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몸짓 깨여나는 심상
한영남근작시에서 살펴본 미래 지향적인 새로운 탐구정신
[ 평론 ] 허인
이니셜 내가 본 한영남ㅡ해학의 달인 통속언어창출의 놀라운 괴재
6월, 파겁을 시작한 뭇꽃이 앞 다투어 조잔한 열매를 두 손에 받아들고 어느새 초하(初夏)의 문턱- 높은 담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리는 계절, 필자는 며칠전 할빈에서 이메일로 보내온 한영남시인의 근작시 10여수를 앞에 놓고 흥분으로 읽는다. 범상찮은 조짐 ㅡ 사실주의를 기초로 모더니즘의 싱싱한 점토우에 새롭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켜 탈변을 목적으로 하려는 굵직한 몸부림 ㅡ 어찌보면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생소한 비유(比拟)와 은유(隐喻)를 단순히 형식적인 모험만이 아닌 형이상학적으로 변이ㅡ 변형시켜 이미지와 이미지사이를 직결로 링크, 꿀맛나는 이미지확장(扩张)을 하이브리드로 완성해보려 하는 대담한 착상, 그리고 언제봐도 심성이 항상 맑고 깨끗한 ㅡ 오직 한영남시인만이 완성시킬수 있는 독특한 시적인 질서와 그러한 조밀한 언어구조속에서 항상 가슴 따뜻하게 느낄수 있는 풋풋한 휴머니즘과 인문정신을 ㅡ추상적, 계기적, 구체적, 병치적ㅡ즉 리성보다는 본능, 질서보다는 충동,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더욱 폭 넓은 세계로 이어가려 하는 과감한 도전ㅡ 한마디로 꿈틀거리는 욕망, 꿈틀거리는 맥박, 깨여나는 심상(心象)을 함께 읽을수가 있어 무척 고무적이라고 총괄하고 싶다.
길림성 안도현 태생인 한영남시인은 일찍 초, 고중시절부터 벌써 신문잡지에 주옥같은 시작품들을 튝속 발표, 현재까지 '갈대는 저렇게 싱거워가지고', '환절기에 건강을 주문받습니다', ‘굳이 네가 불러주지 않아도 수선화는 꽃으로 아름답다’, '무깍지동네', '우리 서로 얘기 좀 합시다', '보리밭은 바람 아니더라도 설레이는것을' 등 시, 수필, 소설, 평론 등을 무려 300여만자 발표, 연변일보 제일제당상,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상,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중국조선족동시탐구상, 중국조선족수필상, 도라지장락주문학상,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다수 수상, 2006년 시집 를 출간ㅡ현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편집으로 사업중인것으로 알고 있다 . 필자가 알건대 한영남시인이 오늘날 개성이 뚜렷하고 유망한 문인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적잖은 아픔과 홀로서기의 나날이 있었던줄로 안다. 시를 써야하는 백공한번째 리유에서 한영남시인은 철없었던 문학도시절 량친부모를 잃고 억이 막혀 혼자 쿨쩍일 힘마저 없었을때 가슴 따뜻한 긍정적인 말 한마디 하여준 고마운 선배문인과 인정에 너무나도 시린 손발을 늘쌍 친동기처럼 어루만져주고 다독여주었던 고마운 동우시인들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늦게야 늙은 총각딱지를 마침내 떼고 늦장가 들어 득남까지 한줄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늦게나마 행복의 메신저로 축하의 박수를 열심히 보내드린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는 뜻 ㅡ어쩌면 요즘처럼 독지층이 얇아져 가는 조선족 시단에서 읽어볼만한 시가 없기로는 시인이나 독자나 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시기에 한영남시인의 이번 해학, 독백, 역설을 위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시킨 근작시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오랜간만에 가슴 설레도록 할것이며 또한 오래도록 긴 여운을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기게 되리라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럼 아래에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에 보내온 주옥같은 근작시 12수를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질서와 의식ㅡ그리고 무의식속에서 이끌어낸 해학의 즐거운 잔치 한 마당
시의 혁신은 곧 사유의 혁신이며 또한 언어의 혁신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를 쓸때 우선 먼저 미학적인 고려를 하여야 하며 또한 감수성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한마디로 누구에게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라 해야겠다 . 일찍 리요다르는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 이 시대에 오면 곧 하나의 환상이거나 지적인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말한적이 있다. 총체성에 대한 갈망이란 현실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모순을 하나의 지적인 체계로 종합하려는 그러한 태도를 말하는것이다.