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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더기우의 시인의 집
김 혁
윤동주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룡정자택 옛터. 표지석조차 없다. (사진 리련화 기자)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일제의 서슬푸른 총칼아래에서도 붓자루를 놓지 않고 우리 말, 우리 글을 보듬었던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집 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우선 명동촌의 시인의 생가를 떠올리게 된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되여있는 생가. 하지만 룡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간행물 《나라사랑》 23집에 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은진중학과 몇분 거리에 있는” 윤동주의 룡정자택 주소는 정안구(靖安區) 제창로(济昌路) 1ㅡ20이였다.
룡정으로 이사오면서 윤동주네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윤혜원 3남매, 거기에다 큰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룡정생활이 시작되였다. 명동의 생가에 비해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나갔다.
동생 윤일주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은진중학교는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사람들은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여기서 더기란 언덕을 가리키는 옛날 방언이다.
룡정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양문화에 눈을 떴다. “영국더기”안에 있던 학교나 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의 피난처가 되였고 병원은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해주고 숨겨주는 은신처가 되였다.
그 결과 “영국더기”는 반일운동을 지원한다는 리유로 일본경찰당국으로부터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서 “영국더기”는 인걸을 많이 키워냈다. 김약연과 윤동주, 송몽규를 비롯하여 박계주, 리태준, 명희조, 문익환, 리봉춘, 안병무 등등. 력사의 행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독립운동가, 문인, 종교인들이 이곳 “영국더기”를 거쳐 나갔다.
“영국더기”의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몇백메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문예지를 만드는가 하면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또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오래동안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다가 타계한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6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윤동주의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절구통우에 빈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학교 문예지를 만드는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룡정 은진중학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또렷이 나타난다.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기도 하고 동시인을 지향하는 문학도이면서도 축구선수이기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일등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 관련 서적만 들고 다니던 그였으나 뜻밖에도 수학을 잘하는데는 친구들이며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날 신세대들의 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꽃미남”, “인기 짱”이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뒤 윤동주는 방학때마다 룡정으로 돌아오군 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사각모와 교복을 벗어 가지런히 걸어놓고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소를 몰고 나갔으며 집안일을 도왔다. 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매돌도 갈아드렸다.
윤일주씨의 회고에서 보면 윤동주가 “방학때마다 이불짐속에 한아름씩 넣어오는 책은 800권 정도” 되였고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서가”가 있어 그 책들을 꽂았다고 한다.
집의 한쪽벽을 전부 차지한 서가, 그 서가에 꽂혀있는 800여권의 책들, 이것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자택의 풍경이였다.
윤동주의 유명한 일화인 진학문제를 놓고 아버지와의 “설전”도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 치렀다.
“물사발이 밖으로 휙 휙 날고 아주 란리가 났었어요.” 하고 윤혜원은 당시를 회상했다.
윤동주는 문과에 가겠다고하는 반면 그의 부친은 의과를 해서 의사가 돼야 한다고 강요한데서 아버지와 윤동주 사이에 처음으로 대립이 생긴것이다.
아버지 윤영석은 젊어서 북경, 일본 도꾜에서 문학쪽의 공부를 한적 있었으나 문학적으로 양명(揚名)해본적은 없었다. 했기에 아들에게만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는 의지가 강력했던것이다.
대립이 계속되더니 끝내는 동주가 밥을 굶고 생전 처음으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날까지 생기도록 사태가 악화되였다. 윤일주씨에 의하면 집안의 험악한 분위기에 동생들은 어지간히 겁이 들었다고 한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문과 지망을 고집하는 손자의 고민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의 중재와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권면에 힘입어서야 윤동주의 문과 지망의 길이 드디여 열렸다.
1940년 은진중학을 졸업한후 윤동주는 “영국더기”를 내렸다.
룡정촌의 더기를 내려선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동산”으로 올랐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또 다시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와 함께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꾜 릿교대학 영문과, 도꾜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했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제창로에 위치한 윤동주의 집으로 운송되여 왔다.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 《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윤동주의 장례식광경을 담은 사진이 보존돼 있는데 그 사진속에서 상복을 입고 애통함에 빠진 윤동주의 친지들을 헤아려 볼수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영정 오른쪽에 서있고 아버지 윤영석은 그 두번째, 동생 일주는 세번째, 어머니 김용은 다섯번째, 녀동생 혜원은 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는 왼쪽으로 네번째에 서있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는 장례를 집도했던 문재린 목사이다.
사연많은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경 그 자택에서 직접 살았던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에 의해 이뤄졌다.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은 중국에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진 1990년 이후, 해마다 윤동주의 고향 연변으로 와서 윤동주묘소를 새롭게 조성하고 중학생잡지사에서 주최하는 “윤동주 문학상”시상식에 참석했다.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은 어제날의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략도를 그렸다.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낸 그 그림에는 당시 “영국더기”의 진풍경이 빠침없이 그려져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 그 곁의 명신녀중학, 독립선언서를 찍었던 제창병원 그리고 동산교회와 카나다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사택의 위치와 간호사들의 기숙사까지 그려져 있다. 그 략도에 윤동주의 자택이 명확하게 표시되여 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해 확인한 또 한분이 있었다. 연변박물관 연구원으로 지냈던 리송덕 옹이였다. 그는 1960년대에 윤동주의 막내동생인 윤광주와 두터운 교분을 맺어 이 자택을 늘 찾았다고 한다.
리송덕 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간도일본총령사관”(지금의 룡정시정부청사) 동쪽 담장에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룡정시 문화관의 바로 뒤편에 자리한 그곳은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현재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이 바로 그 위치에 오픈돼 있다.
6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김정호(76세)씨에 의하면 기계수리공장은 50년대에는 고아원이였다가 “항미원조”전쟁이 일자 의족공장으로 탈바꿈했다가 현재의 기계공장으로 되였다고 한다.
기계수리공장은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으나 현재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생겼다. 주차장 남쪽켠에 지어진 차고 부근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 집터이다.
윤동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이 룡정자택 뜨락에서 남긴 합영.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을 아울러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연변일보" 2015-7-28
[출처] 더기 위의 시인의 집|작성자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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