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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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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 100선 [모셔온 향기]
2016년 03월 19일 15시 30분  조회:5312  추천:0  작성자: 강려

한국현대시 100선

 



 

‘해’ 하면 떠오르는 시, 그것도 ‘새해’ 하면 떠오르는 시, 현대시에서 드물게 희망으로 충만한 시,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 읽게 되는 시가 바로 박두진의 ‘해’이다. 1946년에 발표된 이 ‘해’가, 해방을 염원하던 해든 해방의 기쁨을 담은 해든, 솟지 않는 해를 향한 촉구든 솟고 있는 해를 향한 경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 해가 여전히, 지금-여기에서, 이글이글 솟구치고 훨훨훨 분방하고 워어이 워어이 불러모으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막 솟는 해처럼, 말의 되풀이는 힘차고 뜻의 개진은 꿋꿋하다. 언어가 어떻게 되풀이되고, 그 되풀이가 어떻게 노래가 되고 주술에 가까워지는가를 보여주는 시다. 

‘씻고’ ‘살라먹는’, 그 세례와 정화에 의해 날마다 생생(生生)하게 새로 뜨는 해. 그 해 아래 시를 살(生)고, 사는(生) 시를 꿈꿔 보는 새벽이다. 삶 속에서 이글이글 솟아나는 예의 그 생생지락(生生之樂)과, 시 속에서 훨훨훨 깃을 치는 시시지락(詩詩之樂)을 꿈꿔 보는 아침이다. 미움과 갈등의 시간을 버리고 강자와 약자가 워어이 워어이 더불어 상생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 보는 새해다.

우리는 이제 달밤에 벌어진 상처, 눈물 같은 골짜기에서 일어난 죄악을 (불)살라 태우고 ‘앳된 얼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니, 새해야 부디 ‘늬’도 그렇게 솟아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의 모든 희망아, ‘늬’도 꼭 그렇게 고운 해처럼 오라. 삼백예순 날의 삶아, ‘앳되고 고운 날’들아, ‘늬’들도 꼭 그렇게만 좋아라. 백년의 백년 내내 낙희낙희(樂喜樂喜)하고 럭키럭키(lucky lucky)하게!


[현대시 100편-2편]    풀 - 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 일러스트=권신아

풀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흔하다. 풀은 자꾸자꾸 돋는다. 비를 만나면 비를 받고 눈보라가 치면 눈보라를 받는다. 한 계절에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한 계절에는 늙고 병든 어머니처럼 야위어서 마른 빛깔 일색이다. 그러나 이 곤란 속에서도 풀은 비명이 없다. 풀은 바깥에서 오는 것들을 긍정한다.

 

풀은 낮은 곳에서 유독 겸손하다. 풀은 둥글게 휘고 둥글게 일어선다. 꺾임이 없는 ‘둥근 곡선’의 자세가 풀의 미덕이다. 느리지만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리는 이 불굴의 힘을 풀은 갖고 있다. 풀은 이변을 꿈꾸지 않는다. 제 몸이 무너지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스스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풀은 솔직한 육필이다. 풀은 ‘발밑까지’ 누워도 발밑에서 일어선다. 바닥까지 내려가 보았으므로 풀은 이제 벼랑을 모른다.

 

새날이 왔다. 새날을 받고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제에 있다. 어제의 슬픔과 어제의 이별과 어제의 질병과 어제의 두려움 속에 있다. 그러나 어제의 곤란은 어제의 곤란으로 끝나야 한다. 열등은 어제의 열등으로 끝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내심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은 만 명의 적이 와도 무서움이 없으며 물러섬이 없을 것이다. 자존(自尊)과 자립(自立)의 에너지가 우리의 자성(自性)이다.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 일어서고 있다는 믿음, 넓고 큰 세상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리라는 믿음, 우리는 이 다짐으로 새날을 살아야 한다. 눈사태를 뚫고 산정(山頂)을 찾아가는 산악인처럼.

 

타계한 해에 발표된 ‘풀’은 김수영(1921~1968)의 마지막 작품이고, 우리 시대 100명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시이기도 하다. 올해로 40주기를 맞은 김수영은 전위적 모더니즘으로, 4·19 혁명 이후에는 참여시(詩)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시는 사람들 가슴 속에 눕고 울고 일어서며 푸르게 살아 있다.

 

 

[애송시 100편 - 제3편]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일러스트=잠산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의 사랑을 따라 한 남자가 돌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돌의 연인이고 돌의 사랑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 돌 속에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고, 소금이 있고, 무심(無心)이 있고, 산 같은 숙명이 있었을 터. 팔다리가 하나로 엉킨 그 돌의 형상을 ‘사랑의 끔찍한 포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데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에서 떠났을까? 어쩌자고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주었을까?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한 남자를 남긴 채. 돌 속에 홀로 남은 그 남자는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면서 부풀어간다. 물의 깊이로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의 부재를 채우며. 그러니 그 돌은 불타는 상상을 불러일으킬밖에. 그러니 그 돌은 매혹일 수밖에.

 

남해 금산, 돌의 사랑은 영원이다. 시간은 대과거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넘나들고, 공간은 물과 돌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안(시작)도 없고 밖(끝)도 없는 그곳에서 시인은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의 심연으로 잠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이 되고 바위가 되는지 남해의 금산(錦山)에 가보면 안다. 남해 금산의 하늘가 상사암(相思巖)에 가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불길 속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돌이 되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의 고통 속에서도 요지부동으로 서로를 마주한 채 뿌리를 박고 있는지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면 안다.

 

모든 사랑은 위험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을, 어긋난 사랑의 피난처이자 보루가 문득 돌이 되어 가라앉기도 한다는 것을, 어쩌면 한 번은 있을 법한 사랑의 깊은 슬픔이 저토록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남해 금산’에서 배웠다. 모든 문을 다 걸어 잠근, 남해 금산 돌의 풍경 속. 80년대 사랑법이었다.

 

80년대 시단에 파란을 일으킨 이성복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하는 낯선 비유와 의식의 초현실적 해체를 통해 시대적 상처를 새롭게 조명했다. ‘남해 금산’은 그러한 실험적 언어가 보다 정제된 서정의 언어로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시다.

 

 

 [애송시 100편 - 제4편]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일러스트=잠산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반 세기 동안이나 그는 우리말을 정갈하게 빚었고 우리말의 숨결을 세세하게 보살펴 고아(高雅)하게 했다. 놀랍게도 ‘즐거운 편지’는 황동규 시인이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그의 데뷔작이다.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과 ‘편지’ 등에서 낭송되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원 제목도 ‘즐거운 편지’였다고 한다. 이제 이 시는 한국인의 애송시가 되었다. 만남과 이별의 회전 속도가 이처럼 빠른 시대에 이 시는 왜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왜 여전히 막막하게 하는가. 헤어져 돌아가던 옛사랑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가.

 

하늘이 먹먹하게 어두워지고 주먹눈이 막 내리는 날이면 어디 먼 산골이나 바닷가 민박집에라도 가고 싶어진다. 작은 넝쿨에 말라붙는 붉은 열매 같은 눈빛을 하고서 눈이 내리는 그 시간을 살고 싶어진다. 눈이 그치면 순백의 설원과 설원 위를 유행(遊行)하는 바람의 노래를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멀리 두고 온 사람을 ‘가까스로’ 떠올릴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시간에 나를 선택하지 않은 사랑을 떠올리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잊혀진 듯 살 것이다. 폭설에 갇힌 순한 산짐승처럼 우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이별의 말은 나의 가슴에서 깨끗하게 씻어낼 것이다. 겨울 하늘에 뜬 달이 천강(千江)을 비추어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나의 사랑을 다시 받아 안는 날이 와도 내가 아직 저 산골짜기 깊은 산막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그런 아주 짧은 후일에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애송시 100편 - 제5편]  ‘’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일러스트=권신아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 '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발표된 '꽃'을 처음 읽은 건 사춘기의 꽃무늬 책받침에서였다. '그'가 '너'로 되기, '나'와 '너'로 관계 맺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 그것이 곧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구나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름이야말로 인식의 근본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백일 내내 핀다는 백일홍은 예외로 치자.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꽃도 논외로 치자. 꽃이 피어 있는 날을 5일쯤이라 치면, 꽃나무에게 꽃인 시간은 365일 중 고작 5일인 셈.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치면, 우리 생에서 꽃핀 기간은 단 1년? 꽃은 인생이 아름답되 짧고, 고독하기에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면, 서로에게 꽃으로 피면, 서로를 껴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부르는 이름도 있고 빨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내 꽃임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 불려지기도 하고, 네 꽃임에도 기어코 네가 부르지 않기도 한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의 운명적 호명(呼名)이여! '하나의 몸짓'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는 것의 신비로움이여!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를 보는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으나, 내가 본 가장 무서운 꽃은 나를 등진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한 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꽃 천지다. 꽃이 피기 전의 정적, 이제 곧 새로운 꽃이 필 것이다. 불러라, 꽃!

 

 

 

 [애송시 100편 - 제6편] 서정주 '冬天(동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은 눈썹을

 

 

지난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일러스트=잠산

겨울 밤하늘을 올려 본다. 얼음에 맨살이 달라붙듯 차갑고 이빨은 시리다. 문득 궁금해진다.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은 왜 한천(寒天)에 사랑의 일과 사랑의 언약과 사랑의 얼굴을 심어 두었을까. 손바닥으로 쓸어보아도 온기라고는 하나 없는 그곳에 왜 하필 사랑을 심어 두었을까. 매서운 새조차 '비끼어 가'는 사랑의 결기를 심어 두었을까.

 

생심(生心)에 대해 문득 생각해본다. 처음으로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을 생각해본다. 무구한 처음을, 손이 타지 않아서 때가 묻지 않은 처음을. 부패와 작파가 없는 처음을. 신성한 처음을. 미당이 한천을 염두에 둔 것은 처음의 사랑과 처음의 연민과 처음의 대비와 처음의 그 생심이 지속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심어 놨'다고 한 까닭도 생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심는다는 것은 생육(生育)한다는 것 아닌가. 여리디 여린 것, 겨우 자리 잡은 것, 막 숨결을 얻은 것, 젖니 같은 것 이런 것이 말하자면 처음이요, 생양해야 할 것들 아닌가. 미당은 초승달이 점점 충만한 빛으로 나아가듯 처음의 사랑 또한 지속되고 원만해지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당의 시에는 생명 없는 것을 생장시키는 독특한 영기(靈氣)가 서려 있다. 그는 시 '첫사랑의 詩'에서 '초등학교 3학년때 / 나는 열두살이었는데요. /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 너무나 좋아해서요. /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 그러면서 산에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 국화밭에 놓아 두곤 /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라고 하지 않았던가. 산돌을 주워 와서 물을 주어 길렀듯이 이 시에서도 미당은 '고은 눈썹'을 생장시키는 재기를 보여준다.

 

미당의 시에는 유계(幽界)가 있다. 그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라며 황홀을 노래했지만 그는 우주의 생명을 수류(水流)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흘러가되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운행에서 그는 목숨 받은 이들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노래했다. 목숨 없는 것에는 목숨의 숨결을 불어 넣었다. 미당의 시의 최심(最深)은 삶 너머의 이승 이전의 유계를 돌보는 시심에 있다. 이 광대한 요량으로 그는 현대시사에수많은 활구(活句)를 낳았다.

 

 

 [애송시 100편 - 제7편] 사평역(沙平驛)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1981년>


 

▲일러스트=권신아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애송시 100편 - 제8편] 묵화 (墨畵) - 김 종 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

 

 

▲일러스터=잠산

김종삼(1921~1984) 시인의 시는 짧다. 짧고 군살이 없다. 그의 시는 여백을 충분히 사용해 언어가 잔상을 갖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다. 언어를 우겨넣거나 막무가내로 끌고 다닌 흔적이 없다. 사물과 세계를 대면하되 사물과 세계의 목소리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물안개가 막 걷히는 새벽 못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작은 여울에 누군가가 정성스레 놓아 둔 몇 개의 징검돌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묵화(墨畵)'의 목소리도 자분자분하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막 돌아와 쌀 씻은 쌀뜨물을 먹고 있는 소를 보여준다. 그의 시선은 소의 목덜미에 가 있다. 하루 종일 써레나 쟁기를 끌었을, 멍에가 얹혀 있었을 그 목덜미를 보여준다. 목덜미에는 굳은살이 박였을 것이다. 그리곤 소의 목덜미와 할머니의 손을 교차시킨다. 할머니도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소와 함께 날이 저무는 저녁을 맞고 있다. 할머니는 겹주름처럼 고랑이 나 있는 밭에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돌을 캐내고 종일 호미질을 했을 것이다. 시인의 시선은 소와 할머니의 부은 발잔등으로 옮아간다. 부은 발잔등을 보여줄 뿐이지만, 우리는 소와 할머니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이 눈여겨본 대목은 소와 할머니의 관계일 것이다. 소는 할머니를, 할머니는 소를 마주하고 있다. 이 둘 사이에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쓰러운 대화와 유대가 오가고 있다. 낮의 소란과 밤의 정적이 합수(合水)하는 성스러운 시간에 마치 삶이란 본래 비곤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이라는 듯 소와 할머니는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 '서로 돌봄'은 훈훈하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얼마나 이 '쓸쓸한 돌봄'을 자주 잊고 사는가)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얼굴 가득 흐뭇하게 피어나던 웃음이 천천히 묽어지는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본래 삶이란 웃음과 슬픔으로 꿰맨 두 겹의 옷감이라는 듯.

 

김종삼 시인은 등산모를 곧잘 썼고 파이프 담배를 자주 물었고 술을 좋아했고 고전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에게 삶은 '방대한 / 공해 속을 걷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며 인간의 원죄를, 불구의 영혼을 아프게 노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는' 사람들과 세상을 좋아하고 동경했다. 그의 시는 말이 적었지만 정직했다. 언어의 낭비가 많고 외화(外華)에 골몰하는 시대를 살수록 언어를 지극히 아껴 쓴, 먹그림같이 실박하게 살다 간 김종삼 시인이 그립다.

 

 

[애송시 100편- 제9편]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病身) 같은 여자,

시집(詩集)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978년>

 

 

▲ 일러스트=권신아

오규원(1941~2007) 시인은, 보통 사람이 호흡하는 산소의 20%밖에 호흡하지 못하는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다 작년 겨울에 타계했다. 임종 직전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제자 손바닥에 써서 남겼다.

 

나는 이 시를 대학교 1학년 때의 여름, 한 남학생이 보낸 대학학보의 주소 띠지 속에서 처음 읽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이 시를 옮겨 나르곤 했던가. 이 시는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에 실린 작품이다. 그러나 시집 '사랑의 감옥'(1991)에 3편의 연작시 중 1편으로 다시 실렸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라는 부제가 첨가되었고, 2연의 끝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와 3연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가 바뀌었다. 부제를 첨가하여 '여자'는 '언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를 뒤로 배치하여 여자나 언어 모두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물푸레, 이 시 덕분에 물푸레나무와 그 잎이 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비해 여릿하고 포릇하고 정말 '쬐그만' 둥근 잎이었다. 천생 '여자'를 닮은, 이를테면 눈물 하면 떠오르는 글썽임이라든가, 슬픔 하면 떠오르는 비릿함이라든가. 병신 하면 떠오르는 어리숙함이라든가, 시집 하면 떠오르는 아련함이라든가….

 

그런 '여자'를 반복해 나열하면 할수록, 묘사하면 할수록 '여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여자'는 신비의 옷을 입는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다. 물푸레나무에 달린 '쬐그만' 잎처럼 하고많은 여자와 '여자'라는 보통명사를 이토록 입에 척척 달라붙도록, 혀에 휘휘 휘감기도록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니!

 

여자는 남자의 '여자'다. 남자의 엄마이고 누이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딸이다. 남자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남자의 부재이자 심연이고, 선물이자 폭력이다. 그러니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 여자를 어찌 정의할 수 있으랴. 모두 가지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한 '여자'를 누가 가졌다 하는가.

 

 

[애송시100편-제10편]사슴-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1938년>

 

 

애송시 100편-제11편] 대설주의보 - 최 승 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1983년>

 

 

 

  

▲ 일러스트=권신아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서 오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머언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는 김광균의 눈이 있는가 하면, 쌀랑쌀랑 푹푹 날리는 백석의 눈이 있다. 기침을 하자며 촉구하는 김수영의 살아있는 눈도 있고, 희다고만 할 수 없는 김춘수의 검은 눈도 있다. 괜, 찮, 타, 괜, 찮, 타, 내리는 서정주의 눈도 있고, 갑작스런 눈물처럼 내리는 기형도의 진눈깨비도 있다.

 

그리고 여기 '백색계엄령'처럼 내리는 최승호(54) 시인의 눈이 있다. 1980년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의 시대였고 폭압의 시대였다. 그는 '상황 판단'이라는 시에서 '굵직한/ 의무의/ 간섭의/ 통제의/ 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섬뜩하게 '그려진다'. '관(觀)'과 '찰(察)'을 시 정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현실을 '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은,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 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군단이다. 도시와 거리에는 투석이 날리고 총성이 울렸으리라. 눈은 비명과 함성을 빨아들이고 침묵을 선포했으리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쉴 새 없이 내림으로써 은폐하는 백색의 폭력, 어떠한 색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 그 '백색의 감옥'에는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꺼칠한 굴뚝새'가 있고, 굴뚝새를 덮쳐버릴 듯 '눈보라 군단'이 몰려오고, 그 군단 뒤로는 '부리부리한 솔개'가 도사리고 있다.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골짜기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칠 때 그 눈발을 향해 날아가는 굴뚝새가 있었던가. 덤벼드는 눈발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췄던가. 꺼칠한 굴뚝새의 영혼아, 살아있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네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다시 날 수 있다면 짧지만 따뜻한 네 날개를 펼쳐 보여다오!

 

 

 [애송시 100편-제12편] 저녁눈 - 박 용 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일러스트=잠산 

 

박용래(1925~1980) 시인은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는 우리말을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기워 시를 써냈다. 그의 시는 가난한 것과 세상이 거들떠보지 않는 작고 하찮은 것들을 세필(細筆)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돌보았다.

 

'저녁눈'을 읽으면 허름한 말집(추녀를 사방으로 삥 두른 집)에 앉아 '탁배기'를 한 잔 하고 있는 박용래 시인이 보이는 듯하다. 말집에는 마차꾼과 지게꾼이 흥성흥성하고,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온 나귀와 노새가 급한 숨을 내쉬느라 투루루 투레질을 하고, 누군가는 구유에 내놓을 여물을 써느라 작두질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해는 떨어지고 추운 밤은 오는데 눈발은 삭풍에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호롱불 불빛을 받으며 떠도는 눈발을, 조랑말의 정처 없는 걸음처럼 난분분한 눈발을, 여물 써는 소리처럼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붐비다'라고 써서 목탄화처럼 평면적인 풍경에 동선(動線)을 끌어넣는가 하면, 한 곳 한 곳 짚어가던 시선을 들어 올려 퀭한 빈터로 옮김으로써 시의 공간을 일순에 넓게 확장하는 재주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물러나 앉아 늦은 저녁 눈발 내리는 그 풍경을 하나의 '공터'로 읽었을 것이다. 마차꾼과 지게꾼의 떠도는 삶과 내일이면 또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그네들의 노심초사와 나귀와 노새의 공복(空腹)을 읽었을 것이다.

 

박용래 시인은 술판에서 엉엉 잘 울던 마음 여린 시인이었다. 천진하게 잘 울어 '눈물의 시인'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용래 시인과 절친했던 소설가 이문구는 '박용래 약전(略傳)'이라는 글에서 박용래 시인의 잦은 눈물에 대해 이렇게 썼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박용래 시인이 생전에 살았던 대전시 오류동 17번지의 15호를 찾아가면 "감새/ 감꽃 속에 살아라"라고 노래했던 선한 그가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다시 살고 있을까

 

 

[애송시 100편- 제13편] 빈집 - 기 형 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 일러스트=권신아

기형도(1962~1989) 시인의 마지막 시다. 1989년 봄호 문예지에서 이 시를 읽었는데 일주일 후에 그의 부음을 접했다. 이제 막 개화하려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삼류 심야극장의 후미진 객석에서 홀로 맞아야 했던 그의 죽음에 이 시가 없었다면 그의 죽음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초라했을 것인가.

 

어릴 적부터 살던 집에서 이사를 계획하고 쓰여졌다는 후일담도 있지만 이 시는 사랑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사랑으로 인해 밤은 짧았고, 짧았던 밤 내내 겨울 안개처럼 창 밖을 떠돌기도 하고 촛불 아래 흰 종이를 펼쳐놓은 채 망설이고 망설였으리라. 그 사랑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이 되었으리라. 실은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집은 집이 아니다. 빈집이고 빈 몸이고 빈 마음이다. 잠그는 방향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문을 잠근다'는 것은, '내 사랑'으로 지칭되는 소중한 것들을 가둔다는 것이고 그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잠금이자 감금일 것이다. 사랑의 열망이 떠나버린 '나'는 '빈집'에 다름 아니고 그 빈집이 관(棺)을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삶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사랑이기에, 사랑의 상실은 죽음을 환기하게 되는 것일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나직이 되뇌며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하나씩 불러낸 후 그것들을 떠나보낼 때, 부름의 언어로 발설되었던 그 실연(失戀)의 언어는 시인의 너무 이른 죽음으로 실연(實演)되었던가. 죽기 일주일 전쯤 "나는 뇌졸중으로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했다던 그의 사인은 실제로 뇌졸중으로 추정되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오래된 서적')이라 했던 그가, 애써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정거장에서의 충고')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건만.

 

그가 소설가 성석제와 듀엣으로 불렀던 팝송 'Perhaps Love'를 들은 적이 있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맑은 고음이 그의 몫이었다. "Perhaps, love is like a resting place…"로 시작하던 화려하면서 청량했던 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라는 그의 독백도.

 

  

 

 

[애송시 100편-제14편]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 정 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1996년>

 

 

 

 

▲ 일러스트=잠산

이 겨울에 사랑이 찾아온 연인들에게 이 시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우선 어렵지가 않다. 쉽고, 리듬이 있어 흐르는 물처럼 출렁출렁한다.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눈이 쌓여 무게가 생기듯이 어느 순간 이 시는 우리들의 가슴께를 누르며 묵직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경험에도 '뜻밖의 폭설'은 내린다. 폭설이 내려 우리는 압도되어 이 시 안에 고립된다.

 

큰 고개를 넘으면서 느닷없는 폭설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사실 좀 도발적이다. 우리는 그 불편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못 잊을 사람하고' 폭설에 갇히고 싶다고 말한다. 폭설에 갇히는 것이 고립의 공포로 엄습해오더라도. 사실 사랑만이 실용적인 것을 모른다. 사랑은 당장의 불편을 모른다.

 

모든 사랑은 고립의 추억을 갖고 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연애편지가 있거든 꺼내서 다시 읽어보라. 연애편지는 고립의 기억, 고립의 문장 아닌가. 둘만의 황홀한 고립. 그러니 사랑에게 고립은 고립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한 기꺼이 고립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후일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더라도. 그것이 모든 길을 끊어 놓더라도. 사랑은 은밀하고, 은밀해서 환하다.

 

문정희(61) 시인은 여고 시절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다. 백일장 당선시들을 모아서 여고 3학년 때 첫 시집을 냈다. 타고난 재기를 미쁘게 본 미당 서정주 시인이 시집의 서문을 썼고, '꽃숨'이라는 시집 제목도 달아주었다. 그녀는 여성의 지위와 몸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려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한국시사에서 '여성'을 당당하게 발언해왔다. 그러면서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사랑의 가치를 활달하고 솔직하게 표현해왔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라는 그녀의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활동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어보라. 사랑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애송시 100편-제15편] 목마와 숙녀 -  박 인 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일러스트=권신아

시냇물 같은 목소리로 낭송했던 가수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를 옮겨 적던 소녀는 이제 중년의 '여류' 시인이 되었다. '등대로(To the lighthouse)'를 쓴 버지니아 울프는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템스강에 뛰어들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 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하며'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목마와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페시미즘의 미래'라는 시어가 대변하듯 6·25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를 드러내고 있다.

 

수려한 외모로 명동 백작, 댄디 보이라 불렸던 박인환(1926~1956) 시인은 모더니즘과 조니 워커와 럭키 스트라이크를 좋아했다. 그는 이 시를 발표하고 5개월 후 세상을 떴다. 시인 이상을 추모하며 연일 계속했던 과음이 원인이었다. 이 시도 어쩐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일필휘지로 쓴 듯하다. 목마를 타던 어린 소녀가 숙녀가 되고, 목마는 숙녀를 버리고 방울 소리만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소녀는 그 방울 소리를 추억하는 늙은 여류 작가가 되고…. 냉혹하게 '가고 오는' 세월이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로 요약되는 서사다.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생명수를 달라며 요절했던 박인환의 생애와, 시냇물처럼 흘러가버린 박인희의 목소리와, 이미 죽은 그를 향해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던 김수영의 애증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인 것을, 우리의 시가 조금은 감상적이고 통속적인들 어떠랴. 목마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모라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 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애송시 100편-제16편]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處女)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일러스트=잠산

물은 선하다. 물은 그 자체로 흐르는 모습이다. 흐르는 에너지이다. 물은 작은 샘에서 솟고, 뿌리에게 스미고, 하나의 의지로 뭉쳐 흐르고, 환희로 넘치고, 작별하듯 하늘로 증발하고, 우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신생의 생명으로 돌아와 이 세계를 흐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사귀고 웃고 슬프고 울고 아득히 사라질 때에도 물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왔으며 우리보다 먼저 사라졌으며 우리보다 먼저 다시 태어났으니, 유한한 우리에게 물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물은 불과 흙과 공기와 더불어 이 세계가 온존하는 한 온존할 것이다. 해서 물은 모든 탄생과 소멸을 완성하며, 그 자체로 소생하고 순환하는 생명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선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이 어떤 부정과 대립이라면 물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어떤 관용. 물은 사랑. 자주 침묵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잊은 적이 없는 마음 큰 이. 우리도 서로에게 물이 되어 서로의 목숨 속을 흐를 수 없을까.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까. 물과 같고 대지와도 같은 침묵의 큰 사랑일 수 없을까.

 

강은교(62) 시인이 '사랑法'이라는 시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중략)//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라고 노래했듯이.

 

강은교 시인은 1968년에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초기에 발표한 시들이 강한 허무 의식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녀의 시는 민중적인 서정에도 가 닿고, 사소하고 하찮은 생명들을 끌어안기도 하는 등 아주 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느 해엔가 그녀가 시의 낭송과 울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속 질병과 상처를 치료하는 '시 치료' 공연을 하는 것을 감명 깊게 본 적이 있다. 그때에도 지금에도 강은교 시인은 이 세계의 순례자로서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생명수를 구해오는 바리데기의 현신이다.

 

 

 [애송시 100편-제17편]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일러스트=권신아정호승(58)시인만큼 노래가 된 시편들을 많이 가진 시인도 드물다. 안치환이 부른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비롯해 28편 이상이다. 그의 시편들이 민중 혹은 대중의 감성을 일깨우는 따뜻한 서정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슬픔'으로 세상을 '포옹'하는 그의 시편들을 읽노라면 좋은 서정시 한 편이 우리를 얼마나 맑게 정화시키고 깊게 위로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곤 한다.

 

그는 별의 시인이다. 그것도 새벽 별의 시인이다. 별이란 단어를 그보다 더 많이 쓴 시인이 또 있을까. 그가 바라보는 별에는 피가 묻어 있기도 하고 새들이 날기도 한다. 그의 별은 강물 위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그 또한 별에 죽음의 편지를 쓰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별들도 어둠 없이는 바라볼 수 없으며, 밤을 통과하지 않고는 새벽 별을 맞이할 수 없다.

 

이 시는 '하늘에는 눈이 있다'라는 단언으로 시작한다. 눈은 '보리밭길'을 덮는 눈(雪)이기도 하고 '진리의 때'를 지키는 눈(眼)이기도 할 것이다. 눈 내린 보리밭길에 밤이 왔으니 '캄캄한 겨울'이겠다. 겨울의 캄캄하고 배고픈 밤은 길기도 길겠다. '가난의 하늘'이니 더욱 그러하겠다. 진리의 때가 늦고 용서가 거짓이 될 때, 북풍이 새벽거리에 몰아치고 새벽이 다시 밤으로 이어질 때 그 하늘은 '죽음의 하늘'이겠다. 그런데 그런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얼마나 따뜻할 것인가.

