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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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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우주소년 케무로-엘리엇 작-김 성 묵 역 댓글:  조회:379  추천:0  2021-09-19
우주소년 케무로-엘리엇 작-김 성 묵 역   ◇ 편집 위원 ◇ 아동문학가 이원수 / 박홍근 문학 박사 최인학 이학 박사 김치규 공학 박사 양옥룡   책머리에   이 이야기는 인공 위성이 여러 개 쏘아 올려지고, 인공 위성 도시라는 것이 건설된 시대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그 인공 위성 중의 하나에 살고 있는 두 소년 케무로와 컬리는 우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식물이나 동물을 모릅니다. 중력에 있어서도 지구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작용을 받고 자랍니다. 새로운 미래의 소년들 - 즉 우주에서 태어나 자란 두 소년은 우주카라는 것을 타고 끝없는 공간을 마음대로 자유로이 날아다닙니다. 이 두 우주 소년은 어떤 모험을 하고, 또 어떤 발견을 할까요? 여러분을 위한 이 SF는 영국의 엘리엇 작가가 쓴 것으로서, 세계의 소년 소녀들이 열렬히 애독하고 있는 걸작입니다. 위성 K호····················· 4 위험한 유성··················· 13 지구인 자손과 샤니아인············· 24 귀여운 벗들··················· 35 무서운 광선총·················· 45 속임 작전···················· 54 도망가는 지구인················· 65 야수의 어금니·················· 77 휴식의 언덕··················· 87 신성한 맹세··················· 95 기분 나쁜 생물················· 104 잘 있거라, 샤니아··············· 112   작품 해설··················· 119   위성 K호   {나의 이름은 컬리, 인공 위성 K호에 살고 있어요. K호는 큰 테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언제나 빙글빙글 돌고 있답니다. 테의 중심부에서 4개의 테의 받침대가 나와 있는데 테의 폭은 1000미터, 길이는 한 바퀴 돌면 4킬로나 됩니다. 테의 받침대가 나와 있는 중심부에는 여러 가지 기계들이 꽉 차 있고, 인공 위성을 움직이는 장소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사람의 기사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해요. K호의 중요한 일은 레이더 스코프(전파 수상경)와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하여, 지구나 그 밖의 유성을 관찰하는 일이어요. 그밖에도 지구에서 날아오는 로켓선이나 우주선의 진로를 정하거나 지시를 하기도 한답니다. 중심부의 큰 축의 머리에는 특별한 출입구가 되어 있어, 우주선에서 옮겨지는 보급 물자나 저장품을 운반하는 우주 트럭이 드나들고 있어요. 우주 트럭으로 오는 사람들은 다들 특별한 우주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인공 위성의 안에는 대개 공기가 통하고 있어요. 인공 위성의 안에는 한 곳만 공기가 희박한 장소가 있는데, 여기서 우리들은 이 별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살고 있답니다.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공기가 희박한 특별한 방에서 살고 있어요. 우주모라든지 우주복 같은 것은 쓰거나 입고 있지 않아요. 그 대신 공기가 통하고 있는 방에는 못 들어가는 거죠. 우리들의 부모가 우리를 찾아올 때에는 우주복을 입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러나 우리들이 찾아갈 때에는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가야만 한답니다. 이 인공 위성은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만든 것이어요. 아버지나 어머니들은 아직 갓난 어린이 때 이 곳에 데리고 왔대요. 이 인공 위성을 만드는 데는 지구에서 우주선으로 여러 가지 부분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그것은 대단한 작업이었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조립한 인공 위성은 절대로 떨어진다는 일은 생길 수가 없어요. 그리하여 한번 돌기 시작하면 관성으로 영원히 도는 것입니다. 속력은 시속 25000킬로이지만, 우리들은 조금도 그 속력을 느끼지 못하지요. 우리들은 지구에서 약 20000킬로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만, 지구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우주복만 입으면 인공 위성의 주위를 자유로이 걸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수리 작업을 할 때는 몹시 피로가 심해지고, 몸을 로프로 묶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다는 일은 없지만, 원심력으로 멀리 떨어져 나가버려 다시 되돌아오는데 매우 힘이 들기 때문이어요. 우리들, 인공 위성 K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누구나 이름 앞에 K(케이)라는 문자를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인공 위성의 호출 부호가 'K'이기 때문이어요. 다른 인공 위성들도 우주의 여기저기에 많이 떠 있습니다. 어느 인공 위성도 제각기 다른 문자를 가지고 있으며, 그 곳에서 태어난 소년 소녀들은 모두 그 문자로 시작되는 아름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   여기까지 쓰고서 컬리는 후우하고 크게 한번 숨을 내쉬었다. "아아, 작문을 쓴다는 건 참 어려워." "뭐가 어려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쓰면 되는 건데." 하고 곁에서 케무로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정말 어려워. 인공 위성의 생김새라든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들의 일까지 일일이 나타내려니까 말야. 그리고 나는 작문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단 말이야." "허허, 작문 대회 ? 그런 것도 있구나, 나의 때는 그런 것 없었는데. 이봐 컬리, 그것보다 우주카로 한 번 신나게 돌아보지 않겠니? 아주 재미있단다." 컬리는 케무로보다 어리고 나이 차는 있었으나 둘은 형제처럼 다정한 사이였다. "그래 가자. 그러나... 아아, 역시 작문이란 어려워. 우선 우주카조차 어떻게 나타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야 뭐 안에는 좌석이 둘 있고, 날씬하고 긴 탈것이라고 쓰면 되잖겠니?" 하며 케무로는 방을 나서면서 컬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원자력을 가진 작은 구슬이 에너지로 되고, 핸들 하나로 전진도 후진도 회전까지도 되는 것이라고 말야. 아니, 그렇게 자세하게는 안 써도 좋을 거야. 자 컬리, 우선 우주를 자유로이 마음껏 돌다가 오자구. 굉장한 일이야." 소년들은 부모와의 면회실로 달음질쳐 갔다. 케무로는 버저를 누르고 커다란 스크린 앞에 섰다. 그러자 곧 키가 큰 사람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케무로와 아주 닮은 얼굴인데, 늠름하고 건장한 풍채이다. 바로 케무로의 아버지였다. "안녕하셔요, 아버지. 컬리와 같이 우주카로 나갔다 오고 싶은데 어떨까요?" "그래 좋아요. 컬리의 부모에게는 내가 말해 놓지. 그러나 조심하여야 한다. 멀리는 가지 말도록 해요." "네, 조심하겠어요." 면회실을 나온 소년들은 오른쪽으로 돌아 제일 가까운 통로로 들어갔다. 거기서 모노레일(단궤 철도) 카를 타고, 우주 주차장에서 내렸다. "역시 또 둘이 왔군. 우주카겠지, 케무로군." 하고 주차장 계원인 샘이 투명한 헬멧 속에서 짐짓 퉁명스럽게 말했다. 샘은 어린 시절에 이 인공 위성으로 왔기 때문에, 공기가 통하는 장소로 나을 때는 언제나 우주복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헬멧 속의 얼굴은 텁석부리이며 우주복을 어색하게 입은 모습은 좀 무섭게 보였으나, 케무로와는 아주 다정한 사이였다. "항상 주의시키는 데도 또 나가니 ? 우주선의 항로 근처를 날아다니는 것이 뭐가 그리 재미있냐?" "재미있고 말고요. 자기도 가고 싶으면서......." 하고 케무로는 입을 삐쭉하며 웃었다. "이 녀석, 어른에게 함부로 말하는 법이 야냐." 샘은 빙그레 웃으면서, 주차장에 서 붉은 우주카를 끌어냈다. 그리고 활주로가 있는 곳까지 날라다 주었다. "원자력 구슬을 새로 넣어 놓았다. 그러니 케무로, 지금껏 보다는 더욱 속력이 날 테니 그런 줄 알고 운전하라구." "감사합니다 샘, 조심하죠." 라고 대답하고, 케무로는 우주카의 조정석에 올라탔다. 붉은 우주카는 어뢰와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앉기 좋은 좌석이 2개 있다. 그리고 케무로의 자리 앞에는 발과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조종 장치가 되어 있었다. 컬리가 올라타자 케무로는 투명한 후드(덮개)를 끌어 당겨 우주카를 씌웠다. 출구가 열렸다. 곧 검고 번쩍거리는 듯한 주위의 빛이 사라지면서 푸른빛이 활주로를 비쳤다. 샘에게 손을 흔들면서 케무로는 스피드 레버를 움직였다. 1,2초 사이였다. 윙하는 진동 소리가 났다. 그것이 슛하는 소리로 변하면서 붉은 우주카는 활주로를 따라 스르르 미끄러져 나아갔다. 그리고는 인공 위성을 둘러싸고 있는 짙은 남색 속으로 붉은 어뢰와도 같이 힘차게 날아나간다. 케무로는 눈앞에 있는 레이더를 통해 한 대의 큰 로켓선이 다른 유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뒤돌아보니 인공 위성 K호는 이미 멀리 떨어져서 까마득하게 보였다. 케무로는 로켓선이 날아오는 향로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우주카를 세우고, 레이더 스크린을 주시했다.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으스스했다. 로켓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항로를 괴물처럼 돌진해 오고 있다. 너무 항로에 접근하면 로켓선에서 내뿜는 거품 같은 파도에 휘말려들 위험이 있다. 그 거품과 같은 파도를 받으면 우주카는 몹시 상하로 흔들린다. 케무로 등은 우주카에 탈 수 있는 것이 허용되어 있었으며, 실습반의 소년들에게는 그것은 스릴 만점의 놀이였다. 인공 위성의 아이들은 인력이나 심한 동요라는 걸 경험한 일이 없다. 학교에서 자세히 배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있다. 그러므로 거품 같은 큰 파도에 의해서 우주카가 상하 좌우로 마구 흔들릴 때, 그것은 참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스릴인 것이다. "온다, 왔다!" 작은 보라색의 점이 반짝이며 긴 선을 이끌면서 레이더 스크린 속에서 점점 커져 오는 것을 보고, 컬리는 완전히 흥분하고 말았다. 그러나 케무로는 얼굴빛이 변하며, "아니, 스크린의 꼭 중앙에 왔어. 이건 너무 지나쳤다." 하고 당황했다. "그러나 이젠 어쩔 수 없잖아, 케무로." 하면서 컬리는 눈을 멀고 먼 우주의 한 곳으로 돌리면서 태연하다. "자, 바로 앞에 왔다 !" 순간 그 작은 점은 곧 금빛의 찬란한 큰 덩어리가 되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직선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거품과 같은 파도의 가장 밑부분에 우주카가 부딪혔다. 여느 때와 같이 파도는 우주카를 흔들며 그냥 스쳐가지 않았다. 반대로 우주카가 파도에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카는 우주선의 뒤에 붙어서 어디까지나 계속 돌진해 간다. 케무로가 걱정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케무로와 컬리는 계기를 보면서 그저 떨고 있을 뿐,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러고서 얼마나한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우주카는 기우뚱 옆으로 기울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주선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오렌지색의 별무리 사이로 우주카는 일직선으로 처박히듯 날아갔다.     위험한 유성   "성운의 돌풍이다!" 하고 외치면서, 케무로는 핸들을 열심히 움직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주카는 별무리 속의 용솟음치는 치는 곳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손을 쓸 수가 없다. 기계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게 돼 버렸어. 우리는 항로에서 800 킬로나 벗어나 있는 거야." 좀체 돌풍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주카는 쉴새없이 회전하고 있을 뿐, 전기를 띤 보라색의 커다란 빛이 획획 스크린을 지나쳐 가고 있다. 둘은 보라색 안개 속에서 마구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겨우 성운의 돌풍 사이에서 벗어났을 때, 케무로는 인공 위성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보라색 성운의 전기 영향을 받아 우주카에 붙어 있는 기계가 고장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주카가 마구 흔들려도, 두 사람은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이제 우주카는 얼마쯤 기울어져 있었지만, 수평으로 날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분은 어때, 컬리?" "좋지 않은 것 같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간신히 성운의 돌풍은 벗어난 것 같다." 하고 케무로는 안심이 되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주위의 어둠은 점점 잿빛을 떤 푸른 놀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윽고 우주카는 정상적인 제자리로 돌아와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 두 소년이 뒤돌아보니, 이미 성운의 돌풍은 엷은 안개처럼 되어 멀리 사라져간다. 케무로는 우주카의 전진 레버를 힘껏 넣었다. 그 순간 케무로는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인력을 나타내는 미터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력이 있는 지대에 들어와 있다. 적어도 인력이 있는 물체에서 400킬로 이내인 곳에 있는 거야. 나는 미터를 조사할 테니까 넌 레이더 쌍안경을 봐 줘." 컬리는 좌석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레이더 쌍안경을 꺼냈다. 스위치를 넣고 우주카의 나아가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춘다. 얼마 동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우주카는 맹렬한 속력으로 날면서도, 점점 밑으로 당겨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야아, 보인다!" 갑자기 컬리가 외쳤다. "나도." 하고 케무로도 동시에 외쳤다. 케무로는 레버를 늦추고, 최대한으로 속력을 줄였다. 그러나 인력을 가리키는 미터는 '위험'이라는 붉은 신호에 가까이 가면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꼭 잡고 있어야 한다, 컬리. 역상승한다." 그러자 컬리는 레이더 쌍안경을 들여다보면서 안전 핸들을 힘있게 잡았다. 그런데 역상승으로 바꾸어 넣어도 아무 충격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주카는 상승하기는커녕 점차 서서히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쌍안경을 이리 줘 봐. 우리들은 어디엔가 착륙하고 있는 것 같다." 하며 케무로는 컬리에게서 쌍안경을 받아들고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뭐가 보이니, 케무로?" 컬리는 걱정되는 듯 물었다. "음, 보이기 시작해. 점점 가까워 오지만 큰일이다." 하고 케무로는 컬리에게 쌍안경을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컬리,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 저것은 틀림없이 유성 64호인 것 같다." "뭐, 유성 64호? 그렇다면 그 위험한 유성......." "그렇지. 우주 탐험대가 쓸모 없다고 보고한 그 유성 말야. 나의 기억으로 저 유성은 달의 영향을 받아 궤도가 뒤바뀌기 쉬운 유성이야. 그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쓴대. 그래서 흔히 '미치광이 유성'이라고 불린다는 거야. 대원들은 그 곳에 그다지 오래 있지는 않았지만 조사한 바로는 로켓선이 착륙하기에는 아주 곤란한 땅이라고 그랬어. 우리는 지금 그 곳에 착륙하려고 하는 거야. 자, 이미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어. 타원형 같애. 지구에 있는 것 같은 큰 산도 없고, 달에 있는 것 같은 분화구도 없는 것 같구나." 하고 케무로는 좌석에서 일어나 플라스틱의 윗도리를 끄집어냈다. "자, 이걸 입자구. 충격을 적게 받을 테니까." 두 소년은 재빨리 플라스틱의 윗도리를 입고 부풀게 했다. 소년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사이에, 위험한 유성은 바로 우주카와 아래로 일직선인 위치에 왔다. 둘은 안전 벨트를 꼭 매고 바짝 긴장했다. 우주카는 마치 장난감 상자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붉은 잎의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회색의 땅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곧 우주카는 완만한 언덕 위에 착륙했다. 그곳은 충격을 작게 하는 부드러운 스펀지와 같은 땅이었다. 그리고 부풀게 한 플라스틱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소년들은 다치지 않았다. 케무로는 플라스틱 옷의 공기를 빼고, 컬리의 것도 빼주었다. "컬리, 나는 이 근처를 조사해 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줘.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넌 곧장 도망쳐. 이 레버를 앞으로 밀고 이 튀어나온 스위치를 누르는 거야. 그러면 우주카는 곧장 상승할 거다." "싫어, 나 혼자 도망치다니 그런 법이 어딨어. 나도 같이 갈 테야." 이리하여 둘은 투명한 후드를 밀어젖히고 우주 카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두 소년은 푹 꼬꾸라졌다. 케무로는 그대로 모로 누워 있었으나, 컬리는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가만, 잠깐 동안 가만히 하고 있어. 우리의 근육을 인력에 숙달시키지 않으면 안 돼. 우리는 지구의 아이들과 달라 인력이 있든 없든 살 수 있지만, 아무튼 지금은 인력에 익숙해져야 해. 그리고 이런 많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폐에 충분한 준비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해." 그러고서 조금 지난 후, 케무로는 한쪽 발을 조금씩 들어보았다. 처음보다는 훨씬 쉽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봐, 우리들의 근육은 점점 여기에 익숙해지고 있어." 하며 케무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우주카는 푸른색을 띤 잿빛의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는 언덕 위에 착륙해 있다. 풀 밑은 누르면 들어가고, 놓으면 곧 튀어나오는 스펀지 같은 물기 있는 땅이다. 공기는 따스하고, 바람은 풀과 나무를 잔잔한 물결처럼 흔들면서 지나간다. 컬리는 발이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이젠 별로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케무로처럼 무릎을 꿇고 일어섰다. 그러나 아직도 인력에 익숙하지 못했던지 둘이는 흔들흔들하면서 넘어졌다. 두 소년은 손을 짚고 땅 위에 덥석 엎드려 잠시 쉬었다. "자, 심호흡을 하자구, 컬리." 몇 차례의 심호흡을 하고 난 후, 케무로는 조심조심 일어섰다. 그리하여 바른 자세로 섰는가 싶더니, 갑자기 어깨가 앞으로 푹 쓰러질 듯하면서 마치 지면에 끌린 것처럼 몸이 구부러졌다. 그러나 몇 차례 그러고 나자, 곧 나아지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케무로는 아직도 다리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를 쓰고 있는 컬리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팔로 컬리를 끌어당겨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렇게 걷기가 어려운 것은 인력 때문만도 아니었다. 지면이 걷기에 아주 힘이 들 정도로 너무 부드러운 탓도 있었다. 케무로는 두 발을 천천히 움직여 조금씩 다리를 크게 벌려 보았다. 그랬더니 쉽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왼발을 내밀 때는 오른쪽 어깨를 뒤로 젖히면서 크게 흔들었다. "이봐, 저 큰 바위 벼랑 끝에서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잘못 본 것은 아닐까?" 그러자 컬리는 입술이 타는 듯 이렇게 말했다. "난 그것보다 목이 말라죽겠어." "우주카에 과일 주스를 조금 가져 온 것이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우리가 지구에 사는 소년이 아니었기에 큰 다행이야. 딱딱한 것을 안 먹고 과일 주스와 당분만 먹어도 되니까 말야." 라고 말하며 케무로는 우주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케무로의 걸음걸이를 보고, 갑자기 컬리는 웃기 시작했다. "야아 케무로, 이상한 걸음걸이다!" "컬리, 너도 별수 없을 거다." 하며 케무로가 우주카 속에서 과일 주스가 든 병을 끄집어내려고 할 때였다. 순간, 둘의 귀에 이상야릇한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나는 아냐, 지금의 소리는......." 컬리가 놀라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도 웃지는 않았어." 하고 케무로는 급히 뒤돌아보았다. 멀리 바위 저쪽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외쳤다.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 앗, 사람이다! 이쪽을 향해서 오고 있다. 커다란 인간이다. 컬리, 저 소리가 들리지?" 지금 평지의 저쪽에서 기묘하고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는 어쩌면 벙어리의 목에서 나오는 듯한 소리의 합창 같았다. 높고 낮게 아무튼 묘했다. 컬리는 과일 주스를 황급히 마시고, 재빨리 병을 케무로에게 주면서 물었다. "이쪽을 향해 아주 빠르게 뛰어오고 있어. 우주카를 움직일 수 없겠니?" "안 돼, 움직이지 않아. 고장이 난 것 같애. 그렇다고 뛸 수도 없으니 할 수 없게 됐다. 조용히 기다려 볼 수밖에 없구나. 다만 저 사람들이 온순한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케무로는 컬리에게 바짝 기대면서 손을 어깨 위로 돌렸다.     지구인 자손과 샤니아인   그 사람들은 소년들 쪽으로 마치 나는 듯이 큰 걸음걸이로 뛰어오고 있다. 한결같이 키가 큰 사나이들 뿐, 회색의 옷을 널따랗게 입고 있다. 더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그 옷들은 풀 빛깔과 같았으며, 풀의 올로써 짠 옷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몸집은 컸으나, 그다지 사나운 것 같지는 않았다. 피부는 붉은 구릿빛이었고, 눈은 놀랄 만큼 푸르고, 또한 아주 훌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광대뼈는 튀어나오고 입은 큰 것이 다소 놀랐을 때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윽고 키가 큰 사나이가 케무로 앞에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와 섰다. 케무로는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셔요?" "후, 후, 후" 하며 대장같이 보이는 사나이가 말했다. 그것은 목구멍 속에서 웃는 듯한 소리였으므로, 컬리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자 대장은 입을 다물고 무서운 눈초리로 컬리를 노려보았다. "해, 해, 해." 대장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가만있어, 컬리. 우리의 웃음소리 같지만, 그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말하는 방법인 모양이야." 하고 케무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대장은 케무로를 가리키고 또 우주카를 가리켰다. 그러고 나더니 넓은 어깨를 흔들면서 저쪽의 바위 언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하, 하' 또는 '호, 호' 등 웃음 같은 소리를 계속 발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진짜 웃는 소리 같이도 들렸고, 그러더니 갑자기 히죽거리며 웃는 소리로 바뀌며, 이번에는 길게 끌어당기는 듯한 소리로, 나중에는 놀랄 때의 소리처럼도 같았다. 케무로는 이 몹시도 기묘한 말씨에 아주 흥미를 느꼈다. 그 웃음 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케무로는 당장 알아차렸다. 그 하나 하나의 음 사이에 말의 높고 낮음에 따라 나타내는 뜻이 있다는 것을. 케무로는 이 큰 사나이들을 겁낼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상야릇한 말씨 때문에 그 사나이들의 얼굴이 더욱 즐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들에게 바위 있는 곳까지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 같다." 하고 케무로는 컬리에게 말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어디든 당신들 마음대로 데려가 달라고 손짓해 보였다. 대장은 알았다는 듯 몸짓을 하고, 뒤돌아보며 뒤의 사나이들에게 무엇인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4명의 사나이들이 앞으로 나와서는, 케무로와 컬리를 마치 날개라도 들듯 획 들어올렸다. 그렇게 어깨 위에 두 소년을 태우고, 그들은 대장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같이 걷는 큰 사나이들은 계속 히죽거리며 웃기도 하고, 커다란 소리로 웃음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우주카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우주카를 가져가 버리면 큰일인데,) 라고 케무로는 생각했다. 케무로는 컬리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컬리는 아주 굳어져서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눈초리로 죽 앞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 언덕 가까이 이르렀을 때, 케무로는 다소 키가 작은 사람들이 큰 사나이들이 오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무리 속에서 돌연 누군가가 이쪽을 향하여 뛰어왔다. 검고 긴 머리, 갈색의 눈, 날씬한 몸매의 귀여운 소녀였다. "안녕하셔요? 저는 리코나여요." 하고 소녀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것은 케무로들이 사용하는 영어였다. "하, 호, 호, 호." 하면서 대장은 리코나를 향해 굵은 팔을 휘두르며, 기묘한 웃음소리로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이 소리를 듣고, 컬리는 또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자 당장에 어두운 웃음소리가 불평이나 하듯, 두 소년을 둘러서 있는 사나이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비웃는 듯한 웃음이나 낮고 시끄러운 소리는, 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실례되는 거여요." 리코나가 컬리에게 충고를 했다. "저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할 셈일까?" "염려 안 해도 돼요. 당신들이 지금부터라도 저 사람들에 대해서 비웃듯이 웃지만 않으면 걱정 없어요." 대장은 걸음을 멈추고 무엇인지 투덜대는 듯한 소리로 리코나에게 말했다. 그러자 리코나는 곧 뒤돌아 서서, 바위 언덕의 출입구 속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많은 여자들이 리코나가 사라진 출입구 왼쪽, 다른 큰 출입구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 여자들은 남자들보다는 키가 좀 작았으나 몸의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크고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몹시도 예쁜 사람들뿐이었다. 광대뼈가 그다지 튀어나오지도 않았고, 입의 언저리는 남자들보다 훨씬 부드러움을 띠고 있었다. 바위를 꿰뚫어서 만든 커다란 구멍 출입구에 큰 사나이들이 가까이 갔을 때, 여자들은 조금 떨어진 출입구 바위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큰 사나이들은 케무로와 컬리를 조용히 내려보았다. 그러자 1, 2초 사이였을까, 두 소년은 중심을 잃고 몸이 앞으로 구부러졌다. 그러나 두 소년은 얼마 안 있어 평형을 되찾고 손짓을 하고 있는 대장 곁으로 걸어가 꼿꼿하게 섰다. "컬리, 다시는 비웃듯이 웃어서는 안 돼." 하고 케무로가 컬리에게 속삭였다. "그래 조심할게. 웃지 않겠어." 대장은 두 소년에게 오라는 듯 몸짓을 하고서, 바위 출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한 발자국 들여놓자, 옅은 안개와도 같은 엷은 빛이 그 속을 뒤덮고 있었다. 그 엷은 빛은 소년들이 통로를 따라 걷고 있는 동안에 차츰 밝아져 왔다. 공기는 서늘한 것이 전보다 한층 신선해지고, 인력의 힘도 이미 줄어들고, 소년들은 힘차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쯤 걸어갔을까, 마침내 둥근 천장의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천장에는 많은 구멍이 뚫어져 있고, 그 곳으로부터 밝은 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 구멍 하나 하나에 공기와 빛을 조절하는 셔터가 달려 있었다. 동굴은 어찌나 큰지 먼 쪽은 희부옇게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소년들은 두텁게 풀을 깔아놓은 침대가 층층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굴 속에는 여러 가지의 가구가 들어서 있었다. 그것들은 죄다 페인트라도 칠한 듯 밟고 푸른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들이 세 사나이들이 앉아 있는 긴 테이블 가까이 갔을 때, 케무로는 그 나무가 자연 그대로의 빛깔이라는 것을 알았다. 테이블의 저쪽에는 잿빛 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마치 옥좌와 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오른쪽에는 소년들을 데리고 온 대장과 꼭 쌍둥이 같은, 키 큰 사나이가 있었다. 그리고 왼쪽에는 같은 옷을 입은, 비슷한 나이의 잿빛 수염을 기른 사나이가 앉아 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대장과 닮지 않았었다. "너희들은 지구에서 왔느냐?" 그 사나이가 영어로 말해 왔기 때문에, 케무로와 컬리는 놀랐다. "아닙니다. 인공 위성 K호에서 왔습니다." 하고 케무로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곳에 착륙했지?" 그러자 케무로는 컬리의 손을 꼭 쥐면서, 자기들이 어째서 우주선의 항로에서 떨어져 성운의 돌풍 속으로 휘말려 들었는가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당신은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들이 하는 말로 저 사람들과 말할 수 있나요?" 하고 이번에는 케무로가 물었다. "그렇다. 그것은 내가 이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지구의 텍사스라는 곳에서 큰 목장을 하고 있었지. 거기서 유전을 발견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가족을 데리고 로켓선으로 우주 여행을 떠났어. 그러나 여기로 왔을 때는 로켓선이 고장이 났는지 어떻게 되어 이곳에 눌러 살게 되었단다. 나의 아버지, 나도 누이도 여기서 태어났다. 지금부터는 나를 페트라고 불러다오." 이때, 옥좌 같은 훌륭한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짧은 웃음 같은 소리로 무엇인가 말하기 시작했다. "왕은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 길게 말하는 것은 싫어하지." 하면서 페트는 왕을 향하여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왕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금 너희들의 말을 국왕에게 이렇게 통역해 두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땅에 살고 있는 샤니아인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므로, 언젠가는 이 나라를 찾고 싶었습니다'라고 말이야." "그러나 우리는......." "좋아 좋아. 그렇게 해 두면 여러 가지로 편리해. 국왕과 그 외 사람들도 우리들의 말은 모르니, 입의 움직이는 상태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뿐이야. 지금부터 너희들은 누구나 옆에 있을 때는 항상 밝은 소리를 내도록 하는 거다. 만일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기라도 한다면 너희들은 이 곳에 있을 수 없게 돼. 그 점을 깊이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들은 힘이 강할 뿐만 아니라, 한 주먹에 너희들의 숨을 끊어놓을 수 있다." "잘 알았습니다, 페트씨." "자, 왕을 향하여 조금 소리를 내어 봐. 짧고, 그리고 긴 웃음소리 같은 음과, 또한 두 가지의 짧은 웃음소리 같은 음으로 말이야. 어서 해봐. 왕이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왕에게 너희들의 뒤를 리코나에게 보살펴 주도록 해달라고 부탁해 보겠다." "예, 리코나라면 조금 전에 만났어요." 하고 컬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페트는, "리코나는 내 딸이야. 어머니는 샤니아인이지. 그 애는 지구의 말을 하는 걸 좋아한단다. 자, 왕 쪽을 돌아봐." 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여운 벗들   케무로는 컬리와 같이 국왕 앞에 섰다. 케무로는 살짝 인사를 하고서 빙긋했다.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바보처럼 이렇게 말했다. "하, 하- 하하-" 효과는 적중. 국왕 앵은 조금 머리를 숙이고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낮고 더듬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내가 말한 뜻은 무엇이었지요?" 하고 케무로는 페트에게 물어 보았다. "바로 이런 뜻이었지. 이곳에 와서 몹시 기쁩니다. 나는 이 곳에 있을 수가 있을까요? 라고 물어본 거야." 하고 페트는 왕을 잠깐 돌아보고 난 후, 빠른 소리로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국왕 앵은, 두 소년을 데리고 온 남자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남자들은 사라져 갔다. 페트가 여러 가지 지혜를 귀띔해 주었으므로, 이미 샤니아인에 대한 불안은 훨씬 줄어져 가고 있었다. 샤니아인들은 이상야릇하다기보다 우스운 말을 하지만, 몹시 머리가 좋아서 인공 위성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부드러운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을 케무로는 깨달았다. 감수성이 빠른 샤니아인들은 곧 케무로의 말솜씨나 얼굴 모습에서, 자기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았다. "리코나가 왔다!" 컬리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소녀는 테이블 옆으로 와서, 왕을 향해 공손히 절을 한 다음 페트가 소년에게 가르쳐 준 말과 너무나 닮은 웃음소리로 말했다. 왕은 부드러운 소리로 대답하는 것 같다. 리코나는 왕을 향해 또 절했다. 왕은 크게 끄덕이고서 높이 손을 들고, 리코나에게 케무로와 말해도 좋다는 신호를 했다. "나를 따라 오셔요. 그러나 먼저 왕에게 인사를 하셔야죠." 그래서 케무로와 컬리는 왕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통로를 걸어서 조금 갔을 때, 3명의 샤니아인이 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어쩐 일인지 그 큰 남자들은 모두 상처투성이였다. 2명의 남자에게 안기다시피 되어 가지고 들어오는 남자는 몹시 중상인 것 같았다. 케무로는 갑자기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동굴 속에 감돌던 평화스러운 기운이 별안간에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하며 리코나는 소년들을 재촉하여, 동굴의 출입구까지 이르렀다. 동굴의 출입구에는 여자들과 함께 한 사람의 젊은 샤니아인이 있었다. 리코나는 손짓을 하며 이상한 웃음소리로 그 남자에게 말했다. 그러자 젊은 샤니아인은 컬리를 얼른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당신은 친구보다 강한 것 같군요. 자, 제 어깨를 꼭 잡아요." 하고 리코나는 케무로에게 속삭였다. 동굴을 급하게 나온 탓인지, 밖으로 나와 중력이 더해진 탓인지 케무로는 숨이 가빠서 입도 잘 벌릴 수 없을 만큼 피로했다. 그러나 리코나가 도와주었으므로 곧 나아졌다. 젊은 남자는 조금도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듯 컬리를 안고 간다. 용암이 쌓이고 쌓인 꾸불꾸불한 길을 올라가니, 붉은 식물이 무성한 언덕에 다다랐다. 몸을 움직이고 심호흡을 한 탓으로, 케무로는 다시 힘이 솟아났다. 언덕 위에 이르렀을 때는 거의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언덕 위는 잿빛 바위의 넓은 광장으로 되어 있었고, 그 저쪽은 깊은 골짜기였다. 케무로는 광장의 가장자리까지 가서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아!"하고 외쳤다. 골짜기에서 언덕 중턱까지 땅은 층층으로 밭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거기에는 바위를 뚫어서 만든 집들이 서 있었다. 광장의 가장자리에서 밭 층계를 향하여 넓은 계단이 통해져 있었다. 계단의 몇 군데는 잘 손질된, 붉은 잎이 달린 키가 작은 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고, 이곳저곳에는 짙은 감색의 꽃이 피어 있었다. 골짜기에는 풀을 뜯고 있는 몇 마리의 작은 동물까지 볼 수가 있었다. 그 동물들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반짝반짝 빛나는 길고 네모진 것이 보였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호수가 아니면 잘 다듬어진 바위인지도 모르겠다. "기분이 어때요? 조금 나아졌나요?" "좋아졌어. 고마와요 리코나." 여기서 세 사람은 서로의 소개를 끝내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샤니아인의 젊은이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저 사람은 톤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저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지요. 사이도 좋은 친구여요. 그런데 우리들이 일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저 사람들은 하지 않고 지내는 일이 많아요. 어쩌면 하기가 싫은 모양이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샤니아인이 지구의 학문을 배웠다면, 이 나라는 훨씬 우수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언제나 말씀하고 있어요." "만일 지구인이 이곳에 착륙한다면, 샤니아인들은 공격을 할까?" "샤니아인들을 무시하듯 웃지만 않는다면 절대로 공격하지는 않을 거여요. 당신들은 내가 지구의 말로 이야기한 맨 처음의 사람들이어요. 물론 지금까지 지구인이 온 것은 몇 번이나 있었고, 현재에도 와 있어요." "뭐, 지구인이 와 있다고? 어디에?" "그리스 호수의 저쪽이어요. 큰 바위 그림자 때문에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로켓선이 조금 전에 착륙하였지요. 아버지 말씀은 그렇게 큰 것은 바위 위에 밖에는 착륙하지 못한대요. 우리들의 선조들은 당신들처럼 땅이 푸석푸석한 곳에 내렸기 때문에 그 로켓선은 가라앉아 버렸대요. 여기는 아직 굳어지지 않은 유성으로서, 지금부터 굳어져 간다는 거여요. 할아버지들이 착륙하였을 때는 이 땅은 걷지도 못할 만큼 부드러웠대요." "리코나의 아버지나 왕은, 왜 우리들에게 바위 저쪽에 착륙해 있다는 로켓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을까?" "사냥꾼들이 아무 말도 못하게 하고 있는 거여요. 사냥꾼들은 여러 사람의 먹을 것을 가져오거나 지켜 줘요. 왕도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명령에 따를 경우가 있어요. 그들은 뛰어난 용사이며, 어떤 숲의 동물보다도 빠르게 뛸 수 있어요." "숲 속의 동물이라니?" "아마 사자일 거여요. 나는 책에서 밖에 보지 못했지만, 사냥꾼들은 그것을 잡아먹기도 해요." "당신들은 어떤 것을 먹지?" "우리는 샤니아인처럼 짐승의 고기는 그다지 먹지 않아요. 저 붉은 나무의 열매나 파란 꽃도 맛있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 식물의 새싹이라든지....... 짐승의 고기는 잘 요리해서 겨우 조금밖에 안 먹어요." "왕은 왜 우리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거지? 바위 저쪽에 내린 로켓선의 지구인들과는 싸울 것을 사냥꾼에게 허락한 것 같은데 말야." "저 조그만 로켓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로켓이 아니야. 우주카라는 건데." 하고 컬리가 나섰다. "이야기 도중에 나서는 건 실례야, 컬리." 하며 케무로는 나무랐다. "당신들의 우주카는 몹시 작아서 많은 사람이 탈 수 없더군요. 그리고 푸른 베일이 내리기 조금 전에 착륙했으므로, 성운의 돌풍으로 항로를 잃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지요." "푸른 베일이라니?" "성운의 돌풍 중심이 언덕에 부딪히면, 돌풍은 휘날려 버리고 모든 것 위에 푸른 베일이 뒤덮여져요. 그것은 점점 식어서 몹시 축축해져 와요. 그 푸른 베일이 걸린 뒤에는 모든 것이 습기를 머금고 신선해지며, 식물들도 싱싱해져 오고, 그리스 호수의 물도 넘치도록 돼요." "그러므로 샤니아인이나 리코나의 아버지는 우리가 타고 온 것이 작고, 우리들도 소년이니까 조금도 위험을 안 느꼈다는 거로군." "말하자면 그래요. 지금까지 이따금 로켓선이 날아왔지요. 그들은 무서운 무기로 샤니아인들을 죽이거나,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빼앗아 도망친 일이 있었어요." "나쁜 놈들이군. 그 따위 짓은 용서할 수 없어." "우리의 선조가 태어난 지구에서 그 따위 사람들이 오다니 슬픈 일이어요. 그들은 왜 총이라는 무서운 무기들을 가지고 오는지 모르겠어요. 샤니아인들은 행복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랍니다." "그건 샤니아인들의 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는지? 왜 리코나와 아버지는 사냥꾼들과 같이 있으면서 지구인의 말로 설명해 주지 않지?" "물론 모르는 바도 아니어요. 그러나 우리는 사냥꾼에게 그것을 잘 설명해 줄 수가 없어요. 설명을 해도 모르거든요. 사냥꾼들은 머리는 좋아도 몹시 단순해서 한 번 나쁘다고 판단하면 절대로 돌이키지 않아요. 그래서 누구도 그들을 설득시킬 수가 없어요. 다만 톤과 같은 젊은이라면 모르지만요." 그러면서 리코나는 말없이 우뚝 서 있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톤은 젊은 샤니아인의 모범이어요. 나는 톤에게 로켓선에 대한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었지요. 톤이나 그의 친구들은 기꺼이 로켓선의 지구인들이 있는 곳까지 가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봤으면 좋겠다는 거여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말을 조금밖에 모르며, 그것을 사냥꾼들에게 잘 말할 수가 없는 거여요." 리코나는 케무로들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이번에는 조용한 웃음소리의 모음으로서 톤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젊은 그들은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톤은 자기들의 모음으로 이야기하면서도, 한편 매우 다정스럽게 손짓을 해 보였다. "톤은 당신과 컬리가 아주 마음에 든다는군요. 그래서 나에게 당신들과 이야기가 통하도록 가르쳐 달라고 말하고 있어요." 라고 말했을 때, 리코나는 갑자기 뒤돌아보며 얼굴빛이 싹 변했다. "큰일 났어요! 사냥꾼들이 당신들을 붙잡으러 왔어요." 케무로는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꽤 먼 저쪽에서 부우부우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키가 큰 남자들이 12명 이쪽을 향해 오는 중이었다.     무서운 광선총   사냥꾼들은 리코나와 열심히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하는 도중, 뱃속에서 나오는 웃음 같은 소리는 사납고 위협하는 말같이 들린다. 리코나는 사냥꾼들을 설득시키려고 열심이었다. 그러나 단념한 듯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당신들을 어떻게든 데려가겠다면서 듣지 않는군요." 그리고 리코나는 또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들이 저 로켓선의 지구인들과 너무나 닮았다는군요. 당신들이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저 지구인들이 총을 들이대지 않을 것이라고." 케무로는 놀라면서 소리쳤다. "총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나 사냥꾼은 누구 하나 무장 같은 것은 안하고 있잖아." "그래요. 그 때문에 사냥꾼들은 몹시 화를 내고 있어요. 지구인은 섬광과 같이 불을 뿜는 무서운 무기를 쓰고 있어요." 하고 리코나도 노여운 듯 말했다. "그것은 광선총 임에 틀림없어." 하면서 케무로는 리코나를 보고 말했다. "이봐요 리코나, 나의 이야기를 사냥꾼들에게 좀 전달해 줄 수 없겠어?" 사냥꾼들은 케무로와 컬리를 인질로 잡아서, 지구인들로부터 무서운 무기를 버리도록 하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신의 말을 들어 보겠대요. 그러나 빨리 해야 해요." 사냥꾼과 무엇인가 주고받던 리코나가 말했다. 사냥꾼들은 잠자코 케무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다. 케무로는 처음에는 긴장하여 굳어 있었으나, 차츰 익숙해지자 조용하고 주의 깊게, 조금이라도 사냥꾼들이 친절미를 갖도록 성의를 다했다. "우선 우리는 샤니아인의 친구라는 것, 그리고 샤니아에 살고 있는 리코나와 아버지나 친척 여러분들도 나와 같은 인종이라는 것을 말해줘요. 로켓선의 지구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지만, 저 사람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지구인은 두려워서 총을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짓을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만일 사냥꾼들이 나를 데리고 가 준다면, 지구인들을 설득하고 싶다고 말야." 케무로의 이야기는 효과가 나타난 것 같았다. 리코나의 통역을 듣고, 사냥꾼들의 태도가 얼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참, 그리고 컬리는 아직 어리니까 동굴로 돌아가도록 해주지 않겠느냐고 물어 봐 줘요." 이것도 리코나의 통역을 듣고 사냥꾼들은 잘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잘 알겠대요. 당신이 로켓선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도 같이 가겠어요." "그건 안 돼. 위험한 곳에 여자를 데리고 갈 순 없어." "난 그런 말은 통역하지 않겠어요. 내가 없으면 누가 통역을 하나요?" "나도 가겠어. 나만 혼자 두고 가면 싫어, 케무로."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컬리가 말했다. "너는 잠자코 있어. 만약 네가 광선총에라도 맞는다고 해 봐, 난 네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하겠어." "컬리는 톤과 같이 있으면 좋아요." 하고 말하더니, 리코나는 톤 쪽을 향해 뭐라고 빠른 소리로 말했다. 톤은 곧 응했다. 그러나 컬리는 싫다는 듯 비죽거린다. "톤과 나는 말이 통하지 않잖아." "컬리, 톤의 말을 공부하고 싶지 않니? 그래서야 어떻게 작문을 쓰겠니. 샤니아 말을 배운다면 아주 훌륭한 작문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컬리는 케무로와 리코나 쪽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그럼, 난 기다리고 있겠어. 역시 좋은 작문을 쓰고 싶단 말야. 리코나, 톤에게 내가 샤니아 말을 배우고 싶다고 말해 주겠어요?" "후우후 라고 말해 봐요." 하고 리코나가 컬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후우후." 컬리는 되도록 리코나의 입모습을 흉내 내어 열심히 말했다. 그러자 톤은 즐거운 듯 컬리를 어깨에 들어올리더니, 마치 나는 듯 사라져 갔다. 사냥꾼들은 케무로와 리코나를 둘러싸더니 어깨 위에 태웠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동안에 나는 듯이 뛰어, 바위가 뒹굴고 있는 골짜기에 도착했다. 사냥꾼들이 너무도 빨리 뛰기 때문에 케무로는 거의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다시 그리스 호수를 벗어나서, 용암이 우뚝 솟아 있는 쪽을 향해 곧장 뛰어갔다. 케무로는 학교에서 학습 슬라이드로 본 달과 지구의 바위 그림과 몹시 닮았다고 생각했다. 지구와 달의 용암처럼 검붉은 색을 하고 있었으나, 바위의 쪼개진 틈 사이에 나 있는 붉은 식물 때문에 한층 더 붉게 보이는 것이었다. 곧 사냥꾼들은 일렬로 서서 꾸불꾸불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언덕 위의 밑에는 하늘을 덮을 듯한 큰 바위 아치가 있었다. 그 밑에까지 오자, 사냥꾼들은 케무로와 리코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사냥꾼들의 앞뒤에 끼여서 언덕을 내려갔다. 좁은 길의 양쪽에는 잿빛의 커다란 바위가 솟아있다. 그래서 케무로는 무엇 하나도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폭이 넓은 선반처럼 튀어나온 바위 위에 왔을 때, 사냥꾼들은 곧 케무로의 주위로 모였다. 대장은 온통 바위로 둘러싸인, 숨기에 알맞은 장소까지 오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앞쪽을 바라보더니 조용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케무로에게 손짓했다. 대장은 케무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케무로가 바위에서 너무 몸이 나가지 않도록 꼭 붙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대장은 손짓 몸짓으로 저 먼 곳을 가리켰다. 케무로는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저만치 청동 색의 큰 우주선이 착륙해 있는 것이 보였다. 번쩍번쩍 빛나는 로켓선의 선체는 조금 엷은 색으로 변해 있는 부분이 여기저기 보였다. 아마 공간을 날아올 때 방사선 때문에 변화를 받은 것일게다. 이 변화가 심해지면 선체는 녹아버리고, 로켓선은 먼지처럼 가루가 되어 끝없는 우주 속으로 날려가 버리고 만다. 로켓선은 널따란 바위 반석 위에 착륙해 있었다. 부딪친 것 같은 상처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로켓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나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보겠어. 그러면 지구인들이 알아차리고 로켓선에서 나올지도 몰라. 대장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어." 하고 케무로는 리코나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대장이 응하는 것을 보고, 케무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천천히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사냥꾼들은 리코나를 바위틈에 감추고, 자기들은 케무로의 뒤에 한 덩어리로 모여 있었다. 케무로는 손을 높이 쳐들고서 흰 손수건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다. 케무로가 다른 방법으로 신호를 해보려고 할 때였다. 돌연 슛! 하는 소리와 함께, 광선총에서 발사된 무서운 광선이 여럿의 머리 위에 있는 바위에 맞고서 불꽃을 일으키며 퉁겼다. 사냥꾼들 중의 한 사람이 신음 소리를 냈다. 케무로는 급히 뒤돌아보았다. 그 사나이의 팔은 바위에서 튕겨나온 광선을 맞고 검게 타 있었다. 대장과 다른 사냥꾼들의 눈에서 일시에 분노가 나타났다. 노여움으로 온 몸을 떨고 있는 듯하다. 리코나는 새파랗게 질려서 호소하듯 케무로를 바라보았다. "케무로, 저 사람들이 총을 못 쏘도록 해 줘요. 빨리요!"     속임 작전   케무로는 공포로 쏜 광선총조차 샤니아인들로 하여금 완전히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샤니아인들을 화나게 하는 로켓선의 지구인들, 몹시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에서 본 사람들은 광선총에 맞은 것은 아니야. 틀림없이 어떤 다른 것에 맞은 것이라고 생각돼." 하고 케무로는 리코나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 사냥꾼이 되려고 지원한 젊은이들이어요. 사냥꾼이 되려면, 지금 로켓선이 착륙해 있는 훨씬 저쪽의 동굴에서 어느 기간 동안 살지 않으면 안 돼요. 그리고서 나중엔 누군가와 싸워서 이길 때, 비로소 사냥꾼으로서 허락되지요. 그래서 그들은 저 바다 쪽에 있는 동굴 근처에서 싸움 연습을 하고 있었을 거여요. 바다라고는 하지만, 아직 굳어지지 않은 땅이랍니다. 그때 지구인과 만났기 때문에 경쟁 상대로서 잘 됐구나 생각하고 싸우려고 했지요. 그러자 지구인은 주먹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때린 거여요." "그럼, 금속으로 된 무선 안테나 같은 것?" "아무튼 대장 아요는 이렇게 말하고 있군요. 샤니아인은 모두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란 것을 당신이 지구인에게 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요. 우주선이나 로켓선이 오기 전까지는 이곳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매일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 때의 사람들은 총 같은 것은 쓰지도 않았어요. 샤니아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마음먹으셨기 때문이었을 거여요." "좋아. 그러면 내가 로켓선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해 보겠어. 그렇게 대장에게 말해줘요." 대장은 리코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서 다른 사냥꾼들과도 상의한 다음, 케무로를 바라보면서 울부짖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하오소, 후우, 혜오오." 그 모음의 소리는 날카롭고 짧은 웃음 같은 소리였다. "당신이 큰 바위를 향하여 크게 외치면, 아주 크게 울려서 로켓선 속의 사람들에게 들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알았어. 해 보겠어." 곧 케무로는 바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총을 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들의 친구이며, 나의 선조는 지구인입니다.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당신들의 로켓 쪽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산울림은 멀리까지 울려갔으나, 로켓선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다. 케무로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외쳤다. 그러자 겨우 응답이 왔다. 그 소리는 웅웅 울려 왔으므로, 케무로는 스피커를 통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알았다. "못 믿겠다. 거짓말 같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나서라. 그러면 믿을 수 있겠다." 이 소리를 듣고 리코나가 대장에게 통역했다. 그러자 아요는 세차게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요는 저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요. 만일 당신이 모습을 나타내면 저 사람들은 반드시 총을 쏠 거래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어. 지구인은 로켓선에 특별한 망원경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멀리서도 나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아무튼 내가 지구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줘야겠어." 아요는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케무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나의 친구들은, 만약 내가 모습을 나타내면 당신들이 총으로 쏠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숨은 장소에서 나와라. 우리는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대장 아요는 케무로를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케무로는 재빨리 몸을 돌려, 숨어 있던 바위에서 뛰어나가고 있었다. 케무로의 움직임은 몹시도 빨랐다. 그러나 강한 중력에 익숙해져 있지 않았으므로 곧 흔들리며 땅에 팔굽을 짚고 말았다. 그리하여 케무로는 조금씩 조금씩 일어섰다. "소년이다!" 라는 소리가 로켓선의 스피커에서 들렸다. "알았다. 총은 안 쏘겠다. 야만인들이 너를 바위에서 밀어냈느냐?" "아닙니다. 내 스스로 나왔습니다." 큰 소리를 지른 탓인지 케무로는 몹시 피로해지고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나는 당신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나는 여기서는 오래도록 서 있거나 빨리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지구인들은 잠시 의논하는 듯하더니 곧 응답했다. "좋아, 기다리겠다." "그런데 나는 당신들의 로켓선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나는 공기가 진한 곳에서는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밖에서 만나겠다. 그러나 너의 친구들에게 어떤 수작이라도 부리지 말라고 일러라." "잘 알았습니다." 아요와 리코나의 도움을 받으며 케무로는 바위 그늘로 돌아와 누웠다. 사냥꾼들은 케무로의 주위에 모여들어 근심스런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이때 다른 사냥꾼이 어디선가 서양배 모양의 파란 표주박 같은 것을 가져 왔다. 그리고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케무로에게 마시라고 주었다. 대단히 맛있다. 사냥꾼들은 이런 표주박을 여러 곳에 숨겨두고, 곧 가져올 수 있도록 해 놓는단다. 케무로는 누워있는 동안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내가 아요의 어깨에 타고 가도 좋은지 물어보는 거다. 한 사람만 데리고 간다면 지구인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리코나도 곧 그 생각에 찬성하고 그다지 반기지 않는 아요를 설득시켰다. 처음에는 무슨 수작을 부리지 않나 하고 의심하던 지구인들도 마침내는 승낙했다. 그러자 케무로는 샤니아인들이 웃는 듯한 소리를 내더라도 절대로 웃지 말라고 약속시킨 다음, 아요의 어깨에 올랐다. 온통 바위투성이인 울퉁불퉁한 길을 아요는 씩씩한 걸음으로 중심을 잡으면서 걸어갔다. 두 사람이 평평한 땅까지 왔을 때 로켓선에서 우주복과 우주모를 쓴, 그렇게 키가 크지 않은 지구인 4 명이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한 사람의 지구인 팔에는 저 무서운 광선총이 금속의 나사 볼트로 묶여 있었다. 또 금속의 팔 장식에는 길고도 뾰족한 못이 붙어있는데, 습격해 오는 적을 찌르기에 알맞게 되어 있었다. 네 사람은 이상한 듯이 샤니아인 아요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쪽의 대장은 케무로에게 말했다. "너는 지구인이지? 우주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에는 얼마나 있었느냐?" "나는 이 유성의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고, 케무로는 이 유성에 오게 된 까닭을 설명했다. "인공위성의 아이로군. 우주의 새 시대에 사는 아이란 녀석이군." 상대는 비웃듯 말했다. 다른 사나이들도 작은 소리로 웃었다. "당신들의 로켓은 추락한 것입니까?" 하고 케무로는 공손하게 물었다. "추락이라니? 우리들은 지구에서 온 특수 조사대야. 우리의 임무는 이 유성에서 산 인간을 가져가는 일이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당신은 대체 누군가요?" "이름은 몰라도 좋아. 도대체 절벽 저쪽에는 뭐가 있지?" "아, 저기에는... 식인종이 있답니다." 케무로는 왠지 이 지구인들을 믿을 수 없었으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뭐 식인종 ! 그럼 넌 왜 잡아먹히지 않았느냐? 그놈들이 우리를 공격한다더냐?" "예, 만일 당신들이 먼저 공격을 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무서운 독의 어금니를 가진 숲 짐승도 있어요." "그렇다면 좋다. 재미있겠다." 하고 상대는 얕보듯 웃더니, "자세히 가르쳐 주어서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하면서 돌연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광선총을 꺼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의 어깨에서 내려라. 만일 그 사나이가 우리들을 따라오지 않는다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해라." "나는 이 나라의 말을 모릅니다." "몸짓으로 전해라." 그러나 케무로가 전할 필요도 없었다. 상대의 거친 말씨와 태도, 더욱 광선총까지 꺼낸 것으로 보아 아요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케무로가 신호를 하며 어깨에서 내리려고 하자, 아요는 케무로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지구인의 대장이 광선총을 들이댔다. "왜 우물거리느냐?" "내리면 나는 설 수가 없습니다. 인력에 익숙하지 못해서요." "그런 것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너를 여기에 내버려두면 누군가가 데리러 올 것이다." 케무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요에게 부탁하여 땅 위에 내렸다. 인력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심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광선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대장뿐이었다. "아아, 역시 설 수가 없습니다." 하며 케무로는 일부러 넘어지는 척하면서, 우주복의 대장 가까이 다가갔다. "저 사나이를 잡아라." 대장은 큰소리로 부하에게 명령했다. 케무로에게 광선총을 들이대고 아요를 노려본다. 케무로는 아요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우주복의 사람들은 아요를 붙들고 비웃어 준다. "자, 어서 놈을 데려가!" 하고 대장은 안심했는지, 광선총을 밑으로 내렸다. 그 순간, 케무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상대의 광선총을 잡고 휙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케무로는 후다닥 뛰어 일어났다. 뺏은 광선총을 재빨리 우주복의 대장 가슴 한복판에 들이댔다. "아요를 내려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을 쏴 죽이겠다!" 하고 케무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도망가는 지구인   "손가락을 방아쇠에서 떼지 못하겠니? 이 어리석은 녀석!" 하고 외치는, 우주복의 대장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광선총은 매우 가벼운 무기였다. 투명하게 보이는 손잡이를 통하여 속에 광선이 충분히 들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케무로는 위협적으로 총의 방향을 조금 돌리고는 버튼을 눌렀다. 무서운 1발! 광선은 온통 바위인 지면을 자주 빛의 선으로 불사르면서 없어져 간다. 케무로는 다시 조용히 총구를 우주복의 사나이들에게로 돌리고는 엄숙하게 말했다 "샤니아인을 놓아주라고 명령해라. 그렇지 않으면 발에 한 방 먹이겠다." 사나이는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샤니아인을 놓아 주라." 그러자 지구인들은 아요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그와 동시에 아요의 팔이 휘둘러졌다. 순간 우주복 차림의 2명의 몸뚱이는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무기인 금속침을 쓸 사이도 없다. 둘은 꽝하고 땅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돌아와요. 아요씨, 돌아와요!" 케무로는 놀라며 외쳤다. 두 지구인을 때려눕힌 득의에 찬 아요에게 위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빨리 우주선으로 돌아가라." 하고 케무로는 소리친 다음, 이번에는 눈앞에 있는 사나이를 향해서, "한 사람은 우주복을 찢긴 것 같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며 다시 총을 들이댔다. "어서 가라니까. 안 가겠다면 쏜다!" "음, 두고 보자. 똑똑히 기억해둬라. 이 분함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 대장이란 사나이는 이렇게 말하고, 허둥지둥 멀어져 갔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부상자를 부축해서 돌아가고 있다. "곧 이 별에서 떠나라. 만약 무기를 꺼내서 대항해 온다면 이 총이 먼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하고 케무로는 우주선마저 태워버릴 수 있는 광선총을 휘두르면서 또다시 소리쳤다. 승강대가 우주선에서 내려지는 것이 보였다. 케무로는 바위와 방벽 쪽을 가리키면서 아요의 어깨에 탔다. 이미 아요의 표정은 완전히 부드러워져 있다. 케무로는 리코나가 컬리에게 일러주던 말이 생각나서, 아주 자연스럽게 아요를 보고 말했다. "후우후우."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있는 아요는 행복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 케무로에게는 숨이 끊어지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바람처럼 뛰었다. 사냥꾼 대장 아요는 나는 듯이 큰 걸음걸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용암이 삐죽삐죽한 바위에서 바위로 뛰면서 급경사를 순식간에 올라갔다. 이리하여 두 사람이 안전한 곳에 이르렀을 때, 열광적으로 맞이해 준 것은 리코나였다. "정말 너무너무 용감했어요!" 리코나는 케무로의 팔을 흔들면서 기뻐했다. "여기서 보니까 아주 비겁한 놈들 같았어요. 그들은 아요를 잡아가려고 하는 것 같더군요." "여기서 그것이 보였어?"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아요를 붙잡고 있기에 얼마나 마음을 죄었는지 몰라요." 사냥꾼들을 무사히 돌아온 대장을 둘러싸고 어깨, 이마, 얼굴까지 만져보며 좋아했다. 이 때였다. 우릉! 하는 크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왔다. 케무로도 리코나도, 그리고 사냥꾼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놈들은 상승관을 데우고 있는 거다." 이윽고 그 크고 날카로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슛하는 소리로 바뀌고, 플루트의 음계와 같이 점점 높아져 간다. 케무로는 광선총을 곽 쥔 채, 바위 끝에 총구를 겨누고서 로켓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에 숨듯이 하여 리코나와 사냥꾼들도 내다보고 있다. 로켓선의 꼬리 쪽이 빨갛게 빛나왔다. 꼬리에서 내뿜는 무서운 열로 해서, 그 밑의 바위에 큰 구멍이 뚫렸다. 플롯 같은 소리는 곧 굵고 천둥 같은 소리로 변하더니, 로켓선은 대단한 빛을 꼬리에서 내뿜으며 하늘을 향해 돌진해갔다. 케무로와 리코나는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사냥꾼들은 이제 살아났다는 기분으로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곧 아요가 큰 소리로 무엇인가 명령하자, 두 사람의 남자가 뛰어갔다. 케무로는 광선총을 자세히 조사한 후, 안전 장치를 찾아서 풀었다. 케무로와 리코나는 다시 사냥꾼들의 어깨에 둘러 매여 용암의 방벽을 가로질러, 멀리 숲 속의 평지를 향해 내려갔다. 처음 동굴에 가까웠을 때, 케무로는 샤니아인들이 거기에 수많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높은 곳에는 국왕 앵이 서 있었다. 그 밑에서 정신없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은 컬리이다. "케무로, 당신은 영웅이 되었어요." 하고 리코나는 케무로를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의식이 시작될 거여요." "의식이라니?" "당신이 샤니아인을 위험에서 구한 공로여요. 의식이 끝나면 당신은 국왕의 아들로서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게 된답니다." 컬리는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들은 로켓선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어. 사냥꾼들이 뛰어와서 케무로가 샤니아인을 구해 주었다고 보고했단 말야." 그러자 페트가 왕 옆에 있다가 나오면서 물었다. "놈들은 어디의 인종들이라고 생각돼?" "틀림없이 지구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이곳에 있었습니까?" "꽤 오랫동안이었지. 확실히는 단정할 수 없으나 놈들은 절대로 과학자들은 아니야. 과학자라면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있어요. 아마 인공 위성에 사는 우주 강도인지도 모르지. 그런 놈들은 어떤 작은 유성에라도 들어가서 시끄럽게 만들고, 또한 손에 닥치는 대로 훔쳐가려고 찾아 돌아다닐 것이다." "그들은 샤니아인의 산 표본을 가져가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더군요." "물론이지. 샤니아인은 지구인에게 귀중한 표본이 될 것이니까 말야." 이때, 왕이 페트의 팔을 당기면서 뭐라고 했다. "국왕에게 꾸중을 들었다." 하고 페트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거다. 왕은 너를 환영하는 의식을 곧 시작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케무로는 적이 당황하여, 골짜기까지 연속되어 있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샤니아인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그들은 케무로, 왕, 사냥꾼들이 모여있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요?" 케무로가 놀라며 묻자, 페트가 대답했다. "저 사람들, 특히 여자와 아이들은 로켓선이 있는 동안 줄곧 숨어 있었단다." 그들은 모두 맑고 깨끗한 얼굴과 영리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 속에는 처음보다 더한층 따뜻한 우정이 깃들여 있었다. "페트씨, 당신들 지구인의 자손은 어디에 있나요?" "제각기 자기들의 집에 살고 있지." 하며 페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와 리코나는 각각 '국왕의 아들' '국왕의 딸'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별 문제는 아니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샤니아인이 초대해주어야만 자리를 같이할 수 있을 정도로 샤니아인은 그들에게 아주 엄격한 제약을 하고 있다. 차차 지나보면 너도 알아차릴 것이다만." 여기서 그치고, 케무로는 이번에는 친구 쪽을 돌아보며 물어 보았다. "뭐 좀 먹었니?" "응, 마시는 건데 정말 맛있었어. 부드럽고 여러 가지의 과일을 섞어서 만든 것 같았어." "컬리, 넌 피로하지 않니 ? 난 지쳤어." 그러자 페트가 왕에게 뭐라고 속삭이고 나더니, "국왕 앵은 의식은 조금 뒤로 미루고, 너희들을 우리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란다. 너와 컬리의 피로가 회복될 때까지 깨우지 말라는 명령이다. 또 달리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없느냐?" "동굴 가까이까지 우주카를 운반해 줄 수는 없는지요? 난 기계를 조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오래 이곳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인공 위성의 사람들이 몹시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요." 곧 케무로와 컬리는 눈을 번쩍거리고 있는 샤니아인들에게 안긴 채 옮겨지고 있었다. 그 뒤로 리코나가 따라왔다. "케무로, 나도 가겠어요." 이리하여 그들은 고원을 가로지르고, 집 앞까지 잇달아 있는 계단을 내려갔다. 두 소년을 입구에 내려놓고 사냥꾼들은 되돌아가 버렸다. 둘은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두 소년은 바른 말씨로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소년들은 지구인의 말을 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두 소년은 더욱 지쳐버렸다. 이 곳은 중력이 밖에 있을 때보다 더 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둘의 괴로움을 알아 차렸는지 부드러운 손으로 들어올리며 낮은 흔들 침대에 눕혀 주었다. 두 소년은 곧 잠들어 버렸다. 리코나가 눈짓을 하자 모두 밖으로 나갔다.     야수의 어금니   이윽고 케무로는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뒤따라서 컬리도 같이 일어났다. "기분이 어때?" 페트가 조용히 물어 보았다. "예, 아주 좋습니다." 라는 대답은 컬리가 했다. 이번은 케무로의 질문. "어쩌면 이렇게 빨리 피로가 풀렸는지 이상해요." "아무튼 우리 가족을 다시 한 번 만나주지 않겠니? 아까는 너희들이 너무 지쳐 있어서 부탁을 못 했어." "좋고 말고요. 만나서 조용히 얘기해 보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방을 나갔다. 막 입구에서 통로로 나갔을 때였다. 피가 얼어붙을 만큼 무섭고도 떨리는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페트는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고, 리코나는 굳어진 얼굴로 페트의 뒤에 숨었다. "의식은 늦어짐에 틀림없다." 이렇게 말하고, 페트는 급히 동굴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서운 울음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 왔다. 지구인의 자손들은 놀란 얼굴로 다른 방에서 통로를 쫓아 나갔다. 모두 무서움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것은 케무로가 지금까지 들어 본 소리 중에서 가장 소름끼치게 하는 것이었다. 컬리는 벌벌 떨면서 귀를 두 손으로 꽉 막았다. 두 소년은 학교에서 지구에 살고 있는 여러 가지 동물에 대해서 배웠다. 그러나 인공 위성에는 동물은 살지 않는다. 동물의 소리라고 하면 교실에서 테이프에 녹음되어 있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그것도 다만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둘이는 귀가 찢어지는 듯했다. 케무로는 어느새 리코나의 손을 꼭 잡고, 한즉 팔로는 컬리를 안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하고 케무로는 물었다. 목에서 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사냥꾼들이 숲 속의 짐승들을 잡으러 갈 것이니까 괜찮을 거여요." 하며 리코나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에겐 무기라곤 없쟎아? "그들은 아주 용감해요." "난 숲의 짐승이라기에 사람이 기르는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 게 아니어요. 그것들은 푸른 베일이 찾아오기 전에 소란을 피우면서 시끄럽게 하는 거여요. 그래서 '푸른 베일'이 가까워짐을 알게 되는 하나의 예보도 돼요. 내가 태어나서부터 아직까지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어요." 옆에 있던 사람이 세 사람을 보고, 숨을 장소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주었다. 그러자 케무로는 말했다. "당신네들은 사냥꾼들을 잘 믿지 않는 것 같군요." "아니, 절대로 믿고 있어요. 그러나 숲 속에는 도대체 얼마의 야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거든요. 그것이 어떤 충동으로 모두 숲 밖으로 나오기도 하니까요. 그 야수들이 아직 잡히지 않았을 때, 많은 어린이들과 샤니아인들이 죽음을 당했을 때가 있었어요." 잠깐 동안 여럿은 잠잠해졌다. 숨막히는 듯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곧 케무로는 컬리를 조용히 통로 쪽으로 밀어 넣었다. "저곳으로 돌아가 있어. 나는 이것만 있으면 염려 없으니까." 하고 케무로는 광선총을 꺼냈다. "안돼, 케무로!" 리코나가 소리를 질렀다. 뒤에 있던 두 사람의 남자도 리코나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케무로를 잡아당기려고 몇 사람이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케무로는 이미 밖으로 뛰어 나가고 있었다. 한잠 자고 난 뒤라 힘도 솟아났다. 이제는 인력 등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길게 줄을 지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보통 때보다는 천천히 걷고 있었으나, 역시 걸음은 빨랐고 크게 발을 옮겨놓고 있었다. 몸을 굽히고 보이지 않는 적이라도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팔을 내젓고 있었다. 줄은 2 줄이었는데, 뒷줄에는 페트의 모습이 보였다. 우워엉, 우워엉... 울부짖는 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들려오고 있다. 케무로는 이젠 그 소리에도 익숙해졌다. 케무로는 험한 길을 있는 힘을 다해 뛰어내려갔다. 골짜기의 큰 동굴 입구에는 붉은 우주카가 놓여져 있었다. 동굴은 케무로와 컬리가 처음 들어갔던 그 동굴이다. 케무로는 우주카의 후드를 벗기고 광선총을 조종석에 두고서 기어들어 갔다. 기계는 아직도 전기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낮에는 충분히 날아오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케무로는 레버를 움직여 조절기를 맞추었다. 우주카는 조용히 떠오르며 크게 커브를 그리면서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속력을 줄이자, 사냥꾼들의 머리 위로 급강하했다. 사냥꾼들은 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페트와 다른 남자들만이 우주카 쪽을 힐끔 쳐다본다. 케무로는 페트가 미친 듯이 돌아가라고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 우주카는 느릿느릿 공중을 돌고 있는 듯했다. 아직 충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케무로는 아래쪽 땅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저쪽 숲에 무성하게 자란 새파란 잎들이 보였다. 케무로는 곧 동물을 찾아냈다. 순간 등이 오싹해지면서 절로 온 몸이 떨려 왔다. 처음에는 아래쪽에 엷은 푸른빛이 나는 듯한 회색의 풀이 가득 자라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야수들이었다. 무리를 짓고 있는 짐승들이었다. 피도 얼어붙을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치켜들고 이빨을 번득이면서 돌아다니고 있다. 숲 속의 야수들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위의 풀이나 나무와 분간 못할 잿빛을 하고 있었다. 소리만 내지 않는다면 그곳에 짐승이 있는 것도 모를 일이었다. 사냥꾼들의 긴 행렬은 아직 야수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알고 있는 듯했다 케무로는 그들의 맨 앞에 있는 아요를 보았다. 우주카를 더욱 낮게 하여 그들의 머리를 선회했다. 그러면서 습격해오는 야수들의 방향을 큰 소리를 질러서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아요나 사냥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사람들의 눈이나 주의력은 온통 야수 쪽으로 쏠려 있다. 순간, 케무로는 깜짝 놀랐다. 야수들이 사냥꾼들에게 덤벼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수들은 몸이 길고 근육은 튼튼하였으며, 뛰어오를 때마다 공중을 치는 무서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옛날, 아주 옛날에 지구에 있었다는 샤벨 호랑이와 아주 흡사하다고 케무로는 생각했다. 그것은 숨막히는 광경이었다. 어금니를 드러낸 야수, 그것들을 낚아채는 사냥꾼들......무시무시한 싸움이었다. 야수는 무서운 이빨로 사냥꾼들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그것을 사냥꾼들은 교묘하고도 용감하게 튼튼한 손으로 달려드는 야수들의 목을 움켜잡는다. 아요는 쌍칼잡이다. 양손으로 닥치는 대로 무찌르고 있다. 야수들의 목을 꺾고 숨통을 끊는데 겨우 2초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케무로는 우주카를 돌렸다. 페트의 머리 위로 가까이 다가가서 몸을 내밀고 소리쳤다. "페트씨, 당신의 앞쪽에 몇백 마리의 짐승이 있습니다. 모두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빨리 돌아가라. 바보 같은 일로 돌아다니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다." 라는 페트의 화난 듯한 소리가 위쪽까지 들려왔다. "나는 광선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용해도 좋겠지요?" 그러나 페트는 대답할 틈도 없었다. 야수들이 일시에 확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그만 페트와 남자들은 야수들의 한복판에 둘러싸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짐승들의 최초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몇 사람은 야수의 이빨에 물어뜯기고 있었다.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도 더러 보였다. 케무로는 우주카를 사냥꾼들과 이빨을 내밀고 있는 야수들 앞으로 몰았다. 재빨리 좌석에서 광선총을 들어올리고서, 안전핀을 열고 겨누었다. 그리고서 왼손으로는 레버를 움직이고, 오른손으로는 방아쇠를 당겼다. 광선총은 자줏빛의 섬광을 연속 내뿜으면서 발사되었다. 이윽고 케무로는 발사를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횐 연기는 앞쪽부터 우윳빛으로 변하면서, 케무로가 총격한 대로 빙글빙글 달팽이 같은 원을 그리며 타오르고 있다. 그 연기 속에서 숲 속의 야수들은 이리저리 뛰면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있다. 이미 반수는 연기 속에서 땅바닥에 쓰러져 가고 있다. 케무로는 되도록 낮게 날면서 야수들 무리를 향하여 자줏빛의 광선을 발사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총이 딱하는 소리를 쳤다. 이미 광선이 다 되었다는 신호였다. 총의 개머리판으로 들여다보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케무로는 그리스 호수 위로 우주카를 돌리고, 그 음울한 물 속에 광선총을 던져버렸다. 자욱한 연기는 사냥꾼들과 몇 걸음 떨어진 지상에 안개처럼 깔려 있다. 케무로는 아직도 그 속에서 날뛰는 야수들의 모습을 보았지만, 이미 그것은 몇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숲 속의 야수들은 많은 무리들을 잃어버린 채, 곧 왔던 길을 느릿느릿 꼬리를 끌면서 숲 속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휴식의 언덕   케무로는 우주카를 온통 바위투성이인 골짜기 가까이에 착륙시켰다. 그리고는 고지식하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페트 쪽으로 갔다. "아니, 부상을 당하셨군요!" "뭐, 대수롭지 않다. 곧 나을 거야." 이때, 두 사람 쪽을 향해 못마땅한 얼굴로 걸어오는 아요를 케무로는 보았다 "케무로, 나와 조금 떨어져 있어 줘." 하고 페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그럼, 아요 씨에게 나를 야수들과 싸울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해 주십시오." "넌 눈치가 빠르군" 라는 페트 씨의 말을 들으면서 케무로는 뒤돌아갔다. 아요는 울부짖듯 소리를 지르면서 가까이 왔다. 그리고는 몹시 화난 얼굴로 페트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몇 차례나 케무로 쪽을 향하여 사납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페트가 케무로의 부탁한 말을 전했다. 그러니까 아요는 케무로를 힐끗 보고 난 후, 다시 페트에게 뭐라고 중얼중얼거렸다. "아요는 네가 '국왕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숲 속의 야수들과 싸우러 왔느냐고 묻고 있다." 케무로가 대답하려고 하자, 페트가 재빨리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되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왜 그렇게 말해야 하나요?" "왕은 너를 사냥꾼들과 같은 지위의 명예로운 국왕의 아들로 한 것이다. 너의 행동을 만약 아요들이 사냥꾼이 아닌 사람이 거들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를 바다로 끌고 가서 그 속에 집어던지고 말 것이다." "뭐라고요, 바다에 집어 던진다고요! 내가 야수들과 싸우고 있는 사냥꾼들을 거들어 주었는데도 말입니까?" "너는 샤니아인이 중요시하는 '명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명예는 즉 힘이란 것을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러나..." "사냥꾼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다. 알겠느냐? 그런 샤니아인이 하는 일을 만약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해 봐, 그것은 사냥꾼들의 명예를 손상하게 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잘 알았습니다. 아요 씨는 내가 사냥꾼들을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그러나 내가 '국왕의 아들'로서 싸웠다면 그들과 한 짝이 되어 싸운 것이 된다는 거지요?" "그렇지, 만약 사냥꾼들이 야수들에게 진다 하더라도, '국왕의 아들' 이외의 사람은 아무도 그들을 도우러 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예-" 하고 케무로는 그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자 케무로와 페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요가 갑자기 케무로의 몸을 잡아서 들어올렸다. 케무로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갑자기 왜 이래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샤니아인이 지금처럼 큰 한숨을 쉴 때는 '휴식의 언덕'이라는 곳에 갈 필요가 있다라는 말이다. 아요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 "컬리에게도 그 말을 해 주십시오." 하고 외쳤으나, 아요는 이미 나는 듯 날쌔게 뛰고 있었으므로 케무로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페트는 케무로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곧 다른 사냥꾼이 컬리를 어깨에 태우고 아요의 뒤를 쫓았다. 컬리는 케무로의 뒤에까지 뒤따라 와서 이렇게 말했다. "케무로, 나는 겁이 나서 혼났어. 상태가 좋지 않은 소리로 우주카가 날고 있지 않겠어. 그리고 리코나는 네가 사냥꾼들이 싸우는 데 끼여든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거라고 그랬어. 나는 네가 저 호수나 그 무서운 야수들 속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고 몹시 걱정했단다." 그러면서 컬리는 이제 안심했다는 듯, "아아, 나는 참말로 놀랐단다. " 라고 말했다. 아요는 컬리가 '아아' 하는 소리를 듣고, 컬리를 태우고 있는 사냥꾼과 뭐라고 얘기하더니 더욱 빨리 뛰어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푸른빛의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언덕에 있는 건물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이 언덕을 '휴식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지친 사람이나 병자는 이 언덕에 옮겨져서 몸을 쉰다. 언덕 위에는 어린이들이 놀고 있었다. 거의가 샤니아인인데, 그 중에는 몇 명 안 되는 지구인의 어린이도 섞여 있었다. 케무로와 컬리는 여기서 한 나이 많은 여자에게 맡겨졌다. "나는 '휴식의 언덕'의 어머니 도나 마리야. 저쪽 건물에는 샤니아인의 어머니 오우나가 있어요. 나는 너희들과 같은 지구인의 어머니란다." 도나 마리는 이 유성에서 최초로 태어난 지구인의 여자 아이였다. 지구 방식으로 따진다면 벌써 백살도 넘었단다. 그러나 조금도 그런 나이로는 보이지 않고, 아주 젊고 빛나는 푸른 눈을 하고 있었다. 도나 마리는 케무로와 컬리를 둥근 천장의 복도를 지나서 넓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의 벽도 천장도 모두 번쩍이듯 밝고 우아한 푸른빛으로 되어 있어, 아주 마음이 착 가라앉는 듯했다. 도나 마리는 케무로와 컬리에게 크게 입을 벌려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입안을 조사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둘 다 아주 건강한데 왜 여기로 데려왔을까? 아마 아요가 너희들이 꼭 몸을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하고 도나 마리는 테이블 뒤에 있는 찬장으로 갔다. 거기서 한 개의 표주박을 꺼내서, 두 개의 작은 컵에다 복숭앗빛의 물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케무로와 컬리에게 하나씩 주었다. "자, 마셔라. 마시고 나면 너희들이 쉴 곳으로 안내하마." 그것은 그들이 언젠가 마셔본 적이 있는 달콤한 과일의 음료와 같았다. 도나 마리는 둘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가자, 복도를 따라서 걸어갔다. 지나면서 보니 어느 방에도 숲의 야수들 가죽으로 싼, 푸른 나무침대에 사람들이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케무로와 컬리가 이르른 복도 끝 쪽에는 네모난 창과 같은 입구가 여러 개 있는 큰방이 있었는데, 두 소년이 방구석 쪽의 긴 의자에서 자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서 자거라. 깨면 식사를 하도록 하자." 라고 말하면서, 도나 마리는 상냥하게 웃어 보이고 방을 나갔다. 케무로는 기분 좋게 불룩 솟아오른 침대 하나를 골라 컬리를 눕히고 자기도 누웠다. 그러자 곧 잠이 왔다. 그들의 졸음은 '유성 64호'에 착륙하면서부터 느껴온 것이었다. 선잠이 아니고, 마치 자기 집의 침대에서 자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잠이었다.     신성한 맹세   "국왕 앵이 심부름하는 사냥꾼을 보내 왔어요. 충분히 쉬고 나면 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돌아와 달라고 말야. 언제 어느 때 푸른 베일이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란다." 라고 도나 마리가, 케무로와 컬리가 눈을 뜨고 얼마 안 되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의식에 대해서 전혀 잊고 있었어요." "둘이는 여기에 오지 않아도 좋았을 만큼 건강해요. 그러나 이왕 왔으니까 피로도 더욱 풀렸겠고, 더 기운이 날 거야. 어때요, 여기가 좋은 곳이라고 생각 안돼?" "정말 좋은 곳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곳을 더 알기 전에 떠나고 싶지 않아요." 하고 케무로는 솔직하게 말했다. 한숨을 잘못 쉬어 이리로 오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도나 마리는 틀림없이 이 훌륭한 휴식의 언덕을 자랑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나 마리는 두 소년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면서, 케무로에게 부디 힘을 소중히 간직하며 사소한 일에는 쓰지 말아야 한다고 몇 차례나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곧 케무로와 컬리는 사냥꾼들의 어깨에 태워져 '휴식의 언덕'을 내려갔다. '휴식의 언덕' 문이 케무로들을 위하여 열려졌을 때는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어둠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차츰 주위가 그 어둠에 묻혀 가고 있었다. 케무로는 이윽고 지금 온 길을 돌아다보았다. 이미 '휴식의 언덕' 주위의 울타리는 밝은 푸른빛에서 어두운 푸른빛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공기는 맑았다. 사냥꾼들은 큰 걸음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곧 앞쪽에 바위 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금가루를 뿌린 듯한 짙은 푸른빛의 구름과 같은 것이, 그들의 머리 위에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공기는 축축해지고 피부가 서늘해져 왔다. 바위 터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낮은 동굴 하나에서 우주카를 옮기고 있는 사냥꾼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리코나와 페트는 큰 동굴 입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베일의 금빛인 곳은 빛깔이 바래고, 푸른빛은 축축한 엷은 막처럼 되어 조용히 사방을 흔들면서 짙어 가고 있다. 조금 있으니까, 계속해서 번져 나오는 엷은 푸른 베일의 축축한 기운이 어두워진 땅을 가득히 덮기 시작했다. 케무로는 이 유성에 아직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우주카의 장치는 이미 전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으며, 추진 기관도 전력을 낼 수 있도록 되어있어 언제든 케무로는 자기의 인공 위성으로 돌아갈 수는 있다. 그러나 케무로는 인공 위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작은 유성에서 여러 가지 생활 모습이나 점차 문명화되어 가는 모습을 어떻게든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동굴의 입구에서 톤을 만났다. 톤이 자꾸 무언가를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컬리는 그와 함께 뛰어갔다. 페트도 곧 자취를 감추었다. "기분이 좋지 않나요?" 하고 리코나가 푸른 베일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이런 것을 본 일이 없어. 그러나 신비스러운 느낌이 드는데," 케무로는 으스스한 듯 몸을 떨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우리들도 푸른 베일이 좋아요. 그러나 자주 보아 왔고, 나중에는 어떤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신비스럽다고 까지는......." "푸른 베일이 내리면 어떤 일이 생기지?" "모든 것이 자꾸자꾸 자라나고, 아주 좋은 냄새로 가득 차게 돼요.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제일 크게 자란 잎사귀를 뜯어서 둥우리를 만들어요." '아직 그렇게는 자라지 않았는데?" "자라지 않는 것도 있지만, 아 저기! 저곳의 잎사귀는 점점 커 나가고 있잖아요. 푸른 베일 때문에 보이지 않을 따름이어요." 그러고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리코나는 곧 케무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케무로, 당신은 곧 돌아가시겠죠?" "음, 돌아가야지." "여기에 와서 즐거웠나요?" "아주 즐거웠어." "또 오시겠어요?" "오고 싶고 말고. 그런데 오래 있으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곧 떠나야 할 것 같애." "그렇겠지요.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의 사람들은 여기를 완전한 유성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여요. 당신은 우연히 이 곳에 온 것이니까요. 만약 당신이 돌아간다면 다시는 이곳에 못 오도록 하겠지요?" "그건 알 수 없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야, 리코나." 이때, 발자국 소리가 났으므로 리코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리코나의 아버지 페트였다. "리코나, 어서 방으로 들어가거라. 나는 케무로와 같이 왕에게 이야기가 있어." 리코나의 모습이 사라지자, 페트는 케무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통로로 들어갔다. 케무로는 페트와 함께 왕인 앵이 전과 다름없이 푸른 긴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넓은 방으로 갔다. 페트는 케무로를 왕의 앞에 데리고 가서는 자기자리에 앓았다. 왕의 뒤에는 아요와 3명의 사냥꾼이 서 있었다. "나는 왕에게 너를 참으로 영리한 소년이라고 믿게 했다. 왕은 네가 아주 마음에 들며, 네가 한 일에 대해서 감사를 하고 있다. 또 아요는 친구로서 마치 사냥꾼을 대하듯이 너를 존경하고 있다." 하고 페트는 한 마디 한 마디 주의 깊게 말했다. 분명히 페트는 케무로의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왕인 앵이 뭐라고 얘기하면, 페트가 그것을 통역해 주었다. "국왕 앵은 너의 훌륭한 태도나 호의에, 그리고 우리들에 대한 도움을 알고서 네가 국왕의 아들로서의 명예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거다. 그걸 전하란다. 아요가 네게 명예의 벨트를 증정할 것이다." 하고 페트가 왕의 뒤에 서 있는 사냥꾼에게 신호를 하자, 아주 아름다운 모양의 푸른 벨트를 내놓았다. 그 벨트는 곱게 다듬어져 있었으며, 왕의 초상이 새겨진 회색 돌의 버클이 붙어 있었다. 아요는 케무로에게 왕의 벨트를 꽉 채워 주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숙이고 왕의 뒤로 돌아갔다. 페트가 엄숙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샤니아에 다시 올 수가 있다면 언제라도 '국왕의 아들'로서 환영할 것이다. 이것은 샤니아의 명예인 것이다." 하고 말한 다음, 웃으면서 다시 타이르듯 말했다. "네가 기억하고 있는 그 소리로 말한다면 아주 기뻐할 거라고 생각되는데." 이 말을 듣고 케무로는 사냥꾼들을 둘러보고 난 후, 국왕 앵을 향하여 절을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후우후우. " 왕도 웃으며 답례로서 절을 했다. 페트는 푸른 나무껍질로 짜여진 길다란 천을 공손히 감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천에 긴 시간 정성 들여 편지를 썼다. 국왕 앵은 이 편지를 너의 인공 위성의 왕, 아니 장관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전해 주었으면 한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자 페트는 그 편지를 케무로에게 주었다. 케무로는 정중히 받아서 품에 간직했다. "우리는 너희들이 온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오래 있어 주었으면 더욱 좋겠으나, 너희들의 가족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빌겠다. 그 전에 말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 그러자 아요와 두 사람의 사냥꾼이 동굴 끝에 있는 모형을 들어올려서는 테이블 쪽으로 옮겨 왔다. 그것은 지구에 있는 것 같은 마을의 모형이었다. 마을의 중심에 있는 큰 석조 건물을 빼놓고는, 다른 모든 건물은 여러 가지 모양의 푸른 빛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 모형과 같은 샤니아를 건설할 것을 바라고 있다. 언젠가는 우리 샤니아인도 지구인의 어린이들도 모두 한 국민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구인의 언어가 없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페트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조사를 당한다거나, 이 땅에 들어와서 빼앗아 간다든지 하는 일은 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네게 부탁한다. 너의 나라 사람이 오지 않도록 당부한다. 그러니 이 곳에 우주선을 보내어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 말아다오. 우리는 우주선도 기계도 총도 필요가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이 샤니아인의 완전한 생활 장소가 될 때까지 평화스러운 나날이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배반하지 말아다오. 이것이 네게 말하고 싶은 전부이다. 케무로, 이 나의 말을 지켜 주겠느냐?" 케무로는 잠시 묵묵히 있다가, 곧 페트를 응시하며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맹세합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인공 위성의 사람들도 그것을 반드시 알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분 나쁜 생물   이윽고 케무로는 넓은 방에서 왕의 뒤를 따라 자기도 나왔다. 통로를 지나서 바위 모퉁이를 도니, 넓은 동굴로 나올 수 있었다. 동굴의 천장은 높고 둥근데 놀라우리 만치 컸다. 벽 쪽에는 푸른 나무와, 샤니아인의 여자들이 만들고 있는 표주박과 그릇들이 쌓여있고, 반사광이 비쳐 밝았다. 여자들은 푸른 나무를, 옆쪽의 물이 든 냄비에 조금 적셨다가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보고 있는 동안에도 표주박, 정 등등 여러 가지 그릇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바로 옆에는 젊은 남자들이 크고. 둥근 돌 위에서 삶지 않은 생가죽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날카롭고 굽은 돌칼로써 다듬어진 가죽을 끊기도 하고 있었다. 그 가죽으로 샌들이나 긴 장갑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또 그 가죽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도 하는데, 그 뒤에서는 젊은 여자들이 케무로가 '휴식의 언덕'에서 본 침대에 까는 천을 만들고 있다. 한편 옷감을 짜고 있는 곳에서는, 지구인의 자손과 샤니아인들이 사이좋게 어울려서 일하고 있다. 여럿이 일하고 있는 곳은 시끄러웠지만,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것에는 저쪽 언덕 가까이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섞여 있다. 케무로는 어린이들과 놀고 있는 컬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이때, 동굴 입구에 서 있던 사냥꾼이 속이 빈 길다한 나무막대를 입에 대고 불었다. 그러자 굵은 나팔 소리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이 세 번 거듭되었을 때, 동굴 속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해졌다. 국왕 앵은 페트를 데리고 동굴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많은 사람들은 벽 쪽에서 제각기 만든 것을 손에 들고, 긴 의자와 좌석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린이들도 동굴 끝에서 뛰어왔다. 페트는 케무로와 컬리를 다정하게 맞이하며, 자기 옆의 의자에 앉혔다. 아요와 사냥꾼들은 열을 가로질러 어린이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왕인 앵이 신호를 했다. 동굴 속은 그야말로 조용했다. 그런데 곧 저쪽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노래 소리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케무로는 지금까지, 이 넓고 큰 동굴을 울리고 있는 이 아름답고 은방울을 굴리는 듯한 소리를 들은 일이 없었다. "저 노래는 우리들이 '국왕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다." 하고 페트가 케무로 쪽으로 몸을 굽히며 속삭였다. 국왕의 노래가 끝나자, 왕인 앵이 손을 들고 또 신호를 했다. 그러자 어린이들은 왕에게 절을 하고 자기들의 가족이 있는 데로 뛰어갔다. 곧 이어서 젊은 사냥꾼들의 씨름이 시작되었다. 씨름은 상대를 세 번 넘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꼭 이겨야만 하는 승부로서, 이 씨름에서 이긴 사람이 다음 '푸른 베일'까지 젊은 사냥꾼의 대장이 된다. "아니, 저 사람은 톤이 아니냐?" 최후로 남은 2명의 사냥꾼을 가리키며 케무로가 외쳤다. "그래, 맞았어!" 컬리도 외치며, 샤니아인들과 함께 톤에게 성원을 보냈다. 의식은 아직도 계속되는 것 같았으나, 페트는 케무로를 돌아보며 가만히 속삭였다. "케무로, 네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아요가 너를 데리고 갈 것이다. 컬리 군은 리코나와 기다리고 있거라. 곧 집에 돌아갈 테니까." 그들은 곧 출발했다. 공기는 아직도 푸르고 피부에 축축함을 느꼈으나, 점점 맑아져서 환해지고 있었다. 아요는 나무 아래에 자라고 있는 푸른 풀을 밟으면서 쉽게 걸어간다. 곧 그리스 호숫가를 지나고, 파도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걸었다. 제 2좌 바위 방벽을 넘은 근처에서 젊은 사냥꾼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은 스펀지와 같은, 땅이 물렁물렁해서 복사뼈까지 발이 빠지는 곳까지 잠자코 걸어갔다. 곧 검은 바위가 있는 곳까지 오자 땅은 다시 굳어져 왔다. 큰 검은 바위 덩어리에 가까워졌을 때 젊은 사냥꾼들은 앞장서 갔다. 케무로들은 갑자기 바다 끝으로 나왔다. 바다라고 하지만 바라보니 풀도 나무도 없는 잿빛의 지대, 그것이 천천히 파도와 같이 흔들리고 있다. 케무로는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급히 눈을 크게 떠보았다. 잿빛 같은 형태가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30이나 40 쯤 있을까...... 케무로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그 기묘한 것은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우는 듯한, 나지막한 소리로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케무로가 한참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모습은 점차 확실해져 왔다. 그 생물은 샤니아인보다는 키가 크지 않고 피부빛깔도 같지 않았다. 얼굴도 얼빠진 듯 무표정하다. 그 눈은 차갑게 이쪽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냥꾼들이 오는 것을, 또 그들의 손길이 닿는 것을 좋아하는 것같이 보였다. 푸른 듯한 머리카락은 자랄 대로 자랐고, 어깨 살도 없으며 더욱이 그 생물은 손이 없다. 단지 끊임없이 흔들고 있는 붉고 넓은 물갈퀴만 있을 뿐....... 이때, 페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케무로들이 다시 그리스 호숫가를 지날 때 페트가 불쑥 말했다. "어때, 케무로." "페트씨, 나는 그 생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면 넌 알았단 말이지. 우리의 선조가 이곳에 왔을 때, 저 생물들은 이 유성에 살고 있던 유일한 생물이었단다. 저 생물들에서 그 아름다운 샤니아인이 태어났단다. 우리는 저 바다가 땅이 되고, 저 생물들이 우리들과 같은 인간으로 발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과학자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하고 케무로는 대답했다. "그럼 우주의 소년이여, 돌아가라! 너는 우리들의 신뢰를 짊어지고 있는 거다. "     잘 있거라, 샤니아   케무로는 우주카 앞에 서자,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컬리도 긴장해서 잘 웃는 웃음조차 없다. 케무로는 왜 그 불쌍한 생물들의 곳으로 데리고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상한 감동을 케무로는 꾹 누르고 있다. 국왕과 아요들은 우주카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 서 있었다. 톤이 과일로 만든 음료가 가득 들어 있는 병과, 나뭇잎으로 싼 먹을 것을 가져 와서 컬리의 손에 쥐어 주며 이리저리 몸짓을 해 보였다. 컬리는 잘 모르면서도 일일이 끄덕이며 웃었다. 그것은 이 젊은 사냥꾼들의 새로운 대장을 만족시킨 것 같았다. 바위 터의 언덕은 전송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페트가 케무로에게 속삭였다. "네가 샤니아인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으면, 국왕이 있는 곳으로 가서 두 번 절을 하고 될수록 큰 소리로 '햐, 햐, 햐'라고 소리치거라. 그것은 '당신들은 놀랍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렇게만 말하면 되나요? 잘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라고 케무로는 대답하고, 페트가 내민 손을 힘차게 잡았다. 케무로가 왕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페트는 컬리에게도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케무로는 왕의 몇 걸음 앞에 멈춰 서서, 두 번 인사를 한 다음 큰 소리로 외쳤다. "햐, 햐, 햐!" 순간 왕은 물론, 사냥꾼들의 얼굴에 즐거움과 자랑의 빛이 떠올랐다. 동시에 케무로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칭송하는 듯한 길고 큰 소리가 울려나오고, 그것은 바위터를 넘어 골짜기 사이를 산울림 되어 갔다. 케무로는 우주카로 돌아가면서, 아직도 귓전에는 그 울려 퍼지는 소리가 쟁쟁했다. 케무로는 리코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리코나도 떠들면서 웃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곧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코나는 케무로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잘 가셔요, 케무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에게 좋지 않는 일을 하고자 하는 어떤 자도 막아 줘요." "잘 알았어, 리코나." 하며 케무로는 굳게 말하고, 리코나의 손을 힘있게 잡아 주었다. 그리고는 컬리와 함께 우주 카 속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케무로는 좌석 위의 후드를 내리고 조종 장치를 움직였다. 상승관은 갑자기 더워지고, 윙하고 추진 기관이 돌기 시작했다. 전체 계기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로써 출발 준비는 끝났다. 케무로는 우주카의 투명한 후드를 통하여 전송하는 사람들에게 최후의 작별 인사를 했다. 드디어 우주카는 유성 위를 선회하면서, 바위터를 낮게 돌았다.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다. 곧 우주카는 상승해서 굉장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우주카는 푸른 공간을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끝없이 날아갔다. 이윽고 유성 샤니아의 인력에서 벗어나자, 곧 레이더 측정기의 중앙에 S라는 빛 글자가 서서히 나타났다. 케무로는 급히 레이더 통화기의 버튼을 누르고 소형 마이크를 들어올렸다. "S인공위성. S인공위성, 이쪽은 케무로의 우주카. K인공 위성의 방향을 지시하는 전파를 보내 주기 바람." 서서히 레이더 측정기의 S라는 글자는 사라져간다...... 우주카의 기수는 내려가고, 다시 왼쪽으로 흔들렸다. 레이더 측정기가 또 번쩍했다. 그 빛깔은 K라는 글자로 바뀌었다. "감사합니다, S인공 위성. 우주카는 K 전파에 올랐음. 그 곳의 파장을 벗겨놓아 주기 바람." 하고 케무로는 마이크로폰을 돌리고 '통화 회로'라고 씌어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몸을 돌리며 후우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케무로는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컬리는 깜짝 놀라며 케무로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제 우리는 한숨을 쉬거나 웃어도 좋아.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꼭 꿈만 같애. 그러나 꿈은 아니겠지?" 하고 컬리가 말했다. "이봐, 컬리." "왜, 케무로?" "부탁이야. 샤니아인에 대해서 작문을 쓰지 않을 수 없겠니?" "왜 그래? 다른 친구들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거야. " 컬리는 이상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봐 컬리, 남의 비밀을 이야기하면 큰 고통이 따른다고 할 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겠니?" "그건 안 해. 그런데 그런 비밀이라도 있니?" "응, 유성 64호와 샤니아인에 대한 거란다." 그러자 컬리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잘 모르겠어. 만약 내가 유성 64호나 샤니아인에 대해 작문을 쓴다면, 샤니아인에게 피해를 주고 그들을 불행하게 하며 죽이는 일까지 있단 말야?" "그렇단다. 나는 그들과 신성한 맹세를 했었다. 나는 인공위성의 높은 분에게만 얘기하겠다고 맹세했단다." 이 말을 들은 컬리는 케무로를 바라보면서 잠자코 있었다. "이봐, 사람은 비밀을 지킴으로써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될 수도 있어 컬리." "알았어, 케무로 난 약속하겠어." 이윽고 컬리는 힘차게 말했다. 그러고서 얼마쯤 되었을까, 인공 위성 K는 두 소년의 눈앞에 그 모습을 나타냈다. 높은 망루 같은 중심부를 가진 거대하고 번쩍거리는 테-. 케무로는 스피커의 스위치를 누르고 호출 부호를 전하면서 인공 위성을 돌기 시작했다. 케무로는 스피커로 외쳤다. "케무로의 우주카에서 보고함. 어느 도착 입구를 쓸까요? 저쪽 것인가요?" "오오, 케무로! 컬리도 같이 왔냐?" "예, 둘 다 무사합니다." "걱정하고 있었다. 무사하다니 안심이다. 자, 10번 도착구에 착륙해라." 주차장 계원 샘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하여 흘러나왔다. 이윽고 두 소년이 탄 붉은 우주카는 조용히 선회하고 난 후, 미끄러지듯 10번 도착구에 착륙했다.   (끝)     작품 해설   인공 위성에 대하여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우주 소년 케무로와 컬리는 인공 위성에서 태어난 소년이므로, 인공 위성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류의 최초 인공 위성을 쏘아 올렸습니다. 83.6킬로의 무게를 가진 스푸트니크 1호라는 인공 위성으로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했습니다. 그것은 1957년 7월부터 1958년 12월까지 세계의 과학자들이 힘을 합하여 지구에 대한 것들과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태양에 대한 것들을 연구하는, 이른바 국제 지구 관측 년이라는 해에 행하여진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일찍부터 인공 위성의 연구에 손을 대었으며, 될 수 있으면 이 지구 관측 년의 시기에 인공 위성을 쏘아 올릴 계획이었지만, 소련에 뒤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미국도 급히 준비를 서두르고 다음해인 1958년 1월 31일에 익스플로러 호라는 인공 위성을 쏘아 올렸습니다. 무게는 14킬로였습니다. 그 후 쏘아 올린 인공 위성의 수는 점차로 불어나서, 1957년에 2개였던 인공 위성이 1960년에는 19개, 현재는 100개 이상의 인공 위성을 쏘아 올리고 있습니다. 인공 위성 1개의 무게는 미국의 예를 들어보면 1958년에 쏘아 올린 것은 14킬로였으나, 1966년 7월에 쏘아 올린 새턴 1호는 길이 28미터, 무게 29톤이라는 무서울 정도의 큰 인공 위성으로 되었습니다. 약 트럭 10대분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그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인공 위성의 형태도 소련의 인공 위성 제 1호 스푸트니크호는 구형이었으나, 그 뒤에 쏘아 올린 것에는 통형, 상자형, 포탄형 등 그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인공 위성은 어떻게 나는가?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구에는 중력이 있어서, 예를 들면 공을 하늘에 던져 올리면 틀림없이 땅에 떨어집니다. 이것은 공의 속도보다 지구의 중력이 더 강하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밖에 공기의 저항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많이 공의 속도를 더욱 강하게 하여 매초 8킬로의 속도로 던져 보면 어떻게 될까요? 매초 8킬로이면 음속의 악 24배가 됩니다. 공기의 저항이 있으면 공은 매초 8킬로의 속도로 차츰 둔하게 떨어지지만, 만일 공기의 저항이 없다고 한다면 공은 그대로 매초 8킬로의 속도로 계속 날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기의 저항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만일 공기의 저항이 거의 없는 곳까지 이 공을 떠받쳐 올려, 매초 8킬로의 극도로 던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인공 위성이 되는 위치일 것입니다. 공기의 저항이 거의 없는 높이는 대개 300킬로 이상 높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까지 떠받쳐 올리게 되고, 거기에서 매초 8킬로의 속도로 할 수 있다면 어떤 물건이라도 틀림없이 인공 위성이 되어서 지구를 빙빙 계속 돌 것입니다. 인공 위성은 지구의 것을 조사하기도 하고, 태양을 비롯하여 우주의 여러 가지를 조사하기도 하고, 또 장래의 우주 여행의 기지로도 됩니다. 현재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인공 위성은 없습니다만, 앞으로는 이 이야기와 같이 인공 위성의 도시가 틀림없이 건설될는지도 모릅니다. 인공 위성을 쏘아 올린 덕택으로, 지구에서 보고 있을 때보다 상상도 못할 우주의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예로써 지구를 감싸고 있는 대기에는 하루에 1천 톤에서 1만 톤의 유성이 굉장한 속도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 유성은 탄환과 같은 비행 물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인공 위성의 덕택으로 이것을 먼지와 흡사한 눈송이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기가 없는 우주에는 항상 지구의 밤보다 어둡고, 항성은 계속 하루 동안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캄캄한 대공을 배경으로 하여 스포트라이트처럼 깜박거리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거대한 불의 덩어리 구실을 하는 것으로서, 수천 킬로나 되는 불꽃 밑에 그 주위가 캄캄한 대공에 툭 불거져 있습니다. 물론 햇빛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구상에서 햇빛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대기와 우리들의 주위에 무수한 물체로부터 반사가 거듭된 것입니다.   다른 별에도 생물이 있을까 ?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는 몇 천만이나 될지 모르는 항성으로 되어 있는 은하계의 일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지구가 소속되어 있는 은하계는 지름이 1천 조 킬로의 1천 배나 된다고 합니다. 상상도 못할 엄청난 거대한 것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중에서도 가장 작은 점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천문학자는 이 밖에도 이 같은 은하계가 십억 정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엄청난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고, 우리들의 태양을 도는 9개의 혹성의 이야기를 해 봅시다. 수성은 지구보다 훨씬 작고 인력도 훨씬 약하기 때문에, 생물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태양을 거의 잊어버렸다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은 지구보다도 훨씬 크기 때문에 지구보다 더 많은 대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기는 생물에게 대단히 유해한 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아무래도 생물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왕성은 대단히 차가운 혹성이기 때문에, 생물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금성과 화성뿐일 것입니다. 금성은 항상 구름이 끼어 있는 혹성인데, 지구보다 더 많은 탄산가스가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성의 온도가 물의 끓는점(110℃)보다 높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물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화성은 어떨까요. 화성의 하루는 대체로 지구의 하루와 같고, 24시간 37분 30초입니다. 화성의 1년은, 즉 화성이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은 지구의 약 2배 정도입니다. 화성의 지름은 지구의 반이고 질량은 10분의 1 일입니다. 그러므로 화성은 지구보다도 인력이 약할 것입니다. 화성의 온도는 낮에는 섭씨 10°부터 밤에는 섭씨 영하 60°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생물은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생명은 무기물 중에서 나왔고,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련의 유명한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10억 년에서 20억 년의 옛날, 굉장히 뜨거웠던 지구가 식어서 여러 종의 탄화물이 생기고, 그 탄화물이 뜨거운 대기에 닿아서 탄화수소가 생겼다고 생각됩니다. 이 탄화수소의 일부가 메탄과 암모니아 등으로 반응되어, 여러 가지 종류의 유기 화합물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는 대단히 복잡한 구조의 단백질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에 생명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우주에는 지구가 소속되어 있는 행성계와 같은 것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어떤 천문학자는 우리들 인간과 흡사한 생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혹성도 이 우주에는 1억 개는 있으리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곧 과학은 분명히 여러 가지를 차례차례 발견해 줄 것 이 틀림없습니다.       우주 소년 케무로 엘리엇 작 ․ 김 성 묵 역   아이디어회관 과학문고 164p 19㎝ (SF세계 명작 10)   인 쇄      1975년 10월 5일 발 행      1975년 10월 10일 역 자      김성묵 제 판      명립정판사 오프셋     장원정판사 인 쇄      일신사 제 본      양지실업 (주)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1099    싸우는 미래인-에드워드 해밀턴 작 -최 인 학 역 댓글:  조회:448  추천:0  2021-09-19
 싸우는 미래인-에드워드 해밀턴 작 -최 인 학 역     ◇편집위원◇   아동문학가 이 원수․박 홍근/문학박사 최 인학 공학박사 양 옥룡/이학박사 김 희규 전교육감 김 성묵   ■ 책 머 리 에   먼 장래에 - 인류는 화성․금성․수성․목성에 진출하여, 태양계 연합이라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그 때는 태양계의 각처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해 나가는 퓨쳐맨(미래인)이라는 그룹이 탄생될 것입니다. 태양계 제 1의 과학자 가디스 뉴턴, 뇌뿐인 학자 사이먼 라이트 박사, 로봇인 클라크, 합성 인간 오토 - 이 4사람이야말로 태양계 연합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챔피언들입니다. 이 퓨쳐맨들 앞에 또 다시 수수께끼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주를 헤매는 소혹성 마마에서 이상한 구원 신호가 전해 옵니다. 그리하여 퓨쳐맨들은 사랑하고 아끼는 코메트에 타임 엔진을 장치하여, 멀고 아득한 1억 년 전의 과거 세계로 대모험의 여행을 떠납니다!     ■ 책 머 리 에·················· 2 ■ 소행성 광산·················· 4 ■ 비밀의 기지················· 16 ■ 과거로부터의 부르짖음············ 22 ■ 제 2 의 달·················· 28 ■ 과거의 지구로················ 34 ■ 검은 우주선················· 38 ■ 화 성 인··················· 46 ■ 화성의 바다················· 52 ■ 루운 궁전에 숨어들어 가다·········· 55 ■ 진로를 가데인으로·············· 65 ■ 큰 이주 계획················· 71 ■ 지갈 박사·················· 77 ■ 섬으로 귀양················· 84 ■ 태양계가 생겼을 때·············· 89 ■ 우주의 포전················· 96 ■ 가데인 최후의 날·············· 102   작품 해설··················· 108   ■ 소행성 광산   소행성은 암흑의 대우주 속을 소리 없이 천천히 돌고 있었다. 공기도 없고, 물도 없다. 중력도 거의 없는 이 소행성의 세계는 생물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야말로 죽음의 세계이다. 주위의 우주에는 빨강, 노랑, 파랑, 하양의 수많은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마치 빛의 음악회를 열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크고 적황색으로 보이는 것이 목성이다. 또 그보다 조금 작으며 무섭도록 붉게 빛나고 있는 것이 화성이다. 여기는 화성과 목성의 한가운데가 되는, 소행성 지대의 중앙이다. 이 근처에는 작은 것은 조그만 돌 만한 것에서부터, 큰 것은 지름이 수 십 킬로, 수 백 킬로미터까지 되는 크고 작은 각종의 소행성이 수만 개 허리띠 같이 퍼져 있다. 조용하다. 진공의 우주에는 소리가 없다.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끝없는 미래에 있어서도 여기서는 다만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정적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별무리 속에서 밝은 빛의 꼬리를 끌면서, 2 개의 흐르는 별이 점점 이 소행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러한 진공의 우주에서 흐르는 별이 빛을 낼 수가 없을 텐데……… 그 흐르는 별과 비슷한 것은 소행성에  가까이 오더니, 급히 방향을 바꾸었다. 빛의 제트기가 소행성의 바깥쪽을 향해 맹렬하게 달렸다. 그런가 했더니 울퉁불퉁한 소행성의 표면에 멋지게 착륙했다. 물론 그것은 흐르는 별은 아니었다. 우주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보통 정기적으로 우주를 날아다니는 우주선과도 다르고, 국제연합 우주경찰의 정찰정도 아니다. 오래 사용했는지 곳곳에 흠이 있는 구식 우주 화물선이었다. 우주 화물선의 문을 열고, 우주복을 입은 5 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틀림없이 여기인가?" 한 남자가 우주모의 라디오로 물었다. "틀림없어. 여기가 소행성 마마이다." 다른 한 사람이 우주와 별지도를 별빛으로 보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여기에 티타늄과 테르륨의 거대한 광맥이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부자가 되었다." 다른 남자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우주 광산가였다. 이 소행성 지대에 있는 많은 소행성 중에는, 때로는 지구에서 좀처럼 얻을 수 없는 대단한 금속자원의 광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우주 광산가들이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다. 이 남자들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대장같아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좋아. 그럼 곧 일을 착수하자. 맬턴, 가이거 계수관을 가지고 와라." 맬턴이라고 불린 남자가 그들 중에서 가장 작았다. 우주모 안에서 보이는 그 얼굴은 아직 18, 19세의 소년 얼굴이었다. 소년은 우주선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곧 가이거 계수관을 가지고 왔다. 그러자 남자들은 모두 제각기 소행성의 울퉁불퉁한 바위산으로 흩어졌다. 맬턴 소년은 화성 태생의 한 나이 많은 광산가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맬턴은 이 노인을 몹시 좋아했다. 젊은 시절부터 계속 우주의 여러 곳을 여행한 노인은, 아는 것도 많았고 항상 신기한 이야기를 해 주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왜 언제까지나 광산 일을 하고 계셔요? 큰 우주 광맥을 발견해서 돈을 많이 번 일도 있었겠죠?" 하고 맬턴은 가이거 계수관으로 가까운 바위의 방사능을 조사하면서 물었다. "음, 여러 번 있었지.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지구에 틀어박혀 있지 못하는 성격이지. 우주에 나와있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잡히지 않고 불안하단다." "그러시다면 광맥을 찾아서 돈벌이할 목적이 아니고 모험이 목적인가요?" "그래, 그렇게 말해도 좋겠지……" 이렇게 주고받으면서 둘은 바위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중력이 거의 없으므로 잘못하면 공중으로 떠오를 것 같아서 걷기가 힘들었다. 문득 맬턴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왜, 방사능의 반응이 있었느냐?" "아니에요. 저걸 좀 보셔요, 바위를 뭔가가 파헤쳐 놓았어요, 건물의 잔해 같아요." 소년은 눈을 반짝였다. 그러나 늙은 광산가는 그렇게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아, 이 근처의 소행성에는 조각이 새겨진 오래된 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의 동강이 같은 것을 볼 수가 있지." "그렇다면…… 옛날 이 소행성에도 사람이 살았겠네요?" "그렇게 간단히 단정할 수는 없지. 공기도 물도 없는 소행성에 사람이 살 수 없잖니. 그러니 건물 같은 것을 세웠을 리 없지." "하지만, 그러면 어째서……" "모를 일이야, 맬턴. 옛날부터 우주 고고학자나 우주 지질학자들은 여러 가지 설을 내놓았단다. 그들 중에는 이 소행성 지대에 퍼져 있는 소행성이 옛날에는 하나의 큰 -지구 만한 행성이었고 거기에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사실은 알 수가 없어요." 맬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고 먼 아득한 옛날, 아직 지구에도 인간이 생겨나지 않고 공룡들이 기어다니던 시대에 여기에 훌륭한 문명 세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원인으로 해서 행성과 더불어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차디찬 암석의 덩어리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머리가 핑 돌 만한 굉장한 이야기다. 잠시 동안 맬턴 소년은 공상에 젖은 채 걷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다시 한 번 놀라며 발을 멈추었다. "왜 그러니?" 늙은 광산가가 물었다. "이상해요…… 어쩐지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는 듯한 기분이어요. 열심히 부르고 있는 것처럼……" 늙은 광산가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내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데……" "아니, 정말이어요. 틀림없이 들렸어요!" 늙은 광산가는 걱정스러운 듯 소년의 우주복 속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맬턴, 넌 아마도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다. 처음으로 우주에 나오니까 없는 것도 보이는 것 같고, 들리지도 않는 소리나 이야기도 들리는 것 같구나. 신경이 피로하면 그럴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맬턴 소년은 뭔가 말하고 싶었으나,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무리 얘기해 보았자,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날 저녁 -이렇게 말해도 소행성의 밤과 낮은 지구와 달라서 기껏 수 시간마다 되돌아오지만- 우주 광산가들은 밤을 지새워 가며 일을 계속했다. 소행성 마마의 뒤쪽에는 생각한 바와 같이 훌륭한 티타늄 광맥이 발견되었으므로, 맬턴 소년도 열심히 일했다. 조금 쉴 때, 그는 또 화성 태생의 늙은 광산가 곁으로 가서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는 여러 가지 일을 잘 알고 계시죠. 혹시 누군가가 시간 여행 방법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나요?" 늙은 광산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왜 묻지? 지난 2 백년 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노력해 보았지만, 아직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단다." "그렇군요……" 맬턴은 실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노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시간 여행의 원리는 이미 오래 전에 발견되어 있지. 너도 알다시피 이 세계는 가로, 세로, 높이, 3 개의 공간의 차원과 시간이라는 네 번째의 차원이 짜여서 '4차원 시공 연속체'라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인류는 처음의 3개의 차원 -공간이면 하늘에도, 땅에도, 바다 속에서도 움직일 수가 있지. 그러므로 4 차원 째의 시간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안 될 리가 없잖은가. 실제로……" 여기까지 말하던 늙은 광산가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요? 누가 시간 안을 여행한 사람이 있었나요?" 하고 맬턴은 성급히 물었다. 노인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것은 한 낭설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캡틴 퓨쳐가 실험에 성공했다는 소문은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아마 정말은 아닐게다." "그렇지 않아요. 정말인지도 몰라요!“ 맬턴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캡틴 퓨쳐는 지구가 낳은 위대한 과학자에요. 그래요, 그는 틀림없이 저 달의 연구실에서 시간여행 실험에 성공했을 거에요!" "만일 성공했다면 발표를 했을 것이 아니냐." "그러나 어떤 이유로 아직 숨기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럴까? 아무튼 시간 여행은 어려워요. 아무리 캡틴 퓨쳐라도 그렇게 쉽게 성공할 리는 만무해." 늙은 광산가는 이렇게 말했으나, 그때 이미 맬턴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해 보겠다. 내가 해 보겠다. 머리가 돈 것인지도 모르겠다.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저 슬픈 소리를 그대로 듣고만 넘겨버릴 수는 없어. 캡틴 퓨쳐에게 이 일을 알리자!) 광산가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으므로, 맬턴이 살짝 작업장을 빠져 나온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깜짝 놀란 것은, 돌연 소행성의 뒤쪽에서 굉장한 빛과 함께 한 대의 우주선이 날아올랐을 때였다. 달려온 늙은 광산가는 남아 있는 한 대의 우주선 문에, 다음과 같은 편지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허락 없이 제멋대로 우주선을 빌리는 대신에, 나의 몫은 여러분들이 나눠 가지십시오. 저는 캡틴 퓨쳐에게로 가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맬턴」   ☆☆☆☆☆☆☆☆☆☆☆☆☆☆☆☆☆☆☆☆☆☆☆ ■ 비밀의 기지   달에서 보는 지구는 아주 큰 녹색의 원반 같았다. 녹색을 띤 그 부드러운 빛은 황량한 밤의 달 표면을 조용히 비치고 있었다. 눈이 닿는 곳까지 몹시 험한 산들과 분화구의 연속이었다. 여기에는 물론 공기도 물도 없다. 다만 사방에 작은 우주진이 가득히 쌓여, 눈처럼 보이며 달 표면을 덮고 있을 뿐…… 그러나 여기 데크 분화구 옆에만은 사방과 다른 데가 있었다. 그것은 몹시 높게 솟아 있는 금속의 기둥이었다. 그 기둥 끝에는 접시 같은 파라볼라 안테나(전파를 일정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발신, 수신함)가 여러 개 지구의 빛을 받아 번쩍번쩍 빛나면서 끊임없이 돌고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그것뿐이고, 그 근처에는 돔(반구 구형의 지붕)도 없고 다른 건물도 없다. 대체 안테나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캡틴 퓨쳐라고 말하는 유명한 가디스 뉴턴과 그 부하인 미래인들의 지저 기지 (地底基地)의 자동 경계 장치 안테나였다. 실은 외부에서 보면 보통의 구멍같이 보이지만, 이 데크 분화구의 바닥에는 인류가 우주에 건설한 가장 크고 가장 새로운 시설을 갖추어 놓은 대단한 우주 기지가 들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우주 기지의 넓은 전망실 안에는 가디스 뉴턴과 클라크, 오토, 그리고 사이먼 라이트 등의 4 명이 편안한 자세로 긴 안락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장, 이렇게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으니 지루해서 못 견디겠어요." 라고 말한 것은 건장한 몸매의 큰 사나이 오토였다. 머리카락도 눈썹도 속눈썹도 없는, 흰 피부에 녹색의 눈을 가진 대머리 사나이다. 오토는 물론 사람이 아니다. 인공 피부에, 인공 심장, 인공 근육에다 합성 뇌를 가진 합성 인간이다. "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 오토, 그래서 너는 지능이 낮다구." 라고 말하며 붉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오토보다 키가 큰 2 미터 50센티나 되는 사나이 클라크이다. 이것도 역시 사람이 아닌, 온 몸이 검게 빛나는 특수 합금으로 된 로봇이다. 그 붉은 눈은 물론 전기로 빛나는 눈이며, 말하는 입은 스피커로 되어 있다. 클라크의 인공 두뇌는 세계 제일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클라크는 항상 자랑하고 싶어한다. "뭐? 이 시시한 쇠 부스러기 같은 녀석!" 오토가 화를 내며 외쳤다. "뭐라구, 이 고무인형 같은 것이!" 클라크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가디스 뉴턴은 또 시작된 둘의 입씨름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이 둘은 언제나 야단스럽게 입씨름을 하지만, 실은 매우 좋은 친구로서 사람끼리도 저렇게 다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의좋은 사이였다. 가디스 뉴턴은 이 둘에 비하면 작게 보이는데, 지구인으로서는 결코 작은 편이 아니다. 훤칠하고 스포츠 선수다운 몸매에 아름다운 그리스 조각 같은 얼굴 모습이다. 그 때문에 언뜻 보면 학자같이 보이지 않으나,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번쩍이고 있는 커다란 반지 -태양계의 모양을 한 10개의 보석으로 된 훌륭한 반지는 '지구 과학 아카데미' 회원의 표시이고, 그가 태양계 제일의 과학자임을 나타내 주고있다. 이 사람이 바로 앞에서 나온 캡틴 퓨쳐라고 일컬어 진 장본인이다. 가디스 뉴턴의 아버지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 연구를 탐낸 악인이 달의 연구소를 습격했을 때 죽고 말았다. 가디스는 그 무렵 아직 어린아이였으며, 그래서 아버지 뉴턴 박사가 발명한 클라크와 오토, 또한 '뇌'라는 별명이 붙은 아버지의 친구인 과학자 사이먼 라이트 박사의 손에서 자라났다. 사이먼 라이트 박사의 '뇌'라는 별명은 다음과 같이 해서 붙여졌다. 사이먼 라이트는 그 옛날 어떤 사건으로 한 번 죽었다. 그러나 그때 뇌만 꺼내어, 가디스의 아버지 뉴턴 박사가 발명한 '뇌의 배양 장치'에 넣어서 다시 살렸다. 즉 사이먼은 뇌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뇌'의 사이먼 박사는, 전망대 안의 자동 경계 장치 앞의 공중에서 붕붕 떠다니고 있다. 그는 사각형의 금속 상자에 넣어져 있으며, 앞에는 렌즈의 눈이 있고, 그 밑에는 전파 신호를 말로 바꾸는 스피커가 달려 있다. 그리고 공중에 떠 있는 것은 가디스 뉴턴이 발명할 중력 차단 광선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디스는 웃으며 보고 있다가, 그 정도에서 클라크와 오토의 입씨름을 말리려고 할 때였다. 순간, 사이먼 박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가디스, 자동 경계 장치에 반응이 보인다. 우주선 한 대가 기지에 다가오고 있다." 가디스가 급히 자기 쪽을 돌아보자, 사이먼 박사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쁜 계획이 있는 놈 같아. 우주선 조종사라면 이 근처가 출입 금지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 것인데 말야." "프로톤 포(양자포)를 준비하겠습니다. 하고 클라크가 말했다. "착륙하고 있어. 5 인승 우주화물선이다." 라고 사이먼이 계속 보고했다. "이봐 클라크, 오토, 무장하고 지상으로 나가자." 하고 가디스가 이렇게 말했을 때, 사이먼이 다시 말했다. "봐라. 가디스, 저것은……" 스크린에 착륙한 우주화물선이 크게 비치고 있다. 문이 열리더니, 한 젊은 사나이가 아직도 뽀얗게 먼지가 휘날리는 지상에 내린다. 우주복 안의 얼굴은 몹시 불안스럽고 당황한 표정이다. "몹시 놀라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가디스가 말했다. "아무튼 조사해 보자."   ■ 과거로부터의 부르짖음   지상으로 나오기 전에, 가디스는 허리 벨트에서 넓고 작은 원반을 꺼내어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순간 가디스의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 가디스 자기만의 투명 장치이다. 이 장치에서 주위에 퍼져 있는 방사선의 힘으로 빛을 굽혀,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는 저 녀석의 우주선에 다른 누가 또 타고 있는가를 조사해 보겠다. 내가 저 녀석 옆에 모습을 나타내거든 둘이 모두 나와라." 가디스는 이렇게 말하고, 살금살금 우주선 쪽으로 걸어갔다. 물론 클라크, 오토에게도 가디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디스는 우주선으로 다가가서, 재빨리 열어놓은 문으로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주선 안에는 아무도 없다. 가디스는 다시 나와서 그 침입한 조종사 옆으로 살며시 다가가서 투명 장치의 스위치를 껐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는 바위 뒤에서 클라크도 오토도 모습을 나라냈다. "앗!" 조종사는 깜짝 놀랐다. "넌 도대체 누구냐? 여기는 국제 연합 우주국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야. 너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하고 가디스가 엄하게 나무라자, 젊은 조종사는 당황했다. "알고 있습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저는 어쨌든 당신들에게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그렇다면 왜 태양계 연합 정부에 신청을 하지 않았어?" "그것은…… 거기서 일하는 사람에게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도 믿어 주실 지 모르겠군요. 캡틴 퓨쳐, 너무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여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냐?" 가디스는 노려보면서 눈을 굴렸다. "태양계의 어떤 행성의 종족이 다 전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도움을 청해 왔기에……" "무슨 엉터리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며 가디스는 젊은 사나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태양계에는 그런 시끄러운 일은 아무 데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일어나면 즉시 우리들에게 연락해 줄 것이다." "현재의 일이 아닙니다- 1 억 년 전의 사람들입니다." 가디스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 1 억 년 전? 이봐, 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그래, 그렇다 치고 대체 어떤 방법으로 네게 연락이 됐지?" "모르겠어요. 나는…… 맬턴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소행성 지대에 있는 소행성 마마에 티타늄 광맥을 찾으러 갔을 때였습니다. 어떤 바위산 그늘에 있을 때, 갑자기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에 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러더니 언어가 아닌 텔레파시(정신 감응) 같은 것이 나의 머리 속에 들려왔어요." "그 따위 엉터리 소리." 오토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가디스는 오토의 말을 막으면서 계속하도록 했다. "그래, 뭐라고 들려왔어?" "그 텔레파시의 주인공은 가데인의 과학자 타무어라고 말했어요. 그는 가데인이 전멸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미래를 향해서 구원을 청한다고 말했어요……" "잠깐만, 지금 가데인이라고 말했지?" 하고 가디스는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여러 번 가데인의 타무어라고 되풀이했어요. 그래서 나는 그 전설을 생각해 냈어요……" "1 억 년 전, 목성과 화성의 한가운데에 가데인이라는 행성이 있었다는 전설 말이지?" 라고 가디스가 대신 풀이하자, 젊은이는 눈을 빛냈다. "알고 계시나요?" "알고 있지. 그리고 어쨌느냐?" "그 타무어란 과학자는 자기가 발명한 시송파(時送波) 광선이라는 것으로 미래에 향해 구원을 청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물론 대답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리고 텔레파시 같은 소리도 그때 끝나고 말았지요. 저는 어떻게든 그 과거로부터의 부르짖음에 대답하고 싶습니다. 캡틴 퓨쳐, 당신이 시간 여행의 실험에 성공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기까지 달려왔어요." 가디스 뉴턴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사이먼 박사 쪽을 보면서 말했다. "어때, 가데인의 전설은 사실이었던가?" 그러자 투명 금속의 상자가 천천히 대답해 왔다.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시송파 광선의 발명에 이미 성공했다." "그러나 그처럼 높은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가데인은 망하고 말았다. 사이먼 박사, 한 번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 가디스. 우리들의 힘을 빌려주면, 잘되면 가데인 사람들을 멸망에서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가디스는 천천히 끄덕이고 맬턴을 쳐다보았다. "맬턴, 잘 와 주었다. 너의 노력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겠다." "그 말씀은…… 저어…… 가데인 사람을 구조하러 가시겠다는 뜻인가요?" "그렇다." "그럼, 결국 캡틴 퓨쳐 당신이 시간 여행의 실험에 성공했다는 것이 정말이었군요." "그렇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은 극히 사소한 실험이었다. 그런데 1 억년이나 되는 아득한 시간여행은 아주 대단한 모험이다. 여러 가지로 다시 고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허나 너의 이야기를 들은 이 마당에 있어서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들은 1 억년 전의 세계를 향해 가는 거다."   ■ 제 2 의 달   그로부터 수 주일이 지났다. 지하 기지의 격납고에서는 그 동안 미래인들이 사랑하고 아끼던 코메트 호의 개조 작업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코메트 호에 타임 엔진(시간 여행용 엔진)을 장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 그 자체의 실험은 이미 99퍼센트까지 확실했다. "100 퍼센트가 아니면 가지 못하나요?" 맬턴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 시간이란 언제나 정확하지 못한 점이 있지. 그래서 절대적인 완전한 시간 여행은 하기가 힘든다." "그렇다면…… 만약 1 만분의 1 이라는 것이 있다면…… 다른 세계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쟎아요?" "그렇지." "그럼, 위험하지 않아요?" 그러자 가디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의 위험은 각오해야 한다. 그렇기 않고서는 이런 대모험은 할 수 없다, 맬턴." 마침내 코메트의 준비가 끝났다. 가디스는 기지의 일을 맬턴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맬턴, 만일 우리가 3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때는 반드시 태양계 연합 정부에 모든 것을 보고해라. 알겠니?" 맬턴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몇 분 후, 코메트 호는 지하 격납고에서 달 표면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으며, 지구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조종대를 잡은 것은 합성 인간 오토, 기관사 자리에 앉은 것은 로봇 클라크, 타임 엔진의 조종판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가디스, 사이먼은 그 옆에서 공중에 떠 있다. 이윽고 가디스가 명령을 내렸다. "출발 준비 완료. 먼저 달과 지구와 중앙까지 가기로 한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대장……" 하며 오토가 물었다. "시간 속을 날아간다면서, 왜 그런 곳까지 가야 합니까?" "천체라는 것은 항상 운동하고 있다. 그러한 것을 잊어서는 안 돼." 하며 가디스는 대꾸했다. "만일 1 억 년 앞을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들이 나타난 공간에 천체가 있다고 해 보라구. 그러면 당장에 원자 폭발이 일어나서 우리들은 뼈도 없어지고 말 것이 아닌가." "과연 그렇겠습니다!" 하며 오토는 털도 없는 머리를 딱 쳤다. "이 전자 뇌의 계산대로 한다면, 우리들은 1억 년 전의 달과 지구 사이로 즉 아무 것도 없는 우주공간으로 갈 것이다. 과거에 닿으면, 또 보통의 공간으로 나와서 가데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가디스는 모두를 한번 돌아보고 난 후, "이제 출발!" 하고 오토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는 조종대를 꽉 당겼다. 곧 코메트 호는 진공의 우주로 날아올랐다. 지구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미터를 보고 있던 오토가 이윽고 속력을 줄이면서 코메트 호를 정지시켰다. 자동 항로 계산기의 바늘은 정확하게 달과 지구 한가운데 거리를 가리키고 있다. "됐다. 그럼 지금부터서 시간 여행이다. 가자!" 가디스는 낮은 소리로 말하고, 타임 엔진의 레버를 열었다. 그러자 모두는 가벼운 눈의 현기증을 느꼈다. 큰 충격은 아니었다- "이, 이것은 굉장한…… 달이……" 오토는 놀라며 창 밖을 가리켰다. 달이 지구의 둘레를 반대 방향으로, 포환을 던진 것처럼 빠르게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구도, 다른 행성도, 아니 태양까지도 그 진로를 모두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더욱이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현기증은 점점 심해 갔다. 눈은 똑똑히 보이지 않게 되고, 눈앞에는 번쩍번쩍 무수한 빛이 날며 흩어진다. "음, 괴롭다……" 누군가가 신음 소리를 냈다. 몸 속의 한 개 한 개의 원자가 시간의 흐름 속을 과거 쪽으로 무리하게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가디스는 희미하게 보이는 눈으로, 시간 다이얼의 눈금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7 천만 년- 7 천 5백만 년- 8 천만 년- 8 천 5 백 - 9 천- 9 천 3 백 - 9 천 6 백 -9 천 9 백 - 9 천 9 백 9 십 9 만 9 천 9 백……… 타임 엔진의 레버는 자동적으로 되돌아왔다. 빛의 소용돌이가 또 창 밖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정지되었다. 달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성공했다. 여기는 1 억 년 전의 세계다!" 라고 말했을 때, 돌연 사이먼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났다! 소행성 같은 것이 가까이 오고 있다. 빨리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부딪친다." 가디스는 레이더를 보았다. 지름이 7, 8백 킬로미터나 될 거대한 소행성 같은 것이 무서운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상하다. 이 근처에는 이런 천체가 있을 리 만무한데……) 이렇게 생각한 순간, 가디스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 여기는 1 억 년 전이다. 아마 그 시절에는 지구가 가지고 있던 제 2 의 달이 아닌가 모르겠다……) 하고 생각하는 동안, 그 작은 천체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     ■ 과거의 지구로   그 순간, 오토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합성인간 밖에 할 수 없는 재빠른 동작으로, 조종대를 당기며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았다. 코메트 호는 천천히 돌면서, 돌진해 오는 제 2의 달과 겨우 스쳐나갔다. 꽈, 꽈앙! 무서운 충격이 코메트 호에 일어났다. 모두는 좌석에서 튕겨 나와 바닥과 벽에 부딪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달의 표면이 코메트호의 바깥쪽을 스치면서 지나간 것이다. 곧 어디선가 무서운 힘으로 공기가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서 조금 후, 가디스는 의식을 회복했다. 코메트 호의 안은 캄캄했고,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엔진도 전기도 꺼지고 만 것이다. 뒤돌아본 가디스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코메트 호의 꼬리 부분이 잘려나가 버린 것이 아닌가. 그리고 코메트 호는 그 충격으로 지구를 향해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추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디스는 일어섰다. 무중력 상태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우선 배터리를 갈아 끼우고 불을 켰다. 그러자 클라크와 오토가 바닥에서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다. 사이먼도 공중에 떠 있게 되었다. 다행히 아무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 속도로 추락하면 6 시간만에 지표에 충돌한다. 그러나 그 전에 지구의 짙은 대기와의 마찰로 타버리고 말 것이다." 라고 사이먼이 조용한 소리로 계산 결과를 보고했다. 가디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고자 하던 가데인에는 가지도 못하고, 도리어 지구 근처에서 이렇게 빨리 조난 당하고 마는가…… 모두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1억 년이라는 전에 죽게 되는구나…… "그러나 코메트 호 머리 부분의 역분사 로켓은 무사합니다. 위험하지만 수직 착륙을 해 봅시다." 하고 오토가 말했다. 가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의 방법은 없네. 모두 힘을 합쳐 부서진 곳을 가능한 한 고쳐 보도록 하자!" 이리하여 클라크, 사이먼, 가디스의 3명은 각기 맡은 일에 착수했다.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꼬리 부분에서 끝없는 우주가 보였다. 먼 저쪽에서 태양이 이글이글 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낯익은 태양은 아니었다. 훨씬 작고 푸르스름하고, 아직 젊은 태양 - 1 억 년 전의 태양이다. 다른 것은 비단 태양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모든 것이 다 다르다. 달에는 저 곰보 같은 분화구도 없고, 표면이 매끈매끈했다. 무섭도록 붉게 빛나고 있던 화성은 지금에는 아름다운 녹색으로 보였다. 목성에는 그 큰 붉은 점이라고 일컫는 거대한 붉은 반점은 없었다. 토성에는 그 훌륭한 테가 없다! 목성과 화성과의 사이에 뽀얀 소형의 별이 한 개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1 억 년 뒤의 태양계에는 없는 행성이다. 아아, 그것이야말로 가데인이다! 가디스의 가슴속에는 굳은 결심이 소용돌이친다. 어떻게든 저기까지 가는 거다. 가서 가데인의 멸망 원인을 찾아내고, 힘이 미치는 데까지 가데인의 사람들을 구조하리라! 그러는 동안에도 코메트 호는 점점 지구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지구의 표면도 가디스들이 잘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북 아메리카가 있어야 할 곳에는 전연 다른 대륙이 펼쳐 있다. 더욱이 아시아는 커다란 섬 정도로 되어 있고, 남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동남 아시아는 하나로 되어 굉장히 큰 대륙을 이루고 있다. 중생대 중엽 경의 지구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대륙에는 거대한 파충류- 공룡들이 힘차게 활보하고 있지 않은가! 이윽고 코메트 호는 지구의 대기권 안으로 들어갔다. 우주선의 바깥벽이 공기와의 마찰로 무서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디스들의 노력으로 부서진 곳을 수리했기 때문에, 공중 분해를 일으킬 염려는 현재로선 없다. 코메트 호는 머리 부분의 역분사 로켓을 가동시켜, 브레이크를 걸고 속력을 줄였다. 지면이 거의 똑똑하게 보였다. "이대로라면 간신히 북 아메리카 근처에 착륙할 것 같다."라고 사이먼이 말했다. 무서운 로켓의 폭음은 우주선을 온통 뒤흔들게 한다. 눈 아래에는 중생대의 고사리의 대 밀림이 넓은 바다와도 같이 멀리 멀리 잇달아 있다. "자, 죽든 살든 해 보겠다!" 라고 오토는 부르짖으며 조종대를 팍 눌렀다. 순간 코메트 호는 일직선으로 그 대 밀림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 슈, 슈, 슈, 슛. 머리 부분의 역분사 로켓이 있는 힘을 다해서 분사하기 시작했다. 그 연기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충돌하여 폭발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착륙에 성공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은 오토의 솜씨에 달려있다. 마침내 모두는 무서운 충격을 받고, 다시 한 번 앉은자리에서 튕겨 나와 의식을 잃고 말았다.   ■ 검은 우주선   가디스는 몸을 흔드는 바람에 깨어났다. 클라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곁에 오토도 사이먼도 있다. "성공했는가…?" "예, 성공했습니다.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대장, 괜찮으십니까?" 가디스는 일어서 보았다. 몸의 마디마디가 뻐근하고 아프다. 그러나 몇 군데 부상은 입었으나,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괜찮다. 밖에 나가 볼까?" 가디스와 오토가 우주복을 벗고 있는 동안, 클라크가 부서진 문을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억지로 열었다. 밖에는 중생대의 정글이 무성하게 필쳐져 있었다. 공기는 찌는 듯이 무덥고 습기가 많았으며, 달콤한 것 같은 섞은 식물의 냄새가 풍겨 왔다. 그리고 무섭게 키가 큰 굉장히 큰 곤충이 날아다니고 있다. "자, 그럼 빨리 일을 나누어서 코메트 호를 수리하자고. 고장난 사이클로트론(원자핵의 인공 파괴용 가속기)과 분사 로켓용의 금속을 첫째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금속 검파 장치를 사용하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하지 않으면 가데인으로 가는 것이 늦어진다. 모두 힘을 내라." 곧 4명은 무서운 중생대의 정글 속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과연 파충류의 시대이다. 조금 나아가니 하늘을 나는 공룡인 익수룡과, 괭이 같은 등지느러미가 죽 붙어 있는 검룡인 스테고사우루스 등을 만났다. 또한 늪지에는 몸길이가 30미터나 되는 무섭게 큰 뇌룡인 브론토사우루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의가 순한 초식 공룡이고. 더구나 운동 신경이 몹시 느린 놈들이라서 걱정은 없었다. 가디스들은 그날 밤. 정글에서 조금 떨어진 초원에 서 야숙했다. 밤이 되니, 지평선은 화산의 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시대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아직 화산 활동과 조산 운동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다음날, 금속 검파 장치가 바라는 방사성 물질의 층을 찾아냈다. 모두는 곧 원자력 드릴과 만능 정련기를 사용하여 금속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3일째에는 상당한 양의 금속을 완성시켰다. 그래서 가디스는 오토만을 작업장에 남겨놓고. 클라크와 사이먼과 더불어 코메트 호의 수리를 하기로 했다. 모두 밤을 새워 가며 일했다. 그리하여 시작한 지 1주일 째에는 거의 수리가 다 되었다. "됐어. 아직 충분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출발하도록 하자. 가데인의 파멸은 다가오고 있는데, 예정보다 1주일이 늦어진 셈이다" 하고 가디스가 말하자, "그럼, 제가 오토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하며 클라크가 작업장으로 향했다. 그리고서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갸악. 끼익! 이 세상에서 들어보지 못한 무서운 과수의 부르짖음이 지금 클라크가 들어서고 있는 정글 속에서 들려왔다. "음, 아마 육식 공룡이 습격한 모양이다" 가디스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사이먼도 그 뒤를 따라 공중을 날고 있다 그 동안에도 무서운 공룡의 부르짖음과 땅을 뒤흔드는 듯한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다. "아아, 저거다!" 가디스가 외쳤다. 거기에는 키가 10미터도 넘는, 굵은 양쪽 다리로 우뚝 서서 거대한 입에 톱니 같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대 괴수와 클라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었다. "티라노사우루스다! 육식 공룡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놈이다" 가디스는 프로톤 총(양자총)을 빼들고 티라노사우루스를 향해 쏘았다. 가죽이 찌지직 소리를 내고 타면서 보라색 연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티라노사우루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기중기 같은 꼬리를 휘둘러 주위의 나무를 넘어뜨려 가며 셋을 향해 덤벼들고 있다. "프로톤 총도 듣지 않습니다, 대장!" 클라크가 분한 듯이 외쳤다. "덩치가 너무 크다. 신경이나 뇌에 조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사이먼 박사는 둘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면서 말했다. "눈을 겨누어라! 눈 뒤에 뇌가 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와락 거대한 입을 벌리고, 둘에게 다가오고 있다. 가디스와 클라크는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섬이 없이 오른쪽과 왼쪽의 눈을 겨누어 프로톤 총을 발사했다. 갸악, 깩 ! 티라노사우루스의 눈은 2개 다 깜짝할 사이에 불꽃으로 덮이고 말았다. 그처럼 거대한 공룡도 그것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프로톤 총이 뇌를 파괴한 것이다. 티라노사우루스는 흔들흔들 크게 비틀거리더니, 여러 개의 큰 나무를 넘어뜨리면서 꽝!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강력한 심장은 아직도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빨리 가디스. 오토가 당했을는지도 모른다." 하고 사이먼 박사가 먼저 날아가면서 고함을 쳤다. 클라크와 가디스도 급히 뒤따랐다. 정글을 빠져 나와 초원의 작업장으로 나온 순간, 가디스는 아아 하고 외치며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원자력 드릴이 파괴되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정련기는 다른 곳에 팽개쳐져 있다. 그리고 근처에는 풀과 나무가 넘어진 채 형편없이 밟혀 있을 뿐, 오토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오토! 어디야? 어디에 있나?" 클라크가 로봇의 특이한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아뿔싸! 오토는 티라노사우루스에게 당한 거다." 라고 말했을 때였다. "보라, 저것을!" 하고 사이먼이 외쳤다. 정글의 저쪽에서, 한 대의 연필 모양의 검은 우주선이 날아오르고 있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도대체 저것은?" "이 시대의 지구에는 아직 인간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렇게 볼 때 저것은 어떤 별의 우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하고 클라크가 광전 눈을 한층 더 붉은 빛을 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토는 티라노사우루스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저놈들에게 유괴 당한 것이 아닐까요?" "틀림없다" 가디스는 끄덕였다 "급하다. 어서 저놈을 추적하지 않으면!"   ■ 화 성 인   그럼, 잠시 오토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오토는 혼자 뒤에 남아서 원자력 드릴과 정련 장치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조금 후, 가까운 정글 속에서 공룡의 걸음걸이 같은 쿵, 쿵 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껏 초식 공룡 정도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오토는 수명의 이상한 복장을 한 사나이들에게 둘러싸인 것을 알았다. 모두 인간 같았으나 피부색이 붉고, 키가 무섭게 큰 점만이 달랐다. "넌 누구냐?" 별안간 대장 같은 사나이가 물었다. 그 언어는 몹시 사투리인 것 같았으나, 화성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언어와 같았으므로 오토는 사나이가 말하는 것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미래에서 왔다" 오토가 대답했다. "그 곳은? 가데인에서 왔는가?" "가데인에서라면?" 하며 대장 같은 사나이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것은 묻느냐? 너는 가데인의 적이냐, 그 편이냐?" 그러자 사나이들은 일제히 오토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오토는 프로톤 총을 빼들 여유도 없이 맨손으로 싸웠다. 오토는 5명에 해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순식간에 2, 3명을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계속 달려드는 적에게는 당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는 철사 줄에 몸을 감기고,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다 같이 미래에서 태어난 자기편에게 하는 태도인가?" "닥쳐, 스파이 놈! 네놈은 가데인 사람들과 한통속이지. 그 편은 우리들 화성인의 적이다" 대장 같은 사나이가 소리쳤다 "뭣이, 화성인?" 오토는 그만 멍해졌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화성인들은 오토를 끌고 갔다. 그리고는 정글 저쪽에 착륙해 있는, 연필처럼 가늘고 긴 검은 우주선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우주선의 선실에는 험상궂은 얼굴의 한 사나이가 있었다. "이 자는 뭐냐?" "가데인의 스파이입니다. 소우 경, 미래에서 왔다면서 엉터리 수작을 하고 있습니다. 스파이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제3행성에서 광석을 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우 경이라고 불린 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별에 너의 한패가 몇 명이나 있지? 무슨 목적으로 그 지갈의 놈들은 너희들을 이 별까지 보냈느냐?" "지갈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닥쳐 스파이 놈. 우리들의 눈은 속이지 못해." 그때, 파수병이 급히 달려와서 보고했다. "정글 속에 이놈의 한패 같은 놈들이 있습니다. 이놈을 찾고 있는 모양 같습니다." 소우 경은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좋아. 그럼 곧 떠올라서 화성으로 돌아가자. 지갈의 악마 놈,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대군을 이 별에 보냈을는지도 모른다. 이놈을 창고에 집어넣어" 오토는 즉시 우주선 창고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곧 우주선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 위를 떠나 우주 공간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오토는 될 대로 되라는 듯 창고의 짐에 기대 있었다. 그러고서 10분 후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가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아직도 우주선은 오토를 태운 채 우주 속을 날고 있었다(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는 우주선 창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았다. 지구는 이미 아주 멀어져서, 푸른 보석같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우주선이 나아가는 곳은 녹색의 화성 - 1억 년 전의 화성이 얄밉게 빛나고 있다.   ☆☆☆☆☆☆☆☆☆☆☆☆☆☆☆☆☆☆☆☆☆☆☆     ■ 화성의 바다   코메트호가 우주에 떠올랐을 때는 이상한 우주선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놈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넓은 우주 속에 숨어 들어가면 알 수가 없는데" 클라크는 분한 듯 이를 갈았다. 그러나 가디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걱정 없어. 일렉트로 스코프(검전기)로 찾으면 그 우주선의 진로를 곧 알 수 있다. 클라크, 지구의 주위를 돌아라" 하고 가디스는 재빨리 복잡한 전자 장치의 키를 조정했다. 이것도 가디스가 발명한 것 중의 하나이다. 우주선이 분사하는 가스에 의해서 그 속력과 방향을 계산할 수 있는 장치이다. 대기권 안에서는 가스는 곧 공기의 흐름 때문에 흩어지고 말지만, 진공의 우주 공간에서는 한참 동안 가스가 남는다. 그것을 재어 보면 우주선이 어느 쪽으로 날았는지 알 수가 있다. 코메트 호는 지구의 대기권 밖을 두 바퀴 돌았다. 그러자 일렉트로 스코프의 스크린에 희미하게 빛나는 가스의 흐름이 나타났다. "이것이다. 잠깐만……" 가디스는 재빨리 손끝으로 키를 두드렸다. 그러자 즉시로 숫자가 스크린에 나타났다. "알았어, 클라크. 놈들은 화성으로 향했다. 곧 추적하자!" "알았습니다. 대장 곧 따라 붙이겠습니다"   그러고서 수일 동안, 코메트 호는 화성을 똑바로 향해서 맹렬한 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토를 납치한 우주선도 속력이 빨랐다. 가도 가도 목표하는 우주선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코메트 호는 화성의 밤이 되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자 거기에 뜻밖의 것이 나타났다. 바다가 있다! "정말 그랬던가……" 사이먼은 신음 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화성의 사막은 그 시대에는 아직 바다였다. 화성은 중력이 작기 때문에 공기와 수증기를 그곳에 멈추게 해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차츰 물과 공기는 없어지고 사막이 되었던 거다." "바다뿐만이 아니다. 봐라, 화성의 대륙 이쪽저쪽에 등불이 많이 보인다- 도시가 있는 것이다. 화성에는 옛날에 문명이 있었던 것이다!" 하고 가디스는 외쳤다. "그럼, 오토를 납치한 것은 아무래도 화성인이겠습니다." 클라크가 조종을 하면서 말했다. "틀림없다. 가스의 흐름이 저 제일 큰 도시의 땅 위에 내리고 있다. 됐어 클라크, 코메트 호를 저 도시의 가까운 바다 위로 내려라." "알았습니다" 클라크는 속력을 늦추고 화성의 대기권 안으로 코메트 호를 조종했다. 다행히 화성에는 아직 레이더 같은 경계 장치가 발명되어 있지 않은 모양이어서, 지상에서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코메트 호는 잠수함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져 있다.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내려가 천천히 도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해안 근처에서 바다위로 떠올랐다. 가디스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저곳에 오토를 찾으러 가겠다. 오토에 대해서는 아마 거리에 소문이 났을 테니까. 어디 있는 지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오토를 구해 내면 곧 포켓 텔리바이저 (텔레비전 송신 장치)로 연락하마. 그렇게 하거든 마중을 나와라." 라고 말하고, 가디스는 풍덩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훌륭한 솜씨로 헤엄쳐 해안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모습이 이윽고 가물가물했을 때, 코메트는 바다 속으로 내려갔다. 곧 큰 소용돌이를 남기며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갔다. 화성의 2 개의 위성에 비쳐서, 화성의 바다는 어둡고 조용히 파도치고 있을 뿐이었다.   ■ 루운 궁전에 숨어들어 가다   그로부터 1 시간쯤 지나서, 가디스는 하늘에서 본 화성의 대도시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 갔다. 물론 도중에 화성인의 복장으로 변장을 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의심을 받지 않았다. 그 도시는 무슨 축제날 같았다. 이미 밤도 깊었는데 큰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으며, 기묘한 건물과 탑에는 낮처럼 밝은 등불이 빛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 도시가 오우터 시이며 화성의 서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축제는 화성 왕국의 황제, 루운 1세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가의 여기저기에는 무장한 병사가 많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축제에 들뜬 화성인들 간에는 무엇인지 모를 불안스러운 기색이 떠돌고 있었다. (어찌 된 까닭일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한 화성인 노인에게 물어 보았다. "오늘은 왜 저렇게 병사들이 많이 있나요?" 그러자 그 늙은 화성인은 얼굴에 놀라는 빛을 띠었다. 가디스는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나는 북쪽 끝에 있는 시골에서 왔기 때문에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늙은 화성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요. 그렇지 않고서야 요즈음의 가데인 소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 "가데인 소동?" 가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렇지. 그 가데인 사람들은 우리 화성인을 전멸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어. 악마 같은 지갈 놈이라 지금이라도 쳐들어올지도 몰라. 아무튼 놈들에게는 악마의 과학이 있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늙은 화성인은 들떠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얄미운 듯 흘겨보았다. "그런데도 바보 같은 녀석들은 축제에만 들떠 있어. 이래서는 안 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예, 그렇게……" 가디스는 입안에서 어물어물했다. 좀더 악마 지갈이라든지 가데인 사람들의 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었으나, 그런 것을 물으면 늙은 화성인은 점점 더 의심하리라. 그러나 늙은 화성인은 자기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이라고 보고 반가웠던 모양이다. 묻지 않은 말까지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도 제 3 행성에서 가데인의 스파이가 붙들렸다는 소문이오. 루운 궁전의 지하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놈은 당장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가디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기뻤다. 좋아서 소리를 지를 뻔하다가 겨우 참았다. 오토의 행방을 뜻밖에 빨리 알게 된 것이다. 이젠 이 화성인에게는 볼일이 없다. 가디스는 그 자리를 떠나서 사람들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루운 궁전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곧 알 수가 있었다. 오우터 시가의 중앙에 당당하게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육각형의 거대한 탑, 그 탑이 있는 건물임에 틀림없다. 가디스는 사람들에 밀려, 차츰 루운 궁전 쪽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궁전 주위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예사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없는 그림자에 숨어서 투명 장치의 스위치를 넣었다. 가디스의 모습은 곧 희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정문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정부의 높은 사람인 듯한 인물이 탄 가스터빈 차가 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파수병들이 문을 열고 차려 자세로 서서 차를 통과시킨다. 가디스는 재빨리 그 차의 뒤를 따라 문을 넘어섰다. 첫째 문은 돌파했다. 궁전 안에도 화려한 옷차림을 한 많은 정치가와 군인, 그리고 그 부인들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가디스는 사람들을 부딪치지 않고 걷는데 아주 힘이 들었다. 홀에서는 지금 성대한 연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중앙 테이블에는 황제와 높은 귀족들이 앉아서, 무엇인가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다. 한쪽에서는 악사들이 신나게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가디스는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자꾸 안으로 안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지하실에 통하는 통로를 발견했다. 그는 재빨리 통로를 뛰어 내려갔다. 통로는 도중에서 미로처럼 여러 군데로 갈려 있었다. (자, 어느 쪽으로 간다?) 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때마침 한 통로 저쪽에 쇠로 된 문이 있고, 거기에 3명의 파수병이 가스총을 들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저기다!) 그는 소리 안 나게 프로톤 총을 빼들고, 다이얼을 약하게 해서 급히 쏘았다. (슛!) 푸르스름한 연기 속에 3 명의 병사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가디스는 재빨리 한 병사가 가지고 있는 열쇠로 쇠문을 열었다. 그러나 쇠문 안에는 수십 개나 되는 작은 방들이 죽 잇달아 있었다. 그 어느 곳에 오토가 갇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가디스는 투명 장치의 스위치를 끄고, 모습을 나타내어 큰 소리로 불렀다. '오토, 어디 있니? 나다. 캡틴 퓨쳐다. 대답해라!" 순간, 바로 옆방의 문안에서 응답해 왔다. "대장, 나 여기에 있습니다!" "좋아. 문에서 떨어져 있어!" 가디스는 재빨리 프로톤 총을 자물쇠에다 쏘았다. 자물쇠에서 보라색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자물쇠는 녹아버렸다. 발로 힘껏 차니 문이 꽝 하고 열렸다. "대장, 꼭 구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며 오토가 기쁨에 넘쳐 뛰어나오니, 그 녹색의 눈빛은 더욱 빛이 난다. 이때, 창백한 얼굴을 한 3 명의 젊은 사나이가 오토가 있던 방에서 나왔다. 가디스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이 사람들은?" "가데인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나이는……" 하며 오토는 셋 중에서 눈이 파랗고 얼굴이 잘생긴 청년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 가데인의 과학자 타무어의 아들 주른입니다. 이들은 2 주일 전에 인질로 붙들려 왔답니다. 까닭은……" 여기서 가디스는 오토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그것이 급하다. 잠깐만 기다려, 곧 코메트 호를 부를 테니까."하고 가디스는 포켓 텔리바이저를 꺼내더니, 호출 버튼을 눌렀다. "예, 대장." 곧 클라크의 대답이 들려왔다. "급히 궁전 상공까지 와라. 착륙할 곳은 프로톤 총으로 가리키마. 대지급이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가디스는 오토들을 돌아보며, "궁전의 옥상으로 뒤따라와라!" 하고 재촉하며 선두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복도 모퉁이에서 한 장교와 3명의 병사와 마주쳤다. "포로가 도망친다. 쏴라!" 장교의 외침과 가디스의 프로톤 총에서 파란 광선이 일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4명은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가디스들은 옥상으로 올라왔다. 이미 상공에는 힘찬 엔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코메트 호다. 가디스는 하늘을 향해 프로톤 총을 쏘았다. 강한 광선이 밤하늘을 향해 빛나며, 가디스들이 있는 장소를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코메트 호는 쌕쌕 분사 소리를 내뿜으며, 궁전의 옥상으로 내려왔다. 그 가스의 힘으로 주위의 나무가 휘어지고, 흙먼지가 요란하게 일어났다. 문이 열렸다. "빨리 타라!" 오토들이 뛰어들어갈 동안, 가디스는 프로톤 총을 겨누고서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가디스도 올라탔다. "빨리 상승해라, 클라크!" 코메트 호는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큰 소리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숨을 돌리고 난 가디스는 명령했다 "진로를 가데인으로, 전속력이다!"   ■ 진로를 가데인으로   조금 지난 뒤, 가디스는 타무어의 아들 주른과 마주 앉아 있었다. 주른은 코메트 호 안을 신기한 듯 이리저리 휘둘러본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정말 미래에서 오셨군요. 이런 훌륭한 우주선은 미래의 사람이 아니고는 만들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주른의 눈에 광채가 흐른다. "이처럼 과학과 기술이 발달되어 있는 당신들이라면, 틀림없이 우리들을 구조해 주실 것입니다." "너의 아버지 계산대로 한다면, 이제부터 얼마 있어야 가데인은 폭발하는가7" 하고 사이먼이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2개월도 채 못 남았습니다." 순간 가디스들은 서로 얼굴들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가데인은 왜 폭발하는가? 수성과 충돌하는가7" "아닙니다, 원인은 목성입니다." 하며 주른은 이렇게 설명했다. "가데인의 궤도는 목성의 궤도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데인이 목성에 가까이 갈 때마다 목성의 인력에 끌려서 점점 목성에 가까워집니다. 그 때문에 가데인에는 큰 지진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리고 2개월이 지나면 또 목성에 가까워질텐데,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가데인의 지면의 일부는 떨어져 나가고 말 것입니다." 주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계속했다. "그러니 나중에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바닷물이 지면의 벌어진 곳으로 해서 지하로 흘러 내려가 대폭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가데인은 산산조각이 되고 말아요." "그럼, 너희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을 해보았는가?" "물론입니다. 수십 년 동안 해 보았지만, 결국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태양계 안에 우리가 살 수 있는 행성은 단 1개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성입니다." "지구와 금성은7" 하고 클라크가 물었다. "가데인은 조그만 행성입니다. 지구와 금성은 너무나 커서 중력이 많습니다. 그래서 화성 외에는 살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며 주른은 슬픈 듯 고개를 내저으며 계속했다. "화성은 지금 인구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한데 수백만의 가데인 사람이 어떻게 이주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화성인도 가데인 사람도 굶어 죽습니다. 우리들이 화성으로 이주하자면 결국 화성인을 없애고, 화성을 점령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습니다." 가디스는 무서운 눈으로 주른을 바라보았다. 주른은 다시 계속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문명인입니다. 그런 무참한 짓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 지휘자가 지갈이라는 과학자랍니다." "지갈…… 그랬었구나." 하고 가디스는 중얼거렸다. "지갈은 이미 동료 과학자들에게 명령하여 무서운 독가스를 많이 만들었지요. '이 독가스를 화성의 대기권 안에 부리면 화성인은 하루만에 전멸하고 만다. 그리고 이 독가스는 5, 6 일이 지나면 화학 변화를 일으켜 해로움이 없어진다. 그러면 화성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지갈은 말하고 있지요. 그러나 저와 아버지인 타무어의 생각은 그렇지 않아요." 주른은 분명하게 말하고 가디스들을 쳐다보았다. 사이먼이 물었다. "너의 아버지 계획은?" "아버지는 다른 태양계로 가서,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자는 계획이지요." "다른 태양계로? 주민 모두가7" 하고 놀라며 사이먼은 다시 물었다. "그렇게 많은 우주선을 어떻게 만들지?" "우주선이 아닙니다. 가데인의 위성의 하나인 유클라를 우주선 대신으로 사용하여 만들 작정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수년 전부터 그 계획을 세워, 가데인의 전 주민이 들어갈 수 있는 터널을 유클라 안에 팠습니다. 또 유클라의 북극에는 거대한 원자력 엔진과 분사구를 장치했습니다. 그리하여 유클라를 위성의 궤도에서 날아오르게 하여, 9 광년이나 걸리는 저 먼 시리우스의 태양계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시리우스라고? 그렇다면 어떠한 속력으로도 몇 십 년은 걸릴 거다." "20년 걸립니다. 그러나 그 동안 주민은 모두 인공 동면으로 들어가서 자는 것입니다. 돌볼 사람도 2, 3 명만 남기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의 나이를 먹지 않고 도착할 수가 있지요." 주른은 미소를 머금고 계속했다. "시리우스까지 가면, 거기에는 우리들의 가데인과 비슷한 행성이 있음을 천문학자들의 조사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엄청난 우주계획을 진행시키려 하고 있지요. 그러나……" 여기서 그는 조금 쉬고 나서 또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계획에는 단 한 가지 - 아주 곤란한 일이 있지요. 그것을 해결 못하면 결국 계획 전부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주른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면서, "그리고 만일 실패했을 때는 지갈의 화성 침략 계획이 가데인 의회에서 결정될 것이며, 우리들의 가데인은 문명인으로서 수치스러운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가디스가 급히 물었다. "그럼, 너의 아버지가 해결 못하고 있는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주십시오." 라고 대답하고, 주른은 지금 다가오는 하얀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운 가데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깊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 큰 이주 계획   가데인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화성과 비슷한 아름다운 별이다. 코메트 호는 주른의 안내를 받아, 수도 파보나의 교회에 있는 넓은 정원에 착륙했다. 우주선에서 나오니까, 정원에 만발한 아름다운 꽃과 달콤한 냄새가 코를 스친다. 그 저쪽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수정과 같은 아름다운 집이 보였다. "자, 저쪽으로 가시지요." 주른을 따라서 일행은 그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노인 한 분과 젊은 아가씨가 빠른 걸음으로 마중을 나왔다. 노인은 주른의 얼굴을 보았는지 놀란 소리를 내면서 마구 달려왔다. "주른이 아니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지금까지 어디 있었지? 난 다시는 못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화성인에게 붙잡혔어요. 그런데 이 지구의 분들이 구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초시 통신(시간을 초월한 통신)을 듣고서요." "나의 초시 통신?" 하며 타무어 노인은 놀란 듯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렇습니다. 나는 가디스 뉴턴, 캡틴 퓨쳐라고 합니다. 이들은 나의 부하입니다. 우리는 1억 년 뒤의 세계에서 당신의 통신을 듣고 온 것입니다." 라고 인사를 하자, 타무어 노인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미래에서 오셨다구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실이라면…… 자, 아무튼 저리로 가십시다." 늙은 타무어는 가디스 일행을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모두는 테이블 앞에 앉았다. 가디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당신의 우주 이주 계획은 주른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있어서, 그 때문에 실행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그것만 해결되면 지갈의 무서운 우주 범죄를 막을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에너지입니다. 즉 방사성 물질이지요. 이 행성에는 그것이 부족합니다. 또 이 태양계의 다른 행성에도 귀한 물건입니다. 실은 내 아들 주른을 제 2 행성에 보냈던 것도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답니다." "그래요. 조사 도중에 화성인에게 붙잡혔던 것입니다." 하고 주른이 말했다. "그러나 그 행성에도 방사성 물질은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단 한 가지의 가능한 방법을 생각해 냈지요. 미래가 되면 방사성 물질을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지요. 그리하여 초시 통신으로 그 방법의 가르침을 받아 방사성 물질을 제조하면, 우리들의 위성 유클라를 시리우스로 출발시킬 수가 있으리라 - 어떻습니까? 캡틴 퓨쳐, 당신들은 이미 방사성 물질을 제조하는 기술을 완성하고 있나요7" 하며 늙은 타무어는 열심히 가디스에게 물었다. 가디스는 한동안 말없이 타무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됐습니다, 타무어. 우리들의 과학도 아직 방사성 물질을 제조할 수 없답니다." 그러자 타무어의 입에서 실망에 찬 깊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나이 많은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가다가, 마침내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만다. "아아, 이제는 끝장이다…… 최후의 한 가닥 희망도 사라졌다. 평화도 가데인의 운명도 이제는 끝났다……" 주른은 슬픈 목소리로 외쳤다. "더욱이 내일 가데인 의회에서는 화성을 공격하려는 지갈의 계획이 제출됩니다. 따라서 그 무서운 화성인 몰살 계획이 진행되고 마는 겁니다! 수십만, 수백만이라는 죄 없는 화성인을 이 우주에서 말살시키고 마는 겁니다……" 그러자 클라크가 탁한 소리로 말했다. "타임 엔진을 사용해서 가데인을 미래로 운반하면 어떨까요?" "안 된다. 첫째로, 가데인의 주민 모두를 미래로 운반할 만한 큰 타임 엔진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린다. 둘째로, 가데인이 폭발하는 것은 절대로 막을 수가 없다. 아무리 미래로 운반하여도 없어지고 말 행성이다. 그러니 다른 행성에는 가데인 사람들은 살수가 없다." 라고 말하고 가디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의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떠돈다. "타무어, 당신의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을 만한 방사성 물질,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7" "그 전에 한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첫째, 필요한 방사성의 물질의 양을 정확하게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럼, 가령 그만한 방사성 물질이 손에 들어왔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당신의 초시 통신 장치를 사용하여 시간 속을 운반할 수 있나요7" "뭐라고요?" 타무어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즉 초시 통신 장치를 초시 전송 장치로도 사용 할 수 있는가 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때, 사이먼 박사가 끼여들었다 "가디스,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위험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무어, 당신은 내일 의회에서 이 나의 계획을 발표하십시오. 즉……" 하고 가디스 뉴턴은 그 계획이란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지갈 박사   이튿날, 수친 명의 가데인 남녀가 파보나 시가의 한가운데에 있는 가데인 의사당에 모여들었다. 의사당은 초만원을 이루었고, 공기조차 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의사당 안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얼마 안 있으면 죽고 말리라는 생각에 어느 누군들 기운이 나겠는가. 이윽고 의회는 트럼펫 소리를 신호로 열렸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의장은 의장석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데인의 여러분들, 우리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살아왔습니다. 이 행성은 8주일 후에는 대폭발을 일으키고 사라져 갈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위대한 두 과학자 지갈 씨와 타무어 씨는 가데인의 전 주민을 구하기 위하여 각각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 계획의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의회에서는 이 두 가지 계획 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니 두 분에게 최후 설명을 부탁하겠습니다. 먼저 지갈 씨……" 하고 의장이 자리에 앉자, 건장하고 자신만만한 얼굴의 남자가 불쑥 일어나더니 단 위로 올라간다. "가데인 여러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살아 남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화성인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준비는 벌써 다 되어 있습니다. 의회의 허가만 내리면, 강력한 독가스를 실은 공격 함대는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죄 없는 화성인을 몰살시킨다는 것은 나로서도 결코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화성인이냐, 가데인 사람이냐, 어느 쪽이든 한쪽이 없어져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가데인 사람이야말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인종입니다. 이제는 더 주저할 시간도 없습니다. 화성인 몰살 계획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타무어 씨의 계획은 절대로 실행될 가능성이 없는 계획입니다. 그러니 이미 나의 의견이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끝내고, 지갈은 타무어 쪽을 힐끗 돌아보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다음에 일어난 타무어의 몸은 여위고, 얼굴도 살이 빠지고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여러분들도 나의 이주 계획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방사성 물질의 부족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 않아요." 하고 지갈이 승리했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나는 초시 통신 장치로 미래에다 구원을 청했습니다. 미래의 과학과 기술, 그리고 드디어 이제 1억 년의 미래에서, 우리들의 시대에 구원의 손을 뻗쳐 왔습니다. 저분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하고 타무어는 방청석에 앉아 있는 가디스들을 가리켰다. 가데인 사람들 중에서 놀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고개를 치켜들어 가디스를 보려고 했다. 타무어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분들의 덕택으로 나의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이주 계획에 필요한 방사성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미래에서 왔다는 저들일지라도 방사성 물질을 제조할 수는 없어" 지갈이 고함치듯 외치자, 타무어는 더욱 침착하게 계속했다. "그렇습니다. 미래에서도 방사성 물질을 제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지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방사성 물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물질 - 예를 들면 납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납은 옛날에는 방사성 물질이었던 것도 있었을 겁니다. 지금부터 1 억 년 전은 지금보다 굉장히 많은 방사성 물질이 있었을 것이며, 더욱 10억 년 전에는 필요한 양보다도 더 많이 있었습니다!" 타무어는 소리를 높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미래에서 온 퓨처맨(미래인)들은 우리들을 위하여 10억 년 전의 세계에 가서, 방사성물질을 가져다 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가데인 사람들은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 많은 방사성 물질을 단 1 대의 우주선으로 어떻게 가져올는지요?" 하고 의장은 앉은자리에서 물었다. "우주선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발명한 초시 통신기와 미래에서 온 지구인의 타임 엔진을 쓰면, 10억 년 전의 방사성 물질을 눈 깜짝할 사이에 유클라로 운반할 수가 있습니다." "그 따위 엉터리, 속임수다!" 지갈은 책상을 치며 고함을 쳤다. 즉시 의사당 안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지갈에 찬성하는 사람, 타무어의 계획을 실천해 보자는 사람, 그들은 제각기 소리를 질러가며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면 큰 싸움이라도 벌어지고 말겠다. 의장이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하시오!" 몇 번이나 이렇게 고함을 친 끝에, 겨우 장내가 수습되었다. 의장은 타무어와 캡틴 퓨쳐 쪽을 보면서 엄숙히 말했다. "의장이 결정합니다. 당신의 계획을 실행해 보도록 합시다. 타무어, 만일 지금부터 4 주일 이내에 그 10억 년 전의 방사성 물질을 유클라로 운반할 수 있으면 이주 계획을 실천합시다. 그러나 만약 그 기간이 넘으면 지갈의 계획을 실천하는 겁니다." 가디스는 의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지갈은 사나운 눈초리로 타무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의 지갈의 가슴속에는, (오냐, 반드시 너의 계획을 방해하고 말겠다.) 라는 생각에 차 있었으니까.   * * * * * * * * * * * * * * * * *     ■ 섬으로 귀양   그로부터 5 일 동안 미래인들은 밤낮으로 일을 계속했다. 타무어의 초시 통신기를 물질 전송 장치로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부터 가데인에는 강한 지진이 일어나게 되었다. 목성에 가까이 왔으므로 목성의 인력에 끌려서 일어나는 지진이다. 5 일째에 드디어 작업은 끝났다. 코메트 호에도 타임 엔진에 연결된 물질 전송 장치가 갖추어졌다. 출발은 이튿날 아침 일찍이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출발하고 말았다. 왜냐면 코메트 호를 지키고 있던 주른이 이상한 사람의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뒤쫓아가 보았지만, 그림자는 재빨리 도망치고 말았다. "아마 지갈이 방해하려고 보낸 자일 거다. 더 이상 방해 당하기 전에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곧 출발의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부디 조심해서." "잘 해 보겠습니다." 미래인들은 타무어와 주른의 전송을 받으며 코메트 호에 올랐다. 출발의 초읽기가 시작되고, 곧 이어서 코메트 호는 가데인의 대기권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데인에서 20만 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코메트 호는 정지했다. 가디스는 타임 엔진의 다이얼을 10억 년 전으로 맞추어서 스위치를 넣었다. 즉시 우주 속에 꽉 흩어져 있던 은하가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 시간의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연 눈을 뜰 수 없는 대폭발이 일어났다. 심한 진동이 일어나, 가디스는 앉은 자리에서 튕겨나 벽에 헬멧을 받고서 기절하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가디스는 문득 정신을 되찾았다. 머리가 아직도 핑핑 돌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얼마 동안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주위를 휘둘러보니, 마침 그때 클라크도 오토도 흔들흔들하면서 겨우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우주선 안은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뒤처럼 엉망이었다. 가디스는 오토를 보고, "모두 괜찮은가?" 하고 물었다. "사이먼 박사는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전기의 선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오토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사이먼 박사의 금속상자를 주워 올리면서 대답했다. "알았다." 가디스는 공구를 꺼내서는 재빨리 배선을 고치기 시작했다. 전기가 제대로 전달되자, 사이먼은 곧 의식을 회복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이먼이 물었다. "우주선 안의 어디선가 폭탄이 폭발했다. 아마 지갈의 스파이가 한 짓이겠지. 우리들이 과거의 세계로 가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 거다." 가디스는 사이클로트론 엔진을 조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엔진은 이상이 없군. 충격으로 멈춘 모양이다. 자, 빨리 목적지로……" 라고 말하다가 가디스는 아아 하고 외쳤다. 문득 타임 엔진의 다이얼을 보았을 때, 놀랍게도 다이얼이 30억 년 전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다이얼이 망가진 건가?" "대장, 큰일났습니다! 에너지 탱크가 온통 비었습니다. 앞서의 충격으로 타임 엔진이 전속력을 낸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얼이 고장난 것은 아니겠구나. 우리는 지금 30억 년 전의 세계에 오고 말았다……" 가디스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너무나 뜻밖의 광경에 놀라서 아연해지고 말았다. 먼 저쪽, 우주의 암흑 저쪽에 거대한 푸른 태양이 타고 있다. 그 태양은-가디스들이 잘 알고 있는 오렌지색의 태양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태양의 주위에는 단 한 개의 행성도 없었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태양은 아직 행성이 생겨나기 전의 원시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직 태양계가 생기기 전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장, 빨리 20억 년 미래로 되돌아갑시다." 라고 클라크가 말했으나, 가디스는 고개를 내젓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없게 됐다, 클라크. 에너지 탱크가 온통 비어 있어서야 타임 엔진을 가동시킬 수가 없잖은가." "그럼, 우리는 과거의 세계에 섬 귀양살이를 당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군요." "어떤 행성에라도 착륙해서 연료로 할 금속 원소를 찾으면…… 아아, 그러나 행성 그 자체가 없으니 어쩔 도리도 없구나." 하며 오토는 머리에 손을 얹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가락만 깨물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쟎아." 가디스는 결심을 한 듯, 부하들을 한 차례 휘둘러본다. "사이클로트론 엔진을 일단 분해하라. 그 안에 있는 금속을 연로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대장, 그것 가지고서는 아무래도 모자랍니다." "물론이다. 그러나 행성이 생겨난 것은 대체로 우리들의 시대보다 30억 년 전이라고 계산되어 있다. 그러므로 몇 만년이나 몇 백만 년 돌아가는 도중에 어쩌면 행성이 생겨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거기에서 연료를 찾아낼 수가 있을 거다." "그렇습니다. 과연 우리 대장이다." 모두는 급히 서둘러서 사이클로트론의 분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꺼낸 중요한 연료가 탱크 안으로 넣어졌다. 스위치를 넣으니 연료는 에너지로 변하여, 타임엔진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다시 점점 속력을 올려, 현재를 향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 태양계가 생겼을 때   태양은 별로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먼 저쪽 우주 끝에서 붉은 빛의 별이 한 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수백만 년을 몇 분 정도의 속력으로 보고 있으니까, 움직임이 저렇게 빨리 보이는 거다." 라고 가디스가 설명했다. 그 동안에도 붉은 별은 점점 태양을 향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저대로라면 저 붉은 별은 태양 옆을 간신히 스쳐 지나갈 것이다. 보라! 우리는 지금 태양계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하고 사이먼이 흥분한 소리로 말했다. 지금 바야흐로 붉은 별은 태양과 같은 크기로 되어, 이글이글 타면서 불꽃을 일으키며 태양 곁을 막 스쳐가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태양과 붉은 별은 다 같이, 보고 있는 동안 점점 모양이 비틀어져 갔다. 제각기 자기 쪽으로 가늘고 길게 부풀어올라서 길다랗게 되었다. "서로가 강한 인력에 당겨서 밀물 썰물의 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보라, 고열 가스가 튀어나오고 있다." "아아, 정말이군요. 가스의 덩어리가 엿같이 늘어져서, 별에서 떨어져 나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앗 떨어졌습니다!" 순간 눈을 뜰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고, 우주 전체가 뽀얗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무서운 충격파동이 우주를 타고 와, 코메트 호를 폭풍의 바다에 뜬 나뭇잎처럼 흔들었다. 모두는 눈도 뜰 수 없고, 그만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충격 파동이 지나간 후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 붉은 별은 이미 태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때였다. 태양 주위에는 지금 10개의 작은 불덩어리가 힘차게 타면서 맹렬한 속력으로 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돌면서도 보고 있는 동안에 검게 식어, 작아지면서 단단해져 가고 있다. "행성이 생겨났다. 태양계가 생겨났다!" 누군가의 입에서 감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처럼 훌륭한 우주의 파노라마를 본 것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들이 처음이다!" 모두들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동안에 점점 행성의 속력이 줄어갔다. 태양 주위를 눈이 돌 정도로 빙글빙글 돌고 있던 행성들은 점점 똑똑히 보이게 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타임 엔진의 다이얼을 보니, 그 진행 속도가 느리다. 연료가 또 적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행성들은 이미 움직임을 정지하고 말았다. 시간은 다시 보통의 속도로 되돌아오고 만 것이다. 가디스는 스펙트로 스코프(분광기)를 사용해서 그 행성들을 조사해 보았다. 만일 아직 그 표면이 단단해져 있지 않으면, 착륙하여 연료의 금속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사이클로트론 엔진을 분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펙트로 스코프의 반응을 보았을 때, 가디스는 마음을 놓았다. 바깥쪽의 목성과 토성은 크기 때문에 아직 꽤 온도가 높은 모양이나, 안쪽의 수성․금성․지구․화성․가데인 등의 5 개의 행성은 이미 단단해져 있었다. "됐다. 그러면 됐어. 오토, 코메트 호를 가데인의 표면으로 향해라." 곧 코메트 호는 얼마 남지 앉은 연료로 가데인의 지표에 착륙했다. 굳은 지 얼마 안 된 가데인의 지면은 용암과 현무암이 멀리까지 계속되어 있는 광야였고, 각처에는 화산이 있었으며, 대폭발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물론 아직 숨을 쉴 만한 대기는 없다. 가디스와 오토는 우주복을 입었다. 클라크와 사이먼은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먼저 이제 바야흐로 생겨난 가데인의 지표에 내렸다. "우선 연료로 할 금속을 찾고, 다음으로 방사성 물질의 광맥을 찾자. 이 행성은 아직 된 지가 얼마 안되니 틀림없이 많이 있을 거다." 모두는 급히 광맥을 찾기 시작했다. 가디스의 생각대로 이 시대의 가데인에는 여러 가지 광물 자원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먼저 연료의 금속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방사성 물질의 큰 광맥도 발견했다. 이윽고 코메트 호의 탱크에는 연료의 금속이 꽉 찼으며, 다음은 드디어 목표로 삼은 방사성 물질이었다. 코메트 호는 광맥 바로 위에 착륙하고, 물질 전송 장치를 바로 옆에 설치했다. 그리고 타임 엔진을 가동시켜, 저 먼 미래의 가데인을 향하여 시간을 맞추어 스위치를 넣었다. 부웅- 뱃속을 울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전송 장치는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애타게 고대하던 타무어들의 눈앞에 방사성 물질이 저 먼 시간을 넘어 운송되고 있었다. 보는 동안에 광맥 위의 지면의 색깔이 점점 변해 가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방사성 물질이 시간을 초월해서 운반되고 있는 증거이다. "성공했다!" 가디스들은 기쁨의 함성을 올리며, 서로의 얼굴을 감격에 차 바라보았다.   ■ 우주의 포전   미래인들은 30억 년 전의 세계에서, 정해진 최후의 그 날까지 계속 방사성 물질을 전송했다. 마침내 출발의 날이 왔다. 코메트 호는 다시 원시의 가데인을 떠나, 우주 공간을 날아오름으로써 또 시간 여행에 들어섰다. 이윽고 코메트 호는 그 30억 년 전의 시간 여행을 마치고, 보통의 공간으로 나왔다. 코메트 호의 아래에는 타무어들이 기다리고 있는 가데인이 떠 있었다. 곧 가데인의 대기권을 뚫고 들어가 파보나 시의 교외에 내려앉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그곳에는 타무어를 비롯하여 주요 인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사성 물질은 도착했습니까?" "어제부터 도착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유클라에는 광물을 제련하고, 연료 창고에 넣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말하는 타무어의 얼굴에는 기쁨과 동시에 한 가닥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무어씨? 방사성 물질이 도착되었으니 기쁘지 않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 여러분들의 계획에 어긋남이라도 있는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지갈이……" "지갈이 어떻게 했습니까?" "방사성 물질이 도착된 것을 알고서는 이미 자기 계획은 끝났다고 본 모양이지요. 그래서 화가 난 지갈은 의회의 명령을 어기고 화성 공격 함대를 출발시켰습니다." "뭐라고요! 언제 출발했습니까?" 가디스는 급히 물었다. "20시간 이상 되었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가디스는 휙 돌아서서 코메트 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클라크와 오토, 사이먼도 그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십니까, 캡틴 퓨쳐?" 하고 타무어가 물었다. "물론 지갈을 쫓아가는 거지요. 코메트 호라면 따라붙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갈의 함대는 무서운 독가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당신들은 하루라도 속히 유클라를 출발시킬 준비를 서둘러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서 가디스는 코메트 호에 올랐다. 또 다시 코메트 호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진로를 화성으로 향하고, 맹렬한 속력으로 우주 사이를 헤쳐가기 시작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뒤따를 수 없다. 만일 지갈의 독가스가 조금이라도 화성의 대기에 뿌려진다면, 화성인은 그대로 죽어갈 것이다. 그처럼 무서운 우주 범죄는 결코 일어날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 "발견했습니다. 1시 방향, 거리 백만 킬로미터!" 하고 클라크가 부르짖듯 외쳤다. 텔리바이저의 초점을 맞추자, 거기에 6 대의 우주 순양함이 정확하게 쐐기 모양의 편대를 지어서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화성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다. "프로톤 포 전투 준비! 만일 지갈이 말을 듣지 않거든 쏴라." 가디스는 엄숙하게 명령했다. 코메트 호는 공격 함대의 위를 날아 넘어갔다. 그리하여 맨 앞을 나르고 있는, 지휘자가 타는 기함으로 가까이 갔다. 가디스는 텔리바이저의 스위치를 넣고 말했다 "이쪽은 캡틴 퓨쳐, 지갈은 들어라. 곧 가데인으로 돌아가라." 스피커에서는 즉시 지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다, 캡틴 퓨쳐. 화성 공격의 계획을 포기한다" 라는 응답과 동시에 지갈의 기함은 방향을 바꾸었고, 뒤따르던 함대도 일제히 기함을 따랐다. "너무 순순히 말을 듣는데-" 오토는 이상한 듯 이마를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돌연 조종대를 꽉 앞으로 누르면서 외쳤다. "속임수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갈의 함대에서 뉴트론 총(중성자 총)이 확 불을 뿜었다. 계속해서 다른 함대도 포문을 열었다. 코메트 호는 오토의 훌륭한 조종으로 쏟아져 오는 뉴트론 광선 사이를 잘도 피하면서 날았다. "이 녀석, 이번에는 네가 받아라!" 하고 외치면서, 클라크가 프로톤 포를 쏘았다. 프로톤 광선은 보기 좋게 지갈의 우주함의 사이클로트론에 명중했다. 폭음과 더불어 지갈의 우주함은 불덩이가 되었다. 계속해서 1 대, 또 1대 순식간에 3대가 불타버렸다. 나머지 3대도 떨면서 항복하겠다고 전해 왔다. "좋다. 즉시로 독가스를 내던지고 가데인으로 돌아가라."가디스가 텔리바이저로 명령하자, 하늘에서 거꾸로 한 바퀴 돈 다음 가데인으로 향했다. 뒤에서는 3개와 불덩어리가 언제까지나 타고 있었다.   ■ 가데인 최후의 날   드디어 가데인의 최후의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진은 계속 일어나고, 곳곳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해일이 대륙으로 침범해 왔다. 목성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인력이 강해지고, 가데인의 땅 표면은 비틀어졌다. 그 지진과 폭풍 속을 파보나 시의 우주선은 유클라를 향해서 날았다. 주민을 유클라의 지하 기지로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타무어와 주른 두 사람은 최후의 주민을 운반할 때까지 파보나 시에 머물러 있었다. 아름답던 파보나 시도 이제는 이미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다. 건물은 쉴새 없이 일어나는 지진 때문에 절반 가량 넘어지고, 밀려들어온 물로 해서 반 이상이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기어이 가데인을 영영 이별할 때가 왔다. "아름다운 가데인이여, 마음의 내 고향이여, 잘 있거라!" 타무어와 주른은 코메트 호에 올라타면서 가데인에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그 눈에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코메트 호는 출발하여 무사히 유클라에 도착했다. 모두는 유클라의 사령실에 모였다. 이미 출발 준비는 다 갖추어져 있었다. 사령실의 커다란 스크린에는 크게 부풀어 오른 무서운 목성의 모습이 비치고 있다. 그 주위를 10개의 위성이 돌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보라, 가데인을!" 돌연 누군가가 외쳤다. 이때, 가데인의 표면에 큰 금이 작 갈라졌다 가데인의 대기도 목성의 인력의 영향을 받아 무섭게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거대한 용솟음이 일어나더니 바닷물을 당겨 올리고 있다. "그만 출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고 오토가 초조한 듯 말했다. "아직 조금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돼요. 정확히 알맞은 때에 출발하지 않으면 목성의 인력에 붙잡혀서, 목성의 위성으로 되고 말 위험성이 있습니다." 라고 타무어가 설명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가데인의 최후의 때는 1초 1초 다가오고 있다. 대륙을 바다가 삼키고, 반대로 바다 속에는 새로운 대륙이 솟아오르고 있다. "됐다. 시간이 임박해 왔다. 모두는 자리에 앉아 주시오. 분사의 충격은 몹시 클 것입니다" 하고 가디스가 모두에게 말했다. 타무어는 조종석에 앉았다. 신호 램프는 빨갛게 켜졌다가 꺼졌다가 했다. "출발!" 붉은 램프가 한층 더 밝아진 것과. 사령실 전체가 굉장한 음향에 뒤덮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북쪽 끝에서 눈부신 불꽃이 꽝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거대한 사이클로트론 엔진이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유클라는 지금 막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스크린에 못 박힌 듯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가데인과 목성은 스크린 속에서 서로 부딪칠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섰다. 가디스는 손을 내밀어 텔리바이저의 초점을 맞추었다. 가데인의 땅 표면이 갑자기 크게 보였다. 아아, 지금이야말로 가데인의 땅 표면은 지옥 그대로였다. 바다도 육지도 지하에서 뿜어 오르는 뜨거운 용암 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닷물은 틈 사이로 굉장한 수증기와 함께 흘러 들어가고 있다. "저럴 수가!" 하고 누군가가 신음하듯 외쳤다. 그때, 가데인은 돌연 폭발했다 순식간에 가데인은 무서운 불덩어리로 되고, 계속 무서운 가스 구름으로 되어서는 사방 팔방으로 흩어져 갔다 "아아, 가데인… 아름다운 가데인은 이제 사라졌다……" 주른이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타무어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든 가데인 사람들도 울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애달픔이 끓고 있었다. 순간 그 가스 구름 속에서 상당히 큰 파편이 날아 나왔다 - 그런가 했더니 즉시 목성에 명중했다. 목성의 표면에 거대한 붉은 무늬가 떠올랐다. "목성의 큰 붉은 점은 이렇게 하여 된 것이다. 그 파편은 목성의 지면을 뚫어 용암을 분출시킨 거다!" 하고 가디스가 말했다. 가데인의 파편은 보고 있는 동안에도 우주 공간에서 점점 퍼져나가, 마침내는 목성과 화성 사이에 띠처럼 흩어져 나아갔다. "저리하여 소행성 지대가 생긴 거구나……" "아니, 지구에 가까이 오는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구에 충돌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파편은 지구에는 명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때마침 그리로 오던 작은 쪽 달에 충돌하여 대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파편들이 큰 쪽 달로 쏟아지고, 그리하여 달의 평야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렸다. "과연 그렇다. 달의 분화구는 저렇게 하여 생겼구나! 그리고 지구에는 달이 1개로 된 거다." 가디스 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클라는 목성에서 떨어져 나가, 태양계의 밖을 향해서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됐다. 이대로 속력을 올린다면 이윽고 유클라는 빛 속도의 2분의 1 정도의 속력으로 되어, 9광년의 거리를 약 20년에 날아서 시리우스에 도착한다. 거기에는 우리들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라고 타무어가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는 가디스들을 돌아보며, "감사합니다, 캡틴 퓨쳐 우리들은 영원히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가디스도 인사에 답했다 "우리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시리우스를 쳐다볼 때마다, 태양계에서 태어난 인류의 자손이 거기에서 훌륭한 문명을 이룩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낼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구 사람과 당신들과는 대우주를 넘고 넘어서, 서로 손을 맞잡을 날이 올 것입니다." 순간 감격에 찬 얼굴로 지구 사람과 가데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말없이 서로의 얼굴들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코메트 호는 거대한 우주선이 되어, 위성 유클라를 떠나 우주 공간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서 얼마 안 되어, 가디스들은 토성의 바로 곁에서 대폭발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토성의 위성은 먼지가 되도록 부서지고 말았으나… 어땠을까, 먼지가 된 그 많은 파편은 토성의 인력에 이끌려, 그 둘레에 보기 좋은 둥근 테를 만들고 말았잖는가! 그것을 보고 가디스가 말했다. "마치 우주 이민의 기념비 같구나." 모두는 넋을 잃은 채, 그 아름다운 우주의 기념비를 언제까지나 쳐다보고 있었다.   (끝)   작품 해설   해밀턴에 대하여   이 소설을 쓴 에드먼드 해밀턴은 미국 SF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전부터 활약하고 있는 중진 작가의 한 사람입니다. 미국에서는 지금부터 50년 전쯤 - 1920년대 중반부터 SF가 매우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의 SF는 옛날부터 있었던 모험 소설과 과학적 ․우주적 재미있는 것을 결합시킨 것이 많고, 특히 대우주를 무대로 하여 영웅이 대 활약하는 것을 쓴 소설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러한 SF를 스페이스 오페라(우주 대활극)라고 말했습니다만, 이 소설의 작자 해밀턴도 그 때 가장 인기 있는 작가였습니다. 해밀턴은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썼습니다. 그는 세계가 태양의 폭발이라든지, 우주 전쟁의 결과 파멸 1보 전에 있는 그러한 소설을 잘 썼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파괴자 해밀턴'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소설 「싸우는 미래인」은 그러한 그의 스페이스 오페라 중에서도 특히 인기 있는 '캡틴 퓨쳐 시리즈' 중의 하나로 쓴 것입니다. 훌륭한 과학자이며 더욱이 강한 영웅 캡틴 퓨쳐, 그 부하에 로봇의 클라크, 합성 인간의 오토, 그리고 캡틴 퓨쳐의 의논 상대인 위대한 과학자인 뇌뿐인 학자 사이먼 박사 - 이러한 재미있는 구성의 퓨처맨들이 지구의 위기와 다른 행성이 위태로울 때 출동하는 대활약의 결과, 무사히 사건을 해결하고 세계를 구제합니다. 이 시리즈는 그 때 SF 팬들에게 대단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소설은 우주 모험과 태양계가 생겨날 때의 상황을 시간 여행과 잘 조화시켜, 진지하고 흥미에 찬 작품으로 인기가 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은 지금 와서 보니 여러 가지로 시대에 뒤떨어진 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태양계가 처음 생겨나는 상태라든지, 별들이 서로 우연히 가까워져 왔다든지 하는 것은 옛날부터 생각해 오던 방법인데, 지금에 와서는 대개의 천문학자들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또 태양계가 생겨난 시대도 30억 년이 아니고, 적어도 45억 년부터 50억 년 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2, 30년 동안에 과학이 무서울 정도로 진보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욱더 큰 과학적 공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소설도 충분히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움직임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공상하는 즐거움은 무슨 말을 해도 스케일이 크고 마음이 훤히 트입니다. 에드먼드 해밀턴은 지금도 미국 SF계에서 활약을 계속하고 있는 인기 작가입니다.     싸우는 미래인 E. 해밀턴 작․최 인학 역 아이디어회관 과학문고 166p 19cm (SF세계명작17)   인 쇄      1975년 10월 5일 발 행      1975년 10월 10일 역 자      최 인 학 제 판      명림 정판사 오프셋     장원 정판사 인 쇄      일 신 사 제 본      양지 실업(주)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1098    시간 초특급 -레이 커밍스 작. 이원수 역 댓글:  조회:456  추천:0  2021-09-19
