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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정지용, 리륙사와 로신 // <<향수>>와 <<추억>>
2015년 07월 04일 23시 15분  조회:6063  추천:0  작성자: 죽림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은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사료된다는 견해가 있고 또한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생애 초반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밍둥춘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3]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어려서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 그의 고모 윤씨는 송신영에게 시집갔는데,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소년 시절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4] 

 

중학 시절 

1931년 14세에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大拉子學校)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의학과 진학 희망)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京城)으로 유학, 그해 4월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숙생활을 하며 그는 저녁밤 하숙집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이때 그는 친구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 등을 방문, 시에 관한 토론을 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이 때에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 유학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교대학(立敎)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도쿄 도시샤대학(同志社)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5]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6] 

 

창씨개명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으로 돼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해선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했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전에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유학생활과 체포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立教大学)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11] 교토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투옥과 최후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룬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후,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 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았다는 주장 등 그의 죽음은 일제 말기에 있었던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는 의문이 수차례 제기되었다. 

 

사후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의해 제정되었다. 

 

작품 

윤동주의 시집은 사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새 명동》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1948년의 초간본은 31편이 수록되었으나,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시를 추가하여 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이 실리게 되었다.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경향 및 평가 

민족적 저항시인,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되며,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조선에서는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학력 

명동소학교 졸업 

지린 다라쯔 중학교 수료 

은진중학교 수료 

평안남도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 수료 

광명중학교  졸업 

경성 연희전문학교 졸업 

일본 릿쿄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일본 도시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제적 

상훈 경력[편집] 

서울 숭실고등학교 명예 졸업장 추서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국민훈장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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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한국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이활(李活)이며 개명하기 전의 이름은 이원록(李源祿)·이원삼(李源三)이다. 육사(陸史)는 그의 아호로 대구형무소 수감생활 중 수감번호인 264를 후일 아호로 썼다. 

 

생애 

 

이육사 동상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진보)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도산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25년 10대 후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이원록의 필명은 여러가지가 있고, 호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가 있어 기재한다. 하나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받은 수인 번호 '264'의 음을 딴 '二六四'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며,'李活'과 '戮史', '肉瀉'를 거쳐 '陸史'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1929년 이육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요양을 위해 집안어른인 이영우의 집이 있는 포항으로 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육사가 어느 날 이영우에게 "저는 "戮史"란 필명을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말은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라는 의미였다. 당시 역사가 일제 역사이니까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 즉 일본을 패망시키겠다는 의미였다. 이에 이영우는 "표현이 혁명적인 의미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같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온건한 '陸史를 쓰라'고 권고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陸史'로 바꿔 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肉瀉'라는 이름은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으로 당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1932년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했을 적 대구 약령시에 대한 기사를 네 차례 연재할 때 사용되었다. 이육사의 필명이나 호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와 같고 이원록이 '陸史'로 불리게 된 연유이다. 

 

문단 등단 시기는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1930년이며,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중국과 대구, 경성부를 오가면서 항일 운동을 하고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으로 작품도 발표했다. 그동안 대구 격문 사건 등으로 수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32년 6월 초 중국 베이핑의 만국빈의사에서 대문호 로신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하였다. 후일 로신이 사망하자 조선일보에 추도문을 게재하고 그의 작품 《고향》을 번역하여 한국내에 소개하였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핑(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 구금 중 순국했다. 둘째동생이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광복 후 1960년 안동시에 이장했다. 유고시집 《육사시집》(1946)이 동생이자 문학평론가인 이원조에 의해 출간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 강점기 하의 그의 항일 투쟁 활동과 일제 강점기 하의 詩作활동을 기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탄신 100주년과 순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는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이육사 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안동시는 안동 강변도로를 '육사로'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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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모방을 위하여 

            -정지용의 [鄕愁]를 중심으로 

이병렬(숭실대 국문과 강사) 



