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가 가장자리에서 정중앙자리에 서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中)
이 작품은 윤동주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에 씌어졌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에서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익숙하지 않은 일본식의 생활공간인 동시에 다다미 여섯 장의 넓이로 그의 세계를 한정하는 구속, 부자유의 은유이다. 그는 이러한 공간 안에 갇혀 있으면서 시를 쓴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이란 시인이 현실을 직접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데 대한 괴로움에 연유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시는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부끄러움은 학문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乖離感), 시를 쓰는 자신과 시 사이의 거리감(距離感) 등에서 오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소외 의식과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는다.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는 1943년 7월 첫 학기를 마치고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사상범으로 체포당한다. 1944년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아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쉽게 쓰여진 시’ 中)윤동주는 그토록 열망하던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 공영방송 NHK PD 출신인 일본인 다고 기치로(62·多胡吉郞)씨는 30년 넘게 윤동주를 취재해 왔다.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는 “윤동주는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이라 조선에서 찍은 사진에는 늘 가장자리에 있다. 이 사진에선 앞줄 가운데에 있다"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윤동주를 위해 일본 친구들이 송별회를 해줬고, 친구들이 주인공을 윤동주를 가운데에 서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교토(京都) 우지(宇治)시의 우지강(宇治川) 아마가세쓰리바시(天ヶ瀨吊り橋)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윤동주 시인의 최후의 사진이 됐다. 우지하시(宇治橋·우지 다리)를 건너기 전, 우지강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와 마주하니 괜스레 마음이 경건해졌다.
우지하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646년 고구려에서 건너간 도등 스님에 의해 건설됐다고 한다. 전쟁과 홍수, 지진 등으로 수 차례 파괴됐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었다. 현재의 다리는 1996년에 지은 것이다.
우지하시 입구에는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의 조각상과 유메노우키하시(夢浮橋)의 유적지 비석이 있다. 유메노우키하시는 소설 속의 다리로, 실재했던 다리는 아니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는 헤이안시대에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가 지은 장편 연애소설이다. 당시 여자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무라사키시키부'도 지은이의 이름이 아니다. 여주인공 중 한 명인 '무라사키노우에(紫の上)'의 이름에 궁녀의 직위명인 '시키부'를 붙인, '무라사키라 불리운 궁녀' 의 이름이다.
작품은 왕의 후궁의 아들인 주인공 겐지와 여러 여자들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전체를 54첩(帖)으로 나누는데 그 중 45첩 하시히메(橋姬)부터 마지막 54첩 유메노우키하시(夢浮橋)까지 10첩(十帖·쥬죠)이 우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가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의 갈등에 몸을 던지는 등 소설 속 장면이 강물과 함께 흘러간다. 시간은 물살과 함께 빠르게 떠내려 가지만 역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우리의 가슴을 휘젓는다.
/이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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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2017년)은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까지 27년의 짧은 삶을 살았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이며 본관은 파평(坡平). 중국 만주 지방 지린 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그곳 명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숭실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를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学) 재학하였으며 현재 그의 시비가 그 대학에 있다.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시(쉽게 씌여진 시)속의 정황을 상상해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중적 구도 특징을 가진다. 밖은 비가 내리고 방안은 부모님의 학비봉투가 있는 외국의 방, 미완의 학생과 원숙한 노교수의 설정, 상실한 동무와 자기 속에 앙금(침전)으로 남음의 존재의식, 살기 어려운 인생인데도 쉽게 씌어진 시에서 오는 자아에 대한 살핌, 등불과 어둠으로 비유한 시대상에 대한 인식, 자기 자신과 악수하는 자아에 대한 존재의미 등, 모두 이중구도다.
