연기가 났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는 연기 속에서 구출되었다.

 

 그녀는 가끔 지하철역 모퉁이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럴 때에도, 수화기를 든 그녀의 손목에서는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나왔

다.

 

 그녀는 취직을 했다. 사파이어, 진주, 루비 등등의 보석들이 가지런히 놓여

진 진열대 앞에 서 있을 때에도, 그녀의 손목에서는 연기가 났다. 그녀는 실

낱처럼 새어나오는 연기를 손수건으로 떨쳐내고 있었다.

 

 그녀는 한때 동그란 소녀였다. 느티나무 길을 지나 버스를 타고, 전철역의

길고 깊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단지 책가방을 고쳐잡던 아주 동그란 소녀였

었다.

 

 그녀의 손목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났다.

 

 

 

 

스모그                                                   

―서쪽의 넓은 벽

 

 그 집의 서쪽 벽엔 창문이 없다. 붉은 벽돌로 3층까지 높여진 벽이 서 있

다. 어느날 한 번, 그 벽 아래 좁은 골목으로 사람의 머리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깡충깡충, 골목의 맞은편 낮은 담장 위로 서른 번쯤 솟았다가

내렸다. 반 토막의 머리, 한 토막의 머리…… 그런데 그 뒤로는 아무도 지나

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매일 그 집의 서쪽 벽을 본다. 창가에 설 때마다 그 벽은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 창문도 없고, 사람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에 우뚝 선 붉은

벽,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비둘기도 지나가지 않는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고 오래된 면도기가 바뀌고 솔 빠진 칫솔들이 새것

으로 바뀌고, 이것저것 바뀌다가 어느날, 짜장면을 시켜서, 검붉은 면발들

을 걸레처럼 뒤집으며 먹다가, 보았다. 내 눈에서 떨어지는 벽돌들, 붉은 벽

돌들.

 

 그 속에 낡은, 내 얼굴처럼 낡은, 수세미가 담긴 빈 그릇 하나. 깡충깡충,

깡충, 깡충

 

 

 

 

아주 오래된 숲에 대하여                            

 

여름 강변에 앉아 우리는 칸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은 아주 커다란 숲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름 강변에서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칸트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유령 칸트가 썩은 가방에서 비닐봉지를 꺼내 우리에게 던진다.

서둘러 우리는 발목을 하나씩 잘라 그의 봉지에 넣어 주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풀밭에

누군가가 기르다 버린 집토끼 한 마리도 죽고, 썩어,

아이스크림처럼 녹는다. 옆에서 칸트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우리는 토끼의 유령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된 숲에 대해 이야기한다.

썩은 가방을 맨 유령 칸트만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동안 오토바이를 탄, 무거운 모자를 쓴 경찰관이 순찰을 돈다.

여름 강변은 아름다운 연인들로 빛난다.

그 사이로 썩은 가방을 맨 중년 하나가

썩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다리 밑 물가로 내려간다.

오토바이를 탄 경찰관이 썩은 가방을 지켜본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썩은 소녀를 바라본다.

강변에서 중년이 썩은 소녀의 몸을 들어올린다.

경찰관이 달려간다.

아름다운 연인들이 갑자기 넘어진다. 소나기가 내린다.

선상카페의 네온사인이 잠깐동안 꺼진다.

여름 강변에 소나기가 유령처럼 내린다.

유령 칸트가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빗속으로 사라진다.

그동안 우리는 라틴 풍으로,

때로는 중국 식으로

아주 오래된 썩은 숲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앵두나무, 앵두나무                                  

 

