诗---桥..
金星龙(苏州)
桥
搭在
两岸之间
睡成了
石头......
桥影子
抓住
桥的大腿
不想
跟着
流水
走......
因为
爱
还
没有
过
桥......。
2016年..️月..️..️日
다리
김성룡
다리는
량안에 다리를
걸치고
점잖게
돌로 잠들어
있다
그림자는
다리의 허리띠
붙 잡고
물살에 떠내려
가지 ㅡ
않으려고
하루종일
몸부림 친다
왜냐
사랑이 아직
다리를
채 건너지
않은
까닭...
오늘의 단평
허인
"회남자. 설산천" 《淮南子·说山训) 에 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 . (미지소재, 비오욕, 세불능천, 악지소재, 비고륭, 세불능귀)"美之所在,虽污辱,世不能贱;恶之所在,虽高隆,世不能贵"。뜻풀이 해보면 " 아름다운 사물은 아무리 어지러운것에 매몰
되여도 결코 그 가치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추악한것은 아무리 올리 춰 보아야 결코 존귀한 신분으로 바뀔수 없다"인것 같다. 김성룡시인은
기실 80년대 말, 90년대 초엽,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동시 창작으로 무척 유명했던 분이다. 흑룡강성 조선어방송국에서 사업하다가 90년대 중엽, 한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획득한후 현재 강소성 소주시에서 의류제조업에 종사, 그런 그가 중문시에 도전하여 현재 시집을 준비중이며 중국당대 문화시대보 등등 국내에서 제일 착지가 굵직하고
영향력이 큰 신문,잡지에 륙속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는줄로 알고 있다.
초기의 그의 중문시 작품들을 살펴보면 짜임새가 너무 좋고 더우기 간결하여 미학의 척도로 극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듯 하여 읽기에 무척 편했고 거기에다 철리적인 관습까지 곁들여 놓아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것일가)하는 의욕심을 충분히 발동하여 끝까지 읽게 하는 그런 마력이 있은것 같다. 반면 너무 깊게 살을 저며 내여 뼈가 다 드러나는듯한 그런 단점도 있는것 같다. 물론 매일 모멘트에 올리는 대부분 작품들이 초고이고보니 그런 오해도 결국 모면키 어려웠던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그런 그가 요즘 큰 작심이라도 한듯이 륙속 내여놓는 수개작은 현란하다 못해 조금 독자들을 당황하게도 만드는것 같다.그만큼 무게감이 늘어났고 황금 비중도 늘어났고 순도가 더 높아 졌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다리"(桥)의 경우 짧은 단시임에도 불구하고 압운의 철학적인 사물현상을 정중하면서도 이외로 너무나도 단순한 마음의 교묘한 그런 움직임 , 즉 사랑으로 련결시켜 놓아 (너무 아름다워 슬프듯이) 크나큰 공명감을 일으킨것 같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제1련에서 잠 들어버린 돌, 그리고 2련에서 다리의 허리띠 부여잡고 떠내려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형상, 다음 제 3련에서는 한술 더 깊게 푸욱 떠서 사랑이 오질 않는 한 다리는 결코 다리로 기다려야 하는 숙명적인 운명을 시인이라는 사명감으로 분석하여 한폭의 그림을 독자들의 머리속에 진한 묵향으로 심어놓아 더욱 공명감이 컸던것이 아닐가로 생각된다.
주역 권이(圈二) "겸괘"(谦卦)에 (겸존이광)"谦尊而光"이라는 구절이 하나 있다.
뜻 풀이 해보면 "존귀한 이는 겸손의 덕을 갖춰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우리 말 속담에도
(순금은 불을 겁내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질 않던가? 부족점이라면 시어 배렬에서 길게 늘여놓아 동시적인 그런 경향이 여직 남아 있는것 같다. 매번 통화때마다 술 냄새를 심양에까지 스스럼없이 풍기는 김성룡시인님, 올해 년말에는 꼭 좋은 시집을 선물로 보내주시길 두손 모아 부탁 드립니다.
심양에서 2016년 8월30일
오늘의 단평
김연의 수필은 깔끔해서 읽기가 무척 편하다. 깔끔하다는것은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고 손댈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황향숙의 수필 "당신은 어떤 승냥이에게 먹이를 주는가?"가 철리적인 관성과 본능에 점철된 봉건 례의범절이라는 화자를 비판과 비교를 예리한 메스로 도입하여 결코 거창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작지도 아니 한 큰 감명을 불러 일으켰다면 김연의 "담요를 덮으며"에서는 순수한 감성의 바다속에서 자연을 만나고 숲을 만나고 구름을 만나고 삶을 만나고 여름을 거쳐 가을을 만나게 되는듯 하여 줄곧 상큼한 기분속에서 비애같은것은 느낄수가 없고 상큼 발랄한 이미지가 완성이 되여 더욱 행복한 독자가 되여가는 그런 느낌이 드는것 같다.
회남자 설림훈 (淮南子,说林训)이런 구절이 하나 있다.(주복내견선유, 마번내견량어)"舟覆乃见善游,马奔乃见良御", 대개 그 뜻을 풀이해보면 "배가 뒤집혀질때에야 비로소 누가 진짜 수영을 할줄 아는 사람인가 알수를 있고 말이 달릴때에야 비로소 누가 진정한 기수인가를 알수가 있다" 뜻이다. 진정 재주가 있는 사람은 평시에 보아낼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허나 풍운변화, 위급한 상황이 닥치게 되면 진면모가 드러나게 된다는 그런 뜻이기도 하다. 필자는 황향숙씨나 김연씨를 그런 부류의 진정 재능을 갖춘 문인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담요를 덮으면서 "에서 "보송보송한 체취","미소가 알른거린다"만져보고 부벼보고" 등등표현은 녀성 특유의 세밀한 관찰과 예리한 감성을 최대한으로 잘 표현한 구절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담요를 덮으며 / 김 연
얼마만인가? 한쪽켠에 곱다라니 개여 두었던 요 아이를 꺼내 보송보송한 그의 속살에서 따뜻한 체취를 느껴본다. 늘 부끄러운듯 두눈을 수줍게 살풋이 내리까는 요 아이, 얼굴에서는 언제나 반가운 미소가 알른거린다. 만져도 보고 부벼도 보고 껴 안아도 보고 아주 잠간 깔고 앉아도 보고ㅡ언제봐도 늘쌍 심성이 부드럽고 고마운 아이다. 또한 마음 구석 한 구석으로는 벌써 요 아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계절이 왔나싶어 뭔가 를 잃어버린듯한 느낌에 리유없이 서운해기도 하다.
아직 숲속 나무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숨박곡질 해대는 뭇새들의 노래소리를 채 듣지 못하였는데 , 다이어트하여 예쁜 치마 입고 한껏 멋도 더 부려보고 싶은데, 바닷가 백사장 모래위에 참새같은 내 발자국 톡톡 찍으며 손에는 신발 들고 시원한 파도소리에 묻혀도 보고 싶은데, 지지고 볶고 가사들을 다 챙겨가지고 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마음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계곡속의 맑은 물을 찾아 실컷 힐링도 더 하고 싶은데, 어느새 여름은 가버렸다.
