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평론가의 지적처럼 요즈음엔 "고통스런 열정이 없이 단순히 일상의
표현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문화귀족주의적 삶에 대한 동경으로 시인이
되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들에게 문학이란, 시란 귀걸이나 머리핀 같은 하나의 악세사리에 불과하다.
거기에 새로운 미라든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고뇌가 있을 리 없다.
어쩌면 그것은 성가신 것이거나 귀찮은 요구사항일른지 모른다. 그저 고만고만한 작품을
만들어 자기만족 혹은 자기과시를 위한 발표에 부산을 떨며 혈안이다가
성공하면 이번에는 잡지 월평이나 계간평에 주목한다. 거기서 주목을
받으면 기고만장하지만 소외되면 또 불만을 표하며 평자들을 싸잡아
욕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류의 인간들에게 허영은 끝이 없다. 부르주아적
삶이 보편화되면서 궁핍을 잃어가는 혹은 망각해가는 시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나타한 일상의 삶에 생채기를 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할
문학이 오히려 타락한 현실에 영합하여 부화뇌동한다면 문학의 존재이유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러한 문학과 예술의 세속화현상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현상인가. 종교의 경우에도 애초의 성스럽고도 강렬한 영적 힘을 지녔던 성인의 가르침이 날로 때가 묻고 타락하여 그 빛나던 광휘를 잃어온 것처럼, 이제 문학도 그 찬란하고 도저했던 아우라aura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현상을 반성케 하고 그 결핍을 보완해 주어야 할 문학의 본분은 무엇인가. 물질적 풍요의 이면에 간절히 궁핍을 원하는 또 하나의 마음들이 있다는 사실은 굳이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번 달에 발표된 시들을 읽으며 확인할 수 있다.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詩窮而後工)는 말이 있다. 구양수가 언명한
이 말에서 "궁"이란 작가가 처한 궁핍한 상황을 말하는데, 물질적 의미보
다는 정신적 의미가 더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체험의 절실성을 강조한 것
이다. 식민지시대 시인 李箱의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건강한 생의 중심부에서 밀려나 있다는 소외감이 시인의 내부
에 한을 머금게 하고 그것이 예술에 투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픈 상처
가 결국 마음의 지도를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험의
절실성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되는 시들을 중심으로 이 달의 시를 읽어보기
로 한다. 먼저 정체불명의 병마와 싸우고 있는 최춘희 시인의 시다.
2.
제주에 사는 鄭시인이 작은 상자에 향기를 가득 담아 보냈다.
7.8월이면 바다를 향해 잘디잔 보라빛 꽃을 피운다는 해녀들이
물질할 때 꽃과 잎을 따 귀를 막으면 아무리 깊은 물 속이라 해도
멀미가 나지 않는다는 숨비기꽃 그는 바다 몰래 잎과 열매를 뜯어
말렸다고 한다 깊고 서늘한 노래 하나가 가만히 내 발등을 덮으며
내려오는 저녁이었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중심에서 비껴 선 어느
그늘 자리에 아픈 몸과 마음이 서로 동무하며 길 떠나자 등을 떠미네
공복의 삶이여 오늘은 너의 속쓰린 얼굴이 왜 이리 못내 보고 싶으냐한
번도 배불리 채워주지 못한 창자 깊숙이 독한 약쑥향기 같은 숨비기꽃
이 저릿한 내음을 꾹꾹 눌러 담아 던지고 싶다 잎진 겨울나무 숲 시퍼
렇게 입술 터진 그 틈새 봄을 기다리며 숨죽인 불씨들, 속의 불꽃되어
꽃의 바다로 둥글게 퍼져 나가네 어머니, 당신의 꽃무덤 자궁 속으로
힘껏 자맥질하여 나,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손이 닿으면 사라지는
사람의 향기
꽃의 향기도 이와 같아서
그 속에 얼굴을 대니 맟을 수 없네
-최춘희, [산책]-숨비기꽃에 길을 묻다 전문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중심에서 비껴 선
어느 그늘 자리"이다. 그곳에서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이 느끼는
실의와 좌절의 강도 또한 절실할 것이다. 생의 욕망이자 에너지인 "에로스"