그런 갈망이 환상이거나 테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은 결국 모든 종합주의적 사고가 허구라는 사실이기때문이다. 이렇듯 탈구성적인 리념은 형식주의적인 이데올리기의 억압에 대한 미적인 저항이며 또한 구성이 아니라 충동을 강조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구성의 파괴가 아닌 구성속의 자연 분만된 여러가지 복잡성, 그리고 얽히고 섥힌 여러가지 겹치기 구조, 이런 태도는 시 ,소설ㅡ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하나의 구속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론을 전제로 하기도 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해체시의 경우 주체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탈구성 혹은 해체 개념에 대한 정확한 리해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럼 여기서 우리 함께 한영남시인의 이번 근작시 중ㅡ 질서와 해학의 즐거운 잔치마당중에서도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부터 다 함께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발가락 하나 감기 걸렸소
머리카락 한오리 발기불능증이오
귀지 한숟가락 당뇨병이라오
눈썹 한 대 좌골신경통을 앓는다오
이빨 한 대 정신분렬증을 치르오
코털 한 대 페암인 듯 하오
손톱 하나 에이즈와 사귀었다오
배꼽 절반이 알콜중독쯤이라오
자지 가운데가 중풍을 맞았다오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
발가락사이 때 한줌이 배 두드리며 만포식이라오
이상 간추린 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
전문이다.
시는 구조적 통일성보다 오히려 단편적인 앙상블로 인식되기도 한다. 앞서 평론에서도 이미 여러번 말한적이 있지만 시는 엄격히 따지면 독백의 양식에 속한다. 을 읽고나면 시인의 놀라운 재치에 저도몰래 즐거운 탄성이 터져 나오는것을 어쩔수 없다 . 즉 인체의 각 기관들로 온갖 병적인 현상들을 직결시켜 완성시킨 이 한 수의 시는 읽을수록 쿡쿡 저도몰래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또한 시인의 기이한 발상과 착상이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아 그야말로 가관이라 해야 할것 같다. 꼭마치 라캉식 행동, 칸트식 발언 , 미셜 푸코식 사유인것처럼 ㅡ/발가락과 감기/, 머리카락 한오리와 발기불능증/, 귀지 한숟가락과 당뇨병/, /눈썹 한대와 좌골신경통/, 이빨 한대와 정신분렬증/, 코털 한대와 페암/, 손톱 하나와 에이즈/, 배꼽 절반이 올콜중독/, 자지 가운데와 중풍/, /겨드랑이털 서너이랑과 백전풍/, 발가락 사이 때 한줌과 만포식/은 어찌보면 단순하면서도 시인의 의도적인 변이, 변형을 통하여 우리 이 사회의 여러가지 병페적인 현상들을 아이러니컬하게 해학적으로ㅡ 즉 유머 있게 풍자 비판하고 있으며 더우기 시인은 줄곧 작자가 아닌 편집자의 립장에 서서 어쩌면 앵커다운 앵커가 되여 차분한 목소리로 뉴스를 진행하듯이 패러독스를 펼쳐가고 있지만 그 효과음은 분명 공명이라는 전환 리듬을 타고서 읽는 이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와도 같이 ㅡ둥둥 웅굴진 북소리가 되여 오래도록 메아리치고 있는듯 싶다. 특히 제일 마지막 련ㅡ /이상 간추린소식이였습니다/ 거울속의 나는 싱싱하기만 했다/에서 살펴볼수 있듯이 시인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결코 는 그런 병적인 현상에는 쉽사리 끌려가지 않으리라는 강한 의지를 비추어 보여주기도 하면서 참된 인간의 성실한 모습을 조심스레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는듯 싶다. 필자는 웬만하면 누구를 함부로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여기서는 꼭 한마디 해야 겠다 . 한영남시인은 우리 이 시대의 해학의 달인임이 틀림없으며 통속언어창출의 괴재(怪才)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귀지, 자지, 그리고 /겨드랑이털 서너이랑이 백전풍과 담판중이라오/라는 표현은 지방적인 방언색채마저 다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더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이라는 익숙하고 지성적인 간결한 사유를 통하여 독자들은 이 시의 매력에 저도몰래 푹 빠지게도 된다. 그럼 아래에 해학의 또다른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
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
눈은 없어도 좋소
다리가 부러져도 좋소
허리가 부러져도 좋소
몸뚱이가 부러져도 좋소
밸은 없는게 낫소
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
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
-이상의 ‘오감도’에 부쳐ㅡ전문이다.