 시간 초특급 -레이 커밍스 작. 이원수 역   책머리에   우리가 가령 5천년 전 옛날로 되돌아가 볼 수 있다면, 단군 임금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백만 년 전으로 갈 수 있다면 공룡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천 년 후의 미래에 가면 어떤 세상을 보게 될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공상의 날개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이 시간의 과거와 미래를 날아가는 이야기가 '시간의 여행' 입니다. 이 책 '시간 초특급' 은 젊은이들이 만든 텔레비전에 비친 이상한 소녀와 경치에서 그것이 현재의 모습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되고 악한을 뒤쫓아 미래에로 혹은 과거로 자유로이 시간을 날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시간의 탑'이나 '시간로켓' 등은 타임머신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악한과 싸우는 용기 있고 착한 젊은이들의 모험을 펼쳐봅시다.     스크린의 미소녀················· 4 타버 박사···················· 16 시간의 탑···················· 28 시간 투시기··················· 51 심야의 탈주··················· 63 기쁨의 재회··················· 75 배반자····················· 82 인디언의 여신·················· 93 타버 제국··················· 101 최후의 통고·················· 109 윈자분해포·················· 113 타버의 최후·················· 120   작품 해설··················· 127   스크린의 미소녀   "야아, 드디어 완성이다!" "그래, 이제 스위치만 넣으면 되는 거야." 두 젊은 청년, 앨런과 에드워드는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두 사람 앞에는 부품들이 드러난 그대로의 커다란 컬러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이 용돈을 아껴서 반년 동안에 조금씩 부품을 사 모은 끝에, 이제 겨우 완성한 것이다. 보기에는 아주 볼품없는 텔레비전이지만, 두 사람의 눈에는 무엇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보물같이 보였다. 여기는 미국의 대도시, 뉴욕의 한복판 센트랄 파크에 가까운 어느 고층 아파트의 한방. 어느덧 한밤중, 12시가 가까웠다. "그럼, 어서 어느 방송국의 심야 방송이라도 비쳐 볼까?" 하며 앨런이 스위치에 손을 대려고 했을 때, 에드워드가 황급히 말렸다. "기다리라구. 이 텔레비전에는 자네 누이동생인 나네트도 꽤 돈을 냈단 말야. 그러니까 시험하는데 참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하면서 부엌 방으로 달려가, 밤참 준비를 하고 있는 나네트를 데리고 왔다. "어머나, 기어이 다 됐군요. 정말 멋져요!․, 하며 나네트는 큰 눈을 반짝였다 "쳇, 자네는 내 누이동생에 대해서 몹시도 신경을 쓰는군." 앨런이 투덜대며 텔레비전의 스위치를 넣었다. 부웅 소리가 나며 스크린이 확 밝아졌다. 세 사람의 눈은 일제히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러나 - "웬일이지, 나오지 않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앨런은 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에드워드는 혹시 배선이 잘못 됐나 하고 여기저기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해요? 아직 병아리 엔지니어들이라서 그렇죠." 라고 나네트가 놀리듯 말했을 때였다. 돌연 스크린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 여러 가지 색깔의 그림자가 휘돌면서 물결치듯 하다가 겹쳐지며 나타났다. "야아, 나온다. 나왔어." "그러나 이건 뭐가 뭔지 알 수 없쟎아․?" 세 사람은 숨을 죽이고 스크린을 지켜보았다. 7가지 색깔 그림자의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더니, 전체가 차츰 안개처럼 흐려져 왔다.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안개의 중앙부에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다른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유난히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곧 이어서 소용돌이치던 희미한 안개가 갑자기 싹 걷히고, 거기에 나타난 이상한 광경!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 울창한 숲, 졸졸졸 흐르는 개울,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곳이 어울려서 피어 있는 잔디밭, 하얀 벽 - 어느 곳의 정원 같았다. 다음 순간, 스크린 중앙의 푸른 그림자가 뚜렷이 그 윤곽을 드러냈다. "아니?" 세 사람은 일제히 놀라서 소리쳤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거대한 수정을 생각케 하는 모습의 아름다운 탑이었다! 그 탑은 온통 푸른빛을 발하며 당당히 솟아 있었다. 곳곳에 창이 있고, 맨 아래 부분에 문인 듯한 것이 보였다. "이게 뭘까?" 앨런이 눈을 크게 떴을 때, 그 문이 옆으로 미끄러지며 열렸다. 그리고 그 곳에 외롭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 그건 소녀였다. 밤과 어둠을 보고 있는 그 얼굴은 꽃처럼 아름답고 싱싱해 보였다. 숱이 많은 금발 머리는, 몸에 착 달라붙은 은백색의 옷 어깨에 늘어뜨려져 있다. 갑자기 화면이 흔들렸다. 그러자 탑과 소녀와 정원 같아 보이던 풍경이 희미해졌다. 세 사람은 자세히 보려고 눈을 비비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스크린에는 어느덧 아무 것도 없었다. "그건 대체 어디였을까? 본 적이 없는 경치였는데?" 세 사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엇에 흘린 듯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느 외국 방송의 전파가 우연히 뛰어들어온 것이 아닐까요?" 하고 나네트가 말했지만,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런 게 아닐 거야. 어딘지 매우 현실을 떠난 그런 풍경이었는걸. 이를테면 먼 별나라라든가, 아니면 아주 먼 미래의 시대라든가……" 그 말에 에드워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무튼 스위치를 끄지 말고, 그대로 두고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하자고. 어쩌면 그 기묘한 광경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이 에드워드의 예감은 바로 들어맞았다. 그날 밤, 새벽 가까이, 세 사람이 피곤해져서 단념하려고 할 무렵- 다시금 스크린이 7가지 색깔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이상스럽고 비현실적인 광경이 돌연 나타난 것이다. 세 사람은 일시에 쏟아지던 졸음이 달아났다. 그들의 눈은 스크린에 붙들어맨 듯이 빨려들었다 밤중에 보던 것과 거의 같은 광경이었다. 역시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밤하늘, 숲, 별빛이 반짝이는 개울물, 그리고 그 거대한 탑- 다만 이번에는 그 탑의 입구가 열린 채로 나타난 것이다. 그 입구에서 젊은 남자가 나왔다. 화면 밖에 누가 있는지 그 쪽을 향해 자꾸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때, 그 뒤에서 소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젊은 남자와 아주 닳은 얼굴이었다. "아아, 아까 본 그 소녀다!" 하고 앨런이 소리쳤다 스크린 속의 남녀는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입구의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세 사람은 기대와 불안으로 몸을 구부리고 스크린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중앙의 탑이 희미해지면서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는 유령처럼 반쯤 투명해지며 유난히 푸른빛을 냈다. 그러자 하얀 벽이 사라져 버렸다. 뜰도. 밤하늘의 별도, 모든 배경이 7가지 색깔의 안개 속에 싸여들어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탑만은 여전히 청백색의 빛을 내면서 화면 중앙에 멈춰 있었다. 그러다가 화면이 갑자기 깜박이면서 환히 밝아졌다. 안개가 걷히고 새로운 광경이 나타났다. 거대한 빛의 탑은 이제는 울창한 숲 속에 솟아 있었다. 환히 빛나는 달빛 아래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다. 세 사람, 아니 다섯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이상했다. "저것 봐, 인디언이 아닌가?" 하고 앨런이 침을 삼켰다. 머리에는 새의 깃털을 꽂고 얼굴에는 물감 칠을 한, 상반신은 맨몸뚱이인 사나이들이었다. 화살을 겨누고, 수풀 뒤에서 거대한 탑을 두려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 인디언 같은 건 없어. 저건 아무래도 4,5 백년 예전의 모습이야:' 에드워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숲과 인디언의 모습은 희미해지면서 사라져 버리고, 배경은 다시 7가지 색깔의 소용돌이로 되돌아왔다. 거대한 빛의 탑은 그대로 중앙에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또 다시 화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번에 나타난 것은 이른 아침의 광경이었다. 어두움 속에 나무들과 수풀이 잠겨 있었다. 꼬불꼬불한 오솔길, 넓은 잔디밭, 희미하게 켜져 있는 가로등- 어디선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돌연 앨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앗! 이, 이건 센트랄 파크가 아닌가? 이 뉴욕의!" "뭐, 뭐라고? 아, 그렇구나. 저 가로등의 모습, 정말 그렇 군." 세 사람은 일제히 소파에서 몸을 앞으로 더욱 구부리고 눈은 스크린에 못 박혀 뗄 줄을 몰랐다. 지금은 그 거대한 탑이, 세 사람이 잘 아는 풍경 속에 당당히 솟아 있는 것이다. 이때, 화면 오른쪽 구석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경찰관이다! 그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거대한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탑의 문이 열렸다. 그 금발의 소녀가 문에서 걸어나오더니, 급히 어두운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문은 다시 닫히고, 탑의 윤곽이 흐릿해지며 흔들렸다. 다음 순간, 탑은 어렴풋하게 흐려지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아니?" "이상해!" 세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어느 새 스크린 속의 하늘은 환히 밝아있었다. 그 아침의 광경 속에 경찰관이 놀라서 실망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거대한 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춘 것이 그에게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여기서 센트랄 파크의 광경은 사라지고 텔레비전의 스크린은 본래의 회색으로 되돌아왔다. 그러고서는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세 사람은 한숨을 내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때, 우연히 밝아져 온 창 밖을 내다본 에드워드가 소리쳤다. "저 저걸 봐! 저 아침 노을의 구름을 보란 말야. 지금 스크린에서 본 것과 똑같은 구름이야. 그러니까 그 화면은 바로 저 센트랄 파크에서 일어난 일이 비친 거란 말이야." 하고 에드워드는 흥분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창 밖에 센트랄 파크 쪽을 가리켰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알겠네." 하고 앨런은 손가락을 젖히며 똑 소리를 냈다. "뭘 알았다는 거지? 어디 말해봐." "그 탑은 말야. 틀림없이 타임머신일 것이네. 말하자면 시간을 날아가는 기계란 말야. 우리가 본 여러 가지 광경은 아마도 센트랄 파크의 어떤 장소에 있어서 미래와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었을 것이네." "그렇다면 그 소녀는 미래에서 온 것이지요. 그렇죠?" 라는 나네트의 말에, 에드워드는 팔짱을 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미래에서? 음,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현대에 왔을까? 단순히 구경을 하러 온 거라고는 할 수 없을텐데 그래! 경찰에 보고해서 그 소녀를 찾도록 해 볼까?" 하고 전화기를 들려고 하는 에드워드를 앨런이 말렸다. "그만두라고. 어차피 믿어 주지도 않을 거야. 그보다 지금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잠시 두고 보기로 하세."     타버 박사   앨런의 말은 바로 들어맞았다. 그날 석간 신문이 다음과 같은 농담 비슷한 기사가 실렸던 것이다. 「유령탑, 센트랄 파크에 출현? 순찰 중의 경찰관이 목격했다고 주장-」 그러나 앨런 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다른 석간 신문의 한 귀퉁이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조그마한 기사였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소녀, 센트랄 파크 부근에서 발견되다. 기억 상실증인지? 즉시 타버 병원에 입원-」   "이건 확실히 그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하필이면 타버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니……." 하며 앨런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침울한 얼굴로 혀를 차는 것을 보고, 에드워드가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타버가 어떻다는 건가?" 그러자 앨런은 말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이윽고 불쾌한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대학 교수였어. 타버 박사는 그때 조수로 있던 사람이야." "그래, 그래서?" "그 자는 꽤 천재였어. 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어떤 학과도 다 뛰어나게 잘했다더군. 그러나 머리는 좋았지만 마음은 간사스럽고 부정한 사나이였어. 그리고……" 여기까지 말하고, 앨런은 왠지 머뭇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나네트가 또렷한 목소리로 오빠를 재촉했다 "오빠, 상관없어. 에드워드에게 얘기해 줘요:' "그래, 말하마. 에드, 사실은 타버란 놈이 말이야, 나네트가 마음에 든다면서 꼭 신부로 데려가겠다고 해 왔었어." "뭐라고?" "그러나 아버지는 타버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물론 나네트도 타버를 몹시 싫어했지. 그래서 깨끗이 거절했었어." "아아, 그것 참 잘했어." 에드워드는 아주 다행이란 듯이 말하고는, 힐끔 나네트를 쳐다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말야……" 앨런은 갑자기 어두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타버란 녀석, 그것에 원한을 품고 아버지의 대학에서 많은 돈을 훔쳐내고는, 그 죄를 아버지한테 뒤집어 씌웠지. 그 때문에 아버지는 직위에서 쫓겨나시고, 그때의 충격으로 중한 병을 얻어 돌아가신 거 야." "아, 그런 나쁜 놈을 가만뒀어?" 하고 에드워드는 주먹을 흔들며 소리쳤다.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리고 타버는 오랫동안 어디에 가서 숨어 있었는데, 요즈음 다시 나타나서 병원을 차렸다네." 라고 말을 끝낸 앨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번의 괴이한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그 소녀를 꼭 만나야 하는데. 과연 타버가 면회를 시켜줄지 어떨지 그게 문제야." "자네는 타버를 만나도 태연할 수 있겠나?" "그야 뭐 시치미를 떼고 있기로 했으니까 걱정 없지." "그럼 좋은 수가 있네. 내가 신문 기자로 가장하고 자네를 따라가겠네, 소녀의 가족을 찾기 위해 신문에 기사를 쓰겠다고 하면, 그 자가 그것까지 안 된다고는 못할 것 아닌가." "글쎄, 잘 될는지……" 아무리 궁리를 해 보아도 다른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결국 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타버의 병원으로 갔다. 석조 건물인데, 6층이나 되는 지나치게 큰 빌딩이었다. 응접실에 안내되었을 때, 우선 눈에 뜨인 것은 대낮인데도 창에 무거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것이었다. 단 둘이 되었을 때, 앨런은 그 블라인드를 슬쩍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이 병원은 이상스러운 구조로 돼 있군. 한가운데가 빈터로 되고. 딴 건물이 서 있어." "에드워드도 같은 말을 했다. "더욱이 저 건물도 괴상하지 않은가. 높이가 6층 높이나 되는데, 창이 하나도 없지 뭔가" 그 높은 건물에는 맨 아래쪽에 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빌딩 쪽도 2층에서부터 위로는 창이 없었다. 마치 뜰에 있는 건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은 설계로 되어있는 것이다. "가끔 이 병원에 대해서 묘한 소문이 들리던데 과연 그럴 듯한 일이야." "묘한 소문이라니?" "이 병원에는 유령이 나온다는 거야." 하고 앨런이 말했을 때, "거짓말이야. 유령이란 게 어디 있어요. 어른들이 미신을 믿는군요"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났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는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 싱글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 "넌 누군지?" "난 맹장 수술을 하고 입원해 있는 거여요. 찰리라고 해요. 곧 퇴원하게 되지만, 저어 아저씨 이상해요." 하더니 소년은 발돋움해서 앨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 이 병원의 일은 뭐든지 다 잘 알고 있어요. 정말이지 유령 같은 건 없어요. 단지 밤중이 되면 가끔 이상한 소리가 나기는 하지만요" "어디서?" "저 창문 없는 건물 속에서요" "그래 ? 저 집안에는 무엇이 있지?" 그러자 찰리는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다. "난 보지 못했어요,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원장 선생님과 몸집이 큰 인디언 조수뿐이거든요. 그 속에서 무엇인지 굉장한 비밀 실험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면서 찰리는 자신만만하게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다가 대낮에도 이렇게 무거운 블라인드를 쳐놓고 내다보지 못하게 하고 있잖아요. 밤이면 더해요. 창이나 문도 모두 쇠를 잠가서 아무도 이 병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까요. 그렇지만요……" 찰리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가만가만 속삭였다. "뒷문은 달라요. 그 문만은 안에서 고리를 벗기면 열리거든요." "넌 참 잘 알고 있구나. 그밖에 또 무슨 눈치챈 것은 없니?" "있어요, 또 있어요!" 하며 찰리는 눈을 빛냈다. "아주 예쁜 누나가 있어요. 어제 아침에 데려 왔어요. 그런데 좀 이상해요. 맨 윗방에 자물쇠를 걸고 가둬 버렸어요." "허어, 정말 이상한 일이구나." "그 원장 선생님은 나쁜 사람인 것 같아요. 그 예쁜 누나가 아주 무서워하고 있었거든요. 난 그 누나를 구해 주고 싶었어요." "이 녀석, 제법 어른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사실 말이지, 이 아저씨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럴 까닭이 있어서 말야." "앗, 아저씨들은 경찰이셔요? 저는 말하겠어요. 전 원장 선생님이 참 싫어요. 그러니까 저도 도와드리겠어요:' 이때, 복도에 발자국 소리가 났다. 앨런은 황급히 찰리에게 말했다. "고맙다. 그럼 찰리, 오늘 밤 10시에 뒷문을 살짝 열어 주겠니 ? 부탁한다." "좋아요,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10시라고 그러셨죠?" 하고 찰리는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그러자 찰리와 엇갈려서 몸이 비대한 검은 수염의 사나이가 들어섰다. "여어 타버 박사, 오랜만입니다" 하며 앨런이 손을 내밀었으나 타버는 그 손을 냉정하게 피했다. "난 자네보다 나네트를 만나고 싶네 그래, 오늘은 대체 무슨 용건인가?" "사실은 어제 여기 기억상실의 소녀가 들어왔지요? 그 때문입니다. 친구인 신문 기자 에드워드가 꼭 크게 기사를 써서 가족을 찾아주고 싶다는군요. 그래서 그 소녀를 만나러 온 겁니다" 타버는 순간 움찔하는 것 같았으나, 곧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기억상실의 소녀? 그런 사람은 여기에 없어." "숨겨도 소용없어요. 우리들은 경찰에서 확인을 하고 왔으니까요. 아니, 우리한테 만나게 하고싶지 않은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어." "역시 입원해 있는 거죠? 정말 면회를 시켜 주지 않겠다면 경찰에서 정식 허가를 맡아오는 수 밖에……" 앨런은 일부러 경찰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타버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알았다구. 하는 수 없지. 만나게는 해 주겠지만 5분 동안만이야. 곧 치료를 시작해야 하니까." 하며 타버는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6층까지 데리고 갔다. 긴 복도를 걸어서 맨 끝의 병실 앞에까지 오자, 맞은쪽 문에서 커다란 몸집의 인디언 사나이가 얼굴을 쑥 내밀었 다. 찰리가 말한 타버의 조수임에 틀림없다. 그 큰 사나이는 두 사람을 쏘아보고 있었다 타버는 그 사나이에게서 열쇠를 받아들더니 병실 문에 꽂으면서 이렇게 변명을 했다. "기억 상실자는 곧잘 도망을 치려고 하지. 그래서 감금해 놓고 있는 거야."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앓아 있던 소녀가 놀란 듯이 일어섰다. '역시 어젯밤 텔레비전에 나타난 그 소녀다!' 앨런과 에드워드는 서로 눈짓으로 이렇게 주고받았다. 물결치는 금발, 파란 큰 눈동자, 은색의 옷. 날씬하고,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름이 뭡니까?" 앨런이 말을 건네자, 뒤에서 타버가 말했다. "소용없어.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아. 어딘지 먼 나라 사람 같으니까." 소녀는 눈을 크게 뜨고, 한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는 공포와 증오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타버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앨런을 보는 소녀의 눈은 그 무엇을 호소하는 듯이 보였던 것이다. "이젠 됐지?" 하고 타버는 초조해하며,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문이 닫힐 때까지, 낯선 그 아름다운 소녀는 애원하듯 앨런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만나세, 앨런군. 그러나 이번에 또 올 때는 꼭 나네트를 데리고 와 주었으면 좋겠네." 타버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뻔뻔스럽게도 이런 말을 한다. 두 사람은 울화가 치미는 것을 꾹 참고 견디었다. 병원을 나섰을 때, 드디어 에드워드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놈은 정말 돼먹지 못한 놈이야. 두 번 다시 나네트의 말을 해 봐라, 가만 두지 않을 테다." "이봐,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구. 그런데 그 빛의 탑에서 나온 소녀 말이야, 타버는 그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애 . 그놈이 하는 짓이니 반드시 무슨 흉계를 꾸며서, 그 곳에 감금해 놓은 것이 틀림없어." "그럼, 그 소녀를 어떻게 해서라도 구출해 내자는 말인가?" "그렇다네. 오늘 밤 10시, 타버 병원 뒷문으로 침입한다. 찰리가 아마 잘 해 줄 걸세."   시간의 탑   그날 밤늦게, 거리에 인적이 끊어졌을 때, 어둠을 타고, 앨런은 타버 병원 뒷문에 가만히 다가갔다. 에드워드는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놓고, 나네트와 함께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나네트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뒤에 남아 있기로 한 것이다. 앨런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바늘은 정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권총을 빼들고 조그만 소리로 찰리를 불렀다. "됐어요, 아저씨! 문고리를 벗겨 놓았어요." 문안에서 찰리의 나지막하지만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서니. 어두운 전등 밑에 찰리가 서 있었다. "고마와. 아무도 보지 않았겠지?" "네, 모두들 자고 있는 걸요." "됐다. 그럼 얼른 그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방으로 가자. 네가 안내를 좀 해 줘."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지금 그 곳에 없어요. 조금 전에 원장 선생님과 운커스, 그 인디언 조수가 데려가 버렸어요." 앨런은 아차 싶었다 "어디로 ? " "저기 창문 없는 실험실로요. 그 안에 가둬놓고 곧 돌아왔나 봐요." "음, 기어이 무슨 흉계를 시작하려는가 보군.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냐. 찰리, 안뜰로 안내해 주겠니?" "그래요. 절 따라 오셔요." 둘은 발소리를 죽여 가며 복도를 걸어나왔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몇 번이나 꼬부라져서 안뜰로 나왔다 바로 눈앞에 높다란 실험실 건물이 덮쳐 누를 듯이 시커멓게 솟아 있다. "문은 어디 있니 ?" "왼쪽에 있어요." 둘은 건물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림 너는 병원 쪽을 지켜보고 있거라." 라고 찰리에게 말하고, 앨런은 가만가만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문은 밀어도 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앨런은 어둠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타버가 언제 불쑥 나타날지도 모른다. 어서 빨리 감금된 소녀를 구해내야 하는데……' 이제 최후의 수단은 문을 부수는 길밖에 없다. 다행히 문은 나무로 되어 있으니까 몸으로 부딪쳐서라도…… 앨런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가, 몸을 웅크리고 어깨를 들이대듯하며 문으로 돌진했다. 콰앙 ! 조용한 안뜰에 지나치게 큰 소리가 울렸건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앨런이 다시 한 번 돌진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앨 런 앞에는 키가 큰 사나이가 서 있었다 "앗, 운커스!" 앨런도 놀랐지만, 키 큰 인디언은 더욱 놀란 모양이었다. 입을 벌리고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때를 놓칠세라, 앨런은 재빨리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권총을 쑥 뽑아들었다. "움직이지 말고 손들엇!" 키 큰 사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그것을 보고 찰리가 소리쳤다. "잘했어요 ! 아저씨, 잘 하시는데요." "쉿, 큰 소리를 내면 안 돼" 하고 앨런은 재빨리 실험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 아름다운 소녀는? 과연 거기에 있었다 놀람과 두려움에 와들와들 떨며 벽에 딱 붙어 있었다. 그러나 뛰어든 사람이 앨런인 줄 알자, 안심하는 빛이 눈에 나타나 보였다. "찰리, 얼른 데리고 나가! 빨리빨리!"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소녀는 앨런이 자기를 구하러 와 준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찰리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앨런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권총을 겨눈 채, 슬금슬금 문 앞으로 뒷걸음쳐 갔다. 이때, 비로소 앨런은 이상한 것에 눈길이 갔다. 두 손을 쳐들고 있는 키 큰 사나이 뒤에, 그 뒤에 높이 솟아 있는 무서우리만큼 큰 시꺼먼 물체- 로켓이다! 삼각형의 날개가 양쪽에 나와 있고, 아래쪽 끝에는 분사관처럼 보이는 것이 붙어 있었다 끄트머리 쪽은 6층 모두를 뚫어낸 높은 천장에 닿을 것 같다. '아니, 이런 거대한 로켓이 어째서 천장이 있는 방안에 놓여 있는 것일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라는 의문이 앨런의 머리 속을 스쳐갔다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서 보니 주변이 어수선했다. "아저씨. 빨리 가요. 모두들 눈치 챈 것 같아요." 뒤돌아보니 거의 모든 창문에 불빛이 환해지고, 환자와 간호원들이 얼굴을 내밀고서 보고 있었다. 떠들썩한 소리는 점점 커져왔다. "찰리. 어서 도망칠 곳을 가르쳐 줘." 앨런이 말했을 때, 돌연 뒤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 운커스라는 큰 사나이가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병원 쪽에서 땅딸막한 큰 사나이가 달려왔다. 타버였다. 앨런은 슬쩍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타버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실험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니, 이상한데?' 앨런은 갑자기 호기심에 끌려, 위험한 것도 잊고 살금살금 실험실 문으로 돌아가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타버가 바야흐로 그 시꺼먼 로켓 속으로 뛰어들고 입구가 닫히는 순간이었다 '저 녀석이 어떡할 셈이지?' 그러자 다음 순간, 뜻밖의 일이 거기서 일어났다. 욍, 윙, 윙, 윙, 윙, 위위위위- 앓는 듯한 소리가 로켓 안에서 들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로켓의 모양이 희미해져 가는 것이었다. 뒤이어 유령처럼 흐릿한 반투명으로 변하더니, 획 지워버리듯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하……!" 앨런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랬구나. 그게 예사 로켓이 아니었어. 소녀가 나온 그 빛의 탑처럼 역시 일종의 타임머신이었던 거야.' 날개와 분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 시간을 날아갈 뿐 아니라 공간도 움직이도록 개조한 것이 분명하다. 즉 '시간 로켓'인 것이다. "아저씨, 빨리요!" 찰리에게 소매를 이끌지라 비로소 앨런은 정신이 났다. "이쪽이어요. 이쪽." 앨런과 소녀는 황급히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복도를 뛰어, 가까스로 뒷문을 빠져나와 병원 밖으로 뛰쳐나왔다. "찰리, 고마왔어! 이젠 안심이다. 은혜는 꼭 갚을테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줘. 알겠지?" 손을 흔드는 찰리를 뒤로하고, 앨런은 소녀를 부축해서 에드워드와 나네트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에드워드와 나네트는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걱정하고 있었다." "오빠, 무사하셨군요." 두 사람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앨런은 소녀를 차 뒷좌석으로 태웠다. 소녀는 충격과 추위 때문인지 새파래져서 떨고 있었다. "나네트, 너의 외투를 덮어 주렴." 라고 말하고, 앨런은 핸들을 잡았다. 차는 인적이 끊어진 뒷골목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앨런은 타버 병원에서 일어난 일을 두 사람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이미 이 괴사건의 내용을 대강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 아름다운 소녀는 시간을 날아가는 탑에서 다른 시대, 아마도 먼 미래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악한 타버 박사도 시간을 나는 장치-공간도 날 수 있다는 점에서 탑보다도 뛰어난 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소녀는 확실히 타버를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몹시 무서워하고 미워하기까지 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타버가 꾸미고 있는 흉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말을 모르는 이 소녀로부터 그런 일을 어떻게 들어볼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런데 앨런, 자네는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 하고 에드워드가 물었다 "우선 이 소녀를 우리 아파트에 숨겨둬야겠지." 차는 밤의 대로를 달려, 차츰 센트랄 파크로 가까이 가고 있다. 이 때, 나네트가 소리쳤다. "오빠, 이 아가씨가 무엇인지 내게 말을 하려는가 봐요." 하며 소녀에게 상냥히 웃어 보였다. 그것에 용기를 얻었는지 소녀는 더듬더듬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기묘한 억양으로 가득 차 있어서 전혀 뜻을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음악과 같아서 귀에 매우 듣기 좋았다. "리어. 리어." 소녀는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풀이해 말했다. "어머, 이 아가씨 이름이 리어인가 봐." 하며 나네트는 몸짓 손짓으로 리어와의 회화에 정신이 없었다. 돌연 나네트가 소리쳐 말했다. "탑이란 말을 알았나 봐. 이봐요 리어, 왜 그래요?" 리어는 차창 밖으로 센트랄 파크의 숲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타워, 타워!" 하며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앨런, 어쩌면 그 빛의 탑이 또 센트랄 파크에 나타나는 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참이야. 좋아!" 앨런은 센트랄 파크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그 거대한 빛의 탑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앨런과 그의 친구들은 낙심을 하고 되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리어는 아직도 차의 문을 덜컥덜컥 밀어 대면서, "타워, 타워 ! " 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밖에 나가고 싶은 모양이야. 하고 싶은 대로 해 줘 보자구. " 문을 열어 주자, 리어는 기쁜 듯이 밖으로 뛰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모두 나와 달라는 듯이 손을 쳤다. 모두 차를 내렸다. 그러자 리어가 앨런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디로 데리고 가고 싶어하는 듯했다. "리어는 이 근방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지?" 하고 에드워드가 나네트에게 속삭였다. 세 사람은 곧 리어를 따라 나무 그늘 밑으로 해서 오솔길을 지나갔다. 곧 넓은 잔디밭에 나섰다. 가로등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아, 여기는…… 텔레비전에 비친 그 곳이 아닌가!" 앨런과 에드워드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럼, 역시 그 탑이 이제 곧 여기에 나타나겠구나." "그럴지도 모르지. 리어는 그걸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군."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잔디밭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위잉, 위잉!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희푸른 거대한 빛의 기둥이 희미하게 흔들리더니, 보고 있는 동안에 점점 탑의 모양으로 변해 왔다. 다음 순간, 그것은 확실한 빛의 탑이 되어 잔디밭 위에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오오!"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는 '시간의 탑'의 거대함에, 앨런 일행은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시간의 탑 문이 스르르 옆으로 열리더니 리어와 비슷한 청년이 나타났다. "선!" 리어는 반가운 듯 소리치며 달려가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위이, 위위 - 시간의 탑 바로 옆에, 또 다른 거대한 희푸른 그림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점점 로켓과 같은 모양으로 변해 갔다. "아아, 타버의 시간 로켓이다!" 앨런이 소리치기가 바쁘게 고체로 변한 시간 로켓의 문이 썩 열리면서, 3명의 사람이 우르르 지상에 뛰어 내렸다. 리어가 비명을 질렀다. 시간의 탑 청년이 앨런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다. "에드워드, 어서 피해라!" 하고 소리치고 나서, 앨런은 나네트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다가 그만 나네트가 돌에 걸려 넘어졌다. 앨런은 얼른 나네트를 붙들고 일으키려 애를 썼다. 시간 로켓의 세 사나이가 두 사람을 뒤쫓아왔다. 타버와 인디언 키다리, 또 한 사람, 짐승의 털가죽을 몸에 두른 원시인 같은 사나이였다. "야앗!" 털가죽의 사나이가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돌도끼를 쳐들었다․ 앨런은 재빨리 돌도끼를 어깨로 받아넘기고는 넘어지면서 권총을 쏘았다. 가슴에 총탄을 받은 털가죽의 사나이는 '으악' 소리치며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그러나 이때 나네트는 타버에게 붙잡혀 시간 로켓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오빠, 에드워드, 저 좀 도와 줘요!" 인디언의 큰 사나이와 맞붙어 싸우고 있던 에드워드는 비명을 듣고, 필사적으로 인디언을 밀어젖혔다. "타버, 거기 서라!" 그러나 타버는 나네트를 안고, 한달음에 시간로켓 입구로 숨어 들어가고 말았다. 뒤쫓아간 에드워드도 정신없이 그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뒤이어 인디언도 시간 로켓으로 들어가자, 입구의 문이 닫혔다. "큰일 났구나. 나네트, 에드워드!" 어깨의 상처를 입고 정신을 잃었던 앨런은 벌떡 일어나서 시간 로켓을 향해 뛰어갔다. 리어와 시간탑의 청년이 앨런을 붙잡고 말렸다. 우~우~ , 우~ 잉- 타버의 시간 로켓은 큰 소리를 내면서, 보고있는 사이 희미해져서 이내 획 사라져 버렸다. "두고 보자, 타버놈 !" 앨런은 털썩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상처의 아픔이 새삼 느껴져 왔다. 결국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그만 픽 쓰러지고 말았다. 놀란 리어와 청년은 급히 앨런을 안아들고, 시간탑 속으로 옮겼다. 앨런은 문득 눈을 떴다. 눈앞이 온통 핏빛으로 새빨갛다. "불이 났다!" 하고 황급히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겨우 알았다. 머리 위에 붉은 등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앨런은 그 붉은 광선을 쬐며 새깃처럼 부드러운 침대에 뉘어져 있는 것이었다. 어깨로 손을 가져가서 만져 보니, 상처는 거의 다 나아 있었다. 아프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붉은 광선이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효력이 있는 것 같았다. 앨런은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쇠붙이로 된 벽과 천장과 방바닥. 창과 문은 모두 꼭 닫혀 있었다. '음, 여기는 시간의 탑 속이다!' 앨런은 그제야 정신이 났다. 침대에서 가만가만 내려오자, 덜덜덜 작은 진동이 느껴져 왔다.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간의 탑은 지금 시간 속을 마구 달리고 있는 거다.' 앨런은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이 탑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일까? 과거로 달리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를 향해 달리는 걸까? 저쪽 벽에는 수없이 많은 다이얼이 붙어 있고, 그 앞에 리어와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앨런이 일어난 걸 알았는지 리어가 웃는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앨런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리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선." 하고 리어가 청년을 소개했다. "나는 앨런이라고 합니다. 구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 선이란 청년은 리어와 닳은 얼굴이었으므로, 어쩌면 리어의 오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선은 빙긋이 웃음을 띠며 미터기가 하나를 가리켰다. 1980 이란 숫자가 보였다. '그렇다. 이 탑은 지금 미래를 향해서 가고 있는 거다 아마 자기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앨런은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몹시 안타까웠다. 그들의 세계는 현대의 말 같은 건 죄다 잊어버린 먼 미래에 있는 것이다. 이때, 갑자기 앨런은 누이동생과 친구의 일이 생각났다. "나네트, 에드워드, 지금 어떻게 하고들 있을까?" "나네트? 에드워드?" 하며 리어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리어 ! 말만 통할 수 있다면…… 나는 나네트와 에드워드를 한시 바삐 구해내야 해. 어떻게든 나네트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해." 하면서 앨런은 자기도 모르게 리어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리어는 앨런이 하고 싶어하는 말을 어렴풋이 나마 알아차린 것 같았다. 갑자기 눈을 빛내며 2층으로 올라가더니, 낯익은 듯한 외투를 들고 내려왔다. 리어가 구출되었을 때, 나네트가 입혀 준 바로 그 외투였다. 리어는 그것을 가리키고, 다음은 연대를 표시하는 미터 기기를 손가락질하며, "예스, 예스!" 하며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했다. 앨런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음, 이 외투가 있으면 나네트가 어디 있는지 곧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 라고 깨닫자, 앨런은 우선 안심이 되었다. '아마 자기들의 세계에 돌아가서 어떻게 도와주겠지……' 앨런이 안심하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리어는 미소를 머금으며 이번에는 앨런의 손을 이끌고 통 모양으로 생긴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는 두 사람을 시간의 탑 꼭대기에 있는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곳은 사방의 벽에 투명한 특수 유리가 끼워져, 시간탑의 밖이 한눈에 바라보이게 되어 있었다. "아앗!" 밖을 내다보았을 때, 앨런은 너무도 이상한 광경에 기절할 듯 놀랐다. 마치 영화 필름이 빠른 속도로 스크린에 비춰질 때처럼, 바깥의 광경이 어지럽도록 빨리 변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센트랄 파크를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이 점점 높아지고 모양을 바꾸며, 보고 있는 사이에 미래적인 건물로 되어 갔다. 한 순간마다 광경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데, 그것은 낮과 밤이 급속도로 이어져 가기 때문이리라. 앨런은 얼핏 옆에 있는 연대 미터기에 눈이 갔다. 숫자가 자꾸 늘어 나가고 있었다. 1995- 2000- 2005 앨런은 지금 단 몇 초 동안에 몇 년 치의 광경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방의 변화에 속도가 부쩍 높아졌다. 시간의 탑이 속력을 더 낸 것이다. 주위의 광경이 몽롱하게 7가지 빛깔로 흐려지더니, 드디어는 흰 회색 한 가지 빛깔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빛깔이 완전히 섞이면 회색이 된다.' 라는 빛깔의 법칙을, 언젠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생각났다. 이제야말로 눈에 보이는 것은 꾸불꾸불한, 형태로 변한 미래적인 빌딩의 희미한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2100- 2200- 2300 도시는 자꾸 거대한 것으로 되어 갔다. 빌딩의 그림자는 점점 높이를 더하여, 마침내는 시간탑의 3배나 되도록 높아졌다. 빌딩들 사이로 고가 도로의 띠가 높게 낮게, 마치 거미줄처럼 나 있었다. 시간탑의 속력이 더욱 올라갔다 3000- 3200- 3400 이 근처에까지 왔을 때, 빌딩의 그림자의 변화가 느려져왔다. 도시 문명은 드디어 절정에 이르러, 진보가 멈추어져 버린 것이다. 4400-~ 4600 ~ 4800 빌딩들의 여기저기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류의 문명은 결국 퇴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5000-5200-5400 이제야 도시는 제 모양이 잃게 되고, 시간의 탑 주위에는 거대한 빌딩의 폐허가 질펀하게 널려있었다. 여기저기에 숲이 나타났다. 빌딩이 폐허는 차츰 수풀에 묻혀 들어갔다. 6700-6800 갑자기 주위의 광경이 회색에서 벗어나 7색으로 물들었다. 시간의 탑 속력이 떨어진 것이다. '드디어 목적지에 가까워졌나 보다.' 앨런은 그제야 자기 정신으로 되돌아온 듯 눈을 비볐다. 리어는 앨런을 이끌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해서 아래로 되돌아왔다. 아래서는 선이 긴장한 얼굴로 바쁘게 미터기와 다이얼을 조절하고 있었다. 시간의 탑은 점점 속력을 늦추었다. 6990-6995-7000 미터기가 7012를 가리켰을 때, 선은 레버를 당겼다. 진동 소리가 딱 그쳤다. 앨런은 한순간 어지러움을 느꼈으나 곧 나았다. 문이 스르르 옆으로 열리며 따뜻한 햇빛이 환히 흘러들었다. 앨런은 선과 리어의 팔을 붙들고, 5천년 미래의 센트랄 파크에 조심조심 내려섰다.     시간 투시기   울창한 숲,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처음 보는 꽃들이 어울려서 핀 넓은 정원,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하얀 벽. "아아, 이 광경은……" 앨런은 곧 기억이 났다. '우리가 컬러 텔레비전으로 본 맨 처음의 화면이 여기였었구나. 하긴 그때는 밤이었지만……' 앨런은 강한 태양 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7012년의 광경이 자연의 장난에 의하여 5천년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앨런들의 시대, 즉 20세기에 다다른 것이다. 어쩌면 저 거대한 시간의 탑이 시간을 뛰어 넘음으로써, 자연의 균형이 일시적으로 깨어진 때문인지도 모른다. 앨런은 리어와 선을 따라 하얀 벽의 문을 빠져나갔다. 눈앞에는 평평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게 5천년 이후의 뉴욕인가?" 하고 앨런은 불현듯 소리내어 외쳤다. "뉴욕? 누야크?" 하며 리어가 돌아다보며 말했다. 이 시대에는 뉴욕이 변하여 누야크로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그 뉴욕이 아직 그대로 있을 때, 여기는 맨해튼섬이라고 불린 큰 섬이었건만 지금은 빌딩의 무리가 깨끗이 사라졌으므로 거의 전부가 한 눈에 보였다. 멀리 조용한 허드슨강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곳곳에 잘 갈아놓은 밭이 보이고, 여기저기에 추녀가 짧은 석조의 집들이 몇 채씩 모여 서 있었다. 앨런은 그 집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여기저기 창문에서 주민들이 얼굴을 내밀고, 어떤 사람은 손을 들어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몸에 착 달라붙은 은색의 옷, 흰 유리 구두,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여자들은 길게 늘어뜨린 것 외에는 모두 똑같은 복장이다. 어른도 아이들도 이마가 넓으며, 20세기 사람들보다 지능이 퍽 높은 것 같았다. 앨런은 신기해하며 유심히 바라보는 주민들 사이를 지가, 하나의 커다란 건물로 안내되었다. 긴 염소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마중을 나왔다. 리어는 반가운 얼굴로 노인을 얼싸안고 무슨 소리인지 속삭였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앨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리어를 위험에서 잘 구해 주셨소. " 이 말을 듣고 앨런은 깜짝 놀랐다. 노인의 말은 조금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훌륭한 영어 그대로가 아닌가. 노인의 이름은 폴이라고 했으며, 리어와 선의 할아버지였다. 폴 노인은 이 시대의 드문 대과학자의 한 분이었으며, 시간 여행의 방법도 그가 발명한 것이었다. 그 시간의 탑을 만든 사람도 폴이란다. 그리고 몇 번이나 20세기를 찾아갔을 때, 영어를 배워 익혔다는 것이다. "그 시간 여행의 방법을 응용하여, 나는 '시간투시기'라는 것도 만들었소. 말하자면 시간의 과거와 미래를 어떤 먼데서라도 볼 수 있는 기계라고나 할까." 하며 폴 노인은 앨런을 위로해 주려고 애쓰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만 있으면 당신 누이동생이나 친구가 있는 곳도 찾아낼 수가 있을 거요. 지금 나의 제자 렌쯔에게 기계 준비를 시켜 놓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앨런은 노인의 친절에 깊이 감사를 표하며, 전부터 품고 있던 커다란 의문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저어, 리어와 여기 여러분은 저 악한 타버 박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자, 노인의 얼굴은 금방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지더니 더듬더듬 얘기를 시작했다. "오래 전에 내 아들, 즉 선과 리어의 아버지가 시간의 탑을 타고 당신네 시대, 1960년대를 찾아간 일이 있었소. 그런데 몰래 한 사나이가 시간의 탑에 올라타고 이곳으로 밀행을 해 왔었소. 그 자가 저 타버였지요. 그 놈은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서, 처음에는 얌전하게 있길래 믿고 여러 가지로 편의를 보아주었던 거요. 그러나 얼마 후에는 악인의 본성 을 드러내어 우리가 발견한 시간 여행의 비밀을 훔쳐내어 자기 손으로 '시간 로켓'을 만들어서는 도망쳐 간 것이오." 라고 말하는 노인의 눈에는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뿐이 아니오, 우리 리어에게 결혼을 강요하다가 듣지 않으니까 그 앙갚음으로 리어의 아버지를 죽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금과 다이아몬드 등의 보석을 몽땅 훔쳐갔다오." "아아, 그러면 저와 사정과 똑 같군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악독한 타버를 반드시 멸망시키고 말겠다고 하늘에 맹세했소. 그러나 나는 이미 늙어서 시간탑을 탈 수가 없고, 선은 시간탑을 지켜야 하니까 항상 그것을 타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그러니 결국 리어가 모든 것을 맡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거요."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계속했다. ' "그러나 리어의 힘으로는 타버를 쓰러뜨리기에는 힘에 겨운 모양이오. 그놈이 당신네 시대에 병원을 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리어를 보내봤지만, 결국 속수무책이었소. 만일 당신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리어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형편이오." 여기서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분한 듯이 흰 수염을 떨었다. "또 한 가지 억울한 일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무기가 없는 일이오. 오랜 평화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무기 만드는 과학은 필요가 없었다오." "타버란 놈이 그렇게도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물론이지. 울트라라는 미사일이요. 타버는 수소폭탄의 몇 천 배의 위력을 가진 초강력 병기를 발명한 모양이오. 게다가 타버는 당신네들 시대와는 달리, 2440년대의 뉴욕에 강력하게 무장을 한 근거지를 갖고 있다오. 그것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거요." "시간 투시기로 다른 시대를 찾을 수는 없는가요?" "그게 원통하게도, 그 기계는 무엇이든 실마리가 될 것이 없이는 찾으려는 걸 찾아내지 못하는 거요. 물론 시간의 탑을 미래로 가져가 보기도 했지. 그랬지만 미래는 어디까지 가도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되고 있어서 무기 같은 건 하나도 없단 말이오. 사실 과거에는 확실히 무서운 무기가 있었어. 기록에 의하면 5천년 경에 어떤 물질이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원자로 분해되어 버리는 비밀 병기가 발명됐다고 하오. 그런 무기만 있으면 좋겠는데, 불행히도 그것이 발명된 시대가 확실치 않단 말이야. 첫째 그걸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느냐가 문제고, 발명자로부터 간단히 빌려 쓸 수도 없는 터이니까 말이요. 기록에는 완전한 형태로 어느 역사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었다고 하니까, 그 곳이 뒷날 폐허로 된 곳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오. 한시라도 빨리 그 시대와 장소를 알아내야 하겠는데..." 이때, 나무 가지처럼 야윈 안경잡이 사나이가 나타나 노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 시간 투시기의 준비가 된 모양이니 날 따라오시오."{ 앨런이 따라간 곳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이었다. 중앙에 빨강, 파랑, 초록의 네온사인 같은 튜브가 얽혀 있는 복잡한 기계가 웅웅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기계의 한 쪽 끝에는 스크린이 붙어 있었다. 이 기계가 '시간 투시기'인 모양이다. 폴 노인은 아까 나타났던 안경 쓴 사나이를 앨런에게 소개했다. "내 제자인 렌쯔요. 나와 타버 외에 시간 여행의 비밀을 아는 건 이 사람뿐이오." "앨런씨, 잘 부탁합니다." 라고 말하는데, 렌쯔도 꽤나 영어를 잘 하는 것이었다. "이 기계는 찾으려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뇌파, 즉 뇌에서 나오는 희미한 전기가 배어들어 있는 물건만 있으면 어떤 시대에서도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서, 렌쯔는 리어로부터 받은 나네트의 외투를 기계 속에 있는 유리판 위에 얹었다. "스크린을 잘 보아주시오. 이 외투가 누이동생의 뇌파의 파장에 맞아들면 곧 화면이 나타납니다." 곧 유리판 위에 놓인 외투에 푸른 광선이 쏟아지듯 비쳤다. 앨런은 숨은 죽이고 스크린을 지켜보았다. 5분 - 10분 - 그러나 스크린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렌쯔는 그만 스위치를 끊었다. "이거 찾을 것 같지 않군요." 이때, 기계를 점검하고 있던 폴 노인이 소리쳤다. "렌쯔, 이 쪽 튜브가 깨져 있어. 이래서야 나타나지 않지." "예? 정말이군요. 이거 죄송합니다 곧 고쳐 가지고 오겠습니다." 하고 렌쯔는 몹시 당황해 하며 얼른 옆방으로 달려갔다. 폴은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태 저런 실수를 하는 사나이가 아니었는데……" 렌쯔가 고친 튜브를 가지고 돌아왔다 다시 실험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잘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스크린에 또렷이 나타난 광경을 보고 앨런은 바짝 긴장했다. 달빛이 환한 밤의 숲 속이었다. 까만 제복들을 입은 사나이들과 새깃 장식을 한 인디언들이 함께 바쁜 듯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숲 저 쪽에 강물이 빛나고 그 강가에 크게 모닥불이 타고 있다.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높이 우뚝 서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타버의 시간 로켓이었다. 그리고 입구에 서 있는 뚱뚱한 사나이, 그는 말할 것도 없이 타버였다. "1664년 9월이군." 폴 노인이 미터기의 숫자를 읽었다. 선이 노인에게 다가와서 무언가 속삭였다. 노인은 앨런을 돌아다보았다 "선이 그러는데, 여기는 허드슨강의 맨해튼섬 강기슭이 틀림 없다는군." 이라는 말을 듣고, 앨런은 즉시 결심했다. "지금이 좋은 기회입니다. 시간의 탑을 빌려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노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앨런, 선, 리어 세 사람은 곧 준비를 갖추어 다시 시간의 탑에 올랐다. 폴 노인이 입구에 서서 앨런의 손을 꼭 쥐었다 "행운을 빌겠소." 반드시 타버 놈을 쓰러뜨려 보이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문이 닫히자, 우렁 우렁 우렁하는 소리와 함께 시간의 탑 은 과거를 향해 맹렬한 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시간 여행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앨런은 한동안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으나 이내 회복이 되었다. "괜찮아요?" 리어가 걱정스러운 듯 앨런을 쳐다보았다. 앨런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이때, 엘리베이터가 2충으로부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앨런, 리어, 선은 앗 하고 서로 얼굴을 보았다. 이 시간의 탑에는 그들 3명 외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거기서 나온 것은 야위고 키가 큰 안경잡이 사나이였다. "렌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그러자 렌쯔는 히죽히죽 어색한 듯이 웃었다. "도와 드리려고요. 나도 폴 선생님의 비밀을 훔쳐간 타버 놈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생각할수록 분해요." "그렇지만 선생님의 허락을 얻었나요?" "아뇨, 말씀은 드려 보았지만 허락해 주지 않았소. 그래서 밀항을 한 거지요." "그렇다면 리어와 선의 의견을 들어보시오." 렌쯔는 미래의 말로 그들에게 설명을 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는 앨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지 않소? 그리고 내가 있으면 당신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거요. 당신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내가 통역이 되어 드리겠소."     심야의 탈주   한편, 나네트와 에드워드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야기는 우선 그들 두 사람이 20세기의 센트랄 파크에서 깊은 밤중에 타버의 시간 로켓에 납치되던 때로 돌아간다. 나네트가 타버에 의해 시간 로켓 안에 끌려 들어가는 걸 본 에드워드가 위험도 무릅쓰고 그 뒤를 좇아, 자기도 시간 로켓 속으로 뛰어들어갔던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혼자이다. 아무리 완력이 강하다 해도 혼자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에 타버의 부하들에게 얻어맞고 쓰러져, 시간 로켓 속의 한 방에 처박혀져 있게 된 것이다. 얼마 동안 그는 기절해 있었다. 그러다가 가늘게 방바닥을 흔드는 진동 소리에 에드워드는 퍼뜩 정신이 났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차디찬 회색 벽과 창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에드워드는 아픈 몸을 이끌고 창 있는 대로 기어갔다 창 밖에서는 센트랄 파크를 에워싼 빌딩과 거리의 모습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해 가고 있었다. 회색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들은 점점 낡은 것으로 변해 갔다. '음, 나는 지금 타버 놈의 시간 로켓에 갇혀 있구나. 그리하여 시간을 거꾸로 한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는 거다..' 에드워드는 창틀에 매달려 쉬지 않고 변해 가는 바깥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때 재미있나, 에드워드군?" 갑자기 놀리듯이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타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타버! 네놈은 우리들을 어떡할 셈이냐? 나네트는 어떻게 했어 ? 어디 있느냐 말야." 에드워드는 주먹을 불끈 쥐고 타버에게 대들듯 소리 쳤다. "조용히 하라군. 여기서는 아무리 덤벼 봤자 소용없다는 것쯤은 자네도 잘 알 텐데." 타버의 손에는 어느새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나네트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소중한 손님이니까 말야. 자네도 마찬가지지. 하긴 우리가 초대한 것은 아니지만." "어째서 나를 죽이지 않느냐? 네게는 방해가 될 뿐이 아닌가?" 그러자 타버는 어깨를 움찔해 보이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단지 나네트가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지. 난 나네트와 결혼을 하고 싶어. 그러니까 기분을 잡치게 할 수는 없단 말이야. 조금 있다가 적당한 시대에 혼자 남아 있게 해 주지." 타버가 히죽히죽 웃는 것을 보고, 에드워드는 머리에 피가 왈칵 솟는 것을 느꼈다. '너 같은 악한에게 나네트를 넘겨줄 수는 없다.' "그런데 얌전하게만 하고 있으면 여기서 내놓아 주겠네. 나네트도 만나게 해 주고 말야. 어때?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식사! 에드워드는 갑자기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벌써 백년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나네트가 무사한지 그의 모습도 빨리 보고 싶다! 에드워드는 할 수 없이 악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네트도 에드워드를 만나보고는 마음을 놓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못하고 타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 다. 타버도 일부러 나네트에게 상냥하게 구는 듯이 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우리들을 어디로 끌고 갈 작정인가?" 에드워드는 기분을 달래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어디라고 ? 아무데도 가지 않는 거야." 타버는 빈정거리는 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알겠나? 우리는 줄곧 이 허드슨강 상공에 떠 있는 거야. 다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뿐이지" "그러면 어느 시대로 갈 작정인가?" "1664년이야. 거기서 하룻밤만 묵는다. 멋진 보물을 인디언들로부터 손에 넣을 작정이다. 금과 은과 보석들이지." 타버는 의기양양해서 지껄여댔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드디어 2445년의 대뉴욕의 시대로 간다." "2445년? 왜냐?" "거기 나의 최대의 근거지가 있기 때문이야. 내가 발명한 초병기 울트라 미사일을 갖춘 내 무적의 타버성이 있지." "그런 걸 가지고 대체 어떡할 작정이냐?" "물어볼 것도 없지. 나의 오랫동안의 꿈은 세계를 정복하는 일이었다. 이제 바야흐로 그 대사업에 착수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타버의 두 눈은 미친 사람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 사나이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다! 20세기의 그 나치스 독일의 히틀러처럼……' 에드워드는 불현듯 등골이 써늘해짐을 느꼈다. 식사를 할 때, 에드워드는 시간 로켓에는 참으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는 걸 알았다 털가죽 옷을 입고, 몽둥이를 쥔 고릴라 같은 원시인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말을 지껄여대는 자도 있고, 아프리카의 흑인도 있다. 조너스라는 이름의, 선과 리어와 같은 시대의 사람 같아 보이는 미래인도 있다. 이 사나이는 이 시간 로켓의 조종사였다. 그리고 타버의 조수 운커스, 이 사나이는 아메리카 인디언이다. 원시인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타버는 두 사람을 조종실로 데리고 갔다 "조너스, 폴이란 놈이 발명한 그 지긋지긋한 '시간 투시기'에 우리가 붙잡혀 있진 않겠지?" 하고 타버가 조종사에게 물었다. "예, 염려 없습니다. 적어도 시간을 날아가고 있는 동안은 발견될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사나이가 잘 숨겨 주리라 생각하니까요." "음, 그렇지. 놈을 우리편에 끌어넣은 건 자네의 공이야. 내가 세계를 정복할 때는 자네한테도 듬뿍 상을 주겠네." "헤헤,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 리어와 선이란 놈은 끈질깁니다. 늦기 전에 그 시간의 탑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 옆에서 듣고 있던 에드워드는 이 주고받는 말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시간 투시기니, 그 사나이니 하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에드워드군, 자네는 기계를 만지기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디 내 시간 로켓의 구조에 대해서 가르쳐 줄까?" 하고 타버는 자못 만족스러운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지껄이는 설명이 반쯤 지났을 때, 갑자기 조너스가 타버를 가로막았다. "주인님, 드디어 1664년에 가까이 왔습니다 "좋아, 밤을 택해서 착륙해." 시간 로켓의 속력이 불쑥 떨어졌다. 회색이었다. 창 밖의 광경의 색깔이 짙어지고, 밤과 낮의 교대가 뚜렷이 보였다 1664년. 그 곳이 어떤 세계였던가는 에드워드는 학교에서 배운 역사에서 미루어 보아 대강 짐작이 갔다.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이 1492년, 허드슨강의 발견자 헨리 허드슨이 이 근방을 탐험한 것이 1609 년이다. 그 후, 이 맨해튼섬 남쪽 끝에 네덜란드 사람이 상륙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뉴암스테르담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영국인이 이 식민지를 빼앗아 뒤에 뉴욕으로 발전시켰다. 타버의 시간 로켓이 착륙 예정인 1664년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충돌이 시작된 해에 해당한다. 물론 그 즈음의 이 근방은 아직 울창한 정글이었고 많은 원주민, 즉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고있을 것이다. 창 밖의 낮과 밤의 교대가 점점 느려져 갔다. 밟았다 어두웠다, 또 밝아졌다가는 어두웠다 하고 있었다. 진동 소리가 딱 그쳤다. "꼭 알맞게 잘 됐어. 예정한 대로 해가 진 바로 뒤로군." 하고 타버는 조너스의 어깨를 두들겼다. 슈슈슈웃 ! 시간 로켓은 곧 분사 불길을 토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허드슨강 언덕에 착륙했다. 타버의 부하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가, 큼직한 모닥불 을 피우기 시작했다. 붉은 불꽃이 강물을 물들였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몇 척의 카누가 줄지어 상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달빛이 쏟아지는 강물에서 노를 젓고 있는 것은 모두 인디언들이지만, 뱃머리에 서서 지휘를 하고 있는 것은 백인들이었다. 타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것이 내가 기다리고 있던 보물선이다. 곧 짐을 내릴 거야.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루비, 금과 은을 모두 합쳐서 몇 10억 달러 어치가 되는지 짐작도 못할 거다. 하하하……" "야아, 과연 굉장하군. 타버, 어때? 내게도 당신의 그 보물이란 걸 한 번 보여 줄 수 없을까? 저렇게 굉장한 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 하고 에드워드가 말하자, 타버는 수상쩍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무슨 계획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나네트는, "나도 한 번 보고 싶군요." 하고 나섰으므로 결국 타버는 승낙을 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운커스가 권총을 쥐고 경비를 맡고 나섰다. 배의 인디언들은 이미 짐을 부리고 있었다. 건장하게 생긴 인디언들이 차례차례 짐짝을 들어 내리면, 타버는 일일이 그 나무 궤짝을 열어 속을 들여다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 속에는 많은 금과 은, 다이아몬드 원석이 가득 들어 있었다. 짐 부리는 일을 감독하고 있는 사람은 카누를 타고 온 몇 사람의 백인인데, 보기에 네덜란드인 같았다. "타버씨, 어떻습니까? 인디언들을 부려서 이만큼 모았습니다. 이만하면 당신의 굉장한 성으로 데려다 주시겠습니까?" "아, 그러고 말고." "고맙습니다. 영국인들과의 전쟁에 끌려드는 건 딱 질색이니까요." 라는 대화가 토막토막 들렸다. 타버는 아주 보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경비를 맡고 있는 운커스까지도 그 막대한 금은보화에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나네트, 갑자기 아픈 시늉을 해요. 그러면 내가 저 놈의 권총을 뺐을 테니까." 에드워드가 가만히 속삭이자, 나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야얏, 아야……" 갑자기 나네트가 배를 움켜쥐고 죽는 시늉을 했다. 에드워드가 소리를 쳤다. "우, 운커스, 나네트가 갑자기 병이 났어. 아까 먹은 것이 잘못된 모양이야. 로켓으로 옮겨 가야겠으니 도와주게." 그러자 운커스는 놀라며 권총을 쥔 채 나네트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에드워드의 재빠른 솜씨. 얏 ! 둔한 소리를 내며 에드워드의 당수가 운커스의 목덜미를 갈겼다. 운커스는 한 마디 소리도 못 내고, 땅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나네트! 이때다!" 에드워드는 운커스의 권총을 빼앗아 잡고는 나네트의 손을 잡고, 뒤쪽의 어두운 정글 속으로 뛰기 시작했다. "야, 저기다! 누구든지 저놈을 빨리 잡아라!" 타버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강 언덕에서 100 미터쯤 되는 곳을 죽어라고 뛰고 있었다.     기쁨의 재회   이야기는 다시 시간의 탑으로 돌아간다. 앨런, 리어, 선, 그리고 렌쯔네 사람은 지금 전속력으로 1664년의 그 밤을 향해 시간을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1 시간이면 목적지, 아니 목적시간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타버의 시간 로켓으로부터 1 마일쯤 떨어진 곳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거기 도착하면 곧 시간 로켓을 습격하여 나네트와 에드워드를 구해내고, 또 될 수만 있으면 타버를 쓰러뜨린다는 것이 앨런의 계획이었다. "자네는 무슨 무기를 가지고 있나?" 하고 렌쯔가 앨런에게 물었다 앨런은 권총을 꺼내 보였다. 렌쯔가 그것에 손을 대려고 하므로, "안 돼. 이건 내가 사용해야 해. 자네 무기는?" 라고 묻자, 렌쯔는 품에서 칼날이 긴 나이프를 꺼냈다. "나는 칼 던지기에 약간 자신이 있어서 말야." "그것 됐어. 소리가 안 나는 편이 유리하지. 우리 둘이서 힘을 합하면 어떻게든 타버를 쓰러뜨릴 수 있어. 잘 부탁하네." "좋아. 더욱이 그 시대를 시간 투시기로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으니까 지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길 안내도 내게 맡기게." 이때, 리어도 같이 가고 싶어하는 시늉을 했다. "아니, 리어는 선과 같이 여기 남아 있어야해." 앨런이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자 리어는 무언지 빠른 말로 렌쯔에게 떠들었다. 렌쯔가 통역을 했다. "리어는 그 시대의 인디언과 말을 할 줄 안다고 그러는군. 전에 한 번 그곳에 갔을 때 연구를 한 모양이야. 인디언들로부터 여신이란 말을 듣는다는 거야." "그래, 그래. 이 탑, 마술의 탑." "인디언들은 이 탑을 보고 마술의 탑이라 하며 놀란 모양이지. 그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우리들을 도와주게 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래도 앨런은 여전히 머리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안 돼. 여자는 거치적거릴 뿐만 아니라, 타버에게 붙들리는 날엔 큰일이니까." 리어는 그제야 단념을 했다. 얼마 후, 시간의 탑은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앨런의 일행은 전망대에 올라가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높은 탑 위에서라서 허드슨강도 눈알에 있는 듯이 잘 보였다. 동쪽에 빛나고 있는 건 이스트강이겠지. 그리고 남쪽에서 빛나는 희미한 불빛, 모닥불 같은 것이 보였다. "저기가 타버가 있는 곳이다." 하고 렌쯔가 말했다. 앨런은 그 위치를 마음속에 또렷이 새겼다. 그리고 눈 아래 울창하고 넓은 정글 지대를 내려다 바라다보았다. 그 곳에는 그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이 곳에서 지금부터 3 백년 후로 되돌아가 서 있다는 것이 앨런에게는 어쩐지 믿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선, 만일 위험한 일이 일어나거든 우리들을 내버려두고, 시간의 탑을 출발시켜 주게." 이렇게 명령하고 나서, 앨런은 리어의 손을 꼭 쥐었다. 어 쩌면 이것이 마지막 될지도 모른다. "앨런, 조심해요." "염려 말어.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앨런은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어 보이고는 손을 흔들며 렌쯔와 함께 어두운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괴로운 여행이었다. 두텁게 우거진 수풀, 쓰러진 큰 나무들, 질퍽거리는 낮은 지대, 험한 벼랑, 물결 쎈 개울. 그리고 언제 어디서 맹수와 인디언이 습격해 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번은 풀뿌리를 붙들며 벼랑을 내려갔을 때, 뒤따라오던 렌쯔가 갑자기 떠밀린 듯이 앨런에게로 와서 부딪쳤다. 앨런은 하마터면 벼랑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왜 이래 렌쯔?" "미안해요. 발이 미끄러졌어." 방향도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앞에 서서 길을 안내하는 렌쯔는 아무래도 왼쪽으로만 굽어져 가는 것 같이 앨런에게 느껴졌다. "이봐, 저쪽이 아닌가?" "아니야, 남쪽은 이쪽일걸." 지형에 밝은 렌쯔의 말이므로 앨런은 고래를 갸웃거리면서도 따라가고 있었다. 괴로운 길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후미진 곳을 지나칠 때였다. 앞쪽에서 마른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우뚝 멈춰 섰다. "앗! 누가 있나보다." 두 사람은 옆의 나무 그늘에 숨어서 앞쪽을 살펴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흐르는 달빛 사이에 희끗희끗 보이는 두 개의 그림자. 그것은 차츰 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혹시 인디언이나 아닐까?두 사람은 식은땀을 홀리고 있었다. 심장의 고동이 심해 왔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의 그림자는 빈터로 나왔다. 달빛이 환히 그들을 비쳤다. 남자와 여자다. 앨런은 벅찬 목소리로 불렀다. . "나네트, 에드워드, 나야 앨런이야!" 하며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오빠!" "앨런, 구해 주러 왔구나." 에드워드와 나네트는 마치 공이 구르듯이 달려왔다. 그들은 서로 얼싸안았다. "좋았어,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이런데서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세 사람이 기뻐하고 있을 때, 에드워드는 갑자기 엄숙한 얼굴이 되었다.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뒤쫓고 있는 놈이 바로 가까이 와 있을지 모른다. 빨리 시간의 탑으로 도망쳐야 해." 그러나 시간탑이 있는 곳이 어느 쪽인지 방향을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렌쯔, 자네는 어느 쪽으로 생각돼?" "글쎄요, 이쪽이겠지요." "그럴까? 그 쪽은 남쪽이 아닌가?" 앨런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에드워드가 동의를 했으므로 그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얼마쯤 나아가자 나무 가지 사이로 멀리 달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보여 왔다. "저것은 이스트강이오." 하고 렌쯔가 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가? 그럼 타버의 시간 로켓은 저쪽 허드슨강 훨씬 남쪽이고, 우리의 시간의 탑은 이쪽이 되는군." 네 사람은 또 길도 없는 길을 묵묵히 헤쳐가고 있었다.     배반자   이따금씩 먼데서 기분 나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네트는 겁에 질려 에드워드에게 매달렸다. 캄캄한 정글을 등불도 없이 헤쳐 가는 터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자 돌연 앞쪽 나무 사이로 반짝 빛나는 밝은 빛. "오! 시간탑인가 보다." 네 사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그 빛은 시간탑의 희푸른 불빛이 아니라 누르스름한 빛깔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의 불빛이다. 앨런이 수상쩍어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을 리가 없는데...... 설마 인디언의 텐트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어디 좀 살펴보고 와야겠다. 자네들은 덤불 속에 숨어들 있게." 라고 말하고 앨런은 발소리를 죽이며 나아갔다. 조금 후 보고 온 것은 높다란 통나무 울타리와 나무로 지은 오두막집들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 근처에서 인디언밖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면 뉴암스테르담밖엔……' 이때, 문득 앨런은 생각해 냈다. '그렇다! 그럴 거야.' 앨런은 부리나케 일행이 있는 데로 되돌아왔다. "렌쯔, 이놈! 네가 우리를 속였지. 저곳은 뉴암스테르담이 아닌가? " 렌쯔는 깜짝 놀랐다. "무, 무슨 말이오? 나는……" 그러자 에드워드가 나서며 말렸다. "이봐. 앨런 자네 미쳤나? 우리편끼리 싸움은 그만둬." "이 놈은 우리편이 아냐. 적의 끄나풀이란 말야. 아까 본 강은 동쪽에 있는 이스트강이 아니라, 서쪽의 허드슨강이었단 말이네. 렌쯔는 우리를 북쪽으로 안내하는 척하고 실은 남쪽으로 끌고 왔어." "뭐라고?" 별안간 렌쯔는 한 걸음 썩 물러서더니, 품에서 나이프를 빼들었다. "탄로 난 이상 하는 수 없지. 네 말대로 나는 타버의 스파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타버의 시간 로켓은 바로 저 쪽에 있다. 네놈들은 도망칠래도 못 쳐!" "이 배반자!" 앨런이 권총을 빼들자, 렌쯔는 칼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 나이프가 날아오기 전에 먼저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타, 탕! 총성은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숲 속에 울려 퍼졌다. 렌쯔는 오른쪽 어깨를 맞고 나이프를 툭 떨어뜨렸다. 그러더니 급히 왼손으로 그걸 집어들고, 나무 그늘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기 섯!" 하고 뒤쫓으려는 앨런을 에드워드가 붙들었다. "그만둬. 이번 총소리로 적이 눈치챘을 테니까 빨리 도망치자구." 세 사람은 마구 달렸다. 그러나 뉴암스테르담은 잠이 깨어 눈뜨기 시작했다. 등불이 하나 하나 켜지며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2개, 3개, 4개- 횃불과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가 도망치는 세 사람의 뒤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10분 후, 앨런 일행은 횃불들에 에워싸이고 말았다. "할 수 없다. 운명에 맡기자." 세 사람은 두 손을 들고 멈춰 섰다. 빙 둘러선 네덜란드인들은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여자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나네트의 어깨를 잡으려고 했다. "건들이지 마." 에드워드가 소리치는 영어를 듣고, 어마어마하게 무장을 한 네덜란드인들은 별안간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너희들은 영국인들이지? 이놈들이 벌써 이런 데까지 들 어왔구나. " "죽여버려라." "아냐, 그러기보다는 영국 놈들과 전쟁에 필요한 인질로 잡아 두는 것이 좋아. 총독 (식민지의 장관) 각하께서 좋아하실 걸세." 네덜란드인들은 의기 양양해서, 세 사람을 마구 몰아 뉴암스테르담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곳은 동네라기보다 요새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거대한 통나무로 짜서 만든 문을 들어서니 튼튼한 통나무집들이 길가로 죽 늘어서 있었다. 어느 집도 환하게 램프를 켜놓고 창문으로는 저마다 무슨 소리인지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이 시대는 영국이 네덜란드에 식민지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때이다. 좋지 않은 때에 붙들렸군." 하고 역사에 밝은 에드워드가 앨런과 나네트에게 말했다. "그래? 그래서 인질로 잡아두자는 거로군." "이 자들에게 우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사람이고, 미래로부터 왔다고 얘기해 봤자 들을 턱도 없고 말이야." 이때, 갑자기 세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을 끌고 가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뭔지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은 세 사람을 데리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려는 걸까? 놓아 보내 주려는 건가?" 라고 앨런이 말하자, 영어를 아는 듯한 네덜란드인이 획 뒤돌아보았다. "놓아주진 않아. 그러나 오늘 밤 이 동네는 몹시 붐비고 있어. 너희들 영국 군함이 바다 복판에 나타났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 바빠서 너희들을 잡아둘 장소가 없단 말이다." 조금 후, 앨런 일행은 동네 밖의 누추한 오두막집에 이르렀다. 세 사람은 각각 밧줄로 얽어매어 집안에 갇히고, 몇 명의 사나이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등불도 없는 캄캄한 속에서 에드워드가 가만히 속삭였다. "나네트, 다친 데는 없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무서워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래도 타버에게 붙잡힌 것보다는 나아. 네덜란드인이 설마 우리를 죽이지야 않겠지." 에드워드의 말에 앨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직 희망은 있다. 어떻게든 여기서 탈출하기만 하면……" 그러나 지금 형편으로서는 전혀 탈출할 희망이 없었다. 세 사람은 칭칭 동여매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럴 즈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쿵쿵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렸다. 등불을 들고 들어온 사람은 발목을 묶은 밧줄만 풀어 주더니, 다시금 동네 안으로 끌고 갔다. "너희들을 만나겠다는 사람이 있다." "우리들을 만나고 싶다고?" 앨런은 불안 속에 휩쓸려 들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들어맞았다. 어느 큰 통나무집에 들어섰을 순간, 귀에 익은 야유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야아, 수고들 했군." "앗, 타, 타버!" 세 사람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았지?" "렌쯔가 알려 줬으니까." 타버는 이 말 한 마디뿐, 세 사람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뉴암스테르담의 총독인 듯한 사나이와 네덜란드 말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의논이 된 모양이었다. 타버는 커다란 가 죽 주머니에서 보석과 금덩이를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산같이 쌓아놓았다. 총독은 떨리는 손으로 그 보석과 금괴를 집어들고, 욕심에 빛나는 눈을 번득였다. 타버는 싱글거리며 세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자, 자네들은 어서 나네트에게 작별 인사를 해라. 너희들도 같이 맡으려고 했지만, 뭐니뭐니 해도 몸값이 많아져서 말일세. 양해해 주기 바라네." "뭐, 뭐라고?" 타버와 말뜻을 깨달은 앨런과 에드워드는 손목을 묶인 채 덤벼들려고 했다. 그러나 곧 네덜란드인들이 붙잡혀 꼼짝하지 못했다. "새삼스레 버둥거리는 건 꼴사납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자네들의 행운을 빌겠네." 타버는 내뱉듯이 말하고는 나네트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오빠, 에드……" 차츰 멀어져 가는 나네트의 목소리- 그러나 두 사람은 분노에 이를 갈 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타버가 가고 나자, 앨런과 에드워드는 다시 아까 갇혀 있던 오두막집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은 모두 방바닥에 뒹굴려진 채, 이미 절망한 나머지 말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피로에 지쳐 잠이 들려던 앨런은 이상스런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찌지직! 무언인지 머리 위의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 또 찌지직 ! "이봐, 에드워드 일어나! 이상하다." 갑자기 먼 곳에서 기묘한 함성이 일어났다. 캬호, 캬호, 캬호- 서부 영화에서 듣던 인디언의 외치는 소리. 탁, 탁, 탁! 지붕에, 벽에 화살이 퉁겨나가는 소리가 우박 소리처럼 점점 심해 왔다. 바깥에 서서 감시하던 네덜란드인의 사나이는 곧 허둥대기 시작했다. 덮어놓고 총을 쏘며, 오두막 안에 있는 앨런과 에드워드를 내버려 둔 채 허겁지겁 요새를 향해 도망쳐 갔다. "앗, 앨런, 불이다!" 하고 에드워드가 비명을 질렀다. 통나무 벽의 저편에 시뻘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인디언들이 불화살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노린내가 나는 횐 연기가 오두막집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세찬 기침을 했다. 그러나 꽁꽁 묶인 두 사람은 연기를 피해 가려 해도 갈 수가 없다. 그저 바닥에서 발버둥칠 뿐이었다. 캬호, 캬호, 캬호! 인디언들의 외치는 소리는 자꾸 가까워 졌다. "에드워드, 아마도 우리들의 운명은 이로써 끝인가 봐." 불빛에 얼굴이 벌개진 앨런이, 연기에 목이 메인 소리로 단념한 듯 속삭였다. 에드워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일단 번쩍 기세를 올린 불바다 속에 건장한 인디언들이 함성을 올리며 뛰어들었다.   인디언의 여신   이야기는 다시 시간의 탑에 타고 있는 리어와 선에게로 돌아간다. 두 사람은 전망대의 창틀에 기대서서, 미래의 말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빠, 앨런은 언제 돌아올까요?" "아마 새벽녘이겠지. 리어야, 앨런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틀림없이 나네트와 에드워드를 구해서 무사히 돌아올 거다." 선은 누이동생의 염려를 웃음으로 넘기면서도 자신은 초조하여 방안을 왔다갔다 거닐고 있었다. 시간은 달팽이 걸음처럼 느릿느릿 가고만 있었다. 리어는 점점 불안이 커져 왔다. 불안을 달래려고 리어는 지껄이고 있었다. "오빠, 우리가 전에 한 번 이 곳에 왔을 때 일을 기억하고 있나요? 그 실버워터 (은빛의 물)란 별명을 가진 인디언의 추장이 있잖아요." "아아, 있었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 추장의 힘을 좀 빌릴 수 없을지 모르겠어요. 그 일족은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이라 믿고 있어요. 시간의 탑을 '태양의 배'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힘을 빌리는 건 좋지만, 그 사람들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가 문제야. 이 캄캄한 정글 속에는 사나운 다른 인디언도 많이 있는데 말야." "그렇긴 하지만……" 하다가 갑자기 리어가 귀를 기울였다. "오빠, 누구 사람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얼른 창으로 달려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리어, 나야! 문 좀 열어 줘." 이번에는 똑똑히 들렸다. 렌쯔의 목소리였다. 리어는 문을 열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소리쳤다. "앨런! 앨런은?" 그러나 방으로 뛰어들어온 것은 렌쯔 뿐이었다.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렌쯔는 아픔을 가까스로 참으며 신음하듯 말했다. "리어, 놀라지 말고 들어요. 사실은. 사실은 앨런은 당했어. 타버란 놈의 권총을 맞았어. 나도 이 꼴이 되고......" "어머, 앨런이?" 순간 리어는 새파랗게 질려 비틀거렸다. 선이 황급히 붙들려고 했다. 린쯔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등뒤로 돌리고 있던 왼손의 날카로운 칼을 휘둘렀다. 선의 심장을 향해 꽉 찔렀다. "앗!" 그러나 선은 운수가 좋았다. 리어의 몸무게 때문에 비틀거렸던 탓으로, 칼은 왼쪽 어깨를 스쳐 허공을 찔렀던 것이다. "무슨 짓이야, 렌쯔!" 깜짝 놀라 소리치는 선에게 렌쯔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덤벼들었다. 선은 바닥에 쓰러지면서 있는 힘을 다해 렌쯔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렌쯔의 몸은 공처럼 퉁겨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순간- "으윽!" 렌쯔는 그만 자기 가슴에 칼이 꽂히고 만 것이었다. 그는 칼자루를 쥔 채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자마자 쿵하고 도로 바닥에 쓰러졌다. 선은 하얗게 된 얼굴로 와들와들 떨며 울고 있는 리어를 끌어안았다. 선의 얼굴도 놀람에 핏기가 없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 렌쯔가, 렌쯔가 반역자 였다니……" "앨런은, 앨런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때, 쓰러져 있던 렌쯔가 가느다란 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양심이 눈을 뜬 것일까. "리어. 바른 대로 말하겠어." 렌쯔는 몇 분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에 모든 것을 리어와 선에게 털어놓았다. '앨런과 에드워드는 뉴암스테르담에 붙들려 있다. 어떻게든 구해내야 한다.' 리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시간탑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축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은 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앗, 리어 저건 인디언들이야. 이 이상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나겠어. 빨리 도망쳐야 해." 하며 선은 부리나케 조종 장치로 달려갔다. 그러나 리어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막았다. "잠깐 ! 저 인디언들을 봐요. 땅에 엎드려 이 쪽을 향해서 절을 하고 있지 않아요? 저건 필시 실버워터의 일족일 거여요." 리어는 곧 아까 말한 계획대로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어가 문을 가만히 열고 조용조용히 문 앞에 나가 서자, 땅바닥에 엎드려서 축원을 하던 인디언들은 일제히 놀람과 존경의 소리를 질렀다. "오! 숲의 아들들이여!" 하며 리어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인디언 말로 엄숙하게 말했다. "겁내지 말라 나는 은혜로운 태양의 여신이로다. 나는 나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벌을 주지 않느니라. 그러니 그대들은 안심할지어다."그러자 인디언들은 안심을 했는지. 더욱 큰 소리로 축원을 하기 시작했다. 리어는 인디언들이 완전히 자기 뜻대로 따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횐 수염의 실버워터 추장을 앞으로 불렀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추장에게 리어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저 남쪽의 피부 색깔이 횐 사람들이 사는 마을 밖에 작은 집이 있다. 그 곳에는 신통력을 일은 두 남자 신이 붙들려 있다. 그대들은 즉시 힘센 젊은이 30명을 데리고 가서. 백인 파수꾼들을 쫓아버리고 두 신을 구할 것이며, 구해서는 이리로 데리고 오라. 그러지 않으면 그대 일족에게 반드시 엄한 천벌이 내릴 것이니라." 늙은 추장은 횐 수염을 땅바닥에 바싹 붙이고, 몸을 떨며 맹세를 했다 "기필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앨런과 에드워드가 갇혀 있는 집을 습격한 것은 바로 그들 실버워터의 일족이었다. 이리하여 오두막집이 불에 타서 내려앉기 직전에 두 사람은 구함을 받았으며, 리어와 선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다.     타버 제국   앨런과 에드워드, 리어, 그리고 선의 네 사람이 시간탑을 미래로 향해서 출발시킨 것은 타버의 시간 로켓이 바야흐로 본거지인 2445년을 향해 간 바로 조금 뒤였다 그들 네 사람이 가려는 목적시간은 물론 2445년이었다. 나네트를 납치한 타버가 최후로 가려는 시간대가 바로 2445년인 것은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앨런은 위로하듯 말했다. "에드워드, 우리가 2445년에 닿으면 곧 정부 당국에 신고를 하자구. 그 시대 사람들은 아주 머리도 좋고, 또 과학을 잘 알고 있을 거니까 말야. 그들의 도움을 얻을 수만 있으면 기필코 타버의 손아귀에서 나네트를 빼앗아 올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에드워드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 입으로 말하기보다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좋아요. 당신들이 2445년으로 가면 우리는 5000년에 가겠어요," 하고 리어는 서투른 말로 이렇게 말했는데, 앨런은 곧 그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리어는 선과 함께 5000년 전후의 도시 폐허 속에 묻혀 있다는, 전설 속의 그 강력한 무기를 다시 한번 찾으러 가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차 찾아보았지만, 발견하지 못한 것을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앨런은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법이다 "염려 없어요. 타버에게 지지 않을 무기, 우리 둘이서 꼭 찾아오겠어요." 하고 리어는 굳은 결심의 빛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탑 밖의 경치는 끊임없이 변해 가고 있었다. 이윽고 초고층 빌딩이 솟아오른 시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선이 조정 장치를 만지자, 시간탑은 갑자기 속력을 낮추어 바로 2445년에서 딱 멈추었다. 동시에 거대한 도시의 소음이 창으로, 문으로 해서 탑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곳은 바로 보행 전용 도로 위였다. 기묘한 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빛의 탑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앨런과 에드워드는 리어와 선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길거리에 내려섰다. 다시 시간탑이 윙윙거리며 청백색으로 흐려지면서 사라져 버리자 통행인들은 더욱 놀란 듯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면서도 멀찍이 에워싸고 서서 무엇인지 떠들어 대고 있었다. 한편 앨런과 에드워드도 주위의 굉장한 광경에 크게 놀랐다. 하늘에라도 닿을 듯한 미래의 거대한 빌딩들, 몇 가닥으로 겹쳐져서 빌딩 사이를 누비고 있는 색색의 고가도로, 그 위를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투명한 바퀴 없는 차들- 그것들을 만든 재료는 모두가 합성 플라스틱과 초합금인 모양이었다. "여보시오, 당신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요? 교통 방해가 아니오!" 라는 큰 소리가 갑자기 귓가를 울렸다. 큰 도회지에 처음 나온 시골뜨기처럼.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앨런과 에드워드는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깨끗한 횐 제복을 입은 큰 사나이가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시대의 경찰관인 듯했다 같은 횐 제복을 입은 다른 몇 경찰관은 구경꾼들을 해산시키고 있다 머리 위쪽에 다리처럼 걸려 있는 자동차 전용도로에서도 맡은 차들이 멈춰 서서,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역시 경찰관의 주의를 받고는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아무튼 경찰서까지 같이 갑시다." 하고 경찰관이 두 사람의 팔을 붙들었다. 악센트는 퍽 이상스러웠지만 틀림없는 영어였다. 아직 이 시대에서는 20세기와 말이 그다지 많이는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저어. 우리는 뭐 잘못한 건 없는데요." 하며 앨런은 이렇게 부탁했다. "우리는 당신들의 친구요. 경찰에 갈 것이 아니라, 이곳 정부 당국에 데려다 주시오. 타버라는 사람의 일로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그럽니다." "타버?" 경찰관은 움찔 놀라는 모양이었다 앨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고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훨씬 상냥한 태도로 흰 경찰차로 안내했다. 두 사람을 태운 경찰차는 고음 사이렌을 울리며 자동차 전용 도로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 다리 위에 이르렀을 때, 앨런은 커다란 전광 문자판에 눈이 가자 소리쳤다. "에드워드, 저걸 봐! 타버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어." 그 전광 문자는 이러했다. 「타버, 대뉴욕시 북부 전 지역의 강제 매수를 통고. 매수 가격은 4조 6천억 달러가 한도라고 주장.」 뒤이어 다른 문자가 번쩍였다 「시의 최고 위원회는 타버의 최후 통고에 대비하여 현재 대책을 협의 중.」 결국 타버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시를 협박해서 토지를 점령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망할 놈의 타버, 여기서도 덤비기 시작했군." 에드워드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잠시 후. 경찰차는 큰 강을 내려다보는 이르렀다. 2445년의 허드슨강이었다. 주위의 광경은 아주 달라져 있지만. 강의 모양은 20세기 때와 다름이 없는 것이 묘하게 그리운 마음을 일게 했다 그 허드슨강 가에 서 있는 거대한 원통형의 빌딩이 시청 빌딩이었다. 경찰은 그 앞에 두 사람을 내려 주었다. 이 시대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스피드였다. 친절한 태도로 두 사람을 맞이한 대뉴욕 시장은, 이야기를 시작한 지 1시간도 못되어 두 사람의 증언을 진실이라고 인정해 준 것이다. 더욱이 시간 여행은 가능한 것인지, 이 시대 사람들이 솔 직하게 믿어 줄지 어떨지,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그것도 대뜸 믿어 주었다. 예상한 이상으로 순조롭게 되어 가는 것이 두 사람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장은 듣기를 마치자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타버가 이 시대 사람 같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나마 느끼고 있었지요. 경찰 당국이 그자의 신원을 아무리 조사해도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어요." 시장의 말에 의하면 이 시대에서의 타버 행동은 이러했다. 10년 전 2435년 초에 돌연 타버는 돈 많은 자본가로 나타나, 이 대뉴욕시의 남쪽 변두리의 땅을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후, 그의 재산과 세력은 눈사람을 만들 때처럼 불어가서 이제는 시의 남쪽 끝의 반을 모두 자기 소유로 하고, 스스로 '타버 제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그는 자기의 군대까지 가지고 있어서, 사실상 독립 국가로 자처함으로써 시와 경찰도 손을 댈 수 없게 되었고, 물론 세금 같은 건 한 푼도 내지 않는다고 했다. "저걸 보시오. 저편에 번쩍이는 엄청나게 큰 금빛 돔(반구형의 지붕)이 보이지요?" 하며 시장은 시청 빌딩 남쪽 창 밖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저것이 돈의 힘으로 타버란 자가 만들어 놓은 '타버성'이랍니다. 듣기로는 저 지붕이 모두 금으로 도금한 것이라는군요. "     최후의 통고   "그리고 어제는 갑자기 타버가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해 온 거랍니다. 타버의 제국을 더 넓히겠으니 시의 북쪽 땅의 반을 팔라고 하며, 동시에 시민들은 그 땅에서 물러가라는 겁니다." 더구나 사들이는 값은 4조 6천억 달러라는 터무니없는 조건을 붙인 것이다. 물론 이런 값으로 시가 그 땅을 팔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하는 짓이었다. "모두가 그 자가 울트라 미사일이라는 초강력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의 세계에는 그것에 대항할 만한 무기가 없습니다. 전쟁을 없애기 위해 파괴 병기의 제조는 금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 "그럼, 무기라고는 전연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 "아니, 가지고 있긴 하지요. 최면 가스총이라든가, 아무튼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는 무기뿐이지요." 이 말을 듣고 앨런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 가지고는 타버가 뽐내기 꼭 알맞다. 그 놈이 이 시대를 택한 것은 세계 정복이 가장 손쉽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당신들이 말한 미래의 강력한 병기가 희망일 뿐이오." 앨런의 마음은 점점 더 침울해졌다. 과연 리어 일행이 그 무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돌연 시장 책상의 버저가 울렸다. 통신실에서 보내는 비상 연락이다. “시장님, 바로 지금 타버가 최후의 통고를 보내 왔습니다. 회의실 정면 스크린에 스위치를 바꾸겠습니다.” “드디어 왔군!” 시장과 위원들은 얼굴빛이 변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새워 회의를 하느라고 핏발이 선 눈을 크게 뜨고, 정면에 있는 스크린을 지켜보았다. 확 밝아진 스크린 위에 타버의 얄미운 붉은 얼굴이 커다랗게 비쳤다. 그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띠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시장 및 최고 위원 여러분 ! 여러분은 나의 정당한 신청에 대해서 일부러 회답을 늦추고 있는 모양이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하여 최후 통고를 하는 바이오. 지금 이 시간부터 10시간 내에, 여러분은 내가 제의한 적절한 값으로 북부 지구를 팔고, 그 곳의 주민을 철수시키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즉시 우리 타버 제국의 군대가 행동을 개시하여 북부 지구를 점령할 것이오. 그럴 때에는 주민의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을 거요. 또 여러분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줄 알지만 우리 제국은 현재 7발의 울트라 미사일을 가지고 있소. 미사일은 각각 다음 여러 국가의 수도를 겨냥하여,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게 되어 있소. 즉 다음의 7개 대 수도들이오.   북유럽 연합의 수도 모스크바 남유럽 연합의 수도 런던 아시아 동맹의 수도 서울 아프리카 민주 연맹의 수도 카이로 남태평양 연방의 수도 캔버라 남아메리카 왕국의 수도 브라질리아 남극 공화국의 수도 프린스 헤럴드   만약 여러분들이 지나치게 저항해서, 우리 제국의 안전을 위협할 때에는 버튼 하나로 그들 모든 국가가 증발해 버리게 된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기를. 끝으로 한 가지 덧붙여 말하겠소. 나의 바라는 바는 이들 국가를 통일하여 대 타버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오. 그럴 때에는 이 북아메리카 합중국 수도 대뉴욕은 대 타버 시로서 우리 대제국의 수도가 된다는 것이오. 이번의 나의 제안은 그 대제국 건설의 첫출발이 되는 셈이니 여러분의 반가운 회답을 기대하는 바이오." 하더니 타버의 자신만만한 얼굴은 스크린에서 획 사라져 갔다. 시장과 위원들은 심한 충격을 받았음인지 어금니를 깨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앨런과 에드워드도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앞으로 10시간…… 그 10시간 안에 리어가 미래에서 원자분해포를 가지고 와 주었으면!.' 이제 최후의 희망이라고는 그것뿐이다. 그러나 그 10시간을 빤히 보고만 헛되이 보낼 수 는 없는 것이다. 시장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곧 북부 지구 시민들에게 피난 명령을 내렸다. 시민들은 차로, 자가용 비행기로, 홍수같이 시외로 시외로 피난해 갔다.   윈자분해포   드디어 10시간에서 앞으로 1시간밖에 안 남았다. 그 동안 앨런과 에드워드들은 시간탑이 나타날 장소를 둘러싸고 이제나저제나 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리어의 시간탑은 나타나지를 않는다. '남은 1시간. 만약 그 동안에 리어들이 원자분해포를 가지고 오지 않는다면 만사는 끝이다.' 시계바늘은 사정없이 가고만 있다. 순식간에 10분이 지나갔다. 그리고 또 10분. 그런데 다음 10분이 지나려고 할 찰라, 돌연 웅웅 웅웅하고 그 정다운 진동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더니 그 거대한 빛의 기둥이 눈앞에 쑥 솟아올랐다. "오오, 시간탑이다!"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와아 하는 환성이 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찌 된 셈인지 시간탑의 모습은 다시 희미해지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찌 된 셈이지 ?" 돌연,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진동 소리가 일어났다. 앨런 들은 급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기에 희미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검은 모습이- "아아, 저건 타버의 시간 로켓이다!" 그 순간, 앨런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미래에서 다시 날아오는 리어의 시간탑을 타버의 시간 로켓이 발견하고 뒤따라 온 것이다. 그리고 시간탑이 그 시대에 정지하려는 것을 타버가 방해하려는 계획임에 틀림이 없었다. '만약 양쪽이 동시에 정지해서 고체화된다면!' 앨런은 식은땀이 났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굉장한 대폭발이 일어나서, 다 같이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앨런과 에드워드는 눈앞에 펼쳐질 거대한 그림자와 그림자의 싸움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고 있었다. 때때로 두 그림자가 합쳐질 때마다 앨런은 온 몸이 오싹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그림자로 있을 동안은 충돌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탑이 나타나고, 로켓이 돌진해 갔다. 양쪽이 동시에 확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서 잠시 후에 다시 탑의 그림자가 나타나면서, 이번에는 그냥 그대로 점점 그 모습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조종사인 선은 드디어 시간탑을 고체화시키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거의 같은 시간에 시간 로켓 쪽에서도 고체화를 시작하여, 탑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앗, 저런 상태로 충돌을 하게 되면……' 앨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시간 로켓은 탑에 부딪히는 순간, 갑자기 희미해지더니 획 사라져 버렸다. 시간탑은 드디어 완전 고체화가여 도로 위에 우람하게 솟아 있었다. "이겼다! 이겼다!" 앨런 일행은 와아 소리를 지르며, 거대한 빛의 탑으로 달려갔다. 입구의 문이 열렸다. 선과 리어가 복잡한 기계의 부품들을 안고 뛰어나왔다. "앨런! 찾아냈어요. 기어코 찾아냈어요.!' "오! 리어, 선, 고마와. 잘도 찾아냈어." 하고 앨런은 감격한 나머지 리어와 선의 손을 꼭 쥐었다.   원자분해포는 조사해 본 결과, 비교적 간단한 설계로 된 무기였다. 부품은 커다란 렌즈와 많은 코일, 그리고 겨냥할 때 쓰는 망원 스크린과 강력한 배터리뿐이었다. 더구나 운반하기가 편리한 소형병기였다. 기계의 원리도 곧 알 수 있었다. 전기 에너지를 가득 모았다가 강력한 진동파로 바꿔서 내보낸다. 그것을 받기만 하면 어떤 물질이라도 세차게 흔들려서 원자의 크기 정도로까지 산산이 분해가 되어버린다. "이제 이것만 가지면 타버 같은 것한테 지지 않는다." 하고 앨런은 과학자와 기사의 앞에서 원자분해포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30분이야. 30분 동안에 어떤 일이 있어도 조립해 낸다." 앨런의 계획은 이러했다. 시청 빌딩 맨 꼭대기에 이 원자분해포를 올려놓고, 타버 제국의 본거지인 타버 성을 겨냥해 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드디어 약속된 10시간이 지나갔다. 타버 제국 군대는 밀물같이 진군을 개시하여, 시의 북부 지구에 밀려들었다. 그들을 맞아 싸우는 것은 시의 경찰군이었다. 경찰군들은 빈약한 무기로도 용감하게 대항해 싸우고 있었다. '제발 이 기계가 완성될 때까지 적을 막고 견뎌 주었으면……' 하고 앨런 일행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10분, 20분, 마침내 30분이 지났다. "됐어. 기어이 완성했어 ! " 바로 이때다. 적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에드워드로부터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큰일 났어, 앨런 ! 타버성의 둥근 지붕이 지금 막 두 조각으로 벌어졌어. 앗, 벌어진 데서 지금 7발의 미사일이 머리를 내밀었다!" "뭐? 야단났군. 우리 쪽 움직임을 보고 불안을 느낀 모양이다." 앨런은 아찔했다. '한시 바삐 원자분해포를 시청 빌딩 꼭대기까지 올려 가야 한다.' 통화 스크린에 타버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나타났다. "여러분! 경찰군의 쓸데없는 저항을 즉각 중지시켜라. 말할 것도 없이 우리 타버 제국의 승리는 확실한 것이다. 어디 내가 지금 울트라 미사일의 발사 버튼에 손을 대고 있는 걸 눈으로 보겠는가?" 앨런은 타버를 노려보았다. "기다려, 타버! 미사일만은 그만두기 바란다." "그렇다면 빨리 경찰군을 철수시켜라." "그래, 알았다." 하고 앨런은 타버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경찰 서장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되도록 경찰군을 천천히 철수시켜 주십시오. 그 동안에 원자분해포를 지붕 꼭대기까지 끌어올릴 테니까요." 이런 일은 꿈에도 모르는 타버는 스크린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뭘 하는 거야? 빨리 빨리!" 그러나 바로 이때, 원자분해포는 7발의 울트라 미사일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타버성의 금빛 돔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타버의 최후   "발사 개시 ! " 에너지 미터기의 바늘이 한껏 올라갔을 순간, 앨런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발사 단추를 눌렀다. 삐이, 삐삐, 삐잇! 녹색 광선이 일직선으로 금빛 도움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패인가?' 앨런의 가슴은 불안에 떨었다. 이때, 망원 스크린에 비친 도움이 파르르 잘게 흔들리더니 확 폭발을 했다. "됐다, 됐어!" 앨런 일행은 뛰어오르며 함성을 질렀다. 바로 지금까지 돔이 있던 근방에는 뭉게뭉게 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루가 되어 버린 금속 물질 원자의 소용돌이였다. 그러자 이때, 에드워드가 앗 하고 소리치며 타버성의 상공을 가리켰다. 지금 막 검고 큰 그림자가 나타나서, 뚜렷한 윤곽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시간 로켓이다! 그것은 천천히 드러나 있는 돔의 마루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앨런은 재빨리 원자분해포의 조준을 시간 로켓에 맞추었다. 이때였다. 돌연 시간 로켓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의 여자가 뛰어내리려 하는 것이 보였다. "앗, 기다려! 앨런, 저 여자는 나네트야. " 그러나 곧 뒤에서 조너스가 나타나더니, 나네트를 억지로 끌어들였다. 그 순간, 돔의 마루바닥에 또 다른 사람의 그림자 둘이 나타났다. "타버와 운커스다!" 앨런은 소리치며 황급히 겨냥했다. 타버는 시간 로켓의 문으로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기다려! 저 속에는 나네트가" 하며 에드워드는 앨런을 붙잡고 늘어졌다. "용서해 줘, 에드워드. 지금 타버를 놓치면 영영" 그런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어찌 된 까닭인지 돌연 시간 로켓이 타버들을 내버려 둔 채,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획 사라져 버린 것이다. "좋아, 지금이 기회다!" 하고 앨런은 재빨리 버튼을 눌렀다. 삐삐! 삐잇! 타버와 운커스는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며 노란 원자의 소용돌이로 변해 버렸다. "잘 했어. 드디어 타버는 쓰러졌어!" 그러나 다음 순간, 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일단 사라졌던 시간 로켓이 갑자기 공중에 모습을 나타냈는가 했더니 보는 사이에 큰 소리와 함께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나네트를 태우고 있을 그 시간 로켓이-   평화가 다시금 세계에 소생했다. 타버와 그의 일당 가운데 중요한 자들은 모두 죽고, 나머지 인물들은 체포되었다. 리어와 선은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미래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싸움으로 나네트를 잃은 에드워드는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나네트가 그 대폭발에서 살아 남았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직 한 가지 괴이한 일이 있었다. 잔해에서는 조너스의 시체밖에 보이지 않은 점이다. 그럼 나네트의 시체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아마도 대폭발 때문에 시체도 남기지 못했으리라.' 앨런도, 에드워드도 단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나네트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 그것은 시간 속에서다. 무슨 나네트의 유품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하고, 타버성의 돔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있던 에드워드는 너무나 놀랐다. 갑자기 공중에 몽롱한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보는 동안에 사람 모습이 되어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에드워드는 다음 순간, 다시 한번 더 기절할 듯 놀랐다. "나네트! 나네트가 아니냐!" 나네트는 실신한 상태였다. 그러나 생명에는 별 일이 없어, 병원에서 곧 기운을 회복했다. '도대체 이런 기이한 현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을까?' 앨런과 에드워드는 이상하기만 했다. "그때, 나네트는 어떡하고 있었니?" "조너스가 타버를 내버려두고 미래로 도망치려고 하길래, 나는 문에서 뛰어내린 거여요. 그때, 이왕이면 시간 로켓을 부숴 버릴 생각을 하고, 조정장치의 전선을 끊어버렸죠." "그래? 이제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 앨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하여 고장을 일으킨 시간 로켓은 곧 폭발을 일으킨 거야. 그런데 나네트는 시간을 날아가고 있던 중에 밖으로 뛰어내렸으니까, 그냥 그대로의 기세로 3일간 시간을 날다가 고체화한 거야." 이 말을 듣고, 에드워드는 기쁨에 젖었다. 밝은 미소를 머금고 외쳤다. "오오! 그렇게 된 거로군 ! 이제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게 됐어." "아냐, 아직 한 가지 남아 있어." 하며 앨런은 진지한 얼굴로 에드워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그건 자네들이 언제 결혼을 하느냐 하는 문제지." 갑자기 에드워드와 나네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에드워드도 지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나에게도 한 가지 걱정이 있네. 그건 자네와 리어가 언제 결혼을 하느냐하는 문제야." 그러자 이번에는 앨런의 얼굴이 붉어져 왔다.         작품 해설   시간 여행에 대하여   SF(공상 과학 소설)에는 현실적으로 있을 것 같지 않은 공상 이야기가 많습니다. 로봇, 우주 여행, 인공 두뇌, 돌연변이체, 반중력 장치, 살인광선, 4차원 여행 등. 이 밖에 시간을 과거와 미래로 여행하는 이야기도 물론 공상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주 여행 같은 것은 이미 현실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로봇이나 인공 두뇌, 돌연변이체, 살인광선 같은 것도 과학의 눈부신 발달로 말미암아 머지 않은 장래에 생겨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반중력 (중력을 없애는 힘)의 연구도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이미 일부 과학자들이 연구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 여행만은 과학자들 중에서 아직 아무도 연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간 그 자체의 성질조차 아직 깊이 알지 못한 형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SF작가로 뛰어난 과학자인 아서 C. 클라크라는 사람은, "사람은 생각해 내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이든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클라크도, "시간 여행만은 예외이다." 하며 단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하니 만큼 시간 여행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하는 것입니다. 시간 여행에 대해서 최초로 과학적인 이야기로 씌어진 것은 영국의 H. G․웰즈의 「타임 머신(1895년)」입니다. 19세기 말, 타임 머신을 발명꾼 청년이 80만 2천 년 후의 미래로 가서, 거기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미래의 인류를 도와 괴물로 변한 지하 인종과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로서 SF 에 최초로 등장하는 시간을 나는 기계 '타임 머신'은 오토바이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 후 SF 작가들은 둥근 공 모양, 스포츠카 모양, 침대 모양, 전차통 모양 등 여러 가지 모양의 타임 머신을 생각해 냈습니다. 시간 그 자체의 성질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방법이 차츰 복잡해졌습니다. 최초 시간 여행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마치 화성이나 금성에라도 가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에 가서 모험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작가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내가 나기 전의 시대로 되돌아가서 나의 아버지를 죽게 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이런 생각을 좀더 깊이 펴 나가면,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방해한다면?' '제 2차 대전 중의 독일군에게 제트기를 빌려준다면?' 라는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큰 문제에 대해서 SF작가들은 여러 가지 답을 소설로 썼습니다. "그 순간부터 역사가 달라진다." "아무리 과거의 일을 변동시키려 해도 한 번 일어난 일이므로 변동시키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이 거기서 가지를 뻗쳐, 역사를 바꾼 사람은 본래 역사의 흐름에 되돌아오지 못한다." 등등입니다. 그 중에는, 이러한 역사를 바꾸려 하는 범죄인을 다스리는 시간 경찰이 생겨서, 그들의 활약을 써놓은 소설도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튼 앞에서 이런 시간 여행은 실지로는 실현 불가능이라고 했습니다만, 어느 때 시간을 자유로이 나는 방법이 뜻밖에도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까닭은 지금까지에 이미 몇 차례 인간이 갑자기 과거로 가서,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고 온 이상스러운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1901년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구경하고 있던 2명의 영국인 교사가 갑자기 현재와는 아주 다른 풍경 속에 들어가서 옛날 옷을 입은 남녀와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풍경이나 사람들이 어쩌면 1789년 프랑스 혁명 시대의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근래의 예로서는, 1946년 11월의 폭풍우 치는 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부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변호사가 벼랑에 자동차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구하러 내려갔다가 4명의 시체와 중상의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경찰로 달려가서 이 일을 알리고 되돌아와 보니, 차도 시체도 중상을 입은 소녀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경찰이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그것은 22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은 일시적으로 인간이 과거에 갔다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설명할 길이 어쩌면 미래의 그 어느 곳에서 온 시간 여행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의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시간이라는 것의 수수께끼에 대해서 요즈음 미국의 물리학자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나왔습니다. 즉, '지금 우리들의 우주는 커져 가고 있지만 클 대로 커져서,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줄어들기 시작하는 순간, 시간도 미래에서 과거로 거꾸로 가기 시작하지 않을까?' 또 소련의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시간은 전기나 광선과 같이 에너지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시간도 전기나 빛과 같이 자유로이 다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끝으로 이 「시간 초특급」의 지은이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합니다. 레이 커밍스는 1887년 미국 출생으로, 어릴 때부터 과학 공부를 좋아하여 한동안은 발명왕 에디슨의 조수로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1930년대에 미래 과학에의 꿈을 담은 즐거운 SF를 많이 썼으며, 195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웰즈와 베르느에서 시작된 SF를 크게 발전시킨 점에서, SF의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시간초특급 레이 커밍스 작. 이원수 역   아이디어 회관 과학문고 174 P 19cm (SF세계명작15)   인 쇄      1975년 10월 5일 발 행      1975년 10월 10일 역 자      이 원 수 제 판      명림 정판사 오프셋     장원출판사 인 쇄      일 신 사 제 본      양지 실업 (주)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1097    별을 쫓는 사람-E E 에반스 댓글:  조회:334  추천:0  2021-09-19
 별을 쫓는 사람   E E 에반스     아빠의 부상··················· 3 행성착륙···················· 12 공포의 낚시··················· 20 애니의 진단··················· 26 모래 속의 상자················· 32 결정체 생물··················· 42 이상한 소리··················· 52 마커를 살펴라·················· 61 우주 해적···················· 67 잠자는 네 사람················· 74 대통령의 만찬회················· 82   아빠의 부상   무서운 소리가 났고, 이어서 심한 충격이 우주정을 흔들었습니다. 존은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는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존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씨익 하는 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공기가 새어 나가는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충돌 직후 멀리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지른 외마디 비명이 생각났습니다. 빨리 새어나가는 공기를 막지 못한다면……. 존은 정신이 혼미한 중에서도 공기가 새어나가는 일이 걱정이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존?" 형이 소리쳤습니다. 존은 벽에 아주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었습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둘둘 뭉쳐 눌렀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황한 존은 비상용 수리함 쪽으로 달려가, 조그만 금속판을 떼어 가지고 와서 벽의 구멍에 갖다 대었습니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아. 밖에 나가서 고쳐야 하겠어.'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존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형이나 아버지, 어머니는 도와주러 오지 않는 걸까?' 존은 서둘러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죠 ? 형, 도대체 왜 이래요 ?" 잭은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쓰러져서 머리를 다치셨단다. 다리까지 부러지시고……." 존은 어머니 옆에 앉아, 어머니의 어깨를 안았습니다. 이 몇 해 동안 존은 키가 무척 커지기는 했지만, 아직 16세의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잭은 아버지가 누울만한 곳을 만들고, 구급 상자에서 약을 꺼내 다친 곳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정의 조종은 서툴렀지만, 형은 이런 일에는 매우 민첩했습니다. 형은 벌써 아버지의 다친 머리 상처에 약을 바르기 위해 면도까지 해 놓았습니다. 어머니가 존에게 말했습니다. "존, 넌 이 우주정을 조종할 수 있겠지. 얼른 되돌아가자꾸나. 어느 별에 병원이 있을까?" 존은 놀라 어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도 우주정의 조정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아마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어머니, 우주정 조정은 땅 위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는 틀려요. 속력은 줄일 수가 있지만, 방향을 바꾸려면 앞으로 이틀은 기다려야 해요." 그러자 잭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어머니. 날아가고 있는 도중에는 갑작스럽게 우주정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어요. 그렇지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아버지의 상처는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요." 존은 다시 계속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병원이 있는 별은, 가장 가까운 곳이라 해도 한 달은 걸려요. 벌써 지구를 떠난 지 6주일이 지났으니까요." 치료가 끝난 후,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존, 아버지가 다친 이유를 알았니?" "예. 조그만 운석이 뚫고 들어와서 아버지에게 맞은 것 같아요. 틀림없을 거예요. 스쳐갔으리라고 생각은 들지만 아무튼 굉장한 속력이니까요. 아버지는 조금 다치신 거예요. " "그래, 그런데 공기는 새지 않는구나." "예. 제가 즉시 응급 처리는 했어요. 그러나 밖에 나가서 제대로 고쳐야 돼요. 되도록 빨리 말이에요." 어머니는 존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이 몹시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이 혼자서 우주정 밖으로 나갈 것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조심해야한다, 존. 밧줄을 단단히 매고......." "괜찮아요. 벌써 여러 번 밖에 나갔잖아요." 존은 그 때까지 여러 번 우주정 밖으로 나간 일이 있었습니다. 나가서 보면 밖의 아름다움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새까만 우주에 몇 10만이나 되는, 헤아릴 수도 없는 빛의 점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빛의 점은 모두가 커다란 태양인 것입니다. 더 멀리에는 몇 10억이라는 태양이 모여진 성운이 가로질러 있고. 주위의 은하수까지, 우리들의 은하계 우주보다 큰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으로 있는 것입니다. 은하수 중에서도 큰 태양은 아주 뚜렷이 보이고 있습니다. 카노푸스, 리켈, 데네브, 베텔규스, 안타레스 등입니다. 지구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위치가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합니다. 별을 바라보던 것을 그만두고, 존은 천천히 선체를 따라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왼쪽으로는 8미터, 그리고는 1미터 가량 문 쪽으로 다가서면 되는 거였지......' 존은 자석 구두를 조심스레 옮기면서 다가갔습니다. 몇 천만의 별빛으로 주위는 무척 밝았습니다. 존은 운석이 부딪친 곳을 발견하여, 벨트의 주머니에서 액화 금속을 뿌리는 도구를 꺼내, 그 구멍에 밀어 넣었습니다 구멍을 메우고 존은 작은 가스 버너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다. 온도가 0도에 가깝기 때문에, 금속은 불이 닿자 곧 빛깔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사히 일을 마치고 선 내로 돌아왔지만, 나갈 때에 도와주었던 형 잭은 문에서 기다려 주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옆에 있지 않으면 약을 조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형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명이 있는 것을 조사하는 일과, 약이 무엇 때문에 효력이 나는가에 대해 조사하는 일 만을 좋아합니다. 서둘러서 방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어머니와 잭은 말없이 아버지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좀 어때요?" "마찬가지지 뭐." "형 어때? 괜찮으실까?" "회복이 생각보다 늦으실 것 같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존은 재빨리 여러 가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은 어떻게 해야 좋은가? 우주정을 운전하며 항로 계산을 하는 것은 누가 해야 하나? 목적지에 닿게 되면 도대체 누가 착륙을 시켜야 하나?' 존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빠, 죽으면 싫어요!' 존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쳤습니다. 아버지 테드 가버는 우주 개척자였습니다. 최초로 지구의 우주선이 항성 시리우스에 갔을 때, 아버지는 그 우주선에 사관으로 탔던 것입니다. 그 후, 우주 여행은 점점 더 성행했습니다. 지금은 3 주간의 휴가만 있으면 1천 크레딧으로 달에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달 정도의 휴가면 4천 크레딧으로 화성이나 금성을 여행 할 수 있습니다. 시리우스나 베가의 행성이라도 정기 여객 우주선이 다니고 있으므로, 요즘에는 지구의 식민지가 된 많은 혹성에 우주선이 많이 왕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테드 가버는 다른 사람이 먼저 발견한 별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혹성을 조사하여, 지구를 위해 쓸모 있는 금속 또는 방사성 자원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존의 아버지는 아주 오랫동안 우주에서 일해 왔으며, 겨우 작은 우주정 하나를 사서 가족과 함께 우주 탐험을 계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존이 타고 있는 우주정은 인류가 아직 까지 날아본 적이 없는 곳을 날고 있습니다. 쓸모 있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의식을 찾을 때까지 어떻게 해야 좋지?' 존은 또 그 일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항로를 어떻게 정하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계신다. 조금 전에도 곧 되돌아가자고 말씀하셨을 정도니까.' 그 면에서는 형 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형이니까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지만, 우주선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합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존은 우주선의 기계를 만지며 자라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에 들어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의 별로 갈 수 있는 항로를 정할 수 있는 방법. 즉 항행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나 수학이 어려운지, 일생을 걸려도 다 알지 못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존, 이 일을 어떡해야 좋으니? 아빠가 이렇게 되시니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존은 갑자기 어른스럽게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어머니. 우리 힘으로도 갈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가 생각하신 일을 그대로 계속하는 거예요." 어머니는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것을........." 이번에는 잭 쪽을 보고 물었습니다. "잭, 네 의견도 듣자꾸나!" 가냘픈 몸을 가진 잭은 더듬거리듯 말했습니다. "모, 모르겠어요. 차라리 지구로 되돌아가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말하는 잭의 눈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18살인데도 잭은 어린 아이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에겐 말해 보아도 소용없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없으면 우린 죽을 지도 모르는 걸요!" 존은 놀란 얼굴로 형 잭을 쳐다보았습니다. "힘을 내, 형!"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존은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머니와 잭이 눈이 둥그래져서 바라보았습니다. "모두 침착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 우주정은 자동이고, 지금 속력을 줄이고 있는 중이니까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아버지에게는 매우 중요한 여행이기 때문에, 만일 지금 중지한다면 아버지는 실망하실 거예요." "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고 있니? " 잭이 물었습니다. "알고 말고. 아버지가 몇 번이나 말씀해 주셨어."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아빠가 나으실 때까지 둘이 의논해서 뭐든 결정하도록 해요, 난 지금부터 뭔가 먹을 것을 만들겠다." 다음 날 아침에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해져서 두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어젯밤 세 번 정도 의식을 찾으셨다. 그렇지만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또 잠드셨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존은 잭과 함께 조종실로 가서 조종실의 여러 가지 기계를 점검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가려고 했던 항성까지 얼마큼 가면 닿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조사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그 항성과 주위의 행성들이 비춰지고 있었습니다. 운석과 충돌할 위험이 없느냐고 잭이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운석이라는 것은 행성의 근처에만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항성계에서 떨어진 곳에서도 운석에 맞는 일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존은 잭에게 자세히 아는 데까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존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둥근 돌을 꺼냈습니다. "어젯밤에 발견했어." 잭은 그 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돌이 벽을 뚫고 들어왔을 때, 우주정의 속력이 줄어들고 있어서 망정이지, 보통 속도 때였으면 아버지에게는 정통으로 불행이 닥쳤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지?" 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잭이 정신이 나간 것처럼 존에게 물어 왔습니다. 우리들이 향하고 있는 항성에는 행성이 4개나 5개 정도가 있는데 그 중 2개나 3개, 아니 4개는 지구와 같아서 인간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행성을 조사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입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정부는 다음 여행을 허락하지 않을 터여서, 아버지는 이 우주정과 우주 여행에 돈을 모조리 투자했던 것입니다. 제일 가까운 곳에 도착하는 데도 2일 이상 걸리는데, 이대로 나갈 수밖에 없다고 존은 잭에게 설명했습니다. "형, 아버지는 괜찮을까? " "글쎄, 심한 상처는 아니지만........, 다리에 깁스 붕대도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존은 안심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만일 돌아가신다면 지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더 무서운 일은 '슬릭 보건'이 자신들이 와 있는 이 근처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지구를 떠날 때 들었던 사실입니다. 슬릭 보건은 유명한 우주 해적입니다. 슬릭 보건이 앞질러 가면 큰일입니다. "존, 이 우주정을 착륙시킬 수 있겠니?" "어젯밤부터 수면 학습기를 사용하여 공부하고 있었어. 그리고 아버지에게 배워 가면서 착륙한 일도 있었으니까, 형이 도와준다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잭은 말없이 한동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얼굴을 들고 힘있게 말했습니다. "힘을 내는 거다!" 형과 동생은 굳게 손을 잡으며 약속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침착하게 기운을 내야 한다며, 잭은 평소 똑똑했던 사람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행성착륙   존은 조종실로 돌아와 우주 기술 책을 꺼내, 별의 지도에 맞춰가며 위치를 조사하고, 조종 장치를 기억하며 암기해 나갔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어서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불안해하였습니다. "언제쯤 도착할 수 있니?" "내일 점심 때 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어머니. 정확한 시간은 조금 뒤에 계산해야 돼요. 형이 앞으로의 일을 결정한다고 말했지만, 우주선에 대해서는 형보다 많이 알고 있으니까, 우주선에서는 내가 선장이 되는 것이 어때요?" 어머니는 놀라 존을 바라보았지만, 형 잭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허락했습니다. "어른이 다 되었구나. 사내다워졌어. 어느 행성에 착륙할 작정이지?"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습니다. "좀더 조사를 해야 해요. 사람이 살 수 있는지를 조사해야 되니까. 우주 해적인 보건이 앞지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도착해야 되요." 모든 것을 잭과 존에게 맡기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호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존과 잭, 그리고 어머니는 조종석에 모여 가까워지고 있는 태양계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태양은 지구의 태양보다 조금 크고 행성의 수는 5개뿐이었습니다. 그 중의 세 개, 2, 3, 4 의 사이에는 위성이 7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와 3 행성은 지구인이 살 수 있을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존은 그 행성 주위의 궤도로 우주정을 돌입시켰습니다. 150킬로미터 높이에서, 아래로 보이는 행성을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식물은 보이는 것 같은데,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구와 같은 크기의 그 행성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달도 하나 있었습니다. "바다도 많이 있고, 아주 굉장한 밀림까지 있어! 망원경으로 봐." 잭이 망원경에 매달려 말했습니다. "호수와 강도 있고 평야도 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땅 같아요." "춘하추동이 있는지, 남극과 북극에 눈과 얼음 같은 것이 보여, 형."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걸." "형! 이곳의 1년은 3백일 정도인 것 같아. 대강 계산해 보았지만." 주장들이 서로 엇갈린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그들의 말에 끼어 들었습니다. "이 별에 내릴 작정이니?" "잠시 후에 결정하겠어요, 어머니." 공기와 온도를 조사해야만 착륙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으므로, 우선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조사를 위해 존은 우주정을 내렸습니다. 온도는 35도 가량, 지구보다 탄산가스가 조금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야에 내리기 위해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돌봐야 했으며, 형은 미터를 봐 주어야 했습니다. 존은 이런 일들을 침착하게 지시하면서, 아주 선장다웠습니다. "형, 바깥의 기압은?" "742." "높이는 43300, 1초에 100씩 내리고 있어." 우주정이 착륙했습니다. 충격이 심했는지, 우주정이 온통 덜거덕거렸습니다. 역분사를 끊고 연료 호스를 끊은 다음, 레버를 중립의 위치로 보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창백해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존은 웃어 보였습니다. 잭은 훌륭한 동생을 격려하고 싶은 마음으로 농담을 했습니다. "너 우주정을 망가뜨릴 작정이었지?" "존은 무척 잘했다. 처음 한 것 치곤 너무 잘했어요," 어머니가 웃어 보였습니다. 존과 잭은 악수를 나누며 웃었습니다. 한 시간쯤 밖을 조사하자는 제의를 존이 했을 때, 우주정 밖에서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무슨 괴물일까! 우주선의 몸통이 흔들릴 정도였습니다. 길이는 5미터 정도, 많은 털에 싸여있고, 높이는 3 미터 가량, 게다가 몸은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괴물이었습니다. 머리는 말과 비슷했으며, 큰 입을 벌리자, 길다란 송곳니가 줄지어 있었습니다. 둘은 창 너머로 이상한 괴물을 숨막힐 정도로 긴장을 하며 지켜보았습니다. 총으로 죽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문을 반쯤 열고 20m즘 떨어진 곳에 있는 괴물을 향해, 존은 왼쪽 눈, 잭은 오른쪽 눈을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쏘았습니다. "하나, 둘, 셋, 쏴!" 붉은 피를 내뿜으며, 괴물이 우주정을 향해 돌진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에 그 거대한 몸뚱이가 부딪혀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뜻밖에 괴수는 울부짖음을 멈추고 비틀대다가 땅 위에 쓰러졌습니다. 어머니가 파랗게 질려 조종실로 들어왔습니다. "뭐가 어떻게 됐니?" "괴물이었어요. 존과 둘이서 물리쳤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선체가 그토록 움직인 것을 보니, 무척 큰 짐승이었나 보구나. 죽었니?" "틀림없이 죽었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 고기를 떼어 오겠어요." 좋은 반찬이 될 거라고 웃어 보이면서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이곳에서 떠나자면서 떨고 있었습니다. 잭과 존은 어머니를 껴안듯이 하여 거실로 쓰이고 있는 방에다 모셔다 드렸습니다. 의자에 앉아, 잭은 어머니를 위로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무척 좋아해요. 언제나 어머니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곤란해요, 다른 별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아직 아버지도 주무시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어머니 ......." "저도 잭형도 어리긴 하지만 남자잖아요. 저희들을 믿어 주세요." 존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어머니는 형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진정이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구나....... 너희들을 어린 아이 취급을 해 미안하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몇 번씩이나 타일렀습니다. 잭과 존은 다시 총에 탄환을 재어 가지고, 우주정 밖으로 나갔습니다. 몇 십 마리나 되는 새들이 날아올랐습니다. 괴물은 어느 사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 새들에게 먹혔나 봅니다. "반찬 하기는 틀렸군." 존이 아쉬운 듯 말하자, 잭은 웃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 존.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쉽잖아. 하지만 송곳니는 굉장한 것 같으니, 저것은 가지고 가자." 잭은 송곳니를 뽑아 가지고, 우주정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우주정 주위를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버 집안의 이 우주정 이름은 '스타 로버'로서 별 사이를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뜻이었습니다. 길이는 26미터, 지름은 가장 굵은 곳이 6미터 정도였습니다. 맨 앞에는 둥글게 조종실이 만들어져 있고, 두꺼운 유리창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이 거실인데, 그것은 가장 큰방이었습니다. 침실이 2개, 욕실과 부엌, 그리고 창고, 연료 탱크와 기계실 이 있었습니다. 온도를 높이거나 내리거나 하기 위한 기계, 공기를 맑게 하는 기계, 전기를 일으키는 발전기, 펌프 등이 있는 기계실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우주정을 날아가게 하는 원자력 로켓 엔진이 있었습니다. 그 아래가 분사관입니다. 착륙할 때, 그 분사관이 망가지지 않았을까 걱정했던 존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무런 이상도 없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주 강한 금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잭은 총을 들고 주의 깊게 주위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선장!" 잭이 웃어 보였습니다. 존은 형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형, 우리가 우주정 밖에 있을 때, 어머니가 우리를 부를 수 있는 장치를 만들면 어떨까? 사이렌이나 그와 비슷한 걸 말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형 잭도 대찬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우주정 입구에 서서 진기한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주정으로 들어가는 에어록 쪽을 돌아보며 존이 어머니를 부르려고 했을 때, 갑작스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는 눈 깜짝할 새에 폭포처럼 쏟아져, 존과 잭은 당황하여 에어록 쪽으로 뛰었습니다. 둘 다 비에 흠뻑 젖어 우주정 안에 들어왔습니다. "굉장히 많이 내리는데, 매일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걸까?" 존이 이상스럽다는 듯이 잭에게 물었습니다. 잭 역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습니다. "글세? 천둥소리도 없고 번개도 치지 않으면서 비가 내리는데!" 어머니는 미소만 짓고 있다가, 두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좋아지시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약간 움직이기까지 했단다. 물론 아직 눈은 감고 계시지만." "정말 다행이에요!" 잭이 기쁜 얼굴로 소리쳤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무릎을 쳤습니다. "여긴 마을이라고는 없어, 우리가 최초로 발을 디딘 인간이 되는 거다." "그래, 맞아!" 존은 잠시 후에 형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알아 차렸습니다. 태양계의 이름은 처음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존, 이 태양계의 이름을 뭐라고 할까?" "그야 뻔하지. 가버!" "좋았어! 그럼 다섯 개의 행성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붙이자!" 5개의 행성에 테드, 마티, 잭, 존, 로버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하나의 세계 전부가 한 가문의 이름으로 불려 진다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공포의 낚시   존은 낚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냇물만 보면 생각하는 것은 그저 낚시였습니다. 아침 식사 때, 문득 생각이 난 듯, 존이 말했습니다. "여기 내려올 때, 옆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걸 못 보았어?" "못 보았는데, 왜?" 물론 냇물이 있으면 고기가 있을 거니까, 낚시질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도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형 역시 밀림을 조사하고 싶어했으므로, 형제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존은 한편으로 아버지가 조사하려던 것이 이 근처에 있는지를 조사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빈터에 마커를 세워야 합니다. 마커란 최초로 어떤 행성을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지구에 알리는 기계입니다. 테이프에,   '여기는 테드 가버에 의해, 2136년 1월 14일에 발견된 가버 태양계 제2 행성, 마티로 불려짐.'   라는 말을 녹음하여 5분 간격으로 지구에 보내게 됩니다. 그 기계 안에는 작은 원자력 전동기가 있고, 5년 동안은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를 지구의 세계연방정부 식민국이 인정하게 되면, 테드 가버는 발견한 날로부터 20년 동안은 이 별에 온 사람들이 얻는 동물, 식물, 광물, 보석 등 모든 것의 0.5%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마커를 빈 터 가장자리에 세워 놓고, 형제는 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며 숲을 향해 나갔습니다. 총에 맞아 죽은 괴수가 지나다닌 곳이었는지, 길 같은 것이 숲 속에 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에 땀이 배도록 총을 꽉 잡았습니다. "나비 좀 봐, 존. 단풍나무 같은 것도, 아니 저건 야자열매 아니야!" 흥분한 목소리로 잭은 외쳐댔습니다. 진기한 동물, 지구에서 자라는 것과 비슷한 나무들을 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풀숲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존은 밀림 속에서 괴상한 짐승이라도 나타날 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며, 주의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우주정 스타 로버에서 꽤 멀어졌을 때, 존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잭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10미터 가량 앞에서 무엇인가가 언뜻 움직였습니다. "탕, 탕! " 존은 연속으로 두 방을 쏘았습니다. "뭐지?" "글쎄, 아직 모르겠어!" 두 소년은 총을 곽 쥐고 조심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풀숲 속에는 큰 토끼 같은 세 발 짐승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요리를 하면 무척 맛있는 반찬이 될 것 같았습니다. 잭은 기뻐하면서 주머니에서 끈을 꺼내 묶은 뒤, 어깨에 메었습니다. 우주정을 떠난 지 약 두 시간 가량 되었을 때, 마침내 냇가에 닿았습니다. 내의 폭은 400미터쯤 되어 보였습니다. 이쯤 되면 작은 내라고 할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존은 흥분하여 떠들어댔습니다. "물고기가 있어, 형. 내가 낚을 테니 형은 주위를 살펴 주어야겠어." 깊지 않은 것 같은 물 속에서 검은 것이 불쑥 움직였습니다. 틀림없이 물고기인 것입니다. 존은 총을 놓고 낚시질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곧 낚싯대가 흔들렸습니다. 물고기가 잡혔다는 반응이 왔습니다. 존은 신이 나서 릴(실, 철사 감는 틀)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40cm 가량 되는 고기를 물가의 모래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송어와 비슷했고 지느러미가 전혀 없었는데, 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헤엄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물고기인지 뱀인지 분간할 수가 없구나! " 잭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한 마디 했습니다. "글쎄 말이야. 물고기 같은데, 뱀장어와 비슷하군. 맛은 있겠어." 이 근처의 물고기들은 처음 낚시질을 당해 본다는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존은 계속 낚싯대를 던졌습니다. 낚시가 수면에 닿기가 바쁘게 반응이 왔습니다. 쉴 사이 없이 고기가 잡혀 오자 존은 신이 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을 때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강 밑바닥은 너무나 부드러운 모래여서, 몸이 점점 빠져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존은 다급해서 잭에게 소리쳤습니다. "형, 살려 줘! 빠져 들어가고 있어!" 잭은 깜짝 놀라, 옆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재빨리 꺾어 존 쪽으로 내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뭇가지가 짧아, 존의 손엔 미치지를 못했습니다. 잭은 그대로 물 속에 뛰어들려고 했습니다. "안 돼 형! 형까지 빠져 들어가 버린다고!" "잠깐만 참아, 존!" 잭은 주위를 돌아보고서 큰 나무에 감겨 있는 덩굴을 끊어 존에게 던졌지만, 잭은 몸무게가 가벼웠으므로, 존을 끌어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존은 벌써 허리까지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잭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덩굴의 끝을 나무에 매었습니다. 존은 벌써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형, 형은 정말 좋은 형이었어.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탁해!"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단념해서는 안 돼, 존! 힘을 내!" 말은 했지만, 잭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쩔쩔 맸습니다. 어머니를 부르러 갔으면 좋겠으나, 그 동안에 존은 어떻게 되는 건가!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좋은 생각이 있어, 존. 조금만 참아! " 이미 존은 목 밑에까지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존, 덩굴을 가슴에 단단히 매야 한다. 절대 풀어서는 안돼." 잭은 소리쳤습니다. 잭은 나무에 맸던 덩굴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덩굴을 가지고 나무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존은 형이 하고자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존은 기운을 냈습니다. 잭은 나무꼭대기로 올라가서는 강기슭 쪽으로 매달렸습니다. 활처럼 나무가 구부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끝에 덩굴을 얽어맸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또 매달렸기 때문에, 나무는 또 구부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무의 꼭대기가 땅에 닿을 듯이 되면서, 덩굴은 끊어질 듯이 팽팽해졌습니다. "뛰어내리면서 나무를 놓을 테다!" 나무 위에서 잭이 소리쳤습니다. "알았어! " "하나, 둘, 셋! " 잭이 나무를 놓으며 뛰어내리는 순간, 목까지 물 속에 가라앉았던 존의 몸이 쑥 빠져 나오는가 싶더니, 순간, 공중으로 날아올라 잭 옆에 떨어졌습니다. 잭은 재빨리 존의 몸에 감겨 있던 덩굴을 풀고, 얼굴에 묻어 있는 모래를 털어 주었습니다. 존은 그 경황에서도 어머니를 걱정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말하지 마, 형." "알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시 낚시질하러 오지 않는 게 좋아." 그들은 스타 로버를 향해, 마의 낚시터를 떠났습니다. 옷이 왜 젖었는가에 대하여도 어머니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우주정에 가까이 오자, 어제처럼 많은 비가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존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잭을 향해 싱긋 웃었습니다. "형, 다행이야. 어머니가 옷이 왜 젖었는가 묻지 않으실 테니까 말야."   애니의 진단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오래도록 깡통 음식만을 먹어 왔으므로, 오랜만에 군침 도는 요리를 먹을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리고 존이 낚아 온 고기였으므로, 더욱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리를 끝낸 어머니는 혹시 독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였습니다. 잭은 살점을 떼어 창고로 가져 가 흰쥐 6마리를 넣어둔 우리 속에 한 조각을 넣었습니다. 먼저 1마리가 달려들어 곧 먹어 치웠습니다. 다음 한 조각은 다른 1마리가 먹어 치웠으나, 5분이 지나도 쥐는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녔습니다. "흰쥐에게 먹였는데 아무 이상 없어요." 잭은 손에 들었던 것을 먹으며 말했습니다. "아주 맛있어요!" 잭은 연신 감탄을 하였습니다. 세 사람은 둘러앉아 오랜만에 싱싱한 생선 요리를 먹었습니다. 순식간에 3개의 접시에 담겨져 있던 고기는 뼈만 남았습니다. 잭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상태를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아까는 주무시던데요." "응, 몇 번이나 움직이셨다. 신음 소리를 내면서 돌아누우려고도 하셨어. 아직 의식을 찾진 못하셨으나, 떠 넣어 주는 수프는 넘기시는 정도다." .잭은 안심했다는 듯이 외쳤습니다. "됐어요. 이제 곧 좋아지실 거예요." 존도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정도의 상처로 굴복하실 분이 아니야. 내일은 우주정을 움직여서 이 행성을 더 조사하기로 해. 그리고서 다른 행성에 가는 거야. 그만 쉬도록 해. 내일을 위해서 말야." 잭은 반대하고 싶었으나, 존이 눈짓을 했으므로 할 수 없이 끄덕거렸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녁 인사를 하고 침실로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왜 그래? 이렇게 빨리 자려 하다니." "형, 미안해. 치료를 좀 받아야 해서 그랬어." 존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셔츠를 벗었습니다. 존의 가슴이나 배에는 붉고 푸른 빛깔의 멍이 커다랗게 생겨, 그곳은 상당히 부어 있었습니다. 잭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손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존은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많이 아팠지만 말을 하지 않은 채, 꾹 참아 왔습니다. 잭은 구급 상자를 꺼내어 치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면제를 먹여, 동생을 빨리 잠들게 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상처의 부은 곳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두 형제는 행성의 주위를 조사하기 위해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존은 식민국에서 낸 책에 죄다 씌어져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대로 하면 되는 거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켰습니다. 존과 잭은 나란히 조종실에 앉아, 잭이 이륙하는 방법을 쓴 책을 보았고, 존은 그대로 조종 장치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연료 밸브를 열어!" 잭이 외쳤습니다. "그래, 됐어." "연료 펌프 스위치를 넣어." "넣었어." "엔진 시동을 걸도록." "됐어." "제 1분사관 시동!" "그래." 네 개의 로켓 분사관이 차례로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우주정은 흔들리며 조용히 떠올랐습니다. "고도는?" " 1700." "2400으로 지면에 수평 하게 해야 해." "알았어." "자동 조종으로 변경토록." 두 소년의 아래에는 행성 마티의 표면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밀림이 계속되기도 하고 이따금 냇물과 호수가 나타났습니다. 1시간 정도가 지나자 대평원 위에 이르렀습니다. 몇 마리의 소가 있었습니다. 발이 3개 달린 들소인 것 같았습니다. 망원경을 보고 있던 잭은 발이 3개라는 것에 놀라 소리치며,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습니다. 평야를 지나니 깊은 숲이 나타났고, 이것이 2천 킬로미터나 계속된 후에는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넘는데 걸린 시간이 1시간 가량이었으니까 대략 1,500킬로미터의 폭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육지가 보였습니다. 2백 킬로미터 정도를 지나자, 산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근처에 금속이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존은 스펙트럼 분광기에 주의하여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찾고 있는 금속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잭에게도 미터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걸 좀 봐, 형 아버지가 찾고 있는 금속이 있는 것 같아." "우주선의 연료로 사용되는 것 말이니?" "잘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무거운 금속인 것 같아. 아버지는 이 태양계에 그 금속이 꼭 있다고 믿으셨어." "그러나 금속이 묻혀있는 장소를 찾는 것도 큰 일 아니냐?" "아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이 도구를 사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어!" 14번 창고에 들어있던, '애니'라고 불리는 특수 금속 탐지기를 꺼내들고, 두 소년은 착륙 장소를 찾았습니다. 금속 탐지기 애니가 가리키는 대로 한 시간쯤, 금속이 가장 많이 묻혀 있을 만한 곳을 찾다가, 드디어 두 소년은 산과 산 사이에 펼쳐진 사막에 스타 로버를 착륙시켰습니다. "산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막이라니........" 잭에게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애니의 진단은 틀림없어. 이 사막에 광맥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5백 미터도 걷지 않았는데, 태양의 열과 불타는 듯한 사막의 뜨거운 반사열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견딜 수가 없어. 우주정에 돌아가 우주복을 입어야겠어." 잭의 말에 존도 찬성했습니다. 우주복에는 냉방장치가 되어 있으므로, 곧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강도가 줄어들고 있어. 형, 지나 왔나 봐. 왼쪽으로 30미터쯤 되돌아가야 되겠어." 존은 애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잭에게 마이크로 말하고는 서둘러서 되돌아섰습니다. "존!" 얼마 후에 잭이 큰 소리로 존을 불렀습니다. 뒤돌아보니까, 잭은 모래 위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존은 형에게로 급히 달려갔으나, 잭은 이미 일어나 서 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무엇에 걸려 넘어졌어. 파 보기로 하자." 잭은 삽으로 모래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존은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형, 금속판인데! 뭐지?" "글쎄, 나도 궁금한데......" 잭은 계속해서 파고, 존은 애니를 계속 그것에다 가까이 댔습니다. 째깍째깍, 애니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모래 속의 상자   묻혀 있는 것은 커다란 상자인 것 같았습니다. 가로, 세로 1미터 가량의 상자 뚜껑이 나타났습니다. 묻혀 있는 부분을 짐작할 수가 없어, 구석 쪽에 좁은 틈을 삽 끝으로 들치며 열어 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습니다. "뭘까, 형? "글쎄다. 하지만 아주 오래 전에 묻혔던 것 같아." 파고 또 파고, 오랜 시간을 허비한 뒤에야, 상자 주위의 모래를 털어 버리고, 겨우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속에 또 하나의 뚜껑이 있었습니다. "형, 이게 뭐지?" 존은 놀라 잭에게 물었습니다. 그곳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각사탕 만한 크기의 금속이 몇 천 개인지 헤아릴 수도 없이 들어 있었습니다. 잭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려 했으나, 존이 재빨리 그 손을 저지했습니다. 애니에서 굉장한 소리가 나고 있었으므로, 방사능이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은 당황하여서 뚜껑을 닫았습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존과 잭은 서로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형, 저건 은하계를 여행하는 생물의 연료 창고인 것 같아." 그러나 잭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하지 마, 여기까지 올 정도의 생물이라면 지구에도 왔을 게 아니냐?"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우주의 크기에 비해 지구 같은 건 존재도 없을 만큼 작아. 여기에 왔다고 해서 꼭 지구에 오라는 법은 없어." "어떻든 저것을 우주정에 운반하여 연료인지 아닌지를 조사해 보도록 하자." 생각 끝에, 우주정을 이곳으로 운전해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원자로에 넣어서 시험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존은 우주정으로 되돌아가 조종석에 앉아서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조종실로 들어온 어머니는 잭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무척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존은 어머니에게 모든 걸 설명했습니다. 존은 어머니에게 안전띠를 매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부조종사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맸습니다. 우주정이 떠오르자,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발견한 것이 뭐지?" "아버지가 말씀하신 새로운 연료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나 방사능이 강해서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조사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설명하고 나서 존은 우주정을 천천히 착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창 밖을 보니 잭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스타 로버가 착륙하자, 잭은 뛰어 들어오며, 어머니에게는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성급하게 그 금속을 어떻게 시험해볼 것인가에 대해서만 흥분해 있었습니다. 두 소년이 의논하는 것을 말없이 보고 있던 어머니는, "실험은 안 된다. 그것은 아빠가 결정하실 일이야!" 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가 일어나셨나요?" "아니. 마찬가지야. 아직까지 주무시고 계시단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요." 두 소년이 아무리 졸라도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한 일은 아버지가 있어야 하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두 소년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존!' 아버지가 눈을 뜨실 때까지 다른 행성에 마커를 두고 올까?" "우선 여기의 일을 끝내도록 하지 뭐, 그래도 아버지가 눈을 뜨시지 않으면 그때 가도록 해." "그래, 그러자." 존은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잭은 씽긋 웃어 보였습니다. "형, 우리도 이젠 당당한 과학자고 조종산데, 왜 어머니는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 거지?" 잭은 고개를 끄떡이며, 다시 씽긋 웃어 보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눈을 뜨시면 그 금속 조사를 어머니가 말리셨다고 말하세요." 어머니도 물론 존의 기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일을 아이들에게만 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잭은 동생을 위로하며 상자가 있는 곳에 표적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미안하구나, 존. 엄마는 너희들에게 너무 무리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알겠니?" 존은 싱긋 웃으며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제가 투정을 부려서 죄송해요, 어머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것은 언제나 옳아요. 저는 제 1 행성의 진로를 계산해 보겠어요." 다른 행성에 마커를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주정이 날아가는 진로를 정확하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존은 책을 보면서, 몇 번씩이나 진로를 계산하는 것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계산을 되풀이하여 틀림이 없음을 알고 존은 겨우 마음을 놓았습니다. "형, 이제 안심이야!" "존, 잠깐……" 그때, 아버지가 누워 있는 침대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 무...... 물." 그것은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였습니다. 어머니, 잭, 존 세 사람은 아버지에게 뛰어갔습니다. 아버지는 눈을 희미하게 뜬 채, 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는 여태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잭은 아버지가 왜 누워 있는가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존은 이제까지 했던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잠이 깨지 않은 소리로, 아버지는 그들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잘했구나........ 훌륭하다......" 그리고는 존이 이상한 금속에 대해서 말하기도 전에 또다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아니 의식을 또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얘들아, 정말 다행이다. 너희들 참 훌륭했다." 장한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 1 행성 테드에의 비행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으며,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태양계의 수성보다 작고, 항성 가버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었으므로, 대단히 더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 마커를 세우고서, 일행은 제 3행성, 잭이라 이름 붙인 곳으로 향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종실을 통해 행성 잭의 모습을 세 사람은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있는지, 사람이 살고 있는지에 패해서 말입니다. 밀림, 사막 그리고 평원의 주위를 두 개의 달이 돌고 있었습니다. 달 하나는 그 지름이 거의 1,500킬로미터, 다른 또 하나는 2,000킬로미터 정도였습니다. 잭은 구름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잭은 소리쳤습니다. "존, 구름이 있다!" 어머니도 들떠서 외쳤습니다. "큰 바다도 보이는구나! " 몇 분 후에 잭이 또 소리쳤습니다. "산맥이 보여! 눈이 쌓여 있다!" 존은 우주정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도록 조종하였습니다. 행성의 표면이 태양계에 미치고 있는 곳을 줄곧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스펙트럼 분광기는 이 행성의 여기저기에 많은 광물이 있다는 것을 가리켜 주고 있었습니다. 식물도 꽤 많았는데, 붉은 색깔로 봐서 가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잭은 쉬지 않고 관측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인간처럼 지능이 우수한 생물이 살고 있다는 징조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우주정의 고도를 낮춘 채, 존은 계속 사진을 찍었습니다. 잭은 공기를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은 없었지만, 매우 희박해서 지면에서는 항상 우주복을 입고 다니는 편이 수월할 것 같았습니다. 물론 화성보다는 좋았지만 지구나, 여기의 제 2 행성만큼은 좋은 공기가 아니었습니다. 온도는 0도 보다는 조금 낮았으나, 낮에는 더 따스해 질 것 같았습니다. "그렇담 여기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겠다. 여기보다 더 나쁜 공기의 별에서도 살고 있으니까 말야". 존이 기쁜 듯이 말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안데스 산맥에 살고 있는 토인은, 화성에 가서도 돔(반구형의 지붕) 없이 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짙은 공기에서는 숨이 막혀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처음에 화성에 갔을 때는 돔이 없어서는 안 되었겠지만 2대째가 되어서는 끄떡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우주정이 착륙하자, 두 소년은 우주복을 입고 바깥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딜 가나 걱정뿐이었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곧바로 5킬로미터 정도 나아가서 우주정 주위를 돈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두워지기 전에는 우주정에 돌아오겠어요," 존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들은 5킬로미터 정도를 무사히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 다음 왼쪽으로 돌아, 1킬로미터 정도에서 숲을 만났습니다. 왠지 기분이 좋지가 않았으므로 둘은 어느 사이에 어깨동무를 하고 걸었습니다. 그 숲의 나무들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무서웠습니다. 숲에서는 단 한 마리의 동물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 2의 행성과는 너무나 다른 것 같았습니다 "숲이 이상한 것 같다. 총의 안전 장치를 풀어." 존은 잭이 시키는 대로 총의 안전 장치를 풀고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지름 100미터 정도의 빈터로 나온 두 소년은, 주위의 나무를 잘 조사해 보았습니다. 둘이 서 있는 곳은 모래였으나, 나무 밑은 흙이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주위에 서 있는 나무가 지구나 제 2 행성에서처럼 곧게 자라지 못하고, 꾸불꾸불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나무가 10미터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줄기는 몹시 굵었습니다. 6개 이상의 가지가 있는 것이 없었고, 잎이 나 있지 않았습니다. 줄기는 밑에서 맨 위에까지 똑 같은 굵기였습니다. 두 소년은 계속 앞으로 걸었습니다. 숲 끝에 이르자, 조금 마음이 놓였습니다. 잭은 한참 흙을 조사하고 나서, 존에게 이상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습니다. "이상해, 이 별에는 조그만 벌레가 하나도 없어." 그것뿐만 아니었습니다. 동물도 새도 그리고 인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식물은 많았지만, 그 식물들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었습니다. "벌레들이 없는데 식물이 어떻게 많아질 수 있지? 꽃가루를 옮길 수 없을 텐데 말이야." "그래, 이상해." 잭은 아주 이상스럽다는 듯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어두워지겠어, 가자." 존과 잭은 우주정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두 소년이 우주정에 가까스로 닿았을 때, 주위는 아주 깜깜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은 뒤, 잭은 조종실에서 식물 표본을 정리했습니다. 그 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존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형, 저것 좀 봐!" 창가로 달려온 잭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습니다. 우주정이 있는 평지에 하얀 풍선처럼 생긴 물체가 마치 유령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지름은 1미터 가량 되었는데, 그 밑 쪽에는 가느다란 실같은 것이 몇 개나 있었습니다. "야아, 저런 건 처음 본다. 나가서 조사해 보자." 그러나 존은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위험할지도 몰라. 이 안에서 더 조사해본 뒤에 나가도록 해." 텔레비전 카메라를 움직였습니다. 그 풍선 같은 물체들은 서치라이트의 불빛을 받자 춤을 추듯이 움직였습니다. 잭이 외쳤습니다. "줄어든다! 빛을 받자 작아지고 있어!" "형,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나가서 한 놈을 잡아올 테니까, 서치라이트를 계속 켜두도록 해." "알았어, 형. 우주복을 입고 나가." 잭은 밖으로 나가, 그 물체를 붙잡으려 했으나, 손을 내밀어서 손이 닿으면 그것은 갈라지면서 없어져 버리곤 했습니다. 잭은 몇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는 존을 리시버로 불렀습니다. "들리니, 존?" "듣고 있어, 이야기해." "공기 분석기 쪽으로 쫓아갈 테니까, 그쪽을 비쳐 줘. 꼭 붙들어서 조사해 보고 싶다." 잭은 부채질하듯이 손을 내저으며, 흰 풍선을 우주정 쪽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그것이 공기 취입구 쪽에 왔을 때, 우주정 안에 있던 존은 재빨리 그것을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잭은 우주정 안으로 들어와, 서둘러 우주복을 벗었습니다. 존은 형이 우주복 벗는 것을 거들며 물었습니다. "형, 뭔가 좀 알았어?" "확실한 건 아직 모르겠어. 그러나 그것이 벌이나 나비 대신 꽃가루를 운반하는 것 같아. 그리고 흙 속에 질소를 스며들게 하는 작용도 하는 것 같아."   결정체 생물   그날 밤, 존은 늦게까지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것이 많은 지, 이마에 주름살이 질 정도로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습니다. 잭은 여러 가지 영양제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주사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만든 수프만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빠른 치료를 위해 잭이 그것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주사를 끝낸 잭은 동생이 무척 짜증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왜 그래? 뭐가 잘 안 되니?" 존은 말소리에 깜짝 놀랐으나, 얼굴을 들고 천천히 대답했습니다. "알 수 없어. 몇 10억 킬로미터 떨어진 지구에 있으면서 아버지는 어떻게 이 가버 항성계에 새 연료가 되 는 자원이 있다는 걸 아셨을까? 단지 스펙트럼 분광만으로 말이야. 우리는 이 행성을 모두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쟎았어..... "그래, 그 이상한 상자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 존, 그 자원은 혹시 저 태양, 가버 항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스펙트럼을 조사해 보았어. 그러나 애니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어."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거니?" 어머니가 갑자기 물었습니다. "중요하고 말고요, 어머니. 인류가 로켓이나 우주선을 만든 직후부터 찾고 있는 것이 좋은 연료이니까요. 아버지는 그것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발견된다 해도 사용하기가 어려울지 모를 일 입니다. 너무 방사능이 강해서 우주정 안에 넣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 지금의 원자로를 가지고 그 연료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실험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게 위험한 것이라면, 아버지가 좋아지실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어머니 가 또 걱정스레 말했습니다.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전 아직 많이 배워야 해요. 그날 어머니가 말리시기를 잘하셨어요, 다른 마커를 전부 세워 놓고, 마티 행성에 되돌아가서 그걸 다시 한 번 조사해야겠어요." 존의 눈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고자하는 의욕에 불타 있었습니다. 걱정하는 어머니를 보고 존은 씩씩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면 허락할 겁니다. 잭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자." 스타 로버는 네 번째의 행성, 존에 가까이 갔습니다. 지름은 7천 킬로미터로서 지구의 중력보다 퍽 낮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성 가버에서는 1억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굉장히 추운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얗게 얼어붙은 얼음의 별에 과연 쓸모 있는 것이 있을까?" 관측을 하며 사진을 찍던 잭이 중얼거리듯이 말했습니다. "형, 온도를 봐 줘! " 존의 말에 잭은 미터를 보며 대꾸했습니다. "거의 마이너스 100도야. 나가 볼래?" "그래, 여기도 생물이 있는지 조사해 보고 싶은 걸." "생물이라고?"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습니다. 잭이 대답을 했습니다. "어머니 어느 곳에나 생물은 있어요. 물론 지구의 것과는 다르지만 이끼 같은 정도는 있을 거예요." "난 모르겠다. 어쨌든 조심해야 해." "우주복의 난방장치라면 이 정도의 온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멀리 가지 않아요. 안심하세요, 어머니." 그들은 난방 장치의 상태가 좋은지에 대해서 조사하기 위해, 5분 가량 우주복을 입은 채로 밖에 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까이 있는 언덕빼기를 향해 걸었습니다. 존은 애니에 주의하면서 걸었고, 잭은 걸으면서 빙원 위에 무슨 식물이 없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애니는 공중에서는 알 수 없어도 땅 가까이에 있으면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존은 항상 애니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얼음 밑의 지면에는 확실히 철, 망간, 은, 구리, 금 등의 금속이 있었으나, 그다지 큰 광맥은 아니었습니다. 중력은 지구보다 10퍼센트 정도 작았으며, 얼음 위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끈거려 잘 걸을 수가 없어, 존." "그래, 그런데 여기의 얼음은 물이 얼어붙은 것이 아닌 것 같아." "그래, 수증기 같은 것이 없으니까, 여기 얼음은 모두 탄산가스가 얼어붙은 거야." 좀 높은 언덕 위에서 망원경으로 계곡을 바라보고 있던 존이 갑자기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는 탑처럼 생긴 바위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피라미드 같은 것이다." 잭도 망원경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둘러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두 형제는 그대로 계곡까지 굉장한 속력으로, 멈출 틈도 없이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그렇지만 별로 다친 곳 없이 그 바위가 있는 곳까지 와서 기묘한 생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존은 그것이 결정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잭도 그 생물 옆에 웅크리고 앉아 그것을 관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높이는 1미터 정도로 피라미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에서 보는 바위의 결정처럼 면이 많았으며, 표면은 거칠었습니다. 주위의 경치가 하얀데 비하여 그것은 회색을 하고 있어 눈에 정확하게 띄었습니다. 잭은 그것을 가만히 두드려 보았습니다. 지링지링 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생각을 한 순간, 그것은 와르르 깨어지며 몇 천 개의 조그만 파편 덩어리들로 되어 버렸습니다.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작은 결정이 되었다가는, 결정 생물이 되고, 또 금세 커 가기 시작했습니다. 존은 깜짝 놀라, "굉장하다!" 고 소리 쳤습니다. 잭은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이것은 생물이야. 탄산가스의 얼음 밑에는 규소 비슷한 물질이 있는 모양이야. 그것에서 영양분을 취하고 있을 것 같아." 주위에는 그것 말고도 서너 개의 피라미드 같은 생물이 서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디에다 쓰는 지는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보면 모두가 깜짝 놀랄 것임은 틀림없었습니다. 존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어머니가 부르는 듯한 사이렌 소리를 들었습니다. "형,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 소리가?" "사이렌 소리 같아!" "어머니가 우릴 부르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야." 잭과 존은 무섭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정신없이 달려 스타 로버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우주정에 가까이 갔을 때, 두 소년은 어머니가 자기들을 부른 이유를 곧 알았습니다. 우주정 에어록의 문을 향해, 그 이상한 결정의 생물이 커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맨 위쪽은 이미 문 있는 곳에 닿고 있었는데, 문틈으로 억지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잭은 재빨리 오른손으로 그 결정의 기둥을 떼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존도 합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계곡에 있는 것과는 달리, 때려도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성질뿐만 아니라, 그것은 모양도 계곡에 있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잭은 우주복의 벨트에 꽂고 있던 화염 총을 빼들고 결정 생물에 불길을 내뿜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총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존은 문 옆으로 뻗고 있는 결정 생물의 아래쪽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제 아무리 강한 결정이라 할지라도 총을 맞고 나서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습니다. 존이 문을 열고 뛰어드는 동안, 잭은 계속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존은 총을 쏘면서 우주정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이 열리자, 어머니는 안에서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존은 에어록 안쪽 문을 열고 조종실로 들어갔습니다. 스위치를 넣자, 스타 로버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는 어머니가 형을 끌어당기고 바깥문이 닫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존은 서서히 우주정을 상승시켜 행성을 도는 궤도에 올려놓고 자동 조종 장치의 스위치를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재빨리 에어록으로 향했습니다. 에어록에서는 잭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존, 어서 어머니를 침대로 운반시켜야 되겠어." 어머니는 우주복을 입지 않은 채, 바깥문에 서 있었기 때문에, 밖의 무서운 추위에 몸이 거의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존은 말없이 어머니를 안아 올려 조금 비틀거리면서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잭은 어머니에게 담요를 덮어 드리고, 존은 부엌에서 뜨거운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한참 후에야 어머니의 얼굴빛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도와주신 것은 고마왔지만, 그렇게 추운 곳에서는 우주복을 입으셔야 해요. 그 정도는 알고 계시면서......" 존의 정성어린 말을 들으며, 어머니는 자신의 실수를 무척 미안해하였습니다. "이제는 너무 잘난 체 하지 말아야겠구나!" 셋이 한바탕 웃고 난 뒤에, 잭의 제의에 의하여 에어록을 조사했습니다. 그런 결정 생물이 들어와 있다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체는 들어와 있지 않았습니다. 존은 곧 제 5 행성의 진로를 계산하여 형과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처럼은 못하겠지만, 제 5행성은 항성에서 약 5억 킬로미터, 여기에서는 3억 5천만 킬로미터입니다. 지금은 태양의 저쪽입니다만........." 돌아오는 데까지 곧바로 날아가는 진로를 계산한 존을 잭은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존은 정말 훌륭한 조종사인 것입니다. 어머니도 존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너는 어느 행성에라도 무사히 데려 가주었고, 또 착륙도 훌륭히 해냈다. 정말 기쁘다, 존." 어머니는 존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스타 로버는 이 항성계에서 가장 바깥쪽에 있는 행성 가까이에 갔습니다. 그러자, 존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가 찾던 것을 찾았어, 그 연료가 제 5행성에 있는 모양이야. 애니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어. 굉장한 모양이야! " 이 행성 역시 새하얀 얼음 덩어리로 싸여져 있었습니다. 이곳도 역시 얼음이라고는 하지만, 물이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탄산가스에서 얼려진 것입니다. 존은 적도에 가까운 빙원에 우주선을 내리고는 매직 핸드(원자로 등의 원거리 조종 기계의 [굴)를 사용하여 마커를 빙원에 꽂고 날아올랐습니다. 하늘에서 그 방사성 자원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8백 킬로미터 정도 날았을까, 멀리 붉게 빛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자, 아래와 앞쪽에는 붉은 가스의 소용돌이가 똑똑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폭풍처럼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지, 고도를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존은 이미 고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존도 그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니는 이 가까이에 방사성 연료가 있다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존은 1만 미터 높이에서 우주정을 돌게 했습니다. 그 소용돌이의 가장 자리를 돌면서 보니까 소용돌이는 지름이 30킬로미터 정도였습니다. "왜 붉을까? 이렇게 추운 별에 화산이 있는 걸까?" 잭이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 어머니 역시 놀라워했습니다. "이 추운 별에 화산이라니?" "저건 무슨 불길 같아요. 지구의 전문가가 내가 촬영한 칼라 사진을 보면 조사를 해주겠지요." 제 4 행성의 바위는 생물이었습니다. 이 우주정 안에 들어오려고 했었던 것으로 봐서, 생각하는 힘을 가졌을 일입니다. 굉장한 불길 역시 생물이라면 그 방사성 자원을 먹고사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존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말없이 고도를 올렸습니다. 형과 어머니도 말없이 눈 아래의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붉은 소용돌이처럼 솟구치는 불길은 두려웠습니다. 그 붉은 소용돌이 속에서 혀와 같은 하나의 불길이 솟구쳐 쑥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기를 떠나야겠어. 저놈은 우리를 쫓아오고 있어." 존은 우주정의 속력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불길의 혀는 놀라운 속력으로 우주정을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곧 스타 로버에 닿을 것 같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불의 생물! 존은 속력을 재빨리 높여, 그 불의 생물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그 불길은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잭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어머니, 이제 안심하세요." 존은 어머니에게 싱긋 웃어 보였습니다.   이상한 소리   지구 연방 식민국이 정한 법률에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탐험대는 그 별의 수도를 어디로 하는가를 정해야 한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 2행성 마티에 그 수도를 정하기 위하여, 존 일행은 다시 제 2행성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고도 8천 미터에서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리하여 적도와 북극 사이를 날고 있는 동안에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하여 거기에 착륙했습니다. 바다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꽤 폭이 넓은 냇가였습니다. 남쪽에는 숲이 있고, 서쪽에는 산맥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존과 잭은 이 별의 수도가 될 곳을 돌아다니면서, 고기랑 생선을 가득 짊어지고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형제를 맞이했습니다. "너희들, 이상한 소리 듣지 못했니? 한 두 시간 전쯤에, 우주선이 날아오는 소리 같았는데......" "우주선이요?" 잭은 이상스럽다는 듯이 존을 쳐다보았습니다. "분명 우주선이었어요, 어머니?" "글쎄다.......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그런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 보았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것이 우주선이었다면, 왜 내려오든지 라디오로 부르지 않았을까? 마커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말입니다. 만일 우주선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머니는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그때 식사 준비를 하러 가던 어머니가 황급하게 존과 잭을 불렀습니다. 형제는 무슨 일일까 싶어 황급히 뛰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놀랍게도 아버지는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직은 힘이 없었지만,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형제는 다투기나 하는 듯이 서로 아버지 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했지만, 어머니가 말렸으므로 그들은 침대 옆에 앉아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두 소년이 한 일에 대해서 어머니에게 다 듣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히 기뻐하는 것 같았습니다. 존은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사진 찍는 일은 모두 엄마가 하셨어요!" 잭은 손을 치켜세웠습니다. "아버지, 존은 굉장한 우주 조종사가 되었어요." 그러자 존은 겸연쩍은 듯이 얼굴을 붉히며, 형의 얘기를 했습니다. "아빠, 아버지의 발과 머리를 치료하고 아버지에게 영양제 주사를 놓은 건 모두 형이 한 일인데 진짜 의사 같았어요." "잭, 너도 참 잘했구나, 고맙다." 아버지와 칭찬에 잭은 신이 나서, 또 동생을 추켜세웠습니다. "존은 더 많이 칭찬 받아야 해요. 진로 계산부터 조종까지 모두 잘 해냈으니까요." 아버지는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잭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예, 제 2 행성에 착륙하여, 지금은 존과 수도로 정할 장소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 태양에는 행성이 5개 있고 2와 3은 사람이 살 수 있지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도 있어요, 아버지." 다음에는 존이 받아 말했습니다. "달은 7개, 제 2 행성에 하나, 제 3 행성에 둘. 제 4에 넷....... 5개의 행성에 모두 마커를 놓고 왔어요." 기쁨에 찬 목소리로 어머니도 끼여들었습니다. "가버 항성계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리고 제 1 의 행성에는 당신의 이름, 차례로 마티, 잭, 존, 제 5 행성에는 우주정 이름을 따서 로버로 부르기로 했어요. 잭은 즐거운 듯이 또 말했습니다. "더운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제 2 행성 마티가 좋아요. 그리고 서늘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은 잭이 좋아요. 그렇지만 어느 쪽에도 물과 숲이 있어요." 존도 신이 나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구 이야기를 해댔습니다. "아빠가 찾고 계시던 새로운 연료를 우리가 발견했어요. 이 행성에 있어요. 모래 속에 상자를 넣고...... 놀라지 마세요, 아버지, 아마 몇 천년 전에 누군가가 두고 간 모양이에요. 그리고 제 5 행성에도 있는데......" 그러자 잭은 존의 말을 막고 자기가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한 불길로 휩싸여 가까이 갈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눈을 빛내며 물었습니다. "그래, 시험은 해보았니?" "아니에요. 엄마가 말려서 못했지만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에요. 아직 저는 너무 어리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굉장한 방사능인 것만은 틀림없어요." "납 상자에 넣어 조사해야 해. 그렇지만 기다려야 한다. 아빠가 몸이 좋아질 때까지. 너도 그것이 좋겠지?" "우리 우주정이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좀 작은 입방체인데, 아주 옛날 우주 여행을 한 사람이 두고 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아빠를 주무시게 하자고, 그들의 그칠 줄 모르는 말들을 상냥하게 막았습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좋아진 것이 아닌 줄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형제는 어머니의 만류가 불만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못 다한 얘기는 내일 계속하기로 하고 그들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흥분이 되어 있었으므로, 여느 때처럼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두 소년이 식당에 가보니, 어머니는 즐거운 듯이 콧노래까지 부르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조금도 괴로워하시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들은 아침밥을 먹으면서, 시가지의 구역을 정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야 되므로, 아빠가 눈을 뜨시면 불러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의아스러운 듯이 어머니는, "왜 그런 일까지 해야 되지, 존?" 하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규칙이었습니다. 옛날의 탐험가 중에서는 새로 발견한 행성에 내려보지도 않고 보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욱 더 기가 막히는 것은 표면이 확실하게 보이는 데까지 가 보지도 않고, 사람이 살 수 있는지의 여부도 살피지를 않아, 사람들이 발견된 별에 이민해 와보면, 그곳은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 때문에 식민국에서는 규칙을 정했던 것입니다. 잘 조사를 하여 사진을 찍고, 시가지도 정하고 이민이 새로 시작될 때를 위하여 구역을 정하는 것입니다. "구역을 정해야만 우리가 실제로 얼마 동안 살아 본 증거가 되니까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둘이서 평원을 측량하고 시가지의 길을 정한 다음 점심때가 지나서 돌아와 보니까, 아버지는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우선 아버지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아빠, 여기 일은 죄다 마쳤어요. 이젠 그 연료인 듯한 상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우주정에 실으면 어떨까요?" 하고 존이 말하자, 아버지는 한참 생각을 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응, 그래도 괜찮겠지...... 그 대신 아빠가 조종실에 있도록 해줄 수 없을까?" 잭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예,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에요. 부조종사 자리를 침대로 바꾸면 되니까요." 존과 잭은 부조종사 자리를, 누워서도 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거 대단히 편안하구나." 아버지가 웃으면서 식구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윽고 스타 로버는 사막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존은 속력을 점차 늦추고 원을 그리면서 돌았습니다. 미터에서 가리키는 위도와 경도를 보아, 여기가 틀림없다는 것을 안 존은, 천천히 고도를 내려 텔레비전 스크린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착륙용 스위치를 잡고 있었습니다. 곧 화면 끝에 그 금속 상자의 뚜껑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얼른 스위치를 밀었습니다. 우주정이 천천히 모래 위에 살짝 착륙하자, 존은 엔진을 멈추었습니다. 아버지는 존의 손 움직임을 일일이 지켜보다가 우주정이 무사히 착륙하자, 놀란 듯이 소리 쳤습니다. "정말 훌륭하다, 존!" 존은 그때 착륙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기계까지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돌아간다면 굉장한 돈을 벌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연신 존의 재주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존은 오히려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존은 멋쩍은 듯이 웃었습니다. 우선 뚜껑을 열기 전에 우주복을 입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분광기를 사용하여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잭이 나서며 말했습니다. "나 혼자 가겠어. 존, 너는 아버지와 둘이서 조사하는 것이 좋아. 나는 방사능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너는 잘 알고 있잖아. 아버지가 좋아지실 때까지 그 것을 취급하는 것은 너니까 말야." "좋아. 그런데 형, 자키를 가지고 가. 그 뚜껑은 굉장히 무거우니까." 잭은 밖으로 나가고 스펙트럼 분광기를 아버지에게 갖다 드렸습니다. 형은 존에 비하여 매우 침착한 편이었습니다. "아버지, 형이 보여요." 우주복을 입은 잭이 자키를 들고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잭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 상자의 뚜껑을 떼고 난 후에 20미터 정도 뛰어서 물러났습니다. 잭은 우선 그곳에 있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분광기를 맞추고 존과 함께 스펙트럼 선을 조사했습니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지자, 아버지는 잭에게 돌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존은 아버지에게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습니다. "별을 떠날 때, 그것들을 어떻게 하죠? 전부 가져가나요?" "아니다. 아무도 훔쳐가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많이 가져가서 연구하는 편이 낫겠지." 존은 아주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 상자를 우주정 밖에 용접을 해서 연구할 수 있는 분량만을 상자에 넣어 두는 생각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퍽 염려스러운 얼굴을 하였습니다. 하긴 그것을 뒤쪽에 붙이는 것이 좋겠지만, 매직 핸드로 끌어올릴 만큼 우주정에 가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운반하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형과 둘이서 운반한다 해도 무리가 따를 일입니다. 존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열심히 무언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낸 것은 우주정을 움직여서 상자 바로 옆에 갖다 대고, 매직 핸드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존의 말을 듣고 놀라며 말했습니다. "그런 걸 할 수 있겠니? 바로 옆에다 이 큰 우주정을 내릴 수 있어?" 물론 안 될지도 모르지만, 존은 해보기로 이미 마음을 먹고 아버지의 허락을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도 한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존을 보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모두 벨트를 맸습니다. 존은 우주정을 이륙시키고, 텔레비전 스크린을 지켜보면서 다시 천천히 착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존이 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기뻐하며 소리쳤습니다. "야, 놀랍다! 존, 넌 일류 조종사야." 어머니는 아버지가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또다시 병이 나면 큰일이므로, 세 사람은 조용히 아버지를 쉬도록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존과 잭에게 견본을 넣을 상자를 만들 것을 부탁하고.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마커를 살펴라   다음날 아침, 잭과 존이 조종실로 가려고 하자, 어머니는 그들을 말렸습니다. "아직 일러요. 아빠가 깨신 다음에 해도 되지 않겠니? 아빠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신 게 아니에요." 존은 부끄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습니다. "빨리 저걸 가져오고 싶어서 그만......." 1시간쯤 후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년은 급히 아버지 곁으로 갔습니다. "아빠, 어제보다 훨씬 좋아지셨어요!" 존은 얼굴빛인 좋아진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도 기분이 무척 좋아졌는지, 팔을 흔들어 보이면서, ] "힘이 나는 것 같다. 너희들 눈에도 아빠가 그렇게 보이지?" 어머니는 즐거운 얼굴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존은 세숫대야에 물을 담고, 수건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아버지, 저걸 운반해 와도 돼요?" 하고 존은 둘이서 만든 나무 상자를 보였습니다. 그 속에는 12장을 겹친 납 조각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래, 해라. 수고했다." 두 소년은 우주정에서 매직 핸드를 움직여 상자의 뚜껑을 열고, 금속의 덩어리를 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 작은 상자에 옮겼습니다. 그것을 연료 창고의 납 금고에 넣고, 존은 다시 물었습니다. "아버지, 이것을 좀 끊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 1밀리그램 정도만 끊어 봐라." 각설탕 정도의 덩어리가 굉장히 무거웠으므로, 12그램이라도 정말 조그만 부스러기인데, 또 1 밀리그램이라면....... 하긴 그래도 방사능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존은 아버지에게 배운 솜씨로 그 방사능 금속을 조금 끊었습니다. 방사성능을 여러 가지로 조사해 본 결과, 그건 대단히 성능이 좋은 놀라운 연료였습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퍽 오랫동안 여기 묻혀 있었나 보다. 지금도 퀴륨보다 방사능이 훨씬 강하구나. 이걸 갖고 지구에 돌아가면 과학자들한테서 큰 소동이 일어날거다." "아버지, 사용할 수가 있을까요?" 존의 질문에 아버지는 힘있게 대답했습니다. "꼭 사용할 수 있을 거다. 놀라운 연료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사용 방법이 중요하지. 방법이 틀린다면 무서운 폭탄이 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자세한 것은 지구의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시험한 조그만 부스러기를 다시 연료 창고에 넣고, 형제는 그 수수께끼의 상자를 우주정 외부에다 용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직 핸드를 사용하여 누르고 네 모서리를 녹여 붙이는 일입니다. 우주정 밖에서 존이 아버지를 라디오로 불렀습니다. "아빠. 들려요? 상자의 뚜껑도 용접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지금은 어떻게 되고 있지?" "고리만 용접해 두었어요." "그래? 그럼 드문드문 용접해 두는 것이 좋겠다." "알겠어요." 이윽고 용접을 끝내고, 존은 우주정에 들어가 우주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에게 일의 결과를 보고했습니다. 더 이상은 이 별에서 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무사히 다 끝냈으니까 말입니다. 그들은 지구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가버의 식구들은 조종실에 모두 모두 모였습니다. 영특한 존은 이미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진로 계산을 끝내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맸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존을 불렀습니다. "존, 한 가지 잊은 것이 있다. 너희들이 두고 온 마커가 제대로 전파를 보내고 있는지, 조사해 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식민국에서 가장 먼저 조사하는 것도 그것이니까." "염려 없어요, 아버지. 형과 제가 하나하나 틀림없이 확인했어요." 존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가 않다. 고장날 경우도 있으니까...... 내려가서 살필 필요는 없고, 우주정 안에서 대강 살피도록 하자." 별 지도를 꺼내 재빨리 조사를 한 존이 말했습니다. "그럼 먼저 제 1 행성, 다음에는 태양으로, 그리고 2, 3, 4, 5를 돌아서 지구로 향하겠습니다." 벨트를 맨 것을 확인한 후에, 존은 스위치를 넣었습니다. 스타 로버는 가버 항성계의 제 2 행성 마티로부터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속력을 내기 시작하여 중력도 2G(지이) 즉, 지구 중력의 두 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중력 때문에 괴로우시죠?" 존이 걱정을 하자. 아버지는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괜찮다. 1시간 정도는 3G로 해도 된다. 그래야만 조사를 끝내고 지구로 돌아갈 때, 속력이 빨라지니까." 곧 우주정은 제 1행성 테드에 가까이 갔습니다. 그 별에서 5만 킬로미터가 되는 지점을 무서운 속력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 지구를 향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방송되고 있는 신호가 들려왔습니다. 다행스러웠고 대단히 만족스러웠습니다. 아버지도 존을 보고 빙긋 웃었습니다. 1시간쯤 지나, 잭이 일어나려 했습니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져와야겠어." "형, 기다려야 해. 2G로 낮출 때까지." 곧 잭은 편하게 일어나서, 어머니가 준비해 둔 샌드위치와 커피를 모두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태양을 돌고 제 3 행성으로 향하는 진로에 오르면 중력을 1G로 낮추고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가까워 오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지구의 태양과 같은 형태의 항성이구나." 존도 자기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예, 그러나 지구의 태양보다 더 커요." "그렇구나. 그런데 이 태양에서 어느 정도의 궤도에 마커를 두었니?" "1천 6백만 킬로미터요." "뭐라고?" 아버지는 깜짝 놀라면서 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존, 사실대로 말해라. 장난으로 말하면 안 돼." 계산이 틀리지 않는다면 1천 6백만 킬로미터에 마커를 설치해야 옳은 일인데, 아버지의 말을 듣자, 존은 무척 의아스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도 조사를 해보세요. 규칙에, 될 수 있는 대로 항성 가까이 하라고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 궤도에 올려놓은 것인데......" "물론 하긴 잘 했다만, 이번에는 그렇게 가까이 까지 가서는 안 된다. 타 죽으면 어쩔래?"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번에는 3천 8백만 킬로미터에서 돌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와 형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존도 자동 조종 장치로 바꾸어 놓고 잠을 청했습니다. 이윽고 네 사람은 가버 행성을 향하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우주 해적   미터를 본 순간에 존은 번쩍 눈을 떴습니다. 무엇인가가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것은 원자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곧 텔레비전 망원경으로 우주정의 주위를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존이 먼저 세로 11, 가로 17인 곳의 스크린에 비쳐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짐작했던 대로 그것은 우주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긴장한 얼굴로 망원경을 그 위치에 맞추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은 점점 크게 열리고 목소리는 날카롭게 높아졌습니다. "슬릭 보건의 우주선이구나! 해적 녀석이야!" 이 말을 듣고 어머니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얼마 전에 내가 들었던 것이 저 우주선 소리였군요!" 잭이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맞아요, 어머니." 존은 벌써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건은 이런 데서 도대체 뭘 할 작정일까요?" "아마, 이 항성계를 자기가 먼저 발견했다고 우길 모양이다." 잭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어떻게 하면 좋지요? 우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섯 개의 행성을 자세히 조사하고 기록했는데, 보건이 그 공로를 가로채겠다니......." "모르겠다. 워낙 교활한 놈이니까, 무슨 속셈이 있을 거다." 어머니는 울상이 되어 물었습니다. "여보, 보건보다 먼저 지구로 돌아가서 식민국에 보고할 수 없어요?" 아버지는 힘있게, 결심에 찬 목소리로 존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보건의 우주선은 진로를 바꾸었다. 쫓아 보아도 소용이 없어. 저쪽은 무장을 하고, 우리는 총밖에 없으니까 말야. 그러니 우리는 서둘러서 마커의 조사를 끝내고, 곧 지구로 향하는 거다. 저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어쨌든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아."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조사해보니까, 우리가 저쪽보다 갑절은 빨라요. 더욱이 저쪽은 마커를 놓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요, 뭐." 존은 이렇게 말했으나,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습니다. 보건은 굉장한 우주해적 입니다. 그 놈의 우주선은 전함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장을 하고 있었고, 속력이 무섭게 빠릅니다. 염려했던 사실이 제 3 행성 잭에 가까이 갔을 때,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제 3 행성으로부터 마커를 통한 전파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는 5개의 행성을 가지고 있는 이 항성계 제 3행성이다. 슬릭 보건과 그 승무원에 의해 2136년 1월 10일에 발견된 것이다......." 몇 번이나 그런 신호가 거듭해서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가버의 네 식구는 너무 놀라 정신인 없는 듯이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곧 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설치한 마커의 테이프를 바꿔치기 한 거다. 제 4, 제 5 행성의 테이프도 바꿨을 거다. 지금 보건은 제 2행성으로 가고 있어. 거기서도 같은 짓을 하려는 거다." "그러나 아버지. 태양 주위에 설치한 마커는 바꿔칠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게 작은 것을 우주 공간에서 줍다니요......." "글쎄다....... 해적들이란 그런 일에는 이력이 난 놈들이니까. 하여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한 가지 뿐이다. 얼른 지구로 돌아가서 보건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거다." "형. 1 G로 낮추고 엄마한테 먹을 것을 달라고 해 줘." "가속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먹을 수 있도록 샌드위치와 음료수가 많이 준비되었습니다." 하루에 3회, 4시간씩 가속도를 2G로 하였고, 그밖에는 1.25G로 하는 고달픈 우주 여행이었습니다. 몸무게 50킬로그램의 사람은 100킬로그램의 무게가 됩니다. 50킬로그램의 사람을 업고 있는 셈이니까, 아무리 우주 여행에 익숙해져 있는 가버 가족 네 사람일지라도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주는 끝없이 공허합니다. 가버 항성계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멀고도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사이에 보건의 우주선이 발견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구까지의 가장 가까운 진로를 잡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두 배의 중력이 참기 힘드시죠?" 존은 걱정이 되어 물었습니다. 아버지의 발은 꽤 좋아지기는 했지만 두 배의 중력이 계속되기 때문에 고통이 무척 심할 게 뻔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아버지는 고통을 애써서 참고 있는 듯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버지는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스타 로버가 지구까지 거리의 3분의 1정도 날아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경보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습니다. 슬릭 보건의 우주선이 가까워지면 울리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였습니다. 존은 그들의 현재 위치를 미터를 보면서, 재빨리 계산해 냈습니다. 그들은 약 8억 킬로미터 뒤에 있었습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슬릭 보건의 우주선이 가버의 우주선보다 훨씬 속력이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떡해요?" 어머니는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하여, 아버지의 팔을 잡고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조용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있을 거요." 존도 역시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속도를 더 내면 어떨까요?" 잭의 말에 아버지는 우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겠다. 존, 2.5G로 속도를 높이도록 해라. 그대로 여섯 시간 정도를 계속해 보자." "그래도 아직 지구까지는 3주일이나......." 존은 망설였습니다. "어머니, 괴로우셔도 이겨내야 해요." 그러자 아버지도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못 견디겠으면 즉각 말해요. 생명에 관계되는 일이니까. 이건 명령이다." 네 사람은 2.5G의 무게를 참고 견디었습니다. 다음 날 미터를 본 존은 풀이 죽어 말했습니다. "보건의 우주선이 어제보다 더 가까이에 와 있어요. 이제는 대략 6억 5천만 킬로......."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저놈들은 빠른지 모르겠군. 왜 그럴까?" "3G를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야." 존은 힘이 죽 빠지는 듯했습니다 이런 속도로 오면 놈들은 10일이면 가버의 우주선을 앞지를 것입니다. 잭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아빠. 만약에 사람이 수면제 같은 것을 먹고 의식을 잃었다 치면. 어느 정도의 가속도를 견딜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습니다." "글쎄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5G 정도까지는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니?" "스웨덴의 과학자가 오랫동안 사람을 잠자게 하는 실험을 했어요. 그걸 생각해왔죠. 일 주일 동안이나 잠자게 했는데. 몸에 별로 해롭지 않았다는군요." 그러자 존이 포크를 놓으며 물었습니다. "그 과학자는 어떻게 잠들도록 만들었지?" "그 과학자 자신이 발명한 약으로..... 책을 가져와서 다시 설명할 테니 기다려라." 어머니는 잭이 일어서는 것을 막으면서 펄쩍 뛰었습니다. 하기는 아무리 보건을 못 쫓아오게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런 일은 조금 생각해 볼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알아나 봅시다. 결정하는 것은 그 뒤에 하기로 하고." 어머니는 그래도 걱정이 된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래도 모험은 싫어요. 무서워요." "탐험가에게 모험이 없을 수 없어요, 여보. 그러나 신중하게 연구를 해보고 결정하도록 합시다." "존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엄마, 잠들게 하는 약은 이 우주정에는 없어요. 그러니 시험해 볼 수도 없잖아요." "참 그렇구나." 잭은 곧 되돌아와서 마이크로 필름을 읽는 기계에 걸었습니다. "있다. 있어!" 잭은 큰 소리로 그것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 사람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 읽고 난 잭은 얼굴을 번쩍 들고 기쁜 듯이 말했습니다. "들으셨죠. 우리를 한꺼번에 일 주일 동안 계속 잠들게 하는 일은 이처럼 쉬운 거예요. 존, 이 우주정은 완전 자동으로 움직인다고 했지? 그러니 우리가 잠들고 있어도 진로는 틀리지 않고 계속 지구를 향해 갈 수 있을 거야." 어머니가 또 무슨 말을 할 것 같았으므로, 아버지가 얼른 나섰습니다. "자, 이젠 2시간이 지났어. 벨트를 매도록 하자. 잠자는 일은 후에 생각하고." 어머니는 벨트를 매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어쩐지 싫구나. 잠들고 있는 사이에 계속 날아간다는 것은......."   잠자는 네 사람   가속을 1.25G로 낮추자, 잭은 마이크로 필름을 계속해서 읽었습니다. 그렇게 3번, 가속도가 늦추어질 때마다 잭은 창고를 들락거렸는데, 식사 준비가 될 때에도 부르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잭의 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째의 식사 때, 잭은 투명한 액체가 가득 든 시험관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면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제 됐어요. 이것을 4 cc씩 주사하면....." "그게 뭔데?" 하고 존이 묻자, 잭은 자신이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물론 잠들게 하는 약이지. 이것을 주사하면 5G의 속도에도 견딜 수 있다." "그런 위험한 짓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어머니는 화난 목소리로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잭이 말하는 걸 들어보기나 합시다. 자, 잭 말해 보렴!" "이 약을 주사하면 계속 잠들게 됩니다. 자는 시간은 얼마만큼 주사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져요. 신진대사가 늦어지며, 높은 가속도에 견딜 수 있게 됩니다. 그것으로 보건을 떨쳐 버리게 되는 거죠, 아버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슬쩍 보고 나더니 물었습니다. "부작용은 없겠니?" "이 책에는 전혀 없다고 씌어 있어요. 2주일 동안 계속 자게 해도 말이에요. 4cc에 5일이니까, 처음에는 그 정도로 해보려고 생각해요." "형! 5G면 보건보다 훨씬 빨리 나는 거야." 존은 뛰어오를 듯 기뻐하며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5G를 5일 동안, 그것을 2회로 합니다. 3일간은 속도를 줄이고, 그리고 7일간은 천천히 속력을 내리고 갑니다." 아버지는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존의 말대로 하면 아마 우리가 썩 빨리 가게 될 거다. 그런데 만일 머뭇거리다가 저 녀석들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면, 그때는 끝장이라는 걸 각오해야 한다. 보건은 우리 우주정을 틀림없이 공격할 것이니까." "조금 전에 재어 보니까, 벌써 3천만 킬로미터 지점까지 뒤따르고 있어요, 아버지." 존의 맡을 듣고 잭이 외쳤습니다. "5G로 가요. 아빠!" "서두르지 마라, 잭.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연구해 봐야지." 하며 아버지는 울상이 되어 있는 어머니를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들은 무엇이든 잘 생각해 본 다음, 정하기로 되어 있지. 그러나 지금은 이 방법 외에 딴 도리가 없다고 생각돼. 보건보다 먼저 지구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 우주에서 죽음을 당할지도 몰라요." 어머니는 단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좋아요...... 당신이 정하는 일이라면." 아버지는 다시 잭에게 물었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라. 책에는 뭐라고 했니?" 그러자 잭은 빠른 목소리로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마이크로 필름을 조사하고 잭이 그 약을 만들었을 때의 기록을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그러더니 아버지는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좋아. 이 방법은 안전하다. 잭이 만든 약은 마이크로 필름에 나와 있는 것과 똑같아." 존은 기뻐하며 벌떡 일어섰습니다. "형, 압력 방석을 가져오자." 형제는 창고로 가서 방석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조종실의 의자에 매었습니다. 그것은 5G의 압력이 가해져도 몸의 뼈가 부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쿠션이었습니다. "형, 주사를 놓고 어느 정도 되면 잠드는 거지?" "1분 정도일 거야. 그건 왜 묻니?" "주사한 후에 스위치를 넣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잭은 자기 방으로 가서 주사기와 영양제의 병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곧 세 사람에게 영양제를 주사한 다음 자기에게도 놓았습니다. 드디어 시험관에 들어 있는 잠드는 약 4 cc를 주사기에 넣고서 어머니 곁으로 갔습니다. "어머니, 괜찮겠어요?" 잭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으나 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팔을 걷어올리며 침착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잭. 엄마는 기분이 아주 좋단다." "그럼 놓겠어요." 잭은 조심조심 주사 바늘을 어머니의 팔에 꽂았습니다. "오래 못 뵙겠어요. 어머니." 잭은 어머니의 뺨에 입을 맞추며 웃었습니다. "형, 다음은 누구 차례지?" "존은 우주정의 조종을 해야 하니까, 아버지가 맞으셔야 되겠어요." 아버지가 말없이 팔목을 내 놓았습니다. 잭은 아버지의 팔에도 신중히 주사를 놓았습니다. 다음은 존의 차례였습니다. "존, 좋아?" "잠깐만 기다려 줘." 하더니 존은 바쁘게 서둘렀습니다. 존은 5일 동안에 5G의 가속도로 계속 난 후, 1G로 되돌아오도록 자동 조종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그 일이 끝나자. 존은 팔을 걷어 올렸습니다. 주사바늘을 꽂으려고 할 때. 존은 잭의 손을 잡았습니다. "형. 잠깐 기다려. 형은 어떻게 할거야? 내가 스위치를 넣으면 5G로 변할 텐데, 그 사이에 자리로 가서 벨트를 매고 주사할 수 있어?" "걱정 마. 어떻게 해볼 테니까." "만약 내가 잠들기 전에 스위치를 넣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돼. 그러니 형이 먼저 주사해. 그래서 잠들기 전에 내게 주사하고 자리로 가면 되잖아." "괜찮다니까, 네게 먼저 주사하고, 자리에 돌아가 내게 주사하는 건 1분이면 충분해." "좋아. 그럼 각자 자리를 잘 정리해야지. 주사 후에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말야." 잠시 후 잭은 존에게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얼른 자기 자리로 가서 벨트를 매고 주사기를 팔에 꽂았습니다. 존은 벌써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견디면서 형이 하는 일을 주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잭이 주사를 끝내자 곧 계기판 쪽을 보았습니다. 이미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존은 재빨리 스위치를 넣고 옆으로 누웠습니다. 눈이 감기면서 존은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존은 어렴풋이 의식이 생기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약이 효력이 없구나. 그럼 보건의 우주선은 이미……. 존은 말할 수 없는 실망 속에서 재빨리 시계를 보았습니다. 시계를 본 후에야 존은 빙그레 웃으며 안심했습니다. 5일, 5시간 정도가 지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밖에 잠자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깊이 자고 깨어난 것입니다. 존은 재빨리 여러 가지 미터와 다이얼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보건의 우주선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얼 좀 먹어야겠는데……." 존은 가족들 쪽을 보았습니다. 세 사람은 아직까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존은 일어서려 하다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차츰 나아져 갔습니다. 그는 기듯이 하여 부엌으로 가서 즉석 수프를 3인분 만들어 가지고 조종실로 되돌아왔습니다. 세 사람 모두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수프를 준비했어요." 이 말을 듣고 세 사람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잭은 벨트를 풀었습니다. 아버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잠을 잤지?" 존은 얼른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아빠. 꼭 5일이 지났어요. 그리고 보건의 우주선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어요. 수프 드세요." 하고 그는 세 사람에게 컵을 주었습니다. "형, 정말로 형 말대로 됐어." 아버지도 잭을 보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구나. 고맙다, 잭...... 당신은 괜찮소?" 어머니도 수프를 마시면서 미소 지었습니다. "좋아요. 정말 잠깐 잔 것 같은데, 벌써 5일이 지났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수프가 어쩌면 이렇게 맛있니!" 존은 싱긋 웃고 나서, 형을 보고 물었습니다. "형, 이상한 일이야. 5일이나 잠들어 있었는데.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으니 말야. 사실 굶어죽지 않을까도 생각했어. 그 영양제 때문이야?" "아니야, 잠드는 약은 우리의 의식을 없애는 것뿐이 아니라, 신진대사를 전혀 시키지 않는다. 체온도 내리고, 호흡이나 심장의 움직임도 거의 멈출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거야. 에너지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은 거다." 수프를 마시고 난 아버지가 잭에게 물었습니다. "잭, 다음 주사할 때까지 얼마나 여유가 있겠느냐?" "예, 여섯 시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잠들도록 할 셈이에요." "응, 그러면 여유가 있구나. 모두 목욕도 할 수 있고, 엄마가 만들어 주는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겠구나. 존과 함께 계산도 할 수가 있겠고." 존은 이미 연필을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존은 연필을 놓았습니다. "보건이 계속 3G의 속도로 오고 있다면 우리는 하루를 푹 쉬어도 문제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12시간 정도 1G로 날기로 하자."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습니다. 모두 목욕을 하고. 옷도 갈아입었습니다. 음식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잭은 또 약을 만들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존은 계산을 계속했습니다. 지금의 위치와 어디서 속력을 낮추느냐는 등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6시간이 지난 후. 잭은 먼저처럼 주사를 놓았고, 네 사람은 다시 깊은 잠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존은 마이크로폰에 대고 말했습니다. "여기는 우주 탐험선 스타 로버. 착륙 허가를 부탁함. 지금의 고도 2만 미터." 그러자 공항 스피커에서 맑은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왔습니다. "여기는 우주 공항. 그쪽 우주선의 크기를 알려 주세요." "22미터의 우주 요트임." "D 착륙장 43번에 4분 후 착륙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존은 서서히 우주정을 착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큰 D글자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속에 보이는 43이라는 숫자에 스타 로버는 꼭 4분 후에 착륙했습니다. "잘했어, 존!" 잭이 외치자 존은 투덜거렸습니다. "그렇지도 않아. 1초 반 정도 빨랐어." "무슨 소리야! 우리는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보건을 따돌리고 말야." 존은 일어나면서 크게 소리쳤습니다. "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식민국으로 가는 거다. 형!" 아버지는 일어서려고 하다가 그대로 쓰러질 듯 비틀거렸습니다. 아버지는 아직 완전치가 못했습니다. 존은 마이크로폰에 대고 말했습니다. "여기는 스타 로버. 공중 택시와 휠체어를 부탁합니다."   대통령의 만찬회   이윽고 네 사람은 모든 기록과 사진을 공중 택시에 싣고 행선지로 향했습니다. 지구 연방의 수도 센트로 폴리스는 무르익은 봄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존. 저 나무랑 꽃들을 좀 봐!" 잭은 기쁨에 넘쳐 소리쳤습니다. 공중 택시는 3분 후에 식민국의 옥상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접수구로 갔습니다. "나는 테드 가버, 우주선 스타 로버의 주인입니다. 지금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새로운 항성계를 발견한 걸 보고하러 왔어요." 아름다운 아가씨는 눈을 빛내며 물었습니다. "거기는 좋은 곳이었나요?"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지구와 비슷한 별이 두 개나 있답니다." "정말 멋지겠어요. 저는 한 번도 우주에 나가 본 일이 없어요, 자, 이것을 기입해 주시겠어요?" 아버지가 서류에 기록을 하자, 아가씨는 전화를 걸고 얼마 후에 미소를 지으며 안내를 했습니다. "이 쪽으로......." 네 사람이 안내되어 간 커다란 방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가버 씨의 가족입니다." 지구의 아가씨가 소개를 하자,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나는 식민국 장관 로버트 윌슨이오." "자, 여러 분이 발견한 별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분명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다 듣고 난 그들은 놀라며, 잭과 존을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아들들을 두셨습니다. 나도 보건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보건이 정당한 수속을 밟으면 취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세밀하게 조사할 것을 약속하지요." 잠시 후, 네 사람은 식민국을 나와서 호텔에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병원으로 갔으나 별로 치료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잭의 치료는 훌륭했으며, 그 때문에 더 치료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3일 후, 식민국에 서 호출이 왔습니다. 보건과 함께 조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사람은 곧 식민국으로 갔고, 큰 방에 안내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마자, 맞은 쪽에 앉아 있던 보건과 그 무리들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습니다. "이봐 가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들이 발견한 별을 훔치겠다니!" 그러자 윌슨 장관이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앉으시오, 보건. 이제부터 사실을 조사하겠소." 식민국의 관리 한 사람이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가버의 보고에 의하면, 이 제 2 행성의 착륙은 1월 14일 입니다. 보건의 보고에 의하면, 제 2 행성의 착륙이 1월 10일로 되어 있습니다. 두 쪽에서 모두 마커를 설치한 모양인데, 마커 전파가 들리는 것은 50광년까지이며 이 항성은 60광년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어느 쪽이 옳은지 판정할 수가 없습니다." 가버의 가족들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다시 다른 한 사람의 관리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가버 보고서에는 지상에서 찍은 사진이 많이 있습니다. 보건의 것은 모두 공중에서 찍은 것입니다." 가버의 가족 네 사람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습니다. 반대로 보건은 초조한 얼굴이 되어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공중 사진 쪽이 더 정확한 줄로 알았으며, 그래서 5천 미터의 높이에서 찍은 거요. 수도로 정할 곳의 사진을 봅시다. 어느 쪽이 더 확실히 찍었는지 당장 알 수 있을 거요." 그래서 사진이 모두에게 배부되었습니다. 한참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사진에 우리들의 우주정이 찍혀 있어요. 저 사람들이 착륙한 날짜를 1월 10일이라고 했는데, 14일에 착륙한 우리의 우주정이 찍혀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보건은 악을 쓰듯 외쳤습니다. "그런 말 말아요! 그건 우리의 우주선이오." 이때. 잭이 일어섰습니다. "장관님,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좋아요, 잭. 말해봐요!" "감사합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그 사진이 어느 쪽의 사진이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필름의 오른쪽 구석에 C(시이)라는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필름을 조사해 보시면 당장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윌슨 장관은 책상의 단추를 눌렀습니다. "필름을 살펴보도록 하지. 보건 씨, 당신의 필름에는 무슨 표시를 했나요?" "아무 표시도 안 했어요." 보건은 분한 듯이 말했습니다. 필름을 조사하고 난 장관은 책상을 치면서 일어섰습니다. "식민국은 이 새로운 항성계를 가버 항성계라고 이름하고, 다섯 개의 행성 이름도 그대로 인정하기로 합니다. 사실은 지금 2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식민국 등대별에서 보고가 있었습니다. 가버 가족이 발견했다는 전파가 왠지 하나씩 보건이 발견했다고 바뀌어 온다는 보고입니다. 축하합니다. 가버 씨와 가족 여러분!" 그러자 보건과 그 무리들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여 도망가듯 일어나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윌슨 장관이 불러 세웠습니다. "잠깐. 보건! 너희들을 사기죄로 체포한다." 순간, 보건은 뒤돌아 서며 옷 속에 숨기고 있던 열선총을 뽑아들었습니다. "움직이는 놈은 쏜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체포될 것 같은가? 자, 비켜 서!" 그러나 뒷문 옆에는 이미 3명의 경찰관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보건, 총을 버리고 손을 들어!" 유유히 도망치려던 보건은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추어 섰습니다. 체념한 듯 그는 열선총을 바닥에 떨어 뜨렸습니다. 놈들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지고, 보건은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이봐 가버,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날았는가?"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신문을 읽어보라고, 이제 발표될 테니까." 아버지는 장관에게 감사한 인사를 했습니다. 장관은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오히려 이쪽입니다. 해적 보건도 체포되었고, 그 귀중한 방사성 금속을 가지고 돌아와 주었으니까요. 잭과 존, 너희들은 정부로부터 상금을 타게 될 거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면서 '오늘밤에는 파티를 열어야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관은 어머니를 향해 말했습니다. "가버 부인, 오늘 저녁은 대통령의 초대로 만찬회가 열립니다. 참석해 주시는 거죠?" 어머니는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어머....... 대통령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고요?" 어리둥절해진 장관은,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별을 쫓는 사람들   1979년 7월 25일 인쇄 1979년 7월 30일 발행 지은이: E. E. 에반스 엮은이: 장 희병 펴낸이: 김 경수
1096    수필의 상징과 은유 - 남홍숙 댓글:  조회:1161  추천:0  2021-05-19
수필의 상징과 은유 - 남홍숙   1. 로그인   상징과 은유로 쓰여 진 문학은 읽는 맛과 느껴지는 멋이 있다. 요리에도 독특한 향과 세련된 장식은 맛과 품위를 더해준다. 하여, 문학에서 상징과 은유는 요리에서 향신료와 데코레이션의 역할을 한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질서 속에서도 상징이 사라진다면 사회는 더 복잡하며 더 허술해지고 우리 가슴은 사막처럼 서걱거릴 것이다. 신호등 앞에서 멈춤을 상징하는 ‘빨간 불’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미소의 상징 ‘모나리자’가 자취를 감춘다고 생각해보라. 이렇듯 상징은 일시적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 졌더라도 우리에게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머니’라는 단 세 음절의 상징으로서 어머니의 품과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훈훈해진다. 세계 각국의 언어도 상징에 속한다. ‘개’라는 동물의 범주,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개별체도 모두 상징이다. 카프카의 잠자와 신화 속 이카루스는 허무의 바다로 추락한 낙오자의 상징이며 지킬과 하이드는 선과 악의 상징이다. 문학작품 속에서는 원관념이 생략된 은유를 상징이라 한다. 역으로 은유는 상징에 원관념을 더한 작품이 된다. 은유에 의해서 “우리의 눈은 호수”가 된다. “모습은 천사”가 된다. “마음은 갈대”가 된다. 세상의 문법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논리의 축약을 은유를 통해서 당당히 드러낸다. 겨울의 바싹 마른 잎에서 여름 동안 담고 있던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보이는 것은 우리의 언어 속에 은유가 들어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필이 문학으로서 장력을 발휘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진부한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야 한다. 식상한 이미지, 구태한 습관적 언어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원적이고 다각적이며 다층적인 생각으로 빈곤하지 않은 수필언어의 옷을 입혀야 한다. 수필작가는 현실에 놓여 진 리얼리티의 틈새를 포착하여 인간 삶의 본질을 찾아내고 우주와의 소통구조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한다. 보이는 것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내어야 한다. 작가의 내면세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언어의 미감을 살려내야 한다. 작가의 경험, 독서를 토대로 한 상상을 통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상징과 은유를 수필문학의 배필로 삼아야 한다.     2. 수필의 상징(symbol)   상징법의 종류로는 기호적, 제도적, 원형적, 문학적 상징이 있다. 기호적 상징은 부호와 도형, 기호로써 현상을 나타낸다. 십자가 - 기독교, 국기 - 나라, 빨간색 신호 - 멈춤, 초록색 십자가 - 병원 등은 기호적 상징이다. 제도적 상징은 반복되는 사회적 관심에 의해 생겨나서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상징이다. 고착화된 상징으로서 독창성이나 참신성이 없어 인습적 상징으로도 불린다. 비둘기 - 평화, 독수리 - 강경파, 소나무 - 절개, 매화 - 선각자로 표현된다. 원형적 상징은 문화, 지역의 한계를 넘어 전 인류의 보편성을 띤다. 수학의 기호, 과학의 기호가 이에 속한다. 또 상(上)의 개념으로서 날아오르는 새, 별, 산, 나무 등으로 표상하며 이들은 희망이나 선(善)을 상징한다. 하(下)의 개념으로는 지옥, 죽음으로서 무질서와 허무를 상징한다. 문학적 상징은 개인적 상징이라고도 하며 독창적이며 참신한 이미지로써 행간의 공명을 높여준다. 구체적 사물로 다른 범주의 의미를 암시, 환기하는 상징법이다. 이상, 위의 모든 상징법은 원관념이 생략되고 보조관념만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은유법과 다른 점이다. 본고에서는 수필 작품 속에 나타난 상징의 효용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첫째, 하나의 상징으로 주제의 함축을 강하게 부각시킨 작품, 둘째, 한 작품 안에 다른 몇 개의 상징들을 배열하고 각각의 차이성을 이용하여 작품을 이어간 경우, 셋째, 작품 속 상징물이 다른 의미체로 변용된 경우, 넷째, 상징, 그 하나에서 다의성을 띠는 작품을 선해서 살펴본다.     1) 상징의 함축성 두 여학생과 남학생이 있다고 하자. 남학생 이름은 동이이며 여학생 이름은 청이이다. 그들의 본래 이름은 길동과 심청이다. 길동은 ‘길을 가는 아이’라는 의미이고 심청은 ‘마음이 맑다’는 의미로 함축된다. 「흥부전」에서 흥부는 ‘흥하는 남자’이고 놀부는 ‘놀고먹는 남자’로, 이름 속에 함축적인 상징이 들어있다. 「흥부전」이라는 서사 속에 그들의 이미지를 유사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길을 건너려면 신호등에 달려있는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길을 건너겠다는 상징을 버튼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동안 그것을 몰라 한참을 신호등 앞에 서 있었던 아이러니를 범한 적이 있다. 이처럼 주관적 경향이 강한 상징성은 “어떤 때는 함축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해 손해나 봉변을 당하기도하고 어떤 때는 함축의미를 환히 알고서도 모르는 척 눈 감기도 한다. 인간의 멋과 맛이 함축의미 속에 있다.”     잠이 깨면 바라다보려고 장미 일곱 송이를 샀다. 거리에 나오니 사람들이 내 꽃을 보고 간다. 여학생들도 내 꽃을 보고 간다. 전차를 기다리고 섰다가 Y를 만났다. 언제나 그는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부인이 달포째 앓는데, 약 지으러 갈 돈도 떨어졌다고 한다. 나에게도 가진 돈이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부인께 갖다 드리라고 장미 두 송이를 주었다. Y와 헤어져서 동대문 행 전차를 탔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와 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문득 C의 화병에 시든 꽃이 그냥 꽂혀 있던 곳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전차가 벌써 종로를 지났으나 그 화병을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전차에서 내려 사직동에 있는 C의 하숙을 찾아갔다. C는 아직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그의 꽃병에 물을 갈아준 뒤에, 가지고 갔던 꽃 중에서 두 송이를 꽂아놓았다. 그리고 딸을 두고 오는 어머니 같이 뒤를 돌아보며 그 집을 나왔다. - 피천득 「장미」 일부     위의 수필에서 보조관념 ‘장미’는 원관념 ‘소시민적 행복’을 상징한다. 작가는 행복이라는 원관념을 작품 뒤로 숨기고도 행복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환기하고 있다. 장미와 행복은 유사성이 없음에도, 콜라주기법으로 엮은 몇 개의 서사가 지닌 상징적 함축에 의하여 작품의 주제가 선명하게 요약된다. 작가가 “잠이 깨면 바라보려고 산 장미 일곱 송이”를 거리에서 사람들이 보고 여학생이 보고 지나간다. 그러다 길에서 만난 Y가 “언제나 나를 보면 웃더니 오늘은 웃지를 않는다.” 작가는 그에게 행복의 상징인 장미 두 송이를 건넨다. 장미를 받은 Y도 행복해지고 그것을 건넨 작가도 행복해졌을 것이다. 이어서 장미 두 송이를 C라는 친구의 빈 하숙방에다 꽂아두고 나온다. 또, 애인을 만나러 가는 K에게 남은 장미 세 송이를 다 준다. 빈손이 된 작가 자신은 “장미 한 송이도 가져서도 안 되는 것 같아 서운하다”는 반어적 결론으로써 잔잔한 행복의 공명을 전해준다. 작가는 장미를 보조관념으로 하여, 행복의 이미지를 스스로 피어나게 한다.     2) 상징의 차이성   어느 날 청이는 동이를 찾아가 모호한 문제를 낸다. “너, 차이가 뭔지 알기나 해?” 그러자 동이는 5분 정도 심사숙고 한 후, 긴 설명을 시작했다. “소쉬르라는 기호학자가 있었어. 그는 ‘서로 다른 것’을 부정형(negation)에 의해서 정의한 사람이야. 누군가 소쉬르에게 ‘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개는 돼지가 아니다, 닭이 아니다, 소가 아니다, 말이 아니다 등의 부정의 연쇄로써 말이야. 다른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개가 되는 ‘개’의 값은 다른 어느 것과도 치환되거나 혼동 될 수 없는 ‘개’ 고유의 가치임을 그는 주장했어. 네가 묻는 차이란 나는 너가 아니기 때문에 나일 수 있다는 거, 소쉬르에 의하면 그것이 차이이지.” 그러자 청이는 “그럼 난 네가 아니기 때문에 나구나. 그래, 바로 그거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너는 너고 나는 나야” 하며 의기양양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엄마는 나를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존재로 생각하셔” 한다. 사실 청이 어머니에게 청이는 공주보다 더 귀하고 오드리 헵번보다 아름다운 존재가 아닌가. 상품의 광고도 차이성을 이용한다. 같은 재료를 쓴 향수이지만 이름만을 달리 붙여서 서로 다른 상품인 것처럼 만든다. 수십 종류의 커피에 대한 광고도 바깥으로 드러나는 차이를 만들기 위하여 엄청난 돈을 투자하며, 소비자는 바로 이 피상적 차이를 산다. 그렇다면 동이는 청이에게 어떤 차이성을 주문할까.     수용하는 삶도 삶이기에 현실에 순종하며 살아간다. 흐르는 대로 떠밀려가는 대로 놓여진 상황에 순종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동안 바람막이로 존재해 준 남편, 어설픈 나를 어머니로 거듭나게 해준 1남 3녀의 자녀들, 미흡한 나를 문단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 주변에서 조언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친구들…. 그러나 모든 것은 나를 나답게 주어진 길에 고개 숙이게 하지만, 진정한 의미로서의 나는 아니다. 나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익사직전의 생명에서 탈피하고 싶어 황금빛 생명선, 붉은 빛 구명조끼를 입고 있을 뿐이다. (중략) 나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전혜린이나 루 살로메 같은 여자가 되거나, 이름 없는 수녀나 비구니가 되는 것…. - 오차숙 「차라리, 구명조끼를 벗고 싶다」 일부     오차숙의 이 작품에는 5갈래로 나누어진(상징의 차이성을 지닌) 인생행로가 등장한다. 익사직전의 생명으로서 붉은 색 구명조끼를 입고 자신만의 존재 찾기를 희구하는 작가 자신의 인생을 비롯하여 전혜린, 루 살로메, 비구니, 수녀의 인생행로이다. “인생행로”라는 원관념으로 상징된 이들 네 종류의 보조관념 군(群)은 작가가 희구하고 있는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조관념으로 채택한 전혜린, 루 살로메, 수녀, 비구니의 인생행로 또한 각각 이질성을 지닌다. 이들은 오차숙의 수필작품에 들어와 각각의 차이를 발생시키며 그들의 삶을 의미화 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아닌 네 갈래의 다른 삶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며 존재의 비상구인 구명조끼를 입고서 전혜린, 루 살로메, 비구니, 수녀적 삶의 바다를 향해 헤엄쳐 간다. 그들의 삶을 거울로 삼아 오차숙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가는 것이다. 위에서 동이는 청이가 아닌 것처럼, 오차숙이 전혜린도, 루 살로메도, 수녀도, 비구니도 아니다. 서로의 인생행로가 전혀 다르다. 하여, 오차숙이 동경하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전혜린의 낯선 곳에서의 모험적인 생과 루 살로메의 지적인 사람들과의 교분을 희구하고 있음이 암시된다. 또, 수녀, 비구니가 상징하는 삶은 속물적 일상에서 탈출하여 혼자일 수 있는 곳에서 영성을 가꾸어 가길 원한다는 암시이다. 독자는 오차숙이 설정해놓은 이 5개의 다름 속에서 무한한 인생행로를 상상을 할 수 있다.     3) 상징의 변용성   어느 날 동이는 공원에서 청이를 만난다. 청이는 동이의 모자 쓴 모습을 보고 “멋있구나” 한다. 모자챙을 거꾸로 쓴 동이의 모습이 색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자를 자세히 보기위해서 동이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청이는 “이거 너희 학교 교모 아니야?” 한다. 사실 동이는 자기 학교를 상징하는 교모에 온갖 배지를 주렁주렁 매달아서 나들이 모자로 변용시켜 돌려쓰고 나온 것이다. 동이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청이는 그런 동이에게서 참신한 멋을 느꼈다. 그러나 청이는 동이의 변용한 모자가 상징하는, 깊은 뜻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았다. 다음 날 동이는 자신의 교모를 원 상태로 되돌려놓기에 바빴을 것이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에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得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은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 이양하 「나무」 일부     동이의 학교를 상징하는 교모가 나들이용으로 변용되듯이 이양하의 수필에서 ‘인생’을 상징하는 나무는 덕 있는 나무에서 고독한 나무로 변용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등가물로서 나무를 끌어와 자신의 내면세계를 객관화하고 있다. 나무를 그저 바라보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자기화하고 있다. 나무가 지닌 독특한 이미지를 세밀히 묘사하여 한 인간과 긴밀하게 관련지음으로써 문학적 형상화를 하고 있다. 노드럽 프라이(N. Frye)는 “모든 작가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상상력을 남달리 갖고 있는 사람이며 작가는 서사를 직접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비유나 상징, 객관적 상관물을 끌어들여 상상하도록 그들의 언어를 바꾸어야한다”고 했다. 문학 장르에서 나무는 다양한 의미체가 되고 있다. 인격을 지닌 한 인간이 되거나 우주 자체로서 그 안의 물질을 생성, 소멸시키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양하의 「나무」에 이르러서는 작가의 인생관을 나무의 덕성과 견인성에 비유하면서 자아성찰에 이르는 상징체로 표상된다. 나무를 다원적인 입장에서 관조하며 바라보던 작가는 자신의 삶의 좌표를 나무의 덕성과 견인주의에다 안치 시키고 있다. 인간보다 우위에 놓여 진 나무는 물, 흙,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불만족을 말하지 않는 덕스러운 인간으로 상징되다가, 안개, 구름,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에 잠기면서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며 고독을 즐기는” 인간으로 변용된다.     4) 상징의 다의성   동이라는 남학생이 청이라는 여학생에게 아르바이트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장미 한 다발을 선물한다. 그러자 청이는 “난 장미는 정말 싫어. 매번 볼 때마다 붉은 색 피가 떠오르거든” 했을 때 청이에게 장미는 ‘피’로 상징된다. 그러나 동이는 그것이 ‘온 리(only) 사랑’의 상징이었으리라. 동이는 마음속으로 ‘뉘앙스 제로인 바보맹추!’ 라며 청이를 차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뉘앙스와 멋을 가지고 출발하는 상징은 개인적 경험에 의하여 상호 해석이 달라진다. 이것이 상징의 다의성이다. 실제로 “시인 릴케가 장미 가시에 손가락이 찔려서 생손을 앓다가 (사실은 파상풍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장미에서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다의적인 상징성은 독자의 심층에 들어가 심원한 반응을 일으킨다.     사랑이 떠나는 소리는, 20층 건물이 파괴공법으로 순간에 무너지는 소리다. 그 굉음이 귀에 남아 밤이면 이명으로 찾아온다. 끝없는 울림 울림. (중략) 길 잃은 혼은 ‘빨간구두’를 신고 숲속을 헤매다 어두운 숲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같은 길에서만 맴돌다 지쳐 가시덤불 위에 넘어졌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두 손을 모으고 그곳에 있던 맑은 샘물로 타는 목을 축인다. 그때 멀리서 한줄기 빛이 보인다. 빛은 안개를 거두어 간다. 두려움에 떨던 나무의 일그러진 검은 그림자가, 지금은 반짝이는 초록색 잎들이다. 빛 안에서 모두가 하나다. 사랑도, 그리움도, 아픔까지도. - 조재은 「언제나 새롭고 가장 오래된 주제」 일부     윤오영은『수필문학 입문』에서 “내가 원하는 수필은 시로 쓴 철학이 아니면 소설로 쓴 시다”라고 했다. 이는 함축적 언어로서의 긴 여운을 주는 수필을 의미한다. 상징의 묘는 윤오영이 희구하는 언어의 경제성 원리에도 부합되며 수준 높은 문학수필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위 인용한 조재은의「언제나 새롭고 가장 오래된 주제」는 윤오영이 지향하는 위 수필론에 부합되며 작품 전체가 은유로 쓰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적 수필로서, 행간에 현의 떨림 같은 울림판을 형성하고 있다. 위의 작품에서 “한줄기 빛”이라는 보조관념은 다의성을 내포하고 있다. ‘믿음’, ‘희망’, ‘아가페적 사랑’이기도 하며 그가 도달하고자하는 ‘절대이상’을 원관념으로 한다. 조재은이 언명한 “빛 안에서 모두가 하나다. 사랑도, 그리움도, 아픔까지도”에서 빛 대신 믿음, 희망, 아가페적 사랑, 절대이상을 대입시켜 볼 때, 상징의 다의성이 독자에게 얼마나 상상의 지평을 열어주고 창의적 세계로 안내하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이렇듯 다의성을 지닌 상징은 작가 자신이 직접 조립해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숨결에 따라 독자가 자의적으로 해독하여 의미를 재생산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행간에 침묵의 공간과 정서의 긴장감이 살아 숨 쉬게 된다. 긴 설명은 행간의 긴장을 빼앗아 갈 우려를 지니고 있는데 비해 위 조재은의 작품처럼 상징의 묘로 부려쓰는 문학작품은 보다 고도의 장력을 지닌 감동을 유발할 수 있게 된다. 독자들은 상징의 다의적 그물 안에서, 읽으면서 구성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다. 이어령은 어느 강단에서 “작가는 빵 속에 초원이 있고 바람이 있으며 호밀이 있음을 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는 작가의 심오한 영성을 중요시 함이다. 한 그루의 나무로써 생을 요약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내밀한 영안으로 포착해내는 상징적 언어의 조합을, 수필 작가들은 끓임 없이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3. 수필의 은유(metaphor)   윤재천은「접목(接木)을 통한 발전의 모색」에서 “수필은 처음부터 잘못된 관념의 늪에 빠져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수필관은 창작성 - 예술성보다는 경험에 대한 진솔한 기록이라는 점에 더 관심을 보여왔다”고 했으며 또 「좋은 수필」에서 “수필은 함축의 묘가 있어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여야 한다”고 했다. 윤재천은 평소 그의 수필론에서 시적수필, 소설적 수필을 강조해 온 터라 이는 그가 수필의 문학성을 염원하고 있음이 감지되며 그 담론의 기저에는 은유적 표현의 중요성도 담겨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의 “지나치게 과감한 은유를 조심하라”고 한 경구도 염두에 두고서, 수필작가는 언어의 조탁에 쉼 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은유는 “익히 아는 어떤 체험에 의해서 잘 모르는 다른 체험을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기호체이다.” 이러한 은유는 연상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가령, “보도 기자는 상어다”라고 했을 때 상어의 냄새 맡고 물어뜯고 씹어대는 특성이 연상적 치환에 의해서 기자의 낌새채고 들춰내고 비판하는 은유적 변신을 하는 것이다. 기자와 상어의 비슷한 행동양태에 의하여 은유가 탄생된 경우이다. 이 두 기호는 연상법칙에 의해 연결된다. “판이하게 서로 다른 것이 어떤 비슷한 특성에 근거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은유는 공상적이고 초현실적 효과를 사람의 마음에 일으킨다. 이 효과가 은유의 힘이다. 하지만 은유는 두 기호의 어떤 공통적 특성만을 돋보이게 할 뿐, 그 외의 다른 특성들은 밑보이게 하거나 숨긴다.” 예를 들면 기자가 매일 물어뜯고 씹어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감시의 기능도 하는 것이다. 은유에는 반드시 원관념(기자)과 보조관념(상어)이 함께 등장한다. 또, 은유에는 관습적 은유, 비관습적 은유가 있으며 관습적 은유에는 구조적, 지향적, 실체적 은유가 있다.     1) 관습적 은유 관습적 은유는 인간의 실제체험에서 연유된 것들이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은유라는 특성으로 분류하기가 새삼스러울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이에, 작가들은 창의적으로 형상화된 은유의 조립에 고심할 필요가 있다.     a. 실체적 은유   실체적 은유는 사건, 관념, 감정 등을 실체화 한다. 사랑, 인내, 정서, 안정, 평화, 행복 등을 실체적인 것들로 환치한다. “사랑을 찾는다” 할 때, 사랑을 마치 연장통에 든 도구이듯 찾는 방식으로 구체화하거나, “사랑이 부족하다”는 은유로 사랑을 정량화 한다. “사랑은 잔인하다”, “사랑을 찾아 나섰다”라는 표현은 모두 실체적 은유에 속한다. 찬송가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은유에서 날마다 나아간다고 하지만 우리의 발은 항상 땅위에 붙어 있다.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동기부여를 한다. “은유는 분명히 우리의 관념을 날마다 더 고결하게 한다. 생각이 고결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땅은 점점 더 높은 곳만큼 소망스러운 곳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넷째사람이 셋째 사람 옆의 빈자리에 빛을 완전히 차단하며 매달려 올랐습니다. 서로서로 통성명을 합니다. 첫째 승객의 이름은 감사이고 둘째 승객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벽을 보고 앉은 승객의 명함은 이해이고 빛의 길을 완전히 차단한 넷째승객은 탐욕이라고 합니다. 요지가지 이름의 인간이 만나서 천태만사 인생사를 연출하는 게 인생행로지요. 철마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가속도는 날개가 되어 철마를 질주시킵니다. 시작은 미약하게 출발하지만 이내 칙칙칙 보이지 않는 미래로, 가야만 할 세상 속으로, 갈 수밖에 없는 내일로 질주합니다. 달리는 철마에 실린 몸이 흔들흔들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빛이 들어오는 쪽엔 의지할 벽이 없습니다. 탐욕이 추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가 싶더니 끝내 옆 사람인 이해조차 끌어 잡고 나락으로 튕겨지고 말았습니다. - 김용옥 「빛」 일부     위 작품은 말미에서 “이 수필은 꿈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라 했다. 이로써 꿈을 수필작품으로 형상화한 그 자체로서도 실체적 은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 수필에서는 “꿈이 현실”인 것이다. 또, 무의식을 그대로 수필로 전이시킨 작품으로서 현실의 욕망이 덧입혀진 가식의 덩어리가 제거되고 난 순수의 응결체로도 효력을 지닌다. 작가는 꿈의 모티브를 통해서 발현된 이미지를 “그대로” 은유의 방식으로 들려주고 있다. ‘인생행로’를 은유한 ‘철마’ 위에 감사, 사랑, 이해, 탐욕을 승객으로 태운다. 이는 추상어를 구체어로 환치하는 수법이다. 그리고 그 관념어들(추상어)은 생명체로서 통성명까지 하는 장면을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첫째 승객의 이름은 감사이고 둘째 승객의 이름은 사랑이다. 독자는 김용옥이 설정해놓은 실체적 은유라는 이 창을 통해 사랑, 감사, 이해, 탐욕의 현상을 실제로 볼 수 있다. 그들이 탄 철마는 아슬아슬하다. 왜냐하면 그 철마는 벽이 없이 흔들흔들 흔들리면서 달리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인식된다. “탐욕이 추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가 싶더니” 끝내 이해까지 끌어안고 추락하게 만든 장면으로 탐욕의 본질적인 속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위 작품에서 철마는 공간을 달리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달린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이르러 “사랑이 곧 빛”이 됨을 언술하는 장치는 구성의 묘를 높여준다. 의식의 근원적 지향점을 실체적 은유를 통하여 표상하고 있다.       b. 지향적 은유   지향적 은유는 공간적 지향성을 유발하는데 이것은 실제적, 문화적 체험에서 기인한다. 한 가지 예로써 레이코프와 존슨은 “상-하 지향성 체험으로부터, ‘의식은 위쪽에 있다’라든가 ‘무의식은 아래쪽에 있다’ 같은 은유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밝은 빛은 위쪽으로부터 오고 어둠은 아래쪽(지하)에 있다는 체험으로부터 위쪽은 좋고 아래쪽은 나쁘다, 라는 은유가 생겨난다. 영은 상방성, 육은 하방성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지향적 은유는 물리적 체험의 세계와 관념적 체험의 세계를 연결해주지만, 이 두 다른 세계의 독립성을 전제하고 있다. 저 위쪽의 관념적 천국을 물리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은유는 무의미해진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늙은 가로등’이란 작품이 있다. 밤이면 가로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마가 넓은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된 작품이다. 가로등은 그 고독한 청년의 허연 이마에 불빛의 쓸쓸한 키스와 쓸쓸한 축복을 부어주었다. 나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젊은 청년의 이마에 비쳐주는 가로등의 쓸쓸한 불빛의 키스를 내 이마 위에도 느꼈다. 다만 내게는 그것이 가로등의 쓸쓸한 불빛이기보다 오히려 신神의 너그러운 축복이요, 내 삶이 내게 비쳐주는 빛과 같았다. 나는 길고 아득한 인생 여로의 대목마다 가로등이 켜 있기를 빌었다. 참으로 가로등을 멀리서 바라볼 때, 그것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은은히 비치는 별빛이다. 나는 그것을 목표로 어둔 길을 어느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가게 된다. - 박목월의 「가로등」 일부     가로등을 원관념으로 한 위 작품은 상방향적인 보조관념을 교체하면서 작가의 소망을 표상하고 있다. 가로등은 신의 축복 → 별빛 → 희망이라는 관념적 세계와 등가성을 가지고 상향적인 공간성을 획득하고 있다. 가로등과 신의 축복, 가로등과 별빛, 가로등과 희망, 그 구심점에는 작가의 소망이 있기에 이와 같은 보조관념이 탄생한다. 인간의 소망은 상방향(위)쪽에 있음을 인식하는 지향적 은유로써 작가의 내면을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로등은 신의 축복이며, 가로등은 별빛이고, 가로등은 희망으로 은유되고 있다. 위쪽에서 빛을 비쳐주는 가로등의 현상, 우리가 올려다보는 상방향으로서의 수직적 공간, 그 시각적 이미지에 의해 종국에는 ‘희망’으로 은유된 것이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수직의 다리로서의 가로등이 작가의 연상적 치환에 의해 신의 축복, 별빛, 희망이라는 지향적 은유를 탄생시키고 있다.     c. 구조적 은유 구조적 은유는 부분, 단계, 목적 같은 것을 표현할 때 쓰인다. “인생은 전쟁이다”라고 했을 때 그에게 인생은 치열하고 야비한 싸움터가 된다. 그러다 그가 목적을 달성했을 때는 “인생은 연극”이거나 “인생은 천국”으로 바뀔 수도 있다. “은유는 자기 달성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은유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 판도가 달라진다.”     원이 순환을 반복한다. 직선이던 팔과 줄이 둥근 원으로 창조되는 줄넘기에 나도 마음의 발을 들여놓고 푹 빠져있다.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순수의 미학이다. 아이들과 줄이 서로에게 몰입하여 지구를 돌리는 동심의 BE - 존재로써 아름다움. 원은 원으로 있어라. 무엇이 환이 될까. 원이 평면이라면 환은 부피의 이미지다. 손가락 두 개로 그려지는 고리環는 단순한 원이 아니라 돈을 지칭한다. 톱니바퀴처럼 세상과 맞물려 세상을 돌리고 자신도 세상 따라 도는 돈. - 남홍숙 「원 VS 환」 일부     위의 글은 ‘원’圓이라는 원관념과 ‘환’環이라는 원관념이 서로 대척관계에 놓여있다. 원의 보조관념은 동심의 "BE - 존재로써 아름다움"으로, 환의 보조관념은 돈의 세계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족쇄의 HAVE - 소유욕에 눈 먼 만국 공용어”로서, 세계를 원 vs 환의 이중 구조로 분류해놓고 있다. 원은 줄넘기 놀이에 빠져있는 아이들의 세상이며, 환은 돈 넘기에 빠져있는 어른들의 세상이다. 원은 “동심의 BE- 존재로써 아름다움”으로 은유되고, 환은 “족쇄의 HAVE - 소유욕에 눈 먼 만국 공용어”로 은유된다. 이로써 이 수필이 현대 사회의 구조적인 한 부분을 표상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원 vs 환」이라는 게임과도 같은 제목은 공평한 출발을 위함이고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한 드러냄이다. 결국 이 작품에 의하면 아이들에게 “인생은 놀이”이고, 어른들에게 “인생은 돈”으로 은유된다. 그것은 현대사회의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물신화 된 사회 구조의 단면을 구조적 은유로 나타내고 있다.     2) 비관습적 은유 비관습적 은유는 공상과 창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은유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일상이라는 갇혀있는 틀거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은유법이다. 그러나 관습적 은유와 비관습적 은유를 구분하는 확실한 선은 없다. 왜냐하면 은유는 문화적 체험에 의해서 생성되기 때문에 한 문화의 관습적 은유가 다른 문화 입장에서는 비관습적 은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모든 이론은 은유이다. 은유가 지니는 표상성의 약점이나 허점에도 불구하고 은유에 의하지 않고는 문학작품이나 문학이론을 만들 다른 방도가 없다. 은유의 허점을 어느 정도 메우고 그것의 약점을 보강하는 수단은 담론이다. 은유로 축조된 세계를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한번 더 살아야한다면 거품으로 태어나고 싶다. 왜 하필 거품이야 하고 묻는다면, 거품이 어때서? 라고 말하겠다. 일생을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듯, 내가 거품이라면 유년기는 ‘치약거품’으로 자라겠다. 누군가 튜브에서 치약을 짜 입에 문다. 아래위로 칫솔질을 한다, 거품이 하얗게 일기 시작한다. 향긋한 냄새와 함께 부푸는 거품은 입 속의 치아를 훑어보지만 정말 닿고 싶은 곳이 있다. 사람들의 하얀 미소와 깨끗한 마음에 닿고 싶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중략) 청년기는 ‘맥주거품’으로 지내겠다. 학구열로 불타는 나이에 알코올로 세월을 보낼 거냐고 놀라겠지만 아니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상처받기 쉽고, 흔들리는 자아로 방황 속에서 길을 헤맬 때, 내게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절실하다면 맥주거품으로 나설 일이다. 둘 셋이나 여럿이 모여 축배의 잔을 들며 생의 절정을 향해 결속하는 그들 자리에 끼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중략) 장년기는 ‘비누거품’으로 보내겠다. - 김희수 「거품이 되고 싶다」 일부     다시 태어난다면 이양하는 나무로 환생하고 싶다고 했으며 김희수는 거품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거품은 사치이거나 진실의 부풀림으로 은유된다. 그러나 누군가 문학작품에서 “거품은 사치다”라는 은유를 사용했다면, 그것은 식상한 은유,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은유다. 위의 작품에서는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의 이상향을 얼핏 생각하면 누구나 꺼릴 수 있는 허상적인 거품으로 은유하고 있다. 비관습적 은유로서 진부한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하고 틀에 박혀있던 시각의 한계를 파격적으로 끌고 간다. 김희수가 열거한 거품은 세대에 따라 종류를 달리한다. 유년기 - 치약거품, 청년기 - 맥주거품, 장년기 - 비누거품이다. 기발한 이 은유의 소재가, 단순한 거품이라고 해서 외출복에 브로치를 바꿔 단 것처럼 가벼운 소품으로만 간주하면 그것은 독서의 결함이다. 거품이라는 다소 가벼운듯한 제재이지만 그 속에는 그의 자아를 동화시키고 자아를 투사하기 위한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다. 이 글에서 거품은 존재의 본질을 천착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처럼 참신한 소재로써 생성되는 창의적 기법의 은유는 문학적 미감을 살려준다. 유년기에는 사람들의 하얀 미소와 깨끗한 마음에 닿고 싶어 치약거품으로, 청년기에는 축배의 잔을 들고 싶어 맥주거품으로, 장년기에는 젖꼭지처럼 또렷한 기억한 토막 건져 올리고 싶어 비누거품으로 환생하길 희구하는 그 발상이 얼마나 참신한가. 이는 비관습적 은유의 동력에서 기인한다.     4. 로그아웃   “피카소에게 있어 예술은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라 했을 때 피카소의 예술은 슬픔과 고통의 은유이자 상징이 된다. 그러나 피카소의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보고 평론가 판 라레아는 “이 화폭 속에서 말(馬)은 스페인 국가주의를 대표하고, 수소는 인민을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해석을 했을 때, 화가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해석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 평론가에게 ‘이 수소는 수소이고, 이 말은 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신분석가 라캉은 “의미는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의미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라고 했다. 본고에서 몇 작가의 작품을 추출하여 은유를 말하고 상징을 내세워 보았지만 이 원고 역시 인용의 표본이 된 원작자나 몇 독자 앞에서 실소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의미는 본질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실소를 하는 그 작가의 인상조차도 수필문학의 비관습적 은유이거나 다의적인 상징으로 차용한다면 어쩌겠는가. 필자의 논을 거부하는 그 작가가 이번에는 조소를 머금을 것인가. 하지만 수필문학의 상징과 은유는 일상의 빵과 물이기도 한 것을, 그것을 부정하겠는가. 문학적 형상화로써, 상징과 은유로써 부정해 보겠는가.     참고서적   김경용,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2004. 3. 박양근, 『좋은 수필 창작론』, 수필과비평사, 2004. 4. 윤오영, 『수필문학 입문』, 태학사, 2001. 5. 윤재천, 『윤재천 문학 전집 1』, 문학관, 2007. 4.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주)월간미술, 2000. 7. 한상렬, 『디지털시대, 수필문학의 패러다임』, 신아출판사, 2003. 5. 이양하, 『나무』, 인터넷 검색창 피천득, 『인연』, 샘터, 2001. 10. 김용옥, 『생각 한 잔 드시지요』, 수필과비평사, 2007. 9. 김희수, 『한순간 그리고 오랫동안』, 문학관, 2006. 6. 남홍숙, 『물빛』, 문학관, 2006. 12. 오차숙, 『장르를 뛰어넘어』, 문학관, 2007. 12. 조재은, 『새롭고 오래된 주제』, 문학관, 2007. 12. 계간수필 29호, 박목월, 「가로등」 수필시대 13호, 이정심, 「수필에서 상징성의 위상」  
1095    수사학 그리고 은유와 환유 댓글:  조회:1117  추천:0  2021-05-19
원문 출처 https://cafe.daum.net/geumchunmunin/CV32/1614 비유란 무엇인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웅변의 여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들에게는 말 잘 하는 능력이 무척 중요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사학'이 발달했다. 수사학이란 본디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기술로서 생각을 좀더 뚜렷하고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말한다. 능력은 타고 난 것이기도 하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얻어진다.   키케로는 수사 담론이 제대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1) 창안 2) 배열 3) 양식 4) 기억 5) 전달의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했다. 창안이란 논거와 증명을 찾아내는 것, 배열이란 찾아낸 논거나 증명을 짜맞추는 것, 양식이란 짜맞춘 자료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낱말과 언어 패턴, 리듬 따위를 고르는 것. 양식의 종류를 1)웅장한 양식 2) 중간 양식 3) 소박한 양식으로 나누고, 세 양식 모두에 두루 적용되는 기준을 1) 정합성(언어를 용법과 관습에 맞게 올바로 사용하는 것) 2) 명확성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말하는 법) 3) 적절성(말하는 상황이나 맥락에 어긋나지 않게 언어를 구사하는 법) 4) 장식성. 그 중 장식성은 수사적 장치로 꼽혔다. 장식성은 처음에는 웅변 양식의 한 특징이었으나 차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수사학인가? 철학인가? 논리학과 수사학의 싸움은 팽팽했다. 미국의 수사이론가 리처드 랜햄의 이론을 보자면, 인간은 크게 , 의 두 갈래로 나뉜다. 진지한 인간은 중심적 자아가 확고하고 동일성을 가진 반면, 수사적 인간은 배우와 같이 그의 행동은 연극적이다. "진지한 인간의 편에서 보면 모든 수사적 언어는 의심스럽고, 수사적 관점에서 보면 투명한 언어는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인 거짓말을 한다." 두 전통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엎치락뒤치락 우열을 다퉈왔다.   수사에 맨처음 의혹의 눈길을 보낸 것은 소크라테스다. 그는 수사를 "무식한 사람의 눈에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득하는 방법"이라 했다. 소크라테스와 동 시대인 파에드로스 역시 수사학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도 수사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수사학에 대하여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 비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유기적 통일성을 중시한 플라톤은 에서 "모든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언어가 생물체라면 언어의 논리성 못지 않게 수사성도 중요하다. 이 견해는 수사적 언어와 논리적 언어, 시어와 일상어를 굳이 구별하지 않으려는 점도 있다. 진리란 문어체의 시어보다 오히려 구어체로 된 일상 대화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의 유기적 언어관은 훗날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수사학에 대해 양면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수사학 자체에 잘못이 있다기보다 그것을 잘못 쓰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잘만 사용하면, 수사는 진리를 왜곡시키거나 숨기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는데 쓸모가 있다 하물며 그는 은유 구사력을 천재의 징표라 주장한다. "훌륭한 은유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에서 직관적으로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구심을 버리지는 못하였는데 은유란 고기맛을 나게 하는 양념이며 지나치게 쓰면 곤란하다 했다. 비유란 어디까지나 모방이론의 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자연을 모방하는 방법 중에 비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내세웠는데, 그들에게 진리는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니지 않았다. 한 마디로 어느 누구에게나 진리는 남을 확신시키거나 남한테 설득을 당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로마의 키케로, 호라티우스, 퀼틸리아누스도 수사학에 관심을 보였다.   키케로는 인간이 동물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수사학 덕분이라 했고, 사상과 언어, 과 은 영혼과 육체처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호라티우스는 문학의 당의정(겉으로는 좋게 보이지만 실제로는해가 될 수 있는 일 비유) 이론을 주장하며 문학이란 쾌락적 기능, 실용적 기능, 미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을 동시에 가졌다고 했다.   키케로는 수사학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심장처럼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수사학을 옷에 견주었는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만든 것처럼 언어의 부족함과 결핍 때문에 수사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언어를 처음으로 견준 사람은 퀸틸리아누스다. 몸에 안 맞는 옷이 볼 품 없 듯이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언어도 어울리지 않다. 논리학과 수사학의 싸움은 중세에 들어 소강상태를 맞는다.   그 무렵 수사학(옷)은 문법학과 논리학(생각)과 더불어 의 한 과목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과 합리성이 대접받는 근대에 들어 수사학은 움추려든다.    수사학은 19세기 낭만주의자에게 크게 조명을 받았다. 독일 관념론자들 장-자크 루소의 세례를 받은 영국 낭만주의자들은 수사학의 가치를 인정했다. 셸리는 언어란 본질적으로 은유적인 것이라 주장하고, 시인이 맡아야 할 임무는 바로 새로운 은유를 창조하여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라 했다.   수사학이란 궁극적으로 이성과 감성을 하나로 결합하여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수단이었다.   이 무렵 수사학에 무게를 실어준 사람은 니체다. 그에게 진리란 기껏해야 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란 그것이 라고 잘라 말한다. 니체는 절대적인 것을 믿는 모든 행동이야말로 병적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수사학과 논리학의 다툼은 20세기까지 지속된다.   크로체는 수사학의 내용과 형식, 주제와 표현을 엄격히 나누려고 한다는 이 점을 들어 이라 지적했고, 비엔나 실증주의자들도 비유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버마스는 수사성에 물들지 않는 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수사학은 20세기 중엽 개화기를 맞았는데, 이에 대해 I.A 리처즈의 공헌이 크다. 에서 그는 "한 낱말이 실제 사용과 추상적으로 적절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종래의 주장을 그는 미신이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언어의 맥락이 중요하다는 것. 비유는 언어에 입히는 옷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언어와 사상은 영혼과 육체의 관계이다. 또한 애매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애매성이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본질적 속성이요 의사소통의 필수적인 방법이다.   특히 문학과 종교처럼 언어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객관성과 논리성에 회의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도 흐름과 연관 있다.   2차 대전 이후 새롭게 선보인 비평이론들이 이라 낙인 찍히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를 비롯한 해체주의자들은 수사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그와 오스틴이 언어의 수사성을 두고 벌인 논쟁은 유명하다. 스피치 행위이론을 처음 세운 오스틴은 언어행위를 순정적 행위와 수행적 행위로 나누고, 모든 언어 행위는 결국 수행적이라 결론지었다. (순정적 행위: 사실이나 정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 수행적: 질문, 약속, 경고, 명령을 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달성하려는 것 (김욱동 에서) 그러면서도 오스틴은 문학어가 일상어에 대하여 '파생적'이고 '기생적'이라고 말한다. 이에 맞서 데리다는 문학어는 물론이고 일상어조차도 수사성에 짙게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며 수사성을 피해 아무리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 상식 속에 숨으려한들 부질 없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나 상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분적이고 당파적이며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이상 수사성과 연관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문학 텍스트를 해체하는 작업이란 텍스트 안에 숨겨진 수사성을 드러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폴 드 만 역시 수사학에 깊이 오염되었다는 점은 문학과 철학의 공통점이라 했다. 수사학은 철학 뿐만 아니라 경제학에도 중요한 몫을 한다고 도 널드 맥클로스키는 에서 경제학의 방법론이 언뜻 객관적인 것 같지만 따져보면 "형이상학과 도덕과 개인적 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법학도 마찬가지다.   로버트 고든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신념 구조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것"이라 말했다. 과학 이론도 역시 마찬가지. 토머스 쿤은 에서 과학을 움직이는 동력은 참과 거짓을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확신이나 설득이라 말한다. 만약 과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릴 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생각을 바꾸도록 설득해야 한다. 동양도 수사학이 발전했다. 중국에서는 문학을 도를 싣는 그릇으로 보려는 '문이재도'가 크게 힘을 떨쳤지만, 이 못지 않게 문학의 형식적 측면에도 무게를 실었다. 에서는 시육의 또는 육시로 일컫는 시적 장치가 있다. 시 육의란 부, 비, 흥, 풍, 아, 송 등 여섯 가지 방법을 말한다. 이 가운데 부와 비와 흥은 오늘날의 수사법에 속하고, 나머지 풍과 아와 송은 장르 이론에 속한다. 이렇게 세가지씩 두 쪽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두고, 삼경삼위설이라 한다. 삼경에서 부가 한 짝이 되고, 비와 흥이 다른 한 짝이 된다. 와 , 의 풀이에 따르면 부는 다른 것에 빗대지 않고 사물을 직접 진술하는 직서법이나 포진법(펴서 늘어 놓음)이다. 비와 흥은 간접적으로 다른 사물에 빗대어 말하는 방법이다. 비는 오늘날의 상징법에, 흥은 오늘날의 연상법에 가깝다. 우리나라도 문학의 형식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이 있다. 김종직과 성현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론가이다. 김종직은 그런데 문장보다 경술을 강조하는 김종직의 글에는 비유가 무성하다. 성현은 에서 김종직의 주장에 반박한다. 김종직은 뿌리(경술)가 튼튼하지 않고서는 가지와 잎사귀(수사나 비유)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 했으나 성현은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게 자랄 때 비로서 뿌리가 제대로 뻗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수사학과 비유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비유를 뜻하는 말인 영어 트로우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어 '트로페(구부러짐, 뒤틀림)'은 에둘러 완곡하게 말하는 방법이다. 트로우프와 함께 쓰이는 '피겨'라는 영어 형상이나 모습을 뜻하는 라틴어 에서 나왔다. 말에서 비유에서 시각적 이미지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비유는 통상 둘로 나눈다. , 가 그것이다.   는 축어적 의미와 다른 어떤 의미를 얻기 위하여 낱말이나 구를 구사(자유자재로 다루어 쓰다)하는 반면, 구사란 은유, 직유, 환유, 반어. 제유, 역설, 상징, 우화, 과장, 의인을 말한다.   에서는 말의 통사론적 순서나 패턴(병치, 도치, 대조, 점층)에 의지한다.   비유는 생성 발전 단계에 따라 죽은 비유, 죽어가고 있는 비유, 살아 있는 비유, 되살아난 비유로 나눈다. 모든 일상어는 죽은 비유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비유를 비롯한 시어를 일상 표준어에 대한 일탈이나 전경화로 본다.   가령 체코 언어학자 앤 무카조프스키는 -비유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보태는 식으로 어휘를 생성한다. -비유는 웃음과 해학을 자아낸다. -부정적인 면은 고루하고 인습적인 생각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구실을 한다. '내자','안사람'은 여성을 집안에서만 가두려는 속셈이다. -비유는 진실을 감추거나 숨기는 기능을 한다.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무엇인가를 빼놓아야 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다. 작가가 의도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작품 속에 남겨놓은 빈공간이나 침묵에 눈길을 돌리려는 정신분석이론이 힘을 얻고 있다. 빌 클린턴 성추문 사건 "부적절한 관계" "친근한 성접촉“ "잠자리는 같이 하였지만 속살은 섞지 않았다."   비유와 세계관 인식론적 관점에서 비유를 처음 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인간이 비유를 통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얻게 된다고 했다. 폴 리쾨르는 철학적 관점에서 비유를 인식 작용과 연관시키고, 존 설은 스피치 행위이론의 관점에서 그것을 발전시킨다. 폴 드 만은
