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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크랩]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5 / 정유화 댓글:  조회:1239  추천:0  2018-11-16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4 ──김춘수의 시론과 시·1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 창작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혐의로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유치留置되었다가 결국 다시 서울로 송환되고 만다. 1946년 이후 통영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향, 김수돈 등과 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였다. 이후 제2시집 『늪』, 제3시집 『기旗』, 제4시집 『린인隣人』 등을 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1954년 시선집 『제1시집第一詩集』을 거쳐 1959년 『꽃의 소묘』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69년에 출간한 『타령조·기타』, 1974년에 출간한 『처용』은 문단의 큰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문단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후에도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80년대의 『처용이후』(1982)를 거쳐 90년대 말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2000년대 초의 『쉰 한 편의 비가』(2003)를 출간한 그의 시력詩歷이 이를 증명하고 남는다. 더불어 그는 시창작 이론에 대한 시론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독자와 문단으로부터 큰 이목과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감성적 차원인 시창작과 이성적 차원인 시론의 통합을 통해서 시적 차원의 폭을 넓혀가면서, 동시에 그것을 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1952년 시 비평지 『시와 시론』에 「시 스타일 시론試論」을 발표하면서 차츰 그의 독자적인 시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한 결실로 탄생한 것이 예의 1958년에 출간한 『한국현대시형태론』이다. 그는 이어서 1961년에 시론집 『시론』(시작법을 겸한)을 출간하였고, 1972년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시론』(시의 이해)를 출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의미와 무의미』를 출간했으며, 1979년에도 시론집 『시의 표정』을 출간하기도 했다. 물론 80년대 이후에도 시와 관련된 크고 작은 시론을 줄곧 피력해 왔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시는 그의 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감성)와 시론(이성)이 상호 대립과 수용 과정을 통해서 정련된 시작품을 산출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그의 시론적 영향이 짙게 배어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의 시론에는 시적 세계가 주는 영향이 짙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예의 김춘수의 시는 ‘의미의 시(비유적 이미지)→ 의미와 무의미 융합의 시(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 무의미의 시(서술적 이미지)’라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론도 ‘의미 시론→ 의미+무의미 시론→ 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시와 시론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초기 시와 초기 시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중·후기시와 시론은 다음호에서 모두 탐색하기로 한다. 2. 김춘수의 초기시론인 ‘의미의 시’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 스스로가 언술한 자기 시론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시작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과거의 나의 시작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 보려는 것이다. 구름과 장미 1947년에 낸 나의 첫시집의 이름이 『구름과 장미』다. 이 시집명은 매우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舶來語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장미도 때로는 감각으로 오는 일이 있었지만, 양과자를 먹을 때와 같은 로서 왔지, 제상祭床에 놓인 시루떡처럼 오지 않았다. 장미를 노래하려고 한 나는 나의 생리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이국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반항의 자각을 지니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것은 관념에의 기갈과 함께 왔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생략…) 유추로서의 장미 나이 서른을 넘고서야 둑이 끊긴 듯 한꺼번에 관념의 무진 기갈이 휩쓸어 왔다. 그와 함께 말의 의미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비로소 청년기를 맞은 모양이다. 나의 의 시절이다. 나는 나의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장미다. 이국취미가 철학하는 모습을 하고 부활한 셈이다. 나의 발상은 서구 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 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還元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딩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30대의 10년 가까이를 나는 그런 모양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하나의 사치요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겉도는 체험 끝에 사람은 또한 뭔가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김춘수전집 2-시론』, 문장, 1984. 381~383쪽. 3. ‘장미’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의 초기 시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호는 다름 아닌 ‘구름’과 ‘장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상징 기호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항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기호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감각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고, 장미는 관념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통시적인 전통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쉽게 대변할 수 있지만, 후자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공시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대변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양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김춘수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예의 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것이다. 부연하면 서술적 이미지로서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전자와 달리 관념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수밖에 없다. 부연하면 비유적 이미지로써의 시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론에 의하면, 김춘수는 비유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관념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추상적인 의미의 시를 쓰게 될 것이다. 형이하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의 의미로써 말이다. 다음의 시를 그런 차원에서 감상해 보도록 한다.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갈대 섰는 풍경」 전문 김춘수 시인은 감각을 버리고 관념에 도취하여 비유적 이미지로써 시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비유적 이미지는 추상적인 의미의 세계를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이성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의 세계, 지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김춘수는 시를 통하여 인식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텍스트에서 “푸른 달빛”은 감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다보니 텍스트 내에서 시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예의 부차적인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들판이 저처럼 울고 있다”라는 비유적 이미지이다. “푸른 달빛”은 그 “들판”을 위해 주변부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쏘대던 바람”도 ‘들판’과 만나면서 비유적(유추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만다. 마지막 연에 가면 들판을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 것으로 비유하여 그 관념적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들판이 왜 그렇게 울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시인 스스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불가지론’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시를 통한 의미론적 탐구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우리는 비유된 짐승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인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과 대립한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들판은 원초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꽃을 위한 서시序詩」 전문 김춘수 시에서 관념의 세계 곧 의미론의 세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는 아마도 「꽃을 위한 서시序詩」일 것이다. 성공적이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얘기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학적인 시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성에 의해 텍스트가 지향하는 의미론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구성은 이항대립적인 체계로 되어 있다. 바로 ‘나-너’의 이항대립적인 구성이다. ‘나-너’의 코드는 대립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낸다. 가령 제1연에서 ‘나/너’는 “위험한 짐승인 나/ 까마득한 어둠인 너”로 대립한다. 우리는 이 대립에서 상호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승의 층위와 자연(어둠)의 층위로 변별되니까 말이다. 제2연에서는 “한밤내 우는 나/ 피었다 지는 너”로 대립한다. 이 대립에서도 상호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분리된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1,2연을 통합해 보면 나와 너는 결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나는 너를 알기를 원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된 ‘나/너’이지만, 이항대립 체계를 통하여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제3연과 제4연이 이항대립하게 된다. “돌 속에 있는 금金(나)/ 얼굴을 가린 신부(너)”로서 말이다. 이 대립 역시 상호 개별적으로 작용한다. ‘금’이라는 광물성의 층위와 ‘신부’라는 인간적인 층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나-너’가 결합할 수 없는 상태인 셈이다. 이 결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의미의 심연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 의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각을 배제하고 이러한 관념, 즉 비유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그 언어가 비유로 쓰일 때에는 그 의미가 언어의 배후로 숨겨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적어도 그런 관념의 상태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비유적 세계가 ‘금’과 ‘신부’라는 감각적인 대상으로 수렴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해석적 차원으로 보면 ‘금’은 울음의 광물화로 영원한 침묵의 존재자를 의미할 것이고, 신부는 그러한 존재, 즉 광물화된 존재를 다시 인간적 존재로 불러내려고 하는 숨겨진 얼굴을 의미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시인이 광물성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세계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의미론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의미’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로 갈 것이다. 그 무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은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김춘수의 시론과 시·1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1922~2004) 시인은 경남 충무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중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과 창작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혐의로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유치留置되었다가 결국 다시 서울로 송환되고 만다. 1946년 이후 통영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향, 김수돈 등과 동인지 『로만파魯漫派』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였다. 이후 제2시집 『늪』, 제3시집 『기旗』, 제4시집 『린인隣人』 등을 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1954년 시선집 『제1시집第一詩集』을 거쳐 1959년 『꽃의 소묘』를 출간하면서 시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1969년에 출간한 『타령조·기타』, 1974년에 출간한 『처용』은 문단의 큰 이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문단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물론 그 후에도 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80년대의 『처용이후』(1982)를 거쳐 90년대 말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2000년대 초의 『쉰 한 편의 비가』(2003)를 출간한 그의 시력詩歷이 이를 증명하고 남는다. 