의인화 수법으로 씌여진 이 시속의 주인공, 즉 ㅡ개구리는 멀리 뛰기 위하여 의 형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안일한 삶속의 리유ㅡ 즉 무승자박(无绳自搏) 이라는 단단한 포승에 꽁꽁 묶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상을 마치 두눈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듯 싶다 . 제1련에서부터 력설적인 어투로 시작된 이 시는 거의 아무런 휘핑도 없이 오직 헤드라인과 초감각적으로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데 있다고 하오/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오금 저려 더 멀리 뛰지 못한다 하오/로 최저한도의 상황제시를 하여놓고서 다시금 제2련에서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뛰기 위한 개구리는/눈은 없어도 좋소…/로 >, , 마저 부려져도 무작정 뛰여야만 하는 강한 충동을 야유적으로 고조시켜놓은듯 싶으며 특히 제3련에서는 아예/밸은 없는게 낫소/뛰기로 작정한 놈 뛰기만 하면 그만이오/배꼽은 뛰기에 차라리 거추장스럽다 하오/로 한술 더 푸욱 떠서 이 없고 이 없어야 어쩌면 살아가는데 적응할수도 있으며 결국 제 4련에서는 /허리 부러진 개구리는 /마침내 뛰지 않아도 좋소/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부제에서부터 이미 살펴 볼수 있다싶이 편지이고보니 아무리 어찌해 보아도 넘을수 없는 장벽같은것을 마주선 인간의 여러가지 형태를 적라라하게 풍자적으로 그려놓은듯 싶다. 그럼 아래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접목하여 완성시킨 몇수의 시를 더 살펴보기로 하자
별이 차마 섬뜩했다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 있었고
언제나 다정한 얼음조각
팔불출이어서 싱거웁다
깊은 재채기는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
끝내 누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
서슬푸른 밤하늘이
조용히 발정한다
/별이 차마 섬뜩했다/로 멋지게 캐릭터를 시작한 이 시에서 필자는 마치 파트 타임이 아닌 터닝 포인트, 어쩌면 긴 타월로 철철 흐르고 있는 식은 땀을 홀로 게면쩍게 슬쩍슬쩍 딲고 있는 이상하게 관심이 쏠리는 별 하나를 만나게 된다. 그 별이 시인에게 주는 섬뜩함이란 도대체 무엇이였을가ㅡ시제가 인것만큼 시인이 말하는 별이 도대체 무엇일가 하는 핀트는 독자 나름대로 설정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된다. 특히 제2련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에서 포플러ㅡ 즉 백양나무는 모두 다 잘 알다싶이 포플러나무는 이 세상에 태여난 그 순간부터 오직 한 자리에만 서 있어야 할 운명임이 분명한데도 시인은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하였다/고 재치있게 표현하여 인생의 허다한 막무가내와 그러한 속박에 저항해보려는 역반심리, 즉 어디론가다 툭툭 털어내치고 훨훨 떠나버리고 싶어지는 그러한 강한 충동, 즉 된 령혼의 가슴 시린 간절한 바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듯 하며 그 다음 자연스럽게 줄 지어 다가서는 /다행히 속으로 울 권리/는 또한 과 이라는 재밌고도 어깨 단단한 이지미를 멋스럽게 견인해 내여 단 한마디 / 싱거웁다/로 현실에 대한 불안, 혹은 그러한 불만정서를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듯 하며 특히 제6련에서 /깊은 재채기/는 시인의 세심한 배려와 지성적인 사유끝에 변이, 변형을 통하여 /차라리 갈대의 웃음파편/이라는 너무나도 궁색하고 허무한 결과ㅡ 즉 자다가도 다시금 벌떡 일어나 초불을 켜들고 찾아 읽고 싶어지도록 간결함의 극치로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결과마저도 시린 가슴에 포옹으로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각근한 태도에 읽는 이마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며 특히 제 8련에서 10련까지 /끝내 누군가가 고운 비자루로 쓸어놓은/서슬푸른 하늘이/조용히 발정한다/는 그물에 걸지리 않는 바람처럼 리상적인 자유와 지향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는 끊임없는 추구와 변함없는 생명운동을 지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실천해보려는 시인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망을 암시해주는듯 싶다. 