염소우리 옆에 집을 지었다. 마루를 놓고 방을 꾸몄다

지푸라기 벼개를 깔고 앵두나무를 눕혔다

옛 이야기 속의 뒤뜰, 푸른 오월이 가볍게 찰랑거리던

수반(水盤)의 물이 마르고

앵두나무는 누웠다. 나는 망설이다 얇은 이불을 열고

이제 물기가 말라 끝까지 작아진 앵두나무에

저고리를 입혔다

행여 놓칠세라 튼튼한 끈으로 나무를 받쳐들고

염소우리를 지나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아

집을 나섰다

팔월의 뜨거운 하늘, 긴 가뭄 위에 올라 앉아

앵두나무가 누웠던 요와 이불

지푸라기 벼개에 불을 지르고

나는 포크레인 기사가 땅파는 소리

윙윙거리는 엔진소리가 끝나자마자

커다란 구덩이 속에 앵두나무를 던졌다

앵두나무를 버렸다

옛 이야기 속의 넓은 마당, 장닭이 내 어깨를

냅다 쏘고 달아나던 날

수반의 뒤 뜰에서 뿌리채 걸어나와

쓰러진 나를 업어 잠재우던 앵두나무

나는 그 앵두나무를 뿌리채 뽑아

포크레인을 부르고, 내 키보다 깊은 구덩이를 파고

그 칙칙한 구덩이 속에

앵두나무를 던졌다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였지만

염소우리 옆을 한 바퀴, 다시 한 바퀴 돌다

자동차의 엔진을 켰다

이제 더 이상 앵두나무는 나를 찾아오지 못한다

따라오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

발명하지 못한다

앵두나무. 앵두나무

내가 그 나무를 흙구덩이 속에 버렸다

이제 앵두나무는 영원히

더 이상의 나를 발명하지 못한다

 

 

 

 

옛이야기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새들이 나를 피해 숲을 떠난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내가 잠들면 키 큰 동물들이 숲으로 돌아와

새들을 사냥한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내가 그 중국인 사내를 걱정하면 새들이

숲에서 빠져나오는 키 큰 동물들을 습격한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내가 영원히 눈을 감고 누우면 새들이,

키 큰 동물들이, 중국인 사내를 공격할 것이다.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그 중국인 사내는 어느 날

키 큰 동물이 되어 큰 새가 되어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의 숲속에 쓰러진 키 큰 짐승

나를 타고 누워버린

중국인 사내는 걱정한다.

 

- 빨리 떠나는 새들

- 늦게 돌아오는 새들

- 쓰러진 짐승만이 나오는

- 내 숲속의 이야기

 

 

 

 

의사 K와 함께                                         

 

의사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이지만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의사 K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가 서둘러 옷을 입고 나간 뒤

나는 의사 K의 열린 옷장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내 오랜 친구인 의사 K는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전에도 의사 K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오늘처럼 밖으로 나갔습니다.

K는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때도 나는 K의 옷장에서

놀이공원 지도를 보았습니다.

롤러 코스터, 휴게소, 작은 광장, 매표소,

분수, 징검다리, 유령의 집, 전망대

지도에는 정확한 위치

조목조목 일러주는 설명문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

잘못 들면 빠져나와

다시 쉽게 가는 길도 적혀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 K는 물론

나 역시

놀이공원에는 절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의사 K의 옷장에서

새로 바뀐 놀이공원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내가 그를 찾아가면 꼭

긴급한 전화가 옵니다.

K는 참 바쁜 의사입니다.

그가 나가면

옷장 문이 또 이렇게

열려있게 됩니다.

놀이공원 지도 속엔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쉬는 사람, 누운 사람, 의사 K와 같은 사람

하나 없지만

나는 또 할 수 없이

이런 저런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도를 보며

의사 K를 기다립니다.

K를 기다리며 나는 옷장에서 떨어진

놀이공원 지도를 보고있지만

의사 K는 놀이공원에는 가지 않습니다.

나 또한 가지 않습니다.

의사 K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긴급한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는 지도를 보며 K를 기다립니다.

의사 K는 나의 오랜 친구입니다.

놀이공원에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겁니다

 

 

 

 

이 가을 한순간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새가 내렸다

고양이가 내렸다

오토바이를 탄 피자 배달원이 내렸고

15톤 트럭이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에서 내렸다
 

텅 빈 버스가 내 손바닥 안으로 굴러왔다
 

나도 내렸다

울고 있던 내 돌들도 모두 내렸다
 

텅 빈 버스가 굴러왔다
 

단풍잎 하나

초침이 돌고 있는 내 눈 속에

떨어지고 있었다 

 

 

 

 

자네트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이제는 다 틀어져 버린 솜

씨로, 틀어진 항아리를 만든다. 내가 주둥이를 최대한 작게 마감할 동안 그

녀는 약을 먹는다.