 

우리 생의 팔할은 두려움과 가난과 거짓으로 점철된 어둠의 시간이다. 눈물과 탄식과 비명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꽃, 그것이 바로 별이 아닐까.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한('슬픔을 위하여')' 법이다. 어두운 현실에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가장 낮은 곳에서 밝다.

 

눈 내리는 보리밭길에 흰 첫 별이 뜰 때부터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에 푸른 마지막 별이 질 때까지 총총한 저 별들에 길을 물으며 캄캄한 겨울을 통과하리라. 그 별들의 반짝임과 온기야말로 우리를 신(神)에 혹은 시(詩)에 가까이 가게 만드는 것이리라.

 

   

 [애송시 100편-제18편]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일러스트 = 잠산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은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혁명가요, 시인이요, 수행자였다. '님의 침묵'은 1926년에 펴낸 그의 유일한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이자 서시이다. 이 시는 님과의 이별과 이별의 슬픔을 재회(再會)로 역동적으로 바꿔놓는다. 이런 극적 구성은 불교 특유의 유심적 상상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돌이키는 것으로써 만해는 있음과 없음, 좋음과 그렇지 못한 것,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만남과 이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아마도 만해의 시를 올연히 뛰어나게 하는 힘은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마음의 편당(偏黨)과 굴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그의 수행자적 기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역설의 화법이 생겨났을 것이다.

 

만해는 시집의 맨 앞에 놓인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라고 썼다. 만해는 님을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고, 님과 나의 관계를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해석했다. 만해는 내 안에서 님을 발견하고 완성하고자 한 실천가였다.

 

조선의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떻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며 만해는 냉골의 거처에서 꼿꼿하게 앉아 지냈다. 해서 '저울추'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돌집(조선총독부)이 마주 보이는 쪽으로 당신의 집을 지을 수 없다며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만해는 깨달음을 얻은 후 오도송에서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그네의 수심에 잠겼던가. 한마디 소리쳐 우주를 설파하니 눈 속의 복숭아꽃 붉게 붉게 나부낀다"라고 읊었다. '눈 속에 핀 복숭아 꽃송이'가 바로 만해의 시요, 만해의 정신이었다 할 것이다.

 

 

 [애송시 100편-제19편] 겨울 바다 - 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 일러스트=권신아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새벽 교회당 구석에서, 간절히 내뻗은 자신의 두 손을 부여잡고 고개를 떨군 채였다. 소리 없이 일렁이는 가파른 등에서 겨울 바다 냄새가 났다. 지난밤 내내 뚝 끊긴 생의 절벽 앞에 서 있다 온 사람의 등이었다. 인간은 기도할 줄 아는 사람과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구분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에 새를 품고 산다, 미지라는 한 마리 새를.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 혹은 희망을 우리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그 새를 잊지 않고 간직한 사람은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미래의 새를 잃어버린 사람은 '겨울 바다' 앞에 서기도 한다. 그곳은 절망의 끝 혹은 허무의 끝일 것이다.

 

보고 싶던 미지의 새들은 죽어 있고 매운 바닷바람에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린, 허무라는 마음의 불(心火)로 불붙은 겨울 바다. 그 죽음의 공간에서 시인은 시간의 힘을 깨닫는다.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말도, 세월이 약이라는 말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를 맑게 깨우치고 우리를 키우는 건 세상을 항해 '끄덕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다.

 

기도는 시간을 견뎌내는 데서 비롯된다.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해달라는 심혼(心魂)의 기도는, 저 차디찬 바다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인고의 물기둥'을 세우는 일이었으리라. '허무의 불'을 '인고의 물'로 버텨내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힘이고 기도의 힘이다.

 

김남조(80) 시인은 기도하는 시인이다. 팔순을 맞이하여 어언 60여 년의 시력(詩歷)으로 간구해온 그의 시편들은 사랑과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한 기도들이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설일(雪日)')를 낭독하는, 떨리는 듯한 그러나 결기 있는. 시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애송시 100편-제20편] 삽 -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일러스트=잠산

시인은 언어의 맨살을 만진다. 말과의 상면과 말의 '한 줄금 소나기'를 만나는 순간의 경이를 시인은 표현한다.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경이가 사라지는 일은 슬픈 일이다.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혀를 대보고 생각을 만드는 이 날것의 감각에서 소위 맛이 사라지면 살맛이 가실 것이니 이 세상은 얼마나 캄캄한 절망이겠는가. 이 세상을 다시 맞는 아침에는 당신도 "아, 세상이 맛있다!"라고 말해 보라. 애초에 생(生)에는 무력감이 없으므로.

 

시 '삽'에는 경이가 있다. 나도 '삽'을 발음해 본다. 입술이 모시조개처럼 예쁘게 모인다. 손으로 목화를 따들이는 느낌이 있다. 시인은 이 발성의 쾌감에 희열한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들어간다.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에 작달막한 삽 한 자루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여준다. 언젠가 제대로 한 번 써볼 생각으로 연일 '마른 볏짚으로' 문질러 놓아 녹슬지도 않았다. (나도 나의 아버지가 들일을 마친 해질 무렵에 마른 볏짚으로 삽날을 문지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 저녁 풍경의 숙연함이여!)

 

시인은 무슨 일에 이 삽을 사용하려 하는 것일까. 당신의 사랑을 얻을 때에 한 번 뜨고, 종국에 닥칠 나의 죽음을 내 스스로 거두어들일 때 한 번 뜨겠다고 한다. 생의 한 경이를 포착한 이 시가 참 좋은 이유는 시 전반부의 발성의 쾌감이 후반부의 비장함으로 진행되는 데에 있다. 비장하지만 마구 심각하지는 않다.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경이다. 경이가 없다면 기다림도 없을 것이므로. (연애에 경이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애인들이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 모두 떠나가 버리는 것처럼)

 

시 전문지 월간 '현대시학'의 주간을 맡고 있는 정진규(69) 시인은 산문시의 성공적인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산문시는 영혼을 한순간에 탁, 부려 놓는다. 그리하여 산문시 아닌 시들보다 오히려 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시 쓰는 일을 비유하길 세상을 배알하는 일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는 올해로 칠순을 맞았다. 그의 시는 종심(從心)이되 어긋남이 없으니 무량무변하다.

 

 

[애송시 100편-제21편]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영화 '박하사탕'에서, 돌아갈 곳 없는 설경구는 철교 위에서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러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빽'이 있는 사람이다. 그 '빽'이 하늘이라면 그는 천하무적으로 세상을 주유하는 사람이다. 하늘을 믿으니 이 땅에서는 깨끗한 빈손일 것이다. 하늘을 믿는데 들고 달고 품고 다닐 리 없다. 그러니 새벽빛에 스러지는 이슬이나, 저물녘 한때의 노을이나, 흘러가고 흘러가는 구름의 손짓 등속과 한패일밖에.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라며 스스로를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시 '행복')라 일컬었던, 왼쪽 얼굴로는 늘 울고 있던 시인, 천상병!(1930~1993) '귀천'은 1970년 발표 당시에는 '주일(主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의 시는 생(生)의 바닥을 쳐본 사람들이 갖는 순도 높은 미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의 언어는 힘주지 않고, 장식하지 않고, 다듬지 않는다. '단순성으로 하여 더 성숙한 시'라 했던가. 이 시에서도 그는 인생이니 삶이니 사랑이니 죽음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도 무욕이니 초월이니 달관이니 관조니 하는 말로 설명하지 말자. 이슬이랑 노을이랑 구름이랑 손잡고 가는 잠깐 동안의 소풍이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가볍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니 소풍처럼 살다갈 뿐.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전도유망한 젊은이였으나 '동백림 사건'(1967)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 후유증은 음주벽과 영양실조로 나타났으며 급기야 행려병자로 쓰러져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친지들에 의해 유고시집 '새'(1968)가 발간되었는데, 그 후로도 천진난만하게 25년을 더 살다 갔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이라고 노래했던 그는 분명 새가 되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갔으니, 자유롭고 가벼운 새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애송시 100편-제22편] 푸른 곰팡이-산책시1 -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일러스트=잠산

이문재(49) 시인의 시들은 치열하고 내부가 끓고 있다. 그의 시들은 결사(結社)를 한다. 주로 도시와 문명의 급소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한다. 시 '푸른 곰팡이'가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1993)은 시단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도시적 공간의 무서운(파시스트적인) 속도에 대항해 '게으르고 어슬렁거리고 해찰하는' 8편의 산책시(散策詩) 연작을 발표한다. 그는 '아파트단지가/ 웨하스처럼, 아니 컴퓨터칩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곳을 느릿느릿 걷는다. 그는 '도시는 단 한 사람의 산책자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느림보는/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 도시에서 당하고 말지요/ 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산책시 3')라고 썼다.

 

시 '푸른 곰팡이'에서도 느림을 예찬한다. 사랑도 산책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이 산책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랑은 불꽃처럼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의 시간을 살면서 사랑은 무르익고 완성된다는 뜻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 보라. 아무리 격렬한 사랑에 휩싸인 사람일지라도 백지를 앞에 두면 말문이 막힐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림이 편지의 미덕. 지우고, 생각을 구겨버리고, 파지(破紙)를 내는 시간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솔직하게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나흘을 또 기다려 보라. 나의 편지가 사랑하는 이의 안뜰과 마루와 품에 전달되기까지의 그 시간을 마른 목으로 가슴 설레며 살아보라. 푸른 강이 흘러가는 그 기다림의 거리를 살아보라. 그러는 동안 사랑은 푸른 강의 수심처럼 깊어질 것이다.

 

요즘 이문재 시인은 따뜻한 체온의 '손'을 주목하고 있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내미는 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근년에 발표한 시 '손은 손을 찾는다'에서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시는 도시와 문명에 단호하게 맞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괸, 그리워하고 연민하는 사랑의 마음이 산다.

 

 

 [애송시 100편-제23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 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1948년>

 

 

 

 

 

▲ 일러스트=권신아

평북 정주하면 소월이 있고 백석(白石·1912~1995)이 있다. 1988년의 월북시인 해금 조치 이후 '백석 붐'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백석 시인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현대시에서 드물었던 북방 정서와 언어의 한 정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장하고 있다가 1948년에 발표했다. 해방 공간에 발표된 백석의 마지막 작품이다.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 집에서'라는 제목의 뜻에 주목해볼 때 친구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낸 고백시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래서일까. 소리 내어 읽노라면 그가 나직이 말을 건네는 듯 '가슴이 꽉 메여 오'고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이곤 한다.

 

'나'라는 맨 얼굴의 시어나 '-이며' '-해서' '-인데'와 같은 나열 혹은 연결어미나 '것이었다'라는 종결어미 등의 반복이 내뿜고 있는 독특한 산문적 리듬이야말로 이 시의 백미다.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한다는 직유며,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직설이며,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역설 등 사무치지 않는 구절이 없다.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기까지의 의연한 회복 과정이 유장한 리듬과 어우러져 한 편의 인생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즈오는 기자와 교사생활을 작파하고 만주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히 살고 있던 그를 찾아간다. 그는 가즈오에게 '나 취했노라'라는 시를 헌정했다. 20년 후 가즈오는 "파를 드리운 백석./ 백이라는 성에, 석이라고 불리는 이름의 시인./ 나도 쉰세살이 되어서 파를 드리워 보았네."('파')라는 시를 그에게 헌정했다. 파를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을 그를 생각한다.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싸락눈을 맞는다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갈매나무를 생각한다.

 

 

 [애송시 100편-제24편] 산문(山門)에 기대어 -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1975년>

 

 

 

 

▲일러스트 잠산 

 

하마터면 이 시는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유성처럼 사라질 뻔했다. 송수권(68) 시인이 서대문 화성여관 숙소에서 이 작품을 백지에 써서 응모를 했는데, 잡지사 기자가 "원고지를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의 원고"라며 휴지통에 버렸다. 당시 편집 주간이었던 이어령씨가 휴지통에 있던 것을 발견해 1975년 '문학사상' 지면에 시인의 데뷔작으로 발표했다. 이 일화로 '휴지통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입소문'을 타 문단에서 화제가 되었고, 발표 이후에는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를 애타게 호명하고 있지만, 이 시는 남동생의 죽음에 바치는 비가(悲歌)였다.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비어 있는 맞은편을 망연히 바라보았을 그 시방(十方)의 비통함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 죽은 동생의 환생에 대한 강한 희원을 드러낸다.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등의 역동적인 문장은 적극적인 환생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산문(山門)은 속계(俗界)와 승계(僧界)의 경계이고, 이승과 명부(冥府)가 갈라지는 경계인 바, 산문에 기대어 생사의 유전(流轉)을 목도하는 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살아도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살아 이처럼 마음을 절절하게 울리는 노래를 낳았다.

 

송수권 시인은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어오면서 황토와 대(竹)와 뻘의 정신에 천착해 왔다. 그는 '곡즉전(曲卽全·구부러짐으로써 온전할 수 있다)'을 으뜸으로 받든다. "곡선 속에 슬픔이 있고, 추억이 있고, 들숨이 있지요. 시간이 있고, 희망이 있고,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시는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애지고 막막'하게 하지만 남도 특유의 가락과 토속어의 사용으로 슬픔과 한을 훌쩍 넘어서는 진경을 보여준다.

 

 

 [애송시 100편-제25편]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2005년>

 

 

 

 

 

▲ 일러스트=잠산

  여름 여치가 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을 정미소를 지난다. 차가운 (겨울) 구름이 떠있다. 그렇게 자전거는 골목 모퉁이를 돈다. (아가였던) 할머니가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있다. '잘 익은 사과'는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다채로운 감각의 성찬으로 펼쳐놓고 있다.

 

백 마리의 여치 울음 소리는 자전거의 바퀴 도는 소리,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와 겹쳐진다. 처녀 엄마가 낳은 입양 가는 아가의 뺨은 구름의 차가움으로 전이되고, 그 구름은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로 확장된다. 고향 마을은 금세 큰 사과로 축소되고, 마을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사과를 깎는 칼날 소리를 낸다. 차르르차르르(사각사각)!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그때마다 고향 마을만큼이나 큰 사과가 깎인다는 발상과 그 큰 사과를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파내 잇몸으로 오물오물 잡수신다는 발상은 사뭇 상징적이면서 동화적이다.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사과는 시간의 신(神)이 돌리는 물레의 실타래에 비견할 만하다.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숨가쁘게 이동하는 시간을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으로 정지시켜 놓는 것도 흥미롭다.

 

차르르차르르 돌던 한 세월이 발갛게 잘 익었겠다. 누군가 고향 마을에서 그 한 세월을 잘 놀다 갔겠다. 껍질이 홀라당 깎인 노르스름한 사과 속살 같았겠다. 군침 가득 돌았겠다. 그렇다면, 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는 '밤낮을 만드시고 이 지구를 세세년년토록 운항하시는' '숫자 나라의 시간 윤전기 노동자인 우리들 앞에서/ 감독을 게을리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 '세상의 모든 달력 공장 공장장님'을 낳은 바로 그 처녀 엄마 아니었을까.

 

김혜순(52) 시인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그는 겹침의 시학을 즐겨 구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가 하면 수축시키고, 감각과 시점을 겹쳐놓는가 하면 뚝 떨어뜨려 놓는다. 여성의 환상적 내면을 몸의 감각과 경험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견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최근 유행하는 '환상시'의 대모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애송시 100편-제26편] 산정 묘지 -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중략)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 일러스트=잠산

시집 '산정묘지'를 펼쳐 자서(自序)를 대신하고 있는 시 '독락당'을 읽는다.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아주 짧지만 고절이 있다. 찬 서릿발 속에 핀 국화 같고, 차돌처럼 향기를 돌돌 말았다 피는 매화 같다. 시집에 수록된 서른 편의 산정묘지 연작시들을 꿰는 시가 바로 '독락당'이라는 시이다.

 

산정묘지 연작시들은 협소한 한국시의 정신적인 영역을 광대하게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의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불어로 번역된 산정묘지 시편들의 성과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시인이 동양적인 정신주의의 극점을 보여주는 이 시편들을 쓰게 된 것은 한학자이면서 불교학자였던 김달진 시인과의 만남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시인은 세속적인 욕망을 덜어내고 영혼의 품위와 위엄을 지향하는 '고사(高士)의 시'를 선보인다.

 

'산정묘지 1'은 설산의 꼭대기에 정신의 처소를 마련해 두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눈이 다 녹아버린" 질척질척하고 비루한 세계가 아니라 얼음이 꽝꽝 언 침묵의 세계에 살겠다는 결의를 드러낸다. '정신적인 공해'의 공간을 떠나 무서운 고요가 사는 산정에 오르겠다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내야 할 정신적인 기품을 잃지 않겠다는 속뜻을 내보인다.

 

조정권(59) 시인은 언어감각이 예민할 뿐만 아니라 고건축과 고전음악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평소에 그를 만나면 그는 "자기를 잘 견뎌내는 일 하나만 잘해도 아주 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성자가 될 수는 없지만,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시끄럽고 험악한 곳을 버리고 고독하게 물러나 앉아 스스로의 마음을 보살피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인 몸을 끌고 저 산정에 오르는 성스러운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애송시 100편-제27편]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1939년>

 

 

 

 

▲ 러스트=권신아

시집 한 권으로 '현대시 100년'에 길이 남은 시인들이 많다. 김소월과 한용운과 김영랑이 그렇다. 특히 유고시집 한 권으로 길이 남은 시인들도 있으니, 이상과 윤동주와 기형도 그리고 여기 이육사(1904~1944) 시인이 그렇다. 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이 따라 다닌다. 지사(志士), 독립투사, 혁명가,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의열단 단원 등. 1928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가 264(혹은 64), 이를 '대륙의 역사'라는 뜻의 한자 '육사(陸史)'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항일운동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단지 17회 정도 감옥을 들락거리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것, 만주·북경 등지를 부단히 왕래했다는 것, 북경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것 정도.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것인지 안 들렸다는 것인지, 초인이 있을 거라는 것인지 초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 이 광야에 목놓아 부르는 사람이 초인인지 나인지, 초인을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노래를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왜 천고(千古)의 뒤에야 오는 것인지 해석 이 애매한 부분이 많은데도 이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이 처음 열렸던 날부터 다시 천고 후까지, 휘달리던 산맥들도 범하지 못했으며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어준 이곳! 이 신성불가침의 시공간 속에서 흰 눈과 흰 말(馬), 매화 향기와 초인의 이미지는 돌올하다. 특히 까마득한 날부터 천고 뒤로 이어지는 대서사적 시제와 감탄하고 묻고 명령하는 극적인 어조 속에서 '광야'의 고결한 미감과 강렬한 정서는 한결 고무된다. 웅대하다는 말, 장엄하다는 말이 이만큼 어울리는 시도 드물 것이다.

 

감옥에서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시 '꽃'에서도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라고 노래했다. 오천 년의 역사가 시작된 이 광야에서, 지금-여기의 눈보라 치는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찬란한 꽃을 피울 미래의 그날을 떠올려본다. 시인이 기꺼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이유일 것이다. 기름을 바른 단정한 머리에 늘 조용조용 말하고 행동했다는, 올곧은 시인이 올곧은 삶 속에서 일구어낸 참 올곧은 시다.

 

 

 [애송시 100편-제28편]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탄부(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원시림 아아 원시림

 

그 아득한 세계의 운반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석탄의 발언.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무변한 세계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후략)

 

 

<1967년>

 

 

 

 

▲ 일러스트=잠산

 겨울 서정시의 대표격인 이 시는 평론가 이숭원씨의 표현대로 '찬란한 시간의 금비늘'이 반짝반짝한다.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는 섬세한 감각이나, "순백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 번째 눈을 뜨듯" 같은 투명한 언어감각을 보라. 시인은 다른 행인들처럼 나뭇가지에 내린 눈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자연 현상인 눈의 적설을 생명의 큰 순환으로 읽어낸 데 있다. 눈이 쌓인 원시림이 석탄이 되고, 탄부의 손에 의해 채탄이 되고, 이층방 스토브의 꽃불이 되고, 하늘로 올라가는 기운이 되고, 다시 숲으로 내려앉는 눈이 되는 그 시간의 돌고 돎-둥근 궤적을 시인은 읽어내고 있다. 이 '돌아옴'의 발견이 이 시를 빼어나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신비롭고, 얼마나 기특하고,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오탁번(65) 시인은 1966년에 동화 당선, 1967년에 시 당선, 1969년에 소설 당선이라는 신춘문예 3관왕의 화려한 등단 이력을 갖고 있다(김은자 시인을 아내로 둔 시인 커플로도 유명한데, 김은자 시인도 신춘문예 2관왕 출신이다). 이 시는 그의 시 데뷔작이다. 너무 가난해서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를 다니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이 졸업장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는 일화를 나는 언젠가 들었다. 대학에서 시 창작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독특했다. 가끔은 밤새 쓴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학생들로부터 터놓고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도 시 창작 수업을 들었는데 기말시험에 '학교에 자목련나무가 몇 그루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을 정도였다.

 

요즘 오탁번 시인은 고향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 그의 고향은 충북 제천시 백운면으로 천둥산과 박달재 사이에 있는 조그만 마을. 폐교된 모교를 사들여 '원서헌'이라는 문학관을 차렸다. 그곳서 그는 시골 아이들에게 시를 읽히는 훈장님이다. 그곳서 그는 우리가 잊어버린 토박이 우리말을 되살려내는 시를 쓰고 있다. "산 속에 큰 항아리를 하나 묻고 그 속에 들어앉아 글을 쓰고 싶다"는 그는 "아기를 낳는 산모의 지독한 아픔과 숨찬 기쁨이 바로 시"라고 말하는 순은의 시인이다.

 

 

 [애송시 100편-제29편]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일러스트 권신아

김종길(81) 시인의 '성탄제'를 읽는 일은 내게 유년의 흑백 사진을 보는 일처럼 애틋하고 살가운 일이다. 겨울밤, 열에 시달리며 칭얼대던 어린 내게 아버지의 코트 자락은 서늘했다. 겉옷을 벗으신 아버지는 물에 만 밥 한 숟갈 위에 찢은 김치를 씻어 올려놓으시고는 아, 아, 하셨다. 하얀 가루약도 그렇게 먹이셨다. 어머니가 방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펴는 사이 오래오래 나를 업고 계셨다.

 

산수유 열매는 고열에 약효가 있다. 열에 시달리는 어린것을 위해 산수유 열매를 찾아 눈 덮인 산을 헤매셨을 아버지의 발걸음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할머니가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고 있으니 아버지 속은 얼마나 더 애련했을까. 흰 눈을 헤치고 따오신 산수유 열매는 혹한을 견디느라 또 얼마나 안으로 말려 있었을까. 눈 속의 붉은 산수유 열매는, 바알간 숯불과 혈액과 더불어 성탄일의 빨간 포인세티아를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가 찾아 헤매셨던, 탄생과 축복과 생명과 거룩을 염원하는 빛깔이다. 생을 치유할 수 있는 약(藥)의 이미지다.

 

김종길 시인은 명망있는 유학자 집안의 후예다. 한학과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영문학이었다. 우리나라에 영미시와 시론, 특히 이미지즘을 소개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유가적 전통과 이미지즘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명징한 이미지, 절제된 표현, 선명한 주제 의식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이를 일컬어 '점잖음의 미학'이라 했던가.

 

차가운 산수유 열매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이 어린것의 열을 내리게 했을 것이다. 특히 산수유, 서느런, 성탄제, 숯불, 설어운 설흔 살의 'ㅅ' 음이 서늘한 청량제 역할을 한다. 그 서늘한 청량제 속 따스한 혈맥이 우리네 가족애일 것이다. 그 따스함은,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그의 시 '설날 아침에'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마음으로 설날 아침을 맞이하자. 매운 추위 속에서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맞이하자. 그 한가운데 가족이 있음을 기억하자

 

 

[애송시 100편-제30편]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2004년> 

 

 

 

 

▲ 일러스트 잠산

 이별이 이별의 사건으로만 완성된다면 사람에겐 애초부터 마음이라는 게 없었을 것이다. 이별 뒤에 오는 축축한 망각의 시간이 훨씬 고통스럽다. 서서히 잊어가며 다시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축음기처럼 생생하게 이별 이전의 일까지를 재생시키는 모든 과정을 아울러 우리는 이별이라는 사건의 전모(全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잊는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생명 없는 사물처럼 안색 없이 돌아서기만 하면 될 것이다. 생명 없는 사물의 안색으로 헤어진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겪을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큰 사랑은 사랑이 소멸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 꽃 이후의 꽃다발 혹은 열매 이후의 열매처럼 쇠잔하게 말라가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어떤 것이 바로 사랑 아니겠는가.

 

무안의 회산 백련지를 찾아가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연꽃이 만개한 그 시간을 찾아가겠지만. 시인은 연못이 폐선처럼 가라앉는 시간에 거기를 찾아간 모양이다. 흰 연꽃도, 푸른 손바닥 같은 연잎도, 따뜻한 한 공기의 밥 같은 연밥도 없는 시간. 시인은 뒤늦게 그 연못을 찾아간 모양이다. 마치 애별리고(愛別離苦)를 겪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사람처럼. 그 연못에서 시인은 연밥과 연잎과 연꽃의 시간을 다시 살려낸다. 우리의 습관인 순차적인 짐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군가의 말대로 나희덕(43) 시인은 '울음의 감별사'이다. 그녀는 한 산문에서 마른 석류를 들여다본 일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붉은 석류가 마르면서 바람 빠진 공처럼 물렁물렁해지고 거기서 작은 벌레들이 기어나오는 것을 보면서 "삶이란 완벽한 진공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안도했다"라고 적었다. 세상의 통증 하나하나와 만날 때 투덜대고, 서운해하며 토라지고, 대놓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녀의 시편들은 시원시원하게 정직해서 비옥하다. 그녀는 복숭아나무 같은 시인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을 펼쳐놓는 복숭아나무. 복숭아나무가 그토록 눈이 부신 나무임을 처음 알게 해준, 복숭아나무와 친족인 시인.

 

 

 [애송시 100편-제31편]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1992년> 

 

 

 

 

▲ 일러스트 권신아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허수경(44)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한다.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당신'이 되기도 한다. 부빈다는 것, 기댄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病)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을 묻은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사실은 슬픔으로 이어진 '살아옴의 상처'와,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한 병의 맨 술을 마시는 중이리라. 백수광부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당신! 당신이 먼저 당도해버린 그곳은 나 또한 혼자서 가야 할 먼 집이다. 그러니 남겨진 나는 참혹할밖에.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그런 울음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애송시 100편-제32편]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2005년> 

 

 

 

 

▲ 일러스트 잠산

  쟁기와 써레와 달구지를 끌던 소, 두꺼운 혀로 억센 풀을 감아 뜯던 소, 송아지를 낳아 대학 공부를 시켜주던 소, 추운 날 아버지가 덕석을 입혀주던 소, 등을 긁어주면 한없이 유순해지던 소, 코뚜레가 꿰어 있는 소, 우시장에 팔려가는 아침에는 주먹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소….

 

소에게 들일이 점점 없어지면서 소의 쓸모는 이제 비육에만 있다지만 소만큼 오랫동안 농가를 살려온 짐승도 드물다. 일하러 갈 땐 강한 무릎으로 불끈 일어서던 소. 뿔이 솟아 있으나 뿔을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는 소. 소의 느린 걸음걸이와 큰 눈과 우직함을 생각해본다.

 

김기택(51) 시인은 소에 관한 시를 네 편 썼다. 꾀는 파리를 쫓아내지도 못하는 무력한 소, 무게를 늘리기 위해 강제로 물을 먹인 소, 도살되는 순간 바람이 빠져 나가서 빈 쇠가죽 부대가 되어버린 소에 대해 썼다. 시집 '소'의 표제작인 이 시는 소에 관한 그의 네 번째 시이다. 전작들이 소의 비극적인 몸에 관한 시라면 이 시는 소라는 종(種)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인의 슬픈 시선이 있다. 한마디의 말도 사용할 줄 모르고 다만 울음이 유일한 언어인 소. 오직 끔벅거리고만 있는 소의 눈. 우리가 최초에는 가졌을 혹은 오히려 우리를 더 슬프게 내내 바라보았을 그 '순하고 동그란 감옥'인 눈. 당신에게 내뱉으면 눈물이 될 것 같아 속에 가두어 두고 수천만 년 동안 머뭇거린 나의 말….

