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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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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들뢰즈 핵심철학 리좀[스크랩] 댓글:  조회:2413  추천:0  2018-02-14
들뢰즈 핵심철학 리좀   제1강 텍스트와 층화 I   『천의 고원』은 개념적 꼴라주이다. 상이한 담론공간에서 형성된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개념들이 모여들어 장대 하고 현란한 지적 꼴라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꼴라주 안에서 각 개념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개념들과 ‘접속’됨으로써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일방향적으로 즉 연역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서 비추어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 안에는 다른 모든 개념들이 접혀 있다. 각 개념들은 각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다른 부분들은 숨긴다.   각 개념들은 『천의 고원』 전체를 ‘표현’한다. 개념들은 서로를 입체적으로 참조하며, 따라서 각 개념들의 의미는 책을 전부 읽었을 때에만 온전히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순환논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없다. 전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에. 카프카의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재독(再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독, 삼독, …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미증유의 새로운 사유 지평이 눈앞에서 활짝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계는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 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생성되어 가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 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것, 고착화된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서론’에 해당하며, 서론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서론 역시 (『천의 고원』 자체를 포함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리좀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의 책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리좀-책 개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리좀’ 개념의 포괄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은 리좀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서 작동하고 있다.  리좀의 일차적인 의미가 생성하는 관계, 차이 자체의 생성에 있다면, 그러한 사유를 통해 (고중세적 본질주의를 포함해) 근대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는데 있다면, 리좀을 이야기하는 주체들, 『천의 고원』의 주체들=저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떠올린다면, 저자들이 자기 언급적 논의로부터, 저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논의는 ‘저자의 죽음’, 그러나 사실상 복수적 저자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둘이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각이 여럿이었기에, 그것에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의 이름들을 남겨놓았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으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을, 또는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도록.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의 한 측면이다. 주체의 죽음은 존재론/인식론의 맥락 이전에 윤리학적 맥락에서 등장 했다. ‘선험적 주체’(칸트) 개념은 세계를, 적어도 현상세계를 인간(의 의식)의 종합 및 구성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더 정확하게는 인식질료로 만들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런 식의 정립에 입각해 유럽적 주체는 비유럽 지역들을 그 눈길 아래에서 대상화/객체화했다. 그래서 선험적 주체의 죽음은 유럽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죽음이다.   (따라서 탈주체주의 사유가 처음으로 사상사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를, 성인 주체는 아동 주체를, …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주체에게서 지배와 정복이 생겨난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죽음은 근대적/선험적 주체와 그 결과들에 대한 반성을 실마리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주체의 죽음은 주-객 분리와 ‘主體(Sujet)’=‘人間(Homme)’의 지배라는 근대 철학의 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저자-임은 주체-임의 한 방식이고, 그래서 주체의 죽음은 저자의 죽음도 함축한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변형을 뜻한다. 큰 주체의 죽음은 동시에 작은 주체들의 탄생이기도 하다. 저자의 죽음은 복수-저자 들의 탄생이다. “나”로부터의 탈주. “나”라고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의 탈주. “나”로부터의 탈주는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에서 사유하기, 즉 의식적/인칭적 주체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비인칭적 개체화들, 나아가 현실적 개체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비개체적 특이성들의 장에서 사유하기이다.   “비인칭적 개체화들,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세계, 이 세계는 누군가(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일상적 진부함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얼굴이자 또한 재현/표상에서 탈주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도래시키는 심층(深層)과 층-허(層-虛)의 참된 본성이기도 한 조우(遭遇)들과 공명(共鳴)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곧 ‘만인(萬人)-되기’의 세계이다. 『천의 고원』에서 우리는 개념들의 꼴라주를 가로지르며 만인이 되고, 또 조우들=만남들과 공명들=함께-울림들을 만끽한다. 모든 이들의 ‘책’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물질들의 이런 노동, 그것들의 관계들이 띠는 외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신을 꾸며내었듯이 말이다.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에도 분절화(分節化)의 선들과 절편성(切片性)의 선들, 층(層)들, 영토성(領土性)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탈주선(脫走線)들과 탈영토화(脫領土化) · 탈층화(脫層化)의 운동들이 있다.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 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새로운 윤리에 대면하고 있다: 책의 내부성을 극복하라. 현대적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과제를 우리는 들뢰즈와 데리다에게서 공히 발견할 수 있다.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 (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 텍스트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영혼 앞에 현존하는 의미, 진리의 담지자, 저자의 영혼이 외화(外化)된 표지, 영혼의 시뮬라크르로서의 책, 데리다는 책의 이런 개념의 외부에서 “담론적인 것이 비담론적인 것에 연계되고, 언어적 ‘기층(基層)’이 […] 전언어적 ‘기층’과 서로 섞이는” 짜기(texere)의 차원, 텍스트의 차원을 발견해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마치 복잡한 지질학적 운동의 저자=창조주로서 선량한 신=조물주를 상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이 때 모든 것은 ‘신의 심판’, ‘신의 판단’이 된다)   책은 저자의 영혼이 외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외부성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외부성 들로서 “분절화의 선들과 절편성의 선들, 층들, 영토성들”, 그리고 “탈주선들과 탈영토화 · 탈층화의 운동들”을 언급 한다. 책은 구조의 측면에서 여러 선들, 층들, 영토(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측면 에서 탈주선, 탈영토화, 탈층화의 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책 개념을 논하는 서론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주요 개념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우선 이 개념들을 정리해 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e)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articulation’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層化=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구분되어 존재 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 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年齡層)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다질적(多質的)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은 ‘탈기관(脫器管)’ 상태를 향하게 되고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 氣의 흐름이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脫層化)’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물체’에 해당 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제3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될 때, 즉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코드화) 존재할 때 ‘영토성’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됨으로써,   즉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으며,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고 해야 한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영토화도 탈영토화 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   * 탈코드화 ― 영토화는 코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계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한 어떤 코드가 작동할 때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도시의 ‘플랜’이라는 코드화가 작동하면 도시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그 코드에 맞추어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계들의 본질은 욕망이기에(‘기계적 배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이다), 애초에 영토화는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 위에 불안하게 형성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교통질서라는 코드가 비현실적으로 무리하게 작동할 때 영토성은 와해되고 갖가지 탈영토화 행태들이 등장 하게 되며, 기계적 배치를 누를 힘을 상실한 코드는 탈코드화할 수밖에 없다.   법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뜻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서 기계적 배치와 (탈)영토성이 일차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관계를 장기와 바둑의 비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개념 규정들을 토대로 배치와 다양체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배치(agencement)   ― 사물들=‘기계들’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형성하며, 서로 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배치(配置)’(또는 다양체, 또는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단일한 하나의 ‘기계’)도 아니며, 또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의 영토성)과 언표들(의 코드)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 층화의 방향과 탈층화의 방향을 오가는 ―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그렇다고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기, 듣기, 사유하기, 대화하기, … 등의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강의’라는 이 배치는 다른 시간에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또 장소를 바꾸어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또 다른 기계들 및 코드들을 통해서 반복되기도 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그리고 경기 규칙들을 비롯한 여러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야구 경기’라는 배치는 우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에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 들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기계들과 코드들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되기도 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 하는 바로 이것들이 ‘배치’이다.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의미이고 사유의 기쁨이 아닌가.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 디아그람(diagramme)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디아그람’이라 부른다. 이 디아그람은 이질적인 두 배치를 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제 3의 차원이다.   여기에서 복잡하다 함은 그것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배치와 배치 사이의 관계, 더구나 (성격을 달리 하는) 기계 차원과 언표 차원의 관계임을 뜻하며, 역동적이라 함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고 또 (존속하다가) 반복되는 존재임을 뜻한다(야구 경기가 열릴 때 디아그람이 작동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며, 경기가 열릴 때면 다시 나타나 반복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 갈 수도 있다   ― 예컨대 야구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이 말을 ‘도표’나 영어식 발음인 ‘다이어그램’ 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치 못한, 아니 차라리 정반대 의미로의 번역이다. 디아-그람은 프로-그람과 대조된다. ‘pro’의 목적론적 뉘앙스와 ‘dia’의 생성론적 뉘앙스를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 그리고 디아그람 개념은 푸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를 디아그람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기계적 배치는 ‘비담론적[신체적] 실천’이고 언표적 배치는 ‘담론적 실천’이다. 푸코는 병원, 수용소, 법원, 감옥, …을 비롯한 기계적 배치들과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형법학, 범죄학…을 비롯한 언표적 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그람들을 그 다원성과 역사성에 입각해 빼어나게 분석해 주었다.   인용된 구절   ―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과 ‘추상기계’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   (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 ― 분절선 들과 절편선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일탈해 가는 탈주선들 ― 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은 배치 개념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배치라는 개념이 비교적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라면, 다양체 개념은 길고 복잡한 의미맥락을 가진 난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길다”고 한 것은 이 개념이 가우스-리만-베르그송-구조주의 등을 거치면서 제련(製鍊)된 개념임을 뜻하며, “복잡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자연철학적-윤리학/정치학적-미학적…인 여러 맥락을 동시에 압축하고 있는 개념임을 뜻한다. 일단 현재의 맥락에서만 잠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여럿은 주로 어떤 주체/주어에 귀속된다. “be attributed to”라는 표현은 최소한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서술. 언어적 측면에서 술어는 주어에 서술된다.(attribute=predicate) 2) 귀속. “맛있다”가 ‘자장면’에 붙을 때(서술될 때), “맛있다”라는 성질은 ‘자장면’이라는 실체에 귀속된다(아리스토              텔레스가 표현했듯이 “부대한다”). 3) 표현. 귀속된/서술된 것은 귀속/서술의 대상을 표현한다. “맛있다”는 ‘자장면’을 표현한다.   여럿은 이런 식의 용법으로, 즉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되어 이해될 때 수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 날 온 사람들은 열명이다.” 열명이라는 복수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된 양적인 여럿이자,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성이다. 이렇게 여럿=다자는 귀속됨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이해된다.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다자”, 즉 일자의 쌍으로서의 다자(일자의 나눔을 통해 형성되고, 다시 합해짐으로써 일자 에로 歸一하는 그런 다자)가 아니라 순수 다자=여럿으로서의 여럿, 그리고 “~은 여럿이다”에서처럼 무엇인가에 귀속되는 여럿이 아니라 “여럿은 ~이다/한다”에서처럼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것은 ‘무엇’, 어떤 “것”, 어떤 실체, 주체, 주어이다. 그렇다면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어떤 집합체를 뜻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집합은, 그것의 요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의” 집합이며 여럿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이다.   여럿이 완전히 봉합될 때, 하나의 통일성, 동일성을 가진 무엇일 때 그것은 여럿이 아니다. 여럿은 어떤 형태로든 불연속, 열림, (그리고 질적 측면들을 감안할 때) 이질성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라 한 것은 어떤 하나(개체이든 집합체이든)가 아닌 진정한 여럿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주어로서, 어떤 ‘실체’ ― 기존의 실체 개념과는 판이한 어떤 실체 ― 로서,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실사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전통적인 실체 개념으로 포착되기 힘든 어떤 것, 주어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여럿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배치와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배치와 다양체의 이 성격을 간파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천의 고원』의 문을 열게 된다.   *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은 기계들이다. 또 예술의 기법, ‘사조’, 구성방식, 전시의 관례… 등은 코드들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 기법… 등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 말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술’은 이 모든 것의 집합인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이란 바로 하나의 배치이다. 예술가, 예술작품, …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 그것은 바로 배치인 것이다. 제5강 탈기관체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 ‘절편성’이다. 분절화는 잘라-붙임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책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를 계기로 배치/다양체 개념을 잠정적으로나마 규정해 보았다. 다양체는 앞으로도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배치는 극히 상식적인 무엇이다. 야구경기, 전시, 전쟁, 강의, 결혼식, 선거, 식사, 시위, … 이 모든 것, 바로 우리가 삶에서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배치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보다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예컨대 ‘되기’ 개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이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와 혼효면(plan de consistance) ― 이제 논의의 물꼬를 돌려 보자.   지금까지 배치가 무엇인지 논했다. 이제 배치가 변해 가는 방향, 즉 영토화/탈영토화, 코드화/탈코드화, 층화/탈층화의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 라는 가치론적 논의를 언급할 때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가장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지평에서 논하자. 이 경우 탈기관체 개념과 혼효면 개념이 핵심적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 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 ― 방향성 ― 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 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 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 층들과 탈기관체의 구분을 비롯해 『천의 고원』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원적 구분을 기존의 이분법 ― 대립(opposition) ― 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이다.   예컨대 다음을 참조. “예를 들어 『천의 고원』이라 해도 형식적으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항대립을 사용합니다. 유목성과 정주성, 무리와 군중, 분자적과 몰적, 마이너리트와 머조리티,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평활(平滑)공간과 조리(條理)공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 제각각 한쪽 편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을 전도하는 것은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속적인 것이 이항대립 내의 근저에 놓여지는 형태로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362쪽)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분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아니다. 즉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차이와 반복』에서 논의된 ‘유기적 재현’의 구도), 하나=전체의 양분으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이며, 예컨대 하나의 배치는 그 것보다 더 유목적인 것에 비해서 더 정주적인 것이고 더 정주적인 것에 비해서는 유목적이다.   가라타니가 들뢰즈/가타리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사고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구절은 이미 헤겔-맑스의 관계를 놓고서 알튀세 시대에 논의된 내용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이 단계를 훨씬 넘어 그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담론사의 시계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즉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즉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그래서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는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는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corps sans organes’ 개념을 가져왔다.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했다. 신의 심판은 신의 판단이다. 예컨대 신은 “허파는 방광 위에 있다”고 판단/심판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몸에서 허파는 방광 위에 있게 되었다.   神/造物主는 세계의 ‘소당연(所當然)’의 근거이다. 그래서 현실의 소당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심판/판단을 끝장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기관체의 추구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적 맥락보다는 세계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분절체계, 부분들=기관들의 분절체계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대학은 기관들의 유기적 집합체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 ‘인문대학’, ‘자연대학’, … 등을 선택해야 하고, ‘물리학과’, ‘생물학과’, …를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광학 전공’, ‘역학 전공’, … 등을 선택해야 한다. 허파냐 심장, 비장, …이냐, 오른쪽 허파냐 왼쪽 허파냐, 어느 허파꽈리냐, … 프락탈 구조처럼 끝없이 기관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세분화된 기관들에까지 이어진다.   세상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체이고, 우리는 늘 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름’을 할당받아야 한다. 어디에 가나 기관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선택 당한다.(“너는 법과대학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해!”) 사실상 우리는 이미 자연에 의해 선택 당해서 이 세계에 ‘인간’이라는 이 종(種)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원숭이, 호랑이, 족제비, …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도 아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신의 심판’이다.   그래서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것은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즉 주어진 존재방식, 주어진 존재형식들에 저항 하는 것, 새로운 존재방식, 존재형식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인식적 맥락에서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으로, “~인가?”에서 “~이 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존재론은 저항의 담론, 투쟁의 담론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 ‘현실적인 것(l'actuel)’은 개체들과 성질들(“S is P”!), 그리고 사회적 분절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인 것을 찾는다. 만일 존재론의 핵심이 현실의 가능 근거를 찾아 그 근거로부터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면, 이들의 사유는 ‘잠재성의 사유’ 또는 ‘잠재적인 것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재성은 곧 특이성들과 강도들 ― “전개체적-비인칭적 특이성들과 비외연적인 강도들” ― 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4장과 5장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기관들의 분절체계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분절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은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친다. 때문에 현실의 분절체계가 억압을 가져오는 한에서 새로운 삶에로의 운동은 항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탈기관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탈기관체는 기관들에가 아니라 유기체라 불리는 이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모든 형태의 분절체계들을 보듬고 있는, 즉 그 위에서 이런/저런 분절체계가 성립하는(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이런/저런 분절체계들로 분절되는) 바탕을 생각하게 되며, 이 바탕은 현실적인 것 아래의 잠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탈기관체는 잠재성 차원을 개념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강도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산출된 강도들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강도적인(intense), 형식화되지 않은, 층화되지 않은, 강도-높은(intensive) 모체[코라], 강도=0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기체의 외연(外延)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층들의 형성 이전의 알[卵]”이다.   * 여기에서 0[零]은 비움, 소멸의 의미로서의 제로가 아니라 차라리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서의 0, 즉 출발점 으로서의 0이다. 바로 뒤에 나오듯이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수한 양태들로 표현되는 출발점 ― “미분화된”이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한 양태가 아니라 모든 양태들을 포용하고 있는 출발점 ― 이라는 점에서 강도=0이다.   * 이 때의 알=卵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잠재성, 탈기관체의 탁월한 예가 수정란이라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물론’은 편협한 유물론이 아니라 차라리 氣 일원론인 것이다. 그러나 氣에 무수한 종류들이 있듯이, 탈기관체에도 무수한 종류들이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 일원론으로 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일의성’ 문제) 탈기관체가 ‘극한’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기계적 배치가 코드에 의해 영토화되어 있는 현실성 아래에서 잠재성을 들여다보며, 그 충만한 氣로 배치를 탈영토화해 나간다. 그래서 탈기관체는 ‘욕망의 내재장(內在場)’이며 “욕망에 고유한 혼효면”이다.   탈기관체는 어떤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탈(脫)’의 운동을 통해서 혼효면 쪽으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더 고착화되어 층화의 [수많은 층위들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층화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신의 심판/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며, 혼효면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실험’으로 열린 길을 걷게 된다.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 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 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 (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 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 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 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 (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 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 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 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 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 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 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 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 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 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 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 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 된다.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 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 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 (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 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끝- 원문 출처 한국문화의 원류카페에서 퍼옴  
259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 댓글:  조회:1809  추천:0  2018-02-13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       들뢰즈는 자신의 사유를 강화하기 위해 많은 개념어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유를 따라잡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또한 분열증적인 글쓰기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상당히 난삽하기도 하다. 그의 글쓰기는 이성에 의해 구조화되고 질서화된 의식이 표출되는 논리적인 문체적 특징을 벗어난다. 이는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사유와 감각의 분열을 일으키는 인간의 원자적 특성들을 표현하는 현대시와 유사한 점이 있다.   현대시라는 말의 이면에는 기존에 것에 대한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시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논리적인 의식의 세계를 표현하는 대신 인간의 순수하고 원초적이고 광기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비춰내려고 한다. 시인은 이런 무의식을 자신의 작품에 드러낸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시인의 욕망의 언어는 무의식의 시학일 수 있다. 하지만 들뢰즈가 진단하는 글쓰기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발현과는 다르다. 들뢰즈에게 글쓰기는 무의식과 의식의 교차로서 체험한 경험의 재료에 표현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완전한, 언제나 형성적이기에 중간에 있는, 그리고 어떤 체험 가능한 혹은 체험한 경험의 재료를 넘어서는 생성 혹은 되기의 문제가 된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아이가 된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에서 시인은 프로이트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는 여성과 아이, 혹은 동물이 되고,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시인은 국가철학적인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아이와 동물이 된다.   시인은 또한 여행가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지도를 그린다. 상상 속의 여행지든 실제적인 여행지든 그곳을 통과하면서 시인은 자연과 삶과 합일을 이루는 새로운 생성을 활성화하면서 지도를 그린다. 이런 여정은 들뢰즈가 말하는 지도의 의미를 갖는다. 지도는 단순히 길의 형상을 그대로 그린 것도 아니고, 지표면의 형상을 정확히 재현한 것도 아니다. 시인은 지도그리기에서 길의 형상과 지표면의 형상을 정확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통념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즉 체험 가능한 혹은 체험한 것들을 그대로 나타내는 재현의 권력에서 탈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재현은 창조적 가능성을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지도그리기는 창조적 가능성이 잠재된 생산적인 글쓰기여야 하고, 시인은 전형화된 형식과 표현에 탈주선을 그려야 한다. 이는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이 실재화되는 경우이다.   글쓰기의 창조적인 탈주선은 우리의 지도를 구성하기도 하고, 시 창작에서 시인이 타자가 되듯이 자신을 구성하게 한다. 시인의 글쓰기는 다양한 출입구가 그려진 지도이자 리좀이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나면서, 수목적인 나무와 달리 자신의 어떤 지점과 다른 지점을 연결 접속한다. 리좀은 단어와 단어, 어구와 어구, 행과 행을 연결하면서 아주 상이한 기호체제들뿐만 아니라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지도이자 리좀적인 글쓰기는 전통적인 문체의 접근과는 다르다. 들뢰즈는 문체를 언어의 연속적인 변이 과정으로 접근한다. 그에게 있어 문체는 변이 속에 언어를 배치하는 과정이고, 변조이며, 통사론의 질료이다. 언어의 연속적인 변이의 과정 속에서 문체는 개인적인 심리학적 창조물이 아니라 언표행위의 배치이다. 들뢰즈가 문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바는 보편적인 형식의 언어 속에서 문체라는 형식의 변이선을 가동함으로써 새로운 표현 형식, 새로운 언어들을 창안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미지와 리듬을 강조하는 시의 언어이자 시의 문체가 아니겠는가!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에서 김혜영은 여성이라는 언표행위의 배치 속에서 금기화된 성담론을 여성적 언어로 전통적이고 남성적인 성담론을 해체하고 희화화한다. 더불어《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황병승은 선형적인 서사성을 해체하여 들뢰즈의 분열적인 글쓰기와 같은 리좀적인 서사구조를 통해 제도적인 통사적/의미적 틀을 무너뜨린다. 이 작품들은 이런 면에서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을 구체화한다고 볼 수 있다.     1) 프로이트 욕망, 삐딱하게 보기     프로이트와 들뢰즈의 중첩을 통한 분석은 새로운 이야기 꾸미기가 될 수 있다. 들뢰즈의 프로이트 욕망에 대한 비판은, 모든 욕망이 본질적으로 성욕에만 집중된다는 것, 모든 욕망이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 아버지는 법과 질서, 문화, 문명을 대변하는 자이고, 아버지에 의한 일차적인 욕망의 억압은 하나의 상징계로서 문명화된 모든 인간적 질서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과 같이 세 가지로 압축된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성욕, 어머니에 대한 욕망, 절대적인 상징적 아버지에 집중한다. “당신의 숨소리 날 삼켜보실래요?”(“동백섬”), “허벅지의 3분의 2지점에서 가로선이 잘리고 두 팔은 다 드러나지요 뭉클하게 처진 젖가슴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배치되어 있네요”(“토르소”), “야릇하게 꼬물거리는 여배우 입술을 쳐다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슬그머니 내 허벅지에 손을 갖다 대었어”(“오랜만에 쓰는 근육들”), “전쟁이 시작되었네 사춘기 꼬마가 침대에 두 손이 묶여 있네 수음하는 아이의 떨리는 눈동자 목사 아빠가 저녁 식가를 금지하네 하얗게 질려가는 아이들 [중략] 아빠, 귀걸이가 필요하지 않아요 난 엄마가 아니예요”(“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 다락방에 앉은 바둑판 엄마의 잠옷 밑으로 손을 넣는 사자”(“별자리”), “눈이 파란 꼬마가 누나에게 묻네 사랑하면 물어뜯는 거야? 목덜미를 깨무는 아빠는 죽지 않는 거지?”(“프로이트를 읽는 오전”), “아버지는 얼룩, 보이지 않는 시선”(“별자리”). 이 시들을 프로이트적으로 분석하면 욕망과 무의식으로 수렴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본래적으로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억압된 욕망은 무의식 깊은 곳에 남는다. 깊숙한 무의식에 처소하는 욕망은 꿈이나 환상 등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재현되거나, 문학이나 예술에서처럼 암묵적 혹은 암시적 형태로 재현되거나, 법에서 금기하는 부정적 형태로 나타난다.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게 된 욕망은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드러낼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다양한 표상들로 재현된다. 이런 결과로 삶은 무의식이 펼쳐지는 하나의 극장이 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의 작품도 무의식의 극장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이 하나의 절대적 상징계이기에 억압된 욕망의 무의식이 하얀 종이 위에서 춤을 춘다는 대응은 얼마나 작위적인 등가식인가?   프로이트의 이러한 정신분석은 들뢰즈가 제기하는 네 가지 기호체제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네 가지 기호체제 중에서 전제적인 기표적 기호체제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에서 남근(혹은 전제 군주)이라는 기표는 다른 기표들이 잠정적이나마 기의를 갖도록 고정시키는 기표가 되어 특권적인 중심의 역할을 한다. 이런 식으로 들뢰즈는 기표적인 기호체제의 중심에 전제 군주의 기표가 있다고 한다. 그 기표는 전제 군주처럼 모든 기표의 자리를 할당하고 그것의 의미를 주거나 박탈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기표는 전제적 기표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표에 수렴될 뿐이고, 그 무서운 권력의 중심점에 아버지가 현존한다. 아버지는 푸코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시선이자 권력이다. 그의 시선은 푸코의 일망 감시체제와 마찬가지로 규율과 훈육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낸다. 그는 주체를 구성하는 대타자이자 주체를 공포에 떨게 하는 절대적이고 폭군적인 초자아다. 다양한 의미적 접근은 거부되고 오직 하나의 의미, 다시 말해 기표는 오직 본질적으로 하나의 중심적인 기표, 특권적인 기표로 환원된다. 아버지의 기표로. 이러한 기표적인 기호체제를 들뢰즈는 편집증적인 체제라고도 하고, 전제 군주적인 체제라고도 한다.   황병승은 “아빠”에서 이러한 중심적인 기표인 아버지의 기표를 탈영토화한다. “[중략] 아빠 하고 부르면/ 우선 배가 고프고/ 아빠하고 부르면/ 아빠는 없고/ 아빠라는 믿음으로/ 개 돼지를 잡아먹는/ 먼 나라의 아빠 숭배자들처럼/ 먹어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아빠를 … [중략] ”(《트랙과 들판의 별》 77). 아버지의 의미가 위계적인 상징적 질서의 중심점에 있다면, 아빠의 의미는 그 질서를 탈영토하여 친밀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친밀한 아빠조차도 “아빠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채 아버지의 상징성을 흔적으로 간직한다. 이중적인 의미로서 “아빠”는 절대적인 폭군과 동일한 아버지라기보다는 분열된 주체의 다양한 양태를 대변하는 표상일 뿐이다. 이렇게 시인은 중심적인 기표인 아버지를 탈주하여 다채로운 분열적 기표들을 생산한다. 이러한 분열적인 주체로의 탈주는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개념을 암시한다.   들뢰즈의 욕망은 존재자체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을 갈구하지만, 그 대상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프로이트의 욕망이 아니다. 그의 욕망은 다양한 접속을 통해 신체가 작동하는 것이다. 신체와의 접속을 통해 욕망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성적 욕망으로만 치환되지 않는다. 접속하는 항(혹은 상황)이 달라지면 다양한 욕망이 생산된다. 황병승의 “멀고 춥고 무섭다”에서 분열된 주체인 음악가 ㄱ, 음악가 ㅁ, 음악가 ㅂ 처럼. 들뢰즈는 욕망과 기계를 하나로 연결한다. 절단하고 접속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 기계이다. 가령 입-기계는 절단하고 접속되는 방식에 따라 말하는 기계, 먹는 기계, 사랑하는 기계가 된다. 다른 접속에서 다른 욕망이 생산된다. 욕망과 기계가 혼합된 욕망하는 기계는 무한한 잠재적 공간 속에서 접속에 따라 긍정적인(혹은 부정적인)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그것이 무엇과 접속하는 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며 분열된다. 그 결과 기계화된 욕망의 본성이 이웃항에 달라지기도 한다. 즉 어떤 기계를 둘러싼 관계가 달라짐에 따라 욕망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의 욕망은 고정된 어떤 본성을 갖지 않고, 관계에 따라, 접속되는 이웃항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 김혜영이 프로이트를 활용해 법과 무의식의 해방을 욕망하듯, 황병승이 분열된 주체를 통해 동일화된 주체의 해방을 욕망하듯, 욕망은 그 배치에 따라 다양하게 꿈틀거리며 분열된다.     2) 기호이야기     들뢰즈는 기호체제를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 탈기표적인 정염적 체제, 전기표적인 원시적 체제, 반기표적인 유목적 체제와 같이 네 가지로 분류한다. 프로이트의 욕망에 근거한 남근적 혹은 전제적 기표는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이고, 이에 대조적인 기호체제가 탈기표적인 정염적 체제이다.   기표적인 체제는 전제적인 특징을 갖는다. 기표들이 중심적인 기표로 환원하는 것은 전제 군주 체제에서 쉽게 드러난다. 전제 군주의 말 혹은 기호는 신하와 사제들에 의해 무한히 해석된다. 하지만 전제 군주는 그 해석들을 하나의 의미로 통합할 수 있다. 전제 군주는 의미화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이러한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는 기표가 기의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갖는다. 비록 기표가 무한히 미끄러지더라도 전제 군주의 생각에 부합되지 않는 기의는 소용이 없다. 오직 전제 군주의 말 혹은 기호가 법이자 신의 계시가 된다.   탈기표적인 체제는 기표적인 의미화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체계다. 이는 기표적인 권력에 익숙하게 길들어져서, 그 권력에 복종하던 것을 중단하기에 배신의 체제라고 불린다. 탈기표적인 체제는 탈주선에 의해 시작되는 체제이고, 지배적인 의미작용과 확립된 질서 세계를 거부하고 배신하는 체제이다. 비록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 관계를 탈영토화하지만, 자기-동일화적인 주체화 과정에서 기호들은 해석되고 재영토화된다. 기독교의 교리를 자기 본의로 해석하여 사리사욕에 열중하는 사람들과 같이, 탈기표적인 체제에서는 자기 주체적으로 기호를 해석하기에 다양한 해석이 생산되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 두 기호체제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혼합된다. 오직 기표-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의미만을 추구할 수 없거니와 기표의 계속적인 미끄러짐을 통해 무한한 의미작용 또한 가능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끊임없이 간섭하고, 서로에 대해 되작용하고, 서로를 각자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런 속성은 김혜영의 “기호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당신이란 상상 속의 기호를 혼자/ 사랑했지요. [중략] 만 년이 지난 뒤/ 무의식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 당신이란/ 기호가 꽃으로 피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당신이 흡혈귀처럼 내 피를 빨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십오 년이 지난 가을이었죠./ 당신만 피를 빠는 줄 알았는데 난 당신의/ 다리에 붙어서 이(邇)처럼 당신의 살갗에/ 혀를 갖다 대곤 했죠. 당신이란 기호는/ 중세의 흑기사처럼 남도를 따라 가다가/ 해가 떠오르는 새벽에 입맞춤을 했지요./ 당신이란 기호를 기다리며 붉은 와인을/ 식탁에 놓고 멍하니 바라보곤 했지요./ 밤마다 낡은 옷장 문을 열고 내려와/ 이부자리에 나란히 눕는 당신이란 기호는/ 거대한 박쥐가 되어 천장으로 올라갔지요./ [중략] 얄밉기도/ 하지만 당신이란 기호가 오래 오래 내 곁에/ 머물기를 바라지요. 혼자 찬밥을 먹는/ 중세의 겨울 저녁을 견딜 수 없을 거야./ 당신이란 기호를 그리워하는 또 하나의 기호.”(“기호이야기”)   시 속에서 “당신”은 하나의 기호이다. 시인이 “당신이라는 기호”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라는 기호는 시인이 체험하거나 상상한 수많은 경험들과 사유들이 농축되어 있기에, “당신”은 기표적인 의미화로 해독될 수 없다. 여기서 “당신”은 탈기표적인 체제의 흐름을 갖는다. 즉 “당신”은 기표 차원보다는 시인의 상상과 사유 속에서 형성되어 있는 기의 차원의 기호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이것을 기호이야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기호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기호이야기라고 한 것은 “당신”의 의미가 단순한 사랑 이야기의 연인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적인 속성을 가짐을 의미한다. 또한 시인이 그리워하는 “당신”은 “꽃”, “흡혈귀”, “이”, “흑기사”, “박쥐” 등의 질료로 표상된다. 이러한 질료들을 통해 “당신”은 미움과 애정이 점철되기도 하고 사랑이 가득차기고 하면서 강밀한 주파수와 공명을 주는 의미가 된다. 이런 점에서 “기호이야기”는 일대일 대응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탈기표적 속성이 강하지만, 추상화된 사랑과 그리움의 관례적인 의미를 완전히 탈주할 수 없기에 기표적인 의미화 속성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안정적으로 구축된 1몰(mole)의 원자 혹은 분자 속에 6.02×1023 전자의 인력․척력과 주파수․공명처럼, “기호이야기”는 예속화된 해석을 거부하는 사랑과 그리움의 이야기지만 사랑과 그리움의 의미를 충만하게 가득 채우면서 재영토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파수의 떨림과 공명이 충만한 언어적 표현은 황병승의 “문친킨”에서 두드러진다. “문친킨”은 들뢰즈가 강조하는 언어를 더듬거리게 하는 방식을 잘 드러낸다. “[중략] 문친킨 문친킨/ 스위트 워러의 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이 말을 자주 중얼거린다/ 배고플 때/ 외롭거나/ 답답할 때/ 잠이 오지 않는 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일 때/ 뒤죽박죽으로 출렁거릴 때/ 담배를 뻑뻑 피우며/ 문친킨 문친킨 … 하고 말이다 [중략]”(“문친킨”). 문친킨이 “무슨 뜻이든”, 문친킨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로 대응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리듬 같이 떨림과 공명을 주는 “문친킨”이라는 기호는 의미의 탈영토화 뿐만 아니라 통사적 구조의 탈영토화를 구현한다. 동시에 “시적 언어의 원시적 에너지, 혹은 마법적인 신비를 보유한다”(《트랙과 들판의 별》 210). 이는 감각과 사건이 일치하여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자 제도화된 언어를 탈주하는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하나의 기호는 김혜영의 “토르소”에서 풍경과 중첩되기도 한다. “[중략] 뭉클하게 처진 젖가슴/ 균형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배치되어 있네요/ 사막의 능선을 닮은 허리와 엉덩이의 구조/ 어때요? 난 뮤즈예요/ 사막에 드문드문 나 있는 잡초처럼 검게 처리된 음모/ 흑백 사진 안에 내 얼굴은 없어요/ 심장이 멎을 듯 떨리던 입술, 화면을 사로잡는/ 시선이 없어도 당신을 소유할 수 있지요/ [중략] 드디어 1분, 당신은 카메라 셔터를 닫는군요/ 시간은 잠시 어항 속에 넣어두었죠/ 선인장이 꽃을 피웠군요/ 사막에는 오래 전에 죽은 소의 머리뼈가 누워 있군요/ 난 뮤즈에요. 얼굴이 없는”(“토르소”). 이 시에서 신체는 사막의 풍경으로 탈영토화하고, 사막은 신체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살바도르 달리의 회화 “메 웨스트의 얼굴”에서 얼굴이 풍경을 이루듯이, 이 시에서 신체는 사막이라는 풍경을 이룬다.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로 이 시를 해석한다면, 이 모델의 신체는 성적 대상일 뿐이다. 미적인 성이 저급한 포르노 사진으로 포획되는 것과 같이. 그 결과 이 신체의 풍경은 욕망을 성욕으로만 수렴하는 권력의 기호가 된다. 하지만 이 신체가 티치아노 회화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의 모델처럼 부드럽고 격조 있는 시선을 가진 누드모델의 고운 신체라면, 그것은 미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세잔의 풍경화처럼 자연적인 풍경화로 탈영토화하는 신체가 될 것이다. 이 또한 탈기표적인 체제와 기표적인 체제가 적절하게 만나는 경우이다. 기호와 풍경이 중첩되는 다른 경우는 황병승의 “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이다. “[중략] 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 그녀는 금방 사랑받고 금방 잊혀진다/ 어둠 속, 한 여자가 울고 두번째 여자가 울고 세번/째 여자가 뛰쳐 나간다/ 기침 끝없는 기침처럼 거울을 사이에 두고 두 여자/가 서로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그녀의 얼굴은 싸움터이다”). 여기서 자아의 얼굴과 거울에 재현된 얼굴은 일치하지 않는다. 분열된 주체의 흐름처럼 다양한 재현된 얼굴을 거울은 반사시킬 것이다. 기표가 기의를 미끄러지듯이. 들뢰즈는 얼굴-언어 개념을 통해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를 왕(혹은 군주)의 얼굴과 상응시킨다. 성난 왕의 얼굴은 절대적 기표를 의미하고, 이 얼굴은 하나의 풍경으로서 권력적 기표를 나타낸다. 왕의 얼굴-언어는 전제적인 권력적 풍경을 표상한다. 이러한 기표적인 전제적 체제를 배신하는 기호체제가 탈기표적 기호체제이고, 이 체제에서 얼굴은 성난 왕의 얼굴을 돌아선다. 즉 돌아선 얼굴은 탈기표적 기호체제와 상응한다. 이 시에서는 돌아선 배신의 얼굴이 아니라, 동일화된 재현을 거부하며 근원적인 자아와 마주보면서 침을 뱉는 얼굴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을 거부하는 배신의 형태로서. 이러한 얼굴 이미지는 분열된 주체를 묘사하는 풍경으로서 배치와 사건에 의해 리좀적인 흐름을 추구하는 욕망하는 기계의 생성적인 주체 이미지를 대변한다.     3) 되기 혹은 생성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을 사유하려 했던 사람들이었고, 고체적인 안정성을 추구하던 사람들과 반대로 액체적인 유동성을 잡아타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고정화된 존재가 아니라 유연한 되기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사이에 벌어지는,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되는 변화를 주목하고, 그러한 변화의 내재성을 주목하며,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탈영토화되고 변이하는 삶을 촉발하는 것이다. 되기는 이렇게 자기 동일적인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이 되는 것이고, 어떤 확고한 것에 뿌리박거나 확실한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되기는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근거에서 벗어나 탈영토화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뿌리와 수목이 아니라 리좀을, 정착이 아니라 유목을, 경직된 위계질서적인 홈 패인 공간보다는 수평적이고 유연한 매끄러운 공간을, 관성이나 중력에서 벗어나는 편위를 선호하고 강조하는 것은 되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생성을 사유하고 생성적 삶을 산다는 것은 영속성과 항속성, 불변, 기초, 근본 등과 같은 초월적인 중심적 단어들과 별리하는 것이고, 변이와 창조, 새로운 것의 탐색과 실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다. 되기는 이렇게 하나의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의 문턱 넘기이다. 되기는 권력적이고 수직적인 남성성에 대치되는 여성, 아이, 동물과 혼합된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가 있다. 여성-되기는 김혜영의 “becoming”에서 잘 드러난다. “[중략] 소녀 때부터 달마다 반복되는 일/ 우주 하나가 몸 안에 태어나/ 그믐달 지는 밤 스르르 죽었나 보다/ 분홍색 나일론 팬티를 사다주신 아버지/ 붉은 꽃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날/ 두개골을 쪼개고 지나가는 두통/ 사춘기를 통과하는 소녀의 호기심/ 남자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척추를 지그시 누르는/ 묵직한 억압은 어디서 올까?/ 인형의 시체가 가득한 쓰레기통/ 아이를 기다리는 둥근 방의 울음/ 늙지 않는 소녀가 복제되는 천국/ 소녀의 속눈썹 파르르 떨리고/ 소년의 뒷모습이 뇌리에 박힌다/ 인형처럼 아이를 낳는 시대/ 불법 복제된 첫사랑의 멜로디/ 왼쪽 눈에 새까만 음표로 떠다닌다”(“becoming”). 이 시는 소녀가 사춘기를 통과하며 호기심 어린 육체적 사랑을 통해 여성이 되는 과정을 성적인 측면에서 다룬 것이다. 차이나는 것만 되돌아온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소녀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자아로 탄생한다. 고정적이고 초월적인 주체를 부정하는 들뢰즈와 같이, 주체는 다양한 사건과 배치를 통해 유동적인 흐름을 타는 자아로 변형되거나 생성된다. 이 시의 소녀는 비록 사랑과 성이 일치하지 않는 시대에 대한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남성 중심적 성을 거부하고 그것에 대한 해방을 실현하기에 능동적인 자아의 생성을 추구한다. 즉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거부하면서 다양한 잠재적 가능성이 실재화되는 하나의 능동적 여성-되기를 구체화한다. 동물-되기는 “현무, 강서대묘 널방 안벽 벽화”에서 잘 표출된다. “죽어서도/ 한 몸이 되고 싶었을까/ 사향이 풍기는 거북의 뒷다리 사이로/ 뱀이 머리를 쑥 밀어 넣는다/ 젖무덤 같은 거북의 등짝을 휘감고/ 앞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반원을 그린 후/ 고개를 뒤로 젖힌 거북의 입술과/ 뱀의 입술이 마주 선다/ [중략] 죽은 연인의 입술에/ 봄바람 후우 불어/ 북방 아득한 곳에 태어나/ 하늘무덤 별자리로 회귀하는 현무/ 죽어서도/ 한 몸이 되어 살았을까”(“현무, 강서대묘 널방 안벽 벽화”). 시인은 시를 쓰면서 동물이 된다. 현무는 암수가 한 몸이고 뱀이 몸과 다리에 칭칭 감겨 있고 다리가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무는 암수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양과 음의 조화. 시인은 현무가 암수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동물-되기를 통해, 상수(constant)와 항상적인 관계만을 부각시키며 척도와 규범으로 현재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남성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욕망한다. 이는 또한 프로이트의 권력적인 무의식으로부터의 탈주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김혜영과 유사하게 황병승은 제도권적인 기성세계의 고착화된 사상을 거부하고 비판하면서, 동물과 아이 되기를 자신의 시에 표현한다. “[중략] 죽어도 좋아,/ 주먹을 내려다보는 소년/ 사라지는 달콤함의 시간들/ … 너의 티셔츠에선 언제나/ 검은 줄무늬 고양이 냄새가 나”(“고양이와 자라는 소년”). “당신이 내지르던 그 야단스런 음계들이 뭘 의미하는지/ 꿈에서조차 나는 알고 싶지 않는데, 나는 두드린다!/ 어린이날이라고/ 당신은 나를 피아노 앞에 주저앉히고/ 나는 더 세고 강하게!/ 두드려도 괴롭고/ 두드리지 않아도 괴롭고/ 당신은 그저 즐거워, 한다 어린이날 기념 독주회라고/ 우리 아이는요 금세 피아노의 주인이 됩니다 보세요/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당신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어린이날기념좌절어린이독주회”). 전자는 동물-되기, 후자는 아이-되기가 드러난다. 이 시들은 기성세대 권력의 무의식적 환영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작가의 탈주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 속에 은폐된 환영이나 환상이 해방되어 유희하는 가장 대표적인 시가 김혜영의 “파라다이스”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삐거덕거리는 강의실 문이 열리고/ 우리는 햄릿의 집(Hamlet House)으로 달려갔다/ 햄릿을 읊조리던 청춘들이 막걸리를 마셨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유령처럼/ 미리내 골짜기에 홀러 다녔다/ 회색빛 우울이 번지던 군사정권 시절/ 오필리어처럼 자살을 꿈꾸기도 했다/ 불꽃이 피어올랐다 예순 살의 소녀와 소년들/ 워즈워드, 바이런, 셀리가 지은 책은 숲에서/ 블록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끝이 없는 길에서/ 만난 우리들은 서로 꼬옥 안아주었다/ 리어왕 복장을 한 교수가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셰익스피어의 외설스러운 말장난을 흉내 내었다/ 구멍을 파는 자여, 무덤을 파는 자여/ 촘스키의 통사론을 열강하시는 교수의 입술에서/ 하얀 꽃이 뛰어나왔다 어깨에 묻은 분필 가루/ 그는 나뭇가지를 칠판에 그렸다 학생들은 노트에/ 그린 나뭇가지를 연애편지에 그려 넣었다/ 폭풍의 언덕으로 질주하던 소녀와 소년들의 머리에/ 희끗희끗 풀잎이 돋아났다 환하게 열린 봄바다/ 고도를 기다리는 과거와 미래의 청춘들/ 효원 광장에 앉아 베게트와 버지니아 울프와/ 플래스가 쌓은 블록으로 푸른 숲을 만든다/ 긴 복도와 콰이강의 다리/ 미리내 계곡 너머 별이 춤추는 파라다이스”(“파라다이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클로디우스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고 분열적으로 변한다. 오필리어는 햄릿의 배신으로 인해 미쳐 버린다. 환영이나 환상에 지배된 두 인물은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우리는 무의식의 환영과 환상에 지배되어 늘 비극을 맞이해야만 하나? 시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꽃이 피어오른다. 환영과 환상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만든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소녀와 소년은 낭만주의 시인인 워즈워드, 바이런, 셀리의 작품들을 읽는다. 하지만 전형화 돼버린 낭만주의 시에는 답도 없고 길도 보이지 않는다. 서로 간 우정의 접속만을 확인한다. 또한 촘스키의 통사론 강의를 들지만 생성문법의 위계질서적인 나뭇가지를 리좀적인 사랑의 나뭇가지로 변형시킨다. 축제는 계속된다. 축제가 열리는 봄의 공간은 탈영토화의 공간이자 접속의 공간이며, 보이지 않는 권력에 무의식이 억압될 필요가 없는 순수 매끄러운 공간이다. 국가장치의 수목적인 특성을 갖는 홈 패인 공간에서 해방된 소녀와 소년은 전쟁기계의 유목적인 매끄러운 공간을 표현했던 작가인 베게트, 버지니아 울프, 플래스의 작품들을 읽는다. 이들 작가가 됨으로써 해방의 공간 파라다이스로 향한다. 이 공간은 보링거의 추상적 선이 부각되는 고딕건축처럼 촉감적이고 유목적인 공간이자 매끄러운 접속의 공간이 된다. 이로써 축제의 공간은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이 잠재된 긍정의 공간이 된다.   생성적 공간은 물론 수목적인 홈 패인 공간이 아니라 유연한 매끄러운 공간이다. 이 공간은 황병승이 표현하는 공간인 길과 광장이다. 길과 광장은 국가철학으로 재단할 수 없고, 유목적 사유가 유희하는 곳이다. 이런 유목적 사유는 특히 황병승의 “트랙과 들판의 별”에 구체화된다.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그러니 모든 길과 광장은 더러워져도 좋으리/ 술병과 전단지와 색종이 토사물로 뒤덮여도 좋으리/ 창가의 먼지 쌓인 석고상은 녹아버려라/ 거추장스러운 외투와 속옷은 강물에 던져버려라/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승리가 있다/ 배척된 채로/ 배척된 채로”(“트랙과 들판의 별”). 여기서 시인은 초월적인 국가철학을 의미하는 석고상, 외투, 속옷을 던져 버리고자 한다. 배척된 채로 현존할 지라도, 유목적 사유가 가능한 트랙과 들판에서 소수자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 삶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재단되는 패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과 연대를 통해 창조적인 생성이 발현하는 희망을 암시한다.     새로운 사유를 구현하는 시는 새로운 사유의 감각을 촉발하고 우리의 감각과 정서를 변용시키며, 우리가 새로운 사유의 리듬에 적절하게 감응하게 만든다. 프로이트를 자기 변용화한 김혜영의 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감응을 촉발시키는 강밀함과 공명을 준다. 프로이트로부터의 탈주를 갈망하는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은 재현으로서의 프로이트가 아니라 들뢰즈가 강조하는 생성으로서의 프로이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안내해 준다. 마찬가지로 황병승도 《트랙과 들판의 별》에서 사건과 사건의 리좀적인 접속을 실현하고, 서정적인 측면과 서사적인 측면의 혼종 교배를 통해 새로운 이야기 꾸미기를 구현하며, 리듬적인 언어의 더듬거리기를 통해 통사적 구조를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언어를 창안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들뢰즈의 생성적인 창조적 시학을 구체화하는 시도가 아닐까!       저자: 사공일- 부경대학교 국제지역연구소 연구교수(영문학 박사) 주요작품들 번역-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음악, 회화, 그리고 일반예술》(2006)과 주디스 슈클라의《일상의 악덕》(2011) 저서-《들뢰즈와 창조성의 정치학》(2008) 논문- 〈들뢰지와 연극: 언어와 몸짓의 변이〉,〈질 들뢰지의 재현, 잠재태, 그리고 연극의 정치학〉, 〈핀터의 The Dumb Waiter : 푸코의 권력의 전략〉, 〈들뢰즈 관점에서 본 푸코의 권력 이미지〉등 10여 편 [출처] 들뢰즈의 창조성의 시학 / 사공일|작성자 옥토끼  
258    이선 시 읽기[ 한국] 댓글:  조회:1622  추천:0  2018-02-12
이선 시 읽기  아래 제목들 클릭하면 해당페지로 이동합니다 ^^       별 닦는 나무 / 공광규  0 0 2017. 10. 13.     인간학 개론 4. -말 ․ 말 ․ 말 / 이오장  0 0 2017. 10. 13.     君子三樂* / 우 원 호  0 0 2017. 10. 13.       분꽃들 / 최서진  0 0 2017. 10. 13.         페르시안 인체신경총 / 김백겸  0 0 2017. 10. 13.       플라스티네이션 4 -조용한 증인 / 김해빈  0 0 2017. 10. 13.         장자론壯者論 / 차영한  0 0 2017. 10. 13.       무성의 입술 / 위상진  0 0 2017. 10. 13.       시와 섹스 / 김용오  0 0 2017. 10. 13.       나무의 외출 / 김용언  0 0 2017. 10. 13.       사라지는 길 / 박소원  0 0 2017. 10. 13.     꽃을 위한 예언서- 강영은   0 0 2017. 10. 13.       꽃들은 아직도 춥다- 박소향  0 0 2017. 10. 13.         詩 / 박수현  0 0 2017. 10. 13.         철쭉나무 그늘 / 김선진  0 0 2017. 10. 13.       불꽃나무 한 그루 / 안차애  0 0 2017. 10. 13.       보자기 / 김유선  0 0 2017. 10. 13.         누드는 슬프다 / 이생진  0 0 2017. 10. 13.     저수지에 빠진 의자 / 유종인  0 0 2017. 10. 13.     알렉시스 조르바씨! / 이춘하  0 0 2017. 10. 13.     당신의 연애는 몇 시인가요 / 강인한  0 0 2017. 10. 13.         구름 위의 발자국 / 신현락  0 0 2017. 10. 13.         조각달 / 신규호  0 0 2017. 10. 13.         은어를 낚다 / 정 호  0 0 2017. 10. 13.       소금꽃 / 손해일   0 0 2017. 10. 13.         교차로 Y / 김인숙   0 0 2017. 10. 13.       y거나 Y / 유지소  0 0 2017. 10. 13.     탈 / 위선환  0 0 2017. 10. 13.     부드러움의 단상 ―접사 / 오남구  0 0 2017. 10. 13.   6 ․ 25 33 / 전봉건  0 0 2017. 10. 13.     구부러진 것들 / 양윤덕  0 0 2017. 10. 13.     김정현- 날샘일기  0 0 2017. 10. 13.     같은 이야기 / 세자르 바예호  0 0 2017. 10. 13.     8月 / 박항식  0 0 2017. 10. 13.     정성수- 사기꾼 이야기  0 0 2017. 10. 13.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0 0 2017. 10. 13.     시답잖은/시답지 않은 – 묘비명 / 이낙봉  0 0 2017. 10. 13.     심상운- 칠 놀이 또는 페인트통  0 0 2017. 10. 13.     이제는​ / 박남희  0 0 2017. 10. 13.     이기철- 불행에게 이런 말을  0 0 2017. 10. 13.     서울에 시집온 봉숭아 / 민용태  0 0 2017. 10. 13.     그가 숨 쉬는 법 / 김 종 희  0 0 2017. 10. 13.     강기옥- 담쟁이 1  0 0 2017. 10. 13.     탱자는, 탱자가 아닙니다 / 장옥관  0 0 2017. 10. 13.     미궁에 빠지다 / 고경숙  0 0 2017. 10. 13.     문효치- 사랑이여 흐르다가  0 0 2017. 10. 13.     최진연- 가을현상  0 0 2017. 10. 13.     허순행 - 황사  0 0 2017. 10. 13.     김규화- 환호  0 0 2017. 10. 13.     김예태- 해바라기 (1) 0 0 2017. 10. 13.     권순자- 순례자  0 0 2017. 10. 13.     신진- 아래세상  0 0 2017. 10. 13.     배홍배- 쥐눈  0 0 2017. 10. 13.     이영준- 존재의 불안 그리고 내일 자 신문  0 0 2017. 10. 13.     오혜정- 우화  0 0 2017. 10. 13.     허영자- 그대의 별이 되어  0 0 2017. 10. 13.     정대구- 너가 바로 나로구나  0 0 2017. 10. 13.     정재학- 공모  0 0 2017. 10. 13.     이경림- 푸른 호랑이 이야기  0 0 2017. 10. 13.    
257    언어(소재)를 공깃돌 놀리듯 가지고 놀기 / 시골풍경 [스크랩 ] 댓글:  조회:1788  추천:0  2018-02-03
언어(소재)를 공깃돌 놀리듯 가지고 놀기 / 시골풍경   소재를 첫눈으로 했을때          ~ 잠재의식으로 가지고 놀기 ~   1.하늘에서 내려온 첫눈들이 지상이 이렇게 아름다워요 라며 호들갑을 떤다 2.나뭇가지마다 꽃으로피어 서로 더 예쁘다며 자랑이다 3.첫눈들이 지상풍경을 사진에 담아 하늘 식구들에게 전송하고 있다 4.하늘에서 먼길 오느라 배고프다며 도시락을 열고 밥을 먹고 있다 5.첫눈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지상 백일장 글짓기를 하고있다         ~ 5감각(육체)으로 가지고 놀기 ~   1.(눈)ㅡ바람에 떠 밀리면서도 산새에 짓밣히면서도 토끼발에 체이면서도 박수를 치고있는 첫눈 2.(귀)ㅡ쫑알 쫑알 깔깔 하하 헤헤 첫눈들의 수다 좀 보아 3.(코)ㅡ눈송이들의 화장품 냄새가 날아와 내 코를 마구 간질이고 있어요 4.(입)ㅡ첫눈 냄새와 웃음 소리를 비벼 먹는 이맛 좀 봐요 5.(촉감)ㅡ알몸으로 눈위에 엎어진다 첫사랑 그여자의 피부인가 차갑던 내몸이    잉걸불처럼 달아 오르네             ~ 아이러니 (엉뚱한이미지)로 가지고 놀기   1.나무껍질 속으로 숨은 눈송이가 겨우네 싹이틀어 내년여름에 반딪불이 되는    꿈을꾸고잇다  2.꽃이되어 헤헤 웃다가 햇빛이 뜨거워 울더니 고드럼 형제가 되어 나란히 메달려 있디 3.회오리 바람에 날려 하늘로 올라간 눈들이 오늘밤 하늘에 별로 떠있다 4.하늘에 달빛을 켜놓고 허수아비 위에 않은눈이 바람을 불러와 팽그러러 땐스를 추고있고 그림자도 덩달아 똑같이 추고있다 5.밤사이 출산한 첫눈들의 영혼이 오늘 저 하늘에 구름으로 떠있다     원문 주소 다음카페  
256    디지털 시론의 실제 외 3편 / 이선 댓글:  조회:1437  추천:0  2018-02-03
디지털 시론의 실제 -회화 기법을 중심으로   이선     Ⅰ. 서론     1. 디지털 시의 정의     ‘디지털 시란 무엇인가?’   거부와 부정을 하면서도 디지털 시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 관심주제가 되었다. 세인의 관심과 비난은 디지털 시가 기존의 시와 어떤 변별력을 갖는지 증명해보이라고 한다. 디지털 시론은 새로운 실험시의 존재증명을 위하여, 시문학 시인들을 중심으로 여러 시인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론은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과도기적 과정에 있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여러 시인들에 의해 탐구되고 있다.   오남구는 이상의 시를 디지털적으로 분석하여 ‘디지털 선언’을 하였다. ‘탈관념’과 ‘염사’ ‘접사’ ‘사진찍기’ 기법을 디지털 시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타계하기 직전, 오남구는 그의 시론이 담긴 시집 『빈자리 X 』를 디지털 실험시로 세상에 내 놓았다. 그러나 오남구의 시가 디지털 시의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남구는 ‘어떻게?’라는 물음표를 던지고 떠났다.   심상운은 오남구의 디지털 선언에 컴퓨터 용어를 차용하여 새로운 디지털 시론의 정의를 정립하였다. 심상운은 디지털을 컴퓨터의 최소단위(unit)들의 ‘합성’과 ‘분리’로 인식하여 ‘모듈’ 이론을 시에 도입하였다. 또한 문덕수가 주장한 새로운 시론 ‘하이퍼텍스트 시론’에도 새 정의를 정립하였다. 인터넷의 ‘링크’의 기능과 ‘리좀’을 하이퍼 시론에 도입하여 ‘양방향성’의 ‘교환’ 이론을 정립하였다. 또한 심상운은 아날로그 시를 ‘단선구조’의 시, 하이퍼텍스트 시를 ‘다선구조’의 시로 정의하여 ‘의미 시’와 ‘무의미 시’로 차별화하였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를 동일 개념으로 파악하여 다수의 논문에서 용어사용을 혼용하고 있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론과 하이퍼 시론에 맞는 시를 실험적으로 창작하여 발표함으로써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에 객관성과 구체성을 부여하였다.    문덕수는 기존의 하이퍼 소설론을 차용하여 을 주장하였다. 문덕수의 ‘하이퍼 시론’은 포괄적이고 광범위하여 추상적이던 디지털 시론을 축소하고 보다 분명하고 명확한 범위를 설정해 주었다. 심상운은 디지털 시론에서 주장한 컴퓨터의 ‘모듈’과 ‘리좀 이론’을 하이퍼 시에도 대입하였다. 또한 새로운 ‘무의미 사물시’를 발표하여 문덕수의 ‘무의미 시론’을 증명하였다. 문덕수의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간단히 살펴보자.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가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그러나 오남구와 심상운, 문덕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시론은 아직 완전하게 정립된 것이 아니다. 하이퍼 시론이나 디지털 시론은 시론이 작품으로 완성되어 나타날 때까지라는 제한성을 갖는다.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는 새로운 구조를 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험적인 것이 안정되어 획일적인 포지션을 가지면 새로움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끝없는 실험정신이 요구되는 것이 디지털 시다.   문예사조는 작품이 선행하고, 작품에 이름이 붙여진 경우가 대부분인데, 디지털 시의 경우 시론이 먼저 주장되고 시가 후속으로 창작되었다. 시론에 맞는 시작품이 아직 실험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과정에 있으므로 앞으로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을 기대한다.   디지털 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정의를 위에서 살펴보았다. 지금은 디지털 시 대신 하이퍼 시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디지털이란 말이 너무 광범위하고 전자적이기 때문이다. 하이퍼는 구체적이고 범위가 더 한정적이며 명시적이다. 본 장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광범위한 디지털 시에 대한 정의를 잠시 뒤로 미루고자 한다. 오히려 디지털 시의 기법을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으로 디지털 시에 대한 정의를 완성하고자 한다.          2. 디지털 시의 기법(방법론)     디지털 시의 정의는 문덕수, 심상운, 오남구의 시론을 토대로 간략하게 위에서 언급하였다. 그래도 ‘과연 어떤 시가 디지털 시란 말인가?’라는 의문점을 갖게 될 것이다. 본 논문은 예시작품을 분석하여 어떤 요소들이 디지털 시를 구성하는 조건인지 밝혀내어 새로운 디지털 시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한다. 디지털 시와 아날로그 시의 차별화된 창작 기법과 방법론을 밝혀서 분류의 기점을 세우려는 것이다. “너네 도대체 디지털 시가 뭐냐?”라는 질문에 대한 객관성을 가진 구체적인 답변자료가 되길 바란다. 본 논문에서는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미술의 회화 기법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정보화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매일 새로운 전자제품들이 사람들의 구매욕을 충동하고 있다. 디지털시계, 디지털 계산기, 디지털 사진, 디지털이란 말이 들어간 전자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디지털은 컴퓨터 시스템을 적용하여 연속적이며 분절적인 오차가 없는 정확한 시스템이다. 디지털은 무한 반복적이며 합성과 재결합이 가능하다. 자기의 기본적인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시스템과 만나 새로운 합성구성,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화할 수 있다.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이지만 조금씩 오차가 난다. 아날로그가 직선이라면 디지털은 점선이다. 또한 모자이크다.   디지털 그림은 점묘화 기법으로 여러 스타일로 합성되기도 하고 형태를 아주 바꾸기도 하고, 다른 이질적인 그림이 들어와 덮어버리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네모 박스 안에서 물고기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물풀이 돋아나 바람에 흔들린다. 그 물풀 사이로 무수히 많은 고기떼가 지나간다. 빠르게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디지털 그림의 중요한 포인트는 화면이 빠르고 운동감 있게 움직이며, 장면이 계속 전환되며, 사물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편집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즉 고정적 정물화가 아니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그림을 무한정 반복 감상할 수 있는 ‘움직이는 그림’이다.       아날로그 시를 지향하여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 곧 디지털 시를 쓰는 시인들의 감각도 디지털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 화면이 빠르게 전개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아날로그 시가 검정과 흰색. 빨강, 파랑색으로 구성된 ‘보여주기’ 위주의 정지된 단일구성의 시라면 디지털 시는 ‘다초점’ ‘다시점’으로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여러 방향의 상상력에 움직임을 가미하여 ‘상상력의 이동’을 보인다. 디지털 시는 한 마디로 ‘움직이는 그림’, 또는 ‘움직이는 영상’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이나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시인의 ‘상상력의 이동’이 생각지도 않았던 기하학 무늬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의미한 ‘단어던지기’나 ‘언어충돌‘로 우연적 미술기법처럼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단어’의 ‘결합’과 ‘분리’가 만든 ‘모자이크 이미지’가 시에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또한 사물을 각각 다른 연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병렬배치’된 사물들이 서로 다른 질서와 의미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다른 의미와 세계로 확산된 무의미하고 낯선 사물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뱉어내면서 한 폭의 ‘추상화’가 그려진다. 의도성을 가지고 쓴 의미추구의 ‘아날로그 시’보다 새로운 감각의 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감각’이다. 새로운 감각의 시는 ’시스템의 혁명’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통하여 보다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여야 한다.   아날로그 시가 ‘보여주기’ 의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디지털 시는 ‘움직이는 그림’으로 입체적이며 운동감이 있는 그림이다. ‘움직이는 그림’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 가능하다. 또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새로운 공감각적 시로 탄생한다.   공간이동은 그림의 내용물인 화면이 변화한다. 합성사진처럼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하다. 즉 ‘시간, 공간, 상상력의 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디자인은 새로운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새로운 시창작 기법의 주요 이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의미,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움은 새로운 철학이다.    본 논문에서는 디지털 시의 요소로서 새로운 시 창작 기법으로  정물화 기법, 겹쳐 그리기 기법, 움직이는 그림 기법, 옴니버스 기법, 기호시 기법, 모자이크 기법, 추상화(구성) 기법 등 입곱 가지 방법론을 소개한다.   본 논문에서는 예시된 디지털 시 작품에서 디지털 시의 요소를 집중적으로 추출해서 분류해 보고자 한다. 내용과 형식, 의미와 디자인을 모두 조명해 보기로 한다.   2. 정물화 기법- ‘탈관념’     디지털 시의 내용, 즉 의미의 영역을 먼저 살펴보자. 디지털 시 쓰기 방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탈관념이다. 아날로그 시들이 의미를 추구했던 관습에서 벗어나 시인의 관념을 배재하고 ‘사진찍기’를 하여 ‘보여주기’하는 방법이다. 아직 시에 공간이동은 없이 보여주기 한다. 정물화와 같다. 그러나 어떤 영상물도 작가의 의도성을 완전히 배재할 수는 없다. 다만 의식적인 강요를 배재하고 객관적 ‘정황’을 ‘보여주기’함으로써 ‘절대상황’만 독자에게 제시할 뿐이다. ‘시적 거리’가 먼 객관적인 사물 시가 탈관념 시에 속한다. 물론 무의미 단어들의 연합인 ‘언농’도 포함한다. 탈관념 시는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독자에게 관찰하도록 한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감사하게 한다. 시는 시로서 현존할 뿐이다. 그냥 작품으로 ‘놓아둔다’. 아래 시는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이다.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사물 시’다.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빨간 저녁놀’ ‘재떨이’ ‘서 있는 사나이’ ‘유리컵’ ‘담배’ ‘육각형성냥갑’ ‘라이터’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작가는 자기의 감정을 담지 않고 냉정하게 ‘정물화’를 그리듯 탁자 주변의 상황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여기에 관념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건조하고 딱딱한 사물들의 ‘정물화’는 무념무상이다. 그냥 이발소 그림처럼 걸려있다. 주목을 받지 않아도 좋다. 위의 정물화가 시적 미의식을 갖는 것은 1연 1행의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부분이다. 빨간 유리컵은 사실적 표현이지만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은 시적 이미지다. 1행을 시적 이미지로 무르익혔기 때문에 이 그림은 '감성적인 서정화‘다.   또한 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고 돌발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사물에 ‘의식’을 넣었기 때문이다.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가고, 신사의 등이 유리컵을 ‘노려보고’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쉰다는 구절이 이 시에 ‘의미’영역을 대변한다. 시의 백미다. 무념무상의 사물에 ‘의식을 넣어’, ‘사물의 감정’을 ‘의인화’하였다. 사건을 유발시키고 있다. 정지된 ‘정물화’는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은 긴장된 정적일 수 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감이다.   ‘사나이의 등’이 ‘노려보고’ 있는 ‘세 유리컵’은 세 사람에 대한 거부를 객관적으로 나타낸다. 독자는 순간적으로 상상할 것이다. 이혼서류를 찍기 직전의 풍경일 수도 있다.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합석했을 수도 있고, 어린 딸아이가 주스를 마시고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약 흥정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배반의 현장일 수도 있다. 독자는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각인된 무의식의 세계와 연상작용하여 순간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 시는 작가의 지시나 의도성을 배제하고 작가의 관념을 집어넣지 않는다. 독자의 감상과 해석 영역이 넓다.   이 시에서는 최소한의 사물과 최소한의 동사와 부사만을 사용했다. ‘힐끗힐끗’이나 ‘발딱발딱’ 같은 부사어와 ‘노려본다’는 최소한의 동사를 사용하여 현장성과 긴장감을 주었다.「탁자를 중심으로 풍경」은 냉정하게 최소한의 요소만 조건적으로 ‘보여주기’하고 있는 ‘정물화’다. 그러나 이 시는 퍼포먼스에 적당한 여러 배경을 제시한다. 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어떤 사건이 ‘침묵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음모처럼 숨어 있다.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도 시적 긴장감을 갖도록 배치한 것은 작가의 저력이다. 작가의 숨은 의도는 한껏, 독자의 호기심을 부추겨놓고는 짐짓 '모르는 척' ‘시침떼기’다.   문덕수는 「탁자를 중심으로 풍경」에서 자신의 을 증명하고자 한다. 탈관념이 관념보다 설득력이 있으며 사물의 시점에서 한 ‘상상력의 이동’은 시에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이퍼 시’와 ‘디지털 시’를 혼용된 개념으로 볼 때, 이 시는 새로운 실험시의 모델로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시‘라고 주장한 오남구의 시론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3. 겹쳐 그리기 기법- ‘다시점’ ‘다초점’     오남구는 염사와 접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디지털 시를 정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학적 공식과 시론은 많은 사람들이 해독하지 못하고 어려워한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염사나 접사라는 남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피하려고 한다. 심상운의 다선구조와 오남구의 염사와 접사와는 달리 필자는 ‘겹쳐 그리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다선구조와 염사, 접사와 비슷한 면이 있을 수도 있으나 ‘겹쳐 그리기’는 미술기법으로 ‘미술 구성’에 가깝다. 여러 개의 선과 면을 겹쳐서 새로운 구성을 ‘보여주기’ 하는 것이다. 여러 선이 될 수도 있고, 여러 면이 될 수도 있는 ‘겹쳐 그리기’는 심상운의 ‘다선구조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은 오히려 ‘옴니버스 형식’에 가깝다.    '겹쳐 그리기‘는 ’외면의 겹쳐 그리기‘와 ’내면의 겹쳐 그리기‘가 있다. 외면의 ’겹쳐 그리기‘는 피카소의 처럼 앞, 뒤, 옆, 위, 아래, 여러 방향으로 직관하고 관찰하여 한 화면 위에 펼쳐 놓은 그림이다. 또한 내면을 여러 방향에서 여러 각도로 관찰하고 직관하여 한 화면 위에 형상화하여 그려내는 것이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 창작 기법이다. 투시도를 여러 개 겹쳐 놓은 것과 같은 시창작 방법론이다.   피카소는 ’다초점, 다시점’의 그림을 그렸다. ‘다른 방향에서 여러 개의 눈으로 바라보기’이다. 단순히 ‘사실 대로 보여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하여 보여주기 하는 것이다. ‘투시도’라고 보면 된다. 여러 각도에서 투시한 그림이다. 찍는 각도와 방향, 위치에 따라서 피사체가 달라진다. 시에서 비유와 비유의 비유와 같은 개념이다. 디지털 시는 한 방향에서 본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구조의 그림이다.   한 단계 더 심연으로 느껴서 ‘투시’하여 ‘보여주기’하는 ‘무엇’이다. ‘무엇’은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방법(기법)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아날로그 시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리던 것을 넘어 보다 본질적인 것을 진정성을 가지고 ‘투시’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여러 겹의 투시도‘라고 명명해 보면 어떨까? 그 시각은 시인의 새로운 발상이어야 한다. 누군가 시도한 헌 기법이 아닌, 새로운 시 쓰기 기법이어야 한다. 다음  오남구의 시「부드러움의 단상」전문이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로운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 오남구,「부드러움의 단상」전문     작가는 ‘신호등이 켜진’ 거리에서 아주 짧은 찰라의 시간 동안 ‘비’를 직관한다. 아날로그 시에서‘비’는 ‘슬픔’과 ‘이별’의 이미지와 관념의 동의어로 쓰여 왔다. 그러나 오남구의 ‘비’는 군더더기 없이, 직관적이다. ‘보여지는 것’그 너머 존재하는 비의 속성을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다. 그것도 여러 방향에서 관찰한 비다.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 비다. 피부로 느껴 접촉한 비다. 이렇게 여러 겹의 ‘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그린 그림 같은 비다.   팔딱팔딱 숨을 쉬는 비, 단단한 비, 날카로운 날을 세운 비, 수직으로 솟는 비, 수평으로 퍼지는 비, 팔딱팔딱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지는 비, 시인은 비를 직관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본다. 직관의 날카로움은 사물성의 비가 운동감을 가지고 변화하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디지털 시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운동성이다. 아날로그 시의 그림이 정지된 ‘정물화’라면 디지털 시의 그림은 ‘움직이는 정물화’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는 지금까지 흔히 보던 정지되고 일상적인 그림이 아니다. 움직임이 있는 특별한 그림이다. 정지된 사물의 운동감은 시에 감각적 새로움을 제공한다. 오남구의 「부드러움의 단상」은 사물을 직관하여 투시한다. 또한 사물에 운동감을 주어 감각의 새로움을 창조하여 디지털 시의 요건을 충족시켰다. ‘겹쳐 그리기 기법’의 또 다른 예를 소개한다. 위상진의 시 「사진촬영금지 구역」1연을 살펴보자.     마그리트 그림 속, 눈 하나가 방에 가득 차있다   어둠의 속눈썹을 따라 들어가면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약처럼 내 얼굴에 쏟아진다     위의 시도 ‘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다. 빛이 얼굴에 쏟아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단계의 층위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속눈썹 위에 여러 개의 성냥개비를 올려놓은 것을 상상해 보라. 몇 겹으로 ’겹쳐 그린 그림‘이 보일 것이다.������겹쳐 보여주기������다시점������������다초점������의 시다.   위의 시는 ‘마그리트 그림- 눈- 어둠의 속눈썹-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약- 내 얼굴’까지‘화살표’를 따라 층위적으로 공간이동하고 있다. ‘내 얼굴에 비치는 불빛'의 한 가지 사실을 점층적으로 ’겹쳐 그리기‘하고 있다. ‘그림- 눈- 속눈썹- 나방- 불빛-흰가루 약- 내 얼굴’까지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쳐 도달하도록 한다. 단일구성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시가 감각적인 구성기법의 그림이 된다.   이때 사물성에 기초를 두고 시를 써야 한다. 관념에 층위를 여러 개 두면 개념이 불분명한 넋두리 시가 된다. 객관화가 되지 않은 대부분의 토로시들은 관념의 층위를 여러 개 겹친 시들이다.   위의 시가‘겹쳐 그리기’를 하며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쳤지만 객관성을 가지는 것은 사물성의 힘이다. 사물성은 관념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시키는 힘이 있다. 시를 쓸 때 관념에 옷을 입혀서 사물화하는 것은 객관화를 회복하기 위함이다.   이 시가 디지털 시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은 현대성이다. 복잡한 여러 겹의 층위와 ‘흰 가루약’등 현대인의 아픈 뇌를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현대인의 고달픔을 연상시킨다. ‘겹쳐 그리기 기법’은 새로운 구성의 시 창작 법이다. 송시월의  「물웅덩이」를 살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 송시월, 「물웅덩이」전문              이 시도 ‘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겹쳐 그리기’ 하고 있다. 물웅덩이 속에는 여러 그림자 들이 ‘겹쳐 그려져’ 있다. ‘붉은 하늘 한 조각’ ‘거꾸로 처박힌 빌딩’ ‘육교 한 토막’ ‘틈새에 끼인 나’ 맷새 한 마리‘가 ‘겹쳐 그려져’ 있다.       일상적인 정물이 아니다. 조각나고, 부서지고, 거꾸로 처박힌, 모서리진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 부조리한 사물들 ‘틈새’에 시인도 끼여 있다. 극한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압박 속에 있다. 작가가 사물 속에 뛰어들어 함께 만든 ‘정물화’다. 정지된 부조화의 그림 속에서 ‘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날아가는 새를 정물화 속에 집어넣어, 그림에 운동감을 준다. 그림에 속에 ‘새를 날림’으로써 정물화는 생동감과 현장성을 갖는다. 시가 확장된다. 따라서 이 시는 정물적인 그림에 운동감을 줌으로써 새로운 디지털적인 생동감을  갖는다. ‘겹쳐 그리기’를 하여 여러 정황을 동시에 ‘보여주기’하고 있다.    물웅덩이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그런데 거기 하늘과 나무, 빌딩, 나, 새가 끼어 있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지만, 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확장하여 ‘상상력을 이동’ 하고 있다. ‘상상력의 이동’을 한 ‘겹쳐 그리기’ 시창작 기법이다.       4.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아날로그 시에서도 ‘이미지’와 ‘시적 상상력’은 시의 중요한 필요충분 요소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에서는 ‘상상력’의 부재는 디지털 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는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상상력의 이동’이라는 복합적 요소를 동시에 실현하며 ‘어머니’라는 보통명사를 특별한 그림으로 다시 그렸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아래 시는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전문이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 김규화, 「한강을 읽다」전문   「한강을 읽다」는 감정을 배재한 냉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보이는 대로 충실하게 그린 객관적 그림이다. 감정을 통제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가 힘을 갖는다. ‘그린다, 흔들어본다, 지워버린다’ 지나간다, 지운다, 가로 지른다‘는 최소한의 동사가 장면전환을 하게 한다.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지우개처럼 ‘물살’과 '돛단배‘와 ’새‘가 화면을 지운다. ’이젤을 거꾸로 세워‘ 그린 그림은 몇 번이고 장면이 바뀌며 ’공간이동‘ ’시간이동‘ ’상상력의 이동’이 진행된다. 정지된 ‘정물화’가 운동감을 가진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김규화의 시는 사물, 즉 피사체의 시점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많은 아날로그의 시들이 시인의 관점에서 시에 접근했다면 이 시는 역발상으로 사물의 시점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한강’이 ‘거꾸로 이젤’을 들고 그림을 그린다. 순행적인 시간의 시점을 거꾸로 돌려 ‘반시계 방향’으로 진입하며 시에 긴장감을 준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1행은 이 시를 시간, 공간, 지각을 모두 열고 심미적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서정적 묘사다. ‘시간’ ‘공간’ ‘지각’ 다초점, 다시점의 시적 구조를 세운다. 직선, 평면 시를 입체시가 되게 하는 요건이다.   이 시는 정지된 그림이 아니다. 여러 부분에서 운동감을 준다. 한강변에 서 있는 부동성의 ‘아파트’라는 사물을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이라는 운동성을 줌으로써 시는 생동감을 갖고 움직임을 갖는다. ‘여기 무슨 구경거리가 있나?’ 궁금하여 몸을 기웃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한강’은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물살이 ‘출렁’ 하고 움직이는 모양이 시각적으로 그려진다. 여러 번 물결이 ‘출렁거림’으로써 이 시는 딱딱한 획일성과 고정성에서 벗어난다. 정서환기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부분은 수채화의 여백의 공간처럼 시적여운을 남긴다. ‘하늘’을 ‘가슴에 클릭’하는 새로움이 감각적이다. ‘흘러내리는’이라는 미완의 동사, 어미변화가 수채화를 그릴 때의 붓놀림처럼 여유로 흐른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그렸다가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지워도’ 여러 번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어머니’의 뿌옇게 아련한 향수 속으로 끌려들게 한다.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부분에서 사용한 ‘올랑촐랑’ 의태어가 큰 역할을 한다. ‘올랑촐랑’은 살가운 모녀의 대화처럼 작고 정다운 의태어다.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라는 표현은 시적 미의식을 고조시킨다. 웅변하지 않아도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창문을 열고’ 독자들의 무의식을 깨운다.   이 시는 사실적인 표현과 정서적인 표현이 아우러져 심상에 한폭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부분은 붓으로 물을 찍어 그림을 그리듯 감각적인 표현이다. 또한 정지된 화면을 바꾸어 ‘장면전환’을 한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는 부분에서 ‘가로 지른다’는 동사를 눈여겨보자. 만약 ‘날아 간다’로 하면 어떤 시적 이미지가 생길까? 모두 떠나버린 공허와 고독한 이미지를 전할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강조되며 냉정한 현실이 부각된다. 그러나 ‘가로 지른다’는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미련과 아쉬움의 이미지다. ‘눈가에 어머니가 어른거리는’ 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남긴다.    ‘물새가 가로 지르며‘ 정지된 그림이 또 한 번 출렁, ’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감각적 운동감을 갖는다.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는 아날로그 시가 아닌 파스텔톤의 ‘움직이는 풍경화’다. 여러 번 출렁거림을 주어 ‘정물화’에 ‘움직임’을 주었다. ‘시간 이동’ ‘공간 이동’ ‘상상력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사물을 이동시켜 붓으로 지우듯 현대적 디지털 기법으로 장면전환을 하였다. 「한강을 읽다」가 현장성과 운동감, 정서환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 시가 고정된 ‘정물화’가 아닌 ‘움직이는 정물화’이기 때문이다.        5. 옴니버스 기법   심상운의 대부분의 시들은 옴니버스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맨살에 링크하기」는 아날로그 시와 디지털 시의 분기점을 비교해 볼 수 있는 품이다. 단어와 제목, 내용에서 신선한 디지털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맨살에 링크하기」시 제목은 현대적이며 감각적이다. 또한 ‘맨살’의 선정적 이미지와 ‘링크하기’의 컴퓨터 용어가 낯설게 맞물려 신선한 현대적 감각을 준다. 다음 시 내용을 살펴보자.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전문         이 시는  ‘통조림’과 ‘비누’, ‘어항’ 세 가지 사물을 각 연에 배치한 옴니버스 형식의 시다. 또한 4연은 긴 ( )를 제시하여 독자에게 시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시인은 새로운 시 형식과 디자인을 실험하고 있다.   1연의 ‘ 통조림 속의 맨살의 꽁치의 검푸른 살’과  2연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는 비누’와 3연의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는 감각적이며 선정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맨살’이라는 공통된 이미지 때문이다.   4연의 긴 ( )는 새로운 시도로서 독자를 시 쓰기에 초대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여기 넣을까? 상상력을 펼치게 한다. 독자와 시인이 50%씩 시를 쓴다. 필자도 ‘아가씨 입술과 이빨 사이에 끼어서 신음하는 빨간 사과의 하얀 맨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써 본다. 감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농염한 문장이 만들어질 것 같지 않은가?   심상운은 새로운 구성과 디자인의 시 형식을 차용하여 디지털적인 요소를 이 시에서 실현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옴니버스적인 이야기는 한편의 각각 다른 시로 만들어도 좋은 소재다.   1연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이 부분에서 새로움은 없다. 사실만 적었다. 냉정한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다음 시행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부분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물에 조건적으로 의식을 집어넣었다. ‘통조림 속의 꽁치’에게 시인은 어떤 역할을 부여하려 한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은 정확하게 죽은 날짜를 명시하고 있다.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부분에서 ‘어떤 주검’이 선명하게 시인의 무의식을 잡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주검은 생생하고 감각적이다. 마지막 부분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에서 시인이 나타내려고 하는 의식이 표출된다. ‘눈감고 있던 꽁치 맨살의 꿈틀거림’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주검’이 의식 표면으로 튀어나온 순간이다. ‘꽁치’라는 대상을 통하여 시인의 무의식은 ‘어떤 주검’을 의식화하고 표출시킨 것이다. 간단한 몇 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는 것은 ‘주검’은 삶과 마찬가지로 생의 주요한 중심 단어이기 때문이다. 종결이면서 시작이다. 누구에게나 아픈 ‘주검’에 얽힌 사연들이 있다. ‘꽁치의 주검’은 승화된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맨살의 주검이다.   2연의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사물인 비누가 대상이지만, 애인의 ‘맨살’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적 쾌락을 느낀다. 다음 행의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는 부분에서는 ‘몸을 줄 듯 줄듯’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뒤로 빼버리는 여자의 모습이 병치된다. 시인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누의 포동포동한 맨살’과 ‘미끄러운 여자의 맨살’의 이미지가 겹쳐 연상작용을 한다. 독자에게 관능적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3연의 1행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화두를선문답처럼 탁, 던진다. 독자에게 ‘어??“ 정서적 환기를 시킨다. 긴장감은 다음 시행에 집중하게 한다. 마지막 행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부분은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 ‘한 쌍의 남녀’를 병치하면서 묘한 관능적 섹슈얼리즘을 풍긴다.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 ‘한 쌍의 남녀’가 간질간질한 욕망을 부추긴다.   「맨살에 링크하기」는 시의 내용과 제목, 디자인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각각 다른 내용을 담은 연들이 연상작용을 부추겨 시적 상상력을 증가시킨다. 이 시는 사물 시로서 내용과 형식에 디지털적인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6. 기호 시(詩) 기법     소쉬르는 단어를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é)가 결합하여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하는 기호라고 정의하였다. 기표는 사물의 본질이 아닌 형식이다. 가상의 무의미한 문자인 기호는 송신자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수신자의 수용 태도에 따라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기표란 단일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고 상징적 의미작용을 하기도 한다. 자연과 사물에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감정을 넣었으나 원래의 자연과 사물은 감정이 없다. 기호 시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문자를 원래의 무의미한 원상태로 돌려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시론은 무의미시론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문덕수의 ‘하이퍼 시론’ 에서 추구하는 ‘무의미 시’가 바로 기호시의 원리를 차용한 시론이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 )와 ( ) 사이에」전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로   빌딩이 자란다   가로수, 긴 괄호[ ] 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먹어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갇힌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괄호( )가 화르르, 열린다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어가는       ― 이선, 「( )와 ( ) 사이에」전문     위의 시는 제목에 ( )를 사용함으로써 디지털적 감각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또한 사물과 관계성을 ( )라는 미지수로 보았다. 만약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자동차가 달리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까?라고 질문해 보았다. 사물은 단어가 아직 붙지 않았으므로 미지수 ( )가 열리고 닫히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에 갇혀서’ 무생물인 빌딩과 생물인 동물과 사람과 나무가 공존한다. 대상인 괄호( )를 열려고 집착하는 관계성을 살펴보고 자 하였다. ( )를 사물이나 관계로 인식하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소통에 장애를 갖는 것은 현대인의 ( ) 인식 때문이다.   단어와 말을 버리고 세계와 사물을 ( )라고 인식하여 본 것이다. ( )를 의미의 공간으로 해석한 것은 모든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역설이다. 사물은 그냥 ( )로 존재한다.     4연의 ‘사내의 주검’에 달라붙어 ( )를 열려고 ‘버둥대’는 ‘쇠파리’처럼 의미 없는 행동이다. 누구도 사내의 닫힌 ( )를 열고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 )는 ( )로서 존재한다. 모든 관계와 사물을 ( )로 인식한 것은 ( )로 사물화한 것이다. 소쉬르가 주장한 ‘말’, 즉 언어는 소통에 여러 장애들을 겪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무의미한  괄호( )라는 기표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소통되지 않는 ( )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 ) 기호시를 시도한 것은 무의미 기표인 ( )를 시에 도입하여 언어와 사물, 관계의 무의미를 ( )화하여 디지털적인 실험시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단어와 문장을 의미적으로 한 것은 여러 개의 의미로 분산되고 해석되는 ( )를 역으로 추적해 본 것이다. 본래의 ( )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단절되고 결합되지 못하는 의미(기의)인  ‘인간’ ‘빌딩’ ‘꽃’ ‘입맞춤’ ‘포옹’ ‘나무’를 간접적으로 ( )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7. 모자이크 기법     디지털은 ‘단절’과 ‘결합’이 작게 나누어지는 최소 단위의 조합인 ‘모자이크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디지털시계는 빨간 불을 반짝이면서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단절’과 ‘결합’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디지털 시에서도 단절과 결합을 통한 ‘추상화 미술기법’과 미술의 ‘구성’과 같은 배열, 즉 몬드리안의 그림이나 샤갈의 그림처럼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불특정하게 결합하고, 분리된 모자이크 시를 예시 작품으로 들고자 하였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언어충돌이 난무한 작품을 찾았으나 완전히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과 투척이 첨예한 미의식적 예술성을 가진 ‘언어 그림’이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양준호의「비상구」를 골라보았다. 양준호의 시는 의미해석을 하려고 하면 어렵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단절’과 ‘단절’. 절대고독의 이미지. 현대인의 위기와 부조리를 ‘극한상황’으로 느끼면 된다. 다행히 시인 자신도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여 주기를 바라며 ‘의미 추구의 시’를 쓰려고 시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바람은 비늘 흔든다 귓속에   파란 새 날아간다   꽃은 피어라 말의 콧등에도   소금은 준비되었을까   뼈들 파도처럼 춤춘다   눈알만 남아 귀만 남은   고무공 뛰어간다      ― 양준호,「비상구」전문     그럼에도 이 짧은 시가 주목받는 것은 시인의 은둔과 고독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단어’를 공기돌 던지듯 허공중에 흩트려 놓은 것 같다. 그러나 ‘바람’ ‘비’ ‘파란 새’ ‘꽃’ ‘소금’ ‘뼈’ ‘파도’ ‘눈알만 남은 고무공’ ‘귀만 남은 고무공’은 「비상구」라는 제목과 부조리하게 흩어졌다가도 묘하게 단어들이 결합한다. 꽉 막힌, 비상구도 없는 곳에서 새처럼 날아보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몸부림이 감지된다. ‘절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비상구를 잃어버린 현대인. 친구가 없는 현대인. 이기주의 시인. 그리고 너. 나.   양준호의 단어들은 결합하고 분리되어 ‘모자이크 이미지’를 구성한다. 단어들의 흩뿌림이 역으로 새로운 디지털 시적 방법론을 제공한다. 디지털 시론이 나오기 훨씬 전인 80년대부터 양준호는 이미 디지털 시를 써 왔다.    8.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 바꾸기(변화)     시스템의 변화를 시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형식과 디자인, 기법, 표현기법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함의한다. 필자의 졸시「귓속말하기」는 디지털 기법의 새로운 시의 형식으로 쓰고자 고민하며 쓴 시다. 결국 디지털 시가 무의미 단어들의 조합이나 연과 연의 단절만 추구한다면 똑같은 이미지와 형식의 시들이 양산될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다 비개성적인 작품들이 만연할 수 있다. 디지털 시가 이름만 가리면 똑같아서 누구의 시인지 모를 정도로 몰개성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디지털 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다. 이 시는 각각의 독립된 다른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병렬배치하였다. 「귓속말하기」부제로 ‘-때, 장소, 시간, 그리고??’라는 제목을 붙여서 각각의 ‘현장상황’을 연상시키고자 하였다. 반복적인 ‘귓속말로’라는 똑같은 말을 넣어 언어의 디자인을 하였다. 추상화기법의 구성 기법이다. 내용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핀 그림으로 디자인하였다.   추상화 기법으로 시의 형식은 ( ) 속에 들어간 ‘귓속말로’가 포인트다. 노랑, 파랑, 빨강, 초록 등 다양한 색깔의 구성 디자인 중, ‘귓속말로’는 보라색 포인트와 같은 것이다. 연마다 똑같은 ‘보라색 포인트’ 말을 넣음으로써, ‘보라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완성하였다. 디자인과 시스템 바꾸기(변화)를 실험적으로 시도한 작품이다. ‘추상화 그림’ 기법으로 ‘몬드리안 무늬’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시다.     개미가 벌에게 엉덩이를 한방 냅다 쏘였어요   이를 악 물고,   입술이 노랗게 물들도록, 호박꽃잎 물어뜯는데   ( “꿀맛 좋니?” 귓속말로 )     오랫동안 기우뚱한 안방 벽이   너덜너덜 갈라지고 금이 간, 건넌방 벽에게 묻는다   ( “나한테 너무 오래 기대고 살지 않았니?” 귓속말로)     숫모기만 보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애~앵 앵앵, 암모기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끈질긴 구애    여자 뒤통수치기 여왕모기, 그녀   (질투도 힘이니? 귓속말로)     초생달이 허공에 밀려   헛바퀴 돌아, 돌아   거꾸로 매달려, 그믐달로 서 있네요   ( “하늘이 노랗게 보이니?” 귓속말로)     하이힐 소리 또각또각, 입술 빨간 꽃바람   피사의 탑에 미~쳐서 리포트를 못 썼다나?   빨간 하품이 강의실 앞 붉은 장미가시에 걸렸다가,   억대 소나무에 걸렸다가,   초록잔디밭 위를 떼구르르,     대학정문에 대자보가 걸렸다고요?   보석자랑? 차자랑? 구찌핸드백 자랑? 꽃바람   맨 먼저 대학교단에 선다고?   ( “쯧 공부해서 남 주니?” 귓속말로)     나뭇잎은 하늘을 한 입 베어 물고   파랗게 멍든 입술로 벙긋거린다   ( “후~욱 불어 버릴까?” 귓속말로)     가랑비, 눈썹에 내려앉아 가볍게 소곤댄다   ( “슬픔도 키스처럼 부드럽지 않니?” 귓속말로)      ― 이선, 「귓속말하기/-때, 장소, 시간, 그리고??」전문     프로이드는 문학을 사회와 화합하지 못하는 인간이 소외와 고독을 승화하여 예술작품으로 생산한 것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누구나 인생에서 ‘어느 때’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뒤통수를 맞은 당혹스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억울한데, 차마 반박하지도 못했던 경험. 그 비열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지켜보는 역겨움.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서 치유하는 과정을 문학창작 과정으로 보았다.   이 시는 인간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속성을 ‘추상화(구성) 기법’으로 보여주고자 하였다. 소통을 위하여 내용은 의미추구를 디자인은 디지털적으로 시도하였다.  모든 시가 무의미만 추구한다고 개성적이며 새로운 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9. 결론      본 논문은 디지털 시론의 정의와 시창작 방법론을 재조명하여 디지털 시의 구성 요소를 미술의 회화 기법을 도입하여 논의해 보았다. 디지털 시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일곱 편의 시를 분석하여 일곱 가지 시 창작 기법을 소개하였다. “디지털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답이 되기를 바란다.   디지털을 선포한 오남구의 ‘탈관념’ ‘염사’ ‘접사’ ‘사진찍기’ 시창작 시론과 심상운의 ‘디지털 시’와 ‘하이퍼텍스트 시’에 대한 정의인 ‘모듈’과 ‘리좀’, ‘단선구조와 다선구조론’을 소개하고 문덕수가 최초로 주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최첨단 시창작 기법인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기법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으며 여러 시인들이 실험정신을 가지고 도전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존의 탈관념과 염사, 접사, 사진 찍기 기법 외에 무의미 시론과 다선구조를 총체적으로 규합하여 몇 가지의 새로운 시창작 기법으로 정리해 보았다. 또한 필자가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 쓰기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구조적인 시론의 핵심 테마를 디지털 시창작 기법으로 정립하였다.   본 논문은 디지털 시가 몬드리안이나 샤갈의 그림처럼 추상화 기법을 쓰고 있으며, 피카소의 그림처럼 ‘다초점’, ‘다시점’의 관찰자 시점으로 한 공간에 여러 방향의 그림을 펼쳐 구성하고, 디자인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본 논문에 언급한 ‘다초점’과 ‘다시점’의 디지털 시론은 ‘겹쳐 그리기’와 ‘움직이는 그림’이다. 여러 방향에서 ‘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그린 입체 그림’이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예로 든 것도 디지털 시가 한 방향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를 구성하고 있는 일곱 가지 시 창작 기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첫째, 정물화 기법- 탈관념  둘째, 겹쳐 그리기- 다시점, 다초점  셋째, 움직이는 그림 기법- 상상력의 이동  넷째, 옴니버스 기법  다섯째, 기호 시 기법  여섯째, 모자이크 기법  일곱째,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 바꾸기(변화)      그 중에서도 본 논문에서 강조한 내용은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회화적 용어를 차용하여 ‘움직이는 그림’으로 정의하고 예시작품을 제시하여 분석한 점이다. 그러나 ‘움직이는 그림’은 아날로그 시가 지향하던 표면의 ‘보여주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사물을 투시하여 직관하고, ‘상상력의 이동’을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서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운동감을 준다.   직관은 사물의 내면을 투시하여 뼈 속까지 엑스레이 찍고, DNA를 분석하며 의미를 확장한다. 새로운 사물의 철학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상상력의 이동’은 독자와의 소통공간을 넓히고 참여의 폭을 넓힌다. 또한 시에 운동감과 생동감을 준다. 새로운 감각과 직관으로 사물의 내면까지 투시한다. 