I. 모방과 표절 
예술 행위 혹은 예술 작품의 표절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저질 시비가 종종 있는 대중가요로부터 소위 국전의 수상작이라는 고급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심심찮게 이 표절시비를 보아 왔으며, 이러한 현상은 문학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 얼마 후 외국 작가의 작품을 모방한 것으로 된다든지, 베스트셀러 대열에 낀 어느 소설이 국내 몇몇 작가의 작품을 조사 하나 틀리지 않게 짜집기한 것으로 독자에 의해 고발된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근년의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일은 모방과 표절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방은 말 그대로 모방이다. 남의 것을 본 떠서 하는 행위이다. 즉 남의 것을 이용하되 결과는 그것과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격언처럼 모방은 또 다른 창조를 전제로 해야한다. 모방이 이러한 창조로 나아가지 못하고 단순한 모방에 그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류라고 부르며 폄하하게 됨은 물론 나아가 표절이라고 한다. 
표절은 글자 그대로 남의 것을 허락없이 베끼는 행위이다. 근래에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어색한 사조 아래 남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행위가 모든 예술작품에 성행하다시피 하고 있으나, 그러한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예술적 창조를 하지 못하면 그것은 단순한 베끼기에 불과할 것이며, 이는 바로 무슨 무슨 사조라는 그럴싸한 이름아래 숨겨진 표절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방이든 표절이든 예술가에게는 특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남의 영감을 이용하여 나의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것은 결국 남의 피와 땀을 그저 먹겠다는 도둑 심보에 다름 아니다. 이는 법의 문제보다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남의 것을 모방 혹은 표절하여 또 다른 예술적 창조를 이루었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것은 비평가나 독자의 몫이지만, 근본적으로 모방이나 표절은 한 당사자가 더욱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표절시비의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예술가의 예술행위는 모방이나 표절에서 시작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예술행위, 예술작품이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는 문학에서의 모방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천재가 아닌 이상, 공자가 이른대로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가 아닌 이상 예술가들의 학습기 혹은 습작기 작품은 앞선 예술 작품을 모방하거나 표절하면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가 문학 소년 혹은 문학 소녀였을 시절에, 소월이나 윤동주, 혹은 만해나 미당의 여러 시에서 따온 구절들을 적당히 배열해 놓고 시를 썼다는 쾌감에 젖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방과 표절을 통한 학습기와 습작기를 거치면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찾게되고, 그 목소리가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그는 개성있는 예술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술행위에서 모방과 표절은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어서는 참다운 예술행위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모방과 표절은, 그것을 빌어 또 다른 예술적 창조를 이루어낼 때에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창조적인 모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모방하고 표절을 하여 예술적인 창조로까지 나아가느냐에 있다. 이러한 물음에 적절한 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이에 정지용의 <향수>와 이 작품을 모방한 작품(필자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인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답을 대신하려 한다. 먼저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이란 작품을 소개하고, 이어서 정지용의 생애와 <향수>를 제시한 다음, 두 작품의 비교 분석을 통해 창조적 모방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트러블 스티크니의 <추억> 
미국의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Joseph Trumbull Stickney)는 1874년 6월 20일 제네바에서 태어나 다섯 살까지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왔다. 그의 아버지(Austin Stickney)는 트리니티 대학의 라틴학과장이었고, 어머니(Harriet champion Stickney)는 코네티컷 주지사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의 부모가 오랜 동안 주로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클리브돈과 뉴욕에서의 1, 2년을 제외하면, 스티크니는 어린 시절을 주로 유럽에서 보냈다. 게다가 하바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의 유일한 선생이었다. 
1895년 문학사학위를 받은 스티크니는 곧 프랑스로 가 소르본느 대학에서 7년 동안 희랍 문학과 산스크리트 문학을 공부했으며, 1903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그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후 3개월 간 그리스에 있다가 하바드 대학 희랍문학과의 강사로 돌아왔는데, 이때 이미 그는 한 권의 시집을 출간( 1902년)했으며, 또 계속적으로 시작을 하는 한편 그리스의 비극시인인 이스킬러스(Aeschvlus)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티크니는 하바드 대학의 강사이자 결혼을 앞 둔, 온 세상이 그의 앞에 활짝 열려있던 30세의 나이에 아깝게도 뇌종양으로 죽고 만다. 이 때가 1904년 10월 11일이었다. 
그가 죽은 이듬해인 1905년 그의 친구들이 스티크니가 생전에 출간한 시집에 그의 유작들을 미완성인 채로 묶어 <트럼블 스티크니 시들>()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간했는데, 이것이 그가 남긴 작품 전부이다. 흔히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요절한 시인들에게 올바른 평가가 아닌 잘못된 동정을 보내는 경향이 있으나, 스티크니의 경우에는 빈틈없는 비평가로 알려진 브룩스(Van Wyck Brooks)나 윌슨(Edmund Wilson)으로부터도 [약속의 시인이자 실행의 시인]이라고 칭송될 정도로 찬사를 받았다. 
친지들의 회고에 의하면 스티크니는 키가 크로 말랐으며 아름다운 음성을 소유한 우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부끄러움을 잘 타고 친구들 간에는 인정 많은 사람으로, 자연에 대한 우울함이 있었으나 유머로 넘친, 청년 시인의 한 본보기였다고 한다. 반면 그는 진정한 학자이자 음악가로서, 그의 바이올린 솜씨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거의 천재적이었으며, 아름다운 회색 눈과 당황해 하는 슬픈 얼굴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특히 문학의 경우 '내가 진실로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시'라고 말할 정도로 스티크니는 시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스티크니의 친구이자 유고시집의 편집에 참여했던 무디(William V. Moody)의 말에 따르면 '그는 동서양의 사고를 새로이 종합한 자신만의 시를 쓰기를 꿈꾸어 왔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포우(Poe)와 스윈번(Swimburne)의 시에서 빌려오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그의 대표작인 <추억>이란 시이다. (시의 번호는 분석의 편의상 필자가 붙인 것임) 


Mnemosyne 

A- It's autumn in the country I remember. 