가을이 접어든 길목에 서서 아쉽게 여름과 안녕을 부른다. 여름따라 가려고 애써 몸부림치는 파란 나뭇잎에 이 글들을 하나하나 적어 딸려보낸다. 여름아, 네가 있어서 즐거웠고 행복했어. 내년에 우리 또 만나는거지~ 그리고 가을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올해에도 이렇게 찾아줘서 고마워.텅 빈 하늘이 벌써 자박자박 걸어와 솜 사탕같은 바람이며 얼음 사탕같은 구름을 우리들 곁에 부리워 놓는다. 이제 너와 함께 할 시간들에 벌써 마음이 들끓어 오른다. 짧지도 길지도 않게 우리 함께 잘 지내보자 가을아~
담요, 니가 난 참 좋다...
2016. 8. 28
들 꽃/ 류설화
이름모를 비탈진 바위사이
그리고 논두렁 흙두렁사이
아련한 네 몸짓에 젖어
순간 멈춘 나는
에돌다 다시
널보러 간다
잎아리를 씻어주는 아침이슬로
잎사이를 메워주는 밤달빛으로
네한몸은 끝내 피여나는구나
그러나
어느 지는날
어느 바람이 불면
너는 피기 위해
더 깊이 눕는다
그러면
바람이 너를 일으키리
2016.09.11
오늘의 단평
원고지에 또박또박 제 이름 써가는 녀자
허인
독일이 낳은 저명한 시인 괴테는 (창작은 패러디이다)고 말한적이 있다. 이 말을 두고 몇몇 로 시인들이 맞는 말이네 틀린 말이네 한때 시야비야 한적이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필요 없는 일이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은 언제, 어느때도 존재하기때문이다. 만약 초학자일 경우 패러다임이 되고 기성 시인일때 자신만의 개성으로 모방한다면 자기 패러디적이라고 말할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팔자의 경우 작자의 개성쪽을 더 추구하다보니 패러디적인 사고방식을 그닥 제창하지 않는 그런쪽이다. 류설화의 들꽃이 자기 패러디식 작품이다. 회의 참석차 윤동주의 시고 아래 새까맣게 도배해가면서 자기 패러디적인 들꽃을 완성한 류설화씨는 초고 그대로 필자에게, 세상에 떳떳이 내여놓을수 있는 몇 안되는 솔직하고 용기있는 그런 사람인것 같다. 또한 시인의 재주를 타고 난듯이 재능이 있는 그런 젊은 시인으로 보인다. 작자의 거듭되는 수개요청에 여직 확답을 주지 않았던 원인이 곧바로 작자의 자기 패러디적인 정서를 파괴하고 싶지 않았던것이였음을 여기서 이제는 밝혀야 할것 같다.그럼 류설화가 그리려고 하는 "들꽃"의 형상은 어떤것이였을가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이름모를 비탈진 바위사이/그리고 논두렁 흙두렁사이/아련한 네 몸짓에 젖어/순간 멈춘 나는/에서 이름모름이라는 파생어가 들꽃이 아닌 듬직한 바위 앞에 붙어 있어 아련한 네 몸짓에 젖은 나의 사유는 바람과도 같은 형체로써 나의 강경한 태도를 대신하였으며 그러한 명확하게 구분된 사유, 혹은 사상이 있었기에 2련에서 자연스럽게/에돌다 다시/널보러 간다/가 완성된것 같다. 다음 "잎아리"라는 신생용어를 새롭게 창출해낸 녀류시인의 참으로 용기는 칭찬 받을만 신선한것이였다고 말하고싶다. 잎아리냐 이파리냐 고민한 흔적이 력력하지만 필자는 신생용어 창출 역시 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아침이슬과 달빛을 꽃이 피여야 할 비옥한 몇줌의 자양분으로 사용한 작자의 슬기역시 칭찬받아 마땅할것 같다. /너는 피기 위해 /더 깊이 눕는다/가 이 시의 포인트이며 축의 역활을 하고 있는데 얼마나 절묘하고 제대로 간결함의 극치인가?/그러면/바람이 너를 일으키리/로 역시 철리적인 사색을 가다듬어 깔끔하게 마무리하여 시적 여운이 더욱 길어지는듯 하다. 이 시의 장점이 바람과 마음의 상호 력칭관계, 그러하기 때문에 바람이 가는곳을 마음이 따라가 마음으로 느끼고 사색하고 고만하게 하는듯 하다. 깔끔하고 읽기 편한 좋은 시라고 생각된다.
부족한 점이라면 리좀(시어와 시어를 이음)이 너무 직설적인 "그리고", "그러나", "그러면"으로 되여 있어 읽기가 편한 반면 품위가 일반화 되여 자기 패러디적임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듯 하다. 그리고 짜깁기의 흔적도 보이는것 같다. 한마디로 경험 부족인것 같다. 패러디와 자기 패러디 사이는 단순한 계발이나 모방 차이가 아니고 작자의 독특한 개성을 얼마나 많이 살리냐의 차이점인것 같다. 류설화시인은 아직 무척 젊고 앳돼 보이는데 독창적인 개성작품이 줄줄이 나오기를 기대해 보고 싶다.
2016.9.14
보슬비(외1수)
김기덕
하늘에도 세탁소가 있나보다
물에 젖은 흰 중고를 세탁하네
간판없이 물 새는 수도꼭지처럼
주르륵 주르륵 비가 내리는 하늘
해가 나면 해살이 걷어갈 이슬방울
다시 지상으로 돌려주는 손들
오늘도 바쁜 하루를 산과 들에 두네
금방 깨어난 어린 생명들을 거느리고
보슬비가 고향을 찾아가나보다
고향이 그리워 나무가지마다
새 편지를 조용히 읽으며 내려오는
들판은 깊은 감격에 푹 젖었다.
산다는 의미
가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길이가 보인다
그 깊이는 보이지 않고 넓이는 어디로
묻혀 있는지 산다는 이미지가 파랗다
산새들이 마을로 내려와 우는 이유를
비우고싶은 숲은 잘 알겠지만
숲으로 지게를 지고 들어가는 한 사나이
멀어 질수록 작아지고 있다
지금 산다는 정의를 읽어보면
다른 세상을 향하여 간다는 이해가 된다
보리밭에 벼짚 사람 속은 비어도
보리고개 넘어가는 진실이 옷을 벗고 있다.
오늘의 단평
허인
솔직히 김기덕시인님의 이번 "보슬비"와 "산다는건"을 읽고서 필자는 깜짝 필자는 놀랐다. 말 그대로 한구절 한구절이 모두 명언이기때문
이였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잡담 모두 제쳐두고 시속으로 직행해보자/하늘에도 세탁소가 있나보다/물에 젖은 흰 중고를 세탁하네/에서 가상적인 서술, 즉 하늘과 세탁소는 시어와 시어사이 리좀(잇기)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만큼 생소한 낱말이 어우러져 돋자들의 눈앞에 펼쳐놓은 그 시각효과는 그야말로 우리들의 상상력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하늘과 세탁소가 너무나도 강력한 포인트로 독자들의 머리속에 떠오르다 보니 아래 시구에서 /물에 젖은 중고를 세탁하네/는 또한 자연스럽지 않을수가 없다. 이 시는 전부 이렇게 추석에 선물 한쪼각씩 건네주듯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간판없이 물 새는 수도꼭지처럼/에서 수도물꼭지와 /주르륵 주르륵 비가 내리는 하늘/에서 하늘의 미묘한 입맞춤은 마치 신혼부부의 애정행각처럼 상상만으로도 달큼하다. /해가 나면 해살이 걷어갈 이슬방울/에서 이슬방울과/다시 지상으로 돌려주는 손들/금방 깨어난 어린 생명들을 거느리고/보슬비가 고향을 찾아가나보다/에서는 로시인의 로련함과 기발함이 그대로 려과없이 투시되는듯 하다. 결구에서/고향이 그리워 나무가지마다/새 편지를 조용히 읽으며 내려오는/들판은 깊은 감격에 푹 젖었다./에서 젖었다의 황금비중이 어느만큼의 무게인가를 독자들은 상상만으라도 그저 행복할것 같다.