본 논문에서는 ‘움직이는 그림-‘상상력의 이동’에 포인트를 두었다. 필자의 새롭게 펼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가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감각의  ‘움직이는 그림’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또한 ‘겹쳐 그리기 기법’도 소개하였다.    제목과 내용, 디자인, 기법에서 실험적이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 규명하는 것이 디지털 시의 목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새로운 감각의 시 창작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소개한 일곱 가지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이 복합적이고 광범위한 디지털 시 창작 기법을 모두 소개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앞으로 내용, 기법, 형태, 등 여러 방향에서 다각적으로 연구되고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실험단계에 있어 ‘과정 수행 중’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시가 완성되고, 새로운 이즘으로 분류될 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디지털 시는 시인과 비평가들의 공격과 혹독한 비난과 질문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디지털 시론은 완성되지 않았고, 디지털 시를 쓰는 시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기법의 작품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과제를 숙제로 남긴다.   이선 시의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     이 선(시인)      이선의 하이퍼시의 특징은 사물시에서 출발한다. 사물시는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에 입각하여‘링크(link)- 리좀(Rhyzome)-무의미 시- 환타지 영상기법- 상상력의 공간이동 및 시간이동’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기법을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필자의 시는 단일구성보다는 복합구성을 갖고 있다.     1. 링크(link)  링크(link)는 두 개의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하이퍼 시의 링크 기능은 , 각 행과 연의 자립성과 독립성이다. 이선의 시에서 하이퍼시의 링크 기능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다음 시는 필자의 「북극에서 온 편지」중 일부다.     “툰드라의 아침밥상은 눈꽃 천지인 걸요…”/ 북극여우가 긴 꼬리로 허공을 흔들며, 빗줄기의 허리를 자릅니다(1연)//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미의 눈빛은/ 북극성(3연)//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수컷의 향기를 뽐내며/ 눈향나무 언덕 향해 달리는, 어린 순록의/ 맑고 유순한 눈빛을 나도 지닌 적 있는데(6연)// 보름달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까?/ 얼음을 녹이는 것은, 내 원죄를 지우는 일(8연)// 나는 퇴화한 꼬리를 치켜세우고, 어둠을 힘껏 문지릅니다/ -흰색이거나 얼룩무늬거나(9연)// 눈향나무 향기로/ 추위를 녹이며, 나의 젖은 몸을 말립니다/ 길은 추울수록, 달빛 투명하고 향기로와서(11행)   위의 시는 각 행과 연이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또한‘제목- 행- 연’은 서로 링크된다. 그러나 위의 1-11연 중‘2연, 4연, 5연, 7연, 10연’을 뺐는데도 시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시의 각 행과 연이 독립적이며 자립적이기 때문이다.  이선의 시는 하이퍼시의 주요한 요소인, 링크 기능을 실현하고 있다.      2. 리좀(Rhyzome)  리좀(Rhyzome)은 그물망처럼 얽혀, 확장되는 기능이다. 리좀의‘이질성, 다양성, 무의미적 단절’은, 하이퍼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은‘중첩 이미지’와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필자의 다음 시「소금꽃을 꺾다」 전문을 읽고‘리좀’기능을 살펴보자.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애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천 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토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4세 여중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소금꽃을 꺾다」 전문    위의 시의 배경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한 공간 안에서 거미줄처럼 합성되어 있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장치한 것이다. 현대문명 속의 부조리한 상황을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하였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한 공간에 마구‘불안’한 현재를 던진다.  위의 시는 ‘신’과 ‘인간’의 ‘질문과 대답’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상투어와 일상적 문장을 거부한다. 그 대화는 혼돈스럽고, 낯설며, 단절적이다. 미성숙한 여중생이 낳은 아기는 곧 외국으로 입양되어‘알렉스’나‘미미’로 자랄 것. 위의 시는 제목에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소금’은 잎도 줄기도 없는 몸통만 있는 사물이다. ‘소금’과 ‘꽃’을 합성한 ‘소금꽃’도 꽃만 있지 줄기나 뿌리가 없다. 꽃받침도 없다. ‘소금꽃을 꺾다’라고 행위를 강조한 제목에 주목하여 보자. 제목이 아이러닉하며 역설적이다. 소금꽃은 꺾을 그‘무엇’이 없다.  ‘사막의 낙타-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도마뱀-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여중생-도둑고양이와 공원’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이동한다. 필자는 리좀 기능을 적용한 사회고발 부조리 시를 발표함으로써, 하이퍼시는 철학과 사유가 없는 말장난이라는 비난을 극복하였다.     3. 무의미 시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는 김춘수가 주장한 ‘무의미 시’이론과는 다르다. 하이퍼시의 무의미 시는 ‘열린 문장’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시의 내용을 한정적이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지시적이거나 명령적이지도 않다. 무의미 시는 불확정적이며 무제한적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선의 다음 시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일부를 살펴보자.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1연)//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2연)//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곧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후회합니다(5연)//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6연)//   위의 시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부적절한 사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어디에도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내용을 중시하는 시 형식이 아니다. 서정시의 지시적이고 명령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이선의 하이퍼시의 문장은 확장적이며 무의미 시에 가깝다. 그러나 김춘수의 무의미시와는 전혀 다르다. 김춘수의 대표적인 무의미 시로 알려진「처용단장」2부-5는 ‘무의미 시’라기보다는, 두 개의 ‘말’과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읊조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무의미 하이퍼시는 각각 다른‘이미지’의 삽입이다. ‘이미지 충돌’로 시를 디자인하고 있다. 김춘수와 필자의 무의미 시의 차이는,‘말’과‘이미지’의 차이다.   당신이 ‘망상중독’이라고 말하는-/ 유칼립투스 꽃을 채취하던, 푸른 달빛을/ 흰 샴 고양이,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 「자서전」일부   위의 시는 몽상적이며,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한정적이거나 지정적이지 않다. 허용적 놓음의 미학이다.   4. 환타지 영상기법     이선의 하이퍼시는 ‘환타지기법’과 ‘영상기법’을 조합하고 있다. 다음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풍경」전문을 읽어보자.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다/ 나는 그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파랑색 벽을 칠한다/ 그녀 눈빛은, 비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네모난 탁자 위에선 레몬차 식어가고// 그녀의 툰드라 언덕에, 나는 야생 히아신스 꽃밭 향기를 내려놓는다/ 두꺼운 스웨터처럼, 내 몸은 그녀의 향기로 체온이 급상승 한다/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흔들며, 어둠을 자른다// 흰 망사장갑은,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조용히 빠져나간다/ 북극곰 발톱처럼 뾰족한 그녀 손가락이, 움켜 쥔 공허// 해빙기, 그녀 심장은 더 이상 얼지 않아서/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노을빛 구름을 뱉어내는/ 북극양귀비꽃 언덕을 지향하고 있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에// 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 툰드라가 녹고 있다// 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 “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          위의 시는 몽환적 ‘환타지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환타지 영상기법’은 시에 운동감을 준다.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여자 손님과 TV에서 상영하고 있는 해빙기의 ‘북극 툰드라’의 모습을 ‘오버랩 영상기법’으로 처리하였다. 낯선 ‘그녀’는 시의 환타지다.   인간의 DNA는 남의 연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호기심이 많다. ‘그녀’와 해빙기의 툰드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이질적 환경에‘적응’해야 하는 위기의 목표가 있다. 툰드라의 ‘북극양귀비꽃’과 그녀는 치환은유 관계다. 시인의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전개하여 ‘보여주기’한 것이다.  김용오 시인은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에서, 이선 시의 특징을 ‘환타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무의미한 언어유희로 전락시키지 않고, 의미화를 추구한다. 인간과 환경을 깊이있게 다룬다.    5. 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   필자가 최초로 명명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은 필자의 다른 논문에서 여러 번 언급하였다. 이선의 하이퍼시의 한 특징은 상상력의 확장이다. 그 효과는 문장의 감각적 미의식과 운동감이다. 문장 표현이 신선하고 젊다. 이선의 하이퍼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순간이동’한다.   상상력의 ‘공간이동, 시간이동’을 통한 ‘순간이동’의 시는 ‘대비효과’가 크다. - 색상대비, 문명대비, 시적거리가 먼 것 끼리의 대비. 확장성, 연상의 폭이 넓다. 이선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머니의 눈빛은/ 북극성// ―「북극에서 온 편지」 3연 1-3행   이질적인 것들이 한 공간에서 조우한다. ‘툰드라’와 ‘북극성’은 먼 이질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친밀한 대상을 끌고 와서, 화자와 밀접하게 연결하였다. 상상력으로 먼‘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현대에 초대하였다.     바람이 꽃씨의 발화점을 외우는 동안/ 바다는 구름을 잉태하지/  늙은 토인여자의 자궁은, 그린파파야 향기// ―「탁상공론 문명일지」 부분  ‘바람과 꽃씨, 바다와 구름, 늙은 토인여자와 그린파파야 향기’는 이질적인 사물들이다. 그러나 한 문장에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친화적 관계로 만들었다.     꽃잎 문을 닫는, 저녁입니까?/ 별빛 부엉이 항문을 닦는, 저녁입니까?//  고비사막, 켜켜이 쌓인 주름살커튼을, 펼치는 저녁/ 두물머리에는, 황사비, 초미세먼지 자욱자욱,/ 물결을 지우는 데 말입니다// 맨드라미 꼬불꼬불, 꽃길에 갇혀/ 별빛에 몸을 적시며 잠들어도 좋은 저녁인데 말입니다/  -쉿,/ 꽁지 붉은 어미 새,/ 대문 우편함에, 새끼 일곱 마리를 부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녁입니까?」 1, 5, 8행    같은 저녁이지만 각각의 저녁은 의미가 다르다. 위의 시의 ‘저녁’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대비시키고 있다.‘환경파괴’와 ‘생명의 잉태’라는 이중적 메시지를 던진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환타지성과 운동감, 전이와 반전의 매력을 연출한다.     이사벨라섬 항문을 간질이며, 춘분점이 지나간다/ 축축하고 비릿한 땅거미를 삼키는/   갈라파고스 거북,// 용암(Lava)을 삼킨 ‘아술산’ 입술, 석양에 붉다// ―「갈라파고스Galάpagos 섬에서」 4행    “ 내 안의 시가 날 잠재우지 않아”/ 내 춤의 날개인, 우주의 긴 푸른 스카프에/ 소리와 빛을 담고, 나는 뜬 눈으로 그의 꿈을 지킨다// ―「이사도라 덩컨」 끝행   위의 시는 시간과 공간으로 이미지가 확장되어 흐른다. 확장된 이미지는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하는 감각적 미의식을 갖는다.  6. 결론 ‘링크- 리좀- 무의미 시’는 하이퍼시의 기본 시론이다. 필자의 하이퍼시의 구조와 시창작 기법은 위의 기본 하이퍼 시론을 포괄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또한‘환타지 영상기법-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었으며, 하이퍼시 창작기법을발전시켰다.  유미주의 시는 표현주의를 지향한다. 하이퍼시는 표현주의에 적합한 시다. 그러나 필자의 시는 표현주의가 지향하는 감각적 미의식과 사유와 철학을 동시에 추구하며 젊은 시를 생산하고자 노력하였다.      예감처럼, 꿈처럼 시는 온다. 필자는 시를 쓸 때, 꿈속 같을 때가 있다. 꿈을 꾸고 나면, 과거 언젠가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 현실의 극한 상황이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평자와 독자에게 ‘하이퍼시’가 앞으로 예리하게 조명받기를 바란다. 또한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기법도 예민하게 독창적으로 발전할 것을 확신한다.  **       하이퍼텍스트 詩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년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크로스오버시대의 몽상 시인     유한근 문학평론가 · 전 SCAU대 교수       이선 시는 난해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난해시는 아니다. 시의 종류에 난해시는 없다. 그러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난해시라는 종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난해시는 편의상 구분이지 그 경향의 시는 없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시를 이해하는 데 이해하기가 까다로울 뿐이고 낯설기뿐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이선의 시가 그러하다. 낯설고 이해하는데 까다로울 뿐이다. 이선 시인은 첫 시집을 이른바 ‘퍼포먼스 시집’이라고 명명하고, 《빨간 손바닥의자》(2012. 시문학사 간)라는 이름으로 묶어 냈다. 이 시집의 ‘시인의 시론’ 〈나의 하이퍼시 쓰기에 대한 견해〉 결론에서 이렇게 하이퍼시에 대해 언급한다. “하이퍼시는 앞으로도 많은 공격을 받을 것이다. (…) 하이퍼 시인들도, 천편일률적인 단어조합에 머물지 않고 시적 진정성과 표현의 새로움을 찾기 위해 더 고민하여야 한다. 하이퍼 시인들이 비슷한 닮은꼴 시들을 양산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 하이퍼시는 예술의 필요조건인, 유일성과 창조성, 철학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하이퍼 시론에 입각한 개성적이고 변별력 있는 작품을 생산해 줄 것을 과제로 제안한다”고 마무리한다. 이는 시인의 하이퍼 시에 대한 일단의 시론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며, 이선의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에서도 ‘시인의 에스프리’로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 기법〉을 묶여, 자신의 시론과 시에 대한 해설을 게재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의 시를 하이퍼 시의 시각에 맞추어 보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탐색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살펴야할 문제는 그의 하이퍼 시에 대한 시단의 평가이다. 문덕수는 이선의 첫 시집 서문에서, 그의 시를 “일률적으로 하이퍼시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며 “그녀의 시는 매우 다양”하다. “그녀는 하이퍼 시라는 전제로 시를 쓰지 않”는다. “모더니즘, 전통시, 낭송시, 드라마-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이 돋”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1)하이퍼성은 시의 본질적인 구조의 확대하는 점, 2)하이퍼시에서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반드시 ‘거리’를 두어야 함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거리’는 J.C. 랜슴의 ‘심미적 거리(審美的 距離 aethetic distance)’임도 밝히고 있다. 이에 반해 첫 시집의 해설을 쓴 심상운은 〈퍼포먼스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에서 그는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퍼포먼스 시집을 평가하고,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정신”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를 전제하고, 나는 다른 시각에서 이선 시에 접근하려 한다.     1. 하이퍼시 혹은 시네마 포엠   먼저 시 한 편을 보자. 이 시집의 표제시인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이다.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은 남미 에콰도르에 있는 원시적 풍광이 그대로인 휴양지이다. 이곳은 밝은 파란색 발의 새인 ‘부비’가 유명하다.     갈라파고스 섬에는 파란 발의 새가 산다 바다코끼리를 향해 활을 겨누는, 원시사내의 팔뚝에 조개를 삼킨 새가 부리를 닦는다 “달빛 잎눈이 점점 어두워가요, 초록바다에 지쳤어요” 맹그로브나무 그늘에 누워, 원시여자는 맨발로 벌거벗은 원시사내의 무성한 가슴털을 헤집으며 투정한다 “들꽃이 시들었구려, 비단뱀 옆구리에 기대어 낮잠을 청해 봐요” 원시사내는 원시여자의 조그만 발을 쓸어 당긴다 (사내의 거친 숨소리, 주술처럼 여자는 눈을 감고) (열아홉 개 작은 섬, 슬몃슬몃 눈을 뜨고)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전설’을 들려주는 바다이구아나, ―갈라파고스 거북이, 귀를 쏭긋쏭긋 다윈의 노란 손바닥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핀치 새가 베로~롱 베~롱 쫑쫑 낮잠꾸러기, 이사벨라 섬을 깨우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 전문     이 시의 표현구조는 희곡적이다. 대사와 지문의 형식을 시의 구조로 차용한다. 한때 장호, 문정희 시인이 벌였던 시극운동의 ‘시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연극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영상·영화적인 요소가 다분한 시이다. 영화의 한 신(scene)을 보듯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단순한 시의 이미지가 아닌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여러 개 모여 하나의 시퀀스(sequence)를 보여준다. 이런 구조로 시를 길게 쓰면 한 편의 단편영화의 영상을 보는 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나는 ‘영상시’라 지칭했는데, 기존의 영상시가 인터넷 상에서나 지면상에서 시와 그림이나 사진을 같이 게재하고 영상시라 불렸다는 점에서 적절한 명칭이 아니기 때문에 시네마포엠, 혹은 영화시, 영상·영화시라 지칭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 시는 대사와 액션, 그리고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 영상시대의 젊은이들의 구미에 맞는 ‘실험시’이다. 나는 여기에서 실험시라는 언어를 사용했다. 실험시라는 언어가 진부하고 도식적인 명칭이라 해도, 이 시는 시의 영역을 확대시켜 나가는 새로운 지평의 시 반열에 종속되기 때문에 편의상 그런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하이퍼시 혹은 퍼포먼스시도 이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선은 첫 시집의 ‘시인의 시론’에서 “하이퍼시가 엘리엇보다 발전된 ‘사물시’를 쓰면서, 연과 연의 ‘낯설게 하기’를 실현하여 하이퍼시가 주장하는 ‘객관화’를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하이퍼시가 엘리엇보다 발전된 ‘새로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엘리엇보다 앞선다. 문덕수가 ‘하이퍼시론’으로 주장하는‘무의미’ 시론은, 독자에게 감각의 새로움과 새로운 미의식, 무한대의 상상과 자유를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그러나 하이퍼시 쓰기에서는 주제는 ‘드러나지 않게’, 시적 표현은 ‘강렬’하게 써야 한다. 미의식과 상상력을 증폭시킬 것, 주제보다는 ‘표현주의’를 지향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렇듯 이선은 하이퍼시에 대한 신뢰가 강렬하다. 나는 이에 대한 반론이나, 설명을 덧붙일 생각은 없다. 다만 여기에 주목해야 하는 부분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인데, 이러한 상상력의 실현은 위에서 언급한 시네마 포엠에서는 필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1〉에서의 시적 공간과 시간이 1연 → 2~5연 → 6연 → 7연으로 자연스럽게 구조되고 있다. 1연의 파란 발의 부비와 원시사내가 공간과 대상을 이동해서 한 신(scene)을 보여주고, 다시 이동하여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전설’을 들려주는/바다이구아나,/갈라파고스 거북이”의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핀치새와 이사벨라 섬으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의 모티프는 지쳐 있는 초록바다, 그 적요를 깨우는 것은 지문처럼 처리한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깨어, “(주술처럼 여자는 눈을 감고)”, “다윈의 노란 손바닥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핀치 새가 베로~롱 베~롱 쫑쫑/낮잠꾸러기, 이사벨라 섬을 깨우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는 상승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이다. 평화롭고 적요한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을 깨우는 것은 새의 비상과 사내의 열정이다. 이렇게 설명되면 이 시의 주제는 분명해진다. 시에 있어서의 주제는 관념적인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어떤 느낌, 분위기도 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 풍경〉도 같은 맥락의 시이다.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 북극 해빙기의 TV 다큐의 장면을 보고,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재생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서의 모티프는 위에서 인용한 시행이다. 해빙과 사랑이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툰드라가 녹고 있다//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시  결말 부분)가 그것이다. 한 편의 짤막한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그 영상은 TV 영상을 모사했다 하더라도, 시인의 상상력을 투과하여 나온 움직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시인의 미학이 함유되어 있다. 예컨대 북극의 흰색 이미지에서 파랑색 벽, 레몬차,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 노을빛 구름, 북극양귀비꽃 언덕, 백야의 푸른 들판으로 공간이동 되면서 색의 이미지가 변용되어 시의 미학을 빛낸다. 시 〈소금꽃을 꺾다〉에서도 이런 시학은 엿보인다.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 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에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000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 -시 〈소금꽃을 꺾다〉의 서두 부분     이 시의 질료는 위에서 보듯이 모래고양이, 낙타, 그리고 뱀이다. 이 질료의 연결은 푸른색 이미지를 통해서이다. 이 시의 공간은 사막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상공에서 서울 거리로, 서울 거리에서 파푸아뉴기니로 이동하지만, 이 시의 모티프는 ‘입양’ 문제이다. 어미낙타와 새끼낙타 이미지를 통해서 한국의 유아 입양을 비판하는 시이다.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11세 초등학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제목 ‘소금꽃을 꺾다’의 의미는 뜬금없다. ‘소금꽃’은 염전의 물기가 증발하면 남은 엉긴 소금 결정을 비유한 언어다. 그리고 땡볕에 땀을 많이 흘려 마르면 옷에 하얗게 생기는 얼룩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그것을 꺾다는 의미가 이 시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인데,의미 단절을 느끼게 한다. 아니면 터무니없지만 인천에 소재한 소금꽃 도서관에 설치된 영·유아 수면실을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 〈까미유 끌로델의 외출〉의 구성은 신(scene) 표시인 ‘#’ 표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이야기를 세 토막의 신(#)으로 구성한 것으로, 시인은 자신에게 까미유 끌로델을 투영시켜 그녀의 입장에서 극적으로 노래한다. #1에서는 “빨강, 주황, 흰색 아네모네 꽃을 내 젖가슴에/탐스럽게 그려 줄래요?”라고. “오, 나의 어여쁜 신神이여”라고 부르는 시적인 ‘당신’에서 구어체로 노래한다. “북두칠성 자리에 둥둥 떠 있어요/나는 그 별을 ‘나의 거북이별’이라고 불러요/나는 ‘나의 별’에 천년 동안 등뼈를 문질러댔죠”라고 노래하는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북두칠성을 거북이별로 인식하는 것은 시인의 주관정신에 의한 것이라 해도 그 별을 천년 동안 등뼈를 문질러댄다는 의미는 동질성에 대한 희구 혹은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열리는, 돌의 입술/오, 돌의 처녀성”라고 인식한 것은 까미유의 침묵을 시적 화자와 동일화하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다. 그리고 #2에서는 ““아~악, 난 미치지 않았어요!”/점점 야위어가는, 수백만 년 풍화된 흰 돌의 갈비뼈/내 천재를 염탐질하는, 당신/차가운 회색 눈,/달그락, 누군가 내 전두엽 뚜껑을 열어요//로댕의 길고 하얀 손톱이 돌의 입술을 찢어요”라고 까미유의 천재성을 시기했다는 로댕과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다. 그리고 #3에서는 “로댕, 당신 눈동자가 어두워요/나의 미소로,/당신 눈동자를 반짝반짝 닦아 드릴게요//별똥별 우르르 쏟아지는, 봄밤/아직, 아기별은 등불을 끄지 않았나요?//1억 만년 뒤에도,/로댕, 나는 당신의 초록별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라고 로댕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 시의 제목 ‘까미유 끌로델의 외출’의 의미는 미지수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구절 1억만 년 뒤에도 당신이 초록별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 그녀의 외출일지도 모른다.     2. 해체와 융합시대의 실험시   하이퍼시에 대한 실험 이외에 이선 시인이 실험하고 있는 시는 종교와 신화와의 크로스오버적 해체와 융합이다. 그리고 이에 덧보태 문화역사적 인물에 대한 자신 나름의 인식을, 한편에서는 혹은 하이퍼시에서 실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가 우리 시단에 없던 바는 아니지만 이 또한 이 시대에 적절한 시적 실험이다. 시 〈붓다를 찾아가는 길〉을 먼저 보자.     기원문 AUM 오~옴 aapyaayantu mamaaN^gaani vaakpraaNashchakshuH 아피아얀투 마만가니 박프라나샥슈흐 shrotram atho balam indriyaaNi cha sarvaaNi 슈로트람 아토바람 인디야니 차 샤르바니 오움 나의 팔 다리와 내가 하는 말, 호흡 눈, 귀를 강하게 해 주소서, 나의 감각들이 활력을 얻도록 해 주소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다가 네가 잠들었느냐, 네가 무지개에 두 다리를 걸치고 거꾸로 누워 온 세상을 측은히 내려다보느냐, 네가 곤히 잠들었으나, 정신은 청량하더냐, 머리가 땅에 닿아, 세상이 답답하더냐, 불면과 편두통에 시달렸더냐, 두 팔이 자꾸 길어져 온 땅을 네가 감싸 안는구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안에 부처가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네 입이 세상 허물 다 받아들여, 완도 앞바다가 되었구나, 반야산, 수효사 안고 우주의 심지가 되었구나,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네 안에 부처가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시 〈붓다를 찾아가는 길〉 전문     위 인용시에서의 “AUM 오~옴”은 불교의 진언眞言인 산스크리트어 ‘옴’일 것이다. 이 음절은 헤브라이어의 ‘아멘’과도 같은 것으로, 이 언어의 의미는 태초의 소리,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으로 본다. 부처에게 귀의하는 자세를 상징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고대 인도에서는 종교적인 의식 전후에 암송하던 신성한 음이었다고 한다. 그 “오움”을 시인은 “나의 팔 다리와 내가 하는 말, 호흡”으로 인식하고, “눈, 귀를 강하게 해 주소서, 나의 감각들이 활력을 얻도록 해 주소서”라는 기원문으로 대신하는 음절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을 이 시에서는 전문前文 혹은 전연前聯으로 서두에 놓는다. 이 시에서의 ‘너’는 시인의 특정 사람일 수도 있지만, 불특정한 사람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다가 네가 잠들었느냐,/네가 무지개에 두 다리를 걸치고/거꾸로 누워 온 세상을 측은히 내려다보느냐”을 보면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나기 전 선혜보살로 보인다. 천상계에서 미륵보살과 함께 수행을 하다가, 지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마음에서 미륵보살보다 먼저 천상에서 내려와 싯다르타 왕자로 태어난 선혜보살로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 전개되는 시행을 볼 때, ‘너’는‘깨달음을 얻기 위한 사람’, 깨달아 부처가 된 사람으로 보인다. 이 시의 제목이 ‘붓다를 찾아가는 길’에서 붓다의 의미가 석가모니라기보다는 ‘깨달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특징은 3행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네 안에 부처가 있다/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의 반복이다. ‘옴’의 반복처럼 반복한다. “울지 마라. 네 안에 깨달음이 있다. 가자. 가자.피안彼岸으로 가자. 우리 함께. 아 깨달음이여. 영원永遠하라”라고 반복한다. 진언으로 지속적인 기원을 하듯이 음을 반복하면서 운율을 통해 무의미공간에 이르는 시적 트릭도 이선 시의 특성이다.     주여, 내 몸의 마디는 부끄러움과 죄로 뚱뚱합니다 마조히즘으로 뭉쳐진, 내 관절의 혹들 겨울밤, 가난한 초록별들은 지독한 마디의 아픔에 〈보라색 형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만, 학자들은 〈밤나무혹벌〉이라 분류하여 명명합니다 내 마디의 벌레혹들, 초봄에 비밀리에 잉태하여 보리밭에 종달새 알을 낳을 때쯤, 무성하게 자랍니다 눈의 조직들, 3-6개씩 무더기로 산란하고 유충을 부화시켜 원죄의 잎사귀 왕국을 번식시킵니다 (…) -시 〈저녁에 드리는 기도〉 첫 연에서     시 〈저녁에 드리는 기도〉는 위에서 보듯이 가운데정렬로 시행을 모아 놓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 모양이 의미하는 바 형벌과 종교적 상징인 십자가의 중앙 집중을 염두에 둔 배열로 보인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기 때문에 시의 모티프와 일치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첫 행 “주여, 내 몸의 마디는 부끄러움과 죄로 뚱뚱합니다”라는 속죄의 고해만 보아도 그러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종교적 상상력이 시적 화자의 몸의 마디인 관절의 혹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밤나무혹벌’로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밤나무를 자기화하여 죄의 표상인 관절의 혹을 밤나무혹벌로 연결시켜 나가는 발칙한 상상력이 춤추는 꿀벌로 그것을 “반전과 아이러니의 원”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벌레들이 탐내는 유충으로 그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그런 뒤 이 시의 결말부분에서 기도한다. “주여, 벌레들이 갉아먹다 남긴 부끄러움으로/겨울 별꽃 밭에, 하얗게 한 줄 시를 쓰게 하소서”라고. 이렇듯 이선의 종교적 상상력은 〈붓다를 찾아가는 길〉와 〈저녁에 드리는 기도〉에서처럼 신앙고백적인 기원의 의미보다는 시를 발상하는 모티브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아이러니적 표현구조로 시를 차용하여 종교신앙시로서의 가치를 거부한다. 시 〈성덕대왕신종〉과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는 《삼국유사》를 모티프로 한다. 《삼국유사》를 원형으로 하여 시로 형상화한 작품은 대표적으로 미당의 많은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미당의 시가 변용된 소재로 불교적 상상력을 통해서 불교사상을 함유한 시를 쓰는데 비해, 이선의 시는 질료와 차용할 뿐 그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변형시킨다는 점이 다르다.     누구의 목소리인가? -에밀레, 에밀레 어느 잃어버린 왕조의 꿈에 좌표를 긋고 달려오신, 당신 불국사 다보탑, 돌사자 머리에 접혀져 -에밀레, 에밀레 4월, 벼이삭 돋아나는 함성 6월, 보리이삭 익히는 바람소리 삼국유사 13페이지부터 소리의 굴절은 시작되었다 탑돌이 하는 신라 처녀, 하얀 버선목 살결 소리 -에밀레, 에밀레 해당화 꽃잎 위로 별빛,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 청동곰팡이에 섞인 미나리아재비 냄새   비천상 선녀여, 역사의 꽃뿌리 더듬고 있더냐 한반도 긴 맥박 소리, 함성으로 뭉쳐 한라에서 백두까지 힘차게 뻗어 천년 동안 숨죽인 소리의 뿌리 “어허 둥둥∽, 에밀레∽ 에밀∽레∽∽” 소리의 투명한 관을 열고, 맨드라미꽃 낮잠을 깨운다 -시 〈성덕대왕신종〉 전문     위의 〈성덕대왕신종〉은 “에밀레, 에밀레”라는 신종 소리가 “4월, 벼이삭 돋아나는 함성” 소리로, “6월,보리이삭 익히는 바람소리”로, “삼국유사 13페이지부터 소리의 굴절” 소리로, “탑돌이 하는 신라 처녀,하얀 버선목 살결 소리”로, “해당화 꽃잎 위로/별빛,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로, 급기야는 “청동곰팡이에 섞인 미나리아재비 냄새”로 도도한 역사의 물결처럼 내려와 “한반도 긴 맥박 소리, 함성으로 뭉쳐/한라에서 백두까지 힘차게 뻗어” “천년 동안 숨죽인 소리의 뿌리”로 남아 “‘어허 둥둥∽, 에밀레∽ 에밀∽레∽∽’/소리의 투명한 관을 열고, 맨드라미꽃 낮잠을 깨운다”고 성덕대왕 신종을 인식하고 쓴 시이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의 꽃뿌리를 더듬”는 “비천상 선녀”로도 인식한다. 신화를 원형으로 하여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쓰는 시나, 또는 신화를 화소로 하여 제재전통에 맥을 같이하는 시는 우리 현대시에서 소중한 자산이다. 이에 시에 대한 가능지평을 이선의 시는 열어 놓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강가에 서성거리는 사슴을 잡아먹고 황색 암구렁이, 한 마리 여러 마리 수컷과 둥글게 한데 엉키어 구애를 하네 물속나라에도 꽃 피고, 잎이 돋네 몸을 휘말고 황색얼룩무늬를 잉태하네 ―대지의 어머니, 고구려 유화   백 번, 죄가 허물을 벗네 -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 전반부     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는 위의 예시에서 보듯이 유화와 주몽을 모티프로 한 시이다. 국보 제259호인 ‘분청사기 구름용무늬 항아리’는 회청색 바탕흙의 몸체에다 상감 장식의 역동적인 용을 조형한 분청사기다. 황색 바탕의 사기가 아니다. 이 시의 화소가 된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가 있는지는 몰라도,국보 제259호를 상상력으로 변용하여 쓴 시로 보인다. 그 무늬를 시인은 위의 시에서 보듯이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신화를 시적 상상력으로 황색 암구렁이가 수컷의 구애로, 황색얼룩무늬를 잉태하는 것으로 신화를 새롭게 창조한다. 그리고 이 시에서 “대지의 아들, 주몽” 신화는 “하늘과 땅이 껍질을 벗고/꽃물 흘러, 흘러 유화의 자궁 속”에서 잉태하여 “천둥 번개 타고 구름 속으로, 용이 승천하”는 것으로 표현하다. 그리고 ‘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를 “함지박만한 달이/황색구렁이 몸통에 올라앉아 힘을 주”어 “광활한 우주가 알을 낳는” 것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이미지로 그려낸다.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 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   바다뱀이 S자로 리드미컬하게 헤엄칩니다 파란 발광체를 발사하는, 등줄기 깊은 바다에는 도로가 따로 없습니다 천지사방 어느 방향으로든 새 도로가 납니다 물고기는 부리로 초고속 도로를 내며 헤엄칩니다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 달빛은 어둑어둑 춥습니다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에서 두-둥 빈 소리가 납니다 젖은 낙엽 어디쯤에선가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 밤 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당신은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곧 후회합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 -시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 전문     랭보와 베를렌느는 프랑스의 동시대 시인이다. 십대의 나이로 파격적인 시를 쓴 랭보의 천재성에 매료된 베를렌느. 그들의 열정과 광기를 그린 영화가 〈토탈 이클립스〉(1995년)이다. 이 영화를 모티프로 삼아 쓴 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 랭보와 베를렌느의 나이 차이는 10살이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베를렌느가 랭보보다 다섯 해를 더 산다. 랭보는 조숙하고 반항적인 천재시인이며 방랑시인이다. 이 둘이 만난 해는 랭보가 16살일 때이다. 랭보는 ‘견자(見者, voyant)의 편지’에서 베를렌느를 칭송함으로써 그와 만나게 되고 끝내는 베를렌느를 아내와 자신 사이에서 방황하게 한다. 이러한 이들의 광기와 열정을 위의 시〈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는 그들의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 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들의 실제 관계를 비유한 것인가. ‘푸른 침대’는 베를렌느의 아내이고, ‘흰 구름’은 랭보의 천재성과 영혼이며, 부러진 연필심은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랭보에게 권총을 발사한 베를렌느의 총이거나, 그로 인해 일찍 절필하게 되는 랭보의 시 창작일까? 이러한 배경을 1연에 깔고, 2연에서는 깊은 바다의 바다뱀, 물고기의 해로海路, 사랑의 면허증,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의 빈 소리,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당신으로 이미지를 단절적으로 연결되어 진행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불연속적인 연결이 하이퍼시의 기법인지에 대한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시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시적 화자의 이미지가 구축된 마지막연이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곧 후회합니다/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도 ‘당신’이라는 시어가 두 번 노출된다. 마지막에서의 ‘당신’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떠난 바다뱀이라고 할 때, 그 바다뱀이 의미하는 바는 불확정적이다. 다음 행의 미장원과 관계된 객관적 상관물로 머리카락 혹은 머리의 가르마라는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이 또한 불투명하다. 그래서 그의 시가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는 셈이다. 행과 행,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비약적이고 단절적이라는 점에서이다. 그리고 마지막행인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된다는 표현은 수미상관법에 의해 장치미학이기는 해도 이 천재시인들의 열정과 광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해와 달과 별이 내/줄기세포를 키우는가 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동자, 예민한 입맛/가는 목소리, 위의 크기와 창자길이,/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페이지가 접혀,/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토스토에프스키,/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나의 詩도 파랑색이다./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나무들 밑둥 잡고, 오늘도 땅에다 부지런히 글씨를 쓴다/제 생각을 뿌리 채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내/내 할딱이는 심장에 마저 붙여주고 갔듯이,//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시 의 전문     위의 시의 제목인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는 주에 의하면 “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선 시인의 다른 시보다 이 시는 비교적 쉽게 자신을 드러낸 시, 혹은 자기 고백시라는 판단이 든다. 이 시는 굳이 설명이나 해설이 요하는 시는 아니다. 그냥 읽으면서 이해해도 좋을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선은 좋은 시, 새로운 시, 독자들에게 충격 혹은 전율을 주는 시를 쓰려고 부지런히 공부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사전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관련서적을 뒤져봐야 한다.그의 상상력은 어떤 때는 지적이고 정적일 때도 있지만 대범하고 발칙하다. 앞서 개진했지만, 이미지 연결의 비약성과 예기하지 못한 이미지의 증폭 등은 낯설게 하기가 아닌 그의 시의 참신성과 독창성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니체, 보들레르, 토스토에프스키,/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등에 대한 흠모와 그들 작가들의 문학혼에 대한 탐색은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 시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공부해서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나의 詩도 파랑색이다”의 키워드인 파랑색 이미지가 의미하는 바 젊은 시를 쓰는 감성적인 시인이며 판타지를 몽상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우리민족의 전통적인 정신사와 역사에 한 발을 디뎌놓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통시적으로 시간이동과 공시적으로 공간이동이 가능한 크로스오버시대의 첨단을 몽상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하이퍼시와 포스트구조주의                                             심 상 운     1, 롤랑 바르트의 이상적 텍스트와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해체 비평으로 넘어가는 접점에 위치한『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 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langue)를 말하면서‘저자(著者)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記意)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의 이론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 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가 아닌‘기표(記標)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단위(unit)들로 형성된‘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이미지들은  ‘의식의 링크(link)’에 의해 연결된다. 이 링크는 하이퍼텍스트의 용어이지만 하이퍼시에서도 사용된다. 그 단위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단위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땅속줄기들의 연결과 같은 개념으로도 인식되는 이 흐름은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想像)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공간도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구조(경계)를 고수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이퍼시 구조의 특성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전통적인 시에서 중요시하는 메시지(주제, 관념)의 전달보다 상상이나 공상(空想) 속의 현상(現象)에 대한 감지(感知)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고정된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이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에서 찾게 된다.   이러한‘무경계(無境界)의 기법’은 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경계를 만드는 분절선(分節線)들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층(層)이나 영토(領土)를 만드는 선(線)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은 인간의 전통적 의식에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無意識)의 사고(思考)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자연(自然)에 더 가깝게 접근된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위계적(位階的)이고 계층화, 영토화된 철학적 사고를 수평적 사고의 구조로 개혁하기 위해서『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이다.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탈-경계의 상상과 사유의 이미지로서 땅속줄기 즉 리좀(Rhizome)의 이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수평으로,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위로 솟아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곁뿌리나 잔뿌리들이 모이는 중심이 없는 덩이줄기들은 가지 또는 줄기는 서로 만나고 흩어지는 방식으로 접속하고 분기(分岐)하며 우발적, 역동적으로 뻗어나가는 생명력을 지닌다. 들뤄즈와 가타리는『천 개의 고원』에서 이런 리좀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책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서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리좀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제시하는『천 개의 고원』은 현대 철학의 한 복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영토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로 인식된다. 이 책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het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 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며 수평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단위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다양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고정된 틀의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사물성),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다양한 이미지들의 결합을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영토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기표의 이미지 덩어리로 인식된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0세기 중엽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Anna Freud)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나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계와 상징계의 차이가 이성에 환상을 개입시키는 작용을 함으로써 인간은 현실적인 면과 비현실적인 면을 공유하게 된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이런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랑그, 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의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에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월간 시문학 2011년 12월호 발표 재료 2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中)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構造主義, structuralism] 이론   좌장: 심 상 운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는 문학에서도 작가들은 기존의 글들을 혼합하는 능력, 재조립하거나 재배치하는 능력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이미 씌어진”언어와 문화의 방대한 사전에 의존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존 베일리는 구조주의 문학론이 문학작품은 작가의 창조적 삶의 산물이며 작가의 본질적 자아를 표현한다는 기존의 관념을 거부한다는 것, 소설이나 희곡이 ‘사물을 있는 대로 말해’주려 한다는 종래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 ‘작가는 죽었으며’ 문학 담론은 어떤 진리의 기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론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호학의 죄는 픽션에서 진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파괴 한 것이다. 훌륭한 이야기에서 진실은 허구보다 앞서고 허구와 분리될 수 있다”는 반구조주의의 이론을 펼친다. 따라서 구조주의는 문학에서도 철학과 같이 ’반인본주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1. 언어학적 배경 언어는 그 자체 안에 독립된 상관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은 글이나 말 속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끌어낸다는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스위스 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구조주의 형성의 토대를 만들었다. 소쉬르는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체계의 개념’을 언어학에 도입시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구조주의적 사유방식의 기초가 만들어졌으며 그의 언어학적 모델은 다양한 사회 문화 현상들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에서 그는 ‘언어학 연구의 대상은 무엇인가’와 ‘언어와 사물의 관계는 무엇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세 가지의 이론으로 내놓았다. 그 첫째가 언어의 체계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별한 것이다. 랑그는 한 언어의 발화들의 기저를 이루는 형성 규칙들과 패턴들의 총체이며, 빠롤은 실제적인 발화들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랑그는 언어의 사회적 측면으로서 우리가 화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는 공유체계인데, 반해서 빠롤은 이 체계가 언어의 실제 용례를 통해 개별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랑그와 빠롤은 그의 언어학에서 기본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둘째는 언어학에서 언어의 통시태보다 공시태를 강조한 것이다. 공시태는 정해진 시점에서 작동하는 동시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며, 통시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언어 체계와 그 요소들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소쉬르는 통시태보다 공시태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여 언어가 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특정한 시점의 언어 구성요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빠롤에 대한 랑그의 강조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곡이 다른 기회에 다른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어도 같은 곡으로 인정되듯이, 빠롤은 같은 형식이 다른 실체로 실현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랑그는 개인적인 화자가 처한 사회적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호들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런 랑그에 대한 논의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대한 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즉, 소쉬르는 언어 상태가 변한다는 사실도 언어가 공시적인 체계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셋째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본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이다. 여기서 기호란 개념을 의미하는 시니피에(signifie')와 청각 이미지를 의미하는 시니피앙(signifiant)이 결합된 것이다. 즉,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의 결합은 어떠한 필연성 없이 결합한 것으로 단지 그 언어집단의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자의적(恣意的)으로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호의 의미는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기호가 속해 있는 체계 안의 다른 가치들과 맺는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므로 기호의 의미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은 그 기호가 언어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에 대해서 갖는 ‘차이’에 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래의 ‘기호=사물’의 모델이 ‘기호=기표/기의’의 모델로 바뀐 것이다. 이 모델에는 사물의 자리가 없다. 언어의 요소들은 낱말과 사물 사이의 결속의 결과로서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체계의 일부로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다. 기호체계로서의 언어의 독자성은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교통신호체계에서 신호가 ‘빨강-노랑-파랑’ 세 가지일 때, 기표(빨강)/기의(서시오), 기표(파랑)/기의(가시오), 기표(노랑)/기의 (기다리시오)의 약속체계를 갖는 것과 같다. 이때 체계는 일종의 임의적 약속으로 빨강과 서시오 사이에 고유의 절대적인 의미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색깔의 차이에 의해서 생길 뿐이다. 그것은 파랑과 노랑도 같다. 여기서 차이란 대립 및 대조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이다. 예컨대, 신호등 빨강은 파랑이 아님이며 파랑은 빨강이 아니라는 뜻이다. 음성언어도 소리의 차이로 형성된다. 음성언어의 최하위단위인 음소(音素)는 유의미한 음 즉 언어 사용자(발화자, 청취자)에게 인지·지각되는 음이다. 음성언어의 체계는 음들의 관계 즉 대립항들이 짝을 이룬 이항대립의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음소의 차원에서 보면 이 대립항은 ‘비음/비(非)비음, 모음/비(非)모음, 유성음/무성음, 긴장음/이완음 등이 있다. 이런 언어관의 요점은 언어 사용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하나의 ’체계‘ 즉 구조라는 점이다. 이런 구조는 화자들이 내재화하고 있는 언어능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저절로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은 동일한 이론적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254    조 향의 초현실주의 문학의 이론과 기법/김 석 댓글:  조회:1177  추천:0  2018-01-28
조 향의 초현실주 문학의 이론과 기법       김 석(시인, 퇴계학회 회원)     1. 들어가는 말   1959년 고 3의 가을 한 날이었다. 학교 교문을 나서는데 길바닥에 책들을 펼쳐 팔고 있었다. 그때 나는 두 권의 단행본과 『向學』이란 잡지 한 권을 샀다. 집에 돌아와 향학의 책장을 넘기다가 박스 안에 사진과 함께 『초현실주의』의 문학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동아대학 조 향 교수님을 접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지원서를 냈다. 어찌 생각하면 이것은 문학적 運命이라 할 수 있겠지만 수직적 질서인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던 나에게는 수평이란 反의 논리를 알게 한 동기면서 攝理였다.   유학에서는 걸어가는 존재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이것을 天命이라 한다. 천명이란 하늘과 땅의 허점을 깁는 사람의 중요성을 말한다.내 대학 졸업 앨범에는 영남 7개 대학 국어국문학과 학술발표회의 광경이 실렸고, 단상에는 『이상론』을 발표했던 내 모습이 보였다. 그 때 경북대학에 계셨던 김춘수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나의 발표에 대한 평을 하셨던 조 향 선생님은 자료 정리에 미숙함은 좀 있지만 대학생으로서 이상의 시에 대한 연구발표는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란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다.   5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동대신동 조 향 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던 일본서적과 일본 화집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은 혹 사모님과 의견충돌이라도 있을 경우는 월급의 태반을 책을 사는데 써버린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대학3학년 가을 강의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시를 쓸 때의 기교에 대해 말했다. 시에서 언어와 언어의 낯설게 하기, 또 언어의 충돌이 가져오는 시적 효과에 대해 말했다. 그 때였다. 한 학우의 “선생님 버스를 타고 가는데 차가 급정거할 경우 사람과 사람의 충돌도 언어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의였다. 화가 난 선생님은 하던 강의를 그만두고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질문했던 학생과 나, 그리고 몇 급우들이 당시 문리대학장으로 있었던 선생님을 찾아가 사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때부터 우리들은 선생님의 문학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국문학과의 선후배 중심으로『오후문학』동인회를 결성하였고, 창간호에『ohooism(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본뜬 시 기법의 논리)』을 선포하기도 했다. 졸업 후 나는 신앙의 문제로 인해 선생님이 주관, 부산 광복동과 남포동 사이의 ‘세븐’다방이었던가『일요문학』의 모임에 옵서버로 가끔 참석했었다. 한 날 三四문학의 창간 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이시우 선생(우리나라 최초의 초현실주의 이론인 ‘絶緣하는 論理’를 1935년 三 四문학 3호에 발표)도 뵌 적이 있다. 이후 우리들은 소한진, 김용태, 송상욱, 김 석, 최휘웅 등이 중심이 되어『시와 의식』을 시작하였고, 선생님의 문하생들 중심으로 부산에서『계간 시 문예』『남부문학』등을 이어 발간했다. 이 문학운동에 참여였던 하현식, 최휘웅 그리고 필자는 시문학사의 도움으로 1975년 합동시집『절대공간』을 상재하기에 이르렀다.   절대공간에 수록된 내 시들은 대략 몽환의 세계를 동시동존으로 병치시킨 기교를 활용했다. 책이 발간되고 상경했던 나는 서대문 한 지하다방에서 문덕수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시집의 발간과 Sur문학운동으로 문단의 현실에 맞섬과 적응하기가 어려움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마침 76년 늦가을, 부산여자대학의 문학 강연 차 오신 조연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나는 초현실주의 문학을 이해해주셨던 신동집 선생님의 추천으로 77, 7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다. 그 때 정릉에 사셨던 조연현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조 선생님은 내가 조 향 선생의 제자임을 알았기 때문에 “일단 문단에 들어와서 잡아먹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말씀이었다. 생각하니 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 시절이 그립고 참으로 고마운 스승들이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70년 초 조향 선생님이 학교재단과 불화사건으로 서울로 상경하였고, 나도 80년 서울사리가 시작되었다. 상경 후 선생님과는 주로 서린호텔 다방에서 몇 차례 만나 뵈었다. 1982년 늦은 봄이었던가, 송상욱 시인과 무교동 한 초밥 집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대접한 것이 이승에서 선생님과 마지막 만남이었다. 또 광화문을 함께 걸은 때도 있었는데 선생님이 광화문에 세운 충무공 동상을 보면서 하신 말씀이었다. 장군의 갑옷과 칼이 저렇게 무겁고 커서 싸움이나 하겠느냐는, 이것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치장 일변도의 동상에 대한 비판의 말씀처럼 들렸다. 아마 선생님은 동상의 가치를 오브제의 관점에서 보고 하신 말씀하신 것 같았다.   나는 근래 쓴 민족서사시『광화문』에서 충무공의 의상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 이렇게 썼다. 충무공은 우리민족에게 용장이나 맹장으로만이 아닌 智將으로 또 물때와 물터를 알았던 민족의 神將이라는 입장에서 보았으리라는, 이후 나는 서울사리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선생님이 한 날 가족과 설악산을 등반하다가 홀연 세상을 뜨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혼자서 찾아갔던 한양대 영안실에는 조봉제 선생님과 아드님, 그리고 선생님의 문학을 깊이 이해했던 젖은 눈으로 따님이 검은 복장으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영정사진 앞에는 평소 애연가이셨던 선생의 명복을 빌며 누가 놓아둔 것이었을까, 반쯤 타 들어간 담배연기가 내가 올렸던 두서 향불에 섞여 영정사진 앞을 스쳐 올라감을 보았다.     2. 본론- 초현실주의 문학의 주요 기법들   나의 대학시절이었던 1960년대 초반 우리의 문단과 시의 풍토는 전후 민족주의 정서가 중심이 된 다양한 기법의 시들의 發芽와 정착기였다. 또 주요 문학잡지로는 사상계와 현대문학과 자유문학이었다. 正音社, 을유문화사의 문학전집, 그리고 신구문화사에서 발행된 전후세계문학이었다. 나는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正音, 乙酉문학전집과 신구문화사에서 갓 나온 전후세계문학을 중심으로 책을 사 모아 읽는 일이 나의 하루하루였다.   또 조 향 선생님의 시 창작, 소설 창작 이론 등 나는 당시 리얼리즘의 우리 문학풍토에서 새로운 시의 기법과 창작이론에 호기심으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선생님은 강의 때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super_ego, ego, id), 특히 합리적 이론이나 이성에 눌려 있는 용광로처럼 본능에서 유발된 에너지로 libido라는 미개척 지평에 대한 트리스탄 짜라, 앙드레 브르통, 의식의 흐름을 다루었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이 상 등 낯선 문학의 매력과 경이로움이었다. 또 당시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문예사조의 소개였다. 특히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와 에른스트, 미로 그리고 뒤샹이 뉴욕의 한『안티팡당』전에서 변기통을 『샘』이라 이름 붙인 레디메이드의 전위예술의 강의들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초현실주의의 문학론을 도입 정착시기에 매진하셨던 선생님의 공과와 주요 Sur 주요 기법에 대하여, 점서占筮였던 주역을 자연철학으로 정립시킨 공자의 『述而不作』이란 말씀을 인용, 모서리에 선 마음으로 소개하려 한다.   가. 초현실주의 정의   ①. 쉬르레알리즘 : 남성명사   마음의 순수한 자연현상으로서, 순수한 자동현상에 의하여 사람이 입으로 말하든지, 필기에 의하든지, 또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하든지,思考의 참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 『理性』에 의하여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記述이다.   ②, 百科辭典 : 철학,   超現實主義는 여태까지 돌보지 않았던 어떤 종류의 *聯想形式의 훌륭한 實在에 대한 신뢰에다 근거를 두며, 또한 꿈의 全能과 *思考의 비타산적인 활동에 대한 信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다른 모든 ‘마음의 mechanism’을 결정적으로 破壞하고 그 대신 인생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절대적 쉬르레알리즘’을 실천해보인 사람들은 아라공, 보아파르, 브르통, 카리브, 데스노스, 나빌, 엘뤼아르, 제라르, 수포, 페레, 비트락 등이다.   *,연상 작용: 자유연상의 형식을 가르치는 말 *. 사고의 비타산적 활동 : 이성의 간섭에서 벗어난 proust가 말한 순수의식으로 투명한 순간.   초현실주의 제1차 선언 ; 1924년 파리.   1919년 앙드레 브르통이 루이 아라공, 필립 수포와 함께 『문학』지를 창간하고 1921년 『다다』운동에 가담하면서 주위에 모여든 젊은 작가들과 함께 최면상태와 심적 자동현상에 대한 실험을 계속한다. 1924년 파리에서 본문 70면에 달하는 짧은 글로 된 『초현실주의 제1차 선언』을 한다, 특징은 문학선언의 배경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절대적인 힘을 입고 있다. 또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 Sur운동은 시를 통한 물질문명의 부르조아적 사고에서 정신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여러 조건의 폐지를 위한 선행조건이었다. 그 해 브르통은『초현실주의 혁명』을 창간한다.   *. 1차 선언의 주요 立言들   ①. 만약 인간이 어떤 명철함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유년시절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상상력이여, 내가 특히 네게서 사랑하는 것은 네가 용서를 모른다는 바로 그 점이다.   ②. 오직 상상력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내게 가르쳐주고, 상상력을 통하여 그 可恐할 금지사항을 조금씩 취소시킬 수 있다   ③. 광인의 비밀, 나는 이 비밀을 캐내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 광인이야말로 지나치게 양심적이요, 정직한 사람이다. 그들의 순결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내 순결밖에 없다.   ④. 우리들은 아직도 논리의 지배하에 살고 있다. 저 절대적 합리주의는 우리들의 경험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는 사실만을 취급하기를 허락한다.   ⑤. 프로이트가 그의 비평을 꿈과 결부시킨 것은 정신활동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꿈이 오늘날까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한 시인이 매일 밤 취침 시간에 생 풀 루가 그의 카마레 城 문에 『시인 집필 중』이라는 팻말을 달아놓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⑥.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 날로 可恐해지는 욕망의 줄을 무정부 상태에서 유지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 달린 문제다. 시가 이 사실을 인간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시는 우리가 견디고 있는 비참에 대한 보상을 내포하고 있다.   ⑦. 필기에 의한 초현실적 작문의 방법은 되도록 정신을 집중하기에 적합한 장소(조향 선생님은 馬上, 寢牀, 廁上이라 했다.)에 위치를 정한 다음 필기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갖고 오도록 하라. 되도록 가장 수동적이며 자극적인 상태에 자신을 위치시켜라. 또 ‘문학은 모든 것에 통하는 가장 서글픈 길’ 중의 하나임을 잘 명심하라.   ⑧. 주제를 미리 생각하지 말고 빨리 쓰도록 하라. 기억에 남지 않도록 또는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이 나지 않도록 빨리 쓰라. 첫 구절은 저절로 씌어 질 것이다. 객관화하려는 우리 의식과 다른 동떨어진 구절들이 시시각각으로 떠오를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다.   ⑨. ‘이성적인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통하여 자기가 갈 수 있는 곳에 도달화게 되는 사람들의 순수한 초현실적인 즐거움을 나는 믿고 있다.   ⑩. 내가 생각하고 있는 쉬르레알리즘이란 우리들의 절대적인 非順應主義를 요구하고 있다. 또 우리들이 이 지상에서 도달하고자 염원하는 완전한 해방의 상태만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초현실주의 제2차 선언 ; 1929년 파리.   2차 선언서에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브르통은 1924 ~ 29년 사이 초현실주의 운동을 회고하고, 비판했다. 주로 Sur 운동에 참여했다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제명당한 인물들의 죄상을 열거했다. 今後 Sur의 운동은 문학, 미술, 정치에 있어서 어떠한 타협도 배제하며 ‘그 본래의 엄격성’을 지켜야 된다는 새로운 결의를 다짐했다.   초현실주의의 정치적 태도는 브르통이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던 공산당 이론과 1935년에 절연을 선언한다. 이후 브르통은 공산주의 혁명이론(트로츠키 등) 그 자체는 찬성하지만 구체적인 계급투쟁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2차 선언의 주요 立言들   ①. 꿈과 현실이라는 외면상 지극히 모순된 이 두 가지 상태가 이를테면, 어떤 종류의 절대적인 현실성, 초현실성 안에 있어서 앞으로 해결을 보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을 정복하기 위해 나는 정진한다.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전달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높은 곳과 낮은 곳, 이러한 것들이 서로 모순된 것으로 느껴지지 않게끔 되는 이를테면, 정신의 어떠한 점(至高點, 화엄경의理事無碍法界나 제8 아라야식,Sur와 선과의 만남 가능)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②. ‘가족, 조국, 종교’라는 관념을 없애기 위해 지금 모든 것이 사용되고 또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져야 할 것이다.   ③. Sur의 사상은 우리들의 심리적인 힘을 전적으로 회복시키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 방법이란 내부로의 현기증 나는 하강, 감춰진 곳의 조직적인 조명, 그런가 하면 다른 곳에서는 점진적인 어둠, 그 금지된 야외지역에서의 영원한 산보로.   ④. 나는 Sur가 그 본질에 있어서 명백한 反共産主義이며 반혁명적인 방향을 취하는 정치운동이라고 말하는 지극히 위험한 비난에 대하여 초현실주의를 변호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⑤. ‘고전적으로’ 생각되어 온 것이 선이라고 인정된다면, 모든 악을 확실히 갈망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의 울음소리’로 밖에 선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⑥. Sur는 어떤 특수한 감정의 노예가 된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를 불멸한 것의 속으로 집어던지는 무엇인가, ‘그 자신보다도 더 강한 것’에 붙들리고 마는 그 이상적인 순간을 인공적으로 재현하기를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 계속 원하게 될 것이다.   ⑦. Sur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상당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본래의 목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Sur, 속에서 구출할 부분과 역할은 앞으로 올 사람들의 순수성과 분노에 달려 있다.   ⑧. 인간은 모든 금지사항을 무시하고 사람들과 사물이 갖는 야수성에 대해서 Sur는 사회적으로 마르크시즘의 공식을 단호한 어조로 적용했었지만 프로이트적 사상비판을 소홀히 할 의사는 없다.   초현실주의 제3차 선언 : 1942년 뉴욕   브르통은 1915년 징집된 1차 대전 중 포병연대를 거쳐 신경정신병학부에 배속된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브르통이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임상의학 의사로 복귀한 때이기도 하다. 이 미국에서의 ‘3차 선언’의 발표와 더불어 Sur 운동은 끝이 난다.   3차 선언의 주요 立言들   ①. 나의 내면에는 지나친 ‘北部 기질’이 있어서 아무리 해도 나는 전면적으로 동의하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이러한 ‘北部 기질’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화강암의 자연적인 요새와 또 화강암과 같은 안개를 동시에 갖춘 것으로 보인다.   ②. 어떠한 순응주의도 거부한다는 것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은 Sur가 처한 지나친 순응주의를 겨냥하는 의미도 된다.   ③. 진실이란 남몰래 웃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 결코 그 정체를 붙잡을 수 없다는 저 엄연한 역사적 과정을 고려해 넣고서 나는 항시 계속 될 수 있고, 또 그 지렛대 역할을 하는 소수파를 위해서 내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다.   ④. 인간은 이 우주의 중심도 아니며 조준점도 아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고양이와 개를 기르고 있듯이, 우리도 이 자연에서 고양이나 개가 차지한 만큼의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살고 있는데, 우리 자신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나. 초현실주의 주요 기법들   ①. 고敲가 아닌 퇴推가 되어야 하는 이유.   선생님이 대학시절 강의 때면 힘써 주장하시던 것 중 하나가 퇴고推敲라는 말이다. 당나라 시인 가도와 한유 사이에 있었던 중국의 문헌 상소잡기의 일화다. 이 일화는 시의 구성에서 단어 하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말이다. 시인 가도는鳥宿池邊樹 僧(推)敲月下門에서 ‘두드리다 는 敲’와 ‘밀다 는 推’ 중에서 어느 쪽이 좋은지 결정이 어려웠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韓退之가 가도에게 推보다는 敲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推敲라는 말이 생겼다. 이 일화에 대한 조 향 선생의 말씀은 敲보다 推(僧推月下門)가 더 옳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敲는 상식적인데 반해 推는 동태가 클뿐더러 敲의‘두드리다’와보다는 ‘밀다’는 말이 더 원거리의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상식으로는 늦은 달밤의 절간의 문은 가볍게 두드려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쓴 시라야 공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절간의 문을 ‘밀겠다. 밀었다’는 말씀을 했다, ‘왜 밀어야만 하는가.’라는 결론을 강조하면서 우리들에게‘퇴’의 시법으로 이미지를 선택, 시행의 배열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선생님은 Sur가 말하는 시는 관념이나 상식을 제거하고 언어의 폭력적 결합이어야 한다는 중요성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②. 단절Dēpaysement미학의 논리 선언   하나의 물체나 단어를 본래 있어야 할 위치에서 전혀 다르고 엉뚱한 곳으로 옮겨놓는 것을 데뻬이즈망Dēpaysement이라 한다. 즉 하나의 물체나 단어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롭고 놀라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이미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것은 서로 멀리 떨어진 두 實在를 서로 접근시키는 데서 생성된다. 접근된 두 실재의 관계가 서로 관련이 멀어진 것일수록 이미지는 한층 강렬한 것이 되고 감동적인 힘과 시적 현실성을 띄게 될 것이다. Sur에서 잠재의식의 무한지평으로 이미지는 순수한 창조이다.(브르통은 삐에르 로베르디의 이미지는 정신의 순수한 창조란 말에 대하여, 정신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초현실주의는 ‘근거리연상과 順聯想’을 배제하고, ‘원거리연상과 逆聯想’을 취하는 시적 기교를 쓴다. Dēpaysement의 대표적인 예로 Lautrēamont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갑자기 만나는 것처럼 아름답다”를 든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비합리성과 불가사의를 이용해서 의식적인 사고과정을 분리시키고 기존의 절대관념으로 수직적 언어(종교, 이성,사상, 계급 등)와 상식이라는 규칙적인 수평언어에 대해 금기시된 ‘테러와 에로티시즘’의 예술적 가능성을 개척함으로써 잠재의식 활동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여기서 초현실주의는 조형예술의 언어도 시적 언어로 정립시켰다. Sur운동은 ‘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두었으며, 시를 볼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조형예술을 이용하였다. 의식의 방심상태의 기법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한 앙드레 브르통과 필립 수포오가 합작으로 쓴 『磁場』(1920)이란 시다.   물방울들의 포로가 된 우리들은 오로지 不滅의 동물일 뿐이다. 우리는 소리 없이 도시를 달리는데 魔法에 걸려 있는 傳單들도 우리에게 닿질 않는다. 유리처럼 깨어지기 쉬운 이 크나큰 정열은 무엇에 쓰는 것이며, 이 말라붙은 죽음의 跳躍은 또 무엇에 쓰는 것이냐,우리는 이제 죽은 天體 이외에는 모른다. 우리의 입은 버림받은 海岸보다 더욱 말라 있고, 우리의 눈은 목적 없이 희망 없이 뒹군다.훌륭한 정거장들도 이제는 우릴 만류하지 못할 것이다. 이 단조로운 分秒를 살기 위해서는, 이 걸레조각처럼 찢어진 世紀를 살기 위해서는......아무래도 숨을 틀어막는 수박에, 옛날에는 歲暮의 태양들을 사랑하였고, 또 어린 시절이ㅡ 그 격렬한 江流처럼 우리들의 시선이 달리던 그 좁은 벌판을 사랑하였다. 어리석은 동물들과 낮 익은 초목으로 代替해 버린 그 옛날의 숲에는 다만 反映의 그림자가 있을 뿐 그 빛깔을 식별할 수 없는 어느 날에 우리들은 고요의 벽을 찾아내었다. 벽은 기념비보다 더 굳센 것이었다. 이제 우릴 존경하는 것은 背恩의 죽음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는데, 아무도 이제는 말문을 열 수 없다. 五官이 모두 마비되었으니 장님들이 우리보다 더욱 나은 자였다. 『雅屍體, 1』(조 향 譯, 아성출판사)   ③. 자유연상과 자동기술법   자유연상이란 프로이트가 환자의 발작(환자가 울고 웃으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두서가 없이 지껄이는 것.)이 멈추는 직후의 안정을 갖게 된 것에서 힌트를 얻어 사용했던 정신병 환자의 심리치료요법이었다. 환자의 마음의 고착상태나 콤플렉스를 풀고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하는 좋은 효과를 가졌다. 자유연상의 방법은 심리의 이동과정에서 한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옮아가는 데는 그 사이에 ‘어떤 관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 사이를 잇는 많은 연상의 사슬이 무의식이라는 것을 프로이트는 알게 되었다. 지금은 자유연상법이 탐구적 영역 전반과정은 물론 정신치료의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는 대신 그것을 자유롭게 ‘문자화시키는 것’이었다.   이성을 괄호 안에 넣어 그 기능(인간은 이성과 종교에 의해서 오랫동안 정신이 사육되어 왔고, 광적인 개념에 빠져 있었다. 이 모든 감각을 착란함으로써 인간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브르통)을 중지시킨 다음 저절로 용출하는 의식의 흐름에 記述을 맡기는 것이 자동기술법이다. 이성이 잠깐 비켜선 경우의 ‘의식의 흐름’ 속에 전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 섞여서 溶出된다. 의식의 세계는 연속의 논리에 지탱되어 있으나 무의식의 세계는 단절의 논리에 지탱되어 있다. 무의식의 상태는 일종의 magma의 상태요, chaos의 상태이다. 그 운동방법은 물에 뜬 꽃가루처럼 Brown운동(병치와 수평이동, 꿈, 환상, 동심, 영감에 의한 빙산처럼 생의 심층 등)의 법칙에 따른다. 그것은 비논리적, 반의미적 충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여기서 논리는 즉 이성의 세계인 의미의 세계를 말한다. 브르통의 다음 작품은 사랑의 원리(욕망은 세계 유일의 원동력, 광적인 사랑)를 언어의 질서로 置換시켜 사랑의 계시적인 힘을 끝없이 탐구한다.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자유로운 결합』의 몇 부분이다.     나의 아내에겐 장작불 같은 머리카락이 여름 하늘의 마른번개 같은 생각들이 모래시계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범에 물린 수달의 허리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高光度 행성의 화관과 꽃 리본 같은 입술이 白土 위에 남겨진 흰쥐의 족적 같은 이빨이 불투명 유리와 황갈색 瑚珀의 혀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비수에 찔린 祭物의 혀가 눈을 깜박이는 인형의 혀가 전무후무한 보석의 혀가 있다   (중략)   나의 아내에겐 오래된 봉봉사탕과 해초 같은 性器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거울의 性器가 있다 나의 아내에겐 눈물 그렁그렁한 눈이 보라색 갑옷과 磁針 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겐 대초원의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겐 감옥 속의 마실 것 같은 눈이 있다 나의 아내에게는 언제나 도끼에 패인 장작 같은 눈이 물과 같은 공기 대지의 불과 같은 차원의 눈이 있다   『시적 모험, 20세기 프랑스 시선』(언어의 세계출판사)   나는 1983년 동대문에 있었던 이화여대 정신과 병동에서 정신병자를 치료하기 위한 psychology drama를 보기 위해 이대 정신과 의사였던 이근후박사의 초대를 받았다. 관람객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담당 의사들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이박사의 말이었다.정신병자들의 공통의 말은 “나는 미치지 않았다”는 말이라 했다. 남자환자가 무대에 오를 때는 상대역은 주로 간호사였고, 여자환자가 무대에 오를 때는 인턴이나 레지던트의 젊은 남자의사들이었다. 그리고 무대 위의 장면은 모니터를 통해서 해당의사들이 그것을 관찰한다고 했다. 다음의 시는 청량리 뇌병원에서 실시한 글에서 한 정신병 아이의 시이다.     누나는 나를 미쳤대요   강유익   .빨간 잉크를/ 음료수로 마셨더니/ 누나를 나를 미쳤대요 .파아란 하늘에 떠 있는/ 조각구름을/ 나라고 했더니/ 누나를 나를 미쳤대요 면도날로 이슬을 도려내어/ 내 님이라고 했더니/ 누나는 나를 미쳤대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내 어머니래서/ 누나를 나를 미쳤대요 .아직도 나는/ 황혼 빛에 갇혀서/ 비를 뿌리는 비둘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래서 누나는 나를 미쳤대요 .호수의 썩은 물을/ 빼 버리는 동안/ 나는 그림자가 되어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 청량리 뇌병원에서 실시한 글에서 한 정신병 아이의 시이다.    『초현실주의 문학』(예술 시리즈 2. 오브제 P84)   *. 우리들이 광인에게 가하는 비판과 또 그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교정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가 표시하는 깊은 초탈은 유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망상을 충분히 음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Sur 1차 선언 중에서)   ④. 검은 해학black humour   *. 諧謔이란 정신이 외부의 응시(관조)에 耽溺하고, 동시에 해학이 그 주관적이고 내성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대상(객체)과 그 현실의 형태가 객관적으로 그대로 노출되었을 때 매료를 당한다.   *. 유머는 외관과 절연함으로써 새로운 미학을 발견되고, 객관적인 유머는 우연의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유머는 사회적 편견을 따르지 않고 절망의 가면을 보며, 자기의 침몰을 방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 공포는 어떠한 병리학적인 자기만족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식물의 성장에 있어서의 비료의 역할, 숨이 막힐 듯한 지독한 냄새가 나서 어렵지만 그러나 식물에 아주 유용한 그런 비료의 역할을 할 것이다. 심리적 긴장의 해방이라는 점을 가장 예각적으로 고찰한 사람은 프로이트다. 그는 Libido(심리적 에너지지) 절약이라는 원리에 의하여 골계, 기지, 해학을 설명하고 있다.   *. 해학諧謔은 자기가 현실의 여러 조건에 깔려서 분쇄粉碎될 것을 알면서도 그 분쇄되는 자기를 객관화해 보고 웃을 수 있는 인간의 태도이다.   *. 해학이란 해방적인 것일뿐더러 지고한 것이다.(프로이드)   *. 우연이란 해학의 스승이다.(에른스트)   *. 웃음이란 경직상태에 대한 반동이다.(한스 르샤르‘Dada’에서)   *. 해학이란 기쁨이 없는 모든 것을 신파연극다운 무익한 것이라 느끼는 때의 그 느낌을 말한다. 감춰진 음험한 생명에 항상 완전히 포착되는 일이 없는 것은 유머뿐이다. (바쉐)   어떤 사람이 정신병원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한 정신병자가 나타나서 그에게로 돌진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심각한 상황)등골이 오싹해진 그 사람은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광인의 발걸음은 빠른 편이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차 좁아졌다. 그는 그만 체념하고 걸음을 멈췄다.(가장 심각한 상황) 그 사람을 따라 잡은 광인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면서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자 이젠 나를 쫓아올 차례야.(위기 곧 심각한 상황의 돌연한 해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심리적인 긴장을 惹起시키는 상황이 갑자기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웃기는 현상엔 작건 크건 간에 비현실적인 장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유머는 기지와 골계 등과 같은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어떤 숭고하고 고귀한 것, 지적활동에 의한 쾌락의 획득을 가능하게 한다.(검은 해학의 보기)   (초현실주의 문학, 예술 시리즈 3. 오브제 P7〜8)   ⑤. 네 가지 수평사고의 光輝   *. 생각놀이 -- 공상놀이-- 自由想像-- 自由聯想   *. 轉換的, 變換的인 여러 각도와 관점을 찾음.   *. 수직적 사고의 강한 통제와 구속에서 벗어남.   *. hunch(육감, 예감)를 소중히 여기고 활용한다, 명석성은 우매성과 인접해 있다.   *. 서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를 병치하는 것, 혹은 난폭함 등 돌연히 놀라게 하는 방법으로, 두 개의 물체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시가 주장할 수 있는 최고의 작업이다. 이것은 시의 행과 행, 연과 연의 독자적이면서 또 동시동존이란 단절의 기교에서 이루어진다.   ⑥. 나비의 변증법   장주가 말하는 萬物齊同이란 즉 사물을 수평으로 가지런히 놓고 바라보는 사상이다. 제물론은 人籟, 地籟, 天籟를 알아야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세 소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 장주의 표현을 빌면 眞人이다.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쉰다고 했다. 발뒤꿈치로 숨을 쉬는 것이 또한 시인이다. 제물론은 장주가 시인과 진인을 천뢰의 소리를 아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비유하여 쓴 글이다.   莊周 ⟶나비⟶ 物化의 세계(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   현실⟶ 꿈 ⟶ 초현실의 세계   (정)⟶ (반)⟶ (합)(꿈에 장주와 나비가 하나가 됨, 초현실주의)   장주의 물화의 세계인 吾喪我의 경지를 초현실주의자들은 ‘至高點’이라 했다. 지고점이란 생과 사,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전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聖과 俗이란 높낮이가 모순으로 지각되는 것을 그만두는(상호대립으로 認知되기를 멈추는) 정신의 한 점이다. 지고점이란 신이 거기에서 세계를 창조한 최초의 점을 말한다. 조향 선생님은 제물론의 吾喪我와 胡蝶夢을 인용하여, 의식과 꿈의 병렬상태에서의 시적공간이 至高點임을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브르통은 서구에서는 종교, 국가, 이성이란 이름 아래 사육당하는 인간의 탈출의 방법으로 자유와 해방이란 Sur운동을 전개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주가 보는 정신적 자유로의 호접몽의 세계와 다른 것이다. 사유체계에서 동양은 일원론의 휴머니즘인데 비하여 서구사상은 이원론 아래서의 휴머니즘이었다. 노장사상을 배경으로 시를 쓸 때는 초월의 문제가 대두되지만, Sur의 시 창작방법은 反합리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양에서는 서양의 기독교처럼 인격의 개념으로 신은 없었다. 동양의 신은 무위자연이 곧 신이었다. 禪에서 말하는 心卽是佛, 양명학의 心卽理, 천도교가 말하는 人乃天은 철저한 사람중심의 휴머니즘이다. 예컨대 “사람이 중요하다”고 할 때 동양은 天과 地인 시간과 공간에 버티어 선 人으로 사람이 天地의 허점을 깁는 뜻으로 사람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서구에서 사람의 중요성은 먼저 인격신이란 절대개념으로 정립된 사람의 중요성을 말했다. 서구의 계몽주의나 正反合의 헤겔의 변증철학에서 反은 신이나 이성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Sur의 탄생과 전개도 이런 서구적 체재의 억누름으로부터 놓임을 위한 투쟁에서 출발한 정신운동이었다. 여기서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은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노장사상의 세례를 입어 선종이 되었다. 그래서 禪을 추구하는 선시나 偈頌의 형식과 내용(화엄경의 이사무애법계로 眞空妙有, 노장의 無爲自然, 주역의 寂然不動 感而遂通, 유학의 知晝夜之道의 死生觀 우리의 태극기의 원리가 되고 있는 0,1,2의 세계와 3,4,5,6의 세계)이 절연의 논리는 같으면서도 기교의 방법에서Sur의 시적 기법과 다른 점이다.   ⑦. 오브제objet론   불어에는 우리말의 ‘물건’에 해당하는 말이 objet와 chose의 두 말이 있다. chose는 사람의 생활에서 필요한 물건을 말한다. 그러나objet는 chose에서 그 물건으로 실용성(쓰임이나 그것이 놓여 있어야 할 곳)을 빼앗거나 또는 chose가 있어야 할 본래의 위치에서 다른 자리로 옮겨진 즉 데빼이즈한 물건을 말한다. 즉 chose를 Dēpayser하거나 실용성을 박탈하면 objet가 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지개의 경우다. ‘짐의 운반’이란 실용성에서 해방되고 백화점에서 장식용으로 전시된 지게는 objet인 것이다. Sur의 시는Dēpayser된 말 즉 오브제로 구성된다. 이처럼 Sur의 시는 의미나 실용성에서 단절(해방)된 오브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단절의 논리는 프로이드나 융이 말하는 무의식에 지배되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Sur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나 경이, 그로테스크의 영상, 해학 등의 새로운 시적인 이미지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단어가 지닌 일상의 의미를 해방(단절)시킴을 의미한다.   ⑧. 오브제의 類別(見者voyant의 미학)   *. 자연의 오브제 : 광물, 식물, 동물계 등에는 그 자체로 놀라운 구조며 모양을 가진 것이 많다. 예컨대 괴이하게 구부러진 水石이나 육상선수들의 질주를 고속으로 촬영하는 장면이나 큰개미핥기, 악어나 하이에나 등 육식동물들의 모습 등   *. 미개인의 오브제 : 에스키모나 오세아니아 사람 등이 주술적 종교에 사용하는 도구나, 색채 등 원시예술이 큐비즘 등 조형예술에 끼친 영향이 크다.   *. 수학적 오브제 : 수학의 원리에 따라서 구성된 입체적 모형을 말한다.   *. 발견된 오브제 : 기이하게 생긴 해안이나 강가에 밀려 온 표류 물건, 고속도로에 버려진 비닐 봉투 등, 때와 장소에 따라 우리는 오브제를 발견할 수 있다.   *. 災害의 오브제 : 분화, 화재, 돌풍 등 재해가 지나간 뒤의 모습들이다. 인공재해로 인한 것일수록 怪奇한 美를 더한다.   *. 움직이는 오브제 : 자동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물체를 말한다. 바람개비, 水車, 풍차, 자동인형, 로봇 등   *. 상징기능의 오브제 : 초현실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브르통에게서 그 자격을 인정받아야 했다. 그는 그에게 접근해오는 사람들에게 행동강령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꿈의 강령까지 부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징기능의 오브제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오브제라고 불리는 것의 근간을 이루는 말이다.   특징은 Machine한 일상적 효용성이 액살縊殺되고, 환상과 무의식적 행위에 의하여 야기惹起되는 표현이다. 이것이 형상화되는 경우는 치환이나 은유의 과정과 흡사하여 인간의 숨겨진 욕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르네 마그리트의 말이다. “나는 색채의 실질적인 외관이 사라지고 시적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색채를 배열하는 과학이 바로 繪畫라 생각한다. 내 그림에는 테마라는 것이 없다. 상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내 그림에서 나오는 시는 알 수 없는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들은 이처럼 모두 ‘시 영역의 확장’을 시도했다.   *. 레드메이드의 오브제 ; 뉴욕의 제1회 「안티팡당 전」의 심시위원이었던 뒤샹은 자기의 작품 『샘』(砂器便器)을 출품하면서 위생기구를 만드는 한 상회 이름으로 僞名 출품했다. 이 작품은 심사위원에 의해서 거부당했지만 1950년 말 뉴욕의 유명 화랑인『시드니 제니스』의 Dada 초대전에는 변기통 안에 제라늄을 채워 커다란 회장 입구의 문짝 위에 걸렸다. 누구나 전람회에 드나드는 사람이면 그 밑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셀 뒤샹의 말이다. “나는 예술이 예술가 자신에게보다도 관객에게 아편의 병처럼 욕망을 일으키는 수단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ready-made를 불순화해서 지키려고 했다.” 가령 석탄 삽을 선택하면 그것은 내버려진 죽음의 세계에서 끄집어내어져 예술작품으로 ‘산 세계’에 놓이게 된다. 이런 시인의 관조가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효용성을 대표하는 것이 곧 이름(名稱)이다.이름과 효용성에서 해방된 물체는 순수하다. 吾喪我의 세계다.   물건이 사람이 만든 체계 바깥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감이 거꾸로 인간의식의 체계 바깥에 있는 자기의 발견을 재촉한다.여기서 물건과 인간은 동시적인 동질의 존재로서 서로 교류가 가능하게 되며, 인간은 자기 무의식의 카오스 속으로 출발하게 된다. ready-m ade의 오브제, 그것은 객체의 세계에 대한 제멋대로의 주체화이다. 브르통은 꿈속에서 가진 비합리적인 冊子며 환상 속에서 뜻밖에 떠오르는 부조리(사르트르가 ‘구토’에서 주인공 로깡뗑이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벤치 밑의 마로니에 뿌리의 벌거숭이를 보면서 사물의 실용성이나 효용성이 박탈한 상태를 통해서 본 ‘마로니에 뿌리라는 意味體(말)와 被意味體(말이 의미하는 실체나 존재)와의 乖離現象이다. 여기서 그는 ‘말은 존재에 씌어진 베일’이라 했다.’이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 우리들은 무섭고 음탕한 벌거숭이 덩어리를 보게 된다. 이것을 사르트르는 嘔吐라 했다.)한 물체 등이 객관적으로 실현될 것을 몽상한 일이 있다고 고백했다.     ⑨. 아시체雅屍體 놀이   아시체 놀이는 1925년 파리의 사또오 街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탄생했다. 누구나 협력하여 예비적 노력을 바랄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몇 명의 참가자에게 한 문장 또는 한 데쌍을 만들게 하는 종이놀이다. 이 놀이에서『雅屍體』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이 경우 참여한 각 사람들은 앞의 협력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보기: 깃이 난 증기가 열쇠로 잠가진 새를 유혹한다. 세네갈의 굴 조개가三色의 빵을 먹을 것이다. ) 아시체 놀이는 1930년까지 지속된다. 그 뒤 약 20년이 지나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이 몰두했던 問答詩(다른 쪽 가운데의 한쪽)의 명칭이 되었다.   마치 눈가림한 사람이 숲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 부딪히는 것처럼, 指導도 방향도 없이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에로, 의식이 흐르는 대로 생각을 맡겨두고 쓰는 일이다. 동양식으로는 東問西答式 시의 놀이이다. 이런 면에서 선시나 偈頌과 맥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는 억눌림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한 ‘정신적 사냥’으로 동문서답식 시의 기교인데 반하여 동양은 법통을 잇기 위한 ‘진리파지’의 큰 주제 아래 그 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래 보기의 시는 조향 선생님이 서울의 某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실험했던 단어와 단어 사이, 시행과 시행 사이에 의식의 단층을 만들었던 합작 시로 『아시체』의 한 시 놀이다.   B__태양을 향한 한 마리 山羊의 갈망은?   J__프로이드가 씹어 먹는 날개란 말야,   K__그 사람은 언제 떠났지?   S__철도 연변의 들국화야,   J__여름 얼굴 위에 흐르는 지렁이는?   K__고양이 생일이었어,   B__연못 옆에 있는 것은 뭐지?   J__전등 속에 든 베레모 같은데,(이하 생략)   다. Sur 미학의 立言들   필자는 대학시절 은사였던 조향 선생님의 강의 내용 중에서 내 뇌리에 남아 있는 말씀들을 더듬어서 찾고, 출간된 선생님의『시어론』등 저서에서 초현실주 사상과 시의 기법의 아포리즘, 즉 立言들을 소개하려 한다.   ☀. 초현실주의의 창조적 영감은 明晳한 몽유상태에서 번득이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 사이를 언제든지 자유로이 왕래하는 것이다.   ☀. 데빼이즈망의 미학은 꿈에 있어서는 電位이고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세계의 논리이다. 이 단절의 미학의 대표적인 예는 “미싱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갑자기 만나는 것처럼 아름답다.”는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시구이다.   ☀. 시인의 두뇌는 말의 은행이다. 훌륭한 시어란 그것이 명쾌함과 동시에 비속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시를 보는 것은 곧‘이미지(내부시각)를 보는 것이다. image는 심상, 영상, 형상 등으로 번역된다. 미래파의’無線想像‘ 입체파의 ’同時同存性‘ Dada的 連續性 초현실주의의 『미싱과 박쥐우산의 미학』으로 심미적 자동기술법에 의해 정리 완성되는 현대시는 회화적이고 음향적이다. 혹은 이미지의 線이 가지는 선명한 조형성이다.   ☀. 상상이란 內發的 직관성에 의한 심상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결합작용이다.   내발적 직관성의 통로가 id 세계의 발로이다. id의 세계는 잠재의식의 1치적 과정이라 일컬어지는 영역이다. 이 무의식의 영역에 있어서는 관념은 흐트러져 있고, 논리적인 통일이 없다. 어떤 정서는 다른 정서와 바꿔 놔주기 쉬우며, 서로 대립해 있는 것이 배타적으로 되어 있지 않고, 모순되지를 않고 병행되어 있다. 좌우간 전체적으로 혼돈된 상태인 것이다. 이 영역의 지상명령은 쾌락을 얻는 일이다.   ☀. 상이성이 원거리이면 원거리일수록 비유표현의 효과는 높아만 가는 것이다. 브르통의 말이다. 한줄기의 특수한 광체가 발휘되는 곳은 어떤 점에 있어서는 우연적인 두 단어가 접근되는 점에서 생긴다. 이것은 두 전도체 사이에서 생긴 電位差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 하얀 일천오백육십칠, 두꺼운 200,000의 논리(언어도 문장의 요소로 단어(시니피에)보다 언어의 기호로서의 기능(시니피앙)을 높이 평가하면서언어의 사용은 대상을 예상하지 않는 것이다.)   *. “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갑자기 만나는 것과 같이 아름답다.” 로트레아몽   #, Freud은 박쥐우산은 남성성기의 상징이요, 재봉틀은 복잡한 기계장치라는 점에서나 여성이 언제나 쓰는 기계라는 점에서 여성 성기를 상징한다. 해부대는 침대의 상징이다.   #. Breton은 박쥐우산은 남성명사, 재봉틀은 여성명사다. 라틴어에서 온 불어의 성 구별에 의한 단어들의 분류는 sex와 관련된 것이 많다고 한다. 박쥐우산이 남자를 나타내고 재봉틀은 여자를 나타내며 해부대는 살기 위해서나 죽기 위해서 공통으로 있어야 하는 침대를 상징했다.   #. Max Ernst는 어떤 기성의 실재(박쥐우산)가 이것과는 동떨어져 있고, 그와 못지않게 부조리한 다른 하나의 실재(재봉틀)와 함께 전혀 엉뚱한 장소(해부대)에 돌연히 병치되었을 경우, 이들 실재는 그런 식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본체(일상성)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절대성(오브제)을 획득한다. 박쥐우산과 재봉틀이 사랑의 행위를 시작하는 것이다.   ☀. 시의 언어는 처음부터 사물과 사물과의 새로운 관계를 인식하는 언어인 것이다. 아이러니는 언제나 고급 시의 특징이다. 여기서 아이러니라고 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며, 서로의 보충을 위한 돌출한 충동을 말하는 것이다.   ☀. 무의식의 세계는 현실적 분별지가 통하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은유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다.   “창문에 의하여 둘로 단절된 한 사내가 있다.”브르통의 말이다.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그 중 한 마디도 바꿔칠 수 없을 정도로 또박또박 발음된, 그러나 온갖 잡음으로 뒤섞여 멍멍하기도 한 대단히 이상스러운 말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내 의식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자면, 이 말은 당시 내가 관계하고 있었던 갖가지 외적 사건과 결된 것이 아니었고,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며, 창에 부딪치듯이 강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애매한 것이라곤 없었다.   “창문에 의해서 둘로 단절된 한 남자가 있다.”는 이미지의 뒤를 따라 끊임없이 일련의 문구가 잇달아 태어났다. 이 구절에는 애매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 속에는 몸의 중심선과 수직으로 교차하는 창에 의해서 몸 한가운데가 절단된 체 걷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창문이 그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이동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진귀한 타입의 이미지와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필립 수포와 공동으로 『磁場』을 펴냈다.   ☀. 인간 정신이 자연 상태인 무의식의 세계는 자연발생적으로 異論理로 가득 차 있다. 이런 無爲自然的인 은유의 세계는 의식의 참여를 거부한 채 자연용출 상태에다 맡겨서 기술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라 한다. 『표주박에서 당나귀가 튀어나오는詩語의 發想法,』이나 『대나무 속에서 옥동자가 나오는 詩語의 發想法』이 다 초현실주의 발상법이고, 이런 관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시작법이 禪詩(불교의 유식철학이 말하는 제8아라야식과 통한다. 이 의식은 진공묘유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마음의 본성이다. 제8아라야식은 그 성질이 본래 無覆無記性이다. 무부는 아라야식 자체는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어둡게 덮어버리고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부장覆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와도 그 맥에 닿고 함께 할 수 있다.   라. 작은 제자가 본 큰 스승님의 문학관   인간과 문화의 진보를 두고 볼 때 앞선 사람의 태도와 신념은 참으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다. 『봄이 오니 꽃(花)이 피는 것은 사실이지만, 꽃(華)이 피니 봄이 온다는 것 또한 진실이요, 사실이다.』나는 민족의 서사시 광화문을 쓰면서 花(物, 몬)가 華(문화)가 되는化(변화)의 중요성을 장자의 소요유의 곤鯤이 붕鵬이 되는 物化의 비유를 들어 내 나라의 역사와 현실을 썼다. 조 향 선생님은 이 땅의 초현실주의 문학의 활로와 정착을 위해 거름이 된 사람이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꽃방석을 하나 내드려야 한다.『꽃이 피어 봄이 오는』초현실주의 시와 시론에서『花⟷華⟶化』의 역할을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강의 중 선생님이 자주 쓰셨던 용어들이다. 推敲, 낭만주의가 아닌 魯漫派, Surrealism, Dark_side와 서치라이트, 검은색의 이미지(조향 소설, 구관조 참조), 순수지속, 콜라주, 몽타주, 낯설게 하기, 폭력적 결합, 의식의 흐름(필자가 동인지‘시외 의식’의 이름을 지을 때 참조했음), 아방가르드, 해체, 밤의 산보로, 오브제, Dada, 입체파, 미래파, 모더니즘 등이다.   *.派 : 1960년대 우리나라의 문학풍토에 대한 선생님 나름대로 진단에서 낭만주의를 ‘Roman派’라는 가차문자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이 ‘ism'을 派라는 말로 협소하게 사용했던 것이 선생님의 문학관이었고, 당시의 우리문단이 극복되어야 했던 ’派‘의 문학풍토와 현실이었다. 이로부터 한 탈출구를 선생님은 초현실주의 문학에 두고 힘을 쏟은 것이다. 이것이 1950년대 부산에 정부가 피난해 있을 때도 선생님이 문단의 중심세력에서 이탈해 있었던 주요 원인이다. 물결이나 물갈래(派)는 강물이나 바다의 한 요소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즉 이런 선생님의 문학관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문단풍토의 이해와 더불어, 또 선생님의 문학운동의 한계를 드러낸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ism : 선생님은 Sur라는 말과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많이 썼다. 『주의』라는 ism을 주역 대성괘大成卦에서는 천수송天水訟이라 한다. 訟은 공공을 위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또 하늘에서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 청명, 곡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만물을 살리지만, 겨울에 내리는 비는 만물을 더욱 시들어 죽게 하는 것이다. 즉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좋은 것이지만 그 비에 묶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ism도 마찬가지다. ism이 Dogma라는 이데올로기에 묶이면 옴쭉달싹을 못하고 죽는다는 뜻이다. 문학도 문학운동도 마찬가지다. 초현실주의 2차 선언에 보면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문학의 옹호를 위하여 동참했던 시인들에 대한 ‘단죄’ 이론이 많이 보인다.       *.searchlight ; 빛을 따라 숨겨진 부분이 밝혀지는 서치라이트는 무의식의 세계를 조명하는데 좋은 기법이라 했다. 무의식이란 집으로 말할 때는 곳간이나 지하실로 비유할 수 있는 삶의 Dark side이다. 나만의 의식을 가지고 id의 세계를 조명하라는 말이었다. 선생님이 오브제와 더불어 자주 사용했던 서치라이트라는 이 용어는 내가 시를 쓸 때나 天이란 우주관, 人이란 인생관, 사물이란 자연관으로 대상을 바라보는데 객관화하는 곡척曲尺이 되고 있다.   *. Collage : ‘풀로 붙이다.’ 그러나 그냥 오리거나 잘라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림이나 갖가지 사진 등에서 그 한 부분씩을 잘라내어,한 장의 종이 위에다 그것들을 ‘遠距離聯想的인 배치로써 붙이는 방법’이다. 이것을 Sur에서는 콜라주 수법의 시라고 한다. 시에 있어서 꼴라주 방법은 잡다하고 서로 엉뚱한 관계에 있는 글자의 크기나 형태가 다른 신문 표제나 광고 문안 등에서 떼어온 말들이 데뻬이즈망의 記述에 의해 한 군데 모아 배치하여 된 시작품이다. 세련과 정제된 문학작품에 비해 콜라주 수법의 시는 시 단어들 자체의 의미 외에 또 다른 해학적 의미가 첨가되는 것이다.   *. Montage : 영화에서 주제와 연관된 필름을 모아 하나의 연속물로 결합시키는 방법인 몽타주를 사용,『씨네 포엠』을 시도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이 기법은 지금도 현대시의 중요 기법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울림으로의 언어를 시 기법에 도입한, 시니피에(의미)보다 시니피앙(울림, 청각영상)의 시를 쓰는데 눈을 뜨게 한 기법이기도 하다.   *. 入眠時 幻覺 ; 幻視, 幻聽, 幻味, 幻臭, 幻觸(運動幻覺, 平行幻覺), 體感幻覺, 半睡眠時 思考에서의 의식이 잠시 피해 있는 상태로 방심상태다. 이것을 브르통은 의식이 ( )에 넣은 상태라고 말했다.   3. 나가는 말   처음 합리주의라는 수직적 사고에 억눌리고 함몰되어 있었던 무의식을 발굴, 해방과 자유를 부여했던 시(문예 전반 운동)를 중심으로 출발했던 Sur의 영향과 사고의 발상법은 지금은 일상생활의 바닥인 의식주에까지 침투되었다.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말한 마로니에 뿌리처럼 뻗어 있다. 이런 초현실주의 사유의 지평이 시문학에 끼친 성과와 평가를 요약해 둔다.   ①.Sur의 정신   이성을 괄호 (이성은 종교보다도 더 어두운 이념이나 개념이란 감옥을 만들었다.)에 넣는 反合理主義며, 反美學의 문예운동이었다. (진리는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적 인식에서 창조된다. 시인들은 사제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빗나간 태초의 말씀을 재발견, 재건하는 것이다. Sur 운동은 이런 시인들의 상상력으로부터 나오는 문학예술의 영역을 잠재의식으로 확대했다.) 즉 가장 세련되게 가다듬고 앞뒤가 맞도록 면밀한 구성을 해야 할 시(문학예술)에 광기, 꿈, 불가사의, 무의식이라 감추고 억눌렀던 것을 시의 지평으로 열었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주장한 낭만주의와 다른 측면에서 사랑과 여성적인 것을 다루었고, 혹은 架空의 실체에서 찾아내려 했다.   ②. 누보로망과 쉬르의 관계   자동기술법이 inspiration(초감각적 지각)을 환기시기에 적합함으로 전후소설의 수법으로 도입되었다. Sur와 누보로망은 일상의 합리적 사고라는 그늘에 가려 있었던 상실된 오브제를 재발견했고, 나아가 오브제의 권리를 회복하고 찾는데 공헌을 했다.   ③. Sur와 한국 현대시와 관계   1920~30년대 우리나라의 문학은 일본을 통한 간접 移植으로 출발이었다, 1930년대에 이 상의 Dada, Sur적 발상의 실험 시들이 등장했다. 이 상은『이상한 可逆反應』등을 통하여 시어를 무의식적 본능세계에 두고 그가 전공한 건축과 수학 등의 용어를 활용하여 시의 세계를 나타내려 했다. Sur는 30년대 우리나라 시의 주류였던 주지주의보다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고 영향을 주었다. 30년대 중반 三四문학과 1950년의 『후반기 동인』이었던 박인환, 김경린, 김규동, 이봉래, 조 향 등에 이르러 Sur의 시와 문학론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 일에 『시와 이론』으로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 내 대학시절 은사였던 조 향 시인이다.   ④. 현대시의 열린 기법으로 Sur의 영향   ㈀. 잠재의식(libido)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 합리적이라는 논리적 사고 방식에서 인간의 사고를 해방(꿈에나 볼 수 있는 경이로운 이미지와 메타포의 다양한 측면 기술 개발)시켰다. 인간의 의식을 superego, ego, id의 세 단층으로 구분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도입, 인간의 내면구조를 확대 조명했다.우리의 의식세계(superego, ego)를 프로이트는 氷山一角이라 했다. 또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id)에서 용출되는 창조적 힘을 시를 쓰는데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 一元論的 감성의 세계에서 多元的인 상상의 세계로 시상을 열었다. 즉 언어의 두께랄까, 사상의 단층을 확대(난해성 문제 대두)시켰다.   ㈄. 생경한 외래어 사용과 전문용어, 신기한 어휘를 사용한 어두운 면도 나타내었다.   ***. 필자가 시인으로 살면서 생각하고 느낀 몇 매듭의 蛇足이다. 언어의 절제로 숭고미를 다루는 시의 최대공약수는 시의 형식과 내용의 균형과 조화로움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가 속한 시대가 평화로운 때는 비싼 문화의 장식품이지만 어려운 때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시의 진보를 위해서는 내용 위주의 시나 내용을 배제하고 언어미학에 충실하며 새로운 시도의 시 기교도 필요한 것이다. 또 이 일이 일상 언어의 메너리즘이나 통속성을『절제와 울림』으로 보완하고 止揚해서 시가 正과 反 혹은 所以然과所當然으로 존재되어야 할 이유이다.   한 문화인류학자는 시와 신화와 종교는 한 뿌리의 가지들이라 했다. 시의 진보를 위해서는, 종교가 있어야 함으로 핵심인 心卽是佛,無無無(비유컨대 어머니의 마음처럼, 없애려고 하여도 없앨 수 없는 없음으로 있는 것 )니, 十字架卽復活이란 모순형용으로 진리를把持하는 것처럼 止揚(aufheben)의 단계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지양의 단계가 헤겔이 말한 定立 ⤄ 反定立 ⟺ 綜合이라는 진보를 위한 삶의 변증법이요, 문화에서 작용과 반작용이 있어야 함으로의 효용이다. 미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과정적 존재’로 사람과 사물, 신을 규명하고 인식하려 했다. 그는 止揚을 통한 통섭과 진보의 관점에서 동서양의 문화와 정신지평의 만남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것이 동양의 인본주의인 유학이 말하는 ‘人 ⟶大 ⟶天 ⟶夫’로 사람의 진보 과정이다.     ☀. 사람~~~~~~~~물(구절양장 비유)~~~~~~~~~~渡(到)彼岸   (몰두해야 뜨는(乘) 이치) 길(신발의 중요성)   事法界 理法界(色卽空) 理事無碍法界(석가 苦)   人 大→天(天命) 夫(一以貫之)(공자 難)   예수 그리스도(救世主) 그리스도 예수(예수 苦難)     물속에 머리를 넣고, 즉 몰두沒頭한 다음에야 ‘붕’ 떠서 헤엄쳐가는 어려움의 이치를 말한 것이 동양시상의 뿌리인 주역이다. 이 머리를 넣어야 뜨는 삶의 이치를 말한 것이 주역의 64 대성괘大成卦의 셋째 괘인 수뢰준水雷屯이다. 이 괘의 형상(格物, 六爻)은 땅속에서 싹이 나오는데 너무 힘들어 뿌리가 구부러진 형상으로 모습이다. 그래서 수뢰준의 괘를 삶의 탄생과 죽음을 나타낸 괘라 말한다. 공자는 이 삶의 구부러짐과 펴짐으로 과정을 難 ‘三萬歲而一成純’이라 했고, 석가는‘應無所住而生其心’의 苦라 했다. 그리고 예수는 苦難(하나님 형상으로 存在)이라 했으며, 우리 사상의 큰 축인 원효는 화엄경을 요약하여 ‘一道出生死 一切無碍人’의 10자로 말했다. 유학은 한 번뿐인 사람의 삶은 天命을 위한 계획이어야 한다 했다. 천명이란 우리가 철학이나 종교, 과학이나 예술에 집중하는 것이다.이 지식이나 정신의 활로를 위해 正이나 反 등 여러 면으로 우리는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지평 또한 원효가 말하는 死生觀으로 삶과 죽음이 하루와 오늘의 낮과 밤의 관계(문학이나 예술의 경우 Eros와 Thanatos의 보완관계)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임의로 골라 본 조 향 선생님의 주요 작품이다.   ☀. 조 향 선생의 시 소개     EPISODE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 아이!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리를 처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개정 증보판 現代文學粹, 自由莊(1952)     바다의 層階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립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한국전후문제시집, 신구문화사 1961)   *, 두 개의 단어는 초현실적이라 불리는 활동에서 동시적으로 발생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보급시키려고 한 저 기계적인 기술방법에 의해서 창조된 초현실주의의 분위기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아주 적합한 것이다.(Sur 1차 선언 중에서)     검은 ceremony   將軍의 銅像이 소피보는 달밤에 장미는 하얗게 웃었다. 웃음들이 회오리바람처럼 휘감기면서 가로수 가지에 걸리더니 Giacometti의 『손』을 抽象한다. 너는 히아신드처럼 웃으면서 물방울 같은 노래를 연해 게워낸다.   恐怖는 通路의 에피소우드. 소리개의 하품은 하얀 미학이다. 五色의 에어 쇼우 속에 무성해 가는 原始林. 나나니벌. 구나방들.   『글쎄올시다』   지평선은 너의 허릴 자르면서 지나가고, 내 안엔 불타는 너의 지평선이 있다. 畵室에선 극성스러운 노랑의 퍼레이드. 검은 ceremony는 로우터리에서 그려지는 오늘의 星座. 모가지 없는 立像들이 하얀 태양 아래서 시커먼 會談을 열고 있는데, 地球의 발목엔 무성해가는 라플레시아.   지금, 世代는 악취의 황혼이다.   까마귀가 어둠을 울부짖고, 검은 계절이 한창 펄럭인다.   (1978년 전환 1집)     밤   그 옆구리를 시꺼먼 구멍에서 콸콸콸 검붉은 피가 쏟아진다.   하수도 에서는 문드러진 내장에 파란 불이 켜지고,   (1959년 자유문학)         不毛의 에레지(合作詩)     A------오늘도   무수히 落下하는 에나멜의 꿈과   B------高層建物 위에 구름처럼 나부끼는 旗幟와의 사이를   C------불안을 안고 轉落하는 현대의 행렬이여 아아멘!   A------함부로   歪曲된 이념을 찢어버리며   B------무너진 禮拜堂의 층층대에서서 오후의 바다를 본다   C------아이스크림과 소녀와의 추억은 내 최후의 抛物線을   그리고,   A------오오   샹데리아 밑에서 바라보는 태양은 우리들의 리리크!   B------dome의 하늘에 拍手처럼 흩어지는 무수한 訃告여!   C------강아지를 몰고 나는 오후의 散步路에 선다.   *A : 김경린 B : 이봉래 C : 조 향   (대학국어 현대문학, 자유장 1958)   *. 이 시는 아시체놀이처럼 자기가 쓴 것을 접어서 남에게 뵈지 않게 한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했기 때문에 행과 행 사이의 단층, 단절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반아시체 문답 시이다.     遺稿 시   나비는 비행기가 장난으로 떨어지는 시늉으로 나뭇잎 새처럼 할랑거리듯이 그렇게 도회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좀 앉아서 쉬었으면 싶은 모양인데도 좀체 앉질 않고, 자리만 물색하다가 날아가려 한다. 앉을 곳이 아무래도 마땅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더니 문득 허수룩한 지붕 밑 벽에 가서 사뿐 앉는다. 앉았다간 다시 날아가선 몇 번이고 그 망설이는 시늉을 한 끝에 앉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비는 다시 훌쩍 날아가더니, 이번엔 높이 높이 치솟더니 서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괴변이 생긴 것이다. 그 나비가 앉았던 자리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에서 수없이 끊임없이 개미 같은 것이 자꾸 쏟아져서 도시의 가로에 차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개미 같은 게 아니고, 개미만큼씩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蟻人들이 물에만 닿으면 무럭무럭 순식간에 커져서 보통의 사람만큼씩 커지는 것이다.   (轉換, 제 5집, 1984)     *. 참고문헌   1. 조향전집 1 詩 (열음사) 2. 조향전집 2 시론. 산문 (열음사) 3. 아시체雅屍體. 1, 2, 3 (부산 아성출판사) 4. 파트라지 迷宮에서 쉬르의 廻廊으로 (조향, 시문학 1982, 1월호) 5. 다다. 쉬르레알리즘 선언 (송재영 譯, 문학과 지성사) 6. 한국 모더니즘 시 연구 (문덕수, 시문학사) 7. 시적 모험, 20세기 프랑스 시 선집 (언어의 세계사) 8. 옥타비오 파스전집 1, 활과 리라 (솔 출판사) 9. 초현실주의 시와 시론 (차영한, 한국문연) 10. 일본 현대시인론(김광림, 국학자료원) 11. 초현실주의 미술 (열화당) 12. 뭉크, 에른스트, 미로, 달리, 마그리트, 칸딘스키 (集英社, 일본 화집)   * 트라미지 : 13세기에 씌어 진 『잡박한 문체』의 글을 말한다. 쉬르의 기법에 그 맥이 닿는다. *. 글 속에 인용부호가 들어갈 부분이 더러 있지만, 필자가 들어가는 말에서 述而不作이란 말을 썼고, 인용된 문장들의 표현에 더러刪定을 가해야 했기 때문에 생략했다.  