B- How warm a wind blew here about the ways! 
And shadows on the hillside lay to slumber. 
During the long sun-sweetened summer-days. 

It's cold abroad the country I remember. 

C- The swallows veering skimmed the golden grain 
At midday with a wing aslant and limber ; 
And yellow cattle browsed upon the plain. 

It's empty down the country I remember. 

D- I had a sister lovely in my sight: 
Her hair was dark, her eyes were very sombre; 
We sang together in the woods at night. 

It's lonely the country I remember. 

E- The babble of our chuldren fills my ears, 
And on our hearth I stare the perished ember 
To flames that show all starry thro' my tears. 

It's dark about the country I remember. 

시의 제목인 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뮤즈신의 어머니이자 [기억의 여신]의 이름이다. 우리말로 옮길 때, [기억]보다는 [추억]이라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즉,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추억>이다. 어설프게나마 이 시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추 억 

지금은 가을이 오는 내 추억의 고향 

따사로운 바람결 길모퉁이 스치고 
향그러운 태양의 긴 여름날 
산마루에 누운 그림자 졸던 곳 

지금은 추운 내 추억의 고향 

한낮에 금빛 곡식물결 박차고 소소떠는 
날씬하게 기울은 제비 날개 
누런 소 넓은 들에 풀 뜯던 곳 
지금은 비인 땅 내 추억의 고향 

칡빛 머릿단에 수심 짙은 눈망울 
내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내 누이와 
밤이면 숲 속에서 함께 노래부르던 곳 

지금은 쓸쓸한 내 추억의 고향 

어린 자식들 도란거리는 소리 내 귀에 가득한데 
난로 속 남은 재 응시하면 
눈물 속에 별인양 불꽃이 반짝이던 곳 

지금은 어두운 내 추억의 고향 

번역이기에 원작의 형식과 각운의 맛을 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엉성한 번역이었지만 향토적인 고향의 모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시를 김현승은 그의 수필<가을에 생각나는 詩들>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그 많은 추억의 시편들 가운데서도 생각나는 것은 미국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의 걸작 <추억>이다. (중략) 얼마나 다사롭고 눈물겹게 만드는 추억의 시편인가? 이 시 한 줄 한 줄은 민감한 독자들의 추억을 오래도록 사로잡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끝 연 마지막 두 행은 얼마나 눈물겹고 감각적인 표현인가? 

김현승이 지적한 것은 [가을]에 생각나는 시이다. 그의 가을과 관련한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이 시를 택한 것은 라는 제목과 함께 [It's autumn in the country I remember.]라는 시행, 그리고 시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만큼 이 시는 가을과 고향에 대한 [추억]을 느끼게 해주는 좋은 시이다. 

III. 정지용의 <향수> 
정지용은 1902년 5월 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농가에서 아버지 정태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약상을 경영하여 농촌에서는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불의에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세가 갑자기 기울어져 가난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학동이 정지용의 시를 빌면서 소개한 정지용의 고향은 이런 곳이다. 

재담과 독설로 숱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던 천재 시인 정지용이 태어난 곳은 실개천이 지즐대며 흐르는 농가마을이다. 지금은 문명의 때를 타고 그 원초적인 자연조차도 과도기적인 열병으로 진통하는 마을로 변해가고 있으나, 그 당시로는 소박하고 인정미 넘치는 그런 마을로 온통 전설의 바다를 이루어 출렁이고 있었다. 
정지용이 태어나서 자란 마을 뒤로는 높은 한 일자로 뻗어간 <일자산>이 있다. 그 산의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실개천을 이루고 청석교 밑을 지나 들판을 가로질러 동쪽 끝으로 흐르고 있다. 그 산기슭에 자리한, 그가 태어나서 자란 집은 일자산의 계곡에서 이어지는 개천을 따라 산 정기가 곧바로 뻗어있는 것도 같지만, 범상의 눈엔 그것이 잘 보이질 않는다. 

