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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쓰기 여정-자작시 해설/심상운
2019년 03월 02일 18시 25분  조회:1017  추천:0  작성자: 강려
나의 시 쓰기 여정-자작시 해설
  
현실문제에서 존재의 의미 찾기와 순수서정 그리고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
  
                      ------2015년 4월 3일<한국시문학 아카데미 금요포럼>에서 발표  
                                                                       
 
                                                                   심 상 운 (시인, 문학평론가)
  
  
내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21살까지 살았다. 내가 태어난 낙원동 그 터에는 지금 춘천관광호텔이 서있다. 1950년대의 춘천은 6, 25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시장을 중심으로 복구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생산 시설이 없는 군사적인 소비도시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춘천의 인구는 2만을 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소양강(북한강)이 휘감고 흐르는 봉의산, 삼악산, 대룡산의 빼어난 자연 풍광은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소년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어린 시절 헤엄치고 물고기 잡으며 놀던 공지천(곰짓내), 대밭이의 물소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문학보다는 미술에 더 마음이 끌렸고 화가(畵家)를 동경하였다. 그래서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1958년 춘고(春高)에서는 소풍 갈 때 스케치북을 가지고 가서 풍경화를 그리게 했다. 미술 시간에도 도회지의 거리에 나가서 자유롭게 스케치를 하게하고 그때 그린 그림들을 뽑아서 교내에 전시했다. 내 그림도 뽑혀서 몇 달 동안 교실 벽에 붙었던 기억이 있다. 그림그리기와 함께 독서도 내 마음을 붙들었다. 라디오도 TV도 없던 시절, 문학에 대한 동경에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에 빠져서 독서삼매에 몰입했다. 책은 주로 헌 책방에서 밑돈을 깔아 놓고 빌려보았다. 이때 헤르만헷세, 톨스토이 등 외국의 유명작가들을 만났으며, 이광수, 방인근, 나도향, 김동인, 김말봉 등의 소설도 남포등을 밝히고 밤을 새워 가며 읽었다. 이런 폭풍 같은 독서가 훗날 내 문학적 토대를 이루었으며 문학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시는 대학에 들어와서 쓰게 되었는데, 내 시의 길잡이는 박목월의 『보라빛 소묘』, 유치환의 『구름에 그린다』, 장만영의 『이정표』 등 당시에 발간된 시인들의 자작시 해설집이었다. 나는 장만영의 『이정표』에 매혹되었다. 시를 언어의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그의 시작 방법이 그림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중대신문> 문리대 학회지 <문경>등에 시를 발표하던 나는 1963년 대학 4학년 때 <교내현상문예>에서 당선이 되어 학생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조병화 시인이 당선시를 2편 뽑았는데, 함께 당선된 학생은 영문과 4학년 노향림(시인)이었다.
  
1964년 대학 졸업 후, 10년간은 문학의 공백기가 되었다. 군대, 취직, 직장생활 등 시 창작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공백기를 지나 1973년 11월 월간 <시문학>에 조병화 시인의 첫 번째 추천을 받고, 1974년 2월에 완료추천을 받아서 등단하였다. 완료 추천인은 문덕수 시인이었다. 완료추천작 「목공환상(木工幻想)」은 관념을 배제한 사물성의 이미지 감각의 시로서 평가를 받았다.
  
1981년에 첫 시집『고향산천』을 상재하였는데, 이 시집에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분단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의식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발간되자마자 5공 정권에 의해 이념서적으로 분류되어 판금(販禁)이 되고, 금서(禁書)가 되었다. 당시 금서가 된 시집은 양성우의『겨울공화국』김지하의『타는 목마름으로』조태일의『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와 내 시집『고향산천』이었다. 그 후 1985년 6월 8일 해금 조치가 있을 때까지 나는 노량진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요시찰인이 되었다. 그들은 수시로 학교에 들려 나의 언행을 점검하고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교장은 시와 관계가 먼 법과 출신이지만『고향산천』을 탐독하였고, 내 시에 감동했다며 중국음식점에서 조촐하게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이 시집으로 인해 발행처인 <시문학사>와 발행인 김규화 시인은 문화공보부로부터 압박을 당했고, 그로 인해 나는 정신적인 고통과 불길한 위험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발간 후 서평이나 평론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1981년 12월 22일자 <동아일보> 분야별 평론가 5인이 선정한 <문화계 ’81 인물 5’- 올해의 시단 5인>의 후보로 올라가서 문학적인 면에서는 뜻밖의 보람을 남겼다. 그리고 <펜클럽>에서 발간한 1995년 봄『펜 문학』의 특집 <해방 50년의 시>에서 박철희 교수(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시의 경향을 거론하면서 “정치적인 폭력, 빈부의 격차, 계층의 갈등, 공동체 파괴와 이에 따르는 인간관계의 왜곡이 이 시대 시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소재로 나타났다.”고 했고, 시인으로는 “김지하, 고은, 신경림, 이성부, 황동규, 김명수, 강은교, 조태일, 양성우, 심상운, 이시영, 정희성 등의 이 시기의 시를 먼저 거론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중요한 한국 현대시사(詩史)의 정리 즉 사초(史草)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은『고향산천』이 남긴 귀중한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에는 31편의 연작시 <고향산천>있다. 그 중 2편을 소개한다.
  