253    코스모스꽃 댓글:  조회:1691  추천:0  2018-01-20
코스모스꽃 2 / 강려     빨간 해살 하얀 코스 아장아장 걷는다   이슬 한방울 분홍 코스 또르르 달린다   갈바람 한점 자주빛 코스 솔솔 뛰여간다 2017년 12월 15일 흑룡강신문 문예면 발표작  
252    공부 .2 댓글:  조회:1650  추천:0  2018-01-20
공부 2 / 강려     강아지풀아 니는 “몽(梦)” 글자 읽는법 어디서 익혔니   물총아 너는 기윽(ㄱ) 자모 어데서 배웠니   호랑나비야 니한테 “범”(虎) 글자 누가 가르쳤니 2017년 12월 15일 흑룡강신문 문예면 발표작
251    은방울꽃 댓글:  조회:1655  추천:0  2018-01-20
은방울꽃 / 강 려   하얀 보조개 동그랗지   하얀 주먹 동그랗지         하얀 하품 동그랗지   2017년 12월 15일 흑룡강신문 문예면 발표작
250    가랑눈 댓글:  조회:1789  추천:0  2018-01-20
가랑눈 / 강려   하얀 눈물방울 가랑가랑   하얀 웃음방울도 가랑가랑   하얀 꿈방울도 가랑가랑   2017년 12월 15일 흑룡강신문 문예면 발표작
249    타로를 위한 시쓰기 / 김기덕 [한국] 댓글:  조회:1589  추천:0  2018-01-20
타로를 위한 시쓰기 / 김기덕    1. 마법사(THE MAGICIAN) 카드를 통한 이미지의 구성     메이저 아르카나의 첫 번째인 마법사 카드는 좋은 두뇌, 손재주, 말재주를 상징하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음을 의미한다. 모두가 홀딱 반할만한 말재주로 사람을 사로잡으며,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자신감에 차있는 젊은이를 말한다. 하지만 지나친 자신감과 영민한 두뇌로 인해 실수할 수 있는 불완전한 상태이다. 이러한 해석을 만들 수 있는 이미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마법사 카드의 이미지 조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손바닥만 한 카드의 위쪽과 아래쪽엔 장미 줄기가 뻗어 있고 꽃들이 피어있다. 이 싱싱한 장미는 젊음과 청춘을 의미한다. 만개한 꽃들은 한창 전성기임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쪽에 장미 속에 서너 개의 백합은 순결과 고상함을 의미한다. 붉은 색 계열의 네모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잔과 칼과 지팡이, 그리고 펜타클이 놓여있다. 황토색의 사각 탁자는 땅을 의미하며, 세상을 말한다. 또한 나의 관심사이며, 아직 모서리가 남겨진 인생의 미완을 의미한다. 컵은 감정, 영감, 정신세계와 무의식을 상징하고 있으며, 완즈인 지팡이는 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불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자신감과 열정이 가득하여 활동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칼은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를 의미하며, 매혹적이지만 냉혹한 감성을 말한다. 카리스마는 대단하지만 믿음이 부족하고, 욕망이 대단하여 돌진하는 강한 활동력을 의미한다. 또한 펜타클은 땅과 물질적 기반, 물질적 세계, 실제적인 문제나 직업, 돈을 의미한다.   이러한 네 가지의 사물이 청년의 앞에 있는 현실의 탁자, 세상의 탁자에 놓여있다. 청년은 이 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집을 수 있다.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꿈이 가득하다. 탁자의 다리는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검은 색은 부패와 소멸, 좌절과 절망이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 즉 세상은 절망의 기둥으로 세워진 탁자인 것이다. 언젠가 그 탁자가 무너질 때가 있겠지만 아직 현실은 튼튼하다. 이 카드의 배경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노란색의 의미는 황금, 번영, 여름, 봄, 날카로움, 영적임, 명랑, 환희, 경고 등을 의미한다. 또한 태양을 상징하여 중국에서는 황제만이 사용하기도 했다. 로마에서도 고귀한 색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유다의 옷으로 상징되어 악당, 겁쟁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 카드에서의 상징은 태양처럼 꿈과 희망이 가득할 수도 있지만 겁쟁이처럼 가볍고 경솔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정중앙에 서있는 청년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있는데, 손에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가 들려있다. 이 지팡이는 마술사의 권위를 상징하며, 이 지팡이를 대는 곳마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한대가 그려져 있다. 그의 상상력, 창조성은 무한하다. 흰옷에 붉은 외투를 걸쳤다. 흰옷은 순수와 순결, 성스러움을 상징하며, 붉은 외투는 열정과 권위를 상징한다. 그의 허리에는 뱀 모양의 흰 허리띠가 띠어져 있다. 뱀은 지혜인데, 허리에 둘러져 욕망과 정신의 중간에서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과 시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가이다. 시는 이미지의 배치이다. 이미지의 배치 속에서 상징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컵과 지팡이와 칼, 그리고 동전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미지 배치의 묘미이다. 세상은 탁자로 상징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물들이 같은 공간에 배치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칼이 청년의 손에 들려있다면 마법사의 이미지는 달라질 것이다. 이는 마법사이기 이전에 장수와 같은 이미지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경이 노란색이 아니라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면 창조성이 충만한 희망적 세계가 아니라 절망적 세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배치 변화에 의해 상징의 세계는 다양하게 바뀔 것이다. 시에서도 이미지의 배치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 시인이 의도하는 상징의 세계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미지의 배치인 것이다. 일반적인 시인들은 자신의 시적 주제를 어떻게 독자에게 전할까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쓴다. 그러다보니 이미지는 끌어오지 못하고 관념어를 쓰게 되는 것이다. 관념어를 쓰게 되면 상징의 세계는 깨지게 된다. 곧 상징의 세계를 보여주지 못하는 시는 예술성이 없는 시가 될 수밖에 없다. 시는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저급독자를 위해 상징적 이미지의 사용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상징적 이미지를 포기하고 저급독자에게 다가서는 순간, 시는 설명적으로 바뀌게 된다. 설명적인 시는 독자의 상상력을 막고 단순한 자기 결론을 독자에게 강요하게 된다. 그것을 읽는 독자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생각의 벽, 사고의 고정관념을 만들게 된다. 시는 자신의 의도 플러스 독자의 또 다른 해석이다. 작자의 의도가 100% 반영된다고 해도 독자가 200%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지로 구성된 시이어야 한다. 관념으로 구성된 시는 작자가 100%의 의도를 집어넣었다면 독자도 아무리 크게 느낀다 해도 100%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로 구성된 시는 작자가 100%로 의도했다면, 독자는 200%, 300%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데 있어서 이미지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어떤 이미지를 끌어오느냐이다. 주제를 생각하고 시 쓰기를 하든, 아니면 소재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시 쓰기를 하든, 먼저 시를 쓰기 위한 생각의 알맹이와 인접한 이미지, 유사한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 둘째로 이러한 이미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이다. 마법사에서 칼은 탁자 위에 배치되어 있다. 그것은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는 인생의 청년기이며, 꿈과 희망이 넘치는 출발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칼을 손에 배치한다면 의미는 달라진다. 칼을 머리 위에 있는 무한대 대신에 배치했다면 희망적이기보다는 전쟁과 살상을 꿈꾸는 절망적 상황이 될 것이다. 이렇듯 이미지를 끌어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시의 주제성이나 상징성이 달라진다. 중세시대의 그림을 오늘날에도 똑같이 시에 그릴 수는 없다. 과거의 상징물들을 오늘날의 상징물들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정해진 공식과 같은 컵과 지팡이, 칼과 펜타클과 같은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대체할 수 있는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의 카드가 하나의 문장이거나 단락이듯이 그 문장이나 단락을 타로카드의 이미지처럼 시에서도 이미지로 구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 이미지의 구성 속엔 바로 상징의 세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출처] 1. 마법사(THE MAGICIAN) 카드를 통한 이미지의 구성|작성자 김기덕   2. 여사제(THE HIGH PRIESTESS)   여사제는 검은 기둥과 흰 기둥 사이에 있다. 이 두 개의 기둥은 양면성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음과 양, 진실과 거짓 등과 같은 양면성의 사이에 앉아있다. 중용의 세계,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꿈꾸는 세계에 있다. 흰 기둥의 J는 Jachin(권력, Strength)을 의미하며, 검은 기둥의 B는 Boaz(국가, Establish)말한다. 이 두 개의 기둥 뒤에는 석류가 열려있다. 이는 풍요로운 생산을 의미하는데, 힘 있는 국가가 얻을 수 있는 결실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여사제와 같이 배치시켰기 때문에 이 여사제의 생각이거나, 기도, 꿈을 상징한다. 그리고 석류와 같이 그려진 나무의 모습은 마치 켜진 촛불과 같다. 이는 경건한 세계를 의미하며, 정신적인 성숙과 결실을 말한다. 이 여사제의 가슴에 그려진 십자가는 종교심을 상징한다. 옷은 주름이 져있지만 십자가는 구겨지지 않았다. 이는 흔들림 없는 신앙을 의미한다. 여사제가 걸친 가운은 푸른 하늘색이다. 그리고 땅에 드리워진 치마는 흰 구름과 같은 색이다. 치마에 걸친 초승달은 구름이 걸친 초승달과 같아서 시간의 흐름, 지나가는 세월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 초승달은 커지는 것이다. 초승달의 색깔은 황금색으로 그렸다. 이는 석류의 색깔과 같은 색으로 꿈과 결실,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여사제의 치마에 걸려있기 때문에 성장하는 여사제, 성숙하는 여사제를 의미한다. 초승달은 상승하는 것이다. 만약 머리 위에 초승달이 걸려 있다면 금세 사라져버릴 것이겠지만, 치마에 걸려 있어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치마의 아랫단은 물결과 같이 그려져 있다. 물결은 흐르는 것이다. 세월과 마찬가지로 지나는 것이고, 흐르는 시간과 같은 것이다. 여사제의 얼굴은 노련미가 없는 젊은 얼굴이다. 이는 미성숙, 아직은 삶의 연륜이 부족하지만 지혜와 총명함을 가지고 있다. 여사제가 손에 들고 있는 Tora는 유대인의 경전으로 신비주의적인 지식보다는 실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많은 조언을 담고 있다. 즉 토라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 편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한다. 흔히 모세오경이라고도 하며, 히브리어로 가르침, 혹은 법을 뜻한다. 이는 정신적으로 안정된 사람을 의미하며,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머리에는 두 개의 뿔과 같은 모자를 썼고, 모자 중앙에는 보름달이 떠있다. 이 두 개의 뿔은 지혜의 날카로움, 확실한 자기주관과 엄격한 사고를 의미하며, 공격적인 지식의 예리함도 갖추고 있다. 보름달은 정확한 때를 의미하기도 하며 세상을 비추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달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가 아니라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토라를 믿고 신을 의지하는 의지자임을 암시한다. 초승달은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발아래 두었고, 보름달은 지는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정점인 머리에 배치했다. 여사제는 풍요로움이 가득한 비밀의 정원 문을 지키고 있다. 굳게 다문 입술에서 정절을 지키고 비밀을 지킬 줄 아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이 여사제는 행동가가 아니라 침착한 사색주의자 임을 알 수 있다. 바닥에 황금색은 희망적이며, 꿈이 가득한 상황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카드에서 많은 의미를 살펴보았다. 하나하나의 그림 속엔 상징이 담겨 있어서 점을 치기 위해 카드를 뽑은 사람이 많은 암시를 받듯, 시도 읽는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그림을 떠올리며 많은 암시를 받을 수 있을 때 독자들은 시에 매료될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만난 오늘의 시 속에서 영감을 받고 희망을 얻어 내일을 살 수 있는 생명시가 될 수도 있다. 절망과 좌절에 빠진 어느 날 한 편의 시를 읽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시, 미래의 운명을 보여줄 수 있는 시를 쓴다면 시는 오늘날과 같이 천대받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타로 점을 치며 하나의 그림 속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타로의 묘미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카드를 뽑는 제비뽑기 같은 과정을 통해 운세를 맞춰볼 수 있다는 점이다. 선택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은 또 다른 강력한 기운에 의해서 자신도 모르게 끌리게 된다는 운명론적인 생각에서 타로는 존재해 왔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흔히 경험했으리라. 자다가 어느 날 문득 성경을 폈는데 그 성경구절이 자신에게 신이 하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기억을. 어느 날 문득 시를 읽었는데 자신의 감정을 대변해주는 시, 어려운 삶을 보듬어주는 시가 된다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러한 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상징성을 담은 이미지의 시가 되어야 한다. 이미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해지는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여사제라는 하나의 그림 속에서 많은 의미를 발견했듯이 하나의 시 속에서 시인이 의도한 의미는 물론 그 이상의 상징적 의미까지도 독자들이 발견하고, 공감하며, 자신의 정서로 받아들여 힘과 위로를 주고, 미래의 삶에까지도 암시를 줄 수 있는 시를 써야할 것이다. [출처] 2. 여사제(THE HIGH PRIESTESS)|작성자 김기덕 3. 여왕   포도가 그려진 옷을 입고 여왕이 추수를 앞둔 들판에 앉아 있는데, 이는 물질적인 풍요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포도는 다산과 많은 생산을 의미한다. 포도 안에는 포도주와 같은 물질적 향락과 정신적인 쾌락이 공존한다. 포도의 그림이 그려진 옷을 입은 것은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추수를 앞둔 들판은 누런 황금색을 띠고 있다. 모든 수고가 끝나고 이제는 거두어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런 물질적 풍요로움이 하늘의 황금색과 대비되고 있다. 역시 하늘의 노란색도 마찬가지로 풍요로움이 가득함을 의미한다. 여왕의 뒤로 상록수의 숲이 보인다. 상록수는 변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풍요가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상록수 뒤로 활엽수의 숲이 같이 공존하고 있다. 곡식을 거두는 계절이지만 아직 잎은 푸르다. 이는 이러한 풍요가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같이 암시하고 있다. 숲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여왕의 발아래로 떨어진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생명을 살리고 키울 수 있는 양식이다. 물줄기는 마르지 않고 넉넉하게 흘러 곡식이 익은 들판을 적시고 여왕의 주변을 적시고 있다. 현재는 풍요롭고 안락한 가운데 있지만, 그녀의 시선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진주목걸이를 하고 황금레이스의 옷을 입고 있어도 그녀의 눈은 우수에 젖어 있다. 더 큰 영광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으며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머리에 쓴 열두 별의 면류관은 장차 올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두 별은 열두 제자를 의미하며, 구원받을 자가 얻을 영광을 상징하고 있듯이 여기서의 열두 별 또한 이 여왕이 꿈꾸고 기다리는 영광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침대 밑에 있는 하트, 베개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며, 잉태의 상징이기도 하다. 여자의 면류관은 자식이며, 자식을 통해 과거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열두 별의 면류관과 이 모든 풍요는 자식의 유무와도 큰 관련성을 갖고 있다. 여왕의 이마에는 월계수관이 씌워져 있는데 이도 고대 올림픽의 승자에게 월계수관을 씌워줬던 것처럼 승자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황금봉은 권위를 상징하며. 의자 위에 놓인 쿠션과 방석은 붉은 색인데, 이것도 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체 그림을 통해 볼 때 현재의 풍요와 권위 속에서도 여왕은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이 풍요와 영광은 지속될 수도 있고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침대의 잉태와 무관하지 않으며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쓰느냐와 큰 관련성을 갖고 있다. 이 카드는 욕망의 끝없음을 의미하지만,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쇠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달도 차면 기울 듯이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현재의 부와 풍요를 즐길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타로의 그림과 시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주제의식을 강조하여 쓰던 시에서는 이미지보다는 전달하고자하는 주제의식 때문에 사건이나 감성의 흐름을 중시해야만 했다. 그래서 기승전결과 같은 의식의 변화, 감정의 진전이 이루어져야했다. 그 변화와 진전은 계단을 오를 때와 같이 납득할 수 있는 선의 보폭이 필요했다. 그래서 죽 시를 읽으면 이해가 가능했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의식의 순차적, 시간적 흐름에서 단절된,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고도의 집중된 의식의 집합을 통해 다양성과 무한변화의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는 몽타주 기법이 쓰이고 있다. 이 몽타주 기법은 이미지들의 결합이며, 적절한 배치이다. 이미지들 간의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상징성은 달라진다. 하나의 타로카드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점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많은 상징적 요소가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보는 방향,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의미로 나누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침대 위에 베개가 있다면 동침을 생각할 수도 있고, 휴식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왕이 입고 있는 옷의 포도는 여성적인 성숙을 상징할 수도 있고, 다산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미지는 상징을 확장시킨다. 설명적이나 관념적인 접근을 통해 시의 문장을 쓰게 되면 상징성은 축소되고, 단순화 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사람들은 단순화된 타로카드의 그림을 통해 인생을 해석하고 예언하려했을까? 거기에는 다양한 해석과 많은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상징성이 가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은유나 상징을 통해 사실 그 이면에 숨겨진 뜻을 전하고자 하는 글이다. 그렇다면 숨겨진 뜻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시는 예술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시도 단순한 자기감정을 전하는데 만족하지 말고 타로카드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많은 이야기 꺼리가 있는 풍요로움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한 이미지들의 배치관계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시를 읽고 생각하게 하는 시, 소설이나 연구서 같은 한 권의 책이 압축된 시를 쓰기 위해선 고농도의 이미지들이 적절히 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오른손에 높이 들고 있는 황금 봉을 왼손에 들고, 밑으로 향해 있다면 권위의 상징에서 추락하여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또한 머리에 열두 별의 면류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썼다면 장차올 영광보다는 고난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에는 많은 언어가 담겨있다. 이미지 속에는 생각이 많은 벙어리가 살고 있다. 그래서 이미지는 독자를 생각하게 하고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결합을 통해 많은 상상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시를 쓰야 할 것이다. [출처] 3. 여왕|작성자 김기덕   4. 황제   타로의 네 번째 카드는 황제이다. 황제는 지배, 안정, 성취, 남성적 권위, 행동력, 의사, 책임감이 강함을 의미한다. 또한 한 명의 남성이 왕관을 머리에 쓰고 옥좌에 앉아 황홀을 들고 있는 그림은 황제의 권위를 나타낸다. 먼저 4라는 숫자는 4방위(동·서·남·북), 4원소(지·수·화·풍), 4성질(온·건·습·냉), 수학의 사칙연산(+·-·×·÷) 등을 나타내어 안정적이고, 확고부동한 권력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황제카드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색깔은 주황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빨강과 노랑을 합친 주황은 붉은 색의 정열과 노란색의 영적 숭고함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 오랜지색은 호사와 화려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불교 승려의 장삼처럼 금욕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오랜지색과 빨간색이 섞인 주황은 영원불변을 상징하기도 하여 왕의 권위가 확고부동함을 나타낸다. 또한 황제는 부정적인 의미도 동시에 갖고 있다. 강한 남성성과 주도권을 의미하는 반면 사태를 외면하고 상황을 기피하려는 이미지를 나타낸다. 황제는 수많은 사람을 거느려야하기 때문에 책임에 대한 과중한 압박감이 있다. 따라서 황제의 표정은 밝지 않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누군가에게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황제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몸을 한껏 뒤로  젖힌 자세에서 오만함까지 느껴진다. 이 카드는 유대 왕(구세주)이 태어날 것을 풍문으로 들은 헤롯왕의 모습으로 권좌에 대한 불안감과 유아살해의 만행을 저질렀던 포악함의 이미지를 함께 담고 있다. 어쩌면 이 견해는 자신의 지배자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을 당시 평민들의 심리를 잘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불멸의 황금빛 목걸이를 두른 황제는 한쪽 손에 십자가 홀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아니면 누군가 싸우려는 기세이다. 배경으로 나오는 돌산은 인간의 포부와 야망, 정복을 의미한다. 또한 돌로 된 왕좌는 권위의 단단함, 강한 지배력을 의미하며, 앙크 십자가는 지식의 열쇠, 힘, 권위의 상징이다. 보주는 창조적 힘을 상징하는 여성에너지와 남성에너지에 대한 소유와 지배력을 상징한다. 왕관은 권위와 왕권을 상징하며, 갑옷은 내적인 단단함과 강함, 그리고 보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염은 연륜 있는, 많은 경험과 풍부한 지식을 나타내며, 숫양은 독단적이고 강인한 힘과 고집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정방향에 대한 해석은 권력, 상황을 지휘하고 이끌 수 있는 막강한 리더십, 탄탄한 미래, 인정받는 실력자를 의미하며, 냉혹한 현실과 막중한 책임감, 믿을 수 있는 신뢰와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이에 대한 역방향은 무기력한 존재를 나타내며 의지가 약하고 낭비가 심하며, 허세를 부리는 자를 의미한다. 미숙하고 마음이 약하며 망설임이 많은 사람을 나타내기도 한다. 타로는 상징적 이미지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그림카드이다. 시에서도 상징적 기법의 시를 쓸 수 있는데, 이미지를 이용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시를 써야 한다. 타로카드의 그림 대신 시에서는 이미지어의 사용을 통해서 상징성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이런 이미지어들이 시를 해석하는 키워드 역할을 하게 된다.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인 최은묵의 키워드라는 시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키워드/최은묵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 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 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데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이다.   2015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키워드’를 보면 상징적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타로카드가 상징적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듯이 이 시도 상징적이 이미지들로 시를 구성하여 다양한 해석과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시의 첫 문장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에서 ‘죽은 우물’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죽은 우물을 건져낸 것은 상징적인 기법인 것이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른다는 표현이나,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 떼”,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 지도”, “배설을 끝낸 평면”,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 등과 같은 표현은 상식적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문장이다. 이는 상징적인 이미지들로 결합된 문장이기 때문에 타로카드에서 이미지를 통해 하나하나 해석해 나가듯 이미지어의 결합들을 풀어나가야 알 수 있는 시이다. 이미지 속에는 이미 원형적인 상징성이 들어 있다. 물론 개인적이거나 공중적인 상징성이 들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인 상징성은 독자와의 소통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시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물 속에 담긴 원형적인 상징성을 이용하여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게 쓰려면 사물에 대한 상징성의 연구가 필요하다. 위 시에서 사용한 ‘우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삶의 원천을 의미한다. 죽은 우물은 병든 사회, 꿈을 상실한 인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치료하려고 뒤집어서 살을 바르지만 부식되지 않는 갈까마귀 떼들이 땅으로 내려 온다. 살은 생명의 요소라서 더 이상 같이 썩지 않게 하려고 하지만, 죽음의 사자와 같은 갈까마귀떼는 부식되지 않고 내려온다. 부식은 금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화학작용이다. 갈까마귀는 생물이지만 금속적 요소를 가지고 표현한 것은 언어적 결합에 있어서 어색할 수도 있으나 삭막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흰개미 또한 상징적 시어라고 할 수 있다. 개미의 종류에는 불개미, 침개미, 검정개미, 혹개미, 주름개미, 왕개미 등등의 많은 종류가 있지만, 왜 하필 흰개미라고 했을까? 흰색은 보호, 순수, 정직, 계몽, 깨끗함과 연결되며, 또한 생기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에서 불개미라는 표현을 썼다면 의미는 달라졌을 것이다. 흰개미의 서민적 의미가 지하의 세계와 더불어 소외계층을 의미해주고 있다. 우리가 타로카드를 해석할 때처럼 상징적 이미지들로 조합된 시를 해석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 공감되기 어렵고, 독자와의 소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렇게 어려운 시를 왜 써야 하는가? 그렇다면 왜 피카소 같은 화가는 공감하기 어려운 그림을 그린 걸까? 예술에는 독자와의 자연스런 소통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부분도 있지만, 고도의 지적인 사람만이 느끼고 소유하고자 하는 지적유희가 있다. 특권층만이 누리고자하는 물질적 고품격의 세계와 같은, 고도의 상징체계를 통해 감추어진 의미의 세계를 누릴 수 있는 고차원의 지적인 유희의 쾌감을 누리고자하는 예술적 욕망이 깔려있다. 타로카드를 이용한 상징시쓰기의 기법은 이러한 고도의 지적유희를 성취시키고자하는 고급독자들을 위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최은묵의 키워드를 분석해보면 우물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다. 우물은 생명을 말하는 것으로 시의 문장마다 생명을 상징하는 단어를 심어놓고 있다. 살이나 두레박, 레드우드, 아이, 여자, 길, 눈물, 물길, 실뿌리, 피부 등등이 모두 생명을 상징하는 단어들로 문장마다 키워드를 심어놓고 있다. 매우 난해한 시 같으나 이렇게 유사한 상징적 요소들을 배치함으로써 문장의 내용들이 이어질 수 있도록 배치하고 있다. 이처럼 황제의 타로카드에도 왕관, 돌산, 황홀, 수염, 갑옷, 숫양, 왕좌, 보주, 주황색 등등의 상징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상징물들을 통해 시를 쓰게 되면 언어의 상징성 때문에 서로가 다 이어지고 통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사물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정서적 분위기를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시는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음과 양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언어의 색깔을 잘 파악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색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의 색을 표현하는 것은 동사와 형용사, 그리고 명사의 활용에서 나타나는데 그 예를 들면, 왕관이라는 사물에서 ‘왕관이 떨어졌다’와 ‘왕관을 썼다’와는 희망적 색깔과 절망적 색깔과의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형용사로 살펴보면 ‘빛나는 왕관’과 ‘퇴색한 왕관’을 볼 수 있다. 명사적인 차이를 보면 ‘보석 왕관’과 ‘플라스틱 왕관’ 등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타로카드를 활용한 시쓰기를 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이러한 상징물들을 찾고, 이 상징물들과 유사상징물을 찾아야 한다. 황제의 상징물은 공식과 같은 것이다. 이 공식에 대입될 수 있는 다른 상징물을 찾아야 한다. 먼저는 배경을 찾아야 한다. 배경이 없는 사건과 사물의 조합은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물을 배경으로 잡는다면 황제카드의 상징물들과 유사한 사물들을 배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황홀-태양, 수염-갈대, 갑옷-물결, 숫양-고사목, 왕좌-절벽, 보주-달, 주황색-노을, 왕관-배, 돌산-능선 등으로 상징적 유사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직유나 은유적인 표현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 짝을 이루는 이 상징물들을 활용하여 직유적, 은유적 관계의 문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태양 같은 황홀’, ‘수염 같은 갈대’ 또는 ‘숫양 뿔의 고사목’, ‘달의 보주’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예술성은 다양한 시각과 복합적 상징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단순성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상징성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 하늘의 황제는 독수리라고 할 수 있다. 바다의 황제는 고래나 상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제와 유사한 사물을 끌어와 배치시킨다면 좀 더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사고가 가능하게 할 수 있다. 황홀-태양-독수리의 눈동자, 수염-갈대-털, 갑옷-물결-발톱, 숫양-고사목-부리, 왕좌-절벽-허공, 보주-달-별, 주황색-노을-하늘, 왕관-배-날개, 돌산-능선-구름 등과 같이 유사한 상징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셋으로 짝이 이루어지면 문장을 만들기도 쉽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지게 된다. 황제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시를 써도 독자의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 이 황제를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끌어와야 이 시는 살릴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이야기로 끌어오기 위해서는 배경이 중요하다. 황제는 과거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이 과거적 인물을 현재적인 우리의 삶과 연결시키기 위해선 현재적 공간으로 끌어오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만든 공간을 강물과 연결시켜서 절벽이 있고 산이 있고, 강물이 흐르는 자연적 공간이다. 이 공간을 도시와 연결시켜서 상징성을 만든다면 우리의 삶 가까이 끌어올 수 있다. 그리고 황제는 과거의 황제가 아니라 타로카드의 황제이며, 집안의 황제이며, 직장의 황제이며, 나라의 황제인 자존감을 주제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공식적인 배치를 통해 완성된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는 내 개인적인 역량의 작품이며, 잘 되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터득하고 쓴다면 보다 명징한 상징적 시를 쓰게 될 것이다. 자기가 왜 썼는지도 모르고 쓴 모호한 시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독자를 우롱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책임 있는 시를 써야 한다.      황제의 비밀   카페나 호주머니, 낡은 가방 속 그 어디에도 황제는 있다.   황홀을 든 태양의 눈동자가 물결 위를 지날 때마다 갈대들은 허리를 꺾었다.   갑옷 속에 감추어진 불안의 발톱이 물결을 할퀴며 건져 올린 안개의 거리는 마차소리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고사목의 뿔들이 내걸린 절벽, 죽음의 부리만이 서로를 쪼아댄다.   피로 번진 노을이 암투의 커튼을 드리운 하늘가 숨겨진 욕망이 치솟는 곳은 어디든 마천루다.   달의 보주를 차지하기 위해 밤마다 강물 위로 별들은 폭죽처럼 쏟아졌었지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 왕관이 녹슨 세월을 흘러 정박하는 곳 아무것도 믿을 수 없던 독수리는 늘 땅으로 추락했다.   날을 세운 바위들만 송곳처럼 삐져나온 안개 속 철탑의 도시 뿔을 단 사람들이 황제가 되어간다. ​ ​아기의 울음이 헤롯의 칼과 방패를 삼킨 후 스카이라운지나 전광판, 갤러리, 그 어디에도 황제는 없다. ​ 대관식을 마친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로 떠난다.   (김기덕/시 전문) [출처] 4. 황제|작성자 김기덕 5. 교황   교황은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신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로 한 손엔 황금색 지팡이를 다른 한 손은 축복의 표시로 세 개의 손가락을 펴고 있어 신뢰감이 강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 황금색은 권위의 상징으로 신과 버금가는 연결자로서의 존귀함을 의미하는데, 십자가를 의미하고 있다. 이 십자가는 삼중십자가로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의미한다. 또한 세 개의 손가락을 편 것은 삼위일체를 의미하며, 머리에 쓴 삼중왕관도 신적 권위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또한 하늘, 땅, 사람 세 가지가 어우러짐을 뜻하기도 한다. 교황 발밑에 있는 두 개의 열쇠는 천국의 열쇠와 땅의 열쇠를 상징한다. 천국의 열쇠는 황금열쇠, 땅의 열쇠는 은열쇠로 되어 있는데,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손인 교황이 황금열쇠를 갖게 되어서 황금열쇠로 나타냈다. ​       실용적인 지혜와 신이 내린 지혜를 상징하기도 하는 열쇠 또한 십자가처럼 크로스해서 그림으로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양털로 짠 Y자형의 하얀 띠인 팔리움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다. 어깨 위에 걸친 팔리움은 선한 목자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교황의 권력을 강조하기보다는 주교관처럼 겸손함을 나타내는 의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교황의 말씀을 듣고 서 있는데, 두 제자를 의미한다. 제자들의 옷엔 장미와 백합이 수놓아 있는데, 장미는 정열과 사랑을 의미하며, 백합은 순결과 순종을 의미한다.     제자는 법률과 규칙, 전통을 의미하며, 대머리는 지식이 충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원칙만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기둥이 좌우에 두 개인 것은 빛과 어둠, 선과 악, 남자와 여자와 같은 모든 대비를 의미한다. 그 기둥 사이에 교황은 위치해 있다. 이는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며 절대로 심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의 푸른색 옷은 신의 무한한 지혜를, 붉은 겉옷은 신의 권위를 상징한다. 교황의 발아래 있는 체크무늬는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것으로 세상을 발아래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고 있는 신발은 흰색인데, 발은 행위를 의미하여 그 행위가 더럽지 않고 깨끗해야함을 상징하고 있다. 숫자 5에 교황을 놓은 것은 무슨 의미일까? 숫자 5는 다섯 손가락처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5는 예수의 몸에 난 상처를 의미하기도 하며, 5일 동안 세상의 완성과 동서남북과 중앙의 배치로 인한 오방의 안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우주의 기를 상징하는 목, 화, 토, 금, 수의 오행이 있다. 5의 다른 의미를 살펴보면 인, 의 예, 지, 신의 오상과 간, 심, 폐, 비, 신의 오장이 있고, 쌀, 보리, 조, 콩, 기장의 오곡이 있다. 인간의 오복인 수, 건강, 부, 덕, 고종명 등이 있다. 어쨌든 인간의 완성적 존재인 교황을 5번에 둠으로써 신성을 입은 최고의 권위를 상징했다. 지금까지의 해석을 통해 그 뜻을 살펴본다면 의식, 연민, 동정심, 친절함, 용서, 영감, 예속상태, 행동력 없음, 소심함, 고지식함, 정신적인 리더 등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하던 상대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거나, 결혼식 날짜가 정해진다는 의미가 있다. 계약이 맺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늘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갖고 있다. 만약에 이 카드가 거꾸로 뽑혔다면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 화려함이나 사치가 가득한 사람이 되거나, 친절하지만 두려운 사람, 게으르고 못난 사람, 현재 상태를 벗어나길 거부하는 비개혁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지금까지 타로카드에서 쓰인 여러 가지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이미지들은 살아있고 혼을 가지고 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우리가 의도하는 시심을 나타낼 수 있다. 타로점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질문을 정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질문의 답을 얻기는 어렵다. “나의 인생에 대해서?”, “앞으로 지구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와 같은 질문의 답은 사실상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주 구체적으로 “내일 면접을 봐야할까?”, “어느 대학에 입학할까?”와 같은 구체적 질문이 필요하다. 이처럼 시에서도 시를 쓸 때 구체적인 대상설정이 필요하다. 그 대상은 이미지이어야 하며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적 사물이나 명징한 대상이 먼저 선택되어야 한다. 지금 내가 슬프니까 막연히 ‘슬픔’을 가지고 시쓰기를 시작할 수는 없다. 슬픔이 담긴 사물이나 이미지, 정황, 스토리를 찾아야 한다. 그 대상을 먼저 정하지 않는다면 구체적 질문을 정하지 않고 타로점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이미지, 정황, 스토리를 정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 앞세워 시를 쓰게 되면 관념적인 시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현재의 많은 시인들이 테크닉의 발달로 언어를 꼬는 능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언어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미지의 활용은 되지 않고 있다. 확실한 시적 대상을 정하고 그 대상 안에 자신의 주제의식을 담을 수 있는 이미지의 배치가 필요하다. 타로카드 다섯 번째인 교황을 통해 우리는 많은 해석을 할 수 있었다. 이 교황카드 안에 배치된 이미지는 교황, 왕관, 기둥, 황홀, 열쇠, 팔리움, 붉고 푸른 옷, 백합과 장미, 체크무늬, 십자가 등 몇 안 되는 사물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시도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정한 시적 대상에 필요한 이미지들을 끌어오고 그 이미지들을 적절히 조합하기 위해선 먼저 확실한 시적 대상 설정이 필요하다. 그 시적 대상은 반드시 이미지가 있는 대상이길 바란다. [출처] 5. 교황|작성자 김기덕   6. 연인들   여섯 번째 카드는 연인들이다. 여자의 등 뒤에 있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그녀를 유혹했던 뱀과 진실의 나무이다. 나무는 삶과 죽음, 부활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나무는 풍요와 지식, 보호, 창조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여자의 뒤에 있는 나무는 지식의 나무로 선악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나무를 감고 있는 것은 하와를 유혹한 뱀으로 선악과를 먹게 된 이브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 우측에 있는 남자는 아담인데, 아담 뒤의 그림은 사막에서 불타올랐던 여호와의 가시떨기나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고, 신의 현현이다. 곧 남자의 뒤에 있는 나무는 생명나무이다. 생명나무는 에덴동산 중앙에 있으며, 재생, 원초, 완전성을 의미한다. 생명나무의 12개의 불꽃은 태양의 순환주기 12개월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두 남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신의 사자이다. 천사를 보며 여자는 뱀의 유혹에 따를 것인가를 생각하고, 남자는 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옷을 입지 않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은 상태가 아니라 그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천사의 양쪽 날개는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상징한다. 사랑이란 긍정적으로 행복과 기쁨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부정적으로 유혹과 파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아직 유혹에 빠지지 않았지만  갈등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색의 날개는 불타는 정열을 나타내며, 머리 위로 비치는 태양은 사랑의 긍정적인 행복과 기쁨을 나타내지만, 천사의 아래쪽에 있는 구름은 사랑의 부정적인 의미로 슬픔과 아픔을 상징한다. 뾰족이 솟은 산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한다. 또한 구름은 물을 상징한다. 주역에서 택산함(䷞)은 산 위에 연못이 있는 형상으로 남녀의 교접을 의미한다. 산의 정기는 위로 치솟고, 물의 정기는 아래로 내려와 서로 교합함으로 사랑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의 상징이다. 천사의 보라색 옷은 고귀함의 상징이며, 신의 예지와 자애를 상징하기도 한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한 수난의 그리스도 옷 빛깔이 되기도 한다. 땅의 녹색은 사랑의 결실로 인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번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은 푸른색을 띠고 있어서 영원성과 맑고 깨끗함, 무한한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연인들에게는 무한한 희망과 꿈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야할 길은 평탄치만은 않다. 우리의 시각으로 카드를 보면 우측에 남자가 있지만, 천사의 입장에서 보면 좌측에 남자가 서있다. 좌측은 양을 상징한다. 양은 홀수, 아버지, 남자, 강함, 움직임, 위쪽방향, 좌측, 맑음, 밝음, 근본, 큼, 귀함, 줄기 등과 같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우측의 여자는 음을 상징한다. 음은 짝수, 땅, 어머니, 여자, 부드러움, 고요함, 아래쪽, 우측, 나중, 끝, 반대, 작음, 천함, 가지 등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특히 사랑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행복할 수도 있지만 불행할 수도 있는 요소를 함께 갖추고 있다. 정방향의 해석은 사랑에 빠지게 됨을 의미하며, 유혹에 흔들림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사람과의 만남을 의미하기도 하며, 재판의 승리나 사랑의 승리로 인한 기쁨을 의미한다. 역방향의 해석은 준비가 덜 되어 사랑에 실패하게 됨을 의미하며, 실수로 창피를 당하거나 손실을 상징한다. 사랑의 상처로 힘들고 괴롭게 됨을 의미하고 있다. 타로카드에서 구체적인 질문을 정했다면 이제는 카드를 뽑아야 한다. 초보자들은 카드 뽑기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카드의 선택은 순전히 직감에 따라야 한다. 카드의 중간에서 원하는 것을 선택해도 좋고, 바닥에서 선택해도 좋다. 하지만 카드를 일부 살짝 들어낸 후 적당히 꺼내어 배열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시에서 카드를 선택하는 것은 시적 대상을 잡는 것이다. 나무를 대상으로 잡든, 봄을 대상으로 잡든, 대상을 선택한 후 그 대상으로부터 이미지를 뽑는 것이다. 위의 연인들 카드에서 태양, 날개, 구름, 보라색 옷, 뱀, 선악과, 생명나무, 산, 남자, 여자, 대지 등과 같은 이미지를 뽑듯 하나의 시적 대상을 정하고 이미지를 뽑는 과정이 바로 카드의 선택과정인 것이다. 만약에 산이라는 시적 대상을 정했다면 산에 속한 이미지 나무, 돌, 계곡, 능선, 낙엽, 꽃, 열매, 산짐승 등등의 이미지를 뽑아야 하는데, 이러한 이미지를 뽑기 위한 대상, 즉 산을 먼저 정하는 것이 카드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시적 대상을 뽑을 때에는 이미지가 있는 대상을 뽑아야 한다. 그래야만 타로카드처럼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무수히 많은 상상과 해석의 여지를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로카드를 뽑는 것은 내가 스스로 알아서 뽑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나의 의지가 아닌 어떤 기운의 흐름에 의해서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 타로카드의 선택에 초월적인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에 끌려 어떤 시적 대상을 선택할 때는 정서적 공감과 지적 합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이 많거나 상상력이 풍부하면 시적 대상을 끌어오는데 어려움이 많지 않을 것이다. 타로기법에서 시적 대상을 정하고 시를 써나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징을 읽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을 읽는 힘이 있을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밀하고 깊은 부분까지 나타낼 수 있는 이미지의 결합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 ‘사막의 연인’은 타로카드의 여섯 번째인 연인에서 이미지를 뽑은 후, 그 이미지를 오늘날의 카페로 끌어와 이미지를 교차시켰다. 연인의 이미지는 아담, 하와, 태양, 구름, 선악과, 뱀, 생명나무, 산, 천사, 초원 등이 있다. 여기에 카페의 이미지를 찾으면 에스프레소, 남자, 여자, 생크림, 탁자, 카펫, 잔, 혀, 조명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연인의 긍정적인 색깔보다는 부정적인 색깔로 이미지화하여 표현하기 위해 타로카드의 정방향의 표현보다는 역방향의 표현을 선택하다보니 사막을 끌어왔다. 그리하여 사막의 이미지 인 모래, 가시, 오아시스, 바람, 선인장 등을 끌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뽑은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아담과 하와-남자와 여자, 황무지-카페, 생명나무-장미, 태양, 달 등으로 대치시켰다. 또한 뱀의 혓바닥-꽃잎, 누드-옷을 입은 모습, 사막-에덴, 오아시스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조합을 통해 분위기, 흐름, 감정, 색깔 등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의 연인(戀人)   아담과 이브가 바람뿐인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퇴색된 열두 개의 생명나무 불꽃이 일 년 열두 달 검은 장미로 피어났다.   생크림을 핥는 뱀의 혓바닥 위로 노을이 지고 꽃잎이 떨어진다.   선악을 알기 전의 남녀는 누드였다. 서로를 알고 난 후부터 아무리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몸에서 붉은 가시들이 솟아났다.   녹색의 초원이 놓인 탁자 위로 에스프레소가 쏟아지자 황무지가 펼쳐진다. 사막을 오가던 말들이 선인장이 되어 모래 속에 뿌리박고 피보다 진한 꽃을 피운다.   아담과 이브가 살던 동산엔 열두 개의 태양과 열두 개의 달이 뜨고, 보라색 옷을 입은 천사가 양팔저울에 해와 달의 열매를 달았지.   구름이 치마끈을 풀고 능선에 앉아 엉덩이를 흔들면 산은 잔이 되고, 잔엔 옥수로 가득했던 눈물을 안 후,   다시 누드로 돌아갈 수 없는 아담과 이브가 라이브 카페의 난간에 앉아 마시는 치사량의 검은 입술이 머그잔을 타고 흘러내린다.   카펫 위엔 엉겅퀴가 자라고, 독버섯이 피어난다. 구둣발에 짓밟힌 오아시스가 뱀처럼 몸을 말며 서로의 발뒤꿈치를 문다. [출처] 6. 연인들|작성자 김기덕   7. 전차 (1)   이륜의 전차를 탄 젊은 왕의 모습인 타로 일곱 번째 카드인 전차는 명확한 목적을 행동으로 옮기는 첫 걸음을 내디딘 장면으로 해석된다. 전차는 승리, 전진, 이동, 자신감을 상징하지만, 전차는 변화와 인과법의 우주의 원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변화와 인연, 인과법을 의미한다. 왕의 양쪽 어깨에 있는 초승달과 얼굴 모양의 장식은 앞으로 겪어야 할 선택의 이중성을 보인다. 초승달은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초승달이 얼굴과 배치됨으로 내면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머리에 쓴 왕관의 8방향의 별은 승계 받은 권력의 상징인 태양이다. 이 태양이 8방향으로 표현된 것은 사방팔방으로 그의 권력이 미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 젊은 왕은 뒤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추억을 회상하지 않는다. 오직 앞만을 바라보며 전진할 것이다. 그의 푸른 옷은 권력을 상징하며, 전차 위에 내려놓은 손은 그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어진 것임을 말한다. 뒤에 배경으로 보이는 서로 다른 도시는 대립되는 전쟁이나 내적 갈등을 상징한다. 휘장에 그려진 별들은 그가 겪어야 할 많은 일들을 상징한다. 별이 각각 크기가 다른 것은 그 사건이 크고 작은 많은 종류라는 걸 말한다.  이 전차를 끄는 스핑크스는 인간의 머리와 가슴을 하고 날개를 단 사자로 이집트와 그리스 전통에서 신성한 장소를 지키는 수호자였다. 검은 색과 흰색의 두 스핑크스는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이렇게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스핑크스들이 이 전차를 끌 수 있을 지에 대해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스핑크스는 악행과 덕행을 상징하며, 세상의 이원적 요소들을 의미하고 있다. 동양철학의 음과 양이며, 사랑에 있어서의 사랑과 증오이다. 세상은 이 이원적 요소들의 대립과 갈등 속에 형성되며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카드의 정방향을 뽑았다면 성공과 승리, 사랑, 정복, 원군, 행동력, 적극력, 돌진력, 개척정신, 독립, 해방을 의미하지만, 역방향의 카드를 뽑았다면 실패와 좌절, 이별, 폭주, 부주의, 제멋대로 함, 독단력, 방약무인, 초조, 호전성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배경으로 칠 해진 노란색은 긍정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노란색은 예로부터 부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중국 제왕의 의복 색깔과 황궁의 기둥이 노란색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임금의 옷도 황금실로 수놓은 곤룡포였다. 또한 신성과 충성, 관용과 아량, 고귀한 성품과 지혜, 합리적 사고, 정신적 성숙, 수확 등과 같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개인이나 사회에 있어서 황금시대, 황금시절 등과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한다. 7이라는 숫자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길한 숫자여서 그런지 수메르 신화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이는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큰 별이 태양,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일곱 개여서 그럴 것이다. 7은 행운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일상생활에서 무지개색이나 칠삭둥이, 북두칠성 등의 영향이 클 것이다. 종교에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칠일 동안 만드셨고,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에도 일곱 번째로 예수님을 배치시켰다. 동양적 사상으로 살펴보면 천, 인, 지 3에다가 동, 서, 남, 북 4가 더해져 완전 숫자로 여기고 있다. 전차를 타로카드 7에 놓은 것은 행운의 상징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차 앞에 그려진 날개는 전진과 상승을, 팽이는 순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전 장에서는 타로카드를 뽑을 때 확실한 대상을 정하고 뽑아야 하는 것처럼 시를 쓸 때도 확실한 대상을 정하고 그에 대한 이미지를 뽑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대상은 이미지가 있는 사물이나 사건, 정황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이번엔 이렇게 타로카드를 뽑되 몇 개의 카드를 뽑을 것인가? 뽑은 카드들에 대한 배치를 어떻게 하며 해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카드의 배열법은 카드를 펼치는 방법으로 스프레드(spread) 또는 레이아웃(layout)이라고도 한다. 즉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위치에 카드를 배열하는 것이다.   1 카드 배열법 카드를 섞은 후 그 중에 한 장만 뽑는다. 가장 기초적인 배열법인데, 메이저와 마이너를 모두 섞은 다음 한 장만 선택하여 뽑는다. 그리하여 이 뽑은 한 장의 카드를 통하여 자신이 얻고자 하는 답을 찾는 방법이다. 시에서도 1 카드 배열법처럼 하나의 단락으로 시를 구성하는 방법을 말한다. 하나의 단락으로 구성된 시는 그 내용이나, 시점, 주제의 통일, 이미지의 통일 등과 같은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카드 배열법 카드를 세 장 내려놓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장 널리 사용되어온 배열법으로써 초보자는 물론 능숙한 사람들까지도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다. 카드는 잡은 순서에 따라 일관성 있게 배열해야 한다. 해석은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의미로 진행되는데, 시에서도 기, 서, 결과 같이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 것을 의미한다. 내용적으로도 과거, 현재, 미래가 되든, 아니면 하나의 대상에 대한 세 방향의 시각이든, 각각 다른 차원의 상징적 연결이든 상관없다. 유사성의 세 가지 사물이나 정황, 스토리를 배치시키는 것도 3 카드 배열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순차적 배열법(평면적 배열법)       순차적 배열은 이야기가 진행되듯이 내용이나 사건, 의미의 진행 또는 진전을 이루는 방법으로 평면적인 관계를 만든다.   비순차적 배열법(입체적 배열법)   비순차적 배열법은 입체성을 살리는 방법으로 유사 상징적 대상들로부터 뽑은 이미지를 무작위로 가져다가 배치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무작위로 가져다가 배치해도 통할 수 있는 것은 유사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상징성을 가진 이미지들이 다 통할 수 있는 것은 그 해석의 여지가 폭넓기 때문이다.   5 카드 배열법 5 카드 배열법은 다섯 장의 카드를 뽑아 각 위치별로 배치한 후 해석하는 방법으로 시에서는 복잡한 이미지의 결합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섯 개의 단락을 만들든, 다섯 개의 구멍으로 사물을 보든, 다섯 개의 유상상징물들을 교차시키든 상관없지만, 그 관계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다섯이라는 수에 철저할 필요는 없다. 여러 시각과 여러 상징물들의 결합, 다층적 의미 등등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결합하여 복잡한 예술적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밖에도 10 카드 배열법이라든지, 켈트 십자가 배열법 등이 있는데 이는 복잡한 방법으로 시에서는 장시적인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7. 전차|작성자 김기덕   8. 힘 (1)   타로카드 8번 힘은 여인이 사자를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어르는 그림이다. 미녀와 야수 같은 그림으로 진정한 강함은 부드러움에 있음을 상징한다. 꼬리를 내린 수사자는 혀를 내민 채 부드러운 여인의 손에 의해 온순해져 있다. 하지만 사자의 내성은 감추어진 발톱처럼 포악하고 위험하다. 언제 달려들어 물을지 모른다. 수사자는 동물적 본능을 의미한다. 또한 대자연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사자로부터 산과 계곡과 나무와 풀들이 살아 숨 쉬는 대자연의 힘이 뻗어 나오고 있는데, 이는 강력한 힘의 대자연이 창조적 여인에 의해 순화되고 길들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미녀와 야수를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사자의 동물적 본능은 이성적인 힘에 의해 조절되고 다루어짐을 상징한다. 여인은 여왕이나 왕비의 옷이 아닌 서민적인 옷을 입었다. 여왕이나 왕비의 권력이 진정한 힘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은 봉이나 지팡이를 들지 않은 맨손이다. 이 맨손은 완력을 쓰지 않고 마음으로 다스릴 때 어떤 강한 것도 굴복시킬 수 있음을 상징한다. 몽둥이나 채찍을 들었다면 이 사자는 물으려고 대들었을 것이다. ​사람관계에서도 법이나 힘으로 억누르려한다면 강한 반발과 대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으로 다스린다면 스스로 굴복하고 애정으로 대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은 또한 흰옷을 입고 있다. 흰옷은 순수하고 깨끗함을 의미한다. 그 만큼 악의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여인의 머리와 허리에서 화초가 자라고 꽃이 피어난다.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러한 애정과 순수한 감정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감을 상징한다. 여인의 머리 위에는 뫼비우스의 띠가 그려져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지혜와 지식, 경험을 상징한다. 이 뫼비우스의 띠는 무한대를 그리고 있다. 그 만큼 많은 지혜가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타로카드 8번인 힘에서 상징하고 있는 것은 힘은 사자와 같이 폭력과 완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부드러움에서 나오며, 지혜와 풍부한 경험 속에서 진정한 힘이 나옴을 상징한 그림이다. 베이컨의 말처럼 아는 것이 힘인 것이다. 과거 자연에 대한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는 많은 자연재해를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과학의 발달로 닥쳐올 자연재해를 미리 예견하고 방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것도 역시 아는 것이 힘인 것이다. 또한 뫼비우스의 띠는 힘의 무한성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할 수 있다. 온 세상을 꽁꽁 얼려버리는 겨울의 힘이 강한 것이 아니라 눈과 얼음을 녹이고 온 세상에 새싹을 돋게 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봄이 진정한 강함임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원래 8번에 있는 힘은 11번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8번 카드와 11번 카드가 지금도 맞바꿔져 사용되기도 한다. 뫼비우스의 띠는 1번 카드 마법사에서 한번 나오고, 11번째 카드 힘에서 두 번째 나온 후 21번 카드 세계에서 두 개가 한꺼번에 나온다. 타로카드 1~9까지는 정신세계 영역인 것이 10번 카드 운명에서 일단락 된 후, 11~20까지 현실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21번 세계에서 두 뫼비우스가 동시에 하나로 엮어짐으로 두 세계의 통합을 의미한다. 배경으로 칠해진 노란색은 따뜻함과 긍정의 의미이다. 따뜻한 미소처럼 강한 것은 없다. 따뜻한 미소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도 있다. 긍정적 마인드처럼 추진력 있는 힘도 없다. 눈에 보이는 총과 칼이 무서운 힘이 아니라 내면에 감추어진 부드러움이 또한 인간관계에서 진정한 힘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카드의 정방향의 의미는 역량의 크기가 큼을 말하거나,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이성과 자제력이 있음을 의미하며, 실행력, 지혜, 용기, 냉정 및 지구전이 필요함을 상징한다. 역방향의 의미는 어리광 및 소극성, 무기력, 임무전가, 우유부단함을 상징하고 있다. 시에 있어서의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 과거에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서정성에 있었지만, 이제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성은 평면적인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시를 만든다. 그 입체성 안에 많은 방들이 있어서 다양한 물건을 숨겨 둘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의미를 감추어 둘 수 있다면, 어장에 많은 고기를 기르듯 정신적, 지식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진정한 힘은 감성의 전달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데 있다. 그러한 힘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다층구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층구조는 유사성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이미지 간의 결합만으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층구조는 반드시 상징성과 철학성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이미지가 만드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유사한 이미지들은 심층적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수평적 구조를 만든다.   꽃 여자 향수       이 관계를 집합으로 표시한다면 꽃∩여자+여자∩향수+향수∩꽃=꽃∩여자∩향수의 관계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집합의 관계는 공통분모를 찾는 작업이며, 서로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며, 다양성,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건물을 짓는 다면 위쪽으로 뻗어가는 것보다 옆으로 확장해 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강물   도시 세계       또한 위의 그림과 같은 관계를 집합으로 표시하면 강물⊂도시+도시⊂세계+강물⊂세계=강물⊂도시⊂세계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관계는 여집합의 관계로 복층적 관계를 만들며, 심오한 차원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이다. 이러한 요소를 찾고 복층적 관계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개념적 요소를 알아야하며, 그 개념적인 요소는 이미지가 아닌 관념성 및 철학성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강물의 안개를 시적 이미지로 끌어왔다면 도시에서의 안개, 세계에서의 안개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같은 안개이지만 그 안개의 의미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찾는 것이 복층적 관계를 만드는 일인데, 이러한 연관관계를 찾기 위해서는 이미지 간의 연관관계보다는 의미의 연관관계, 철학성 및 관념성의 연관관계를 알고 연결시켰을 때만이 심층적인 깊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안개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안개와 유사한 이미지를 찾는다면 연기나 구름 등과 같은 이미지를 찾을 수 있겠으나 이러한 이미지의 관계는 심층적 관계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강물에서의 안개, 도시에서의 안개, 세계 속에서의 안개, 내 마음 속에서의 안개를 찾았을 때 심층적인 관계를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한 관계는 똑같은 안개이지만 의미가 다른 것이다. 이렇게 다른 의미의 똑같은 이미지를 찾고 접속시키기 위해서는 관념성, 즉 철학성이 필요한 것이다. 위에 있는 타로카드 8번의 힘에 그려져 있는 사자는 맹수성, 폭력성, 완력성, 육체성 등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 맞는 상징적 요소를 찾는다면 폭군, 남자, 왕, 자연, 바다, 감정 등과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유사성에서 연결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자가 가지고 있는 관념성에서 뻗어나간 사고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여자의 유사성은 꽃이나 천사와 같은 것이 되겠지만, 그것보다 폭군 같은 사자를 달랠 수 있는 부드러운 여성성이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폭군을 달랠 수 있는 여성성, 왕을 달랠 수 있는 여성성,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여성성,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있는 여성성,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이성과 같은 관념성으로 연결 관계를 찾아야 한다. 야수와 미녀의 관계는 가정과 사회, 세계의 보편적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미녀와 야수를 통해 세상과 사회와 가정, 내 마음 속의 야수성과 여성성을 함께 복층적으로 그려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층적 상징관계를 그려주는 것은 유사한 이미지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철학성, 관념성의 상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타로카드 8번 힘의 손, 화관, 드레스, 여인, 뫼비우스의 띠, 꼬리, 이빨, 발톱, 사자, 벌판 등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봄과 겨울, 미녀와 야수, 가정의 남편과 아내, 폭군과 여인 등의 관계를 나타낸 시이다.   미녀와 야수   화관을 쓴 여인이 눈보라의 꼬리를 감춘 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마와 목덜미를 간질이는 손에선 쇠사슬이나 망치보다 강한 쇳물이 흘러내리고 발톱을 숨긴 사자가 고개를 흔들며 얼음의 눈빛을 떨군다.   긴 혀를 빼문 태양이 핥아대는 거리엔 하루 종일 푸른 잎들이 돋아나와 갈기를 흔들었다.   꽁꽁 얼어붙은 설산의 이빨 폭군의 뇌성은 밤에 더욱 빛났었다.   흰 드레스에서 쏟아지는 꽃잎들로 벌판엔 초록빛이 물들고 가시뿐인 사내들의 몸에선 새싹이 돋아난다.   성해 속에 감추어진 이빨들이 물어뜯던 유리창마다 햇살 같은 눈웃음이 물방울로 맺힌다.   허리에 두른 꽃잎들 속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빙판을 녹이며 강물로 흘러가는 꽃향기 갈색 사자의 세포마다 새싹이 움트고 초록빛 갈기를 휘날리던 사내의 전성기는 여인의 손끝에서 왔다.   뫼비우스 머리띠를 한 여인이 꽃잎으로 피어나는 밤 얼어붙은 도시의 벌판을 지나온 발가락마다 으르렁으르렁 발톱들이 잘려나간다. [출처] 8. 힘|작성자 김기덕   9. 은둔자   타로카드 9번째 은둔자는 별이 들어있는 등불을 높이 든 늙은 남자가 지팡이를 들고 설산 위에 서있는 그림이다. 은둔자는 고독과 현인, 현자를 상징하며, 정신과 마음의 정화와 치료를 의미한다. 노인이 오른손에 든 별이 들어있는 등불은 세상을 밝히는 지혜를 상징한다. 등불 속에 들어있는 별은 꺼지지 않는 불이다. 바람과 같은 외부의 자극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의 지혜를 상징한다. 별의 빛깔은 황금색이다. 황금색은 고귀함을 의미하며, 차원이 높은 영적 고매함을 뜻한다. 이 노인은 오른손에 등불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이는 세상 멀리까지 비추기 위함이다. 몽매한 세상을 밝히고자하는 현자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왼손에 든 지팡이 또한 황금색인데, 이것도 고귀함의 상징이며, 크고 긴 지팡이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가졌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팡이가 짧고 가늘었다면 이는 자신의 몸을 의지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겠지만, 크고 긴 지팡이는 자신을 의지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될 수 있는 영적 깨달음의 지팡이인 것이다. ​또한 이 늙은 남자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눈을 감고 있다. 세상을 보고 있지만 눈을 감고 있는 것은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인 세상에 치우친 자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인 것이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핵심을 찌르는 조언을 하고, 정신적이며, 조용하고, 영웅과 같은 존재로 오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듯한 모습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신인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를 연상케 하는 이 노인은 현자이지만, 혼자이기 때문에 고독하며, 반성적, 또는 성찰적이다. 사려 깊음과 신중함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긴 수염은 지성과 연륜, 지도자, 권위자, 세상을 탈속한 신선과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맨발의 이 노인은 긴 회색 옷을 입고 설산 위에 서있다. 맨발은 고행, 무소유를 의미하며, 긴 회색 옷은 승복이나 수도사의 옷을 연상케 한다. 승복은 청빈한 삶, 흑과 백의 초월, 원융의 색이기도 하며, 무소유, 신성, 경외감을 상징한다. 자유의 색, 아름다움을 숨겨놓은 색이라고도 한다. 또한 회색은 검정도 하양도 아닌 기회주의자, 중립자, 자연물에 대비한 인공물, 존재감이 없는 회색분자, 우울, 노인의 색깔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산은 고행의 세상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차가운 현실을 상징하며, 얼어붙은 마음의 세계를 뜻한다. 이러한 설산의 꼭대기에 서있음은 성숙된 차원의 사람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지성의 최고도에 있음을 의미한다.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이며, 인간 세상과는 어느 정도 격리된 초월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추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언제든지 가지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카드의 배경은 온통 파란색으로 되어 있다. 파란색은 맑게 개인 하늘, 넓은 바다, 희망과 미지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신선함을 주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게 한다. 청순, 청아하며, 깨끗함의 상징이다. 천국을 의미하며, 안전, 정적인 신뢰, 명예와 세련미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 성공이나 꿈을 상징하며, 자립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수심과 비애, 우울, 미숙함, 차가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은둔자 카드는 주역의 천산돈(䷠)과 같다. 천산돈은 위에 하늘(☰:乾)이 있고, 아래에 산(☶:艮)이 모양으로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하늘이 부여한 명을 지키는 상이다. 遯은 돼지와 같이 어리석은 체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를 닦는 의미가 있다. 遯은 안으로 산과 같이 굳건한 절개와 자제를 행하고 밖으로는 하늘과 같이 강건한 도로써 소인을 교화하고, 소인배적인 생각, 즉 형이하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형이상적으로 종교적, 철학적 성향을 띠게 된다. 은둔자를 왜 타로카드 9번에 놓았을까? 9는 한자리수 중 가장 큰 숫자이다. 완전, 완성, 전체성을 상징한다. 균형, 질서, 최상의 완전을 표현한 거룩한 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속세로부터 초월된 의미가 있으며, 무한과의 경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 만큼 은둔자는 개인적 완성, 속세와의 단절, 무한한 이상을 추구하는 의미가 숫자 9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카드의 정방향의 해석은 조언, 신중, 배려, 독립, 지혜, 은신, 상담, 지식, 근심, 현명함, 판단의 자유, 경고, 경계, 신중히 관찰함, 자기부정, 후퇴, 퇴화, 역행, 취소, 감정을 억누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징한다. 역방향은 폐쇄성, 소극성, 무계획, 오해, 비관적, 경솔함, 성급함, 무모함, 미성숙, 바르지 않은 충고, 우울함, 실패, 일의 지연 등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타로카드를 활용한 시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색깔을 맞추는 것이다. 언어의 색깔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백색과 흑색의 대비라고 할 수 있다. 색은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밝은 색은 기쁨과 환희, 희망, 꿈 등과 같은 감정을 표현해주지만, 어두운 색은 절망, 좌절, 고통, 슬픔, 역경 등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시쓰기에서 슬프다느니 기쁘다느니 말하기 전에 언어의 색깔을 표현해주면 그 감정을 이미지로 표현할 수 가 있을 것이다. 먼저 이미지의 색깔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에는 다 색깔이 담겨있다. 그 색깔은 한 가지의 색이 아니라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이 동시에 같이 공존한다. 예를 들면 나무라고 하는 이미지 속에는 여러 이미지가 들어 있겠지만, 크게 밝은 색과 어두운 색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푸른 잎들이 반짝이는 나무’ 라고 한다면 이 나무의 이미지는 밝은 색을 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쓰러져 말라비틀어진 나무’ 라고 한다면 이 나무의 이미지는 어두운 색을 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이미지에는 크게 두 가지의 색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색깔은 감정적인 색깔인 것이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글이기 때문에 그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설명적인 언어로 구성된 시는 일차원의 평면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는 예술적인 가치가 없는 시이다. 생각할 거리가 없는 것이다. 고급독자들은 이러한 시를 읽고 감동하지 않을 것이다. 시의 생명은 상징성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복층적으로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느냐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에는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중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대중을 의식하지 않고 고도의 예술성을 구현한 특수층들을 위한 예술이 있다. 대중성과 예술성은 같이 갈 수도 있지만, 어느 정점을 지나면 함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도의 예술성을 추구하고자 하는데 대중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 요즘의 예술작품들은 복잡해지고 상징화 되어가고 있다. 미술작품을 보더라도 복잡해지는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더욱 추상화되어가고 있다. 인터넷이 활발히 활동하는 시대에 가상세계의 현실적 출현과 맞물려 과거에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과거의 풍경화 같은 그림만 고집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한 그림들은 식상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감각을 갖고 보다 심오한 예술적 쾌감을 추구하는 세대들에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없게 되었다. 풍경화는 정서의 환기, 복잡한 도심을 벗어난 편안과 위로의 마음은 줄지언정, 예술적인 깊이와 쾌감을 주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유독 시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역행하는 시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시의 기능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정서적 기쁨을 주는 것이라는 이유를 달고 있다. 시는 복잡해서는 안 되고, 고도의 상징성을 가져도 안 되고, 난해해도 안 된다는 생각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독자들이 외면한 현실을 개탄하며.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독자에게 방향타를 맞춘 시의 뱃머리는 대양을 향하지 못하고 뭍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상황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시들이 식상한 감정들만 반복적으로 양산해내고 있다. 시에는 왜 고급독자는 없고 수준이하로 평준화 되었는가. 복잡한 추상화들이 화랑에 내걸려 사람들을 상상의 나라로 이끌며 꿈꿀 수 있게 하는데, 시는 복잡하다는 의식으로 외면당하고 내팽개쳐져야 하는가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우리 속에 시는 복잡하면 안 된다는 의식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자위하며,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안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의식, 새로운 시각, 새로운 방법이 우리 시에도 필요하다. 시는 의식의 표현이다. 표현은 이미지의 실현이며, 이 이미지는 감각적이어야 한다. 이 감각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시각적인 비중이 가장 많이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각적인 시대, 영상의 시대에 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도 시각적인 이미지를 살려야 한다. 이러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의 색깔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색깔을 팔레트에서 섞어 여러 가지 색을 만들 듯 사물들을 조함하여 자신이 원하는 언어의 색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캔버스에 붉은 색만 칠해놨다면 그림을 감상하는 감상자들은 나름의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붉은 색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혁명이나 피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저녁노을이나 용광로, 불속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걸 일일이 설명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붉은 색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도 마찬가지이다. 설명해서 자신의 의도를 말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의도는 창작자와 독자가 꼭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창작자는 자신이 만들었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 상상력을 단절시키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고, 혼이 있다. 그 이미지 속엔 곧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징성을 살려서 이미지들을 조합하고 색감을 표현한다면 독자들이 스스로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예술적 세계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타로카드 은둔자에서 우리는 등불이나 지팡이, 설산, 수염, 맨발 등과 같은 이미지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이 이미지들 속에 들어있는 색깔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색깔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등불은 밝은 색이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환한 색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지혜나 지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지팡이 또한 앞길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밝은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카드에도 이 둘은 황금색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시를 쓰면서 이러한 이미지를 사용하게 될 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로 색을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별이 들어 있는 등불’은 밝고 희망적인 색이다. 하지만 ‘불 꺼진 등불’은 같은 등불이지만 세상을 밝힐 수 없는 어두운 등불인 것이다. 그래서 밝은 색이 아니라 어두운 색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은 감정으로 언어를 통해 그리는 그림이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밝은 색, 즉 기쁨이나 행복, 평안, 환희 등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미지를 밝은 색으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두운 색, 슬픔이나 좌절, 아픔, 고독, 고통 등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미지를 어두운 색으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 절벽에 선 나무 김 기 덕   바다로 향해 가는 불빛들의 검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뼈만 남은 어깨엔 눈과 비와 바람을 채색한 누더기뿐.   바람의 난간에 선 맨발 실금 하나 사이로 생존과 파멸이 공존하고 있었다. 뜬구름 접어서 종이비행기로 날려준 바람 줄을 나는 놓지 못하는 걸까.   절벽에 매달려 힘줄이 불거진 나무의 발은 평생 수직의 길을 걸어왔다. 담쟁이 더듬거리던 길로 나의 발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못 박혀 직각의 모서리를 걸었다.   날개 접은 종이비행기들의 풍문이 떠다니며 벼랑 끝으로 낙엽들을 몰아갔다.   달은 지프라이터에 갇혀 초승달로 사그라지고 담배 불빛 깜박이던 옥상에 올라 마지막 어둠을 태우던 눈빛들   절벽에 매달려서야 창틀의 위대함을 알았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유리창을 껴안고 절벽에 매달려 본 적이 있던가. 내 몸 하나도 붙들지 못했던 옹벽   바위를 껴안던 지네발 같은 뿌리가 뽑혀 내 척추로 이식되던 밤 신경마다 흐르고 있는 이빨들의 강을 보았지.   무너질 수 없다고 이를 앙다문 뼈들이 빌딩처럼 일어선 절벽에 매달린 절규.     10. 운명의 수레바퀴   타로카드 10번째인 운명의 수레바퀴는 카드 위에 TARO라고 쓰인 거대한 수레바퀴가 있고, 그 위에 칼을 들고 있는 스핑크스가 보인다. 그 오른쪽엔 아누비스가, 왼쪽엔 티몬이 있고, 카드의 네 귀퉁이에는 사람, 독수리, 사자, 황소가 책을 보고 있는 그림이다. 수레바퀴는 순환을 의미한다. 윤회나 계절의 변화, 시작과 끝을 의미하며, 시간의 변화, 운명, 금전, 전환기, 예측할 수 없는 결과, 지구의를 상징한다. 사진이나 그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배의 방향타나 비행기의 방향타, 자동차의 운전대도 같은 상징적 존재이다. 수레바퀴의 중앙 꼭대기에 칼을 들고 앉아있는 스핑크스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판단을 의미한다. 정확함은 수레바퀴의 정중앙에 앉아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음을 상징하며, 칼은 그 판단이 예리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스핑크스의 색깔은 하늘색이다. 하늘색은 맑고 바른 정신을 의미한다. 흑심으로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하기 때문에 그 판단이 바를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지혜로움, 위엄, 경고, 신비주의, 수수께끼 등을 상징한다. 스핑크스는 원래 전지의 신이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지로 인한 잘못된 판단은 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다. 왼쪽엔 뱀이 거꾸로 추락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뱀은 죽음과 파괴를 상징하며, 나락으로 떨어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뱀을 아래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뱀은 인간을 타락케 한 존재이다. 본능적이며, 성적이며, 욕망을 상징한다. 오른쪽에서 등으로 바퀴를 밀어 올리는  아누비스는 죽은 자의 수호신이며, 죽은 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다. 시체 방부처리를 하는 신이기도 하며, 지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누비스의 방향은 위쪽을 향해 있고, 상승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수레바퀴 안에 그려진 네 개의 선들은 중세 연금술사들이 믿고 있던 세상의 구성요소 4원소 소금, 수은, 유황, 공기를 의미하고 있다. 이 그림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은 스핑크스와 티몬, 아누비스인데, 윤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스핑크스는 인간의 죄에 따라 판단을 하고, 뱀은 그 판단에 따라 나락으로 떨어드리고, 아누비스는 죽은 영혼을 다시 저승으로 옮김으로 삶과 죽음, 그리고 심판을 나타내주고 있다. 카드의 네 귀퉁이에는 책을 읽고 있는 네 형상이 그려져 있다. 먼저 위쪽엔 사람과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위쪽은 신에 가까운 단계, 아래쪽은 짐승의 단계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황금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다 같이 구름 속에 있다. 구름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인생의 모호함이 담겨있다. 또한 네 귀퉁이의 사자가 바람을 붙들고 있는 성경상의 표현을 통해본다면 구름 속에는 바람이 들어있고, 비가 들어있다. 바람은 변화이고, 환란이고, 고통이고, 능력일 수도 있다. 그것은 구름 속에 담긴 비와 바람의 능력 때문이다. 이 네 형상들이 갖고 있는 것은 책인데, 책은 진리를 의미하며, 법칙, 원리, 철칙을 의미한다. 좌측 위에 있는 사람은 물병자리를 의미하며, 정신적인 부분을 상징한다. 우측의 독수리는 직관력과 통찰력을 의미하며, 전갈자리를 나타낸다. 좌측 아래에 있는 황소는 의지력을 상징하며, 황소자리를 나타낸다. 우측의 사자는 추진력, 실천력을 의미하며, 사자자리를 나타낸다. 이 네 상징물은 동서남북, 춘하추동을 의미하며, 주역의 건곤감리와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아직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변화하게 되며, 새로운 다음단계로 전환하게 된다. 운명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여 다시 돌아오는 계절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굴곡이 있고, 온대로 다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10번에 놓은 것은 숫자 10이 10>1+0=1이 되어 새로운 시작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10은 근원, 신, 탄생, 중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카드의 정방향은 전환, 행운, 기회, 변화, 결과, 운명, 인연, 성장, 순리, 전환기, 완성, 문제해결 등을 의미한다. “행운의 별은 당신 머리 위에 있다. 또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당신은 행복을 맛볼 것이다. 무언가 시작하고 싶으면 지금이 기회이다.” 라는 말을 해줄 수 있는 카드이다. 역방향은 상황의 악화, 이별, 사고, 하강기, 시기상조, 불리한 입장, 궁핍함, 실연, 어긋난 사랑. 불운, 방해, 단절 등을 의미한다. 하지만 금전 보유량이 증가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마음은 여유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은 타로카드의 해석을 통해 운명의 수레바퀴에 대한 상징성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상징적 이미지들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색깔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내가 밝고 기쁘게 시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미지의 색깔을 밝게 표현해야 하지만, 어둡게 시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이미지들의 색깔을 어둡게 바꾸어주어야 한다.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얻을 수 있었다. 수레바퀴, 스핑크스, 아누비스, 뱀, 독수리, 사람, 사자, 황소, 구름, 책, 칼 등과 같은 이미지들은 운명의 수레바퀴를 해석할 수 있는 암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을 내 맘대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이 이미지들의 색깔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이미지들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명사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다른 이미지의 명사를 사용하여 원하는 이미지의 색깔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명사와 명사의 연결 관계를 통해 직유, 또는 은유적 연결을 만들어 줌으로 감정의 색깔을 덧입히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수레바퀴라는 이미지가 있다면 이 수레바퀴를 밝게 표현하려면 ‘부챗살 같은 태양의 수레바퀴’나, ‘부챗살 태양 같은 수레바퀴’의 표현은 수레바퀴를 밝은 색으로 채색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수레바퀴를 어둡게 표현한다면 ‘살이 부러진 녹슨 세월의 수레바퀴’, 또는 ‘살이 부러진 녹슨 세월 같은 수레바퀴’로 표현한다면 수레바퀴를 어두운 색으로 바꾸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의 색깔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해 준다. 슬픔과 고통, 좌절을 쓰려면 이러한 이미지를 어둡게 변화시켜주면 된다. 자신의 감정을 밝게 표현해 주려면 이미지의 색깔을 밝게 표현해 주면 된다.   밝은 색 이미지                    어두운 색 이미지 스핑크스 - 하늘색 스핑크스         칼의 스핑크스 뱀 - 꽃 같은 뱀                          악마의 뱀 독수리 - 황금 독수리                  저승사자 같은 독수리 구름 - 솜사탕 구름                     먹물 같은 구름 사자 - 불꽃 갈기의 사자              마른 풀잎 갈기의 사자 황소 - 구릿빛 황소                     지푸라기 황소   둘째는 형용사로 바꿀 수 있는 표현 방법이다. 시에서 가급적 형용사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것은 직접적인 표현이 되기 때문에 시의 상징성이 떨어지게 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형용사, 부사는 시의 표현문장에서 가급적 빼기를 권한다. 더욱 부사는 문장을 표현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빼어야 한다. 그리고 부사를 쓰려면 다른 이미지로 바꾸어 표현해 주어야 한다. ‘빨리 달리는 말’과 같은 문장을 쓰고 싶다면 부사 ‘빨리’를 빼고 ‘바람 같은 말’과 같이 바꾸어 표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형용사는 필요에 따라 사용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붉은 말’, ‘검은 말’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용사를 사용해 이미지의 색깔을 바꾸어준다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밝은 색                             어두운 색 스핑크스 - 파란 스핑크스            검은 스핑크스 뱀 - 어린 뱀                              독한 뱀 독수리 - 용감한 독수리               겁먹은 독수리 구름 - 흰 구름                           터진 구름 사자 - 눈부신 사자                     파리한 사자 황소 - 살찐 황소                        어룽진 황소   세 번째로는 동사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상승적, 희망적, 긍정적인 동사들은 모두 밝은 색깔의 언어들이기 때문에 살아 생동하는 이미지로 바꾸어준다. 하지만 하강적, 절망적, 부정적인 동사들은 어두운 색깔의 동사들이기 때문에 소멸적, 축소적인 이미지로 만들어준다.   밝은 색                                  어두운 색 스핑크스 - 스핑크스가 날아간다          스핑크스가 추락한다 뱀 - 뱀이 고개를 쳐든다                     뱀이 고개를 움츠린다 독수리 - 독수리가 하늘로 오른다         독수리가 죽어간다 구름 - 구름이 떠오른다                      구름이 눈물을 흘린다 사자 - 사자가 초원을 달린다               사자가 쓰러진다 황소 - 황소가 노래한다                      황소가 운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이미지의 색깔을 변화시켜주면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에 맞게 문장을 만들어줄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직선적으로 표현하려해서는 좋은 시를 쓰기 어렵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언어의 색깔을 맞추어 이미지를 표현해 주면 그 안에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많은 감정들이 담기기 때문에 폭넓은 표현이 가능하다. 자신이 원하는 감정을 직선적으로 표현하면 독자는 그 이상 상상할 수가 없다. 자신이 10의 분량을 전하고 싶었다면 10 이상을 독자가 얻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직선적인 표현 속에는 다른 상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치료나 미술심리연구에 관한 이론들이 요즘 많이 나오고 있다. 그림 속에서 아이의 마음의 병을 읽고 치료의 방법을 찾는 학문들이 대부분이다. 어떠한 색을 썼는가만으로도 그 아이의 심리를 알고 마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듯이, 언어에도 색깔을 맞추어 문장을 만들면 그 색깔에 따라 감정을 읽을 수 있고 시적 작자가 의도하는 방향의 의미를 유추할 수가 있다. 이미지의 색깔을 맞추어 시를 쓰면 상징성이 커지기 때문에 상상력의 여지가 많아진다. 그리고 작자가 독자에게 주입하는 시가 아니라 독자가 상상하고 유추하며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시를 쓰게 된다. [출처] 10. 운명의 수레바퀴|작성자 김기덕   11. 법(JUSTICE)   붉은 옷에 녹색 망토를 걸친 왕이 두 개의 기둥 사이에 앉아 오른 손에는 양날의 검을,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이 카드는 전통적인 법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그는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칼을 사용할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판결은 곧 이루어질 것이다. 그 판결은 전통적인 것이어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왕은 붉은 색의 옷을 입고 있다. 옛날에는 붉은 염료가 비쌌기 때문에 귀족, 또는 왕족이 입는 옷이었다. 동양에서는 가장 고귀한 색이 황색이고, 두 번째로 고귀한 색이 붉은 색이었다. 서양의 경우는 자주색이 가장 고귀한 색이고, 그 다음 붉은 색이 두 번째로 고귀한 색깔이었다. 자주색이 황제의 옷이고 붉은 색이 귀족, 왕족의 색이었다. 빨간색은 피와 연결되어 폭력과 잔인성으로 상징되기도 하지만, 생명과 정열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 왕이 입은 붉은 법의는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보랏빛 휘장도 법의 권위와 무게감, 신뢰감 등을 의미하고 있다. 보라색은 외고집, 심술, 비사교적, 자기중심적, 투쟁을 나타낸다. 이는 자신의 판단에 누구의 말이나 행동에 흔들림이 없음을 상징한다. 보라는 여성을 상징하는 빨강과 남성을 상징하는 파랑과의 조합으로 생긴다. 또한 따뜻한 색의 빨강과 차가운 색의 파랑이 만나 중성적 요소를 나타낸다. 이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할 것을 암시한다. 보라색은 귀함과 아웃사이더의 두 가지 의미가 강하다. 달팽이 만 마리에서 손수건 한 장을 물들일 만큼의 보라색을 얻을 수 있었다니 희소한 색이어서 그 가치가 더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는 부귀와 권력을 상징하지만, 부정적으로는 우울과 허영, 동성애 등을 상징한다. 두 개의 기둥은 좌우의 선과 악, 애정의 사랑과 증오 등을 나타내며, 두 기둥의 색깔에 차이가 없음은 편파적으로 흐르지 않고 양면을 똑같이 생각하며 다루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오른손에 들린 양날의 칼도 이중성, 양면성에 대한 공평을 나타내고 있다. 칼은 집중력, 지배의 상징이며, 결단력, 이성적, 분석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왼손에 든 양팔저울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좌로나 우로 기울지 않은 저울의 모습을 보임으로 완벽한 평행, 공정성, 균형과 조화, 냉철한 판단력을 상징하고 있다. 머리에 쓴 왕관은 뛰어난 지혜를 의미하며, 상황판단 능력이 대단함을 나타내준다. 이 왕은 지혜가 출중했던 솔로몬 왕을 상징하며, 그의 냉철한 판단력을 나타내주고 있다. 눈가리개를 안 한 이 왕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만든 법의 작용보다 성스러운 정의를 의미하며, 오류나 편견이 없는 신성의 법칙을 상징한다. 이 왕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은 즉각 칼을 사용할 준비가 끝났음을 의미하며, 판결이 임박했음을 상징한다. 이 카드의 정방향을 해석하면 이치에 맞는 정의, 조화, 평등, 올바름, 미덕, 명예, 순결, 적당한 보상 등을 상징한다. 마음에 들건 아니건 최후의 결과는 공정할 것이다. 균형, 평형, 침착, 냉정함을 아울러 상징한다. 역방향의 뜻은 선입관, 잘못된 고소, 편협적이고 엄격한 재판, 조금의 동정도 용납지 않는 판결 등을 의미한다. 이 카드의 그림은 하나같이 정의와 공정성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사물의 상징성 때문이다. 이 상징성은 사물에 담긴 정신, 혼과 같은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 의미는 사물을 새롭게 만들며, 살아있는 존재로 생명력을 갖게 한다. 움직이지 돌과 담과 철기둥까지도 살아있는 존재다. 그 안에는 자석과 같은 기를 가지고 있으며, 표면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상징적, 이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호흡하며 움직이는 목숨이 있어서 활동하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부패하고 있는 시체까지도 실은 냄새를 풍기며 분해되는 활동 속에 살아있는 존재인 것이다. 생물학적인 생존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역할과 존재의 상징성 속에 만물은 살아 활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시인은 죽은 것들을 살리고, 살아있는 것들을 조합하고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여야 한다. 그것은 그 사물 속에 담긴 정신을 찾는 것이며, 상징성을 통하여 혼을 부여하는 작업인 것이다. 하나의 시 속엔 인간의 정서와 혼이 담겨있어야 한다. 그 정서와 혼이 관념적으로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왜 관념적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 관념성은 시인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상상력을 한정시키고 의미의 폭을 축소시킬 수밖에 없다. 관념으로 이루어진 글은 전달문이며, 설명문과 같은 것이다. 관념으로 이루어진 문장 속에서 시적, 예술적인 표현을 읽을 수는 없다. 시는 고도로 압축된 알집 속의 추상화처럼 많은 생각들로 집적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언어를 피하고 상징적 생명으로 가득 찬 사물이나 이미지를 끌어오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엔 혼이 담겨있다. 우리 인간은 육체라는 물질 속에 정신, 또는 혼이 담겨있다. 육체라는 표면적인 구조물 속에 숨겨진 존재가 담겨있는 이중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육체는 현실적이며, 가시적이고, 감각적이다. 하지만 내면엔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이고, 비감각적인 정신이 존재하듯이 하나의 이미지에도 표면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 존재하지만, 그 내면엔 초월적이고 비감각적인 상징성이 담겨있다. 이러한 이중구조가 분리된 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 식물과 생기의 분리, 스크린과 빛의 분리 와 같은 것을 또 다른 죽음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 속에도 새로운 이중구조가 생성되고,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생명은 바로 이미지와 그 안에 담긴 상징성으로 존재하는 생명인 것이다. 혹자들을 중심으로 상징성을 배제한 이미지만 가지고 시를 쓰고자하는 운동이 있었다. 기호시, 사물시와 같은 것들인데, 이러한 시는 이미지만 있고 상징성이 없기 때문에 죽은 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에서 아무리 관념성을 제거한다고 해도 그 이미지 속에 담긴 상징성은 나무속에 나이테처럼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완전한 상징성을 제거한 이미지만의 시를 쓰기는 불가능하며, 쓴다손 치더라도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감응을 줄 수가 없게 된다. 신이 창조한 존재물들에는 다 의미가 있고, 존재가치가 있다. 짐승이 남긴 분비물마저도 분해되어 거름이 되고, 곤충들의 먹이가 되어 살아있는 활동을 한다. 하물며 시인이 창조한 창조물이 이미지만 있고 그 안에 상징성이 없다면 죽은 것이며,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시나 사물시처럼 이미지에서 관념성을 배제하고자 쓴 시도 그 안에는 아직 관념성, 즉 상징성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시인 자신의 주관적 상징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모호하게 함으로 독자들의 다양한 상징성을 살리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읽는 독자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끌어내고, 상징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상징에는 많은 길들이 있다. 그 길은 복잡하고 미묘하여 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흥분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어떤 상징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길로 인해 더 이상의 새로움이 없는 죽은 존재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다. 빨간 신호등은 정지를 의미한다. 빨간 신호등은 죽은 상징으로 더 이상 새로움이 없고, 기호화한 것이다. 무관념의 이미지들만을 쌓아서 탈관념의 시를 쓰려고 한다는 것은 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돌만으로 탑을 쌓는다 해도 그 탑에는 이미 상징성이 담겨있다. 죽은 나무로 십자가를 만든다면 이미 그 안에 상징성이 담겨있는 것이다. 상징성은 이미지의 정신이고 혼이기 때문에 이미지만 존재할 수 없다. 정신과 혼이 없는 이미지로 시를 쓸 수도 없겠지만, 쓴다 해도 죽은 시를 쓰는 것이다. 시인은 사물 속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자이다. 살아있는 존재들은 시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하나의 돌이나 보석까지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된다. 언어의 이미지도 빨간 신호등처럼 오래 쓰다보면 언젠가는 새로움이 사라지고 기호화하여 생명력을 잃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이미지들에게 새로운 상징성을 부여하여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또한 뚜렷한 존재가치를 찾지 못했던 이미지들 속에 새로운 상징성을 부여하여 살아갈 수 있는 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타로의 이미지를 연구하고, 그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를 쓰고자 하는 타로 시쓰기의 기법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11. 법(JUSTICE)|작성자 김기덕   12. 매달린 남자   타로카드 12번은 T자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남자의 그림이다. 성경상의 베드로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으며, 시련의 시기, 움직일 수 없는 입장, 괴로운 체험, 과도기를 의미한다. 또한 거꾸로 매달린 점으로 보아 새로운 시작, 새로운 관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이해를 의미한다. 형틀에 매달린 시간은 고통을 의미한다. 사형수를 의미하는 그림은 반성의 시간을 의미하며, 재앙이나 갈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형틀은 T자형의 나무로 되어있다. 십자가의 형틀은 원래 T자형이었다고도 한다. T자형의 형틀엔 푸른 잎들이 자라고 있다. 이 형틀은 죽음의 형틀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형틀이다. 그래서 이 형틀에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얻어 새롭게 될 것을 암시한다. 형틀에 매달린 왼쪽 다리를 묶은 줄도 연약하게 보인다. 머지않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이다. 이것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곧 새롭게 탈출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한 쪽 다리가 매달린 이 남자의 다리는 4자 모양을 만들고 있다. 이 4자는 육체의 죽음, 표면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다리의 붉은 타이즈는 희생적 죽음과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열적 활동을 예고한다. 즉 희생을 통한 영혼의 자유와 성숙을 의미한다. 상의의 푸른 옷은 지식이 충만하며, 지혜가 가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다 희망적인 삶을 말한다. 형틀에 매달린 발에는 황금색 신발이 신겨져 있다. 