1913년 그의 나이 12세 때에 혼인을 하여 이곳에 살았고,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14년)하고 4년간 한문을 수학하면서도 이곳에서 살았다. 어쨌거나 정지용은 그가 태어난 이곳에서 유년기는 물론, 휘문고보를 거쳐 동지사대학을 마치고 모교인 휘문고보에 교사로 취임하여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그러나 이는 주소지일 뿐, 실제는 14세이후 고향을 떠나 객지의 고달픈 삶을 영위했다. 
정지용의 문학적 재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4월 휘문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선배로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등이 있었고, 후배로는 이태준이 같은 학교에 다녔다. 1학년 때의 성적이 88명 중 1등을 할 정도로, 창가나 체조 등 실기과목을 제외하면 전 과목에 걸쳐 고루 성적이 우수했으며, 특히 영어와 작문에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후에 동지사대 영문학부에 진학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 그는 교비생으로 휘문고보를 다녔다. 
박팔양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1918년) 이미 휘문고보, 중앙고보, 일고, 고상, 법전 등의 학생들이 모여 문학동인을 결성, 등사판 문예동인지인 <요람>을 발간하기도 했다는데, 휘문고보의 중심 학생이 정지용이었다고 한다. 이 <요람>을 통해 정지용은 많은 습작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한편 1922년에는 휘문고보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 하는 문우회의 학예부장을 맡아 <휘문> 창간호의 편집위원이 된다. 이듬해 3월 휘문고보 5년제를 졸업하고, 4월에는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학부에 진학한다.(이하 정지용의 생애는 이 글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에 생략한다) 
이러한 정지용의 삶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농촌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벗삼아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것이 된다. 다음으로 그는 14세 이후 객지 생활을 통해 누구보다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으리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휘문고보 시절 이미 시인의 자질을 보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어와 작문에 능통하여 영문학부를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은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정지용이 초기 시의 대표작인 <향수>는 1927년 3월 <<조선지광>>에 발표되지만 작품 말미에 1913년 3월에 쓴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박팔양의 기록에 의하면 1918년에 시작한 <요람>은 동인지가 1923년까지 약 10호 정도 나왔으며, 여기에 <향수>를 비롯한 그의 여러 작품이 실렸다는데,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정지용의 동시나 민요풍의 여러 시편들이 <향수>와 함께 이미 <요람>동인지 시대인 1918년부터 1923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조선지광>>에 발표된 <향수>는 이렇다. (철자법과 띄어쓰기 모두 <<조선지광>>에 실려있는 그대로이며, 시행의 번호는 분석의 편의상 필자가 붙인 것임) 

鄕 愁 

I- 넓은 벌 동쪽 끄트로 
넷니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빗 게으른 우름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 엔들 니칠니야. 

II- 질화로에 재가 식어 지면 
뷔인 바 테 밤 ㅅ 바람 소리 말을 달니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 
집벼개를 도다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 엔들 니칠니야. 

III-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한울 비치 그립어 서 
되는대로 쏜 화살을 차지러 
풀섭 이슬에 한추룸 휘적시 든 곳, 
-------그곳이 참하 꿈 엔들 니칠니야. 

IV-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가튼 
검은 귀밋머리 날니는 누의와 
아무러치도 안코 엽블것도 업는 
사철 발 버슨 안해 가 
따가운 해쌀을 지고 이삭 줏 든 곳, 
-------그곳이 참하 꿈 엔들 니칠니야. 

V- 한울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업는 모래성으로 발을 옴기고, 
서리 까막이 우지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비체 돌아안저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 엔들 니칠니야. 

유행가의 노랫말로도 쓰일 정도로 친숙해진 이 시에서 우리는 정지용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함께, 그가 그리워했던 고향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즉, 평화롭고, 사랑스럽고, 정겨운, 지극히 향토적 서경이 그것이다. 유년 시절의 추억이 담겨져 있으며, 한가로운 서경과 함께 아버지, 누이, 그리고 안해와 그들이 [돌아안저 도란도란거리는]는 행복한 모습이 바로 정지용의 고향인 것이다. 서경과 서정이 어우러져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하는 이 시는 정지용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마음의 고향이라 할 만큼 우리들의 정서에 부합되는 것이다. 