1094    구조주의는 의미주의다 [퍼온 글] 댓글:  조회:695  추천:0  2021-05-19
원문 출처 https://cafe.daum.net/geumchunmunin/CV32/1616 1. 구조주의의 이론 1) 구조주의의 개념 구조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환기하는 독특한 국면들 때문이다. 문학론의 경우 구조주의는 작품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되지만 구조주의가 강조하는 구조의 개념은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론이나 낭만주의의 유기체론 따위도 구조의 개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품은 하나의 전체이며 전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유기적 결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소박한 구조의 개념이 20세기 문학론의 대표적 유형으로 부각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마디로 구조가 아니라 구조주의라는 용어가 갑자기 유행된 이유는 무엇일까? 20세기의 지적 상황을 먼저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20세기 전반의 서구의 지적 상황은 지식의 단편화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일종의 원자론적 인식론이 팽배한다. 사물을 전체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서 분리된 개체. 곧 하나의 원자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의 전형적인 보기가 소위 실존주의이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세계나 타인으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된 하나의 개체로 인식된다. 따라서 삶의 본질은 고독이나 부조리로 드러난다. 이러한 원자론적 인식론에 반대되는 당시의 지적 태도로 마르크스주의를 들 수 있다. 문학론의 경우 루카치의 주지주의 비판, 사르트르의 후기이론 따위가 그것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적인 변증법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었고, 특히 역사에 대한 지나친 신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판되고 있었다. 구조주의는 이러한 지적 상황, 곧 원자론의 인식과 유물사관의 약점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정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40년대를 전후하여 태동한 이러한 지적 태도가 실제로 확고한 방법론으로 수용된 것은 60년대를 전후하면서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사고 법칙이 원시인이든 문명인이든 동일함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 정신은 인간의 상징적 기능이 구현하는 보편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신화에서 읽을 수 있는 구조적 체계가 그렇다. 신화의 구성 성분들은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의 다발로 존재한다. 관계들의 다발이란 관계들이 서로 결합되어 신화적 의미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신화의 의미는 결국 신화를 구성하는 성분들의 상호관계로 나타난다. 문학론의 경우 이러한 구조주의적 인식론은 언어, 특히 문학적 언어를 지배하는 보편적 법칙의 발견을 지향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20년대의 러시아 형식주의, 30년대의 체코 구조주의,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까지의 미국 신비평 이론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문학 작품을 작가나 독자나 세계에서 독립된 하나의 객체로 인식한다. 그러나 협의의 구조주의 문학론은 60년대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고 봄이 옳다. 따라서 극도의 객관주의적 시선으로 작품을 보며, 이때 작품이라는 하나의 객체는 언어적 구조로 드러난다. 그것은 언어적 기호의 세계이다. 구조주의의 중심 개념은 체계이며 따라서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체계적 구조, 변형, 구조와 의미의 상관성 따위가 강조된다. 피아체의 소위 전체성, 변형성, 자기 규정성이 강조된다. 또한 구조주의자들은 개별적 작품이 아니라 유형, 나아가 문화라는 거대한 체계 속의 한 체계로서 문학을 연구한다. 그들의 이론적 배경은 대체로 동일하다. 그들이 서 있는 토대, 곧 논리 체계를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   2) 구조주의의 논리 구조주의 문학론이 서 있는 이론적 토대는 언어학과 인류학이다. 언어학이 강조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전통적 관점을 거부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언어학자는 스위스의 소쉬르이다. 그는 세계에 대한 원자론적 인식을 거부한다. 세계에 대한 원자론적 인식이란 세계가 고립된 객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객체들을 전체에서 독립시켜 개별적으로 고찰하고 분류할 수 있다는 신념을 전제로 한다. 언어학의 경우 이러한 태도는 언어를 고립된 단위들, 이를테면 낱말들의 단순한 집합으로 보며 그들의 의미 역시 낱말들의 관계가 아니라, 개별적인 낱말들이 환기한다는 신념을 유도한다. 언어와 낱말의 관계는 원자론적 인식론에서 읽을 수 있던 세계와 객체들의 관계와 동일하다. 언어에 대한 전통적 관점은 언어를 이렇게 정의할 뿐만 아니라 언어가 통시적 차원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통시적 차원 때문에 언어학은 변화의 법칙을 찾는다는 견해로 수렵된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혁명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러한 전통적 관점을 정면에서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언어를 고립된 객체들의 집함으로 보는 실체론적 견해를 뒤엎고 그는 구조주의적 인식론에 의하여 언어를 최초로 정의한다, 언어에 대한 실체론적 견해가 아니라 관계론적 견해가 제시된 셈이다.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제네바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출판한 (1916)에서 그는 언어는 개별적 부분들로서가 아니라 부분들의 상호 관계에 의하여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시적 연구보다는 공시적 연구를 강조한 것이다. 그의 독창성은 총체적 체계로서의 언어가 어느 시대에나 그 자체로서 완벽하다는 주장에 있다. 언어는 실제로 발화된 말들의 총체가 아니다.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가 물리적으로 기술될 수 있고,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실체로서의 말이 아니라는, 이러한 자각은 실체론적 언어관을 전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어 행위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눈다. 언어 활동, 언어, 말이 그것들이다. 언어 활동은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을 의미하지만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개념이다. 언어는 우리의 말(parole)이 타인의 지성에 호응할 수 있고. (따라서 담화를 생성케 하는 언어 체계, 혹은 추상적 법칙을 의미한다.) 말은 일상적 언술, 곧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실체를 의미한다. 언어가 실제로 발화된 말들의 총체가 아니라는 인식은 그의 유명한 장기놀이 개념으로 설명된다.   장기놀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장기판,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장기놀이에서 장기판, 장기말의 크기, 장기판이나 장기말을 이루고 있는 재료들은 중요치 않다. 장기판의 재료는 종이이든 상아이든 관계 없으며 장기말의 크기나 형태도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장기말의 상호간의 관계, 곧 장기말의 기능, 역할, 장기판의 구성 등이다. 한마디로 장기에서 중요한 것은 장기의 형식인 추상적인 법칙이다. 물론 장기판,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실체들의 총화가 장기는 아닌 것이다. 장기판이나 장기말은 언어학에서의 말에 해당되고 장기의 법칙, 곧 추상적 형식은 언어에 해당된다. 따라서 언어는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언어라는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관계, 기능으로 정의된다.   문학론의 경우 개별적 작품들은 말에 해당되며 작품을 생성하는 추상적 법칙들은 언어에 해당된다. 결국 작품이라는 전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구조로 인식된다.    구조주의 문학론의 다른 이론적 토대로는 인류학을 들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여 대표되는 구조 인류학적 관점이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특히 유행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인류학은 크게 친족 이론, 신화 이론, 야성 사고 이론으로 나뉘어 진다. 이 글에서는 신화 이론을 중심으로 몇 가지 기본 개념만 살피기로 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회 생활은 무의식을 기초로 성립된다. 사회 생활의 연구는 단순한 경험주의적 시각으로 충분치 않고, 단순한 자연주의적 시각으로는 오도된 결론을 유발할 가능성이 많다. 사회 생활에 대한 모든 연구는 무의식적 기초를 탐구해야 하며, 그것은 문화의 언어를 탐구해야 함을 뜻한다. 표면적이고 물질적인 말의 세계가 아니라 심층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무의식적 기초의 단서를 원시 사회 무당들의 질병 치료 양식에서 읽는다. 무당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질병을 신화의 세계, 곧 환자가 믿고 있는 귀신들의 세계와 관련시키는 그의 능력에 힘입는다고 본다. 그것은 오늘날의 의사들이 질병의 원인과 결과를 합리적으로 따지는 인과적 방법과는 매우 다르다. 오늘날의 의사가 합리적 방법, 따라서 의식의 논리에 의지한다면 옛날의 무당은 비합리적 방법, 따라서 무의식의 논리에 의지한다. 무당은 환자에게 독특한 신화적 체계에 속하는 언어를 부여한다. 환자는 이 신화적 체계를 현실로 인식함으로써. 곧 무당의 독특한 발화에 의하여 혼돈에서 깨어난다. 질병이란 혼돈된 신화적 체계이며, 무당의 언어는 그러한 혼돈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환자의 치료는 신화적 언어 곧 신화적 체계의 발견과 관계된다. 따라서 신화는 갈등을 해석하는 방법이며, 집단적 무의식(ritual)의 기초, 일종의 미적 유희로 산물로 인식되며, 신화의 주인공들은 의인화된 추상, 성스러운 영웅, 혹은 전락한 신으로 유추된다. 레비-스트로스의 궁극적인 관심은 인간들의 정신을 반영하며 동시에 형성적(formative)인 특성을 나타내는 신화적 구조를, 탐구함에 있었다. 신화의 구조는 인간 정신의 구조를 반영한다.   특히 그는 신화와 언어의 관계를 동일성과 차이성의 논리로 해석하였으며, 동일성은 소쉬르의 언어, 차이성은 소쉬르의 말에 해당한다.   신화 연구에서 그가 발견한 기본 명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화 의미가 신화를 구성하는 고립된 요소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요소들이 결합되는 방식 및 변형의 잠재성 속에 존재한다는 명제이다. 다른 하나는 신화 속에 언어는 특수한 속성들을 나타내며, 그 속성들은 일상적 언어의 차원을 초월한다는 명제이다. 문학론의 경우 이러한 신화 연구는 작품 자체를 신화와 동일시함으로써 작품의 의미, 문학적 언어의 특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유발했다.   3) 구조주의 비판 구조주의 문학론의 이론적 토대라 할 언어학과 인류학에서 도출되는 이러한 기본 논리들은 그러나 실체로 문학론의 경우 다양한 모습들로 굴절된다. 대표적인 이론가들만 들어도 야곱슨, 레비-스트로스, 졸레, 소류, 프로프, 토도로프, 바르트, 제네 등이 있다.   20세기의 대표적 문학론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는 구조주의적 방법이란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의의를 주는 것일까. 구조주의 문학론의 한계와 가능성은 무엇일까. 첫째 구조주의 문학론이 언어학적 방법을 원용한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지적된다. 구조주의 문학론의 정당성은 이론 전개를 위하여 기술적 용어를 언어학적으로 원용함에 있다. 그러나 언어학적 기술은 문학적 반응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문학적 반응의 문제는 또한 언어학적 조작적 방법이나 통계적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한편의 시가 오직 특수한 시적 구조로 짜여진 메시지만 주는 것이라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시적 메시지의 문법과 구문만 연구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시적 구조로 짜여진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자를 전제로 하는 반응적 체계이다. 반응은 언제나 송신자와 수신자의 상황을 전제로 한다. 시는 이러한 상황의 이중성을 자각할 때 섬세하게 이해된다. 시는 언어적 구조이며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둘째 구조주의는 여러 문학적 일상들을 법칙들로 환원시킴으로써 기계적 예술론을 강조한다. 예술 고유의 자발성을 고려치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구조주의 자체가 아직도 하나의 신비에 싸여 있기 때문에 충분한 설득력을 띠지는 못한다. 구조주의 자체가 신비에 싸여 있다는 것은 구조라는 개념이 단순한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사고 양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의 본질이 바로 구조를 형성하는 능력에 있다는 생각은 칸트 같은 철학자 뿐만 아니라 형태 심리학자들과 최근의 자연 과학자들의 이론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아직은 구체적인 실증의 단계에 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인간의 정신은 상징적 기능을 수행하고, 이 상징적 기능이 구현된 것이 신화이며, 신화는 구조적 체계를 나타낸다는 논리는 구조주의의 밝은 면을 암시한다.   셋째 구조주의는 언어의 본질과 사고 과정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인간적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적 특수성과 고립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적 이념을 거부한다. 또한 역사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도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구조주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이념일 수 있다. 따라서 문학론의 경우 구조주의는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 된다. 세계를 보는 눈이 되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인간 조건을 자유와 선택이라는 윤리적 명제로 요약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의 신뢰를 강조한다. 사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의 대립은 실존적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의 이념적 차이가 무엇인가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준다. 전자는 인간이 역사 속에 존재함을 확신하며, 따라서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한다. 후자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으며, 따라서 역사주의적 태도를 거부한다. 전자, 실존주의는 현대 과학의 중요한 결과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는 현대 과학의 중요한 결과들을 수용한다. 예컨대 인간적 진실을 상대성 원리에 의하여 파악한다고 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원리, 곧 모든 측정이 측정을 가능켸 하는 준거들, 이를테면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명제를 수용한다. 상대성 원리는 또한 역사적 진리라는 마르크스즈의적 개념에 배반된다. 우리에게는 한 역사가 아니라 많은 역사가 있고, 각 역사는 역사가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해석한 신화의 다양한 변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르트르가 인간은 역사 속에 살며 신화란 역사로부터의 도피라고 본다면,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은 신화 속에 살며 역사는 신화로부터의 도피라고 본다. 역사의 진보란 신화의 변형 속은 대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구조주의는 최근 탈구조주의로 전환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데리다 같은 철학자의 논리에서 읽히는 것이지만, 탈구조주의적 시각은 구조주의가 구조적 체계를 강조함에 반하여 그러한 체계를 지배하는 중심에 대해 비판한다.   2. 구조주의 수용 1) 구조주의의 수용 문학을 연구하는 방법은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문학 작품이란, 현실 세계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고, 작가의 기질이나 감정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고, 독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문학 작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나름대로 문학 연구의 길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문학 작품과 현실 세계의 관계, 문학 작품과 작가의 관계, 문학 작품과 독자의 관계를 살피는 일 따위로 나타난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물론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지니지만,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 밖의 것들과 밀착시켜 연구한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한계에 대한 자각이 소위 20세기에 오면서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 자체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재적 접근법을 태어나게 한다. 구조주의란 문학 연구의 경우 내재적 접근법 가운데 하나로 수용된다. 내재적 접근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 자체로 연구한다는 점에서는 러시아 형식주의, 미국의 신비평 혹은 다소 다른 관점에서이긴 해도 신화 비평이나 원형 비평 같은 것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연구에 있어서 구조주의가 나타내는 의의는 결국 문학 작품을 문학 작품 자체로 연구하겠다는 새로운 의지와, 20세기 초의 형식주의나 신화 비평과는 다른 국면을 드러낸다는 점에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구조주의란 구조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서 출발한다. 구조라는 용어는 17세기 생물학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언어학, 문학, 문학에서도 폭넓게 사용된다.   물론 구조와 유사한 의미로 체계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 일이다.   구조의 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따라서 체계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고, 기능이라는 제3의 개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대체로 구조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구조란 체계의 기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구조는 체계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구조는 그 자체로는 어떤 기능을 나타내지 않고, 다만 한 체계가 주어질 떼 기능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교통 신호의 경우, 그 신호 체계는 교통을 규제하는 기능을 나타낸다.   이때 신호 체계가 이러한 기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그 체계가 계기적(繼起的)으로 교체되는 붉은색과 초록색의 대립이라는 구조를 소유하기 때문이며, 이때 두 색의 대립성이 바로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체계는 체계로서의 형식을 지니지만, 구조는 형식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형식이란 물질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것, 곧 체계의 물질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구조는 물질적으로 드러날 수 없는 것, 곧 체계의 의미적 양식이라고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의 경우 율격(律格), 연(聯)의 배열같은 기술적 문제, 곧 2행 시니 시조니 하는 것은 시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구조는 한편의 시에서 사상이 조직되는 양상, 곧 대조, 평행, 반복 등으로 나타난다.   구조를 체계의 의미적 양식이라고 한 것은 시의 구조가 시라는 체계로 하여금 어떤 의미를 나타나게 하는 하나의 정신 활동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학의 경우 형식 분석과 구조 분석은 다르다. 전자가 문학 작품의 물질성을 다룬다면, 후자는 물질성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성을 다룬다. 러시아 형식주의 및 미국의 신비평이 전자를 지향한다면, 20세기 후반에 유행하기 시작한 구조주의는 후자를 지향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체계의 형식이 아니라 체계의 구조를 해명한다고 할 수 있다.   2) 언어학의 경우 언어를 하나의 구조로 인식한 언어학자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쉬르이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1916)에서 그는 언어가 자기 충족적 체계라는 견해를 발전시킨다. 따라서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상호 관계이다. 언어 체계의 기능은 의미 작용에 있으며, 언어 체계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기호이다. 기호는 소리 심상과 개념이라는 두 양상을 소유한다. 이를테면 "사람"이라는 기호가 "saram"이라는 소리 심상과 "人"이라는 개념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人"이라는 개념을 미국에서는 "human", 중국에서는 "人間"으로 부른다는 점에 유의한다면, 결국 소리 심상과 개념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기호는 자의성(恣意性)을 본질로 한다. 기호를 형성하는 소리 심상과 개념 사이에는 어떤 내적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적 기호의 제1원칙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소리 심상은 오직 시간적으로만 전개된다. 따라서 소리 심상은 선형성을 본질로 하며, 이것이 언어적 기호의 제2원칙이다. 언어적 기호의 이러한 특성을 전제로 할 때, 하나의 기호에 언어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상이성(相異性)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이성은 물론 소리 심상들 사이에서도 드러나며, 개념들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의 기호가 언어적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이러한 상이성은 언어의 경우에는 논리적으로 실증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산"이라는 기호가 언어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삼"이라는 기호와의 상이성을 전제로 해서이다. 그렇지만 이 두 기호간의 상이성은 논리적으로 실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산"은 "삽" "간" "상" 등 여러 가지 기호에 대해서도 상이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이라는 기호에 대한 연구는 이 기호가 담화 속에서 선형적 본질을 기초로 하여 다른 기호와 어떤 관계를 성취하는가를 따지는 일로 수렴된다. 전자를 통합적 관계, 후자를 계열적 관계라고 부른다. 전자는 기호들의 배열 관계, 후자는 담화의 일정 시점에 실현된 기호와 대치되어 나타날 수는 있지만 상호 배타적이어서 동시에 나타날 수 없는 잠재적 언어 요소들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산이 높다"고 할 때, "산"→"이"→"높다"는 통합적인 관계이며, 이때 "산"이 "산맥"으로 대치되거나, "높다"가 "크다"로 대치되어 통합체가 구성된다면 "산"과 "산맥" "높다"와 "크다"의 관계는 계열적 관계가 된다. 상이성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투르베츠코이의 (1939)에 오면 대립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더욱 세밀하게 탐구된다. 그는 일찌기 언어가 나타내는 구조의 두 측면, 곧 의식적 측면과 무의식적 측면을 분별했으며, 이러한 분별은 특히 후기 구조주의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에 의하면 실제로 발음되는 것은 발해진 언어의 체계를 직접 그리고 필연적으로 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음성학의 영역이 바로 음운론의 영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해진 언어의 체계, 혹은 법칙은 실제로 발음되는 것을 토대로 한 가설과 추리에 의하여 성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후기 저술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성에 대해서 레비-스트로스 같은 후학(後學)들보다는 관심을 덜 기울인다. 오직 그는 참된 구조는 언어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강조한다.   3) 인류학의 경우 이러한 구조 언어학은 레비-스트로스 같은 인류학자에 의하여 프랑스에서 새롭게 수용된다. 또한 이러한 구조 언어학은 촘스키의 저술에서 새로운 방향을 나타낸다. 촘스키는 문법의 표면 구조와 심층 구조의 대립, 심층 구조의 변형, 생성이라는 개념이며,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체계가 나타내는 역동적 교환성이다. 이러한 인식은 언어의 교통이 낱말들의 교환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과 유사한 발상을 토대로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 상간의 금지라는 사회현상으로서, 족의 결혼 제도를 여자들의 교환 체계로 해석한다. 성관계는 언어의 경우와 똑같이 교통의 위대한 기능 가운데 한 기능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심리적 구조들의 특성은 무의식 현상이라는 사실이 중시된다. 따라서 그는 사회 제도와 인습의 심층에 존재하는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지향한다. 이러한 발상은 구조 언어학자 투르베츠코이의 견해와 유사하다. 언어 체계의 기능, 곧 교통에 대해서는 오랜 시일에 걸쳐 논의되어 왔고, 특히 구조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기능을 충족시키는 구조적 요소들과 그 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왔다.   인류학의 경우에도, 친족 연구의 경우에서처럼 친족 체계의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고, 특히 구조 인류학자들은 어떻게 이 요소들이 하나의 체계의 구조를 구성하며, 그 체계의 기능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해 왔다. 뿐만 아니라 언어학의 경우처럼 인류학의 경우에도 구조적 특성은 여러 관습, 신화, 친족 유형 등에 드러나는 상이성을 연구할 때 드러난다. 구조라는 항수(恒數)는 결혼의 특수한 한 가지 법칙이 아니라, 결혼의 여러 법칙들이 모여 이루는 유형이며, 그 변수(變數)는 제한된 수효로 교환의 순환적 질서를 지킴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20세기 후반의 구조주의 운동이 그토록 유행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를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1955)와 (1962)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자전(自傳), 여행기, 철학적 성찰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구조주의자의 면모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구조주의의 도덕적 성격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크다. 그의 지적 발전에 영향을 끼친 사상은 마르크시즘과 정신 분석학이며, 이것이 그의 신화 연구의 배경이 되고, 세 가지의 기본적 사회-철학적 문제를 환기한다. 곧 집단 속에서의 개인의 위치, 집단과 자연 세계의 관계, 자신이 연구하는 문화와 자신이 소속한 문화 양자와 관련되는 인류학자의 책임 등이 그것이다. 촘스키의 경우가 그렇듯이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에도 그가 연구하는 구조들은 인간의 정신을 반영하는 한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에서 그는 이러한 주제를 좀더 명확히 다진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가장 자연스런 상태에 두는 일이다. 여기서 그는 흔히 원시인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으로 사고한다는 이제까지의 견해에 비판한다. 그는 원시인의 사고 속에서 소위 "구체성의 과학"을 발견한다. 또한 원시인들은 기사(技師)라기 보다는 조립공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조립은 구조주의의 기본 개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신화는 마치 언어가 초기 언어들의 단편으로부터 구성되듯이, 초기 신화들의 단편으로부터 구성될 수 있으며 이때 분석의 과정이 요구된다.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함께 되는 것은 기계보다 더욱 정확한 구조를 소유한 원시인들의 정신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구조는 이러한 정신을 반영한다. 신화의 경우 분석 과정은 제1의 신화가 어떻게 제2의 신화의 변형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일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신화의 심층 구조를 탐구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정신의 유형을 추출하고, 무질서한 자료에 질서를 부여하고, 자유라는 환상의 심층에 일종의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일이다.   4) 문학의 경우 문학 연구에서 구조에 대한 관심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분석에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문학 연구에 있어서의 구조주의적 접근법은 20세기 후반에 오면서 구조 언어학의 이론을 모형으로 해서 한결 명료하게 부각된다. 구조주의 비평의 충격적인 보기 가운데 하나는 언어학자 야콥슨과 인류학자 레베-스트로스가 공동으로 성취한 보들레르의 소네트 '고양이'에 대한 분석(1962)이다. 이러한 연구에서 읽을 수 있듯이 문학의 경우 구조주의적인 접근법은 문학을 포함해서 어떤 문화적 현상, 문화적 활동, 문화적 산물들도 내적 관계들로 구성되는 자기 충족적 자기 결정적 구조로 나타나는 의미 체계로 인식한다.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음운이나 말소리는 실증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요소들의 순수한 관계에 의해서 해명된다. 체계의 요소들은 체계 내부에서 다른 요소들과 대립되거나 상이성(相異性)을 드러내는 관계에 의해서 증명된다. 또한 전체로서의 하나의 체계는 위계적 계층들을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낮은 단계의 요소들은 복잡한 결합을 통하여 복잡한 기능을 나타낸다. 구조주의자들은 총체적 체계, 그 체계를 구성하는 관계들의 하부 구조, 결합 법칙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언어에 대해서 소쉬르가 말하는 소위 숨어 있는 체계, 곧 "랑그(langue)"를 찾는 일과 유사하다. 따라서 구조주의 접근법이 환기하는 제1의 임무는 체계가 암시하는 구조와, 그 구조의 자질들을 명시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심층적 체계를 특수한 문화 형상 속에 나타나게 하는 일이다. 소쉬르 식으로 랑그를 특수한 언술인 "빠롤(parole)" 속에 나타나게 만드는 작업과 같다. 구조주의적 접근법에 따르면 문학은 제1의 질서 체계인 언어를 사용해서 형성되는 제2의 질서 체계로 인식된다. 말하자면 제1의 질서 체계를 수단으로 하는 제2의 질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학의 이론을 모형으로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하나의 문학 작품이나 혹은 어떤 시각에서 서로 관계되는 일정한 수의 문학 작품군을 취급한다. 이들은 음운론적 계층, 형태론적 계층, 통사론적 계층에서 문학 작품이 어떻게 조직되는가를 분석하고, 혹은 통합적 계증, 계열적 계층에서 문학 작품의 구조적 요소들이 띠는 관계를 분석한다. 토도로프 같은 일부 비평가는 한 문장의 통사법(syntax), 곧 통사 규칙을 모형으로 문학 작품의 구조를 분석한다. 말하자면 문학 작품의 구조적 요소들이 나타내는 기능은 한 문장 속에 명사, 동사, 형용사 등이 나타내는 기능과 유사하다는 가설에 의해 작품을 분석한다. 일부 구조주의 이론가들은 언어학의 모형을 더욱 충실하게 원용한다. 주로 소설의 분석에서 그렇지만 그들은 어떤 주어진 문학적 유형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결합 법칙들과, 문학적 인습의 심층 체계를 밝히는 일은 사회 제도와의 관계 속에서 문학의 문법, 체계적 규칙, 약호 체계(code)를 명시하는 일이 된다. 그것은 언어에 대해 언어학이 구축하려는 것과 같은 방향에서 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학을 구축하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5) 구조주의 비평 20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구조주의 비평의 두드러진 양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학 작품은 기술(記述)의 한 가지 양식이며, 그것은 순수한 문학적 인습과 약호 체계에 따라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됨으로써 구성된다. 인습과 약호 체계라는 이러한 인자들은 문학적 제도 속에서 체계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과는 무관하게 스스로의 문학적 효과를 형성한다. 둘째 개별적 작가 혹은 주체는 문학 작품을 생산함에 있어서 어떤 계획이나 의도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 작가, 곧 의식적 자아는 언어적 인습 속에서 "나"라는 대명사가 나타내는 그러한 기능을 나타낼 뿐이다. 작가는 언어적 인습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작가의 정신은 하나의 "맡겨진 공간"이 되며 문학적 인습, 약호 체계, 결합 법칙 같은 비인격적 체계는 이러한 공간 속에서 하나의 특수한 기술물(記述物)이 된다. 세째 객체로서의 독자는 독서라는 비인격적 활동 속에 용해되고 만다. 그는 의미들로 침투된 하나의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를 기술한다. 결국 구조주의 비평의 초점은 독서 행위이며, 독서 행위는 필연적으로 인습과 약호 체계를 수반함으로써 문학 작품의 의미를 태어나게 한다. 곧 구조주의 비평은 문학적 기술(記述)의 단편이라 할 수 있는 문장, 어귀, 낱말 등의 배열에 새로운 형식과 의미를 부여한다. 초기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독서가 비록 하나의 정확한 의미보다는 복잡한 이미지 효과를 산출한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는 이제까지 계승된 문학적 세계에 의해 규제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데리다를 중심으로 하는 탈구조주의 비평가들은 독서 곧 문학적 기술이란 무한한 의미들의 창조적 유희, 혹은 제멋대로의 유희를 태어나게 하는 "표시"들만 보여주면 된다고 제의한다. 또한 구조주의 비평가들은 오랫동안 전통적 비평가들과 수사학자(修辭學者)들이 발전시킨 분석적 용어들을 채용하지만,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용한다. 이를테면 작품의 통일성, 장르, 구성, 화자, 인물, 비유어 같은 친숙한 비평 개념들이 구조주의자에 의하여 작품의 객관적 자질로 일단 간주되면, 그것들은 곧장 반응과 기대의 체계로 수용된다. 따라서 분석 과정에서 이러한 체계들은 충족되거나 좌절되거나 변경될 수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문학 작품을 읽어감에 있어서 통일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그 작품에 대해서 지니게 되는 반응과 기대의 체계가 어떻게 충족되고 좌절되고 변경되는가를 더듬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시보다는 산문에 더욱 많은 관심을 나타낸다. 소설 구성의 유형과 구조 분석의 선구자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러시아 형식주의자 프로프이며, 그는 (1928)에서 러시아 민담의 항수(恒數)와 변수(變數)를 탐구했다. 인물들의 행동이 기능을 나타낸다는 관점에서 그는 러시아 민담에 나타나는 기능을 31개로 요약했다. 한편의 산문 소설에 대한 철저한 구조 분석은 롤랑 바르트의 (1970)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으며, 여기서 그는 발작의 중편 소설 를 절단하여 가장 작은 기능적 단위들을 설정한다. 이 단위들은 한 낱말로부터 문장들의 계기(繼起)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구성되며, 다음 이 단위들 속에서 해석적 독서를 인도하는 약호 체계의 다섯 가지 유형을 분별한다. 이밖에도 토로도프는 에서 수사학, 통사론, 의미론의 시각 가운데 특히 통사론의 시각으로 작품을 분석했으며, 최근에는 후기 구조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는 푸코, 데리다, 알튜서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실정이다  
1093    은유의 현대적 개념【퍼온 글】 댓글:  조회:1118  추천:0  2021-05-19
원문 출처 https://cafe.daum.net/geumchunmunin/CV32/1617?q=현대은유문법 은유의 현대적 개념 1.상호작용으로서의 은유 현대에 와서 은유란 전통적 자리바꿈의 전이나 대치나 비교나 꾸밈만 아니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단어나 문맥들이 상호작용 또는 충돌하여 새로운 제3의 의미나 정서를 드러내는창조적 작업으로 해석하고 있다.   비유사성에 의한 폭력적인 전이, 대치도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2.리처즈의 주지와 매체의 상호충돌 상호작용의 논리는 리처즈가 은유를 주지와 매체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이 둘의 상호충돌을 강조하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은유의 진정한 의미는“하나님 당신은 놋쇠항아리다”(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에서 보듯이 하나님과 놋쇠항아리는 유사성의 관계가 아니라 비유사성의 상호 충돌해 새 의미와 정서를 자아냄 말한다.   그는 같은 은유라 할지라도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경험의 포괄과 배제를 내세운다. 이질적인 경험의 이미지를 포괄하는 시가 좋은 시이다.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차디찬 잿빛 바위 위에, 오 바다여! 솟아오르는 나의 생각을 나의 혀로 토로해 주었으면 — 테니슨의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에서   너는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불사조여 어떠한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아 죽이지는 못하였다 이 깊어가는 밤에 내가 듣는 저 소리는 옛날 제왕과 촌부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 키이츠의 「나이팅게일을 위한 오드」에서   앞의 시는 주로 바다를 소재로 하여 떠나간 사람에 대한 애상을 적고 있는데 그 소재는 차디찬 잿빛 바위 바다, 파도 등 주로 일상적인 경험들(동질적인 경험)의 사물들, 유사한 사물들만을 동원하여 단조로운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뒤의 경우는 비록 같은 낭만파 시인의 시지만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에 대한 상상을 “어떤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아 죽이지 못하였다” “옛날 제왕과 촌부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등은 나이팅게일과는 매우 이질적인 매체의 사물들을 은유로 포괄하여 생소한 충돌이 보다 시적인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 김종삼의 「나의 본적」에서 이 시의 주지(원관념)은 ‘나의 본적’이다. 본적의 의미는 호적상의 어떤 장소가 아니고 ‘햇볕 쪼이는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라는 것이다. 나의 본적의 의미는 마른 잎과 계곡과 나무 잎새라는 비교적 비유사성의 은유로 충돌되어 인간 존재의 근원은 자연이다.   3.긴장관계의 은유 테이트는 좋은 시는 내포와 외연가 가장 먼 양극에서 모든 의미를 통일한 것이라고 하면서 텐션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텐션은 시 속에서 발견되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두 요소가 가장 알맞게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 두 마음은 하나이므로 나는 가야 하지만, 또한 한 몸이어서 두 쪽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늘이어 놓네 마치 금이 공기처럼 얄팍하게 늘어나듯이 - 존던의 「애도를 금하는 고별의 노래」 이 시는 ‘마치 금이 공기처럼 얄팍하게 늘어나듯이’란 시구가 텐션있는 이미지이다. 이 시구의 은유에 보조관념 금은 물질로서 테이트가 말하는 외연이며 물질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이다. 내포적 의미는 ‘연인들의 영적관계’을 의미하며 그것은 정신이기 때문에 무한한 것이다. 상반된 먼 자리에 있는 두 관념, 즉 외연과 내포를 연결하는 것을 기상(奇想)이다. 기상이란 원래 기발한 착상이란 뜻으로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두 물건이나 상황을 결합하여 정교한 비유의 관계를 형성하는 시어법이다.   존슨은 기상을 한마디로 조화로운 부조화, 상이한 이미지들의 결합, 가장 이질적인 관념들의 폭력적인 결합이라고 하였다.   두 개의 충실한 분수 두 개의 걸어가는 목욕탕, 두 개의 우는 동작 휴대용으로 압축된 대양(大洋)들 - 크래쇼의 「성 막달라 마리아」 예수 앞에서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이 글썽이는 두 눈물을 표현한 것으로 과장된 감이 있으나 기발한 발상이다.   4.투쟁의 원리와 은유 휠라이트는 투쟁적 삶의 원리와 긴장언어의 상호관계를 말한다. 모든 생명의 유기체들은 상반되는 두 힘의 지속적이며 다양한 싸움을 겪고 있고, 그러한 싸움 없이는 유기체와 생명은 죽어 없어진다. . 인간의 삶은 두 가지 상반된 끌림 사이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상황에서 아폴로적 비전을 추구하며 때로는 그 반대일 경우도 있다. 이처럼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로 보고 시도 은유도 투쟁을 통한 긴장의 언어가 된다고 하였다. 긴장 언어는 바로 의미론적 긴장을 지향하며 그것은 사물의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인간의 근본적 활동이다.   긴장 언어의 기본단위가 이미지, 은유, 상징의 형식으로 시어의 독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열두시에 나는 죽어 나는 가을 비에 젖어 펄럭이는 질환이 되고 한없이 깊은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곤충의 눈에 비친 암흑이 된다. 두려운 칼 자욱이 된다. — 이승훈의 「사진」에서 사진에 대한 인상을 죽어서 ‘가을비에 펄럭이는 질환’ ‘곤충의 눈에 비친 암흑’ ‘두려운 칼 자욱’이 된다는 것이다. 사진의 일상적인 해석과는 무관한 질환과 칼 자욱이 등장하는가 하면, 비에 젖어 펄럭이는 질환이라는 극히 비현실적인 어휘를 구사함으로써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이들 어휘나 시행은 대립과 모순으로 인한 투쟁과 긴장을 강하게 고조시키고 있다.   은유의 상호작용설은 그밖에 부룩스의 파라독스와 아이러니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러시아 형식주의에서는 낯설게 만들기 전경화이다.   충돌과 긴장과 역설과 반어와 일탈의 개념들은 시에 대한 은유의 새로운 관심과 분석적 이론들을 영미 계통의 이미지즘이나 신비평이라 한다.   은유의 현대적 종류 1.문맥적 은유 맥스 블랙은 은유의 상호작용론을 보다 확장된 해석을 하였다. 비유의 방식을 세가지로 분류하여. 첫째 문자 그대로의 표현을 다른 낱말로 대신하는 대치론, 예) 키다리를 ‘전봇대’, 그녀의 얼굴을 ‘보름달’. 둘째 비교론인데 ‘그는 부처와 같다’, ‘그는 부처다’와 같이 의미를 한정 셋째 상호작용론, 대치나 비교의 관점이 단어와 단어 간의 축어적인 번역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은유는 한 작품 전체에서 주 주제(초점)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조 주제들(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의미를 생성해내는 것이다. 블랙의 상호작용론은 단어에서 문장으로 넓힌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떨어져서 혼자 서보려 했지만 터널을 지나는 기차처럼 맹렬한 기세로 통증이 돌아왔다.” 그레이엄그린의 에서 다리가 부러진 병사가 적에게 도움을 받을 때의 통증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2, 이야기 은유 리꾀르는 해석학적 견지에서 언술(담화)의 차원으로 확대한다. 은유를 사용하는 문학은 일차적 의미보다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미론의 차원에서 취급되어야 한다고 했다.   의미 혁신은 은유의 경우 낱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문장, 술부에서 발생한다. 은유가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은 현실을 새롭게 그리는 상상력의 동원을 말한다.   수사학에서 특정 어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지만. 은유의 차원에서는 문장 전체가 새로운 뜻을 지닌다.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푸는 해석 행위다. 꾸민 이야기는 거대한 은유다.”라고 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 비유다.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라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라는 술부의 은유를 함께 이해할 때 온전한 이해가 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저녁에〉전문   문장 전체를 읽어야 화자의 의미를 만날 수 있다. 저녁이면 무수한 별들이 보인다. 나에게만 특별히 관심 가는 별이 있다. 나에게만 특별히 관심 가는 별이 무엇일까. 연인, 꿈, 진리, 화자가 특별하게 의미를 두는 어떤 것이다. 그런 별은 밤이 깊을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내가 있는 곳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와 나의 만남은 천재일우 바로 운명적인 만남, 마침내 완성된 영원한 만남이기를.   3, 담론적 은유 후루쇼프스키도 '담화'로서의 은유를 강조한다. 은유는 텍스트의 연속체 안에서 변화하는 역동적 의미체이다.   은유의 의미를 독자의 지식수준, 텍스트의 시점과 발화 양상, 그리고 독서와 해석이 현실적 문맥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하는 작가 텍스트 독자 간의 관계에서 해석하는 통합적 의미론이다. 독자의 상상력을 대폭 허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막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다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날 조금 더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一生이 된 빈 수숫대를 본다 단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집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장석남, 달과 수숫대 -"貧" 결실이 가까운 수숫대가 빈약한 낮달을 처음엔 소홀히 했었다. 좀 여물어진 달을 개울물로 채우기 했다. 비운 것을 가득 채워주는 수숫대의 맑은 일생, 달은 두 개 서까래 같은 수숫대 사이 들락날락하는 존재다. 초승달과 보름달,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와 빈 수숫대, 수숫대는 달을 쓸며 존재한다는 고즈넉한 이야기 은유다. 달과 수숫대의 은유적 상호작용이 텍스트 텍스트를 넘어 인생과 자연으로 확장되어 있다.   은유의 현대적 기능 은유와 의미 옮기기 1.의미란 무엇인가 의미(意味)란 말이나 글 그리고 사물 행위 현상이 지닌 뜻이다. 인간의 언어는 의미를 지닌 그릇이고 의미를 대신하는 기호다. 의미는 가치 관념 사상 생각 감정 현상 진리 도 등이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의미지만 의미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의미설을 보자면. 지시설-언어표현의 의미가 그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물이다. ‘개’ 어휘의 의미는 실제로 대상물 ‘개’라는 것이다. 개념설⦁심적영상설(心的映像說)-어떤 표현에 접하였을 때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영상이 표현의 의미라는 것이다. 심적 영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용법설⦁맥락설-문장의 맥락 안에서 사용되는 현상, 그 사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국면이다.   2.의미의 전이 전치 대치 옮기기 내 마음은 호수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마음이란 기존 언어를 호수로 전이시켰다. 언어란 어떤 사물을 지정하는 것으로 안다. 마음은 인간의 심리상태다. 이를 사전적 개념 문자적 개념이라 하고 과학에서는 이런 고정적 어법을 사용한다. 마음의 고요함 흔들림 감수성 등은 호수와 같다. 시인은 “내 마음은 호수요” 라고 원래의 개념을 이동시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도 그렇다. 절대신 여호와와 양치기 인간 목자는 이질적이지만 그 역할의 일면에서는 인도자란 공통점이 있다.   3.관념어와 사물어의 전이 네 방법 전이의 방법을 의미론적 차원에서 볼 때 추상어와 구체어, 관념어 사물어 간의 전이로 설명한다. ① 구상적 이미지가 다른 구상적 이미지로 전이되는 경우 ② 추상적 관념이 구상적 이미지로 전이되는 경우 ③ 구상적 이미지가 추상적 관념으로 전이되는 경우 ④ 추상적 관념이 다른 추상적 관념으로 전이되는 경우 있다.   (1) 사물어에서 사물어로 낙엽은 나비가 되고 나비는 가난한 불꽃 새벽이슬 비탈진 언덕의 개나리 빙하기의 공룡 발자국 여자의 아린 눈물 가시 돋힌 흑장미 에덴의 처음남자   (1)의 시는 구상적 사물이 다른 구상적 사물로 전이 형식이다. 낙엽은 나비로, 나비는 불꽃, 이슬, 개나리, 발자국, 눈물, 흑장미, 남자로 전환하면서 의미의 전환을 모색한다.   (2) 관념에서 사물어로 의식은 한 마리 작은 산새 톱니 같은 부리와 羽毛의 날개를 단 무색투명한 어둠 속의 새 무성한 여름날엔 나무가지 잎새 속에 숨어 살면서 까칫까칫 잎새마다 구멍을 뚫다가 목말라, 목말라, 구멍을 뚫다가 홍윤숙 「한 마리 작은 새」에서   (2) 첫 행과 둘째 행에서 추상적 관념이 구체적인 사물 이미지로 전이된 경우다. 의식이란 추상어가 한 마리 작은 산새’라는 구체적 사물어로 새롭게 명명되고 있다. 대부분의 시들은 (1)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애매하고 막연하고 불가시한 의미를 가시적 감각적인 사물 이미지로 애매한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3) 사물어에서 관념어로 비는 하나씩 불안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인습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속력을 벗어 던졌어 비는 그날 떨어지던 모체 이후 마음을 비비는 순간 보다 생활을 얹는 시간으로 꿈을 꿰는 감동 보다 시계를 보는 형안으로 헤엄치는 머리속 질주 보다 만지는 손가락의 정착으로 놓여나는 신경의 分子. 김지향 「비는」에서 (3)이나 (4)의 시에서처럼 구체적인 사물어를 관념으로 바꾸거나 아예 관념을 관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3) ‘비’라는 사물 이미지를 불안 인습 속도와 관련 짓고 꿈을 꿰는 감동’, ‘머리 속 질주’, ‘신경의 분자’ 등 관념적 비유어로 전이시키는데 구체적 사물의 의미를 추상적 의미로 확산하고 있는 경우다.   (4) 관념어에서 관념어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의   (4)의 경우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어리디어린 순결이다”에서 하나님이란 관념어가 늙은 비애라는 관념어로 어리디어린 순결로 하나님-비애, 순결의 형식으로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전이된다. 관념적 언어로 전이될 경우 그것은 의미의 확장이란 장점은 있지만 의미의 확실성이란 측면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시에서 특히 일부 모더니즘시의 난해성이 여기에 있다. 이는 이 시에서 하나님을 놋쇠 항아리나 연둣빛 바람으로 은유화한 것과 비교해보면 더욱 난해성의 정도가 분명해진다.   은유와 의미 만들기 1. 문학의 창작 또는 창조와 은유 문학에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창조가 신이 무에서 유의 세계를 만들내는 의미로 쓰인다. 문학은 기존 이야기를 새 방식으로 재창조를 창작이라한다. 예술적 창작도 새 방식으로 새로 고쳐진 의미를 창조라 한다.   창조든 창작이든 모두 은유에 의해 의미의 확대나 축소나 이동이 비롯된다.   2.의미의 축소와 확대 축소 은유는 두 기호의 공통 특성만 부각시키고 다른 부분은 숨기는 약점이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하면, 마음이라는 넓은 의미의 세계가 호수라는 의미로만 한정된다.   은유에 의한 이해와 지식은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의미가 축소되고 한정적이다.   의미의 축소 변형의 대표적인 경전이 바고 성경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도 그렇다. 원래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인데 목자 하나님이라고 하면 구체적 하나 의미로 너무 축소되었다.   목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등의 은유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절대자를 목자나 아버지로 축소하여 하나님과 쉽게 소통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도 자신을 인자, 생수,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 포도나무 등의 은유로 의미를 축소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드러냈다. 은유적 치환을 통하여 그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발굴된다.   새로운 지식이란 같은 대상일지라도 낡은 은유적 인식에서 새로운 은유적 인식으로 바뀐다는 뜻. 은유의 망상조직이 바로 무한히 확대되는 지식의 세계이다. 신체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용어인 ‘손’이 ‘손이 필요하다(노동력)’ ‘손을 봐줘야겠다(위해)‘ ’손이 크다(씀씀이)‘ ’손을 내밀다(도움)‘와 같이 확대된다.   의미의 이동 단어의 의미만 변하는 현상이다. 역사 사회 심리 등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세 국어의 ‘어엿브다’는 ‘불쌍하다’의 뜻이었다. 근대에 이르러서 ‘아름답다’의 의미로 바뀌었다.   사회적으로 팔찌는 장식품인데 수갑의 뜻도 된다. 심리적으로는 죽다가 돌아 가다로, 내외가 부부로, 배우(재주꾼)가 스타로, 수작(술잔을 주고받음)이 말을 주고받음으로 이동한다 . ⓵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 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김춘수의 에서   ⓶낙엽은 나비가 되고 나비는 가난한 불꽃 새벽이슬 비탈진 언덕의 개나리 빙하기의 공룡 발자국 여자의 아린 눈물 홍문표 「낙엽은 나비가 되고」에서 ⓵ 시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늙은 비애(悲哀)다 놋쇠 항아리다 라고 은유적 전이를 시도한 것은 본래의 의미를 축소한 것이다.   ⓶의 시에서 낙엽을 나비로 의미의 이동이라고 하겠지만 나비를 불꽃 새벽이슬 개나리 공룡발자국 눈물 등의 은유 이미지로 한 것은 나비의 의미를 무한히 확장의 가능성 보인다.   은유는 본래의 개념을 변형 축소 확대를 통해 구체적으로 사물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롭게 세계를 창조한다.   오르테가는 "은유는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이다 했다.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다. 신은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인간은 은유를 통해 말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3.의미의 투사와 동화와 동일시 투사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나 욕망 등을 다른 사람, 외부 환경적인 이유 때문이라 생각한다.   시인은 자아와 갈등의 관계인 세계를 자아의 욕망, 가치관, 감정에 맞게 만들어 동화를 이룬다.   ① 노래도 바람도 아닌 괴이한 소리 따라 산을 넘어가고 있노라면 뒤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다 보면 아무도 없는데 내가 이고 가던 하늘이 저 나뭇가지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 최선령의 「다리를 건널 때」에서   ② 내가 당신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슬한 봉우리 휘날리는 깃발 가을 하늘에 덩그렇게 빛나는 결실 바로 추수군의 얼굴입니다 홍문표의 「내가 당신의 자녀가 되는 것은」에서 ① “내가 이고 가던 하늘이/저 나뭇가지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는 하늘이 신음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하늘이란 우주적 사물이 신음(심리적 현상)으로 동화된 것이다.   ② ‘나’ 또는 ‘당신의 자녀’라는 인격적 자아가 봉우리, 깃발, 열매, 얼굴이라는 사물로 투사되고 있다. 투사와 동화를 통해서 기존의 의미를 해체, 보완하면서 무한한 창조의 하늘로 비상한다.   현대 은유의 문법 은유의 문법;서술형 은유 (1) 문장의 기본 문법 문학문장이나 일반문장이나 모두 소통의 공통규칙(단어와 문장 배열 문법적 규칙)은 동일해야한다.   5언 9품사 7성분 긴 작품도 주어+술어라는 기본적인 단문들이 모인 것이다. 문법은 단문의 구성과 기능에 대한 규칙이다.   단어는 의미·형태·기능에 따라 명사, 대명사, 수사, 동사, 형용사, 관형사, 부사, 조사, 감탄사의 9품사로 나누고,   품사는 역할에 따라 체언, 용언, 수식언, 관계언(조사), 독립언(감탄사) 등 5언으로 구분하며, 이들을 문장의 구성 부분에 따라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 독립어 등 7성분(구성부분)으로 나눈다.   체언(體言)은 관형어 + (명사, 대명사, 수사) + 조사가 붙어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 독립어 등 문장의 뼈대구실을 한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 + 주격 조사 '가' → 주어) 우리는 이제 중학생이다. ('중학생' + 서술격 조사 '이다' → 서술어) 그가 나를 이겼다. ('나' + 목적격 조사 '를' → 목적어)   용언(用言)은 동사, 형용사, 보조용언(보조동사, 보조형용사)으로 어미변화를 통해 동작이나 작용, 성질이나 상태 등을 서술한다. 그는 밥을 든든히 먹었다(용언=서술어=동사) 그는 밥을 든든히 먹어 두었다(용언=서술어=동사+보조동사)   수식언(修飾言)은 체언을 수식하는 관형사와 용언을 수식하는 부사로 그 뜻을 꾸미거나 한정한다.   철수의(관형어) 동생이 밥을 많이(부사어) 먹는다.   (2) 우리말 문법과 은유의 문법 은유는 사물을 대신한 이미지로 대부분 명사다. 명사는 체언으로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등 문장 구성의 부분 역할을 하게 된다. 1) 나비는 곤충이다-일반문장(나비+곤충=인접관계) 2) 나비는 꽃이다-은유문장(원관념=나비, 보조관념=꽃, 이질관계) 3) 내 마음은 호수요-은유문장(원관념=마음, 보조관념=호수) 4) 내 마음은 호수가 아니오-은유문장 5) 나는 호수인 그의 마음을 좋아한다.-은유문장 6) 호수의 마음이 그녀의 마음이다-은유문장 7) 나는 호수인 그의 마음에 눈을 돌렸다.-은유문장   1)을 제외하고는 모두 은유가 포함된 문장이다. 2) 나비는 이질적인 꽃으로 전이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은유 4)는 보어, 5)6)7)은 관형어가 되어 호수라는 이미지(보조관념)로 드러내고 있다.   (3)브링크만의 명사은유와 품사 브링크만도 명사은유는 모든 품사들과 결합하여 다양하게 은유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들고 있다.   ‘이다’란 서술격 조사를 품은 은유 - 그녀는 한 마리 나비이다.(서술어) 사역동사의 형태로 된 조사를 품은 은유 - 그는 이리가(보어) 되었다. 동격 혹은 관계절을 품은 은유 - 장미꽃(관형어)인 그 소녀 돈호법 또는 호격조사를 품은 은유 - 오오, 나의 등대여!(주어) 소유격조사를 품은 은유 - 질투의(관형어) 불꽃, 슬픔의(관형어) 강 다른 구문 속의 소유격으로서의 은유 -악마의 무리인, 형태 없는 저 불꽃의(관형어) 말들 동사를 품은 은유 - 나르는(관형어) 꽃(나비) 형용사를 품은 은유 - 슬픈(관형어) 달 부사를 품은 은유 - 헐떡거리며 부는(관형어) 바람 문법적 분석은 은유도 일반문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2) 서술형 은유, “A는 B다”형 은유 문장의 가장 기본형식은 첫째는 “무엇은 무엇이다”와 둘째는 “무엇이 어떠하다“의 두 형식이다. 전자는 사물의 의미나 개념을 정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물의 상태 성질 동작 등을 말하는 형식이다.   명사가 다른 명사로 전이되는 은유문장의 경우 그 대표적인 문법은 “A는 B다”라는 “내 마음은 호수요”라든지 “나비는 꽃이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결국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주어+서술어의 문장인데   이상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득 실은 쌍두마차였습니다 현실은 갈갈이 찢어진 두 날개의 葬送의 만가였습니다 아하! 내 청춘은 이 두 바위틈에 난 고민의 싹이었습니다 - 김용호 「싹」 전형적인 “A는 B다”형이다. 이상은 쌍두마차다, 현실은 장송의 만가다, 청춘은 고민의 싹이다 라는 은유의 문법이다.   “A는 B다”의 단순한 문장의 은유라면 단순은유라 하겠지만 “A는 B다, C다, D다” 확장될 때는 이를 확장은유라고 한다.   아아 나는 이제 숯이요 물이요 불이요 그 모든 것 나는 이제 술이요 물이요 불이요 예언자요 심판자요 피도 눈물도 오줌이요 똥이요 송미자요 강철주요 김성성이요 박경님이요...... 그 모든 것이다. --   “A는 B다”형에서 ‘B다’의 경우 서술격 조사 ‘이다’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박두진의 에서 주어는 ‘이는’이고, 서술어는 속삭임, 울음, 피흘림 등의 명사형인데 모두 ‘이다’라는 서술형 조사를 생략한 것이다.   서술어(보조관념)는 동사나 형용사도 될 수 있다. 1) 달빛이(주어) 밝다(술어, 형용사)-일반문장 2) 달빛이(주어-원관념) 운다(술어,동사,보조관념), 슬프다(형), 흐느적거린다(동), 중얼거린다(동), 눈을 흘긴다(동), 허리를 굽힌다(동)-은유문장 2) 달빛이란 무생물의 주어가 운다 슬프다 흐느적거린다 등 달빛과 무관한 생물의 동사나 형용사를 결합한 일반 상식을 뛰어넘은 은유적 표현이다.   (3) 수식형 은유 - 관형어 은유, 부사어 은유 가, 관형어 은유 1) A의 B형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에 관형격조사 ‘의’를 붙여 뒤에 있는 체언을 꾸미는 A의 B형이다. 관형격조사 ‘의’가 그 다음의 명사가 그 앞의 명사의 소유물임을 나타낸다. 1) 이것은 어머니의(관형어) 사진(이다, 서술격조사 생략) 2) 이것은 어머니의(관형어) 깃발(이다, 서술격조사 생략 은유) 2) ‘어머니의 깃발’은 문법상 어머니가 깃발을 꾸민 관형어로 어머니의 꿈이나 소망을 ‘어머니의 깃발’ 이미지로 은유화. 원관념은 ‘이것은’이란 어머니의 소망이고 보조관념은 ‘어머니의 깃발’이라는 복합적 은유 이미지가 된다.   사과의 바다 : 김구용의 「頌」 바람의 사람 : 전봉건의 「처음으로 열리는」   한편 A의 B형에서 관형격조사 ‘의‘를 생략하는 경우 우리(의) 학교, 어머니(의) 가방, 고향(의) 마을-일반문장 바람(의) 허리, 하늘(의) 치마 - 은유문장   2) A+ㄴ,+ㄹ,+던, +는 B형 용언(동사, 형용사)에 관형사형 어미를 붙여 A-ㄴ,-ㄹ,-던, -는 B형의 관형어를 만들 수 있다. 1) 천년을 불붙는 바다 - 이성교 「노을」에서 2) 질기고 긴 세월 구석구석 저리는 관절염의 아픈 밤비로 만난다면 오, 우리가 매일 무엇으로 다시 만난다면 - 강계순 「연가」에서   나, 부사어 은유 형용사나 동사가 용언으로 서술어 역할을 하므로 이들 용언를 꾸미는 것들은 부사어가 되고 부사어 유유가 된다.   서울 사는 재미는 상한 공기를 마시고 빛바랜 푸루죽죽한 하늘을 이고 사는 재미다. 소리에 부대끼다가, 빛깔에 부대끼다가, 그리고 나면 적막에 부대끼다가, 어디 털석 주저앉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재미다. - 허유 「서울 사는 재미」에서   이 시는 1연에서 “서울 사는(관형어) 재미는-재미다”(주어+서술어)에 ‘상한 공기를 마시고’, 빛바랜 푸루죽죽한 하늘을 이고 사는‘은 모두 ’재미다‘를 수식하는 관형사어 은유다.   그런데 ’소리에 부대끼다가‘ ’빛깔에 부대끼다가‘ ’적막에 부대끼다가’는 모두 ‘부대끼다가’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어 은유다.   그리고 ‘어디 털석 주저앉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은 역시 ‘재미다‘를 수식하는 관형어구 은유다.   다, 혼합형 은유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들 앞에 관형어 부사어의 구와 절들이 배치되어 은유가 혼합된 모습을 보게 된다. (1) 시간의 둔탁한 大門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선 밤이 으스럼과 부딪쳐 기둥을 끌어안고 누우런 밀밭을 밟고 온 그 밤의 신발 밑에서 향긋한 보리 냄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 오규원 「분명한 사건」에서   (2)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에서 (1) 주어는 3행의 ‘밤이‘고 목적어는 ’고개를’ 최종서술어는 ‘내밀고 있다‘ 이다. ‘시간의 둔탁한 大門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선’은 주어인 원관념 밤을 수식하는 보조관념 관형어구 은유다. 4행 ‘으스럼과 부딪쳐’에서 9행 셋째 행의 ‘어리둥절한 얼굴로’까지는 목적어 ‘고개를‘을 수식하는 혼합적인 은유의 구절들이다. (2) 문장골격은 첫 문장은 주어는 숨겨두고 ‘눈썹을(목적어)+심어놨더니’(서술어)의 문장과 ‘새가(주어)+그걸(목적어) 알고(부사어) 비끼어가네’(서술어)의 두 문장이 복문으로 되어 있고, 첫 문장의 목적어 눈썹 앞에는 ‘내+마음+속+우리+님의’ 중복된 관형어구가 ‘눈썹’을 수식하고 있고, 서술어 ‘씻어서’ 앞에는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라는 부사어들이 중복구를 형성하여 서술어 ‘씻어서’를 꾸미고 있으며, 두 번째 문장에서는 주어 ‘새’ 앞엔 관형구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이 서술어 ‘비끼어가네’ 앞에는 부사어 ‘시늉하며‘가 배치되어 있다.   초승달을 원관념으로 하고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보조관념으로 하여 화자가 추구하는 절대적 대상에 대한 간절함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라는 은유로 표현하였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에 대한 외경심을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는 고도의 상징적 은유로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내 아내는 갖고 있다. 호랑이 이빨 사이의 수문의 몸통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장미꽃 무늬 리본 매듭과 최후의 웅대한 별의 화환의 입술을 흰 땅 위의 흰 생쥐의 흔적 같은 이를 문지른 호박과 유리의 혀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칼에 찔린 祭餠같은 혀를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인형의 혀 같은 혀를 믿기 어려운 보석의 혀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어린이의 첫 습자 글씨 같은 눈썹을 제비둥지의 가장자리 같은 눈썹을 -앙드레 브르똥 「자유로운 결합」에서 ‘내 아내는(주어) 갖고 있다(서술어).’ 라는 단문에 구체적으로 갖고 있는 것들(목적어)을 1행에서는 몸통을, 2행에서는 입술을, 3행에서는 이를, 4행에서는 혀를, 이렇게 계속 나열하고 그 목적어들 앞에 은유적인 관형어들을 배치한 혼합은유 시다.   치환은유(바꿔놓기 은유) (1) 의미와 감정 표현의 두 방법 휠라이트는 「은유와 실재」에서 치환은유와 병치은유로 나누어 전자를 ‘전이’에 의한 것이라 하고 후자를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2) 치환은유 -바꿔놓기 은유 치환은유의 기본적인 문장은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 라는 형식이 된다.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 C(보조관념)다, D(보조관념)다 등 이런 경우 이를 확장은유라고 한다.   또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 라는 단문의 A나 B에 관형어은유나 부사어은유가 수식어로 첨부되어 은유 속에 은유가 액자식 은유, 혼합형은유라고 한다.   1) 단순은유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어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김동명의 「내 마음은」에서   봄바람은 안기기 잘하는 나비 여름은 할퀴기 잘하는 곰 가을바람은 울기 잘하는 송아지 겨울바람은 뛰어 달리는 성난 말 —황석우의 「사계의 바람」   2) 확장은유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다윗의 시 「시편18;2」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3) 액자식 은유 또는 혼합형은유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진 꽃밭이다 가나안의 혼인잔치다 맹진사댁 청사초롱이다 사월의 산언덕 포동한 등성이마다 너울 쓴 신부처럼 파닥이는 가슴이다 두려움의 껍질들이 허물을 벗고 차마 부끄러워 마지막 정절에 혼절하는 잔인한 환성이다 -홍문표의 「꽃밭에서」에서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1) 김동명의 「내 마음은」 “내 마음은 호수요”는 마음(원관념)+호수(보조관념)의 형식으로 단순은유다. 원관념 하나에 보조관념 하나로 치환된 은유다. 2연에서는 마음이 촛불이라는 보조관념으로 치환되었다. 1,2연 전체로 보면 마음이란 원관념이 호수와 촛불이라는 보조관념으로 확장된 확장은유가 된다.   황석우의 「사계의 바람」은 1행에서 봄바람은 나비, 2행에서 여름은 곰, 3행에서 가을바람은 송아지, 4행에서 겨울바람은 말로 치환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모두 1;1로 옮겨진 것들로 단순은유   2) 다윗의 시 「시편18:2」를 보면 ‘여호와’라는 원관념에 보조관념은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바위, 방패, 뿔, 산성 등 무려 8개로 옮겨지고 있는 전형적인 확산은유의 본보기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도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원관념이 2행에서 늙은 비애, 3행에서 살점, 5행에서 놋쇠 항아리, 10행에서 순결, 13행에서 연둣빛 바람으로 보조관념들이 나열되어 있어 역시 확장은유의 작품이다.   다윗의 시에서 원관념 ‘여호와’는 반석, 요새, 방패, 바위, 뿔, 산성 등 방어와 보호라는 유사성을 가진 이미지들이다. 전통적 은유란 유사성에 의한 유추이다.   김춘수의 시에서 ‘하나님’이란 원관념이 늙은 비애, 살점, 놋쇠항아리 등 보조관념으로 유추 경우 이미지들 간에 비유사성, 이질감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 은유의 개념이 유사성에 의한 치환보다는 비유사성(상호충돌)에 의한 의미와 감성의 창조를 드러내다.   3) 홍문표의 「꽃밭에서」 1연 원관념 ‘꽃밭’이 보조관념 혼인잔치, 청사초롱, 파닥이는 가슴으로 확산되고 있다. 2연 잔인한 환성 앞에 “두려움의 껍질들이 허물을 벗고”라는 은유의 구절이 있고, ‘ 마지막 정절에 혼절하는’이란 관형구의 은유가 있다. 2연의 구성을 보면 ‘꽃밭’이란 원관념과 ‘잔인한 환성’이란 보조관념 사이 두 개의 은유가 삽입된 액자식 은유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일절을 보면 이 시의 원관념은 ‘맹서는’이고 보조관념은 ‘날아갔습니다’이다 ‘맹서는’이란 원관념 앞에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이란 은유가 있고, ‘날아갔습니다’ 앞에는 ‘차디찬 티끌’과 ‘한숨의 미풍’이란 은유가 있어 전체 은유 속에 부분 은유가 액자처럼 구성되었다.   (3). 병치은유-마주놓기 은유 1) 병치와 상호작용 미술에는 색상대비란 것이 있다. 색상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색을 대비시켰을 때 원래의 색보다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노랑색은 검정색과 대비했을 때 훨씬 선명하다.   음악에는 대위법이나 화성학이 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모든 낱말의 의미는 서로 다른 낱말과의 음성적 변별성에서 탄생한다고 하였다.   2) 고전시가의 병치은유 상호작용의 원리는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음양의 법칙이나 이원론의 변증법적 과정이 예이다. 시가에 대조법, 대구법이란 상호작용의 문장법이 있었다.   江碧鳥逾白(강벽조유백)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산청화욕연) 산이 푸르니 꽃이 붉게타고 있네 今春看又過(금춘간우과) 올봄도 보기만 하면서 또 보내니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어느 날이 곧 돌아갈 해인가 -두보의 절구(絶句) 1행에서 파란 강과 하얀 갈매기 2행에서는 푸른 산과 붉은 꽃이 색상대비를 이루고, 1행과 2행은 강과 산이 공간적인 병치를 이루고 있다. 3,4행을 보면 인간과 자연, 평화로운 자연과 불행한 인간, 불변과 안정의 자연에 비해 고향조차 못 가는 유랑하는 화자의 불안과 고뇌가 병치되어 더욱 처절하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 시조 1행에서 산과 물이라는 자연 공간이 대비될 뿐만 아니라 옛 산과 옛 물이 아님이란 말로 불변의 영원한 시간과 불가역의 무상한 시간이 병치되었으며 2행에서는 흐르는 물의 그 불가역적 시간성을 재확인하고 3행에서는 인간과 동일시하여 산의 영원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3) 현대시의 병치은유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라는 단선적 치환은유에서 ‘A는 B다’라는 은유와 다른 ‘a는 b다’라는 은유가 마주보며 각각의 의미를 드러내 서로 충돌하여 또 다른 의미와 정서를 드러내거나 또는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 병치은유이다.   군중 속에 끼어있는 유령의 얼굴들 검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비에 젖은 꽃잎들 - 파운드 「지하철 정거장에서」   아뜨리에서 흘러나오던 루드비히의 주창곡(奏唱曲) 소묘(素描)의 보석길 한가하였던 창가(娼街)의 한낮 옹기장수의 불던 단조(單調) - 김종삼 「아뜨리에 환상」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 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에서   병치은유는 두 사물을 그냥 대조적으로 배치해 놓을 뿐이다. 각각 독자 존재하는 비동일성, 비 친숙화의 폭력적 배열이다.   (4)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조화 전통적인 치환은유의 경우 참신한 상상이 결여될 경우 진부할 수 있고 병치은유가 지나치게 이질적인 이미지로 채워질 경우 난해한 언어희롱으로 독자와 멀어질 수 있다.   휠라이트도 훌륭한 시는 치환적 요소와 병치적 요소가 확연히 구분될 수 없으며 이들은 다만 상보적으로 융합되어 작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현대의 특징을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혼돈이라고 할 때, 그동안 은유가 추구해온 동일성의 방향에서 비동일성을 추구하려는 노력도 함께 이해된다.   은유의 일탈과 낯설음의 정도 1.은유의 상호작용과 긴장관계 현대에 와서 은유란 원관념과 보조관념, 은유와 은유의 문맥들이 상호작용 또는 충돌하여 새로운 제 3의 의미나 정서를 드러내는 창조적 작업이다.   현대적 은유의 대세는 오히려 비 유사성을 통한 생소함 긴장감을 조성하여 시의 감동성을 극대화 하는 작업이다.   자 그러면 갑시다, 그대와 나는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놀이 하늘에 퍼뜨려지거든 -엘리어트의 「J.A.프로푸록의 연가」에서   엘리엇이 객관적 상관물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 이 시에서 ‘수술대 위 마취된 환자’는 바로 객관적 상관물이다. 하늘에 퍼뜨려지는 저녁놀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즉 희미하고 몽롱한 상태를 독자에게 보다 선명히 전달하기 위하여 수술대 위에 있는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의 몽롱한 상태를 객관적 상관물(보조관념)으로 동원하고 있다.   객관적 상관물이란 특정한 정서의 대상, 상황, 사건 이미지다. 나보다 더 깊이 사랑의 광산을 팠던 사람들이여 말해보라 사랑의 행복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를 나도 사랑하고 소유하고 알아보았다 그러나 늙을 때까지 내가 사랑하고 소유하고 알아볼지라도 나는 그 숨은 신비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존던의 「사랑의 연금술」에서   존던은 ‘광산을 파는 일’ 을 ‘여자를 사랑하는 일’ 로 비유하고 남녀의 사랑의 양극화 성격을 폭력적으로 결합하는 기발한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김현승의 시에서 불꽃이나 눈송이도 객관적 상관물이며 동시에 기발한 기상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김현승 「절대 신앙」 러시아의 쉬클로프스키는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 또는 일탈성의 구조에 있다고 하였다. 친숙한 의미의 은유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은유,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은유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고 하였다.   시어나 은유의 친숙화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지각이 반복해 습관화될 때 조성된다. 지각은 자동화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낯익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생략하고 손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탈 언어화 상태가 된다.   프라그의 무카로브스키는 언어의 인식적 기능과 표현적 기능을 구별하면서 언어의 표현면이 우세할 때, 표현행위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수법으로 언어가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 미적 사용되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를 전경화(前景化)라 한다.   전경화란 일상적이고 문법적인 언어들을 배경화하고 낯설은 시어들을 뚜렷하게 전면으로 제시하는 수법이다.   낯설게 하기나 전경화는 어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운, 리듬, 어휘 등 시 구성 요소들 속에서 실천되는 현대시의 수법이다.   (1)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위에 떴지   (2)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 하다가 봄날의 먼 앵두 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은회색이다. — 김춘수의 「은종이」에서 (1) “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가고 있다”라는 시행에서 활자와 코끼리라는 시어의 배열은 아무리 상상해도 그 유사성이나 기존의 시학에서 말하는 사고의 경제성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친숙함도 없고 관습적인 자동화의 지각도 없다. 전혀 예상 밖의 언어가 대치되어 일상의 어법을 일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낯설은 언어가 주는 당혹감은 오히려 지각의 새로운 충격으로 유도된다.   2. 은유의 일탈과 낯설음의 정도 1) 의미의 전이자질과 의미자질 낯설음의 은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인식이 현대시에서 은유를 해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언어가 가지는 기본 의미 원관념이 시의 은유에서는 낯설음의 의미로 전이되는데 보조관념으로 바뀜, 벗어남 일탈이 일어나는데 원관념과의 벗어남의 정도, 일탈의 정도가 다르다.   그 벗어남의 정도가 바로 시의 창조성, 개성, 예술성 등 미학적 시적 비평이다.   시의 은유에서 의미의 벗어남, 일탈 낯설게 만들기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학의 전이자질과 의미자질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낱말이 갖는 여러 가지 자질들의 변별성에서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환락(pill)과 부리(bill)이라는 말을 보면 두 단어의 첫 글자 /p/와 /b/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하다. 말하자면 /p/와 /b/의 변별성 때문에 ‘환락’과 ‘부리’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구별하게 된다. 그런데 /p/와 /b/를 좀더 구체적으로 음운론적 자질을 보면 /p/는 양순음+파열음+무성음이다. 또한 /b/는 양순음+파열음+유성음이다. 따라서 두 음가는 양순음과 파열음이란 공통적 자질을 가졌고 다만 무성음과 유성음이란 변별성, 즉 음성의 시차적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음운론적 변별성이 다른 의미를 탄생시킨다. 우리말의 ‘밥’과 ‘밤’의 의미는 ‘바‘에 ㅂ이냐 ㅁ이냐로 구별된다. 이처럼 의미는 고유하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적 전이자질의 차이에서 탄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와인라이츠는 언어의 의미 자질에 관한 이론들을 통해 의미의 변별성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남자(man)는 +남성(male)+성인(adult)+인간(human) 등 의미자질로 구분된다. 남자와 대비한 여자(woman)는 비남성(-male)+성인+인간 등으로 구분되어 남자와 여자란 다 같이 성인이며 인간인 점에서는 동일하나 성만 구별되는 변별적 자질을 지닌 것이다.   남자(man); +남성 (male), +성인(adult), +인간(human) 여자(woman); 비남성(-male) +성인(adult), +인간(human) 사람; 생물 인간 명사 짐승; 생물 비인간 명사 자동차; 비생물, 비인간, 명사   사람과 짐승, 자동차의 경우 의미자질을 비교해 보면 사람과 짐승은 같은 생물에 같은 명사인데 사람과 자동차는 비생물(-animate), 비인간(-human)+명사로 분석되어 다 같이 명사라는 데는 일치하나 자동차는 생물도 인간도 아니기에 사람과 짐승의의 관계에 비하여 훨씬 동질성이 희박한 동일성을 벗어난 일탈성, 이질성, 낯설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 은유의 일탈과 그 차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거리,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미학적 심도, 일탈의 정도, 낯설음의 강도가 어떻게 강화되는지를 ‘노래하다’라는 원관념의 동사가 전이 되는 단계를 보자. ① 어린이가 노래한다. ② 새가 노래한다. ③ 꽃이 노래한다. ④ 강이 노래한다. ⑤ 바위가 노래한다. ⑥ 고독이 노래한다. ① 노래하는 동작의 주체가 인간이므로 어법상으로나 의미상으로 보아 가장 정상적인 일반진술이다. ② 관용적이기는 하나 ‘노래한다’는 말은 ‘지저귀다’가 전이된 은유로 ①보다 벗어난 것이다. ③ 꽃잎이 흩날림의 은유로 식물이기 때문에 ②보다는 더욱 벗어난 형식이다. ④와 ⑤ 같은 무생물인 사물이어서 ③보다 벗어났지만 강은 산에 비하여 물이 흐르는 성질을 감안한다면 ⑤가 더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⑥ 관념적인 추상어다. ⑤보다 더욱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①에서 ⑥까지의 동사은유를 보면 그 벗어남의 정도가 인간
1092    우주 괴인 자이로 박사 - 에드먼드 해밀턴 지음 댓글:  조회:577  추천:0  2021-03-20
우주 괴인 자이로 박사 Calling Captain Future   에드먼드 해밀턴 Edmond Hamilton 지음 에드먼드 해밀턴 1904년 미국에서 출생. 15세에 대학에 입학한 천재였으나 중퇴하고, SF를 쓰기 시작했음. 스페이스 오페라를 잘 썼다. "캡틴 퓨쳐" 시리즈, "달들의 왕", "허공의 유산", "백만 년 후의 세계" 등 380여 편이 있음. 편집 위원 아동 문학가 이원수, 박홍근/공학 박사 양옥룡 문학 박사 최인학/이학 박사 김희귀 전 교육감 김성묵   가까워지는 암흑성················ 4 캡틴 퓨쳐와 그의 동료·············· 16 변장의 명수··················· 27 서둘러라!··················· 37 진로를 태양으로················· 47 털북숭이 생물·················· 49 문어 인간···················· 65 커밋 호····················· 71 마법사····················· 76 움직이는 산··················· 91 캡틴을 죽여라················· 109 코발트···················· 120 흉계에 걸리다················· 136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148 캡틴과 자이로 박사··············· 160 암흑성을 추적하라··············· 173 자이로 박사의 정체··············· 180 다시 만날 수 있다··············· 189 등장 인물 캡틴 퓨쳐 : 이름은 커티스 뉴턴. 이 책의 주인공이다. 태양계 제 1의 과학자이며, 퓨쳐맨(미래인) 세 사람과 대활극을 벌인다. 사이먼 : 살아 있는 뇌만 있다. 캡틴 퓨쳐를 키우고, 그의 둘도 없는 상담역이다. 오토 : 인간과 흡사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캡틴 퓨쳐의 동료. 클라크 :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 역시 캡틴 퓨쳐의 동료. 케인 박사 : 금성 천문대의 천문학자. 존 랜들: 아름다운 여자 비밀 정보 부원. 커얼 로머 : 행성 지리학자, 명왕성 조사단의 단장. 레인 : 명왕성의 위성인 케르베로스의 형무소장 그림 : 명왕성의 위성인 케이론의 모피상. 에즈라 : 명왕성 행성 경찰의 사령   가까워지는 암흑성   행성 간 우주선 팰리스 호는, 지금 금성에서 지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항해 중이었다. 호화 여객선 팰리스 호의 살롱에서는 여느 때처럼 금성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고, 떠들어대기도 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잠시 후에 불길한 그 사건이 일어나서, 사람들을 순식간에 불안 속으로 떨어뜨리리라고는 그 누구도 꿈에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파크스 통신사는 선교(항해 중 선장이 지휘하는 곳)의 텔레바이저(텔레비전 송신기) 앞에서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일등 운전사가 들어와서 통신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슬슬 지구의 제 4 우주항에 연락을 취해 줘. 우주선의 입항은 내일 오전 7시라고 말이야." 곧 스파크스 통신사는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넣었다. 텔레바이저의 스크린에 지구의 제 4우주항의 주임 관제관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임 관제관은 끄덕이고 말했다. "팰리스 호, 알았어. 제 4 우주항의 제 15도크로……" 주임 관제관의 모습이 희미해지며 떨린다고 생각되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이상한 사나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스파크스는 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그 이상한 사나이는 언뜻 보아도, 지구의 인간 같지가 않았다. 이마가 몹시 나와 있었으며, 검은 눈은 사람을 끌어당길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또 입고 있는 옷도 온통 검은 색깔이었다. 스파크스는 그 때 어쩐지 사나이가 슈퍼맨인 것처럼 여겨졌다. 사실, 그와 같이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사나이는 표정에 아무 변화도 없이 쉰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이로 박사다. 나는 태양계의 모든 주민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다. 거대한 암흑성이 태양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암흑성과 태양은 충돌하여, 태양계의 생물은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고 있다." 스파크스는 숨을 들이켰다. 암흑성이란 것은 타버린 항성, 죽은 태양을 말한다. 그 거대한 암흑성이 태양을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은…… 자이로 박사라고 밝힌 사나이는, 그 암흑성의 위치를 엄숙하게 가리키고는 한층 소리를 높였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최후의 날'은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앞으로 수 주일로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 나만이 그 충돌을 피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태양계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이로 박사의 이야기에 끌려 들어간 스파크스 통신사는 끄덕이고 말았다. "이런 위기가 다가오고 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보다도 이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내가 자유롭게 태양계의 모든 기계와 자재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쪽이 중요하다. 따라서 나와 내가 지휘하는 '최후의 날 자위단'에 그 동안만 태양계 정부의 모든 명령권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고 자이로 박사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서는 텔레바이저의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스파크스는 한동안 멍청해 있었다. 지금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큰일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태양계 최후의 날을 피하지 않으면…… 그러자 제 4 우주항의 주임 관재관의 모습이 다시 텔레바이저에 나타났다. "이봐, 지금 보았겠지?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작자가 태양계의 모든 파장에 끼여들어 전 텔레바이저에 수신시켰어." 스파크스는 물었다. "대체 누구입니까? 보통 인간 같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그 사나이가 말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태양계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리석은 잠꼬대야. 곧 어떤 엉터리 같은 놈인가 알 수 있어." 주임 관제관은 내뱉듯이 말하고,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이어 텔레바이저의 위에 붙어 있는 버저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태양계 정부의 긴급 방송이다. 곧 태양계 정부의 보도관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 태양계의 여러분, 이제 막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나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천문학자의 보고에 의하면, 그 사나이가 말한 위치에는 암흑성도 없으며, 또 아무런 변화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태양계 정부 보도관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스파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엉터리였군. 그러나 장난치고는 너무 지나치잖아." 그런데 이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장난이었던가 하고 안심했으며, 소문마저도 점차로 없어져 가고, 행성 경찰은 이 위험 인물인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려고 전 행성을 남김없이 찾고 있었다. 그러나 자이로 박사가 자기 스스로 태양계의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 대로, 어디에서도 그의 색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박사가 방송에 사용한 전파가 전혀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디서 발신했는지 조차도 확실히 알아 낼 수 없었다. 2주일이 지나도 자이로 박사의 그림자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에, 행성 경찰은 그만 포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장난에 말려들기보다는 다른 할 일이 얼마든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럴 때, 또 자이로 박사가 텔레바이저에 끼어 들어왔던 것이다. "태양계 세계 사람들에게 구한다. 너희들은 나의 경고를 믿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제 보아라. 너희들의 소형 망원경으로도 이제는 암흑성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자네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것이 좋을 거다. 나의 말이 옳은지, 너희들 과학자들의 말이 옳은지를." 기분 나쁜 눈을 한 자이로 박사는 승리나 한 듯이 이렇게 말하고 나서는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두 번째의 경고를 믿고 개중에는 당장에 자기의 소형 전자 망원경으로 관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자이로 박사의 말대로, 거기에 암흑의 물체를 확인했다. 태양계 안에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이로 박사의 방송 후, 태양계 정부는 당황하여 취소를 위한 방송을 했다. "전 태양계의 여러분, 천문학자는 사수 자리의 방향에 확실히 어떤 종류의 암흑체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질량을 거의 0에 가깝고, 아무런 위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을 부채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역시 암흑성은 자이로 박사라는 사람이 말한 대로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런데도 우리의 천문학자는 처음에 그런 암흑성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어." "그렇다면, 암흑성이 태양을 향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 아닌가? 자이로 박사의 말투로는 태양계 최후의 날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부의 발표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천문학자가 두 번이나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로 위험은 없는 것일까 하고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점점 날이 갈수록 자이로 박사의 경고를 믿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든 행성에서 자이로 박사가 말한 그 '최후의 날 자위단'에 참가하려고 했다. '자위단'은 모두 검은 원반의 마크를 소매에 붙이고, 우주정의 깃머리에도 그 마크를 붙였다. 그리고 태양계의 행성에서 행성으로 같은 동료들을 늘리려고 뛰어다니고 있었다. 물론 태양계 전부를 지배하는 힘을 자이로 박사에게 넘겨 주어 '최후의 날'을 막으러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두 번째의 자이로 박사의 방송이 있은 지 일주일 가량 지났다. 개중에는 또 박사의 방송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면서,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켜고 줄곧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 기대에 응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보통 인간답지 않은 자이로 박사의 모습이 스크린 가득히 나타난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짖어대듯이 외쳤다. "태양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고한다. 너희들의 천문학자는 암흑성을 발견했으나 아무런 위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떻게 됐느냐? 나에게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그렇게 말한 천문학자들은 가족을 데리고 어디론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대충돌이 일어난 뒤에 어딘가 살아 남을 행성으로 도망칠 작정인 것이다. 얼마나 비열한 놈들이냐. 놈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이 태양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뿐이란 걸 믿어야 한다." 온통 검정 옷을 입은 자이로 박사의 모습이 사라지자 곧 태양계 정부의 보도원이 텔레바이저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괴로운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그 말소리조차 약했다. "전 태양계의 여러분, 천문학자 중 몇 사람은 가족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평상시의 성격으로 보아, 일부러 숨을 사람들은 아니라고 확실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겁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수상한 사나이의 말을 신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위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용하지 말라고? 그리고 위험은 없다고? 천만에 아무도 이제는 정부의 말 같은 건 믿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고 말고. 위험을 피해 도망친 천문학자보다 자이로 박사의 말을 신용하는 것이 뭐가 우스우냐 말이야." "나는 이 때까지 정부의 발표를 신용해 왔어. 그러나 이제는 참을 수가 없어.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자이로 박사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 모두 정부로 밀려가서 자이로 박사의 말대로 정부의 명령권을 박사에게 주라고 요구하지." 태양계와 모든 행성에서 그날 밤, 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특히 태양계 정부의 수도 뉴욕은 대단했다. 정부의 빌딩 앞은 수많은 군중으로 꽉 차 있었다. "대통령과 평의회는 당장에 물러나라! 그리고 자이로 박사와 최후의 날 '자위단'에게 뒷일을 맡겨라." 사람들은 소리를 합하여 외쳤다. 그 소리에는 공포가 스며 있었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도 시시각각으로 태양계 최후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제임스 카슈 대통령은 자기의 방에서 아래의 큰 파도처럼 웅성대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통령은 비서인 보넬에게 긴장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이상 더 소동이 번진다면 정부는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이로 박사는 사람들을 선동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놈이다." 비서인 보넬은 의아스러운 듯 머리를 흔들고 나서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 각하, 자이로 박사가 다만 선동술만 뛰어났을까요? 그 사나이는 우리들의 천문학자들이 가장 큰 천체 망원경을 가지고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암흑성을 발견했으니까 말입니다." 카슈 대통령은 끄덕였다. "음, 그 점이 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거야. 왜 그 사나이만이 암흑성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아무튼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완력으로 빼앗으려고 한다. 정체 불명의 사나이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첫째로 가까워지고 있는 암흑성의 질량은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작은 것이고, 위험은 전혀 없으니까 말야." 그 때, 숨을 헐떡거리며 행성 경찰 장관 호크 앤더스가 들어왔다. "대통령, 이제 우리들의 힘으로는 밀려오는 군중을 막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행성인 관청에도 군중이 밀어닥쳐서 소동을 부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나가다간 일주일도 못 되어 태양계 정부는 자이로 박사의 손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카슈 대통령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어떤 경우에도 꼼짝하지 않는 앤더스 장관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볼 때, 꽤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다. 카슈 대통령은 물었다. "자이로 박사를 체포할 수는 없는가?" "죄송합니다. 전혀 종잡을 수조차 없습니다." "그럼 행방불명이 된 천문학자 존스와 게리머들은?" "그것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앤더스 장관은 죄송한 듯이 눈을 감았다. 카슈 대통령은 창문에서 천천히 올라가는 보름달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태양계 정부의 위기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나이가 단 한 사람 있다." 비서의 보넬이 문득 깨달은 것처럼 대통령을 보고 외쳤다. "캡틴 퓨쳐입니까?" "그렇다. 캡틴 퓨쳐와 퓨쳐맨이이라 불리우는 그 세 사람의 기묘한 동료들 말이다. 좋아, 북극에 텔레바이저로 지령하여 신호등에 불을 켜게 해라. 어서, 보넬!“ 30분 후, 북극의 얼어붙은 황야에 거대한 마그네슘의 불이 타올랐다. 그 신호야말로 우주의 어디엔가 있는 캡틴 퓨쳐와 그 한패인 퓨쳐맨에게 위기를 알리는 것이다. 그 불빛은 저 멀리 떨어진 우주 공간의 어디서나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캡틴 퓨쳐와 그의 동료   그 때, 캡틴 퓨쳐는 달세계의 치코 크레이터에 위치한 연구소에 있었다. 치코 크레이터의 화구 호수 같이 보이는 밑바닥에는 둥근 보석처럼 무엇인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캡틴 퓨쳐 연구소의 큰 창문이었다. 그 연구소는 태양계 최고의 천문 과학자에 어울리는 훌륭한 설비와 기계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기계의 소음 속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실험을 시작할까요, 사이먼?" 그 소리는 몹시 맑았다. "좀더 기다려, 커티스" 대답한 목소리는 인간의 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목 쉰 금속이 삐걱거리는 것 같은 소리였다. 무리도 아니다. 다른 한쪽 소리의 주인공, 사이먼 라이트는 살아 있는 뇌이니까. 즉 사이먼은 몸은 없고 그 대신 그 뇌를 죽지 않도록 특별한 네모진 투명한 상자에 넣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자에는 입 대신 스피커가, 눈 대신으로는 쑥 내민 파이프의 끝에 렌즈의 눈이, 또 귀 대신에는 마이크가 장치되어 있었다. 먼젓번의 맑은 목소리의 커티스 뉴턴은 어깨가 넓고 키가 2미터 가까이나 되는 늠름한 청년이었다. 약간 검은 얼굴과 시원한 그 눈은 얼핏 보기에도 커티스가 굉장한 천재임을 말하고 있었다. 커티스는 왼쪽 손에 큰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그 반지의 9개의 보석은 초소형 원자력 발전기이며, 한가운데의 보석의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물론 그 한가운데의 보석은 태양을, 아홉 개의 보석은 태양계에 있는 아홉 개의 행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반지를 끼고 있는 인물이야말로 캡틴 퓨쳐인 것이다. 그 때 커티스와 사이먼은, 구리를 순수한 붕소로 변하게 하는 실험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것이 성공되면, 천왕성까지 적은 양의 붕소를 가지러 갈 필요가 없어진다. 굉장한 발명인 것이다. 드디어 최후의 실험에 접어들려고 했을 때, 바위를 파서 만든 연구소의 한 구석에서 굉장히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나는 우릉우릉 하는 기계와 같은 큰 소리이며, 한쪽은 시익시익하는 목쉰 소리였다. 캡틴 퓨쳐는 얼굴을 들며 외쳤다. "클라크와 오토가 또 다툼을 시작했군! 왜 저 둘은 사이가 나쁘지, 클라크! 오토!“ 곧 연구실에 보통 인간과는 달라 보이는 클라크와 오토가 들어 왔다. 클라크는 키가 2미터 이상이나 되는 금속제의 로봇이다. 그의 굵은 두 팔에는 태양계 제일의 힘이 숨어있다. 오토는 인간과 흡사하게 만들어진 하얀 살결의 안드로이드 합성 인간이다. 인간과 흡사하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머리카락이 없는 흰머리와 얼굴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과는 달랐다, 그의 민첩성은 어떤 사람도 흉내 내지 못한다. 로봇인 클라크의 어깨에 곰과 비슷한 색다른 작은 회색의 동물이 착 달라 불어 있다. 달의 개다. 달의 개답게 호흡할 필요도 없고, 먹이인 광석을 강한 이빨로 썰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달의 개는 구리 조각을 열심히 씹고 있다. 캡틴 퓨쳐는 말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었어? 너희들은 왜 그렇게 사이가 나쁘냐?" 오토는 화가 나서 미치려 했다. "그만두라고 했는데, 클라크란 놈이 어디서 이 달의 개 이이크를 주워 가지고 와서 기르니까 곤란합니다. 이이크란 놈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권총을 먹어치웠어요!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뭐든지 먹어치워요. 그래도 이놈을 버리려 하지 않아요." 로봇인 클라크는 굵은 금속의 팔로 이이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토란 놈은 인간이 아니므로, 우리들 인간이 애완 동물을 기르는 마음을 모릅니다." 오토는 점점 더 화가 나서 미쳤다. "인간이 아니라고? 나야말로 누가 보아도 인간 그 자체다. 너 같은 놈은 금속의 잡동사니 덩어리야, 그런 주제에 뭐라고!“ "금속 덩어리라고!“ 캡틴 퓨쳐는 당황하며, 그들의 가운데 끼여들어 둘을 떼어놓았다. "이젠 그만둬. 우리들은 동료가 아니냐." 그러자 살아 있는 뇌 사이먼 자이트가 말했다. "그렇다. 너희들은 언제나 어느 쪽이 인간이냐고 싸우는데, 그게 무슨 대수인가. 전에는 인간이었던 이 나를 보는 게 좋아. 인간다운 몸집은 가지고 있지 않으나, 역시 너희들과 같은 퓨쳐의 하나가 아니냐. 그 점이 중요하지 않은가." 캡틴 퓨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먼, 오토, 클라크를 둘러보는 그 눈은 인정이 넘쳐 있었다. 사이먼의 말대로 그 세 사람이야말로 캡틴 퓨쳐와 함께 태양계의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큰 활약을 하고 있는 퓨쳐맨이었다, 그리고 또 이 퓨쳐맨 커티스 뉴턴을 훌륭한 청년으로 키운 팀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커티스 뉴턴의 아버지 로저 뉴턴 박사는 아내 엘레느와 함께 달세계에 이주했다. 벌써 51세기가 되자, 태양계 전체가 하나의 나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행성이나 위성에는 크고 작은 도시가 만들어져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만은 황폐한 그대로였다. 로저 커티스 박사가 그 달에 이주한 것은,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들 박사 부처와 함께 달에 건너간 것은 친구인 지금의 살아 있는 뇌인 사이먼이었다. 사이먼은 유명한 과학자였는데, 불행하게도 병이 들어 죽을 직전이었다. 그 때 로저 뉴턴 박사가 사이먼의 뇌를 꺼내어, 특별한 상자에 넣어서 뇌만은 죽지 않게 했던 것이다. 로저들이 달에 이주하여 얼마 되지 않아서, 캡틴 퓨쳐인 커티스가 태어났다. 이 행복하고 즐거운 생활에서 로저와 사이먼은 우선 로봇인 클라크를 만들었다. 다음에는 안드로이드인 오토를 만들었다. 인간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 이상으로 성실한 인조 인간을 완성하는 것만 로저의 꿈이었던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때,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로저의 발명품을 훔치려고 벼르던 악당이 결국 연구소를 습격하여 로저와 부인 엘레느를 죽인 것이다. 부인 엘레느는 숨을 거두기 전, 줄곧 짧게 괴로운 숨을 내쉬면서도 고아가 될 처지에 놓이게 된 커티스의 장래를 보아달라며 사이먼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 악과 싸우는 늠름한 인간으로서 커티스로 키워 달라고 부탁하며 죽어갔다. 사이먼들은 열심히 커티스를 키웠다. 사이먼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과학 지식을 모조리 커티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마침내 커티스는 그들을 능가할 정도의 훌륭한 과학자가 되었다. 태양계 제일의 힘을 가진 로봇 클라크는 소년을 슈퍼맨 정도의 늠름한 몸으로 단련시켰다. 또 매우 재빠른 변장의 명수 오토는 소년에게 어떤 때라도 재빠른 솜씨로 뛰어나게 행동하게끔 훈련시켰던 것이다. 이리하여 태양계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당과 맞서 싸우는 늠름한 정의의 슈퍼 맨, 캡틴 퓨쳐가 태어났던 것이다. 이 캡틴 퓨쳐와 그에게 충실한 퓨쳐맨은 태양계 중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성능이 좋은 우주선 '커밋(Comet)'을 만들었다. 그리고 태양계 정부에 나쁜 일을 걸어오는 악당과 행성을 돌아다니며 싸우겠다고 요청했던 것이다. 처음 태양계 정부는 퓨쳐맨들의 요청을 반쯤은 의심하고 있었는데, 차츰 퓨쳐맨의 활동이 훌륭한 데에 아주 반해, 잇달아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커티스는 이 충실한 세 사람을 마음 속으로부터 사랑하고, 또 의지하고 있었다. 커티스는 말했다. "너희들은 나에게 있어서 인간 이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싸움만 하다니……" 여기까지 말했을 때, 사이먼이 갑자기 말했다. "신호다!" 사이먼의 렌즈 눈은 머리 위의 유리창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에 우주에 뜬 녹색의 지구가 보였다. 서둘러 다른 세 사람도 보았는데, 북극에 해당하는 하얀 곳에 한 점의 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캡틴 퓨쳐는 얼굴을 긴장시키고 말했다. "태양계 정부가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우리들을 부를 정도라면 굉장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곧 커밋에 오르자!" 이제는 시시한 싸움 같은 것은 어디엔가 날아가 버렸다.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이 말했다. "클라크, 나를 운반해 줘." 로봇 클라크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고, 달의 개 이이크를 한쪽 손에 들고서, 서둘러 캡틴 퓨쳐와 오토의 뒤를 따라갔다. 20분 후, 눈길을 끄는 이색적인 모양의 고속 우주선 커밋 호는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시간 후, 커밋 호는 뉴욕의 강가에 있는 하얀 지붕 부근에 착륙하려고 했다. 보기 좋게 착륙한 커밋 호에서 옥상으로 나온 퓨쳐맨은 멀리 아래의 광장에서 대군중이 경찰들과 서로 뒤얽혀 싸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캡틴 퓨쳐는 입술을 깨물며 들어갔다. "매우 절박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자, 빨리 가자!" 퓨쳐맨은 대통령의 방으로 급히 내려갔다. 안에 있던 카슈 대통령, 비서 보넬, 앨리어즈 행성 경찰 장관은 커티스와 퓨쳐맨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캡틴 퓨쳐가 와 주었으니, 이제는 안심이다." 하며 대통령은 큰소리로 외쳤다. 커티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빌딩 앞에 있는 대군중을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요?" "태양계 정부의 권력을 모두 자이로 박사와 그 일당에게 넘겨주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라네." "자이로 박사? 그 놈은 어떤 놈입니까?" 커티스가 묻자, 비서 보넬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이로 박사의 방송을 듣지 못했습니까! 암흑성과 충돌한다는…… 이제는 주민의 무려 90퍼센트 가량이 박사의 경고를 믿고 있답니다." 캡틴 퓨쳐가 말했다. "우리들은 계속 새로운 실험을 해 왔습니다. 그 암흑성이라는 게 뭡니까?" 여기서 대통령은 긴밀히 이제까지의 일을 빠르게 이야기했다. 캡틴은 중얼거렸다. "곧 사이먼과 내가 그 암흑성을 관측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선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지 않고서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그런 헛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을 선동한 비겁한 짓을 한 근본을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자 앤더스 장관은 절망하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데 자이로 박사의 거처를 발견 못해 곤란을 당하고 있소. 그뿐 아니라 대통령이 설명한 것처럼 천문학자들이 잇달아 행방불명되고 있소. 1시간 가량 전에도 금성 천문대의 케인 박사가 행방불명되어 버렸다네." 그러자 캡틴이 말했다. "그 행방불명의 사건은 자이로 박사가 저지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곧 금성으로 가서 실마리를 찾아봅시다." 그 때, 갑자기 텔레바이저의 버저가 울렸다. 앤더스 장관은 텔레바이저에 다가서면서 말했다. "금성으로부터 닥터의 연락이군. 케인 박사에게 붙어 놓았던 정보 부원으로부터의 보고일 거요." 하며 장관은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스크린 안에 검은 머리칼을 한 아주 귀여운 지구인 소녀가 나타났다. 캡틴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존 랜들!“ 존은 보기에는 귀여운 소녀지만, 가장 능숙한 비밀 정보원이다. 이전에 함께 일할 때 캡틴을 많이 도와 주었다. 저쪽은 캡틴을 알아 내고 외쳤다. "캡틴 퓨쳐! 그럼, 당신도 이 사건을 취급하고 있군요. 좋아요!“ 얼굴이 좀 창백해진 채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존은 그러고 나서 빠른 어투로 말했다. "나, 실마리를 잡았어요. 저는 지금 금성에 있지만, 켄스 케인 박사가 자위단에게 유괴되어 가는 것을 미행했어요. 우주선까지 따라갔더니, 놈들이 다음에는 화성의 천문학자인 가틀러를 유괴하겠다는 말을 듣고……" 여기까지 말한 존은 입을 다물더니, 그리고 나서 외쳤다. "누군가 여기 들어오려고 해요? 자위단의 놈들에게 눈치 채어……" 갑자기 존의 모습이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고 곧이어 스크린은 캄캄해졌다. 캡틴은 외쳤다. "존! 존!" 사이먼이 말했다. "자위단은 존이 미행하고 잇는 것을 눈치챘어. 그리고 케인과 함께 유괴하려고 했어, 커티스."   변장의 명수   그 후, 이윽고 캡틴과 퓨쳐맨을 태운 커밋 호는 화성의 실티즈 시에 몰래 착륙하고 있었다. '최후의 날 자위단'이 유괴하려고 하는 가틀러는 실티즈 시의 천문 대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위단이 올 때 잠복하여 체포하려는 것이 캡틴의 계획이었다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은 의아스럽게 말했다. "놈들은, 자기들의 흉계를 존이 이쪽에 알려 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쪽으로 어슬렁거리며 올 리가 없지." "글쎄, 어떨까요? 존이 알려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어쩐지 아무튼 해 봅시다. 이쪽으로 올 때에는 존과 케인 박사를 인질로 데리고 올 테니까, 잘 되면 역전 홈런이 될 수 있지요." 캡틴이 이렇게 말하자, 로봇 클라크가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우리들의 힘으로 놈들을 체포합시다." 캡틴은 웃었다. "그런데 클라크, 이번에는 너와 사이먼이 커밋 호에 남아 있기로 했어." "그러면 오토와 둘이서? 왜 나는 안 됩니까?" 오토가 심술궂게 클라크의 말을 받아서 대답했다. "너 같은 잡동사니 로봇이 거리 한복판을 걸어다니면 당장에 적에게 눈치채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그 미치광이 애완견과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단, 그 미치광이 개가 내 기계라도 씹기라도 하면 이번에는 우주 공간에 집어던질 테니까." 달의 개 이이크는 클라크의 팔에 안겨 눈을 뜨고는 이를 갈고 있었다. 달의 개는 대기도 소리도 없는 달세계에서 자랐기 때문에 텔레파시로 상대가 전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캡틴은 언쟁을 하고 있는 클라크와 오토를 무시하고 특별 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사이먼을 보고 말했다. "우리들이 나가 있는 동안에 암흑성에 관한 정밀한 관측을 해 보지 않겠습니까?" "알았어. 해 두지. 그보다도 조심해서 가야 한다." 커밋 호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연구소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기계 말고도 마이크로 필름에 기록된 놀랄 만큼 많은 책이 비치되어 있다. 그 기록을 사용하고, 클라크를 조수로 하여 관측하면 어느 천문학자보다도 사이먼은 확실한 것을 붙잡을 것임에 틀림없다. 캡틴은 오토를 데리고 오싹할 만큼 싸늘한 화성의 밤 쪽으로 나갔다. 천문대는 실티즈 시의 저쪽 3킬로미터 앞에 있었다. 화성과 밤하늘에는 포보스와 데이모스의 두 개의 위성이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실티즈 시가 가까워졌다. 어느 화성의 도시도 그러하지만, 머리가 큰 빌딩들이 꽉 들어차 있는 것이다. 시의 중심부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뭐라고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잘 들어보니, 여기서도 자이로 박사에게 태양계를 구원해 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캡틴은 무거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안 되겠는데. 빨리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여 그런 엉터리 방송을 그만두게 하지 않고서는." 캡틴과 오토는 이윽고 실티즈 천문대에 도착했다. 천문대는 거리 끝, 사막이 시작되는 근처에 있었다. 어둑어둑한 천문대 안에는 머리가 벗겨진 붉은 살결의 화성인이 홀로 천체 망원경 옆 책상에서 열심히 계산하고 있었다. 그 화성인은 등 뒤에 몰래 다가선 캡틴과 오토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너희들은 뭐냐!“ 오토의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캡틴은 왼손을 내밀었다. 거기에 끼고 있는 큰 반지를 보고 행성인은 외쳤다. "캡틴 퓨쳐!“ "그렇소. 당신은 가틀러 천문 대장이지요?" 화성인은 크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캡틴 퓨쳐가 여기에?" "자위단 놈들이 당신을 유괴하려고 합니다. 이제라도 올 것입니다." "뭐 , 뭐라고요!“ 가틀러는 공포에 떨었다. 캡틴은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나의 친구 오토가 당신을 대신할 테니까요." 하면서 오토 쪽을 되돌아보았다. "자아 오토, 이 사람으로 변장해라." 오토는 끄덕이자마자, 벌써 허리의 벨트에 붙어 있는 네모난 용기에서 변장용 기구를 꺼내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한 화학 기름을 머리며 몸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 재빠른 솜씨는 과연 소문과 같았다. 오토의 새하얀 합성 피부는 화학 약품에 의해 부드럽게 되고, 부드럽게 되자 찰흙처럼 자유롭게 얼굴 모양을 변하게 할 수 있었다. 오토는 두 손을 사용하여, 우선 도요새의 발처럼 가느다랗고 긴 화성인의 발처럼 변하게 했다. 그리고 가슴을 넓히고, 맨 나중에 가틀러와 똑같은 얼굴로 만들어 냈다. 조각가처럼 훌륭한 솜씨였다. 이윽고 피부가 굳어지기 시작하자, 오토의 살결은 본래와 같은 탄력을 지니게 되었다. 자기와 꼭 닳은 화성인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보고, 가틀러 천문 대장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오토는 말했다. "변장을 했습니다. 캡틴." 그 목소리도 가틀러와 똑같았다. 캡틴은 말했다. "가틀러 대장, 오늘밤은 오토가 당신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전을 위해 곧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가틀러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군요. 아무튼 캡틴 퓨쳐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하고 가틀러가 천문대를 나가자, 캡틴은 오토에게 명령했다. "이 돔의 바로 밖에 놈들의 우주선이 착륙하면 몇 사람만 남겨놓고 이쪽으로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러면 되도록 떠들거나 반항을 하며 시간을 끌어 주게. 나는 그 틈에 우주선에 숨어 들어가서 존과 켄스 케인을 구출해 낼 테니까." "그건 안 됩니다. 캡틴, 위험해요. 행성 경찰엔 연락하는 편이 좋아요."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짓을 하게 되면 존 일행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내게 맡겨둬. 너는 망원경이 있는 곳에 가서 천문학자의 흉내를 내고 있으면 돼." "맡겨 주십시오. 여기 앉아 망원경을 기웃거리는 늙은이보다 내가 오히려 훨씬 행성의 일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캡틴은 킥킥 웃으면서 천문대를 나와서는 뒤쪽 으슥한 곳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허리에서 프로톤 권총을 잡아 겨누고 있었다. 캡틴은 화성의 위성인 포보스가 지평선에 모습을 감출 때 쯤, 머리 위의 별이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을 알았다. 화성의 올빼미라고 생각했지만, 곧 로켓 엔진의 희미한 떨림을 들을 수 있었다. (자위단의 우주선이 틀림없다. 왔다!) 우주선은 빙빙 돌면서 천문대를 향해 내려왔다. 불을 끄고 로켓 분사를 적게 하며 내려왔기 대문에 마치 검은 유령선 같았다. 우주선은 천문대 바로 가까이에 착륙했다. 그리고 우주선 한가운데 문이 활짝 열렸다고 생각되자마자, 10명 정도의 사람이 소리를 죽이며 잇달아 내려왔다. 그 중의 두 사람이 감시를 섰다. 차가운 별빛에 원자총이 반짝 빛났다. 나머지는 발소리를 죽이면서 천문대 쪽으로 걸어왔다. 보기에는 지구인 같았고, 회색의 옷의 어깨에는 자위단의 검은 둥근 마크가 붙어 있었다. (좋아, 지금이다!) 캡틴은 합금으로 만든 벨트에서 둥글고 작은 기구를 꺼냈다. 그것은 주위의 빛을 굴절시키고,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기계로서, 캡틴이 한 발명 중에서도 훌륭한 것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10분 동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 동안에 존 일행을 구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캡틴이 그 기계를 머리 위에 꽂고 단추를 누르자,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보이다가 점점 그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천문대 쪽에서는 가틀러의 소리를 흉내내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토는 되도록 시간을 끌려고 애쓰고 있는 중일 것이다. 완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자, 동시에 캡틴 쪽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모든 빛이 자기의 주위에 굴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캡틴은 주위의 모습을 모조리 눈에 익혀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은 육감으로 해 나가야 한다. 캡틴은 살짝 두 감시원의 사이를 빠져 나와 승강구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하여 우주선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또 모습을 나타내기까지 기다렸다. 여기까지는 모습을 감추어도 좋았으나, 지금부터 앞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서는 존을 찾아 낼 수 없다. 천문대 쪽은 오토가 말한 대로 큰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이윽고 주위의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캡틴은 서둘러서 통로를 뱃머리 쪽으로 향했다. 존들은 반드시 뱃머리 쪽에 유괴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자위단의 한 사람이 선실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상대는 순간 어안이 벙벙하여 캡틴을 지켜보다가, 곧 허리의 원자총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캡틴 쪽이 더 빨랐다. 이미 프로톤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상대는 깨끗이 뒤집어졌다. 죽지 않게 출력을 약하게 했기 때문에 정신을 잃기만 한 것이다. 조금 더 가자, 통로를 마주한 어떤 문의 빗장이 부서져 있었다. 캡틴은 얼른 알아차리고, 곧 그 빗장을 빼고는 문을 열어 보았다. 안은 어두웠으나 역시 두 사람이 갇혀 있었다. 한 사람은 지구인의 아가씨였다. 앉아서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몸집이 작은 금성인이었다. "존? 캡틴 박사! 자, 탈출합시다!“ 하고 캡틴은 작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캡틴을 알아본 존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 캡틴! 전 반드시 구출하러 오리라고……" "쉬이? 들리면 곤란해." 그러나 늦었다. 선 내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캡틴 퓨쳐가 숨어 들어온 모양이다!“ 쿵쿵, 자위단의 무리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그 절반을 쓰러뜨렸다. 남은 작자들은 천문대 쪽으로 큰소리를 질렀다. "캡틴 퓨쳐의 흉계다! 빨리 배로 돌아 오라!“ 캡틴은 재빠른 동작으로 남은 사나이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프로톤 권총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한 녀석이, 무섭게 인상이 나쁜 지구인으로 보이는 작은 사나이가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핑크 색의 덩어리를 캡틴을 향해 집어던졌다. 존이 비명을 올렸다. "로프 뱀! 캡틴, 조심해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핑크 색의 물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캡틴의 손발에 휘어 감겼고 굉장한 힘으로 조이기 시작했다. 다른 것들도 존과 케인의 몸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존이 말한 대로 그것은 로프 뱀이라고 불리는 토성의 뱀이었다. 악당들이 길들여 로프 대신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놈에게 물리면 제아무리 캡틴이라 할지라도 어쩌지를 못한다. 그래도 캡틴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인상이 나쁜 작은 사나이는 우주선의 밖을 향해 외쳤다. "카라크, 빨리 돌아오라! 가틀러 대장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곧 이륙한다!" 우주선의 로켓 엔진이 부르릉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천문대에서 당황하여 뛰어나온 지휘자인 듯한 큰 사나이와 자위단은 급히 우주선으로 되돌아왔다. 그러자 우주선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캡틴을 태운 그대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굉장한 기세로 뒤쫓아온 오토가 떠오르기 시작한 우주선의 아직 열어놓은 대로 있는 문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가장자리에 손을 걸었다. 오토는 안드로이드 였기 때문에 이런 도약을 할 수 있었다. 곧 한 패의 사람들이 몸을 구부렸기 때문에 로프 뱀에 묶인 그대로 캡틴은 외쳤다. "조심해!" 그러나 상대는 오토를 가틀러 천문 대장인 줄 알고 어떻게든 끌어올리려고 했다. 오토는 위에서 자기 손을 잡은 사나이와 흔들리는 선체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주선은 더욱 심하게 기울어서 오토와 자위단의 사나이는 우주선의 바깥 어둠 속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서둘러라!   "오토!“ 캡틴은 어쩔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원망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대여섯 마리의 로프 뱀은 더한층 강하게 휘감겨들 뿐이다. 그 때, 그 인상이 나쁜 작은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 옆에는 아까부터 카라크라고 불리는 큰 사나이가 있다. 큰 사나이쪽은 우둔한 작자인 모양으로 작은 머리를 듬직한 몸 위에 덩그러니 올려놓고 있었다. 작은 사나이는 캡틴의 몸을 발로 세차게 차며 비웃었다. "꼴 좀 봐라! 우리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자기가 걸리다니! 이 자가 캡틴 퓨쳐라고 하는 사나이인가?" 그러나 캡틴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작은 사나이를 쏘아보았다. "로지, 나는 널 알고 있다. 나쁜 지혜로서 유명한 화학자지. 너는 카라크에게 호르몬을 주사하여 거인으로 만들어 나쁜 일을 돕게 했었지. 5년 전에 체포되어, 카라크와 함께 명왕성의 위성에서 죄인을 보내는 케르베로스 별에 종신형으로 처박혔었지." 그러자 로지는 증오하듯이 말했다. "그래 너는 알고 있겠지. 나를 붙잡은 것은 너니까 말이야. 그 사례를 톡톡히 갚아야겠어, 캡틴 퓨쳐!" 하며 허리의 원자총을 천천히 뽑았다. 그 때, 자위단의 하나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로지, 이놈을 죽여서는 안 된다. 자이로 박사의 명령을 잊어서는 안 돼." 그 사나이는 유독 살결이 희고, 얼굴 모양도 반반했다. 그러고 보니, 그 눈에는 표정이 없었다. 지구인 같지만, 과연 지구인인지 캡틴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했다. 로지는 투덜거리면서 권총을 도로 찼다. "내가 자이로 박사에게 연락해 보겠어. 박사도 이 사나이를 우주선 밖으로 내던지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존이 외쳤다. "모두 제가 잘못했어요! 그 때 소리치지만 않았어도……" 곧 텔레바이저에 자이로 박사가 나타났다. 자이로 박사는 로지의 보고를 듣고, 캡틴을 향해 거칠게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멍청이야! 하필이면 이 위험에서 태양계를 구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인 나를 방해하려고 들다니!" 이미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캡틴은 그래도 비웃듯이 말했다. "그런 엉터리가 내게 통할 줄 아느냐? 만약에 정말 큰 위험이 다가와서 너만이 구할 수 있다면 그 힘을 정부에 제공하면 어때. 네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태양계를 지배하고 싶기 때문이다! 경고하건대 반드시 그 야망을 부셔 버릴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화를 냈다. "나에게 사로잡힌 네가 도리어 경고라고! 캡틴 퓨쳐, 건방지구나!“ 로지가 말했다. "곧 죽여 버립시다!“ "아니,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다른 놈들과 함께 기지까지 데리고 와야 한다. '원수의 집'이 그 놈의 마음에 들 것이다." "'원수의 집'에? 그건 좋군요." 로지는 의미 있게 빙그레 웃었다. 자이로 박사는 덧붙였다. "그러니 알겠지, 절대로 놓치지 말아라. 어쨌든 캡틴 퓨쳐는 탈주의 명인이니까 말야." "내게 걸린 놈은 아무도 도망치지 못해요." 로지가 가증오스러운 듯이 말하자, 자이로 박사는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로지가 명령했다. "이놈들 셋을 아까 넣었던 창고에 다시 처넣어라." 카라크는 가볍게 캡틴 퓨쳐를 들어 메었다. 카라크는 굉장한 장사였다. 다른 사나이들은 존과 케인을 들쳐 메었다. 세 사람을 창고에 처넣은 로지는, 캡틴이 허리에 차고 있는 합금제의 벨트와 프로톤 권총을 빼앗았다. 그리고 로지는 작은 기계를 꺼내어 그 스위치를 넣었다. 그러자 부웅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때였다. 세 사람의 몸을 감고 있던 로프 뱀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프 뱀은 세 사람의 몸에서 멀어지더니 로지가 들고 있는 큰 자루로 기어 들어갔다. 재빠른 캡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동시에 입구의 문이 쿵 닫히고, 빗장이 내려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사나이 금성인 켄스 케인은 겨우 일어서며 성난 소리로 외쳤다. "정말 지독한 짓을 하는 놈들이군. 이 남극성 천문대에서 케페이드 성운의 발견자인 나를 마치 감자 자루처럼 취급하다니." 존이 말했다. "나 때문이어요. 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이제 그런 말은 그만 됐어. 존은 놈들을 잡을 실마리를 찾아 내는 큰 공을 세웠으니까. 그보다도 나와 오토의 작전이 잘못됐어." "그러고 보니, 오토는 괜찮은지요?" "나도 그걸 걱정하고는 있지만, 오토니까…… 만약에 오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 원수는 반드시 갚겠어." 하며 캡틴이 입술을 굳게 다물자 켄스 케인이 말했다. "그런데 이 방에서 어떻게 빠져 나가지요?" 그러자 캡틴은 빙그레 웃었다. "케인 박사, 나는 이보다 더 위험한 고비를 몇 번이나 당했어요. 그러나 모두 뚫고 나왔습니다." 라고 말하고, 캡틴은 창 너머로 눈길을 보냈다. 타오르는 태양과 붉은 화성은 점점 뒤로 멀어져 갔다. "아마도 태양계의 끝을 향해 가는 모양이다. 이 진로라면, 앞에는 천왕성과 명왕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자이로 박사의 기지는 그 어느 쪽에 있을 것이다." 존이 물었다. "저 자위단 학자들의 정체가 궁금해요. 로지와 카라크는 제외하고 정말 지구인일까요? 아까 놈들 중에 어느 놈의 손에 닿았을 때, 어쩐지 다른 것같이 느꼈어요." 캡틴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어쩌면…… 아니, 지금은 그보다도 탈출할 것을 생각해야 돼." 그러나 합금제의 벨트도 빼앗기고 없다. 거기에는 비밀 주머니가 있어서 지금까지 절대절명의 순간에 캡틴을 구해 낸 여러 가지 기구가 넣어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곳을 탈출하는 데는 복도로 나 있는 문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을 부셔버리면 앗 할 순간에 공기가 없어져서 죽고 만다. 그렇다고 밖에서 빗장을 지른 한 장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을 부수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캡틴은 끄덕이고 나서 제자리에 앉더니, 왼손의 큰 반지를 뽑았다. 그리고 주의 깊게 반지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케인은 초조한 듯이 물었다. "대체 뭘 시도하는 거지요?" "이 반지 속에 작은 원자력 모터가 있어요. 그걸 꺼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작은 모터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요?" 캡틴은 빙그레 웃기만 하고, 아무 대꾸도 없이 분해를 계속했다. 이윽고 케인이 말했다. "겨우 목성의 궤도를 넘은 모양이오. 탈출 계획은 됐겠지요?" 캡틴은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다지 잘 되지는 않았지만 작은 원자 버너를 만들었습니다, 이놈은 몇 분 동안에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지만 이 문과 빗장 정도는 불태워 버립니다." 그래도 케인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문을 부순다고 해도 어떻게 도망치지요? 이 우주선을 빼앗을 작정인가요?" "적이 너무 많아요. 구명 보트를 훔쳐서 도망칩니다. 그리고 텔레바이저로 퓨쳐맨과 연락을 취하여 커밋 호를 이리 오게 합시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문에 귀를 기울였다. 통로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 버너의 스위치를 넣었다. 작기는 했지만, 굉장한 불길이 금속의 문 가장자리를 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깊어갔다. 4~5분이 지나자, 에너지를 모조리 사용해 버렸는지 불길은 픽 하고 불꽃을 뿌리고 꺼졌다. 캡틴은 끄덕이고 나서, 살짝 문을 밀에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잘못 계산한 것일까. 바깥이 빗장을 덜 태운 것일까. "그릴 리가 없다." 캡틴은 문에 어깨를 대고 힘껏 밀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활짝 열렸다. 캡틴은 기뻐하며 두 사람에게 속삭였다. "구명 보트는 뱃머리 가까운 곳 오른편에 있다. 우주선이 천문대 옆에 내려왔을 때 보았어. 자아, 가자." 세 사람은 뱃머리 쪽으로 나아갔다. 캡틴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무기 로커는 어딜까?…… 아, 역시 있구나. 나의 프로톤 권총과 합금제의 벨트가 걸려 있다." 캡틴은 기쁜 듯 로커로 가까이 갔다. 그 때, 존이 비명을 질렀다. "캡틴!" 뒤돌아보자, 자위단의 하나가 막다른 조종실에서 불쑥 통로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이쪽을 알아차리고 권총을 뽑으려고 하지 않는가! 캡틴은 무서운 속도로 무기 로커까지 달렸다. 오토로부터 평상시에 훈련받은 것이다. 눈에조차 보이지 않을 속도로 벽에 걸린 프로톤 권총을 뽑자마자 돌아서며 자위단을 향해 발사했다. 즉각 상대는 정신을 잃고 털썩 쓰러졌다. "빨리!" 캡틴은 벨트를 허리에 매면서 오른쪽의 작은 방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도 뒤따랐다. 구명 보트로 통하는 둥근 문을 발견하자, 우선 존을 들여보냈다. 케인은 곧 뒤따르려다가 멈춰 서서 말했다. "저 방으로 되돌아가야 해. 연구 노트를 거기 두고 왔어!“ 하며 되돌아가려고 하자, 캡틴은 당황해 하며 그 팔을 불잡았다. "정신 나갔어요? 자아, 빨리 타요." "내게 명령하는 거요? 싫소. 그 노트를 찾아오겠소." 케인이 부득부득 주장하므로, 캡틴은 그 몸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입구의 둥근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나서 벽에 붙어 있는 렌치를 사용하여 우주선의 중간에 박혀 있는 볼트를 뽑기 시작했다. 최후의 볼트가 빠지자, 캡틴은 서둘러서 앞자리의 조종 장치 앞에 앉아 레버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작은 구명 보트는 소형 로켓 엔진을 분사하면서 조용히 우주선을 떠나갔다. 캡틴은 보트를 크게 돌리며 방향을 잡았다.   진로를 태양으로   존은 기뻐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잘 되어 가다니, 캡틴?" 곧 케인이 화난 소리로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거요. 몇 주일 동안이나 걸려서 연구한 노트를 두고 오게 하다니! 나를 완력으로 끌어왔지요. 캡틴?" "조용히 해 줘요. 이쪽은 그 정도가 아니오. 놈들은 프로톤 권총에 기절해 있는 사나이를 곧 발견 할거요. 그러면 되돌아와 우리들을 추적할 것이 틀림없어요. 그 우주선에 추적되면 당장에 추격 당하고 말아요." 캡틴은 딱 잘라 말하고 나서, 엔진의 스로틀을 완전히 열었다. 그 때, 보트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캡틴은 약간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에테르 난류다. 이건 좋지 않은데." 존이 외쳤다. "캡틴, 놈들이 쫓아왔어요!" 뒤를 돌아보니, 무수한 별 사이로 아까의 우주선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캡틴은 끄덕이고 나서, 보트를 가로 세로 마구 비틀며 추적하는 자들을 혼란하게 했다. 그러나 적은 엄청난 속력이다. 존이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와요!" 그 때 보트는 맹렬한 에테르 난류 속에 돌입했는지 마구 뒤흔들렸다. 보트의 로켓 분사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강한 힘이었다. 더욱이 적은 바로 뒤에까지 다가오고 있다. 그 때 존이 또 외쳤다. "아니, 놈들이 되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적이 단념했어요!" "아니 단념한 게 아니야. 놈들은 우리들처럼 잡히지 않으려고 되돌아간 거야." 캡틴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존은 되물었다. "잡히지 않게라니요?" "그렇다. 우리들처럼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말야."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 존은 두려운 듯 떨면서 중얼거렸다. 지구의 사르갓소스 바다와 같이 이 에테르 난류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면, 어떤 우주선도 탈출한 예가 없다. 우주선의 무덤인 것이다. 작은 사나이 케인도 아까의 연구 노트가 어쩌고저쩌고 하던 원기는 어디로 갔는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멍청하게 캡틴 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털북숭이 생물   안드로이드 오토가 자위단의 한 사람과 우주선에서 굴러 떨어진 곳은 화성의 사막 위, 20미터 정도 되는 곳이었다. 어둠 속을 굉장한 기세로 떨어져 가면서, 오토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자기의 몸을 상대의 위에 가져가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하면, 지상에 충돌될 때 상대가 조금은 쿠션의 구실을 해 줄 것이었다. 민첩한 오토였다. 그야말로 팔은 순간에 그것을 해 냈는데, 지상에 충돌했을 때, 제아무리 오토라지만, 정신을 잃었을 정도였다.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오토는 적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물론 상대는 즉사하였다. 그런데 그 시체를 본 오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일까?) 오토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체라고 쓰러져 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 자기와 맞붙어 싸우던 사나이와는 비슷하지도 않은 전혀 틀린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짧은 털에 뒤덮여 있었고, 발은 뒤꿈치에서부터 앞쪽이 두 개로 갈라지고, 손도 손가락이 두 곳밖에 없다. 머리의 꼭대기는 평평하고, 눈꺼풀이 없는 검고 큰 두 개의 눈이 얼굴까지 빈틈없이 나 있는 흰털의 안쪽에서 멍청하게 보고 있었다. 이 생물은 가죽 벨트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붙어 있는 원통형의 기계는 충돌하였을 때, 가루가 되어 버렸다. (나는 추락 당시의 충격으로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아까는 틀림없이 지구인이었는데.)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이 없다. 멀리 사라져 가는 로켓 엔진 소리에 오토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오토는 이거 야단났구나 하는 난처함과 어떻게 할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캡틴이 유괴를 당했단 말인가? 나와 함께 한 일이 실패를 하다니. 클라크 그 놈이 뭐라고 할지. 아무튼 곧 커밋 호로 되돌아가야 한다. ) 오토는 꽤 무거운 털북숭이 시체를 어깨에 들쳐 맸다. 살아 있는 뇌 사이먼에게 조언을 부탁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티즈 시로 가까이 가는 것을 피하여 멀리 돌아서 커밋 호가 있는 장소를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겨우 커밋 호에 되돌아와 보니, 그 중앙의 연구실에서는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이 로봇인 클라크와 함께 암흑성의 관측을 하고 있었다. 화성인으로 변장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사이먼도 클라크도 깜짝 놀란 듯이 오토를 보았다. 오토는 시체를 방바닥에 털썩 내던지고는 풀이 죽어 말했다. "나야, 오토.“ 사이먼이 곧 날카롭게 물었다. "캡틴은 어디 있나?" 오토는 말이 막혔다. 더듬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저…… 놈들에게…… 자위단 놈들에게 납치되었습니다." 하면서 간단하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고 있던 클라크는 광전관으로 된 큰 눈을 환하게 비치면서 미쳐 날뛰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는 편이 좋다고 말했잖아. 모든 게 너의 책임이다. 캡틴이 납치되는 것을 팔짱을 끼고 구경만 했구나?" 오토는 더 참을 수가 없어 큰 소리를 질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책임은 아니야. 나는 캡틴의 말대로 했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우리들의 캡틴을 납치되게 했나? 꼼짝할 수 없었던 일도 아니지 않은가!“ 사이먼도 차갑게 말했다. "조용히 해! 그런 걸 가지고 다투어 봤자 소용없어. 그보다도 그 우주선의 뒤를 쫓는 일이 급하다." 그러자 오토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풀이 죽어 말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우주선이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놈의 시체를 짊어지고 왔어요. 무슨 실마리라도 되지 않을까요?" 하며 오토는 자신이 지구인과 함께 추락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괴상한 생물로 변한 경위를 설명했다. 사이먼은 렌즈 눈으로 그 시체를 세밀하게 조사해 보았다. "이런 생물이 있다니?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더욱이 살아 있을 때 지구인으로 보였다는 것도 모르겠어. 오토, 자네가 놈과 맞붙었을 때도 놈을 지구인처럼 느꼈나?" 오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 그렇지, 놈의 손을 잡았을 때, 몹시 털북숭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이놈은 어떤 방법으로 지구인처럼 보이도록 했던 거다." "그럼, 왜 놈이 죽자 지구인처럼 보이지 않았습니까?" "놈의 벨트에 붙어 있는 장치가 틀림없이 지구인으로 보이게 하는 원인이었을 거야. 그것이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원래대로 되돌아 온 것이다." 사이먼이 이렇게 말하자 오토는 다시 머리를 갸우뚱했다. 지구인처럼 보이게 하는 그런 기계 같은 것이 정말 있는 것일까?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은 또 다시 시체를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X선으로 조사해 보았다. 이윽고 사이먼은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구나! 이 생물은 명왕성이나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놈이다." 오토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명왕성이라고요? 이런 것이 명왕성에 살고 있는 것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사이먼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얼음으로 덮여 있는 명왕성은 아직 전부 탐험된 것은 아니지. 게다가 세 개의 위성과 전혀 알지 못 하는 곳이 있고. 더욱이 이 생물의 눈을 보아라. 저녁 무렵의 밝기 정도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털이 많고 뼈도 그다지 강한지 않다는 것은 기온이 낮고 천체의 크기가 중간 정도의 장소에서 살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 천체라면 명왕성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놈은 태양계 밖에서 왔는지도 모르잖아요?" 오토가 반박하자, 사이먼은 조금도 변함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럴 리는 없어. 이 생물이 지닌 눈의 망막은 우리들의 태양이 내고 있는 자외선을 느끼는 것 같은 구조로 되어 있으니 말이야." 클라크가 외쳤다. "그럼, 캡틴은 명왕성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틀림없이 자이로 박사라고 하는 놈의 비밀 기지는 거기에 있어. 곧 출발합시다." 그러고서 5분 후, 클라크가 조종하는 커밋 호는 떠오르기 시작했다. 클라크는 도중에 레버를 앞으로 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커밋 호는 진짜 커밋 Comet '혜성'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것도 캡틴의 발명이다. 분사관에서 두터운 이온의 입자를 분출시켜, 그것이 선체를 싸고 길게 꼬리를 끈다. 얼른 보아서는 혜성같이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적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커밋 호는 위장을 한 그대로 굉장한 속도로 명왕성을 향해 계속 날아갔다. 그 동안에도 사이먼은 소형 망원경으로 암흑성의 관측을 계속했다. 오토가 초조한 듯이 말했다. "캡틴에게 큰일이 일어나고 있을 텐데, 이렇게 태평스럽게 암흑성의 관측만 계속하고 있다니요." 사이먼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왜 커티스를 걱정하지 않겠는가. 내 자식 같은 커티스가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지. 그러나 이 관측은 커티스가 자이로 박사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건 그렇겠지요. 캡틴이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말이지요." 오토가 비꼬자, 클라크가 옆에서 말했다. "캡틴이 죽음을 당하다니 말도 안 돼. 곧 발견하여 구조하겠어!“ "그렇다면, 오직 좋을까……" 오토는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앞쪽에 무엇인가 있다. 놈들의 우주선일지도 모른다!“ 사이먼과 클라크도 긴장하여 앞쪽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색다른 모양의 우주선이 이쪽으로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사이먼이 말했다. "자위단의 우주선은 아니다. 진로가 틀린다." 클라크가 외쳤다. "이쪽으로 파고든다. 부딪칠 작정인가!“   우주선의 묘지   한편, 캡틴 퓨쳐들은 에테르 난류에 휩쓸려 점점 날려 갔다. 위험을 예측하고 방향을 바꾼 자위단의 우주선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캡틴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이렇게 된 것은 내 책임이다. 이 난류가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추적자를 속이려고 생각한 것이……" 존은 캡틴을 믿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말했다. "확실히 당신은 추적자를 보기 좋게 속였지 뭐여요. 사르갓소 바다에서라도 어떻게 탈출할 수 있겠죠." 그러나 캡틴은 말했다. "존도 알고 있겠지. 이 에테르 난류는 모두 중앙의 소용돌이치는 데로 흐르고 있지. 이 흐름에 휩쓸리면, 무엇이나 거기로 빨려 들어가서, 아무리 버둥거려도 거의 탈출을 못한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다시 한번 해 보자." 캡틴은 스로틀 레버를 크게 열었다. 그러나 에테르 난류에서 빠져 나가는 데는 너무나도 힘이 약했다. 캡틴은 엔진을 멈추었다. 중앙으로 흘러 들어가기까지 속력을 절약해 두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캡틴은 구명 보트의 앞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중앙으로 흘러 들어올 작정이었다. 그러면…… 그러나 캡틴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윽고 구명 보트는 이 때까지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상하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캡틴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주를 붙잡고 있어요." 두 사람은 당혹해 하며 지주를 붙잡았다. 그러나 다음의 흔들림은 더 심했다. 어느 쪽이 위인지 아래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을까. 갑자기 구명 보트가 저수지 속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케인이 창 밖을 보며 말했다. "에테르 난류에서 겨우 빠져 나온 것 같구나." 존도 기쁜 듯이 환성을 질렀다.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중심에 들어왔기 때문에 난류가 적어지고 조용할 뿐이다. 아무튼 소용이 없겠지만, 다시 한번 해 보자." 캡틴은 로켓을 분사하여 지금 온 쪽으로 뱃머리를 돌려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30초도 채 안 되어 뱃머리가 눈에 보이는 에테르 난류의 벽에 부딪쳤다. 그리고는 원래 장소로 튕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더 강한 에너지를 손에 넣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캡틴이 중얼거리자, 케인이 절망적으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손에 넣지요?" 캡틴은 조용히 창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기 있어." 그가 가리킨 저 멀리에는 무엇인가 큰 금속의 덩어리 같은 것이 보인다. 구명 보트가 그쪽에 가까워짐에 따라 그것은 여러 가지 모양을 한 우주선의 잔해나, 크고 작은 여러 운석이 모인 곳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존은 너무나 기분이 좋지 않아 두려운 듯 물었다. "저건 뭐여요." "이 사르갓소 바닥에 끌려들어온 우주선들이야. 여기서 탈출에 성공한 우주선은 하나도 없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태양계에서 건설된 여러 가지 우주선이 눈에 띄었다. 한 때는 행성에서 행성으로 많은 사람들을 운반한 호화선을 비롯하여 대형 화물선, 정찰 우주정 등이 조용히 놓여 있는 것이다. 희미한 태양 빛에 비쳐 푸르고 희게 빛나는 그 모양을 보자 끝없는 공포가 엄습했다. 존이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호흡에 필요한 공기를 모조리 써 버렸을 테니까." "그럼, 이 구명 보트의 공기 탱크가 텅 비게 되면 우리들도 죽는 거죠! 앞으로 겨우 이틀이나 견딜까요?" "그래서 저 우주선 속에서 이 보트에 적당한 원자력 엔진을 찾아 내 여기서 탈출하려고 생각했던 거야. 부서지지 않고 보존되었고, 여기에 맞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존은 몸을 떨었다. "저 죽음의 우주선 속에 들어가서 찾는 거여요?" "응, 존은 케인 대장과 함께 여기 남아 있어 줘." "아니, 저도 가겠어요." 그러나 케인이 말했다. "나는 여기 남겠어. 남아서 두고 온 노트에 기록한 것을 다시 생각해 내어 정리해 볼 작정이다." 그리하여 캡틴과 존은 우주복을 입고 좁은 에어록을 빠져 나와 밖으로 나왔다. 곧 벨트에서 소형의 추진기를 빼내어 추진을 시작했다. 작은 로켓은 두 사람을 천천히 가까이 있는 난파선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처음의 우주선은 화물선이었는데, 뱃머리 쪽은 마치 거인이 손으로 움켜쥐어 뭉그러뜨려 놓은 것처럼 우글쭈글해 져 있었다. "운석에 당했어. 너무 심해서 사용할 엔진은 찾아 낼 수 없어." 캡틴은 존에게 우주선의 무전기를 통해서 말했다. 다음의 우주선은 대형의 정기 여객선이었다. 우주선 안은 눈을 바로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화성인, 금성인, 지구인을 비롯하여 태양계의 남녀의 시체가 겹치어 얼어붙은 채로 뒹굴고 있었다. 엔진실로 내려가 보았다. 원통형의 거대한 원자력 엔진은 아무 상처가 없었으나, 캡틴은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너무 크다. 다른 걸 찾아보자." 그 다음의 우주선은 우주 해적에게 당한 모양으로 보기에도 참혹했다. 존은 몸서리치듯 말했다. "태양계에서 이러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캡틴이 말했다. "퍽 오래 전 이야기이다. 이 덩어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모두 구식의 우주선들뿐이다. 새로 난파된 우주선은 덩어리의 주위에 있을 것이 틀림없어. 그쪽으로 가 보자. 거기라면 새로운 타입의 사용할 수 있는 엔진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그쪽으로 가려고 할 때, 존이 갑자기 안쪽의 덩어리를 가리켰다. "저건 뭘까?" 존이 가리킨 것은, 30미터 정도 길이의 회색 원통형의 물체였다. 아무래도 우주선처럼 보이진 않았다. 캡틴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뭘까? 아무리 봐도 이 태양계에서 만든 우주선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태양계 밖의 것일지도 모른다." 이 태양계 밖의 생물의 우주선이 여기까지 와서 난파되어 흘러왔다는 생각을 들자, 캡틴은 몹시 흥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좀 가까이 보자. 따라오겠어, 존?" 물론 존도 싫다고 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수수께끼의 원통으로 가까이 갔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수수께끼의 원통의 저쪽에 다른 우주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우주선이라는 것은 몹시 작고 빈약했으며 구식 로켓 분사관이 몇 개나 나와 있는, 모양이 없는 것이었다. 존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마치 원시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아요! 이런 걸로 우주 항해를 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러나 캡틴은 몸이 굳어져 가지고 말했다. "나는 짐작이 가는 게 있어. 저건……" 캡틴은 뱃머리 쪽을 돌아보며 끄덕였다. "역시 그렇구나. 파이오니아 3세 호다!“ "파이오니아 3세 호라고요? 그러면, 마크 칼의 우주선이 아닌가요. 처음으로 목성보다 앞쪽의 행성을 탐험한 마크 칼의 배가 여기에……" 캡틴은 거의 존경에 가까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 마크 칼의 우주선이다. 마크는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처음으로 내린 사나이다. 다시 명왕성을 향하여 날아가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여기에 죽어 있다니?" 수수께끼의 우주선 탐험은 뒤로 미루고, 두 사람은 파이오니아 3세 호의 입구를 억지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옛날의 소형 우주선에는 겨우 여섯 명의 사나이 밖에 타지 않았으며, 여섯 사람 모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 우주의 개척자들은 자기들의 뒤를 이을 것을 믿고 여기서 죽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종실의 좌석에는 웅크리고 앉은 채 약간 검게 마른 사나이가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정면의 유리 너머 우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존이 말했다 "마크 칼이어요!“ 마크 칼의 얼굴은 역사책에도 나와 있을 뿐 아니라 동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여 잘못 볼 리는 없다. 캡틴은 그 용감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뜨거운 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기들도 마크 칼처럼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에 갇혀 있는 것이다. 캡틴은 힘주어 말했다. "마크 칼의 분함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도 나는 여기서 탈출하겠어."   문어 인간   캡틴은 말했다. "자아, 여길 나가서 에너지를 찾으러 가자. 그 전에 저 수수께끼의 원통을 좀 조사해 보자. 태양계 밖의 우주선을 조사할 기회는 또 없을 테니까 말야." 연구가로서의 캡틴은 이럴 때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문이나 창 같은 것은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존이 말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뭐 우리들의 세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걸요." "걱정할 건 없어. 안의 생물이 살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어디에 입구가 있는 것일까? 어떻게 문을 찾아 내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때였다. 마치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한 점이 점점 넓어지면서 지름 3미터 정도의 둥근 구멍이 우주선 중간에 뚫렸다. 캡틴의 눈이 빛났다. "이 문은 텔레파시의 작용을 한다! 내가 문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생각하자, 문이 열렸어! 이런 장치를 발명하다니, 어떤 생물일까! 자, 가자 존!" "무서워요!“ 존은 깜짝 놀라며, 캡틴의 뒤를 따라 마법의 구멍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빈틈없이 금속의 선반이 만들어져 그 하나 하나에 제비꽃 색깔의 램프가 켜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금속의 선반에 얼어붙어 누워 있는 기괴한 생물을 보았을 때, 존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무리도 아니었다. 마치 문어와 인간의 혼혈아 같은 생물이다. 두터운 비늘에 덮이고, 딱딱하게 솟아 나온 것이 등뼈에 줄지어 있고, 네 개의 팔은 마치 솟아 나온 촉수 같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 태양계의 생물은 아니다. 공기도 호흡하지 않는 것 같다. 겨우 선반에 하나하나 켜져 있는 제비꽃 색깔의 램프가 그 생물의 몸을 보존하는 모양이다. 벽에는 탱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캡틴은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모두 비어 있었고, 본래는 붉은 액체가 들어 있던 모양으로 그 찌꺼기가 붙어 있었다. "피가 이 탱크 속에 들어 있었어! 틀림없이 이 생물의 먹이는 혈액인 것 같다. 그것이 없어졌으니까 말이야." 원통의 뱃머리 쪽에는 제어판 같은 것이 있었다 레버와 스위치 같은 것도 태양계와는 전혀 달랐다. 캡틴이 그쪽으로 가까이 가자, 갑자기 제어반의 여러 가지 색깔의 램프가 일제히 켜졌다. 그와 동시에 그 제어판에 가징 가까운 선반에 드러누웠던 두 사람의 문어 인간의 위에 있는 제비꽃 색깔의 램프가 꺼졌다. 그리고 그 두 외계인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캡틴은 순간 긴장하여 외쳤다. "알았다! 놈들은 먹이인 피를 모조리 먹어 치우고, 동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를 가진 생물이 우주선 안에 들어오면 탐지기가 움직이고, 지휘자인 두 사람을 눈뜨게 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이 두 사람이 완전히 눈을 뜨면, 다른 제비꽃 색깔의 램프를 모두 끄고, 우리들의 피를 빨러 오는 것이다. 그 전에 제어판을 부숴 버려야……" 캡틴이 제어판으로 달려가며 이렇게 말했을 때, 존이 비명을 올렸다. "캡틴!" 캡틴이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비늘 투성이의 촉수에 몸을 잡히고 말았다. 문어 인간은 생각한 것보다 빨리 눈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한 개의 촉수가 캡틴의 무릎을, 한 개는 목, 그 밖의 두 개는 가슴에 엉겨 붙어 있다. 더 무서운 것은, 또 하나의 문어 인간이 제어판에 다가서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동료들을 깨우려 하고 있는 거다. 존은 필사적으로 캡틴의 몸에 엉겨붙은 촉수를 떼려고 했다. 캡틴은 있는 힘을 다해서 허리의 프로톤 권총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하여 그것을 뽑아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제어판에 네 개의 손을 내밀고 있는 문어 인간을 향하여 발사했다. 순식간에 문어 인간은 검게 그을리고 말았다. 캡틴을 붙잡고 있던 문어 인간은, 캡틴의 몸을 들어올려 바닥에 집어던지려고 했다. 캡틴은 들어올려진 채로 두 발을 발사했다. 문어 인간이 쓰러지는 것과 통시에 캡틴도 바닥 위에 던져지고 말았다. 캡틴은 재빨리 일어섰다. 그리고는 선반 위에 잠들고 있는 다른 문어 인간에게 날카롭게 눈길을 보냈다. 천만다행으로 제비꽃 색깔의 램프 아래에서, 문어 인간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계속 잠들어 있었다. 캡틴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위험했어! 우리들이 들어온 것을 알린 탐지기는 지휘자 두 사람만 깨운 거다. 다른 것들을 깨우는 것은 지휘자의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피를 탐내는 생물은 우주의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주 공간의 추위도 진공도 문제가 안 되다니, 무서운 생물이다." 존은 몸을 떨었다. "피가 먹이라니, 징그러운 생물이군요. 어서 여기서 나가지요, 캡틴." 캡틴은 더 자세히 이 문어 인간이나, 문어 인간을 낳게 한 과학을 조사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어물어물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들어왔던 둥근 구멍으로 즉시 밖으로 나왔다. 소리도 없이, 그 구멍은 점점 닫혀져 갔다. 캡틴은 그 수수께끼의 우주선을 향해 중얼거렸다. "언젠가 또 여기 와서 조사를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를 탈출하고 나서의 이야기지만." 캡틴은 될 수 있는 대로 난파선의 덩어리 가장자리에 있는 새로운 우주선을 찾았다. 그 일은 뜻밖에도 간단했다. 어쩌면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원자력 엔진 10개를 찾아서 구명 보트로 끌고 갔다. 그리 하여 힘을 다하여 10개의 원자력 엔진을 우주선 뒤쪽의 동력부에 끌어넣었다. 하나 하나 조심하여 바닥에 장치했다. 존은 숨가쁘게 이 어려운 작업을 도왔다. 겨우 작업이 끝나자, 존은 기름으로 새까맣게 된 얼굴로 진지하게 캡틴에게 물었다. "이젠 정말 밖으로 나갈 수 있겠어요?" "글쎄, 잘 빠져 나갈 수 있을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공간에 튕겨 나가든지 어느 쪽이겠지. 아무튼 이 원자력 엔진이 견디어 기계들이 제멋대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어쨌든 다른 방법은 없어. 자, 두 사람 모두 준비는 됐겠지요. 엔진을 발동시킵니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엔진의 스위치를 넣었다. 굉장한 소리가 작은 구명 보트를 압도했다. 그와 동시에 맹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당장에 우주선이 제각기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캡틴은 출력을 더욱 높였다. 그리고 더 이상 우주선이 지탱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 될 때, 캡틴은 분사관의 스로틀 레버를 열었다. 그 순간 세 사람은 굉장한 기세로 좌석에 눌렸다. 그와 동시에 구명 보트는 눈이 돌아갈 정도의 속력으로 앞으로 날아갔다. 난파선의 덩어리는 즉시로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이윽고 에테르 난류가 소용돌이치는 벽에 부딪칠 예정이다. 캡틴은 굳은 얼굴로 스로틀 레버를 꽉 틀어쥐었다. 그 순간 에테르 난류의 벽은 구명 보트를 튕겨 보내려고 했다. "실패할 것인가!“ 그러나 갑자기 얻어맞은 로켓은 마구 부딪쳐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 벽을 뚫었던 것이다. 몇 분 동안인가, 점점 약해지는 에테르 난류 속을 나아갔다. 갑자기 튕기는 것처럼 구명 보트는 우주 공간으로 날아서, 무서운 기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캡틴은 얼른 뒤에 장치한 원자력 엔진의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존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당신은 저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를 탈출한 최초의 인간이에요!“ 캡틴은 침착하게 말했다. "목성 쪽으로 진로를 잡자. 그리고 퓨쳐맨을 불러, 자이로 박사를 추적해야 한다."   커밋 호   구명 보트는 하얗게 빛나는 목성을 향하여 계속 나아갔다. 앞쪽을 지켜보고 있던 캡틴이 갑자지 기쁜 소리를 질렀다. "앗, 퓨쳐맨이 왔다!“ 존도 케인도 얼른 캡틴이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작은 혜성이 하나 가까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작은 혜성이 하나 보일 뿐, 아무것도 없잖아요." 라고 케인이 말하자, 캡틴은 싱긋이 웃었다. "저게 무슨 이름의 혜성인지 알고 있나요?" 케인은 안타까운 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나는 혜성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이런 궤도를 지나는 혜성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캡틴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건 혜성이 아니오. 커밋이라는 이름의 우주선입니다. 퓨쳐맨은 혜성처럼 위장을 해서 날고 있는 겁니다." 존이 물었다. "이 구명 보트에는 텔레바이저가 없는데요. 어떻게 우리들이 여기 있는 것을 알려 주나요?" "스토퍼를 걸어야겠어. 자, 그럼 붙잡고 있어요." 캡틴은 스로틀을 열었다. 구명 보트는 굉장한 기세로 커밋 호를 향하여 급강하하고 있었다. 클라크와 오토가 깨달은 것은 그 때였다. 그리고 캡틴은 서로 부딪칠 만할 곳에서 크게 손을 흔듦과, 동시에 뱃머리를 쑥 올려 층돌을 피했다. 캡틴은 말했다. "모두 알고 있었을 거야. 어쨌든 무엇이라도 놓쳐버릴 것 같은 퓨쳐맨은 아니니까 말야." 그대로였다. 커밋 호는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리고 나서 이윽고 커밋 호와 구명 보트는 나란히 멈추어 섰던 것이다. 캡틴과 존과 케인은 우주복을 입고, 옆에 떠 있는 커밋 호에 옮겨 탔다. 로봇 클라크는 귀가 멀 것 같은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 왔다. "캡틴! 무사했군요. 물론 나는 캡틴이 반드시 무사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만, 그 놈의 실수가 원인이지만 말이에요." 그 놈이라고 불린 안드로이드 오토는 열심히 듣고 있었다. "어떻게 탈출했습니까? 그 쓰레기 같은 놈들을 몇 명이나 해치웠습니까?" 캡틴은 웃었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사람을 죽이지 않고 탈출하려니까 고생한 거야. 그보다도 우주의 사르갓소 바다를 빠져 나오는 것이 큰일이었어." 그 말을 들은 사이먼은 깜짝 놀란 것처럼, 렌즈의 눈을 캡틴 쪽으로 돌렸다. "사르갓소 바다라고! 용하게 빠져 나왔군." 그리하여 캡틴은 그 동안의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힘주어 말했다. "아무튼 자이로 박사를 한시바삐 퇴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2, 3일 되면 태양계에서 큰 소동이 일어난다. 나는 자이로 박사의 기지가 천왕성이나 명왕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이먼이 말했다. "커티스, 명왕성이야." 하며 털북숭이의 수상한 시체를 조사한 결과를 이야기 해 주었다. "좋아요. 곧 커밋 호를 출발시킵시다. 그래, 그 목표는 명왕성입니다!“ 캡틴이 말하자, 클라크는 기쁜 듯이 쿵쿵 크게 발소리를 울리면서 조종실로 들어갔다. 금성의 천문 대장 케인이 달했다. "나도 명왕성으로 가는 건가요?" "그래요. 자이로 박사를 빨리 해치우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명왕성에 도착하면 곧 금성 행을 탈 수 있으니까요." 케인은 중얼거리며 불평을 했다. 그러는 동안 클라크는 이미 출발을 시켰다. 커밋 호는 굉장한 속력으로 명왕성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캡틴은 끄덕이며 사이먼 쪽을 보았다. "암흑성을 관측해 두었습니까?"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은 괴로운 듯 대답했다. "관측하기는 했으나, 그런데 전혀 알 수가 없어. 확실히 암흑성은 굉장히 크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그 크기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질량이 작다." "왜 그럴까요? 더 큰 관측기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요?" "응, 명왕성으로 가면 탈타로스 천문대의 기구를 빌려 다시 한번 조사해 볼 작정이야. 그러나 이 암흑성에 대해서만은 알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캡틴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그 크기에 비해서 그렇게 작은 질량이라면 확실히 큰일입니다." 이윽고 커밋 호 안에서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퓨쳐맨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로 되어 있는 식사도, 존과 케인에게 있어서는 이제까지 경험한 일도 없는 기이한 것이었다. 캡틴과 존과 케인 앞에는 진공 냉장실에서 꺼내온 식료로서 지구의 냉동 고기, 화성의 사막 사과, 목성의 우주 빵, 금성의 포도주가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밖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오토는 화학 약품의 액체를 꿀꺽 마시면 끝난다. 사이먼은 몸이 없기 때문에 영양을 취할 필요도 없다. 소형 방사기에서 보내는 진동에 위해 피로를 제거하면 된다. 커밋 호를 자동 조종으로 전환시킨 클라크는 두터운 가슴에 붙어 있는 뚜껑을 열고, 구리로 된 작은 덩어리를 안에 넣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클라크는 뚜껑을 닫고서는 나머지 구리 조각을 달의 개 이이크에게 주었다. 이이크는 얼른 그 구리 조각을 먹어치우고는 만족스럽게 눈을 빛내고 있다. 존은 깜짝 놀라며 클라크에게 물었다. "이이크는 어떤 금속이라도 먹나요?" 클라크는 자기가 귀여워하고 있는 애완견이 존의 눈에 들었으므로 아주 기분이 종은 모양이었다. "어떤 금속이라도 먹어요. 나의 몸은 아주 단단한 금속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씹지 못하지만요. 좋아하는 것은 구리입니다. 그리고 금과 은도 좋아하지요." 그러자 오토가 밉살스럽게 끼어 들었다. "이놈은 나의 변장용의 은 튜브에는 정신이 없어요. 그 때문에……" 존은 금팔찌를 빼어서는 이이크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먹어." 클라크가 말했다. "이놈은 소리를 듣지 못해요. 그 대신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그러면 알 수 있죠." 그래서 존이 클라크의 말대로 하자, 이이크는 기뻐하며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팔찌를 먹어치우고 난 이이크는, 갑자기 이상한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클라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금을 너무 많이 먹으면 이이크는 병이 납니다." 오토가 말했다. "병이라고? 취한 게 아냐?"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이 달의 개 이이크는 후에 큰 공을 세우고 캡틴들을 구원하는데, 그 때는 누구 하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기묘한 식사가 끝나자, 캡틴은 금성에서 만들어진 줄이 스무 개가 되는 기타를 켜면서 창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존은 그 모습을 보며, 캡틴이 명왕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제부터의 싸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마법사   커밋 호는 명왕성의 수도 탈타로스를 덮고 있는 큰 돔의 원형의 지붕으로 점점 가까이 갔다. 돔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우주항이 있다. 거기에는 지구의 황혼 정도의 불빛 속에서 등대가 빛나고 있었다. 돔의 저쪽에는 눈이 아플 정도의 설원이 펼쳐지고, 그 저쪽에는 등을 내놓은 산맥이 우뚝 솟아 있었다. 드디어 착륙이다. 추위도 더위도 모르는 클라크는 태연한 것 같지만, 추위가 가장 싫은 오토는 실망한 듯 바깥 경치를 보고 있었다. 존과 케인도 좁은 조정실에 들어와서는 걱정스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착륙하자 캡틴은 커밋 호의 문을 열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커밋 호 안으로 휙 들어 왔다. 캡틴이 말했다. "클라크를 데리고 가겠다. 너무 춥다. 다른 사람은 남아 주게 ." "어디로 가세요?" 하고 존이 물었다. "우선 먼저 행성 경찰 본부로 가서 상세하게 물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사이먼들이 돔의 서쪽 탈타로스 천문대에 가면 우리는 자이로 박사를 추적한다." 캡틴이 말하자, 존이 말했다. "그럼 나도 데리고 가 주세요. 여기 행성 경찰의 사령은 에즈라가 아니에요?. 기억하고 계시죠?" "기억하고 말고. 에즈라 아저씨가 있다면 존도 와라." 에즈라 가아니는 행성 경찰 중에서도 실력자이며, 캡틴과도 함께 일한 사이였다. 캡틴과 존과 그 수상한 시체를 짊어진 클라크는 극심하게 추운, 저녁처럼 어둑어둑한 명왕성에 내려섰다. 달의 개 이이크는 여전히 클라크의 목에 매달린 채였다. 명왕성의 하늘에는 하늘 끝 가까이에 가장 큰 위성인 케이론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나머지 두 개의 위성 케르베로스와 스틱스는 지평선 너머에서 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케이론에는 매우 질이 좋은 모피가 되는 짐승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지구의 사냥꾼들이 달려드는 사냥터이기도 했다. 케르베로스는 유형 위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듯이 태양계의 흉악범이 갇혀 있는 형무소가 있다. 다만 스틱스는 표면이 모두 물로 덮여 있기 때문에, 거기에 착륙하거나 기지를 설치한 지구인은 하나도 없다. 세 사람은 이윽고 전자동에 의해 자동적으로 열리고 닫히는 문을 빠져, 탈타로스 시의 돔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훈훈했고, 아토믹 램프가 주욱 열 지어 거리를 비치고 있었다. 다른 행성의 도시에 비하여 주민의 수는 적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지구인과 명왕성인 밖에는 없었다. 그 명왕성인은 지구인과 흡사하나, 그 큰 몸집과 얼굴까지 검은 털로 온통 덮여 있고 마치 두 개의 동굴처럼 뻥 뚫린 구멍 안쪽에 형광 빛을 던지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길다란 털에 덮여 있기 때문에 이 돔에서는 무덥고 괴로워서 명왕성인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래서 옛날부터의 명왕성의 가죽 조끼 앞을 넓게 열어 놓고 있다. 이윽고 행성 경찰의 표시가 붙어 있는 이층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세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입구에 서 있는 경관이 불렀다. "잠깐만!“ 경관은 특히 클라크를 수상하게 지켜보았다. 캡틴은 손을 들어, 그 반지를 보여 주었다. 커밋 호에서 여기로 오는 동안에 원자력으로 수리해 놓은 것이다. "캡틴 퓨쳐!“ 반지를 본 경관은 깜짝 놀라며 큰소리를 질렀다. 안쪽에서 사령의 마크를 붙인 희끗희끗 머리가 센 사나이가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캡틴 퓨쳐! 그리고 클라크와 존!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나요?" 에즈라는 진심으로 기쁜 듯이 캡틴의 손을 잡았다. "자네가 온 걸 보니, 무슨 큰 사건이 일어난 게 틀림없겠군." 에즈라가 이렇게 말하자 캡틴은 웃으면서 말했다. "에즈라 아저씨도 많이 늙었군요. 지금 대 사건이라고 하면 무엇인 줄로 생각되나요?" 에즈라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응…… 대 사건…… 설마 자이로 박사에 대한 건은 아니겠지." "그겁니다. 자이로 박사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에즈라는 캡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캡틴의 눈에는 보통이 아닌 결의가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 명왕성에 자이로 박사의 기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어쨌든 이 명왕성 근처에 놈의 기지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캡틴은 자위단의 하나가 죽는 즉시로 털북숭이의 생물로 변한 경위를 말해 주었다. "그 놈을 조사한 결과, 명왕성 근처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이 그 시체입니다." 클라크는 시체의 포장을 풀었다. 나이 많은 에즈라 사령은 그 흰털에 덮여 있는 생물을 열심히 조사했다. "나는 이런 놈을 여기서 본 일이 없어. 물론 명왕성의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지는 않지만." 하고 에즈라는 중얼거렸다. 캡틴은 물었다. "명왕성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누굽니까?" 에즈라는 생각하면서 말했다. "글쎄, 행성 지리학자로서 지금 명왕성 조사단의 단장을 하고 있는 커얼 로머가 가장 좋지. 로머는 지금 탈타로스에 있을 거야. 곧 부르지." 몇 분이 걸리지 않아서 커얼 로머가 왔다. 커얼 로머는 40세 정도의 지구인으로서, 보기에 학자다운 지적인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이 기후가 극심한 명왕성을 조사했기 때문에 피부도 붉고 검게 단단해 보였다. 로머는 그 괴물의 시체를 조사하는 동안 점점 난처한 얼굴로 변해 갔다. "나는 이러한 생물이 명왕성에 있다는 말을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물로 움직이는 빙하의 저쪽 빙원은 아무도 가지 못했기 때문에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처럼 지성을 가진 생물이라면 우리들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캡틴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세 개의 위성에는 어떨까요?" "그거라면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물에 덮여 있는 스틱스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유형 위성인 케르베로스의 대부분과 케이론의 많은 부분은 조사가 끝나지 않고 있으니까요. 케르베로스라면 형무소장 랜드르 레인, 케이론이라면 모피상의 빅터 그림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에즈라가 끼어 들었다. "그림도 레인도 지금 용무가 있어서 탈타로스에 와 있지. 좋아, 두 사람을 불러 보자." 캡틴은 끄덕였다. 그리고 형무소장인 레인에게는 그것과는 관계 없이 만나보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탈주할 수 없다는 형무소에서 자위단에 참가하고 있는 로지와 카라크가 어떻게 빠져 나갔는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먼저 모피상의 그림이 왔다. 그림은 뚱뚱하고 간사스러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캡틴은 한눈으로 싫은 작자라고 생각했다. 그림은 시체를 보더니 큰 소리를 질렀다. "바쁜 시간에 이렇게 왔는데. 이건 뭐야, 이런 건 케이론에 없는 것만은 확실해요. 게다가 명왕성 안에 있을 리가 없어요." 캡틴이 물었다. . "어떻게 그렇게 확실히 단언할 수 있소?" "할 수 있지요. 우리가 고용한 사냥꾼들은 어떤 조사단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곳까지 갔으니까 말이오." 로머가 반대했다. "그렇지만 자네의 부하들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곳도 있을 거야." 그림은 코웃음 쳤다. "그럼 당신들이 나보다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겁니까? 뭐 좋아요. 나는 바빠요. 이런 이상한 시체와 마주 서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그림은 얼른 본부를 나가고 말았다. 다음으로 온 것은 케르베로스의 형무소장인 랜드르 레인이었다. 레인은 가장 흉악한 범인을 가두어 놓는 형무소의 소장이라고는 생각한 수 없을 만큼 신경질적이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나이였다. 레인은 말했다. "이름은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캡틴 퓨쳐. 우리 형무소에 많은 악당들을 보내 주셔서……" "잠깐만, 기다려 줘요. 내가 보낸 놈들 중 둘은 거기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키 작은 동물학자인 로지, 또 한 사람은 키 큰 카라크입니다." 레인은 분명히 말했다. "로지와 카라크라면 몇 달 전에 탈주했습니다. 나의 형무소에서의 최초의 탈주자입니다.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아직 모릅니다." 캡틴은 그 이야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레인은 괴물의 시체를 보고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생물이 케르베로스에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 나는 형무소 외의 것은 자세히 모르지만, 간수들은 조사를 했으며 간수들로부터 이런 생물이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습니다." 캡틴은 레인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갈지는 않았다. 형무소장 레인이 돌아가자, 캡틴은 에즈라 사령에게 물었다. "이 시체를 명왕성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습니다. 누가 없을까요?" 에즈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라면 안성맞춤인 놈이 이 건물 안에 있어. 사버라고 하는데, 어떤 용무로 빙원으로 갈 때 그 안내를 시키고 있지." 사버는 틀림없이 표준적인 명왕성인이었다. 뾰족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검은 긴 털에 덮여 있었다. 형광을 내보내는 코고 둥근 눈은 로봇인 클라크를 무서운 듯이 바라보았다. 사버는 혀가 잘 돌지 않는 지구어로 말했다. "빙원으로 가는가?" "아니, 너는 이런 놈을 그 전에 본 일이 있는가?" 하면서 늙은 사령은 흰털에 덮여 있는 괴물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 때, 사버는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마법사다!“ 캡틴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너는, 이 생물을 그 전에 본 일이 있는가?" 그러니까 사버는 무서운 듯이 그 시체를 지쳐보면 말했다. "나, 전에 본 일 없어. 그러나 들은 일은 있어. 할아버지 킬리가 마법사에 대해 말했어." 캡틴은 명왕성의 말로 말을 걸었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 생물에 대해 말해 주었는가?" 캡틴이 명왕성의 말을 알고 있는 것을 알자, 사버는 줄줄 지껄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지구인이 오기 전에는 마법사가 자주 나타났던 모양이야. 굉장히 나이 많은 할아버지 킬리가 젊었을 때 말야. 그 놈들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은 모양이야." 캡틴은 열심히 물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그 마법사가 어디에서 왔다는 걸 이야기 해 주었는가?" "아니, 나도 묻지 않았지만." 캡틴은 실망했으나,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질문을 계속했다. "너의 할아버지 킬리는 아직 살아 있는가?" "그래, 모두와 함께 아이스 타운에." "그 아이스 타운이라는 건 어디에 있는가?" "움직이는 산이라든가 지옥의 바다라고 당신들이 말하는 얼음 바다의 북쪽이야." 캡틴은 에즈라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그 아이스 타운의 사버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에즈라가 말했다. "잠깐만! 움직이는 산 저쪽은, 지구인이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곳이야." "그래도 가겠습니다. 경찰의 가벼운 로켓을 빌려 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버를 길잡이로 데리고 가고 싶은데요." "그건 괜찮지만……" 에즈라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캡틴은 주저하지 않고 존, 클라크, 사버의 세 사람을 데리고 돔을 나가 급히 커밋 호로 갔다. 커밋 호에 들어가자, 캡틴은 사이먼에게 이제까지의 경위를 설명해 주고 나서 말했다. "나와 클라크는 이 사버의 안내를 받아, 이제부터 아이스 타운으로 향합니다." "신납니다! 역시 내가 따라가지 않고서는." 클라크가 환성을 올리자 캡틴은 꾸짖었다. "그 대신 이이크는 두고 가야 한다." "이이크 말입니까? 할 수 없지요. 오토에게 시중을 부탁할 수밖에." 그러자 혼자 남게 된 오토가 화를 터뜨렸다. "웃기지 마. 그 따위 놈의 시중을 들어 줄 수는 없어." 두 사람은 또 여느 때처럼 시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이먼이 꾸짖었다. "그만둬! 커티스, 그럼 우리들은 탈타로스의 천문대에 가서 암흑성의 관측이나 할까." "네, 존과 오토를 조수로 하여 암흑성의 정체를 규명해 주기를 바랍니다." "알았어. 조심해서 갔다 와라." 그리고 나서 10분 후, 캡틴과 클라크와 사버는 우주 공항에서 날씬하고 가벼운 로켓에 올랐다. 곧바로 북쪽으로 향해 출발했다. 즉시로 거품 같은 모양을 한 탈타로스 시는 보이지 않았다. 빙원의 한가운데에는 꽤 너비가 넓은 급류가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사버가 말했다. "저것이 죽음의 강이야, 소금물이 흐르고 있지만. 저 흐름을 쫓아가면, 얼음 바다로 나가요." 캡틴이 끄덕이고, 전방에 솟아 있는 은빛의 산맥을 가리 켰다. "사버, 저게 움직이는 산인가?" 사버가 말했다. "우리들 아이스 타운 사람은 저걸 무거워한다. 몇 번이나 우리 종족의 거리나 마을을 멸망시켰으니까." 이윽고 움직이는 산이 가벼운 로켓의 바로 아래에 왔다. 이 움직이는 산이라는 것은 높이 3천 미터나 되는 얼음의 덩어리가 거의 남서의 방향을 천천히 움직여 가는 것이다. 지구의 빙하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고 속도도 몇 배 나 된다. 그 때, 클라크가 큰 소리를 질렀다. "캡틴, 위를?"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최후의 날 자위단'의 마크를 붙인, 검은 색깔의 우주선이 이쪽을 향해 급강하해서 오지 않는가! 캡틴은 이를 갈았다. "잠복하고 있었구나." 곧 경로켓을 옆으로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우주선의 원자 포가 불을 뿜고 있었다. 경로켓의 뒷 부분과 분사관이 날아갔다. 그리고 수백 미터 아래의 빙원을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검은 색깔의 우주선은 성공했다고 판단하고, 급상승하여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사버가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이제는 틀렸다! 경로켓이 움직이는 산이 오고있는 앞쪽을 향해 떨어졌다!“ 움직이는 산   최후의 그 순간까지 머리를 재빨리 움직여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캡틴이다. 사버가 어물거리고, 클라크가 밖으로 던져지지 않으려고 달라 불고 있는 동안에 로켓 몸체의 꼬리 쪽에 닿고 있었다. 분사관은 날아갔으나 이 로켓의 동력원인 원자력 엔진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다. 캡틴은 도중에서 끊어져 있는 출력 파이프를 재빨리 떼어냈다. 그리고 곧 조종석으로 되돌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의 행동이다. 클라크가 비명을 올렸다. "캡틴, 이제는 틀렸습니다!“ 로켓은 심하게 상하 좌우로 돌면서 어제 얼마 아니던 빙원에 충돌한다. 캡틴은 조절판을 힘주어 잡고 있다. 그리고 빙빙 돌면서 벌어져 가는 로켓 몸체의 꼬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다!“ 조절판을 활짝 열자, 원자력 엔진에서 굉장한 원자 불길이 아래로 향하여 뿜어 나왔다. 그 맹렬한 기세 때문에 하마터면 끝장이 날뻔한 로켓 몸체에 굉장한 브레이크가 걸렸다. 몸체는 빙글 돌았다. 그 때문에 브레이크의 효과는 없어졌으나, 낙하의 속도는 충분히 늦추어졌다. 그래도 굉장한 기세로 빙원에 부딪혔지만, 다행히 캡틴이 비틀거리며 곧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캡틴은 역시 비틀비틀 일어선 클라크와 사버에게 말했다. "자위단의 우주선은 이제 우리가 죽은 건으로 생각하고 안심하고 가버린 모양이다." 사버가 말했다. "이젠 정말 죽을 거다. 저것을!" 무엇인가 부딪치는 우박 같은 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가까이 온다. 캡틴은 외쳤다. "움직이는 산이다!“ 높이 3백 미터나 되는 얼음 산맥, 움직이는 산이 이쪽을 향해 오는 것이다. 이제 몇백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1분 동안에 몇 미터의 속도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인다. "도망쳐라! 뛰지 않으면 당한다!“ "그래봤자, 움직이는 산에서 도망칠 수는 없어!" 사버는 절망적인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달려가는 캡틴과 클라크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캡틴은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에도 달리면서 언제나의 습관대로, 왜 자위단에게 습격당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자기가 명왕성에서 자이로 박사의 기지를 찾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경찰 본부의 에즈라 사령, 그리고 행성 지리학자인 커얼 로머, 케르베로스의 형무소장인 랜드르 레인, 케이론의 모피상 빅터 그림 등 네 사람이다. 에즈라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 중에 자이로 박사가 있었던 것일까? 확실히 세 사람 모두 자이로 박사와는 전혀 비슷하지 않다. 그런데 그 흰 털북숭이 생물이 인간으로 둔갑하고 있었던 것은? 그러므로 그 세 사람 중 누군가가 자이로 박사로 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클라크가 얼음산의 으르릉 으르릉거리는 소리 속에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얼음에게 잡히고 말아요!“ "더 빨리!“ 이윽고 사버가 외쳤다. "소용없어! 앞을 봐!“ 그대로였다. 달빛 속에서 가는 쪽을 보고 있던 캡틴은 당장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가고 있는 쪽에는 죽음의 강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강기슭까지 이른 캡틴은 언뜻 보고도 강을 헤엄쳐서 건널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은 소용돌이치며 굉장한 속도로 흐르고 있다. 사버는 이제 틀렸다고 단념한 모양이었다. "하느님의 뜻이다! 이제 이것으로 끝장이다!“ 캡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우리들에게 끝장은 없다! 클라크, 저기 있는 얼음 덩어리를 강속에 밀어 넣어 주게! 물에 뜨면 얼른 거기로 뛰어올라야 한다. 저 강의 속도라면 얼음산이 밀려오기 전에 강 아래로 내려갈 수 있을 거다!“ 그야말로 캡틴이었다. 어떤 곤란에도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그 순간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캡틴의 말에 힘을 얻어 사버까지 강속에 절반을 내민 모양을 한 얼음덩이를 밀기 시작했다. 이런 때 발휘하는 클라크의 힘의 굉장함이란! 이윽고 천천히 얼음 덩어리는 물 쪽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뛰어올라라! 얼음 덩어리가 물에 뜨기 전에." 세 사람은 급히 미끌미끌 미끄러지는 얼음을 향하여 뛰어 올랐다. 캡틴과 사버가 우선 무사히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클라크는 좀 뒤늦게 오르는 바람에 얼음의 가장자리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캡틴은 얼른 클라크의 손을 꽉 잡으며 있는 힘을 다해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나서 캡틴은 두 사람에게 외쳤다. "얼음 위에 손을 걸 수 있게 구멍을 뚫어라." 사버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벌써 저렇게 가까워졌다. 우리가 하류로 도망치기 전에……" 캡틴은 격려했다. "위험하기는 하나 괜찮다!" 라고 말하면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음의 산맥은 수십 미터 앞에까지 다가오고 있다. 세 사람은 소용돌이치며 용솟음치며 물보라를 올리고 있는 급류의 위를, 얼음 덩어리 위에 붙어 있다. 두터운 방한복을 입은 캡틴, 강철을 차갑게 달빛에 빛내고 있는 클라크, 털북숭이 사버의 세 사람은 필사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이제는 얼음의 절벽은 불과 수십 미터까지 다가왔다. 얼음벽 위쪽에서는 끊임없이 얼음덩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좀더!" 급류는 마치 세 사람의 위기를 느꼈는지 한층 흐름을 빨리 했다. 그리고 얼음의 산맥이 강 속에 무너져 내리는 위험한 고비에서, 세 사람을 태운 얼음 덩어리는 얼음 산맥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갔다. 캡틴은 큰 소리를 질렀다. "살았다!" 뒤돌아보니, 얼음 산맥은 강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금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강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윽고 움직이는 산은 멀리 상류의 저쪽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흐름은 점점 빨라질 뿐이었고, 조금도 그 속도를 늦출 것 같지 않았다. 캡틴은 말했다. "이래 가지고선 얼음에서 내릴 수가 없겠는데." 그러자 사버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흐름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얼음의 바다에 나가기까지 더욱 빨라질 뿐이다." "뭐라고? 얼음의 바다라면 지옥의 바다를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랬었지, 죽음의 강은 지옥의 바다로 통한다고. 그 지옥의 바다 저쪽에 너희들의 일족이 살고 있지?" 캡틴이 말하자, 사버는 두려운 듯 말했다. "그건 그래. 그러나 이젠 친구들을 만나지 못해……" 이윽고, 앞쪽은 면도칼로 끊어 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폭포다! 단단히 잡아라!" 하나의 어려움이 지나니까 또 하나의 어려움, 또 하나의 어려움! 그러나 캡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자아, 간다. 저쪽은 바다인 모양이다." 폭포의 가장자리에서 흐름은 물보라를 올리고 있었다. 얼음 덩어리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다음,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빠른 기세로 떨어져 갔다. 필사적으로 겨우 손에 잡힐 만한 것에 달라붙은 세 사람은, 이윽고 얼음 덩어리의 흔들림이 약해진 것을 느꼈다. 흠뻑 젖은 캡틴은 한숨을 쉬고 나서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얼음 덩어리는 달빛에 비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았다!" 클라크가 외쳤다. 그러나 사버는 겁을 먹고 말했다. "빨리 기슭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돼. 이 바다에는 무서운 괴물이 우글거리고 있으니까." 세 사람은 노 대신 손으로 저었다. 물 속은 얼어붙을 듯이 차갑다. 얼음 덩어리는 천천히 기슭으로 가까이 같다. 캡틴은 이제 사버의 할아버지 킬리를 만난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차가운 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킬리를 만나면 마법사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이로 박사의 기지는 반드시 거기에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클라크는 손으로 노를 젓던 것을 멈추고 가리켰다. "저건, 캡틴?" 가리킨 쪽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바싹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잔물결이 있었다. 사버가 외쳤다. "비부르이다! 가장 크고 위험한 괴물이다!" 괴물은 갑자기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의 지구에 살고 있던 공룡 브론토 사우루스와 흡사한 놈으로 털로 뒤덮여 있었다. 뱀같이 긴 목 끝에 달려 있는 머리의 붉은 눈은 굉장히 빛나고 어금니를 내밀고 달려들었다. 어느 사이에 손에 들고 있던 캡틴의 프로톤 권총이 불을 뿜었다. 파랗고 하얀 빔은 물 아래쪽을 향해서 빠르게 달렸다. 비브르의 가죽에서 찍 소리가 나며 작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물론 비부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격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성난 비부르는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물을 헤치면서 돌진해 왔다. 사버가 비명을 올렸다. 저놈의 가죽은 너무 두꺼워 어떤 무기도 튕겨 보낸다. 캡틴은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겨누고 발사했다. 빛나고 있던 오른쪽 눈은 보기 좋게 날아갔다. 비부르는 굉장한 소리를 지르며, 물갈퀴가 붙은 앞발로 미친 것처럼 얼굴을 할퀴었다. 그 때, 사버가 외쳤다. "우리를 구하러 온다!“ 캡틴이 바라보자, 저 멀리에 횃불을 달아 올린 작은 배의 무리가 이쪽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 이번에는 클라크가 외쳤다. "캡틴, 괴물이!“ 당황하며 뒤돌아보니, 비부르는 심한 아픔으로 미친 듯이 날뛰며 또 다시 이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는 중이었다. 캡틴은 얼른 비부르의 오른쪽 눈의 자리에 쾡 하니 뚫린 구멍을 향하여 발사했다. 적중되었다. 빔은 바로 비부르의 뇌에 닿았던 것이다. 비부르는 튕긴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가 앞으로 퍽 쓰러졌다. 그런데 그 때, 괴물의 굵은 앞발이 세 사람을 태운 얼음을 뒤집어엎었다. 세 사람은 얼어붙을 것 차가운 물 속에 던져지고 말았다. 물 속 깊이 들어간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케이스에 넣고, 필사적으로 물을 헤치며 수면 위에 얼굴을 내놓았다. 사버도 물을 헤치면서 다가오는 배 쪽으로 큰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강철로 된 클라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알았다. 돌멩이처럼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배에서 털북숭이 손이 내밀어졌다. 캡틴과 사버는 배 위로 끌어올려졌다. 사버는 배에 타고 있는 키가 작고 퉁퉁한 사나이에게 빠른 말로 뭐라고 지껄였다. 그리고 나서 캡틴을 보고 말했다. "이 사나이는 우리들 종족의 족장 고르르이다. 모두 고기를 잡으러 왔단다. 그러다가 비부르가 누군가를 습격하는 것을 알고 와 주었다." 고르르는 존경하는 얼굴로 말했다. "비부르를 퇴치하다니, 당신은 용감한 사람이다." 캡틴은 말했다. "한 사람이 가라앉았어. 구해야겠는데, 당신들의 힘을 빌리고 싶다." 사버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벌써 죽고 말았어!“ 캡틴은 웃었다. "클라크는 죽지 않는다. 아무튼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닻줄을 빌려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가죽 닻줄을 받아서, 그것을 두 줄로 함께 모았다. 몰려온 여섯 척의 구리로 만든 작은 배에 타고 있는 명왕성인들은 캡틴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르르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좋지 않은 바람이 불어온다. 오래 여기 있을 수 없다." "곧 된다. 이 정도면 밑바닥까지 닿을 거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보트에서 작은 원자력 램프를 꺼내어 로프 끝에 매달았다.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램프를 끝에 맨 그대로 천천히 물 속으로 내렸다. 바다 밑바닥에 있는 클라크는 이 램프를 발견하면 그리로 올 것이다. 한 동안 캡틴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버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눈보라를 만난다." 마침 그 때, 로프를 아래에서 당긴다. "됐다! 클라크가 로프를 붙잡았어. 도와 줘." 캡틴과 명왕성인은 로프를 당기기 시작했다. 상대는 클라크이다. 힘껏 로프를 당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20센티, 30센티 위로 끌어올렸다. 이윽고 클라크는 머리와 어깨를 바다 위에 드러냈다. 캡틴은 손을 내밀어 클라크를 배 위에 올려 주었다. 그 때 캡틴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클라크는 정말로 우스운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부가 몸을 장식한 것처럼, 해초를 가득 온 몸에 걸치고, 게다가 바다 밑의 진흙으로 온통 얼룩 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클라크는 한심한 모양이었다. 고르르는 곧 돛을 올리게 하고, 북동으로 진로를 잡았다. 캡틴의 흠뻑 젖은 옷은 차가운 바람을 맞아 빳빳하게 젖어 있었다. 그래도 캡틴은 태연했다. 그 태연한 얼굴은 몇 번의 위기를 넘어온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고르르가 소리 높이 외쳤다. "쿠른의 항구다!“ 작은 배는 크게 돌아, 높이 솟은 곶을 스쳐 작은 포구로 들어갔다. 사버가 말했다. "바로 저기가 내 고향 쿠른 마을이야." 상륙한 캡틴과 클라크는 얼음 언덕의 아래를 돌아가듯 계속되는 길을 따라갔다. 이윽고 일행은 작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거기가 사버들의 아이스 타운이었다. 마을의 건물은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적당한 틀 속에 물을 넣으면 즉시로 얼기 때문에 집을 만드는 것은 간단했다. 고르르는 캡틴과 클라크와 사버를 매우 큰 네모진 건물로 데리고 갔다. 고르르는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다. 당신들은 나의 귀중한 손님이므로 여기로 데리고 온 거다." 캡틴은 사버에게 속삭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너의 할아버지 킬리를 만나고 싶다." 그러자 사버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여기 있을 거다. 고르르는 가족의 한 사람이야." 안내된 넓은 방도 모든 것이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의자 위에는 모피가 깔려 있었다. 방에는 열 명 정도의 남녀가 있었다. 고르르가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자 사버가 캡틴의 소매를 당겼다. 캡틴은 당기는 대로 방구석에 안내되어 갔다. "나의 할아버지 킬리다." 킬리는 비부르의 두터운 모피로 온몸을 덮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을 들고 힘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버입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는 지구인을 데리고 왔어요. 이 사람은 마법사에 대해 듣고 싶답니다." 킬리는 되물었다. "마법사라고? 그 놈들은 지구인들이 오는 바람에 벌써 숨어버리고 없어." 캡틴은 말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듣고 싶은 것은 그 마법사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까운 곳입니까?" "아니야. 놈들은 이 근처에 살고 있는 건 아니야. 놈들은 날아다니는 배로 왔었어. 굉장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었단 말야. 상대를 착각하게도 하고, 아무튼 자기 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 진짜 정체는 흰털이 나 있는 놈들이지만." 바로 그거라고 캡틴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옛날부터 자기의 모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니, 굉장히 진보된 생물이다. 캡틴은 물었다. "그런데 대체 놈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놈들은 위성에서 온 거야. 하늘을 나는 배로 말야." "어느 위성입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세 개의 위성 중 어느 것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러면 어느 달일까? 물에 덮여 있는 스틱스를 제외하고, 케르베로스나 케이론의 어느 쪽이다. 캡틴이 또 물어 보았다. "그 외에 기억나는 것은 얹습니까? 킬리는 미안한 듯이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놈들이 우리들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 뿐이야. 뭐라고 하더라, 옳지. 자기들 입에 맞는 코발트인가가 들어 있지 않다고 했어." 캡틴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코발트라고요? 그러면 놈들은 코발트염이 가득 포함되어 있는 천체에서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그 괴물의 뼈는 굉장히 푸른 빛깔을 띠고 있었어. 그래, 코발트 때문임이 틀림없어." 캡틴은 뛰어오르고 싶도록 그 발견이 기뻤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냐 하면 케르베로스와 케이론의 두 개의 위성 중 코발트염이 가득 포함되어 있는 쪽을 확인하면 된다." 클라크가 옆에서 말했다. "그러나 모피상 그림도 형무소장 레인도 그런 생물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느 쪽인가 거짓말을 하고 있어." 캡틴은 의미 있게 말했다. 곧 캡틴은 포켓 텔레바이저를 꺼내어 오토를 불러내었다. 캡틴은 오토가 나타나자 말했다. "유도 전파를 그리로 내보낼 테니 곧 커밋 호로 이리로 와. 우리들의 경로켓은 추락하고 말았어." "곧 가겠습니다!" 오토는 이렇게 대답하며, 아주 흥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일까? 오토의 태도가 이상한데." "이이크가 무사하면 좋겠는데요." 클라크도 자기 나름대로의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캡틴과 클라크는 명왕성인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식사가 끝나자 캡틴과 클라크는 눈보라치는 큰 거리로 나왔다. 이윽고 희미한 낮은 소리가 들렸다. 커밋 호가 왔다. 커밋 호가 착륙하자 캡틴은 고르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클라크와 사버를 데리고 올라탔다. 오토가 조종석에서 뛰어왔다. 오토의 눈은 심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소리를 질렀다. "사이먼이, 사이먼이 자위단 놈들에게 납치되어 갔습니다." 그래! 그래서 텔레바이저로 호출했을 오토가 당황해 하였구나. "사이먼이 납치되었다고? 언제 일이냐?" "캡틴으로부터의 연락이 들어오기 좀 전입니다. 사이먼은 케인과 함께 천문대의 망원경으로 관측을 하고 있었고, 나와 존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묘한 슈우슈 하는 소리가 나고, 그리고 모두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지요. 눈도 보이고 귀도 들려 모든 것을 잘 알 수 있었으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나이들이 나의 옆을 지나서 반사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군요. 얼떨결에 쓰러졌기 때문에 사나이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이먼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으나, 확실히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모두 밖으로 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틀림없이 문틈으로 가스가 밖으로 새어 나갔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때는 사이먼이 없어졌음을 알았습니다." "탈타로스 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전속력으로!“ 캡틴은 명령했다. 그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자기를 아버지 대신 길러 준 사이먼이었다. 캡틴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 커밋 호는 남쪽으로 전속력으로 나아가고 있다.   캡틴을 죽여라   커밋 호는 탈타로스 시의 돔이 아니라 천문대의 바로 옆에 착륙했다. 돌아올 때의 비행은 겨우 수십 분이었다, 캡틴에게는 몇 시간이나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캡틴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사이먼! 살아 있어 주오." 커밋 호에서 뛰어 나가자, 캡틴은 사버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돌아가도 좋아. 덕분에 살았다." 그리고 천문대의 입구로 달려갔다. 안에서 존이 달려나왔다. 그 뒤로 에즈라 사령과 케인이 따라왔다. 존은 창백했다. 캡틴은 갑자기 물었다. "여기 들어온 것은 자이로 박사가 아니었소?" 그러자 금성의 천문 대장인 켄스 케인이 빠른 말로 대답했다. "그렇소. 틀림없이 자이로 박사다. 나는 바로 옆에 뒹굴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들을 수가 있었지. 놈들은 캡틴이 어느 정도의 자위단 일을 알고 있는지를 알려고 했던 것이오. 사이먼이 대답하지 않으므로 살아 있는 뇌의 순환 펌프를 잠그겠다는 위협을 했소. 그래도 사이먼이 대답하지 않자, 데리고 가버렸지. 로지와 카라크도 함께였어." 캡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이로란 놈, 사이먼에게 고문을 가하다니! 그 놈은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내가 타고 있는 경로켓에 기습을 하면서 자기는 여기 와서 사이먼을 납치한 거다." 그런데 캡틴은 여기서 놀란 것처럼 입을 다물고, 그리고 나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사이먼이 하던 암흑성의 관측을 중지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자이로에게 곤란한 일이 알려지게 되기 때문이었을까……" 켄스 케인이 말했다. "나는 왜 자이로 박사가 다시 한 번 나를 납치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놈은 당신을 납치하여, 태양계의 위기를 겁내서 어딘가에 도망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도망쳤다고 생각한 당신이 여기에 나타났으며, 그래서 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놈들의 사정이 좋아진 까닭도 있습니다." 그리고 캡틴은 천문대 안을 자세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곧 캡틴의 날카로운 눈은 방바닥에 불어 있는 흰 진흙 같은 것을 발견했다. 캡틴은 에즈라에게 말했다. "이 가까운 곳에 이런 흰 초산염을 포함한 토지가 있습니까?" "들은 일이 없는데?" "그럼, 커밋 호에서 이것을 분석해 봅시다. 모두 함께 갑시다." 커밋 호의 작은 실험실에 들어가자 캡틴은 곧 그 초산염의 분석에 착수했다. 태양계 최고의 과학자 캡틴 퓨쳐의 솜씨는 훌륭했다. 이윽고 대형 전자 현미경에서 눈을 뗀 캡틴은 큰소리로 말했다. "역시 이 흰 초산염은 명왕성의 것이 아니라, 위성에서 운반해 온 것이다." 케인이 이상한 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런 걸 알지요?" "이 땅 속에는 어떤 박테리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박테리아는 기온이 낮은 이 명왕성에서는 살 수 없어요. 좀 따스한 위성이라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에즈라씨, 레인과 그림과 그리고 행성 지리학자인 로머를 불러 주지 않겠습니까?" 에즈라의 눈이 반짝였다. "자이로 박사의 기지는 위성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군. 좋아, 불러오겠어." 그리고서 에즈라는 곧 되돌아왔다. 데리고 온 것은 그야말로 학자다운 그 커얼 로머 혼자였다. 에즈라는 말했다. "내가 한 발짝 늦어서 레인은 케르베로스로 되돌아갔어. 그림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하겠어." 캡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로머에게 초산염의 표본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런 것을 케르베로스나 케이론에서 본 일이 있습니까?" 로머는 의아한 듯이 말했다. "케르베로스의 형무소 근처에 있었다고 생각되요. 그러나 자신은 없습니다. 그 곳에는 불과 며칠밖에 머무르지 않았으니까요. 형무소장 레인이 케르베로스에 착륙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에즈라도 덧붙였다. "레인은 행성 경찰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아." 캡틴은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틀림없이 자이로 박사는 마법사가 지구인으로 보인 것처럼 누구인가로 변장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누구인지? 캡틴은 이제까지 만난 인간, 지구인 중 하나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캡틴은 모두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유형 위성인 케르베로스에 갔다 오겠습니다. 레인에게서 꼭 들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클라크와 오토는 나를 따라와. 존, 존은 여기 남아서 에즈라씨와 함께 그림의 거처를 찾아 주기를 바란다." "알았어요." 존은 끄덕였다. 그러자 금성인의 켄스 케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사이먼은 훌륭한 과학자다. 그 사나이를 구출하는데 나도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케인은 금성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한 말은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았다. 캡틴은 금성인 천문학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중요한 일을 해 주기를 바랍니다. 암흑성이 나타나서 주위의 항성의 위치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관측해 주기를 바랍니다." "좋아요, 하지요." 네 사람은 곧 커밋 호로 내려갔다. 그리고 케인은 또 천문대로, 존과 에즈라와 로머는 탈타로스 시의 돔을 향하여 굉장한 눈보라 속을 걷기 시작했다. 커밋 호는 조절판 레버를 완전히 열어놓고 급상승을 해 갔다. 그리고 불과 몇 초도 안 되어 우주 공간으로 나갔다. 쳐다보니 케르베로스가 흰 원반처럼 떠 있었다. 케이론과 스틱스는 명왕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커밋 호는 그 케르베로스를 향하여 전속력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조종석에 앉아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지켜보고 있는 캡틴에게 오토가 말을 걸었다. "당신은 레인이나 그림의 어느 쪽이 자이로 박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캡틴이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있으니까, 오토는 다시 계속했다. "레인임에 틀림없어요. 천문대의 진흙이 케르베로스의 것이라면." 클라크의 광전 눈도 분노로 기분 나쁠 정도로 불타고 있다. "레인이 정말로 사이먼에게 고문을 가하거나, 유괴한 것이 밝혀지면 이 내가 엄하게 사례를 해 주겠어!“ 오토가 되받았다. "내가 놈을 처치한 다음에 말기지." "뭐라고, 네 다음이라고? 사이먼이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은 너 때문이야. 저번에도 너는 형편없는 실수를 저지른 주제에." "뭐라고? 바보 로봇인 주제에 무슨 소릴 하고 있어!" 또 여느 때와 같은 시비가 시작되자,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캡틴이 꾸짖었다. "그만두지 못해? 그 따위 시비를 하고 있을 때는 아니잖아. 사이먼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태양계 전체가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소동이다." 오토와 클라크는 입을 다물었다. 케르베로스는 점점 커져갔다. 캡틴은 그 전에도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다. 또 몇십 명의 악당을 이 곳으로 보내기도 했다. 캡틴이 붙잡는 범인은 보통 범인이 아니었고, 종신형으로 모두 여기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이윽고 커밋 호는 형무소로부터 7, 8백 미터 되는 곳에 착륙했다. "클라크는 여기 남아서 커밋을 지켜다오." 라고 캡틴이 말하자, 당장 클라크는 불만을 드러냈다. "오토는 데리고 가면서 나를……" "아니, 오토도 곧 돌아온다. 어쨌든 커밋 호를 비워놓을 수는 없진 않느냔 말야." 이렇게 말하고서, 캡틴은 오토를 데리고 검게 치솟은 형무소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몸에 붙어 있는 중력기를 벌써 조정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캡틴은 걸으면서 주위에 주의 깊게 눈을 돌리고 있었다. 형무소의 새까만 문 옆에 이르렀을 때, 희고 부드러운 바위를 찾아 냈다. 캡틴은 그 부드러운 초산염의 바위 조각을 주웠다. "탈타로스 천문대에서 본 것과 같다.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야!“ 캡틴은 또 주위를 살폈다. 눈에 띄는 생물이라고 하면, 바위 사이를 쪼르르 재빨리 달리는 조그마한 위성 도마뱀뿐이다. "오토, 저 위성 도마뱀 한 마리를 잡아서 커밋 호에 가지고 오너라." 오토는 입을 삐죽거렸다. "위성 도마뱀을 잡기 위해서 나를 데리고 왔나요?" "도마뱀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잡히지는 않아. 그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어." 오토를 남기고 형무소의 건물 옆에까지 오자, 눈이 부실만큼 밝은 서치라이트가 캡틴을 비추었다. 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라! 누구인가?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이다." 캡틴은 조용히 왼손을 들고 말했다. "캡틴 퓨쳐다. 형무소장 랜드르 레인을 만나러 왔다." "캡틴 퓨쳐라고?" 간수는 캡틴의 왼손에 끼고 있는 빛나는 반지를 보았는지 깜짝 놀라며 말투까지 달라졌다. 태양계 정부는 일체의 정부 기관에 캡틴 퓨쳐에게 협력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간수가 말했다. "곧 소장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캡틴은 엄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다!“ 캡틴의 엄한 목소리에 눌린 간수는 곧 문을 열었다. 부웅 하는 원자력 모터의 소리와 함께 거대한 정문이 열렸다. 캡틴이 안으로 들어가자, 철컥 문이 닫혔다. 이렇게 되면 탈출 같은 건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캡틴은 간수의 안내로 소장실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랜드르 레인은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캡틴 퓨쳐! 규칙을 지켜 주지 않으면……" 하고 매우 불안한 듯이 말한다. "규칙 같은 건 이럴 때는 별 도움이 안됩니다. 나는 자이로 박사의 뒤를 쫓아온 겁니다." 레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자이로 박사라고요? 설마 여기에 자위단의 기지가 있다는 건 아니겠지요?" "아직은 모르지만, 명왕성인은 당신에게도 보여드린 털북숭이 생물이 위성에서 날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케이론에 틀림없소. 간수들로 누구 한 사람 그런 생물은 본 일이 없다고 하니까요." 레인은 큰 소리로 말했다. 캡틴은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면 간수에게 직접 물어 보고 싶은데요. 그런데 그 전에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소. 로지와 카라크는 어떻게 여기를 탈출했지요?" "그건, 어느 날 아침 탈출하여……" 캡틴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두 사람의 기록을 보여 주시오." "기록 말입니까?" 레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류를 넣어놓은 큰 캐비닛 쪽으로 갔다. 거기에는 수천 개의 금속제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그 각각의 가장자리에 정리 번호가 빛을 내고 있었다. 죄수의 번호였다. 죄수가 형무소에 있는 동안은 특수한 방사선으로 서류 케이스의 번호가 빛을 내는 장치로 되어 있는 것이다. 레인은 빛을 내지 않는 서류가 몇 장 있는 것을 깨달았다. "빛을 내지 않는 서류 번호의 죄수는 모두 탈주했나요?" 레인은 당황하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놈들이 형무소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탈주하면, 그 서류의 빛이 사라지면서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경계가 엄중한데, 어떻게 탈주했지요?" "네, 그것이 전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정부에 보고는 했겠지요?" 레인은 괴로운 듯이 말했다. "아니, 그렇게 되면 나는 목이 잘려요. 그래서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설마 당신이 보고하지는 않겠지요?" 캡틴은 어이가 없었다. 가장 위험한 악당을 놓치고도 자기의 파면이 걱정되어 정부에 알리지 않다니. "보고하고 말고요. 이젠 당신 같은 무책임한 사나이의 말을 신용할 수 없어요. 간수들을 불러 줘요. 그 사람들에게 물어 보겠어." 레인은 울상이 되며 가엾게 말했다. "할 수 없지요. 불러오지요.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레인이 나간 뒤, 캡틴은 다시 캐비닛 속의 서류를 조사해 보았다. 어느 것이나 이름난 악당이다. 그것이 몇 10명이나 한꺼번에 잇달아 모습을 감추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상하다. "이건 레인이 보고도 모른 척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악당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때 밖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캡틴은 얼른 창가로 달려갔다. 죄수가 갇혀 있는 큰 건물에서 간수가 뛰어나오며, 큰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다.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간수의 뒤에서는 죄수 무리가 한꺼번에 몰아 닥치고 있었다. 손에는 간수에게서 빼앗았는지 원자총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감시탑 위의 간수를 쓰러뜨렸다. 지휘자인 듯한 사나이가 외쳤다. "사무소다! 거기에 캡틴이 있다." 뒤따르던 죄수들이 일제히 외쳤다. "캡틴 퓨쳐를 죽여라!“ 캡틴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곧 깨달았다. 이 곳에는 캡틴이 불잡은 악당들이 수두룩히 있는 것이다. 캡틴이 온 것을 알려 주고 선동을 하면, 복수를 하려고 몰려올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구인, 화성인, 토성인, 또 그 외의 행성들의 악당들은 저마다 떠들어 대고 있었다. "캡틴 퓨쳐를 죽여라!“   코발트   캡틴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렌드르 레인의 짓이다!“ 캡틴은 곧 문을 잠그고, 창문의 금속제 셔터를 내렸다. 그리고 포켓 텔레바이저를 꺼내어 스위치를 넣었다. 오토와 클라크를 불러내려고 생각한 것이다. 두 사람이 구원을 와서 프로톤 권총을 사용하면…… 죄수들은 문을 두들기며, "얌전히 나와라, 캡틴 퓨쳐!" 커밋 호는 응답하지 않았다. 캡틴은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형무소의 건물을 모든 전파를 통하지 안도록 방사선으로 막아놓은 것이다. 정말 위급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캡틴은 여느 때처럼 냉정했다. 어떻게 여기를 빠져 나갈 방법은 없을까 하고 재빨리 생각했다. 벨트에 붙어 있는 기계를 사용하여 자기를 보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와락 이 방에 들이닥치면, 가령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눈치를 채지 않게 방에서 나갈 수는 없다. 죄수들은 원자총을 사용하여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제 몇 초의 여유도 없다. 이 같은 순간에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캡틴은 소장의 방안을 날카로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거기 한쪽 벽에는 두터운 금속의 문이 있고, 무기 창고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렇다. 무기 창고에는 총이나 탄환, 원자 폭탄까지도 있을 것이다. 캡틴은 그 문으로 달려갔다. 문은 원자 불꽃에도 끄덕하지 않는 아주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앞에는 수학자가 고안해 전 조합식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에는 네 가지 색깔로 구분된 20개의 단추가 붙어 있었다. 자물쇠를 열려면 색깔로 맞추는 것과 번호순으로 단추를 눌러야 한다. 단추로 짜 맞추는 데는 수백만 가지나 된다. 그 중에서 어떻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캡틴은 이 자물쇠를 만든 수학자보다도 수학에 정통하다. 캡틴은 벨트에서 작은 금속의 톱날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장으로 접어서 자물쇠를 가볍게 두들겼다. 캡틴은 귀를 기울이며 그 울려나오는 음향으로 재빨리 도형을 그렸다. 밖에서는 죄수들의 함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캡틴은 얼음 같은 냉정함을 지키며 잇달아 도형을 그리며 복잡한 계산을 계속했다. 드디어 뒤에서는 문의 일부가 깨지고 있었다. 지휘자인 듯한 사나이가 떠들어댄다. "드디어 맞췄다!“ 하며 캡틴은 벌떡 일어섰다. 드디어 짜 맞추기를 알아 낸 것이다. 캡틴은 재빨리 20개의 단추를 복잡한 순서로 눌렀다. 그 얼굴은 자신에 넘쳐 있었다. 일 초도 걸리지 않아 자물쇠는 철커덕 소리를 냈다. 캡틴은 힘을 주어 무기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 때 입구의 문이 부서지면서 피에 미친 죄수들이 흉악한 인상의 지구인에게 이끌려 와아 하고 들이 닥쳤다. 그런데 죄수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놀라며 그 자리에 말뚝처럼 멈춰서 버렸다. 무기 창고의 입구에 캡틴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캡틴의 프로톤 권총은 자기들의 가슴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기 창고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휘자인 듯한 그 흉악한 지구인은 마구 기쁜 함성을 질렀다. "끝내 하고 말았어! 저놈이 캡틴 퓨쳐다! 누구도 손대지 마! 내가 만족될 때까지 놈을 요리할 테니까." "놈을 해치워라!“ 죄수들은 그의 사기를 돋구어 주었다. 그러자 지휘자는 손에 원자총을 든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그쪽으로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지휘자는 떠들어댔다. "나를 기억하고 있나, 캡틴 퓨쳐!“ "물론이다. 내가 너를 처넣었으니까 알고 있고 말고, 너는 루카스다. 너는 무기를 목성인에게 몰래 팔아 돈을 끌어 모으고 싸움을 선동한 악당이지.“ 캡틴은 차디차게 말했다. 루카스는 비웃었다. "잘도 말해 주는구나. 죽기 전에 무엇인가 해 둘 말은 없는가?" 캡틴은 날카롭게 말했다. "보이지 않는가? 나는 무기 창고에 프로톤 권총을 겨누고 있다." "그게 어떻다는 거지?" "만약에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이 속에 있는 원자 폭탄이나 탄환에 명중한다. 그러면 이 형무소는 단번에 날아가 버린다." 루카스와 다른 죄수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 마셨다. 루카스는 위세를 부렸다. "그,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을 하면, 너 역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캡틴은 싱긋 웃고 나서 말했다. "하고 말고. 너희들은 내가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대로였다. 태양계의 사람이라면 캡틴이 한다고 하면 틀림없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터이다. 캡틴은 또 말했다. "너희들처럼 사람을 마구 죽이고 악당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놈들을 다시 풀어놓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한다. 내가 함께 죽는다고 해도 물론이다. 자아, 10초 이내에 무기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 방아쇠를 당겨 버리겠다." 숨가쁜 싸움이었다. 그러자 한 죄수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덜커덕 방바닥에 내던졌다. 죄수들은 그를 따라 일제히 무기를 버렸다. 캡틴 스스로도 이 싸움이 성공할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다만 이 악당들을 다시 세상에 자유로이 풀어놓을 수는 없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캡틴은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엄숙하게 말했다. "간수를 불러라 그리고 너희들은 모두 항복했다고 말해라." 완전히 기가 꺾인 죄수들은 캡틴이 말한 대로 얌전히 감방으로 끌려갔다. 캡틴 그제야 마음을 놓고 중얼거렸다. "허허. 자칫하면 어떻게 되는가 했지. 이번에는 레인의 차례다." 하며 캡틴은 레인을 찾으러 방을 나갔다. 레인은 큰 감방의 어두운 북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캡틴은 차갑게 말했다. "레인, 무슨 짓이냐? 죄수들을 선동하여 나를 해치우려 하다니. 너의 계획은 실패했다." 레인은 중얼거렸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죄수들이 제멋대로……" "변명해도 소용없다! 간수에게 물어 보면 당장에 안다. 그보다도 모든 걸 자백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좋다. 끝까지 숨기면, 이 형무소에 처넣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죄수들이 너를 어떻게 취급하리라고 생각하나?" 레인은 완전히 겁을 먹어버렸다. "자백하겠습니다. 내가 선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는 필요 없다. 다만 한 가지 듣고 싶은 일이 있다. 탈옥한 죄수들의 일인데, 네가 모든 것을 해 주었지?" "네…… 내가 밤에 몰래 했습니다. 위에는 케이론으로 싣고 갈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레인의 짓이었다. 더군다나 벌써 또 하나의 위성 케이론에 보냈다니, 수수께끼는 드디어 풀린 것만 같다. "그럼, 모피상의 그림한테로?" "그렇습니다. 그림으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림은 사냥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곳으로는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수를 사냥꾼으로 석방해 주면, 대금을 준다고 했습니다." 레인은 겁을 먹은 채 이렇게 말하고 나서 변명조로 덧붙였다. "여기 가두어 놓는 것과 별로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놈들은 케이론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탈타로스 시나 어디에 모습을 나타내면, 곧 붙잡히게 되니까요." "그런 건 이유가 되지 않아. 어쨌든 그래서 로지나 카라크가 지금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캡틴은 간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간수장에게 척척 명령을 내렸다. "레인을 곧 체포해라. 새로운 소장이 올 때까지 자네가 소장 일을 맡아 보라." 그리고 간수들에게 질문했다. "자네들은 이 케르베로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그렇다면 이런 생물을 모르는가?" 캡틴은 흰털이 온 몸에 나 있는 기묘한 생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간수들은 다만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여기는 그런 생물은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레인이 말한 것 중에서 그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고 여기 과연 없다고도 할 수는 없다. 캡틴은 실망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실마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캡틴은 서둘러서 커밋 호로 되돌아왔다. 오토와 클라크는 캡틴의 이야기를 듣고 마구 화를 냈다. 클라크는 강철의 주먹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캡틴을 죽이려 하다니! 곧 형무소로 가서 레인을 때려눕히지 않고서는 분이 안 풀려." "그럴 사이가 없어, 클라크. 그보다 오토, 위성 도마뱀을 잡았나?" "네. 당신이 그런 위험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위성 도마뱀을 쫓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도마뱀이 필요했습니까?" 캡틴은 자기가 발명한 분석 장치에 작은 도마뱀을 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 도마뱀의 뼈에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는지 알고 싶었던 거다." 오토는 외쳤다. "그랬습니까. 캡틴? 마법사의 뼈에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같은 행성에 사는 생물에도 당연히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분석 장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캡틴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대로다. 그러나 이 도마뱀에는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케르베로스에는 마법사가 없다는 뜻이지." 오토는 그래도 주장했다. "그러나 레인이 자이로 박사가 틀림없죠? 발자국의 흰 초산염이 증거가 아닙니까?"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레인이 자이로 박사가 아니라는 증거야. 그 정도는 여기 오기까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어." "이 오토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천문대에 있던 것은 우주복의 구두 자국이다. 가스를 마시지 않으려고 자이로 박사가 입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케르베로스는 대기가 있기 때문에 우주복을 입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니까 자이로 박사가 일부러 입고 케르베로스에서 온 것처럼 한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속임수를 썼던 것이다." "그랬어요? 그럼 여기가 아니니까 놈들의 기지는 케이론이다." 오토가 말하자, 캡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게 될 것 같구나." "그렇다면 뻔하군요. 레인이 로지와 카라크를 넘겨 준 것은 그림이라고 하니까, 자이로 박사의 정체는 그림임에 분명하군요." "음, 지금쯤은 에즈라 아저씨와 존이 있는 곳을 찾아 냈을 거다. 곧 명왕성으로 되돌아가자." 이윽고 커밋 호는 새벽이 되어 오는 탈타로스 시의 돔의 바로 옆에 착륙했다 캡틴은 천문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에 가기 전에 케인을 만날 생각이었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보자, 케인은 서둘러 다가왔다. 캡틴은 금성의 천문 대장 케인에게 초조하게 물었다. "부탁한 암흑성 주위에 있는 항성의 위치를 알아 냈습니까?" 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끝났지. 어느 항성도 이전 위치에서 변동이 없어요." 캡틴은 신음했다. "뭐라고요, 변동이 없다고요…… 그렇다는 건 그 암흑성은 이 때까지와는 달리……" 캡틴은 곧 탈타로스 시로 되돌아갔다. 가는 도중 캡틴이 너무도 깊이 생각에 잠겨 있으므로 클라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케인의 관측이 그렇게 중대했나요?" "아아, 엉뚱한 걸 이야기해 주었다." 캡틴은 이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캡틴이 행성 경찰 명왕성 본부에 가자, 에즈라 사령은 벌떡 일어서서 캡틴을 맞이했다. 에즈라는 그 동안 몹시 여위어 있었다. 캡틴은 물었다. "모피상 그림의 기지를 알았습니까?" "경관들이 모두 조사에 나섰으나 아직 몰라요. 케이론으로 돌아갔는지도 몰라. 그보다 캡틴, 큰일이 일어났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지리학자인 커얼 로머가 잡혀서 아마도 죽음을 당한 것 갈아요." 하며 에즈라는 이렇게 설명했다. 로머는 그림의 거처를 찾아 냈다면서 텔레바이저로 연락해왔다. 그런데 그 보고 도중 스크린이 찢어지는 것 같은 섬광이 비치더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그 후 그림의 뒤를 쫓고 있던 존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어리석은!“ 캡틴이 이렇게 외쳤을 때, 흥분한 경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등에는 몹시 당한 털북숭이 명왕성인을 메고 있었다. 캡틴은 그것을 보고, 다시 놀랐다. "사버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사냥꾼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길을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서둘러서 캡틴은 사버의 옆으로 다가갔다. 사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했다. 캡틴은 심한 분노로 목소리조차 떨리고 있었다. "정신 차려, 누구에게 당했어, 사버?" 사버는 형광의 눈을 멍청히 뜨고 중얼거렸다. "자이로 박사의…… 졸도. 그 놈…… 당신의 친구의…… 여자…… 붙잡고…… 나를 쏘았어…… 창고 속에…… 그 놈들…… 나 죽었어…… 하고 생각하…… 여자가 데리…… 갔어…… 그래도…… 나는…… 길에…… 기어 나왔어……" 바즈라가 외쳤다. "자이로란 놈, 사이먼에 이어 존을 유괴했던가! 그 창고에 쳐들어가서 수색을 해라!“ 캡틴도 에즈라를 뒤따르면서 클라크에게 명령했다. "사버를 치료해 주게, 클라크!“ 에즈라들을 태운 로켓 차는 사버가 발견된 근처의 창고로 달렸다. 경찰이 말했다. "여기입니다. 이 창고는 바로 얼마 전 그림의 회사가 빌린 것입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지구인인 듯한 시체가 하나 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몹시 검게 그을린 사체였다. 캡틴은 곧 원자총에 당한 무참한 시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찾고 있는 듯 했으나 찾지 못한 모양이다. 에즈라가 말했다. "커얼 로머의 시체다. 그림을 알아 낸 것은 좋았으나, 그 때문에……" 캡틴은 주위를 조사한 끝에 바닥 위에 있는 비밀 문을 발견했다. 안으로 뛰어들어간 캡틴은 이윽고 되돌아왔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아래의 터널은 돔의 밖에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젠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에즈라가 신음하듯 말했다. "그러면 자이로란 놈, 사이먼과 존을 기지로 데리고 갔구나! 그림이 자이로라면, 그 기지는 케이론이 된다." 캡틴들은 서둘러서 경찰서로 되돌아왔다. 클라크는 명왕성인인 사버의 위에 엎드려 있다가 캡틴이 온 걸 알자, 한 마디 했다. "이젠 틀렸습니다." 사버는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캡틴을 지켜보며 숨가쁘게 중얼거렸다 "나…… 당신…… 좋아…… 지구인 중에서도……" 그리고서 사버는 눈을 감았다. 캡틴은 가슴 속에서 무언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꾹 누르며, 사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슬픔을 잊어버리려는 듯이 에즈라에게 물었다. "명왕성의 위성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어디에 가면 입수할 수 있나요?" "명왕성 조사단에 있을 거다. 단장인 로머는 이제는 없겠지만." 그 때였다. 텔레바이저로 연락하고 있던 경관이 놀란 소리를 질렀다. "자이로 박사의 방송이 끼어 들어왔습니다!“ 캡틴들은 텔레바이저에 서둘러 다가갔다 스크린에는 온통 검은 색인 키 크고 기분 나쁜 자이로 박사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자이로 박사는 노려보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태양계의 주민에게 고한다. 이것이 최후의 기회다. 은하 쪽으로 눈을 돌리고 확인하는 것이 좋을 거다. 이제 암흑성은 바로 저기에 다가오고 있다. 이제 하루나 적어도 이틀 이상 늦으면, 나의 힘으로도 태양계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없게 된다. 이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정부에 맡길 수는 없다.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서 정부의 모든 권한을 나에게 넘기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는 한, 태양계는 최후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에즈라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저놈! 이렇게 되면 태양계의 사람들은 무서움에 미쳐버린다. 정부도 앞으로 24시간을 견딜지 어떨지……"   흉계에 걸리다   캡틴은 서둘러서 클라크와 오토를 데리고 명왕성 조사단의 사무소로 갔다. 이제는 어물어물할 수도 없다. 캡틴은 제 2의 위성 케이론에 대한 자료를 전부 빌려서 보았다. 기록에 커얼 로머는 두 번이나 홀로 케이론을 탐험한 적이 있다. 모피상 그림은 4, 5년 전 케이론 전부를 태양계 정부에서 빌리고는 맹수 콜렛을 잡아 그 값비싼 모피를 팔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튼 캡틴이 필요로 하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토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데서 시간을 보냅니까? 그 자이로 박사의 정체가 그림이라고 안 이상, 곧 케이론으로 쳐들어갑시다." 클라크도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 사이먼이 어떤 변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 캡틴 역시 사이먼의 일이 걱정되어 마음이 급했다. 그러나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 두는 것이 좋다. 자료들을 본래의 선반에 도로 놓기 신작했을 때, 밖은 몹시 시끄러웠다. "뭘까?" 캡틴이 말하자, 창가에 다가선 오토가 외쳤다. "명왕성 정부 빌딩 앞 공원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세 사람은 얼른 밖으로 나가 보았다. 저쪽 공원은 군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의가 지구인들이었으나, 털북숭이 명왕성인이며 다른 행성인도 좀 섞여 있었다. 지휘자인 듯한 사나이가 외쳤다. "우리들은 즉시로 태양계 정부의 전권을 자이로 박사에게 넘기고, 이 태양계의 위기를 구할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떠들어댔다. "그렇다!“ "찬성이다!" "어물어물하다가는 때를 놓친다." "지사를 끌어내어 와라! 그리하여 지사에게 정부가 전권을 자이로 박사에게 넘기라고 해야 한다." 군중은 정부 빌딩으로 몰려갔다. 에즈라 휘하의 다섯 명의 부하 경관이 그 군중 앞을 막아섰다. 에즈라는 침착한 태도로 외쳤다. "지사는 여기 있지 않다. 1천 6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에리시아 시에 가 있다." 지휘자인 사나이가 외쳤다. "그렇다면 명왕성 정부 빌딩을 점령하자. 그리고 자이로 박사에게 넘겨야 한다!“ 에즈라는 원자 권총을 손에 쥐고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있는 한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그 따위 자이로 박사의 엉터리 방송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정신들이 있는가." 사람들은 와아 떠들어댔다. "뭐가 엉터리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암흑성은 가까워 오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버티고 서 있는 에즈라들을 대항해서 정부 빌딩을 점령할 만한 용기는 없는 것 같았다. 캡틴이 말했다. "에즈라에게 맡고 있으니 안심이다. 그보다 우리는 서둘러 커밋 호로 돌아가자." 돔 너머는 대낮인데도 검은 원반 모양을 한 암흑성이 똑똑히 보였다. 확실히 저것이 충돌하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자꾸 날마다 커 가는 암흑성을 다시 보았을 때, 자기의 그 생각이 정말로 정당한 것일까 하고 자신이 없어진다. 캡틴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것 이외에는 암흑성의 수수께끼를 풀 해답은 없다.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암흑성 주위의 항성의 위치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강력한 증거다.) 커밋 호에 되돌아오자, 캡틴은 명령을 내렸다. "케이론으로 직행이다." 조종석에 뛰어든 오토는 크게 기뻐했다. "재미있게 되었다!" 1시간 남짓하여, 케이론은 눈앞에 크게 다가왔다. 커밋 호는 그 주위를 크게 돌아서 낮 부분으로 나왔다. 고도를 3백 미터로 낮추어 아래의 동태를 살폈다. 황폐하기는 했으나, 생물은 살고 있었다. 케이론 사슴의 떼는 커밋 호의 폭음에 놀라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다리가 여섯이며, 회색을 띠고 있다. 사슴의 뒤에는 역시 여섯 개의 다리와 큰 어금니를 가진 생물이 있었다. "저건 위성의 멧돼지다. 콜렛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오토가 중얼거리자, 캡틴이 명령했다. "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커얼 로머의 지도에 의하면, 북극에서 150킬로미터 정도 남쪽에 그림의 모피 창고가 있을 것이다." 요트가 북서로 진로를 잡았을 때, 곧 클라크가 큰 소리를 질렀다. "콜렛이다!" 콜렛이라는 것은 지구의 로키산맥에 사는 회색곰과 흡사했다. 다만 케이론의 생물이 모두 그러하듯이 다리가 여섯 개이며, 맨 앞의 다리 두 개로 물건을 할퀴거나, 찢는 데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회색곰과 다른 것은 태양계에 널리 알려진 그 사나움이다. 콜렛은 큰 머리를 들고, 커밋 호를 향하여 어금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짖어댔다. 오토가 말했다. "저 정도니까 그림이 형무소의 죄수를 사냥꾼으로 고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보통 사냥꾼이라면 도망칠게 틀림없어." 이윽고 저 멀리에 나직한 집이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그림의 창고다, 오토." 창고 근처에서 우주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착륙하자, 캡틴은 오토에게 명령했다. "나와 클라크가 들이닥치면 위성의 멧돼지를 잡아 줘. 나중에 코발트 검출 시험을 할 테니까." "이전에는 도마뱀이더니, 이번에는 멧돼지 사냥입니까?" 하고 오토가 중얼거렸다. 