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1917~1945)는 이미 국내외에 많이 알려졌다. 그의 목숨을 앗아간 ‘적국’인 일본에서조차 그를 많이 기리고 있다. 그가 다니던 동지사대학교 캠퍼스에는 버젓이 그의 기념비까지 서있디. 이제 곧 그의 탄생 백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국내외에서 많은 기념활동이 있을 걸로 사료된다. 오늘 우리의 이 모임도 윤동주를 기리는 한 활동이 되겠다. 윤동주는 우리가 아무리 기리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이유를 묻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명지고문(明知故问)-뻔한 이유를 묻는듯하여 내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그러나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곳에 잘 모르는 부분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적어도 딱 찍어 말하라 하면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본고는 제 나름대로 ‘잘 모르는 부분’, ‘딱 찍어 말하’기 힘든 부분에 대해 소견을 피력해볼가 한다.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이유, 많고도 많겠지. 일언난진(一言难尽)-단마디 명창으로 말하기 벅찬 줄로 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윤동주를 기리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주요 키워드 흐름으로 짚어볼가 한다. 즉 인도주의→참회의식→인간양심. 이 세 키워드흐름은 윤동주시의 정수를 이해하는 관건이 되겠다. 따라서 본고는 일단, 이 흐름을 타고 윤동주시를 살펴보도록 하고 다음, 윤동주시의 오늘날 시대적 의의를 조명해보도록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윤동주는 일제식민지시대에 살다 간 시인이다. 이런 식민지시대에 있어서 조선사람은 ‘슬픈 族屬’들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분명 민족적인 상징코드인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 ‘흰 띠’로 조선사람을 상징하고 ‘거츤 발’, ‘슬픈 몸집’, ‘가는 허리’로 식민지참상을 어필하고 있다.
이런 식민지시대에 꿈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동주의 ‘꿈은 깨어지고’가 탄생한다.
여기서 극명하게 ‘노래 하든 종달’, ‘봄타령’, ‘붉은 마음의 塔’, ‘손톱으로 새긴 大理石塔’으로 꿈을 나타냈다면 ‘도망쳐 날아나고’, ‘금잔디밭은 아니다’, ‘塔은 무너졌다’로 그 깨어짐을 나타낸다. 그것은 실로 자연의 아름다운 ‘꿈’이든, 인간의 알심들인 붉게 타는 꿈이든 ‘하로저녁 暴風’ 즉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식민지통치에 ‘餘地없이’ 깨어지고 만다.
이에 식민지통치는 실로 ‘무서운 時間’으로 안겨온다.
아무런 발언권도 없고 아무런 소유권도 없는 처지. 그러니 자연적으로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는가고 한탄하게 된다.
윤동주는 ‘흰 그림자들/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흰 그림자’)이 당하는 이런 식민지현실을 좌시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돌아와 보는 밤’과 ‘못자는 밤’을 보자.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괴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돌아와 보는 밤’)처럼 ‘낮’으로 상징되는 식민지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하여 밤에 편안히 잠이 드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못자는 밤’에 부대낀다.
식민지 ‘밤은/많기도 하다.’ 그래 ‘못 자는 밤’도 그만큼 많기도 하리라.
윤동주는 이런 식민지현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오오 荒廢의 숙밭,/눈물과 목메임이여!’(‘꿈은 깨어지고’)가 터져나온다. 그래서 더 없는 ‘비애’를 느꼈으리라.
이상 보다시피 윤동주시에는 슬픔, 괴로움, 고독, 흐림 등 서러움의 한이 많이 서려있다. 이것은 그의 동요동시를 주로 쓴 사회의식이 희박하다고 평가받는 초기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산협의 오후’를 보자.
역시 ‘서러움’과 ‘슬픔’이 묻어난다. 바로 이런 안쓰러움에 기인하는 ‘비애’로부터 윤동주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이’(‘쉽게 씌어진 시’)다고 외웠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런 안쓰러운 비애에만 안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것을 깨닫’(‘흰 그림자’)는다. ‘괴롬의 거리/灰色빛 밤거리를/걷고 있는 이 마음/旋風이 일고 있네.’(‘거리에서’) 그의 마음은 ‘旋風이 일고 있’다. 평온할 수가 없다. 바로 이 시점에서 ‘자화상’이 생겨난 줄로 안다.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밉기도 하고 가엽기도 한 ‘자화상’. 이런 자화상이 부끄럽다. 이제 부끄러움은 도를 더 해 간다.