가 좌절될 때 죽음의 충동("타나토스")이 얼굴을 내민다. "몸과 마음
동무하며" 길 떠나자고 한다. 몸은 마음이 깃드는 장소이니 분리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몸이 허하니 공복감 또한 강하다. 절박한 허무감이
엄습한다. 화자는 "공복의 삶이여" 하고 탄식한다. 同病相憐! 나처럼
"속쓰린" 너의 얼굴이 못내 보고 싶어진다. 이러한 때에 멀리 제주에
사는 친구가 보내온 "숨비기꽃"의 향기를 맡으며 화자는 황혼에 "깊고
서늘한 노래"인 시의 순간을 만난다. 그러면서 아무리 깊은 생의 물 속
이라 해도 "멀미"가 나지 않는 그 꽃을 닮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시인에겐 "한 번도 배불리 채워 주지 못한 창자"의 몸이 있고,
"봄을 기다리며 숨 죽인 불씨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속의 불꽃"
되어 "꽃의 바다"로 둥글게 퍼져나가고 싶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와 이어지며 재생에의 욕망으로 타오른다. 그런데 이러한 재생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힘껏 자맥질하여 들어가야만 가능하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의 하나인 "자궁회귀본능"이 미의식의 원천이라는
마광수 교수의 이론을 빌지 않더라도 이 시는 생명의 결핍을 겪고 있는
시의 화자가 좀더 완전한 생명의 근원에 이르고자 하는 소망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것은 마지막 연에서 보듯이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독한 약쑥향기"와도 같은 극한의 궁핍을
이겨내는 고뇌의 "불꽃"이 타올라야만 재생과 부활에 이를 수 있음을,
나아가 새로운 예술의 창조에 다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대개 병이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오랜 동안 병인이 누적되어 오다가 어느 시점에 현상하는
것이다. 조지훈도 [病에게]란 시에서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生의 畏敬을 가르치네"라 노래했지만 몸의 궁핍이라 할 병을 만날 때
우리는 살아온 날의 허물을 되돌아보게 되고 더욱 겸허하게 절대자에게
용서를 빌게 된다. 방만하게 경영하던 국가가 거덜이 나고 환란의 궁핍에
처해서야 비로소 실상을 자각하고 헛된 거품을 가라앉혀 보려 하는 오늘
의 우리에게처럼, 병은 그런 의미에서 정다운 교사이기도 하다.
갑자기 목이 메이고
두터운 안개 파도처럼 밀려왔다.
끝모를 억울함에 주먹을 움켜쥐고
기도하였으므로
손에 묵주가 쥐여 있었더면
아마 묵주알이 물렁물렁해졌을 것이다.
하느님 제가 통 속에서
모래나 먼지보다 더 작아져 비오니
부디 지난날을 보지 마시고
제 더러움도 낱낱이 덮어주시어
올무에서 저를 건져주소서.
-조창환, [통 속에서] 부분
화자는 "거칠어진 오장육부" 때문에 씨티촬영을 체험하면서 "갑자기 목이"
메인다. "두터운 안개"와도 같은 두려움과 회한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느낀다. 모든 것은 자업자득의 업보임에도 불구하고 "끝 모를 억울함"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쩌면 한 사람의 건전한 중년 가장으로서 나름
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도 이렇게 병마가 도래하여 고통스러워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 공동의 업보로 인한
공해와 거대 조직사회가 주는 스트레스, 존재의 운명이라 할 시간의 압박,
각종 문명의 공해 등에 둘러싸인 현대인들은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곧
축복이자 기적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존재의 부조리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신체생명의 위협은 매우 원초적인 것이어서 이 경우 삶에의 집착은 엄청
나게 강해지는 것이다. "손에 묵주가 쥐어 있었더면/아마 묵주알이 물렁
물렁해졌을 것이다." 결국 유한하고 나약한 존재인 인간은 "통"으로
상징화된 극한상황에서 그 오만을 버리고 "모래와 먼지보다 더 작아져"
그 올무(올가미)에서 건져달라고 애원한다. "부디 지난날을 보지 마시고/
제 더러움도 낱낱이 덮어"달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아집을 벗어나 순수고도 절실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
궁핍한 상황이 결과적으로 순정한 정서를 유발시켜 창작의 계기가 되고
있다.
4.