김기덕시인을 흔히 향토파, 전통파 시인으로 평가하는 평론인들이 더러 있는데 필자가 보건대 김기덕시인님은 단순한 향토파, 전통파 시인이 아닌 현대파시인인것 같다. 사유의 혁신에서 그는 언제나 소리없이 앞장서서 이미지 혁신에 꾸준히 심혈을 기울리고 있는듯 싶다. 그러한 끈질긴 노력은 그의 근래 근작시들에서 분명히 빛을 발하고 있으며 너무나도 선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는것 같다. 솔직히 공간적 시어 배렬이나 시간적 내러티브(narrative)를 중시한다는건 결코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마치 즉흥이 구술형이라면 담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고 자연에 인격을 부여하여 인간의 옷을 입고 인간적인 대화를 나눈다는건 얼마나 간거한 작업인지를 진정 시를 쓰고 아끼는 사람만이 그 엄청난 깊이를 알수 있을것 같다. 김기덕시인의 그러한 길이와 너비, 그리고 깊이를 우리는 "산다는건"에서 더욱 똑똑히 찾아볼수 있을것 같다.
/가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길이가 보인다/에서 먼저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확고한 자세가 보이고 생명의 변
두리가 아닌 그 중심에 서서 철학적인 혜안으로 살펴본 "길이"가 먼저 등장한다. 길이가 있으면 넓이도 있기 마련이고 깊이도 있기 마련이다. /그 깊이는 보이지 않고 넓이는 어디로/묻혀 있는지 산다는 이미지가 파랗다/에서 파랗다는 여기서 얼마나 싱싱한 이미지로 다가오는가?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는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듯한 약간 허구프고 진실한 독백으로 이 세상에 던지는 야유로도 보인다. /지금 산다는 정의를 읽어보면
다른 세상을 향하여 간다는 이해가 된다/보리밭에 벼짚 사람 속은 비어도/보리고개 넘어가는 진실이 옷을 벗고 있다./. 이 두수의 시가 세상에 던져주는 멧세지는 무척 힌트적이여서 읽는 사람마다 몇번씩 머리속에 되새겨봐야 할것 같다
부족한점이라면 시어선택이 몇군데 모호하고 그 효과에 의문점을 주고 있는듯 하다. 이를테면 (흰 중고를 세탁한다)에서 중고,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조금 희미해 보인다. 다음 "산다는건"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길이와 넓이, 깊이에서 폭력적 조합에서의 맞춰 깁기식이 보이는듯 하고 련결이 다소 생소한 그런 느낌을 주고 있는것 같다."실례로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길이가 보인다'에서 독자들은 '길이 보인다'를 먼저 떠올리게 되여 간혹 오타가 아니였을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듯 하다. 그 다음 시구에서 넓이와 깊이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오해가 풀린다) 아무쪼록 김시인님의 "보슬비"와 "산다는건" 두수의 시는 이 달의 아주 멋지고 좋은 시임을 인정한다. 필자가 알건대 김기덕시인님은 파킨스 병으로 타자가 어려울만큼 병마와 싸우는 중인것으로 안다. 좋은 시 잘 읽었습니다. 김기덕시인님 건강하시고 좋은 시 더 많이 쓰세요.
2016.9.15
차 (茶)
박춘월
빈 시간에
담백하고 단정한 널
부어 넣을 때가 있다
자정같은 네 속에서
엉켜있던 매듭들
풀려나가는 소리 곱다
한가로움과 평안함의 향기
익어터지는
빈 틈들
한잔의 넌
출렁이는 오아시스여라
화판에 널려있는
잡동사니 뽑아내고
여백의 령토 넓혀가는
네 귓속말 카텐 저쪽은
눈가루 잔잔히 내리는 오붓한 마을이다
풀꽃 가만히 웃고 있는 먼먼 언덕이다
오늘의 단평
그릇에 담아 올린 그윽한 차향기
허인
슈클로프스키는 (예술은 삶의 생동감을 복원하기 위해서 있다. 예술은 우리가 사물을 느끼게 하고 " 돌"은 돌로 느끼게 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의 생동감을 인식되는대로가 아니고 감지되는대로 느끼게 하는데 있다. 예술의 기교는 사물을 낯설게 하는데 있다)고 말한적이 있다. 박춘월시인은 말 그대로 90년대 중엽 현대시의 광풍취우속에서 성장해온 그런 시인이다. 그만큼 그는 오늘까지도 조선족문단에서 독보적인 존재라는 그런 뜻이기도 하다.일찍 "록" , "찻잔"등 주옥같은 시들을 문단에 내놓아 시적인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 그로 인해 시야비야 시끄러운 일들도 무척 많았던줄로 알고 있다. 필자의 몇번씩이나 되는 원고 독촉에도 어김없이 사양만 거듭하더니 자신의 모멘트에 슬쩍 올려놓은 "차"라는 시를 읽고 필자는 지금 흥분으로 이 글을 쓴다.예술은 예술일때만이 그 독보적인 존재 가치가 있다는 말이 있다. 만사 제쳐두고 우리 함께 시속으로 직행해 보도록 하자.
/빈 시간들에/담백하고 단정한 널/부어 넣을 때가 있다/에서 가장 선명하게 눈에 띄이는것은 곧바로 시공을, 공간을 그릇으로 삼은 녀류시인의 로련함 침착성이다. 빈 시간은 공간을 이다. 시인에게 그 공간은 어떠한 모습일가? 상상과 기억의 쪼각들을 퍼즐처럼 주어 맞추노라면 결국 우리들의 감각에 와닿는건 마음의 공간이며 심미적인 효과는 한잔의 차가 배속으로 직행했을때의 그 여유로움이다. 들쑥날쑥한것 같지만 시인이 느낀 차 한잔의 모습은 과연 어떤것이일가?/자정같은 네 속에서/엉켜있던 매듭들/풀려나가는 소리 곱다/에서 자정의 함의는 오감을 죄다 동원하여야 감각으로 느낄수 있는 매듭 풀리는 소리가 곱다ㅡ로 마무리 된다. 여기서 곱다의 비중은 인간세상의 정화작용, 어쩌면 다이어트, 혹은 오래 묵은 체증이라도 말끔히 해소해가듯이 잘 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다음 /한가로움과 평안함의 향기 /익어터지는 /빈 틈들/좋은것은 함께 즐기려는 시인의 배려심이 보인다. 한가로움도, 평안함의 향기도 빈틈으로 새여나가 공유할수 있는 그 높이는 놀라웁도록 오아시스와도 같은 파급효과ㅡ즉 /한잔의 넌/
출렁이는 오아시스여라/에서 잘 나타난다.