캡틴과 클라크는 담벽에 둘러싸인 그림의 기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이크는 클라크의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공기는 엷었으나, 명왕성처럼 춥지는 않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캡틴과 클라크는 문을 지나 중앙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모피가 쌓여 있는 방에 들어갔다. 안에는 목성인이 하나, 화성인이 둘, 지구인이 셋 있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캡틴들이 들어가자. 당황하여 원자총을 뽑으려 했다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들이대면서 외쳤다. "총에서 손을 떼라!" 사나이들은 얼른 총을 놓았다. "클라크, 놈들의 총을 구부리고 치워라." 클라크는 즉시 아주 간단히 사냥용의 원자총을 한데 묶어 구부린 후 구석으로 치웠다. 캡틴은 엄하게 말했다. "그림은 어디 있나?" 지느러미 같은 팔을 가진 목성인은 캡틴이 끼고 있는 반지를 보고 얼굴색이 변했다. "캡틴 퓨쳐다!“ "그대로다. 그림은 어디 있나?" 라고 말하며, 캡틴은 노려보았다. "사장은…… 사장은…… 사무소에 있습니다. 이쪽, 이쪽입니다." 목성인은 캡틴과 클라크를 문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문을 열지 않고 소리쳤다. "사장, 캡틴 퓨쳐가 면회입니다." 캡틴과 클라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간 순간,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방은 시멘트의 벽으로 둘러싸이고, 천장에는 굵은 철봉이 끼워져 있었다. 캡틴은 얼른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문은 찰깍 하고 닫혔다. 이어 자물쇠 소리가 뒤에서 크게 울렸다. "큰일났다. 흉계에 걸려들었다! 클라크 부숴 버려라!" 클라크의 힘이라면 그런 문 같은 건 부수지 못할 것은 없다. 클라크가 이이크를 바닥에 내려놓고 문에 어깨를 갖다댔을 때, 그 이이크가 무엇에 놀랐는지 클라크의 어깨에 기어오르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캡틴은 긴장했다, "이이크가 뭔가 텔레파시로 위험을 느낀 모양이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캡틴은 시멘트벽의 하나가 갑자기 스르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천천히 여섯 개의 다리가 달린 괴물이 이쪽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캡틴은 외쳤다. "콜렛이다! 놈들의 흉계는 이거였어!“ 이 콜렛은 다른 행성의 동물원에 팔려고 사로잡은 것임에 틀림없다. 콜렛은 거기에 인간과 로봇이 있는 것을 깨닫고는 멈춰 섰다. 그리고 건물을 뒤흔들어 놓을 만큼의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캡틴은 프로톤 권총의 출력을 최대로 하고 괴물을 향해 발사했다. 총은 틀림없이 콜렛의 옆구리에 명중되었다. 그런데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성난 콜렛은 그 몸집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빠른 동작으로 캡틴에게 달려들어, 맨 앞쪽의 두 다리로 캡틴의 몸을 붙잡았다. 콜렛의 무서운 턱이 쩍 열리며, 뜨거운 숨이 훅 캡틴을 얼굴을 덮쳤다. 아아, 위급한 순간이다. 그러나 캡틴은 아무도 흉내를 낼 수 없을 만큼 날쌔게 콜렛의 앞발을 피했다. 다만 캡틴의 옷소매는 콜렛의 발톱에 의해 갈기갈기 찢겼다. 캡틴은 한 번 더 프로톤 권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상대는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굉장히 큰 성난 소리를 내며 캡틴을 다시 습격했다. 그 때였다. 로봇 클라크가 콜렛의 뒤에서 달려 든 것은. 클라크는 튼튼한 팔로 상대의 굵은 목을 꽉 졸랐다. 클라크는 확실히 컸다. 그러나 콜렛에 비하면, 꽤 작아 보인다. 그를 뿌리치려고 몸을 비트는 콜렛에게 매달려, 클라크는 있는 힘을 다해 괴물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다. 클라크가 콜렛에게 매달려 있으므로, 캡틴은 프로톤 권총을 발사할 수 없었다. 이이크는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마루 바닥에 몸을 움츠리고 이를 덜덜 떨며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클라크는 여전히 콜렛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콜렛은 버둥거리며 몸부림치고 있다. 갑자기 뚝 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거대한 털북숭이 콜렛은 뻗었다. 콜렛의 목이 부러진 것이다. 클라크의 눈은 붉게 빛나며 캡틴을 쳐다보았다. 캡틴도 클라크를 쳐다보았다. 말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부모를 잃은 아기 캡틴을 키울 때부터, 이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캡틴과 퓨쳐맨의 사이는 굳게 맺어 주고 있었다. 캡틴은 들어왔던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클라크에게 말했다. "끌을 가지고 이 문을 열어 보라고." 클라크는 가슴에 붙어 있는 작은 로커에서 몇 개의 날카로운 끌을 꺼냈다. 그리고 자기의 손가락을 떼어 내고 끌을 붙였다. 기계 인간의 장점이다. 클라크는 문 둘레의 시멘트벽에다 당장 큰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기에 손을 넣어 문의 자물쇠를 벗겼다. 클라크가 말했다. "저놈들을 혼내 주겠어. 자아, 갑시다." 캡틴들은 서둘러 여섯 명의 사냥꾼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섯 명은 당황하여 도망치려고 했다. "서라!“ 캡틴은 도망쳐 가는 여섯 명의 머리를 향해 일부러 빗나가게 프로톤 권총을 한 발 발사했다. 즉시 여섯 명은 도망치려다가 말고, 떨면서 되돌아왔다. 캡틴은 자신을 흉계에 걸려들게 한 목성인을 노려보았다. "잘도 흉계를 꾸며 우리들을 죽이려 했구나. 누가 명령했지? 그림이냐?" 목성인은 움츠리며 말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우리들을 또 다시 체포하러 온 줄 생각했기 때문에…… 사장은 없습니다. 아직 명왕성에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캡틴은 다른 다섯 명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말에는 거짓이 없는 듯 다섯 사람도 두려운 듯 캡틴을 보고 끄덕였다. 그래서 캡틴은 말했다. "형무소의 소장 레인의 도움을 받아 함께 탈옥한 놈들은 어디 있나?" "다른 사람들은 사냥 나갔습니다. 우리들은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겁에 질려 있는 목성인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끄덕였다. 캡틴은 또 물었다. "너희들과 함께 로지와 카라크도 탈옥했지?" "네, 그러나 로지와 카라크는 여기 와서 곧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여기 왔을 때, 커얼 로머라는 학자가 조사를 위해서 여기 있었을 텐데. 알고 있나?" "로머 씨가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들이 발견되지 않도록 사장이 잘 해 주었습니다." 점점 수수께끼가 풀려갔다. 캡틴은 여섯 명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 곳을 떠나겠다. 보아 하니 우주선도 없고 도망칠 수도 없겠지. 행성 경찰이 와서 너희들을 형무소에 되돌려보낼 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한다." 하고 커밋 호로 돌아갔을 때, 오토는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오토의 앞에는 프로톤 권총으로 마비된 위성 사슴이 뒹굴고 있었다. 오토는 캡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매가 찢어져 있군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캡틴은 경위를 말해 주었다. 오토는 외쳤다. "그럼, 내가 위성 사슴을 쫓고 있는 동안에 클라크는 사람으로서는 낼 수 없는 힘으로 콜렛과 일 대 일로 싸우고 있었군요." 클라크는 뭐라고 한 마디 하려고 하다가, 오토가 잘해 주었다는 눈초리를 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캡틴은 얼른 위성 멧돼지를 대상으로 X선 스펙트럼 검사를 시작했다. 오토는 말했다. "그 놈의 뼈에 코발트가 가득 포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어요. 벌써 놈들의 소굴이 케이론 어디인가는 확실하니까요." 캡틴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검사를 끝내고 나자 큰 소리로 말했다. "이놈에게 코발트가 검출되지 않았어. 마법사가 케이론에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런 어리석은!“ 오토가 말하자, 클라크도 거들었다. "명왕성인의 킬리 아저씨가 명왕성의 위성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케르베로스가 아니었으니까 케이론입니다." 그러나 캡틴은 이미 둘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했다.   해답은 하나밖에 없다?   "알겠어. 케르베로스에도 케이론에도 마법사는 살고 있지 않다. 허나 명왕성에는 위성이 세 개 있다." 오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설마 스틱스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거기는 물로 뒤덮여 있으니까, 생물이 살 수 없어요." 캡틴은 상관없이 말했다. "오토, 커밋 호를 상승시켜라! 그리고 스틱스로 향한다." "그, 그런 어리석은 일을!“ 요트가 말하자, 클라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캡틴의 명령을 따라라!“ 오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커밋 호를 출발시켰다. 커밋 호가 곧장 스틱스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동안 캡틴은 열심히 추리해 보았다. 아무튼 스틱스 외에 그 흰털의 괴수가 살고 있을 만한 곳은 없다. 그러는 동안 캡틴은 문득 어떤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로커에 가서 엉망진창으로 찌부러진 작은 장치를 가져왔다. 그것은 오토와 껴안은 채로 화성에 떨어진 그 흰털의 괴물이 벨트에 붙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구인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는 장치가 틀림없다 엉망진창으로 찌부러져 잘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장치는 무엇인가 특별한 역선을 방사하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캡틴은 그 찌부러진 기계를 커밋 호에 있는 여러 가지 측정기를 사용하여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본래 어떤 역선을 방사하고 있었는지를 캐내려고 했다. 그 동안에도 스틱스는 점점 커 갔다. 클라크는 이이크를 안고 앉아서는, 그 명왕성의 위성 스틱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토는 더욱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조절판 레버를 쥐고 있었다. 마침내 캡틴은 엉망진창으로 찌부러진 기계가 본래 방사하고 있던 역선을 탐지하는 소형의 장치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캡틴은 중얼거렸다. "이놈으로 나의 추리를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캡틴이 옆으로 다가 갔을 때, 조종석에 있던 오토가 말했다. "스틱스에 가도 헛일입니다. 지금까지 착륙한 우주선은 한 척도 없으니까요. 북극에서 남극까지 물에 잠겨 있지요." 캡틴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걸 확인하려고 하는 거야." 커밋 호는 드디어 제 3의 위성 스틱스에 다가갔다. 물로 뒤덮여 있을 정도니까, 이 위성에 대기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커밋 호가 내려가기 시작하자, 대기가 쉬이쉬이 소리를 냈다. 이윽고 수백 미터 아래의 끝없는 녹색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흰 파도가 일렁였다. 오토는 화가 난 듯이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어딜 봐도 육지는 안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렇지만 곧 알게 돼."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조금 전에 만든 탐지 장치를 꺼냈다. 그리고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장치에서 작고 붉은 광선이 흘러나왔다 캡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여기에는 강력한 역선이 작용하고 있다! 이제 수수께끼는 풀렸다! 자이로 박사의 비밀 기지의 수수께끼가 말이야. 그리고 그 이상의 비밀도." "무슨 소릴 하고 있습니까, 캡틴?" 오토가 물었으나, 캡틴은 오토의 말을 무시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캡틴은 지금 자기가 푼 수수께끼에서, 자이로 박사의 큰 음모를 파괴하러 가는 것이 과연 좋은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사이먼을 구출해 내는 것이 자기의 임무라고 캡틴은 결심했다. 캡틴은 결심하고 말했다. "오토, 바다에 박아라!“ 놀란 듯이 오토는 큰소리로 되물었다. "바다 속에라고요? 그런 짓을 하면 아무리 커밋 호라도 버티지 못합니다. 저 사나운 파도에 긁히거나 암초에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언제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신용하지 못하게 되었어, 오토?" 캡틴은 웃으면서 그러나 엄숙하게 말했다. 오토는 입을 삐죽했다. "이, 나 말입니까? 캡틴이 하라고 하면 태양 속에라도 박아 넣을 나입니다요." 그러면서 오토는 조절판을 열고 심한 파도가 용솟음치는 바다를 향해 급강하시켰다. 커밋 호가 흰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큰 파도를 향해 돌진하자, 클라크도 걱정스러운 듯이 캡틴을 얼핏 쳐다보았다. 커밋 호는 휘익 바닷속으로 돌진해 갔다. 그 때였다. 놀랄 사이도 없이 주위의 바다가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커밋 호는 넓고 넓은 수백 미터의 상공에서 육지를 향해 날고 있는 것이었다. 오토는 재빨리 육지에 박히지 않으려고 커밋 호를 수평으로 되돌렸다. 육지는 저 멀리 지평선까지 두텁고 거대한 백색의 밀림으로 빽빽이 덮여 있었다. 여우한테 홀린 것 같아 오토가 외쳤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건?" 클라크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바다는 대체 어딜 갔죠, 캡틴!“ 캡틴은 말했다. "바다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오토는 외쳤다. "그러나 캡틴 당신도 보지 않았어요!“ "우리들이 본 것은 착각이었어. 그 마법사가 자기의 모습을 지구인으로 보이게 한 것처럼, 어떤 역선을 사용하여 바다처럼 보이게 했던 거야." 클라크와 오토는 어이가 없어 멍해졌다. 그러자 캡틴이 설명 해 주었다. "나는 케이론과 케르베로스에 마법사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여기 스틱스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스틱스는 바다로 덮여 있었어." 클라크와 오토는 끄덕였다. 캡틴은 계속했다. "명왕성의 킬리 할아버지는 그 흰 털북숭이 생물이 상대를 착각하게 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어. 또 오토도 지구인이라고 생각한 상대가 그 흰털 북숭이의 생물이라는 것을 발견했지. 그래서 어쩌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 바다가 있는 것처럼 이쪽을 착각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캡틴은 그 역선 탐지기를 두 사람에게 다시 보여 주었다. "나는 찌부러진 기계가 어떤 역선을 방사하고 있었는가를 조사해서, 대체로 그 가능성을 알아 내어. 그리고 그 역선을 알아 내는 탐지기를 서둘러서 만들었지. 그리고 여기 상공에서 스위치를 넣자, 아니다 다를까, 그 역선이 방사되고 있었던 거야. 역시 그 바다는 환상이었던 거야." 오토가 반론했다. "그러나 이 위성은 지구인이 처음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바다로 덮여 있었어요." 캡틴은 끄덕였다. "그대로다. 그러나 킬리 할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나. 마법사들은 지구인이 와서부터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야. 마법사는 지구인이 왔기 때문에 자기들의 위성을 위장해 버린 거야." 오토와 클라크는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엷은 커튼과 같은 반투명의 것이 상공을 덮고 있었다. 오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서 모두 한 사람 남김없이 이 위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인가!“ 캡틴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니, 한 사람도 남김없이 라는 뜻은 아니야. 적어도 단 한 사람은 착각이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오토가 외쳤다. "그림이다! 그래, 자이로 박사로 둔갑하고 있는 그림이 틀림없다. 이제는 속지 않는다!“ 캡틴은 탐지기를 주의 깊게 보면서 재빨리 계산했다. 그리고 나서 오토에게, "조금 서쪽으로 진로를 돌려라. 역선이 방사되고 있는 근원은 그쪽 방향이다. 반드시 거기에 마법사의 도시와 자이로 박사의 비밀 기지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클라크가 물었다. "거기에 사이먼이 잡혀 있는 거죠?" 캡틴은 끄덕였다. 그리고 걱정되는 듯이 말했다. "무사히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사이먼을 찾아 내어 구출하는 일이다. 고도를 최하로 내리고 속도를 늦추라." 30분 가량 가자, 산림 저쪽에 흰 돌로 된 많은 뾰족한 탑이 있는 것이 보였다. 뾰족탑 주위에는 가느다란 금속의 기둥이 모여 있고,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공이 붙어 흰 빛깔을 내고 있다. 캡틴은 말했다. "착륙해라! 너무 접근하면 위험하다." 커밋 호는 거대한 칡의 밀림 속에 착륙했다. 주위는 조용했다. 캡틴이 말했다. "자아, 저 부분을 정찰하자! 이런 장소니까 감시원을 남기지 않아도 되니까 모두 가자." 캡틴의 뒤를 오토와 클라크가 따랐다. 클라크의 어깨에는 이이크가 달라붙어 있었다. 오토는 클라크에게 불평을 했다. "사이먼을 구출하러 간다는데, 이런 중대한 시기에 달의 개를 데리고 가는 거냐, 너는?" 클라크는 변명을 했다. "이이크는 케이론에서 콜렛을 만나고 나서부터 좀 겁을 내고 있어. 그러니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리고 이이크는 절대로 방해는 안 돼." "방해가 안 된다고? 너 같은 금속 덩어리도 나에게는 방해가 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클라크가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 오토, 이이크가 남아서 커밋 호를 통째로 씹어버리면 곤란하잖아." 캡틴들은 흰 숲 속을 걷기 시작했다. 흰 숲은 머리 위의 3미터 정도나 솟아 있어 매우 기분이 나빴다. 때때로 털이 많은 작은 동물이 일행이 지나가는 길을 싹 가로질러 가기도 했다. 클라크의 어깨에 앉아 있는 이이크는 파란 가지를 물어뜯고는 씹기 시작했다. 클라크가 깜짝 놀라며 속삭였다. "이이크가 식물을 먹다니, 처음이야." 캡틴이 말했다. "그 가지에 코발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야. 자, 가지가 부러진 데가 빛나고 있잖아. 이로써 마법사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솟아 있는 뾰족한 탑에 가까워짐에 따라 캡틴들은 주위를 경계하면서 나아갔다. 캡틴은 희미하게 흰빛을 내는 가느다란 금속의 기둥 위에 있는 공을 보고 말했다. "저것이 바로 이 위성이 바다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역선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요트가 속삭였다. "누군가가 있다!“ "풀 속에 숨어라!“ 캡틴은 흰 풀숲으로 뛰어들면서 말했다. 클라크와 오토도 뒤따랐다. 캡틴은 살짝 머리를 내놓고 발소리가 나는 쪽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10명 정도의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틀림없이 흰 털북숭이의 마법사였다. 그 마법사들은 역시 흰털에 덮인 지구의 캥거루처럼 두 발로 깡충깡충 뛰는 동물을 타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스틱스인에 틀림없다.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종족이다. 스틱스인의 안장에는 금속의 투망인 듯한 것이 있었다. 캡틴은 말했다. "사냥을 가는 것인가? 틀림없이 지금 타고 있는 것 같은 동물을 잡아서 길들일 거다." 스틱스인들은 세 사람 바로 앞을 지나 멀리 갔다. 캡틴들은 또 전진을 시작했다. 이윽고 칡나무 아래로 스틱스인의 도시가 똑똑히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 도시는 그다지 크지도 않고, 어디나 낡은 석조 건물뿐이다. 도시 사이를 흰 털북숭이 스틱스인이 오가고 있다. 그 중의 몇 사람은 깡충깡충 뛰는 동물의 등에 타고 있었다. 캡틴은 허리의 벨트에 손을 붙은 채 각오한 듯이 말했다.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장치를 사용하여 저기 갔다 오겠어. 그리고 사이먼들을 구출해 올 테니까,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게." 오토가 반대했다. "그것으론 10분도 가지 못해요. 저기까지 절반도 못 가서 모습이 드러나고 맙니다!“ "걱정 마.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캡틴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클라크의 어깨에 앉아 있는 이이크가 무서운 듯이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텔레파시로 무엇인가 느낀 것이다. 캡틴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생물을 타고 있던 10여 명의 스틱스인들이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스틱스인이다, 조심해라!“ 캡틴은 이렇게 외치면서 얼른 프로톤 총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이미 스틱스인들이 와락 달려들었다. 그리고 투망을 캡틴들을 향해 던졌다. 상대를 마비되도록만 하는 세기로 맞춘 프로톤 총을 사용하여, 캡틴은 즉시로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이미 투망이 공중에 크게 퍼지고 있었다. 투망은 캡틴과 클라크와 오토의 세 사람 위로 떨어져 내렸다. 더욱이 두 번째, 세 번째의 투망이 그 뒤를 이었다.   캡틴과 자이로 박사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이 없었다. 오토가 화가 나서 외쳤다. "털북숭이놈들, 우리들을 물고기처럼 그물로서 잡으려 하다니! 그 물고기가 어떤 것인지 그물에서 나오면 알려 주겠어!“ 캡틴은 오토에게 말했다. "침착해, 오토. 이 그물은 아무리 해도 찢지 못해. 이중 삼중으로 씌어졌으니까. 기회를 기다리자. 반드시 올 거다." 이렇게 격려는 하지만, 캡틴은 이처럼 간단히 생포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클라크는 걱정이 되는 듯 말했다. "캡틴, 이이크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이크는 스틱스인이 나타나자 몸을 날려 숲 속으로 숨어버렸다. 오토가 노려보면서 내쏘았다. "이 판국에도 달의 개 이이크를 걱정하고 있는 거냐! 사이먼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가. 태양계 정부가 쓰러져 가고 있는 데도 걸핏하면 이이크, 이이크야!" 캡틴은 쓴웃음을 지으며, 클라크를 위로했다. "이이크는 잡힌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 혼자로도 잘할 거다. 오히려 지금은 우리들보다 나은 형편이 아닌가." 스틱스인들은 강제로 캡틴들을 나직하고 튼튼한 건물의 둥근 방에 넣었다. 거기에는 예상한 대로 세 명의 사나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세 명이라는 것은 물론 자이로 박사와 형무소를 탈주한 작은 사나이 로지, 큰 사나이 카라크였다. 캡틴들이 자이로 박사 앞에 끌려오자, 자이로 박사는 우선 스틱스인을 칭찬했다. "이놈들을 생포하다니, 큰 공을 세웠다. 잘 했다! 이놈들은 너희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적이다. 자, 가도 좋아. 이제는 우리가 맡겠어" 스틱스인들은 방을 나갔다. 캡틴은 얼른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죽 늘어선 고라사이트제의 투명한 큰 케이스 속에 행방불명이 된 과학자들이 마치 냉동되어 있듯이 서 있는 것을 알았다. 케이스 중 하나에는 존도 있었다. 존은 캡틴 쪽으로 눈을 돌린 채로 굳어 있었다. 캡틴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케이스의 옆에 아직 살아 있는 뇌 사이먼도 있었다. 오토도 곧 알아차렸는지 소리쳤다. "사이먼, 놈들이 당신을 고문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러나 사이먼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다만 그 렌즈의 눈은 의미 있게 발성 장치 쪽을 보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검은 옷을 입은 자이로 박사는 캡틴에게 크고 거만한 소리로 말했다. "겨우 마주볼 수 있게 되었구나, 캡틴 퓨쳐!“ 캡틴은 분노의 눈으로 노려보면서 차갑게 대꾸했다. "마주볼 수 있게 될 것은 이게 처음은 아니야." "전에 만났을 때는 지금처럼 착각을 이용한 변장이나 목소리를 만들어 하지는 않았었지." 오토와 클라크, 그리고 로지와 카라크도 이 두 사람의 대결을 침을 삼키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쪽의 자이로 박사는 이제 태양계 정부를 탈취하려는 괴인이며, 저쪽의 캡틴 퓨쳐는 태양계를 몇 번이나 구원한 정의의 사나이다. 자이로 박사는 여전히 거만한 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말할 수 있겠다. 나는 너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었어. 네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잘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작은 사나이 로지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지금도 안심해서는 안 되요. 이놈이 살아 있은 동안은 결코 안심할 수 없어요. 자,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해요!" 자이로 박사는 머리를 내저었다. "그건 안 돼! 스틱스인들은 우리들이 이미 사람을 둘이나 죽인 것을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있어. 더 이상 살인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로지, 걱정할 건 없잖아. 이놈들도 '원수의 집'의 진열품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캡틴은 비웃었다. "하고 싶으면 해도 좋아. 이런 시시한 진열품을 만드는 것으로 안심이 된다면 말이야. 명왕성의 탈타로스 천문대에서 오토들에게 사용한 가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는 짓이 과연 더럽고 비겁하고 시시하기 짝이 없어." 캡틴의 욕설에 자이로 박사는 화를 내며 대답했다. "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는 태양계 정부의 지도자가 되고도 충분한 사람이다. 지금이야말로 태양계의 주민은 나를 지도자로 해야 한다고 정부와 맞서고 있지 않은가. 암흑성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캡틴은 엄숙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집어치워. 그것이 허위라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 자이로, 나는 암흑성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정체를 알고 있다니?" 자이로 박사는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캡틴은 침착하게 끄덕이며 말해 주었다. "알고 있었지. 암흑성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그것도 착각을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야." 자이로 박사는 크게 놀라며, 캡틴을 노려보았다. 로지는 더욱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에 죽여버리는 것이 좋다고 하잖아요. 이놈은 악마보다 더 눈치가 빠른 놈입니다. 우리들의 계획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오토까지 큰소리를 질렀다. "정말입니까, 캡틴?" "정말이고 말고. 저렇게 크게 보이지만, 사실은 있지도 않은 거야. 태양계 밖에 우주선을 보내 몇 주일이나 걸려 천천히 돌아오게 한다. 그 우주선의 위에, 이 행성이 바다로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한 장치를 싣고, 엄청나게 큰 암흑성이 가까이 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 거야." 캡틴의 설명을 듣고 오토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래서 어느 천문학자도 그 암흑성의 질량을 계산했지만 제로에 가까웠던 거였군요." "그렇다. 어느 천문학자도 알지 못하고 말았지만, 나는 금성의 천문학자 캔스 케인에게 부탁하여, 암흑성 주위의 항성의 위치를 관측하게 했어. 왜냐 하면 그 암흑성에 정말 질량이 있다면 아인슈타인 박사의 학설처럼 그 옆을 지나는 빛은 좀 구부러질 테니까. 빛이 구부러지면 항성의 위치도 조금 변하게 되지. 그러나 관측 결과 케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짜 질량이 없는 것이 되고, 다만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추리를 하면 대답은 하나밖에 없어. 우주선에 장치를 실어 착각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자이로 박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캡틴 퓨쳐, 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우수한 놈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나의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암흑성이 있는 곳까지 가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공격하지 않았지?" 캡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이야말로 망설였던 일이다. "그렇게 하면 네게 잡혀 있는 살아 있는 뇌 사이먼이 위험하다. 그를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지." 자이로 박사는 비웃었다. "동료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의 위험조차 외면했는가. 자기 몸만 위험하게 한 것이 아니지. 이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도 암흑성으로 위장한 우주선은 점점 태양계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당황한 주민들은 나를 지배자로 내세우려 하고 있는 거다." 여기서 자이로 박사는 다시 비웃으며 계속했다. "내가 지배자가 되면 나는 단지 우주선을 태양계에서 멀리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태양계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지. 이 나의 착각을 일으키는 굉장한 힘을 이제부터라도 사용해 간다면 아무도 내게 반항하지 못한다." 캡틴은 경멸하듯 말했다. "너는 지금 그 착각을 일으키는 힘을 네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 거짓말은 집어치워. 그 힘은 옛날 스틱스인이 발명한 것이지 않은가!" "그것까지 알고 있는가. 그래도 어떻게 착각을 일으키는지, 그 비밀은 알지 못하겠지." 캡틴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웃기지 마. 그건 사물에 반사되는 빛을 바꾸는 역선으로 일으킨다. 보통 인간이 상대방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그 사람의 몸에 광선이 부딪쳐서 보통 반사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역선에 의하여, 인간의 몸에서의 반사 대신, 돌멩이로부터의 반사처럼 보이게 바꾸어 버리면 상대의 눈에는 인간이 아니라 돌멩이처럼 보이는 거다. 네가 그렇게 변장할 수 있는 것도, 스틱스인이 지구인으로 보인 것도, 이 위성이 바다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 것도, 모두 같은 이치다." "너야말로 캡틴 퓨쳐다!“ 드디어 자이로 박사도 손을 든 모양이다. 캡틴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한 가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다. 너는 어떻게 스틱스인을 한패로 해서 그 중요한 비밀을 캐냈는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 보니 스틱스인은 자이로 박사가 두 사람이나 사람을 죽인 일을 불미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을 끌어 스틱스의 지배자를 만날 수 있다면 자이로 박사의 음모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알고 싶은가? 너는 사로잡힌 몸이다. 어차피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야기해 주지. 나는 이 위성에 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전설에 이끌려 여기 왔다. 그리고 바다의 위장을 뚫고 보기 좋게 착륙했다. 그러나 곧 스틱스인에게 붙잡혔다. 스틱스인은 살인이나 전쟁을 몹시 싫어하는 종족이라 나를 귀중하게 취급해 주었어. 그들은 지구인에게 정복되어 식민지가 되지 않을까 해서, 바다에 덮여 있는 듯이 위장할 정도로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걸 이용하여 태양계를 지배하려고 생각했다. 지구인은 이 위장을 발견해 침략해 올 것이다. 그리고 스틱스인을 노예로 만들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고 위협했지. 그걸 피하려면 스틱스인은 친구인 내가 이 태양계의 지배자가 되는 외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하게 했지. 그래서 놈들은 착각을 일으키는 비밀을 나에게 건네 주고, 우주선의 건조를 도와 주었던 것이다. 그 밖의 일은 네가 상상한 대로다." 캡틴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척하면서 사실은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스틱스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에게 자이로의 흉계를 말해 줄 수 있다면. "이놈은 당신에게 이야기를 시켜 시간을 끌기만 합니다. 리모르 왕이 옵니다!“ 자이로 박사는 갑자기 긴장해서 말했다. "이놈을 리모르 왕과 이야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서둘러서 그라사이트 케이스에 넣어 버려라." 로지와 카라크는 움직이지 못하는 캡틴을 들어서는 줄지어 있는 케이스의 하나에다 간단하게 처넣어 버렸다. 캡틴은 케이스가 닫혀지자 몸부림쳤다. 그 때문에 투망이 매우 느슨해졌다.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씨익하며 가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찌르는 것 같은 냄새였다. 그리고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움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고 생각하자마자, 온 몸의 힘이 빠지고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토도 같은 운명이 되어, 케이스 안에서 꼼짝 못하게 되어 있었다. 로지는 클라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로봇은 어떻게 합니까? 놈은 호흡을 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움직일 수 없게 할 수 있다. 이놈의 전기 신경 계통은 여기다." 하며 자이로 박사는 원자 권총을 들고, 클라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클라크의 목 아래를 겨누어 쏘았다. 즉시로 클라크의 광전 눈은 빛을 잃고 말았다. 그 때, 보석을 박은 벨트를 한 키 큰 사나이가, 스틱스인 몇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아마 리모르 왕인 것 같았다. 리모르 왕은 그 광경을 보고는 서투른 지구어로 말했다. "또 포로인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 나는 이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아. 우리들은 이 가스를 병의 치료에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이로 박사는 점잖게 대답했다. "이제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계획이 성공하면 이놈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줄 테니까요." 캡틴은 자이로 박사가 자기들을 자유롭게 놓아줄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리모르 왕은 발끈한 듯이 이렇게 말했다. "포로의 일만이 아니다. 당신은 지구인과 명왕성인을 마구 죽이고 있다. 우리들은 피를 흘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종족이다. 나는 살인을 해서까지 당신의 계획이 성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도 피를 흘리는 일은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이제 이 이상은 절대로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 내 계획이 실패하면 더 많은 피가 흐르게 됩니다. 지구인은 노예로 쓸 적은 숫자만 남기고, 나머지 스틱스인을 하나 남기지 않고 죽일 것이니까요." 자이로 박사가 이렇게 말하자, 리모르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당신의 말은 틀리지 않겠지. 그러나 빨리 계획을 끝내길 바란다." "앞으로 5, 6시간 이내에 내가 태양계 정부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위성에 지구인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자 리모르 왕은 찌푸린 얼굴로 줄지어 있는 케이스를 언뜻 보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나갔다. 캡틴은 분했다. 리모르 왕과 이야기를 할 수만 있다면 자이로 박사의 음모를 즉시로 무너뜨리고, 스틱스인을 동료로 만들 수 있을텐데. 그 때, 로지가 텔레바이저가 있는 곳에서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박사! 화성의 뉴스 방송을 잡았습니다. 들어 주십시오." 스크린에 화성인 아나운서가 나타나서 매우 흥분한 투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제 어느 행성에서도 육안으로 똑똑히 암흑성이 보입니다. 태양계 최후의 날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정부를 자이로 박사에게 넘기라고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카슈 대통령은 만약 정부를 자이로 박사에게 넘겨도 이 위기가 구원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캡틴 퓨쳐가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고 있다, 캡틴 퓨쳐를 믿고 겁내지 말라는 현명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캡틴 퓨쳐의 이름을 꺼내도 사람들을 달랠 수는 없습니다. 금성과 수성의 행성 위원회는 자이로 박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안건에 찬성했습니다. 천왕성도 그것에 따를 것입니다. 몇 시간 후에는 다른 행성들도 찬성하게 될 것입니다." 텔레바이저의 스위치를 끄며, 자이로 박사는 뽐내듯이 외쳤다. "드디어 나는 승리했다! 로지, 우주선을 준비해라. 착각 장치를 실은 우주선을 뒤쫓아 옮겨 타라. 만약에 모든 행성 위원회가 나를 대통령으로 할 것을 결정하면 암흑성의 진로를 조금씩 바꿔라. 그리고 내가 태양계의 위기를 구원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다." 자이로 타사와 로지와 카라크는 캡틴 쪽을 비웃듯이 보고는 서둘러 집을 나갔다. 캡틴은 어쩔 수 없이 다만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우주선이 이륙하는 발사음이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자이로 박사가 출발한 것임에 틀림없다. 캡틴은 분했다. 자이로 박사의 음모가 계획대로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캡틴은 음모를 저지할 수 없는 것이다.   암흑성을 추적하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깥이 어두워진 것으로 보아, 몇 시간이 지난 것은 틀림없다. 캄캄해지기 전인데 우주선이 되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이로 박사를 그 암흑성에 보내고 되돌아온 것일 게다. 생각은 뻔한데 몸은 움직일 수가 없으니. 꼭 지옥에라도 있는 것 같았다. 카슈 대통령이 열심히 시간을 끌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것만 같다. 캡틴 퓨쳐가 어떻게 이 수수께끼를 풀어 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는…… 캡틴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악문다. 이제까지도 몇 번이나 절체 절명의 위기를 뚫고 나왔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떤 방법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 때였다. 캡틴은 문틈으로 무엇인가 작은 것이 두려워하며 엿보는 것을 깨달았다. 이이크다, 달의 개 이이크다! 이이크는 어쩌다 도망치기는 했어도 자기들의 뒤를 쫓아온 것임에 틀림없다. 이이크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클라크를 보자, 기쁜 듯이 다가왔다. 그러나 클라크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슬픈 듯이 클라크의 얼굴을 할퀴기 시작했다. 순간 캡틴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번득였다. 그렇다! 자기는 몸은 움직이지 못하지만 생각하는 일, 기도하는 일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이크에게 텔레파시로 명령할 수 있다. 캡틴은 힘차게 눈을 감고 마음을 집중시켜, 이이크를 마음 속으로 불렀다. (이이크 이리 와라, 이리로.) 그러자 이이크는 갑자기 클라크의 얼굴을 할퀴는 것을 그만두고, 캡틴 쪽을 쳐다보았다. 잘 되었구나! 캡틴은 다시 텔레파시로 이이크에게 명령했다. (이이크, 이리로 와라!) 이이크는 천천히 캡틴이 들어가 있는 그라사이트의 케이스 쪽으로 걸어왔다. (이이크, 이 케이스의 밑을 씹어 보아라. 네가 좋아하는 귀금속이 많이 들어있다. 맛있게 먹어 봐라!) 이이크는 순간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라사이트의 케이스의 밑바닥에 코를 비볐다. 그러나 곧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뒤로 물러섰다. 캡틴은 필사적으로 불렀다. (참 맛있다! 먹어 봐라.) 마침내 이이크는 뾰족한 입으로 씹기 시작했다. 끌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다. 간단히 씹을 수가 있다. 그런데 이이크는 문득 씹는 것을 그만두고 성난 것처럼 캡틴을 지켜보았다. 맛있다고 했는데, 조금도 그렇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캡틴은 초조하게 되풀이했다. (더 깊이 씹어 보아라. 그러면 가장 좋아하는 은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씹어라!)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아무튼 해 보자는 듯 이이크는 다시 한번 씹어 보았다. 그와 동시에 씨익 하고 가스가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이크는 이렇게 맛이 없는 것은 처음이라는 듯 캡틴을 보았다. (됐다, 고맙다, 이이크!) 가스가 빠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캡틴은 다시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캡틴은 투망을 벗길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게 되었다. 곧 케이스의 문을 비틀어 열고 밖으로 나왔다. 캡틴은 곧 오토가 들어 있는 케이스에 다가가서 비틀어 열었다. 오토는 자유롭게 되자, 거칠게 중얼거렸다. "나는 영원히 이 속에 처넣어진 채로 있게 될 줄만 생각했어요. 이 원수는 꼭 갚겠어!“ 뒤이어 구출된 존은 울먹이면서 말했다. "오 캡틴, 당신이 반드시 구출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어요!" "존, 오토를 도와서 다른 사람들을 꺼내 주지 않겠어?" 캡틴은 이렇게 말하고, 자기는 살아 있는 뇌 사이먼에게 다가갔다. 몸을 굽히고 발성 장치를 수리했다. 곧 접속이 되었다. 사이먼은 말했다. "잘 했어, 커티스. 그러나 이제는 늦은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커밋 호로 쫓으면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그 전에 클라크를 구출하지 않으면……" 캡틴은 곧 클라크의 목의 덮개를 벗기고 전기 신경 계통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벨트에서 공구를 꺼내서 절단된 배선을 주의 깊게 이었다. 그 순간, 클라크와 광전 눈은 빛나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캡틴? 어떻게 케이스에서 나왔나요?" "이이크 덕택이야. 케이스를 씹도록 텔레파시로 부탁했지." 이이크는 벌써 클라크와 어깨에 기어올라가서 즐거운 듯이 촐랑대고 있었다. 클라크가 큰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라고? 좋아, 상으로 먹고 싶은 대로 은을 먹여 주겠어." 그 동안에도 오토와 존은 케이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모두 꺼내어 자유롭게 해 주었다. 캡틴은 사이먼에게 말했다. "곧 출발하자, 암흑성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우주선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 때 오토가 외쳤다. "스틱스인들이 옵니다!“ "좋아. 곧바로 뛰어 커밋 호로 가자." 캡틴은 이렇게 말하며 자유롭게 된 천문학자들에게로 돌아섰다.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스틱스인은 당신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일이 성공하면 곧 돌아올 겁니다." 스틱스인의 한 사람이 입구에 나타났다. 케이스에서 사람들이 빠져 나온 것을 본 스틱스인은 놀라서 뒤돌아 소리쳤다. "박사, 죄수가 도망쳤어!“ 캡틴은 즉시로 출력을 가장 낮게 한 프로톤 권총을 쏘고는 클라크와 오토에게 외쳤다. "가자! 존, 너는 사이먼을 데리고 와!“ 존은 얼른 사이먼의 케이스를 들고 캡틴의 뒤를 쫓았다. 거리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서치라이트가 교차하고 있었다. 그 속을 털북숭이 스틱스인들이 와와 함성을 지르며 건물 쪽으로 몰려왔다. 캡틴은 외쳤다. "뚫고 나가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단, 권총의 출력은 최하로 내려라!" 캡틴과 오토는 상대방을 마비시킬 정도로 출력을 낮춘 권총을 사방팔방으로 발사하면서, 스틱스인 선두의 무리 속으로 돌진했다. 그 뒤에 사이먼을 안은 존, 그리고 후방은 클라크가 맡았다. 클라크의 목에는 이이크가 달라붙어 있다. 캡틴과 퓨쳐맨들은 점점 늘어나는 스틱스인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프로톤 권총을 발사했다. 그래도 뒤에서 계속 쫓아오는 스틱스인들이 있으면 클라크가 주먹으로 쳐서 쫓아버렸다. 겨우 커밋 호가 있는 흰 숲에 닿았다. 그렇게 거리를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스틱스인이 전쟁을 싫어하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캡틴들이 커밋 호에 도착하자, 발소리를 듣고 우주선 안에서 스틱스인 경비원 두 사람이 뛰어나왔다. 캡틴들은 즉시로 프로톤 권총으로 두 사람을 쓰러뜨리고 우주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조종석에 뛰어들자, 캡틴은 사이클로톤의 기동 스위치를 넣었다. "빨리 이륙해 줘요, 스틱스인들이 와요!“ 오토가 재촉했으나, 캡틴은 싱긋 웃고 나서 조절판 레버를 열었다. 커밋 호는 튕긴 듯이 상승을 시작했다, 그리고 즉시로 반투명의 위장층을 단숨에 뚫고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스틱스의 표면에는 거센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눈부신 별의 한 가운데는 그 암흑성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캡틴은 그 방향으로 진로를 정확하게 잡았다. "저 암흑성을 쫓아서 착각을 지워버리겠어! 태양계의 사람들에게 위기 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거다." 하고 캡틴은 외쳤다. 자이로 박사의 정체   커밋 호는 대단한 작은 흰 점으로 되고 그 대신 환상의 암흑성은 점점 커 갔다. 존이 큰소리를 질렀다. "저것이 착각이라니, 아무리 보아도 진짜여요!" 캡틴은 싱긋 웃었다. "저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곧바로 돌진해 보이겠어." "괜찮겠지요?" 클라크가 걱정스럽게 말했으나, 캡틴은 마치 자폭이라도 하는 것처럼 암흑성을 향하여 스피드를 올렸다. 새까만 암흑성이 정면 가득히 앞을 막고 있었다. 검고 거친 표면이 눈앞에 다가왔다. 충돌한다! 존이 가느다란 비명을 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커밋 호는 그 새까만 표면에 마구 부딪치며 뚫고 나갔던 것이다! 아무런 충격도 없었다. 역시 암흑성은 환상이었던 것이다. 다만 반투명의 층이 어디까지나 커밋 호를 감싸는 것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캡틴은 그 중심부에 반짝이는 금속 덩어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것이 착각을 일으키는 근원인 우주선이다! 자이로란 놈은 저기 있다." 커밋 호는 급상승하여, 그대고 상대의 우주선을 향하여 급강하했다. "오토, 프로톤 포 준비!“ 오토는 눈을 빛냈다. "우주 끝까지 날려버리겠어!“ "잠깐만, 스틱스인도 타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우주선 꼬리를 겨누어 움직이지 못하게만 해. 사격!" 급강하하여 가는 커밋 호에서 푸르고 하얀 광선이 휙 상대방 우주선의 꼬리를 습격했다. "명중!“ 요트가 손뼉을 쳤다. 꼬리의 분사관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적은 즉시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캡틴은 오토에게 명령했다. "우주복을 입어라! 저쪽에 옮겨간다. 클라크도 따라와라!“ 캡틴은 속력을 낮춘 상대의 우주선 뒤에 커밋 호를 바싹 붙였다. 속도를 같게 한 다음 자동 조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오토와 클라크를 데리고 에어록을 지나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재빨리 우주 유영을 하여 즉시 상대의 선체 한복판에 닿았다. "에어록의 문을 열어라. 클라크." 캡틴은 우주복의 무전기로 외쳤다. 클라크는 명왕성의 위성에서 보여 준 것처럼, 손가락 중 두 개를 드릴로 바꾸어 몇 초도 되지 않아 금속제의 선체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 손을 넣어 굉장히 센 힘으로 문을 비틀어 열었다. 캡틴 일행은 에어록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서 캡틴은 스위치를 밀어 안쪽의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클라크와 오토를 거느리고 우주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기다리고 있던 원자총의 빔이 캡틴 일행을 습격했다! 자이로 박사와 로지와 카라크가 몇 미터 앞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의 뒤에는 5, 6명의 스틱스인이 몹시 떨면서 있었다. 그런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은 실로 순간의 일이었다. 원자총의 빔이 번쩍하는 순간 클라크는 캡틴을 옆으로 밀쳐 버렸다. 원자 빔은 캡틴 대신 클라크에게 명중했다. 그러나 클라크의 강철 가슴에서 단지 불꽃만 일어났을 뿐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앞으로!“ 캡틴은 이렇게 외치며 프로톤 권총을 발사하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이놈아!“ 자이로 박사는 미친 듯이 외치면서 캡틴을 향해 비어 있는 원자총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너무나 날뛰는 통에 캡틴의 프로톤 권총의 빔은 자이로 박사의 몸을 스쳤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자이로 박사가 엉망이 된 원자총을 흔들어대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잇던 프로톤 권총이 날아갔다. 이제 어쩔 수도 없었다. 캡틴은 재빠르게 자이로 박사에게 몸을 날리며 손으로 상대의 목을 졸랐다. 자이로 박사는 원자총으로 맹렬하게 캡틴의 머리를 계속 갈겼다.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캡틴은 손을 늦추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자기가 지게 되면 누가 태양계를 구할 것인가. 갑자기 자이로 박사의 미친 듯이 갈기는 힘이 약해졌다고 생각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손이 맥없이 떨어져나갔다. 캡틴이 끝내 승리한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로지는 오토의 프로톤 권총에 당하고, 키라크는 클라크에게 얻어맞아 쓰러져 있었다. 오토가 달려 왔다. "박사 놈은 죽었습니까?" 캡틴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죽었다. 죽일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쪽이 죽게 될 뻔 했으니까." 상대가 아무리 지독한 악당이라고 할지라도 피를 싫어하는 캡틴은 얼굴을 돌렸다. 곧 마음을 가다듬고, 우주선 속을 둘러보았다. 캡틴에게는 아직 남은 일이 있는 것이다 떨고 있는 스틱스인들과 옆이 큰 원통형의 장치가 있었다. 캡틴은 스틱스인들에게 안심하라는 몸짓을 하며 가까이 갔다. "너희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곧 그 장치를 멈춰 주게. 지금 당장." 그것이야말로 환상의 암흑성을 만들어 내는 기계임이 틀림없다. 스틱스인들은 당황해 하며 장치인 레버의 스위치를 조작했다. 캡틴은 얼른 창 밖을 보았다. 그러자 순간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로 그 반투명한 것이 싹 사라져 버렸다. 캡틴은 자이로 박사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후회하면서도 싸움을 끝낸 기쁨을 느끼며 말했다. "태양계의 사람들은 별안간 암흑성이 보이지 않게 되었으므로 당황하고 있을 거야." 거기에 우주복을 입은 존이 사이먼을 안고 들어왔다. 존은 그 착각을 일으키는 장치를 벨트에 단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이로 박사를 보기 위해 왔다. "자이로 박사는, 아니 그림은 죽었나요?" 캡틴은 무거운 마음으로 말했다. "음, 그런데 이 사나이는 모피상의 그림이 아니야." 오토가 외쳤다. "뭐라고요?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형무소장 레인도 아니고, 로머는 죽었으며, 남은 것은 그림만이 아닙니까?" 캡틴은 대답 대신 자이로 박사의 벨트에 있는 장치에 손을 가져가더니 스위치를 돌렸다. 그러자 지구인을 능가하는 자이로 박사는 일순에 사라지고, 거기에는 중년의 그야말로 학자다운 사나이가 쓰러져 있었다. 오토가 외쳤다. "이런 일이? 커얼 로머는 이미 죽었는데요!“ 캡틴은 더욱 우울한 듯이 대 답했다. "그래 로머다. 로머는 죽지 않았다. 저 검게 그을린 시체야말로 실은 빅터 그림이었던 것이다." 어이없어 하는 모두에게 캡틴은 다시 우울한 얼굴로 설명해 주었다. "자이로 박사가 레인임을 입증했던 그 흰 흙의 발자국이 반대로 레인이 자이로 박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그 전에도 말했었지. 그러면 남는 것은 그림과 로머, 두 사람뿐이다. 나는 그 시체를 조사하러 갔을 때, 시체의 주위에 포켓 텔레바이저 같은 잔재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로머는 텔레바이저로 연락하고 있을 때, 원자총인가 그 어떤 것으로 당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 시체는 누군가? 로머가 아니라면, 필경 그림이 아닌가. 그래서 그 시체는 그림에 틀림없다고 추리했던 것이다." 존은 눈이 휘둥그래져 가지고 듣고 있었다. "왜 그림은 살해됐나요?" "아마 빌린 창고를 조사하는 동안 그 비밀 터널을 발견했을 거다. 그래서 거기가 자이로 박사의 비밀 거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로머는 그림을 죽이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자기를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할 나쁜 흉계를 생각해 내었을 거야." 모두는 너무나도 훌륭한 캡틴의 추리에 탄복하고 말았다. 캡틴은 계속했다. "더욱이 로머는 명왕성의 위성을 탐험했기 때문에 그 흰 흙을 입수할 수도 있었고, 로지와 카라크를 졸개로 끌어넣을 수도 있었지. 아무튼 로머는 나쁜 짓에는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나이다." 존이 말했다. "이 악의 천재인 자의 음모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캡틴 당신이기 때문이어요!“ 캡틴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퓨쳐맨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야."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지난 어느 날 저녁의 일. 명왕성의 탈타로스시의 우주 공항에서는 막 커밋 호가 이륙하려 하고 있었다. 캡틴과 퓨쳐맨은 에즈라 사령과 존과 금성의 천문 대장 켄스 케인과 작별 인사를 찬고 있었다. 캡틴은 말했다. "케인 씨, 왜 우리들과 함께 가지 않나요? 커밋 호의 스피드라면 그렇게 멀리 도는 것은 아닌데요." "그렇고 말고요. 나는 당신과 천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사이먼이 이렇게 말하자, 케인은 천만에 라는 듯한 이야기 투로 말했다. "나는 정기선으로 돌아가겠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또 어떤 사건에 휩쓸려 들어갈지 모르는 걸요." 그래서 모두 크게 웃었다. 행성 경찰의 본부 명령으로 남게 된 존은 슬픈 듯이 말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그러나 새로운 위성과 스틱스인의 뒷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요." 캡틴은 끄덕였다. "그렇고 말고. 그 사람들은 지나치게 다른 종족과의 교류를 경계한다. 내가 한 달이나 여기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 캡틴의 노력으로 겨우 스틱스인은 바다에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위장을 풀고, 태양계의 일원이 될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오토와 클라크는 또 이이크의 일로 시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캡틴은 싱긋이 웃고 말했다. "지구에 되돌아가면, 사이먼과 둘이서 이 둘을 얌전히 있게 하는 방법을 실험하려고 생각하고 있어." 사이먼이 말했다. "캡틴, 이제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네 ." 그러자 작별이 섭섭한 듯 존이 말했다. "끝내 작별이군요. 이것만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어요. 태양계 전체의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어요." 캡틴은 곤란하다는 듯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천만에, 나는 다만 모험이 즐거울 뿐이야. 그럼 안녕. 다시 우주의 어딘가에서 만나요!“ 에즈라 사령이 말했다. "또 큰 사건이 일어나면 싫어도 만나게 돼." 이윽고 커밋 호는 굉장한 분사를 남기고 마구 상승해갔다. 존은 커밋 호가 별의 바다 저쪽으로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전송을 했다. 에즈라 사령은 위로하듯이 말했다. "캡틴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캡틴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캡틴도 말했듯이 이제 곧 만나게 되요." "그건 알고 있지만." 존도 역시 우주 개발 경쟁이 심해지는 지금, 캡틴을 필요로 하는 큰 사건이 계속 잇달아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건에 자기도 가담하게 되면, 또 캡틴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캡틴과 퓨쳐맨은 저 북극의 거대한 신호가 부르면 반드시 출동할 것이다. 힘있고 믿음직하게 태양계의 사람들을 위해서 출동하는 것이다. 그 때는……     우주괴인 자이로 박사 SF 세계명작 49   인 쇄      1977년 12월 10일 발 행      1977년 12월 15일 역 자      박홍근 조 판      이우 인쇄사 오프셋 인쇄 장원 정판사 활판 인쇄  이우 인쇄사 제 본      서문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제 2-213호       전화 (26) 1975, (25) 7981    
1091    타임 머신 - H. G. 웰즈 H. G. Wells 지음 댓글:  조회:824  추천:0  2021-03-20
타임 머신 THE TIME MACHINE   H. G. 웰즈 H. G. Wells 지음     H. G. 웰즈 1866년 영국 태생, 베르느와 더불어 세계 SF계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투명 인간", "우주 전쟁 ", "달세계 최초의 사람"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 공학박사 최 인학 문학박사 양 옥룡/이학박사 김 희규 전교육감 김 성묵       책 머 리   여러분은 몇 년 전인 과거의 세계로 되돌아가서 어렸을 때의 자기를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몇 천 년 혹은 몇 만년 후의 미래의 세계로 앞질러 가서 그 변화된 세계를 구경하기도 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미래거나 과거거나 가보고 싶은 시대로 시간을 초월해서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기한 일이 될까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어온 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타임 머신을 발명하여 80만 년 후의 세계에 가본 시간 여행가가 거기에서 겪은 일을 친구들에게 이야기 해 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인데, SF 소설이라기보다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는 이야기라고 절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도 이 타임 머신을 타고 미래의 세계로 시간 여행을 출발해 봅시다.     타임 머신 믿겨지지 않는 일················· 5 다리를 저는 시간 여행가············· 23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34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 43 사라져 버린 타임 머신·············· 62 살며시 다가오는 몰록·············· 96 안전한 잠자리를 찾아서············· 107 성냥과 장뇌·················· 119 타오르는 불·················· 132 열린 스핑크스의 받침대············· 144 괴물 게의 해변················· 151 위너가 준 하얀 꽃··············· 162 끝맺음···················· 170   베디안 심야의 사고·················· 174 미소녀···················· 181 우주인···················· 188   작품 해설··················· 198   등장 인물   시간 여행가 :타임 머신을 발명해 80만년 후의 세계를 여행한다. 그 곳은 놀랍게도 인간이 퇴화되어 있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여행을 떠난 것을 몹시 후회한다. 그 곳에서 위너라는 아가씨를 만나 현대로 데려 오려고 하였으나...... 그 후 또 시간 여행을 떠나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위너 : 강에서 수영하다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었을 때 시간 여행가에게 구조 받게 된다. 그 후 시간 여행가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 무슨 일이건 지속성 없는 미래인이면서도 끊임없이 시간 여행가에게 관심을 표시한다.     믿겨지지 않는 일   시간 여행가(우리들은 그를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는 우리들에게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반짝거리고, 언제나 창백하기만 하던 그 얼굴에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난롯불은 벌겋게 달아 있었고 은으로 만든 백합꽃 모양의 촛대에서는 밝은 불빛이 유리 술잔의 거품을 환히 비쳐 주고 있었다. 우리가 앉은 의자는 그가 고안해서 만든 것으로, 그냥 앉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앉은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방안은 식사를 마친 뒤의 태평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들 거북한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안온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시간 여행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긴요한 점을 가리키면서 얘기를 꺼냈다. 우리들은 의자에 편히 앉은 채, 이 새로운 역설(우리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을 힘들여 말하고 있는 그 진지한 태도와 풍부한 지식에 감탄하고 있었다. "잘 들어주게. 이제부터 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두세 가지 관념을 부정해 보일 테니 말일세. 예를 들면 기하학(도형의 성질 및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이라는 것, 즉 자네들이 학교에서 배운 기하라는 건 틀린 생각 위에 이루어진 것이란 말일세.“ "이건 굉장히 큰 문제부터 시작하는군. 하고 따지기 잘 하는 붉은 머리털의 필비가 말했다. "어떤 일이든 나는 확실한 비유를 들지 않고 자네들에게 인정을 바라지는 않네. 내가 자네들에게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일은 자네들도 이제 곧 이해하게 될 테니까. 자네들도 잘 알고 있겠지만 수학상의 선, 즉 다시 말하면 굵기가 없는 선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걸세. 자네들도 그렇게 배웠겠지? 이와 함께 수학적 평면이란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단지 추상으로 파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렇지.“ 심리학자가가 대꾸했다. "그리고 가로, 세로, 높이 밖에 없는 육면체란 것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그 말에는 반대하겠네." 하고 필비가 입을 열었다. "육면체는 존재할 수 있어. 그리고 실제로 있는 모든 물체는........" "대개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그러나 잠깐 기다리게. 순간적인 육면체란 것이 존재할 수 있겠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걸." 하고 필비는 말했다. "얼마의 시간 동안 존속하지 않는 육면체란 것이 실재로 존재하는가 말이네." 필비는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시간 여행가가 말을 이었다. "실존(현실전인 존재․실재)하는 물체는 모두 네 방향으로 넓이를 가지고 있네. 가로, 세로, 높이, 그리고 지속 시간이지. 그런데도 우리들의 육체의 본질적인 관점에서, 거기 관해선 이제 설명을 하겠지만, 우리들은 이 사실을 항상 잊고 있는 걸세. 사실은 네 개의 차원이 있는데 그 중 셋은 흔히 우리들이 공간의 세 평면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간이네.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세 차원과 시간의 차원 사이에 우리들은 자칫하면 있지도 않은 구별을 하려고 하지. 우리들의 의식은 나서 죽을 때까지 시간에 따라 한 방향으로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야.“ 그건......?“ 젊은 친구가 램프 불에다 꺼진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그건......잘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넘기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 시간 여행가는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실은 이것이 제 4차원의 본래의 의미라는 거야. 세상에는 제 4차원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어. 4차원이란 시간을 다만 다른 각도에서 본 데 지나지 않지만 말일세. 시간과 공간의 세 차원과의 사이에는 우리들의 의식이 시간을 따라 옮겨간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일세. 그런데도 바보 같은 사람들은 이 관념에 대한 그릇된 생각 밖에는 알지를 못한단 말야. 그들이 이 제 4차원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듣지 못했어.“ 하고 이 지방의 시장이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네. 수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듯 이 공간은 세 가지 차원, 즉 가로, 세로, 높이라고 해도 좋을 것을 가지고, 서로 직각으로 이어지는 세 평면에 의해 항상 한정되어 진다는 거야. 그런데 철학자들 중에는 왜 하필 세 평면만 생각하는가, 왜 이 세 직각과 관계 있는 또 하나의 방향을 생각해선 안 되는가 하고 반문해 온 사람이 있었네. 그리고 그들은 4차원 기하학이라는 걸 정립하려고까지 했었네. 뉴컴 교수(1835~1909. 미국의 천체 역학자)가 바로 한 달쯤 전에 뉴욕 수학 협회에서 여기에 대해서 연설을 했었네. 자네들도 알고 있다시피 우리들은 두 차원 밖에 갖지 않은 평면 위에 삼 차원의 물체의 형태를 나타낼 수가 있네. 마찬가지로 3차원의 물체로서 4차원의 물체를 나타낼 수도 있다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 원근법(멀고 가까움을 그림에 표현하는 방법)을 잘 이해 할 수 있다면 말이네, 알겠나?“ "알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시장이 중얼거리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깊이 생각하는 듯, 마치 주문이라도 외는 것 같이 중얼중얼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흠, 알았네.“ 잠시 후 그는 그렇게 말하고 금방 변한 사람처럼 밝은 얼굴이 되었다. "알았으면 된 걸세. 사실 말이지, 나는 요새 한 동안 이 4차원 기하학에 대해 연구를 해 왔다네. 연구 결과에는 꽤 기묘한 것도 있어. 이를테면 여기 어떤 사나이의 여덟 살 때의 사진이 있다고 하세. 또 한 장은 15세 때의 것이고, 17세, 23세, 이렇게 여러 나이 때의 사진이 있네. 이 사진들은 모두가 말하자면 단면이고, 그 사나이의 한결 같이 변하지 않은 4차원적 존재를 3차원적인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네. 과학자는..." 시간 여행가는 지금 자기가 말한 것을 여러 사람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얘기를 계속했다. "시간은 공간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있네. 여기에 통속적인 수학 도표가 있지. 기상도라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선은 기압계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는 걸세. 어제는 꽤 높았지만 밤이 되자 내려가고, 그러다 오늘 아침에는 다시 올라 그 뒤로 서서히 여기까지 올라와 있네. 물론 수은은 일반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공간의 어느 차원에서도 이런 선을 긋지는 않았어. 하지만 착실히 수은은 이런 선을 따라간 거야.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선이 시간의 차원에 따라 옮아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네.“ "그렇군.“ 의사가 난롯불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말했다. "정말 시간이 공간의 네 번째 차원에 불과한 것이라면 어째서 다른 것으로 여기게 됐으며 또 그렇게 생각해 왔을까? 게다가 우리들은 공간의 세 차원 중에서는 돌아다닐 수가 있는데 어째서 시간 속에서는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인가?" 이 말에 시간 여행가는 빙긋이 웃음을 띠었다. "우리들이 자유로이 공간을 돌아다닌다는 건 확실한 것인가? 우리는 좌우로 혹은 앞뒤로 맘대로 갈 수가 있네.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해 왔지. 우리들이 두 차원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하세. 그러나 위아래로는 어떤가. 인력이 우리를 제한하고 있네." "그렇다고만 할 건 아니지.“ 하고 의사가 대꾸했다. "기구가 있어.“ "하지만, 기구가 발명되기까지는 인간은 순간적으로 뜀질을 하여 오르거나 뛰어내리는 일 밖엔 자유로이 상하로 운동을 하지 못했네." "아니야. 조금씩은 아래위로도 운동할 수 있었어." 의사가 말했다. "위로 오르기보다는 내리는 편이 쉽지. 훨씬 쉬워." "그렇지만 시간 속에서는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들은 현재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단 말이네." "여보게, 바로 그것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네. 그리고 온 지상 사람들이 잘못 생각해 온 점이지. 우리들은 항상 현재의 순간으로부터 빠져 나오고 있단 말이야. 우리와 정신은 물질적인 게 아니라서 차원도 갖지 않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정한 속도로 시간 차원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걸세, 만일 우리들의 생존이 지상 100킬로미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려가겠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시간 속을 내려가고 있는 걸세.“ "그런데, 곤란한 일은........" 하고 심리학자가 입을 열었다. "........공간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이게 되지만, 시간 속에서는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단 말이야.“ "나의 대발명도 실은 거기서 생겨난 걸세. 그러나 시간 속을 맘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네. 가령 내가 사진을 특별히 생생하게 생각해 냈다고 하면 나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네. 말하자면 방심 상태가 되어 일순간 그 때로 되돌아가는 거야. 물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 곳에 멈추어 있을 수는 없지. 마치 야만인이나 동물이 땅 위에서 2미터 이상 위에 멈추어 있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문명인은 그 점에 있어 야만인보다는 훨씬 우수하네. 기구를 타고 인력을 이겨내고 올라갈 수가 있으니까 말이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시간 차원에 따라 정지를 하거나 속도를 빨리 하거나 되돌아오거나 반대 방향으로 여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그야 아무리 해 봤댔자......" 하고 필비가 대꾸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하고 시간 여행가는 질문을 했다.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무슨 이치?“ 시간 여행가가 다그쳐 물었다. "말로는 검은 것을 흰 거라고 우길 수도 있지만, 나를 납득시키지는 못하네.“ 하고 필비가 대답했다. "그래도 머지 않아 자네는 내가 4차원의 기하학을 연구한 목적을 알게 될 걸세. 오래 전부터 나는 기계에 대해서 대단한 생각을 갖고 있었어.“ "시간 여행을 하는 기계 말입니까?" 하고 청년이 물었다. "운전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공간과 시간을 날아 어느 쪽으로라도 자유로이 여행을 하는 기계라네." 필비는 서슴지 않고 큰 소리로 껄껄 웃어댔다. 시간 여행가가 말했다. "나는 그걸 실험을 통해서 증명했어.“ "그건 역사가에게 아주 편리한 것이 되겠는데." 하고 심리학자가 말을 이었다. "과거로 여행을 해서, 이를테면 헤이스팅스의 전쟁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해롤드 2세의 앵글로색슨 군을 쳐부순 전쟁)의 기록이 정확한가 어떤가 확인을 하고 올 수가 있을 테니 말이네." "자네가 그런델 갔다가는 눈총을 받거나 푸대접을 받을 것이 뻔해.“ 하고 의사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들의 조상들은 엉뚱한 곳에서 온 사람에 대해서 그다지 관대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네.“ "호머와 플라톤의 입으로부터 직접 그리스말을 배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고 청년이 말했다. "그런 짓을 하다가는 자네는 학위 예비 시험에 낙제하기 알맞을 거네. 독일의 학자들이 그리스말을 개량해 버렸으니 말이지.“ "그리고 또 미래로도 갈 수 있지요.“ 청년이 또 말했다. "이런 건 어때? 돈을 몽땅 예금해 놓고 이자가 붙는 대로 두었다가 자기는 미래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것 말입니다.“ "거기가 만일 공산주의 사회라면 어떻게 되지?" 하고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이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이로군.“ 하고 심리학자가 말했다. “그럴 걸세,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태까지 잠자코 있었던 거야!“ "실험을 통해서 증명을 했다고 했지? 자네는 그걸 증명해 보이겠다는 건가?" 하고 내가 소리쳤다. "실험이라고?“ 벌써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한 필비가 큰 소리로 물었다. "하여간 자네의 실험을 보여 주게. 결과는 뻔한 것이겠지만.“ 심리학자가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시간 여행가는 싱긋이 웃으며 우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여전히 가느다란 웃음을 띄우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천천히 방을 나갔다. 연구실로 통하는 긴 복도를 타닥타닥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뭘 만들었다는 걸까?" 심리학자가 우리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괴상한 요술 같은 것이겠지.“ 의사가 대답했다. 필비는 노천 극장에서 구경한 요술쟁이의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아직 앞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시간 여행가가 돌아왔다. 그래서 필비의 모처럼의 얘기는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시간 여행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탁상시계 정도의 크기로 된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 세공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상아와 무언지 투명한 결정체(안정하여 일정한 형태를 이룬 물체)가 사용된 것이었다. 이제 여기서 미리 양해를 얻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이제부터 일어난 일은, 만일 그의 설명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전혀 설명할 길이 없는 일들이다. 그는 방 안 여기 저기에 놓여 있는 8각형의 작은 테이블 하나를 가져다가 난로 앞에 두 다리를 얻을 수 있도록 놓았다. 그리고는 그 테이블 위에 지금 말한 기계를 놓고 의자를 다가앉았다. 이 기계 외에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은 갓이 있는 소형 램프 뿐으로, 그 밝은 불빛이 이 모형을 환히 비춰 주고 있었다. 방에는 열 두 자루 가량의 양초가 있어서 두 개는 난로 위의 선반 위에 있는 놋쇠 촛대에 켜 있고, 몇 자루는 벽에 붙은 촛대에서 타고 있어서 방안은 환하게 밝았다. 나는 난로에 제일 가까운 안락 의자에 앉아서 그 의자를 시간 여행가와 난로 사이로 끌어갔다. 필비는 시간 여행가 뒤쪽에 앉아 그의 어깨너머로 넘겨다보고 있었다. 의사와 시장은 오른쪽에서 시간 여행가의 옆얼굴을 지켜보고, 심리학자는 왼쪽에서 보고 있었다. 청년은 심리학자 뒤에 서 있었다. 우리들은 모두 주의해서 지켜보았다. 이런 데서라면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감쪽같이 한다고 해도 속임수를 쓸 순 없을 것 같았다. 시간 여행가는 우리들을 한 번 휘돌아 본 뒤에 다시 그 기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어떻게 하는 건가?" 하고 심리학자가 물었다. "이 작은 기계는......?" 시간 여행가는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기계 위에서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단지 모형에 지나지 않네. 기계에게 시간 속을 여행하게 하려는 것이 나의 계획이라네. 자네들도 눈치 챘겠지만 이 기계는 이상스럽게 비뚤어져 있고, 이 가로지른 막대 근처가 묘하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물건이 아닌 것 같을 걸세." 그는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키며, “여기 조그만 흰색 레버 (지렛대)가 있고 이쪽에도 하나 있네.“ 의사는 의자에서 일어나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곱게 된 거로군." 하고 그는 말했다. "만드는데 2년이 걸렸다네." 시간 여행가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모두들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자, 이제 자네들에게도 잘 알아 달라고 하는 거지만, 이 레버를 누르면 기계는 미래를 향해 날아가고, 이쪽 레버를 누르면 반대로 운동을 하네. 이 걸상은 시간 여행자가 앉는 자리야. 이제 내가 이 레버를 누르면 기계는 날아가 보이지 않게 될 걸세. 미래 세계로 날아가서 사라져 버릴 걸세. 잘 보아주게. 테이블을 잘 보고 있어서 속임수 같은 게 아님을 잘 보아달란 말이네. 이 모형을 없애 버리고도 사기꾼으로 불리는 일이 있어선 난 못 견디게 되니까 말야.“ 한 1분쯤 시간이 흘렀다. 심리학자는 내게 말을 하려는 듯하더니 그만 두는 것 같았다. 시간 여행가가 레버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니야.“ 그는 별안간 말했다. "자네가 해 주게.“ 시간 여행가는 심리학자를 돌아보며 그의 손을 잡더니 손가락을 내밀라고 했다. 이리하여 타임 머신의 모형을 끝없는 여행의 길에 띄워 보낸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심리학자, 그 사람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레버가 도는 걸 보았다. 진정 속임수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휘익 바람이 일더니, 램프 불이 흔들거렸다. 난로 위 선반에 있는 촛불 하나가 꺼졌다. 작은 기계는 갑자기 돌기 시작하더니 희미해져서 1초 동안쯤 유령이나, 희미하게 빛나는 놋쇠와 상아의 소용돌이처럼 보이다가 휙 사라져 버렸다. 테이블 위에는 램프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한 1분 동안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필비가 말했다. "정말 놀랬다!“ 심리학자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제 정신이 나자, 재빨리 테이블 밑을 들여다봤다. 그걸 보고 시간 여행가는 통쾌하게 웃었다. "그래 어떤가?“ 하고 그는 조금 전의 심리학자의 말투를 흉내내어 물었다. 그리고는 일어나 선반 위에 있는 담배 갑에서 파이프에 담배를 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말 제 정신으로 그 기계가 시간 여행을 떠났다고 믿고 있나?“ 의사가 말했다. "물론!“ 시간 여행가는 한 마디로 대답하고 허리를 굽혀 난롯불을 불쏘시개에 옮겨 붙였다. 그리고는 뒤돌아 서서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심리학자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심리학자는 침착한 것처럼 보이려고 담배를 집어들었으나 거꾸로 물고 불을 붙이려 했다. "그리고 저기엔 거의 다 완성이 된 진짜 기계가 있다네.“ 하며 시간 여행가는 연구실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완성이 되면 내가 직접 시간 여행을 떠날 작정이네. 자네는 아까 그 기계가 정말 미래를 향해 갔다고 생각하나?“ 하고 필비가 말했다. "그것이 미래인지 과거인지 확실한 것은 잘 모르지만.“ 잠시 후 심리학자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어디로 갔다면 과거로 간 게 틀림없을 거야." "어째서?“ 하고 시간 여행가가 물었다. "가령, 그것은 공간을 움직여 가지는 않는다고 하고, 만일 미래로 갔다고 한다면 아직 여기에야 할 것일세. 지금의 시간을 지나갈 것이니까." "그렇지만 만일 과거로 갔다고 하면 우리들이 그 방에 들어왔을 때에도 보였을 게 아닌가? 지난 목요일 날, 여기 왔을 때에는 물론이고 전전 주의 목요일에도, 그 전의 목요일에도!“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참 어려운 문제로군." 시장이 막연하게 말하며 시간 여행가를 바라보았다. 시간 여행가는, "조금도 어려울 건 없어.“하며 심리학자를 향해 말했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자네라면 설명이 되겠지. 그 기계는 식역 (어떤 의식 작용의 발생과 소실과의 경계) 아래의 표상이지. 알겠나? 희박하게 해서 나타낸 표상이란 말일세." "물론 그렇지.“ 하고 심리학자는 말하고 나서 우리들에게 대해서 보증이라도 하는 듯이 말했다. "심리학에서는 쉬운 문제야. 깜박 잊고 있었어. 간단히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로써 그저 역설(언뜻 보면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속에 일종의 진리를 품은 말)도 훌륭히 설명이 되네. 우리는 그 기계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거야. 돌아가고 있는 차바퀴의 바큇살이나 공중을 날아가는 탄환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만일 그 것이 우리보다 50배나 100라 해도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하면, 또 만일 우리가 1초 나아갈 동안에 1분이나 나아간다고 하면, 그 기계의 인상은 멈춰 있을 때의 인상의 50분의 1이나 100분의 1이 될 걸세. 지극히 명료한 일 아닌가!“ 그는 기계가 놓여 있던 공간에서 손을 저어 보이고는, "어때, 알겠는가?“ 하며 웃음을 지었다. 우리들은 자리에 앉은 데로 1분쯤 빈 테이블 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시간 여행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우리들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엔 꽤 당연한 것 같이 들리지만........" 하고 의사가 말했다. "내일까지 기다려 주게. 아침이 되어 올바른 생각이 되살아날 때까지 말이네.“ "진짜 타임 머신을 구경하겠나'?" 시간 여행가가 우리들을 보고 물었다. 그리고는 램프를 들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긴 복도를 지나 연구실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갔다. 나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흔들리는 램프 불빛에 그의 기묘하게 큰 머리의 그림자가 펄럭이고 있었던 것을. 우리들은 모두 여우에게 홀린 듯한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연구실에는 아까 우리들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조그만 기계를 아주 커다랗게 확대해 놓은 것 같은 기계가 놓아져 있었다. 니켈과 상아의 부분품이 붙어 있고, 결정의 덩어리를 줄로 갈고 자르고 한 부분품도 있었다. 기계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지만 비틀어진 결정의 막대기가 몇 개 아직 덜 되어 몇 장의 도면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좀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 중의 한 개를 집어들었다. 석영인 듯 했다. "이보게 자네......?" 의사를 불렀다. "자네는 지금 제 정신인가? 아니면 이건도 트릭(속임수)인가?......하긴 크리스마스 때 자네가 보여 준 그 유령처럼 말이네.“ "이 기계를 타고........" 하며 시간 여행가는 램프 불을 높이 쳐들며 말했다. "나는 시간을 여행할 작정이야. 알겠나? 세상에 나서 난 아직 이렇게까지 진심이 되 본 일은 없었네.“ 우리들은 누구나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의사의 어깨 너머로 필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한쪽 눈을 찔끔해 보였다.   다리를 저는 시간 여행가   그 때, 우리들은 누구나 타임 머신을 엉터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왜냐 하면 시간 여행가는 너무나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신용하기 어려운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진실한 것을 알 수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굽히거나 가리지도 않는 솔직함 뒤에는 무언지 우리들에게는 엉뚱한 계획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만일 필비가 그 모험을 가리켜, 시간 여행가가 말한 대로의 말로 실행했다고 가정하면 우리들도 그렇게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비라면 곧 그는 동기가 어떤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 여행가에게는 여러모로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어서 아무래도 쉽게 신용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 한 일이라면 당연하게 생각될 것 같은 일도 그가 하면 속임수 같이 보이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너무 쉽게 해 내는 것은 사실 좀 생각할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나중에 창피를 당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애들 방에 얇은 도자기를 놓아두는 것처럼 불안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다음 목요일까지 시간 여행에 대한 일은 되도록 입에 올리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구나 마음속으로는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면서도......시간 여행이란 사실 그럴 성싶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겠지. 혹시 가능하다면 대단한 혼란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나 자신은 그 모형이 속임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금요일에 동식물 학회에서 의사와 만나 말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는 츄우반겐(독일의 지명)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본 일이 있다고 하며 촛불이 꺼진 점에 특히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속임수의 방법에 대해서는 그로서도 설명하지 못했다. 다음 금요일, 우리는 다시 리치먼드로 갔다. 나는 시간 여행가를 제일 잘 찾아가는 손님중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찾아 간 시간이 늦었으므로 벌써 4,5명의 손님이 객실에 모여 있었다. 의사가 한 손에 종이 조각을, 다른 한 손에 시계를 쥐고 난로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시간 여행가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벌써 일곱 시 반이야.“ 의사가 말했다. "저녁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 갔어?“ 하고 나는 물었다. "이제 왔군. 좀 이상한 일인 있네. 그 친군 부득이한 일이 있어 좀 늦는 모양이야. 이 종이 쪽지에 일곱 시까지 오지 않거든 저녁 식사를 시작하라고 적어놨네. 늦은 까닭은 와서 얘기하겠다는 거야.“ "음식 맛이 없어지겠는데.“ 하고 신문사의 편집장이 말했다. 이리해서 의사가 초인종을 눌렀다. 요전번 식사 때 와 있던 사람으로는 의사와 나 밖에는 심리학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 말에는 지금 말한 편집장 브랑크와 신문 기자와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내가 모르는 수염을 기른 조용한 내성적인 사나이였다. 이 사나이는 그날 밤 한 입도 열지 않았다. 시간 여행가가 자리에 없는데 대해서는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얘기가 있었다. 나는 농담 삼아 시간 여행을 떠난 게 아닌가 하고 말했다. 편집장은 그렇게 생각하는 까닭을 말해 달라고 했다. 심리학자가 자진해서, 전 주일 여기서 본 일들을 서투른 말솜씨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쯤 얘기가 진행됐을 때 도어를 밖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나는 도어를 향해 앉아 있어서 맨 먼저 그걸 알았다. "여, 이제 왔군.“하고 내가 소리쳤다. 도어가 더 열리더니 시간 여행가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놀란 소리를 쳤다. "아니 어찌된 일인가?" 의사도 알아보고 소리쳤다.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도어 쪽을 돌아다보았다. 시간 여행가는 아주 형편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웃옷은 먼지와 흙투성이가 되 있었고 소매는 초록색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머리칼은 헝클어지고 그 전보다 더 흰머리가 많아 보였다. 먼지와 흙이 묻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흰머리가 많아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얼굴빛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턱에는 갈색의 상처가 있었다. 게다가 얼굴은 심한 고통을 받고 온 사람처럼 홀쭉하게 야위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잠깐 도어에서 등불이 눈에 부신 듯 잠시 멈춰 서 있었다. 그러다가 방안으로 들어왔는데 다리를 다친 부랑자처럼 절뚝거렸다. 우리들은 말없이 그를 지켜보며 먼저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괴로운 듯 테이블 쪽으로 가서 포도주 잔에 손을 내밀었다. 편집장이 샴페인을 따라 그에게 밀어 주었다. 그 술을 마시자 얼마간 기운이 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얼 하고 왔는가?" 하고 의사가 물었다. 시간 여행가는 그 소리를 못들은 듯, “자, 식사를 계속하게." 그는 약간 더듬거리며 말하고, "이젠 괜찮아.“하고는 더 달라는 듯이 잔을 내밀었다. 편집장이 또 따랐다. 그는 이번에도 단번에 죽 들이켰다. "맛 좋다.“ 그의 눈은 맑아지고 볼에도 희미하게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들의 얼굴을 죽 둘러보고 만족한 듯이 가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뜻하고 아늑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할 말을 하나하나 찾는 듯이 느릿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네. 그리고 나서 얘기를 하지. 그 닭고기를 조금 남겨 놔주게. 고기에 굶주렸어.“ 그는 오래간만에 찾아 온 편집장 쪽을 보고, "잘 있었는가?“ 하고 인사를 했다. 편집장이 곧바로 질문을 시작하려 했다. "이제 곧 얘기할 거야.“하고 시간 여행가는, "아직 좀 이상해. 하지만 곧 좋아질 거야." 하고 말하고는 술잔을 놓고 이층으로 통하는 도어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그가 다리를 절고 있는 데도 그의 발이 타박타박 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는 그의 발을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다 낡아빠진 양말 밖에는 아무 것도 신고 있지 않았다. 도어가 그의 뒤에서 닫혔다. 나는 그를 뒤따라 가보려고 했으나 그가 지나친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성미인 것을 생각했다. 나는 1분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유명한 과학자의 별난 행동'이라고 지껄이는 편집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항상 버릇으로 신문 기사의 제목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불빛 밝은 저녁 식사의 테이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체 어떤 일을 하고 온 걸까요?" 하고 신문 기자는 물었다. "풋내기 거지 흉내라도 내고 왔다는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나는 심리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짐작했다. 나는 아픈 듯이 다리를 절며 2층으로 올라가는 시간 여행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 밖에는 아무도 그가 절뚝거리는 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놀라움에서 맨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의사였다. 그는 초인종을 눌러 - 시간 여행가는 식사 때 하인이 옆에 있는 걸 싫어했었다 - 따뜻한 요리를 가져오게 했다. 그제야 편집장은 중얼중얼하며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말없는 사나이도 같이 따라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식사가 다시 시작됐다. 잠시 동안은 모든 사람의 얘기가 시간 여행가에 대한 것으로만 오갔다. 편집장은 호기심을 참지 못해, "우리들의 친구는 수입이 적다해서 거지 노릇을 하여 생활에 보태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네부카드넷 쟈르왕(기원전 605(?)~562(?). 바빌론의 왕으로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태인을 포로로 했음) 같은 데가 있다는 건가?“ 하고 말했다. "이건 타임 머신과 관계가 있는 것 같군.“ 내가 이렇게 말하고 며칠 전 모임에서 심리학자가 한 말을 얘기했다. 새로 온 손님들은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편집장은 희롱조로 말했다. "시간 여행이란 뭔가? 아무리 역사 속을 굴러 다녔다 해도 흙먼지 투성이가 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는 이런 익살이 맘에 든 듯, "미래 세계에는 양복 솔도 없는가 보군." 하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신문 기자도 전혀 믿으려 하지 않고 편집장과 한 통속이 되어 무조건 농담으로 돌렸다. 그들은 둘 다 새로운 형의 저널리스트(언론인)로 아주 명랑하고 남을 깔보는 데가 있었다. "내일 모래, 본사 특파원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문 기자가 지껄이기 시작했을 때 시간 여행가가 돌아왔다. 그 전처럼 야회복으로 갈아입고 피로해진 얼굴 이외에는 아까 나를 놀라게 한 모습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편집장이 농담조로 말했다. "이 친구들의 말이 자네는 내주 중까지 여행을 하고 왔다면서? 꼬마 노두즈버리 (1847~1929. 당시의 영국 수상)가 어떻게 하고 있던가 말해 주지 안겠나? 얼마를 내면 되겠나?“ 시간여행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위해 남겨 놓은 좌석에 앉았다. 그는 평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내 양고기는 어디 있나?" 하로 그는 감격한 듯이 말했다. "다시금 고기에 포크를 대게 되다니 참 다행한 일이야.“ "얘기는?" 편집장이 큰 소리로 물었다. "얘기 같은 건 그만 두어라." 하고 시간 여행가는 말했다. "우선 뭘 먹어서, 배가 부르기까지는 한 마디도 안 한다. 어, 고맙네. 소금도 좀." "한 마디만 해 주게. 자넨 시간 여행을 하고 왔는가?" 내가 물었다. "음" 시간 여행가는 입에 가득 요리를 넣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편집장이, "자네의 이야기 1행에 1실링씩 지불하겠네." 하고 농담을 했다. 시간 여행가는 빈 술잔을 말없는 사나이 쪽으로 내밀고 손톱으로 쳐서 달가닥 소리를 냈다. 말없는 사나이는 시간 여행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좌중은 흥이 깨져 버렸다. 나는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자꾸 목구멍에서 나오려는 걸 참고 있었는데, 그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시간 여행가는 먹는데 열중하여 한참 입으로 고기를 밀어 넣기에 바빴다. 의사는 담배를 피며 가는 눈으로 시간 여행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는 사나이는 아까 전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자꾸만 샴페인만 따라서는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드디어 시간 여행가는 빈 접시를 앞으로 내밀고 우리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실례했네.“ 하고 그는 말했다. "하마터면 굶어 죽을 뻔했네, 정말 지독한 꼴을 당했어.“ 그는 담배를 손에 들고 불을 붙였다. "우리, 휴게실로 가지 않겠나? 지저분한 그릇들을 앞에 놓고 앉아서 하기엔 너무나 얘기가 길어.“ 그리고는 나가는 길에 벨을 누르고, 일동을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벌써 프랑크와 대시와 초즈에게도 타임 머신에 대한 얘기를 해 줬는가?" 그는 안락 의자에 앉으면서 새로운 손님들의 이름을 물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얘기였겠지." 하고 편집장이 먼저 대답했다. "오늘밤은 토론은 질색이다. 자네들에게 얘기해 주는 건 좋지만 토론은 싫단 말일세." 하고 시간 여행가는 말을 계속했다. "자네들이 원한다면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겠네. 그렇지만 쓸데없는 말참견은 말아주게. 나는 굉장히 얘기하고 싶네. 이 얘기는 정녕 거짓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네. 하지만 이건 사실이야, 어디서 어디까지도. 나는 4시에 연구실에 있었네. 그리고 그로부터......8일이 지났어. 일찍이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8일간이었어. 나는 이젠 녹초가 됐다. 그렇지만 이 얘기를 자네들에게 다해버릴 때까지는 도저히 잠을 잘 수는 없어. 침대에는 얘기가 끝난 후에 가기로 하겠네. 얘기에 방해는 말아 주게. 알겠나?" "알겠네, 방해할 까닭이 없지." 하고 편집장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입을 모아 달했다. "염려 말게.“ 여기서 시간 여행가는 앞으로 말하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의자에 기대앉아서 피곤한 사람 모양으로 말하고 있었으나 곧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 얘기를 쓰면서 나는 그 멋지고 훌륭한 것을 나타내기에는 펜과 잉크의 힘이 모자람을, 더욱이 나 자신의 표현력이 모자람을 절실히 느꼈다. 여러분은 주의 깊게 읽어 주리라 믿지만, 조그만 램프 불빛 속에 떠오른, 창백한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그 목소리의 가락도 들을 수가 없었다. 얘기에 따라 변하는 그의 표정을 알 수도 없었다. 우리들 듣는 사람들은 대개 불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있었다. 휴게실에는 촛불이 켜 있지 않았기 때문에 램프 불빛을 받고 있는 것은 신문 기자의 얼굴과 말없는 사나이의 무릎에서 아래쪽 다리뿐이었다. 우리들은 처음에는 때때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지만 조금 후부터는 시간 여행가의 얼굴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지난 주 목요일, 나는 자네들 몇 사람에게 타임 머신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연구실에 놓아둔, 아직 미완성의 실물을 보여 주었다. 그건 지금도 거기 있다네. 한 번 여행을 하고 왔기 때문에 조금 고장이 났지만, 상아 막대기가 하나 부러지고 놋쇠로 된 손잡이도 하나 구부러져 버렸네. 그밖에 다른 것은 괜찮네. 나는 그걸 금요일까지 완성할 계획이었지. 그런데 금요일이 되어 조립이 거의 끝나고 나서 보니, 니켈 막대기 하나가 꼭 3센티미터 짧은 걸 발견했지. 그래, 그걸 다시 고쳐 만들다보니 타임 머신이 완성된 것은 겨우 오늘 아침이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타임 머신이 작동을 시작한 것은 오늘 아침 열 시였다. 나는 최후의 점검을 하고, 다시 한 번 모든 나사못을 조사하고 각 부분에 조금씩 기름을 치고 나서 드디어 의자에 올라앉았다. 그 때의 나의 기분은 자살하려는 사람이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자 이제부터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의 기분과 같았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한 손으로 발진 레버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정지 레버를 잡았다. 먼저 발진 레버를 누르고 거의 동시에 정지 레버를 눌렀다. 머리가 어찔어찔한 것이 꼭 높은 데서 떨어져 내리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구실은 그냥 그대로였다. 이건 어찌된 일인가? 지금 그 느낌은 기분 탓이었을까? 나는 퍼뜩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건 열 시나 열 시 1분 조금 지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벌써 3시 반 가까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발진 레버를 다시 한 번 눌렀다. 연구실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해지고 주위가 어두워져 왔다. 가정부 와젯이 들어와서 뜰 쪽으로 난 도어로 향해 걸어갔는데 나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방을 가로질러 가려면 1분쯤 걸릴 텐데 마치 로켓처럼 휙 날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레버를 최대한으로 눌렀다. 마치 램프 불을 불어 끈 것처럼 깜깜한 밤이 되었다. 앗! 하는 사이에 아침이 되었다. 연구실은 희미하게 안개가 낀 것 같이 보였고 그 때부터 점점 더 희미해져 버렸다. 이내 밤이 되어 사방이 어두워지고 그리고는 다시 낮이 되고, 또 밤이 되고 낮이 되고......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지. 내 귀에는 웅웅 소리만 끊임없이 들려왔고 이상하게 답답한 혼란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시간 여행을 할 때의 그 기묘한 느낌을 도저히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몹시 역겨운 기분이었다. 제트 코스터를 타고 머리를 쳐 박힐 듯이 달릴 때의 느낌과 꼭 같았다. 나는 당장에라도 무엇과 충돌해서 산산조각이 되지나 않나 하는 불안감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더 밤과 낮이 바뀌어지는 것이 빨라졌다. 흐릿하게 보이던 연구실도 드디어 사라져 버리고 태양이 휘익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1분 동안마다 보였는데 그 1분 1분이 하루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 연구실이 부서져서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이미 무섭게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장 걸음이 느린 달팽이까지도 굉장한 속도로 달려가 버리기 때문에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밝은 빛과 어둡고 깜깜한 빛이 잇달아 바뀌므로 눈이 몹시 아팠다. 그 토막토막 지나가는 어둠 속에 달이 빙글빙글 맴을 돌며 초생달에서 보름달로 변해 가는 것이 보이고 별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 아련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드디어 다시 속도가 더해짐에 따라 휙 휙 바뀌던 밤과 낮이 한데 뒤섞여 한 줄로 이어져 회색이 되었다. 하늘은 새벽 하늘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색으로 변했다. 태양은 하나의 띠가 되어 공간에 밝은 아치를 그리고, 달은 가늘게 흔들리는 것처럼 되었다. 별은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이따금 푸른 하늘에 밝은 테가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주위는 안개가 낀 것같이 희미할 뿐이었다. 나는 아직 이 집이 서 있는 언덕 중턱에 있으므로 언덕 꼭대기가 회색으로 부옇게 머리 위에 보였다. 나무들은 마치 김을 뿜어내듯이 자라서 갈색과 초록으로 번갈아 색깔이 바뀌어지며 계속 성장하여 가지를 뻗고 떨다가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큰 건물이 쑤욱 나타났다가는 꿈처럼 사라져가기도 했다. 지구의 표면이 온통 달라져 버린 것 같이 생각되었다. 내 눈앞에서 녹아 흘러가는 것이었다. 속도계 다이얼의 작은 바늘이 점점 더 도는 속도가 빨라져갔다. 이윽고 태양의 띠는 1분 정도로 하지에서 동지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 것은 타임 머신의 속도가 1분간에 1년 이상을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분마다 흰 눈이 땅을 뒤덮었다고 생각하면 금방 봄의 밝은 초록색으로 뒤덮이는 것이었다. 출발한 때의 그 역겨운 기분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몹시 들뜬 것 같은 기분으로 변해져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계가 흔들리는 그 이상한 느낌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리는 완전히 혼란해 있었으므로 그런 것쯤은 조금도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발광 상태로 미래를 향해 비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한동안은 사고력이 없어졌는지 기계를 정지시킬까, 아니면 언제까지 계속 진행시킬까 하는 생각이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리는 최초로 느끼게 된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내 마음속에는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종의 호기심과     공포감 같은 것이리라. 그래서 나는 기어코 이 두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되어 버렸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 눈앞을 달려가는 이 희미하고 붙잡을 길 없는 세계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떨까? 인류는 어떤 정도로 훌륭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일까? 내 주위에는 크고 멋진 건물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현재의 어느 건물보다도 훨씬 더 컸지만, 마치 희미한 빛과 안개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언덕은 풍부한 초록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것은 겨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 머리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구는 대단히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기계를 정지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나와 기계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는 무슨 다른 물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무서운 속도로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내 몸은 말하자면 희박해져서 방해물 사이를 바람과 같이 지나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를 정지시키게 되면 사정은 달라져서 내 몸의 분자는 도중에 있는 방해물의 분자와 충돌하게 된다. 내 원자는 방해물의 원자와 충돌해 큰 화학반응, 아마도 굉장한 폭발을 일으켜 내 몸도 기계도 모든 차원으로부터 미래 세계로 날아가 버리게 될 것이다. 여기 대해서는 이 기계를 만들고 있을 때에도 여러 차례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걸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나이라면 마땅히 맞서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위험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엔 그 위험이 내 앞에 닥쳐온 것이다. 그러니까 전에 생각한 것처럼 태평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실 모든 것이 전혀 첫 경험이었다. 더구나 기계는 기분 나쁜 흔들림을 하기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도 했다. 특히 언제까지나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나의 신경은 아주 이상해졌다. 나는 타임 머신을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홧김에 도리어 당장 정지시켜 보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 급히 정지 레버를 와락 잡아 당겼다. 그러자, 기계는 심하게 돌기 시작하고 나는 휙 공중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귀에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한 동안 실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신이 들어 살펴보니 우박이 섞인 비가 한참 내 주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나둥그러져 있는 타임 머신을 앞에 두고 보드라운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아직도 회색으로 보였지만 그 듣기 싫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사방을 둘러 봤다. 그 곳은 철쭉꽃이 울타리처럼 무성한 정원 안의 조그마한 잔디밭 같았다. 연보라와 자줏빛 꽃이 우박을 맞아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우박은 되튕겨 오르기도 하고 춤추듯이 뛰기도 하면서 타임 머신 위에 쏟아져 땅 위에 연기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는 금새 흠뻑 젖어 있었다. "훌륭한 대접이로군.“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오랜 세월을 두고 너를 만나러 왔는데도.........." 이윽고 나는 바보처럼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언가 거대한 석상이 철쭉꽃 주위의 소나기 빗발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의 내 기분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네. 커튼 모양으로 내리고 있던 우박이 좀 엷어짐에 따라 흰 석상이 또렷이 보여졌다. 무척 큰 것으로, 옆에 있는 은빛 자작나무가 그 어깨 근처까지 밖에 닿지 않았다. 이 석상은 흰 대리석으로 되 있었고, 날개를 가진 스핑크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날개는 양쪽 겨드랑이에 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날아오르려는 듯 떨리고 있었다. 석상 받침대는 청동으로 만든 것 같았고 두껍게 녹이 나 있었다. 그 석상의 얼굴은 나를 향하여 보이지 않는 눈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석상은 비바람에 많이 상해서 중한 병에라도 걸린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잠시 서서 석상을 바라보았다. 석상은 우박 섞인 비가 세게 오다 가늘게 오다 하는데 따라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났다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드디어 나는 잠깐 석상에서 눈길을 돌렸다. 우박 비의 커튼이 엷어져서 하늘은 해가 나타날 듯이 밝아져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이 여행의 무모함을 깊이 느꼈다. 이 우박의 장막이 완전히 걷히고 나면 도대체 어떤 것이 나타날 것인가? 인류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만일 아주 잔인하게 변해 버렸다면......? 만약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비인간적이고 난폭하고 게다가 무섭게 힘이 센 것으로 변해 버렸다면......? 아니 그들이 나를 볼 때 옛 세상의 야만적인 동물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무섭고 기분 나쁜 것으로 여겨져서 당장 죽이려고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박비가 그침에 따라 다른 큰 건물들의 뒤편 난간과 둥근 기둥이 높이 솟아있는 거대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숲에 뒤덮인 언덕의 비탈도 훤히 나타났다. 나는 더럭 겁이 나서 미친 사람처럼 타임 머신으로 달려가 무작정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그러자 이 때 햇볕이 비구름 사이로 비쳐 왔다. 회색 우박은 쫓겨나서 유령의 긴 옷자락처럼 사라져 갔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여름 하늘의 진한 푸르름 속에 엷은 갈색 구름 송이가 빙빙 돌며 사라져 가고 있었다. 주위의 큰 건물은 아까 비에 젖어서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우박들이 쌓여 있는 곳은 한결 희게 보였다. 나는 미지의 세계에 알몸뚱이로 내동댕이쳐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솔개에게 붙잡힐지도 몰라 겁에 질린 채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작은 새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두려움에 나는 미칠 것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를 악물고는, 손과 발로 힘껏 타임 머신을 끝어 일으키려고 했다. 한사코 힘을 쓴 덕택에 타임 머신을 제대로 일으킬 수 있었으나 그 바람에 나는 턱을 기계에 긁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나는 한 손을 좌석에 걸치고 또 한 손으로는 레버를 잡고 헐떡거리며 올라타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게 되고 나니 다시 용기가 났다. 나는 좀더 주의 깊게 대담히 이 머나먼 미래의 세계를 둘러보았다. 가까운 건물 위의 둥근 창으로부터 사치스런 엷은 옷을 입은 한 떼의 사람들이 내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는 듯 이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 때, 내게로 가까이 오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흰 스핑크스 옆 수풀을 헤치며 달려오는 사람의 머리와 어깨가 보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나와 타임 머신이 놓여 있는 작은 잔디밭으로 바로 이어져 있는 오솔길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건 멀쩡하게 생긴 인간(아마 1미터 20센티미터 가량의 키였을 것이다.)으로 자줏빛 옷을 입고 팔목에 가죽띠를 하고 있었다. 발에는 샌들인지 가죽 구두(어떤 쪽인지 알 수 없었다.)를 신고 있었다. 다리를 무릎까지 내놓고 머리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알았지만, 이 곳은 아주 따뜻한 기후였던 것이다. 그 사나이는 몹시 우아했지만 여간 약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어슴푸레하게 홍조를 띤 얼굴은 꼭 폐결핵 환자를 연상시켰다. 흔히 말하는 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를 보고 나는 갑자기 자신이 생겼다. 나는 타임 머신에서 손을 떼었다.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   다음 순간 나는 이 미래 세계의 연약한 인간의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는 똑바로 이쪽으로 다가와서 내 눈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태도에는 나를 무서워하는 것 같은 데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나는 뜻밖의 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따라온 다른 두 사람을 돌아다보고 극히 달콤하고 부드럽고 묘한 말로 얘기를 걸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여 와서 어느덧 내 주위는 여덟 명인가 열 명인가 되는 날씬한 사람들로 조그만 무리를 이루었다.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나는 갑자기 내 목소리가 그들에게는 너무나 사납고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 귀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서 조금 망설이다가 내 손을 만졌다. 다른 사람들도 보드랍고 작은 손으로 내 등과 어깨를 만지는 걸 깨달았다. 내가 실제로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경계해야 할 아무런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사실 이 작고 귀여운 인간의 모습에는 나를 안심시키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고상한 부드러움과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함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너무도 연약해 보였기 때문에 한 열 명쯤이 떼를 지어 덤벼든다고 해도 볼링의 공을 던지듯 내던져 버릴 수 있을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이 조그만 연분홍색 손으로 타임 머신을 만지려 했을 때에는 황급히 안 된다는 몸짓을 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시기를 놓치지 않은 동안에 지금까지 잊고 있던 위험을 깨달았다. 그래서 타임 머신의 칸막이 기둥 너머로 팥을 내밀어 조그마한 발진 레버를 뽑아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서 그들과 얘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좀더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인형 같은 귀여움 속에도 몇 가지 특징이 있다는 걸 알아내었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은 목과 턱에서 싹둑 잘려져 있었다. 얼굴에는 잔털 하나 나지 않았고 귀는 몹시도 작았다. 입도 작은 데 새빨갛고 얇은 입술을 하고 있었다. 조그만 턱은 끝이 뾰족했다. 눈은 크고 부드러워 보였다. 그리고...... 이건 나의 편리한 대로의 말일지는 모르지만, 마땅히 나에게 대해서 좀더 가져 주어도 좋을 관심을 조금도 가져 주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나와 얘기를 하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고, 다만 내 주위에 서서 미소를 짓거나 자기들끼리 비둘기 울음소리 같은 달콤한 소리로 얘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이쪽에서 먼저 얘기를 걸어 보기로 했다. 나는 우선 타임 머신과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어떻게 시간을 표시할까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해를 가리켰다. 그러자 곧 흰색에 자줏빛 무늬의 옷을 입은, 유달리 귀여운 조그만 사나이가 내 몸짓을 흉내내고, 더구나 놀라운 것은 뇌성 소리의 흉내까지 내는 것이 아닌가. 그의 몸짓의 뜻은 잘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상당히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녀석들은 혹시 바보가 아닐까 하고,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는 자네들에게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겠지? 알겠는가? 나는 전부터 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80만 3천 년 전인가 그 후의 인간은 지식이나 예술이나, 그 밖의 모든 일에 우리들보다 훨씬 앞서 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그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내게 질문을 했는데 그건 다섯 살 짜리 어린애 정도의 지능도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즉 당신은 뇌운(우레 구름)을 타고 태양으로부터 왔는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확실히 이 사람들은 바보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의 의복과 허약해 보이는 체격과 날씬한 얼굴 모습으로 어쩐지 그런 것 같다고 느끼고 있던 일이지만 나는 상당히 실망했다. 한동안은 내가 타임 머신을 만든 것도 헛일이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해를 가리키며 그들이 깜짝 놀랄 만큼 진짜와 똑같은 우렛소리를 흉내내어 보였다. 그들은 한두 걸음 물러서서 절을 했다. 그리고는 한 사람이 내가 처음 보는 이상한 꽃으로 엮은 꽃 목걸이를 가지고 웃으면서 다가와서 그걸 내 목에 걸어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고 귀여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조금 후, 그들은 여기저기 뛰어 돌아다니며 꽃을 꺾어 가지고는 웃으며 내게 던져서 드디어 나는 꽃으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 꽃들은 사실 눈으로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을 두고 진화된 것이리라. 이윽고 그들 중 누가 나를 가까운 건물로 데리고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자고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흰 대리석의 스핑크스 옆을 지나, 이미 무너져 가는 큰 석조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이 스핑크스는 아까부터 마냥 찬웃음을 지으며 나의 놀라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들과 같이 걸어가면서 바로 조금 전까지 미래의 인간이란 것은 굉장히 진실하고 지적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서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큰문이 있는 그 건물은 굉장히 큰 것이었다. 작은 이들의 무리는 점점 불어나고, 커다란 그 시꺼먼 출입문은 기분 나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나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머리 너머로 보이는 땅은 아름다운 수풀과 꽃들이 뒤섞여 있는 황폐한 들로, 긴 세월을 두고 돌아보지 않았는 데도 잡초가 나지 않은 정원 같은 느낌이었다. 길다란 이삭 모양을 한 흰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게 보였으나 그 양초 같은 꽃잎의 지름은 30센티미터는 충분히 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아주 야생인 것같이 여러 관목의 수풀 사이에 피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나 그 때는 그리 자세히 조사해 보진 못했다. 타임 머신은 철쭉꽃으로 에워싸인 잔디밭에 내버려 둔 채로 였다. 입구의 아치에는 정교한 조각을 해 놓았다. 지나면서 흘깃 보니 고대 페니키아의 무늬 같이 느껴졌지만, 자세히 관찰한 건 아니다. 몹시 깎이고 풍화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한결 선명한 빛깔의 옷을 입은 몇 사람이 입구에서 나를 맞아 주며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9세기 풍의 검은 옷을 입고 꽃 목걸이를 한 나의 모습은 아주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내 곁에는 밝고 고상한 빛깔의 옷들을 입고 하얗게 빛나는 손발을 가진 인간들의 소용돌이였다. 그들의 음악과 같은 소리로 웃고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큰문은 갈색 커튼이 쳐진 큰 홀로 통해 있었다. 천장은 어둠침침했고 창에는 곳곳에 색유리가 끼워 있었는데, 유리가 깨진 곳으로부터 부드러운 광선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마룻바닥은 무언지 굉장히 단단한 흰 금속의 커다란 덩어리 (나무가 아닌)로 되어 있는데 상당히 닳아 패여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밟고 다닌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특히 왕래가 잦은 곳은 깊은 홈이 푹 파여 있었다. 홀 안쪽을 향하여 직각으로 갈아서 만든 돌로 된 많은 테이블이 줄을 지어 있었다. 바닥에서 30센티 가량의 높이로 그 위에는 많은 과일이 차려져 있었다. 그 중의 몇은 엄청나게 크게 성장한 일종의 산딸기와 오렌지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일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에는 많은 방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그 방석에 앉으며 내게도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들은 예의 같은 건 돌보지 않고 손으로 과일을 먹고 껍질과 속은 테이블 옆에 뚫어져 있는 둥그런 구멍에 내던졌다. 나도 즐거이 그들이 하는 대로 흉내를 냈다. 몹시 목이 말랐고 시장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나는 과일을 먹으면서 가끔 홀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건물의 완전히 황폐해진 모습이었다. 색유리에 무늬나 그림이 그려진 판유리를 끼인 창은 여기저기 부서져 있고, 홀 안쪽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에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내게서 가까운 대리석 테이블은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극도로 사치하고 아름다웠다. 넓은 홀 안에는 약 2, 3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대개 내 곁에 아주 가까이 앉아서 조그만 눈을 반짝이며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누구나 같은 종류의 보드랍고 튼튼해 보이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하나 더 말해둔다면, 그들의 식사는 과일뿐이었다. 이 머나먼 미래의 인간들은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던 것이었다. 그들과 같이 있는 동안, 나는 약간은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일로 참고 견디어야만 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소나 말이나 양이나 개는 모두 먼 옛날의 공룡처럼 멸망하고 없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과일들은 맛이 매우 좋았다. 특히 내가 거기 있을 동안, 한창 나오는 과일은 삼각형의 껍질 속에 들어 있는 과일이었는데 뛰어나게 맛이 좋아, 나는 그걸 주식으로 하고 있었다. 처음 한 동안 나는 이러한 처음 보는 과일과 꽃을 대할 때마다 이상하게만 여겨졌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시장하던 걸 잊게 되자, 나는 그 사람들의 말을 익혀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것이야말로 먹는 일 다음으로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말을 익히는 데는 과일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과일 하나를 집어들고 자꾸 무얼 묻는 것 같은 말을 하기도 하고 몸짓을 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쪽이 생각을 전하는 일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아무리 애를 쓰며 손짓 발짓을 해도 상대는 깜짝 놀라 눈을 둥그렇게 하거나 자꾸 웃기만 할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한 금발의 사나이가 내 기분을 짐작했는지 무슨 이름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오랫동안 서로 주고받고, 또 무언지 계속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그들의 미묘한 말을 흉내내어 보이자 신이 나서 좋아하며 재미있어 했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학교 선생님에게 배우는 기분으로 기를 써서 배웠다. 드디어 적어도 20개쯤의 물건 이름을 익힐 수가 있었다. '저것' '이것'이란 말들도 배웠으며 '먹는다'는 말까지도 알아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일이어서, 이 작은 인간들은 내가 묻는 일에 곧 싫증을 내어, 질문을 하려 들면 피해 가버리고 하므로 하는 수 없이 그들의 마음이 내킬 때마다 조금씩 배우기로 했다. 사실 나는 그들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배우기는 어렵다는 걸 곧 알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게으로고 싫증을 잘 내는 사람들을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이 작은 이들에 대해 묘한 걸 깨달았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그 어떤 일에나 관심을 크게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곧잘 어린애들처럼 소리치며 내 곁에 달려와서 내가 하는 것을 구경하려 하지만 곧 싫증을 내어 다른 장난감을 찾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식사와 회화의 첫 과정이 끝났을 때, 처음에 나를 에워싼 사람들은 내 곁에는 거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으나 이것 역시 묘한 일이지만, 나도 이 작은 이들의 일을 그다지 관심이 가지지 않게 되어갔다. 배가 부르게 되자 나는 입구의 문을 나와 밝은 햇볕 아래를 거닐었다. 걷는 중에도 새로운 작은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여러 차례 내 뒤를 따라와서 얘기를 하고 웃고 했다. 그리고 내게 정다운 태도로 미소를 짓기도 하고 손짓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곧 나를 버려 두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큰 홀에서 나왔을 때는 밖은 벌써 조용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저녁 해의 따스한 볕이 근방 일대를 비쳐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물체가 모두 내 머리를 혼란케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나온 그 큰 건물은 강을 옆에 낀 넓은 골짜기의 비탈에 서 있었다. 이 강은 템즈 강 같았는데, 현재의 위치에서 1킬로미터쯤 이동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2킬로미터쯤 이어진 저편 등성이 꼭대기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거기서 라면 시기 80만 2천 7백 1년의 지구의 모습을 조금 넓게 바라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80만 2천 7백 1년이라는 것은 타임 머신의 작은 다이얼이 가리키고 있는 날짜인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주의 깊게 근처의 광경을 살펴보았다. 어찌하여 미래의 세계는 이렇게까지 황폐해 버렸는가를 설명해 줄 만한 것을 찾아보려고 한 것이었다. 이 곳은 정말 몹시 황폐해진 세계였다. 예를 들면, 언덕의 조금 올라간 곳에 화강암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서 그걸 알루미늄 덩어리로 이어 붙인 곳이 있어, 깎은 듯이 선 돌 벽이 커다란 미로와 같이 되어 있었다. 여기 저기에 무너진 곳이 있고, 그런 곳에는 아주 아름다운 탑 모양을 한 식물이 무성히 우거져 있었다. 그 잎의 둘레는 갈색이었고, 가시는 전혀 나 있지를 않았다. 그 돌의 벽들은 정녕 큰 건물의 잔해에 틀림이 없었지만, 무엇에 쓰려고 지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뒷날 내가 아주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장소였고, 그것은 다시 이상한 일로 연결되어 갔지만 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잠시 쉬고 있던 높은 곳에서 나는 얼른 어떤 일이 생각나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어느 곳에도 작은 집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한 채로 지은 집도, 어쩌면 가족이란 것도 다 없어져 버린 것 같았다. 푸른 나무들이 서 있는 사이로 여러 곳에 궁전과 같은 건물이 서 있는데도 주택이나 별장 같은 집은 전혀 볼 수 없었다. 19세기의 영국의 풍경으로는 그런 것이 특징으로 되어 있었는데도.......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와 함께 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내 뒤에 따라온 5,6명의 작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일을 깨달았다. 그들은 같은 모양의 옷을 입고, 하나같이 상냥하며 수염 없는 얼굴로 여자 같은 통통한 손과 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걸 눈치 채지 못한 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여기서는 무엇이나 다 이상한 일 뿐이었으니까. 이렇게 해서 겨우 확실한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주는 의복과, 체격과 태도는 미래의 인간들에게서는 다 같은 것으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조금 작게 해 놓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래 세계의 사람들은 한가하고 아무 걱정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아무리 닮았다 해도 조금도 불편할 게 없으리라. 남자의 강함이나 여자의 상냥함이나 가족 제도나 직업의 다양성 같은 것은 육체적인 힘이 큰 역할을 하는 시대에서만 필요한 것이었다. 인구가 많아서 균형이 잡혀 있는 세계에서는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폭력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전혀 없어지고 자손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가정이라는 것은 그다지 필요가 없으리라. 아니 전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을 기르기 위해 남성과 여성이 확실하게 구별되어야 할 필요성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 말한 일들은 우리들 세계에서도 이미 조금씩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미래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완성되어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러나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그 때 내가 생각한 일이고 뒤에 가서 사실과 얼마나 다른가를 깨닫게 되었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는 예쁘장한 작은 건물이 있는 걸 발견했다. 둥근 지붕이 있는 우물 같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문득, 아직도 우물 같은 게 있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덕 꼭대기까지에는 큰 건물이 없었다. 나의 다리 힘은 그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강했으므로 얼마 후 비로소 나 혼자 있게 되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기운이 나고 모험적인 기분이 되어 언덕 꼭대기를 향해 계속 해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노란 금속으로 된 걸상이 있었다. 그것들은 군데군데 상해서 빨갛게 녹이 나 있었고, 반쯤은 보드라운 이끼에 덮여 있었다. 나는 거기 걸터앉아서 지금 저녁 햇볕을 받으며 긴 하루를 끝내려 하고 있는 이 미래의 세계를 저 멀리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 것은 일찍이 본 일이 없는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운 경치였다. 태양은 벌써 지평선 아래로 잠겨, 서쪽 하늘은 금빛으로 불타오르고, 거기 몇 줄의 보라색과 붉은 색의 선이 수평으로 뻗어 있었다. 눈 아래로는 템즈 강이 빛이 나는 강철의 띠처럼 길게 놓여 있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푸른 수풀 사이에는 큰 궁전 같은 건물이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어떤 것은 아주 황폐해져 있었지만 그 중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것도 있었다. 거칠어진 정원 곳곳에 커다란 석상이 있었고, 이곳 저곳에 둥근 지붕과 뾰족탑 같은 것이 우뚝 서 있었다. 울타리도 없고 농토의 소유권을 알게 해 주는 아무런 표지도 없었다. 근방이 모두 정원이었던 것이다. 이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제까지에 보아온 것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날 저녁에 내가 깨달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이건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사실을 반쯤이거나, 사실의 한 면 밖에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날 저녁,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 나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에 맞부닥친 것이다. 붉은 저녁 해는 인류가 멸망해 가고 있는 시대에 와 있다는 걸 생각하게 해 주었다. 지금 우리들이 열성으로 해나가는 노력의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이건 당연한 결과였다. 힘이란 것은 필요에서 생기는 것이며, 안정된 생활은 힘의 필요를 없게 만든다. 생활 상태를 좋게 하려는 노력은 인류의 생활을 훨씬 더 안정된 것으로 하려는 문명의 활동이 착착 진행되어 그 절정에 이른 것이다. 자연을 이기려고 투쟁한 인류는 차례차례 승리를 거두어 왔다. 현재에서는 하나의 꿈이라 생각되는 일이 확실한 계획으로 옮겨져서 드디어 달성된 것이다. 그 성과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들인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위생 시설과 농업은 아직 초보 단계인 것이다. 현대 의학은 인간의 질병의 극히 적은 일부와 싸우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조금씩 쉬지 않고 그 활동을 넓혀 가고 있다. 현대의 농업과 원예는 곳곳에서 어떤 종류의 잡초를 전멸시키고 20여 종류의 유용 식물을 길러내었지만, 아직 대부분의 식물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식물 자체가 제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이다. 우리들은 우리 맘에 드는 식물과 동물은 극소수이지만 선택하여 기르는 방법으로 차차 개량해 가고 있다. 맛좋은 복숭아라든가, 씨 없는 포도라든가, 보다 아름답고 큰 꽃이라든가, 보다 더 쓸모 있는 소라든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은 목표가 분명하지 정해져 있지 않은 데다가 그 지식도 충분하지 못한 관계로 아주 손쉽게 해 내지는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연은 소심하고 서투른 인간이 하는 일에는 그리 쉽게 응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러한 일도 훨씬 나아지고 훌륭하게 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때로는 길을 돌아가는 것 같은 결과가 된다손 치더라도 대체로 자연의 진행 과정인 것이다. 인류는 영리해져서 교양을 쌓고 서로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정복이라는 방향으로 점점 급속하게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동물과 식물의 균형을 주의 깊게 잘 조정해서 우리들 인간의 필요에 적합하도록 해 놓을 것이다. 이 미래 세계에서는 이 조정이 완수되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에. 공중에는 단 한 마리의 모기도 없게 되고, 땅 위에는 한 포기의 잡초나 버섯도 없어졌다. 어디로 가나 과일과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 차서 아름다운 나비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상적인 제초제나 살충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겠지. 질병도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나는 거기 있을 동안 한 번도 유행병 같은 것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또 얘기하게 되리라 생각하지만 노화 현상이라는 것도 거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사회생활의 향상이라는 것도 훌륭히 성취되어 있었다. 인류는 훌륭한 건물 속에 살며 좋은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이었다. 모든 분쟁은, 사회적 분쟁이나 경제적인 분쟁도, 완전히 없어졌다. 상점이나 광고나 교총이라는 것 따위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러했기에 그 아름다운 저녁놀의 하늘 밑에서 내가 여기가 바로 천국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었다. 어려운 인구 증가의 문제도 해결됐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렇듯이, 경우가 달라지자, 그 변화에 대해서 적응성이라는 것이 생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생물학이 잘못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의 지혜와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은 곤궁한 생활에서 빠져 나오려는 투쟁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 아래서는 활동적이고 힘과 지혜가 있는 자는 살아 남을 것이고, 약한 자는 멸망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있는 자들이 협력하여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전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가족 제도와 그로 인해 생기는 갖가지 일, 즉 치열한 투쟁과 자손에 대한 유전자 어버이들의 자기 희생의 정신 등은, 어린것들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에 어떤 위험이 있다고 할 것인가! 나는 이 미래 세계의 인간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지능의 낮음, 크고 많은 폐허 등을 보고 있는 동안에 이것은 자연이 완전히 정복된 결과라고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전쟁 다음에는 평화가 오는 것이다. 인류는 과거에는 강하고 영리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에너지를 남김 없이 다 써서 자기들의 생활 환경의 개선을 꾀했다. 그리하여 지금 그 개선된 환경에 알맞은 것으로 인간이 변화된 것이다. 안전하게 마음이 편하고 안정된 환경에서는 지금 우리들의 힘으로 되어 있는 정력도 그다지 소용이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도 전에는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어떤 종류의 성격이나 기질과 욕망은 자칫하면 실패의 원인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육체적인 용기라든가 투쟁심이라든가 하는 것은 문명인에게는 별로 소용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장애물로까지 변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적당하게 균형이 잡혀 안정이 된 사회에서는 힘이란 것은 지적인 것이거나 육체적인 것이거나 모두 필요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미래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전쟁과 폭력의 위험이라 무서운 짐승의 습격을 받을 걱정이 없어졌을 것이다. 또 강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소모성 질병도 없어지고, 애써 일하는 일도 없어진 것 같았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약한 자라고 하는 사람도 강한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힘을 가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한 자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강한 자보다 훨씬 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강한 자는 그 힘을 쓸 곳이 없는 정력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본 저 굉장히 아름다운 건물은 욕망과 정력을 가지고 있는 최후의 인간이 세워 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정력은 인류가 그들의 환경과 완전히 조화된 후로는 이미 필요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저 건물들은 인류에게 최후의 평화가 찾아왔을 때의 승리의 기념비인 것이다. 이것이 안정된 사회에서는 불필요하게 되어버렸을 것이며, 그것은 우선 예술과 쾌락으로 쏟아지다가 드디어는 무기력과 퇴폐가 닥쳐오게 된 것이리라. 예술에의 의욕도 나중에는 없어져 버릴 것이다. 내가 본 미래 세계에서도 그것은 벌써 거의 없어져 버렸다. 자기 자신을 꽃으로 장식하는 일, 태양 광선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일, 이런 것 정도가 예술적인 마음의 흔적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런 것조차도 앞으로는 희박해져서 꽉 찬 상태의 무기력 속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 현대인은 괴로움이나 가난이라는 숫돌로서 끊임없이 갈아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고맙지 않은 숫돌 같은 건 이미 사라져 버린 것 같이 생각되었다. 차차 짙어오는 어두음 속에 서서 나는 이런 뒤늦게 얻은 해석으로 미래 세계의 문제를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다. 그 날씬한 인간의 수수께끼도 모두 풀렸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미래 세계의 인간은,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는 일에 성공한 것이리라. 아니, 지나치게 성공한 것이리라, 그 때문에, 그들의 인구는 필요 이상으로 줄어져 버린 것이리라. 사람이 살기 않는 건물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극히 단순했지만 이치에 정확하게 맞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실 잘못된 이론이란 것이 대개 이런 것이긴 하지만.   사라져 버린 타임 머신   그 곳에 서서 인류의 완전한 승리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런 빛깔의 둥근 달이 은빛이 넘치고 있는 북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아래쪽에서 돌아다니고 있던 밝은 빛깔의 옷을 입은 작은 이들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부엉이가 소리도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밤의 찬 기운에 몸을 떨었다. 나는 언덕을 내려가서 잠잘 곳을 찾기로 했다. 나는 낮에 따라갔던 건물을 찾으려 여기 저기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 허연 스핑크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달빛이 밝아옴에 따라 뚜렷해졌다. 그것과 맞서 있는 자작나무도 보였다. 철쭉꽃의 수풀이 희푸른 달빛 속에 검게 보이고 그 자그마한 잔디밭도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나는 억지로 나 자신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저건 아까 그 잔디밭이 아니야!“ 그리나 그건 아까 그 잔디밭이었다. 왜냐하면 허물어져 가는 스핑크스의 얼굴이 그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알았을 때, 나의 기분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겠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임 머신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 느닷없이 채찍으로 얼굴을 후려쳐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나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그 괴상한 미래세계에 혼자 남아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전신이 쓰리고 아픈 것 같았다. 꽈악 목을 졸리어 숨이 막혀버리는 기분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공포에 떨며 정신없이 언덕을 뛰어갔다. 한 번 앞으로 고꾸라져서 얼굴을 찢겼다. 그러나 피 같은 걸 닦을 겨를도 없이 금방 일어나 또 달음박질을 해 내려갔다. 뜨뜻한 피가 볼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나는 달리면서 계속 이렇게 지껄이고 있었다. "그놈들은 조금 움직여 봤을 뿐일 거야. 거치적거리지 않게 풀숲 속에 넣어 두었을 뿐일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따위의 일시적인 위안의 말이 얼마나 바보스런 것이라는 걸 깨닫고 타임 머신은 벌써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숨이 차서 괴로웠다. 언덕 꼭대기에서 작은 잔디밭까지는 3킬로미터는 충분히 되는데 나는 그걸 10분 정도 밖에 안 걸려 뛰어 내려 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미 젊지도 않은 이 내가 말일세. 나는 달리면서 타임 머신을 내버려두고 태만했던 나의 바보 같은 짓을 소리를 내어 욕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숨이 찼다. 큰 소리로 외쳤지만 대답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 세계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잔디밭에까지 와 보고, 내가 가장 두려워 한 일이 현실로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타임 머신은 깨끗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검은 수풀에 둘러싸인 빈 잔디밭을 보고 있으려니까 내 몸뚱이는 싸늘해지면서 갑자기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디 한 구석에 숨겨놓은 거나 아닐까 하고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다가 우뚝 멈춰 서서는 머리칼을 움켜쥐고 잡아뜯기도 했다. 내 머리 위쪽에는 청동 받침대에 앉은 스핑크스가 달빛을 받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나의 허둥대는 꼴을 보고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해 보려 했다. 어쩌면, 작은 이들은 나를 위해 타임 머신을 어떤 곳에 보관해 둔 것인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체력과 지능에서 볼 때 도저히 그런 일은 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염려한 것은, 그 작은 이들은 내가 전혀 짐작하지 못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나의 발명품을 어느 곳에 운반하여 숨겨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안심해도 좋을 일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그것과 똑같은 기계를 발명한 사람이 없는 한, 타임 머신을 시간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발진 레버를 뽑아 놓은 이상, 나중에 그 구조를 설명하겠지만 그 누구도 그 기계를 시간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기계는 공간적으로 움직여져 숨겨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에다 숨겼단 말인가? 나는 아마 미친 사람처럼 변해 버렸을 것이다. 스핑크스의 주위의 수풀 속을 마구 휘젓고 돌아다녔는데 그 때 무엇인지 작고 희끄무레한 것이 뛰어나온 것을 기억한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그건 작은 노루가 아니었나 생각했다. 나는 그날 밤늦도록 주먹을 휘두르며 수풀을 헤치며 돌아다니고 있었으므로 손가락 끝에서 피가 나고 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괴로움을 못 이겨 울고 부르짖으며, 커다란 대리석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큰 건물 안은 어둠과 고요뿐, 사람의 자취는 볼 수 없었다. 나는 울퉁불퉁한 마룻바닥에 걸려, 공작석 테이블에 부딪혀 하마터면 정강이를 깰 뻔했다. 성냥을 그어 먼지투성이의 커튼을 젖히며 걸어갔다. 커튼 저편 쪽도 널따란 홀이었다. 그 곳에는 쿠션(푹신푹신한 방석)이 가득 깔려 있었고, 20명 가량의 작은 이들이 자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다시 찾아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투덜대며 성냥을 그어 들고 조용하기 만한 어둠 속으로부터 불쑥 나타났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성냥 같은 건 이미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타임 머신은 어디 있나?" 나는 화난 어린애 모양 소리치며 작은 이들을 잡아 흔들어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됐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대부분은 몹시 겁난 얼굴들을 했다. 내 주위에 모인 그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에 나는 퍼뜩 생각이 났다. 이런 경우에 그들의 공포심을 크게 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하다니,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낮에 본 그들의 거동에서 생각해도 그들은 이미 내게서 두려움 같은 것은 갖지 않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곧 성냥을 내던지고 길목에 서 있던 한 작은 이 하나를 밀어 넘어뜨리면서, 넓은 식당을 마구 뛰어 달빛 속으로 뛰쳐나왔다. 작은 이들의 놀라 떠드는 소리와 작은 발로 왔다갔다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나는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타임 머신이 없어지다니,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나는 친구들로부터 혼자 떨어져 나와, 알지 못하는 세계에 한 마리의 별난 동물로 남아있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신과 운명을 저주하면서 미친 듯이 이곳 저곳을 헤매어 다녔을 것이다. 기나긴 절망의 밤이 깊어감에 따라 몹시 피로함을 느꼈다. 나는 타임 머신이 숨겨져 있을 만한 곳은 남기지 않고 들여다보고, 달빛을 받고 있는 폐허 속을 더듬으며 돌아다녔고, 어둠 속에서 무언지 모를 짐승 같은 것을 건드리기도 했다. 드디어 나는 스핑크스 곁에서 땅에 엎어져 뭐라고 표현할 수 얹는 처참한 기분으로 울기 시작했다. 내 마음은 엄청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에는 아침이었다. 두세 마리의 참새가 잔디밭, 내 손이 닿을 만한 곳에서 나풀나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상쾌하게 맑은 아침이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도 불안하고 절망적인 기분이 드는지, 애써 알아내려고 노력했다. 간신히 지금까지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간밤의 어리석고 발광적인 행동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에게 타일렀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나는 내 게 말했다. "설령 타임 머신이 정말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깨어져 버렸다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일은 침착하게 참고 견디는 일이다. 저들의 거동을 살피고 어떤 방법으로 타임 머신을 감추었는가를 알아보는 일이다. 그리고 재료와 도구를 구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다시 또 한 대의 타임 머신을 만들어 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라도 해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절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그 곳은 아름답고 재미있는 세계였다. 그러다가 문득 단지 타임 머신은 어딘 가로 옮겨 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욱이 침착하고 끈기 있게 참으면서 그 숨겨 둔 장소를 알아내어 완력으로써, 아니면 어떻게 속여서라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어디 몸을 씻을 곳이 없나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피로하여 몸이 굳어지고 흙투성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주 쾌청한 아침이어서 나도 상쾌한 기분이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미 미쳐 날뛰며 돌아다닐 기운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다시 타임 머신을 찾기 시작했지만 어젯밤엔 어째서 그렇게까지 사납게 날뛰었는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작은 잔디밭 주위의 땅을 세밀히 조사해 봤다. 그리고 지나가는 작은 이들을 붙들고 손짓 발짓으로 어떻게든 기계가 있는 곳을 물어 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들에게 나의 몸짓의 의미가 전달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자는 멍하니 서 있기만 하고 어떤 자는 내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웃기만 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웃는 얼굴을 힘껏 때려 주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들을 때리다니,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지만, 공포심과 분노로 혼란에 빠져 있는 나의 마음은 자칫하면 격해져서 사납게 굴려고 하는 상태로 변해 있었다. 잔디밭이 훨씬 더 여러 가지 일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잔디밭에 한 줄로 곧게 홈이 파져 있는 걸 발견했다. 스핑크스의 받침대와,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뒤집혀진 타임 머신을 일으켜 세우려고 내가 남긴 발자국과의 바로 중간 지점이었다. 다른 곳으로 타임 머신을 움직여간 듯한 자취가 있었고, 작은 이들이 내었으리라 여겨지는 작고 긴 발자국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스핑크스의 받침대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받침대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은 청동의 큰 덩어리가 아니고 양쪽에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진 청동 판을 붙인 것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 청동 판을 두들겨 보았다. 받침대의 속은 텅 빈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청동 판을 조사해 보니, 판과 테두리가 빠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손잡이나 열쇠 구멍은 없었지만, 만일 이 판이 문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안 쪽에서 열리도록 되어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이로써 한 가지는 명백해졌다. 타임 머신이 이 받침대 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당연한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 속으로 옮겨 넣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주홍색 옷을 입은 두 작은 이의 머리가 수풀을 뚫고 꽃이 활짝 피어있는 능금나무 밑을 지나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들 쪽을 향해 이리 오라는 뜻으로 손짓을 해 보였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나는 청동의 받침대를 손가락질하며 그것을 열고 싶다는 것을 손짓과 몸짓으로 알리려고 했다. 그런데 나의 손짓을 보자 그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적당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굉장히 고상한 아가씨가 심히 쌍스런 몸짓을 보았을 때에 나타내는 그런 태도라고나 할까? 두 사람은 지독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가 버렸다. 나는 다음에 온 흰옷을 입은 상냥한 얼굴의 작은 이에게도 지금 한 것과 같은 몸짓을 해 보였다. 결과는 꼭 같았다. 그걸 보자 웬일인지 나 자신도 부끄러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타임 머신을 찾고 싶어서 또 한 번 그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아까 그 두 사람처럼 이 사람도 가버리려 하므로, 나는 왈칵 화가 났다. 큰 걸음으로 뒤쫓아가 그의 멱살을 잡고 스핑크스 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두려움과 미움의 표정을 보고 나는 황급히 그를 놓아주고 말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주먹으로 청동 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누군가가 킥킥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이윽고 나는 강에서 제법 큰돌을 주워 왔다. 그것으로 청동 판에의 소용돌이 무늬가 망가지고 녹이 푸석푸석 벗겨질 때까지 계속 두들겨 댔다. 작은 이들은 내가 무서운 기세로 쾅쾅 두들기고 있는걸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능히 들었을 터인데, 단 한 사람도 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언덕에서 한 떼의 작은 이들이 가만히 이쪽을 살펴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어느덧 몸에 열이 나고 피로해져 물러나 앉아서 가만히 받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성급한 나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유럽 사람인 내게는 너무 오래 지켜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한 문제를 가지고 몇 해나 걸려 연구하는 일은 가능해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24시간을 그냥 보내는 건 도저히 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 후에 나는 일어나 다시 언덕 쪽을 향해 무턱대고 수풀을 헤치며 걸어가고 있었다. "참는 거다.“ 나는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타임 머신을 찾고 싶으면 스핑크스는 가만히 두어야 한다. 그놈들이 정말로 타임 머신을 빼앗아 갈 생각이었다면 청동의 받침대를 부셔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빼앗아 갈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부탁하면 곧 돌려 줄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알 수 없는 것뿐인 곳에서 이런 수수께끼를 풀려고 해 봤댔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 일만 하고 있다가는 끝내는 미치고 말지도 모른다. 우선 이 세계를 잘 관찰하여 놈들이 하는 짓을 배워야겠다. 그러나 섣불리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지. 그리고 언젠가는 타임 머신을 되찾을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갑자기 내자신의 처지가 우스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미래의 세계에 가보려고 몇 년을 두고 괴로운 연구를 계속해 왔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거기서 도망쳐 나가려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여태껏 아무도 생각해 보지도 못한 복잡하고 무서운 함정에다 밀어 넣은 것이었다. 모두 나 때문이지만 이젠 다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소리 내어 어허허허 웃어댔다. 전처럼 바로 그 큰 궁전 같은 건물에 들어가니, 작은 이들이 어쩐지 나를 슬슬 피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내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청동 받침대를 쾅쾅 두들겼던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여간 그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런 것에 모른 체 시치미를 떼며, 그들을 쫓아다니는 짓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을 했다. 그렇게 한 덕분에 한 이틀 후에는 모든 것이 전과 같이 되었다. 나는 되도록 빨리 작은 이들의 말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한편, 여기 저기를 조사해 보러 돌아다녔다. 나는 자세한 것을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아주 간단한 말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맡은 거의 명사와 동사만으로 되어 있었다. 추상 명사가 있기는 해도 극히 적고, 형용사는 거의 없었다. 문장도 대체로 간단해서 보통 두 세 개의 낱말로 되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극히 간단한 일 외에는 그들과 얘기를 곧 나눌 수가 있었다. 나는 타임 머신과 스핑크스 받침대의 수수께끼는 가급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좀더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 일도 알게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네들도 알겠지만, 무엇인가 나를 불잡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는 맨 처음 도착한 곳에서 4, 5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는 가지 않았다. 내가 있는 곳은 템즈 강 유역과 같이 경치가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어느 언덕에 올라가 보아도 템즈 강 유역에 있는 것과 같은 훌륭한 건물들이 많이 보였고, 그 건물들은 재료와 형태도 여러 가지로 달랐다. 또 비슷비슷한 울창한 상록수의 숲과 꽃을 활짝 피운 나무들과 고사리들도 보였다. 곳곳에 강물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흐르고 강 건너 쪽은 땅은 차츰 높아져서 푸르게 물결치는 언덕을 이루고, 그 끝은 조용한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가 있는 것이었다. 얼마 후, 나는 이상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몇 개의 둥근 우물 같이 생긴 것인데 아주 깊은 것처럼 생각됐다. 그 중 하나는 처음 이 언덕에 올라왔을 때 지나간 오솔길 가에 있었다. 다른 우물들과 같이, 이 우물의 테두리도 묘한 무늬가 새겨진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조그마한 둥근 지붕이 비가 들지 않도록 덮여 있었다. 나는 이런 우물가에 걸터앉아서 깜깜한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으나 물의 반사는 보이지 않았다. 성냥불을 켜 보아도 불빛의 반사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우물에서나 비슷한 소리가 들려 왔다. 큰 엔진이 돌고 있는 것 같은 덜덜덜덜 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성냥불의 흔들림에서 공기가 쉬지 않고 그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걸 알았다. 더욱이, 조그마한 종이쪽을 던졌더니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휙하고 빨려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잠시 후, 나는 이 우물이 언덕 여기 저기에 서 있는 높은 탑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이 탑의 꼭대기에는 더운 날 햇볕에 쬐인 바닷가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기의 흔들거림 같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일을 관련시켜 생각해 볼 때, 나는 이 땅 밑에 큰 환기 장치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작은 이들의 위생 설비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전혀 엉뚱한 추측에 불과했다. 여기서 말해 두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나는 이 미래세계에 있는 동안, 하수도라든가 교통 기관이라든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연 알 길이 없었다. 이 날까지 내가 읽어 본 유토피아 이야기나 미래의 이야기 중에는 건물과 공공 시설 등에 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나처럼 실제로 그런 곳에 간 사람에게는 좀처럼 알기 어려운 것이다. 생전 처음으로 런던에 온 중앙 아프리카의 흑인이 제나라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런던에 대한 얘기를 한다고 하자. 과연 뭐라고 설명할까? 그는 철도 회사에 대해서, 사회 운동에 대해서, 전신 전화에 대해서 운송 회사에 대해서, 우편환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 물론 우리들은 그 흑인 사나이에게 그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해 주었다고 해서, 설령 그 사나이에게는 이해가 갔다고 하더라도 런던에 와 본 일이 없는 그의 친구들이 어느 만큼 이해를 하겠는가! 게다가 현재의 흑인과 백인과의 거리에 비교한다면, 나와 이 미래 세계의 인간과의 거리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이다. 나는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자동 장치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알 수 없었다. 가령 시체를 매장하는 문제인데, 화장장과 무덤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나는 아직 내가 탐험하지 못한 어느 곳에 묘지와 화장터가 있으려니 했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 모로 깊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만족스런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궁리하고 있는 중에 또 한 가지 더욱 이상한 문제에 부닥쳤다. 이곳 사람들 중에는 노인이나 병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앞에서 인류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결과 퇴화된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무슨 납득이 갈 만한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여기서 나를 곤란하게 한 문제를 몇 가지 열거해 보기로 하겠다. 내가 이미 조사해 본 몇 개의 큰 건물은 주택과 대식당과 침실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기계와 연장 같은 따위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곳 사람들은 고운 의복을 입고 있는 것이 그 의복은 때에 따라 갈아입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그들이 신고 있는 샌들도 장식은 붙어 있지 않았지만 금속제로 꽤 애써 만든 것이었다. 이런 물건들은 대체 어디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 작은 이들에게서는 그런 걸 만들고 있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게도 없고 상점도 없다. 그렇다고 딴 곳에서 가져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재미있게 놀며, 강에서 헤엄을 치며, 장난 삼아 서로 사랑을 하기도 하며, 과일을 따먹으며, 잠자는 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활이 가능할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또 타임 머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누군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흰 스핑크스의 받침대 속에다 옮겨 놓은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것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물이 없는 우물과 공기가 일렁거리고 있는 탑도 그렇다. 무언가 하나의 실마리가 걸려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어떻게 말해야 좋을 것인가? 가령 이곳에 돌에 새겨진 글이 있다고 하자. 매우 쉬운 영어로 씌어져 있으나 그 가운데 전혀 알 수 없는 말과 문자가 섞여 있다는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도착한 지 사흘만에 내 눈에 비친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란 것은...... 그날 나는 한 친구, 아니 친구 비슷한 사람이 생겼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나는 몇 사람의 작은 이들이 강의 얕은 데서 목욕을 하고 있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물에 떠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강 한가운데는 물살이 세었다. 그렇지만 얼마쯤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물살쯤은 전혀 문제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말하면 그 작은 이들의 체력이 얼마나 약한지를 자네들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네만. 눈앞에서 물에 빠져 애처롭게 울며 소리치고 치는 사람을 보고도 누구 하나 구해 주려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걸 알자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지고 강 아래쪽으로 달려가서 가엾은 여자 작은 이를 붙잡아 무사히 육지에 끌어 올려 주었다. 손발을 잠시 주물러 주자, 그 여자는 곧 숨을 쉬고 깨어났다. 나는 그 여자가 완전히 기운을 차린 걸 본 다음, 그 곳을 떠나왔다. 나는 벌써 전적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으므로 그 여자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건 오전 중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탐험에서 돌아와 늘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할 때, 그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반가운 듯 소리치며 다가오더니 커다란 꽃다발을 내게 주었다. 그건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이 꽃다발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아마 내가 혼자 몸으로 외로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쨌든 나는 이 선물에 대해서 정성껏 감사의 뜻을 나타내 보였다. 잠시 후, 우리는 돌로 지은 조그마한 정자에 앉아서 얘기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사실 둘은 서로 웃어 보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의 귀여움은 꼭 어린애의 귀여움과 같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서로 꽃을 주고받으며, 또 그녀는 내 손에 키스를 해 주었다. 나도 같이 그녀의 손에 키스해 주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이 '위너'라는 것을 겨우 알았다. 무슨 뜻의 이름인지는 몰라도 그녀에게는 꼭 들어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녀와 나의 기묘한 우정의 시초였다. 그건 1주일간 계속되다가 끝났지만, 거기 대해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겠다. 그녀는 정말이지 꼭 어린애 같았다. 언제나 내 곁에 있고 싶어하여 내가 가는 곳은 어디라도 따라 오려고 했다. 그리고 가끔 탐험에도 따라 왔다가 도중에서 지쳐버리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두고 탐험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애처롭게 나를 부르고 있었으나 나로서는 탐험을 중지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런 작은 이와 연애 놀이를 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곳에까지 온 건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몇 번이고 타일렀다. 그러긴 했지만 내게서 혼자 떨어지자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어서 미친 듯이 나를 끌어 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그때의 기분은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 성가시기도 했다. 그건 어쨌든, 그녀는 내게 있어 큰 위안이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내 곁에 따라다니는 것은 어린애 같은 애정에서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내가 그녀를 내버려두고 탐험을 지속한 일은 그녀를 크게 슬프게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나중에야 느끼게 될 일이었지만 그녀는 내게 있어서도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퍽 좋아한 모양으로, 그걸 서투른 표정으로 알러 주었지만 그저 그랬을 뿐이고, 나는 작은 인형 같은 그녀가 있는 흰 스핑크스 곁으로 돌아오면, 마치 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었다. 나는 언덕을 넘어 돌아올 때면 곧 흰색과 금빛의 옷을 입은 그녀의 조그만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미래의 세계에도 아직 공포심이란 것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안 것도 그녀에게서였다. 그녀는 해가 있을 동안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우스울 정도로 믿고 있었다. 예를 든다면, 나는 갑자기 어이없는 말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무서운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방긋이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둠이나 그늘이나 검은 것을 무서워했다. 어둠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너무도 지나치게 무서워하기에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주의 깊게 관찰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어떤 일을 깨달았다. 작은 이들은 어두워지면 큰집에 모여 함께 잔다는 것이었다. 불을 들지 않고 거기에 들어가면 그들은 무서워하며 큰 소동을 벌였다. 어두워지기만 하면 밖에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집안에서도 혼자 자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정말 바보였다. 그들이 왜 무서워하는가를 알려고 하지 않고 위너가 싫어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 떨어져 나와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이었다. 위너는 매우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대한 애정 때문에 우리가 알게 된 후로는 다섯 밤을, 마지막의 하룻밤까지도 내 팔을 베고 잤던 것이었다. 아니, 위너 이야기로 그만 얘기가 딴 길로 흘러 버린 것 같다. 이전 그녀를 구조해 준 전날 밤의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나는 새벽에 잠이 깨어 눈을 떴다. 불안스런 밤이라 몹시 흉한 꿈을 꾼 것이었다. 내가 물에 빠졌는데 말미잘의 물렁물렁한 더듬이가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징그러워 얼른 눈을 떴다. 이 때 무언지 회색의 것이 황급히 방에서 튀어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자려고 했으나 안정이 안 되고 무언가 불안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어두컴컴한 회색의 시간이었고,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것이 그 빛깔은 알 수 없어도 형태만은 또렷했다. 그런데도 그 회색의 것은 진짜의 것이 아니라고만 생각되었다. 나는 일어나 큰 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 곳을 지나 궁전 앞 포석(돌로 만든 길) 위로 나왔다. 잠을 설쳤지만 그런 대로 해 돋는 광경이나 구경하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달은 이미 지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과 새벽의 희푸른 빛이 어우러져서 어쩐지 무시무시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풀들은 시꺼멓게 보이고, 땅은 회색, 하늘은 음산하게 흐려 있었다. 나는 언덕 위에 유령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덕 비탈에 시선을 보내자 세 개의 흰 그림자가 몇 번이나 보였다. 흰 원숭이 같은 꼴을 한 것이 꽤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두어 번 보였다. 한 번은 무너진 건물 옆을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셋이 무언지 꺼먼 물건을 운반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뒤로 그것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수풀 속으로 사라졌을 것 같았다. 뭐니뭐니 해도 아직 밝지 않은 때였으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그날 아침 일찍 느꼈던 불안하고 섬뜩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나는 그 유령 같아 보인 것도 그런 기분 아래서 허깨비를 본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쪽 하늘이 밝아져서 아침 햇빛이 비치자 사방에 다시금 싱싱한 빛깔이 되살아났고,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허연 것은 그림자조차 없었다. 그것은 어둠침침한 곳에서 사는 생물인 모양이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그랜트 앨런(18BB~1899;영국의 작가, 과학 해설자)의 그 괴이한 학설을 생각하고 우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각 시대가 유령을 남긴다고 하며 나중에는 온 세계가 유령으로 가득 차 버릴 것이라고 했다. 이 설에 따르면, 그로부터 80만 년이나 지났으니 이곳에는 무수한 유령이 있음직도 하다. 한꺼번에 네 사람의 유령을 보았다 해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농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오전 중, 그냥 계속해서 아까 그 그림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위너를 구조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유령 생각은 완전히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나는 그 유령이 내가 미친 듯이 타임 머신을 찾으러 돌아다닐 때 나를 놀라게 한 그 허연 동물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랬지만 유령 같은 걸 생각하고 있느니보다 위너를 생각하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 유령들은 더욱더 나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이미 말한 걸로 생각하지만, 이 미래 세계의 기후는 우리들의 세계보다 훨씬 따뜻했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태양이 더 뜨거워진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지구가 더 태양에 가까이 간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태양은 앞으로 점점 식어 가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하고들 있다. 다윈 2세(유명한 생물학자 다윈의 둘째 아들 천문학자)의 이론 같은 걸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유성은 최후에 가서는 하나 하나 그들의 어미별로 돌아간다는 걸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면 태양은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어쩌면 태양에 가까이 있던 유성들이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운명의 길을 밟아간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미래 세계의 태양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태양보다 훨씬 뜨거웠다. 그런데 어느 날, 몹시도 더운 아침, 여기 와서 나흘째 아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더위와 햇볕을 피하려고 내가 먹고 자고 하는 큰 우물 가까이 있는 커다란 폐허로 들어갔다. 나는 여기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쌓아 놓은 돌무더기 사이로 기어 올라가자니까 좁은 복도가 나왔다. 끝과 양쪽 창은 무너져 내린 돌덩이들로 막아 놓고 있었다. 이제까지 바깥 밝은 곳에 있던 나는 처음엔 너무나 어두운 걸 느꼈다. 손을 저어 더듬으며 들어갔다. 밝은 데 있던 내 눈이 앞을 잘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돌연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밖의 햇볕을 막아 번쩍번쩍 빛나는 두 개의 눈이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사나운 짐승을 무서워한 태고의 본능적인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빤히 그 빛나는 눈을 쏘아보았다. 무섭다고 해서 무턱대고 달아나 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퍼뜩 나는 여기서는 인간은 지극히 안전하게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그리고 또 어둠을 이상하게도 무서워하고 있는 걸 생각했다. 나는 애써 두려움을 참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러 봤다. 바른 데로 말하면 내 목소리는 낮게 됐었을 것이고 또 떨렸을 것이다. 손을 내밀자 무언지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그 순간 빛나는 눈은 휙 옆으로 비켜나고 무언지 허연 것이 내 옆을 지나 도망쳐 갔다. 나는 간이 콩알만해져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묘하게 작은 원숭이 같은 것이 괴상한 모양으로 머리를 숙이고 뒤쪽 햇볕이 쬐는 곳을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돌무더기에 부딪쳐 잠시 망설이더니 곧 옆으로 빠져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돌무더기 밑의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물론 똑똑히 보지는 못했지만 둔한 흰 빛깔을 하고 있었고, 회색이 섞인 붉고 큰 눈을 하고, 머리에서부터 등에 걸쳐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있는 걸 알았다. 그러나, 너무나 빨리 달아났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네 발로 달려간 것인지, 아니면 팔을 아래로 낮게 내려뜨리고 달려간 것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나는 한 숨 돌리고 나서 그 놈의 뒤를 쫓아 둘째 돌무더기 사이로 들어가 보았다.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깜깜한 어둠 속에, 전에 말한, 그 둥근 우물 같은 것이 있는 걸 알았다. 그것은 쌓아진 돌기둥으로 반쯤 덮여 숨겨져 있었다. 나는 퍼뜩, 저 생물은 이 우물 구멍으로 도망쳐 들어 간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성냥을 그어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조그만 회색 생물이 도망쳐 들어가며 커다란 눈을 빛내어 이쪽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오싹했다. 꼭 인간의 모습을 한 거미 같았다. 그놈은 우물을 기어내려 갔다.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지만, 우물의 안쪽에는 쇠붙이로 된 손과 발을 받칠 것이 많이 박혀 있어서 마치 사닥다리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냥개비의 불이 손가락을 뜨겁게 했으므로 나는 성냥불을 내버렸다. 그것은 떨어져 내려가는 도중에 꺼져버렸다. 다시 한 번 성냥을 켰을 때는 이미 그 작은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우물 언저리에 앉아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 본 것이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차차 생각을 정리 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 세계의 인간은 한 종류뿐만이 아니라 두 종류의 인간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닐까? 지상 세계에 있는 그 우아한 작은 이들만이 우리들의 자손은 아니었다. 아까 내 곁을 스쳐 지나간 그 창백하고 보기 흉한 밤의 생물도 우리들의 자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나는 공기가 아른거리고 있던 탑과 지하의 환기 설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여우같고 원숭이 같기도 한 인간은, 이 미래 세계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빈둥빈둥 할 일없이 살고 있는 지상 세계의 아름다운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 우물 속에는 대체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나는 우물가에 걸터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그 무엇이나 무서워할 건 없다.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내려가 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내려가 보자고 생각하니 어쩐지 무서웠다. 아직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지상의 세계의 아름다운 두 사람이 희롱을 하면서 햇빛 속을 달려와서 그늘진 곳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여자를 쫓아오면서 꽃을 던져 주고 있었다. 그들은, 넘어져 있는 집 기둥에 손을 걸치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우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로 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그 우물을 가리키며 그들의 말로서 물어 보려고 하자, 두 사람은 점점 더 난처하다는 표정을 하고 얼굴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성냥에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재미있어 하라고 성냥을 두세 번 켜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물에 대해서 물어 보려고 했지만 역시 허사였다. 그래서, 두 사람을 거기에 내버려두고 위너에게로 돌아가 그녀에게 물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 때, 내 생각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 생각하거나 느낀 일과는 다른 새로운 생각이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이런 우물과 환기탑과 유령 등의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물론 청동 판의 의미와 타임 머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직은 극히 막연한 것이긴 했지만, 내 머리를 괴롭힌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새로운 생각이란 것은 이러한 것이었다. 즉, 이 제2의 종류에 속하는 인간은 틀림없이 지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특히 세 가지 일로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이 좀처럼 지상에 나오지 않는 것은 우선 오랜 지하 생활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사는 동물에는 흔히 그런 것이 있었다. 예를 든다면 켄터키 주(미국 중동부에 있는 주)에 있는 동굴 속의 흰 물고기 같은 것. 그리고 그 빛을 잘 반사하는 커다란 눈, 그것은 밤에 나다니는 동물에 공통된 특징이다. 올빼미와 고양이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양 광선이 비치는 곳에서는 몹시 허둥대고 어두운 그늘을 향해 부리나케 도망쳐 가는 일, 그리고 밝은 곳에서는 묘하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일, 이건 모두 그들의 눈에 있는 망막이 빛에 몹시 민감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 발 밑에는 커다란 터널이 수없이 파져 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 곳이 이 지하 인종의 거주지인 것이다. 언덕 비탈의 환기탑과 우물은, 사실 강 양쪽의 골짜기를 제외하면 그것은 곳곳마다 있었다. 이 터널의 그물이 얼마나 널리 펼쳐져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인공의 지하 세계에서는 지상의 인간들이 안락하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생각은 극히 정당한 것으로 느껴졌으므로 나는 곧 그 생각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어째서 인류가 둘로 갈라지게 됐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는 벌써 자네들에게도 대충 전달이 되겠지만, 나는 곧 그것이 전혀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우선 우리들 시대의 일에서부터 생각해 나가면 모든 일은 명료해지리라 생각했다. 현재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차이는 일시적, 사회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점점 광범하게 되어 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제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러한 사고 방법은 자네들에게는 무척 바보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에도 그러한 징조는 계속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지하의 공간을 여러 가지 목적에 이용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런던의 지하철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전차도 있고 지하도도 있으며 지하의 공장이나 레스토랑도 있는데 그런 것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반드시 이런 경향이 점점 심해져서 드디어는 푸른 하늘 아래서는 일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깊고, 점점 넓고 크게 되어 가는 지하의 공장으로 들어간 인간은 거기서 점점 더 긴 시간을 보내게 되고 결국엔......! 현재에도 이스트 엔드(런던의 빈민의 거리)의 노동자들은 지상의 자연으로부터 아주 떨어져 나가 인공적인 장소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한편, 부유한 자들에게는 배타적인 경향이 있어서, 이건 그들의 교육이 점점 높아져 가난한 사람들과의 거리가 더욱더 멀어진 결과일 테지만, 땅의 대부분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독차지하려 들고 있다. 이를테면 런던 주변의 아름다운 토지의 반쯤은 아마도 일반 사람에게는 드나들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부유한 자들은 점점 교육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더욱더 세련된 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과의 괴리는 한층 더 커지고,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뒤바뀌거나 서로 결혼을 하거나 하는 일은 점점 더 없어져 간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직 그러한 결혼이 이따금 행해져서 인류가 딱 둘로 갈라지는 걸 겨우 막고 있는 셈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드디어 지상에는 가진 자들만이 살며 쾌락과 아름다음을 추구하고, 지하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며 그들의 노동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변해 가는 것이다. 지하에 들어간 자들은 필시 동굴 속의 환기료를,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을 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만일 그걸 내지 않으면 굶어 죽게 하거나 질식시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소질이 없는 자와 반항적인 자는 죽여 버릴 것이다. 결국 이러한 두 개의 계급 관계는 영구적인 것이 되어 살아 남은 자들은 지하 생활에 익숙해져서, 지상의 인간이 행복하듯이, 그들도 또한 그들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니까 지상의 인간이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지하의 인간들이 창백한 피부를 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내가 꿈꾸고 있던 인류의 위대한 승리한 것은 이런 형태의 것은 아니었다. 이 곳에 있는 것은 내가 상상한 것 같은, 도덕 교육의 승리라든가, 전체적인 협력의 승리라든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목격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완성된 과학과 현재의 생산 제도를 합리적으로 밀고 나간 제도에 의해 지켜진 진짜 귀족 계급이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승리일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로 변한, 같은 인간에 대한 승리이기도 했다.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그 때 내가 생각한 이론이었다. 나에게는 유토피아 이야기에 나오는 것 같은 편리한 해설자는 없었다. 나의 설명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올바른 사고 방식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 비로소 달성된, 균형이 잡힌 문명은 벌써 전성 시대를 지나 이제 바야흐로 쇠퇴기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지상 세계의 인간은 너무나 완전하기 지나치도록 보장되었기 때문에 점차 퇴화해서 체격이나 체력이나 지적 능력 등이 모두 약해져 버렸다. 그건 이미 확실하게 나타나 보였다. 지하세계의 인간에 대해서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 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몰록' (곁들여서 말해 두지만, 지하의 인간은 이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은 '엘로이' (이것이 저 아름다운 지상 인간의 이름이다)보다 훨씬 크게 변화했을 것으로 생각됐다. 아직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다. 왜 몰록은 나의 타임 머신을 훔쳐 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타임 머신을 훔쳐 간 건 그들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엘로이가 이 세계의 지배자라면 왜 나를 위해 빼앗아 주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그렇게도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위너에게도 지하 세계에 대하여 물어보았지만, 역시 실망했을 뿐이다. 처음에 그녀는 나의 질문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체 했다. 다음에는 대답하기를 거절했다. 위너는 그런 건 말을 하기조차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무섭게 다그쳐 묻자 그만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내가 미래 세계에서 본, 내가 흘린 눈물은 별도로 하고, 단 하나의 눈물이었다. 위너의 눈물을 보고, 나는 그 이상 몰록에 대해 묻는 것을 그만 두고 어떻게든 위너의 눈에서 현재 인간의 잔재인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생각했다. 내가 성냥을 그어 보이자, 위니는 곧 생글생글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즐거운 듯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살며시 다가오는 몰록   자네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새로운 단서를 잡아 거기에 의해서 타임 머신의 행방을 찾으려 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나서였다. 그 창백한 인간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꽁무니를 빼고 싶어지기만 했다. 그놈들은 구더기나 박물관에 있는 알코올에 담긴 표본처럼 하얗게 빛이 바랜 색깔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만지면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내가 꽁무니를 뺀 것은 아마 엘로이들의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그들이 몰록을 싫어하는 기분을 조금은 알게 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다음 날 밤,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몸이 조금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다 할 이유도 없으면서 한두 번 굉장히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달빛을 받고 작은 이들이 자고 있는 큰 홀(그날 밤은 위너도 그들과 같이 있었다)에 간만에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 있는 걸 보고서야 마음이 놓여진 게 생각난다. 그때 문득 생각난 일이지만, 앞으로 2, 3일이 지나면 달은 4분의 1로 기울어져 어두운 밤이 계속된다. 그렇게 되면 저 지하의 허연 여우 원숭이 같은 누추한 생물들이 옛날 사람을 해치는 짐승을 대신하여 새로운 짐승으로 더욱 많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때 그 이틀동안 나는 자기의 임무를 게을리 한 사람 같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타임 머신을 되찾으려면 용감하게 지하로 들어가서 그들의 비밀을 캐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비밀에 맞서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친구가 있었다면 물론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외로운 혼자였다. 캄캄한 우물을 내려가는 것만 해도 내 마음은 벌써 기가 죽는 것이었다. 이 기분은 도저히 자네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뒤쪽이 몹시도 불안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초조와 불안을 느꼈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이제까지 보다 더 먼 곳까지 탐험을 떠났던 것이다. 동서쪽, 현재 '쿰드'라 불리고 있는 지금의 언덕 지대를 걸어가면, 멀리 저편, 지금의 번스테드 쪽에 초록색 큰 건물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건 이제까지 보아온 건물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큰 궁전과 어떤 폐허보다도 컸다. 건물의 정면은 동양풍으로 되어 있었고, 표면은 엷은 초록색으로 광채가 났다. 어떤 종류의 중국 도자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청록색이었다. 외관이 다른 것은 사용 목적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나는 그 안에 들어가서 조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꽤 시간이 늦은 것 같았다. 그 곳까지 가는데 꽤 긴 거리를 걸었기 때문에 피로해 있었다. 그래서 탐험은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되돌아와서 작은 위너의 환영과 포옹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어제 내가 그 청자의 궁전을 탐험해 보고자 한 것은 자기의 기분을 속이기 위한 까닭이었음을 또렷이 알았다. 무서운 지하 탐험을 하루라도 뒤로 미루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는 더 어물거리고 있을 게 아니라 곧 지하로 내려가 보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 다음 날 아침 일찍, 그 화강암과 알루미늄의 폐허에 가까이 있는 우물을 향해 출발했다. 위너도 잰걸음으로 따라왔다. 그녀는 즐거운 듯 내 옆을 춤추듯 걸으며 우물까지 왔는데, 내가 우물가에서 아래를 들여다보자, 몹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위너, 안녕!“ 하고 내가 그녀를 안아 올려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땅에 내려놓고 우물 벽을 더듬어 발 디딜 곳을 찾았다. 나는 아주 빨리 그걸 찾았지만 사실을 말하면 용기가 없어질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위너가 놀라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아주 슬픈 소리로 나를 부르며 다가와서 작은 손으로 나를 끌어 당겼다. 그녀가 반대를 했기에 도리어 들어 갈 용기가 난 것도 같았다. 나는 약간 난폭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끝내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우물가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위너의 수심에 싸인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건들건들 흔들리는 디딤쇠를 꽉 붙들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우물의 깊이는 대충 200미터가 돼 보였다. 나는 그 깊이를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됐다. 내려가는 데는 벽에서 비쭉비쭉 나와 있는 쇠끝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것들은 나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사람의 몸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라 곧 피로해지고 몸이 굳어져 왔다. 아니, 피로해진 것만이 아니었다. 쇠끝 하나가 나의 몸무게로 해서 갑자기 휘어져 하마터면 깜깜한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릴 뻔했던 것이었다. 나는 잠시 동안 한 손으로 매달려 있었는데 이때부터는 쉬지 않고 내려가야 했다. 이윽고 팔과 등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되도록 빨리 디딤쇠를 갈아 잡으며 내려갔다. 퍼뜩 위를 쳐다보니 우물 구멍이 조그마한 푸른 원반 같이 보이고 그 속에 별이 하나 보였다. 위너의 머리가 동그랗게 내밀고 있는 것도 보였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덜덜덜 하는 기계 소리가 점점 커져서 기분이 나빠졌다. 머리 위의 조그만 원반 밖에는 어디나 모두 깊은 어둠이었다. 조금 있다 다시 한 번 쳐다보았을 때엔 위너의 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이 불안스런 기분이었다. 그냥 도로 올라가서 지하의 세계에 관한 일 같은 것은 잊어버리기로 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냥 내려가고 있었다. 드디어 30센티미터쯤 오른쪽 벽에서 옆으로 뚫린 조그만 구멍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얼른 기어 들어가 보니 그것은 수평으로 된 좁은 터널의 입구였다. 누워서 쉴 수가 있는 곳이었다. 아주 제때에 발견된 셈이었다. 팔은 아프고 어깨는 떨리어 이제라도 떨어지지 않나 하고 진땀이 나던 참이었다. 게다가 어디를 봐도 깜깜한 암흑이어서 눈이 이상해져 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곳으로 공기를 끌어들이는 기계의 덜덜거리는 소리가 땅 속을 울리고 있었다. 얼마 동안 그곳에 누워 있었는지 모르지만 흐느적거리는 손이 내 얼굴에 닿아 깜짝 놀랐다. 어둠 속에 벌떡 일어나 앉자 성냥갑을 꺼내어 급히 불을 켰다. 그 불빛으로 내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던 허연 생물 셋이 황급히 달아나는 게 보였다. 언젠가 지상의 폐허에서 본 것과 같은 것들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살고 있으므로 그들의 눈은 별나게 크고 민감했다. 꼭 바다 깊은 데 있는 물고기의 눈처럼 빛을 반사하는 것이었다.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나를 잘도 알아본 모양이었다. 성냥불만 없었다면 나 같은 건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좀더 자세히 관찰하려고 성냥을 긋기가 바쁘게 쏜살같이 도망쳐 어두운 바위 뒤나 터널 속에 숨더니 거기서 기분 나쁜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지상 세계의 말과는 다른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탐험을 중단하고 도망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터널 속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니 기계 소리는 점점 커져 왔다. 이윽고 터널이 넓어지더니 넓은 곳에 이르렀다. 성냥 한 개피를 그어 보니 천장이 둥글게 된 큰 동굴에 와 있었다. 어두운 동굴은 성냥불이 비춰지지도 않는 저 앞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기야 성냥 한 개피가 타고 있을 동안에 본 것이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러기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도 그리 확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커다란 기계 같은 것이 어둠 속에 높다랗게 서 있는데 그 그림자 속에 희미한 유령 같은 몰록들이 성냥불 빛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 곳은 공기가 탁해서 후덥지근하고 피비린내 같은 것이 코에 스며들어 왔다. 중앙에서 좀 떨어진 곳에 흰 금속의 조그마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고기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면 몰록들은 육식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수상하다고 생각한 걸 기억하고 있다. 그 커다란 붉은 고깃덩어리를 보면 상당히 큰 동물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런 동물이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일까?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보였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냄새, 정체 모를 커다란 고깃덩어리, 어둠 속에 숨어서 가만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내게로 공격해 오려고 노려보고 있는 흉물스런 몰록인들. 성냥개비가 다 타서 땅바닥에 떨어져 어둠 속에 조그만 붉은 점이 되어 굴렀다. 나는 시간 여행에 나서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허술한 장비 밖에 하지 않았던가 하고 후회를 했다. 타임 머신에 올라 출발할 때, 나는 어리석게도 미래 세계의 인간은 모든 점에 있어 현재의 우리들보다 훨씬 진보되어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나는 무기도 약품도 담배도 준비하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아주 담배가 피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충분한 성냥까지도 준비하지 않고 온 것이다. 카메라를 가져 왔더라면 지하 세계를 찍어 뒷날 천천히 조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실제는 하늘이 준 무기, 내 손과 발과 이빨만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다. 이제 남아 있는 건 그 무기들과 네 개비의 성냥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기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건 무서웠다. 더구나 성냥불이 꺼지기 전의 그 작은 불빛으로 이미 성냥도 거의 동이 난 걸 알았다. 그 때까지 성냥을 아낄 필요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거의 반 갑이나 되는 성냥을 지상 세계의 인간들을 즐겁게 해 주느라고 써 버렸던 것이었다. 불이란 그들에게는 참으로 진귀한 것이었다. 이제 남은 성냥은 단 네 개비뿐이었다. 어둠 속에 서 있으려니까 손이 하나 내 손을 건드리고 앙상한 손가락이 내 얼굴 위를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비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내 주위에는 그 흉한 몰록들이 몰려와 있어서 그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성냥갑이 가만히 빠져나가게 당겨지는 것 같았고, 몇 개의 손이 뒤에서 내 옷을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들에게 신체 검사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짓을 하려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이 어둠 속에서 돌연 알고도 남을 만큼 깨달아졌던 것이었다. 나는 되도록 큰 소리로 야단을 쳐봤다. 그러자 그들은 휙 달아났다. 그리고도 곧 다시 슬슬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층 더 대담해져서 내 옷을 잡고 저희들끼리 괴상한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와들와들 떨면서 또 한 번 소릴 쳤다. 그 소리는 외치는 소리에 가까웠다. 이번 소리에는 그들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도리어 괴상한 웃음소리를 지르면서 내게 덤벼들었다. 정말이지 나는 겁이 더럭 났다. 나는 또 한 개비의 성냥을 그어서 그 불빛을 이용해서 도망을 칠 생각을 했다. 성냥을 그어, 주머니에서 종이 조각을 꺼내 거기에다 불을 붙여 좁은 터널 쪽으로 도망쳐 갔다. 그러나, 터널에 들어섰을 때, 종이의 불은 꺼져 버렸다. 어둠 속을 몰록들이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비 쏟아지는 소리로 뒤쫓아오는 걸 알았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는 몇이나 되는 손아귀에 붙들렸다. 틀림없이 그들은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 한 개비의 성냥을 그어 깜짝 놀라는 그들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들이 얼마나 추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자네들은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턱이 없는 창백한 얼굴과, 눈꺼풀이 없고 분홍색이 곁들인 커다란 회색의 눈. 그리고 눈이 부시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의 그 얼굴이란......! 그러나 멈춰 서서 그런 걸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계속 뛰었고 두 개비의 성냥이 다 타 버리자, 세 개비 째의 성냥을 그었다. 그것이 거의 다 탔을 때 간신히 터널 입구에 다다랐다. 나는 거기서 턱 드러누웠다. 아래서 들려오는 커다란 펌프 소리에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옆으로 팔을 뻗어 발 디딤쇠를 찾았으나 그때 뒤에서 다리를 붙잡혀 와락 뒤로 끌어당겨졌다. 나는 마지막 성냥을 그었다. 그러나, 그건 금방 꺼져 버렸다. 그래도 내 손은 디딤쇠를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힘차게 다리로 걷어차서 몰록들의 손을 떼어버리고는, 그들이 눈을 끔벅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빨리빨리 우물 벽을 올라갔다. 그런데도 단 한 녀석, 나를 한참 동안 따라오는 놈이 있어 하마터면 구두를 빼앗길 뻔했다. 어디까지 기어올라가도 한이 없는 것 같았다. 앞으로 7미터 정도 남았을 때, 심한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디딤쇠에 매달려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후의 2, 3미터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싸움이었다. 몇 번이나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드디어 우물가를 넘어서서 비틀거리며 폐허를 빠져 나와 밝은 태양 광선 속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나는 앞으로 픽 쓰러졌다. 흙 냄새가 실로 시원하게 느껴졌다. 위너가 내 손과 귀에 키스를 하고, 다른 엘로이들의 목소리가 들린 걸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는 실신을 해서 한동안 정신없이 쓰러져 버린 것이었다.   안전한 잠자리를 찾아서   그런데 나의 처지는 전보다 훨씬 나빠진 것같이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밤이 되면 타임 머신을 잃은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낮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도망쳐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곤 했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이번의 탐험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었다. 이제까지 나는, 타임 머신은 작은 이들이 단순히 어린애 같은 장난으로 감춰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혹시 무언가 정체를 모를 힘에 의해서 숨겨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겨낼 방법만 알게 되면 도로 찾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몰록이라는 보기 싫은 놈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냉혹하고 무서운 인간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전에는 굴속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굴에 대한 일과 거기서 나오는 일만 생각했었다. 그랬지만 지금의 나는 덫에 채인 짐승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라도 적이 다가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두려워한 적은, 자네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초생달 밤의 어두움이었다. 언젠가 위너는 이 어두운 밤에 대해서 얘기해 준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어떤 뜻인지 몰랐었다. 그리나 이제는 차차 나에게 가까이 오는 어두운 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짐작해서 알 수가 있었다. 달은 벌써 기울기 시작하여 밤마다 어두운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왜 지상의 작은 이들이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몰록들이 어두운 초생달 밤에 어떤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일까? 나는 두 번째로 세운 가설도 전혀 틀린 것이었다는 걸 제법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찍이 지상 세계의 인간들은 풍족한 귀족 계급이었다. 몰록들은 이들에게 기계와 같이 부려지는 하인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이미 그 옛날에 변해져서 인류가 진화한 결과 생겨난 이 두 인종은 아주 새로운 관계에 옮아가려 하고 있었거나 이미 옮아가 버린 것이었다. 엘로이들은 카를링 왕조(751~987년의 프랑스의 왕조)의 왕들처럼 오직 아름다운 겉치레만의 것이 되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아직까지 지상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몰록들이 오랫동안 지하 생활을 계속해 온 결과 밝은 지상 생활에 견디지 못하게 된 탓이리라. 나의 상상으로는, 몰록들은 엘로이들을 길러 주고 있었지만 그건 아마 그들이 엘로이의 하인이었을 시대의 낡은 습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그걸 마치, 말이 앞발로 땅을 파헤치듯이, 인간이 사냥으로 잡은 짐승을 죽이며 즐기듯이 해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래 된 습관이란 것은 소용이 없어졌는데도 좀처럼 인간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낡은 질서의 한 부분이 무너진 것은 확실했다. 복수의 여신은 지금 급속히 엘로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 옛날, 몇 천 세대 전 옛날, 인류는 자기들의 형제인 인간을 안락한 생황과 태양 아래 밝은 곳으로부터 추방했다. 지금 그 형제들이 되돌아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서...... 엘로이들은 이제 새삼 옛날의 교훈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시금 '두려움'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불현듯, 그 지하에서 본 고깃덩어리가 생각났다. 왜 그런 것이 생각났는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아니고 갑자기 생각난 것이었다. 나는 그 고기의 모양을 생각해 내려 했다. 무엇인가를 닮은 걸 본 일이 있는 것 같았으나 그 때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엘로이들이 신비적인 공포에 대해서 전연 무력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현대인이다. 벌써 공포에 의해 인간이 무력해지거나, 신비에 의해서 겁을 내거나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인류의 전성기인 현대의 인간인 것이다. 적어도 나는 자기 스스로 나를 지킬 작정이다. 나는 주저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무기와, 안심하고 잘 수 있는 편한 보루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로 했다. 그 보루를 발판으로 하면 나도 이 기묘한 세계에 충분히 대항해 갈 수가 있을 것이다. 밤마다 어떤 괴물이 습격해 올지 모른다해서 온통 잃어버렸던 자신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놈들에 대해서 안전한 잠자리를 발견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잠을 잘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놈들은 나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를 했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 졌다. 그 날 오후 나는 템즈 강 유역을 거닐며 찾아보았는데 몰록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 여겨지는 장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 우물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기어오르기를 잘하기 때문에 어떤 건물이나 높은 나무라도 간단히 올라올 것이 뻔했다. 그 때, 저 청자 궁전의 높은 뾰족탑과 번쩍번쩍 빛나는 벽이 퍼뜩 생각났다. 그래서 저녁나절, 나는 위니를 어깨에 올려 앉히고 남서쪽을 향해 언덕을 올라갔다. 거기서는 12,3킬로미터 가량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석실은 3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였다. 처음 그 궁전을 본 것은 안개 낀 오후였다. 그런 때에는 실제보다 가까이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쪽 구두 뒤축이 떨어져 나가서 못이 발바닥을 찔러 이 구두는 집에 있을 때 신던 것으로 헌 구두인 만큼 발이 편한 것이었다. 나는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궁전이 보이는 데까지 갔을 때 해는 이미 지고, 길게 보이는 건물 그림자가 엷은 황색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위너는 내 어깨에 올라앉는 걸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내려달라고 하여 내 옆에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오다가 때때로 여기 저기 뛰어가서 꽃을 꺾어 나의 호주머니에 꽂아주곤 했다. 위너는 언제나 내 호주머니를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드디어 그걸 색다른 꽃병으로 삼아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호주머니를 꽃병이라 생각하고 사용한 것이었다. 오! 생각난다. 내 웃옷을 갈아입을 때 알았지만........ 시간 여행자는 이야기를 멈추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말없이 두 송이의 시들은 꽃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엄청나게 큰 하얀 꽃으로 당아욱 꽃을 닳은 것이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황혼의 적막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언덕 꼭대기를 넘어 윔블던(런던 남쪽 교외의 도시) 쪽으로 나아갔다. 위너는 피곤해서 회색 석조 건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는 멀리 보이는 청자 전의 뾰족탑을 가리키면서 우리는 무서운 것을 피하기 위해 저기로 가는 것이라고 알려 주려고 애를 썼다. 해 지기 전 모든 것이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그 적막을 자네들은 아는가? 나뭇잎을 흔드는 살랑 바람조차 날개를 접어 버린다. 저녁의 그 고요한 가운데는 언제나 무언가 내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것이 있었다. 하늘은 맑게 개어 끝없이 넓고, 멀리 해가 잠겨 들어간 곳 근처에는 한 줄 두 줄 옆으로 길게 뻗힌 구름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저녁만은 내 마음의 설레임 속에 공포감이 섞여 있는 것을 느낀다. 점점 어두워지는 적막 속에서 나의 감각은 묘하게도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땅 아래 지하의 동굴까지가 몸에 느껴져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몰록들이 개미 떼처럼 우왕좌왕하면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땅바닥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흥분하면서, 몰록은 내가 그들의 주거지에 들어간 것을 선전 포고로 알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그 놈들은 무엇 때문에 내 타임 머신을 가져갔단 말인가! 우리는 적막한 그 속을 걷고 있었다. 먼 하늘의 푸른색도 사라지고, 별이 하나 둘 반짝이기 시작했다. 땅은 어둠에 묻히고 나무들이 시꺼멓게 보이기 시작했다. 위너의 공포와 피로는 심해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안고 얘기를 걸어 위로해 주었다. 이윽고 근처가 더욱 어두워지자 그녀는 내 목에 두 팔을 감더니, 눈을 감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긴 언덕을 내려가 골짜기로 나왔다. 그 곳은 더욱 어두워서 하마터면 개울에 굴러 떨어질 뻔했다. 나는 개울을 건너 반대쪽 골짜기의 비탈을 올라가 잠들어 있는 집들과 머리가 떨어져 버린 폰(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은 사람, 반은 양의 모습을 한 신) 같은 조각의 옆을 지나쳤다. 이 근방에도 아카시아가 무성하게 나 있었다. 이제까지는 몰록을 만나지 않았지만 밤은 아직 초저녁이고 달이 뜨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 되기까지에는 아직 멀었다. 다음 언덕 위에 이르자 울창해 보이는 숲이 앞쪽에 시꺼멓게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숲을 보고 나는 망설였다. 숲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끝없이 넓은 숲이었다. 나는 갑자기 피로를 느끼고, 특히 발이 몹시 아팠다. 걸음을 멈춘 다음 위너를 가만히 어깨에서 내려 들고 잔디 위에 앉았다. 청자 궁전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울창한 숲 속을 기웃거리며 무엇이 숨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무성한 나무들이 가지를 서로 얽고 있는 그 아래에서는 별조차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위험이란 걸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가령 위험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나무에 부딪치기 쉬울 것 같았다. 나는 낮의 흥분으로 몹시 피로해 있었다. 그래서 위험한 곳에 들어가기를 단념하고, 그날 밥은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서 지내기로 했다. 다행히 위너는 잠이 깊게 들어 있었다. 나는 정성껏 그녀를 내 웃옷으로 싸 덮어 주고 그 곁에 앉아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언덕 중턱은 조용하고 인기척도 없었다. 그러나, 가끔 어두운 숲 속에는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있다는 기분을 주었다. 잘 개인 날씨라 머리 위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별을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 된 별자리는 아주 하늘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별의 움직임은, 인간이 백 번 다시 태어나도 변하지 않을 정도로 극히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 극히 작은 변화가 이미 오래 전에 별자리의 모양을 눈에 서툴게 바꿔 놓은 것이었다. 그래도 은하수만은 별들을 훅하고 불어 성글어진 것 같은 옛날 그대로였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처음 보는 굉장히 많은 별이 있었다. 붉은 색으로 빛났다. 그것은 전체 푸른빛으로 빛나는 시리우스별보다 훨씬 큰 별이었다. 반짝거리는 빛의 집 같은 별들 가운데 하나의 밝은 별이 마치 옛날의 친구 얼굴같이 상냥하고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 별을 보고 있는 중에, 나 자신의 근심은 물론 지상의 모든 문제들이 갑자기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 별과의 헤아릴 수 없는 먼 거리와, 미지의 과거로 유유히 움직여 가는 그 운동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지구의 극(남극-북극)이라는 커다란 세차 운동(넘어지려는 팽이의 축이 그리는 일주형의 운동)에 대한 것도 생각해 봤다.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이 조촐한 회전 운동은 단 40회 밖에 하지 않았다. 그 얼마 안 되는 회전 운동 사이에 모든 인간의 활동이, 전통이, 복잡한 조직이, 국가가, 문학이, 포부가, 아니 옛날 사람들의 기억까지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신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자기들의 훌륭한 조상의 일도 잊어버린 저 연약한 인간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허여스름한 인간이었다. 나는 이 두 인종 사이에 있는 커다란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내가 본 그 고깃덩어리가 무엇이었던가를 확실히 깨닫게 되자 갑자기 온 몸이 떨렸다. 나는 내 곁에 잠들어 있는 작은 위너를 들여다보았다. 별빛 아래 그녀의 얼굴은 희고, 별 같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곧 그 무서운 생각을 머리에서 떨어 버렸다. 긴 밤 동안, 나는 되도록 몰록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새로운 별자리 가운데서 옛날 별자리의 흔적을 찾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늘은 맑아서 안개 같은 구름이 한두 송이 떠 있을 뿐이었다. 필시 나는 가끔 졸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불침번을 하고 있는 중에 얼굴 없는 화재의 반사와도 같이 동쪽 하늘이 희끄므레 해지더니 야위고 두 끝인 뾰족하고 푸르스름한 달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걸 뒤쫓는 듯 새벽이 다가왔다. 하늘은 처음엔 희뿌옇다가 이내 따스한 분홍색으로 변해 갔다. 몰록은 우리들 가까이 오지 않았다. 사실 그 날 밤은 그 언덕에서 한 마리의 몰록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아침이 되어 자신이 생기니까 간밤에 그렇게도 무서워한 일이 우습게 생각되었다. 나는 일어나서 보았다. 뒤축이 떨어져 나간 구두를 신고 있는 쪽 발은 복사뼈가 있는 데가 부어서 발뒤꿈치가 아팠다. 그래서 다시 풀밭에 앉아 구두를 벗어 던져 버렸다. 위너를 깨워 일으켜 가지고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어젯밤에는 시꺼멓고 무섭게 보이던 곳이 지금은 짙푸른 나무들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우리는 과일을 따서 시장한 배를 채웠다. 조금 후, 우리는 다른 엘로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마치 밤 같은 건 없다는 듯이 밝은 햇볕 속에서 웃고 춤추고 있었다. 나는 또 그 고깃덩어리를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는 이미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마음 속 깊이 이 사람들은 정말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인류라고 하는 큰 강물의 물이 거의 다 말라 버리고 조금 남은 찌꺼기라는 생각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틀림없이 오랜 옛날 인류가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 몰록들은 식량이 부족하게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들은 아마 쥐 같은 해로운 동물을 잡아먹으며 목숨을 이어갔을 것이다. 현재에도 인간은 옛날에 비해 훨씬 음식을 가려먹는 일이 없게 되었다. 원숭이와 비교해 봐도 훨씬 그런 것이다. 아무 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습성은 이 미래의 사람답지 않은 인류의 자손에까지 와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냉정히 생각해 보려고 했다. 요컨대 몰록들은 3, 4천년 전 우리들의 조상들인 식인종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인연이 먼 자들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상태를 슬퍼할 만한 지성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뭐 구태여 애석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엘로이들은 살찐 소에 불과한 것이요, 거미들 같은 몰록들에 의해서 길러져서 그들의 먹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위너는 내 곁에서 세상 모르고 춤추고 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건 인간의 방종에 대한 엄한 벌이라 생각하고 오싹오싹 스며드는 두려움에서 한시 바삐 피해 나가고 싶어졌다. 인간은 딴 인간을 부려먹음으로 해서 편하고 즐겁게 살아 왔다. 그리고 그건 운명이니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 왔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운명이 반대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 멸망해 가는 귀족 계급인 엘로이들을 멸시해 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들의 지능이 저하했다하더라도, 그들의 모습은 인간과 같았기 때문에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포와 퇴화에 관해서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를 못했다. 우선 첫째로 생각한 것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쇠붙이와 돌로 어떻게 해서든 무기를 만드는 일이 있다. 이건 당장에라도 하지 않아선 안 될 일이라 생각되었다. 다음은 불을 가지는 방법이었다. 횃불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몰록에 대해서는 이보다 효과 있는 무기가 없다. 그리고 허언 스핑크스의 받침대인 철제 문을 여는 도구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떠오른 것이 큰 쇠뭉치였다. 그 문을 열고 눈부신 횃불을 들고 들어가 타임 머신을 발견하여 이곳으로부터 도망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몰록들로서는 타임 머신을 그리 먼 곳까지 운반할 힘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위너를 현대로 데려 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좋은 피난처가 될 것 같은 저 청자 궁전을 향해 걸어갔다.   성냥과 장뇌   우리가 청자 궁전 바로 옆에까지 간 것은 오정 가까운 때였다. 거기엔 사람이 사는 것 같은 기미는 없고 무너진 곳이 많았다. 창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남아있을 뿐이고, 녹이 슨 금속 창문 가에서는 벗겨진 커다란 녹색 타일이 떨어져 있었다. 건물은 낮은 풀 언덕에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동북 끝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현재의 윈드워스나 바타시로 생각되는 근처에 강물이 휘어져 굽어 들어 간 곳이 매우 깊은 것을 본 것이다. 나는 퍼뜩, 그 생각은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바다의 생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어 가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궁전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걸 짓는데 사용한 재료는 도자기였는데, 표면에 무언지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위너 보고 읽어보라고 하다가, 위너의 머리에는 글자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그녀는 언제나 실제 이상으로 지금 사람들과 같게 생각되었다. 아마도 그녀의 애정이 아주 인간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 문 안쪽에는, 그 문은 부서져서 열린 그대로 였는데, 보통 홀이 아니고 많은 창문으로 햇볕이 잘 비쳐 드는 긴 진열실로 되어 있었다. 나는 데번의 박물관을 생각했다. 타일을 깐 바닥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였고, 죽 늘어놓은 진열품 위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다. 홀 한복판에는 이상하게 무시무시한 물건이 서 있었는데 그건 거대한 동물의 해골의 아랫부분 같았다. 구부러진 발로 보아 금룡(중생대에 번영했던 공룡의 일종)과 마찬가지로 이미 멸망해 버린 동물의 뼈란 걸 알았다. 두개골과 윗부분은 두꺼운 먼지를 쓴 채 그 옆에 굴러 떨어져 있었는데 지붕이 새어 빗물을 맞아서인지 그 뼈는 허물어져 있었다. 진열실 안쪽에는 검룡(중생대에 번영했던 공룡의 일종)의 거대한 뼈가 놓여 있었다. 내가 이 곳을 박물관이라 생각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홀 옆쪽에는 기울어진 선반 같은 것이 있었는데 두꺼운 먼지를 털고 보니 현대의 진열대였다. 그리나 그 속의 물건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진열대는 밀폐되어 기체가 통하지 못하게 되 있었음이 확실했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확실히 현대보다 얼마 뒤에 세워진 박물관의 폐허였다. 그리고 이곳은 고생물 실로 예전에는 훌륭한 화석의 표본들이 진열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막을 길이 없는 부식의 자취를 어느 표본에서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박테리아와 곰팡이가 전멸하고 없으므로 썩는 힘은 옛날의 1퍼센트 정도로 약해져서 부식의 속도도 느렸을 것이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보물들에는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저기에 진귀한 화석들이 부서졌거나, 갈대로 만든 실로 붙들려 매여 있거나 하는 것을 보면 작은 이들이 손을 댄 것 같았다. 또 어느 곳에는 진열대까지 이동되어 있었다. 몰록의 짓이리라 생각되기도 했다. 그 곳은 참으로 고요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기 때문에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위너는 진열대를 보고 놀고 있다가 내게로 다가와서, 가만히 내 손을 잡고 곁에 서 있었다. 처음에 나는 이 인류가 현명했던 시대의 기념품에 너무나 놀라 그것을 이용할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타임 머신에 대한 것조차 잠시 머리에서 멀어져 버렸던 것이다. 건물의 크기에서 보아, 이 청자 궁전에는 고대 생물실 외에도 여러 개의 방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역사실과 아니 도서실도 있을지 모른다. 그건 나에게 있어, 적어도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는, 고대 지질학의 다 부서진 진열품 따위보다 훨씬 흥미 있는 것이었다. 조사해 본 결과 또 하나 작은 진열실이 첫째 방과 직각으로 붙어 있음을 알았다. 그곳은 광물실인 듯, 나는 유황 덩어리에서 화약을 만들 것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초석이나 초산칼륨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필시 오랜 옛날에 녹아 없어진 것이리라. 그래도 유황을 잊어버릴 수 없어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진열실에 있던 물건은 내가 본 것들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나는 광물학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서 첫째 방과 평행으로 가고 있는 몹시 망가진 복도를 걸어봤다. 그곳은 동식물학의 진열실로 되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 진열품도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되어 있었다. 동물의 박제 표본의 흔적인 듯한 쭈그러진 검은 것이 세 개, 전에는 알코올이 들었을 것 같은 병 속의 말라빠진 미라, 부서져서 갈색 먼지 같이 되어버린 식물 등 그런 것뿐이었다. 조금 후 우리들은 굉장히 큰 진열실로 들어갔다. 이 방은 몹시 채광이 나빴고 마룻바닥은 내가 들어선 곳에서부터 서서히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다. 천장 여기저기에 허연 공 같은 것이 매달려 있었는데, 대개가 금이 갔거나 깨진 것들이었다. 이 방은 인공적으로 조명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나는 얼마쯤 생기가 났다. 그건 내가 서 있는 양쪽에는 커다란 기계가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몹시 녹이 슬었고 부서져 있었지만 그 중에는 아직 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몇 있었다. 자네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기계에는 홀딱 빠지는 터라 잠시 돌아다니며 관찰을 하기로 했다. 대개의 기계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었고 도대체 무엇에 쓰는 것인지 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걸 알게 되면 몰록들을 공격하는데 소용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위너가 내 곁에 바싹 다가왔다. 너무도 갑자기 그라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았다. 만일 위너가 없었더라면 나는 이 방바닥이 기울어져 있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방바닥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박물관이 언덕 비탈을 파고 거기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들어간 방의 한쪽 끝은 완전히 땅 위에 나와 있어서 조금 밖에 안 되는 좁은 창문으로 밖의 광선이 숨어 들어왔다. 그러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면이 높아져서 창문을 막고, 끝에서는 창문 위쪽에서 약간의 광선이 들어올 뿐이었다. 나는 그 기계들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갔는데 너무나 기계에 정신을 빼앗겨 차차 광선이 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위너가 몹시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비로소 그걸 알아차린 것이었다. 방의 차일 안쪽은 캄캄했다. 나는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지는 조금 적었고, 먼지의 표면이 일정하지 않았다. 다시 그 안쪽 어두운 곳을 보니, 먼지 위에 조그만 발자국이 많이 찍혀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고 나는 이제라도 몰록들이 오지 않을까 불안해졌다. 기계 같은 걸 관찰한답시고 엉뚱하게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후도 꽤 오래 된 것 같았다. 무기도, 숨을 곳도, 불을 일으킬 만한 것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방구석 쪽 어둠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타닥타닥 하는 소리와 전에 우물 밑에서 들은 것 같은 괴상한 소리였다. 나는 위너의 손을 붙잡았다가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나서, 그녀를 그 곳에 남겨 놓고 어떤 기계 있는 데로 갔다. 그 기계에는 철도 신호소에 있는 지렛대 같은 레버가 쑥 내밀어져 있었다. 나는 기계로 기어올라가 두 손으로 그걸 잡고 힘껏 옆으로 잡아당겼다. 중앙 통로에 혼자 내버려진 위너는 돌연 울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한 대로 레버는 1분간쯤 잡아당기니까 툭 부러졌다. 몰록의 머리통은 간단히 깨뜨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묵직한 쇠뭉치를 들고 위너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정말 그놈들을 죽여주고 싶었다. 제 자손을 죽이다니, 꽤도 야만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놈들에게 대해서 인간답게 대해 주라고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러나, 위너를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게다가 그놈들을 죽이면 타임 머신을 부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므로 방 안쪽에 있는 몰록을 죽이러 가는 일은 그만 두기로 했다. 한 손에 레버를 들고, 한 팔에는 위너를 안고 그 방을 나와 다른 큰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처음 봤을 때는 누더기 같이 날은 군기가 걸린 군대의 교회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방 양편에 걸려 있는 갈색 누더기 같아 보인 것은 썩어 가는 책의 잔해였던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오래 전에 썩어 흩어져서 글자는 전부 다 문드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곳곳에 뒤틀린 종이와 부서진 철사들이 남아 있어서, 이 갈색의 누더기 같은 것은 옛날엔 책이었다는 걸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만약 내가 문학자였더라면, 그것들에서 문학적 야심의 허무함을 통감하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슴 깊이 느낀 것은 그 얼마나 많은 노력이 헛되이 쓰여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썩은 종이의 산더미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그 때 내가 생각한 것은 런던 왕립 학회 회보와 거기에 실은 광학에 관한 나의 열 일곱 건의 논문에 관한 일이었다. 그 다음엔 넓은 계단을 올라가 응용 과학실이었을 것 같은 곳으로 갔다. 나는 여기서 무엇이든지 소용될 물건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고 크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천장 한쪽 구석이 무너져 내린 외에는 이 진열실은 제법 본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부서지지 않은 진열대를 남김없이 들여다보며 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한 밀폐된 진열대에서 한 통의 성냥을 발견했다. 가슴이 마구 떨었다. 성냥을 꺼내 그어 보았다. 성냥은 완전히 쓸 수 있었다. 나는 위너를 향해, "춤을 추자.“ 라고 그녀가 하는 말로 소리쳤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무서운 적을 상대하여 싸울 무기가 간신히 손에 들어 온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그 황폐해진 박물관의 두텁고 보드라운 먼지의 융단 위에서 위너를 크게 즐겁게 해 주었다. 나는 되도록 명랑하게 휘파람을 불며 아주 재미있게 일종의 혼합 댄스를 추어 보였다. 그건 일부분은 고상한 왈츠 컨트리 댄스이고, 일부분은 스키핑 스텝 (나는 연미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잘 출 수가 없었지만), 일부분은 즉흥적인 춤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각하여도 이 한 통의 성냥이 그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에 무사히 남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정말 다행한 일이었지만...... 더구나 정말 이상한 것은 내가 훨씬 더 뜻하지 않은 물건을 발견한 일이다. 뜻밖에도 그것은 장뇌 (색이 없고 반투명의 광택이 있으며 특이한 향기가 나는 물질로 화약이나 방충제 등의 제조에 쓰임)였다. 그건 밀봉된 병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걸 파라핀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 병을 깨어 보았다. 그런데 틀림없는 장뇌의 냄새가 났던 것이다. 모든 것이 썩어버린 가운데서, 이 휘발성 물질만이 아마도 몇 천 세기 동안 보존되어 온 것이었다. 나는 장뇌를 내던져 버리려다가, 퍼뜩 장뇌는 잘 타며 탈 때는 밝은 불꽃을 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장뇌는 훌륭히 양초의 구실을 할 것이다. 그래 나는 그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저 청동의 쇠문을 깨뜨리는데 쓰일 만한 화약이나 도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지금까지에 가장 소용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저 쇠몽둥이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용기를 얻어 그 진열실을 나온 것이었다. 그 기나긴 오후의 일을 남김없이 다 얘기할 수는 없다. 내가 조사하며 돌아다닌 곳을 차례대로 생각해 내기에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정도니까. 나는 여러 가지 무기를 놓은 녹슨 진열대가 줄지어 있는 긴 진열실의 일을 기억하고있다. 거기서 나는 쇠몽둥이 대신 도끼나 칼을 가질까 하고 한동안 망설였었다. 두 가지 다 가질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청동의 문을 비틀어 열기에는 쇠몽둥이가 편리할 것 같았다. 거기에는 많은 총과 권총도 있었다. 대개 녹이 잔뜩 슬어 있었지만, 그 중에는 별난 금속으로 만들어져서 조금도 녹이 슬지 않는 것도 몇 가지 있었다. 옛날에는 화약도 있었겠지만 완전히 썩어 먼지로 변해 버렸을 것이다. 방 한 구석이 꺼멓게 그을려 부서져 있는 것은 아마 표본 중에 어떤 것이 폭발을 한 때문이라 생각되었다. 다른 방에는 인형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폴리네시아, 멕시코, 그리스, 페니키아 등 내가 알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의 인형들이 전부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고 있을 수가 없어 특별히 맘에 드는 남아메리카 원산의 활석(곱돌)으로 만들어진 괴물의 코에다 내 이름을 새겨 넣었다. 저녁때가 가까워지자 나의 흥미는 식어져 갔다. 그래도 진열실에서 진열실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 두지 못했다. 그곳은 모두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을 죽이고 있었으며 어떤 곳은 무너져 내려앉아 있었다. 진열품 중에는 녹으로만 남은 것과 이탄(탄화의 정도가 낮은 석탄)의 산더미로 돼 있는 것도 있었으나 그 중에는 어느 정도의 본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도 있었다. 어떤 곳에서 나는 주석 광산의 모형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진열대 속에 두 개의 다이너마이트가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나는 버럭 소리쳤다. "있었다. 