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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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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심상운 시론

나를 감동시킨 오늘의 시 100편 <33>//심 상 운
2019년 07월 26일 20시 15분  조회:1389  추천:0  작성자: 강려
*2008년 2월호 <시문학> 발표* 김시철/위상진/이솔의 시
 
김시철 시인의 시-「강원도 100-고라니의 죽음」「강원도 118-수목장樹木葬
 
눈 내리는 아침 현관을 나서려니
현관마루로 올라서던 <고라니> 녀석
후닥닥 도망을 친다.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 한건
나다.
도망가는 놈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이 아침 놈이 웬일로
우리 집엘 온 것일까
나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눈 쌓인 산속엔 먹을 것이 없어서
혹여 내 집엘 동냥 온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내내
도망치던 놈의 뒷모습이 선해
먹을 것을 내다놓고 닷새를 기다렸지만
종무소식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닌 걸 안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덫에 걸린 고라니가 마을 사람들
술안주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전문
 
요 며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만큼을 살았으니
이제는 비켜서야 할 때다.
혼(魂) 다 빠진 육신(肉身)
굳이 무덤 만들어 썩힐 것이 아니라
뒷동산 어느 소나무 밑에 다가
한 줌
수목장(樹木葬) 을 하면 어떨까.
요 며칠
그 생각에 깊이 들다보니
뒷산이 모두 내 집이요
소나무가 모두 내 몸만 같네.
-「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전문
 
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인 자신의 체험이다. 그 체험은 시를 의미의 세계보다 한 단계 높은 존재의 세계로 끌어 올리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T.S.엘리엇의 “시란「무엇은 사실이다」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좀더 리얼하게 느끼도록 해 주는 것”이란 말도 시의 창작과정創作過程에서 체험을 중요시한 시론으로 해석된다. 이 시론은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문덕수의 수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도와 맥을 같이 한다.
김시철 시인의 연작시「강원도」에는 그가 서울을 떠나서 강원도 평창 산골에 터를 잡고 산 몇 년간의 생생한 생활체험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의 시가 현대시의 기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자연발생적인 정서의 표현에 머물고 있지만, 사실(fact)이 주는 시적 감동 속으로 독자들을 들어가게 하고 시를 읽는 맛을 진하게 한다. 특히 그의 사상이나 견해가 직설적으로 들어있지 않고, 그것이 사실적 체험 속에 융합되어서 표현된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된)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깊은 울림을 준다.「강원도 ․ 100-고라니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는 시인의 특별한 언어적 수사가 없어서 언어와 사실이 등가관계等價關係를 이루고 있지만 독자들을 뜨거운 피가 흐르는 감성과 사유의 공간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는 어느 눈 내린 겨울 날 아침, 현관에서 고라니와의 예상치 않은 마주침에 놀란다. 그때 그는 도망가는 고라니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이 아침 놈이 웬일로/우리 집엘 온 것일까/나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걸까//아니면,/눈 쌓인 산속엔 먹을 것이 없어서/혹여 내 집엘 동냥 온 건 아닐까.//그날 이후 내내/도망치던 놈의 뒷모습이 선해/먹을 것을 내다놓고 닷새를 기다렸지만/종무소식이다.>라고 고라니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서술하고 있다. 그 심경 속에는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선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다. 그 마음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삶을 누리는 순수한 동화同化의 마음이다. 추운 겨울철을 견디는 산속의 동물들에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 굶주림이다. 몇 년 동안 산골 생활을 한 시인은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들과 공생共生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터득하고 있다. 그 방법에는 관념적인 사상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자연과의 화합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겨울철 산짐승들이 다니는 산길에 덫을 놓고, 그 덫에 걸린 짐승들을 술안주 감으로 삼고 즐기는 것을 농한기 놀이의 방법으로 당연시한다. 그는 이 시의 끝 연에서 그 인습적因襲的(원시적)이고 무지無知한 삶의 현장을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닌 걸 안 것은/그로부터 며칠 후/덫에 걸린 고라니가 마을 사람들/술안주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부터.>라고 담담한 어조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어조는 담담하지만 그 어조 속에 담긴 그의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은 시의 여운으로 남아서 독자들의 마음을 휘어 감는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하느냐고, 독자들에게 인간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자연관(자연친화 사상)은「강원도 ․ 118-수목장樹木葬」에서 더 개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면서<혼(魂) 다 빠진 육신(肉身)/굳이 무덤 만들어 썩힐 것이 아니라/뒷동산 어느 소나무 밑에 다가/한 줌/수목장(樹木葬) 을 하면 어떨까.>라고 죽음을 맞이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요 며칠/그 생각에 깊이 들다보니/뒷산이 모두 내 집이요/소나무가 모두 내 몸만 같네.>라고, 한없이 넓은 또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상상에 젖어들고 있다. 그의 상상은 관념의 문을 열고 나온 사실적인 이미지가 되어서 이 세상의 생명의 뿌리와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불변하는 자연의 원리 속으로 벌거벗은 시인의 정신이 들어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저 뒷동산의 나무와 내가 한 몸이 된다는 상상은 인간의 우월성을 모두 벗어버린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 인간이라는 굴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큰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것은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이 시의 향기를 즐기면서 철학적 사유의 공간 속으로 잠시 들어가게 되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 김시철(金時哲): 1956년 김광섭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 <林檎> <조용한 無題> <생활> <시가 안 되는 밤에> 등 다수
 