고향산천 . 12
-싸리꽃
  
이른 여름
강원도 산비탈엔
살내음 환한 싸리꽃
  
스물 두 살의 나는
小銃을 버리고
한 아름 싸리꽃과 함께
땅바닥에 누웠다.
  
여름은 온통
치마폭 가득
푸른 불길
  
나는 방금 불속에서
새로 태어난
청록색 풀잎이었다.
  
「고향산천 . 12-싸리꽃」은 81년 봄 시문학 출신들의 모임 <시문학회> 사화집에 발표한 작품이다. 나는 이 시의 시상을 어느 해 여름 강원도 원통 골 산비탈에서 무더기로 피어 있는 싸리 꽃 속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소총을 들고 포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앞에 발그레한 빛과 향기를 뿜으며 피어있는 싸리 꽃. 나는 무릎이 벗겨져 뻘겋게 번지는 혈흔의 아픔도 잊고 싸리 꽃 무더기 속으로 내 온 몸을 던졌다. 나는 이 시에서 역사 속의 나와 자연본래의 나를 결합시켜 새로운 생명적 창조의 나로 그려 보았다. 스물 두 살의 나는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다. 그런 내가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소총(증오심, 적대감)을 버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고향산천에 환히 핀 싸리꽃(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껴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원형적(原形的)인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는 정신적으로 분단(分斷)의 역사를 극복한 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산천 . 18
-어느 소년병의 잠
  
그는 이제 눈 감고
풀잎에 내리는 흰 눈을 보고 있다.
새소리도 마침내
맑은 이슬로 내리고
질경이 뿌리에 닿는 볕이
손등의 눈을 녹이고 있다.
  
<밝음과 어둠의 문지방 사이에
걸쳐 있는 그의 발목>
  
어느 날 그는 소총 멜방에 끌려
청솔 돋는 마을을
떠나갔을 뿐
죽은 것 같지 않다.
  
눈감고 편안히 누워
산천의 흰 눈 맞으며
언 땅 밑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소년병의 잠
  
「고향산천 . 18-어느 소년병의 잠」은 어릴 적 기억의 재생이다. 6,25 때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춘천에서 30리쯤 떨어진 시골 ‘곰실’이란 곳으로 피란을 갔다. 시내에서는 식량도 없고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후퇴하는 한패의 인민군 병사들을 보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그들은 패잔병으로 기진맥진한 몰골이 처참했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다리를 절며 걸어와선 쓰러지던 그들의 모습. 그 중에는 총신을 질질 끄는 소년병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화하며 그들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언젠가 깨어나야 할 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봄이 오면 그들은 깨어나리라. 그들은 잠을 자면서 비로소 산천의 햇빛과 만나고 맑은 새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언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의지를 그려 보았다
  
『고향산천』이후 나는 20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을 광풍 같이 휩쓸고 간 1980년대의 <민중시>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내 존재에 대한 탐구와 순수서정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시절 내 시의 표현이 지향하는 것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의 시어가 빚어내는 이미지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지는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의 의미를 싱싱하게 지속시켜주는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의 투명한 보석이 되어 자율적(自律的)인 독립적 가치를 지니면서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고 시의 세계를 무한히 넓혀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적인 정서의 적절한 조화(調和)와 현실의 문제였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생명, 그리움, 신적(神的)인 존재 등 ―을 중시하여도 현실의 문제들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의 문제들도 문제의 원형(原形)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나는 또 시각적(視覺的)인 이미지와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시속에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리는 시속에서 의미를 감각화(感覺化)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시의 리듬을 돋구어주고 신명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3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두 번째 시집『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서 골라 본 것이다.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 숲- 신神들의 마을> 전문 
  