여기서 걸음마 익히지 못한 포플러, 다정한 얼음쪼각, 갈대의 웃음파편은 폭력적조합을 이루면서도 전혀 이상하거나 낯선 감이 없어 한영남시인이 언어련금술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잘 다루고 있는지를 아낌없이 잘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분명한 질서와 구조속에서 생명운동이 진행중이다. 그럼 아래에 수학 매트르식이 아닌 속사로 생명구조와 분명한 질서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명운동을 마치 눈앞에 생생히 보이는듯이 그려놓은 을 잠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나간다
마당에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침이면 버스도 빠져나간다
마당에 트럭 차들이 서있다
아직도 트럭 차들이 서있다
여보게 시작들 합세
마당에 차들이 없다
마당에 차들이 없다
하루가 도르르 말려 저쪽으로 사라지고
하루일에 지친 차들이 다시 들어온다
마당에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서있다
곤하게 전차 버스 트럭 차들이 잠잔다
전문이다
은유에 기대여 직조된 이미지 그 자체를 통해 많은 자유련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한수의 시는 없이도 매일 진행되는 생명과정에 대한 한차례의 미적감수를 경유했다는데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삶과 분리된 구성물이 아닌 진행속에 있는 구성물, 즉 제1련에서 볼수 있다싶이 을 바라는 시인의 시선은 정지된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물인 전차, 버스, 차, 트럭을 따라 움직이는것, 또한 혼자서는 절대로 저절로 움직일수조차 없는 피창조물들의 기계적인 움직임속에서 창조자인 인간이 기계에 기계적으로 매달려 살아가는 곤한 모습을 머리속에 떠올리게 하는듯 싶다. 꼼꼼히 살펴보면 새벽같이 전차가 빠져 나가고 나면 그 자리는 잠시 비게 되며 다음은 버스ㅡ 차들 ㅡ여기서 시인은 분명 원유의 질서를 해체하려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들을 재발견, 즉 차들의 움직임을 통하여 현대인의 바쁜 일상과 희노애락을 엿볼수 있게끔 하고 있는듯 싶다. 시의 언어는 의미전달의 언어구조가 아닌 의미형성의 새로운 이미지구조여야 한다. 특히 문체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있는 세부의 기능이기때문에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태도라고 해야 할것 같다.그럼 아래에 남달리 시각 효과가 뛰여난 와,를 살펴보기로 하자
탐미주의적 경향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
나비
풀-
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훨
나
풀
나도 한수의 시로 남을수 있다면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정조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사랑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아픔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행복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심장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령혼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무덤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의미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이름을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용서를 버린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버린다
나를 위해 나의 모든것을 버린 나는