결구에서 화판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 여백의 령토 , 귓속말, 카텐 저쪽, 눈가루 ,오붓한 마을, 풀꽃, 먼먼 언덕은 숙련된 언어련금술로 동화같은 화폭에서 애잔한 동경이나 미래, 혹은 회귀본능의 자연섭리를 자연스레 펼쳐 보이는듯 하다.
실재의 언어만으로 씌여진 시는 실재를 아무런 려과없이 보여주려는것이 아니다. 언어로 만들어진 "하나의 비 실재의 세계를 보여주려는것이다".상상력은 단지 실재만을 나타내 주는 거울 같은것으로써 현실로부터 단절하고 력설의 효과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곧바로 상상력의 마력으로 보여진다. 암튼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모자르트의 탈중심속에서의 있음의 미학을 읽는듯 하여 상쾌한 기분이다. 박춘월시인님, 좋은 시 많이 쓰시고 시를 함께 공유합시다
2016.9.17
행복에 대한 생각/유해금
해마다 꽃피는 봄이 오면 모멘트에서 흔히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자의 시 을 읽을 수 있다. 사실 나도 이 시를 무지 좋아하는데 읽을 때 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건 시에 나타난 해자의 그 소박한 소원들이 오늘을 직시하지 못하고, 모두 ‘내일부터’라는 특정된 시간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자신이 해자보다는 훨씬 행복하다는 느낌에 얼마만큼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내일부터’가 아닌 이미 진행중인 매일, 내 가족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돈 벌러 뛰어 다닌다. 그리고 ‘량식과 채소를 관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집 한 채는 바다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봄날같이 사랑으로 넘치고,
나는 또 매일 모멘트로 자신의 일상속에서 느끼는 잔잔한 행복과 감동을 모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눈다.
나는 언녕부터 모든 강과 모든 산이 다 따뜻한 이름과 존재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세상을 느슨히 바라볼 수 있고 또 푸근히 대할 수 있다.
그리고 나도 해자가 바라던 것처럼 누구에게나 ‘ 그대를 축복하네 / 그대에게 찬란한 앞날이 있기를 바라네 / 그대가 풍진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네’ 이런 말들을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신선이 아닌만큼 살다보면 흔히 생계에 바쁘거나 어떤 목적를 달성하기 위하여 허겁지겁 달려가느라 많은 것을 소홀하게 된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큰일만 이루어 진다면 다른 소소한 것들을 희생하는 것 쯤은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가슴이 식어 가고, 주변이 차가워 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된다.
우리 애들도 이제는 훌쩍 커 버려서 내가 늘 입에 달고 있는 라는 말이 남듣기에 어색할 정도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애기를 데리고 노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서 ‘우리 애들 저만 했을 때 난 어떻게 했던가?’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는데 별로 떠오르는 게 많지 않다.
하루는 퇴근길에 슈퍼에 들렀다가 은이银耳버섯을 보고 은이연자탕银耳莲子汤을 안 한지도 참 오래다는 생각이 들어 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와 끓이기 시작했다. 애들이 저녁자습 끝내고 돌아올 때는 이미 연자탕이 다 되어 온집안에 연자탕향이 그윽할 때였다.
애들은 고중을 다니면서부터 주말말고는 아침밥만 집에서 먹고 점심 저녁은 학교에서 먹는다. 그래서 저녁자습 끝나고 집에 오면 영양보충을 해줄까 싶어서 맛있는 음식을 몇번 준비해 보았었는데 매번 밤에 음식 먹으면 살찐다고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꼬셔도 인생의 제일 아름다운 시절을 뚱보로 살 수 없다며 의지가 견결해서 매번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그날, 집에 들어서자마자 애들은 은이연자탕 냄새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와, 은이연자탕이다! 참 오래간만이다…’
한 공기씩 담아주니 탈없이 받아 먹으며 재잘거렸다.
‘엄마, 그 때는 왜 이거 자주 끓여줬어?’
‘사스때문이었나?...’
성격이 덜덜한 아들은 게눈감추듯 후룩후룩 금방 먹어 버리는데, 얌전하고 꽤나 분위기 따지는 딸은 사기숟가락으로 여유작작 홀짝홀짝 마신다. 그 모습은 참 만족스럽고 아름다워서 바라보는 내 마음이 사뭇 즐거웠다.
사실 은이연자탕은 영양은 풍부해도 애들의 입맛에 별로 잘 맞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매번 이것을 먹일 때마다 예쁜 공기와 사기로 된 탕숟가락같은 것으로 분위기를 잘 짜 주어야만 애들이 거기에 홀려서 먹어 주곤 했다. 그러나 그랬던 것이 이제는 애들의 기억속에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는가 보다. 마치 내가 옛날의 뽀얗게 김 서린 시골의 주방과 우리엄마가 쪄 주던 하얀 인절미를 그리워하듯이…
천하의 모든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우리 애들이 언제나 꾸김없이 씩씩하게 잘 자라기를 원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는지 나도 애들의 공부성적에 관심이 더 커졌고, 바쁘다는 이유로 은이연자탕같은 소소한 일들을 소홀해 버렸다.
사실 행복이라는 것은 소소한 일들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잔잔한 감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큰일을 계획했다거나 리상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한다는 핑게로 이런 것들을 다 희생해야 한다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등산을 할 때 만약 산을 오르는 목적이 단순이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고, 등산 도중에도 풍경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내쳐 달려만 간다면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높은 산봉우리가 나타나서 한없이 맹랑하거나, 드넓은 땅과 하늘사이에 서서 자신의 묘소함을 한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반면에 열심히 느끼고 즐기며 오르다나면 어느 높이에서든지 우리는 자신이 흘린 매 한방울 땀의 가치를 잘 알수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만큼 만족할 줄 알게 될 것이다.
행복은 큰 일을 이루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진주같이 잔잔한 감동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그것들을 모아 꿰매어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자의 애수
류해금
바람이 센 것 같아도 정작 이렇게 바닷가에 나와 보니까 별로 큰 바람이 아니었다. 해변가 벤취에 앉아서 불어오는 바다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저 파도를 보느라니 마음이 무명의 애수에 젖어 오르고 또 웬지 할머니와 엄마 생각이 난다.
30여년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에 강변에 채소를 씻으러 나가셨다가 이렇게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머리가 아프시다고 누우신 것이 그 이튿날로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께서는 그때 흘러가는 강물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쩌면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애수에 젖어 계셨을 지도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다. 그때 분치고 드물게 한자까지 아는 학식이 있는 할머니께서 어떻게 중국에 나오시게 되었는지도 잘 모른다. 어려서 할머니한테 옛말을 해 달라고 많이 조르기는 했어도 이런 일을 여쭈어 본 기억은 없다. 그저 아버지한테서 할머니는 젊었을 때 자유를 위하여 중국에 오게 된 신여성이라는 말을 어렴풋이 들었을 뿐이다.
