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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친구 정병욱
2018년 06월 29일 22시 31분  조회:3946  추천:0  작성자: 죽림

 

잊지 못할 윤동주

 

                                                          정병욱(1922~1982)

 

 

<윤동주 유고 시가 보존됐던 진월면 망덕리의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

 

1941년 9월, 우리의 알차고 즐거운 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김송 씨가 요시찰 인물이었던 데다가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감시하는 일제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일본 고등계 형사가 무시로 찾아와 우리 방 서가에 꽃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 가기도 하고,

고리짝을 뒤져서 편지를 빼앗아 가기도 하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는 다시 하숙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졸업반이었던 동주는 생활이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진학에 대한 고민,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이런 가운데 하숙집을 또 옮겨야 하는 일이 겹치면서 동주는 무척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중요한 작품들을 썼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은 이 무렵에 쓴 시들이다.

 

동주는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속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집을 보면, 1941년 5월 31일 하루에 '또 태초의 아침', '십자가', '눈 감고 간다' 등 세 편을 썼고, 6월 2일에는 '바람이 불어'를 썼는데,

동주와 같은 과작의 시인이 하루에 세 편의 시를 쏟아 놓고,

이틀 뒤에 또 한 편을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완성된 시를

다만 원고지에 옮겨 적은 날이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는 이처럼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詩語)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

 

 

유명한‘또 다른 고향’에서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 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라는 구절에서 '풍화 작용'이란 말을 놓고,

그것이 시어답지 못하다고 매우 불만스러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칠 수 있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두었지만, 끝내 만족해하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작품을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았다.

‘별 헤는 밤’에서 그는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로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 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이처럼,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수용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생각하면,

동주의 그 너그러운 마음에 다시금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정병욱. 국문학자(1922~1982).  호는 백영(影).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고전문학의 여러 분야를 두루 연구하였으며, 

특히 판소리 연구에 업적을 쌓았다.

저서에 <국문학산고(文學散藁)>,  <시조문학사전> 등이 있다.

 

 


 

 

 

지난 2007년 전라남도는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등록한다는 통보를

문화재청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은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소재하는데,

1925년에 건립된 가옥으로 백영(白影) 정병욱(鄭炳昱, 1922∼1982)과

그의 가족에 의해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의 유고가 온전히 보존되었던 곳이다.

 

윤동주는 1943년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2년형을 받고

광복 전인 1945년 2월에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또한 위의 수필을 쓴 그의 친우 정병욱은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한글 연구 등에 매진한 인물로 우리나라 국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이 원고를 정병욱에게 맡겨 그의 집에서 보관함으로써 어렵게 보존되다가

광복 후 1948년에 간행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의 대표작으로는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이 있는데,

그의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그리고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의 사진의 가옥은 고 정병욱 교수가 기거하던 고택이라는 점,

양조장과 주택을 겸용해 온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사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한글로 작성된 시고가

두 분의 우정과 신뢰로 보존됨으로써 광복 후에 시집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건축적ㆍ국문학사적인 의미가 크다.

건물 뿐만 아니라 윤동주와 정병욱 두사람만 알 수 있는 사연을

정병욱 자신이 글로 표현한 점도 이채롭다.

물질적인 유산의 형태는 찾아서 보존하면 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두사람 간의 무형의 우정은 이렇게 글로써 표현되어

후세에 남겨지는 것도 의미있는 일로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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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민족서정시인 윤동주. 일제 치하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풀어낸 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담겨진 그의 문학정신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윤동주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다.

청년 윤동주가 남긴 시들은 자칫하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전 친구 정병욱에게 그가 써놓은 원고를 맡기는 데 정병욱은 이 원고를 그의 집 마루 밑바닥에 숨겨놓고 잘 간직했다. 그 장소가 바로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이다.

윤동주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2년여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곳이 바로 광양이다. 광양을 통해 어둠속에 갇혀 있던 ‘윤동주시인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정지했던 바람’은 다시 생기를 얻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빛을 잃었던 별’들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윤동주와 광양과의 이런 인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한 지역 언론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으며 시는 지난 2007년 7월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지만 윤동주시인과 광양시 간에 맺어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 인연을 어떻게 가꿔나가느냐는 광양시민들의 몫이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2년여동안 원고를 숨겨두었던 마루밑.

 

 

 

 

 

 

 

 

 

 

 

■ 일제감시 피해 윤동주 유고 숨겨둔 정병욱 생가

 

섬진강변에 위치한 진월면 망덕리 길가에는 1925년에 지어진, 가옥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정 병욱 가옥으로 알려진 이 집은 과거 양조장이었다. 따라서 도로 쪽 가옥에는 가게가 나 있고 뒤쪽은 살림집으로 돼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 등이 살고 있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윤동주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졸업을 (1941) 즈음해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접는다.

은사였던 이양하교수는 일제가 시의 내용을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해 출판을 만류했다. 윤동주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교수와 후배이자 친구인 정병욱에게 각각 건넸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용 당하게 되자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일본헌병에게 들키지 않게끔 잘 간직해줄 것과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님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 왔다고 한다.

광복 후 학병에서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로부터 2년여 동안 숨겨왔던 유고를 건네받았고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발간했다.

윤동주 본인과 이양하교수가 지니고 있었던 원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어서 정병욱 집안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없을 뻔했다.

한편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 등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밝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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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아트 접목해 스토리가 있는 국악 선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조국의 아픔을 노래하며 민족의 별이 된 시인 윤동주.