 

김기택 시인의 시는 무섭도록 정밀한 관찰과 투시를 자랑한다. 그는 대상을 냉정하고도 빠끔히 묘사한다. 그는 하등동물의 도태된 본능을 그려내거나 사람의 망가진, 불구의 육체를 고집스럽게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생명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생명의 '원시림'을 복원시켜 놓는다.

 

시 '신생아 2'에서 '아기를 안았던 팔에서/ 아직도 아기 냄새가 난다/ 아가미들이 숨쉬던 바닷물 냄새/ 두 손 가득 양수 냄새가 난다// 하루종일 그 비린내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머리를 씻는다/ 내 머리는 자궁이 된다/ 아기가 들어와 종일 헤엄치며 논다'라고 그는 노래했다. 이런 시를 한껏 들이쉬면 어지럽고 시끄럽던 머리가 맑아진다. 선홍빛 아가미가 어느새 새로 생겨난다.

 

 

    [애송시 100편-제33편] 저녁의 염전 -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2007년>

 

 

 

 

▲ 일러스트 권신아

  바닷물을 끌어다가 삼일 정도 가둬두면 바닥에 소금 알갱이가 뭉치기 시작한다. 가만히 고인 바닷물이 제 안의 소금을 응결시키고 있는 저녁의 염전을 볼 때면 마음이 쓸쓸해지곤 한다. 스러지는 햇빛, 슬어가는 어둠, 남루한 생의 얼룩, 비늘 같은 욕망의 흔적, 서늘한 죽음의 그늘… 흩어져 있던 그리 어두컴컴한 것들이 가라앉곤 했던가.

 

흰 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상갓집 밤불처럼 노을이 내리는 염전. 그곳에서 시인은 소금의 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와 같은 그 '희디흰 물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소금의 빛, 그 '몇 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을 본다. 소금의 근원인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은 모든 생명의 시원이자 종말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끝과 시작을 듣고 보는 셈이다. 우리의 내장이 이리 어둡고 이리 쓴 이유일 것이다. 물의 내장이 그러하고, 생의 내장이 그러한 것처럼.

 

노을 속으로 바닷물이 건너는 염전에 서면, 죽음과 소멸을 견뎌내는 법을 배우는 것만 같다. 실리고, 스미고, 비치고, 번지고, 가라앉고, 퍼지는 술어의 움직임 속에서 하얗게 증발하는 허공 속 흰 눈같이. 아니 깊은 바다 속 소리의 영혼같이, 아니 아니 온갖 사랑이 밀려왔다 밀려간 사람 속 쓰디쓴 내장같이. "나 없는 변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부재중')라는 그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김경주(32) 시인은 젊다. 2003년에 등단하여 2007년에 첫 시집을 냈으니 시력 또한 젊다. 한 시인은 "이 무시무시한 시인의 등장은 한국 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스무 살 이후,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이 공부 저 공부 하며 밥벌이를 위해 대필작가, 학원강사, 광고일, '야설' 작가까지 했다는 기이한 이력이 인상적이었던가. 수려한 외모에 여행, 사진, 에세이, 영화, 연극을 넘나드는 전방위적 재능이 또 신인류(!)적이었던가.

 

 

 [애송시 100편-제34편] 어떤 적막 -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2000년> 

 

 

 

▲ 일러스트 장산

  들꽃을 따서 엮은 둥근 꽃팔찌. 그 반짝이는 꽃팔찌를 말없이 만들었을 당신의 낮과 당신의 손. 가는 손목에 차고 다니다 탁자에 벗어놓은 당신의 꽃팔찌. 들꽃 같은 시간의 꽃팔찌. 쓸쓸함과 적막이라는 삶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꽃팔찌.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쓸쓸함과 적막함. 당신은 없고 이제 나의 팔목에 차 본 둥근 꽃팔찌. 오, 들꽃처럼, 들꽃으로 엮은 꽃팔찌처럼 온기와 생기(生氣)의 일가를 이루려 했던 당신의 마음.

 

이 시처럼 정현종(69) 시인은 작품을 통해 삶의 생기를 발견해내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전후의 한국 시단에 팽배해 있던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경향을 내내 보여주었다. 그는 사물들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었고, 만물과의 우주적인 교감을 노래했다. 그는 탄력 있는 생각의 샘을 소유한 시인이다. 그의 언어는 은유적이고 율동적인데, "가벼움, 경묘(輕妙)함이 나의 시론의 하나"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가볍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 자유로운 정신은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축복일 터. 해서 정현종 시인은 "가슴이 고만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리는" 시인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단 두 줄로 짧게 쓴 시 '섬'은 많은 독자들이 여전히 사랑하는 시이며, 그가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네루다와 로르카, 옥타비오 파스 등 외국 시인들의 시집과 시론서들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의 영혼은 어둠 속에서도 샛별처럼 빛나야 하는 것. 우리의 영혼은 바닥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오르는 공처럼 생동해야 하는 것. 시인은 한 대담에서 "이 세상이 내 앞에 처음으로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라. 그렇게 살라"고 당부한다. 오늘은 그의 시 '꽃시간'을 함께 읽어보자. 당신에게도 오늘이 꽃시간이기를, 안팎이 둥근 꽃팔찌의 시간이기를.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트는 그곳이여."

 

 

 [애송시 100편-제35편] 그릇1 - 오세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1992년>

 

 

 

 

▲ 일러스트 권신아

  시력 44년을 맞는 오세영(65) 시인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자 국문학 박사이자 교수로 시작과 평론과 시학을 병행해 왔다. 지금까지 17권의 시집으로 출간된 그의 시들은 물질과 정신, 문명과 자연, 철학적 지성과 감성적 정서가 상응하는 '잘 빚어진' 서정시를 견지하고 있다. 이를 '전통의 토대 위에 형성된 철학화된 서정시' 혹은 '모순의 시학'이라 했던가.

 

일찍이 노자는 말했다. 도는 빈 그릇과 같다고. 얼마든지 퍼내서 사용할 수 있고, 언제나 넘치는 일이 없고, 깊고 멀어서 천지 만물의 근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릇은 하나인데 그 하나로 인해 안과 밖이 나뉘고, 그릇에게는 밖인데 그 밖이 안을 품고 있고, 비어 있음으로 다른 것을 채운다. 그릇에 대한 시인의 통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시인은 '절제와 균형'을 긴장된 힘으로 유지하고 있던 그릇의 '깨짐'에 주목한다.

 

깨진다는 것은 긴장하고 날카로워진다는 것이다. 모와 날을 세운다는 것이다. 겨냥하고 노린다는 것이다. 때로 상처를 내고 피를 부르기도 한다.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 충만한 둥금의 세계지만, 언제나 깨질 위기에 처해 있고 깨졌을 때 이면을 드러낸다.

 

그러한 파괴는 이전을 벗음으로써 이후를 여는 파탈(擺脫)이 된다. 스스로뿐 아니라 타자의 파탈을 이끌기도 한다. 스스로뿐 아니라 타자를 상처냄으로써 상처 깊숙한 곳에서 혼(魂)의 성숙을 이끌기도 한다.

 

그러므로 깨진 그릇이야말로 끝이면서 시작이다. 시작의 '눈뜸'은 바로 끝의 '깨짐'과 한 몸을 이룬다. 때문에 시인에게 '깨진다는 것'은 갇히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공간을 뛰쳐나온 존재의 환희다. 빈 공간이며 허공이고 무(無)다. "깨지는 그릇./ 자리에서 밀린 그릇은/ 차라리 깨진다./ 깨짐으로써 본분을 지키는/ 살아 있는 흙,/ 살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 깨진다는 것이다"('살아 있는 흙 -그릇14').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깨져서 새롭게 완성되는 '깨진 그릇'이야말로 오세영 시인의 가장 개성적인 개인 상징이라 할 만하다.

 

 

 [애송시 100편-제36편]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1929년>

 

 

 

 

▲ 일러스트 잠산

  임화(1908~1953)는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의 핵심 멤버로 카프의 서기장을 지낸 시인이자 평론가였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임화는 모던 보이였다. 영화 '유랑'과 '혼가'에서 주연을 맞기도 해 '조선의 발렌티노'로 불리었다. 그는 계급주의 문학의 선봉에 서서 카프를 이끌었지만, 막상 1935년에는 카프 해산계를 직접 내야 했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 종로 한청빌딩에 조선문학건설본부라는 간판을 내걸어 좌익 계열 문인들을 규합했다. 그 후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으나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이 시는 사건적이고 소설적인 데서 시의 소재를 찾았고, 소박하고 '된 그대로의 말'을 사용했고, 노동자들의 낭독에 편한 리듬을 씀으로써 카프문학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단편 서사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사(製絲) 공장 여직공이었다가 이제는 백 장의 봉투를 붙이면 일전을 버는 일을 하는 화자가 오빠에게 보내는 애틋한 편지글 형식이다.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라는 표현으로 봐서 오빠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로에 '오빠' 혹은 '혁명가의 정신'을 빗대어서, 역경―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지는―이 지금 닥쳐왔지만 굴하지 않고 이겨내겠다는 뜻을 밝혀 놓았다.

 

임화는 올해로 김기림, 김유정, 최재서, 백철과 함께 탄생 100돌을 맞았다. 임화는 1936년에 '오오 적이여, 너는 나의 용기다'라는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썼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 20'에서 '임화'라는 시를 통해 '아직껏 한국문학사에는 버려둔 무덤이 있다/ 마른 쑥대머리 무덤/ 그 무덤 벙어리 풀려 열리는 날/ 그 무덤 속 해골/ 뚜벅 걸어나오는 날/ 임화는 오리라// 아름다운 얼굴 다시 오리라 부신 햇살 뿜어 오리라'라고 써 왕양(汪洋)한 기상의 소유자였던 그를 추모했다.

 

 

 [애송시 100편-제37편] 문의(文義)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벋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주(註) : 문의(文義)-충북 청원군의 한 마을.

 

 

<1974년> 

 

 

 

 

 

▲ 일러스트 권신아

 중학생 때 길에서 주운 한하운 시집을 읽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시인.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시인. 출가와 환속, 숱한 기행, 폐결핵, 자살시도,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기도 한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시인. 시, 소설, 평론, 평전, 번역, 수필 등 150여 권에 이르는 신화적 글쓰기로 유명한 시인. '젊은 시인이여 술을 마셔라'라고 일갈하는 말술의 시인. 격정적인 시낭송이 일품인 시인. 낭만적인 허무의식에서, 역사와 민중에 대한 첨예한 현실인식으로, 그리고 선적(禪的) 초월의식으로 시적 변모를 거듭해온 시인. 올해로 등단 반세기를 맞이하는 시인. 여러 의미로 고은(75) 시인은 '큰' 시인임에 분명하다.

 

이 시는 신동문 시인의 모친상을 조문하러 문의에 갔다가 쓴 시라고 알려져 있다. '문(文)'과 '의(義)'의 마을, 문사(文士) 혹은 지사(志士)들이 꿈꾸었을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명이다(실제의 문의마을은 80년 대청댐 담수로 수몰되었으며 그 일부가 문의문화재단지에 복원되었다). 문의마을에 눈은 만났다가 갈라지기를 거듭하는 삶과 죽음, 산과 들, 마을과 길의 경계를 덮으며 내린다. 경계를 덮으며 내리는 눈은 온 세상을 낮게 그리고 가깝게 만들고, 적막하게 그리고 서로를 껴안아주고 받아줄 듯 내린다. 시인에게 그 눈은 죽음처럼 내리는 것이다. 우리 삶 속의 죽음처럼.

 

그의 다른 시 "싸락눈이 내려서/ 돌아다보면 여기저기 저승"('작은 노래'),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눈길')라는 시에서도 눈은 '대지(大地)의 고백(告白)'이나 '위대한 적막(寂寞)'처럼 내린다. 한 평자는 그러한 눈을 '아름다운 허무'라고도 했다. 그러나 눈은 금세 내리고 금세 녹아버리듯, 우리가 삶에서 죽음의 의미를 깨닫기란 높고 먼 일이다. 상여(喪輿)의 길처럼, 마을에서 산에 이르는 길은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겨울 문의에 가서 시인이 본 것은 그 길이 '가까스로 만난'다는 것이고,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덮으며, 가깝게 낮게 내리는 눈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으리라.

 

 

 [애송시 100편-제38편]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1996년> 

 

 

▲ 일러스트=잠산

"아무리 하찮게 산// 사람의 생(生)과 견주어 보아도// 시(詩)는 삶의 사족(蛇足)에 불과"('詩')하지만 시인은 시를 써서 세상의 돈을 쥔다. 끙끙대고 밤을 새우며 쓴 노력에 비하면 원고료는 박하고, 몇 년 만에 펴내고 받는 인세로 꾸리는 생활은 기궁하다.

 

그러나 이 가난한 시인은 원고료와 인세를 교환하면 쌀이 두 말, 국밥이 한 그릇,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이나 되니 든 공에 비해 너무 많은 게 아닌가라고 묻는다. 쌀이 두 말이 되기까지의 노동, 한 그릇의 국밥이 되기까지의 노동, 굵은 소금 한 됫박이 되기까지의 노동에 비하면 내 노동의 대가는 얼마나 고맙고 큰 것인가 라고 말한다. 땡볕 속에서 몸으로 얻어낸 그것들에 비할진대. 이 세상 정직한 사람들의 숭고한 노동에 비할진대.

 

함민복(46) 시인의 초기 시는 거대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공포를 노래했다. "이 시대에는 왜 사연은 없고/ 납부통지서만 날아오는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절실한 사연이 아닌가"('자본주의의 사연')라고 노래했고, 서울을 문명을 주사하는 '백신의 도시'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1996년 그는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원인, 마당에 고욤나무가 서 있는 강화도 동막리 폐가 한 채에 홀로 살림을 부렸다. 동네 형님 고기잡이배를 따라다니며 망둥이, 숭어, 농어를 잡고, 이제는 뻘낙지를 잡을 줄도 아는 어민후계자 시인이 되었다. 뻘에 말뚝을 박으려면 힘으로 내려 박는 것이 아니라 "뻘이 말뚝을 품어 제 몸으로 빨아들일 때까지/ 좌우로 또는 앞뒤로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뻘에 말뚝 박는 법')는 것도 배웠고, 그물 매는 것을 배우러 나갔다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경진 아빠 배 좀 신나게 몰아보지/ 먼지도 안 나는 길인데 뭐!"('승리호의 봄')라며 농담을 할 줄도 안다.

 

강화의 서해 갯바람과 갈매기와 뻘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의 시는 단단한 문명에 맞서는 '부드러움의 시학'으로 나아가면서 우리 시단에서는 한동안 드물었던 '섬시(詩)' 명편들을 낳고 있다. 강화도의 '물때달력'을 오늘도 들여다보고 있을 시인아

 

 

 [애송시 100편-제38편] 전라도 가시내 - 이용악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1947년> 

 

 

 

 

 

▲ 일러스트=권신아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먹었느냐고 묻지 말라/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라"(시 '나를 만나거든')던 시인 이용악(1914~1971)! 그는 한반도의 최북단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을 건너 할아버지는 소금을 밀수입했고 친척들은 그 강을 건너 아라사(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민을 갔다. 그 두만강을 건너 밀무역 행상 중 아버지는 객사하였으며, 홀로 된 어머니는 국숫집을 하며 어린 자식들을 키웠다. 시인 또한 서울에서 동경에서 품팔이 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이야기성과 체험의 구체성이 두드러진 그의 시들을 읽는 일은 일제강점기의 불행한 개인사, 가족사, 그리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읽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북간도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났다. 사내는 언 발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한다.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북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 속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채 이틀을 울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팔려왔다. 그런 두 남녀가 국경 너머에서 만나 겨울밤 내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그 밤 내 사내가 '가시내야'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것도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 전라도 가시내는 한없이 차고 한없이 차진 느낌이다. 고향을 떠나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고 울었던 가시내, 지금은 남실남실 술을 치는 가시내. 때로 싸늘한 웃음을 보조개를 소리 없이 새기는 가시내, 까무스레한 얼굴에 눈이 바다처럼 푸른 가시내,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는 가시내…. 이 함경도 사내처럼 나는, 그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만 같다. 전라도 개펄의 바지락 조개 같고 세발낙지 같고 때로 꿈꿈한 홍어 같기도 했으리라.

 

그 밤 내내 함경도 사내가 피워 올리는 북쪽 눈포래 냄새와, 전라도 가시내가 피워 올리는 남쪽 바다 냄새에 북간도 술막이 흥성했겠다. 그 술막의 술독 바닥났겠다. 눈에 선한, '흉참한' 시대를 살았던 그 전라도 가시내.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제비 같은 소녀야-강 건너 주막에서)!

 

 

 [애송시 100편-제40편] 박꽃 -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 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 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1977년> 

 

 

 

 

 

▲ 일러스트 잠산

  꽃의 개화를 본 적이 있으신지. 그 잎잎의 열어젖힘을 본 적이 있으신지.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일을 씨앗이 움트는 일이라고 했다지만, 꽃의 '열린 앉음새'라 불러도 좋을 꽃의 개화는 사람을 압도한다. 대개 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핀다.

 

천천히 진행되는 개화 파노라마를 관심있게 시종 지켜볼 만큼 여유롭고 섬세한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많지 않겠지만.

 

이 시에서 사람을 '벌떼 같은 사람'이라고 비유한 부분은 압권이다. 정신없이 분주하고 시끌시끌 작당(作黨)하여 몰려다니며 입으로 바늘 같은 독설을 내뱉는 세간의 사람들을 잉잉거리는 벌떼 무리에 비유했다. 인간의 시간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소란이 뚝 그쳤을 때 자연의 시간은 도래한다. 그리고 오, 하얀 박꽃은 피어난다. 물소리는 물소리로 들린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들린다.

 

자연의 시간에는 살기(殺氣)가 없다.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세계를 맑게 회복시킨다. 씻어낸다. 시 '무인도'에서 "인간을 만나고 온 바다,/ 물거품 버릴 데를 찾아 무인도(無人島)로 가고 있다"라고 했을 때의 무인도처럼. 하산(下山)한 당신도 '죄(罪) 짓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자연의 시간에 살고 싶지 않으신지.

 

이 시는 '산(山)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신대철(63) 시인의 첫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에 실려 있다. 신대철 시인은 1977년 첫 시집을 출간하고 23년간 절필을 했다. 2000년 시작 활동을 재개한 후 근년에는 알래스카, 시베리아 평원, 바이칼호, 몽골, 두만강 등 원시적이고 광활한 자연에 대한 시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곳에 정착하게 된 사람들의 이산의 역사와 고통을 부각시키면서. 신대철 시인은 북파 공작원 부대의 학군장교로 군복무를 했고, 그 당시의 기억을 토대로 전쟁과 남북 분단의 아픈 현대사를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충청도 청양의 깊은 산에서 화전민으로 살았던 그만의 체험은 붉은 혈액이 되어 신대철 시의 몸을 움직인다. 그의 시는 큰 산이요 큰 숲이다. 더 깊숙이 평화롭고, 깨금이 떨어지고, 아그배가 떨어지는 그런 곳. 당신도 가서 살고 싶지 않으신지.

 

 

  [애송시 100편-제41편]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1993년> 

 

 

 

▲ 일러스트=권신아

  말문이 트인 아이는 어느 날 선언한다. "엄마, 오늘부터 엄마는 아지, 아빠는 끼리, 언니는 콩콩이, 나는 밍밍이야, 이제 그렇게 불러야 돼, 꼭." 또 어느 날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부터 식탁은 구름, 의자는 나무, 밥은 흙, 반찬은 소라라고 해야 돼, 알았지?" 난감, 황당 그 자체일 때가 많은 박상순(46) 시인의 시는 이런 네 살배기 놀이의 사유로 들여다보았을 때 쉽게 이해되곤 한다. 그러니 주의하시라! 그의 시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묻는 순간 당신은 헛방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니.

 

'A는 B'라는 반복으로 이루어진 시다. A와 B의 관계는 무연하고 또 우연하다. 인과관계가 없는 '관계 맺기' 혹은 '이름 바꾸기' 놀이다. 그러니 왜 첫 번째가 나이고 6이 나무이고 7이 돌고래인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독자들도 A에 혹은 B에 마음껏 다른 단어를 넣어 읽어도 무방하다. 또한, 이 시는 앞에는 숫자가, 뒤에는 낱말이 새겨진 아이들의 카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나무라고 씌어 있고, 7이라 쓰인 카드의 뒷면에는 돌고래라고 씌어 있다. 십진법에 따르면 세상 혹은 세상의 모든 숫자는 1부터 10까지의 숫자로 환원된다. 현실과 언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숫자와 낱말의 관계도 무연하고 우연한 약속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관계도 그러하다는 것일까?

 

이 시의 핵심은, '내'가 이 순서와 관계를 (외우듯) 반복하는 그 리듬에 있다. '자, 아무 생각 말고 따라 해 봐'라는 식의 폭력적인 우리의 교육 현실 혹은 성장 과정을 암시하는 것일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내지는 언어(혹은 제도)의 감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유년의 로망이 담긴 단어의 나열이라는 점에서 상실한 본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무것이면서 아무것이 아니기도 할 것이다. 언뜻 보면 천진난만한데 읽다 보면 슬쩍 공포스러워지는 까닭들이다.

 

박상순 시인은 회화를 전공한 미술학도다. 유능한 북(표지)디자이너이자 편집자이며 출판인이기도 하다. '무서운 아이들'의 유희적 상상력, 신경증적 반복, 파격적 시 형식, 의미의 비약적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에 대해 다 알려고 하지 말자. 다 알려고 하면 박상순 시는 없다. 박상순보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지만 그 누구도 박상순처럼 시를 쓰지는 못한다. 그게 중요하다.

 

 

 [애송시 100편-제42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零下) 십삼도(十三度)

 

영하(零下) 이십도(二十度) 지상(地上)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起立)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零下)에서

 

영상(零上)으로 영상(零上) 오도(五度)

 

영상(零上) 십삼도(十三度) 지상(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일러스트=잠산

황지우(56) 시인의 시 '손을 씻는다'를 함께 읽는다.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라고 쓴 시. 한 점 오점 없이 살 수는 없다. 저질러가면서 우리는 산다. 좌충우돌하면서 난동을 부리면서.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시대가 진화해가는 것은 우리가 내부적으로 가진 자기 반성과 좀 더 나아지려는 희망의 추구 같은 것 때문이다.

 

이 시는 솔직하다. 나무는 꼭 나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헐벗고 무방비이고, 때로는 벌 받고, 긴가민가 하는 사람으로 읽어도 좋다.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라고 중얼중얼할 줄은 아는 사람이다. 아주 숙맥이거나 속물적이지는 않아서 현재의 환멸을 볼 줄은 아는, 앙가슴이 뛰는 그런 사람. 바깥 세상이 영하인지 영상인지 구별할 줄 알아 드디어 버틸 줄도 거부할 줄도 알게 된 사람. 마침내 싹도 잎도 틔우면서 불쑥 기립하여 봄의 나무가 된 사람. 자력의 운동성을 가진, 스스로를 혁명하는 사람. 자기 몸을 쳐서 바다를 건너가는 새 같은 사람. 의지의 사람… 우리는 이런 봄나무를 기다리는 것 아닌가.

 

황지우 시인은 1980년대를 날카로운 풍자로 노래했다. 그는 1980년대의 독재와 살해와 검열에 맞선 '시의 시국사범'이었다. 한 대담에서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시대가 우리를 건드렸다"고 표현했는데, 그의 시는 권력의 중증(重症)을 처절하게 해체하려한 양심이었다. 설령 그가 시 '뼈아픈 후회'에서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라고 써 지나온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있지만, 이 혹독한 자기 검열의 고백이 황지우 시의 미덕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시대와의 불화와 선적(禪的)인 기개를 넘나드는 그의 시는 한국시사에서 푸릇푸릇한 '방풍(防風)의 대밭'이다.

 

 

 [애송시 100편-제43편]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2006〉)

 

 


 

▲ 일러스트=권신아

  해방둥이 문인수(62) 시인은 마흔이 넘어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다. 하지만 시적 성취는 어느 시인보다 높아 환갑 지나 시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시는 정진규 시인의 부친상에 문상을 갔다가 선친에 대한 회고담을 듣고 쓰인 시인데, 바야흐로 문인수 시인의 대표시가 되었다. 문상을 다녀와 순식간에 쓰였을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막힘이 없이 활달하다.

 

환갑이 지난 아들이 아흔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뉘고 있다. 정신은 아직 초롱한 아버지가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떠나버린 스스로의 몸에 난감해 하실까봐 아들이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겄다아"며 농 반 어리광 반을 부리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그 모습은 흐뭇하고 뭉클하다. 이 '쉬'는 단음절인데 그 뜻은 다의적이어서 긴 여운을 남긴다. 일차적으로는 오줌을 누시라는 말이겠고, 그것도 쉬이(쉽게) 누시라는 말이겠고, 아버지가 힘겹게 오줌을 누시는 중이니 우주로 하여금 조용히 하라는 말이겠다. 아버지를 향해, 우주를 향해 그리고 신을 향해 내는 울력의 소리이자 당부의 소리이고 주술의 소리일 것이다.

 

오줌발을 '길고 긴 뜨신 끈'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압권이다. 계산해 보지는 못했지만 한 사람이 평생 눈 오줌발을 잇고 잇는다면 지구 한 바퀴쯤은 돌 수 있지 않을까. 그 길고 뜨신 오줌발이야말로 한 생명의 끈이고 한 욕망의 끈이다. 그 '길고 긴 뜨신 끈'을 늙은 아들은 안타깝게 땅에 붙들어 매려 하고 더 늙으신 아버지는 이제 힘겨워 땅으로부터마저 풀려 한다. 아들은 온몸에 사무쳐 '몸 갚아드리듯' 아버지를 안고, 안긴 아버지는 온몸을 더 작게 더 가볍게 움츠리려 애쓴다. 안기고 안은 늙은 두 부자의 대조적인 내면이 시를 더욱 깊게 한다.

 

마지막 행의 '쉬!'는 첫 행의 '상가(喪家)'를 환기시킨다. 이제 아들의 쉬- 소리도, 툭 툭 끊기던 아버지의 오줌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길고 긴 뜨신 오줌발'도 쉬!, 이렇게 조용히 끊기기도 하는 것이다. 때로 '시가 뭘까' 라는 고민을 할 때 이런 시는 쉬운 답을 주기도 한다. 삶의 희로애락을 한순간에 집약시키는 것, 그 순간에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통찰이 녹아 있는 것이라는. 이 시가 그러하지 않는가.

 

 

   [애송시 100편-제44편]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었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는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서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일러스트=잠산

흔하게도 인생은 여행에 비유된다. 우리는 흘러가면서 만난다. 사람과 붐비는 시장과 웃음과 꽃밭과 폭풍의 바다와 벼랑과 사막을 만난다. 그러므로 삶에는 여독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내 여행의 종착지를 생각한다.

 

이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적적한 곳으로 데려간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가서 살자고 한다. 종일을 살아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개옻 그늘과 늦가을만이 살고 있는 곳. 세상의 쓸쓸함을 다 살아본 듯 벌써 무욕을 알고, 골짜기보다 더 깊은 눈으로 속리(俗離)한 우리를 맞아줄 여인이 살고 있는 곳. 그러나 그런 곳이 있을까. 잇속이나 명리나 부귀 같은 것은 손을 털 듯 탁, 탁 털어버린 곳. 더 움켜쥐려는 근욕(根欲)이 사라져 알몸의 자아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 퇴폐도 맑게 씻기어서 별처럼 빛나는 곳. 삶을 탕진한 사람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마지막 성지(聖地). 그곳서 우리의 여행이 끝난다면 후회는 없으리니.

 

많은 독자들은 김명인(62) 시인의 첫 시집 '동두천(東豆川)'을 기억할 것이다. 기지촌에서 혼혈아에게 국어를 가르치던 시기의 경험을 쓴 동두천 연작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니.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동두천 4')라고 써 수많은 독자를 여지없이 울먹이게 한 시!