더불어 그는 시창작 이론에 대한 시론을 깊이 있게 탐색한 시인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가 독자와 문단으로부터 큰 이목과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다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감성적 차원인 시창작과 이성적 차원인 시론의 통합을 통해서 시적 차원의 폭을 넓혀가면서, 동시에 그것을 늘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는 1952년 시 비평지 『시와 시론』에 「시 스타일 시론試論」을 발표하면서 차츰 그의 독자적인 시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한 결실로 탄생한 것이 예의 1958년에 출간한 『한국현대시형태론』이다. 그는 이어서 1961년에 시론집 『시론』(시작법을 겸한)을 출간하였고, 1972년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시론』(시의 이해)를 출간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의미와 무의미』를 출간했으며, 1979년에도 시론집 『시의 표정』을 출간하기도 했다. 물론 80년대 이후에도 시와 관련된 크고 작은 시론을 줄곧 피력해 왔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시는 그의 시론과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시(감성)와 시론(이성)이 상호 대립과 수용 과정을 통해서 정련된 시작품을 산출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그의 시론적 영향이 짙게 배어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그의 시론에는 시적 세계가 주는 영향이 짙게 배어있기 마련이다. 예의 김춘수의 시는 ‘의미의 시(비유적 이미지)→ 의미와 무의미 융합의 시(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 무의미의 시(서술적 이미지)’라는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시론도 ‘의미 시론→ 의미+무의미 시론→ 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시와 시론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초기 시와 초기 시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중·후기시와 시론은 다음호에서 모두 탐색하기로 한다. 2. 김춘수의 초기시론인 ‘의미의 시’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 스스로가 언술한 자기 시론이다. 나는 이 글에서 나의 시작과정을 그냥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입장에서 과거의 나의 시작을 다소 비판적으로 따져 보려는 것이다. 구름과 장미 1947년에 낸 나의 첫시집의 이름이 『구름과 장미』다. 이 시집명은 매우 상징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舶來語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장미도 때로는 감각으로 오는 일이 있었지만, 양과자를 먹을 때와 같은 로서 왔지, 제상祭床에 놓인 시루떡처럼 오지 않았다. 장미를 노래하려고 한 나는 나의 생리에 대한 반항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이국취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반항의 자각을 지니지 못했다. 몇 년 뒤에 그것은 관념에의 기갈과 함께 왔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생략…) 유추로서의 장미 나이 서른을 넘고서야 둑이 끊긴 듯 한꺼번에 관념의 무진 기갈이 휩쓸어 왔다. 그와 함께 말의 의미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비로소 청년기를 맞은 모양이다. 나의 의 시절이다. 나는 나의 관념을 담을 유추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장미다. 이국취미가 철학하는 모습을 하고 부활한 셈이다. 나의 발상은 서구 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 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還元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딩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30대의 10년 가까이를 나는 그런 모양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하나의 사치요 허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겉도는 체험 끝에 사람은 또한 뭔가를 조금씩 깨달아 가는지도 모른다. ──『김춘수전집 2-시론』, 문장, 1984. 381~383쪽. 3. ‘장미’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의 초기 시론의 핵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호는 다름 아닌 ‘구름’과 ‘장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상징 기호가 서로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항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기호이다. 왜냐하면 구름은 감각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고, 장미는 관념적인 시세계를 지향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자는 통시적인 전통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쉽게 대변할 수 있지만, 후자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공시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자아의 정서와 인식을 대변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렇게 양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김춘수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 예의 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것이다. 부연하면 서술적 이미지로서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후자의 시론으로 시를 쓴다면 전자와 달리 관념적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시를 쓰게 될 수밖에 없다. 부연하면 비유적 이미지로써의 시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론에 의하면, 김춘수는 비유적 이미지에 봉사하는 관념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추상적인 의미의 시를 쓰게 될 것이다. 형이하의 의미가 아니라 형이상의 의미로써 말이다. 다음의 시를 그런 차원에서 감상해 보도록 한다.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갈대 섰는 풍경」 전문 김춘수 시인은 감각을 버리고 관념에 도취하여 비유적 이미지로써 시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비유적 이미지는 추상적인 의미의 세계를 나타내준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몸으로 느끼는 구체적인 감각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이성적으로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식의 세계, 지식의 세계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김춘수는 시를 통하여 인식의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 텍스트에서 “푸른 달빛”은 감각적 이미지이다. 그러다보니 텍스트 내에서 시적 의미를 구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예의 부차적인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텍스트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들판이 저처럼 울고 있다”라는 비유적 이미지이다. “푸른 달빛”은 그 “들판”을 위해 주변부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쏘대던 바람”도 ‘들판’과 만나면서 비유적(유추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만다. 마지막 연에 가면 들판을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 것으로 비유하여 그 관념적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들판이 왜 그렇게 울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시인 스스로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언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불가지론’이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시를 통한 의미론적 탐구는 어려운 것이다. 다만 우리는 비유된 짐승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인위적이고 이기적인 인간과 대립한다. 말하자면 원초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들판은 원초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꽃을 위한 서시序詩」 전문 김춘수 시에서 관념의 세계 곧 의미론의 세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주는 시는 아마도 「꽃을 위한 서시序詩」일 것이다. 성공적이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얘기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학적인 시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성에 의해 텍스트가 지향하는 의미론적 세계를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구성은 이항대립적인 체계로 되어 있다. 바로 ‘나-너’의 이항대립적인 구성이다. ‘나-너’의 코드는 대립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생산해낸다. 가령 제1연에서 ‘나/너’는 “위험한 짐승인 나/ 까마득한 어둠인 너”로 대립한다. 우리는 이 대립에서 상호 결합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승의 층위와 자연(어둠)의 층위로 변별되니까 말이다. 제2연에서는 “한밤내 우는 나/ 피었다 지는 너”로 대립한다. 이 대립에서도 상호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분리된 존재라는 점이다. 결국 1,2연을 통합해 보면 나와 너는 결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나는 너를 알기를 원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표현된 ‘나/너’이지만, 이항대립 체계를 통하여 그 의미를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제3연과 제4연이 이항대립하게 된다. “돌 속에 있는 금金(나)/ 얼굴을 가린 신부(너)”로서 말이다. 이 대립 역시 상호 개별적으로 작용한다. ‘금’이라는 광물성의 층위와 ‘신부’라는 인간적인 층위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나-너’가 결합할 수 없는 상태인 셈이다. 이 결합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의미의 심연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 의미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 감각을 배제하고 이러한 관념, 즉 비유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예의 그 언어가 비유로 쓰일 때에는 그 의미가 언어의 배후로 숨겨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는 적어도 그런 관념의 상태를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비유적 세계가 ‘금’과 ‘신부’라는 감각적인 대상으로 수렴되고 있기에 그러하다. 물론 해석적 차원으로 보면 ‘금’은 울음의 광물화로 영원한 침묵의 존재자를 의미할 것이고, 신부는 그러한 존재, 즉 광물화된 존재를 다시 인간적 존재로 불러내려고 하는 숨겨진 얼굴을 의미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시인이 광물성의 세계에서 인간적인 세계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는 살기 위해서 더 이상 의미론적 세계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는 ‘의미’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로 갈 것이다. 그 무의미의 세계에 대한 것은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는 시인의 시세계詩世界·5   ──김춘수의 시론과 시·2   정유화   1. 들어가는 말   김춘수 시인은 ‘의미의 시론’으로 시적 출발을 하였다. ‘의미의 시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의 시보다 관념적 이미지의 시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서술적 이미지보다 비유적 이미지를 주된 시적 방법론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의 비유적 이미지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의미나 관념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요컨대 의미에 봉사하는 도구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로 구성된 비유적 이미지가 대상이 지닌 불가시적인 의미를 명료하게 모두 밝혀주는 것은 아니다. 기호로써의 언어가 그런 한계를 지닌 만큼 비유적 이미지로 구성된 언어적 이미지 또한 그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김춘수는 이러한 한계를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그는 대상에 대한 의미론적 탐구 작업에 끝내는 회의를 가지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의미의 시’ 곧, 비유적 이미지로 시를 건축하려던 욕망을 청산하고 무의미시를 향한 시적 세계를 욕망하고 만다. 달리 표현하면 서술적 이미지로 시를 건축하려는 욕망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욕망의 과정이 단순하지는 않다. ‘의미’와 ‘무의미’ 시론이 대립·갈등하는 시적 단계(비유적 이미지+서술적 이미지)를 거쳐 독자적 단계인 ‘무의미시론(서술적 이미지)’에 안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미+무의미 시론’→‘무의미 시론’이라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본고에서는 무의미시론에 이르는 단계적 과정을 핵심적으로 언급한 다음, 이러한 시론으로써 그의 시 텍스트를 독자들과 가볍게 감상하고자 한다.       2. 김춘수의 중후기 시론인 ‘무의미시론’   다음의 글은 김춘수 시인이 자술한 무의미시에 대한 시론이다.     늦은 트레이닝   아이들이 장난을 익히듯 나는 말을 새로 익힐 생각이었다. 50년대의 말에서부터 60년대의 전반에 걸쳐 나는 의식적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데상시기時期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타령조」라고 하는 시가 두 달에 한 편 정도로 쓰여지게 되었다. 일종의 언롱言弄이다. 의미를 일부러 붙여 보기도 하고 그러고 싶을 때에 의미를 빼버리기도 하는 그런 수련이다. 이 시기의 부산물로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등이 있다.(…생략…).   묘사의 연습 끝에 나는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어느 정도 얻게 되었다. 관념공포증은 필연적으로 관념 도피에로 나를 이끌어 갔다. 나는 사생寫生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는 훈련을 계속하였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의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여기서 나는 시詩의 일종 순수한 상태를 만들어 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나의 의도상의 기대를 글로써 공개하기도 하고, 작품도 만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 처음 나타난 결과는 실패였다.(…생략…)(→그 예로 김춘수는 「인동忍冬 잎」을 들고 있다.)   사생이라고 하지만,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은 버리고, 다른 어느 부분은 과장한다.(…생략…)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연상이 끼이게 된다. 논리와 자유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개입하게 되면 대상의 형태는 부숴지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한다. 무의미의 시詩가 이리하여 탄생한다.   