이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했는데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서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 숲-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시 전체의 이미지는 흰 색과 검은 색을 대조시켜 시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시에서 생명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개발(開發)이라는 인위(人爲)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컴컴한 잡목림(雜木林)속에서 벌어지는 생명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환희를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젊은 신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라고 시의 앞뒤에 시청각(視聽覺)이 서로 한 데 어울린 동적인 이미지를 넣은 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환희의 감정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의도였다. 윤강원(尹江遠)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월평(月評)에서 “성스러운 것, 활달하고 자유로운 것. 평화스러우면서도 원형적(原形的) 생명감이 충만한 것에 대한 열망이 일종의 복귀의지의 꿈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神)을 등장 시켰다. 이 신은 생명의 원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자들은 원시적인 에니미즘(animism)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로 또 「수부水夫의 꿈」과 「벼랑 위의 꽃」을 들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검은 꿈의 바다를 
떠도는 수부水夫 
한밤중 달의 은사시빛 
밧줄이 부서진 내 배의 
동체를 끌고 간다. 
나는 저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곁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항해의 끝이 되어도 
설령 내가 영혼만으로 
떠돈다 할지라도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나는 얼마나 황홀한 빛의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인가. 
그 곳에는 악惡도 선善도, 
오직 순수한 신神들의 소리만 살아 
고생대古生代의 바다가 아직도 파도 친다. 
아아, 나의 첫 항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차디찬 꿈의 
빙산氷山을 지나 더 멀고 먼 
푸른 바다로 떠나가야 한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그 모래밭까지 
--「수부水夫의 꿈」전문 
  
앞의 시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 숲- 신神들의 마을」이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데 반해 「수부水夫의 꿈」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두 편의 시에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의 원적지(原籍地)를 찾는 의식의 흐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내 존재의 고향을 찾아 항해하는 수부(水夫)가 되었다.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황홀한 빛의 침대, 고생대古生代의 바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등은 내 의식을 객관화하여 드러내기 위한 은유의 언어이고 상상(想像) 속의 그림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선(善)과 악(惡), 죽음과 무(無)의 세계를 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생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시는 관념적(觀念的)이고 사색적(思索的)인 내용이 중심이 되는 시다. 나는 벽돌같이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고 신선한 상상의 언어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는 관념어와 구상어(具象語)의 조화를 시도하였으며, 객관적인 이미지와 주관적인 정서를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시적인 감흥(感興)을 주기 위해서 "나"를 시의 화자로 삼아 독백조(獨白調)의 어조로 시를 구성하였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들을 아시는가 
  
우리들이 산을 오르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들일 때 
그 꽃들 만나고 가는 바람이 
우리들 머리나 가슴을 향기롭게 스치고 지나가고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란 가슴을 드러내곤 하였지 
  
높은 산 까마득한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릴 박고 피어 있는 꽃 
  
햇볕 따뜻한 날이면 
누군가 그 꽃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거 같다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을 해버린 모습으로 
한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찾은 듯한 모습으로 
속살까지도 빨간 꽃 옆에서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그 곳이 먼 옛날 떠나온 제집인 양 누워 있을 거 같다 
----「벼랑 위의 꽃」 전문 
  
이 시는 어느 봄날 산행 중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갈무리한 시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은 실제의 꽃도 될 수 있지만 상상 속의 꽃으로도 확대된다. 저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유혹했던 절벽 위의 철쭉꽃으로,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피어있는 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산행(山行)을 할 때 우리들의 가슴을 더 향기롭게 해주는 것은 그 상상 속의 꽃들을 만나고 가는 바람의 향기라고 차원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햇볕 따스한 봄날 그 꽃 옆에 누군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상상의 세계를 넓혀 보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 속에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존재의 본래적(本來的)인 모습일 수도 있고,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속의 “속살까지도 빨간 꽃”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상징(象徵)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시의 기능 중에서 이 세상의 허무(虛無)를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벼랑 위의 꽃」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끼는 시가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시속의 빨간, 파란 등 색채언어(色彩言語)는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또 의미를 상승시키는 구실을 하면서 미적 감각과 서정성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을 짚어보면 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드는 존재의 암시와 발견, 존재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나는 내 시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모색하는 시간을 갖고 새로운 시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문덕수 시집『선․〮 공간』(1966,12 성문각)의 시편들을 다시 읽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동영상으로 표출된 초현실의 이미지 세계를 다루었는데, 아쉬운 것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이 시집의 시편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시편들은 40여년이 지난 2008년에 거론되기 시작한 ‘하이퍼 시’의 근원이 되는 시가 되었다.)
  