있었어!“ 그리고는 반가운 마음으로 상자를 깨뜨렸다. 그러나, 약간은 걱정이 되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옆에 있는 작은 진열실을 선택해서 거기서 시험을 해 보기로 작정했다. 이 때처럼 낙심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5분, 10분, 15분........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다이너마이트는 모형이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가짜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스핑크스나 청동의 쇠문도 날려버렸을 것이 틀림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타임 머신을 발견할 기회도, 이건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무엇이나 다 날려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 뒤였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는 박물관 속의 조그만 가운데 뜰로 갔다. 그곳은 잔디밭으로 되어 있었고 세 그루의 과일나무가 서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과일을 따서 배를 채웠다. 차차 밤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몰록들이 가까이 오지 못할 곳은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 대해선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몰록들을 방어하기에 제일 좋은 무기, 즉 성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일 불꽃이 필요하다면 호주머니 속에 장뇌가 들어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넓은 장소에서 불을 피우면서 밤을 새우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타임 머신을 찾으러 가는 것이다. 거기 필요한 연장으로서 나는 지금 쇠몽둥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을 알게 됨에 따라 저 청동 문짝을 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제까지 나는 그 문을 억지로 열기를 삼가고 있었다. 문짝 안 쪽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짝은 그리 튼튼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쇠몽둥이도 아주 소용없는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타오르는 불   우리는 아직 해가 지평선 위에 남아 있을 즈음에 박물관을 나왔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핑크스가 있는 곳에 도착 할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 어둡기 전에 어젯밤에 길이 막혀 머물렀던 숲을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나의 계획은 그날 밤 안에 되도록 멀리 가서 모닥불을 피우고 그 불빛에 의지해서 하룻밤을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걸어가면서도 눈에 띄는 작은 가지와 마른풀들을 주워 모았다. 이내 내 팔에는 그런 것들이 한아름이나 되었다. 이런 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걸음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느렸다. 게다가 위니는 피로에 지쳐 있었다. 물론 나도 졸려 못 견딜 지경이었다. 아직 숲에 닿기도 전에 이미 밤이 되었다. 숲에서 가까운 덤불로 뒤덮인 언덕 위에 이르자, 위너는 캄캄한 숲을 무서워하여 도무지 걸으려고 하질 않았다. 나도 위험이 임박해 있음을 느꼈다. 다른 때 같으면 더 나아가지 않았을 것인데도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게 되었다. 나는 하룻밤과 이틀 동안 전혀 잠을 자지 못했다. 열이 나고 마음이 초조했다. 졸음이 엄습해 오는 것과 잠이 들면 몰록들이 습격해 온다는 것을 걱정했다. 어름어름하고 있는 동안에 뒤쪽의 컴컴한 달빛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셋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들 주위에는 덤불과 키가 큰 풀이 나 있을 뿐이었다. 놈이 살그머니 다가오는 날에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나의 계산으로는 숲의 너비는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것 같았다. 숲을 빠져나가 아무 것도 나 있지 않은 언덕 중턱에 이르기만 하면 좀 더 안전하게 숨을 곳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성냥과 장뇌로 길을 비추면서 숲을 빠져나갈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그러나, 성냥불을 켜들고 가려면 땔나무들은 가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것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때 문득 이 나무에 불을 붙여 뒤쪽에 있는 몰록들을 놀라게 해 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방법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나, 그 때는 우리들의 나아갈 길을 지키기에는 아주 적합한 방법으로 여겨졌었다. 자네들은 모르겠지, 그러나 인류가 살지 않는 온화한 기후의 땅에서는 불꽃이란 것은 정말 희귀한 것이었다. 태양과 열은 물건을 태울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워지는 일은 거의 없다. 하기야 열대 지방에서는 이슬방울이 볼록 렌즈체 구실을 해서 태양의 빛을 모아 불이 일어나는 일이 가끔 있는 모양이며, 벼락이 떨어져서 물건을 태우는 일은 있어도 그것으로 불이 번져 타는 일은 좀처럼 없다. 식물이 썩어서 그 발효열로 뜨는 일은 때때로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불이 붙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이 미래 세계에는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전부 잊어버리고 있었다. 위너에게는 땔감의 나무더미를 핥고 있는 붉은 불꽃의 혓바닥은 정말 처음 보는 이상한 것이었다. 위너는 불꽃 옆으로 달려가서 그걸 손으로 만져 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만일 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필시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나는 위너를 붙잡아 발버둥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녀를 안고 앞쪽 숲 속으로 기운차게 걸어 들어갔다. 모닥불의 불빛은 한동안 우리의 앞길을 비쳐 주었다. 얼마 후 뒤돌아보니 얹히어 있는 나뭇가지 틈으로 아까 그 모닥불이 근처 숲에 옮아 붙어 나가는 게 보였다. 그 불은 반원을 그리며 언덕의 풀을 태우고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불을 보고 웃으며 앞으로 나아갈 쪽의 시커먼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근처는 캄캄했다. 위너는 내게 꼭 매달려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니까 나무에 부딪치지 않고 걸어 갈 수가 있었다. 머리 위에는 캄캄한 어둠이 뒤덮여 있었으나 곳곳에 틈이 있어 거기로 검푸른 먼 밤하늘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 팔에는 위너를 안았고, 한 손에는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으므로 성냥을 그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발아래서 잔가지가 꺾이는 소리와 머리 위를 불어 가는 은은한 바람 소리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때 주위에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그냥 걸어가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소리는 점점 또렷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전에 지하 세계에서 들은 것 같은 기묘한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 왔다. 확실히 몇 사람의 몰록이 숨어 있다가 나를 습격하려고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과연 1분쯤 지나자 어떤 놈이 내 웃옷을 잡아당기며 팔을 스쳤다. 위너는 무섭게 몸을 떨며 입을 꼭 다물고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이때야말로 성냥을 그을 때였다. 그러나 성냥을 꺼내려면 위너를 내려놓아야 했다. 나는 위너를 땅에 내려 두고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런 사이에 내 무릎 근처의 어둠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위너는 도무지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몰록들은 그 기묘한 비둘기 울음소리 같은 꾸꾸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드럽고 작은 손이 내 웃옷과 잔등에 기어올라와서 목을 건드렸다. 이때서야 비로소 나는 성냥을 그어 착하고 불을 켰다. 나는 성냥불을 들고 내둘렀다. 몰록들의 허연 등어리가 나무 숲 속으로 도망쳐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장뇌덩이를 꺼내어 성냥이 꺼지려 할 때 곧 이것에 불을 붙일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나서 위너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내 다리를 끌어 잡은 채 땅바닥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나서 허리를 굽혀 위너를 들여다봤다. 위너는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운 듯이 보였다. 나는 장뇌덩이에 불을 붙여 땅바닥에 내던졌다. 장뇌는 활활 타오르면서 마침내 몰록들과 어둠을 쫓아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위너를 안아 올렸다. 주위의 숲은 많은 몰록들의 떠드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위너는 그만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어깨에 올려 앉히고 일으켜서 걸어 가려고 했는데 이때 갑자기 무서운 일이 생각났다. 성냥을 긋고 위너를 도와주고 하는 동안에 나는 몇 번이나 몸의 방향이 변해 있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건지 전혀 방향을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어쩌면 다시 청자 궁전 쪽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서 진땀이 솟아 나오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빨리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그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노숙을 하기로 마음을 결정했다. 나는 풀숲에 있는 나무 그루에 아직도 꼼짝 못하고 있는 위너를 기대 앉혀 놓았다. 그리고는 장뇌의 덩이가 다 타 없어지기 전에 빠른 몸짓으로 나뭇가지와 마른 잎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몰록의 눈들이 붉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장뇌의 불은 깜빡거리다간 꺼져 버렸다. 나는 성냥을 그었다. 그 순간 위너 곁으로 다가오려고 하던 두 사람의 몰록이 놀라 물러났다. 한 사람은 불빛이 눈이 부시어 똑바로 내게로 달려든다. 나는 주먹으로 그놈을 후려갈겼다. 머리뼈가 으스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놈은 죽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나는 또 한 덩이의 장뇌에 불을 붙이고는 모닥불을 지필 나뭇가지를 모았다. 그때는 순간 머리 위에 있는 나무가 말라죽은 나무란 걸 알았다.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와서부터 약 1주일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그 나무는 바짝 말라 있었다. 나는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낙엽과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그만두고 그 나무에 올라가서 가지를 꺾기 시작했다. 이제는 숲 속에 매운 연기를 올리며 모닥불이 활활 타서 장뇌덩이는 태우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나는 쇠몽둥이 옆에 쓰러져 있는 위너에게 다가가서, 어떻게든 그분의 맘을 돌리게 하려 했으나 위너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지 어떤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때 모닥불 연기가 우리 쪽으로 불어와서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더구나 근처에는 온통 장뇌의 증기가 꽉 차 있었다. 모닥불은 앞으로 한 시간 가량 나무를 넣지 않아도 견딜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지친 뒤라 온몸이 나른해져서 주저앉았다. 숲 속은 무언지 모르게 졸음을 부르는 것 같은 은은한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 사방은 캄캄한데 몰록들의 손이 나를 휘어잡고 있었다. 나는 놈들의 끈적끈적한 듯한 손가락을 뿌리치고 호주머니 속의 성냥을 찾았다. 성냥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몰록들은 다시 와서 나를 휘어잡았다. 그제야 나는 어째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깨달았다. 내가 졸고 있는 틈에 모닥불이 꺼져 버린 것이었다.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숲 속에는 나무 타는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목과 머리카락과 어깨를 붙잡혀 당장이라도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 흐물흐물한 생물들에게 붙잡혀 있다는 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 나쁘고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커다란 거미줄에 걸려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드디어 기운이 빠져 쓰러지고 말았다. 조그마한 이빨이 목덜미를 물어뜯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엎치락뒤치락하여 이리저리 굴렀다. 그런 사이에 내 손이 쇠몽둥이에 닿았다. 그 순간 갑자기 기운이 솟아올랐다. 나는 발버둥치며 일어나서 그 쥐새끼 같은 몰록들을 뿌리쳐 버렸다. 그리고는 쇠몽둥이를 바로잡고 그 놈들의 머리가 있음직한 곳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살과 피가 퍽퍽 터지는 것이 느껴지더니 내 몸은 자유로워졌다. 격렬한 싸움 끝에 흔히 느껴지는 그 기묘한 기백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나는 이미 내 목숨이나 위너의 목숨도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왕 그렇게 될 바엔 놈들의 몸뚱이로 그 값을 치르게 해 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큰 나무를 뒤로하고 서서 쇠몽둥이를 내둘렀다. 숲 속엔 어디에나 그 놈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아우성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소리는 흥분된 나머지 한결 더 높아지고 뛰어다니는 소리도 한층 더 빨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놈도 내 팔이 닿는 곳으로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나는 어둠 속을 쏘아보며 서 있어야 했다. 이 때 갑자기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놈들이 나를 무서워하고 있다면?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캄캄하던 어둠의 세상이 갑자기 밝아온 것이었다. 내 근처에 있던 몰록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 근처에 있던 세 사람의 몰록이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몰록들이 도망을 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흐르는 물처럼 내 뒤에서 앞쪽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몰록들의 잔등이가 허옇게 보이지 않고 벌겋게 보였다. 어리둥절해서 보고 있으려니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이 아닌 불똥들이 날아가다가는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였다. 숲 속에 나무 타는 냄새가 가득 차고 아까 까지 들리던 졸음겨운 소리가 굉장히 큰 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몰록이 왜 도망치고 있는지 그제야 그 까닭을 알았다. 나는 의지하고 있던 나무에서 앞으로 나와 뒤돌아보았다. 가까이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불타고 있는 숲의 불길이 보였다. 우리가 맨 처음 보았던 모닥불이 산불로 번져 우리를 뒤쫓아 온 것이었다. 나는 그 불빛으로 위너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들려오는 생나무 타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나는 침착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냥 쇠몽둥이에를 쥐고 몰록들을 뒤쫓아갔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달음박질이었다. 한 번은 들고 가는 불이 꺼져 가는 걸 보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드는 몰록들을 피해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 좀 환히 트인 빈 땅에 이르렀다. 그 때 한 녀석의 몰록이 비틀거리며 내 곁으로 와서 나를 스쳐 지나더니 곧바로 불 속으로 달려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참으로 흉한 광경을 보아야 했다. 그것은 이 미래 세계에 와서 본 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광경이었다. 불길은 점점 건너편 숲에도 옮아가서 벌써 노란 색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이 빈터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언덕 중턱에 3, 4십 명과 몰록들이 있었다. 그들은 밝은 불빛과 열에 눈이 부시어 갈팡질팡 헤매다 서로 부딪쳐 넘어지며 야단법석을 치고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그들의 눈이 아무 것도 볼 수 없게된 걸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면 엉겁결에 쇠몽둥이로 후려쳤었다. 한 녀석을 죽였고 여러 녀석을 부상시켰다. 그러나, 시뻘건 하늘을 뒤로 아가위나무 덤불 밑을 손으로 더듬으며 헤매고 있는 한 몰록의 모습을 보고, 그의 신음 소리를 들으니 그들이 이 불로 해서 꼼짝할 수 없게 된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후려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도 때때로 내가 있는 데로 비틀거리면서 오는 녀석들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비켜 주곤 했다. 산불이 약간 수그러진다. 나는 놈들이 나를 알아보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걱정이 됐다. 그래서 미리 녀석들을 몇 명쯤 때려 눕혀 줄까 하고 싸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불이 다시 되살아 올라 활활 탔으므로 나는 불타오르는 마음을 꾸욱 눌렀다. 나는 몰록들을 피하여 언덕 둘레를 돌아다니며 위너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위너는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언덕 꼭대기에 주저앉아 그 장님 같은 기묘한 몰록의 무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손으로 더듬으며 우왕좌왕 하다가 불이 가까이 다가오면 무서운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썼다. 소용돌이치며 치솟는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고 그 벌겋게 물든 하늘 사이사이로 마치 딴 세상같이 멀리 작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서너 명의 몰록이 허우적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주먹으로 갈겨 주며 쫓아버렸다. 그날 밤 동안, 나는 이건 꿈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꿈에서 깨어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어도 보고 큰 소리를 질러도 보았다. 두 손으로 땅바닥을 쳐보기도 하고 또 앉았다 섰다 해 보기도 했다. 이리저리 돌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비비며 제발 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빌기도 했다. 나는 세 번이나 몰록들이 괴로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았다. 그러나, 드디어 간신히 기세가 죽어 가는 불길 위에도, 흘러가는 검은 연기 뒤에도, 희어졌다 검었다 하는 나무 위에도, 얼마 남지 않은 몰록들의 어리둥절히는 모습 위에도, 그리고 완전히 지친 나에게도 아침의 환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위너를 찾아 다녀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끝내 찾을 수가 얹었다. 몰록들은 그녀의 자그마한 몸뚱이를 납치해 가다가 숲 속에 버리고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위너가 몰록들의 먹이가 된다는 그 무서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내 근방에 있는 그 아무런 힘도 없는 괴물들을 몰살시켜 버리려는 충동이 일어났지만 끝내 참아 버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언덕은 숲 속의 작은 섬처럼 솟아 있었다. 꼭대기에서는 연기를 통해 청자 궁전이 보였다. 이것으로 허연 스핑크스가 있는 곳의 방향도 짐작이 갔다. 근처가 더 밝아지자, 나는 풀로 발을 싸매고 절뚝거리며 아직 연기를 내고 있는 잿더미와 부서져 타고 있는 시꺼매진 나무들을 밟으며 타임 머신이 숨겨져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절뚝거리고 있었고 또 몹시 피로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여운 위너의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위너를 잃어버린 일은 최대의 불행이라 생각되었다. 지금 이 방에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위너를 잃은 슬픔도 꿈속처럼 느껴지지만, 그 날 아침 나는 다시 외로운, 완전히 외로운 몸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밝은 아침 하늘 아래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던 잿더미를 헤치며 걷고 있는 중에 나는 갑자기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내 바지 주머니에는 아직 몇 개비의 성냥이 어질러져 있었다. 성냥갑이 없어질 때 갑에서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열린 스핑크스의 받침대   아침 여덟 시에서 아홉 시쯤 나는 그 누런 쇠 걸상이 있는 곳으로 왔다. 처음 이 세계에 도착한 저녁에 나는 여기서 사방을 둘러봤던 것이다. 그 때의 나의 조급한 결단을 생각하고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의 풍경은 그 때와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짙은 초록의 덤불도, 훌륭한 궁전도, 장대한 폐허도, 푸른 양쪽 언덕 사이로 흐르고 있는 은빛 강물도 모두 그날 그때 그대로였다. 수목 사이로 수려한 의복을 걸친 미래인들이 여기저기에 오가고 있었다. 내가 위너를 구해 준 그 곳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걸 보자 나는 다시금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지하 세계로 통한 굴을 덮고 있는 둥근 지붕이 여기저기에 보였다. 이제 와서는 저 지상 세계의 인간들의 즐거운 생활, 그 뒤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를 또렷이 알게 되었다. 그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즐거워 보였다. 마치 들판에서 놀고 있는 양처럼 즐거워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양처럼 적을 알지도 못하고 만일의 경우를 위해 준비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죽을 때도 바로 양과 같았다. 나는 인간의 지혜가 그려 놓은 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던가를 슬프게 생각했다. 인간은 바로 자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인간은 즐겁고 여유 있는 생활을 찾아 열심히 노력해 왔다. 영원히 안정된 평화의 세계라는 걸 목표로 해서 노력한 결과 드디어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한 번은 인류의 생명과 재산이 거의 완전하게 지켜진 때가 정녕 있었을 것이다. 부자는 그의 재물과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었고, 노동자는 생활과 일이 보장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세계에서는 실업 문제나 사회 문제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단히 평온한 시대가 한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지혜의 힘은 환경의 변화와 위험과 곤란에 의해 높아진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지만 우리는 곧잘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완전히 환경과 조화된 동물은 기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습관과 본능으로서 할 일을 다 할 수 있는 동안은 지혜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없고 또 변화할 필요도 없는 곳에서는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곤란과 위험에 둘러싸여 있는 동물만이 필요에 의해 자연 지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본 바에는 이렇게 지상 세계의 인간은 무기력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지하 세계는 오로지 기계적인 생산의 장소로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도 영구히는 계속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지하 세계로 가는 식량 공급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되지 않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몇 천 년 동안이나 잊고 있던 굶주림이 다시 지하 세계에 찾아온 것이다. 지하의 인간들은 기계를 맡고 있었다. 이 기계는 완전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습관 만으로서는 움직일 수 없고 얼마간의 지혜를 필요로 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인간적인 성질로서는 어느 지상인 보다도 뒤떨어졌지만 독창력에 있어서는 지상인 보다 우월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다른 고기가 손에 들어오지 않게 되자, 옛날부터 습관적으로 금해져 오던 것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서기 80만 2천 7백 1년의 세계에서 본 그 끔찍한 일을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이 전혀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게는 그렇게 생각되었기에 자네들에게도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다. 이 며칠 동안의 피로와 흥분과 불안으로 해서 나는 녹초가 되어 있었고, 게다가 가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거기 앉아서 그 조촐한 풍경과 따스한 햇볕을 쬐고 있으니 어느 정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너무나 고단해서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꾸뻑꾸뻑 졸기 시작했다. 나는 이때 한숨 자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잔디밭에 누워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해가 지기 바로 조금 전에 나는 눈을 떴다. 이젠 선잠을 자다가 몰록들에게 붙들릴 염려는 없었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언덕을 내려 흰 스핑크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 손은 쇠몽둥이를 들고 또 한 손은 호주머니 속의 성냥개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 있었다. 스핑크스 근처로 가 보니 청동 문짝이 열려 있는 것이었다. 문짝은 아래 쪽 수채 속에까지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 볼까 어쩔까 망설이며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속에는 조그만 방이 있었고, 그 구석 좀 높은 곳에 타임 머신이 놓여져 있었다. 내 호주머니 속에는 타임 머신을 동작시키는 조그만 레버가 들어 있었다. 나는 흰 스핑크스를 점령해 버리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했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깨끗이 열려 있는 것이었다. 나는 쇠몽둥이를 내던졌다. 그걸 써 보지 못한 것이 약간은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입구를 향해 몸을 굽히다가 퍼뜩 이번에야말로 몰록들의 속셈을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청동 문틀을 넘어 타임 머신 쪽으로 들어갔다. 타임 머신은 놀랍게도 정성껏 기름을 치고 걸레질을 잘 해 놓은 상태였다. 어쩌면 몰록들이 이 기계의 용도를 알려고 일부러 분해를 해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타임 머신을 조사해 보았다. 내가 고안해서 만든 기계에 오랜만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이 때, 혹시나 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청동 문짝이 갑자기 슬슬 올라오더니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 버린 것이었다. 완전히 캄캄해졌다. 나는 결국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적어도 몰록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몰록들이 킥킥 웃으며 모여드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성냥을 그으려 했다. 아까는 레버를 기계에 꽂아 아무 미련 없이 귀신이 사라지듯 사라져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하찮은 일을 잊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성냥은 곽이 없이는 불을 일으킬 수 없는 그런 성냥이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자네들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그 조그만 괴물들은 벌써 내 곁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 녀석이 내 몸을 건드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레버를 휘둘러 그 놈들을 후려치면서 타임 머신의 좌석에 올라앉으려 했다. 또 다른 손 하나가 계속하여 나를 휘어잡았다. 나는 끈질기게 레버를 뺏으려고 하는 그들의 손을 한사코 뿌리쳤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한 손으로 레버를 꽂을 구멍을 더듬어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레버 한 개를 뺏길 뻔했다. 레버가 내 손에서 떨어지려 했을 때 나는 내 머리로 어둠 속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상대의 두개골이 우지직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렀다. 이리하여 나는 가까스로 레버를 되찾은 것이었다. 이 최후의 싸움은 숲 속에서의 싸움보다도 훨씬 치열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나는 레버를 제자리에 꽂고 쓱 잡아당겼다.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그 앞에서 어둠이 사라져 갔다. 이렇게 하여 나는 다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회색 빛의 소용돌이 속에 맴돌아 들어간 것이었다.   괴물 게의 해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타임 머신의 여행은 구역질과 현기증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좌석에 똑바로 앉지 못하여 비뚤어진 불안정한 자세였다. 얼마 정도의 동안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마구 흔들리는 기계에 들러붙어 있었다. 어디를 향해 날아가는 것인지도 몰랐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이얼을 보니 놀라운 일이었다. 엉뚱한 곳에 와 있었던 것이었다. 제 1의 다이얼은 1일 단위의 눈금이다. 제 2의 다이얼은 1000일 단위, 제 3의 다이얼은 100만 일 단위, 제 4의 다이얼은 10억 일 단위의 눈금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과거를 향해 레버를 끌어당겨야 할 것을 미래를 향해 당겨 버린 것이다. 다이얼을 보았을 때 벌써 1000일 단위의 바늘이 시계의 초침 같은 속도로 빙빙 돌아가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렇게 나아가고 있는 중에는 사방의 광경은 기묘하게 변해 왔다. 번쩍번쩍 흔들리고 있던 빛이 점점 어두워져 왔다. 그런데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날고 있는데도, 나는 낮과 밤의 교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건 타임 머신의 속도가 느려진 것을 뜻하는 것이다. 낮과 밤의 교대는 아주 또렷해져 갔다. 나는 처음 그것을 몹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낮과 밤의 속도는 점점 느려져서, 태양이 하늘을 건너가는 속도도 늦어졌다. 그리고 나중엔 낮과 밤이 한 번 바뀌는데 몇 세기나 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지구는 으스름한 빛 속에 휩싸여 버렸다. 이 으스름한 빛은 때로 희미한 어둠과 하늘을 지나가는 혜성의 빛으로 지워지는 정도였다. 태양을 나타내고 있던 빛의 띠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태양은 지지 않게 되어 다만 서쪽 하늘에서 높아졌다 낮아졌다 할뿐이었다. 그리고 전보다 크고 붉은 색이 짙어져 갔다. 달이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별들이 도는 속도도 점점 느려져서 이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빛의 점처럼 되어 버렸다. 드디어 그 새빨간, 엄청나게 큰 태양도 내가 타임 머신을 정지시킬 직전에는 수평선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게 됐다. 그건 둔한 열을 가진 거대한 돔 같이 되어, 가끔 약간 꺼져 가는 것처럼 껌벅거렸다. 어쩌다 한 번 태양은 다시 환히 밝아지더니 곧 다시 둔한 붉은 색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나는 태양이 떠올랐다 내렸다 하는 속도가 느려진데서 인력의 활동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구는 이미 태양에게 한쪽 면만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재 달이 지구에게 언제나 같은 면만 향해 있듯이........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타임 머신을 정지시키려 했다. 요전에는 갑자기 정지시키다가 머리부터 냅다 내던져졌던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다이얼의 바늘이 움직이는 정도가 점점 느려져서 이윽고 1000만 단위의 바늘은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1일 단위의 바늘의 움직임도 상당히 느껴져서 나는 얼떨떨하던 기분에서 많이 회복되었다. 속도가 더욱 떨어지더니 이윽고 황폐한 바닷가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극히 조용히 타임 머신을 정지시키고 좌석에 앉은 채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이미 푸르지 않았다. 북동쪽은 잉크 빛처럼 검고 그 속에 푸르스름한 별이 깜박거리지도 않고 빛나고 있었다. 머리 위의 하늘은 진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별도 보이지 않았으나 남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붉은 빛깔이 더 짙어져서 불타는 것처럼 보였는데, 거기 커다란 태양이 지평선에 일부분 잠긴 채 빨간 모습으로 멈춰 있었다. 근처의 바위들은 몹시 야단스런 홍색인데 거기서 처음에 눈에 뜨인 생물은 짙은 녹색의 식물이었다. 그것들은 남동쪽을 향한 바위의 불쑥 내민 곳에 빽빽이 들어 붙어 있었다. 그 초록색은 숲에 있는 이끼와 동굴 속의 지의초처럼 짙은 녹색이었다. 이곳에 나 있는 것들은 일 년 내내 어둠침침한 곳에서 사는 식물이었던 것이다. 타임 머신은 바닷가의 평평한 비탈에 서 있었다. 바다는 남동쪽을 향해 넓어지고 음산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밝고 선명한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바람이 없었기 때문에 해변을 씻어 주는 물결도 없었고, 바다는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다만 평온한 숨결 같은 약한 물결이 바다를 부풀게 해서 이 영원의 바다가 아직은 겨우 살아 있음을 알게 해 줄 뿐이었다. 가끔 파도가 쳐 오는 해안선을 따라 두꺼운 소금기 층이 져 있었는데 그것이 하늘의 빨간빛을 반사하여 연분홍색으로 보였다. 나는 머리가 무겁고 호흡도 많이 틀려진 걸 느꼈다. 그 느낌에서 나는 언젠가 산에 올라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공기 중의 산소가 현재보다 희박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폐하고 비탈진 땅 저편 하늘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엄청나게 큰 흰나비 같이 생긴 것이 옆으로 날개를 나울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동그라미를 그리며 얕은 산그늘로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 소리는 몹시도 기분 나쁜 것이어서 나는 오싹해지며 몸이 떨렸다. 그리고는 좌석에 꼭 달라붙었다. 다시 한 번 사방을 들러보니 바로 옆에 이제까지는 불은 바위덩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뭉그적뭉그적 이쪽으로 옮겨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게 모양을 한 괴물이었다. 상상이 되는가? 이 테이블보다 커다란 게란 것이 말일세. 그 놈은 많은 다리를 굼실굼실 움직이며, 커다란 가위를 흔들며, 마차를 모는 마부의 채찍같이 길다란 더듬이를 움직여 주위를 더듬으며 쇠붙이 같은 얼굴 양쪽에 쑥 튀어나온 눈으로 물끄러미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등에는 주름이 잡혀 보기 흉한 흑이 가득 붙었고, 곳곳에 연둣빛 어린 딱지 같은 것들이 붙어 있었다. 복잡하게 생긴 입 근처에는 많은 촉수가 나 있어서, 게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흔들 거리며 근처를 더듬고 있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내가 있는 곳으로 기어오고 있는 것이다. 노란 눈으로 보고 있을 때 나는 파리라도 앉은 듯 내 볼이 근질근질하는 걸 느꼈다. 나는 손으로 쓸어 보았으나 금시 또 근지러워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귓불까지 근질거렸다. 나는 철썩 근지러운 곳을 쳤다. 그러나 무슨 실같은 것이 손에 닿았으나 미끈거리면서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내 바로 뒤에 또 한 마리의 괴물 게가 있었다. 그놈의 더듬이를 내가 만진 것이었다. 나는 심술스럽게 툭 튀어나온 눈을 껌뻑이며 무얼 먹고 싶은 듯이 입을 벌름거리며 물풀이 붙은 커다란 가위를 쳐들고 내게 덤벼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곧 레버를 잡고 타임 머신을 한 발쯤 앞으로 나아가게 해서 이 괴물들에게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나는 역시 같은 그 바닷가에 있었다. 기계가 정지하자 바로 또 괴물의 게들이 보였다. 어둠침침한 속에 짙은 초록빛 이끼 사이로 수십 마리의 괴물 게들이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세계의 극도로 황폐해진 모습은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동쪽의 붉은 하늘과 북쪽의 검은 하늘, 죽은 것 같은 바다,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바위투성이의 해변, 돌 거죽에 독기가 있어 보이는 초록색 이끼, 숨을 쉬기도 괴로운 엷은 공기 등이 모두 등골이 오싹오싹해지도록 무서운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나는 다시 100년 정도 앞으로 타임 머신을 나아가게 했다. 그 곳도 역시 새빨간 태양이 얼마쯤 더 크고 또 흐리멍덩해 보였다. 죽은 듯한 바다도, 싸늘한 공기도 모두 한가지였다. 초록색 이끼와 붉은 바위틈에는 역시 기분 나쁜 게들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커다란 초생달 같은 창백한 곡선이 보였다. 나는 1,000년 가량씩 타임 머신을 정지시켜 가며, 지구의 불가사의한 운명에 이끌려 여행을 계속했다. 그리고 서쪽 하늘에서 태양이 점점 커지고 점점 흐릿해져 가는 것과, 오래된 지구의 생물들이 차차 사라져 가는 것을 넋을 잃고 관찰하고 있었다. 드디어 3천만 년 이상 앞의 세계까지 가자 커다란 태양은 어두운 하늘의 10분의 1 가까이 뒤덮고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타임 머신을 정지시켰다. 거기서는 우글우글 하는 게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붉은 빛깔의 바닷가에는 탁한 녹색의 돌 거죽에 난 식물 외에는 살아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 듯했다. 여기 저기에 허연 것들이 보였다. 지독한 추위가 엄습해 오고 때때로 눈이 내렸다. 북동쪽을 보니 어두운 하늘의 별빛 아래 눈이 빛나고 있었다. 파도처럼 높았다 낮았다 하는 언덕 위는 연분홍색이 짙은 하얀 색이었다. 바닷가는 얼음이 얼어붙었고 바다 가운데는 얼음덩이들이 떠 있었다. 그러나, 바다의 대부분은 영구히 지지 않는 저녁 햇볕을 받아 새빨갛게 물들어 아직 얼지 않은 채로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생물이 혹시 없을까 하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불안하기만 해서 타임 머신에 올라앉은 채로 잠시도 좌석을 뜨지 못했다. 그러나, 지상에도 하늘에도 바다에도 움직이는 거라곤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오직 바위에 달라붙은 초록색의 미끌미끌한 것이 아직 완전히 생명이 멸망해 버리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바다에는 모래톱이 나타나 있었다. 썰물 때였던 것이다. 거기서 무언지 검은 것이 떨고 있는 깃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 그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본 것은 내 눈의 착각이고, 저 검은 것은 보통 바위였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늘의 빛은 매우 밝고 별도 깜빡거리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 때 돌연 태양의 서쪽 둥근 테에 변화가 생긴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점점 퍼져 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 검은 그림자가 점점 태양을 덮어 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일식이 시작된 것이었다. 달이나 수성이 태양 앞을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나는 처음에는 달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나, 아무리 봐도 지구보다 안쪽의 혹성이 지구 바로 앞을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방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동쪽으로부터 찬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고, 눈발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내렸다. 바닷가에서 파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생명 없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세상은 깊은 침묵에 싸여 있었다. 그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적막,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의 목소리도, 염소 우는소리도, 새 소리도,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소리도, 우리 인간 생활의 배경이 되어 있는 그런 소리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어두움이 짙어 갈수록 펑펑 쏟아지는 눈은 한층 더 심하게 내려, 내 눈앞에서 춤추고 있었다. 추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드디어 먼 언덕의 눈으로 하얀 꼭대기도 하나하나 어둠 속에 파묻혀 들어가 버렸다. 조용하던 바람이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일식의 중심부의 검은 그림자가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눈이 보이는 거라고는 희고 푸른 별들 뿐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빛을 잃고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하늘도 새까맣다. 이 넓고 큰 암흑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숨을 쉴 때마다 느끼게 하는 가슴 아픔에 나는 완전히 맥을 못 추게 되고 말았다. 전신이 파들파들 떨리고 심한 구역질이 났다. 이윽고 다시 태양의 가장자리가 하늘에 걸린 구부러진 새빨간 활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기분을 진정 시키려고 타임 머신에서 내려섰다. 머리가 어찔어찔해서 이대로 라면 돌아가는 여행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어찔어찔했지만 나는 그대로 서서 참고 있는데, 다시 모래톱에서 붉은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무언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둥그런 축구공 만한 크기였다. 아니 좀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 놈은 몇 개의 촉수를 늘어뜨리곤, 마치 피와 같이 빨갛게 출렁이는 바다를 뒤로 하여 때때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 정신을 잃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도 먼데서, 그리고 이렇게 무서운 어두컴컴한 데서 쓰러지는 날에는 모든 것이 그만 이라 생각하고 가물거리기 시작한 정신을 잡아, 흔들듯이 비틀거리며 타임 머신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이렇게 해서 나는 돌아온 걸세. 나는 오랫동안 타임 머신 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을 거야. 낮과 밤이 다시 또 눈이 핑핑 돌만큼 빠른 속도로 뒤바뀌고 있었네. 태양은 점점 금빛으로 되어갔고, 하늘도 파래졌고, 호흡도 훨씬 편해졌지. 다이얼의 바늘은 빙글빙글 역회전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다시금 희미한 건물의 그림자가 보였다. 멸망하기 시작한 인류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것이었지만 그것도 또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100만 일 단위의 다이얼 바늘이 제로(0)를 가리켰을 때 나는 스피드를 떨어뜨렸다. 눈에 익을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1천 일 단위의 다이얼 바늘이 제로에 돌아와 낮과 밤의 교대가 차차 느리게 되었다. 이윽고 연구실의 바랜 벽이 보였다. 나는 서서히 타임 머신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하찮은 일이지만, 나는 묘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앞에서 얘기했다고 생각하지만 출발 때의 일이었다. 타임 머신의 속도가 아직 그리 올라가지 않았을 때 와젯 부인이 방을 건너 질러 갔었는데 그것이 마치 로켓이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게 보였다. 내가 돌아왔을 때도 그녀는 또 연구실을 가로질러 가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녀의 동작이 전번과는 정반대로 보였다. 막다른 쪽의 도어가 열리고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로 연구실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앞에 들어왔던 도어로 뒷걸음을 해서 나가는 것이었다. 그 조금 전에 금방 하인 힐리어를 본 것 같았는데 그의 모습은 번개같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타임 머신을 정지시키고 그립던 연구실을 둘러봤다. 가구나 장치들이 출발할 때와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나는 비실비실 하며 기계에서 내려와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몇 분 동안 나는 심하게 떨었지만 곧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그 동안 여기서 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이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타임 머신은 이 연구실 남동쪽 구석에서 출발했었다. 그것이 지금은 서북쪽 벽을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두 곳의 거리는 내가 미래 세계에 도착했을 때 그 조그만 잔디밭과 몰록이 타임 머신을 옮겨다 둔 흰 스핑크스의 받침대 사이의 거리와 꼭 같은 것이다. 내 머리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이윽고 나는 일어나 다리를 절뚝거리며 복도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 발뒤꿈치가 아프고 몸이 몹시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문 옆 테이블에 펠펜 신문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날짜를 보니 오늘이고, 시계를 보니 그럭저럭 여덟 시였다. 자네들 목소리가 들리고,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너무도 기분이 나쁘고 피로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엄청나게 맛난 고기 냄새가 흘러 왔다. 그래서 문을 열고 자네들한테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의 일은 자네들도 알고 있는 그대로다. 나는 몸을 씻고 식사를 마친 다음, 지금 이렇게 자네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 걸세.   위너가 준 하얀 꽃   그는 여기서 한 숨을 돌린 후 말을 이었다. "아직 얘기는 도저히 자네들에게는 믿어지지가 않을 걸세. 나 자신도 오늘 밤 이렇게 반가운 자네들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런 이상한 모험담을 들려주고 있지만 이게 도대체 사실인지 아닌지 조차 분간 할 수 없으니 말일세.“ 그는 의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자네에게 꼭 믿어 주길 바래서가 아니네.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예언이라 생각해도 좋고. 연구실 안에서 꿈을 꾼 거란 말을 들어도 좋네.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중에 이런 얘기를 생각해 냈다고 해도 상관없네. 내가 이 얘기를 정말이라고 하는 건 얘기의 흥미를 돋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 그런데 만들어 낸 얘기라고 할 때 자네들은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파이프를 집어들고, 언제나처럼 난로를 탁탁 쳤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의자가 삐걱거리더니 융단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나는 시간 여행가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 얘기를 듣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어둠침침한 쪽에 앉아 있었고 난로의 불빛이 그들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의사는 이 집주인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 듯했다. 편집장은 벌써 여섯 개째의 여송연 담배 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문 기자는 회중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편집장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자네가 소설가가 아닌 게 정말 유감스럽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시간 여행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네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단 말이군!" "글쎄........“ "그럴 줄 알았네." 시간 여행가는 우리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성냥은 어디 있나?" 하고 물었다. 성냥을 그어 파이프를 뻐끔뻐끔하면서 그는 말했다. "사실이지,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라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는 천천히 작은 테이블 위에 있는 시들은 흰 꽃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하다가 파이프를 쥔 손을 젖혀 손가락 관절의 반쯤 아물어 가고 있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의사가 일어나 램프 불 앞으로 다가가서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별난 암술인데 ......"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리학자가 몸을 내밀고 팔을 뻗쳐 꽃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 때 신문 기자가, "이런 야단났군. 벌써 1시 15분 전이야. 집엔 어떻게 가지?“ 하고 걱정을 했다. "역에까지만 가면 합승 마차가 얼마든지 있네." 하고 심리학자가 말했다. "별난 꽃이야. 무슨 종류의 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이걸 내가 가져도 괜찮겠나?" 하고 시간 여행가를 바라보았다. "그건 곤란해.“ 시간 여행가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의사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정말 어디서 꺾어온 건가7" 시간 여행가는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마치 자기 머리 속에서 도망칠 것 같은 생각을 못 나가게 막으려는 것 같았다. "이 꽃은 내가 타임 머신을 타고 여행할 때 위너가 내 포켓에 꽂아 준 것이네." 하고 그는 말한 다음 방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이게 모두 꿈이라니 그럴 수가 있는가? 이 방도, 자네들도, 언제와도 다르지 않은 이 분위기도 나는 다 잘 기억하고 있네. 나는 타임 머신을 만들지 않았던가 ? 그리고 그 모형도. 그걸 모두 꿈이라고 한단 말인가? 인생을 꿈이라고들 하지. 때로는 아주 불행한 꿈이라고. 그렇지만 꿈이라고 하더라도 성실하지 않은 꿈이라면 나는 견디어 낼 수 없어.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 머리가 잘못 되어 있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런 꿈을 꾸었을까? 나는 타임 머신을 가보고 와야겠어. 만일 그게 정말로 저 방에 있다고 하면........" 그는 서둘러 램프를 들고 붉은 불꽃을 너울거리며 복도로 나갔다. 우리도 그를 따라 나갔다. 가물거리는 램프 불빛 속에 타임 머신은 확실히 앉아 있었다. 형편없이 찌그러진 모습을 한 채...... 그것은 놋쇠와 흑단(늘푸른 큰키나무로 재목이 굵고 치밀하며 아름다운 광택이 나는 검은 빛깔로 고급가구 기구, 악기 등의 재로)과 상아와 반투명으로 빛나는 석영으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손으로 만져 보니 딱딱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난간을 만져 보았다. 상아 부분에는 갈색으로 흐려진 얼룩이 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풀과 이끼가 묻어 있었다. 난간 하나는 휘어져 있었다. 시간 여행가는 램프를 긴 의자 위에 올려놓고 휘어진 난간을 어루만졌다. "이걸 보니 알겠어. 내가 말한 건 정말이었네. 이런 추운 곳에 자네들을 끌고 와서 미안하네." 그는 다시 램프를 집어들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휴게실로 돌아왔다. 그는 현관까지 나와 우리들을 배웅하며 편집장이 코트를 입는 걸 도와주었다. 의사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네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피로해 있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껄껄 웃었다. 나는 그가 현관 도어를 열고 큰 소리로 잘 가라고 인사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편집장과 같이 마차를 탔다. 편집장은 그 얘기를 허풍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얘기 내용은 참으로 엉뚱하고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의 말하는 어조는 정말로 진실 되고 당연한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 한잠도 자지 못하고 그에게서 들은 얘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한 번 시간 여행가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다음 날 그는 연구실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집안 사람들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터이라 연구실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동안 타임 머신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내밀어 레버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땅딸막하고 퍽도 완강하게 보인 기계가 바람에 불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민감함에 크게 놀랐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어릴 때 흔히 알지 못하는 것에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된다고 주의 받은 일이 생각났다. 나는 복도를 걸어 되돌아 나왔다. 휴게실에서 시간 여행가를 만났다. 그는 어디 외출을 하려는 참이었다. 어깨에 소형 카메라를 메고 다른 편 어깨에는 접어서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조그만 배낭을 매고 있다. 그는 나를 보자 빙그레 웃으며 악수 대신 팔꿈치를 내밀었다. "몹시도 바쁘다네. 저 기계 덕분에........" 하며 그는 말했다. "하지만 농담 아니었던가? 정말 또 시간 여행을 할 작정인가?“ 하고 내가 물었다. "정말이고 말고. 정말 여행을 떠날 걸세." 그는 똑바로 내 눈을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방안을 둘러보았다. "30분 가량 기다려 주겠는가?"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자네가 왜 왔는지 나는 알고 있네. 마침 잘 와주었어. 저기 잡지가 있어. 그런 거나 보면서 점심 시간까지만 기다려 주면 이번에야 정말 모든 것을 증명해 보여 주겠네. 잠시 동안 자네를 혼자 있게 해야겠는데 괜찮겠나?“ 나는 좋다고 했지만 그 때는 그가 말한 뜻을 잘 알지 못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걸어갔다. 연구실 도어가 꽝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신문을 빼들었다. 대체 그는 점심시간까지 무얼 하겠다는 것일까? 그 때 퍼뜩 어떤 광고에 눈길이 가자 나는 두 시에 출판업자 리처드슨과 만날 약속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는 일어서서 이 사정을 시간 여행가에게 알려 주려고 복도를 나왔다. 연구실의 도어에 손을 댔을 때 안에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갑자기 끊어지는가 했을 때 철컥 하는 소리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도어를 열었을 때, 나는 무서운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들었다. 방안에서 유리창이 깨져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간 여행가는 보이지 않았다. 검정과 놋쇠 빛깔의 것이 뱅뱅 돌고 있는 속에 의미하게 유령 같은 사람의 그림자가 앉아 있는 게 한순간 보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의 그림자는 투명체여서 그 뒤에 있는 의자와 의자 위에 놓여 있는 도면까지도 환히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유령 같은 사람의 그림자는 내가 눈을 비볐을 때는 사라져 버렸다. 타임 머신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연구실 저편 구석은 휑하니 비어 날아오른 먼지가 내려앉고 있을 뿐이었다. 천장의 채광창의 유리 한 장이 공기의 소용돌이로 깨진 것 같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무언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알았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는 미처 깨닫지를 못했다. 멍하니 서 있노라니까 뜰로 통하는 도어가 열리고 하인이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윽고 나는 정신을 차려 그에게 물었다. "주인은 그 쪽으로 나가셨는가?“ "아뇨. 아무도 이쪽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주인님이 여기 계신가 하고........" 이로서 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나는 리처드슨과의 약속을 어기기로 하고 이곳에서 시간 여행가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더 겉 다른 얘기를 들려주겠지. 표본이나 사진도 찍어올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평생 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 여행가가 모습을 감춘 것도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그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지만 그 날 이후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끝맺음   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는 돌아올까? 과거의 세계에 가서 구석기 (백만 년 전부터 2만 5천 년 전까지) 시대의 피에 굶주린 털북숭이의 야만인들에게 붙잡혀 버리지나 않았을까? 백악기 (약 1억 4천만 년 전부터 7천만 년 전까지)의 바닷속 깊이 빠져 버린 거나 아닐까? 저 쥐라기 (1억 8천만 년 전부터 1억 3천 5백만 년 전까지)의 거대한 파충류의 괴물인, 기괴한 도마뱀들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버린 거나 아닐까? 아니면, 또 지금도, 지금이란 말을 써도 좋다면, 공룡이 기어다니는 쥐라기의 산호초 위라든가, 황폐한 소금 호숫가를 헤매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전번 여행보다 훨씬 가까운 미래 세계로 갔을까? 인간이 아직 인간으로 살아 있고, 우리 시대에서는 아직 수수께끼로 되어 있으며 골치 아픈 문제로 되어 있는 일도 모두 해결되어 인류의 전성기라 할 시대로 갔을까? 나의 생각으로 말한다면 현대와 같이 불충분한 경험과 단편적인 이론이 서로 아무런 조화도 이루지 못한 시대를 아무래도 인류의 전성기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물론 나 개인의 생각이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타임 머신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지만 그는 인류의 진보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문명이 된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요, 그것은 얼마 안 가서 무너져 그걸 만든 사람들을 깔아뭉개 버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 듯이 태연스럽게 살아 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내게 있어 미래는 검은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그의 말에서 극히 작은 한 분야를 알았을 뿐이며, 미래의 세계는 넓고 또 넓은 것이다. 내 곁에는 지금도 그 두 송이의 별스런 하얀 꽃이 있어서 나를 위로해 주고 있다. 이미 시들어서 갈색으로 퇴색해져 이제라도 흩어져 버릴 것 같아도, 인류의 지혜와 힘이 멸망해 버린다해도 이것이야말로 감사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까지나 인간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는 걸 밝혀 주는 유일한 긍지인 것이다.   끝       베디안   크리스 네빌 Kris Nevile 지음     심야의 사고   어두운 밤하늘에 하얀 것이 번쩍거리기 시작하였다. 눈은 소리도 없이 사뿐사뿐 내려 숲도 들도 절벽도 언덕도 그리고 그 사이로 꾸불꾸불하게 뻗친 도로를 엷고 하얀 천으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눈에 푹 덮인 도로에는 개 한 마리도 없었다. 너무나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밤이었다. 그 조용한 밤에 문득 가냘픈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둠 속 저쪽 먼 곳에서 두 개의 노란 색 눈이 번쩍이었다. 엔진 소리가 짐승들의 울음소리로 들렸고, 노란 눈은 헤드라이트였다. 도로의 반대쪽 편에서 한 대의 승용차가 눈을 휘날리며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승용차는 대단히 급한 모양이었다. 체인을 감지 않은 타이어가 푹 싹인 눈 위를 미끄러져 가며 커브를 지나갈 때마다 도로에서 튕겨나갈 것 같이 미끄러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엔진은 삐거덕거리고 타이어는 비명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는 한없이 내리고 있는 눈에 반사되어 미친 듯이 번뜩이고 있었다. 승용차에는 한 쌍의 남녀가 타고 있었다. 여자는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갓난애를 안고 있었다. 추워서인지 배가 고파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심한 승용차의 진동 때문인지 갓난애는 계속 울고 있었다. "여보! 좀 천천히 달리세요. 위험해요." 젊은 여자가 운전하고 있는 사나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서둘지 않으면 늦어진다.“ 남자는 핸들을 꽉 진 채 앞만 계속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자동차를 이렇게 눈 속에서 속력을 내시니........" "알고 있어. 그러나 만약 출발 시간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이런 곳에 남겨진다면 당신도 싫겠지?“ "그건 그렇지만........"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또 한바탕 우는 어린애를 흔들면서, "그래, 그래! 울지마. 아가." 하고 달랬다. 바로 그때였다. "아차!“ 남자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맹렬한 속도를 계속 줄이지 않고 급커브를 돌던 순간, 헤드라이트와 이미 눈앞에 바싹 나타난 커다란 트럭의 모습을 비친다. 남자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 핸들을 필사적으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트럭은 가까스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브레이크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타이어는 눈 위를 스키처럼 쭉 미끄러졌다. "여보!" 여자는 어린애를 힘껏 가슴에 안으면서 소리쳤다. 그 때 승용차는 이미 비스듬히 쓰려져 가면서 도로 바깥쪽으로 미끄러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모퉁이로 굴렀다. 그대로 두 번 굴러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 승용차는 이미 비틀리고 움푹 들어가고 찌그러지고 형편없이 부서졌다. 부서지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끝나자 사방은 또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 졌다. 그 때,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부서진 승용차의 바로 옆의 풀밭에서 가냘프게 들려왔다. 그 승용차를 간신히 스쳐간 트럭은 곧 멈췄다. 트럭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승용차는 이미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큰일났다.!" "도저히 살수가 없겠군요!" 운전사와 조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절벽을 내려가 무참하게 부서진 승용차 옆으로 갔다. 조수가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아무도 없잖아?" 조수는 깜짝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뭐라고? 그럴 리가........" 운전사도 깜짝 놀랐다. 형편없이 부서진 승용차 속에는 분명히 있어야 할 사람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거기에는 회색의 먼지 같은 것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떨어지는 동안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았을까요?" "정말 이상한 일이다 !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혹시 밖으로 튕겨 나간 것이 아닐까 해서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푹 쌓인 눈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물론 튕겨 나간 시체의 흔적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흡사 유령이 운전한 것 같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갑자기 긴장했다. 어디선가 가냘픈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어린애다!“ 조수가 외치고 풀밭으로 뛰어갔다. 거기에는 갓난애가 홀로 눈 위에서 울고 있었다. 조수가 살며시 안아들었다. 갓난애는 계집애였으며 왼팔이 부러졌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가엾어라. 이 팔은 평생 낫지 않겠는데........" 갓난애를 진찰한 병원의 의사가 말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부상으로 살아 있는 것만도 기적이군. 그런 사고에서........" "기적이라고 하면 ......?“ 운전사가 기억을 더듬으며 물었다. "이 애의 부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골짜기에라도 떨어지고 맡았겠지. 이런 사건에는 간혹 상상도 못할 먼 곳으로 튕겨 나가는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경찰에서도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심한 치료와 간호의 덕택으로 갓난애는 얼마 안 가서 상처가 다 나았다. "불쌍하게도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간호원들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렇게 귀여우니 틀림없이 곧 새 어머니가 생기게 될 테지 " 그리고 그 말은 얼마 안 가서 사실이 되었다. 사람이 아주 좋아 보이는 중년 부부가 병원에 찾아왔다. "아, 귀엽고 예쁜 아이!“ 여자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갓난애를 살며시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오늘부터 넌 내 딸이 되는 거야. 지금부터 너를 베디안이라고 부르겠다.“ "좋은 이름이군요.“ 의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남자가 의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정말로 이 애의 부모가 돌아가셨을까요? 우리들이 이 애를 기르고 있는데 문득 나타나지는 않을까요?“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이 살아 있더라도 되돌려 달라고는 할 수 없죠." "되돌려 주다니요? 제 딸인데요?“ 어머니가 된 여자는 얼굴을 붉히며 갓난애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고 말고.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해도 자기 딸이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야." 아버지가 된 남자가 말했다. "곤란한 것은 베디안의 생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의사가 말을 하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애의 생일은 오늘입니다. 우리들의 딸이 된 날이 이 애의 탄생일, 그것이 좋겠지요?"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의사가 찬성하자 중년 부부는 즐겁게 웃었다.   미소녀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 베디안은 병 한 번 앓지 않고 잘 자랐다. 서너 살에는 길가는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로 귀엽게 생겼다. 그러나, 사고 때 다친 왼쪽 팔만은 아무래도 완쾌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라지도 않고 굳은 채로 있었다. 베디안을 사랑하는 양부모는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면서 진찰을 받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양부모들은 언짢게 생각했으나 베디안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손재주가 놀라울 정도였었다. 세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누구나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우거진 숲과 맑은 물, 푸른 하늘에 둥둥 떠 흐르는 흰 구름, 태양이 내려 쪼이는 더운 여름날의 풍경,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태양, 부슬부슬 내리는 비 등 베디안의 그림 속에서는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저 아이는 그림의 천재이어요. 언젠가는 틀림없이 훌륭한 화가가 될 것입니다.“ 하고 어느 날 미술 선생이 교무실에서 사이가 좋은 음악 선생에게 말했다. 그러자 음악 선생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입을 떼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베디안은 음악에 천재입니다. 부자유스러운 손으로 바이올린을 가지고 상급생보다 어려운 연습곡을 훌륭하게 켜는 것을 보셨죠? 나는 전에 베디안이 켜는 것을 듣고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지요. 너무 깨끗하고 황홀해서........그러한 기분이 든 적은 별로 없었어요." 음악 선생의 눈은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나, 베디안의 재능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수학, 역사, 물상, 생물 등 모든 과목에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이상한 아이어요. 그 아이는 한 번 외우면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애는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를 가르치면 거기에 관계 있는 것은 즉시로 이해하고 말지요. 하나를 듣고 열 가지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 아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끔 그 아이가 무서울 때가 있어요.“ 또 한 선생이 말했다. "나는 우리 학교의 학생 중에서 베디안에게 장난을 거는 아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그렇게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며 서로 얼굴을 처다 보았다. "나는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군요.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조금 불량한 남학생이 베디안의 손에 대해서 욕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베디안은 잠자코 그 아이를 쳐다볼 뿐이었어요. 그러자, 남학생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어요. 그 때의 베디안의 눈을 나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군요. 깊은 바다같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아름답고도 매서운 눈이었지요.“ 그 선생은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베디안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숙사 제도의 여자 고등 학교에 입학하자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베디안은 아름답고 성적도 우수하고 특히 새로 배우기 시작한 배구를 썩 잘 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어쩐지 베디안의 행동은 전처럼 활발하거나 명랑하지 못한 것 같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을 한다든지 잡담을 하는 일도 점점 없어져 갔다. 혼자 살며시 기숙사를 빠져 나와 사람이 없는 빌딩 옥상에 서서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왜 다른 사람들과 다를까?) 베디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의문과 싸워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왜 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모두 무의미하고 시시하게만 느껴질까?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들이 하등 동물인 개나 고양이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베디안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턴지 모르게 부풀어올라 드디어 가슴속에 꽉 차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딴 사람이 옆에 있기만 하여도 일종의 고통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난 아주 어릴 때부터 필요 이상으로 친한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사람들과 나와는 어딘가 모르게 틀리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였다) 그것은 살을 깎는 듯한 고독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만 단 혼자이고, 마음을 서로 주고받을 만한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슬퍼지고 몸이 점점 식어서 굳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림은? 음악은? 배구는?) 베디안은 어딘가 의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그림이나 음악이나 배구도 쫓아가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엄마?“ 문득 베디안의 차갑게 식은 마음의 한 모퉁이에서 따뜻한 것이 흘러 나왔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이 그녀에게 미소를 던져 주고 있었다. "아빠!“ 환상 속의 아버지가 살며시 어머니 곁으로 와서 똑같은 미소로 그녀를 지켜본다. "베디안, 집으로 돌아온." "돌아가겠어요" "나는 꼭 돌아가겠어요!“ 그러나 베디안은 방학 때까지 기다렸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참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 주일간의 방학이 오자 베디안은 기차를 타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초인종의 버튼을 누르는 베디안의 손이 조금 떨렸다. 거실에는 아버지만 혼자 계셨다. "베디안, 잘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 환상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어디 계셔요?" "아........ 병원에. 베디안, 엄마가 조금 몸이 불편한 모양인데 별로 대단한지는 않다. 곧 나을 거다.“ 베디안이 바다같이 깊어 보이는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자 아버지는 얼굴을 돌렸다. "아빠........ 가르쳐 주셔요."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고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아무래도 너에게 숨길 수가 없구나. 네 눈은 너무나 날카롭군.“ "심하신 가요?“ "그렇다.“ "무슨 병이어요?“ "숨길 수 없구나. 베디안, 엄마는 위암이다. 그것도 사방으로 퍼져서 이미 늦었다. 이제 한 달 정도 밖에는........" "왜,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으셨어요?" 베디안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는 자기 병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너도 아무 것도 모른 체 하여라, 보통 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엄마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엄마를 그대로 행복한 채 죽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베디안은 아버지의 엄한 말씀에는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아빠, 그렇게 하겠어요."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는 생각보다는 건강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그 얼굴에서 손끝에까지 나타나 있었다. 일 주일 동안의 방학은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베디안은 방학을 더 연장시키려고 했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거라. 베디안, 우리들은 언제든지 또 만날 수가 있잖아.“ 베디안은 하는 수 없이 학교로 되돌아왔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엄마가 죽는다면 나도 죽고 싶다!) 하고 베디안은 생각했다. 기숙사로 되돌아온 지 삼 일째의 저녁 무렵 친구가 베디안에게 , "누군가가 교문에서 너를 보자고 하더라." 라고 알려 주었다. 교문 앞으로 가자 어떤 처음 보는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양복을 입은 청년이 저녁 노을을 등지고 서 있는 것을 보자 베디안은 자기도 모르게 섬뜩했다. "베디안이죠?“ "네.“ "나는 시르라고 합니다. 알겠죠?" 놀랄 일이었다. 베디안은 알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이 시르였다. 단지 시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와요." 베디안의 몸은 열병 환자처럼 떨리고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청년이 말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문 모퉁이에 스포츠 카가 한 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자동차는 곧 달리기 시작하였다. 자동차가 어디를 어떻게 달렸는지 베디안은 몰랐다. 귓전을 쌩쌩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는 바람이 사라지자 차는 교외의 어떤 큰 집 안에 들어가서 정지했다. 집은 빈집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어떤 방의 문을 열자 거기에 한 노인이 책상을 향해서 앉아 있었다. 노인은 베디안을 보고 나더니 시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이 그 아이다.) 베디안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눈을 꼭 감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라." 베디안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갑자기 머리의 일부분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지금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과 마음으로서 이야기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라니......!“ 말을 하다가 말고 베디안은 말을 멈추었다. 자기 자신도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알았겠지? 베디안, 너도 우리와 똑같이 이 지구의 인간이 아니다." 노인은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우주인   노인의 생각은 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이 베디안의 마음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우리들은 여기서부터 수천 광년의 우주 저쪽 은하의 핵 항성계에 존재하는 아미오별에서 온 우주인이다. 지구인과는 달라서 이미 수억 년의 역사와 문명을 가진 고등 종족이지. 우리들의 문명은 절정에 달했고 모든 악한 것은 소멸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종족은 자유롭게 우주의 모든 곳까지 여행하여 수많은 혹성들의 생물을 연구하고 있단다." 노인의 생각은 계속 전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지구 햇수로 17년 전 우리들은 이 지구에 왔었다. 너는 그 때 아직 갓난애였지. 양친과 같이 왔었단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할 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구의 자동차에 서투르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나 양친이 돌아가셨단다." 베디안의 마음은 놀람으로 가득 찼다. "우리들 아미오별 사람은 죽으면 신체의 분자의 변화가 일어나 육체는 소멸해 버리고 약간의 섬유질의 먼지 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구인은 아무 것도 모르지. 우리들은 너도 그 사고로 소멸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수개월 전 네가 살아 남아서 지구인으로 성장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그래서 우리들이 너를 찾으러 오게 된 것이란다.“ 노인의 사고파가 중단되었다. 엄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쓸쓸했었죠? 베디안, 오랫동안 다른 종족 안에서 홀로 살아왔으니........ 그것은 우리보다 지능이 높은 종족 같으면 괜찮지요, 모습은 별다름 없어도 정신적으로 고독하게 발달된 종족도 있는데 이 지구 인종과 같이 모습도 정신도 다같이 보기 싫고, 더욱이 자기의 신체를 자기 마음대로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종족은 거의 없지요." 시르의 사고파가 날아 왔다. 베디안은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 시르 역시 인간과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쯤도 모르겠어요? 물론 우리들의 이 모습은 지구인의 모습을 빌린 것이죠. 다른 혹성을 여행 할 때에는 그 혹성의 생물의 모습을 빌리는 것이지요. 자, 똑똑히 보셔요." 사고파가 중단된 순간부터 시르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몸의 색채가 희미해지더니 투명하게 되고 무지개 같은 오색의 빛에 싸이더니 돌연 거대한 나비가 되어 날기 시작했다. "정신의 고도 집중으로 우리들은 우리들의 신체의 분자 배열을 변경하고 재편성시켜서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죠.“ 나비가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곧 고양이로 변하더니, 그 고양이가 한 걸음 발을 옮기자 개로 되고, 그것이 희미하게 되더니 다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시르로 되돌아왔다. "베디안도 할 수가 있지요. 우선 그 팔을 스스로 고치는 것이어요.“ 베디안은 주저했다. "주저하지 말아라. 너에게는 능력이 있다. 정신을 통일하여 '팔아 나아라'라고 생각해라. 그렇다. 그대로 생각을 계속해라. 그러면 팔의 뼈와 근육의 세포가 바뀌어져서 새로운 팔이 살아 나오는 것이다. 봐라, 나았다?“ 베디안은 팔을 보았다. 완쾌되었다. 좌우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팔! 정말 팔은 완쾌된 것이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지? 베디안, 너는 분명히 아미오별 사람이다. 우리들과 같이 돌아가야지.“ 베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쓸쓸하게 느꼈던 모든 원인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아미오별 사람인 자신과 지구인과의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지요. 가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아무튼 나의 고향이고 나를 이해하는 것은 나의 동포뿐이니까요. 데리고 가주셔요. 아미오, 나의 고향에!“ 베디안의 가슴 속 깊이에서 사고파가 용솟음쳤다. "그러면 결정되었다. 곧 출발하자. 저쪽 바다에 우리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다.“ 베디안은 조금 망설였다. "아빠와 엄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요...." "그것은 안 된다.“ 노인은 책망하는 말투였다. "지구인에게 우리들의 존재를 알려서는 안 된다." "뵙기만 하고 가도 안 되나요?" "안 된다.“ "17년 동안이나 나를 키워 주신 분이어요. 나를 사랑하고 계셔요. 그리고 나도........" "사랑이라?“ 노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지나면 너 역시 그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가 기르는 개에게나 고양이에게 대하는 애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너와 그들과는 그 정도로 틀린다.“ 베디안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렇지 않아요.“ "알았다. 이제 그 얘긴 그만 두자." 노인은 일어섰다. 시르도 일어섰다. 베디안도 따라 일어섰다. 헬리콥터와 흡사한 은색의 비행차는 저녁 노을이 짙은 해상을 소리도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베디안은 좌석 옆과 창문에 뺨을 대고 멀어져 가는 육지를 보고 있었다. 17년 동안의 추억들이 등같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문득 어떤 일을 생각해 내자 베디안의 마음은 안정되었다. 그녀는 조종석에 앉아 있는 시르에게 사고파를 보냈다. "시르, 우리들의 별에도 그림이 있나요?" "그림?“ "사람이나 바다나 산이나 꽃 같은 것을 그리는 것 말이어요.“ "그런 것은 없지요." "왜 없나요?“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음악은?“ "왜 인공의 음악을 듣지요? 대우주가, 별의 빛이, 암모니아와 메탄가스의 화학 변화 같은 자연이 음악을 들려주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 말고요. 시르, 자기 자신이 악기를 들고 켜면서 ........" "시시해요. 베디안은 17년 동안 지구의 하등 생물의 습관이 몸에 밴 모양이군요. 고쳐야 해요." 시르의 사고파가 서슴없이 말했다. 베디안은 아직 구름이 낮게 깔려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부터 아무런 추억도 없는 곳으로 가는구나! 다 죽어 가는 엄마와 쓸쓸히 계시는 아빠를 뒤에 두고........) 베디안의 머리 안에서는 문득 사고파가 혼란해졌다. 머리가 뒤흔들리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베디안, 어디가 아프냐?" 노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그 때, "보인다! 우주선이다!“ 하고 시르가 말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은색의 거대한 해파리와 같은 우주선은 주의해서 잘 보지 않으면 쉽게 눈이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시르와 노인은 자기들을 아미오별로 운반해 줄 우주선을 기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한 순간 두 사람은 베디안에 대한 것을 잊고 있었다. (나에게는 엄마의 위암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엄마를 죽음에서 구해낼 힘이 있다.) 그 순간에 베디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적어도 2일만이라도 나는........) 창밖에는 여러 마리의 갈매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차는 우주선의 갑판에 살며시 앉았다. 베디안은 작지만 아담한 둥근 창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잠시 동안 여기에 있거라." 노인과 시르는 베디안을 혼자 남겨두고 나갔다. 우주선은 출발 준비로 바빴다. 베디안은 둥근 창문 가까이 갔다. 한 시간쯤 지나서 바다에 어둠이 덮였을 때 출발 준비가 끝났다. 노인은 베디안이 있는 방으로 되돌아왔다. 방안을 획 돌아본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베디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다. 어딜 갔지?“ 노인은 그 때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둥근 창으로 바다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리고 파도치는 넓은 바다와 밝은 밤하늘의 일부가 보였다. 어느 사이에 구름이 흩어지고 달이 나와서 끝없이 넓은 바다를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 파도 위를 한 마리의 큰 갈매기가 비스듬히 날아가고 있었다. 아직 나는데 익숙하지 못한지 큰 날개의 움직임이 서툴러서 잘못하면 균형을 잃고 바다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갈매기는 그 때 목을 쑤욱 내밀고 힘을 내서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 파도치는 수평선 저쪽의 육지를 향해서 힘껏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곳, 그림과 음악과 추억이 있는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베디안의 모습이었다.   끝       작품 해설   미래를 예언하는 이야기   허버트 조지 웰즈(H. G. WELLS)는 1866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상인이었는데 생활이 넉넉한 편이 되진 못했습니다. 그는 7세 때 발목을 다쳐서 오랫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을 때 그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동기가 되어 독서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상업 학교에 입학하여 항상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11세 때 아버지가 불구자가 되는 바람에 14세 때에는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직장을 얻어 일하면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학교에 나가 생물학을 가리키기도 하고 과학 교과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27세 때 폐결핵에 걸려 오랫동안 요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몇 편의 단편 소설을 써서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해서 작가로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은 아직 SF의 초창기이라서 작가도 거의 없었으며, 프랑스의 베르느(1828~1901)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웰즈가 풍부한 과학 지식을 토대로 하여 최초로 시간 여행을 과학적으로 쓴 것이 바로 이 타임 머신입니다. 1805년에 단행본으로 발행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일약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모로 박사의 섬」, 「투명 인간」, 「우주 전쟁」, 「달 세계 최초의 사람」 등을 발표하여 SF작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현재에 와서는 웰즈는 베르느와 함께 세계 SF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타임 머신을 발명하여 80만 년 후의 세계에 가본 시간 여행가가 거기에서 겪은 일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인데, 사회 문명 비판가, 역사가로서의 식견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어서 일종의 SF 소설이라기보다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이야기라고 절찬을 받고 있습니다. '베르느의 작품은 실천의 가능성이 있는 발명과 발견을 작품 속에 써서 독자의 흥미를 끌고 있지만, 나의 작품의 발명과 발견은 공상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 라고 웰즈 자신이 말한 것과 같이 그의 작품은 현실 가능성이 없는 것을 가능하도록 생각하게 하고 독자들이 읽는데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에 말려 들어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임 머신은 80여년 전에 쓰인 작품인데 현재까지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애독하고 있는 것은 인류의 운명에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명이 진보됨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기계에 의존하게 되어 인류의 퇴화가 시작되어 80만 년 후의 세계에서는 체력도 지식도, 아니 인간성 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맙니다. 시간 여행가는 그 세계에서 물에 빠진 소녀를 구출하여 그 소녀로부터 인간다운 사랑을 받는데,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인류가 변해도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장래에 큰 관심을 가진 웰즈는 제 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과 교육과 종교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여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또, 세계 평화를 기원하여 「지적 국제 연맹」을 제창하여 글과 강연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1920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세계 문화사 대계」는 이러한 뜻을 내용으로 해서 쓴 책입니다. 그 외 「생명의 과학」, 「인류의 노동과 부와 행복」등 웰즈의 작품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 영국 최대의 문화인인 문호라고 존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세계의 현실적 움직임을 보고 차츰 비관적이 되어 제 2 차 세계 대전의 원자 폭탄 사용을 알고 완전히 실망한 채 1946년 80세로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   '베디안' 작가 크리스 네빌(Kris Nevile)은 1925년에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때 입대하여 각처의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플라스틱 제조 회사에 근무하며 합성 수지를 연구하였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였는데 그 작품은 초인 과학을 다루는 것이 많았습니다. 주로 단편을 즐겨 썼으며 약 50여 편 정도 발표했습니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도 회사에 계속 근무하고, 고분자 물질의 연구를 계속하며 수술에 사용할 플라스틱 재료를 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합성 수지에 대한 전문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1966년 회사를 퇴직하고 작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빌의 소설에는 현재의 과학보다 많이 진보된 초인 과학의 기술과 현재의 과학 지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서는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이 설치는 것이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우주인도 역시 인간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공포     이 은 교훈․전기․문학․모험․탐험․괴담․추리 등 각 분야에 걸쳐 소년소녀들에게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작품을 엄선하여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5   기적이 일어났다················· 9 이상한 힘···················· 12 지옥으로 꺼져라················· 15 뉘우침····················· 20 내 탓이다···················· 27 모든 것이 전과 같이··············· 30     하늘의 공포·················· 34   피묻은 수첩··················· 38 암스트롱의 수기················· 40     작은 거인··················· 50   이상한 발자국·················· 53 콘크리트 속의 그림자·············· 56 사람이냐 유령이냐················ 60 나타난 괴상한 인간··············· 63 지하 사람이다!················· 66 지하에서의 싸움················· 69 인간의 시체를 표본으로?············· 73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78     벽 속의 아프리카··············· 83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86 고장이 났을까?················· 90 겁주는 말투··················· 95 피묻은 스카프·················· 99 덤벼드는 사자················· 103     우주 스파이·················· 112   우주 전쟁··················· 115 너를 체포한다················· 118 이제 살았다.················· 124 외톨박이··················· 127 새튼 숲 속으로················· 131 나는 과연 누구냐················ 135     우주에서 온 거머리·············· 143   괭이날을 녹이는 바위·············· 146 자라나는 바위················· 149 배탈나게 만드는 작전·············· 153 원자 폭탄 공격················· 158 지구가 깨져도················· 160 꾀어내기 작전················· 164 태양이 잡아먹힌다··············· 168 우주 속의 불꽃················· 172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Men Like Gods   웰즈 Herbert George Wells 지음   인간은 옛부터, 자연이나 인간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힘에 대해 늘 마음이 끌려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기적이 가장 동경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인데, 옛 전설이나 신화 등에서,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만일 자기에게 신기한 힘이 있어서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든지, 산 한복판을 둘로 딱 가르고 그 속을 지나다닌다든지, 혹은 '먹을 것이 나와라'하면 맛있는 음식물이 나온다든지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 이것은 비록 인간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체념할 수 없는 인간의 오랜 염원인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해서 과학 소설이나 공상 소설에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여러 가지의 과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실현시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쓴 는 19세기 때의 미국의 기계 기사가 6세기 때의 영국의 아더왕의 궁전으로 옮겨가서 거기서 근대 과학의 지식을 응용하여 당시 아더왕 궁전에서 큰 권력을 쥐고 있던 대마술사 멀린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를 노리는 적을 무찌르고, 영국인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그리고 있는데, 6세기 때의 옛날 영국인들은 그것이 모두 신통한 마술이요, 기술인 것처럼 여겨왔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과학 기술이 한층 더 발달하게 될 미래의 사회에서는 현대인의 눈으로는 기적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일도 예사로운 일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과학소설의 시조로 불리는 H. G. 웰즈도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썼습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의 빛과 굴절률을 바꾸어 유리처럼 투명하게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만드는 , 동물의 몸 구조를 바꾸어 인간처럼 말을 할 줄 아는 동물 인간을 만들어 내는 , 인간의 운동 신경의 속도를 다른 인간의 눈에는 띄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빠르게 하는 등은 모두 이러한 과학적 방법으로 기적을 나타내 보려는 아이디어에서 씌어진 과학 소설입니다. 이 도 웰즈가 쓴 것입니다. 이 소설은 과학과 옛날부터의 기적 - 이 두 가지가 교묘히 잘 이용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포저린게이 청년이 어째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얻었느냐, 어떻게 하여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느냐 하는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야기 가운데는 지구 물리학에 관한 지식이 빈틈없이 응용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이 우주를 이루는 근본적 조건의 한 가지로,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지상에서 쓰이는 시간은 지구의 자전을 멈추게 하면 자연적으로 멈춰지게 됩니다. 하지만 지구의 자전을 별안간 딱 멈추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기적이 일어났다   롱 드래곤 주점은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흥청거렸다. 수많은 사람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활쏘기 게임장의 담당 점원인 청년 포저린게이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비미슈라는 친구하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말을 했댔자…" 하고 비미슈는 포저린게이를 깔보는 것 같은 눈초리로 흘겨보며 말했다. "기적 같은 것이 어찌 일어날 까닭이 있겠나?" "그야 쉽게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한번 일어났다 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나. 아무튼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그 어떤 특별할 힘을 가진 특별한 인물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니까 말야." "이것 봐, 그따위 소릴 했댔자…" 하고 비미슈는 반박했다. "일어날 턱이 없는 기적을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렇다고만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어, 기적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당장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포저린게이는 좀 흥분된 표정이 되더니 술집 한 모퉁이에서 타오르고 있는 램프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예를 들어, 저 램프가 보통 때라면 거꾸로 서서 그대로 탈 수 야 없지 않겠어. 그렇지, 비미슈?" "그야 물론이지. 그런데?" "그런데 이 자리에 특별한 힘을 지닌 인간이 있어서, 이렇게 한다면 말이다." 포저린게이는 일어나더니, 손을 램프 쪽으로 쭉 뻗었다. "먼저 정신을 집중시켜, '거꾸로 서서 타거라' 하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 에잇!" 포저린게이는 손을 뻗친 채 갑자기 외치며 램프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램프는 별안간 공중에서 거꾸로 서더니 불꽃이 밑으로 향한 채 조용히 타고 있지 않은가. 램프 곁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뛰어 달아났다. 다른 사람들도 멍하니 입만 딱 벌린 채 램프를 지켜보며 슬슬 뒤로 물러섰다. 1초, 2초, 3초, … 여전히 램프는 거꾸로 선 채 타고 있었다. 포저린게이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숨이 가빠지고 정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턱이 없지." 그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램프는 별안간 확 타오르더니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램프는 산산조각이 나고 석유는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다행히도 불이 꺼졌으므로 불은 나지 않았다.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것처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으나, 이윽고 모두 쑥덕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것 참… 우리 눈이 어떻게 된 거야?"l "그럼, 그럼, 눈의 착각이야." "아냐, 틀림없이 요술일걸. 포저린게이가 요술을 부려서 우리를 홀린 거야." 포저린게이는 깜짝 놀라 '그런 일이 없어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멸시하는 눈초리로 자기를 바라보는 바람에 그만 말문이 탁 막히고 말았다. "이것 봐, 장난도 분수가 있지, 위험한 짓을 어쩌자고 함부로 하는 거야?" 비미슈가 책망을 했다. "참, 괘씸한 녀석이군." "얼른 썩 꺼지지 못해." 주위의 술꾼들이 떠들어댔다. 포저린게이는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책망이 쏟아져 나온 데다가 뜻밖의 일이라 정신이 엇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술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이상한 힘   포저린게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 위에 털썩 걸터앉자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아까 롱 드래곤 주점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했다. 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장난 삼아 한 짓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때,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 램프를 보고 '거꾸로 서서 타거라.' 하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 난 것이다.) 포저린게이는 다시 한 번 더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안에 켜 두었던 촛불에 손가락을 들이대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공중에 떠올라라!" 그러자 촛불은 공중에 스르르 떴다. "앗!" 포저린게이가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큰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촛불은 방바닥에 툭 떨어져 꺼지고 말았다. 그는 한참 동안 캄캄한 방안에서 몸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역시 엄청난 일이 생기는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촛불에 불을 켤 생각으로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성냥이 없었다. "아, 성냥이 있었으면…"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순간, 포저린게이의 손에는 어디서인지도 모르게 성냥갑이 날아 들어왔다. 기적은 또 일어났다. 포저린게이는 다시 한번 더 실험해 보았다. 그는 양초를 꽂아 세우고 말했다. "불아, 켜 져라!" 그랬더니 양초에 불이 확 켜지는 게 아닌가. "이것 참, 신통하구나." 포저린게이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젠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특별한 인물 - 바로, 자기 자신이 아닌가.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컵에 물을 담기게 하고, 뱀이 나타나게 했다가 물러가게도 하고, 또 종이쪽지를 공중에 띄워 보고 - 이것이 모두 뜻대로 잘 되어 그는 만족해했다. 그 때는 벌써 밤 1시가 좀 지났다. (너무 늦게 자다가는 내일의 일에 지장이 생긴다. 이젠 자야지.) 포저린게이는 옷을 벗으면서 또 가슴 설레는 일을 생각해냈다. "나를 침대에 뉘어라." 그러자 그는 침대 속에 드러누워졌다. "보들보들한 새 잠옷을 꺼내어 내게 입혀다오." 이번에도 명령대로 되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명령했다. "기적이여, 이번에는 나를 푹 자게 하라. 그리고 내일 아침 7시에 일어나게 하라." 이렇게 말하자마자 포저린게이는 벌써 쿨쿨 자고 있었다.   지옥으로 꺼져라   다음날 아침 포저린게이는 7시 정각에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어제 저녁 일이 모두 꿈이 아닐까 하고 여겨졌다. 그래서 시험삼아, "햄에그를 다오." 하고 말해 보았다. 그러자 식탁 위에는 방금 구운 듯한 맛있는 햄에그가 김을 무럭무럭 내고 있었다. 과연 꿈은 아니었다. 포저린게이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 직장으로 나갔다. 아침 활쏘기 게임장 일은 꽤 바빴다. 청소다 뭐다 하며 모조리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기적의 힘으로 청소도 정리도 눈 깜짝할 동안에 끝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거야말로 통쾌하구나." 포저린게이는 얼마나 즐거웠던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기적의 힘을 쓰는 데는 주의해야 할 것이 많았다. 무심코 다른 사람한테 들키는 날에는, 또 엊저녁의 술자리에서처럼 '나쁜 장난'이라 야단맞을 염려가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써먹을 만큼 익숙하지도 못했다. 가령 자전거를 타는 데도 자꾸 연습을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탈 수 없듯이, 기적은 자전거 타기보다 훨씬 더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저린게이 청년은 근무를 마치자 인적이 없는 가스 공장 뒤로 가서, 거기서 기적 연습을 실컷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그는 언제나 짚고 다니던 지팡이에다 장미꽃을 피워 보기로 했다. 시험을 해 보자 지팡이에는 당장 아름다운 장미꽃이 방실방실 피어나서 주위는 온통 달콤한 꽃향기로 가득 찼다. 그 때, 뒤쪽에서 어떤 사람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장미꽃이 만발한 지팡이를 들키는 날에는 또 곤란한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는 얼른 '먼저대로 돌아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만, "돌아가!" 하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지팡이는 무서운 힘으로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이쿠, 이게 뭐야!" 하고 성난 고함 소리가 뒤쪽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찔레덩굴을 던진 놈이 ! 아이쿠, 무릎이야!" 포저린게이는 급히 소리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랬더니, 이 근처를 순찰하던 낯익은 경찰관이 아닌가. 경찰관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턱수염을 쓸면서 포저린게이를 노려보았다. "오라, 너는 엊저녁 롱 드래곤 주점에서 장난을 쳐서 램프를 부순 녀석이 아냐?" "예, 예에… 참으로 죄송합니다." 포저린게이는 어떻다고 변명할 길이 없어서 어물어물 사과했다. "또 오늘 저녁만 해도 이런 컴컴한 곳에 숨어서 남한테 찔레덩굴을 집어던지다니 대관절 어째서 넌 그런 장난만 골라 가며 하는 거냐?" "그것은 에에… 이거 야단났군." "어서 말 좀 해 보라고." "즉, 에에… 저는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니, 기적을 일으킨다고? 턱없는 소리 작작 해. 너는 경찰관을 찔레덩굴로 때렸단 말이다. 그런 엉터리 수작이 통할 줄 아니? 어쨌든 파출소까지 가자." 이 말을 듣자, 포저린게이는 약이 바짝 올랐다. "이 멍텅구리 같은! 엉터리인지 아닌지 본때를 보여 주마. 너 같은 건 당장 지옥으로 썩 꺼져!" 이렇게 말한 순간, 포저린게이 청년은 눈을 부릅떴다. 방금 까지도 턱 버티고 큰소리치던 경찰관의 모습이 싹 꺼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는 사방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으나, 경찰관의 모습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뉘우침   그 이튿날 아침 신문에, 그 경찰관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큼 크게 보도되었다. 순찰중의 경찰관이 행방불명이 되었으므로 경찰에서는 발을 헛디뎌 템즈 강에라도 빠져 죽은 것이나 아닐까 하며 배와 잠수부를 동원해서 강물에서 시체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포저린게이는 그만 기가 탁 죽고 말았다. (그 경찰관은 지금쯤 어찌되었을까. 내가 지옥으로 가라고 소리쳤을 순간 싹없어지고 말았으니, 역시 지옥으로 갔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되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만일에 저 세상에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나같이 죄지은 자도 반드시 지옥으로 가겠지. 그리하여 악마들에게 시달려 고통을 받겠지…) 포저린게이는 일요일 밤, 가까운 교회로 갔다. 빼빼 마르고 휘청거릴 만큼 키가 큰 메딕 목사는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좀처럼 교회에 오지 않던 포저린게이가 끝까지 설교를 귀담아들었을 뿐 아니라, 꼭 상의할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재에 마주앉자, 포저린게이는 대뜸 말을 꺼냈다. "목사님, 실은 저는 참회를 하러 왔습니다." "호오, 무슨 일이기에?" "실은 제가… 어제 .경찰관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것 같아요. 저, 신문에서 행방불명이라 떠들썩한 그 경찰관 말씀입니다." "뭐라고?" 메딕 목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어 주시진 않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저한테는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거든요." "그런 시시한 소린 그만두게. 난 바쁜 몸이니 어서 돌아가 줘." 메딕 목사는 화를 벌컥 내며 일어섰다. 포저린게이는 당황하여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좋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당장 기적을 일으켜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담뱃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비꽃 화분이 되어라!" 담뱃갑은 어느 사이에 화분으로 변했다. 메딕 목사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거 참 놀랍군. 자넨 마술사였군 그래. 대관절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거지?" "마술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되는 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요. 자, 보십시오. 금붕어 항아리가 되어라!" 제비꽃 화분은 금시 금붕어 항아리로 변했다. 포저린게이는 그것을 또 비둘기로 바꾸고, 또 토끼로 바꾸자,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또 담뱃갑으로 되돌려 놓았다. 메딕 목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포저린게이의 기적을 넋잃고 보고 있었다. "자, 이만 하면 아시겠죠, 목사님?" "응… 직접 내 눈으로 보았으니, 참말로 믿을 수밖에." 포저린게이는 그 롱 드래곤 주점에서 비미슈하고 벌였던 논쟁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그는 메딕 목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응… 그것 참 어려운 문제로군.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들었으니까." 메딕 목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포저린게이는 크게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군다나 장시간을 지껄여댄 데다가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배를 쫄쫄 곯았던 까닭에 기운도 쪽 빠져 있었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으므로 메딕 목사는 그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요리사는 요리 솜씨가 형편없는 데다가 매우 게으 름뱅이였기 때문에 음식은 아주 맛없고 먹어 볼 것 없는 빈약한 것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저의 기적의 힘으로 맛있는 걸 좀 상에 올려놓을까요?" 포저린게이가 말하자 목사는 매우 기뻐하며, "그러면 나는 먹음직스럽게 두꺼운 비프스테이크하고, 샐러드와 계란 요리, 그리고 맛있는 포도주가 좋겠군." 주문한 요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식탁 위에 가득히 차려졌다. 포저린게이도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기적의 힘으로 주문하고는 두 사람은 사이좋은 친구처럼 마시고 먹었다. 목사는 술기운이 얼큰히 돌고 배가 부르자, 아까까지의 걱정이 싹 달아났다. 그리고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옳지, 내가 왜 미처 이런 생각을 못했던고. 여보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네." 메딕 목사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목사님?" "자네는 기적의 힘으로 경찰관을 지옥에 보냈잖나. 하지만 역시 기적의 힘으로 이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면 그것으로 죄 값은 치러지는 거라네." "아, 그렇겠군요. 하지만 어떤 일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포저린게이가 물었다. "그거야 뻔하지 뭔가. 마음씨가 나쁜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만든다든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든지 하는 일이지." "예, 알겠습니다. 목사님, 그럼 어떤 사람의 마음을 고쳐 주어야 하는지, 또 도와야 하는지를 일일이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럼, 그럼. 가르쳐 주고 말고. 이 맛있는 포도주를 한 병만 더 마시고 곧 출발하도록 하세." 두 사람은 하늘이라도 날 듯한 유쾌한 기분이 되어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겨우 일어섰을 때는 벌써 한밤중이었다. 밤거리에는 주정꾼들이 술에 잔뜩 취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메딕 목사는 곧 포저린게이한테 명령했다. "저 주정뱅이들을 제정신으로 돌아가게 해 줘." "예, 알았습니다." 포저린게이가 한쪽 손을 살짝 흔들고 입 속으로 뭐라 중얼중얼하자, 주정뱅이들은 한꺼번에 술이 다 깨어버렸다. 그리고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동안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으나, 이윽고 맥없이 슬슬 집으론 돌아갔다. "옳거니, 됐어. 그런 식으로 하면 돼." 메딕 목사는 의기양양하여 말했다. 두 사람은 한길로 나섰다. 거리에는 사람과 마차가 붐볐으나, 길이 나쁜데다 좁은 탓으로 혼잡을 빚고 있었다. "이번엔 저 도로다. 저것을 훌륭한 도로로 싹 바꿔 놔 봐." 포저린게이가 도로를 바라보여 입속말로 두세 마디 중얼중얼하자, 도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쭉 곧고 넓고 깨끗한 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금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새로운 기적을 자꾸자꾸 일으키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더러운 개천을 물고기가 노는 깨끗한 내로 바꿔 놓았다. 방금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낡아빠진 다리를 튼튼한 새 다리로 바꿔 놓고, 질퍽질퍽한 늪지의 물을 말려 버리는가 하면, 허물어진 선창가를 깨끗이 수리하기도 했다. 거기까지 해 나갔을 때, 교회의 종소리가 3시를 알려 주었다. 포저린게이는 갑자 놀라, "아, 벌써 새벽 3시가 되었군. 이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지." "무슨 소릴, 아직 시작일 뿐이 아닌가?" 기적의 힘에 홀딱 정신이 빠진 메딕 목사는 꾸짖듯이 말했다. "아침까지는 이 동네를 완전히 새마을로 만들어 놓아야 하네." "하지만 저는 직장에 나가야 하고, 또 너무 늦게 돌아가면 하숙집 아주머니가…" "그런 일엔 더 신경 쓸 것 없어요." 메딕 목사는 어째서 그런 것도 모를까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그 기적의 힘으로 시간을 딱 멈추게 하면 되잖나, 이 사람아! 그러면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아침이 오지 않도록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군요… 하지만 어떡하면 시간이 멈추나요?" "간단한 일이지 뭐." 메딕 목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구상에 아침이 되고 밤이 되는 건 무슨 까닭인가. 지구가 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지구의 회전을 멈추게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렇군요. 목사님은 과연 머리가 좋으시네요."' 포저린게이는 두 발을 딱 벌리고 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구야, 멈춰라!"   내 탓이다   다음 순간, 포저린게이는 무서운 속력으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메딕 목사도, 옆에 서 있던 마차도, 길을 가던 들개도, 나무도, 돌도… 무엇무엇 할 것 없이 송두리째 공중으로 튕겨 올라가고 만 것이다. 한순간 포저린게이는 무서운 회오리바람에 휘말린 것이 라 여겼다. "기적이여, 나를 안전하게 땅에 내려 놓아다오." 이렇게 외치자마자, 그는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버린 빌딩의 옥상에 사뿐 내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대관절 어찌된 영문일까. 동네는 마치 무서운 폭격을 당한 것처럼 형편없는 폐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빌딩은 무너지고, 목조 건물은 그 자리에 폭삭 내려앉고, 지붕이나 가로수가 날아가 버리고, 온 하늘에는 벽돌과 돌과 나무와 인간과 소와 말과 돼지… 그밖에도 수많은 것들이 날고 있었다. 우르르 우르르륵. 지옥 세계의 밑구멍이 빠져 버린 것처럼 무서운 태풍이 휘몰아치고, 눈알이 터져 달아날 듯이 번갯불이 번쩍번쩍 빛나고, 천지를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천둥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도대체 이건 어찌된 거야. 이 폭풍우는 여간한 폭풍우가 아니다.) 포저린게이는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철근에 매달리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밤하늘에는 희푸른 달빛만 비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점점 더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혹시나, 이 폭풍우도 내 탓이 아닐까?) 포저린게이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으려고. 나는 지구야, 멈춰라 했을 뿐이지, 폭풍우야 불어라, 지진아 일어나거라 란 말은 한 기억이 없는데…) 그는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가만 있자. 나는 시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 지구를 멈추게 했거든. 지구는 시속 1천 6백 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딱 멈추게 했으니, 즉…) 포저린게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만일에 맹렬한 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마차를 갑자기 세우면,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은 좌석에서 쏟아져 내려 달아나게 된다. 그 탄력이 더 강하면 마차 밖으로 탁 튀어나갈지도 모른다. 만일에 그 마차가 지구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속 1천 6백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는 지구가 별안간 멈추어 버린다면 - 물론 지구상에 있는 것은 모조리 대포의 탄환보다 빠른 속도로 공중으로 쏟아질 것은 뻔한 일이다. 도시도 마을도 빌딩도 집도 다리도 인간도… 세계 속의 모든 것이 그 탄력에 의해 부수어지고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그의 기적의 힘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참으로 엄청난 짓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그 경찰관을 지옥으로 보낸 죄 값을 치르기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구나. 아아, 나는 세계를 멸망시켰다. 살인자다…) 포저린게이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때 문득, 바다 쪽을 바라본 그는 무서운 광경에 정신이 쏠렸다. 해일이었다. 바다도 역시 기적의 힘으로 뒤흔들려 하늘을 뒤덮는 듯한 무서운 물벼락이 이리로 휘몰아쳐 오는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전과 같이   포저린게이는 필사적으로 그 파멸을 막으려 하였다. "그만 멈춰라! 제발 좀 가라 앉아다오!" 그는 밀어닥치는 물벼락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기적도 해일한테는 이기지 못하는지 여전히 자꾸자꾸 몰아닥쳐 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을 보고,"바람아, 그쳐라!" 하며 있는 힘을 다해 크게 외쳤다. 그러나 바람은 그의 말을 불어 날려 버리듯이 한층 더 세게 불어닥칠 뿐이었다. "폭풍우여, 가라앉아라. 번개야, 그만 꺼져 버려라!" 그는 두 손 모아 비는 마음으로 외쳐댔다. 하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다.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사그라져 버렸던지, 아니면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서 그런지… 포저린게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맸다. (차라리 처음부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얻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는 자꾸 불어닥치는 바람에 날려가 버리지 않으려고 철근을 꼭 붙잡고 안간힘을 쓰며 막 눈앞에 밀어닥친 해일을 지켜보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기적이여, 기적이여, 잘 들어 다오! 이제 간절히 바라노니, 나한테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거둬 가다오. 나로 하여금 전과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해다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정성껏 빌었다. "기적이여, 이젠 그만해다오. 아무 일도 없었던 옛날로 날 돌아가게 해 다오. 나로 하여금 롱 드래곤 주점에서 처음 기적을 일으켰던 그 전 상태로 돌아가게 해 다오!" 포저린게이는 눈을 감았다. "자, 제발 부탁합니다!" 그 순간, 바람 기운이 싹 떨어진 느낌이 들고 주위가 캄캄해졌다. 무서운 소리가 딱 그치고 고요가 온 세계를 둘러쌌다. (아아… 역시 안 되는구나. 끝내 세계의 끝장이 날 판이구나.) 그가 이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와글와글 소란스러워졌다. 그는 퍼뜩 눈을 떴다. 거기는 다름 아닌 롱 드래곤 주점이 아닌가. 주위에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로, 낯익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웃고 성내고 이야기하고 흥청거렸다. 그 외 앞에는 친구 비미슈가 맥주 잔을 들고, 남을 깔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은 전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포저린게이 청년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왜냐 하면, 모든 일이 기적이 일어나던 전으로 되돌아와 버렸기 때문에, 그도 지금까지의 일을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이것 봐, 그 따위 소릴 했댔자…." 하고 비미슈가 말했다.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날 까닭이 있겠나?" "그야 쉽사리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야. 한번 일어났다 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나." 포저린게이는 어쩐지 언제 어느 곳에서 똑같은 말씨름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아무튼 기적을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저 램프가 보통 때라면 거꾸로 서서 그대로 탈 수야 없지 않겠어, 그렇지? 하지만 기적의 힘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때, 램프가 별안간 공중으로 떠오르고 거꾸로 되더니, 조용히 불꽃을 태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늘의 공포 The Horror of the Heights   코난 도일 Arthur Conan Doyle 지음       옛날부터 사람들은 하늘이라는 것에 대해 보통 다른 감정을 품어 왔습니다. 하늘은 신비스럽게만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늘은 푸르고 맑고 조용하게 보이다가도, 금새 시꺼먼 먹구름이 몰려와 호우(豪雨)를 퍼붓기도 하고, 바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무서운 폭풍우를 휘몰아쳐 땅 위를 휩쓸고, 홍수를 일으켜 집이나 논밭을 떠내려가게 합니다. 캄캄한 밤하늘을 뒤흔드는 천둥과 벼락 소리나 어둠 속에서 불칼처럼 휘둘러대는 번갯불은 옛날 사람들을 얼마나 놀라게 하고 겁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는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진 것 - 여러 신들과 초자연의 괴물과 악마들이 산다고 여겼습니다. 번개는 번개의 신이 던지는 불덩이요, 폭풍은 바람의 신이 일으키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자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러한 미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바람은 태양으로 따뜻해진 대기의 이동이고 비는 공중으로 증발했던 수증기가 식어서 물방울이 된 것이고, 또 천둥은 정전기의 부딪침이라는 원리를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도 인간은 하늘에 대한 공포에서 좀처럼 떠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약 2백 년 전, 즉 1784년 프랑스의 몽골리에 형제가 만든 기구가 처음으로 인간을 하늘로 올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부터 기구는 점점 발달되어 자꾸자꾸 더 높은 하늘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1840년에는 7천 미터까지, 1860년대에는 1만 1천 미터 높이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직도 높은 하늘에 올라가면 공기가 적어진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지 못했던 까닭에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높은 하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인류 사상 처음으로 하늘을 난 것은 1903년의 일이었는데, 그 때부터 한동안은 겨우 고도 1백 미터쯤 되는 낮은 하늘을 흔들흔들 날았습니다. 이 소설이 씌어진 1910년은 아직 비행기가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러한 공상이 떠올랐던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물론 지금은 대개의 제트 여객기는 1만 미터의 높은 하늘을 날고, 2만 미터, 3만 미터 가량까지 올라가는 것으로는 군용기나 실험기 같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따른 과학의 눈부신 발전상을 실감케 하는 소설이라 하겠습니다. 코난 도일(1859~1930)은 괴기소설의 아버지라 할 만큼 너무나 유명합니다. 명탐정 셜록 홈즈를 비롯해서 수많은 괴기소설 중에는 문학사에 영원히 남는 걸작이 많습니다. 또, 과학 소설과 공포 소설도 많이 썼습니다. 가장 유명한 과학 소설은 와 , 그리고 공포 소설로는 이 책의 작품 등이 있습니다. 피묻은 수첩   세상에는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말이라든지, 꾸민 이야기라든지, 혹은 단순한 생각의 잘못이라든지 넘겨버릴 수 없는 사건이 있는 법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와 같이 세상에서도 드문 괴상한 사건의 하나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의 9월 15일, 켄트 주 위지엄 마을의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때, 자유롭게 수첩장을 끼었다 빼었다 할 수 있게 만든 낮선 수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데서부터였다. 수첩에는 깨알같은 글씨가 꽉 차 있었지만 농부는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 표지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크, 혹시나 끔찍한 살인 사건의 증거일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농부는 그 수첩을 곧 마을 이장한테 가져갔다. 이장은 그것을 자세히 읽어 보고, 그 너무나 괴상한 내용에 깜짝 놀라, 전부터 잘 아는 런던 대학 교수한테 보냈다. 그 대학 교수도 크게 놀랐다. 그래서, "이것은 전문가한테 보여야지." 하고, 런던 항공 협회에 넘겼다. 런던 항공 협회의 사람들은 그 수첩을 한 번 보고 나더니 매우 흥분했다. 수첩은 앞쪽 두 페이지와, 마지막 한 페이지가 없었는데, 거기에 적혀 있는 내용에서 누구의 것인지 당장 알 수가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지난해 9월 14일, 혼자서 고공 기록에 도전했다가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영국 항공계의 명조종사 조이스 암스트롱의 최후의 수기였던 것이다. 암스트롱은 영국에서도 손꼽힐 만큼 큰 부자였다. 특히 기계에 관해서 자세하여 특허를 몇 가지나 딴 발명가이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유명했던 것은 그가 비행기에 미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디바이지스 시 근처에 있는 그의 전용 비행장에는 자가용 비행기가 네 대나 있었고, 한해 동안에 1백 50회나 하늘을 날아 여러 가지의 비행 기록을 세웠다. 요즘, 그는 특히 고공 비행에 세계 기록을 세우기 위해 새로운 비행기를 주문하는 등 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비참한 사건이 하나 생겼다. 영국 공군의 조종사로, 암스트롱에 버금가는 적수 마틀 중위가 1만 미터의 고공(高空)에 도전했다가 원인 불명의 사고로 추락되어 무참히 죽었던 것이다. 중위의 시체는 비행기의 잔해와 함께 발견되었으나 머리 부분이 송두리째 없었다. 암스트롱은 이 사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틀 중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도 1만 미터 이상의 고공 신기록을 세워 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10일, 1만 2천 3백 90미터라는 눈부신 고공 기록을 거뜬히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암스트롱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날로부터 불과 나흘만에 다시 고공 기록에 도전하였는데, 그것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수첩은 그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과, 행방불명의 진상을 밝혀 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상이란 참으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상한 것이었다. 당신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는 다음에 적은 수기를 읽고 스스로 판단해 주기를 바란다.   암스트롱의 수기   (이 수기는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앞의 두 페이지와 뒤의 한 페이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중간에서 시작해서 중간에 끝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주의해서 읽을 것.)   …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분명히 고공 기록에 도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고, 사고도 일어나기 쉬우므로, 그로 말미암아 죽거나 행방불명이 된 조종사가 몇이나 생겼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 죽는 모양이며 추락하는 방법인 것이다. 예를 들면, 2~3년 전에 죽은 프랑스의 베리아 비행사와, 또 그 다음에 죽은 영국의 박스터 비행사의 경우는 비행기의 잔해가 발견되었을 뿐 끝내 비행사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박스터의 경우에는 마침 그 밑을 비행하고 있던 다른 비행사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의 손에 잡힌 것처럼 자꾸자꾸 올라가는 박스터를 보았다지만 비행기는 도저히 그런 수직 상승을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또, 올해에 들어서 코나 비행사는 간신히 비행장까지 돌아오기는 했어도, 조종석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죽어 버렸다. 의사의 진단으로는 심장마비라 했지만, 코나 비행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보통 사람의 세 배나 건강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느냐 그는 죽기 직전, '아, 무서워라… 무서워라.' 하고 거듭 말했다지 않은가? 그리고 또 이번에는 마틀 중위의 비극이다. 마틀 중위의 시체는 머리가 없어졌다. 추락할 때의 충격으로 떨어져 달아났다고들 하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파편도 남기지 않고 없어진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의 비행복에 흥건히 묻어 있던 기름이다. 그것은 비행기에 사용되는 어떤 기름과도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름은 대관절 어디서 묻었단 말인가? 1만 미터 이상의 높은 하늘은 아직도 전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이다. 어쩌면 거기에는 고공 밀림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들이 아직도 모르는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틀 중위도 코나도 박스터도 그 괴물의 습격을 받은 것은 아닐까?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수수께끼를 풀고야 말겠다. 나는 그것을 밝혀내고 싶었다.   9월 10일 아침 9시 반이 좀 지나자 나는 나의 애기인 최신식 베로나 단발기로 떠올랐다. 친구들에게는 고공의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나왔다. 하지만 나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엽총과 노루잡이용 총알 한 다스를 잊지 않았다. 그밖에도 물론 고공용 산소 호흡기나 방한용 털스웨터, 방한복에 방한모, 방한화 등 추위를 막기 위한 완전 장비를 갖추었던 것이다. 베로나 기는 상쾌하게 날았다. 크게 원을 그리면서 정점 고도를 높여 갔다. 1천 미터쯤 올라갔을 무렵, 강한 천둥과 소나기를 만났다. 그러나 비구름 층을 뚫고 올라가자, 곧 비는 그치고 주위는 매우 잠잠해졌다. 10시경, 3천 미터의 고도까지 도달했다. 그 뒤로는 매우 순조로와 구름 봉우리를 자꾸자꾸 뛰어넘어 어느 사이에 4천 미터, 5천 미터로 상승해 가고 있었다. 그 무렵에 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베로나 기의 나사못이란 나사못은 모조리 삐걱거려 방금이라도 날개가 떨어져 달아나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한참 동안은 바람을 업고 날면서 고도를 높여 갔다. 7천 미터에 도달하자 방향을 바꾸어 월트샤 지방의 상공을 향해 날았다. 마틀 중위 비행기가 조난 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나는 이 근처에도 고공 밀림이 있으리라고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고 에어포켓에 빠지기도 하여 언제 공중 분해 될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지경이었다. 나는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낙하산의 끈을 늦추고 언제라도 금방 뛰어내릴 수가 있도록 했다. 이 때부터 종종 구역질이 나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공기가 적어지고 산소가 부족하게 된 탓이었다. 그래서 산소 호흡기를 달았더니 금방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이었다. 1시 반, 애기는 드디어 1만 미터를 넘었다. 나는 세계의 왕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저 멀리 땅 위를 내려다보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베로나 기의 기능은 아직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고도를 높여 갔다. 고공 밀림이 만일 있다고 하면 이 근처에서 위쪽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1만 2천 미터쯤 올라가니, 그보다 더 올라가기는 매우 곤란해졌다. 공기가 너무 모자라서 비행기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무렵부터 엔진의 기능이 떨어지며 기침을 하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만 3천 미터 근처까지 상승했을 때, 나는 마침내 단념하고 말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상으로는 더 올라가지 않는데다가 가솔린이 앞으로 한 시간 분밖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고도를 유지하면서 쌍안경으로 주위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주위에는 은빛으로 곱게 빛나는 구름 덩어리가 흩어져 있을 뿐 그밖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기수를 돌려 내려가려고 했다. 그 때였다. 비행기 앞에 화환 같은 모양을 한 이상한 구름이 태양 광선을 받아 번쩍 번쩍 빛을 내고, 빙글빙글 돌면서 나타난 것이다. 비킬 사이도 없었으므로 비행기는 그 속을 뚫고 들어갔다. 베로나 기는 별로 다른 일없이 그 속을 지나갔으나, 그 때 나는 뿌연 기름 같은 물질이 비행기의 창과 날개에 묻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수증기도 안개도 아닌, 어떤 매우 작은 미생물의 덩어리 - 바닷물의 플랑크톤 같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무서운 괴물을 보았다. 그 괴물은 의사당의 둥근 지붕보다도 훨씬 더 큰 인경(鱗莖)처럼 생긴 괴물 - 하늘을 나는 해파리라고 표현해야 할지, 어쨌든 이상한 괴물이었다. 몸뚱이 전체가 분홍빛이고 가느다란 초록색줄 무늬가 여러 줄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두 개의 긴 초록색 촉수가 늘어져 있었다. 그 하늘을 나는 해파리는 규칙적으로 숨을 쉬면서 천천히 너울너울 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생물을 좀더 자세히 보려고 비행기를 선회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그 일대에 모여 있는 몇십, 몇백, 아니 몇천이나 되는 하늘을 나는 해파리의 큰 무리 속에 뛰어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하늘의 생물은 해파리뿐만이 아니었다. 넘실넘실하며 기나긴 바다뱀과 똑같이 생긴 것이 있는가 하면 기구처럼 둥근 것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명주처럼 엷고 투명하며 햇빛에 반사되어 일곱 가지 무지개 빛으로 번쩍이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저 아득한 상공에서 또 다른 괴상한 생물이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것은 몸 전체가 보랏빛을 띠고 있고, 한가운데에는 눈과 비슷한 검은 원반이 두 개, 희고 딱딱한 듯한 부리처럼 생긴 툭 튀어나온 것이 하나 달려 있었다. 그리고 내 비행기를 발견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덮쳐 왔다. 나는 바짝 속도를 내었다. 그 괴상한 매같이 생긴 공중 동물의 속력은 비행기보다 훨씬 더 빨랐다. 그 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행기를 따라와 나란히 날더니, 몸 아래쪽에서 여러 개의 긴 촉수들을 쫙 뻗쳤다. 한 촉수가 열기로 뜨거운 엔진에 닿았다. 데인 탓일까. 촉수가 치직 소리를 내며 움츠려졌다. 또 한 개는 프로펠러에 닿자마자 갈기갈기 찢어졌다. 나는 베로나 기의 기수를 급히 아래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촉수는 또다시 무서운 속력으로 쫓아왔다. 그래서 뒤쪽에서 좌석 안으로 뚫고 들어와서는 내 몸을 휘감았다. 놀랄 만큼 강한 힘이었다. 나는 좌석에서 끌려나갈 뻔했다. 그래서 얼른 엽총을 집어들자 두 방을 연거푸 쏘았다. 그 중 한 방이 공중에 뜨는 구실을 하는 듯한 주머니 같은 것에 명중되자 그 속의 기체가 피익 하고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괴물은 갑자기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됐다!" 나는 이 때다 하고 전속력으로 급강하를 계속했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고공 밀림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비행장에 돌아오자 나는 친구들에게 고공 비행의 신기록을 세웠다고만 말했다. 공중 생물에 관한 이야기만은 도무지 믿어 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 괴물들의 사진을 찍어 와야지. 그래서 그 사실을 온 세계에 대해 발표해야지.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다시 한번 더 저 고공 밀림을 향해 출발할 작정이다.   수기는 여기서 끝났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틀림없이 비행기 안에서 적었으리라 여겨지는, 흔들린 글씨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1만 2천 미터. 이제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가망이 없다. 놈들이 세 방향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다. 하느님, 도와주소서. 아아, 이젠 끝장이다…   이것이 조이스 암스트롱의 최후였던 것이다. 작은 거인 The Microscopic Giants   에른스트 Paul F. Ernst 지음       과학 소설에는,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침략자가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합니다. 화성인이나 목성인, 그러고 토성인과 같이, 태양계 외의 행성에서 온 인간인 경우도 있습니다. 태양계보다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별이나 성운(星雲)의 우주인일 때도 있습니다. 또 바다에서 기어올라온 괴상한 짐승일 경우도 있고, 태고의 공룡이 부활되어 기습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침략자는 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대지 밑에서 사는 지하 인간입니다. 지구 위의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2백만 년에서 3백만 년 전 원숭이 종류가 점점 진화되어, 마침내 호모 사피엔스(지혜가 있는 인종, 즉 인간)로서 독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방면으로 진출하여 갖가지의 인종과 민족으로 갈라지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동물의 왕자로 군림하여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가 모르는 인류의 한 종족이 아득한 옛날에 땅 밑에 파고 들어가서 생활을 하기 시작하지나 않았을까요? 수백만 년 전 인류나 원숭이의 아득히 오랜 선조가 겨우 나무 위 생활을 버리고 땅 위로 내려왔을 무렵, 그대로 동굴이나 지하 굴속에서 살게 되자, 차츰 지하 생활에 익숙해져 진화된 인류가 생기지나 않았을까요? 만일 이러한 인류가 있다고 하면 - 그 인종은 점차 지하의 높은 압력이나 열에 견딜 수 있도록 몸이 진화되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지하 사람들은 땅 표면에서 수천 미터 되는 깊은 지하를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기고 거기에 지하 도시를 만들어 독특한 문명을 발전시켰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과학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인류는 지금까지 갈 수 없었던 지하 세계에도 진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드릴이라든지, 굴착기 같은 땅을 파는 기술이 발전되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광물이나 석유를 찾기도 하면서 지구의 내부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핵무기 실험을 지하에서 한다든지, 바다 밑을 볼링하여 연구한다든지, 지하 도시를 계획하는 등 여러 가지의 일들이 실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지하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 지하 사람들에게 대한 도전이 아닐까요? 즉, 지하 사람들은 우리들 땅 위에서 사는 인류를 위험한 적, 악질적인 침략자로 보기 시작한 것이나 아닐까요? 그러한 일이 만의 일이라도 있다면… 그야말로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공상 과학 공포 소설의 작자 폴 에른스트는 1930년대에 미국에서 활약하던 사람인데, 이 작품은 지하에 관한 것의 걸작으로서, 여러 명작집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발자국   그 괴상한 사건이 생긴 것은 상당히 오래 전, 그러니까 지난 번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사건 서류는 어디론지 뿔뿔이 흩어져 없어지고, 신문이나 라디오에도 발표된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은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던 줄을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나한테는 한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는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구리였다. 그 무렵 세계는 온통 구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구리는 전선이나 탄환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온 세계의 구리 광산에서는 온갖 힘을 다해서 구리를 캐내고 있었다. 나하고 친구인 광산 기사 벨몬트가 일하고 있던 곳도 그러한 광산 중의 하나였다. 다만, 우리들의 구리 광산은 다른 곳과는 좀 달랐다. 그것은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갱도가 있는 광산이었던 것이다. 보통의 구리 광산의 갱도의 깊이는 기껏해야 5~6백 미터 가량이었다. 가장 깊은 갱도라 해도 2친 미터 가량밖에 안 된다. 그러나 우리 둘이 일하고 있던 휴베리올 구리 광산의 갱도는 무려 1만 3천 미터나 되는 엄청난 깊이였다. 더구나 우리는 보다 더 순수한 구리의 광맥을 찾기 위해, 지하 깊이 자꾸자꾸 파내려 갔다. 그래서 그 사건이 생긴 날, 우리들은 1만 3천 2백 미터의 깊이까지 파내려 갔던 것이다. 거기에는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던 아주 멋진 구리 광맥이 있었다. "만세, 드디어 찾았다!" 우리들은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 날뛰었다. 그리고 당장에 수평 갱도를 팔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할 일 때문에 한 발 먼저 땅 위로 올라왔고, 벨몬트가 남아서 광부들을 지휘하여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때의 일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나한테, 벨몬트가 눈을 유난히 빛내며 다가왔다. "프레이터, 굉장한 것을 보았어!" 그는 흥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뭔데 그래. 대관절 무얼 보았다는 거야?" 나는 되물었다. "기가 막히는 발견일세. 곧 국립 박물관에 전화를 해야겠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무선 전화 앞에 자리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대관절 뭘 가지고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매머드의 뼈나 공룡의 화석이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발자국이야. 화석으로 된 인간의 발자국이란 말일세." "그럴리가?" 나는 엉겁결에 큰 소리를 질렀다 그 까닭은 1만 3천 미터 깊이의 지층은 1백만 년 이상 전의 것으로, 인류의 조상도 아직 이 세상에 없었던 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몬트는 자신 있듯이, "하지만 분명히 있는 데야 도리가 없지 않겠나. 저 바위 위에 남아 있는 자국은 틀림없이 인류의 가장 오랜 조상의 발자국이야," 벨몬트는 갑자기 소리를 낮추었다. "더구나, 놀랄 만한 사실이 있어. 그 발자국은 신을 신은 발자국이란 말이야."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세히 보고 말하라고. 그건 틀림없이 광부의 발자국일 테니. 아니, 이 사람아, 정신나간 소리 작작해. 그런 걸 국립 박물관의 전문가에게까지 보이며 수선을 떨다간 웃음거리밖에 안 돼요." 그러나 벨몬트는 웃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가 않대도. 그 발자국은 난쟁이나 어린이만큼 작은걸. 기껏해야 60센티미터 가량밖에 안 되는 키를 가진 인간의 것이란 말일세." "그럼, 광부 중의 누군가가 장난을 쳤겠지 뭐." "그렇지가 않대도 그래. 내 말 좀 똑똑히 들어보라고. 거기는 아주 단단한 바위 층이어서, 여간해선 지워지지도 않아요, 아무리, 누가 그런 힘든 장난을 치려고." "도대체 그건 어디에 있는가?" "수평 갱도의 막다른 곳이야. 왜 그 바위 층의 갈라진 틈새가 있지 않던가. 우리가 콘크리트를 들이붓던 곳 말일세, 바로 그 근처야."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럴리가 없어. 그 콘크리트는 내가 감독해서 광부한테 시킨 거야. 그 때는 아무 것도 없었어." "그렇게 고집을 부릴 테면, 어디 한번 자네가 직접 가보고 오란 말이야. 그것이 가장 확실할 테니. 자, 그럼, 나도 같이 갈게." . 그리하여 우리들은 함께 갱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것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콘크리트 속의 그림자   이윽, 우리는 갱도 속을 천천히 내려가는 상자 모양의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담고 있었다. 공기 압력이 바뀌게 되므로 너무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간신히 수평 갱도의 막다른 곳까지 왔을 때, 우리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이 지하 세계에는 기압이 높은 관계로 숨이 찼던 것이다. 아무리 송풍 장치를 돌려봐도 온도는 40도 가까운 무더위가 되는 곳이다. "여기야." 콘크리트 벽 바로 앞까지 왔을 때, 벨몬트가 발 밑의 땅을 가리켰다. 나는 거기를 보았다. 가슴이 섬뜩했다. 그 바위 표면에 길이 10센티미터 가량의 작은 발자국이 열두어 개나 나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 발자국은 마치 보드라운 모래밭을 밟았을 때 나는 것처럼 2~3센티미터쯤 패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분명히 신발 밑바닥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등골에 찬물이 끼얹은 것처럼 오싹함을 느꼈다. 벨몬트가 말한 것은 정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1백만 년이나 전에, 이런 지하에 신발을 신은 인간이 걸어다녔다니, 그런 턱없는 일이 있을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 때, 문득 콘크리트 벽을 바라본 나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콘크리트 표면이 희게 흐린 듯이 뿌옇게 빛나며 마치 반투명 유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콘크리트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더니, 그 안쪽에서 빛의 무늬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몸뚱이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해 볼 겨를조차 없이 후딱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찌는 듯이 덥고 숨막히는 데다가, 이런 이상한 발자국을 보았으니, 눈 앞에 환상이 나타났던 게지.> 그러나 벨몬트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자, 이젠 알겠지. 바로 국립 박물관에 전화를 걸러가세." "잠깐만!" 나는 그 때 또 하나의 이상한 사실을 목격했다. 발자국은 앞을 향해 대여섯 개, 뒤를 향해 대여섯 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콘크리트 벽안에서 나와, 주위를 잠깐 살펴보고는 다시 콘크리트 벽 안으로 돌아 들어간 듯이 보였다. "앗!" 갑자기 벨몬트가 외치더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자국에 눈을 가까이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왜 그래?" "아까 내가 확인했을 때는 발자국이 열두 개밖에 없었어. 그런데 지금 보니, 새 자국이 네 개나 더 나 있는걸." 우리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이 꼿꼿이 선 채 그 발자국을 들여다보았다. 새 발자국이 나 있다는 것은, 곧 벨몬트가 사무실에 올라간 동안에 그 어떤 것이 이 근처를 돌아다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숨이 칵칵 막히도록 무더운 갱도 안에서 우리는 숨소리를 죽인 채 꼼짝 못하고 멍청히 서 있었다.   사람이냐 유령이냐   "프레이터 씨!" 별안간 부르는 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광부 조장 카슨 노인이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것이었다. "프레이터 씨, 아무래도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아요. 광부들이 일하기 싫다고들 합니다." "왜요?" "다름 아니라, 광부 하나가 유령을 보았다는 바람에… 그래서 다른 광부들도 기분이 나쁘다면서 작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유령을요?" "예, 이 콘크리트 벽 안에 사람이 있더래요." 나하고 벨몬트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카슨 노인은 목을 움츠렸다. "정말 턱없는 소리지 뭡니까. 그 인간이란 것은 키가 50센티미터나 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난쟁이래요. 콘크리트 속에서 이쪽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나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콘크리트를 통해서 보였다는 겁니다." 카슨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그따위 턱없는 소린 아예 믿지 않지만, 광부들은 미신을 좋아하거든요. 아무튼 이처럼 깊은 곳까지 파내려 온 것은 처음 아니겠어요. 산신령님이 성을 벌컥 내며 나타났느니 뭐니 하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겨드랑이 밑에는 식은땀이 흠뻑 배었다. "알았어요. 그 광부를 좀 데리고 와 주시오." 카슨 노인은 곧 그 광부를 데리고 왔다. 당당한 체격에 다부지게 보이는 늙은 광부로, 여간한 일을 가지고는 함부로 떠들어댈 만한 겁쟁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주름진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일을 그만두겠소, 기사님. 그런 기분 나쁜 것이 있는 곳에선 일할 수 없어요." "좀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없겠어요?" "벽 속에 번쩍번쩍하는 난쟁이가 있었어요." "그럴리가! 당신은 옛날에 난 이 발자국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니오?" 벨몬트가 옆에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렇지가 않아요. 이 내 눈으로 똑똑히 본 걸요." 광부는 이렇게 말한 다음 발 밑을 가리키며, "이 발자국은 옛날 것이 아니란 말이오. 바로 두 시간쯤 전에 그 번쩍이는 난쟁이들이 낸 거요. 알겠어요, 기사님 들?" 우리 두 사람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말문이 막혔다. 그 광부는 어쨌든 그만두겠다면서 돌아가 버렸다. "에잇, 참, 별꼴 다 보는군." 벨몬트가 내뱉듯이 말했다. "참으로 미신쟁이들만 모였군 그래. 콘크리트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생물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 라고…" 나는 아까 내 눈으로 본 것을 벨몬트한테 말하려 했지만 비웃음만 살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자, 그럼 어쩐다?" "이걸 그대로 두었다간 광부들 사이에 그 터무니없는 헛소문이 퍼져서 모두 일을 팽개칠 거다. 그런 말은 얼토당토않은 착각이라는 걸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돼." 하고 벨몬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아무튼 나도 그 괴물의 정체를 가려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나는 카슨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밤에는 광부들을 철수시켜 주시오. 오늘밤은 우리가 이 갱도를 감시할 테니." "그럽시다." 카슨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나타난 괴상한 인간   우리는 일단 사무실로 돌아가서, 손전등과 물통 따위의 장비를 갖추어 갱도로 다시 돌아왔다. 만일을 위해서 둘 다 권총을 한 자루씩 차고 왔다. 인기척이 없는 갱도 속은 그야말로 기분이 나빴다. 갱도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지하수 소리가 괴물의 울음 소리처럼 들려왔다. 우리 두 사람은 바로 그 발자국이 나 있는 갱도의 막다른 곳인 콘크리트 벽 앞에 앉았다. 벌써 한밤중이었지만, 전등불이 환히 비쳐서 그 근처는 대낮같이 밝았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느닷없이 벨몬트가 몸을 움찔하더니, "이크, 저것 봐!" 하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권총에 손을 갖다 대며 그 쪽을 보았다. 콘크리트의 한가운데가 희미하게 빛나며, 안에서 빛의 무늬 같은 것이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마음 탓이라 여기고 손으로 눈을 닦았다. 그래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두께 3미터나 되는 콘크리트의 가장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 덩어리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마치 콘크리트 속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점점 이쪽을 향해서 번져 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혹시 내 정신이 돌지나 않았나 의심했다. 그러나 벨몬트도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심장은 심한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속의 빛나는 그 괴물은 차차 뚜렷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겨우 60센티미터 가량이나 될까말까. 그렇지만 흔히 서커스 따위에 나오는, 머리만 크고 손발이 몽땅한 꼴사나운 난쟁이는 아니었다. 비록 몸은 작지만 그런 대로 쭉 빠진 균형 잡힌 몸매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한 과학 영화라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괴상한 광경이었다. 그 난쟁이는 마치 물 속이나 강한 바람결을 헤치고 오는 것처럼 상반신을 앞으로 구부리고 다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가 야무지게 땅바닥에 내디디며 반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한 가벼운 몸짓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바닷물 속에서 잠수부가 허우적거리며 걸어가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난쟁이가 걸어오면서 헤치고 있는 것은 물론 물도 바람도 아니다. 그 딱딱한 콘크리트인 것이다. 즉, 난쟁이는 콘크리트 속을 마치 물이나 공기 속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난쟁이 뒤에는 마치 물 속을 헤엄칠 때 생기는 물거품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몸 전체가 희미하게 빛났다. "앗, 저. 얼굴…" 벨몬트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나도 그것을 느꼈다. 난쟁이는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들보다 훨씬 더 다듬어진 멋진 얼굴이었다. 쪽 곧게 뻗은 오똑한 코, 잘생긴 입, 총명하게 보이는 맑고 큼직한 눈매 - 분명히 우리 인간과 같은,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발달된 고등 생물인 것 같았다.   지하 사람이다!   우리는 몸을 떨었다. 분명, 저것은 지하에서 태어나서 지하에서 자라난 지하 세계의 인간임에 틀림없다.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1백만 년이나 2백만 년 전에 유인원 무리에서 갈라져 독립되었다고 생물학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보다 훨씬 전에 인류의 조상의 조상이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져 따로따로 진화된 것이리라. 인류의 대부분은 지상 생활의 나무 위나 풀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하 생활자는 땅 속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몇만 년, 몇십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지하의 인류, 다시 말해서 지하 사람들은 점점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그것은 보통과 같은 동굴이 아니라, 지하 몇 십 킬로미터나 되는 지각의 갈라진 틈새였을 것이다. 그런데 땅 속 깊은 세계에는 기압이 높고 열도 높다. 그래서 기나긴 세월 동안 지하 사람의 몸은 환경에 적응되어 차차 단단하게 변화되어 갔다. 마침내 지하 사람들의 몸 세포를 이루고 있는 분자의 구조까지도 변화되고 만 것이다. 콘크리트가 단단한 것은 콘크리트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콘크리트보다 훨씬 더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진 생물이 있다고 하면 그 생물은 콘크리트 속을 마치 물고기가 물 속을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듯이, 또 인간이 공기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듯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그 난쟁이는 어느 사이에 다가와 콘크리트 벽 표면까지는 겨우 수 센티미터만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았더니 둘이었다. 지하 사람들은 우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 사람들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가 있었다. 난쟁이는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제트기의 비행사가 입는 비행복과 비슷했다. "오호라, 저것들이 살고 있는 곳은 여기보다 훨씬 더 깊은 땅 속일 거야. 그래서 여기는 마치 우리들의 높은 하늘과 마찬가지로 기압이 낮은 곳이 되겠지. 그러니 저것은 비행복이란 말일세." 나는 벨몬트한테 귀뜸해 주었다. "만일에 이 추측이 맞는다면 저것들이 왜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벨몬트가 의문을 나타냈다. "아마, 우리들이 이 갱도를 파고 있는 소리를 듣고 조사하러 온 거겠지." 그때, 벨몬트가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고 몸을 움츠렸다. "어이… 저 뒤에도 또 있어." 그것은 나한테도 보였다. 콘크리트의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또 이상한 빛의 덩어리 두 개가 표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나타났던 두 난쟁이 옆에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 봐 ! 놈들은 우릴 적으로 여기고 있어. 저 눈초리는 마치 맹수라도 노려보는 것 같군 그래." 벨몬트가 목구멍에서 간신히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맞았다. 지하 사람의 눈에는 적의와 살기가 등등했고, 기분 나쁜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만일에 물고기에게 인간과 똑같은 지혜가 있어서 인간을 미워한다면, 틀림없이 저런 눈초리로 노려보겠지.) 차갑고도 험상궂고 무서운 그 눈초리…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놈들은 우리를 적이라 여기고 있어. 여기는 놈들의 나라이고, 우리는 그들의 나라를 쳐들어간 침입자라는 거겠지.) 나는 마음속에서 외쳤다.   지하에서의 싸움   "이크! 온다!" 벨몬트는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었다. 한 난쟁이가 별안간 불쑥 두 손을 내밀었다. 콘크리트 속에서 밖으로 두 팔이 불쑥 나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도 하다. 콘크리트에는 아무 자국도 나지 않았다. 부서진 조각마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얼른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대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난쟁이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몸뚱이가 콘크리트 밖으로 완전히 나왔다. 다른 세 사람도 얼른 따라나오더니 콘크리트 벽 앞에서 한 줄로 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 뒤에는 구멍 같은 것이 하나도 생기지 않으니 어찌된 일일까. (역시 내 짐작이 들어맞는구나. 이것들의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의 밀도가 높은 탓으로 보통의 물질 속을 꿰뚫고 다닐 수가 있구나.) 이론적으로는 알겠지만 실제로 눈 앞에 두고 보는 것과 이론과는 또 차이가 있는 법이다. 우리들은 너무나 무서운 광경을 눈 앞에 두고, 그저 멍하니 난쟁이들의 거동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난쟁이들은 일렬 횡대로 늘어선 채, 천천히 우리를 보고 다가 공격선을 죄었다. 벨몬트가 권총을 빼들었다. 그렇지만 함부로 쏘지 않고 내 얼굴을 힐끗 보았다. 상대편이 너무나 작기 때문에 쏠 기분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하 사람은 넷 다 우리의 무릎께밖에 오지 않았으므로 쏜다면 한꺼번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네 난쟁이는 약 2미터 앞까지 오더니 걸음을 딱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젖히듯이 치켜들고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그 중 하나가 은빛으로 번쩍이는 옷 속에 손을 찔러 넣더니 가는 철사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이 무기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요, 고약한 것이!" 별안간 벨몬트가 큰 소리를 치더니 그 난쟁이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탕!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갱내에 메아리쳤다. 총알은 영락없이 난쟁이의 가슴에 명중했다. 나는 난쟁이의 가슴이 펑 뚫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일까. 난쟁이는 마치 모기한테 물린 것만큼도 느끼지 않는 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지 않는가. 그뿐이 아니었다. 놀란 티도 나타내지 않은 채 적개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초리로 우리를 쏘아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처럼 무서운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도 권총을 빼들자 다른 난쟁이를 겨누어 갈겨댔다. 탕 타탕! 벼락같은 총소리가 서너 번 갱도 안에 울렸다. 그러나 자욱한 연기와 화약 냄새 속에서, 네 난쟁이들은 총알에 맞았어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다. "제기랄 것! 총알이 놈들의 몸을 뚫고 지나가 버리는군." 벨몬트가 비명 섞인 소리로 외쳤다. 과연 뒤쪽의 콘크리트에 총알 맞은 자리가 대여섯 군데나 있었다. 그렇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지하 사람들이 총알을 맞았다기보다 그들이 총알 속을 뚫고 지나갔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만큼 지하 사람들의 몸의 물질은 단단한 것이었다. 못같이 생긴 무기를 가진 난쟁이가 또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뒤의 세 사람도 따랐다. 우리는 성큼 뒤로 물러섰다. 그 때, 나는 또 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난쟁이들이 발을 내디디면 그 단단한 바위 위에도 마치 진흙 위를 걷듯이 움푹움푹 패이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저 수수께끼의 발자국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지하 사람의 체중이 너무 무거운 관계로, 바위 속에 움푹 패어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의 상대가 그 얼마나 무서운 적인지를 새삼 느꼈다. 굉장히 단단한 물질로 되어 있는 난쟁이들은 총알이나 다른 무기도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어린이만큼 작은 난쟁이 몸에는 불도저만큼이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침 그 때 선두에 섰던 난쟁이가 가지고 있던 못 같이 생긴 무기 끄트머리에서 희미한 불꽃이 확 튀었다. "앗!" 벨몬트가 무서워 비명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툭하고 둔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내가 얼른 그를 부축하려고 달려들었을 때, 그의 오른쪽 가슴은 벌써 떨어져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아마 얻어맞는 순간에 벌써 숨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난쟁이가 쥐고 있던 그 작은 무기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보자, 나는 눈이 뒤집힐 듯한 분함을 느꼈다. 나는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권총으로 그 무기를 가진 난쟁이한테 바싹 들이대고 힘껏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총성이 잇따라 울려 퍼지고, 총알은 모두 난쟁이의 몸을 빠져나가 뒷벽에 맞았다. 난쟁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내 권총의 총알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못 같은 무기를 번쩍 들었다. 빨간 불꽃이 확 튀었다., "아이쿠!" 내 자신의 비명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전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때, 내 오른쪽 손은 권총을 꼭 쥔 채, 손목에서 잘려나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시체를 표본으로?   그렇지만, 그 때의 나는 적개심과 분노의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나는 중상에도 굴하지 않고 난쟁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선두의 난쟁이를 힘껏 걷어찼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처럼 헛되고 어리석은 공격법은 없었다. 총알이 듣지 않는 상대에게 육탄전으로 달려들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발은 상대편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 순간, 뼛속까지 저려오는 심한 아픔을 느끼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난쟁이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놈한테 꼼짝없이 죽는구나…) 나는 정신이 멀어지는 것 같은 심한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흐려지는 눈을 가까스로 부릅뜨고 상대편을 노려보았다. 난쟁이들은 입가에 뜻 모를 웃음을 띠더니 등을 홱 돌렸다. 그리고 벨몬트의 시체를 들어올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외 세 배나 되는 벨몬트의 몸을 한 손으로 30센티미터 가량이나 달랑 들어올렸다. 난쟁이들은 벨몬트의 시체를 들고 콘크리트 벽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벨몬트의 시체를 지하 세계로 가지고 갈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대로 두지는 않을 테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자, 간신히 엉금엉금 기면서 벨몬트의 시체를 끌어당기려 했다. 지하 사람 하나가 그것을 눈치채고 그의 작은 손으로 내 허벅지를 꾹 찔렀다. 나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지하 사람의 손이 나의 허벅지 속에 푹 파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놈은 손에 아무 반응이 없자, 몸의 균형을 잃고 앞으로 기우뚱거렸다. 그 힘으로 지하 사람의 팔은 어깨까지 내 다리에 푹 박히고 말았다. 기절할 만큼 아팠다. 지하 사람은 곧 팔을 뺐다. 그런데도 내 바지에는 구멍이 나 있지도 않았으며,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콘크리트의 경우와 똑같았다. 그 난쟁이는 동료들한테 갔다. 그리고 급히 서둘자는 듯한 시늉을 했다. 그 때 알았지만, 지하 사람들은 매우 숨결이 가빠 보였다. 엷은 기압 속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호흡이 답답해진 모양이었다. 세 지하 사람들이 벨몬트의 시체를 옆으로 들고 나란히 콘크리트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하나는 뒤따랐다. 네 사람의 몸은 천천히 콘크리트 벽 속으로 녹아 들어가듯이 사려져 갔다. 그런데 또 기묘한 일이 생겼다. 그놈들의 몸뚱이는 모두 콘크리트 벽 속에 들어가 버렸지만, 벨몬트의 몸만은 콘크리트 벽에 딱 붙어 버린 것처럼 밖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하 사람은 콘크리트 속에 들어갈 수가 있었지만 콘크리트보다 훨씬 밀도가 낮은 인간의 몸은 스며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하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서로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벨몬트의 시체를 콘크리트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벨몬트의 시체를 콘크리트의 벽에 달라붙을 따름이다. 네 난쟁이는 점점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산소가 부족한 물고기처럼 입을 빠끔빠끔 벌리며 괴로운 듯이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저놈들을 뭣 때문에 저렇게도 벨몬트의 시체를 탐내는 것일까?)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옳지… 저 지하 사람들은 지하 세계의 생물학자인지 뭔지 아무튼 과학자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비경(秘境)을 탐험해서 신기한 동물이나 곤충을 표본으로 채취하여 가져가듯이 벨몬트의 시체를 이 땅 위의 표본으로서 가지고 돌아가 연구하려는 것이구나…) 풀이 죽고 만 내 마음에, 또다시 불길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벨몬트의 시체에 기어가자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졌다. 기묘한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콘크리트 속에서는 네 난쟁이가 벨몬트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밖에서는 내가 피투성이가 된 채 벨몬트의 시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는 사이에 난쟁이들은 더 참고 견딜 수가 없게 된 모양이었다. 한 난쟁이가 뭍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크게 입을 벌리더니, 벨몬트한테서 손을 떼고 비틀비틀하면서 콘크리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또 한 난쟁이가 어떤 뜻 모를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먼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갱도 속에서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언젠가는 나타날 거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주위에는 광부 조장인 카슨 노인을 비롯해서 여러 광부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모여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콘크리트 벽에서 2미터 가량 떨어진 바위 위에 뉘어져 있었다. 콘크리트 벽에는 직경 2미터 가량의 큰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 아래에는 걸레처럼 무참히 찢긴 벨몬트의 시체가 가로놓여 있었다. 지하 사람들도 마침내 벨몬트의 시체를 가져가는 것을 단념하고 만 것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일어나, 벨몬트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기어가려 했다. "프레이터 씨, 벨몬트 씨는 벌써 죽어 버렸어요. 당신도 얼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처의 출혈이 심하니까요." 카슨 노인이 나를 붙들었다. "내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요! 놈들이 내 친구를 죽였어요. 마치 벌레를 짓이겨 죽이듯이 비참하게 말이오. 원수를 갚아야지." 나는 붙들려드는 광부들을 밀어젖히고는 마구 울부짖었다. 너무나 무서운 꼴을 당하여 정신이 좀 이상해지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광부들은 나를 억지로 붙들어 수직갱도까지 날라다가 엘리베이터에 싣고, 땅 위로 데리고 갔다. 나는 곧 병원으로 운반되었다. 그리하여 목숨을 건졌다. 오른쪽 손목 끝이 달아나고 왼쪽 다리와 오른쪽 허벅다리가 삐었다는 진단이었으나 치료가 잘 되었기 때문에 한 달도 채 못 되어 완전히 나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있은 지 한 주일 가량 지나, 상처가 좀 아물기 시작하고 겨우 걸음을 옮겨 놓을 만큼 되자 나는 살그머니 병원을 빠져 나와, 또 다시 그 갱도에 몰래 들어갔다. 그래서 광부들이 한 때 자리를 비우는 휴식시간을 틈타 가장 구석진 사건 현장의 그 갱도에 몰래 숨어 들어가서 폭약을 장치하여 가지고 갱도를 폭파해 버렸던 것이다. 갱도는 중간에서 완전히 막혀 버리고, 그 구리 광산은 쓸모 없게 되고 말았다. 당연히 나는 군사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뜻밖에도 무죄로 끝났다. 너무 일에 열중했던 나머지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나는 재판 때, 모든 사람들에게 지하 사람의 무서운 모습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갱도를 폭파한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지하 사람들이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지하 세계에 난쟁이가 있다는 것과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더 미친 사람으로 여기니 기막히는 노릇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벨몬트도 그놈들이 죽였다고 주장해도 사람들은, (지하에 사는 인류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어. 콘크리트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생물이 어디 있어. 그런 것을 참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머리가 완전히 돌아 버린 증거야.)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벨몬트의 죽음은 결국 원인을 모르는 폭발 사고 탓이라고 했다. 재판소의 무죄판결을 언도 받음과 동시에 나는 정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뒤부터는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신께 맹세코 말하거니와, 이제까지의 내 말에는 털끝만큼의 허풍도 없다. 그 작은 거인들은 지금도 저 지하 세계에서 활개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최근의 내 걱정거리는 그 괴물들이 앞으로 한층 더 과학 기술을 발달시켜 다시 땅 위 세계를 탐험하고, 땅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어쩌면 지금 당장에라도, 땅 위에 그 괴기한 모습을 불쑥 내밀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체험했던 그 사건 후, 벌써 몇 십 년이 훨씬 지나갔다. 지금쯤은 벌써 그들의 연구나 조사가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그래서 땅 위 세계를 향해 행동을 일으키기 시작할 무렵인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땅 위에 나타난다면? 지금의 인류의 병기로는 절대로 그들한테 이길 수 없다. 지금 아무리 큰 어느 나라의 로켓포나 대포도 그 작은 지하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렇지만 지하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이 무서운 무기 - 아마 열선총(熱線銃)일 것이다 - 가 있지 않은가. 그 무기로 공격받는 날에는 어떤 제트기나 어떤 탱크도 영락없이 파괴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속절없이 그 작은 거인들한테 정복당하고 마는 것이다. 아아… 그들이 땅 위에 모습을 나타내는 때가 언제일까? 한 해 뒤냐, 한 달 뒤냐. 아니, 내일일지도… 오늘일지도 모른다. 벽 속의 아프리카 The Veldt   브래드베리 Ray Bradbury 지음       세상은 기계 문명의 발달에 따라 차차 편리해지고 있습니다. 겨우 몇십 년 전에 비교해 보아도 지금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만큼 편리하고 살기 좋고 즐거운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고 비행기가 처음으로 하늘을 날게 된 것도 겨우 7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자동차를 타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온 세계의 하늘에는 비행기의 항로가 그물처럼 얽혀 있습니다. 곧 완성될 에스에스티(SST ; 초음속 여객기)는 한국에서 미국까지 세 시간 남짓이면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로켓․우주선․텔레비전․전자 계산기 등의 전자공업 기술의 발달은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재 과학 기술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이 지난다면 세계는 지금과는 아주 다른 세계로 변해 있겠지요. 이러한 흐름을 따라 인간의 생활 방식도 크게 바뀌어질 것입니다. 전자 두뇌나 텔레비전이나 자동식 기계나 재료나 그 밖의 모든 물질 문명의 발달도, 인간이 사는 집도 놀랄 만큼 바뀔 것입니다. 집의 문도 지금의 사무실의 문처럼 모두 자동식으로 바뀔 것이고, 조명 같은 것도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아도 어두워지거나 하면 필요할 적마다 자동적으로 켜지게 될 것입니다. 전기 냉장고․전기 세탁기․냉온방 장치․전자 조리기 등도 훨씬 더 발달하여, 전자 두뇌에 프로그램을 넣어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인간에게 척척 서비스하게 되겠지요. 다시 말해서 미래의 집은 거기에 사는 인간을 저절로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잠자게 해 주며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게 해 주는 로봇 하우스로 되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테니 참으로 편리하고도 편할 겁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와 같은 편리하고도 편한 생활에만 기대고 지내야 옳을까요. 그런 생활로 말미암아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을 희생하는 결과가 되지나 않을까요? 예를 들면, 인간의 마음이 기계에 의해 좀 먹히는 일은 없을까요? 이 소설은 그러한 두려운 문젯거리를 우리한테 깨우쳐 줄 것입니다. 레이 브래드베리(1920~)는 지금 미국의 과학 소설 작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가로서 유명합니다. 브래드베리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행복이라는 문제를 소재로 하여 , 등 뛰어난 과학 소설을 많이 써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그날 밤에도 피터와 웬디는 저녁 식사 때를 놓치고 말았다. 따끈따끈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기만 해도 침이 꿀꺽 넘어가는 저녁 요리가 자동 조리기에서 식탁 위에 옮겨지는 것을 바라보며,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매우 우울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얘들은 또 어린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가 보군." 하들리 씨가 말을 꺼냈다. "그런가 봐요. 그것에 정신이 팔려 식사 시간마저 잊었나 보죠." "그거 참, 성가신 애들인데." "그래요." 하들리 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서 살짝 들여다보아야지." "저도 갈께요. 식사를 온장고에 넣어 둬요." 리디어 부인이 말하자 식탁 근처에서, "예, 알았어요." 하는 말소리가 들리고, 식탁 한복판이 푹 껴지더니 요리 그릇을 그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 부부는 식당을 나왔다. 자동문이 열렸다가 닫혀지자, 복도에는 자동적으로 전깃불이 환하게 켜졌다. 전깃불은 두 사람이 걸어감에 따라 자동적으로 앞쪽에서 켜졌다가, 그들이 지나가자 꺼졌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로봇 하우스인 것이다. 이 집은 옷을 입는 데서부터 식사 준비, 설거지, 아기 돌보기, 어린이의 놀이상대, 어른의 상담역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안 되는 것이라고는 없는 기막히게 편리하고 살기 좋은 집인 것이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어린이방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 안에 전깃불이 확 켜지더니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거기에는 아프리카의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싱그러운 푸른 초원. 저 먼 곳에는 울창한 밀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위의 파란 하늘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향긋한 식물 냄새를 풍기는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선지 영양이 제 자리 걸음치는 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푸드득 새가 활개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였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매 한 마리가 쏜살같이 하늘로 치솟았다. "불길한 새." "그렇지, 콘도르로군. 시체를 뜯어먹는 놈이오." 리디어 부인이 밀림의 그늘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사자가 있네요. 뭔지 잡아먹고 있는 것 같아요. 콘도르가 먹이를 가로채기 위해 노리고 있어요." 남편과 아내는 식은땀이 흠뻑 배어 나왔다. 때마침 큰 나무 뒤에서 사자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왔다. 사자는 두 사람을 보자, 나직이 으르렁거리며 그 큰 머리를 바싹 낮추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확 드러내더니 별안간 그 사자는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이크, 큰일났어요!" 리디어 부인은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남편의 손을 잡자 문 쪽으로 뛰어나갔다. 문을 쾅 닫고 복도로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숨을 헐떡였다. "당신도 참 바보로군. 저건 입체 영화란 말이오. 저 사자며 초원이며 독수리도 모두 저 방의 벽과 천장에 있는 환상장치에서 비춰진 것인데, 뭘 그러오. 저 싱싱한 나무 냄새며 자연의 소리만 하더라도, 인공 장치에서 나온다는 것쯤 잘 알 텐데. 내 원." 하들리 씨는 껄껄 웃으며 말했지만, 리디어 부인은 웃지 않았다. "물론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너무나 실물과 똑같으니 그만…" 하들리 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아이들은 대관절 어딜 갔을까. 방 안에는 없잖소." "아마 친구네 집에 놀러 갔겠죠 뭐." 리디어 부인은 더 말하려다 말고 하들리 씨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에는 걱정의 빛이 어리어 있었다.   고장이 났을까?   리디어 부인은 식당으로 돌아오자 말했다. "여보, 저 환상 장치는 우리 아이들이 머리 속에 무엇인가 생각하면, 그것을 얼른 느끼고는 생각한 그대로를 입체영화로 만들어서 비쳐 주는 거겠죠?" "그럼, 그럼." "그럼 어째서 아이들이 없는데도, 아프리카의 초원 풍경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을까요?" "그런 일은 가끔 있어요. 이를테면 텔레비전을 꺼 버렸는데도, 한참 동안 끄기 전의 상이 그대로 스크린에 남아 있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아마, 피터와 웬디는 방금 아까까지도 그 방에 있었을 거요. 그래서 그 영상이 남아 있었을 거요." "그럴까요…" "암, 그렇고말고. 내 말이 틀림없다니까." "저는… 저 방의 환상 장치가 고장난 것이 아닐까하고 여겼는걸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만일에 고장이 났다면, 당장에 컴퓨터에 그 사실이 나타날 테니까, 우리가 당장 알 수 있지." "그야 그럴 테지만 만일에 그 장치마저 고장이 났다면?" "그럴 리가 없소. 그건 지나친 생각이오." "그랬으면 좋으련만…" 하들리 씨는 아직도 불안해하는 리디어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먹다 만 요리 접시에 나이프와 포크를 걸쳐놓고 일어섰다. "그렇다면 다시 가서 보고 오겠소. 이젠 아프리카의 풍경도 지워졌을 테지." 하들리 씨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어린이 방을 향해 걸어갔다. 어린이 방에 가까이 가자, 방안에서 어렴풋이 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하들리 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문을 열자 거기에는 적도와 아프리카 초원이 펼쳐 있고 - 불과 5~6미터 앞에서 아까 그 사자가 쭈그리고 앉아 먹이를 뜯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사자의 입가에는 피가 새빨갛게 묻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물씬 나는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사자는 하들리 씨를 보자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험상궂게 으르렁댔다. 하들리 씨는 문을 열어놓은 채 성큼성큼 방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자는 눈을 까뒤집고 힐끗 그를 노려보았다. "썩 꺼져 버려!" 사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들리 씨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머리 속에 그렸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초원과 사자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이봐, 이 방아 듣거라! 알라딘의 요술램프라고 했는데도 모르겠느냐?" 하들리 씨는 화를 버럭 내면서 꾸짖었다. 그런데도 풍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좋다. '오즈의 마법사'도 '돌리틀 선생과 동물들'이라도 뭐든지 좋으니 아프리카하고 바꿔 놓아라." 그러나 아프리카의 풍경은 여전히 펼쳐지고 있었다. 사자는 하들리 씨를 경계해 가며 먹이를 우물우물 먹고 있다. 하들리 씨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급히 방을 뛰쳐나오자 부리나케 식당으로 돌아왔다. '저 아이들 방이 좀 이상하군." 하들리 씨는 내뱉듯이 말했다. "전혀 말을 듣지 않는군 그래." "아직 그 아프리카죠?" 리디어 부인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나…" "혹시라니, 대관절 무슨 뜻이오?" "아이들이 늘 아프리카나 사자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환상 장치에 버릇이 생긴 것이나 아닌지." "설마!" "그렇지가 않다면, 피터가 장치에다가 손을 댔을지도 모르겠군요." "응,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고서야 아프리카가 없어지지 않을 까닭이 없지." 리디어 부인은 하들리 씨를 쳐다보았다. "여보, 2~3일 동안만 아이들 방을 잠가 두면 어떨까요?" "그렇게 해 놓으면, 피터 남매가 야단날 거요. 지난 달이었던가, 그 장난쳤던 벌로 아이들 방을 두세 시간 잠갔더니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소." "바로 그 점이어요. 피터나 웬디도, 어린이 방이 없어서는 못 견딜 것처럼구니 큰 일이군요. 마치 이 로봇 하우스의 마력에 사로잡힌 것만 같아요. 이래서는 아이들한테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여보." 리디어 부인은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여보, 차라리 이 집을 꼭 잠가 두고 2~3일 동안 여행이나 다녀오도록 합시다. 하이킹도 좋고요. 로봇이며 자동식 기계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생활이 하고 싶어졌어요." "정말이오, 여보? 요리나 청소도 당신이 손수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게 힘들걸. 지치고 말 거요." "그래도 좋아요. 너무나 기계에만 맡기는 일에 그만 싫증이 나요. 또 불안하고요. 제 손으로 뭐든지 하고 싶어요.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시키는 게 좋을 거고요." 하들리 씨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아내 말이 옳을지 몰랐다.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자연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기계만 믿다가 보니, 인간이 하는 일이란 너무도 없다. (그러고 보니, 나나 아내도 요즘 좀 불안해지고 있는 것 같군.) 하들리 씨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돌아왔어요, 아빠, 엄마." 힘찬 목소리가 들리며, 웬디와 피터가 식당에 들어섰다. "로봇 헬리콥터로 잠깐 공중 산책을 하고 왔어요." 하고 피터가 말했다. "식사에 늦어서 미안해요, 엄마." 웬디가 귀여운 보조개를 한쪽 볼에 살짝 드러내며 말했다. "피터, 너는 어린이 방의 환상 장치에 손을 댄 건 아니겠지?" 하들리 씨가 커피를 마시면서 넌지시 물었다. "손을 대다니요, 아빠!" "어린이 방에는 늘 아프리카만 나타나 있으니 말이다." 피터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없어요, 아빠. 우리가 나갈 때는 아프리카를 깨끗이 지워 버렸는데요." "거짓말해선 못 써요. 아빠는 아까 엄마하고 똑똑히 보고 왔는걸." 피터는 웬디를 돌아보았다. "웬디, 좀 가보고 오렴." "안 가도 돼." 하들리 씨가 말렸지만 벌서 늦었다. 웬디는 제비처럼 날쌔게 식당에서 뛰어나갔다. "그렇다면 어디, 나도 한번 더 확인해 보고 오마." 하들리 씨가 걸상에서 일어서자, 리디어 부인도 피터와 함께 따라 나섰다. 결국 모두가 한 번 더 어린이 방으로 가 보게 되었다. 모두 가 보니 어린이 방의 문이 열어 젖혀진 채, 방 안에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푸른 숲으로 가득 차 있는 풍경이 보였다. 깨끗한 냇물이 졸졸 흐르고, 산새들이 즐겁게 지저귀며, 나비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들꽃 위를 펄렁펄렁 맴돌고 있었다. 아프리카 초원과 사자는 아무 데도 없었다. "저것 보셔요, 제 말이 맞잖아요." 하고 피터가 말했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그리고 하들리 씨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어린이 방의 문을 잠갔다. "아빠, 문을 잠그면 어떻게 해요?" 피터가 항의하듯이 말했다. "오늘밤은 그만 자도록 해라." "하지만…" "자라는데도 못 알아듣겠니?" 하들리 씨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끔하게 말했다. 그렇게 꾸짖은 것은 이주 오랜만이었다. 피터와 웬디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복도를 걸어갔다.   겁주는 말투   그날, 하들리 씨 부부는 밤이 이슥했는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보, 역시 그건 웬디가 한 짓일까요? 리디어 부인이 속삭이듯이 물었다. "물론이지. 아마 피터하고 짰을 거요. 그래서 우리가 가기 전에 어린이 방의 풍경을 싹 바꿔놓은 게지." "하지만 왜 그랬을까요? 그 아이들은 어째서 그런 거짓 말을 했을까요?" "아프리카를 무척 좋아하는 탓이겠지, 그리고 저 방 때문이지. 저 방을 저희들 멋대로 해 두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든지, 말을 듣지 않는 것도 예사로 알게 되어 버렸지." 하들리 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 참 곤란하게 되었군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요." "저 방을 잠가 둡시다. 그리고 당신 말대로 여행이나 떠납시다. 그것도 2~3일이 아니라 한 달쯤 말이오. 그래서 자연의 공기를 마시면 로봇 하우스에서 들었던 나쁜 버릇도 고쳐지겠지." "과연 고쳐질까요? 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 제 버릇으로 돌아가고 말 것 아니어요?" "만일 그렇게 되면… 이 집을 팔아 버립시다. 실은 아이들을 위해서 일부러 지은 집이긴 하지만… 결국 너무나 편리한 기계에만 모든 것을 맡긴 것이 잘못이었어." 하고, 하들리 씨는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로봇학자 친구한테 저 방을 좀 조사해 봐 달랄까?"   이튿날 아침 식사 때, 하들리 씨는 피터와 웬디한테 여행 계획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피터는 깜짝 놀란 듯이 식사를 멈추고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방도 잠가 버리나요?" "그렇단다. 그래서, 좀더 자연 속의 생활을 하자꾸나. 참 재미있을 거다." "아이 참 아빠도, 전 싫어요." 웬디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구두끈도 자기 손으로 매어야 하나요? 이를 닦는 일도, 머리를 감는 일, 목욕을 하는 것 등 모두 자기 손으로 해야 하나요? 그런 건 싫어요, 전." "아냐, 때로는 그것도 좋단다." "귀찮은 일이어요. 아빠, 지난 번 아빠가 자동 그림 그리기 기계를 없애 버리실 땐 정말 실망했어요." "그건, 네가 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아녀요, 싫어요. 기계가 손보다 훨씬 더 잘 그려 주는데 뭘 그러세요, 아빠." "닥쳐!" 하들리 씨는 다시 화를 발끈 내고 말았다. 피터는 말이 쑥 들어가고 말았다. 웬디도 눈물을 머금었다. 한참 동안 모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피터가 식사를 마치고 접시를 오물 처리기에 밀어 넣으면서 느닷없이 말했다. "아빠, 여행은 언제 떠나요?" "지금 생각 중이란다."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끄고 말이죠?" "그렇게 해야겠구나." "그것만은 그만뒀으면 해요." 피터는 넌지시 말했다. 그 목소리가 어쩐지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 나쁜 말투로 들렸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 쳐다보았다. (피터가 왠지 우리한테 겁을 주는 것 같구나.) 리디어 부인은 이런 생각이 들자, 새삼스럽게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피터하고 웬디는 밖으로 놀러 나갔다.   피묻은 스카프   친구인 로봇 공학자는 그날 오후가 좀 지나서 찾아왔다. 피터와 웬디는 또 헬리콥터를 타고 어디론지 놀러가 버리고 없었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로봇 공학자를 어린이 방으로 안내했다. 열쇠를 꽂고 방문을 열자, 또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자는 숲가에서 입에 새빨간 피를 묻히고 열심히 먹이를 뜯어먹고 있었다. 로봇 공학자는 주위를 천천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응, 정말 이건 좋지 않군. 이렇게 된지 얼마나 됐지?" "한 달쯤 되었을 걸세." "이거 안 되겠는걸. 이 따위 방은 당장에라도 부셔 버려야겠는걸. 그러지 않았다가는 피터 남매가 영영 단념할 수 없게 되지. 그것도 하루라도 일찍 서두르지 않는다면 절대로 단념하지 못하게 된다네." "그다지도 심한가…" 하들리 씨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당신네들이 잘못했어. 당신들 부모가 말일세." 로봇 공학자는 하들리 씨 부부를 힐끗 바라보며 비꼬았다. "당신들은 아이들을 너무나 응석받이로 만들었단 말일세. 무엇이든지 좋을 대로만 내버려 둔 거로군. 더구나 부모가 돌봐 주지 않고 기계한테 그 일을 전부 맡겼으니 기계는 뭐든지 원대로 들어주고 언제나 놀이 상대로 되어 주었지. 결국, 이 어린이 방은 피터 남매에겐 아빠나 엄마의 대신 역할을 한 거란 말일세. 이대로 두었다가는 저 아이들은 어떤 인간이 될지 몰라요." "아직 늦지 않았을까요?" 리디어 부인은 조심조심 물었다. 머리 속에는 아침 식사 때, 피터가 배짱 좋게 은근히 겁주던 말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봇 공학자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직도 늦진 않아요. 다만 그걸 위해서는 이 방을 그대로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이 방의 스위치를 꺼 버리고, 곧 여행을 떠나세요. 그리고 돌아오시는 대로 저한테 아이들을 데리고 오십시오." "하지만… 너무 갑작스레, 이 방을 없애 버린다는 건 너무 충격이 심하지 않을까?" "그런 소릴 하고 있을 때가 못 되니 그리 알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갑자기 사자가 세 사람을 쳐다보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으나, 곧 로봇 공학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이거 너무나 감쪽같이 잘 되어 있어서 나까지 이상한 기분이 드는걸. 자, 나갑시다." "참 잘 꾸몄다고 생각하셔요?" 하고, 리디어 부인이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저는 때때로 저것이 잘못되어…" 부인은 이렇게 말하다 말고 망설였다. "잘못되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로봇 공학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진짜 사자가 되어 우리를 덮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럴 리야!" "하지만… 환상 장치가 고장이라도 나는 날엔? 그렇지 않고 누군가 어떤 이상한 장치라도 해놓는다면." "가령 아무리 손재주를 부린다 해도 환상이 진짜의 것으로 바뀔 리가 있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 환상 장치는 너무나 잘 되어 있어. 로봇 하우스로서는 최고급이거든. 이만큼 훌륭한 전자 두뇌는 의지를 가질 수가 있을 거야. 그래서 의지를 가진 것은 - 죽기를 싫어할 테니." "자넨 대관절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로봇 공학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하들리 씨의 표정을 살폈다. "말하자면… 저 어린이 방은 스위치가 꺼지기를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거야. 전자 두뇌한테는 스위치가 끊긴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하니까." "아니, 이 사람아! 자네마저 노이로제에 걸린 모양이군. 아니, 그럼, 이 어린이 방이 스위치 끊기는 것이 싫어서 자네들한테 무슨 짓을 한다는 건가?" "… 혹시, 아이들을 살살 꾀어서…"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하들리 씨는 아차 하고 말을 뚝 끊었다. 발 밑에 무슨 물건이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몸을 구부려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매우 구겨져서 짜부라진 헌 지갑이었다. 큰 짐승이 마구 물어뜯은 이빨 자국 같은 것이 나 있었다. "앗!" 리디어 부인이 별안간 날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었다. 로봇 공학자가 리디어 부인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 쪽을 보고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것은 스카프였다. 스카프에는 피와 - 그리고 사자의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로봇 공학자는 기묘한 표정을 짓더니, 두 부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건?" "제 스카프예요." 리디어 부인은 굳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들리 씨는 터벅터벅 문 앞에 있는 스위치 판으로 다가가더니 스위치를 확 꺼 버렸다.   덤벼드는 사자   피터와 웬디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들리 씨는 집 안의 전자 장치 스위치를 모조리 끄고 난 다음이었다. 전자 시계․전자 레인지․전자 난방기․자동 구두닦이․구두끈 매는 기계․자동 목욕탕․청소 로봇․마사지 로봇 등 - 모든 것이 스위치가 끊기는 바람에 멈춰 버렸다. "아빠, 왜 그러세요! 그건 안 돼요, 안 돼!" 피터는 비명 지르듯이 투정을 부렸다. "어린이 방도 죽어 버렸군요. 우리들의 어린이 방을 그만 죽여 놨네요." 웬디도 히스테리를 일으켜 울부짖었다. "얌전하게 있어. 이렇게 떠드는 게 아니야!" 하들리 씨는 큰 소리로 두 아이를 꾸짖었으나, 남매는 미친 듯이 날뛰고 떠들고 할 따름이었다. 피터는 앞에 닥치는 대로 손으로 집어던지고, 발로 걷어차고 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웬디는 엉엉 울면서 발버둥쳤다. "여보, 잠깐만이라도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좀 넣어 줍시다. 아주 잠깐만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나 봐요." 리디어 부인이 흐느껴 우는 웬디를 꼭 껴안아 주면서 말했다. "아니, 그건 안 돼요! 이젠 절대로 스위치를 안 넣을 거요. 그리고 이 집도 오늘이 마지막이오. 로봇 하우스 따위에선 두 번 다시 살지 않을 거야.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역시 좋아." 하들리 씨는 엄숙히 말했다. 피터와 웬디는 한층 더 소리를 떠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했다. "아빠는 싫어! 아빠는 죽어 버려!" 피터가 발버둥을 치며 울부짖었다. "엄마도 그래, 엄마도 이젠 필요 없어!" 웬디도 리디어 부인의 품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울부짖었다. 두 부부는 서로 눈짓을 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피터와 웬디도 정신이 이상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디어 부인은 하들리 씨한테 말했다. "여보, 나도 부탁해요. 한 번만 더, 단 1분이라도 좋으니 어린이 방의 스위치를 넣어 주세요. - 얘, 피터야, 그렇지? 1분만이야. 그걸로 그 방과 작별하는 거야. 알겠니, 그럼 되겠지?" "응… 그럴께요. 좋아요." 하들리 씨는 웬디를 보았다. 웬디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이 가득히 괸 눈으로 하들리 씨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들리 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래, 알았다. 단 1분만이야. 너희 둘 다 알겠지?" "1분이면 돼요!" 두 아이는 입을 모아 대답했다. 하들리 씨는 스위치 판 열쇠를 꺼내어 리디어 부인에게 넘겨주었다. "1분이 지나거든 얼른 나와서 옷을 갈아입어라. 그리고 헬리콥터로 비행장엘 가는 거다, 알겠느냐?" "예, 알았어요, 아빠." 두 남매는 이제 기분이 좋아져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리디어 부인의 손을 잡고 어린이 방으로 갔다. 하들리 씨는 그 동안에 2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거기에 리디어 부인이 올라왔다. "아이들은?" "1분이 지나면 꼭 끄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맡겨놓고 왔어요. 나도 좀 갈아입어야 할 게 아니여요. 아이구 온통 집이 떠나갈 듯이 야단법석을 떨더니만 그만하고 그쳤으니 원." "그렇지. 앞으로 5분 남짓 있으면 이런 도깨비 같은 집과는 영영 작별하고 좀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되지." 두 부부는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자 그 때 아래층에서 아이들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엄마. 이것 보셔요! 어서 와 주셔요!" 그 소리는 어쩐지 매우 절박하고도 당황한 것처럼 들렸다.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리디어 부인은 안색이 싹 바뀌어, 아래층으로 통하는 공기 파이프 안에 뛰어들어갔다. 하들리 씨도 뒤따랐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 방에 내려섰다. 방문은 열려진 채였다. 방안에는 눈부신 태양과 푸른 초원과 밀림, 그리고 사자가 있었다. 그러나 피터와 웬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자는 고개를 낮추고 두 부부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그 때, 문이 꽝 닫혀 버렸다. 하들리 씨와 리디어 부인은 당황하여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을 열어라!" 하들리 씨가 손잡이를 잡고 찰칵찰칵 돌리고, 쾅쾅 두드리며 고함을 쳤다. "여보, 어떻게 된 거여요?" "밖에서 문을 잠근 모양이오. 얘, 피터.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 벌써 출발 시간이야. 어서 이 문을 열어라!" 하들리 씨는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싫어요, 아빠. 문을 열면 이 방의 스위치를 끄려고 그러시죠? 그러면 우리 로봇 하우스는 죽어 버리는 걸요." 피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피터. 너는 나쁜 아이구나. 벌을 줄 테다!" 하들리 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난 나쁜 아이여요." 피터가 대답했다. "실은 이런 짓을 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엄마도 우리의 기분을 몰라주니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자한테 아빠의 헌 지갑과 엄마의 스카프를 던져 줘서 냄새를 익히게 했는걸요. 이제 당장 그 사자가 아빠와 엄마의 냄새를 맡고 덤벼들 거여요. 그러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너 아무래도 좀 이상해진 모양이구나." "아이쿠, 여보, 저 사자가!" 리디어 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얼른 뒤를 돌아보았더니, 어느 사이에 벌써 사자가 -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앞과 좌우 세 방향에서 슬슬 죄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자는 험상궂은 얼굴을 내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목을 골골거리며 천천히 한발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마른 풀을 밟는 소리마저 똑똑히 들렸다. "저건 영화일 뿐이야. 그렇게 겁낼 건 없어요!" 하들리 씨는 아내의 몸을 꼭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리디어 부인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하들리 씨도 속으로는 겁이 났다. 사자가 덤벼들었다. 그 앞발이 무서운 힘으로 하들리 씨의 몸을 때려눕혔다. 또 한 마리가 리디어 부인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졌다.두 사람은 비명을 울렸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피터와 웬디는 어린이 방의 아프리카 속에 있었다. 초원 속에서 번쩍 번쩍 빛나는 햇볕을 쬐며 엎드려 있으니까 땀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아주 좋았다. 저만큼 떨어질 밀림 어귀에 사자 세 마리가 먹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 위를 먹이를 가로채려고 콘도르가 빙빙 원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피터! 우리는 나쁜 아이들일까?" 웬디가 문득 화환을 만들고 있던 손을 멈추고 피터에게 물었다. 피터는 누이동생을 돌아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지는 모르지만… 할 수 없지. 웬디, 쓸쓸하니?" "응, 약간." "하지만 우리에겐 로봇 하우스가 있잖니? 어린이 방엔 아프리카도 있어. 그러니 아빠랑 엄마는 싹 잊어버리도록 하자." "그래. 곧 잊혀지겠지 뭐." 두 남매는 빙긋 웃으며 또다시 먼 곳에 있는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들도 이제 싸움을 그치고 사이좋게 먹이를 나누어 먹고 있었다.   우주 스파이 Imposter   필립 K. 딕 Philip K. Dick 지음       과학 소설 중에는 웰즈 시대부터 뛰어난 침략을 그린 소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소설은 '이것은 소설이다. 꾸며낸 이야기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 속에 끌려 들어가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맛보게 되고, 또 자기 신변에도 그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마음을 졸이는 그러한 것이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뜻에서, 웰즈의 은 우리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바깥 세계에서 들이닥치는 침략을 실감나고 생생하게 상상시켜 주는 최초의 걸작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미국의 어느 방송국이 이 소설은 라디오 드라마로 하며 방송했을 때, 그것을 청취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 줄 알고 큰 소동을 벌였던 일이 있습니다. 화성인의 우주선이 프린스턴 시 교외에 착륙하고, 그 안에서 큰 문어처럼 생긴 괴물 화성인이 나타나 초록빛을 내는 열선(熱線)을 가지고 사람이나 집, 다리, 마을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모조리 태워 버리고, 무서운 독가스를 뿜어내면서 뉴욕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 이것이 실황 방송인 것처럼 전국에 방송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참으로 화성인이 쳐들어왔다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집을 뛰쳐나와 '사람 살려요'하며 울부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뉴욕에서 피난 가는 사람도 있고, 경찰서로 몰려가 방독면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는 등, 순식간에 뉴욕의 온 시내는 온통 전쟁의 공포 속에 휘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소동에 말려든 것은 일반 시민만은 일반 시민만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도, 휴가 중이던 장병들에게는 '즉시 귀대하라'는 긴급 명령이 전달되고, 출동 준비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동이 가라앉기까지는 몇 시간이나 걸렸는데, 그 다음날 신문에는, 그 사건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과학 소설에 익숙해진 현대에는 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요. 그 뒤로 우주인의 지구 침략 이야기는 많이 쐬어졌고, 그 침략 방법도 차차 복잡 교묘하게 되어 왔습니다. 즉, 언뜻 보기에는 지구인인지 침략해 온 우주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꾸며 쳐들어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만일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 예를 들어,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혹시나 우주인이 아닐까 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이 소설을 쓴 필립 K. 딕은 지금 미국에서 활약 중인 유명한 공상 과학소설 작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특히 서스펜스가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에 넘치는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 전쟁   그날 아침, 스펜스 올햄 기사는 아침 식사를 들면서 아내한테 말했다. "머지 않아 반드시 휴가를 얻어내겠소." "하지만 그러다가 그 계획은 어떡하고요?"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다시 물었다. "잠깐 내가 자리를 비우는 건 괜찮아요. 어쨌든 좀 쉬어야겠어. 벌서 10년이 나 쉴새 없이 꼬박 일해 왔거든. 휴가를 얻거든, 우리 한번 새튼 숲 속으로 가서 캠프를 합시다." "새튼 숲?" 하고 아내는 설거지를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는 이틀인가 사홀 전에 불타고 말았잖아요. 거 왜 무엇인지 번쩍 빛을 내더니 산불이 났다는…" "아니, 새튼 숲이 불타다니? 대관절 그 원인이 뭔데?" "잘 모르겠어요."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모양이야. 모두 전쟁밖에 생각지 않으니 원." "전쟁 이외의 무엇을 생각할 겨를이나 있겠어요." 아내는 한숨 섞인 어조로 말했다. 올햄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아내의 말이 맞았다. 10년 전, 알파 켄타우리별(星)의 우주 함대가 별안간 지구를 쳐들어왔었다. 지구 방위군은 필사적으로 대항해 싸웠으나, 켄타우리 별 사람들의 워낙 뛰어난 우주선 앞에는, 형편없이 박살나고 알았던 것이다. 우주 함대는 지구의 각 도시를 습격하여 마구 때려부수었다. 그래서 지구는 파멸 직전까지 몰렸다. 때마침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적의 우주선 공격으로부터 도시를 지키는 방공 스크린을 발명했다. 이 스크린은 그 무서운 힘을 떨치던 우주인의 열선이나 미사일도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는 강력한 것이었다. 스크린은 처음에 주요 도시와 기지 위에 쳐졌으나 머지 않아 지구를 완전히 뒤덮게 되었다. 켄타우리 별 사람은 달리 손을 쓰지 못해 당황했다. 거기에다 지구 방위군은 총반격을 가해 적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그 뒤로 우주 전쟁은 이겼다졌다 해가며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켄타우리 별 군(軍)은 어떻게 해서라도 지구의 방공 스크린을 돌파하려 했으나, 그것만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그 반면에 지구군도 바깥 우주에 가서 켄타우리 우주 함대와 싸우기만 하면 언제나 지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쪽은 서로 상대편의 동정을 살피다가 기회만 있으면 기습 공격을 가하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지구 쪽에서도 그 동안 아무 일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구상의 우수한 과학자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켄타우리 별 군대를 쳐부술 새 무기 발명에 온갖 힘을 다하고 있었다. 올햄 기사의 '계획'도 그 중의 한 가지였던 것이다 그의 계획은 머지 않아 곧 완성될 참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완성되는 날에는… 그 얄미운 침략자를 철저히 물리치고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낼 수가 있을 것이다. 올햄 기사는 식탁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그 계획을 하루빨리 완성시켜, 휴가를 얻어 푹 좀 쉬었으면…" 그는 양복 저고리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들자 현관으로 나왔다. 연구소로 출근시켜 줄 쾌속(快速) 에어카가 맞으러 오게 되어 있었다. "여보, 에어카가 왔어요." 아내가 말했다. 아침해가 찬란히 빛나는 동쪽 하늘에서, 지금 딱정벌레처럼 생긴 소형 쾌속 에어카가, 그 검은 차체 룰 번쩍이면서 이리로 날아오고 있었다. 에어카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현관 앞에 소리 없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조종석의 문이 열리고, 친구인 넬슨 기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자, 다녀오리다." 올햄은 아내한테 인사말을 남기고 에어카에 올랐다.   너를 체포한다   올햄이 자리에 올라앉자, 쾌속 에어카는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아, 전속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좌석에는 또 한 사람의 낯선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올햄은 넬슨한테 말을 건넸다. "어떤 새로운 소식이라도 없나?" "별로." 넬슨이 대답했다. "켄타우리 별 군대가 소행성대에서 소규모의 공격을 가해 왔어. 우리편에서 소행성 하나를 잃기는 했지만 적에게도 손해를 주었어." "우리들의 '계획'이 완성되면, 아주 단단히 혼을 내어 주겠지만… 글쎄, 언제쯤 완성될까?" "과학자가 그처럼 마음이 약해서는 안 될 텐데." 느닷없이 옆에 앉았던 낯선 사나이가 말했다. 넬슨이 소개했다. "이쪽은 피터즈 소령이야." "안녕하셔요. 연구소에서는 뵌 적이 없군요." "나는 연구소 사람이 아닙니다." 피터즈 소령은 움푹하고 날카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넬슨한테 힐끔 눈짓을 했다. 올햄은 어쩐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창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쾌속 에어카는 지금 황폐해진 무인 사막 위를 전속력으로 날고 있었다. "난 보안국에서 왔소." "예? 연구소에 적이라도 몰래 들어왔단 말이오?" 올햄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보안국은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눈을 번쩍이며 켄타우리 별 군대의 스파이를 막아내는 일을 맡고 있는 기관이었다. "실은 그런 일로 당신을 만나러 온 거요. 올햄 기사." 올햄은 당황했다. "그건 또 왜요?" "당신을 켄타우리 별의 스파이로 체포하기 위해서죠. 이자를 체포해, 넬슨!" 이렇게 말한 순간 넬슨이 뒤로 획 돌아앉으며 올햄의 옆구리에 광선총을 들이댔다. 올햄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입만 딱 벌린 채 친구를 노려보았다. 넬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죽여 버릴까요? 당장 해치우는 것이 좋을 겁니다. 뒤로 미루다간 위험할 테니까요." 넬슨은 피터즈에게 쉰 목소리로 빨리 지껄였다. 올햄은 더욱 더 놀라서 친구의 얼굴을 치켜보았다. "대관절… 대관절, 이게 무슨 짓인가? 어째서 나를 죽이려는 건가?" 피터즈 소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에어카 안에 장치된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켰다. 스크린에는 낯익은 보안국장의 얼굴이 비쳤다. "무사히 체포했습니다. 국장님, 바로 이 사나이입니다." 피터즈가 보고하자, 보안국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을 하던가?" "아닙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순순히 차에 탔습니다." "응 그래, 거기가 어딘가?" "지금 막 방공 스크린을 벗어나는 중입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구는 안전합니다. 국장님." "음, 수고가 많네. 그럼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달로 가 주게. 제 시간 안에 닿을 수 있겠나?" "염려 마십시오, 국장님. 제가 얻은 정보로는 그것이 일어나려면, 일종의 암호가 필요합니다." "달에는 미리 연락을 해 두겠네. 그럼 잘 부탁해." 보안국장의 얼굴이 사라졌다. 올햄은 또 창 밖을 내다보았다. 지구는 벌써 아득히 멀어져, 아메리카 대륙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해치우는 게 어떨까요?" 하고, 넬슨이 또 물었다. "기다리게. 두세 가지 질문을 해야겠어." 피터즈 소령은 올햄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지금 달을 향해 가고 있다. 한 시간 뒤에는 달 뒷면의 바다 위에 착륙한다. 착륙함과 동시에 거기에 대기중인 방위군 대원에게 자네를 넘겨 준다. 대원은 자네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토막토막 잘라서 사방에 흩뜨려 버린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냐? 까닭도 없이 함부로 죽이겠다니!" 올햄은 호통을 쳤다. "물론 그 까닭을 말해 주지. 2~3일 전, 켄타우리 별 군대의 우주선 한 대가 방공스크린을 돌파하여 지구에 침입했어. 그 우주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스파이 로봇을 지구상에 내려놓았어. 그 로봇은 어떤 인간을 죽이고는 감쪽같이 그 인간으로 둔갑해 버렸어." 피터즈 소령은 올햄을 힐끗 거들떠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로봇의 몸 속에는, 유(U) 폭탄이 장치되어 있지. 그것은 아주 모양이 작지만, 도시 하나쯤은 거뜬히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야. 그 폭탄은 암호만 맞으면 언제든지 폭발하게끔 되어 있는 모양이야." "그것이 바로 나란 말인가?" 하고, 올햄은 간담이 서늘해져 물었다. "그런 엉터리 수작을!" "로봇은 죽인 인간으로 감쪽같이 둔갑할 수가 있거든. 얼굴 생김새, 기억, 모습할 것 없이 송두리째 죽인 인간과 똑같게 되어 버릴 수가 있지. 그래서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가려 낼 수가 없을 만큼 완전히 똑같단 말이야." 피터즈 소령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래서 수상하다고 여긴 것이 자네란 말이다. 적은 자네의 연구가 완성의 문턱에까지 도달된 걸 알고서 자네를 죽이고, 가짜 자네를 우리 연구소에 잠입시켜 연구소를 몽땅 날려보낼 흉계를 꾸민 거야.""나는 가짜가 아니야! 진짜 스펜스 올햄이야!" 올햄은 뱃속에서 짜내는 듯한 큰 소리로 내질렀다. "자네는 사흘 전, 새튼 숲으로 산책하러 갔었지. 그 때 진짜 자네는 죽음을 당하고, 지금의 자네와 같은 가짜로 변한 거다." "그런 일은 없어." 올햄은 넬슨을 돌아보았다. "로봇은 올햄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단 한가지, 그 몸 속에 장치된 U폭탄을 제외하고 말이야." 피터즈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달이 눈 앞에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도착해." 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 살았다.   에어카는 달 표면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창 너머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구릉이 끝없이 퍼져 있었다. 올햄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어떻게 해야 살아날까. 어떻게 하면 이 무서운 오해를 풀어 버릴 수가 있을까.) "착륙 준비." 피터즈 소령이 말했다. 한 구릉 기슭에 건물이 보였다. 거기에 지구 방위군의 폭탄 처리반이 대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몇 분 이내에 그는 죽는 것이다. 폭탄 처리반은 그를 해부하고, 토막토막 잘라 버린다 - 그리고 비로소 폭탄이 들어 있지 않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네라면 내가 진짠지 가짠지 잘 알 것 아니냐. 우리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야. 벌써 20년이나 사귀어온 친한 친구가 아닌가?" "가까이 오지 마! 쏠 테야!" 넬슨이 공포에 질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광선총을 한층 더 바싹 들이댔다. "잘 들어보라고. 우리가 대학 2학년 때, 데이트했던 아가씨를 알고 있겠지. 그리고 3학년 때, 교수한테서 레포트로 칭찬 받았던 일도 말이야." "닥쳐! 그 이상 더 지껄이지 마. 네놈은 로봇이야. 올햄을 죽인 살인 로봇이란 말이야!" 넬슨은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내뱉듯이 외쳤다. "아니야, 난 분명히 올햄이야. 너무나 억울하고 엉뚱한 착각을 해선 안 돼. 그 로봇은 나하고 마주친 적이 없어. 우주선이 추락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잖아?" 그는 자기 몸을 어루만졌다. "나를 지구로 데려가서 조사해 줘. 엑스(X)선으로 검사한다든지, 심리테스트를 한다든지… 아 참 그렇군. 새튼의 숲을 뒤져 보면 추락된 우주선 안에 로봇이 있을 거야." 피터즈가 가로맡았다. "이 로봇은 자기가 진짜 올햄이라고 여기고 있군."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고 만다. 에어카는 천천히 착륙했다. 겨우 두세 번 튀어 올랐으나 곧 사뿐히 내려앉고 엔진이 멎었다. 먼저 피터즈가 우주복을 입었다. 넬슨을 그 사이에도 올햄 옆구리에 광선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피터즈가 우주복을 입고 나자, 광선총을 받아들고, 다음에 넬슨이 우주복을 입었다. "이자를 어떻게 할까요, 우주복을 입힐까요?" 넬슨이 묻자, 피터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로봇은 산소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창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다. "처리반이 왔어. 문을 열어라." "잠깐! 기다려" 하고, 올햄이 외쳤다. "그 문을 열면, 나는 숨이 막혀 죽는다. 기압이 낮아서 피가 끓어 죽어 버린다" 넬슨은 약간 주저했다. "부탁이야, 넬슨, 그 문만 열면 나는 당장에 죽고 만다. 죽고 난 뒤에 내가 진짜 올햄으로 밝혀졌댔자 때는 이미 늦고 만다!" "어서 문을 열어!" 피터즈가 냉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넬슨의 손이 문의 손잡이에 닿은 채 뻣뻣해졌다. 그 순간, 올햄은 번개처럼 어떤 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는 일부러 태연히 좌석에 기대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열어도 좋아. 자네 말대로 나에게는 공기가 필요 없어." 그는 이런 말을 하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자네들이 얼마나 빨리 달아날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 "달아나?" 피터즈 소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들의 목숨은 앞으로 15초야. 방금 나는 기폭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어." "하지만 암호는…" "그건 거짓 선전이야. 자네들은 잘못된 정보를 얻었던 거다. 앞으로 14초." 다음 순간, 두 사람은 후닥닥 문을 열고 앞을 다투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 안의 공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듯이 진공 속으로 새어 나갔다. 올햄은 재빨리 몸을 날려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자동 기압 장치가 움직이고 새 공기가 나와, 엷어진 공기를 메워 주었다. 올햄은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이다. 창 밖을 내다보았더니 두 사나이는 다른 사나이들한테 무어라 소리치며 걸음아 살려라 달아나고 있었다. 처리반 대원들도 덩달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작전은 생각대로 멋지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올햄은 조종석에 앉아 다이얼을 돌렸다. 에어카는 사뿐 공중에 떠올랐다. 달 표면에서는 사나이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었지 뭔가." 올햄은 혼잣말을 지껄이며 에어카를 지구 쪽으로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외톨박이   1시간 뒤, 올햄은 지구의 대기권에 다시 돌입했다. 그리고 미국의 자기 집 근처 1킬로미터 떨어진 산 속에 착륙했다. 그는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넣고, 자기 집 번호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아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스펜스! 당신 어디 계셨어요? 대관절 무슨 일이 생겼어요?" "지금 뭐라 말할 순 없어. 연구소에 가서, 첸바렌 박사를 집으로 모시고 와 줘요. X선의 기계와 심리 테스트 장치 등 모두 가지고 오도록 일러 줘요." "하지만…" "내 말대로 해 줘요, 메어리. 밤이 되거든 살짝 집엘 갈 테니. 누구 연락이 없었소?" "아뇨, 아무도 없었어요. 왜요?" "아냐, 그저 물어 본 거요. 나한테서 연락이 있었다는 걸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 돼요. 첸바렌 박사에겐 내가 위험한 병에 걸려 있다든지 해서 적당히 말해요. 알겠소?"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올햄은 텔레비전 전화의 스위치를 껐다. 그는 산 속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럭저럭 밤의 어둠이 사방에 내리 깔릴 무렵, 에어카를 나와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이 밝게 비친 창문 하나만 보였다. 서재의 불빛이었다. 그는 울타리 밑에 몸을 바싹 붙이고 집 안의 동정을 살폈다. 집 안은 고요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첸바렌 박사는 벌써 와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는 첸바렌 박사한테 자기가 진짜 스펜스 올햄 기사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박사한테 신체 검사를 받아서, 그 결과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첸바렌 박사는 연구소에서도 가장 존경받고 있는 유명한 의사다. 그의 말이라면 모두 믿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살금살금 현관으로 다가갔다. 집 안은 역시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기분 나쁘리만큼 너무 조용한걸.) 그는 발길을 멈췄다. (혹시 함정은 아닐까. 보안국 녀석들이 냄새를 맡고 집 안에서 나를 잡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렇지만 확인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될 대로 되라는 듯이 현관문 앞에 가서 벨을 눌렀다. 벨이 집 안에서 울렸다. 집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내였다.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는 자기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잠자코 뛰어나와 울타리 옆 나무 그늘에 얼른 몸을 숨겼다. 아내를 밀어뜨리고 두세 명의 보안국원이 뛰어나오며 광선총을 쏘아댔다. 담이 갈라지고 나무 울타리가 타올랐다. 올햄은 필사적으로 뛰고 또 뛰어 산 쪽으로 도망쳤다. 별안간 근처 일대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하늘과 땅에서 조명등이 한꺼번에 그 주위를 비쳤기 때문이었다. 올햄은 나무 그늘에서 나무 그늘로, 재빠르게 건너뛰면서 산으로 치달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에어카까지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미처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제 그는 이 세계에서 자기편이라곤 아무도 없다. 친구 넬슨은 다짜고짜 그를 쏘아 죽이려 들었다. 그리고 아내는… 아내의 얼굴은 분명히 그를 로봇으로 여기고 있는 표정이 아니던가. 올햄은 뛰고 또 뛰어 달아났다.   새튼 숲 속으로   올햄은 아까 에어카를 세워 놓았던 장소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나무 그늘 사이로 에어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올햄은 그 자리에 말뚝처럼 멈칫 서 버렸다. 에어카 옆에는 낯익은 피터즈 소령의 모습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령의 손에는 무시무시한 광선총이 꽉 들려져 있었다. "올햄, 어서 나와라! 자네가 이 근처에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어." 느닷없이 피터즈 소령의 우렁찬 목소리가 밤 공기를 뒤흔들었다. 올햄은 깜짝 놀라 냉큼 몸을 엎드렸다. 이젠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피터즈 소령은 올햄에게 겁을 주어 꾀어내기 위해 마이크를 써서 함부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듣거라, 올햄, 자네는 독 안에 든 쥐란 말이야. 이 근처는 물샐 틈 없이 포위되어 있다." 피터즈 소령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네는 아직껏 자기 자신이 로봇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모양이야. 그렇지만 자네는 로봇이야. 이 지구를 파괴하기 위해서 알파 켄타우리 별에서 몰래 숨어 들어온 폭탄 로봇이란 말이다. 자네가 어떤 암호를 말하는 순간, 둘레 10킬로미터 안에 있는 것은 모조리 증발해 버리는 거야." 올햄은 주위를 살폈다. 보안국원이 포위망을 점점 죄어 들어오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었다. "자네가 제 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우리가 갈 테다. 이 근처는 개미 한 마리 얼씬 못 하게 경비되고 있어." 올햄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터즈 소령의 말이 맞기도 하다. 운이 억세게 좋아야 밤 동안만은 붙들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겠지만 아침이 되면 영락없이 붙잡히고 만다. 그래서 광선총 한 방으로 이 세상은 하직이다. 그건 이미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직도 살 길이 남아 있을까? 있다. 꼭 한 가지 남아 있다. 있고 말고. 그것은 켄타우리별의 우주선이 부서진 잔해를 찾아내는 일이다. 피터즈 소령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켄타우리 별의 로봇이 자기로 둔갑한 것이라 믿고 있는 점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럴 턱이 없다는 것을 올햄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로봇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절대로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켄타우리 별의 우주선은 이 근처에서 착륙에 실패하고 추락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을 것이 아닌가. 그러고 그 속에 로봇의 잔해도 남아 있을 것이다. 만일에 그 우주선과 로봇의 잔해를 찾아내어 피터즈들에게 보여 준다고 하면, 아무리 미련한 녀석들일지라도 오해를 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뉘우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그 우주선의 잔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처음에 그는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문득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우주선은 땅에 떨어져서 타 버렸다. 그래서 아내 메어리가 오늘 아침, 2~3일 전에 새튼 숲이 불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번갯불처럼 번쩍 빛나더니 별안간 폭발한 것처럼 타올랐다고 하지 않았던가. 새튼 숲이 틀림없다. 우주선은 새튼의 숲에 떨어져서 숲을 불바다로 만들었겠지. 거기에 가기만 하면 자기가 진짜 스펜스 올햄 기사라는 걸 증명할 수가 있겠지.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용기와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주위를 살피면서 새튼 숲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새튼 숲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나는 과연 누구냐   아침이 밝았다. 올햄은 새튼 숲 속으로 갔다. 우주선이 떨어진 곳은 바로 이 근처일 테지. 이 숲은 소년시절부터 곧잘 놀러오던 곳이어서,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다. 숲 깊숙한 곳에는 불쑥 솟아나 있는 산봉우리가 있다. 아마 우주선은 그 봉우리를 피하다가 그만 충돌되어 떨어졌겠지. 그의 상상은 들어맞았다. 그는 얼마동안 찾아 돌아다녔다. 그러자 숯덩이처럼 타다 남은 나무 재 속에 어지럽게 헝클어진 금속 덩어리가 있었다. 올햄은 그 주위를 샅샅이 뒤졌다. 그것은 틀림없는 우주선의 - 그것도 지구의 것이 아닌, 바늘 모양처럼 생긴 우주선의 잔해였던 것이다. (이 잔해 속에 로봇의 잔해도 있을 거야.)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미처 찾아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보안국원들이었다. 그는 나뭇가지 사이로 총을 겨눈 대열이 이쪽으로 밀어닥치는 것을 보았다. 선두에서 피터즈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어떤 결심을 하고 나자, 피터즈 앞에 천천히 걸어나가며 양손을 들고 소리쳤다. "피터즈 소령, 나야!" 피터즈는 주춤하고 서더니 광선총을 겨누었다. "쏘지 말아요!" 올햄은 큰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 기다려 줘! 내 뒤를 보라고. 켄타우리 별의 우주선의 잔해가 있어." 주위에서 보안국원들이 일제히 뛰어나와서 그를 둘러쌌다. "부탁이야, 아직 쏘지 말아 줘! 나는 놈들의 우주선이 틀림없이 여기에 추락했을 것을 알고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거야. 피터즈, 좀 조사해 봐 주게. 로봇의 잔해가 반드시 있을 거야." 올햄은 필사적으로 빨리 지껄였다. 피터즈는 망설였다. 그 때 보안국원 하나가, 우주선의 잔해 밑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소령님! 이 밑에 무엇이 있습니다." "그거야!" 올햄은 펄쩍 뛰면서 외쳤다. "놈을 쏘아라! 아무도 안 쏘면 내가 쏠 테야!" 누군가 소리쳤다. 넬슨이었다. "쏘지 마. 내가 책임자다. 내 명령이 내릴 때까지는 아무도 쏘아선 안 돼." 피터즈가 돌아보며 명령했다. "얼른 쏘지 않으면 안 돼요. 놈은 올햄을 죽였어. 언제 우리를 죽일지 몰라요, 만일 폭탄이 폭발하면…" "시끄러워!" 피터즈 소령은 넬슨을 꾸짖고 부하에게 일렀다. "거길 파헤쳐 봐." 부하들은 겁먹은 얼굴로 조심조심 금속 파편을 치우고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올햄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일에 로봇이 완전히 재로 되어 버려서 흔적도 없다면…) 올햄은 이렇게 생각하자, 식은땀이 확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모처럼의 기회도 헛되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피터즈 소령님, 제발 저자를 쏘게 해 주시오. 우리가 죽기 전에요." 넬슨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 때, 부하 두 사람이 일어섰다. "소령님! 이건 틀림없이 켄타우리 별의 바늘형 우주선의 잔해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인간의 몸뚱이 같은 것이 파묻혀 있습니다." "어디, 그럼. 내가 좀 보겠다." 피터즈 소령은 비탈을 타고 부하가 작업하는 곳에 뛰어내려갔다. 올햄과 다른 대원들도 뒤를 따랐다. 과연 구부러지고 뒤틀린 인간의 모습 비슷한 것이 반쯤 흙에 파묻혀 넘어졌다. 입을 딱 벌리고 눈은 유리처럼 동그랗게 크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라기보다는 로봇 같았다. 피터즈 소령이 올햄을 돌아보았다. "믿어지진 않지만… 자네는 거짓말 않겠지?" 올햄은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소가 자연히 터져 나왔다. "믿어지지 않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야. 이처럼 꼭 닮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놈을 본 적이 없단 말이야.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린걸."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보안국원이 파낸 그 소름끼치는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폭탄도 발견되겠지. 만일 폭탄이 암호에 의해서 폭발하는 것이라면 이 놈은 벌써 죽어 버렸으니 이젠 안심이란 말이야."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올햄 기사, 당신에겐 정말 미안하게 되었군. 당신에겐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상상되고도 남음이 있어요. 실은 당신이 그토록 재치 있게 달아나 주지 않았던들, 지금쯤은 우리가 당신을 죽이고 말았을 거요." "이젠 다 지난 일인 걸요 뭘." 피터즈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대로는 내 기분이 풀리지 않소. 오라, 당신이 휴가를 얻을 수 있도록 내가 주선해 드리겠소. 한 달쯤 마음껏 푹 쉬고 오도록 하시오." "고맙소. 하지만 지금 심정 같아서는 집에 돌아가고 싶을 따름이오." 그 때, 시체를 뒤적이고 있던 국원 하나가 가슴팍을 가리키며, "여기에 폭탄 같은 것의 한쪽 끝이 보입니다." 하고 보고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가슴에 뚫린 큰 상처 안에 금속성의 번쩍이는 물건이 보였다. 그러자, 그 때까지 묵묵히 있던 넬슨이 갑자기 시체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가슴팍에 손을 대려고 했다. "다치면 안 돼. 