타성[無意識]은 매우 힘든 일이기는 하나 그 내용을 바꿔갈 수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을 아주 관념적으로 비유적으로 쓰던 타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즉물적으로 서술적으로 써보겠다는 의도적 노력을 거듭하다 보면, 그것이 또 하나 새로운 타성이 되어 낡은 타성을 압도할 수가 있게 된다는 그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새로운 타성은 새로운 무의식으로 등장할 수 있다. 이것을 나는 전의식前意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60년대 후반쯤에서 나는 이 전의식을 풀어놓아 보았다. 이런 행위는 물론 내 의도, 즉 내 의식의 명령 하에서 생긴 일이다. 무의미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 다음에 내 의도(의식)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 관계에서 시는 완성된다. 그리고 나의 자유연상은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非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旗手가 된다.   「처용단장」 제1부는 나의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쓰여진 연작連作이다. 여기서 나는 인상학파印象學派의 사생寫生과 세잔느풍의 추상과 액션 페인팅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싶었으나 내 뜻대로 되어졌는지는 의문이다.(…생략…)   자각을 못 가지고 시를 쓰다 보니 남은 것은 토운 뿐이었다. 이럴 때 나에게 불어닥친 것은 걷잡을 수 없는 관념에의 기갈이라고 하는 강풍이었다. 그 기세에 한동안 휩쓸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허무를 앓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이 허무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이 허무의 빛깔을 나는 어떻게든 똑똑히 보아야 한다. 보고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意味라고 하는 안경을 끼고는 그것이 보여지지 않았다. 나는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粉末을 어디론가 날려버려야 했다. 말에 의미가 없고 보니 거기 구멍이 하나 뚫리게 된다. 그 구멍으로 나는 요즘 허무의 빛깔이 어떤 것인가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보일 듯 보일 듯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처용단장 제2부」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허무가 있을 뿐이다.(…생략…)   나에게 이미지가 없다고 할 때,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행行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行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그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연 다른 활로를 제시한다.(…생략…) 한 행이나 두 행이 어울려 이미지로 응고되려는 순간, 소리(리듬)로 그것을 처단하는 수도 있다. 소리가 또 이미지로 응고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처단하기도 한다. 연작連作에 있어서는 한 편의 시가 다른 한 편의 시에 대하여 그런 관계에 있다. 이것이 내가 본 허무의 빛깔이요 내가 만드는 무의미의 시詩다.   ──김춘수, 『김춘수전집2 시론』, 문장, 1984, pp.385~389   3. ‘무의미시론’으로써 시 텍스트 읽기   김춘수 시인이 의미의 세계, 곧 비유적인 이미지의 세계를 떠나 무의미의 세계 곧, 서술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첫 번째 특징은 다름 아닌 ‘데생dessin’적 시론이다. 일종의 실험 시론이라 할 수 있는 데생 시론은 완성된 시를 쓰기 전에 미리 그것을 위해 이리저리 가볍게 시를 구상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데생시론에 의해 건축된 시작품은 시인이 욕망하는 최종의 작품은 아니다. 요컨대 과정 중에 있는 작품이다.  김춘수는 그의 데생시론에서 시의 의미를 덧붙여 보기도 하고 의미를 빼보기도 하는 상반된 실험을 해보고 있다. 이것이 데생시론의 중요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직 그의 시론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단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데생시론의 대표적인 작품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다. 감상해 보도록 한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數千數萬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이 텍스트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만큼 시적 이미지가 주는 인상이 감각적이고 생생하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해주는 시적 기법은 다름 아닌 묘사이다. 주지하다시피 묘사는 비유적 이미지보다는 서술적 이미지를 위해 존재한다. 관념을 배제하고 감각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때 감각적 이미지는 의미를 나타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된다. 물론 이미지가 존재하기에 거기에서도 의미지향성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다만 추상으로 감지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 곧 감각으로 감지된다는 점이 변별적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비유적 이미지)인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김춘수의 시의 목적은 의미보다는 데생 그 자체, 곧 묘사 그 자체이다. 이에 따라 묘사에서 의도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데생시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에서는 묘사 자체의 서술적 이미지보다는 그 이미지가 산출해내는 의미가 전경화前景化되고 있다.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셈이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건축하는 묘사적 이미지가 이항대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의 이항대립은 의미를 산출하는 발판이 된다.   가령, “3월”은 2월(겨울, 죽음)과 4월(봄, 삶)이라는 대립항을 매개하는 매개적 이미지이다. 이에 따라 내리는 “눈”은 ‘끝남의 겨울’과 ‘시작의 ‘봄’을 매개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곧 두 대립적인 의미를 동시에 통합하는 의미작용을 한다. 그래서 산뜻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생명의 에너지를 표상한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새로 돋은 정맥”이라는 감각적 이미지도 그래서 가능해지고 있다. 그 다음에는 동양과 서양의 대립적인 항목들을 통합하는 이미지이다. 예컨대 ‘샤갈, 올리브, (숙녀), (난대성)’ 등의 서구지향성의 이미지·기후와 ‘지붕과 굴뚝, 아낙, 아궁이, 겨울(온대성)’이라는 동양지향성의 이미지·기후가 통합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로 인하여 동양의 전통서정과 서구의 (전통)정서가 신선하게 결합되는 이미지를 산출하게 만든다. 요컨대 모순의 통합적 이미지가 우리의 감각을 신선하게 자극한다. 동시에 그 자극이 곧 의미로 전환된다. 그래서 김춘수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시론에 완전히 부합하지 못하는 실험용 작품이 된다. 텍스트가 의미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실험용 텍스트를 통하여 비로소 관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서술적 이미지에 대한 철저한 훈련 덕분이다. 그래서 언어 자체가 이미지만을 지향하려는 시 텍스트를 산출하기에 이른다. 김춘수는 이러한 시를 일종의 순수시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런 의도로 쓴 작품이 바로 『인동忍冬 잎』이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人間의 꿈보다도   더욱 슬프다.   ──「인동忍冬 잎」 전문       김춘수는 묘사적 기법을 동원하여 서술적 이미지로 텍스트를 구조화하고 있다. 묘사적 기법으로 본다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의 작동 기능은 달리 나타난다. 이 텍스트에서의 이미지는 의미보다는 이미지 자체를 지향하려는 강한 성질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구성된 이미지들이 하나하나의 장면만을 연출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흰 눈’과 ‘붉은 열매’의 감각적인 대립이 어떤 의미를 지향하기보다는 하나의 장면 자체를 지향한다. ‘붉은 열매’와 ‘하얀 새’의 감각적인 대립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이미지 자체를 지향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김춘수는 이 시를 실패작으로 단언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6,7행의 “이루지 못한”, “더욱 슬프다”의 언술이 관념적인 설명으로 구성되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의미지향의 언술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춘수는 사생, 곧 묘사에 대한 더욱 철저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묘사는 감각적인 대상의 재구성이다. 지금까지는 그 재구성을 할 때에 적어도 이미지와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장면들을 제시해주었고, 그리고 그 연계성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완전히 의미론적 세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장면들을 통하여 의미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묘사 기법을 초월하고 만다. 김춘수는 감각적인 대상을 재구성할 때, 거기에 논리와 자유연상을 개입시켜 작동하게 한다. 이에 따라 대상의 형태는 부서지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각기 층위가 다른 이미지들이 상호 충돌·결합하기도 한다. 물론 충돌·결합한 그 장면이 연출하는 의미를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무의미시론이다. 그는 이렇게 논리를 초월하는 자유연상 의식을 전의식이라고 명명한다. 예의 자유연상(무의식)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늘 현실을 지배하는 현실 의식의 간섭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연상(무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처용단장」 제1부이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처용단장 제1부」 Ⅰ의 Ⅳ     ‘무의식’과 ‘의식’이 투쟁하는 무의미시 텍스트라고 해서 그 안에 묘사적 이미지가 부재하다는 말은 아니다. 묘사적 이미지가 있지만, 그 이미지가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소멸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미지와 대상 사이에 거리가 없어지게 되고, 이미지 자체가 그 실존으로 남게 된다. 시에서 대상이 소멸했다는 것은 그 의미론적 세계가 소멸했다는 뜻이다. 결국 남은 것은 비실재하는 이미지 조합의 장면들뿐이다. 좀더 부연하면 의식이 지배하는 언어적 현실(이미지)을 소멸시켜버리고 무의식이 지배하는 언어적 현실(이미지)을 새롭게 창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을 분류해보면 그러한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의식적인 언술을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의 반복적 언술,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라는 언술,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라는 언술이다. 이 언술 속에 있는 이미지는 객관적인 현실을 반영해 주고 있다. 달리 말해서 의미론적으로 파악이 가능한 세계이다. 다음으로 무의식적인 언술을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척 내리고 있었다.”라는 언술,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라는 언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이라는 언술,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라는 언술 등이다. 물론 의미론적 파악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이 언술 속에 있는 이미지들이 실제의 현실을 해체하고 시인의 내면에 있는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를 건축하고 있는 ‘겨울비, 바다, 군함, 물새, 사나이’ 등의 이미지들은 ‘의식/무의식’, ‘현실/내면’, ‘객관/주관’의 대립적 세계를 통합하면서 자기만의 시적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김춘수는 ‘의식/무의식’의 대립적 언술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아직 현실의 잔영, 다시 말해서 현실을 지시해주는 언어의 의미 잔영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김춘수는 극단적으로 무의미시론을 전개해 나간다. 그 극단은 바로 말을 부수고 의미의 분말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언급하자면 이미지까지 처단하여 그 이미지까지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에 이어 이미지까지 사라졌을 때, 시 텍스트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에 의하면 바로 시적 허무이다. 이런 점에서 무의미시의 절정은 허무의 세계를 최고조로 나타낸 것이 된다.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그대가 바람이라면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처용단장 제2부」 Ⅱ     이 텍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을 지시해줄 이미지조차 해체되어버리고 남아있는 것이라곤 ‘소리에 가까운’ 언어의 배열뿐이다. 여기에서 ‘소리에 가깝다’라는 것은 시적 언어가 지시해줄 대상이나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빈껍데기만 현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빈껍데기의 언어를 읽으면 그냥 소리만 나게 된다. 가령, “발바닥”, “겨드랑이”는 신체언어로써 그 의미를 지시해주는 정상적인 기능을 한다. 부연하면 의미의 분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체언어인 “발바닥”, “겨드랑이”가 비신체기호인 “구름”, “풀”, “별”과 결합되면서 그 의미기능은 상실되어버리고 만다. 곧 정상적인 문법의 틀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언어는 그 의미의 틀을 버리게 된다. “구름”, “풀”, “별”은 자연기호에 속한다. 예의 신체기호와 자연기호의 결합은 비정상적이다. 그러나 비정상적이기에 우리의 시선을 끌 수가 있다. 그 결합의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의인화된 “구름 발바닥”, “풀 발바닥”, “별 겨드랑이”는 신선한 이미지로 전경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 의미들은 모두 분말로 흩어지고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소리의 반복이다. 곧 소리의 울림뿐이다. 명사적 층위인 “구름 발바닥”, “풀 발바닥”, “별 겨드랑이”의 반복적 시행과 서술어 층위인 “보여다오”의 반복적 시행이 결합된 반복적 리듬뿐이다. 즉, 의미는 사라졌지만 반복적 리듬은 더욱 크게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반복적 구조는 그 언어가 어떠하든지 간에 의미를 발생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텅 빈 언어의 껍데기에서 ‘허무(소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의미’를 보기도 한다. 말하자면 천상적인 요소인 ‘구름, 별’과 지상적 요소인 ‘풀’, 그리고 천상과 지상을 매개해주는 ‘바람’과의 연관관계, 곧 공간적 관계를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탐색해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반복적 시행 속에 드러난 그 공간적 의미로써 말이다. 이렇게 보면,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언어로써 언어를 초월하려는 시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존의 시적 문법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문법의 틀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 새로운 문법의 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장면을 부수고 해체하여 그것 자체를 전경화하는 일이다. 그와 동시에 반복적 어구, 어절, 시행을 구조화한 반복적 리듬을 후경화하는 일이다. 결국 그의 무의미시는 전경화, 후경화에 의하여 역설적으로 의미의 세계로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정유화 /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 『미소를 가꾸다』가 있고 중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편집위원이며 서울시립대 강의전담 교수      