발은 행실을 의미하며, 앞으로 나아갈 미래를 의미한다. 황금색 신발은 새롭게 변화하여 밝은 미래로 향해 갈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바르게 행동할 것을 의미한다. 또한 매달린 남자의 손은 뒤로 하고 있다. 손을 앞으로 내밀지 않음은 나서지 않을 것과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것을 상징한다. 매달린 남자의 머리는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그의 아이디어는 반짝이고, 기발한 상상력을 가져서 엉뚱하지만 항상 재밌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다. 이 카드의 정방향은 희생, 인내, 시련극복, 성장의 시기, 자기희생, 때를 기다림을 의미한다. 또한 태도변화, 고정관념의 변화, 회개, 후회를 의미한다. 올바른 판단이라도 때에 따라 침묵해야하며, 인내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지혜가 있어 손해는 보지 않지만, 지금은 활약할 시기가 아님을 상징한다. 역방향은 불가항력의 시기, 겸허함이 필요한 시기, 남을 위해 움직여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불륜이나 비밀이 탄로 남을 의미하며, 무의미한 희생이나 처벌을 상징한다. 때로는 자신이 행동해야할 때도 있지만, 주변에서 원하지 않으면 떠나야 하는 상황을 상징한다. 매달린 남자의 그림은 T자 형틀, 거꾸로 매달린 남자, 4자형의 다리, 붉은 타이즈, 푸른 옷, 신발, 빛나는 머리, 발을 묶은 끈 등의 이미지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조합되어 있지만, 이 조합된 이미지들을 통해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내면에 관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의 관념은 시적 표현에 있어서 배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미지를 강조하며, 설명적이 아닌 표현을 강조하다보니 관념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되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물론 시에 있어서 직접적인 관념의 표현은 지양되어야 한다.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관념어를 직접적으로 쓴다면 예술적인 깊이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념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이미지만의 시는 존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지 속엔 이미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옥구슬이라는 이미지 속엔 이미 귀함과 순수함과 같은 관념의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을 제거하고 시를 쓰고자했던 기호시 운동이나, 디카시, 탈관념을 중시한 하이퍼시 등의 운동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지만, 실질적으로는 완벽하게 이론에 맞게 구현하기 어려운 시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최대한의 관념적 표현을 배제함으로써 이미지가 충만한 회화적 현대시의 길을 열 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현대시는 이미지의 결합과 유사이미지의 건너뛰기를 통해 사고의 확장을 꾀하여 왔고, 다초점적인 다양성을 추구해 왔다. 특히 하이퍼시는 큐비즘적 다양성과 리좀적인 사고의 확장, 현실과 이상과 같은 대립 점들의 건너뛰기를 통해 작자가 주입하고 리드하는 시가 아니라 독자가 생각하고 만들어 갈 수 있는 시를 쓰고자 했다. 이러한 시들은 다층적인 표현을 통해 관념이 제거된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유사한 이미지들을 접속시키고, 유사한 상황과 이야기를 연결시켜 사고의 확장을 꾀하여왔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의 결과물로 나온 시들은 복잡하고 다양했지만, 마음에는 감동과 여운을 남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음미하고 생각해 볼만한 깊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에서의 철학성, 상징성은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읽고 정신적인 의미나 깨달음, 마음의 감동이 없다면 그 시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독자가 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질적 수준이 안 되어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더욱 문제는 그 깊이마저 없다는 점이다. 그 깊이는 다층적 상징성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들의 연결 관계에서 유사성에 집중하여 심층적 깊이를 만들지 못하고 평면적 다양성, 즉 흩어놓기의 기법이 됨으로 지저분하고 복잡하지만 그 안에서의 심층적 사고의 깊이를 읽기는 어려웠다. 시를 읽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집중해야 했지만, 집중한 만큼의 효과, 시적 쾌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급독자들마저도 회의감을 갖게 하였다. 여기에는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관념을 배제함으로 인간이 표면적이 아니라 심층적으로 느끼는 원초적 내면의 쾌감을 무시하게 된 결과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미지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표면적인 자극이다. 이러한 표면적인 자극이 표면에 그치지 않고 내면까지 연결되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요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느 화가가 캔버스에 노란색만 칠해놨다면 그 노란색을 보고 감상자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유채밭이나 은행잎이 떨어진 길 등과 같은 저마다의 이미지를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다양한 연상만으로 감동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유채밭에서의 사랑하는 사람과의 입맞춤이나 은행잎이 떨어진 길에서의 이별 같은 구체적 사건이나 경험으로 인한 개인의 체험적 슬픔이나 기쁨 때문에 노란색의 그림만으로도 감동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미지만으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구체적 사건이나 의미로 인해 감동, 즉 관념성으로 인해서 감동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미지에서 관념성을 무조건 제거할 것이 아니라 관념을 이용한 이미지의 활용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시 쓰기에 있어서의 관념의 활용   현대시는 평면적인 시 쓰기가 아니라 입체적인 시 쓰기라고 했다. 건물로 말한다면 1층짜리 초가집이나 기와집이 아니라 10층이나 100층과 같은 빌딩을 짓는 것이다. 이러한 빌딩을 짓는 데에는 일층자리 집을 짓는 것과는 공법부터가 다르다. 다층으로 갈수록 콘크리트에 철근을 넣든지, 철골을 써야한다. 시도 평면적인 시가 아니라 입체적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다층적 사고를 엮어줄 수 있는 상징적 철골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철골은 이미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안개에 대한 유사 이미지를 찾는다면 연기나 구름, 입김, 가스와 같은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들의 조합으로는 수평적인 관계는 만들 수 있어도 심층적인 관계를 만들기는 어렵다. 안개에 대한 심층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안개의 관념성, 즉 답답함이나 소통부재와 같은 관념성이 철골을 이룬 안개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찾아야 한다. 강가의 안개, 도시의 안개, 국가의 안개, 세계의 안개, 마음의 안개, 정신의 안개와 같은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발견은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관념의 상황적 변화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같은 관념의 상황적 변화는 입체적인 공간성을 만들어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삼차원의 공간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많은 차원의 공간성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심층적 사고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다. 수백 미터 암반을 뚫고 생수를 뽑아 올리는 데는 관정이 필요하다. 이 관정을 통하여 암반 속에 들어있는 생수를 끌어 모아 지상으로 뿜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정의 역할을 하는 것이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해 주는 관념인 것이다. 강가의 안개가 도시의 안개, 국가의 안개, 세계의 안개, 내 마음의 안개가 된다고 했는데, 만약 파도라면 도시의 파도, 나라의 파도, 세계의 파도, 내 마음의 파도와 같이 일률적으로 나간다면 더 이상의 다양성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강가의 안개에서 도시의 안개로 확장했다면 도시의 안개적 요소는 다 안개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강가의 안개와 연결될 수 있는 도시의 안개에 대한 상징적 요소는 대모나 폭력배의 활동, 경기의 침체, 정치의 불안, 환경적 저해요소인 매연이나 황사, 도시인들 간의 소통부재 등의 셀 수 없이 많은 안개적인 요소가 다 접속 가능한 안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안개 요소들을 끌어와서 직접적 이미지로 쓸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이미지를 배경으로 깔며 보이지 않게 내면으로 그려줄 수도 있는데, 이는 투명한 유리건물과 같이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잠재적 존재인 것이다. 시에서는 이런 잠재적인 존재들이 많을수록 상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가의 안개나 도시의 안개, 세계의 안개와 같은 변화도 있겠지만, 과학적 안개, 예술적 안개, 종교적인 안개 등등의 많은 안개를 끌어올 수가 있을 것이다. 과학적, 예술적, 종교적, 도시적, 세계적 등과 같은 구분은 커다란 구멍과 같은 것으로 그 안의 많은 이미지들을 취사선택하고 접속시켜 활용할 수가 있는 구분된 창고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창고 안에는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시적 이미지에 대한 무수히 많은 상징적 이미지들이 담겨 있어서 맘먹은 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신이 쓰고자 하는 시적 이미지에 대한 유사이미지를 찾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적 대상인 이미지에 대한 유사이미지를 찾는 것과 시적 대상인 이미지의 관념성을 중심으로 한 상징적 이미지를 찾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에 대해 시를 쓴다면 태양의 유사이미지 불꽃, 눈동자, 심장 등과 같은 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이미지로는 깊이 있는 시를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사성이 너무나 표시가 나기 때문에 시의 모호성을 살리거나 고도의 상징적 구조를 만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태양의 관념성, 즉 열정이나 밝음, 영광, 희망 등과 같은 관념성을 중심에 놓고 내 마음의 태양, 가정의 태양, 도시의 태양, 국가의 태양, 세계의 태양을 종교의 태양, 예술의 태양, 철학의 태양 등등의 많은 태양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태양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부모님, 직장, 돈, 지식, 명예, 종교, 예술, 건강 등등의 많은 태양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태양이라면 정치적 지도자, 상징적인 탑, 숲이나 공원, 발전시설 등등의 많은 이미지를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를 끌어오든, 아니면 암묵적 배경으로 깔고 사용하든지 하여 포괄적인 상징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작품 최은묵의 키워드도 바로 이러한 구조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키워드는 관념어 생명이다. 이 관념어 생명에 대한 이미지 우물, 피부, 아이, 여인, 길, 나무, 눈물, 물길, 실뿌리 등을 찾고, 그 이미지의 연결을 통하여 암담한 현실 속에서의 참 생명을 추구한 시이다. [출처] 12. 매달린 남자|작성자 김기덕     13. 죽음    타로카드 13번 죽음은 백말을 탄 검은 기사가 장미와 백합이 그려진 검은 깃발을 들고 있다. 두 벽 사이에서는 태양이 떠오르고, 말 앞에는 교황이 서서 기도하고 있다. 땅에는 황제가 쓰러져 있고, 어린아이가 꽃을 들고 있다. 그 뒤쪽엔 흰옷을 입은 여인이 외면하고 있다. 멀리 강물이 흐르고 돛단배가 떠간다. 땅은 온통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다. 백말은 새로운 시대가 다가옴을 의미한다. 백마 위에 탄 검은 기사는 흑사병과 같은 질병이며, 재앙과 전쟁, 죽음을 상징한다. 그가 든 검은 깃발은 전염병이나 전쟁, 죽음의 기세가 클 것임을 상징한다. 검은 깃발 안에 그려진 십자군 원정대의 흰 장미와 백합은 물과 불의 결합, 십자가를 의미하며, 반대되는 것들의 통합을 의미한다. 해골은 수많은 희생을 뜻하며, 새로운 시대를 몰고 오는 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죽음의 신을 상징하는 해골의 기사는 삶의 투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 아래 쓰러진 황제는 교권에 의해 추락한 황제의 권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버려진 왕관처럼 아무리 강한 힘도 언젠가는 죽음 수밖에 없는 종말을 예고한다. ​황제는 보수적인 인물을 의미하며, 기득권의 몰락, 포기를 상징한다. 흰말 앞에 선 교황은 흰말이 당도하고자 하는 목적적 존재이다. ​이는 종교로 황권을 무너트리고 교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의도가 그림에 담겨 있다. 교황은 신의 축복이며,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말의 머리 쪽에 있는 두 탑 사이의 태양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종말 이후의 재탄생을 상징하며, 부활을 뜻하고 있다. 말 앞에 있는 어린아이는 새로운 시작과 성장을 의미하며, 변화할 미래를 상징한다. 손에 든 꽃다발과 머리에 꽂은 꽃은 새로운 희망을 상징한다. 어린아이는 말을 바라보며 환영하는 신진세력이다. 어린아이 뒤에서 외면한 여인은 타로카드8번에서 사자를 다스리던 여인이다. 이 여인은 운명을 억누르던 여인이며,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기성세대를 의미한다. 멀리 보이는 강물은 세월의 흐름을 말하며, 그 강물 위에 있는 배는 한 배를 탄 시대적 존재를 의미한다. 황금색 땅과 교황의 옷 색깔이 하나로 통일된 것은 세상에 팽배한 황금만능주의와 그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종교의 세속화를 상징한다. 13이란 숫자에 죽음이라는 카드를 놓은 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 12명을 상징하며, 최후의 만찬과 같은 마지막을 의미한다. 13일의 금요일을 서양에서는 기피하는 날로 인식했던 것도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의미하는 13과 십자가에 박은 못(金)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한 13과 못을 의미하는 금이 겹친 날을 특히 불운의 날로 생각했다. 이 카드의 정방향은 파멸, 결말,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새 시대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는 의미가 있다. 남은 것은 하나도 없이 끝남을 의미한다. 역방향은 새로운 시작, 변화, 상속을 의미한다.   타로를 이용한 시 쓰기에 있어서 적절한 칼라의 사용과 이미지의 배치는 시의 생명적인 요소이다. 위의 그림에서도 흰말과 검은 기사가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한 검은 깃발과 흰색의 백합과 장미의 그림도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세상은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 위에 탄 기사와 말을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표현했고, 깃발의 흑과 백 역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표현했다. 말의 발굽 아래 황제가 쓰러진 것은 쇠퇴와 멸망이며, 말 앞에 교황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말의 발 앞에 아이는 새롭게 자라날 성장의 시기를 의미하며, 외면한 여인은 기성세대이다. 멀리 강물이 흐르고, 돛단배가 떠간다. 그리고 성벽 사이로 태양이 떠오른다. 태양의 아래쪽은 아직 어둠이 묻어있다. 태양이 막 떠오르는 것에 비해 땅은 너무 환하고 황금색이다. 그리고 교황의 옷과 같은 색이다. 이는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세상과 속화된 종교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황의 힘으로 세상이 밝아질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이미지의 배치는 참으로 치밀하고 의도적이다. 만약에 말이 검은 색이고 기사가 흰색이었다면 의미는 달라졌을 것이다. 교황이 쓰러져 있고, 황제가 말 앞에 서있다면 그 시대성 또한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태양과 땅이 황금색이 아니고 붉은 색이었다면 피로 물든 세상이 될 테지만, 황금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피로 정복된 세상이 아니라 고귀함으로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버려진 황제의 왕관과 지팡이니 손을 모은 교황의 모습 등, 이미지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시에서도 이미지의 배치는 많은 상징적 관계를 나타내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이미지 간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중심이미지에 대한 수직적 이미지인지, 수평적 이미지인지를 파악하고 사용하여야 한다. 중심이미지는 시를 쓰고자 하는 핵심이미지로서 마인드맵의 둥치와 같으며, 시를 쓰고자 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막에 대해 쓰고자 한다면 사막은 중심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또한 중심이미지는 사막뿐만이 아니라 사막에 속한 모든 이미지는 중심이미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막의 모래나 바람, 선인장, 낙타, 오아시스 등은 모두 중심이미지에 속하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중심이미지 사막에 대한 하나의 몸체이며, 함께 따라가는 부속물이다. 사막에 속한 이러한 이미지들은 주변 정황이나, 사막에 대한 묘사는 가능하나 사고의 입체성이나 의미의 심층적 관계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사막에 대해 시를 쓰고자 할 때 이러한 이미지를 끌어들이는 것은 시 쓰기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에서 그림의 기본이 정물화나 풍경화 인 것처럼, 시에서도 사막에 속한 이러한 이미지들은 1차원적인 이미지이다. 즉 이어진 하나의 선처럼 모두가 사막에 속한 이미지들이기 때문에 그림은 나타내줄 수는 있겠지만, 깊은 의미나 환기된 상징성을 나타내주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층적 상징성을 만들어주기 위한 이미지의 배치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사막이 없는 곳에서 사막을 만들어줄 때 입체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하라 사막이나 고비 사막 같은 것을 나열한들 입체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막이 없는 곳에서 사막을 만들었을 때 입체성이 생긴다는 것은 사막이 추상성으로 갔을 때 입체성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의 사막, 도시의 사막, 하늘의 사막, 역사적 사막 등과 같은 것은 실재 사막이 없지만, 사막을 만듦으로써 그냥 입체성이 아닌 심층적 입체성이 생기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면 마음의 사막은 메마른 사랑의 강이나, 갈라진 마음의 틈, 건조한 눈빛 등과 같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도시의 사막에서 이미지를 찾으면 아스팔트길이나, 콘크리트 광장, 빌딩의 사구, 황사의 유리창, 스모그의 하늘, 낙타를 닮은 느림보 차들,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 등 모두가 도시의 사막을 이루는 이미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사막도 살펴보면 구름이나, 매연, 황사, 새떼, 행성들, 은하수 등도 다 하늘의 사막을 만들 수 있는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배치는 이미지를 통해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사막에 대해 시의 방향을 잡고 이미지를 배치하여 입체적 사고의 건물을 짓고자 할 때 사막에 속한 모래나 바람이나 오아시스와 같은 이미지들은 건물의 기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기초 위에 마음의 사막, 도시의 사막, 하늘의 사막, 연인 간의 사막, 역사적 사막, 종교적 사막을 세웠을 때 심층적인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사막과 유사한 이미지의 배치관계는 수평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산만해질 수 있어서 너무 많이 끌어들이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타로카드 13번 죽음의 이미지에서 볼 때 말 앞에 있는 어린아이나 여인의 설정 같은 이미지의 배치는 사실성과는 관계가 없지만, 주제성, 즉 목적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미지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시에서도 주제성, 목적된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비현실적인 이미지의 배치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가위 김 기 덕   하늘을 오린 가위들이 황사로 날아왔다. 조각난 모래 바람은 찢어진 헝겊조각처럼 펄럭였다.   가위질할 수 없는 밤과 아침 사이로 빠져든 도시는 사막에 잠기고 낙타로 깨어난 차들은 느릿느릿 사구를 넘었다.   죽은 태양을 파묻은 땅에선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비릿한 악취를 풍겼다. 스펀지 같은 폐에 꽂힌 바늘들은 찢긴 상처를 꿰매지 못해 수풀로 짠 바람을 밀어 넣어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북북 찢어버리고 싶은 하루의 책장을 오리면 태양처럼 떠오를 꽃과 아이들, 이슬방울 영롱한 아침과 가위를 부서뜨릴 바위덩어리. 가위! 바위! 보!   간밤에 내 몸을 짓눌렀던 검은 가위는 어디부터 오려내고 싶었을까. 담배연기 가득한 폐, 이미지를 상실한 뇌 황사로 뿌연 내 가슴 속 하늘도 오려내고 싶었겠지만 난 공포감으로 상영 중인 꿈의 필름을 소리 내어 잘랐다.   비단 폭처럼 찢어진 어둠 속에서 보았던 잠든 여인의 눈부신 속살, 창가에서 그믐달이 코를 골고 있었다. 새벽은 동녘부터 야금야금 오려져 능선을 만들어갔다.   오늘밤 머리맡엔 어머니가 쓰시던 가위 하나 놓고 자야겠다.   [출처] 13. 죽음|작성자 김기덕   14. 절제   타로카드 14번 절제는 붉은 날개의 천사가 흰옷을 입고 손에 든 두 개의 컵으로 물을 따르고 있다. 머리는 황금같이 빛나고 한 발은 연못 속에, 한 발은 땅을 밟고 있다. 연못가에는 수선화가 피어있고, 연못에서 난 길은 두 산 사이로 나있는데, 길 끝엔 왕관처럼 빛나는 불꽃이 있다. 이 그림의 뜻은 절제와 균형, 중용, 조절, 비율이 맞게 뒤섞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붉은 날개의 천사는 미카엘 천사로 태양의 천사이며, 전쟁의 수호천사이다. 붉은 날개는 불처럼 분명한 신의 의지를, 그의 빛나는 머리는 진리의 빛을 의미하며, 깨달음을 의미하는 노란색으로 칠해져 정신적인 깨달음을 의미한다. 신성, 태양을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천사가 입은 흰옷은 순결함을 의미하며, 가슴에 있는 삼각형의 문양은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두 개의 컵을 손에 들고 컵 속의 물을 서로 교환하고 있다. 물은 융통성을 의미하며, 순리를 상징한다. 두 개의 컵은 고인 물과 신성한 물,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 남성과 여성, 음과 양, 영혼과 육체, 의식과 무의식 등과 같이 대칭, 또는 대립을 의미하는 물이다.  ​서로의 물을 교환함으로 절충점 찾기, 정화작업, 균형과 조화, 교감을 의미한다. 물고기가 없이 맑은 물은 순결한 마음을 상징하며, 발은 추구하는 진리를 상징한다. 물에 담근 발은 무의식, 정신세계를 의미하며, 땅을 밟고 있는 발은 의식, 물질세계를 의미한다. 발이 두 곳을 다 밟고 있기 때문에 융통성을 의미하며,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상징한다. 수선화는 자기애, 자기주의, 고결, 신비, 자존심 등의 꽃말을 갖지만, 여기에서는 수련과 자기정화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연못에서 시작된 길은 산과 산 사이로 나서 왕관과 같은 태양빛을 향하고 있다. 이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갔을 때 빛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두 산은 포도주와 물, 뜨거운 물과 찬물, 감정과 욕망의 대립적 관계를 의미하며, 치우치지 않고 균형과 조화의 중용의 도를 추구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왕관과 같은 불꽃은 세상을 두루 살피는 신의 불꽃이다. 곧 목표나 이상을 의미하며, 영광의 빛, 성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타로카드 14번은 이미지들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컵과 컵, 천사의 후광과 왕관의 빛, 산과 들, 또는 두 개의 산, 물속의 발과 땅의 발, 연못과 땅 등 모두가 대칭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대칭적 관계에서 치우침이 없는 양면성의 추구를 통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만이 절제가 가능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시를 씀에 있어서도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이미지에만 치우쳐도 가벼워지며, 관념에만 치우쳐도 싱거워지는 것이다. 시는 막힘이 없는 소통이다. 지금까지 거론한 시 쓰기의 방법이 이미지의 배치와 접속의 관계를 말해왔지만, 기계적인 이미지의 접속만으로 시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 이미지 안에 담긴 관념성과 철학성을 보고 이미지를 끌어오고 조합을 시켜야 한다. 하나의 시를 쓰는 과정은 세상과의 소통이며, 사물 하나하나와의 결합이고, 세상을 다스리는 신과의 통섭이다. 타로카드는 점을 치는 도구이다. 점을 치는 도구는 신성한 것이며, 단순히 그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 속에 신령함이 같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로카드를 뽑을 때 단순히 재미로 뽑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적절한 카드를 뽑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힘이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 힘은 우리의 내부에서 나오는 예지적 능력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외부적인 절대적 힘에 의해 나도 모르게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타로카드를 가지고 점을 보는 순간만큼은 초원적인 순간이며, 영적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고도의 영감이 교감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신의 경지에 다다른 창조자이다. 여호와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신 것은 언어 속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세상엔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언어로 빛을 창조한 것이다. 빛의 재료는 곧 언어이다. 그러므로 빛과 언어는 무관한 관계가 아니며, 이질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빛은 언어가 될 수 있으며, 언어는 빛이 될 수 있다는 상관관계를 갖는다. 이처럼 세상 모든 만물이 신의 언어로 지어졌다면 세상의 모든 만물은 언어가 될 수 있고, 언어는 다시 세상만물이 될 수 있는 순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시를 쓰는 작업은 세상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언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현실로 불러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 속엔 이미지가 들어있다. 언어 속엔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아니면 추상적이든 비추상적이든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물 속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관념적이든 이미지적이든 상징의 언어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이는 서로 공통적 요소를 갖추고 있어서 언어가 세삼만물이 되고 세상만물은 또 다시 언어가 될 수 있는 상호교환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는 언어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언어로 언어적인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즉 관념적인 요소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물적인 요소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관념적 설명이나 단지 언어에 그치는 요소들의 집합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신과 마찬가지의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창조하는 것도 신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언어로 이루어진 사물적인 존재의 현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과 언어는 상호교환성이 있음을 알았듯이 사물과 사물 간에도 상호 교환성이 존재하며, 언어와 언어 간에도 상호 교환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물질은 나노의 세계로 가면 결합과 분해가 가능해진다. 우리 인간의 몸도 나노의 물질로 분해되고 결합할 수 있다면 순간이동도 가능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언어도 언어 간의 상호 접속과 새로운 배치를 통해 무한한 의미의 변화를 이룰 수가 있는 상호교환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호 교환성은 물질적, 표면적, 형식적인 결합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정신적, 내면적, 실질적인 결합의 관계를 만든다. 시인은 이러한 모든 사물과의 상호소통과 교접, 임신과 출산, 분리와 결합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를 갖지 않으면 혼이 담긴 시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며, 신이 내재한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깨달음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이러한 세계를 읽고 느끼며, 깨닫게 하기 위해서 신적 차원, 아니 신과 사물, 인간이 우주만물과 혼재된 세계를 창조하고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시인의 정신은 시공을 초월하여 성경에서 말하는 일곱째 하늘까지도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 14. 절제|작성자 김기덕   15. 악마   염소 이마에 그려진 펜타클은 실용적이며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욕망을 상징한다. 박쥐는 예로부터 서양에서는 마녀, 악마로 상징되어왔다. 낮에는 숨기고 밤에만 펴는 어둠의 존재로 인식되어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악마의 오른손은 중지와 약지를 벌린 저주의 각인을 하고 있다. 떳떳하지 못한 돈이나 관계를 의미하며, 왼손은 횃불을 거꾸로 들고 있는데, 이는 신을 부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악마의 발은 몸집에 비해 작게 그려져 있다. 이는 나중에 강한 욕망으로 인한 빚더미에 앉거나 돈관리가 안 됨을 의미한다. 악마의 발밑에는 옷을 입지 않은 남녀가 쇠사슬에 목이 매어있다. 옷을 입지 않은 남녀는 성적인 타락을 의미한다. 육체적인 욕망이나 유혹으로 인해 헤어나오지 못함을 의미한다. 머리에 난 뿔도 욕망이나 욕심을 상징하며, 쇠사슬은 구속, 집착, 중독을 의미하는데, 느슨해서 마음먹으면 풀고 나올 수 있으나 스스로 풀고 나올 수 있는 의지가 없음을 상징하고 있다. 남자의 꼬리는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꼬리에 악마가 횃불을 대어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 불꽃은 욕정의 불꽃이며, 남녀관계의 지나친 욕망인 것이다.      여자의 꼬리에는 포도가 달려있는데, 포도는 다산을 의미한다. 본능을 의미하는 꼬리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흔드느냐에 따라 그 처신이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타로카드 15번 악마는 6번 연인과 관계가 있다.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6번 연인으로 표현되고,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의 모습은 15번 악마로 표현되어 있다. 숫자 15는 1+5=6의 관계로 6번 유혹, 선택의 관계에서 15번 상통, 연합, 통합, 재편, 신장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6번 연인은 정신적인 의미이며, 15번은 육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타로카드 15번 악마의 정방향은 타산적이며, 야심, 권력을 상징한다. 또한 유혹에 약한 것을 의미하며, 게으른 성격을 의미한다. 이기주의, 속박, 향상심 결여, 불륜, 폭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역방향의 해석은 야심, 권력, 반성 등을 의미하며, 개방되어 있거나 출구가 보이는 현실적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관계를 끊어야 할 때이거나 이별, 이혼 등을 의미한다.   타로카드는 몇 개의 상징적 그림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상황과 입장에 따라서 무수히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림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시쓰기에 있어서도 이러한 상징성을 살리고 상황에 따라서 많은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지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미지의 결합은 단순하다. 하지만 그 해석은 참으로 다양하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힘이고, 이미지 속에 담긴 생명성 때문이다. 주역에서 우주가 아무리 큰 것이나 태극 안에 있고, 아무리 작은 존재일지라도 태극을 그 안에 갖고 있다고 했다. 太는 하나(一)에서 둘(人)이 생기고 그 둘이 사귀어 자식(•)을 낳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모든 만물은 태극에서 탄생하였지만, 그 안에는 각각 태극의 존재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 태극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든 사물은 음과 양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를 분해해 봐도 거기엔 음의 전자와 양자가 존재하듯이 아무리 큰 우주도 태극이요, 아무리 작은 입자도 태극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 만물이 창조되었지만, 세상 그 어디에도 안 계신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태극은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에는 신의 정신이 깃들고, 살아있는 혼이 존재한다. 우리가 느끼는 생물학적 살아있음이 생존이 아니라 무궁한 세월 속에서 광물질까지도 변화생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러한 살아있는 존재를 느껴야 한다. 내가 산이 되고 바위가 되고 물이 될 수 있는 소통과 변환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살아서 서로 소통하고 유체이탈하며 몸을 맞바꿀 수 있는 빙의적 사고가 필요하다. 인간이라는 고등동물을 놓고 그 주변에 하등동물을 배치하는 것과 같은 사실적 시각으로는 이미지의 조합을 이룬 그림을 그리기는 실상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극은 모든 사물을 낳았고, 모든 사물은 태극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의 존재가 산이 될 수 있고, 산이 나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몸도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태극이요, 우주도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태극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소우주요, 세상 우주는 대우주인 것이다. 시쓰기는 인접이든, 유사든, 상징이든 서로 관계된 사물을 끌어오고, 그 사물 간의 상동성을 이용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위해 포괄적, 확장적으로 결합하여 표현하는 글쓰기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시쓰기는 나와 우주와의 소통인 것이다. 그 소통은 유체이탈, changing of body and mand의 기법이며, 정신과 혼을 발견하는 일이다. 또한 죽은 것들, 의미 없는 것들, 그리고 의미는 있으나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것들을 위해 새롭게 혼을 불어 넣으며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창조를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존의 인간 우월적인 고정관념을 벗어버리고 먼지 하나까지도 수평적 관계로 바라보고 생명성을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바람 속에서 신의 소리를 듣고, 혼의 부르짖음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의 휘파람소리를 듣고, 풀과 나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그 사물 안에 담긴 혼의 존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혼의 존재를 볼 수 있을 때 시를 쓰고자 하는 내가 그 혼과 맞바꿔 나무의 혼이 되고 풀의 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시를 쓸 때 그 시는 살아있는 시가 될 수 있고, 마음을 울리고, 혼을 울리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 악마의 중독 김 기 덕     염소가 검은 상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열어보였다. 젖이 가득한 젖꼭지에서 강이 흘러나왔다. 어둠 속에 뿔들은 왕관처럼 반짝였고 이마에 새겨진 모조품 별에선 가식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박쥐의 은빛 날개를 퍼덕이며 펼친 오른손엔 못 자국이 선명했다. 중지와 약지를 땐 저주의 각인에 혀를 끼우고 왼손에 들었던 횃불로 바람의 꼬리에 불을 붙이자 악성 루머가 피어났다. 사람들은 스스로 검은 상자에 매달린 중독성의 쇠사슬을 목에 걸었다. 자동조절 되지 않는 나의 몸에서도 고열이 일었다. 통증으로 웅크렸던 배를 독수리의 발톱이 휘젓자 거친 호흡으로 흔들리던 종잇장이 찢겨나갔다. 꺼낸 폐를 독수리가 인공호흡기처럼 입에 물고 숲을 흡입했다. 노을이 빠져나간 얼굴에선 어둠이 흘러나왔다. 달의 내장을 꺼낸 굴뚝들은 목에다 구름을 뱀처럼 두르고 방안을 들여다봤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구멍 난 튜브 속에서 지독한 황사와 매연, 미세먼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의 목구멍에서도 뱀의 혓바닥이 아지랑이로 피어올랐다. 독수리가 홀연히 날아간 후에야, 검은 상자 위에 염소가 목의 쇠사슬을 풀었다. 재가 된 사람들이 마른 풀처럼 공중에 떠다녔다. 한 모금의 백색연기였다. [출처] 15. 악마|작성자 김기덕   16. 탑   타로카드 16번 흔들리는 탑은 번개 맞은 탑이 무너지고 불이 나면서 사람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한 것으로써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지나친 교만과 물욕, 권력욕으로 주어진 재난을 의미하며, 겸손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탑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을 의미하는데, 인간이 교만해져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보다 높아지려 탑을 쌓았으나 신께서 무너뜨리고 언어들을 흩어놓음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재난은 이유가 있는 재난으로써 자초한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악마의 구속이 깨어짐을 의미하기도 하며, 영감, 자유, 실재를 상징한다. 탑은 강금, 환각의 장소를 의미하며, 속박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를 얻음을 의미한다. 탑은 하나의 아성과 같은 것으로 야욕과 착각의 성이며, 정신적인 감옥, 벗어나지 못할 틀을 의미하기도 한다. 탑의 꼭대기는 왕관의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높은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며, 욕망과 오만이 가득함을 의미한다. 성을 파괴한 번개는 외부적인 강박이나 압력, 물리적 강압에 의해 변화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지속되던 상황이 변화를 맞이하는데, 그 변화는 부정적 결과인 사고나 재난으로 찾아온다. 쌓아가던 노력이나 공력이 종말을 고하게 되며, 많은 상실과 손해가 따르게 됨을 의미한다. 성에서 떨어지는 불꽃은 22개인데, 22의 숫자는 메이저카드의 숫자를 의미한다. 또한 10행성의 12개의 별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떨어지는 사람은 남과 여인데, 여자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남자는 왕관을 쓰고 있어서 이것도 역시 오만과 권위에 가득 차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권위의식과 오만에 가득 차게 되면 반드시 추락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감옥이나 아성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탑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솟아있고 주변에 구름이 모여 있는 것도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을 상징하고 있다. 탑 밑을 고이고 있는 뾰족한 돌들은 따뜻하고 온화한 마음들이 아니라 날카롭고 강한 마음의 소유자들임을 상징한다. 타로카드 16은 1+6=7로써 7번 전차카드와 수비학적으로 연관이 있어서 권력과 많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이 카드의 정방향의 해석은 파산선고나 실연 통보를 의미한다. 사기를 당하여 집안이 폭삭 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정리해고를 당하여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경우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루아침에 사고를 당하거나, 지위의 하락, 사랑의 파국, 급변, 파산, 안정된 기반의 상실을 의미한다. 역방향의 카드가 나오면 불가능적인 상황을 의미하며, 손해나 위기, 폭행, 모욕, 비난이나 압박을 받게 됨을 상징한다. 스트레스의 급증이나 숨겨진 진실의 폭로와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을 의미한다.   타로카드 16번 탑은 상승이미지와 하강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산과 탑, 구름, 하늘, 왕관 등은 상승이미지이며, 번개와 떨어지는 남녀, 불꽃 등은 하강이미지이다. 이미지를 통하여 감정을 표현하고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특징을 잘 파악해야 한다. 모든 이미지들은 상승적 이미지가 될 수도 있고 하강적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내면에 음과 양이 존재하듯, 밝고 어두움이 같이 공존하듯이 상승적 이미지와 하강적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낙엽이 하강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춤추는 낙엽으로 표현한다면 결코 하강적 이미지에만 국한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내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모든 이미지의 느낌을 조정하고 바꾸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상승적인 삶, 하강적인 삶, 그리고 머물러 있는 삶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상승적인 삶은 성장이나 성공,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현재보다 나아지고자 하는 지향성을 갖고 있는 상태로 볼 수 있다. 성공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거나, 천국에 가기 위해 종교에 심취해 있다거나, 사랑으로 인해 기쁨과 환희가 충일해 있다면 이 것은 모두 상승적인 상태나 감정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만나고자 바벨탑을 쌓았던 행동과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곤 한다. 하지만 하강적 삶은 실망이나 낙심, 절망적 상황을 의미한다. 별똥별이 떨어지듯 인간의 죽음이나 상실, 실패와 같은 것으로 자신이 현재 처한 위치에서 낮아지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아무리 높은 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방향성이 아래로 향하고 있다면 하강적 삶인 것이며, 하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하강적 이미지는 지상이나 나락, 죽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육체적, 정신적 종말을 향하고 있다. 수평적 삶은 특별한 변화가 없는 밋밋한 반복을 의미하며, 성장도 실패도 없는 잠과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삶을 방향성을 가지고 구분하는 이유는 이미지의 사용상 방향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나타내 줄 수 있다면 시를 쓰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지의 사용에 있어서 색깔을 구분하고, 그 색깔을 이용하여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삶의 방향성, 사물의 방향성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자신의 감정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희극과 비극의 씨줄과 날줄로 짠 옷감과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희극과 비극의 상승과 하강 곡선을 그리는 그라프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슬프다느니, 기쁘다느니 말하지 말고 상승과 하강의 곡선을 그림으로 그라프와 같이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의 하루 삶은 상승과 하강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상승과 하강의 곡선만 보면 주식의 하루 상황을 다 알 수 있다. 우리의 감정에도 곡선이 있다. 상승하든 하강하든 그 곡선을 주시하여 본다면 하루의 모든 삶을 들여다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을 가지고 이미지를 그린다면 ‘태양이 뜬다’, ‘태양이 솟는다’, ‘태양이 빛난다’ 등은 태양의 상승적 이미지이나 ‘태양이 진다’, ‘태양이 가라앉는다’, ‘태양이 시든다’ 등과 같은 표현은 하강적 이미지일 것이다.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 놓인 밧줄을 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신의 모습처럼 상승했다가도 어느 순간 동물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하는 게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상승과 하락의 관계를 알고 잘 표현할 수 있다면 관념성에서 벗어나 이미지로 충만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흔들리는 탑 김 기 덕 ​ 벽돌들은 구름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를 밀쳐내며 부서져 내렸다. 조각난 족속과 언어들이 굴러 떨어진 계곡엔 낮선 눈들이 채워지고, 돌 틈마다 방언들이 피어났지. 융기와 침강을 반복해 온 꽃의 단층들. 창밖에선 구름이 천둥소리를 내며 빗방울로 무너졌어. 고함과 그릇 깨지는 소리로 조각 나기 시작한 방안은 어둠이 밀려와 빛의 휘장이 찢겨졌지. 기둥이었던 그녀가 빠져나간 후 기울기 시작한 허리뼈. 가슴을 열고 바람을 들이려했던 심장의 창문마다 불꽃 연기가 피어올랐어. 하늘을 닮고 싶었던 나의 푸른 옷들이 찢겨져 내리던 잎새. 무지개다리를 건너던 빨간 장화가 벗겨진 하늘가엔 발목이 시린 나목들이 발을 동동 굴렀지, 날개가 되지 못한 붉은 망토가 노을 속에 너울거리던 저녁을 기억해. 시계탑 앞에 모였던 펭귄들도 조각조각 떨어져 내리는 시간의 퍼즐을 맞추다 길을 잃었지. 떼어진 간판들도 눈처럼 비처럼 거리를 적셨지. 어둠이 쓰러진 밤, 내 몸의 장기와 기관들도 꽃의 성벽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해. 감각의 천장을 만들며 하늘 떠받치던 뼈들이 땅으로 꺼져가. 추락하는 수직의 화살들, 젖은 새가 날개를 접으면 바벨탑은 또 가을, 새로운 언어와 족속을 남기고 무너질 거야. 허물어진 어미의 성에서 기어나오는 어린 거미들. 내 몸의 자궁이 열린다. [출처] 16. 탑|작성자 김기덕   class="fil5 pcol2b" v:shapes="_x0000_i1032">17. 별   타로카드 17번 별은 파란 하늘 중앙에 큰 별이 떠있고, 주변에 7개의 작은 별들이 그려져 있다. 나신의 여자가 연못에 한 발을 딛고 두 손에 든 항아리의 물을 쏟는다. 대지엔 꽃들이 피어나고,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는 그림이다. 중앙에 있는 황금색의 커다란 별은 큰 꿈을 의미하며, 큰 목표나 영적 직관력을 의미한다. 별의 황금색은 이 여인의 머리색과 같은 색으로 연결되어 있다. 별빛이 머리의 색과 같이 빛남은 하늘의 영감이나 아이디어가 필요하고 또 연결되어야함을 나타내고 있다. 주변에 있는 흰색의 일곱 개 별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나 희망적 미래를 상징한다. 북두칠성의 일곱 개의 별과 같은 것으로 큰 별보다 작은 꿈들이나 이성적 상태 등을 의미한다. 또한 내면의 단편적 무능을 커다란 별인 영적 직관을 통하여 일깨워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신의 여인은 이러한 꿈과 희망의 영적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두 손에 든 항아리로 물을 뜨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옷을 입지 않은 나신은 자신, 그리고 자아를 의미한다.   ​  물을 뜨는데 몰두한 모습은 넓은 세상을 두고 자아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신의 현실에 몰두하고 있는 상태이다. 물은 정화, 인내를 의미하며, 일이나 놀이, 자아, 차가운 이성을 상징한다. 이러한 물을 두 개의 항아리로 떴다가 부었다가를 반복한다. 이는 자기의 세계에 빠져 원대한 꿈과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여인의 등 뒤에서 새가 초록빛 나무 위에 앉아 속삭인다. 새는 하늘을 나는 존재로 영적인 존재이며, 신령한 존재인 것이다. 별과 하늘과의 연결 관계로 새는 이 여인에게 충고를 한다. 하지만 새의 속삭임을 이 여인은 듣지 않는다. 열심히 물을 퍼서 쏟는 대지는 푸른 초원으로 펼쳐져서 생명이 가득하다. 세상은 이러한 자기 몰입과 열심히 이루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물을 담는 행위는 감정의 조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격앙된 상태의 감정에 물을 끼얹어 냉정한 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이성적 행위, 자기몰입을 통한 자신만의 이상추구로 인해 해야 할 더 큰 일을 잊어버리고 사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물을 퍼내는 작업은 남의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남의 것을 약탈한다는 의미도 있으며, 연애 상대를 바꾸는 의미도 있다. 이 카드의 정방향의 의미는 상상했던 것이 이루어지거나, 파산에서 벗어남의 의미가 있으며, 소원성취, 희망의 미래와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래의 큰 가능성, 계시나 영적 호기심을 상징하며, 충분한 감성적 본능, 순수를 의미하기도 하여 이성이 필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방향의 의미는 해낼 수 없는 일을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타인에게 사기를 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거짓으로 돈을 뜯거나 과대포장, 말로만 해결, 힘든 현실,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상징한다.   타로를 이용한 시쓰기는 이미지 속에 내재된 상징성을 활용하여 이미지 간의 조합, 배치를 통해 시인이 나타내고자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미지로 감정을 표현하게 되면 관념적 단순한 개념에서 보다 확장된 종합적 감정을 표현할 수가 있게 된다. ‘슬프다’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눈물’이나 ‘이슬’ 등과 같은 이미지를 불러온다면 슬픔의 관념적 감정보다 확장된 눈물의 상징적 의미들이 독자에게 폭넓은 감정을 갖게 한다. 시적 방법으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온 은유적 기법은 ‘A=B이다’와 같은 형식을 갖는다. 또한 A는 C, D, E, F…… 등의 다른 존재로 치환을 하게 된다. 오규원 시인은 “오랜 기간 시인들은 시적 대상에 대한 의미화 작업을 해오며 시적 대상을 명확히 하는 일을 해온 듯하다. 하지만 사실은 시적 대상을 파편화하고, 덧칠하는 작업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존재의 언어는 왜곡되지 않는 ‘사실적 현상’을 통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은유의 세계에서 환유의 세계로 전환되어 한다고 말한다. 환유는 한 낱말 대신 그것과 가까운 다른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은유는 유사성을 통하여 다른 사물을 끌어오고 환치시키는 것이지만, 환유는 인접성을 통하여 사물을 끌어오는 방법이다.   그 마을의 주소는 햇빛 속이다 바람뿐인 빈 들을 부둥켜안고 허우적거리다가 사지가 비틀린 햇빛의 통증이 길마다 널려있는 논밭 사이다 반쯤 타다가 남은 옷을 걸치고 나무들이 멍청이 서서 눈만 감았다 떴다 하는 언덕에서 뜨거운 이마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소름끼치는, 소름끼치는 울음을 우는 햇빛 속이다   (오규원/ ‘그 마을의 주소’ 일부)       그의 방에는 침대가 하나 식탁이 하나 의자가 둘 그의 방에는 조리대가 하나 가스레인지가 하나 수도꼭지가 하나 조리대가 붙은 벽면 보이지 않는 화장실 하나 그의 방에는 낡은 냉장고 하나 방바닥에 놓인 전기밥솥 하나 비닐로 만든 간이 옷장 천장에는 동그란 형광등 하나 (오규원/ ‘그의 방’ 일부)   위의 두시를 비교하면 그 마을의 주소는 은유적으로 쓴 시이고, 그의 방은 환유적으로 쓴 시이다. 오규원은 은유적인 시보다는 환유적인 시를 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적 측면이 아닌 독자의 입장에서 두 시를 비교해보면 그의 방은 너무 사실적이고, 생각의 여지가 많지 않다. 관념이 배제되고 이미지만으로 쓴 시이며, 환유적인 기법으로만 써서 방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한다. 언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외곡되지 않은 언어, 그 자체로 순수한 이미지의 언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는 것이 대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는 언어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인 만큼, 사물자체가 사실적이든, 본질적이든 간에 언어자체만으로서 존재하고 쓰이기는 어렵다. 오래전부터 시인들은 인간과 언어를 분리하고자 노력해 왔다. 사물과 관념의 분리를 통해 언어 자체가 사물이 되는 즉물적인 언어를 시에서 사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즉물적인 언어들의 나열을 통하여 시를 썼지만, 그 시에선 살아있는 존재성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인접성을 통하여 현상자체가 된 언어들을 끌어오다 보면 이미지의 나열이 될 수가 있다. 그림으로 말하면 사실화나 풍경화에 가깝게 된다. 관념을 모두 걸러내고 이미지만 가지고 쓰고자하는 디카시가 한동안 유행한 적이 있다. 디카시는 말 그대로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듯이 시를 쓰고자 하는 기법인데, 사실적인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관념성을 배제하고 현상자체, 사물만을 보여주고자 하는 기법이었다.       할(喝)!/나석중 ​ 자꾸 뒤돌아보았다 너무 어이없는 놈이라고 크게 나를 꾸짖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요즘엔 디카시가 디지털카메라 사진을 배경으로 하여 함축적인 시를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디카시는 사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반쪽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처음에 생경한 느낌을 주었지만, 인간의 감정과 정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시의 본질적 시각에서는 독자에게 감응을 줄 수가 없었다. 요즘 사실적인 풍경화를 감상하기 위해 미술관에 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풍경화나 정물화는 또 다른 세계의 복사에 가깝다. 이 복사는 한꺼번에 수십 장, 수백 장 베낄 수 있는 눈코 없는 계란 같은 존재다. 위의 시처럼 방에 침대가 있고, 식탁이 있고, 의자가 있고 등등의 표현은 누구라도 쓸 수 있는 복사물 같은 것이다. 시는 언어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의 파편화나 덧칠하기와 같은, 사물의 편협한 해석을 피하고 보다 확장된 의미의 이미지를 사용하기 위해선 상징적 방법을 써야 할 것이다. 즉물적 언어의 독자성을 위해 인간의 감정이 배제되는 시는 생명 없는 사물의 나열에 불과할 수 있다. 시는 인간중심으로 선회해야 한다. 현대는 과학이 발달하고, 생활의 복잡성으로 인해 그 만큼 인간의 심리도 복잡다변화 되었다. 이러한 인간 심리를 표현하고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다양한 사용이 불가피하다. ‘A=B이다’와 같은 일대 일의 유사성도 표현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인접한 것만을 끌어오는 환유적인 기법도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대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유사성, 인접성, 상징성의 복합적인 기법이 필요하고, 사실적 묘사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사고의 건너뛰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실의 공간뿐 아니라 가상공간의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성, 즉물성, 파편화 되지 않는 사실적 현상들만을 추구한다면 시는 움직임이 없는 사물로 고착될 수 있다. 그 안에는 예술적 생명력이 없다. 시가 예술적 활동이라면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예술적 요소가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예술적 요소는 입체적 의미를 가져야 하며, 조화와 균형, 아름다움과 같은 미학 속에서 사고의 심층적 깊이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입체적 의미는 단순하고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미묘해야 한다. 한 눈에 다 들어오는 글이나 단번에 터득될 수 있는 경지라면 그것은 예술성이 높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방에 침대가 하나, 식탁이 하나, 의자가 하나라는 것과 같은 표현은 거의 생각할 거리가 없는 평면적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보는 것마다 이름을 지을 때, 그 언어는 즉물적인 언어였다. 그 즉물적인 언어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쪽이 환유적 시나, 디카시, 하이퍼시, 즉물시 등등의 시가 있다. 이러한 시들은 언어의 독자적 존립 쪽에 그 비중을 두고 있다. 하지만 시는 언어의 독자적 존립, 즉 사물 자체의 가공 없는 존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사물을 통해 효율적, 확장적, 예술적,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느냐에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 17. 별|작성자 김기덕   타로카드 18번 달 (1)   타로카드 18번 달은 파란 하늘에 여러 모양의 달이 떠있고, 달 아래에서 개와 늑대가 울고 있다. 연못에선 가재가 달을 향해 길을 떠나려고 하나 길은 너무나 멀다. 하늘에 떠있는 달은 변화와 불안감을 나타낸다.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의 모습을 합친 달의 모습은 다양한 변화를 나타낸 것이며, 눈 감은 사람의 어두운 표정은 불안감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달은 뒷면을 숨기고 앞면만 보여줌으로써 이중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달은 밤, 어둠, 음, 무의식을 의미하며, 여성적 감정의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달이 밝으면 늑대에게 발각될 것이고, 어두우면 길을 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늑대와 개의 두 마리 동물은 미약한 자극이나 별것 아닌 사건을 의미한다. 개는 인간에게 길들여진 모습이나 의식을, 늑대는 감춰진 내면과 보이지 않는 적을 상징한다. 그래서 개는 의식을, 늑대는 본능이나 무의식을 상징한다. 달 옆의 두 개의 탑은 남성과 여성의 공존, 이중성, 대칭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연못에서 나온 가재가 가고자 하는 길은 꼬불꼬불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 길은 아무리 가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태를 상징한다. 연못에서 나온 가재는 약한 자신을 숨기기 위해 강한 척 하는 내면의 모습이다. 가재는 겉은 딱딱하지만 속은 부드럽다. 탑의 길을 따라 가야하는 먼 여정의 두려움과 불안을 나타내고 있다. 연못은 감정을 의미하는데,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모습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의 동요, 무의식의 동요를 일으키는 연못의 물결은 가재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도록 부추기고 있다. 물은 감정과 무의식을 상징한다. 숫자 18은 1+8=9의 의미로 완성, 승화, 이상, 휴머니즘, 끝을 상징한다. 타로카드 9는 은둔자인데 달의 얼굴은 은둔자를 닮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카드의 정방향은 생각지도 않던 사람이 적이 되거나, 상황변화로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문들이 상처를 주거나, 나쁜 결과, 불안, 현실도피를 의미하며, 기만, 불안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역방향의 의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나, 작은 사건, 불안한 생활, 회사의 감원위기, 집중력 약화, 과거에서 벗어남, 희망, 직감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시는 발견이다. 하늘에서 별을 발견하듯, 일상의 평범 속에서 특별한 진리나 원칙, 새로운 이미지의 결합, 특별한 깨달음, 사물의 재해석과 같은 발견이 필요하다. 남들이 감히 생각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고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시는 식상하지 않을 것이다. 시의 가치는 새로움에 있다. 그 새로움은 지금까지 아무도 쓰지 않은 방법이며, 인간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상상이어야 한다. 일상적인 사물이나 현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상징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고, 새로운 상징성의 창조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많은 상징적 요소로 표현될 수 있다. 볼을 간질이는 손, 불을 키우는 부채질, 귓불을 할퀴는 손톱, 돛단배를 미는 덩치 큰 사내의 팔뚝 등과 같은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바람에 대한 상징성의 다양한 해석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람에 대한 유사성만을 바라보게 된다면 다양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 표현의 깊이도 덜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발견은 바람 속에 잠재하여 있는 다양한 상징성을 볼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상징성에는 죽은 상징성과 살아 있는 상징성, 그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상징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죽은 상징성은 오랜 동안 상징적으로 사용되어 누구나 다 알게 되고, 통속적으로 사용될 때 그 사물의 상징성은 죽은 상징인 것이다. 빨간 신호등은 정지를 의미한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 누구나 다 정지하게 되고, 가던 길을 멈추게 된다. 이 빨간 신호등의 상징성은 이미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움이 없다. 새로움이 없는 상징성은 죽은 것이다. 이미 널리 통용되어 기호처럼 굳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생명성이 없다. 둘째로 살아 있는 상징성은 지금 현재 사용되고, 어느 정도 상징성이 살아있어서 의미를 확장해주고, 사고의 전환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상징성을 의미한다. “나는 거울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라는 문장을 썼다면 거울은 자아성찰이나 반성의 상징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두루 쓰이고 있지만 이미 굳어진 것이라고까지는 볼 수 없다. 지금 사용이 가능하고, 시에서 사용이 되고 있다. 하나 더 예를 든다면 “붉은 양수가 터진 바다에서 태양이 태어나고 있었다.” 라고 표현했다면 붉게 물든 바다는 아이를 낳기 위한 양수를 상징하며, 태양은 귀하게 태어나는 아이를 상징한다. 이러한 상징은 그 동안 다른 시인들이 사용했던 이미지이며,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상징성인 것이다. 사물의 이러한 상징성을 살아있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새롭게 태어나는 상징성은 지금까지 통용되지 않았던 상징성을 새롭게 탄생시켰을 때 이를 태어나는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가치는 창조의 능력에 있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상징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창조했을 때 그 시는 참신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시인은 남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는 자이다. 시대를 앞서고, 평범한 사고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비록 언어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언어의 한계성을 뛰어넘어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시인의 몫이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는 상징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남들이 다루지 않은 신선한 소재를 찾아야 한다. 돼지고기로 요리한 음식은 아무리 새롭게 해도 대부분 다양한 종류의 요리로 먹어본 음식이기 때문에 새로움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베리아 눈밭에서 자란 순록을 요리로 선택한다면 재료 그 자체로 새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재료는 과거적인 것을 가급적 피해야 한다. 현대의 시인은 오늘날을 사는 사람으로서 현실을 대변하고 현실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샘은 어디가나 있는 흔한 존재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샘이 사라지고 수도문화로 바뀌었다. 이러한 삶의 변화 속에서 샘을 끌어와 시로 쓴다면 그 속에는 새로움이 있을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시인의 눈이 필요하다. 또한 새로움은 새로운 지식에서 생성된다. 그래서 시인들은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과거적인 철학과 삶의 원칙들에 매이지 말고 보다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주역은 B.C.3000년경 복희씨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리고 2천년이 넘게 지나 오늘날에 이르다보니 경의 문구들이 오늘날과 맞지 않고 비유 또한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주역을 삼사십년 했다는 분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경구를 달달 외우다시피해왔다. 그래서 과거적으로 해석하고 과거적으로만 바라보니 오늘날에는 주역이 맞지 않는다는 인식을 주기도 한다. 괘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지수사는 땅 속에 물이 고인 상태를 말하는데, 군중이 모인 형상으로 과거에는 군사들이 전쟁을 위해 모이거나, 농번기에 농사일을 위해 모이는 경우 외에는 평민들이 모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군중들이 모여야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지수사괘가 나오면 전쟁으로 해석해 왔지만 이제는 전쟁으로 해석해서는 맞지 않는다. 이처럼 아무리 수천 년을 경서로 간직해 왔지만 오늘날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면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과거를 토대로하여 시를 쓰더라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과학의 시대가 되었다. 과거의 사람들이 꿈꾸던 낙원의 삶이 오늘날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삶속에 살면서 언제까지나 과거의 농경적인 삶을 그리며, 시대에 뒤떨어진 진부함으로 시를 쓸것인지 답답하다. 시인은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 과거의 훌륭한 시인들이 시대의 몽매함을 깨우고 미래를 내다보며 시를 썼듯이 오늘날의 시인들도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노래하고 인간성 상실의 절망과 무가치해지는 허무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예술적 시각을 통해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무한 상상의 세계를 탐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창조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터진 신발 밑창에서 땅과 연결된 문을 발견했다 발을 움직이자 나무뿌리 틈으로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발가락에 힘을 주고 지냈으니 눌린 것들의 소란은 도무지 위로 오르지 못했던 거다   나무 밑동이 전해주는 야사(野史)나, 자식들 몰래 내뱉는 어머니의 한숨, 대개 이런 소리들은 바닥으로 깔리는데   누워야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퇴적층의 화석처럼 생생하게 굳어버린, 이따금, 죽음을 맞는 돼지의 비명처럼 높이 솟구치는, 발자국을 잃고 주저앉은 소리들   소나무는 자신이 들은 소리를 잎으로 콕콕 찍어 땅 속에 저장하고 땅에 발자국 한 번 남기지 못한 채 지워진 태아는 소리의 젖을 먹고 나무가 된다는 걸, 당신은 알까   낡은 라디오 잡음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뿌리 곁에 밑창 터진 신발을 내려놓았다l 서서히 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오래된 소리들을 다 비워낸 문은 새로운 이야기로 층층이 굳어지고 나무들은 땅속에 입을 둔 채 소리들의 발자국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땅의 문」 전문/최은묵 시인   위의 시는 최은묵 시인의 「땅의 문」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최은묵 시인은 찢어진 신발 밑창에서 땅의 문을 발견했다.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상징성을 발견한 것이다. 찢어진 신발에 대한 시는 여러 편 발견할 수 있으나, 그 찢어진 신발의 밑창을 통해 땅의 문을 발견하고 땅의 문을 통해 들리는 영혼들의 소리를 표현한 시인은 없었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을 접할 때 뒤통수를 맞은 듯 전율하게 된다.   하늘을 오린 가위들이 황사로 날아왔다. 찢어진 헝겊조각처럼 펄럭이는 내 봄날의 모래바람   가위질할 수 없는 밤과 아침 사이로 빠져든 도시는 사막에 잠기고 낙타로 깨어난 차들은 느릿느릿 사구를 넘었다.   죽은 태양을 파묻은 땅에선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비릿한 악취를 풍겼지. 스펀지 같은 폐에 꽂힌 바늘들은 찢긴 상처를 꿰매지 못해 수풀로 짠 바람을 밀어 넣어도 숨을 쉴 수가 없었어.   찢어버리고 싶은 하루의 졸린 책장을 오리면 태양은 다시 떠오를까. 꽃과 아이들, 이슬방울 영롱한 아침과 가위를 부서뜨릴 바위덩어리. 가위! 바위! 보!   간밤에 내 몸을 짓눌렀던 검은 가위는 어디부터 나를 오려내고 싶었을까. 담배연기 찌든 폐, 이미지를 상실한 뇌 황사로 뿌연 내 가슴 한 귀퉁이도 오려내고 싶었겠지만, 난 공포감으로 상영 중인 가위 꿈의 필름을 소리 내어 잘라냈어.   비단 폭처럼 찢어진 어둠 속에서 보았지 잠든 여인의 눈부신 속살, 등 돌린 창가에서 그믐달이 새벽을 꿈꾸고 있는 것을. 아침이 동녘부터 야금야금 오려져 능선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어.   흐린 유리창을 오리면 무지개가 뜨던 오늘밤 머리맡엔 어머니가 쓰시던 가위 하나 놓고 자야겠다. 「가위로 오린 풍경」전문/김기덕 시인   위의 시 「가위로 오린 풍경」은 가위에 대한 큐비즘적 접근이 이루어진 시이다. 가위는 색종이를 오리고 헝겊을 오리는 가위뿐만이 아니라 꿈에 눌리는 가위와 가위 바위 보의 가위, 시간의 가위, 하늘에 뜬 그믐달과 같은 이미지의 가위, 기억을 잘라올 수 있는 상상의 가위 등의 다양한 가위를 시 한편에 담았다. 가위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접근은 가위에 대한 새로운 상징성의 발견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의 새로움은 사물에 대한 상징성의 새로운 발견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양한 접근, 다촛점의 바라봄이 없이는 접근하기가 불가능하다. 요즘 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는 시가 말장난에 그쳐서가 아니라 새로운 상징성의 창조와 다양한 상징성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사물에 대한 새로운 상징성과 다양한 상징적 접근에 대한 이해와 그 사용을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정체된 사고를 새로운 상상적 사고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사물에 대한 한방향의 바라보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을 만들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을 통해 사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봄이 필요하다. [출처] 타로카드 18번 달|작성자 김기덕   19. 태양 (1)     타로 카드 19번째는 태양이다. 태양은 하늘에 강렬한 태양이 떠있고, 백말을 탄 어린 아이가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그림이다. 태양은 24개의 햇살이 그려진 황금색으로 활력의 근원이며, 행복을 의미한다. 또한 금전운이 좋으며, 부의 상징이다. 태양이 하늘에 떠서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존재를 상징하며, 어디에서든 중심인물이 됨을 의미한다. 24개의 햇살은 24절기를 의미하기도 하고 24시간을 의미하는데, 만족할만한 결과, 완벽한 승리를 상징한다. 하지만 태양은 하늘에 홀로 떠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외로움이 있게 됨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상에 선자는 고독하고 외로운 결정을 하게 된다. 그 누구와도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위치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백말을 탄 어린아이는 원하는 결과물을 말하며, 능력 이상의 성과를 상징하기도 한다. 어린아이는 풍요와 성장할 것을 의미하지만, 어디든지 떠나야할 역마살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이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창은 방심하면 다칠 수 있는 위험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함을 상징한다. 창에 달린 붉은 휘장은 열정, 자신감을 상징하며 승승장구할 것을 의미한다. 위로부터 휘장이 물결을 이루듯 내려온 것은 윗사람으로부터 힘을 얻고 도움을 받게 됨을 상징한다. 또한 아이가 타고 있는 백말은 움직이는 돈이나 도움, 명예, 성취를 의미한다. 백마는 아이를 등에 태우고 아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이것은 일을 이루기 위한 큰 도움을 의미하며, 자산과 같은 것을 상징한다. 아이의 뒤에 세워진 벽돌담은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에 이 담이 검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장벽이나 위험을 상징할 것이다. 이 담은 아이를 위해 쳐진 보호벽이며, 안전과 더불어 무모한 행동을 자제시키는 긍정적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다. 담 뒤에 있는 해바라기는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해바라기가 해를 쳐다보지 않고 해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자만으로 기고만장하게 되면 주위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담 너머에 해바라기가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나 기타 세력을 등에 업지 말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다. 태양에 대한 정방향의 해석은 행복을 누릴 것을 의미하며, 목적한 바를 성취하게 됨을 상징한다. 만족한 결과를 의미하며, 활약기를 상징하고, 진보와 발전, 강력한 체력, 그리고 큰 기쁨을 상징한다. 반대로 역방향의 카드는 일등은 아니지만 대학에 들어 갈만한 성적을 얻는다든지, 승진은 안 되지만 원만한 직장생활, 아이는 없어도 행복한 부부생활, 뛰어나진 않아도 노력하는 부부 등과 같은 정도의 큰 결과를 얻지는 못해도 소규모의 결과는 얻을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불행이나 외로움, 계획의 취소 등과 같은 부정적 결과를 얻게 됨을 상징한다.   시에서 태양과 같은 존재는 독자의 감성을 건드릴 수 있는 반짝이는 문장일 것이다. 시 속에 단 한 줄이라도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문장이 있다면 그 시는 독자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핵심적인 주제의식이고, 말하고자하는 철학성이나 참신한 이미지의 공감적 표현일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위해선 사물을 통한 통찰이 필요하다. 단순히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깨닫고, 간직하고 싶은 금언과 같은 생명력이 충만한 문장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장은 삶에 대한 철학이 담기던지, 아니면 예술적 차원의 표현이든지, 아니면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 어머니의 채취 같은 것이어야 한다. 시의 문장 하나하나를 다 이러한 문장으로 갈고 다듬으면 더욱 좋겠지만, 문장 모두를 다 그렇게 표현하기는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이라 해도 금석의 문장으로 만드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다. 시에서 언어의 조탁은 고대로부터 추구되어온 필수 요소이며, 시의 표현에 핵심적 사항이었다. 하나의 문장이 독자의 감성을 건드리고, 눈물짓게 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 시는 살아있는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감성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 해도 그 안에 더욱 심오한 철학성이나 예술성이 담겨 있다면 그 시는 어쩌면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의미성 없이 문장을 만들거나, 독자의 주관적 시각에서 빗어낸 자기만의 시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빛나는 문장을 만들라. 사금처럼 반짝이는 문장을 만들어 보는 이에게 인생의 깨달음을 줄 수 있다면 그 문장, 그 시는 태양처럼 세상을 두루 비출 수 있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부싯돌 속에서 태어난 씨앗들은 별처럼 반짝거렸지. ​ 마른 쑥잎에서 실연기로 성장해 바람결에 눈을 뜬 불씨들 석유나 나무나 양초 위에서 붉은 혓바닥을 놀렸지. ​ 태풍처럼 커질 풍문을 기다리며​ 순식간에 집을 삼키고도 남을 불새들은 몸을 웅크리고 담배와 폭죽과 수류탄 속에 잠들어 있었어.   성냥골 같은 뇌관을 건드리면 언제 터질지 모를 불장난으로 단 한 번 불꽃이 되고 싶은 봉오리들이 재가 될 운명의 껍질 속에 몸을 숨겨왔지. ​ 태양을 먹고 살아온 잎들은 불을 토하려 물을 뽑아 올리는데 단 한마디 기도로 피어나기 위해 침묵해온 향불 흐릴수록 세상에 진동하는 번개이기 위해 태풍의 고요와 심해의 어둠이 감싸온 심장이 꿈틀거렸지. ​ 가시덤불에서 타오르던 야훼의 불꽃이 몸속에서 타오르지만 않았다면, 불이 빚어서 혼이 된 흙이 도자기처럼 간직하고 싶은 불의 추억 ​ 감출 수 없는 뜨거움 때문에 성화는 분수처럼 타올랐어. ​ 악을 용서하며 꿈을 재생하는 연금술사의 손이 풀무 불로 지나는 계절, 껍질이 깨진 은행에서 천년의 줄기와 가지들이 폭발하고​ 아기의 입술에선 태초의 말씀이 울음을 터트리는데 ​ 재가 되기 전 마지막 바람의 입술을 기다리는 ​숯 「불의 기억」 전문/김기덕 시인   위의 시는 필자의 졸시 「불의 기억」의 전문이다. 위의 시에서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문장은 많지 않다. 독자에 따라서는 한 문장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단락에서 “재가 되기 전 마지막 바람의 입술을 기다리는 숯”에서 우리 인생의 내면에 깔려있는 마지막 꿈꾸고 있는 절실한 사랑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고자 했다. 서정주 시인하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 보다.”가 생각난다. 김소월 하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보내드리오리다.”가 생각나고, 김수영 하면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난다.”와 같은 구절이 생각난다. 시인은 이러한 명구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태양 같은 구절, 태양 같은 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출처] 19. 태양|작성자 김기덕   20. 심판 [ 글 올린 분 한글파일로 올려서 중국파일로는 열수없음]   21. 세계   21. 세계(THE WORLD ​ 타로카드 21번은 월계수 화환 속에서 누드의 여인이 지휘봉을 들고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다. 월계수의 화환은 하나의 완성된 세계를 의미하며, 또한 벗어나야할 틀을 의미하기도 한다. 월계수의 관은 승리자에게만 주어진 왕관과 같은 것이다. 이 월계관 안의 여인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으며, 원을 이루고 있는 자신의 세계에서 성공한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지휘봉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하는 일이나 주인공이 됨을 의미한다. 이 원 안의 세계는 자신의 지휘 안에 있는 세계인 것이다. 아름다운 육체에 보라색 천이 둘러져 있는 것은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임을 상징한다. 여인의 머리가 금발인 것도 황금과 같이 귀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월계수 관 안의 세계는 좁아서 알껍질처럼 깨고 새롭게 나와야 하는 세계인 것이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과감히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자주색 천으로 묶여진 뫼비우스의 띠는 무한대와 영원함을 상징한다. 위와 아래에 묶여진 것은 하늘과 땅의 영원함을 상징하며, 처음과 끝, 그리고 시작과 마침을 의미한다. 원 밖의 네 생물은 사람, 독수리, 황소, 사자인데, 각각 구름 속에 들어 있다. 타로카드 10번 운명의 수레바퀴에서는 네 생물이 구름 위에서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책을 본다는 것은 공부하고 노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학업이 풍부함을 의미하며, 독수리는 추진력, 통찰력을 상징한다. 황소는 재물이나 신용, 안정성을 의미하며 사자는 카리스마나 리더십을 의미한다. 이 네 생물이 원 안에 있지 않고 원 밖에 있는 것은 또 다른 목표, 새로운 세계를 향한 노력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구름 속에 있다는 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타로 21번 세계카드의 정방향은 애착, 완성, 완벽함, 궁극적인 변화, 모든 노력의 결과가 나온다. 성공, 종합, 통합, 실현, 능력, 수완, 맡았던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또한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됨을 의미한다. 하지만 역방향은 불완전, 시작한 일을 완성시킬 수가 없다. 비전 부족, 실망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타로는 상징적 사물들로 짜진 그림이다. 그 상징적 사물들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많은 상징적 의미들을 나타내주고 있다. 시도 역시 사물어로 구성된 언어적 회화에 가깝다고 본다면 타로와 같이 어떤 사물들을 배치하느냐에 따라 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시의 상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시의 예술적 차원은 달라진다.   천부경은 천제 환국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다 5대 환웅 때에 이르러 신지 현덕에게 명하여 녹도문자로 기록하게 한 81수의 시이다.( 「소도경전본훈」) 최치원이 천부경이 세겨진 옛날비석을 발견하여 신지의 전문을 첩으로 기록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의 대야발이 천부경의 내용을 담은 단기고사를 편찬하였고, 광성문 황제는 태학을 세워 천문경, 환단고사를 강의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숭유정책으로 천부사상이 소멸하게 되었다가 숙종 때 이맥이 규원사화를 통해 천부경을 부활시켰고, 명종 때는 남사고가 격암유록을 썼다. 계연수는 1911년 를 합해 환단고기를 발간하였다. 하늘의 인장(印章)을 말하는 천부(天苻)는 우주존재계의 심벌(상징)을 의미하며, 카발라의 생명나무를 말한다. 카발라는 서양 정신세계의 배후에 있는 모태이다. 모든 철학과 종교의 밑바탕에 존재하는 신비철학체계이며, 오컬트, 마법사, 연금술사들에 의해 연구 발전되어온 형이상학체계이다. 천부경은 글자에는 어려움이 없으나 내용이 심오하여 해석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상징성을 알고 나면 의외로 쉽다고 할 수 있다. 천부경은 압축적으로 우주를 해설한 지상 최고(最古), 최고(最高)의 경전으로 명확성과 논리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부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간직한 이유는 지혜의 보존에 있다. 언어는 시대가 지나면 변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상징은 변하지 않고 오래도록 의미를 간직할 수 있다. 둘째는 천부경을 알 수 없는 무자격자를 배제하기 위함에 있다. 셋째로 진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천부경의 가치는 카발라를 거론했다는데 있다. 카발라(Kabblah)는 입에서 귀로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카발라는 스승에서 제자에게로 직접 전수되었던 비밀스런 신비의 진리였다. 그래서 카발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른다. 카발라의 종류는 두 가지가 있다. 씌어지지 않은 카발라와 씌어진 카발라로 나눌 수 있는데, 씌어지지 않은 카발라는 내용의 심오함으로 무자격자를 배제하기 위해 직접 입으로 전수된 카발라를 말한다. 씌어진 카발라는 서기 200년 이후 세펠 에트지라가 쓴 와 서기 1,200년경 모세 드 레온이 쓴 같은 책을 말한다. 천부경의 의미는 씌어진 카발라라는 것이다. 천부경은 환인시대에 구전되다가 환웅시대, B. C 3898년 문자로 정착하였다. 세계 최초의 씌어진 카발라로 서양보다 4000년이 앞선다.   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은 하나가 시작되었지만 시작된 하나가 없다는 뜻이다.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과 연관하여 끝없이 순환하는 우주의 섭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체적 해석으로 보면 불완전하다. 析三極 된 객체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一始는 하나가 시작된 생명나무의 케텔을 의미한다. 無始一은 그러나 시작된 하나는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析三極은 시작되었지만 시작되지 않은 하나가 삼극으로 나뉘었다는 말이다. 1이 케텔이면 시작되지 않은 1은 케텔 중의 케텔 ‘호아’, 대일(大一)을 의미한다. 케텔은 무한자(숫자값 0)로부터 나왔다. 케텔이 케텔로 완성되는 시기는 호크마가 나올 때이다. 그릇이 넘치듯 케텔이 완전히 형성된 그 이후에 호크마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무한에서 케텔이 나오는데,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상태는 케텔 이전의 무한자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는 생명나무 형성과정과 동일한 미시적 발출과정을 의미한다. 즉 케텔 이전의 케텔 상태를 말한다. 케텔은 옆얼굴로 묘사되는데 이는 이중성을 의미한다. 1번 세피라는 케텔의 안 보이는 얼굴을 말하며, 10번 세피라는 보이는 얼굴을 의미한다. 호아(Hoa)는 우리나라 말로 대일(大一)을 뜻하는 것으로 비현현계, 무한계로 불교의 공(空), 도교의 도(道), 유교의 무극, 카발라의 아인소프를 말한다. 아인소프는 창조가 없는 무의 상태, 공상태를 말하며, 물질계(아시아계) 및 예트지라, 브리어, 아트질루트 이전의 세계를 의미한다.   析三極 無盡本 석삼극 무진본은 삼극으로 나뉘었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삼극은 대일(大一)에서 케텔, 호크마, 비나가 발출하여 생명나무의 기반을 이룬 세 개의 세피로트를 말한다. 도덕경에 보면 ‘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이라는 글이 있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는 언급에서 보듯이 카발라에서 보면 무한에서 케텔이 나오고, 케텔에서 호크마가 나오며, 호크마에서 비나가 나와 삼자로부터 만물이 생성, ‘셋이 만물을 낳았다.’ 라고 한다. 이로부터 생성된 것들은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 네자흐, 호드, 예소드, 말쿠트 등인데 말쿠트는 물질세계를 의미한다. 이렇게 생성된 카발라는 가로구조와 세로구조로 구분할 수 있다. 가로구조는 제1 트리아드인 케텔, 호크마, 비나로 이루어지고, 제2 트리아드는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로 이루어졌다. 또한 제3 트리아드는 네자흐, 호드, 예소드이다. 세로구조는 좌측기둥 비나, 게부라, 호드이며, 우측기둥은 호크마, 헤세드, 네자흐이다. 중간기둥은 케텔, 티페레트, 예소드, 말쿠트로 이루어져 생명나무가 삼극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일일지일이인일삼은 天 하나가 하나요, 地 하나가 둘이요, 人 하나가 셋이라는 말이다. 주역에서 天一, 地二, 人三에서의 의미는 첫째, 둘째, 셋째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뒤에 언급된 一積十鉅 無匱化三을 보면 ‘하나가 쌓여 십으로 커지고 무의 궤가 셋으로 하였다.’ 라고 표기하여 주역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천부경은 십수로 우주구조를 설명한 경전이다. 천부경의 천, 지, 인은 카발라의 세로구조의 세로기둥들을 지칭한다. 그래서 천수는 2, 4, 7을 말하고, 지수는 3, 5, 8을 말하며, 인수는 1, 6, 9, 10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일은 대일(大一)을 의미하며, 대일은 석삼극된, 대등한 가치를 지니는 각각의 극을 암시한다. 이 세 극은 생명나무 우측기둥, 좌측기둥, 중앙기둥을 말하는데, 우측기둥은 남성을 의미하며, 천극을 지칭한다. 좌측기둥은 영성과 지극을, 중앙기둥은 양성원리와 인극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천극, 지극, 인극을 삼극으로 나타내고 있다. 역학은 이분법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서 역리상 수체계는 천부경 적용에 오류를 가져온다.   一積十鉅 無匱化三 일적십거 무궤화삼은 하나가 쌓이고 십으로 커져서 무의 궤가 십으로 화하였다는 뜻이다. 케텔 1에서부터 말쿠트 십까지 숫자가 쌓여가지고 무괘(無의 궤짝)인 생명나무가 삼극으로 화하였다는 것이다. 無란 생명나무 최초의 세피라인 케텔을 낳은 존재인 아인소프(무극, 공, 도)를 의미한다. 이 무의 담긴 것을 무궤로 보고 세 개의 기둥으로 화했음을 주장한 것이다. 化三은 곧 析三極을 곧 말한다. 무궤는 無의 궤짝, 케텔이 아닌 大一, 호아를 의미한다. 一積十鉅 無匱化三에서 일적은 십거,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 무궤도 화삼이라는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됨으로써 아주 짜임새 있는 문장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81수의 천부경은 고도로 집약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생명나무를 탄생시킨 무한자는 세 개의 베일로 가려져 있는데, 아인(AIN: 무), 아인소프(AIN SVP: 무한), 아인 소프 아우르(AIN SVP AUR: 무한광)로 나뉘어져 세 개의 영광을 나타낸다. 첫 번째 베일인 아인(A, I, N)은 케텔, 호크마, 비나 세 숫자(1, 2, 3)를 잠재적으로 포함한다. 두 번째 베일인 아인 소프(A, I, N, S, V, P)는 케텔, 호크마, 비나,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의 여섯 숫자(1, 2, 3, 4, 5, 6)를 포함한다. 세 번째 베일은 아인 소프 아우르(A, I, N, S, V, P, A, U, R)를 포함하는 아홉 숫자(1, 2, 3, 4, 5, 6, 7, 8, 9)를 잠재적으로 포함한다. 이 베일들은 현현된 것이 아니며, 세피로트가 나오기 이전의 원형적 상태를 말한다. 이를 카발라의 음의 18베일이라고 한다. 아인이 아인 소프로, 아인 소프에서 아인 소프 아우르로 형성된 無가 응고되어 케텔이 형성된다. 최종분열수 9에서 더 이상 확장되지 않고 다시 최초의 1로 현현된다. 케텔에서 말쿠트의 단계로 생명나무가 현현되는데, 음존재의 9단계는 케텔 형성 이전 음존재의 말쿠트에 해당된다. 생명나무는 케텔 중의 케텔의 말쿠트에서 고형화되어 무한자의 최초 고형화 단계이다. 여기에서의 무궤는 케텔 중의 케텔인 대일을 의미한다. 「삼한관경본기」를 보면 이와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一積而陰位 十鉅而陽作 無匱而衷生焉”인데, “하나가 쌓여서 음을 이루고, 십으로 커져서 양을 만들고, 무궤에서 충이 생겼다.”는 뜻이다. 하나가 쌓여서 음을 이루었다는 말은 아인, 아인 소프, 아인 소프 아우르의 단계인 음존재를 의미한다. 십으로 커져서 양을 만들고는 이러한 음존재들이 케텔의 단계에서 말쿠트의 단계로 발전하여 양을 만들고, 무궤에서 충이 생겼다는 것은 음존재에서 케텔이 생겨남을 말한다.   天二三地二三人二三 천이삼지이삼인이삼은 천일일지일이인이삼과 비슷하지만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생명나무의 수평구분은 존재의 제계를 설명한다. 세 개의 세피로트를 하나로 묶은 것을 기능삼각형이라고 하기도 한다. 1트리아드는 케텔, 호크마, 비나이며, 2트리아드는 헤세드, 게부라, 티페레트이고, 3트리아드는 네자흐, 호드, 예소드를 말한다. 트리아드는 세 개의 세피로트가 삼위일체로 하나의 기능을 수행한다. 1트리아드와 2트리아드 사이에는 심연이 놓여 있는데, 이는 다른 존재차원을 말한다. 2트리아드와 3트리아드 사이에는 베일인 파로케트가 드리워져 있다. 천이삼지이삼인이삼 뒤의 삼은 기능삼각형인 트리아드를 이루는 천수 둘, 지수 둘, 인수 둘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수는 2와 4를, 지수는 3과 5를, 인수는 1과 6을 나타낸다.   大三合六生七八九 대삼합육생칠팔구는 대삼이 합하여진 여섯 수가 7, 8, 9를 낳았다는 뜻이다. 대삼은 1트리아드, 2트리아드를 의미하며, 1트리아드와 2트리아드가 합하여 3트리아드인 7, 8, 9를 낳았다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육은 십수 체계상의 여섯 번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위의 두 기능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여섯 개의 세피로트 수를 의미한다. 천수 2와 4, 지수 3과 5, 인수 1과 6, 이 여섯 개의 수가 합하여져서 7, 8, 9로 이루어진 트리아드를 낳음을 뜻한다. 비유적으로 1트리아드는 오시리스, 재생의 뜻이 있는 망자의 군주를 의미하기도 하며, 2트리아드는 이시스로 모성, 마술, 생산의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3트리아드는 호루스로 복수, 하늘, 수호의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말쿠트를 호루스의 자식이라고 하기도 한다. 카발라의 1트리아드는 부성계이며, 2트리아드는 모성계를 나타낸다.   運三四成環五七 운삼사성환오칠은 삼과 사를 운용하여 오와 칠의 환을 이루었다는 말로 천부경 중 가장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다. 천부경은 우주의 현상과 존재의 구조를 설해 놓은 경전이다. 굳이 81자로 이루어진 데는 우주론적 이유가 있다고 본다. 우주의 형상이고 우주의 구조인 카발라 생명나무는 10光 22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까지는 생명나무의 십광인 세피로트를 주요 골격구조로 하여 수직구조와 수평구조로 설명했다. 하지만 22개의 카발라 길의 설명이 필요하다. 81자로 카발라의 생명나무길 22개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심벌을 이용하여 7자로 멋지게 표현해 놓았다. 그것이 운삼사환오칠인데, 삼과 사를 운용하여 환을 만들되 그 환은 5, 7의 환이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삼과 사는 삼각형과 사각형을 말하고 환은 원을 의미한다. 원방각도는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 합체된 심벌을 의미한다. 카발라의 22길은 히브리어의 삼모자(三母字), 칠복자(七復字), 12단자(單字)에 함축된 의미인 3+7+12=22로 이루어졌다. 히브리어 22자를 살펴보면 3모자는 알프레, 쉬, 멕이다. 7복자는 베트, 카프, 기멜, 페, 레쉬, 탈레트, 타우이며, 12단자는 바우(와우), 차데, 테트, 요드, 라메인, 아인, 사메크, 포프, 레트, 자인, 눈, 헤 등이다. 운삼사성환오칠에서 삼사는 삼각형과 사각형을 말한다. 환오칠은 원이 다섯 개의 면과 일곱 개의 면으로 나뉘어짐을 의미한다. 7복자는 원방각도에서 만들어 낸 7개의 분할 면을 나타낸다. 운삼사성환오칠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천부경이 ‘생명나무’의 심벌을 설명하는 것인데다가 그 심벌을 또 하나의 심벌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를 심벌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천부경이 갖는 고도의 축약성 때문이다. 애초 천부경의 작가는 글자수를 정했음이 분명하다. 81자 속에 우주의 원리를 담기 위해서는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81자여야 하는가? 이를 밝히기 위해 사전작업으로 천부경 본문의 81개의 한자를 전부 하나의 점으로 생각하여 카발라의 기본적 우주론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중앙을 기준으로 하여 네 겹의 사각형과 8개의 축을 그릴 수가 있다. 사각형의 중심은 호아(대일)이며, 대일을 상징하는 점을 둘러싸고 있는 네 겹의 사각형은 안쪽에서부터 각기 존재의 4계인 아트질루트계, 브리어계, 예트지라계, 아시아계를 상징한다. 중심점을 기준으로 하여 8방으로 뻗어나간 8개의 축상에는 32개의 점이 있다. 즉 중심점+32의 구조로 배열되어 있다. 카발라에 의하면 신은 32개의 길을 따라 내려왔다고 한다. 즉 1+32는 우주의 기본 법칙을 상징하고 있다.   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일묘연만왕만래 용변부동본은 하나가 묘하게 넘쳐서 무수히 오가며, 쓰임은 변하지만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피라에서 다른 세피라로 움직임을 카발라에서는 ‘넘친다’로 표현한다. 다이온 포춘이 쓴 40쪽을 보면 “각 세피라는 물웅덩이와 같아서 그것이 꽉 찬 뒤 아래의 웅덩이로 흘러간다.” 라고 표현했다. 한 세피라에서 다른 세피라로 발출되어 나오기 위해서는 선행하는 세피라 안에서 10단계에 걸친 성숙 단계를 거친다. 카발라의 가르침은 존재의 4계(아트질루트계, 브리어계, 예트지라계, 아시아계)는 각각 10개의 세피로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세피로트는 다시 10개의 세피로트로 이루어져 있다.   本心本 太陽昻明 본심본 태양앙명은 본심은 본래 태양을 우러러 밝힌다는 뜻이다. 천부(天符)는 생명나무를 말하는데, 생명나무는 10세피로트와 22라인으로 이루어져 신이 내려온 32길을 보여준다. 운삼사성환오칠은 22법칙을 설명한 것으로 생명나무의 기본구조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그 다음부턴 부연설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묘연만왕만래 용변부동본 본심본태양 일중천지일은 생명나무 전체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이 왜 천부경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천부경이 카발라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해하기 힘들다. 본심이란 인간의 본품성, 자성, 고급자아를 의미한다. 생명나무는 세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에너지, 의식, 형상을 대표하는 기둥 중 우측기둥은 에너지를, 좌측기둥은 형상을, 중간기둥은 의식을 나타낸다. 우측기둥은 자비의 기둥으로 포지티브, 남성의 원리를 내포하며, 적극성과 건설, 유동적인 에너지이다. 좌측기둥은 엄정의 기둥으로 네거티브, 여성의 원리, 소극성을 나타낸다. 파괴적이며 구체적 형상을 나타낸다. 중간기둥은 의식을 나타내며, 의식의 차원들, 의식의 차원들이 작용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중간기둥 중에는 말쿠트, 예소드, 테페레트, 케텔이 있는데, 말쿠트는 감각의식을, 예소드는 아스트랄 심령인 달의 사이킥 의식을 의미한다. 티페레트는 일루미네이션을 얻는 의식으로 저급자아와 고급자아의 합일을 이루어 태양이 상징하는 진정한 자아를 형성한다. 케텔은 신성을 의미한다. 이렇듯 중간기둥은 인간의식의 성장, 깨달음의 단계를 나타낸다. 신성에 이를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나타내는 것이며, 화살의 길, 불의 길이라고도 한다.   人中天地一 인중천지일은 ‘사람 가운데 천과 지가 하나다.’ 라는 뜻이다. 천부경은 생명나무를 말한 것으로 생명나무의 범주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생명나무의 중간기둥인 인극 가운데 우측기둥인 천극과 좌측기둥인 지극이 하나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나무 중간기둥이 남성원리인 양과 여성원리인 음이 합일된 양성일체의 합일임을 언급한 것이다. 균형의 기둥이라 한 중간기둥은 의식을 의미하며, 의식의 성장은 음과 양의 균형, 즉 중도의 길에서만 가능하다. 요가에서의 깨달음을 보면 음의 채널인 이다(Ida)와 양의 채널인 핑갈라(Pingala)가 균형 잡혔을 때 중간의 수슘나가 활동하고, 척추 끝의 쿤달리니가 중간기맥인 수슘나의 관을 따라 머리로 상승하여 사하스라라 차크라를 일깨운 상태라고 한다.   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은 하나가 끝났으나 그 하나는 끝난 것이 아니다 라는 뜻이다. 하나의 시작은 케텔이며 하나의 끝은 말쿠트이다. 하나의 끝남이 말쿠트이지만, 말쿠트는 다시 케텔로 시작된다. 말쿠트 숫자값은 10인데, 10은 완전수로 1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10=1+0으로 1을 나타낸다. 신의 속성은 질서와 균형이다. 신의 부재는 무질서와 불균형인데, 카발라에서 신의 부재를 네거티브 생명나무, 암흑의 나무,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생명나무의 말쿠트는 암흑의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말쿠트의 우리 인간은 암흑나무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내적인 무질서와 불균형을 극복한다면 생명나무의 길을 따라 의식을 각성시켜 신과 합일될 수 있다. 카발라에서 인간존재의 이유를 악인 무질서와 불균형을 선인 질서와 균형으로 변형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이렇듯 카발라에서는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인간의 사명을 티쿤(Tikkun)이라고 한다.   시를 쓰는 것은 티쿤적 삶을 사는 것이다. 지식과 언어, 감정으로만 쓰는 작업이 아니라 어두운 세상을 밝혀가는 신적인 사명을 이루어가는 일이다. 현란한 언어의 테크닉과 정리되지 않은 정신적 무질서 속에서 시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시는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숭고함에서 나온다. 언어의 숭고함은 세상만물이 언어로 지어졌고, 언어 속에서 진리로 살다가 마지막 언어로 마칠 것이기 때문이다. 숭고한 언어를 사용하여 시를 쓰기 위해서는 언어에 살아있는 혼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을 멘탈체, 아스트랄체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한다. 시인은 하나의 언어 속에 멘탈계와 아스트랄계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를 통해 케텔 이전의 케텔을 보여주면서 생명나무의 길을 가야 한다. 한민족의 조상인 환인들 시대의 천부경이 유대교의 하나님, 엘로힘의 제사장으로서의 반차를 쫓은 멜기세덱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전해주었던 카발라를 설명하고 있었다는 점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편의 시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 왔던 모든 고정관념들이 깨어지는 통렬한 희열을 느낀다. [출처] 21. 세계|작성자 김기덕
248    약 .2 댓글:  조회:1719  추천:0  2017-12-08
약. 2 / 강려   쉿 ! 비위 상하면 뾰로통약 오른대   쉿 ! 화 나면 뾰로통약   오른대   2017년 12월 8일  "중국조선족소년보" '진달래아동문예' 면  발표작  
247    약 .1 댓글:  조회:1683  추천:0  2017-12-08
약. 1  / 강려   이슬비가 하얀 련꽃한테 비타민 한알 내밀며 “영양제야. ”   해님이 초록빛 련잎에겐 해살칼슘 한알 내밀며 “뼈가 든든해진대”   2017년 12월 8일  "중국조선족소년보" '진달래아동문예' 면  발표작  
246    시로 쓰는 시작론 묶음 / 오남구 댓글:  조회:1418  추천:0  2017-12-07
시로 쓰는 시작론 묶음 / 오남구   고정관념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1     고정관념의 대표 선수  신神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부서진 이미지의 조각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2     아스팔트 위에서  유리, 산산이 깨어진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  아니, 아침의 풍경들이  산산이 깨뜨려진다.  수많은 유리조각 하나 하나마다  온전하고 현란한  하늘이 들어가 있다.  -꽤 오랫동안  유리 조각들을 들여다보고  부서진 유리의 이미지 조각들을  창틀에다 짜맞추어 본다.  실제로 셀로판지를  구겼다 접었다 쫙 펴듯이 한다.  그 때마다 비쳐서  움직이는 사물의 모습  유리를 통해서 투시된  구겨서 버리는 내면,  -두 개의 생각이 반복하여  쫓기고 쫓는다.   감각 여행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3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그시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 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우주 유영遊泳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4     지구 밖의 한 점에서 보자  지구의 자전에 따라서  낮에 서 있던 나무가  밤에는 쳐박히는 모습이 된다  어둠 속에 산발한 잎들  느낌을 움직여 보자  “자, 나무를 눈 앞에 떠 올리시오!”  “빙글 움직인다, 밤!”  “빙글 움직인다, 낮!”   직관지直觀知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5     “꽃을 하나하나 분해하시오!”  “눈을 맞추시오!”  되도록 자세하게 분해하며  부분부분을 보도록 한다.  “쓰레기통에 버리시오!”  해서 모두 쓰레기를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꽃은 없게 되고  눈맞춘 느낌만 있게 되고,  그 후 그 느낌을 그대로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이  꽃잎이며 수술이며 자유로이  마음 속에 그래서 핀  마음의 꽃.    의식의 불빛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6     낮에는 건물의 분명한 외형  선명히 강한 느낌을 나타내다가  밤이 되면 모든 윤곽은 사라지고  다만 의식의 불빛이 빛난다.  이 때 내부가 환희처럼  드러나 보인다.  내부가 환히 드러나 본질이 보인다.  빛에 의해 형상이 보이던 꽃  모습이 몽롱히 사라지면  형체가 없는 무형한 꽃  생명의 본질이 움직인다.   탈관념脫觀念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7     살포시 눈을 감으면 좋다  마음 속으로 눈 앞에  깨끗하고 가장 아름다운 공을  상상해서 그린다  공을 튀기어 본다  공이 점점 높이 튀어 오르도록 한다  그래서 천장도 뚫고 올라가서  하늘 높이 튀어 오른다  이렇게 튀는 상상을 반복해서  파란 하늘까지  튀어 오르게 하여  별로서 박힐 때까지 계속한다  이런 일을 반복한다  심상이 관념의 벽인 천장도 뚫고 나서  중력의 아무런 관계 없이  눈을 떠 본다. 컵이며 휴지며  모든 사물이 뜬다.   마음에 비치는 언어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8     눈을 감고 있는  명상하는 배경이  수묵화처럼 펼친다  조선의 여인이 앉아 있듯, 달 기울고  싸락눈 북새치고  외로운 개가 깨어 짖는다  그토록 시간이 가고  푸르도록 바라본 세월이었을까  가끔은 눈물도 찍어 내는  그 자신을  애틋이 직관하기도 한다.   마음이 물을 보면 물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9 마음은 원래 비어 형상이 없고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들 만상萬象이 있게 된다 마음이 물을 보면 물이 되고 바람을 보면 바람이 된다 내 손에 꽃을 들고 있을 때 마음이 화병이면 꽃이 된다 꽃은 마음의 질서이다 몸을 이루고 있는 성품이 작용하는 느낌이다 질서는 성품이 투사된 느낌이다.   시인의 화두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10     ‘꽃!’하고 오직 집중이다.  스님이 화두를 가지고  혜안慧眼을 열어가듯  눈을 감고 있노라면  마음 속에서 거품이 올라오듯  잠재해 있던 느낌  꽃들이 떠오른다.  끝내는 아무 생각도 없이  맑게 되어 어느덧 그  마음도 맑아 투명하다.   우주는 생명체 / 오남구 -시로 쓰는 시작론·11     육신에 마음이 있듯  나와 우주는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우주에도 마음이 있으니  그 마음이 신이다. 그러니  곧 내 마음이 신이요  신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신도 흐트러진다.  
