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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1941~ )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이 있었다
혓바닥뿐인 생이라니! 달팽이의 한 생은 고달팠으리라. 달팽이는 제 뼈를 녹여 만든 누옥(陋屋) 한 채를 등에 짊어지고 끌며 일생을 보낸다. 등에 얹은 집의 무게는 달팽이가 감당해야 할 평생의 수고다. 온 뜨락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드난살이하는 처지라도 달팽이를 부러워하는 이 없지 않으리! 집 없는 설움에 눈시울이 붉어진 적이 있는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내 콧날이 시큰해진 것은 ‘달팽이 약전’이 집 없이 한세상 떠돈 내 ‘아버지 약전’이었던 탓이다. <장석주·시인>
서정춘 시인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순천 매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1년 제3회 박용래문학상과 2004년 제1회 순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竹篇』(동학사, 1996)『봄, 파르티잔』(시와시학사. 2001)『귀』(시와시학사. 2005)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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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편(竹篇) 1
- 여행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빨랫줄
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줄 닽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망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뿐이다
-현대시학.2005년 11월호-
범종이 울더라
벙어리로 울더라
허공에서
허공에서
허공은
벙어리가 울기 좋은 곳
허공 없으면
울 곳 없으리
계간 『유심』 2009년 3~4월호 발표
초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 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버릴 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혼불 1
오, 불아
누가
훅 불어버린 불아
눈감고 눈 준
명목暝目도 버려놓고
겁도 없이 겂도 없이
일확천금 허공만을 훔쳐서
떠돌이로 달아나는
너, 마지막 처음인
불아
계간 창작과 비평2006년 여름호[창비]에서
돌의 시간
자네가 너무 많은 시간을 여의고 나서 그때 온전한 허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지나간 시간 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눈을 뜰 수 없고 온몸을 안으로 안으로 웅크리며 신음과 고통만을 삭이고 있는 그동안이 자네가 비로소 돌이 되고 있음이네
자네가 돌이 되고 돌 속으로 스며서 벙어리가 된 시간을 한 뭉치 녹여 본다면 자네 마음속 고요 한 뭉치는 동굴 속의 까마득한 금이 되어 시간의 누런 여물을 되씹고 있음이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루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
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말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집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
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51년 하
필이면 어린 나의 생일날 일기장에 침 발린 연필 글씨로 씌
어 있었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종소리
한 번을 울어서
여러 산 너머
가루 가루 울어서
여러 산 너머
돌아오지 말아라
돌아오지 말아라
어디 거기 앉아서
둥근 괄호 열고
둥근 괄호 닫고
항아리 되어 있어라
종소리들아
저수지에서 생긴 일 2
어느 날 저수지 낚시터엘 갔었더랍니다 처음에는 저수지 물이 아주 잔잔해서 마치 잘 닦인 거울 속 마음 같아 보였는데 거기다가 길게 날숨 쉬듯 낚싯줄을 드리웠는데 때마침 저수지 물이 심각하게 들숨 날숨으로 술렁거렸고 난데없는 왜가리의 울음방울 소리엔 듯 화들짝 놀란 물고기가 저수지 전체를 들어 올렸다가 풍덩풍덩 놓쳐버렸기 때문에 나 역시 낚싯줄에 간신히 걸린 한 무게를 깜짝깜짝 놓쳐버릴 수밖에 없었더랍니다 그러자 저수지 물은 다시 잔잔해졌고 아 이렇게 한순간에 일어난 "긴장감 속에 깃든 평화"를 나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아직 맛본 일이 없었더랍니다.
화음(和音)
햇볕이 질화로처럼 따뜻한 봄날이다
일전, 쑥밭골 미나리꽝에서는 새순 돋아 일어나는 미나리의 연약한 힘에 받혀 살얼음 바스러지는 소리가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다가 홰를 치는 장닭울음 소리에 채여 지리산 화개철쭉으로 사라지는 화음이 멀기도 하였다
낡은 집 돌담각에 등을 대고 오돌오돌 앉아서 실성한 듯 투덜거리는 저 홀할머니의 아들 하나는 빨치산이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푸른 시 (2006년 제8호)
수평선
하늘 밑 바다 위에
빨랫줄이 보인다.