아직 위험할지도 몰라. 뒷일은 폭발물 처리반에게 맡기는 게 좋을 거야." 올햄이 주의시켰다. 그런데도 넬슨은 거기에 손을 집어넣 어 그 금속성 물건을 확 잡아 뽑았다. "그만두라니까!" 올햄이 소리쳤다. 넬슨은 얼른 일어섰다. 넬슨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서 종이처럼 핏기가 싹 가셨다. "이걸… 이걸 좀 보라고." 그는 피에 젖은 그 금속성의 물건을 불쑥 올햄 앞에 내밀었다. "앗! 이, 이건 켄타우리 별 사람이 쓰는 칼이다." 올햄은 자기도 모르게 입 속에서 중얼댔다. 그것은 분명히 켄타우리 별 사람이 언제든지 몸에 지니고 있는 가늘고 날카로운 칼이었다. "이것이 올햄을, 내 친구를 죽인 거다. 네가 죽인 거야. 죽여서 우주선 곁에 파묻어 둔 게 틀림없어…" 넬슨은 소곤거리듯이 말했다. 모든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넬슨과 그 나이프를 번갈아 가며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자네는 로봇이야." 넬슨이 올햄의 눈 속으로 파고 들어갈 듯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올햄은 몸을 떨었다. "이것은 내가 아니라니까!" 그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마음속에 뭉게뭉게 연기처럼 피어올라왔다. "그렇지만 만일에… 만일에, 이 시체가 진짜의 나라고 하면, 이 나는 바로 로봇…" 올햄은 그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이,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는 그 말이 바로 암호였던 것이다. 다음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멀리 알파 켄타우리 별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우주에서 온 거머리 The Leech   셰클리 Robert Sheckley 지음       지구의 인류에게 멸망의 위기를 몰고 오는 것은 우주인의 침략 뿐만은 아닙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자연의 위기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태양을 예로 들어봅시다. 태양이 없어진다고 하면, 그 열과 빛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흘도 못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고마운 태양이 도리어 인류를 죽이는 무서운 적이 될 경우도 있습니다. 태양의 열이 지금보다 1할만큼 더 높아진다고 하면 지구는 당장에 뜨거운 사막이 되어 버리고 생물은 도저히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할쯤이 더 높아진다면 지구의 표면 기온은 1백도가 되어 숲이나 들이나 도시나 할 것 없이 불바다가 될 겁니다. 더구나 그 높은 온도로 말미암아서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자꾸자꾸 녹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바다의 수위가 높아져 서해안 지방이나 평야에는 바닷물이 밀어닥쳐 순식간에 바다의 일부로 변해 버릴 것입니다. 뉴욕이나 런던이나 부산도 바다 밑에 잠겨 버릴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온 세계에 무서운 집중호우가 쏟아질 것입니다. 높은 온도 때문에, 바다에서 활발히 증발된 많은 수증기가 비구름이 되어 큰비가 계속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강이란 강은 큰 홍수가 나서 도시나 농촌 할 것이 모두 떠내려가겠지요. 그리고 또 만일에 태양이 좀더 뜨거워지고 어떤 원인으로 말미암아 큰 폭발을 일으킨다면 우리 지구는 물론 화성이나 금성, 그 밖의 행성도 그 여파를 받아서 한꺼번에 증발해 버릴 것입니다. 또 반대로 태양이 지금보다 더 식는다고 하면, 지구상에는 아득한 옛날에 몇 번이나 있었던 큰 빙하가 생기고, 문명 세계는 모두 두꺼운 얼음 밑에 깔리고 말 것입니다. 이 밖에도, 일어날지 모르는 자연의 큰 재해를 생각해 보면 끝이 없습니다.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있는 작은 행성과 충돌할지도 모르고, 수성이 부딪쳐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지구상에서 인류가 평화적으로 번성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운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너무나 믿고 있다가는 이 소설처럼 엉뚱한 일에 휘말려들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을 쓴 로버트 셰클리는 미국에서 비교적 젊은 층의 작가이지만, 미처 남이 생각지도 못했던 색다른 과학 소설을 곧잘 써서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셰클리의 소설은 매우 우습고 익살맞지만, 그 익살 가운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등의 작품이 유명합니다. 괭이날을 녹이는 바위   "교수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마이클즈 교수는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을 건 사람은 마이클즈 교수의 별장지기 코나즈였다. "좀 쉬셔야 할 텐데, 제가 성가시게 구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만, 참으로 이상한 것을 발견했으니 꼭 좀 봐 주십시오." 코나즈는 조심조심 말했다. 마이클즈 교수가 쉬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말을 시키든지 전화를 바꿔 주든지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이클즈 교수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인류학자이자, 물리학자요, 화학자이다. 언제든지 가을에서 봄에 이르기까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회에 참석하며, 책을 쓰는 등 매우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름 동안에는 이 뉴욕 주(州)의 시골 별장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다만 낮잠과 독서와 낚시, 그리고 등산을 하면서 한가로이 지낸다. 코나즈는 주인 마이클즈 교수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말했다. "예, 교수님. 꼭 좀 일어나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듣고 계십니까?" 마이클즈 교수는 겨우 실눈을 떴다. "응, 듣고 말고. 코나즈. 대관절 어떻게 생긴 우주인을 보았다는 거야?" "우, 우주인이라뇨?" 코나즈는 깜짝 놀란 듯이 되물었다. 교수는 아직도 졸음이 오는 듯한 목소리로, "에, 초록색을 한 화성인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코나즈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한테는 바위 조각으로밖엔 보이질 않습니다만…" 이번에는 마이클즈 교수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코나즈를 다시 보았다. "자네는 대수롭지도 않은 바위 조각을 발견했다면서, 나의 낮잠 시감을 망치려는 거야?" "죄송합니다, 교수님… 저도 이런 사소한 일로 성가시게 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하지만, 그 바위 조각 같은 놈이 저의 괭이 날을 5센티미터나 녹여 버렸기에 그만…" 코나즈는 변명을 늘어놓듯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말하였다. "괭이 날을 5센티미터나 녹여 버렸다…" 마이클즈 교수는 앵무새처럼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코나즈가 내민 괭이 날을 보았다. 과연 코나즈 말대로 괭이 날이 움푹 패어 들어가 있었다. "약간 닿았을 뿐인데 이처럼 망가졌습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아무 말도 없이 긴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신을 신었다. "그걸 좀 보여다오." "예, 이쪽입니다." 코나즈는 교수를 마당으로 안내했다. 마당에는 깨끗한 잔디가 깔려 있고, 그 앞쪽에는 길이 나 있었다. 길 옆 1미터 가량 되는 곳에 도랑이 있는데, 그 안에는 트럭의 타이어 만한 긴 타원 꼴의 평평한 바위 하나가 도랑을 막고 있었다. 그 표면은 아름다운 얼룩 무늬로 덮여 있었다. "저것을 들어내려고 괭이로 움직였더니, 아, 글세 괭이 날 이 녹아 버리지 않겠습니까?" 코나즈가 말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쭈그리고 앉아, 안경을 콧등을 밀어 올리고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별로 다른 점이 없는 바위였지만, 마이클즈 교수는 시험삼아 코나즈의 괭이를 바위에 대보았다. 그랬더니 쇠로 된 날이 2~3센티미터나 못 쓰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마이클즈 교수는 괭이 날과 바위를 번갈아 보았다. 바위는 열을 뿜고 있지 않고 차가운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도 마치 2~3천 도나 되는 뜨거운 용광로처럼 쇠를 녹여 버리는 것이 아닌가? 교수는 시험삼아 흙을 한 줌 움켜쥐고 그 바위에 뿌려 보았다. 그러자 흙은 바위 위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녹아 버려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 교수는 좀 큼직한 돌을 얹어놓았다. 돌은 마치 난로 위에 얹어놓은 얼음덩이처럼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 "교수님, 참 이상한 바위죠?" 마이클즈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한 것이로군." "대관절 이건 뭘까요?" "보통 바위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마치… 뭐랄까, 거머리 갈군 그래. 거머리는 피를 빨지만, 이 바위는 흙이나 괭이 날이나 돌을 빨아먹는군." 마이클즈 교수는 입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중얼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 대학에 전화를 걸어서, 광물학 교수와 생물학 교수한테 급히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천하에 유명한 마이클 교수도 그 바위 거머리가 그토록 큰 문제를 일으킬 줄은 미처 몰랐다   자라나는 바위   이튿날 아침, 마이클즈 교수가 마당에 나가 보았더니, 그 바위는 지름 2미터 반이나 되어 있었다. 또 그 다음날에는 5미터 반이나 될 만큼 커져서, 마침내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길은 사람이나 차가 지나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보안관이 달려 왔다. "마이클즈 교수님, 야단났군요. 이 바위는…" "그렇소, 보안관. 이 놈을 녹여 버리기 위해서 지금 산(酸)을 구하는 중이지만, 좀 힘들군요." 마이클즈 교수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잠시라도 이 길이 막히면 곤란해요. 차가 지나갈 수 없고, 첫째 이 도로는 군에서 사용 중이니까요." "미안하오, 보안관. 나도 손을 써 보았지만 별 도리가 없으니…" "그럼, 제가 한번 해 보죠." 보안관은 차에서 쇠막대를 가져와 그 바위 밑에 찔러 넣어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쇠막대가 바위에 닿는 순간 반쯤 녹아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설 보안관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가스등과 큰 망치를 꺼내고, 먼저 가스 불로 그 바위의 가장자리를 15분 가량 열을 가한 뒤에 큰 망치를 휘둘러 힘껏 내리쳤다. 아무리 단단한 바위라도 깨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으리라 여겼으나, 그렇지가 않았다. 망치의 머리가 달아났을 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군용 트럭 대열이 들이닥쳤다. 맨 앞의 지프차가 바위 앞에 멈춰서고, 대령의 계급장을 단 키 큰 군인이 내렸다. "길을 막아서는 안 돼요. 얼른 치워 주시오." "우리들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요." 마이클즈 교수는 지금까지의 일을 간단히 대령한테 설명했다. 그러나 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미 육군 군용차의 통행을 막아서는 안 돼요." 대령은 지프차 운전병에게 명령했다. "이 바위를 타넘고 가도록 해!" 운전병은 엔진 소리를 요란스럽게 내며, 바위를 향해 지프차를 몰았다. 그러나 차가 바위 위에 올라간 순간, 딱 멈춰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액셀레이터를 밟아대도 꼼짝하지 않았다. "대관절 어찌된 거지?" 대령은 짜증을 냈다. "대령, 지프차가 녹기 시작했어요. 어서 내리지 않으면 위험해요." 마이클즈 교수가 옆에서 주의시켰다. 대령은 지프차 밑을 내려다보자, 타이어가 반쯤 녹아 없어진 것을 알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그리고 황급히 땅 위로 뛰어내렸다. 운전병도 뒤따라 뛰어내렸다. 지프차는 마치 난로 위의 얼음 덩어리처럼 녹아 버렸다. 타이어가 녹고, 차체가 녹고 -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남았던 무선 안테나도 마침내 녹아 없어져 버렸다. 대령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았다. 그래서 부관인 중위한테 명령했다. "얼른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오너라!" "대령… 그런 것도 다 헛일일 겁니다." 마이클즈가 옆에서 말했으나 대령은 막무가내였다. "미국 육군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이윽고 중위가 다이너마이트를 가져다가 바위 위에 쌓았다. "모두 멀찌감치 물러가!" 대령은 싸움터에서 군대를 지휘하듯이 가슴을 딱 펴고 의젓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다이너마이트는 쌓이는 족족 녹아 내렸다. 그러나 재빨리 갖다 쌓았으므로 그런 대로 쌓여 갔다. "기관총 발사 준비!" 대령의 명령이 날카롭게 떨어졌다. 기관총이 마이클즈 교수 댁 마당에 장치되고, 두 병사가 제자리에 앉았다. 마이클즈 교수들은 멀리 떨어져서 형편을 살폈다. "발사! 탕, 탕, 탕탕탕! 기관총구에서 불이 내뿜어졌다. 다음 순간, 쾅, 쾅, 쾅! 땅이 꺼질 듯한 폭음과 함께 번쩍 하는 섬광과 불기둥이 일시에 일고, 검은 연기가 그 바위를 뒤덮었다. 그리고 폭풍이 마이클즈 교수들의 머리 위를 회오리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까짓 것, 이제야 날아가 버렸을 테지." 대령은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검은 연기가 사라지고 나자, 대령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바위는 날아가 버리기는커녕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 바위는 분명히 배 가량이나 더 커져서 덩그러니 솟아 있지 않은가. 마이클즈 교수는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배탈나게 만드는 작전   그로부터 한 주일이 지난 뒤, 마이클즈 교수는 언덕 위에 올라가 그의 별장이 점점 무너져 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살아 있는 바위는 이제 지름이 수백 미터나 되는 작은 동산만큼이나 커져서, 그 가장자리가 별장의 현관에 닿아 이제 막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현관 기둥이 부러지고 지붕이 바위 위에 무너졌다. "별장이여, 안녕." 마이클즈 교수는 혼자 중얼거렸다. 10년 동안이나 매년 여름 시원하게 보내던 그 고마운 별장과 이런 야릇한 이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 때 장교 하나가 마이클즈 교수 뒤로 가까이 걸어왔다. "교수님, 오도넬 장군님께서 좀 뵙자고 하십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고개만 끄덕이고, 장교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닥치는 대로 녹이고 삼키며 자꾸만 커 가는 괴물 바위의 주위 5백 미터 밖에는 철조망이 빙 둘러쳐져 있었고, 군대가 총을 들고 지키고 있었다. 신문기자나 구경꾼들을 멀리 하기 위해서였다. 장교는 교수를 막사로 안내했다. 막사 안에는 코밑 수염을 기르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다 자신만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장한 군인이 책상을 향해 앉아 있었다. "마이클즈 교수님이시죠? 난 오도넬 중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도넬 중장은 교수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서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좋으시다면 우리 사단의 고문으로 모셨으면 하는데 의향이 어떠신지요. 이 괴상한 살아 있는 바위를 발견하신 분이 바로 교수님 아닙니까!" "기꺼이 돕도록 힘써 보지요. 하지만 나는 인류학자입니다. 그러니 이 바위에 관해서 잘 알 만한 전문가는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아닐까요?" "바로 그 점입니다. 교수님." 오도넬 장군은 찌푸린 얼굴을 더욱 찡그리며 말하였다. "나는 늘 과학에는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군대는 과학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도저히 전쟁에 이길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의 말을 그대로 고스란히 다 듣다가는 아무 일도 되지 않을 때가 많겠죠. 아무튼 과학자는 색다른 연구 재료가 생기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언제까지나 붙들고 있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나의 임무는 단 1분이라도 더 빨리 저 괴물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물론 나도 그럴 작정이고, 또 부숴 버릴 자신도 있어요.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할 수 있어요!" 오도넬 장군은 흥분하여 주먹으로 책상을 탕탕 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리 간단히 처리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이클즈 교수는 이해력이 뒤지는 학생을 가르치듯이 끈기 있게 차근차근 말했다. 장군의 태도는 조용해졌다. "그렇겠죠. 그럼 어째서 간단히 처리될 수 없는지를 좀 설명해 주십시오. 나한테는 아무래도 그 점이 이해가 안 가니까요." "그럼 설명해 드리죠." 마이클즈 교수는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것은 이 지구상의 것이 아닌 - 어떤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에서 생겨난, 에너지 생물이라 할 만한 특별한 생물인 겁니다." "그 까닭은?" "즉, 이 생물은 물질을 에너지의 형태로 바꿔서 흡수하여, 몸 안에서 다시 물질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괭이 날이나 지프차나 흙이나, 혹은 내 별장을 녹여서 삼켜 버린 것은 그 때문이죠." "호, 그렇군요." "또 이 생물은 에너지를 그대로 빨아들여서. 자기의 몸의 일부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키든지, 기관총 탄환에 맞으면 맞을수록 그것은 고스란히 에너지로서 저 생물에 흡수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강력한 무기로 공격해 보면 어떨까요? 나는 방금 이 언덕 저쪽에 중포부대를 배치해 놓았지요. 2백 밀리 야전 중포의 일제 사격을 퍼붓는다면…" 마이클즈 교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장군께서는 내 말을 잘 이해 못 하시는군요. 아시겠어요? 저 생물은 말하자면 먹보 거머리 같은 거란 말입니다. 저 우주에서 온 거머리에게는 에너지가 아주 맛있는 먹이가 되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강력한 에너지 병기를 써 보았자, 모조리 빨아먹고 마는 겁니다." "그것 참 고약하군. 그까짓 거머리가!" 장군은 짜증스러운 듯이 내뱉었다. "그래서 나는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필요하다고 한 겁니다. 모두 서로 협력해서 잘 연구해 보면, 그 어떤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게 아닙니까." "그런 일을 하고 있을 틈이 없어요." 오도넬 장군은 엄숙한 표정이 되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교수께서 그 우주 거머리에게는 에너지가 먹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예, 그랬지요." "우리들도 음식물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잖아요?" "예, 그런데요…" "바로 그겁니다!" 오도넬 장군은 또 한번 주먹으로 책상을 탁 쳤다. "지금부터 중포대에 명령해서, 그 에너지를 싫증이 날 만큼 잔뜩 먹여 줍시다. 그래서 배탈이 나게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 놈을 죽일 수가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마이클즈. 교수는 모호한 대답을 했다. 장군은 제멋대로 교수의 손을 잡았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당신은 과연 훌륭한 과학자입니다. 나의 작전에 과학적인 이론을 뒷받침해 주어 나에게 자신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장군은 마이클즈 교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일어섰다. "자, 나갑시다. 우리가 저 우주 거머리한테 인간 힘의 위대함을 보여 주기로 합시다!"   원자 폭탄 공격   그러나 그 중포부대의 포격은 참으로 엉뚱한 결과로 끝나 버렸다. 언덕 밑에 늘어선 10문의 2백 밀리 중포가 포격을 시작하자, 그 우주 거머리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잇따라 명중되는 포탄의 폭발로, 우주 거머리의 몸뚱이는 반쯤 파묻히고, 그 무시무시한 괴물도 죽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엉뚱한 착각이었다. 우주 거머리는 별안간 지름 3킬로미터나 되게 자란 몸뚱이를 번쩍 일으켜, 흔들흔들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중포 진지를 천천히 덮치려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군인들은 대포고 탄약이고 다 팽개치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그러나 67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전사자도 - 물론 한 사람 남김없이 우주 거머리의 먹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오도넬 장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했다. 그리고 곧 워싱턴의 연합 참모본부에 원자탄이나 수소 폭탄을 사용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렵에는 대통령도 이 문제를 놓고 매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장 원폭이나 수폭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과학자단을 현지로 급히 보냈다. 물리학자․화학자․생물학자, 그 밖의 몇 십 명이나 되는 과학자가 현지로 달려와서 여러 가지로 조사하며 연일 회의를 열고 토론을 했다. 그러나 그런 괴물은 일찍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토론은 1주일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 동안에도 우주 거머리는 주위의 땅을 갉아 삼키며 자꾸자꾸 커 가기만 했다. 덩치가 워낙 커서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 같았다. 열흘이 되자, 우주 거머리는 지름이 10킬로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로 변했다. 그런데 좀 다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주 거머리의 성장은 차차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 많은 에너지를 얼마든지 필요로 하고 있는데도, 흙을 녹여서는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영양분이 모자랐던 것이다. 14일째가 되자 우주 거머리는 지름 12킬로미터로 커졌으나 영양 부족이 뚜렷이 나타나고, 차차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2~3일만 그대로 둔다면 도리어 부피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름째 되는 날, 마침내 과학자단은 원자 폭탄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은 오도넬 장군에게 즉시 원자 폭탄을 사용할 것을 허가했다. 오도넬 장군은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다. 그리고 얼마 멀지 않은 미사일 기지에서, 원폭 미사일을 발사했다. 최초의 원폭 미사일이 우주 거머리의 배에 명중하여 버섯 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을 때, 그 때까지만 해도 에너지가 부족해서 지쳐 있던 우주 거머리는 그 굉장한 원폭 에너지를 잔뜩 빨아먹고 숨을 되돌렸다. 잇따라 네 개의 원폭 미사일이 명중되자 하늘에서 정찰을 했다. 정찰기에 타고 있던 비행사는 한동안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우주 거머리는 불과 수 시간 동안에 지름 1백 20킬로미터를 넘는 무서운 속도로 커져서 산과 골짜기를 타넘고 마을과 도시를 집어삼키며 자꾸자꾸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구가 깨져도   "내가 뭐랍디까!" 회의장 책상을 탕탕 치면서 오도넬 장군은 흥분을 참지 못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원자 폭탄을 사용하고 싶다고 했을 때, 당장 허가해 줬던들 이런 꼴이 되고 말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을 늘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고 말았으니, 이 지경이 된 것 아닙니까." 오도넬 장군은 책상에 둘러앉아 있는 과학자들과 다른 군인들을 독기어린 눈으로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이번에야말로 간섭을 받지 않겠단 말입니다. 이번에 나는 당장 수소 폭탄 1백 개의 사용 허가를 얻을 작정입니다." "저런 터무니없는!" 과학자 한 사람의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수폭을 그렇게 쓰다가는, 대기 중에 방사능이 퍼져서 온 세계가 전멸해 버려요!" "어디 그뿐이겠소, 지각(땅껍질)이 갈라지고, 지구가 두 조각이 날지도 몰라요!" 또 한 과학자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지만 오도넬 장군을 그 과학자들을 업신여기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쟁이라는 건 항상 모든 위험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겁내지 않고 용감하게 위험을 물리치는 자에게 승리가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이젠 아무 의견도 필요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께 허가를 얻을 수 있도록 찬성해 주겠지요?" 오도넬 장군은 눈을 부라렸다. 마이클즈 교수는 회의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과학자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 쳐다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이젠 오도넬 장군에게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주 거머리는 지금도 한 시간에 4미터 이상이나 자꾸만 커져 가고 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한 달만에 뉴욕 주 전체를 삼킬 것이고, 반 년 만에는 북아메리카를… 그리고 1년이 못 되어 전지구를 통째로 삼켜 버릴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만일 수폭을 그런 식으로 함부로 썼다가는 비록 우주 거머리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지구상에는 방사능이 퍼져서 인류는 원자병 때문에 죽어 버릴 것이다. 혹은 땅껍질에 구멍이 펑 뚫리고, 지진과 홍수로 지구상은 형편없이 파괴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어느 쪽을 택해야 옳을지 아무도 모르게 되 고 말았다. (우주 거머리는 지금도 갈증이 난 듯이 얼마든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에너지가 있는 곳이라면, 뛰어오르거나 파고 들어가서라도 가까이 가려 하고 있다. 그런 성질을 교묘히 이용해서, 저 우주 거머리를 지구 밖으로 용케 쫓아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이클즈 교수는 골똘히 생각했다. (수소 폭탄의 에너지는 우주 거머리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동시에 그것은 우주 거머리에게는, 아주 맛있는 먹이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그 수소 폭탄을 미끼삼아 우주 거머리를 꾀어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오도넬 장군은 책상 위에 장치된 대통령 전용 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면 여러분, 이대로 결정된 걸로 알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소 폭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찬성한 겁니다. 대통령 각하께 이렇게 전화를 드려도 이의가 없겠죠?" "잠깐만, 장군." 마이클즈 교수가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젠 더 기다릴 수가 없어요." 장군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다이얼을 돌리려 했으나, 마이클즈 교수는 그의 손을 잡고 말렸다. "잠깐만, 좋은 수가 있어요, 장군. 수소 폭탄을 폭발시키지 않더라도, 우주 거머리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그게 정말입니까?" 오도넬 장군은 의심스런 얼굴로 마이클즈 교수를 바라보았다. "이건 틀림없을 겁니다. 자, 들어보세요. 이런 방법입니다…" 그는 설명을 시작했다.   꾀어내기 작전   그로부터 한참 뒤에, 오도넬 장군과 마이클즈 교수를 중심으로 하여, 군인과 과학자단은 우주 기지의 컨트롤 센터에 모였다. 마이클즈 교수의 계획은 벌써 일찌감치 이 컨트롤 센터의 컴퓨터에 넣어져서, 많은 기사와 장병들이 분주하게 연락을 취하고 또 계산을 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장군님," 컨트롤 센터의 기지 사령관이 장군에게 보고했다. "우주선은 10개 분의 수소폭탄을 싣고 발사대에 대기 중입니다. 명령대로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습니다." "좋아." 장군은 힐끗 사령관의 얼굴을 보고 나서 눈짓으로 알렸다. "저쪽 준비도 다 됐겠지?" "예, 절대로 빈틈없이 해놓았습니다." "수고했네, 사정관." 오도넬 장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니터 텔레비전을 켜 주게. 앞으로 30초 이내에 우주선을 발사시킨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넓은 컨트롤 센터의 벽 정면에 장치된 큰 텔레비전 스크린이 밝게 비쳤다. 그 스크린에는 우주 기지 저쪽 편에 우뚝 솟은 발사대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뚜렷이 보였다. 발사대에는 태양계 탐험용의 대형 우주선이 당당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카운트다운 개시 30초 전, 25초 전, 20초 전, …"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컨트롤 센터 안에서는 본격적으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잘 될까?" 한 과학자가 나직이 소곤거렸다. "잘 될 거야." 마이클즈 교수가 역시 긴장된 나머지 좀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의 하나라도 실패한다면, 이제 지구는 영원히 마지막이야." "15초 전, 10초 전, …" "저 우주선은 무인 조종인가 보지. 원거리 조종으로 용케 놈을 꾀어낼 수 있을까?" 또 한 사람의 다른 과학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그건, 염려 마셔요. 저희들한테 맡겨 주십시오." 기지 사령관이 자신 있는 듯이 말했다. "9-8-7-6-5-4-3-2-1-0!"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우주선은 꼬리에서 굉장히 거센 흰 불꽃을 내뿜으면서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하늘 한구석으로 사라져 가 버렸다. 스크린의 화면이 확 바뀌어 우주 공간을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의 모습이 비쳐졌다. 우주 정거장에서 중계되어 오는 것이었다. 우주선은 어느 사이에 우주 거머리가 누워 있는 뉴욕 주의 산맥 지대 상공으로 날아왔다. 그래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 선회가 시작되었을 때, 지상에서는 거대한 바위산 같은 것이 천천히 하늘로 떠올라 가고 있었다. 그것은 여태까지 지상에서 계속 자라고 있던 우주 거머리였다. "제대로 되어 가는군! 저놈은 방사성 물질의 꾐에 빠져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군 그래." 과학자 중 한 사람이 외쳤다. "이제부터가 문제야. 실패해선 안 돼!" 장군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컴퓨터의 단추를 눌렀다 껐다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스크린 속의 우주선은 천천히 방향을 바꾸더니, 지구에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우주 거머리가 그 뒤를 따라갔다. 우주선은 우주 거머리가 간신히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점점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우주 거머리도 차차 지구로부터 멀어져 갔다. "야, 계획이 성공했다! 놈은 우주 공간으로 꾀어 나가고 있군!" 누군가 흥분된 어조로 외쳤다. 마이클즈 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태양이 잡아먹힌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모든 사람들은 스크린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상황은 어떤가?" 하고 오도넬 장군이 물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무인 우주선과 우주 거머리는 지금 수성의 궤도를 지나서 똑바로 태양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됐구나!" 장군은 버릇처럼 되어 있는 깨진 종소리 같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얼마 안 가서, 우주 거머리는 태양에 충돌하여 녹아 버리겠구나." "예 , 그렇습니다." 기지 사령관이 대답했다. "속도는 계산보다는 다소 느린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사흘하고도 10시간 30분만에는 태양 속에 뛰어들어가 버리게 됩니다. 만사는 그것으로 골나게 됩니다." "그것 참, 잘 되어 가는군." 오도넬 장군은 과학자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러분, 축배를 듭시다." 병사들이 유리컵과 술을 가지고 왔다. 모든 사람 앞에 술잔이 놓이고 술이 가득히 따라지자, 장군은 몸을 뒤로 젖혀 의젓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들은 일치 단결하여 저 우주에서 온 괴물을 물리쳤습니다. 여기 계시는 마이클즈 교수님을 비롯해서 여러분이 협력해 주신 덕분에, 미국 육군은 다시금,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대통령 각하께 약속드린 대로 저 괴물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장군은 잔을 높이 들었다. 모두 따라서 잔을 들었다. 그러나 술잔을 옆에 밀어 놓고, 책상 위에서 무슨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이클즈 교수였다. "마이클즈 교수님, 어떻게 된 겁니까? 함께 건배하시지 않겠습니까?" 장군이 재촉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일어섰다. 그러나 그의 얼굴빛은 새파래졌다. "이거 큰일났어요." "뭐가 큰일인가요?" "속도가 너무 늦어요." "하지만, 다소 속도가 늦더라도 결국은 태양에…"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날아간다면 그 놈이 태양 에너지를 빨아들여 자꾸자꾸 커져서, 태양에 도착할 무렵에는, 태양과 거의 같은 정도의 크기로 되어 태양을 잡아먹고 말게 됩니다." 일동은 입을 딱 벌리고 마이클즈 교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다음 순간 한 과학자가 소리쳤다. "우주선의 진로를 바꾸면 어떨까요? 태양을 빗나가게 해서, 태양계 밖으로 꾀어내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우주 괴물을 파괴하지는 못하잖아요…" 오도넬 장군이 입을 뾰족 내밀며 말했다. "아니, 파괴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장군님. 태양에서 멀리 떨어지면, 우주 거머리는 점점 에너지를 잃어서 짜부라들게 되지요." 하고, 마이클즈 교수가 옆에서 설명을 보탰다. "그래서, 맨 처음에 내 별장 마당에 떨어졌을 때처럼 아주 작은 바윗돌만큼 되어 버리지요. 그렇게 되면, 우주 거머리도 완전히 해를 끼치지 않게 되죠. 어쨌든 지금 당장 진로를 바꾸지 않으면 우주 거머리의 에너지는 점점 커져서 뒤에 가서는 진로를 바꿀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오도넬 장군은 이런 설명을 듣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불만스러운 듯이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문득 어떤 일이 생각난 듯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지 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좋아, 그럼 진로를 바꾸도록 하게!" 장군의 명령이 전해지자, 컴퓨터로 전파 신호를 무인 우주선에 보냈다. 무인 우주선은 즉시 진로를 바꿨다. 우주 거머리는 잠깐 동안 머뭇거리고 있었다. 똑바로 앞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뜨겁고도 맛있는 에너지 덩어리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도 까마득한 먼 곳에 있었다. 그것에 비해서 방사성 물질의 맛있는 에너지는 바로 앞을 내달리고 있다. 우주 거머리는 역시 먼 곳의 먹이보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가까운 먹이를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우주선 뒤를 따랐다. 그 때, 스크린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스크린의 화면 위에서, 작게 빛나는 점 한 개와, 크게 빛나는 점 한 개가 지금 태양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했군…" "그렇지만, 이젠 안심인걸. 머지않아 저놈은 태양계를 벗어나게 돼. 그렇게 되면 자꾸자꾸 에너지를 잃게 되고 아무 해가 없는 바윗돌로 되고 마는 거야." 모든 사람의 얼굴에 겨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 다시 축배를 듭시다. " 이번에는 마이클즈 교수도 기꺼이 축배를 높이 치켜들었다.   우주 속의 불꽃   세계는 이 뉴스를 듣고, 축제 기분으로 들떴다. 세계 모든 곳의 도시나 농촌, 관공서, 회사, 가정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합니다!" 하는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지구의 평화를 흐뭇하게 여겼다. 세계 각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날마다, 시간마다, 우주 거머리의 행방을 뒤쫓으며 소식을 전했다. 우주 거머리는 시시각각으로 지구에서, 그리고 태양계에서 멀어져 갔다. 그럭저럭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1주일이 지났다. 우주 거머리는 이제 벌써 태양계를 벗어나 아득히 먼 별들이 총총한 끝없는 우주 공간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열흘째 되는 날, 마이클즈 교수는 오도넬 장군의 부름을 받아 또 다시 우주 기지로 갔다. 컨트롤 센터로 갔더니, 장군은 싱글벙글하면서 교수를 맞았다."야아, 마이클즈 교수님, 참 잘 오셨습니다." "무슨 용건이 라도…" "예, 꼭 좀 봐 주셔야 할 것이 있어서요." 장군은 텔레비전 스크린을 켜게 했다. 화면에는 작은 점 두 개만이 외로이 비쳐져 있었다. 우주 거머리는 이제 완전히 짜부라들어서 우주선과 거의 비슷한 크기로 되어 있었다. "거리도 벌써 5백억 킬로미터 이상이나 됩니다. 교수님, 이젠 안심할 수 있겠죠?" 마이클즈 교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터져 나왔다. 장군은 아직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젠 절대 안전합니다. 조금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별안간 컴퓨터 담당자 쪽을 보았다. "이제 됐어. 아까 내 명령대로 해." 컴퓨터 담당 기사가 얼른 대답을 하더니 계기반의 단추를 조작했다. 그러자 스크린에 비쳤던 점 두 개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좁아지기 시작했다. 마이클즈 교수는 깜짝 놀랐다. "장군, 이거 왜 그러시오?" "나는 저 우주 거머리를 반드시 파괴해 버리겠다고 대통령 각하께 약속을 했소. 나는 여태까지 절대로 약속을 어긴 적이 없어요." "하지만…" "그러니 나는 이제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겁니다. 우주선에 실어 둔 수소 폭탄은 우주 거머리와 부딪침과 동시에 폭발하겠죠. 그래서 우주 거머리 놈을 아주 박살을 내버릴 작정이오!" "아, 안 되요, 장군." 마이클즈 교수는 크게 외쳤다. 그러나 때는 벌써 늦었다. 마침 그 순간, 두 개의 점은 딱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눈 앞을 캄캄하게 만드는 큰 폭발이 스크린을 가득히 메운 것이다. "야, 성공이다!" 오도넬 장군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외쳤다. "나는 미국 군인답게 드디어 약속은 지켰소. 저 괘씸한 우주 거머리를 아주 가루로 만들어 버렸소!" 텔레비전 스크린은 곧 어두워졌다. 폭발이 끝난 것이다. 스크린에는 이제 아무 것도 비치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교수님. 이젠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겠죠?" "그래, 맞았소.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렸소." 마이클즈 교수는 음산하고 컴컴한 지옥 밑바닥에서 나는 소리처럼 대답했다.   태양계를 멀리 떨어진 캄캄하고 차디찬 우주 공간에서 몇 만, 몇 십만이나 되는 작은 조각들로 부서진 우주 거머리는 무서운 속도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는 지금은 보통과 같은 작은 돌멩이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중의 몇천, 몇만 개는 태양 가까이로 날아간다. 가까이 갈수록 태양 에너지를 빨아들이고는 자꾸만 커져 가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날, 마이클즈 교수의 별장 마당에 떨어진 것만큼의 크기로 자라서 다시 지구로 떨어질 것이다. 단, 이번에는 한 개뿐만 아니라, 몇천, 몇만 개가 떼를 지어서…  
1089    태양계 요새 - 돌레짤 지음 / 이 인석 옮김 댓글:  조회:546  추천:0  2021-03-20
태양계 요새   돌레짤 지음 / 이 인석 옮김   ◇편집 위원 ◇   아동 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 박사 최 인학 공학 박사 양 옥룡/이학 박사 김 희규 전 교육감 김 성묵       토성의 테를 산책하다 ·············· 4 대장의 이야기·················· 17 방문객····················· 24 륀크스 호에서의 파티·············· 29 크라무의 비밀·················· 34 정찰선 스틱스 호 출발·············· 39 태양계를 떠나서················· 44 유령선····················· 52 별 서로간의 이야기··············· 58 다시 유령선으로················· 68 되살아나는 과거················· 75 결 정······················ 80 토우레 출발··················· 87 참사의 진상··················· 91 메도우서의 수수께끼··············· 98 암흑의 세계·················· 105 운명과의 경주················· 111 뜻밖에!···················· 116 비임, 잘 있거라················ 118   작품 해설··················· 126   책머리에   언젠가는 우리 인류는 대우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선 태양을 중심으로 한 태양계를 개발시키겠지요. 달을 비롯하여 화성과 금성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도시가 점차로 건설될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일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먼 장래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첫발은 이미 디디고 섰으니까요. 이 이야기는 모두 미래의 것입니다. 토성보다 먼 바깥 우주를 탐색하러 간 우주선이 잇달아 불가사의한 사건을 만나자, 태양계 정부는 안의 우주를 한 개의 요새로 만들어 거기에서 지키고 있게 합니다. 토성 가까운 전진 기지에 있던 청년들은 그렇게 지키고만 있으니 지루해서, 드디어는 탐험의 길로 출발합니다. 자, 여러분도 같이 끝없는 우주 여행에 눈길을 돌려보시기를……   토성의 테를 산책하다   "아아――"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그는 젊은 전파 천문학자 돌 큐르비. 지구에서 14억 3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도 하품이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루하니까 하품이 날 수밖에. 태양계의 어디를 가도 이렇게 지루해서야 일할 맛이 없는데." "그래. 꼭 요새 안에서 사는 기분이야. 그러나 태양계 최고 위원회에서 결정한 일이니까 하는 수 없지." 라고 대답한 사람은 사이가 좋은 페트 프리튼, 광학 천문학자이다. "정말이야. 유령에 싸여 있는 요새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 높은 사람들이 자기들 멋대로 무서워하고 있으니까." 이 세 번째로 입을 연 사람은 게르트 비디히라고 하는 환경 공학 엔지니어이다. "견딜 수가 없어. 토성의 궤도 이상 벗어나서도 안 된다고 하잖아. 그 내부의 지름이 30억 킬로미터는 되지. 그러나 은하계의 크기에 비하면 하나의 모래알에 지나지 않아." "최고 위원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 모험 정신이 없으니까 따분해서 못 견디겠군. 우리가 그만한 기술을 못 가지고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어때, 다음 근무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 토성의 테까지 산책이나 해 볼까? 기분 전환으로 말이야" "좋고 말고!" 큐르비의 의견에 모두 소리 높여 찬성을 했다.   그들은 토성의 제 2위성 엥게라도스에 있는, 태양계 요새 기지의 대원들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구에서 14억 3천만 킬로미터로서, 우주선으로 3개월이나 걸리는 곳이다. 목성, 소행성 케레스. 그리고 화성의 궤도를 사람이 없는 중계 스테이션이 돌고 있기 때문에 무선이면 지구와의 연락은 곧 할 수가 있다. 곧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우주이므로 빨라도 1시간 15분이다. 인류는 너무나도 빨리 태양계를 개발해 왔다. 달과 화성, 그리고 금성에서 사는 사람도 많아졌을 뿐 아니라,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도 지금은 어른이 되어 훌륭하게 일하고 있다. 사람끼리의 전쟁은 이미 옛날 이야기로 되고 말았다. 게다가 배우기 쉬운 언어가 만들어지고, 태양계의 어디를 가든 그 언어로 얘기 할 수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최고 위원회는 토성의 궤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토성의 제 2위성 엥게라도스는 토성에서 23만 8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돌고 있다. 지름이 5백 킬로미터이므로 달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태양계 행성의 위성 중에서는 큰 편이다. 태양에서 굉장히 멀기 때문에, 몹시 춥다. 그래서 기지는 지하 100 미터에 있다. 물론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큐르비, 프리튼, 비디히 세 사람 사령실로!" 라는 소리가 갑자기 스피커에서 울려왔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들을 마주 앉았다. "뢴트겐 대장이야. 대체 무슨 일이지? 지금은" 하고 비디히가 고개를 갸웃했다. 대장 알렉스 페드로프의 명령이다. 뢴트겐은 그의 별명으로서, 부하의 비밀 이야기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천리안이라도 가진 것은 아니고, 집회실에 정밀한 마이크를 비밀리에 장치해 놓았던 것이다. 비겁하게 보일지 모르나, 여기는 우주에 떨어진 작은 섬이다. 이런 곳의 대장이 된 사람은 부하의 기분을 하나에서 열까지 세밀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페드로프 대장은 세 사람을 쳐다보더니 의자에서 일어섰다. "수고한다. 너희들의 휴식은 아직 8시간 남아 있다. 그때까지 무엇을 할거야? 말해 봐, 아니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야." "잠깐 토성의 테에 소풍이라도 할까 하고요. 괜찮겠습니까?" 돌 큐르비가 대표로 대답했다 "괜찮고 말고.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때로는 기분 전환을 시킬 필요가 있지. 여기의 상황은 지루하니까.“ 하며 대장은 빙긋이 웃었다. 세 사람은 좀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동행인이 한 사람이라도 더 생겨서 기뻤다. 대장은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서 달의 태생은 나 혼자 뿐이야. 사람은 대체로 고향의 별 환경에 따라가지. 달에는 공기가 없다. 즉 멀리까지 잘 보인다. 그러므로 달에서 태어난 사람은 특별히 눈이 좋아. 하하하……" 그러자 비디히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곤란하군요. 금성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곳은 항상 두꺼운 구름에 싸여 있으니까, 시야가 매우 나쁘지요." "그 반면 금성인들은 몸 주위의 것을 잘 관찰하지. 자네가 환경 공학을 선택한 것이 그 때문인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어떨까요?" 하고 물은 사람은 큐르비이다. "자네가 태어난 지구는, 태양계에 흩어져 있는 인류에게 생명의 샘이라고 해도 좋다. 너의 전문인 전파 천문학도 지구에서 가장 진보되어 있다. 그리고 프리튼은 화성 태생의 광학 천문학자이다. 이 두 개의 천문학이 형제인 것처럼, 지구와 화성과도 형제지간이다. 더욱이 자네 고향은 아이슬란드였었지. 즉 너는 바이킹의 자손이 되는 셈이다. 네가 남달리 모험을 좋아하는 것도 까닭이 있는 거다. 콜럼버스 보다 5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레이프의 이야기, 그린란드에 식민지를 건설한 에이릭의 이야기…… 어렸을 때 열심히 읽었다." 큐르비는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아버지도 자주 말씀하셨지요. 그런 배로 북해의 심한 파도를 헤치고 건너간 것은, 지금의 무선과 레이더가 있는 우주선으로 이 별에서 저 별로 나는 것보다 더욱 용기 있는 일이었을 것이라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 시간이 가니까 출발 준비다. 테의 바깥쪽까지 10만 킬로미터지. 정찰정 게본 호로 간다. 화학 연료를 사용해서, 초속 10 킬로미터로 하면 얼마나 걸리나?" 프리튼이 재빨리 노트에 계산했다. "16분 40초입니다." "좋아. 그럼 그 동안 날아가는 거리는?" "5 천 킬로미터." "됐어. 그럼 나머지 9만 5천 킬로미터에는……" "9천 5백 초 걸립니다. 즉……" "2시간 30분이면 되겠지. 좋아, 7시간이면 돌아 올 수 있어." 정찰정은 공처럼 둥근 모양인데, 앞뒤에 사람이 타는 방과 동력실이 붙어 있다. 화학 연료라고 하지만, 옛날의 로켓처럼 요란한 소리나 연기를 뿜어내지 않는다. 조금도 추진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소리 없이 나아가게 한다. 엥게라도스의 작은 중력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가속이 되면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훈련으로 단련되어 있다. 언제 보아도 토성은 훌륭하다. 캄캄한 우주 공간에 당당하게 떠 있다. 게본 호는 적도를 향해서 똑바로 토성에 가까이 갔으므로, 옆에서 본 테는 붉은 줄이 되어 큰 별을 둘로 갈라놓고 있다. 먼 태양의 빛을 받아서 테는 토성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윽고 정찰정은 가장 바깥쪽의 테 가까이로 갔다. 토성의 테는 3개로 되어 있는데, 모두 같은 중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유영 준비!" 네 사람은 에어 록으로 들어가서 우주복을 입었다. 온도 조절, 공기 공급, 무선 연락, 소형 추진 장치…… 모두 이상없다. 게본 호는 속도를 테의 공전 속도에 맞추었다. 이 속도라면 14 시간에 토성을 한 바퀴 돈다. 이상한 경치였다. 눈앞에 바위벽이 우뚝우뚝 서 있다. 헤아릴 수 없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고, 토성의 주위를 돌고 있다. 만일 지구의 달이 폭발한다면 아마 이렇게 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두에 선다. 간격 1킬로미터로 따라와라. 전망이 좋을 성싶은 바위 위에 내리자." 대장이 앞서고, 그 뒤로 모두 우주 공간으로 뛰어 나갔다. 조그만 로켓을 잘 조종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이건 굉장한, 굉장한 모험이다." 비디히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큐르비가 받아서 말했다. "뭘, 대단치 않아. 좀더 신나는 모험을 하고 싶다구!" 무선으로 하는 말이므로 물론 대장에게도 들린다 "가만, 가만. 급히 서두르면 안 돼. 생각한 것보다 실제로 부딪쳐 보면 그다지 즐겁지는 않을 거야, 알겠니? 저기 큰 바위에 내린다" 네 사람은 무수히 깔린 바위 위에 서서히 미끄러져 내렸다. 바위의 흩어져 있는 모습은 불가사의한 힘으로 지탱되어, 오랜 옛날부터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따금 바위와 바위의 틈 사이에서 저쪽의 공간이 바라다 보인다. 목적지에 착륙했다. 잘못 움직이면 그 반동으로 뛰어올라 갈 것 같다. 프리튼은 열심히 사방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대장님 이상합니다. 테의 저쪽 끝을 보니 먼 쪽이 높아져 있는 것 같아요" "네가 말한 대로다. 알겠나, 천체는 모두 공이다. 둥글다. 그 지면이 평평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아. 그러나 이 테의 표면은 가까이서 보면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지만, 태양계에서 유일한 완전한 평면을 가진 천체이다. 그래서 평면에 익숙지 않은 눈으로는 오히려 먼 쪽이 높아 보이는 거지." 테의 안쪽에 갈 시간은 없었다. 거기에는 가스가 있고, 정찰정의 조종도 어렵다. 바위가 별똥별로 되어, 메탄과 암모니아의 토성 대기 중에서 타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대장님, 아직 토성에 내린 사람은 없죠?" 하고 프리튼이 또 다시 물었다. "아직 없지. 대기권에 들어가면 캄캄해진다는 것 밖에 알고 있지 않다. 레이더는 말을 듣지 않는다. 자,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간다. 한 번 더 잘 봐 두라." 이때였다. 그들의 리시버에 기지의 대장 대리로부터 긴급 통신이 들어온 것은, "이쪽은 오우엔, 대장에게 전함. 게본 호 중계로 연락하십시오." 우주복에 장치된 무전기로는 10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기지까지는 닿지 않는다. "이쪽은 페드로프, 현재 게본 호에 되돌아가는 중이다. 무슨 일이야?" "목성과 토성 궤도 중간에서 접근 중인 물체를 레이더가 포착했습니다!" "알았다. 곧 가겠다. 경보를 내라. 다른 기지에도 곧 연락을." 오우엔은 당황하지 않고 명령을 실행했다. 연락이라고 하지만 전자 계산기, 발신기, 안테나 등을 조정하는 것이라 복잡한 일이었다. 게본 호에 도착해서, 큐르비는 우주복을 벗으며 말했다. "기지에 있었으면 좋을 뻔했어. 내 전파 망원경으로 포착할 수 있는 건데!"   대장의 이야기   "전속력으로 기지로 직행!" 위성 엥게라도스와 공전 속도 쪽이 테의 공전 속도보다 늦어, 기지까지는 아까보다 훨씬 뒤지고 있다 얼마 지나자, 대장이 세 사람을 옆으로 불렀다. "이 기회에 얘기해 둘 것이 있다. 우리가 같이 일하는 데 중요한 일이다. 너희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그렇게들 만족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실은 그렇습니다." 큐르비는 무엇이든 숨겨두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 기분은 잘 안다. 너희들은 안드로메다 성운이나 큰곰자리의 M18번 별에 가고 싶겠지, 새로운 우주를 발견하고도 싶을 거다. 우리는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런 별의 세계를 모르니까 말이다." "정말 굉장하겠지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너희들은 최고 위원회가 우주 파일럿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가 있다. 옛날의 은하계 탐험대에 대해서 공포하지 않은 일들이 있다." "예? 처음 듣는 소린데요." 프리튼이 놀라며 말했다. "가르쳐 주십시오, 대장님." "좋아. 너희들은 화성의 우주 대학에서 페르크세 작전의 일을 들어보았는가?" "예, 헤르메스 이야기도요." "그래 무한한 은하계 우주를 찾으러 나섰던 우주선 헤르메스 호는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 달에 자매선 하세르 호가 해왕성의 위성인 트리톤에서 헤르메스 호의 잔해를 발견했다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어떤 별의 생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세르 호와 또 1척의 배가 재차 태양계를 떠나려 했으나, 이상한 우주선을 만나 되돌아오고 말았지. 너희들이 아는 것은 이 정도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최고 위원회는 함부로 그 사실을 공포해서 일반 시민들에게 불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탐험 대원들에게도 굳게 입을 다물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우수한 우주 요원이다. 기지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여기서 얘기하마." 이때,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쪽은 오우엔." "말하라.“ "물체는 타원 궤도로 접근 중. 천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쪽에서 불러 보아도 응답이 없습니다." "알았다." 대장은 스위치를 끄고, 다시 세 사람을 향했다. "에,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래, 사실은 그 괴 우주선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것도 헤르메스 호의 항법사 코튼 비임이- 그는 무선으로 태양계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연락해 왔다. 물론 괴선에 타고 있는 생물의 명령이었지. 아무래도 감시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 만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듣고 있었다. "괴선의 선체 불빛이 켜졌다가 꺼졌다가 하는 것을 하세르 호의 통신사가 눈치챘다. 무심코 보고 있던 중 문득 생각이 났지. 그 옛날에 사용하던 모르스 신호 같았다. 곧 노트에 받아 적고 해독해 본 거다. " "그들은, 인류에게 ‘위험하다. 그것은……’ 거기에서 그쳤다. 계속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또 짧게 세 번 불이 켜지고 그뿐이었다. 무슨 일일까?…… SOS(구조 신호)였다." "그러면 비임 외에도 사람이?" 하고 비디히가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그렇다. 괴선의 생물이 모르스 신호를 알 까닭이 없으니까." "SOS라면 왜 구조하러 안 갔나요?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요." 프리튼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러나 제군들, 그건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광속으로 날아가는 우주선 내에서는 시간 가는 것이 많이 늦어진다고 하잖아요. 그게 사실이라면 비임 들도 그만큼 덜 늙었을 게 아닙니까. 아직 늦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고 큐르비도 흥분하면서 말했다. "태양계 최고 위원회는 그런 것들을 모두 생각한 다음에……" "아무 손도 못 썼다는 말이지요." "기다려 보라고. 결론은 그렇게 간단히 내릴 수 없는 거야. 빛의 신호도 어쩌면 함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진짜 곤란에 빠져 있을 겁니다. 최후의 희망을 모르스 신호에 의지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괴선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찾아보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높은 사람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너무 조심을 하기 때문에." 하고 비디히도 지지 않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침착성이 없어. 아무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기습에 대비하는 조치를 했지.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먼 물체라도 탐지할 수 있다. 헤르메스 호와 같은 사건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토성의 궤도에는 자꾸자꾸 기지가 건설되고, 정찰정은 명왕성까지 날아다닌다. 여기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자 큐르비가 정색을 하며 질문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괴선의 선단이 나타나면 우리들은 어떻게 합니까?" "어려운 질문이다. 실은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상대편이 어떻게 나올지도 전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즉 우리들의 행동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체 모를 유령에게 둘러싸인 채 요새에 처박혀 있는 셈이군요.“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어. 인류가 처음으로 다른 고등 생물과 만날지도 모르는 거다.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있어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그래도 큐르비는 불만스러웠다.   방문객   엥게라도스 기지로 돌아온 대장은 곧 오우엔에게 그 뒤의 상황을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진로도 같고, 응답도 없습니다." "안테나 개의 반응은?" "린다, 라일라, 메도우서 3마리 모두 아무 일 없이 순합니다." "그래, 그럼 괜찮겠지……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한 시간이 지나도 응답이 없거든 무장 정찰선 스틱스 호에 준비를 해라."   여기서 안테나 개의 설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동물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지진 같은 것도 미리 알아차리고,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 등이다. 특히 개가 그런 점에서 뛰어났다. 동물 심리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그 능력의 정체를 잡을 수가 없었다. 훈련을 시키면 그에 따라 더욱 예민해진다는 것밖에 모른다. 잘은 알 수 없지만, 아주 옛날의 인간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페르크세 작전 때에도 헤르메스 호의 잔해를 발견하는 데 안테나 개가 큰 공을 세웠다. 그 힘은 우주 공간에 있어서 더욱 강하게 되는 모양이다. 마치 무슨 특별한 안테나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안테나 개라고 부르고 있다. 말하자면 걸어다니는 위험 탐지기이다. 다만 말을 못하기 때문에 위험의 종류까지는 가르쳐 줄 수가 없다. 어느 전진 기지에나 안테나 개가 배치되어 있다. 엥게라도스에 있는 세 마리는 모두 암컷인데, 조상은 셰퍼드이다. 물론 대원들과는 잘 사귀고 있다. 대장이 집회실로 가자, 졸고 있던 세 마리는 꼬리를 흔들면서 달려왔다. "이상한 느낌은 없었니?" 그러자 대답 대신에 세 마리는 멍멍 짖었다. "그래, 그래. 너희들을 믿고 있다." 그때, 스피커가 울렸다. "대장님, 사령실로!" 페드로프는 곧 사령실로 갔다. 오우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물체에서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음, 그렇지 않아도 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뭐지?" "손님입니다. 곧 뮤리우스 제독이 전함 륀크스 호로 임시 시찰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잘 되었군.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해 볼 수 있게 됐으니 말야." 긴장했던 마음이 일시에 풀어지고 말았다. 륀크스 호가 도착할 때까지 기지에서는 며칠 간 환영 준비에 바빴다. 이윽고 륀크스 호는 엥게라도스의 궤도에 들어서고, 천천히 착륙하기 시작했다. 엥게라도스의 중력이 약하므로 역분사도 조금만 하면 되었다. 기지의 입구에서 기밀 식의 통로가 죽 뻗으며 전함 에어 록에 갖다댔으므로, 손님들은 우주복을 벗지 않고도 기지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기지의 24명은 집회실에서 손님을 맞았다. 뮤리우스 제독은 우주항법의 대가이다. 그밖에도 우주에 있는 인류의 지위에 대한 여러 가지 훌륭한 책을 써내어, 태양계 중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24명은 제독으로부터 한 사람씩 다정한 악수를 받고 륀크스 호에서 큰 파티를 열었다 이윽고 뮤리우스 제독은 페드로프 대장의 안내를 받으며 사령실로 들어갔다. "페드로프 군, 자네가 취한 조치는 만점이야. 륀크스 호를 발견하는 것도 빨랐다. 연락 방법도 좋았다. 자네 쪽의 무장 정찰선이 마중 오면 미안해서 가만히 오려고 했었지." 페드로프는 정해진 대로의 보고를 마치고, 젊은 대원들의 불만과 토성의 테까지 산책한 일들을 얘기했다. "제독님, 페르크세 작전 이후 그 우주인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지금쯤은 그들이 오지 않을까요? 저도 부하들과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자 뮤리우스 제독이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걸. 우리들은 결국 인간의 시간, 지구의 시간으로 사물을 생각하고 말지. 그러나 이 태양계 안에서도 시간이란 것은 일정하지 않다. 알겠나, 명왕성에서의 1년은 지구에서의 250년에 해당한다. 수십 년 전 우리와 스쳐 지나간 우주인은 전혀 다른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까, 그 수십 년이 길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들뿐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주의 깊게 행동하며, 설사 헛수고일지라도 젊은이들에게는 공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미래를 짊어질 사람은 그들이니까." "그렇습니다. 저의 부하들은 정말 훌륭한 녀석들뿐입니다. 무서움을 모르고 의무감에 충실하며, 머리도 좋고 모험 정신에 불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루한 것만은 참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륀크스 호에서의 파티   륀크스 호의 큰 홀에는 100명이나 들어갈 정도로 넓다. 천장이 낮은 이외에는 우주선 안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승무원과 기지 요원들 중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사람만 빼고는 모두 모였다. 화성식으로 맛을 낸 금성의 물고기, 야채는 달의 인공 채소밭에서 키운 것, 그리고 지구의 새는 요새 태양계에서 유행하는 방식으로 요리되었다. 고기는 륀크스 호의 그늘에 걸어놓았으므로, 저온과 우주선으로 인하여 굉장히 맛이 있었다. 안테나 개들에게도 그 맛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세 마리는 모두 테이블 밑을 끙끙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정말 즐겁습니다. 이런 파티는……" 하고 큐르비는 옆에 있는 남자를 보고 말했다. 남자는 륀크스 호의 전파 천문학자이다. 벌써부터 큐르비와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그는 어딘지 이상한 남자였다. 곁에 있던 페트 프리튼은 아까부터 자세히 보고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왠지 기분이 나빠져 간다. 첫째,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청년 같기도 하고 노인같아도 보인다. 아무튼 머리는 검으며 윤기가 흐르고, 피부는 번질번질하고 그을러 있다. 말을 하는 데에도 기묘한 습관이 있다. 더욱이 지금의 젊은이에게는 맞지 않은 단어와 말솜씨이다. "저 사람, 이름이 뭡니까?" 하고 프리튼은 옆에 있는 청년에게 물어 보았다. 건장하고 큰 남자인데, 얼굴은 매우 순하게 보였다. 라크 심슨이라고 하는데, 지구 태생으로서 화성에서 수학을, 달에서 컴퓨터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아아- 저 사람 말인가요? 우리는 그를 "요술쟁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무에 관한 일 이외는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몹시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지요. 그러나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제독에게는 신용을 얻고 있지요. 말하자면 전파 천문학자로서는 대단하지요, 안드로메다 성운에서의 신호라도 잡아서 해독할 수 있다더군요." "예에, 어디 태생인가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요. 제독은 혹시 모르지만.“ "물어 본 일은 없나요?" 왠지 프리튼은 열심히 묻는다. "물론 물어 보았지만, 우물쭈물하고 싫은 얼굴을 하길래, 그 후로는 물어 보지 않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군요. 나의 친구인 큐르비와 저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잖아요" "정말입니다. 이상한 일도 있군요.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얘기를 하다니." 프리튼은 이 사람 좋은 청년 심슨에게서 많은 얘기를 잘 들었다. 륀크스 호가 달의 메스딩거 A 화구를 출발했을 때, 이 요술쟁이는 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의 전파 천문학자가 어떤 사고로 화성에 내리고, 그 대신으로 탄 사람이 이 남자라고 한다. 그렇다고 화성 출신도 아니다. 이름도 크라무라는 것밖에 모른다…… "아무튼 이상해요. 안테나 개가 그를 주시하고 몰래 지키고 있어요.“ 어느 사이에 프리튼은 심슨과 친해졌다 "음, 그러나 짖지는 않군요. 위험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아요.“ 크라무와 큐르비는 여전히 이야기에 열중해 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크라무 쪽이고, 큐르비는 이따금 질문을 할 정도이다. 눈을 빛내며 듣고 있다. "요술쟁이 선생,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 파티가 끝나고 모두 기지로 돌아갔지만, 큐르비만은 언제까지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크라무의 비밀   다음날. 프리튼과 큐르비는 근무를 마치고 기지의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베란다 앞에는 지구의 풀과 나무를 고생해 가며 심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귀한 풍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큐르비, 크라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대단한 인물이야.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마치 방사선을 내뿜는 것 같아." "과연 요술쟁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군. 그러나 나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뭘 말이야? 그 사람이야말로 나에게 알맞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계획과 용기를 지니고 있어. 그것이면 됐잖아, 과학적 지식도 풍부해." "그래도 모두 그를 피하고 있어. 안테나 개도……" "뭐? 그건 너 때문이야. 하지만 너는 나의 친구이니까 크라무에게 들은 것을 얘기해 주겠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거야." "……?" "그는 전파 천문학에서는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그가 최근에 어떤 발견을 했었다. 그것을 나에게만 얘기해 주었다." "흥,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겠군."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현재하고 있는 일이 더욱 지루하게 여겨졌다." "어서 말을 해 보라고. 모험 이야기인가?" "아니, 암시 정도였지만……" "점점 이상하게 말을 돌리는군." "좋아. 특별한 비밀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 크라무도 용감한 친구에게는 얘기해도 괜찮다고 그러더군. 그러나 너무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은 곤란해. 알겠나?" "알만해. 그러면 맹세를 할까요?“ 우스갯소리로 대꾸해 보려고 했으나, 말이 그럴 듯하게 나오지 않는다. 큐르비는 프리튼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속삭였다. "그는 전파 신호를 잡았어. 발신의 근원은 우주선인 모양이야. 물론 인간의 것은 아니지. 그러나 몹시 흩어져 있어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아마 SOS 같다고 말했다." "뭐? SOS…… 요전의 대장도 그런 말을 했잖아." "그렇지. 어쩌면 아직 인간이 우주인에게 붙잡혀 있을지도 모른다." "음, 그런데 크라무는 왜 제독에게 그 얘기를 안 하지?" "그것도 물어 보았다." "뭐라고 그러던?" "설사 보고를 해도 조사 허가를 얻을 수가 없대. 오히려 반대로 더욱 조심만 하게 된다는 거야." "하긴 그래. 하지만 SOS라면 구원을 바라고 있는 거다." "아니, 크라무는 SOS가 꼭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거야. 100퍼센트 확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야." "그게 사실이라면 뭔가 있는 거다. 그것뿐인가, 그가 얘기한 것이?" "나더러 페드로프에게 부탁해서, 뮤리우스와 조사 비행 허가를 얻어 보면 어떠냐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자료를 제공해 주겠다는 거야." "그도 간다고 했나?" "그 말은 안 했어. 그러나 청년으로서는 훌륭한 일거리라고 그러더군." "흠, 그럼 자기는 젊지 않다는 얘긴가?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 이야기는 이게 전부인가?" "중요한 것은……" "음, 아무튼 심각한 문제다. 잘 생각해 보자구. 나는 지금부터 근무해야 돼. 자, 또 만나." 하고 프리튼은 큐르비의 손을 잡고는, 헤엄치듯 복도를 사라져 갔다.   정찰선 스틱스 호 출발   대우주 전함 륀크스 호의 사정실. 뮤리우스 제독과 페드로프 대장은, 큐르비와 프리튼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인 채 조용히 듣고 있다. "꼭 가고 싶은가? 너의 보고는 매우 흥미가 있다만, 사실 같지가 않다." 라고 말하는 대장의 목소리도 엄숙하다. 큐르비는 자신 만만하게 대답했다.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조사해 보아도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보고하러 온 것입니다." 하고 보고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큐르비는 카시오페이아자리의 전파별 A의 전파에, 또 하나의 다른 전파가 겹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섭계에 의하면, 발신 근원이 카시오페이아자리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별이거나, 아니면 인공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다. 전파 근원도 극히 희미하고, 언제 재어 보아도 거리의 변동이 거의 없다는 거다. 프리튼도 망원경으로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입니다. 이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곧 조사대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프리튼도 큐르비에 거들었다. "그러나 스틱스 호로 되겠는가? 아냐, 그 전에 전문가 크라무의 의견을 듣고 싶은데, 어떤가?" 뮤리우스 제독은 아주 신중하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두 젊은이가 원하는 바였다. "예, 좋습니다. 그 사람도 동행해 주었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곧 크라무가 들어왔다. 그러자 방안의 분위기가 어쩐지 차가운 느낌이다. 제독의 말이 끝나자, 크라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나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틀림없다니 큐르비 군의 솜씨는 대단하군요." 그런데 카시오페이아자리 A별의 이름을 들었을 때, 크라무의 눈이 빛나는 것을 프리튼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페드로프 대장은 마음을 결정한 모양이다. "그렇습니까, 확실하겠지요? 그러나 저 정찰선으로써 간다는 것은 어떨까요?" 크라무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 같으면 곧 출발시키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카시오페이아자리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훨씬 앞에 있는 태양계의 근처까지면 좋습니다. 내가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크라무씨, 같이 갑시다!" 돌연 프리튼이 정면으로 부탁했다. 크라무는 순간 어리둥절한 것 같았으나, 곧 침착을 되찾고 핑계 대듯 말하는 것이 동행을 안 할 눈치였다. 그러나 뮤리우스 제독은 조사 비행 허가를 내 주고, 페드로프 대장도 협력을 부탁하자 크라무도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게 되었다. 륀크스 호에서는 또 한 사람, 프리튼과 친하게 된 심슨이 항법사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엥게라도스 기지에서는 큐르비, 프리튼, 그리고 비디히도 참가한다. 환경 공학과 동력을 책임진다. 거기에 안테나 개중 메도우서도 참가한다. 그래서 다섯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개로 짜여졌다. "언제 출발할 것인가?" 하고 페드로프 대장이 물었다. "12시간 후!" "좋아, 스틱스 호의 준비는 끝나 있다. 그러나 미지의 세계로 날아가는 거다. 부디 조심해 다오. 제독과 내가 책임을 지고 허가를 내어 준 것이니까, 잊지 말기를……" "정찰선의 무기는 아주 급할 때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쪽에서 먼저 쏘지 말라. 탐험대의 대장으로 큐르비를 임명한다. 임무가 무겁다. 그러나 무선으로 연락이 될 때까지는 나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알았습니다, 대장님!" 12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드디어 출발 시간은 다가왔다. 페드로프 대장은 잠깐 큐르비를 방으로 불러서, "극비"라고 표시한 서류를 넘겨주었다. 페르크세 작전의 자세한 보고서였다. "잘 읽어 두라. 쓰일 때가 있을 거다. 돌아오거든 도로 나에게 가져와라. 자, 너의 바이킹의 피가 끓어오르는 일이다. 그러나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럼 행운을 빌겠다!" 큐르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장의 손을 힘주어 잡고서는 방에서 나왔다.   태양계를 떠나서   소형 우주선 스틱스 호는 이미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크라무의 지시대로 이상한 목표를 향해서, 어두운 공간을 일직선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크라무 선생은 왜 저렇게 찬바람이 휙휙 돌지? 방이 따로 갈라져서 정말 다행이다." "비디히도 그렇게 생각하나? 큐르비, 확실히 크라무는 기묘한 인물이야.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야. 메도우서 역시 그 사람 옆에는 절대로 안가잖아." 가고 프리튼은 좀 뽐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뭐, 그러다가 말겠지. 그런데 지금은 기지에 있을 때보다 더 지루하군. 그저 날고 있을 뿐이니 말야." "무슨 배부른 소리야. 광자의 날개로 우주를 달린다는 것이 얼마나 재밌어. 조금만 더 참아 보시지요." 하고 비디히는 신난다는 듯 말했다. 이때, 항법실에서 키가 큰 심슨이 들어왔다. 갑자기 방이 좁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침 잘 왔어, 심슨." 하며 비디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건넨다. "우라늄 1그램이 완전 분열하면 얼마만한 에너지가 되지? 옛날 시험볼 때 암기했었는데 잊어먹고 말았어." "10조 킬로 파운드 미터이지." "지구 중력으로 말인가?" "그렇다네." 비디히는 노트에 계산을 하더니 이윽고, "정말 놀랐는데! 그럼 우라늄 1그램에서 1천 파운드(약 0.5톤)의 무기를 100억 킬로미터나 들어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지구의 중력으로 계산해서 말야. 100억 킬로미터라면 태양에서 토성까지의 7배나 된다." "연료로서 부피가 없어 이상적이지. 이것도 핵분열을 완전히 제거되도록 한 덕택이다. 이 정찰선은 많은 우라늄을 싣고 있다. 속력을 내려고만 하면 광속이라도 낼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속력이 형편없지 뭐야." 큐르비는 약간 비꼬듯이 말하고, 크라무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저 크라무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페르크세 작전에 관계가 있는 것 같다구. 그 괴선의 이야기 있잖아. 크라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프리튼이 받아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나 그는 왜 오는 것을 꺼렸을까? 우리들만 보내려 한 것은 기지의 인원을 줄이려고? 그렇다면 그 목적은? 아무래도 이상해……" 모두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들을 쳐다보았다. 무거운 공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심슨이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크라무가 문제의 우주인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이상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자, 추측만 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좀 쉬자구, 어떤 일이 일어나면 통지해 주겠다." 혼자 남은 큐르비는 엥게라도스 기지와 연락을 취했다. 무엇인가 마음에 집히는 것이라도 있는 모양 같았다. 아직 전파는 겨우 닿고 있었다. 왕복에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큐르비는 불을 끄고, 바깥을 보는 텔레비전의 위치를 켰다. 태양은 이미 조그만 빛의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지구 같은 것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조차 없다. 방안의 공기는 상쾌했다. 비디히의 수고로 스위치를 켜면, 그리운 냄새가 방안을 가득 차게 한다. 지구의 전나무 냄새, 갓 내린 눈의 냄새, 화성의 사막 냄새, 금성의 바다 냄새 등이…… 큐르비는 달콤한 기분에 젖어 눈을 감았다…… 나는 우주의 바이킹이다. 그 옛날의 선조는 큰 바다 저쪽에서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 우리들이 발견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눈을 뜨고 스위치를 바꾸어 켰다. 스크린에 안드로메다 성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때, 발 옆에 있던 메도우서가 벌벌 떨고 있다. 큐르비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뒤돌아보았다. 크라무였다. 소리도 없이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순간, 큐르비는 문득 크라무라는 이름에 대해서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슬란드의 옛 전설에 힘센 양치기가 있었다. 그는 괴물과 싸워서 그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어 유령이 되어 사방을 설치고 다녔다. 그 이름이 바로 크라무였다. 어쩐지 등이 서늘해져 왔다. 거기에 차가운 목소리가 이렇게 물었다. "진로는 바로 잡고 있나요, 에다다우리 별에?" "네, 틀림없습니다. 목표는 아직 멀었나요?"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의 경험과 추측이 틀림없다면, 아마 여러분은 머지않아 어떤 체험을 하게 될 거요. 그것은 악몽 같을지도 모릅니다. 태양계와 항성의 세계 중간에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생각 못할 일이 있지요.“ "그게 무엇이지요?" "설명은 뒤에 하지요. 지금은 레이더로 사방을 샅샅이 살펴보시오. 그리고 무엇이든 발견되면 곧 나를 불러 주시오……" 말을 끝마친 크라무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때, 무전기에 신호가 들어왔다. 페드로프 대장으로부터였다. 조금 전에 부탁한 사진을 찾았으니 지금 전송하겠다는 거다. 전송 수상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츰 모양을 이루어 가는 사진, 큐르비는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사진은 명랑해 보이는 한 청년의 얼굴로 뚜렷이 나타났다. (음, 그렇구나, 이젠 틀림없어.) 큐르비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얼굴 표정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났다. 큐르비는 얼른 사진을 감추었다. 들어온 사람은 프리튼이었다. "아무래도 잠이 안 오잖아. 그래서 왔어. 뭐 별다른 일은 없나?" "곧 있겠지 뭐." 큐르비의 대답은 간단했다.   유령선   큐르비는 레이더의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레이더란 것은 빛 대신에 전파를 사용한 탐조등과 같은 것이다. 전파가 저 먼 곳까지의 공간을 어김없이 찾는다. 문득 큐르비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스크린에 빛의 점 같은 것이 비치고 있지 않은가! 혜성인가? 거리를 재어 본다. 30분이면 닿을 만한 곳이다. 곧 프리튼을 불렀다. "찾은 것 같다! 너의 망원경으로 조사해 줘." 프리튼은 스위치를 켜고, 돔(반구형의 지붕)에서 고성능의 반사 망원경을 꺼졌다. 이와 같은 어두운 공간에서 조그만 물체를 잡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프리튼은 잘 해냈다. "음, 천체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주선이나 다른 무엇이다. 무선으로 연락해 보자." "좋아, 대답이 없을 때는 경보를 울려라." 아니나 다를까 대답이 없다. 경보 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모두 집합했다. 크라무는 이상하게도 흥분하고 있다. "찾았나요?" "그렇습니다." 큐르비는 그를 날카롭게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무선 연락은? 그 대답은?" "아니, 없었지요. 없다는 것은 저쪽에 무선 장치가 없거나, 아니면……" 그러자 크라무가 돌연 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소." "이야기해 주시지요." 하고 큐르비가 조용히 말했다. "저 물체, 아니 우주선에는 틀림없이 무선 장치가 있습니다. 나는 알고 있소. 대답이 없는 까닭은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임에 분명합니다……" 이때, 심슨이 연락해 왔다. "감속 준비!" 정찰선 스틱스 호에 브레이크를 거는 거다. 그때는 인간의 신체에 무서운 중력을 받으므로, 특별히 마련한 방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터져서 죽고 마는 것이다. 그 고통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만든 약도 발명되었다. 숨막히는 30분간이 지나고, 스틱스 호는 이상한 물체의 바로 옆에 조용히 멈추었다. 크라무의 얼굴에는 생기가 났다. 큐르비를 보고 말했다. "저쪽 물체에 타 봅시다. 위험은 없어요." "좋습니다 나와 심슨이 같이 가겠소. 프리튼과 비디히는 여기 남아 있어 주게." 괴선은 둥근 모양이었다. 지름은 60미터쯤 되고, 거기에서 여러 가지 물건이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데 무엇에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큐르비는 심슨을 보고 말했다. "어때, ‘물체’라든지 ‘우주선’이라고 하면 불편하니 이 괴선을 ‘토우레’라고 부르기로 하지. 지구의 고대인이 북쪽 끝의 바다라고 생각했던 전설의 섬 이름이다." "좋아, 적어도 존재하고 있는 것에는 이름이 있어야지. 우리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인가? 어려운 문자 쓰는 건 질색이다. 자, 토우레의 비밀을 알아보러 가자." 세 사람은 헬멧을 쓰고, 에어 록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공기가 쏴아 흘러내린다. 우주복 점검 - 이상 없음. 무선 장치 - 이상 없음. 바깥쪽의 문을 열고, 우주 공간을 헤엄쳐 나갔다. "야아, 이건 우주선이라기보다는 우주 스테이션 같다." 하고 큐르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크라무가 가장 앞서서 괴선 토우레에 붙어 섰다. 그는 무엇인가 찾고 있는 듯 했는데, 아마 발견한 모양이다. 스위치나 다른 무엇을 누른 것일까? 평평한 표면에 뻐끔한 구멍이 열렸다. 반구형의 구멍이다. 그곳으로 세 사람이 들어가자 반구는 빙 돌았다. 과연 잘 고안한 에어 록이다. "메도우서는 어떻게 하고 있나?" 큐르비는 무선으로 스틱스 호에 남아 있는 프리튼에게 물었다. "얌전해." 큐르비는 일단 안심했다. 메도우서는 신용할 수 있다. 좁은 반구의 방에는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크라무는 벽에 붙어 있는 계기를 보자, 살며시 헬멧을 벗었다. 소리는 없다. 방안의 기압은 우주복의 기압과 같았다. 공기로 호흡할 수가 있다. "안심해요. 우주복을 벗읍시다." 눈앞에 둥그렇게 입구가 열렸다. 그것을 지나니 복도가 나타났다. 크라무가 맨 앞에 서고, 세 사람은 달려갔다. 문이 있었다. 초록색의 램프가 켜져 있는데, 그것은 안의 기압이 정상임을 지시하고 있는 것 같다. 크라무는 문을 와락 열면서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곧 두 사람도 안을 보고 놀랐다. 보통 사람의 방이었다. 벽 쪽에 2개의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책상과 의자도 있다. 이상한 것은 중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온도도 꼭 알맞다.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알았어. 대답이 없었던 것은 모두가 여기를 빠져나간 때문일 거요." 하고 크라무는 천천히 말했다. "크라무씨!" 큐르비는 상대방의 이름을 힘주어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사하기 전에 꼭 설명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일단 스틱스 호로 되돌아가서 들어볼까요?" "하지만……" 반대하려던 크라무는 덩치 큰 사나이 심슨이 노려보았으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별 서로간의 이야기   정찰선의 좁은 선실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메도우서까지도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들으려는 듯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과연 크라무의 비밀은? 실로 이상한 이야기가, 태양계를 멀리 떠나 있는 이 어두운 공간에서 바야흐로 시작되려 하고 있다. 큐르비는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계기판을 꽉 잡고 있었다. 이윽고 크라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놀라셨겠지요. 저 우주 스테이션-토우레였습니까- 의 모습을 내가 자세히 알기 때문에. 지구에서 나고 태양계를 개척한 인류 이외에도, 우주에는 진화된 생물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중 두 개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다른 하나는 간접적으로……" "왜 우리들도……?" 하고 심슨이 입을 열었다. "조금 기다려 주시오. 그렇게 단번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사건이 시간상으로나 공간상으로나 크게 펼쳐져 있으니까요.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페르크세 작전의 일, 해왕성의 위성 트리톤에서 혜르메스 호의 잔해가 발견된 일, 하세르 호가 이상한 괴선과 만났다는 일 등을 말입니다." 그러자 큐르비가 대표해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것도, 빛을 사용한 SOS 신호의 일도." "그렇습니까? 그러면 말하기가 수월하군요. 사실은 우리들은 그 우주선의 생물에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우주 스테이션도 그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지금, 뭔가 모두 꿈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이야기해 주십시오. 모두 다 같은 인간이 아닙니까? 괴로운 추억은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것은 모두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나와 당신들의 사이에는 깊고 깊은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에는 이상한 체험이 쌓여 있습니다. 나로서도 잘 모르겠어요. 자신이 인간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어떤지, 인간에서도 저 우주인들 사이에서도 동료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크라무 당신은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현실에 돌아와 있는 겁니다. 륀크스 호의 한 사람이지요. 전파 천문학과 우주항법의 일인자입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모험을 시켜 주지 않았습니까? 그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은 잘 모를 겁니다. 왜 내가 륀크스 호에 탔는가? 어째서 이상한 SOS의 일을 이야기했는가? 만약 이 토우레에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거기서 크라무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후회하는 것처럼……. 큐르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나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상할 수는 있겠지요. 죄다 이야기하시지요. 고통스럽겠지만 그러면 우리의 동료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크라무는 눈을 감았다. "아닙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하십시오. 당신은 코튼 비임이죠. 원래는 헤르메스 호의 항법사였고요." 순간 크라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큐르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큐르비가 손에 들고 있는 사진을 보자,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윽고 다소 침착해진 그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의 젊은 시절의 사진입니다. 제 1차 탐험대의 한 사람이었죠. 트리톤에서 조난 당한 헤르메스 호의 승무원이지요. 옛날 동료들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자, 서둘러야죠. 빨리 토우레로 다시 가서 조사를!" 이상하게도 크라무, 아니 코튼 비임은 점점 변해갔다. 사람다워진 것이다. 그 기괴한 어두운 그림자는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아니, 우선 설명을 해 주십시오. 그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우선 얘기하지요, 그때, 최초의 은하계 탐험선 헤르메스 호는 출발 후 무사히 날아가고 있었어요. 트리톤에 도착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뜻하지 않은 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치 번갯불처럼 그것이 어두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공격을 당했나요? 레이더에 관측되지 않았습니까?" 하고 심슨이 물었다. "공격?…… 그렇게 말할 수는 없죠. 이쪽에서는 손도 써보지 못했어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무튼 우리들은 그냥 멍청하게 있었을 뿐이었소. 그야 우리들 역시 우리 같은 생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막연히 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갑자기 만날 줄이야." "대체 그것은 어떤 것이었나요?" 심슨의 눈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지금 이야기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토우레 속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때 말하지요. 아무튼 우리들은 그야말로 간단하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헤르메스 호를 완전히 분해하여 갔지요. 아, 연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과는 생각하는 방법도, 행동하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아직 잡혀 있나요? 그들의 별로 갔습니까?" "아니, 그들의 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들 중에 나만을 되돌려 보내 주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모르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광선에도, 레이더의 전파에도 반사하지 않는 우주선으로 남태평양의 포나페이 섬에 내려 주었습니다.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신분을 감춘 채 저 우주 공항에서 근무했죠. 그리고 드디어는 륀크스 호에 타게 된 것입니다." "되돌려 보내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솔직하게 말하지요. 인간을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우주선에 대한 전문가를……" 그러자 심슨이 놀라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생물의 기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보다 뛰어난 것 같은데요?" "그들의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기술입니다." 하고 코튼 비임은 말했다. 큐르비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데서 기술을 빌려와서?" "그렇습니다. 우주 진출에는 우리들 쪽이 더 적합하지요." "그건 모르지요. 우리의 선조가 바이킹의 배로 아메리카에 상륙했을 때, 인디언과 여러 가지로 복잡했다지요. 그때까지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상대였지만 아무튼 인간끼리. 그러나 우주에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잠깐 비임 씨……" 하며 심슨이 또 입을 열었다. "비임씨, 당신 혼자 토우레를 떠나 지구로 되돌아올 때, 헤르메스 호의 선원들은 무사했나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10명이 부족했었지요. 나를 지구에 보내 준 것은 인간을 데리고 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우주인으로부터 최면술 같은 것에 걸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잔인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그들은 우리들과는 전연 다릅니다. 개미와 사람과는 다르지요. 사람은 개미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우주인과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10명이 부족하게 되었지요?" 라고 묻는 큐르비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이상한 이야기일 겁니다. 10명은 그들의 과학적 탐구심에 희생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렇다고 모르모트의 대신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하여튼 나는 그런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기를 꺼려한 것도 보다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올 생각에서였죠. 그러나 무리하게 거절하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온 것이지요." 하고 코튼 비임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토우레가 온통 비어 있는 것을 안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아아, 이제는 안심이다 하는 기분입니다." 라는 비임의 얼굴은 한층 젊어진 것 같아 보였다. 놀랍게도 안테나 개 메도우서도, 아까부터 얌전하게 그의 발 밑에서 자고 있었다.   다시 유령선으로   이번에는 전원이 토우레의 조사에 나섰다. 모두는 비임이 있기 때문에 안심했다. 데리고 온 메도우서도 이젠 예사로웠다. 토우레는 미지의 생물이 태양계에 대한 감시용으로 사용한 우주 스테이션인 동시에, 광속에 가까운 속력을 낼 수 있는 우주선이라고 한다. "비임씨, 조종할 수 있나요?" 하고 심슨이 물었다. 모두 비임에게 마음을 놓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파괴되지 않았으면 5명으로 가동할 수 있지요." "야아, 가동시켜 보면 재미있겠어요." "그런데 비임씨의 동료들은 대체 어디에 갔을까요? 우주인도 있었겠죠?" 하고 프리튼이 물으면서, 토우레의 에어 록 안에서 헬멧을 벗는다. "우선 그걸 조사하는 겁니다." 다섯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중력을 똑똑히 느낄 수 있다. 큐르비가 물었다. "인공 중력을 만들어 놓은 건가요?" "아니, 그건 아직…… 그 대신 토우레의 중심부에 무거운, 즉 밀도가 대단히 큰 물체가 넣어져 있지요. 그 기술 방법은 간단합니다. 중력이 큰 편이 좋으면 중심부 쪽으로 가면 되지요." "과연 배울 것이 많은 것 같군." 이윽고 비임은 네 사람을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인간이 거주하는 구역은 끝납니다." 살펴보니 안쪽 벽의 한 면은 투명하게 되어 있고, 그 바깥쪽은…… "마치 수족관 같다!" 하고 비디히가 문득 소리를 쳤다. "그대로입니다. 저쪽은 물입니다." "물?" 모두는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지구의 것과 거의 같은 진짜 물입니다." "토우레에 물의 재생 장치는 없었나요?" 라고 묻는 큐르비도 믿을 수 언다는 얼굴이다. "있지요. 그러나 그 물은 사람용이 아닙니다." "그 우주인이 이 많은 물을 마시나요?" 그러자 비임은 흰 이를 보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사실은 저기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이 뜻밖의 말에 누구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윽고 심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설마……?" "물에서 산다고 해서 반드시 물고기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불행히도 헤르메스 호에는 생물학자가 타고 있지 않았으므로 잘은 모르겠지만, 물고기는 아니겠지요. 사람보다는 조금 작았습니다. 보기에는 오징어 비슷했습니다. 몸통은 밋밋하고, 촉수는 4개, 그 끝에는 물건을 잡는 손톱이 있었죠." 큐르비는 커다란 물통의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하고 비임은 옆의 좁은 방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잠수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천천히 물통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서 이상한 것을 끌어안고 되돌아왔다. "이것은 잠수복의 반대지요. 그들이 물을 나오게 할 때 사용하는, 그렇지요 잠공복이지요. 물 밖에서는 지느러미 같은 것으로 걷습니다. 어정어정, 참 지구의 물고기들도 지느러미로 지면을 걷는 것이 있었지요. 큐르비씨, 그들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어떻습니까? 그쪽이 편리하겠지요." "그렇군요. 노지러스 인은 어떨까요? 문어의 것입니다만.“ "좋아요, 좋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에도 어질러진 흔적이 없으니, 외부에서 습격을 당했다고는 할 수가 없군요. 어떻게 된 거지? 헤르메스 호의 동료가 어딘가에 연락을 남겨 놓았을 텐데. 자. 토우레의 안을 찾아봅시다." 곧 둥그런 사령실을 발견했다. 정밀한 기계와 알 수 없는 것들이 꽉 차 있었다. 큐르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이것도 노지러스 인이 만든 것인가요? 물 속에서?" "그것에 대해서 나도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동료들과 여러 가지로 의논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모르겠더군요." "하하, 지금 중요한 것은 토우레에 아무도 없는 이유입니다." 하며 심슨이 이렇게 물었다. "비임씨, 토우레는 구명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니 점점 이상해집니다." 그러면서 사방을 찾고 있던 중, 비임이 옛날의 거실에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해 전다. 「자세한 정보는 기록실의 제 3호 테이프 레코더에 있다. 」 라고 쐬어 있었다. 기록실은 인간들이 노지러스 인의 도움을 받아서, 여러 가지 학문상의 조사와 연구 결과를 정리시켜 놓은 방이다. 천문학, 우주항법에는 매우 귀중한 물건이다. 비임은 곧 제 3호 테이프 레코더에 스위치를 넣었다. 똑똑한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쪽은 렌 가이, 이쪽은 렌 가이. 원래 헤르메스 호의 의사……」 다섯 사람은 기록실에 앉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되살아나는 과거   「……훗날 인간이 이 스테이션을 찾아올지 모른다. 그때를 위해서 이 테이프에 우리들의 운명을 녹음해 둔다. 지금 우리들은 20명이다. 과거에 불행한 사고로 10명을 잃었다. 이제 우리들은 스테이션을 떠난다. 날짜를 남기고 싶으나, 지구의 시간에 대해서 알 방법이 아무 것도 없다. 문득 생각이 나므로, 여기에서 본 현재의, 태양계의 사진을 찍어 놓았다. 이것을 분석해 보라.」 소리가 그치며 테이프 레코더가 열리더니, 1장의 필름이 툭 떨어졌다. 비임은 그것을 주워 빛에 대어 보았다. "보십시오. 행성입니다. 수성은 보이지 않아요. 너무 멀지요. 자, 이것은 금성……" "앗, 지구다!" "화성도 있다!" 사진의 분석은 뒤로 미루고, 또 테이프 레코더에 스위치를 넣었다 「스테이션을 떠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들 밖에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스테이션의 주인인 생물은 전멸하고 말았다. 정체 모를 전염병이 발생하여 손댈 방법이 없었다. 지구의 시간으로 쳐서 3일만에 물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은 이미 없었다. 우선 환자는 기력을 잃고, 그리고 마비가 되어 죽었다. 시체는 곧 녹고 말았으므로, 연구의 표본으로 사용할 수 없었으며 그대로 우주 공간에 장사지냈다. 나는 의사이다. 물론 병의 근원을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모든 시체에는 어떤 바이러스가 있음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것이 죽게 한 범인인지는 확실치 않다. 실험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생물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해롭지 않은 바이러스가 보인다. 그것이 우주선의 영향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위험하게 변형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로서는 언제 이와 비슷한 병에 걸릴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안 되기를 원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여기를 찾아온 사람들은 우리가 이 스테이션을 떠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리라. 이것을 그대로 조종하여 태양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스테이션의 동력이 고장나서 우리로서는 고칠 수가 없었다. 즉 여기에 있으면서 구조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가, 그 두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의논한 끝에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정했다. 헤르메스 호의 오하라 선장 등 10명이 사망한 것은, 이럴 때 실로 큰 손실이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우수한 엔지니어였으므로. 그러나 대우주를 고향집처럼 삼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으며,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통신사와 광물학자는 엔지니어로, 물리학자는 연료 기사로, 의사는 항법사가 되었다. 다행히 모두가 지구에서 기초 교육을 받았으므로, 어느 정도는 맡은 일을 해 낼 수 있었다. 즉 우리들은 스테이션의 수리 공장에서 모든 자재를 동원하여, 20명이 탈 수 있는 소형 우주선을 만들고, 헤르메스 2세 호라고 명명했다. 성능은 대단히 좋았다. 무선도 있다. 레이더도 있다. 동력은 광자 로켓이다. 우주인의 배를 만날 걱정은 없을 것이다. 트리톤에서 우리를 습격하여, 이 별 사이의 우주를 사방으로 끌고 다니면서 이 스테이션으로 데리고 온 배 이외에는 한 척도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 한 척도 1년 안에는 여기를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태양계로 가지 않을 것이다. 이 근처에서 전파를 내는 암흑 성운을 발견했으니, 첫째 그것을 먼저 조사하고 싶다. 성운에 대한 자료는 제4호 테이프 레코더에 녹음해 놓았다. 우리들은 지구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이것으로 우리들의 인사로 대신하겠다. 우리는 결코 옛 고향인 행성을 잊은 일은 없다. 지구여, 태양계여, 평화롭게 지내기를. 지금부터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의 이름을 말하겠다. 그러나 여기에 없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   코튼 비임은 여기서 스위치를 끄고 말았다. "이제 됐습니다. 이름을 들어본들 소용없어요." 슬픈 듯한 목소리였다. "렌 가이들이 스테이션을 떠나고 나서 노지러스 인은 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고 심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잠깐이라도 왔다면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텐데." "그러나 지금이라도 올지 모른다. 그렇잖나, 큐르비?" 라고 말하는 프리튼은 걱정인 모양이다. "그렇지. 대책을 세워야 할거야. 비임씨, 당신의 의견은?" "우선 가이들이 언제 여기서 나갔는지, 그걸 알 필요가 있어요." "좋습니다. 스틱스 호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곧 빨리!"   결 정   문제의 사진은 스틱스 호의 전자 계산기에 넣어서, 심슨과 프리튼이 분석하기로 했다. 결과를 알 때까지는 2, 3시간 걸린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큐르비가 조용히 말했다. "어쩌다 정말 무서운 모험이 되었어."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라고 말하는 비디히는 기쁜 모양이다. "노지러스 인의 우주선이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하고 문득 비임이 물었다. "스틱스 호는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야 알고 있지요. 큐르비씨, 그러나 그건 좀 곤란하지요. 우선 무기가 말을 들을는지 모릅니다. 거기에다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나요.“ "그렇지요. 그러나 아무튼 혜르메스 1세 호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상대는 무기를 사용했나요? 만약 당신들도 무장이 되어 있었다면 저항했을까요? 똑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으니 까요." 비임은 한참 동안 큐르비를 쳐다보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물론 되풀이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후, 우리들도 노지러스 인도 충분히 경험을 쌓고 있지요, 그리고 내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들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헤르메스 1세 호는 군사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후에야 그렇다고 생각한 일이지만,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생물간에는 그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노지러스 인은 어떤 것과 만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 점이 달랐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때 그들의 우주선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것이 착륙할 2, 3분 전이었고……" "기밀 문서에 의하면, 레이더도 듣지 않았다던데요." "그래요. 그들은 스위치 하나로 레이더 파를 흡수시키고 말았지요.“ "그러면 상대는 실력 행사를 안 했다고 말씀하시는데, 자 어째서 모두가 붙잡혔습니까? 헤르메스 호도 파괴되고 말입니다." "붙들린 것은 우리들의 호기심 때문입니다. 눈앞에는 먼 태양의 빛이 둔탁하게 비치는 이상한 형태의 우주선이 있었지요. 에어 록이 열리더니 무서운 우주복을 입은 것들이 꾸역꾸역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정어정 걸어서 돌아다니더군요. 무섭지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한 번 안을 조사해 보려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마비성 가스에 당하고 말았지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왕성은 먼 저쪽에 있었답니다." "아니, 나 같으면 그것들을 한꺼번에......" 하고 비디히가 억울해 했다. "지금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그러나 그때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설사 그들을 처치했다해도, 우리로서는 배의 조종을 모르지요." "잠깐만, 물어볼 게 있어요." 하고 큐르비가 말을 막았다.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그 우주선에 공기가 있었다는 것이 말입니다. 노지러스 인은 물 속에서......" "그것이 문제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그들의 역사는 모르고 있습니다.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그들의 별에 대한 것도 모릅니다. 아마 거의 물의 별이라고는 생각되지만." "물 속에서 우주선을 만들다니,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군요. 높은 열을 내는 장치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라고 말하는 비디히는 엔지니어이다. "그렇지. 그 우주선은 말야, 그들의 작품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손에 넣었을까?" "알겠니? 20세기의 중엽부터 지구나 어딘가의 우주선이 불시착하여, 기계는 무사했는데 승무원이 다 죽고 말았다고 한다면?" "그럴지도 몰라. 그러면 인간은 좀더 빨리 우주에 내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고 큐르비는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배 안에 공기가 있었다는 것도 그럴 듯하게 생각되는군요. 배를 만든 것은 우리와 비슷한 생물이었겠지요." "이왕 만나려면 그쪽이 더 좋았을 텐데. 오징어의 친척은 아무래도……" 하고 비디히는 겁이 난다는 듯 목을 움츠렸다. "허허, 노지러스 인도 아마 똑같은 소리를 할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그들은 우리들의 손을 빌리기를 원하고 있으니. 어쩌면 하늘에서 우주선을 만든 것이 우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입니다, 지금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들과 최초로 의사를 통한 사람이 나니까요." "잠깐, 손을 빌리자는 것은?" "노지러스 인은 물에서 나오면 운동이 매우 느립니다. 우리들의 몇 분의 일도 못하지요. 그렇다고 조종 장치를 물에 담가 놓고 있을 수는 없고……" "오하라 선장들은 어떻게 돼서……" 하고 큐르비가 물었을 때, 심슨과 프리튼이 달려왔다. "알았어, 85일 전이다!" 비임은 눈에 활기 띄며 말했다. "아직 따라붙을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위험하지요. 임시로 끼워 맞춘 우주선이니까요! 자, 토우레를 고칩시다. 조종은 내가 해 보지요." "그러나 아무 말도 없이 빌리려니까 꺼림칙하군요. 옳지, 좋은 생각이 있어요. 여기에 연락을 남겨 놓고 노지러스 인에게 맡겨 둡시다. 비임씨, 부탁합니다." "좋아요, 큐르비. 그러는 것이 놓겠습니다. 아무튼 그들도 헤르메스 호를 부쉈으니, 그렇게 해도 좋겠지요." "노지러스 인은 헤르메스 호의 승무원을 태양계에 되돌려 보낼 생각은 없었던가요?" 하고 프리튼이 물었다.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실행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너무 아까워서였겠지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천사가 아닌 이상, 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자, 페드로프 대장에게 일단 보고를 하고 추적 개시다. 아마 대장의 대답은 기다릴 수 없을 거다."   토우레 출발   솜씨 있는 비임과 비디히다. 결사적으로 일한 끝에, 기어이 토우레를 고쳤다. 비디히는 그 엔진에 완전히 감탄을 하고 말았다. "훌륭하다. 이 무거운 물체의 연료로서는 최고일 것이다. 합성시켜 만든 것일까?" 그러자 천문학자인 프리튼이 설명했다. "아니, 백색 왜성의 것이야. 이러한 별은 전부터 알고 있지. 무섭게 밀도가 단단하다. 단 1 입방 센티가 지구상에서는 100킬로그램이나 되는 물질도 되어 있다. 옛날에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었지. 보기에는 아주 작지만 덥고, 파르스름한 빛을 띤다. 표면적은 작지만, 빛을 내도 에너지를 소모시키지 않는다. 이런 별은 수소 원자를 다 쓰고, 중성자만으로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섭게 밀도가 단단한 거다." "아아, 그런 물질이라? 조금 얻었으면 좋겠어." "시리우스의 반성(질량이 작은 별)이 그것이야. 시리우스는 항성으로서는 여기서 가까운 편이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이 좋아. 중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말야. 우주선 같은 것도 형편없이 찌부러지고 말 것이다. 표면 온도만 해도 1 만 도는 될 거야." "음, 그래. 그럼 한 가지 묻겠는데, 항성의 에너지가 수소를 헬륨으로 바꿔서 나오는 것은 알고 있다. 핵융합 반응…… 굉장한 수폭이라고 말하겠지. 그러나 수소 원자를 다 쓰고 만 별이 폭발하는 것은 어째서이지?" "내부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야. 수소 원자가 다 없어지고 만 뒤의 뽀얗게 작은 별, 즉 백색 왜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음, 어쨌든 좋아, 편리한 원료가 있어서 말야. 중성자 엔진은 광자 엔진보다 융통성이 있어. 선체가 전기를 띠지도 않는다. 고속을 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큰 배는 좋군, 기분만 내키면 수영도 할 수 있다. 천문대도 훌륭해. 멋지게 일할 수 있어." 거기에 다른 세 사람이 달려왔다. "이봐, 기뻐하라구. 헤르메스 2 세 호와 연락이 됐어. 저쪽의 전력이 약해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별일은 없다는 거야. 이쪽 통신은 틀림없이 전해졌다." 비임이 노지러스 인의 식료를 사용하여 훌륭한 음식을 만들었다. 식탁보도 새로운 것이다. 태양계로부터 55광년 떨어진 곳에서 유쾌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맛있었다. 죄다 수산물이었으나, 실로 여러 가지 맛이 나서 즐거웠다. "노지러스 인은 물만 마시고 있는 줄 알았는데, 비임씨?" 하고 비디히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요. 우리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그들은 놀라더군요. 자, 인류와 노지러스인의 번영을 위하여 건배!" 출발에 앞서 모두는 천문대에 모여서 그리운 태양에 작별의 인사를 보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태양은 어느 별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잘 있어요, 태양이여." 하고 프리튼은 엄숙하게 말했다. "그 옛날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의 나라 밖에 있는데도, 아직 당신의 빛은 우리들을 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잘 있어요, 태양이여, 다시 만날 날까지!" 금성에서 태어나 태양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은 비디히도, 점차 유쾌한 기분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참사의 진상   비임은 어쩐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렌 가이로부터의 대답은?" 큐르비가 대답했다.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우리들과 만나기 위해 속력을 늦추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갑자기 만든 우주선이라 걱정이 되는군요. 도착하면 토우레로 갈아타는 게 좋겠어요." "그렇습니다. 가이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어디까지나 의사님이지 항법사는 아니지요. 우주 비행의 조종사는 모두 죽고 말았으니까요." 심슨이 입을 열었다. "그럼 헤르메스 2 세 호는 어째서 곧바로 태양계로 되돌아오지 않지요?" "우주의 인간들은 그 있잖아요. 호기심과 연구심이 실로 끝이 없다는 것을." "좋습니다. 이쪽도 그때까지 토우레를 철저히 조사해 보는 겁니다." 노지러스 인의 자료실을 조사해 보았다.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우주 항해의 기록을, 일종의 비디오 테이프에 기록해 두고 있었다. 비임은 기술에 대해서는 육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 노지러스 인과 오랫동안 같이 생각한 까닭에, 얼마 안 되어서 그 사용 방법을 알아냈다. 재생 방법이 이루어진 순간, 그의 입에서 부르짖음이 새어 나왔다. "이것은 그 사고의 기록이다!" 모두 곧 모였다. 노지러스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의 스위치는 끄고, 화면의 영상만을 남겨 두었다. 사건을 직접 목격한 비임이 해설을 한다. "노지러스 인은 어느 때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물체는 약 1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 토우레와 평행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운석?" 하고 프리튼이 물었다. "아니오. 몰랐는데 거기에 이상야릇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 보십시오. 자주 발화 신호 같은 것이 번쩍 번쩍 빛나는 것이 있지요.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지요. 하여튼 노지러스 인은 조사대를 내 보내기로 했습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말입니다. 노지러스 인으로는 움직임이 느려서 아무래도 무리였죠. 대원은 오하라 선장 외 10명. 어찌 된 까닭인지 토우레에는 구명정이 없었으므로 모두 우주복을 입고 출발했습니다. 결국 우리들도, 노지러스 인도 우주의 신비라는 것을 너무나 얕잡아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10명이 에어 록에서 차례 차례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토우레의 서치라이트도 100킬로 앞까지는 닿지 않습니다. 대원들의 소형 로켓의 섬광도 곧 꺼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최후의 모습이었습니다." 큐르비들은 숨을 죽였다. 먼 과거가 되살아난 것이다. "보십시오, 오하라 선장의 목소리입니다. ‘물체는 접근 중, 검은 윤곽이 보인다. 이상하다.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부딪히면 큰일이다. 브레이크를 걸어라!’ 대원은 브레이크를 걸었지요. 그 순간……" 그러더니 비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눈은 스크린에서 떠나지 않았다. 돌연, 물체의 근처에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강렬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리고서 또 한 차례 오하라 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분사 빨리! 아아――" 그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불기둥으로 변했다. 불기둥은 모두 10개 일어나고, 이윽고 스크린은 깜깜해 졌다.   한참 동안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비임이 침묵을 깨뜨렸다. "이것이 오하라 선장들의 최후입니다.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심슨이 물었다. "전 우주가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우주의 신비의 한 구석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반물질입니까?" 라는 큐르비의 목소리도 흥분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며 비임은 말을 계속했다. "반물질이었습니다. 반양자(양자의 반대물로 양자와 접촉하면 서로 파괴되는데, 우주를 파괴하는 힘이 있다고 함), 반중성자 등으로 되어 있는 물질이죠. 처음부터 그것을 알아차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 빛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정말이군요. 태양계에서 날아온 우주진이 부딪쳐서 물질과 반물질이 서로 충돌하여 파괴되면서 빛이 된다……" 하고 프리튼이 중얼거리듯 말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아직 반물질 등은 이론으로 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거든요. 겨우 미립자 가속 실험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였죠. 그것으로 만들어진 아주 작은 반물질이라도 백만 분의 1초만에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튼 무서운 체험이었습니다. 귀중한 체험이었죠. 동료 10명의 목숨과 바꾼 것이었으니까요." 큐르비는 어두운 얼굴로, "10명의 육체는 빛이 되고 말았다. 그 빛은 지금도, 아니 언제까지나 넓은 우주 속에서 점점 퍼져나가고 있으리라. 영원히 퍼져가고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몹시 이상한 기분이 되는군." 하고 조용히 말했다   메도우서의 수수께끼   "이봐, 반물질을 찾았니?" 하고 비디히가 손을 들고 물었다. 천체 관측 돔에서 내려온 프리튼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상 없어, 그런데 섭섭하게도 말야. 왜 하필 그런 반물질 같은 것인 이 우주에 뛰어 들어온 것일까?" "아마 반물질의 우주가 있었던 모양이지. 그것이 보통의 우주와 부딪쳐서 없어진 그 나머지인지도 모르지." 거기에 심슨이 끼여들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입자와 부딪쳐서, 대량의 반물질이 빛으로 다 변하지 않은 모양이야. 모두 꺼지지 않은 모양이지?" "음, 우주진이 아주 적은 곳을 헤매고 있다던가……" 이때, 큐르비의 발 옆에 누워 있던 메도우서가 갑자기 끙끙거렸다. "왜 그러니?" "노지러스 인이라도 왔나?" 큐르비는 메도우서를 데리고 사령실로 들어갔다. 하나 하나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공기 정화 장치, 공기 순환 장치, 온도 조절 장치, 방사선 방어 장치…… 모두 이상없다. 그러나 메도우서는 조용히 있지 않았다. 항법실의 문을 발로 끌어당긴다. "들어가고 싶니?" 개는 그렇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좋아. 말을 못하니 화가 나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이만큼 기술을 진보시킨 인간들도 너희들의 이야기를 모르니 할 수 없잖니." 항법실로 들어가자, 메도우서는 얌전해졌다. 자동 조정 장치를 본 순간, 큐르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곧 모두를 불러들였다. "뭐니, 왜 그래?" "보라고, 진로를 벗어나고 있다!" 과연 그러했다.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메도우서는 알았던 모양이야. 조종 장치에도 동력에도 이상은 없다. 그럼 어떻게 된 까닭일까?" "바깥의 영향일 것이다." 하고 프리튼이 얼른 대답했다. 비임이 그 말에 덧붙였다. "우선 생각되는 것은 천체의 중력입니다. 굉장히 큰 것입니다. 레이더에는?" 레이더 스크린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한데. 공간의 구조가 달라졌나?" "그럴 리는 없잖은가?" 문득 프리튼이 명안을 생각해 냈다. 전자 계산기로 진로의 근처에 있어야 할 천체의 크기와 방향을 조사하려는 거다. 메도우서는 얌전히 있다. 지금 같아서는 위험은 없는 것 같다. 이윽고 심슨이 넘어질 듯이 달려왔다. 흥분하고 있었다. "Wx33, Zr47 공역이다. 레이더를 그쪽으로 돌려라, 빨리!" 모두의 눈은 스크린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앗, 저거다!" "돌진해 온다, 무서운 힘으로!" "아니, 이쪽이 끌려 들어가고 있다. 비임, 역분사를 부탁합니다!" 하고 누군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이 위급한 때에도 비임은 침착했다. 입술에는 옅은 미소까지 어려 있다. 젊은이는 모험을 찾아서 덤벼들지만, 실제로 위험과 맞부딪치면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거다…… 그런 미소 같았다. 역분사가 시작되자 갑자기 몸이 몹시 무거워졌다. 언제 끝날지 모를 것 같은, 그런 긴 시간이 흘렀다. 속도는 조금씩조금씩 줄어들었다. 살아난 것이다. 토우레의 동력이 괴상한 별의 중력을 이겨낸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야. 메도우서의 덕택이다. 얼떨떨한데……" 하며 프리튼은 이마의 땀을 훔쳤다. 모두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되돌아왔다. "도대체 그게 뭐였지?" "음, 계산기로 알아낸 중력은 대단했다. 그러니 거리를 알 수 없으므로 별의 질량도 모르겠어. 가령 3백만 킬로미터 앞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태양보다 훨씬 클 거다."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크다면 보일 것이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 여기는 어두운 우주니까." "그러나 태양만큼 크다면, 빛을 내지 않아도 먼 별의 빛을 몇 개인가는 받고 있을 게 아닌가?" 하고 프리튼은 반신반의했다. 그러자 심슨이 자료를 가져왔다. "레이더로 거리를 알았어. 2백 33만 1천 4백 킬로미터." "뭐라구? 지구와 달까지의 거리의 단 6배가 아닌가. 이거야말로 태양계의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크게 놀라게 할 대 발견이다." "그렇다." 하고 심슨은 이렇게 말했다. "질량은 태양과 같으나, 지구보다 작은 별이다. 전파를 내지 않으므로, 가까이 갈 때까지 알 수 없다." 프리튼이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그렇다면 사멸한 백색 왜성이다. 밀도는 지구의 30만 배쯤 된다." "원통하군. 착륙해서 표본을 가져올 수 없으니 말야!" 비디히가 이렇게 말하자, 비임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비디히, 저 별의 표면에서 당신의 체중이 어느 정도 되리라고 생각하나요? 알겠어요, 태양의 표면에는 지구에서의 무게가 29배나 되요. 그런데 태양과 그 별의 질량은 같아요. 그러나 태양의 반지름이 69만 5천 킬로미터에 비해, 그 별은 불과 5천 킬로미터 남짓해요. 말하자면 그 별에 내렸을 때, 태양의 표면보다 중력의 중심이 139배 가까이 되는 겁니다. 중력은 139의 제곱이니까, 1만 9천 3백 21 배지요. 지구상의 경우와 비교하면, 거기에 또 89배를 하는 거지요. 즉 56만 3백 9배가되는 겁니다. 당신은 지구에서 몇 킬로그램이었지요?" "80 킬로였죠" "그렇다면 그 별에서의 당신 몸무게는…… 놀라지 마시오, 4만 4천 8백 23톤 7백 20 킬로그램이 되는 거요." 모두 어이없이 웃었지만, 그 숫자가 가진 의미를 알고서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윽고 심슨이 말했다. "이름을 붙여 놓자구. 폴리페스모가 어떨까? 그리스 신화 중의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이지. 아무튼 이 별도 옛날에는 태양과 같은 항성이었다. 행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찾아볼까요, 비임?" "그래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폴리페스모 가까이는 있지 않을 겁니다. 태양계의 가장 안쪽에 있는 수성도 태양에서 6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철저하게 찾아봅시다. 어떻게든 해보는 겁니다."   암흑의 세계   위험한 항성, 폴리페스모는 날이 갈수록 멀어져가고 있다. 어느 날, 비임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물체 발견, 제 3 레이더 스크린의 방향에!" 발사된 레이더의 전파는 스크린에 똑똑히 빛의 점을 만들고 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러나 광학 망원경으로도, 전파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매우 가까워져서야 겨우 대체적인 형태를 알게 되었다. 프리튼이 자료를 가지고 왔다. "지름 7천 2백 킬로미터. 내가 태어난 화성보다 조금 작다. 폴리페스모부터의 거리는 3억 킬로미터. 태양, 화성간보다 조금 멀다. 착륙해 보자." "아니, 우선 물질을 조사해 봐야지요. 오하라 선장의 예도 있으니까." 라고 말하는 비임은 언제나 신중하다. "좋습니다. 섬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해서 손해볼 것은 없어. 로켓 존데(기상관측용의 기구)를 쏘아보자. 곧 준비하겠다. 만약 그 별이 반물질로 되어 있으면 흰 빛, 보통의 물질이면 붉은 빛이 보일 거다."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심슨은 이 음산한 별을 케르베로스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을 지키는 개의 이름이다. 이윽고 로켓은 행성까지 날아갔다. 목표의 별은 눈앞을 거의 가리고 있다. 하늘에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커다란 구멍 같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인광을 내고 있다. 몇 분이 지나갔다. 붉은 빛이 번쩍 나타나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괜찮다, 위성 궤도로!" 토우레는 케르베로스 상공 8백 킬로미터의 궤도에 들어섰다. 탐험 대원은 큐르비, 프리튼, 비임 3명으로 정해졌다. 심슨과 비디히는 토우레에 남게 되어 기분이 언짢았다. 스틱스 호를 보트 대신으로 사용하여 무사히 착륙했다. 서치라이트로 사방을 비쳐 보았으나, 어느 곳도 바위뿐 아무것도 없다. 스틱스 호는 다시 날아올라, 대기도 없는 사멸된 행성 케르베로스의 상공을 낮게 날며 돌아보았다. 로켓의 불꽃으로 땅 표면의 모습은 대체로 알 수가 있다. 한참 날아갔을 때, 언덕이 보였다. 여러 군데 땅이 갈라져 갔다. "됐다, 여기에 착륙하는 거다." 우주복을 입은 채 세 사람은 주의하면서 지면에 내렸다. 프리튼은 땅이 갈라진 바닥 밑을 들여다보았다. 큐르비는 조심하라고 무선으로 말했다. 가이거 계수관이 울리고 있다. 방사능이 있다는 증거이다. "괜찮아, 큐르비. 생물이 있었지는 않은 것 같다." "어때, 슬슬 되돌아갈까?" 하고 큐르비가 말했을 때, 프리튼이 갑자기 외쳤다. "앗, 빛이!" 두 사람은 달려갔다. 땅이 갈라진 옆에는 가이거 계수관의 소리가 높이 울렸다. 과연 빛이었다. 약하기는 하나, 분명히 인광이었다. 땅의 갈라진 벽을 따라, 깊은 바닥에서부터 천천히 땅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방사선 금속의 광맥이겠지. 조사해 볼까?" "좋아." "진짜 광맥일까요? 그렇다면 너무 곧은데요." 이럴 때의 비임의 육감은 놀랄 만큼 날카로워진다. 이 빛의 줄기를 1킬로미터쯤 따라가니, 줄기는 땅 표면으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반대쪽에서도 같은 빛의 줄기가 올라와서, 거기서 마주치고 있다. 곁으로 가서 조사하던 프리튼이 또 큰 소리로 외쳤다. "보라, 보라구!" 프리튼의 라이트가 비치고 있는 것은 인공의 것이었다. 빛의 줄기가 마주친 데에 굴뚝이 있고, 거기에 사다리가 달려 있지 않은가! 큐르비가 그것을 잡고 선뜻 내려가려고 하는데, 비임이 말렸다. "큐르비, 프리튼, 이것은 인간용이 아니오. 간격이 대단히 넓어요. 거인이 아니면 내려갈 수 없어요. 더욱이 방사능도 강하고, 그 곁에는 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의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뮤리우스 제독으로 하여금 태양계 최고 위원회에 부탁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군요. 대규모의 탐험대를 조직하도록 부탁하는 겁니다. 선뜻 물러설 줄 아는 용기도 중요한 것이지요." "뭐라고요? 여기까지 와서 말입니까!" 하고 프리튼은 발로 땅을 차며 원통한 듯 말했다 "로프를 사용해서 내려갈 수 없을까?" "이봐 프리튼, 비임씨의 말이 옳다. 무턱대고 할 수는 없쟎아. 지금은 제대로의 장비조차 없어. 이것보다 헤르메스 2세 호의 구조가 더 중요해." 큐르비는 대장이다. 그래서 비임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단지 연구하기 위해서 사다리의 재료를 좀 깎아 두었다. 깎는 도구가 없어서 가까이의 단단한 돌을 사용했다. "석기 시대 같군." 하며 큐르비는 웃었다 비임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가장 무리 없는 방법이 가장 신용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겠지요." 토우레에 되돌아와서도 그들 사이에는 의논이 여러 가지였다. "땅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케르베로스라는 이름이 점점 알맞아 가는데……" "지하에 생물이 있다고 말하는 건가?" "어쩌면 별의 내부는 아직 따스할지도 모른다." "진짜 상태를 알고 싶구나." 이때, 비임이 입을 열었다. "나의 의견은 좀 다릅니다. 빛과 줄기는 상공에서 잘 보일 것입니다. 표지 같은 것이나 아닐는지. 그 별에 고등 생물이 살고 있다고는 아무래도 생각 안 돼요. 그렇잖으면 어떤 우주선을 위한 보급 기지 같기도 하구요. 연료나 식량 말입니다. 그것으로서는 알맞은 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 염려가 우선 없습니다. 우리들이 발견한 것도 실로 우연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노지러스 인의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무 소리를 들은 일이 없으니까." 심슨이 탄복하며 말했다. "과연 자네들이 안 내려가길 잘했어. 어떤 도난 방지 장치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운명과의 경주   토우레가 헤르메스 호를 뒤쫓는 진로로 되돌아오자, 얼마간은 아무 일이 없었다. 토우레의 거주실에서 심슨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눈을 돌려, 옆에 있는 비임에게 물어 보았다. "비임씨, 당신은 대체 몇 살입니까?" "반갑지 않은 질문인데…… 그럼, 내가 되묻겠는데 얼마나 되어 보이지? 그 헤르메스 호의 일을 모른다고 치고 말야." "에…… 많아도 45세. 오히려 시간과는 관계없어요……" "그 말대로 시간과 관계가 없다고 할까. 나는 노지러스 인과 함께 광속으로 우주를 나는 동안, 시간을 잊고 말았어요. 지난번에 지구에 되돌아가서 그 해를 알았을 때 실로 놀랐어요. 내가 태어난 해는……" 하고 비임은 심슨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심슨의 얼굴은 갑자기 굳어지며, 눈을 있는 대로 떴다. "그렇다면…… 70세!" 비임은 쓸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메스 2세 호는 양로원이지. 그때만 해도 대원 중에서는 내가 제일 젊었었는데……" "그러나 비임씨…… 비임씨는 조금도 늙어 보이지 않아요." "그것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아무든 시간의 팽창이라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도 학자들의 이론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지요. 그러나 제대로 증명되어 있지는 않아요. 우리들의 입장도 그러해요. 시간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시계와 달력으로서 비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엥게라도스 기지를 출발할 때, 시계를 맞춰 놓고 그때부터 계속 지구 시간에 의하고 있지요? 거기에 계속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고 있고요. 태양계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 비교하면, 확실히 우리들의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이지요." "적어도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예컨대 지구상에서는 1년이면 시드는 풀도 우주 스테이션에서 재배하면 몇 년 동안 싱싱하게 푸를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시간 팽창의 예 중 하나지요."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가이들도 암흑 성운의 탐험을 포기하고, 이쪽으로 되돌아온답니다. 제발 무사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거듭했는데, 이런 불행한 사고로 죽는다면 분하고 분한 일입니다." "정말이다. 임시로 끼워 맞춘 우주선이니까 더욱 안타깝다." 하고 비디히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려면 14일 걸립니다. 그러나 어쨌든 급히 서둘러 봅시다." 비임은 힘주어 말했다. 혜르메스 2세 호는 점점 상태가 나빠져 갔다. 토우레도 전속력을 다 내어 계속 날고 있지만, 우주는 넓고도 넓다. 큐르비가 무전실에서 되돌아왔다. "산소 예비 탱크, 이제 1개밖에 안 남았대! 탄산가스가 심할 텐데……" "제발 참고 견디어 줬으면……" 라는 비임의 목소리는 차라리 기도에 가까웠다. "가이는 의사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지." 헤르메스 2세 호에서의 통신은 5일째 끊겨 있었다. 화학 처리로 탄산가스를 해가 없도록 할 수는 있으나, 산소가 자꾸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졸린다…… 하고 말해 올 뿐. 토우레는 운명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될 최후의 순간에 부닥쳤다. 8일째 되는 날 이상한 일이 있었다. 메도우서가 갑자기 짖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 듯이 짖었다. 모두는 소름이 끼쳤다. "가이 박사들은 죽은 것일까?" "설마 죽을 리가…… 다른 위험에 부닥쳤겠지." 레이더로 사방을 수색해 보았지만, 아무 일도 없다. 이윽고 메도우서도 잠잠해졌다.   뜻밖에!   "보인다!" 레이더 스크린에 조그만 빛의 점이 나타났다. 다섯 사람은 숨을 죽였다. 이번에는 비임, 심슨, 그리고 의학에 소질이 있는 프리튼이 구원하러 가기로 되어 있다. 늦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으면? 토우레에 비하면, 꼬마 헤르메스 2세 호는 마치 아이들 장난감 같았다. 세 사람은 우주복을 입고, 에어 록으로 달려갔다. 길고 긴 시간이 흘렀다. 남은 두 사람은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저쪽에 심슨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없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다! 온통 비어있다." "그럴 리가?" "정말이야. 아무리 찾아보아도……" 곧 비임과 프리튼도 나왔다. 세 사람은 모두 토우레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비임의 손엔 한 장의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렌 가이의 편지가 있었어. 큐르비, 읽어 주지 않겠어요?"   비임, 잘 있거라   큐르비는 소리를 내어 읽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헤르메스 2세 호를 떠난다.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안심하길. 조금만 잘못했어도 위태로울 뻔했다.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구조는 뜻하지 않던 곳에서 왔다. 당신들이 노지러스 인이라고 부르고 있는 생물의 우주선이, 돌연 옆에 갖다댄 것이다. 곧 사정을 알고 우리들을 수용해 주었다. 지금은 아무 이상이 없다. 당신들을 만나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옛 고향을 잊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들은 다른 세계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지구에 되돌아간다 해도 오히려 당황할 뿐이다. 우리들의 운명의 길은 노지러스 인에게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들은 지금 우리들의 생명의 은인도 된다. 우리들은 그들의 곁에 남기로 결심했다. 노지러스 인들은 우리를 그들의 별로 데려가 준다고 약속했다. 언젠가는 또 다시 인간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우리들은 이 대우주에 생겨난 2개의 문화를 연결하는 선구자가 될 것이다. 우주의 고등 생물에는 탐구심이 강했다. 우리들도 그 탐구심 때문에 노지러스 인에 붙잡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분하고 슬펐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인간과 노지러스 인과는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서로의 이익이 되는 길이다. 바로 지금부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들은 그들에게 토우레와 거기에 타고 있던 노지러스 인의 운명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들은 당신들에게 토우레를 양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기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하지. 토우레는 아직도 바이러스로 더럽혀져 있으니까." 하고 심슨이 불쑥 말했다. 가이 박사의 편지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노지러스 인이 태양계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의 별과 더불어 이 태양계를 지키려 하고 있다. 양쪽 인류가 다시 만나는 날은 언제일까? 그건 그들도 모른다. 부디 토우레로 뒤따라오지는 마시라. 이것은 그들의 희망이다……」   꽤 오랫동안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코튼 비임이 얼굴을 들었다. "큐르비, 당신은 토우레의 선장입니다. 노지러스의 우주선과 연락해도 괜찮을까요?" "목적은요?" "나중에 얘기하겠소 부탁이오!" 큐르비는 한동안 생각하고 나서, "좋습니다!" 라고 말하자, 비임은 무전실로 사라졌다. 얼마 안 되어 되돌아온 그의 눈에는 굳은 결의가 번쩍이고 있었다. "비디히, 당신은 환경 엔지니어입니다. 헤르메스 2세 호를 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부탁하오. 그리고 큐르비 대장, 여기서 작별을 고하고 싶습니다. 지금 노지러스 인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헤르메스 2세 호를 타고 그 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거기가 바로 내가 돌아갈 장소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토우레에 스틱스 호를 싣고 태양계로 돌아가 주십시오. 무선이 말을 들으면 뮤리우스 제독과 페드로프 대장에게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만, 여기서는 너무나 멀군요. 양해하십시오. 20 명의 동료……" "알았습니다, 비임씨.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힘이 미치는 데까지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안 계셨더라면 이런 훌륭한 모험도 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고 큐르비는 비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친구로서 지냅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거든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태양계 요새의 벽을 천천히 닦고 계십시오, 라고." 네 사람은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헤어짐의 고통은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비임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선생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관측 돔에서 네 사람은 비임이 탄 작은 우주선이 별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윽고 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구나. 메도우서가 짖은 것은, 레이더 전파 흡입 장치를 달고 있는 노지러스 인의 우주선이 바로 옆을 지나갔을 때였던 거야. 알았어." "그렇다. 자, 보고할 것이 산더미 같다. 모두 자기 자리로 갈 것. 엔진 전속력! 태양계로 진로를!" 하고 큐르비가 호령하자, 제각기 자기의 위치로 흩어져 갔다.       작품 해설   우주의 신비   인류가 정말 우주에 진출하면, 반드시 여러 가지의 이상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큐르비 등이 체험하는 수많은 사건은 공상만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다소 낯선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 몇 개를 간단히 설명하고, 우주의 신비를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전파 천문학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발달한 레이더 기술을 응용하여 전혀 새로운 천문학이 탄생했습니다. 별에서 오는 빛이 아니고, 전파를 잡아서 연구하는 전파 천문학. 이것은 하늘이 맑지 않아도 상관없으며, 그 덕택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별이 우주에는 꽉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보통의 망원경을 사용하는 광학 천문학과 서로 힘을 합해, 우주의 신비를 풀어 나갈 것입니다.   백색 왜성   희고 작은 별입니다. 시리우스의 반성은 반지름이 지구의 2배인데, 문제는 놀랍게도 질량이 태양과 거의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 별의 형태가 성냥갑 만한 것이라도 무게는 1톤이나 됩니다. 그것은 그 별을 형성하고 있는 물질의 원자핵과 원자핵이 매우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데, 대우주는 이러한 별에서 발생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반물질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작고 작은 태양계 우주와 같은 것으로서, 1억을 줄지어도 겨우 1mm쯤 될 정도입니다. 태양에 해당되는 플러스(+)의 전기를 띠고 있는 양성자와, 전기를 띠지 않은 것이 중성자, 이들이 원자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둘레를 행성처럼 돌고 있는 것이 마이너스(-)의 전기를 띤 전자입니다. 그런데 원자핵 파괴 장치 기계 안에서 마이너스 전하를 가진 "반양성자"를 만들었습니다. 만듦과 동시에 사라지고 맙니다만, 이러한 "반물질" 만으로 이루어진 우주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우주에서는 전기성이 모두가 반대입니다. 중성자와 같은 전기성이 없는 소립자는 자기의 성질이 반대로 됩니다. 반물질의 세계에 사는 생물도 같아서, 우리들은 절대로 반물질 세계의 생물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서로 악수라도 한다면 무서운 폭발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 우주의 별과 반물질의 별이 충돌하여 폭발하면 재도 가스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감마선이 방출될 뿐입니다.   광속과 시간   빛의 속도와 맞서는 속력으로 몇 년인가 우주를 날고 온 파일럿이 그리운 지구에 돌아와 보니, 동생이 자기보다 더 늙어 있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거리라는 것으로 생각해 볼까요. 어떤 배가 500킬로미터 항해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이 거리는 지구상의 한 점에서 본 것이고, 지구 그 자체의 자전과 공전을 계산에 넣는다면 그 배가 실제로 이동한 공간의 거리는 전연 틀리는 것이 됩니다. 말하자면 거리, 속도, 시간이란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것입니다. 로켓이 빛의 99%에 달하는 속도로 날면 거기에서의 1년은 지구상에서의 7년에 해당되고, 속도를 99.99%올리면 실로 70년에 해당되게 됩니다. 파일럿의 속력은 그 영향을 받아서 느려질 것입니다. 제트기가 음속을 돌파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광자 로켓이 광속의 벽과 겨누기에는 더욱 큰 일이겠지요. 원자의 저항이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은하계의 우주 공간에는 1입방 센티미터에 1개의 수소 원자가 있습니다. 광속의 3분의 1로 날아도 1초간에 180억의 양성자와 전자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견고하게 만들지 않으면 우주선은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작자 돌레짤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SF작가인데, 비인 공과 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에서 1945년까지 비인 방송국에서 과학 담당의 기획을 맡아보았습니다. 또 1949년까지는 비인 천문대에서 연구를 하고, 오스트리아 우주 과학 협회 사무장도 지낸 바 있습니다. 정확한 과학 지식과 따뜻한 휴머니즘이 넘쳐흐르는, 소년을 위한 건강하고 즐거운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태양계 요새 SF세계명작 20   인 쇄      1975년 10월 5일 발 행      1975년 10월 10일 역 자      이 인석 제 판      명립 정판사 오프셋     장원 정판사 인 쇄      일신사 제 본      양지실업(주)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 회관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5가 19-29       등록 1975. 2. 26. 제 2-213호       전화 (26) 1975, (26) 1970    
1088    황혼의 타임 머신 - 강 민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편 댓글:  조회:533  추천:0  2021-03-20
황혼의 타임 머신   강 민 작   에스에프 세계 명작 한국 SF작가 협회 편   강 민 o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수료 o 월간 「학원」 편집장 o 월간 「주부 생활」 편집국장 o 현대시인, 문인 협회, 팬클럽 한국 본부 회원 o 한국SF작가 협회 회원 o 현 금성 출판사 편집국장   ■ 편집 위원 아동 문학가 이원수․박홍근 / 문학 박사 최인학 공학 박사 양옥룡 / 이학 박사 김희규 전 교육감 김성목 표지 그림 신동우 / 속 그림 최충훈   이상한 통···················· 4 여기는 어디냐?················· 11 주문국과 솔본국················· 16 철민, 두령(頭領)이 되다············ 29 잊어버린 숙제·················· 36 강미화 선생 납치되다!·············· 43 든든한 구원대(救援隊)············· 49 황솔을 사로잡다················· 55 그림자 없는 적(敵)··············· 62 솔본국의 패배·················· 68 도둑맞은 타임머신················ 80 중대한 회의··················· 83 솔본국의 솔솔이················· 87 허실음양(虛實陰陽)의 싸움··········· 93 솔본의 화공(火攻)··············· 101 두 사람의 솔솔이················ 113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라!············ 119 주스와 스테레오················ 126 강적(强敵), 왕호룡·············· 133 심야(深夜)의 활극··············· 141 온(溫) 솔솔이의 소원············· 149 솔솔아, 용서해라!··············· 155 연(鳶)과 로켓················· 165 드디어 결전(決戰)··············· 174 최후의 비책(秘策)··············· 181 슬픈 승리!·················· 187   ■ 작품 해설·················· 194   이상한 통   저녁 노을이 비낀 서울의 거리는 벌써 건물의 그림자며 전신주와 그늘이 길게 뻗쳐 있었다. 쉴 새 없이 줄을 잇는 자동차의 행렬도 허둥지둥 클랙슨 소리를 울리고, 시장 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의 발걸음도 바빠져 갔다. 아직도 훤한 하늘에 이미 네온사인이 깜빡이기 시작하며 얼마 후에 다가올 밤을 맞이하듯이 화사한 인공(人工)의 무지개를 그려 내고 있었다. "철민아, 너 저기 건널목 곁에 있는 고물상에 가 본 일 있니?" 용재가 물었다. "아니, 없어. 고물상이라면 옛날 골동품 항아리나 불상(佛像) 따위를 팔고 있는 곳 말이지. 넌 그런 곳에 무슨 흥미가 있니?" "아냐, 그게 아냐! 그 고물상에는 말이야, 망가진 텔레비전 부속품이랑 전기 청소기의 모터 같은 걸 팔고 있어. 조금만 고치면 쓸만한 걸 말이야." "허, 그래." 철민과 용재는 중학교 2학년생, 같은 학급의 친구였다.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둘이 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친한 친구 사이다. "야, 철민아, 우리 잠깐 거기 좀 가 보자. 응, 재미있는 것들이 많단 말이야." 철민의 마음은 용재의 말에 완전히 이끌려 버렸다. "그래 좋아 가 보자. 그렇지만 그걸 보면 곧 돌아가야 해. 너무 늦으면 집에서 혼나." "알았어. 나도 그렇게 오래 있을 순 없으니까." 두 사람은 당장 눈을 반짝거리며 급한 걸음을 옮겼다. 고물상은 건널목 곁의 상점들이 늘어선 한 모퉁이에 있었는데,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았다 철민은 벌써부터 이 가게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안에 들어와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곰팡내가 나고 먼지가 수북히 쌓인 가게 안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가게의 천장에는 불그스레한 백열등(白熱燈)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용재는 익숙한 듯이 주루루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한 구석에 쌓인 쇠붙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과연 그것은 용재의 말대로 내장(內臟)을 드러낸 텔레비전이며 전기 청소기 따위의 잡다한 기계류의 더미였다. "철민아, 이 텔레비전, 여기만 고치면 쓸 수 있을 것 같다." "아, 넌 참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지." "허, 이 모터면 아이들 하나쯤은 태우고 달리는 전차도 만들 수 있겠는 걸." 두 사람은 완전히 열중해 버렸다. "철민아, 난 지금 신문 배달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돈을 모으면 이 모터하고 저기 저 소형 변압기(變壓器) 망가진 걸 사려고 해." "그래." 그러는 동안에 철민은 숱한 먼지투성이의 기계류 속에 무슨 부속품인지 알 수 없는 묘하게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조그맣게 정돈된 무슨 장치가 섞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직경이 10센티미터 가량의 둥근 통으로서 전에는 완전히 금속판으로 덮여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커버를 끼웠던 볼트의 구멍만이 남아서 그 내부의 매우 복잡한 배선(配線)이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었다. "용재야, 이게 뭘까?" "어디 봐." 용재는 얼굴을 맞대고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 "모르겠는데, 굉장히 배선이 복잡하구나. 그보다 이쪽에 있는 이 핸드 토키 좀 봐." 용재는 아마 그 기계에는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철민은 그 기묘한 기계가 괜히 마음에 들었다. 똑같이 망가진 기계라도 모터나 전기 청소기보다는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가 더 공상(空想)을 자극한다. 마침내, 철민은 가게의 구석 자리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이 고물상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저씨, 이 기계는 뭐예요?" 주인은 신문에서 눈을 떼고, 그 기계를 흘깃 보고는 다시 철민을 보고 말했다. "아, 그것 말이지. 나도 뭔지 잘 모르겠다. 한 반년쯤 전에 다른 기계하고 같이 사들였는데, 어디다 쓰는 건지 통 알 수가 없구나. 그래서 어떻든 거기 놓아 두었는데, 넌 그게 뭔지 알겠니?" "나도 모르니까 물었죠. 아저씨, 이것 얼마예요?" 주인은 신문을 놓고, 새삼스럽게 그 묘한 기계를 살펴보았다. "글쎄, 한 500원 받을까?" "500원이요? 너무 비싸요." 주인은, 다시는 철민이 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철민아, 철민아, 이제 가자. 너무 늦었어. 집에 가면 혼날 거야." 용재가 서둘러댔다. 철민은 용재의 뒤를 따라 고물상에서 나오면서 다시 한번 돌아다보았다. "500원……." 그 기계에 그 값이 비싼 것인지 싼 것인지 잘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그 때 철민은 그 기계가 무척 갖고 싶었다. 언젠가 낡은 자명종 시계를 수리했을 때의 그 흥분이 온몸에 생생하게 소생해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좋아, 난 그 기계를 고쳐 볼 테야. 어디에 쓰는 건지 연구해야지." "그만 둬, 그 따위 것에 공연히 헛수고하지마. 그보다 그 텔레비전을 수리하는 편이 돈벌이가 될 거야." 용재는 아무래도 텔레비전을 수리해서 아르바이트를 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아……" 철민이 자기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이동생 솔솔이가 뛰어나왔다. 솔솔이는 초등학교 6학년생. 철민에게는 매우 다정한 동생이지만, 때로는 엉뚱한 적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다. "오빠, 용재 오빠하고 건널목 곁에 있는 고물상에 들어갔었지. 난 다 알았어." "시끄러워. 잠깐 기계를 보고 왔을 뿐이야." "나 엄마한테 일러 줘야지." "요게!" 철민이가 주먹을 쥐고 한 걸음 다가서는데, "엄마, 엄마 오빠가……." 하며 솔솔이가 째지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뭐냐, 철민아! 넌 어디에서 놀다가 이제야 오고서 큰 소리냐!" 어머니의 음성이 철민이를 덮쳤다. 철민은 고개를 움츠리고 제 공부방으로 후퇴했다. "그 기계, 500원 이랬지……" 이 달의 용돈은 이제 거의 다 써 버리고 100원 가량밖에 안 남았다. 생각하면 점점 더 갖고 싶어져서 도저히 내달까지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저 저금통을 부수자. 저 속에는 아마 300원쯤은 들어 있을 거야." 그 저금통은 은행에서 얻어 온 것인데 여태까지 학용품을 사고 남은 잔돈을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철민이가 여름 방학에 학교에서 단체로 가는 해수욕장에 가기 위한 비용의 일부로 쓰게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철민은 괴로웠다. 여태까지 쓰고 싶은 것을 참고 모아온 것을 여기서 부숴 버리고 꺼내기는 좀 억울하지만, 결국 유혹에 지고 말았다. 철민은 일어나 책상 위에서 저금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힘껏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다. 덜컥! 깨진 저금통 조각과 숱한 동전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철민은 열심히 세기 시작했다. '어라, 420원이나 되는데, 됐어 됐어!" 철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는 많은 동전을 주머니에 털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현관으로 나왔다. "어머니, 나 잠깐 문방구점에 좀 갔다 오겠어요."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기 전에 벌써 철민은 밖으로 뛰어 나오고 있었다. 고물상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손님도 없었다. 철민은 아까 본 기계 앞에 몸을 구부려 그것을 집었다. 대부분의 기구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복잡하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철민은 기뻤다. 복잡하면 할수록 연구해 볼만한 보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전에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한 자명종 시계 따위는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아저씨, 이것 주세요. 500원이라고 하셨죠. 자요." "뭘 하려고 그러니, 그런 걸……." "어디에 쓰는 건지 연구해 보겠어요." "허, 그래. 알면 나한테도 가르쳐 주려무나. 뭔지 모르는 걸 팔면 어쩐지 마음에 걸리니까." "아, 그러죠." 기묘한 둥근 통은 철민의 수중에서 싸늘한 금속의 살갗을 하고 있었다. 철민은 걸으면서, 마음은 그것을 분해할 때의 스릴에 가득 차 있었다. 나사못이며 핀을 하나씩 풀어낼 때마다 번호를 붙이고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분해해 간다. 그리고, 완전히 분해되었을 때 다시 조립하는 것이다. 어느 틈엔지 철민은 가로등 불빛이 그리는 밝은 원 속에 서서 손에 든 둥근 통을 열어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통 밑바닥에 조그만 손잡이가 달려 있었는데, 손에 들고 걷고 있는 사이에 진동으로 거기가 차츰 느슨해져, 흔들거리고 있었다. 철민은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으로 그것을 잡고 힘껏 돌렸다. "빠져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손잡이는 텔레비전의 다이얼을 돌리듯 좌우로 자유롭게 회전시킬 수가 있었다. "이걸 돌리면……." 철민은 그것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렸다. 갑자기 둥근 통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찌잉 하고 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둥근 통의 내부에서라기보다 어딘가가 철민을 에워싼 공간의 한 부분이 세차게 찢어지는 듯한 심한 울림이었다. 철민의 눈앞에서 모든 빛이 사라졌다.   여기는 어디냐?   많은 사람들의 외침 소리가 드높게 들리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몸 곁을 아슬아슬하게 짐수레에 가득히 살림살이를 실은 사람들이 달려 지나갔다. "왜 그럴까, 저 사람들은." 철민은 머리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심히 허둥대는 사람들…… 그것은 예사 일이 아니었다. "어럽쇼!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쓰러져 있을까." 거기는 수풀에 에워싸인 조그만 마을의 변두리였다. 반쯤 잡초에 뒤덮인 밭이 마을의 뒤켠 수풀 저쪽에 펼쳐진 들판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을의 일부에 불이 나고 있었다. 붉은 불길은 수풀의 상공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긴 어딜까? 그리고 난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철민이 여태까지 전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길도 방향도 모르겠는데, 대체 여기는 서울일까?" 철민의 가슴에 시커먼 불안이 솟아올랐다. "그렇지! 난 고물상에서 그 둥근 통을 사오는 길이었지." 허둥지둥 둘레를 살펴보니, 그것은 방금 쓰러져 있던 곁에 떨어져 있었다. 철민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자기의 신상에 큰 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예감이 철민의 가슴을 숨막히도록 조여들었다. 우선 저기 불타는 마을로 가서 현재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아, 내가 혹시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려서……." 그것은 실로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소동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집이 불타서 쓰러지는 소리하며, 남녀의 비명,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폭풍처럼 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 때 왼쪽의 숲 속에서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저마다 손에는 곡괭이며 죽창(竹槍) 따위를 들고 있다. 철민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붉은 불빛 속에 철민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은 우르르 뒤로 물러나 손에 든 무기를 겨누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엇인가 소리쳤다. 철민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들을 항해 도리어 소리쳐 물었다. "왜 그러죠, 모두들. 그리고 여긴 어디죠? 가르쳐 줘요." 집이 다 탄 모양으로 둘레가 한 순간 밝아졌다. 그 불빛 속에서 철민은 정말 깜짝 놀라도록 제 눈을 의심했다. "뭐, 뭐예요! 그 모양은……." 그들 속에서 특히 몸집이 건장한 사나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게 취하고 무시무시한 살기(殺氣)를 풍기며 철민을 살폈다. "네 놈도 솔본국 놈이냐?" 철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솔본국?" "네 놈도 솔본국의 한패지. 잘 걸렸다 이놈. 남의 마을을 불사르고 네 놈들은 성할 것 같으냐! 덤벼라, 이놈!" "이봐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솔본국이니 마을을 불살랐다느니, 난 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그보다 불을 끄는 게 어때요." "음, 이 나쁜 놈!" 사나이는 죽창을 꼬나 쥐자 철민을 향해 총알처럼 덤벼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 철민은 위기 일발에서 겨우 몸을 피했다. 정통으로 맞으면 틀림없이 몸을 다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으나 학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체육 시간을 좋아하고 운동 신경도 남달리 예민한 철민이었으므로 그 정도의 죽창 공격쯤은 피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왜 이래요. 그만 둬요!" 철민은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그 사나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공격을 피했을 때, 철민의 가슴에는 심한 노여움이 치솟았다. 순간,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어 야구 투수가 던지는 식의 강속구(强速球)로 상대방의 미간을 노려 던졌다. 사나이는 이마를 싸쥐며 땅 위에 뒹굴었다. 그 손에서 죽창이 날았다. "보았죠! 대답하지 않으면, 저 사람처럼 되는 거예요. 빨리 대답해요. 빨리, 여긴 어디죠?" 그들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철민은 돌을 주워 들었다. "말하지 않겠어요!" 그러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이 부근은 주문국의 XX마을이라고 합죠." "주문국의 XX마을?" "예." "무슨 구(區)냔 말예요." "무슨 구라니 무슨 소립네까?" "이봐요, 여긴 서울이 아네요!" "서울요? 글쎄요 들어본 일이 없는뎁쇼." "그만둬요! 이젠 됐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렇게 이상한 상투를 틀고 있는 거예요?" "상투? 아, 이것 말입죠. 왜라니 그저……." 철민의 가슴은 차츰 크게 파도치기 시작했다. 목이 말라서 머리 속이 불타는 것 같았다.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필사적으로, '침착해라, 침착해!' 하고 외치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리는 것을 이를 악물어 겨우 참았다. 꿈이냐, 생시냐! 아니, 꿈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미쳤단 말인가? 아니다. 결코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철민은 어지럽게 밀려오는 심한 현기증 속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난 아무래도 옛날로 잘못 들어온 것 같다. 이것은 어쩌면…… 아니, 틀림없다. 아, 이 일을 어쩐담,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간담?' 절망이 철민의 온몸을 휘감았다. "아! 솔본국 놈들이다. 솔본국 놈들이 왔다!" 사나이들은 금방 허둥대기 시작했다. 철민이가 보니까 마을 저쪽에서 짙은 갈색 옷을 입은 기묘한 차림의 사나이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리고 철민이가 서 있는 것을 보더니, 그들은 날카로운 칼을 거꾸로 쥐고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회오리바람처럼 달려들겠지. 철민은 저도 모르게 떨어져 있는 죽창을 집어 들고는 몸을 낮게 굽히고 죽창을 겨누었다. "음, 내가 이런 데서 죽을 줄 알구." 수풀이 환하게 타올랐다.   주문국과 솔본국   정면의 사나이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왔다. 철민은 저도 모르게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순간, 그 사나이는 나는 새처럼 대지를 박찼다. 긴칼이 타오르는 불꽃에 붉게 빛났다. 일순 철민의 죽창이 원을 그리며 세차게 움직였다. 사나이가 용수철처럼 멋진 폼으로 뛰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손쉽게 죽창의 한 끝으로 툭 밀어 쓰러뜨렸다. 갈색 옷의 사나이들은 썰물처럼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 심한 불꽃이 철민이들이 있는 위로 새빨간 눈보라처럼 떨어져 왔다. "앗 뜨거!" 철민은 떨어지는 불꽃을 죽창으로 털었다. 그 틈을 노렸는지,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철민의 얼굴을 겨냥해서 날아왔다. "에잇!" 철민은 재빨리 죽창 끝으로 그것을 쳐버렸다. 그런데 하나, 또 하나……. 그것은 총알처럼 울리며 날아왔으나 첫번째 것을 쳐내고 나자, 나중은 편했다. 딱! 딱! 딱! 철민의 발치에 맑은 금속음을 내면서 그것은 떨어졌다. 그것은 끝이 날카롭게 뾰족한 표창이었다. 철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 이것 큰일났구나. 아마 이놈들은 옛날의 무사(武士)거나 산적 패거리인 모양이다. 그림에서 본 것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고, 저 표창만 해도 굉장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데서 이런 기묘한 놈들에게 죽임을 당하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철민의 눈은 궁지에 몰린 맹수처럼 빛났다. "에잇……." 죽창을 꼬나 쥐자, 철민은 맹렬한 기세로 달렸다. 가까이에 있던 한 놈의 몸 어딘가에 죽창이 예리한 소리를 내면서 부딪쳤다. 철민은 죽창을 마구 휘둘러 댔다. "물러나라! 물러나!" 어디선가 누가 외치고 있었다. 그 소리에 발맞추듯 갈색 옷의 사나이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처럼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자리에는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 둘이 길게 뻗어 있었다. 철민은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이미 서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몹시 지쳐 있었다. 화재가 난 곳의 불길은 낮게 땅 위를 기고 있다. 그 붉은 빛 속에 몇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달려왔다. 그 뒤에서 곡괭이며 낫을 든 사나이들이 조금 뒤떨어져 겁먹은 얼굴로 어슬렁어슬렁 따라 오고 있다. 선두에 선 몇 사람은 바지 가랑이를 추켜 올리고 긴 칼자루를 잡은 채 철민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수상한 놈, 순순히 말을 들어라!" 말투로 보아, 그들은 아마 치안(治安)을 담당한 무사들인 것 같았다. "도대체 왜들 이래요? 그리고 지금 몇 시쯤 됐죠?" 무사들은 철민의 말에 흠칫 놀란 듯이 발걸음을 멈추고 심한 놀라움을 온 몸에 띄우며 돌부처처럼 몸이 굳어졌다. 그제야 그들은 철민의 학생복이며 부수수한 머리 따위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어떤 놈이냐? 어디서 왔지?" 무사의 음성은 들떠서, 말끝은 우습도록 떨리고 있었다. "난 돌아가고 싶어요. 여긴 어디죠?" 그들이 그 길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으나 철민은 속으로 비는 듯한 심정으로 물었다. 겸손하게 굴면 어쩌면 철민을 도와 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내 이름은 철민이고 서울 ○○동 157번지에 살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불식간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제 그 곳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갑자기 철민의 가슴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솟아올랐다. '아, 괜히 잠자코 집을 빠져 나왔구나. 저금통을 부수고……. 어머니.' 철민의 마음 속에서 언제까지나 음식물의 냄새가 나던 부엌 옆방의 일체가 갑자기 환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큰일났구나. 어떻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쯤 집에서는 나를 찾고 있을 텐데……. 이제 곧 저녁 식사시간이거든.' '아버지, 어머니, 솔솔아!' 철민은 속으로 절규했다. "이봐, 잠자코 있으면 알 수가 없잖아. 빨리 대답해 봐." 다급한 음성이 귓전에서 들렸다. 철민은 흠칫 놀라며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찔하던 철민의 고독감은 당장 현실로 되돌아 왔다. 무사들은 온몸에 살기(殺氣)를 띄우고 철민을 포위했다. "저어, 나리, 잠깐 말씀드릴 것이 있는뎁쇼." 무사들 뒤에 있던 사나이들 중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낫을 든 중늙은이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어떤 무사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 소곤거렸다. "음, 음, 그래. 그러면 저기에 쓰러져 있는 솔본국 놈들은 저 소년이 쓰러뜨렸단 말이지. 음, 그러면 우리편인지도 모르겠군. 어떻든 지금은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잠깐만……." 그 무사는 방금이라도 덤빌 듯한 동료들을 말리듯이 두 손을 좌우로 펴고, "잠깐만, 지금 좀 묘한 얘기를 들었오. 저 소년은 아마 우리편인 모양이오." "뭐라고? 저 소년이? 그럼 솔본국 놈이 아니란 말씀이오." 무사들은 갑자기 생기가 나며, 기분 나쁜 듯이 뒤로 물러섰다. "저 옷차림이라든지, 지금 솔본국 놈들을 쓰러뜨린 재주로 보아 이건 확실히 보통 소년이 아닐 것이오. 그러니 이 문제는 차라리 사또께 여쭈어 보도록 합시다" 한 무사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불탄 자리에서 약한 불길이 일었다. 거기에 물을 퍼붓고 다니는 사나이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검게 떠올라 보였다. 솔본국 무사들에게 습격을 받은 이들의 집 내부에서는 뒤치다꺼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타다 남은 관가(官家)의 사랑채에서 철민은 사또라는 사나이와 마주 대하고 있었다. "난 이 고을 사또 정형룡인데, 아까의 활약은 굉장하셨소. 어떻든 이름 있는 분이겠소만, 지장이 없으면 성함을 알고 싶소." "철민, 서울에 있는 △△중학교의 2학년생입니다." "△△중학교? 허허허, 그건 무슨 중앙의 암행어사의 조직인가요?" "암행어사 조직이요? 아닙니다." "상당히 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그건 무슨 제복(制服)이오?" "참 말귀도 못 알아들으시네요." "……?" "어떻든 좋습니다. 그 보다 사또! 이 소동은 대체 무슨 일이죠?" 철민은 점점 귀찮아졌다. 이런 곳에서 돌대가리 무사들을 상대로 일일이 대답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차츰 분노로 변했다. "이봐요. 사또, 아까의 그 소동은 어찌된 일이냔 말입니다." 철민은 분노 끝에 그렇게 고자세로 윽박 질렀다. 사또의 얼굴에 별안간 두려움의 빛이 나타났다. 혹시나 중앙에서 내려온 암행어사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가는 후일에 자기 입장이 곤란해진다. 상부에 무슨 보고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소년은 나이는 어리지만 굉장히 지체가 높은 인물인지도 모른다. 사또는 순간 그렇게 생각하자,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약간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아, 그 문제에 대해선 전일에 상세한 보고를 상부에 올렸습니다만……. 여하간 솔본국 놈들은 조직적이고 기세도 당당해서 이쪽에서도 몰아내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려. 면목이 없습니다." 사또는 우선 말씨부터가 공손히 달라졌다. "솔본국 사람들이 어째서 침입해 오느냐 말입니다." "전일에 상부에 보고 드린 바와 같이……." "상부에 보고한 건 알았으니까, 이제 나한테 설명해 달란 말예요." 그러면서 철민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켰다. "……예, 죄송합니다." 사또는 정말 걱정스러웠는지 몸이 굳어져, "그게 좀 묘한 문제 때문입니다그려. 원래 우리 주문국과 솔본국은 한 나라였는데, 어느 땐가 두 왕자가 태어나서 당시의 왕께서는 나라를 둘로 갈라 두 왕자에게 계승케 했죠. 그래서 이후 이 두 나라는 좋은 형제 국으로 몇백 년을 이어 내려오다가 근래에 와서 주문국에 흉년이 들어, 변방의 백성들이 작당해서 솔본국에 몰려들어가 농산물을 훔쳐 오기가 일쑤여서 우리 주문국에서도 그 행패를 자율적으로 단속해 왔습니다. 그런데도 솔본국에서는 앙심을 품고 조직적인 게릴라를 투입해서 우리 나라의 변방 마을을 불사르고 인명을 살상(殺傷)하게 되었소이다." "허, 그래요. 남의 나라의 곡식을 훔쳐오는 주문국 사람들도 나쁘지만, 인명을 살상하는 솔본국도 나쁘군요." "말씀대로 입니다." 그러면서 사또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철민을 상부에서 내려온 암행어사쯤으로 알고 있는데, 주문국과 솔본국의 관계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철민은 그것을 재빨리 눈치챘으나 시치미를 뚝 떼고 "그래,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또는 고개를 숙이고, "예, 그래서 상부의 지원을 받아 유능한 무사 20여 명이 이곳에 와 있습니다만, 워낙 솔본국 게릴라들의 기세가 강해서 도저히 물리칠 길이 없소이다." "물리칠 길이 없다니, 사또께서는 그렇게 멍청하니 있을 게 아니라, 무슨 방법을 생각해야 될게 아닙니까?" "예, 예……." 사또는 방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 때, 이웃 방의 장지문이 슬며시 열리며 한 무사가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어사께서 가지고 계시던 것이 아닌지요. 방금 아랫사람들이 가지고 왔습니다만……." 그들은 철민을 이미 중앙에서 내려온 암행어사로 단정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 기묘한 둥근 통이었다. "아, 그건 내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철민은 두 손으로 둥근 통을 받았다. 그것을 본 사또는 바로 이 때라는 듯이, "그럼, 이제 야식(夜食)이라도 드시고 편히 쉬시지요." 하며 허둥지둥 방에서 나갔다. 철민은 방 한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서 멍하니 외로움과 싸우고 있었다. 솔본국이니 주문국이니, 정말 엉뚱한 곳에 휘말려든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면 어찌하나…… 아버지, 어머니도 못 만나고, 솔솔이며 용재, 그 밖의 다정한 친구들도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 빠져 버렸을까. 아아, 그 때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옛날로 날아올 만한 무엇인가 특별한 짓을 나는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철민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그 건널목의 고물상 앞거리 가로등의 둥근 불빛 밑에서 나는 이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둥근 통의 밑바닥에 달린 손잡이가 느슨해진 것을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갑자기 현기증이 날 듯한 기대(期待)가 충격처럼 철민의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혹시! 아, 제발 그래다오! 철민은 저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둥근 통을 뒤집어 보니, 손잡이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 정신 없이 그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렸다. 둥근 통의 내부에서 무엇인가 찡하게 울렸다. 그것은 둥근 통의 내부에서라기보다 철민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의 일부분이 세차게 찢기는 듯한 격심한 울림이었다. 철민의 눈앞에서 모든 빛이 사라져 갔다. …… 커다란 덤프 트럭이 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철민은 맥이 쭉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돌아온 것을 기뻐하기 전에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뒤 같았다. "왜 그러니? 어디 몸이라도 아프냐?" 지나가던 사람이 철민을 들여다보았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철민은 둥근 통을 들고 일어섰다. 벌써 시간은 여덟시가 넘어 있었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오자, "철민아! 너 여태까지 어디 갔다 왔니? 저녁도 안 먹고……." 평소엔 상냥한 할머니도 지금은 무서운 눈으로 철민을 노려보았다. 철민은 변명하는 것도 잊고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너 저금통을 부수고 돈을 꺼내 갔었구나. 그 돈을 쓸 때는 어머니하고 상의한 다음에 쓰기로 하구서. 무얼 했니?" "이거예요. 묘한 기계가 있어서……." "아무리 묘한 기계가 있더라도 저녁 식사도 안하고 잠자코 가는 법이 어디 있니!" 솔솔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오빠, 저금통을 깨뜨렸으면 나한테 꾼 돈 갚아야 될 게 아냐." 철민은 한껏 무서운 얼굴로 솔솔이를 노려보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들고나서도 철민은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오늘의 그 기묘한 경험이 아직도 온 몸에 뜨겁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첫째, 그 둥근 통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옛날로 가 버렸다. 그리고 왼쪽으로 다시 돌렸더니 이 곳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어쩌면 언젠가 책에서 읽은 타임 머신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분해해서 내부를 조사하느니 조그만 더 그대로 두고 다시 써 보자. 둘째, 나는 솔본국 무사들과 싸웠다. 무사들이란 굉장한 무술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 스포츠를 했고, 또 영양분이 풍부한 것을 실컷 먹고 있다. 이쪽이 체력도 있고 운동 신경도 더 발달해 있는 셈이다. 그 놈들의 표창보다 학교의 야구부에 있는 이태현 군의 속구(速球)가 오히려 더 빠른 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이태현 군의 투구를 가끔 홈런을 날리지 않는가. "그렇지!" 철민은 벌떡 일어났다, 집 안은 모두 잠들어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가만히 전등을 켜고 벗어 두었던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 긴 끈을 끄집어내어 둥근 통을 묶어 가지고 목에 걸었다. 손전등과 성냥을 주머니에 넣고, 또 책상 서랍에서 딱총 알을 움켜서 종이에 싼 후 이것도 주머니에 넣었다. 현관으로 나왔으나, 신발을 신으려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양말을 둘 껴 신었다. "이제 됐다!" 둥근 통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약간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결단을 내려 오른쪽으로 돌렸다. 다시 무엇인가 찌잉 하고 찢어지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며 희미하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을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철민은 허리까지 닿는 풀숲 속에 서 있었다. 아까 왔던 마을 뒤켠에 있는 들판인 것 같았다. 철민은 풀밭을 헤치면서 조용히 마을로 다가갔다. 불타버린 집의 기둥이 기분 나쁘게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집을 지나 철민은 마을로 들어섰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꼭 유령의 거리 같잖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때 희미하게 공기가 움직였다. 그것은 발자국과는 다르다, 인간의 호흡에 의해 흩어지는 공기의 흐름 같았다. "누군가 숨어 있구나!" 철민은 걸음을 멈추고 땅 위에 몸을 낮게 웅크렸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에게 발견되지 않고 이쪽은 어두운 밤하늘에 상대방을 비쳐 볼 수가 있는 것이다. 20미터 가량 전방의 한 그루 나무 밑에 한 사나이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바짓단을 동여매고 등에 칼을 메고 있다. "이놈은 솔본국 놈일까, 아니면 주문국의 무사일까?" 이윽고, 그 사나이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민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어떤 지점을 향해 발소리를 죽여 가면서 접근해 가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잘 보이도록 철민도 자리를 바꾸고 있었다. "쉿!" 말이 되지 않는 기합 소리가 튀어나오며 그 사나이의 오른손에서 무엇인가가 날았다. 쨍그렁! 쨍그렁!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발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핫하하!! 네까짓 주문국 놈들한테 잡힐 줄 아냐, 이 바보 같은 자식들아!" 표창에라도 얻어맞은 듯한 주문국 사람의 신음 소리가 낮게 들렸다. 철민은 그늘 속에서 뛰쳐나갔다. 솔본국 무사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전등을 내밀고 재빨리 켰다 껐다 했다. 그 빛을 받고 갈색의 옷을 입은 사나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다. "어때, 눈이 부시지? 이것이 유명한 광선 눈가리개다!" 철민은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며 그를 놀려댔다. 뒤켠 지붕 위에서 소리없이 또 하나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음, 이 괘씸한 놈!" 그 그림자는 괴물처럼 두 손을 벌려 철민의 머리 위로 바람을 일으키며 떨어져 왔다.   철민, 두령(頭領)이 되다   순간, 철민이 옆으로 몸을 피하며 손에서 무엇인가를 뿌린 것과 그 뿌려진 것 위로 검은 그림자가 떨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탕! 탕! 탕탕-! 무서운 폭음이 어둠을 찢었다. 검은 그림자는 그 폭음 한 가운데서 정신 없이 손발을 휘젓고 있었다. "음, 내가 실수를 하다니……." 어금니를 악문 신음 소리가 들렸다. "핫하하, 딱총 폭탄 위로 떨어지다니, 바보 같은 녀석!" 어디선가 철민의 드높은 비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고막이 터지고 기력과 함께 방향 감각을 잃고 허둥지둥 달아나려던 솔본국의 무사는 경비하던 주문국 사람들에게 당장 붙들려 버렸다. "아, 정말 훌륭하셨오, 어떠한 무술인지 모르지만 정말 귀신이 곡할만한 활약이었소이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중앙 당국에 대한 체면상, 언제까지나 진압을 하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사또의 목이 잘릴 위험도 있다. "사또!" "예!" 철민은 눈쌀을 찌푸리고 사또를 흘겨보았다. 체격이 좋은 철민 쪽이 15센티 가량이나 키가 컸다. 그렇지 않아도 사또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있다. "솔본국 놈들이 둘이나 숨어 들어와 있는데도 주문국 쪽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군요. 이렇게 경비가 소홀해서야 쓰겠습니까?" "진정 면목이 없소이다. 하지만 우리편 무사들도……" "아니, 그래 가지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난 약간 환멸을 느꼈습니다." 사또는 몸둘 바를 모르고 움찔움찔했다. "참 그렇게 하지…… 이봐요 사또, 내가 주문국의 무사들에게 신식 무술을 가르쳐 주기로 하죠." 여태까지 책에서 읽은 여러 개의 무용담이며, 갖가지 무술이 철민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신식 무술이 과학적이어야만 되는 것이죠. 즉, 합리적이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 예, 예……." 사또는 필사적인 표정으로 철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님은 젊었을 적에 당시 한학자(漢學者)로서는 상당히 유명했던 박한수(朴漢洙) 선생에게서 희귀하도록 학문을 쌓고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 이 기묘한 소년의 말을 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또는 내심 당황함과 동시에 등줄기에 오한이 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알겠죠, 사또?" "예, 그저 탄복할 따름이올시다." 사또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이미 이 지경에 이르면 안다 모른다가 문제가 아니다. 그저 면접 시험을 받는 학생처럼 겁이 났다. "자기 혼자서만 공을 독점할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여러 사람에게 협력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죠." "예, 예."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면 어디에 숨어야 하는가, 무엇을 이용하면 좋은가, 자기가 벌레나 작은 동물이 된 기분으로 생각해 봐야 되는 거죠. 이것은 즉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인 것이오. 알았죠, 사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철민의 말투에는 어느덧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반말기가 섞였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곧 주문국의 무사들을 부르시오." "예!" 경비하는 무사 몇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이 마을 중앙의 광장으로 모였다. 모두들 깊은 호기심과 다소의 두려움을 품고 모닥불에 비치는 철민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당신들의 대장은 누구요?" 철민의 말에 호응하여 한 사나이가 일어났다. 몸집이 작은 사나이였지만 바위 덩어리처럼 탄탄한 체격이었다. "주문국의 땅벌이라고 합니다." "땅벌? 이상한 이름도 있군." "죄송합니다." 원래는 무사로서의 점잖은 이름이 있겠지만, 그들은 주문국 연방 경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비밀 조직의 요원인 관계로 그런 이상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별로 죄송할 것은 없소. 그런데 땅벌 대장, 여러 가지 가르칠 일이 많지만, 우선 당신들이 입고 있는 옷, 그것은 말이오. 이건 도리어 좋지 않소. 밤에 활동하는 데는 짙은 그린 색이거나 초콜릿색이 좋은 법이오." 그러자 땅벌 대장은 긴장하여 반문했다. "그 뭡니까…… 그린 색이라든가 초콜릿색은 대체 어떤 색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짙은 녹색이거나 갈색에 가까운 붉은 빛을 말하는 것이오. 밤이라고 해도 그 옷 빛깔처럼 주위가 새까매지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도리어 더 눈에 띄기 쉬운 거요. 밤의 어둠 속에서는 짙은 녹색 같은 것이 어둠에 흡수되어 눈에 덜 띄게 되는 것이오." "예, 예!" "당장 옷 빛깔을 바꾸시오. 그리고 야간에는 절대로 칼을 빼지 마시오. 별빛을 받아 반사하니까 자기가 있는 곳을 알리는 셈이 되는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적을 쓰러뜨리죠?" "적을 쓰러뜨릴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적에게 쓰러지지 않을 생각을 해야 하오. 아무래도 칼을 빼야 할 때는 칼집 채 빼시오." "으음,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분의 말씀은 모두 우리 주문국에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술의 비전(秘傳)속에 있는 것이오. 철민 선생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소이다. 아까 보이신 솜씨라든가, 그저 탄복할 뿐이외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우리들의 두령이 되시어 우리를 이끌어 주실 의사는 없으신지?" "이끌어 달라면, 즉 명령해 달라 이 말씀인가요? 좋습니다." 철민이도 이제는 자유로이 돌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속이 편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땅벌은 만면에 기쁜 빛을 띄우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좋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너희들의 두령으로서 너희들을 지휘한다. 땅벌 다음의 간부들은 이름을 대라!" "철새랑입니다." "매미랑입니다." "돌쇠랑입니다." "저는 수풀랑이라고 합니다." 모두들 괴상한 이름의 네 사나이가 공손히 절을 했다. 그 사나이들은 모두들 굉장한 전투력을 지닌 육체의 소유자였다. 철민을 에워싸고 있는 10여 명의 주문국 무사들 속에 아까부터 줄곧 무엇인가 집념이 가득한 눈초리로 철민을 지켜보는 한 사나이가 있는 것을 이 때 철민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면 4사람이 한 조가 되어 분대를 만든다. 이 4사람은 절대 흩어져서는 안되며 늘 함께 행동한다. 그리고 땅벌랑 지금 경비에 나서고 있는 사람까지 합쳐서 모두 몇 사람이 되오?" "모두 17명입니다." "좋소, 그럼 4개 분대를 만들 수 있겠군. 4분대의 분대장 철새랑, B분대는 매미랑, 알았나. C분대는 수풀랑, D분대는 돌쇠랑이 맡는다. 땅벌랑은 내 부관(副官)이다!" "예이!" "D분대는 이 곳에 남아 예비대(豫備隊)가 된다. A․B․C 각 분대는 마을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을 지켜라." "두령, 그러면 남쪽은 어떻게 합니까?" "남쪽은 비워 둬라. 그곳으로 솔본국 놈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적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고요?" "들여놓지 않고는 언제까지나 승패가 나지 않을 게 아닌가. 그보다는 일부러 틈을 주어 마을로 들어오게 한 후에 독 안에 든 쥐 꼴로 만들어 대번에 처치해 버리는 것이다." 땅벌랑은 이 대담한 전술에 완전히 넋이 나가 그저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그와 함께 점점 더 철민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깊어진 것 같다. "땅벌랑, 사또에게 전달해서 마을 남쪽에 개인호를 파게 하시오." "개인호라면……?" "정말 바보 같은 친구로군. 혼자 들어갈 수 있는 참호 말이오. 그곳에 사또의 부하를 한 사람씩 숨겨두는 거요." "알았습니다." 땅벌은 그림자처럼 달려갔다. 잠시 동안 마을 남쪽의 나무들 사이에서 비밀히 작업을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그것도 끝났는지 으슥한 밤의 고요가 물 속처럼 둘레를 에워쌌다. "오지 않는군요." 어둠 속에서 땅벌랑의 말이 들렸다. "아무리 솔본국 놈들이라도 밤낮으로 침입해 오지는 않겠지." 철민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하품이 새어 나왔다. 생각해 보면, 평소 같으면 지금쯤은 벌써 잠자리에 들 있을 시간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돌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궁둥이가 아팠다. "두령, 내가 일어나 있을 테니까 저리 가서 한잠 주무시지요." 땅벌랑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 그럴까." 철민은 일어나서 다시 한번 하품을 했다. 한 번 잠이 오면 견딜 수가 없다. 철민의 지금 소망은 그저 잠자리에 드는 일 뿐이다. 이제는 주물국도 솔본국도 통 생각이 없었다.   잊어버린 숙제   "철민아, 철민아, 언제까지 자고 있을 셈이냐. 학교에 늦는다.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아침에 늑장을 부리다니……. 쯧쯧!" 어머니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크, 야단났구나!" 철민은 벌떡 일어나 던져 두었던 바지를 꿰어 입고 웃옷을 걸쳤다. 베갯맡의 시계는 이미 8시 20분을 지나 있었다. 앞으로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교과서와 노트를 가방 속에 던져 넣자 현관을 뛰쳐나갔다. "철민아! 너 어젯밤에 그렇게 늦게까지 어디 갔다 왔니? 그 말을 하기 전에는 학교에 못 간다." 어머니의 화난 음성이 배후에서 철민의 등줄기를 찔렀다. 이어서 더욱 두려운 제 2 탄이 날아왔다. "철민이 너 요즘 통 공부를 하지 않더구나. 웬일이냐?" 평소에는 말이 없는 아버지까지도 꾸중을 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늦게까지?" 철민은 문득 발을 멈췄다. 어제 밤이라니? 늦게까지? 일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철민의 마음 속에서 작열했다. "아차!" 그랬었구나. 그 때 나는 잠에 못 이겨 잠자리에 들 작정으로 집에 돌아와 버린 것이다. 땅벌 녀석이 저리로 가서 자라는 바람에 그만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버렸던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주문국 사람들은? 그 후, 솔본국 놈들이 침입해 오지나 않았는지. 철민은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몸이 굳어졌다. "철민아, 어서 대답해 봐. 어젯밤엔 아버지랑 솔솔이까지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어제 어딜 갔다 왔느냐 말이야?" 안에서 아버지의 무거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철민아,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치면 못 써!" 이제는 꼼짝달싹도 못하고 당할 판이다. 철민은 가방을 옆에 끼자, 아무 소리도 없이 바람처럼 현관에서 달려나갔다. 어떻든 학교에 늦어서는 안 된다. 주문국 사람들과의 약속이 마음에 걸렸지만 학교에 늦으면 방과후에 청소 당번을 해야 한다. 그리고 클래스의 결의로 금주엔 절대로 지각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클래스 위원인 민식이놈은 까다롭단 말이야.' 철민의 클래스에서는 아침 조회 전에 위원이 지각한 사람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어디 두고 보자!" 철민은 달리면서 중얼거렸다. 솔본국 무사의 얼굴과 출석부 조사 위원의 모습이 불꽃처럼 교차되었다. 철민이 숨을 헐떡거리며 교실로 뛰어드는 것과 담임 선생인 강미화 선생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나타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민식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연필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철민아, 너 겨우 시간에 대어 왔구나." 여느 때의 철민이라면 여기서 한 마디 하겠지만 오늘 아침엔 그대로 제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첫째 시간은 수학……. 수학은 좋아하는 학과 중의 하나였다. 이모저모 생각하다가 겨우 문제를 풀었을 때의 기쁨은 크다. 그런데도 성적이 더 오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시험이 되면 다소 당황하기 때문이다. 수학은 담임이며 이 학교의 유일한 여선생인 강미화 선생 담당이다. 달걀형의 얼굴로 머리를 한데 묶어 치켜올리고 있다. 강미화 선생은 교과서를 집어 들자, 물방울 같이 시원한 눈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57페이지의 응용 문제는 숙제였다. 그러면 누가 나와서 흑판에 쓰도록, 누가 좋을까 응, 철민군." 철민의 등줄기에 뜨거운 소름이 끼쳐 내렸다. '큰일났구나! 숙제를 깜빡 잊었구나.' 온몸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어제는 학교에서 돌아오자, 곧 그 고물상에 달려가고 그 후, 주문국과 솔본국 사이의 싸움에 말려들고, 또……. "왜 그러니? 철민이 너 숙제 안 해 왔구나." 철민은 고개를 숙였다. "네, 잊고 왔습니다." 강미화 선생은 천만 뜻밖이라는 듯이 눈쌀을 찌푸리고, 철민을 흘겨보았다. 철민이 수학 숙제를 잊고 오다니, 여태까지 없는 일이었다. "잊고 왔다니 왜, 무슨 일이 있었니?" 담임 선생이 아니라면 그저 주의만 듣고 말 것을 담임 선생인 경우에는 클래스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지도에까지 주의가 미치므로 생도로서도 우물쭈물 넘길 수가 없다. 철민은 궁지에 몰려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을 의식했다. "깜박 잊어 먹었습니다." "어제는 집에 가서 한 번도 가방을 열지 않았구나. 가방을 열고, 수학 교과서나 노트를 보면 자연히 숙제가 있는 걸 알 텐데……." "죄송합니다." 사실 선생님 말씀대로였다. 찍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논리 정연한 말씀만 하시니까 여선생은 질색이란 말이야. 철민은 어물어물 자리에 앉았다. 강미화 선생은 철민이 충분히 반성했다고 생각한 모양, 다른 학생들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그 이름을 불렀다. "그 두 번째와 세 번째 문제는 모두 방정식을 이용해서 식을 만드는 거예요." 철민은 어느 사이엔가 문제를 푸는 데에 열중했다. 그 때, 문득 철민의 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속삭임처럼 멀리서 차츰 힘을 잃어 가며 철민의 귀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슨 소리일까, 저건." 철민은 연필을 든 손을 멈추고, 그 소리 없는 소리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것은 차츰 분명한 의미를 이루며 철민의 귀에 들려왔다. '……두령!…… 두령!……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구원해 주십시오.' 철민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저 소리는 땅벌의 소리다!" 옆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철민의 그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일제히 철민을 쳐다보았다. "뭐예요, 철민군!" 강미화 선생이 창가에서 그렇게 주의했다. '…… 두령, 솔본국 놈들의 새벽 공격에 아군은 고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화술(火術)에 걸려 마을은 불타고…… 이제는 우리도 마지막입니다…… 두령……' 땅벌의 음성은 처절하게 들려온다. 그것은 필사적인 힘으로 두령으로 모시는 철민을 찾아 외치고 있었다. 철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땅벌랑, 이제 곧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라.'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치자 철민은 일어났다. 교과서와 노트를 가방에 던져 넣자, 그것을 끼고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선생님, 집으로 가 봐야겠습니다." "집으로 가다니? 왜?" "저어,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럽니다. 부탁입니다." 철민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벌써 교실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어이가 없어 가만히 보고 있던 강미화 선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만 기다려, 철민아 너 그 태도가 뭐냐?" 그 소리를 뒤로 흘려버리며 철민은 가방 속에서 그 둥근 통을 꺼냈다. "참 그렇지!" 복도 구석에 있는 붉은 소화기(消火器)를 옆에 끼고 둥근 통의 손잡이를 힘을 주어 돌렸다. 철민의 뒤를 쫓아온 강미화 선생이 철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철민군, 이리 와요, 교실로." 강미화 선생은 여태까지 볼 수 없던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철민은 일순 망설였다. '…… 두령, 두령께서 계시면 이렇게 패하지는 않았을 텐데, 억울하오, 억울하오…….' "조금만 더 참아 다오, 땅벌! 위험해요, 선생님. 오시면 안 돼요. 이제 곧 간다." 세 가지의 소리를 한꺼번에 하면서 그 소리가 아직 사라지기도 전에 주위는 갑자기 불바다로 변했다. 검은 연기가 낮게 땅을 기고, 열풍 속에 칼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강미화 선생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철민은 소리쳤다. "나다! 내가 돌아왔다. 땅벌, 땅벌랑은 어디에 있소?" 그 소리를 향해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면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날아왔다. 다시 새로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철민은 강미화 선생을 부축이면서 필사적으로 달렸다.   강미화 선생 납치되다!   타오르는 불꽃은 잉잉거리며 무서운 소리를 내고 소용돌이쳤다. 어디를 보아도 둘레는 온통 불바다였다. 커다란 불똥이 눈보라처럼 온 몸에 떨어져 왔다. 머리며 옷, 눈썹까지도 따끔따끔 불똥에 타들었다. 뜨거움도 아픔도 문제가 아니었다. 철민은 윗도리를 벗어 김 미화 선생의 머리를 덮어 주었다. 정신이 나간 듯, 발걸음이 비틀거리는 강미화 선생을 얼싸안듯이 지키며 철민은 달렸다. 겨우 불바다를 벗어나, 불길이 닿지 않는 어두운 나무 그늘로 철민은 굴러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요. 오시면 안 된다는데도……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꼭 선생님은 무사히 모셔다 드릴 테니까 안심하세요." 선생님은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철민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아이 무서워. 이 불길은?…… 여기는 어디냐?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일까?" 강미화 선생은 얼굴을 들고 공허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학교의 복도에서 별안간 이 무서운 불바다와 칼싸움의 복판으로 끌려와, 아마 정신이 혼미해진 모양이다. 눈은 초점을 잃고 시선이 허공을 헤매었다. 철민은 강미화 선생의 어깨를 힘껏 뒤흔들었다. "정신차려요, 선생님. 난 솔본국 놈들을 무찌르러 저리로 가야 해요. 곧 돌아올 테니까, 선생님은 여기서 움직이면 안돼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강미화 선생은 흐릿한 눈으로 철민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철민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이제 곧 간다. 땅벌!" 철민은 소화기(消火器)를 꽉 끌어안았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자, 몸을 굽히고 총알처럼 다시 불바다로 달려갔다. "땅벌, 땅벌! 땅벌랑은 어디 있소?" 그러는 철민의 등에 번쩍 번갯불 같이 창이 날아 왔다. 순간, 철민은 그것을 피부 어느 곳에 느끼며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굽혔다. 그리고는 어깨 끝을 스치며 날아가는 창을 왼손을 뻗쳐 꽉 움켜쥐었다. "덤벼라! 솔본국 놈들!" 그 소리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철민 앞을 막아섰다. "좋아! 목숨이 필요 없는 모양이군." 철민은 창 끝을 곧장 뻗고 한쪽 발을 축(軸)으로 해서 빙그르르 돌았다. 긴 창칼 끝에 철컥철컥하는 충격이 왔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고, 우르르 물러나는 발자국 소리가 겹쳤다. 철민은 짐승처럼 등을 굽히고 소리도 없이 달렸다. 그 앞을 가로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땅벌, 땅벌랑은 어디 있소?" 솔본국의 정예 무사들이 대세를 회복하고 철민의 뒤를 쫓으려 했을 때는, 그 소리는 이미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심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하늘을 흐르는 불똥은 마치 급류(急流) 같았다. 철민은 주의 깊게 불길이 흐르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음, 마을 북쪽이로군." 철민은 검은 그림자가 되어 달렸다. 불길로 이루어진 듯한 숲 사이를 왼쪽으로 돌자, 거기 철민이 구하는 것이 있었다. "빌어먹을, 저따위 것!" 철민은 끼고 있던 소화기의 마개를 뺐다. 콕을 비틀자 소화제(消火劑)의 분말이 안개처럼 뿜어 나갔다. 그 안개가 뿌려지자, 그토록 맹렬한 불길도 갑자기 가라앉으며 흰 연기로 변해 낮게 땅을 기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던 불똥도 대번에 검은 그을음이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소화기를 몸 앞에 내밀고 철민은 돌격 태세로 들어갔다. 불바다는 순식간에 타다 남은 기둥이며 판자 벽으로 변하고, 검은 연기는 흰 연기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철민의 몸에 무엇인가 따끔따끔한 것이 부딪쳐 왔다.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에 철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소화제는 짙은 안개가 되어 둘레의 모든 것을 에워쌌다. "으음, 이거 안 되겠다. 모두들 후퇴하라!" 그 소리를 향해 철민은 창을 던졌다. 철민은 창던지기에도 자신이 있었다. 도시 대항 시합에도 선수로 뽑혀 출장한 적이 있었다. 역시 명중했는지 어떤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둘레가 조용해졌다. 철민의 눈앞에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바람개비가 장치되어 있었다. 나무 뼈대에 두껍게 종이를 바른 날개가 여섯 장, 그것을 회전시키는 긴 나무와 몇 개의 핸들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날개차(車)의 둘레에는 쌀겨가 드높이 쌓여 있었다. 그 쌀겨에서는 기름 냄새가 강하게 나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기름을 뿌린 쌀겨에 불을 붙여,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켜 날린 거로군. 솔본국 놈들, 제법인데 ……." 솔본국 무사들의 화공술(火攻術)은 정말 놀랄만 했다. 솔본국 무사들이 후퇴한 것을 알고 달아났던 마을 사람들이 줄을 이어 슬슬 돌아왔다. "아! 땅벌랑, 이게 어찌된 일이오?" 광장 구석에 부상자들이 누워 있었다. 땅벌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숨도 겨우 쉬고 있었다. 그래도 달려온 철민의 모습을 보더니, 핏기 없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아, 두령, 무사하셨군요. 두령이 안 계시는 동안에 이 꼴이 되었소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요 땅벌랑, 내가 잘못했소. 내가 없는 바람에 여러분에게 이런 폐를 입혔구려." 땅벌은 철민의 손을 확 움켜쥐었다. "두령, 고맙소. 그저 이 땅벌은 기쁠 뿐이외다." 이 우직한 중년의 무사는 자기들이 두령으로 모시는 인물에게서 친밀한 위로의 말을 듣고 그저 감격하고 있었다. 그 소박한 표현에 철민도 감격했다. "이봐요, 땅벌랑! 기운을 차려서 빨리 나아야 돼요. 내가 나중에 약과 몸보신(補身)이 될 음식을 갖다 드리겠소." 땅벌은 깊은 존경과 감사의 눈으로 철민을 바라보았다.   "각 분대 집합! 부상자는 그대로." 철민의 구령에 모여든 주문국의 무사들은 모두 형편없는 몰골들이었다. 옷은 불에 타고, 피가 얼굴이며 팔뚝에 말라붙어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톱니처럼 날이 빠진 긴칼을 지팡이 삼아 짚고 허덕이고 있었다. 이편의 손해는 뜻밖에 컸다. 살아 남은 사람은, 돌쇠랑, 매미랑, 그리고 험악한 눈초리의 고참 무사가 한 사람, 게다가 견습 정도의 젊은 사나이, 그 네 사람만이 겨우 부상을 입지 않아, 다음 싸움에 힘이 될 수 있는 정도였다. 땅벌랑과 철새랑은 중상(重傷)을 입고 있었다. 결국 17명의 주문국 무사들 중, 단 하룻밤의 싸움으로 반 이상이 전사를 하고 있었다. 마을의 반 이상의 집이 불타고, 사또의 집도 불이 붙어 모조리 재로 변했다. 이것은 명확히 솔본국의 승리였다. 철민은 아무 말도 없이 입술을 물었다. 그때, 철민은 중대한 일을 잊고 있음을 알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차, 강미화 선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철민은 헐레벌떡 강미화 선생을 숨겨 둔 나무 그늘로 달려갔다. 그 곳에 강미화 선생은 없었다. "선생님, 선생님, 어디 가셨어요. 어서 나오세요." 철민의 부름 소리는 덧없이 산울림을 부를 뿐이었다 "저건 뭘까? 종이 조각 같은데……."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나무 등걸에 못 박혀 있었다. 철민의 눈길은 그 종이 조각으로 흡수되었다.   「여기 있던 여인을 빌려 가오 - 인질금(人質金) 1천냥은 비싸지 않을 것이오. 내일 달이 뜨는 시간에 받도록 해 주시오. 깊이 생각하시길 바라오. 청솔」   먹빛도 선명한 그 글은 찍 소리도 하지 못하게 하고 싸늘한 느낌으로 철민의 눈길에 뛰어들고 있었다. 내일 밤, 달이 뜨는 시간에 1천냥과 강미화 선생을 바꾸자는 것이다. "아, 당했다, 당했어…… 빌어먹을…… 내가 졌구나, 졌어!" 철민은 머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나무 그늘에 숨겨 두었던 강미화 선생이 발견되어 인질(人質)로 납치 당한 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아, 그때 역시 다시 한 번 돌아가 강미화 선생님을 학교로 돌려보내 드렸어야 했는데…… 1천냥의 인질금을 어디서 구한담. 여기 사또나 주문국 무사들은 그렇게 큰 돈을 가지고 있을 리 없고……' 존경하는 강미화 선생이, 증오할 솔본국 놈들의 손에 납치된 이상 철민도 이제는 필사적이었다. 여태까지의 전쟁놀이 같은 기분으로는 여간해서 솔본국 놈들의 손에서 강미화 선생을 빼앗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선생님, 기운을 잃지 마세요. 꼭 내가 구원해 드릴게요." 철민은 목청껏 소리쳤다. 그것은 한 마리의 이리가 강적을 만나, 전투 개시를 선고하는 울부짖음 같았다.   든든한 구원대(救援隊)   철민은 네 사람의 주문국 무사에게 마을의 사수(死守)를 명령했다. 사건의 중대성 때문에 사또를 비롯하여 모두들 묵묵히 철민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 불쌍한 것은 사또였다. 철민의 불쾌한 표정이 모조리 자기의 탓인 양, 조그만 몸집을 더욱 쭈그리고 철민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 편의 인원은 갑자기 줄어버렸다.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기 위해 솔본국 무사들의 본거지로 침입해간다 해도 나 혼자서는 좀 기가 죽는다. 땅벌랑이라도 몸이 성하면 좋겠는데, 현재로서는 무리이고, 이걸 어쩔까?' 철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 학교 친구들의 응원을 바라면 되겠다. 용재 -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 남웅 - 힘이 세고 유도부의 선수다. 말이 없는 텁텁한 성격인데 신뢰할 수 있다. 종운 - 몸집은 클래스에서 제일 작지만 민첩하고 내 충실한 부하니까 함께 데리고 오자.' 철민의 가슴속에서 계획이 정리되었다. 철민은 자기가 없는 동안의 자세한 지시를 하기 위해 매미랑을 불렀다. 매미랑은 당장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매미랑! 내가 없는 동안은 매미랑이 책임자가 되어 주시오. 한시도 방심하지 말고 잘 해 주시오. 알았죠. 우리는 꼭 이길 것이오. 솔본국 놈들을 혼을 내 주는 거요." "알았습니다!" "좋소, 가시오!" 매미랑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철민은 목에 걸고 있는 둥근 통의 손잡이를 돌렸다. 철민은 노는 시간을 이용하여 세 친구를 교정으로 불러 냈다. "왜 그러니, 철민아. 강미화 선생님하고 같이 없어져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어." "강미화 선생님은 그때부터 교원실에도 안 오셨대. 국어 선생님이 이상한 일이라고 하시더군,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철민은 음성을 낮추어 "그 강미화 선생님 때문에 그러는데 말이야……, 놀라지 말고 들어줘. 사실은……." 놀라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은 무리다. 철민의 이야기에 세 사람은 완전히 놀라버렸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그들도 강미화 선생이 솔본국 무사들에게 납치 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낯빛이 변했다. 그리고 다시 철민이 세 사람에게 응원을 청하자 당장 흥분해서 철민을 둘러쌌다. "야, 굉장하구나 철민아! 네가 그러니까 주문국 무사들의 두령이 됐단 말이지?…… 좋아, 난 꼭 데리고 가 줘." "철민아, 그래, 언제 가는 거니? 지금 당장 가도 좋아." "아냐, 잠깐만 기다려. 지금 곧 세 사람이 갑자기 조퇴하면 학교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겐 그렇게 알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학교가 파한 다음에 우리 집으로 와 줘. 오늘밤엔 우리 집에 모여서 공부하는 걸로 하면 될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하자 이제 나도 무사가 되는 셈이지. 에헴! 팔이 운다 울어…… 자 들어봐." "바보 같은 소리 마, 종운아, 너 그건 윗도리의 소매가 흔들리는 소리야." "그림 부탁한다. 준비는 내가 해 둘게." 세 사람은 교실로, 철민은 울타리 사이를 빠져 밖으로 나갔다. 철민은 몰래 자기 방문을 열고 뒤꼍으로 해서 제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철민은 벽장에서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테이프 레코더, 자명종 시계, 확대경, 물통, 야구용의 스파이크, 알코올 램프, 펜치, 드라이버, 그밖에 손에 닿는 대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가방은 송아지만큼이나 부풀어올랐다. 거기에다 로프를 걸어 등에 지고 일어서니까, 그 무게로 다리가 비틀거렸다. 겨우 문을 빠져 나와 한 걸음 한 걸음 바깥 길로 나왔다. 약방에서 상처에 바르는 약과 붕대 뭉치를 사고, 계란과 우유를 사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웃 잡화상에서 작은 병에 든 위스키를 하나 샀다. 큰 것을 사고 싶었으나 이미 돈이 모자랐다. 위스키 병을 들고 가게를 나섰을 때, 철민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봐, 학생! 어딜 가는 거지? 오늘은 학교 쉬는 날인가가." 무거운 몸을 겨우 돌이켜 뒤돌아다보니 순찰 중인 경찰관 한 사람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철민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학생은 위스키를 산 것 같은데. 그건 설마 학생이 마시는 건 아니겠지?" "아, 이거요. 이건 땅벌랑에게 줄 거예요." "땅벌랑? 그건 누구지?" "주문국의 무사예요. 내 부하죠." "주문국의 무사? 네 부하?" "아, 그래요. 땅벌은 지금 중상을 입고 있어요. 솔본국 놈들한테 당했거든요. 좀 멍청한 데가 있지만, 좋은 사람이죠." 경찰관의 표정은 차츰 더 험악해졌다. 그 눈에 노여운 빛이 떠오르며 철민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잠깐 저기 파출소까지 좀 가서 그 가방 속을 보여 다오." "싫어요." "뭐! 싫다고." 경찰관의 굵은 팔이 쑥 뻗쳐 왔다. 순간, 철민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뒤에 남은 경찰관은 잠시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갑자기 부끄러운 듯한 얼굴이 되어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후, 위스키를 마시게 했더니 땅벌랑은 훨씬 기운이 났다. 특히 위스키가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땅벌랑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위스키에 입맛을 다시며 좋아하던 땅벌도 우유와 계란을 먹을 때는 보기에도 불쌍할 정도였다. 그러나 철민이 지켜보고 있으니 싫다고도 할 수 없다. 눈을 감고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철민이 잇달아 가방에서 꺼내는 여러 가지 기구는, 땅벌랑을 비롯한 주문국 무사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철민은 자명종 시계의 태엽을 감고 바늘을 맞췄다.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 벨 소리에 돌쇠랑은 반사적으로 품안에 품고 있는 단검을 빼어 들어, 여러 사람의 웃음을 샀다. 오후 세시. 철민은 다시 자기 집 문 앞에 나타났다. 10분쯤 기다리니까 용재를 비롯한 세 사람이 흥분한 얼굴로 나타났다. 철민은 그 세 사람에게 자기 소매를 잡게 하고, 그대로 땅벌랑들이 있는 마을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작전 회의가 열렸다. 주문국 무사들은 우측, 용재들은 좌측, 중앙에 철민과 땅벌랑, 그 아래쪽에 사또가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또, 솔본국 놈들의 본거지는 어디입니까?" 사또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한내 마을의 청명사(淸明寺)라는 절이 솔본국 청솔의 본거지라고 합니다." "음, 한내 마을이란…… 야 용재야, 지금의 한강 건너에 있는 어떤 마을인 모양이지." "아마 그럴 거야. 허지만 지금은 청명사라는 절이 없어." "그러면 사또, 그 솔본국 놈들 본거지의 수비 현황은?" 사또를 대신해서 돌쇠랑이 앞으로 나왔다. "아뢰옵니다. 그 본거지를 지키는 솔본국 놈들의 수는 18명, 철통진이라는 비법을 가지고 경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기껏해야 함정이나 파놓고, 화약이나 뭘 묻어 두었겠지." "예,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그 진을 깨뜨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알았오. 오늘밤 그것을 깨뜨리겠소. 용재하고 남웅이, 종운이, 그리고 돌쇠랑은 나를 따라 오도록. 매미랑은 땅벌랑을 도와 이 곳을 지키시오, 알았죠?" "예!" 이 때, 철민의 등뒤에서 땅벌랑이 희미하게 몸을 움직였다. 돌아다본 철민의 눈에 무서운 긴장감으로 얼굴이 굳어진 땅벌랑의 눈이 천장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요, 땅벌랑?" 철민의 음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좌악 하고 여러 개의 표창이 날아왔다. 여러 사람이 일제히 벽 쪽으로 몸을 피하는 것과, 천장의 복판이 뚫리며 검은 옷차림의 사나이들이 뛰어내리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 검은 옷차림의 사나이들을 향해 남웅과 종운의 손에서 벌써 두 줄의 로프가 뱀처럼 뻗어 공간을 날았다.   황솔을 사로잡다   "조심해라! 솔본국 놈들의 습격이다!" 종운이는 흘깃 철민을 돌아다보며 싱긋 웃었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바람처럼 마룻바닥 위에 내려선 채, 어떤 사람은 한쪽 발로 서고, 어떤 사람은 허리를 굽히고, 어떤 사람은 한쪽 무릎을 꿇어, 마치 기묘한 무용이 중단된 듯한 자세로 기분 나쁘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 한 순간의 동(動)에서 정(靜)으로, 얼음장같은 싸늘한 긴장 속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흘렀다. 남웅과 종운의 손에서 뻗어 나간 로프는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늘어나 솔본국 무사 두 사람의 팔과 다리를 얽어매고 있었다. 돌쇠랑과 매미랑도 긴칼을 반쯤 뺀 채 아직 공격 자세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눈에 들어가도 눈 한번 깜짝일 수가 없다. 한 순간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그것이 최후였다. '음, 이놈들은 굉장한데 여태까지의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구나, 그들도 드디어 주력(主力) 부대를 내보낸 모양이다.' 철민의 온몸의 근육은 처절한 싸움의 예감에 떨렸다. "덤벼라, 솔본국 놈들!" 현기증이 날 듯한 긴장감 속에서 철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얼음장같은 고요는 한 모퉁이에서 무너졌다. "제기랄…… 이게 뭐야. 무사들이란 좀더 근사한 줄 알았더니 천장에서 내려와 한쪽 발로 서 있기나 하구. 이건 꼭 사기 아냐?" "정말이야! 저것 좀 봐. 종운아, 저 친구는 꼭 WC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모양이야." 정말 이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농담이 여러 사람의 바늘 끝 같은 마음의 날카로운 밸런스를 깨뜨렸다. "후후후, 아하하하……." 남웅과 종운의 웃음소리가 폭발했다. 뜻하지 않은 이 웃음소리에 솔본국 무사들은 몹시 동요했다. "왜, 왜 웃느냐!" 선두에 섰던 무사가 부르짖듯이 외쳤다. "어럽쇼, 이봐 남웅아, 이 사람 괜히 화를 내는데…… 우리들이 웃는 게 들린 모양이지." 이런 종운의 빈정거림에 마침내 분노가 터진 그 무사는 견디다 못해 별안간 몸을 날려 종운을 향해 덤벼들었다. 쌩! 하고 칼이 울렸다. 그 눈에 보이지도 알은 칼날의 움직임보다도 빨리 종운은 옆으로 날았다. 그 손에 잡혀 있는 로프에 팔이 잡힌 무사는, 이런 종운의 재빠른 동작 때문에 빈틈을 찔려 크게 비틀거렸다. 그가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동작보다 먼저 종운의 작은 몸집이 총알처럼 그의 등에 부딪쳤다. 뒤이어 남웅이 차례였다. 그리고 돌쇠랑과 매미랑이 거의 동시에 마룻바닥을 박찼다. 마지막으로 정현룡 사또가 칼을 빼들고 이 난투(亂鬪)에 끼어 들었다. 불의에 습격해 온 솔본국 무사들의 처음에 우월했던 상태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들은 덤벼드는 종운이들을 막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로프를 끊으려고 칼을 휘둘렀으나, 종운과 남웅이 재빠르게 움직이므로 거기에 따라 마룻바닥 위를 질질 끌려 다닐 뿐이었다. "에잇!" 남웅의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은 복장의 무사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벽의 흙이 우르르 떨어졌다. 유도부 주장 남웅의 특기인 업어치기가 들어맞은 것이다. 뒤이어 2, 3인의 무사가 그 남웅을 둘러싸고 필살의 기세로 틈을 노린다. 철민은 눈을 화경 같이 흡뜨고 치열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철민의 오른쪽에 용재, 왼쪽에 땅벌랑이 빈틈없이 몸을 가누고 있었다. "야앗!" 깨지는 듯한 기합 소리와 함께 조그만 표창이 공기를 가르며 철민의 얼굴로 날아왔다. 철민의 움직이는 것보다도 먼저 용재의 오른손이 재빨리 번득였다. 쨍! 맑은 쇳소리가 세 사람의 귓전을 울렸다. 표창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비켜 나갔다. 용재의 손에서 던져진 드라이버가 마룻바닥에 떨어져 뚜르르 굴렀다 "용재야, 굉장하구나, 드라이버를 표창 대신 쓰다니……" "뭘 이쯤 가지고. 난 드라이버를 늘 갖고 다니거든." 용재는 약간 면구스러운 듯이 학생복 저고리 밑을 들춰 보였다. 그 허리에 드라이버며 스패너 등을 꽂은 폭넓은 벨트가 감겨 있었다. 역시 밥 먹기보다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용재다웠다. 순간적인 위기에 임해서도 늘 쓰던 드라이버에 자동적으로 손길이 갔던 모양이었다. "으음, 듣기보다 더욱 굉장한 놈들이구나……" 검은 옷을 입은 솔본국 무사 중의 한 명이 두 손을 벌리고 접근해 왔다. 두려움도 없이 세 사람의 상대와 싸우려는 자신만만한 투지(鬪志)가 온몸에 넘쳐 있었다. 땅벌랑이 부상한 몸의 아픔을 견디면서 칼을 들었다. "후후후, 그 상처로는 좀 무리일 걸" 그렇게 비웃는 그 솔본국 부사의 양쪽 손에는 날카로운 표창이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땅벌랑, 당신은 비켜서 보고 계시오. 이봐, 솔본국 친구, 뭐라는 누군지 이름이나 대 보시지." "음, 저 세상으로 가는 선물로 듣고 싶다면 들려 주지, 나는 솔본국 청솔의 동생 황솔이다. 보지 못하던 무사가 주문국 사또 집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보려고 왔다." "강미화 선생을 납치해 간 것도 네 놈이냐?" "강미화 선생? 아, 그 여자 말이로군. 그건 내가 아니다. 나의 형 청솔의 부하가 한 짓이다. 여자 따위를 유괴하는 것은 내 취미에 맞지 않아." "음, 그렇군. 그럼 황솔, 너는 돌아가서 네 형에게 전해라. 내일 달이 뜨는 시간까지 강미화 선생과 보상금 1천냥을 함께 가지고 오라고 말이다. 만약 가지고 오지 않을 때는 너희들은 한 놈도 남김 없이 여기서 죽을 줄 알아라." 철민이 침착하고 묘하게 가라앉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 말 뒤에 숨은 철민의 굳은 결의와 기백에 황솔은 묵묵히 불꽃같은 눈동자를 태우며 철민을 노려보았다. 한 순간, 황솔의 몸은 허공을 날았다. 두 개의 표창은 번개처럼 철민의 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 두 개의 날카로운 표창은 철민의 바로 눈 앞 공중에 멎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황솔의 눈에 그것이 보였는지 어떤지 황솔은 바람을 가르며 철민 위로 덮쳐 내려왔다. 예기치 않았던 공격 차례의 차질이 황솔의 얼굴에서 핏기를 앗아갔다. 두 개의 표창은 정확히 적을 쓰러뜨렸어야 했으며, 쓰러진 그 위에 덮쳐내려 마지막 한 수를 찌르는 이 방법에 황솔은 여태까지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므로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황솔의 눈에 철민의 싱긋 웃는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허공에 멎어 있는 표창에 손을 뻗치려다 그대로 털썩 마루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나려다 몸이 통 말을 듣지 않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무엇인가 무척 협소한 곳에 갇혀 버린 느낌이었다. 두 명의 적이 로프로 자기를 묶으려는 것을 알고 황솔은 필사적으로 날뛰었으나, 팔굽이 말을 안 들어 칼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처음으로 그의 마음 속에 무서운 공포심이 일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우욱! 악마냐, 귀신이냐! 이 괴이한 기술은……." 황솔은 좁은 공간에 갇혀, 그 위로부터 로프로 빙글빙글 묶여서 붙들린 물고기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어떠냐, 황솔, 이것이 유명한 무술 극치(極致) 투명옥(透明獄)의 비법이다." 철민과 용재는 얼굴을 마주 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투명한 비닐의 테이프 크로스를 쳐놓은 줄은 아무리 솔본국 무사라도 알 수가 없었겠지." 손으로 던진 표창으로 탄력성이 강한 비닐을 꿰뚫기는 아무리 힘이 센 장사라도 힘든 일이다. 그래도 황솔이 던진 표창은 그것을 반쯤 꿰뚫고 떨어지지도 않은 채, 꽂혀 있었으니 오히려 그 무서운 위력에 탄복할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허공을 날아 덮쳐오는 황솔의 밑에다 철민과 용재는 활짝 펴서 달아 매놓은 비닐의 테이블 크로스 밑자락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 황솔이라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황솔의 체중으로 쳐 놓은 끈은 끊어지고, 동시에 두 사람은 날 뛰는 황솔의 몸에 비닐을 뒤집어 씌워 로프로 빙글빙글 묶어 버렸다. 종운과 남웅도 그들의 상대를 완전히 사로잡아 의기가 충천해 있었다. 돌쇠랑과 매미랑, 그리고 사또는 황솔을 사로잡은 두 사람의 솜씨에 경탄함과 동시에 약간 두려워진 모양이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슬그머니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철민 선생 및 용재 선생, 도대체 이건 무슨 마술인지요? 황솔이라면, 그의 형 청솔에 못잖은 뛰어난 무사요. 여태까지 그의 손에 쓰러진 우리 주문국 무사가 숱했는데, 그것을 이렇게 쉽사리 사로잡다니…… 나는 어쩐지 여러분이 두려워집니다 그려." "하하하…… 사또, 요 정도를 가지고 놀라실 건 없어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선 비닐 보자기로 물건을 싸는 따위는 세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가 있거든요." "그렇소이까.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군요." "그래요…… 그럼 여러분 잠깐만……" 여덟 사람은 일제히 철민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림자 없는 적(敵)   잡목이 우거진 숲이 완전한 구릉 지대(丘陵地帶)를 이룬 사이를 뚫고, 몇 줄기의 맑은 시냇물이 종일 물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 시냇물은 모두가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 서면, 바로 눈 밑에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하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그 흐름의 아득한 저쪽에는 굽이진 산들의 모습이 보이고, 들판의 복판을 곧장 더듬어 온 큰길에서 왼쪽으로 갈린 사잇길이 한강의 갯벌을 따라 이윽고 한내 마을로 다가온다. 잡목 숲으로 에워싸인 성황당(城隍堂) 앞에서 그 길은 좌우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면 태자당(太子堂)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원불사(圓佛寺)로 가는 길이다. 그 오른쪽 길을 약 백여 미터쯤 간 왼쪽의 언덕 꼭대기에 청명사(淸明寺)가 있었다. 대낮에도 우거진 소나무 숲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 아래서 보면, 이 절이 예전에는 상당히 격이 높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문(山門)의 구조, 대웅전의 지붕, 이끼 낀 앞뜰 등 그 어느 하나만 보아도 모두 유서 깊은 고찰(古刹)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짙은 어둠 속에서 보면, 특히 그것이 주위의 소나무 숲이 윙윙거리며 바람이 부는 밤 같은 때는 버림받은 지 오래고 사는 것이라고는 마물이나 귀신 밖에 없는 폐허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 청명사의 무너진 흰 벽을 푸른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소나무 숲의 높은 가지는 희미하게 바람 소리를 내고,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밤의 어두운 장막을 헤치고 전해 왔다. 그 대웅전 안에서 깜박깜박 조그만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촛대의 흔들리는 불빛을 옆얼굴에 받으면서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솔본국 무사들의 대장 청솔이었다. 나이는 30여 세 가량, 잘잘 윤이 흐르는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깎아낸 듯한 얼굴의 선(線)이 뛰어난 의지와 단련의 비범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온 몸을 먹장 같은 검은 옷으로 두르고 짧은 표창 띠를 허리에 차고 있다. 청솔 앞에 꿇어 엎드려 있는 몇 사람은 이들도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무사들이었다. "이 바보 같은 놈들아, 내 아우이자 너희들에게는 부대장(部隊長)인 황솔이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도망쳐 왔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대장. 우리가 그대로 도망쳐 온 것은 아닙니다. 일전부터 주문국 놈들에게 가담한 불가사의한 무사, 그는 풍문에 듣는 바대로 무서운 무술의 소유자여서 황솔 님까지도 쉽사리 사로잡는 형편……,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올시다. 그것을 대장에게 전해드리려고 우리는 혈로(血路)를 뚫고 겨우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음, 그래 그 무사의 무술이란 어떤 것이냐?" "혼전(混戰) 중이라 확실히 볼 수는 없었으나, 무엇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광주리 같은 것으로 황솔님을 사로잡은 것 같았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광주리?" 청솔은 굵은 눈을 모아 눈살을 찌푸리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좋다. 이번만은 용서한다. 모두들 물러가 쉬거라." "예…… 예……" 무사들은 마룻바닥에 허리가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잠깐만, 범선만은 남아라." 한 사람의 늙은 무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범선, 다음에 우리가 취할 길은 무엇인가?" 늙은 무사는 잠시동안 생각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보아 온 모든 기억을 이 늙은 무사는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예, 그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를 상대로 싸움을 오래 끌어서는 이쪽이 불리합니다. 우리 솔본의 비법, 아지랑이 진법(陣法)을 사용하여 일거에 섬멸해 버림이 어떠하올지?" "음, 그도 그렇군. 허지만 아지랑이 진법은 한 번 쓰면 두 번 다시는 쓸 수 없는 비법 중의 비법. 범선, 충분히 생각하여 보오. 명령을 기다리시오." "알았소이다." 늙은 무사 범선은 발소리도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얌전하게 인질금 1천냥을 낼지 어떨지.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때에야말로 비법 아지랑이 진법을 써서 모조리 섬멸해 버릴 테다. 후후……" 청솔은 일그러진 얼굴로 혼자 기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때였다. 청솔의 귀에 어디선가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밑바닥에서 끊임없는 고역에 시달리는 죽은 사람의 신음 소리가 전파되어 오는 듯, 조용한 대웅전의 심야의 공기를 희미하게 뒤흔들었다. "누구냐!" 신음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범선, 악귀!" 청솔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부하를 불렀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무사가 청솔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음, 저 소리가 들리느냐?" 범선과 악귀는 그러는 청솔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였다. 순간, 그들은 동시에 재빨리 몸을 날려 청솔의 좌우에 웅크리고 앉았다. 역시 대장의 측근에 있는 이 솔본국 무사의 정예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이상한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 형님, 형님…… 아, 괴로워…… 숨이 막혀요…… 살려 주시오. 살려…… 으음, 지옥의 고역이라도 이토록……." 신음 소리가 무시무시한 비명으로 변하여 청솔의 귀를 때렸다. "대장, 저것은 황솔님의 목소리……." "황솔님, 지금 어느 곳에 계시오……?" "으음, 저건 분명히 황솔의 음성. 둘이서 가 보시오." 범선의 몸은 새처럼 친정을 향해 높이 뛰었다. 악귀는 단숨에 마룻바닥을 제치고 사라져 갔다. 청솔은 긴칼의 손잡이를 잡고 주의 깊게 둘레의 어둠을 지켜보았다. "…… 형님…… 살려 주시오. 빨리 와서 내 생명을 끊어주시오…… 그것이 차라리 내게 내리는 자비요…… 아, 죽여라! 죽여다오!" 그 소리는 높게 낮게 청솔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대장! 천장에도 지붕에도 아무도 없소이다." 범선이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마루에 내려섰다. "대장! 마루 밑에는 경천환 이하 세 사람의 우리 동료가 숨어 있을 뿐이외다." 악귀가 마룻바닥으로 난 구멍에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쳤다. "범선과 악귀는 다시 구석구석까지 찾아보아라. 황솔 기다려 다오. 이제 곧 가서 살려 줄 테다." 청솔은 입술을 깨물며 웅얼거렸다. 중상(重傷)을 입고 신음하는 황솔의 몸을 이것 보라는 듯이 부근에 내버리고 간 적의 행동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철통진에 의해 엄중히 수비되고 있는 이 청명사의 대웅전에 어떻게 접근해 왔을까. 청솔은 이를 갈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품 속에서 피리를 꺼내들고 날카롭게 불었다. "…… 으윽…… 아, 괴롭다. 아앗!…… 숨이 막힌다……." 황솔의 비통한 신음 소리는 대웅전에 모인 솔본국 무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너희들에게도 저 황솔의 신음 소리가 들리겠지! 가라! 가서 황솔을 구해라!" 30명의 무사들은 소리도 없이 흩어졌다. 솔본국의 패배   "이상한데요, 대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 보면 소리는 어느 틈엔지 뒤로 돌아가 있어요. 왼쪽에서 들린다고 생각하면 실은 오른쪽에서 들리기도 하고, 아무래도 신음 소리의 소재를 알 수가 없소이다." 악귀는 자못 분한 듯이 그 음성이 떨렸다. "대장! 이 절 안에는 수상한 자의 그림자 하나 없소이다. 그런데도 황솔님의 신음 소리는 그치질 않는군요. 이게 대체 어찌된 사연인지……." 범선은 깊이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 내가 아직 젊었을 적에 어떤 지방 성 밑에서 환술(幻術)이라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소. 안남이라든가 어디서 왔다는 이국(異國)의 마술사였는데, 그가 이와 같이 여기 저기에서 소리가 나는 방법을 보여 주고 있었소이다. 대장! 제가 생각건대 이것은 그 환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주문국 놈들에게 가담한 사나이들은 이국의 마술쟁이가 아닐는지 모르겠소. 옷차림이라든가 또 그 말씨라든가, 아무래도 이국적인 냄새가 짙소이다." "으음, 환술이라……." "…… 형덜, 솔본국의 동지들이여…… 그들은 정녕…… 천마(天魔)요, 이건 분명히 천마의 짓이요…… 아앗!" 청솔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불쑥 일어났다. 그 얼굴은 비장한 결의에 넘쳐 있었다. "듣거라! 이제부터……." 늘어선 부하들을 향해 무엇인가 말하려던 청솔의 분노한 소리를 지우듯, 그 보다 높이 대웅전을 뒤흔든 함성이 있었다. "핫하하하하! 청솔, 어떠냐? 이제 무서워졌겠지. 그렇지만 아직 멀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맛을 보여 줄 테다. 자, 뒤를 보아라!" 일순, 물 속처럼 두려운 침묵이 생겼다. 그토록 담대한 청솔도, 정예임을 자랑하는 솔본국의 무사들도 자기들의 뒤를 돌아다볼 용기를 잃었다.   "윽!" "으, 으음!" 뱃속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부르짖음이 무사들의 입에서 연달아 쏟아져 나왔다. "오, 황솔님!" "아, 저건!" 보라! 대웅전의 판자 벽에 환영처럼 몽롱하게 떠오른 것은 사로잡힌 짐승처럼 꿈틀거리는 한 사람의 그림자였다. 무슨 빛인지, 엷은 노랑 빛이 희미하게 벽이며 마루를 비치고 그 빛 속에서 꽁꽁 묶인 그 사람의 그림자는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 아, 괴롭다. 눈이 안 보인다…… 음, 비, 빌어먹을……." 그 사람의 그림자는 황솔이었다. 그의 온몸을 둘러싸고 흰 연기가 안개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무사들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이 절의 안팎을 빈틈없이 수색하여 수상한 자가 없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황솔의 모습이 이와 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사의한 것을 믿지 않는 그들의 이성(理性)이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대장!" "아, 이것은 황솔님의 원한 어린 망령의 소치인가!" "무서운 일이다!" 역전의 용사인 악귀며 범선마저도 입술이 파래져 떨고있었다. "…… 나무아미타불…… 황솔님, 부디 성불(成佛)해 주시오." 경천환이 신음하듯 말하며 한 손을 쳐들고 허리를 숙였다. 그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청솔이 마룻장을 울리며 불쑥 일어섰다. "여러분, 모두 정신을 똑똑히 차리시오." 그 소리는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오른손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재빨리 움직이자, 표창이 유성처럼 황솔의 모습을 향해 날았다. 철썩, 철썩, 철썩! 판자 벽을 꿰뚫는 표창 소리가 갑자기 그 때까지 넋을 잃고 있던 솔본국 무사들을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다. "에잇!" "야앗!" 그들은 괴상한 기합 소리를 지르며, 새까만 회오리바람이 되어 황솔의 모습이 보이는 판자 벽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두둥실 하고 황솔의 모습이 무게가 없는 것인 양 휘날렸다. 노랑 색의 조용한 빛이 별안간 눈부신 빛으로 변하더니 일순 어둠이 닥쳐왔다. 허공에 뿌옇게 불이 타오르며 순식간에 불길이 판자 문에서 천장으로 치솟았다. 그 불꽃 속에서 등을 구부리고 달리는 2, 3명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에잇!" 악귀는 품속의 단도를 잡아 낮게 던진다. 달리는 사람 중의 하나가 뒤돌아다보며 무엇인가 소리친 것 같았다. 흰 이빨이 악귀를 비웃는 듯 반짝 빛났다.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이 날아왔다. 악귀는 몸을 날려 위태롭게 피했다. 앞으로 뛰어나온 솔본국 무사의 한 사람이 배를 움켜잡고 웅크리고 앉았다. 부웅! 불길은 순식간에 대웅전을 에워싸고 번져 갔다. 어디에 적이 있는지, 누가 자기편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채, 그저 발소리와 외침 소리만이 둘레에 가득 차 있었다. 범선은 대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걱정이 되었으나, 어둠과 불길 속에서 싸움 중에서 대장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셈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굉장히 몸이 가벼운 인물이 범선에게로 달려왔다. "누, 누구냐?" 피할 사이도 없이 범선은 더럭 박치기를 당하고 비틀거렸다. 이 늙은 무사는 여태까지 겪은 몇십 번의 싸움에서 한 번도 적의 손을 제 몸에 닿게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자랑인 범선은, "아뿔싸!" 하고 외쳤다. 몸을 바로잡을 사이도 없이 그 인물은 범선의 허리에 발을 걸고 어깨를 발판으로 하여 날쌔게 천장으로 뛰어 올랐다. "앗! 이놈이……."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범선이 칼을 치켜올리는 것보다 일순 먼저, 불타는 재목이 천장에서 떨어져 왔다. 범선은 옆으로 몸을 날려 겨우 피했다.   어느 사이엔지 싸움은 대웅전 앞의 경내로 옮겨져 있었다. 대웅전의 타오르는 불길은 높이 높이 하늘을 그을렸다. 이 청명사를 에워싼 깊은 소나무 숲은 불길에 휩싸이고 때마침 불기 시작한 열풍에 윙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청솔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바늘로 찌르는 듯이 눈이 아프고 끊이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가슴 속까지 바싹 말라붙어 청솔은 쉴 새 없이 목을 움켜쥐었다. "분하구나!" "대장, 당장은 적에게 승리를 양보하고, 기회를 엿보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천환도 한 손으로 눈을 연신 문지르며 청솔을 재촉했다. "청솔, 어디로 달아나느냐?" 갑자기 뒤에서 누가 소리쳤다. 그것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경천환은 긴칼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불길에 맨 눈은 적의 모습을 볼 수도 없었으나 칼 솜씨로는 솔본국 무사 중에 당하는 자가 없다는 경천환의 필살의 일격은 정확히 소리친 적의 허리를 옆으로 치고 있었다. 짜악! "으윽!" 경천환은 팔의 근육이 마비되어 저도 모르게 칼을 떨어뜨렸다. 두 동강이가 난 대나무 통이 허공을 날았다. "이 바보 같은 놈아, 그건 마디를 뚫은 대나무 통이란 말이야. 그걸 입에 대고 소리치고 있었거든. 대나무 통 끝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내가 거기 있을 까닭이 없지." "비, 비겁하다!" "뭐가 비겁하단 말이냐. 자, 이거나 받아라." "앗, 뜨거!" 경천환은 정신 없이 몸에 얽혀 온 불꽃의 끈을 떼어버렸다. 끈은 흰 연기와 오렌지 빛 불길을 뿜으면서 찌그르르 오므라들었다. 경천환은 눈과 코를 감싸 쥐고 뒹굴었다. "우웃, 괴롭다. 숨이 막힌다." 그러는 경천환을 등뒤에 내버려두고 청솔은 연기 속을 뚫고 달렸다. 어깨 너머로 돌아다본 그의 눈에 입과 코를 하얀 천으로 가린 몸집이 작은 적이 경천환의 몸을 뛰어넘고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맛이 어때, 괴롭지. 필름이 타는 연기를 마셨으니 어련하실라구." …… 필름. 필름이란 무엇일까. 이 냄새면 그 황솔의 괴로움도 당연하다. 목숨을 끊는 것이 자비라고 외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달리면서 청솔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토록 심한 패전(敗戰)은 난생 처음이라고 생각되었다. 청명사의 언덕은 이제 모조리 불길에 싸여 있었다. 깊은 소나무 숲 잡목 숲도 윙윙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불길은 바람을 부르고, 바람은 불길을 몰아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먼 부락에서 종소리 가 울렸다. 청솔은 소나무 숲에 에워싸인 웅덩이의 풀숲 속에 몸을 눕혔다. 북쪽 하늘이 새빨갛게 불타고 있다. 눈이 타는 듯 아팠다. 시냇물을 떠서 눈을 식혔다. 목구멍의 아픔은 그럭저럭 가라앉았으나 그래도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목구멍 속이 쥐어뜯듯이 아팠다. "아, 대장. 이곳에 계셨군요. 범선이올시다." 바삭바삭 풀잎을 헤치며 범선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이 어서 악귀가, "면목이 없소이다, 대장. 모두 우리가 모자라는 탓입니다." "알았다. 승부는 이제부터야. 우선 푹 쉬도록 해." 청솔도 이름 있는 솔본국 무사들의 대장이니 만큼 이제 부하를 문책하는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북쪽 하늘은 점점 더 붉게 빛났다. 아마 청명사의 언덕 전체가 심한 산불에 휩싸인 모양이었다. 둘씩 셋씩 모여드는 부하에게 악귀가 점호를 하기 시작했다. "뱀 밭의 진평." "예!" "높마을의 외눈." "예!" "유천사의 선랑." "예, 여기 있습니다." "천왕봉의 길선." 대답이 없었다. "길선! 길선은 없나?" 악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름은 불러도 대답이 없는 자가 속출했다. "34명 중, 여기에 모인 자는 겨우 13명이란 말이지, 이게 어찌된 셈인가." "하지만 악귀, 이 곳을 피하여 다른 곳에 숨어 있는 자도 있겠지." 청솔은 가라앉아 있는 여러 사람의 기분을 불러일으키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평소부터 만일 청명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에는 이 소나무 숲 속에 있는 웅덩이를 집합 장소로 하기로 정해 놓았으나, 적에게 미행 당해 이 곳을 발견당할 위험이 있을 때는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달아날 경우도 있다. 청솔은 여전히 아픈 눈을 크게 뜨고 주위의 어둠을 살폈다. "조용해라, 누군가 이리로 오고 있다!" 높마을의 외눈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낮게 소리쳤다. 희미하게 풀잎 스치는 소리가 밤 공기를 가르며 전해져 온다. "음,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인가." 청솔의 온몸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소름이 끼쳤다. 상처를 입고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지금 적의 습격을 받는다면 아무리 용감한 솔본국 무사라도 전멸할 것이 뻔하다. 그래도 모두 몸을 일으켜 최후의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다가오는 자의 호흡 소리까지 들릴까 생각할 정도로 풀잎 스치는 소리는 다가왔다. "이미 이렇게 된 바에야 함께 죽을 각오로 한 놈이라도 더 쓰러뜨려라. 과연 솔본국 무사들의 최후다웠다는 말을 듣도록. 알았나!" 여러 사람은 소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오, 대장, 여기 계셨군요. 여러분, 나요. 경천환이요. 잘못 표창 따위를 던지진 마시오." 수풀 저쪽에서 목쉰 소리가 날아왔다. "오, 경천환. 적인 줄만 알았네." 여러 사람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신들 좀 차리시오.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호미족(虎尾足)을 썼지 않소. 그걸 모를 정도로 여러분은 정신이 나갔단 말이오." 그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솔본국 무사들은 모두 각자 독특한 걸음을 고안하고 있다. 그에 의해 어둠 속에서의 싸움이나 정찰 같은 때, 잘못해서 있을 동지들끼리의 싸움을 피하는 것이었다. 지금 경천환이 사용한 보행법은 속보(速報)로 세 걸음 전진하다가 거기서 4분의 1호흡 정도로 정지하고 다시 속보로 세 걸음 전진하는 식의 걸음이다. 그리고 잠자고 있는 호랑이의 꼬리를 밟듯이 발끝으로 가볍게 걷기 때문에 경천환은 스스로 그것을 호미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대장, 무사하셨군요, 여러분도……." 경천환은 떠메고 온 커다란 부대 자루를 털썩 땅 위에 던졌다.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경천환, 그것은 무엇이냐?" "대장. 이것이 우리 수중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항상 99%의 승리를 거두고 있는 셈이요." 경천환은 큰 소리를 치며 부대 자루를 풀러 거꾸로 들었다. 털썩 굴러 떨어진 것은 새끼줄로 꽁꽁 묶인 강미화 선생이었다. 흩어진 머리가 땅 위에 길게 늘어졌다. "오, 이건, 경천환 잘했다. 잘했어. 이 인질(人質)은 적의 방화로 타죽은 줄만 알았는데……." "예, 저도 일단 밖으로 몸을 피했으나 이대로 적에게 빼앗겨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격하는 적을 피해 대웅전으로 숨어 들어가 떠메고 왔소이다." "잘했다! 우선 누워서 쉬도록." 청솔은 완전히 기분이 좋아져 경천환의 공을 치하했다. 높마을의 외눈이 긴 칼을 옆에 끼고 청솔에게로 다가왔다. "대장, 증오의 대상인 적군의 여자, 이 여자를 토막내어 적에게 보내 줍시다." 채 대답도 듣지 않고 그는 긴칼을 번쩍 빼어 들었다. 으음! 하고 강미화 선생은 괴로운 듯이 낮게 신음했다. 청솔이 말했다. "바보 같은 놈. 닥쳐라! 인질에다 상처를 입혀서는 흥정이 안 된다. 사지가 멀쩡해야만 천금의 가치가 있는 법이지. 숨통을 끊는 것은 흥정이 안 됐을 때 해도 늦지 않다" 악귀가 험악한 눈으로 높마을의 외눈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외눈. 