‘별혜는 밤’, ‘쉽게 씌여진 시’, ‘길’을 보자.
여기서 ‘부끄러운 이름’과 ‘쉽게 씌여진’ ‘부끄러운’ 시가아렷이 등장한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기가 부끄럽다. 그럼 왜서 부끄러우냐? 식민지지식인으로서 어쩔수 없이 무력하게 사는 것이 부끄럽고 남은 피를 흘린단데 나는 편안히 사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시란 삶의 처절한 역경속에서 아픔을 딛고 생겨나야 하는데 안온한 생활속에서 음풍명월하는듯하여 부끄럽다. 바로 여기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이 탄생한다.
암담한 식민지현실에서 ‘어릴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린’ 마당에 외국에서 부모들 부쳐주는 학비로 편안히 강의나 들으며 ‘쉽게 씌어지는’ 시나 쓰는 자기가 회의스럽고 한없이 부끄럽다는 것이다. 어쩌면 무사히 편안하게 살아있다는 자체가 굉장히 욕되고 죄스럽다. 그래서 이런 부끄러움은 곧 바로 자아반성의 참회의식으로 이어진다. ‘참회록’을 보자.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그는 ‘어느 왕조의 유물’에서 ‘이다지도 욕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역사의 퇴물 같은 도태물에 다름 아니다. 이때까지 ‘무슨 기쁨을 바라/살아온’ 자체가 죄스럽다. 그래 ‘즐거운 날’에 ‘참회록을 쓸’ 일이다. ‘젊은 나이’에 고백한 사사로운 사랑까지도 후회하면서.
윤동주의 이런 참회의식은 일단 신성한 자아희생정신으로 나아간다.
참회의 부대낌속에서 시적 자아는 ‘괴로웠던 사나이’가 된다. 그래서 ‘幸福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공감을 나타낸다. 그래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피를 흘리고 싶다. 이 세상을 구하려는 장엄한 뜻을 품고. 그러나 ‘조용히 흘리’고 싶다. 자기 현시적이기보다는 내심으로부터 울어러 나오는 진정성이 이렇게 시킨다. 그래서 그 피는 ‘꽃처럼 피어나’는 아름다운 것이 된다. 여기서 윤동주는 기독교신자로서 예수와 십자가로 표상되는 희생과 구원이라는 기독교원형모티프를 빌어 민족의 구원을 위한 자기의 최고의 희생을 언약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참회의식은 인간적 양심의 올곧은 추구로 나아간다. ‘참회록’의 마지막 두 연을 좀 보자.
여기서 첫 연은 바로 혼신을 다 한 자아성찰과 수양의 경지를 말한다. 두 번째 연은 그 결과 홀로인 쓸쓸한 슬픈 모습이나마 험악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려는 비장함을 나타내고 있다. 노신의 산문시 ‘지나가는 나그네(过客)’의 이미지와 비슷한데가 있다.
여기서 시적 자아가 돌아온 고향에는 죽음의 ‘白骨’과 ‘어둠’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志操 높은 개’가 있다.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시적 자아는 이 개가 ‘나를 쫓는 것일게다’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그런 ‘白骨’과 ‘어둠’에 매몰되지 말고 새로운 추구를 하라는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그래 시적 자아는 ‘가자가자/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고 다짐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기 위함이다.
보다시피 윤동주에게는 분명 인간의 양심에 기초한 미래지향적인 확고한 추구가 엿보인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위의 시구들에서 이런 점들을 충분히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길’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시의 시안(诗眼)은 ‘새로운 길’. 이 ‘새로운 길’이야 말로 인간의 양심에 의한 정도(正道). 그리고 그것은 희망의 길. 그런만큼 그것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쉼없이 갈지어다. 그것은 액자소설 같은 구조속에 호응하며 그 분위기가 무르녹는다.