문명의 진보와는 별 상관없이 궁핍이 생활화되어 살아가면서도
불만스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생을 달관한 듯한 행복한 표정들을
담은 다큐물을 볼 때마다 우리는 진한 감동을 받는다. 한국 내에도
이런 오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고 그들을 취재한 프로들은 더욱
친근하고 진하게 삶의 본질이 뭔가를 생각하게 한다. 문명의 때가 덜
묻은 청정한 오지 중의 하나로 강원도 정선 땅을 드는 것은 그러한
오지의 궁핍한 삶이 낳은 "정선아라리"의 깊은 맛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그곳을 찾고 또 노래부른다. 지난 설날에도 다큐
멘터리 "동강"과 "비둘기호 풍경 그리고 정선이야기"라는 두 개의 프로
그램을 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으로의 아련한 여행을 경험했다.
첩첩산중, 고립된 공간에서 형성된 독특한 산간문화는 그들 삶의 바탕이
되어 집과 일터와 자연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정선 출신 진용선 시인은 아예 귀향을 했다지만, 대구의 시인 문인수도
틈만 나면 정선을 찾는다고 한다. "내 속이 정선인 것 같다"는 시작메모
처럼 그것은 어쩌면 문인수 시의 전반적인 특징의 하나인 한의 미학과
정서에 딱 맡는 구체적 지리공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필자의 주변에도 동강을 사랑하는 모임의 회원으로 있는 시인들이
많다. 고재종 시인은 우리 나라 강 중에서 가장 강다운 강이 동강이라고
도 해서 나로 하여금 빨리 가 보고 싶은 충동을 갖게도 했다.
{현대시학} 2월호에는 문인수 시인의 정선 시편이 10편이나 발표되어
있어서 제재의 일관성, 분위기의 통일성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시적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유장하게 이어지는 길의 이미지며, 짧은 형식에서
오는 간결미, 정제미, 한의 정서 등이 우리 서정시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친근감도 더하다.
강원도 정선땅은 산이 많다.
산이 많으니 산 넘는 고개도 많다.
비알밭에 호미 걸고
막장에서 막장으로 산 넘어 봐라
한 세상 넘는 일이 숨이 차고 눈물 나지
그리하여 저 노래는 애가 터진다.
애 터지게 느리고 구성져서
끊어지거나 무너지지는 않는다.
소나무 등허리가 그렇게 다 굽었다.
동강 물길이 또 섧게 돈다.
-문인수, [정선아리랑] 전문
우리는 왜 정선아라리만 들으면 가슴이 콱 막히고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 나라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등허리가" 굽은
소나무처럼 집단무의식 속에 내재된 보편정서의 동질감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위의 시는 민족정서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
하고 있는 시라 하겠다. "끊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 무궁화와도 같은
끈질긴 생명력과 서러움과 풍류 같은 것 말이다.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악인 우리 나라 지형상 느리고 유장한 리듬의 정선아리랑은 그만큼
동질성이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선이라는 시적 공간은
문인수 시인의 말처럼, 자신의 내면과 "궁합"이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시인은 같이 발표된 시화에서 "정선엘 가면 물안개
속에서도, 밤중 부엉이 소리의 암흑 속에서도 내가 잘 보인다. 정선엘
가면 풀려나고 싶다가도 금세 또 더 깊숙이 갇히고 싶다"고 말하는 것
이다.
노향림의 시는 시적 수사의 방법론은 다소 다르지만 문인수가 정선에
갇히고 싶어하는 심정과 같은 궁핍의 정서를 남도의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몇 걸음 더 가고 싶은 비둘기호가
마지막으로 남원 옹정역에 닿는 날
날개 없는 비둘기들 사이에 나는
앉아 있었다 마음은 마냥 산줄기를
타고 넘어가 구른다.