할머니께서 옛말을 해주시다가 당신이 살던 고향에 대해 이야기 하신 것이 아직도 머리 속에 그림처럼 남아있다. 겨울이면 눈이 꿈결처럼 쌓이는 강원도의 어느 동네, 양지쪽 산비탈의 눈이 녹다가 얼어서 애들이 썰매에 앉아서 엉덩이만 삐뚝하면 멀리까지 미끄러져 갈 수 있어서 미끄럼치기를 하기가 그렇게 좋았다는 그런 고장…
매번 고향 이야기를 하시고 나면 할머니는 망연해지신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쓸쓸하게 하시는 말씀이
‘그 난리 판에 다들 무사했는지?…’이 한마디였다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할머니의 애수를 다 알 수 없었다. 광복전에 중국에서 살았으면 하고 찾아 온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을 호랑이같은 시어머니가 무서워서 있으라 말도 못하고 돌려보내고 광복후에는 또 3.8선때문에 가족들의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버린 그 세월에 할머니의 애수는 그 강물과 같이 세월속에 흐르고 또 흘렀으리라.
엄마, 풍으로 반신불수에 말문까지 막히신 우리 엄마, 그래도 정신만은 흐리지 않고 지탱하고 있는 엄마의 눈빛은 더없이 슬프고 아프다.
나의 생일날에
‘엄마, 낳아주시고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라고 하면
‘아니야, 너들이 씩씩하게 잘 커 주고 말썽없이 잘 살아서 내가 고맙다’
하시던 엄마였는데, 이제는 전화를 하면 말 할 수 없다고 전화기를 밀면서 받기를 거부하신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일찍 병상에 드러눕는 바람에 그렇게 잘한 공부도 중학교까지밖에 못하고 또 그것이 일생의 한이 되어 억척같이 우리 형제들을 고중, 대학까지 뒤바라지 해주셨다. 그러시고도 지나간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그때는 왜 그렇게 돈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옛날 애들은 정말 고생하면서 컸어…’
하고 되러 우리한테 미안해 하셨다.
세월은 그처럼 아름답던 우리 엄마의 얼굴을 주름투성이로 만들어 더는 거울 보기 싫다는 할머니로 되게 하더니 이제는 정력과 기력마저 다 빼앗아 서지도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허물만 남겨 두었다.
고향을 두고도 돌아갈 수 없었던 할머니, 생계를 위해 억척같이 살아 오신 엄마, 그들의 애수가 나의 사색에 조수처럼 밀려온다.
나는 정녕 고향이 있는 것일가? 내가 고향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 곳에서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뼈 묻기를 거부하시고 화장하여 골회를 강물에 띄우시라 하셨다. 할머니는 어쩌면 강물따라 바다로 이미 당신의 고향을 찾아가셨을지도 모른다.
그 곳에 청춘도 피땀도 다 바치신 우리 엄마 아버지는 정든 땅 버리고 지금 동생 따라 낯선 해변도시로 가셨다. 그래서 내가 고향으로 그리워 해 온 그 곳은 이젠 가야 할 이유조차 사라지고 나의 동년의 추억은 부평초가 되고 말았다.
1년에 고작 한 두 번, 배번 길어야 1주일씩 내가 친정에 갔다올 때마다 말 못하시는 엄마는 눈물을 흘리시고 나는 또 ‘건강하셔야 되요, 다음 설에 또 올게요…’하고 엄마가 한해동안 눈빠지게 기다리실 말 한마디 달랑 남기고 떠나온다. 그러나 매번 크고작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이 다가올 때면 나는 또 며칠전부터 초조해진다. 종래로 우리에게 오라가라 말씀 없으셔도 외로운 부모님께 내가 어떻게 인사를 드리던지간에 그건 다 빈말에 지나지 않기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쓴 ‘출세는 고향을 버리는 것이였다’라는 말이 생각나서 더없이 쓸쓸하다. 여직껏 버둥거려 온 것이 고작 고향을 버리는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는 것이고 부모님 외롭게 만드는 것이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더구나 허무할 때도 많다.
나에게는 언제나 친정에 갈 수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 제일 당당한 이유들로는 ‘출근해야 되서’, ‘애들 공부 바빠서’, ‘시집에 가야 해서’ … 등등이다. 몸은 언제나 이런저런 사슬에 얽매이고 령혼은 량심의 채찍에 얻어 맞으며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운명, 우리할머니 때나 지금 내 때나 별로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가끔 50이면 지천명이라는 공자의 말에 나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사명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자식으로, 부모로, 형제로, 안해로, 사회인으로…나는 정녕 내 운명을 제대로 알기나 하며, 제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봄이면 새싹처럼 행복이 돋아나는 녀자
오늘의 단평
허인
한편의 좋은 수필은 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공유 그 자체만으로도 즐겁다고 생각한다. 류해금시인의 수필 "행복에 대한 생각"과 "녀자의 애수"가 곧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류해금시인은 시보다 수필을 더 잘 쓰는것 같다. 시 창작에서 철학적인 사유와 다도의 짙은 향내음이 그의 시에서 주요 골격을 이루긴 하였지만 가끔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모습도 뚜렷하게 보인다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헌데 몇번 보내온 수필들을 읽어보노라면 어느사이 감상의 차원을 넘어서서 공유와 함께 즐기게 된다." 행복에 대한 생각"의 경우 /해마다 꽃피는 봄이 오면 모멘트에서 흔히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는 해자의 시 (面朝大海,春暖花开)을 읽을 수 있다. /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하여 애써 끌고 가려는것이 아니라 어느새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나도 이 시를 무지 좋아하는데 읽을 때 마다 가슴이 아프다. 그건 시에 나타난 해자의 그 소박한 소원들이 오늘을 직시하지 못하고, 모두 ‘내일부터’라는 특정된 시간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에서 시인 해자와의 공통점 내일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무게있는 화자를 견인해냈다는게 곧바로 이 수필의 성공여부로 된것 같다. 허나 여러가지 차이점도 보이기도 한다. / 그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자신이 해자보다는 훨씬 행복하다는 느낌에 얼마만큼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에서 제 삶을 꿋꿋한 의지 하나로 서슴없이 펼쳐 보이는 작자의 적극적인 갊의 태도는 얼마나 자랑차고 긍지감이 넘치는가? 허나 이 세상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진것이 분명하다. 하요 비교라는 진부한 상식과 함께 발전도 있는것이 아닐가?
/우리 애들도 이제는 훌쩍 커 버려서 내가 늘 입에 달고 있는 라는 말이 남듣기에 어색할 정도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애기를 데리고 노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서 ‘우리 애들 저만 했을 때 난 어떻게 했던가?’하고 생각해 볼 때도 있는데 별로 떠오르는 게 많지 않다./에서 시작하여 들여다 본 작자의 일상생활은 모험이 아닌 자기반성의 조용한 목소리이며 행복이 된다./하루는 퇴근길에 슈퍼에 들렀다가 은이银耳버섯을 보고 은이연자탕银耳莲子汤을 안 한지도 참 오래다는 생각이 들어 재료를 사가지고 돌아와 끓이기 시작했다. 애들이 저녁자습 끝내고 돌아올 때는 이미 연자탕이 다 되어 온집안에 연자탕향이 그윽할 때였다.