245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과 표현 /김기덕[ 한국] 댓글:  조회:1618  추천:0  2017-11-09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과 표현 ​       김 기 덕 [ 한국]     시인들은 많지만 표현의 방법을 제대로 알고 시를 쓰는 시인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관념을 전달하기 위해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나열에 치중하여 시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시의 개념을 생각한다면 언어를 통해 그림을 그리듯이 시를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림 속에는 화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성이나 메시지가 있겠지만, 그림 자체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림 속에 담긴 관념을 금을 캐듯 채취하는 것이다.하나의 시 속엔 철학의 광맥이, 관념의 광맥이 필요하다. 그 관념성은 지상에서 볼 수 없는 광맥처럼 숨겨진 존재이다. 잘 표현된 시 속엔 철학과 사상, 이념의 고차원적인 광맥이 숨겨져 있어야 하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 시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표현 속에 관념을 감추고 심오한 생각의 깊이를 보여주기 위해선 표현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 시의 표현은 하나의 단어로도 가능하지만 대부분 문장에서 시작된다. 그 문장은 이미지로 결합된 문장이며, 설명이나 관념의 기름기가 빠진 순수 사물적이거나 감각적이어야 한다.     1.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의 필요성   지금까지 우리의 시 쓰기는 대부분 연역적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역적 방법은 간접추리와 직접추리와 같은 연역적 추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간접추리는 일반적으로 둘 이상의 명제로부터 새로운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예) “모든 유대류는 척추동물이다.” “모든 캥거루는 유대류이다.” 그러므로 “모든 캥거루는 척추동물이다.”   직접추리는 하나의 명제에서부터 새로운 한 명제를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예) “모든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어느 비이성적 동물도 사람이 아니다.” 예) “어느 자유주의자도 전체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전체주이자도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시는 증명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학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시 쓰기의 방법적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연역적 방법은 일반적인 원리를 가지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예) 모든 동물은 죽는다. -대전제(일반적 원리) 사람은 동물이다. -소전제(구체적 사실) 그러므로 사람은 죽는다. -추론(구체적 원리)   연역적 방법의 시 쓰기는 하나의 주제의식, 즉 결론적 의미를 이끌어내기 위해 자연이나 사물, 정황의 의미, 철학성, 교훈성, 유희성 등등의 대전제를 세우고 감성적 정서나 이야기 등의 소전제를 덧붙여 시인의 시적 의도를 나타내는 방식이다. 연역적 방법의 시는 연역법적 증명의 형식을 갖는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발상에서부터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의미한다. 대전제는 시에 대한 발상을 얻고 어떤 주제로 써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소전제는 이 주제에 대한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 등의 표현을 빌려와 주제성을 뒷받침하는 것을 의미한다. 추론은 결론적 감성의 증명, 새로운 차원의 제시, 상승된 시심의 도출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는 정확한 논리적 증명을 위한 글은 아니지만, 그 방법적인 면에서 볼 때 대부분 연역적 방법을 취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시는 비논리의 논리이다.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비논리와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논리적 사고로 이해하려 한다면 시의 접근성이 차단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연역적 방식의 시들은 시간성, 인과성, 예상가능성의 원리들을 통해 생각을 펼치며 개인적 정서의 증명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첫 문장을 보면 시의 가능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첫 문장이 표현되었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앞으로 생각이 뻗어갈 수 있는 씨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 씨알은 주제의식을 나타내며 시적 정서를 증명하기 위한 대전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들은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내용을 거의 다 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의 표현방법을 말하면서 접근법을 끌어들인 것은 표현을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의도에서 시 쓰기를 시작한다면 시에 대한 표현보다는 관념성에 갇히게 된다. 물론 숨겨진 관념을 나타내기 위해 잘 표현된 시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시인들에겐 시 쓰기의 근본적인 접근 방법을 바꾸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 쓰기 방법은 하나의 사물이나 풍경, 이야기 등을 통해 착상이 이루어지면 연못에 던져진 돌의 파장처럼 이미지를 확장해 가거나 굴착기 같은 생각의 압력을 통해 사고의 지반을 꿰뚫으려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작점은 착상의 중심이고, 시의 전개는 이 중심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정방향의 일방적 시 쓰기가 되어 예상이 쉽고 의미가 드러나 식상한 맛을 주었다. 시는 어려워야 하나? 라는 질문을 받는다. 시는 어려워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깊이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반복하여 써온 시의 정서들이 이제는 식상한 공식이 되었다. 첫줄을 읽고 다 알아버린 시의 맛은 맹물 같은 것이다. 대하소설을 읽는데 그 내용이 예상된다면 누가 시간을 들여 읽으려하겠는가. 초보적 시 쓰기에서 벗어난 고수들의 바람은 신선한 접근과 파격적 전개는 아니라 해도 우려먹어서 맛이 다 빠진 녹차 잎 같은 시는 아닐 것이다. 시를 어렵게 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한 편의 시 속에 많은 이미지와 생각의 씨알을 담는다면 당연 시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편하게 읽혀서 감동을 주는 시도 있지만 그 속에 안주해서 감동도 없고 신선함도 없는 시들이 너무 많다. 새로운 실험을 통해 과감히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존의 방식을 버려야 할 것이다.     2.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   이러한 기존의 연역적 시 쓰기 방식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귀납적 방법이다. 시 쓰기의 귀납적 방법은 연역적 방식과 접근법에서 상반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연역의 추리는 그 전제가 참이면 결론도 필연적으로 참이지만, 귀납적 추리는 전제와 결론 사이에 필연성이 없다. 귀납적 추리는 그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 낼 때 개연성(꼭 단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그러리라고 생각되는 성질.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의한 귀납적 비약이 반드시 따른다. 이러한 논리학의 논리가 시에 도입되어 활용될 때는 연역적 전개의 반대적 방향성을 갖는다. 귀납법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을 통해 일반적인 원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예) 사람은 죽는다. -구체적 사실 소도 죽는다. 돼지도 죽는다. 개도 죽는다. 사람, 소, 돼지, 개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은 죽는다. -추론(일반적 원리)   다시 말하면 연역법은 일반적 원리를 근거로 구체적, 개별적 문제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귀납법은 구체적, 개별적 사실들을 논거로 하여 일반적인 원리를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은 연역법의 대전제와 같은 의미, 철학성, 교훈성, 유희성 등을 세우기 이전에 관찰적 근거들을 모으듯 이미지를 뽑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먼지라는 소재를 통해 시를 쓴다면, 연역적 방법은 ‘먼지를 통해 인간은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는 주제성을 통해 접근한다든지, ‘먼지로 인한 폐해’와 같은 문제성으로 출발할 것이다. 하지만 귀납적 방법은 먼지라는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관찰적 근거가 되는 주변 이미지를 뽑으라는 것이다. 먼저 유사한 이미지들로 모래, 재, 진드기, 꽃가루 등을 찾았다면, 인접성의 이미지 침대, 방, 진공청소기, 걸레 등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상징적 이미지인 사람, 별, 나뭇잎, 구름 등을 찾아 순서를 정한다.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은 확장된 이미지, 팽창된 의식에서 집중된 이미지, 집약된 의식으로 가는 수축의 과정이다. 먼지와 연결된 이미지가 세상엔 무수히 많다. 이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취사선택하여 집약된 정서적 논증을 이루어야 한다.     ⑴ ‘먼지’를 소재로 한 구체적 시 쓰기 방법   먼지라는 소재를 대상으로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먼저 먼지에 대한 책을 한 권 정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먼지에 대한 기본 지식이 갖추어진 다음에 이미지를 뽑게 되면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이미지들을 뽑을 수 있다. 인간은 아는 만큼 생각하고 아는 만큼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시를 쓰면서 논문이나 책을 통해 그에 연관된 방대한 양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또한 한 편의 시 속에 책 한 권 분량의 지식과 상징을 압축할 수 있다면 대단한 시가 될 것이다. 한 줄 문장 속에 책 한 권을 압축하기 위해선 상징적 이미지의 활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상징적 이미지 속엔 천년 은행나무의 씨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최대한 많이 뽑을수록 좋다. 그것을 다 활용하지 않아도 연관된 사고의 확장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뽑은 이미지에 대한 문장 만들기 뽑은 이미지를 가지고 문장을 만들 때는 벌이 꽃에서 단물을 빨아 몸에서 침과 함께 숙성시켜 꿀을 생산해 내듯 그 이미지를 자신의 경험과 정서적 지식을 통해 숙성시켜 시적표현으로 토해내야 한다. 그래서 똑같은 이미지라도 시인마다 다르게 표현되며, 다른 맛과 색깔을 나타낼 수 있다. 그렇다면 먼지에 대해 유사성, 인접성, 상징성으로 뽑은 이미지를 가지고 나의 정서적 사고의 숙성을 통한 문장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꽃가루: 꽃 입술에서 나온 꽃가루들이 거울 같은 세상을 지운다.   화산재: 성층권까지 치솟는 분노의 화산재.   모래: 변심한 애인의 모래바람.   중금속 입자: 중금속으로 살던 입자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나를 깨운다.   석면가루: 석면가루의 말들이 진폐증을 일으킨다.   진드기: 진드기나 박테리아들과 한 이불 덮으며 살아도   침대: 침대 밑 쥐며느리나 개미들처럼 껴안지 못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책상: 책상 위에 쌓인 중금속들이 비둘기로 날아간다.   창문: 유리창에 달라붙은 꽃가루들이 자동차가 되어 달린다.   나: 나는 몇 억만 년 전에 피어난 소금방울이고 화산재였나.   벽: 벽을 통과해 내 몸 속에 둥지 틀고 먼지들이 기침을 한다.   구름: 구름방울, 빗방울로 살다가 지상 위에 날개를 접는다.   별: 반짝이는 먼지들로 가득한 은하계에 바람이 인다.   화장터 연기: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는 내 안의 미립자들.   지구: 먼지별에 가득 찬 먼지들 서로 껴안고 몰려다닌다.   노을: 굴절과 산란을 만들며 노을처럼 흩어진다.   빛: 나뭇잎마다 수북이 쌓이는 빛     ⑵ ‘먼지’를 소재로 한 시 쓰기의 완성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온 문장들을 적절히 배합하고 배치하여 한 편의 시로 만들면 되는데, 하나하나의 문장이 거의 독립적이기 때문에 배치순서가 달라도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 있거나. 사고의 대소, 현실과 이상 등의 차이에 의해 다르게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서 부족한 부분들은 좀 더 보충하여 매끄럽게 다듬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 나름대로 완성한 시이다.   먼지 보고서   먼지별에 가득 찬 먼지들 서로 껴안고 몰려다닌다. 바람의 미세 혼령들 한통속으로 몸을 드나들며 구름을 일으킨다. 성층권까지 치솟는 분노의 화산재 변심한 애인의 모래바람 꽃 입술에서 나온 꽃가루들이 거울 같은 세상을 지운다. 불을 피우고, 물을 뒤집어쓰며 풀풀 먼지만 피우다가 연기로 사라지는 미세먼지들 벽을 통과해 내 몸속에 둥지 틀고 기침을 한다. 어젯밤 꿈으로 분해된 초미세먼지의 빙의 아 무서워, 현실의 악몽들은 중금속으로 살던 입자들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나를 깨운다. 분해결합하며 공간 이동한 에어로졸들은 또 거미가 되고 세균이 되겠지. 진드기나 박테리아들과 한 이불 덮으며 구름방울, 빗방울로 살다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질 내 안의 미립자들 쥐며느리나 개미들처럼 껴안지 못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책상 위에 쌓인 중금속들이 비둘기로 날아간다. 유리창에 달라붙은 꽃가루들이 자동차가 되어 달린다. 나는 몇 억만 년 전에 피어난 소금방울이고 화산재였나. 석면가루의 말들이 진폐증을 일으킨다. 메트로놈의 파장이 엔진을 돌린다. 먼지로 왔다가 먼지로 돌아가는 날개들의 소리 없는 퍼덕임 굴절과 산란을 만들며 노을처럼 흩어진다. 반짝이는 먼지들로 가득한 은하계에 바람이 인다. 나뭇잎마다 수북이 쌓이는 빛. (먼지보고서 전문/ 김기덕)     3. 귀납적 시 쓰기 방법에 있어서의 표현 문장 만들기   귀납적 방법의 관찰적 근거들로 찾은 이미지들은 완성된 시의 정서적 증명을 위한 핵심요소들이다. 이 핵심적 근거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시의 정서적 증명을 위한 표현의 방식이 달라진다. 하나의 문장 속엔 이미지의 뼈를 세우고 생동하는 활력의 살을 붙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미지가 있는 명사를 선택해야 한다. 관념적 명사를 제외시키고 이미지적 명사를 주어로 해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말씀보다는 성경을, 권력보다는 총과 칼을, 사랑이라는 관념보다는 하트나 눈물 같은 이미지를 문장의 주어로 써야한다. 이러한 사물적 단어를 주어로 끌어오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사물 속에 이미 담겨 있는 관념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점은 사물 속에 담긴 죽은 관념을 봐서는 안 된다. 그 관념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어야 하며 자기만의 깨달음,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한다. 빨간 신호등은 정지를 나타낸다. 이 정지의 관념은 누구나 다 아는 관념이기 때문에 이 관념을 염두에 둔 빨간 신호등을 끌어온다면 이미 죽은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빨간 신호등은 신선한 시의 이미지를 쓰기 위해선 새로운 관념의 옷을 입혀야 한다. 내 앞에 켜진 빨간 신호등은 나의 관점에서는 정지이지만 다른 방향에 있는 차들의 관점에서는 소통이 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사물을 끌어와 문장의 주어로 쓸 때는 새로운 관념의 차원을 생각해야 한다. 시에서의 핵심적 문장은 주어+동사의 문장이다. 이미지로 선택된 사물의 주어에 어떤 동사를 배치해야 살아있는 표현이 될까? 시는 결국 언어로 그린 사물적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인간 정서를 표현하는데 있다. 그렇다면 사물적 그림을 그리되 그 그림 속에서 인간적 정서를 느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사의 쓰임이 더욱 중요하다. 만약에 먼지라는 이미지의 사물을 선택했다면 먼지를 주어로 해서 동사를 배치할 때 인간적 정서가 있는 동사냐 아니냐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먼지들이 떠다닌다.’라는 문장과 ‘먼지들이 어깨동무하고 몰려다닌다.’라는 문장은 차원이 다르다. ‘먼지들이 떠다닌다.’라는 문장은 1차원의 문장이라면 ‘먼지들이 어깨동무하고 몰려다닌다.’라고 하면 2차원, 3차원의 의미를 갖는 문장이 된다. 그래서 동사의 정서적 배치는 시의 상징적 관계를 만들며 다양한 해석을 갖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인들이 인간적 정서의 연결고리가 있는 동사를 사용하지 못하고 1차원적인 주어에 대한 서술만을 하기 때문에 표현의 문장 만들기에 실패하곤 한다. 몇 가지 인간적 정서의 연결고리가 있는 동사의 사용에 대한 예를 든다면 ‘달이 밝다’는 ‘달이 웃는다’로, ‘낙엽이 진다’는‘낙엽이 투신한다’로, ‘별이 반짝인다’는 ‘별이 윙크한다’와 같은 표현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이미 활유법이라는 방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의 문장을 씀에 있어서는, 즉 사물적 언어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활유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적 동사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증명하고자 하는 정서적 결론을 쉽게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서적 문장 표현에는 동사의 활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깨동무한 먼지’, ‘웃음 짓는 달’, ‘투신하는 낙엽’ 등과 같이 직접 주어를 꾸며줄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큰 틀에서 동사의 활용방법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의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이러한 표현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표현은 사물로 바꾸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사람과 사물은 공존하고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하나의 그림 속에 넣을 수 있지만, 심층적 조화와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위해선 사람을 사물로 변환시켜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물로 변형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시에서의 등장은 사물과 인간의 경계를 긋고, 의미가 드러난 관념 쪽으로 이끌 수가 있다. 예를 든다면 ‘여자가 서있다’라는 문장에서 여자를 사물로 바꾸어 준다면 ‘느티나무 같은 여자가 서있다’와 같이 바꾸어줄 필요가 있다. 여자를 사물로 바꾸어주는 과정에서 직유든, 은유든, 상징이든 상관없다. 단지 감쪽같은 접합을 위한 언어적 풀질의 테크닉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느티나무 같은 여자’든, ‘느티나무 여자’든, ‘느티나무’든 그것은 시인의 역량에 따라서, 또는 표현하고자 하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내가 근골의 팔을 내보인다’라는 문장도 표현의 문장으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플라타너스 같은 사내가(플라타너스 사내가/ 플라타너스가) 근골의 팔을 내보인다’로 사내를 사물로 바꾸어준다면 자연스런 언어적 표현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근골의 팔을 내보인다’라는 표현에서도 이미 사내는 나무로 변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근골’이란 단어 자체가 뿌리와 뼈를 접합시키는 이미지이며, ‘근골의 팔’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자연적 사물을 인간적 정서와 연결시킨 표현이기 때문이다.     4. 귀납적 시 쓰기의 결론   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은 기존의 수목적 사고의 방식에서 탈피하여 유목적 사고의 방식을 추구하는 구체적 방법 중에 하나이다. 사고는 흐름과 방향성을 갖는다. 그 흐름과 방향성은 그냥 놔두면 관습적인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나무에 매달린 사과는 항상 땅으로만 떨어진다. 시에서의 사과는 땅이 아닌 하늘로 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관습적 사고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뻗어 온 우리의 사고, 시적 전개의 방식을 과감히 탈피하여 잎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뿌리로 접근하는 방식의 추구가 바로 귀납적 시 쓰기의 방식이다. 내가 무엇에 대해 시를 쓸 것인가 하는 대전제를 세우고, 많은 이미지와 스토리를 끌어와 작자의 의도대로 정서적 결론을 이끌며 도출하던 시의 방식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한다. 이미지든 사건이든 시적 대상을 잡았다면 먼저 이미지를 뽑고, 이미지적 문장을 통해 언어의 그림을 그려줌으로써 독자들이 생각하고 유추해 갈 수 있는 시를 써야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표현적 문장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조합하는데 묘미가 있다. 하나의 화폭에서 풍경화나 정물화를 그린다고 가정할 때는 나름대로 그리는 순서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들이 분해되어 재구성 될 때는 순서가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관찰적 근거들이 모여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듯 나름대로 주제성을 느끼며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주제적 큰 틀을 표현하고 정서적 증명을 위해 연관된 많은 사실적 근거의 이미지를 찾고, 이미지들을 인간적 감성의 연결고리가 있는 동사들로 표현의 문장을 만들어 뒤섞인 퍼즐적 조합을 통해 시를 썼을 때 독자들은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은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귀납법적인 방법에 의한 표현적 시 쓰기는 식상해진 관념적 시의 탈피를 위해 도전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의 생명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244    이미지의 공식 / 김기덕 [ 한국] 댓글:  조회:8259  추천:0  2017-10-18
배치의 이론과 마인드맵의 시쓰기ㅡ 김기덕   한 시학도에게 주는 공개편지 문덕수 함께 시를 쓰는 입장에서 시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러한 공개 서한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론이나 시학에 관한 것도 물론입니다. 나는 우선 김기덕 형에게 많이 독서하고 많은 고전(古典)을 읽으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음에 대하여 사랑과 경의를 표합니다. 소박한 감정을 즉흥적으로 노래하던 옛날과는 달리 현대의 시는 많이 독서하고 많이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시는 구한말 이후 지금까지 관념일변도(觀念一辺倒)로 흘러왔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사의 기술이나 비평도 관념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사를 자본과 노동, 권력과 소외라는 2분법으로 보거나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말한 주인과 노예의 대립구조의 연장 선상에 있는 관념주의로 보아 온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장하는 하이퍼시 운동은 시 자체가 관념화에 너무 깊이 빠지는 사태에 쐐기를 박고, 역사를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 도색(塗色)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역사 안과 역사 너머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퍼시만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라고 보지 않으며 하이퍼시의 이론만 유일무이의 시학이라고 우기는 것도 아닙니다. 배재학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열고 있는 금요시론포럼도 이제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법 그 형식과 전통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이퍼시의 이론이 계기가 되어서 또 다른 이론도 파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김기덕 형의 『이미지의 공식』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이 글의 제목인 ‘공식’에 대해서 정말 공식이라는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를 위한 이미지를 창조하는 공식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김형의 글에서 김형의 광범위한 독서량을 생각하면서 일종의 사랑의 생각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형께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를 읽은 것을 먼저 거론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상(樹木狀)에서 장구한 서양 철학사에서 철학적 사유의 모델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목상에서 일자중심(一者中心)에서 2항 대립형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발전형태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한 이론을 위하여 리좀(rhizome)을 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리좀에 대한 김기덕 형의 이해도 대체로 이와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봅시다. 나무를 보면 하나의 큰 줄기가 있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 가지에는 또 작은 가지가 갈라져 나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본 것은 이러한 수목상의 조직이 철학을 비롯해 인간의 사유라든지 사회조직의 모델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도식에서 말하는 계통수(系統樹)라고 말합니다만 이 나무에서 초월적인 일자(一者)인 이 줄기를 중심으로 이항대립(二項對立)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변증법이나 분석적 사유는 트리(tree) 조직의 원리와 같다고 본 것입니다. 리좀은 근경(根莖), 지하경을 의미한다고 사전에 적혀 있습니다. 칸나나 고구마 덩어리처럼 어떤 중심이 없이 이질적인 선이 교차하면서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망상조직(網狀組織)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의 신경조직도 리좀이라고 합니다. 스크럼, 럭비,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3~ )의 악보(미케네 a) 등도 리좀적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유나 글쓰기에는 하나의 중심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관념들을 표현한다. 예컨대 언어에는 기본적인 구조나 문법이 존재하고, 그것이 프랑스어, 독일어, 인도어와 같이 상이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본다. 이런 사유와 글쓰기의 스타일은 판명한 질서와 방향을 생산하기 때문에 수목(나무 같은)인 것이다. 대조적으로 리좀학(이 책의 저자는 Rhizome과 Rhizomatics을 구별해서 쓰고 있다. 인용자)은 임의적이고 탈중심화 되며, 증식하는 접속들을 만들어낸다. 언어의 경우 우리는 근원적인 구조나 문법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단지 상이한 발화 체계들과 스타일들이 있다는 것, 이런 모든 차이들에 대한 ‘나무’ 혹은 ‘뿌리’를 찾는 시도가 사후적 발명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리좀적 방법은 근거와 결론, 원인과 결과, 주체와 표현 사이의 구별이나 위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클레어 콜브락 지음, 한정헌 옮김 『들뢰즈 이해하기』 크린비, 2007, 32쪽). 다시 말하거니와 김기덕 형도 리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또 하나 ‘배치’ 문제가 있습니다. 김 형께서는 “시는 적절한 배치에 의해 그 차원을 달리 한다. 배치는 계열과 달리 어떤 개개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연결된 전체를 포괄하려는 개념이다”라고 말하고 그 다음엔 “진달래꽃 하면 김소월이 생각날 것이다.…… 진달래꽃이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길과 접속한다면 이별이나 영접을 상징할 수 있다. 만약 진달래꽃이 여자의 머리와 접속한다면 장신구가 되거나 정신이상이 될 것이다. 진달래꽃이 병이나 도자기와 접속하면 진달래주가 될 것이고, 쌀가루나 밀가루와 접속하면 화전이나 꽃밥으로 전환될 것이다.”라는 대목으로 연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한 마디로 ‘배치’ (agencement)에 관한 책이라고 합니다만, 굳이 이 말을 인용하는 것은 김기덕 형의 독서 범위가 넓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선 이 배치를 계열화(mise en séries)라는 개념과 함께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훌륭한 철학서인 『노마디즘』 (이진경, 자유, 2002)에서는 여러 가지 축구공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축구공 이야기는 김 형의 여러 가지 배치 이야기와 유사합니다.(동서, 58쪽) 사람, 물건, 동물, 글자 등의 어떤 것과도 연결되어 어떤 의미를 만드는 계열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김 형은 “배치 안에서 각 항은 접속하여 새로운 이미지나 상징을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너무 얘기가 길어짐을 염려하면서 「주역」 (周易)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김 형께서 어째서 「주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하이퍼시의 이론 정립을 위해 하이퍼시의 구조 중에 주역의 기본 이론과 하이퍼시가 관련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주역의 괘(卦)의 도형과 기호(sign)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주역」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주역에 관한 김기덕 형의 글을 잘 모르겠으나 다만 시의 구조와 「주역」 원론의 접점 같은 것이 더욱 밀도 있게 연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 형께서는 더욱 건강하고 조신(操身)하면서 치열하게 연구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나는 건강이 안 좋아서 손도 떨리고 글도 조리 있게 쓰지 못합니다. 이 글을 발행하고자 하는 책 머리에 서문 대신에 편지 형식으로 놓아도 무방합니다. 내내. [출처] 한 시학도에게 주는 공개편지|작성자 김기덕 수목적 시쓰기 수목적 시쓰기는 순차적, 인과적, 논리적인 글쓰기로 선형적 전개를 이룬다. 나무의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가지에서 잎으로 확장하든지, 그 반대로 축소되는 형식을 갖는다. 수목적 시의 특징은 주제의 통일이다. 하나의 시엔 하나의 주제가 필요하고, 주제에 어긋나는 내용은 제거된다. 예를 들면 정원사가 기린 모양의 나무를 만든다면 기린의 모양을 벗어난 가지는 잘라내어야 한다. 시어들은 주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유사성이나 인접성에 의해 동원되며, 그 접속관계는 대부분 1:1의 관계를 이룬다. 이 1:1의 관계는 진달래꽃이 배치에 따라 여러 각도의 이미지로 사용될 수 있지만,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길과 배치되어 이별의 관계로만 접속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1:1의 관계로 접속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가 아닌 유사성이나 인접성에 의한 요소들의 집합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수목형의 대표적인 시는 서정시이다.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외적으로 리듬과 장단을 갖추고, 내적으로는 구조나 사상 및 정서 등의 요소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내용적 특징으로는 음악성, 서정성, 주관성을 가지며, 주제도 한 가지이고 사상, 감정도 한 가지로 이루어진다. 서정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주관적 서정이며, 내적 체험의 표현이다. 객관적 현실을 주관적 체험으로 전환시켜 표현함으로써 세계와 자아가 대립하거나, 융합하거나, 세계를 자아의 내면으로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바람은 머리 풀고 울었습니다. - 중략- 탄환을 쫓는 비명 소리가 절벽에 메아리로 박힌 뒤 터진 틈새로 포연이 솟아올라도 수의처럼 상처를 가리는 안개 군화 발굽에 실신한 백사장은 하류를 따라 허연 나신(裸身)을 드러내고 뭉개진 젖가슴 위로 술 취한 시대가 비틀거리며 지나갑니다. 굽이굽이 한 서린 강물 속으로 백골은 뜨물같이 풀어져 긴 그림자를 끌며 자지러지는 포말 -김기덕의 「한탄강」 일부 필자의 시 「한탄강」은 한탄강을 주관적인 감정으로 재해석하여 쓴 것이다. 「한탄강」처럼 수목적인 시는 시인의 생각이 선명히 드러나야 하고 기, 승, 전, 결이든 기, 서, 결이든 정해진 방식을 통해 주제의 통일을 추구한다. 다양하게 외적, 내적으로 변형된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근본형식을 토대로 한다. 그래서 시인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이해하기 쉬워서 머리로 생각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의 중심에서 줄기로, 가지로, 잎사귀로 뻗어간 사고의 단순성이 이제는 식상한 시대가 되었고 진화된 현실세계를 표현하고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출처] 수목적 시쓰기|작성자 김기덕   유목적 시쓰기 배치를 통한 시쓰기는 정주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리좀적 글쓰기이다. 유목적이란 단순히 정주성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사고의 확장과 무한한 연결 가능성을 통해 다양체를 추구함을 의미한다. 서정시에서의 유추나 상상력을 통한 사고의 확장은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한계 내에서 직유적, 은유적, 상징적 기법들을 통해 구현되어 왔다. 이러한 의식의 확장을 위해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원리가 적용되었고, 아이러니나 패러독스 같은 방법이 동원되었다. 직유나 은유는 본의가 비유의 대상인 유의와 거의 1:1의 관계를 이루고 본의와 유의가 드러난 상태지만, 상징은 1:1의 관계를 형성하며 유의만 남고 본의는 숨어 있는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유의 속에 숨겨진 본의는 명백하거나 확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되거나 암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징은 다양체가 내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며 관념성을 통해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다양체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유목적 글쓰기에서의 다양체는 첫째, 차이가 차이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동일자의 운동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차이가 어떤 하나의 중심, 일자로 포섭되거나 동일화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이러한 원리로 볼 때 다양체는 서정시의 비유나 상징적 기법에서 쓰이던 인접성과 유사성의 끌어오기 기법에서 더욱 멀어진 의미의 관계망을 요구하고 있다. 서정시는 예를 들면 화폐의 척도나 획일적인 발견을 통해 이질적인 것이 나타났을 때 다양체 확장 계기보다 사고의 다양성을 묶는 단순화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 집합을 이루고 하나의 추가가 전체의 의미망을 크게 다르게 할 수 있는, 접속되는 항들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 수가 달라질 수 있는 글쓰기를 유목적(리좀적)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유목적 시쓰기|작성자 김기덕 1)     리좀이론 rhizome은 뿌리줄기라는 말로 하나의 중심뿌리에서 중간뿌리로, 중간뿌리에서 잔뿌리로 연결되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줄기에서 옥수수나 보리의 수염뿌리처럼 중심뿌리가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관계를 말한다. 둥치에서 큰 가지가 뻗어나가고 큰 가지에서 잔가지가 뻗어서 잎이 나오는 구조가 아니라 단번에 근원에 닿아 있는 구조로서 모양이 다를 뿐 모든 것이 똑같은 실체인 것이다. 고전적 글의 구성방식은 뿌리(결론)로 귀착되는 나뭇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리좀적 글쓰기는 하나의 결론으로만 끌고 가지 않는 모호한 집합의 다양체이며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이다.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에서 언급하고 있는 리좀적 특징을 본다면 나무의 뿌리와 달리 리좀은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 접속한다. 반드시 자신과 동일 본성을 가진 특질과 연결되지 않으며, 하나로도 여럿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고 차원들 또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고른 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를 구성하며, 자신의 차원을 바꿀 때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대일의 대응관계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분할선들 성층작용의 선들이 여러 차원을 이루고 도주선 탈주선을 따라 본성이 변하며 변신한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 등을 통해 나아간다.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연결 접속, 역전,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며 나무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다.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록을 부숴버리고, 시작도 끝도 무화시키는 방법으로 사물들 사이에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거나 반대로 가는 위치를 정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출처] 리좀이론|작성자 김기덕   리좀적 글쓰기의 활용 리좀적 이론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글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무한히 분할 증식해 가는 중간줄기와 같은 글쓰기는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개체들의 나열과 같아서 의미나 형태의 수직적 관계를 이루기보다는 수평적 관계를 만든다.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되는 관계가 아닌 1:1의 접속관계를 만드는 관계는 나열적 수평관계를 만든다. 대등한 관계는 상하관계가 될 수 없으며 속하기도 하고 포괄하기도 하는 크고 작은 관계가 없다면 밋밋한 바닥, 의식의 층이 상실된 평평한 판에 불과할 것이다. 무한히 증식하고 번식해 나간 잔디밭과 같은 것으로 의식의 확장, 다양체의 생성은 가능하나 깊이와 높이를 따지고, 하나의 개체에 속한 크고 작은 기관들, 그 기관을 구성하는 미세적 요소와 같은 의식의 수직적 관계망을 엮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보리나 옥수수와 같은 식물이 수염뿌리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수염뿌리 전체를 하나나 둘로 잡아주고 묶어줄 수 있을 때 수염뿌리의 증식은 의미가 있다. 다양체의 존재는 이 다양체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철학이나 메시지,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큰 이미지나 배치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다양체의 존재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아무런 연관 없이 연결된 이미지들을 보고 우린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다양체를 묶어줄 수 있는 줄기는 눈에 보이지 않되 존재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하나로 통일된 주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력이 강한 다육식물, 그리고 꺾꽂이나 휘묻이 할 수 있는 식물은 결국 뿌리를 만들고 줄기를 만들고 잎을 만들어 통일성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리좀적 글쓰기만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으며, 구현한다 해도 산만하기 쉽고 그 깊이를 보여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리좀적 요소를 하나로 묶어주고 큰 틀을 형성해 줄 수 있는 숨겨진 철학적 요소, 아니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적 요소(주제나 이미지)가 필요하다 [출처] 리좀적 글쓰기의 활용|작성자 김기덕   3) 하이퍼시 현재 일고 있는 하이퍼시의 핵심은 리좀적 글쓰기를 통한 다양체의 추구와 탈관념의 실현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본다면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만들며,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표현하며, 정적 이미지를 동적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현대시의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는 대부분 하이퍼성을 띄고 있다. 은유나 상징적 기법들도 하이퍼적인 요소로 사고의 건너뛰기, 확산과 다양성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이퍼시와 은유나 상징시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은유나 상징은 표현으로 되어 있으나 그 속에 많은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에서 내 마음은 호수로 환치, 건너뛰기를 했으나 그 안에는 넓고, 푸르고, 맑고, 깊은 등등의 관념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확장은 이미지만 남고 관념은 사라지는 탈관념의 시이다. 그러나 모든 이미지 자체에는 관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한 탈관념의 실현은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관념배제를 통해 시를 읽고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그냥 느끼고 감각하게 하려 한다. 그래서 하이퍼시를 읽고 나면 크게 마음에 남는 느낌이 없는 듯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이미지를 끌어와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생각은 단순하고, 단선적이라는 것이다. 형식의 다양체는 이루었으나 내면의 다양체는 만들지 못한 시들이 하이퍼운동의 시들 속에서 엿보인다. 읽기만 복잡하지 생각할 것은 없다는 지적도 많다. 진정한 하이퍼시는 내적, 외적 건너뛰기이며, 탈관념, 즉 관념이 숨어서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관념이 매몰된 이미지의 추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은유시나 상징시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거기엔 결합의 관계, 결합의 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는 배치의 관계이며, 배치의 합성을 통한 새로운 이미지의 해석을 만드는 것이다. 배치는 방사형으로 퍼져 있으며, 형이상과 형이하, 힉스에서 우주로 연결되어 무한한 사고의 확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직선적 배치는 서정시의 주류이며, 상징시나 초현실주의적인 시들도 몇몇의 선들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이퍼시는 보다 복잡한 배치선들로 구성되며, 평면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무수한 수직선들의 결합인 방사형(상징성의 집합) 배치의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하이퍼시|작성자 김기덕   진화된 시쓰기의 목표 진화된 시쓰기는 기존의 수목적 시쓰기의 틀에서 벗어나 유목적 시쓰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유목적 시쓰기는 배치를 통해 다양성을 추구하며, 리좀적 이론을 활용하되 증식하고 확장하는 수염뿌리를 묶어줄 수 있는 줄기와 같은 철학이나 주제성을 추구한다. 이러한 주제나 철학은 보이지 않게 묻혀 있는 매몰된 관념이 되어야 하며 커피 속의 크림처럼 녹아 있어야 한다. 다양체의 선정과 확장의 방법은 유사성, 인접성의 연결과 상징, 욕망의 선 및 탈주선의 활용, story의 변화, 주역적 접속점 찾기 등을 통해 그 방법을 모색한다. 상이한 접속점들의 연결방법은 콜라주 기법이나 파워포인트 기법, 데칼코마니 기법, 마블링 기법, 시퀀스 기법, 주역점의 기법 등을 통해 짜깁기 형식을 취함으로써 단순한 사진찍기에서 벗어나 양탄자를 직조하듯 언어의 직조와 사고의 직조를 꾀한다. 이러한 언어의 구체적 직조방법은 마인드맵을 통해 지도화(地圖化) 한다. 표현의 방법은 설명이나 관념을 없애고 이미지만을 추출하여 이미지의 결합을 이루어야 한다. 그 이미지를 결합하기 위해 이미지에 속하는 단어만 시어라인을 통해 구별하고, 언어의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표면적 이미지의 결합뿐만 아니라 이면적 상징, 의미의 결합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빙산이론’인데, 수면 위에 보이는 것은 이미지이지만 수면 속에 잠긴 부분은 이미지에 담긴 상징성이나 관념을 의미한다. 시를 쓰는 것은 수면 위의 빙산을 보여주는 것이고, 수면 속에 잠긴 빙산은 숨겨져서 지식과 경험의 척도에 따라 독자가 파악하고 느껴야 할 부분이다. 시의 내용이 시인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고 독자가 리드하고 주역이 되는 객관적 시가 되어야 한다. 구체적 표현을 위해 문장구성을 위한 선명한 이미지의 명사를 선택하고 동사의 많은 대등항 속에서 살아 있는 생선처럼 펄펄 뛰는 언어의 선택이 필요하다. 또한 설명의 문장을 표현의 문장으로 바꾸는 작업을 통해 표현의 내용적 연결을 추구할 수 있다. 진화적 시쓰기의 중점은 얼마나 많은 접속점을 찾아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연결하고 표현하느냐이다. 어린아이들의 블록놀이처럼 연결점이 많을수록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듯이 언어에서도 많은 연결점을 찾아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창출과 시적 의미의 확장을 꾀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런 다양한 접속점의 발견을 위해 기존의 신화·역사적인 시각, 철학적, 종교적, 과학적, 예술적 시각 등등의 시각에서 한국의 꿈풀이 및 주역적 시각을 추가하여 무한한 접속점의 발견으로 다양체의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다양체의 생산은 수평적 시쓰기의 형태에 머물지 않고 수직적, 횡단적 시쓰기가 되어야 하며, 클릭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맘껏 끌어올 수 있는 컴퓨터적 가상공간의 시쓰기가 되어야 한다 [출처] 진화된 시쓰기의 목표|작성자 김기덕   배치 시는 적절한 배치에 의해 그 차원을 달리 한다. 배치는 사건이나 계열화와는 달리 어떤 개개의 의미를 포착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연결된 전체를 포괄하려는 개념이다. 배치 안에서 각 항은 접속하여 새로운 이미지와 상징을 만든다. 여러 접속으로 만들어진 배치가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하나의 커다란 상징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접속항이 달라지면 절단, 채취의 흐름이 변화하면서 다양체를 형성하게 된다. 하나의 시 속에 많은 다양체가 형성된다면 그 시는 입체성을 띄게 된다. 평면적 시쓰기는 복잡한 현실세계를 보다 예술적인 차원으로 접근, 표현하는 데 미흡하지 않을 수 없다. 한눈에 들어오는 수채화적인 글쓰기보다 피카소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 예술의 차원은 복잡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차원은 소재나 제목을 통해 얼마나 많은 다양체를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다양체는 다양한 종류의 나열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소재나 제목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미지나 상징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느냐이다. 평면적인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단순하지만, 입체적인 대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다양하다. 밑면을 보고, 윗면을 보고, 안과 밖을 보듯 느낌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입체적 글쓰기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배치를 통해 많은 상징과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 ‘진달래꽃’하면 김소월이 생각날 것이다. “영변에 약산”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등으로 표현되는 진달래꽃을 무엇과 배치시킬 수 있을까? 진달래꽃이 김소월의 시에서처럼 길과 접속한다면 이별이나 영접을 상징할 수 있다. 만약 진달래꽃이 여자의 머리와 접속한다면 장신구가 되거나 정신이상이 될 것이다. 진달래꽃이 병이나 도자기와 접속한다면 진달래주가 될 것이고, 쌀가루나 밀가루와 접속한다면 화전이나 꽃밥으로 전환될 것이다. 총이나 군화와 배치한다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나 피를 상징할 것이다. 또한 바람과 배치하면 낙화와 같은 허무를, 강물과의 배치는 자살과 같은 이미지나 상징을 만들게 될 것이다. 질 들뢰즈는 접속항이 달라지면 절단, 채취로 흐름의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기계로 표현한다. 입은 먹는 기계이고, 말하는 기계이고, 섹스의 기계이고, 토하는 항문의 기계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붉은 깃발이 배치되는 바에 따라 구조신호가 될 수 있고, 혁명군이 될 수 있고, 위험신호가 될 수 있듯이 배치에 따라 새로운 상징과 이미지가 탄생한다. 시의 첫줄을 읽고 마지막 줄을 읽어 그 의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라면 평면적인 글이요, 아메바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화된 시쓰기는 변화이고, 새로운 의식의 물고를 트는 것이며, 다이아몬드의 다양한 각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출처] 이미지의 공식- 배치|작성자 김기덕 마인드맵을 이용한 시쓰기 1. 논리 마인드맵의 필요성 인간의 두뇌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들은 복잡한 신경세포로 연결되어 정신활동을 지배하고 있다. 좌뇌는 언어학(말하기, 읽기, 계산, 작문), 논리적, 계열적 과제에 우세한 반면 우뇌는 비언어적, 공간적, 창의적 능력 및 음악, 얼굴 익히기, 자유로운 연구 등에 우세하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한 편의 시 속에 옷감을 직조하듯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상상력, 음악적, 미술적 요소 및 모든 능력을 총 집결하여 하나의 주제나 사물을 개인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동안 시는 개인적 감정의 흐름대로 써온 것이 주류였다. 시는 개인적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기에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쓴 시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 객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친 시는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쳐 시의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지나친 의욕으로 가분수가 될 수도 있고, 시심을 뒷받침 해주지 못해 미성숙의 시나 절름발이 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구상을 통한 구성을 제대로 하지 않고 시를 쓰게 되면 첫째로 흘러가는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고, 둘째는 중간에 막히게 되면 그 막힌 것을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게 된다. 셋째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적절한 조화와 배치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논리 마인드맵 기법은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시를 쓰기 전에 충분히 자료를 모으고, 방향을 설정하고, 다양한 시각의 변화와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다. 집을 짓는데 필요한 재료를 미리 준비해서 정리를 해 놓고 집을 짓는 것과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구해서 짓는 것은 차이가 크다. 또한 재료가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정리가 되지 않고 여기저기 널려 있다면 집을 짓기 위한 시간보다 재료를 찾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다양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쓰기 전에 다양한 시각적 사고가 있어야 하며 그 분야에 대한 자료 찾기가 필요하다. 써나가는 과정은 직선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전후좌우를 돌아보며 취사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쓰기 전에 얼마나 많은 다양성의 재료와 변화 있는 설계가 있느냐에 따라 평면적 시쓰기가 아닌 심층적 시쓰기가 이루어질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면 자신의 감정과 지식, 경험에 의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시각을 버리고 정해놓은 여러 개의 구멍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게 된다. 철학적 시각의 구멍으로 사물을 보라. 그 사물은 인생의 의미를 던질 것이다. 음악적 시각의 구멍으로 들여다보라. 언어의 운율과 사고의 리듬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미술적 시각으로 바라보라. 구조와 대칭, 색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접근을 통한 통합된 감정 및 이미지, 의미의 재료들을 총동원하여 한 편의 시를 건축한다면 그 시는 짓다 만 듯한 집이나, 엉성한 집이 아니라 그 방향, 그 분야에 최고의 예술성을 간직한, 균형과 조화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논리마인드 맵의 필요성|작성자 김기덕   2. 마인드맵의 정의와 시에서의 접목 마인드맵은 두뇌의 기능을 파악한 후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학습에 이용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활용해 공부하게 되면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쓰기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책 한 권의 분량을 A4용지 한 장에 정리하여 담을 수 있기 때문에 내용을 압축할 수 있다. 둘째는 마인드맵을 그릴 때는 이미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억이 잘 되고 설명적인 것을 이미지화시키는 습관을 갖게 된다. 시쓰기는 이미지화 작업이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볼 때 마인드맵은 자연스럽게 이미지를 끌어오고 조합하여 그림의 설계도를 그려준다. 설계도가 잘 그려져야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있다. 하나의 소재나 주제를 선택하고 창조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미지를 끌어와 그물망처럼 엮다 보면 전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진다. 세밀한 부분까지 꼼꼼히 설계도를 그렸을 때 시를 쓰는 시간은 단축될 수 있다. 그리고 시를 쓰다가 막혀서 중단하는 일이 없게 된다. 어쩌면 시를 쓰는 시간보다 마인드맵을 통해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여 전체적인 방향과 밑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훨씬 중요하고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작품에 대한 욕심과 급한 마음으로 마인드맵을 소홀이 하고 성급히 시작(詩作)에 임하면 더 많은 시간적인 낭비와 완성의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마인드맵의 과정을 통해 선명한 소재나 주제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자신의 경험과 다양한 시각을 동원하여 뒤집어보고 파헤쳤을 때 심도 있는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다. 자신의 감정에 끌려 안일하게 시작한 한 방향적인 시쓰기가 아닌 다양한 절도와 천의 시각에서 한 편의 시 속에 엑스레이처럼 뼈 속까지 표현해 내는 다양체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출처] 마인드 맵의 정의와 시에서의 접목|작성자 김기덕   3. 마인드맵의 구조 마인드맵의 구조는 나무의 형태를 취한다. 첫째 쓰고자 하는 핵심 소재나 주제를 항상 중심 이미지로 놓고 시작한다. 곧 나무의 둥치가 되어 이 둥치로부터 많은 생각이 뻗어가게 해야 한다. 시를 쓰기 위한 중심을 잡을 때는 가급적 이미지가 있는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하다. 주제를 먼저 잡으면 생각이 경직되고 주제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다. 소재를 선택하고 이미지를 선택할 때 그와 연관된 이미지를 뽑을 수 있고, 이미지를 만들며 생각의 줄기를 뻗어갈 수 있다. 둘째는 중심 이미지에 관련된 주요 이미지는 둥치에서 뻗은 줄기처럼 연결하여 표현한다. 둥치에서 나온 줄기는 가지와는 다르게 개략적인 것으로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줄기가 튼튼하고 균형을 잘 잡아주어야 하듯 풍성한 이미지를 뽑고 다각도의 시각으로 조명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에만 몰입된 시쓰기는 한쪽으로 치우친 나무처럼 쓰러지게 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감정을 가진 사람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객관적이고 심도 있는 다양체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가지들의 연결은 핵심 이미지와 핵심 단어를 통해 확산된다.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가지들은 다양한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줄기와 연관된 모든 이미지나 단어들이 여기에 속한다. 유사한 것들과 연관된 것들, 그리고 속한 모든 것들을 이미지로 뽑아야 한다. 관념으로 뽑으면 나중에 그림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이 뽑은 것 같지만 정작 시를 쓸 때는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무성한 가지를 만들어 놓아야 많은 사고의 집을 지을 수 있다. 넷째는 계속 이어지는 이미지들은 나뭇가지의 마디마디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듯한 구조를 취한다. 표면적 이미지의 크기나 생각하는 내용물의 대소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세밀하고 깊이 있게 접근하느냐의 분류에 따라 가지들은 더 미세하게 뻗어가고 분기된다. 세밀한 가지까지 그려준 나무형태의 마인드맵을 그릴 때, 시는 풍부해지고 다양해진다. 막상 시를 쓸 때 찾은 재료를 다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시와 모르고 쓰는 시에는 차이가 있다. 이상의 네 가지 형태를 설명했는데, 나무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수목형 시쓰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마인드맵으로 찾은 내용을 순서대로 쓴다면 물론 수목형 시쓰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재료들을 찢어 붙이는 콜라주기법처럼 맘대로, 다양하게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뿌리와 뿌리들이 서로 분기·접속하는 리좀적 시쓰기가 가능하게 된다 [출처] 마인드 맵의 구조|작성자 김기덕   4. 마인드맵을 그리는 방법 마인드맵을 그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부잔센터에서 지은 『반갑다, 마인드맵』의 내용을 참조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백지를 준비한다. A4용지나 그보다 더 큰 용지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줄이 쳐진 종이는 다양한 생각을 펼치는데 제한을 주기 때문에 대뇌피질의 표현 능력을 종이 위에 360도 돌아가게 표현해 주는 데 도움을 주는 백지가 필요하다. 2. 백지 표면의 공간은 풍경화를 그릴 때처럼 자유롭게 사용한다. 단어나 이미지를 측면으로 시계방향에 따라 이동하여 이용하므로 공간이 충분하다. 그래서 책 한 권의 분량도 압축하여 넣을 수 있다. 3. 종이를 가로로 펴놓고 지면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한다. 중심은 가장 시의 핵심이며 정신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심에서 발원하여 시의 강이 흐르게 된다. 중심은 시작이고 또한 본체인 것이다. 4. 쓰고, 생각하려는 내용에 대해 이미지를 정해야 한다. 이미지 안에는 이미 관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만약 슬픔을 표현하려 한다면 눈물이나 비, 손수건 등의 이미지를 정해 그림으로 나타내야 한다. 그림은 몇 천 개의 관념어보다 값어치가 있다. 이것은 결합의 시초로써 무수한 접속점을 갖고 있으며,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주고 머릿속에 잘 기억되도록 단순화시킨다. 5. 핵심 이미지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색상을 사용한다. 색상은 두뇌의 상상력을 유발시키고 주의력을 끌게 한다. 6. 이미지를 열어둔다. 틀을 미리 만들고 생각하게 되면 단조로움을 주고 생각을 막을 가능성이 있다. 7. 선은 단어의 길이와 같게 한다. 단어보다 긴 선은 생각의 연결을 단절시키지만 단어 길이와 같은 선은 연결을 강하게 해준다. 8. 핵심이미지에 연결된 쪽의 선은 그 보다 세부적인 내용을 담을 가지의 선보다 두껍고, 선의 형태는 유선적이며 유기적이어야 한다.  [출처] 마인드 맵을 그리는 방법|작성자 김기덕  마인드맵의 구성요소 1) 둥치 둥치는 첫 번째 잡은 시상이다. 이 시상을 가장 중심에 놓고 이 시상으로부터 뻗어가는 생각을 그리게 된다. 시상은 시가 될 만한 씨앗이어야 한다. 관념을 선택한다면 씨앗을 싹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죽은 씨앗이다. 파종하기 위해 실한 씨앗을 보관하듯 싹이 틀만한 이미지를 잡아야 한다. 또한 마인드맵은 한 알의 은행이 싹이 터서 천년 묵은 열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되듯, 하나의 생각 덩어리를 중심에 놓고 생각의 줄기를 뻗고 가지를 내고 잎을 피워 열매를 따는 과정을 하나의 백지 속에서 이루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둥치를 결정하는 하나의 씨앗에서 천년의 은행나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심미안의 눈으로 소재를 보고 마인드맵의 둥치를 정했을 때 산 같은 시, 바다 같은 시를 쓸 수 있다. 시의 성패는 둥치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둥치는 많은 생각의 줄기와 가지를 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관념을 둥치로 선택했을 때 많은 이미지를 만들기는 쉽지 않지만, 바다라는 이미지를 끌어온다면 바다에 대한 많은 이미지를 끌어와서 줄기와 가지를 쉽게 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마인드 맵의 구성요소|작성자 김기덕 줄기   줄기는 둥치로 정한 하나의 씨알을 싹틔워 사방으로 뻗어가게 하는 방향설정이고 분야를 쪼개는 다양한 시각이다. 하나의 사물을 상, 하, 동, 서, 남, 북의 시각으로 나누어 묘사한다든지 하나의 대상을 철학적, 예술적, 역사적, 과학적, 종교적, 음악적, 미술적 또는 천·인·지 등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구분을 말한다. 시상으로 잡힌 하나의 이미지나 대상을 이렇게 나누어 본다면 책 한 권을 쓸 정도로 많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다. 나누어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면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생각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쪼개고 나누어 생각할 때 새로운 줄기, 새로운 가지와 무수한 잎을 피울 수 있다. 줄기는 다양한 분야를 제시하고 내용에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평면적이고 확산적일 수 있지만, 심층을 만드는 계단이기도 하다. 모양은 시계 속의 숫자와 같으며 진행 방향도 같다. 시계 속의 숫자는 하루가 도면처럼 펼쳐진 것이지만, 시간 속에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은 취하지 않는다. 다양한 생각의 줄기를 만들어야 한다. 판타지든, 리얼리티든, 형이상이든, 형이하든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과감히 줄기를 만들고 자료를 채취해야 한다. 이미지가 없는 자료, 관념과 지식적인 자료는 시에서 대부분 쓸모없거나 방해자가 된다. 풍경이 그려지는 자료, 오감을 자극하는 자료를 꺾어야 한다. 유사한 이미지를 찾고 인접한 것들을 모아야 한다. 별처럼, 불가사리처럼, 십자가처럼 뻗어있는 뿔은 전 세계, 전 우주로 향한 무한대의 상징인 것처럼 줄기는 사고의 무한대로 향하는 화살표이며 풍향계이다 [출처] 줄기|작성자 김기덕 가지    가지는 줄기에서 나누어지는 세부적인 사항으로 보편적이지만 특수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식적인 내용이나 지식적인 구체성을 띄어야 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 연결고리를 걸고 있어야 한다. 그 연결고리는 접속점으로써 크게 표면적 접속과 이면적 접속으로 나눌 수 있다. 표면적 접속은 유사성이나 인접성으로 나타나며, 이면적 접속은 상징성이나 욕망의 선, story 등으로 나타난다. 가지는 자세하고 세밀해야 하며, 확산적이면서 심도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가지를 만드는 데는 통찰이 필요하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보고 그려야 한다. 나뭇가지 끝들은 미세해져서 하늘과 연결되듯이 마인드맵의 가지들은 하늘처럼 배경이 되는 철학이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주제의식이나 철학의 관념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배경 속에 녹아서 보이지 않지만 설탕물처럼 맛보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가지는 그러한 배경과 연결되지만, 이미지로 얽혀야 한다. 이 가지 저 가지가 얽혀서 부채 모양을 만들고 기린 모양을 만들고 우산 모양을 만들 듯 무질서한 것 같지만, 큰 틀의 질서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큰 틀의 질서를 위해 생각의 가지는 자르지 말아야 한다. 마인드맵의 과정은 큰 틀을 초월해 있는 것이지만, 시를 쓸 때는 큰 틀 안에서의 취사선택이다. 큰 틀은 결과이지 사전에 정해 놓은 경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큰 틀은 처음 보는 모양이 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 모양일 수도 있다. 가지를 뻗을 때 어떤 모양을 생각하고 뻗는 나무는 없다. 맘껏 뻗다보니 자연스러운 각각의 모양이 되었다. 시도 이런 자유분방함 속에서 높은 예술성이 탄생한다. 남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차원을 만들 수 있다. 가지는 지상의 리좀이며 생각의 그물망이다. 맘껏 접속하고 분기하여 촘촘한 이미지의 그물망을 짜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숭어 떼 같은 상징들이 가득해야 한다. [출처] 가지|작성자 김기덕 잎 많은 가지들을 찾은 후에는 잎을 만들어야 한다. 잎은 가지 위에 있는 이미지를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미지를 주어로 하여 목적어, 동사를 찾아 문장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 때 문장은 표현이 되어야 하는데, 표현을 위한 언어, 곧 시어로써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시어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으나 반드시 이미지어와 관념어를 구분해서 써야 한다. 표현은 명사와 동사에서 결정된다. 명사는 관념어 대신,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물이나 상황이 되어야 한다. 동사는 구체적이며 살아 있는 언어이어야 한다. 또한 여러 대등항 중에서 가장 적합한 동사를 선택해야 하는데, 적합성의 기준은 살아 있는 이미지를 표현해 주되 둥치와 연관시키기 위한 표면적, 이면적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문장은 둥치를 연상시키거나, 둥치를 보조해주거나, 둥치를 풀어주거나, 묘사해주거나, 표현해 줄 수 있는 문장이어야 한다. 아무리 철학적인 문장, 아무리 금언의 문장이라고 해도 둥치와의 연간성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이미 낙엽이며, 시의 나무와는 상관없는 존재일 뿐이다. 표면적인 연결이든, 상징적인 연결이든 아주 미세하더라도 둥치로부터 영양분을 받고 또 광합성한 영양분을 둥치로 보내 의식의 저장, 철학과 주제성을 몸통에 비축하는 하나하나의 잎들이 전체적인 시의 나무를 장식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장에서 부사와 형용사는 최대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불필요한 수식은 무조건 빼야 한다. 군더더기는 건강한 문장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다. 싱싱한 잎, 건강한 잎을 가지마다 달아야 한다. 이런 건강한 잎들이 연결 문장을 만들고, 연결 문장이 모여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단락들이 모아져 한 편의 짜임새 있는 시가 된다 [출처] 잎|작성자 김기덕 시 쓰기   시쓰기는 가지마다 매달린 많은 문장들을 적절히 배치하고 연결시키는 것이다. 마인드맵은 시의 씨알인 둥치에서 줄기가 나고, 줄기에서 가지들이 분화하여 영양분을 둥치를 통해 잎으로 전달하는 확산운동이다. 하지만 시쓰기는 그 반대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잎의 문장들을 모아 가지로 이어진 문장을 만들고, 여러 가지의 문장이 만나 줄기의 단락을 만들어 하나의 시가 완성된 둥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곧 잎에서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만들고, 그 양분을 모아 가지와 줄기를 통해 둥치에 모아져 거목이 되듯, 주제의식, 철학의 양분이 결집되어 완성된 시의 나무를 보여주어야 한다. 시쓰기에서는 분기하고 확산하던 사고들이 모아져야 하고, 구심점을 향해 결집되어야 한다. 태극이 양의가 되고, 양의가 사상이 되고, 사상이 분화하여 팔괘가 되고, 육십사괘로 나뉘어 세상만물로 분화된 것이 다시 모아져 태극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바로 시쓰기이다. 완성된 시는 하나의 개체가 되고, 사물이 되고, 인격이 되어 만물 속의 일부로 다시 돌아간다. 하나의 시 속엔 우주만물의 비밀이 담겨 있고, 시가 완성되는 과정은 곧 우주만물의 변화 주기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시 쓰기|작성자 김기덕 사고의 분화   마인드맵을 통해 사고의 분화과정을 살펴보았다. 둥치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쪼개지는 과정에는 분화의 법칙이 존재한다. 일정한 법칙이 없이 아무렇게나 뻗어갈 수 있는 사고는 공상과 같은 것으로 허황될 뿐, 통일된 의식을 보여주지 못한다. 공상은 에너지가 없다. 새로운 창조를 만드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유추와 연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창조적 상상력엔 끈 이론이 존재한다. 양성자, 중성자를 묶어주는 핵력과 강력이 있다. 세포가 분화하여 나누어지지만, 그 안에는 같은 유전자가 존재한다. 언어의 분화, 이미지의 확산에도 유전자가 필요하다. 그 유전자는 유사성이며, 인접성이며, 상징이며, 욕망의 선이며, story이며, 주역적 변화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시어가 분화하여 새로운 시어를 만드는 과정엔 이러한 유전자를 토대로 하여 사고의 확장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확장되었을 때 다시 하나로 모으는 시쓰기의 과정에서 접속점을 찾을 수 있다. 접속점이 많을수록 블록을 연결하듯 원하는 모양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사고의 분화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원칙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들이 해석의 길을 추적해 갈 수 있고, 창작자가 의도하는 바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사고의 분화|작성자 김기덕 1. 유사성   유사성을 통하여 사고의 확장과 이미지의 변화를 이룰 수 있으며, 또한 선택을 통해 새로운 결합을 이룰 수가 있다. 하지만 교사, 스승, 교원, 교수 같은 유사성은 시의 이미지 확장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명칭의 유사성이나 의미의 유사성과 같이 유사하지만 확연히 드러난 것들은 시적 사고의 확장 및 선택, 결합의 예술적 조건에 적합하지 않다. 유사성은 은유적 표현의 원리인 만큼, 보다 예술성이 있는 은유성을 만드는 데는 감추어진 유사성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꽃과 여자는 유사하지만 ‘꽃 같은 여자’는 너무 드러난 유사성 때문에 식상한 비유관계를 만들게 된다. 보다 참신하고 심도 있는 예술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유사성의 새로운 발견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써본 적 없는 유사 이미지를 동원하여 시를 쓴다면 그 시는 참신하고 매혹적일 것이다. 하지만 남들이 다 쓴 유사 이미지는 시든 꽃이며, 생명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거리가 멀수록 그 관계는 더욱 긴장되며 팽팽해질 것이다. 시에서의 유사성은 본의와 유의와의 관계를 만들어 은유적 표현을 만들기도 하지만, 배치에서의 유사성은 병치적 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병치는 은유적 관계보다는 좀 더 건너뛰기한 것으로서 참신성과 함께 사고의 확장을 이루어 준다. 또한 병치는 구절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지만, 리좀적 시쓰기의 관계에서는 뿌리 하나하나가 큰 줄기에 연결되어 있듯이 주제성이나 철학성의 줄기에 잔뿌리처럼 연결되는 상징관계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사성을 통한 건너뛰기는 과거와 현제와 미래의 시간적 건너뛰기 및 지역적, 사상적, 종교적 결합을 만들어 구심점을 만드는 역할을 가능하게 한다. [출처] 유사성|작성자 김기덕 2. 인접성   인접성은 공간적인 관계를 만들어준다고 할 수 있다. 산과 인접한 것에 속하는 것을 본다면 나무, 돌, 계곡, 폭포, 꽃, 새, 마을 등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요소들은 공간화를 갖게 해주는 요소들이다. 시에서의 인접성은 공간적 이미지를 만들고 그림과 같은 시각성을 보여준다. 주제를 잘 드러낼 만한 개체들만 취사선택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정물화를 그리는 것 같은 기법이며, 절제된 원리가 필요하다. 인접성은 유사성처럼 대등한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단지 입체적인 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배치적 요소다. 인접한 요소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구도는 달라진다. 시 속에서의 인접한 요소들의 배치는 환유적 표현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원인과 결과, 용기와 내용물, 소유물과 소유주, 산지와 산물, 출신지와 그 사람, 기호와 실체, 건물주와 건물명 등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부분이 전체를, 전체가 부분을 표현하는 제유도 인접성에 의한 표현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접한 것들의 관계는 유사성의 건너뛰기보다는 한 구성체의 주변적 요소를 끌어오는 것이므로 그 폭이 좁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요소에 대한 단순화가 가능하며, 단순화를 통한 상징적 요소를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종이비행기’라는 소재를 가지고 시를 쓴다면, 무엇과 종이비행기를 인접한 관계로 연결시켜주느냐에 따라 시의 공간성은 달라진다. 종이비행기를 장애아, 아파트, 창문, 아스팔트와 인접시켜준다면,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영혼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학생, 교실옥상, 푸른 하늘 등과 인접시킨다면, 푸른 미래를 꿈꾸는 젊음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인접성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공간 속에서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 준다. [출처] 인접성|작성자 김기덕 3. 상징 상징은 건너뛰기이다. 한 방향이 아닌 여러 방향으로 한꺼번에 건너뛸 수 있는 기술이다. 상징의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더 복잡한 관계의 접속을 만들 수 있지만, 그 깊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단순한 건너뛰기가 될 수도 있다. 유사성은 수평적 건너뛰기를 만들고, 인접성은 주변의 공간성을 만들어주지만, 상징은 방사형으로 확장될 수 있는 시의 폭탄적 기법이다. 그래서 단 하나의 상징어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으로 무릎 꿇게 할 수 있다. 상징은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건너뛰기와는 그 폭과 차원이 다르다. 유사성이나 인접성은 수족관의 물고기와 같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관계를 만든다면 상징은 천길 물속의 깊고 다양한 관계 만들기이다. 상징으로 접속된 시는 그 깊이를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그 만큼 많은 다양체를 건져 올릴 수 있다. 무수히 많은 다양체들의 접속점을 찾아 이미지를 연결한다면 한 편의 시 속에 천 개의 고원이 펼쳐질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의 상징기법은 기존의 서정적 상징과는 구별이 필요하다. 서정시의 상징은 관념성이 내포되어 있어서 상징을 이용한 시쓰기를 하면 관념시가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상징에 대한 해석도 상징물 자체에 한정된 해석을 하지만, 배치를 통한 상징은 배치되는 배치물과의 관계에 따라 함께 짝을 이뤄 해석되며, 배치물을 끌어오기 때문에 이미지 간의 관계 만들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관념성은 숨고 사물 간의 관계를 통한 상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사물과의 접속점을 통해 상징이 확장되기 때문에 방사형의 사고 확장을 이룰 수 있으며 관념화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시쓰기가 가능하게 된다. [출처] 상징|작성자 김기덕 4. 욕망의 선   욕망의 관계에 의하여 사물을 맘대로 끌어오고 결속하는 관계를 말한다. 사물 하나하나에 감정을 부여하여 욕망을 불어넣고, 욕망의 관계를 통해 결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감사와 찬양으로 바뀐다. 감사와 찬양의 욕망 안에서 신의 피조물인 만물은 포함될 수 있으며, 그 어떤 사물도 결합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갈대들은 춤추고, 바위들은 기도하고 있다’와 같이 구체적 관련이 없어도 서로 묶을 수 있다. 아무리 관련 없는 사물일지라도 자신의 감정과 욕망 안에서 새롭게 변형시킨다면 충분한 연관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새로운 감정 선을 이을 수 있다. 이별 뒤에 세상이 다 슬프게 보인다든지, 기쁨에 가득 차 바라보는 풍경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을 때 그 어떤 사물을 끌어와도 한 무리, 한 성격의 집합으로 묶을 수 있다. 사물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바늘은 찌르고자 하는 욕망을, 풀은 붙이고자 하는 욕망을, 악기는 소리를 내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이 욕망을 통해 전혀 유사하지 않아도 접속이 가능하다. 욕망의 선을 찾기 위해선 깊은 관찰이 필요하다. 사물의 성격이며 성질을 잘 살펴봄으로써 그 내면의 욕망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욕망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창출되는 것이다. 바늘이 찌르기 위한 것인지, 상처를 꿰매기 위한 것인지, 가시를 빼기 위한 것인지, 문신을 새기기 위한 것인지, 바느질을 하기 위한 것인지 어떤 곳으로 욕망의 선이 뻗느냐에 따라 다음 접속관계는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모양이나 기능, 성분 등에 의해 자유자재로 변화할 수 있으며, 보는 시각에 따라 그 차원도 달리 할 수 있다. 이 욕망의 선은 둥치 안의 주제성이나 철학성과 연관이 많다. 한 곳으로 시선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게 하는 화살표와 같다. 흔해빠진 욕망의 선으로 끌고 가지는 말아야 한다. 새로운 욕망의 선을 만들고 과감하게 탈주선을 그려야 한다. 평평한 대지에 습곡을 만들고 산맥을 형성해야 한다. 밋밋한 의식에 칼날 같은 감각을 세우고 새로운 욕망의 그물 안에 가두어진 세상만물을 맘껏 요리해야 한다 [출처] 욕망의 선|작성자 김기덕 5. 스토리(story)   스토리(story)는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접속이 가능한 형태를 말한다. 시에서는 날아다니는 의식의 확장, 이미지의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접속에 따라 새로운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여기에서의 접속은 곧 분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분기는 또한 접속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춘향이와 이도령이 만나는 장면에서 견우와 직녀가 등장할 수 있고, 갑자기 도적 떼가 나타나 죽일 수도 있고, 호랑이와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며 기도할 수도 있다.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 어떻게 전환하고 꺾이느냐에 따라 새로운 신화와 역사, 에피소드나 허구적 환타지가 연결될 수 있다. 이 결합에서 이야기의 유사성이나 상황의 비슷함에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건의 끼어들기가 가능하다. 이것은 수목형 시쓰기가 아닌 유목형 시쓰기, 배치를 통한 언어의 직조에 의한 시쓰기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기법이다. 토막 난 우화들의 연결이나, 지역적 신화의 바꿔치기 및 동시대의 역사적 사건의 섞어짜기, 현대적 사건과 과거적 사건과의 겹치기 기법은 바로 이 story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이나 이미지를 겹쳐 놓거나 섞어 놓을 때 우리의 사고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의미와 이미지를 만든다. 이러한 story 간의 분기와 접속을 통해 다양체를 만들기도 하고, 하나가 되기도 하는 기법을 story 기법이라고 한다. [출처] 스토리|작성자 김기덕 리좀적 표현의 방법   1. 빙산이론   수면 위에 떠있는 빙산은 드러난 부분보다 감춰진 부분이 더 많다. 드러난 부분만 보고 가까이 다가가면 배는 충돌하여 난파될 것이다. 하지만 오랜 경험을 가진 유능한 선장은 수면 위에 뜬 빙산만 보고도 수면 속의 빙산을 눈치 챈다. 배에 탄 여행객들은 수면에 뜬 빙산만 볼 뿐 감춰진 부분을 보기는 어렵다. 시쓰기는 빙산의 보이는 부분을 그리는 것이다. 고급 독자는 빙산의 보이는 부분만 보고도 유능한 선장처럼 수면 속에 잠긴 부분을 읽을 줄 안다. 시는 수면 위에 뜬 빙산의 일부를 그리는 것이지만 그 밑에는 어마어마한 상징의 얼음이 잠겨 있어야 한다. 잠긴 부분까지 다 보여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잠긴 부분은 유능한 선장인 독자들이 각자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수면이라는 수평선상의 위로 드러난 부분은 이미지가 있는 시어이지만 가라앉은 것은 관념이다. 그래서 이미지가 있는 시어로 그림을 그려주면 그 언어 속의 관념들이 가라앉아 수면 속에 많은 의미를 감추게 된다. 이미지어와 관념어의 구분선은 빙산이 떠있는 수평선이다. 수평선에 의해 이미지와 관념이 나누어지듯 우리의 마음속에도 엄격한 수평선을 긋고 시를 써야 한다. 아무리 욕심이 날지라도 관념어는 쓰지 말아야 한다. 관념어는 땅이 다 파헤쳐진 밭에 드러난 고구마와 같은 것이니 더 이상 상상의 여지가 없다. 고구마 밭의 줄기와 잎의 표현을 빌려야 한다. 그 줄기와 잎을 보고 농부는 튼실한 고구마를 상상한다. 물에 잠긴 부분까지 다 드러내려고 하게 되면 그 빙산은 녹아서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차갑고 투명하면서 돌처럼 굳어진 시의 결정들은 풀어져 맹물 같은 시가 될 것이다. 이미지의 결합으로 고농도의 압축된 시는 얼음덩어리 같지만, 관념으로 풀어진 시는 맹물같이 무덤덤하고 싱거운 것이다. 독자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설명해야 이해할 것 같은 인식은 이미 자신이 풀어져 물같이 된 것이다. 작은 빙산을 수면에 띄우고 수면 속에 산 같은 덩치를 키워야 한다. 작은 빙산을 보고 섣불리 다가왔던 배들이 파손될 수 있도록 엄청난 무게와 파워를 키워야 한다. 그 무게와 파워는 상상의 크기와 깊이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면 속에 감추면 감출수록, 해저로 가라앉으면 가라앉을수록 빙산은 더 무서워진다. 무서운 빙산처럼 다가오는 시, 수면 위에 작은 단면을 보고 감이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시를 써야 한다. [출처] 빙산이론|작성자 김기덕   2. 시어라인   시어라인은 하나의 제목이나 소재를 놓고 마인드맵을 통해 관련 언어를 찾았을 때 이미지가 있는 단어는 시어가 되지만, 관념으로 이루어진 단어는 시어가 될 수 없다는 구분을 갖게 하는 구획선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레드 와인’을 가지고 마인드맵을 통해 관련 언어를 찾아본다면, 레드와인은 마인드맵의 둥치가 될 것이다. 이 둥치에서 각자 나름대로 줄기를 뽑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과거, 현재, 미래, 유사성 등의 줄기를 설정하고 가지를 뽑아보자. 과거의 줄기엔 포도밭, 햇빛, 바람, 거름, 포도, 장화, 오크통 등의 관련 이미지들이 나왔다면 이 이미지들만을 시를 쓰는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도밭, 햇빛, 바람, 거름 등은 밑바탕이라든지, 본능, 원초성을, 장화는 밟히고 으깨어짐을, 오크통은 어둠이나 감옥, 절망 등을 내포하고 있다. 시를 쓸 때는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관념어를 쓰지 말고 관념어 대신 관념어를 담고 있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줄기에서 이미지를 뽑아본다면 포도주, 코르크, 입술, 글라스 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어가 시어가 되고, 이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포도주의 정신인 열정이나 자유, 코르크의 억압이나 질식, 입술의 사랑이나 열정, 글라스의 투명함이나 맑음과 같은 관념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줄기에서 이미지를 뽑는다면 찢어진 라벨, 빈병, 쏟아진 피와 같은 것을 찾을 수 있다. 짖어진 라벨은 처녀성의 상실이나 파괴를, 빈병은 죽음이나 허무를, 쏟아진 피는 전쟁이나 상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유사성의 시각에서 본다면 입술이나 피, 볼, 낙엽, 노을 등을 찾을 수 있다. 입술은 사랑이나 정열을, 피는 죽음이나 생명을, 볼은 수줍음이나 취기를, 낙엽이나 노을은 사라짐과 같은 관념을 포함하고 있다. 이상의 열거는 개략적인 것이다. 더 복잡한 관념을 끌어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최소한에 머물렀다. 시를 쓸 때는 관념을 쓰지 말고 관념을 포함하고 있는 이미지를 써야 한다. 그래서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사물 속의 관념을 읽고 관념 대신 사물로 자신의 관념을 대신 나타내는 것이 시적 표현의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자유자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징성을 알아야 한다. 상징이 빠진 시는 상상할 수 없다. 생명이 빠져나간 시체요, 마른 나무에 불과하다. ​ 상징성을 품고 있는 이미지와 상징성이 드러난 관념과의 구별이 곧 시어라인이다. 마인드맵을 통해 줄기에서 가지로 분화될 때 이미지로만 그리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관념의 가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지는 반드시 이미지의 가지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마인드맵을 만든다면 자연스럽게 시어라인은 형성될 것이다. 또한 동사의 사용이 중요하다. 추상적인 동사들은 좋은 시를 쓰는데 적합하지 않다. 구체적인 동사를 끌어와서 명사와 짝을 이루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먹다’라는 단어는 추상적인 동사이다. “그녀는 밥을 먹는다.”라는 문장의 ‘먹는다’라는 동사는 시쓰기에 적합한 언어가 아니다. ‘먹는다’를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어야 한다. “맷돌을 갈듯 밥을 자근자근 씹는다.”라든지, “볼때기가 터지도록 밥을 퍼 담는다.”와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동반될 수 있는 동사의 사용이 중요하다. 이미지적인 명사에 구체적 묘사의 동사가 결합될 때 문장은 표현의 문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문장을 만들기 위한 명사와 동사의 채취 ‧ 절단이 가능한 구역의 경계가 바로 시어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시어라인|작성자 김기덕   3. 시의 상징성   상징은 존재와 의미의 2가성, 다의성 또한 모호성이나 밝혀짐의 기대를 갖는 것을 본질로 한다고 김기붕은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중에서 언급하고 있다.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며 동시에 의미를 갖는 것으로 현상은 곧 무언가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기호의 의미의 우호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유추관계가 긴밀히 작용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유사성이 아니라 막연한 암시에 의해 다른 것을 뜻하거나 표현하는 것이다. 낭만주의는 감성체계에 바탕을 둔 서정적 산물로서 우주의 중심을 주관적, 개인적 관념에 두고 있다면, 상징주의는 감성체계와 이성체계에 근거를 둔 이념적 정화를 중심으로 하고 인간까지 포괄하는 우주 자신을 중심에 두고 감각과 이념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모든 현상은 자족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인간의 인식이 첨가되면 경이로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 그래서 하나의 사물은 존재하지 않고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미와 속뜻을 갖게 된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볼 때 의미나 관념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상이나 사물을 그리기 위해서는 이미지어가 필요한데, 그 표현된 언어의 그림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속뜻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읽으려고 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이미지어가 갖는 자체의 상징성, 또한 같은 이미지라 해도 여러 사람의 감정이나 시각차에 따라 달라지는 의미는 시의 모호성을 극대화 시키는 요소이다. 모호성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다양체적 요소이며, 나와 세상 모든 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시의 필연적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현상 속에 담긴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현상을 만들고, 의도된 사물의 조합을 이루어 다양한 형식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작품 세계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이어서 보다 많은 현상을 유추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의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상징주의자들은 “가시세계는 불가시 세계의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감각적 대상 속에 정신적 현상의 상징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어로써 생각하게 하는, 또는 자신의 생각을 전하려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감각적 언어들 속의 상징들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자유자재로 감각적 언어를 요리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시의 상징성|작성자 김기덕   4. 상징과 리좀적 관계   하나의 이미지는 여러 상징적 관계를 만들어 분화되고 확장되는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십자가라는 상징물은 구원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사형의 형틀이 되기도 한다. 또한 플러스의 의미도 되며, 우주나 영원한 세상을 상징하고 부처님 가슴에 있는 길상을 의미하는 卍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십자가가 네 개의 상징물로 분화되었다면, 이 네 개의 분화점은 곧 접속점이 될 수 있고, 이 네 개의 접속점은 다양한 배치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구원의 상징으로 배치한다면 교회, 미사, 성경책, 천국, 천사, 베드로 등등으로 분화되고 여기에서 또 다시 수없는 분화가 가능할 것이다. 형틀의 의미로 배치한다면 로마, 죄수, 사형장, 못, 창 등으로 분화될 수 있을 것이고, 플러스의 의미로 배치된다면, 드라이버, 계산기, 수학책, 양지, 저축 등으로 확장될 것이다. 또한 卍 으로 배치된다면 절이나 나치, 우주 등과 같은 새로운 접속점을 만들 것이다. 이렇듯 십자가라는 하나의 이미지는 무수히 많은 접속점을 만들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며 다양체를 만든다. 이것이 몇 번 더 확장되면서 분화된다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맞닿게 될 것이고, 연관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상징적인 관계를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고, 리좀의 뿌리처럼 뒤얽혀 있다. 하나의 사물이 하나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1:1의 관계는 없다. 하나의 사물 속에는 미처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많은 연결고리와 접속점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이것을 발견하고 찾아서 서로 분기 ‧ 접속시킴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다양체를 만들어서 그 안에 새로운 의미나 진리, 주제의식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 나를 비롯한 하나하나의 사물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물망 같은 상징으로 촘촘히 엮어져 있다. 이 많은 분기 ‧ 접속점들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 분기 ‧ 접속점을 원하는 대로 찾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시쓰기는 막힘이 없고 그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출처] 상징과 리좀적 관계|작성자 김기덕   5. 기호학파적 접근과 상징의 적용   소쉬르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기호들은 문학작품의 언어적 의미를 보이지 않는 언어의 관계성을 강조하며, 이것은 공시적인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했다. 언어를 사고의 표현에서 언어를 기호의 체계로 이해하면서 기표인 시니피앙과 기의인 시니피에 사이의 관계를 이끌어 왔다. 기호는 세 가지로 기표와 기의 그리고 기표와 기의가 결합하여 만든 새로운 요소인 기호이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의미화 작용이라 하고, 외부세계가 공급하는 기표, 마음이라고 하는 내부세계가 공급하는 기의가 결합되어 표상의 세계에 편입하는 기호가 탄생된다. 문학적 기호는 다중의미체이다. 다중의미성은 기표에 기의가 자의로 연결되는 경험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기호의 다중매체가 바로 상징적 요소이며, 다양체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는 신화체계 속에서 메타언어를 찾고 있다. 바르트는 1차질서, 그리고 2차질서로 구분하면서, 1차질서는 의미작용에서 현실의 수준, 자연의 수준이라 하고, 2차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라고 했다. 1차질서는 기호의 모호함이 없는 객관적, 직접적 자연의 의미를 가지며, 현실의 외연적 의미만을 생산한다고 했다. 2차질서는 두 가지로 하나는 함축이고, 다른 하나는 질서로 구분한다. 함축은 기표가 기의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의미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달에서 얼굴을 생각한다든지, 배를 상상한다든지, 백동전을 연상하는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신화는 함축의 의미체계로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언어들의 조합을 통해 로만 야콥슨은 언어의 시적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야콥슨은 은유/환유의 의미론적 양분법을 바탕으로 그의 시각을 전개하는데, 양극성과 등가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양극성이라는 개념은 언어 운용의 연합적 축과 통합적 축을 말한다. 전자는 선택의 영역이며, 후자는 결합의 영역이다. 이때 “선택의 근간은 등가성, 유사성, 상이성, 동의어와 반의어 따위가 있고, 결합 곧 배열의 순서를 이루는 밑바탕은 인접성”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상징적 요소들의 결합에도 적용될 수 있다. 야콥슨의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에서 수직적 차원은 언어저장고에서 한 단어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는 은유에 의해서 일어난다. 또한 수평적 차원에서는 환유에 의해서 결합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주어+동사의 문장이라면, 주어의 위치에 놓일 여러 대등한 단어들 중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하고, 동사는 대등한 환유적 요소들 중에서 선택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배치의 리좀적 시에 있어서는 은유적 요소가 또 다른 상징적 요소로 전환되어 문장과 문장으로 접속될 수 있다. 예를 들면(도랑물이, 개여울이, 강물이, 시냇물이) 중 하나와 (소리 지르다, 노래하다, 달려간다, 흐른다) 중 하나가 선택되어 만약에 ‘강물이 흐른다’가 되었다면, 강물에 대한 상징(세월-달력, 정화-목욕탕, 식수-수도꼭지, 발전-전구) 등의 여러 상징물 중에서 선택하여 새로운 배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또 다른 문장이어야 하고, 그 거리감이 너무 멀거나 이어짐에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단락을 띄워 결합할 수 있다. 야콥슨의 선택 ‧ 결합의 방법을 활용하여 시의 문장을 만드는 능력을 갖추고, 이에 대하여 상상적 요소들의 활용능력을 키운다면 의식의 확장과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결합을 이룬 새롭고 참신한 시를 쓰게 될 것이다. [출처] 기호학파적 접근과 상징의 적용|작성자 김기덕   6. 상징에 대한 케빈 베이컨의 6단계 이론 접목   케빈 베이컨의 6단계 이론은 한 사람이 평생 살면서 알고 지내는 사람의 숫자가 적게 잡아 100명이라고 가정한다면 다시 그 100명이 또 다른 100명, 그러면 10,000명이 다시 100명해서 여섯 단계만 거슬러 가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징관계에서도 이렇게 단계를 거듭해 나가면 모든 사물이 다 통할 수 있다는 가정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징을 통한 이미지의 접속은 어떤 사물이든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 과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의식을 확장해서 사물을 연결, 접속시킬 수만 있다면 시의 구성은 한결 쉬워질 것이다. 또한 사고의 분기, 분화도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만들어 감으로 의식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1단계에서 2단계로 분화한 상징은 눈에 보이도록 그 관계가 확연히 드러나 있지만, 3단계, 4단계로 더 확장해서 이미지가 분화한다면 복잡해지고 쉽게 눈치채기 어려운 깊은 단계의 상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징단계를 활용해 시를 쓴다면 바다 같은 시, 우주 같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상징에 대한 케빈 베이컨의 6단계 이론 접목|작성자 김기덕   7. 상징 연구의 필요성   시쓰기에서 상징을 꿰뚫고 있다는 것은 큰 재산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상징성을 발견할 때 여러 다양체의 접속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 속에는 이미 많은 상징들이 들어 있다. 공중적이든, 원형적이든 삶 속에서 습득되고 인지된 의식에 의해 우리는 사물 속의 상징들을 감지하고 있다. 이 상징의 종류를 많이 알고 있다면 여러 접속점이 있는 장난감 블록으로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시쓰기에 매우 유리하다. 만약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으로만 본다면 십자가를 통해 시를 전개 할 때 그 만큼 단순한 전개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칼 구스타프 융의 개인적 상징, 공중적 상징, 원형적 상징을 공부해 왔고,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을 통해 여러 상징적 요소들을 접해 왔다. 우리의 인식 속에는 이미 이러한 상징들이 고정관념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이미지를 보면 그 속에서 여러 상징적 요소들을 유추하게 된다. 예를 들면 뱀이라는 사물을 보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한 것과 저주 받아 배로 기어 다니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또한 갈라진 혀로 인해 두 마음을 가진 자 및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을 상상한다. 하지만 불교적 시각으로 보면 우리와 똑같은 중생으로 전생에 죄가 많아 뱀으로 환생한 것일 뿐이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으로 보면 남자의 성으로 상징되기도 하지만, 한국의 꿈에서는 조상이나 지혜로운 자녀의 태몽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뱀이라는 이미지를 시 속에 끌어 오기까지는 이러한 상징성을 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서정주의 ‘화사’에서 “스며라, 배암!”은 순이를 대상으로 한 성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질 들레즈가 깃발을 통해 말한 배치 관계를 보면, 붉은 깃발이 배와 배치되면 구호신호를, 데모하는 군중과 배치되면 혁명을 상징한다고 했다. 여기에서의 붉은색은 무질서, 위험, 열정, 희생, 피를 원형적 상징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배치가 달라짐으로써 해석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배치관계에서 상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은 신화나 종교, 역사, 이야기 등을 통해 생성 발전되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상징성의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우리나라의 방대한 꿈풀이 사전을 통해 한국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원형적 상징을 연구해 왔다. 방대한 양의 꿈해석을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다른 장에서 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시를 위한 상징성을 확장하고자 한다. [출처] 상징연구의 필요성|작성자 김기덕   시쓰기의 기법   1. 문장 구성을 위한 언어의 선택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선 언어의 선택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첫째는 얼마나 좋은 이미지어를 쓰느냐에 따라 시의 생명력은 달라진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지만, 시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 그 시는 미적 가치를 상실한다. 그 이유는 표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추상적인 사랑을 읊조리던 시대가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관념어는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랑을 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이라는 관념어를 대신할 수 있는 이미지어를 찾아야 한다. 하트라든지, 보석이라든지, 꿀물이라든지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사물을 찾아서 표현해 주어야 한다. 하나의 사물로 표현이 안 된다면 정황을 만들어서 그 정황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서정주 시인의 ‘동천’을 보면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문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고 표현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지만, 그 안에는 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담겨 있다. 둘째는 대등항의 언어를 최대한 동원한 후 그 중에서 최적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너의 눈 속에서 하늘을 보았다.”라는 문장이 있다면 여기에서 핵심은 생략된 주어 ‘나’가 아니라 너의 눈 속에서 본 ‘하늘’이다. 이 하늘에 대한 대등항을 최대한 찾아 적합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늘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야콥슨은 유사성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지만, 나는 상징어의 대체가 가능하다고 본다. 하늘은 천국, 남자, 남편, 아버지, 서북쪽, 대평원, 늦가을, 머리, 말, 이상세계, 하늘색, 꿈, 무지개, 구름, 비행기 등등의 상징어를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언어 중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맞는 최적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최적의 문장을 만들었을 때 한 문장 한 문장 살아있는 시를 쓸 수 있다. 