위상진 시인의 시-「한강」(각색 시)
 
나는 흐르는 동안에만 물의 씨앗을 낳는다
태백에서 흘러오다 두물머리 어디쯤에서
천 년을 잘라내고
어둠이 치마폭을 들추며 달을 내려놓는다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
(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오래 전 끊어졌다 이어진 다리 아래
물그림자를 밀고 가는 무늬
흐르듯 멈추듯 달이 사리를 품는 중이다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
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
김창렬이 그린 흐르지 못한 물방울이
바다로 가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양수가 싹을 틔우며
내 품으로 떨어진 꽃잎 같은 이름
하나 둘 불러낸다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
나는 흐르며 단단한 심이 박힌
물의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
--------------------「한강」(각색 시) 전문
 
21세기 한국 현대시는 잃어버렸던 음악성과 공연성을 다시 찾기 위한 시운동을 벌이고 있다. 시인들은 무대에 설치된 스크린에 시의 영상을 비추고, 조명과 배경음악과 연기, 시의 낭송과 노래 등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는 시의 이미지를 관객(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시를 <공연시>라고 명명命名한다. (2007년 11월 17 한국 현대시인협회 주최 제1회 전국 공연시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공식적으로 <공연시>의 장르 선언을 함) 현대시의 이런 변화의 움직임은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모더니즘 시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따라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시와 연극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서 ‘열린 시’의 의미를 갖는다.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 시)은 이런 관점에서 관심을 끌고 흥미롭게 읽힌다. 그는 자신이 창작한「한강」을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연출의 과정을 거치고, 자신의 연기를 통해 관객(독자)들에게 ‘보여주기(showing)’를 한다. 그리고 그 연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각색시脚色詩「한강」을 새로운 창작시와 같이 발표하고 있다. 이런 그의 각색시는 일반적인 서정시를 공연시로 만드는 ‘연출 노트’를 시의 행간에 넣은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그 자체가 창조적인 시적 행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각색시「한강」은 원시와는 다른 독특한 시의 맛과 향기를 독자들에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한강」의 원시는 시인의 사유와 개성적인 이미지로 구성된 평면적인 서정시다. <나는 흐르는 동안에만 물의 씨앗을 낳는다/태백에서 흘러오다 두물머리 어디쯤에서/천 년을 잘라내고/어둠이 치마폭을 들추며 달을 내려놓는다>는 첫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의 ‘나’(주체)는 한강이고, 한강의 독백으로 시가 전개된다. 따라서 시인의 관념이 시의 독백을 지배하고 한강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푸른 천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굽이굽이 휘어지며 맨발로 숨차게 흘러온다/(흰옷)과 땅(검정옷)이 뒤섞인다) 라는 ( )속의 지문은 가상현실의 한강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시에 생동감과 예술적인 환상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자극을 가하고 환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리고 평면적인 시의 공간을 입체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고 시의 감각을 오감五感으로 확대한다. 