2    [스크랩] . 무의미 시론 댓글:  조회:1301  추천:0  2018-11-16
. 무의미 시론     내 주요문학 수업은 70년대에 이루어졌다. 감수성은 다소 있으나 지적인 소양은 부족한 시기에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모델이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선배들이 다들 김춘수와 김수영을 언급하고 있어서 그들 작품을 정독해서 읽어 보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이 문단에 화제로 오르고 잡지 평문에 도배를 하다시피 해서 “무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이 시절 한참 미학관련 서적들을 보고 있어서 ‘미(美)란 무엇인가’하는 명제에 나는 빠져 있었다. ‘미(美)’가 대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인 반면 “무의미(無意味)”란 간단하다.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간단한 용어를 어렵게 생각한 이유는 나는 혹시라도 이 용어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무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노자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無)’와 불교의 ‘공(空)’과도 연결되는 관념이 아닐까 매우 어렵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춘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해석은 기우에 불과하다.     이미지란 대상에 대한 통일된 전망을 두고 하는 말이라면 나에게는 이미지가 없다. 이 말은 나에게는 일정한 세계관이 없다는 것이 된다. 즉 허무가 있을 뿐이다. 이미지 콤플렉스같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나에게는 없다. 시를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이미지를 수사나 기교의 차원에서 보고 있는 것은 하나의 폐단이다. ...허무는 나에게 있어 영원이라는 것의 빛깔이다.(「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시『처용단장』중에서 발췌)     김춘수가 예시로 든 시와 시론을 보면 이미지가 부르는 관념은 중요하지 않고 ‘말의 긴장된 장난’이 중요하다.  김춘수는 다시 또 말한다.     무의미 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치고 나면 시 한 편의 초고가 종이 위에 새겨진다. 그 다음 내 의도가 그 초고에 개입한다. 시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전의식(前意識)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관계에서 시는 완성된다. 그리고, 나의 자유연상은 현실을 일단 폐허로 만들어 놓고 비재(非在)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기수(旗手)가 된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여기서 비재(非在)의 세계란 김춘수가 말하는 ‘허무’를 뜻하는 것 같다. 김춘수는 왜 허무에 빠지고 관념이나 의미를 배격하게 되었을까. 시가 의미와 가치를 배격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독자는 가진다. 김춘수는 다시 자신의 시론에서 자신의 시적변용과정을 설명한다.       나의 발상은 서구관념철학을 닮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플라토니즘에 접근해 간 모양이다. 이데아 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시야를 지평선 저쪽으로까지 넓혀주기도 하였다. 도깨비와 귀신을 나는 찾아 다녔다. 선험(先驗)의 세계를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환원과 제일인(第一因)으로 파악해야 하는 집념의 포로가 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實在)를 놓치고 감각을 놓치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들어 끝내는 허무를 안고 뒹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50년대도 다 가려고 할 때였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이데아 라고 하는 비재(非在)’가 용어상의 혼란을 불러왔다. 플라톤에게는 ‘이데아’가 실재(實在)고 현상과 사물은 비실재(非實在)였다. 실재(實在) 즉 제일원인(第一原因)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경우 종교에서는 역설과 상징을 사용한다. 그러나 역설과 상징은 ‘말할 수 없는 것’의 실체를 체득(體得)했으나 표현방법이 마땅치 않을 경우 사용하는 우회로이다. 김춘수의 표현대로라면 “도깨비와 귀신”인 실재(實在)를 지적으로는 이해했으나 수도자가 아니어서 체득할 수는 없었고 불가지론(不可知論)과 허무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김춘수는 또 반문한다.       염불을 외우는 것은 이미지를 그리는 것일까? 이미지가 구원에 연결된다는 것일까? 아니다 염불을 외우는 것은 하나의 리듬을 탄다는 것이다. 이미지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탈(脫) 이미지이고 초(超) 이미지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미지는 뜻이 그리는 상(象)이지만 리듬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뜻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이미지만으로는 시(詩)가 되지만, 리듬만으로는 주문(呪文)이 될 뿐이다. 시가 이미지로 머무는 한 시는 구원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2. 김춘수의 리듬과 주문       김춘수가 의미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구원’을 위해 택한 방법이 리듬과 주문이었다. 리듬제일주의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음악해석과  말라르메의 ‘예술지상주의’에 연결하면 그런대로 설명이 된다. 음악은 음향과 리듬이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가사가 없이 순수한 음악만으로도 감정전달이 가능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인간의 깊은 내적세계의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이 경우 제일 좋은 길은 시를 버리고 음악을 하면 된다. 의미와 관념이 형식상으로는 없으니 순수예술이라고 이름 할 수 있다(그런데 음악을 해설하는 음악평론가들은 온갖 의미와 관념으로 음악을 설명하고 있으니 음악의 내면에 의미와 관념이 없다는 주장도 따져 보아야 할 명제이다).   리듬이 아닌 주문(呪文)이라는 용어에 이르면 좀 복잡해진다. 주문에는 의미와 관념과 리듬이 같이 결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리듬은 음악으로 귀속되니까 이를 피하기 위해 주문을 말한 것 같다. 김춘수가 주문(呪文)을 얻으려고 시도했다는 시를 소개해보자.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하늘 수박은 올리브 빛이다.   바보야,   바람이 지는가 자는가 하더니   눈이 내린다 바보야,   하늘 수박은 한 여름이다 바보야,   올리브열매는 내년가을이다 바보야,   우찌 살꼬 바보야,   이 바보야,   (시「하늘 수박」전문)     주문(呪文)이란 주술적(呪術的)인 작용을 낳게 하기 위하여 입으로 외는 글귀이다. 원시종교에서 보편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데 지금도 무속적(巫俗的) 의례에서 무녀들이 주문을 외워 초혼(招魂)과 강신(降神)을 한다. 동학과 천도교(天道敎)에서 심령(心靈)을 연마하고 한울님(하느님)에게 빌 때 외우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등도 주문이고 넓게는 기독교의 ‘주기도문’도 주문이다. 모두 강한  의미와 관념을 가지고 있고 이때의 리듬은 의미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의미와 관념을 배격하고자 하는 김춘수가 이런 의미의 주문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그는 불교의 ‘만트라’를 염두에 두었을까.  신주(神呪)·밀주(密呪)·밀언(密言) 등으로도 번역하는 ‘만트라’는 신들을 부르는 신성하고 마력적(魔力的)인 어구이다. 원래는 뜻이 있으나  중국·한국·일본에서는 산스트리트어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를 음사(音寫)하여 표현한다. 반야심경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같은 만트라가 이의 대표이다. 산스크리트로는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스바하)인데 마법사고로는 발음의 특정한 톤과 음정이 발하는 파(波)의 에너지가 중요하다. 진언밀교의 수도자들은 이 파(波)의 에너지가 다른 차원의 에너지와 정보와 공명해서 다른 차원(세상)의 지혜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다.   김춘수는 시(詩)란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김춘수의 다른 시나 시론과 산문을 보면 구원이 있다고 믿은 주문(呪文)에 대해 깊이 천착하고 공부한 흔적은 없다. 그는 막연히 주문이란 음악적인 리듬을 근간으로 하고 종교제의에서 사용하는 형식이니까 시의 시원(始原)성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김춘수는 시론에 관한 글「자유시의 전개」에서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해 자유시와 산문시의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行)은 저마다 리듬과 의미와 이미지의 중량(重量)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 그 중량은 밸런스가 잡히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쪽에 부담이 너무 커지거나 하여 저울대가 기울게 되면 시 전체의 분위기를 깨뜨리게 된다     나는 이 말에 동감을 한다. 김춘수의 생각과 같이 시작(詩作)은 '리듬과 이미지와 의미’를 동시에 고려하여 이루어진다. 시의 중요한 세 가지 구성요소는 상호간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대도 김춘수가 의미와 이미지를 죽이고 리듬으로서 시를 바라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김춘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꽃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 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新婦)여.   (시「꽃을 위한 서시」전문)       이데아 로서의 신부의 이미지는 릴케와 평계(平溪) 이정호의 시에서 얻은 것이다. 이 비재(非在;신부)는 끝내 시가 될 수 없는 심연(深淵)까지 나를 몰고 갔다. 그 심연을 앞에 하고는 어떤 말도 의미의 옷이 벗겨질 수 밖에 없다.  평계(平溪)의 침묵을 단지 나는 그의 게으름으로만 돌리지 못한다. 나는 이 시기에 어떤 관념은 말의 피안에 있다는 것도 눈치채게 되었다. 나는 관념공포증에 걸려들었다. 말의 피안(彼岸)에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앞에 서는 말이 하나의 물체로 얼어붙는다. (「의미에서 무의미까지」,김춘수, 『오늘의 시론집』, 문학과 지성)       김춘수가 고민한 문제를 나도 겪은 적이 있다. “말의 피안”에 있는 관념, 즉 이데아나 형이상학적 실체를 드러내고자하는 사람은 말을 버려야 한다. 비트켄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하여야 한다’라는 명제를 드러낸 적이 있다. 전기 철학인 ‘언어그림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으로 그 의미를 명확히 도출할 수 없는 명제에 관해서는 ‘그림’(이미지)으로써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침묵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선가(禪家)에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을 말한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 개인(존재)은 선택을 해야 한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해서 불가의 깨달음으로 가던지, 제한된 언어의 제약 내에서 주어진 수단을 다해서 자신이 아는 바를 표현해야 한다. 불가에서는 오도송(悟道頌)같은 형식으로 역설과 이이러니를 통해 피안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물의 제일원인을 믿는 신비주의자들은 상징으로서 이 ‘침묵의 자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우연히 ‘무한의 침묵’의 무게를 엿보았으나 근기(根氣)가 약한 나 같은 사람은 시가 무서워져서 십년동안 절필을 하게 된다. 이 선택에서 김춘수는 의미와 관념이 무서워져서 리듬으로 도망가고자 했다. 수도자들은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수행에서 이 세계를 감당하지만 김춘수는 말 대신 리듬으로 우회하고자 했다. 김춘수는 만년까지 지신의 신념인 무의미시론을 끌고 가지 못했다. 시에서 언어의 리듬만 가지고는 시라는 전체얼굴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의미시의 주요 근거인 리듬에 대해 더 생각해 보자.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산문자체도 리듬이 있지만 시는 리듬의 형식이 더 도드라진다. 인류의 태초에 발생한 문학이 운문이었고 주문들이 리듬의 형식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리듬은 언어의 원초적인 속성을 지닌다. 언어의 리듬에 대하여 옥타비아 빠스의 생각을 들어보자.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만일 언어라는 것이 비밀스러운 리듬에 의하여 지배되는 구(句)가 끊임없이 변전(變轉)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리듬의 재생산은 우리에게 말을 다스리는 힘을 줄것이다. 언어의 역동성은 시인으로 하여금 말 사이에 존재하는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언어의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끈다.(『활과 리라』     “모든 현상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이 세계의 운동이 리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물리학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경험으로 알고있다.  하루는 밤과 낮으로 깜박이며, 일년은 四時로 깜박이며, 지구 세차운동으로 황도의 별들은 26,000년을 주기로 위치를 바꾸어 시야에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결국 시간의 리듬이다. 태양과 달의 운동은 지구생명들의 활동과 휴지, 각성과 수면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바다의 썰물과 밀물은 리듬으로 해안선에 도착한다. 시간(time)의 어원이 조수(tide)라고 한다. 원시인간들이 바닷가의 물고기를 먹고 살았을 때 몸으로 부딪친 사물은 조수였다. 자연의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이 어려웠다. 인간도 자연의 리듬이다. 지구에서 목숨을 받아 꽃처럼 피었다가 어둠으로 진다. 결국 긴 시간 속에서 리듬으로 깜박이는 존재다. 긴 리듬과 짧은 리듬이 우리의 심장과 영혼을 흔들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희로애락도 리듬의 변화를 탄다. 거시세계가 아닌 미시세계에서도 원자와 분자와 아원자들이 진동한다(리듬으로 춤춘다). 사물은 춤추면서 파장을 만들어내는데 전자기파와 음파, 파도등의 물결파(리듬파)는 시공을 가득 채우면서 물질과 물질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에 파로 전달된 에너지차이를 뇌가 인식한다. 정보의 결합은 한편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작은 이야기의 결합이 큰 이야기의 이미지와 꿈을 만들어낸다. 세계가 이런 모습이니 사물의 모사인 언어가 리듬을 갖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김춘수가 리듬에 주목한 점은 이해가 된다. 언어의 보다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듬으로 ‘언어의 피안에 있는 형이상학적 상태’가 전달되리라 생각한 것은 방향이 잘 못 된 것 같다. 