시의 치열함은 내용에서도 오지만, 대부분 문장의 함축과 적절한 표현에서 오는 것이다. 셋째는 동사의 환유적 선택에 의해 생동감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다. “너의 눈 속에서 하늘을 보았다.”에서 ‘보았다’에 대한 환유적 대등항을 찾으면 “너의 눈 속에서 하늘이 (녹아 내렸다, 웃었다, 흘러갔다, 불탔다) 등의 여러 가지 경우가 가능할 것이다. 동사는 말 그대로 움직임씨다. 동사의 활용에 따라 그 문장의 활용성이 달라진다.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가장 적합한 동선을 이 동사가 그려준다. 적절한 동사의 환유를 통해 감정이입과 더불어 시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완성된 하나의 문장은 살아 있는 문장이 될 것이며, 시의 표현 의도를 적절히 반영해 줄 수 있는 보석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출처] 시쓰기의 기법-문장 구성을 위한 언어의 선택|작성자 김기덕    2. 설명의 문장을 표현의 문장으로 고치기       의외로 설명과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인들이 많다. 또한 표현하려고 했지만 설명적인 시를 쓰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설명과 표현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적절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의 꽃이 있다고 치자. 이 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아름다움이라든지, 향기로움, 순수함 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물과 사물 속의 관념으로 나누어 볼 때 사물 속의 상징적인 뜻을 드러내서 쓴 시는 설명적이고, 사물 속의 상징적인 뜻을 숨기고 사물만 가지고 쓴 시는 표현된 시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물 속에 내포된 상징적인 뜻은 관념이다. 예를 들면 별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영원성이라든지, 밝음, 빛남 등의 관념성을 포함하고 있다. 시에서 영원성이나 밝음, 빛남의 언어가 필요할 때 영원성이나 밝음, 빛남을 그대로 쓰지 않고 별이라는 사물을 끌어와 대신 쓰는 것이 시의 표현 방법이다. 그래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을 대신하는 사물 찾기가 필요하고, 의도한 관념에 적합한 이미지를 찾아서 대체했을 때 그 시는 표현된 시가 된다. 또한 의도된 관념의 폭은 좁았지만 그것을 이미지로 대체하고 나면 그 이미지의 상징성 때문에 관념의 폭은 확장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별이 영원함과 밝음 및 빛남의 상징물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끌어올 수는 없다.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에 본인이 그리고자 하는 그림에 어울릴 때는 별을 끌어올 수 있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림을 만든다면 다른 대체 이미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의도된 그림, 의도된 어리둥절함의 그림이라면 이런 논리는 부질없는 것이다. 오히려 비논리적이고 언밸런스적인 이미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의도의 문장을 쓰고자 한다면, 이 문장은 설명적 문장이기 때문에 시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표현된 문장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에서 ‘나는’이나 ‘당신을’도 비유적인 사물로 바꿀 수 있지만, 일단 이것은 놔두고 ‘영원히’와 ‘사랑하리’를 바꾸어 표현해 보자. ‘영원히’의 관념을 대신할 이미지(별, 돌, 보석, 태양 등등)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 이미지에 맞도록 ‘사랑하리’를 고쳐주어야 한다. 만약 ‘별’을 선택했다면 “나는 별이 되어 그대 창가에 뜨리.”나, “나는 별이 되어 밤마다 그대 모습 비추리.”와 같이 바꾸어야 한다. 관념에 대한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는 사물의 상징성을 보아야 하고, 상징적 의미를 통해 사물을 취사선택해서 시 속으로 끌어와야 표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에서 표현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그리고자 하는 밑그림과 조화시켜 만든다면 한 구절 한 구절 설명적 요소를 없애고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설명의 문장을 표현의 문장으로 고치기|작성자 김기덕   4. 데칼코마니 기법   데칼코마니는 화면을 접어 밀착시킴으로써 물감의 흐름으로 생기는 우연한 얼룩이나 어긋남의 효과를 이용한 기법이다. 즉 종이 위에 그림물감을 두껍게 칠하고 반으로 접거나 다른 종이를 덮어 찍어서 대칭적인 무늬를 만드는 회화 기법이다. 시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나 사건을 끌어와서 충실히 묘사한 후 단락을 바꾸어 대칭적인 이미지와 사건을 만들어주는 기법이다. 이 대칭의 관계는 사건 대 사건일 수도 있고, 현실 대 비현실일 수도 있으며, 사실 대 추상일 수도 있다. 물감을 짜듯 단순한 묘사나 간단한 이야기 전개로도 충분하지만, 대칭적 관계가 만드는 사고의 폭이 이승과 저승의 관계처럼 넓어질 수 있다. 호숫가에 비친 산그림자의 관계처럼 단순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를 대칭적으로 보여주듯 의도하는 바에 따라 그 차원을 달리할 수 있다. 원면과 접혀진 면이 따로 구분되기도 하지만 하나의 형태로 보여지듯, 이야기나 사건이 서로 다르더라도 전체적인 象, 즉 하나의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녀의 골반」이라는 석류화의 시를 보면 1 나비 꿈을 꾸고 엄마는 날 낳았다 흰 꿈, 엄마는 치마폭에 날 쓸어 담았다 커다란 모시나비, 손끝에 잡혔다가 분가루 묻어나갔다 –중략- 나비 날개엔 먼지가 끼지 않았다 한 꿈, 계단 입구에서 두 날개 맞접고 오래 기도하고 있었다 환한 꿈, 나는 오래전 그녀의 골반을 통과한 나비였다.2  초음파상 골반뼈는 하얀 나비 같았죠 그녀의 골반뼈에 종양이 생겼을 때 보았던 그 나비, 그러니까 그녀의 꺼먼 엉덩이살 안에 나비 날개가 굳어 있었던 거죠 나는 잘 벌어지지 않는 날개 사이로 미끄러져 나왔던 거죠 –중략- 이 지상 마지막까지 날고 있을 나비, 그러니까 내 속을 빠져나간 어린 나비는 지금 내 앞에서 폴짝폴짝 날아오르고 있는데요   나비가 엄마의 골반과 일치하고 있다. 이렇게 두 개의 사물이나 상황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여 묘사하는 기법을 데칼코마니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데칼코마니 기법|작성자 김기덕   5. 마블링 기법   마블링은 종이 따위에 대리암 무늬를 만드는 기법으로 물 위에 유성물감을 떨어뜨려 저은 다음 종이를 물 위에 덮어 묻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시에서는 여러 개의 관점으로 한 대상을 휘젓듯이 묘사하거나, 여러 대상을 뒤섞어서 묘사하는 방법을 말한다. 대리암의 무늬처럼 불규칙적인 형식의 연결로 내용이 난해하고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이미지들 간의 상징적 연결로 사고의 확장을 꾀할 수 있다. 추상적이며 모호한 리좀적 뿌리들의 연결로 처음도 끝도 없는 고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리암의 물결무늬를 통해 혹자는 새를 읽을 테고, 혹자는 구름을 읽을 테고, 혹자는 바람과 세월을 읽을 것이다. 그 만큼 보는 각도에 따라 상징의 깊이가 깊다고 할 수 있으며, 아무나 읽거나 쓸 수 없는 고난도의 기법이다. 건너뛰기의 상징적 폭은 그 만큼 넓을 수밖에 없다. 새의 날개인 줄 알았는데 구름이었고, 구름인 줄 알았는데 손바닥이었고, 손바닥인 줄 알았는데 강물이었고, 강물인 줄 알았는데 화살이었던 것처럼, 물결 같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만든 무수한 무늬들의 집합과 같은 이미지들의 배치 및 결합을 만드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마블링 기법|작성자 김기덕   6. 꼴라쥬 기법   꼴라쥬는 주변에 보이는 일반적인 사물을 화폭에 붙여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납작한 곡물이나 씨앗, 모래, 합판, 종이, 천, 나무껍질, 장판지, 스티로폼, 노끈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하여 크기에 맞게 자르거나 모자이크처럼 부숴서 붙이는 방법이다. 시에서 꼴라쥬 기법은 여러 이미지들을 끌어와서 큰 틀의 그림(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을 위해 조각조각 붙이는 작업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무관한 것 같지만 연관이 있어야 하고, 무질서한 것 같지만 질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징적 연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밑그림은 붙이는 사물에 지워지듯이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전체를 통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기법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사물을 끌어오는 것을 피하고 상징성이 통하는 사물을 끌어와야 한다. 전혀 다른 재료들을 붙이기 함으로써 재료 간의 경계를 만들 듯 상징물 간의 격차로 인한 거리감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조각조각 희망을 끼워 넣으며 가족들은 제 몸에 맞는 무늬를 고르지만 목소리 큰 아내 곁에서 무능한 남편은 늘 모자이크 처리된다. 땅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세력을 맞추고 하늘엔 완성된 은하의 별들이 총총히 채워지는데 빈 구석이 많아 나는 평생 성경 속의 구절들을 꿰맞춰왔다. 예수와 붓다와 공자와 소크라테스, 하지만 미완인 나의 퍼즐엔 아버지가 없다. 김기덕, 「퍼즐놀이」의 일부   이 시는 서로 연관관계가 없는 생소한 사물들인 돌고래, 태권V, 재건축단지, 가족들, 별, 성경, 성인들, 불경 등이 모아졌지만, 전체적인 주제의식이 통일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서로 사물들 간에 유사성이나 인접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상징적인 요소들의 연결로 인해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그림을 통일성 있게 그려주려 했다. [출처] 꼴라쥬 기법|작성자 김기덕   7. 시퀜스 기법   시퀜스 기법은 여러 개의 화면을 겹쳐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 화면 겹치기 방법은 유사한 것일 수도 있고,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하나의 통일된 의식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 통일된 의식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버리면 어리둥절해질 것이고, 너무 가까이 두면 식상해질 것이다. 예를 들면 4.19 학생의거 사건의 화면에 통합민주당 사진과 SNS 휴대폰 사진을 겹쳐서 놓는다면 유사성은 없지만, 통일된 상징성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화면들을 순차적으로 짜는 겹치기 방식이다. 4.19 학생의거 사건에 대한 내용을 첫째 단락으로 쓰고, 둘째는 통합민주당 사진, 셋째는 SNS 휴대폰 사진의 순으로 단락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4.19 학생의거 사진과 통합민주당 사진, SNS 휴대폰 사진을 섞어서 직물을 직조하듯 짜는 방식이다. 이러한 경우는 세 화면을 넘나들면서 단락에 상관없이 쓰는 방식이다. 좀 더 복잡하고 난해할 수 있지만, 시의 상징성이 강화될 수 있다. 하지만 첫 번째 방식은 이해하기 쉽고, 한 눈에 들어오는 장점이 있지만, 나열하듯 화면을 이어붙인 느낌이 들어서 긴장감이 떨어질 수 있다. 이 기법은 단락 간의 내용이나 이야기가 이어지지 말아야 하고, 전 단락의 어떤 묘사에 대한 확장이나 축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사한 것들의 집합보다는 생소하고 거리감이 멀수록 시퀜스 기법은 효과가 있다. 아주 동떨어진 것 같지만 상징적 연결고리로 묶여지고 소통해야 한다. 교집합이나 공집합적인 관계보다는 독자적이고 개별적이지만 손을 맞잡은 연인과 같이 한 방향을 바라보아야 한다. [출처] 시퀜스 기법|작성자 김기덕   8. 퍼즐 맞추기 기법   퍼즐 맞추기 기법은 하나의 제목이나 주제와 관련된 모든 이미지를 끌어온 뒤 그 이미지들을 전체의 큰 그림(주제성)에 맞게 하나하나 끼워 맞추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빛이라는 제목의 시를 쓴다면 빛과 연관된 이미지 성냥, 연탄, 장작, 유성, 별, 반딧불, 달, 태양, 얼굴, 베드로, 예수, 유리, 피, 눈빛, 하루살이, 화살, 총탄, 질주의 무리, 자동차, 광야의 외치는 소리 등등의 많은 관련이미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하나의 커다란 주제의식에 맞도록 문장을 꾸며주는 것이다. 빛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진리’라는 주제의식을 밑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면 위에 열거된 이미지들을 주제의식에 맞는 모양으로 변화시켜 끼워 넣는 방식이다. 만약 ‘번지점프’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다면 관련 이미지 날개, 곤돌라, 하늘, 강, 끈, 아프리카 부족, 땅, 물, 나무, 꽃, 낙엽, 열매, 아파트, 다이빙, 안전장치, 부도 등을 찾은 후 ‘인생의 부침’과 같은 큰 그림을 표현하고 싶다면 그 그림에 맞는 부분만 오려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나의 이미지에는 여러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를 나타내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밑그림에 맞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기법은 좀 다르지만 서정적 특징인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데 적합하며 주관적 몰입이 가능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퍼즐 기법은 꼴라쥬 기법과 아주 흡사하지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꼴라쥬는 찢어서 붙이듯 끌어온 이미지가 상징적이고 낮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임의적이기 때문에 약간은 억지스러운 면도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퍼즐 기법은 다 재단된 이미지를 끼워 넣는 것이다. 그래서 상징성보다는 유사성이나 인접성의 이미지들이 동원되고 자연스러운 연결 관계를 만들어 준다고 할 수 있다. 미묘한 차이이기 때문에 개념은 구분하지만, 실재 쓰임에 있어서는 혼용해서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한 시쓰기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시들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시늉한 저자의 작품들이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여러분들은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출처] 퍼즐 맞추기 기법|작성자 김기덕   판판한 판과 골진 판에 대하여   우리에게는 고정관념이 있다. 고정관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려는 생각이다. 산에 비가 내려 물이 흐르게 되면 계곡으로만 흐른다. 산등성이를 타고 물줄기들이 거슬러 흐르는 경우는 없다. 오랜 지각변동으로 융기, 침강하면서 생긴 계곡으로 수천 년 이 물줄기는 흘러왔다. 오랜 경험과 누적된 지식으로 우리의 뇌 속엔 수많은 계곡들이 패여 있다. 그것은 손금 같기도 하고 주름살 같기도 하다. 평평한 판은 물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 없는 판이다. 고정된 의식세계가 없이 개방되고 자유로운 사고의 방목이다. 우유가 한 방울 떨어질 때 생긴 왕관현상처럼 사방으로 뻗고자 하는 말미잘 같은 촉수들이 살아 있다. 옥수수나 보리처럼 한 사고의 줄기에서 확장하여 무수히 뻗는 수염뿌리의 리좀이다. 사고의 바닥을 평평하게 가지라. 세월 속에서 나도 모르게 빗물에 깎이고, 도랑물에 패여 주름처럼 사고의 골이 늘어나고 깊어진다. 골이 좀 더 깊어지지 않도록 새로운 지식으로 메우라. 오그라들면 주름지고, 펴지면 팽팽해지듯이 움츠러들지 말고 사고를 확장하라. 그리고 사고의 스피드를 늘려라. 빨리 달리는 자의 앞길은 대평원이고, 벌판이고, 고속도로다. 생각의 속력을 늦추면 늦출수록 언덕과 절벽이 가로막는다. 과감히 대륙과 대륙을 횡단하라. 자신의 사고 영역에서 탈출하여 하늘로, 지하로, 지평으로 뻗어서 수직적, 수평적 광활한 공간을 확보하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너의 작품은 자유를 얻으리라. [출처] 판판한 판과 골진 판에 대하여|작성자 김기덕   횡단적 문학의 이해   문학은 다른 종류의 삶을 창안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만드는 생산기계이다. 변용, 촉발로 포획되는 삶의 방식을 막스,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 가타리가 살아왔다. 그들의 말은 섞이고, 우리의 말도 삶 속에서 섞인다. 들뢰즈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것을 섞어 제3의 사유를 만들었다. 리얼리즘의 덫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다. 욕망은 힘의 작용에 방향을 부여하는 의지적 성분이다. 능력은 힘을 수반하고 있는 잠재적 상태이다. 삶은 욕망의 내재적 장이며, 문학은 능력이 글의 형태로 표현된 것의 집합이다. 배치는 요소들이 계열화에 의해 표시되는 사물의 상태이며, 기계는 특정한 효과를 반복하여 생산하는 것의 집합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삶을 창안하는 것이고,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평범한 삶에서 특이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평균적 삶에서 극한적 삶을 사는 것이며, 주어진 삶을 넘어선 삶을 사는 것이다. 욕망과 권력은 항상 배치로 존재한다. 욕망은 삶의 특정한 방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의 배치가 권력의 배치이다. 욕망은 다른 욕망과 조우, 부딪히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한다. 새로운 요소와 접속하여 새로운 계열을 형성한다. 철학, 문학, 예술은 형식 없는 내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는 순간 내용은 전개하는 특정한 형식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용 없는 순수형식은 수학자, 논리학자의 공상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표현은 내용으로 환원되지 않는 층위를 이룬다. 내용과 표현은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지만(상관성), 서로 자율적이고 환원불가능하다. 소수자들은 현재 상태에 삶의 흐름을 고정하려는 권력에 반하는 성분의 집합이다. 다수성은 그 반대로 현재의 권력에 부합하는 성분의 집합이다. 다수자는 주류적, 지배적이며, 소수자는 거기에서 벗어난 억압, 무시세력이다. 치열한 작품을 쓰는 자들은 소수자들이다. 작품은 삶의 과정에 들어가는 특정한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기계다. 작품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며, 어떤 삶을 살려는 욕망, 능력의 표현이다. 그것은 생산한 욕망과 능력이 작용하는 기계이며, 그런 욕망에 의해 방향 지워지는 삶의 반복, 출현하는 장소, 외부요소들, 독자와 환경, 다른 책과의 접속 항들에 따라 다른 효과를 생산한다. 작품은 삶의 다른 과정에 들어가는 특정한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기계다. 이러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작가인데, 작가는 다른 삶의 구성에 결부된 모든 것을 향해 열린 사람이며, 잠재적으로 그것과 결합하고 있는 기계이다. 작가는 독신자 기계로서 어떤 것과 결합할 수 있는 기계로 잠재적인 결합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작가가 만드는 다른 종류의 삶은 기존의 삶에 대한 변화와 갱신의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불평과 불만, 고통, 불편을 수반하는 현재의 삶에 대한 변환을 추구한다. 니체는 기존의 지배적 삶의 질병을 진단, 치유하여 새로운 삶을 만들고자 했다. 이들이 만든 작품의 의미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기계가 규정되며, 기계의 의미는 기계의 용법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문학은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이다. 아무리 조그만 소리로 말해도 어떤 삶에 대한 언표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이 다른 종류의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집합적 배치 안에 있으며, 집합적인 언표행위이다. 문학은 이러한 삶을 제안하는 것이며, 집합적 욕망의 표현이다. 문학은 삶과 결부된 집합적 욕망의 배치의 표현이며 그것의 언표행위이다. 문학은 비인칭적 특이성으로 펼쳐지는 형식을 갖는다. 나로 진행되든, 너로 진행되든 상관없는 삶에 관한 언표들의 집합이다. 방향과 강도에 의해 삶의 흐름을 방사하거나 끌어들이는 비인칭적 특이성이다. 문학에 있어서 적극적 의미의 문학, 혁명적 문학은 횡단적이다. 힘과 욕망의 흐름을 기존의 삶의 틀 안에 가두고, 통합하는 경계를 넘어서고, 가로지른다. 경계는 흐름의 가변성을 제한하고, 고정하는 조건을 말하며, 경계를 따라 삶의 홈이 파인다. 여기서의 횡단은 수직적, 수평적으로 삶의 표면을 구획하고, 경계를 가로지르고, 넘어서는 것이다. 혁명적이라 함은 혁명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을 하는 문학보다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 더 중요하다. 횡단은 경계가 지어진 하나의 영토에서 다른 영토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것이다. 횡단적 문학은 기존의 것과 다른 삶의 방식, 부재하는 삶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횡단적 문학은 기존의 삶과 부재하는 삶의 사이에 있다. 곧 상이한 삶 사이에 있는 문학이다. 횡단적 문학에서 횡단성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문학성은 커진다. 횡단성의 크기는 그것이 넘어설 수 없는 이질성의 폭과 비례한다. 여기에서의 경계는 내부를 고정하고 통합하며, 동질화시킨다. 또한 외부와의 차별성을 갖게 하고 이질성을 극대화 시킨다. 하나의 경계 안은 이질성의 폭이 협소하다. 횡단계수는 경계의 수에 비례하고 수용 가능한 이질성의 폭에 비례한다. 문학성은 문학기계의 능력이다. 문학의 미적 성질은 아름다움에 대한 고전적인 내적 범주에 의한 구분으로서 보들레르는 추함 자체가 문학의 대상이었고, 표현주의는 신체의 표면에 새겨진 추함을 통해 삶을 가시화했다. 기존의 미학주의적 잔재를 걷어내야 한다. 문학성 내지 예술성에 대한 반미학주의적 개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문학기계의 능력은 무엇인가? 문학기계의 능력은 다른 종류의 삶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스스로 다른 종류의 삶의 일부로서 표현하며, 그것을 통해 다른 삶으로 촉발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다른 삶을 생성하는 능력이다. 생성 능력의 강렬도에 따라 단순한 문장이지만 강렬한 힘의 글이 있고, 잘 다듬어졌지만 추동의 힘이 미약한 글이 있다. 이러한 문학은 접속에 의해 이루어진다. 문학기계 능력은 접속하여 작동할 수 있는 기계들의 폭에 의해 외적으로 정의된다. 접속은 접속하는 이웃 항에 따라 다른 기계가 되고 변환 능력을 갖는다. 예를 들면 위는 식도에 접속하여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 채취한다. 입은 성대를 통해 소리의 흐름을 절단, 채취하며, 생식기와 접속하여 섹스기계가 되고, 토하여 항문기계가 된다. 위와 입을 비교하면 위보다 입의 탈영토화 계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변환 능력은 탈영토적 능력인데, 탈영토화 잠재력은 다른 기계에 접속하여 다른 배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탈영토화 하는 횡단적 문학은 모델화하거나 전형화하기 보다는 거기서 벗어나는 탈영토화의 성분을 통해 펼쳐진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며, 새로운 영토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평범성, 평균성을 벗어날 때 효과적으로 성취가 가능하다. 이들의 문학을 소수적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성과 다수성은 숫자적 구별이 아니다. 하나의 척도는 기준이고 잣대인데, 이미 작용하고 있는 권력을 내장하고 있다. 척도는 언제나 주류를 형성하고, 지배적 위치를 점하며, 다수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것에서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소수화 되는 것이다. 소수성은 주변성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주변성은 동일한 척도를 전제한 가운데 중심과 척도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상태이며, 다수성의 대칭적 짝이다. 이에 비해 소수성은 척도를 공유하지 않으며, 척도로 표시되는 지배적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 소수문학은 다수적 언어의 소수화를 수반한다. 다수자들의 언어 안에서 변형시키는 방식이지 소수자들이 사용하는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다. 이는 자기만의 언어 세계에 숨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기 삼아 다수 안에 들어가 휘젓고 다니며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자신만의 순수한 언어로 주변의 삶을 묘사하라. 다수적 언어의 내부에서 그것을 변형시켜 새로운 언어 창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라. 횡단적 문학은 소수적 문학이다. 이상 『들레즈와 문학-기계』 중 이진경 교수의 「문학-기계와 횡단적 문학」의 압축을 통해 새로운 사고의 탈영토화를 생각해 보았다. 이미지의 횡단, 사고의 횡단을 추구하는 시쓰기가 필요하다. 오진현 시인의 『첫 나비의 아름다운 「의미의 비행」』에서 언급한 탈관념의 실현도 새로운 시쓰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출처] 횡단적 문학의 이해|작성자 김기덕   시쓰기의 미래   우리의 삶은 컴퓨터나 TV, 휴대폰 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다. 현실세계의 삶이 점차 가상공간이라는 비현실과 상상의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클릭 한 번으로 우리는 산을 끌어오고, 바다를 끌어오고, 무한한 우주 속을 유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지전능함을 바탕으로 우리의 사고는 변화무쌍하며 무한한 사고의 팽창과 수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현대는 가상과 현실의 모호함뿐만 아니라 계절의 구분, 지리적인 경계, 시간의 흐름, 남과 여의 역할 등을 나누던 구획선들이 사라졌다. 그 만큼 현대인의 정신도 복잡해졌고, 빠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확신하고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고나면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지고 새로운 용어들이 생겨난다.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과 생각은 반응속도가 빨라지며 복잡해져간다. 머릿속에 존재하던 단순 이미지들은 깨어지고, 서정성의 자연은 파괴되어 인공적인 도시공간을 만들어간다. 시는 자연성의 파괴와 기계화되어가는 감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시는 향수를 불러왔고, 애수에 젖어 변하는 세상을 한탄하며 농경적인 삶을 그리게 했다. 자동차의 부품과 같은 복잡함보다는 간결하고 단순한 풍경의 이미지를 추구했다. 그러다 보니 아날로그적인 세대들에게는 설득력을 얻었지만, 디지털 세대들에겐 공감을 얻지 못했다. 물론 형식의 복잡함으로 독자를 멀어지게 한 이유도 있지만, 그 후로 시는 일부 세대의 전유물처럼 전락했고 고립되기 시작했다. 시는 문학을 선도하고 세상을 앞질러가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시는 살 수 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시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아니다. 생동하고 성장하는 무한 상상의 세포분열이어야 한다. 그 분열은 지극히 미시적이며, 거시적이어야 한다. 힉스입자의 반응에서부터 무한 우주로 뻗어가는 상상력이어야 한다. 그러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현대인들, 특히 고급독자들의 감각은 대단이 발달되어 있다. 많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꿰뚫어 보고, 복잡한 공식들을 풀어간다. 원하는 대로 로봇이 되고 슈퍼맨이 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많은 이미지를 검색하며 자신의 용도에 맞는 모델을 고른다. 단순성의 반복, 정해진 룰의 식상한 게임은 아웃될 수밖에 없고, 정복된 후 버려질 수밖에 없다. 변화에 적응된 사고들은 새로운 세계를 원한다. 시도 이제는 아날로그적인 수목형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자재로 클릭하며 맘껏 산을 끌어오고, 바다를 끌어와야 한다. 여러 개의 창을 열어 놓고 한꺼번에 작업할 수 있는 다중의 마인드가 필요하다. 그 복잡한 과정들을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저만치 독자들을 앞서가야 한다. 이제 시는 이발소적인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다. 비슷한 그림, 비슷한 색칠이 독자를 못 견디게 만든다. 자연만을 고집하지 말고 과감히 컴퓨터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가상과 현실을 연결하여 제2, 제3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여러 개의 창을 열어놓고 한꺼번에 세상을 내려다보며 클릭 한 번으로 시공을 초월해야 한다. 변화무쌍한 현실공간을 날아다니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이 바로 미래의 시쓰기가 되어야 한다. [출처] 시쓰기의 미래|작성자 김기덕      주역과 시 /김기덕   8. ䷇ 수지비(水地比)   수지비는 위에 水(☵:坎)가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는 모양으로 물과 땅이 친하여 서로 돕는 관계를 이룬다. 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형상으로 서로 의지하며 돕는다는 뜻이 있다. 比는 하괘가 坤(땅)이니 순하고 어질며, 상괘는 坎(물)이라서 아래로 흐르니, 땅 위에 물이 있는 것 같이 서로 밀접하게 친한 것을 말한다. 덕망 높은 군주를 위해 어진 신하들이 보필하며 친함으로 서로 협력하는 상이다. 64괘는 배치의 관계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시의 소재나 주제의식을 잡고 시를 쓰고자 할 때 무턱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재나 주제의식에 대한 유사적, 인접적, 상징적인 사물을 찾은 뒤 적절한 배치관계를 찾고, 정해진 배치관계에 따라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이 바로 64가지인 64괘인 것이다. 이 64가지를 다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기존에 쓰던 주제의 통일적인 중천건괘의 방법이나, 중지곤괘의 방법 등을 비롯하여 몇 가지만 익혀서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역을 통한 시쓰기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과 방법을 활용하여 쓰는 것이기 때문에 64가지를 다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본 책을 교재로 삼아서 시를 쓰면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또한 주역적 시쓰기가 공식처럼 경직되어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괘나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등의 다양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으니, 이러한 변화는 시인의 의지에 따라 무한한 창작의 자유를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부분이다. 효로 풀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주제와 정서의 음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다섯 번째 배치에서 변화를 꾀한 뒤 여섯 번째 배치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승전결식의 방법이다. 다섯 번째는 轉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고의 확장과 변환을 이루었다가 다시 주제의식으로 모아지는 통일된 내용의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노음)는 약하고 부드러운 존재이나 슬픔, 아픔 등을 끌어와, 人(⚏:노음)에서 음의 감정을 더욱 발전시켜 가다가 天(⚍:소음)에 와서 내적 아픔이나 설움, 절망 등의 음의 감정을 절제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팔괘로 표현하면 첫 문장의 배치는 坤(☷)괘로서 땅을 상징한다. 유순하고 후덕하여 모든 것을 품는 어머니와 같은 정서이다. 둘째 문장의 배치는 이러한 여성적인 감정에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마음을 보듬어주고 모아주는, 따뜻함과 갈등의 승화가 있는 정서의 시쓰기 방법이다.    比는 人자가 두 개 나란히 서있는 모양으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정답게 협조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수지비(水地比)는 땅 위에 물이 있는 형상이다. 대지는 물을 안아주고 물은 땅을 적시며 친애하고 협력하여 생성하고 화육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형성하듯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감정으로 아름다운 정서를 노래하는 긍정적 표현이다. 수지비의 호괘는 ䷖ 산지박(山地剝)으로 땅 위에 높은 산이 있는 상이다. 배합괘는 ䷍ 화천대유(火天大有)로 인군자리에 올라 천하를 얻는 상이며, 도전괘, 착종괘는 ䷆ 지수사(地水師)로 무리를 모아야 함을 상징한다. [출처] 8.수지비|작성자 김기덕   9. ䷈ 풍천소축(風天小畜)   풍천소축은 天(☰:乾)이 아래에 있고, 위에 風(☴:巽)이 있는 괘상으로 하늘 위에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유약한 음이 위에 있어 아래의 강건한 양을 그치게 하여 쌓으니 소축이다. 소축은 작게 쌓아 올라간다는 뜻으로 畜은 밭에 물건을 높이 쌓아 까마득하다는 뜻이다. 양실한 물건을 쌓아올림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바람으로 인해 위가 약간씩 흔들리니 많이 쌓을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소축은 안으로는 강건한 乾이 있고 밖으로는 부드러운 巽이 있어서 외유내강의 덕을 갖추고 있다. 강함을 상징하는 모든 양효 가운데 오직 하나인 음효가 상승하는 양의 기운을 막아 모두를 축적하지 못하고 일부만 축적하는 상이다. 효를 가지고 시를 만들면 첫 번째에서 세 번째 배치까지 양효로 구성되어 가볍고 메마른 감정 위주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음의 배치를 해주는 방법이다. 가운데에 음의 감정을 배치함으로써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뭉클한 감동이 느껴질 수 있도록 어둡고 탁한 분위기를 설정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노양)는 한 여름이나 오후와 같이 생기가 있고 기쁨이 있다. 人(⚍:소음)은 봄의 정취와 같다. 또한 해가 뜨는 아침과 같이 상승하는 양의 기운을 퍼지게 하여 天(⚌:노양)에서 한낮과 같은 양의 문장으로 끝맺는 방식이다. 시가 전체적으로 밝으나 무게감을 두어 내면의 아름다운 상처를 한가운데 보석처럼 드러나게 하는 기법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처음의 배치는 天(☰)괘로서 밝고 명랑하고 강건함으로 자칫 공허감을 줄 수 있는 남성적 감정 다음에 巽(☴)을 배치하여 부드럽고, 섬세하여 귀여운 여동생과 같은 감정을 배치함으로 잔잔한 여운이 남도록 쓰는 방법이다. 주역적 시쓰기의 특징은 색깔의 배치이다. 소재에 따라, 또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색깔을 배치함으로 정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 창작이다. 양의 색은 밝고 화려하며 따뜻하다. 음의 색깔은 어둡고 탁하며 차갑다. 언어로 그리는 그림에도 이런 다양한 색깔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깊이 및 의도의 정확성을 분명하게 나타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체를 밝게 칠한다면 중천건(䷀)이 될 것이고, 전체를 어둡게 칠한다면 중지곤(䷁)이 될 것이다. 그 외에 어떤 부분을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 각각 64괘의 모양을 이루게 될 것이다. 전체가 밝은 시만 좋은 시는 아닐 것이다. 전체가 어두운 시가 치열한 시는 아닐 것이다. 다양한 색깔, 다양한 배치가 더욱 낯설고 개성적인 시의 영토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풍천소축의 호괘는 대칭적, 대조적 기법의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마주보기적 배치인 ䷉ 천택리(天澤履), 배합괘는 하나의 통일된 시각의 표현인 ䷏ 뇌지예(雷地豫), 착종괘는 여성적 시각의 밝은 표현인 ䷫ 천풍구(天風姤)이다. [출처] 9. 풍천소축|작성자 김기덕   10. ䷉ 천택리(天澤履)   천택리는 위로 天(☰:乾)이 있고, 아래로는 澤(☱:兌)이 있는 모양으로 하늘이 연못에 비치듯 하늘의 이치를 밟아 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履는 회복함(復)을 주장하는(尸) 뜻이 있으니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따라 예를 회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履는 하괘가 兌(연못)이므로 안으로 함께 기뻐하고, 상괘가 乾(하늘)이므로 밖으로 굳건히 실천하는 모양이니, 기뻐하고 화합함으로 행하는 중정의 도가 있다. 또한 위에 하늘이 있고 밑에 못이 있으니 상하의 나뉨과 귀하고 천함의 구별이 있어 예로 회복을 실행하는 괘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배치를 양의 문장으로 한 다음,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배치하였다가, 그 이후 문장을 양의 문장으로 표현해주는 방법이다. 하늘의 구름과 달과 별들이 음의 물속에서 반사되듯이 표현된 방법이다. 데칼코마니적인 방법이기도한 이 기법은 하늘의 차원과 물속의 차원이 다르며, 정신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가 다르듯이 상하의 복합적 배치, 또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배치와 같은 마주보기적인 거울 기법이다. 사상으로 접근하면 地(⚌:노양)는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맑고 깨끗하며 명랑하다. 人(⚎:소양)은 겉은 기쁘고 생기에 차있지만 속은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하고 병들어 있다. 天(⚌:노양)은 청명하며 움직임이 있고 크다. 하늘은 맑고 땅은 생기에 가득 차있어서 양의 색깔로 채워지지만, 인간은 내면의 슬픔을 어쩌지 못한다. 팔괘로 풀면 기쁨이 가득한 兌(☱)괘가 밑에 있고, 강하고 밝은 덕이 위에 있어 서로 비추며 마주보는 유사성이 있다. 처음엔 하늘의 단락이 있고, 다음에 하늘을 비추는 연못의 단락이 있어서 유사성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는 시쓰기 방법이다. 천택리는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태양은 하늘에 있고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는 원리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밤이 새면 낮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혼란이 없고 뒤바뀜이 없다. 시쓰기에서 두 개의 유사성이 결합하여 호수의 하늘과 같이 서로를 조명해 줄 때 하늘엔 하늘의 원리가, 호수에 호수의 원리가 질서를 유지하며 독단적인 내용을 갖고 공존해야 한다. 그래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유사하지만 다른 내용을 형성하고,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 천택리의 응용을 위해 천택리의 성격이나 재질의 구분은 호괘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으로, 반대편에서 본 입장인 도전괘는 ䷈ 풍천소축(風天小畜), 반대상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배합괘인 ䷎ 지산겸(地山謙), 상‧하의 입장변경을 표현하는 착종괘는 ䷪ 택천쾌(澤天夬)이다. [출처] 10. 천택리|작성자 김기덕   11. ䷊ 지천태(地天泰)   지천태는 위에 땅(☷:坤)이 있고 아래에 하늘(☰:乾)이 있는 모양으로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열려 나오는 상이다. 하늘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고 땅의 기운은 위로 올라 교합하여 태평한 세상이 된다. 泰는 父, 母, 子의 세 사람을 뜻하며, 부정과 모혈로부터 어린 생명이 탄생함을 의미한다. 안으로는 乾의 굳세고 건장한 덕이 있고 밖으로는 坤의 순한 덕이 있으니 외유내강의 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서 서로 통하니 형통하는 상으로 정월괘이며 새봄이 되는 때를 이른다. 음효와 양효가 각기 셋으로 음양의 이치가 고르게 배치되고 있어 안정된 모습이다. 효로 살펴보면 양의 문장이 첫째, 둘째, 셋째로 나오고 다음에 음의 문장이 넷, 다섯, 여섯 번째 나오는 형식으로 음과 양이 대조를 이루는 방식이다. 만약에 얼굴을 표현한다면 돌출된 이마나 코, 광대뼈와 같은 곳을 양적으로 밝고 강하게 표현한 후 입이나 귓구멍, 콧구멍 같은 곳을 음적으로 어둡고 연약하게 표현하여 서로 대조를 이루게 하면서도 통합된 의미를 모을 수 있도록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음과 양이 공존한다. 이러한 음과 양의 대조를 통해 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노양)는 여름이나 한낮의 표현과 같이 강렬하며 극적인 표현을 의미하며, 人(⚍:소음)은 강하고 극적이던 표현이 약하고 부드러워지면서 겉과 속이 표리를 이루는 표현을, 天(⚏:노음)은 겨울이나 한밤중 같은 부정적이며 차가운 대조의 표현을 이루는 방법이다. 팔괘로 풀면 강하고 굳세며 정신적인 의미의 乾(☰)이 밑에 있고, 나약하고 부드러우며 육체적인 의미의 坤(☷)이 위에 있는 형상으로 형이상적이면서도 형이하적인 면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시쓰기이다. 천택리는 유사성을 통해 서로 마주보는 데칼코마니적인 기법이라면 지천태는 대조적인 것이 서로 마주보면서 있는 형상이기도 하며, 인간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지천태의 표현은 땅의 기운이 하강하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는 형상으로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만물을 기르는 것이며,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하나로 모이는 이치와 같다. 속의 강한 뜻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기법이기도 하며 핵심에는 군자를 변두리에는 소인을 배치한 것과 같은 대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동시에 정신과 육체, 이상과 현실, 사물과 그 안의 상징성 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를 인과관계로 끌고 가고자 한다면 지괘를 선택해야 한다. 지괘는 뽑은 괘중에서 노양은 음으로, 노음은 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노양과 노음이 변한 괘가 바로 지괘이다. 노양과 노음이 나오지 않았다면 지괘는 없는 것이며 당분간 본괘가 지속될 것임을 나타낸다. 지천태의 호괘는 이질적인 관계의 연결을 만드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는 조화와 상생의 ䷋ 천지비(天地否)이다. [출처] 11. 지천태|작성자 김기덕 12. ䷋ 천지비(天地否)   천지비는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어 상하로 막혀 머물러 있을 뿐 소통이 되지 않는 상이다. 하늘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띠고 땅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을 띠기 때문에 둘 사이는 멀어질 뿐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否를 보면 만물은 호흡과 생명활동을 구멍으로 하는데, 그 구멍(口)이 막혀(不) 곤궁한 모습이다. 위의 乾(☰)은 실하나 아래에 坤(☷)이 허하니 서로 교합하지 못하고 만물이 닫혀 있는 상이다. 하늘과 땅이 통하지 않고 아비와 자식이 갈등하며, 임금과 백성의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목, 질시하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천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지천태는 조화와 상생의 관계를 말하지만 천지비는 갈등과 반목, 부조화를 내면에 깔고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셋째의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치밀하고 꼼꼼하며, 어둡고 탁하며, 비천하고 낮은 의미를 갖지만, 넷째, 다섯째, 여섯째의 내용들은 엉성하고 명랑하며, 움직임이 있고, 밝고 맑으며, 높고 귀한 의미를 가짐으로 내면과의 갈등을 표출하고 상하의 부조화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시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지만 반대적인 입장에서의 접근이나 시각차를 나타내는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지극한 슬픔에 빠져 있지만 하늘은 기쁨으로 충만한 상이다. 人은 그 가운데에서 강한 척 하지만 불안과 좌절을 격고 있는 모양이다. 계시가 없는 신앙인과 같으며, 꿈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주인이 없는 애완동물과 같은 형상이다. 시적인 형식에 있어서도 상하의 상관관계를 갖지 못하고 배반관계, 또는 대치관계를 갖는다. 팔괘로 보면 신적 질서인 天이 인간세상인 땅에 관여하지 않고 동물적 질서인 땅은 인간 영혼의 교감이 있는 하늘에 구하지 않음으로 답답한 정서적 고립을 이루고 있다. 마주 의지하여 일어서는 人자의 형상처럼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사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否卦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거부된 상태이다. 하늘과 땅이 막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막혀버린 관계이다. 천지비는 내괘가 음이고 외괘가 양인데, 이것은 내심은 유약하면서 외면은 강한 것처럼 꾸미는 것으로 기만과 속임수가 있다.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 간에 의미의 연결을 이루지 못하고 정반대의 파국으로 치닫는 부정적 배치관계를 갖고 있다. 주제의 통일을 중시하는 시쓰기에서 단락 간에 의미가 상충한다면 통일성은 깨어질 것이다. 마인드맵에서 서로 반대되는 가지의 방향으로 뻗어감으로 의식이 확장되듯 천지비의 시쓰기는 가지에서 둥치 쪽 방향으로 주제의식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확장되고 퍼짐으로 난해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천지비의 호괘는 점점 의식의 확장을 이루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는 음양의 이치가 고르게 균형을 이룬 ䷊ 지천태(地天泰)이다. [출처] 12. 천지비|작성자 김기덕   13. ䷌ 천화동인(天火同人)   천화동인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는 火(☲:離)가 있는 모양으로 하늘에 해가 떠올라 만물이 생동하며 서로 모이는 형상이다. 同人의 의미는 사람들이 뜻을 하나로 하여 함께하는 것을 말하는데, 유일한 음인 六二(효의 두 번째 음효)를 중심으로 양들이 모이게 된다. 내면은 밝고 외면은 강건한 덕이 있으니 밝은 지혜로써 힘차게 도를 행하는 괘이다. 남과 내가 하나가 되는 형국이며, 세상의 모든 사물과 내가 하나를 이루어 교감을 갖는 관계에 놓여 있다. 두 번째에 놓인 음의 효는 나를 상징하며 나를 중심으로 모든 양들이 집중하고 있는 모양으로 시에서는 서정적 시쓰기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서정적 시쓰기의 특징은 나라는 존재의 주관적 감정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어오고 요리하며, 서정적인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천화동인의 괘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쓰기 형식이다. 효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六二의 나는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이다. 이런 풍부한 감정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밝고 아름답게 쓰고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긍정적인 양의 시각이 담겨 있다. 시인의 존재는 약간 우수에 잠길 수 있어도 그의 메시지는 세상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세상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따뜻한 세상을 담고 있다. 그 문장들이 나를 향해, 곧 글 쓰는 시인을 향해 주제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소음)는 땅에서 새싹이 움트는 형상이다. 밝게 확장되어가고 성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人(⚌:노양)은 긍정적이며 행복한 상황을 의미하며, 天(⚌:노양)도 역시 맑고 투명하며 소망으로 가득 차있다. 마인드맵 천 ‧ 인 ‧ 지의 줄기에서 가지를 뻗어갈 때 긍정적이며 건강한 의식으로 확장해야 한다. 팔괘로 살펴보면 하늘에 해가 떠있는 상이다. 그래서 색깔이 밝고 환하다. 천지는 광명으로 가득 차있고 만물은 생기가 넘친다. 시인의 순수한 내면을 통해 밝고 아름답게 세상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높은 곳에 있는 하늘과 높은 곳을 지향하는 불은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同人은 남과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뜻이 같은 것들, 즉 유사한 것들을 모아 하나의 주제를 지향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곧 주제의 통일을 의미하며 사물의 유사성과 인접성을 통해 접속하는 방법이다. 천화동인의 호괘는 음의 대상을 양적인 표현으로 이끄는 ䷫ 천풍구(天風姤)이고, 배합괘는 남성적 시각의 슬픔이나 고통과 같은 음의 배치인 ䷆ 지수사(地水師)이며, 도전괘, 착종괘는 태양처럼 밝고 환한 ䷍ 화천대유(火天大有)이다. [출처] 13. 천화동인|작성자 김기덕   14. ䷍ 화천대유(火天大有)   화천대유는 위에 火(☲:離)가 있고 아래에 天(☰:乾)이 있는 괘상으로 해가 중천에 뜬 모양으로 크게 소유함을 이른다.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밝은 상으로 모든 만물을 밝히는 상이다. 六五(효의 다섯 번째 음효)의 음이 왕위에 올라 상하의 여러 양들과 응하니 크게 형통하는 괘상이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 상으로 대유는 크게 있다는 뜻이다. 하늘 높이 솟은 태양처럼 세상만물을 비추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모양으로 태양이 없이는 세상에 생명이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만큼 고마운 것이 없으며 태양만큼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화천대유는 태양처럼 크게 이 세상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왕, 대통령, 사장, 아버지의 위치인 五爻가 음이고 모두 양으로 되어 있는 괘이다. 임금인 五爻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밝고 아름답게 쓰는 시로 경축시나 칭송시로 비쳐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왕 같은 사물, 왕 같은 대상이 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긍정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밝은 분위기로 진행되다가 다섯 번째 여성적이며 우울한 심정을 나타낸 후, 그리고 여섯 번째 문장에서 밝게 끝내는 시쓰기의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삼재인 地는 初爻인 양과 二爻인 양이 만나 노양(⚌)이 되었다. 初爻인 地는 흙, 땅, 지구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형이하적인 사물이나 물체를 끌어오는 것이 필요하다. 二爻인 地도 지옥이나 어둠과 같은 세계일지라도 양적인 형이상적 실체의 접근이 필요하다. 人은 三爻인 양과 四爻인 양으로 이루어진 노양으로 형이하적인 동물적, 육체적인 접근과 영혼, 정신적인 형이상적 접근을 긍정적이고 밝게 함으로써 양적인 힘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天은 五爻의 음적인 문장이 오고 六爻엔 양적인 문장이 옴으로써 어둡고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지만 그 속에서 영혼의 세계인 천국과 극락을 바라보는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팔괘로 보면 상괘인 외괘는 火(☲:離)이고 하괘인 내괘는 天(☰:乾)으로 이루어져 하늘 위에 해가 떠있는 형상이다. 외괘는 오후, 외적인 것, 쇠퇴, 해체, 성장, 얼굴, 객체, 대상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외괘가 태양과 같으므로 밝고 긍정적이며 행복한 접근이 필요하다. 내괘는 오전, 내적인 것, 도래, 창조, 탄생, 몸, 주체, 나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내괘는 강건하고 광명하며 건조한 의미인 天이므로 적극적이며 지배적인 힘을 띠어야 한다. 화천대유의 시쓰기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왕과 같은 사물이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 칭송이나 찬양과 같은 형식으로 밝고 아름답게 쓰는 방식이다. 지상 최대의 태양과 같은 존재인 시적 대상을 향해 신을 모시듯 격조를 높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화천대유의 변화를 살펴보면 호괘는 양적 묘사에서 마지막 음의 묘사로 뒤집는 ䷪ 택천쾌(澤天快)이며, 배합괘는 정답고 조화로운 표현인 ䷇ 수지비(水地比), 도전괘, 착종괘는 서정적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 ䷌ 천화동인(天火同人)이다. [출처] 14. 화천대유|작성자 김기덕   15. ䷎ 지산겸(地山謙)   지산겸은 地(☷:坤)가 위에 있고 山(☶:艮)이 아래에 있는 괘상으로 높은 산이 땅보다 아래에 있으므로 겸손함을 상징한다. 겸은 산같이 높은 덕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땅 같은 자의 아래에 있으니,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말고 남을 존중함이 필요하다. 겸손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상태이므로 시쓰기에서도 자신의 의도대로 쓰지 않고 독자의 의도에 맞추어 쓰는 방법이다. 독자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고, 모든 시가 그렇지만 특히 독자가 상상하며 유추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효로 풀이하면 九三만 양이고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괘이므로 첫 번째, 두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을 쓰고, 세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을 쓴 후 나머지는 모두 음의 문장으로 써야 한다. 겸괘에서의 핵심은 九三이다. 九三이 다른 존재에게 겸손해야하지만 다른 존재들도 역시 九三에게 겸손해야 한다. 그것은 곧 시에서 시의 핵심을 세 번째 문장에 오게 하는 것이다. 이 핵심은 음 중에서 양이며, 슬픔 중에서 기쁨이며, 어둠 중에서 빛이며, 절망 중에서 희망인 것이다. 그러나 산은 땅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양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내면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상으로 풀면 天(⚏), 地(⚏)는 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렇게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이지만 시인만은 내면의 강함(⚍:소음)으로 새싹처럼 고개 내밀고 있다. 고개 숙인 새싹들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게 내면을 감춘 모습엔 희망이 담겨져 있다. 또한 부드럽고 순한 여성적인 정서 속에 남성적 강함이 숨겨져 있는 모습이다. 시인 자신의 의도나 감정도 숨겨져서 객관성을 갖게 해야 한다. 팔괘로 보면 어머니를 의미하며, 유순함과 서남방과 소, 신체 중의 배를 상징하는 땅(곤괘)이 위에 있고, 산을 의미하며, 소남(小男), 정지, 동북쪽, 신체 중의 손, 개를 상징하는 산이 아래에 위치해 있다. 아래는 산으로 이루어진 단락을 의미하며, 위는 땅으로 이루어진 단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첫째 단락은 막힘과 단절, 심리적 답답함을 표현해야 하며, 둘째 단락은 유순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여성적인 정서로 이러한 단절과 막힘, 삶의 아픔과 절망을 포용하며 순응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고난 속에서 참고 인내하는 어머니와 같은 자세의 시쓰기이다.    보름달은 기울고 초승달은 커가는 것이 세상이치이고, 높은 곳의 흙은 깎이어 낮은 곳으로 퇴적되며, 물은 평면을 유지하려고 아래로 흐르는 것이 세상 원리이듯이 위대한 시인은 가장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물을 표현해야 한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다고 감탄하며 들뜰 것이 아니라 벌레 같은 마음으로 시를 쓸 때 그 시는 산을 품은 땅과 같은 큰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절망하며 흐느끼는 세상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들의 아픔에 대해 내 입장을 숨기고 그들의 입장에서 쓰는 것이 지산겸의 시쓰기이다. ䷎ 지산겸(地山謙)의 호괘는 자연스런 감정표출을 의미하는 ䷧ 뇌수해(雷水解)이며, 도전괘는 다른 하나의 시각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 뇌지예(雷地豫), 배합괘는 데칼코마니적 기법인 ䷉ 천택리(天澤履), 착종괘는 절해고도의 시인 ䷖ 산지박(山地剝)이다. [출처] 15. 지산겸|작성자 김기덕   * 단락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   단락의 변화에서 다룬 것이 본괘,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지괘이다. 여기에서의 단락 변화는 내용의 새로운 흐름 전개를 말하며, 바라보는 시각의 또 다른 방향이나 새로운 차원을 말한다. 본괘는 쓰고자 하는 시의 본질적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선풍기에 대해 시를 쓴다면, 선풍기의 모양이나 성격, 기능, 작동법, 디자인, 바람의 세기, 가격 등과 같은 선풍기의 기본적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는 방법이다. 호괘는 시적 대상에 대한 내면성이나 내면적인 재질 ‧ 부품이 갖는 정신적인 상징성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선풍기에 대해 예를 들면 더위를 식혀주는 성질이나 시간에 맞게 돌아가고 꺼지는 자기조절, 내부적인 모터의 회전에 대한 상징성 등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호괘는 단순히 내부에 있는 부품이라고 해서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을 말하는 것으로, 시적 대상이 의미하는 형이상적인 것, 또는 상징적인 것을 말한다. 도전괘는 반대편에서 본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사물의 감춰진 모습이나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 또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본 시각에서 시적 대상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선풍기의 감춰진 뒷모습이나 선풍기와 상관없는 책의 입장이나 에어컨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을 가지고 쓰는 방법이다. 배합괘는 반대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시적 대상이 처한 상황과 반대되는 상황에서 바라보고 접근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선풍기를 시적 대상으로 잡았다면 히터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든지, 겨울의 상황에서 선풍기를 묘사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착종괘는 상하의 입장을 바꾸는 방법으로 거꾸로 보기의 일종이다. 선풍기에 대해서 본다면 거꾸로 놓고 선풍기의 모양이나 쓰임새를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역전된 시각, 내려다보기나 올려다보기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괘는 흐름의 종료,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의 존재 결과나 진행 방향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결과를 말한다. 인과관계라고도 할 수 있고, 결론적인 도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의 시적 대상을 이러한 여러 각도로 접근하면서 단락을 바꾸고 묘사, 표현한다면 글쓰기의 정해진 룰과 같은 하나하나의 괘들이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64괘의 방법이 다섯 가지의 변괘를 만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글쓰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출처] 단락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작성자 김기덕     16. ䷏ 뇌지예(雷地豫)   뇌지예는 위에 雷(☳:震)가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는 괘상으로 땅을 뚫고 초목이 밖으로 움터서 즐거워하는 모양이다. 豫는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모양이니 순히 움직여 나아가는 것이다. 豫는 오직 한 개인 양효가 모든 음효와 호응하는 형태여서 도리에 순응하여 움직이면 형통하는 괘이다. 하늘과 땅도 자연의 도리에 따라 순응하고 움직이듯 나라도 도리에 순응하면 크게 발전함을 의미한다. 시에서는 하나의 시각으로 사물을 표현함을 의미한다. 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듯, 강의 시각으로 세월을 보듯, 바람의 시각에서 낙엽과 인생을 보듯 하나의 주체적인 사물을 통해 활유적,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표현 방법이다. 효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뇌지예(雷地豫)는 九四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음효로 이루어져 있다. 九四는 재상, 대신, 간부급 및 교생, 몸통, 몸의 앞부분, 형, 40대의 위치를 의미한다. 또한 九四는 사물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되 나머지 효가 모두 음이므로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시가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부연한다면 음의 문장은 右, 地, 母, 女, 柔, 靜, 下, 偶, 重, 濁, 暗, 後, 末, 逆, 小, 卑, 枝, 老, 哀, 惡, 慾, 病, 死, 緻密, 消極的, 陰凶 등을 나타낼 수 있는 문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하늘(⚏:노음)과 땅(⚏:노음)이 모두 노음인데, 사람만 소양(⚎)이다. 이는 천지만물이 음으로 둘러싸여 있고 세상을 보는 사람 또한 음의 상태지만, 내면의 음을 감추고 양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 양적인 시각이 자신을 내세우지 못하고 사물의 시각을 빌려 음의 세상을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위에 온 震은 二陰 속에 一陽이 처하여 문이 열려있는 모양으로 一陽이 밖으로 강건히 움직여 변화를 이루는 상이다. 우레가 진동하는 형상이며, 땅 속의 초목이 움트는 상이다. 오행상 양목에 속하며, 물상으로 발(足), 용, 큰길 등을 상징한다. 아래에 온 地는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지극히 유순하고 광활하며 습하다. 안이 비어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모양으로 만물을 생육, 번성시키는 땅을 의미한다. 어머니, 오장육부를 담은 배, 유순한 소 등이 여기에 속하며, 평탄한 대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땅 위에 울리는 우레와 같은 모양으로 겨울 동안 움츠렸던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지각을 뚫고 힘차게 땅 위로 오르는 기상을 갖고 있다. 현실의 미성숙을 내면의 강함으로 극복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을 느끼게 해야 한다. 뇌지예(雷地豫)의 변괘에서 인과관계로 가자면 지괘를 살펴보아야 하고, 내면의 변화는 호괘인 ䷦ 수산건(水山蹇)으로, 반대 입장은 도전괘인 ䷎ 지산겸(地山謙)괘로, 반대상황은 배합괘인 ䷈ 풍천소축(風天小畜)괘로, 상하의 입장변경인 착종괘는 ䷗ 지뢰복(地雷復)괘로 확장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16. 뇌지예|작성자 김기덕   17. ䷐ 택뢰수(澤雷隨)   택뢰수는 위에 澤(☱:兌)이 있고 아래에 雷(☳:震)가 있는 형상으로 아래에서 震이 움직임에 따라 위에서 연못물이 즐겁게 일렁이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隨는 때를 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가 동에서 떠서 남을 거쳐 서에서 지듯이 해의 운행에 따라 만물이 좇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에는 움직이는 성질이 있고 밖으로는 기뻐하는 덕이 있으니 실천에 옮겨서 기쁜 결실이 있게 되는 괘이다. 효의 위치를 보면 음과 양이 반반으로 섞여 있는데,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시작하여 두 번째, 세 번째는 음의 문장으로 표현된 후,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양의 문장으로 표현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룬 다음, 음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하는 형식이다. 시의 정서를 통일시키는 데 있어서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어떻게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음과 양의 관계는 배치의 관계로 양지와 음지를 동시에 그리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양의 문장과 음의 문장의 관계는 음영을 표현한 미술의 빛과 어둠의 기법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빛이 살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하고, 어둠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빛이 존재해야 하듯 배치관계에서의 음양의 조화를 통해 언어적 그림의 선명한 감정전달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천 ‧ 인 ‧ 지가 모두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地(⚍:소음)는 내면은 강하고 외면은 부드러운 모습으로 형이상적인 땅의 모습보다는 현실적인 땅의 모습에 치중되어 있는데, 天(⚍:소음)도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하늘보다는 현실적인 하늘이 강조되어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人(⚎:소양)은 현실적인 면보다는 이상적인 면이 강하고, 종교나 제의에 치우쳐 있다. 이는 현실을 표현하면서 정신적인 고뇌와 신적인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해 보면 밑에는 우레가 진동하며 초목이 움터 나오는 형상인데, 위에는 연못이 출렁이며 기쁨을 누리는 형상이다. 팔괘의 두 단락으로 보면 첫째 단락은 생동하며 초목이 움트는 것 같은 활동성을 표현하고, 둘째 단락은 연못의 물이 춤추며 기뻐하는 것 같은 이미지의 표현이다. 택뢰수는 강한 자가 유순한 자를 따르는 형태인데, 유순한 자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임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화합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우레가 못 속에 잠겨 있는 상으로 이는 평화와 안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요함은 애수와 석양의 따사로움을 연상케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물결이 일며 생성과 발전의 분위기가 5월의 풀향기처럼 감도는 싱싱하고 젊음이 가득한 고요함이다.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시쓰기의 방법이다. 택뢰수의 호괘는 점점 커지는 확장적, 상승적 묘사인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 배합괘는 순탄한 논리의 배반적 기법인 ䷑ 산풍고(山風蠱), 착종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단락을 연결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다. [출처] 17. 택뢰수|작성자 김기덕   18. ䷑ 산풍고(山風蠱)   산풍고는 山(☶:艮)이 위에 있고 風(☴:巽)이 아래에 위치해 있는 상으로 산 아래 바람이 불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형상이다. 蠱는 그릇(血) 위에 세 마리 벌레가 있는 모양으로 그릇을 좀먹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巽은 한 음이 생하는 모양이고 艮은 두 음이 자라는 모양이니 음이 성하는 가을의 때와 같다. 안으로는 순하고 밖으로는 그침의 덕이 있으니 산과 같은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형상이다. 효로 살펴보면 백성이나 신입사원, 신입생, 10대와 같은 初爻가 음으로 시작하고, 재상, 간부, 몸통, 40대와 같은 四爻, 왕, 대통령, 사장, 아버지, 50대와 같은 五爻가 음으로 이루어진 산풍고는 병들기 쉬운 인생의 고비를 상징하고 있다. 10대의 사춘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인생의 미래는 달라진다. 또한 40대, 50대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허무로 인해 병들기 시작하는 때이다. 병적 허무와 정신적 공황기의 절망적 감정을 시의 내부에 심음으로써 벌레 먹은 듯 감정적 천공을 만드는 시쓰기이다. 즉 양의 바탕 위에 음의 요소를 구멍 뚫듯 배치하는 것이다. 사상으로 보면 하늘(⚎)과 땅(⚎)은 같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만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은 형이상적인 천국, 영혼의 세계를 그리고 있고, 땅 또한 지하의 형이상적인 세계인 지옥, 어둠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나 人의 세계만 물질적, 육체적인 지향성을 갖고 있다. 이는 건전한 정신세계의 병들음이며, 푸른 잎의 구멍과 같다. 하나의 동질적 바탕 위에 이질적 요소의 구멍 뚫기와 같은 시쓰기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산(☶:艮)인 一陽二陰이 위에 있어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치는 상인데, 小男, 집지키는 개, 작은 길, 작은 돌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는 一陰이 二陽 아래 엎드려 숨어 있는 모양으로 공손 ‧ 겸양하여 자신을 낮추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長女, 노끈, 닭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 아래 바람이 부니 낙엽이 떨어지는 형상이다. 첫째 단락은 나무나 풀과 같이 부드럽고 순탄하며, 땅에 뿌리내리기와 같은 시쓰기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락은 이러한 순탄함이 막히면서 절망과 좌절의 아픔이 짓누르는 듯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순탄한 논리의 배반이 군데군데 역설적으로 도입됨으로써 아름다운 단풍잎이 아니라 벌레 먹어 구멍이 뚫려 감정을 더욱 자극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젊은 시기를 보내고 노년의 후회와 허무, 삭막함을 표현하는 시쓰기도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산풍고의 변괘 중 호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배합괘는 ䷐ 택뢰수(澤雷隨), 착종괘는 ䷴ 풍산점(風山漸)이다. [출처] 18. 산풍고|작성자 김기덕   19. ䷒ 지택림(地澤臨)   지택림은 위에 地(☷:坤)가 있고 아래에 澤(☱:兌)이 있는 모양으로 땅에 못물이 고여 모든 만물을 기르는 상이다. 臨은 모체 속에서 양이 자라, 나올 때가 임박한 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의 기운을 받아 수태한 후 품성을 갖추어 만물이 나오는 상이다. 안의 兌는 기쁨의 상이고, 밖의 坤은 순한 모양이니 기뻐하면서 순하게 나아가는 형상이다. 절기로는 한겨울인 12월이며, 새로운 한 해가 임박하는 때이다. 復괘는 양이 처음 나오는 괘로서 하늘의 문이 열리는 때라면, 양이 하나 더 자라 땅의 문이 열리는 때이고 곧이어 만물이 생겨나는 형상이다. 귀한 양으로 復(䷗)에서 더 발전하여 백성에게 임하니 크게 형통하고 이로운 것이다. 효로 이 상을 풀이하면 初爻와 二爻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나머지 효들은 모두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구성이다. 이 모양은 여러 개의 음이 꽃받침처럼 받쳐주고 그 속에서 양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양의 문장은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양의 모양을 띠어야 하고 나머지 음의 문장들은 이 두 문장을 뒷받침하는 꽃받침과 같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양의 문장은 꿈이나 이상과 같은 것이며, 음의 문장은 이 꿈과 이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현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양의 문장은 형이상적이요, 음의 문장은 형이하적이어서 두 개의 양의 문장에 초점을 두고 나머지 문장은 배경적인 구성을 하는 시쓰기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양(⚌)이고, 人은 노음(⚏)이며, 天도 노음(⚏)이다. 땅에 속한 나무나 짐승, 곤충들은 생기로 가득 차 있지만, 하늘은 아직 흐리고 기온이 풀리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생기를 찾지 못하고 절망과 좌절 속에 있다. 하늘과 인간은 침체되어 있지만 땅만은 새로운 봄을 준비하며 부지런히 얼음 속으로 물이 흐르는 모양이다. 땅의 위대함을 통해 사람과 하늘이 회복되어 가는 희망적 시쓰기 기법이다. 팔괘로 보면 땅(☷) 속에 못(☱)이 있는 모양으로 깊은 연못을 상징한다. 깊은 연못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영감과 교훈을 준다. 깊고 푸른 연못의 맑은 물을 보면 청춘이 즐겁고 인생에 희망이 샘솟는다. 아직 땅은 어둡고 축축하며 무거운 감정이다. 하지만 그 땅 속에서 숨 쉬는 연못은 희망을 비춰준다. 깊고 심오한 영감으로 현실의 어둠을 극복하고 맑고 고요한 심성의 깨달음으로 희망을 찾는 모양이다. 첫 단락은 삶의 기쁨과 깨달음의 고요가 거울 같은 수면처럼 차분하게 나타나야 하고, 둘째 단락은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암울한 현실과 미완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 ䷒ 지택림(地澤臨)은 바닥에 생명처럼 솟아나는 원천이 있다. 고요히 정지하여 있지만 물은 항상 새롭다. 그래서 부패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고, 격돌하지도 않고, 순조롭고 자연스러우면서 묵은 것과 새것을 교체하면서 변하지 않는다. 음의 문장 속에서 양의 문장이 새로운 꿈과 희망을 제시하며 기쁨을 갖게 하는 시쓰기이다. 지택림의 변괘 중 호괘는 근본을 회복하여 새롭게 나아가는 ䷗ 지뢰복(地雷復)이며, 배합괘는 형이상적인 시를 의미하는 ䷠ 천산둔(天山遯), 도전괘는 군자의 교화가 세상을 감화시키는 ䷓ 풍지관(風地觀), 착종괘는 산문시적인 ䷬ 택지취(澤地萃)이다.   20. ䷓ 풍지관(風地觀)   風地觀은 風(☴:巽)이 위에 있고 地(☷:坤)가 아래에 있는 상으로 땅 위에 바람이 불어 만물이 이를 따라 흔들리는 형상이다. 觀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두루 살피는 모양이니 시적 대상에 대한 관조적인 접근으로 마치 황새가 창공을 날면서 먹이를 찾는 것과 같다. 안으로 지극히 유순하고 밖으로는 부드러운 덕이 있는 모양이니 군자가 마음을 비우고 극한 경지로 들어가 관찰하고 연구하는 괘이다. 또한 땅 위에 바람이 불어 모든 초목이 흔들리는 모양이니 군자의 교화가 세상에 감화를 일으키는 형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다섯 번째 문장과 여섯 번째 문장이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는 형태이다. 觀의 살핀다는 의미처럼 음의 시각으로 시적 대상을 자세히 관찰, 세밀하게 묘사하다가 결말 부분에서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짓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슬픔이나 절망, 고통과 같은 음의 성격으로 진행되다가 희망이나 꿈을 불어 넣는 식의 양의 결말로 끝부분을 마무리하는 시의 형태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삼재 중 地는 ⚏(노음)으로 겨울이나 한밤중과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 어두운 현실이나 암담한 미래와 같은, 현실적인 사실이나 사물의 위치, 상태 등이 지극히 쇠퇴해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또한 人도 마찬가지로 ⚏(노음)으로 상황뿐만 아니라 시인이나 시의 주체적 인물이 음의 극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슬픔이나 절망, 고독의 감정을 가지며 지극히 음의 세계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天에서 ⚌(노양)으로 급반전함으로써 세상의 변화와 심리적, 정신적인 변화의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형식의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땅 위에 바람이 부는 형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의미를 가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쓰기의 형태로 관조적인 시쓰기이다. 몰입이 되어서 사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치열함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관찰하고 지켜봄으로써 어둡고 답답한 현실의 음적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꿈을 나누는 관조적 묘사를 의미한다. 풍지관의 바람은 얼핏 폭풍이나 태풍과 같은, 나무를 부러뜨리고 지붕을 날려버리는 사나운 바람을 연상하거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매섭게 나무 끝을 불어가는 삭풍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풍지관은 그러한 사납고 어지러운 바람이 아니라 풀잎도 꽃봉오리도 즐겁게 어루만져 주는 봄바람이거나 햇살에 눈부시게 쏟아지는 신록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둡고 차가운 현실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희망적 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풍지관의 변괘 중 호괘는 ䷖ 산지박(山地剝)이며, 도전괘는 ䷒ 지택림(地澤臨), 배합괘는 ䷡ 뇌천대장(雷天大壯), 착종괘는 ䷭ 지풍승(地風升)이다.   21. ䷔ 화뢰서합(火雷噬嗑)   火雷噬嗑은 火(☲:離)가 위에 있고 雷(☳:震)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雷電이 합하여 빛나고 두 물건이 서로 함께하여 합하니 火雷噬嗑이다. 噬는 씹는 것이요, 嗑은 다물어 합하는 것이니 입 속의 물건을 씹어 합하는 의미가 있고, 위턱과 아래턱 사이에 물건이 들어 있는 괘의 모양을 하고 있다. 상괘의 離는 번개이고 하괘의 震은 우레로서 번개치고 우레가 따름으로써 서로 모여 합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침이 지나 한낮이 되는 때이며, 봄철이 지나 여름이 되는 시기이니 만물이 통하는 이치가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빨 사이에 끼어있는 음식과 같이 핵심적 요소(시적주체)가 오고 다섯 번째는 음의 문장, 여섯 번째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문장이라고 명명된 부분은 꼭 하나의 문장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내용적인 의미의 통일체를 말한다. 즉 하나의 시적 대상을 음과 양의 시각으로 씹듯이 밀도 있고 다양하게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소음(⚍)으로 이루어져 내면은 강하지만 외면은 부드럽고 약한 모양을 갖고 있다. 人과 天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속은 부드럽고 약하지만 외면은 강하고 밝은 모습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의 의식은 외향적인 하늘과 내향적인 땅의 가운데에서 합하여져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번개가 치고 그 뒤를 천둥이 따르듯이 시인의 의식 속에 하늘과 땅이 합하여 통합된 주제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이며, 정신과 물질의 조화, 음과 양의 조화가 있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번개가 친 다음에 우레가 있는 모양을 이루기도 하고, 하늘에서 번개가 치자 땅에서 우레가 울리는 형상이다. 하지만 시쓰기에서 첫째 단락이 우레의 의미를, 둘째 단락이 번개의 의미가 있는 의미의 배치를 갖기 때문에 이는 역인과적 관계를 의미하며 결과 후 과정을 쓰는 것과 같은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의 섞임은 음식물을 씹었을 때처럼 잘 섞여야 한다. 윗니 아랫니가 음식을 끊고 씹으며 서로 맞닿아 조화를 이루듯이 剛强을 상징하는 양괘인 震과 유화를 상징하는 음괘인 離가 합력하는 긍정적인 시쓰기이라고 할 수 있다. 火雷噬嗑의 호괘는 슬픔과 우울에 침잠된 ䷦ 수산건(水山蹇)이며, 도전괘는 의식의 절제를 의미하는 ䷕ 산화비(山火賁), 배합괘는 정서와 사상의 우물파기인 ䷯ 수풍정(水風井), 착종괘는 다양한 묘사와 풍성한 의식의 ䷶ 뇌화풍(雷火風)이다. [출처] 21. 화뢰서합|작성자 김기덕   22. ䷕ 산화비(山火賁)   산화비는 山(☶:艮)이 위에 있고 火(☲:離)가 아래에 놓여 산속에 불이 있는 모양이다. 생장의 과정을 마치고 아름답게 결실을 맺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山火賁이다. 賁는 종자가 다 여물어 열매 맺는다는 뜻으로 열매(貝)가 많이 매달린(卉) 모양으로 ‘빛나다, 꾸미다, 열매 맺다’라는 뜻이 있다. 안으로 밝고 화려함에도 밖으로 그치는 덕이 있으니 꾸밈의 소박한 절도를 지켜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순리에 따르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와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산화비의 여섯 효를 압축하면 ☲(火)의 형태를 갖는데, 이는 내면의 아픔을 감추고 밖으로 아름답게 승화된 시쓰기이다. 그래서 첫 문장과 끝 문장을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중간에 음의 감정을 내비침으로 전체적으로 내면의 고통은 안으로 숨기고 밖으로는 이러한 진실을 꾸밈으로 더욱 아픔을 절제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 내면적인 절제의 정한적 요소와 형식적인 절제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는 배치를 통한 절제된 내면을 나타내고자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소음(⚍)으로 강한 내면을 감추고, 유약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독자에게 감정적 호소가 되어야 한다. 이 감정적 호소는 낭만주의적인 쏟아놓음이 아니라 절제 속의 호소여야 한다. 이의 구체적인 방법은 땅의 사물적 효는 양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땅의 정신적 효는 음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양적 사물 속에서 음의 감정 및 정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人의 소음(⚍)에서도 계속되다가 마지막 단계인 天의 배치에서 음적인 감정을 뒤엎고 양의 감정으로 승화시켜 희망적인 색채를 띠게 하는 방법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산이 불을 가두고 있는 형국이다. 불은 밝히 드러내고자 하는 감정이며, 여러 가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과잉적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산이 막고 있다. 산은 그친다는 뜻과 가로막는 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산화비(山火賁)의 모양을 통해 풀이해 보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가로막고 있는 상이다. 그래서 의식이 절제되어야 하고 슬픔이나 절망의 음적 감정이 수면에 잠긴 채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와 같은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통해 함축적인 표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산화비의 변효 중 호괘는 감정표출의 시인 ䷧ 뇌수해(雷水解)이며, 도전괘는 음양의 조화를 이룬 ䷔ 화뢰서합(火雷噬嗑), 배합괘는 절망적 현실을 표현한 ䷬ 택수곤(澤水坤), 착종괘는 하이퍼적 기법인 ䷷ 화산여(火山旅)이다. [출처] 22. 산화비|작성자 김기덕   23. ䷖ 산지박(山地剝)   산지박은 산(☶:艮)이 위에 있고 地(☷:坤)가 아래에 놓여 땅 위에 높이 솟은 산이 아래가 깎여 무너지는 모양이어서 山地剝이라고 한다. 剝은 근본 종자를 의미하는 彔(근본 록)을 刂(선칼 도: 칼, 낫 등)로 베어 열매를 거둠을 이른다. 剝은 안으로 유순히 행하고 밖으로 두터이 드러내지 않으니, 음에 의해 박락(剝落) 되는 때를 알아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때를 기다려 머무는 덕이 있다. 박괘는 늦가을로서 음이 극성해지는 상강 절기에 해당하니, 낙엽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때이며, 대지가 비바람에 침식되어 높이 솟아 깎이는 모습이다. 시에서는 높은 산에 홀로 선 듯한 고독과 절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고함의 시이다. 또한 외로움이나 사회적 왕따, 궁지에 몰린 자와 같은 절해고도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에서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다가 마지막 여섯 번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으로 끝맺는 방법이다. 전체 분위기에서 양의 문장은 중심이 되는 의식이지만 사라져야 할 의식, 아쉬움의 표현인 의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음의 감정은 살고 마지막 남은 양의 감정은 떨어져 나가는 낙엽처럼 아름답지만 허무한 것이다. 이 양의 감정은 아쉬움이며, 허무이며, 또한 다음해를 기약하는 결실이며 씨앗이기도 하다. 지속되는 음의 감정이 종국적인 양의 감정을 밀어내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음(⚏)으로 시기로 보면 한겨울이고, 때로 보면 한밤중이며, 정신으로 보면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음의 기운이 人(⚏:노음)에서도 지속되다가 天(⚎:소양)에서 언뜻 양의 기운이 나타나지만 한밤의 유성과 같이 사라져버릴 것을 예감함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갖게 하는 시쓰기이다. 이는 강물 위에 살얼음과 같으며 튕겨져 나가기 직전의 샴페인 병마개와 같은 상태이다. 그 속에서 극적 긴장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몰 직전의 잔광을 그리는 것과 같거나, 엄동설한 직전의 가냘픈 햇살과 같은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땅 위에 솟아 있는 산의 형상을 갖고 있는데, 柔가 剛을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소인의 세력이 강대해져 바른 정치를 하려 해도 되지 않는 상황과 같이 음적 정서가 팽배해져 양적인 정서가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양마저 변질시켜버릴 듯한 기세다. 짝수, 땅, 어머니, 여자, 부드러움, 고요함, 아래쪽, 우측, 무거움, 탁함, 어두움, 끊어짐, 들어감, 나중, 끝, 반대, 작음, 천함, 가지 등과 같은 음의 배치를 이룬 후 마지막 연에서 양의 문장을 배치하여 극적인 상황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지박의 변괘인 호괘는 여성적 감정의 표현인 ䷁ 중지곤(重地坤)이며, 도전괘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 지뢰복(地雷復), 배합괘는 양적 시각의 막판 뒤집기인 ䷪ 택천쾌(澤天夬), 착종괘는 독자의 의도에 맞추는 ䷎ 지산겸(地山謙)이다. [출처] 23. 산지박|작성자 김기덕   24. ䷗ 지뢰복(地雷復)   지뢰복은 地(☷:坤)가 위에 놓이고 雷(☳:震)가 아래에 놓인 괘상으로 땅 속에서 양이 생기기 시작하여 회복하는 모양을 이루니 地雷復이다. 復은 종자인 한 양(日)이 깊은 땅 속에서 서서히 움터 나오는(⼻, 行, 也) 뜻을 가지고 있다. 내면에는 움직임이 있고 외면으로는 유순함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움직여 나아감이 순조로운 모양을 이루고 있다. 復卦는 동짓달(음11월)괘로서 음이 극성한 때이다. 땅 속에서 초목이 발아하는 모습인데, 근본을 회복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를 가지며, 서두르지 않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 사람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初爻만 양이고 모두 음효로 이루어진 모양으로 첫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음의 문장으로 배치하는 방법이다. 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작은 양의 새싹이 움트는 형국으로 절망 중에 희망을 묘사하는 시이며, 혼탁함 속에서 근본을 찾고자 하는 시이다. 얼어붙은 강물 속에서 소생하는 봄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정신, 현실, 의지를 표현하는 시쓰기로 새로운 시작의 모양을 뜻하고 있다. 사상으로 표현하면 땅에 속한 물질적인 존재의 미미한 변화만 감지될 뿐, 땅의 형이상적인 형태나 人의 형이상적인 면이나 형이하적인 면들은 모두 음의 상황이다. 또한 하늘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하늘이나 추상적인 하늘이 모두 음의 상황으로 채워져 있다. 그림으로 그린다면 하늘도, 사람도, 땅도 다 어두운데 땅 속에서만 미미한 생명의 움직임이 감지되는 등불을 그리는 것과 같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며, 시의 제목이나 주제의식에 맞는 하늘적인 요소(눈에 보이는 sky든 정신적인 이상세계든)와 사람과 연관된 삶이나 관념, 또한 땅에 속한 모든 사물과의 차원적인 관계에서 땅의 사물적 요소만이 양으로 표현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양의 사물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양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소금과 같은 존재의 사물이다. 팔괘로 보면 우레의 에너지가 땅 속에 살아있는 것이 復의 괘상이다. 겹겹이 쌓인 여러 음효 밑에 다만 한 개의 양효가 있는데, 중첩된 음의 기운 속에 양의 기운이 살아나고 있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일몰 직전의 잔광과 같은 산지박의 시쓰기의 정반대로 극한의 벽을 뚫고 빛이 보이는 새벽과 같은 새로운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한 줄기의 어린 광선이지만 그것은 장차 천지를 지배하며 음기와 암흑을 정복하여 퍼져가는 광명이다. 첫째 단락은 변화하고 생동하는 우레의 형상을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암흑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땅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잠에서 깨어나는 천지만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지뢰복의 변괘 중 호괘는 여성적 정한의 감정인 ䷁ 중지곤(重地坤)이며, 도전괘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고함의 ䷖ 산지박(山地剝), 배합괘는 음적 대상도 아름답게 표현한 ䷫ 천풍구(天風姤), 착종괘는 환유적 표현인 ䷏ 뇌지예(雷地豫)이다. [출처] 24.지뢰복 |작성자 김기덕   * 문장 및 단락 구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   효의 입장에서 시의 형식을 보면 여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듯이 보이지만, 하나의 효가 꼭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효가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내용적 연결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섯 개의 효가 압축되어 세 개의 효로 구성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重天乾(䷀)은 乾(☰)으로, 重地坤(䷁)은 坤(☷)으로, 山澤節(䷨)은 離(☲)로, 雷風恒(䷟)은 坎☵과 같이 압축될 수 있기 때문에 세 개의 문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또한 이 세 개의 문장도 乾(☰)은 양(⚊)으로, 坤(☷)은 음(⚋)으로, 離(☲)는 음(⚋)으로, 坎(☵)은 음(⚋)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배치의 형태를 참고하여 자유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시 전체를 천 ‧ 인 ‧ 지의 시각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는 차원의 구분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한 우주만물의 차별적 시각이다. 이 천 ‧ 인 ‧ 지 속에 우리가 쓰고자 하는 모든 시적 대상들이 다 들어 있다. 그 대상을 차원에 따라 구분하여 시의 배치에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과 재배치의 효율성은 논리마인드맵 기법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마인드맵 기법은 둥치에서 줄기, 줄기에서 가지, 가지에서 잎이나 열매로 분화되듯이 주역적 시쓰기에서는 태극에서 양의, 양의에서 사상, 사상에서 팔괘, 팔괘에서 육십사괘로 분화되는 과정을 공부했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태극이 양의, 사상, 팔괘, 육십사괘가 되듯이 하나의 문장이 두 문장, 두 문장이 네 문장, 네 문장이 여덟 문장, 여덟 문장이 육십사 개의 문장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반대로 육십사 개의 문장이 한 문장이 될 수도 있고 두 문장이 될 수도 있으며, 여덟 개의 문장이 두 개의 문장, 네 개의 문장으로 변화될 수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밀한 법칙이 존재하고 그 법칙에 의해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상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사상의 기본적 요소는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이지만 이 네 가지의 상이 육십사괘에서는 천 ‧ 인 ‧ 지의 여섯 개의 효 구조로 배치되기 때문에 세 개의 단락을 형성한다. 이 단락은 표면적인 단락과 이면적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 ‧ 서 ‧ 결이나 서론 ‧ 본론 ‧ 결론의 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 팔괘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육십사괘는 乾 ‧ 兌 ‧ 離 ‧ 震 ‧ 巽 ‧ 坎 ‧ 艮 ‧ 坤의 팔괘가 중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팔괘는 세 개의 효로 이루어져 세 개의 문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이 세 개의 문장을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육십사괘는 다시 팔괘가 될 수 있고, 팔괘는 사상이 될 수 있고, 사상은 하나의 태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자유로운 확장과 분화, 팽창이 가능하고, 또한 수축과 압축, 절단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십사괘의 설명과정에서 문장이나 단락으로 표현된 것들은 정확무오한 문법적 해석을 통한 명칭이 아니라 보다 확산되고 재조명된 유연한 명칭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문장 및 단락 구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작성자 김기덕   25. ䷘ 천뢰무망(天雷无妄)   천뢰무망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는 雷(☳:震)가 와서 하늘 아래 우레가 울리는 모양으로, 뇌성벽력이 울리면 누구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듯이 천도를 따라 바르게 행하므로 无妄이다. 无妄은 하늘의 마음을 갖고 여색을 멀리하며 본성 그대로 행한다는 뜻이 있다. 본성을 회복하면 망령됨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위에 있는 하늘은 강건하고 아래에 있는 우레는 진동하니 강건하게 나아가는 덕을 갖춘 상으로, 하늘과 같이 공정무사하고 강건한 도로써 본연의 마음을 지켜 하늘에 순응하는 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배치한 후 나머지 네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 문장은 모두 양으로 배치하는 형식이다. 망령됨이 없이 하늘의 뜻을 따라 쓰는 방법으로 시인의 감정을 최대한 줄이고 하늘의 큰 진리를 쓰고자 하는 방법이다. 자칫 관념적으로 치우치기 쉬우나 절대적으로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소음)와 人(⚎:소양)이 대립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서 서로의 생각이나 표현이 통일을 이루기가 어려우나 天(⚌:노양)이 밝고 강건하므로 하늘의 뜻을 따라 행하면 다툼이나 거침이 없고 통일된 주제 의식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시의 전개가 형이상적이고 관념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물을 끌어와 배치관계를 이미지적으로 만들어 주도록 해야 한다. 사물의 속성이나 시인의 생각에 치우치지 말고 보다 넓은 보편적 진리나 원리를 생각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팔괘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은 우레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화가 많고 흔들림이 많은 것이지만 생기가 가득한 단락이다. 두 번째 단락은 지적이고 강건하며, 하늘의 큰 이치가 담긴 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레는 땅을 의미하고, 안을 의미하며, 물질적인 형이하를 의미하지만 乾은 하늘을 의미하고, 밖을 의미하며, 형이상을 의미한다. 형이상적인 단락과 형이하적인 단락이 대치를 이루나 형이상적인 단락이 시의 주제성을 이끌고 중심역할을 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따르는 시쓰기이다. 천뢰무망은 하늘을 의미하는 건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의미하는 진괘가 아래에 있어 우레가 하늘에서 크게 진동하고 있는 모양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의 엄한 뜻이며 세상을 호령하는 하늘의 명령인 것이다. 하늘의 시각에서 세상과 인간을 향해 우레 같은 의미의 시를 표현으로 나타내 주어야 하는 시이다. 天雷无妄의 변괘 중 호괘는 점점 의식의 확장을 꾀하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는 스케일이 크고 웅장한 시 ䷙ 산천대축(山天大畜), 배합괘는 대지를 뚫고 나오는 나무의 기상을 간직한 ䷭ 지풍승(地風升), 착종괘는 강렬한 남성적 정서에 대한 여성적 정서의 조화를 이룬 ䷡ 뇌천대장(雷天大壯)이다. [출처] 25. 천뢰무망|작성자 김기덕   26. ䷙ 산천대축(山天大畜)   산천대축은 山(☶:艮)이 위에 있고 天(☰:乾)이 아래에 있어 물건이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높이 쌓이는 모양이다. 대축은 크게 쌓는다는 뜻으로 아래의 하늘은 大 ‧ 玄, 위의 산은 田의 모양이다.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그침이 있으니 산에 하늘의 도가 밀려와 크게 쌓이는 이치가 있다. 흙이 크게 쌓여야 큰 산을 이루고 사람도 학문과 경험이 쌓여야 큰일을 행할 수 있듯이 글을 씀에도 크게 쌓은 사람과 쌓은 것이 없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가 없다. 효를 분석해보면 첫째, 둘째, 셋째 효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강하고 튼튼한 받침대를 형성하듯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감정과 정서, 의지의 표현이 긍정적이고 강해야 한다. 넷째, 다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유약한 음이 합하여 모이는 형식이다. 하늘의 양기가 아래로 내려 모이는 것이 대축이다. 또한 밑의 세 양은 흐르는 강물과 같지만 위에 있는 두 개의 음이 가로막음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이게 된다. 마지막 상구는 막혔던 것이 넘침으로 한 순간 세상을 범람하게 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산천대축의 효를 통한 시쓰기는 初九, 九二, 九三의 격앙된 감정이 六四, 六五에서 절제되고 응축되어 고인 내적 감정이 마지막 문장에서 승화되어 흘러넘치는 시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양(⚌)으로 강하고 건실한 힘이 넘친다. 人은 소음(⚍)으로 내면은 강하지만 외적인 표현은 부드럽고 연약하다. 그래서 유약한 감정이 넘치려 하지만 天이 이러한 감정을 억제하고 누르면서 강하고 희망적인 승화의 과정을 나타낸다. 大畜은 장애요소가 클수록 큰 감정을 싹틔우고 큰 감정이 승화되어 보다 더 큰 감동을 만들어 내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산 속에 들어 있는 하늘이다. 산 같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 있는 하늘의 큰 뜻이다. 이러한 큰 뜻은 인생의 풍상을 견디고 산같이 살아온 사람일수록 많이 쌓여 있다. 깊은 내공을 쌓고 그 내공을 풀어내는 시쓰기이다. 산이 그 속에 하늘의 큰 에너지를 받아 축적하고 있는 상태이다. 산은 현실이나 사물적인 것이지만 하늘은 이것들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이며, 형이상적인 상징성을 의미한다. 산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뜻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시적 표현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비행기를 타고 밀림지대를 날아보면 나무의 바다, 풀의 바다가 펼쳐진다. 대해의 물굽이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과 나무들을 키우는 산의 힘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 산이 기르는 힘, 축적된 에너지의 강한 시심을 풀어내는 상징적인 접근 방법이다. 山天大畜의 變卦 중 호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단락을 이어주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는 하늘에 순응하는 시쓰기인 ䷘ 천뢰무망(天雷无妄), 배합괘는 산문형식의 시인 ䷬ 택지취(澤地萃), 착종괘는 철학적, 종교적 시각인 ䷠ 천산돈(天山遯)이다. [출처] 26. 산천대축|작성자 김기덕   27. ䷚ 산뢰이(山雷頤)   산뢰이는 山(☶:艮)이 위에 있고 雷(☳:震)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산 아래 초목이 길러지며, 인체로는 턱의 형상으로 위턱은 그쳐있고 아래턱은 움직임으로써 물건을 씹어 몸을 기르는 상이 山雷頤이다. 頤의 의미를 풀이하면 臣(신하신)은 六二부터 六五까지의 음효를 의미하며, 頁(머리혈)은 上九 양효가 머리가 되어 뭇 효를 기른다는 뜻이다. 上九 양효가 위턱이 되고 初九 양효가 아래턱이 되며, 중간의 음효들이 이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頤는 음식을 씹어서 몸을 기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수양하여 자신을 기르고 남을 기르는 修己治人의 의미를 가진다. 효로 풀이하면 아래턱과 위턱을 의미하는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빨을 상징하는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식이다. 이는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도 있게 먹듯 艮으로 그치고 아래의 震으로 동하며, 가운데는 비어있는 입의 모양이다. 마음을 비우고 언어를 절제함으로 시를 써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산뢰이는 대나무와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강하고 단단함이 표면을 감싸고 있지만 내부는 텅 비어서 가볍고 휘어질 수 있는 덕이 있다. 강직함과 절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욕심을 비우고 푸른 정신으로 꼿꼿한 선비정신과 같은 기질의 시쓰기이다. 또한 속이 빈 피리의 소리와 같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인내와 의지가 담긴 양의 문장이지만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의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서 피리는 강하지만 그 소리는 구슬프고 가냘프듯 시의 형식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 산뢰이는 ☲의 상으로 땅과 하늘은 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람만 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형이상적인 정신세계와 형이하적인 물질세계가 양적요소로 생기가 가득하지만 시인 자신만 음의 감정에 충일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음의 감정은 슬픔과 절망에 찬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空의 세계와 같은 것이다. 비어 있음으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듯, 물질과 정신 속에서의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내면 비우기와 같은 시이다. 팔괘로 보면 산뢰이는 턱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와 맨 위의 양효는 잇몸과 같고 그 안에 있는 네 개의 음효는 이빨처럼 보인다. ☶(산)은 위턱, ☳(우레)는 아래턱과 같은데, 산은 그친다는 뜻으로 움직이지 않는 위턱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레는 움직인다는 뜻으로 씹을 때 움직이는 아래턱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이렇게 씹음으로써 생명이 유지되고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 기른다는 의미의 산뢰이는 물고기를 기르는 바다와 같고, 나무를 기르는 숲과 같으며 새를 기르는 하늘과 같은 것이다.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남에게 양분을 공급해야 한다. 이렇게 기르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워 쓰는 시가 山雷頤의 방법이다. 산뢰이의 호괘는 ䷁ 중지곤(重地坤)이며, 배합괘는 처음의 의도가 새롭게 변함으로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 착종괘는 음적 요소들이 주변을 이루고 있지만 정작 시인은 양에 가득찬 시쓰기의 ䷽ 뇌산소과(雷山小過)이다. [출처] 27. 산뢰이|작성자 김기덕   28. ䷛ 택풍대과(澤風大過)   택풍대과는 澤(☱:兌)이 위에 있고 風(☴:巽)이 아래에 있는 상으로 兌(西方金)에 의해 아래의 巽(東方木)이 金克木을 당하여 멸실되며, 本과 末이 虛하여 전도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大過의 大는 큰 하늘을 의미하며, 過는 지나감을 뜻하니 天道가 변하는 중천과도기를 의미한다. 대과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는데, 하나는 큰 허물이 있음을, 다른 하나는 지나간다는 뜻이다. 대과에는 하늘의 도가 크게 변함을 의미하는 뜻이 담겨 있어서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때로 정신문명에서 물질문명으로 본말이 전도되는 오늘날과 같은 시기를 말하기도 한다. 대과는 강한 양이 중간에 끼어 있어서 견실함이 있으나 아래와 위가 허한 음으로 이루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상으로, 過는 나아가는 과정(辵:쉬엄쉬엄 쉬어갈 착)이 지나쳐 입이 삐뚤어짐(咼:입이 삐뚤어질 괘)을 의미하여 변하는 속도가 빠름을 말한다. 시에서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작품을 말한다. 효로 살펴보면 처음과 끝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는데,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음의 문장에 비해 양의 문장이 많음으로 인해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진리의 비진리, 참에 대한 거짓, 논리에 대한 비논리, 의미에 대한 무의미의 추구와 같은 형식으로 의외성이 있거나 비틀기가 있는 작품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으로 흙, 땅, 지구 등의 형이하적인 요소 중 음의 요소를 취하되 地의 형이상적인 지옥, 어둠의 세계와 같은 것들은 양적인 요소를 취함으로 개인적인 해석에 치중되어 있다. 또한 人은 노양(⚌)으로 동물적, 육체적인 형이하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의 형이상적인 면까지 양적인 문장, 해석으로 접근되어 있다. 거기에 天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天의 세계를 제외한 우주적인 형이하의 세계를 양의 세계로 표현하고 다가감으로 지나친 개인적 해석과 주관적 감정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大過卦는 양이 지나쳐서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이니 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주관적으로 치우친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적 무리가 따를 수 있으며 균형적 배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불균형의 형식을 가질 수 있다. 