이것은 연극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효과를 일반적인 서정시에 도입하는 예例로 ‘시+연극’의 긍정적인 면을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한 장면의 연극을 감상하는 이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오래 전 끊어졌다 이어진 다리 아래/물그림자를 밀고 가는 무늬/흐르듯 멈추듯 달이 사리를 품는 중이다> (물그림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휘감고/손가락 끝에서 CD가 물비늘처럼 반짝거린다/ 푸른 강이 천천히 색소폰 소리를 타고 흐른다)에서는 연기자의 연기와 그가 사용하는 소도구에서 독자들은 독창적인 감각에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 환상의 공간속으로 자신들의 상상을 넣어보는 재미와도 만나게 된다. 특히 CD를 사용하여 반짝이는 한강의 물빛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현대적인 감수성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objet)와도 관련되는 시적 소재의 확대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동하는 감성은 <김창렬이 그린 흐르지 못한 물방울이/바다로 가는 생각을 하는 사이/양수가 싹을 틔우며/내 품으로 떨어진 꽃잎 같은 이름/하나 둘 불러낸다> (원을 그리며 도는 빨간색 체조 리본/ 꽃잎처럼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생명들)에서는 어떤 논리적 흐름에서 벗어난 상상의 세계로 비약하는데, 이는 시의 공간을 구체화시키고 난해성을 풀어주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것은 상상의 집합적 구조가 원을 그리며 돌다가 연기자의 다리 아래로 떨어진 빨간 체조 리본의 꽃으로 초점을 맞추면서 시의 상징이 극의 상징으로 전이轉移되기 때문이다. 이때, 연기자가 여자일 경우 시 속의 ‘양수’와 어울려서 생명의 원천을 더 본질적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시의 끝부분 <나는 흐르며 단단한 심이 박힌/물의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낸다>라는 평범한 구절이 (푸른 천을 뒤집어 쓴 비밀스런 강의 뿌리에서/ 물의 자식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린다)로 인해 성스러운 제의적祭儀的 장면으로 승화되고, 이때 연기자(시인)는 물에서 생명을 받아내는 존재자로 부각된다. 이런 극적 전환의 장면에서 나는 원시보다 각색된 시의 매력에 더 끌리게 되고 각색시의 독립적인 완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위상진 시인의「한강」(각색시)이 아직 미완성의 실험적 작품이지만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공연성이 시사적詩史的 가치와 중요성만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위상진 : 1993년 월간 <시문학> 등단. 시집:「햇살로 실뜨기」
 
이 솔 시인의 시-「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암벽 위 소나무를 특히 좋아하여
그 뿌리를 붙안고 산다
균근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곰팡이는 틈새의 물기를 먹고
실뿌리의 왕성한 힘을 양분으로 큰다
실뿌리는 암석을 부수며
곰팡이와 하나가 된다
은밀한 이야기 나누며
가느랗고 끊기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
암석이 갈라지고 드러난 솔뿌리의 자태
꿈같이 뽀얀 실뿌리덩이로 피어난
한줌 흙 없이도 버텨낸
거센 바람에도 암석을 붙안고 서게 한, 나는
내밀한 암각화를 그리는 곰팡이다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전문
 
코끼리 장식이 붙어 있는 향나무 도장을 판다
삼각칼 끝으로 코끼리의 발바닥을 파고든다
삼각칼 끝 칼날을 세우고 파고든다
장지의 굳은살에 칼을 기대고
신중하게 한 점, 한 획을 새긴다
천천히 획을 그려나가면서
깊게 파고들고 부드럽게 깎아낸다
살짝 점을 찍고 가볍게 날리듯
삐치면서 이 아무개를 새긴다
향나무의 속살은 둥근 얼굴로 나타난다
칼끝에서 찌꺼기를 털어낸다
둥근 얼굴에 살이 붙고
여린 미소 드러나면
이제 향이 우러나올 차례다
한 점, 한 획에서
둥근 얼굴에서
깊은 향이 피어난다
------「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전문
 