애들은 고중을 다니면서부터 주말말고는 아침밥만 집에서 먹고 점심 저녁은 학교에서 먹는다. 그래서 저녁자습 끝나고 집에 오면 영양보충을 해줄까 싶어서 맛있는 음식을 몇번 준비해 보았었는데 매번 밤에 음식 먹으면 살찐다고 거절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꼬셔도 인생의 제일 아름다운 시절을 뚱보로 살 수 없다며 의지가 견결해서 매번 요지부동이었다. /에서 마지막 결구까지 읽어 보노라면 남자들 눈엔 어쩌면 사소한것 같은 행복 꾸러미가 된다. 그래서 이 수필은 룡머리에 구렁이 꼬리가 아닌 호랑이 꼬리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함께 즐기노라면 희노애락과 함께 달착지근함이 이 수필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보인다.
솔직히 필자는 /여자의 애수/를 류해금씨의 수작(秀作)으로 치고싶다. 말 그대로 스토리 묶음이며 감동의 물결이 찰랑이는가 하면 말 그대로 바이러스같은 정서적인 감정에 읽는 내내 가슴이 울렁 거리는것 같다. 작중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형상은 나 자신의 삶의 행적을 되돌아 보게 됨에 충분한 리유가 되며 또한 깊은 감동이 되기도 하는것 같다. 인생은 누구의 그림자 아래에서 사는것이 아니라 상호의 거울이 된다. 여자의 애수는 그래서 공명감이 컸던것 같다.
실례로/양지쪽 산비탈의 눈이 녹다가 얼어서 애들이 썰매에 앉아서 엉덩이만 삐뚝하면 멀리까지 미끄러져 갈 수 있어서 미끄럼치기를 하기가 그렇게 좋았다는 그런 고장…/이라는 할머니의 고향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라던가
/‘엄마, 낳아주시고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라고 하면 '아니야, 너들이 씩씩하게 잘 커 주고 말썽없이 잘 살아서 내가 고맙다’/라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읽는 내내 감동이 아닐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스로리와 스토리 엮음이 좋았고 이 가을에 부모님 생각해보면서 읽으면 아주 좋은 수필이라고 생각한다.산동 청도문단은 수필 잘 쓰는 분들이 많은것 같다.아마도 장학규씨의 영향을 적잖게 받은것이 아닐가 조심스레 생각한다.
2016년.9.16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 (외2수)
박은화
산은 저기 있었는데
옛날부터 거기 있었는데
언젠부턴가 불러지기 시작한 이름
산 저쪽의 사람들은 남산이라 우기고
산 이쪽의 사람들은 북산이라 우기네
저 강은 그 강인데
옛날부터 흐르던 그 강인데
저 산을 에돌아 잘만 흐르는데
남산을 흐르면 남강이라 부르고
북산기슭 스쳐가면 북강이 되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사상
저승과 이승의 만남이
여기서 이뤄지는가
은하교 건너온 늙은 량주를 반기는
"홍동백서","좌포우혜","조률이시"
돼지고기,물고기,제철과일들
제사상앞에 모인이들
차례로 술을 붓고 절한다
"부디 살펴주소서"
한마디씩 건네고
저마다 제사 음식 맛있게 먹는다
이들을 바라보는 액자속의 늙은 량주
두눈에 이슬이 반짝이는가
해빛이 눈에 비쳐와 눈물이 돈다
지나가던 바람이 머물다 하늘로 간다
지금은 한창 음복중인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무지개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혼자서는 이룰수 없다는걸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에서 가장 고운 그림은
서로 어울려 그려진다는걸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의 그 어떤 사랑도
가고 오는 다리가 필요하다는걸
무지개 하늘에 걸려
일깨워주더라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걸
오늘의 단평
의식의 흐름속에서 둘러보는 인간세태
허인
의식의 흐름은 마치 강물의 흐름과도 같은것이여서 막을수 조차 없다 . 의식류(意思流)라는 말은 90년대 중엽, 한족문단에서부터 흥행하여 차츰 조선족문단에까지 그 령역을 넓혀 왔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이 몽롱미를 무척 선호하였던것 같다. 헌데 탤렌트 박은화씨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 외 2수는 재밌고 구수하게 이야기식으로 차곡차곡 엮어져 읽기에 무척 편하고 구조주의 립장에 서서 살펴보면 기승전합이 분명하여 울림이 더욱 큰듯 하다.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부서지는 불확정속 삶의 단편들이야 말로 가장 실사적이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의 말을 빌어 자연스레 자연으로 접근하여
친근함을 이끌어낸 박은화씨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네)에는 어떤 아집의 영악스러움과 관습이 슴배여 있고 지혜와 슬기도 있는지를 다함께 곰곰히 살펴보도록 하자!
/산은 저기 있었는데 /옛날부터 거기 있었는데/언젠부턴가 불러지기 시작한 이름/산 저쪽의 사람들은 남산이라 우기고/산 이쪽의 사람들은 북산이라 우기네/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인간 위주로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아집과 그러한 고집덩어리이다. 산을 민둥산, 혹은 푸른 산, 칼산이라 부른다고 하여 산이 대답하는것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편리를 위하여 굳이 남산, 북산으로 이름지어 부르며 옥신각신한다. 이 시의 흐름은 전부 이러하다. 강도 남강, 북강 ㅡ 지나가는 말처럼 서술된 이 한수의 시에 자꾸 눈길이 끌리고 공명감이 커져가는 원인은 무엇때문일가? 필자가 살펴보건대 그건 아무래도 나, 즉 자아가 아닌 제3자의 립장에 서서 실재의 인간세태를 살펴보면서 보고 느낀 그대로 이야기식으로 서술하였기때문이 아닐가 싶다.
(제사상)과 (무지개)의 경우도 같은 실례이다. /저승과 이승의 만남이 /여기서 이뤄지는가/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하였갈래 늙은 량주가 등장할수가 있었고 "홍동백서","좌포우혜",
"조률이시"돼지고기,물고기,제철과일들도 등장이 자영스러울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싶다. 마치 제사차례를 눈에 보아는듯이 묘사한것이 이 시의 특징인것으로 보인다.(무지개)의 경우 눈에 보이는것만 같고 사물의 모든 현상을 판단하지 말라는ㅡ 즉 자연의 륜곽에서 인간적인 사유를 건져 올려놓고서 교훈으로 삼으려는 리정표로 보인다.
십오륙년간 문학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필자에게 있어서 박은화, 김연, 강려, 등등은 생소한 이름이 아닐수가 없다. 그런 이들의 성숙한 작품을 읽을때면 감회가 새롭고 확 트인 사유에 감탄하지 않을수가 없다. 부족한 점이라면 시인 자체의 창작이 굴곡이 너무 심한것 같다. 좋은 시가 나올때면 이것 정말 박은화가 쓴 시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ㅡ 어떤 시들은 사유의 폭이 너무 좁아 또한 안타까울 정도로ㅡ 암튼 박은화씨 좋은 시 잘 봤고요. 한번 또 한번 좋은 시 많이 쓰세요.
2016.9.19
나의 집은
김철호
나의 집은
서울 도심에 있다
갈래갈래 수만갈래 골목길 중에
대단한구 사소한로 천만호다
지은지 60~70년된 청기와집 안에는
서발 막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고
인간 또한 달랑 하나
소외되고 약자인
병들고 늙고 못생긴 나 뿐이다
한들 어떠랴?