육첩방은 다다미 6개로 3평 정도의 크기의 보통 방이다. 여기에 ‘땀내의 사랑’으로 비유한 부모님의 사랑이 방 안은 포근함으로 말하고 있다. 다만 비가 내리는 외국의 방 안 모습에서 시인의 자아 현실을 대신 그리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당시 현실이나 현재 우리의 삶도 그리 다르지 않다. 언제나 고독 속에 사랑의 최고형상인 부모의 헌신적인 모습, 동무와 같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아인식이나 실존인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보통 시가 쉬운 것은 아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시인은 시가 쉽게 씌어졌음은 다행이 아닌 부끄러운 일일수도 있다는 고백을 한다. 따스함과 외로움, 한계적 존재의식과 의망에 대한 미래의식 등이 작품 안에 동시적으로 설치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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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강처중 기자와 정지용 주필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있을 수 없다."
한국인의 애송시를 선정할 때면 늘 선두를 다투는 '국민 시인' 윤동주(1917~1945). 그는 59년 전 오늘인 1947년 2월13일자 경향신문에 유고시 '쉽게 씌어진 시'가 게재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당대 최고 시인으로 경향신문 주필이던 정지용은 이날 시인 소개글에서 "시인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동 묘지에 묻히고 그의 비통한 시 10여편은 내게 있다. 지면이 있는 대로 연달아 발표하기에 윤군보다도 내가 자랑스럽다"고 썼다. 경향신문은 같은 해 3월13일자, 7월27일자에 그의 유작 '또 다른 고향'과 '소년'을 실었다.
경향신문, 정지용, 당시 무명의 작고 시인 윤동주를 연결한 데는 경향신문 조사부 기자였던 강처중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강처중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다. 그의 존재는 윤동주 연구가인 송우혜씨('윤동주 평전'의 저자)에 의해 최근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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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정리]
지은이 :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 아명(兒名) 해환. 만주 북간도 출생. 일본 유학 항일 민족 운동으로 수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함.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의 슬픔과 자아의식을 표현한 저항시인. 유고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이 있다.
제목: 쉽게 씌여진 시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의시(主意詩)
율격 : 내재율(1연과 8연의 반복)
성격 : 회고적. 의지적
어조 : 독백적
심상 : 묘사적 심상(시각적, 청각적)
표현 : 상징어의 사용. 수미쌍관의 구성. 자아 정체를 통한 반성
구성 :
1연 구속과 부자유의 현실
2연 현실을 움직일 수 없는 괴로움 (1-2연. 기)
3,4연 현재의 삶에 대한 회의
5,6연 현재 삶에서의 상실감
7연 반성적 자기 성찰 (3-7연. 서)
8연 현실 재인식
9연 나의 희망적 의지
10연 두 자아의 화합 (8-10연. 결)
제재 : 내면화된 나
주제 : 자기반성과 현실 극복의 의지. 어두운 시대 현실에서의 고뇌와 자아 성찰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지은이가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 지은 것으로서,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면화된 반성적 독백 속에서 성찰하고 있다. 10연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누어 이해해 보기로 한다.
1,2연에서는 낯설고 부자유스러운 현실 상황과 그 현실을 어떻게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운명적 괴로움을 말했다. 3연에서 7연까지의 내용은 이와 같은 상황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여 자신의 현재를 회의적 시선으로 응시하는 반성적 성찰의 기록이다. 마지막 세 연은 이런 과정을 거쳐 시인이 음울한 상황에 체념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적 기다림으로써 오늘의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자기 정위(自己定位)의 노력을 보여 준다.