시를 건축물에 비유하면서 정서와 사상은 시라는 건축물의 중심이 되는 설계도나 기둥과 같다고 하는 이론은 쉽게 변하지 않는 보편성을 갖는다. 그 이론은 보통의 글쓰기 이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시의 겉모습이 되는 사물(사건)은 시의 중심이 아닌 부수적인 것 즉 건축물의 미적 표현도구나 소재로 평가될 뿐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정서와 고정관념(이념)에 식상食傷한 현대 시인들은 시의 중심을 시인의 정서와 사상만이 아닌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 사물자체(사건)에 두려고 한다. 그들은 언어의 기능을 의미의 전달에서 언어의 순수한 예술적 기능으로 전위轉位하려 하고, 사물(사건)을 비유比喩나 상징(의미)의 도구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인 ‘사물성의 세계’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그 이유는 정서나 사상은 대부분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인식인데 반해서 사물(사건)과 언어는 객관적이고 비교적 가변성이 적은 독자적인 존재의 세계(fact)이기 때문이다. 이솔 시인의 시편에는 이런 ‘사물인식의 세계’가 선명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적 정서의 과장된 노출이나 고정관념의 인과적 논리성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신선한 사물성의 언어를 맛보게 한다. 그는 독자들을 자신의 행위나 사물 속으로 안내하면서 사물성의 세계가 펼쳐 보이는 물질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의 앞부분은 미세한 사물의 세계를 관찰하는 시인의 눈을, 끝부분은 사물세계 속으로 들어간 자신의 모습 즉 사물과 합일合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균근菌根곰팡이는/암벽 위 소나무를 특히 좋아하여/그 뿌리를 붙안고 산다/균근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가는〔細〕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라는, 이 시 속에는 사물세계에 대한 시인의 몰입과 세밀한 관찰만 있을 뿐, 어떤 정서나 사상의 개입이 없다. 그의 사물인식은 대상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중립적인 위치에서 직관적이고 단도직입적 單刀直入的으로 사물과 만나는데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의 눈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활동을 고성능 카메라로 찍어서 보여주는 과학자의 눈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독자들의 시선은 암석에서 번식하는 균근菌根곰팡이의 생태에 집중되고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사물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끝부분 <한줌 흙 없이도 버텨낸/거센 바람에도 암석을 붙안고 서게 한, 나는/내밀한 암각화를 그리는 곰팡이다>에서는 곰팡이와 한 몸이 된 시인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고, 그에 대한 해석은 어떤 관념이 아닌 독자의 상상과 감성에 맡기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중심은 사물세계에 대한 감지와 인식이고, 그 인식이 ‘사물성의 세계에 대한 환기喚起’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칼끝이 깊으니 향이 깊다」는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물을 만지고 또 다른 사물을 창조해내고 즐기는 행위를 보여준다. 이런 행위는 사물인식의 시원始原이 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이들이 흙이 무엇인지 개념을 알기 이전에 흙을 만지고 흙으로 무엇을 만들고 하는 놀이를 통해서 흙과 친해지고 흙을 인식하게 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시는 보는 것보다는 만지고 즐기는 것이 더 사물의 근원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삼각칼로 나무에 도장을 새기던 자신의 체험을, <코끼리 장식이 붙어 있는 향나무 도장을 판다/삼각칼 끝으로 코끼리의 발바닥을 파고든다/삼각칼 끝 칼날을 세우고 파고든다/장지의 굳은살에 칼을 기대고/신중하게 한 점, 한 획을 새긴다/천천히 획을 그려나가면서/깊게 파고들고 부드럽게 깎아낸다/살짝 점을 찍고 가볍게 날리듯/삐치면서 이 아무개를 새긴다>라고, 극히 사실적인 시의 언어로 재현再現하면서 독자들을 사물의 내면으로 몰입시킨다. 이런 그의 사실적 진술陳述의 언어 속에는 어떤 관념도 사상도 침투할 수 없다. 그 속에는 오로지 언어이전의 ‘물질과 행위行爲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언어(관념)의 시달림에 지친 독자들에게 맑은 물과 같은 투명한 사물성의 감성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의미생성 이전의 사물성의 세계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세계를 일깨우고, 세상의 풍화작용에 닳아버린 감성을 회복시키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언어이전의 세계로 떠나가는 상상에 젖게 한다. 이런 시를 시의 방법적인 면에서 ‘사물시事物詩’라고 명명命名하기도 하는데, 이솔 시인의 독특한(unique) 감성의 언어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이솔 : 2001년 월간 <시문학> 등단. 시집: 「수자직으로 짜기」「신갈 氏의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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