내가 모든것을 버려서 비여버린 나는
드디여 한수의 시로 남는다
길은 길에 미안하오
길은 어디로 어떻게 뚫린거라도 괜찮소
길은 걸어주는것이 도리요
길은 자주 걸어줄수록 길이요
길은 혼자만의 길이 있듯이
길은 여러 사람의 길도 있소
길은 혼자만 걷고 싶은 길임에도
길은 여러 사람이 자꾸 기웃거리오
길은 혼자 걸어도 길이요
길은 여럿이 걸어도 길이요
길은 길이기에 길들었다고 생각하면 위험하오
길은 아무렇게나 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더욱 위험하오
길은 저만치 길다운데
길은 길일뿐이오
시인이 굳이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하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시어로 접근하려는 것은 어쩌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인습적인 사고를 단단히 긍정하면서도 또한 끊임없이 전복해보려는 시인의 각근한 노력과도 관계되는상 싶다. 이러한 각근한 노력끝에 한영남시인이 를 바라본 시각현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가? 필자가 보건대 그건 아마도 단순히 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한 수단인것이 아니라 사물의 전체적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즉 한가지 측면만 통하여 깊이 료해하고 결정해보려는 심리를 폭죽효과로 삶의 공간에 터뜨리려 한것 같다.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여기서 은 어쩌면 바람앞에 흔들리는 일수도 있고 또한 의 줄임자일수도 있으며 무려 500여개의 은 마치 수천 수만마리의 나비가 동시에 하늘을 날아오르는듯한 환각을 주어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다음 결속어 은 시인의 생명에 대한 무한한 열애와 환희를 나타내려 한것 같다. 반복구사법, 겹치기기법, 절충법으로 씌여진 ,역시 같은 실례라고 생각이 된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누드를 버린다/로 시작하여 정조, 사랑, 아픔, 행복, 심장 ,령혼 , 무덤, 의미 , 이름 , 용서, 훈민정음 ㅡ 그리고 무려 13차례나 되는 라는 고도로 집중이 되는 비움속에서 평생을 한수의 시로만 남고싶은 시인의 간절한 욕망, 그리고 동업자가 일수도 혹은 일수도 있기에 거기에서 오는 미안함을 길로 간결히 표현한 는 첫째, 시각효과가 뛰여나며 둘째, 군더더기 하나없이 주체의식이 명확하며 셋째, 시의 또다른 가능성마저 제시해주는듯 싶다. 다만 프로의 경우 탐미주의적 경향, 즉 시대적 발현의 새로운 심상으로 받아들여 지겠지만 아마추어의 경우 자칫하면 문자유희에 빠질 그런 우려가 있음을 모두 류의해야 할것 같다.
물덩이들의 반란
물들이
물덩이들이
왈칵왈칵 내 목구멍을 헤집는다
내 목의 겨불내를 닦아주기 위해서
얼마쯤 머뭇거리거나 서성거려주어야 하는데
녀석들은 추호의 주저도 없이
살겠다는듯이 내 위장속으로 란폭하게 쓸려들어간다
내 목구멍을 한껏 벌려버리고는
잘 줴기진 물덩이들이
제법 단단해가지고
한사코 아우성치며 빨리듯 들어간다
물은
물들은 이런것이 아니겠는데
부드러운 물들이여야 하는데
물덩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힘을 자랑한다
분명 나를 아프게 한 물덩이들이
사랑스럽다
리얼리즘이 세계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이 자율성을 강조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텍스트성을 강조로 한다 . 무릇 이 시대의 모든 문화현상과 사회현상은 지극히 단순한 상호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일시되며 더 나아가서는 가끔 사회현상이 문화현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더불어 문화현상이 사회현상을 시의 심층 구조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말이라고 해야 할것 같다 . 은 제목자체에서부터 이미 엿볼수가 있다싶이 지극히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단순하였던것들이 가 되여 잘 줴기지고 때론 제법 이 단단해져 간혹 할수도 있지만 결국 사랑스럽다는 표현으로 상호 의존된 력학관계와 애잔한 관용의 미학을 섬세하게 그림으로 그려낸듯 싶다.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