나는 2005년 한국현대시인협회 사화집『새는 휘파람소리로 난다』에 게재할 2004년 시단의 총평을 의뢰받고,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을 집필했다. 그때 현대시의 기법에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내 눈을 놀라게 한 것은 오남구 시인을 중심으로 <시류동인>들이 시도하고 있는 ‘디지털리즘 시’ 운동이었다. 그들의 시운동은 넓고 깊은 디지털의 이론을 포괄하지 못하고, 대상에 대한 시인의 직관적인 감성과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지만 언어에 대한 인식(탈관념, 기호성)과 대상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 찍기(염사, 접사)를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이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의 ‘디지털리즘 시’를 21세기 새로운 시의 모델로 설정하고 집중적인 조명을 하였다. 그들의 시가 나에게 준 영감은 현대시가 의미의 세계(관념)에서 영상의 세계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개인적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한 지식을 쌓고, 오남구 시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생각을 토대로 하여「디지털 시의 이해-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시론을 집필하고, 2006년 11월 금요포럼에서 이 시론을 발표하였다. 당시 포럼에서 돈키호테 같은 내 디지털시의 이론을 지지하고 격려해준 시인은 문덕수 선생님뿐이었다. 
  
2008년 오남구 시인의 제의로 김규화 시인과 함께 3인이 최초의 <하이퍼시 동인>이 되었다. 나는 2008년 4월호 『시문학』 ‘이슈의 숲길’에서 김규화 시인과의 대담을 통해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시대적 당위성과 미래지향성에 합의를 하고, 하이퍼시의 창작에 몰입했다. 처음엔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명명했던 것을 하이퍼시라고 개명한 이유는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를 전제로 한 명칭이라는 점에서 종이 위에 전개하는 하이퍼텍스트시의 명칭은 하이퍼시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현대는 영상 시대이고 인테넷을 통한 수평적인 네트워크 시대다. 따라서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시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디지털 시는 21세기의 감각에 부합하는 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영상 시대의 언어미학과 가상현실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로서 컴퓨터 공간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에서 생성된 ‘하이퍼 시’의 모태가 되는 시가 되었다. 디지털시에서 이미지의 집합적 구조의 바탕이 되는 모듈(Module) 이론은 하이퍼시에서 리좀(Rhizome)의 이론으로 바뀌었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정신의학자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합동으로 저술한 『천개의 고원』에서 말한 리좀은 수직적 선형(線形)을 탈피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이루어졌으며, 서로 대립적인 독립관계를 갖는 세계지만 서로 연결되고 결합함으로써 다양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연출한다는 점에서는 모듈 이론과 부합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시를 수직적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시라고 하면 하이퍼시는 수평적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하이퍼시(디지털 시)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의 수직적 논리적 사고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내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2010년 5월 푸른 사상사)에 들어 있는 하이퍼 시의 조건과 특성이다. 그러나 이 조건과 특성은 굳어진 틀에 갇힌 고착적(固着的)인 것이 아니라는 데서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하이퍼시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내 하이퍼시(디지털시) 초기의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공간의 시 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4개의 단위(unit)로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에 흐르는 의식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이 시의 내면에는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갈구는‘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설득적 표현과는 전혀 다른 암시적인 보여주기(showing)의 기법이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은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에서 이 시에 대한 평가로‘특이성이 없는 범용성’의 시라는 지적과 함께 “그 주제에 속할 수 있는 장면을 누구라도 계속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시가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특이성이 없는 범용성(凡庸性)이라는 그의 지적은 하이퍼시의 일반화(난해성의 해소와 독자와의 소통)를 위한 방향제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 같다.
  
한국 현대시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현대시의 시대정신이다. 언제까지 과거의 언어에 갇혀 있을지 답답하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는 이 시대의 시 현장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의 길은 다양하고 모두가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쪽만 고집하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현대시인협회 기관지 『한국현대시』12호 <권두언>에서 “현대시의 전통과 변화를 그 대립적인 면만 강조하면 현대시는 시대정신의 범위에서 이탈 되고 말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할 때,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다양한 에너지가 충만한 시가 탄생하리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끝으로 위에서 서술한 나의 시 쓰기의 방법을 요약하면 197,80년대의 현실문제의 시⟶1990년대의 존재의 의미 찾기와 순수서정시⟶2000년 이후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의 3단계로 나누워진다. 이 3단계의 밑바탕에는 이미지즘(imagism)이 들어있다. 자연발생적이고 관념적 표현에서 벗어나 하나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려는 이미지즘은 내 시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중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지로 형성된 내 시편들의 내면에 끊임없이 ‘생명의식’이 흐르고 있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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