김춘수가 시도한 언어의 리듬이 제사장과 사제들이 추구한 주문(呪文)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 수박」에서 드러낸 반복어귀가 주문(呪文)의 비밀리듬을 가지고 있을까. 반복어귀가 감추어진 세계의 리듬과 공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나에게는 드러난 시의 평범한 리듬이 보일 뿐, 드러나지 않은 사물의 전체성을 암시하는 리듬이 느껴지지 않는다.   과학과 경험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직관에 의해 먼저 가설과 이론이 자유롭게 세워진다. 그러나 천재의 사고실험을 거친 이론이라도 실험과 검증에 의해 입증되어야 전제아래서의 진리로 인정받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직관에 의한 사고실험의 소산이었으나 태양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굴절됨이 실험으로서 검증되고서야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마찬가지로 김춘수의 리듬과 주문에 의한 시 이론이 성립하려면 리듬만으로 충분한 시가 있어야 한다.   음악내부에서도 리듬과 더불어 음정과 화음이 곁들여져야 음악의 형식이 완성된다. 리듬만으로 이루어진 타악기의 연주가 음악의 깊은 세계를 드러내기에는 단조롭지 않은가.       3. 이미지(Image)와 김춘수의 서술이미지     이미지(Image)란 사전적 정으로는 감각기관에 대한 직접자극으로 얻어진 정보가 아닌 상기(想起) ·상상(想像) ·사고(思考)를 통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映像)을 말한다. 시에서는 상상(想像)을 통한 구체적이고 직관적인 상(像)을 주로 언급한다. 이미지는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비유적 이미지에 수사학에 말하는 직유, 은유,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등이 포함된다. 사유(思惟)와 표현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신비평가(新批評家)들은 수사를 의미론에 입각하여 분석하고 문학과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보았다. 수사는 사유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언어장치이다. 의미의 폭과 깊이를 넓히고 표상이미지를 풍부하게 한다.   개별 사물은 서로에게 대립되면서 고유의 성질과 형상을 가지고 있다. 존재론적 입장에서는 사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과학은 사물을 수(數)와 양(量)으로 환원해서 사물간의 추상적 관계를 만들어 내고 인간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사물을 다룬다. 시(詩)는 사물의 동일성(同一性)을 드러내어서 현실에 없는 가능성을 세계를 만들어 놓고 즐거워한다. 양자 모두 사물에 대한 인간의 투사와 제어를 목표로 한다. 모두가 기호인데 과학은 수(數)를 시는 언어(이미지)를 사용하는 점이 다르다. 두 방식 모두 사물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드러내 인간의 인식에 자유를 부여하고 현실해석력을 높인다.   예시를 들어 구체적으로 이해해보자. 흙 1kg과 물 1kg은 분명히 다른 사물이지만 1kg이라는 추상적 성질에 의해 동일한 관계를 가진다. 이 관계로 물 1kg의 무게를 흙1kg으로 지탱할 수 있다는 통찰이 나오고 제방을 쌓는 건축가는 사물을 다루는 지혜를 얻는다.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수의 이데아적 성질이 만물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언어의 세계에서  ‘수선화’와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다른 존재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강가의 수선화이다’라는 은유가 두 사물이 각자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연결된 다른 존재의 속성을 드러낸다. 다른 존재의 속성이란 여자가 수선화이고 수선화가 여자인 가능성의 세계이지만 형이상학자들은 근본이 같다고 생각한다. 불가는 연기에 의해 두 사물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플로티누스는 사물의 제일원인인 일자(一者)의 다른 표현으로 보았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수(數)로 사물의 보이지 않는 통일성의 관계를 직관하고 이를 실체로 본 속성과 같다. 이름을 달리 했을 뿐 ‘사물의 보이지 않는 힘과 관계’에 대한 전체성에 대한 생각은 동서양이 그리 다르지 않다.   시인들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강가의 수선화이다’라는 A=B의 세계가 자신이 새로 창조한 세계라고 믿는다. 양자는 각자 상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존재(사물의 제일원인)의 개별적 드러냄이가. 시인은 현실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수사적 이미지의 세계로 드러냄으로서 새 방식으로 세계모습을 창조한다. 낭만주의자들이 시인의 이러한 상상력(Imagination)을 신의 창조에 비견한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이유이다.    수사적 이미지의 능력과 비유를 김춘수는 왜 포기하고 서술적 이미지에 기대고자 했을까. 다시 김춘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나는 시에서는 충분히 구체적이고 싶다. 맛있는 담배(문맥상 구체적인 현실의 비유이다)를 실컷 피우고 싶다. 관념을 말하고 싶지 않다. ... 그대로의 주어진 생을 시에서 즐기고 싶다. 관념 과잉상태인 실제의 내 생활에 어떤 환기장치, 또는 어떤 균형감각을 회복시켜주는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내가 만드는 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관념을 배제하기 위하여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자. 그 것은 일종의 묘사절대주의의 경지가 된다. 설명을 전연 배격한다. 설명은 일종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가치관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회의주의가 되기도 하고, 현상학적 망설임(판단중지, 판단유보)의 상태, 판단을 괄호안에 집어넣는 상태가 된다. (시론 「대상의 붕괴」에서 인용)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시「눈물」전문)     김춘수는 설명에서 ‘형이상학적 관념’을 배제하기 위하여 서술적 이미지를 쓴다고 하였다. 형이상학에 대한 불가지론과 회의주의자인 태도에 의해 형이상학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하겠다는 입장도 이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형이상학적 관념은 비유적 이미지에서만 드러나는 것일까. 서술적 이미지에서는 형이상학적 관념은 사라지는 것일까. 피안에 이르는 주문(呪文)이라 일컬어지는 반야심경의 부분을 보자.     이 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呪文)을 말해주니, 주문은 곧 이러하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공(空)이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공의 상태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라는 서술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서술적 이미지가 관념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상하다. 그렇다고 시에 대해서 고민한  김춘수가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의 능력을 모른 것도 아니다. 다음의 시를 예로 들어 김춘수는 시의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梅嶺花初發 매령화초발     매화고개엔 꽃이 피기 시작했으나 天山雪未開 천산설미개     천산의 눈은 아직 녹지 않았겠지 雪處疑花滿 설처의화만     눈 덮인 곳에도 아마 꽃은 만발하여 花邊似雪廻 화변사설회     꽃 주변에는 눈이 빙빙 돌겠지 因風入舞袖 인풍입무수     바람이 춤추는 무희의 소매 속으로 들어와 雜粉向妝臺 잡분향장대     온갖 분가루가 그녀의 화장대에 어지러우리 匈奴幾萬里 흉노기만리     흉노의 침입은 이미 수만리나 진군하여 春至不知來 춘지부지래     봄이 이르렀어도 봄이 왔음을 알지 못하리라     (「의미에서 무의미까지」에는 원문만 있는데 雪이 모두 雲으로 표기되었다. 대구대학교 중문학과 전영란교수의 도움을 얻어 본래대로 雪로 바꾸고 해석을 새로 했다. 매화와 눈의 대비가 봄과 흉노의 침입으로 인한 나라형편의 어려움을 은유해서 시의 구조가 명확하다. 天山은 지명인데 이 시기에는 흉노의 점령지였다 한다. 김춘수 시론전집에도 誤記로 되어있어서 눈 밝은 사람한테 흉잡힐까 아쉬웠다)     당 고종 때의 시인 노조린(盧照鄰)의 오언율시 「매화락(梅花落)」이다. 끝의 두 행을 빼고는 나머지 여섯 행이 모두 이미지로 되어있다. 요컨대 매화(梅花), 설(雪), 무수(舞袖), 분(紛) 장대(妝臺)등이 그리는 정경은 아주 화려하고 관능적이다...........이러한 이미지의 생태적 다양성및 다의성(多意性)은 산문의 진술(Statement)이 가지는 정확성과 비교할 때 매우 반 산문적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개념전달(산문의 경우처럼)과는 전연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즉 〈이미지의 생태적 다양성및 다의성(多意性)〉은 시(詩)의 것이다. 시는 이리하여 개념을 넘어선, 사물의 생성한 개성적 파악을 위하여 이미지로 말을 하여야 한다. 시는 곧 이미지라고도 말할 수 있다......이미지는 결국 그 생태면이나 기능면에서 볼 때 〈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 전 우주가 필요하다(폴 클로 델)〉는 그 감각 및 상상력과 잇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양인은 그 감각및 그 상상력을 보다 서정적으로 말한다. 즉, 〈낙엽 한 잎에 우주의 가을을 느낀다〉고. (시론「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에서 인용)        〈한 마리의 나비가 나는 데에도 전 우주가 필요하다〉와 〈낙엽 한 잎에 우주의 가을을 느낀다〉는 구절은 모두 작은 사물에 비유한 큰 관념과 의미(우주적인)를 전달하고 있다. 예로부터 명시의 구절이라고 알려지고 고전이 된 시다. 김춘수는 왜 시의 관념과 의미를 지우려고 했을까. 기존의 방법으로는 이런 시의 깊이를 뛰어넘을 수가 없어서 방법상으로만 새로움을 추구했던 것일까. ‘무의미 시’라는 시가 지금까지 한국시사(詩史)에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임에는 틀림없다. 김춘수는 이 주장으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새로운 시창작 방법이라는데 누군들 호기심이 일지 않겠는가.   이 아이디어가 김춘수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미술계에서 다다이즘 운동이 있었고 이들의 슬로건인 ‘무의미함의 의미’에서 용어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다에서는 ‘무의미함의 의미’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여 문맥과 문맥이 전혀 맞지 않는 글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거나 무형식으로 비현실이나 초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현실에서는 ‘무의미’일지 모르나 다른 현실에서는 ‘의미’인 상태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김춘수도 기존 시이론에서는 무의미일지는 모르나 ‘리듬과 주문’의 세계에서는 ‘의미’일지도 모르는 시를 추구함으로서 미술에서의 다다운동과 어느 정도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다다가 기존의 예술적 감수성에 반기를 들고 의도적으로 예술을 불쾌한 것으로 표현한 반면 김춘수는 음악적 감수성에 기대고 대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점에서 다다와는 다르다. 오히려 근래의 한국 ‘미래파’시인들이 변태적 성(性)과 파괴의 추함을 대상으로 삼아 무의식아래 욕망을 드러낸 수법이 다다와 비슷하다.  김춘수는 초기시에 릴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릴케는 시에 관념과 상징의 의미를 많이 사용했다. 김춘수가 릴케와 흄의 시를 대비해서 설명한 대목이 있다.       죽음은 위대하다./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이다./우리가 생명의 한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그것은 우리의 한 복판에서/감히 울기를 한다(릴케의 시 부분)       가을 밤의 싸늘한 감촉-/밖을 나섰더니./얼굴이 붉은 농부처럼/불그레한 달이 울타리를 넘어다 보고 있었다./나는 말을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주위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어/되회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희었다.(T.E.흄의 시 부분)       릴케의 상기 시는 ‘예지’를 작접으로 토로하고 있다.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그의 인생관적 문제성에 많이 힘입고 있는 것이다. 릴케와 같은 시를 느낄 수가 있다. 상징적인 태도라 할까? 이에 비하여 T.E.흄과 같은 시인의 시를 대할 때 시를 직접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상징성이 없는 대신 시 그것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김춘수는 관념/의미를 벗어던지고 사물이 주는 직접적인 감각과 심미를 추구하고자 했다. 김춘수는 하이데거가 휠덜린의 시를 대상으로 쓴『휠덜린과 시의 본질』을 말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휠덜린의 노트에서 “모든 재보財寶중에서 가장 위험물인 언어”라는 대목을 분석한것을 인용한다.     언어를 존재를 위협하는 ‘위험물’로 보는 동시에 언어가 없으면 세계가 없는 것이 되니까 언어를  우리가 가진 재보들 중의 하나의 ‘재보’로 본다. 시작과 언어의 이상이 같은 변증법적 운동은 그것들이 지양되어 마침내 하이데거의 시의 본질인 ‘시란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 된다.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한마디로 존재자의 덧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 역시 하이데거에 있어서와 같이 존재(고향)의 빛에 대한 갈망을 내포로 지니고 있는 하나의 외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연(존재자-제행무상)과 내포(존재)의 긴장이 훌륭한 시를 낳게 한다.(「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언어에서는 의미론과 존재론은 서로에게 의지한다. 의미는 존재가 없으면 피상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고 존재는 언어(혹은 존재자)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사물이나 명제(혹은 진리)에 대해 정확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과학이나 논리철학의 태도이다. 환원이 그 방법론인데 부분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그려낼 수 있으나 사물과 상황이 관계하는 전체성은 훼손을 받는다. 비트겐슈타인이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여기서 나왔다. 김춘수가 언어에 대해 고민한 대목이다. 시가 형이상학적 존재(신, 불교의 ‘空’, ‘절대정신’)을 대상으로 하면 불립문자(不立文字)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벽에 부딪힌다. 그는 또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를 들어 언어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언어는 그 대상의 진상을 놓친다고 보았다. 시인이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이 문제에서 나는 십년간 침묵을 했고 김춘수는 시를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미지(관념)을 포기하고자 했다.      “외연(존재자-제행무상)과 내포(존재)의 긴장이 훌륭한 시를 낳게 한다”라는 김춘수의 말을 생각해보자. 외연(언어)으로 내포(존재)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문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수사를 사용했다. 은유와 상징은 형이상학적 함의를 드러내기에 가장 좋은 기법으로 여겨져 왔다. 바이블이나 불경에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와 ‘불성’을 드러내기 위해 비유를 사용해 왔다. 그 비유는 시인과 수도자들이 본인의 개성으로 전체성과 만나는 자리에서 항상 새롭게 이루어져 왔고 독자는 새로운 비유 속에서 드러나는 이 세계의 전체성에 감명을 받는다.  김춘수는 문학이 철학이나 과학 혹은 종교와 다른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가 부딪힌 문제는 문학의 문제가 아닌 형이상학의 문제였다. 