이상 우리는 윤동주의 시적 흐름을 인도주의→참회의식→인간양심이라는 키포인트에 기초하여 살펴보았다. 사실 뭐니뭐니 해도 그의 ‘서시’는 이런 시적 흐름의 집대성시가 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보다시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안쓰러워하는 여린 심성이니 인간에 대해서 더 말해서 무엇하랴. 결국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더 없이 넓은 인도주의정신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는 자아반성적이고 양심적 삶을 추구하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는 것은 민족의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서시’는 윤동주가 후기 사회의식이 돋보이는 시창작에로의 전환점을 시사해주고 그의 전반 시의 대표작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럼 아래에 인도주의→참회의식→인간양심으로 개괄되는 윤동주정신의 생성원인에 대해 잠간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1차적으로 윤동주의 천성적으로 온순하고 부드럽고 정직하고 다정다감했던 성품 즉 착한 인간성에서 그 원인을 찾아본다. 그리고 2차적으로 그의 기독교적인 신앙심에서 찾는다. 그의 집안은 장로인 할아버지 윤하현 대로부터 아버지 윤영석 대에 이르기까지 독실한 기독교집안이었는데 윤동주 자신도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중학교도 기독교계통의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에 다녔다. 이로부터 윤동주는 천성적인 성품도 성품이겠지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진정한 종교적 심성 즉 사랑과 반성의 마음을 키웠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남는 문제는 우리 시대에 윤동주정신의 의의와 가치에 대한 진맥이 되겠다.
현재 우리 시대는 현대라는 타이틀속에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개성주의가 팽배하다. 상대를 타자화하고 모두들 자아중심적이고 자기가 잘 났다고 하는 시대다. 콧대가 높은 시대. 개인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그리고 욕망시대. 물욕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명예욕, 권력욕, 지배욕 등 각종 정신적 욕구가 통판친다. 그런만큼 타인에 대한 겸허한 자세나 배려심이 고갈되어 간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윤동주의 그 인도주의와 사랑주의가 더 없이 귀중한 감로수가 되겠다. 약자, 풀뿌리인생들에 대한 인간적 배려와 헌신적 사랑이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시기다.
우리 시대는 참회가 필요한 시대. 역사문제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일본의 조선식민통치나 제2차세계대전 범죄만 놓고 보아도 그렇다. 일본은 도저히 참회나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근 들어 전쟁 당사자로서 침략전쟁과 군사력 포기를 영원히 약속했던 평화헌법 9조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무력행사가 가능하다고 헌법 해석을 변경한다든가,
조어도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위안부 존재사실을 부인하는 등 극우주의의 철면피나 군국주의를 부활하려는 새로운 패권주의는 심상치 않다. 과거사를 반성하고 겸허한 자세로 살아가야 할 일본임을 생각할 때 실로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여기에 일본 극우세력을 등에 없고 해묵은 ‘식민지사관’을 표방하는 ‘김문학현상’으로 대변되는 새친일파들의 진면모는 어불성설의 ‘황당파’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진정한 참회의식에 기초한 인간의 양심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제2차세계대전 범죄자로서 독일이 성실하게 자기네들의 유태인살해를 비롯한 전쟁범죄에 대해 참회뿐만 아니라 배상을 통한 일련의 행동으로 주변국이나 해당 관련국들로부터 새로운 신임을 얻었다. 이것이 게르만민족과 야마도민족의 차이. 게르만민족은 적어도 천주교, 기독교적인 참회의식이 하나의 전통으로 정립되어 있다. 바로 이런 참회의식이 윤동주의 참회의식와도 통하는 바다. 야마도민족은 1차적으로 이런 참회의식이 없다. 한치보기의 천박한 신도(神道)정신만 있을 뿐이다. 야마도민족이 저 멀리 게르만민족에서 배우기 힘들면 가까운 윤동주에게서 이 참회의식을 배울지어!
인간은 성인이 아닌 이상 누가 잘 못을 안 저지르겠는가. 문제는 윤동주식 참회의식의 유무다. 참회의식에 기초하고 인간의 양심에 의해 올곧이 살 때 우리 사는 세상이 한결 사람 사는 맛이 날 것이다.
한마디로 윤동주정신은 우리 시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본 지주가 될 것이다.
전광하 박용일 편저:윤동주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诗
권영민 엮음, 윤동주연구, 문학사상사 1995.
우상렬, 윤동주와 심연수 시 비교연구, 서시 2005.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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