 

 

김명인 시인은 동두천 연작 발표 후에도 지금까지 '욕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막막한 표랑을 강한 연민으로 감싸 안아온 시인이다. 그는 한국의 서정시가 실험과 해체와 생각의 과잉과 포즈의 유행을 탈 때에도 흔들림 없이 서정시를 지켜내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맡아 왔다. 그의시에 대해 이승훈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한마디로 김명인의 시는 마음이 놓인다"라고. 동감이다

 

 

 [애송시 100편 - 45]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972년>

 

 


 

 

▲ 일러스트 권신아

  시간은 가고 기억은 쌓인다.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 하던가. 향수(鄕愁)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추억이자 그리움이다. 상처나 슬픔조차도 지나간 것이기에 아름답고 생의 근원에 대한 동경을 일깨워주는 고향. 마음의 고향은 늘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에 자리하고, 향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게 한다.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더 유명해진 정지용(1902~1950)의 '향수'는 이십대 초반의 시인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고향인 충북 옥천을 다니러가며 쓴 시다. 이제 곧 떠나야 할 고향이기에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검정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정종을 좋아했던 그는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나면 낭랑한 목소리로 이 '향수'와 함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고향'을 즐겨 낭송했다 한다. 신석정 시인은 "지용같이 시를 잘 읊는 사람은 보지 못했노라" 회고한 바 있다.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라고 믿었던 그는 우리 현대시사에서 언어와 감각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 시 또한 소리내어 읽노라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는 ㅂㅂㅂ 말을 달리는 듯하고,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함추름 휘적시던 곳'은 ㅎㅎㅎ 흩어져 있는 듯하다. 실개천을 '옛이야기 지줄대는' 소리로, 황소를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으로, 아버지를 '엷은 졸음'으로 감각하는 솜씨 또한 일품이다. '해설피'가 해가 설핏할 무렵인지 느리고 어설프게(혹은 슬프게)인지, '석근' 별이 성근(성긴) 별인지 섞인 별인지 애매하지만 그 질감만은 새록하다.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아버지와 검은 귀밑머리를 날리는 누이와 사철 발벗은 아내가 집안에 있고 집밖으로는 넓은 벌과 실개천이, 파란 하늘과 풀섶 이슬이, 석근 별과 서리 까마귀가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이미 마음의 고향이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를 후렴처럼 노래하며 '그곳'을 그리듯 보여주는 단순한 시 형식은 음악적 울림은 물론 애틋한 향수의 정감을 쉽고 실감나게 전달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흙에서 자란 마음'을 서늘옵고 빛나게 '이마받이'해보는 아침이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춘설(春雪)')롭지 아니한가.

 

 

 [애송시 100편 - 제46편] 어디로? -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 일러스트=잠산

최하림(69)은 한글 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62년 평론가 김현·김치수, 소설가 김승옥과 한글 세대 최초의 동인지 '산문시대'를 함께 냈다. 최하림 시인의 시는 점점 그윽하다. 그는 내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조금 걸어나가면 강이 바라보이는 양수리 그의 집에

 

갔을 때에도 그는 어둠이 내리는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의 말은 "참 좋지요"가 전부였다. 그에게는 오연(傲然)함이 없다.

 

 

최하림 시인은 빛과 어둠, 정지와 운동 사이의 미묘한 오고 감을 살피는 데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 이 시를 읽어도 그렇다. 황혼이 내리는 무렵에 나무들이 있고 바람이 있고 오두막이 있고 사내가 있고 징검다리가 있고 흐르는 물이 있다. 이 존재들의 뒤에는 커튼처럼 황혼이 있다. 황혼은 아래로 하강하고, 바람은 직립한 나무들에게 수평으로 이동하고, 오두막과 사내는 수직으로 서 있거나 수직으로 움직이고, 물은 옆으로 흐른다. 존재들은 내려오고 올라가고 옆으로 이동한다. 움직이는가 했더니 곧 멈추어 선다. 동작을 보여주지만 격하지 않다. 시인은 돌보듯이 존재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건넨다. 하나만을 전유하려는 못된 버릇도 없다. 해서 존재들은 하나하나가 언뜻언뜻하고 얼핏얼핏하다. 어느 것 하나가 도드라질 양이면 그 윤곽을 살짝 지워놓는다. 마음은 곧잘 뛰쳐나가길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그렇지가 않으니 갸륵하다. 마음은 이렇게 우묵하고 참할 때가 있다.

 

자작나무 껍질을 머리에 쓰고 너덜너덜하게 옷을 입고 다녔다는, 숨어 살았다는 한산(寒山)은 "우스워라, 나의 길이여/ 거마(車馬)의 자국조차 없네/ 돌고 도는 시내의 굽이를 알 수 없고/ 첩첩의 산은 그 겹을 모르겠네/(…)/ 내 여기에 이르러 길 잃고 헤매느니/ 그림자를 돌아보며 '어디로?' 물어보네"라고 썼는데, 이 시에서는 나아갈 길의 향방조차 묻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잘 묻는다. 그러나 "어디로?" 라고 보채며 질문하지 말자. 다만 거기에 여기에 있을 뿐.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을 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어야"('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할 뿐. 그럴 때 손결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듯 삶에는 빛이 인다. 그 빛에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

 

 

 [애송시 100편-4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 일러스트 잠산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己未) 독립선언문에는 시 못지않은 리듬과 비장한 여운이 있다. 고교 시절, 이 선언문과 함께 짝패처럼 좔좔좔 암송해야 했던 시가 이상화(1901~1943)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월 8일 장날을 기해 대구에서 학생만세운동을 모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상화(相和)라는 이름을 상화(尙火)나 상화(想華)로 쓰곤 했는데, 정녕 그의 시와 삶이 '항상 불' 같았으며 '만주를 오가며 늘 독립운동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니 3월이 되면 이 시가 떠오를 수밖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신령'이고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그리고 시인은 '지금은'에 담긴 이 봄의 혼곤 속을 '다리를 절며 걷'고 있다.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판)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

 

 

 [애송시 100편 - 제48편]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일러스트=잠산

너무나 아름다운 이 시를 통째로 암송할 수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말씨와 어렵지 않은 입말로 쓴 시. 무엇보다 이 시는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천상의 별과 지상의 잎새에 걸쳐 있는 넓은 공간의식도 놀랍다. 삶은 잡목림 같은 것. 해서 번뇌와 의혹과 부정의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와 잎새와 같은 우리를 교란시키는 것. 부끄러움은 하루 걸러 오는 것. 그러나 어둠을 배경으로 별은 빛나고, 바람과 같은 시련을 만날 때 큰 사랑은 움트는 것. 다만 우리는 나의 부끄러움으로, 나의 양심으로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고고함과 지순함과 강직함으로 사랑하자.

 

윤동주(1917~1945) 시인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어둠과 황폐를 의식의 순결함으로 초월하려고 했다. 그는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또 다른 고향')고 써 스스로를 반성했고,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쓰며 자신을 끊임없이 돌이켜 봤다.

 

종교적인 순교의 의지로도 읽히고 독립에의 의지로도 읽히는 등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갖고 있는 이 시를 쓴 것은 1941년 11월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는 1941년 자선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주변에서 시국을 염려해서 시집 출간 연기를 권함에 따라 뜻을 미루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3년 7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출감을 기다렸지만 불운하게도 해방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의 차디찬 바닥에서 옥사했다.

 

윤동주 시인은 생전에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했다. 다만 이 시가 포함된 원고뭉치가 국문학자 정병욱의 어머니에 의해 장롱 속에 몰래 보관되다가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정지용 시인은 유고시집의 서문에서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라고 써서 청년 윤동주의 죽음을 애도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별 헤는 밤')고 노래한 영원한 청년 윤동주. 생전에 그는 자기 성찰로 뒤척이는 한 잎의 잎새였으나, 이제 보석처럼 빛나는 천상의 별이 됐다.

 

 

  [애송시 100편 - 제 49편]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일러스트=권선아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마음이 울렁거리는 일이다. 바람 불면 그곳이 어디든 따라 나서고 싶고, 바람 들면 온몸이 저절로 살랑살랑 나부끼게 되고, 바람나면 불타는 두 눈에 세상 보이는 것 아마 없으리.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사무치는 일이다. 빈자리를 어루만지는 부재와 상실,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슴이 시리고 뼛속까지 시리리. 그리고 바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다. 물처럼 세월처럼,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으리.

 

삶이, 사랑이, 시(詩)의 말이 바람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 바람(願)이라서, 바람(風) 같아서 간절한 것들이다. 이 시를 읽노라면 간절하게 그리운 부재가 떠오르고, 간절하게 따뜻한 배려가 떠오른다. 몸을 떠나 영혼으로 떠돌며 사랑하는 사람 곁을 지키던 영화 '사랑과 영혼', 그 애틋한 바람의 영혼도 떠오른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사랑의 괴로움, 사랑의 피로까지를 함께하는 바람의 마음. 그렇게 따뜻한 바람이라면 '가끔'이 아니라 매일매일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고 싶다.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 무섭고 아름답겠지./ 나도 목숨 건 사랑의/ 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성년의 비밀')

 

이 시는 조용필이 부른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랫말과 흡사하다. 물론 이 시가 5년쯤 먼저다. 의사이기도 한 마종기(69) 시인은 고희를 앞두고도 여전히 젊고 댄디(dandy)하다. 어떤 선입관과 고정관념과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동화작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여성 무용가 박외선 사이에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성장해 의과대학 재학 시절 시인으로 등단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40여 년간 방사선과 전문의로 지내며 시를 써왔다.

 

그는 올해로 시력 49년을 맞는다. 투명하면서 울림이 깊은 그의 시에 유난히 위로받고 행복해하는 마니아들이 많다. 오롯한 그리움과 따뜻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누군가 말했다. 그의 시는 '맹물' 같다고. 어느 날 마시면 상쾌하고 시원하고, 어느 날은 목이 메고 어느 날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고. "나는 이제 고국에서는/ 바람으로만 남겠네"('산수유')라는 그의 최근 시의 구절이 떠오른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라는 이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과 함께. 그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시민임이 분명하다, 저 바람처럼.

 

 

  [애송시 100편 - 제 50편]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일러스트=잠산

봄! 살찐 볼을 만지는 것 같다. 입안에 쑥 냄새가 돈다. 노란 산수유 그늘도 펼쳐진다. 연못가 버들개지도 눈을 뜬다. 볕은 보송보송하다. 옷은 가볍고 걸음은 경쾌하다. 찬 없이 따뜻한 밥과 냉잇국 한 그릇을 받고 싶다. 차닥차닥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리던 옛날의 빨래터도 다시 가보고 싶다.

 

봄! 자연에게만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도 그것은 돌아온다. 인심에도 계절이 있다. 정치가 싸움판을 걷어내거나, 경제가 잘 돌아 보통사람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 훈풍 부는 봄이 왔다고 한다. 넉넉하고 화창하면 모두 봄이다. 그러므로 봄은 우리의 일상에서 제일로 선호하는 비유의 언어이다. 봄에는 게정게정 불평하는 소리가 싹 사라진다.

 

이 시의 맛은 봄을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으로 빗댄 데 있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봄의 비유로서의 사람은 순박하고 좀 어수룩하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저기서 기웃거리는 것을 좀 보라. 무리에 끼어서 한눈도 팔고 궂은 데서 뒹굴기도 한다.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을 모르고 한량처럼 '나자빠져' 있기도 한다. 느려터졌지만 한판 싸움질도 하는 것을 보니 강퍅하니 나름으로는 고집도 센 듯하다. 대처를 떠도느라 산전수전 다 겪었다. 몸고생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아, 그러나 사람 냄새가 나는 그는 '마침내' 돌아온다. 민주주의의 도래처럼. 격전지에서 생환한 용사처럼. 봄의 백성이 되어 꿈에도 못 잊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품으로.

 

이성부(66) 시인은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를 지닌 민중시인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울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라고 쓴 시 '벼'는 민중서정시의 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광주 출신의 그는 '80년 광주'를 겪은 후 죄의식으로 방황을 하다 산(山)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얻는다. 그는 산행을 통해 "처음에 울적하게 막혔던 것이 나중에는 쾌함을 얻는다"라는 퇴계의 글귀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년까지는 지리산과 백두대간을 종주한 경험으로 '내가 걷는 백두대간' 연작시를 발표했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 오늘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오는 봄을 마중 나가자. 들길과 거리와 사람 사는 동네에, 그리하여 이 세상에 봄볕 그득할 때까지.

 

 

 [애송시 100편 - 제 51편]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일러스트 권신아

  출간되자마자 금서(禁書)가 된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구하기 위해 책방을 뒤지고 다녔던 것도, 최루 속에서 금지곡(禁止曲)이었던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렀던 것도, 시보다 운동을 택했던 선배가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주점에서 결혼식을 했던 것도, 지금도 김광석이 부른 '타는 목마름으로'를 들으면 뭉클해지는 것도 다 이 시 때문이다.

 

쫓고 쫓기는, 맞고 때리는, 울고 신음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의 중첩을 통해 지난 70년대의 공포와 고통을 날카롭게 드러낸 시다. 누군가는 그렇게 피를 흘리며 뒷골목으로 쫓겼고 누군가는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자정부터 신 새벽 사이, 뒷골목과 뒷골목 사이,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열망했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이 시가 뜨거운 것은 잊혀져 가는 '민주주의'를 노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했기에 더욱 뜨겁다. 오래 가지지 못한 아니 너무도 오래 잃어버린 그 모든 목마름의 이름을 '타는 목마름'으로 남 몰래 쓰고 있는 한, 이 시는 여전히 뜨겁게 살아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되살아오는 것이다.

 

그의 본명은 '영일'(英一, 한 꽃송이)이다. 거리 입간판에 조그맣게 써있던 '지하'라는 글자를 보고 지었다는 필명 '지하'(地下가 芝河로 바뀌었다). 시위, 필화사건,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으로 체포, 투옥, 사형 및 무기징역 선고, 석방을 거듭하면서 김지하(67) 시인은 70년대 내내 박정희 정권과 맞섰다. 감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듣는 순간, 무상함에 휩싸여 "잘 가시오. 나도 뒤따라가리다"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고 한다. 이후 '투사' 김지하는 '생명사상가' 김지하로 변신한다. 감옥 창틀에 싹을 틔운 민들레를 보고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에 눈을 떴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시(詩)란 어둠을/ 어둠대로 쓰면서 어둠을/ 수정하는 것// 쓰면서/ 저도 몰래 햇살을 이끄는 일"('속 3')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시인, 그리고 이제 자신의 시와 삶이 우주 저편으로까지 이어지는 '흰 그늘의 길'에 서기를 꿈꾸는 시인, 그가 있어 우리 시는 또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애송시 100편 - 제 52편]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일러스트=잠산

'입아아입(入我我入)'이라고 했다. 저것이 나한테 들어 있고, 내가 저것 속에 들어 있다고 했다. 이 세계는 서로가 연결되어 주고받는 중중무진(重重無盡) 연기의 세계이다. '법화경'을 보면 입아아입을 몸소 실천한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는 이가 있다.

 

그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공경합니다. 나는 당신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고 말하면서 살았다. 막대기나 돌멩이로 때릴 때도 피해 도망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후일에 많은 사람은 상불경보살의 큰 사랑을 알고 그를 예배 공경했다지만.

 

김선우(38) 시인은 90년대 여성시의 흐름을 이어오면서 여성의 '육체성'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시를 읽으면 상불경보살이라는 이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의 시는 너와 나의 차별이 없는 큰 화해와 사랑의 세계를 발언한다. 해서 그녀의 시에는 "너의 영혼인 내 몸"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나 아닌 것들이 나를 빚어/ 그대 아닌 것들로 빚어진 그대를 사랑하오니"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젊은 여성 시인인 그녀가 우주 생명에 대한 무차별적 사랑을 가붓한 어조로 고백하는 이유는 이 물질세계를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자못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고 인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그녀의 시는 딱한 생명을 뱃속에 품고 강보에 받아내고 젖을 먹여 길러내는 모성을 보여준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의 몸을 과감하게 등장시켜 관능적이기도 하지만, "아프지 마, 목숨이 이미 아픈 거니까/ 아파도 환한 벼랑이 목숨이니까"라고 말할 때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시는 사바세계의 가엾은 목숨을 살려내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의 마음을 지녀 몸을 섞고 탐하는 쾌락을 넘어선 자리에 있다.

 

개화(開花)를 모티프로 삼고 있는 이 시는 그 뜻이 비교적 쉽게 읽힌다. 그러나 꽃피는 꽃의 몸과 내 몸을 교차시키면서 이 시는 의미의 확장을 얻는다. 꽃과 꽃벌의 혼례가 꽃과 나와의 혼례로 얽혀 읽히면서 이 시는 심상치 않은 의미를 낳는다. 그것은 성애적인 열락을 넘어선다. 그러나 "사랑이여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더 "밥알을/ 서로의 입에 떠 넣어주"며 살아야 하는가

 

 

 [애송시 100편 - 제 52편] 바다와 나비 - 김기령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청산(靑山)이라면 몰라도 바다는 나비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거대한 바다에 비해 흰나비는 얼마나 작고 어리고 가냘픈가. 이 무구한 흰나비는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알 수 없는 수심과 거센 물결에 대해 들은 적도 없다. 흰나비에게 푸르게 펼쳐진 것은 청(靑)무우밭이고 그렇게 푸른 것은 꽃을 피워야 마땅하다. 흰나비가 삼월의 바다에서 청무우꽃을 꿈꾸는 까닭이다. 그러나 짜디짠 바다에 흰나비의 날개만 절 뿐, 삼월이어도, 바다가 푸르긴 해도, 바다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나비의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만 비친다. 삼월의 바다, 어린 나비, 초생달은 모두 이른 것들이다. 시작인 것들이다.

 

허공을 나는 것들은 날개가 중요하고 땅을 걷는 것들은 허리가 중요하다. 헌데 '나비의 허리'라니! 공주의 아름다움은 춤에 있고 나비의 아름다움은 비상(飛翔)에 있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에서 돌아온 나비. 바다로의 비상에 실패하고 뭍으로 귀환한 '나비의 허리'는 상징적 의미가 깊다. 이제 흰나비는 청무우 꽃그늘을 노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짜디짠, 바다의 깊이와 파도의 흔들림을 맛본, 허리가 실한 나비다. "땅을 밟고 하는 사랑은 언제고 흙이 묻"('주피터 추방')기 마련이다. 새롭고 먼 곳을 향해 비상하다 날개가 절어본 적이 있기에, 흰나비는 이제 흙이 묻더라도 땅을 밟는 사랑을 알았으리라.

 

이 시의 꽃은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이다. 하얗고 가늘고 기다란 나비의 몸과 초생달이 그려지고, 새파란 바닷물에 새파랗게 전 흰나비의 허리가 그려지고, 지쳐 돌아오는 흰나비 허리를 비추는 저물녘 초생달이 그려지기도 한다. '시린' 풍경들이다. 어쨌든 '바다'가 냉혹한 현실이라면 '나비'는 순진한 꿈의 표상이다. 꿈은 언제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른 채 도전한다. 근대 혹은 서구문명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지식인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역사 혹은 시대의 흐름 앞에 무력했던 시인의 모습도.

 

김기림(1908~?) 시인의 탄생은 현대시 탄생과 그 햇수를 같이 한다(얼마 전 출생연도가 1907년으로 기록된 학적부가 발굴되어 탄생 101주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30년대 이상(李箱)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모더니즘을 주도하면서 서구문명 지향하는 '새로운 생활'을 동경했다. 그는 기자, 문학비평가(이론가), 번역가, 대학 교수를 겸한 모더니즘 선봉에 선 시인이었으나 분단과 전쟁은 그를 납북 이후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비운의 모더니스트'로 만들어버렸다.

 

 

 [애송시 100편 - 제 54편] 나그네 - 박목월

 

 

 

강(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박목월(1916~1978)이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펴낸 3인 시집 '청록집'(1946)에 실려 있다. 임시 정가 30원의 '청록집'을 발간한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시인들은 '청록파'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 서정시의 큰 산맥을 이룬 이 3인은 모두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경주에 살고 있던 박목월을 조지훈이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이 시는 박목월과 조지훈의 각별한 관계에서 태어났다.

 

'목월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으로 이 시를 썼기 때문이다. '완화삼'의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의 한 부분인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를 부제로 삼았다. '완화삼'의 시어인 나그네와 구름과 달과 강마을과 저녁 노을을 그대로 받아서 썼다. 다만 '완화삼'이 나그네의 구슬픈 우수(憂愁)를 더 드러내면서 가야 할 앞길의 정서적 거리를 '물길은 칠백리(七百里)'로 표현했다면, '나그네'에서는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남도(南道) 삼백리(三百里)'의 길을 표표히 가는 나그네의 심사를 부각시켰다.

 

이 시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접한 최초의 시였다. 외할머니가 벽에 붙여져 있던 이 시를 '가갸거겨'를 배우던 방식으로 흥얼흥얼하는 것을 곁에서 들었다. 그처럼 이 시는 우리말의 가락이 아주 잘 살아 있다.

 

조지훈은 박목월의 시에 대해 "압운(押韻)이 없는 현대시에도 이렇게 절실한 심운(心韻)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 시를 읽으면 역시 그 평이 그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시를 쓸 때에는 꼭 연필을 깎아 썼다는 박목월. 아이들에게 공책을 사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한지를 묶어 공책을 만들어줄 정도로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던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山)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고 노래한 박목월. 시를 알게 되면서부터 본명 박영종(朴泳鐘) 대신 '木月'이라는 큰 자연의 이름을 스스로 붙였던 그. 식민지 현실을 외면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박두진의 말대로 청록파에게 자연은 "온갖 제약을 타개하기 위한 시의 유일한 혈로(血路)"였는지 모른다. 그 한가운데에 '애달픈 꿈꾸는 사람' 박목월이 있다.

 

 

 [애송시 100편 - 제 55편] 봄바다 - 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 일러스트=권신아

구장집 마누라는 방뎅이도 크고 젖통도 크고 잠도 푸지게 잘 자니 미끈덩 아들 쑥쑥 낳겠다. 역시나 셋째가 제일 미끈덩하겠다. 미끈덩 인물 재산이겠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라도 되는 양 바람깨나 피우겠다. 도망치듯 상경해 이양저양 살피다 부잣집 과부 만나 한몫 챙기기도 하겠다. 살집 좋은 과부 곁에서 시름시름 늙어가며 이모저모 기웃대다 '인생 탕진하'겠다. 저리 생생(生生)한 구장집 마누라 몸을 거쳐 미끈덩 셋째 아들로 환생하는 것, 사내들의 로망이겠다. 이 시의 묘미는 현실 속 구장집 마누라가 아니라, 상상 속 셋째 아들의 부잣집 과부로 튀는 오지랖의 '쓰리 쿠션'에 있겠다.

 

이 시를 읽노라면 김 시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이시영 시인의 재미난 산문시 하나가 떠오른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술자리에 김사인 시인이 폭우 속 흰 고무신을 신고 와 합류했다는 것. 새벽 즈음에 이 시인의 처가 천둥치듯 "복희년 나오라고 그래!" 소리치며 들이닥쳤다는 것. 바로 그때 "나와 송 사이에서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던 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문밖으로 내빼는데 흰고무신 신은 발이 비호처럼 빨랐다. 그리고 빗속을 번개처럼 가르며 사라졌다. 복희씨가 졸린 눈을 뜨기도 전에, 송과 나의 처가 시퍼렇게 걷어붙인 팔을 풀기도 전에 일어난 아주 순식간의 일이었다"('김사인의 흰고무신')는 것.

 

김사인(52) 시인은 사람 좋은 충청도 양반이다. 떠듬떠듬 어눌하게, 천천히 길게, 그러나 뜨겁게 시를 쓰는 시인이다. 첫 시집을 내고 19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냈으니, 시 한 편을 길게는 30년을 쓰고 썼다니 '곡진'하다는 말, '지극'하다는 말은 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 그가 1980년대의 혁혁한 문화운동가이자 날카로운 논객이었다는 건, '노동해방문학'사건에 관여해 수배되기도 했다는 건 다 아는 전력(!)이다. "시는 크고 요란한 것이 아니라 작고 나지막한 섬김"이라고 말하는 그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시를 높이고 세상과 사물을 높이는 드문 미덕을 가진 시인임에 틀림없다.

 

봄은 남쪽으로부터 오고, 남쪽 끝 바다로부터 온다.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같이 방방한 저 들판에, 구장집 마누라 젖통 같이 봉긋한 저 능선에, 구장집 마누라 코골이 같이 달디단 봄바람으로 온다. 바다 내음 향긋한 천지가 무릇 봄바다다. 물 맑은 봄바다에 두둥실 떠가는 저 배를 타고 미끈덩 풋것들로 환생하고 싶다. 어쨌든 봄이고 하여튼 봄밤이고 바야흐로 봄바다다.

 

 

 [애송시 100편 - 제 56편]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일러스트=잠산

시름 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땅 한 평 가꾸다 갈래요/ 우리나라 하늘 한 평 비추다 갈래요"라고 노래했던 시인 고정희(1948~1991).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그녀가 상한 영혼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흙에 심은 뿌리 죽는 법 보았나요"라고 묻는 것 같다.

 

평론가 김주연이 분석한 대로 이 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는 성경의 말씀과 겹쳐 읽힌다. '하늘 아래'라는 표현도 예수의 언약과 임재(臨在)를 둥글게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 넋으로 기댈 곳 없이 큰 고통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힘껏힘껏 껴안고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이 시는 보여준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다분히 기독교적인 신앙에 기초한 시편들을 써낸 고정희 시인은 기독교의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칼을 들이댔다.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라고 질문했고, 동시에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라며 고민했다. 그녀가 비판하고 날카롭게 투시한 대상은 눈앞의 현실 그 자체였으며, 돌봄이 있는 따뜻한 공동체는 그녀가 꿈꾸는 세계였다.

 

고정희 시인은 한 생애를 정열적으로 살다 간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다.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지냈고, 여성주의 문화집단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제도적 억압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힘, 그것이 자유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의 시는 항상 자유 의지에 속해 있는 하나의 에너지"라고 자평했는데, 조금의 호락호락함도 없이 평소 신념을 시 창작과 생활에서 실천했다. 한 시대의 깊고 어두운 계곡을 묵상했으므로 그녀의 시는 미지근하거나 융융한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는 80년대의 격문이면서 '우릉우릉 폭발하는 화산(火山)'이었다.

 

1991년 6월 지리산 뱀사골을 오르다 폭우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충격적인 죽음을 생각하면 생전에 쓴 시 '지리산의 봄 1-뱀사골에서 쓴 편지'가 자꾸 떠오른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라고 쓴 시. 그녀의 시를 읽고 있는 오늘 새벽은 내 가슴이 아프다.

 

 

 [애송시 100편 - 제 57편] 달은 추억의 반죽 덩어리 - 송찬호

 

 

 

 

 

누가 저기다 밥을 쏟아 놓았을까 모락모락 밥집 위로 뜨는 희망처럼

 

늦은 저녁 밥상에 한 그릇씩 달을 띄우고 둘러앉을 때

 

달을 깨뜨리고 달 속에서 떠오르는 노오란 달

 

달은 바라만 보아도 부풀어오르는 추억의 반죽 덩어리

 

우리가 이 지상까지 흘러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빛을 잃은 것이냐

 

먹고 버린 달 껍질이 조각조각 모여 달의 원형으로 회복되기까지

 

어기여차, 밤을 굴려가는 달빛처럼 빛나는 단단한 근육 덩어리

 

달은 꽁꽁 뭉친 주먹밥이다. 밥집 위에 뜬 희망처럼, 꺼지지 않는

 

 

 

 

▲ 일러스트=권신아

  동치미 무를 먹으며 아삭아삭 달을 베어먹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팥죽에 뜬 새알을 떠먹으며 어두운 밤하늘을 들락날락하는 달을 떠먹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달걀과 밀가루가 들어간 둥근 지짐이와 부침들을 먹을 때마다 달(빛)을 지져먹고 달(빛)을 부쳐 먹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모든 알들은 달을, 하얗고 부드러운 가루들은 달빛을 닮았다. 그리고 흰 고봉밥이, 노란 달걀 프라이가, 토실한 감자가, 탐스럽고 둥근 빵이 죄다 달을 닮아 있지 않은가. 그뿐 아니다. 밥상에 뜬 온갖 달들을 만들어내는 엄마와 아내와 누이와 딸이 모두 달의 여인들이니, 우리는 밥상에 뜬 달을 먹고 자라는, 그 달을 만드는 이 달에 의해 키워지는, 달의 후예들이다. 그러니 밥이 달이고, 밥의 집이 달의 집이다.