절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수도자처럼 언어를 버리고 수도원이나 사막의 동굴로 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비유를 창조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인식의 한계에서 시인은 정면돌파를 해서 새로운 자리와 상황을 보여주는 일이 시인(느끼고 표현하는 앎의 사람)의 임무다. 시인의 역량이 부족하면 나같이 도망가거나 김춘수식의 우회가 등장한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김춘수는 은유와 상징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서술적 이미지로 갔고 산문이 될 염려가 있기에 리듬을 중요시한 시적 전략을 세웠다.           4, 상징계에서 상상계로의 퇴행       의미와 관념(상징계)에서 주문 꿈(상상계)로의 퇴행을 한 김춘수의 시적 변용은 무엇을 의미할까. 라깡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을 통해 사회적자아를 얻는다고 한다. 상징이란 금기와 법 질서로 표상되는 언어의 세계(의식)이고 상상계란 꿈,욕망을 이루어진 언어이전의 세계(무의식)이다. 언어(현실)에 절망을 느낀 사람은 언어를 극복한 세계(초월. 형이상학)로 간다. 그러나 초월의지가 없는 사람은 유토피아(理想)를 상상계(꿈)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상상계에서 유토피아를 찾는다. 그는 상상의 이미지로 자신만의 제국을 세우려하고 현실(상징계)에서 얻지 못한 만족을 얻는다.  상상계의 의식에 비친 거울속의 자아는 이상회된 자신의 형상이며 자아의 ‘原象’이다. 시인들은 이상화된 세계 즉 내 아름다운 모습이 투영된 세계를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이니 ‘나르시스’의 거울에 갇힌 자이다.   시란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언어)의 세계로 떠오른 것이다. 시는 꿈처럼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언어로 구성된 세계이다. 언어는 개인의 경험이전에 선재(先在)한 문화이며 종족과 집단의 의식과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개인은 태어나서 꿈속에서 살다가 집단의 상징질서(언어)를 받아들여 문화의 지혜와 보호 속에 산다. 언어가 사물과 세계의 상징이지만(인류의 시야가 관계하고 해석한 상징이겠지만) 언어는 자연(실재계)과 분리되어 있다. 언어는 자연(실재)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진실에서 절망한다. 자연(실재)이란 언어로 드러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꿈이며 환상이며 동시에 상징이다. 동물은 언어(꿈과 환상)가 없기에 우울증이나 자살이 없다고 한다. 인간만이 자연(실재)을 언어로 왜곡해서 보기에 언어는 축복이기도 하고 저주이기도 하다.   김춘수는 언어의 의미와 관념(상징질서)를 버리고 초월하는 대신 리듬과 주문이 있는 상상계로 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정신에서 이상세계란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바다가 왼 종일   생쥐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 따끔   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날이 저물자   내 늑골사이 늑골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다시 또 아침이 오고   바다가 또 한번   생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뚝, 뚝, 뚝 천(阡)의 사과알이   하늘로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 가고 또 밤이와서   잠자는 내 어깨 위   그 해의 새눈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한 쪽이 조금 열리고   개동백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었다.   잠을 자면서도 나는   내리는 그   희디흰 눈발을 보고 있었다.    (시「처용단장」제 1부 눈, 바다, 산다화(山茶花)중 부분)    「처용단장」을 김춘수의 시의식이 최고로 반영된 작품으로 친다. 그가 주장한 무의미시론이 잘 반영되었는지는 판단을 유보한다. 나는 이 작품에서도 의미를 읽어내기 때문이다. 「처용단장」이라는 제목부터가 이미 신화적 상징을 차용하고 있다. 신화적 상징의 제목과 본문에서 유년이 본 사물이미지의 간격을 긴 시간으로 벌려놓고 이미 독자에게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김춘수 식이라면 “처용”이라는 상징인물과  “바다” “생쥐” “느릅나무” “거머리” “베꼬니아” “개동백” “눈”은 의미관계가 없는 ‘넌센스’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구조에 ‘무의미’라 없다. 무작위로 떠 있는 하늘의 별을 보고도 마음에 형태를 그리고 “사자자리”와 “황소자리”같은 형상이미지를 붙이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신화가 된 이 정신구조물은 아직도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정말로 ‘무의미’를  노렸다면 제목을 “처용단장”같은 신화이미지를 차용하지 않고 ‘크레인’나 ‘자동차’를 붙였어야 했다. 그래도 독자는 또 의미를 창출한다. 상상력이 좋은 전문독자는 “김춘수의 ‘자동차’시에 나타난 유년의 바다이미지와 기계문명과의 대상관계이론을 통한 시의식 분석”같은 제목의 논문을 쓸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비약해보니 시란 참 재미있는 물건이다. 의미 시와 무의미 시가 자리를 바꾸고 창조와 해석이 뒤섞여서 저마다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시가 꿈이며 환상이기 때문이다. 꿈의 해몽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는가. 김춘수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소회를 밝힌 대목이 있다.     이미지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피안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즉 사물의 의미를 탐색하는 태도다. 이미지를 순수하게 사용하는 것은 사물을 그 자체로서 보고 즐기는 태도다. 이 두 개의 태도가 나에게 있어서는 석연치가 않다. 혼합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의식한다. 이러한 자의식은 시작에 있어 나를 몹시 괴롭히고 있다. 이러한 자의식이 없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의 시는 비유가 되는 일이 많다. 부분적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전체적으로도 그렇다. 이른바 택처와 스트랙처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끝내 휴먼한 것을 떠나지 못한 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이 휴먼한 것을 벗어나고 싶은 이를테면 해방돠고 싶은 원망은 늘 나에게 있다. 말하자면 꿈과 같은 상태-라고 해도 정확한 기술은 못된다-즉, 꿈에서 현실적인 의미를 공제해 버린 그런 상태에 대한 원망이 있다. 시가 완전히 난센스가 되어 버린 그러한 상태-초현실주의 어떤 시에서 그런 상태를 본 일이 있다.  (「김춘수 시론 전집1」에서 인용)     휴먼(인간)의 의식이란 의미와 가치를 사물에 투영해서 자신의 자의식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의식을 말한 것 같다.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뇌 속에 있으면서도 뇌 속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과 의식은 발생학적으로는 인간이 외부환경에 적응해서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졌다. 정신은 개인의 외부에 일어나는 사건과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 감각을 수용하는 동시에 경험과 기억을 환경에 투사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의 ‘지향성’이 발생한다. 지향성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다. 이 때 인간의 마음에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물(욕망과 관계가 있다)이 의미로 다가온다. 이 정신의 ‘지향성’은 매우 강력해서 지금 여기의 현실에 한정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수, 이데아 , 형이상학)까지 지향한다.   정신의 지향성이 인간의 내면으로 향할 경우 현실에고를 벗어난 다른 정신차원의 자신(Self)를 경험하기도 한다. 김춘수가 추구한 무의미는 현실에고가 지향하는 ‘의미’를 벗어나서 무의식세계의 꿈이나 초현실세계의 이미지가 주는 ‘새로움’이나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인간에게 즐거움이나 호기심 또는 “원망”을 유발한다면 무의미 일 수가 없다.   무신론인 과학자에게(「만들어진 신」을 쓴 리차드.도킨스가 생각난다)에게 신(神)이란 김춘수가 말하는 넌센스(무의미)이지만 독실한 신자에게는 최고의 의미이다. 그의 종교적 욕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건대 김춘수가 추구한 시세계에 대한 용어인 "무의미“는 용어를 잘못 선택했다. 그의 시론을 읽어보면 시의 언어기능과 형이상학적 관념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무의미 시작(詩作)이라는「처용단장」을 주의 깊게읽어보면 그의 시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느껴진다. 이토록 시에 대한 집착을 보인 시들이 ‘무의미’ 시라니? 내게는 다른 형태의 의미(초현실세계에 대한 '원망'으로서의 의미)를 추구한 시들로 판단된다.        5. 김춘수의 ‘하나님’과 형이상학     하나님은 언제나 꼭두새벽에   나를 부르신다.   달은 서천을 가고 있고   많은 별들이 아직도   어둠의 가슴을 우비고 있다.   저 쪽에서 하나님은 또 한번   나를 부르신다.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 가까이   가끔 천리향이   홀로 눈뜨고 있는 것을 본다.   (시「잠자는 처용」전문 )     김춘수는 「잠자는 처용」은 이 시와는 직접 관계가 없으며 시적 트릭을 생각하고 붙였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이시가 무의미시가 되지는 않는다. 나(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언어의식에 비추어 다시 의미를 부여한다. 나(독자)는 다시 해석한다. “잠자는 처용”은 시인자신의 투사이며 시에서는 “천리향“의 이미지로 들어났구나. "하나님”이라는 형이상항적 실체는 화자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데 화자는 “잠자는 처용”처럼 현실세계에서 갇혀있다는 얘기네. 그의 무의식속의 영혼(Self)은 “천리향(千里香)”처럼 눈을 떠서 하나님의 소명을 보고 있다는 얘기네.   형이상학이나 구원에 대해 그토록 고민을 많이 했으면서도 김춘수가 시에 표현한 ‘하나님’이나 예수의 위치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시집 『남천』에서 ‘예수를 위한 여섯 편의 소묘’라는 소 제목하에 예수에 관한 시 「마약」「아만드 꽃」「요보라의 쑥」「세 째번 마리아」「가나에서의 혼인」「겟세마네에서」를 선보이고 있다. 김춘수는 기독교나 예수에 경도되었으면서도 현실적로는 교회를 가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원은 제도권의 교회나 종교 이데올로기에 있지 않다고 본 것 같다. 그의 수필을 보면 말과 행동을 같이 한 예수의 양심과 십자가에 박혀서도 고통을 인내한 초인적인 모습이 김춘수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성서의 기록에는 자기의 육체에 박히는 못의 그 아픔 때문에 예수가 의식을 잃었다고는 되어 있지 않다. 그는 까무라치지 않았고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리도록 까지 하느님을 찬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인적인 능력이라고 하겠는데, 이 장면을 상상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비유로 보이기도 하고, 다른 목적을 위한 허구로 보이기도 한다. (시론『왜 나는 시인인가』)       예수의 목에는 「유대의 왕」이라고 쓰인 호패가 차여져 있다. 골고다 언덕의 좁은 꼬부라진 길바닥은 당나귀의 분뇨로 범벅이 돼 있다. 경사진 오르막도 있다. 피와 땀이 온 몸을 짓이기고 흙먼지가 눈을 뜨지 못하게 한다. 짊어진 십자가는 무게가 75kg이나 된다. 힘에 부대껴 쓰러지면 그 때마다 누군가가 침을 뱉고 돌을 던진다. 이윽고 느린 박자로 해가 기운다. 멀리 골란 고원을 저녁 이내가 스쳐간다. 이내는 땅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발이 없으니까.(시「계단을 위한 바리에떼」부분)     예수가 숨이 끊어질 때 천둥은 치지 않고 느티나무 큰 가지도 부러지지 않았다. 골고다 언덕에는 느티나무가 없다, 해는 너무 달아서 흰 빛을 내고 있다. 예루살렘의 하늘에 그날 밤 늦도록 무지개가 서지도 않았다. 다란 갈릴리 호숫가의 뜨거운 햇살이 작은 풀꽃(아만드 꽃이라고 했던가,) 몇 포기 서쪽을 바라고 시들게 했다. 그 움푹 파인 언저리 너무 고요하다. (시「의자를 위한 바리에떼」부분)     인간의 감정은 감정이입(Empathy)의 능력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우리는 고문 받는 자의 아픔을 보고 내 아픔이 아닌데도 같은 종류의 아픔을 느낀다. 상상이니까 강도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의 심정은 개인의 과거경험과 연결되어 동일한 심정을 느끼게 한다. 영화를 보고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같이 공감하는 능력은 인간이 가상세계를 현실같이 느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최근에 거울 신경 세포(mirror neuron) 가 뇌 안에서 발견되어서 과학자의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감정이입의 과학적인 구조와 설명이 가능해 졌다. 김춘수는 신약성경의 스토리가 이성에 반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상징이나 우화로서 진실이기를 바란다. 이런 바람과 감정이입이 위 시편들을 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앙과 종교는 매우 어려운 주제이다. 인간의 실존에 필연이면서도 종교만큼 많은 논란을 볼러 오는 주제도 없다. 내 견해로는 종교에서의 구원은 단순히 제도권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믿는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영지주의(Gnosis)는 고대 그리스어로 ‘앎, 깨달음,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의 뜻인데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實在)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의 도움(예수와 같은 신성의 지식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에 의해 물질의 악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인 ‘그노시스’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노시스는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이 모든 물질과 육체에 깃들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구원을 13세기 독일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우리는 모든 사물 속에서 신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심정은 마음 속에, 그리고 온갖 노력 속에, 그리고 사랑 속에 신을 항상 현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춘수가 신비한 인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구원을 얻었다는 기록과 증거는 없다. 그는 기독교의 상징과 예수의 고난에는 매력을 느끼고 작품을 남겼으나 이는 자신의 육체적 한계상황을 초극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사로서 그렸을 뿐, 구원에 대한 갈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품은 「잠자는 처용」에서 든 “천리향(千里香)”의 이미지로 암시되는 정도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적 이미지를 추구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감을 얻고 무의식 중에 그 영감을 시로 옮기기도 한다.  사물=신이라는 범신론적인 깨달음이 아름다운 시로 나타나 기독교적인 좁은 울타리의 해석이 아닌 확장된 신의 이미지가 나타난  시가 다음 시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인도의 “브라만”이나 불교의 “공(空)”으로 바꾸어도 이 시는 뜻이 훼손되지 않는다. 형이상학적 신비주의 생각을 이 시는 온전히 반영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시「나의 하나님」전문)      시인이란 언어에 대한 고민과 깨달음 앞에 선 자일까? 수도자나 비의를 추구하는 자는 오히려 시적 표현을 통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석가가 일생동안 말한 불법의 설명도 모두 은유와 알레고리 상징을 통한 시적 비유였다. 