빨랫줄 위에는
다른 하늘이 없고
빨랫줄에
빨래는 파도뿐이다
봄, 파르티잔 서정춘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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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줄
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 아래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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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잠자리
저! 일획으로 커진 성냥개비만한 것 저것이 여러번씩 내 속눈썹 지지는 마른 번갯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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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어느 길 잃은 어린 여자아이가 한 손의 손가락에 꽃신발 한 짝만을 걸쳐서 들고 걸어서 맨발로 울고는 가고 나는 그 아이 뒤 곁에서 제자리 걸음을 걸었습니다 전생 같은 수수년 저 오래 전에 서럽게 떠나버린 그녀일까고 그녀일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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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박
밤이더라 먼 데 별빛 아래 빈 나뭇가지에 쪽박 하나이 걸쳐 있더라 걸쳐서 별빛 받아든 별거지더라 초승달이더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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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 : 시인의 시 *竹篇·1 ―여행 서정춘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초로(草露) 나는 이슬 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기러기 허드레 허드레 빨래줄을 높이 들어올리는 가을 하늘 늦비 올까 말까 가을걷이 들판을 도르래 도르래 소리로 날아오른 기러기떼 허드레 빨랫줄에 빨래를 걷어가는 분주한 저물녘 먼 어머니 *단풍놀이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성화(聖畵) 별빛은 제일 많이 어두운 어두운 오두막 지붕 위에 뜨고 귀뚜리는 제일 많이 어두운 어 두운 오두막 부엌에서 울고 철없이 늙어버린 숯빛 두 그림자, 귤빛 봉창에 비쳐지고 있었다 *난(蘭) 난을 기르듯 여자를 기른다면 오지게 귀 밝은 요즘 여자가 와서 내 뺨을 치고서 파르르 떨겠지 *낙화시절 누군가가 <이 강산 낙화유슈 흐르는 봄에> 문밖 세상 나온 기념으로 사진이나 한 방 찍고 가자 해 사진을 찍다가 끽다거를 생각했다 그 순간의 빈틈에 카메라의 셔터가 터지고 나도 터진다 빈몸 터진다 <이 강산 낙화유슈 흐르는 봄에>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 어머니는 언덕배기 구덩이에 호박씨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끼칼로 떽끼칼로 나물 캐고 있고 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 나는 나는 나는 몽당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 *낙차(落差) -해우소에서 마음 놓고 듣네 나 똥 떨어지는 소리 대웅전 뒤뜰에 동백나무 똥꽃 떨어지는 소리 노스님 주장자가 텅텅 바닥을 치는 소리 다 떨어지고 없는 소리 *늦꽃 들국화는 오래 참고 늦꽃으로 핀다 그러나 말없이 이름 없는 佳人 같아 좋다 아주 조그맣고 예쁘다 예쁘다를 위하여 늦가을 햇볕이 아직 따뜻했음 좋겠는데, 이 꽃이 바람의 무게를 달고 홀린 듯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꽃이 가장 오랜 늦꽃이고 꽃이지만 중생 같다 *죽편. 2 - 공법 하늘은 텅 빈 노다지로구나 노다지를 조심해야지 조심하기 전에도 한 마디 비워 놓고 조심하고 나서도 한 마디 비워 놓고 잣대 눈금으로 죽절 바로 세워 허허실실 올라가 봐 노다지도 문제 없어 빈 칸 닫고 빈 칸 오르는 푸른 아파트 공법 **서정춘 시인은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죽편》(1996) 《봄, 파르티잔》(2001), 등의 시집을 냈다. 한 편의 시집을 아껴 내고, 28년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 한 시인의 말이 부드럽고 날카롭다. “그렇게 설사하듯 시를 쓰는 거라면 나도 못 쓸 것 없지요. 시 천 편이 함형수의 <해바라 기의 비명> 한 편을 못 당할 걸 아는데 어떻게 함부로 시를 쓴다요. 천천히 쓰지요. 좋은 시 다섯 편만 남길라요.” ( 인사동에서 차를 마시며 백석 시인의 추억을 들려주시고 열심으로 사는 것이,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 단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들려주시던 시인의 모습이 그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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