내 덕에 내가 먹고 사는 나는
내 노래에 내가 흥겨워 춤을 추기도 한다
남의 나라에서 쫓겨온 새 한마리처럼
첫 둥지를 틀었을 때는
그까짓 쪽박만한 꿈 하나 때문에
눈만 뜨면 서러웠지만
전기 자격증 따고부터는
나의 집은
비로소 사람 사는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직 옛말하기에는 멀었지만
배짱하나만은 두둑하라고
나는 날마다 젊어지는 기분이다
어슬렁 다가온 봄,
나의 집은
내 웃고 사는 모습에 내가 고마워
과연 거꾸로 흐르는 세월에 메달렸나보다...
오늘의 단평
지천명의 고개에서 휘두르는 항변의 용기
허인
김철호시인님의 근작시 "나의 집"은 약소군체를 위한 대변이며 불가항력적인 조롱같은 운명에 대한 무언의 항변으로 보인다. 또한 리산의 아픔과 디아스포라의 영악한 삶을 영위해나갈수 있는 질감이 살아 꿈틀거리는 고독과 향수를 살갗이 아닌 피부로ㅡ 육성이 아닌 감성으로 온몸에 식은 땀이 바질바질 흐르듯이 실감나게 공명으로 인도하는것 같다.모두 잘 알겠지만 김철호시인님은 중국조선족문단의 저명한 동시인이자 현재 국내치고 몇이 안되는 포스트리스트로 생각한다. 수련은 과정이지 결과는 결코 아니다. 이러한 깊이 있는 수련의 과정이 있었길래 "나의 집"은 리얼을 베이스로 서울ㅡ 즉 고국을 크나 큰 구리종으로, 인간 또한 달랑 나뿐을 ㅡ큰 방망이로 둥둥 두드려 그 공명감이 읽는이들의 가슴을 더욱 트게 울리는듯 하다.제2인생을 허구가 아닌 진실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재한 조선족동포들의 꿈뿐인 참혹한 현지생활을 이처럼 잘 반영한 시를 솔직히 이 시 외에 필자는 아직 본적이 없다. 그럼 잡담 그난두고 다 함께 김철호시인님의 (나의 집)으로 나들이를 다녀와 보자!
/서울 도심에 있다/갈래갈래 수만갈래 골목길 중에/대단한구 사소한로 천만호다/지은지 60~70년된 청기와집 안에는/서발 막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고/인간 또한 달랑 하나/여기서 갈래갈래 수만갈래 골목길은ㅡ 인생길이며ㅡ 또한 리얼리즘이 아닌 형상의 비유가 된다. 한마디로 가로 가도 세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직접 가본 서울은 상상외로 험악하다.
밝고 아름다운 반면 어두운 곳에서는 어떤 이들이 살고 있을가?/소외되고 약자인/병들고 늙고 못생긴 나 뿐이다/한들 어떠랴?/내 덕에 내가 먹고 사는 나는/내 노래에 내가 흥겨워 춤을 추기도 한다/로 생의 의지와 의욕을 재 충전해가는듯한 그런 느낌과 홀로 술상에 마주앉아 맞은편 술잔에다 술을 부어놓고 대작하는듯한 자아위안이 가슴이 뭉클하게 하며 그 다음 /남의 나라에서 쫓겨온 새 한마리처럼/첫 둥지를 틀었을 때는/그까짓 쪽박만한 꿈 하나 때문에 /눈만 뜨면 서러웠지만/에서는 디아스포라들의 자꾸만 가물가물해져 가는 정체성에 불쑥 밝은 전등불을 들이대여 반디불같은 희망이라도 주고 싶듯이/전기 자격증 따고부터는/나의 집은/비로소 사람 사는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로 빈 둥지에 날아든 뻐꾹새의 울음소리에 읽는 사람들을 감동하게도 하는것 같다. 이야기 서술식으로 화자를 이끌어낸 이 시에는 작자의 멘트나 모멘트는 없다. 있다면 객관적인 력설뿐이다. /아직 옛말하기에는 멀었지만/배짱 하나만은 두둑하라고/나는 날마다 젊어지는 기분이다/어슬렁 다가온 봄,/나의 집은/
/내 웃고 사는 모습에 내가 고마워/과연 거꾸로 흐르는 세월에 메달렸나보다.../로 까끔하게 마무리 맺은 제일 마지막 결구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첫 비행에 성공한 새끼제비들의 신난 모습이 아니라 착지에 성공한 개구리들의 더 멀리 뛰기 위한 점프로 보인다. 한수의 시가 독자의 뇌에 전파하는 영향력은 참으로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이 시의 장점은 작자의 정서적이 개괄이 아닌 객관적인 서술 자체이며 부족한 점이라면 서울이라는 무대에 올라 선 나의 형상, 말 그대로 디아스포라들의 진정한 신분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아쉬운것 같다. 조선족 동포이라는 특수한 명함을 독자들의 손에 한장씩 쥐여줬더라면 좋지 않았을가 하는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다. 암튼 오랜만에 김철호시인님의 시 한수에 단평을 붙여 끝마치면서 김철호시인님께 좋은 시 있으시면 함께 공유할것을 부탁 드리고 싶다.
2016.9.17
확인 결과 "나의 집"의 작자는 연변 김철호시인님과는 동명이인임을 알게 되였습니다. 시가 좋아 그냥 이대로 올립니다. 김철호시인님의 량해를 이미 얻었고 다른 분들 역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운 코스모스소녀
맹영수
건강엔 누구도 장담없다더니 그처럼 무병하던 장모가 병원침상에 호구를 붙히게 되였다. 사위도 반자식이라 나는 여러가지 과일과 위문금을 갖고 병실을 노크했다. 비록 편치 않은 몸이긴 했지만 아직은 정신만은 맑은 장모는 눈길이 마주치자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끼치고 더우기는 누구에겐가 간호를 맡긴다는것이 퍽 불안하고 미안스러웠던것이다. 장모는 오금을 변변히 쓰지 못하면서도 기어히 화장실출입만 자신 스스로 하려했다. 이제는 인생의 막고개에 접어들었어도 우리앞에서 장모는 여전히 자신이 녀자란것만은 고집하고있었다.
나는 자주 병문안을 하는것으로써 나의 “부족함”을 메꾸기에 노력했다. 어느날 음식을 사들고 병실에 들어서던 나는 장모의 마준쪽에 왠 소녀가 누워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열서너살되여 보이는 소녀는 눈망울이 퍼그나 컸는데 그 동그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수집음이 골똑 넘쳐있었다. 여느 동년배 아이들같으면 침상에 누워서도 귀에 레시바를 걸고 음악을 감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엄마와 투정이라도 부리려만 소녀는 그냥 조용한 시선으로 벽이나 창밖을 응시하군해서 금방 까난 병아리를 보듯 측은지심이 드는걸 스스로도 주체할수 없었다. 알고보니 소녀는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엄마와 함께 살고있었다. 그만큼 일찍 철이 든 소녀는 조용한 환경에 퍽 더 익숙해졌다.
. 나는 병실을 찾을 때마다 소녀에게 과실같은것을 쥐여주고 잡지같은것을 같다주어 소녀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소녀는 나를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살짝 이를 보이면서 고맙다고 웃어주었다. 웃는 모습이 조용하긴 해도 초롱꽃같아 참으로 보기좋았다. 그때면 나는 네 웃는 모습이 참으로 이뻐서 이다음 연예인이 되였으면 좋겠다고 하면 소녀는 잠간이라도 기분에 들뜨군 했다… 그사이 우리는 부쩍 가까워져서 소녀는 모름지기 무척히도 나를 기다리군했다. 그러나 그냥 그쯤이였다.