IV. <추억>과 <향수>의 거리 
앞에 소개한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과 정지용의 <향수>는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두 시인의 생애와 관련하여 두 작품의 창작 연대와 그 구조를 분석해 보면 이는 분명해진다. 
우선 생애와 관련지어 볼 때, 정지용의 습작기는 그가 휘문고보에 입학하던 1918년에서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 영문학부에 수학하던 1925년 사이가 된다. 당시 문학도로서 접할 수 있는 현대시는 대략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의 국내외 시이다. 식민지 시대인 만큼 일본 시인과 함께, 서구시의 대표라 할 프랑스 상징주의 시는 물론 영미시를 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더구나 앞에서 소개한 트럼블 스티크니는 미국의 근대시가 현대시로 전환하고 있던 1900년대의 과도기에 나와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의 한사람임은 물론, 요절한 시인으로 젊은이들에게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던 시인이었다. 게다가 정지용은 영어에 능통하고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1923년 <<조선지광>>에 <향수>를 발표하기 전에 정지용은 스티크니의 <추억>을 읽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추측은 앞에 소개한 <추억>과 <향수>의 구조 및 기법을 견주어 보면 더욱 신빙성을 획득하게 된다. 우선 외형상으로 무척 닮아 있다. 전체 5연의 구성은 물론 매 연이 끝나며 후렴구의 형식 1 행이 반복되는 것이 그렇다. 
먼저 스티크니의 <추억>을 보자. 형식 면으로 볼 때, 시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한 행(A)을 독립된 하나의 연으로 처리하면서 전체를 5연으로, 한 연은 3행과 후렴구 형식의 1행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말고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음송형식의 시의 전형이다. 
이러한 음송형식은 각운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매 연의 끝에 나오는 후렴 형식의 1행(B- , C- , E-123)은 It's로 시작하여 항상 remember로 끝난다. 게다가 B연에서는 way와 3행의 days, C연에서는 grain과 plain, D연에서는 sight와 night, 그리고 E에서는 ears와 tears를 통해 매 연마다 1행과 3행의 각운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행 구분과 동음어의 반복을 통해 정형시 혹은 음성시의 전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역시 전체 5연으로 구성된 하나의 정형을 이루고 있다. 스티크니의 <추억>처럼 시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독립된 연은 없다. 그러나 매 연마다 4(5)행으로 묘사하고 있는 고향의 모습은 모두 [``````는(든) 곳]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렴구 형식의 1행은 그러한 고향의 모습, [그 곳에 참하 꿈 엔들 니칠리야.]의 반복이다. 
따라서 <향수>의 전체적인 시형식은 <추억>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추억>의 5연 형식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 모습을 5개의 연에 균등하게 분배했고, 각운의 맛을 살리려 매 연의 끝에 나오는 후렴형식의 1행은 It's로 시작하여 항상 remember로 끝나지만 그 내용은 서로 상이한데, <향수>는 이를 하나로 통일하여 5회에 걸쳐 반복함으로써 <향수>를 더욱 절실하게 표현하며 운을 살리고 있다. 결국 <향수>의 형식은 <추억>의 그것을 빌어 나름대로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시의 내용을 보자. <추억>의 전체적인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고향의 가을은 이러이러한 곳(각연의 )이었는데 지금은 춥고 cold(B-④), 텅 비어있고 empty(C-④), 외롭고 lonely(D-④), 어두운 dark(E-④)곳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 기억 속의 고향과 현재의 고향이 대조를 이루며 흔히 가을이란 이미지가 주는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문제는 기억 속의 고향이다. 
김현승이 지적한 것처럼 <추억>의 고향은 다사롭고 눈물겨운 곳이다. 지극히 평화롭고 서정적 자아의 행복이 가득한 곳이다. 길모퉁이를 돌아 부는 바람, 졸고 있는 언덕의 그림자, 향기로운 여름날, 황금들판을 나는 제비, 풀을 뜯는 소, 검은 머리의 누이, 숲 속의 노래, 어린 자식들의 재잘거림, 별빛 같은 불꽃, 이 모든 것을 서정적 자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모습이다. 그런 곳이 지금은 춥고, 텅 비어있고, 외롭고 어두운 곳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기에 [추억]처럼 눈물겨울 수밖에 없다. 
정지용의 <향수>는 바로 <추억>에서 서정적 자아의 기억에 내재라는 고향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고, 질화로에 재가 식고, 아버지가 졸고 있고, 검은 머리 누이, 안해, 따가운 햇살, 하늘의 별, 흐릿한 불빛, 도란거리는 소리, 이 모두는 <추억>의 고향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바로 소재와 이미지의 차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소재 혹은 이미지가 유사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I - 꿈 엔들 니칠리야. A- I remember 
I - 회돌아 나가고 B- blew here about the ways 
I - 황소 C- yellow cattle 
II-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E- the perished ember 
II- 뷔인 바테 C- empty down 
II- 엷은 조름 B- lay to slumber 
IV- 검은 귀밋머리 날니는 D- hair was dark 
IV- 누의 D- a sister 
IV- 따가운 해쌀 B- the long sun-sweetened 
V- 별 E- starry 
V- 우지짓고 지나가는 C- veering skimmed 
V- 흐릿한 불비체 E- the perished ember 
V- 도란도란거리는 E- babble 

