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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2022년 08월 15일 17시 41분  조회:635  추천:0  작성자: 강려

책머리에 (p.331~332)

1902년 늦가을이었다. 나는 빈 신시가지의 육군대학 교정에 있는 늙은 밤나무 아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얼마나 독서에 빠져 있었던지, 우리 학교 교수들 가운데 유일한 민간인이며 학문에 조예가 깊고 온화한 호라체크 교수님이 내 곁에 와서 앉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교수님은 내 손에서 책을 거두어 표지를 들여다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인가?" 그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러고는 책장을 넘기며 시를 두세 편 훑어본 다음 생각에 잠긴 눈길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기숙생 르네 릴케가 시인이 됐구먼."

그리하여 나는 15년 전쯤 부모님에게 떠밀려 장교가 되기 위해 상트펠텐 육군유년 학교에 들어갔던 그 가냘프고 창백한 얼굴의 소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 호라체크 교수님은 학교 목사로 그곳에 근무하셨는데, 지금도 그 기숙생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신다고 했다. 교수님은 그를 조용하고 진지하며 똑똑한 학생으로 묘사했다. 그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며, 군대 같은 학교생활을 4년 동안 참을성 있게 견딘 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메리 슈바이스키르헨에 있는 육군실업학교로 진학했다. 그 학교에 들어가고부터 그의 체질로는 군대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으므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프라하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 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교수님은 모른다고 하셨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내가 그 자리에서 내 습작 시를 라이너 마리아 릴케에게 보내 비평을 청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때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았던 나는 내 소질과는 정반대되는 직업을 구하려던 참이었고, 누군가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면 《나의 축제를 위하여》를 쓴 시인에게 이해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러기로 마음을 굳히기도 전에 나는 습작 시에 곁들여 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렇게 편지로 내 속내를 털어놓은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몇 주가 지나 서야 답장이 왔다. 파란 봉인이 된 그 편지에는 파리 소인이 찍혀 있었다. 들어보니 묵직했다. 겉봉에는 아름답고 단정한 필체로 보낸 이가 적혀 있었고, 본문도 첫째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그와 똑같은 필체로 채워져 있었다 그때부터 나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사이에는 규칙적으로 편지가 오갔다. 편지는 1908년까지 이어지다가 그 뒤 서서히 시들해져 갔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따뜻하고 세심한 배려에서 시인이 애써 만류했던 그 영역으로 내 삶01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소개하는 10통의 편지이다. 이 편지들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삶과 그가 창작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오늘과 내일의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위대하고 유일무이한 인간이 말할 때 하찮은 사람이여 침묵해야 하리.

1929년 6월, 베를린에서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첫째 편지 - 시를 꼭 써야 하는가? (p.333~336)

파리에서
1903년 2월 17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께,
보내 주신 편지는 며칠 전에야 받았습니다. 편지에서 보여주신 두터운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군요. 내겐 당신 시의 본질을 분석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비평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작품을 느끼는 데 있어서 비평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습니다. 비평은 언제나 많든 적든 그럴듯해 보이는 오해를 낳기 마련이니까요. 세상사란 흔히 믿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포착하거나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으며, 아직 그 어떤 낱말도 들어서지 못한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더욱 표현이 불가능한 대상은, 우리의 덧없는 인생과 더불어 존속하는, 바로 저 비밀로 가득한 존재인 예술작품일 것입니다.

이렇게 운을 뗐으니 이제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겠군요. 당신 시는 개성적이지 않지만, 개성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는 싹을 조용히 품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특히 당신의 마지막 시 <나의 영혼>을 읽을 때 가장 뚜렷해졌습니다. 이 시에는 개성이 시어와 운율로 나타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레오파르디에게>라는 아름다운 시에는 이 위대하고 고독한 인간과의 친근감 비슷한 것이 자라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시는, 마지막 시와 레오파르디에게 부치는 그 시조차도, 아직 독자적이지 못하며, 그 자체로는 미완성에 불과합니다. 시와 함께 보내 주신 친절한 편지 덕분에 나는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지만 무어라고 꼭 짚어낼 수는 없었던 여러 결함들을 비로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쓴 시들이 어떠냐고 묻습니다. 지금은 내게 묻고 있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겠지요. 당신은 잡지사에 시를 보냅니다. 그러고는 자꾸만 다른 이의 시와 당신의 시를 비교하면서, 혹시나 편집자가 당신이 애써서 쓴 작품을 거절하지나 않을지 걱정합니다. (내게 충고를 부탁했으니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제 나는 그런 짓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외부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바로 지금 무엇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조언하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아무도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십시오. 당신이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이유가 당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글쓰기를 그만둘 바에야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무엇보다 한밤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갸', 그 대답을 찾아 내부로 내부로 파고드십시오. 그 대답이 긍정이라면, 그 진지한 물음에 힘차고 짤막하게 “나는 반드시 써야만 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이 필연성에 따라 삶을 만들어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가장 무심하고 사소해 보이는 시간까지도 이런 충동의 징표 또는 중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자연으로 다가가십시오. 인류 최초의 인간이 된 것처럼,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은 것을 표현해 보십시오. 사랑시는 쓰지 마세요. 너무 흔하고 평범한 형식은 피하십시오. 그린 형식이 가장 어려운 법입니다. 이미 전통적으로 훌륭하고 탁월한 작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영역에서 당신만의 개성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위대하고 성숙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주제는 피하고, 일상에서 주제를 찾으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소망, 스쳐 지나가는 생각,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을 그려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뜨겁고 차분하며 겸허한 솔직함으로 묘사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주변 사물이나 꿈속에서 본 풍경, 또는 추억의 대상을 이용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이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그 일상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비난할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아직 진정한 시인이 아니기에 일상의 풍요로움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창작하는 사람에게 빈곤한 소재나 감흥을 주지 않는 장소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벽에 가로막혀 세상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감옥에 갇혔다 할지라도, 당신에게는 어린 시절이라는 왕의 부와 맞먹는 소중한 기억의 보물창고가 있지 않습니까? 그곳으로 당신의 관심을 돌리십시오. 저 먼 과거의 잃어버린 감각들을 되살리려 노력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확고해지고 당신의 고독은 더욱더 넓게 퍼져나가 세상 사람들의 소음마저 멀리 비껴가는 어스름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하여 시를 쓰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다른 이에게 당신의 시가 훌륭한지 물어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잡지사에 시를 보내어 관심을 끌고자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 시 속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소유물을, 당신 삶의 한 조각을, 당신 삶의 한 가닥 목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연성에서 싹트는 예술 작품은 훌륭합니다. 이 기원의 문제야말로 예술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인 것입니다. 그 밖의 판단 기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내가 당신에게 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내면으로 들어가 당신의 삶이 솟아나오는 깊은 근원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꼭 창작 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그 원천에서만 발견될 것입니다, 답이 나오면 그 의미를 따지지 말고 그대로 받아 들이 십시오, 아마도 당신이 예술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답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무거운 짐과 위대함을 짊어지십시오. 외부에서 올지도 모르는 보상을 바라지 마십시오. 창조자는 스스로 하나의 세계여야 하며 그 자신과 그가 속한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내면으로, 당신의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뒤 시인이 되려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시를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고 느낀다면 시를 써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요구한 이러한 내면의 성찰이 그저 헛된 것만은 아니겠지요. 어찌되었든 이를 계기로 당신의 삶은 그 고유한 길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그 길이 훌륭하고 풍요로우며 드넓기를 성심을 다해 기원합니다.

이 이상 무슨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모두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조언을 드린다면, 조용히 그리고 진지하게 당신의 성장의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외부세계로 향한 채, 그로부터 질문의 답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만큼 당신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없습니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 당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감정만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보낸 편지에서 호라체크 교수님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무척 기뻤습니다. 나는 그 경애할 만한 학자에게 큰 존경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부디 나의 이 마음을 그분께 전해주세요. 교수님께서 아직도 나를 기억하신다니 정말 영광스럽고 고마운 일입니다.