 

'조각조각' 달집 아래를 걸을 때, '모락모락' 밥집 곁을 지나칠 때 그 집들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부푸는 추억이자 꺼지지 않은 희망임을 깨닫는다. 저녁 밥상 앞에 둥그렇게 앉아 '한 그릇씩의 달'을 비우며 서로를 마주볼 때 '꼭꼭 뭉친 주먹밥'처럼 비로소 한 식구(食口)임을 확인한다. 그런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꽃의 향기를 구부려 꿀을 만들고/ 잎을 구부려 지붕을 만들고/ 물을 구부려 물방울 보석을 만들고(…) 이 세계를 둥글게 완성시켜 놓"('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는다. 달은 어머니처럼 둥글고, 이 둥근 것들을 우리는 끊을 수 없다. 밤의 어둠을 굴리는 달(빛)이 이울며 차며 '달의 원형'을 회복하듯, 우리도 그렇게 추억과 희망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들로 배가 둥그렇게 부르리라. 또 다른 달을 낳기도 하리라. 그것이 달의 역사(歷史)이고 달의 미래일 것이다.

 

 

 

80년대가 끝나갈 무렵에 출간된 송찬호(49)의 첫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가 불러일으켰던 반향은 컸다. 그는 마치 연금술사와도 같이, 시대와 가족과 인간과 사물과 언어를 비극적이면서 비의적(秘儀的)으로 결합시키곤 한다. "나는 시를 무겁게 시작한다. 그리고 오래 매만진다"는 시작 태도는 시의 이미지를 돌올하게 하고 형이상학적인 깊이를 거느리게 한다. 소를 치던 어린 시절 '아이 지게'를 갖는 게 꿈이었다는, 고춧가루 몇 되를 들고 가출해 소설을 쓰기도 했다는, 군대와 대학 생활을 제외하고는 고향 보은을 떠나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그는 자신에게는 '시 쓰는 일'이 전부일 뿐이라고 일갈하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이런 시인이라야 모름지기 전업시인일 것이다.

 

 

 [애송시 100편 제 -58편]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일러스트=잠산

번짐이라니. 바뀜이 아니라 번짐이라니. 목련꽃이 피는 일을,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절의 순환을, 너와 나 사이 사랑과 이별의 사건을,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그 둥?을, 시간과 공간의 옮김을 번짐이라고 부르다니. 먹물이 화선지에서 고요하게 번지듯이. 그리하여 번짐은 환함이라니. 씨나 날로 결어서 천을 짜듯이 조촘조촘 가는 것이라니.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나아가는 것이라니. 번짐이라고 부르면 나와 당신은 얼마나 가까운가. 이 생(生)을 받아 가꾸는 일이 얼마나 거룩한가.

 

장석남(43) 시인의 시는 강한 전염력을 갖고 있다. 그의 시는 '번지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나아간다. 밀어내고 부드럽게 떠나고 밀려들어오는, 그 '어쩌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우리들 '마음 그늘을 빌려서 잠시 살다가 가는 것들'을 아주 잘 들여다보고 귀담아듣는 출중한 감각을 자랑한다. "찌르라기떼가 왔다/ 쌀 씻어 안치는 소리처럼 우는/ 검은 새떼들"('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라고 쓴다거나,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준다/ 막 이삭 피는 보리밭을 핥는 바람/ 아, 저 혓자국!"('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이라고 쓸 때의 놀라운 감각이라니!

 

장석남 시인의 마음에는 '옹근 고요'가 살고 있는 것 같다. 옹근 고요 위에서 그의 시는 태어난다. 고독과 외면과 섭섭함과 흔들림과 설움과 간신히 잦아드는 것과 사소함과 곰곰 궁금함과 은밀함과 찬란함과 되비쳐옴과…… 그 모든 감정의 섬세한 자세를 그의 시는 그려낸다. '겨우'라고 수식될 세상 살림들의 속삭임과 혈육인 듯 함께 살면서 '물항아리에 물 차 오르면 거기에 어룽대는 물의 빛'과도 같은, 사람의 가슴에 도는 생(生)의 윤기를 발견해낸다. (삶에 윤기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시에도 자원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갈증/ 그건 아무도 모르게 영혼을 찢어놓는,/ 남은 모르는 갈증/ 갈증"('시법(詩法)')이라고 말하는 그는 우리 시대에 아주 드문 서정시인이다.

 

첫 시집을 내고 "나는 춤꾼이거나 가수이거나 아니면 유능한 세션맨이 되었어야 옳았다"고 고백하는, 해서 한때는 전기기타를 배우러 사설강습소를 다녔다는, 해서 한때는 배우로도 활동한, 거문고를 안고 사치를 부리기도 한다는 시인. 장석남 시인을 만날 때마다 나는 확신하게 된다, 모르긴 몰라도 시인은 울림통 하나쯤은 지닌 근사한 악기여야 한다는 것을.

 

 

 [애송시 100편 - 제 59편]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일러스트=권신아

그늘! 나비 그늘, 꽃 그늘, 나무 그늘, 처마 그늘, 담 그늘, 당신 그늘, 심지어 위태롭게 서 있는 전봇대나 바지랑대에도 그늘은 있다. 그늘은 눈부시지 않고 어둡지 않다. 뜨거운 햇살은 가려주고 비바람은 대신 먼저 맞아준다. 여운, 깊이, 여유, 멋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림자와 다르다. 그래서일까. 그늘 아래 서면, 잠시, 시간도 잊고 이름도 잊고 일도 잊고 갈 곳도 잊는다. 그늘 아래 스스로를 부리듯 노동과 불안과 걱정을 부려두고, 잊거나 잃은 것을 떠올리며 눈물짓기도 한다.

 

시간과 계절은 너무 빨리 달아나고, 우리는 너무 빨리 늙고, 늘 배고픔과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출근과 스트레스와 피로와 시름과 술과 담배에 지쳐 있는데… 맨땅에 뿌리를 내린 채 사시사철 변함 없는 사철나무의 그늘이니 참 깊고 넓겠다. 시인 장정일(46)이 꿈꾸던 '사철나무 그늘', 누구나 그런 그늘 하나쯤은 꿈꾸기 마련이다. '가장 장정일답지 않는 시'임에도 가장 많이 애송되고, 시인 스스로도 첫 시집을 여는 시로 삼았던 까닭일 것이다.

 

이 시는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이 반복되는 보니엠(Boney M)의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Rivers of Babylon)'를 들으며 읽어야 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편, 137편)라는 성경 구절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탑과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번영의 땅 바빌론은, '시온(Zion·예수살렘의 도시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을 생각하며 견뎌야 했던 이방의 땅, 고난의 땅, 타락의 땅이다. 원조 '디아스포라'의 고난과 희망이 담긴 디스코 풍의 이 노래는, 80년대 내내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던 공장노동자들의 휴식시간을 장악하기도 했던가.

 

불온하다는 말, 문제적이라는 말이 장정일처럼 잘 어울리는 시인이 또 있을까. 중졸의 학력과 방황의 청소년기,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했다는 독학, 최연소 '김수영 문학상' 수상, 극작가, 소설가, 외설 시비, 무시무시한 독서량, TV 교양프로 진행, 교수…. 그는 정복자처럼 자신의 삶을 찬탈했으며 게릴라처럼 80년대 시단을 점령했다. 그리고 어느날 '시 쓰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그가 이른바 '쉬인' 장정일이다. '동사무소 하급 공무원'을 꿈꾸며 들었을 '바빌론의 강가'를 다시 들으며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쉬는 마음'을 헤아려보는 아침이다.

 

 

[애송시 100편 - 제 60편]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江)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1933~1997)은 생전에 '슬픔의 연금술사'로 불린 시인이다. 시 '눈물 속의 눈물'에서 "꽃잎 속에 새 꽃잎/ 겹쳐 피듯이// 눈물 속에 새로 또/ 눈물 나던 것이네"라고 노래했듯이 그의 시들은 눈시울이 촉초근하게 젖어 있다.

 

박재삼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이 시는 노을이 붉게 번지는, 굽이쳐 흐르는 강을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며 썼을 것이다. '눈물'과 '울음'과 '강'과 '산골 물'과 '바다'로 연결되는 물의 이미지는 누선(淚腺)을 자극하고, '햇볕'과 '불빛'으로 연결되는 불의 이미지는 삶의 소진과 소멸을 두드러지게 하는 바, 이 시는 사랑의 비극과 고독과 생(生)의 무상(無常)을 동뜨게 드러낸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이라는 표현은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을 아는 내 마음 꽃나무"('자연(自然)')라는 표현과 쏙 빼닮았다. '눈물나고나'와 '보것네' 등의 종결어미에서는 그의 다른 시편에서도 예사인 전통적인 가락의 활용을 보여준다. 이 시가 처음 월간지에 발표된 후 박두진 시인은 "노도(怒濤)처럼 세찬 현대의 휩쓸림 속에서 배추 꽃목처럼 목이 가늘고 애잔한, 실개천처럼 맑고도 잔잔한 서정"이라고 평해 신예 박재삼을 주목했다.

 

박재삼 시의 가옥을 떠받치는 두 기둥인 '한'과 '가락'의 능수능란한 구사는 그가 자라난 생활환경과 관련이 있다.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생선 장사를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집이 가난해서 낮에는 중학교 급사로 일하면서 야간반에서 수학을 했다. 집 형편이 옹색해 책을 살 수 없어 '가람시조집'을 빌려다 공책에 베껴 쓰고 늘 외웠고, 중학 시절 김상옥 시인의 작문 지도를 받으면서 전통시의 낭창낭창한 가락에 눈떴다.

 

병을 얻어 직장을 그만둔 후로는 시를 쓰고 신문에 바둑 관전평을 써서 생계를 꾸렸다. '요석자(樂石子)'라는 이름으로 바둑 관전평을 썼는데 바둑계에서는 그를 '박국수(朴國手)'라고 불렀다. 병을 앓고 난 후, 가난한 시인은 새봄을 맞는 소회를 썼다. "눈여겨 볼 것이로다, 촉트는 풀잎,/ 가려운 흙살이 터지면서/ 약간은 아픈 기(氣)도 있으면서/ 아, 그러면서 기쁘면서…/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형(兄)뻘로 보이는 넉넉함이로다."('병후(病後)에') 그러니 우리네 삶이 '햇볕 반(半) 그늘 반(半)'이라 하더라도 오늘 당신은 글썽임보다 반짝이는 쪽을, 촉트는 생동(生動)을 보아라.

 

 

 [애송시 100편 - 제 61편] 노동의 새벽 - 박노해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일러스트=권신아

'박노해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음반'(2004)을 들으며 시집 '노동의 새벽'(1984)을 읽는다. 장사익, 윤도현 밴드, NEXT 등이 '노동의 새벽' 시편들에 곡을 붙여 노래한 앨범이다. '노동의 새벽'은 어두운 새벽빛의 표지다.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 상으로 바칩니다"라는 시인의 헌사로 시작하고 있다. '노동해방'을 줄여 필명으로 삼은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50)의 시에, 독설로 민중문학론을 설파했던 고(故) 채광석의 기획 및 해설과, 민중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고(故) 오윤의 판화가 어우러져 사회과학 출판사 풀빛에서 출간된 시집이다. '노동'과 '해방'과 '문학'의 접점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이 시집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한 상징이다. 금서(禁書)로 노동문학의 전범이 되었고, 판매량이 100만부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책 중 한 권이 되었다.

 

이 시는 '시대의 새벽을 부른' 박노해의 명실상부한 대표시다. 조출(조기출근)-야근(야간잔업)의 노동현실에서 야근현장은 졸음과 사투를 해야 하는 전쟁터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시다의 꿈')으로, 조는 순간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손 무덤')야 하는 무참한 사고 없이 무사히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이면 속이 빈 '쓰린 가슴'에 '차거운 소주'를 부을 수밖에. '어쩔 수 없는' 분노와 슬픔 때문에 붓고, '기어코'의 깡다구와 오기의 힘으로 붓는다. 고통과 절망을 위무하기 위해 붓고, 연대와 희망을 고무하기 위해 붓는다. 차가운 소주가 뜨거운 소주로 변하는 '노동자의 햇새벽'에, 식히기 위해 붓고 태우기 위해 붓는다.


 

그는 열다섯에 상경해 야간 상고를 졸업하고 섬유·화학·건설·금속·운수 노동을 하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에 투신했다. '사노맹(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반국가단체 수괴'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나는 노동자이자 시인이며 혁명가입니다"라는 최후진술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지금은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지역을 돌며 생명과 평화와 나눔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수감 중에 썼다는 시 '그 해 겨울나무'가 떠오른다. "그해 겨울,/ 나의 시작은 나의 패배였다"로 시작해 "그해 겨울,/ 나의 패배는 참된 시작이었다"로 끝을 맺는다.

 

 

 [애송시 100편 - 제 62편] 눈물 - 김현승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1957년에 펴낸 김현승(1913~1975)의 첫 시집 '김현승시초'에 실려 있다. 시집의 장정을 서정주 시인이 맡았다고 되어 있고, 가격은 육백환이라 적혀 있다. 시인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를 주선하여 준 서정주 시백의 우의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고 자서에 썼다. 서정주 시인은 김현승 시인에 대해 "사람 사이의 정(情)에 철저했던 그는 정의감을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고수하는 데서도 철저했던 것인데, 이것은 그의 고독(孤獨)의 원인일 것이다"라고 평가해 친근한 사이임을 자랑했다.

 

어린 자식을 잃은 참혹한 슬픔을 노래한 시들은 많다. 김광균의 시 '은수저'가 그렇고, 정지용의 시 '유리창'이 그렇다. 김광균은 "저녁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가 앉던 밥상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라고 썼고, 정지용은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라고 썼다.

 

아들을 잃고 난 후 창작한 것으로 알려진 시 '눈물'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의지해 그 슬픔을 넘어선다. '들이라 하올제'의 대상이나 '당신'은 그가 신앙한 절대자였다. 그는 눈물이야말로 한 점 생명의 씨앗과도 같고, 더러움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이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웃음'보다는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눈물'을 귀하게 보았다. 눈물의 참회 이후 인간이 지니게 될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옹호했다. 이 시가 기독교적 신앙시의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가 정작 염원한 것은 더 심오한 가치였다. 그는 스스로 밝히길 "나는 또한 신앙에 순응하기만 하는 시인은 아니다"라며 "떳떳하고 참되고 올바른 인간정신을 나의 시에 스며들게 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느낀다"고 했다.

 

눈물이 너무 흔해서 아무래도 천국엘 못 갈 것 같다고 한 김현승 시인의 자화상은 어떠했을까. "내 목이 가늘어 회의에 기울기 좋고", "연애엔 아주 실망(失望)이고" "눈이 커서 눈이 서러워,/ 모질고 싸특하진 않으나,/ 신앙과 이웃들에 자못 길들기 어려운 나"('자화상')라고 써 본인의 내·외형적인 기질의 근사치를 내놓았다.

 

현대시 100년의 역사에서 김현승 시인처럼 고독과 슬픔을 지독하게 노래한 시인도 드물다. '싸늘한 증류수의 시대'를 살다간 그에게 고독과 슬픔과 뜨거운 눈물은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이었다. "슬픔은 나를/ 목욕시켜준다,/ 나를 다시 한 번 깨끗게 하여준다"며 "슬픔 안에 있으면/ 나는 바르다!"고 썼을 정도로. 숭전대학교(현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에 기도 중 쓰러진 뒤 병석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의 옹호자였던 시인은 영혼의 옷마저 벗고 우리 곁을 떠났다.

 

 

 [애송시 100편 - 제 63편] 그리스도 폴의 강(江) 1 - 구상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 일러스트=권신아

구상(1919~2004) 시인은 강과 물을 유난히 사랑했던 시인이다. 당호를 관수재(觀水齋)라 하고 서재에 '관수세심(觀水洗心)'이라는 편액을 걸어놓고는, 그 글귀대로 여의도 윤중제방에 나아가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어내곤 했다. 수(水)와 심(心)은 통하는 글자이기에 관수(觀水)와 세심(洗心)은 '마음을 바라보는' 일인 바, "마치 매일예배를 보듯/ 나는 오늘도 강에 나와 있"('겨울강 산조(散調)')곤 했던 것이리라.

 

무릇 물은 맑다. 흐르면서 넓어지고, 끊이지 않고, 거슬러 오르지도 않는다. 무엇이든 그 밑바닥으로 흘러들고, 다른 무엇에 스며들었을 때에는 이미 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물이었다./ 맑은 물이었다./ 맑은 물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가면서 항상 제자리에 있었다./ 제자리에 있으면서/ 순간마다 새로웠다.// 새로우면서 과거와/ 이어져 있었다."('그리스도 폴의 강 11'). 강에서 사람을 업어 건네는 수행을 통해 예수 발현(發顯)을 체험했던 성자 '그리스도 폴'의 강처럼, 시인에게 강은 건너가야 하는 삶의 터였으며 구도의 방편이자 사랑의 궁극이었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기에, 오늘이 바로 영원이고 오늘 하루가 신비의 샘이다. 오늘 시방 그 영원을 살고 있기에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고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하는('오늘') 것이리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꽃자리')인 것이리라. 그러니 내가 앉아 있는 지금-여기의 꽃자리가 '반갑고 고맙고 기쁠' 수밖에. 그는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파랑(波浪) 많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시편들은 고요한 강물처럼 조용하고 편안하다. 진솔하고 정갈하다. 그의 삶도 시와 다르지 않았다.

 

이 시는 아침 강의 신비와 신성을 노래하고 있다. 자욱한 아침 안개는 물과 하늘, 여기와 저기,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지운 채 세계를 하나의 '허공'으로 만들고 있다. 그 허공 속을 저어 가는 나룻배는 이미 비승비속(非僧非俗)이다. 구불구불 휜 흰 백양목 가지에 앉은 검은 까치 한 마리, 여인네 속살 같은 물밑의 모래, 생래의 즐거움으로 노니는 잔 고기떼, 동터오는 황금의 햇발은 인간이 침범하지 않는 태고(太古)적 아침 강의 이미지들이다. 이런 강을 마음에 품고 하루의 아침을 시작한다면, 매일 매일의 밥벌이 터에서도 '밥 먹는 짐승'으로 전락하지 않을 것 같다.

 

 

 [애송시 100편 - 제 64편] 섬진강1 -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일러스트=잠산

김용택(60) 시인은 섬진강의 시인이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 덕치초등학교 선생님이다. 그는 하루도 섬진강을 보지 않는 날이 없이 섬진강과 함께 살아왔다.

 

그를 80년대 대표적 농촌시인으로 우뚝 서게 한 섬진강 연작시는 섬진강변의 새와 풀꽃과 흙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가득 담고 있다. 그에게 섬진강이라는 공간은 "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을/ 강물에 가져다 버리"('섬진강 2')는 누이가 살던 곳이요,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 나르"면서 "해 저문 강 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섬진강 9')가 살아온 곳이요, "누구는 이라자라 쟁기질 잘하고/ 소 잘 다루고/ 누구는 선일 잘하고/ 모 잘 심고 써레질 잘하고"('섬진강 13') 그리하여 다 사람 구실을 하고 인심에 변동이 없는 곳이다.

 

이 시는 섬진강 연작시의 말머리 시이다. 생명들의 이마에 꽃등을 달아주는 생명의 젖줄 섬진강을 노래했다. 지도에도 없지만 그네들만은 서로 아끼고 챙겨가며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사는 곳, 일어서서 껄껄 웃는 지리산과 훤한 이마 끄덕이는 무등산을 부모처럼 이웃처럼 모시고 사는 곳, 그런 큰 산들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까닭에 지금껏 마른 적 없는 도도한 흐름이 있는 곳, 크고 굳세고 건강한 살림 공동체…….

 

섬진강 연작시에는 시골 사람들의 투박한 입담이 들꽃처럼 곳곳에 피어 있다. '너무 그리 말더라고' 등의 전라도 방언과 '저런 오사럴 놈들' 같은 상말을 구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툭 터놓고 말하는 그의 시는 맑고 정직하다. "나는 내 이웃들의 농사에/ 내 손이 희어서 부끄러웠고/ 뙤약볕 아래 그을린 농사군들의/ 억울한 일생이/ 보리꺼시락처럼 목에 걸려/ 때로 못밥이 넘어가지 않아/ 못 드는 술잔을 들곤 했다"('길에서')는 고해성사와도 같은 자기고백을 보라. 그럼으로써 "우리 어매 날 낳아/ 가난한 일 속에 날 기른/ 헐벗은 젖가슴 같은 산천"('섬진강 27')을 다 노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아직도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 땅을 파는/ 농군"('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의 편에 섰다. 살 아프고 맘 아픈 그들의 편에 서서 환장할 것 같은,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한 농촌의 현실을 다 발언했다.

 

그의 시에서는 포슬포슬한 흙냄새가 난다. 그의 시를 통해 은어 떼가 헤엄치는 푸른 강과 넓디넓은 평야를 본다. 가슴이 넓어지고 따뜻하다.

 

 

 [애송시 100편 - 제 65편] 생명의 서(書) -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일러스트=권신아

유치환(1908~1967) 시인의 작품 가운데 애송시 후보를 꼽으라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는 시 '행복'을 떠올릴 독자도 있겠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는 편지의 고수(高手)였다. 일본 유학시절,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후일 그 소녀와의 결혼식 때 들러리를 섰던 화동(花童)이 먼 훗날 '꽃'의 시인으로 유명해진 김춘수였다. 시조 시인 이영도에게 보냈던 편지들은 책으로 묶이기도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나,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그리움')와 같은 절절한 연시들은 바로 사랑의 편지에서 비롯되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사랑의 시인'과는 사뭇 다른, '의지의 시인' '허무의 시인'의 면모가 유치환의 진면목에 더 가깝다. 형이상학적인 역설을 근간으로 하는 '생명의 서'는 유치환 시 정신의 정수를 보여준다. 생명이 부대끼는 병든 상태에서 무생명의 공간, 바로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을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사멸·영겁·허적 등의 관념적 시어가 사막의 무생명성을 강조한다. 또한 열사의 끝 그 '영겁의 허적' 속에 '호올로' 맞는 고독이 열렬하다는 것, 생명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회한 없는 백골'이 될 때까지 배우겠다는 것에서도 생명에의 역설은 두드러진다. 모든 생명의 본연은 무(無)다. 생명의 시작은 죽음의 끝과 이어져 있다. 그러기에 사멸의 땅 사막에서 근원적 생명을 배우려는 것이리라.

 

대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영겁의 시간이 층층이 새겨진 사막의 적막, 그 열렬한 고독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에의 충동이 샘솟는 단독자(單獨者)가 있다. 물 한 줄기 찾을 수 없는 사멸의 사막 끝을 생명에의 의지를 등에 지고 낙타처럼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그러기에 생명의 '서(書)'에는 생명이 충만한 삶의 서(序)와 서(誓)뿐만 아니라 경전의 의미까지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형이상학적 전통이 희박한 우리 현대시사에서, 드물게도 인간의 의지 혹은 정신적 높이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를 '생명파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이고 '사막' 하면 그의 시가 떠오르는 까닭이다.

 

 

 [애송시 100편 - 제 65편]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2006년>

어른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해도 시가 될 때가 많다. 주름살 사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짧고 두서없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말이지만 마늘처럼 매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씀으로부터 태어났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는 앉아 쉴 곳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어디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허리를 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가 심상찮은 것은 의자를 내놓을 데를 태연무심하게 열거하는 어머니의 품 큰 생각에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꽃과 열매와 참외밭과 호박과 망자(亡者)에게도 의자를 내주어야 한다는 그 우주적인 마음 씀씀이에 있다. 공생과 배려에 기초한 이런 모성적 마음씨는 식구를 다 거둬가며 밥을 먹여온 삶의 연륜에서 생겨난 것이리라.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인생을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라고 먹줄을 대듯 명쾌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정록(44) 시인의 시에는 모자(母子)가 자주 등장한다. 시 '꽃벼슬'에서는 한식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모자가 찾아간다. 아들은 무덤에 난 쥐구멍에다 꽃다발을 꽂아드린다. "꽃밥 한 그릇 바치는 것이다". 어머니는 쥐구멍에 술잔을 따르며 "새끼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라고 익살맞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어머니는 농(弄)으로 "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라시며 "아예 술병을 쥐구멍에 박아놓는다". (모자 사이에 오가는 이 능청능청한 대화여.)

 

이정록 시인의 시는 이처럼 곰살가운 살내가 수북하니 풍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옷 벗고 대중목욕탕에 함께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사랑은 울컥이란 짐승의 둥우리"라고 말하는 그는 안간힘을 쓰며 사는, 몸살 앓는 사람들의 머리맡으로 가 슬그머니 앉는다. 식은땀을 흘리는 자식의 머리맡에서 차가운 물수건을 들고 꼬박 밤을 새던 어머니처럼.

 

그는 시와 삶의 거리를 18.44미터라고 말한다. (18.44미터는 투수판에서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이다.) 18.44미터가 곧 "너와 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거리"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삶을 정면으로 팽팽하게 응시한다. 삶에 근거해 삶의 현장에서 그의 시는 발발한다.

 

"내 꿈 하나는 방방곡곡 문 닫은 방앗간을 헐값에 사들여서 술집을 내는 것"('좋은 술집')이라고 말하는 시인. 가난하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공짜 술도 나눠주고 봉지쌀도 나눠주고 싶다는 시인. 그는 소년교도소에 가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는 천안 중앙고등학교 교사이다.

 

 

[애송시 100편 - 제 67편]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황인숙 시인은 좀체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는 방식도, 취향도, 생각도, 표정도, 말투도, 심지어 헤어스타일까지도. 황 시인의 절친한 후배 장석남 시인은 사석에서 이렇게 얘기한 적 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이제 30년이 지나가는데도 정말 안 변하는 사람이 황인숙 선배라고, 그쯤이면 도(道)의 경지라고. 새들은 변하지 않는다, 늙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새'과다.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새처럼, 그는 명실상부한 '프리랜서'로 30여 년을 자유롭게 살고 있다. 글을 쓰며(맛깔스런 그의 산문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세든 집에서 혼자 산다. 책과 음악과 식도락과 고양이(들)와 그의 단짝 벗들과 더불어 산다. "마감 닥친 쪽글을 쓰느라 낑낑거리며/ 잡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부르짖는/ 가난하고 게으른 시인이/ 그 동네에도 살고 있을 것이다"('파두―비바, 알파마!')

 

타인에게 칼을 건넬 때는 반드시 칼등을 잡고 칼날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건네는 것이 예의다. 이사 갈 때 칼을 버리고 가면 그 집과의 인연을 끊고 가는 것이고, 부엌에 칼을 아무렇게나 놓으면 가족이 다치거나 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칼(날)이 날카롭기 때문에 이런 금기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는 금기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칼로 사과를 먹다가 언니에게 이 금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건만, 지금도 여전히 시인은 사과껍질을 깎던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칼로 사과를 먹으며 누군가에게 칼로 사과를 먹였던 일을 떠올린다.

 

이 시의 맛을 깊게 하는 건 마지막 연이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오래 되짚어 보게 하는 구절이다. 젊지 않은데도, 여전히 가슴 아플, 많은 일이 줄지 않는 걸 보면 칼로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칼로 주는 사과를 너무 많이 받아 먹었나 보다. 칼로 먹고 칼로 먹였던 게 비단 사과뿐이었겠나 싶다. 뭔가를 준다는 게 이렇게 위태로울 때가 있다. 그것이 자기에게든 타인에게든, 그것이 사랑이든 배려든. 젊음이 아름다운 건, 가슴 아플, 많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젊음은 그러기에 두려운 대상이다. 황인숙 시인은 여전히 젊고 경쾌하다. 계속 칼로 사과를 콕콕 찍어먹을 수 있을 만큼! 부리로 사과를 콕콕 쪼아먹는 새처럼, 아니 그의 시처럼.

 

 

[애송시 100편 - 제 68편]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일러스트=잠산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난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으니, 나는 풀이 더 많고 사람이 다닌 발자취가 적은 외로운 길을 선택해서 걸어갔노라고 쓴 시. 그리고 그런 선택으로 인하여 나에게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쓴 시.

 

이 아침에도 우리의 목전(目前)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놓여 있다. 낯익고 평탄한 길이 있고, 그렇지 않은 길이 있다. 소의 잔등처럼 유순하고 완만하고 반듯해진 길이 있고, 나아갈 틈이 없는 가시넝쿨을 헤치듯 누군가 처음으로 개시(開示)해야 하는 길도 있다. 그러나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인 우리는 각지고 불규칙한 길보단 대열의 후미에서 앞의 궤적을 뒤따라가고 싶어진다. 은근슬쩍 길들여졌으므로, 이 순응을 등지고 뒤집는 일은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어렵다.

