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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언어란 이 괴물을 쉽게 휘여잡을줄 알아야...
2017년 05월 01일 01시 51분  조회:2364  추천:0  작성자: 죽림

시인에게 기교는 무엇인가 - 이창배 


워즈워스가 장황하게 시인론을 펴면서도 시의 기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그가 시는 일상인의 일상어로 써야 한다든지, 조작된 장식어를 쓰지 말 것 등을 주장했겠지만 그렇게 주장한 본뜻은 "시는 힘찬 감정의 자연스런 표출"이어야 하지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감정 우위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기교를 경시하고 감정을 쏟아내는 데 주력하는 경우와 기교에 주력하는 경우는 시론상의 차이 이상으로 작시과정에서는 시의 성패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대체로 고전주의 시학쪽으로 기울어진 현대시학에서는 시인을 제작자(maker)로, 그리고 시를 제품(art)으로 본다. 그래서 시를 기교(형식)의 산물로 본다. 특히 포스트모던 시학에서는 텍스트를 벗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의미'는 텍스트에서의 언어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본다. 똑같은 소재를 갖고서도 좋은 항아리를 빚어내는 도공과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 도공의 솜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표현하고 싶은 것, 그것을 느낌이라고 해도 좋고, 아픔이라고 해도 좋고, 실상(리얼리티)이라고 해도 좋고, 주제라고 해도 좋다. 그 '주제'는 언어 이전의 추상, 즉 없음의 상태이다. 시의 출발을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 감정은 모양도 이름도 없는 구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언어를 갖게 되므로써 비로소 모양을 갖추고 생명을 얻게 된다. 주제에 생명을 부여하는 데 쓰이는 언어를 주무르는 시인의 솜씨를 기교라고 한다. 시인은 이때 주제와 언어와의 타협점을 찾고자 괴로운 '시의 병'을 앓게 된다. 그 주제를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감정과 이성의 싸움이고, 또한 그것은 로고스(의미)를 로고스(언어)로 포촉하는 싸움이다. 시인은 말을 고르고 행을 바꾸는 하나하나의 과정에서 '주제'의 눈치를 살피고 그 간섭과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막연한 존재이지만, 시인을 붙잡고 괴롭히는 주제는 쉽게 언어로 휘어잡을 수 없는 괴물이다. 이 괴물이 공룡처럼 가공할 만한 존재일 수도 있지만, 시인에 따라서는 생쥐 정도의 경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 대시인과 이류시인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시인이 도전하는 대상이 공룡이냐 생쥐냐의 차이에서 결정되고, 이차적으로는 그 대상과의 싸움이 성공하여 잘 연주되는 멜로디처럼 화음의 선율을 들려주느냐에 달려 있다. 엘리엇은 주제와 언어와의 관계에 언급하여 "낡은 방법에 의한 우회적인 공부는 항상 말과 의미와의 견딜 수 없는 싸움"을 자아낼 뿐이라고 말한 일이 있고, 그보다 앞서 그 양자의 조화롭지 못한 경우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말이 
의미의 짐을 싣고 긴장할 때면 터지고, 때로는 깨어지며 
부정확할 때엔 벗어나고, 미끄러지고, 소멸하고 썩는다. 
결국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고요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비명의 목소리, 
힐책, 조롱의 목소리, 또는 단순히 지껄이는 목소리는 
항상 말을 공격한다. 
-[번트 노튼] 중에서 


엘리엇은 특히 표현과 내용의 조화로운 상태를 강조하여 그 경지를 '고요'라 했다. 그는 그것을 선의 경지와 같은 예술의 극치로 생각했다. 그는 시에서 말이 내용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빈약한 내용에 말만 잘 다듬어진 기교주의 시를 이류시로 생각했다. 
기교파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시인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지용이 그 대표적이고 영국과 미국에서는 17세기의 소위 왕당파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로버트 해릭, 에즈먼드 윌러 등, 그리고 20세기 초의 조지왕조파 시인들, 그리고 에즈라 파운드 등 寫像派 시인들이 그에 속한다. 이들 시인의 시는 대체로 일상 사물이나 사소한 체험을 정확하고 기발한 비유로 형상화하는 데 그쳤을 뿐, 시인의 감정의 심도와 강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다음에 정지용의 시 한 편과 같은 계열의 시인 김광균의 시 한 편을 인용해 본다.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부풀어오른 水平이 보이고, 

하늘이 함폭 나려앉아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투명한 魚族이 행렬하는 위치에 
흔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랏속같이 
소란한 무인도의 魚笛을 불고- 

해협 오전 2시의 고독은 오롯한 圓光을 쓰다. 
서러울 리 없는 눈물을 소녀처럼 짓자.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다음 날 항구의 개인 날씨여 

항해는 정히 연애처럼 비등하고 
이제 어드메를 달밤의 태양이 피어오른다. 
- [해협] 전문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갈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半圓을 긋고 잠기어간다. 
-[秋日抒情] 전문 


정지용의 [해협]은 (어쩌면 판부연락석을 타고 일본으로 가는) 기선의 선창으로 내다본 해협의 인상을 그려낸 풍경화이다. 주로 직유로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나열한 이 시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하늘이......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든지, "귀는 소랏 속같이 / 소란한 무인도의 어적을 불고"와 같은 기발한 비유들이라 할 수 있고, 가을날의 시골 풍경을 그려낸 김광균이 시의 수법과 유사하다. 1910년대의 영국에서 한창이던 이미지스트 시풍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 시편들은 서정시라기보다는 즉물시, 혹은 서경시라 할 수 있어서 마치 투명유리를 통해서 보는 수묵화 같기도 하고 먹물로 찍어낸 탁본글씨 같기도 하여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시인의 생명력이 전달되지 않는다. 이 시편들에 대하여 시인 서정주는 이 '기발한 비유'들이 마치 "졸부네 따님 금은보석으로 울긋불긋 장식하고 나오"는 것 같아서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는 [花蛇]와 한 무렵에 쓰여진 일군의 시들을 쓸 때에 내가 탈각하려고 애쓴 것은 정지용의 형용수사적 장식적 시어조직에 의한 심미가치 형성의 지양에 있었다. 내 이때의 기호로는 졸부네 따님, 금은보석으로 울긋불긋 장식하고 나오는 듯하는 그따위 장식적 심미는 비위에 맞지 않을 뿐더러, 이미 치렁치렁 거북스럽고 시대에도 뒤떨어져 보여, 그리 말고 장식하지 않은 純裸의 미의 형성을 노렸던 것이다. ......무엇처럼 무엇처럼 등의 형용사구 부사구의 효력으로 시를 장식하는 데 더 많이 골몰하는 것들은 인생의 진수와는 너무 멀리 있는 것으로 내게 보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30년대의 정지용, 김광균 등 시인들은 1910년대 영국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로서 그들은 시에서 감정을 배제한 고담한 시를 쓰고자 노력한 시인들이다. 그들은 소위 일컫는 모더니즘 시운동의 선언문을 통하여 시인은 이미지를 통하여 말할 것이며, 그 이미지는 견고하고 (hard and dry), 정확하고(exact), 구체적(concrete)이어야 할 것이지, 정서적이고 추상적이고 막연해서는 안 된다고, 이전의 감상적이고, 상징적인 시의 기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나, 영국에 있어서나 모더니즘 시대의 기교 위주의 이미지스트 시인들은 비록 그들의 시가 크게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축축하고 불확실하고 막연한 감정의 시를 초극하는 단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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