보내주신 시들을 동봉해서 돌려드립니다. 내게 보여주신 크고 진지한 신뢰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보답의 뜻으로, 비록 당신에게 나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지만, 내가 아는 한 솔직하게 답변함으로써 그 신뢰에 조금이나마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진심 어린 존경과 공감을 담아,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둘째 편지 - 반어법과 추천도서에 관하여 (p.337~338)

이탈리아, 피사 근교의 비아레지오에서

1903년 4월 5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이 보내주신 2월 24일자 편지에 오늘에서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병에 걸렸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유행성 감기에 걸린 것처럼 무기력증에 빠져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해도 몸 상태가 좋아지지 않기에 이 남쪽 바닷가를 찾게 되었습니다. 전에 한 번 이곳에 와서 몸이 회복된 적이 있거든요. 그렇지만 아직 건강을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편지 쓰기도 힘겹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그다지 길게는 못 쓰지만, 양해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당신 편지는 언제나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이 점만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답장은 한참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결국 근원적으로 그리고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이름도 없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조언하거나 심지어 그를 도우려면,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하고 또 많은 일들이 성공해야 하며 행복한 결과를 이루도록 전제적인 주변상황이 조화롭게 하나로 모아져야 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리 겠습니다. 

첫 번째는 반어법(irony)입니다.
반어법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특히 창조력이 빈약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창조력이 넘칠 때는 삶을 포착하는 수단의 하나로써 사용해 보십시오. 그 쓰임이 순수할 때면, 반어법 그 자체도 순수합니다. 그럴 때 반어법을 쓰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반어법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진다거나 타성에 젖을까 봐 두렵다면, 그때는 위대하고 진지한 대상으로 눈을 돌리십시오. 그것들 앞에서 반어법은 하찮고 초라해질 테니까요. 사물의 깊이를 탐색하십시오. 반어법은 거기까지는 결코 도달하지 못합니다.-그리하여 위대함에 가까이 다가갔다면, 동시에 그런 이해의 형태가 당신 존재의 필연성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를 음미해보십시오. 만약 그것이 우연에 불과하다면、엄숙한 사건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그것은 곧 당신에게서 떨어져나갈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이 당신에게 속하고 선천적으로 내재한다면, 더욱더 강하게 성장하여 진지한 도구로써 당신의 예술을 이루는 데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오늘 당신한테 말씀드리고자 하는 두 번째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가진 책 중에서 내게 꼭 필요한 책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어디나 가지고 다니는 책은 딱 두 권이지요. 그 책들은 지금도 내 좌우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덴마크의 위대한 시인 옌스 페테르 야콥센이 쓴 책입니다. 당신도 그의 작품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의 작품들은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일부가 훌륭하게 번역되어 레클람 출판사의 세계 문고로 나와 있으니까요. 야콥센의 소품집 《여섯 가지 이야기》와 소설 《닐스 뤼네》를 사십시오. 그리고 소품집에 첫 번째로 실린 <모겐스>라는 제목의 단편부터 읽어보십시오. 하나의 세계가, 행복과 풍요로움과 불가사의 한 위대함이 당신을 감쌀 것입니다. 한동안 이 책들 속에 파
묻혀 지내면서, 거기에서 배울 만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을 습득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책들을 사랑하십시오. 당신이 어떤 인생행로를 걷든지 그 사랑은 천 배 만 배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장담하건대, 그것은 당신의 존재라는 옷감을 짜는 데 들어가는 경험, 좌절, 기쁨과 같은 모든 실타래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더러 창작의 본질과 그 깊이와 영원성에 대해 무언가 깨달음을 준 은인이 누구인지 물으신다면, 내가 말할 수 있는 이름은 단 둘뿐입니다. 바로 위대하고 위대한 시인 야콥센과 현존하는 모든 예술가 중 필적할 자가 없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당신의 인생행로에 늘 성공이 있기를!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셋째 편지 - 야콥센의 작품에 관하여 (p.339~342)

피사 근교의 비아레지오에서
1903년 4월 23일

부활절을 맞아 보내주신 편지, 아주 기쁘게 읽었습니다. 당신의 여러 면모를 엿볼 수 있어서 매우 좋았기 때문이죠. 또 야콥센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술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들으니, 이전 당신의 삶과 여러 문제들을 이 풍요로운 보물창고로 안내한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닐스 뤼네>를 펼쳐보십시오. 정말 찬란하고 심오한 책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인생에서 가장 은은한 향기로부터 가장 진한 열매의 풍부하고 위대한 맛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듯 느껴지지요. 이 책에는 이해되지 않거나 파악되지 않거나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떨려오는 추억의 여운으로 모든 걸 알아볼 수 있지요. 어떤 체험도 무의미하게 다루지 않으며,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건이라도 운명처럼 펼쳐집니다. 그리하여 운명 자체가 커다란 직물처럼 느껴집다. 한 올 한 올이 한없이 다정한 손길로 짜여 다른 실 옆에 놓이고 마침내는 수백 올의 실과 엮이게 되는 경탄스러운 직물이지요. 당신은 비로소 이 책을 읽는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진기한 꿈속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이 주는 무수한 경이로움을 통과해 갈 것입니다.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읽어도 지금과 똑같은 경이감을 느끼리라는 점, 처음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 그 놀라운 힘이며 옛날이야기와도 닮은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독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큰 즐거움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고, 어떤 의미에서 사물을 보는 관점이 보다 좋아지고 단순해지며, 인생에 대한 믿음이 훨씬 깊어져 그 인생이 더욱 신성하고 위대해질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마리 그룹베의 운명과 동경을 그린 뛰어난 책과 야콥센의 시간집, 일기, 단상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록 그저 그런 번역본이긴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음악 속에 사는 듯한 그의 시를 읽어 보십시오 (이를 위해서라도 기회가 되면 이 모든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 아름다운 야콥센 전집을 구입하기를 권합니다. 라이프치히의 오이겐 디트리히사에서 총 3권으로 출간되었는데 번역이 훌륭한데다 가격도 겨우 권당 5, 6 마르크 정도입니다.)