 

이 시는 우리 마음에 악착스레 붙어사는 순응주의를 되돌아보게 한다. 보통 사람들의 비겁과 안일에 대해 울화통을 터뜨린다. 앞선 행로에 기생하여 '꼬리를 물고 뱅뱅' 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야멸치게 묻는다. 좌충우돌이면 어떠냐고, 뒤죽박죽이면 어떠냐고 묻는다. 풍파(風波), 그것이 우리들 삶의 표정이며,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므로 안주(安住)하려 하거나 상처받지 않으려 하지 말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나, 이 야유는 좀 불편하다.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그래서 만만히 볼 수 없는 이런 맹랑한 발언은 우리들의 속을 긁어 놓는다.

 

이 시가 실려 있는 김중식(41) 시인의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의 시편들은 길들여진 우리의 일상과 사고를 전복하려는 노력을 줄기차게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우회(迂廻)가 없다. 그는 스스로 자초하는 존재들의 억센 자유의지를 격려한다. 시집 뒤표지 글은 이렇게 썼다. "자기 삶을 방목(放牧)시킨 그를 나는 존경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목된 삶은 야생마처럼 갈기를 세우고 주인의 울타리를 넘어서려 한다. 그 고투의 흔적이 역력한 그의 연보를 읽을 때 나는 열등감을 느낀다."

 

사는 일이 지치고 가야 할 길이 막막할 때 스스로를 이렇게 불러보자. "주인공아!" 생념(生念)이라 했으니 엄두를 내보자. 박약한 의지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자. 당신은 당신의 삶의 후견인(後見人). 아무도 간 적 없는 길을 당신이 앞서가고 앞서간 당신을 당신이 뒤따라가는 것. 야단법석인 이 삶을 살아 가야 할 주인공아

 

 

[애송시 100편 - 제 69편] 농무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일러스트=권신아

'우리'라는 말은 참 오묘하다. '우리'라는 말에는 내가 들어있고 네가 들어있다. '지금-여기'라는 울 안에는 '너' 하나를 비롯해 무한한 '너'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그 '안'에는 널따란 품 같은 수평적 친밀함은 있지만 수직적 높낮이는 없고, '한솥밥'이라는 공모와 공유와 공감의 연대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뜨끈뜨끈한 끈기가 우리의 어깨를 감싸곤 한다. 신경림(72) 시인은 '우리'라는 시어를 우리의 시와 현실 속에 말뚝처럼 세워놓았다.

 

긴급조치가 발령되기 시작했던 197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된 시집 ≪농무≫는 '우리' 현실의 사실주의적 묘사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시적 발견이었다. 이를테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파장(罷場)>)이라며 민중의 삶과 민중들의 연대감을 살갑게 담아내곤 했다. 혹은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겨울밤>)이라며 농민들의 애환과 정서를 일체의 수식 없이 단숨에 끌어올리곤 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하나의 민중적 경사'로, 70년대 '민중시의 물꼬를 튼' 시집으로 평가되었다.

 

농무는 두렛일을 하며 두레패들과 함께 놀아야 하는 농악과 춤이다. 그러니 본래의 무대는 논두렁이나 밭두렁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시에서 농무는 운동장의 가설무대에서 분을 바르고 구경꾼들을 위한 볼거리로 전락해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비어가고 쇠락해가는 농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술과 노름과 빚과 주정과 싸움과 울음만 늘어나는 농촌의 현실이 답답하고 고달프고 원통해서 농사꾼인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술잔이 돌고 술기운 취해서 걸립패의 후예인 '우리'는 보름달 아래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에 나선다.

 

소시장을 거쳐 도살장을 돌며, 임꺽정과 그의 배신자 서림이처럼 한패가 되어 놀아보지만, 쪼무래기 처녀애들이나 꼬일 뿐이다. 돌고 돌면서 점점 더해가는 '우리'의 신명에는 술기운과 분노와 원통이 묻어나고, 놀고 놀면서 점점 가벼워진 '우리'의 고갯짓에는 아직 흥과 신바람이 남아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인 '우리'의 고단한 삶을 신명 난 가락에 실어, 치고 빠지는 슬픔과 해학의 정조가 일품이다.

 

 

[애송시 100편 - 제 70편] 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 버린 일 얼마나 오래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大)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게 퍼져서. 그런데, 스윽, 칼날이 지나가듯 제비가 공중을 한 층 횡으로 서늘하게 자르면서 지나간 모양이다. 손가락을 퉁기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기습처럼.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민첩한 한 줄기 바람으로.

 

집과 나의 중심부를 뚫고 지나갔으니 급소(명자리)를 맞은 듯 어이없고 어리둥절해서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얼마나 시원한 것인가. 체증(滯症)이 가신 듯했을 것이다. 마음을 꼭 붙들어 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마음을 사방으로 허술하게 경계 없이 풀어놓는 것으로서 우리는 마음의 열림을 얻기도 한다. 그것이 무방비의 미덕이다. 좀 게으르게 혹은 별 준비 없이 멍청하게 있다가 한번쯤 당해보기도 해보라. 그런 당함에는 오히려 소득이 있다. 마음의 앞뒤 문을 다 열어놓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을 볼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조급하게 각박하게 쓰느니 차라리 이처럼 마음에 장애를 아예 만들지 않음이 오히려 '심심(深心)'이요, '정(定)'에 가깝다.

 

손택수(38) 시인은 긍정심이 아주 많은 시인이다. 다른 존재들의 '빛나는 통증'을 그의 시는 받아 안는다. 그의 시는 그가 어렸을 때 그곳서 자랐다는 전남 담양 강쟁리 마을을 배경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곳 마을 사람들의 천문(天文)적인 상상력은 그의 시에 들어와 크게 빛을 발하면서 그만의 새로운 서정을 만들어낸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 눈이 올랑갑다"('가새각시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와 매달 스무 여드렛날은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달과 토성의 파종법')이자 "땅심이 제일 좋은 날"이라며 밭에 씨를 뿌리러 가던 할머니의 상통천문(上通天文)이 자주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콧구멍에는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혼쥐로 살고 있다는 믿음, 임신한 몸으로 시큼하고 골코롬한 홍어를 먹으면 태어날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진다는 믿음 등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 마을에서 자연 발효된 이런 금기사항은 우리 시에서 어느덧 희귀해진 것이어서 각별하고 값지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안마시술소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 안마시술소 맹인들에게 시를 읽어주면서 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시영 시인은 그를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고향의 기억'을 잊지 않는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역린(逆鱗)'을 생각한다.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있다고"('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하는데,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인 역린을 생각한다. 그의 시에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생(生)을 펄떡이게 하는, '뽈끈 들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시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은 역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애송시 100편 - 제 71편]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일러스트=권신아

소월(1902~1934)을 생각하면 노랫가락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그의 시가 노래처럼 가락을 타고, 실제로 그가 노랫가락을 즐겨 듣고 그 노랫가락을 시로 썼고, 무엇보다 그의 시가 많은 노래로 불렸기 때문일 것이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엄마야 누나야〉)에서 시작해 정미조의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개여울〉), 홍민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부모〉), 장은숙의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못잊어〉), 건아들의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활주로의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마야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진달래꽃〉)에 이르기까지. 가히 '국민시인'이라 칭할 만하다.

 

그런 소월을 생각하면 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시가 〈진달래꽃〉이다. 소월은 외가인 평북 구성에서 태어나 그 가까운 정주에서 자랐으며 그 가까운 곽산에서 31세의 나이에 아편 과다복용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정주 가까운 영변에는 약산이 있고, 약산은 진달래꽃으로 유명하다. 그가 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약산의 진달래꽃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꽃'으로 보통명사화시키고 있다.

 

'가실 때에는'이라는 미래가정형에 주목해볼 때, 이 시는 사랑의 절정에서 이별을 염려하는 시로 읽힌다. 사랑이 깊을 때 사랑의 끝인 이별을 생각해보는 건 인지상정의 일. 백이면 백, 헤어질 때 '말없이 고이' 보내주겠다고 한다. 죽어도 눈물만은 보이지 않겠다고 한다. 아무튼 그땐 그렇다! 그 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해달라는 소망이야말로 이별의 로망인 바, 떠나는 길에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리려는 이유일 것이다. 특히 '아름'은 두 팔로 안았던 사랑의 충만함을 환기시켜 주는 감각적 시어다.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떠나는 건 아무래도 여자에게 더 어울린다. '말없이 보내드리우리다'나 '죽어도 아니 눈물을 보이겠다'는 결기야말로 남자다운 이별의 태도일 것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실 그때, 눈물을 참기란 죽는 일만큼이나 힘겨운 일이지만 그래도 당신을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겠고, 당신이 '사뿐히 즈려 밟고' 떠날 수 있도록 눈물만은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 이 시의 전모다. 얼마나 애틋한 사랑시인가. 이 사랑시는 영혼을 다해 죽음 너머를 향해 부르는 절절한 이별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초혼·招魂〉)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애송시 100편 - 제 72편] 마음의 수수밭 -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1994 년>  - 천양희

 

 

 

 

▲ 일러스트 잠삼

마음을 네모진 돌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다. 비가 떨어져도 깨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네모진 돌. 그러나 우리네 마음이 어디 그러한가. 마음은 사나운 코끼리에 비유되고 번갯불에 비유되고 원숭이에 비유되니 그 분주함과 변화무쌍을 제어하기 어렵다. 시시각각 생기면 사라지니 붙잡으려야 붙잡을 수 없다. 마음에는 '차츰'과 '조용히'와 '차근차근'이 살지 않는다. 마음은 근심의 주머니여서 고통에 결박되므로 큰 병(病)의 뒤끝처럼 완쾌가 드물다.

 

이 시는 쉬지 않는 마음을 수수밭의 일렁임에 빗대었다.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이 시는 강원도 어느 마을에서 만난 수수밭이 시 창작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죽음을 각오하고 떠난 여행길에서 살아 돌아온 마음으로 쓴 시"라고 고백했다. 바람결에 서럽게 서걱대는 수수밭에 앉아 통곡을 했다고도 한다. 그런 일이 있은 지 8년 만에 이 절창의 시는 태어났다고 했다. 시인은 암처럼 깊어진 삶의 그림자를 끌고 보리밭과 수수밭과 계곡 초입에 있었을 절을 지나 산을 올랐을 것이다. 속 빈 고사목을 두들겨 쪼는 까막딱따구리도 도중에 만나면서. 절벽에 홀로 섰을 때 산 아래 저쪽에서 아직도 쪼그리고 앉아 수수밭처럼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멀찍이서 보았을 것이다. 비로소 고통마저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통과 안온과 증오와 자애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화엄의 생명세계를 보았을 것이다. 저속하고 용렬한 세상과의 불화가 사라졌을 것이다.

 

천양희(66) 시인은 1965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올해로 시력 43년이 되는 그녀는 "고통에 함몰된 나를 시가 구원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럴까. 김승희 시인은 그녀의 시를 "고독 위에 새긴 존재의 찬란한 금속세공과도 같다"고 평했다. 아직도 원고지에 시를 쓰고, 시를 쓰기 전에는 꼭 손부터 깨끗이 씻는다는 시인.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벌새가 사는 법〉) 그녀는 혹독하게 그녀의 '몸을 쳐서' 시를 쓴다. 고통의 몸을 쳐서 쓴 시들이기에 그녀의 시편들은 존재들의 뒤편을 읽어낸다. 문득 생(生)의 뒤란으로 돌아가 만나게 되는 쓸쓸함과 욕됨과 근심의 얼굴을. 시 〈뒤편〉에서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라고 썼듯이.

 

시집 《너무 많은 입》에 실린 '시인의 말'은 그녀의 골똘한 시작(詩作)을 짐작하게 한다. "시 생각만 했다 시 생각만 하다가 세상에 시달릴 힘이 생겼다 생긴 힘이 있어 시 생각만 했다 그토록 믿어왔던 시 오늘은 그만 내 일생이 되었다, 살아봐야겠다."

 

 

[애송시 100편 - 제 73편] 반성 704 - 김영승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1987년> - 김 영 승

 

 

 

 

 

▲ 일러스트 권신아

김영승(49)은 반성의 시인이다. 그는 술이나 잠에서 반쯤 깬 반성(半醒)의 시인이고 기존의 서정시로부터 반 옥타브쯤 들떠 읊조리는 반성(半聲)의 시인이다. 가난과 무능으로 일그러진 욕망의 고백을 일삼는 반성(反性)의 시인이고, 구도자적 치열함으로 당대와 스스로를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반성(半聖)의 시인이다. 그는 이 모든 반성의 삶을 돌이켜 살피며 반성(反省)한다. 반성하는 기록자, 반성하는 반항인, 반성하는 백수(白手), 반성하는 주정꾼, 반성하는 폐인, 반성하는 시인이 바로 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반성시는 취언(醉言)이고 포르노이고 일기이고 철학이고 종교이기도 하다.

 

'밍키'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강아지 이름이다. "놀랍고 분(憤)해 죽겠다는 듯 밍키가 짖는다/ '저젓……영키야!'/ 하며 어머니가 소리치고 나서 웃는다// 영승이를 부르시려 한 건지/ 밍키를 부르시려 한 건지// 하긴 나를 밍승이라고 부르면 또 어떠랴"(〈반성 764〉),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서럽다// 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 밍키를 보면/ 서럽다"(〈반성 673〉)에서처럼, 그는 스스로를 반성할 때 슬쩍 자신을 밍키에게 얹어놓곤 한다.

 

이 시에서도 병들고 구차한 밍키의 모습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며, 스스로가 밍키의 남편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밍키도 아닌, 밍키의 남편 같다는 데서 날카롭고 쓸쓸한 유머는 더해진다. 밍키에 대한 사랑은, 설움과 누추함 속에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동병상련일 것이다. 실은 아내도 없이 상처투성이로 뒹구는 백수의 외로움과 고독과 소외를 얘기하려는 것이리라. 그가 동병상련하는 것은 구차한 강아지, 밍키만이 아니다. 발로 눌러 끄는 선풍기(〈반성 743〉)나 똥통에 빠진 슬리퍼 한 짝(〈반성 827〉)이나 만신창이가 된 풍뎅이(〈반성 608〉)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아름다운 폐인〉)라는 그의 자조와 위악과 오만은,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그는 자신의 시를 "훔쳐보기만을 하는 변태성욕자처럼/ 자기자신과 세계에 대한 불연속적 보고서의 작성자로 전락한/ 사실무근한// 인간과 인간사와/ 그리고 '나'라고 하는 개체의 일들을/ 왜곡되게 기록한 것//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서정시"(〈반성·서(序)〉)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렇게 반성의 끝을 향해 치달았던 그의 시는 개인과 젊음이 차압당한 폭력적이었던 80년대에 대한 저항이자, 그 회복을 위한 자존과 실존의 고해성사일 것이다. 우리 시사에서 드물게도 외설시비를 불러일으켰던 《반성》은 '아름다운 폐인'의 경지에서 '시인됨' 혹은 '시됨'의 가능성을 새롭게 모색한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애송시 100편 - 제 74편] 절벽 - 이 상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일러스트=잠산

아마도 시인은 꽃이 핀 것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꽃잎이 둥글게 열리는 것과 꽃의 둘레를 달무리처럼 둥글게 감싸는 향기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둥근 공간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눕힌다. 죽은 사람의 몸이 놓이게 되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이 묘혈인데, 그처럼 오목하게 파인 곳에 자신의 몸을 눕힌다. 이 시는 시인의 다른 시에 비해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지만 문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밝게 만개한 꽃과 비산하는 꽃 향기의 반대편에 차디찬 주검과 서늘한 묘혈을 배치하고 있다. 열린 공중과 유폐된 땅 속, 두 공간은 서로 차단되어 멀리 떨어져 있다. 시인은 이 이격된 거리를 가파르고 낙차가 큰 절벽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에도 병이 든 육체를 바라보는 시인의 황폐한 자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이상(1910~1937·본명 김해경)은 실험적인 글쓰기를 보여준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기이한 발상과 국어 문법을 파기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에도 지금에도 파격 그 자체이다. 절망적인 근대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자아의 분열과 의식과잉을 그는 익히지 않고 날것 그대로 드러냈다. 해서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오감도〉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쳐 연재 15회 만에 전격적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독자들은 이상의 시에 대해 "개수작", "미친 놈의 잠꼬대" 등의 화포와도 같은 말들을 동원해 비난을 퍼부었다).

 

시인 이상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온도차가 뚜렷했다. 희대의 문제아였고, 모던 보이였고, 모더니스트였고, 천재작가였으며,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고은)이었고, "모국어의 훼손에나 기여한 시인"(유종호)이었으며, 그는 "잉크로 글을 쓰지 않고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썼다"(김기림).

 

그러나 이상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술에 솜씨가 있어 하융(河戎)이라는 이름으로 박태원의 신문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그의 시는 숫자와 도형의 사용, 공간 분할 등을 보여주는 바, 이것은 그가 한때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한 전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애송시 100편 - 제 75편]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968년>

 

▲ 일러스트 권신아

김광섭(1905~1977) 시인의 호는 이산(怡山), '기쁜 산'이다. 그는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반대한 애국교육자, 광복 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한 우익 문단의 건설자,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낸 정치인, 언론사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현대사 100년을 정말 '산'처럼 살았다. 실제로도 그는 늘 산을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속으로 간다"(〈산〉), "목마른 아스팔트를 옆으로 빠져서/ 나는 계절이 풀리는 산으로 간다"(〈산바람처럼〉).

 

'남포 깐다' '남포 튼다'는 말이 있었다. 남포란 다이너마이트를 이르는 말이다. 이 개발 저 개발로 너도나도 산업화의 역군이었던 60~70년대 내내 대한민국 전역에 이 산 저 산을 깨는 남포 소리 울려 퍼졌었다. 산을 깎아 돌을 채취하고 도로를 만들고 빌딩을 올리곤 했다. 뻥 뻥 남포를 까면 산에 살던 뭇 짐승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강에 살던 뭇 물고기들은 기절을 하기도 했다. 뻥 뻥 남포 까는 소리에 밤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산동네, 달동네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돌 깨는 소리가 채석장에서 울리면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돌 깨는 산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중 성북동 집 마당에 앉아 하늘을 돌아나가는 비둘기떼를 보고 착상했다고 한다.

 

성북동 산과 산동네가 개발되면서 산비둘기는 둥지를 빼앗겼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들이 산을 깨는 것과 비둘기들 가슴에 금이 가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제 산비둘기들은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그렇게 쫓긴 산비둘기들이 거리로, 광장으로, 고가 밑으로, 옥상으로, 창턱으로 흰 똥을 찍찍 내갈기며 뒤뚱뒤뚱 걸어다니고 있다. 산동네, 달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내쫓기곤 했다. 재개발과 산업화와 도시화와 문명화의 이면이었다. 유심초가 부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저녁에〉)라는 시를 읊조려 보는 아침이다.

 

 

[애송시 100편 - 제 76편] 조국(祖國) - 정 완 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1962년>

 

 

 

 

▲ 일러스트 = 잠산7

 

정완영(89) 시인은 평생 한국의 정형시인 시조만을 위해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정완영 시인을 통해 "이 당대, 시조 분야의 숭고한 순교자적 상(像)"(박경용)을 만난다. 시조를 말할 때 가람 이병기와 노산(鷺山) 이은상을 먼저 말하고, 그다음에 초정(草汀) 김상옥, 이호우를 말하고, 그 뒤에 백수(白水) 정완영을 세워 말한다. "백랑도천(白浪滔天) 같은 분노도 산진수회처(山盡水廻處)의 석간수 같은 설움도 시조 3장에 다 담으셨다."(조오현)

 

박재삼 시인은 정완영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숭앙해서 "조용하게 잘 참는 것이 있다"면서 "야단스럽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성품이 그를 시조의 거목이게 했다"고 썼다.

 

이 시조는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정완영 시인의 초기 작품이다. 조국의 슬픈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시 〈만경평야에 와서>에서 "애흡다 열루(熱淚)의 땅 내 조국은 날 울리고"라고 썼을 때처럼. 조국을 한 채의 전통악기 가얏고(가야금)에 빗대면서 조국에 대한 큰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옛 시조의 행 배열을 살리면서 시종 장중한 어조로 감칠맛 나는 고유어를 사용했다. 청각에 시각을 한데 버무리는 감각적 이미지의 활용은 압권이다. 가얏고의 서러운 가락이 귀에 들리는 듯하고,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청사(靑史)를 보는 듯하고, 한 마리 학의 고고한 성품을 가슴으로 마주하는 것 같다.

 

정완영 시인의 시조는 천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사와 우주적인 상상력을 자랑한다.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을 닦아낸다/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 빛도 닦으리."(〈초봄〉)같은 시조를 보라. 무릎을 치며 저절로 감탄할밖에.

 

이뿐만 아니라 정완영 시인은 정겨운 동시조도 많이 써왔다. 〈분이네 살구나무〉는 대표적이다.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시조는 말로만 쓰는 시가 아니라 말과 말의 행간(行間)에 침묵을 더 많이 심어두는 시"라고 말하는 그는 요즘도 매일 간곡하게 시조를 창작한다. 원로 시조시인의 이 창창(滄滄)한 뜻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애송시 100편 - 제 77편] 국토서시(國土序詩) - 조 태 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1975년>         

 

 

                                                                                    

 

 

▲ 일러스트 권신아

 육척 거구, 고집불통, 임전무퇴, 대의명분의 시인. '쑥대머리'를 부르며 '소주에 밥말아 먹던'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시인. 국토와 식칼의 시인. 반골에 강골의 광주 시인. 의리와 정(情)의 시인. 조태일(1941~1999) 시인에게 붙여진 수식들이다. 그는 〈국토〉 연작시와 〈식칼론〉 연작시로 1970년대 우리시의 저항성에 일획을 더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 대해 '몸도 크지만 마음이 더 큰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스스로도 "이 조가야, 그 거창한 체구엔/ 노동을 하는 게 썩 어울리는데/ 시를 쓴다니 허허허 우습다, 조가야"(〈석탄·국토 15〉)라고 노래했다.

 

감옥에 갇힌 후배의 가솔들을 찾아 쌀과 연탄을 사주고, 언제나 제자들 밥부터 챙기는 격의 없는 스승이었다 한다. 술에 취한 야밤에 장독대에 올라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독재자는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삿대질 삼창을 일삼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어머니의 통장에 다섯 해나 더 용돈을 송금했다고 한다. 그의 대학 은사였던 조병화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먼저 간 제자를 추모하며 "조태일은 시인이다 착하고 정직하고 곧고 의리의 시인이다 어린이도 느끼는 시인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념적 지향성은 서로 달랐으되, 스승은 젓갈 행상을 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하는 제자의 형편을 알고 장학금을 받게 해주었고 제자는 두고두고 스승에게 극진했다는 미담도 잘 알려져 있다.

 

나라 국(國), 흙 토(土)! 국토는 우리 땅이다. 조태일 시인이 노래하듯, 우리의 하늘 밑이고 삶이고, 우리의 가락이고, 우리의 혼이고 숨결이다. 그뿐 아니다. 피와 살과 뼈에 이르는 우리의 온몸 그 자체이다. 그게 있어야 나라도 있고 국가도 있고 민족도 있다. 이 마땅하고 당연한 우리의 땅을 잃어버렸을 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김소월),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한용운)라고 노래했다. 70년대 조태일에게 국토는 특히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혼'으로 상징되는 소외된 민중의 다른 이름이다. 이 땅의 주인인 그들을 위해 '일렁이는 피', '다 닳아진 살결', '허연 뼈'까지 보태리라는 시인의 뜨거운 의지가 돌올하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라고 국토에 대한 숙명적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은, 간암으로 99년 9월 7일, 58세의 나이로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그곳/ 그곳이 나의 고향,/ 그곳에 묻"(〈풀씨〉)혔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국토이고, 오매불망 국토를 노래했던 시인의 유택이 되었다. 그는 28세에 "내가 죽는 날은 99년 9월 9일 이전"(〈간추린 일기〉)이라고 썼다. 미래를 예언한 그의 시참(詩讖)이 서늘하다.

 

 

 [현대시 100년…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78) 일찌기 나는 -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 일러스트 잠산

1980년대 대표적인 여성시인의 한 사람인 최승자(56) 시인. 그녀의 시는 송곳의 언어로 위선적인 세계와 정면으로 맞선 하나의 살의(殺意)였다. 가장 최승자답다는 이 충격적인 일갈을 혹시 기억하시는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개 같은 가을이〉)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뼈를 잘못 삼켰다."(〈시인〉)라며 시인의 기본 성깔을 운운한 그녀는 삶의 고통과 세계의 위선을 거리낌 없이 폭로했다. 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

 

이 시에도 폐광과 같은 유폐와 자기 방기가 있다. 시인은 '곰팡이'와 '오줌 자국'과 '죽은 시체'에 자기 존재의 흔적을 견준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의 귓가를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지고 마는 '영원한 루머'일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감히 말하며 아예 내 존재의 근거를 박탈해 버리려는 이런 듣기 거북한 발언은 그녀의 다른 시편에서도 흔하게 있다. 그녀에게 "이 조건 반사적 자동 반복적/ 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2〉)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아주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이런 발언에는 위선의 세계에 대한 강한 혐오와 저주가 깐질기게 숨어 있다. 그녀는 이 세계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병들어 있다고 보았다. 세계가 비명으로 가득 차 있고, 탐욕의 넝마이며, 치명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데 누군들 그곳서 생존을 구걸하겠는가. 그러므로 내 존재를 루머도 없게 치워달라고 할밖에.

 

그러므로 이 시에서 그녀가 독하고 날카로운 비유를 동원해 본인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위악의 방식이다. 이 부패한 지상에서 더 이상 썩지 않으려고 '부정하는 법'을 그녀는 선택한 것이다.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시인. '허무의 사제' 최승자 시인은 세상을 혹독하게 앓고 시를 혹독하게 앓았다. 시로써는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고독의 창 앞에 쏟아부을/ 충분한 피"(〈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13〉)로 시를 써냈다.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자화상〉) 라고 읊었다. 그녀는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자살 연구》, 《침묵의 세계》 등 주옥 같은 역서를 낸 능력 있는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금 병환 중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신작시를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 끔찍하게 독한 그녀의 시가 그립다. 그녀가 밤새 짜낸 '치욕의 망토'로 '귀멀고 눈멀은' 우리들은 따스함을 얻겠지. 그녀가 시 〈삼십세〉에서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라고 쓴 것을 읽고 기이한 쾌감을 느꼈었던 것처럼.

 

 

[애송시 100편 - 제 79편] 투명한 속 - 이하석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1980년>


 

▲ 일러스트 권신아

  투명한 것은 비친다. 통과하며 통과시킨다. 더 많은 것들을 제 속에 '품어 비춘다'. 투명한 속은 제 속을 훤히 드러내며 더 많은 것들을 제 몸에 비추어낸다.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은 투명한 속을 깊숙이 열며 '비쳐 들어간다'. 시간의 흔적과 문명의 찌꺼기를 받아들이고 뱉어내는 유리 부스러기의 투명한 속은 보호구역이다. 그 투명한 속은 끝이 없다. 투명한 유리 속 제비꽃처럼, 그 찬란하고 선명하고 쓸쓸하고 고요한 남빛 그림자처럼.

