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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 시인
봄바람을 등진 초록빛 바다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위태롭다.
잔주름 차마폭의 두둥실거리는 물결은,
오스라질 듯 한껏 경쾌(輕快)롭다.
마스트 끝에 붉은 깃발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 ☆
이 생생한 풍경(風景)을 앞세우며 뒤세우며
온 하루 거닐고 싶다.
ㅡ 우중충한 5월 하늘 아래로,
ㅡ 바닷빛 포기 포기에 수(繡) 놓은 언덕으로,
1937년 5월 29일
오늘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윤동주 시인의 『풍경(風景)』이라는 시를 읽어 봅시다.///
///지난 3월 말 일본 교토에 다녀왔다. 벚꽃이 흐드러져 꽃 대궐을 차린 듯했다. 교토에 가면 바쁜 일정을 쪼개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도시샤(同志社)대 이마데가와(今出川) 캠퍼스에 있는 정지용(1902.5.15-1950?)과 윤동주(1917.12.30-1945.2.16)의 시비(詩碑)다. 내가 특별히 시에 조예가 깊다거나, 두 시인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캠퍼스 일대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흥미롭고, 적국의 천년고도(千年古都)에 유학한 식민지 청년의 고뇌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도시샤대 이마데가와 캠퍼스는 일본 중세를 지배했던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가 설치된 곳이다. 길 하나 건너로 천황이 거처한 드넓은 고쇼(御所)가 위엄을 뽐내고, 담 하나 너머로는 조선통신사가 머문 정갈한 상국사(相國寺)가 품격을 자랑한다. 1875년 니지마 조(新島襄)가 미국 선교사 등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도시샤대는 기독교 사립학교로서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에비나 단조(海老名彈正)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캠퍼스 안의 창영관(彰榮館), 유종관(有終館), 예배당, 클라크기념관, 해리스 이화학관 등은 모두 130년 이상 된 건물로서 중요문화재다. 유서 깊은 캠퍼스 한가운데 가장 좋은 곳에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서 있다. 조국을 잃은 두 유학생은 아름다운 캠퍼스를 드나들면서 가끔 낭만을 즐기고 자주 현실을 원망했다.
정지용은 1923년(22세)부터 1929년(28세)까지 도시샤대에서 수학했다. 윤동주보다 15년 연상이고, 20년 먼저 입학했다. 재학 기간도 윤동주(10개월 가량)보다 훨씬 길었다(6년). 그는 고향 옥천에 처를 놔두고 유학해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휘문고보가 교사로 근무할 것을 조건으로 그의 학비를 대주었다. 그가 도시샤대를 택한 이유는 기독교에 이끌린 데다, 이 대학 영문과가 간사이(關西)에서 가장 유명했기 때문이다. 교토의 자유로운 학풍도 마음에 들었다. 정지용은 조선민예운동(朝鮮民藝運動)을 주창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강의(휘트먼과 블레이크 강독)를 듣고, ‘윌리엄 블레이크 시에서의 상상’이란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정지용은 교토에서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1885-1942)의 작품을 탐독하고 본뜨면서 시작(詩作)에 힘썼다. 기타하라는 일본 근대 시사(詩史)에서 불세출의 천재로 인정받는 시인이었다. 일본어에 새 목숨, 새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소운(1907-1981)도 그의 추천으로 일본문단에 합류했다. 정지용은 그에게 직접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작품을 열심히 모방하며 자기 시를 창작해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국 전통 민요의 가락을 살리면서도 근대시의 새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정지용은 교토에서 도회지의 풍경과 생활을 서정적으로 읊었다. 당시 일본은 이른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파도를 타고 대중문화를 구가했다. 정지용은 가와라마치(河原町) 번화가, 가모가와(鴨川) 풀섶, 히에이잔(比叡山) 숲 속을 거닐며 ‘카페프랑스’ ‘황마차’ ‘압천(鴨川)’ ‘슬픈 인상화’ ‘다리 위’ 등을 지었다. 이 작품들은 한국 모더니즘의 모태라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가 1928년 7월 22일 세례를 받은 가와라마치교회(성프란시스코 사비엘 천주당)에도 들러보았다. 그의 세례명은 프란시스코(방지거, 方濟各)였다.