(이곳에 장미가 피어있다면… )-그 섬세함과 형식은 독보적이지요-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그 책의 서문을 쓴 이와 비교해보더라도 의문의 여지 없이 옳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당부 드리고 싶은 건, 가급적 미학 비평은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글들은 생기 없는 완고한 사고에 갇혀 굳어버린 의미 없고 편파적인 견해거나, 오늘은 이 의견이 이겼다가 내일은 저 의견이 이기는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예술 작품은 한없이 고독하기에, 비평에 의존하는 것만큼 거기에 다가가기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예술작품을 포착할 수 있고, 정당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 그런 논쟁의 글이나 비평, 해설을 대한 때면 당신 자신과 당신의 감정이 옳다고 생각하십시오. 당신이 틀렸더라도,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장이 세월과 함께 당신을 다른 인식으로 서서히 이끌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이 조용하고 흐트러짐 없는 발전을 이루도록 놓아두십시오. 모든 진보가 그렇듯이, 그 발전은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강요한다거나 재촉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요. 달이 차기를 기다렸다가 분만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모든 인상과 모든 감정의 싹이 온전히 그 자체로 어둠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에서, 무의식 속에서, 이성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완전히 자라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러고 나서 깊은 겸허함과 인내심으로 새로운 명료함이 해산할 순간을 기다리십시오. 이것만이 예술가의 삶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을 이해할 때나 창작할 때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시간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해(年)는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10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릇 예술가란 재거나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름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말고, 수액의 흐름을 억지로 재촉하지 않고 봄 폭풍 한가운데서도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성숙하십시오. 그러지않아아도 여름은 오니까요. 하지만 여름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자들, 마치 눈앞에 영원이 펼쳐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근심 없고 고요하며 마음이 탁 트인 자들에게만 옵니다. 나는 이 진리를 고통 속에서, 그리로 그 고통에 감사하면서 날마다 배웁니다. 인내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리하르트 데멜, 그의 책은(참고로 말하자면, 그 책에 관해서는 조금밖에 모릅니다. 그 사람 자체에 관해서도요)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만났나 싶으면 금세 다음 페이지에서 그 감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책이지요. 매혹적인 것들을 보잘 것 없는 것들로 뒤엎어버리면 어쩌나 겁이 날 정도입니다, 당신은 '육감적인 삶과 시'라는 표현으로 그의 특징을 정확히 잘 잡아냈습니다. 실제로 예술적 체험은 그 고통과 열망에 있어서 믿을 수 없으리만치 성적(性的) 체험과 비슷합니다. 두 현상은 동일한 동경과 황홀감이 다른 형식으로 표출된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열'이라는 말 대신에 성(性)
을 넣는다면-넓고 순수한 의미에서, 곧 교회의 잘못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왜곡되기 이전 의미에서-데멜의 예술은 매우 위대하고 한없이 중요해 질 것입니다. 그의 시가 가진 힘은 위대하며, 원초적 본능처럼 강력합니다. 그 안에는 자유로운 박자가 담겨 있으며, 그의 내부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 힘이 언제나 솔직하고 가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창작자가 처하게 되는 가장 어려운 시련 중 하나입니다. 창작자는 자기가 지닌 최고의 미덕을 스스로 의식하거나 예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미덕의 순수성을 해치고 싶지 않다면요!) 이 힘이 그(데멜)의 본성을 소용돌이치다가 성적인 것으로 변했을 때, 그곳에서 그 힘은 자신에게 맞는 순진무구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거기에 진정으로 성숙하고 순수한 세계는 없습니다. 충분히 인간적이지 못하고 단순히 남성적인 성의 세계가 있을 뿐이죠. 욕정과 도취와 흥분에 지나지 않는, 남성이 일그러뜨린 사람을
강제로 짊어진 낡은 선입관과 교만을 업은 세계입니다. 그가 남자로서만 사랑하고 인간으로서는 사랑하지 않는 탓에 그의 성 감각 안에는 무언가 편협하고, 거칠어 보이며, 악의적이고, 일시적이며, 영속적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들이 그의 예술을 저속하고 모호하며 의심쩍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은 오점이 없다고 할 수 없지요. 그의 예술은 시간과 열정으로 특징지워지며, 따라서 그 가운데 오래 살아남을 만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이 그렇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 안에 있는 위대함을 깊이 맛보고 즐겨도 무방합니다. 다만 그로 인해 타락하거나 데멜
의 세계를 추종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것은 간통과 혼란으로 가득한 한없이 무시무시한 세계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고뇌 이상의 괴로움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더 많은 위대함으로 나아갈 기회와 영원을 추구할 용기를 가져다주는, 우리 인간의 참된 운명의 길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내 책에 대해서 말씀드리 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좋아하실 만한 책들을 다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책들은 일단 출간되면 더는 내 소유물이 아니고, 나는 몹시 가난합니다. 나 자신조차 내 책들을 구매할 수 없는 형편이지요. 늘 그러고 싶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 책을 받고 좋아할 것이 틀림없는 분들께조차 드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따라서 쪽지에다 최근에 출간된 내 책들(12~13권 정도 되는 책 가운데 최근 것만 적습니다)의 제목(그리고 출판사명을 적어드릴 테니 기회가 닿는 대로 그 중 몇 권을 주문하시라고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내 책을 곁에 두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넷째 편지 - 성에 관하여 (p.343~347)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에서
1903년 7월 16일

열흘 전쯤에 파리를 떠났습니다. 몸이 너무나 안 좋고 완전히 지쳤던 터라 드넓은 북부의 평야로 왔습니다. 이 광활함과 적막함과 하늘이 다시 건강을 되찾게 해주겠지요. 그런데 정작 나를 맞아준 건 긴 장마였습니다. 오늘에야 겨우, 쉬지 않고 몰아치던 폭풍우가 누그러지고 청명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첫 순간을 이용하여 당신에게 안부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나는 당신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고 오래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답장 쓰기를 잊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당신 편지는 다른 편지들 틈에서 눈에 띄면 또 다시 읽게 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읽다 보면 당신이 바로 가까이에서 느껴졌지요. 5월 2일 자 편지였는데, 당신도 물론 잘 기억하실 겁니다. 이렇게 도회지를 멀리 떠나 이 커다란 고요 속에서 당신 편지를 읽자면, 삶에 대한 당신의 아름다운 근심에 감동하게 됩니다. 파리에서도 이미 느낀 바 있지만, 그보다 더욱 격렬한 감동이지요. 도시에서는 사물을 뒤흔드는 사나운 소음 때문에 모든 것이 음색을 잃고 사라지고 말거든요. 그런데 이곳, 광활한 땅 위로 바닷바람이 휘몰아치는 이곳에 있으니, 당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나름의 생명을 지닌 질문과
느낌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처럼 너무나 섬세하고 거의 설명이 불가능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어김없이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다고 이 평생 그 물음을 해결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 눈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는 사물과 비슷한 것들에 의지한다면 말이지요. 거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뜻밖에도 위대함과 무한한 가치를 품고 있는 자연속의 단순하고 소박한 존재들에게 다가간다면, 이런 하잖아 보이는 작은 것들에게 사랑을 품고서 마치 주인을 대하는 하인처럼 이들로부터 신뢰를 얻고자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좀더 쉽고 한결같으며 친근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일은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서는 이성이 아니라,
당신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각성과 앎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모든 시작을 앞에 두고 계시니, 되도록이면 이렇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당신 마음속에 있는 풀리지 않은 모든 문제에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물음 자체를 굳게 닫힌 방이나 대단히 진기한 언어로 쓰인 책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곧바로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지금은 구하지 못
합니다.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겪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물음에 직접 부딪히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먼 훗날 그 해답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내면에 특별히 행복하고 순수한 삶의 형태를 빚어낼 가능성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갈고닦으십시오. 당신에게 다가오는 것은 크나큰 신뢰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자신의 의지에서, 당신 내면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불평하지 마십시오. 성(性)이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짐 지워진 모든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진지한 것은 대부분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진지합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의 기질과 본성에서, 당신의 경험이나 어린 시절이나 힘에서 인습이나 관습에 영향 받지 않은) 완전히 고유한 성 관념을 얻게 된다면, 이제 자아를 잃거나 당신이 가진 가장 큰 재산에 스스로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육체의 쾌락은 감각적인 체험으로서, 순수한 시각이나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달콤한 과일의 순수한 미각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하고 무한한 경험이자,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인식인 동시에 모든 인식의 성취요, 영광입니다. 쾌락을 맛보는 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 경험을 남용하고 허비한다는 데 있으며, 또한 절정의 순간
을 위해 아껴두어야 할 그런 경험을, 인생의 따분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흥거리로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먹는 일조차 다른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한편에서는 궁핍이, 다른 한편에서는 과잉이 이 식욕의 해맑은 속성을 흐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모든 강하고 단순한 욕구마저 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은 그 욕구들을 스스로 맑게 만들어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이면 몰라도 고독한 사람은 가능합니다). 고독한 사람은 동식물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랑과 동경의 조용하고 영속적인 모습이라는 사실을 잘 떠올리며 식물을 볼 때처럼 동물을 보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이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기꺼이 한몸이 되고 번식하고 성장해간다는 사실, 그것도 육체의 쾌락이
나 고통에서가 아니라 필연에 따른 행동이라는 사실, 이 필연이야말로 쾌락이나 고통보다 위대하고 의지나 반항심보다 강력한 것임을 잘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아아, 이 지상에 있는 가장 하찮은 존재에 이르기까지 거기에 깃든 이 넘치는 비밀을 인간이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더 진지하게 품는다면, 그리하여 가볍게 생각하고 넘기는 대신 그 비밀이 얼마나 두렵고 중대한 것인가를 느끼고 견디게 된다면! 또한 인간의 생식능력이 정신과 육체 둘로 나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태도를 지닌다면! 왜냐하면 정신적인 창조도 육체적인 창조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그 본질은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신적인 창조는 육체적 쾌락의 더욱 은밀하고 황홀하여 영속적인 반복일 따름입니다. “창조자가 되어 무언가를 낳고 만들려는 생각은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위대한 증거를 얻고 실제로 이뤄내지 않는 한 허황한 것이며, 사물과 동물의 세계에서 지속적인 동의를 보내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창조를 즐기는 행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까닭은 바로 그것이 우리가 물려 받는 수백만 번의 잉태와 분만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자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잊고 있던 숱한 사랑의 밤이 되살아나 그 생각을 숭고함과 고귀으로 가득 채웁니다. 한편 한밤중에 하나가 되어 떨리는 쾌락 속에서 얼싸안은 연인들은 미래의 시인들이 부를, 형언할 길 없는 환희의 노래를 위해 달콤함과 깊이와 힘을 쌓아 올리는 진지한 작업을 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리로 미래를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방황하고 사랑에 눈이 멀어 포옹하는 그
순간에도 미래는 찾아오고 새 생명은 탄생합니다. 명백히 우연의 영역인 듯한 곳에서도 법칙은 눈뜨며, 그 법칙에 따라, 저항력 있는 힘찬 정자가 그를 활짝 맞아들이는 난자를 향해 돌진하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저 밑바닥에서는 모든 것이 법칙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비밀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봉인된 편지인 양 자기도 모르게 남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다양한 이름과 복잡한 현상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 위에는 우리 모두가 그리워하는 위대한 모성이 존재할 테니까요. 처녀의 아름다움, (당신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리자면 "아직 아무것도 다하지 않은" 존재의 아름다움은 스스로 예감하고 준비하며 불안과 동경에 전율하는 모성입니다. 어머니
의 아름다움은 섬기는 모성이며, 노파의 가슴속에서 그것은 위대한 추억이 됩니다. 남성에게도 모성이 있으며, 내게는 육체와 정신 두 측면으로 여겨집니다. 남성의 생식 작용도 일종의 분만이며, 내면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 창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이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친근한 것이지요. 세계의 위대한 개혁은 남자와 여자가 모든 그릇된 감정과 혐오감에서 벗어나 서로를 대립하는 존재가 아닌 형제며 이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부과된 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소박하고 진지하며 끈기 있게 짊어지기 위해 인간으로서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고독한 사람은 언젠가는 다른 이들도 생각해낼 모든 것을 벌써부터 준비하여 보다 실수 없는 손길로 만들어갑니다. 그러니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고독이 아름다운 탄식의 소리를 자아내며 당신에게 맛보여준 고통을 짊어지십시오. 당신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멀게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야말로 당신 주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그토록 멀어졌다면, 당신의 지평선은 별들 아래 어딘가에 이를 만큼 광대해져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뒤처진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그들 앞에서 태연하고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십시오. 의심으로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이 이해 못할 확신이나 기쁨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지 마십
시오. 그런 사람들과도 어떠한 형태로든 단순하고 친밀하게 결합하고자 노력하십시오. 당신만 차근차근 맞춰 긴다면, 굳이 그들과 똑같아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낯설지라도 그런 사람들의 삶을 사랑하고, 늙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노인들은 당신이 믿는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는 상투적인 갈등에 논쟁거리를 제공하지 않도록 조
심하십시오. 그러한 갈등은 자식의 기력을 크게 소모시키고, 비록 자식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언제든 따뜻하게 품어줄 부모의 사랑마저도 좀먹게 합니다. 부모에게 조언을 구하지 말고, 이해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만 당신에게 남겨줄 유산처럼 쌓아둔 그들의 사랑을 믿으십오. 그 사랑 안에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벗어나서는 안될 힘과 축복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먼저 어떤 직업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직업은 당신을 독립시켜 모든 의미에서 완전히 홀로 서게 하니까요. 당신 안의 생명이 그 직업에 제약을 느끼는지 한번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지켜보십시오. 나는 직업이란 대단히 힘든 것이며, 인간에게 대단히 까다로운 요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에는 거대한 인습이 짐 지워져 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해 개인의 견해가 받아들여질 여지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고독이 아주 낯선 상황 한복판에서도 당신이 의지할 곳과 고향이 되어 주겠지요. 당신은 바로 거기에서 당신의 모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이 기꺼이 당신과 동행할 것이며, 나의 믿음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다섯째 편지 (p.348~350)