 

 나는 노래를 듣는다. 약에 취한 그녀의 노래, 음악대학을 다닌 솜씨로, 그

녀는 내 항아리를 노래한다. 나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간다. 항아리 속에 그

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항아리를 만든다. 그녀의 이름을 새기고 그녀의 노래

를 묻고 마침내 그녀를 묻고,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뚜껑을 밀봉한다.

 

 그녀가 아픈 날, 나는 가로수에 대해 공부를 한다. 그녀를 묻은 뒤에도 나

는 가로수만 생각한다. 미술대학을 다닌 솜씨로, 노란 가로수. 불타는 가로

수. 그 속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가로수, 노래하는 가로수.

 

 이제는 다 까먹어버린 솜씨로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다, 담겨질 거대한 항

아리를 만든다. 담겨질 사람이 없다. 나는 다시 가로수에 대해 공부한다. 거

꾸로 서는 가로수, 날개 달린 가로수, 돌덩이를 삼킨 가로수, 항아리를 삼킨

가로수.

 

 나를 긴 줄에 묶어 책꽂이 뒤로 끌고 가는 가로수, 나를 잡아 먹는 가로수,

온몸이 다 항아리처럼 불어난 나의 가로수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이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지난밤, 술 취한 배들이 하늘을 날고, 술 취한 구름이 하늘을 덮고, 풀들의

뿌리는 어둠의 깊이를 미처 알지 못한 채 땅을 향해 거꾸로 솟아올랐습니

다.

 

 지난밤, 한 남자가 말했습니다-이제 하늘이 터질 것 같아. 큰 가방을 마련

해, 큰 가방. 내 눈물을 거두고, 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솟아오

른 풀들의 뿌리를 거두어야 해.

 

 지난밤, 한 남자의 머리 위에서 하늘이 터져버렸습니다- 술 취한 배들, 술

취한 구름, 거꾸로 선 풀들의 뿌리, 가방집의 가방들도 모조리 터져버렸습

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터진 하늘과 긴 강물이 그의 곁에 숨죽여

앉아 있었습니다.

 

 지난밤, 한 남자가 가방집 지붕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 꿈 속의 내 가방은

작은 뿌리, 내 가방은 취한 때, 내 가방은 술 취한 구름, 내 가방은 기나긴

강물, 그리고 내 가방은 거대한 눈물.

 

 만져 봐, 만져 봐.

 

 지난밤, 한 남자가 세계의 끝에서 말했습니다 만져 봐. 터진 하늘 아래 피

는 봄, 터진 가방 아래 흐르는 거대한 강물, 꽃봄처럼 터져나온 내 심장이

너의 손을 잡는꿈 
 

박상순(朴賞淳)                                                                                      

 

1962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서양화 전공.

1991년 《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1996년 <현대시 동인상> 수상.

 

시집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와『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이 있다.

최근 신작시집  [Love Adagio] (민음사, 2004)

 

 박상순은 기법적으로는 이른 바 <해체시> 계열에 속하는 시인이다. 많은 평자들은 그의 시를 <미끄러지는 시니피앙 놀이>로 보고 있지만, 내 견해는 다르다. 기법적으로는 이수명이 그의 시세계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보이지만, 박상순과 이수명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이수명의 시세계가 거의 투명하고 자의적인 기호 놀이로 일관하는 데 반해서, 박상순의 언어들은 일정한 심리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상처와 고뇌를 지니고 있다. 그의 언어는 투명한 시니피앙들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박상순이 심리적인 시들을 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시들은 이른 바 <무서운 동화> 계열에 속하는데, 읽고 나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투명한 슬픔을 느끼게 된다. 아주 도시적이면서도 동시에 목가적인 언어. 그의 시적 자아는 타락한 일상 안에서 타락한 방식으로 살아가도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집요한 순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적 자아가 거의 언제나 소년이거나 소녀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다. 외로움과 아픔. 그리고 망가진 세계. 그 안에서 부서진 마네킹 같은, 얻어맞아서 빠개진, 그러나 상처를 치료할 붕대조차 얻지 못한, 가엾고 순결하지만, 강하고 독립적인 소년과 소녀들이 조용조용 움직인다. 슬프고 아름답고, 말이 안되는 부조리한 동화. 쉽게 위안하려 들지 않는 것으로 위안하는 힘이 그들의 부서진 형태로부터 나온다.

[김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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