이 인질을 떠메어 온 것은 경천환이란 말이야. 네가 뭔데 칼을 빼들고 야단이냐." 외눈은 분한 듯이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제 그만 둬라. 집안 싸움은 안 해야지, 그보다 먼저 다음 계략을 짜기로 하자." 여러 사람은 어둠 속에서 청솔의 얼굴에 시선을 모았다. "경천환은 뱀 밭의 진평 외에 한 사람을 데리고 인질을 원불사 옮겨라." "뭐라고요? 대장, 원불사라면 적의 본거지 바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좋은 것이다. 적은 이 한내 마을에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역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배후에다 인질을 숨기는 것이다. 게다가 그 곳은 적중에 있어서 진퇴가 극히 편리하다. 경천환, 빨리 가라!" "예! 그럼 대장님께서는?" "음, 이제부터 세발못(洗髮池) 근처의 송천사(松天寺)로 자리를 옮긴다." "알았습니다. 그럼 먼저 갑니다." 경천환은 급히 강미화 선생을 짐처럼 푸댓자루에 집어넣었다. "진평, 이것을 메어라, 그리고 도리환, 네가 따라 와라." 새 사람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둑맞은 타임머신   "아, 누가 또 온 모양이야. 음, 석청사의 희죽이로군."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악귀가 일동을 돌아보며 낮게 소리쳤다. "뭐, 희죽이라고……." 이윽고, 한 사람의 복면을 한 무사가 웅덩이로 뛰어 들어왔다. "여러분, 오래간만이오. 오, 대장께서도……." "웬일인가, 희죽이?" 뛰어 들어온 무사는 땀에 범벅이 된 복면을 재빨리 벗었다. 나타난 얼굴은 놀랍게도 주문국 무사의 한 사람이었다. 철민이 처음 마을의 뜨락에서 땅벌랑이며 철새랑, 매미랑 등의 주문국 무사의 간부들과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있던 10여 명의 주문국 무사들 속에 섞여 날카로운 눈초리로 철민의 얼굴을 살피고 있던 그 사나이였다. "이거 정말 주문국 놈 행세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 대장, 그놈들은 정말 기묘한 놈들이오. 도대체 어느 곳의 어떤 놈들인지 통 짐작도 할 수가 없소이다." "혹시 이국(異國)의 요술쟁이가 아니냐?" "글쎄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든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희죽이, 청명사의 대웅전에 황솔의 모습이 나타났었는데, 그건 무슨 요술이냐?" "애, 저도 잘은 모르겠소이다만, 뭔가 얇은 비단에다……음, 뭐라던가…… 매, 매직 잉, 잉크라든가…… 어떻든 그런 것으로 황솔님의 모습을 그려 가지고 그것을 뒤에서 기묘하게 빛나는 막대기로 비치더군요." "으음, 그러면 그 소리는?" "예, 그것도 뭐라던가요. 테프, 테프레코다라든가, 아니 테이프 레코, 레코더라든가 하는 것인데, 엘레키라는 것을 쓰는 것 같더군요. 그 조그만 상자는 사람의 음성을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말을 꺼내 쓸 수 있는 도구였소이다." "그 도구에다 황솔의 신음 소리를 담았다가 대웅전 어느 곳에 장치를 한 것이로군."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사방이 열리는 상자를 만들어 거기다 그 상자를 넣고 교대로 상자의 옆을 열면 흘러나오는 소리가 어느 때는 좌측에서, 어느 때는 우측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방향이 달라진다구요." "으음 그랬었군! 어쩐지 황솔의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려 통 그 장소를 알 수가 없었거든." 그 때, 악귀가 나섰다. "그 필름이란 뭐지?" "글쎄 모르겠소. 그런데 그 물건에 불을 붙이면 냄새가 어떻게나 고약한지 아무리 단련된 무사라도 정신을 잃을 정도요." "그것으로 황솔님을 괴롭힌 모양이군." 들으면 들을수록 무서운 상대였다. 여태까지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마술을 쓰는 놈들임이 분명했다. "아, 그리고 대장 그들의 두령인 듯한 사나이가 늘 옆에 끼고 있는 것이 있는데 무척 귀한 것인 모양이오. 자, 이것이요." 희죽이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철민의 둥근 통, 즉 타임머신이었다. "뭐냐? 이게……." "뭔지 모르지만, 무척 소중한 것인 모양입니다. 이것을 오늘밤은 사또 녀석한테 맡기고 갔더군요. 사또 녀석이 안방 벽장에 몰래 넣어 둔 것을 슬쩍 훔쳐왔소이다." 범선이 그것을 받아들고 이리 저리 뒤적거렸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듯, 악귀에게 넘겼다. "희죽이 수고했다. 조금 더 주문국 놈들 사이에 끼어 첩자(스파이) 노릇을 해 다오. 악귀, 그 뭔지 모르는 것은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려라. 폭발이라도 하면 큰 일이다." 청솔은 그 기묘한 둥근 통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악귀는 당장 단도를 빼어 들고 발 밑에다 30센티미터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타임머신을 묻었다. 그리고는 발을 굴러 굳히고 위에다 풀을 덮었다. "이것을 묻은 장소는 잊어라. 이것이 적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이것을 빼앗은 것만으로도 우리의 승리다." 청솔이 어금니를 악문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그러면 세발못 북쪽에 있는 송천사로 가자." 청솔은 얼음장같은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이것으로 싸움은 피장파장이다. 두고 봐라." 어두운 벌판의 밤에 바람 소리만이 윙윙거리며 나뭇가지를 울리고 있었다.   중대한 회의   새벽녘의 상쾌한 바람이 잡목 숲이며 불타 버린 사또의 집터 위를 불며 지나갔다. 그 저쪽의 동녘 하늘은 벌써 새벽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한내 마을 청명사의 습격을 마친 철민의 일행은 한 덩어리가 되어 돌아왔다. 본거지를 지키고 있던 땅벌랑과 매미랑이 그림자처럼 나와 일동을 맞이했다. 그들은 뛰어난 무사답게 마중 인사 따위는 입밖에도 내지 않는다. 어디서 적군이 엿듣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일 뿐이다. 도리어 거창하게 등불을 들고 달려온 것은 이 곳 사또인 정현룡의 부하들이었다. "아, 정말 훌륭한 활약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청명사의 불길이 잘 보이더군요." "자, 피곤하실 텐데 우선 차라도 한잔 드시죠." "이젠 솔본국 놈들도 두 번 다시 이 마을에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정말 경하할 일입니다." 시끄럽도록 저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다. "어, 사또께서……." 부하들이 앞에서 다가오는 인물에게 재빨리 길을 비킨다. 등불에 비친 얼굴은 이 곳의 사또인 정현룡이다.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허리를 굽히는 부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철민 앞에 우뚝 서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무엇인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는 깊이 사죄하는 듯 무릎까지 손을 늘어뜨렸다. 철민의 얼굴에 심한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철민아, 왜 그러니?" "무슨 일이야?" 용재와 남웅이 철민의 돌연한 변화에 근심스레 물었다. 철민은 그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몸이 굳어진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철민아, 철민아!" 그러자 비로소 그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철민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 아냐. 아무 것도 아냐!" 철민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맥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재도, 남웅도, 종운도, 또 땅벌랑도 의아스러운 눈길을 그러는 철민에게 쏟고 있었다. 단지 사또 한 사람만이 풀이 죽어 힘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사또의 집터 한 모퉁이에 급히 지은 판잣집이 임시로 사또의 집무소가 되어 있었다. 철민은 쉴 사이도 없이 당장 용재, 남웅, 종운, 그리고 땅벌랑을 데리고 그 판잣집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중대한 회의인 듯 돌쇠랑과 매미랑이 직접 경비를 맡았다. 게다가 또 그 바깥쪽을 젊은 무사와 또 한 사람, 그 문제의 희죽이가 사또의 부하들과 함께 멀찌감치 에워싸며 배치돼 있었다. 정현룡 사또는 저쪽의 커다란 나무 밑에 기운 없이 서 있었다. 회의는 길었다. 벌써 밤이 새어 농가의 추녀에서는 아침을 짓는 연기가 어렴풋이 흐르기 시작했다. 회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판잣집 속에서, 무엇인가 끊임없이 토론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낮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따금. "음, 야단났군." "이대로 있다간 큰일이야, 철민아!" 낮으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돌쇠랑과 매미랑, 사또의 부하들은 잠자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엇인가 큰 사건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철민들이 인질로 잡힌 강미화 선생을 되찾지 못한 점과 돌아와서 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전황(戰況)은 매우 불리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돌쇠랑이며 매미랑, 사또의 부하들의 표정은 차츰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까닭은 오적 정현룡 사또만이 알고 있다. 사또는 몇 번이나 자결(自決)하여 철민에게 사죄하려 했으나, 그것도 너무나 무책임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회의가 끝나기를 식은땀을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까닭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희죽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경비에 임하면서 속으로는 그 둥근 통을 빼앗은 것이 적에게 예상 이상의 타격을 준 듯한 결과에 혼자 만족하고 있었다. 이처럼 반 이상 전의(戰意)를 상실한 적이 다음엔 어떤 작전으로 나올지, 이번엔 그것을 청솔 대장에게 보고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임무였다. 그 후에도 한참이나 되어서야 철민 일행은 판자 집에서 나왔다. "모두들 수고했소. 그럼 감시하는 사람만 남고, 다른 사람은 쉬도록 하시오." 철민의 음성은 공허하게 울렸다.   솔본국의 솔솔이   나무숲의 큰 가지가 겹겹이 우거진 골짜기 밑에 송천사가 있었다. 북쪽으로부터는 비석향(碑石鄕), 남쪽으로부터는 천석향에 이어진 구릉(丘陵)이 세발못 끝에서 하나로 이어져 높은 벼랑을 이루고 있다. 그 벼랑에서 스며 나온 물이 몇 줄기의 조그만 폭포가 되어 벼랑의 골짜기로 떨어져간다. 그 골짜기에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는 물보라를 맞는 듯, 송천사의 나지막한 초가 지붕이 있었다. 둘레에는 심한 빗소리 같은 물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 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가만히 마루에 앉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솔본국의 청솔이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듯, 나뭇가지가 버석버석 울렸다. 문득 범선이 목을 길게 늘여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장, 발자국 소리가……. 암만 해도 우리편 사람 같은데……." 범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악귀도 칼을 들고 눈쌀을 모았다. 바람 속에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10여 명 있는 모양이다. 비로소 청솔의 눈이 떠졌다. "대장, 어디 계십니까. 5인의 철갑대(鐵甲隊)가 왔소이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로 잘못 들을 정도의 낮은 소리가 청솔의 귀에 들려왔다. "뭐라구! 5인의 철갑대라고?" "오, 이건 정말 믿음직한 분들이 나타나셨군." 범선과 악귀도 진심으로 기쁜 듯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대장, 오래간만입니다. 흐름별입니다. 범선, 악귀, 두 분께서도 안녕하시니 반갑습니다." 쳐다보아야 할 정도로 키가 큰 사나이가 청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악귀, 등불이라도 켜라. 절간에 등불이 켜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겠지." 청솔의 말을 좇아 조그만 등불이 켜졌다. 침침한 오렌지색 불빛이 절간 앞의 풀잎에 움직였다. "흐름별, 이 곳의 상황은 대충 알겠지만, 자세한 것은 범 선에게 들어라." 키가 큰 사나이는 고개를 숙였다. 청솔은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인물들에게 차례로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음, 평길, 육장, 원태, 그리고 청목이로군. 잘 왔다." 청솔도 이 뜻밖의 구원대를 얻어 역시 기쁜 모양이었다. "부하를 10여 명 데리고 왔으니, 수하에 넣어 주십시오." 다섯 사람의 뒤에 검은 옷의 이름 없는 무사들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대장, 실은……." 흐름별이 약간 곤란한 일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뭔가?" 그 때, 갑자기 엎드려 있는 무사들 뒤에서 맑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비켜라!" 철썩! 가느다란 대나무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리며 엎드려 있던 사나이들 중의 하나가 윽! 하고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사나이들이 재빨리 양쪽으로 길을 비켰다. 그 움직임에 동조하듯 철갑대의 다섯 사람도 순식간에 좌우로 비켜섰다. 등불의 불빛 속에 나타난 것은 아직 나이 어린 한 사람의 무사였다. 흔들리는 불빛을 받고 커다란 눈동자가 물에 젖은 듯 빛났다. "오라버니, 제가 왔어요." 소년 같은 얼굴이 웃으면 꽃잎처럼 아름다웠다. 머리 뒤에서 묶어 등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윤기 있게 빛났다. "솔솔이! 그렇게 오지 말라고 했는데……." 청솔은 얼굴을 찡그렸다. "오라버니, 집의 아버지께서도 걱정하시길래 내가 가서 도와 드리겠다고 했더니 몹시 화를 내시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철갑대 다섯 분의 뒤를 쫓아 뛰쳐나왔죠." 청솔은 씁쓰름한 얼굴이었다. "솔솔아, 너는 앞으로 온(溫)씨 댁을 이을 귀한 몸이다. 이 오라비를 생각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너는 이미 우리의 한 패가 아니다. 자중(自重)해야지." 솔본국 온(溫)씨 집안의 솔솔이. 실은 솔본국 무사들 가운데 그녀의 미모와 재능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은 별세한 그녀의 아버지, 검은솔이 그녀를 거친 자기들의 생활 속에 묻히게 하는 것을 아낀 나머지, 솔본국의 명문(名門) 온씨 집안의 양녀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까 솔솔이가 청솔에게 말한 아버지란 이 양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 솔솔이는 무술에 있어서는 오라비인 청솔보다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가끔 이웃집의 애지중지하는 화초를 남몰래 꺾어버리고, 혹은 근처의 염색 집에서 잘 염색해 놓은 천에다 딴 무늬를 그려 넣어 솔솔이에 대한 원망 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원래가 명분가의 딸이고, 또 그 예쁘장한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녀의 그런 장난을 용서할 수밖에 없어지는 것이었다. "솔솔아, 너 이제 몇 살이지?" "열세 살이에요, 왜요?" "열세 살쯤 되면……." "오라버니! 꾸중 소리는 이제 듣기 싫어요. 그보다 이렇게 비좁은 골짜기에서 뭘 하고 계시는 거예요?" 솔솔이는 초승달 같은 눈썹을 치뜨고 악귀며 범선을 노려보았다. 검은 옷이 도리어 솔솔이를 가련하게 보이고 있었다. 소녀의 취미에 맞게 화려하게 장식한 가늘고 긴칼이 아름답게 빛났다. "높은 곳, 높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진퇴에 유리하다는 것이 우리들의 전법인 줄 아는데, 이와 같이 손바닥 같은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은 이미 겁에 질린 증거예요. 범선, 악귀, 너희들 같은 인물이 그래 오라버니 곁에 있으면서 이 꼴이 뭐냐!" 두 사람의 무사는 찍 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솔솔아, 말이 좀 지나친 것 같다. 이번의 적은 도저히 솔본, 주문의 무사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무서운 놈들이다. 나 청솔도 이제는 시종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을 솔솔이는 귀가 없는 듯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오라버니, 백가구(白可口)의 강호에게 대포를 8문 만들게 했어요. 초약(硝藥)도 많이 있죠, 이 밤이 새기 전에 적의 본거지를 격파해 버립시다." "뭐? 대포라고. 그건 또 굉장한 것을 가지고 왔구나. 헌데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어떠냐, 너희들 의견은?" 범선과 악귀, 그리고 철갑대의 다섯 명까지도 놀라는 눈으로 솔솔이를 보았다. 솔솔이라면 그 정도의 것은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래, 그 대포는 지금 어디 있느냐?" "미륵불이 있는 경내(境內)에 이미 도착해 있을 거예요. 오라버니, 누구든 심부름을 보내 주세요." "좋다. 그럼 일을 시작하는 셈치고, 철갑대 다섯 사람이 부하들을 데리고 그 대포를 운반해 오도록." "예!" 흐름별이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른다. "오라버니, 대포만 가지고는 재미가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청솔은 누이동생이 다가오자, 눈매에 웃음 빛이 떠올랐다. 역시 이 누이동생이 귀여운 모양이다. 솔솔이는 청솔의 귀에 입을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음, 과연 좋은 생각이군. 그럼 어디 한 번 해 볼까…… 범선, 악귀, 이리로……." 범선과 악귀에게 손짓했다. 범선은 품 속에서 지도를 꺼내 네 사람 앞에 펴놓았다. "이 소나무가 두 그루 있는 곳에서 밭으로 빠지는 사잇길에 폭약을 묻어 적의 퇴로(退路)를 막고, 사또 집 뒤를 흐르는 시냇물에 기름을 흘리는 거요. 그리고 철갑대의 부하들에게 조총을 주어 이 곳에 숨어 있게 하고, 우리는……" 솔솔이의 작전은, 청솔이와 범선, 악귀까지도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한 것이었다. '음, 과연 돌아가신 검은솔님이 아들이었다면…… 하고 한탄하신 심정도 알만 하군.' 범선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시간도 채 못되어 대포가 도착했다. 대포라고는 해도 요즘의 야포(野砲)나 중포(重砲)와는 종류가 다르다. 포신의 내부만 1센티미터 정도의 두툼한 청동(靑銅)의 통. 그 외부를 석면(石綿) 같은 것으로 싸고, 주위를 구리철사로 꽉 조인 후, 또 외부를 두꺼운 참나무 판으로 싼 위를 다시 철사로 빽빽이 동여매고 있다. 구경(口徑) 15센티 정도의 요즘으로 치명적 박격포 같은 것이다. 그것을 2문씩 말에 싣고, 따로 탄약을 실은 마차가 한 대, 흐름별이 지휘하여 벼랑 위에 늘어놓았다. "집합!" 청솔이 긴 칼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드디어 총공격의 때는 왔다.   허실음양(虛實陰陽)의 싸움   "희죽이, 희죽이는 없나. 두령께서 부르시네." 땅벌랑이 판잣집 앞에서 소리쳤다. "예, 여기 있습니다." 희죽이는 속으로 아찔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판잣집 앞에선 철민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희죽이 네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다." 철민의 음성은 침통했다. "잘 들어, 이제부터 곧 솔본국의 청솔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이렇게 전해라. 이쪽에서 사로잡고 있는 황솔을 곧 돌려 보낸다. 돈 천냥도 보내겠다. 이쪽엔 그저 강미화 선생을 돌려 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또 희죽이, 이건 아직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만약 허락해 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솔본국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전해라." "두령, 그럼 우리는 솔본국에 항복한단 말인가요?" "음, 이렇게 된 바에야 하는 수 없는 일이지. 사실은 말이야, 희죽이 아주 소중한 것이 없어져 버렸단 말이야. 아마 틀림없이 솔본국 무사들이 훔쳐 갔을 거야. 우리로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니까, 이쯤 된 바에야 차라리 싸움을 그만 두고 그 소중한 것을 돌려 달랄 수밖에 없어. 그래서 청솔에게 상의를 해 보자는 거지." 희죽이는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아, 그거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럼 곧 다녀오겠습니다." 희죽이는 꾸벅 절을 하자 바람처럼 달려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철민은 재빨리 종운에게 눈짓을 했다. 종운은 자기도 그것을 눈짓으로 받고 남몰래 그 자리를 떴다. "땅벌랑, 부탁하겠소." 땅벌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돌쇠랑을 데리고 잡목 숲 사이로 사라졌다. 판잣집 안에서는 탕탕, 덜컹덜컹 하고 무엇인가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마을에 있던 주문국 무사 드디어 항복하다!」 이 통보는 솔본국 무사들을 진심으로 기뻐 날뛰게 했다. 악귀며 범선에게 있어서는, 승리의 직접적인 원인이 희죽이의 활약에 있다는 데에 불만이 있었으나, 그래도 솔본국이 이겼다는 사실은 기쁘다. 그러나 그토록 뛰어난 무술을 가진 놈들이 이렇게 쉽사리 손을 들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희죽이의 설명을 들어 보면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청솔은 일시 작전을 중지하고 곧 회의를 열었다. 청솔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항복해 오는 그 놈들을 이쪽 편에 넣을 생각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청솔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일동을 둘러보았다. 그 때 솔솔이가 앞으로 나왔다. 솔솔이의 눈은 곧장 희죽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희죽이, 너 이 앞으로 나와라!" 희죽이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모두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나오라는데…… 빨리 나와!" 솔솔이는 긴칼을 쑥 뽑았다. 새벽녘이 가까운 서늘한 바람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등불이 당장 꺼질 것처럼 깜박였다. 그 빛 속에서 솔솔이가 빼어 든 칼이 무지개를 그었다. 그 칼끝이 불쑥 희죽이의 두 눈 사이를 겨누었다. "왜, 왜 이러십니까? 이건, 이, 이건……." 희죽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적미적 물러났다. 악귀도 범선도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자기에게 칼이 겨누어진 듯한 심한 공포를 느꼈다. 솔솔이의 온몸에는 섣불리 말을 걸 수 없는 싸늘한 살기 (殺氣)가 넘쳐 있었다. "희죽이! 네 임무는 적의 한 사람이 되어 오랫동안 적중에 숨어 그 비밀을 캐어내는 첩자가 아니냐! 그 첩자인 네가 그렇게 쉽사리 속아넘어가다니! 이 바보 같은 놈!" 솔솔이의 음성은 늘어선 무사들의 가슴을 예리하게 꿰뚫었다. 희죽이의 얼굴은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두 손을 얼굴 앞에서 내저었다.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솔솔이님, 제가 속아넘어가다니요. 이 희죽이 그렇게 천치 바보는 아닙니다." "그래." 솔솔이는 엷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흔들리는 불빛을 받아 깜짝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럼 묻겠는데 희죽이, 싸움의 승패에 관련이 있을 정도로 소중한 물건을 가령 한 때나마 남의 손에 넘겨 주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 그것은……." "더구나 솔본국의 뛰어난 무사조차도 당하기 힘든 무술의 소유자가 무엇 때문에 사또 따위에게 그 물건을 맡겼겠는가, 희죽이!" "그, 그것은 설마 제가 저희들 편에 잠입해 들어가 있는 줄은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사또가 그 물건을 벽장에 숨겨 두는 것을 봤다고 했겠다. 그것이 바로 제 편에 잠입한 적을 찾아 내기 위해 꾸민 함정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 말이지." 희죽이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솔솔이님, 사또가 남몰래 벽장 속에 숨기는 사실이야말로 그것이 진짜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함정도 꾸미는 것이다. 진실로 소중한 물건을 맡은 것이라면 왜 너 같은 자의 눈에 띄도록 할 필요가 있는가? 잠자코 품 속에 넣어 두면 아무도 모를 텐데…… 그것도 일부러 알도록 한 사실이 애당초 이상하지 않는가." 솔솔이의 말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청솔이 썩 앞으로 나섰다. "아, 알았다. 솔솔아, 양(陽)의 뒤에는 음(陰), 음의 뒤에는 양이 있다. 적의 뒤의 또 뒤를 친다. 이것이 무술의 극치다. 희죽이! 솔솔이의 말을 잘 알아들었겠지?" "오라버니, 그것만이 아니에요. 아마 틀림없이 희죽이는 뒤를 밟혔을 거예요……." "뭐라고! 뒤를 밟혔다고." "항복하겠다는 적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마음의 여유는 반드시 틈을 보였을 터, 이러한 자를 미행하기란 용이한 일, 미행하는 자가 있음도 희죽이는 몰랐겠지." "으음, 과연 적이지만 훌륭한 술책이로군." "오라버니, 항복한 척하고 기뻐하는 적의 허를 치는 것은 이 또한 전법의 묘(妙). 잘 알아 두세요." "에잇, 쌍!" 청솔은 긴칼을 뽑아 들고 희죽이에게 덤벼들려 했다. 솔솔이의 왼손이 재빨리 움직여 청솔의 팔굽을 잡았다. "오라버니, 지금 희죽이를 베면 일이 더욱 어긋납니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적에게 속은 척하는 거예요." 솔솔이의 음성은 어디까지나 시원했다. "뭐라구, 속은 척하라고?" "적이 꾸민 함정에 쉽게 빠진 척하고 그 적의 방심한 틈을 거꾸로 치는 거예요. 적은 항복한 척하고 우리는 적이 항복한 것을 기뻐하는 척하고. 오라버니, 허실음양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음, 알았다. 솔솔아, 그럼 이 희죽이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희죽이는 다시 적진으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적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기뻐한 나머지 모두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보고를 시키면 어떨까요?" 청솔은 몇 번이나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솔은 희죽이 쪽으로 돌아섰다. "그 자리에 앉아라! 희죽이, 솔솔이가 지금 말한 대로다. 급히 돌아가 사또에게 적당히 보고해라. 앞으로는 세심한 주의를 해서 다시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여느 때 같으면 당장 목을 쳐죽이겠지만, 이번만은 용서한다. 알았지!" "예, 예이" 희죽이는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빨리 가라!" 엎드려 있던 희죽이는 일어나 몸을 굽히자 총알처럼 어둠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그 때, 희죽이가 달려간 방향과는 반대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나뭇가지가 꺾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귀에는 도저히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소리였으나, 여기 있는 무사들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범선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잽싸게 움직였다. 그 밑을 기어들듯 악귀의 몸이 뛰어 날았다. 범선의 손을 떠난 표창은 쌔앵! 소리를 내며, 방금 나뭇가지가 꺾어지는 소리가 난 무성한 숲을 해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악귀는 손에 든 칼로 등촛대를 가르고 있었다. 순간, 암흑 속에서 솔본국의 무사들은 숨을 죽였다. 새벽녘에 가까운 바람만이 우수수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갔다. 어디에선가 부엉이가 울었다. 그대로 약 30분쯤 흘렀을까. 첫 동작을 보인 것은 흐름별이었다. "에잇! 달아난 것 같군. 분명히 적의 정찰병이었는데……." 깊은 어둠 속에서 겨우 여러 사람들이 움직이는 기척이 소생했다. "오라버니, 그 정찰병은 희죽이의 뒤를 쫓아 왔을 거예요. 정말 실수했어요. 살려 보내는 것이 아닌데……." "이것으로 우리측 계획도 새었단 말이로군." 청솔이 신음했다. 솔솔이가 그 청솔의 신음을 막았다. "오라버니, 계획이 새었다고 해도, 아직은 괜찮을 거예요. 그래요, 지금부터 당장 공격해 들어갑시다." "하지만, 솔솔아, 우리측 계획이 새었다면 적의 방비도 그만큼 단단할 게 아니냐." 이쯤 되니까 청솔은 무척 신중했다. "오라버니, 왜 그리 겁이 많아졌어요? 화공술(火攻術)에는 밤낮이 없는 법, 가령 계획이 새었다고 하더라도 대포를 막을 방비는 그렇게 쉽지 않은 거예요. 적이나 우리나 계획이 새어버린 지금엔 그저 강공(强攻)할 도리 밖에 없어요.' 확실히 전력을 다해 부딪친다면, 대포며 총을 가지고 있는 솔본국 측이 유리하다. 게다가 지뢰화(地雷火)며 불을 놓기 위한 기름도 풍부하다. 청솔은 재빨리 머리 속에서 그렇게 판단했다,. "듣거라! 이제부터 아까 세운 전법에 따라 사또의 집을 공격한다. 대포를 쏘고, 달아나는 적은 총으로 쏘아라. 항복한 적은 그 자리에서 베어 버려라. 집, 나무, 밭 따위에 오로지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라. 한 명이라도 놓치지 말아. 대포는 흐름별이 지휘한다. 총은 악귀와 대원 3명. 범선은 정면으로 돌격하라. 평길, 육장, 청목은 지뢰화를 매설하라. 원태는 후진(後陣)이 된다. 그럼, 출발!" 여러 사람은 한 무리가 되어, 사당 앞의 어둠 속에서 달려나갔다. 무사들은 모두 밤눈이 밝다. 이 빈틈 없이 무성한 숲 속의 나뭇가지며 작지만 흐름이 급한 골짜기의 냇물, 그리고 험한 벼랑을 기어오르고 뛰어넘으며 순식간에 웅덩이를 에워 싼 언덕 위로 뛰어나왔다. 나무 그늘 밑에 조용히 몇 마리의 말이 매어져 있었다. 그 등에는 이미 분해된 대포며 총, 탄약, 지뢰화 등   솔본의 화공(火攻)   철민의 부대가 본거지를 삼고 있는 곳은, 주문국의 XX마을의 북서쪽 호두리에 가까운 세발못 근처, 원불사를 우측에 바라보며, 이윽고 미륵불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지는 부근이었다. 이 곳은 어쩐지 대나무 숲이 무성해 있었다. 이 대나무 숲을 빠져 나오면, 길은 아래로 내려와 웅덩이가 되고, 세발못으로 흐르는 폭 2미터 정도의 시냇물이 있어서, 그 양쪽은 널찍한 습지(濕地)인데, 억새풀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은 그 대나무 숲을 등에 지고, 잡목 숲에 에워싸여 있었다. 조용히 취락을 이루고 있었다. 거듭되는 솔본국의 습격으로 마을의 집은 반 이상이나 불타 버리고, 잡목 숲도 거의 해골 같은 모습으로 검게 그을린 가지를 뻗치고 있을 뿐이었다. 청솔이 앞을 보자 그 곳에 보따리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말고삐를 잡고, 백가구의 강호에 가서 따라온 잡졸(雜卒)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탄약을 나르거나 화승(火繩)의 불을 지키는 졸개로 끌려 나온 것이었다. "자, 출발이다." 청솔은 그들을 재촉했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수송대를 가운데에 넣고 원진(圓陣)을 만들고는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흐름별이 이끄는 대포 부대는 몰래 대나무 숲 동쪽에 진을 쳤다. 그리고 당장 화약을 장전하고 탄알을 밀어 넣은 다음, 화승을 짧게 잘라 포격 준비를 완료했다. 그리고 평길, 육장, 청목의 세 사람은 무거운 지뢰화를 짊어지고 소리도 없이 마을 서쪽으로 달려갔다. 총을 든 악귀는 부하들을 데리고 마을의 왼편쪽으로 이동했다. 또 철갑대의 부하 두 사람은 기름이 든 커다란 통을 지렛대로 짊어지고 마을 뒤로 숨어 들어갔다. 동쪽 하늘은 점차 밝아져 갔다. 어디선가 닭이 울고 있었다. 쏟아지는 벌레 소리가 시끄러웠다. 얼마 후, 지뢰화를 매설한 평길 일행이 돌아왔다. 청솔은 솔솔이를 거느리고 마을이 잘 보이는 곳으로 나섰다. 원태가 뒤를 따랐다. "대장, 지뢰화 8개, 분명히 묻고 왔습니다." 평길이 땅에 엎드려 조용히 보고했다. "알았다. 그럼, 세 사람은 범선을 따르라." "옛!" 청솔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날카롭게 불었다. 공격의 신호였다. 그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쾅?" 천지가 진동하는 대포 소리가 울렸다. "피잉!" 여러 발의 포탄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마을을 향해 날았다. 환하게 보라 빛 불기둥이 일었다. 그 빛 속에 박살이 난 지붕이며 기둥이 높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콰, 콰앙!" 두 번째의 일제 사격이었다. 강호의 부하들은 과연 훌륭한 솜씨였다. 이 선제(先制) 포격을 거의 속사(速射)에 가까운 속도로 발사시키는 것이었다. 집의 파편이 불꽃을 끌며 다른 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서 맹렬한 불길이 일었다. 붉은 불길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우르르 뛰쳐나왔다. "탕! 탕! 탕!" 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붉은 불빛 속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세 번째의 포격은 마을 중앙에 불기둥과 먼지를 일으켰다. 집이 천천히 기울면서 지붕이 무너지듯 불길 속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총소리가 계속 들렸다. 청솔의 일행은 보이지 않는 어떤 목표물을 겨누어 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활을 겨누고 뛰쳐나온 사나이가 화살을 쥔 채 허무하게 총알 밥이 되었다. 뒤를 이어 한 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달렸으나, 그도 채 5미터도 전진하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어떤 집에서 한 농부가 길다란 막대기를 겨드랑이에 끼고 벌떡, 그는 당장 정신이 나간 듯, 엉금엉금 기어서 나온 집으로 다시 달아나 버렸다. 다음 순간, 그 집에 포탄이 떨어졌다. 집은 산산이 흩어져 휘날렸다. 마을 뒤켠에서 새빨간 불길이 높이높이 치솟았다. 뿌린 기름에다 불을 지른 모양이다. 불길은 검은 연기를 동반하고 윙윙 대나무 숲을 훑어 나갔다. "앗핫하하……. 어떠냐? 솔본의 솜씨가……." 청솔이 붉은 빛으로 검붉게 물든 얼굴을 쳐들고 귀신처럼 웃었다. 그 순간, 우르르, 쾅! 대지를 흔들며 무시무시한 소리가 일었다. "오, 지뢰화가 터졌다. 주문국 놈들 이제는 마지막이다. 달아날 테면 달아나 봐라. 샛길에는 지뢰화가 기다리고 있을 걸."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방, 지뢰화가 폭발했다. 청솔은 두 번째 휘파람을 날카롭게 불었다. "야아!" 범선은 뛰어 일어나 긴 칼을 번쩍 뽑아 들었다. "나를 따르라!" 아까부터 이 때를 기다리고 있던 네 사람은 회오리바람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불타는 마을로 쇄도해 들어갔다. 청솔의 휘파람 소리를 신호로 대포는 일제히 포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흐름별도 대포 곁을 떠나, 그의 장기인 긴 창을 겨누고 마을로 쳐들어갔다. 악귀도 역시 총알을 잰 총을 옆에 끼고, 세 사람의 부하를 이끌어 마을로 달려갔다. 마을은 불바다였다. 불타 떨어지는 집들의 불똥이 소나기처럼 솔본국 무사들 위로 떨어져 왔다. "음, 비, 빌어먹을 솔본국 놈들!" 새파란 얼굴로 울부짖으며 덤벼드는 사또의 부하를 범선은 단칼에 베어버렸다. 악귀는 필사적으로 덤비는 주문국 무사의 칼을 피하며 얼른 총을 겨누어 쏘았다. 정면에서 악귀의 머리 위를 치려던 적은 칼을 치켜든 채, 피할 사이도 없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흐름별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한 집의 판자 문을 냅다 걷어찼다. 그 판자 문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검은 그림자를 향해, 그는 번개처럼 창 끝을 내밀었다. 죽창을 든 농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흐름별은 품에서 폭약을 꺼내 집 안으로 던졌다. 순간, 환하게 불길이 소용돌이쳤다.   "솔솔아, 이만 하면 싸움의 결말도 다 난 것 같구나. 적군의 반은 대포 밥이 되고, 그밖에는 총알과 범선 일행의 칼에 쓰러진 모양이다. 마을 뒤의 대나무 숲이 저처럼 불바다가 되어서는 달아나지도 못하겠지." 그러나 솔솔이는 아까부터 무엇인가 불안한 표정으로 마을의 불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때 가만히 청솔의 음성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 이상해 죽겠어요. 적의 응수가 너무 빈약하군요." 솔솔이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했다. "응수라구? 내가 지금 말하지 않았니. 대포알을 먹고 대 부분 나가떨어졌다고." "아니에요, 오라버니! 이 정도의 공격을 받고 패배한 푼수치고는 너무 혼란이 없어요. 게다가 지뢰화가 폭발한 것도 겨우 둘 뿐. 나머지 사람이 모두 저 불 속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으음!" "오라버니, 이것은 역시 희죽이를 뒤쫓아온 적의 정찰병이 우리의 화공 계획을 엿들었다고 봐야겠어요. 적의 수비 는 대단하다고 봐야 돼요." 그 때, 문득 솔솔이가 배후의 어둠을 돌아다보았다. "오라버니! 저게 뭘까요?" 그 소리는 긴장에 얼마간 떨리고 있었다. "대장, 뭔가 이리로 오고 있습니다." 부하 중의 하나가 억누른 음성으로 비명처럼 외쳤다. "오라버니, 저건 사람의 발소리가 아니에요." 우지직하고 작은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다가오고, 붉은 빛 속에 불쑥 무섭게 큰 물건이 모습을 나타냈다. 부르릉, 탕탕탕……. 여태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무서운 폭음이 공기를 뒤흔들며 다가왔다. 그것은 풀과 나무를 밀어내며 서 있는 청솔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옆에 서 있던 원태가 칼을 빼들고 덤벼들었으나, 금방 공처럼 튕겨 땅 위로 나뒹굴었다. "오라버니, 빨리 피해요!" 솔솔이는 청솔을 밀어내고 몸을 굽혀 필사적으로 달렸다. 청솔은 정신을 차리자 솔솔이의 뒤를 좇아 달렸다. '이게 대체 어찌된 셈인가. 저것은 마물(魔物)인가 아니면 짐승인가?'   "어딜 달아나느냐, 청솔!" 철민은 핸들을 굳게 쥐고 소리쳤다. 어제 하루 종일 여럿이서 판잣집에 틀어박혀 회의를 계속하는 척하고 사실은 몰래 현대에서 가져온 2대의 모터사이클, 그것을 하루종일 걸려 두터운 판자와 이것도 함께 가져온 플라스틱 판으로 엄중히 장갑(裝甲)을 한 장갑차였다. "청솔, 이젠 달아나도 소용없다!" 철민은 강렬한 라이트를 달아나는 청솔의 등에 비쳤다. 그 순간, 철민은 라이트의 불빛을 막아 선 솔솔이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음, 뭐야, 계집애 아냐!" 철민은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땅벌랑, 뒤를 부탁하오!" 뒷좌석의 땅벌랑의 소리를 등에 흘리며 철민은 측면의 도어를 밀며 몸을 날렸다. "덤벼라! 솔본국의 비겁한 놈들!" 철민은 박쥐처럼 손발을 펴고 달려들었다. 맨손으로 덤비는 철민을 향해 솔솔이는 크게 칼을 휘둘렀다. 긴칼이 무지개를 그으며 철민의 정면을 향해 날았다. "얏!" 철민은 몸을 웅크려 솔솔이의 칼날을 허공에 흘렸다. 소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서운 검술이었다. '아차!' 철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까짓 소녀 하나쯤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것은 뜻밖의 강적이었다. 무엇이든 무기가 있어야겠는데…… 철민은 조금씩 다가오는 솔솔이의 살기를 온 몸에 받으면서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발치의 어둠은 나무토막 하나 찾아 내기 힘들었다. "자, 솔본국 온(溫) 솔솔이의 칼을 받아 봐라!" 쨍쨍한 소리가 철민의 귓전을 때렸다. "뭐, 온 솔솔이라고! 건방지다! 난 서울 △△중학교의 철민이야. 자, 덤벼라!" 이제는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철민은 주먹을 낮게 겨누고 솔솔이의 공격을 기다렸다. '아, 짧은 막대기라도 하나 있으면…….' 솔솔이가 문득 웃은 것 같았다. 철민은 반사적으로 2미터쯤 뒤로 뛰어 물러났다. 그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솔솔이는 벌써 총알처럼 달려 들어왔다. 아무 곳도 다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만큼 솔솔이의 공격은 빨랐다. 철민의 몸을 피하는 것도 또 바람처럼 기민했다. 쫓겨가는 솔본국 무사들의 절망적인 외침이며 칼 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솔솔이도 차츰 초조해졌다. 여태까지 자기의 칼을 피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가령 첫번째는 어떻게는 피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계속하여 그것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이 눈앞의 이 작은 소년은 몇 번이나 공격을 가해도 그 때마다 날쌔게 좌로 우로 피하며 칼끝을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솔솔이는 풀썩 뒤로 몸을 날리자, 칼 끝을 곧장 하늘로 향해 겨누었다. 필살의 기합이 온몸에 넘쳐 있었다. 철민은 순간, 아, 예쁜 소녀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마음이 뜻밖의 여유를 철민에게 주었다. 철민의 오른발은 이 때 떨어져 있던 한 자루의 막대기를 가볍게 밟았다. '됐다!' 일순 솔솔이의 칼이 바람을 갈랐다. 철민은 순간적으로 몸을 굽혀 막대기를 오른손에 갑자기 그대로의 자세로 중천을 향해 치올렸다. 백은(白銀)의 칼날과 석자(약 1미터) 길이의 막대기가 열 십자로 교차했다. 얼굴을 맞대고 선다고 보였던 두 사람은 동시에 좌우로 뛰어 몸을 피했다. 솔솔이는 차츰 승세(勝勢)가 사라져 감을 느꼈다. 맨손일 때도 칠 수 없던 적은, 이제는 충분한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이렇게 민첩한 인간이 있다는 것이 솔솔이에게는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철민은 겨우 손에 넣은 막대기를 중단(中段)으로 겨누었다. 길이도 무게도 딱 알맞았다. "자, 덤벼 봐! 왜 무서워졌나?" 솔솔이는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큰 소리 말아. 네가 덤벼 봐라!" "솔솔이라고 했겠다. 우리 집 솔솔이하고 마찬가지로 어차피 너도 건방지고 울보겠지. 자! 솔솔아, 때려 줄까?" 철민은 문득, 이 솔본국의 소녀 무사가 제 여동생 솔솔이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소리쳤다. 솔솔이는 평소 집에서는 건방진 소리를 곧잘 하여 철민이 하는 짓을 곧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일러바치는 미운 계집애다. 음, 오늘이야말로 혼을 내줘야지! 철민은 별안간 엉뚱한 곳에서 투지를 불태웠다. 그 소리를 들은 온(溫) 솔솔이는 놀랐다, 결사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서 건방지다느니, 울보라느니 때려 주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은 솔솔이는 문득 마음의 긴장이 풀렸다. 순간 맹렬히 돌입해 온 철민의 타격을 채 피하지 못해 솔솔이는 크게 비틀거렸다. 그 왼쪽의 어깨에 딱! 하는 무거운 타격이 왔다. 솔솔이는 벌렁 땅 위에 쓰러져 굴렀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을까 솔솔이는 머리 속에서 언뜻 생각했다. 바람을 가르며 막대기가 떨어져 왔다. 이번에는 팔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팔은 마비되고 솔솔이는 다시 땅 위에 굴렀다. 솔솔이는 분노로 눈앞이 아물아물했다. 이런 치욕적인 처사를 여태까지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솔본국의 온(溫) 솔솔이가 그래 막대기로 얻어맞고 땅 위에 구르다니! 솔솔이는 뛰어 일어나자마자 단도를 재빨리 빼어 들었다. 그것을 양손에 들자, 몸을 굽혀 적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앗, 위험하다!' 철민은 몸을 비켜 옆구리에 아슬아슬하게 단도의 공격을 피했다. 철민은 손에 든 막대기를 내어 던지자. 흐르는 솔솔이의 오른쪽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목덜미를 잡는다. 순간, 솔솔이 수도(手刀)가 철민이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그 왼손을 다시 쳐 올렸다. 솔솔이의 달콤한 냄새가 스르르 철민의 얼굴을 에워쌌다. '우엑, 냄새야!' 철민은 저도 모르게 힘을 늦췄다. 순간, 솔솔이의 몸은 매끄럽게 철민의 손을 빠져 등뒤로 돌았다. 단도의 날카로운 칼끝이 철민의 등뒤에서 엄습해 왔다. '앗, 위험!' 철민은 그 손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꽉 꼈다. 위기였다. 솔솔이가 단도를 또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면, 철민은 등 뒤를 찔리고 말았을 것이다. 잡고 있는 오른손을 놓고 달아날까? 철민은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이겼다!' 솔솔이는 적의 난조(亂調)를 느끼고 필살의 순간을 엿보았다. 적이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자기의 오른손을 놓은 순간 단도를 날린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장이 날 것이다. 철민을 솔솔이의 그런 심중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잡고 있는 오른손에 그 마음의 움직임이 분명히 전달되어 온다. 오른손을 놓고 뛰어 물러나는 몇십 분의 1초가 진짜 죽는 순간이었다. 적은 당연히 자유로워진 오른손의 단도를 날려 오겠지. '이래선 안 되겠다!' 철민의 왼손은 재빨리 움직여 주머니 속의 타임머신을 잡았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이 방법밖에 없었다. 솔솔이의 오른팔을 겨드랑이에 낀 채 부자유한 오른손의 손 끝으로 둥근 통의 손잡이를 찾는다. 그것을 본 솔솔이의 낯빛이 달라졌다. "앗, 그것은 희죽이가 훔쳐 온……." "바보 같은 소리 마! 그건 가짜야." "역시……." 솔솔이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 순간, 철민의 움직임을 솔솔이는 적의 허점으로 보았다. 솔솔이는 힘껏 몸을 비틀자 재빨리 허리에서 칼집을 뽑아 들었다. 그것은 이런 경우 강력한 무기다. 솔솔이는 그것을 높이 치켜들자 철민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철민은 뒤로부터의 공격에 숨을 죽이고 손끝에 있는 힘을 다했다. 째앵-.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겹쳐 쓰러졌다.   두 사람의 솔솔이   밤은 완전히 새었으나, 거리에는 아직 인적이 없었고, 철길의 건널목 차단기(遮斷機)는 열린 채로 있었다. 그 저쪽에 있는 △△역의 텅 빈 개찰구가 을씨년스럽게 넓어 보였다. 그 인적 없는 도로에 철민과 솔솔이는 양쪽으로 동시에 훌쩍 뛰며 갈라섰다. 솔솔이는 현기증이라도 일어났는지 두어 번 고개를 흔들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왜 그러지? 이제 못 당하겠다는 걸 알았겠지." 철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 소리에 솔솔이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자기 둘레에 일어난 이변(異變)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칼집을 떨어뜨린 듯, 오른손의 짧은 단도만이 아침 햇빛 속에 싸늘하게 빛났다. "에잇!" 솔솔이는 낮게 소리치자 핏발이 선 눈으로 철민을 노려보며 그림자처럼 달려들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너 죽고 나 죽자." "농담 말아!" 철민은 날쌔게 몸을 피했다. 여기까지 와서 같이 죽다니 말이 되느냐 말이다. 솔솔이는 약이 올라 입술을 악물고 뒤로 물러서는 철민을 뒤쫓았다. 가로수를 몇 번이나 누비며 철민은 자기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길로 달렸다. 큰 길에서 싸우다가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면 뒤가 귀찮기 때문이다. 철민의 집에서는 슬슬 여동생 솔솔이가 잠에서 깨어 일어날 시간이다. 철민은 이웃집 앞에 멎어 있는 자동차의 지붕을 딛고 훌쩍 자기 집 뜰로 뛰어내렸다. "멈춰라!" 솔솔이는 곧장 달려가자마자 철문을 뛰어 넘었다. 철민은 현관 옆을 돌아 자기 방 창 밑으로 갔다. 방에는 야구 배트며 기타 적당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창문으로 들어가려다 철민은 아차 하고 실망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아마 안으로부터 잠겨 있는 모양이었다. '솔솔이는 일어났을까?' 철민은 뜰의 나무 사이를 누비며 달렸다. "멈춰라! 어딜 달아나려고!" 솔솔이의 음성이 아침의 조용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레이스의 커튼 저쪽에 솔솔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철민은 한 달음에 솔솔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머나, 오빠! 어디 갔다 왔지? 학교도 빼먹고!" 솔솔이는 그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소리쳤다. "여기 있었구나!" 창 밖에서 들여다보며 솔본국의 온(溫) 솔솔이가 소리쳤다. 다음 순간, 그녀는 방안으로 일진 바람처럼 뛰어들어 왔다. "어머나, 이 여잔 누구지?" "에잇!" "얏!" 세 가지 각기 다른 외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철민, 온 솔솔이, 그리고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삼각형의 정점이 되어 마주 섰다. "뭐야, 이 여잔 남의 집에 신을 신은 채 뛰어들어 칼을 휘두르니……. 너 불량 소녀구나?" 여동생 솔솔이는 금방 눈을 곤두세우고 소리쳤다. 하얀 얼굴은 화가 나서 붉게 물들었다. 온 솔솔이는 이 때 처음으로 시선을 철민에게서 솔솔이에게로 옮겼다. 그 얼굴에 격심한 놀라움의 빛이 떠올랐다. 철민을 쫓고 있을 때의 결사적인 투지(鬪志)는 급속히 사라지며 심한 혼란이 마음 속에 동요를 일으켰다. "아, 이, 이건……." "온 솔솔이, 잘 봐라. 이건 꿈도 아니고 환영(幻影)도 아니란 말이야." 철민의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솔솔이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손에서 단도가 떨어져 둔탁한 금속성을 냈다. "오빠, 이 여잔 대체 누구지? 오빠 친구야?" "친구? 말도 말아, 솔본국 제일의 검객(劍客) 온 솔솔이야." "온 솔솔이?"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눈길을 모았다. "내가 졌다! 어떤 요술인지는 몰라도 진정 이것은 기상천외의 수다. 자, 내 목을 쳐라!" 온 솔솔이는 무너지듯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길고 검은 머리가 방바닥에 늘어졌다. "이봐, 얼굴을 들고 사방을 잘 살펴봐." 그 말에 온(溫) 솔솔이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길을 들었다. 그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 이상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다. 빨리 내 목을 쳐서 승리를 거둬라." "이봐, 여기는 말이야, 여태까지 네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 300년이나 지난 시대란 말이야. 알겠어? 여긴 현대의 서울이란 말이야." 온 솔솔이는 차근차근 철민을 훑어보고,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를 살펴보고 방 안에 놓인 피아노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차츰 그녀의 머리 속에 못 박히고 있었다. "저 분은 역시 그대와 같은 무사인가요?…… 정말 아름다운 옷을 입고 계시군요." 아직 네글리제(잠옷) 바람인 솔솔이는 입을 딱 벌렸다. "오빠, 이 여자, 돈 것 아냐?" 솔솔이는 머리 옆에서 손가락을 빙그르르 돌렸다. "아냐, 그렇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 실은 300년 전인 옛날의 세계에서 갑자기 이리로 왔기 때문에 놀라고 있는 거야." "300년 전?…… 또 오빠의 허풍이 시작됐구나." 온 솔솔이는 힘없는 모습으로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에게로 다가갔다. "이봐요. 난 이미 패배한 몸.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하는 수 없지만, 그대의 오라버니는 너무도 엄격하신 분. 이렇게 된 바에야 그대의 손으로 내 목을 쳐주시오." 솔솔이는 무슨 말인가 할 듯하다가 온 솔솔이의 너무나 진지한 표정에 겨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안 모양이었다. 솔솔이는 언뜻 철민의 얼굴을 보더니 단호히 말했다. "좋아, 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내가 가르쳐 주지. 오빠! 이 방에서 나가 줘." "야, 너 괜찮겠니? 그 여자는 굉장한 여자란 말이야. 솔본국 제일의 검객이란 말이야." "솔본국의 검객인지 뭔지 모르지만, 어떻든 우선 옷을 갈아입어야 될 게 아냐. 이것 봐, 온통 먼지투성이잖아. 오빠, 레이디가 옷을 갈아입는데 거기 그렇게 서 있을 작정이야. 빨리 나가 줘." 철민은 하는 수 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솔솔이의 방에서 뛰어 나왔다. 그리고 자기 방 도어를 열고 들어가 미리부터 생각해 놓은 물건을 몇 개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 소란통에 아버지며 어머니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솔솔아,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어디 가셨니?" 철민의 소리에 도어 저쪽에서 솔솔이의 음성이 돌아왔다. "오빠가 작은 집에 갔는지도 모른다고 엊저녁에 거기 가셨어. 늦게 될 테니까 거기서 주무시겠다고……." 철민은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정말 재수가 좋은 날이다. 그러면 온(溫) 솔솔이에 대해 귀찮게 추궁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 철민은 부엌으로 가서 수돗물을 틀어 입에 대고 실컷 마셨다. 엊저녁부터의 싸움으로 몸은 무척 피곤하지만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철민은 세숫대야 앞에 서서 슬쩍 둥근 통의 손잡이를 돌려 홀연히 사라졌다.   강미화 선생을 탈환하라!   원불사로 가는 길을 두 대의 모터사이클이 아침 바람을 가르며 돌진하고 있었다. "땅벌랑! 적의 혼란한 틈을 타서 일거에 강미화 선생을 탈환해야 돼요." "용재님,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우리에게 이로울 때는 없을 거예요." 두 사람은 탄환처럼 원불사의 산문(山門)으로 이어진 잡목 숲 속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장갑(裝甲)을 풀어버린 모터사이클은 엔진 소리도 경쾌하게 냇물의 다리를 뛰어넘어 원불사의 나무 울타리를 돌파하고 경내로 달려들어갔다. 푸른 이끼로 깊이 덮인 넓은 경내에는 인적이 없었다. 정면의 석가당을 향해 질풍처럼 달린다. 빵빵! 용재가 힘껏 경적을 울렸다. 석가당의 문이 열리며 새 사나이가 달려나왔다. 세 사람 모두 이 처음 보는 괴상한 탈 것에 깜짝 놀랐다. "어엇! 이게 뭐냐? 말이냐, 소냐?" "이 무서운 소리는?" 그러나 역시 경천환은 놀라고 있지만은 않았다. "오, 땅벌, 기묘한 짐승을 타고 왔구나!" 경천환은 긴칼을 쑥 뽑아들었다. 그 경천환을 향해 두 대와 모터사이클이 빙그르 바퀴를 돌렸다. 뱀 밭의 진평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공포에서 폭약(爆藥)을 높이 들었다. 용재의 손에서 한 줄의 로프가 살아 있는 것처럼 뻗어 나갔다. 높은 나무 가지를 뒤흔들며 아침 바람이 불며 지나갔다. 이슬이 우르르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모터사이클의 시트를 적시고 빼어든 칼날 위로 흩어져 내렸다. 진평의 손에서 날아간 폭약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폭발하는 것과 용재의 손에서 번갯불처럼 뻗친 로프가 경천환의 오른쪽 팔에 얽히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됐다! 달려라." 배기관(排氣管)의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용재가 외쳤다. 경천환은 모터사이클에 끌려 흙먼지를 일으키며 미끄러져 갔다. "음, 아앗!" 어떻게 해서든지 오른쪽 팔에 얽힌 로프를 끊어 버리려 했으나, 용재는 점점 더 스피드를 올렸다. 원불사의 넓은 경내를 크게 둥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땅벌랑은 폭약의 연기를 일순간에 돌파하자, 멈칫하니 서 있는 진평을 향해 돌진했다. "아앗!" 허둥지둥 몸을 피하는 진평에게 유성처럼 표창이 날았다. "맛이 어떠냐!" 용재는 모터사이클을 세웠다. 경천환은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흙투성이가 되어 기절해 있었다. "됐다. 강미화 선생을 찾아라!" 두 사람은 날쌔게 모터사이클에서 뛰어내렸다. 단숨에 층계를 뛰어 올라가자 안의 판자 문을 밀어 열었다. "앗, 강미화 선생님!" 안쪽 구석진 기둥 밑에 강미화 선생이 나 뒹굴어 있었다. 땅벌랑이 강미화 선생을 묶은 밧줄을 끊었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이젠 살았어요." "어머나, 넌 용재가 아니냐! 너까지 여기에……? 얘, 제발 좀 가르쳐 다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셈이냐?" 강미화 선생의 음성은 불안과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그, 그건 선생님, 저, 철민이가 가지고 있는 타, 타임머신 때문이에요." "타임머신?" "네, 그래요. 지금 우리는 솔본국의 무사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거예요. 선생님을 사로잡아 갔던 놈들이 바로 그놈들입니다." 강미화 선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절망적으로 쪼그려 앉았다. 정말 무리도 아니다. 타임머신이니 솔본국의 무사들과의 싸움이니……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강미화 선생에게 믿어질 것인가. "용재님, 어떻든 여기서는 우선 물러갔다가 나중에 천천히 설명을 드리시죠." 땅벌랑이 뒤에서 가만히 속삭였다. "하긴 그렇군. 선생님, 자, 우리 본거지로 돌아가요." "난 이제 싫다. 이렇게 무서운 곳, 돌아가고 싶어." 강미화 선생은 당장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는 선생님을 두 사람은 양쪽에서 부축하여 데리고 나왔다. "용재하고 철민이는 무서운 사람들이로구나. 난 돌아가겠어." 용재는 매우 난처해져서 땅벌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땅벌랑은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 끄떡였다. "아닙니다. 아가씨, 이 용재님이나 우리들의 두령 철민님께서는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이 수라장(修羅場)도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오니 굽어 살피십시오." 땅벌랑의 성실성 있는 설명에 강미화 선생도 문득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똑똑한 걸음걸이로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가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경내를 훑어 본 땅벌랑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아차! 용재님, 경천환 녀석이 달아났습니다그려." "음, 아침 이슬을 맞고 숨을 돌이킨 모양이군…… 아, 그러고 보니 진평도 사라졌구나." 아까 땅벌랑과의 결전 끝에 표창 세 개를 맞고 땅에 쓰러져 있던 진평의 모습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경천환이 진평을 구원해 가지고 달아났는지 혹은 상처를 입은 진평이 경천환을 끌어 일으켜 자취를 감추었는지. 어떻든 이것은 가공할만한 체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완전히 목숨을 끊어 놓아야 했을 텐데……." 땅벌랑이 중얼거렸다. "닥쳐요. 목숨을 끊어 놓다니 야만인이나 할 소리예요." 강미화 선생이 눈쌀을 찌푸렸다. "이것도 우리들의 규율이니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아가씨라니, 나 말인가요?" 강미화 선생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이 사람은 주문국 제일의 무사로서 땅벌랑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을 아마 대갓집의 아가씨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용재야, 너희들은 도대체……." 용재는 머리를 에워싸고 옆으로 달아났다. "잠깐만 참으십시오, 아가씨. 꾸지람은 나중에 이 땅벌이 받을 터이오니, 우선 이 모, 터모터가 아니고…… 저어……." "모터사이클이오." "아, 참, 그 사이클 말입니다. 이걸 타십시오. 이 수레는 말이 끄는 것이 아니라, 엘레키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정말 귀중한 것이외다. 그렇죠, 아가씨." "땅벌랑, 선생님은 모터사이클 같은 것 다 알고 계셔요." 땅벌랑은 금방 면구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지며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렇겠습지요. 워낙 고귀한 신분이시니……."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도 다 알고 있어요." 선생님은 빙긋 웃었다. "용재야, 이 분을 놀리면 안 돼. 그럼 가요, 땅벌랑!" 강미화 선생에게 이 중년의 소박한 무사가 지니는 인정이 따뜻이 전달되어 왔다. 사정은 아직 잘 알 수 없으나, 자기를 위로하고 기운을 내게 해 주려는 진심이 고마웠던 것이다. 강미화 선생을 뒷자리에 태운 땅벌랑의 모터사이클을 선두로 두 대의 차는 폭음도 드높게 원불사의 경내를 빠져 나왔다. 강미화 선생을 맞이하여 철민네의 진지는 오랜만에 승리의 웃음을 되찾았다. 돌쇠랑, 매미랑이 마을의 부녀자를 지휘하여 잔치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은 뒤 옷매무새를 고치자 그럭저럭 평소의 명랑하고 아름답고 약간은 엄격한 강미화 선생의 본 모습이 되돌아 왔다. 그 무렵이 되자, 돌쇠랑을 선두로 마을의 여자들이 숱한 음식을 올려놓은 상을 들고 들어왔다. 철민을 비롯하여 용재, 남웅, 땅벌랑, 사또 등, 중요 인물들이 강미화 선생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여러 사람의 입으로부터 여태까지의 경과가 보고되었다. 강미화 선생은 수저를 드는 것도 잊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으나 차츰 그 표정이 달라졌다. "철민아, 그 타임머신은 나중에 구경하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선생님, 저는 이 땅벌랑이며 사또,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도와서 솔본국 무사들을 무찌르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는, 아니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어른들이 걱정하실 텐데……." "예, 알고 있습니다. 허지만 이 상태를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다 끝난 다음, 현대로 돌아가서 설명할 작정입니다." 강미화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민아, 온(溫) 솔솔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용재가 말했다. 철민은 온 솔솔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앗, 그러면 좋겠군. 선생님, 저희 집에 가서 제 동생과 온 솔솔이가 둘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아주시지 않겠어요? 동생이 잘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은 되지만요." "그것도 좋겠구나. 그럼 누가 나하고 같이 가 주겠니?" "그럼, 남웅아, 네가 갔다 오려무나." 그리고 계속 작전 회의가 열렸다. 이래서 싸움은 이제 엇비슷하게 되었다. 아니, 온 솔솔이가 적의 전력(戰力)에서 빠졌으니까, 5.5 대 4.5 정도의 차이가 생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앞으로의 적의 동정을 살펴 거기 따라서 이 편의 작전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매미랑의 제안으로 다시 주문국 무사 10여 명을 보충하여 전력을 높이기로 했다. 그 심부름을 위해 젊은 무사가 즉석에서 출발했다. 응원 부대가 오면 그가 그 중의 몇 사람을 지휘하도록 맡기겠다는 언약을 받고 용기 백배하여 떠난 것이다. 철민은 필요한 물품을 자세히 메모하여 남웅에게 맡겼다. 사또는 마침내 최후의 결전을 맞이하여, 이 마을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럼 남웅아, 넌 먼저 출발해라. 선생님, 학교 일은 잘 부탁합니다." 철민은 주머니에서 타임머신을 꺼내어 그 끈을 남웅의 목에 걸어 주었다.   주스와 스테레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溫) 솔솔이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세수를 시키고 머리에 묻은 먼지며 흙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허리에까지 닿는 긴 머리를 둘둘 말아 올려 핀으로 집었다. 그리고 제 옷장에서 그녀에게 맞을 만한 옷을 찾아 바꿔 입혔다. 온 솔솔이는 완전히 인형처럼 솔솔이의 말을 쫓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며 마음을 턱 내맡기고 있었다. "자, 이 겨울 좀 봐요." 솔솔이는 커다란 삼면경(三面鏡) 앞으로 데리고 갔다. 엷은 갈색 스커트에 라이트 블루의 심플한 디자인의 블라우스가 볕에 그을려 거무칙칙해진 온 솔솔이를 소년처럼 경쾌하게 보이고 있었다. 말아 올린 머리칼 몇 올이 갸름한 목덜미에 늘어져 있었다. 솔솔이는 제 마음에 드는 밝은 초록 색 손수건으로 말아 올린 머리를 매어 주었다. "어머나, 넌 정말 예쁘구나." 솔솔이는 감탄했다.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는 온 솔솔이는, 그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고 긴칼을 휘두르며 투지 만만하던 예전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인물 같았다. 그 날씬한 모습은 마치 암사슴처럼 민첩하고 들에 핀 꽃처럼 우아했다. "아뇨, 저 같은 거야 뭐…… 아가씨야말로……." 온 솔솔이는 수줍은 듯이 눈을 숙였다. "레코드 안 들을래요? 나, 레코드 많이 가지고 있어요." 솔솔이는 올 여름에 졸라서 산 스테레오의 스위치를 넣었다. "난 리키 넬슨을 좋아해요. 약간 어른스런 기분도 있거든요, 난……." 온(溫) 솔솔이는 스테레오와 솔솔이가 손에 든 레코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달콤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온 솔솔이의 얼굴에 핏기가 올랐다. 심한 놀라움 뒤에는 불가사의한 즐거움이 솟았다. "우리 춤 춰요." 솔솔이는 손가락을 울리며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어렴풋이 배운 남국의 리듬이 하얀 솔솔이의 얼굴을 빛나게 했다. 온 솔솔이도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솔솔이의 스텝을 흉내내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생긋 웃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의 친구인 듯,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미소지으며 눈길을 주고받았다. "주스 마시겠어요?" 솔솔이는 부엌의 전기 냉장고에서 주스 병을 들고 왔다. 어머니에게 발각되면 야단을 맞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창문에 달린 쇠붙이에 마개를 끼고 오른손 팔굽으로 탁 친다. 마개가 빠지고 주스가 넘쳐흐르는 것을 재빨리 왼손으로 병을 입에다 갖다 대었다. '계집애가 건방지게…….' 철민의 그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솔솔이는 목을 움츠리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온 솔솔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병을 들고 서 있었다. "내가 열어 줄께." 솔솔이는 재빠른 동작으로 다시 병마개를 땄다. "솔솔아, 솔솔아!" 현관 쪽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네!" 솔솔이는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그 뒤를 온 솔솔이가 따랐다. "아, 강 선생님." 거기 서 있는 사람은 강미화 선생이었다. 그 뒤에 남웅이 서 있었다. "솔솔아, 괜찮니?" "네? 뭐 가요?" "아, 친구가 와 있구나!"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어깨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선생님, 소개합니다. 이 친구는 온(溫) 솔솔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분은 강미화 선생님이에요." "온 솔솔이?" "뭐라고! 온 솔솔이!" 제일 뒤의 말은 남웅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날쌔게 몸을 날려 2미터나 뒤로 물러서 유도의 자세를 취했다. "나하고 제일 친한 친구에요. 선생님하고 남웅 오빠도 올라오세요." 온 솔솔이와 강미화 선생은 여태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서로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온 솔솔이는 얼른 복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속임수도 전법(戰法)인 이상, 용서는 빌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솔솔이는 당황해서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이봐요, 여기서는 그런 것 다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인사는 하지 말아요." 강미화 선생은 처음엔 어리둥절했으나 한참 있다가 이 아름다운 소녀가 그 무시무시했던 솔본국의 온 솔솔이라는 것을 알자, 그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아갔다. "괜찮아요……. 여기서는 적도 없고 우리편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양복, 아가씨에게 정말 잘 어울리네요. 아주 멋있어요." 두 사람은 온 솔솔이를 부축하듯 양쪽에서 밀며 방으로 들어갔다. "허어, 저 소녀가 온 솔솔이란 말이지. 정말 예뻐졌는 데…… 그리고 솔솔이하고 친구가 되었다니 정말 놀랍단 말이야." 남웅은 중얼중얼 혼자 중얼거렸다. 남웅의 눈에는 마치 번데기에서 마름다운 나비로 변한 듯한, 멋진 온 솔솔이의 변신(變身)이 아로새겨졌다. "흠, 알 수 없는 일이야." 방에서는 강미화 선생과 온 솔솔이가 몸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강미화 선생은 상냥한 언니처럼 온 솔솔이에게 지금이 그 때로부터 300년이나 지난 후의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어떤 이상한 기계에 의해 청솔이며 솔솔이네의 시대와 자유롭게 왕래를 할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현대에는 칼이며 창을 휘둘러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은 없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온 솔솔이는 멍하니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강미화 선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강미화 선생의 몸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 그녀의 가슴 속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이 솔본국의 소녀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여러 가지 일을 상기시켰다. "선생님은 꼭 제 어머니나 언니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요……. 어머님은 안 계시나요?" "제 어머니는 아직 제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대요." 온 솔솔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에 젖은 눈동자는 의지할 데 없는 소녀의 고독과 슬픔을 담고 깊은 호수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그랬군요. 그럼 이제부터는 내가 어머님이나 언니가 돼 줄께요. 그리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죠. 수예며 춤, 노래, 또 그림도……." 강미화 선생은 빗을 손에 들고 온 솔솔이의 머리를 잘 빗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스커트에 조그만 얼룩을 지으며 번졌다. "선생님, 저 식사 준비를 하고 오겠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팔 소매를 걷어 부치고 나섰다. "남웅 오빠, 뭘 멍청하니 보고 있는 거예요, 빨리 도와 줘요." 남웅은 얼떨떨해서 뛰어 일어났다. "나, 난 철민이하고……" "남웅 오빠는 오빠 말이면 뭐든지 다 들으면서 내 말은 안 듣겠단 말이죠." 솔솔이의 눈썹이 곤두섰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이 더욱 커진 것 같았다. "아, 알았어, 알았어." 남웅은 솔솔이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웅 오빠는 그 쌀을 씻어요." 그러더니 곧, 솔솔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강적(强敵), 왕호룡   "남웅이 자식 뭘 여태까지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 철민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웅에게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마을의 삼면에는 이미 견고한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흙 가마를 겹쳐 쌓고, 날카롭게 깎은 대나무 창을 주욱 꽂아 놓아, 이제는 어지간한 무사라도 이것을 타넘기란 불가능했다. 그리고 개방해 놓은 한쪽에는 몇 겹으로 조그만 호(壕)를 파서 산병선(散兵線)으로 삼았다. 그 무렵, 이 마을로 이어진 숲 속의 길을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달려오는 한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흰옷에 흰 장갑, 흰 쇠붙이를 머리에 끼고, 직경 20센티미터나 되는 쇳덩어리를 왼손에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윽고 마을 서쪽에 나타났다. 잠시 동안 사방을 살피고 있더니, 두 발을 웅크리고 박쥐처럼 하늘을 날았다. 대번에 바리케이드를 뛰어 넘는다. 높이 5미터나 되는 이 견고한 바리케이드도 이 괴상한 사나이 앞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와라, 철민! 나는 솔본국 무사들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왕호룡(王虎龍)이다. 나와라, 철민! 내 그 모가지를 잘라 주마." 위잉 하고 공기를 뒤흔들며 쇳덩어리가 돌기 시작했다. 무서운 힘이었다. 이것을 보고 철민도 낯빛이 변했다. "어엇, 이건 굉장한 녀석이 나타났는데……." 종운이 머리 꼭대기에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를 질렀다. "철민아, 조심해! 이놈은 좀 무시무시하다." "으음, 왕호룡 녀석, 기어이 나타났구나." 땅벌랑이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그림자처럼 철민이 곁으로 다가섰다. 위잉, 위잉 하고 공기를 가르며 돌아가는 거대한 쇳덩어리를 지켜보며, 빠른 말씨로, "두령, 저 놈은 솔본국에서도 일급의 무사입니다. 여태까지 저 놈의 손에 쓰러진 주문국 무사가 20여 명이나 됩니다. 언젠가는 우리 눈앞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두령,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땅벌랑은 결사적인 표정으로 긴칼을 잡았다. "자, 어떻게 된 거야. 뭘 꾸물거리고 있어. 하나 둘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덤벼 보지." 왕호룡은 강철같은 빛깔의 얼굴을 씰룩거리며 크게 입을 벌렸다. 위잉! 쉬익! 쇳덩어리와 청동의 쇠사슬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광장에 퍼졌다. 소용돌이치는 웅성거림 속에서 누구나 그 거대한 쇳덩어리가 자기를 향해 날아왔다고 생각했다. 철민도 용재도 종운도 모두 일제히 저도 모르게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핫핫하하! 어때. 자, 간다!" 왕호룡은 바른손에 쥔 쇠사슬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철민은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뭐래도 이런 공격을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다. 모조리 흰 것으로 차린 모습이라든지 쳐다볼 정도로 큰 키라든지, 보통 어른의 두 배는 됨직한 넓은 어깨 폭, 게다가 사나운 짐승처럼 잔인하게 빛나는 두 눈 등, 모두가 무시무시한 박력에 차 있었다. "자, 간다! 받아라!" 왕호룡은 마치 아이들을 놀리듯 외치며 무엇인지 경을 가는 것처럼 광장 중앙으로 나왔다. 누가 던졌는지 표창이 쇳덩어리에 맞아 흰 섬광을 그리며 빗나갔다. "하하하, 쓸 데 없는 짓 하지 말아. 표창 따위를 던지다니……." 철민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음, 이놈이 사람을 뭘로 알고……." 그러나 화가 치민 다고 섣불리 뛰어나갔다가는 그야말로 적의 책략에 말려들게 된다. "철민이란 어떤 녀석이냐? 제일 먼저 처치해 주지, 나와라, 나와!" "쏴라!" 사또가 외쳤다. 2~3명의 부하가 우르르 활을 들고 달려 나왔다. 화살을 활줄에 대고 겨누는 동안, "이얏!" 하는 왕호룡의 부르짖음과 함께 쇠사슬이 쉬익 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뻗었다. 쇳덩어리는 활을 겨눈 사또의 부하들을 돌덩이처럼 날려버렸다. 부러진 활과 화살이 높게 날아 올랐다. "이건 보통 놈이 아닌데……. 솔본국 놈들 반격의 시간을 얻으려고 굉장한 녀석을 파견했군." 용재가 등뒤에서 속삭였다. "좋아, 해치우자. 내 말을 잘 들어. 저 놈은 분명히 굉장한 장사지만,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야. 저렇게 언제까지나 저런 것을 휘둘러 댈 수는 없을 거야. 손발의 움직임이 둔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우리 넷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거야. 그래서 상대편의 주의를 분산시켜야 해." "알았어, 철민아. 저 쇳덩어리를 피하는 것은 배구에서 하는 회전 리시브의 요령으로 하자." "오케이! 자, 그럼……." 철민과 용재, 종운, 그리고 땅벌랑의 네 사람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흠, 이놈들 봐라!" 왕호룡은 쇠사슬을 짧게 끌어당기자, 다시 유유히 휘둘러 대기 시작한다. 철민들의 공격 태세를 보고, 사또의 부하들은 뒤로 일제히 물러나 멀찌감치에서 요소 요소를 굳게 지켰다. "자, 간다." 정면으로 돌아간 철민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쇳덩어리가 번개처럼 날았다. 일순, "영차!" 철민은 날래게 몸을 날려 쇳덩어리 밑을 빠져 나왔다. 공처럼 굴러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난다. 탕! 땅을 울리며 쇳덩어리가 땅바닥을 때렸다. 그 순간, 그것은 벌써 쉬익 소리를 내며 왕호룡의 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숨 쉴 사이도 없이 쇳덩어리는 그대로 왕호룡의 뒤에 낮게 도사린 용재를 향해 날았다. "영차!" 용재도 빙그르르 몸을 굴렸다. 탕! 용재의 뒤, 정확히 2미터쯤 되는 곳에 쇳덩어리가 낙하했다. "잘한다, 용재야!" "음. 요 자식들아!" 왕호룡은 온통 분노가 치받쳤다. 날아오는 쇳덩어리를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거나 옆으로 피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짓이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쇳덩어리는 뒤로 물러서면 그 다리에 부딪힌다. 왕호룡의 그 낙하 각도를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잇! 얏! 위잉!" 유성처럼 쇳덩어리가 엄습해왔다. 이마 바로 앞, 1미터까지 다가왔을 때, 철민은 순간적으로 용수철처럼 앞으로 몸을 굴렸다. 타앙! 쉬익! 땅이 울리고 당겨지는 쇠사슬의 울림소리. 몸을 굴린 철민의 머리 위를 쇳덩어리가 돌아간다. 벌떡 일어나는 철민. 그것이 거의 동시였다. 왕호룡은 차츰 초조해졌다. 여태까지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쇳덩어리 쪽으로 몸을 던져 피하는 적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 번 회전 리시브를 할 적마다 네 사람은 조금씩 왕호룡 쪽으로 다가갔다. '음, 뒤로 물러서면 좋을 텐데, 이놈들, 앞으로 몸을 던지다니!' 왕호룡은 속으로 으스스 두려움이 생겼다. 적(敵)들의 가벼운 몸놀림도 칭찬할만 하거니와, 바람보다도 빠르다고 자랑하던 자기 쇳덩어리의 움직임을 이토록 정확하게 간파하는 능력에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어떠냐, 왕호룡! 힘만 가지고는 안 된단 말이야. 빠른 동작을 간파할 수 있는 육감이 필요한 거야." 철민이 외쳤다. "암, 그렇고 말고. 넌 아무래도 트레이닝이 부족한 것 같아. 좀더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하란 말이야." 종운이 약을 올렸다. "에잇!" 쇠사슬의 길이는 이미 10미터도 채 못되도록 줄어들고 있었다. 무거운 쇳덩어리를 자유롭게 돌리기 위해서는 이미 쇠사슬의 길이가 너무 짧아지고 있었다 왕호룡은 민첩한 네 마리의 늑대에게 에워싸인 거대한 곰처럼 바야흐로 완전히 움직임을 봉쇄 당하고 있었다. 다음 번의 쇳덩어리가 날아오는 것을 피하는 순간이 네 사람이 일제히 돌격 태세로 들어가는 때였다. 회전 리시브의 자세 그대로 단번에 굴러 왕호룡의 다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광장은 일순, 죽음처럼 조용해지고 쇳덩어리의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드높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왕호룡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이얏!" 왕호룡은 그 큰 키를 둘로 꺾어 날쌔게 몸을 굽히고 두 손이 쇠사슬을 쥐자 지상 1미터 쇳덩어리는 낮게 도사린 이 사람의 하반신을 쓸듯 먼지를 일구며 원을 그렸다. 재빨리 철민이 뛰었다. 멋진 공중 회전이다. 무릎을 안아 쥐고 몸을 웅크리자 그 모습은 이미 훌쩍 훌쩍 몸을 날려 공중에서 돌았다. 필사적인 공격을 교묘하게 피신 당한 왕호룡은 네 사람의 발이 땅에 닿기 전에 갑자기 쇠사슬을 집어던지고 바람처럼 달렸다.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땅을 울리며 네 사람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앗, 저 놈이 달아난다." 그런데 달아났다고 생각한 왕호룡은 단숨에 20미터쯤 달리더니 그 기운으로 풀쩍 몸을 날려 전방의 민가(民家) 지붕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럽쇼, 저놈은 틀림없이 높이뛰기의 올림픽 대표 선수나 되겠는데……" "종운아! 지금은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냐" 용재가 종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때, 여기까진 못 오겠지?" "뭐라고? 좋아, 이번에야말로 화살 맛을 보여 주지." "잠깐만, 철민아 이놈, 이걸 좀 봐라!" 왕호룡은 품속에서 네모진 종이 뭉치를 꺼냈다. "봐라, 이건 지뢰탄(地雷彈)이다. 이제 한 놈도 남김 없이 죽여 주마." 왕호룡은 증오에 찬 표정으로 흰 이를 드러내자 그것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자, 먹어라! 한 놈도 남지 말고 저승으로 가라!" 지붕 위에 있는 왕호룡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조리 풀잎처럼 파랗게 질렸다. "으음!"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철민도 속수무책이었다. 머리 위로부터 지뢰탄 세례를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왕호룡은 결정적인 승리의 쾌감에 취해 빙그레 웃었다. 그 때, 종운이 흘낏 태양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번쩍! 지붕 위에서 강렬한 광선의 작렬이 눈에 띄었다. "으앗!" 왕호룡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그 큰 몸집이 비틀거리며 훌쩍 몸이 공중에 떴다. 그리고 급경사의 지붕 위를 뚜르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엎드려라!" 철민의 외침 소리에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땅에 엎드렸다. 종운의 손에서 떨어진 손거울이 저만치 떨어졌다. 탕탕! 처절한 폭음 소리가 나며 초가 지붕이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핫핫하, 왕호룡 녀석 드디어 자폭(自爆)했구나." 무럭무럭 이는 먼지를 뒤집어쓰며 모두들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다.   심야(深夜)의 활극   강미화 선생은 학교에 다녀온다면서 솔솔이의 집을 나섰다. 남웅도 철민에게 부탁 받은 물건을 갖춰야겠다면서 바쁘게 뛰어 나갔다. 갑자기 조용해진 집 안에서 온 솔솔이와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다시 마주 대하고 앉았다. "이봐요, 미스 온(溫), 이젠 다시 돌아갈 생각 말고 그냥 우리 집에서 살아요.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내 부탁해 볼께요." 온 솔솔이는 문득 슬픈 듯이 고개를 숙였다. "솔솔 아가씨, 그렇지만 난 솔본국의 여인, 댁의 부모님은 좋아하시지 않을 거예요." "그럴 리가 없어요. 미스 온. 혹시 오빠가 시끄럽게 굴지는 모르지만……" "오라버니라면, 그 철민 도령을 말씀하시는지요?" 솔솔이는 후훗! 웃음을 터뜨렸다. "철-민-도-령! 철민 도령이라고요! 아, 그래요. 개구쟁이 오빠 말이에요." "그런 말하시면 안 돼요. 철민 도령은 훌륭한 분, 좋은 오라버니를 두어서 아가씨는 행복하시겠어요." "하긴 그래요. 가끔 짓궂은 데도 있지만, 사실은 좋은 오빠예요." 두 사람은 마주보고 미소지었다. 온 솔솔이의 가슴에 이때 그 철민의 생기 발랄한 얼굴이 뜨거운 숨결이 되어 스며 들어왔다. 온 솔솔이는 가능하면 정말 이 집의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아름다운 의상, 여태까지 본적도 없는 숱한 진귀하고 예쁘장한 소녀의 소지품, 삼면경(三面鏡)이며 텔레비전, 스테레오 등에 솔솔이의 마음은 뛰었다. 그리고 또 철민의 모습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온 솔솔이는 어쩐지 찌잉! 하고 마음 속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현관 쪽에서 갑자기 신발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아, 아버지하고 엄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미스 온, 잠깐만 여기 들어가 있어요. 이유는 나중에 얘기할게요." "여기에요?" "그래요, 그래요. 빨리 이 벽장 속에 들어가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급히 온 솔솔이를 벽장 속에 감췄다. 그리고 허둥지둥 여기 저기를 깨끗이 치웠다. 온 솔솔이에게 보이고 있던 앨범이며 학교의 사진, 제 취미로 모으고 있던 우표철, 평소 아끼고 있는 아름다운 자수의 손수건 등을 정리해서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다. "솔솔아, 아무 일 없었니? 그리고 철민이는 돌아왔니? 암만해도 이상하다. 대체 어딜 갔을까? 작은댁에도 가 있질 않더라." 어머니의 음성이 현관 쪽에서 들려왔다. "수고들 하셨어요." 솔솔이는 안정되지 않은 가슴을 달래며 현관으로 나갔다. "솔솔아, 철민에게서 무슨 연락이라도 없었니?" 아버지가 물었다. 철민은 여태까지 곧잘 시내의 친척집에 가서 묵고 오는 버릇이 있었다. "아뇨, 아무 연락도 없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응접실로 들어섰다. "여보, 이건 필경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경찰에 수색원을 내는 게 어떨까요?" 어머니가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글쎄…… 허지만 철민이하고 한 반인 용재며 남웅, 종운이 세 아이도 함께 자취를 감춘 걸 보니 이건 아마 네 아이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것 같소. 그렇다면 철민이가 무슨 사고가 나서 병원에 가 있을 리도 없고……." 솔솔이는 멈칫멈칫 입을 열었다. "저어, 아버지, 오빠는 절대 안심이에요, 절대……" "절대 안심이라니, 네가 어떻게 아니?" "글쎄 안심해도 좋다니까요." 어머니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아버지의 찻잔에 차를 따르다 말고, "솔솔이, 너 철민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구나? 너 철민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아니, 아니에요. 난 몰라요." "솔솔아, 아버지하고 엄마가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오빠가 있는 곳을 알면 말해라!" 아버지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솔솔이는 벌떡 일어나서 제 방으로 달아났다. 온(溫) 솔솔이는 벽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하고 엄마는 지금 기분이 대단히 나빠요. 그래서 얼른 도망쳐 왔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벽장문을 빠끔히 열고 온 솔솔이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되시는 철민 도령하며 아가씨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군요. 정말 부러워요." 벽장 속에서 옹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온 솔솔이는 즐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자리에 드신 것을 보고, 솔솔이는 제 방문을 잠갔다. 그러고 나서야 살며시 벽장문을 열고 온 솔솔이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미안해요, 좁은 곳에 가둬 놓아서. 이젠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잠드셨으니까 괜찮아요…… 우리 인제 침대에 누워서 얘기해요." 철민이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를 위해 장롱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네글리제를 꺼냈다. "미스 온은 이걸 입어요. 베개는 뭘로 할까……" 그러다가 여행용 공기 베개를 꺼내 바람을 넣었다. 온 솔솔이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기 전에 얼굴을 씻는 것은 미용상 꼭 필요하지만, 지금 세수를 하러 갔다간 엄마한테 들킬지도 모르니까 이 콜드크림을 써요." 이런 일은 말괄량이 솔솔이의 특기 중의 하나다. 아름다운 병에 든 크림에 온 솔솔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고 그것을 거즈로 닦아 주었다. 온 솔솔이는 언니의 시중을 받는 여동생처럼 얌전히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벽시계가 두 번 울렸다. 방안에는 두 사람의 솔솔이의 숨소리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 부엌 유리창에 검게 비치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장갑을 낀 손에 쥔 잭나이프로 교묘히 유리창을 따 열었다. 어둠 속에서 사나이는 무서운 눈초리로 둘레를 살폈다. 바닥이 두터운 농구화는 고양이처럼 발자국 소리를 죽였다. 부엌에서 복도로 그림자처럼 몸을 옮겨갔다. 장갑을 낀 손이 조용히 조용히 미닫이를 밀어 연다. 딸깍! 하고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의외로 크게 울렸다. "누구냐!" 솔솔이 아버지의 음성이 어둠을 뚫고 들렸다. 사나이는 혀를 찼다. "조용해라! 목숨이 아깝거든……." 사나이는 낮게 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하고 팍 손전등을 켰다. 그 빛 속에서 잭나이프가 번쩍 빛났다.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도둑이야!" "닥쳐!" 세 사람의 몸뚱이가 한데 뭉쳐 뒹굴었다. 손전등의 빛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와르르 무너졌다. "솔솔아, 솔솔아! 빨리 112로 전화를 걸어라! 도둑이다." "시끄럽다!" 그 때,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잭나이프보다도 빠르게 질풍처럼 뛰어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윽! 으윽!"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함부로 잭나이프를 휘둘렀다. 뛰어든 사람은 그 칼날 밑을 빠져 사나이의 가슴팍을 쳤다. "윽, 아얏!" "에잇!"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소리가 딱하고 울리더니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빨리 전기를 켜요!" 아버지는 겨우 전등을 찾아 켰다. 눈부신 전깃불 밑에 서 있는 것은, "어머나, 너, 넌 누구냐?" "소, 솔솔이는?" 온 솔솔이는 순식간에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었다. "솔솔이라고 부르시기에……" 그 발치에 도둑놈은 맥없이 뻗어 있었다. 방문 앞에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역시 풀이 죽어 서 있었다. "솔솔이 친구냐?" "네, 네가 이 도둑놈을……." 철민의 부모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놀랐다. 온 솔솔이는 방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얌전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를 드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솔본국 청솔의 여동생 온(溫) 솔솔이입니다……." "어머나!"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한 달음에 온 솔솔이에게 달려와 허둥지둥 그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 얘는 나하고 한 반에 있는 온 솔솔이에요. 나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 오라고 했어요. 얘 우린 저리로 가자."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몸을 껴안듯 하고 방밖으로 밀어내었다. "얘는 호신술(護身術)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도둑 따위는 간단히……" 어쩌고 떠들어대면서 솔솔이는 온 솔솔이의 등을 밀고 복도로 나왔다. 그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버지가 문득 제 정신이 든 듯,, "다시 한 번 인사를 해야겠구나……. 솔솔아, 솔솔아!" "네, 지금 가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온 솔솔이에게 제 방엔 들어가 있으라고 눈짓을 한 다음, 곧 부모님의 방으로 돌아왔다. "왜 그래요,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방으로 들어간 줄 알았던 온 솔솔이가 어느 틈엔지 문지방 너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아, 아냐, 아니에요. 솔솔이라고 불렀지만 미스 온이 아니라 나를 부른 거예요. 자, 저리로 가 있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온 솔솔이의 팔을 잡고 방 밖으로 끌어 내었다. "얘, 얘, 솔솔아!" "네, 네, 곧 가겠습니다." 또 온 솔솔이가 대답했다. 솔솔이는 당황해서 그 입을 가로막았다. "네 알았어요. 화장실에 다녀와서 곧 갈게요. 아버지, 인 사는 안 하셔도 괜찮아요. 자, 빨리 가요. 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에도 머리의 회전이 빠르고 말솜씨가 좋아, 오빠인 철민을 능가할 정도의 솔솔이지만 오늘밤엔 더욱 말솜씨가 좋다. 게다가 어쩐지 어물어물하는 행동이 수상하다. 아버지가 솔솔이의 뒤를 쫓아 복도로 나가려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백차(白車)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철민의 부모는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진홍빛 섬광등(閃光燈)이 밤의 어둠을 뚫고 백차가 멎었다. 긴장한 얼굴의 경찰관이 민첩하게 달려 들어왔다.   온(溫) 솔솔이의 소원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지만 정말 놀랐는데요. 이 집에는 여자 호걸이 있는 모양이에요. 일주일이나 걸려서 이 집의 동정을 살펴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런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경찰관에 의해 숨을 돌이킨 도둑놈은 수갑을 차고 맥없이 일어섰다. "이 도둑놈을 잡은 분을 좀 만나 뵈어야겠는데요……." 경찰관이 말했다. 아버지 뒤에 서 있던 솔솔이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제 친구예요. 온 솔솔이라고 해요. 호신술을 하거든요. 지금 방에서 자고 있으니까 그냥 좀 놓아 두셨으면 좋겠어요." 솔솔이의 순진한 하얀 얼굴에 진홍빛 섬광등이 비쳤다. "그래요. 그럼 이름만이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경찰관은 주머니에서 검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이름? 온 솔솔이에요. 학교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학교는 저어……" "너하고 한 반이라면서……" 곁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는 괜한 소릴 하신단 말이야!"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속으로 눈을 흘겼다. "네, ○○○여중이요." "혹시 경찰에서 학교 문의를 하면 어떡할까." 「여학생 도둑을 잡다!」 어쩌고 신문에라도 나면 어떡할까? 온 솔솔이가 ○○○여자 중학교에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목을 가만히 움츠렸다. "저어 경관 아저씨, 학교엔 제발 알리지 말아 주세요. 신문사 사람에게도요. 온 솔솔이는 무척 수줍음을 타는 아이니까. 그렇게 되면 혹시 자살이라도 할지 몰라요." "하하하, 아, 그래요. 그건 정말 곤란하군요. 그렇지만 이건 시경 국장님의 상을 받을지도 모르는데요." "안 돼요. 안 돼요!" 경찰관은 민첩하게 경례를 하자, 백차에 올라탔다. 이웃집에서 나온 사람들도 재미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솔솔아, 그 애한테 뭔가 인사를 하자. 뭐가 좋겠니?" "아, 졸려! 내일, 내일 해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듯 하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가만히 문을 열었다. "어머나, 오빠!"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은 철민이었다. "언제 돌아왔어?" "백차가 서 있길래 얼마 동안 동정을 살피고 있었지. 도둑놈이 들어 왔었다면서?" "온 솔솔이가 붙잡았어요. 깨끗이……." 그 온 솔솔이는 전기 스탠드의 엷은 핑크빛 밑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미스 온?" "……." 온 솔솔이는 말이 없고 철민이 입을 열었다 "솔본국 놈들이 마침내 결전(決戰)의 태세를 갖춘 모양이야. 강변에 부지런히 진지를 만들고 자재(資材)를 모아 두고 있거든. 매미랑하고 돌쇠랑이 정보 수집을 해 왔어." 온 솔솔이는 얼굴이 상기되며 얼굴을 들었다 "솔솔 아가씨, 전 지금 오라버니에게 저를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제 소원을 안 들어 주시는군요." "돌아가요? 왜요?"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뜻밖이라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려 반문했다. "솔솔 아가씨를 비롯하여 철민 도령하며 모두 친절하신 분들. 우리 솔본국에도 이유가 있지만, 이러한 분들을 상대로 피 흘리는 싸움은 이제 그만 둬야겠어요. 돌아가서 제 오라버니 청솔에게도 그렇게 권할 작정이에요." "아. 그게 좋겠군요." "안 돼. 솔솔아, 너 생각해 봐. 이 온 솔솔이가 그런다고 청솔이 금방 말을 들을 것 같니?" "아니에요. 꼭 제 말을 듣도록 해 보겠어요." 온 솔솔이는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미스 온의 말이 맞아요. 오빠도 그만 해요." "철민 도령님, 우리 솔본국에도 이렇게 즐겁고 아름다운 생활을 몇 10분의 1, 아니 몇 백분의 1이라도 시켜 주고 싶어요. 원래 밭을 갈고 꽃을 가꾸며, 때로는 노래를 부르는 생활이 우리 솔본국에도 있었습니다…." 온 솔솔이의 눈에는 어느 사이인지 눈물이 고여 반짝이 고 있었다. 그 눈에는 저 보랏빛 안개 속에 나부끼는 들판의 잡목 숲이며 맑은 시냇물 소리, 청아한 닭 울음소리며 아이들의 노래 소리 등, 평화롭고 태평스러운 하루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그런 평온한 생활에서 벗어나, 피비린내 나는 싸움 속에 투신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무척이나 역겨워졌다. 엄격한 무사로서의 훈련을 견디어온 온 솔솔이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소녀다운 부드러운 감정에 처음으로 불을 붙인 것은,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었다. 그 발랄한 행동이며 아름다운 의상, 보기만 해도 즐거운 여러 가지 소지품, 그것들은 온 솔솔이에게 마치 꿈속의 사건만 같이 생각되었다. "제발 부탁이어요, 철민 도련님, 제 오라버니 청솔에게 제 마음을 전해 싸움을 그만 두게 하겠어요." 온(溫) 솔솔이와 얼굴은 굳은 결의와 맑은 눈물에 젖어 빛나고 있었다. "미스 온,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미스 온의 오빠 청솔이라는 분에게 잘 얘기해 줘요." "정말 곤란한데……." 철민은 심각한 얼굴로 발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민은 온 솔솔이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지만, 만일 그 솔본국의 청솔이 제 여동생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이 온 솔솔이는 대체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어차피 이들은 남매 지간이 아닌가. 내키지 않더라도 제 오빠를 도울 게 뻔하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온 솔솔이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공연히 적의 힘을 증강시켜 주는 결과가 될 게 아닌가. 철민은 온 솔솔이의 말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 반면 속으로 냉정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온 솔솔이가 적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본전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싸울 의욕을 잃고 있다. 그리고 혹시 청솔이 제 여동생의 말을 받아드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이 편의 큰 이익이다. "좋다! 데리고 간다." 온 솔솔이는 깊이깊이 고개를 숙였다. "정녕 고맙습니다."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가 그 어깨를 껴안았다. "미스 온, 갔다가 꼭 다시 와야 되요. 응, 응……." 온 솔솔이는 철민의 여동생 손을 잡고 쓸쓸히 미소지었다. "아가씨, 난 목숨을 걸고 오라버니를 타이르겠습니다." "싫어요! 목숨을 걸고 라니……. 틀림없이 이리로 돌아와야 되요, 꼭……." 철민의 여동생 솔솔이는 책상 서랍에서 자기가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진주 목걸이를 꺼내, 그것을 온 솔솔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철민아, 철민아! 물건은 전부 준비됐어, 이제 떠나자!" 용재의 가만가만한 소리가 들렸다. "음, 가자!" 철민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일어났다.   솔솔아, 용서해라!   새벽이다. 상쾌한 바람이 아득히 한강의 흐름을 내려다보는 완만한 구릉(丘陵)지대를 불며 지나간다. 그 잡목 숲으로 이어진 낮은 언덕 그늘에 철민, 용재, 종운, 땅벌랑의 네 사람은 웅크리고 있었다. "철민아, 연료도 배터리도 문제없어." "OK!" "그럼 시작하자!" 용재가 스위치를 넣고 레버를 당겼다. 붕, 붕, 부르릉…… 배기관(排氣管)에서 보랏빛 연기가 뿜어 나왔다. "OK, OK!" 붕붕! 부르릉, 부르릉! 날개폭 2미터, 몸체 길이 1.5미터, 수냉식(水冷式) 1마력 짜리의 커다란 라디콘 모형 비행기다. 진홍빛으로 칠한 날개에 새하얀 동체가 멋지다. 멍키 스피릿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거야. 조종 전파는 40MHz, 20채널이나 쓸 수 있거든." 기계 만지기를 밥 먹기보다 좋아하는 용재가 만든 꼭 진짜 같은 모형 비행기였다. "카메라의 컨디션도 최고야." "자, 봐!" 용재가 컨트롤 박스의 스위치를 찰칵 넣었다. 땅벌랑이 풀을 베어 널빤지를 깐 급조(急造) 활주로 위를 멍키 스피릿 호(號)는 날쌔게 달려나갔다. 그 동체 밑에 검은 카메라가 뚜렷이 눈에 띈다. "솔본국 놈들, 설마 공중에서 사진 정찰을 할 줄은 까맣게 모르겠지." 이것이야말로 철민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든 무인 정찰기였다. 동체 밑에 부착한 35밀리 카메라의 셔터에서 필름의 되감기까지 모두 전파로 컨트롤할 수가 있다. 망원 렌즈에 적외선 필름까지 갖춰 놓았다. 멍키는 저공(低空)을 화살처럼 선회했다. 철민과 종운이 망원경을 눈에 댔다. "우선 강 건너의 오른쪽 숲 속을 찍자. 거기가 수상해." 용재가 다이얼을 돌린다. "좀더 오른쪽으로. 고도(고도)를 올려. 조금 더 오른쪽으로……." 부웅! 모형 비행기는 마치 진짜 정찰기처럼 곧장 한강을 날아 넘어갔다. 우거진 잡목 숲을 스쳐 선회한다. 그러더니 확! 하고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한층 더 속도를 내고 아침 바람을 갈랐다. 찰칵, 지익, 찰칵. 지익! 셔터가 눌리며 필름이 감겨진다.   바로 그 무렵. 한강의 흐름을 따라 있는 작은 절간 앞에서 마주 대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오라버니! 이제 이 이상의 싸움은 그만 두세요. 도저히 우리가 이겨 낼 수 없는 상대예요." "무슨 소리냐, 닥쳐라! 솔솔아, 적의 수중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사로서의 수치인데, 이제 와서 다시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다니!" 온 솔솔이는 필사적이었다. "오라버니! 철민 도령과 한 번만 만나 보세요. 만나서 여러 가지 상의를 해 보시면, 철민 도령은 워낙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까 틀림없이 나쁘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철민 도령이라고? 에잇, 이 바보 같은……." "그야말로 즐거운 하루였어요. 철민 도령의 여동생도 저와 같은 솔솔이라는 이름이었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오라버니!" "에이, 시끄럽다! 닥쳐라!" "오라버니,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고, 그건 정말 말할 수 없이 밝은 세상이었어요. 극락(極樂)이란 아마 그런 곳을 말하는 것일 거예요. 전 거기가 좋아요.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요." "솔솔아!" 청솔은 갑자기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사실 이 오라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네겐 즐거운 일, 아름다운 것만 주고 싶다. 아버님 어머님이 모두 네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넌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모른다. 그러니 이 오라비가 부모님을 대신해서 네 행복을 찾아 주어야겠지. 하지만 솔솔아, 난 솔본국 무사의 대장이다. 이 내 말에 목숨을 버리고 규율을 지켜온 부하들의 심정도 생각해 줘야 한다. 가령 우리들의 전통도 스러져 가는 불빛처럼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들 남아 있는 사람들의 힘으로 지켜 나아가야겠지. 솔솔아, 좋다, 너만이라도 그 곳으로 가거라. 오라비는 너를 비웃거나 나무라지 않겠다." 용맹무쌍한 솔본국의 무사 청솔도 한 껍질 벗겨 보면 제 여동생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온화한 오라버니였다. "자, 부하들이 보면 난처하다. 그 철민에게로 가거라." "오라버니!" 온 솔솔이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눈물은 솔솔이의 발치 땅 위를 적시며 떨어졌다. 그 때, "대장! 기, 기괴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저, 저걸 보십시오."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청솔이 돌아다 본 눈앞에 우르르 달려온 것은 다섯 명의 철갑대와 그 두령 흐름별이었다. "저게 뭐냐?" 그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저쪽 숲 위를 독수리처럼 날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저것 좀 보십시오. 저렇게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부웅! 희미한 폭음이 전해져 왔다. "범선과 악귀가 화살을 쏘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새 같기도 한데……." "설마! 으음! 저 부르짖음은 어쩐지 소름이 끼친다." 온 솔솔이는 청솔을 향해 소리쳤다. "오라버니, 저것도 아마 철민 도령이 띄운 것일 거예요…… 이 이상 싸워보았자 소용없어요, 오라버니." 흐름별의 눈이 번쩍 빛났다. "솔솔 아가씨, 내 부하가 말하더군요. 아가씨가 적의 두령 철민과 나란히 걷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솔솔이는 흑! 숨을 들이켰다. "정찰 나갔던 몇 사람이 보았다고 하니 아마 틀림이 없을 것 같소이다. 아가씨, 저 기괴한 새 같은 것은 뭐죠? 아가씨는 알고 계시겠지?" "난 모르오!" "아가씨, 여러 사람이 말하더군요. 아마 아가씨는 적과 내통하고 있는 듯하다고……." "닥쳐라, 흐름별!" "그렇다면 어떻게 아가씨는 적진에서 나오셨소? 그리고 또 조금 전 대장에게 이 이상 싸워도 소용없다는 말을 한 것은 무슨 뜻이오?" 흐름별은 독사 같은 눈초리로 청솔을 노려보았다. "대장, 아군 내부에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이 싸움도 끝장이오. 이제 우리 솔본국 무사도 다 썩어 빠진 것 같소이 다." 청솔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하잘 것 없는 병졸의 말이라고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은 끝까지 캐내지 않으면 안되겠소, 대장!" 흐름별은 얼음장같이 싸늘한 의혹과 살기를 품고, 도리어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청솔에게 따졌다. 모여든 솔본국의 무사들도 꼼짝도 않고 청솔의 얼굴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청솔은 무엇엔가 잘못을 빌 듯이 눈을 감았다. "용서해라, 솔솔아!" 일순, 청솔의 칼이 번개처럼 빛났다. "앗!" 피할 틈도 없이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칼을 받고 솔솔이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오라버니!"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더럭 땅에 엎어졌다. "자, 보았겠지! 이것이 나 청솔의 진심이다!" 청솔은 일그러진 얼굴로 모여든 무사들을 노려보았다. 정면으로 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그 눈에서 뿜어 나오고 있었다. 흐름별을 비롯하여 범선도 악귀도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발을 끌며 뒷걸음질을 쳤다. "대장, 잘 알았습니다." 부하 중의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솔솔이가 적의 두령과 내통했다고 한 것은 누구냐! 앞으로 나와라!" 일동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앞으로 나오란 말이야!" 이대로는 수습되지 않을 듯한 무서운 예감이 여러 사람의 가슴에 부풀어올랐다. "눈골(雪洞)의 문길이가……." 여러 사람은 웅성웅성 한 사람의 이름을 대었다. 그들의 시선은 뒷전에서 목을 움츠리고 있는 문길에게로 집중되었다. "대장! 전 거짓말을 안 합니다. 분명히 이 눈으로…… 아앗!" 청솔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방금 솔솔이의 피를 묻힌 칼날이 일순 무지개를 그리며 문길의 몸을 꿰뚫었다. "자, 이제 모두들 제 자리로 돌아가라!" 겁에 질려 새파래진 부하들은 재빨리 강변을 달려 흩어졌다. "하하하, 대장,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흐름별은 짐짓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불쑥 옆으로 외면하며 땅에다 침을 뱉었다. "아, 실례했소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하자, 제 부하들을 이끌고 절간 앞에서 사라졌다. "음, 흐름별 놈, 이놈아!" 악귀가 칼을 뽑아 들고 흐름별의 뒤를 쫓으려 했다. 범선이 그것을 말렸다. 범선의 음성은 떨리고 쇳소리가 났다. "그만 둬, 악귀! 모든 것은 이 싸움이 끝나고 나서 해결하자. 참아야 해." 청솔은 거칠게 칼을 꽂고 숲 밖으로 걸어나갔다.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솔솔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뒤에는 악귀와 범선이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 위를 철민들의 정찰기가 날개를 기울이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이봐, 사진 아직 안 됐어?" "잠깐만 기다려." 암실 속에서 종운의 소리가 들렸다. 마을 한 복판에 마련된, 철민들이 작전실(作戰室)이라고 부르는 오두막 집 속 한 모퉁이에 사진용 암실이 있었다. 지금 종운은 적진을 촬영해 온 사진 정찰기와 필름을 현상하느라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빨리 해!" "실패하면 용서 없다!" 그 때, 암실 속에서 종운이 외쳤다. "앗! 이거 야단났다." 철민과 용재는 가슴이 선뜻해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종운아, 너 필름 현상을 잘못한 건 아니겠지?" 그 순간, 암실 문이 무서운 기세로 열렸다. "이것 좀 봐, 철민아!" 아직도 물에 젖어 있는 필름을 치켜들고 여러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앗!" 한 장의 필름에는 손발을 내던지고 땅에 엎어져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두 사람의 무사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이 쪽이 범선, 이쪽이 악귀구나. 그런데, 이 가운데 쓰러져 있는 건 누굴까?" 철민은 갑자기 얼굴이 새파래져 소리쳤다. "이, 이건 온 솔솔이다 ! 그렇다면 청솔 놈, 제 여동생을 죽인 모양이야!" 철민은 비통한 표정으로 외쳤다. "으음, 청솔 놈, 제 여동생을 죽이다니……." 철민의 눈에 그 크고 둥근 눈의 온 솔솔이의 얼굴이 뚜렷이 떠올랐다. 철민의 가슴은 칼로 저미는 것 같았다. "아, 역시 그 놈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철민의 눈은 분노에 불탔다. "음, 좋다! 전부 이리로 모여라!" 철민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태까지는 이 고을 사또를 돕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싸움은 다르다. 목적은 뚜렷해졌다. 저 냉혹 무쌍한 청솔과 그 부하들을 한 놈 남김 없이 없애버리는 것이다. '온(溫) 솔솔아! 잠시만 기다려 다오. 꼭 네 원수는 갚아 주마.' 철민은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을 삼키며 가슴속으로 그렇게 소리쳤다.   연(鳶)과 로켓   부웅, 부르르…… 활짝 개인 하늘의 한 모퉁이에서 태평스러운 연 나는 소리가 들린다. 근처 마을 아이들이 띄우고 있는 것이겠지. "…셋, 넷, 아니 또 올라오는데……." 땅벌랑이 이마에 손을 대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굉장히 큰 연이군. 긴 꼬리를 달았어." 돌쇠랑이 미소지었다. "앗!" 별안간 땅벌랑이 몸이 굳어져 푸른 하늘에 떠오른 연을 지켜보았다. 여섯 개의 커다란 연은 화살처럼 철민들이 진치고 있는 언덕 위를 향해 급강하해 왔다. "두령? 저건 솔본국 무사들의 비술(秘術), 연공법(鳶攻法)입니다. 큰일났습니다." "뭐라고? 솔본국 무사라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부웅, 부르르르…… 연줄 울리는 소리가 괴조(怪鳥)의 울음소리처럼 울리며 머리 위로 엄습해 왔다. 피융! 파, 파! 화살이 소낙비처럼 쏟아져 왔다. 예리한 화살촉은 풀잎을 깎아내고 나뭇가지를 날리며 대지에 깊숙이 박혔다. 사또의 부하 몇 명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부웅…… 급강하해 온 커다란 연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뒤이어 다음의 연이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덮쳐 온다. 그 커다란 연에 솔본국 무사가 몸을 밧줄로 묶고 활을 당기고 있다. 피융! 팍, 팍! 철민과 용재, 땅벌랑은 모두 필사적으로 그 지상 공격의 화살을 피해 도망쳐 나왔다. 쉬익! 불꽃을 끌며 불화살이 떨어져 왔다. 윙윙! 냇가의 풀밭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푸른 하늘에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치솟는다. 불을 당긴 화살은 계속 새로운 화염을 불러 일으켰다. "두령, 이대로 있다가는 불길에 싸여 타 죽겠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몸을 피해도 상공의 연에서 내려다보면 금방 발견되어 버린다. 부웅! 승리를 자랑하듯 솔본국의 커다란 연은 토끼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웅대한 원을 그리며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철민 두령, 어떡하시겠소?" 사또가 뿌려 내리는 불똥을 나뭇가지로 떨어내며 달려왔다. "음,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지. 이봐, 종운아! 그걸 준비해라." 철민은 소리쳤다. "그걸? 철민아, 그건 마지막 결전을 위해 남겨 둔 비밀 무기가 아냐." 종운이 의아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 그건 나도 알아. 허지만 이쯤 됐으니 어떡하니. 저 연을 공격하지 않으면 이 불바다에서 탈출할 수가 없으니……." "좋아, 알았어!" 종운은 사또의 부하가 짊어지고 온 짐을 풀게 했다. "빨리 조립해라." 연기와 불길 속에서 금방 기묘한 판대가 장치되었다. 그것은 원형의 기반 위에 자유롭게 상하로 각도를 바꿀 수가 있는 굵은 홈통 같은 발사기였다. "됐다. 준비 완료!" 종운이 빛나는 눈으로 외쳤다. "그럼, 종운아! 저 연을 모조리 쏘아 떨어뜨려라!" 종운은 길이 1미터 반 가량의 가느다란 수제(手製) 로켓을 발사기에 놓았다. 로켓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가늘게 쪼갠 대나무와 양철을 교대로 겹쳐 놓고, 철사로 꽉 조여 맨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은 강력한 무연 화약(無煙火藥)이다. 이것이야말로 종운이 고심해서 고안한 대지(對地) 미사일이었다. "그 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데 잘 될까?" 종운은 잠깐 불안스러운 듯이 눈을 깜빡였다. "문제없을 거야. 여기서라면 아무도 말리지 않을 테니까, 마음놓고 해 봐." 용재와 남웅이 종운의 등을 탁 쳐주었다. 종운이가 그 후라고 한 것은, 한 1년쯤 전에 그가 학교 운동장에서 자기가 만든 로켓의 발사 실험을 하려다가 실패하여, 불을 뿜는 로켓이 운동장을 날아다녀 일대 소동을 일으킨 일을 말하는 것이다. 선생님에게는 눈에 불이 나도록 야단을 맞고, 집에 가서도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입에 신물이 나도록 혼이 나서, 그 후, 로켓의 실험에서 손을 뗀 것이었다. 민첩한 꼬마 종운이의 다른 사람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특기가, 실은 이 로켓 제작이었다. 종운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발사기를 회전시키며 허공의 한 모퉁이를 노려보았다.   "왔다!" 커다란 연 하나가 다시 바람을 가르며 엄습해 왔다. "좋아, 발사!" 쉬익! 로켓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발사기를 뛰쳐 날았다. 굉장한 스피드로 허공으로 치솟는다. 타앙! 번쩍 섬광이 일었다. 커다란 연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대나무의 연살이며 두툼한 한지(韓紙), 실 따위가 후르륵 타면서 흩어져 날렸다. 연에 타고 있던 솔본국의 무사는 손발을 벌리고 인형처럼 풀밭으로 떨어져 갔다. "야, 명중이다!" "자, 다시 한 방 발사!" 쉬익! 쉬, 쉬익! 로켓 꼬리에서 뿜는 흰 연기가 잇따라 푸른 하늘을 수놓았다. 타앙, 타, 타앙! 커다란 연은 차례로 부서졌다. 순식간에 4개나 떨어져 버리고, 남은 2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듯, 멀리 날아갔다. "자! 이 때다!" 사또의 부하들은 각기 작은 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타오르는 불길을 두드려 껐다. 철민네 일행은 연기를 뚫고 달렸다. "저쪽에 보이는 솔밭에 진을 치자." 용재와 남웅, 종운, 땅벌랑을 비롯한 주문국 무사들의 일당도 등을 굽히고 달렸다. 탈출은 성공했다. 높직한 솔밭으로 진지를 옳기고 여러 사람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두령, 이것으로 서전(緖戰)은 우선 피장파장입니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 외다." 땅벌랑이 이마의 땀을 씻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땅벌랑, 이 편의 실력을 보여 준 셈이 되어서 이 승부, 현재로선 6대 4로 우리가 불리하오. 로켓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은 정말 억울했소." 그 말을 듣자, 땅벌랑은 분한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아, 두령! 우리 편 증원 부대가 왔습니다." 매미랑이 기쁜 듯이 외치며 달려왔다. "오, 이제야 왔구나." 증원 부대를 부르러 갔던 땅벌랑의 젊은 부하 한 사람이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뒤에는 무장을 한 20명 가량의 무사들이 줄을 지어,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좋아, 그럼, 구리용, 네가 두령에게 보고를 드려라." 땅벌랑이 젊은 무사에게 말했다. 이 무사는 아직도 사관생도 정도의 신분이어서, 여태까지는 두령인 철민에게 직접 말을 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옛!" 젊은 구리용의 얼굴은 비로소 내린 직접 보고의 영광에 감격하여 벌겋게 상기되었다. "땅벌님의 수하 구리용입니다. 증원 부대 20명을 데리고 방금 돌아왔습니다." "음, 수고했다, 구리용! 피곤하겠지," "예, 고마우신 말씀……." "땅벌랑, 어떻소, 구리용도 이제는 떳떳한 간부로 기용하시는 게……." "예, 잘 알겠습니다. 구리용, 너도 들었지. 고마우신 두령의 말씀 명심해서 받아 들여라." 구리용은 땅 속으로 기어들 듯이 납짝 엎드렸다. "그럼, 그 20명의 증원 부대는 우선 구리용에게 일임한다. 네가 그들의 대장이다. 알았지." 구리용은 그저 말없이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철민, 용재, 남웅, 종운, 그리고 땅벌랑, 수풀랑, 매미랑……, 이들이 전력(戰力)의 중심이었다. 게다가 사또 이하 14명의 무사들. 그리고 젊은 구리용과 그가 이끄는 20명의 증원 부대. 바야흐로 결전을 앞두고 당당한 세력이었다. 드디어 결전(決戰)   철민은 전 병력을 솔밭 언덕 뒤에 숨겼다. 원래 이 언덕을 견고한 진지로 하여 솔본국의 공격을 맞을 생각은 없었다. "먼저 강을 건너 공격하는 편이 이기는 것이다. 수비를 해서 이긴 예는 없단 말이야." 철민은 강 건너 맞은 편의 적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때,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몇 장의 사진을 꺼내 보고 무엇인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던 용재가 얼굴을 들었다. "철민아, 이것 좀 봐. 아까 사진 정찰기로 쩍은 사진 속에 이런 게 들어 있단 말이야." "어디 좀 보자." 철민이 들여다보았다. "강 이쪽이 약간 찍혀져 있는데, 이것 봐, 이게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솔밭이야. 이 솔밭 둘레에 몇 군데 새 흙이 불룩하게 솟아 있는 곳이 있잖아. 이게 뭘까?" 과연 새 흙이 거기만 하얗게 찍혀 있었다. "새 흙이라고요?" 땅벌랑이 문득 눈쌀을 찌푸렸다. "자, 봐요, 땅벌랑!" 사진을 받아든 땅벌랑의 얼굴이 금방 긴장했다. "이봐, 수풀, 매미, 나를 따라와!" 수풀랑과 매미랑도 땅벌랑의 말뜻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두 사람이 다 낯빛이 달라졌다. "구리용! 너는 부하들을 데리고 여기를 지켜라. 진형은 물고기 비늘진(魚鱗陣), 안개법이 좋다." "예!" 땅벌랑은 두 사람을 데리고 화살처럼 어디론가 달려갔다. 철민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러지? 대체." 구리용은 재빨리 자기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여기 저기의 소나무 위로 올려 보냈다. "구리용! 부하를 두 사람만 이리로 보내라!" "예! 문창의 육손, 군들의 스라소니는 두령 앞으로 나서라." 그러자 당장 두 사람의 무사가 철민 앞에 나와 머리를 숙였다. "잘 들어라! 너희들은 이제부터 당장 적진으로 숨어 들어가, 온(溫) 솔솔이의 시체를 빼앗아 와라. 놈들이 어디다 묻거나 내버리기 전에 찾아 내야 한다. 온 솔솔이는 우리 손으로 따뜻이 장사를 치러 주겠다." 철민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 자, 가거라!" 문창의 육손, 군들의 스라소니의 두 사람은 소리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그 모습을 철민은 꼼짝도 하지 알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두령, 큰일났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땅벌랑이, 평소의 그의 태도와는 달리 황급하게 말했다. 뒤따라온 수풀랑과 매미랑의 얼굴도, 여태까지와는 달리 불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오, 도대체." "두령, 이, 이 언덕은 적의 지하 진지로 포위되어 있습니다." "지하 진지라니?" "그렇습니다. 그 사진에 찍혀 있던 새 흙이 있는 장소는 그 출입구 같습니다." 매미랑도 나서서 말했다. "아마 솔본국 놈들은, 이 언덕의 땅 밑에다 지하 진지를 구축하고, 통로를 종횡으로 마련하여, 기회를 엿보아 일거에 쳐 나올 심산인가 봅니다." "으음, 적이지만 훌륭한 작전이구나. 그러면, 아까의 화공(火攻)도 결국은 우리를 이리로 몰아 올리려는 목적이었군! 어쩐지 불이 붙지 않은 곳을 찾아와 보니 이리로 오게 되었어." 철민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태까지의 그들의 공격 방법과는 전혀 다른, 굉장히 치밀한 작전이었다. 아마 결전을 앞두고 적군도 필사적으로 저력(底力)을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다. "두령, 지금 우리는 독 안에 든 쥐입니다. 어떡하죠?" "음, 큰일났군. 언덕의 둘레는 적군에게 포위를 당하고, 앞엔 한강이 흐르고 있으니, 꼼짝도 못하게 됐어." 용재의 눈도 핏발이 섰다. "앗!" 별안간 땅벌랑이 땅에 엎드려 지면에 귀를 대었다. 그 눈이 이글이글 빛났다. "마침내 지하 진지의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두령!" 수풀랑과 매미랑도 지면에 귀를 갔다 대었다. "어, 들린다, 들려." 그 때, 소나무 위에서 구리용이 외쳤다. "두령, 강 건너의 적군이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고개를 길게 뽑고 살펴보니, 수많은 솔본국의 무사들이 검은 콩알처럼 강을 건너오는 것이 보였다. "왔구나, 솔본국 놈들! 좋다! 해가 질 때까지는 앞으로 4시간, 그 때까지 승부를 내 주마. 황혼의 한강수를 놈들의 피로 물들여 줄 테니, 두고 봐라." 철민의 음성이 드높이 울렸다. 그 소리를 받아, 땅벌랑도 어깨에 멘 칼을 쑥 뽑아 들었다. "갑시다, 두령!"   "저것 좀 봐, 철민아!" 종운이 절규했다. 철민들이 진을 치고 있는 언덕 기슭은, 무성한 억새풀이 뒤덮고 있었다. 그 억새풀을 올려놓은 채, 갑자기 지표(地表)가 직경 2미터 가량 둥근 뚜껑처럼 불쑥 열렸다. 그 밑에 어두운 터널 입구가 보였다. "앗!" 터널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뛰어 나왔다. 손에 든 긴칼이 번쩍 빛났다. 하나, 둘, 셋, ……, 여덟, 아홉, 열, ……. 마치 기계에서 튀어나오듯 터널에서 뛰쳐나오자, 칼을 휘두르며 언덕을 단숨에 달려 올라온다. "앗, 저기도, 여기도……." 언덕을 에워싸듯 여섯 군데나 터널이 뚫렸다. 그 터널에서도 십여 명의 무사가 나오고 있다. "음, 이것이야말로 유명한 솔본국의 지갑육방진(地甲六方陣)이구나." 매미랑이 중얼거렸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짐승을 산꼭대기로 몰아 올리는 사냥꾼들처럼, 재빨리 흩어지자 언덕의 중복을 빙 둘러쌌다. 강을 건너오는 청솔의 본대(本隊) 선봉은, 벌써 강가를 달려 화살처럼 이 언덕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다. 마주 싸우는 수밖에…… 이봐요, 사또! 당신네는 전력을 기울여 언덕의 중복을 포위한 적군과 싸우시오. 한쪽을 무너뜨려 강가로 나가야 하오. 알겠소?" "예잇!" 사또도 이제는 필사적이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긴장한 빛을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리용! 너는 부하들을 지휘하여 강을 건너오는 적을 맞아 싸워라. 저놈들은 적군의 주력이니까 힘이 들겠지만 잘 부탁한다." "알았습니다." 그러자 용재가 걱정스러운 듯이 철민의 낯빛을 살폈다. "우리는 어떡하지?" "응, 청솔의 친위대(親衛隊)하고 한 판 하는 거야. 여러 사람은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뭉쳐 있어야 돼. 땅벌랑도 알았겠죠?" "잘 알았소이다." "좋아!" 철민은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두어 번 흔들며 소리쳤다. "사또! 구리용! 출발하시오." "오!" 두 개의 집단은 짐승들처럼 함성을 지르며 구르듯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와아아! 우우우! 금방 치열한 전투가 벌러졌다. 언덕을 포위한 솔본국의 무사들은 수효가 많았으나, 언덕을 달려 내려오는 기세로 덤벼드는 것은 쉽사리 막아 낼 수가 없다. 그 태세로는 쌍방의 전력은 호각이었다. 칼싸움이 벌어지고, 순식간에 피바다가 이루어졌다. 사또의 부하들은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들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이런 집단 전투에는 익숙지 못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검술은 당장에라도 덤벼드는 적병을 쓰러뜨리기에 충분한 듯했지만, 교묘한 솔본국 특공대들의 전술 앞에는 당연히 쓰러뜨릴 수 있는 적까지도 놓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앗, 또 당했다! 빌어먹을! 정신 차려라!" 종운이 땅을 구르며 소리쳤다. 피융! 팍, 팍! 언덕 위에 서 있는 일곱 사람 위에 화살이 우박처럼 날아왔다. "아, 이거 야단났군. 돌파 당했는데……." 사또의 부하들이 막고 있던 방위진이 마침내 무너졌다. 10여 명의 솔본국 무사들이 곧장 달려 올라온다. "종운아, 로켓탄으로 무찔러라!" "오케이!" 종운은 재빨리 로켓탄을 발사기에 끼웠다. 솔본국의 무사들은 벌써 20미터 부근까지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들이 불꽃같은 살기를 띄고 있다. "발사!" 쉬익! 로켓탄은 번개처럼 솔본국 특공대를 향해 날아갔다. 콰, 콰앙! 눈부신 섬광이 일었다. 무시무시한 폭풍이 특공대를 쓸어버렸다. 떨어져 나간 팔이 칼을 쥔 채 빙글빙글 돌며 기슭으로 날아갔다. "종운아, 사또의 부대를 엄호 사격해 줘라." 사또의 부대는 차츰 밀리어 언덕 중복을 위로 위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들을 추격하는 솔본국의 무사들은 언덕을 올라오는 검은 파도처럼 보였다. 쉬익! 콰앙! 로켓탄은 검은 연기를 끌며 계속 날아갔다. 검은 연기가 일고, 진홍빛 불꽃이 소용돌이쳤다. 언덕 중복의 풀밭에 불이 붙어, 갈색의 연기가 무럭무럭 싸움터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방위선이 돌파 당해, 검은 옷의 솔본국 무사들이 메뚜기처럼 언덕의 사면을 달려오기 시작했다. "철민아, 로켓탄이 떨어졌어!" 종운이 분한 듯이 외쳤다. "용재야, 멍키 스피릿 호로 특공(特攻)을 하자." "알았어 시작이다." 용재는 가솔린이 든 연료통을, 카메라를 뗀 라디콘 정찰기 동체 밑에 붙들어 매었다. 그 연료통의 입을 늦추어 가솔린으로 적신 헝겊을 끼워 넣고, 거기에 불을 붙였다. 부르릉…… 멍키 동체 밑에서 길다란 한 줄기 불길을 끌며 날아갔다. 긴칼을 번득이며 달려 올라오는 솔본국 무사들을 향해 멍키 맹렬히 급강하했다. 콰앙! 순간, 환하게 불길이 일었다. 산산이 부서진 멍키의 기체는 불똥을 튕기며 솔본국의 특공대를 엄습했다. 아앗! 뜨, 뜨거! 귓전을 울리는 비명이 올랐다. 불기둥이 된 솔본국 무사들은 불을 끄려고 열중하여 지면을 굴렀다. 불길과 연기를 끌며 그들은 경주처럼 언덕의 사면을 기슭까지 굴러 내려갔다. 일순, 패색(敗色)이 짙어진 적군을 향해 구리용의 부대가 돌격한다. 사또의 일행이 칼을 휘두르며 덤벼든다. 언덕의 한 걸음, 한 발자국을 에워싸고 몰아 떨어뜨리려는 자와 몰아 올리려는 자들이 피바람을 일으키며 뒤엉켰다.   최후의 비책(秘策)   "땅벌랑, 지금 청솔은 어디에 있소?" 철민은 이제야말로 청솔을 찾아 승패를 결정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솔본국의 인해전술(人海戰術) 때문에 아군은 차츰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 얼마 후면 적군은 이 언덕으로 쳐 올라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청솔과 맞싸울 기회는 영영 없어질지도 모른다. "두령, 청솔은 저기에……." 땅벌랑이 강 건너의 한 곳을 가리켰다. 은빛으로 빛나는 강 건너 대안(對岸)의 흰 모래밭 위에 작은 인형들처럼 10여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으음, 청솔 녀석, 저런 곳에서 전투 지휘를 하고 있었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과 아군의 격전을 냉정히 관찰하며 지휘를 하고 있는 청솔은 과연 전투에 익숙한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저대로 놓아 두어서는 청솔을 무찌를 수가 없겠는데." 철민은 입술을 악물었다. 솔본국 군대의 포위를 돌파하고, 또 강을 건너가지 않으면 청솔이 있는 솔본국의 본진(本陣)까지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상태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가령, 이 포위망을 뚫는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는 도중에 양쪽 강기슭으로부터 화살의 세례를 받게 된다. "아앗!" "영차, 영차!" 갑자기 언덕 밑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었다. 그것은 정말 기분 나쁘게 들려왔다. 칼을 휘두르는 소리, 흙먼지, 비명, 칼과 칼이 부딪치는 난투 소리를 뚫고, 커다란 문짝을 세운 듯한 것이 연이어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밑에 조그만 수레바퀴를 달고 그 뒤에서 여러 명의 무사가 밀고 있다. 수백 장의 그것은 순식간에 담장 처럼 언덕의 중복을 빙 둘러쌌다. "영차, 영차!" 그 담장 같은 것들은 천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싸움을 하고 있던 솔본국의 무사들은 재빨리 그 뒤에 가 숨고, 싸움터에는 구리용과 사또의 부하들만이 남아 있었다. 두께 10센티미터쯤 되는 견고한 나무로 만들어진 그 담장은, 구리용들의 필사적인 돌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영차, 영차! 영차!" 그것은 마치 롤러처럼 치올라온다. 철민의 일행은 완전히 그물 속에 갇힌 물고기의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그물은 점점 좁혀 들어온다. 그 순간, 탕, 타다탕! 담장 뒤에서 일제히 조총 소리가 났다. "앗, 위험하다. 엎드려라!" 납짝 땅 위에 엎드린 일곱 사람의 머리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피융, 피융! 파, 파팍! 팍! 뒤이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철민아, 이대로 있다가는 전멸하겠다. 빨리 무슨 수를 써야지……." 종운이 이빨을 딱딱 마주치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이제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날개라도 있지 않는 한 이 포위망을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그리고 앞으로 2, 3분 후면, 이들에게는 틀림없이 죽음이 닥쳐 올 것이다. "하다 못해 청솔 놈에게 생채기라도 내주고 싶었는데, 정 말 억울하외다." 땅벌랑의 눈에는 분한 나머지 눈물이 고여 반짝이고 있었다. 그 때, 철민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철민의 눈이 갑자기 번쩍 빛났다. "그렇다! 이봐, 모두들 모여서 스크럼을 짜라!" "스크럼을?" "그래. 빨리 하란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의아스러운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철민의 말대로 서로 팔짱을 끼어 굳게 스크럼을 짰다., "두령, 이러고 마지막 염불이라도 외는 겁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마시오. 자, 내 말을 들어요. 땅벌랑과 무사들은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돼요. 알겠죠!" 철민은 용재와 두 사람의 친구들에게 슬쩍 눈짓을 하자, 주머니에서 타임머신을 꺼냈다. 용재들의 눈이 그것을 보았다. "야, 있다, 있어. 저기……." "한 놈 남김 없이 죽여 버려라!" 솔본국 돌격대들의 외침이 일곱 사람을 폭풍처럼 에워쌌다. 타, 타앙! 필살의 일제 사격 소리가 언덕 꼭대기를 뒤흔들었다. 그 총알이 일곱 사람의 몸을 벌집처럼 꿰뚫기 직전, 위잉! 철민의 손에서 타임머신이 희미한 소리를 내고 울렸다. "자, 달려라!' 철민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는 현대의 한강변이었다. 스크럼을 짠 팔에 철민은 있는 힘을 다해 여러 사람을 끌며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한강에 가로놓인 비교적 한적한 제 3 한강교 위를 차들이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철민은 다리를 다 건너자, 뚝 밑으로 달려 내려가, 강변의 모래를 파낸 뒤에 고인 커다란 물웅덩이를 소리를 내며 달렸다. 놀란 것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검은 옷의 옛 무사와 소년들이 스크럼을 짜고 바람처럼 도로에서 내려와 강변으로 달려나왔기 때문이다. '저게 뭘까?' '뭘 하고 있는 거지?' '영화 촬영이라도 하나?' 뚝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창에서도 이상하다는 듯이 몇 사람의 얼굴이 내다보고 있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다. 주의해!" "문제없어." 이제는 철민의 계획을 알게 된 용재며 남웅도 땅벌랑들의 팔을 꽉 끼고 달렸다. 무슨 영문인 줄 모르는 땅벌랑들도 이것이 두령의 극비의 병법이라고 생각하여, 철민의 말대로 더욱 눈을 꽉 감고 끌려갔다. 그 때, 마침 강변 모래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래 파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복판으로 일곱 사람이 물방울을 튕기며 달려 들어왔다. "이봐, 이봐! 뭐야, 너희는? 남이 일하고 있는 데 들어오면 어떡해!" "이 자식들이!" 작업은 당장 중단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런 욕설 속을 일곱 사람은 아무 소리도 없이 달려간다. "음, 저 놈들을 잡아라!" 서너 명의 일꾼들이 우르르 쫓아왔다. 그러는데, "아마, 이 근처였지, 청솔이 서 있던 곳이……." 철민은 발을 멈추고 여러 사람을 정지시켰다. 타임머신이 희미한 금속성을 내며 울렸다. 일곱 사람의 모습은 뒤쫓던 사람들의 눈앞에서 일순 연기처럼 사라졌다.   슬픈 승리!   강 건너의 언덕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칼싸움 소리가, 하얗게 빛나는 강물을 건너 들려오고 있었다. 그 쪽을 향해 냉정한 자세로 늘어서 있는 청솔과 그의 친위대를 향해, 철민의 일행은 바람처럼 돌격해 들어갔다. "자, 돌격이다!" "야앗!" 별안간 등뒤에서 나타난 철민들에게, 그토록 뛰어난 무사인 청솔도 심한 놀라움과 공포를 느끼고, 낯빛이 종잇장처럼 하얘졌다. "아앗, 어느 틈에……." "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여러분, 정신 차리시오!" 철민은 총알처럼 달려들어 솔본국 무사 한 사람으로부터 긴칼을 빼앗았다. "앗!" 솔본국의 무사는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그 순간 철민의 몸은 껑충 뛰어 2미터나 도약했다. "으윽!" 그 무사는 어깨를 잡고 모래밭 위에 쓰러졌다. "여기, 땅벌이 왔다! 범선은 나와서 내 칼을 받아라!" 난투 속에서 땅벌랑의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한쪽에서는 악귀와 수풀랑이, 경천환과 매미랑이 불꽃을 튀기며 격돌했다. "자, 모조리 해치워라!" 종운과 남웅, 용재가 한데 뭉쳐 흐름별이 이끄는 일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에잇!" "야앗!" "으음!" 피비린내 나는 절규가 교차되고 먼지가 일었다. 남웅이 휘두르는 자전거의 체인이 번쩍번쩍 먼지 속에서 빛났다. "으음, 적이지만 정말 놀라운 술책이다. 저 언덕 위에서 벌벌 떨고 있더니, 어느 틈에 강을 건너왔는가." 청솔은 전혀 뜻밖인 이 철민의 급습에 무척 놀라고 분한 듯이 표정이 일그러졌다. "핫하하하, 어때, 놀랐지. 청솔! 이것이야말로 마술 같은 타임 슬립이다. ……네 놈은 인간도 아니다. 누이동생을 죽이다니. 동생의 진심도 모르는 어리석은 놈. 자, 온 솔솔이의 원한을 내가 풀어 주겠다." "음, 시끄럽다. 덤벼라!" 철컥! 두 사람의 칼이 쨍 불꽃을 튕기며 맞부딪쳤다. "야앗!" 청솔은 철민의 공격을 피하자, 철민의 허리를 향해 무서운 일격을 가했다. "앗!" 청솔의 맹렬한 일격을 가로막은 철민의 칼은 그 순간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아차!" 철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청솔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느긋이 웃었다. "자, 간다! 받아라!" 청솔이 드높이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 때, 철민의 손이 슬그머니 주머니로 들어갔다. '야앗!' 청솔의 칼은 번개처럼 철민의 정면에서 날아왔다. 그 밑으로 몸을 피하며 철민은 제비처럼 날쌔게 청솔의 품안으로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 뒤엉키듯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일순,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돌부처처럼 굳어져 있었다. 20초, 30초, ……. "어떠냐, 청솔! 이것이 비술(秘術) 엘레키 묶음법이다." 철민이 외쳤다. 장검을 내려뜨린 청솔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으음?" 청솔은 신음하며 강변 모래밭에 털썩 쓰러졌다. 그 품에서 철민은 검은 상자를 꺼내었다. "이 배터리는 500볼트나 된단 말이야." 그것은 발로 걷어차자, 퍽! 하고 새파란 섬광을 뿜었다. 타버린 껍질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서로 교차된 순간, 철민은 고무 주머니에 넣은 배터리를 꺼내 스위치를 누른 다음, 청솔의 품속에 그것을 밀어 넣었던 것이다. 철민은 주머니에서 고무 주머니를 꺼내 배터리를 집어넣었다. "오, 두령 ? 여기에 계셨군요." 어디선가 문창의 육손과 군들의 스라소니, 두 사람이 달려왔다. 그 육손의 등에 온(溫) 솔솔이가 축 늘어져 업혀 있었다. "아! 온 솔솔이?" 철민은 솔솔이를 모래밭 위에 안아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제 싸움은 끝났어요." 철민의 팔에 안겨 온 솔솔이는 가늘게 눈을 떴다. 힘없는 눈동자가 철민의 얼굴을 잡았다. "처, 철민 도령? 소, 솔솔 아가씨에게 아, 안부를…." 온 솔솔이의 손에는 철민의 집에서 나올 때, 철민의 여동생인 솔솔이에게서 받은 진주 목걸이가 굳게 쥐어져 있었다 "정신 차려요, 정신……." "이, 이번에…… 다시 태어날 적에는…… 처, 철민 도령과 사이 좋게 지…… 지내겠어요." 온 솔솔이는 사라져 가는 환영(幻影)처럼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전투를 마친 용재며 땅벌랑들이 지르는 승리의 함성이 넓은 강변에 소용돌이 쳤다. 때마침, 서쪽 하늘에는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환하게 빛났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철민의 이마도, 철민의 품에 안긴 온 솔솔이의 얼굴도, 그 저녁 노을은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 작품 해설   만일 시간 여행(時間旅行)을 할 수 있다면   강 민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우연히 손에 넣은 타임머신을 써서 생각지도 못하던 옛날 세계로 날아가 당시의 무사들 싸움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 기술의 힘을 빌어 무사들을 상대로 대 활약을 펴는데…… 물론 우리는 이런 통쾌한 사건과 부닥칠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시간」이라는 것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언제나 일정한 스피드로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흐름에서 빠져 나와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로 되돌아가거나,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껑충 뛰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그럴 수가 있을까요? 인간은 예부터 인간의 힘으로 절대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던 꿈을 잇따라 가능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은 비행기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꿈은 잠수함으로 실현하였으며 달에 가고 싶다는 꿈도 바야흐로 실현 단계에 이르러서 단순한 공상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시간 속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일만은 할 수가 없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 즉 시간의 정체를 아직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좋은 것이라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 여행은 전혀 불가능한 공상에 지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여러 가지 기록을 조사해 보면, 시간 여행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사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8세기말께, 프랑스에 상․레르망 백작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것을 자세히 조사하여 루이 16세에게, "지금 정치를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혁명이 일어나, 당신이나 왕비, 그리고 왕족도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충고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전해들은 당시의 프랑스 수상은 이것을 반역이라고 잘못 생각한 끝에, 경찰에 상․레르망 백작의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경찰은 밤늦게 백작의 집을 습격하여 개미 한 마리 빠져 나올 수 없게 철저히 포위한 다음 집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안방에 있었을 백작과 집사(執事) 로제르의 모습이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이 두 사람은 네덜란드의 어떤 귀족 집에 나타났습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그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나왔는지는 끝내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상․레르망 백작은 네덜란드에 망명한 1784년에 죽고, 그 후 9년이 지난 1793년에는 백작이 예언한 대로 혁명이 일어나서, 왕과 왕비. 그리고 루이 왕조의 귀족들 거의 전부가 단두대(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전에 이미 죽었을 백작이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입니다. 백작을 만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시녀였던 아데마르 부인이었습니다. 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부인은 전에 백작이 죽었을 때 분명히 그 장례식에도 참석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는 부인에게 백작은, "나는 유령이 아니오. 실은 시간 여행자인 것이오. 어떤 방법을 써서 고대 그리스며 중세(中世)에도 간 적이 있소. 일전에는 동양에까지 다녀왔소."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기록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901년, 프랑스의 파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두 분의 영국 여자 대학 선생님이 갑자기 19세기 식의 복장을 한 아름다운 귀부인과 신사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기묘한 일도 다 있구나 하며 돌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아무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오래된 기록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 두 선생님이 본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시종인 신하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즉 그 때, 두 선생님은 일종의 시간 여행을 하여 18세기의 과거 세계로 잘못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했습니다. 그밖에도 시간 여행자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사람들의 이야기며, 시간 여행밖에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시간이라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쩌면 타임머신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자연 현상으로서 일어나는 시간 여행 현상의 비밀도 해명될 지 모릅니다. SF 속에 등장하는 타임 트래블(시간 여행)은 이런 생각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또 SF에서 타임머신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SF의 시조라고 하는 H. G. 웰즈입니다. 그는 그의「타임머신」이라는 소설에서, 처음으로 시간 여행 과학기술의 힘으로 한다는 생각을 SF 속에 도입 시 킨 것입니다. 그의 타임머신은 언뜻 보면 스쿠터 비슷한 것인데 맹렬한 회전운동으로 광속(光速)을 넘었을 때, 미래와 과거를 향해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래, SF에는 온갖 타임 트래블을 취급한 것이 등장하고, 또 여러 가지 타입의 타임머신이며 타임 트래블의 방법이 고안되었습니다. 과거로 가는 것, 미래로 가는 것, 현재로 미래인이 찾아오는 것, 시간 여행함으로써 미래로부터 미래의 발명품을 훔쳐 밀수입하려는 것이며, 과거를 자기 멋대로 변경시키려고 하는 시간 범죄자를 취조하는 타임 패트롤을 다룬 것 등…… 시간 속을 자유자재로 이동함에 따라 일어나는 온갖 사건을 취급한 작품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 그 타임머신도 거대한 공 같은 구형(球型)애서 치과의사의 의자 같은 의자형, 앉은뱅이 저울처럼 위에 타고 가는 저울형, 자동차처럼 타는 자동차형 등 천차만별입니다. 좀더 대규모적인 것은 멀리 떨어진 타임머신 발전소로부터의 특수 전파로 어느 지구(地區) 전부를 미래나 과거로 보내버린다는 것도 있습니다. 자연 현상으로서의 타임 트래블에서는 재미있는 작품이 마크 트웨인의 것이 있습니다. 「아더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라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19세기말의 미국의 어떤 젊은 공장장이 부하에게 얻어맞아 정신을 잃은 순간에, 6세기의 영국에 군림하고 있던 아더왕의 궁전으로 날아가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타임 트래블인데, 과학자였던 그 청년은 19세기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여, 그 무렵 대 마왕(大魔王)이라고 자칭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던 마술사 멀린과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멀린의 마술이 엉터리인데 비하여 그는 과학적입니다. 화약을 만들고 전화를 만들고 권총이며 기관총, 자전거를 만들어서 멀린을 무찌르고 아더왕의 주변에서 국민을 괴롭히고 있던 나쁜 정치가와 기사들을 무찌르며 대 활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SF는 사실 그 후에도 많이 나왔습니다. 이 황혼의 타임머신도 그런 종류의 SF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애독자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SF는 항상 과학보다 앞장서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날이 발전해 가는 과학 문명의 앞날을 위해서도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니 만큼 여러분께서도 SF를 읽음으로써 과학에 대한 꿈을 키우고, 그것을 실현시켜 훌륭한 우리 나라의 과학도가 되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구성상 어쩔 수 없이 옛날의 국가는 가상국(假想國)으로 했습니다. 「솔본국」과 「주문국」은 사실 작자의 머리 속에서 그려진 환상의 나라입니다. 애독자 여러분들이 이것을 우리 나라의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어느 나라에 비교해 읽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의 자유에 속할 것입니다.   황혼의 타임머신 강 민 작 아이디어 회관 과학 문고 224p. 19cm (SF 세계 명작(한국편) 53>   인 쇄      1978년 4월 25일 발 행      1978년 6월 5일 작 자      강 민 오프셋 인쇄 삼정 인쇄소 활판 인쇄  삼정 인쇄소 제 본      서문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 회관  
1087    행성에서 온 소년- 패트리샤 라이트슨 지음 댓글:  조회:625  추천:0  2021-03-20
행성에서 온 소년 DOWN TO EARTH   패트리샤 라이트슨 PATRICIA WRIGHTSON 지음   패트리샤 라이트슨 1920년 오스트레일리아 태생. 뉴사우드웨일즈 주 아동문학상 수상. 현대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동문학가로 불리고 있다. "꼬부라진 뱀", "깃으로 꾸민 뱀", "나의 경마장", "꿀 바위" 등.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 원수․박 홍근/문학박사 최 인학 공학박사 양 옥룡/이학박사 김 희규 전교육감 김 성묵     버릇없는 소년·················· 5 유령의 집 탐험················· 10 수수께끼의 거주자················ 14 그림이 사라졌다················· 20 무서운 고양이 할멈··············· 26 나는 우주인··················· 32 지구인은 저능아다················ 39 고양이 할멈을 쫓아라 !············· 48 이상한 푸른 광선의 수수께끼··········· 61 기발한 장식··················· 73 지구 멸망의 폭력················ 79 생명의 불의 비밀················ 83 그 누가 보고 있다················ 91 위험한 쇼핑광·················· 95 드디어 해 버린 일················ 99 백주의 도주·················· 107 우주 스파이 마틴················ 122 마틴 그림을 그리다··············· 131 남아 있는 암호················· 136 저 소년을 잡아라!··············· 149 마술이냐, 최면술이냐············· 156 빛나는 침대 속에서··············· 166 터널 호텔··················· 171 위험한 일요일················· 188 네 사람의 괴인의 정체············· 194   작품 해설··················· 209   등장 인물   마틴 :혹성에서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에 온 초능력을 가진 우주 소년. 지구에 머무는 동안 유령의 집으로 불리는 빈집에 살며 갖가지의 흥미진진한 사건에 부닥친다. 조지 애덤스 :모험과 의협심이 강한 다정다감한 소년. 그의 이러한 성격은 우주소년 마틴에게도 작용하여 마틴과 우정은 깊어만 간다. 루크 디 :약간은 심술궂고 남 앞에 나서 뽐내기를 좋아하는 흥분 잘 하는 조지의 친구. 데이비드 게이트 :어느 날 조지와 거리에서 20센트를 걸고 눈싸움을 하는데, 여기에 마틴이 등장하여 조지와 함께 제일 먼저 우주인을 목격하게 된다. 캐시 브린불 :호기심 많은 13살의 소녀. 유령의 집에서 조지와 만나 친구가 된다. 고양이 할멈 :이상하리만큼 고양이에 대하여 극진한 애정을 가진 할멈. 에번스 :자칭 에스 디(S.D.) 통신의 조사원. 이상한 레이스 모자의 여자 :원예용품점에서 쇼핑하며 만난 마틴에게 돈을 주어 마틴은 경찰서에 붙들려가게 된다.   버릇없는 소년   "아무리 도시를 새롭게 한다는 이유가 있다고 해도 말야. 그렇게 오랜 역사가 새겨진 탑이 있는 건물까지 깨뜨려 버리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 말야." 올해 13살인 조지 애덤스는 옆에 서 있는 친구 루크 디에게 불만을 쏟아 놓듯이 소리쳤다. "너는 그렇게 말하지만, 예외를 인정해 주다가는 여기저기에 낡은 건물들이 벌레 먹은 이빨처럼 남아 있게 되어서, 도시의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거야." 루크 디는 같은 나이의 조지가 감상적이라는 듯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소리는 와르르 하고 무너져 쏟아지는 탑의 벽돌 소리에 묻혀서 조지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여기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첫째 가는 상업 도시, 인구 약 2백 7십 2만의 시드니다. 조지가 말한 대로 시드니에서는 지금 새로운 도시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여기뿐만 아니라, 시내 여러 곳에서 낡은 건물이 파괴되고 근대적인 그러나 살풍경한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파괴 작업은 크레인(기중기)과 파괴용 쇳덩어리를 사용하여 행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노무자들은 머리에서부터 뿌연 먼지를 눈처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몸이 먼지에 뒤덮이니 피로도 더해지는 듯하여 해가 아직 높은데도 작업을 끝냈다. 그리고, 영국인의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이 뽐내고 있을 적의 관습에 따라, 맥주를 마시러 돌아가 버린 것이다. 크레인은 큰 철제 창틀을 떼어 낸 상태에서 중단되어 있었다. 창틀이 빠져나갔기 때문에 창문은 20퍼센트나 더 넓어져서, 집안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루크 디는 혼자 기운이 나서, "좋아! 내가 탐험을 좀 하고 와야지." 하고는, 철거 작업중인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벽돌더미를 넘어 가서는 벽에 붙어 날쌔게 기어올랐다. 이 광경을 본 어른들이 모두 "저런 ! 저런 ! " 하며 놀랐다. 루크는 그걸 눈치챘는지 보란 듯이 포즈를 취하며 조지를 돌아보았다. (쳇! 또 시작했구나.) 조지는 속으로 혀를 찼다. 루크는 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서는 별나게 흥분하며, 레인저 부대(특별 공격대 ․결사대) 같은 짓을 해 보이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루크는 점점 기세가 올라, 계속 벽을 오르고 있다. 조지는 시시한 생각이 들어 휙 돌아서서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야위고 검은 피부에 앞니가 쑥 내민 것이 유달리 눈에 띈다. 친구의 하나인 데이비드 게이트였다. 데이비드는 조지의 얼굴을 보자, "야, 조지, 내기는 아무래도 내가 이긴 거지? 자, 20센트 내 놔." 하며, 때묻은 손을 내밀었다. "내기라니, 무슨 내기야?" "얼빠진 소리 마. 왜 3일 전에 여기서 내기하지 않았어?" "......." "그때 넌 분명히 말했어. 크레인을 쓰면 3일 동안에 바로 오늘까지 건물도 탑도 깨끗이 철거시키고 땅바닥이 평평하게 정리된다고 했지? 그 때 난 말했어. 반도 파괴하기 어려울 거라고. 그래 우린 20센트 걸고 내기를 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저것 봐 건물은 저렇게 남아 있지. 그래서 루크 디가 언제나처럼 저 건물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단 말야." 데이비드는 루크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포오지는 쳇! 하고 혀를 차고는 주머니에서 20센트 짜리 동전 2개를 꺼내어 그 중 하나를 데이비드에게 주면서 말했다. "데이비드, 1개 더 갖고 싶지?" "그야 싫을 리 있나?" "그럼 한 번 더 내기를 하자. 이번에는 철거 날짜 같은 것 말고 눈싸움으로 하자. 마주 노려보기 말이다. 먼저 웃는 쪽이 20센트 내는 거야." "좋아, 해 보자.' 두 소년은 20센트를 위해, 온몸의 힘을 얼굴과 눈에 모아 가지고 상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먼저 내기를 걸어온 조지의 눈싸움은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렇다 해도 무슨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서 핏기를 싹 없애 가지고는 창백한 데드 마스크(죽은 사람의 얼굴에서 본을 떠서 만든 가면) 같이 되어 눈을 부릅뜨기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편인 데이비드도 만만치는 않았다. 온통 얼굴이 주름투성이가 되어 조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1분, 2분, 눈싸움은 계속되었다. 3분쯤 됐을 때, 조지는 목덜미에 무언지 뜨거운 것이 닿는 걸 느꼈다. 그와 함께 찬 기운이 몸에 소름을 끼치게 했다. '이건 데이비드가 아닌 또 다른 누가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는 거야. 왜? 왜 그런 짓을 하지?' 조지는 오른손을 들어 타임을 요구했다. 데이비드가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데이비드도 "조지, 누군가가 우리를 노려보는 것 같지 않아?" 하고, 소리쳤다. 두 소년은 동시에 오른쪽을 돌아다보다가 앗! 하고 숨을 죽였다. 10미터 가량 떨어진 보도에 12, 3살쯤 돼 보이는 소년이 서 있었다. 이 근방에서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조지와 데이비드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저놈이다. 저놈이 우리들 눈싸움을 방해했어. 건방진 녀석이다." 조지는 시비를 걸려고 그 소년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두세 걸음 나아가자, 그 소년은 방향을 바꾸어 돌아섰다. 그러더니 금새 가랑잎처럼 몸을 훌쩍 날려 바람에 날려 가는 것 같은 속력으로 바다 쪽을 향해 달아났다. 그건 꼭 경관에게 들킨 범인과 같은 거동이었다. "뭐야, 그 자식, 별난 놈이군. 야, 조지, 이번 내기는 무승부다." 데이비드는 휘파람을 불며 가 버렸다.     유령의 집 탐험   조지는 웬일인지 그 버릇없는 소년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마침 저녁밥 때까지는 시간이 넉넉히 있었으므로, 그 버릇없는 소년이 달아난 바다 쪽을 향해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2, 3번 길모퉁이를 돌아서 길에서 5, 6미터나 낮은 곳에 백동백나무와 녹나무에 둘러싸인 큰 고옥(지은 지 오래 된 집)이 있었다. 터가 넓어 여기저기에 정원수들이 있고, 클로버의 연분홍색 꽃이 융단을 펴놓은 듯 가득 피어 있었다. 건물을 적어도 2백 년을 지난 것 같았다. 녹이 슨 철판 지붕이 저녁 햇볕에 둔하게 빛나고 있었다. 2층은 주택이지만 1층은 철문이 내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차고인 듯했다. 2충에는 널찍한 베란다가 있고 아래에서 층계를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유령이 사는 집인가 보다. 얼마 안 가서 철거되고 새로운 빌딩이 서게 되겠지." 조지는 혼자 중얼거리며 지나치려 하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서양 협죽도(늘푸른 딸기나무)의 화분이 있는 베란다에 허연 주발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들개인지 희고 야윈 개가 베란다의 층계를 재빠르게 뛰어올라가더니 주발에 머리를 처박고 무언지 맛있게 먹고 있지 않는가. "이상한데……. 그렇다면 저 유령의 집에 누군가가 살고 있으면서 저 들개를 기르는 모양이군." 조지는 더욱 주의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2층 베란다에 가까운 유리창이 약 30센티쯤 열려 있는 걸 알았다. (틀림없이 누군가가 저 집에 살고 있어.) 호기심에 사로잡힌 조지는 유령의 집 탐험을 계획했다. 유령의 집의 집터는 높이 1미터 가량의 쇠그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곳곳에 부서진 데가 있어서 조지는 손쉽게 울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성한 잡초를 헤치며 건물을 향해 들어가자, 아까 본 흰 개가 달려와서 조지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이 봐, 그러지 말고 안내를 해 줘." 조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개는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2충 베란다를 오르는 층계를 앞서서 올라갔다. 조지도 뒤따라 계단을 오르려했지만 그 층계가 보기보다 훨씬 낡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건 위험한데……. 조심해서 올라가야지 까딱 잘못하면 무너지겠어. 역시 이 집은 오래 동안 비어 있던 게 틀림없군." 조지는 조심조심 층계를 올라 베란다에서 열려 있는 창문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매캐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루에는 잿빛먼지가 2센티나 수북히 쌓여 있어서 흰 개가 꼬리를 흔들 때마다 뿌옇게 먼지가 일었다. 조심조심 방안에 들어간 조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층계를 찾아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건물인지 층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마루 한 구석에 네모난 뚜껑 같은 것이 있어 아래층 방을 내려다 볼 수가 있었다. 채광(햇볕을 받아들임)을 위한 창이 있기는 했지만, 아래층은 위층에 비해 훨씬 어두웠다. 바닥은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데 곳곳에 웅덩이처럼 파인 데가 보였다. "하하, 알겠다. 저건 욕실이었어. 어떤 놈이 들어와서 타일을 몽땅 벗겨다가 팔아먹은 거야." 조지는 아래층 한 귀퉁이에 도어가 있는 걸 발견했다. 조지는 조심스레 쇠 계단을 내려가서 도어를 열고 보잘 것 없는 1층으로 들어갔다. 셔터가 내려져 있는 곳은 역시 차고였다. 기름이 들었던 엠(M)표 석유 깡통과 낡은 스토브, 이미 풍화해서 못 쓰게 된 타이어가 3개 쌓여 있었다. "적어도 한 3년은 비워 둔 모양이야." 조지는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퍼뜩, 차고 바닥에 식료품 전문의 슈퍼마켓의 포장지가 버려져 있는걸 발견했다. "슈퍼마켓의 포장지가 있는 걸 보면, 필경 누가 여기 살면서 개까지 기르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조지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른일까? 아니면 혹시라도 자활(자기 능력으로 독립하여 살아감)생활을 즐기는 아이들일까?" 조지는 수수께끼의 거주자의 정체를 밝히려고 마음을 크게 먹고 차고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5, 6장의 그림이 버려져 있었다. 조지는 그 그림들이 너무나 엉터리인 것을 보고 놀랐다. 노랑, 파랑, 빨강, 초록들의 원색을 써서 기묘한 동물과 나비를 그린 것인데, 어느 것이나 데생이 되어 있지 않았다. '유치원 애들이라도 이보다는 잘 그릴 거야. 아니 어쩌면 머리가 돈 사람이 그린 건지도 몰라. 하지만 이런 것이 천재의 걸작인지도 모를 일이지. 아무튼 이건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그림일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조지는 왠지 무서움을 느껴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그림을 버리려고 했을 때, 갑자기 뒤쪽에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덮어씌우듯 들려 왔다.     수수께끼의 거주자   "이거 봐요.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조지가 놀라 획 돌아보니, 도어에서 쏘아 들어온 광선을 옆얼굴에 받으며, 12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갸름한 얼굴로 머리카락은 붉고 곱슬곱슬했다. 제 어머니가 입던 옷인 듯 핑크 색 공단의 블라우스와 연보라색의 장미꽃 모양의 짧은 스커트를 깜찍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소녀는 조지를 갈색 눈으로 나무라듯 노려보면서 말했다. "왜, 무엇 하러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는 거죠?“ 조지는 소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얼 하거나 화낼 것 없지 않아?" 소녀는 곱슬머리를 힘있게 저으며 말했다. “난 당신을 벌써 열흘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에요." 조지는 웃으며, "열흘이나? 우리 집은 여기서 2킬로나 떨어져 있어. 옳아, 알겠어. 지붕 위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나를 지켜봤단 말이지." 조지의 빈정거림은 소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놀리지 말아요. 우리 집은 저기란 말야." 소녀는 한 구역 저편에 있는 붉은 이층집을 가리키고는 자신 만만한 어조로 소리쳤다. "저기 커튼이 쳐져 있는 방이 우리 방이야. 난 매일 저기서 이곳을 감시하고 있었어. 넌 하루 종일 이 집을 돌아다니지 않았어?" 조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녀도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네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였단 말이니?" "아무튼 나는 오늘,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여기 들어와 봤어. 네가 감시하고 있던 사람은 딴 사람이란 말야." "그래?"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멋쩍은 듯이 조지가 손에 들고 있는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어머, 이상한 그림이야." "이건 어린애가 그린 그림일 거야. 차고 구석에 버려져 있었어." 소녀가 그 그림을 받아들더니, "어린애가 그렸다는 증거가 어디 있어? 너 미술 점수는 C겠지. 만일 A라면 이 그림을 그리는데 대단한 솜씨가 있었다는 걸 단박 알아봤을 거야." 하고, 조지를 여지없이 몰아붙인다. 그러는데도 조지는 웬일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소녀에게 호감이 가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가?" 조지는 다시 한 번 그림을 들여다보는데 소녀가 또 물었다. "너. 정말 여기 한 번도 온 일이 없었니? 맹세한다고 말할 수 있어?" 이 말에는 조지도 울컥해서, "맹세고 뭐고 그런 소리할 필요도 없어. 온 일이 없으니까 없다고 한 거야. 네가 그렇게도 끈질긴 걸 보니 아마 꿈을 꾸기라도 한 모양이구나." "꿈을 꾸었다고? 실례의 소리를 하네." 붉은 곱슬머리 소녀는 여자답지 않게 힘 센 손으로 조지의 팔을 잡더니, "이리 와봐, 내가 증거를 보여 줄게." 하며, 앞서서 밖으로 나갔다. 아까 본 흰 개가 어디서 불쑥 나타나 뒤따라왔다. 건물 뒤쪽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소녀는 뜰 한 구석에 반이나 썩은 채 서 있는 목조 오두막으로 조지를 데리고 가서는, 그 안에서 커다란 통조림통을 꺼냈다 "이거 봐, 아직 상하지 않은 고기가 반이나 남아 있잖아?" 조지도 들여다보고는, "맞아, 이건 베란다에 놓여 있는 그릇에 남아 있던 고기와 꼭 같은 거다. 말하자면, 여기서 살고 있는 수수께끼의 사람은, 이 정어리 고기로 흰 개를 기르고 있었다는 얘기가 돼." 하고, 궁금한 걸 알아냈다는 듯 말했다. 소녀도 그제야 조지가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흰둥이 들개를 10일 전부터 여기 살고 있는 사람 엑스(X)가 기르고 있는 거로구나. 개가 말을 할 줄 안다면 가르쳐 주련만……." 소녀는 허리를 굽혀 흰둥이에게 얘기라도 할 듯이 말했다. 그러자 흰둥이는 휙 돌아서서 차고 있는 데로 향해 뛰어갔다. 차고에는 튼튼한 철문의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흰둥이가 무섭게 짖어대며 셔터에 몸을 마구 부딪쳐댔다. 그러자 안에서 야단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니까 흰둥이는 잠잠해졌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여자아이가 갑자기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나, 캐시 브린블이라고 해. 13살이야." 조지도 그 인사에 끌려들어, "난 조지 애덤스, 너와 동갑이다." "조지, 너 저금 무슨 소리 나는 것 들었지?" "들었다." "쥐나 고양이나 개소리는 아니었지?" "그래, 물론 내 목소리도 아니었고……." "이제 네가 여기를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졌어." "고맙다." 캐시 브린블은 장난기 있는 눈을 반짝 빛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직 조금 의심스러워." "뭐, 무엇이?" "그건 네가 개척자들 자손다운 용기의 주인공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야. 자, 어떡할 테야." 조지는 조금은 두려웠지만 곧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캐시,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이 차고 속을 탐험해 볼께."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자세를 갖추면서 차고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뜻밖에 캐시도 뒤따라 왔다. 두 아이는 어두컴컴한 차고에서 천재적인 그림이 내 버려져 있던 구석 쪽까지 샅샅이 조사해 보았으나, 사람은커녕 쥐새끼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무슨 소리가 났는데……." 조지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벽 쪽에서 덜커덕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놀란 캐시가 조지에게 달려와서, "조지, 그 소리는 말야, 그 소리는 저기서 났어." 하며, 구속에 놓여 있는, 1세기 전의 쇠난로를 손가락질했다. "저 난로 속에 누가 숨어 있는 거야.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거야." 조지는 난로를 돌아다보고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캐시, 이번에야말로 꿈을 꾸고 있구나. 저 난로는 주둥이가 작아서 강아지도 들어갈 수 없어. 무슨 백설 공주 얘기에 나오는 난쟁이란 말이야?" 그러면서도 조지는 속으로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눈의 착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조지는 난로 안에서 조그만 석탄이 파랗게 타다가 확 꺼지는 걸 확실히 보았던 것이다. 조금 전에 차고 안쪽에는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다. 출입구는 지금 조지들이 들어온 한 군데 밖에 없다. 이를테면 밀실과 같은 곳이다. 수상한 자는 이 밀실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림이 사라졌다   조지는 캐시를 따라 유령의 집을 나왔다. 사방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안 되겠다. 벌써 6시인 걸. 빨리 가지 않으면 저녁 식사시간에 늦겠다.' 조지는 화난 때의 어머니 얼굴을 생각했다. 그래서 캐시와 다음 토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는 급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오는 길에 아주 다 부셔 놓은 집터가 있었다. 수복이 쌓여 있는 잡동사니 위에 하얀 것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타일의 한 조각이었다. 초록색의 나뭇잎 무늬가 아주 선명했다. 조지는 그걸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돌아온 조지에게 어머니는, 어째서 10분이나 늦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조지는 탑이 있는 옛 건물을 철거하는 데서 2시간 이상이나 견학을 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현장 근처에서 주운 것이라고 하면서 가지고 온 타일 조각을 내보였다. 어머니는 손에 들고 보다가, "내력이 있을 것 같은 거로구나." 하고, 싱긋이 웃고는 그걸 맨틀피스(벽난로의 장식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덕택으로 조지는 저녁밥을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 주 금요일, 캐시와 약속한 전날, 신문 지국에 소년 신문 대금을 주러 간 조지는 역시 신문 대금을 내러 온 데이비드를 만났다. 데이비드는 여자 친구인 엘리자베스 브라운을 데리고 와 있었다. "여어, 조지 왔구나." 데이비드는 자랑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체크 무늬 자수가 붙은 무명 드레스를 입고 윤이 나는 긴 밤색 머리칼을 하얀 댕기로 묶은 엘리자베스가 유난히 눈에 띄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데이비드는 좀체 안 하던 소리까지 한 것이다. "이 봐, 조지. 차가운 소다수라도 한 잔 사 줄까?" 조지는 눈을 동그랗게 했지만 데이비드가 엘리자베스에게 좋게 보이려는 생각에서라 알아채고 순순히 응했다. "그래? 어디서?" "스코트 할아버지의 구석 다방은 어때?" "응, 좋지." 스코트 할아버지의 구석 다방이라는 건, 그 이름대로 프로즈 거리 변두리의 길모퉁이에 있었다. 테이블은 단 3개뿐이고, 열 사람도 들어앉을 수 없는 작은 찻집이었다. 그렇지만 거기서 파는 소다수의 맛으로 말한다면 시드니에서 첫 손가락을 꼽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 아이들은 삐꺽거리는 의자에 앉아서 주인 스코트 할아버지가 날라다 준 소다수에 스트로(빨대)를 넣었다. 목구멍이 탁 트이는 것 같았을 때, 도어를 열고 한 소녀가 들어와서 소리쳤다. "할아버지, 아이스크림 있어요?" 그 소녀의 얼굴을 본 조지는 '아아'하고 짧게 소리쳤다. 며칠 전의 빨간 곱슬머리의 캐시 브린블이었던 것이다. 캐시도 눈이 둥그래져서 조지 곁으로 다가와서는, 데이비드와 엘리자베스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말했다. "유령의 집 사건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니?" 조지는 데이비드 일행의 눈치를 보면서도, "무슨 사건 해결에 관계 있는 실마리라도 잡았니7" 하고, 물었다. "실마리라고 할 수 있을지 그건 모르지만, 어제 가보니까 차고 구석에 버려져 있던 그림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어 " "그래? 그러니까 그 그림이 엉터리인 걸 알고 치워 버린 건가 봐. 아무튼 쥐들이 한 짓이 아닌 것만은 사실인 것 같구나." 조지는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모습을 데이비드가 놓칠 리 없었다. "조지, 도대체 어떻게 봤니? 유령의 집이니 이상한 그림이니 하는 것 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없겠니?" 데이비드는 조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조지는 요즘 생긴 일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듣고 난 데이비드는, "그거 재미있구나. 드릴과 서스펜스에 가득 찬 얘기 같은데. 그렇지만 아까운 짓을 했구나. 나 같으면 그 그림을 1장이라도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러자 캐시가 빙긋이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아니라도 그만한 지혜는 누구나 가지고 있단 말이야." "뭐? 그럼 지금 그 그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야. 어디 좀 보여 줘." "너는 참 주의력이 없구나. 내 옷에는 그림은커녕 그림 염서 1장 넣을 포켓도 없단 말야. 그림은 그 유령의 집이 있는 곳에 숨겨 두었어. 보고 싶거든 날 따라와. 내가 안내해 줄 테니까……." 조지는 데이비드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체면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두 아이는 눈을 빛내면서 같이 따라가게 해 달라고 졸라댔다. 이렇게 해서 조지 일행은 전날의 그 유령의 집을 향해 바닷가 둑 위를 나란히 걸어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루크 디를 만났다. "너희들 어디 가는 거야?" 하고, 루크 디가 입을 뾰족이 해 가지고 물었다. 조지는, '또 귀찮은 녀석이 붙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좀 볼일이 있어서……." 조지는 얼버무리고 가려는데, 루크 디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 알고 있어. 잡초가 잔뜩 난 빈집에 가는 거지?" "루크, 너도 그 유령의 집을 알고 있었어?" "그 유명한 집을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난 벌써 1주일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어. 그 증거를 보여 줄까?" 루크는 휘이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한 마리의 흰 개가 총알같이 달려와 루크에게 좋아란 듯 덤빈다. 유령의 집에 있던 그 흰둥이였다. "루크, 너 참 빠르구나. 어느 새 그 흰둥이를 길들였지?" 조지는 탄복을 하며 물었지만 루크는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 어제 차고 셔터 안쪽에서 흰둥이를 야단친 것이 어쩌면 이 루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는 다른 비밀 문으로 도망친 것이다.' 조지의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무서운 고양이 할멈   캐시는 나는 모른다는 듯이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지 않고 정면에 있는 다 부서져 가는 대문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이나 다름없이 잡초가 우거져 있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세 소년과 두 소녀를 맞이했다. 조지가 캐시에게 물었다. "그 그림은 어디 숨겨 뒀어? 차라리 너희 집으로 옮겨 버렸다면 좋았을 걸……." "어머, 그럴 순 없지. 그걸 집으로 가져가면 나는 도둑이 되잖아? 이 집안에서 옮겨 놓는 건 정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캐시의 말에 데이비드와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따지기 잘 하는 루크는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 "그야 어느 편이든 간에 우리는 지금 가택 침입을 하고 있는 거다. 일기장에는 쓸 수 없겠는걸." 하여, 기분을 잡쳐 놓았다. 캐시는 화난 얼굴로 루크를 쏘아보았지만, 그러면서도 정원 한쪽 구석에 있는 다 무너져 가는 광으로 일동을 안내했다. "이제 봐. 여기다 감춰 뒀거든." 캐시는 숯섬 속에서 요전번에 본 그림들을 꺼냈다. 그것은 몇 장이나 되던 것들 중에서 눈에 띄던 그림들이었다. 캐시가 소중히 먼지를 턴 듯, 그림의 색채는 전날 보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찬란했다. 커다란 나비가 푸른 하늘을 향해 금빛 날개를 펴고, 여태껏 그 누구도 보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한 기묘한 동물 두 마리가 에메랄드 색의 들판에서 춤추는 듯 뛰고 있었다. "이건 아주 별난 그림이다. 어느 미술관에도 없을 거야." 그림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은 데이비드는 옆에 있는 엘리자베스에게 자신 만만한 얼굴로, 조지가 들어보지도 못한 외국 사람 이름을 서넛 들어가며 얘기를 했다. 엘리자베스는 알지도 못하면서 감동하는 체 데이비드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조지가 지지 않으려는 듯, 캐시에게 질문을 했다. "달리 변한 일은 없었니?" "있어 " 캐시는 광 한 구석에서 요전날 본 고기 통조림통을 들고 나왔다. "모두들 봐 줘. 이렇게 정어리 고기가 가득 들어 있지?" "흠, 새 깡통이군." 루크 디는 깡통 속을 들여다보다가 깡통에 붙어있는 회색 털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햇볕에 비춰 보고는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뭘 발견했니?" 하고, 엘리자베스가 묻자, 루크는 득의 만면하여, "너희들은 이 집에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이 흰 개를 기르고 있다고 믿겠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인 모양이야." "그래? 그럼 누가 기르고 있다는 거야. 설마 괴물이 기르는 건 아닐 테지?" 캐시가 놀려대는 소리를 하자, 루크는 바지를 추켜올리고 넓은 뜰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 무얼 하려는 걸까?" 데이비드가 조지에게 속삭였다. 루크는 휘파람을 불어 흰둥이를 불러서 잡동사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금새 검은빛과 회색의 고양이 두 마리가 잡동사니 무더기 저편에서 후다닥 뛰어나왔다. 흰둥이가 덤벼들어 한 마리 대 두 마리의 싸움이 벌어졌다. 루크는 본 체도 하지 않고 조지에게로 돌아와서 말했다. "지금 본 대로 수수께끼의 인물은 여기서 저 고양이들을 기르고 있는 거다. 그것도 저 고양이들에게 깡통 채 먹게 해 주면서 말야." "그러는 걸 봤어, 루크?" "보지 않아도 그런 것쯤 알 수 있어. 깡통 안 쪽에 고양이털이 붙어 있었으니까 말야." 루크의 의기양양한 말에 여자아이들은 감동을 한 것 같았다. "마치 '셜록 홈즈' 같구나. 이왕이면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누구인가 그 정체도 밝혀 주었으면 좋겠어." 하고, 엘리자베스가 루크를 치켜올렸다. "아, 좋아." 루크는 점점 더 우쭐대며, "수수께끼의 인물은 고양이 할멈이야." 하고, 말했다. "뭐, 고양이 할멈?" 여자아이들은 무섭다는 듯이 움츠렸다. 고양이 할멈이란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에 나오는 마녀를 말하는 것이다. 몇 백 마리나 되는 도둑고양이를 길들여 길러서 그 고양이들을 가지고 온갖 장난을 하여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맨 나중에 가서는 자기 자신의 입이 귀까지 찢어진 둔갑 고양이가 되어 버렸다는, 어린이들이 무서워하는 얘기이다. 엘리자베스도 캐시도 그런 마녀가 살아 있다거나 하는 일은 이 우주 시대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고양이와 싸움을 끝낸 흰둥이가 돌아왔다. 루크는 휘파람을 불어 개를 불렀다. 그러나 흰둥이는 기분이 나빠졌는지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화를 잘 내는 루크는 금새 뾰로통해 가지고 데이비드와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기세 좋게 걸어서 문을 나가 버렸다. 뒤에는 캐시와 조지가 남아 있었다. 루크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흰둥이는 갑자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는 차고 쪽으로 가서 그 안에 적이 있기라도 한 듯이 자세를 취하며 꼬리를 뒤로 감추고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캐시가 와들와들 떨면서, "저것 봐, 저 개 하는 짓을 봐. 고양이 할멈이 저 차고 셔터 뒤에 숨어 있는 거야." 하고, 말하였다. 흰둥이는 계속 으르렁거리면서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더니 몇 미터 떨어져 나와서 그냥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다. '역시 저 차고 안에는 정체 불명의 무엇이 숨어 있는 거다. 괴물은 아니더라도 어쩌면 탈옥수일지도 몰라. 경찰에 알려 주어야지.' 조지는 캐시를 감싸며 대문 쪽으로 달려나가려 했다. 그때 뒤에서, "거기서 기다려 줘." 하는, 말투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획 돌아다보니 1층 출입문에서 한 소년이 나오고 있었다. 나이와 체격은 조지 또래로 보였고 키는 1, 2센티 작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어 가까이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태도도 어른스러웠다. 그는 천천히 조지에게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소년을 바라보던 조지는 퍼뜩 생각이 나서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놈이다. 나하고 데이비드가 눈싸움을 할 때 옆에서 강한 눈길을 보내서 방해를 했기 때문에 내게 20센트 손해를 보게 한 그놈이야."     나는 우주인   잠시 동안 노려보는 상태가 어색하게 계속되었다. 조지는 강렬한 시선을 가진 소년이, 조지 일행의 불법 침입을 탓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소년은 입을 떼지 않는다. 그래서 선수를 치기로 했다. "여기가 너의 집이냐?" "아니, 아니야." 소년은 선명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럼 너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무의식중에 심문하는 말투가 되었다. 소년은 잠시 생각하더니, "네가 듣고 싶은 건 지금 일이냐, 아니면 일상적인 일이냐?" 조지는 마음속으로 '이 녀석, 마치 루크처럼 이치만 따지는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좀 부루퉁해 가지고 물었다. "잔소리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줘. 여기서, 이 자리에서 뭘 하고 있었는가 묻지 않니?" "바로 조금 전에는." 소년은 화를 내지도 않고, "너희들을 관찰하고 있었어. 그리고 고양이와 저 흰 개도……." 하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어? 다시 말하면 숨어서 보고 있었다는 거로 구나, 그런 짓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니?" "자랑스럽게? 나는 그다지 자랑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소년은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아까부터 조지와 이상한 소년의 주고받는 얘기를 듣고 있던 캐시 브린블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두 소년 사이에 끼어 들었다. 소년의 눈은 빛나고 붉은 곱슬머리는 흥분한 나머지 전기를 일으킨 것처럼 직직 소리를 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 봐. 넌 전부터 여기에 있었지. 그러고 밤에도 여기서 자고 그러는 거지?" 캐시의 질문에 소년은 당연한 일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는 자신 있게 조지를 돌아보며, "어때, 내가 말한 대로지? 누군가가 이 집에 살고 있다고 했잖아." "그렇구나! " 조지의 가슴에는 기분 좋은 우월감이 뜨거운 조수처럼 넘쳤다. '루크 녀석, 이런 멋진 특종을 모르고 여기서 나가 버렸지. 재수 없는 놈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저절로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래서 기운을 내어 또 물었다.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낡은 빈집에 혼자 살고 있는 거야?" "그건 공해가 없고 조용하고 살기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야." "조용해서라고? 그럼 너희 집은 훨씬 소란하고 복잡한 동네인가 보구나."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림 산동네?" "아니야, 훨씬 더 높은 데야." "훨씬 더 높은 데?" "그럼." 소년은 하늘을 손가락질하며 똑같은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 집은 다른 행성에 있어, 물론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지만." "다른 행성에서 왔다고? 그럼 너는 우주인이란 말이야?" "그래." 조지는 픽 웃음을 터뜨렸으나 캐시는, "농담은 그만 해." 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화난 소리를 했다. "난 네가 이 집에서 어정거리는 걸 10일 전부터 보고 있었단 말야. 그래도 나는 이 조지 애덤스밖에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있어 준거야. 그런데도 넌 그런 엉터리 소리를 해서 우리를 속이려는 거니? 정직하게 말 해. 뭘 하려고 이 집에 들어와 있었는지. 보물이라도 찾아보려는 거니? 아니면 집을 쫓겨 나오기라도 해서 그랬니?" 이상한 소년은 난처한 얼굴로 되풀이해 말했다. "알아주지 못하겠니? 난 우주인이야. 우주선을 타고 이 지구에 온 사람이란 말이야……." 조지는 웃음을 참으며 , "너, 다음 번에는 비행접시로 왔다고 할 것 아니야?" 소년은 조지와 캐시에게서 놀림을 받고 있는 걸 알았는지, 성난 표정을 짓고는 획 돌아서서 어두컴컴한 차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지는 캐시의 팔을 잡고 문 있는 데로 데리고 갔다. 캐시는 몸을 떨면서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사람을 무시하고 있지 뭐니. 도대체 그 애 정신이 돈 것 아냐." 조지는 위로해 주는 어조로, "말하자면 그 애는 자존심이 강한 거야. 그러니까 그런 소리라도 하는 수밖에 없는 거야. 아마도 불쌍한 환경에서 자란 모양이다." "제 자존심을 갖는 건 좋다고 해도, 우리 자존심은 어떡하라는 거지? 돼먹지 않게 우리를 바보 취급 한 거야." 조지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캐시, 나는 그 녀석 말고, 또 하나 다른 괴상한 인물이 뒤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저 애는 그 자의 앞잡이란 말야. 방금도 우리들의 사정을 살피러 왔던 거야." “조지, 네 머리가 정말 비상하구나. 그래, 그러고 보니 또 한 사람 더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에이, 믿을 수 없는 목격자구만." 조지는 이렇게 말하고 잔걸음으로 차고 문 있는 데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은 여전히 컴컴했다. 그러나 잠시 후 어둠에 눈이 익어지자 안의 광경이 드러났다. 조지는 아무도 있는 건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여어, 우주인! 어디 있니?"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래 다시 큰 소리로 불렀다. "여어, 화성인 마틴 군. 중요한 얘기가 있다. 숨어 있지 말고 이리 나와 줘." 그러자 그 묘한 억양(악센트)을 띤 소리의 대답이 들려 왔다. "숨어 있는 게 아니야. 난 아까부터 너희 눈앞에 있는 거야." "뭐, 눈앞에?" "그럼. 차고 차문 셔터 바로 뒤를 보아."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조지와 캐시는 셔터를 뒤로하고 그 이상한 소년이 서 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조지는 섬뜩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 "마틴 군, 아까는 실례했다. 하긴 네가 지구인이 상상하고 있는 우주인의 모습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던 거야. 말하자면 네가 너무나 우리들과 닮았기 때문이야. 내가 하는 말 알겠지?" 그러자 소년의 안색이 변하고, 아까 와는 아주 다른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설마 너희들은 지구인의 그 쩨쩨하고 열등한 눈으로 우리들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겠지. 설마 거기까지 자만하고 있진 않겠지?" "뭐라고?" 조지는 정말 화가 나서 반문했다. "그럼 너는, 우주인의 쩨쩨하고 열등한 눈으로 우리들이 낱낱이 보인다는 말이야." 우주인은 한 10초 동안 망설이다가, "아니야, 사실대로 말하면, 내게도 보이지 않아 " 하고, 실토를 했다. 그제야 조지도 솔직하게 말했다.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더구나 여기는 어두워서 말이야. 밝은 데로 나가지 않겠니?" "좋아, 그렇게 하자."     지구인은 저능아다   조지와 우주 소년은 차고에서 볕이 밝은 뜰로 나왔다. 조지는 햇볕이 부시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우리는 피차 상대방의 본모습을 보고 있지 못했다는 너의 학설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지 않겠니?" "좋아, 설명을 하겠어." 우주 소년은 기품 있게 대답하고는, "아무리 세세하게 설명을 해도 지구 소년의 머리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되지만, 아무튼 답부터 먼저 말한다면, 너희들은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거야." "어째서? 이렇게 보이는데도?" "보이는 게 아니야. 너희들이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는 거지.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허상을 보고 있는 거야." "그럴까?" "어디 내가 어떤 모습과 얼굴을 하고 있는지 말해 봐. 그래, 저기 있는 여자아이도……." 우주 소년은 캐시에게도 가까이 오려고 했다. 캐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조지는 우주 소년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글쎄, 나이는 12, 3살, 우리들과 같은 또래. 키는 150센티쯤 되겠지, 머리칼은 밤색이고……." 캐시도 옆에서 거들었다. "입술은 새빨갛고, 약간 주근깨가 있어. 약간 건방져 보이고 다소 위엄이 있어." 그러자 끝까지 듣지도 않고 우주 소년은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놀랐다. 나이는 맞았지만, 내 몸의 실제 모습과는 영 틀린 얘기들을 하고 있어." "………." "그래도, 이걸로 지구인의 머리와 그 상상력의 한계를 알겠다. 그만하면 안심해도 괜찮겠지." "상상력과 네 참모습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간단히 말하자면 너는 지금 내가 보인다고 믿고 있지만, 그건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는 거야. 내 본모습은 알지 못하고 있어. 왜 그런가 하면, 그건 우리들 우주인이 너희들 지구인의 상상의 한계를 훨씬 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가? 내 마음대로 환상을 그려 가지고 그걸 너라고 믿고 있단 말이지?" 조지는 반쯤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때 옆에서 캐시가 우주 소년에게 반격을 가했다. "그럼 상상력이 풍부한 네 눈에는 우리 두 사람의 참 모습이 보인다는 거야?" "물론이지." "그럼 자세히 묘사해 봐." "할 수 있어. 한 마디로 말해서, 너의 두 사람은 우리 우주인과 똑같다." "어럽쇼." 조지는 얼빠진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머리에 손을 얹고, "그럼 피부가 자줏빛이고 뿔이 2개 쑤욱 나 있니?" "아니야, 그런 건 나 있지 않아. 저 아가씨는 귀엽게 생겼고, 너도 가까스로 귀여운 축에는 들겠지. 그렇지만 학교 성적은 중간쯤이겠군. 내 컴퓨터에는 아까 여기 있던 흰 개를 부르던 아이가 제일 지능지수가 높다고 나와 있었어." 조지는 뾰로통해 가지고 말했다. "전연 맞지 않는걸. 루크보다 내 성적이 훨씬 위란 말야." 그러나 그 말소리는 별로 힘이 없었다. 우주 소년은 빙긋 웃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피차 실제 모습을 알기 못한다는 걸 알겠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는데 있어서는 별 지장이 없는 것 아니겠니?" "그야 그렇지.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기만 한다면……." "그건 가능할 것 같아. 나는 특수 능력으로 네 마음을 알 수 있어. 년 나에게 어떤 적의도 갖고 있지 않아." "나도 지구인의 특수 능력으로써 네가 나쁜 아이가 아니란 걸 알았어." 그러자 잠자코 있어도 좋을 것을, 캐시가 참견을 했다. "그렇지, 널 착실한 아이야. 머리가 좀 이상해졌을 뿐이지." 그러나 이 말에 우주 소년은 화내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희 쪽의 차원이 낮기 때문이야, 이 계집애야!" "계집애라고 부르는 건 좀 삼가해 줘. 내게는 어엿이 캐시 브린불이라는 훌륭한 이름이 있으니까 말야." "알았다. 그럴 앞으로는 캐시라고 부르겠어." 우주 소년은 순순히 응해 주었다. 기분이 좀 좋아진 캐시가 다시 물었다. "넌 어째서 많은 도시 중에서 이 시드니를, 그리고 이 장소를 택했는지 그 까닭을 얘기해 봐." "여기가 특히 맘에 들어서가 아니야. 단지 혼자서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가 우연히 이 빈집을 발견했기 때문이야. 시험삼아 하룻밤 자 보니까 마음에 들었지. 그래서 아주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넌 여기서 어떻게 생활을 하니? 먹을 것은 어디서 가져오는지……. 저 통조림 깡통은……?" "아아, 그건 고양이와 개가 먹는 거야. 나는 저런 것 일체 먹지 않아." 조지와 캐시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일시에 떠올랐다. '어쩌면 이 소년은 산 고양이고기를 먹고 있는 거나 아닐까?' 그러자 소년은 두 아이의 마음속을 알아챘는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몹시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구나." 그러자 캐시가 물었다. "이 집엔 너 외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니? 이를테면, 고양이를 닮은 여자라든가……." "아, 네가 말하는 것은 가끔 여기 드나드는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고양이 할머니 말인가 보구나." "그래, 그래." 캐시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대고 소리쳤다. "고양이 할머니라면 자주 보기도 했고 드나드는 소리도 들었어. 그렇지만 그쪽에서는 내가 여기 살고 있는 줄 아마 모를 거야." "고양이 할멈은 어떻게 생긴 여자니? 어디 좀 말해 줘." "내 눈에 비치는 고양이 할머니 모습과 너희들 눈에 비치는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을 거야. 차라리 너희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어때?" 조지는 또 하나 특종을 얻게 되는 기쁨에 가슴을 부풀리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줘. 대체 몇 시쯤 오면 볼 수 있니?" "글쎄……. 오늘밤은 그 여자가 안 오는 날이야. 내일 밤 8시가 어떻겠니?" "내일은 마침 토요일인데, 좋아!" 조지는 캐시에게 형편을 물었다. 캐시도 좋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조지가 우주 소년에게 질문했다. "넌 언제까지 이 지구에 머물러 있을 예정이냐?" "글쎄, 다음 초생달이 뜰 때까지나 있게 될 거야. 나로서는 처음 하는 우주 여행이라서 너무 오래 있으면 사고가 나기 쉬워." "처음 하는 우주 여행이라면서도 꽤 즐기고 있는 모양인걸. 영어도 잘 하고……." 그러자 우주 소년은 불끈 화라도 난 듯이 말했다. "난 영어 같은 건 한 마디도 모른단 말야. 내가 하는 말은 모두 내가 태어난 별나라의 말인걸." "그래? 그렇다면 어떻게 내게 말이 통하니?" "넌 참 모르는구나. 난 너와 캐시를 만났을 때, 텔레파시(마음과 마음으로 하는 말) 회선을 설치한 거야. 너도 알겠지만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그 말의 내용이 우선 뇌에서 만들어져 목구멍을 통해 음파로 되지 않니? 텔레파시 회선은 네가 하려는 말의 내용을 네가 소리로 내기도 전에 벌써 내 뇌에 전해준다. 그리고 나는 텔레파시 회선으로 대답을 하는 거란다. 내가 영어를 잘 지껄이고 있는 듯이 느낀 것은 네 뇌의 상상력의 장난이야." "또 상상력이라……." 조지는 정말이지 화가 났다. 그러나 우주 소년은 히죽 웃고, "그런데 상상력이 필요 이상으로 활동할 때도 있어. 아까 너희 둘은 같은 시간에 이런 생각을 했었지? '이 괴상한 녀석이 어쩌면 산 고양이고기를 먹고사는 거나 아닐까' 하고. 하하하, 나는 무엇이나 다 알고 있는 거야." 조지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 아이는 머리가 돈 게 아니다. 정말 우주에서 온 것이다.' 조지는 캐시에게 돌아가자는 눈짓을 했다. 캐시도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너는 참 기발한 그림을 그리더구나. 너희 화성 사람들은 모두 그림을 좋아하니?" 하고, 물었다. 소년은 처음엔 무슨 얘기인지 알지 못해 하다가 곧 깨달은 듯, "아, 그것 말이야? 그건 내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굴러다니던 그립이야. 그 고양이 할멈의 작품이 아닐까?" 그림에 대한 얘기는 그걸로 끝내고, 조지는 캐시를 데리고 유령의 집을 나왔다. 우주 소년은 문 앞까지 나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가스 불이라도 끄는 걸 잊고 있다가 생각난 것처럼 부리나케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지와 캐시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부두 쪽을 향해 걸어갔다. 바닷가 공원에 이르러 둘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쉬었다. "이봐." 조지가 뭘 생각하면서 말했다. "이 시드니의 평화를 교란하는 두 괴인물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우리 둘 뿐이야. 이대로 비밀을 갖고만 있어도 괜찮겠니?" "아니, 조지, 넌 그 소년을 정말 우주에서 온 괴인이라고 믿고 있니? 너 참 이상하구나. 그 앤 머리가 좀 돈 아이에 지나지 않아." "정말 그럴까?" "그렇지. 지구인의 두뇌는 저급하다는 등, 텔레파시가 어떻다는 등, 엉터리 소리뿐인걸.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은 으레 남을 저급하다고 하는 거야." "그래도 이치에 맞는 말이었어." "그런 것이 우주인일 것 같아? 우주인이라면 레이저 광선총을 가지고 있기나,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아무튼 초능력을 우리한테 보여줬을 거란 말야" "캐시, 그런 무기를 가지고 겁주는 건 저급한 우주인이다. 실력 있는 자는 뽐내지 않는다지 않아? 그런 것이 진짜 우주인이지." "어쩜 넌 그 미친 아이한테 완전히 정복을 당했어. 그래 넌 내일 밤 8시에 고양이 할멈을 조사하러 갈 작정이니?" "암, 가고 말고." "맙소사!" "그럼 너는 그 시간에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겠다는 거야?" "지금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행중이야. 언니하고 둘뿐이니 외출은 자유로와. 같이 가 주어도 좋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그럼 잘 가." 캐시는 손을 흔들며 가 버렸다. "에그, 정말은 같이 가고싶어 못 견뎌 하면서도…." 조지는 한숨을 쉬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 할멈을 쫓아라 !   조지는 빌로드가에 있는 5층 건물인 분양아파트 5층에 양친과 같이 살고 있다. 방이 일곱이고 주위가 조용한 주택지라 시드니에서는 중류 이상이라 할 가정이었다. 약속한 토요일, 조지는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밤 어떻게 해야 외출 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우주 소년이니 유령의 집이니 하는 얘기를 꺼냈다가는 보내 주지 않을 것이 뻔한 일이다. 아니 더욱 곤란한 상태, 즉 아버지까지 '어디 나도 같이 가보자' 하고 나선다면 그건 야단이다. 그래서 조지는 우주 소년 이야기는 비밀로 해 두기로 작정했다. 조지는 아버지 쪽은 보지도 않고 어머니께 말했다. "어머니, 나, 고양이 할멈 같아 보이는 여자를 쫓고 있는 중이에요." "뭐? 그 전설에 나오는 고양이 할멈을……." 이런 얘기를 몹시 좋아하는 어머니는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래 조지는 자세히 그 얘기를 해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의외로 허락해 주었다. "좋아 가보고 오너라. 그래도 9시 반까지는 꼭 돌아와야 한다." 조지는 좀 뾰로통해 가지고, "어머닌 이상해. 요전 날 마술쇼를 보러갈 때는 11시까지 허락해 주시지 않았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건 목적이 달랐지. 쇼 구경이라면 10시 반이면 정확히 끝이 난다는 걸 알지만, 고양이 할멈이 나타날지 어떨지는 미리 정확한 예정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야. 9시 반을 절대 엄수해야 돼!" "알았어요, 아버지." 조지는 그 이상 얘기해도 시간 연장은 어려울 것 같아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기로 했다. 어머니는 조지의 솔직함을 기쁘게 생각하여, "얘, 이것, 고양이 할멈의 고양이들에게 선물로 주어라." 하시며, 1킬로의 쇠고기를 비닐 봉지에 넣어 주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조지는 비닐 봉지를 옆에 끼고 1분의 시간이라도 아끼려는 듯 계단을 빠르게 내려 밖으로 나왔다. 항구로 가는 평평하지 못한 길 여기저기에는 토요일 밤다운 번잡과, 주말의 여유를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서리어 있었다. 바닷가 고가도로를 몇 백대나 되는 자동차들이 밝은 눈망울을 가진 곤충들처럼 윙윙 소리를 내며 주말의 놀이 장소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조지는 흘낏 시계를 보았다. 오후 7시 반. 그 이상한 소년과 약속한 8시까지는 꼭 30분이 남아 있다. 조지는 조금 이르다는 생각을 했지만 밤의 유령의 집을 잘 관찰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문을 들어서니 베란다가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그 기묘한 모습을 쑤욱 내밀고 있었다. 조지의 호기심은 회충 벌레처럼 아까부터 요동을 하고 있었다. 이재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이상한 소년과 고양이 할멈의 정체는 과연 밝혀질 것인가. 사방은 조용하여 풀잎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만 풀벌레들이 찌륵찌륵 소리를 계속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야 마치 무인도야. 그러면 그 소년은 로빈슨 크루소란 말인가." 이렇게 꿍얼거리고 있을 때, 건물 옆쪽 그늘진 곳으로부터 허연 것이 쑤욱 나타나서, 소리도 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고, 고양이 할멈 아냐?" 조지는 긴장하여 재빨리 자세를 바로 하였다. 그러자 고양이 할멈이 말했다. "조지, 기다리고 있었어. 역시 왔구나." "이거 캐시 아냐. 사람 놀라게 하지 말아 줘." 조지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계속하여 말했다. "대체 언제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니?" "어둡기 전부터야." "왜 왔지? 어제는 기다리지 말라고 해 놓고서……." "조지, 너도 좀 바보스럽구나. 특종을 찾고 싶어 할 때는 친구들을 떼어버리는 게 신문 기자의 정신인 걸 몰라?" "네 말이 맞아. 그래 무슨 수확이라도 있었니?" "그런데 실패야. 고양이 할멈도, 그 머리가 돈 아이도 나타나지 않는 걸. 어젯밤에 어디 딴 데로 이사해 갔는지도 모르겠어." 캐시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때 조지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웃고 있는 캐시의 등이 잠깐 동안 청백색으로 훤히 빛나 보였던 것이다. "캐시, 네 뒤에 누가……." 하고, 일러주는데, 마치 캐시의 등에서 벗겨져 나온 것처럼 그 우주 소년이 나타났다. "여어, 왔구나 난 아까부터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캐시는 조지의 팔에 매달렸다. 그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여자가 떨고 있는 걸 보면 남자들은 도리어 용기가 나는 법이다. 조지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서, "이 봐, 남의 뒤에 숨어 있는 건 그다지 좋은 취미가 아니잖아?" "숨어 있는 게 아니야. 캐시가 우연히도 내 앞에 와서 섰을 뿐이지." "그러면 말이라도 걸어 줄 것이지……." "그렇구나, 잘못했다." 우주 소년은 솔직하게 사과하고는 작은 소리로 조지에게 속삭였다. "온다. 고양이 할멈이……." 조지와 캐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모습도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기미도 없었다. "너, 잘못 본 거 아니니?" "아니야. 틀림없어. 앞으로 5분만 지나면 나타나. 지금 내 레이더가 잡은 거야." "5분이나 먼저 알 수 있니?" 조지는 이 소년은 틀림없이 다른 천체로부터 온 거라 생각했다. 그래 존경하는 마음으로, "전부터 물어 보고 싶어 한 일인데, 너의 본래 이름은 뭐라고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니?" "우리들의 별에서는 컴퓨터로 정리하기 때문에 모든 우주인은 번호로 등록이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식 이름은 숫자야. 물론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지만." "그럼 그 이름이 뭐냐?" "으응." 하고, 우주 소년은 웬일인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조지는, "뭐 굳이 듣지 않아도 좋아. 그 대신 우주 소년, 우주에서 온 아이라고만 해서는 어쩐지 친근감이 가지 않으니까 '마틴'이라고 하면 어떻겠니?" "마틴, 극히 평범하지만, 그것도 좋아. 너희들이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우주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쉬잇!'하며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고양이 할멈이 지금 대문을 들어섰다. 여기서 잘 관찰하기로 하자." 조지는 캐시의 손을 잡고, 차고 안으로 들어가서는 문 뒤에 도마뱀처럼 착 달라붙었다. 조지들은 문에서 머리만 내밀어 밖을 살펴보기로 했다. 날씬하게 야윈 여자가 슈퍼마켓에 있는 두 바퀴의 쇼핑 카 같은 걸 밀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고양이 할멈이었다. 그가 밀고 오는 쇼핑카는 기름이 떨어졌는지 굴대와 차바퀴에 끼익끼익 소리가 나고 있었다. 고양이 할멈은 조지들이 엿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차고 앞을 지나갔다. 초여름인데도 얼굴을 푸른 스카프로 푹 싸매고 있었다. 스카프는 헐렁헐렁해서 바닷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조지는 그의 몸집과 걸음걸이로 보아 고양이 할멈의 나이를 40세쯤이 아닐까 생각했다. 고양이 할멈은 광 앞에서 쇼핑 카를 멈추고 비닐 봉지를 꺼내더니 속의 것을 깡통에 탁 털어 부었다. 캐시는 조지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정어리 고기야. 저건……." 고양이 할멈은 엿보고 있는 줄은 모르는 듯 '쯧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자 이웃 건물과 빈터, 풀숲 뒤에서 검정과 하양과 회색 등 삽색 얼룩이와 갖가지 고양이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앞발을 깡통에 집어넣고 서로 다투어 고양이 할멈이 주는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고양이 할멈은 다 먹고 난 고양이를 차례차례 안아 올렸다. 그리고 얼굴을 비벼대며, 무언지 얘기를 하였다. 그 광경을 본 조지는 왠지 김이 빠져버리는 젓 같았다. "저 사람 마녀가 아니잖아. 고양이를 좋아하는 예사 사람인걸." 30분 가량 걸려서 먹이는 말짱히 치워졌다. 고양이할멈은 모여든 고양이들에게 빠이빠이 하며 손을 흔들고는 다시 쇼핑 카를 밀며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조지들은 들켜선 안 된다 하고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고양이 할멈은 딱 멈춰 섰다. 그러더니 아이들이 숨어 있는 문 쪽을 향해 목 쉰 듯한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얘들아, 우리 고양이를 해치면 안 돼. 알았지?" 고양이 할멈은 바퀴를 털털거리며 유유히 대문을 지나 거리로 나갔다. "그 여자, 고양이 눈을 가졌어. 들어올 때부터 우리가 여기 있는 걸 눈치 채고 있었던 거야. 역시 저건 마녀다." 조지는 캐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캐시는 턱을 덜덜 떨면서도, "조지, 만일 마녀라면 뒤쫓아가서 숨어사는 집을 확인해야 하지 않니?" 하고, 말했다. "그래." 조지와 캐시는 고양이 할멈의 뒤를 쫓아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그 여자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조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노인에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지금 여기로 쇼핑 카를 밀고 가는 부인을 못 보셨어요?" 하고, 물었다. 노인은 산동네 쪽을 가리켰다. "그 여자는 저 길로 올라갔다. 빨리 가면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고맙습니다." 두 아이는 열심히 뛰었다. 가다 보니 노란 색 가로등 불빛에 고양이 할멈이 두른 스카프를 바람에 날리면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고양이 할멈은 빌로드 가에 이르자 걸음걸이를 늦추었다. 그리고 2백 미터쯤 가서는 옆으로 꺾인 골목길로 들어섰다. 조지와 캐시는 풀이 우거진 사잇길을 달려갔다. 써늘한 밤 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구두로 밟는 풀이 스적거리는 우아한 추적이었다. "참, 마틴은 어떻게 됐을까?" 조지는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틴은 바로 조지의 뒤 1미터쯤 떨어진 곳에 바싹 붙어서 달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마틴은 거리 감각을 잃은 것 같았다. 지구인이라면 남의 등 뒤 1미터쯤에 붙어서 뛰어올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마틴이 마치 고양이처럼 발자국 소리 하나 없이 따라오는 것이었다. 달려온다기보다 공중을 날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마틴은 고양이 할멈의 추적을 즐기고 있는 거야.' 조지가 이렇게 중얼거렸을 때, 고양이 할멈이 딱 멈춰 섰다. 오른쪽에는 돌담이 있고 왼쪽에는 1미터 간격으로 말뚝이 서 있고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저편에 시드니 항만의 아름다운 밤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고양이 할멈은 오른쪽 돌담에 붙어 있는 작은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더니 착 돌렸다. 작은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고양이 할멈은 한번 뒤돌아보았다. 조지들은 들키지 않으려고 전신주 뒤에 숨었다. 고양이 할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쇼핑 카를 밀며 오른쪽 담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저, 저쪽이 고양이 할멈의 집이다." 조지 일행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사실 마틴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작은 문 가까이까지 가서 저편의 사정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수십 마리의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캐시는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조지, 지금 그 박력 있는 소릴 들었니? 그건 고양이가 아니야. 타이거 카브나 아니면 살쾡이인지도 몰라." 그러자 마틴이 웃으며, "지금 우는 소릴 내는 건 보통 고양이야. 수상한 사람들이 왔으니 주인님 조심해 주세요, 하고 고양이 할멈에게 알려 주는 거야." "아, 마틴, 너는 고양이의 말도 알아듣니?" 마틴은 어둠 속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대답했다. "전에도 설명한 대로 텔레파시의 능력 때문에 우리들은 우주의 모든 생물의 말을 이해한단 말이야." 조지는 마틴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 고양이 할멈의 추적(뒤쫓아 봄) 같은 것쯤 바보 같은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사해야 할 것은 고양이 할멈에 대한 일이 아니지, 저 마틴의 비밀이다. 오냐! 내일은 나 혼자서 저 유령의 집에 뛰어들어가 볼 테다' 조지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시계를 보니 시계 바늘은 이미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한 귀가 시간까지는 앞으로 30분밖에 없다. 조지는 다음날 밤의 활약을 위해서라도 오늘밤은 기어이 시간을 지켜 신용을 얻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더 고양이 할멈에 대해 조사를 하고 싶어하는 캐시를 재촉하여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는 부랴부랴 뛰어 돌아왔다. 그렇게 했는데도 약속한 9시 반은 15분이나 지나 있었다. 아버지는 조지의 얼굴을 보자, "오, 빨리 왔구나, 뭐 10시까지만 오면 되는 거였는데 ……." 아마 30분은 에누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고양이 할멈에 대한 얘기를 들으러 왔다. 조지는 간단히 설명하고 나서, "다음 번에는 꼭 고양이 할멈의 정체를 밝혀 보이겠어요. 모처럼 주신 거지만 이건 줄 기회가 없었어요." 조지는 어머니가 선물로 주라고 한 고기를 내놓았다.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시는 어머니였다. 그러니 그 고기는 아마 근처에 있는 도둑고양이들에게라도 주실 것이다. '우리 어머니도 고양이 할멈의 소질이 있어!' 조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들어갔다.     이상한 푸른 광선의 수수께끼   다음날, 일요일 오전 10시가 지나서, 조지는 혼자 유령의 집으로 갔다. '오늘은 기어코 마틴의 비밀을 캐내고 말 테다. 아무리 초능력의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24시간 계속 긴장 상태를 계속하지는 못하겠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에는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 거야.' 조지는 처음 유령의 집에 왔을 때처럼 부서진 울타리를 통해 건물에 다가갔다. 주위를 살펴보고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베란다로 오르는 계단을 올라갔다. 요전번의 그 문은 역시 한 30센티쯤 열려 있었다. 자신 만만한 마틴은 문단속 같은 건 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조지는 이층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헌 의자에도, 매트리스(침대용 요) 위에도 마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조지는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어두운 방들을 일일이 조사해 보았으나, 역시 허사였다. "이상하다. 어디로 갔을까?" 돌아서려고 마음을 먹은 조지는 요전번에 본 옛날식 석탄 스토브에서 반딧불 같은 희푸른 불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요전에 캐시도 스토브에 푸른 불빛을 보았다고 했었는데……." 조지는 허리를 굽혀 스토브를 들여다보았다. 스토브 자체의 덩치는 컸지만 불을 때는 아궁이는 의외로 작아서 높이가 45, 6센티, 깊이가 30센티쯤이었다. 조지는 아궁이 문을 열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차갑고 섬뜩했다. 아마도 여러 날, 아니 녹이 슬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몇 년 동안 불을 피우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잘 못 보았나?" 조지는 손을 떼려다가 마치 뜨거운 불에 데기라도 한 듯이, "앗!" 하고, 소리치며 손을 움츠렸다. 아궁이 안에서 다시금 그 희푸른 빛이 도깨비불처럼 아롱거린 것이다. 그러나 그 빛은 깜박할 사이에 형광등처럼 확 꺼져 버렸다. 이번만은 눈의 착각도 잘 못 본 것도 아니었다. 가까이서 확실히 본 것이다. 조지는 무서워져서 허둥지둥 문을 향해 도망을 쳤다. 이 때 뒤에서 틀림없는, "아아아……." 하는, 하품하는 소리가 들렸다. 급히 밖으로 뛰어나온 조지는 그것이 마틴의 하품 소리이리라 생각했다. 조지는 꽥 돌아서서 쭈핏쭈핏 문간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마틴, 어디 있는 거야. 말 좀 해봐." 마틴은 안 쪽에서 눈을 비비며 나오고 있었다. "마틴, 미안해 내가 네 낮잠을 깨웠구나." "그랬어. 고양이처럼 발소리도 안 내고 살금살금 들어 와서 말야." 마틴은 비꼬는 말투로 대답했다. 조지는 얼굴의 땀을 훔치며, "대체 넌 어디서 자고 있었니? 내가 여기저기 찾아 다녔는데……." "찾기도 하고 몸을 건드리기도 했어." "뭐? 건드렸다고? 손으로 말이야, 발로 말이야?" 마틴이 대답을 하려 할 때, 뜰에서 소란스런 아이들 소리가 들려 왔다. 그 가운데 루크 디의 목소리도 섞여서 들려 왔다. '좋지 않은 때에, 제일 좋지 않은 사람이 나타났군.' 조지는 혀를 찼다. 밖으로 나와 보니, 과연 루크 디가 데이비드 게이트와 같이,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곳의 고양이를 놀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캐시가 애써 말리고 있었다. 루크 디는 조지를 보자 히죽히죽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야, 조지구나, 어럽쇼. 이건 가짜 우주인 씨도 같이 있구만." 루크 디는 마틴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고는, "과연 별나게 생겼다. 이러니까 조지나 캐시가 속아넘어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안 그래, 데이비드?" "음!" 데이비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은 놀림을 당한다는 걸 알고 소년답게 화를 냈다. "나는 가짜 우주인이 아니야. 먼 행성에서 우주선을 타고 이 지구에 온 거야. 우주 패스포트도 가지고 있어." 루크는 점점 짓궂어져서, "이건 참 재미있는데. 나는 전부터 우주의 푸른 귀신을 보고 싶어했어. 어떠냐, 그 옷을 벗고 네 푸른 살을 보여 주지 않겠어?" 조지는 마틴의 이마에 점점 핏대가 서는 걸 보았다. 그래서 달려가서 그의 팔을 잡으며, "마틴, 화 내지 마. 저 두 아이는 본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야." "본심이 아니라면 더구나 용서할 수 없어." 마틴은 조지를 밀치고 루크 디의 코앞에 바짝 다가갔다. 조지는 틀림없이 마틴이 루크를 때릴 줄 알았다. 그러나, 마틴은 잡동사니 더미에서 놀고 있는 여러 마리 고양이들을 손가락질하며 루크와 데이비드를 쏘아보고 소리쳤다. "너희들의 머리는 저 고양이와 마찬가지야. 더구나 에티켓(예의)은 저 고양이보다도 못해." 그러고는 루크가 소리치기도 전에 재빨리 돌아서서 위엄 있는 걸음걸이로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루크와 데이비드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마틴이 사라져 버린 차고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루크의 까만 석탄 같은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쳐들며 루크는 데이비드에게 소리쳤다. "저 사기꾼이 우리를 고양이보다 못하다고 해서 참을 수 없다. 결투를 하는 거다. 땅바닥에 메다 처박아 줘야 해." "그렇다. 적어도 우리가 고양이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 주자." 캐시 브린블이 황급히 달려가서, "그만 둬. 그 애는 머리가 이상해. 괜히 그러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거야." 하고 말렸다. 그러나 사내아이들이란 여자아이가 말리면 더욱 용감한 걸 보여 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두 소년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놀랍게도 두 아이는 회중전등을 준비해 갖고 있었다. "출입구는 여기 뿐이야. 그놈이 아무리 날쌔다 해도 이젠 독 안에 든 쥐다." 둘은 차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캐시는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괜찮겠느냐고? 누구 말이야, 우주인? 아니면 지구인들?" "양쪽 다 말야." 조지는 웃으며 말했다. "마틴에 대해서라면 걱정할 것 없다. 그 애는 푸른 빛 투명 인간이니까 절대로 루크들에게는 발견되지 않아." "아니 조지, 너까지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니니?" 캐시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듯 조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조지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까 스토브 안에 파랗게 타고 있던 괴이한 광선을 생각했다. '그것이 우주인 마틴의 정체다. 마틴의 생명의 불이다. 마틴은 루크들이 찾아내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내가 찾을 때처럼 확 꺼져 버릴 것이다.' 10분쯤 지났다. 과연 루크와 데이비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차고에서 나왔다. "아무리 뒤져도 없어. 어쩌면 이 건물에는 비밀 지하실이 있는지도 몰라. 그놈은 그 지하실에 숨은 거야." 루크가 말하자 데이비드도 옆에서, "그러고 보니 차고 한 구석에 맨홀(땅구멍) 같은 것이 있었어. 그게 지하실로 내려가는 입구야. 곡괭이를 가져와서 열어 보자." 조지는 괴상한 광선에 대한 얘기를 일러줄까 생각도 했지만, 루크들이 부지깽이로 스토브 아궁이를 쑤시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 입을 꼭 다물어 버렸다. "마틴도 피로해 있을 거야, 여기를 한시 바삐 조용하게 해 주지 않으면……" 조지는 루크들과 같이 대문 밖으로 나왔다. 루크와 데이비드는 곡괭이를 찾으러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캐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조지, 루크는 곡괭이니 뭐니 했지만 정말 지하실을 찾을 셈일까?" "아니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루크는 눈치 빠른 소년이야. 마틴이 지구인 이상의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걸 이미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 "꽤 확신을 하는구나. 무슨 새로운 증거라도 잡았니?" "그럼." 조지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조지는 스토브 속에서 타고 있던 푸른 괴광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캐시는 그 얘기를 듣자, "그래 전에 나도 말하지 않았니? 그 때 그 스토브 안에 누가 있다고……." "그랬었지." 조지는 대답하면서 열심히 생각해 보고 있었다. '마틴은 전에, 우리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보고 있는 내 모습은 실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라고 했었다. 그 마틴의 실제 모습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망원경을 가지고 볼까. 확대경을 가지고 볼까. 아니 그런 걸로는 안 되겠지.' 캐시는 조지의 태도를 보고, "멍청한 머리, 아니 멍청한 상상력으로 무얼 생각하고 있니?" 하고 물었다. 조지는 화를 내지도 않고 캐시에게 의논을 했다. 캐시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잡동사니 더미 위에 버려져 있는 깨진 마네킹 인형을 바라보자 눈을 빛내고, "야, 좋은 방법이 있어!" 하고, 소리쳤다. "뭐야, 큰 소리를 지르면서……?" "아주 신통한 방법이란 말야. 조지, 너 혹시 몸에 좀 끼이는 화려한 푸른색의 알로하 셔츠를 갖고 있니?" "알로하는 아니지만, 아주 눈에 잘 띄는 초록색 셔츠는 하나 있어." "그래? 그럼 그걸 마틴에게 선사해 줄 수 없겠니?" "그럴 수야 있지만, 그 애도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어?" "넌 참 둔하구나. 그럼 내가 자세히 설명을 해 줄게. 푸른 광선이 되는 정도라면 마틴은 정녕 푸른색을 좋아할 거야. 만일 네가 화려한 푸른색 셔츠를 선물로 주면, 지금 입고 있는 걸 버리고 즐겨 바꿔 입을 거란 말이야."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거냐?" "또 설명을 하라는 거니? 네 몸에 좀 작은 옷이면 마틴에게도 꽉 끼게 될 거 아니니? 끼는 옷을 입게 되면 몸의 형태가 또렷이 나타난단 말이야." "그래 그래. 옷을 입을 때의 움직임으로 손이 둘이고, 몸뚱이가 둥근가, 아니면 세모꼴인가, 야위었는가, 진짜 스타일을 알 수 있다는 거지. 이건 좋은 방법이다." 캐시는 다리가 부러진 인형을 집어들고는 그 스커트를 잡아당겼다. 아마도 고쳐 가지고 제 애완용으로 하려는 모양이었다. 캐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조지, 너 마틴이 어떤 구두를 신고 있었는지 생각나?" "글쎄, 목걸이 구두라든가. 아냐 캔버스 슈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 애는 뛰어갈 때도 고양이처럼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았어. 맨발이야." 캐시는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들의 기억이란 것 정말 믿을 수 없는 거로구나. 나도 어쩐지 생각이 나지 않아. 혹시 네게 구두가 여분이 있거든 한 켤레 갖다 주렴." "알았다. 그럼 점심 먹고 2시안에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조지는 집으로 달려와 옷장 안에서 노랑과 갈색 무늬가 있는 초록색 셔츠를 꺼냈다 그 셔츠는 지나치게 화려해서 루크들에게 흉을 잡힌 일도 있어, 가장 입기 싫어한 옷이었다. 들고 나오려니까 어머니가 문간에 서 있었다. 조지는 재빨리 그 셔츠를 제 옷 속에 숨겨 가지고, 현관에서 헌 운동화 한 켤레를 집어들었다. 눈치 빠른 어머니가, "조지, 그 신발은 왜 집어드니?" 하고, 물었다. 조지는 아차 했다. "사실은요, 제 동무 중에 발가락이 나오는 구두를 신고 있는 애가 있어요. 그 애한테 주고 싶어서요." 조지는 재빨리 우주 비행접시의 주인을 가난한 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지, 그런 일은 좀 당당하게 하는 거야." 하고는, 부엌에 가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다. "자, 이거 그 애하고 같이 먹어라." 어머니는 오렌지까지 넣어 주었다. "네." 조지는 안심하고 땀을 닦았다. 조지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와는 다른 데가 있는 것 같았다. 조지를 하루에 한 번은 꼭꼭 나무라지만, "그런 짓은 하지 마라. 그런 애하고는 같이 놀지 마라……." 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어머니에 비하면 아버지는 대조적이었다. "안 된다면 안 돼!" 하고, 야단을 치기만 하는 것이다. 조지는 어머니의 교육 방침이 훨씬 현대적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기발한 장식   조지는 캐시와 약속한 시간보다 30분 일찍 유령의 집에 도착했다. 마틴은 베란다에 놓여 있는 낡은 의자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는 몹시 피로해 보였는데 지금은 딴 사람 같이 생기가 있어 보였다. 조지는 계단을 올라가서 말을 걸었다. "마틴, 1시간쯤 낮잠이라도 잤니?" "1시간? 천만의 말씀. 15분쯤 잤어. 우리 우주인들은 지구인과는 달라 체력 회복이 빠르단다." 마틴은 또 오만한 소리를 했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뭘 했어?" "음, 이층 내 방을 장식했지. 보겠니?" "그래." 마틴을 따라 방에 들어간 조지는 앗! 하고 놀랐다. 창의 커튼 레일에 전선줄이 여러 가닥 매어 있는데, 그 줄 끝에 사과, 바나나, 소시지 등이 매달려 공중에 흔들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틴은 자랑스러운 듯 뽐내며 말했다. "어때, 나의 실내 장식 솜씨가……?" "훌륭하다. 사과와 소시지를 사용한 것은 확실히 천재적이다." 조지는 모처럼 가져온 샌드위치를 방 가운데 매달기라도 하면 안 되겠다 싶어 가만히 의자 위에 놓고는 말했다. "마틴, 네게 선물로 가져온 게 있는데 받아 주겠니?" "아, 좋아, 받고 말고. 뭐니?" 조지는 그 화려한 푸른색 셔츠를 내놓았다. 마틴은 반가운 얼굴로 그걸 받아들고, "멋진 빛깔이다. 감촉도 좋은데. 입어 볼까?" "그럼, 입어 봐." 조지는 마틴이 제 앞에서 그걸 입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티켓을 아는 마틴은 "잠깐 실례" 하고는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3분도 지나지 않아서 마틴은 조지의 그 푸른색 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예상한 대로 허리 부분이 약간 느슨한 느낌이 있을 뿐, 어깨 너비나 목둘레가 모두 꼭 맞았다. '네모꼴도 육모꼴도 아니잖아? 우리와 같은 체격이구나.' 조금 실망하여 조지가 속으로 중얼거리자 마틴이 또 가슴이 덜컹 하는 소리를 했다. "조지, 기대에 어긋나게 해서 미안해, 두뇌와는 달리 우리들의 체격은 지구인과 별 차이가 없단다. 우리들의 관광국에서 발행하고 있는 우주 여행 안내의 지구 편에는, '갈아입을 셔츠는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품질이 좀 낮은 것으로 견딜 수 있다면 현지에서도 구할 수 있다.'고 적혀 있단다." 이 때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캐시 브린블이 들어왔다. 캐시는 눈을 동그랗게 하면서, "어머! 마틴, 아주 잘 어울리는데……." 하고, 먼저 조지가 선사한 셔츠를 칭찬한 다음에 실내 장식을 바라보았다. "마틴, 넌 정말 천재적이야. 하지만 저건 오래가지 못하니까 곧 먹어 버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캐시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소시지를 가리키며 충고를 했다. 그러자 마틴은, "아, 그거라면 염려 없어. 보존액을 칠해 놓았으니까." "보존액? 그거 효과가 확실해?" "그야 우리별에서 만든 거니까 틀림없이. 그리고 또 나는 저걸 먹을 필요도 없어." 조지는 전부터 먹는 것에 대해서 물어 보고 싶던 참이라, "넌 매일 무얼 먹고 있니? 설마 여행 중의 양식을 모두 너희별에서 가지고 오지는 않았겠지?" 하고, 물었다. "이 지구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박테리아가 수없이 많기 때문에, 나는 여행 중에 먹을 도시락을 모두 준비해 가지고 온 거야." "야아! 그건 놀라운 일인데, 몇 달 치의 음식을 가져왔다면 너희 비행접시 속은 음식으로 가득 찼겠구나." "아니야. 농축(진하게 바짝 졸임)시켜 놓은 것이라 부피는 아주 작은 걸." 마틴은 조지와 캐시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서 차고 스토브 속에 손을 넣어 조그만 흰 봉지를 꺼내어 보란 듯이 조지의 눈앞에 펴 보였다. 그 속에는 비스킷이 여남은 개 들어 있었다. 조지는 목을 빼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건 꼭 개 먹이 비스킷 같은데. 그래 이걸 하루에 몇 개나 먹니?" "그야 하루 1개지." "뭐라고? 단 1개라고? 가엾어라!" "가엾긴 뭐가 가엾니? 영양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한 개로 충분하다." 옆에 있던 캐시도 끼여들며, "그렇지만 마시는 건 충분히 마시겠지?" 하고, 말했다. "아니야, 물은 한 방울도 먹지 않는다." "어째서? 네 몸의 성분에는 수분이 없다는 말이야?" "지구인의 몸에 있는 수분 비율은 70 몇 퍼센트라지만 우리들은 그 10분의 1 쯤이야. 게다가 출발 전에 소비할 만큼의 수분은 의사가 완전히 보급해 주었으니까." "그래? 그럼 먹고 마시고 하는 즐거움이란 건 전혀 없겠구나." 가엾어하는 표정으로 조지가 말하자 마틴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먹는 일이 즐거움이라고? 그건 무슨 뜻이니?" "뭐라고 말할까……. 식도락이라는 것 말이야." "점점 더 모를 소리를 하는구나. 아무튼 우리는 식사나 마시는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실험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편이 더 유익하지 않겠니?" "그렇긴 하겠다." 조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간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이제 알겠다." "무얼?" "네가 모처럼의 휴가를 이 유령의 집, 아니 철거직전의 집 속에서 빈둥빈둥하고 있는 까닭을 말야." "…………." "다시 말하면 너는 산책 같은 걸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산책, 정처 없이 이것저것을 보면서 돌아다니는 것 말이지? 그건 좋은 거야." "그럼 왜 산책은 하지 않니?" 그러자 마틴은 비로소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도 이 동네 곳곳을 탐험해 보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만한 안내자가 없이는 어쩐지 불안해서야. 고양이 할멈을 뒤쫓을 때는 너희들과 같이 갔기 때문에 안심이 됐지만…." 조지는 기가 나서, "그럼 우리가 안내인이 돼 줄 테니 같이 바닷가로 가보겠니?" "아! 좋아, 좋아." 마틴은 정말 즐거운 듯했다. 조지는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주 소년인 마틴도 우리들 지구 소년과 다르지 않구나. 아무리 뛰어난 과학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모르는 곳에 혼자 가 있으면 불안한 게지.' 그리고 조지는 친근감을 느끼면서 말했다. "마틴, 나 네게 주려고 구두도 가져왔는데 신겠니? 지구 위를 걸을 때는 지구 제품이 더 편할 것 같은데." 조지는 집에서 가져온 운동화를 내주었다. 마틴은 자기 신발과 견주어 보았다. 마틴의 구두는 베인지 가죽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천으로 되어 있고, 퍽 불편해 보였다. 마틴은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말했다. "이 구두, 벌써 3년이나 신었다." "뭐, 3년이나 ! 그런데도 닳지 않았구나. 어째서 그러냐, 너희 별에서는 걸어다니지도 않니?" "아니 걸어다니긴 해도……." 마틴은 두 켤레의 신발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오늘은 내 구두로 갈게. 이 다음에 빌려 줘." "그럼, 그렇게 해." 조지도 억지로 권하지 않고 마틴과 캐시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지구 멸망의 폭력   역시 마틴의 걸음걸이는 우주인답게 별났다. 마치 무중력의 달세계를 걷고 있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저러니까 구두를 3년이나 신을 수 있겠구나.' 조지는 입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그 비밀을 열심히 생각해 보았다. 문을 나와 공원을 향해 걷고 있을 때 어젯밤 조지들이 고양이 할멈의 행방을 물었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가고 있었다. 마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훨훨 그 노인에게 가까이 가서 "할아버지 어젯밤에는 고마왔어요." 하고, 인사를 하고는 노인을 부축해 주려고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노인은 자동차에라도 부딪친 듯 깜짝 놀라며, 서둘러 말했다. "얘야, 괜찮다. 아직은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 염려 마라." "그래도……." 마틴은 '왜 사양을 하세요?' 하고 묻는 듯이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노인도 마틴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오오, 너는 저 폐가(버려 둔 집) 베란다에서 곧잘 낮잠을 자던 아이로구나. 거기가 네가 살던 집이냐?" 하고, 말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어쩐 일인지 마틴은 조지들과 얘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공손한 말씨로 대답했다. "그럼 이 시드니 태생이 아닌 게로구나. 그러고 보니 알겠다. 요즘 도회지 아이들은 모두 이기주의라서 남이야 어떻든 돌보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 어디서 왔는고?" "저는 머나먼 별에서 왔어요." "뭐, 뭐라고? 나는 귀가 멀어서……. 다시 한 번 말해 봐라." 마틴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머나먼 별에서 이 지구에 시찰 여행을 온 거예요." "그럼, 너는……." 노인의 얼굴빛이 변해 갔다. 이 때 옆에서, "와하하하……." 하고,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소리의 주인은 언제 나타났는지 루크 디였다. 루크 디는 일부러 바지를 추켜올려 깔끔하게 몸단장을 하고서 마틴을 향해 첫말부터 난폭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 봐, 정신 이상자 놈아. 얼빠진 소리는 그만 해두지 못하겠어? 그 따위 거짓말이 통할 줄 알고 있나?" 여기 대해서 마틴은 불쾌한 얼굴로, 그러나 정중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남을 믿을 줄 모르는 가엾은 분이시군요. 잘 알고 있지요." 루크는 놀림을 받았다고 느끼자, 노여움으로 얼굴이 시뻘개졌다. "임마, 잘 들어! 이 거짓말쟁이 놈아, 도대체 넌 새로 온 주제에 이 동네의 우두머리인 나한테 경의도 표하지 않고 뭐냔 말야? 이 시드니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내 허가가 필요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말란 말야." 루크 디는 불량배 같은 익숙한 태도와 말씨로 마틴을 위협했다. 조지는 마틴에게 달려가서, 귀 가까이 속삭였다. "마틴, 부탁이다. 제발 화내지 말아 줘." 이와 동시에 캐시는 루크 디에게 달려가서, "루크, 이 분은 우리들 지구인에게는 손님인 거야. 실례의 말은 하지 말아 줘." 그러나 이런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루크를 차디찬 눈길로 노려보며, 마틴은 또렷이 말했다. "나는 너 같은, 열등 문명이 낳은 불량품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나는 여기 있는, 보다 훌륭한 지능을 가진 생물하고만 사귀기로 하고 있단 말이야." 마틴은 조지와 캐시를 손으로 가리켰다. 루크 디는 만일 마틴이 자기를 나쁘게만 말했어도 어쩌면 참을 수가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마틴이, 저에게 적수(경쟁 상대)인 조지를 치켜세우는 데에는 분함이 열 배나 더 커져 폭발하였다. "이 새끼가 잘도 지껄여." 루크 디는 두세 발 다가가서 오른손을 들어 힘껏 마틴의 왼쪽 뺨을 쳤다. "앗!" 조지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번뜩 스쳤다. '크, 큰일났다. 마틴은 급히 저희 별로 날아가서 보고를 하겠지. 그러면 마틴의 별에 있는 주민들이 화가 나서 비행접시로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아, 루크의 무지한 폭력이 지구를 멸망시키게 하는 것이다.'     생명의 불의 비밀   다음 순간, 마틴은 마치 슬로 비디오에 나온 한 권투 선수의 케이 오(KO) 장면처럼 천천히 넘어졌다. 뒤이어 기묘한 광경이 나타났다. 마틴의 몸이 온통 고무로 되어 있는 것 같이 1미터 이상이나 아래위로 두세 번 퉁겨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캐시의 발목을 두 손으로 붙잡고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어디를 다친 것일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지가 달려가서 일으키려고 하자, 마틴은 낮은 소리로, "괜찮아, 가만 둬 줘." 했다. 1분쯤 지나자, 마틴은 거센 물결에 시달린 배를 탄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 모양을 본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 개구쟁이 녀석의 펀치가 너무 세었던가, 아니면 이 애의 중력 조절이 잘못됐던 모양인데……." 한편 가해자인 루크도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화석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 않고 서서, "다들 보았지 않아? 난 정말 조금 건드렸을 뿐이야. 저렇게 바운드(뛰는 일)까지 하다니, 어떻게 된 셈일까?" 하며, 도움을 청하는 듯 조지와 캐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지는 마틴이 성낼까 두려웠다. 그런데 마틴은 의외로 조용한 말씨로, "틀림없이 넌 루크란 이름이었지? 네가 만일 다시 한번 내게 그런 짓을 하겠다면 미리 예고를 하고 때려 줘." 하고, 루크를 쳐다보았다. "…………." "예고만 해 준다면 나는 중력 조정 장치를 조절해서 지금 같은 창피한 꼴은 안 보일 거다. 자, 다시 한 번 해 봐. 어디서든지 덤벼들어 봐." 마틴은 오른쪽 발을 반쯤 앞으로 내밀고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은 일류 권투 선수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어, 땅에 뿌리가 박힌 것 같아 보였다. 루크 디는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는지, 휙 뒤돌아 서서는 앞만 보고 달아나 버렸다. 마틴은 경멸의 웃음을 띠며 조지에게 말했다. "저 애의 태도는 완전히 소수점 이하다. 지능지수는 너보다 좋지만 뇌 속에 결함이 있는 것 같다." 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지능지수 지능지수하고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 줘, 마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마틴이 솔직하게 사과를 하고, 또 루크의 머리에 결함이 있다는 결론을 내려 주었기 때문에, 조지는 기분이 나아져서 물었다. "마틴, 넌 아까 몇 번이나 땅바닥에서 위로 퉁겨 올랐는데, 왜 그랬니?" "아. 그건 우리별과 이 지구의 중력의 차이 때문이야. 지구의 중력은 우리별의 3분의 1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뛰어오른다. 보통 때는 조정으로 견디지만 심한 충격을 받으면 그렇게 돼 버려." "음, 그러니까 우리가 달이 갔을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 난 거로구나." 조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시 물었다. "마틴, 너희 별나라는 우리 지구보다 훨씬 과학이 발달돼 있나보구나." "물론이지." "그렇다면 어째 너는 루크의 기습을 미리 알지 못했니? 다시 말하자면, 너희별도 외적의 공격에 대해서, 지금의 너처럼 항상 무방비 상태란 말이냐?" "그야 물론 우리는 외적의 기습에 대해서 항상 경계 태세를 취하여, 우리들의 중력권 안에 돌입해 오기 전에 자동적으로 격퇴하는 장치를 갖춰 놓고 있는 거야. 그렇지만 그건 과학적 병기에 의한 공격에 대해서만 그러는 거란다. 그리고 지금처럼 나 자신도 야만이나 저능, 비열, 그리고 원시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전혀 무력해. 그런 면을 루크한테 당한 거지. 그 애는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설마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하고, 조지는 머리를 저었다. 그러자 캐시가 명랑한 목소리로, "이 봐, 우리 바닷가에 가는 건 그만 두고 저기 저 언덕에 올라가 보는 게 어때?" 하며, 1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을 가리켰다. 그 언덕은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보드라운 풀로 뒤덮인 여성적인 모습으로, '미술관 뒷산'이라 불리고 있었다. 조지가 동의를 하고 마틴에게 설명을 했다. "마틴, 저 언덕에 올라가면, 시드니 항만의 전부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단다." "아, 그래?" 마틴은 좋아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후에 세 아이들은 미술관 뒷산 꼭대기의 풀밭에 누워 있었다. 발 아래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빨강, 하양, 파랑의 색색의 돛을 단 요트가 물매미처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아, 여기는 공기가 참 맑구나." 마틴은 엎드리고 있던 몸을 뒤척여 반듯이 누우며 말했다. 조지도 캐시도 마틴을 따라 하늘을 보고 누웠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풀 향기, 따스한 햇볕, 낮잠을 자기에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곳이었다. 조지는 어느 새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지는 누군가가 몸을 흔드는 것 같아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코앞에 캐시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캐시는 조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지, 마틴을 봐. 큰 소리 지르지 말고 봐" "으응?" 조지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캐시의 충고도 잊고,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마틴은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몸은 커다란 형광등이기라도 한 듯, 훤하게 빛을 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엷은 불빛은 느린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캐, 캐시,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을까?" 조지의 말소리가 떨렸다. 그러자 마틴이 번쩍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불빛은 확 꺼져 버렸다. "조지 왜 그러니? 네 얼굴이 심상치 않은데. 아! 알겠다. 내 몸이 훤하게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지?" "그랬어. 정말 놀랐어." "놀랄 것 없어. 아까 너희들도 잤겠지?" "응, 조금은……." 캐시가 대답했다. "그 때 나는 우연히 눈을 떴었어. 그런데 캐시는 주황빛으로, 조지는 연분홍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어." "그럴 리가 있어? 난 여태까지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는 걸 들은 일이 없단 말야." "그야 지구인끼리니까 그래." "지구인끼리는 왜 불빛을 못 본단 말이니?" "그건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알겠니?" "반쯤은 알고 반쯤은 모르는 상태야. 그런데 왜 너는 깨어있을 때는 불빛이 안 나고 잘 때만 빛이 나는 거야?" "간단하게 설명을 한다면 이런 거야. 나뿐 아니라, 우리 우주의 생물은 태어날 적에 조물주로부터 제각기 자기의 생명의 불을 받아 가지는 거야. 그건 사람에 따라서, 어떤 이는 초록색이기도 하고 빨간색 혹은 노란색이기도 해. 그렇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체면이라든가 허세라든가, 수치심이라든가 하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거야. 그래서 아까도 말한 대로 여러 가지 선입관이 방해를 해서 생명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 거란다." "그러고 보면 자고 있을 때일망정 우리가 생명의 불빛을 서로 보았다는 건, 우리 서로가 이상한 선입관이나, 허세나 체면을 앞세우지 않고 알몸으로 사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겠구나." "그래, 바로 그런 거야. 앞으로도 서로 믿고 지내기로 하자. 그래 우리 별과 너희들의 지구와의 친선에 도움이 되는 일일 테니까." "마틴, 네 말은 마치 우주대사의 메시지 같구나." "하하하, 그러냐." 마틴은 유쾌하게 웃더니, 곧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우주인이란 걸 밝히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 너희들, 미안하지만 나와 사귀고 있다는 걸 이 이상 남에게 말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알겠다." "비록 너희 집안 사람에게도 말야. 정말 약속해 주겠니?" "그래, 지구인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어." 조지와 캐시는 굳게 약속을 해 주었다. 그러나 약속을 한 때문에 두 아이는 다같이 괴로운 처지에 서게 된 것이다. 조지와 캐시는 마틴을 유령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마틴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 저녁볕에 빛나고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캐시는 저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조지에게 물었다. "조지, 넌 마틴의 그 이치인지 이론인지 하는 걸 잘 알고 있니?" "난 과학자가 아니라서 마틴이 말하는 것이 바른 건지 틀린 것인지 단언하지는 못해. 그렇지만 그 애가 말하는 것은 일종의 철학이고, 인생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깊이 생각해 보면, 과연 그렇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래, 서로가 믿고 지내면 알몸뚱이가 보이고 생명의 불이 환하게 보인다고도 했었지. 조지, 네 생명의 불은 무슨 빛깔이라고 했더라?" 조지는 시간이 이미 6시 가까이된 걸 알자 안색이 달라졌다. "캐시, 나도 마틴이 말한 네 생명의 불 빛깔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저녁 식탁 옆에서 얼굴을 시뻘겋게 하고 화내고 있을 것만은 틀림없구나. 그럼 잘 가." 조지는 멍하게 서 있는 캐시를 남겨 두고 부리나케 집으로 뛰어 돌아왔다.     그 누가 보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조지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다음 초승달까지는 며칠이나 남았어요?" 하고, 물어보았다. "글쎄." 어머니는 달력을 뒤적여 조사해 보고 나서, "두 주일 남았구나. 그런데 그건 왜 묻지?" "그저……." 조지가 대답에 궁해 하자 어머니가 도리어 도와주었다. "알겠다. 고양이 할멈과 관계 있는 일이겠지. 고양이 할멈은 초승달 때 잘 나오니까. 하지만 초승달을 보면서 우는 고양이는 사납다고 하니 제발 조심해라." "예, 어머니." 조지는 안심을 하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월요일 조지는 학교에서 돌아와 쉬고 있다가 오후 3시가 지나 마틴을 찾아갔다. 마틴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은 미안했어." 인사가 끝나자, 마틴은 자랑거리인 실내 장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보존액을 칠했는데도 이 꼴이란다." 과연 바나나는 시꺼멓게 되었고, 소시지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지구의 박테리아는 마틴의 별나라 약으로서도, 그 번식을 중지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다 버릴 수밖에 없겠구나, 마틴?" "그래도 그렇게 하면 집안이 살풍경해지니까 말야." 마틴이 아까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캐시가 들어왔다. 아마도 캐시는 저희 집 창에서 조지가 마틴을 찾아온 걸 바라다보았던 모양이었다. 지기를 싫어하는 말괄량이 같아 보이는 캐시도, 우주 소년인 마틴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캐시는 광주리에서 새 바나나를 꺼내더니 검어진 바나나를 철사에서 뽑아 내고 대신 매달았다. 마틴이 몹시 좋아하며, "고마와 덕택에 방안이 환해진 것 같다." 고, 말했다. '캐시라는 아이, 보기와는 달리 섬세한 신경을 가지고 있구나.' 조지도 새로운 발견을 한 듯한 기분이었다. 마틴은 캐시가 뽑아 놓은 검은 바나나와 소시지의 배때기를 손가락으로 자꾸 누르고 있더니,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창 밖을 노려보았다. "마틴 뭘 보는 거야?" 조지도 밖을 내다봤다. 3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빌딩 베란다에 서너 사람의 여자아이들이 이쪽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틴, 저 애들, 네 동무들이냐?" 캐시가 물었다. "아니야, 한 번도 얘기해 본 일이 없는 아이들인데 곧잘 저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나도 가끔 바라봐 주지." 마틴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베란다로 나가서 가볍게 훌쩍훌쩍 2미터 가량 높이로 뜀질을 해 보였다. 꼭 몸 전체가 용수철로 되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여자아이들이 와르르 박수를 쳤다. 마틴은 박수 소리에 신이 나서 이번에는 몸을 비틀어 뒤쪽으로 공중제비를 하는 등 초인적인 곡예까지 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자아이들을 향해 과장된 몸짓으로 절을 하기까지 하였다. 조지는 득의 만면해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온 마틴에게 말했다. "마틴 정말 멋진 곡예였어. 루크도 제법 했지만 네가 훨씬 멋진 곡예였어." "그래?" "그렇지만 조금은 경솔한 짓 같기도 해." "어째서?" "지금 네 곡예를 보고 있는 사람은 어린애들 뿐이 아니야. 저 빌딩에 사는 어른들도 보았단 말이야. 그 중에는 신문 기자랑 방송 기자들도 있었는지 몰라. 만일 그들이 있었다면 네 얘기는 이 시드니 시민들이 금방 다 알게 될 거야." "그래? 정말 네 말대로 그럴 것 같구나." 마틴은 솔직하게 자기의 경솔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이재부터는 너한테 허락을 받지 않고는 절대로 모험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     위험한 쇼핑광   화요일서부터 금요일까지 마틴은 집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이 되자, 적이 갑갑했던지 조지에게 부탁해 왔다. "조지, 오늘은 시장 구경이라도 시켜 주지 않겠니? 나 앞으로 열흘도 못 가서, 이 지구와 이별을 해야 하게 되니까……." 조지는 캐시에게 의논을 했다. 캐시는 잠깐 생각하다가, "난 오늘 언니한테서 여러 가지 시장을 봐 오란 부탁을 받았단 말야. 