로마에서
1903년 10월 29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8월 29일자 편지는 피렌체에서 받았습니다. 두 달이 지난 지금에야 그 사실을 알리는군요. 나의 게으름을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하지만 나는 여행 중에 편지 쓰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편지를 쓰는 데 있어서 내게는 꼭 필요한 도구들 밖에도 약간의 정적과 고독과 너무 낯설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6주 전쯤 로마에 도착했는데, 그때 로마는 텅 비어 한산했고 열병이 속출할 만큼 무더웠습니다. 이런 상황에다가 이곳에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겹치는 바람에, 우리를 둘러싼 불안은 도무지 그칠 것 같지 않았고 타향살이의 무게가 우리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로마는 (아직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처음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워지리만큼 서글픈 인상을 풍겼다는 점도 덧붙여야겠습니다. 이 도시가 내뿜는 무기력하고 우중충한 박물관 같은 분위기며, 발굴되고 애써 복원된 어마어마한 과거(그 덕분에 초라한 현재가 먹고사는 셈이지만)며, 학자나 문헌연구가들이 바람을 잡으면 널리고 널린 이탈리아 여행객들이 덮어놓고 맞장구치는, 온통 깨지고 허물어진 물건들을 둘러싼 끔찍한 과대평가가 이런
인상을 부추기는 원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물건들은 우리 삶이 아니며 우리 것이어서도 안 되는 다른 시대, 다른 삶01 빚은 우연한 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방어적인 태도로 몇 주를 보낸 뒤 우리는 아직 얼마간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마침내 침착함을 되찾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여기에 다른 곳보다 많은 아름다움이 있는 건 아니야. 몇 세대에 걸쳐 끊임없이 칭송되고 수선공이 보수를 거듭해온 이 유물들은 아무 영혼도, 가치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
야," 하지만 이곳에는 아름다운 것도 잔뜩 있습니다. 어딜 가나 아름다운 것들 천지지요. 한없이 생기 넘치는 물줄기가 고대 수로를 따라 대도시로 흘러들어와, 수많은 광장마다 설치된 하얀 석조 분수대 위에서 춥추고 널따란 수반 안으로 넓게 번지며 떨어집니다. 물줄기는 낮에는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밤에는 목소리를 드높입니다. 이곳의 밤은 광활하고 별이 총총하며 감미로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이곳에는 정원도 있고, 인상적인 가로수과 돌계단도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고안한 이 돌계단은 미끄러지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본뜬 것으로, 물결에서 물결이 생겨나듯이 앞으로 기울여 한 단 한 단 폭넓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인상들을 통해 인간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다스럽게 지껄여대는(실제로 어찌나 떠들기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 온갖 사물의 호소로부터 자기 자신을 되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 영원 속에 머무르며 조용히 누릴 수 있는 고독이 깃든 몇 안 되는 사물들을 발견하게 되지요.

현재 나는 시내 중심인 카피톨에서 지냅니다. 보존된 로마 예술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기마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요. 그렇지만 몇 주 안에 한적하고 아담한 곳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커다란 공원 깊숙한 곳에 외딴 섬처럼 자리 잡은 집으로, 오래된 발코니가 딸린 방을 쓰게 될 겁니다. 도시의 소음과 소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지요. 겨우내 그곳에서 지내며 위대한 고요를 즐길 생각입니다. 그 고요함이 훌륭하고 유익한 시간을 선물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옮기면 차분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 자세한 편지는 그때 다시 쓰도록 하지요. 당신 편지에 대해서도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오늘은(진작 알리지 않은 점은 내 잘못입니다만) 당신이 편지에서 말씀하신 그 책을 당신이 무척 공들여 썼다고 했던) 내가 받아보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려드려야겠군요. 보르프스베데에서 당신에게 되돌아간 것 아닐까요? (외국으로는소포를 보내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정말 그렇게 되었기를, 그리고 그것이 사실로 확인되기를 바랍니다. 분실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이탈리아의 우편 사정으로는 분실도 드문 일이 아니지만요.