팔괘로 접근하면 바람(☴:巽) 위에 놓인 연못(☱:兌)과 같은 모양으로 물 위에 거센 바람이 불어 어지러운 풍파를 일으켜 놓은 듯한 혼란과 불안의 상태이다. 또한 형상이 네 개인 양효와 위아래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음효로 되어 있어서 음양의 조화를 잃고 있다. 예를 들면 남녀관계에서 첫효는 사효와 상응하는 관계이므로 늙은 여자가 어린 여자를 사랑하는 격이요, 육효는 삼효와 상응하는 관계이므로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사랑하는 격이니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듯 시에서도 균형과 조화보다는 불균형과 부조화, 그리고 지나친 자기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택풍대과의 변괘 중 호괘는 ䷀ 중천건(重天乾)이며, 배합괘는 ䷚ 산뢰이(山雷頤), 착종괘는 주변 사물로 인해 힘을 얻는 ䷼ 풍택중부(風澤中孚)이다. [출처] 28. 택풍대과|작성자 김기덕   29. ䷜ 중수감(重水坎)   중수감은 위와 아래에 모두 물(☵:坎)이 중첩한 상으로 거듭 험난한 데 빠져 있는 모양이다. 坎은 흙이 파여 구덩이를 이룬 모양으로 어렵다는 뜻과 물이 흐름으로써 흙이 쓸려 파이게 되는, 흐르는 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감은 안팎으로 어려운 상태이나 위와 아래의 중에 양이 거하여 중심을 잡아줌으로 양의 강건함이 물 흐르듯 하여 주제의 통일을 이루어 주는 형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과 셋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지만 두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또한 넷째, 여섯째 문장도 다섯째 문장이 중간에서 양의 문장으로 기둥 역할을 함으로써 주제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붙잡아 주고 있다. 즉 음의 문장으로 사고의 확장과 변형을 꾀하더라도 중심 문장인 양의 문장에서 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잡아 주고, 사고를 한 점으로 모아 줌으로써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집중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人은 노음(⚏)으로 자신의 지나친 감정에 빠져 있는 상태이지만, 天(⚍:소음)과 地(⚎:소양)가 중심을 잡아 줌으로써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人(⚏:노음)의 음적 상상력이 天과 地의 양에 의해 제한되어서 주제의식이나 시적 의도에 갇힘으로써 정서적 안정, 내용적 균형을 이루어 주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위에도 물(☵:坎)이요, 아래도 물이므로 두 가지 물이 하나로 잘 섞이는 상태이다. 그래서 첫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이 의미상 크게 달라지지 않고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 ☵의 모양을 살펴보면 단락 속에 하나의 핵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 핵은 주제적 묘사일 수도 있고, 으뜸 되는 철학일 수도 있고, 가장 강렬한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핵을 가진 단락의 중첩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고 이미지를 집약할 수 있다. 중수감의 변괘 중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이며, 배합괘는 음이 중심을 잡아주는 ䷝ 중화리(重火離), 도전괘와 착종괘는 부도전괘인 ䷜ 중수감(重水坎)이다.     30. ䷝ 중화리(重火離)   중화리는 상과 하에 불(☲:離)이 거듭된 모양으로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는 형상이다. 離는 짐승의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모양으로 새(隹)와 산짐승(离) 등이 그물에 걸림을 뜻하며,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돌아감과 같이 ‘떠나다’, ‘환하다’, ‘흩어지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안팎으로 밝고 환한 세상을 이뤄 만물을 기르는 모양이다. 시간적으로는 밝은 한낮의 때이며 중천을 의미한다. 괘의 모양을 보면 중수감과 반대의 상황이며, 음과 양의 역전을 이루고 있다. 이를 중수감의 해석과 연관하여 생각해 본다면 중수감은 왕성한 음의 감정을 모아 양의 문장이 기준을 잡고 문장 및 내용의 통일을 이루었다. 반면 重火離는 강한 양의 감정을 음의 문장이 중심을 잡고 음의 감정으로 문장 및 내용의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다. 양의 감정은 자칫 들뜨기 쉽고 긍정적이며 순응적이어서 평범할 수 있으나 음의 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요소가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을 세워 비범하게 해 주는 시쓰기이다. 효의 시각에서 보면 양의 문장들 가운데 음의 문장을 놓아 차분한 감정의 전개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확장하고 퍼져가고자 하는 양의 성질을 응집시켜 집중시키는 역할을 음이 해 줌으로써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에 따른 통일성 있는 시쓰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사상의 시각으로 보아도 人(⚌)의 노양이 天과 地의 음에 막혀 절제되고 함축되는 의미를 갖는다. 팔괘로 보면 離는 불탄다는 뜻으로 해와 달은 하늘에 걸려 있고 온갖 곡식과 초목은 땅에 정착하여 자라고 있다. 그럼으로 천지는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광명의 세계가 된다. 날마다 새로운 빛, 한결 같은 정열, 젊음과 생명이 약동하는 밝은 세계를 그리되 그 안에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어둠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불이 타는 불 속에는 재가 생기고 구멍이 생기듯이 눈부시게 빛나기만 하면 가까이 할 수 없다. 밝고 아름답기만 한 사물 속에서 어찌 깊은 철학을 느낄 수 있겠는가? 진정한 생명의 글은 밝은 빛 속의 그늘이나,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다. 중수감이나 중화리의 글쓰기는 주제의 통일이나 핵이 되는 묘사를 통해 시적 감정을 통일시키는 기법이다. 중화리의 변괘 중 호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배합괘는 ䷜ 중수감(重水坎), 착종괘, 도전괘는 부도전괘인 ䷝ 중화리(重火離)이다. [출처] 30. 중화리|작성자 김기덕   31. ䷞ 택산함(澤山咸)   택산함은 산(☶:艮) 위에 못(☱:兌)이 있는 모양으로 산의 양기는 아래로 향하고 못의 음 기운은 증발하여 위로 올라가 서로 통하는 형상이다. 산과 연못의 기운이 상통하고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상이니, 咸은 서로 느껴 함께하는 뜻이다. 咸은 서로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로 합하는 ‘다 함’의 뜻을 갖고 있다. 感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咸은 보다 포괄적인 뜻으로 모든 음양의 기운이 서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으로는 하늘의 양기는 산을 거쳐 땅으로 내리고 땅의 음기는 못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가 교통함을 의미한다. 인간적으로는 소남과 소녀가 느끼는 것으로 교합을 의미하며, 수도로는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도통하는 것이 咸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셋째에서 다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가 다시 마지막에 음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음과 양이 교합하여 감정을 주고받듯 서로 상통하는 감상적인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 人은 노양(⚌)으로 이루어지고 天은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地는 음적이어서 받아들이고, 人은 양적이어서 발산하고, 天은 강함을 순하고 부드러움으로 조화시켜 서로의 감정을 하나로 만들고 있다. 팔괘로 풀이해 보면 하늘의 성기인 산이 아래에 있고 땅의 성기인 못이 위에 있는 상으로 서로 기운이 통하는 상태이다. 시쓰기에서도 사람과 세상 모든 만물이 통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내용적으로는 감상적이며, 서정적인 것을 의미하며, 기법적으로는 활유적인 기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와의 소통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과 세계가 통할 수 있는 시쓰기로 지적인 배치가 아니라 정서적인 배치를 이루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쓰기가 되어야 한다. 咸은 感과 같다. 즉 느낀다는 의미로 음과 양의 두 에너지가 감응하고 협력하여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택산함의 변괘 중 호괘는 음의 대상에 대한 양적표현을 이룬 ䷫ 천풍구(天風姤)이며, 도전괘는 항구한 이치를 발견하고 쓰는 시인 ䷟ 뇌풍항(雷風恒), 배합괘, 착종괘는 헌시나 찬양시인 ䷨ 산택손(山澤巽)이다. [출처] 31. 택산함|작성자 김기덕    뇌풍항(雷風恒)   뇌풍항은 雷(☳:震)가 위에 있고 유순한 風(☴:巽)이 아래에 있어서 함께 순응하여 움직인다. 천지의 법칙은 항구하여 그치는 일이 없다. 하나가 마치면 하나가 시작된다. 해와 달은 하늘의 항구불변의 원칙을 얻었고, 춘하추동의 사계절은 항상 변화하며 있기 때문에 영원한 순환을 계속할 수 있다. 성현도 그 도를 지켜 항구해야 비로소 천지교화가 가능할 것이다. 항구한 것을 깊이 관찰함으로 천지만물의 실상을 볼 수 있듯, 천지만물의 이치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맞는 시쓰기가 바로 뇌풍항이다. 恒은 천지간(二)의 日, 月(日)이 서로 짝하되 끝없이 왕래 순환함으로써 영구히 주야를 밝히듯, 서로의 마음을 합하여 부부로서 항구한 도를 갖춤을 의미한다. 안으로 음목이 뿌리박고 밖으로 양목이 뿌리를 뻗어 장구히 생장하는 모양이며, 인사적으로는 장남이 위엄을 보이고 장녀가 공손히 집안일을 주장하는 상으로 부부의 도를 이루고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처음에 음의 문장이 오고 양의 문장이 두 번째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온 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음의 문장이 와서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항구적 성장을 표현하고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뿌리를 박고, 人(⚌)은 성장하고, 天(⚏)은 씨앗을 맺음으로 항구적인 법칙을 말하고 있다. 항구한 법칙의 원리를 통해 변함없는 진리의 표현을 의미한다. 팔괘로 살펴보면 우레와 바람은 만물을 흔들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잠시도 머무르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은 움직임으로, 곧 살아 있음으로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있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정지되고 고정된 것이 계속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살아 있는 시,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영원할 수 있다. 그것은 사고의 정지와 고정이 아닌 변화와 새로움이며 형식의 낯설게 하기이다. 뇌풍항의 호괘는 ䷪ 택천쾌(澤天夬)이며, 도전괘는 ䷞ 택산함(澤山咸), 배합괘, 착종괘는 위에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 풍뇌익(風雷益)이다. [출처] 32. 뇌풍항|작성자 김기덕   33. ䷠ 천산돈(天山遯)   천산돈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 山(☶:艮)이 있는 모양으로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하늘이 부여한 명을 지키는 상이다. 遯은 돼지(豚: 돼지 돈)와 같이 어리석은 체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를 닦는(辵-쉬엄쉬엄 쉬어갈 착: 점차 움직여 나아감) 의미가 있다. 괘상에서도 아래의 두 음(소인)이 자라 점차 네 개의 양(군자)을 핍박하는 형상이다. 遯은 안으로 산과 같이 굳건한 절개와 자제를 행하고 밖으로는 하늘과 같이 강건한 도로써 소인을 교화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시에서 보자면 천산돈은 소인배적인 생각, 즉 형이하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형이상적인 생각으로 뻗어감을 의미하는 형이상시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시는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인식과 철학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시로 철학적, 종교적 경향을 지니게 된다. 형이상시의 중요한 특징은 기상(奇想-conceit)을 중심으로 한 구조인데, 기상은 두 가지 사물이나 개념을 교묘하고 대담하게 연결하여 뜻밖의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시 수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해 보면 첫 문장이나 둘째 문장은 형이하적인 사물을 끌어오지만 셋째에서부터 여섯 번째까지는 끌어온 사물과 연결되는 추상적 이미지를 배치시키는 방법이다. 밑에 두 개의 음효는 형이하적인 것이며 사물적인 요소이지만 이 요소들이 억눌리면서 형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대체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음(⚏)으로 현실적인 생각, 범속한 것이나 비천한 것을 의미하는데 人과 天은 노양(⚌)으로 성에 속한 것이나 정신적인 것, 고귀하고 고차원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곧 사물의 평범성을 땅에서 취하여 시인의 고결한 정신을 통해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출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물질적이고 비천한 것은 억제되고 정신적이고 고결한 것은 상승하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산인 첫째 단락과 하늘인 둘째 단락의 배치를 통해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방법이다. 천산돈은 선비적 은둔사상의 발로가 되었다. 은둔 속에 세상을 피해 자신만의 도를 닦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물질이나 사물 그 자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 새로운 추상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도의 시쓰기 방법이다. 천산돈의 변괘 중 호괘는 음의 대상에 대한 양의 표현을 이룬 ䷫ 천풍구(天風姤)이며, 도전괘는 강한 남성적 출발에 여성적 마침을 가짐으로 음양의 균형을 꾀하는 ䷡ 뇌천대장(雷天大壯), 배합괘는 생수처럼 솟는 원천의 시인 ䷒ 지택림(地澤臨), 착종괘는 웅장한 스케일의 ䷙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출처] 33. 천산돈|작성자 김기덕   34. ䷡ 뇌천대장(雷天大壯)   뇌천대장은 아래에 天(☰:乾)이 있고 위에 雷(☳:震)가 울리는 모양으로,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크게 움직여 씩씩한 상을 나타내고 있다. 大壯의 大는 하나(一)가 둘(人)로 늘어나 커지는 것이며, 壯은 문무를 겸비한 장부(士)가 방패(爿: 널빤지, 방패)를 들고 전진함을 뜻한다. 하늘 위에 뇌성이 울리는 괘상으로 양기가 크게 성장하는 모습이다. 시기적으로는 2월(음)로서 양기가 성장하여 초목이 움터 나오려는 때이고 방위로는 동방인 묘에 해당하니 출문하는 의미가 있다. 시에서는 너무 강렬한 의식의 일방적 진행은 시적 정서를 떨어뜨리고 양적 요소에 치우침으로 구호적 성격이 되기 쉽다. 이러한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끝에서 여성적인 정서를 끌어와 남성적 이미지의 상쇄를 꾀하는 방법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는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엔 음효를 배치함으로써 상승된 격정적 감정을 눌러주고 차분한 이미지로 마무리하고 있다. 또한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에서 마무리를 어둡고 부정적인 색깔로 처리함으로써 밝은 모습으로만 뻗어가려는 흐름을 끊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노양(⚌)으로 물질이나 심리상태가 모두 양이다. 이런 양적 요소에 노음(⚏)인 天을 배치하여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정으로 끝을 맺었다. 이는 상반된 감정을 끌어와 불타듯 왕성한 의지적 이미지를 억누름으로 보다 더 양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팔괘로 접근하면 하늘 위에서 우레가 울고 있다. 크게 뻗어가는 상이며 번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뻗다보면 교만해지고 또 가벼워질 수 있는 상태에서 음적 요소로 끝맺음으로 무게와 깊이를 더해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뇌천대장의 변괘 중 호괘는 양의 일관된 진행에 대한 마지막 뒤집기의 ䷪ 택천쾌(澤天夬)이며, 배합괘는 군자의 교화와 같은 ䷓ 풍지관(風地觀), 착종괘는 하늘에 순응하는 시쓰기의 ䷘천뢰무망(天雷无妄)이다. [출처] 34. 뇌천대장|작성자 김기덕   35. ䷢ 화지진(火地晉)   화지진은 땅(☷:坤) 위로 불(☲:離)이 나온 모양으로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올라 나아가는 일출과 같다. 晉은 밝은 기운(日)이 地間(二)에 나타나 환히 밝힘을 가리키니 ‘나아가다’, ‘눈동자’의 뜻이 있다. 晉은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는 밝은 덕이 있으므로 해가 땅 위에 떠올라 세상을 두루 비추는 일출의 모양이니, 본래의 성품을 밝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효로 풀이하면 地의 첫째, 둘째, 셋째 문장은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地의 세 음은 어두운 땅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이 어두운 땅, 이슬 젖은 눈물의 땅을 태양이 떠올라 밝게 비추듯이 地의 세 문장은 음의 문장을 이룬다. 이 음의 문장이 있은 다음 네 번째로 양의 문장이 와서 어둠을 가시게 하고 젖은 눈물을 말려 주게 된다. 다섯째 문장에서는 아직 덜 마른 땅처럼 음이 남아 있고, 여섯 번째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밝고 희망적으로 배치함으로 힘을 내 정진하는 형식의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으로 어둠과 눈물의 땅이지만 人에서 소양(⚎)은 내적 어둠을 묻고 밝은 빛으로 나타남으로 희망적으로 전진하게 되며, 天도 마찬가지로 소양(⚎)으로 차츰 어둠을 걷고 밝아지는 느낌의 방식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晉은 進과 같다. 밝은 태양이 지평선 위에 나타나 순차적으로 하늘에 올라 大明의 세상을 이뤄가는 기상이다. 하늘로 오르는 태양은 아침의 태양이다. 어둠을 밝히는 세상만물을 따뜻하게 감싸는 꿈과 희망의 시가 바로 火地晉이다. 화지진의 변괘 중 호괘는 꿈과 희망을 밝히는 화지진의 내면은 슬픔과 고통의 극복임을 의미하는 ䷦ 수산건(水山蹇)이며, 배합괘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염원의 ䷄ 수천수(水天需)이고, 도전괘 및 착종괘는 절명시나 비탄시의 ䷣ 지화명이(地火明夷)이다. [출처] 35. 화지진|작성자 김기덕   36. ䷣ 지화명이(地火明夷)   지화명이는 위에 땅(☷:坤)이 있고 아래에 불(☲:離)이 있는 상으로 해가 져서 땅 속으로 들어간 모양으로 밝음이 어두움에 묻힌 상태이다. 明夷의 明은 日과 月의 會意字로서 해와 달이 주야로 밝힘을 의미하며, 夷는 大+弓 으로 큰 활로 인해 상처를 입음을 의미한다. 明夷는 안으로는 밝으면서도 밖으로는 유순함으로 행하는 상이다. 시에서는 밝은 감정을 숨기고 우수와 고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셋째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나머지 문장은 모두 음으로 배치하여 해와 달이 사라진 암흑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절명시나 비탄적 감정의 시로 꿈과 희망이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와 人은 소음(⚍)으로 안으로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밖으로 밝게 표현하지 않고 어둡고 음침하게 표현함으로 음적인 감정표현이 된다. 또한 天은 노음(⚏)으로 음적인 감정이 발전 심화됨으로 어둠은 더욱 어둡게, 슬픔은 더욱 슬프게 표현되어 절망적인 비탄의 감정이 지배하게 된다. 팔괘로 풀이하면 첫째 단락은 해나 달 같은 밝음이 오지만 두 번째 단락에서 지하에 갇히게 됨으로 기쁨이나 행복은 사라지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만 남아서 어둠을 표현하고 있다. 밝은 감정도 어둡게 몰아가는 방법으로 감정의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고난을 참고 견디는 모양으로 인내하고 견디는 고난극복의 상이다. 明夷는 태양이 땅 속에 들어간 상태, 고난에 처한 상태이며, 밝은 것이 패하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밝고 아름다운 세상보다는 어둡고 험한 세상을 표현하고, 그 속성에 맞는 사물의 배치를 이루어 절망적으로 나아가는 시쓰기이다. 지화명이의 변괘 중 호괘를 살펴보면 ䷧ 뇌수해(雷水解)이며, 배합괘는 ䷅ 천수송(天水訟), 도전괘, 착종괘는 ䷢ 화지진(火地晉)이다. 변괘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할 수 있으나 변괘는 본괘에 대한 다른 방향의 시각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괘라는 하나의 사물이 있다면 옆에서 보고, 위에서 보고, 밑에서 보고, 속에 들어가서 봄으로 그 사물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시의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다. [출처] 36. 지화명이|작성자 김기덕   37. ䷤ 풍화가인(風火家人)   풍화가인은 안으로 불(☲:離)이 있고 밖으로 바람(☴:巽)이 불어 바람을 타고 불이 성하는 모양이며, 밖에서 들어와 안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아래의 離(☲)는 밝은 생명력을 뜻하는 人이요, 위의 巽(☴)은 안을 가지런히 정돈함을 의미하니 齊家의 家에 해당한다. 또한 장녀(巽)가 위에서 가사를 이끌고 중녀(離)는 아래에서 밝게 응하니 가인이다. 가인은 집안을 바르게 하는 괘이다. 집안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제 몸을 먼저 닦아야 하듯 한 편의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마음의 수양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가인의 시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이다. 효로 살펴보면 긍정과 부정, 희망과 절망의 반복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발견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문장의 배치는 양의 문장, 둘째는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다가 다섯째, 여섯째에서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양과 음이 섞여서 갈등과 고민, 번뇌의 모양을 이루다가 天(⚌)에서 긍정과 화합과 깨달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는 속과 성이 섞인 세상의 삶에서 성을 깨닫고 성적인 삶을 추구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적인 성향의 자기성찰적인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家人은 집안사람이란 뜻으로 가족을 의미한다. 바람과 불을 가정의 심볼로 표현했는데, 불이 타면 바람이 생기고 바람은 다시 그 불을 부채질하여 확대 발전된다. 이는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바른 길이 시작되고 국가와 사회로 뻗어가 큰 발전을 이룸과 같다. 시에서는 가정의 바른 도는 수신에서 시작되듯이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으로써 시의 큰 발전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풍화가인의 시쓰기는 내면으로 돌아가 근본을 살펴봄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풍화가인의 변효 중 호괘는 비정석적, 비상식적인 부조화의 배치인 ䷿ 화수미제(火水未濟)이며, 도전괘는 어긋남에 의해 강조되는 시인 ䷥ 화택규(火澤睽), 배합괘는 강한 감정표출의 ䷧ 뇌수해(雷水解), 착종괘는 불을 때듯 하는 간절한 시의 ䷱ 화풍정(火風鼎)이다. [출처] 37. 풍화가인|작성자 김기덕   38. ䷥ 화택규(火澤睽)   화택규는 연못(☱:兌)이 아래에 있고 불(☲:離)이 위에 있는 모양으로 밖의 불은 위로 타오르고 안의 연못물은 아래로 고여서 서로 어긋나게 나아가는 상이다. 괘상으로 볼 때 離는 日行을 뜻하고 兌는 月行을 가리키는데, 일행도수에 비해 월행도수가 어긋나는 것이 규이다. 나무를 구부리고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세상에 보임은 睽卦에서 取하였다고 한다. 활을 쏠 때 활줄은 뒤로 당기고 활대는 앞으로 밀면서 생기는 힘이 화살을 격발하게 하니 비록 처음은 어긋나나 그 어긋남에 의해 힘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에서 어긋남에 의해 시가 강조되고 강렬해져 깊은 감동을 주는 경우를 의미한다. 대칭적, 또는 대조적인 표현 기법을 통해 감동을 더해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도입부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문장만 양의 문장이 오고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이 와서 양의 문장과 음의 문장이 교차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로 어긋나는 반대 방향의 시각, 표현을 통해 도입부에 제시한 표현을 강조하고 의미를 확장시키는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으로 확실한 주제적인 표현을 내걸고 그 표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표현을 人(⚎)이나 天(⚎)에서 대조적, 대칭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의미의 확장을 꾀하고 표현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처음의 주제적 표현을 강조해 주는 시쓰기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연못(☱)은 불과 물의 관계처럼 서로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은 위로 솟아오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의 향하는 방향이 반대 방향이다. 이는 강한 반발심을 의미하며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睽라는 한자의 뜻이 ‘사팔눈’, ‘노려보다’, ‘등지다’의 의미이듯 삐딱한 시각, 거꾸로 보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창작자의 의도가 ‘삐딱하게 보기’이며, ‘거꾸로 보기’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시인들이 ‘삐딱하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음과 양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끌어오거나, 오행의 상극의 관계를 알고 사물을 끌어온다면 ‘삐딱하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 또는 ‘반대적인 접근’, ‘대칭적인 관계’ 설정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시의 정서나 의미를 강조하여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화택규의 변괘 중 호괘는 윤리적이며 정석적인 ䷾ 수화기제(水火旣濟)이며, 도전괘는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 배합괘는 슬픔과 우울에 침잠된 정서의 ䷦ 수산건(水山蹇), 착종괘는 대결구도적 배치의 ䷰ 택화혁(澤火革)이다. [출처] 38. 화택규|작성자 김기덕   39. ䷦ 수산건(水山蹇)   水山蹇은 水(☵:坎)가 위에 있고 山(☶:艮)이 아래에 처한 모양인데, 험한 것을 보고 안에서 그쳐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를 어기고 전진한다면 큰 난관에 빠지므로 경계하여 蹇이라 하였다. 蹇의 의미를 살펴보면 외괘인 坎은 北方水로서 추운 겨울철에 해당하여 寒이고, 내괘인 간은 그치는 것이므로 발(足)이 얼어붙어 나아가기 힘든 상태를 말한다. 시에서 蹇의 상황은 큰 난관에 부딪혀 절망에 빠져있는 감정을 의미하며 슬픔과 우울함에 침잠된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엔 음의 문장이 오고,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 그리고 다섯째는 양의 문장이 온 후 여섯째는 음의 문장이 오는 형식이다. ‘첫째 문장’이나 ‘둘째 문장’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문장의 개념은 표면상의 한 문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상, 내용상의 문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첫 번째’라고 표현했더라도 두 개, 또는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蹇의 여섯 효는 山戰水戰의 험난한 역경을 겪은 괘상이며, 산 위에서 비를 만나는 상황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삼효와 오효가 양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효는 산의 꼭대기, 곧 높은 이상과 같은 것이고, 오효는 자아를 상징하므로 높은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으나 현실은 절망적이기 때문에 그 절망감은 더욱 큰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음(⚏)으로 한겨울과 같으며, 人과 天은 소음(⚍)으로 새싹을 기다리는 봄과 같다. 이는 한겨울의 땅 속에 뿌리를 박고 봄을 열망하지만 현실은 아직 얼어붙은 동토의 극심한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도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둠이 짙듯이 봄을 기다리는 한겨울의 삭막한 감정이 더욱 절박한 것과 같은 절망적 표현을 의미한다. 팔괘로 보면 산과 물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험난한 형국으로 첫째 단락은 山(☶:艮)으로 막힘이 있는 정서의 답답함을, 둘째 단락은 水(☵:坎)로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표현하는 절망적 표현기법이다. 수산건의 변괘 중 호괘는 ䷿ 화수미제(火水未濟)이며, 도전괘는 ䷧ 뇌수해(雷水解), 배합괘는 ䷥ 화택규(火澤睽), 착종괘는 ䷃ 산수몽(山水蒙)이다. [출처] 39. 수산건|작성자 김기덕   40. ䷧ 뇌수해(雷水解)   뇌수해는 위로 움직임이 있는 우레(☳:震)가 動하고, 아래에는 험한 물(☵:坎)이 있어 움직임으로써 험난함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외괘인 震은 밖으로 움직여 나오는 것이니 童牛의 뿔(角) 형상이다. 내호괘인 離는 伐兵의 상으로 刀가 나오며, 中虛하여 심성이 유순한 牛로 나타나기도 한다. 解는 험한 내적 과정을 지난 후 밖으로 순순히 풀려나오는 것을 상징하는 괘인데, 시에서는 가슴에 맺혔던 감정을 밖으로 술술 풀어내는 감정표출의 시를 의미한다. 일부는 측상의 시, 배설의 시라고도 하지만, 여기에는 감정의 절제와 언어의 조탁이 기본적으로 밑바탕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감정표현에 대한 적절한 묘사가 필요하다. 효로 풀이해 보면 첫째는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며 다섯째와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뇌수해의 모양을 보면 이효와 사효의 양이 열린 입과 같고, 삼효는 입안의 여자 혀와 같은 형상으로 쏟아내는 감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와 人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안에 맺힌 것들이 풀려 나오는 형상이지만, 아직 天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는 天(마음)에 맺힌 감정들이 人(언어)과 地(행동)로 표출되고 있는 과정을 나타내 주고 있다. 팔괘롤 풀이하면 뇌수해의 우레는 움직이는 것이고 물은 험난한 것이므로 험난함에서 벗어남을 상징한다. 봄 우레에 봄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우레가 울고 봄비가 내리면 얼었던 세상이 풀리며 온 세상에 초목이 피어나듯이 해는 풀리는 감정을 의미한다. 첫째 단락은 坎으로 고난이나 심적 갈등에 대한 표현을 의미하며, 두 번째 단락에서는 변화에 대한 도약적 감정의 표현을 통한 감정표출의 시이다. 뇌수해의 변괘 중 호괘는 정서적 안정을 이룬 높은 성취도의 ䷾ 수화기제(水火旣濟)이며, 도전괘는 큰 난관의 ䷦ 수산건(水山蹇), 배합괘는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 ䷤ 풍화가인(風火家人), 착종괘는 험한 가운데 새로움이 움트는 ䷂ 수뢰둔(水雷屯)이다. [출처] 40. 뇌수해|작성자 김기덕   41. ䷨ 산택손(山澤損)   산택손은 산(☶:艮) 아래 연못(☱:兌)이 놓인 상황으로 아래에 있는 연못의 기운이 발하여 산에 덜어주는 상이다. 윤택한 못의 기운이 산속의 풀과 나무와 짐승들에게 생기를 공급하고 활력을 주듯 안을 덜어서 밖에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損은 물건의 수효(員:수효원)를 손으로 헤아려 덜어주는 뜻과, 어린 생명(具)이 모태(口) 밖으로 나오는 것을 손(手)으로 받아내는 뜻이 있다. 시에서는 힘과 용기를 주거나 위로를 줄 수 있는 찬양시, 헌시, 칭송시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損은 아래 백성의 것을 덜어 위(政府)를 더해 주어 백성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것과 같다. 이는 위를 의미하는 부모나 선배, 선생님이나 상사, 떠받드는 애인 등으로 덜어 주는 정신적 감정의 표현이 바로 산택손의 시쓰기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엔 양효가 오고 셋째, 넷째, 다섯째 문장엔 음효가 왔다가 마지막 여섯째 문장엔 양의 문장 배치로 끝맺는 형식이다. 첫째, 둘째 문장에서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며 의지적인 장점이나 강점을 배치하고, 삼, 사, 오효에서 열악한 현실이나 부정적 현실을 끌어와 대치시킨 후 마지막에서 찬양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아 기쁨과 힘을 줄 수 있는 시쓰기의 방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양(⚌)인데, 이는 넉넉함이고 풍요함을 의미한다. 한낮의 태양과 같은 뜨거운 열기이며, 한여름과 같은 왕성함이다. 地의 이 왕성함이 노음(⚏)인 人이나 소양(⚎)인 天에게 덜어 줌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損의 형상은 澤(☱:兌)의 삼효가 음효로서 그 모습이 마치 아래에서 삼효를 떼어내어 위의 山(☶:艮)에 있는 사효, 오효의 음에 보태어 주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봉사하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산택손의 반대인 풍뢰익(䷩)은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 주는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단락은 기쁨과 풍요함이며, 둘째 단락은 막힘과 부족함이 있어 채워지는 느낌의 시쓰기 방법이다. 산택손의 변괘 중 호괘는 중첩된 음의 기운 속에 양의 기운이 살아나는 ䷗ 지뢰복(地雷復)이며, 도전괘는 꿈과 희망의 시인 ䷩ 풍뢰익(風雷益), 배합괘, 착종괘는 감상적이며 정서적인 교통을 이루는 ䷞ 택산함(澤山咸)이다. [출처] 41. 산택손|작성자 김기덕   42. ䷩ 풍뢰익(風雷益)   풍뢰익은 바람(☴:巽) 아래 우레(☳:震)가 일어나는 모양으로 바람은 아래로 내려오고 우레는 위로 올라가 서로 부딪히며 만물이 크게 동요, 진작하여 유익함이 생기는 상이다. 益은 초목을 고무 진작시켜 가지가 무성히 성장하는 상인데, 震은 양목으로 뿌리부터 줄기를 뻗어나가는 것이요, 巽은 음목으로 가지에 꽃과 열매가 열리는 모양이다. 益은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위하여 성의와 노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태양이 땅 위의 모든 생명들이 원하는 열과 빛을 보내어 생성 발전시키듯이 고난에 처한 사람이나 아랫사람, 아니면 서민이나 죄인, 불우한 현실의 사람들을 위해 희망이나 빛이 될 수 있는 시를 풍뢰익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이지만 둘째, 셋째, 넷째 문장이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아래쪽이 부족함을 상징하지만, 다섯째, 여섯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이 옴으로 넉넉함을 덜어주며 희망적인 결말을 가져오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소음(⚍)으로 쇠퇴해 가고 있는 상황이며, 人은 노음(⚏)으로 지극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여기에 天이 노양(⚌)으로 강하고 왕성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아래쪽에 힘을 더해 줌으로 유익함이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팔괘로 보면 위의 바람은 동남방을 의미하며 순조로움을 상징한다. 동남방에서 불어온 봄바람은 만물을 싹틔우며 이롭게 하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우레는 움직임이고 변화여서 쉽게 받아들이고 유익해짐을 상징한다. 첫 단락은 震괘로 아랫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며, 즐겁게 하고 감동받게 할 수 있는 표현이나 메시지라면, 둘째 단락의 風은 그들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결실을 이루게 하는 손길이며 유익과 행복을 줄 수 있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 풍뢰익의 변괘 중 호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시인 ䷖ 산지박(山地剝)이며, 도전괘는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주는 헌시나 찬양시인 ䷨ 산택손(山澤損), 배합괘와 착종괘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발견한 ䷟ 뇌풍항(雷風恒)의 시쓰기이다. [출처] 42. 풍뢰익|작성자 김기덕   43. ䷪ 택천쾌(澤天夬)   택천쾌는 연못(☱:兌)의 기운이 증발하여 하늘(☰:乾) 위에 있는 모양으로 여섯 번째 효인 음이 아래 다섯 양에 의해 처단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夬는 아래로 하늘의 강건한 덕이 있고 위로는 연못의 기쁨이 있어서 마지막 남은 문제를 척결함으로써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시적으로 하나의 소재나 주제의식에 대한 양적인 일관된 묘사를 하다가 끝에서 뒤집어 버림으로 강렬한 마무리를 갖는 시쓰기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에서 다섯 번째 문장까지는 한 시각의 일방적인 묘사나 철학적 접근이 마지막 문장에서 뒤집어지거나 새로운 결론, 또는 생경한 표현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모두 노양(⚌)으로 강한 이미지의 표현, 또한 긍정적 접근이 이루어지지만 天에서 소음(⚍)이 옴으로 지속되던 긍정적 감정을 감추고 부정적이거나 아니면 낯설게 하기, 또는 전체를 아우르는 확실한 강조의 표현으로 마무리함을 의미한다. 팔괘로 보면 澤天夬(䷪)는 모든 양효 위에 한 개의 음효가 위치하고 있어 모든 선을 누르면서 악의 세력이 높은 지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태이다. 夬는 ‘결단한다’, ‘결행한다’는 뜻인데, 악의 발효를 배려하기 위해 궐기하고 준비하는 상태와 같다. 이는 하괘인 天(☰)과 상괘인 못(☱)으로 나뉘어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되는 것 같지만, 실은 다섯 개의 양과 한 개의 음으로 나뉘어 형식적, 또는 실질적 두 단락으로 구분되는 형식의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첫째 단락은 긍정적 진행의 묘사가 이루어지고 두 번째 단락에서 이를 뒤집는 간략한 문장, 또는 한 문장의 핵심을 찌르는 반어적 결론의 시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택천쾌의 변괘 중 호괘는 힘 있고 밝은 시인 ䷀ 중천건(重天乾)이며, 도전괘는 음적인 대상을 밝고 강한 남성적으로 표현한 ䷫ 천풍구(天風姤), 배합괘는 고고함의 경지인 ䷖ 산지박(山地剝), 착종괘는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 천택리(天澤履)이다. [출처] 43. 택천쾌|작성자 김기덕   44. ䷫ 천풍구(天風姤)   천풍구는 하늘(☰:乾) 아래 바람(☴:巽)이 부는 모양으로, 가장 아래에 처한 一陰이 다섯 양을 쫓고 있는 형태이고, 또한 음이 처음 상태로 음을 거느리는 后가 되는 상을 의미한다. 姤는 안으로는 유순한 가운데 밖으로 강건함이 있으니 위의 강건한 乾父의 명을 좇아 아래에 巽長女가 그 도를 따르는 괘로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만물에 두루 파고드는 상태이다. 절기로 보면 夏至인 한여름으로 음력 5월경이며, 하루는 가장 환한 정오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는 여성적인 음의 시작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효가 음인 여성적 시작을 의미하는데, 둘째 효부터 여섯째 효까지 양의 효로 이루어졌으므로 여성적인 음의 시작이지만 절망이나 고통, 분노와 같은 것이 아닌 밝고 희망적이며, 아름다운 시각의 모성적 따뜻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의 대상을 양적으로 표현하는 시쓰기이다. 그렇다면 음의 문장과 양의 문장은 어떻게 만들고 구분할 수 있을까? 첫째는 음적인 사물들의 결합이며, 둘째는 음적인 상태나 감정, 분위기의 형성이다. 사람의 얼굴에서 보면 이마, 콧날, 치아, 광대뼈와 같은 것들은 양적인 요소이지만, 콧구멍, 귓구멍, 입과 같은 부분은 음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적 ‧ 음적 요소와의 결합을 통한 양의 문장, 음의 문장이 있다. 또한 여기에 양적 ‧ 음적 감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도 양의 문장, 음의 문장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이’는 양적 요소이지만 어떤 감정이나 상태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음이 될 수 도 있고 양이 될 수도 있다. “이가 반짝였다.”라는 문장은 양적 요소에 양적 상태가 결합되어 양의 문장을 만들어 주지만, “이가 부러졌다.”라는 표현은 양적 요소와 결합했지만 상태가 음적 요소이므로 음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에는 음과 양이 공존하기 때문에 양적인 요소라 해도 그 안에는 음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장의 음과 양의 구분은 사물적 요소보다는 상태나 감정적 요소에 의해 좌우됨을 알 수 있다. 사상에서 天, 人, 地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형식적 의미의 단락일 수도 있으나 天(성) - 人(성과 속의 공존) - 地(속)의 차원이나, 천(형이상) - 인(공존) - 지(형이하)의 구분과 같은 내용적인 단락이 될 수도 있다. 姤의 地는 소양(⚎)으로 밝음을 지향하고 있으며, 人과 天은 모두 태양(⚌)으로 한낮과 같은 밝은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하늘에서 부는 바람은 음산하고 무서운 바람이 아니라 밝고 환하며, 초목을 생장시키는 유익한 바람이다. 그러므로 천풍구의 시는 밝고 아름다운 감정의 유익하고 정감 있는 접속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姤는 만난다는 뜻이다. 한 柔가 다섯의 剛을 만난 형태로 많은 남자들 사이에 한 여자가 있어서 조종하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주도하에 매사가 진행되며, 남성 못지않게 강한 여자의 입김에 세상이 휘둘리게 되는 상이다. 이는 시에서 여성적인 시각의 주도적 진행을 의미하며 남성적인 강하고 밝은 분위기의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천풍구의 변효를 살펴보면 호괘는 밝고 강한 ䷀ 중천건(重天乾)이며, 도전괘는 양의 진행을 뒤집어 의외의 음적 결말을 맺는 ䷪ 택천쾌(澤天夬), 배합괘는 본성을 회복하고, 근본을 회복하는 ䷗ 지뢰복(地雷復), 착종괘는 양 가운데에 음을 배치하여 부드러움을 더해주는 ䷈ 풍천소축(風天小畜)이다. [출처] 44. 천풍구|작성자 김기덕   45. ䷬ 택지취(澤地萃)   택지취는 땅(☷:坤 ) 위에 물이 고여 연못(☱:兌)이 된 모양으로 사방의 물이 두루 합하여 모이는 것을 말한다. 萃의 뜻을 보면 병졸들이 모이듯 초목(艹)이 무성하게 우거져 어우러진 의미가 있고, 읽을 때에는 췌가 아닌 취로 발음한다. 萃는 안으로 지극히 유순하고 밖으로는 기쁨의 덕이 있어 물이 대지를 흐르며 합쳐져 마침내는 큰 바다를 이루어 출렁이는 모양을 나타낸다. 이는 시쓰기에서 대하를 이루는 듯한 흐름의 산문시를 의미하며, 형식이나 틀이 없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방법이다. 물은 물끼리 모여 흘러가듯 주제의 통일을 이루어야 하며, 정서의 동질적인 결합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서사적 구성도 택지취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택지취의 효를 살펴보면 초효에서 삼효까지는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실질적인 리더인 사효와 오효가 양으로 구성되어 강력한 힘의 구심점을 이루어 나아가는 상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핵심은 사효, 오효이며, 강한 주제의식으로 집중된 시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으로 다양한 사물적 요소일 수도 있고, 흩어진 생각의 단편들일 수도 있다. 人(⚎)에서 모아져 표출되었다가 天(⚍)에서 강하게 마무리 짓지 않고 여운을 남기듯 끝맺음을 하였다. 천 ‧ 인 ‧ 지의 의미는 넓게 보면 세상만물을 상징한다. 하늘과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물도 다 끌어올 수 있고 결합, 배치가 가능하다. 또한 작게 보면 사람의 얼굴과 같은 것이다. 눈썹 위로부터 이마는 天이요, 눈썹부터 코끝까지는 人이요, 인중부터 턱까지는 地로 구분하여 초년, 중년, 말년으로 관상을 보듯 그 응용의 세계는 무한하다. 팔괘로 풀이하면 취는 모이는 것의 상징이다. 아래에선 유순하고 위에서는 즐거워한다. 강건한 군주와 유순한 신하가 도리를 지키고 서로 호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인재가 모이고 복된 것이 모여온다. 시에서도 다양한 사물과 다양한 사고들이 하나의 핵심 주제로 모여 장구한 흐름을 만드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 사고의 흐름을 이루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이다. 모이는 데는 특별한 형식이 없다. 자석에 쇳가루가 모이듯 시인의 강한 정서의 힘에 이끌린 사물과 의식들의 일관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택지취의 변괘를 보면 호괘는 점차적으로 사고의 확장과 차원의 상승을 추구하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는 땅 속에서 싹이 움트는 형상인 ䷭ 지풍승(地風升), 배합괘는 축적된 에너지의 강한 시심을 풀어내는 ䷙ 산천대축(山天大畜), 착종괘는 기뻐하며 순하게 나아가는 모양인 ䷒ 지택림(地澤臨)이다. [출처] 45. 택지취|작성자 김기덕   46. ䷭ 지풍승(地風升)   지풍승은 땅(☷:坤) 속에 초목(☴:巽)이 뿌리를 박고 움터오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升은 안으로 순하고 밖으로는 유순함이 있어 음도가 성숙해가는 과정이며, 음물이 점차 쌓여 오르는 상이다. 아래의 巽은 나무를 의미하는데, 바람이 안으로 파고들 듯 땅 속에 뿌리를 내리는 모양이다. 위의 곤은 초목을 생육시키는 땅이니 땅 속에서 싹이 움터서 나오는 형상이다. 시에서의 기법은 희망적 감정이나 현실의 꿈을 상징하는 씨앗을 내면에 싹틔우고 암담한 현실, 또는 절망적 상황의 대지를 뚫고 나오는 기상이 있는 배치의 시쓰기이다.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인데, 둘째,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땅 속에 묻혀 있는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이 씨앗들이 땅(☷)에 숨겨져 아직은 밖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고 살짝 모습만 비추고 있는 형상이다. 핵심적인 의식이 모여 있는 문장으로 화분(음의 문장들) 속에서 살짝 고개 내밀기 시작한 새싹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地(☷)는 화분의 흙과 같은 존재로 덮어주고 감추어주는 역할을 하며, 핵심 내용을 드러내기 위한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화분은 크게 보면 전 지구적인 땅이며, 소우주적인 몸이며, 영원한 세계로 향한 우리의 정신적 토대를 의미한다. 地風升의 시적 분위기는 땅 속에 나무가 있어 싹이 트고 마침내는 큰 재목이 되는 상으로 구이, 구삼의 두 효가 바르고 깊은 뜻을 담고 있어 전체적인 시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형식이다. 사상의 시각으로 보면 地는 소양(⚎)으로 땅 위로 솟아오르는 강한 힘이고, 人의 소음(⚍)은 솟아오르고자하는 힘을 억누르고 있는 상이다. 天은 노음(⚏)으로 이러한 의식이나 상황을 덮고 있는 존재로 아직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다. 웅비하는 시의식의 감춰짐이나 내면의 배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升은 땅을 의미하는 坤卦가 위에 있고 바람(나무)을 의미하는 巽卦가 놓여서 크게 발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부드러운 새싹이 때를 맞춰 성장하는 상태로 종순한 태도로 순리에 따르는 상이다. 아직은 어리고 약한 새싹이라서 사나운 비바람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 머잖아 의젓한 나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발전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시가 바로 지풍승의 시이다. 지풍승이 변화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을 살펴보면 호괘는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을 추구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는 대하를 이루듯 흐르는 산문시인 ䷬ 택지취(澤地萃), 배합괘는 강건한 도로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 천뢰무망(天雷无妄), 착종괘는 어두운 현실을 따뜻하게 녹여줄 수 있는 시쓰기의 ䷓ 풍지관(風地觀)이다. [출처] 46. 지풍승|작성자 김기덕   47. ䷮ 택수곤(澤水坤)   택수곤은 위에 연못(☱:兌)이 있고 아래에 물(☵:坎)이 놓여 연못의 물이 마른 모양으로 곤궁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困卦는 剛爻가 柔爻에 의해 가려져 험난함을 나타내는데, 못에 물이 없어 곤궁한 상황으로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시에서도 곤궁한 상황, 절망적 현실 묘사의 방법으로 희망적인 것을 과거나 미실현의 단계에 놓고 절망적인 요소를 현재나 현실 진행단계로 놓아 음적인 요소가 양적인 요소를 지배, 또는 덮어버림으로써 현실의 절망을 강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채송화, 맨드라미 웃음 짓던 토담은 허물어지고, 꿈에 부풀던 항아리들은 깨어져”와 같은 구절에서 양의 요소들이 음의 요소에 의해 허물어지고 깨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음효와 양효의 대조적인 상황에서 음이 양을 덮어버림으로 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쓰기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 번째는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양의 문장을 포위, 덮어버림으로 음적인 상황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인 地는 소양(⚎)으로 음을 기반으로 해서 양이 뻗어 나오고 있는 상이다. 둘째 단락인 人 또한 소양(⚎)으로 음의 토양에서 양이 자라고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단락인 天에서 소음(⚍)이 되어 지금까지 기반이 되었던 양적인 요소들이 부정되고 음적인 요소로 변함으로써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감정이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감정으로 변화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곤괘는 연못 아래에 있는 물로 물이 마른 연못을 상징한다. 困은 곤란, 곤궁, 곤고한 상태이니 口(상자) 속에 木(나무)이 들어 있는 상이다. 나무는 두텁고 넓은 땅에 뿌리 내리고, 높고 시원스런 공간으로 줄기를 펴고 가지를 뻗으면서 막힘도 거리낌도 없이 자라는 것인데, 형틀에 갇힌 형상을 이루어 곤고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감정을 통해 물이 마른 연못의 곤고함 같은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택수곤의 變卦들을 살펴보면 호괘는 마음의 수양과 깨달음이 있는 ䷤ 풍화가인(風火家人), 도전괘는 음양이 교차한 맑은 샘물 같은 시의 ䷯ 수풍정(水風井), 배합괘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의미하는 ䷕ 산화비(山火賁), 착종괘는 절제된 시어, 함축적 운율의 시쓰기인 ䷻ 수택절(水澤節)이다. [출처] 47. 택수곤|작성자 김기덕   48. ䷯ 수풍정(水風井)   수풍정은 나무(☴:巽) 위에 물(☵:坎)이 있는 모양으로 아래로 井자의 나무를 놓아 샘물이 위로 솟아오르는 우물의 형상이다. 井은 안으로 겸손하고 밖으로 과감히 행하는 덕이 있으며, 땅 속의 물을 끌어올려 두루 우물물의 혜택을 베푸는 괘이다. 땅을 깊이 파야 맑은 샘물이 나오듯 마음을 가라앉히고 맑게 하여 정신과 육신이 청정함으로 만사를 통하니, 시에서도 마음을 맑게 하여 깊은 샘을 파듯 심오한 정신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우물과 같은 시쓰기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이며,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다. 이 형식은 첫째 음의 문장, 둘째 양의 문장, 셋째 음의 문장인 ☵의 형태로 압축될 수도 있다. 시는 정서와 사상의 우물파기이다. 음과 양이 교차한 감정의 직조를 통해 맑은 샘물 같은 시를 쓰고자 하는 방식이 바로 수풍정의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 人과 天은 소음(⚍)으로 음과 양이 하나씩 교차하고 있다. 이는 섞어 짜기와 같은 직조의 모양이다. 나무로 우물 정자의 침목을 만들 듯 음과 양의 문장이 교차를 이루어 샘물과 같은 진리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생 ‧ 로 ‧ 병 ‧ 사 ‧ 애 ‧ 오 ‧ 욕, 이 모두가 기쁨과 슬픔으로 섞어 짠 삶이듯 세 개의 단락이 감정의 교차, 표현의 교차, 욕망의 교차를 이루며 심오한 인생의 철학이 있는 시를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井은 우물이다. 한 고을은 옮길지라도 우물은 옮길 수가 없다. 줄기차게 샘솟는 근원이 땅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우물은 항상 맑은 물을 담고 줄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갈증을 해소하게 하고 생명을 키워 준다. 이러한 우물처럼 시는 누구나 읽고 깨달음을 얻으며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물의 생명력처럼 시 속엔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수풍정의 시쓰기는 영혼의 우물파기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두레박을 통해 맑은 물을 퍼 올리듯, 또한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줄기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 결실하는 시이다. 수풍정의 특색은 진리의 샘물과 같은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음과 양의 섞어 짜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꽃이나 열매와 같은 긍정적 향기나 삶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후련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풍정의 변괘 중 호괘는 어긋남의 대칭적, 대조적 기법인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음의 요소가 양을 지배하는 절망적 상황의 ䷮ 택수곤(澤水困), 배합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 신 ‧ 구의 조화, 남녀의 조화와 같은 상반된 관계의 조화를 의미하는 ䷔ 화뢰서합(火雷噬嗑), 착종괘는 흩어놓기 기법인 ䷺ 풍수환(風水渙)이다. [출처] 48. 수풍정|작성자 김기덕   49. ䷰ 택화혁(澤火革)   택화혁은 연못(☱:兌)이 위에 있고 불(☲:離)이 아래에 놓여 연못 속에 불이 들어있는 상이다. 위의 물은 아래로 흐르고 아래의 불은 위로 타올라 水 ‧ 火가 서로 대결하는 상태이다. 물은 불을 끄려하고 불은 물을 말리려 하는 가운데 상대를 고쳐 변하게 하니 革이다. 革은 안으로 밝고 밖으로 기쁨이 있으며,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른 괘로 곡식이 익어 결실하는 때를 의미한다. 시에서는 대결구도적인 배치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상승을 꾀하는 방법으로 더 넓은 사고의 확장과 이미지의 다양성 추구를 위한 것이다. 하늘을 선명하게 그리기 위해 어두운 땅을 배치한다든지,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기 위해 야수를 배치하는 기법과 같은 것인데,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의 전체적인 조화와 새로움을 위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택화혁을 효로 접근해 보면 첫 문장은 강한 양의 문장으로 위로 올라가 革하려는 강한 이미지이나 뒤에 음의 문장이 옴으로 상비관계를 이룬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이 와서 革하려는 시적의식이나 이미지의 창출에 강한 힘을 보탠다. 마지막 여섯 번째 문장에서 배치되는 음의 국면을 전개시킴으로 강렬한 시심을 표출하고자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革은 기존의 보편적인 이미지나 정서, 보편적 의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와 天은 소음(⚍)으로 내적인 양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숨어 있는 象이다. 地와 天은 시적 대상이 되는 세상만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적 소용돌이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모양은 바로 보편적인 사물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地와 天에 비해 세 번째, 네 번째 효인 人은 강한 양이 두 개인 노양(⚌)이다. 여기에서의 노양은 강한 변화의 욕구이며 새로운 시각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 새로운 변화의 강한 양적 의식을 부여하는 상이 택화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끌어와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모든 시쓰기가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대조적인 기법을 통한 혁명적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출처] 49. 택화혁|작성자 김기덕   50. ䷱ 화풍정(火風鼎)   화풍정은 아래에 나무와 바람(☴:巽)이 놓여 위로 불(☲:離)을 피우는 모양이다. 괘체로 보면 巽下絶(첫째 효의 끊어진 음효)은 아래의 갈라진 솥발과 같고, 離虛中(다섯 번째 효의 음효)은 빈 솥의 형상이니 화풍정이다. 火風鼎은 안으로는 순순히 따르며 받아들이는 덕을 이루고 밖으로는 환히 밝히니, 스스로를 가다듬어 밖을 밝히며 솥 안에 음식물을 넣고 삶는 형상이다. 시에서는 음적인 소재를 선택하더라도 그 소재를 푹푹 삶고 고아서 맑고, 영양가 있게 우려내는 솥과 같은 시쓰기이다. 화풍정은 치열한 시의 불때기를 의미하며, 사골을 고듯이 깊은 뜻을 우려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로 귀하게 삶은 음식은 제일 먼저 신께 드렸듯이 그 안엔 기도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어려운 현실이나 부정적 요소라고 할 수 있으나 두 번째 문장에서부터 네 번째 문장까지 양의 문장을 놓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마음으로 재해석해 초월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다섯 번째 문장에서 다시 한 번 음의 문장을 통해 현실을 재인식하지만, 여섯 번째 문장을 통해 음의 세계를 극복하고 양의 세계를 구축함으로 강렬한 희망적 메시지를 남기는 방법이다. 화풍정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펄펄 끓는 절규와 간절함이 필요하다. 그 절규와 간절함이 관념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무의미의 이미지 나열 또한 피해야할 부분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天과 地가 모두 소양(⚎)으로 이루어져서 내면의 소극적인 의미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여, 人(노양:⚌)의 강렬함이 삶아지고 드러날 수 있도록 솥과 같은 배치를 이루어야 한다. 天과 地의 초점은 人에게 맞추어져 있다. 그 초점은 태풍의 눈과 같은 것이며 블랙홀과 같은 흡입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모양은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물들이 시인의 긍정적 의식에 집중되어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鼎은 솥을 상징하는 모양으로 나무로 불을 때서 삶고 익힌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단락인 巽(☴)은 바람과 나무를 상징한다. 불을 때기 위한 준비단계이며, 본격적인 주제의식을 삶기 위한 도입적 요소이고, 중심에 대한 진입과정이다.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 단락에서 진일보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본격적인 불때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불때기는 고기를 삶는 것이며, 쇠를 녹이는 것이며, 감정을 들볶는 것이다. 이렇듯 두 개의 단락이 계층을 이루어야 하고, 감정의 진일보가 있어야 한다. 즉 두 개의 단락이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불과 나무와 바람은 서로 호흡이 맞는 팀 멤버와 같아서 서로가 필요한 관계요 상보적인 존재들로 하나의 시적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팀워크가 필요한 협력체이다. 화풍정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일관된 묘사를 하다가 끝에서 뒤집어버리는 ䷪ 택천쾌(澤天夬)이며, 도전괘는 대결구도적인 배치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상승을 꾀하는 방법인 ䷰ 택화혁(澤火革), 배합괘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의미처럼 험한 가운데 새로움이 움트는 ䷂ 수뢰둔(水雷屯), 착종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이다. [출처] 50. 화풍정|작성자 김기덕   51. ䷲ 중뢰진(重雷震)   중뢰진은 아래 위가 모두 우레(☳:震)로 이어진 괘로 우레가 거듭 쳐서 만물을 크게 요동시키며 발전시키는 象으로 땅 속에 숨어 있던 초목의 싹이 밖으로 움터 나오는 모양이다. 진은 해 뜨는 동방을 의미하며 동방의 기운으로 만물이 움터 나옴을 의미하는 괘이다. 시에서는 새싹이 나듯 중첩된 우레의 모양(☳ ☳)은 양의 중심 이미지에 음의 부분적인 이미지들이 움터 나오듯 배치되는 방법이다. 또한 중심 사물이나 개체가 제시되고 그 아래 의성어나 의태어, 세부적인 표현이 전개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구리가 개굴개굴”에서 ‘개구리’는 시의 중심 이미지인 첫 효인 양이고, ‘개굴개굴’은 두 번째, 세 번째 효인 음과 같다. 하나 더 예를 든다면 “거인 나무가 쓰러져 잠들어 있다. 코를 골 때마다 귀를 닮은 잎들만 들썩거릴 뿐,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깨워도 꿈쩍하지 않는다.”와 같은 표현이 있다면 중심사물인 ‘거인나무’는 첫 효인 양과 같으며, 중심사물인 거인을 세부적으로 묘사해 나가는 귀를 닮은 ‘잎’이나, 바람이 흔들어 깨우는 ‘가지’의 묘사는 六二, 六三 효인 음과 같은 것이다. 효로 분석해 보면 첫 효는 새싹이 움트는 나무의 몸체일 수도 있고 새싹이 나오는 땅일 수도 있다. 둘째, 셋째 음의 효는 새싹과 같은 것으로 몸체에서 파생되는 세부적 이미지나 중심 사상에서 파생된 보조적인 의미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레(☳:震)는 움직임이고 변화이고 잘게 쪼개짐이다. 중심 이미지나 중심 사상에 대한 변화, 새로운 뻗어감이나 분화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음(⚍)으로 양의 기운이 땅 속으로 뻗어가는 뿌리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人은 소양(⚎)으로 내면의 의식이 양의 기운을 따라 밖으로 표출되고 있는 象이다. 天은 물방울과 같은 개체들이 가득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는 중심 이미지의 분화, 확산을 의미하며, 중심사물이나 개체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나 지엽적인 접근을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우레가 거듭거듭 겹쳐오는 것이 중뢰진의 괘상이다. 두 개의 단락이 반복적일 수도 있고, 별개의 묘사일 수도 있지만,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들처럼 주된 대지의 이미지에 종된 새싹들이 피어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천둥은 고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현대전쟁의 어마어마한 포탄소리를 듣지 못한 그들에게는 천둥이야말로 최고의 공포였을 것이다. 우레는 오늘날의 포탄과 같은 것이다. 수류탄이 터지듯 하나의 양의 효에서 분화되는 음의 파편들을 연상케 한다. 이는 하나의 상징적 사물에서 분화, 확산되는 상징성이기도 하다. 상징성으로 폭탄이 터지듯 확산하는 의미나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뢰진과 관련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슬픔과 우울함에 침잠된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 수산건(水山蹇)이며, 도전괘는 重雷震의 반대적인 글쓰기로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인 ䷳ 중산간(重山艮), 배합괘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인 ䷸ 중풍손(重風巽), 착종괘는 ䷲ 중뢰진(重雷震)이다. [출처] 51. 중뢰진|작성자 김기덕   52. ䷳ 중산간(重山艮)   중산간은 아래 위가 모두 山(☶:艮)인 괘로 산이 거듭 중첩된 상이다. 艮은 안팎으로 거듭 그치는 덕이 있어 첩첩산중과 같이 어려운 모양을 이른다. 그러나 제 위치에서 본분을 지키고 때를 알아 처사하면 허물이 없다. 艮은 동북 방향에 속하니 아침 해가 솟는 뿌리에 해당하므로 만물의 종시가 艮方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시에서 重山艮은 重雷震의 반대적인 글쓰기로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이다. 논술과 같은 비문학에서는 결론이 뒤에 있는 미괄식 글쓰기와 같고, 시에서는 핵심표현이나 주제의식이 담긴 문장, 또는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표현을 뒤에 쓰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과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형성되어 뒤쪽으로 갈수록 의미나 표현이 강하고 확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음의 문장과 여섯 번째 양의 문장으로 반복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논증적인 관계로 본다면 귀납법적인 형식의 전개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음(⚏)으로 음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음적인 요소는 감정이나 사물의 관계뿐만 아니라 궤의 모양으로 볼 때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예시와 같으며 뒷받침 문장과 같다. 人의 소음(⚍)은 강한 핵심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졌다가 天의 소양(⚎)에 와서 내적인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며 강한 핵심을 표현해 주고 있다. 팔괘로 본다면 산이 겹쳐져서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그치는 상을 이루고 있다. 두 개의 단락을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나타낼 수도 있으며, 작은 봉우리와 같은 중간 점검 후 더 큰 봉우리 같은 최종 결론적인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침이라는 것은 결론이며, 핵심이며, 최종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그침이 여러 겹을 이룰 수도 있고, 여러 계단처럼 계층을 이룰 수도 있다. 중산간의 변괘 중 내부적 정황이나 성격, 심리, 사건의 내막을 말해주는 내부적 시각의 호괘는 ䷧ 뇌수해(雷水解)이며, 본괘의 단락에 대해 정반대적인 내용이나 묘사를 의미하는 도전괘는 ䷲ 중뢰진(重雷震), 아이러니나 역설적인 표현을 의미하는 배합괘는 ䷹ 중택태(重澤兌), 잘라서 새로운 조합을 통해 바라보는 착종괘적 표현은 ䷳ 중산간(重山艮)이다. [출처] 52. 중산간|작성자 김기덕   53. ䷴ 풍산점(風山漸)   풍산점은 바람(☴:巽)이 위에 있고 산(☶:艮)이 아래에 놓여 산 위에 나무가 점점 자라는 象이다. 漸은 산 위에 바람이 불어 초목과 금수가 미동하며 점진하는 괘상이며, 人事로는 여자가 집안(☶:친정)에서 부덕을 쌓은 후 혼기(☴)가 이르러 시집가는 모습이다. 또한 입춘 절기로부터 입하 절기로 나아가는 봄의 과정이니 만물이 땅 속으로부터 나와 점차 자라는 때를 이른다. 漸은 시에서 정신에 뿌리박은 하나의 시상이 점점 자라는 과정을 거쳐 의식이 확장되거나, 사고가 깊어지거나, 이미지의 농도가 짙어지거나, 형이상적 차원이 상승하여 점점 표현의 무게와 밀도, 깊이, 높이가 커지는 방향적 진행의 묘사를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이 와서 하나의 계단을 이루고, 다시 음의 문장이 와서 수평을 유지했다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양의 문장이 와서 비약적 상승을 꾀하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더욱 정확한 발전형태를 볼 수 있는데, 地의 노음(⚏)에서 人의 소음(⚍), 天의 태양(⚌)으로 그 기운이 상승하면서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단계별로 상승하는 점층적인 표현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점차 소멸해가는 점강적인 기법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방황’을 “나무들의 가지가 흔들린다./ 사람들이 어깨가 떨린다./ 하늘의 구름이 소용돌이친다.”라고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단계별로 차원과 강도가 달라지고 있다. 이렇듯 漸은 점점 더 발전하고 강해지는 시적 표현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풍산점(䷴)은 산 위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 산에 심겨진 나무는 눈, 비, 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자라게 된다. 급하게 자란 나무는 태풍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급격한 비약, 과장적인 건너뛰기를 지양하고 한 단계, 한 단계 철학적 시상을 키우거나 표현의 밀도감을 더해 가는 언어의 드로잉이다. 풍산점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하는 ䷿ 화수미제(火水未濟)이고, 도전괘, 배합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이질적인 단락 간의 연결 관계를 만들어 주는 형식의 ䷵ 뇌택귀매(雷澤歸妹), 착종괘는 산과 같은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형상인 ䷑ 산풍고(山風蠱)이다. [출처] 53. 풍산점|작성자 김기덕     54. ䷵ 뇌택귀매(雷澤歸妹)   뇌택귀매는 위에 우레(☳:震)가 있고 아래에 연못(☱:兌)이 놓인 상으로 兌의 少女가 위 震의 장남을 좇아 시집오는 궤이다. 귀매는 안으로 기뻐하며 밖으로 움직임이 있는 모양으로 어린 소녀가 위의 장남을 좇아 시집오는 형상으로 서방에 속한 兌가 동방에 속한 震에게 시집오는 과정이다. 시간상으로는 저녁을 지나 아침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혼은 이질적인 가정의 풍속이나 가문 간의 문화적, 혈연적인 연결 관계를 맺어주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이질적인 단락 간의 연결 관계를 만들어 주는 형식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효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섯째와 여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질적인 관계에서 셋째와 넷째 문장이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김으로 이질적인 전체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세 번째 효와 네 번째 효는 이질적인 관계를 묶어 주는 끈이나, 붙여 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성분이나 다른 차원의 사물을 이어 주기 위해서는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암수의 코드와 같은 연결점을 통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이고 天은 노음(⚏)이라서 상대적으로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나 人이 소양(⚎) 이어서 地의 노양은 인의 음이 끌어당기고, 天의 노음은 人의 양이 끌어당김으로 서로를 완충시키고 새로운 의식과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사관계 간의 접속이 아닌 상이한 관계 간의 접속이며 반대적, 대립적인 관계 간의 연결, 그리고 아주 먼 유사성의 사물이나 사건들 간의 연결을 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한 것들 간의 연결을 꾀하기 위해서는 내부적인 미세한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며, 연결의 끈을 찾아야 한다. 팔괘로 본다면 아래의 연못과 위의 우레는 서로의 유사관계를 찾아볼 수 없지만 연못의 셋째 효인 소녀와 우레의 첫째 효인 장남이 만나 관계를 이루고 결혼을 하는 상이다. 하나의 단락과 또 하나의 단락이 크게 유사한 내용이 없지만 그 단락 속의 한두 줄의 문장을 통해 서로 연결하고 이어질 수 있도록 접속, 긴밀한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뇌택귀매의 관계는 병치의 관계와는 다르다. 병치는 유사한 사물이나 상황의 단어나 문장을 병치시킴으로 건너뛰기를 하는 방법이지만, 뇌택귀매의 방법은 이질적이고 비전도적인 관계의 사물이나 상황을 풀칠하여 붙이듯 접속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풀 역할을 하는 것은 주제나 제목, 또는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뇌택귀매의 변괘 중 호괘는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하는 ䷾ 수화미제(水火未濟)이며, 도전괘, 배합괘는 의식이 확장되거나, 사고가 깊어지거나, 이미지의 농도가 짙어지거나, 형이상적 차원이 상승하여 점점 표현의 무게와 밀도, 깊이, 높이가 커지는 방향적 진행의 묘사를 의미하는 ䷴ 풍산점(風山漸), 착종괘는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 택뢰수(澤雷隨)이다. [출처] 54. 뇌택귀매|작성자 김기덕   55. ䷶ 뇌화풍(雷火豊) 뇌화풍은 아래에 火(☲:離)가 있고 위에 雷(☳:震)가 있어 번개가 친 후 우레가 울리는 상으로 밝음으로써 움직여 나아가 행하는 까닭에 風大하여진다. 괘상으로는 번개(☲)가 친 후 뇌성(☳)이 상응하는 상으로 同聲相應의 이치를 이른다. 이는 마치 수탉이 홰를 치면 모든 닭들이 따라서 함께 우는 이치니 서로 응하여 합하다 보면 풍성해지는 법이다. 시에서 뇌화풍은 하나의 주제나 제목을 향한 다양한 시각의 묘사적 접근을 통해 풍성한 의식이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있다. 다양하지만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통일성이 있지만 하늘과 땅, 인간 사이의 여러 이야기나 묘사들이 접목되어 풍요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셋째, 넷째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둘째와 다섯째, 여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만들고 있다. 첫째의 양과 둘째의 음이 상응하고, 셋째, 넷째의 양이 다섯째, 여섯째의 음과 상응관계를 이루어 다양한 관계를 만들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하늘과 사람, 땅이 모두 제각각으로 다양하지만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어 풍요함을 나타내 주어야 한다. 地는 소음(⚍), 人은 노양(⚌), 天은 노음(⚏)으로 천 ‧ 인 ‧ 지가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다양함이 하나로 묶여 풍요함을 나타낼 수 있는 글쓰기이다. 자칫 여러 종류의 나열만 나타낼 수도 있지만 부챗살처럼 여러 조각이 하나의 주제나 큰 틀의 이미지로 모아져 다양성을 갖게 해야 한다. 팔괘로 보면 아래에 번개가 먼저 있은 후 위에 우레가 놓여 나중에 천둥이 뒤쫓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 번개만 친다면 그 무서움은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번개 후에 우렁찬 천둥이 울릴 때 그 무서움은 배가되듯이, 번개 같은 하나의 단락에서 상응하는 천둥 같은 두 번째의 단락을 통해 풍대함을 갖게 해 주는 방식이다. 그 풍대함의 표현이 빛과 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빛만 밝은들 이 둘의 조합보다는 그 풍대함은 적을 것이다. 뇌화풍의 글은 바로 이런 상승효과를 노린 다양함의 조합이며 효율적인 표현의 협공이라고 할 수 있다. 뇌화풍과 관련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시에서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도전괘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리저리 떠돌 듯 연결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의 ䷦ 화산여(火山旅), 배합괘는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연결, 이미지의 조합에 신경 쓰지 않고 따로따로 흩어놓는 기법인 ䷺ 풍수환(風水渙), 착종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이며, 정신과 물질의 조화, 음과 양의 조화가 있는 시쓰기인 ䷔ 화뢰서합(火雷噬嗑)이다. [출처] 55. 뇌화풍|작성자 김기덕   56. ䷷ 화산여(火山旅) 화산여는 山(☶:艮)이 아래에 놓이고 火(☲:離)가 위에 위치하여 산 위에 불이 붙은 象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와 같이 산등성이의 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旅는 안으로 그치는 절제가 있으며 밖으로는 밝은 덕이 있으니, 해와 달이 일정하게 주야왕래하며 사시를 운행하는 현상이다. 시에서 旅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리저리 떠돌 듯 연결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이다. 태양의 뜨고 짐은 일정하지만 굿은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도 있듯이 일정한 원칙이 있지만 그 원칙 속에서의 많은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시쓰기이다. 산 위에 부는 바람에 따라 산에서 산으로 건너뛰듯이 정서적, 상징적 표현의 이동을 꾀할 수 있다. 만물의 도나 인생의 삶 역시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떠날 수 없는 불역의 방도가 있듯 변화무쌍하지만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형식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셋째와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음, 음, 양, 양, 음, 양으로 원칙이 있지만 음양의 변화를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의 노음(⚏)과 人의 노양(⚌)이 큰 변화를 이루는데, 여기에 天의 소양(⚎)이 둘에 상응한 원칙을 가지고 중심을 잡고 있는 象이다. 人은 인간적이며 정서적이지만 地는 사물적인 것을 의미한다. 사물에 따른 인간적인 정서의 큰 변화를 天의 원리, 즉 형이상적인 원리가 지주가 되어 人과 地를 포괄하고 있는 모양이다. 天의 형이상적인 원칙 아래 인간의 정서나 육체, 삶은 地의 사물적인 것과의 많은 거리, 상이성 등을 좁혀 人에서 地로, 地에서 人으로의 변화와 건너 뜀, 오고감의 관계를 이루어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旅는 산(☶:艮) 위의 밝은 불(☲:離)을 의미한다. 불도 밝게 널리 비추는 것인데 산 위에만 있지 않고 확산되고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 旅다. 첫째 단락은 그침이 있는 산이다. 그침은 원칙이며, 대전제이며, 결론적인 마침이다. 둘째 단락은 확산적인 불이다. 이 불은 사방으로 퍼져가는 욕망이고, 열정이고, 진리이다. 불의 변화된 몸짓은 이리저리 옮겨 붙는 상징적 접속이고 배치이다. 하나의 원칙을 세운 보리 줄기에서 많은 뿌리들의 표현과 이미지가 뻗어나가듯이 旅의 글쓰기는 옮겨 붙는 불의 배치적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화산여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도전괘는 하나의 주제나 제목을 향한 다양한 시각의 묘사적 접근을 통해 풍성한 의식이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 뇌화풍(雷火豊), 배합괘는 연못에 담겨진 물처럼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갖추고 절제를 하듯 시쓰기에서도 절제된 언어의 선택, 정해진 운율, 함축적 표현이 있는 형식을 의미하는 ䷻ 수택절(水澤節), 착종괘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통해 함축적인 표현을 이루고자하는 ䷕ 산화비(山火賁)이다. [출처] 56. 화산여|작성자 김기덕   57. ䷸ 중풍손(重風巽)   중풍손은 상하로 거듭 바람(☴:巽)이 부는 象으로 바람이 서로를 따라 합하듯 공손한 덕으로 한 몸을 이루는 모양이다. 巽은 안팎으로 순하고 부드러운 겸손의 마음이 바람과 같이 안으로 파고드는 형상으로 시에서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이다. 바람(☴)은 장녀를 뜻하는데, 장녀가 겹쳐짐으로 강조된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둘째,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넷째 문장은 음의 문장, 다섯째, 여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의 문장은 두 양의 문장을 리드하는 여성적 감성이며, 시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지침이 되고 있다. 두 양의 문장 또한 음의 문장을 따르며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극히 부드럽고 순화된 언어의 문장을 이루어야 한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으로 사물의 밝은 부분을 선택하여 人을 소음(⚍)의 마음으로 여성화함으로써 하늘의 밝은 뜻을 드러내는 형상을 갖게 하고 있다. 天은 양의 강한 추상성, 또는 형이상의 차원을 이루고 人과 地는 서로 받아들임으로 순화되고 하나 되어 己+己+共의 뜻을 이룬다. 팔괘로 풀이하면 바람(☴)이 겹쳐있다. 巽은 장녀를 의미하며, 나무나 풀을 상징하고 들어감을 뜻한다. 장녀는 여성성을 의미하며, 나무나 풀은 바람에 흔들리는 여심과 같으며, 들어감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외적인 사회성보다는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규방적인 정서를 의미한다.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이 똑같은 여성적 정서를 통해 이루어지며 서로의 관계가 하나의 시적 대상에 대한 유사적 접근을 형성하고 있다. 중풍손에 대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활을 쏠 때 활줄은 뒤로 당기고 활대는 앞으로 밀면서 생기는 힘이 화살을 격발하게 하니 비록 처음은 어긋나나 그 어긋남에 의해 힘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기쁨이 충만한 시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 물결이 치는 큰 바다 같은 상을 이루고 있어 음률이 있는 시도 여기에 속하며, 물 흐르듯 청산유수격의 시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 중택태(重澤兌), 배합괘는 새싹이 나듯 ☳☳가 양의 중심 이미지에 음의 부분적인 이미지들이 움터 나오듯 배치되는 ䷲ 중뢰진(重雷震), 착종괘는 ䷸ 중풍손(重風巽)이다. [출처] 57. 중풍손|작성자 김기덕   58. ䷹ 중택태(重澤兌)   중택태는 위와 아래가 거듭 연못(☱:兌)을 이루어 큰 연못을 이룬 괘로서, 물이 고여 일렁이듯 밖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象이다. 兌는 방위상으로 서방이고 계절상으로는 결실기인 가을철을 의미하니 풍요와 기쁨이 가득한 것을 상징한다. 상하로 기쁨이 가득하니 안팎으로 기쁨을 함께 누리는 모양으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소녀를 의미하여 동심의 세계에서 즐거이 노니는 때를 상징한다. 또한 ☱는 구멍이 열린 象으로 口舌, 무당 등을 뜻하기도 한다. 시에서는 기쁨이 충만한 시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 물결이 치는 큰 바다 같은 상을 이루고 있어 음률이 있는 시도 여기에 속하며, 물 흐르듯 청산유수격의 시도 바로 중택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와 둘째의 양(⚌)은 충만한 물의 형상이며, 셋 번째 효인 음(⚋)은 물결이 출렁이는 파도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음은 음의 문장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춤추는 파도와 같은 문장으로 풀이되어야 할 것이다. 흥을 돋우는 추임새나 후렴구, 또는 문장과 같은 것으로 덩실덩실 춤추는 동작의 글쓰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으로 이루어졌고, 人은 소양(⚎), 天은 소음(⚍)으로 구성되어 물속에 가라앉은 물체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가장 강한 것은 맨 아래에 놓이고 그 다음 강한 것이 그 위에 오르고, 더 가벼운 것이 맨 위로 올라와 물속에 가라앉은 물체의 비중을 보는 것 같다. 마음의 연못 속에도 앙금은 가라앉고 기쁨은 밖으로 표출되듯, 삶의 앙금은 가라앉히고 기쁜 감정, 즐거운 시상을 밖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도 기쁨이며, 둘째 단락도 기쁨이 가득한 글쓰기이다. 그렇다고 기쁨의 감정이라고 해서 배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설명적 언어의 나열을 이룬 기쁨과 환희의 들뜬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 장구하면서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내적 희열의 몸짓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중택태의 변효를 살펴보면 호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이며, 도전괘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인 ䷸ 중풍손(重風巽), 배합괘는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인 ䷳ 중산간(重山艮), 착종괘는 ䷹ 중택태(重澤兌)이다. [출처] 58. 중택태|작성자 김기덕   59. ䷺ 풍수환(風水渙)   풍수환은 위에 바람(☴:巽)이 오고 아래에 물(☵:坎)이 놓여 물 위에 바람이 부는 상으로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흩어지는 괘이다. 손순한 덕으로 안의 중심을 지키면서 밖으로 그릇된 것을 흩어내는 이치가 있고, 배를 띄움에 있어 조류와 바람의 이치를 이용하는 의미도 있으나 詩에서는 각각을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연결, 이미지의 조합에 신경 쓰지 않고 따로따로 흩어놓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 넷째는 음의 문장, 다섯째,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넷째에서 음이 겹치고, 다섯째, 여섯째에서 양이 겹치고 있으나 배치만 음적이고 양적인 요소의 중복일 뿐 반드시 내용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용에 상관없이 이미지를 배치하여 이미지의 확산, 사고의 확장, 통일된 주제의식 등을 흩어놓고 분산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접근해 보면 地는 소양(⚎)이고, 人은 노음(⚏), 天은 노양(⚌)으로 천 ․ 인 ․ 지가 각각 다른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天과 人과 地가 각각 다른 이미지, 다른 사고, 다른 표현의 기법을 사용할 수 있다. 반드시 주제를 일치시킬 필요가 없지만, 제목에 따라 확장의 폭을 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 개의 단락으로 형성된 표현이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내용을 갖게 됨으로 아주 낯설고 어리둥절한 표현을 만드는 방법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물 위에 부는 바람의 상으로 바람이 물결을 흩어놓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로 모아지고 뭉쳐지게 하는 주제의식이나 통일된 이미지에 대한 의도적인 분해, 흩어놓음, 산만하게 하기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연관관계가 없는 것들을 배치시킨다면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이는 분열된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반영이며, 자칫 광인의 중얼거림이나 몸짓 같은 것을 의미하여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하는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풍수환의 변괘 중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頤는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재물이나 덕을 두루 베풀어 흩어야 하니 이것이 기르는 道라고 할 수 있다. 도전괘는 ䷻ 수택절(水澤節)이다 渙은 흩어지는 것이니 흩어지다 보면 어딘가에 걸려 멈추기 때문에 節이 되는 것이다. 배합괘는 渙의 반대인 ䷶ 뇌화풍(雷火豊)이고, 착종괘는 ䷯ 수풍정(水風井)으로, 渙은 흩어지는 것이지만 井은 두레박으로 샘물을 끌어올리는 象이라서 시의 다양한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출처] 59. 풍수환|작성자 김기덕   60. ䷻ 수택절(水澤節)   수택절은 물(☵:坎)이 위에 있고 연못(☱:兌)이 아래에 놓인 象으로 차면 넘쳐흐르게 하고 비면 고여 모이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연못에 담겨진 물처럼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갖추고 절제를 하듯 시쓰기에서도 절제된 언어의 선택, 정해진 운율, 함축적 표현이 있는 형식을 의미한다. 節은 서방을 거쳐 북방에 이르는 괘상으로 저녁을 지나 밤이 오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는 때라서 일을 마치는 마디를 의미한다. 신체의 관절, 초목의 마디, 24절기 등이 모두 節의 이치이며, 절도, 절제 등을 뜻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셋째, 넷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양, 양, 음, 음, 양, 음으로 통일된 절제를 가지고 있다. 내호괘 震(☳)은 대나무가 뻗는 象이요, 외호괘 艮(☶)은 마디를 맺는 象이다. 시의 전체적 형식에 절도가 있고 대나무의 마디와 같은 함축적 끊음이 있어야 한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이고 人은 노음(⚏) 며, 天은 소음(⚍)인데, 天 ․ 人 ․ 地가 각각 다른 모습을 이루어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대나무가 마디를 이루어 뻗어가듯 한 단락마다 함축적 절도를 이루고 있어서 압축된 표현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팔괘로 보면 연못에 가두어진 물을 의미하는데, 흐르는 성질의 물을 가두어 하나의 형태를 만들듯 유려한 언어의 흐름을 막고 꼭 필요한 형태의 이미지를 절도 있게 그리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다. 네모질 수도 있고, 동그랄 수도 있고, 길쭉한 타원형일 수도 있다. 이러한 연못의 모양이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이다. 연못의 물은 언어다. 언어를 통해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연못을 그리는 방법이다. 언어의 절제와 함축적 표현이 필요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수택절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시작하고 마치는 주기를 뜻하니 이로 말미암아 節의 度數가 있게 된다. 도전괘는 분열된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반영이며, 자칫 광인의 중얼거림이나 몸짓 같은 것을 의미하여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하는 시쓰기라고 할 수도 있는 ䷺ 풍수환(風水渙)이며, 배합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인 ䷷ 화산여(火山旅), 착종괘는 ䷮ 택수곤(澤水困)으로 못 속의 물이 아래로 스미어 땅이 마르니 곤궁한 象이다. [출처] 60. 수택절|작성자 김기덕   61. ䷼ 풍택중부(風澤中孚) 풍택중부는 위에 바람(☴:巽)이 놓이고 아래에 연못(☱:兌)이 있는 象으로서 안으로 기뻐하고 밖으로 부드럽게 행하니 중심이 미더운 모습이다. 孚는 마치 어미닭이 알 속에 들어있는 어린 새끼(子)를 부화시키기 위해 발톱(爪)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품고 있는 뜻이 들어 있는데, 中孚의 象은 강한 양에 의해 유약한 음이 안으로 길러지는 모양으로 부모의 품에서 어린 생명이 자라나는 현상을 상징한다. 시에서 풍택중부는 자연이나 주변 사물, 또는 상황에 의해 시인 자신이나 인간의 유약한 마음에 대한 에너지 공급과 같은 시쓰기이다. 그런 만큼 자연이나 주변 사물은 강하게 그려지고 시인 자신이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표현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과 둘째 문장, 다섯째와 여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중간에 있는 셋째, 넷째 문장만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외부적인 자연이나 사물은 강하고 크지만 시인이나 다른 인간의 존재는 나약하고 작은 존재로 표현되어 자연이나 외부적 사물에 의해 힘을 얻고, 꿈과 희망이 키워지는 형태의 시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접근하면 地는 노양(⚌)이고 天도 노양(⚌)인데, 人만 노음(⚏)으로 人은 절망과 어둠에 처한 상황이지만 주변의 地와 天은 광명한 태양과 같아서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또한 풍택중부는 가운데가 빈 배와 같은데, 가운데가 비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널 수 있다. 이는 마음을 비운 사람과 같아서 세상의 바다를 건너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음을 비운 시쓰기도 중부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연못 위에 부는 바람이다. 기쁨이 가득한 연못 위에 부는 부드러운 바람은 기쁨을 배가시키며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에 충분하다. 주변 환경이나 사물에 의해 힘을 얻는 배치가 중부이며, 힘과 위로를 얻는 시쓰기이다. 풍택중부의 변괘를 보면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기르는 양육의 공이 있는 상이다. 頤는 上下의 두 양이 안의 음들을 기르는 것이요, 중부는 안의 두 음이 허한 상태로 양들을 미덥게 좇는 것이다. 배합괘는 ䷽ 뇌산소과(雷山小過)로 소과는 산 위에 나무가 자라는 象으로 일단 그쳤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착종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로 本未가 허약해 엎어지는 象을 이루고 있다. [출처] 61. 풍택중부|작성자 김기덕   62. ䷽ 뇌산소과(雷山小過)   뇌산소과는 위에 雷(☳:震)가 있고 아래에 山(☶:艮)이 놓여 있는 상이다. 안으로 그치고 밖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으므로 일단 멈추었다가 나아가게 되니 소과이며, 二陽四陰의 괘로서 陰(小)이 과도하니 小過가 된다. 小過의 互卦가 大過임을 미루어 볼 때 모든 것이 소과하는 가운데 대과를 이루니 하루가 30번 거듭하여 한 달이 되고(小過), 한 달이 12회 거듭하여 한 해를 이룸(大過)과 같다. 소과는 작은 일은 가능하고 큰일은 가능하지 못하여 나는 새가 소리를 남김에 올라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내려오는 것은 마땅한 듯하면 좋은 상황이다. 시에서는 시인 주변에 음의 배치가 많지만,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작 시인은 희망이 가득한 상태의 글쓰기이다. 절망적 상황,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어머니와 같은, 슬픔과 고통의 현실을 덮는 눈의 부드러운 빛깔이 색칠하는 것 같은 표현을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와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며, 셋째와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와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음적 요소가 강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소과는 六二와 六五의 柔가 중을 얻고, 강은 中正을 얻지 못했으니, 큰일은 할 수 없고 작은 일은 가능하듯 시의 흐름이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작고 소심한 감정의 전개를 이룸이 특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天은 노음(⚏)이며, 人만 노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만물은 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사람만 양으로 이루어져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네 음이 두 양보다 많은데다 음이 중을 얻고 양은 중을 잃었으니 음이 형통하는 상황이다. 사람이 양을 추구하려 하나 세상과 하늘의 이치는 음 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큰 뜻을 이루기가 어렵고 막힘이 있는 모양이다. 첫째와 셋째 단락은 음의 단락을 이루고, 둘째 단락만 양의 단락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음적 배치의 강세를 이루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뇌산소과는 상괘와 하괘가 서로 등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서로 지향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의 마음이 괴리하고 있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는 지위를 얻지 못하고 소인배들만 기를 펴고 있어서 악이 선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과잉의욕을 버려야 하고 확대 전진을 시도하지 말아야 하므로 소극적, 여성적 내용의 시쓰기이다. 또한 이 괘는 나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효인 삼, 사효는 새의 몸을 의미하며, 나머지 음효는 각각의 좌우 날개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나는 새는 위로 오를 수 없다. 그것은 대기의 압력을 거슬러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순조로워서 땅의 인력에 편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 역리하여 거스르지 말고 순순히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의 글쓰기이다. 뇌산소과의 호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인데, 대과는 크게 나아가는 뜻이 있는 양의 지나침이요, 일월의 운행을 의미하기도 한다. 배합괘는 ䷼ 풍택중부이며, 착종괘는 ䷚ 산뢰이(山雷頤)이다. 산뢰이는 一陽이 始發하여 一陽이 終止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산 아래 초목이 길러지는 상이다 [출처] 62. 뇌산소과|작성자 김기덕   63. ䷾ 수화기제(水火旣濟)   수화기제는 물(☵:坎)이 위에 있고 불(☲:離)이 아래에 놓여 있는 象으로 물은 달을 상징하며 불은 해를 상징하여 日月이 서로 만나 밝게 비추는 水昇火降을 이루고 있다. 또한 卦體의 모든 효들이 제 위치에 바르게 처하고 서로 응하니 旣濟이다. 효의 正位를 따진다면 초효는 양, 이효는 음, 삼효는 양, 사효는 음, 오효는 양, 상효는 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수화기제는 모든 효들이 제 位를 바르게 얻어 음양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에서는 감정과 지성의 조화, 격정과 인내의 조화, 어둠과 밝음의 조화, 남과 여의 조화와 같은 윤리적이며 정석적인 시쓰기를 의미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 둘째는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형식으로 정 위치에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 위치라 함은 상식적이며, 윤리적이며, 원칙적인 관계를 말하며, 합리적인 배치 및 조화로운 색채의 조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마음의 정서적 안정과 편안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완성도가 높은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과 天이 똑같은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음은 內剛外柔의 성질로 시에서는 강한 감정의 절제적 표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단락, 둘째 단락, 셋째 단락의 흐름에 차이가 없으며, 안정적이고 심도 있는 감정의 표현을 이룰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수화기제는 물을 의미하는 坎卦가 상괘로 놓이고, 불을 의미하는 離卦가 하괘로 되어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고 불은 위로 타오르는 성질이 있다. 물은 위에 있으므로 그 마음은 아래로 향해 있고 불이 밑에 있으므로 그 마음은 위로 향하고 있어서 서로 만나 교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물과 불의 기운이 합쳐져 물건을 삶고 익히듯이 기제는 각기 정당한 위치를 얻고 서로 협력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시쓰기에서도 정석적인 배치를 통해 타당한 관계를 만들고 정서적, 지적 관계를 충실히 엮어 감동을 배가시키는 시쓰기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수화기제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등 모든 괘가 ䷿ 화수미제(火水未濟)를 이루고 있다. 기제는 모든 효가 제 位를 바르게 얻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내괘는 불이고 외괘는 물로 이루어져 먼저는 밝으나 나중은 험난한 일이 생김을 의미하듯 수화기제의 변괘는 모두 서로 화합치 못하는 화수미제로 이루어져 있다. 정석적 시쓰기에서 변형된 것은 다 변칙적인 시가 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출처] 63. 수화기제|작성자 김기덕   64. ䷿ 화수미제(火水未濟)   화수미제는 위에 불(☲:離)이 놓이고 아래에 물(☵:坎)이 놓인 象으로 불은 위로 타오르고 물은 아래로 흘러 서로 사귀지 못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든 효가 정상적인 제 위치를 얻지 못하고 부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未濟(일이 아직 끝나지 않음)이다. 효의 정 위치는 초양, 이음, 삼양, 사음, 오양, 상음의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초음, 이양, 삼음, 사양, 오음, 상양의 관계를 이루어 완전히 상반된 모양을 갖고 있다. 이는 시에서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三陰三陽이 모두 바른 위에 처하지 못하고 있다. 내괘가 坎水이므로 험난한 데 빠져 건너지 못하는 형국이며, 외호괘도 坎水이므로 橫流하는 상이다.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향하는 성질로 상극을 이루고 있지만 물이 불을 끄고 불이 물을 하늘로 오르게 하듯 그 속에 또 다른 상생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시쓰기에서도 반역적인 관계, 뒤집는 관계, 도전적, 역전의 배치를 통해 의미를 강화시키고 표현을 도발적, 충격적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天과 人과 地가 모두 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양은 內柔外剛, 內貧外富적인 모양으로 심리와 표현의 격차, 의지와 도전의 격차를 만들며, 배치의 관계가 상이하고 비범하며 생경한 상태를 말한다.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 셋째 단락이 같은 형태를 이루며, 의식적인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무언가 새로운 조합과 새로운 정비 및 시작이 필요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불이 물 위에 있는 상태로 위치가 적당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 괘의 형태는 주역의 논리에 한 개도 적당한 위치에 있지 않다. 천지와 일월에 이르기까지 제 위치를 얻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뒤죽박죽된 관계를 의미하며 아직 미완성을 상징한다. 주역의 법칙은 영원히 미완성이며 인생도 영원히 미완성이다. 또한 시도 영원한 미완성이며, 영원한 미스테리인 것이다. 시의 정석은 없다. 사고의 원칙은 없다. 완벽한 시를 쓴 것 같지만 실은 거기서부터 시는 걸음마 단계의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진다. 사물의 배치에 정석은 없다. 불완전한 배치, 비뚤어진 배치가 곧 시의 시작이며 사고의 중심인 것이다. 화수미제의 변괘는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모두 수화기제이다. 기제는 미제를 낳고 미제는 기제를 낳아 끝없이 운행한다. 주역 上經의 머릿괘인 乾 ․〮 坤은 도전괘, 호괘, 착종괘가 모두 불변이고 다만 서로 배합관계만 이루므로 乾坤이 부동의 본체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기제, 미제는 상호 끝없이 변동하여 오가니 건곤은 不易의 몸이요, 기제 ․ 미제는 交易의 本이라 할 수 있다. [출처] 64. 화수미제|작성자 김기덕     * 주역적 시쓰기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64괘의 시쓰기 방법을 제시했다. 64가지의 시쓰기 방법에서 변효의 방법까지 더하면 실상 시쓰기의 방법은 320가지의 방법으로 나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좋은 시를 쓰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 가지의 방법으로라도 제대로 시를 쓸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시인일 것이다. 현 시대의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에 맞는 방법으로 시를 쓰면서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여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둔 시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무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일방적인 설득의 시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일방적이던 TV나 라디오 등의 매체들이 이제는 쌍방의 소통을 중시하고 있다. 시도 일방적인 자기감정의 전달에서 벗어나 쌍방소통을 이루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전달의 시는 주제의 통일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독자가 먼저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시는 주제성보다는 회화성이 중요하다. 언어로 그린 그림을 보고 독자들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그림은 색의 배치이며, 사물의 구도인 것이다. 이러한 구도를 만들고 색을 다양하게 배치하기 위해선 다양한 시쓰기의 방법이 필요하고, 배치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열거한 주역적 방법은 배치의 변화이다. 주역적 시쓰기는 배치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새로운 구도를 잡고 천변만화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다. 기의 흐름에 따라 천지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이치를 밝힌 주역을 해석하고 괘의 모양에 따라 언어를 배치함으로써 시인이 의도하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방법에 대해 예가 될 수 있는 시를 제시할 수 있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기존의 시에선 이 방법들을 뒷받침할 만한 적합한 시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예시를 쓰면서 이론을 정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증명되지 않은 시창작법처럼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론을 먼저 정리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남은 나의 시간들은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시를 쓰는데 채워질 것이다. 또한 이 이론에 공감하는 많은 시인들이 나타나서 더 많은 연구를 하고 미비한 점들을 채워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출처] 주역적 시쓰기에 대한 기대|작성자 김기덕  
243    가장 기본적인 수필창작 형태 / 이관희 댓글:  조회:1546  추천:0  2017-10-15