예수가 ‘하늘나라’를 설명하는 방법도 모두 비유였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의 구체적인 은유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을 입체적으로 향상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도 ‘하나님’이라는 일자(一者)를 새로운 비유로 독자에게 제시해서 지금까지 없던 시적세계를 만들어 냈지 않은가.         6.새로운 문화환경과 미래시      시란 고대에 노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노래는 사라지고 회화적 이미지를 위주로 하는 그림이 되었다. 회화는 이미지와 비유하자면 색채와 빛깔의 음악으로 이루어진다. 시도 음악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음악성이 높을수록 시의 본질이나 고대원형에 더 가깝다. 사람의 뇌는 좌반구가 언어를 다루고 우반구가 노래와 음악을 담당한다고 한다. 시란 그러므로 좌.우 뇌를 동시에 사용해서 만들어내는 복잡한 정신활동이다. 김춘수가 관념과 의미를 포기하고자 한 것은 적극적인 해석으로는 ‘시의 음악’에 복귀하고자 하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리스시인들이 수금을 타며 시적영감에 불타서 시를 노래하는 시대가 아니다. 의식은 더욱 복잡해지고 사물에 대한 정보와 해석은 고도의 추상을 요구한다. 추상의 정점에 수학과 시가 서있다. 수학의 방정식은 날로 다차원의 세계인식을 그려내고 있다(예를 들어 세계를 ‘초끈 이론’으로 해석하는 수학공간은 11차원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시가 확장된 세계해석모델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마도 더 복잡한 언어적 은유와 상징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정신의 긴장이 싫어서 고대의 리듬이나 음악으로 시를 한정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의 문화에서는 일종의 퇴행이다. 이를 음표와 화음이 많은 클래식을 해석하기 싫은 청중이 동요나 민요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에 비유한다면 비약적인 해석일까. 음악은 시에 필요하다. 그러나 음악과 시적상징의 의미가 다차원적으로 융합하는 시가  확장된 세계해석에 필요한(정서상의 단순한 위로나 언어의 기호놀이가 아닌) 시의 미래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 작품에서 의미를 전하는 산문적 요소를 없애고 순수하게 감동을 일으키는 정서적 요소만으로 쓴 시 소위 발레리의 ‘순수시’라는 것도 실험에 그쳤다. 김춘수가 실험한 “무의미”는 보다 큰 ‘의미’의 시에 포함되며 시는 통합예술로 진화하는 중이다. 그의 실험이 시란 무언인가의 반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는 무의미하지는 않다. 나도 이글을 쓰면서 시의 양상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시의 형식이 무엇이던 간에 시의 원형 포에지(Poesie)는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문화환경에서 나타날 미래시의 형식과 내용이 나는 궁굼하다.         김춘수 시인 年譜(연보)                                                                ▲1922년 11월 25일 경남 통영 출생 ▲1940년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42년 일왕과 총독정치를 비방해 퇴학 ▲1946∼51년 통영중, 마산중·고 교사 ▲1960∼78년 경북대 문리대 교수 ▲1979∼81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88년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시집:‘애가’(46) ‘구름과 장미’(48), ‘늪’(50), ‘기(旗)’(51), ‘인인(燐人)’(53), ‘꽃의 소묘’·‘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59), ‘타령조 기타’(69), ‘꽃의 소묘’(77), ‘남천(南天)’(77), ‘비에 젖은 달’(80), ‘김춘수 시전집’(집문당·86), ‘라틴점묘 기타(其他)’(88), ‘처용단장’(91), ‘서서 잠자는 숲’(93), ‘김춘수 시전집’(민음사·94), ‘호(壺)’(96), ‘들림, 도스토예프스키’(97), ‘의자와 계단’(99), ‘거울 속의 천사’(2001), ‘쉰한 편의 비가’(2002), 시론집 및 산문:‘한국 현대시 형태론’(58), ‘시론’(61), ‘시의 표정’(79), 수상집 ‘오지 않는 저녁’(79), ‘시의 이해와 작법’(89), ‘시의 위상’(91), 산문집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93), 장편소설 ‘꽃과 여우’(97)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58), 자유아세아문학상(59), 문화의달 은관문화훈장(92), 제5회 대산문학상(97), 제12회 인촌상(98),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2004)      김백겸(시인. 웹진 시인광장 전임 主幹)   [출처] 前現 주간들의 詩와 아포리즘【65】김백겸 전임 主幹의 詩와 아포리즘【47】수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자 했던 김춘수 시인【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8년 6월호(2018, June) ㅡ통호 제110호ㅡ|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1    [스크랩] 하이퍼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 장경기 댓글:  조회:1179  추천:0  2018-11-16
하이퍼 융복합시대의 시문학 —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멀티포엠아트 운동                                                                               장 경 기(시인ㆍ멀티포엠아티스트)       우리 몸의 일부가 된 스마트폰과 같은 첨단 지능형 테크놀로지는 구글, 패이스북, 유튜브 등이 이루는 글로벌 네트워크 환경과 융복합을 이루면서 문자, 영상, 음악, 이미지 등 다양한 형태를 지닌 디지털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접하고 공기처럼 숨 쉬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로해서 현대인들은 어느덧 융복합 멀티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융복합 매체 환경 속에서 시의 본질을 계승하고 더욱 환하게 꽃피워나가기 위해서, 매체가 새로 생겨날 때마다 이를 활용해서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해온 시문학 운동이 멀티포엠아트 운동이다. 1996. 8. 1. 을 발표한 이래로 17년 동안 운동을 펼쳐오면서, 그 일환으로 필자가 창작해온 멀티포엠아트 작품이 시리즈다. 현재 28권 시리즈 1300여 편의 작품까지 진행되고 있다.   융복합 멀티언어를 활용하여 창작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융복합예술, 하이퍼아트, 하이퍼 시문학, 멀티포엠아트, 토털콘텐츠 산업 등으로서의 다양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한강아리랑‘ 시리즈는 그 창작 과정이 바로 매체 발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멀티 융복합시대, 첨단 지능형 테크놀로지 시대를 관통하면서 시문학 예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가는 ‘한강아리랑’이 특히 융복합 하이퍼아트, 하이퍼 시문학으로서는 어떤 특징을 가지며, 앞으로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가를 살펴봄으로써 하이퍼 융복합시대가 펼쳐놓는 시의 신대륙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1. 디지털 정보로 축적된창작 무의식 늪지대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본격적인 시점은 17년 전인 1996. 8. 1. 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멀티포엠아트는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시문학이다. 오늘날과 같은 융복합 멀티언어 시대에 멀티언어의 꽃이자 정수로서, 영혼의 가장 섬세하고 깊은 내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해 내는 멀티언어의 크리스털로서의 역할, 융합 멀티언어의 깊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다듬어내고 꽃피어내는 역할을 해내겠다는 취지의 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은 현재 까지 발표해오면서 융복합 멀티언어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시는 정신의 순금이며 영혼의 크리스털이요 마음의 양식이다. 인류가 있어온 이래 시는 절대고독과 허무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의 삶을 지탱하고 위로하며 영원을 향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데 늘 함께 해왔다. 하이퍼 융복합 시대에 이러한 시의 본질을 계승하고 인류의 삶과 함께 해나가자는 것이 것이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의 기본 방향이다. 창작물과 창작 과정들이 계속 축적되는 외장하드는 어느덧 나의 휴먼블랙박스요 분신이 된다. 그렇게 문자, 영상, 음, 이미지 등을 모두 포함하는 융복합 멀티언어로 창작해오는 언제 부턴가. 글을 써도 그림을 그려도 동영상으로 창작을 해도 컴퓨터를 통해서 하게 되었다.   한 대의 컴퓨터 안에 글, 이미지, 애니메이션, 영상, 음, 웹문서 등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작가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멀티적인 창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창작을 하는 동안, 컴퓨터에 연결된 외장하드에는 자연스럽게 창작 재료, 과정들까지 고스란히 축적되어 간다. 내 생각, 감정의 섬세한 무늬들이 그 속으로 배여 들고 다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면 또 그만큼 나의 내면에서 나온 글이, 이미지, 영상, 소리들이 눈송이처럼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간다. 그런 외장하드 속은 거대한 늪지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나의 휴먼블랙박스가 되어가고 있음을 실감해야 했다.   2. 작품은 창작 무의식 지대의 꽃     창작이란 결국 이 사이버 늪에 나를 축적시키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창작이란 결국 사이버 늪 속에 내 스스로를 복재해 넣으며 불사를 꿈꾸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앞으로의 창작 역시 이 늪에 내 스스로를 퇴적시키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 늪 위에 피어난 수련 같은 꽃송이들이 바로 한 편의 시이고 멀티포엠이고 디지털아트 작품인 셈이라. 그 꽃송이만을 꺾어 예쁜 화병에 꺾꽂이해 보여주는 것이 작품 발표요 전시였던 셈이라.   ‘그래, 나로부터 나온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동안 서로 뒤섞여들면서 갖가지 꽃을 피워내고 향내를 빚어내며 독특한 모습을 이뤄나가는 저 사이버 늪지대야 말로 내 온 삶으로 일궈내고 있는, 내가 빚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작품이 아니겠는가.’   나의 작품은 공기다.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네트워크 속을 흐른다. 우리는 이미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정보를 공기처럼 접하고 활용할 수 있는 융복합 멀티언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디지털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은 곧 언제 어디서든 작품을 창작 단계에서부터 서로 접하고 교감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있다. 외장하드에 있는 작품들은 그대로 디지털 네트워크 속으로 흐른다. 작품은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처럼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면서 어디로든 스며든다. 인터넷 상에서의 존재 방식 역시 서버와 같은 한 곳에 둥지를 튼 상태에서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방식을 점점 벗어나고 있다. 패이스북, 유튜브, 구글, 네이버, 다음, 스마트폰 등 다양한 터미널에 분산되어 있으면서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고 융합되어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변신해 가고 있다. 한 인간의 모든 것이 네트워크상에 분산해서 존재하면서 활동한다. 육신을 거처로 하는 나와는 또 다른 네트워크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인 셈이다. 감상자중 누군가는 사이버 늪 안으로 들어와 꽃 몇 송이만 보고 나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저 지구 반대편에서 네트워크를 타고 들어와 늪 저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뒤지며 자신도 그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함께 꽃을 피워낼 수도 있다.   3. 창작 현장은 융복합의 소용돌이     은 내용면에서 母語, 神話, 生命, 存在, 삶이라는 5개의 굵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 한 창작자의 머리에서 나온 시리즈는 1996년 멀티포엠아트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씨앗이 움트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 십 여년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은 의도적인 방향 정립이 아닌, 자연스런 흐름 속에서 그 나름의 몇 개의 굵은 흐름을 강줄기처럼 자연스럽게 형성해 가고 있다. 母語, 神話, 生命, 存在, 삶이라는 5개의 줄기다. 한 창작자의 생각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어떤 갈래를 가지게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한강아리랑’은 멀티포엠아트, 융복합예술, 하이퍼아트, 하이퍼시문학 등의 특성을 지속하면서 디지털 정보와 네트워크의 발달과 함께 그 매체 환경에 적응하면서 아직은 알 수 없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고 진화해 나갈 것이다. 그 속에서 작품의 내용 역시 ‘母語, 神話, 生命, 存在, 삶’이라는 현재의 5가지의 갈래를 기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가지들을 돋아내고 뻗어나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와 작품들을 열매로서 꽃으로서 피워나갈 것이다.   나의 작품에 완결이란 없다. 각 프로젝트와 작품들은 변화하는 매체에 적응하면서 저마다 진화하고 번식해간다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의 일환으로 융복합 멀티언어를 활용해서 창작해온 시리즈는 현재 문자시는 물론 디지털아트, 설치미술, 멀티포엠아트영화, 시나리오, 소설, 연극 등으로 이뤄진 융복합예술, 토털콘텐츠 산업으로 성장해가고 있다. 최근에는 하이퍼 융복합 환경 속에서 열린 작품, 열린 창작, 열린 표현이라는 방향으로 펼쳐나감으로써 이 시대정신을 포괄적으로 가꿔나가고 넓게 포용하는 느티나무형 토털콘텐츠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4. 공기처럼 네트워크 속에 분산되어 흐름으로 존재하는 작품들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융복합예술, 멀티포엠아트, 하이퍼아트 시문학 작품이다 이제까지 살펴봤듯이 창작 무의식 늪지대를 이루면서 외장하드에 축적되는 디지털 정보들은, 컴퓨터를 통하여 패이스북, 유튜브, 클라우드, 스마트폰 등의 네트워크를 타고 흐른다. 이때 작품의 거처 역시 자유자재로 바꾸고 분산시켜가며 필요로 하는 어디로든 언제든 공기처럼 출몰하고 접근해 간다. 현재 28권 1300여 편의 작품으로까지 진행된 작품들과 그 창작 과정, 관련 자료들은 27개의 외장하드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다. 그 중에 중요한 작품과 자료들은 에 중복 보관되고 있다. 작품과 관련 일부 자료가 동영상 전문 사이트인 유튜브에 동영상으로 올라간다. 디지털북과 이미지, 웹문서 형태의 작품집들이 멀티포엠 서버에 축적되어서, 멀티포엠아트방송을 중심으로 서비스된다. 이를 기반으로 해서 링크로 하여 패이스북, 관련 홈들에 노출되고 있다.   오프라인으로는 종이책 작품집들, 관련 잡지 발표, CD, DVD 작품집 등이 있다. 그리고 미술전시 갤러리, 디지털아트축제, 멀티포엠아트축제, 문화예술관련 행사 등을 통해서 발표되고 보이고 있다 이렇게 외장하드, 컴퓨터, 클라우드, 패이스북, 유튜브, 각종 네트워크, 스마트폰, 그 외에 오프라인의 설치, 조형물, 전시물 등에 걸쳐서 디지털 정보 형태로 다양하게 분산되어 존재하면서도 서로 융합되어 ‘한강아리랑’이라는 하나의 덩어리, 나의 분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오늘날 작품의 한 존재 방식인 셈이다.   