그 책이 배달되었더라면 (당신의 소식을 대할 때면 늘 그래 왔듯이) 나는 기쁘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쓴 시들도 (제게 보내주신다면) 언제든 성심성의껏 읽고 또 읽으며 음미하고 싶군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여섯째 편지 - 직업과 신에 관하여 (p.351~354)

로마에서
1903년 12월 23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성탄절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로 한창인 이런 때, 평소보다 더 큰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당신에게 어찌 인사말 한마디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고독의 위대함을 느꼈다면 그것을 기뻐하십시오. 위대하지 않은 고독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만 합니다. 고독은 단 하나뿐이며, 위대하고 쉽게 짊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흔한 관계라도 좋으니, 뜻하지 않게 맺어진 보잘것 없는 관계도 좋고 아무 가치 없는 표면적 관계라도 좋으니 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고독과 맞바꾸고 싶다고 바라는 시기가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고독이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고독의 성장은 소년의 성장처럼 고통을 동반하며, 막 시작되는 봄처럼 서글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결국, 필요한 것은 고독, 오로지 위대한 내면의 고독뿐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는 것--이는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자못 중요하고 대단해 보이는 일들에--그 모습이 하도 바빠 보이는 데다, 어린 눈이 어른들의 일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만--얽매여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꼈던 고독, 바로 그런 고독이 필요합니다.

그러다가 어른들의 일이란 것이 딱하기 짝이 없으며 그들의 직업이 그 자체로 굳어버려 삶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못한다는 사실을 문득 간파하면, 왜 우리는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그런 모습을 서먹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일까요? 자기 세계의 밑바닥에서, 다시 말해 그 자체가 일이요 지위요 직업인 자기 만의 고독 저 멀리에서 그 모습을 방관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어린아이의 현명한 몰이해를 거부와 경멸로 바꾸어놓으려 합니까? 몰이해는 고독을 의미하지만, 거부와 경멸은 일종의 관여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수단을 써서 거기에서 멀어지려고도 하지만요.

부디 당신이 내부에 지니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십시오. 그 생각을 뭐라고 부르든 그건 당신 마음입니다. 그 생각이 당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든 미래에 대한 동경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저 당신 내부에 떠오른 그 생각에 주의를 쏟으며, 그 생각을 당신 주변에서 보이는 모든 것 위에 놓으십시오. 당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당신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을 만합니다. 어떻게든 당신은 그것과 관련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입장을 해명하느라고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용기를 들여서는 안 됩니다. 대체 어느 누가 당신더러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단 말입 니까? 나는 당신의 직업이 힘들고 당신과 반대되는 성향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압니다. 더 나아가 당신이 언제, 어떤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짐작했었습니다. 그게 현실이 되고 나니 나는 당신을 진정시킬 수가 없군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직업이란 다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직업이란 본디 개개인에게 온갖 것을 요구하는 법이고, 늘 적대적이며, 입을 꾹 다문 채 뚱한 표정으로 무미 건조한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증오로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당신의 현재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인습과 편견과 오해를 잔뜩 짊어지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겉보기에 더 큰 자유를 누리는 직업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자체 내에 드넓은 자유로운 공간을 갖고 진정한 삶을 구성하는 위대한 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그런 직업은 없습니다. 고독한 개인만이 하나의 사물처럼 심오한 법칙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동틀 무렵의 아침 풍경 속을 걸어갈 때, 또는 사건들로 가득한 황혼을 바라볼 때, 그리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느낄 때, 모든 세속적 지위는 마치 죽은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가듯이 삶의 한복판에 서 있는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이 장교로서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은 다른 직업을 택했다 하더라도 비슷하게 겪었을 일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직업도 갖지 않고 사회와는 단지 가볍고 독립적인 관계만을 맺는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구속감은 여전히 당신을 따라다닐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당신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떤 유대감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사물에 다가가 보십시오. 사물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직 밤이 있습니다. 나무 사이를 누비고 수많은 땅 위를 지나가는 바람이 있습니다. 사물들과 동물들은 아직 당신이 관여할 만한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당신의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합니다. 그 아이들을 보고 당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면, 다시 그 고독한 어린아이들 틈에서 살아가면 됩니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존엄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디에나 등장했던 신을 더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소박함과 적막감을 떠올리기가 두렵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이 정말로 신을 잃어버렸는지 자문해보십시오. 오히려 신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요? 대체 언제 신을 가졌었습니까? 어린 아이가 신을 지닌다는 걸 믿습니까? 장정들조차 간신히 짊어져야 하는, 노인들은 숫제 깔아뭉개질 듯이 무거운 그 신을요? 정말로 당신은 신을 가진 사람이 돌멩이를 잃어버리듯이 그렇게 쉽게 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는 설사 신을 지녔던 사람이 있다 치더라도, 그가 신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신이 그를 버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신이 없었음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동경이 만들어낸 환상이며 마호메트는 그 자신의 오만함이 만들어낸 속임수라고 느낀다면, 우리가 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깜짝 놀라며 신이 없음을 느낀다면--그렇다면 도대체 왜 당신은 결코 존재한 적 없는 신을 과거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리워하고, 진짜로 잃어버린 것처럼 찾아다니는 것입니까?

왜 당신은 신을 앞으로 나타날 존재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왜 영원으로부터 이제 곧 출현하게 될 존재, 미래의 존재, 우리가 이파리로 달린 나무의 마지막 열매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신의 탄생을 미래에 일어날 일로 생각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당신의 생애를 위대한 잉태의 역사에 담긴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하루처럼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매 순간이 시작임을 왜 보지 않으십니까? 시작 자체가 그토록 아름다운데 그것이 신의 시작이라고는 어째서 생각하지 않나요? 신이 완전하다면, 많고 많은 것들 사이에서 신이 선별할 수 있도록 먼저 신 앞에 하찮은 존재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만물을 그의 안에 품으려면 신은 마지막에 오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존재가 이미 과거에
있었다면, 대체 우리에게 어떤 존재 의의가 있겠습니까?

꿀벌이 꿀을 모으듯, 우리도 만물 가운데서 가장 달콤한 것을 모아서 신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에서 나온 작고 소박한 행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일, 일에 이은 휴식, 침묵, 작고 고독한 기쁨, 함께하는 이나 따르는 이도 없이 혼자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는 신을 만듭니다. 우리 조상이 우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처럼 우리 또한 신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
리의 조상은 이렇게나 오랜 세월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그들은 우리 안에 여러 가능성으로, 우리의 운명에 지워진 짐처럼, 우리 안에 흐르는 피처럼, 시간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른 얼굴처럼 존재합니다.

그 무엇이 당신에게서 언젠가는 신 안에 머물 날이 오리라는, 가장 아득하고 궁극적인 존재인 신의 일부가 되리라는 희망을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카푸스 씨, 아마도 그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 는 당신의 삶에 이런 고뇌가 필요하리라 신께서 생각하시는 거라고 믿으십시오. 그런 경건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축하하십시오. 삶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당신 안의 모든 것들이 신을 위해 일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당신이 그토록 숨 가쁘게 신에게 열중했듯이 말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불쾌한 기분
일랑 떨쳐 버리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신의 도래를 방해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겨울이 끝날 무렵, 대지가 봄이 찾아오는 걸 막지 않듯이 부디 기쁨과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출처: R.M. 릴케 / 백정승 옮김 -- 동서문화사

 

일곱째 편지 - 사랑에 관하여 (p.355~361)

로마에서
1904년 5월 14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지난번 편지를 받고 나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일 때문에, 그다음에는 여러 가지가 거치적거려서, 마지막에는 몸이 좋지 않아서 답장을 쓰지 못했습니다. 차분하고 기분 좋은 날을 잡아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이곳에서도 초봄 날씨가 심술궂고 변덕스러워서 고생을 좀 했지요) 이렇게 당신에게 안부도 묻고, 당신이 편지에 쓰셨던 질문들에 대해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성심껏 답해드리고자 합니다.

보시면 아시 겠지만, 당신이 보내주신 소네트를 내 필체로 옮겨 써보았습니다. 아름답고 소박하며 고요한 우아함이 느껴지는 형식미를 갖춘 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읽은 당신의 시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렇게 필사본을 동봉하는 이유는, 자기 작품을 남의 필체로 다시 읽는 것이 중요하고도 대단히 새로운 경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남이 쓴 시라는 생각으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그 시가 얼마나 완벽하게 당신 고유의 것인지를 가슴 깊이 느끼게 될 테지요.