한 편의 시에서 이렇게 많은 유사점을 찾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예는 바로 <향수>가 <추억>을 모방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특히 V- 과 V- 의 소재와 분위기는 E- 을 그대로 빌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III연을 제외하면 모든 연이 <추억>의 전 연의 여러 행에서 그 소재와 분위기 혹은 이미지를 빌어 온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향수>는 분명 <추억>의 형식을 빌었고, 소재와 이미지를 차용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의 구조와 기법을 빌었을지언정 그 주제와 감흥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추억>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과거와 현재의 대조이다. 서정적 자아는 현재 고향에 돌아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가을이다. 그런데 고향의 모습이 너무 변해버렸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향의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답고, 따뜻한 곳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구태여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을씨년스럽고, 공허하고, 외롭고 어두운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기에 김현승의 지적대로 다사로우면서도 눈물겨운 모습이다. 
그러나 <향수>는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음에도 이를 현재와 대조시키지 않는다. 서정적 자아도 고향이 아닌 타향에 있다. 타향에서 고향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적 자아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고향의 평화롭고,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들만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이를 현재까지 지속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그곳 이 참하 꿈엔들 니칠리야.]를 반복함으로서 [향수]를 더욱 절실하게 할 뿐이다. 
또한 서정적 자아의 시각의 경우 <추억>은 B, C, D, E로 진행하면서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중된다. 그러나 <향수>는 원경과 근경이 혼합되어 있다. I연은 원경, II연은 근경, III연은 다시 원경으로 나가다가 IV연과 V연은 다시 근경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원경과 근경의 혼합을 통해 <추억>처럼 서정적 자아의 시각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즉 고향의 모습에서 가족의 모습으로 집중된다. 특히 <향수>는 <추억>의 누이와 어린 자식들만이 아니라, 아버지, 누이, 안해 그리고 그들이 모여 앉아 도란거리는 모습을 통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정겨운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정지용의 실제 고향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서구적인 [말] 달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만 당시 조선의 농촌에서 느낄 수 있는 향토적인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깔려있는 즉 정지용은 비록 <추억>의 여러 면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조선의 농촌에 걸맞는 분위기와 감흥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인 모방인 것이다. 


V. 창조적 모방을 위하여 
앞에서 정지용의 <향수>는 미국의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을 모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도 아님을 아울러 밝혔다. 
두 작품의 발표 연대와 정지용의 생애로 미루어 분명 정지용은 습작기에 트럼블 스티크니의 <추억>을 접했고, 그는 이 시를 매우 감명 깊게 읽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분명 이 시를 염두에 두고 <향수>를 썼을 것이다. 시의 형식이나 소재 그리고 이미지를 빌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스티크니의 시를 단순히 번역이나 번안만 한 것이 아니라, 스티크니가 사용한 시의 구성 기법, 행과 연의 구분, 후렴구의 기능, 그리고 소재와 이미지를 완전한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이를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조선의 농촌, 자신의 고향의 서경과 서정에 맞게 재창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향수>에는 <추억>에서 읽을 수 있는 cold, empty, lonely 그리고 dark와 같은 춥고, 공허하고, 쓸쓸하고, 어두운 가을을 찾을 수 없다. 언제 읽어도 정겹고, 따뜻한 고향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것은, 비록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모방 혹은 표절을 했다고 하더라도, 정지용은 이를 통해 조선에 어울리는 서경과 서정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모방이나 표절이 아니라 창조적인 모방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지용의 <향수>가 미국 시인의 시를 모방하였다는 것을 밝히면서도, <향수>가 아름다운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스티크니의 <추억>을 읽고, 이를 통해 자신의 고향을 생각했고, 정지용은 <추억>의 제요소를 빌어 자신의 고향을 그렸다. 구성기법, 소재, 리듬, 이미지는 물론 구체적인 단어까지 빌면서도 그는 이를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고향을 그렸다. 그리하여 전혀 새로운 조선의 서경과 서정을 읊었다. 모방은 하되 단순한 모방이 아니며, 하다못해 단어까지 그대로 빌면서도 그 단어의 쓰임이 시 전체의 내용 속에 용해되어 있도록 만들었다. 스티크니가 창조해 놓은 <추억>을 통해, 정지용은 그가 느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재창조해 낸 것이다. 이는 바로 창조적인 모방인 것이다. 
창조적인 모방, 그것은 모든 예술행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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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 - 꿈에도 못 잊는 인간의 본향

 
 
지금은 도시로 변해버린 뉴욕 퀸즈 카운티의 1920년대 전원 풍경. 농가의 생김새만 다를 뿐 한국의 시골 풍경과 매우 유사하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1927년, 정지용; 1902년-1950년> 
 