 

이하석(60) 시인의 〈투명한 속〉을 읽다보면 영화 《밀양(密陽)》의 '햇살이 시궁창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마당 한구석의 흙탕물을 비추는 그 비밀스런 햇볕 혹은 숨어있는 햇살에 카메라 시선은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하석 시인의 시선이 그렇다. 그는 도시문명 속에서 구석지고 버려지고 망가지고 폐허화된 '것들'의 뒷풍경을, 클로즈업된 카메라 시선으로 보여준다. 인간을 편리하고 안락하게 해주는 현대문명의 뒷면에는 산업쓰레기와 비인간적 삶이 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그가 살고 있던 대구 주변에 널린 산업쓰레기 현장을 흑백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바탕으로 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진처럼 감정 개입은 배제한 채. 쓰레기 가득한 이러한 낯선 시선은 '냉혹한 사실주의' '극사실주의'로 평가되었으며 1980년대 우리 시단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쇳조각, 폐타이어, 유리병, 깡통, 껌종이, 신문지, 비닐 등 산업화의 노폐물들은 흙과 풀뿌리에 뒤엉켜 덮여 있다.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뒷쪽 풍경 1〉)에서처럼, 그것들은 쉽사리 흙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풀과 더불어 성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들, 오랜 시간 후 흙과 풀뿌리에 깃들어 투명해지고 흙과 풀을 제 속에 품어 비칠 때, 그것들의 투명한 속은 흙과 풀을 통과하며 통과시킨다. 먼지와 녹물과 날카로움과 독성을 잠재우며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이 시도 버려진 유리병(조각)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있다. 유리의 반짝임과 투명함 쪽으로 흙과 풀들은 뻗어나간다.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로 상징되는 '제비꽃'은 버려진 유리 부스러기의 '투명한 속'을 비쳐 오고 비쳐 들어간다. 봄의 기운 혹은 생명의 싹 혹은 자연의 힘이다. 우리는 날마다 보고 있지 않은가. 유리 부스러기 속, 제비꽃 같은 남빛 그림자를! 시멘트 콘크리트 틈으로 돋아나는 노란 민들레꽃이나, 타일 콜타르 틈으로 삐쳐 나온 연한 세 잎 네 잎 클로버의 경이 그 자체를!

 

 

[애송시 100편 - 제 80편] 갈대 등본 - 신 용 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일러스트 잠산

 젊은 시인 신용목(34)은 "바람 교도(敎徒)"(시인 박형준의 말)다. 그의 시 곳곳에는 바람이 불어오고 멈추고 쌓이고 흐른다. 독특한 것은 그가 포착하는 바람의 속성인데, 그의 생각에 바람은 쌓이는 것이면서 강하게 '무는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바람이 비의 칼집을 잡고 서는 날"(〈바람 농군〉)에서처럼 바람을 정지시켜 묶어두거나,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새들의 페루〉), 혹은 "나는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 물려 있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라고 써서 바람의 '무는 힘'을 강조한다. 아무튼 '바람 교도'답게 그의 시집을 펼치면 바람이 와르르 쏟아진다.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문장이 모 기업의 에어컨 광고 문구로 사용되어 더 많은 이에게 알려진 이 시에도 바람이 등장한다. 시인은 폐(廢)염전을 걸어가고 있다. 저녁 무렵이었을 테고, 갈대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을 것이다. 바람 속에서 갈대는 갈대숲에 깃든 새들을 "통증처럼 뱉어내"고 있었을 것이다. 늦가을이었으므로 갈꽃이 진 갈대는 '촉'처럼 '화살'처럼 서 있고 시인은 그 갈대들을 보면서 세월의 한 참극과 풍파를 기억해 냈을 것이다. 아마도 가족사에 해당될 사건들을. (그래서 제목이 〈갈대 등본〉 아닌가. 우리가 동사무소에 가서 한 장씩 떼는 '주민등록등본'처럼.) 가족사 가운데서도 아버지와 관련된 과거의 일을 시인은 떠올렸을 것이다. 갈대처럼 누추를 입고, 뼛속까지 바람의 지층이 나 있고,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이제는 꺾인 아버지를 보았을 것이다. 지금 시인이 서 있는 공간, 즉 폐염전과 빈 둑과 꺾인 갈대와 바람이 부는 이 공간이 마치 아버지라는 존재의 영역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는 표현에는 개인적인 참회를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를 복원하려는 결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노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나비 눈》의 대본을 쓰기도 한 신용목 시인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허기'를 돌본다. 이주노동자, 구두수선공, 시장통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시는 따뜻하고 서글서글하다. '등이 굽은 가축'인 우리를 돌보는 아파트 경비원 정씨는 "어제는/ 물통을 청소하고 오늘은/ 배설구를 씻는다 가축은/ 정갈해야 하므로 내일은/ 쥐똥나무를 전지하고 모레는/ 짜기철망을 손질한다 가축은/ 안전해야 하므로/ 정해진 시간마다/ 상한 데는 없는지 손전등을 들고/ 고삐를 훑으러 간다"(〈경비원 정씨〉)

 

신용목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젊은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는 그런 평가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한다.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죄(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죄(罪)가 나를 씻어주겠다"(〈별〉)

 

 

[애송시 100편 - 제 81편]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 일러스트=권신아

  사월이면 보리가 패기 시작한다. 초록이 지천으로 팬 보리밭을 지날 적이면 보리피리가 불고 싶어진다. 보리의 싹이 나오기 전의 보릿대를 꺾어 불면 피-ㄹ- 소리가 났다. 보릿대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손톱으로 작은 구멍을 내 요령껏 불면 피-ㄹ 닐니리 소리가 나기도 했다. 청보리밭의 소리이자 고향의 소리 피-ㄹ 닐니리. 피-ㄹ 닐니리는 향수의 소리다.

 

〈보리피리〉의 시인 한하운(1920~1975).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문둥이'였다.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936년 17세의 나이에 한센병 진단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해 도청에 근무하며 양양한 미래를 시작하던 25세에 다시 악화되어 직장도 그만 두고 숨어들었다. 이때 이름도 하운(何雲, 어찌 내 인생이 떠도는 구름이 되었느냐)으로 바꾸었다. 1946년 함흥학생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월남했다. 구걸을 하며 연명하다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1949년 《신천지》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전라도 길 -소록도 가는 길에〉) 외 12편이 실리면서, '불우의 시인' '천작(天作)의 죄수' '정처 없는 유리(遊離)의 가두(街頭)에서 방황하고 섰는 걸인'으로 소개되었다.

 

〈보리피리〉를 읽다보면 말 그대로 '천형(天刑)'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의 삶과 세월이 떠오른다. 보리피리를 불며 가는 '꽃 청산', '인환(인간의 세계)의 거리', '방랑의 기산하(많은 산과 들)'는, 그의 고향 함경도 함주에서부터 남쪽 끝 섬 소록도까지 이르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사월의 고향 들판에서 불었던 보리피리를 불며 그는 내내 그 멀고 먼 거리를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온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러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파랑새〉)라고 노래하며.

 

시는 행간을, 행간의 여백을 읽는 일이다. 이 시는 신문사에 갔다가 즉석에서 써준 즉흥시다. 한 편의 시에, 가곡이나 가요로 가장 많은 곡이 붙여진 시이기도 하다. 그의 삶이 그토록 불우하고 파란만장하지 않았더라면, '인환'이나 '기산하' 같은 한자어를 제외한다면 동시라 해도 무방할 이 단순한 시가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기운생동 창끝처럼 패는 새파란 보리가, 지는 꽃처럼 문드러지는 붉은 살끝을 거느리고 있기에, 피-ㄹ 닐니리 봄의 보리피리 소리가 한층 깊고 서럽다.

 

 

[애송시 100편 - 제 82편]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함형수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일러스트=잠산

  함형수(1914~1946) 시인은 생전에 불과 17편의 시편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해서 노동자 숙박소 등을 전전했지만 하모니카와 시 노트만은 꼭 갖고 다녔다. 한 여배우와 동거했지만 사랑에 실패하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정신착란증에 시달리다 북에서 숨졌다. 그는 평생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못했지만, <해바라기의 비명> 만큼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인부락》은 서정주·김달진·김동리·오장환·김광균·함형수 등이 참여한 시 동인지였다. (《시인부락》 동인들은 '생명파'로 불렸다.) 함형수 시인은 이 시를 1936년 《시인부락》 창간호에 발표했다. 우선 이 시를 읽으면 후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나 《해바라기》 같은 그림이 떠오른다. '압생트'라는 싸구려 술을 많이 마셔서 물체가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에 시달렸다는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술을 마시는 이유를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정신착란증으로 권총 자살한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도 함형수 시인의 불우한 죽음과 겹쳐 읽혀진다. 함형수 시인이 '청년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를 창작하면서 빈센트 반 고흐의 열정적인 삶과 죽음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적어도 둘 사이에 적잖은 영향관계가 있다고 분석하는 의견은 많다.

 

시인은 자신의 무덤 앞에는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말한다. '차거운' 주검 앞에 세운 '차거운' 비석은 죽음을 완성하고, 죽음을 죽음으로 붙박는 것. 마치 널이 죽은 사람의 몸을 사방으로 서늘하게 가두듯이. 대신 노랗게 출렁이는, 태양처럼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고 말한다. 다함이 없는, 대해(大海)와 같은 보리밭의 생명력과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노고지리(종다리)의 꿈과 자유를 달라고 말한다. 노란 빛깔과 푸른 빛깔의 색채대비가 인상적인 이 시는 식민지시대의 고한(苦恨)을 넘어서면서, 몸과 사랑과 꿈의 죽음을 완강하게 거부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시종 넘쳐난다.

 

"눈앞에 보이는 삶의 미미(微微)한 즐거움은 선화륜(旋火輪)과 같다"고 했다. 선화륜은 횃불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빙빙 돌릴 때 생기는 불의 둥근 원(圓)을 말한다. 그만큼 삶의 즐거움은 허망하게도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지속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미산(須彌山) 같고 큰 바다 같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마음에 해바라기가 자라고 보리밭이 출렁이고 종다리가 날아오르게 하자. 보리밭의 너비와 종다리의 높이를 사랑하자. 함형수 시인의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불멸의 선물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애송시 100편 - 제 83편] 솟구쳐 오르기 2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일러스트=권신아 김승희(56) 시인의 시를 읽노라면 '시는 상처의 꽃'이라는 말이 입에 돈다. 상처에서 피처럼 피어나는 꽃, 그것이 시라는 생각에 미친다. 우리는 가족·사랑·출산·질병·밥벌이·이념·사회를 떠나 살 수 없기에, 우리들 상처는 우리들 보금자리에서 생긴다. 매일매일이 상처투성이다. 상처로부터 솟구쳐 오르게 하는 '용수철'이 없다면 우리는 상처로 짓뭉그러져 있을 것이다. 우리 몸에 내장된 '상처의 용수철'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삶은 상처의 화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튕겨 오르는 힘, 솟구쳐 오르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매일 새롭게 아침을 맞는다.

 

〈솟구쳐 오르기〉 연작시들을 통해 시인은 "활활 타오르는 상처의 꽃에서 훨훨 날아가는 새의 날개의 푸드득 솟구쳐 오름"(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의 자서)을 찾아 어둡고 지리멸렬한 일상의 삶 위로 튀어 오른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창을 장대로 삼아 장대 높이뛰기를 하듯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르고(〈솟구쳐 오르기1〉), 상처의 힘을 깨닫기 위해 긴 머리에 성냥불을 당기고 싶어하고(〈솟구쳐 오르기3〉), 상처의 혼(魂), 아니 혼 속에 간직한 상처의 오케스트라에서 터져 나오는 황금 별들의 찬란한 음악을 듣기(〈솟구쳐 오르기10〉)도 한다. 상처를 비상의 날개로 삼아 날아 오르고자 한다. 그는 '시인은 천형을 앓는 무당'과 같은 존재라고 쓴 적이 있다. 무당이 고통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자라면, 상처의 작두를 타고 상처의 작두 위에서 공중부양을 하는 이가 시인일 것이다. 그 역시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과 더불어 1970년대 여성시의 새로운 솟구침을 주도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시 쓰기 외에도 에세이, 평론, 장·단편 소설, 동화, 논문, 번역 등 분출하는 글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시에서도 상처에 내재한 자기갱생 및 자기정화의 힘을 노래하고 있다. 봄은 겨울에서 솟구쳐 오른다. 파란 싹, 파아란 보리, 개구리, 빨간 넝쿨장미, 민들레, 나뭇가지의 새 눈의 몸을 빌려 솟아오른다. 땅속이나 바위 밑에서부터, 담벼락을 타고 시멘트를 뚫고, 텅 빈 허공을 일으키며 기어오른다. 떨어져야 다시 튀어 오르는 공처럼 내내 얼어 있던 것들이, 넘어져야 다시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내내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당겨져야 다시 줄어드는 고무줄처럼 내내 아팠던 것들이, 오늘도 '상처의 용수철'을 타고 튕겨 오른다. 내일도 스카이콩콩을 타고 날아오른다. 아아 오오 우우~ 기지개를 켜며 솟구쳐 오르는 탄성(彈性)의 탄성(歎聲) 소리 가득한 아침이다. "쓰러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바닥이여 바닥에서/ 무거운 사슬들이/ 짤랑짤랑 가벼운 빛의 음악이 되는 그날까지"(〈무거움 가벼움 솟아오름〉).

 

 

[애송시 100편 - 제 84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일러스트=잠산

  이 시는 4·19세대의 좌절과 절망을 노래한 4·19세대의 만가(輓歌)이다. 김광규(67) 시인은 한글로 교육을 받은 첫 세대로 4·19가 일어난 1960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이 시를 4·19혁명 18년 뒤에 썼다. 중남미 보컬그룹이 불러 1960년대 초반 크게 유행했던 노래와 동명의 제목이다.

 

터놓고 말하는 이 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변해버린 세상과 변해버린 사람들의 살풍경, 온데간데없는 열망과 초심(初心), 터럭만큼의 부끄러움조차 없게 된 양심, 판치는 속물주의와 물질주의. 이것을 시인은 부지불식간에 빠져들게 된 깊숙한 '늪'이라고 부른다. 크게 호통을 치지 않는데도 이 시를 읽고 나면 뭉근하게 가슴이 저민다. 왜 그런가.

 

우리는 점점 어깨가 움츠러들고 왜소화되어 간다.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작은 사내들〉) 시인은 어느덧 소시민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입장 없음과 순순히 따름이 정녕 우리들이 고대한 초상이었느냐며 정직한 질문을 던진다. 면구스럽다.

 

독문학자이기도 한 김광규 시인은 일상시(日常詩)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시인이다. "김광규의 시는 그 생각에 비뚤어짐이 없으며 그 어조에 격렬한 부르짖음이 없으며 그 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고 그 관심이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지 아니한다."(문학평론가 이남호)

 

김광규 시인 스스로도 자신의 시는 오페라에 있어서의 레치타티보(서창)쯤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의 시는 아리아처럼 목청을 높여 외치지는 않는다. 다만 낮게 중얼중얼거릴 뿐. 하지만 이 중얼거림은 살기 바쁜,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배불리 먹는 일에 열중인 우리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마치 맨발로 사금파리를 밟은 듯하게. 일례로, 그는 우리를 '4월의 가로수'에 섬뜩하게 빗댄다. 우리의 모습이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4월의 가로수〉) 있는 수양버들이라니! 그러나 둘러댈 말이 없다.

 

4·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오면 이 시를 다시 읽게 된다. 까슬까슬하게 카랑카랑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

 

 

 [애송시 100편 - 제 85편]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일러스트=권신아

  천지에 꽃 피는 소리 가득하다. 등성이는 등성이대로 기슭은 기슭대로 봄꽃들 넘쳐난다. 껍질만 살짝 문질러도 생강 냄새가 확 풍기는, 산수유꽃 닮은 생강나무꽃, 사람 환장하게 하는, 산복사꽃, 개살구꽃, 제비꽃, 메꽃, 달맞이꽃, 애기똥풀꽃, 쑥부쟁이꽃 본 적 있다. 이 꽃들의 소요! 사람 홀린다는 흰 동백꽃,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꿩의바람꽃, 아침이면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있다. 해가 나면 자줏빛 꽃잎을 활짝 연다는 바람난 처녀꽃, 엘레지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며느리배꼽꽃은 아직 못 보았다. 저 꽃들의 고요!

 

"어진 이는 만월(滿月)을 경계하고/ 시인은 낙화를 찬미하나니/ 그것은 모순의 모순이다"(한용운 〈모순〉)라고 했거늘,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속의 분별과 속도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리라. 올해로 40주기를 맞는 조지훈(1920~1968) 시인은 섭리로서의 소멸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보여준 시인이다. '지조(志操)'를 지킨 논객이자, '주정(酒酊)'의 교양과 '주격(酒格)'의 품계를 변별했던 풍류를 아는 학자였으며, 무엇보다 낙화를 찬미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이 시는 화두처럼 시작한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꽃은 바람에 지지 않는다. 피면 지고, 차면 이울기 마련이라서, 꽃은 꽃의 시간이 다해서 지는 것이다. 저 꽃을 지게 하는 건, 바람이 아니라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시간인 것이다. 시인은 촛불이 켜진 방안에서, 주렴 밖으로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있다. 아니 꽃이 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돋았던 별이 하나 둘 스러지는 새벽, 먼 산의 소쩍새가 울고, 뜰에는 꽃이 지고 있다. 달빛이 고즈넉했던지 꽃 지는 그림자가 미닫이에 비친다. 방 안의 촛불을 꺼야, 지는 꽃이 빛을 발한다. 인간의 촛불을 꺼야, 어둠 속에서 목숨이 지는 자연의 꽃이 내는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다.

 

그는 범종소리를, 과실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비유한 적이 있다. "허공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다시 엉기고 맴돌아/ 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 치며 종소리는/ 웅 웅 웅 웅……/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오른다 아득한 것"(〈범종(梵鐘)〉)이라고. 그 새벽에도 꽃이 지는 소리 웅 웅 웅 웅…… 아득했으리라. 흰 창호지문을 물들이는, '우련(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붉은, 낙화의 그림자! 지는 꽃의 그림자를 나는 이 시에서 처음 배웠다.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꽃이 다시 보인다는 것도. 밤새 진 꽃들 한 치는 쌓이리라. 꽃은, 진 후에 더욱 꽃이기에, 지는 꽃의 슬픔을 이리 높고 깊게 맞을 일이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이 과묵한 슬픔 앞에 목이 멘다.

 

 

 [애송시 100편 - 제 86편] 서시 - 이시영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1976년>

 

 

▲ 일러스트 잠산

  이시영(59) 시인을 떠올리면 그가 늘 쓰고 다녔던 검고 둥글고 큰 뿔테 안경과 그 너머의 빛나는 안광(眼光)이 생각난다. 깡마른 체구와 또각또각 한마디씩 끊어가며 내놓는 정직한 말이 생각난다. 그는 1974년 문인들의 민주화운동 조직이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에 참여한 이후 엄혹의 시대와 맞서는 문인의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해 연행되고 구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9년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있을 때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잡지에 게재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신 철폐를 위해, 구속 문인과 양심수 석방을 위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노동자의 살 권리를 위해 국가 폭력에 맞서고 분연히 일어나 싸웠다. 그런 체험과 시대에 대한 울분을 선혈(鮮血)의 언어로 기동력 있게 쓴 것이 그의 민중시였다.

 

첫시집 《만월》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에도 그의 발자취와 육성이 살아있다. 이 시는 어둠의 시대를 살다 실종되고 도피중인 동지가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압수되고, 두들겨 맞고, 체포당한 자유와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등과 평화가 어서 빨리 돌아오기를 열망하고 있다. 댓잎이 살랑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숨막히는 고요가 기다림의 절절함이라면, 천지를 쿵쿵 울리는 역동적인 발자국 소리는 돌아옴의 당위에 해당한다. 저 폭압의 시대에는 자식의 생사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뜬눈으로 눈물로 밤을 지새운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시영 시인은 민중시를, 이야기시를, 우리말을 세공(細工)한 단시(短詩)를 선보여 왔다. 근년에는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스크럼을 짜고 함께 통과해온 인물들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시를 써내고 있다.

 

광주일고 1학년 생활기록부에 장래 희망을 법관으로 적어 놓은 해방전사 김남주, 휘파람 잘 부는 송영, 마포추탕집에서 쭈글쭈글한 냄비에 된장을 듬뿍 넣고 끓여 함께 먹던 조태일, 문단 제일의 재담가 황석영, 상갓집에 가면 제일 나중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인심 좋은 이문구, 섬진강서 갓 올라와 창작과비평사 문을 벌컥 열고 사과궤짝을 쿵 하고 바닥에 내려놓던 김용택 등등.

 

그는 지나간 옛일들을, 고통의 역사를 애틋하게 따듯하게 불러낸다. 특히 송기원과의 두터운 교분을 자랑하는 시편들은 왁자하고 눈물겹다. (이시영 시인은 송기원, 이진행과 함께 '서라벌예대 문창과 68학번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시영 시인은 "마치 이 세상에 잘못 놀러 나온 사람처럼 부재(不在)로서 자신의 고독과 대면하며 살아온 사람"(〈시인〉)이 바로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서러운 사람에게로 불어간다. 가슴이 뭉클하다.

 

 

[애송시 100편 - 제 87편] 껍데기는 가라 - 신 동 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 일러스트 권신아

  기운생동, 만화방창의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던 이는 엘리어트였다. 우리에게도 4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부여의 시인, 금강의 시인, 신동엽(1930~1969)은 이렇게 노래했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4월은 갈아엎는 달〉)이라고. 겨울 땅을 갈아엎어 줘야 싹들이 더 잘 일어서는 이 4월에.

 

4월 19일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 〈껍데기는 가라〉는 벼락같은, 천둥같은 시다. 이 시에 무엇을 더 덧붙일 수 있으랴. 덧붙이는 순간 사족이고 군말일 뿐이다. 그만큼 시 자체

 

로 명명(明明)하고 백백(白白)하다. 1967년에 발표된 이 시는 4·19 혁명의 실패, 5·16 군사 쿠데타, 6·3 사태, 베트남 전쟁 파병, 분단의 고착, 외세의 개입 등 1960년대의 구체적 시대상황을 시의 배면에 깔고 있다. 그러니 시인에게 삼천리 한반도의 사월은 껍데기들로 가득했을 것이다.

 

'껍데기는 가라'라고 반복적으로 촉구하고 있지만 사실 이 시의 핵심은 '껍데기'보다는 '중립의 초례청'에 있다. 이 '중립(中立)'에는 남과 북,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넘어서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백두에서부터 한라까지, 동학년(1894년) 곰나루에서부터 4·19(1960년) 광화문까지, 백제의 후손 아사달과 아사녀의 못다 이룬 사랑에서부터 신라의 석가탑(無影塔)과 영지(影池)까지를 아우르는 이 중립의 스케일은 얼마나 장쾌한지.

 

이 웅대한 중립의 시 공간을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라는 문장 하나로 관(貫)하고 통(通)해낸다. 이 중립이야말로 진정한 알맹이이자 흙가슴이며, '부끄럼을 빛내며' 두 몸이 맞절하여 새로운 생명이 잉태할 수 있는 화해의 장(場)이라고 말하고 있다. 60년대 참여문학를 대표하는 이 시는 이후 민중·민족 문학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짐짓 물을 때, 시인이 보고자 했던 '하늘'은,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봄은〉)는 사월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런 하늘은 보지 못하는 한, 시인은 여전히 4월에는 껍데기는 가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은 것이고,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애송시 100편 - 제 88편]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일러스트=잠산

  꽃이 지고 있다. 손에 꼭 쥐었던 것을 놓아버리고 있다. 어떤 꽃의 낙화에는 만행을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이 있다. 미련 없이 돌아서기 때문에 낙화에는 구차함도 요사스러움도 없다. 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 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며칠 눈물을 돌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제때에 떠나감은 말끔하고 쾌적하다.

 

새잎이 돋고, 줄기가 힘차게 뻗고, 꽃이 벙글고, 벌이 꽃의 외곽을 맴돌고, 비로소 어느 아침에는 꽃이 '하롱하롱' 지고, 꽃의 시간을 구구절절 기억하며 열매가 맺히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큰 운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부귀는 빈천(貧賤)으로 바뀌고, 만남은 이별로 바뀌고, 건강은 늙고 죽음을 초래한다. 시시각각 바뀐다. 그래서 이런 것에는 견실성이 없다. 견실성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불교에서는 "온갖 사물은 다 없어질 것이어서 공중의 번개 같고, 굽지 않은 질그릇, 빌린 물건, 썩은 풀로 엮은 울타리, 모래로 된 기슭과 같다"고 했다. 이형기(1933~2005) 시인의 초기 시에 속하는 이 시는 집착 없음과 아름다운 물러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형기 시인은 1950년 시 〈비오는 날〉을 잡지 《문예》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때 그의 나이 17세. 최연소 등단기록이었다. "시(詩)란 본질적으로 구축해 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야. 시에 절대적 가치란 없어. 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팔자를 타고난 놈들이 시인이야. 그 무엇이건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유 말이야." 그는 시 창작뿐만 아니라 소설, 평론, 시론, 수필 등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펼쳤다. 초기에는 자연 서정을 선보였으나 현대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악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시 세계로 나아갔다. 그는 한국시사에서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을 선보였다.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길〉)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라고 말했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랜 투병생활을 했다. 그러나 고통스런 병석에 있으면서도 그는 아내의 대필로 시를 계속 창작했다. 그는 슬픔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아포리즘을 남겼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그때는 슬퍼해 봐도 물론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슬픔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슬픔은 가장 순수하고 따라서 값지다."

 

 

[애송시 100편 - 제 89편] 철길 -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 일러스트=권신아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나직이 되뇌면 생각의 꼬리가 철길처럼 길게 이어지곤 한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는 순간 수수께끼라도 떠안은 듯 뒷말을 잇도록 한다. 김정환(54) 시인은 '철길이 철길인 것은'을 되뇌며 (철)길과 만남과 희망을 엮어 이렇게 노래한다. 만날 수 없음이 이리도 끈질기기 때문이고,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아닌 게 아니라 '철길이 철길인 것은'하고 되뇌면 신촌역, 성북역, 용산역, 서울역을 오가던 아련한 철길들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철로도 아니고, 철도도 아니고, 바로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이 인간 안쪽으로 뻗어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철길은 두 개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길과 또 하나의 길, 한 사람의 길과 또 한 사람의 길! 그 두 길은 서로 마주칠 수 없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서로 버팅김으로써 지나감의 속도와 무게를 견뎌내는 길이다. 지금 당장은 만날 수 없는 길이지만,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시간의 누적인 역사(歷史)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1899년 제물포에서 노량진을 오가는 경인선이 첫 경적을 울린 이후 철길은 격동의 근대사를 달려왔다. 수탈하고 징병하고 피란하고 산업하러 가는 길에 철길이 있었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뜻한 핏줄이기 때문이다. 방방곡곡을 누비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나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간다. 상경하고 귀경하고 입영하고 귀대하고 여행하는 곳에 늘 철길이 있었다. 그러니 '철길이 철길인 것은' 그 길에 자갈돌처럼 깔려 있는 기다림 때문이다. 그 기다림이 너무 길고 외로워서, 철길이 두 길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철길이 철길인 것은' 끝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철길을 사랑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는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육교〉)고, "음침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기름 묻은 이슬이 검게, 선로 위에서 반짝인다/ 아직 젖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검붉은 눈동자〉)라며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다. 고통도 절망도 이별도 끝이 있기 때문에 견딜 만한 것이고,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고, 결국 희망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한" 것이다. 당신이든 미래든 휴전선 너머든 완행이든 급행이든, 바로 그곳까지 달려가는 것이 철길인 것이다.

 

 

[애송시 100편 - 제 90편] 추일서정(秋日抒情)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1947년>

 

 

 

▲ 일러스트 잠산

  김광균(1914~1993) 시인은 1930년대 후반 회화적 이미지즘의 새로운 문법을 선보였다. 그는 시에 '회화(繪?)'라는 웃옷을 입혔다. 모더니즘 시론가 김기림은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

 

김광균의 시는 독자들의 눈앞에 한 장 한 장의 데생을 그려 보이는 작법을 구사했다. 이런 데에는 김광균이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많은 화가와 직간접적으로 교우한 영향이 컸다. 김광균은 고흐의 그림을 처음 접한 충격을 이렇게 고백했다.

 

"고흐의 '수차(水車)가 있는 가교(假橋)'를 처음 보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다. 그때 느낀 유럽 회화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세계미술전집을 구하며, 거기 침몰하는 듯하여 나는 급속히 회화의 바다에 표류하기 시작했다. 시집보다 화집이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했고, 내 정신세계의 새로운 영양(營養)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그는 섬세한 감각의 촉수로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우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뎃상〉)로 표현했고, 흰 눈이 내리는 모습은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로 표현했고, 성교당(聖敎堂)의 종소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로 빛나게 노래했다.

 

마치 먼지 낀 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에서도 그는 공허하고 고독하고 스산한 마음을 '모양으로 번역'해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낙엽을 보면서 망명정부에서 발행하는 무가치한 지폐를 떠올리고, 폐허가 된 도룬(토룬) 시(市)의 공백(空白)한 하늘을 떠올린다. 구불구불한 길은 '구겨진 넥타이'로, 잎이 다 떨어진 포플러 나목(裸木)은 초라한 '근골'로, 불투명하고 얇은 구름은 '세로팡지(셀로판지)'로 표현함으로써 아주 구체적으로 대상을 조형한다.