정지용은 도시샤대를 졸업한 후 휘문고보 영어 교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경향신문 주간(1946.10.1-1947.7.9),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을 때 윤동주 시를 게재하고, 곧이어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행했다(1948.1.30). 그는 서문에서 윤동주의 순결한 생애를, ‘동(冬) 섣달의 꽃,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라고 칭송했다. 윤동주는 정지용을 통해 비로소 불멸의 민족 시인으로 부활한 셈이다.
정지용을 기리는 유지들은 2005년 윤동주 시비 곁에 그의 ‘압천’을 새긴 시비를 건립했다. 윤동주 시비보다 10년 늦었지만, 도시샤대는 정지용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그의 시비를 세우도록 배려한 것이다. 나는 화강암 속살이 희게 빛나는 시비 앞에서 선후배가 서로 끌고 밀며 저승에서나마 마음껏 조국을 노래하라고 기원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이 시에서 "오스라질듯"이 란
"오스라지다";ㅡ
물체의 겉면에 주름이 가볍게 잡히어 오그라들다
라는 뜻이랍니다.
물결의 주름을 묘사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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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영혼의 시대적 고뇌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를 어렵지 않게 암송할 수 있을 것이고, 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이 친숙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이 친숙함이 오히려 시인의 마음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은 아닐까? 잎새, 바람, 별 같은 편안하고 쉬운 단어들이 이 시를 무작정 쉽고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시인은 고작 잎새에 이는 사소한 바람에도 괴로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아서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것들이 아닌, 죽어 가는 나약한 것들을 사랑해야겠다고 말한다. 시를 꼼꼼히 읽고 행간을 음미하다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시인의 간곡한 마음이 느껴진다.
제목이 알려 주다시피 이 시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페이지에 놓인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서시」가 보여 주는 시 세계를 좀 더 깊고 풍요롭게 만날 수 있다.
윤동주는 1917년 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간도'라고 하면, 가난에 찌들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버리고 떠난 유이민(流移民)이 떠오른다. 그러나 명동촌은 함경도의 학자들이 가솔을 이끌고 집단으로 이주하여 만든 한인(韓人) 마을이었고, 1900년 간도로 이주한 윤동주의 집안은 시인이 태어났을 무렵엔 이미 이 마을에 정착하여 안정된 기반을 다진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다. 그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하는 열다섯 살 때까지 고향에서 생활하며 평화와 순수의 세계를 지향하는 본질적인 자아를 형성한다.
윤동주는 명동촌을 떠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삶의 어두운 요소를 체험하고, 중학 시절에는 민족의식을 자극할 만한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들을 겪게 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대체로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문학 소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성장기 동안 그는 그 어둠에 물들지 않으며 자신의 순수한 세계만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시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이력은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스무 살 무렵인 1936~37년경에 씌어진 그의 많은 동시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소박하게 보여 준다. 사물과 동물과 식물들은 인간의 세계와 행복하고 충만하게 어우러져 있다. 밤에 소복히 내린 눈은 "지붕이랑 / 길이랑 밭이랑 / 추워한다고 / 덮어 주는 이불"처럼 따뜻한 존재이다(「눈」). 물소리를 그리워하는 "아롱아롱 조개껍데기"는 어린 화자의 마음과 넘나든다(「조개껍질」). 심지어는 이 따뜻한 세계를 파괴하는 근대 문물인 비행기에 대해서조차, "숨결이 찬 모양"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보낸다(「비행기」).