 
고 사는 게 힘들수록 향수(鄕愁)가 커지는 것은 인지상정, 한자 ‘鄕愁’도 그래서 생겨났다. 시골 향(鄕)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본뜬 것으로서 본래 의미는 ‘함께 밥을 먹다’, 그게 훗날 ‘마을’ ‘시골’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자 거기에 먹을 식(食)을 더해 ‘잔치’라는 의미로 썼다. 가을 추(秋) 아래 마음 심(心)이 붙은 시름 수(愁)도 마찬가지다. 가을 추(秋)는 벼 화(禾)에 불 화(火)가 붙은 것으로서 추수를 앞두고 곡식을 좀먹는 메뚜기들을 잡아 불태우는 모양을 그린 것이라는 게 정설, 겨울을 날 양식이 모자랄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그린 것인 바, 농경문화권에서 밥을 같이 먹던 혈연․지연에 대한 그리움 또한 시름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감정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걸 거꾸로 말하자면, 향수는 ‘너’와 ‘나’의 성분과 사상과 다름을 극복해주는 공통분모로써, 향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감성으로 돌아가는 것인 바, 인간애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시인들이 고향을 노래했던 것도 ‘향수’를 통해 인간애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본향을 아담과 이브가 죄 짓기 이전에 살았던 에덴동산으로 설정해놨듯이, 시골출신이 도회지의 물질만능주의에 타락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고향에서의 순수를 그리워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이지만, 사는 게 고달프고 외로울수록 향수가 더욱 증폭된다는 것을 누구라서 부인하랴. 아예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자고 일어나면 논밭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요즘 고향 또한 예전의 그 때 그 모습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고 보면 현대인의 고향은 자신의 가슴 속이나 꿈속에만 남아있는 실루엣 같은 것이라고 해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대인은 모두 다 실향민(失鄕民),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년-1950년)도 ‘현대인이 상실한, 상실할 수밖에 없는 고향’을 주목했던 것 같다. 1903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이 ‘향수’를 발표한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인 1923년 경, 휘문고보 재학시절인 1919년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므로 ‘향수’는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 유학 시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바, 당시 일본에 유학 갔던 대부분의 조선 젊은이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정지용 또한 낯선 타관에서 나라를 빼앗긴 2등 국민으로서 서러움을 톡톡히 겪으면서 ‘향수’의 시상을 가다듬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왼쪽부터, 1946년 건설출판사에서 펴낸 정지용 시집, 정지용, 스티크니
최남선(崔南善)이 한국 최초의 신체시로 일컬어지는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을 발표한 게 1908년이고 주요한(朱耀翰)이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발표한 게 1919년, 그 이후 불과 4년만에 정지용이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라든지 ‘금빛 게으른 울음’ 등의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을 자유자재로 구사해가며 지금의 어느 현대시에 비겨도 모자람이 없는 작품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래서 혹자는 정지용이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 중에 접했을 구미 영시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머지 시상과 시적 기교를 습관적으로 차용(?)했을 거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향수’가 하버드대 출신으로서 30세 때 뇌종양으로 숨진 미국 시인 조셉 트럼블 스티크니(Joseph Trumbull Stickney; 1874∼1904)의 ‘추억(Mnemosyne)’를 모방 또는 번안했다는 글이 나돌기도 했었다. 실제로 ‘향수’와 ‘추억’은 구조와 시상의 전개가 똑같을 뿐만 아니라, 매 연마다 ‘the country I remember’(추억)과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향수)가 반복된 것도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고, ‘소’ ‘누이’ 등의 소재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지용이 스티크니의 것을 한국말로 살짝 고쳐 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령 ‘향수’가 ‘추억’을 베낀 것이라고 해도, ‘향수’의 문학적 가치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아니 될 듯싶다. ‘향수’와 ‘추억’의 프레임과 테크닉은 같을망정 ‘향수’는 조선인의 가슴 속에 따뜻하게 묻혀 있는 ‘고향’을 그린 것인 반면 ‘추억’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불안을 그렸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별될 뿐만 아니라 정지용이 한국 현대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런 사소한 시시비비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어 보인다. 한국전쟁 때 월북했던 탓에 정지용은 누군가가 평했던 것처럼 “살아서는 불우한 시인이었고 죽어서는 사상적 금기 대상”이었지만,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많은 기라성 같은 후배 문인들을 등단시킴으로써 한국시단의 씨알을 굵게 만든 탁월한 문학가였다. 1933년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젊은 천재 시인 이상의 시를 실어 길을 터줬고, 1939년 ‘문장(文章)’ 편집인으로 있을 때는 조지훈․박두진․박목월 등 세칭 ‘청록파’를 등단시켰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화여전교수와 경향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후배들을 길러냈었다. 그런 그가 한창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하던 스무 살 시절에 서양시인의 시 하나 모방했다고 해서 손가락질한다면 그게 더 비문학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나 ‘사철 발 벗은 안해’를 두고 있는 사람들만큼은 정지용을 너그러이 이해해주리라고 믿는다. 왜? 한국인들의 ‘고향 인심’은 그렇게 야박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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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이 표절했다는 '향수'의 영문시 원본 

Mnemosyne[nim?s?ni]?(추억)
( Joseph Trumbull Stickney(1874~1904)
스위스 태생 미국인

It's autumn in the country I remember.
How warm a wind blew here about the ways!
And shadows on the hillside lay to slumber.
During the long sun-sweetened summer-days.
It's cold abroad the country I remember.
The swallows veering skimmed the golden grain
At midday with a wing aslant and limber ;
And yellow cattle browsed upon the plain.
It's empty down the country I remember.
I had a sister lovely in my sight:
Her hair was dark, her eyes were very sombre;
We sang together in the woods at night.
It's lonely the country I remember.
The babble of our children fills my ears,
And on our hearth I stare the perished ember
To flames that show all starry thro' my tears.
It's dark about the country I remember.