 

낙엽을 망명정부의 무용한 지폐에 비유하거나, 공장의 지붕을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도시적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 나타나는 황량한 심사는 모색(暮色) 그득한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상실감과 창백한 감상(感傷)은 가족들의 죽음, 실향 등의 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되었다. 해서 혹자는 김광균을 '엘레지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6년 12세의 나이로 '중외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면서 천부적인 시안(詩眼)을 자랑했던 김광균 시인은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 납북된 동생의 사업을 인수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렇지만, 그는 안개 자욱하던 한국 시단에 장명등(長明燈) 하나를 켜 놓았다. 아직도 그곳서 가늘고 고단한 불빛이 새어나오며 밤을 밝히고 있다.

 

 

[애송시 100편 - 제 91편]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2006년>

 

 

▲ 일러스트 권신아

  "저질러라, 닥치면 겪는다, 긍게 긍갑다"를 인생의 3계명으로 삼고 사는 여성 시인이 있다. 실제로도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에서 살았으며, "치사량과 열정과 눈물 한 방울만큼의 광기와 고독/ 개미의 페로몬 같은 상상력"(〈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을 재료로 '시 같은 거짓말'을 제조하고 '거짓말 같은 시'를 타전하여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씩씩하고 싹싹한 안현미(36) 시인의 얘기다.

 

2006년에 엮어낸 그의 첫시집 《곰곰》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활짝 핀 착란의 찰나에서 건져 올린 생짜의 시, 시라니!"라고. 그의 시를 읽는 일은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내 아버지"(〈고장난 심장〉)와 "까치밥처럼 눈물겨운 엄마"(〈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의 틈바구니에서 '생짜'로 캐낸, 캄캄한 그러나 반짝이는, 검은 조개탄을 들여다보는 일만 같다.

 

누구에게나 '젊은 날의 비망록'은 있는 것이어서, 그 비망록이 어둡고 고통스러울수록 그 젊음은 젊었음이 틀림없다. 이 시는 시인의 '젊은 날의 초상'이다. 여상, 산동네, 등록금, 비키니 옷장, 순대국밥, 번개탄, 연탄가스 중독, 헌책방 따위로 그려지는 90년대면서도 '여전히 70년대적인' 풍경이다.

 

거기에는 짐작되는 아픔이 있고 헤아려지는 가난과 고독이 있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할 때, '~이었지만'을 경계로 앞 문장은 뒤 문장에 의해 뒤집힌다. 경계는 해체된다.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라고 말할 때, 앞 문장은 뒤 문장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라고 말할 때도 앞 문장은 뒤 문장에서 무참히 무너진다. 이렇게 앞과 뒤는 가파르게 반전하지만 사실은 동어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리듬감은 여기서 살아난다.

 

시인에게 '거짓말'은 '시'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타전하다'라는 말은 "목마른 시인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팔리지 않는 위독한 모국어로 시(詩)를 쓰고 있었다"(〈그해 여름〉)의 다른 표현이며, 그의 시에서는 거짓말을 제조하다, 환을 연주하다(보다), 몽유병에 꽂히다, 착란에 휩싸이다 등으로 변주된다.

 

그런데, 나를 울게 하고 결국은 가족이 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란 무엇에 대한 은유일까? 야행성의 창녀들일까, 치한 혹은 사내들일까, 불안이나 공포일까, 죽음일까…… 어쨌든 "그녀의 더듬이는 쓴다 우우, 우, 우 그녀의 더듬이가 운다"(〈거짓말을 제조하다〉). 그것은 진행형이다.

 

 

[애송시 100편 - 제 92편]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일러스트=잠산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중략)/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5·18광주항쟁을 최초로 형상화한 이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썼던 시인이 바로 김준태(60) 시인이다.

 

이 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 1면에 일부 게재되었고, 전 세계 외신을 타고 나라 밖으로도 알려졌다. 이 시 발표 후 전남매일은 강제 폐간되었고, 김준태 시인은 재직하던 전남고교에서 해직되었다. 이 일례는 그의 문학적 이력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진보적 문인인 김준태 시인은 시를 통해 대동세상(大同世上)에의 열망을 노래해왔다.

 

남도의 입심을 잘 살려가며 시를 써내는 김준태 시인. 그의 시 세계의 원적(原籍)은 농민시이다.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에서도 그랬고, 그 이후 발표한 〈밭시〉 연작에서도 그랬다. "칼과/ 흙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흙을/ 찌른 칼은/ 어느새/ 흙에 붙들려/ 녹슬어버렸다"(〈칼과 흙-밭시(詩) 52〉). 그는 흙의 건강한 생명력을 강하게 신뢰하는 시인이다.

 

시 〈참깨를 털면서〉는 김준태 시인의 데뷔작이다. 밭에서 할머니와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가 참깨를 털고 있다. 할머니는 깻단을 슬슬 막대기질 하지만, '나'는 산그늘이 내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조바심을 낸다. 명령하듯 깻단을 한번 내리치면 복종하듯 솨아솨아 쏟아지는 깨알들이 기막히게 신기하고 신이 난다. 그예 모가지까지 털다가 꾸중을 듣는다. 목숨 가진 것에 대한 조금의 외경도 포용도 없이 무턱대고 털어대는 쾌감에 정신없으니 왜 혼나지 않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서, 인간의 본직을 잘 잊고 사는 나도 할머니 곁에서 참깨를 털며 한 차례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 참깨농사뿐만 아니라 사람농사까지 원융(圓融)하게 지어온 그 할머니로부터 꺼끌꺼끌한 사투리로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

 

준엄한 역사의식으로 당대에 대응해 우직하게 노래하는 김준태 시인의 또 다른 관심사는 통일문학이다. 말을 구부리거나 곧은 문장을 비틀어서 만든 시가 아니라 '심장을 싸늘하게 감싸는' 시를 찾는다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안테나의 촉수가 쉴 새 없이 작동되어야 하고 상황이 타전이 되어 오면 재빠르게 이웃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혹은 예언의 나팔을 불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름하여 시인이 아니던가." 현실로부터 비켜서지 않는 그의 열정은 폭포수 같다 할 것이다.

 

 

[애송시 100편 - 제 93편] 감나무 -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1996년>

 

 

 

▲ 일러스트 권신아

  소설가 현기영의 발문을 빌려 말하자면, 좀 '지랄 같은 성깔'과 '흰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는 개구쟁이의 웃음'과, 그리고 '시적 허기증'이라 할 만한 왕성한 창작 욕구가 가장 그답다고 한다. 그가 바로 이재무(50) 시인이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고향과 유년에의 기억, 도시와 문명의 피로 등 자신의 삶 체험을 진솔하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는 "퇴고할 필요가 별로 없는 완전한 모습의 시가 초고부터 씌어진 경우 좋은 시가 많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감나무〉야말로 단숨에 쓰여진 시임에 틀림없다.

 

고향을 버리고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감나무 한 그루쯤은 담고 산다. 흰 보석 같은 감꽃과 달착지근했던 그 꽃맛, 새파란 감잎과 툭 툭 떨어지던 풋감들이 만들어내는 그 그늘, 꽃보다 더 고왔던 붉은 감잎과 그 거름, 감과 곶감과 까치밥의 그 달콤한 맛…. 그것들이 있는 풍경이란 하나같이 정답고 포근하다. 이 고향 같은 '감'은 도무지 어디서 비롯된 이름일까.

 

15년 동안을, 주인이 도망치듯 떠난 빈집에서 꽃을 내고 잎을 내고 감을 내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 풍경은 애틋하다. 성큼 들어설 주인을 마중이라도 하려는 듯 사립 쪽으로 가지를 내뻗고 있다. 연초록 새순도 담장 너머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새순이 잎이 되고 그 잎이 질 때, 한 기다림을 다 살았을 때, 그렁그렁 붉은 눈물을 매달고 바람의 안부에나 귀기울이는 것이리라. 날렵하게 포착해낸 이 짧은 시의 여백에는 농촌의 붕괴와 이농 현상이 있고, 한 가족의 곡절 많은 삶이 있고, 녹록치 않았을 도시살이가 있고, 무작정의 세월이 있고 계절이 있고,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고, 인정이 있고 섭리가 있다.

 

이런 감나무는 또 어떤가.

"저물 무렵 밭둔덕에 외로이 서 있는/ 늙은 감나무와 나란히 서서/ 인생의 황혼을 억세게 갈무리하시는/ 아부지의 등허리엔/ 살아온 날의 높고 낮은 등고선이/ 가파르게 펼쳐져 있다"(〈아부지〉).

 

이 감나무는 주인과 함께 늙어가며, 뻗어가는 가지들을 잘 갈무리하고 있다.

"초겨울 인적 드문 숲속/ 앙상한 가지에 매달려/ 위태위태한 빨간 슬픔의 홍시/ 하나의 마음으로 기다린다"(〈기다림〉).

이 감나무는 기다림을 완성시켜줄 '큰 입 가진 임자'를 기다리는 것이리라. 고향이란 이런 감나무처럼 애틋하게 기다려주는 곳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이런 감나무로 통하는 것이다.

 

새순이 돋았으니 감꽃마저 지고 나면, 감이 열리고 감잎이 물들 것이다. 그리고 까치밥 하나 오래 맺혀 있으리라. 고향 빈집에 남겨두고 온 저 감나무는 그렇게 삼십년을 알콩달콩 한 식구처럼 살았으니, 십오년에 또 십오년은 더, 피붙이처럼 그리워할 것이다. 속을 바짝바짝 태우며 그리 오래 기다렸던 감나무니 그 감은 또 오죽 달 것인가.

 

 

[애송시 100편 - 제 94편]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 끝 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2005년>

 

 

 

▲ 일러스트 잠산

  정끝별(44) 시인의 시는 경쾌하다. 언어에 용수철 같은 탄력이 있고 집중력 있게 나아간다. 그녀의 시는 '불붙는 것'을 읽어내는 솜씨가 있다. 시적 대상이 갖고 있는 상반된 성격을 동시에 읽어내는 놀라운 수품(手品). 하나 속에 들어있는 상반된 성격의 팽팽한 대립을 말할 때 그녀의 시는 유니크(unique)하다. 그녀의 시는 모임과 빠져나감, 격렬함과 멸렬함, 달아남과 풀어줌 등 이 세상의 모든 시적 대상이 아마도 갖고 있을 상반된 두 성격, 한데 엉킨 두 성격을 표현한다. 해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열망을 추슬러서 세상 안으로 돌아와 자리잡을 때 정끝별의 시에는 물기가 번지고 리듬이 인다"(소설가 김훈의 말).

 

이 시에서도 시인은 허공에 혹은 담장에 맞닥뜨린 가지의 엉킨 두 마음을 읽어낸다. 사람에게도 그렇듯이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감행의 신명이 공존할 것이다. 다만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는 혼연일체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것을 범박하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 사랑의 배후로써 우리는 금단과 망설임과 삶의 궁기(窮氣)를 넘어선다. 사랑 아니라면 어떻게 한낱 가지에 불과한 우리가 이 세상의 허공을, 허공의 단단한 담을, 허공의 낙차 큰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정끝별 시인은 시 <나도 음악 소리를 낸다>에서 우리의 삶은 "조율되지 않은 건반 몇 개로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낡아가는 악기는 쉬지 않고 음악소리를 낸다. 나 딸 나 애인 나 아내 나 주부 나 며느리 나 학생 나 선생 응 나는 엄마 그리고 그리고 대대손손 아프디아픈 욕망의 음계, 전 생을 손가락에 실어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 이 시에서처럼 그녀의 시는 삶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을 딛고 나아간다. 길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타이어의 둥근 힘처럼. 조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가 없다면 우리 삶의 악보는 진혼곡 그 자체일 터. 그녀의 시가 각별한 것은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의 음계를 연주하는, 이 특별한 식미(食味)에 있다.

 

바람을 표절하고,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하고,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하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되고 싶다는 정끝별 시인. 그녀의 시는 봄나물처럼 생기발랄하다. 부럽게 상큼한 맛으로 그녀의 시는 우리의 입맛까지 살려준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며 지친 이의 마음에 숟가락을 쥐여주는 이 시는 얼마나 푸근푸근한가.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중략)/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밥이 쓰다>).

 

 

 [애송시 100편 - 제 95편]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 일러스트=권신아

  이장욱(40) 시인의 시는 몽롱하다 아니 명쾌하다. 난해하다 아니 낯설다. 좀 다르게 말해보자. 그는 낮을 사는 시인이다 아니 밤을 사는 시인이다. 그는 시인이다 아니 소설가다. 노문학자다 아니 (픽션)에세이스트다 아니 비평가다. 현대시 모더니티의 한 극점에 서 있는 '우울한 모던보이'다, 아니 서정시의 안부(內部)를 공략하는 '진정한 인파이터'다. 짐작하겠지만, 그는 그 모두이면서 단지 문학 그 자체이다. 이 시의 묘미도 이런 어울림에 있다. 대화와 독백, 여기저기서 끌어온 문장들의 인용과 변용, 절망을 농담으로 받아치는 경쾌함, 뜬금 없고 돌연한 조증(躁症)과 울증(鬱症)의 변주, 비극적이면서 냉소적인 다변(多辯)으로 날렵하게 치고 빠지는 잽이 장기인 시이다.

 

파이터!라는 말은 자극적이다. 인파이터! 라고 듣는 순간 단전에서부터 전의(戰意)가 꿈틀거린다면 당신은 사각의 링 위에서 난투극을 벌여본 적이 있거나 벌이고 있는 자다. 외곽을 돌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아웃파이터이거나 상대에게 바짝 달라붙어 저돌적인 공격을 퍼붓는 인파이터일 것이다. 1982년 겨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파이터 맨시니의 강펀치를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복서 김득구, 그 경기에서 김득구는 분명 맨시니보다 더 인파이터였다. 그러나 김득구는 오는 펀치를 피해 되받아치는 카운터 펀치, 그 한 방의 나이스 펀치를 날리지 못했다.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코끼리〉). 김득구는 그렇게 무너졌다. 가출해 구두닦이를 전전하다 헝그리 복서로 막 인생이 피려고 할 그때, 14회전까지 계속 얻어맞았지만, 그때까지 버텨온 김득구의 드림, 김득구의 땀과 눈물, 김득구의 피로, 김득구의 공포…김득구는 살아 생전 술을 마시면 노래했다. "권투란 무엇인가, 맞는 걸까, 때리는 걸까".

 

이 사각의 링에서 그 누군들 단 한 방의 펀치도 맞지 않으면서 단 한 방의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아웃파이터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야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일 뿐, 이름하여 '인파이터 코끼리군'. 우리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저 모호한 구름에 너무 바짝 붙어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어! 우리 삶이란 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싸움임에 틀림없어!

 

 

 

[애송시 100편 - 제 96편] 비망록 - 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일러스트=잠산

누구든 삶의 중요한 골자를 적는 하나의 비망록을 갖고 있다. 생(生)의 사건은 낙차가 있고, 중립(中立)이 없으므로, 그 자체로 강렬하지 않은 생(生)의 시간은 없다. 어떤 과거는 해약하고 싶어진다. 어떤 과거는 지금에라도 더 꽃피우고 싶어진다. 어느 때는 폭풍이 지나가는 바닷가처럼스산하고 절벽처럼 위태위태해 시큰한 냉기가 돌기도 한다. 어느 때는 사랑이 붉은 가슴에게로 오지만 눈물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는 밤도 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모두 속기할 수는 없다. 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미망(迷妄) 속에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미망(未忘)만을 기록할 뿐.

 

김경미(49) 시인의 데뷔작인 이 시에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로 넘어가는 나이의, 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여성이 등장한다. 신(神)은 그녀의 절망을 구원하지 않았고, 그녀가 만나는 이들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산두목 같은 사내'는 끝내 그녀의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 그러나 젊은 열정이 어딘들 못 나서랴.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그예 젊은 열정은 생의(生意)를 내는 것. 마치 견고한

 

배는 풍랑에도 해를 입지 않듯이.

 

미래에 대한 이 적극적인 의욕은 시 〈겨울 강가에서〉에도 드러난다.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그러나, 이 굽히지 않는 마음이 20대의 젊음에게만 있을쏜가. 우리는 또 내일을 만나고, 내일은 공백(空白)의 페이지이고, 내일은 새롭게 써야 할 비망록인 것을.

 

고형렬 시인의 표현대로, 김경미 시인은 "맵차고도 직정적인 여성시인"이다. 그녀는 자기 혐오와 자기 부정을 통해 자신과 전면전을 치르는 시인이다. 해서 그녀의 시는 이 세상의 패악함과 간활함에 맞선다. 시 〈나의 서역〉의 도발적인 허무는 또 어떤가.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 실물은 전부 헛된 것/ 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 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 실물은 없다 아무곳에도/ 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꺼내 보이는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다시 만나 동백꽃처럼 모가지를 꺾으며 서로를 외면하게 될지라도. 다시 만나 과거의 비망록을 다시 열람하려는 용기,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아직 남아있는 그리움 아니겠는가.

 

 

[애송시 - 제 97편]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일러스트=권신아

문태준(38) 시인의 시에서는 뜨듯한 여물 냄새가 난다. 느림보 소가 뱃속에 든 구수한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투실한 입모양이 떠오른다. 잘 먹었노라고 낮고 길고 느리게 음매- 울 것도 같다. 21세기 벽두의 우리 시단에서 그의 시는 '오래된 미래'다. 찬란한 '극빈(極貧)'과 '수런거리는 뒤란'을 간직한 청정보호구역이다. '시인·평론가가 선정한 2003년 최고의 시'로 뽑히기도 했던 이 시는 겹겹의 배경을 거느리고 있다. 수묵의 농담(濃淡)처럼 그 그림자가 자연스럽다. 죽기 직전의 개조개가 삐죽 내밀고 있는 맨살에서, 죽은 부처의 맨발을 떠올리는 상상력의 음역은 웅숭깊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 아버지의 맨발, 그 부르튼 한평생을 얘기하고 있다. 시를 포착하는 시적 예지와 시안(詩眼)의 번뜩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에 제일 나중에 나와,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하중을 견뎌내고서는, 세상으로부터 제일 나중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맨발이다. 맨발로 살다 맨발로 돌아가는 모든 것들은 평속(平俗)한 세파를 화엄적으로 견뎌내는 존재들이다. 길 위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길 없는 길을 '맨발'로 걸어 다니다 길 위에서 열반에 든 부처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섭을 위해 관 밖으로 내밀어 보여준 두 발에는 천 개의 바퀴살을 하나로 연결시킨 바퀴테와 바퀴통의 형상이 새겨있었다고 한다. 부처는 무량겁 지혜의 형상을,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제자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바깥'에서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이 맨발의 움직임은 적막하다. 어물전의 개조개가 무방비로 내놓았다가,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맨발을 거두어들이는 그 느린 속도에는 죽음이 묻어 있다. 무언가를 잃고 자신의 초라한 움막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맨발'의, 적나라한, 온 궁리를 다한 뒤끝의 거둠이다. 탁발승의 벌거벗은 적멸이요, 개조개 속에 담긴 부처다. '조문'하듯 만져주는 시인의 손길 또한 애잔하다. 개조개가 슬쩍 내보인 맨발에서 천길 바다 밑을 걷고 또 걸었던 성스러운 걸인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우리의 아버지들과, 그 범속(凡俗)한 빈궁 속에서 세계의 아득한 끝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차디찬 맨발을 만져본 사람에게 이 시의 적막함은 유난하다.

 

인연이든 시간이든 기적이든 순력(巡歷)을 다했기에 '바깥'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부르튼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기에, '아-' 하고 우는 것들을 채워주었기에, 느리고 느리게 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바깥〉)!

 

 

[애송시 100편 - 제 98편] 오산 인터체인지 - 조병화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 일러스트=잠산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건/ 사람뿐이다.// 시간에 집을 지으라/ 생각에 집을 지으라//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것은/ '오고 가는 것'들이다."(〈의자 6〉)

 

조병화(1921~2003) 시인의 시 〈의자 6〉을 읽고서 나는 망연히 물처럼 앉아 있다. 나의 바깥은 바람 가듯 물결 지듯 지나가는 것이 있다. 순간순간이 작별이다. 여관이 여관에 들었다 나가는 하룻밤 손님과 작별하듯이. 허공이 허공에 일었다 잦아드는 먼지와 작별하듯이.

 

그리고 〈오산 인터체인지〉를 다시 읽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보인다. 사랑이 갈라서는 것이 보인다. 맞잡았다 놓는 당신과 나의 손을 안개가 물컹물컹 잡아 쥔다. 안개를 두른 당신과 나의 행로에 대해 알 방도가 없다. 나는 동쪽으로 사십 리를 가지만, 당신은 남쪽으로 천 리를 가야 한다. 내가 가야 할 거리보다 당신이 가야 할 거리가 까마득하게 더 멀다. 당신이 나를 떠나 보내는 거리보다 내가 당신을 떠나 보내는 거리가 훨씬 멀다. "자, 그럼"이라는 대목은 또 어떤가. 가슴이 아프다. "자, 그럼"이라는 표현에는 뒤편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단호한 듯 순응하는 듯 "자, 그럼"이라고 말하지만, 그 음색에는 애써 숨긴 슬픔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 시에서처럼 조병화 시인은 단독자인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밀통하고 내통했다. 꾸밈이 없는 어투로 그는 생애 내내 우리네 도시인들의 슬픔을 노래했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비밀을 아느냐// 나는 아직 어려서// 슬픔이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능력"(〈너는 나의 빛〉). 그는 '편운(片雲)'이라는 호를 썼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의 발간을 계기로 등단한 후 유고시집을 포함해 총 53권의 창작시집과 시론집, 수필집 등 무려 16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럭비와 그림을 좋아했다. 럭비선수로 일본 원정까지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에도 상당한 솜씨가 있었다. 여백을 넉넉하게 살린 그림을 즐겨 그려 여러 권의 화집을 냈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시를 쉽게, 빨리 쓰되 한 차례 쓰고 난 뒤에는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애써 쓴 시를 짐짓 모르는 척 내버려두는 시간은 참으로 적막하였을 것이다.) 내버려 둔 시가 며칠 후에 다시 눈에 밟히면 고쳐 썼고, 눈에 어른거리지 않으면 매몰스레 아예 버렸다고 한다.

 

박재삼 시인은 "조병화 시인의 시에서는 어디서든 난해한 데라곤 없다. 그저 술술 읽히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 〈어머니〉도 난해한 데라곤 없다. "어머님은 속삭이는 우주/ 속삭이는 사랑/ 속삭이는 말씀/ 속삭이는 샘"이라고 그는 썼다.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담담함은 더 감당을 못하겠다. 나직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사람의 내상이 더 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 그럼"이라고 말하며 작별을 고하는 사람, 그이에게는 "말도 무용해진다".

 

 

[애송시 100편 - 제 99편]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 희 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일이 끝나 저물어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년>

 

 

 

▲ 일러스트 권신아

정희성(63) 시인은 해방둥이다. 올해로 38년의 시력에 4권의 시집이 전부인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시(詩)를 찾아서〉), 그의 시를 읽노라면 언(言)과 사(寺)가 서로를 세우고 있는 시(詩)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시는 나직하게 절제되어 있으며 민중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쉽게 읽히되 진정하고, 단정하되 뜨겁다. "그는 자신의 시처럼 단정하고 단아하지만 단아한 외형 속에는 강철이 들어 있다"고 했던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시와 시인과 시인의 삶이 버성기지 않은, 참 보기 좋은 경우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눈덮여 얼어붙은 허허 강벌/ 새벽종 울리면 어둠 걷히고/ 난지도 취로사업장 강바닥엔 까마귀떼처럼/ 삽을 든 사람들 뒤덮인다"(〈언 땅을 파며〉)나, "퍼내도 바닥이 흰 서러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놈이/ 팔다리만 성해서 무얼 하나/ 공사판엔 며칠째 일도 없는데/ 삽을 들고 북한산을 퍼낼까/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북한산 바닥까지 눈을 퍼낸다"(〈눈을 퍼내며〉) 등의 시와 함께 읽을 때,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라는 핵심 구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삽'이라는 한 글자에는 많은 의미와 뉘앙스가 담겨 있다. 파다, 덮다, 뜨다, 퍼담다, 퍼내다 등의 술어를 수반하는 삽질은 자신의 몸을 구부리고 낮춰야 하는 일이다. 한 삽에 한 삽을 더해야 하는 묵묵하고 막막한 일이다. 흙 한 삽, 모래 한 삽, 석탄 한 삽, 시멘트 한 삽이 모여야 밥이 되고 집이 되고 길이 되고 마을이 되고 무덤이 된다. 삽질의 정수(精髓)란 그 우직함과 그 정직함에 있다. 그 정직함을 배반할 때 삽은 무기가 되기도 한다. 농민이든 노동자든, 노동의 본질이 삽질에 있는 것이다.

 

공자는 냇물을 보며 "흘러가는 것들이 저와 같구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 아니듯, 저무는 것이 어디 하루뿐이겠는가. 인생도, 세월도 다 그렇게 흐르고 저문다. 흐르다 고이면 썩기도 하고 그 썩은 곳에 말간 달이 뜨기도 한다. 두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우리가 저와 같아서'는 그러한 자연의 섭리를 불운한 삶 그 안쪽으로 순하게 끌어안는 모습이다.

 

'저와 같아서'라는 말에는 수다나 울분이 없다. 하루가 저물듯, 고단한 노동이 저물어 연장을 씻듯, 노동의 비애와 슬픔도 함께 씻어낼 뿐이다. 저물어 가는 삶의 비애와 슬픔도 함께 씻었으리라. 흐르는 것들은, 저물 수 있는 것들은 그러한 정화와 치유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해서 이 시를 읽고 나면 어느덧 '우리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되고 싶은 것이다. 흘러가는 것들이 저와 같으니!

 

 

[애송시 100편 - 제 100편]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일러스트=잠산

  김영랑의 본명은 윤식(允植). 1915년 결혼했으나 일찍 상처(喪妻)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쓸쓸한 뫼 앞에〉)라고 노래했다. 고향인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본 유학 때에는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가깝게 지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1950년 9·28 수복 때 유탄에 맞아 애석하게도 운명했다.

 

영랑은 '내 마음'을 많이 노래했다. 초기 시에서는 '내 마음'을 빛나고 황홀한 자연에 빗대어, 주로 3, 4음보 4행시에 담아 은은하고 섬세하게 노래했다.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자연에 순결한 마음을 실어 노래했다. 이것은 불순하고 추악한 식민지 현실을 대립적으로 드러내려는 속내가 있었다.

 

이 시를 김영랑은 나이 서른 살을 갓 넘긴 무렵에 썼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의 꿈과 그 시간의 보람, 모란이 지고 난 후의 설움과 불모성을 함께 노래했다. 이 시는 찬란한 광채의 '절정에 달한' 시간을 포착하듯 짧게 처리하면서 음울과 부재의 시간을 길고도 지속적으로 할애하는 데 시적 묘미가 있어 보인다. 시인은 낙화 후의 사건을 아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떨어져 누운 꽃잎'의 시듦뿐만 아니라, 시듦 이후의 건조와 아주 사라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한 데에는 모란이 피는 희귀한 일의 극명(克明)한 황홀을 강조하기 위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감미로운 언어의 울림을 살려내는 난숙함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고,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을 특별하게 읽어낼 줄 알았던 영랑의 유다른 안목과 영리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가 사람이라면 그이는 무엇을 간곡하게 바라며 뛰는 가슴인가. 많은 시들이 울분과 슬픔의 감정을 표표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 더 찬란한 쪽으로 몰아쳐 가기를 바라는 열망에 기초해 있다. 한편 한편의 시는 그런 마음의 예감과 기미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아무리 작은 것을 노래해도 이미 뜨겁고 거대하다.

 

애송시 100편의 연재를 오늘로써 마친다. 가쁘게 오면서 우리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느꼈다. 열독에 감사드린다. 이제 당신의 마음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살아라. '허리통이 부드럽게' 드러난 보리의 오월을 보아라. 신록의 눈동자로 살아라. 당일(當日)에도 명일(明日)에도 우리네 마음은 '향 맑은 옥돌'이요, 은물결이오니.

 


출처 http://mc0713.com.ne.kr/essay/essa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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