동시 창작에서 멀어진 후에도 윤동주는 유년의 따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별 헤는 밤」은 그러한 시인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 「별 헤는 밤」 중에서
그가 간절하게 호명하는 이름들은 하나하나 모여서 순수하고 화해로운 유년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같은 순한 짐승들은 스스럼없이 인간들에게 다가가고, 가난한 이웃 사람들은 세파에 찌든 얼굴이 아닌 정겨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 국경 지대의 이국 소녀들도 여기서는 네 땅, 내 땅을 가지고 싸우는 '타민족'이 아니라 그저 함께 노니는 벗들이며,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이국(異國)의 시인들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다. 이들은 이미 잃어버린 과거에 살고 있으며, 또 멀고 먼 북간도에 속하는 존재들이다. 별 하나마다 불러온 이름 사이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함께 놓아 보기도 하지만, 얼른 흙으로 덮어 버릴 수밖에 없다. 모순과 균열로 가득한 현실 속의 "나"는 이미 그 낙원으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 면면히 흐르는 간절한 그리움은, 그 세계를 결코 되찾을 수 없다는 데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별 헤는 밤」은 자선(自選) 원고 묶음의 맨 마지막에 놓이는 시이다. 그는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기념하여 그 동안 쓴 작품 가운데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별 헤는 밤」과 「서시」 사이에 놓이는 시편들은, 잃어버린 과거의 낙원에 대한 동경과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미래를 향한 나지막한 다짐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시인의 내면적 고투를 보여 준다.
1938년 6월 19일에 씌어진 「사랑의 전당(殿堂)」은 윤동주 자신이 직접 묶은 원고에서 제외되었으며, 또 1948년에 간행된 유고 시집에도 수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는 동시의 세계를 포기하고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인의 결심을 보여 주는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과 그곳에 머물고 있는 "순이"에게서 멀어져야겠다고 말한다.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窓)에 부닥치기 전 /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 뒷문으로 멀리 사라"져 "험준한 산맥"을 마주해야 한다. 아늑하고 평화로운 사랑의 전당에 계속해서 머물기만 한다면, "어둠과 바람"이 몰려와 사랑의 전당을 뒤흔들 것이라는 뼈아픈 인식이 엿보인다.
이 무렵부터 윤동주는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참혹한 현실과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문학적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식민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운 화해의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본성과 가혹한 시대를 정직하게 대면하고자 하는 양심의 내면적 갈등이었다. 1939년 9월에 씌어진 「자화상(自畵像)」은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미묘하고 섬세하게 그려 내고 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그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자화상」 중에서
우물 속의 얼굴은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 사이에 순수하고 평화롭게 머무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다. 시인은 자신의 얼굴이 미워지기도 하고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엾어지기도 한다. 이 시는 유년의 풍경 속에 "추억처럼" 순수하고 평화롭게 머물고 싶은 갈망과 그러한 갈망을 떨쳐 내고 현실에 굳게 발 딛어야 한다는 결심 사이에서 망설이고 갈등하는 시인 자신의 고뇌를 보여 준다.
이 망설임과 갈등은 '부끄러움'이라는 자기 인식으로 집약된다. 유년의 순수한 낙원과 비교해 볼 때 현재의 자신은 현실의 모순과 균열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부끄럽다. 그는 그 아름다운 세계에 속할 수 없기에 자신의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한다(「별 헤는 밤」). 또한 도래해야 할 미래의 비전을 생각할 때 현재의 자신은 확신에 찬 신념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부끄럽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참회록을 쓰며 "부끄런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참회록」). 그리고 과거의 순수한 낙원을 지향하는 마음과 미래의 어느 밝은 날을 지향하는 마음은 "하늘"이라는 상징을 통해 도덕적 염결성으로 통일된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지만(「서시」),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르다(「길」).
윤동주의 거의 모든 시에는 원고 말미에 시를 쓴 날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날짜들을 살펴보면, 그의 시들이 순수하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가혹한 시대의 삶 쪽에 점점 더 무게 중심을 두어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민 지배를 받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깊은 자각과 기독교적 사유에서 촉발된 실존 의식이 이러한 변화를 불러온 것 같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十字架)」 중에서
윤동주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시에 기독교적 소재와 구조가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필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 시들이 1941년에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는 사실은, 시대의 분위기에 의해 그의 종교적 사유가 첨예해진 것은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1941년은 식민 정책이 한층 강화된 시기였다.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며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고, 조선의 젊은이들은 강제 징용·징집의 대상이 되었다. 현실의 암울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기독교적 세계 해석과 만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역시 1941년에 창작된 시들 중 하나이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이란 종교적 차원에서 보자면 원죄를 짊어진 채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가리키는 것일 테고,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보자면 식민의 탄압이 거세지는 가혹한 현실을 비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어둠"을 피해 "햇빛"을 쫓아가는 대신, 어둠 속에 머물며 조용히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어둠을 진정으로 밝히는 일은 역설적으로 그 어둠을 함께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뼈아픈 인식이 이 시의 근저에 흐르고 있다.