이 소네트와 당신의 편지를 반복해서 읽는 일은 즐거웠습니다. 그 두 가지 에 감사드립니다.

당신 안에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소망이 있다고 해서 혼란스러워하지는 마십시오. 차분한 생각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도구로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 소망은 당신의 고독을 드넓은 들판 위로 펼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어려움에 천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려움에 부딪힙니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성장하고 나름의 방식에 따라 스스로를 방어하며,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온갖 어려움에 맞서 온몸으로 싸웁니다.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어려움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고독은 좋은 것입니다. 고독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어렵다면, 그만큼 더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늘어나는 셈입니다.

사랑도 좋은 일입니다. 사랑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려운 궁극의 과제이자 마지막 시련입니다. 다른 일들은 사랑을 위한 준비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일에 서툰 젊은이들은 아직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혼신을 다해, 그들의 고독하고 수줍으며 높은 곳을 향해 고동치는 심장에 모인 힘을 모두 쏟아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무언가 배우는 기간은 언제나 기나긴 은둔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삶 속으로 깊게 파고든 사랑은 오랫동안 고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할수록 고독은 더욱 커지고 깊어집니다. 이때의 사랑은 결코 결합이나 헌신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없습니다. 정화되지 않은 존재, 준비되지 않은 존재, 독립적이지 못한 존재
끼리의 결합이란 대체 무엇01겠습니까?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성숙시키고, 스스로를 고유한 하나의 세계로 세우도록 만드는 고귀한 사건입니다. 사랑은 개인에게 부과된 위대하고도 가혹한 요구이며, 그를 머나먼 곳으로 이끄는 부름입니다. 젊은이들은 오직 이런 차원에서,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갈고닦아야 하는(밤낮으로 귀 기울이고 밍치질해야 하는 의무로서 그들에게 주어진 사랑을 이용해야 합니다. 헌신이나 희생, 결합으로서의 사랑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힘을 모으고 비축해야 할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평생에 걸친 노력으로도 그런 사랑을 성취하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그럼 에도 젊은이들은 너무나 쉽게 사랑에 뛰어들고, 또 너무나 쉽게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맙니다. 성급함은 젊은이들의 본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 다가오면 거기에 자신의 모든 걸 내맡김으로써 온갖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헛되이 기력을 소모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요? 이른바 그들이 결합이라고 부르는, 또는 그게 가능하다면, 기쁜 듯이 그들의 행복이라, 미래라 부를 그 반쯤 부서진 존재더미와 더불어 삶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상대방을 위한답시고 자기 자신을 잃고, 그다음엔 상대방을 잃고, 급기야는 미래에 찾아올 모든 인연을 잃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지평을 잃고 조용히 왔다가 사라지는 예감으로 가득 찬 섬세함을 공허한 당혹감과 맞바꿉니다. 그리하여 이제 환멸과 절망과 빈곤만 남은 그들은 위험한 길목마다 설치되어 있는 공공대피소처럼 우리 인생에 무수히 많이 세워져 있는 관습 가운데 하나로 도피합니다. 인간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 이만큼 관습이 잘 갖춰져 있는 영역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고안해낸 온갖 구명대며 보트며 튜브 따위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사회는 이러한 온갖 종류의 피난처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때문에, 사회는 그것을 다른 모든 대중오락과 마찬가지로 쉽고 값싸고 안전한 오락거리로 만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거짓된 사랑을 하는(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젊은이들(평균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수준에 머뭅니다) 또한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개성에 따라 삶을 영위할 수 있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본성은 사랑의 문제가 그 밖의 다른 중요한 문제들과 달리, 관습과 같은 사회적인 해결책을
통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이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밀한 문제는 각 경우마다 새롭고 특수한 해결책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제 자신을 관계 속에 던져버린 사람,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서 그 어떤 경계나 차이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리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전부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자아로부터,
자신의 깊은 고독으로부터 빠져나올 탈출구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무력하기만 할 뿐입니다. 애써 (결혼과 같은) 눈에 빤히 보이는 관습을 거부한다 해도 그보다는 덜 대중적이지만 치명적인 것은 마찬가지인 또 다른 관습적인 해결책에 빠져들고 맙니다. 결국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이루어진 잘못된 결합의 문제를 풀기 위한 모든 시도는 관습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란에서 비롯
된 모든 상황은 그것이 아무리 비일상적인(다시 말해서 비도덕 적인) 성격을 갖는다 해도 결국 일종의 관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헤어짐조차도 관습적입니다. 무기력하고 아무런 결실도 얻을 수 없는, 몰개성적이고 우연한 결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물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고통스러운 죽음과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사랑에도 아무런 해명도 해법도 암시도 없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가 봉인한 채 가지고 다니다가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게 될 이 두 과제에 대해서 우리는 합의에 기초한 어떤 공통 법칙도 찾아낼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인으로서 삶을 시험에 들게 할수록 우리 개인은 이 위대한 두 과제를 더욱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어려운 일이 우리 성장 과정에 제시하는 요구들은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어서, 우리 같은 초심자에게는 그것을 감당해낼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견디며 이 사랑을 무거운 짐으로서 또 수련으로서 받아들이고, 보통 사람들이 자기 존재에 가장 절실한 진지함을 피해서 숨어온 모든 값싸고 경박한 놀이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먼 훗날의 후손들은 조금이나마 진보와 개선의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결코 무가치 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상 우리는 개인 간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편견 없이 바라보려 하는 단계에 도달한 최초의 인류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도에 참고할 만한 어떠한 본보기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우리의 조심스러운 첫걸음에 도움을 줄 많은 것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자아를 찾는 과정에서 소녀와 부인들은 처음 잠깐 동안에는 남성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흉내 내고 남성과 똑같은 직업을 가지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과도기가 지나면, 여성들이 그처럼 (종종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수없이 변장하고 변해온 것이 단지 왜곡을 강요하는 남성의 영향 밑에서 그녀들의 본질을 정화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면에 더욱 내밀하고 내실 있는 형태의 삶을 품고 있는 여성은 삶의 씨앗을 잉태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삶의 표면 아래로 내려가 본 적이 없고, 오만하고 성급하게 자신이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을 평가절하 해버리는 천성적으로 경박한 남성보다 더 풍요롭고 더 이상적인 인간입니다. 그동안 고통과 수모를 받아 온 이러한 여성의 인간성은 신분변화와 오랜 사회적 관습의
변화와 더불어 마침내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남성들은 그때 가서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지금도 특히 북쪽 나라에서는 그렇게 믿을 만한 조짐 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명칭이 단순히 남성의 반대를 의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독립된 어떤 것을 뜻하는 날이 올 겁니다. 그때는 여성을 생각하면 보충이나 한계 같은 단어 대신 생명, 존재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그런 소녀와 부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으로서의 '인간'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진보는 처음엔 뒤처진 남성들의 강한 반대에 부닥칠 테지만, 결국 지금의 온갖 오류로 가득한 사랑의 경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그것을 성과 여성이 아닌,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로 바꿔놓을 것입니다. 이 더욱 인간적인 사랑 (결합할 때든 헤어질 때든 한없이 사려 깊고 조용하게 선의로써 분명하게 행해질 사랑)은 우리가 뼈를 깎는 고통으로 준비하는 사랑, 곧 두
고독이 서로 지켜주고 서로 한계를 넘지 않으며 서로 인사함으로써 성립하는 사랑과 매우 흡사할 것입니다.

한 말씀만 더 드리 겠습니다. 당신이 언젠가 소년이었을 때 부여받은 그 위대한 사랑이 사라져버렸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대하고 훌륭한 소망이 오늘날 삶의 기반인 의도가 그때 당신 안에서 성숙해 있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사랑이 당신 기억 속에 강하고 힘차게 남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 사랑이야말로 당신 최초의 깊은 고독이었고. 당신이
살면서 행했던 첫 내면의 작업이었으니까요. 친애하는 카루스 씨. 모든 일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SONETT
Durch mein Lehen sinn chse Klags
ohne Seufer rin nefdunkles Weh.