기적 소리도 없이 굴러가는 낡은 쇠바퀴 소리 하나
붙들지 못했다 나를 붙드는 건
밤톨만큼씩 굴러 다니는 사투리였다
장꾼들이 이고 지고 온 보퉁이마다
눈이 부은 잠 부족한 아침이 꽂혀 있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찬서리 묻은 하늘이 덮여 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적삼 아래
둥그런 젖무덤을 보인 아낙들이
제 키들을 낮추며 비둘기호에서 내린다
졸업 사진 속 얼굴같은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맘껏 서성인다
집찰구 밖으로 뚫린 역마당엔
옆구리가 다 터져나온 보퉁이들
나도 주저앉는다
-노향림, [비둘기호] 전문
비둘기호 기차는 주로 서민들이 타고 다니는 기차다. 그런 점에서 삶의
현장의 냄새가 가장 짙게 배어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든 사투리들, 냄새
나는 보퉁이들, 그리고 생존에 지친 서민들의 궁핍한 삶의 모습들, 어쩌면
시인이 또한 삶에 지쳐 잠시 잊어버리고 있던 그러한 고향의 풍경이 눈에
선한 듯하다. 그곳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적삼 아래/둥그런 젖무덤을 보인
아낙들"이 살아가는 원초적 건강함의 세계일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그러
한 건강한 원초적 삶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날개없는
비둘기"라는 표상 속에서 그러한 세계로의 회귀는 실현가능성이 그렇게
높아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며 어쩌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숙명적 결함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인은 궁핍의 상태에서 사물에 대한 감각이 더 예민해지기 마련이지만,
"시의 공졸(工拙)은 궁달(窮達)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타고난
능력에 관계되는 것일 뿐"(정민, {한시미학산책} 참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궁핍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고, 다만 중요한 것은
시인이 그 궁핍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조선 중기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월사(月沙) 이정귀는 "궁함이 능히 오로지
하게끔 하여, 오로지함을 이루면 능히 저절로 공교해지는 것(詩專而後工)"
이라 했으니 예술창조를 향한 일념정진의 매진이야말로 좋은 작품을 생산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여겨진다. 다만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
(詩能窮人)는 말은 오늘날의 현실에도 부합되는 사실이니 무명의 설움과
고독과 가난과 같은 시인됨의 궁핍을 이겨낼 결의와 자신이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시인의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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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울창창 ―한세정(1978∼ )
기다려라
관통할 것이다
나를 향해
나는 전진하고
나를 딛고
나는 뻗어나갈 것이다
손이 없으면
이마로 돌격하리라
절망이 뺨을 후려칠 때마다
초록의 힘으로
나는 더욱 무성하게
뿌리 내릴 것이다
기다려라
압도할 것이다
절망 위에 절망을 얹어
내가 절망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까지
초록의 목덜미가
선연한 핏줄로 붉어질 때까지
나는 이파리를 움켜쥐고
또 다른 이파리를 향해
울울창창(鬱鬱蒼蒼)
온몸으로 나를
흔들어댈 것이다
‘기다려라/관통할 것이다’, 나무의 목소리를 빌려 화자는 의지를 표명한다. 나무의 관통은 수직으로 이행된다. 나무처럼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꿰뚫고 하늘을 향해 뻗치는 기세로 살아가리라는 이 수직 상승의 의지! ‘나를 향해/나는 전진하고/나를 딛고/나는 뻗어나갈 것이다’, ‘나’, ‘나’, ‘나’! 뿌리 내린 자리에서 평생을 보내는 대개의 식물같이 ‘나’라는 뿌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초록의 힘으로’ ‘더욱 무성하게/뿌리’ 내리려는, ‘나의 생’에 대한 옹골찬 지향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징이겠다. 그런데 살아가노라면 그 인간 고유의 자존(自存) 감각과 생명력을 꺼뜨리는, ‘절망이 뺨을 후려칠 때’가 언제 어디에서라도 생길 수 있다. ‘손이 없으면/이마로 돌격하리라’, ‘절망 위에 절망을 얹어’ 등의 언표만으로도 현재 화자의 심정이나 처한 상황이 절망에 압도당할 지경으로 팍팍하다는 게 짐작된다. 하지만 삶아, 네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익히 알지만, 나 또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야! 조용히 시들어 버리고 사그라질 내가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한다지? 그래, 온몸으로, 온몸으로 맞받아치리라. 한파로도 가뭄으로도 뿌리가 옹골차지는 나무처럼, 어떤 절망도 내 ‘초록 힘’을 키우는 밑거름으로 만들리라. ‘나는 더욱 무성하게/뿌리 내릴 것이다’! 화자는 자신에게 ‘기다려라’ 속삭이며 기를 살린다. ‘기다려라, 압도할 것이다’, 능히 절망을 절망시킬 것 같은 화자의 기세다. 내 결코 생이파리인 채 지지 않으리. ‘초록의 목덜미가/선연한 핏줄로 붉어질 때까지’, 내게 주어진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태우리! 우리도 울울창창 숲에 가서 화자처럼 무럭무럭 김 오르는 초록 피를 수혈받고 힘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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