   
원본시 번역

추 억
요셉 트럼블 스티크니

지금은 가을이 오는 내 추억의 고향
따사로운 바람결 길모퉁이 스치고
향그러운 태양의 긴 여름날
산마루에 누운 그림자 졸던 곳
지금은 추운 내 추억의 고향
한낮에 금빛 곡식물결 박차고 소소떠는
날씬하게 기울은 제비 날개
누런 소 넓은 들에 풀 뜯던 곳
지금은 비인 땅 내 추억의 고향
칡빛 머릿단에 수심 짙은 눈망울
내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내 누이와
밤이면 숲 속에서 함께 노래 부르던 곳
지금은 쓸쓸한 내 추억의 고향
어린 자식들 도란거리는 소리 내 귀에 가득한데
난로 속 남은 재 응시하면
눈물 속에 별인양 불꽃이 반짝이던 곳
지금은 어두운 내 추억의 고향


향수(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註釋)
1.헤설피 : 소리가 느릿하고 길며 약간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지는 모양
2.함초롬 : 가지런하고 고운 모양
3.아무렇지도 않고 : 덤덤하고
4.성근 : 드문 드문
5.서리까마귀 : 가을까마귀

?鄭芝容(1902-?)?아명 지용(池龍).
①충북 옥천, 12세 결혼, 천주교신자,부친은 한의사
②옥천보통학교, 휘문고보 졸업
③일본 도시샤(同志社)대 영문과 졸
④휘문고 영어교사, 이화여대 교수, 경향신문(카토릭계신문),주간, 출판사 ‘문장’에 있으면서 청록파 박목월,박두진, 조지훈을 등단 시킴.
⑤保導聯盟(도울보,이끌도)에 가입하여 공산주의자들의 전향 강연에 큰 역할 했음.
⑥1950. 6.25 전쟁 이후 행방이 묘연.


●정지용의 詩 ?향수?의 표절 시비에 대한
나의 반론
(다음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 대한 폄하(貶下) 및 폄훼(貶毁) 글에 대해 제가 해당 카페에 반론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정지용이 詩 ?향수?를 미국 詩에서 표절했다는 논란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대전 지방에서는 공주대 국어교육과 구중회 교수가 자기 소견을 발표 했었고 그 외에도 理論詩(評論)를 하는 사람 중에 상당수가 정지용의 ?향수?를 문제시 하려고 시비를 붙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시인 아니 시의 대가들은 ?향수?를 현재 우리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 훌륭한 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詩가 순수한 창작시가 아니고 표절시라 할지라도 ?향수?는 누구도 표절 할 수 없는 훌륭한 표절이므로 이 詩가 주는 엄청난 효과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향수?가 표절작’이라고 그 가치를 격하하려해도 이미 ?향수?는 우리 가슴속 깊이 자리 잡아 격하의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표절이면 어떻고 번역시면 어떤가. 읽어서 감동이 오고 들어서 기쁘면 되는 것 아닌가? 사기(詐欺)를 친 정지용은 우리 곁에 없고 정지용의 사기가 우리에게 손해 입힌 사실이 없으니 우리는 이 표절시가 주는 감동만 우리의 것으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두 시를 잘 비교해 보라. 지용이 스티크니의 추억을 읽은 후 향수를 썼다면 그는 추억을 통해 향수의 영감을 얻은 것이지 분명 표절은 아니다. 향수를 표절시라고 한다면 이 땅에 진정한 창작시는 없는 것이다.

 표절시비를 일으켜 자기 이름을 빛내려는 당신들은 어느모로보나 순수성이 없는 나쁜 사람들이다. 이미 마신 꿀물 속에 침 뱉었다고 말해 꿀물을 토하게 하려는 치사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최고의 노래방? repertory?하나를 빼앗아 가려는 치한들과 다름 없는 인간들이다.

남을 깎아 내리려 하지 말고 나도 노력해서 그만큼 되도록 최선을 다 하거나 아니면 잠자코 있어라. 하기사 그런 왜곡된 마음을 가진 자가 제대로 된 한 줄의 글이라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Richard Carlson이 쓴 "우리는 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가?" 라는 책에서 그가 말한 "침묵의 힘을 믿어라" 라는 명언을 그대들에게 팁으로 전하며,

정지용의 티없고 순수한 마음을 담은 시 한 편을 더불어 선사 하노니 그대들도 님처럼 순박한 마음으로 붓을 놀려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길 바란다.
영국의 재사 죠지 버나드 쇼의 회한의 절규가 당신들의 절규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줄 알았지" 
-버나드 쇼-

별똥
정지용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려
벼르고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어린 날 내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수많은 별똥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때, 별똥이 떨어질 때 바로
언덕을 넘어 별똥 떨어진 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다음에, 다음에.... 벼르기만 하다가 다 자라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
별똥은 그저 물체가 대기권에서 타고난 흔적일 뿐이란 슬픈 지식의 소유자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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