어느날 소녀와 나사이에 무언의 담벽이 쌓여졌다. 소녀가 실수를 아니, 내가 무의식중 실수를 했던것이다. 그날 점심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던 나는 소녀의 엄마가 그애에게 속적삼을 바꿔 입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순간이였으나 나는 그애의 하얀 가슴살을 피끗 보게 되였다. 소녀의 얼굴은 무르익은 앵두처럼 막 터질듯 했다. 더불어 눈가엔 금시 이슬같은것이 막 떨어질듯싶었다. 소녀는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갈듯 감히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고 누워버렸다. 싸늘한 랭기가 병실안을 꽉 채우고있었다. 소녀는 무언의 침묵으로 나에게 항의를 하고있었다. 소녀는 사춘기를 앓고있었고 부끄러움을 타고있었다…결국 싱거운 놈이 되여버린 나는 그날 소녀를 별로 지껄이지 못하고 병실을 나오고말았다.
얼마후 장모가 퇴원하게 되였다. 이제는 소녀와도 마지막 만남이였다. 나는 잡지 두개를 소녀의 침상에 놓고 그 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천천히 물러났다. 링겔을 맞고 있던 그 애는 가볍게 머리를 돌리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정작 눈길이 마주치자 그 애는 그날처럼 또 나를 정시하지 못하였다. 마치도 자기가 되려 내께 죄라도 진듯 그 모양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소녀는 아직도 그날의 부끄럼에서 철저히 헤여나오지 못하고있었다. 그 순간 문뜩 나의 머리엔 언제 들어도 소박한 코스모스 그 이름이 떠올랐다.
코스모스소녀! 나는 소녀에게 그런 이름을 붙혀주고싶다. 코스모스는 여름과 가을사이에 피는 체격이 훤칠한 꽃으로서 그 색갈도 진분홍,연분홍, 흰색…등으로 아롱다롱하다. 하지만 코스모스는 여느 꽃과 달리 늘 소박하고 수집음을 곧잘 타면서 사람들을 반긴다. 어쩜 소녀야말로 그런 꽃이 아니겠는가?
기실 나는 소녀의 이름은 알아도 학교나 주소마저도 모른다. 허나 몇달이 지나도록 소녀의 그 수집은 모습은 여전히 눈가에 삼삼해서 가슴이 아련하다. 솔직히 모든것이 개방되여 벗을수록 환성이 터지는 요즘 세상에서 소녀처럼 부끄러움과 수집음을 아는 애들이 얼마나 있을가?…
어쩌면 소녀와의 만남은 나에게 감사하고 행운스런 일이다. 그만큼 나를 포함하여 지금 이 세상에서 부끄럼앞에서 진정 당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가?
오-그리운 코스모스소녀여!
오늘의 단평
잔잔한 감동의 하모니
허인
맹영수 수필가의 (그리운 코스모스여)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다. 좌충우돌 거창하고 씩씩한 남자들의 그러한 파워나 파괴력보다 오히려 녀성들보다 더욱 녀성스러운 세심한 관찰이 마치 조리졸졸 흘러가는 천만갈래 시냇물이 모이고 모여 큰 호수를 이루는듯 하다. 아름다운 풍경은 결국 하모니가 되여 무척 흥미로운 감동의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건강엔 누구도 장담 없다더니 그처럼 무병하던 장모가 병원침상에 호구를 붙히게 되였다. 사위도 반자식이라 나는 여러가지 과일과 위문금을 갖고 병실을 노크했다. 비록 편치 않은 몸이긴 했지만 아직은 정신만은 맑은 장모는 눈길이 마주치자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에서 살펴볼수 있는것은 생로병사를 대하는 가장 인간적인 담담한 태도이다. 왜내 하면 작중에서 이미 설명했다싶이 /자식들에게 부담을 끼치고 더우기는 누구에겐가 간호를 맡긴다는것이 퍽 불안하고 미안스러웠던것이다. 장모는 오금을 변변히 쓰지 못하면서도 기어히 화장실출입만 자신 스스로 하려했다./에서 찾아 볼수가 있다 싶이 스스로 추한것을 알고 아무리 자식일지라 하더라도 남녀의 선을 굳이 넘어서려 하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도덕개념이 환자의 머리속에 각인되여 있었기때문이 아닐가 싶다.
그러한 의지와 의력은 결국 병마마저 이겨내게 한다. 만약 여기서 수필이 끝났더라면 이 수필 역시 신변잡기에 불과했을것이다. 허나 작중의 중요한 스토리는 필살기처럼 사춘기 병을 앓고 있는 소녀와의 부지런한 접촉, 그리고 조그마한 오해에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러한 오해는 자연스러운것이며 또한 악의가 아닌 호상의 배려로, 그리고 묵언의 지지로도 받아 들여지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이 세상은 더욱 살맛이 나지 않을가도 싶다.
/어느날 음식을 사들고 병실에 들어서던 나는 장모의 마준쪽에 왠 소녀가 누워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열서너살되여 보이는 소녀는 눈망울이 퍼그나 컸는데 그 동그란 눈동자에는 그 어떤 수집음이 골똑 넘쳐있었다. /에서 시작하여
/소녀와 나사이에 무언의 담벽이 쌓여졌다. 소녀가 실수를 아니, 내가 무의식중 실수를 했던것이다. 그날 점심 병실문을 열고 들어서던 나는 소녀의 엄마가 그애에게 속적삼을 바꿔 입히는것을 보게 되였다. 순간이였으나 나는 그애의 하얀 가슴살을 피끗 보게 되였다. 소녀의 얼굴은 무르익은 앵두처럼 막 터질듯 했다. 더불어 눈가엔 금시 이슬같은것이 막 떨어 질듯싶었다./에서 찾아볼수 있는것은 누구나 무의식중에 한번쯤 아름다운 실수를 할수 있다는 계시이기도 하며 /얼마후 장모가 퇴원하게 되였다. 이제는 소녀와도 마지막 만남이였다. 나는 잡지 두개를 소녀의 침상에 놓고 그 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천천히 물러났다. 링겔을 맞고 있던 그 애는 가볍게 머리를 돌리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서 찾아볼수 있는것은 천진란만한 동심의 움직임이며 이제는 더는 나의것이 아닌 아늑하고 아득한 추억, 그러했기에 작자의 머리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것이 늘 그리운 교정의 코스모스가 아니였을가 생각된다.
사람이 이세상을 살면서 굳이 성이며 이름을 죄다 기억해야 할 아무런 필요가 없다. 허나 한오리 또 한오리 스토리들을 글속에 꼬박꼬박 박아넣어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준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수필의 경우 아무리 아름다운 경물묘사라 할지라도 스토리가 없고 세심한 심리묘사가 없다면 결국 미사구려로밖에 볼수 없을것으로 보여잔다. 맹영수의 (그리운 코스모스)는 사건의 발단, 발전, 결말이 선명하고 로인과 사춘기를 앓는 소녀의 미묘한 심리묘사를 독특하게 그려내여 공면감이 더욱 큰듯하다. 맹영수님 좋은 수필 잘 봤습니다. 방송국 성철이 형과 각별한 사이라고 들었는데 쭈욱 좋은 글들을 더 많이 쓰십세요
2016.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