Meiner Träume reiner Blürenschnee
ist die Weihe meiner stillsten Tage.

Öfter aber kreuzt die große Frage
meinen Pfad. Ich werde klein und geh
kalt vorüber wie an einem See,
dessen Flut ich nicht zu messen wage.

Und dann sinkt ein Leid auf mich, so trübe
wie das Grau glanzarmer Sommernächte,
die ein Stern durchflimmert--dann und wann--
Meine Hände tasten dann nach Liebe
weil ich gerne Laute beten möchte,
die mein heißer Mund nicht finden kann .......

Franz Kappus

소네트

내 인생 사이를 탄식도 없이
한숨도 없이 떨며 지나가는 어둡고도 어두운 고통.
내 꿈들의 청정무구한 눈보라는
내 조용하기 짝이 없는 날들의 봉헌식

그러나 더 자주 커다란 물음이 내 길을
막아서 네, 나는 움츠러들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호숫가를
지나갈 때처럼 추위에 떨고 있다네

그때 어떤 슬픔이
마치 별빛이--이따금--가물거리며 새어나오는
어슴푸레한 여름밤들의 잿빛과도 같이 흐릿하게 내 위로 가라앉는다네

그러면 내 손은 사랑을 더듬어 찾네.
내 뜨거운 입이 찾아내지 못하는
소리를 기도처럼 읊조리고 싶어서……

프란츠 카푸스

 

여덟째 편지 - 슬픔과 고독에 관하여

스웨덴, 프레디 보레비 고르에서
1904년 8월 12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내 얘기가 당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잠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그동안 많은 큰 슬픔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 곁을 지나가는 그런 슬픔 들이 힘겹고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고 당신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큰 슬픔들이 오히려 당신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간 것은 아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슬퍼하는 동안 당신 안에서 많은 것이 변하지 않았나요? 당신 존재의 어느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나요? 슬픔이 위험하고 나쁜 경우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슬픔을 억누르려 할 때뿐입니다. 그런 슬픔은 겉으로만 그럴싸하게 대충 치료받은 질병처럼 잠시 물러났다가 이내 더 무섭게 터져 나옵 니다. 그러고는 인간 내부에 모여서, 삶을 부여받지 못한 채 모욕당하고 타락한 생물이 됩니다. 인간은 그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식의 한계와 예감의 외벽을 넘어 조금 더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기쁨보다도 슬픔을 더 큰 신뢰감으로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가 새로운 미지의 무언가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의 감정은 수줍어 쭈뼛거리며 입을 다물고, 우리 내부의 모든 것이 뒷걸
음질쳐 적막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그 새로운 것이 그 적막 한가운데에 머물러 서서 침묵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거의 모든 슬픔은 긴장의 순간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우리는 이 순간을 마비라고 느낍니다. 이 순간 우리의 감정은 뒤로 물러선 채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면으로 들어온 낯선 손님과 홀로 대면해야 합니다. 친근하고 익숙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떨어져나갑니다. 우리는 예전과는 더 이상 같은 곳에 머물 수 없는 변화의 한복판에 놓이게 됩니다. 그 슬픔 또한 지나갑니다. 그 새로운 것은 심장 속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의 심실을 관통하여 사라집니다. 벌써 피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쉽게 속일 수 있을 정도지요. 

하지만 우리는 변했습니다. 손님이 들어오면 집안 분위기가 바뀌듯이, 누가 왔었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 손님의 정체를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래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현실이 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우리 안으로 틀어와 그 모습을 바꾼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신호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슬플 때 고독하고 빈틈없이 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미래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은 언뜻 아무런 사건도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외부에서 비롯된 사건인 양 느껴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저 시끄럽고 우연한 순간들보다 훨씬 더 삶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다 참을성 있고 고요해질수록 우리 존재는 슬픔을 향해 더욱더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이 우리 안으 로 깊숙하게, 왜곡 없이 들어올수록 그것은 보다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고 또한 우리의 운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이 일어날 때(말하자면, 그것이 우리로부터 나와 다른 이들에게로 전해질 때),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친밀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서서히 발전해가는 방향이며, 따라서 우리의 운명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은 어떤 낯선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있어 왔던 어떤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과정들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님을 서서히 깨달아가겠지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나온 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의 내면에 운명이 남아 있을 때 이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막상 운명과 부닥쳤을 때 그 낯설음에 혼란스러워 하며 그것이 지금 막 자기에게로 온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로서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그와 비슷한 것조차 발견한 적이 없노라 맹세할 수도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태양의 운동에 대해서 잘못 알아왔듯이, 그들 또한 운명의 운동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푸스씨, 미래는 굳건히 서 있습니다 . 하지만 우리는 무한한 공간 속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고독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인간이 택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은 사실 하찮은 것임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독합니다. 고독을 얼버무리고 자못 그렇지 않은 듯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러는 대신, 우리가 고독한 존재임을 명확히 꿰뚫어 보고 차라리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편이 훨씬 현명합니다. 물론 그러다가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여느 때 우리의 눈이 머물며 쉬던 것들, 우리 가까이에 있던 낯익은 사물들이 사라지고 멀리 있던 것들은 더더욱 멀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자기 방에 있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느닷없이 산꼭대기로 끌려간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비슷할 것입니다. 극도의 불안감,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내맡겨졌다는 두려움에 숨이 막혀 오겠지요. 마치 추락하고 있거나 공중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또는 온몸이 산산조각 난 듯한 기분일 것입니다. 이러한 감각의 상태에 적응하고, 또 이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의 뇌는 엄청난 거짓말을 꾸며 내야 하겠지요. 

이처럼 고독한 사람에게는 모든 거리감과 모든 척도가 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의 상당수는 갑자기 일어나고, 그 산꼭대기에 놓인 남자처럼 견딜 수 있는 한도를 훨씬 벗어난 듯 보이는 괴상한 공상과 기이한 감각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까지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한 그 안에서 우리 존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전혀 생소한 것까지도 그 범위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용기입니다. 우리가 마주칠지도 모르는 가장 이상한 것, 기이한 것, 불가사의 한 것을 용기 있게 직면하십시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인류는 이제껏 겁쟁이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는 우리의 삶에 말할 수 없이 큰 해악을 끼쳐왔습니다. 사람들이 기이한 현상이라 부르는 경험들, 이른바 '영혼의 세계, 죽음 등, 우리의 삶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자기방어로 인해 우리의 일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런 것들을 느끼던 인간의 감각능력마저 퇴화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신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불가사의 한 것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개개인의 존재를 빈약하게 만듭니다. 더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커다란 제약이 생겨납니다 . 이는 마치 무한한 가능성의 강바닥에서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강기슭으로 끌어올려진 것과 같습니다. 인간관계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단조롭고 구태의연하게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비단 게으름 때문만은 아닙니다.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체험을 덮어놓고 마다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아무리 수수께끼 같은 것일지라도 거부하지 않을 사람만이 다른 이들과 생동감 넘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자기 존재의 맨 밑바닥까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한 개인의 존재를 방에 비유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방의 창가 구석자리나 늘 오가는 동선에 해당하는 작은 공간만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일종의 안정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에 등장하는 죄수들이 그들이 갇힌 무시무시한 감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며 손으로 벽을 더듬는 그 위험 가득한 불안정함이 훨씬 인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수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함정도 덫도 없습니다. 우리를 겁주거나 괴롭힐만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요소로서의 삶 속에 놓였습니다. 게다가 수천 년에 걸친 적응을 통해 이 삶과 아주 닮은 존재가 되었기에 뛰어난 보호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불신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세계는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기때문입니다. 그곳에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포요, 심연이 있다면 우리의 심연입니다. 또한 그곳에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어려운 것에 천착하라는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면, 아무리 낯설던 것도 더없이 친숙하고 믿음직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모든 민족의 시초에서 발견되는 오랜 신화, 마지막 순간에 공주로 변하는 용의 신화를 어찌 잊겠습니까. 우리 삶의 모든 용들은 우리가 아름다움과 용기를 조금만 더 보여주기를 기다리는 공주일는지 모릅니다. 모든 공포는 그 가장 깊은 본질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도움을 바라는 무력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카푸스 씨, 

여태껏 본 적 없는 커다란 슬픔이 당신 앞길을 가로막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불안감이 빛처럼, 구름이 드리운 그림자처럼 당신 손 위를, 그리고 당신의 모든 행동 위를 지나가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면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으며, 삶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았고, 당신은 삶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고 삶은 당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왜 당신은 불안함과 슬픔과 우울함이 당신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것들을 당신 삶에서 쫓아내려 하십니까? 왜 그 모든 것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려 합니까? 당신은 지금 과도기에 있으며, 이런 때에 당신이 바랄 수 있는 건 오직 스스로 변화하는 것뿐임을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신 삶의 어떤 부분이 병들어 있다 해도, 병이란 유기체가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취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런 때는 유기체가 병에 걸리도록 도와주고, 완전히 병을 앓고 나면 이번에는 병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병은 유기체의 성장 수단인 것입니다. 