이 창작 디지털 정보들은 끊임없이 서로 뒤섞이고 융합되면서 또 다른 창작물들을 빚어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한 하나의 작품, 단일한 하나의 형태란 오히려 어색해 보인다. 한강아리랑 시리즈들은 별개의 아이템으로 있으면서도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또 서로를 잉태시키기도 한다.   첨단과학기술과 멀티미디어, 시, 예술 등 이질적인 분야를 융합시키는 멀티포엠아트와 같은 창작 방법을 오늘날 사회와 산업은 필요로 하고 있음을 주목 오늘날 사회와 산업은 첨단과학기술과 예술, 문학, 인문학 등의 서로 이질적인 분야들 간의 융복합을 통해서 인류의 삶을 바꿔놓는 획기적인 발전을 꾀하고 있다. ‘첨단과학기술 + 멀티미디어 + 시 + 예술=융복합예술= 멀티포엠아트’라는 특성을 가지고 시문학과 첨단과학기술, 미디어 등 이질적인 분야들을 구체적으로 융합시키는 멀티포엠아트의 창작 방법은 이 시대의 화두를 풀어내는 또 하나의 과정이 되고 있는 셈이다.   5. 융복합 멀티언어     멀티포엠아트 활동은 용복합 시대 주 언어인 ‘융복합 멀티언어’를 아름답고 섬세하게 가꾸는 일 시문학 본연의 역할은 그 시대 언어의 표현 영역을 확대하고 가꾸는 일이다. 스마트폰, 페이스북 등 첨단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시대에 멀티언어는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 속에 정착되는 언어의 한 형태이다. 상호작용, 비선형성, 다매체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하이퍼 융복합 멀티언어’는 지능형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함께 새롭게 개발되는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표현방법을 넓혀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에 적절한 표현방법, 소통방법을 제공하고 개척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인류 삶과의 공존, 인류 언어에 대한 적극적인 개척과 개발, 활용은 ‘하이퍼 멀티포엠아트’가 가지는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정보시대가 열린 것은 불과 십여 년 전이다. 그만큼 융복합 멀티언어의 영역은 아직 미답의 신대륙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미지의 땅에서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창작해 나가는 영역이 母語다.   母語는 물질계에서의 산소(O), 수소(H) 등의 기본 원소들에 비교될 수 있다. 정신계를 이루는 기본 원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어를 활용해서 다양한 이야기와 표현을 해내는 것이 작업 내용이다.   인류의 집단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원형적인 언어세계, 오늘날의 언어들로 분화되기 이전의 원형 상태의 언어를 모어라 칭했다. 그리고 그 모어들을 단어처럼 활용하고 결합시켜서 작업한 것이 바로 제2권 , 제9권 , 제22권 등이다.   6. 융복합 멀티포엠아트의 발표, 소통, 산업화 과정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창작 유통 감상이 이뤄진다 창작공간이 되고 있는 컴퓨터에는 프리미어, 포토샵, 워드, 플래시, 베가스, 드림위버, 쿨에디터 등의 디지털 저작도구들이 열려 있다. 동시에 창작 과정과 작품 일체를 축적시키는 외장하드가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인터넷으로는 패이스북, 유튜브, 구글 등이 연결되어 있어서, 완결된 작품이나 과정에 있는 작품, 아이디어, 자료들이 보이면서 관련 인들과 아이디어를 교환한다. 스마트폰은 항상 옆에 있어서 카카오톡 등으로 수시로 네트워크가 이뤄진다.   이와 같이 컴퓨터를 중심으로 외장하드, 스마트폰, 저작 프로그램들, 인터넷, SNS 등이 서로 연결된 상황에서 창작이 이뤄진다. 그리고 유통, 감상이 이뤄지는 것이다.   감상 면에서는 검색기능 강화, 대용량 터미널 활용, 네트워크, SNS 발달 등으로 어떤 작품이든 언제 어떤 곳에서든 바로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쌍방향 네트워크 상황이 주어지고 있다고 해서 창작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많은 변수들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을 경제적인 부담이나 기타 여러 제약 요소에서 많이 풀려나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이다.   디지털 정보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인접 장르들과 융합할 때, 공기처럼 세계 어디로든 어떤 형태로든 다가갈 수 있는 폭넓은 활동의 문이 열린다. 문자뿐만 아니라 영상, 음, 조형 설치물 등 다양한 형태로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융합 확장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융복합 네트워크에 자유자재로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시문학 활동 역시 언제 어디서든 어떤 매체로든 언어, 국경, 미디어 형태, 장소, 온오프라인 등의 구별과 제한을 초월하여 이뤄지는, 창작의 유비쿼터스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7. 멀티포엠아트 17년사는 디지털정보시대 매체발달 과정의 문학 예술적 기록     신예술장르 는 17년 전인 1996. 8. 1일 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한국이 낳은 융복합 시예술이다 1996년 멀티디지털시대의 신예술장르로서 ‘문자, 영상, 음, 설치 조형물 등 가능한 모든 매체를 함께 활용하여 융합 멀티언어로 창작하는 융복합 시예술’이라는 개념을 선언문을 통하여 뚜렷하게 정립하고 그 이후부터 2010년 까지 발표해오면서 작품 창작과 관련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융복합시대에 융복합 멀티언어로 표현하는 ‘멀티언어의 정수’ ‘멀티언어의 꽃’ ‘멀티언어로 빚어내는 시’라는 독자적이고 뚜렷한 영역을 개척해왔다. 2010년을 전후해서는 스마트폰, 클라우드, 패이스북, 유튜브 등의 네트워크가 융복합 환경을 본격적으로 이뤄가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2010. 10. 1일 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서 ‘첨단과학기술 + 멀티미디어시 + 시 + 예술=멀티포엠아트’라는 개념으로 확대하여, 현재 까지 발표해오면서 융복합예술로서의 멀티포엠아트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 17년 동안의 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영상시집, CD롬 시집, DVD시집, 母語 그림을 단어로 활용한 작품집, 시를 원작으로 한 토털콘텐츠 산업, 400여 미터의 대형 시화전, 야외 대형스크린으로 발표하는 시집, 디지털아트형 멀티포엠아트, 외장하드로 된 시집, 멀티포엠아트 영화, 유튜브로 발표하는 시집 등을 발표해오면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이러한 매체환경에 충실하게 적응하면서 이를 활용하여 창작해 왔다. 그로해서 현대의 매체환경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8. 융복합 멀티언어 창작에 있어서의 17년 동안의 창작 환경 변화 과정     현재는 지능형테크놀로지, 쌍방향, 다매체, 비선형, 소셜네트워크 등의 창작 환경이 이뤄지고 있다 멀티포엠아트 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발한 1996년 만해도 비디오, 티브이, 필름 등이 멀티 매체의 주를 이루던 시대였다. 2000년대를 전후한 디지털시대의 도래로 문자, 영상, 음, 이미지 등이 모두 디지털 정보화되고 저작도구 프로그램들이 컴퓨터 안으로 들어오면서 서로 융복합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하는 지능형테크놀로지가 등장하여 그야말로 모든 매체들을 한데로 융합시키고 있다. 패이스북과 같은 쌍방향 소셜커뮤니티 (SNS)의 발달, 유튜브와 같은 동영상 써비스의 발달 등이 작품 창작, 발표, 감상 모든 면에서 바로 이전 세대들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매체 환경이 하루하루 밀려오고 있다.   인간의 뇌를 스캔해 축적해 놓은 외장하드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창작과정에서 특징적인 첫째 현상은 역시 창작 무의식 늪지대 형성이다. 디지털 정보화된 창작 작품, 창작 과정, 관련 자료들이 외장하드에 17년여 동안 축적됨에 따라서 그 자체로 창작 무의식 늪지대, 콘텐츠 늪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외장하드, 인터넷, SNS 네트워크, 멀티저작 도구, 스마트폰 등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행해지는 창작 현장도 보여주고 있다. 그 안에 디지털정보들은 서로 뒤엉켜 융복합을 일으키면서 진화하고 번식해나간다. 작품은 그 늪 위로 피어나는 꽃들이라 할 수 있다.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면서 융복합예술로, 멀티포엠아트로, 하이퍼아트, 하이퍼시문학의 모습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작품은 공기다, 네트워크 속에 흐름으로 생존하는 디지털정보로 된 창작품들 두 번째 특성은 바로 ‘나의 작품은 공기다’라는 선언을 가능케 하는 현상이다. 발표, 감상 면에서 보면 검색기능 강화, 대용량 터미널, 인터넷 SNS 등의 발달로 언제 어디서든 작품 감상, 유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오프라인의 책, DVD, 조형설치물, 박물관, 테마파크, 콘텐츠 산업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작품들은 동시에 디지털 정보로 변신하고 진화하여 네트워크상에, 유튜브에, 패이스북에 스마트폰에 어디에든 분산되어 존재한다. 그러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네트워크 속에서 흐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특히 정보, 네트워크, 인터렉티브, 융복합 등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활용하는 창작 방식을 주목하고 있다. 과거 단일 작품을 착상에서 완결까지 창작하는 방식에서는 미리 주제와 구성 등을 정하고 창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흐름이라는 형태로 디지털정보들이 네트워크 상에 산재하면서, 이들이 모이고 융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구체화되어가는 융합 멀티언어를 활용한 창작 방식에서는 주제나 구성 등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이뤄지는 속에서 나중에 결정되고 구체화 되어가게 된다.   무정형, 애매한 형태로 모티브가 생기고 이것이 진화하고 번식해가는 과정에서 작품의 주제, 표현방법, 발표, 감상 시스템 등도 그 시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변화 과정들은 쌍방향, 다매체, 비선형을 핵심으로 하는 하이퍼아트, 하이퍼시의 특성을 여러 측면에서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강아리랑’에서 각 권들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들 중에 고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외장하드 속의 콘텐츠 늪은 바로 뒤엉켜 있는 한 덩어리로서의 리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융합 멀티언어를 활용한 창작은 과학, 패션, 인문학 등의 이질적인 분야들과 더욱 폭넓게 융복합을 일으키면서 또 다른 미지의 창작 방법과 형태, 작품을 낳게 될 것이다.   9. 멀티포엠아트는 융합 멀티언어의 詩魂     하이퍼 융복합 시대 시 예술의 방향 지능형 테크놀로지로 불리는 스마트폰은 인체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지적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등을 확대시켜 주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인터넷, SNS 네트워크, 티브이 등에 접속한 채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메모, 클릭, 검색 등의 사소한 행위들까지 구글, 애플 등의 빅테이터에 저장되고 분석 처리되어 다양한 용도에 데이터로 활용된다.   이와 같은 정보와 지능형 테크놀로지는 이미 우리의 공기와 마찬가지가 되었다. 정보, 지능형 테크놀로지, 빅데이터, 클라우드, 인터렉티브, 융복합, 로봇, 사이보그, 생명공학, 줄기세포, 뇌스캔, 나노 등은 요즘 가장 많이 우리의 주변을 떠도는 말들이고 실제로 우리의 삶을 이뤄가는 핵심적인 요소들이 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표현해내는 창작 방법, 형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 찾아내고 제대로 표현해 내는 것이 우리 창작자들의 작업이리라.   멀티포엠아트는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 운동 작품 역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지능형 청소기 등과 같이 실제로 정보나 지능형 테크놀로지를 포함하고 있는 창작품, 이런 것들을 활용하고 있는 창작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조형 면에서 보면 돌덩이, 석고 덩어리로서의 조각에서 더 나아가 컴퓨터, 로봇, 스마트폰과 같은 형태의 정보 유기체로서의 작품을 예로 들 수 있다. 음악, 시각예술에 있어서도 감각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사고를 이끌어내는 정신의 꽃으로서의 작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매체 활용 면에서도 단일 매체에서 더 나아가 융복합예술, 인터렉티브예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현실을 이루고 있는 지능형테크놀로지를 활용하고 반영할 때, 우리의 삶과 정신을 이끌어가는 작품을 빚어낼 수 있으리라 본다. 하이퍼 멀티포엠아트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지능형 테크놀로지 환경을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디지털정보,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생명공학 등의 우리의 생활환경을 반영하고 이를 제대로 표현해내는 역할이 필요하다. 하이퍼 시예술 운동은 이러한 생활환경, 지능형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융복합, 첨단과학 환경 속에서 태어난 시예술운동이다. 이러한 여건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활용하고 이를 시예술로 표현해냄으로서 정신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10. 작품에 완결이란 없다. 계속 진화하고 번식한다     융합 멀티언어를 활용하여 창작하는 멀티포엠아트라는 영역에서 태어나 17년이라는 독자적인 역사성을 가지면서 아날로그로 비디오테이프에 담기기도 하고, 디지털 정보로 CD-ROM, DVD 등에 담겨 발표되기도 하고, 극장에서 필름으로 상영되기도 했던 작품들은 이제 인터넷 네트워크 환경 속에 흐름으로서 존재 방식을 변신시키고 있다. 유튜브, 패이스북, 스마트폰, 구글 등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흐르면서 어디로든 스며들고 함께 호흡하면서 스스로를 변신시키고 진화하며 번식해 나간다.   현재 28권 1300여 편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의 존재방식이다. 이라는 전체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작품들은 하나의 촉수에 해당된다. 그 작품들은 저마다 제 촉수를 세상으로 뻗어가면서 계속 분열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이라는 전체성은 계속해서 확장된다.   융복합 멀티언어를 활용하여 창작하는 장르로 태어난 멀티포엠아트 시문학 운동이, IT 강국으로 지능형 테크놀로지인 스마트폰, 인터넷 등의 활용 면에서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앞서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선도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로벌 무대로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잠재력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가슴 벅찬 일이다.   주) 하이퍼 융복합 시대를 맞이하여, 원고 개재에 있어서도 다매체를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가고 있습니다. 본 원고에 나오는 28권 시리즈 1300여 편의 작품은 인터넷 상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본 원고의 과 ‘자세한 관련 이미지들이 함께 하는 원고’를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장경기 1992년 로 등단. 1996. 8. 1일 을 발표한 이후로 시인, 멀티포엠아티스트로 활동. 현재 제 10 선언문까지 발표해오면서 멀티포엠아트 연작 작품집 시리즈로 , , 등 28권 1300여 편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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