이 시에 나오는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상황을 나타낸 것 같지만 사실은 식민지 지배국 일본에서 오히려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자각한 시인의 단호한 육성으로 이해된다. 화자는 자신이 언어로 무엇을 이야기할 뿐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만, 종국에는 그 나약함을 극복하고 시대의 어둠과 맞서려는 결의를 표현하고 있다. 특히, 결말 부분에서 갈등과 방황 속에 보내던 두 자아가 눈물과 위안 속에 합일(合一)하는 것을 표현한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시인은 조국을 잃어버린 현실과, 그 조국을 집어삼킨 나라에 유학해 공부하면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 그러면서도 쉽게 시를 쓰는 자신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있다. 작품 전체로 보아 두 개의 ‘나’가 대립되고 있다. ‘현실 속의 나’와 ‘시를 쓰는 나’가 그것이다. 이 때 ‘현실 속의 나’는 무기력한 자아를 가리킴에 비해 ‘시를 쓰는 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자 하는 역사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의 대립은 7연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8연부터 반전하여 두 개의 자아는 화해와 조화를 이루어 나간다. 8연에서 문득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반복이 되는데, 이는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9-10연을 보면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미래에 대한 어떤 다짐을 통해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는 현재까지의 부끄러운 자아의 모습이 자기 성찰을 통해 역사적 자아로 승화되면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참고> 현실의 자각을 통한 자기 인식의 비극성
이 작품에서 우선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육첩방은 남의 나라’로 요약되고 있는 현실의 인식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적 인식이 선행되고 있기 때문에 시적 자아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시적 자아가 가장 아파하는 순간은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시를 쓰는 일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시인이 시를 쓰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결국 외적인 상황과 자기 존재가 함께 요구하는 삶의 총체적인 인식에 통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에게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시대의 고통을 자기 내면에 끌어들여 놓고 그것을 고뇌하는 시적 자아의 ‘자기 인식의 비극성’이다.
<참고> 윤동주와 ‘부끄러움’의 미학
윤동주의 시를 두고 저항시라고 보는 견해와 더불어 최근에는 자아 성찰의 내면적 고백의 시라는 관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 중에서 ‘부끄러움’은 후자의 관점에 따른 것이다. 즉,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양심 있는 지식인의 고뇌를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극복하여 식민지 후기의 무질서한 정서에 하나의 질서를 부여한다. 그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신과 생활에 대한 애정 있는 관찰,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이념에 대한 순결한 신앙과 시의 형식에 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이다. 그의 부끄러움의 미학은 자신의 욕됨, 미움, 자신에 대한 가엾음과 부끄러움 등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의 부끄러움은 그로 하여금 그가 가야 할 길을 가게 하는 자각의 가장 높은 심적 계기를 이룬다는 점과, 자기 혼자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아픈 자각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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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출전 : 시집 '하늘과 바라모가 별과 시'(1948)
10연으로 된 이 시는 생활의 성찰과 극복의 의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연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제시했다. '육첩방'은 일본이라는 낯설고 부자유스러운 공간을 뜻하며, '밤비'는 암담하고 쓸쓸한 당시의 상황과 관련된다.
제2연은 시인으로서의 괴로움을 표명한 것이다. 시인이란 당신의 현실에 직접 대응하지 못하고 다만 언어를 다듬고 있는 천명(天命)을 지닌 사람이라는 데서 괴로움을 느낀다.
제3, 4연은 현실을 외면하고, 낡은 지식이나 얻으러 대학에 다니는 자신의 행활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늙은 교수의 강의'는 현실과 거리가 먼 낡은 지식으로 해석된다.
제5, 6연은 유년 시절에는 꿈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것을 다 잃어버리고 일본에서 무의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싹튼다.
제7연은 시를 쓰는 일, 공부를 하는 일 등이 현실 상황과 괴리(乖離)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부끄러워한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현재의 암담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연유한다.
제8연은 제1연을 변형한 것으로 배경의 제시다. 부자유한 상황과 암담한 현실이 자신을 자꾸 압박해 온다.
제9연에서 시적 화자는 이런 상황과 현실에서 체념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결의를 보여 준다. 이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기 위해 등불을 밝혀야겠다. 그러면 밝은 시대가 올 것이다. '등불'은 광명의 심상으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노력이며 '아침'은 새 시대로 '어둠'과 대립을 이룬다. '최후의 나'는 굳은 의지의 자아로 보인다.
제10연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두 자아가 화합을 하는 장면이다. 여기에 두 '나'가 나오는데 암담한 현실에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체념적인 자아와 현실을 반성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자아가 그것이다. '최초의 악수'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분열된 자아의 화해, 일치를 뜻한다.
이 시는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 부끄러움은 학문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 시를 쓰는 자신과 시 사이의 거리감 등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소외 의식과 내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는 부끄러워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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