카푸스 씨,
당신 안에서는 지금 대단히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투병 중인 환자처럼 끈기 있고, 회복기 환자처럼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현재 당신 상태는 양쪽 모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당신은 자기 몸 상태를 감시해야 하는 의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병이든 의사마저도 때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날들이 있는 법입니다. 당신이 자기 몸을 돌보는 의사로서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렇게 기다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너무 꼼꼼히 관찰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일에 얽힌 당신의 과거를 비난의 눈으로 (다시 말해,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소년 시절에 저지른 잘못과 소망과 동경 가운데 지금 당신 내면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기억해내거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고독하고 무력한 유년시절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대단히 어렵고 복잡 미묘하며, 많은 영향을 받는 동시에 모든 실제 생활관계와 동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악덕 하나가 그 안으로 침투했다고 해서 그것을 덮어놓고 '악'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명칭은 조심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것도 어떤 범죄의 이름이지 이름 붙일 수 없는 개인의 행동 그 자체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행동은 인생의 필연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그 인생이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이 힘의 소모를 그토록 크게 느끼는 것은 승리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당연하기는 하지만, 승리는 당신이 이루어냈다고 생각하는 위업이 아닙니다. 당신이 기만 대신 그 자리에 놓을 수 있었던 어떤 것, 이른바 참되고 알찬 어떤 것이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바로 위업이지요. 그것이 없었더라면 당신의 승리는 그저 의미 없는 도의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승리는 당신의 인생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내가 언제나 잘되기를 기도하는 당신 인생에 말입니다. 당신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었는지 기억하시 겠습니까? 나는 이제 그 인생이 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기에 삶은 계속 험난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기에 삶은 성장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을 위로하려 애쓰는 이 사람이 당신에게 가끔 위안이 되는 소박하고 조용한 말이나 하면서 쉽게 인생을 산다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 또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당신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이런 글을 쓸 수도 없었겠지요.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홉째 편지 - 감정에 관하여

스웨덴, 욘세레드 푸루보리에서
1904년 11월 4일

친애하는 카푸스 씨,
그동안 편지 한통 쓰지 못하고 보냈습니다. 한편으로는 여행을 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이 바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편지를 쓰는 일이 힘겹게 느껴집니다. 벌써 여러 통을 써야 했거든요. 손이 몹시 피곤합니다. 누군가에게 받아쓰게 할 수 있다면 많은 이야기를 할 텐데 그럴 수는 없으니, 당신의 긴 편지에 얼마 되지 않는 말로나마 답장하는 것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나는 오로지 당신이 잘되기를 기도하며 당신을 생각하곤 하는데, 실은 이것이 당신에게 가장 의미 있고 힘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내 편지가 과연 도움 될지는 종종 의심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그저 내 편지를 딤덤하게 받아주세요. 그리고 지나지치게 고마워 하지 마십시오. 그냥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려 봅시다.

이제 당신이 한 말들에 대해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을 것 을같습니다. 당신이 어떤 회의를 품고 있는지, 외부와 내부를 조화시킬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 그밖에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일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제껏 했던 말과 똑같을 테니까요. 괴로움을 묵묵히 참고 견딜 충분한 인내심을 갖기를, 어려움 속에서도 나날이 더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당신의 고독을 신뢰할 수 있는 내면의 단순성을 발견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제쳐두더라도, 인생을 그냥 내버려두십시오. 부디 내 말을 믿으세요, 인생은 어떤 상황에서든 옳습니다.

이제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해보겠습니다. 당신의 존재 전체를 온전히 이해하고 고양하는 모든 감정은 순수합니다. 반대로 당신 존재의 일부만을 이해하고 당신을 일그러뜨리는 모든 감정은 불순합니다. 당신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하는 모든 것은 좋습니다. 당신을 예전 가장 좋았던 순간의 당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것은 옳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존재 전체에 퍼지는 것이라면, 그리고 도취나 혼탁함이 아니라 그 바닥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많은 기쁨과 같은 것이라면, 당신을 고양하는 모든 것은 다 옳습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 겠습니까?

당신의 의심도 잘만 다스리면 좋은 자질이 될 수 있습니다. 의심은 지식과 비판적 정신의 힘을 아울러 갖추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당신 안의 무언가를 파괴하려 들 때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보십시오. 의심에게 증거를 요구하고, 그것을 시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의심하는 마음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심지어는 발끈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말고, 논쟁을 끝까지 끌고 가십시오. 그런 식으로 번번이 신중하고 철저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언젠가 의심이 파괴자로부터 당신의 가장 훌륭한 일꾼이-아마도 당신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현명한 일꾼이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오늘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번에 프라하에서 발행된 독일 연구라는 잡지에 실린 저의 짧은 시의 별쇄본을 동봉합니다. 이 시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삶과 죽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강력한 것인지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열번째 편지

파리에서
1908년 성탄절 다음 날에

친애하는 카푸스 씨,
당신에게 멋진 편지를 받고서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렇게 손에 잡힐 듯 실감 나는 당신의 근황을 전해 듣고서,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좋은 소식인 듯 합니다. 사실 이 편지는 성탄절 전날 밤에 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겨울 유난히 많고 끊이질 않는 일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이 전통 축제가 어느새 코앞에 와 있더군요. 꼭 필요한 일들을 처리할 시간조차 거의 없었을 정도입니다. 편지 쓰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이 성탄절 축제의 며칠 동안 나는 자주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거센 남풍이 산들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듯이 휘몰아치는 광활한 산속의 외로운 요새에서 당신이 얼마나 조용히 지내고 있을지를 상상했습니다.

그런 소리와 움직임을 품은 고요함은 참으로 거대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 고요에 먼 바다가 선사시대의 그토록 조화롭고 깊은 음색을 더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제 내가 당신에게 바랄 수 있는 건, 다만 그 거대한 고독이 굳은 믿음과 인내로 당신에게 작용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는 것뿐입니다. 그 고독은 영원히 당신의 삶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당신이 겪고 행할 모든 일에 숨어서 영향을 끼치며 당신의 삶에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 있는 조상의 피가 우리의 피와 뒤섞여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고유한 요소가 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삶의 중대한 변화를 맞을 때마다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런 고립된 환경에서 얼마 되지 않는 동료들과 함께 그토록 구체적이고 확고한 존재로 직책과 제복과 직무를 갖게 된 것이 기쁩니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이 모든 것들은 진지함과 필연성을 띠게 되며, 자칫 놀이나 시간 때우기가 되기 십상인 군복무는 주의 깊고 독립적인 의식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훈련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작용하고, 때때로 위대한 자연과 대면하도록 이끄는 이런 환경조건이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부입니다.

예술은 단지 삶의 한 가지 형태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 생활이 알게 모르게 예술을 위해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기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술과 가까운 척하는 저널리즘과 대부분의 비평들, 그리고 스스로 문학이라 불리고자 하는 온갖 가짜들과 같이 현실생활과 동떨어진 어정쩡한 직업보다는 현실생활에 밀착된 직업이 오히려 예술과 더 가까운 법입니다, 한마디 로 말해서, 나는 당신이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직업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처럼 혐한 현실 속에서 고독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이 기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그와 같은 생활을 유지하여 더욱더 강건해지시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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