어쩌면 그는 유고시집의 제목처럼 바람이 돼 이제는 평온을 얻은 조국 어딘가를 흔적 없이 떠돌아다녔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될 뻔한 그를 빛나는 별로 만들어준 숨은 조력자가 있다. 바로 윤동주의 흰 그림자, 백영(白影) 정병욱 선생이다.

광양시립국악단이 문학의 수호자이며 윤동주라는 별을 지키고 떠난 정병욱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서시…백영으로 피어나다’라는 주제로 제12회 정기연주회(2016년 6월)를 마련했다.

강종화 지휘자는“ 정병욱에 의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이 나왔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서시’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정병욱이 없으면 윤동주도 없었다”고 강조하며“ 광양시민이라면 정병욱 가옥에서 윤동주의 시집이 발견된 것을 적극 알려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해도 우리만큼은 정병욱 선생을 기억해야한다”고 말했다.

강 지휘자는 진월 망덕에 위치한 정병욱 가옥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국악을 통해 정병욱 선생을 재조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곧 12번째 정기연주회의 주제가 됐다.

문화적 재산이 빈약한 광양에 정병욱 선생의 존재는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이번 공연을 계기로 또 다른 광양 고유의 문화가 탄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

2막은 윤동주의 시를 가사로 만든 노래를 국악으로 편곡해 새로움을 선사한다.

3막은 이번 공연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샌드아트를 접목시켜 윤동주와 정병욱의 이야기를 모래로 표현하는...

강 지휘자는“ 윤동주라는 별과, 그 별을 마지막까지 지키고 간 백영 정병욱 선생의 삶과 문학을 되살리는 장이 될 것”이라며“ 많은 분들이 공연을 통해 광양시민으로서 자긍심을 기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광양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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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2018년 1월), 전남 광양시에서는 윤동주 문학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윤동주 문학 왜 광양인가?’라는 주제 아래 경상대 강희근 교수, 일본의 교토여자대학 우에노 준 교수, 그리고 필자가 발표자로 나서 윤동주 문학에 대한 재해석 과정과 결과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더불어 광양과 윤동주가 결속해 갈 생성적 가치에 대해 하루종일 열띤 논의를 이어 갔다. 윤동주 시의 연원과 특성 그리고 새로운 콘텐츠로의 확장 가능성이 진지하게 모색된 자리였다.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윤동주와 광양의 연관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 맥락은 이러하다. 1941년 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 기념으로 친필 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3부 작성해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한 부는 은사인 이양하 교수께 드리고, 나머지 한 부는 문과 2년 후배 정병욱에게 건넸다. 윤동주가 타계했을 때 자신과 이양하 교수가 가지고 있던 것은 일실됐으나, 정병욱이 보관했던 원고가 해방 후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우리는 윤동주라는 보석 같은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정병욱은 1943년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윤동주 시집 원고를 어머니께 맡기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루 널을 뜯어 그 아래에 원고를 보관했던 것이다.

일찍이 정병욱은 이 원고를 어머니가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보관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그 후 정병욱의 누이동생 정덕희가 새로운 증언을 하게 되어 사실이 바로잡히게 됐는데, 정병욱이 학병 나가느라 집에 없어서 잘 몰랐을 거라고 하면서 정덕희는 그 원고가 마루 밑에 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마루 널 아래 땅을 깊이 파서 그 속에 짚을 깐 다음 큰 독을 들여놓고, 그 안에 원고를 넣어 보관했다는 것이다. 깊이 숨겼을 뿐만 아니라 짚으로 건조 상태가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은 정덕희 여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를 ‘윤동주 평전’의 작가 송우혜 선생이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바 있다. 정병욱은 집에 돌아와 이 원고를 다시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원고는 ?1948년 1월 한 권의 시집으로 빛을 보게 됐는데, 이 원고가 망실됐다면 우리는 최소한 윤동주의 ‘서시’나 ‘별 헤는 밤’, ‘길’,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등을 전혀 만나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 문학사에 윤동주라는 빛(光)과 볕(陽)을 한꺼번에 쏘아 준 사건이 광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정병욱 가옥에 보존됐던 윤동주 유고 원본은 지금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원래 정병욱은 경남 남해 출신이고 하동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는데, 부친의 사업차 일가가 광양으로 옮겨 가 살게 됐다. 고택이 있는 망덕포구는 옛날분들이 섬진강을 거슬러서 구례나 광양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섬진강물이 남해 바다와 합수하는 곳이기도 하다. 1925년 건물인 이 고택의 공식 이름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고, 현재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돼 있다. 이제 이 고택은 두 사람의 우정과 믿음을 문학사의 아름다운 후경(後景)으로 두른 채 맑은 섬진강물처럼 광양 밤바다에 뜬 밝은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다. 매천 황현 선생의 고향이기도 한 광양은 이러한 윤동주·정병욱으로 이어지는 상징 가치에 눈을 뜨고, 한편으로는 정병욱 고택을 명소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윤동주를 가능하게 했던 이곳의 문화적 브랜드를 차근차근 만들어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윤동주와 정병욱과 광양의 세 꼭짓점을 잇는 커다란 문화적, 학문적 기념비가 될 것이다.

 
이제 윤동주와 다섯 살 차이였던 정병욱도 얼마 있으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자신의 호(號)를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가져와 ‘백영’(白影)이라고 지었을 만큼 윤동주를 사랑했던 정병욱. 윤동주와 그가 맺었던 생전의 인연과 사후에도 지속되는 아름다운 관계를 광양시가 잘 이어 가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 본다.
///서울신문 / 유성호 교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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