  가장 기본적인 창작 형태       이관희 (시인 문학평론가 창작에세이 이론창안)         【 눈雪 위의 글씨 】   윤오영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목필木筆을 들고 종일 들판으로 돌아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 하고 돌아왔다. 내 글씨는 옥판玉板의 전자篆字 같이 아름다웠다.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 검은 흙만이 슬프게도 드러나 있었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기뻐했다.   (필자주 : 본서는 55편의 작품에 대한 55가지의 창작양식을 분석, 강의하고 있다. 55편 모두 동일한 분석 항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 작품 「눈 위의 글씨」 와 같은 상세 강의는 본 작품에서만 행하고 있다. 나머지54편에 대한 상세 강의가 필요 할 시는 「눈 위의 글씨」 편을 참고 하도록 편집 되었다.)   ∥창작 분석∥   1. 소재의 형상적 발견 1) 창작문학의 소재 발견과 일반산문문학(에세이)의 소재 발견은 다르다 문예 창작법의 첫 번째 단계는 소재의 발견에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야 말로 실제 문예 창작법의 ABC 중에서도 A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창작은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작문학의 소재 발견과 일반산문문학의 소재 발견은 다르다. 문학에는 두 가지 직능의 문학이 있다. 하나는 창작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다. 시,소설, 희곡, 동화, 그리고 창작문예수필은 창작문학이다. 그러나 에세이는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다. 창작문학은 현실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문학이다. 그러나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은 상상력의 세계가 아닌 ‘이미 있는 현실의 것’에 관해서 토의하는 형식의 문학이다. 창작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해야 된다. 왜냐하면 문예창작이란 상상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창작)일반산문문학(본고에서는 그 대표적 형식인 에세이를 예로 들것이다. 이하 동일)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해야 된다. 에세이는 형상적 존재 창작에 목적이 있는 문학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에 관한 개념적 논의에 목적이 있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작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해야 되고, 에세이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해야 된다는 말은 마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밭에다 팥을 심어 놓고 콩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없고, 콩을 심어 놓고 팥이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없다. 창작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원고지에 형상을 심어야 되고,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는 개념(논리)을 심어야 된다.   2) 소재의 상상적 발견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해야 된다. 왜냐하면 문학의 형상은 상상적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문학의 소재는 삼라만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라만상이 그대로 다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적으로 발견된 것만이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문학적으로 발견 된 일이 없는 소재의 나열이 잡문, 신변잡기가 된다. 소재의 ‘문학적 발견’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문학적 발견이란 자연 상태의 소재를 예술작품으로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고, 소재를 예술작품으로 발견한다는 뜻은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한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본질상 작가가 상상한 상상력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예창작의 실제는 한 마디로 [이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저것]이라는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이것]이라는 소재는 현실이며, 사실이며, 자연 상태의 것이다. 자연 상태의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예술적으로 생긴 것이라 해도 창작물은 아니다. 창작물이란 상상력의 산물이어야 창작물이 될 수 있다. 설사 어떤 예술작품이 사실보다도 못한 조잡한 작품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것이 예술이고 작품이지 사실이 그보다 낫다고 해서 사실을 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현실의 사실이나 자연 상태의 어떤 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있고,기가 막힌 것이라 해도 그것 자체에 반해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의 훌륭함을 뛰어 넘어 그보다 더 나은 상상력의 세계를 볼 줄 알아야 된다. 만약에 어떤 작가가 금강산에 가서 ‘야아, 기가 막히네!’라고 감탄만 하다가 온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금강산에 관해서 아무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쓴다고 해도 ‘야아, 금강산에 가 봤더니 입이 딱 벌어져서 할 말이 없더라.’는 식의 글 이상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작가는 호랑이한테 잡혀 가도 정신만은 예술적으로 똑바로 차려야 되는 사람이다. 금강산이 아무리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하더라도 작가는 거기에 넋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상상력의 금강산을 볼 줄 알아야 된다. 작가가 [이것]이라는 소재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저것]이라는 창작의 세계가 다름 아닌 현실보다 더 아름다운 ‘상상력의 금강산’인 것이다. 문학이란 본질상 상상력의 세계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이 사실부터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해해야만 된다. 작가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대답은 작가란 상상력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작가는 아침에 눈을 뜰 때도 현실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에서 눈을 떠야 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도 상상력의 세계에서 잠이 들어야 된다. 그리고 꿈속에서도 상상해야 된다. 작가의 책상머리에는 ‘상상하라’는 한 마디가 좌우명으로 평생 붙어 있어야 된다.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상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재의 형상적 발견이란 첫째로 [이것]이라는 사실의 소재를 [저것]이라는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윤오영의 「눈 위의 글씨」에서,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곳의 ‘생각했다’는 상상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소재의 상상적 발견이다.   3) 소재의 형상적 발견*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한다는 것과 개념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소재를 상상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의 소재를 상상적인 시각에서 보고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이 아닌 현실적 문제(개념)로 발견한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은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문학이 아니고, ‘이미 있는 사실의 것’을 가지고 사실적인 토의를 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에세이가 그 대표적인 형식이다. 그러면 소재를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 하는가? 상상적 형상이란 형상적 존재 혹은 사물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문예창작이란 존재를 창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학의 존재는 상상적으로만 존재 할 수 있는 형상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예창작이란 형상적 존재를 창작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창작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세계다. 이 때 독립된 세계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의 세계라는 뜻이다. 하나의 문학작품이 진정으로 하나의 독립된 세계라면 그 세계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들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계란 존재하는 것들의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그 대답은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현대문학 이론에서 말하고 있는 창작개념인 ‘존재의 총계에 부가’하는 새로운 존재의 창조라는 말이 바로 이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몰톤 · 조연현) 이때의 새로운 존재란 말 할 것도 없이 현실의 존재가 아닌 상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소재를 문학적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현실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인 예술작품의 대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소재를 예술작품으로 발견한다는 것은 첫 번째로는 자연 상태의 소재를 자연 상태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한다는 뜻이고, 두 번째로는 상상력의 세계로 발견한다는 뜻은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이고,세 번째로는 상상적 형상으로 발견한다는 뜻은 형상적 존재로 발견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창작수필 작가가 산문수필 작품이나 에세이 작품을 쓰고자 한다면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해야 할 필요는 없다.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평문 형식의 에세이를 쓰려고 하면서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전개가 필요한 비평문에 은유와 같은 비개념적인 형상적 표현이 다량으로 표출된다면 그 글은 개념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 작가가 처음부터 어떤 소재를 가지고 창작 작품을 쓰기로 작정하였다면 반드시 소재를 형상적 존재로 발견해야만 된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다.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심어야 되고, 에세이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개념’을 심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 작품이 될성부른 소재는 그 떡잎이 되는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예술적이고, 상상적인 형상적 존재로 발견하게 되고, 에세이 작품이 될성부른 소재는 그 떡잎이 되는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대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에세이는 ‘무엇’에 관한 ‘생각을 짓는 문학’이고, 창작문학은 ‘무엇’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다. 다시 말하면 에세이는 작가가 무엇에 관하여 생각한 것을 진술하는 문학이고, 창작문학은 작가가 상상한 존재ㆍ사물을 형상화하는 문학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화라는 말의 본질적인 뜻은 형상적 존재를 형상화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에세이는 형상적 존재를 형상화하는 문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에세이 작품을 써 놓고 형상화 운운하는 것은 광의적 의미로는 형상적이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도 있지만 본질적 의미에서는 잘못된 논리인 것이다. 에세이는 그 주제를 형상적으로 구현하기는 하지만 어떤 형상적 존재를 창작하지는 않는 문학양식이기 때문이다. 독자가 에세이를 읽는 목적은 어떤 문제에 관한 작가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고, 반대로 창작문학을 읽는 목적은 작가의 생각이나 의견을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상상한 상상력의 세계를 읽기 위해서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야 말로 문학 창작법의 ABC 중에서도 A에 해당하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창작문예수필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이 말을 문학의 ABC 중에서도 A의 원리와 원칙으로 삼아 책상머리에 걸어둔다면 틀림없이 훌륭한 창작 작가가 될 것이다. 윤오영의 「눈 위의 글씨」의 소재는 제목 그대로 ‘눈 위에 쓴 글씨’다. 그런데 작가는 ‘눈 위에 쓴 글씨’라는 소재를 봄에 돋아나는 ‘새싹’이라는 존재론적 형상으로, 즉 형상적 대상으로 발견하고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라는 ‘눈 위의 글씨’를 [저것]이라는 봄에 돋아난 ‘새싹’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재의 형상적 발견이다.   2. 창조적 창작발상 1) 창작문예수필의 창작발상과 에세이의 작품발상은 다르다 문예 창작법의 두 번째 단계는 창조적 창작발상에 있다. 이 항목에서도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 될 것은 창작문예수필의 소재 발견과 에세이의 소재 발견이 다른 것처럼 창작발상도 창작문예수필의 창작발상과 에세이의 집필발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에세이의 집필발상은 개념적인 발상이 되어야 한다. 가을 달밤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고교한 달빛과,툭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감상에 흠뻑 빠져 있던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에세이 작품을 쓰겠다고 한다면 한 줄의 생각도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달밤에 관한 에세이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달밤의 감상에 잠길 것이 아니라 달밤에 관한 개념적 생각에 빠져 들어가야 된다. 반대로 달밤에 관한 개념적 생각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이 달밤을 소재로 창작 작품을 쓰겠다고 한다면 이 역시 한 줄의 작품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창작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달밤에 관한 개념적 생각을 파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달밤을 상상적이고 형상적인 달밤으로 발견하는 일부터 해야 되고, 거기서 상상적이고 창조적인 창작발상을 길어내서 그것을 형상화하는 구상작업을 해야 되는 것이다.   2) 창조적 창작발상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소재를 상상적이고, 형상적으로 발견하였다 하더라도 그 소재로부터 아무 창조적 창작발상을 얻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게 된다면 혹 산문수필 작품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창작 작품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창작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재로부터 창조적 창작발상을 발견, 이끌어 내야지만 된다. 창작발상이란 창작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밭에 콩씨도 팥씨도 심은 일이 없는데 김만 열심히 맨다고 콩이 나겠는가, 팥이 나겠는가? 창작수문예필의 창조적 창작발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적인 창작발상은 소재에 대한 창조적 비유(은유 · 상징)의 발견을 의미한다. 필자가 지금 창작발상에 관한 말을 하면서 창작문예수필의 ‘기본적인 창작발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즉 지금 논의하고 있는 창작발상은 ‘기본적’인 논의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소재에 대한 창조적 비유의 발견이란 [이것]이라는 소재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무엇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라는 직유적 관계나 혹은 ‘[이것]은 [저것]이다’, 라는 은유적 관계의 발견을 의미한다. 이를 T.S.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의 발견’ 이론으로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눈 위에 쓴 글씨’라는 소재에 대한 비유가 무엇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된다. *객관적 상관물 :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정서나 사상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으므로 그것을 나타내 주는 어떤 사물, 정황, 혹은 일련의 사건을 발견하여 표현하는 창작기법.(「현대시론」 박진환) 윤오영의 「눈 위의 글씨」에서는 봄에 돋아 난 ‘새싹’을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의 은유(창작발상)로 발견하고 있다. 창작문예수필의 문학 이론적 해석은 ‘산문의 시’ 문학이라는 것이다. ‘산문의 시’ 문학이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시적 발상이란 무엇인가? 시적 발상의 실제가 무엇이든 그것은 시적 대상이라는 원관념에 대한 존재론적 보조관념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 마음은 호수요’의 ‘호수’라는 은유 발견이 그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구조는 소재의 문학화 곧 구성작업과 그 소재에 대한 비유 발견이라는 2중적 구조 창작에 있다. 이 문제는 아래 구성 항목에서 자세하게 논하게 될 것이다. 본 항목에서 논하고 있는 소재에 대한 창조적 비유 발견이란 다름 아닌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개념인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발견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필자가 발굴해 내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공통적인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은유나 상징 창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 봄에 돋아 난 ‘새싹’을 지난겨울에 ‘눈 위에 쓴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난 것으로 보는 은유 창작이 그것이다. 작가들은 많은 경우 소재의 발견과 창작발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작법상으로는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소재의 문학적 발견이란 소재를 형상적으로 발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창작발상에까지 이르게 되어야 진정한 문학적 발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작발상이 없이 ‘야, 그것 참 멋있는 얘기가 되겠는데’라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문예창작이란 창작발상의 형상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창작발상이 없는 글은 창작문학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창작문학과 에세이 문학이 갈라지는 첫 번째 지점은 소재의 발견에 있고, 두 번째 지점은 창작발상에 있다. 작가가 소재로부터 얻는 창작발상이 형상적이고 창조적인 것이면 창작 작품을 쓰게 될 것이고, 개념적이고 토의적인 발상을 얻게 된다면 에세이 작품을 쓰게 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비유 발견’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 일 뿐이라는 점이다. 창작양식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작품의 제재가 되고 있는 소재에 대한 비유적 등가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이라는 사실이다.   3. 주제의 형상적 파악 문예 창작법의 세 번째 단계는 주제 파악에 있다. 주제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면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썼는지 알 수 없는 글이 되고 말 것이다. 작가가 소재와 창작발상을 어떻게 발견하고 인식 하느냐에 따라서 창작 작품을 쓸 수도 있고, 에세이 작품을 쓸 수도 있듯이 주제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서도 창작 작품을 쓸 수도 있고 에세이 작품을 쓸 수도 있다. 창작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주제도 형상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제의 형상적 파악’은 소재의 형상적 발견과 창조적 창작발상만큼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시 말하면 설사 주제를 개념적이고 토의적으로 파악하였다 하더라도 작가가 소재와 창작발상을 창조적이고 형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매우 창작적인 산문수필 작품을 쓰거나 혹은 창작 작품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소재의 형상적 인식과 창조적 창작발상이 그만큼 창작의 절대 조건이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작가가 처음부터 창작 작품을 쓰기로 의도하였다면 주제도 자연히 형상적이고 창조적으로 파악하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면 ‘새봄을 맞이하는 기쁨’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제를 형상적으로 파악한다면 ‘새봄을 맞이하는 기쁨을 지난겨울 눈 위에 쓴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났다고 보는 경이로움으로’ 형상화화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다.   4. 창작 대상의 발견 문예 창작법의 네 번째 단계는 창작대상의 발견에 있다. 창작대상이란 작가가 형상화하고자 하는 형상적 존재를 의미한다. 형상적 존재는 좁은 의미에서는 작품 속의 인물이나 사물이다. 그러나 인물과 사물을 포함한 작품 자체로 보는 시각도 가져야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문학예술 작품이 창작하는 형상은 그 존재 양상이 반드시 현실적 사물과 같은 모양으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 예술이 창작하는 형상은 본질적으로 비유적 형상으로서의 존재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은유적 존재로서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시와 창작문예수필 작품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소설의 경우는 가공의 인물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항목에서 말하는 창작대상의 발견이라는 말을 질문형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작품은 이 같은 소재와 창작발상을 가지고 무엇을 창작(형상화)하고 있는가.’라는 말이 된다.(필자주 : ‘형상화’라는 말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공부를 진행하자. 「형상화의 바른 뜻」을 다시 보라.) 창작대상의 발견과 창작발상은 본질상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창작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창작발상은 ‘아, 이거다’하는 막연한 느낌 가운데서‘어떤 확실한 것’으로 떠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즉 분명히 무엇인가를 보기는 보았는데 마치 안개 속에서 본 것처럼, 그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명치 않은 막연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같은 창작발상을 가지고 창작구상을 계속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차츰 그 윤곽이 분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이 같은 구상과정을 통해서 분명한 모습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창작대상이다. 창작대상이 분명한 형상적 존재로 발견되지 못한 상태, 즉 막연하게 ‘이것이다’라는 창작발상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혹 산문수필 작품은 될 수는 있겠지만 창작 작품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창작이란 형상적 존재를 형상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창작양식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하다. 창작문예수필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문학이다. 그 기본 창작개념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창작’이다. 실제 작품창작에서는 크게 세 가지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소재에 대한 비유(은유 · 상징)창작, 두 번째는 시적 정서의 산문적 형상화, 세 번째는 서사(소설 · 동화 · 희곡) 구성법 등이 기본 창작양상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 작품은 눈 위에 쓴 글씨가 봄이 되자 새싹으로 돋아났다고 보는 은유를 창작하고 있다. 즉 [이것]이라는 소재인 ‘눈 위에 쓴 글씨’를 가지고 ‘새싹’이라는 [저것]으로 만들어 내는 은유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 은유란 두 이질적인 대상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동질성에 근거한다. 은유 창작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적 창작론에서부터 문예창작법의 중요 창작 요건으로 여겨져 왔다. 현대 시작법에서는 은유 창작이 없는 시창작이란 생각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시작법의 중심 작법으로 여긴다.   5. 창조적 구성 작업 1) 소재의 문학화 창작문예수필은 무엇을 어떻게 창작하는 문학인가? 창작문학이란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시는 창조적 언어(시어)의 상상력 세계를 만들어 내고, 소설은 허구적 이야기(인물 · 서사)의 상상력 세계를 만들어 낸다. 창작문예수필은 시어도, 허구적 이야기도 아닌 사물의 마음의 이야기, 즉 사물과 교감의 상상력 세계를 창작하는 문학이다.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는 그 대표적인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은유 창작’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창작’이 그것이다. 문학 창작법의 다섯 번째 단계는 구성작업에 있다. 구성이란 ‘문학적으로 발견한 소재와 창작발상을 어떻게 작품화(상상력의 세계화)할 것이냐’의 문제다. 소재의 작품화란 문학화를 의미하고 문학화란 곧 상상력 세계화를 의미한다. 문학을 하고자 하는 문학도에게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라는 말의 뜻을 문학 이론적으로 바로 이해하는 일은 초등학생이 한글을 깨우치고,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 일만큼 절대로 중요한 기초 작법이론이다. 구성작업이란 다름 아닌 소재의 작품화, 즉 상상력 세계화 작업을 의미한다. 창작문예수필이 에세이로부터 진화되어 나오는 과정에서 본질적으로 어려웠던 난제는 작품의 제재로 사용하고 있는 사실의 소재에 대한 상상력화 방법론에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창작문예수필의 전신인 에세이 문학은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현실적 토의를 하는 형식의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세이 집필 개념은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몽테뉴 「essai」의 서문)’이라는 사실의 소재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 그 소재에 관해서 ‘현실적인 토의’를 하는 형식의 ‘생각을 짓는’ 데에 있다. 상상력화, 즉 창작화 시키지 않은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다. 따라서 에세이 작품 속의 ‘나’와 ‘나의 세계’는 곧 작가 자신과 작가 자신의 사실적 세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에세이문학의 창작성은 ‘창작적인 변화(몰톤 · 조연현)’, 즉 ‘창작적인 표현’, 혹은 ‘창작적인 구현’ 이상이 될 필요도 없고,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에세이(산문수필) 작품은 아무리 풍부한 상상적인 형상적 문장법으로 제작된 작품이라도 여전히 소재의 문학화, 소재의 상상력 세계화가 안 된 일반산문문학 작품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세이 작품 속의 ‘나’와 ‘나에 관한 이야기나 생각’은 모두 사실의 세계인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문학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 즉 비현실의 세계다. 그러므로 문학화*란 소재의 비현실화를 의미하게 된다.   소재가 아직 소재인 상태로 있을 때, 그것은 조잡함을 면치 못한다. 조잡하다는 것은 비현실화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이다.(「문학에의 초대」 齊藤勇저 이철범역 경서출판사 53쪽)   창작문예수필은 에세이문학이 아니다. 시, 소설 같은 창작문학이다. 그러므로 소재를 문학화, 즉 상상력 세계화 시켜야 된다. 창작문예수필이 ‘사실의 소재’를 작품 속에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는 점에서는 에세이 문학과 같다. 그러나 소재를 상상력화 시킨다는 점에서는 에세이 문학과 완전히 다른 창작문학이 된다. 다시 말하면 창작문예수필은 사실의 소재를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시키는 창작문학인 것이다. 사실의 소재를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시킨다는 것은 ‘사실의 세계’를 ‘상상력 세계’로 만든다는 뜻이다. 소재의 출처는 주관적 경험에 있다. 그러므로 소재가 소재 상태로 있는 동안은 주관적 경험의 현실적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이 문학화가 된 후에는 더 이상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이 아닌 객관적 세계인 창작된 세계의 일이 되는 것이다. ‘내 집 안 일이나 사사 일’, 즉 사실의 소재가 구성작업을 거쳐서 문학화(상상력화) 된 후에는 더 이상 사실의 세계와 1:1의 관계가 아닌 개연성(蓋然性 probability )의 세계, 즉 상상력의 세계의 이야기가 된다는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에서부터 시작 된 가장 오래된 창작론이다.(참고 : 「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이상섭) 현대에 와서는 포스터의 구성론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론이다.(참고 : 「소설의 양상」 E.M.Forster) 그러므로 구성된 창작문예수필 작품 속의 ‘나’와 ‘나의 이야기’들은 더 이상 작가 자신과 작가 자신의 사실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창작문예수필 작품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특별히 이 점에 관한 명확한 이론적 이해를 해야만 된다. 창작수필을 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에세이 작품(혹은 기존의 수필)을 쓸 때와 같이 작품 속의 ‘나’와 작가 자신을 동일시하는 인식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위에서 지적한 ‘비현실化’ 작업이 덜 된 조잡한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의 소재를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창작문학화 시키는 본질적인 방법이 창조적 구성작업이다. 위에서 말한 창작의 네 가지 단계는 구상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구상 단계에서는 아직 한 줄의 작품도 만든 것이 없다. 물론 많은 메모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원고지를 펴 놓고 본격적인 집필단계에 들어 간 것은 아니다. 실제 집필단계는 구성작업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수필을 가리켜서 처음부터 ‘여기의 문학’이니 ‘서자문학’이니 혹평하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신변잡기’에 ‘그것도 문학이라고 하고 있느냐’라고 노골적으로 조롱을 하게 된 문학 이론적 원인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작품화(문학화), 상상력화 즉 구성작업이 안 된 글을 써 놓고 창작문학이라고 우겨 온 데에 있다. 작품화*란 한 마디로 문학화를 의미하고, 문학화란 소재의 비현실화를 의미하고, 소재의 비현실화란 사실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본질상 상상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왜 상상력의 세계 일 수밖에 없는가? 인간은 신적 창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적 창조란 사실적 창조다. 곧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창세기1장3절)’는 성경의 창조론 같은 사실적 창조는 신만이 하실 수 있는 창조다. 문학적 창조란 신적 창조가 아닌 인간이 상상력 속에서 할 수 있는 창조를 의미한다. 즉 사실적 창조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에서의 상상적 창조인 것이다. 창작문예수필도 기존의 수필과 다름없이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 양식이라는 점에서는 똑 같은데 사실의 소재가 어떻게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답이 구성작업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문예창작 방법론의 핵심은 구성법(플롯)에 있다.   호메로스는 플롯을 만들었기 때문에 시인이고, 엠페도클레스는 그 철학사상을 단지 운문으로 서술한 까닭에 시인이 될 수 없다.(「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이상섭 23쪽)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작된 창작 방법론의 첫 번째 개념이다. 즉 플롯을 만들었다면 창작문학이고, 그렇지 않으면 창작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의 소재를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 세계화 시키는 그 구성(플롯)*이라는 것은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은 필연성과 개연성(蓋然性)을 중요하게 여기고, 포스터의 구성론은 인과율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필연성, 개연성, 인과율은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동질성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스터의 구성론에 의하면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는 것은 구성이 안 된 시간적 순서에 의한 사실적 진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성이란 어떻게 하는 것이냐?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구성이라고 E.M 포스터는 말하고 있다.(「소설의 양상」 E.M 포스터 94쪽) ‘왕비가 죽었다.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는데 왕이 죽은 슬픔 때문에 왕비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왜 구성인가? 그것은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는 시간적 순서가 깨어져 왕비의 죽음이 서두에 나서고 있고, 그 왕비의 죽음과 왕의 죽음 사이에 인과율이 개입되어 인과율에 의한 사건이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첫 째로, 구성이란 사실의 소재의 시간적 순서를 깨트려 버린다는 것이다. 시간적 순서에 의하면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중요한 구성요소는 시간적 순서를 깨트린 대신에 사건과 사건 사이를 인과율로 연결시킨다는 점이다. 그 결과 시간적 진술에서는 ‘왕의 죽음’이 서두에 나섰는데 시간적 순서가 깨어지고 대신 인과율이 그 자리에 들어서자 ‘왕비가 죽었다.’가 서두에 나서고, 그 원인(인과율)이 왕의 죽음에 있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적 서술에 의한 ‘옛날식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중은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었느냐’를 물으며 이야기를 듣고, 현대식 구성된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왜 그렇게 되었느냐’를 물으며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포스터의 구성론이다. 창작문예수필작품 속의 제재는 기존의 수필작품 속의 사실의 소재로서의 제재와 다르다. 기존의 수필작품 속의 제재는 구성이 안 된, 있었던 사실의 시간적 순서에 의한 진술, 즉 사실의 소재의 모사(模寫)적 재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작품 속의 제재는 구성작업을 통하여 문학화, 즉 시간적 순서가 깨어진 자리에 인과율과 필연성이 개입하는 구성작업을 통하여 개연성이 성립된, 더 이상 사실의 소재의 사실성과 관계가 없는 상상력 세계화, 곧 소재의 비현실화가 이루어진 창작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 다음 문장 속에서 창조적 구성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 검은 흙만이 슬프게도 드러나 있었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눈과 함께 녹아서 없어진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났다’는 발상이 창조적 상상력의 구성이다. 이곳의 ‘생각했다’ 는 ‘상상했다’이다. 만약에 작가가 이 같은 창조적 상상력에 의한 구성을 하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평범한 사실적 진술에 그친 ‘산문수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온 들판에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나서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는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었다.   2)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구조 시와 소설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즉 사실의 소재를 직접 작품의 제재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절대 창작조건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시나 소설처럼 소재를 작품 밖에서 허구화하여, 허구화한 그곳에서부터 창작을 시작할 것이라면 차라리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쓸 일이지 굳이 수필이라는 이름의 문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수필이 수필인 까닭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이라는 점에 있다. 이 한 가지 수필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수필문학이 존재하는 한 영구히 변할 수 없는 수필의 태생적 본질이다. 소재를 작품 밖에서 허구화 하여 그곳에서부터 창작 작업을 시작하는 일과 소재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서 문학화 하는 일은 전혀 다른 양상의 창작행위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시와 소설이 작품 밖에서 소재를 허구화하는 일은 화가가 꽃이라는 사실의 소재를 보고 그림을 그릴 때 그것이 화판 위에 색깔과 선으로 표현되기 이전에 먼저 화가의 뇌리 속에서 눈앞의 실제 꽃과는 다른 새로운 꽃으로 변용(變容)된 그것(예술작품화)이 화판 위에 표현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창작문예수필이 사실의 소재를 작품 속에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 문학화 하는 작업은 조각가가 돌덩이라는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서 새로운 창조적 형상으로 깎고 다듬어 내는 창작행위와 같다고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가의 소재인 실제 꽃은 직접 작품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작품 밖에서 허구화(變容)된 그것이 화판 위에 표현되고, 조각가의 돌덩이는 그것 자체가 작품 속으로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사용되어 작품화 되어가는 것이다. 조각가가 돌덩이라는 사실의 소재(제재)를 직접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 작품화하듯 창작문예수필 작가도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제재로 삼아 작품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문예수필의 구성*은 엄밀하게 해부하면 크게 두 가지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첫 번째 구조는 사실의 소재 자체의 구성작업이고, 두 번째 구조는 그 사실의 소재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은유ㆍ상징) 창작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 같은 창작문예수필만의 독특한 창작 구조를 다음과 같이 잘 보여주고 있다. (1) 이 작품의 소재부분, 즉 작품의 제재가 된 [이것]이라는 소재부분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①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는 목필木筆을 들고 종일 들판으로 돌아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 하고 돌아왔다. 내 글씨는 옥판玉板의 전자篆字 같이 아름다웠다.’ ②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 검은 흙만이 슬프게도 드러나 있었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 또 열흘 뒤에 가 봤더니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 ①번은 최초 소재부분으로 작품의 발단 부분에 해당한다. ②번은 최초 소재가 발전된 부분으로 작품의 전개 부분에 해당한다. (2) 이 작품의 [저것]이라는 소재에 대한 은유적 창작 세계는 다음 문장에 있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뻐했다.’ 이 부분이 작품의 제재로 삼고 있는 소재에 대한 존재론적 비유 창작이 되는 까닭은 ‘눈 위에 쓴 글씨’라는 소재가 ‘새싹’이라는 은유적 창조물로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눈 위에 쓴 글씨’가 ‘새싹’으로 돋아나고 있는 창조적 구성 방법이 다름 아닌 ‘생각했다’에 있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의 ‘생각했다’가 그것이다. 이곳의 ‘생각했다’는 ‘상상했다’는 뜻이다. 문예창작의 본질적 발상법은 상상력에 있다. 상상하는 것이 곧 창작하는 것이다. 문예작품의 구성작업이란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상상적 구성작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 건물의 설계도 같은 것이 아니다. 실제 건물의 설계도는 실제 건물을 짓기 위한 설계도다. 그러나 문예작품의 구성작업은 실제 건물이 아닌 상상력의 세계를 짓기 위한 설계 작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예작품을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과정을 구상작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작품구상*을 한다는 뜻은 사실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만들기 위해서 상상적으로 이리 저리 얽어 짠다는 뜻인 것이다. 얽어 짜는 작업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배열(配列)이라고 말하고 이를 플롯이라고 한다.   3) 창작문예수필의 대표적인 두 가지 서술 양식 지금까지 발견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서술 양식*은 크게 두 가지로 발견되고 있다. 그 첫째는 서사(사건 · 이야기)적 서술 양식이고, 두 번째는 서정적 서술 양식이다. 서사란 사람의 행위에 근본을 두고 있는 이야기 세계이고, 서정이란 사람의 감정에 근본을 두고 있는 이야기 세계다. 행위는 성격에 근거를 두고 있고, 감정은 마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소설은 성격적인 이야기 세계라 할 수 있고, 시는 감정적인 이야기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창작문예수필은 서사적 이야기 세계와 서정적 이야기 세계 모두를 다룰 수 있는 복합, 융합, 접목 양식의 문학이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본질은 소설적 허구의 서사 이야기 세계가 아닌 시적 서정의 이야기 세계다. 이를‘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 한다. 따라서 소설적 행위 사건도 정서로 풀어내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봄이 되자 돋아난 ‘새싹’(원관념)을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보조관념)로 보는 은유적 창작발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서정적 서술 양식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4) 창작문예수필의 문장 창작문예수필은 본질상 서사문학이 아닌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문학이다. 그렇다고 창작문예수필은 서사를 창작(구성적 창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아 구성작업을 통한 서사창작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허구적 서사와 구분 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창작문예수필이 소설적 허구서사를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은 또한 아니다. 소설적 허구서사 창작을 위해서는 액자수법 등의 문학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 소설 창작과 다른 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굴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의 서사 창작은 서사도 서정으로 풀어내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적 서사는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시적 서정은 이야기를 압축하여 말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장이 응축, 함축적인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아주 짧은 길이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야기(사건) 전개의 호흡이 짧고, 밀도는 긴박하다. 창작문예수필은 대개 원고지 10장 안팎 길이의 문학양식이다. 시 보다는 길지만 소설보다는 훨씬 짧은 문학이다.따라서 창작문예수필의 문장은 호흡이 짧고 밀도가 함축적인 문장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설적인 완만함과 산만함의 문장세계가 아닌 것이다.   5) 세부 구성 작가는 ‘눈 위에 쓴 글씨’를 ‘새싹’의 이미지로(반대로 ‘새싹’을 ‘눈 위에 썼던 글씨’의 이미지로 보게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형상화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발단은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이다. ‘들에 눈이 하얗게 덮여있는’ 사건(서정적 이야기)이 다음 전개문장의 행동을 이끌어 내는 원인(발단)이 되고 있다. 작중 화자 ‘나’는 ‘들에 눈이 하얗게 덮여있는’ 정서적 사건에 이끌려서 목필을 들고 나가서 ‘마음 내키는 대로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 하고’ 돌아온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전개부분이다.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는 사건(정서ㆍ이야기)의 위기 부분이다. ‘내 글씨도 남아 있지 아니했다.’는 사건(정서)의 절정부분이다. ‘새싹들이 파릇파릇 아름답게 돋아나고 있었다.’는 사건(정서)의 전환점이다. ‘눈 녹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저 새싹들을 나게 한 것’은 사건(정서)의 반전이다.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창조적 발견이다. ‘기뻐했다.’가 이 작품의 대단원이다. 창작문예수필의 문학 이론적 해석은 ‘산문의 시’라는 것이다. 산문의 시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봄에 돋아난 새싹(원관념)을 지난겨울 눈 위에 쓴 글씨(보조관념)가 새싹이 되어 돋아난 것으로 보는 시적 발상을 운문 형식이 아닌 산문형식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6. 서두문장, 종결문장, 집필, 퇴고 창작문예수필 작법의 여섯 번째 단계는 서두 찾기다.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창작문예수필은 시나 소설과는 다른 창작문예수필만의 독특한 창작구조를 가지고 있는 문학이다. 따라서 소재의 발견, 창작발상, 구성법 모두가 시, 소설과는 다른 창작문예수필만의 독특한 창작양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탄생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새로운 장르 문학이 탄생해야 하였겠는가? 이상에서 말한 여러 창작 조건들이 모두 준비되었다면 곧 작품 집필을 시작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준비가 되었어도 아직 한 가지 더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서두와 종결 문장 찾기라는 것이다.   1)서두 문장 찾기 짚신짝도 제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문예 창작이란 잃어버린 짚신짝 찾기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형상화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창작의 숙제다. 그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짚신짝 찾기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서두 찾기야 말로 짚신짝 중의 짚신짝이라고 할 수 있다. 서두가 그 작품에 딱 들어가 맞는 짝이 아니면 제 짝을 찾은 짚신 한 켤레 같은 작품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억지로 짝을 맞춘 신발 한 켤레는 곧 독자의 눈에 띄어 졸작 비평을 면치 못하게 된다. 따라서 창작수필 작가가 작품구성을 하는 일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 다름 아닌 서두 찾기인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서두는 작품의 전개 내용과 딱 들어가 맞는 짚신짝이 되어야 한다. 내용과 서두가 딱 들어가 맞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서두가 전체 작품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서두가 전체 작품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작품의 서두는 사건(이야기)의 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사건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는 2중 역할을 수행하기에 딱 알맞는 부분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필수 조건을 더한다면 작품의 서두는 독자를 단번에 작품 안으로 끌어 들일 수 있는 흥미를 유발해야 된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의 서두는 ‘어느 날 들에 나갔더니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이다. 이 서두 문장은 작품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 역할과 함께 다음 문장, ‘나는 목필木筆을 들고 종일 들판으로 돌아다니며’의 사건으로 작품을 밀어내서 전개 부분으로 나아가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목필木筆을 들고 ··· 눈 위에다 낙서落書를’한 행위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 ‘열흘 뒤에 가 봤더니 눈은 다 녹아 버려 자취도 없고’의 사건으로 발전하여 전개되어 가고 있다.   2) 종결 문장 찾기 지금까지 발굴되고 있는 창작문예수필 작품들의 종결문장은 작품의 제재로 삼은 소재에 대한 은유의 완성이 되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양식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 작품의 경우 ‘그 속에는 내 글씨도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그것이다. 새싹은 지난겨울 눈 위에 썼던 글씨의 은유다. 따라서 창작문예수필의 종결문장은 창작발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통상적인 작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의 창작발상은 소재에 대한 시적 발상이 그 기본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3) 집필 소재의 형상적 발견, 창작발상, 창조적 구성법 등 작품 구상단계를 거쳐서 어디서부터 작품 집필을 시작해서 어디서 끝은 내야 할지 그 가장 알맞는 서두와 종결문장까지 찾아내게 되었다면 곧 집필에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초고는 가능한 앉은 자리에서 완성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집필태도는 작가에 따라 다 다르기 마련이다.그러므로 ‘앉은 자리에서 집필’은 작법은 아니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특성으로 알아둔다면 창작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는 단 한마디의 시어만 착상된 상태에서 더 이상 글이 안 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일반적인 창작과정이다. 소설의 경우는 쓰다 말다 쓰다 말다 하는 일을 수 없이 되풀이 하는 과정을 통해서 한 편의 작품이 완성된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경우는 이 같은 시창작과정과도 다르고 소설과도 다르다. 그 이유는 창작수필의 창작세계는 ‘때에 맞는 말 한마디’, 혹은 ‘제 철 꽃’과 같은 문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벚꽃은 봄에 펴야 어울리고, 코스모스는 가을에 펴야 어울린다. 남들 다 웃은 다음에 똑 같은 농담을 또 던진다면 썰렁해 질 것이다. 말은 때에 맞추어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언어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자 본질적인 기능일 것이다. 나오라고 소리 쳐야 할 때에 들어가라고 소리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문학은 언어를 재료로 한 예술이다. 그 가운데서 창작문예수필은 소재의 발견에서부터 인생의 어떤 특정 때(경우)에 가장 알맞는 소재를 발견하여, 그 소재에 가장 알맞는 비유를 찾아내서 형상화 하는 문학이다. 꽃이 제철을 놓치면 꽃으로서의 운치를 잃게 되는 것과 같이 말도 때와 경우를 놓치면 소용에 닿을 수 없다. 제철 꽃과 같은 문학이므로 자연히 그 집필방식도 꽃들이 때를 맞추어 다투어 피어나듯 앉은 자리에서 집필을 끝내는 경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집필에 관한 이 같은 필자의 생각은 이론이 아니므로 참고만 삼고, 각자의 집필 방식대로 하면 될 것이다. ‘때에 맞는 말과 같은 문학’이라든지 ‘제철 꽃과 같은 문학’이라는 말은 모두 다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특징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들일 뿐이다. 참고삼아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창작문예수필은 비빔밥과 같은 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빔밥은 비비기 시작한 이상 앉은 자리에서 비벼서 먹어야 되는 음식이다. 비비다 말고 두었다가 다시 먹으면 맛이 변해서 먹을 수 없다. 또 비빔밥은 아무리 여러 가지 나물과 재료를 동원한다 해도 한 그릇 안에서 비벼서 먹게 되어 있는 음식이다. 정식 코스 음식처럼 한 가지 음식이 나오면 먹고 기다렸다가 다음 코스가 나오면 또 그것을 먹고 하는 식의 요리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작가 윤오영이 이 작품을 머릿속에서 구상한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집필은 앉은자리에서 끝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4) 퇴고 퇴고는 시나 소설 등의 퇴고 과정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초고가 완성되면 서랍 속에 넣어 놓고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적어도 2,3주가 지난 후, 처음 초고를 쓸 때의 분위기와 감정, 생각 등을 잊어버릴만할 때 까지 덮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다시 열어 보면 고쳐야 할 부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즉 퇴고는 객관적인 눈이 준비 되었을 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같은 과정을 작품에 만족 할 때까지 몇 번이든 되풀이 하는 것이 좋다.   7. 이 작품에서 배울 작법상의 힌트는 무엇인가? ‘수필을 몰라도 시는 쓸 수 있지만 시를 모르고는 수필을 쓸 수 없다’는 윤오영의 말뜻이 무엇이었는가를 확인하게 된다. 윤오영의 이 말은 창작문예수필의 창작이론의 핵심이다. 필자는 윤오영 선생이 수필문학에 남긴 업적은 이 한마디 말만으로도 영구히 기억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8. 창작에 적용하기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은 소재에 대한 비유적 형상 발견에 있다. 이 작품의 경우 봄에 돋아난 새싹을 겨울에 눈 위에 썼던 글씨로 보는 은유가 그것이다. 이 같은 창작방식을 자신의 작품창작에 적용하는 것이 창작문예수필 작법의 시작이다.   9. 참고 할 점 1) 그러나 소재에 대한 비유적 형상 발견이라는 것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양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창작양식은 삼라만상만큼 다양한 것이다. 그러나 1백층 건물도 기초공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예술본능* 문학의 기원을 인간의 예술본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문학론의 기초이론이다. ‘자기표현본능설’, ‘모방충돌설’, ‘유희본능설’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능에는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요건들을 갖추고 있는 예술본능이 있다는 것이 ‘자기표현본능설’, ‘유희본능설’, ‘모방충돌설’의 근거인 것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그 실 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발굴 해 내고 있는 창작문예수필 작가들 중에서 대표적인 작가는 윤오영과 피천득이다. 그런데 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인가. 그토록 뛰어난 창작양식을 보여 주고 있는 윤오영과 피천득이 현대문학의 창작론의 중심이자 핵심론인 플롯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수필은 소설과 달리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수필문학입문」 윤오영 230쪽)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수필」 피천득)   이처럼 창작론의 핵심인 플롯론을 부정하고 있는 윤오영과 피천득이 정작 자신의 작품에서는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도 뛰어난 창조적 구성법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 대답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첫 번째 대답이 바로 예술본능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문학 이론은 작품 자체에 있음을 늘 강조하여 오고 있다. 작가는 그 자신도 이론적으로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는 창작 논리를 자신의 작품 속에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는 마치 복중의 어린 아이와 같다고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태중의 아이가 어떤 과학적 원리로 잉태되어 배속에서 자라고 있는지 그 이론적 원리는 모르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스런 아이를 분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예술 일 수 있는 본질적인 원인은 인간의 예술본능에 있다는 것이 ‘모방충돌설’, ‘유희본능설’, ‘자기표현본능설’인 것이다. 흔히 ‘너는 그림에 소양이 있으니 장차 화가가 되라’ 든지, ‘음악적 소질이 풍부하니 음악가가 되라’는 등의 말이 바로 이 같은 예술본능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이 같은 예술본능을 일깨워서 과학적 훈련을 거쳐서 계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창작문예수필이 어떻게 창작수필론 자체가 없는 기존의 잡문 쓰기(홍매의 ‘붓 가는 대로’) 속에서 창작의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느냐에 대한 원천적인 대답도 이 같은 인간의 예술본능에 그 대답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두 번째 대답은 말 할 것도 없이 후천적 창작훈련에 의한 것임이 분명 할 것이다. 후천적 창작훈련은 문학과 회화, 음악 등 창작예술로부터 얻게 되었을 것이다. 그 분명한 증거가 창작문예수필 작품으로 발견되고 있는 상당수의 작품이 선배 시인, 소설가, 미술가, 음악가 등 창작예술을 하는 작가들에 의해서 창작된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윤오영과 피천득이 명문화하여 플롯을 부정하므로 기존의 수필의 ‘신변잡기’화에 결과적으로 앞장 선 셈이 된 것은 수필문학의 큰 두 선배의 문학 족적에 남겨진 오점으로 지적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작문예수필을 공부하고자 하는 창작문학 지망생은 기존의 수필의 이론 아닌 이론들은 깨끗이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문예창작의 본질적 방법은 창조적(상상적) 구성작업에 있다. 글 쓰는 일에 구성이 필요 없다는 주장은 마치 빌딩을 세우는 데 무슨 설계도가 필요하냐는 억지 주장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창작문예수필 지망생이 ‘창조적 구성’이라는 실제 창작법을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소화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빼어난 창작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윤오영의 수필문학론에는 ‘수필을 모르고 시는 쓸 수 있어도 시를 모르고는 수필을 쓸 수 없다.’(「수필문학입문」 윤오영 태학사 194쪽)는 말 외에는 구체적인 창작론이 없다.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에 비유될 것이다.’(상동 175쪽)의 곶감론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직 이론 전개에까지는 미치지 못한 수필에 관한 교양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오영은 오히려 ‘다만 나는 수필에서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보다는 무드의 문학이라고 한다’(동상 245)라고 하여 수필을 형상화(사물 · 존재 · 이미지)의 문학이 아닌 무드(정서 · 감정의 유로)의 문학으로 봄으로써 현대문학의 창작론을 19세기 낭만주의론으로 퇴보시키고 있다. 더구나 ‘수필은 소설과 같이 플롯을 필요로 하지 아니하며’(동상230)라고 하여 플롯을 부정하므로 수필을 창작론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고 말았다.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플롯론은 창작론의 중심 방법론이다. 플롯을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혹 철학서나 역사서(사실적 기록)일 수는 있어도 창작문학은 될 수 없다. 창작이란 곧 플롯(구성)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10. 이 작품이 창작문학이라는 문학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1) 이 작품은 봄에 돋아나는 새싹을 겨울에 눈 위에 쓴 글씨가 녹아서 새싹으로 돋아나는 것이라고 보는 시적 발상, 곧 창조적 발상을 산문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곧 ‘산문의 시’ 문학이다. 2) 산문문학으로서 갖춰야 할 창작 작업의 조건은 구성작업(플롯)에 있다. 이 작품은 위에서 살펴 본대로 발단, 전개, 위기. 절정, 발견, 대단원까지 구성작업의 여섯 단계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11. 이 작품의 창작양상을 [가장 기본적인 창작 형태]라고 한 까닭이 무엇인지 파악 되었는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개념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 창작’이다. 이 작품은 그 같은 기본 창작개념을 구체적인 작법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12. 창작 팁(Tip · 비결). ‘문예창작이라는 말은 존재론적 '형상화'를 의미한다.’   작품 속의 사실적 존재나 현상은 (중략)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구체화하는 형상적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런 형상, 이런 형상화를 통해서 말한다.(「현대시 작법」 오규원 문학과 지성사 50쪽)   창작문학이란 존재(사물 · 형상)를 만들어 내는(형상화) 문학이라는 뜻이다. 문예창작이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면 그 방법은 반드시 존재론적 형상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존재론적 형상화 작업이란 정서나 관념도 사물화 하여 형상적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작문학 작품 속에는 반드시 작가에 의해서 형상화(창작) 된 존재론적인 어떤 구체적 사물이나 존재 혹은 세계가 있어야 된다.   * 글은 쓰는 것이고, 작품은 만드는(창조) 것이다. * 창작은 형상을 만들어 내는 일(형상화)이고, 일반산문문학(에세이)은 개념(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242    동시 "첫눈"에 대한 평론 묶음 댓글:  조회:3032  추천:5  2017-10-14
동시 "첫눈 " 에 대한 평론 묶음 과 다차원           한설매                                                                                                          하이퍼 동시를 배우기 시작하여 벌써 첫 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하이퍼 동시를 배우면서 동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게되였다. 그것은 동시는 전통동시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현대동시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이퍼동시도 있다는 깨침이였다. 며칠전 우연히 읽어보게된 권오삼의 “꾸준히 실험시를 써보라” 문장 중에 “내가 쓴 시 중에도 순전히 내 문학적 욕심으로 쓴게 있어요. 실험시라고 할수 있는건데 독자를 위해 쓴게 아니라 순전히 동시문학을 위해서 쓴거지요. 성인시에서는 실험시가 많이 나오잖아요. 동시도 필요하다고 봐요.” 라는 구절이 있다. 정말 큰 계발을 주는 말이다. 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일상적으로 독자를 위해 글을 쓰는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란다. 쓴단다. 독자를 위하지않고 동시문학을 위한다는 말의 차이는 엄청 큰것 같다. 독자를 위해쓴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문학을 한다는 말이고 남을 교육하기 위해 쓴다는 말일 것이고 순전히 동시문학을 위해 쓴다는 것은 문학을 예술로 생각하고 심미관념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우리가 쓰고 있는 하이퍼 동시는 어떤것인가? 먼저 하이퍼 시란 무엇인가 알아보자. 하이퍼 시란 무의식으로 쓴 시이다. 무의식으로 쓰게 되면 차원이 다른 이미지가 술술 나오게 된다. 이미지들이 차원이 다르기에 원인과 결과로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가 독립성을 띠고, 련결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되게 된다. 그리하여 한수의 시에 성질이 다른 이미지들이 모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쓰는 종적구성의 시인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여러개의 이미지로 구성된 횡적구성으로 된 시가 태여나게 된다.   아래에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제4회 윤동주 문학상 동시상 수상한 황희숙 동시을 보자 떨어진다 쬐꼬만 은빛 보석이   떨어진다 커다란 그물에   떨어진다 땅거미 반찬으로      의 전문이다. 전형적인 하이퍼 동시이다. 첫째: 동시 “첫눈”은 다차원구조이다. 매련마다 다른 이미지들 움직임이 다. 1련, 2련, 3련서로 련관성이 없는 사물이 한수의 시를 구성하였다. 둘째: 횡적 배렬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매련마다 서로 순서를 바꾸어 놓아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로 구성되던 종적구성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시이다. 셋째: 하이퍼시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인 링크 도 있다. 다시 더 자세하게 하나하나 살펴보자 1련에서 여기서 작자는 첫눈 오는 날 빤짝이며 떨어지는 눈꽃을 은빛 보석에 비유하고 있다. 매번 첫눈이 내릴 때면 어린이든 어른이든 다 그 깨끗하고 아름다은 눈꽃에 마음을 빼앗기군 한다. 길가에서 첫눈이 내릴 때 두 손을 들고 눈을 귀중한 보석이라도 받아 가질 듯 서로 앞다투어 달려가 떨어지는 눈꽃을 받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눈처럼 깨끗하고 맑은 어린아이들의 마음도 눈꽃이 되여 반짝이는것 같다. 2련에서  그물이라면 실이나 노끈, 철사 따위로 구멍이 나게 얽은 물건이다. 여기서 작자는 말하는 은 무엇일가? 정말 우리가 흔히 보는 무언가 잡기 위해 무언가 묶기 위해 만든 그물일가? 아니다 작가기 말하는 그물은 은어이다. 작자는 첫눈이 내릴 때 산에 들에 길......등 대지에 눈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마치 온 대지 전체가 그물이 되여 내리는 눈을 받는다고 상상하지 않았을가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먼 하늘에서 내리는 이 아파할가 대지가 그물이 되여 살짝 받아 안는다고 상상해보니 마치 엄마가 달려오는 아이가 넘어질가 두팔 벌려 안아주는것 같다. 정말 따뜻한 마음이 담긴 변형이다. 작자의 사유는 누구든지 정확하게 맞추기 어렵다. 필자만의 생각이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착상이다. 추은 겨울날 눈내리는 모습도 이렇게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표현할수 있다는 것은 동시인만이 갖고있는 동심적 상상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3련에서 . 작자는 정말 대단한 발견을 하였다.  땅거미는 언어적 해석을 하면 해가진 뒤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까지의 어스름 할 때를 말한다. 그럼 이건 시간적 환경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땅거미는 입도 다리도 몸둥이도 따로 없다. 작자는 를입도 있고 발도 있는 우리 주위에 흔히 볼수 있는 거미로변형시켰다. 그럼 반찬은 무엇을 말하는걸가? 거미는 메뚜기, 나비, 모기,파리등 곤충을 잡아먹고 산다. 그럼 땅은 거미가 친 거미줄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거미가 줄에 걸린 메뚜기, 나비 모기, 파리 등 먹이감인것이다. 필자는 눈꽃이 땅에 떨어져 녹아 사라지는 순간을 땅거미가 먹어버렸다고 상상한것이다. 즉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먹이감을 먹어치운것과 같은 말이되겠다.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혹자는 눈이 어떻게 반찬이 되는가고 의문스러워 할수도 있다. 언어의 자유결합 기능에 의하여 산생된 이란 말이 처음으로 동시에 올랐으니깐. 언어의 기능에 의하여 산생되는 새로운 조어가 맞는가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조금은 언어 수양이 약한 표현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의 작자들은 이런 현상이 이라고 하였다. ( 천개의 고원 784쪽) 동시 에서 매련마다 링크 작용을 하는 “떨어진다”는 동적 이미지로서 독자들에게 첫눈이 내리는 모습을 구수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황희숙 동시 “첫눈”은 다차원 기능을 적용한 동시이다.  도표로 그려본다면 즉 문학적으로 말하면 “첫눈”에서 , , 등 성질이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므로 다차원을 형성하고있다. 다차원이란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사물의 다양함을 말한다. 우리는 다차원속에 살고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수림이라고 하면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돌도 있고, 시내물도 있다. 이것이 자연의 다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더 말하자면 우리 집안에는 걸상도 있고, 책장도 있고, 밥상도 있고, 텔레비죤도 있고, 핸드폰... 등 있다. 우리 이 모든 사물과 긴밀하게 같이 공존하고 있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한가지라도 없으면 더 불편할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동시들은 자연과 우리 주위의 모든 사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연속 모든 사물들은 땅우에 공존하고있다. 즉 땅이란 한 선에 놓여져있다. 나무있기 때문에 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돌이 있기 때문에 시내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 평등한 선우에 있다. 이것이 다차원이자 하이퍼이다. 그러니 우리 쓰는 한수의 동시에 많은 이미지들 (이미지들은 자연과 우리 주위 사물에서 오는것이다.) 이 공존할수 있다. 아래에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제3회 윤동주 문학상 동시상을 수상한 김봉순 동시 “양배추”를 보자   해살을 꽁꽁 싸먹는다 바람을 꽁꽁 싸먹는다 새소리 꽁꽁 싸먹는다 어느새 동글동글 배 뚱뚱이 됐네   “양배추”의 전문이다. 양배추는 우리 일상생활에 먹는 일종의 채소이다. 시장에 가면 사시장철 흔하게 보고 먹는 채소가 작자의 손에 의하여 깜직하고 귀여운 동시로 다시 탄생하였다. 동시 “양배추” 전반시가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공력을 들이였다. 1련: . 여기서 해살은 해에서 뿜겨나오는 빛을 말한다. 볼수 있고 느낄수 있는 하나의 자연현상이다. 이런 해살을 양배추 이파리가 겹쳐있는 특성을 살려 해살을 싸먹는다고 하였다. 이련을 읽어보면서 필자는 따뜻한 해살을 먹는 양배추 입은 뜨거웠지 않았을가 하고 걱정도 해보았다. 2련:  바람은 우리가 볼수도 만질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바람으로 인해 다른 사물의 흔들림에서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느낄수 있다. 작자의 필끝에서 바람도 양배추가 꽁꽁 싸서 먹을수 있는 반찬으로 되였다. 바람맛은 무슨 맛일가? 양배추만 알고 있을 것이다. 3련:  새소리는 새의 울음소리를 말한다. 작자는 청각적 현상을 시각화하여 우리한테 보여주었다. 4련:  마지막 련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의 3개련의 종결이라고 생각하고이 시는 현대동시고 하이퍼 동시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것이다. 하지만 하이퍼 동시를 쓸줄 아는 사람은 절대 이렇게 말을 하지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는 3개련이 종결도 되고 독립적 이미지도 되기 때문이다. 4련을 어떠한 위치에 놓아도 이 동시는 어색하지 않다. 하이퍼 동시의 횡적배렬 특성에 맞으니깐. 다시 말하면 동시 를 1련,2련,3련.4련 순서로 배렬할수 있고, 4련,1련, 2련,3련 순서로도 배렬할수 있다. 또 4련,2련.련 1련, 혹 2련,3련,1련,4련,  3련,1련,2련,4련 이렇게 배렬하여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동시에서 작자는 손도 발도 눈도 입도 없는 채소 양배추를 배 뚱뚱이로 이인화 하였다. 필자는 이 동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흔히 먹는 보쌈이 떠올랐다. 보쌈집에 가서 보쌈을 먹을 때면 쌈을 싸먹을 소고기, 삼겹살, 족발 그리고 마늘 고추, 양념장... 등 다양한 반찬들이 밥상에 오른다.그럼 여기서 은 소고기이고 , 은 고기 먹을 때 같이 먹는 마늘 고추이고, 맛을 더 해 주는 양념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정확한 해설은 작자만이 알것이다. 너무나도 귀여운 동시이다. 가 . , 를 꽁꽁 싸서 먹는 모습이 마치 배뚱뚱한 아이가 소고기 쌈에 마늘도 놓고 양념장도 넣어 야무지게 쌈을 싸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동시 “양배추”에서 1련 . 2련 , 3련 , 4련 는 어느 한 이미지도 직접 련계를 가지고 있지않고 어느 한 사물도 다른 사물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매련의 이미지들은 독립성을 가지고있다. 이 독립성을 가진 이미지들이 한수의 시를구성하였다. 다시 말해서 다차원 기능을 적용한 동시이다. 도표로 그려보다면 이것이 바로 하이퍼동시의 핵심인 이미지와 이미지사이가 단절되여 있고 서로 련계성이 없다는 특성을 구비한 하이퍼 동시다. 우에 두수의 동시를 보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쓴것이 아니라 사물의 형태나모양, 성질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물로 만들었다. 어떤 규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물인 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 ㅡ 아무런 제한성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으로 부각된 표현들이다. 두수의 시를 학습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성인시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동시도 여러 갈래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야하지 않을가. 한 격식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되지 않을가. 꾸준히 새로운 실험시를 써보는것이 좋지 않을가. 선자리 걸음을 하면 안되지 않을가. 우리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여야 하지 않을가.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가 배우면서 실험하고  있는 동시 ㅡ 하이퍼 동시가 꾸준히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라고 생각된다.                                                       2017년 9월 20일   하이퍼동시 에 대한 단상                                            윤옥자        황희숙 동시인의 에 대하여 말해 보고저 필을 들었다. 우선 그의 이 어떤시인지 읽어보자         첫눈   황희숙   떨어 진다 쬐꼼한 은빛 보석이   떨어 진다 커다란 그물에   떨어 진다 땅거미 반찬으로       제목이이니깐 시인은을 맞는 기쁨으로 에 대한 시야를 남달리 한것 같다. 이 시를 보면 제목이 인데 시문에는 첫눈이란 말이 없다 이 떨어진다 하였고 이라 했다. 시인은 떨어지는 을 보면서 상상을 뛰여넘어 환상속에서 이질적인 이미지 을 보았다.      쟈크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라고 했다. 이 어록을 살펴보면 사물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 질때 재현의 여러통로란 다선이란 뜻으로 풀이되고 무의식 공간에서 생소한 이미지로 된 사물 즉 리좀이 만들어 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 무엇인가 빠져나가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들리지 않는 이것이 응사라 했는데 이런 응시가 하이퍼시가 아닌가 싶다. 하이퍼시에서 리좀으로 된 이미지는 무의식 공간에서 환상속을 날아 다니면서 여러 갈래로 접속될수 있는 복잡한 련관성의 지도를 만들어 가는, 깨여지고, 부서지며 재생하는 것으로 령토화 되고 재령토화 되며 절편된다. 또 숨겨져있는 그 무엇이 많고도 많다. 쟈크라캉은 또 라고 했다. 응시가 왜곡된 상이란 말은 변형된 사물이란 말이다, 하이퍼시가 환상속에서 얻어지는 허상도 응시라 할수있다. 응시는 하이퍼시고 하이퍼시는 판도라 상자라 말하고싶다. 쟈크 라캉의 어록에서 라 했는데 우의 시에서 시각을 통해 을 보았고 재현의 여러통로란 상상을 뛰여넘은 환상속에서 이미지로 된 이 배열 되였으며 빠져나가고 사라진다 했는데 자리에 이 자리를 차지하고 이 빠져 나가고 자리를 또 그물이 차지하고 은빛 보석은 빠져 나가고 이렇게 단계별로 전달 되였다.  시 첫련에 쬐꼼한  라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황홀하게 빛나는이 떨어지는 것으로 이미지화 했다. 이은 시인의 의도된 생각이 아니다. 무의식 공간에서 상상으로 얻어진 이미지며 리좀이며 령토다 여기에서 이미지란 탈과념 된 사물을 말하는데 그것이  은빛 보석이다. 이 은빛보석이 바로 하나의 응시라고 할수 있겠다. 리좀이란 끊임없이 련결되고 도약하며 일탈하는 련쇄라 했다. 리좀자리에 있는 은빛 보석은 돌과도 련결될수 있고 꽃과도 련결되였다가 도약하여 일탈하는 련쇄이다. 령토란 련결되였다가 도약하며 차지한 자리를 말한다.   두번째 련에서는  이번에는 그물로 이미지화 했다.  삼련에서는  라 한다. 시인은 시를 쓸때 몇십분의 일초, 몇백분의 일초의 것을 쓴다고 한다. 많이 오지 않는 첫눈이 녹으면서 어둠이 깃들때 시인은 어둠속에 사라지는 눈을 보고 환상속에서 땅거미 반찬으로 이미지화 했다. 시는 이미지로 말하고 이미지의 움직임으로 보여 준다 했다. 쟈크 라캉이 말했듯이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레 접하게 되는 경험이겠다. 시인은 을 응시하면서환상의 나래를 마음껏 펴고 훌륭한 하이퍼 동시 을 썼다 .   깜찍한 아이들 언어로  횡적구성으로 되여있다. 횡적구성이란 한수의 시에서 성질이 다른 이미지가 함께 생성되여있는것을 말한다. 이란 시에는 도있고 도 있고도 있다.이런 것들은 모두 성질이 다른 것들인데 한수의 에서 공생한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의미를 가지고 있음으로 련과 련을 바꾸어 놓아도 될수있고 독자가 참여하여 더 내리 써도 무방하다.  이런식으로 말이다. 시인은, 쟈크 라캉이 말했듯이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레 접하는 떨어지는  첫눈을 보면서 환상속에서 이란 사물을 떠 올리게 되였다. 은 에 의하여 빠져 나가고 사라지였다. 은 다음련에 의하여 산생된 에 의하여 빠져나가 사라지고 만 남았다. 은 또 에 의하여 빠져 나가고 사라지였고 만남았다. 은 을 대체 하였고 은 을 대체하였고 은 을 대체 하였다. 마치 파도가 솟구쳤다가 물앉고 하는 것처럼, 산봉우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 또 각 련마다 같은 말이 있을 때는 링크로 되고 없을 때는 초링크로 되는데 이 시에서는 각 련마다 가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링크로된 하이퍼동시에 해당된다   이상 에 대한 단상을 마친다.                               2017.    9.  21.     다선적인 동시 “첫눈” 에 대한 단평                                           강려   필자는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도 모르고 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 제4회 윤동주문학상 동시상을 수상한 황희숙선생님의 동시 “첫눈”에 대한 필자만의 단평을 감히 몇자 적어본다. “떨어진다 /쬐꼬한 / 은빛 보석이 // 떨어진다 / 커다란 / 그물에 // 떨어진다 / 땅거미 / 반찬으로 // ” 이번 4회 윤동주문학상 동시상을 수상한 황선생님의 “첫눈’의 전문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속에 “은빛 보석”, “커다란 그물” “땅거미의 반찬” 등 서로 다른 이미지가 함께 공존한다고 하겠다 . 즉 동시가 단선이 아닌 다선으로 되여있는 실험적인 동시라 하겠다. 그럼 단선은 무엇이고 다선이란 무엇인가? 단선이란 줄이 한가닥 이라는 말이라 하겠다 . 즉 외줄이라는 말이라 하겠다 다선이란  줄이 여러가닥이란 말이라 하겠다. “숙제 기계, 오 숙제 기계 / 여태껏 본 것 가운데 가장 완벽한 발명품 / 숙제를 넣고 은화 하나를 집어넣으세요 / 그러곤 스위치를 탁 누르면 단 십 초 안에 / 숙제가 끝나서 나옵니다 대단히 빠르고 말끔하게 / 자, 여기 나왔습니다 9 더하기 4의 답은 3입니다 / 3이라고? / 어이쿠 / 생각했던 것만큼 / 완전한 건 아닌 모양이군 //” 미국의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며,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시인, 음악가로 폭넓은 예술활동을 했다는 쉘 실버스타인의 단선적인 동시 ”숙제기계” 전문인데 전반동시가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서술만 있다. 즉 숙제기계가 대신해준 수학숙제의 답이 틀리게 나왔다는 것만 쓰고 있다.  즉 단선구조인것이다 근데 “첫눈”은 “숙제기계” 와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의 이미지를 갖고 쓰는 종적구성이 아닌 여러개의 이미지로 구성된 횡적구성으로 된 동시라 하겠다 . 1련에서 시적화자는 첫눈이 “은빛보석”으로 떨어지고있는 그림을 보여준다. 누가 떨군 은빛보석일까는 어린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고 하겠다 . 2련에서 시적화자는 그물에 떨어지는 첫눈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즉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아이가 상할가봐 산 들 길 나무 등이 이쁜 그물이 되여 떨어지는 첫눈을 받아준다는 사랑의 그림이라 하겠다. 3련에서 시적화자는 땅거미의 반찬으로 떨어지는 첫눈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어쩜 어둠이 맨 이밥만 먹는게 안쓰러워 구름이 소고기반찬이며 달알채며  준다는 따뜻한 그림이라 하겠다 필자는 1련, 2련, 3련이 차원이 다른 이미지로 씌여졌기에 련과 련을 서로 바꿔도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작과 끝이 따로 없기에 읽는 독자가 더 써내려갈수도 있는것이다. 종적구성이 아닌 횡적구성으로 된 동시이니까 총적으로 황쌤의 동시 “첫눈”은 동심의 크레용이라 할수있는  “은빛보석 “  “그물’’ 반찬”으로 첫눈 오는 날의 정경을 3장의 이쁜 그림으로 우리한테 펼쳐보여주고 있다. 시적화자는 혼자가 아닌 어울림의 미학을 깨닫고 있다. 복잡한듯 매련마다 링크인 “떨어진다” 는 연결고리를 이어가고 있지만 단순한 연결을 하고 있어 어린이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언젠가 한국 권오삼동시인님의 “여러빛갈의 동시 읽기”란 평론에   라는 단락을 읽은적 있다 . 그러면  황선생님의 동시 “첫눈”은 동심의 눈높이에서 어린 독자를 배려하고 쓴 우리한테 본보기를 보여준 그 여러빛갈의 동시들중의 가히 실험동시라 할수있는 다선적인 동시라고 본다 필자는 황희숙선생님의 새로운 정진을 기대한다.   2017-09-22     도주하는         김봉순     문학창작이란 새로운 예술작품을 쓰는것인 만큼 하이퍼시 10대 촉구중 도주를 갖고 하이퍼동시 “첫눈”에 대한 짧은 소견을 말해보려 한다 하이퍼시 창작론 84페지엔 “ 하이퍼시는 고정이 아니라 도주를 촉구한다. 시간은 도 주를 하고있다…사람도 도주 하고 식물도 도주하고 … 시간의 도주를 따라 모든 사물 들도 따라서 도주한다. 도주를 통하여 ” (210페지)…”라는 단락이 있다 도주란 피하거나 쫓기여 달아난다는것인데 그러면 시적인 도주는 어떤것일가 ? 하나 의 물질에서 그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물질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사물들의 도주로 하여 하이퍼시가 태여난다고 할수 있다. 도주는 행과 행사이 에서 벌어지기도 하고 련과 련사이에서도 벌어지기도 하고 한행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아래 시로서 설명해보자.   떨어진다 쬐고만 은빛 보석이   떨어진다 커다란 그물에   떨어진다 당거미 반찬으로   동북아 문학예술연구회 제4회 윤동주문학상 동시상 수상한 황희숙 동시 의 전문이다. 이 동시는 전형적인 하이퍼동시이다. 찬찬히 읽어보면 매 련마다 사물들이 얼굴을 내 밀었다가 사라지는 경상이다.  한마디로 귀여운 도주이다. 첫눈이 1련에서   으로, 2련에서 로, 3련에서 도주하였다. 이들은 서로 아무런 인연도 련계도 없다.이렇게 련계도 안되는 물질들의 움직임의 련속을 도주라 한다. 이 도주는 련과 련사이에서의 도주라고 할수 있다.   도주를 나누는 기준은 내용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서는 세가지 내용으로 도주했다. 도주가 형성되는 경우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현실에서 초월로 도약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에서 초월로 이어지는 경우라 하겠다. 의 경우는 련과 련사이에서 초월에서 초월로 이어지는 경우라 할수 있다. 하이퍼시는 여러번의 도주를 집성하여 시를 만들게 되는데 모든 도주는  동시 에서   , , 처럼 새로운 사물을 낳게 된다. 도주는 운동이다.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되는 운동이다. 하이퍼시는 모순속에서 새로운 모순이 나타난다. 항상 새로운 모순이 나타나는것은 도주의 조건이고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둔갑하는 것은 도주의 완성이며 결실이다. 완성과 결실은 또다시 새로운 도주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도주는 끝이 없다. 에서의 , , 은 앞의 사물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련계도 없이 자유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런 자유로운 등장이 바로 도주의 표징이며 이 사물에서 저 사물로 뛰여가기이다. 이러한 도주는 어떠한 기준도 없다. 동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자유롭고 귀여운 도주만이 있을뿐이다. 또한 도주에는 링크(련결)가 알리는 도주와 링크가 알리지 않는 도주가 있다. 에서는 링크가 알리는 도주이다.     아래에  더 자세히 이 동시를 살펴보자.   떨어진다 쬐꼬만  은빛 보석이   1련에서 눈꽃을 은빛 보석이라고 비유하면서 도주하였다. 눈이 내릴 때 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은 마치 하늘에서 은빛 보석이 떨어지는것 같다고 한다. 만약 은빛보석이 떨어진다면 얼마나 희한하랴. 아이들도 어른들도 두 팔을 쫙 벌리고 은빛 보석을 한알이라도 더 많이 받아가지려 할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눈처럼 깨끗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의 세계도 엿볼수 있다. 이라고 한것은 아이들의 상상을 나타내는 기발한 착상인것 같다.   떨어진다 커다란 그물에   2련에서 그물로 도주하였다. 아마 작자는 산, 나무, 길, 강을 얼기설기 엮어진 그물로 상상하고 그물 용도에 의하여 하늘에서 모래무치, 버들치, 쫑개들이 내려와 그물에 걸린다고 상상하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도주는 시의 공간확장에 속한다. 2련에서 로 도주하여 1련보다 차원이 다르기에  공간이 넓어졌다 할수 있다. 대단한 착상이다.    떨어진다 땅거미 반찬으로   3련에서는 .도주하였다. 땅거미는 해가 넘어가면서 땅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것을 말한다.어둠이 시작되면 밤이 온다. 밤은 모든 사물을 삼켜버린다.   땅거미가 입이 없어도 반찬을 먹는다고 말한것은 어둠에 의하여 내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기발한 착상이다.   이렇게 하이퍼시 사물은 각이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이  여러가지 도주의 경로를 거치면서 차원이 다른 다양체를 형성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도주는 하이퍼시의 중요한 명제같다.     2017년 10월 9일
241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 권오삼 댓글:  조회:1407  추천:0  2017-10-14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 권오삼     만남 동시인 권오삼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취재, 정리 : 최현정     ‘동시인’ 하면 떠오르는 아동문학의 ‘어른’이 있다. 1975년 동시로 등단, 아동문학 시장이싹트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동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시인 권오삼. 수원의 자택으로찾아가 4시간 가까이 살아온 이야기, 권정생 작가의 이야기, 동시에 대한 그리고 아동문학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70년대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80년대에는 장사를 하면서 90년대 후반부터 사업을 접고 동시쓰기에 전념하기까지 그가 살아온 다양한 인생이 현실 참여 동시집부터 동심이 가득 담긴 저학년 동시집과 고학년 동시집까지 그가 만들어낸 시세계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처음부터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한참동안 망설였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여러 번 듣다 보니 마치 ‘동시 창작 개론’처럼 경험을 토대로 한 동시 창작의 원칙 혹은 노하우로 정리할 수 있었다. 경험을 토대로 전하는 생생한동시 창작 개론, 이번 호 만남에서는 동시를 쓰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담았다.   주변의 사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라   “나는 95년에 수원으로 와서 13년 동안 여기 공원에서 동시를 썼어요. 그러고 보니 시집네 권이 여기서 나온 꼴이네요. 시를 쓰려면 사물과 교감이 있어야 해요. 내 가까이 있는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 돼요.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무심히 보면 안 돼요. 여기저기 다니며 많이 보면 인식의 폭은 넓어지겠지만 시가 되고 글이 되는 건 아니지요. 동시는 성인시와 달라서 삶의 깊이, 무게를 다룰 수 없잖아요. 내가 공원의 도토리나무를 소재로 서너편 쓴 게 있는데, 만날 보는 도토리나무지만 어제 본 것하고 오늘 본 게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고, 또 해마다 보는 느낌이 다르지요. 얼마 전에 울산 암구대 반각화를 보고 왔어요. 같이 간 다른 동시인들은 반각화에 있던 고래랑 아기 고래를 보면서 시를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나는 길에 버려져 있던 아기 신발을보고 시를 떠올렸어요. 설마 신발을 버렸을까, 잘못 두어서 잃어버렸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고 돌아오는 내내 그 신발이 눈에 밟혔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신발을 보고 시상이 떠올랐는데 아직 쓰지는 못 했어요. 작은 거라도 나에게 의미를 줘야 그게 시가 되는 거지요. 시인이라면 언제라도 사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사물이 다가오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겠지요. 머리(의식)가 깨어있어야지요. 의식이나 감각이 깨어있어야 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시가 쓰여 진다고 봐요.”     제대로 된 시 열 편만 써라   “일본 하이쿠의 대가 마쓰오 바쇼가 한 말이 있어요. ‘다섯 편만 쓰면 당신은 시인이다. 열편을 쓰면 당신은 대가다.’ 여기서 말하는 다섯 편이나 열 편은 그냥 다섯 편이나 열 편이아니라 제대로 쓴 다섯 편 열 편이겠지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우리나라 유명 시인들 중에도 좋은 작품 열 편을 가진 시인은 흔치 않다고 봐요. 김소월, 이상화, 김영랑 등 이들 시인의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이 몇 편이나 되는지 생각해 봐요. 뛰어난 시가 열 편만 된다면대단한 시인이지요. 그리고 그 시들이 시간의 무게를 견뎌내어 50년, 100년 뒤에도 남는다면 정말 대단한 거지요. 보들레르나 랭보, 김소월 같은 시인은 시집을 한 권만 냈잖아요. 시집은 평생 한 권만 내면되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작품이 나올까 싶어 쓰다 보니 시집이여러 권 되는 거지요.” 퇴고 과정에 많은 시간을 투여하라     “나는 지금도 습작생이에요. 미당 선생이 이런 말을 했지요. ‘작품은 언제나 미완성이다’라고. 6월호에 발표한 「바람 부는 날」은 작년에 낸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있던 건데 다시 보니까 미흡한 점이 보여 고쳐서 발표했어요. 함께 발표한 「나무」도 다시 보니까 세 군데나 미흡해서 고친 뒤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올렸어요. 쓸 때는안 보이다가 활자로 된 다음에야 꼭 눈에 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습작생이에요. 완전하게 써서 첨삭할 때가 한 군데도 없다, 마음에 든다, 그래야 되는데. 김소월도 「진달래꽃」을 스무 번 정도 고쳐서 발표했다고 했나, 가끔은 발표한 작품을 다시 고쳐 보기도하지만 고치지 않은 게 더 좋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고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면 나스스로 혼란에 빠져서 판단이 잘 안서요. 그럴 때는 시간을 두고 봐야 돼요. 쓴 작품을 묵힌 뒤에 다시 보고 나서 만족하면 발표를 해야 돼요. 몇 년 전에 쓴 거라도 계속해서 그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고쳐야 해요. 얼마만큼 그 작품에 시간을 투여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쉽게 써서 급하게 발표하면 안 돼요. 두고 두고 고친 뒤에 발표해야 돼요. 나 역시 충분히봤다고 생각하고 작품을 보낸 뒤, 발표된 작품을 보면 또 미진하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는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돼요. 그래서 나는 아직도 습작생이에요.”     동화와 비교하지 마라     “동시를 동화와 비교하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들어요. 7,80년대에는 동화나 동시나 시장이없어 대부분 자비 출판했고, 인쇄 출판은 거의 없었어요. 상대적 박탈감이 없었지요. 90년대 이후부터 동화는 아주 빠르게 시장이 커지고 동시는 느린 상태였으니까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껴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동시도 30년 전보다는 시장이 커졌어요. 나도 80년 초에 동시집을 자비출판을 했지만 그때는 거의 그랬어요. 동시는 동시인 지망생이나 동시인들끼리만 보는 거였어요. 돌이켜 보면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졌어요. 지금은 경제적 여유도 있고, 부모들도 아이에게 동시를 읽히려고 하지요.”   동시는 본래 어려운 장르다     “동시가 동화보다 독자들에게 확산이 안 되는 이유는 운문문학의 특성 때문이라고 봐요.시는 본래 어려운 거예요. 쉬우면 시가 아니고 유행가 가사여야지요. 서사문학은 스토리거든요. 이야기니까 사람들이 그 내용을 따라가면 되지요. 옛이야기는 지금 봐도 재미있잖아요. 시대를 초월해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라든가 재미는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는 정서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정서를 표현하다 보니 그 정서를이해하지 못하면 독자가 못 따라 오는 거지요. 정서라는 건 1학년과 3학년이 틀리고, 5학년하고도 틀리잖아요. 그래서 동시가 참 어려워요. 개선책은 있을 수 있지만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이원수 선생님 동시를 예로 들어볼게요. 이원수 선생님의 동시 200여 편 중에 아이들이좋아할 동시만 4,50편 묶어서 동시집을 낸 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요. 왜 그럴까요? 공감하는 독자도 있지만 공감 못하는독자도 있다는 거지요. 이원수 선생님의 좋은 동시는 삶을 표현한 것인데 요즘 독자들에게는 정서가 안 맞는 거지요. 이런 게 동시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요, 한계라고 봐요. 성인시는 그렇지 않지만.   동시가 안 팔린다고 해서 서운해 할 필요 없어요. 좋게 생각하면 동시는 동화와는 다른 고고한 물건이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보면 돼요. 그렇다고 동시 쓰는걸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아이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교훈을 주고, 아이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심성을 곱게 하고……. 나도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시를 썼어요.그래야 내가 보람된 일을 하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음악이나 그림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하듯 동시도 그렇게즐겁게 감상하면 되는 것이고, 고급 오락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대단하게 여길 건 없다고봐요. 독자가 소수더라도, 그 소수의 독자가 내 동시를 읽고 잠시라도 즐거웠다면, 잠시라도 기쁨을 맛봤다면 그걸로 족한 거지요.” 상상력을 해방시켜 틀 밖으로 나와라     “성인시 쓰던 시인들이 쓴 동시를 보고 나도 많이 느낀 게 있어요. 불성실한 답변일지는모르지만 정직하게 말한다면 시는 고급 오락이라고 생각해요. 동시단에 있는 이들은 전형적인 동시를 고수하지요. 동시의 원줄기가 있다면 거기서 다양한 곁가지들이 뻗어 나와야하잖아요. 그런 시가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나 김기택, 최명란 시인의 동시라고 봐요.말놀이 동시에도 약점이 있어요. 그게 한 권으로 그쳐야 하는데 2권, 3권, 4권 계속되면 첫권의 모방밖에 안 된다는 거지요. 나는 그렇게 봐요. 정통적인 동시는 새로운 소재를 만나발상이 참신하면 새로운 동시가 되지만, 말놀이 동시의 경우는 양적으로 늘이는 것뿐이지매 권마다 새로울 수는 없지요. 상투성에 빠지기 쉽지요. 아쉬운 건 왜 동시인들은 이제까지 그런 동시 쓸 생각을 못했나 하는 거지요. 오래 전 나도말놀이 동시를 몇 편 썼어요. 그땐 이건 동시가 아니다, 라고 낙인찍어 버리고 더 이상 안쓴 거지요. 이제까지 대다수 동시인들은 틀 안에 갇혀서 벗어날 줄 몰랐어요. 그만큼 상상력이 빈곤했다는 거지요. 최승호 시인이나 김기택, 최명란 시인은 그런 면에서 자유로웠던 거예요. 동시인들은 교육적인 것에 매여서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못했는데, 그 사람들은 그런 게 없었던 거지요. 그들이 그런 동시를 발표하면서 동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켜 주었다고 봐요.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동시만 쓰는 동시인들은 동시를 의미 있게 쓰려고 하고, 성인시를 쓰는 시인들은 동시를 그냥 재미있게 쓰려고 한다는 겁니다. 역할이 뒤바뀐 거예요. 표현 방법에서도 동시인이 써야 할 방법을 그들이 쓰고, 성인시인들이 써야 할 방법을 동시인들이 쓰고. 까닭은 성인시를 쓰는 이들은 의미나 메시지 따위는 성인시로 풀어낼 수 있으니 동시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동시를 발랄하게 재미있게 쓰려고 한 거지요. 그들은 성인시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동시로 풀어낸 거지요. 반면에 동시인들은 자신이 겪은 인생이라든가, 하고 싶은 말을 달리 풀어낼 길이 없으니 거꾸로 동시에다가 담아 보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느끼지요. 그러다 보니 동시가 무거워지고딱딱해지고 그러는 거 같아요.”     꾸준히 실험시도 써보라     “동시를 쓸 때는 독자를 배려해야 돼요. 나도 예전에 뭘 모르고 쓸 때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어요. 지금은 쓰면서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해요. 작품을 읽을 때도 아이의 눈높이로 작품을 보려고 해요. 아이들이 이 작품을 이해할까? 어떻게 생각할까?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감응을 할까? 이런 걸 생각하면서 동시를 읽고 써요. 내가 쓴 시 중에도 순전히 내 문학적 욕심으로 쓴 게 있어요. 실험시라고 할 수 있는 건데독자를 위해 쓴 게 아니라 순전히 동시문학을 위해서 쓴 거지요. 성인시에서는 실험시가많이 나오잖아요. 동시도 필요하다고 봐요. 3년 전부터 시도하고 있는데 어려워요. 실제로해 보면 실패할 확률이 높거든요. 지금까지 쓰던 시 쓰면 위험부담은 없지요. 하지만 새로운 것도 시도해 봐야 돼요. 동시문학을 위해서죠. 그렇게 하다보면 새로운 방향으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때가 있겠지요. 능력 있는 후배 동시인들이 실험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고 설령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건 작품이 실패한 것이지 시도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성인시도 여러 갈래가 있듯이 동시도 여러 갈래의 시를 위해 새로운 길을 찾으면서 계속업그레이드 시켜나가야 돼요. 전통적인 방법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냥 대필이라고 할 수있지요. 지금부터 현대적인 작품을 써야 몇 십 년 지나도 구닥다리가 안 되는 거지, 지금부터 현대성이 없는 시를 쓰면 5, 6년만 지나도 낡은 시가 되어 버릴 수 있지요. 오늘 새로운것도 내일이면 낡은 것이 되잖아요. 동시를 쓰다 보면 고민거리가 많이 생겨요. 고민거리가 많다는 건 좋은 현상 아닙니까? 고민거리가 없으면 현실에 만족하고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보면 됩니다. 상품과 마찬가지로작품도 늘 불만을 가져야 새로운 게 나오겠지요. 불만을 가지려면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해요. 낡은 시도 제대로 못 쓰는 사람이 새로운 좋은 시를 쓸 수는없는 거지요. 기성 동시인들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해야 합니다. 나도 노력을 하고 있지만 쉽지 않아요. 쉽지 않으니까 도전해 볼만 한 거지요. 새로운 형식과 내용, 기법으로쓰느라 전달에 문제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어린독자를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다 하더라도)시간이 지나 어느 단계 이르면 독자 배려 문제도 해결된다고 봐요.”     최고가 될 수 있다, 용기를 가져라     “어떤 후배가 지금부터 30년 이내에 발표된 동시들을 보니 제대로 된 동시가 별로 없더라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기회가 좋네! 네가 조금만 잘 써도 되겠네.’ 했지요. 그렇지않아요? 이제까지 마음에 드는 시가 별로 없다면 자신이 조금만 노력해서 쓰면 우뚝하게드러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동시는 시시해, 좋은 동시가 없어, 그렇게 냉소적으로 부정만 해버리면 바람직하지 않지요.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쓰면 내가 아무리 잘 써도 돋보일 확률은 낮지요. 모두가 잘 못쓴다고 여겨질 때 생각을 바꾸어 내가 조금만 잘 쓰면 되겠구나,이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동시를 쓰면 좋잖아요. 권오삼 동시를 보니 형편없네,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권오삼이보다는 더 잘 쓰겠다, 이러고 쓰면 후배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신나고 통쾌하고 재미있어요. 그러니 용기를 내어 치열하게 작품을 쓰라고 말해두고 싶어요.” 권오삼 시인은 인터뷰 말미에 필자에게 ‘아동문학을 위해 애쓰는 젊은 사람’ 에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 했다. ‘젊은 사람들이 잘 해주길 부탁한다’는 말 속에는 아동문학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가 오랜 동안 동시인의 자리를 지키면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동시를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 권오삼)     194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5 월」이, 1976년 소년 중앙문학상에 「그네 타는 아이」가 각각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집으로 『강아지풀』, 『가시철조망』, 『물도 꿈을 꾼다』, 『고양이가 내 뱃속에서』, 『도토리나무가 부르는 슬픈 노래』,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 있다. (어린이와 문학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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