이 시가 종교적인 것은 다만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같은 단어가 나오고 자기 희생의 문제가 다루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화자는 현재 교회당 밑에서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는 사람이다.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서 조용히 피를 흘리는 일조차도 "허락"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 속에는 자기 희생조차 개인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시의 감동은 그저 현실과 신의 섭리에 대한 깊은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인식이 감동의 원천이라면 철학·신학 서적들이 더더욱 깊은 감동을 주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현실과 종교에 대한 속 깊은 인식으로부터 자기 희생의 길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교회당 꼭대기에 걸린 환한 햇빛 세계에 대한 갈망을 버리지 못한다. 본성적 갈망과 실천적 의지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이 시의 감성적 울림을 크게 만든다.
윤동주가 한 단계 더 성숙한 내면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 것은 「또 다른 고향」에서이다. 이 시는 그가 연희전문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에 가서 쓴 작품이다.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그의 다른 시들이 내면적 고뇌로부터 시적인 감동을 끌어낸다면, 이 작품은 현실의 질곡과 모순을 타개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 준다. 이 시에서 시대적 양심을 실천하는 세계는 "또 다른 고향"이라 명명된다. 그가 백골과 함께 한방에 누워 있는 "고향"은 일차적으로 유년의 행복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 이 고향은 아늑하고 평화로운 만큼 폐쇄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쫓기는 사람"처럼 가야 한다는 구절은 일차적으로 고향을 떠나는 일이 고향을 박탈당하는 것과 다름없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가자 가자"라는 자기 추동의 언어가 말해 주듯, 고향을 잃는 일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또 다른 고향의 추구는, 결국은 고향의 포기가 아니라 고향의 회복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생각은 폐쇄적이고 개인적인 순수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균열과 갈등을 포괄하고 넘어서는 더욱 크고 성숙된 선(善)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윤동주는 자선 원고를 묶은 후 6편의 시를 더 썼다. 「참회록」을 제외하면 도쿄의 릿쿄 대학 영문과를 다니면서 쓴 시들이다. 그는 유학 생활을 하며 퍽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때 씌어진 시편들에는 이국 생활의 쓸쓸함과 함께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한 담담한 신념이 담겨 있다. "남의 나라"에서 시가 쉽게 씌어진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쉽게 씌어진 시」).
그러나 이듬해인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떠나기 전 윤동주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16일 이국의 감옥에서 스물여덟의 짧은 생을 마쳤다. 죄명은 "사상 불온, 독립운동, 비일본신민(非日本臣民), 온건하나 서구 사상 농후" 등이었다.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그의 내면의 여정은 미완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투명하게 비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사진 속의 온화하고 순한 시인의 얼굴이 그대로 연상된다. 시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윤동주의 시들처럼 시인의 내면을 맑고 선명하게 비춰 주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은 시인이 가혹한 시대를 깊이 있게 고뇌하고 정직하게 살아내려고 했으며, 그로 인한 번민과 갈등을 솔직 담백한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함께 하며 그 어둠 속에 스스로를 묻으려 했다. 생전에 변변히 발표된 적 없던 그의 시들 역시 시대의 어둠에 함께 묻힐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윤동주의 영혼과 그의 시들은 시대의 가혹한 어둠을 함께 함으로써, 더욱 순결하고 밝게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다.
1. 윤동주는 '저항 시인'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윤동주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고, 그의 시들 역시 투쟁적인 성격을 보이는 것은 거의 없다. 한 시인이 역사와 민족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 수 있을까. 1940년대의 식민지 현실을 염두에 두며 생각해 보자.
2. 윤동주가 동시 창작에서 멀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3. 윤동주의 시대적 고민과 종교적 성찰은 어떻게 만나는가. 종교적 성찰이 두드러지는 시에서는 시대적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고, 시대적 고민이 두드러지는 시에서는 종교적 성찰의 흔적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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