마틴도 같이 가자고 하면 어떨까?" 하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은 같이 상점이 많은 킹스 크로스 가로 나갔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거리는 쇼핑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캐시는 리스트를 들여다보면서 빵과 과일 같은 것을 사서 가방에 넣었다. 마틴은 캐시가 값을 치르고 물건을 받을 때마다 가게 주인이 그걸 저한테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같이 간 개처럼 눈알을 빛내면서 물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더욱이 마틴의 흥미를 끈 것은 상품과의 교환으로 캐시가 점원에게 주는 지폐와 동전이었다. "너희들은 어째서 물건을 살 때마다 네모난 종이와 동그란 쇠붙이를 주는 거냐?" 그는 상점 거리 한가운데서 큰 소리로 이런 질문을 했다. 조지는 전혀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당장은 무슨 말로 설명을 해 주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나 조금 후에는, "글쎄,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들은 자기가 한 일에 따라서 그 네모난 종이와 동전을 받게 되는 거란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많이 받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맛난 음식을 실컷 먹게 되는 거야." "그렇겠다. 그건 게으름뱅이를 없애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일 뿐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겠구나. 내가 우리별에 돌아가면 맨 먼저 이 얘기부터 해 줄 테다." 마틴은 감탄을 하면서 지폐와 동그란 동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네모난 종이와 동그란 쇠붙이는 어느 쪽이 더 강하니?" "종이쪽이 10배나 20배쯤 더 강하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조지는 돈의 단위를 설명해 주었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나도 기회가 있기만 하면 종이돈을 듬뿍 갖기로 하겠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해 봐." 조지는 무심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런 얘기로 해서 얼마 후에 큰 사건이 생길 줄은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캐시의 시장보기는 30분쯤으로 대략 끝이 났는데, 제법 부피가 컸다. 우주 소년 마틴은 상점의 진열장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특히 마틴이 흥미를 느낀 것은 도자기와 미술품들이었다. 하나를 보고 으음! 또 하나를 보고는 야아 ! 하며 감탄의 소리와 환성을 연발했다. 그러다가는, "아, 나도 종이돈과 동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저것들을 모두 내 손에 넣을 수 있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조지는 캐시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캐시, 마틴은 아마도 쇼핑광이 됐나 봐. 이곳에 너무 오래 있다가는 엉뚱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빨리 돌아가는 게 좋겠다." 하고,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캐시도 즉시 찬성을 했지만, 길 저편 쪽에 원예용품점이 있는 걸 보고는, "조지, 우리 아빠가 여행에서 돌아오시면 개장을 만드신다고 하셨어. 저기서 빨강 페인트를 좀 사가고 싶은데……." 하였다. "좋아, 내가 들어다 줄께." 조지는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하고, 마틴을 찾았다. 마틴은 옆 골목길에 조금 들어가 있는 운동구점 앞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진열장 안의 축구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틴, 이리 와." 하고, 조지가 소리를 치자, 마틴은 휙 돌아다보고는 부리나케 달려오다가 갑자기 체격이 좋은 젊은 선원(뱃사람)과 정면으로 딱 부딪쳐 버렸다. 다음 순간 루크 디와의 사건 때와 똑같은 광경이 일어났다. 마틴은 2미터 가량 훌쩍 뛰어오르고는 두 번 세 번, 크게 되튕겨 오르내렸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가로등 기둥을 붙들고 네 번째 퉁기기를 면했다. "미안해, 미안해, 괜찮니?" 젊은 선원이 놀란 얼굴로 마틴에게 사과를 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잘못했던 거예요." 마틴도 그 선원에게 사과를 했다. 선원은 마틴이 다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나서, 마치 에스에프(SF)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보고 난 뒤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어져 갔다. '마틴의 몸은 풍선과 같다. 조금만 밀어도 몇 미터나 날아간다. 만일 자동차에라도 부딪친다면 이거야말로 큰일이 나겠는데.' 조지는 조심조심 마틴을 데리고 횡단보도를 건너 원예용품점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해 버린 일   점포 안은 주말 수리에 쓰는 못이며 철사, 드라이버 등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휴일 목수들은 강력한 전기 드릴(나사송곳)과 톱의 실연(실제로 보여줌) 판매 코너에 모여 서 있었다. 캐시는 조지를 페인트 코너로 데리고 가서 두 파운드 짜리를 살 것인지 세 파운드 짜리를 살 것인지 의견을 물었다. 그러는 동안 마틴은 복잡한 가게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레이스 모자를 쓴 뚱뚱한 부인이 빨간색 쓰레받기를 고르고 있는 걸 보자, 눈을 빛내며 다가갔다. 아무 것도 모르는 부인은 돈 무늬를 그린 장식이 붙은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어 점원에게 물건값을 치르려 헸다. 그러자 구경을 하고 있던 마틴이, "갖고 싶은 걸 이렇게 살 수 있다니, 정말 부럽군요, 내게는……." 부인이 깜짝 놀라, "어머,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애로군. 너, 이 시드니에 사는 애냐?" 하고, 물었다. 마틴은 친절하게 대꾸를 해 주는 걸 보고는, "아니에요, 먼 곳에서 왔어요. 그래서, 나는 이 때까지 돈을 가져 보지도 못했고 본 적도 없어요." "아니, 그림 먼 곳에서 어떻게 예까지 왔지? 히치하이크(차를 얻어 타며 하는 도보 여행)로?" 부인은 뚫어지게 마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광경을 본 조지는, '이거 야단났다. 이러다가는 마틴이 또 엉뚱한 짓을 하겠는데……' 하고, 마틴의 부인과의 대화를 막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때 조지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마틴과 얘기를 하고 있는 부인의 레이스 붙은 큰 모자 뒤에 다른 상점의 가격표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저건 이상한데, 어쩐 일일까?" 캐시에게 물어보려고 뒤돌아보자, 그 부인은 웬일인지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틴에게, "한 번도 돈을 가져보지 못했다면 어디 한 움큼 쥐어 보렴." 하며, 핸드백을 열고 한 움큼의 돈을 꺼내어 마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마틴은 뛸 듯이 좋아하면서 고개를 꾸뻑였다. "고맙습니다. 이제 이걸로 나도 갖고 싶은 걸 많이 사겠어요." "그렇게 해라." 그리고 부인은 웬일인지 도망치듯 가게에서 나가 버렸다. 조지는 마틴의 팔을 꽉 잡으며 타일렀다. "마틴, 너 이게 무슨 짓이냐. 너의 지금 행동은 거지와 같아, 어서 따라가서 돈을 도로 주어. 나도 같이 따라가 줄께." 그러나 마틴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건 내가 쓰레받기를 들고 있어 주니까 그 대신 준거야. 너희들이 말하는 정당한 보수라는 것과 다르다는 말이야?" "마틴, 정상적인 사람은, 한 번 만났을 뿐인 남의 조그마한 친절에 대해서 돈 같은 걸 주는 게 아니야. 그 사람, 좀 이상하단 말이야. 게다가……." 조지는 마틴에게 돈을 쥐어 준 그 부인이 가격표가 붙은 모자를 쓰고 있었던 걸 생각했다. '알았다. 그 여자는 어디서 몽태치기(물건을 사는 척 하며 훔침)를 했을 거다. 마틴이 얻은 돈도 도둑질한 것이거나, 혹은 소매치기한 것이 틀림없어.' 조지는 마틴의 소매를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래도 마틴은 아직 이 일의 중대함을 모르는 듯, 이상한 부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꼭 쥐고, "만일 내가 받아서 안 되는 것이라면 너하고 캐시에게 줄께." 고, 했다. "또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니?" 조지는 성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 돈을 한시 바삐 돌려주지 않으면 큰일 난단 말이야." 조지는 둘레둘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수상한 부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조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언짢은 일은 곧잘 뒤이어 일어나기 쉬운 것이다. 조지는 길 반대쪽에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 걸 보았다. 그 인물은 조지와 마틴 쪽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는 방송국 기자인 듯한 사람이 검은 빛 작은 테이프 레코드를 갖고 있었다. 라이벌(경쟁 상대 )인 루크 디 였다. '루크 디 녀석, 유령의 집을 나을 때부터 죽 뒤를 밟았는지도 모르겠군.' 조지는 하는 수없이, 지금 당장 가장 믿음직한 친구인 캐시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마틴, 넌 여기에 서 있어. 한 발도 움직이면 안 돼 알겠니?" 마틴이 수긍하는 걸 보고 나서야 조지는 원예용품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캐시는 페인트 깡통을 손에 들고 골이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지, 어디 갔더랬어? 나는 네가 가 버린 줄 알고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캐시, 난처한 일이 생겼어." 조지가 더듬거리는 소리로 사건의 대강을 얘기해 주었다. 캐시는 얼굴빛이 달라지며, "조지는, 큰 소리로 '거기 서요!' 하고 소리치면서 그 수상한 여자를 뒤쫓아갔어야 했어. 그러면 사람들이 협력을 해서 잡아줬을 거 아냐?" "그런 소리를 하지만, 캐시, 큰 소동이 벌어지면 마틴의 정체가 탄로되어 버리지 않느냐 말이야." 조지는 뛰는 가슴을 누르며, "게다가 캐시, 그 귀찮은 녀석 루크가 방송 기자일 성싶은 사람과 같이, 마틴의 비밀을 캐내어 특종으로 하려 하고 있단 말야." "그래?" 캐시는 심문을 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조지, 넌 마틴이 수상한 그 여자한테서 돈을 받는 걸 목격했다는 거지?" "암." "그 때 말릴 걸 그랬구나." "응, 그런데 마틴은 눈 깜짝할 동안에 돈을 감아쥐어 버렸어." "데리고 나온 똥개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왈칵 집어먹듯이 말이지? 그럼 이렇게 하자. 아무튼 마틴을 데리고 경찰서로 가자. 거기 가서 까닭을 말하고 경찰에 돈을 넘겨주는 거야. 증인은 네가 서면 돼. 달리 좋은 방법은 없어. 더구나 경찰은 우리 지구의 평화에 관계없는 이상, 마틴을 지켜 줄 거라고 믿어." "알았다. 그렇게 해 보자." 조지가 가게에서 나와 보니, 마틴은 아까 있던 자리에 돈을 꼭 쥔 채 서 있었다. 마틴은 캐시를 보자, "캐시, 이 돈, 정말 쓰면 안 되는 거니?" 하고, 물었다. 캐시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곧 험상궂은 얼굴을 하며, 타이르듯 말했다. "마틴, 조금쯤은 반성을 해 줘. 네가 모르는 사람에게서 돈을 받은 때문에 우리는 대단한 골치를 앓게 됐단 말이야." "왜?" "우리 나라에서는 까닭 모를 돈을 받든지 줍든지 했을 때는 곧 갖다 바치기로 돼 있어." "그러냐?" 마틴은 쥐고 있는 지폐와 동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그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거라면 우리 이렇게 하자." 하며, 대뜸 돈을 킹스 크로스 거리 한가운데를 향해 휙 집어 던졌다. 지폐들은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날아가고 동전들은 햇볕에 반짝반짝 깜박이며 사방으로 굴러갔다. "야아앗!" 킹스 크로스 큰길에는 금새 큰 소동이 벌어졌다. 야윈 한 사나이가 지폐를 주워 재빨리 포켓에 쑤셔 넣었다. 뒤이어 두 소년이 20 센트 짜리 동전을 주우려고 길 복판으로 달려가 서로 머리를 맞부딪쳤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지팡이로 한 장의 돈을 꼭 찌르듯이 하여 집어들었다. 그러나 돈을 주워 든 사람들의 한 반쯤은, '그렇다고 내 것으로 할 수는 없겠지.' 하는 표정으로 마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소동은 점점 커져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자동차도 지나갈 수 없게 되어 경적을 시끄럽게 울려 댔다. 뒤따라 제복 제모의 경관이 두 사람 달려왔다. 한 사람이 익숙한 솜씨로 교통 정리를 시작하자, 한 사람은 지폐와 동전을 주운 사람들에게서 돈을 모두 회수했다.     백주의 도주   회수한 자리에서 계산해 본 돈은 모두 110달러였다. 경관은 연필과 수첩을 꺼내어 마틴을 향해, 봉고드럼(얼룩양의 가죽으로 만든 북)처럼 부드럽고 다정스런 소리로 물었다. "네가 떨어뜨린 돈은 이보다 더 많지 않았니?" "많았는지 적었는지 모릅니다. 전 얼마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기억하지 못해? 자기가 가진 돈을……?" 그 때까지 상냥하던 경관의 눈이 갑자기 험상궂어졌다. 직업상의 육감에서 범죄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다. 그 경관은 같이 온 경관과 무언지 의논을 하더니 조지와 캐시에게, "너희들 셋이 다같이 파출소까지 가 주어야겠다." 고 말했다. "예." 마틴의 주위에는 벌써 사람들이 삥 둘러서 있었으므로, 조지는 그렇게 된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했다. 1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파출소에 조지 일행을 데리고 간 경관은 입구 도어를 닫고는 마틴을 향해 물었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 같다마는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고, 우선 대금 분실계를 내야 하겠지. 이름은 무어라고 하지?" "저어, 그건 저어, 마틴입니다. "마틴이라, 그럼 성은 뭐지?" "아, 화성인 마틴이에요." 경관은 손에 들었던 수첩을 책상 위에 놓고 마틴을 쏘아보았다. "제 이름을 얼른 대지 못하는 걸 보니, 마틴이란 건 여기서 얼른 생각해 낸 이름이거나 아니면 별명이겠지. 너, 경찰관을 놀리다가는 벌을 받게 되는 수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조지가 황급히 구원 작업을 시작했다. "화성인이라고 하는 건 경관 아저씨 말대로 우리가 이 애한테 붙여준 별명이에요. 그렇지만 마틴이란 건 본명이랍니다. 성은 스미스라고 해요. 그렇지, 마틴?" 마틴 스미스는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자세히 조사하기로 하고 우선 네 말대로 그렇다고 하자. 다음은 주소다." "지금은 빈집에 혼자 살고 있어요. 가까운 데 바다가 있어요. 아 참, 공원도……." "빈집에서 혼자 산다고? 두말할 것 없는 부랑아로군. 그래 그 동네 이름은? 그리고 번지는?" 마틴은 대답을 못했다. 경관은 다시 의심을 품고 마틴을 향해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마틴 스미스 군, 너는 어째서 소중한 많은 돈을 길바닥에다 내던졌지? 그런 장난을 하면 큰 혼란이 일어난다는 것을 몰랐단 말이냐?" "…………." 그러나 마틴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으므로 조지가 대신 대답을 했다. "마틴은 돈이란 걸 이날까지 전연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오늘 처음으로 손에 돈을 쥐어 본 거예요." "110달러라면 큰 돈이야. 그 돈은 어디서 났나? 설마 네가 준 돈은 아닐 테지." "물론입니다. 저희들은 단 10달러도 가지지 않았어요. 마틴은 저기 저 가게에서 모르는 사람한테서 얻은 거예요." "허스프 원예용품점 안에서 말이냐? 넌 마틴 군이 받는 걸 보고 있었나?" "네." "그럼 그 사람의 나이와 인상을 말해 봐." "레이스 달린 모자를 쓴 중년 부인이었어요." "으음." 경관은 캐시를 보고, "어떤 옷을 입고 있었나 기억하고 있니?" 하고, 물었다. "사실 저는 그때 가게 안 쪽에 있었기 때문에 마틴이 돈을 받는 건 못 봤어요. 나중에 조지가 얘기를 해 주기에 곧 되돌려주라고 권했는데, 그 부인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경찰에 갖다드리려고 했을 때, 마틴이 돈을 길에다 뿌려 버린 거예요." "오냐, 알겠다. 미안하지만 증인인 너희들은 잠시 입을 열지 말고 기다려 줘. 내가 직접 이 소년 마틴 스미스군의 입으로 들어봐야 겠으니까." 경관은 마틴을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물었다. "자, 그럼 그 돈을 어떻게 해서 손에 넣었나 얘기 해 봐." "그건 지금, 내가 존경하고 있는 두 친구가 말한 대로 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인이 있기에 나는 그게 부러워서 바라보고 있었어요. 사실이지 나는 돈이라곤 하나도 갖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그 여자가 내게 한 움큼 돈을 쥐어 준 거예요. 아마도 쓸데가 없었나 보죠. 아니 무거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군요." 경관은 정색을 하며, "돈이 무거워 남에게 주는 거라면, 그 여자는 대단한 큰 부자겠군. 그래 그 사람의 이름은?" "…………." 마틴은 도움을 청하는 듯, 조지 쪽을 돌아보고 물었다. "조지, 그 사람의 이름은 무어라고 해?" 조지는 마틴이 너무 자주 도움을 청하는데 화가 났다. "이름을 물어볼 틈이나 있었어? 그럴 겨를이 없지 않았어? 게다가 그 때 나는 야단났다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 마구 뛰고 있었단 말이야." 경관은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조지의 말을 입 속으로 되풀이했다. 그의 눈은 점점 직업적으로 되어갔다. 그리고 판결문이라도 읽는 듯한 소리로 마틴에게 말했다. "마틴 스미스 군, 아무튼 너는 처음 만난 여자로부터 110달러 이상의 많은 돈을 얻었다. 그러나 뒤에 두려워져서 급히 길에다 뿌려 버린 것이다. 그렇지?" 그건 일종의 유도 심문 같았다. 그러나 우주인 마틴에게는 통하지 않는 일이었다. "두려운 건 없습니다. 다만 그 돈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여기 있는 캐시와 조지에게도 귀찮은 폐가 끼쳐질까 싶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아, 그러더니 결국 귀찮은 일이 생겼군요." "뭐?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귀찮아졌다고?" 경관은 매우 기분이 나빠진 듯한 말투로, "그러고 보니 너는 나보다도 훨씬 부자로군. 그렇지 않으면 110달러나 되는 돈을 그리 손쉽게 내버릴 수는 없을 것 아니냐!" 마틴은 냉정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결론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저는 당신이 얼마큼 돈을 가진 분인지 모르는 터이고, 더구나 저희 별에는 돈이란 것이 전연 없으니까요." 경관은 드디어 화를 냈다. "너, 아까부터 잠자코 있으니까 안하무인이로구나.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어야 해." "제가 무얼 무시했나요?" 마틴도 큰 소리로 대꾸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조지는 마틴의 손가락이 분노에 벌벌 떨고 있는걸 보았다. 마틴과 경관과의 사이에 긴장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이렇게 되면 마틴이 지구인이 아니란 걸 성실하게 말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조지는 흘낏 캐시를 건너다보았다. 캐시도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하고, 조지가 바야흐로 마틴의 신분을 경관에게 털어놓으려고 할 때였다. 파출소의 문을 왈칵 열고 한 사나이가 뛰어들어 왔다. 아까 루크 디와 같이 길 건너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어깨에 매고 있는 건 역시 테이프 레코드였다. "실례합니다. 물어 볼 말이 있어서 왔는데요……." 그 사나이는 경관에게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경관은 노크도 하지 않고 뛰어든 사나이를 수상쩍게 노려보며, "여보세요, 나는 지금 바빠요. 길을 물으려면 길에서 있는 경관에게 물어 보세요." 그러자 사나이는 고개를 저으며, "아뇨, 내가 묻고 싶은 건 당신에게 미성년자의 인격과 명예를 지키려는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것이요." "아까부터 보아하니, 당신의 취조는 미성년인 소년에 대해서 좀 가혹한 것 같군요." 경관의 얼굴에 일순 귀찮은 놈이 뛰어들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뛰어든 사나이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사나이는 얼굴을 마틴에게로 돌리더니, "자네는 확실히 마틴이라고 했지? 나를 알아보겠나?" 뜻밖에도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가 놀라, "마틴, 너 이분을 알고 있어?" "아, 2, 3일 전에 공원을 산보하고 있을 때 이분이, '나는 루크 디의 친구요. 에스 디(SD) 통신의 조사원을 하고 있는데, 시드니의 소년 생활에 대해 몇 마디 얘기해 줘요.' 하고 부탁했었어. 그래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일을 몇 마디 얘기했었어." 조지에게는 그 때의 광경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이 에스 디 (SD) 통신의 조사원이란 건 정말 수완 있는 사람이야. 마틴한테서 여러 가지 일을 조사해 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이 여기 뛰어들어 왔을까. 사건이 더 복잡하게 되지나 말았으면 좋겠건만…….' 조사원은 테이프 레코드의 스위치를 딸가닥 소리가 나게 넣고는, 또 마틴을 향해 물었다. "대체 당신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마틴은 조사원을 실력 있는 자기편이라고 생각했던지 단박 기운이 나서 대답했다. "그건 정말 시시한 일 때문이었어요. 상냥한 부인이 제게 돈을 주었기 때문에 여기 있는 조지와 캐시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재수 없는 물건이라 생각하고 그 돈을 길바닥에 내던졌는데, 그게 더 큰 소동을 일으키게 된 거예요." "하하하, 그만한 일로 여기로 끌려왔단 말이야?" 에스 디(SD) 통신의 조사원이라는 사나이는 이번에는 경관을 향해 비난했다. "당신의 행동은 완전히 불공평했군요." 경관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자네는 이 마틴인가 하는 아이의 보호자요? 어째서 나를 비난하는 거요? 정말 에스 디 (SD)통신의 조사원이면 신분 증명서를 보여 줘요." 경관은 마틴은 제쳐놓고 에스 디(SD) 통신의 조사원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조지가 입 속으로 중얼거렸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팔을 잡아당겼다. 루크 디였다. 루크는 눈으로 조지에게 도망치자는 신호를 보내고 턱으로 바깥을 가리키고는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조지는 곧 그 뜻을 알아차렸다. '때는 지금이다. 도망치자!' 조사원은 어떡하다 보니, 경관을 향해 어려운 과학용어를 줏어대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이 있소……." 조사원과 루크 디는 확실히 공동 작전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지는 캐시에게 기대어, 초록색 멕시칸 모자 무늬가 있는 스커트를 잡아당겼다. 캐시도 루크가 온 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곤란한 것은,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딘지 얼빠진 데가 있는 마틴에게 도망가자는 뜻을 전하는 일이었다 조지는 마틴이 선원에게 부딪쳤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 했다. '그렇다. 중력 관계로 마틴의 몸은 풋볼 같이 가벼울 것이다. 좋아, 어디 해 보자!' 조지는 마틴의 줄무늬 있는 초록 셔츠를 거머쥐고 파출소에서 로켓 같이 뛰어나왔다. 예상한 대로 마틴의 몸뚱이는 믿을 수 없을 만치 가벼웠다. "거, 거기 섯!" 경관의 외치는 소리를 뒤로 듣는 순간, 조지는 '아! 큰일 났다'하고, 양심이 저리도록 아팠다. 그러나 이제 뒤돌아 설 수는 없었다. 남은 방범은 단 하나, 마틴을 데리고 끝까지 도망치는 길밖엔 없었다. 조지도 캐시도, 공중 전화 박스 뒤에서 뛰어나온 루크도 모두 죽어라 하고 달렸다. 캐시의 스커트에 붙어 있는 초록색 모자 그림의 자수는 큰 물결을 만난 조각배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대낮의 도주였다. 월리엄 거리에서 칼턴 거리를 향하는 급하지 않은 내리막길을 달렸다. 숨 가빠하면서 루크가 소리쳤다. "마틴, 넌 공중을 날 수 있구나." "아냐, 날고 있는 건 아냐.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것으로 보이는 거야." 그냥 그렇다고 해 두어도 좋을 것을, 마틴은 또 이러니저러니 해서 루크의 기분을 상하게 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루크 디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지는 루크 디가 어째서 구조를 하러 왔는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두 아이의 사이는 결코 좋지는 않았지 않는가. '결국 루크 디는 마틴과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그리고 호기심 때문일 거야.' 조지는 계속 달리면서도 이런 해답을 찾아내고 있었다. 이 때, 뒤에서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 왔다. 아마도 그건 조지 일행을 잡으러 온 차는 아닌 거 같았다. 그러나 도망치는 사람은 교회당의 평화스런 종소리에도 겁을 내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곧 붙잡히겠다." 조지는 왼쪽으로 꼬부라져서는 좁은 돌층계를 뛰어 내려갔다. 돌층계 아래는 마틴이 숨어사는 집에서 가까운 바닷가 거리였다. 경관의 모습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조지 일행은 겨우 안심을 하고 마틴이 숨어사는 집으로 걸어갔다. 그 집 문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조지는 중대한 단서를 파출소에 남겨 놓고 온 것을 생각했다. 그는 캐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캐시, 야단났다. 마틴이 사는 집 부근 지리를 아까 그 경관에게 가르쳐 줘 버렸구나." "참, 그랬어." 캐시도 얼굴빛이 변했다. 그러나 곧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만일 경관이 찾아와서 마틴을 체포하려들면, 마틴은 이상한 푸른빛으로 변해 가지고 스토브 속에 들어가 버리겠지 뭐." "음, 그렇구나." 조지는 웃으며 말했으나, 그 웃음 속에는 무겁고 석연찮은 것이 섞여 있었다. '마틴에게는 비밀의 방법이 있으니까 좋지만, 우리들은 아까 그 경관에게 들키면 어떻게 해야하나?' "잘 가, 다음에 또 만나!" 선선히 손을 흔들며 유령의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마틴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조지는 마음을 돌려 먹고 루크 디에게 말했다. "네 덕분에 우선 위기는 면했다만 오늘 사건으로 마틴은 수배인이 되어 버렸어. 앞으로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글세……." 루크 디는 바지를 추켜올려 외모를 갖추고는, "사실 나는 저 에스 디(SD) 통신의 조사원과 아침부터 여기 잠복(숨어서 감시함)해 있었던 거야. 그러다가 너희들의 뒤를 밟아 갔었어." "그랬어? 우린 전연 눈치채지 못했어." "나는 너희들이 마틴을 행인이 많은 킹스 크로스로 데리고 가는 걸 보고, '이건 서투른데……, 까딱 잘못하면 엉뚱한 사고가 일어나고 말거야' 하고 걱정을 했었어." "네 말대로야. 킹스 크로스 같은 번화한 곳에 마틴을 데리고 간 건 나의 큰 실수였어. 그렇지만 지난 일을 갖고 이러쿵저러쿵해도 별 수 없는 일이고 문제는 이제부터야. 너와 같이 있는 에스 디(SD)통신의 조사원이란 사람, 믿을 수 있는 분이냐?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마틴에게 사건의 대강 얘기를 듣는 걸로 보아, 여간내기가 아닐 것 같은데……." "나도 2, 3번 만났을 뿐이라 잘은 모르지만, 머리가 퍽 좋은 사람인 건 틀림없어. 아마 마틴과도 몇 번 만나서 얘기를 녹음해 놓은 것 같아." "그럼 마틴이 우주에서 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겠구나." "그야 물론 알고 있어." "비밀을 지켜 줄까?" "그 사람은 특종 기사에 목숨을 걸고 있다. 경관이 물어 봐도 뻔들뻔들 얘기를 주고받을 뿐이야. 하지만 경찰이 만일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면 마틴이나 너희들이나 또 고양이 할멈의 일까지도 모조리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거야." "…………." 조지의 불안은 점점 더해 갔다. 캐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마도 이제 와서는 경찰서에서 도망쳐 온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같은 형편인 조지가 말했다. "캐시, 걱정할 것 없어. 우리들은 아무런 부끄러운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다만 마틴에게 돈을 쥐어 준 그 몽태치기 여자 뿐이야. 더구나 우리는 그 돈을 단 1센트도 받지 않았지 않아?" "그건 그래." 캐시가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조지도 다소 마음이 놓였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웠다. 점심 시간이다. 조지는 언제나처럼 전속력으로 자기 집으로 달려갔다.     우주 스파이 마틴   현관문을 열었을 때, 조지의 눈에 뜨인 것은 마루에 가득 펼쳐져 있는 빨랫감들이었다. 어머니는 그 한가운데서 두 손을 허리에 대고 서서 무언지 생각하고 있다가, 조지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조지야, 네 노란색, 갈색 무늬가 있는 초록 셔츠, 어디 있는지 모르겠니? 빨래를 하려는데 통 보이지를 않는구나." '이크, 탄로가 났나보다.' 조지는 놀라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셔츠는 지금 마틴이 입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실대로 얘기를 했다가는 마틴의 일이 탄로가 나고 말 것이다. 기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조지는 세면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이 좔좔 나오게 해놓고 푸우푸우 얼굴을 씻으면서 어머니에게 둘러댈 꾀를 이것저것 궁리해 보고 있었다. "얘, 어디다 뒀니?" 어머니가 방에서 소리쳤다. 조지는 손으로 무릎을 탁 치며, "어머니, 생각났어요. 그 셔츠 내가 어디다 벗어 두고 잊어버리고 왔어요." "벗어 두고 잊다니, 그럴 리가 있어? 셔츠는 모자와는 다르지 않아?" 조지는 잠시 궁리하다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정말은요 어머니, 한 20일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멜버른에 간 날, 친구들하고 같이 셔츠를 벗어 놓고 부두 근처 바다에서 헤엄을 쳤었어요." "재는, 20일 전엔 아직 추웠을 텐데.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랬니?" "그래도 난 감기 같은 것 들지 않았단 말이에요." 조지는 가슴을 좍 펴고 말했다. 어머니는 대견한 듯이 조지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는 감기를 잘도 앓더니 이젠 건강해진 거로구나." '됐다! 이제 화제를 딴 데로 돌릴 수 있겠다.' 조지는 안심하고 희망을 가졌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다시 추궁한 것이다. "그런데 셔츠는?" "아, 셔츠 말이죠. 헤엄을 치고 나와 보니까 벗어 둔 곳에 없지 않아요? 누군가가 내가 헤엄치고 있는 동안에 가져가 버린 거예요." "그렇게 함부로 벗어 두었으니까 그렇지, 그건 값비싼 셔츠였으니까." "난 어머니한테 꾸중을 들을 것 같아 부두 가까운 곳에 사는 동무 아이한테서 흰 셔츠를 빌어 입고 집에 와서 그 다음 날 아침에 돌려보냈어요." "그랬어? 그런데 조지야. 너 앞으로 어떡한 테냐? 그 셔츠를 찾아 올 가망이 있니?" "누군가가 몰래 가져 가 버렸으니까 찾긴 어려울 것 같아요." "알았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만일 앞으로 10일이 지나도 셔츠가 발견되지 않으면 네가 셔츠 값을 내는 거다. 다음 달치 용돈 속에서 말이다." "그, 그건 너무 심해요, 어머니." "그러니까 네가 탐정이 된 셈치고 이 시드니 시내를 돌아다니며 찾아 봐." "알았어요, 어머니. 그럼 제가 기회를 봐서 찾아올게요." "조지, 지금 뭐라고 했지?" 어머니가 눈을 번쩍였다. '이크, 말을 잘못했구나!' 조지가 입술을 꼭 물었을 때, 때마침 조지 이상으로 말썽 많은 아버지가 돌아왔다. 덕택으로 조지는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오후에 마틴에게 가서 셔츠를 도로 받아 오기로 하자. 그리고 마틴이 그의 행성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사실대로 얘기하면 될 거야.' 점심을 먹고 난 조지는, '마틴도 낮잠을 깼을 때다.' 하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와 조심조심 유령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마틴은 스토브 안에도 뒤꼍 광에도 없었다. "에잇, 남의 속도 모르고 어디를 어정어정 돌아다니고 있다니!" 이층 창문으로부터 바다 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공원 쪽으로부터 마틴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조지는 계단을 뛰어내려가서, 뜰 한복판에서 마틴을 맞았다. 마틴은 싱글벙글 하면서, "야아, 조지 오늘 아침엔 참 재미있었어. 그런데 오후엔 어디를 구경시켜 줄 테야?" "마틴, 구경이라니, 그런 태평스런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넌 지명 수배자가 되어 있어. 언제 여기로 경관이 들이닥칠지 모른단 말이야." "그래도 아까 그 경관이 가까이 온다면 난 곧 알 수 있어. 슬쩍 숨어 버리면 될 것 아냐?" "마틴, 지구의 경찰력은 거미줄처럼 쳐 있는 거야. 그 경관은 전화로 네 일을 본서에 연락했을 거야. 지금 시드니 시내의 몇 천 명이나 되는 경관이 눈을 까뒤집고 수상한 소년의 행방을 찾고 있을 거란 말이다." "그래? 열이나 백이라면 어떻게 피할 수 있지만 상대가 몇 천 명이나 된다면 이건 좀 곤란한데." 마틴은 비로소 사건의 중대함을 어느 정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거기에 캐시도 나타났다. 캐시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지, 우리가 이 빈집이 바닷가 공원 근처에 있다는 걸 말했지? 지금쯤 경찰서 사람들이 시드니 시의 지도를 보면서 그린 집을 낱낱이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몰라 곧 여기에도 올 거야." "그래? 그럼 한시 바삐, 다같이 어디로 피해 가서 숨자." 조지가 이렇게 말하자 마틴은, "너희들에게 그런 폐를 끼치는 건 안 될 일이다. 내가 자진해서 경찰서에 가겠어. 그래서 경찰관 중에 제일 지위가 높고 이해심이 있는 사람을 찾아, 사실을 얘기하겠어." 조지는 황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냐, 그건 서투른 일이야. 아무튼 경찰관이란 사람들은, 아까 취조하는 걸 봐도 알겠지만 위에서 아래까지 완고한 돌대가리들이야. 네가 지껄이면 지껄이는 만큼, '이 녀석 머리가 돈 거 아냐? 정신 병원에 진찰을 받게 해 보자'고 할지도 몰라. 네가 혹시 초록색 뿔이라도 머리에 나 있다면 몰라도……. 요컨대 경관이란 건, 자기 눈으로 환히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은 믿으려 하지 않는 인종들이야." "그럼 그자들한테 내가 우주인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면 되겠지. 그러면 얘기는 간단해. 경찰의 우두머리를 찾아가서, 그 방에서 펄쩍펄쩍 천장까지 뛰어 올라 보일 테다." 조지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고 생각했으나, 곧 다른 걱정이 먹구름처럼 피어났다. "그렇게 해 보이면 확실히 그들도 네가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겠지. 하지만 경관은 타이어가 펑크가 나도, 총을 쏜 것이라고 오해를 할만큼 겁내기를 잘 하는 인간들만 모여 있는 거야. 네가 지구인이 아닌 걸 알았다 하면, 당장 우주 스파이라고 의심을 하게 된 거 란 말이다." "나를 우주 스파이라고?" "그래. 지구 정복과 점령을 노리는 너희별의 권력자들이 보낸 솜씨 좋은 소년 스파이라고 말야." 마틴은 어처구니없는 듯, 눈을 깜박였다. "지구를 탈취하려 한다고? 무엇 때문에? 우리들은 벌써 다른 행성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또 다른 하나를 갖고 싶어 할 까닭이 없잖아?" "하지만 너희들 별에서도 새로운 영토를 갖고 싶겠지.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몇 십 년이 지나면 땅과 양식이 모자라게 되겠지. 너희별은 우리 지구보다도 문명이 발달해 있으니까 대기오염과 여러 가지 공해로 골치를 앓고 있을 거야. 그런 이유만으로도 새로운 깨끗한 땅을 갖고 싶어 할 것인데 말이야…." 얘기를 하는 중에 조지는 화가 났다. 마틴이 허리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었던 것이다. 아니 웃는다기보다 차라리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숨 가쁘게 얘기를 했다. "조지, 네가 말한 대로, 우리별은 방사능과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로 더럽혀져 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다른 새로운 별이나 행성을 갖고 싶어하다 우주인은 하나도 없어. 생각해 봐. 남의 것을 뺏느니보다는 자기네 별을 좋게 해 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니? 어때, 내 말이 틀렸니?" "정말 네 말대로야. 그렇지만 그걸 경관에게 말한다 해서, 경찰관들이 믿어 주겠니?" 아까부터 잠자코 마틴과 조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캐시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마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마틴, 나도 조지와 마찬가지로 네가 하는 말이 정당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은 조지가 말한 대로 경찰의 눈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는다면 네 지구 여행은 정말 불유쾌한 것이 되어 버릴 거야." 마틴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 지구에서는 권력에 반항한다는 것이 때로는 미덕이 되고 있구나. 그럼 어디 잘 해 보자." 조지가, "캐시, 우리 시드니에서 경관이 찾아올 가능성이 적은 곳이 어딜까?" 하고, 물었다. "글쎄, 해군기지 아닐까." "천만에! 그곳에는 경관들보다 더 침략에 떨고 있는 군인들이 우글우글해." "그렇구나. 아참! 동물원은 어떨까? 조지는 동물원에서 경관을 본 일 있어?" "동물원? 참 그걸 생각 못했군. 거기서 경찰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 게다가 아이들이 많이 와 있고, 신기한 동물도 많으니까, 마틴도 필시 좋아할 거야." 조지와 캐시는 마틴을 데리고 부두로 가서, 거기서 타롱거 항의 연락선을 타고 1시간쯤 지나 타롱거 동물원에 도착했다. 정문을 들어서자 이내 조지는 마틴을 동물원으로 데리고 온 짓이 크게 잘한 일임을 깨달았다. 왜냐 하면, 마침 토요일이었으므로, 동물원에는 가족 동반의 입장자들로 붐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 소년 마틴은 다른 구경군들과는 달라서 우리 밖의 동물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물론 우리 안의 동물들, 게으름뱅이 사자, 사방을 둘레둘레 보고 있는 기린, 벼룩을 잡고 있는 원숭이들에게도 대단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속의 식구들은 과연 대단한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몇 천 명이나 되는 입장자 중에 섞여 있는 단 한 사람의 딴 세상 사람인 마틴을 보자, 그의 정체를 알아채고 이빨을 드러내거나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저놈들, 무엇 때문에 저렇게 긴장해 가지고 야단들이야?" 마틴은 저를 싫어하는 건 줄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우리의 철망 가까이 다가가서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지의 일행은 맨 끝으로 코끼리 우리 앞에 이르렀다. 그 코끼리는 온순하기로 이름난 동물이었는데 마틴을 보자 꽤액 하고 기묘한 울음을 울며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가 쾅 내리짚었다. 담당 계원이 놀라 달래려 했으나, 코끼리는 그 쪼끄만 눈에 벌겋게 핏발을 세우며 마틴을 쏘아보고 있었다. 조지는 황급히 마틴을 데리고 수족관으로 갔다. 오후 5시의 마감 시간까지 거기서 지낸 조지 일행은 연락선을 타고 부두로 돌아왔다. 헤어질 때 마틴은 조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별에는 동물원 같은 건 없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내일은 또 어디로 데리고 가 주겠니?"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또 어디든 가야지." 조지는 저도 모르게 끌려들어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마틴 그림을 그리다   다음날인 일요일, 조지는 어머니에게 친구들하고 낚시하러 가기로 했으니 샌드위치 도시락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마틴, 캐시, 데이비드, 거기다 엘리자베스까지 불러내어, 시드니 바다에 보트를 타고 나갔다. 루크에게도 같이 가기를 청했지만 마침 가족끼리 드라이브를 하게 되어 있어서 동행이 되지 못했다. 고기는 재미나게 잘 잡혔다. 특히 마틴에게 있어서 낚시는 세상에 나서 처음 해 보는 것이었다. 마틴의 별에서는 고기를 잡을 땐, 아쿠아렁(물속 호흡기)을 달고 바닷 속에 들어가 수중총(물 속에서 쓸 수 있도록 된 총)을 쏘아 잡던가, 아니면 폭탄을 쓴다고 했다. 오후 2시가 지나서 유령의 집에 돌아오자, 마틴은 좀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 이 즐거운 지구 생활도 앞으로 1주일밖에 안 남았구나." 조지는 마틴이 다음 초승달 때 일요일 밤이면 지구와 이별하게 된다고 한 얘기를 생각해 냈다. "그렇구나. 그런데 타고 갈 기계는 어떻게 되었니?" 조지는 유령의 집 안 어느 곳에, 일인용의 반투명 우주선이라도 숨겨 두고 있지 않나 생각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마틴은, "다음 일요일 오후 8시에 나를 데려 갈 우주 비행 접시가 오기로 되어 있어. 사실은 어젯밤에 연락이 왔었어." 하고, 대답했다. "그래? 아, 네가 가고 나면 쓸쓸해지겠는데…." 이렇게 중얼거린 조지는 언뜻 생각이 나서, "마틴, 그 후로 고양이 할멈 여기 왔었니?" 하고, 물었다. "아, 그 때 우리들이 뒤쫓아가서 돌담 저편으로 몰아넣은 일이 있었지. 그 때부터 두 번쯤 나타났더랬어. 그래도 내가 있는 걸 알고는 부랴부랴 도망쳐 버렸단다. 내가 이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귀여운 고양이들을 못 만나게 되어 버린 거야. 필시 나를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해." "그러니?" 조지 생각에는 어쩌면 고양이 할멈이 마틴이 여기 살고 있다는 걸 경찰에 밀고하지나 않았을까 의심치 들었다. 그러나 곧, '고양이 할멈은 마틴이 수배 인물인 줄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경찰이 여기로 찾아오게 되는 날에는 고양이 할멈 자신의 비밀까지도 드러나 버리게 될 것이니까 어리석은 밀고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좀더 엄중히 마틴에게 주의를 주어 놓았더라면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날 오후 4시쯤, 조지는 캐시와 같이 또 유령의 집으로 갔었다. 그러나 마틴은 집에 없었다. 캐시는 불안스레 사방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외출을 할 때는 메모라도 적어놓고 가면 될 텐데, 약삭빠르지 못한 애야." 마틴은 한 30분 후에 돌아왔다. 캐시가 불평을 하자 마틴은 대꾸했다 "글쎄,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는 지구인의 글자를 쓸 줄 모르는 걸 어떡해?" 이 말을 들은 캐시는, "그렇구나. 그럼 좋은 방법이 있다. 내가 집에 가서 가져올게." 하고, 나가더니 10분쯤 지나 돌아왔다. 캐시는 12가지색 크레용과 조그만 스케치북을 마틴 앞에 내놓았다. "마틴, 너희별에도 이런 것 있니?" "아냐, 처음 보는 거야, 이 빛깔 있는 막대기는 먹는 거냐?" "어머, 먹는 거냐고?" 캐시는 웃으며, 크레용으로 스케치북에 꽃과 나무를 그렸다. 마틴은 그야말로 두 눈을 별처럼 반짝이며 보고 있다가, "나는 이 때까지 그림이란 걸 한 번도 그려본 일이 없다. 캐시처럼 잘 그려질지는 모르지만 어디 나도 한 번 그려보자." 마틴은 크레용을 상자에서 모조리 꺼내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서투르기 짝이 없는 손놀림을 보고, 조지는 유령의 집에 있었던 그림은 마틴이 그린 것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았다. 마틴이 그린 것은 코끼리와 표범의 그림이었다. 마틴에게 있어서는, 그 동물원에서의 한 때가 가장 인상 깊었던 모양이었다. 조지는 마틴이 제 고향인 별의 풍경이라도 그려 주었으면 하고 기대했었지만 1시간이 지나도 동물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마틴, 다음 외출할 때는 네가 산보하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놓아줘." 하고, 조지가 말했다. 사실 이건 조지가 일부러 꾸민 계략이었다. 마틴 자신은 자기의 모습이 조지 같은 지구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 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마틴이 자화상을 그린다면 마틴의 진짜 모습을 아는 데 큰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보기 좋게 묵살되고 말았다. 다음 월요일, 드디어 두려워하고 있던 일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남아 있는 암호   월요일 날, 조지와 캐시는 하룻밤 사이에 마틴이 어떤 그림을 그려 놓았나 큰 기대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날도 마틴은 집에 없었다. "어제 그렇게까지 일러두었으니까 아마 편지가 아닌 그림 메모를 그려 놓고 나갔을 거야." 캐시는 이렇게 말하며 마틴의 방에 들어가다가, "앗!" 하고, 소리쳤다. 방 한가운데에 어제 선물로 준 크레용과 스케치북이 내동댕이쳐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스케치북은 펼쳐진 채였고 크레용은 상자에서 쏟아진 채였다. "마틴에게 무슨 일이……" 무거운 불안감에 휩싸인 조지는 스케치북을 집어들고 들여다보았다. 왼쪽 페이지에는 고양이 할멈 같아 보이는 여자와 레이스의 모자를 쓴 여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캐시도 그걸 들여다보고는, "조지, 이 레이스 모자를 쓴 여자, 누굴까?" 하고, 물었다. "캐시, 이 사람이 요전날 소동을 일으킨 주인공이란다. 이 봐, 원예용품점에서 마틴에게 110달러를 준 사람이야.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그린 그림치고는 특징을 잘 잡아 그렸는데……." 오른쪽 페이지에는 경관의 얼굴과 고삐와 안장을 한 말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무슨 뜻일까?" 캐시가 묻자, 조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캐시, 큰일났다. 이건 마틴의 그림 편지야. 암호로 그린 에스 오 에스(SOS)야!" "뭐? 이게 어째서?" "모르겠니? 우선 첫 페이지부터 차례차례 생각해 봐. 고양이 할멈, 이건 고양이 할멈이 오늘 여기 나타났다는 걸 알려 주고 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레이스 모자의 여자는?" "마틴은 레이스 모자의 여자와 고양이 할멈이 서로 관계가 있다는 걸 육감으로 안 모양이야. 아니 어쩌면, 고양이 할멈과 저 레이스 모자의 부인이 한사람이라고 의심했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비교해 보면, 두 여자는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지 않니?" "조지, 그건 너무나 대담한 상상이야." "그럼 그건 잠시 접어 두고, 다음은 이 안장을 얹은 말과 경찰관의 얼굴이다. 왜 마틴이 말의 그림을 그렸겠니? 동물원에는 말이라곤 없었고, 더구나 안장과 고삐를 가진 건 좀처럼 보기도 어려운 거 아니야. 그렇지만 지금도 말을 부리는 단체는 있어." 캐시도 앗! 하고 소리쳤다. "조지, 알겠어. 이건 시드니 시의 기마 경관이야. 기마 경관이 몇 사람 여기에 온 거야." "그렇지. 이제 순서대로 그 광경을 생각해 보자. 먼저 고양이 할멈이 여길 왔다. 그리고 마틴이 있는 걸 확인하고서는 비겁하게도 경찰에 밀고를 한 거야. 마틴의 걸음이 빠른 걸 알고 있는 경찰에서는 곧 기마 경관을 이 집으로 보냈어. 마틴은 초능력을 써서 피했으면 될 텐데 우리들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편지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붙들려 버린 게 틀림없어!" "가엾어라, 마틴!" 캐시는 슬픈 소리로 말했다. 조지는 황급히 , "캐시, 지금 말한 것은 우리들의 추리야. 그대로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는 거야. 하지만 마틴이 사라져 버린 것만은 확실해. 루크와 의논해서 행방을 찾아보자꾸나." 조지는 공중 전화로 루크에게 전화를 결었다. 루크는 얘기를 듣고 나서, "조지, 그 이상한 아이는 제 말로는 몇 살이라고 했냐?" "확실히 12살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경찰에 붙잡혀 가서도 12살이라고 하겠지.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에스 디(SD) 통신의 에번스씨에게 의논해 보겠어. 10분 후에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줘." 조지는 10분 후에 또 한 번 전화를 걸었다. 루크는, "조지, 에번스씨는 이러는구나. 만일 경찰이 그 마틴을 보호했을 경우에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청소년 복지 위원회에 넘기게 된대. 복지 위원회의 험상궂은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은 모두 마틴을 심문해서 부모님에게로 보내거나, 부모님을 호출하거나 둘 중의 한 가지 조처를 한대." "잠깐 기다려, 루크. 마틴의 부모님은 아마도 몇 천 광년(천문학에서 쓰이는 거리 단위)이나 떨어진 별에 있단 말야." "그래, 그러니까 마틴은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는, 보호 센터로 보내지게 되는 게 아닐까 말이야." "루크, 마틴은 제 나라에서 가지고 온 비스킷밖엔 없지 않아? 보호 센터의 식사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아. 어디 있는지 그 장소를 알아 내 가지고 그 애 먹을 걸 차입해 주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될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건 정말 야단났는데. 에번스 씨 얘기는, 이 시드니에는 소년 보호 센터가 2군데 있대. 중심 지구의 센터에는 내가 가 볼게. 조지 너는 교외의 세인트 클리에 쪽을 찾아가 봐." "좋아, 그러겠어." "에번스 씨 말로는, 아마도 그쪽에 수용되는 건 오늘 밥8시 지나서일 거라고 했어. 지금 가 봐도 헛일일 테니 내일 오후 방과후에 가기로 해." "그래, 그렇게 하자." 화요일 오후까지의 20시간은 조지에게는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조지는 마틴과의 약속을 지켜 어머니에게는 교외의 친구들을 찾아간다고 하고 집을 나왔다. 만일을 염려해서 다시 한번 마틴의 집에 가 보았지만 마틴은 역시 없었다. 스토브 안을 찾아보니, 비스킷이 10개 든 조그만 봉지가 있었다. "마틴의 10일치 식량이다. 좋아, 이걸 선물로 가지고 가야지!" 조지는 그걸 포켓에 넣고 울무울에서 교외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조지의 초조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천천히 달렸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갑자기 나무들이 많아졌다. 목조와 벽돌로 된 옛날의 낡은 집도 눈에 많이 띄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주위의 풍경과 잘 어울려 보였다. 조지는 '세인트 클리어'라고 써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그리고 지나가는 중년 부인에게, "이 근처에 소년 보호 센터라는 게 있습니까?" 하고, 물어 봤다. 그리자 그 부인은 수상쩍어 하는 눈으로 조지를 살피면서, "너도 거기 들어가는 길이니?" 하고, 물었다. 조지는 세차게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 조금 일이 있어서 가는 길이에요." "그래? 그럼 다행이다. 거기엔 부랑아들이랑 히피도 제대로 못 된 아이들이 많이 있으니까 말이다." 조지는 그 부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가슴속으로 외쳤다. '부랑아도 아닌 마틴이 만일 그런 곳에 갇혀 있다면, 난 경찰서에서 제일 높은 사람을 찾아가서 한바탕 야단을 쳐 줄 테다.' 그 부인이 가르쳐 준 센터는 언뜻 봐서는 학교와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 집의 대지는 1만 평방미터 가량 되어 보였다. 대문에 '세인트 클리어 소년 보호소'라 새긴 놋쇠 간판이 걸려 있었다. 정문 앞을 지나치며 슬쩍 안을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체육관 같은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100평방미터 가량의 넓은 장소에 주택이 10채쯤 줄지어 서 있었다. 보기에는 학교와 비슷했지만, 다른 점은 집터 주위가 높이 3미터 가량의 철판으로 엄중하게 둘러쳐져 있는 것이 수용되어 있는 아이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임에 틀림없었다. 조지는 정문 옆에 있는 사무실에 가서, "여기 저희 동무 마틴 스미스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려다가, 그러면 마틴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어 물을 것 같아 그만 두기로 했다. "마틴 스미스는 사실은 우주에서 온 소년입니다." 하고, 아무리 설령을 해도 완고한 수위는 믿어 주지를 않을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조지마저 보호를 받게 될 우려조차 있었다. 그래서, 조지는 철판 벽을 따라 뒤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마침 안성맞춤으로 철판 벽 한가운데 직경 5센티 가량의 구멍이 뚫려 있었으므로 거기다 눈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아까 본 그 조그만 집의 뒤쪽이 환히 보였다. 회색 셔츠를 입은 소년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오라, 회색 셔츠가 이곳의 제복이구나. 소년들은 저 작은 집에 여남은 명씩 수용되어 있는 거다." 조지는 가까운 집으로부터 일제히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 오는 걸 알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아하! 여기서는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매일 오후 4시엔 전원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 우리 마틴은 어떡하고 있을까?' 그러자 가까운 집 뒷문에서 한 소년이 도망치듯 뛰어 나왔다. 소년은 누군가를 피하는 듯 옆에 있는 느릅나무 뒤에 숨었다. '옳아, 저 애도 샤워를 싫어하는 모양이지. 나하고 똑같이.' 쓴웃음을 띤 조지는 갑자기 숨을 죽였다. 그 소년의 뒷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기억이 났던 것이다. "앗! 마틴이다. 저게 바로 마틴이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마틴이 그 초록색 셔츠가 아닌, 다른 소년들과 같은, 여기서 입는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지는 가슴속에 불같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복지 위원회의 아저씨들, 내가 선물로 준 고급 초록 셔츠를 벗기고 저 따위를 입혀 놨어? 재판소에 고소를 해서라도 초록 셔츠를 꼭 찾아내고야 말 테니 어디 두고 봐!' 조지의 노여움은 셔츠를 찾아 내지 않으면 다음 달치 용돈이 줄어들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셔츠 같은 것보다도 마틴에 대한 일이 더 급했다. 조지는 철판 구멍에 입을 대고, "마틴, 마틴!" 하고, 작은 소리로, 그러나 야무지게 불렀다. 마틴은 곧 알아듣고 사방을 들러보았다. 조지는 재빨리 철판 구멍에 손가락 셋을 밀어 넣고 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마틴이 쑤욱 달려왔다. 마틴이 가까이 오자, 구멍에서 보는 좁은 시야는 회색 셔츠로 가득 차 버렸다. 마틴은 구멍 저편에서 내다보고 눈알을 굴리며 반갑게 소리쳤다. "역시 조지로구나. 잘 와 줬다.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찾아 왔니?" "네가 그려 놓은 그림을 보고, 또 루크가 얘기해 준 덕택이야. 너 그 그림처럼 기마 경관에게 붙들려 왔지?" "응." 마틴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얼굴빛도 좋지 않았다. 조지는 언뜻 생각이 나서, "마틴, 너 배고프지? 여기 식사는 어때?" "분량도 많고 여러 가지 음식이야, 그렇지만 내 입에는 맞질 않아." "그래?" 조지는 스토브 안에서 꺼내 온 비스킷을 철판 구멍으로 들이밀어 마틴에게 주었다. "이거 정말 고맙다. 조지 너 참 눈치 빠르구나." 마틴은 곧 맛있는 듯이 이틀 분인 2개나 먹어치웠다. 그리자 곧 안색이 좋아진 것 같았다. 조지는, "마틴, 너도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게 싫지?" "그야 말할 것도 없지. 내가 있던 집만큼 좋지가 않아." "그럼 왜 도망치지 않았니? 너는 부랑아도 아니고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는데 말야. 더구나 너는 지구인도 아니니까 지구 사람들의 법을 따라야 할 필요도 없는 거야." 그러나 마틴은 세게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설령 이 지구의 주민이 아니라 해도 지구에 온 이상 지구의 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게다가 나는 우리별을 대표해서 이 지구에 온 거야. 만일 내가 탈주를 한다면 우리별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 되는 거야. 그래서 절대로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가령 내가 사형을 당하게 된다 해도……." 조지는 기가 막혔다. "마틴, 옛날에는 너 같은 행동이 영웅적이라고 칭찬 받았어. 그렇지만 지금은 완고한 사람이란 말을 들을 뿐이야." 마틴은 점점 얼굴빛이 붉어지더니, "뭐라고 해도 좋아. 나는 절대로 여기서 견디어 낼 테니까.' "그래, 맘대로 해." 조지는 탈주를 권하는 건 단념하기로 하고, "마틴, 넌 경찰에서 네가 지구인이 아니고 다른 행성에서 온 소년이란 걸 명백히 말했니?" 하고, 물었다. "응, 경찰관 말고, 재판관 같아 보이는 위엄 있는 사람이 있길래 말해 버렸어.' "재판관 같이 뵈는 사람? 아, 알겠다. 소년 보호사일거야. 그러니까 그분이 뭐라고 하던?" "내 얼굴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어. 아마도 나를 정신이 이상해 진 아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렇다면 네가 잘 하는 뛰어오르기라도 해서 천장까지 올랐다 내렸다 해 보였음 좋았을 걸 그랬구나." "물론 몇 번이나 해 보였지. 하마터면 천장에 있는 샹델리아까지 깨뜨릴 뻔했어." "…………." "몇 번이나 되풀이했기 때문에 나도 좀 피곤해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노라니까 그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지 않겠어? '이건 훌륭한 곡예사로군. 이애는 아마도 서커스나 마술단에서 맹훈련을 받은 게 틀림없어.' 그러고는 기어이 이곳으로 보내 버리더라구." 마틴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줄지어 있는 작은 집들이 일제히 댕그랑댕그랑 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마틴이 황급히 조지에게 말했다. "조지, 저건 집합하라는 종이다. 곧 가봐야겠어." "알겠다. 어서 가 봐." 마틴은 달려가려다가 곧 뒤돌아 섰다. 그리고는 철판 구멍에 입을 대고 빠르게 말했다. "조지, 너한테서 빌린 초록 셔츠 말야. 이곳에 있는 여자한테 뺏겼어. 하지만 꼭 도로 찾을 테다." 마틴은 말을 끝내자 나는 듯이 집 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구멍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조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셔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건데, 저 녀석이 성실한데는 정말 놀랐어." 그리고 내일은 2년만에 처음으로 학교를 결석하더라도 다시 문안을 오리라 생각했다.     저 소년을 잡아라!   수요일. 물론 조지는 마지막 시간까지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부엌 식당 탁자 위에 있는 신문을 펼쳐, 마틴에 대한 기사가 나 있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우선 마틴이 살던 집으로 가 보았다. 뜰에는 몇 십 마리나 되는 고양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서 고양이 할멈이 먹이를 주고 있었다. 고양이 할멈은 조지를 보자, "얘, 너 여기 살고 있는 이상한 사내아이와 친구냐?" 하고, 물었다. "네에. 그래요." "그 애가 그저께 저녁부터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다뇨?" 조지는 무척 아주머니가 경찰에 밀고하지 않았어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혹시 그렇지 않았으면 더욱 난처하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자 고양이 할멈은, "그 애도 적당한 때 이 집을 잘 나갔어. 이 집도 이젠 곧 철거된다니까 말야. 나와 이 집의 고양이들과의 교제도 인제 곧 끝장이란다." 고양이 할멈은 속상하다는 듯 고기들을 휙휙 내둘러 던졌다. 조지는 고양이 할멈과 얘기하고 있다가는 시간만 허비된다 싶어, 캐시를 부르러 가기로 했다. 그러나 대문간에서 갈색 보자기를 들고 부리나케 들어오는 캐시와 마주쳤다. 캐시는 조지의 얼굴을 보자 대뜸 말했다. "저어, 지금 막 루크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아, 뭐라고?" "루크는 에스 디 통신의 에번스씨하고 의논을 했는데, 에번스씨는 만일 마틴의 비밀을 지키고 싶다면, 보호센터에 넣어두는 건 위험하니 마틴에게 탈주를 권하는 것이 좋겠다는 거야." "그래?" 조지는 손톱을 씹었다. 사실 조지는 어제 보호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공중 전화로 루크에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세인트 클리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조지는 언뜻 이런 생각이 났다. '마틴은 잠을 잘 때엔 자연히 몸에서 푸른빛을 낸다. 만일 같은 방의 소년들이 그걸 알게 되면 큰 소동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어젯밤에는 무사히 지냈는지 모르겠군. 옆에 앉아 있는 캐시에게 그런 얘기를 하자 캐시도, "그래. 그리고 혹시 누가 마틴의 몸을 조금이라도 밀거나 하면……." 걱정거리는 계속해 생기고 있었다. 그런 걱정 속에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조지와 캐시는 자연히 걸음을 빨리 하고 있었다. 조지들이 서둘러 걸어가고 있을 때 뒤에는 긴급 자동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앗! 구급차 아냐?" 뒤돌아 본 조지는 사다리 소방차였으므로 놀랐다. 사다리 소방차는 무서운 속력으로 두 아이 곁을 지나갔다. 조지는 가는 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연기 나는 곳도 없는데 대체 어디서 불이 났을까?" 소방차는 끼익 하고 바퀴를 삐걱거리며 좌회전을 하더니 그냥 보호 센터의 넓은 구내로 들어갔다. "소방차가 왜 보호 센터로 갈까?" 소방차를 따라 보호 센터를 바라다보던 조지가 놀란 소리를 냈다. "야? 저것 봐라." 보호 센터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3층 건물의 집회실, 그 집회실에서 공중 높이 서 있는 기를 다는 긴 장대 꼭대기에 한 소년이, 마치 의자에 걸터앉은 듯이 오뚝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캐시도 그걸 쳐다보고는, "조지, 야단났어. 저건 마틴이야." "그래, 그런데 어떻게 저런 곳에 올라갔을까?" "아마도 같은 방에 있는 아이들이 훼방을 놓은 모양이야. 조지, 어떻게 해야 하지? 만일 손을 놓기라도 하는 날엔 저렇게 높은 데서 떨어져 단박 죽게 될 거야." 조지가 달음박질해 갔다. 보호 센터의 철문은 열려 있었다. 구경꾼들이 꾸역꾸역 들어가고 있었다. 구내로 들어가니 더욱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틴이 걸터앉아 있는 깃대는, 담쟁이가 엉키어 있는 콘크리트 건물인 집회실의 2층 발코니에서 솟아 있는 것이었다. 10미터 높이는 족히 될 것 같았고,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센터의 소장인 듯한 50세 가량의 남자가 메가폰을 가지고 나와서 깃대 위에 있는 마틴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어어이, 마틴 스미스, 언제까지 거기서 버티고 있을 테냐. 곧 내려와라. 내려오면 난폭한 짓을 한 죄는 용서해 주겠다." 캐시는 조지의 손을 꼭 잡고, "마틴이 난폭한 짓을 했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요전번처럼 무슨 오해를 받은 걸 거야." 조지는 옆에 서 있는 30세 가량의 구경꾼에게 시치미를 떼고 물어 보았다. "왜 저 애는 저런 데로 올라갔을까요?" "나도 잘 모르겠다만, 저 애는 새로 들어온 아이인 모양이야. 그것도 의사조차 없는 두메산골에서 온 아이인 모양이구나." "두메에서요?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오늘 아침에 보호 센터의 의사가 진찰을 하려고 청진기를 꺼내자 소년은 단박 사람 살리라고 소리 치면서 청진기를 빼앗아 갖고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는구나. 그러고는 의사를 밀어내 버리고 방에서 뛰쳐나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조지는 마틴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틴은 아마도 청진기를 본 적이 없었던 거야. 검은 뱀 같아 보이는 것이 쑤욱 나오니까 누구나 처음 보는 사람은 놀랄만하지.' 조지가 마틴과 친구인 줄 모르는 그 사람은 신이 나서 얘기를 계속했다. "저 애 때문에 센터 안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이 법석이 났지. 그런데 그 애의 모습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밖으로 도망칠 거라 생각하고 경찰에 연락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건조실에 나타났다는구나." "건조실에요?" "그렇지. 거기서 발견되어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고는 여러 사람에게 쫓겨 드디어는 숨을 곳이 없어지니 저 높은 깃대로 슬슬 기어올라 갔다는구나. 마술단에 있었던 아이라 아주 몸 가볍게 잘 올라간 모양이야." 그 사람은 구경거리를 재미있어 하는 듯이, 깃대 위에 마틴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지에게는 그런 한가로움이 화가 나 못 견딜 지경이었다. 캐시는 떨리는 소리로, "조지, 저대로 있다가는 우주 비행접시가 마틴을 데리러 오기도 전에 마틴은 굶어 죽게 돼. 내가 불러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보호 센터 소장이 또 메가폰을 가지고 소리쳤다. "어어이, 마틴. 앞으로 1분만 더 기다리겠다. 네가 스스로 내려오지 않으면 소방수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널 잡아올 수밖에 없다. 알겠나?" 그러나 마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깃대 끝에 걸터앉은 채로 무언지 곰곰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조지는 마틴에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누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1분이 지나갔다. 소장이 소방대 대장과 의논을 했다.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깃대 아래에 구조 그물이 쳐졌다. 소방자동차의 쇠사다리가 슬슬 길어져서 그 끝이 깃대 꼭대기 가까이까지 올라갔다. 소방수가 굵은 밧줄을 메고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마틴은 그쪽에 엉덩이를 둔 채 돌아다보려 하지도 않는다. 소방수가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오를 때마다 조지의 심장은 고동이 높아져 갔다. '마틴은 휙 뒤돌아보고 소방수를 밀어 떨구려 하지 않을까. 만일 그런 짓이라도 하는 날에는…….' 드디어 소방수는 마틴에게 손이 닿을 만한 곳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내려다 줄께. 우선 이 밧줄 끝을 네 허리에 둘러매고, 그리고 이쪽으로 손을 내밀어." "……." 그래도 마틴은 들은 체하지 않았다. 소방수는 화가 나서 손을 쑥 내 밀었다. 그런데 이 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마틴의 몸뚱이가 사진 찍을 때의 플래시 전구처럼 청백색으로 확 빛난 것이다. 그리고 마틴의 모습은 순식간에 공중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술이냐, 최면술이냐   손에 땀을 쥐며 보고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멍하니, 아무 것도 없는 깃대 꼭대기만 쳐다보고 있다가 뒤늦게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했다. "이건 고등 마술이다." "우리가 모두 최면술에 걸려 있었던 거야." "이건 범죄일지도 모르겠군. 우리들의 주의를 깃대 위에 집중시켜 놀고 한편에서 끔찍한 범행을 한 놈이 있었을 것 같아." 마틴의 초능력을 알고 있는 조지에게조차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최면술이라고 하면 그런 것도 같고, 고등 마술이라고 하면 또 그렇게도 생각이 들었다. 만일 고등 마술이라면 마틴은 그 청백색 광선으로 구경꾼들의 눈을 어지럽게 해 놓고, 깃대를 스르르 타고 내려 도망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마틴은 곧 바로 유령의 집으로 돌아갈 텐데." 이렇게 생각하자 조지는 캐시를 재촉하여 돌아가려 했다.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대학 교수 같아 보이는 신사와, 학생 같은 청년의 주고받는 얘기가 귀에 들려왔다. "교수님,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교수님은 지금 깃대 꼭대기에 오뚝하니 앉아 있던 소년을, 이곳 의사 선생 말대로 과대망상광(자기를 엉뚱하게 위대한 사람이라고 믿기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수라고 불린 신사는 낮은 목소리로 또렷이 부정했다. "하워드 군, 사실은 나는 아까 이 보호 센터의 의무실 옆방에서 그 소년을 넌지시 관찰하고 있었네. 나는 30년 동안의 정신의학 연구의 경험과 명예를 걸고서 명백히 말하네. 그 소년은 과대망상광은 커녕 엄청난 능력과 지능지수의 소유자일세. 나는 그 소년이 과연 어디서 왔는지 대단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네." "교수님, 교수님은 그 소년이, 그 초능력을 써서 저 높다란 깃대 꼭대기에서 땅 위로 뛰어내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러나 아마도 그 소년은 그런 모험은 하지 않았을 걸세. 청백색 섬광으로 우리들의 눈을 어둡게 해 놓고, 그 순간에 집회실 3층의 지붕으로 내려와서, 지붕의 창에서 3층 안으로 숨어 들어가 구경꾼들 틈에 끼여 슬그머니 달아난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교수님, 그렇다면 그 사실을 한시 바삐 보호 센터의 사무원에게 알려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냐. 이젠 이미 늦었어. 소란을 크게 할뿐이지." "그래도……."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하워드에게 교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워드 군, 조급해 할 것 없네. 사실 나는 4차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그 소년을 다시 한 번 만날 가망이 있다네. "네, 어디서요?" 이 때 교수라는 신사는 조지가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걸 비로소 눈치채고 깜짝 놀라며 황급히 다음 얘기를 삼켜 버렸다. 신사는 이내 기다리고 있는 초록색 고급 승용차에 올라타고 시내 쪽으로 가 버렸다. 조지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캐시, 지금 그 교수도 마틴은 섬광(번쩍 빛남)으로 구경군의 눈을 어둡게 해 놓고, 집회실 지붕에 뛰어내렸을지 모른다고 했지?" "그래. 빗물 홈통을 타고 미끄러져 내린 것이 아니냐고 한 네 의견과 좀 비슷한데." "그렇지. 하지만 이 두 가지 설은 어느 쪽도 맞지 않았을 것 같아. 제 아무리 눈부신 광선으로 남의 눈을 어둡게 했다 하더라도 수십 명의 눈을 오래도록 속일 수는 없지 않겠어?" 조지는 집회실 건물을 다시 한번 노려보았다. "캐시, 역시 내 생각은 맞지 않았어. 빗물 홈통을 따라 내려오면 아무래도 남의 눈에 띠었을 거야." "그렇겠어." 캐시도 맞장구를 쳤다. 이 때 조지는 엉뚱한 말을 했다. "빗물 홈통 바깥쪽을 따라 내려오면 발견될지도 모르지만 만일 빗물처럼 홈통 속을 내려온다면 아무도 모를 거야." 캐시는 픽 웃으며, 말했다. "조지, 너 정신 있니7" "그야 정신없이 한 말이 아냐. 캐시 너는 마틴이 초능력의 소유자라는 걸 잊고 있어. 그 애는 필요하다면 제 몸을 조그만 반딧불로 변하게 할 수도 있어. 반딧벌레의 작은 불이 되어 저 빗물 홈통을 한달음에 미끄러져 내려온다. 그리고는 하수도에라도 숨어 버리면 절대로 발견되지는 않아." 캐시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조지, 멋지다! 굉장한 추리야. 그래 지금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니?" 보호 센터 안은 아직도 사람들이 있었다. 선생의 명령을 받은 것이리라. 보호 센터에 수용돼 있는 소년들은 테이블 밑과 광 같은, 아무튼 사람이 숨을 수 있을 만한 곳이면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구경꾼들도 2, 30명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뜰의 여기 저기 구석진 곳을 뒤지고 있었다. "캐시, 우리도 저 사람들 틈에 끼여 찾아보자." 조지는 용기를 내어 건물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우선 깃대에 가장 가까운 빗물 홈통을 조사했다. 홈통을 통해 내려오는 물은 배수구에 흘러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조지는 배수구에 얼굴을 갖다대고 소리를 죽여 가며, "마틴, 마틴, 어디 숨어 있니?" 하고, 불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없어 낙담하고 있는데 캐시가 말했다. "마틴은 여간 깨끗한 걸 좋아하지 않았어. 이런 곳에 숨어 있을 리가 없어요." "그럼 어디 있을 것 같니?" 조지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사나와졌다. 그러자 캐시는 건물에 붙어 있는 쇠로 된 가스 미터 박스를 가리키며, "조지, 마틴은 유령의 집에 있을 때 이것 비슷한 모양의 스토브 안에 숨어 있지 않았어? 어쩌면 이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조지는 손뼉을 탁 쳤다. "캐시, 좋은 생각을 했다. 어디 들여다 봐." 캐시가 가스 미터 박스의 열쇠 구멍에 눈을 바싹 갖다 대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등뒤로 돌려 빠르게 조지에게 신호를 보냈다. 조지가 캐시를 대신하여 들여다보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 희미하게 청백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마틴이다. 마틴은 푸른 불빛으로 변해 가지고 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조지는 사방을 둘러보고 난 뒤에 열쇠 구멍에 입을 대고, 기뻐서 소리쳤다 "마틴, 나야. 조지야. 지금 곁에 아무도 없으니 어서 나와." 그러자 이내 마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안 돼. 열이 식을 때까지 2, 3일 여기 숨어 있고 싶어. 또 그런 소동이 일어나면 정말 싫으니까." "네 기분은 잘 알겠다. 그렇지만 만일 가스 미터의 검침원(미터 바늘을 조사하는 사람)이 와서 미터가 희푸르게 빛나고 있는 겉 보는 날이면 반드시 서비스 차를 부를 거야. 그렇게 되면 또 야단법석이 나고 말 거 아니야?" "알겠어. 그럼 탈출을 해 볼까. 하지만 예사 때의 몸뚱이로선 안 돼. 내 몸이 들어갈 만한 무슨 조그만 깡통 같은 게 없겠니?" "깡통으로 어떡하려고?" "푸른 불빛 그대로 그 속에 숨는 거지." "여긴 깡통이 없는데." 조지가 사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캐시가 손에 들고 있던 갈색 두 겹 종이 봉지를 내밀었다. "조지, 여기 오기 전에 마틴의 집에 가 봤었어. 그러니까 이층 한 구석에 마틴의 비스킷이 5, 6개 남아 있길래 이 봉지에 넣어 가지고 왔었어. 이 봉지 속에 들어갈 순 없을까?" 조지가 그걸 마틴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마틴이 , "깡통이 없으면 봉지라도 좋아. 되도록 주둥이를 크게 벌려 놔 줘. 자, 들어간다. 하나, 둘, 셋……." 희푸른 빛이 가스 미터 박스의 열쇠 구멍에서 뛰어나와 순식간에 캐시가 들고 있는 갈색 봉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캐시는 급히 봉지 주둥이를 막았다. 이미 사방은 저녁 어둠이 서리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봉지 전체가 형광등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이 때, 조지는 왈칵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캐시의 손을 잡고 "자, 어서 밖으로!" 하고, 재촉했다. 두 아이는 마치 범죄 현장에서 도망치는 범인처럼 숨을 할딱이며 보호 센터의 구내에서 빠져 나왔다. 재수 좋게 시내행 버스가 이내 왔다. 캐시는 마틴이 들어 있는 종이 봉지를 남에게 들키지 않도록 버스 창과 제 몸 사이에 놓았다. 그러자 종이 봉지가 부스럭거렸다. 조지는 금방 알아채고 주의를 주었다. "캐시, 파랑 벌레가 숨이 막히겠다. 봉지에 숨구멍을 조금만 뚫어 줘." "그렇겠구나." 캐시는 곱슬머리를 묶은 머리핀으로 종이 봉지를 찔러 구멍을 내 주었다. 그러자 1분도 채 안 가서 마틴은 조용해졌다. 30분 가량 걸려 집에서 가까운 울무울에 도착했다. 조지 일행은 공원의 사람 기척이 없는 숲 속에 들어가서 종이 봉지를 열었다. 희푸른 빛이 뛰어나오더니 확 빛나는 순간 사람으로 변했다. "고맙다. 너희들 덕택으로 살았다." 마틴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조지와 캐시는 마치 굉장한 마술을 구경한 것처럼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마틴은 회색 셔츠 밑에 손을 넣더니 차곡차곡 개진 베 같은 것을 꺼내어 조지에게 주었다. "마틴, 이건 내가 네게 빌려 준 셔츠 아냐?" "그래. 찾아 가지고 온다고 약속했잖아." "그래서 년 건조실에 뛰어들어갔구나. 그런 어려운 짓은 안 해도 좋았는데……." 그러면서도 조지는 몹시 반가웠다. 왜냐 하면 셔츠 값을 어머니에게 내면 용돈은 거의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틴은 캐시로부터 조금 전까지 제가 들어가 있던 비스킷 봉지를 받아들고, "그럼 내일 다시 만나자. 난 이틀 밤이나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고단하거든." 하며, 유령의 집을 향해 나는 듯이 걸어갔다. "앗, 잠깐 기다려." 조지가 뒤따라가서, 교수라고 하는 검은 옷의 신사가 아마도 마틴의 정체를 알아 낸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어쩌면 오늘밤에라도 빈집을 조사하러 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러자 마틴은, "아, 내가 보호 센터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을 때 옆방에서 살그머니 나를 살펴보고 있었던 사람이다. 걱정 마. 조심할게." 하고는, 정말 피곤한 듯한 걸음걸이로 숨어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지는 감탄한 듯이 중얼거렸다. "파란 불이 되기도 하고 봉지 속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이웃 방의 사정까지 알다니, 과연 마틴은 초능력의 주인공이야!" 그러나 캐시는 무심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만큼 나는 앞으로의 일이 무서워졌어. 만일 마틴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러 봐. 그 때는 마틴의 별나라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마틴을 데리러 오는 비행접시가 오는 일요일 밤까지는 앞으로 나흘, 아무튼 이런 대로 무사히 지냈으면 좋겠지만……." 두 아이의 모습을 공원에서 그 때 그 노인이 유심히 보고 있었건만, 조지나 캐시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빛나는 침대 속에서   다음 날 토요일 오후 3시, 조지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마틴의 집으로 달려갔다. 마틴은 이층 방에서 조지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틴, 검은 양복의 교수가 오지 않았었니?" "왔었어. 오후 1시 좀 지나서, 경관 한 사람과 조수인 듯한 사람을 데리고 녹색 차를 타고 왔었어. 나는 네가 일러준 대로 곧 푸른 광선이 되어 환기통속에 숨어 있었어." "그거 잘 했다. 그래 그 사람들은 이 방에까지 올라 왔었니?" "그래.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들어와서 구석구석 돌아보며 찾고 있었어. 아주 끈질기게 말야." "그랬어?" "경관이 먼저 단념을 하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에게 '박사님, 그 소년은 여기 돌아오지 않았군요. 다른 빈집을 찾아 숨은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어. 그래도 검은 양복은 "여기 있는 것 같은데……." 하며 버티더라. 조금 전에야 겨우 떠났는데 들키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하고 있었단다." 얘기를 들은 조지는, 마틴에게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한시 바삐 딴 곳으로 옮겨가지 않으면 또 다시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마틴에게 남아 있는 비스킷을 모두 갖게 하고 같이 방을 나왔다. 캐시를 불러내어 의논을 하니 캐시도, "그렇구나. 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 더구나 나는 여기 자주 오기도 어렵게 됐어. 아빠와 엄마가 오늘밤에 여행에서 돌아오시니까 말야." 둘은 궁리를 하였지만 어디로 옮겨야 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루크 디에게 전화를 걸어 봤다. 루크 디는 긴장해 가지고, "어디 의논을 해 보자. 어디서 만날까? 그렇군, 울무울에 그린 컵이라는 커피집이 있지?" "아, 커피잔의 모양을 딴 네온사인이 현관 밖에 걸려 있는 그 커피집 말이지?" 조지는 캐시와 마틴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공원 앞을 지날 때, 전날 마틴이 도와 드린 노인이 언제나처럼 쓸쓸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조지 일행을 보고는 얼굴을 들어 눈으로 인사를 했다. 조지들도 '안녕하셔요'하고 인사를 했다. 30 걸음쯤 가다가 캐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지금 그 할아버지 눈에서 푸른빛이 나지 않았니?" "아냐. 보통 눈이었어. 캐시 네 기분 때문일 거야." 조지는 상대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린 컵이라는 커피집에 닿은 조지는 방 안쪽 칸막이 자리에 앉아서 루크 디를 기다렸다. 루크 디는 10 분쯤 지나서 들어왔다.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일요일 오후까지 마틴을 어디에 숨겨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 의논했다. 그러나 좋은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가 탄 조지가 루크 디에게, "에스 디 통신의 에번스씨한테 의논해 보면 어떻겠니? 그 사람, 요전번 사고 때도 경관을 놀려주기까지 했으니까 필시 좋은 의견을 내주리라 믿어." 그러나 루크 디는 머리를 저으며, "그건 안 돼." 하고, 냉담하게 대답했다 "왜? 어째서?" "어제 내가 그의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더라. 그래 하는 수없이 에스 디 통신사로 걸어 보니까, 에번스라는 사람은 없다지 않아?" "이상하구나." 캐시는 마틴을 돌아다보고 바짝 긴장했다. 어쩌면 저렇게도 태평일까! 모두가 마틴의 일로 궁리하기에 골몰해 있는데 자기는 꾸벅꾸벅 졸고 있지 않는가. 그뿐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서 마틴의 몸뚱이는 희푸르게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마틴, 자지 마!" 캐시가 흔들어 깨웠다. 마틴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내가 숨을 집은 정해졌어?" 하고, 큰 소리로 물었다. "쉬잇, 가만가만 얘기 해." 조지가 화난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점원이 놀란 얼굴로 보고 있었다. 조지는 황급히 마틴의 손을 끌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시간은 벌써 6시를 지나 사방에 어둠이 서리기 시작하고 커다란 그린 컵의 네온이 빛나고 있었다. 이때 조지의 머리에 하나의 아이디어가 네온사인처럼 번쩍였다. "그렇다. 좋은 생각이 하나 났다. 마틴, 저 네온등 간판 속에 숨는 거야. 저 속에 라면 청백색으로 네 몸이 빛을 발해도 같은 불빛, 즉 보호색이니까 아무 염려도 없는 거야." "조지, 과연 멋진 아이디어다. 그런데 저 네온등, 가게가 문을 닫을 땐 꺼 버리지 않을까?" "아니야. 걱정 없어. 저기 봐. 철야 영업 연중 무휴라고 써 있지 않니. 즉 이 네온사인은 손님을 부르기 위해 밤새도록 켜 있을 거야." 조지는 마틴에게 다시 물었다. "어때, 마틴. 멋진 장소지?" "그래 그래." 마틴은 대답은 했지만 정말 맘에 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아무 데나 다 좋으니까." "그럼 이곳으로 정하자. 내일은 금요일이지만 우리 학교 창립 기념일이기 때문에 오전 10 시부터 시작이야. 7시 반에는 형편을 살피러 올 테니까 그때쯤 해서 저 네온사인에서 내려와 저기 있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어 줘." 마틴은 어지간히 졸리운 듯 희푸르게 빛을 내더니, 그냥 쑤욱 날아올라 커피잔 모양의 커다란 네온사인 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네온 빛이 밝기 때문에 밖에서는 마틴의 불빛은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다. 조지와 루크는 안심하고 돌아오려는데 캐시가 한 마디 했다. "저런 데서 자다가 마틴이 감전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터널 호텔   다음날은, 금요일. 조지는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늦게 들어오는 것은 걱정하고 화도 내며,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지만, 일찍 나가는 것은 그다지 관심 두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습성을 이용한 조지의 작전 승리였다. 약속한 7시 반보다 약간 일찍, 그린 컵 커피점에 도착한 조지는 깜짝 놀랐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마틴이 전날 본 교수와 무언지 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꽤 중요한 얘기인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진지한 얼굴이었다. 5분쯤 지나서 교수는 조지의 얼굴을 흘낏 보더니 급한 듯이 가 버렸다. 조지가 달려가서 물었다. "마틴, 뭘 했어?" "염려할 것 없어. 어젯밤에는 광선 침대 안에서 푹 잘 잤어. 좋은 장소를 구해 주어서 고마왔어."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 교수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니?" "뭐, 별로……." "마틴, 우리는 친한 친구야. 말해 줘." "응, 사실은 그 교수가 어제부터 우리들의 뒤를 쫓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내가 네온사인 안에 숨는 것을 보고 밤새도록 이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아. 나는 아침에 네온사인에서 내려와 가지고 이 버스 정류장에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7시가 지나자, 어디선가 그 신사가 저 앞길에 나타나더니 내 곁으로 와서 내게 불쑥 한마디 질문을 했어." "뭐라고?" "'넌 행성에서 왔지?‘ 하고." "그래 넌 바른 대로 대답했니?" "아, 했지. 그러니까 그 사람이 또 물었어. 데리러 오는 비행접시는 언제 도착하느냐고. 그래서 나는 가르쳐 줬어. 오는 일요일 오후 8시라고.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냐. 그 여자가 한 말과 같군' 하고 중얼거리더니 그냥 가 버렸어." "마틴, 너는 정말 우리들의 마음을 몰라주는구나. 그 사람은 경찰과 정보를 주고받고 있는 거야. 지금쯤 필시 경찰 본부에 연락을 하고 있을 거란 말이야. 여기 있다가는 단박 붙잡힐 테니 아무튼 어디로든 피해 가자." 조지가 마틴의 팔을 잡고 다른 곳으로 가려할 때 캐시가 왔다. 캐시는 조지로부터 방금 있었던 얘기를 듣고, "아무 데나 한 곳에 있으면 발견되니까 교통 기관을 이용하는 게 어떻겠니?" "캐시, 교통 기관이라 하지만 그것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 버스, 기차, 택시……." "버스는 금방 종점에 닿아 버리니까 좋지 않아. 기차라면 먼 데까지 갈 수 있어. 택시는 비싸고……. 참 지하철은 어떻겠니? 거기라면 밖에 나오지만 않으면 오래오래 타고 있을 수 있으니까." "지하철! 그게 좋겠다. 마침 내게 회수권도 있고." 조지 일행은 곧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전차를 탔다. 마틴은 빠르고 시원하고 게다가 좌석이 많이 비어 있는 지하철이 제일 맘에 드는 것 같았다. 둘레둘레 차안을 돌아보기도 하고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기도 하며, 아주 분주하게 굴었다. 5분쯤 걸려 전차는 세인트 제임스 역에 도착했다. 그 때 조지의 머리에 또 좋은 생각이 번개처럼 번뜩였다. "캐시, 마틴, 여기서 내리자." 조지는 마틴의 손을 끌고 플랫폼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전차의 도어가 닫히고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캐시가 숨가쁜 소리로 "웬일이니? 차안에 경관이라도 타고 있어서 꽁무니를 뺀 거니?" "아냐. 그게 아니고, 아주 좋은 피신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조지는 선로 건너편 플랫폼의 통근객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걸 알자, 일부러 유유히 벤치에 걸터앉았다. 전차가 들어와서 통근객들을 싣고 가 버린 후엔 양쪽 폼 모두 다른 손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다음 전차가 올 때까지는 10분의 시간이 있다. "캐시, 너 3년 가량 전에 이 세인트 제임스 역에서 지선(갈려나간 철도선)이 벗어나 있었던 것 생각나니?" "알고 있어. 식물원 행이었지." "그래. 그런데 고속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자 손님이 줄어들어 지하철국에서는 그 지선을 폐지해 버렸어. 지금은 선로도 뜯어내고 길고 긴 광이 되어 있을 거야. 사람도 좀체 들어가지 않는 곳이지." "알았다. 조지. 넌 터널 속에 마틴을 숨겨 두려는 거지?" "그래. 좋은 생각이지?" 조지는 캐시와 마틴을 데리고 폼의 끝으로 달려갔다. 그러니까 갈아탈 때 쓰던 통로가 있었다. 벽의 하얀 타일 위에 '식물원 행 폼'이란 안내 표지가 표를 덧불인 채 남아 있었다. 더욱이 통로 한 가운데에는 목척까지 세워져 있었다. 조지 일행은 목척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자 휑한 플랫폼이 나왔다. 3년 전까지는 거기 전차가 와서 많은 손님을 토해 놓기도 하고 들이마시기도 한 데건만 이제는 텅 빈 자리가 되어 침침한 등불이 켜 있을 뿐이었다. 선로였던 곳에는 레일도 침목도 없고 배수구의 물만 조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저 안쪽에는 어두운 터널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창고로 쓰이고 있다는 얘기였지만, 부서진 연결기와 고물이 된 탄차가 뒹굴어져 있을 뿐이었다. "마틴, 미안하지만 이 터널 호텔 속에서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밤만 견디어 보지 않겠니? 물론 매일 우리가 찾아와 줄 테니까." 조지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마틴에게 지하철 회수권을 주고는 연민(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의 정을 느끼면서 세인트 제임스 역으로 돌아왔다. 그 날, 조지는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마틴을 찾아가지 못한다. 이번 2주일 가량을 마틴과 사귀느라고 학교 숙제가 산더미 같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으므로 조지의 학교도, 애덤스씨의 회사도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애덤스씨네 아침 식사는 다른 날과 달리 8시에 시작되어 30분이나 걸렸다. 식사를 마치자 애덤스씨는 신문을 펴 보다가 갑자기 "이거 대단한 뉴스로군!" 하고, 그 나이답지 않게 큰 소리로 말했다. 비밀을 가지고 있는 조지는 깜짝 놀라며, "아버지, 세인트 클리어 소년 보호 센터에 나타난 우주인에 대한 거예요?" 하고, 물었다. 아버지 애덤스씨는 눈을 깜박이며, "뭐랬니, 지금? 우주인이 나타났다고 했냐?" 조지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 "아뇨, 그런 말이 아네요." 이 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에이프런에 손을 닦으며 들어 와서 말했다. "조지, 너 요새 좀 이상하구나. 어제도 네 책상 위를 치우다 보니 없어졌던 초록색 셔츠가 있었어. 그건 분명히 바닷가에서 도둑맞았다고 하지 않았니?" 조지는 움쭉달싹할 수 없는 위기에 부닥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때 애덤스씨가 무의식적으로 구원을 해주었다. 애덤스씨는 신문을 두 손으로 펴들고, "시드니 항구 밖 바다에서 긴급 대합동 연습이라, 이건 좀 수상한데.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군." 어머니는 이번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여보, 내가 아이들과 얘기할 때는 방해하지 말아 줘요." "그런가, 이거 잘못했구려. 그렇지만 이건 중대한 사건이야. 당신도 조금쯤은 국제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리라 믿는데……." "그래야 하나요?" 듣고 있던 조지는 '됐다!' 하고 마음을 놓았다. 아마도 형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논쟁 쪽으로 발전 할 것처럼 보였다. 애덤스씨는 신문의 한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걸 보오. 어찌 세기의 대사건이 아닌가7" 애덤스 부인이 소리내어 기사를 읽었다. "국제 안전 위원회는 지난 밤, 긴급 이사회를 열고 시드니 항구 밖 바다에서 각국 해공군(해군과 공군)에 의한 임시 대연습을 행하기로 결정했다. 참가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인도 등 아세안의 여러 나라,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예(알짜로 골라 뽑아서 날쌔고 용맹한 부대)이다. 그 일부는 이미 시드니 남쪽 바다로 급거 출동중이며 다음 일요일에는 줄잡아 50척의 군함과 1천대의 신예(새롭게 출현해서 기세나 힘이 빼어남) 비행기가 정해진 지점에 도착할 예정이다." 어머니는 남편 애덤스씨에게 신문을 돌려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연습이죠.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잖아요." "여보, 이런 뉴스는 활자로 나와 있지 않은 곳에 진상이 감춰져 있는 거요. 평소에 발걸음이 맞지 않던 여러 나라가 갑자기 모인다는 건, 긴급 이사회가 중대하고 위험한 뉴스를 얻었기 때문인거요." "이를테면 어떤……." "말하자면 우리 오스트레일리아에 유사 이래(역사가 생긴 그 뒤)의 위험한 일이 닥쳐와 있는 걸거요." "알겠어요. 어떤 나라가 이 시드니를 공격해 오는 건가 보죠. 대체 어떤 나라일까요?" 어머니의 손이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애덤스씨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금 이 지구상에는 남의 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고 해도 좋겠지." "그럼 다른 행성으로부터의 공격인가요?" "그렇소.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소?" 그러자 어머니는 한숨 놓으면서 말했다. "그런 예상이랄까 상상이랄까 하는 것은 대개 안 맞기 일쑤예요. 난 안심했어요." 조지를 캐어묻는 것도 잊어버리고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 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걱정에 조지의 가슴은 점점 크게 뛸 뿐이었다. '아버지 말씀 대로다. 아마도 그 교수가 국제연합의 안전 위원회에 일요일 밤 8시 마틴의 별에서 비행접시가 시드니로 온다고 보고를 한 것이리라. 그래서 안전 위원회는 국제연합에 긴급 출동을 명령한 것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건 정말 큰일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마틴을 데리러 오는 비행접시는 국제연합의 손에 격추되어 버릴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마틴의 행성은 지구를 응징(잘못을 깨우쳐 뉘우치도록 징계함)하려고 비행접시 함대를 파견해서 쳐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다. 마틴의 말에 의하면 그의 행성의 과학은 지구보다 적어도 몇 천 년은 진보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과학력으로 본격적인 공격을 해 온다면 지구는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 버린다. 당장 마틴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엉덩이가 들썩들썩 좀이 쑤신 조지는 아침밥을 먹기가 바쁘게, "저, 잘 아는 과학자한테 가서 행성으로부터 공격이 있을 수 있는지 어떤지 알아보고 오겠어요." 하고는, 총알같이 집을 뛰쳐나왔다. 세인트 제임스 역에 도착한 조지는 캄캄한 터널을 향해 작은 소리로, "마틴! 마틴!" 하고, 불렀다. 이윽고 마틴이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조지는 마틴이 피곤해 보이므로,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하고, 물었다. "아니, 별일 없었어. 아참, 이걸 돌려주어야지." 마틴은 단 한 장 남은 지하철 회수권을 조지 앞에 내밀었다. 조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마틴, 넌 이 차표를 쓰면서 시드니 시내를 돌아 다녔니?" "그랬지. 네 회수권을 많이 써서 미안하다." "그거야 좋지만 위험한 일을 당하진 않았니?" "아니, 정말 즐거웠어." "그건 어제 낮이겠구나. 그래 어디 어딜 가 봤어?" "숲과 못이 있는 공원이 차창에서 내다보이기에 내렸지." "알겠다. 하이드 파크다. 거기선 또 어디로 갔었니?" "다음은 높이 10미터나 뿜어 올리는 분수가 있길래 한참 구경을 했지 누런색 피부의 사나이가 내 사진을 정면에서 몇 장이나 찍었단다." "아치형의 둥근 분수였겠군. 누런 색 피부라면 아마 아시아 사람일 거야. 그 사람이 비밀 첩보부원, 다시 말하면 스파이 같아 보이진 않았니?" "아니야. 그 사람은 단순한 여행자였어." "그래? 정말 스파이라면 사진도 살짝 찍을 테니까, 그러니까 수상한 사람은 안 만난 셈이구나." "아, 수상한 사람 대신 옛적 친구를 만났어." "옛적 친구?" "그래. 내가 전차를 타고 있으니까 그 사나이가 올라와서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았어." "누구야. 공원에서 자주 본 그 노인?" "아냐. 그 검은 상자를 가슴에 달고 파출소에서 내가 위험했을 때 구해 준 사람 말야." "뭐? 그 사람에게 들켰구나. 그래 무슨 얘기라도 했었니?" "응, 언제까지 지구에 있을 거냐고 묻기에 바른 대로 대답해 줬어." "마틴, 너 같은 사람을 이 지구에서는 너무 고지식한 바보라고 해. 알겠니? 내 말을 잘 들어 줘. 그 사람은 에스 디(SD) 통신의 조사원이라고 하고 다니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아무튼 그 자는 검은 양복의 교수 이상으로 정체불명의 사나이야. 네 비밀을 전문적으로 캐고 있는 국제 안전 위원회의 비밀 공작원인지도 모른다." 조지가 이렇게 말하자 마틴은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그 사람이 말이야? 이건 재미있는 얘기구나. 하지만 그건 오해야. 조지, 안심해. 그 사람은 그런 큰 인물이 아니야. 너한테만 살짝 털어놓으마……." 그러나 조지는 마틴의 얘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소리쳤다. "마틴, 좌우간 지금 굉장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어. 내일 일요일 밤, 너의 비행접시가 너를 데리러 지구에 나타나면, 지구의 해군과 공군은 전력을 다해 비행접시를 쏘아 떨어뜨리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조지가 이렇게 말하자 그 대단한 마틴도 안색이 싹 달라졌다. "뭐라고? 나를 데리러 오는 비행접시를?" 그리고는 좀 떨리는 소리로, "그래, 지구의 군대는 어떤 병기로 우리 비행접시를 공격하는 거니?" "글쎄, 우선 제트기가 로켓탄으로 전쟁을 시작하겠지. 다음에 군함이 곡사포. 아, 그리고 만일 미국의 신예군함이 오면 살인 레이저 광선으로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뭐,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마틴." 마틴은 그제야 후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지금 네가 말한 것 같은 병기는 우리별에서는 고대 박물관에서밖에 볼 수 없어. 우리들 행성의 비행접시는 레이저 광선을 받아도, 로켓탄을 맞아도 꼼짝도 안 하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또 그 공격을 손쉽게 피하는 장치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적의 병기를 거꾸로 이용해서 공격자를 전멸시킬 수도 있다." 이번에는 조지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마틴, 부탁이다. 대지급으로 너를 데리러 오는 비행접시에 연락을 해줘. 그래서 어떨 일이 있더라도 지구 군대와 싸우지 않도록 네가 엄중히 주의를 시켜다오."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지금은 전파 상태가 나빠서 안 되겠지만 오늘밤에 꼭 터널 안에서 연락할 테니 안심해. 그건 그렇고, 내가 지구에 있는 것도 앞으로 하루 반밖에 안 남았구나. 오늘은 어디로 데리고 가 주겠어?" 태평스런 마틴의 태도와 명랑한 목소리에 조지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날 하루, 조지는 마틴에게 시드니 시내의 박물관과 오페라 하우스, 미술관 등을 안내해 주었다. 어디에서나 마틴은 대단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 조지도 안내해 준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미술관에 있는 프랑스의 유명한 대가의 작품 앞에서, "흥, 이건 근사한데. 하지만 나라도 앞으로 석 달만 공부하면 이런 것쯤은 그릴 수 있어." 하고 말했을 때는 누가 알아챘을까 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다행히 경관에게 눈치 채이지 않고 오후 6시경 세인트 제임스 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 안녕!" 마틴은 조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어두컴컴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조지는 저런 곳에서 자야만 하는 마틴이 가엾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만약 오늘밤을 우리 집에서 재워 준다면 마틴은 얼마나 좋아할까?' 이런 생각을 하니 뒤쫓아가서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이 불 일 듯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양친에게 모조리 얘기를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조지의 아버지 애덤스씨는 비교적 완고한 분이었다. 조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마틴이 우주인이란 걸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마틴에게 바로 그 수직 뜀뛰기를 시켜 보이면 단번에 알아 줄 테지만, 그 때는 크게 놀라서 경찰에 연락할 것이 뻔했다. '역시 안 되겠어.' 조지는 발길을 돌려 세인트 제임스 역의 플랫폼을 향해 걸어갔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조지, 과학자는 행성으로부터의 내습(습격해 옴)에 대해서 뭐라고 하니?" 하고, 물었다. 조지는 잠시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아침의 일이 생각났다. "과학자는 이렇게 말하던데요. 몇 천 광년이나 되는 먼 행성에서 이 지구까지 날아온다면, 그들이 가진 과학의 힘은 지구와 비교해서 몇 천년 앞서 있다는 걸 알 수 있다고요." "흠, 우리는 아직 화성에도 못 갔으니까 말이지. 그 말이 옳아." "그 과학자는 이런 얘기도 했어요. 그런 방문객은 만일 지구의 군대가 대항해 싸운다 해도 가볍게 피하며, 상대를 하지도 않을 거라고요. 마치 큰 어른이 아기가 달라붙어도 웃고만 있듯이 말예요." 조지가 생각해 낸 얘기가 아니고 행성인인 마틴의 얘기를 바탕으로 해서 한 말이라 훌륭한 대답이 되었다. 과연 애덤스씨는 감탄하여, "그 과학자의 머리는 대단한 거다. 대체 어디 살고 있는 사람이니?" 하고, 물었다. "저어 터널…… 아니, 그게 아니고, 세인트 제임스 역 근처에요." "그러냐, 언제 한 번 아버지에게도 소개시켜 주지 않겠니?" "네, 될 수 있으면요." 조지는 이것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므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위험한 일요일   행성에서 온 소년 마틴이 지구를 떠나는 일요일 아침은 제트기의 폭음과 함께 밝았다. 애덤스씨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며, "연습치고는 엄청나기도 하고, 역시 강력한 외적이 쳐들어오는 것인가. 오늘은 위험한 일요일이 될지도 모르겠군." 하며,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어머니도 조지도 무관심하니까, "그럼 교외로 드라이브나 갈까?" 하고, 말했다. 조지는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나 걱정이 되었다. 그 때 마침 캐시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 조지니? 오늘은 기어코 최후의 날이지?" "그래." "루크와 데이비드도 불러서 같이 어디 안 가겠니?" "글세, 잠깐 기다려 줘." 조지는 어머니에게 의논을 했다. 어머니는 교외 드라이브는 생각이 없었던 듯, 간단히 허락을 해 주었다. 조지는 캐시에게 세인트 제임스 역으로 오라고 하고는 이달치 남은 용돈을 가지고 현관을 나섰다. 그러자 어머니가 부엌과 복도 사이의 칸막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조지, 오늘은 바다로 가선 안 돼." "왜요?" "오늘부터 시드니 항구 밖 바다에서 대연습을 하게 되어 많은 군함이 들어와, 어느 거나 민간 선박보다는 빠른 스피드로 바다를 달릴 테니까 민간 선박과의 사이에 니어미스(이상 접근)가 생길지도 모르는 거야. 배 같은 것 타선 안 돼." "네 , 알았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조지는 어머니의 세심한 염려에 놀랐다. 확실히 오늘은 시드니 항구 밖 바다에 위험이 가득 찰 것이다. 더구나 위험을 크게 폭발시킬 핵(사물이나 현상의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마틴과 동행이다. 조지는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아무쪼록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떨며 지하철역을 향하여 갔다. 세인트 제임스 역 플랫폼 끝 쪽에서 캐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캐시, 용케 잘 나왔구나." 조지가 말하자 캐시는, "엄마 아빠가 돌아오셨기 때문에 나오기가 어려웠지만, 뭐라 해도 오늘이 마지막 날인걸……." 캐시의 목소리에도 마틴을 무사히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둘은 나란히, 폐지된 터널로 들어가서 작은 소리로 마틴을 불렀다. 마틴은 비스킷을 씹으면서 나왔다. "여어, 조지, 캐시, 갈 잤니? 지금 막 식사를 하던 중이야. 잃어버리고 떨어뜨리고 해서 준비해 온 비스킷은 꼭 1개가 남았을 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밤 비행접시로 돌아가지 않으면 굶어죽게 되는 거야." 그러면서 마틴은 밝은 얼굴로, "그런데 오늘은 어디로 데려가 줄거니?" 하고, 물었다. "마지막 날이니까 네가 가보고 싶은 곳으로 안내해줄게." "그래? 그럼 요전에 갔던 동물원에 같이 가 줘." "또 코끼리랑 표범들이 으르렁대는 꼴을 보고 싶니?" "그놈들은 으르렁거리는 게 아니야. 사실은 나를 환영해 주는 거란다." 뛰어난 텔레파시(정신 감응)의 소유자인 마틴에게도 자기가 동물들의 눈에는 수상한 놈으로 보인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기도 어렵고, 마틴이 굳이 바라는 것이라 조지도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요전번처럼 울무울의 부두에서 연락선을 타고 동물원을 향해 갔다. 어머니가 말해 준 대로 끊임없이 해군 함정이 바다를 오가고 있었다. 조지는 어머니의 주의를 듣지 않고 바다로 나온 것이 양심에 걸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마틴은 연락 보트 갑판 난간에 기대서서 사방의 경치를 바라보고 있다가 본토(여기서는 시드니를 말함)와 매단 다리로 이어져 있는 반도(세 면은 바다에 싸이고 한 면은 육지에 잇달린 땅)가 보이자, "조지, 저건 뭐냐?" 하고, 물었다. "아, 저건 반도인데도 가든 섬이라고 부른다." "그래? 저게 가든 섬이라? 알았다." "왜 그런 건 묻니?" "응, 오늘 아침 일찍, 나를 데리러 오고 있는 비행접시로부터 연락이 왔었어. 오후 8시 예정대로 가든 섬과 본토를 잇는 매단 다리 가까운 바다에 착수(물에 내림) 한다고." "마틴, 그런. 중요한 일을 어째 이제껏 물어보지도 않고 있었지? 보아서 알겠지만 이 근방에는 해군 함정이 우글우글 하지 않니? 그 가운데 착수한다면, 놈들은 먹이를 발견한 범고래 같이, 일제히 달려들 거야." "아무리 모여들어도 염려 없다. 우리별의 비행접시는 그 속을 휙휙 빠져나가 버릴 테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너는 어떻게 오늘밤에 가든 섬 근처 바다에 갈 작정이냐?" "그렇구나. 보트로 갈까. 조지, 네가 데려다 주지 않겠니?" "그야 널 위해서니까 가 주겠다만, 만일 보트에서 비행접시로 옮아 타려고 할 때 군함이 덤벼들면 우리들까지 바닷 속 고기밥이 되어 버릴 텐데." 그러자 마틴은 자신 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의 안전은 내가 보장한다. 안심해라." 조지는 마틴의 별의 과학력을 믿기로 하고 그 얘기는 그걸로 끝마쳤다. 동물원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리고 맹수들은 요전번과 다름없이 마틴을 보고는 적대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12시가 됐을 때, 조지와 캐시는 동물원 안에 있는 식당에서 샌드위치와 주스로 가벼운 식사를 했다. 아침에 하루치의 영양을 보급한 마틴은 언제나처럼 남이 먹는 걸 보고만 있었다. '마틴의 별의 사람들은 먹는 즐거움이란 걸 모르는 것이다. 서글픈 일이다.' 특히 먹보인 조지는 그들이 불쌍히 생각되었다. 오후 2시, 조지 일행 동물원을 출발하여 울무울로 향했다. 페리의 큰 부두에 도착했을 때, 조지가 마틴에게 말했다. "인제 너무 어정어정 돌아다니지 말고 공원 나무 밑 벤치에서 쉬기로 하자." 그러자 마틴은 크게 하품을 하고 나서 물었다. "조지, 가든 섬에는 보트로 몇 분쯤 걸릴까?" "저긴 보이는 보트 부두에서 20분쯤으로 생각하면 넉넉할 거야." "그래? 그럼 보트 부두에는 7시 반에 오면 되겠구나." 조지는 깜짝 놀라 물었다. "마틴, 그 새 어디 갈 데라도 있니?" "응, 아침부터 활동을 했기 때문에 좀 피곤해. 요전의 그 집 스토브 안에서 잠시 낮잠을 잘까 해서. 게다가……." 그리고 좀 말하기 어려운 듯이, "사실은 나, 거기에 귀중한 물건을 두고 온 걸 생각 해 냈단다." "그 집 근처에는 스파이와 경찰관이 득시글거릴 텐데. 어디 나하고 같이 가보자." 그러나 이 때 캐시가 조지를 눈짓으로 말렸다. 조지는 위험하다고 느꼈지만 마지못해 단념을 했다. 마틴은 그야말로 연실이 끊어진 연처럼 줄달음쳐 달려가 버렸다. 보고 있던 조지는 루크 디와 데이비드,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전화를 걸어 마틴이 드디어 오늘 밤 7시 반에 울무울의 보트 부두에서 행성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렸다. 루크의 데이비드, 엘리자베스는 모두 한결같이 배웅을 하러 나오겠다고 했다. 캐시와 헤어진 조지는 전세 보트 가게에 가서 두 사람이 젓는 대형 보트를 7시에서 9시까지 빌리기로 예약을 했다. 그런데 그 때 조지는, 한 사나이가 보트 표를 파는 곳 뒤쪽에서 조지의 거동을 살피고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네 사람의 괴인의 정체   오후 6시 반, 집에서 일찍 저녁을 먹은 조지는 공원에서 보트 부두를 향해 걷고 있었다. 이미 해는 졌지만 바다에서 하고 있는 합동 연습의 서치라이트(탐조등) 불빛으로 바다와 항구가 대낮같이 밝았다. 이 때 문을 닫은 선물용품 가게 그늘 쪽에서 캐시가 뛰어나와 조지의 손을 잡고는 가게의 그늘진 곳으로 끌어들였다. 캐시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조지, 야단났어." "왜? 무슨 일이 났니?" "저걸 좀 봐." 캐시는 부두 끝 쪽을 가리켰다. 바라다 본 조지는 저도 모르게 앗! 하고 소리쳤다. 그곳에 네 사람의 그림자가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서치라이트의 불빛에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환히 보였다. 고양이 할멈과 레이스의 모자를 쓴 몽태치기 여자, 통신사의 조사원 그리고 공원에서 늘 앉아 쉬고 있던 노인이었다. 루크는 조지 귀에 입을 갖다대고 "내가 6시 반에 여기 오니까, 저 사람들은 벌써 저기 와 있었어." "루크, 저 네 사람은 모두 마틴에게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고양이 할멈과 레이스 모자의 여자는 마틴에게 폐를 끼쳤고, 에스 디 통신의 조사원은 한 번 위험한 데서 마틴을 구해 주었어. 노인은 언제나 공원에서 마틴을 감시하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지금 이 중요한 시간에 여기 나타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옆에서 캐시도 말참견을 했다. "그 사람들, 틀림없이 스파이야. 아니 어쩌면 우주인 마틴을 잡아 볼모로 해 가지고 몸값을 뜯어내려는 악한의 끄나풀일 거야." "캐시, 마틴이 여기 돌아올 때까지 아직 40분의 시간이 남아 있다. 우리들의 힘으로 저 사람들로부터 마틴을 지키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우선 우리 세 남자가 저 자들을 심문해 볼께. 만일 큰 싸움이 되거든, 저 공중 전화로 경찰에 연락을 해 줘." "알았어. 조심해서 해." "염려 말어." 조지와 루크, 데이비드의 세 사내아이는 수상한 네 사람에게로 가까이 갔다. "여어!" 조사원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고양이 할멈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하얀 레이스의 모자를 쓴 여자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노인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자세를 고쳤다. 조지는 캐묻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 거기서 뭘 하고 있어요?" "우리말이냐? 마틴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조지는 태연히 말했다. "마틴은 오늘 밤 8시에 데리러 오는 비행접시를 타고 그 애의 행성으로 돌아간단 말예요, 시간이 없으니까 제발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자 고양이 할멈이 입을 열었다. "방해를 놀 까닭이 있니? 우리도 같은 비행접시로 고향 별로 돌아가는 길인데……." 조지는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고향 별로 가신다고요? 그럼 당신들도 마틴과 같은 우주인이란 말씀입니까?" "아아, 그렇고 말고!" 조지는 깜짝 놀라면서도 눈앞의 안개가 개어져 가는 걸 느꼈다. 이 기묘한 네 사람이 모두 우주인이라면, 번번이 일어났던 수수께끼 같은 행동들은 모두 마음에 집히는 것들이었다. 고양이 할멈의 이상하리만큼 극진한 고양이에 대한 애정, 갑자기 마틴에게 돈을 준 레이스 모자의 여자, 더구나 파출소에서 묘한 이론을 들고 나와 마틴의 위기를 모면케 해 준 조사원, 하루 종일 공원에서 멍하니 쉬고만 있던 노인. 그들의 행동은 모두가 지구인의 상식으로서는 생각 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그렇지만……." 조지는 새로운 의문이 생겨 조사원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같은 별에서 왔다면서 어찌 서로 처음 보았을 때 알아보지 못했지요?" 노인이 나서서 대답해 주었다. "우리들은 약 3년 동안, 한 사람씩 따로따로 이 지구에 왔단다. 이 지구에 오자마자 우리들은 자동적으로 지구인의 모습으로 변신되도록 조정되어 있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끼리도 처음 만났을 때는 같은 별의 주민인 걸 알지 못한 거야. 그러니까 지구인인 줄만 아는 거지. 그러나 2번 3번 만나는 가운데 무언지 모르게 알게 되는 거야. 그리고 우리들 다섯 사람은 서로가 같은 행성인이란 걸 알았지만, 특별히 친해질 시간이 없었어. 그리고 우리 별 나라 여행사 사정으로 오늘밤 같은 비행선을 타고 고향별로 돌아가게 된 것이란다." "아아! 그랬었습니까?" 조지는 네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금도 우주인다운 데는 발견할 수 없었다. 루크도 같은 기분이었던지, 조사원을 보고 말했다. "에번스 씨, 그럼 아직도 지구에는 당신들 외에 당신 같은 행성인이 지구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가요?" "아마 한 10명쯤 있으리라 생각해. 하지만 한 번 만나보는 정도로서는 알아보지 못하지." 조지는 그 검은 옷 입은 교수의 빈틈없는 눈초리를 생각했다. "그럼 검은 양복의 교수라는 사람도 당신과 같은 별의 사람인가요?" 그러자 네 사람은 일제히 머리를 저었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은 틀림없는 지구인이야. 그러나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빨리 우리들의 정체를 알아냈어. 방심할 수 없는 사나이야." 그러자 고양이 할멈이 걱정스런 태도로 말했다. "그래요. 그 사람, 10일 전에도 나를 붙들고 여러 가지 얘기를 물었어요. 그리고, 아까 내가 고양이들한테 이별을 하려고 마틴이 숨어살던 집에 갔더니 그 사람이 어슬렁거리고 있던걸요. 어쩌면 마틴과 얘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난 좀 걱정이 되는데……." 이 말을 듣자 조지는 루크 디의 팔을 붙들고 말했다. "루크, 마틴이 위태롭게 됐어. 지금 당장 구하러 가자." "그래, 알았다." 루크도 찬성했다. 캐시에게 말하니 저도 같이 가겠다고 졸랐다. 그래서 조지는 데이비드와 엘리자베스에게 보트 준비를 해 놓도록 부탁을 하고, 캐시와 루크를 데리고 마틴이 숨어살던 집으로 달려갔다. 그 집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이층에는 모처럼 이라기보다 처음으로 등불이 켜져 있었다. "교수가 왔나보다." 조지는, 루크와 캐시를 아래에서 기다리게 하고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다 무너져 가는 베란다의 층계를 올라갔다. 문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의자엔 앉아 있는 교수의 등이 보였다. 그의 앞에는 역시 마틴이 앉아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조용히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중이었다. "교수님, 몇 번이나 말씀 드리지만, 지구인의 상상력은 약하고, 신경 조직도 거칠어서 당신들은 우리들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에요." "그러길래 아까부터 몇 번이나 청하는 게 아닙니까?" 교수는 12살 짜리 소년에게 마치 윗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정중한 말씨로 얘기했다. "적어도 앞으로 한 달 동안이나마 이 지구에 머물러 있어 줄 수 없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식량이 없어요. 저의 비스킷은 단 1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일치에요." "1개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걸 영양 연구소에서 분석하면 그 성분을 알 수 있으니까 그와 같은 걸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미스 씨, 만일 당신에게 지구인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지구인이 먹는 걸 먹어야 합니다. 현재 당신과 같은 행성의 사람이 고양이 할멈도 날고기까지도 먹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음식을 먹는 데서만이 비로소 우정이 싹트고, 단절(끊음)이 메워지는 것 아닐까요?" 그러자 마틴은 불쾌한 표정을 얼굴에 띠고, "교수님, 먹는 음식의 기호란 건 사람마다 다릅니다. 제가 지구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나무라는 건 당신의 잘못입니다. 더구나……." 마틴은 눈동자를 빛내며 계속했다. "같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서로의 참모습을 볼 수 없어도, 마음과 마음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조지 애덤스, 캐시 브린불, 루크 디, 데이비드 게이트,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다섯 사람은 모두 진심으로 저를 환영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저를 보호했고, 저의 비밀을 지켜주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친절과 우정을 일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듣고 있던 조지는 가슴속이 찡 하니 뜨거워 왔다. 마틴은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조지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 저는 이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틴이 휙 뒤돌아 서더니 선반 위에 있는 종이 봉지를 내려 옆에 끼고 나섰다. 그러자 교수가 어조를 달리하며 급히 말했다. "그럼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기의 오른쪽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마틴 스미스여, 내 눈을 잘 보라. 절대로 한눈 팔지 말고." 마틴이 무심코 교수를 노려봤다. 10초, 20초, 무엇에 끌리는 듯 마틴이 교수에게로 다가간다. 눈이 희미해져 있었다. 조지는 이 때 비로소 교수의 계략을 눈치챘다. '큰일났다. 교수는 최면술을 써서 마틴을 포로로 만들어 연구를 하려는 것이다!' 조지의 결단은 빨랐다. 허리를 굽히고 와락 달려가 교수를 뒤에서 쾅 들이받았다. "으악!" 교수는 벽에까지 밀려가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와 함께 최면술이 깨져 마틴은 언뜻 정신을 차렸다. "마틴, 큰일났어. 빨리 서들지 않으면 비행접시를 놓치겠어." "응!" 조지는 마틴의 손을 끌고 베란다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베란다로 통하는 층계는 너무나 오래 된 것이라 조심조심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교수도 뒤쫓아 베란다 위에 나타났다. "기다려!" 교수는 소리치며 층계를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교수는 마틴들보다 훨씬 몸이 무거웠다. 더구나 조심스레 밟지도 않았기 때문에 베란다는 우지끈 뚝딱……,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으아악!" 교수는 땅에 떨어져 심하게 허리를 다쳤다, "이때다 빨리 빨리!" 새 아이들은 쏜살같이 보트 부두를 향해 달렸다. 이미 시간은 7시 40분이 되어 있었다. 데이비드는 보트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사람의 우주인 어른들은 벌써 보트에 앉아 있었다. 보트의 정원 관계상, 가든 섬까지 배웅을 갈 수 있는 건 보트를 저을 조지와 데이비드 두 사람만이었다. 마틴은, "그럼……." 하며 캐시, 루크, 엘리자베스, 세 아이들 손을 차례차례 잡았다. 캐시는 잘 가라는 인사말을 하려다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루크는 마틴의 옆구리에 끼고 있는 종이 봉지를 보고, "그건 뭐냐?" 고, 물었다. "아, 이거 말이냐?" 마틴은 캐시한테서 받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나 우리 고향에 돌아가서도 매일 그림 공부를 할 작정이다." 마틴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캐시는 울던 얼굴에 빙긋 웃음을 띠었다. 마틴은 보트에 올라탔다. 체중이 가벼웠으므로 배가 흔들리지도 않았다. 조지와 데이비드는 가든 섬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저었다. 시드니 만의 안팎은 구축함, 프리깃함(경무장을 한 소형 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치라이트는 하늘을 빙빙 돌고 있는 제트기의 모습을 은빛 날개처럼 비쳐 주고 있었다. 조지와 데이비드는 아무 말 없이 배만 저었다. 이윽고 앞쪽에 가든 섬의 검고 긴 그림자가 보였다. 본토와 이어져 있는 길다란 매단 다리의 일루미네이션(전등 장식)은 바닷물에 활 모양으로 굽어져 비치어 쉴 새 없이 깜박이고 있었다. 이 때 마틴이 불쑥 말했다. "됐다. 여기서 배를 멈춰 줘. 한 곳을 빙빙 돌면서 ……." 데이비드와 조지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무섭게 강한 압력이 느껴져왔다. 시꺼먼 그림자가 마귀같이 지나갔다. 마틴은 반가운 듯이, "우리 비행접시다!" 하고, 소리쳤다. "아니, 여기 내려앉는 거니? 파도가 일어 보트가 뒤집힐 틴데." 마틴이 싱긋 웃으며, "물에 내리진 않아. 바다 위 100미터와 공중에 정지해 가지고 우리들을 빨아올려 줄 거야." "빨아올리다니? 그러면 이 시드니만의 바닷물이 마구 빨려 올라가게 될 것 아냐?" 조지는 정말 걱정스레 말했다. 그러자 슈웃 하는 전기 소제기 같은 소리가 들리고 잔잔한 바람이 불더니, 주위가 어두컴컴해졌다. 쳐다보니 머리 위에 검은 그림자가 구름같이 뒤덮여 있었다. 마틴의 별에서 온 비행접시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고양이 할멈이, 레이스 모자의 여자가, 지구의 기록을 담은 레코드를 가슴에 드리운 조사원이, 노인이, 차례로 일어섰다. 그리고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한 사람 또 한사람 하늘로 올라가서 검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틴은 조지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이별의 인사를 했다. "조지, 정말 여러 가지로 고마왔다. 그리고 너에게 끝으로 한 마디 충고하고 싶은데……." "뭔데?" "너는 남의 일을 너무 돌보는 것 같아. 앞으로는 적당히 하도록 해." '핏? 실컷 남의 보살핌을 받고 나서…….' 조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가슴이 벅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틴은 손을 흔들며 검은 그림자를 향해 수직으로 떠올라 갔다. 3초 후, 살랑 바람과 함께 검은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사방이 훤히 밝아왔다. 서치라이트는 미친 듯 밤하늘을 이리저리 비추고 있었다. 조지와 데이비드는 흔들리는 보트 안에서 잠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모두가 꿈 같은 생각이 들었다. 5분 후 조지와 데이비드는 노를 저어 울무울로 향했다. 조지는 마틴에 대해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걸 아버지, 어머니에게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하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야단을 맞을 것이다. 용돈을 감액(액수를 줄임)당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할 수 없지. 나는 귀중한, 실로 귀중한 경험을 했는걸. 더구나 마틴과의 약속도 지켜 주었고…….' 조지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고는 힘차게 노를 저었다. 바로 그 시간에 시드니 만 상공을 돌고 있던 제트 전투기의 파일롯이 대연습 본부에 무전 송화기를 통해 보고를 하고 있었다. "정체 불명의 유성(별똥별) 같은 물체가 시드니 만에서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본 기(비행기)는 연료부족으로 추격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시드니 항구 밖 바다에는 다시 몇 갑절의 군함과 항공기가 모여들어 외계로부터의 적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작품 해설   물질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   "행성에서 온 소년"은 라이트슨의 대표 작품이다. 라이트슨 부인은 1920년 인구가 아주 적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앙부 벽지에서 태어났다. 중앙부는 면적이 넓지만, 좋은 땅은 목축지이고 대부분이 사막이었다. 때문에 학교가 있는 시가지는 수백 킬로나 떨어져 있어서 돈 많은 목축가는 자가용이나 비행기로 아이들을 통학시켜 교육하였다. 자가용이 없는 집 아이들이 매일 통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벽지에 사는 아이들을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문교부 당국은 통신 교육을 실시해 왔는데, 최근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러나 라이트슨 부인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시설도 없었다. 그러므로 라이트슨 부인은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씩 시가지에 나가 부쳐 온 많은 교재와 출판사에서 직접 부쳐온 책들을 받으러 우체국으로 나갔다. 이런 방법으로 책을 구하여 열심히 독서에 열중한 라이트슨 부인은 새로운 지식을 많이 쌓아 갔으며, 중학 과정을 수료할 무렵에는 장차 소설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시드니로 나가 고등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졸업하자 곧 라이트슨 씨와 결혼하여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니 매일 바빠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라 창작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1954년 어느 날 라이트슨 부인은 이러한 불만을 친구에게 쏟아 놓았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창작이라는 것은 바쁜 중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닐까? 예를 들면 발명왕 에디슨의 발명은 모두 잠자는 시간을 4시간으로 단축하고 빚쟁이에게 쫓기는 고통스런 생활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라이트슨 부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깨우쳐 곧 창작에 착수하였다. 남편과 자녀들도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었다. 그리하여 1956년 처음으로 소년 소녀 소설 "꼬부라진 뱀"을 발표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소년 소녀들에게 크게 인기를 얻었다. 또한 뉴 사우스 웨일즈 주의 아동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이에 자신을 갖게 된 라이트슨 부인은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1963년에는 "새털이 장식되어 있는 한 별"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미국 도서관 협회 우량 도서로 지정되었다. 라이트슨 부인의 작품은 대부분 오스트레일리아 동쪽 해안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대자연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으며, 사춘기를 맞이하는 15세 소녀의 미묘한 심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동시에 모성애적인 따뜻한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이러한 라이트슨 부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계속 소년 소설을 써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부인은 많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과 마찬가지로 개척 정신의 소유자였다. 부인은 지금까지 자기가 손대지 않은 분야인 SF 세계에 진출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부인에겐 과학적 지식과 스릴 등 많은 문제점이 따르고 있었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위태롭다고 충고하였으나, 라이트슨 부인은 뜻을 굽히지 않고 노력하여 마침내 마음먹은 대로 SF계에 뛰어드는 데 성공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자라난 만큼, "행성에서 온 소년"을 쓸 무렵의 시드니 시가의 개조는 라이트슨 부인에게 큰 문제였던 것 같다. 그 증거로 라이트슨 부인은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 조지에게 “오래된 탑이 있는 성까지 뜯어 없애지 않아도……." 라고 감상적인 말을 하게 하고 있다. 행성에서 온 소년 마틴을 통해서도 '우리 행성에도 건설로 말미암은 환경 오염으로 두통을 앓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은 다른 새롭고 아름다운 일을 찾고 있지도 않다'라고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현재를 살고 있는 지구인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무턱대고 생산성 향상과 풍부한 문화 생활을 꿈꾸어 온 많은 사람들은 초음속 비행기와 큰 공장과 고속도로를 완성하는 대신에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아 온 아름다운 환경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처신하였을까? 조금이라도 옛날 상태로 되돌아갈 노력은커녕 주말을 이용하는 별장과 집단 휴양소, 문화설비를 완비한 대형 시가를 따로 건설하여 오염 지대를 더욱더 확대해 가고 있다. 장래 이 지구 모든 곳이 오염되고 말았을 때 지구인은 별장지를 찾듯이 우주선이라도 타고 다른 행성에 이주하게 될 것이니, 행성의 주민을 무력을 써서 몰아내고 토지를 확보할 것이다. 이것이 대다수 지구인의 사고 방식이다. 지구인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우주인이 지구에 왔다고만 하면 곧 공격과 침략을 결부시키고 있다. 상대가 어떤 목적으로 지구에 왔을까를 과학적으로 재조사하기도 전에, 본격적인 요격 태세를 취하는 것은 지구의 파멸을 자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트슨 부인은 이러한 것을 우려하여 이 작품 속에서 여러 번 경고하고 있다. 라이트슨 부인은 이 책을 통하여 과학 평론가와 미래 학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지구인들은 이대로 환경 파멸을 계속해도 좋을까요?" "만약 우주인이 실제로 지구에 왔을 때 이 책의 내용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지구는 완전할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교수와 과학자는 대답하고 있다. "이대로 필경 오염과 건설을 계속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 지구인보다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우주인이 지구에 오는 일은 절대로 없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면 라이트슨 부인도 안심할 것이다.    
1086    동위원소인간 - 찰스 에릭 메인 Charles Eric Maine 지음 댓글:  조회:463  추천:0  2021-03-19
동위원소인간   찰스 에릭 메인 Charles Eric Maine 지음 등장 인물   델라니 : 주인공으로서 주간지 '뷰'의 민완 기자. 사건 사진 중 신원 불명인 한 장의 사진이 유명한 과학자와 닮은 걸 발견하고 조사한다. 그런데 그 뒤에 무서운 사건이 숨겨져 있었으니……. 데이 : 주간지 '뷰'의 사진 기자. 델라니와 함께 사건을 추적하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만만치 않은 여자. 레이너 : 원자 물리학자. 방사성 물질 전문가로서 프란드 연구소 교수. 이 사건의 열쇠를 쥔 중요 인물 구레아리 경부 : 이 사건의 음모를 미리 알아채고 있으면서, 델라니의 조사를 방해라고 생각한다. 프레스튼 박사 : 노잔 병원의 의사. 레이너 박사를 치료한다. 바스코 : 이 사건의 음모 주모자. 올리베 : 주간지 '뷰'의 편집장 메인랜드 : 원자력 연구소 소장 브레슬라 박사 : 전쟁 전까지는 유럽에서 제일 손꼽히는 정형외과 의사로 유명했었는데, 전쟁이 끝나자 행방을 감추었다. 마르크스 박사 : 노잔 병원의 정신과 의사 아레건 : 바스코 일당의 한 사람     사건 발생···················· 4 엉터리 기자··················· 9 레이너 박사··················· 15 한 번 죽었다?·················· 20 수수께끼의 회화················· 23 가짜 박사···················· 29 7초 반 빠르다.················· 36 자백제(자백시키는 약)············· 43 탈출······················ 47 역(반대)치료법················· 50 본 정신을 되찾다.················ 56 원자 폭발은 막을 수 없다.············ 64 타오르다.··················· 68 위기 일발···················· 71   사건 발생   내가 출판사 편집실에 들어갔을 때 기자 마크레는 편집장 책상 곁에서 현상한 사진을 보아가며 올리베 편집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보게 델라니, 늦었네. 곧 사진기자를 데리고 신축한 스테파나 병원의 개원식(병원이 개원하는 날 행하는 의식) 상황을 취재하고 오게." 편집장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항상 말하는 식으로 날카롭게 말했다. "병원의 개원식 에요? 그 따위 일은 누군가 딴 사람에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베 편집장은, "일하는 데 마음에 드는 일과 안 드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 잔소리 말고 빨리 갔다와!" 하고, 호령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나는 마크레와 서로 마주보았다. 마크레는 빙긋이 웃었다. 나는 그 동료가 부러웠다. 아마 뭔가 재미있는 사건이 있어서 밤늦게까지 뛰어다닌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캄캄한 빌딩 거리를 배경으로 경찰 순찰차가 서 있고, 정복 경찰관과 형사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진과, 고속도로에서 경기용 차와 세단 차가 형편없이 부서져 있는 무서운 교통 사고의 사진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 중의 한 장이 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예사로 보면 흔히 있는 사건 사진이었다. 물에 빠져 온 몸이 물투성이인 한 사나이가 들것에 태워져 있었다. 얼굴빛은 죽은 사람 같고 숨도 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나의 흥미를 끈 것은 그 사나이의 얼굴이 어디에서인가 만나 본 낯익은 얼굴인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사나이 몸 둘레가 희미하게 희게 빛나고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이다. 나는 마크레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게 누구야?" 마크레는 그 사진을 보고 어깨를 들썩하더니, "누군지 몰라. 대단치 않은 사람이겠지. 총에 맞고 강에 버려진 모양이야. 보통 강도가 아니면 부랑자들 사이의 싸움이겠지." "죽었는가?" "아니, 곧 죽을만한 중상인데 숨은 붙어 있어서 노잔 병원에 수용되어 생명은 건진 모양일세." "이 사진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을 현상할 때 광선이 들어갔겠지." 나는 그 사진을 한 번 더 주의 깊게 보았다. 아무래도 어디에서 만나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40살 정도의 사나이는 눈언저리가 쑥 들어가고 턱이 긴 특징 있는 얼굴이다. 나는 생각이 안 나서 초조하고 짜증이 났다."이 사진을 좀 빌리자." 내가 부탁을 하니 마크레는 이상히 여기며, "좋아. 이 사진은 쓸모 없는 것이니까." 내가 그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데 올리베 편집장이 되돌아와서 또 재촉했다. "여보게 델라니, 아직 가지 않았는가? 스테파나 병원의 기사와 사진은 해질 무렵까지 필요한 거네." "네, 알았습니다. 곧 출발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승강기를 타고 아래층의 자료실에 들어갔다. 자료실에는 많은 서류가 정리되어 있었다. 기사를 쓸 때 참고로 하기 위하여 가지각색의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유명한 인물, 유명한 장소, 유명한 사건, 그 외에도 어지간한 것은 모두 찾아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곳이다. 나는 방안에 꽉 차 있는 자료 정리 서고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진의 사나이를 여기서 조사할 생각인 것이다. 나는 과학 기자였기 때문에 내가 만나는 사람은 대개 과학자이다. 그러므로 그 사나이는 내가 이 수개월동안 어떤 용무로 만난 일이 있는 과학자일 것이다. 나는 서고 앞을 왔다갔다하며 그 사나이를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천문학자도 아니고, 생물학자, 전자공학자, 과학자, 모두 아니다. 나는 물리학자의 서류철이 있는 곳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렇다! 그 사나이는 반년쯤 전에 원자력 연구소 회의장에서 만난 것이 틀림없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한 원자 물리학자를 닮았다! 서류철을 꺼내어 나는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에는 그 인물의 사진과 경력과 주요 연구 제목이 실려 있다. 그 서류철을 반쯤 넘겼을 때 눈언저리가 쑥 들어가고 턱이 긴 40세쯤 되는 사나이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다!" 나는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 사진 밑의 기사를 읽었다.     나는 마크레에게서 가져온 사진을 꺼내어 서류철에 있는 사진과 대조하여 보았다. 그 사람이 틀림없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레이너 박사라면 지금 동위원소 K를 응용한 원자력 엔진 연료의 발명자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이다. 그러한 중요 인물이 등에 총을 맞고, 빈사 상태의 중상을 입고 강속에 내던져졌다. 더구나 아무도 모르게 병원 한 방에 수용되어 있다! 이것은 큰 사건이다. 특종 기사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료실을 나왔다.   엉터리 기자   "어디로 갈 거예요. 스테파나 병원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여자 사진 기자 데이가 말했다. "스테파나 병원에 가기 전에 레이너 박사 일을 조사하러 노잔 병원으로 가는 거다." "그러나 그 사나이가 레이너 박사가 아니라면 공연한 시간 낭비예요. 스테파나 병원 개원식의 기사를 해질 무렵까지 준비하지 못하면 편집장이 굉장히 화를 낼 거예요." "책임은 내가 진다. 하여튼 조사 해야겠으니 협력해 줘." 데이는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차가 노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잔 병원에 도착한 나는 데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접수처에 이름을 기재했다. "오늘 아침 일찍 운반된 환자의 방은 몇 호실입니까? 경찰이 강에서 구조한 사나이 말입니다." 접수계원은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구레아리 경부에게 허가를 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물어 봐 주십시오." "지금 수술실에 계시니 연락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접수계원이 전화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데이의 손을 잡고 재빨리 그 곳을 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수술실로 간다. 전화를 걸면 면회를 못할 것이 뻔하지." 주저하는 데이를 데리고 수술실 출입문까지 왔을 때 문이 안에서 열리면서 간호원이 침대를 밀고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레이너 박사가 틀림없어 보였다. 방안에는 간호원과 의사, 그리고 비옷을 입은 두 사나이가 있었다. 키가 크고 건장하게 생긴 사람이 구레아리 경부 같았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경부." 구레아리 경부는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쏘아봤다. "지금 그 사람은 오늘 아침 강에서 구조한 사람이지요? 그의 신원을 알았습니까?" "자네는 주간지 '뷰'의 델라니 기자인가? 나는 승낙도 없이 찾아오는 무례한 사람에겐 말을 않겠네." "아니요.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떤 정보인가?" "나는 그 사람의 신원을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엉터리 같은 소리하지 말게." "이것을 보십시오." 나는 호주머니에서 마크레에게 빌린 사진과 자료실에서 가지고 온 레이너의 사진을 꺼냈다. 경부는 양쪽 사진을 보고 뒤쪽에 씌어 있는 설명문을 읽었다. "스티븐 레이너……." 구레아리 경부는 소리 내어 읽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 사실을 딴 사람에게 얘기했는가?" "아니요. 특종 기사라고 생각되어 편집장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구레아리 경부는 부하 형사를 돌아보고, "본서에 들어가 레이너의 집과 프란드 연구소를 조사하라! 만약 레이너가 없으면 왜 행방불명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도 조사하라." 형사는 명령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다. "만약 자네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중대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레이너 박사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절대 틀림이 없습니다." "서둘지 말게. 곧 알게 되겠지." 구레아리 경부는 의사와 같이 방을 나갔다. 우리도 급히 뒤를 따랐다. 의사와 경부는 계단을 계속 내려갔다. 그 환자의 병실로 가는 모양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별관의 격리 병동으로 갔다. 그 곳에서 경부가 우리를 돌아보더니, "아직 자네에게는 환자를 면회시킬 수 없다. 돌아가 주게." "그러나 신원을 알았는데요……." "나중에 본서에 오면 알려주지." 그 이상 버텨 보았자 별 도리가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돌아섰다. 그러나 이대로 두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경부와 의사가 한 방에 들어가고 난 다음, 나는 데이의 팔을 붙들고 속삭였다. "아무 말 말아." 나는 데이와 함께 살금살금 경부와 의사가 들어간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 방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구레아리 경부와 의사와 간호원이 레이너의 침대를 둘러싸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봐, 데이! 내가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말을 할 것이니 데이는 재빨리 사진을 찍어줘야 해." "그러나 델라니씨, 그런 짓을 하면 경부가……." "잔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나는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고 문을 열고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데이가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번쩍이니 모두들 눈이 캄캄한 모양인지, 얼떨떨하니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야, 도망치지 말고 기다려!" 성난 구레아리 경부의 소리를 들은 체 만 체 우리는 출구를 향한 복도를 달렸다. 우리가 현관 계단을 내려섰을 때 급한 걸음으로 들어서고 있는, 명령을 받고 나갔던 형사를 만났다. 나는 천연스럽게 형사를 불러 세웠다. "아, 형사님, 레이너 박사는 역시 행방불명이었지요?" 형사는 내 말을 듣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같은 기자는 정말 엉터리없는 거짓말쟁이다. 기사를 재미있게 쓰기 위하여 어떤 거짓말이라도 예사로 하니 말야." "무슨 이야기요?" 형사는 우리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프란드 연구소에 전화를 걸어 레이너 박사와 직접 이야기하고 왔다. 박사는 여전히 연구에 몰두하고 계시더라." 형사는 쏘아 부치듯 말하고 우리의 옆을 바람같이 스쳐가며, 한 마디 덧붙였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머리나 식혀라."   레이너 박사   조금 후 우리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사나이는 틀림없이 레이너 박사일 것이다. 그러나 그 레이너 박사는 틀림없이 연구소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나이는 역시 레이너 박사가 아닌 모양이다. 내가 경솔하게 생각하고 엉뚱한 공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이상하다. 그렇게 꼭 닮은 얼굴은 쌍둥이 외에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국가 기밀에 속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과학자이다. 아무래도 무언가 흑막이 있는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직접 프란드 연구소에 가 레이너 박사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시도 주저할 수가 없었다. "데이 양은 회사에 되돌아가 방금 찍은 사진을 현상해 줘. 나는 잠깐 프란드 연구소에 갔다 올 테니." 데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 스테파나 병원 기사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내 육감으로는 이 일이 스테파나 병원의 취재보다 몇 백 배 더 중요한 것 같다." "큰 일을 저지르겠네요." 데이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나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내고, 차를 집어타고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로 달렸다. 검문소를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보니 한 대의 경찰 차가 눈에 띄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상한 대로 경부는 부하 형사와 같이 소장인 메인랜드 박사의 사무실에 있었다. 나는 메인랜드 박사와 1년 전에 만난 일이 있어서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내가 사진을 내어놓았더니 메인랜드 박사는 그 사진을 보고, "정말 이 사나이는 레이너 박사와 아주 닮았네. 그러나 뭔가 잘못 봤겠지. 하여튼 레이너는 여기에 있어요."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닮았기에 확인해보려는 것입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말했다. "지금 곧 올 것이니 확인해 보십시오." 이윽고 출입문에 노크 소리가 나고, 레이너 박사가 들어왔다. 그는 틀림없이 반 년 전에 내가 만난 레이너 박사였다. 그러나 얼굴은 상처투성이고 이마에는 넓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메인랜드 박사는 우리들을 소개하였다. 나는 레이너 박사 앞으로 다가서서, "오랜만입니다. 박사님. 델라니입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음……기억할 것도 같고……." 그 소리가 감기라도 걸려 있었는지 몹시 쉰 목소리였다. "레이너 박사, 직무상 물어 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실은 어제 저녁 당신과 꼭 닮은 사나이가 총에 맞고 템즈 강에 떠내려오는 것을 구조했습니다. 이것이 그 사진입니다. 마음에 집히는 것이 없습니까?" 구레아리 경부는 그 사진을 박사에게 건네주었다. "쌍둥이 형제나, 아니면 당신과 꼭 닮은 친척이라도 계십니까" 레이너 박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실례했습니다. 그 사나이의 신원을 전혀 알 수가 없어서요." "그 사나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레이너 박사가 물었다. "네, 그러나 의식이 없습니다."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는 지금 바쁩니다. 내 사무실로 돌아가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한 마디만 물어 보겠습니다." 나는 나가려는 박사를 불러 세웠다. "그 부상은 어떻게 입었습니까? 자동차 사고라도 당했습니까?" "그래요. 트럭이 내 차의 뒤를 받았어요." 레이너는 귀찮은 듯이 대답하고 바로 그 방을 나가버렸다. "정말 부상이 그만한 것이 다행이었어요. 중요한 실험이 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메인랜드 박사가 레이너의 뒷모습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는 이 이상 이곳에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되어, 우리는 메인랜드 박사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 걷다가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구레아리 경부에게 말했다. "경부님, 당신은 트럭에 충돌 당한 일이 있습니까?" "왜 그런 것을 묻나?" 구레아리 경부는 여기까지 와서 조사하였는데도 별 신통한 게 없어 기분이 좋지 않은지 퉁명스레 대꾸했다. "충돌 당했을 때는 뒤로 넘어지겠지요? 그렇다면 얼굴에 중상을 입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구레아리 경부는 귀찮은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델라니 군, 자네는 왜 사건에 대해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가?" "네, 알았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 번 죽었다?   나는 차를 천천히 몰아 달렸으나 회사에 들어갈 생각도, 스테파나 병원에 갈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솟아올라서 결국 나는 핸들을 돌려 다시 노잔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환자를 치료하고 있던 의사 프레스튼 박사에게 면회를 신청했다. 프레스튼 의사는 귀찮은 듯, 달갑지 않은 태도로 만나 주었다. "도대체 무슨 용건이오?" "박사님, 저는 원자력 연구소에 가서 레이너 박사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쩐지 그 사람이 진짜 레이너 박사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즉 진짜는 이 병원에 있는 그 사나이이고, 원자력 연구소에 있는 사람은 가짜같이 느껴집니다." "자네는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프레스튼 박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첫째로 레이너 박사가 얼굴에 심한 부상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 부상을 입게 된 교통 사고 이야기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목소리가 제가 들었던 목소리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설명이 되겠지. 경찰은 뭐라고 하던가?" "경찰은 저를 상대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것 봐." 프레스튼 박사는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또 질문하였다. "박사님, 그 환자의 상황을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프레스튼 박사는 우물쭈물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등에 두 발의 권총 탄환이 명중되어 있었다." "그런 몸으로 강에 빠졌는데, 왜 익사하지 않았을까요?" "운이 좋았지. 한 발은 어깨 살에 꽂혔을 뿐이고, 또 한 발은 척추 뼈를 스쳐갔다. 그 충격으로 심장과 폐가 정지되어 거의 호흡도 중단되어 있었다. 그 까닭에 익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환자는 아직도 의식불명입니까?" "아니, 지금은 의식을 되찾았어." "그렇다면 왜 본인에게 신원을 묻지 않습니까?" 프레스톤 박사는 머리를 저었다. "그것이 안 된단 말이야. 환자는 일종의 기억상실에 걸려 있다.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가 횡설수설이야." 박사는 조금 생각하더니, "그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 사람은 수술대 위에서 한 번 죽었었으니까." "한 번 죽고 되살아난 겁니까." "그렇다. 심장이 몇 초 동안 정지되어 있었는데, 강심제 주사를 놓아서 다시 움직이게 되었다." 프레스튼 박사에게 더 이상 질문을 해봐도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는 회사로 돌아왔다. 데이가 편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은 다 되었어요." 나는 봉투 안에 든 사진을 꺼내어 보고 깜짝 놀랐다. 사진 속의 그 환자의 둘레가 또 허옇게 흐려져 보이지 않는가! 여기 희미하게 흐릿해진 것은 무엇일까?" "모르겠어요. 필름에 광선이 들어갈 리 만무하고요. 다른 사진들을 깨끗하게 나왔는데, 정말 이상해요."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흐려진 것은 무언가 사건에 중대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사진을 챙겨들고 올리베 편집장을 만나러갔다. 편집장은 예상했던 대로 굉장한 화를 냈다. 내가 레이너 박사의 사건을 설명하기 시작하였으나 전혀 듣지도 않으려고 하였다. "알겠지? 자네는 사건 기자가 아니야. 과학 기자야. 나는 스테파나 병원 개원식의 기사와 사진이 필요한 거야." 편집장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까지 가지고 오지 않으면 너는 해고다. 알겠나!" "알았습니다."   수수께끼의 회화   재차 데이를 데리고 스테파나 병원을 향하여 차를 운전하면서 나는 그 사진이 왜 희미하게 흐려졌을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문득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흐려진 것에 대한 원인을 하나 생각해냈다. 방사성 물질에 부닥치면 필름이 감광(광선의 감을 받음)되어 사진이 나오지 않는 수가 있다. 방사성 물질……. 레이너 박사는 방사성 물질의 전문가이라서 항상 방사선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별명을 '동위원소 인간'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즉 레이너 박사와 같이 항상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고 있으면 그것이 신체에 영향을 미쳐 방사성을 띠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이 희미하게 흐려진 원인일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핸들을 돌려 노잔 병원 쪽으로 차를 달렸다. "델라니! 어디로 갈 작정이에요?" 데이가 고함을 쳤다. "10분밖에 안 걸린다. 부탁하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데이가 쫑알대는 소리를 들은 체 만 체 차를 몰았다. 데이는 화가 나서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어딘 가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접수계에서 거절당할 것을 피하기 위하여 뒷문으로 돌아서 살며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프레스튼 박사의 출입문을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여니, 박사는 깜짝 놀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서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꼭 만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서였습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데이가 찍은 사진을 꺼냈다. "이것은 오늘 아침 병원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프레스튼 박사는 사진을 받아들었다. "이 사진의 흐려진 곳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 사람이 방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레이너 박사는 동위원소 인간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사능이라…….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생각이 나네. 그 환자는 적혈구(붉은 피톨)가 적고 신경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또 뇌 장애도 일으키고 있었네." "그것은 모두가 방사성 장애의 징조이지요." 프레스튼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레이너 박사는 틀림없이 연구소에 있다고 경찰에서 말하고 있다." 나는 실망하였으나, 다시 기운을 내어 질문하였다. "박사님, 단 1분이라도 좋으니 그 환자와 이야기하도록 해줄 수 없겠습니까?" "시간의 낭비이다. 할 필요성이 없네." 프레스튼 박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집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조금 전 환자와 이야기한 속기록이다. 읽어보게." 속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적혀 있었다.   "의사 : 너는 미국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환자 : 아니오." "의사 : 너는 가족이 있는가?" "환자 : 나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당신 쪽에서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 : 나는 너를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너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있다." "환자 : UTC이다." "의사 : UTC라니?" "환자 : 나는 말리려고 하였다."   정말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환자 자신은 나름대로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있으나, 질문은 전혀 무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마음이 통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스티븐 레이너인가하고 물어 보았습니까?" "이름은 물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이쪽에서 스티븐 레이너 박사인가 물어보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면 무엇인가 기억해낼는지도 모릅니다." 프레스튼 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승낙하였다. "좋아. 다시 한 번 해보자. 만약 그 환자가 레이너라면 이것은 정말 큰 일이다. 프란드 연구소에 무언가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급히 격리실로 갔다. 프레스튼 박사가 전등을 켜니 환자는 겨우 몸을 요동하고 눈을 떴다. 갑자기 여위어 있었으나, 정신이 든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입을 움직여 중얼거렸다. 프레스튼 박사는 침대를 몸을 굽히고, "레이너 박사, 스티븐 레이너 박사." 1, 2초 동안 환자는 프레스튼 박사를 쳐다보더니 성난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내가 말하는 것을 모르는가?" 프레스튼 박사는 이렇게 물었다. 환자는 초조한 빛으로, "왜 모두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가?" "나의 질문에 대답해라!" 환자는 눈을 감고 피로한지 눈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누가 당신을 쏘았소?" 환자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말하려고 할 때,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테스트(시험) 때문이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였나?" "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당신들은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당신은 똑바로 대답해 주시오." 나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환자는 또 힘이 빠진 것 같았다. "그대로이다. 바스코다." "바스코는?" "물론 모든 것이 UTC 때문이다. 나는 신경이 긴장되었다. "당신은 계속 UTC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아니, 정신이 희미해져 모든 것이……." "무엇이든 좋으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까?" 환자는 또 잠자코 있다가 이윽고, "그 사람이 나를 매수하려 하였다." "누가 당신을 매수하려 했는가요." 그러나 환자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윽고 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물을 한 잔." 프레스튼 박사는 물을 한 잔 따라 주었다. 그 때 간호원이 초록색 큰 봉투를 가지고 들어왔다. "선생님, 여기에 계셨습니까? 이 환자의 엑스선 사진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 뒤에 볼 것이니 거기다 두고 나가." "지금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프레스튼 박사는 이상한 얼굴로 간호원을 쳐다보았다. "왜? 이상한 일이라도 있었나?" "아무 것도 찍혀지지 않았습니다!" 간호원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프레스튼 박사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들여 안에 든 필름을 꺼내 보았다. 까맣기만 하고 아무 것도 찍혀져 있지 아니하였다. "방사능 때문이오! 그의 몸에 있는 방사능 때문에 필름이 감광되었습니다." 나는 외쳤다. 박사와 나는 서로 얼굴을 한참 동안 마주보았다.   가짜 박사   해질 무렵 데이와 나는 회사 가까운 다방에 있었다. 나는 올리베 편집장에게 휴직 명령을 받았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거예요?" 데이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모르겠어. 하여간 그 사나이가 레이너 박사라는 것은 절대로 틀림없는데, 아무래도 그것을 밝혀 낼 방법이 없어." "그러나 그것을 해결해내지 못하면 올리베 편집장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 그러나 이 이상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도 모르겠다." "잘 하면……." 데이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잘 하면, 프란드 연구소에 있는 레이너 박사를 조사하면 새로운 좋은 방법의 실마리가 풀릴는지도 몰라요." "어떻게 조사할까?"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사진을 찍어서……. 그 사진이 만약 방사능의 감광이 없다면……." "그러면 가짜라고 알 수 있게 된다. 정말 그것은 좋은 생각이다. 데이, 나에게 카메라를 빌려다오." "왜요. 델라니?" 데이가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내가 그 사람 사진을 찍으러 가는 거야." "사진이라면 내가 더 전문가예요." "데이는 안 오는 게 좋겠어. 레이너 박사는 나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은 나를 습격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데이도 위험한 거야. 그래도 좋아?" "좋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데이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데이의 얼굴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결심이 똑똑히 나타나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반가웠다. 지금까지 혼자 일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곁에 훌륭한 동료가 나타난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가자. 데이!"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날 밤 8시를 지나 우리는 프란드 연구소에서 나온 레이너 박사의 차를 미행하기 시작하였다. 연구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이너 박사의 집에서 찍으려는 것이었다. 레이너 박사의 차 뒷부분에는 충돌 당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차는 포드 가도를 남으로 달려 주택가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 때 한 대의 검은 차가 우리 차와 레이너 박사 차 중간으로 끼여들어 왔다. 그래서 박사의 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혀를 차며 액셀러레이터(동력을 내는 발로 밟는 장치)를 밟고 속력을 내어 그 차를 앞지르려하였다. 그 때 데이가 내 손을 잡았다. "앞지르지 마세요." "왜?" "그 차는 프란드 연구소에서부터 계속 우리 뒤를 따라왔어요." "뭐라고?" "정말이에요. 운전사 옆에 흰 목도리와 흰 장갑을 낀 키 큰 사나이가 앉아 있어요." "그렇다고 그 차가 우리를 미행한다고는 볼 수 없잖아. 그런데 미행한다면 왜 우리 차를 앞지를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를 미행한 것이 아니고 레이너 박사를 미행하고 있는 거예요." "음, 그래!" 데이의 추리가 옳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북 런던 거리에 왔을 때 레이너 박사의 차가 급히 정거하니, 그 검은 색의 차도 따라서 정거한 것이다. 나는 그대로 차를 달려 그 차들을 앞질러가 십자로 모퉁이에 정거하였다. 뒤를 돌아보니 레이너가 차에서 내려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있었다. 그 때 뒤차에서도 키가 큰 사나이가 내렸다. 그 사나이는 검은 색 모자를 쓰고, 목둘레에 털을 단 오버를 입고,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흡사 스파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같았다. 그 사나이는 레이너의 뒤를 따라 아파트로 들어갔다. "이제 어떻게 하죠?" 데이가 물었다. "10분 기다렸다가 현관으로 정정당당히 들어가, 주간지 '뷰'에서 인터뷰(기자가 기사를 취재하기 위하여 하는 회담)하러 왔습니다, 라고 말하지." "만약 거절당하면?" "그 때는 데이가 재빨리 사진을 찍고 달아나는 거야. 아파트에 들어가서 하얀 장갑을 낀 사나이의 얼굴을 한 번 똑똑히 보아야겠어. 그 놈이 범인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까닭은?" "가짜 레이너 박사는 이 사건의 주역일는지도 모른다. 주범은 흰 장갑을 낀 사나이이고, 레이너의 가짜는 그 놈에게 조종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것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조사하는 거다." 10분 뒤에 우리는 레이너 박사 집 앞까지 갔다.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살며시 열리고, 얼굴이 둥글고 건강한 사나이가 밖을 내다본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사나이의 차를 운전한 사람 같았다. "레이너 박사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주간지 '뷰'의 기자 델라니, 이 사람은 사진 기자입니다." 그 사나이는 흘끔흘끔 우리를 쳐다보더니, "기다려 주십시오. 박사에게 여쭈어 보겠습니다."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또 한 번 문이 열리고 얼굴이 상처투성이인 레이너 박사가 나타났다. "밤늦게 대단히 미안합니다. 편집장이 이번 사건이 대단히 재미있다고 하며, 꼭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총에 맞은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이시겠지요. 그러나 하여튼 세계적 과학자와 꼭 닮은 사람이 총에 맞았으니, 우리 독자들은 대단히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레이너 박사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현관 안에 들어가자 책장 위에 검은 색의 모자와 흰 장갑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털을 단 검은 오버와 흰 목도리도 걸려 있었다. 우리는 서재로 안내되었다. 그 흰 장갑을 낀 사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을 묻고 싶습니까?" 레이너 박사가 물었다. "나는 이 사건은 내일 원자력 연구소에서 거행될 특별 테스트와 관계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박사는 힐끔 나를 노려보았다. "그 까닭은?"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기자의 육감이라고 할까요?" "육감이란 아무 소용이 없어. 내일 테스트와 이 사건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는 몰라." 나는 작전을 바꾸기로 하였다. "박사님은 지금까지 여러 방면의 연구를 많이 하셨지요? 아마 전쟁이 끝나고 얼마 후인 1948년경에 콜롬비아 대학에서 신기한 금속의 연구를 하시고 계셨을 겁니다." 레이너 박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학에서 몇 년 계셨습니까?" "아 그렇지……. 똑똑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1년 반정도 아니었던가요. 아참, 타이어 교수님과 공동 연구를 하셨잖아요." "아 그랬던가." 나는 데이에게 눈짓을 했다. 데이는 준비하고 있던 카메라로 갑자기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비쳤을 때 레이너 박사는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무슨 짓을 하는가, 무례하게!" "실례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인터뷰할 때는 사진을 찍게 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기분 나쁘다! 곧 돌아가라." 레이너 박사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리고 말해두지만 이 사진을 보도하면 나는 자네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겠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요." "그건 왜?" "당신은 진짜 레이너 박사가 아니니까요." "뭐라고?" 레이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지금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알겠습니까? 스티븐 레이너 박사는 1948년경에는 콜롬비아 대학에 재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타이어 교수라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내가 꾸며낸 말입니다. 그 무렵 레이너 박사는 남태평양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것을 아는가?" "6개월 전 진짜 박사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데이의 손을 잡고 방문을 나왔다. 레이너는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나는 나올 때 그 곳에 놓여 있는 모자 안에 새겨진 글귀를 보았다. 거기에는, 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는 출입문 손잡이를 잡으며 뒤돌아보며 말했다. "충고해둔다. 가짜 박사, 형무소에 가고 싶지 않거든 빨리 달아나는 게 좋을 거야. 동료 바스코를 데리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 방을 뛰쳐나왔다.   7초 반 빠르다.   우리는 차를 타고 곧 출발했다. 뒤돌아보았으나 뒤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나는 가까운 공중 전화통 앞에 차를 세우고 경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구레아리 경부는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형사에게 대충 이야기를 했다. "레이너 박사의 주택을 감시하도록 구레아리 경부에게 부탁해주시오. 박사는 날이 새기 전에 그 일당과 도주할 우려가 있습니다. 정체가 탄로 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우리는 곧 시가를 향하여 빠르게 차를 몰았다. "정말 용단 있는 일을 했습니다." 데이가 한숨 돌리고 말했다. "그렇게 했으니 놈들은 꼭 어떤 반응이 있을 거야. 그리고 경시청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아마 그 놈들은 원자력 연구소에서 어떤 비밀을 훔쳐내려는 스파이일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데이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자기들의 정체를 밝혀 낸 기자를 그대로 둘 리가 없잖아요." "자기들이 도망치기에도 바쁠 텐데, 그럴 여유가 없을 거야." 나는 차를 회사 쪽으로 몰았다. "하여간 데이 양은 오늘 밤 안에 그 사진을 현상해놓게." "나는 아무래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그 사람이 그렇게 레이너 박사를 닮았는지 말이에요." "그것은 간단하지." "레이너 박사와 닮은 사람과 의사를 매수하여 성형수술을 시켜, 얼굴을 레이너 박사같이 만든 거야. 교통 사고를 당하였다는 것은 수술할 때 생긴 얼굴의 상처를 감추기 위한 방법이지." 차는 곧 회사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사진부로 가서 사진을 현상하였다. 사진은 깨끗하게 나왔다. "잘했다. 이 사진을 보니 그 놈이 가짜라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군. 다음은 흰 장갑을 낀 바스코라는 사람을 조사하자." "그 사람이 바스코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레이너 박사의 아파트에서 나올 때 모자에 이름을 새겨 놓은 것을 보았지. EV, 즉 이(E) 바스코이다." "어떤 사람일까요?" "그 환자, 즉 진짜 레이너 박사는 바스코의 이름과 UTC라는 말을 자주 하였지. 틀림없이 이 두 사람은 중대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자, 회사 자료실에 가서 조사하자." 우리는 자료실로 갔다. 그러나 자료실에는 수천 개의 서류철이 있었으므로 조사는 수월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프레스튼 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 델라니 군인가. 그 환자의 방사능 테스트를 해보니 매분 6천 카운트(방사성의 입자의 수효를 셀 때 1초 또는 1분간당의 수효)의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보통 같으면 이렇게 방사능을 받는다면 살수가 없다." "오랫동안 차츰차츰 방사능에 익숙해진 사람, 즉 레이너 박사 같은 사람 아니면 이미 죽고 말았을 테지요?"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드디어 프레스튼 박사도 내 편이 되어 준 것이다. "박사님, 오늘 밤 한 번 더 그 환자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좋지요?" 프레스튼 박사는 승낙하였다. 나는 데이를 돌아보고 지시하였다. "나는 지금부터 한 번 더 노잔 병원으로 간다. 데이 양은 여기서 UTC를 조사해주게. 자, 내일 만나." 데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회사 녹음기를 찾아들고 차를 탔다. 20분 후, 나는 노잔 병원 경리실에서 프레스튼 박사와 수수께끼의 환자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나는 환자에게 질문을 하기 위하여, 녹음기의 스위치를 켠 뒤에 마이크를 환자의 입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환자는 가냘픈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안 되요……. 할 수 없어요……. 생각해내려고 애쓰지만……." "당신은 전혀 자기에 대한 일을 기억할 수 없습니까?" 나는 이렇게 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고 말아서……." 그가 또 말꼬리를 흐렸지만 나는 단념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나는 당신이 스티븐 레이너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그러자, 환자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 일은 전에 전부 말했습니다. 바스코의 이야기도,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바스코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때까지 나는 그들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은 독일 사람 같았습니다." "그 외의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레이너 박사의 얼굴에는 땀이 솟아올랐다. "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고 큰 건물이……." 그렇게 말하고 레이너 박사는 입을 다물었다. 잇달아 질문을 당하니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 외에 뭔가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까?" 그러자, 레이너 박사는 갑자기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당신들의 물음에 나는 성의껏 대답하고 있소. 이 이상 무엇을 대답하란 말이오."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으나 레이너 박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레스튼 박사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더 이상 질문하는 것은 무리이다. 환자는 몹시 지쳐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녹음기 스위치를 껐다. 나는 프레스튼 박사 방으로 가서 녹음기 소리를 재생시켜 종이에 받아썼다. 그러나 몇 번 들어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아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델라니 군, 헛된 일이야. 그 사람이 진짜 레이너이건 아니건 간에, 아무튼 머리가 돌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하여튼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났으니까 뇌가 이상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박사님, 레이너는 7초나 8초 동안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났지요?" "그렇다네." 나는 또다시 녹음기 소리를 재생시켰다. 그리고 시계의 초침을 들여다보았다. 나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나는 흥분하였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종이에 내가 생각한 대로 다시 녹음의 소리를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프레스튼 박사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것을 보십시오."   "델라니 : 당신은 전혀 자기 일에 대한 일을 기억할 수 없습니까?" "환자 : 안돼요……. 할 수 없어요……. 생각해내려고 애쓰지만……." "델라니 : 나는 당신이 스티븐 레이너 박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 생각이 안 납니까?" "환자 :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고 말아서……." "델라니 : 그 바스코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환자 : 그 일은 전에 전부 말했습니다. 바스코의 이야기도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델라니 : 그 외의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환자 : 이 때까지 나는 그들을 만난 일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은 독일 사람 같았습니다." "델라니 : 그 외에 뭔가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환자 : 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검고 큰 건물이……." "델라니 :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환자 : 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당신들의 물음에 나는 성의껏 대답하고 있소. 이 이상 무엇을 대답하란 말이오?"   우리 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리가 맞는다. "이 환자는 시간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박사님!" "그러나…… 그런 일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프레스튼 박사는 우울한 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사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내가 시간을 재어 보니 레이너 박사는 정확히 7초 반만큼 질문하는 것보다 앞의 것을 시간적으로 앞질러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일어섰다. "박사님, 그 이유는 오늘 저녁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회사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녹음기를 거기에 둔 채 밖으로 나와 차를 탔다. 회사로 가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에서 무엇인가 큰 음모를 꾸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진짜 레이너 박사는 그 음모 때문에 유괴되어 총에 맞고 강에 버려진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음모는 무엇일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을 체포하던가 아니면 진짜 레이너 박사가 기억을 되찾든지 해야만 한다. 회사에 돌아와 자료실에 들어가 보니, 이미 데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경찰에 전화를 걸었으나 구레아리 경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 나는 비로소 피로를 느꼈다. 생각해보니, 나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조사하고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내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아파트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1시 30분 경이었다. 나는 무거운 발을 끌다시피 하여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나는 머리를 강하게 두들겨 맞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자백제(자백시키는 약)   나는 잠에서 깨어나듯이 천천히 정신을 되찾았다. 머리가 몹시 아팠다. 나는 아픈 머리에 손을 대어 보려다가 비로소 내 손이 묶여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천천히 사방을 살펴보았다. 내 테이블 위에는 검은 모자와 흰 장갑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두 사람의 발이 보였다. 쳐다보니 그들은 요전에 본 운전사와 흰 장갑을 낀 사나이였다. "일어나라." 운전사가 말했다. 나는 겨우 일어났다. "델라니 군, 너는 대단히 귀찮은 놈이다." 바스코가 여송연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말했다.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직업이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갑자기 운전사가 내 배를 쳤다. 그 힘이 얼마나 세었던지 나는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운전사가 난폭하게 나를 잡아 일으켰다. "너는 어느 정도 알고 있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모든 것이라니, 어느 정도이냐?" "그것은 말할 수 없다." "이놈아! 바스코 씨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라!" 운전사의 주먹이 내 얼굴에 날아왔다. 나는 또 쓰러졌다. "이 놈은 대단한 놈이다. 시간이 없으니 이 놈에게 주사를 놓을까?" 흰 장갑의 주인공인 바스코가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방 모퉁이에 있던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독일 사람 같은 백발의 노인이었다. 이 사람이 레이너 박사가 말한 독일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주사기를 꺼내어서 내 팔에 찔렀다. 그 순간 나는 뇌 세포가 폭발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 무엇이든지 정직하게 대답하겠지." 독일 사람이 말했다. "됐다. 델라니, 레이너 박사는 지금 어디에 있나?" 바스코가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내 입은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노잔 병원에 있다." "몇 호실에?" "격리실에 있다." "레이너 박사는 의식을 회복했나?" "회복했다." "경찰은 박사를 만나 이야기하였나?" "아마 이야기했을 것이다." "박사는 무슨 말을 했나?" "아무 이야기도 못 하였다. 기억 상실증에 걸려 아무 것도 기억해 내지 못하였다." "병세는 좋아졌는가?" "조금씩 좋아져 간다. 내일이면 기억 상실증이 나을는지도 모른다." 바스코가 독일 사람을 돌아보며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지금 이 놈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일까?" "사실일거야. 실력 있는 정신과 의사라면 기억 상실증 정도는 간단하게 치료할거야." "그렇다면 일찌감치 손을 써야지." 바스코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보며 말을 계속하였다. "이 놈을 잠재워라." 그러자, 독일 사람은 나에게 또 다른 주사를 놓았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쾅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나는 또 의식을 잃고 말았다.   탈출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에는 나는 침대에 묶여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침대 옆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요." "음…… 잠깐 이 끈을 풀어 불 수 없을까요?" "안돼요." "부탁이오. 오줌이 마려워요." 여자는 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무거운 자동 권총을 꺼내어 나에게 들이대며, "달아날 기색이 보이면 쏘아 버리겠어요." 하고 끈을 풀어 주었다. 나는 일어서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다시 온 힘을 다해 일어서니 눈앞에 자동 권총의 총구가 보였다. "자, 빨리 화장실로 가요." 나는 그 여자의 감시를 받으며 화장실로 갔다. 용무를 마치고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힐끔 창 밖을 내다보니 아침인데, 거리에는 왕래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조용하였다. 침실로 되돌아오니 그 여자는 나에게 침대에 누우라고 명령했다. "조금만 이대로 놓아두시오. 그건 그렇고, 당신같이 예쁜 여자가 왜 강도의 흉내를 내고 있소?" 나는 조금이라도 시간의 여유를 얻기 위하여 그렇게 말했다. "나는 브레슬라 선생의 간호원이오. 선생의 명령을 지킬 따름이오." "브레슬라 선생이라니, 그 늙어빠진 독일 사람 말이오?" "우리 선생님을 헐뜯으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선생님은 전쟁 전에는 유럽에서 제일 가는 의사였던 분이에요." "그러나 그 훌륭한 선생은 지금에 와서는 강도와 한 패이거나 스파이의 앞잡이가 아니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잘못 알고 있소. 사실은……." 나는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재빨리 그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엉겁결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나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오른손으로 여자를 갈겼다. 그 여자는 권총을 떨어뜨리고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권총을 집어 호주머니에 넣고, 여자를 침대에 눕혀 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나서 상처를 돌보았다. 탄환이 어깨에 들어박혀 있어서 왼쪽 팔을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웃옷을 입고 주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거기에 많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 사진은 모두가 스티븐 레이너 박사의 얼굴을 크게 만든 사진이었다. 사진을 호주머니에 넣었을 때 힘 센 운전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운전사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흉악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호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권총을 꺼내어 정확하게 겨냥하여 쏘았다. 그러자, 운전사는 신음 소리를 내며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잠시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천천히 운전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다. 나는 곧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왔다. 거리에 나선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8시 30분 경이었다.   역(반대)치료법   방에 들어서니 전화벨 소리가 계속 났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데이의 전화였다. "잠꾸러기예요! 계속 전화를 걸었어요." "알았어……. 그런데 무슨 용건이지?" 데이는 화난 소리로 말했다. "정말! 당신은 나에게 UTC에 대해서 조사하여 달라는 것을 잊었어요?" "그랬지……. 알아냈나?" "알아냈어요. 그것은 회사의 이름이에요." "어떤 회사이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유나이티드 텅스텐스틸 주식회사인데, 런던에도 지사가 있고 텅스텐 광업에서는 세계 제일의 큰 회사예요. 더욱이 그 중역에 에마뉴엘 바스코라는 사람이 있어요." "바로 그것이다!" 나는 흥분했다. "그 회사가 뭔가 프란드 연구소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어떻게 하지요?" "나는 노잔 병원으로 가겠다. 데이도 그 곳으로 빨리 와." "네, 알았어요. 가겠어요." 데이는 힘차게 대답했다. 나는 방을 나오자마자 낯익은 형사와 마주쳤다. "델라니씨, 구레아리 경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부는 어디에 있지요?" "노잔 병원에." "그것 참 잘 됐소. 나도 그 곳으로 가려는 중이오." 형사는 부상을 입은 내 얼굴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굴은 왜 그래요?" "좀 난폭한 친구에게 얻어맞았지." 나는 지난 밤 이야기를 대충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운전사를 쏜 권총을 꺼내어 형사에게 넘겨주었다. 형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순찰차 무전으로 경시청에 연락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 노잔 병원으로 떠났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부상의 치료를 받았다. 어깨의 총알을 빼내고 붕대를 감으니 한결 시원하였다. 그리고 나서 구레아리 경부를 만났다. 경부는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시었다. 어제 저녁 이야기를 이미 형사로부터 보고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제 저녁에 찾아냈던 레이너 박사의 사진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경부의 눈앞에 들이댔다. "이 사진을 봐요. 이것은 그 가짜 박사의 얼굴을 레이너 박사의 얼굴과 닮도록 하기 위해 정형 수술에 이용한 사진이오. 이래도 그 사나이가 가짜가 아니라고 우겨댈 셈이오?" 구레아리 경부는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내 얼굴을 쏘아보았다. "델라니, 이렇게 되었으니 다 이야기해주지. 경찰은 자네가 생각하듯 굼벵이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야. 레이너의 정체를 우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네.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에는 어제부터 부하들을 배치시키고 있다. 지금쯤은 UTC의 바스코 사무실을 경찰대가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듣고 보니 내가 어리벙벙해졌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서 왜 지금까지 아무 일을 하지 않았소." "아무 것도 모르는 체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자네가 템즈 강에서 발견한 사나이를 레이너 박사라고 말한 직후부터 MI5(영국 정보부)와 미국FBI(연방 경찰국)와 연락을 하여 수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범인들은 송두리째 체포하기 위하여 비밀도 해두었던 것이다. 레이너 박사의 일도 일부러 숨기고 있었다. 그래서 범인들은 레이너 박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네 같은, 바보 같은 기자가 소란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나는 맥이 풀려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구레아리 경부는 말을 이었다. "자네는 모든 것에 훼방을 놓아 일을 그르치게 하고 말았다. 그 때 프레스튼 박사와, 대머리에다 음산한 표정을 한 야윈 사람이 들어왔다. 프레스튼 박사는 그 사람을 구레아리 경부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이 병원 정신과 의사인 아레구스 마르크스 박사입니다." 그리고 나서, 박사는 나를 그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델라니라는 기자인데, 레이너 박사의 의식이 시간적으로 사실보다 앞지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마르크스 박사님, 레이너 박사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천리안(먼데서 일어난 일을 즉각적으로 알아내는 능력)이 된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마르크스 박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통의 천리안이 아니야, 내가 여러 가지로 테스트해 보았다. 밝은 불빛으로 눈을 비추니, 그 환자는 내가 불빛을 비추기 꼭 7초 반 전에 눈을 깜박거렸다. 말하자면 그 사람은 마음도 육체도 모두 7초반을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구레아리 경부가 참견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박사님, 이런 일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가설을 세울 수는 있지." 마르크스 박사는 조용히 말해다. "프레스튼 박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환자는 7초 반 동안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심장이 정지되고 육체가 죽어 있는 동안에도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즉 그 사람의 이식은 7초 반만큼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장이 정지되면 뇌의 활동도 정지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자, 프레스튼 박사가 대답했다. "그렇다. 보통 같으면 심장이 정지되고 혈액을 보낼 수가 없으면 뇌도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 환자는 보통의 환자가 아니다. 몇 년 동안 보통 사람 같으면 곧 죽고 말 정도의 방사능을 계속 쪼여서 강한 방사능을 지닌 인간이 된 것이다. 즉 동위원소 인간이다." 마르크스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학적으로 조사해보지 않으면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방사선이 그 사람의 뇌를 아주 특수하게 변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구레아리 경부가 또 참견을 했다. "레이너 박사의 기억 상실증도 치료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시간을 앞지른 것도 고칠 수 있습니까?" 마르크스 박사가 대답했다. "지금의 레이너 박사의 기억에는 7초반의 차이가 있소. 그 차이를 고쳐 주면 기억은 반드시 되돌아올 수 있소. 다시 말하면, 시간을 앞지르고 있을 때 그 반대 일을 해주면 되는 것이오. 즉 육체를 살려둔 채 의식만을 7초 반 죽이는 방법인 것이오." "그 일은 위험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죽을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며 영원히 고칠 수 없을 것이오." 이렇게 말하고 마르크스 박사는 프레스튼 박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소?" "글쎄요…… 강력한 알칼로이드(식물 중에서 발견된 특수한 알칼리성의 유기 화합물인데, 모르핀, 코카인, 니코틴 같은 것이다. 사람의 신경에 큰 영향을 주고 환상을 일으키기도 하며 정신을 돌게 하는 작용을 한다. 특히 모르핀 성질을 가진 아편과 코카인 등의 독성은 무섭다.)를 주사시켜 뇌 세포를 마비시키고, 정확히 7초 반 뒤에, 이번에는 반대의 효력을 가진 뇌의 자극제를 주사하면, 환자의 이식과 육체와의 시간적 간격이 없어질는지도 모르지요." "위험하오. 그건 너무나 위험하오!" 경부가 머리를 흔들며 외쳤다. 한동안 그들은 잠자코 서로 얼굴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때 복도에서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출입문이 힘차게 열리고 병원의 한 의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들어왔다. "프레스튼 박사님! 지금 격리실의 환자의 방에 이상한 사람이 몰래 숨어 들어와 환자에게 주사를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그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계속하였다. "겨우 주사를 못 놓도록 막았지만, 그 사람은 자기 목에 주사기를 찌르고 죽고 말았습니다. 주사기에는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앞서 방을 뛰쳐나가고 우리들도 그 뒤를 따랐다.   본 정신을 되찾다.   네 사람은 격리실로 뛰어갔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마르크스 박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은 브레슬라 박사이다!" 나는 곁으로 가까이 갔다. 그 사람은 내가 바스코에게 잡혔을 때 같이 있었던 늙은 독일 사람이었다. "그는 유럽 제일의 성형외과 전문 의사로서 유명한 사람이오. 전쟁 중에는 나치스에 협력하여 유태인의 산 사람을 실험용으로 사용하였던 사람이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행방불명이 되었소." "그래요? 아마 그 동안 영국에서, 숨어서 의사 노릇을 한 모양이지. 성형수술의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레이너 박사의 가짜를 만드는 데 협력했구나!" 나는 구레아리 경부를 돌아다보았다. 경찰 수사를 방해한 것은 잘못했다고 생각되나, 나는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육감이 적중된 것이 기뻤다. 그 때 간호원이 급히 들어와 구레아리 경부에게 전화가 왔다고 전했다. 경부가 나간 다음 브레슬라의 시체는 운반되어 나가고, 레이너 박사도 다른 병실로 옮겨졌다. 이윽고 되돌아온 구레아리 경부는 나에게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자네가 한 일도 귀찮아서 못 견디었는데, 이번에는 자네의 동료인 여자 사진 기자까지 귀찮게 구는구나." "데이가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 "저지른 것뿐인가? 그녀는 경찰보다 먼저 바스코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갔다." 나는 빙긋이 웃었다. 데이의 기자 정신을 칭찬하여 주고 싶었다. "그 때문에 바스코 일당은 달아나고 말았다. 물론 그녀를 유괴해서."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러면 데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모르니까 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복잡한데 큰 일을 저질러 놓았다." "그러면, 구출할 방법이 없습니까?" "글쎄, 우리는 자네의 연락으로 브레슬라의 조수인 간호원을 붙들어 놓았다. 지금 그 간호원을 심문하고 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가짜 레이너 박사도 있지 않습니까. 그 가짜를 잡아서 조사하면 어떨까요?" 나의 제의에 경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레이너도 달아났다. 오늘 아침 일찍이 연구실에서 사라진 채 자기 집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바보 같은 경찰이구나! 용의자를 모두 놓치고 말다니!" 나는 화가 나서 그 방에서 뛰쳐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구레아리 경부가 내 팔을 잡았다. "자네 혼자 뛰쳐나가 보아야 데이 양을 찾을 수는 없네. 그러기보다 여기서 진짜 레이너 박사의 기억을 되찾는 일에 협력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되면 그녀가 유괴된 장소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켜 병원에 남기로 했다. 그로부터 레이너 박사의 기억을 되찾는 수술 준비가 될 동안 2시간이 걸렸는데, 나에게는 지루한 시간으로 2년이나 된 것 같았다. 겨우 준비가 완료되어 우리는 수술실로 갔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시작한다." 흰 수술복을 입은 프레스튼 박사는 우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최초의 주사를 놓으면 레이너 박사는 의식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은 극히 짧은 시간인 1,2분밖에 약 효과가 없고, 그 시간이 지나면 또 몇 시간 의식을 잃을 것이오." "우리는 2분간밖에 질문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지요?" 구레아리 경부가 말했다. "그렇지요. 더욱이 너무 복잡한 이야기를 들으면 발작을 일으킬는지도 모르니 주의해주십시오." 프레스튼 박사는 환자 쪽을 향하였다. "주사기를……." 박사가 이렇게 말하니 간호원이 주사기를 박사에게 넘겨주었다. 박사는 레이너 박사의 목에 주사기를 꽂았다.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얼마 뒤에 레이너 박사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프레스튼 박사가 우리들에게 눈짓을 하면서, "시작하십시오." 하고 말했다. 구레아리 경부가 레이너 박사 곁에 바싹 다가섰다. "나는 경찰에 있는 사람인데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듣겠소?" "네." 레이너 박사는 가냘픈 소리이나 똑똑하게 대답하였다. 나의 가슴은 두근두근하였다. 레이너 박사가 본 정신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당신을 쏜 사람은 누구요?" "바스코의 운전사 브로아이입니다." "왜 총에 맞았습니까?" "달아나려고 강에 뛰어들었더니 뒤에서 쏘았소." "당신은 갇혀 있었습니까?" "그렇소. 바스코가 매수하려 하는 것을 거절했더니……." "그 일을 좀 자세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구레아리 경부가 계속 질문을 하자 좀 괴로운지 레이너 박사는 고통스럽게 숨을 쉬었다. 이윽고 레이너 박사는 응답을 하였다. "바스코는 내가 협력해주면 10만 달러를 준다 하였으나 나는 거절했소." "어떤 일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까?" "원자로에 손을 써 달라는 것이오. 플루토늄(방사성의 초우란 원소의 하나)을 한 개 더 넣으라고 말했소. 그런 짓을 하면 제어봉(원자로에서 핵분열에 의한 연쇄 반응이 적당한 비율로 진행되도록 하는 막대기)을 당기는 순간에 프란드 연구소는 날아가고 말아요." 레이너 박사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의 일을 회상하니 새삼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박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구레아리 경부가 다시 물었다. "그 후 어떻게 했지요?" "4, 5일전에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소. 나는 강제로 차에 실려가고 말았소." "세 사람이라니?" "바스코와 브로아이와 브레슬라 말이오." "어디로 끌고 갔습니까?" "강가에 있는 창고 같은 건물이오. 불에 탄 것 같은 건물인데, 나는 사흘동안 그 곳에 감금되어 있었소……." 2분이 다 되어 가자, 레이너 박사는 대단히 괴로운 표정이었으나, 억지로 힘을 내어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나는 연구소에서 아레건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소. 그 사람이 UTC 사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소." "그 사람은 우리도 알고 있소. 그 사람은 MI5의 협조를 받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말했다. "모두 체포해주십시오. 제어 장치를 엄중히 지켜주시오." "잘 알았습니다." 구레아리 경부가 힘있게 대답했다. "당신이 감금되었던 창고는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까?" "상파울로…… 엘루……."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레이너 박사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프레스튼 박사는 레이너 박사의 맥을 짚어보고 눈을 조사하고 나서 말했다. "이제는 더 말할 수 없소. 몇 시간동안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술실을 나왔다. "상파울로 엘루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남아메리카의 지명 같은데……. 하여간 템즈 강가에 있는 창고를 이 잡듯 찾아볼 수밖에 없다." 구레아리 경부가 단언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다가는 어떻게 하지요? 데이는 그 동안 그 놈들이 죽이고 말는지도 모르잖습니까!" 나는 화난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경부는 내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고, 부하 형사들에게 뭔가 지시하였다. 내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경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델라니, 어디로 가는 건가?" "바스코의 사무실에 가면 어떤 증거라도 잡을 것 같아서……." 경부는 조금 주저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좋아. 그러나 뭔가 발견했을 때에는 우리에게 연락을 하게. 절대 혼자 행동을 하면 안 되네. 그 곳에는 내 부하들이 있을 걸세." "잘 알았습니다."   원자 폭발은 막을 수 없다.   얼마 안되어 나는 밥랜드 거리에 있는 바스코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 곳에는 얼굴을 아는 형사와 또 한 사람이 사무실 안을 조사하고 있었다. 구레아리 경부가 전화를 걸어서 부하들에게 연락을 한 모양인지 그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나는 책상과 선반 등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형사들이 뒤진 뒤라 형편없이 흐트러져 있어서 이렇다 한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지쳐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가며 방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벽에는 광산과, UTC 본사와, 항구에서 배에 짐을 싣고 있는 칼라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광석을 실어내는 풍경의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부두에 대놓고 있는 배 이름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았는데, 곁에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상파울로 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지명이 아니고 배 이름이다!" 나는 무심코 큰 소리로 외쳤다. 형사들은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그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얼굴을 아는 형사가 전화를 받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 "알았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경부가 프란드 연구소로 빨리 오라는 전갈이다. 당신은 멋대로 행동하면 안되오." "알고 있어요." 두 형사가 나가고 난 다음 나는 서류 상자를 뒤적거렸다. 거기에서 주문서 한 장을 보았다. 거기에는 '마그네슘 배달할 곳-런던 항 엘루 도크(부두) 상파울로 호' 라고, 적혀 있었다. "레이너 박사가 '엘루'하고 말을 끊었는데, 이 엘루 도크라는 말이군! 이제 알았다!"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프란드 연구소에 전화를 걸었으나, 구레아리 경부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나는 경부가 오면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밖으로 나왔다. 구레아리 경부와 연락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지만, 그렇게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데이의 생명이 위태롭다. 1분이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늦을지도 모른다. 나는 엘루 도크로 차를 달렸다. 엘루 도크는 썩은 냄새가 나는 지저분한 부두였다. 이 곳은 작은 화물선만 사용하는 쇠퇴한 부두인데, 이 곳에 서있는 창고도 오래되어 낡은 건물뿐이었다. 부두 근처까지 왔을 때, 폭격을 당해 형편없이 되어 버린 너덜너덜한 창고가 보였다. 입구에는 'UTC 화물 창고'라고 씌어져 있었다. 나는 그 창고를 지나쳐 다른 창고 쪽으로 차를 달렸다. 창고 가까운 바다에 1척의 소형 화물선이 떠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이 상파울로 호 같았다. 나는 상파울로 호와 창고를 훑어보았다. 바스코와 데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창고 정면의 출입문 앞에 다가가서 무거운 출입문을 당겼다. 문은 끽 소리가 나고 곧 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계단이 있고 그 위에 있는 방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거기에는 누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쇠파이프를 하나 손에 집어들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반쯤 올라갔을 때 아래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그 때 회중전등 빛이 내 얼굴을 비추었다. 아래에 있던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바로 그 때 위에 있는 방의 문이 열리고 바스코가 쑥 나왔다. "아레건인가?" 바스코가 물었다. 나는 그 순간 계단 손잡이를 뛰어넘어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그 사람과 맞붙어 마룻바닥에서 뒹굴며 싸웠다. 싸우는 동안에 나는 누군가에게 머리를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갑자기 물을 끼얹어 나는 정신을 되찾았다. 눈을 떠보니 가짜 레이너가 빈 물통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즉 그 사람이 아레건이었다. 나는 방안을 한바퀴 돌아보았다. 지저분한 창고 안인데, 천장에는 거미줄이 걸려 있고 방 한구석에 상자 2개를 포갠 것 위에 초가 커져 있었다. 그 옆에 광석 부대와 파라핀(석유에서 분리되는 희고 반투명한 납 모양의 고체)이 쌓여 있었다. 그 곳에 데이가 힘없이 앉아 있고, 그 옆에 바스코가 앉아 있었다. "정말 너는 바보 같은 놈이다." 바스코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럴까? 그렇게도 뽐내던 UTC도 이제는 마지막이다. 곧 여기에 경찰이 달려올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오기 전에 프란드 연구소에 연락해놓았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단순한 바보야. 우리 조직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복잡하게 되어 있다. 자네가 프란드 연구소에 부탁한 말은 절대로 경찰에 연락이 안 될 것이다." 나는 속으로 놀라면서 바스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득의에 찬 미소를 띠었다. "그것 뿐이 아니다. 아무리 경찰이 엄중히 감시하여도 프란드 연구소의 폭발은 막을 수 없다. 원자로는 조금만 있으면 큰 폭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너는 그 전에 이미 죽을 것이니, 굉장한 폭발을 구경 못할 것이다. 바스코는 그렇게 말한 다음 아레건을 방 모퉁이로 불러 무엇인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타오르다.   내가 데이 곁으로 다가가자, 데이는 나를 보고 몸을 떨고 있었다. "델라니 씨, 용서해요. 내가 잘못하여 당신까지 이렇게 만들고 말았어요." "염려 마! 그것보다 그들은 왜 기다리고 있을까?" "한 동료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 사람이 오면 모터보트를 타고 상파울로 호로 갈 모양이에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모르겠어요." 데이는 나에게 매달렸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상파울로 호를 탈 때까지는 무사할 것이다. 그리고 출항한 다음 바다에 떠밀어 넣을 거다." 그 때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던 바스코와 아레건이 이 쪽으로 왔다. "델라니 군, 내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올 때까지 조용히 있는 것이 좋을 거야. 만약 탈출을 기도하면 아레건이 너희들을 그 자리에서 죽일 것이니까." 바스코가 턱으로 가리킨 곳에 대형 자동 권총을 쥔 아레건이 서 있었다. 바스코는 밖으로 나갔다. 아레건은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촛불 쪽으로 걸어갔다.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왜 이래!" 아레건은 권총을 겨누어 다가와서 말했다. "아레건, 생각을 고치는 것이 어때!"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아레건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바스코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일이 모두 끝나면 바스코에게 귀찮은 사람이 되고 만다. 도망쳐봤자 한평생 숨어살아야 한다. 그리고 바스코에게는 너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언젠가 너는 경찰에 잡히게 될 것이니까. 그럴 경우 바스코는 아주 난처하게 된다. 바스코는 그것을 예상하고 너를 살려 두지 않을 거다." "닥쳐라!" 아레건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호령했다. "마음을 고치게, 아레건. 너는 이용당할 뿐이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네.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을 거다." "이 놈 더 중얼거리면……." 아레건이 가까이 왔다. 나는 무서워서 피하는 체 한 발 뒷걸음질하여 일부러 촛불을 세워 놓은 상자에 부딪쳤다. 촛불은 파라핀 위에 굴러 떨어져서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이 놈!" 아레건이 외치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내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마룻바닥에 엎드리며 광석 부대를 집어 던졌다. 그 부대가 아레건의 얼굴에 맞았다. 그 순간 또 한 발 총알이 튀어나왔다. 나는 아레건에게 덤벼들었다. 아레건은 넘어져 타오르는 파라핀 안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는 비명을 울렸다. 나는 아레건을 발로 차고 그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다. "꼼짝 마라!" 나는 호령했다. 아레건은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마룻바닥에서 대굴대굴 뒹굴었다. 불은 점점 퍼져서 나무 계단과 문에까지 번져갔다. "나가자! 아레건, 밖으로 나가자!" 나는 데이의 팔을 잡고 아레건을 앞세워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불은 이미 2층 창문으로 솟아오르고 사방이 불바다가 되었다. 나는 데이에게 차를 몰고 오라 하여, 아레건의 손을 묶고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프란드 원자력 연구소로 빠르게 차를 달렸다.   위기 일발   원자력 연구소에 도착한 것은 8시쯤이었다. 연구소 안은 8시 반에 시작될 테스트 때문에 몹시 분주하였다. 구레아리 경부는 아직 부하 형사와 같이 연구소 안에 있었다. 테스트하는 동안 경계를 맡은 것이다. 나는 차에서 아레건을 붙들어 내려 경부에게 인도하고, 그 동안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구레아리 경부는 그 장소에서 아레건을 심문하였다. 그러나 아레건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건을 별실로 데려가고, 바스코 체포의 수배를 지시하고 나서, 경부는 나를 흘려보면서 말했다. "델라니, 자네는 또 자네 멋대로 행동하였구나. 그만큼 주의시켰는데, 왜 우리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았는가?" "아니, 나는 틀림없이 연락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연락을 받고 당신이 급히 달려올 줄 알았어요. 그러나 소식조차 없어서 나 혼자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나는 바스코가 말한 것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요. 바스코도 그렇게 말했어요. 자기들의 조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연구소 내에 스파이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연락하는 것을 방해했군요." 구레아리 경부는 유심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것뿐 아닙니다. 바스코는 연구소의 폭발은 절대로 경찰이 막을 수 없고, 꼭 파괴시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군요." 우리는 거의 동시에 시계를 보았다. 8시 15분, 15분 후에는 테스트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경부는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인랜드 박사에게 가 보자." 우리는 원자로 실에서 테스트를 감독하고 있는 메인랜드 박사를 만나러 갔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박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상한데, 그 연락은 나도 받지 않았소. 그 때의 교환수에게 물어 봅시다." 그렇게 말하고 박사가 전화를 걸었으나, 그 때 교환수는 퇴근하고 없었다. "내일 출근하면 다시 물어 봅시다." 메인랜드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그런데, 그 아레건이라는 사람이 뭔가 자백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나는 메인랜드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박사님, 테스트는 예정대로 하는 것입니까?" "물론이지요. 장치는 전부 점검하여 아무 곳에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상이 없으면 테스트를 해야지요." "그러나 바스코는 꼭 이것을 파괴시킨다고 하던데요." "이상 없는 것을 내 자신이 확인했으니 틀림이 없을 겁니다." 구레아리 경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 더 아레건을 심문하겠습니다. 무언가 자백할는지 모르니까요." "나도 따라 가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메인랜드 박사는, "나는 여기에 있겠습니다. 곧 테스트가 시작될 것이니까요." 하고, 대꾸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경부와 나는 아레건이 있는 방으로 갔다. 아레건은 냉랭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레건, 만약 바스코가 말한 것이 정말이라면 이 연구소는 10분 후에 핵폭발을 일으킨다. 그로 인하여 연구소는 방사능으로 덮이게 되고 우리들은 형태도 없어질 것이다.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어떨까?" 내가 부드럽게 말했으나, 아레건의 표정은 변화하지 않았다. "도대체 너는 남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가? 왜 너만 희생당하려 하는가." "나는 이용당하고 있지 않다. 우리들의 친구는 비겁한 사람이 없다. 생사를 같이 하자고 맹세했다. 만약 이 곳이 폭발되면 그 친구들도 나와 같이 죽을 것이다. 내가 그 친구들을 배반할 줄 아는가?" 아레건은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확고한 신념이 깃들여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말해 보았자 허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계의 분침은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메인랜드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한 번 이상이 없는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나이였다. "메인랜드 박사는 방금 나가셨습니다. 조금 전에 전화가 걸려 와서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전갈이 왔답니다. 박사는 병원에 가셨습니다. 실험은 계획대로 진행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구레아리 경부에게 전했다. 구레아리 경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전화를 잡고 무엇인가 몇 마디 빠른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와 아레건을 번갈아 보면서, "메인랜드 박사의 부인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는 구실을 만들어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하고 말했다. "엉터리다. 거짓말이다!" 갑자기 아레건이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틀림없다. 지금 내가 박사 부인과 직접 대화했다. 부인은 집에 계시더라." "이 놈이 나를 속였구나. 나를 희생시키고 저만 빠져나갔구나!" 아레건은 고함을 지르고는 내 몸을 양손으로 붙들고 부르르 떨었다. "이제 알았겠지! 자, 어디에 폭발 장치를 했는가 말해라!" 아레건은 잠시 동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원자로 안이다. 제어봉 한 개에 플루토늄을 장전하여 놓았다. 제어봉을 넣으면 핵폭발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2분전이었다. 나는 원자로로 달려갔다. 스위치 판 앞에 서있던 계원이 달려오는 나를 보고 놀란 빛으로 돌아보았다. 이 곳 시계는 8시 2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분전이다. 곧 스위치를 넣으려고 할 때였다. "기다려! 스위치를 넣으면 폭발한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모든 일은 끝났다. 바스코와 메인랜드는 상파울로 호에 타고 있는 것을 수상 경찰이 체포했다. 메인랜드는 처음부터 UTC를 중심으로 한 스파이 단의 한 패이고, 원자력 연구소의 비밀에 대해 내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너 박사의 로켓 연료의 비밀을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자, 연구소를 파괴시켜 연구를 허사로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폭발을 방지하지 못했더라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정말 위기 일발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다음 데이와 내가 연구소를 나오려 할 때, 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는 올리베 편집장으로부터 걸려온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큰 소리로 호령했다. "델라니, 원고는 아직 안 썼나? 왜 꾸물거리는가!" "편집장, 나는 정직 상태가 아니었습니까?" "그렇건 말건 자네는 기자이다. 델라니, 특종 기사가 있는데 정직이 무슨 상관이냐? 기사를 쓰는 것이 기자이다! 지금부터 두 시간 안으로 기사를 써서 가지고 와라! 알겠나?" "알았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데이도 따라 웃고 있었다. 나는 줄곧 호령만 하는 편집장이 어쩐지 좋아졌다.      
1085    로봇 머신 X -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댓글:  조회:492  추천:0  2021-03-19
로봇 머신 X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편집 위원 아동문학가 이 원수 박 홍근/문학박사 최 인학 공학박사 양 옥룡/이학박사 김 희규 전교육감 김 성묵     아이 보는 로봇 로비··············· 3 수성 로봇 스피디················ 35 거짓말쟁이 로봇 하비·············· 61 전자 두뇌 머신 X················ 90   작품 해설··················· 119   아이 보는 로봇 로비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정성환 옮김/ 김완기 그림   로비의 우울증   "97, 98, 99, 100.“ 글로리아는 눈을 뜨고 살며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정원에서는 윙윙 하는 벌레 소리가 들려 온다. '어디에 숨었을까, 로비는.' 글로리아는 풀숲과 나무 뒤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로비는 없었다. '틀림없이 집안에 숨었을 거야. 집안에는 숨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 글로리아는 심술이 나서 금세 볼이 부었다. 그리고 빨간 지붕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때, 뒤쪽 풀숲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글로리아가 뒤돌아보자, 시꺼멓고 커다란 것이 뛰어나왔다. "앗, 로비다. 찾았다!“ 글로리아는 소리쳤다. 로비는 휭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정원 끝의 전나무가 결승점이다. 글로리아에게 붙잡히기 전에 전나무에 당도하면 로비의 승리다. "비겁해, 로비. 뛰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글로리아는 숨을 할딱이며 로비를 쫓아갔다. 전나무까지 앞으로 5미터. 그러자 로비는 갑자기 달리기를 그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글로리아는 힘껏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로비를 붙잡았다. "로비는 참 느리구나." 글로리아는 파란 눈을 굴리며 의기 양양해졌다. 그러나 로비는 잠자코 있다. 빨간 유리 눈을 번쩍이며 글로리아를 지켜보고 있다. 로비는 말을 하지 못하는 로봇이었다. 진짜로 달리면 어른도 당할 수 없다. 하지만 글로리아에겐 일부러 져 준다. 글로리아가 기뻐하는 것이 로비에겐 무척 반가운 것이다. "이번엔 로비가 술래야." 글로리아가 말했다. 로비는 전나무 아래에 서서 눈을 감았다. 커다란 원통형 몸뚱이 속에서 째깍째깍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뱃속에 있는 기계가 시간을 재고 있는 것이다. 째깍째깍 30초, 째깍째깍 60초, 째깍째깍 90초...... 정확히 100초가 지났다. 로비는 눈을 번쩍 떴다. 빨간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옳지, 저 나무 그늘에 보이는 빨간 것은 글로리아의 양복이다.’ 로비는 슬며시 떡갈나무로 다가가서 재빨리 빨간 양복 자락을 잡았다. 글로리아가 금세 볼이 퉁퉁 부어 떡갈나무 그늘에서 나왔다. “엉터리야, 로비는. 틀림없이 보고 있었지?” “아냐, 아냐.”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 하겠어. 로비가 엉터리 짓만 하니까 재미가 없어. 이번엔 에어코스터(공중 태워주기)놀이야.” 하고 말했다. 글로리아가 너무도 억울한 말만 하니까 착한 로비도 화가 났다. 잔디 위에 주저앉아 모른 체하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글로리아는 당황하여 로비를 달랬다. "미안해, 로비. 이젠 엉터리 짓 했다고 안 할께.“ 그래도 로비는 모른 체하고 있다. 글로리아가 보드라 하 주 운 뺨을 로비의 딱딱한 강철 뺨에 갖다 대고 사과해도 허사였다. 글로리아는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그럼 좋아. 그 대신 이제부터는 절대로 옛날 이야기는 해 주지 않을 테야." 그 말을 들은 로비는 황급히 일어섰다. '옛날 이야기를 안 해 주면 큰일이다. ' 로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 하면 로비는 옛날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다. 글로리아는 계획이 들어맞았으므로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자, 로비, 너는 에어코스터야." 글로리아는 로비의 어깨 위로 기어올라갔다. "출발! 로비!“ 글로리아는 구령을 내렸다. 로비는 굉장한 힘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글로리아의 귓전에서 휙휙 바람 소리가 일었다. “부릉.” 글로리아는 로비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자 로비 에어코스터는 크게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푸른 잔디가 휘청하고 흔들렸다. 글로리아는 로비의 목에 꼭 매달렸다. "앗, 해적이다! 와아, 해치워라, 따따따따." 말괄량이 글로리아는 기관총을 쏘는 흉내를 냈다. 로비도 지지 않고 스피드를 내며 잔디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글로리아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달리고 있는 느낌이다. 에어코스터 놀이가 끝나자 이번에는 옛날 이야기 차례였다. 로비와 글로리아는 잔디 위에 누웠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지?“ 글로리아가 물었다. 로비는 손가락 한 개를 내밀더니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또 신데렐라야? 용케 질리지도 않는구나." 로비는 신데렐라 아가씨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또다시 손가락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할 수 없구나." 글로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아주 옛날에 신데렐라라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심술 사나운 계모와 못생긴 두 언니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로비의 눈이 저녁놀의 서쪽 하늘처럼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때, "글로리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로비는 흠칫 하고 얼굴을 들었다. 글로리아의 어머니다. 글로리아는 슬픈 듯이 로비를 보았다. "로비, 돌아가자, 엄마한테 꾸중듣기 전에, " 로비는 이야기를 계속 듣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다. 하지만 곧 일어섰다. 어머니한테 거역하면 안 된다. 로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글로리아의 어머니는 로비를 싫어했다. 어머니는 현관에 버티고 서 있었다. "도대체 어딜 갔었니? 목이 쉬도록 불렀는데." 어머니는 쨍쨍 소리쳤다. "미안해요, 엄마. 정원에서 로비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어." 글로리아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어머니는 로비를 노려보고, "안 되겠어, 로비. 너까지 식사시간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자, 이젠 됐어. 방으로 들어가 있어요." 글로리아는 당황하여 엄마의 앞치마 자락을 붙잡았다. "부탁이야, 엄마. 로비를 보내지 마. 이야기가 아직 덜 끝났어.“ "아니, 그건 안 돼." "로비는 얌전하게 있을 거야.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는단 말야. 그렇지, 로비?“ 로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엄한 얼굴을 하고, "말을 안 들으면 앞으론 로비와 놀지 못하게 할거야." 글로리아의 눈에 어느 새 눈물이 괴었다. “그럼, 할 수 없어, 로비. 네 방으로 가. 이야기는 내일 또 하자." 로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맥없이 방을 나갔다. 어머니는 정말 미운 듯이 로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사라진 로봇   그 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과학자인 아버지는 매일 밤늦게까지 글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침 금성 여행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어머니는 책상머리에 서서 말을 꺼냈다. "그 로봇은 안 되겠어요. 아침부터 밤까지 글로리아에게만 붙어 있어요." 아버지는 보고서에서 얼굴을 쳐들었다. "아이 보는 로봇이니까 당연하잖소? 그만큼 훌륭한 로봇은 좀처럼 구하기 힘들단 말야." 아버지는 다시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의 소중한 외동딸을 로봇에게 맡길 수는 없어요. 로봇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뭐여요.“ "로비는 벌써 2년이나 우리 집에서 일하고 있는데, 실수한 일은 없잖소." "그거야 아직까지는 없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천천히 파이프에 불을 당겼다. "잘 들어요, 여보. 로봇은 말야, 인간보다도 훨씬 신뢰할 수 있어. 로비는 아이들의 놀이 상대를 하는 게 그의 일이거든. 친절하고, 싹싹하고, 얌전하고, 그렇게 훌륭한 아이 보는 로봇은 온 세계를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어요.“ "그렇지만 기계니까 고장이 날는지도 모르잖아요. 만일 어딘가 잘못돼서 글로리아를......“ "바보 같은 소린 그만 해요." 아버지는 크게 나무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근심스러운 얼굴을 보자 마음을 돌리고, 로비가 절대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로봇은 로봇법 3원칙이라는 세 개의 원칙에 따라 만드는 거야. 첫째 규칙은, 로봇은 인간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거야." 아버지는 후유 하고 파이프의 연기를 내뿜었다. “만일 로봇이 이 규칙을 어기려고 하면 몸 속의 기계가 부서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거야. 자, 이만하면 안심하겠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방을 나갔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저녁의 일이다. 아버지가 근무처에서 돌아오자 어머니가 창백한 얼굴로 문간에 서 있었다. "여보, 이젠 더 참을 수 없어요. 로비가 위험하다고 이웃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 집엘 오지 않아요." 아버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잖소. 로비가 글로리아의 뒷바라지만 잘 해 주면 그것으로 그만이야." 어머니는 안타깝다는 듯이, "하지만 글로리아는 로비하고 밖에 놀지를 않아요. 이웃 아이들하고는 통 놀려고 하지를 않아요. 저러다간 장차 아무도 상대를 안 하게 될 거여요. 그런 건 이제 로봇 회사에 돌려 주셔요. 제발 부탁이어요."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어머니가 너무도 필사적이었으므로 아버지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걱정할 것 없어.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마침내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다음 일요일의 일이었다. 아침 식사 때, 테이블 앞에 앉은 아버지는 글로리아에게 말했다. “글로리아, 낮에 시내로 서커스를 구경하러 가자.” 글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와아, 신난다.“ 글로리아는 펄쩍 뛰며 기뻐했다. “로비에게 말해 주고 올 테야." 하며 방에서 뛰어나가려고 했다. 아버지는 황급히, “로비는 안돼. 로봇은 넣어 주지 않는단 말야." 글로리아는 약간 실망하는 것 같았으나 곧 체념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글로리아는 아버지와 함께 힘차게 집을 나섰다. 시내까지는 제트카로 10분이 걸린다. 아버지가 제트카를 운전했다. 하늘을 나는 서커스는 대단한 인기여서 온 시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코끼리의 공중 곡예는 근사했다. 유리로 된 커다란 상자 속에서 코끼리가 둥실둥실 공중을 헤엄치는 것이다. 글로리아는 완전히 흥분했다. 돌아오는 제트카 속에서도 글로리아는 방금 보고 온 공중 서커스에 관한 일만 지껄이고 있었다. 로비 생각 같은 건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생글생글하면서 맞이했다. 어머니 뒤에서 귀여운 콜리가 아장아장 따라왔다. 글로리아는 푸른 눈을 깜박이며, "어머나, 예쁜 강아지다. 어떻게 된 거야?“ "너한테 사 주는 거야. 잘 귀여워해 줘라." 어머니는 콜리를 껴안아 글로리아에게 내밀었다. "아이, 좋아. 앗 그렇지, 로비에게 보여 줘야지." 그 말을 듣자 어머니는 흠칫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는 난처한 듯이 눈길을 돌렸다. "로비, 로비.“ 글로리아는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곧 달려왔을 로비가 언제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커스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화가 났을까?' 글로리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콜리를 보여 주면 틀림없이 화가 풀릴 거야.' 글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급히 지하실로 달려갔다. "로비, 이리 나와. 좋은 것 보여 줄게." 글로리아는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방안은 조용했다. 글로리아는 어쩐지 가슴이 설레었다. 급히 문을 열었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로비가 없다!' 글로리아의 심장은 멈출 것만 같았다. 글로리아는 황급히 어머니한테로 달려갔다. “로비가 없어, 엄마. 로비가 없어졌어." 글로리아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넘쳐흘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본 채 잠자코 있었다. "엄마, 로비는 어디 있어?“ 글로리아는 어머니에게 매달렸다. 어머니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글로리아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글로리아, 로비는 말없이 집을 나가 버렸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어. 하지만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게다. 그때까지 이 강아지와 놀아라." 글로리아의 뺨에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런 개는 보기도 싫어. 나는 로비하고 놀 테야. 로비, 로비, 돌아와 줘......” 글로리아는 울부짖었다. “울기는 왜 우니. 로비는 한낱 기계가 아니냐. 언젠가는 망가질 텐데." "로비는 기계가 아냐. 내 친구야. 로비, 로비." 글로리아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글로리아가 우는 소리가 어머니한테까지 들렸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은, 로비는 오늘 로봇 회사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글로리아가 아무리 기다려도 로비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2, 3일이 지나면 씻은 듯이 잊어버리겠지, 하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이었다. 글로리아는 이제 홀짝홀짝 울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전혀 웃지를 않게 되었다.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창 밖을 내다보고만 있다. 어머니가 사다 준 강아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머니도 그러한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틀림없이 원기를 회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윽고 여름이 왔다. 단풍나무가 잎이 무성해져서 잔디 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여전히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머니도 걱정한 나머지 무척 우울해졌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요즘은 밥도 잘 안 먹고 얼굴빛도 나빠지기만 해요." “그럴 거야. 역시 로비를 도로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럼 지금 곧 로봇 회사에 전화를 걸어야겠군.“ 아버지는 원기 있게 일어섰다. 그러자 어머니는 삽시간에 얼굴빛이 변했다. “안 돼요. 모처럼 내쫓은 것을 다시 데려오다니, 당치도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아버지는 불끈해서 내쏘았다. 어머니는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어딘가 여행을 데려가면 어떨까요? 집에 있는 것이 나쁠런지도 몰라요. 눈에 보이는 것마다 로비를 생각나게 하는 것뿐일 테니까요." "응, 그건 좋은 생각이군." 아버지도 찬성했다. "어디로 갈까?“ "뉴욕이 좋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여름의 뉴욕이라면 한증막 같은 더위여서 일부러 고생하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뉴욕에는 글로리아의 마음에 드는 것이 많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할 수 없었다. 그 날 밤, 어머니는 글로리아에게 뉴욕으로 여행 간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글로리아의 눈이 오랜만에 빛났다. 일주일 후, 글로리아 일행은 뉴욕 행 제트기 올라탔다. 글로리아는 초음속 제트기에 타는 것이 처음이었다. 뉴욕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글로리아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창문 아래로 보이는 소프트 크림과 같은 뭉실뭉실한 구름도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글로리아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매우 반가워서, "뉴욕에 도착하면 매일 밤 공중 서커스를 보러 가자.“ 고 말했다 그러자 글로리아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엄마, 숨기지 않아도 좋아. 나는 다 알고 있어” 어머니는 처음에 글로리아가 무슨 말을 꺼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눈을 깜박거렸다. 글로리아는 어머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로비를 찾으러 가는 거죠?” 어머니는 말문이 막힐 만큼 놀랐다. 그러나 억지로 웃음을 보이며, "응, 그래. 너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단다.“ 하고 말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글로리아는 뉴욕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쓸 거라고 어머니는 염려한 것이다. 글로리아는 생긋이 웃고 나서 어머니한테 살짝 키스를 했다.     말하는 로버트   뉴욕은 미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다. 1천 미터 가량의 높은 빌딩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한가로운 시골 마을에서 자란 글로리아는 눈이 빙빙 돌 만큼 놀라 버렸다. 보는 것, 듣는 것이 모두 신기한 것뿐이었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성층권 관측탑과 도시 한복판에 있는 동물원은 글로리아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았다. 성층권 관측탑에 올라가 하늘을 보니, 대낮인데도 하늘은 밤과 같이 어둡고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평선은 공처럼 둥글게 보였다. 동물원 복판쯤에 있는 커다란 연못에서는 향유고래가 헤엄치고 있었다. 고래가 등으로 물을 뿜어내는 것을 글로리아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롱아일랜드에서는 유리로 된 해저 유람선을 탔다. 깊은 바다 밑은 꿈나라와도 같았다. 흔들흔들 일렁거리는 유령과 같은 해초 사이를 지나가자, 이상한 모양의 물고기가 떼지어 몰려왔다. 물고기는 모두 파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박물관과 유원지에도 갔다. 어디를 가나 글로리아는 매우 즐거운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보고 안심했다. 뉴욕에 온 보람이 있다고, 아버지도 무척 기뻐하셨다. 글로리아는 로비를 정말로 잊어버린 것일까? 이윽고 뉴욕에 머물러 있을 날도 며칠 남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글로리아들은 과학공업박물관에 갔다. 거기서 글로리아는 뜻하지 않은 것을 만난 것이다. 박물관에서는 마침 아이들을 위한 전람회가 있었다. 회장에는 이상한 기계가 잔뜩 진열되어 있어, 글로리아는 열심히 보며 다녔다. 일렉트로 매그닛 (전자석) 앞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열심히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어머니가 정신을 차려 보니, 글로리아의 모습이 안 보였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글로리아의 대답은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글로리아는 엄마에게 말도 안 하고 밖에 나갈 아이가 아니다. '틀림없이 이 건물 안에 있다. '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안내원과 함께 넓은 건물 안을 찾아 헤맸다. 글로리아는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글로리아는 박물관 구석에 있는 의 방에 몰래 숨어 들어간 것이다. 조금 전, 부모님들과 이 방 앞을 지날 때 의 방이라는 푯말을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말하는 로봇은 로비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중에 물어 보자.' 글로리아는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글로리아는 부모님들이 일렉트로 매그닛에 정실이 팔려 있는 사이에 의 방으로 달려갔다. 는 로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선과 코일과 톱니바퀴가 네모진 커다란 쇠상자에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런 것이 말을 할 수 있을까?' 글로리아는 낙심했다. 그러나 결심하고 물어 보았다. "저어, 당신은 말을 하는 로봇인가요?" 그러자 톱니바퀴가 끼익 끼익 돌면서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말을 하는-- 로봇이다.“ '아아, 잘됐다.' 하고 글로리아는 생각했다. "그럼 로비의 일을 알고 계시나요?“ "로비? 누구- 말이야?“ "저의 친구여요. 키는 저의 두 배쯤이고요, 아주 친절하고 싹싹해요. 하지만 가끔 장난도 해요." 글로리아는 열심히 설명했다. 는 로비라는 이름은 들은 일도 없었으므로 몹시 난처했다. "그건 - 로봇인가?“ "예, 로봇여요. 하지만 사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요.“ '로봇 - 나와 똑같은 로봇인가?“ "예, 그렇다니까요. 어서 빨리 로비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줘요." 그러자 의 톱니바퀴가 와그르르 하고 심한 소리를 냈다. 코일에서 반짝반짝 하고 빨간 불꽃이 튀었다. 글로리아는 깜짝 놀라, "로봇 씨, 로봇 씨, 어떻게 된 거여요?" 그러나 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너무 열심히 생각했기 때문에 코일이 타 버린 것이다. 그 때, 글로리아의 뒤쪽에서 요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러 왔다. "있어요! 이런 곳에 있었어!“ 글로리아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어머니가 달려 들어왔다. "어머나,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니? 우린 얼마나 걱정했다고. 나쁜 애 같으니." 어머니는 글로리아를 힘껏 껴안았다. 글로리아는 어머니를 쳐다보며, "난 말하는 로봇에게 물어 보러 왔어. 로비가 있는 곳을 가르쳐 달래려고 말야." 그 말을 들은 어머니의 얼굴은 삽시간에 흐려졌다. '이 아이는 여전히 로비의 일을 잊지 않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어머니는 지금까지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 때부터 글로리아는 또다시 그전처럼 침울해졌다. 다음 날도 호텔 방에 틀어박혀서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몹시 난처했다. 어떻게 하면 글로리아가 원기를 되찾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했으나 좀처럼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얼굴을 쳐들며 소리쳤다. "좋은 수가 있어." 어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글로리아를 로봇 회사로 데려가는 거야. 그리고 로봇을 조립하는 장면을 보여 주는 거지." 로봇 회사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글로리아는 로비가 보통 기계라는 걸 잊고 있어. 인간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까 로비의 몸뚱이는 피와 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철과 동선으로 되어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면 되는 거야." "효과가 있을까요?“ 어머니는 아직도 근심스러운 것 같았다. "염려 없어. 내게 맡기라고. 지금 곧 로봇 회사에 전화를 걸어 부탁해야지." 아버지는 곧 전화를 걸었다.   로봇 공장   US 로봇 회사는 텍사스의 사막 한복판에 서 있다. 은빛 건물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키다리 지배인이 글로리아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천천히 견학하고 가십시오. 저희 공장에서는 하루에 1천 대의 로봇을 생산합니다. 아이 보는 로봇, 청소 로봇, 요리하는 로봇, 세탁하는 로봇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키다리 지배인은 연방 지껄이며 공장 안을 안내해 주었다. 로봇 조립 공장은 지하 10층에 있었다. 대낮처럼 밝고, 기계 소리가 윙윙거리며 희미하게 들려왔다. 둥근 테이블이나 네모난 테이블을 둘러싸고 로봇들이 부지런히 새로운 로봇을 조립하고 있었다. “로봇을 조립하는 데는 먼저 이것과 이것을--.” 키다리 지배인이 설명을 시작했다. 지배인의 설명은 글로리아에겐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어느 로봇이나 곁눈도 팔지 않고 손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글로리아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시한 로봇이구나.’ 글로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엔 방 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방 한구석의 삼각 테이블에서 일하고 있는 로봇이 글로리아의 눈에 띄었다. 그 로봇은 다른 로봇들에 비하면 손의 움직임이 무척 느렸다. 게다가---어딘가 모르게 로비와 비슷하다...... 글로리아의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했다. '어쩌면 로비일지도 모른다.‘ 글로리아는 아버지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눈을 똑바로 뜨고 보았다. '앗, 그렇다. 역시 로비야! ' "로비!“ 글로리아는 소리 쳤다. 그러자 그 로봇은 흠칫하면서 비틀거렸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덜커덩 바닥에 떨어뜨렸다. 글로리아는 말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들은 깜짝 놀라 글로리아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 때다. 무서운 일이 일어난 것은. 방 저 쪽에서 커다란 트랙터가 굉장한 속력으로 달려왔다. 아버지는 미친 사람처럼 튀어 나갔다. "트랙터를 세워!“ 지배인이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시꺼먼 트랙터는 우르릉 하고 굉장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의 눈앞을 지나쳤다. 글로리아의 몸이 트랙터에 깔렸다고 생각한 순간, 옆에서 시꺼먼 덩어리가 튀어 나와 글로리아의 몸을 획 잡아챘다. 앗, 하는 순간의 일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금방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정신을 차려 보니, 로봇이 글로리아를 껴안고 서 있었다. 그것은 로비였다. 글로리아의 위험을 깨달은 로비는 용감하게 뛰어들어 글로리아를 구한 것이다. 로비는 글로리아의 집을 나와 로봇 회사로 돌아온 후, 계속해서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리아는 로비의 목에 꼭 매달렸다. "로비, 이젠 아무 데도 가면 안 돼. 알았지?“ 글로리아는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로비의 딱딱한 손을 잡고, "고맙다, 로비. 잘해 주었어.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향해, "로비는 글로리아의 생명의 은인이야. 역시 집으로 데려 가야겠어.“ 아버지의 그 말씀에 어머니의 완고한 마음도 풀렸다. "예, 그렇게 해요. 역시 로비는 글로리아의 가장 친한 친구였군요.“ 글로리아의 뺨이 오랜만에 장미 빛으로 빛났다. “로비, 이번에 또 말없이 어디로 가면, 신데렐라 아가씨의 이야기는 절대로 해 주지 않을 거야." 로비는 강철 팔로 글로리아를 정답게 껴안았다. 그 빨간 눈은 반짝반짝 빛나, '이젠 절대로 아무 데도 안 가겠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성 로봇 스피디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정성환 옮김/ 김완기 그림   미아가 된 스피디   여기는 수성의 지하에 있는 광산 스테이션이다. 지금 무전실에서는 텁석부리 그레고리가 무전기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거기에 우당탕퉁탕 달려온 건 빨간 머리의 마이클 이다. "뭘 그렇게 설치고 있는 거야?“ 텁석부리 그레고리가 태평스럽게 물었다. "큰일났어. 스피디란 놈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빨간 머리 마이클의 얼굴은 창백했다. "뭐? 그거 큰일인데." 그레고리도 당황하여 일어섰다. 빨간 머리 마이클과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모두 US 로봇 회사의 기술원들이다. 머리털이 빨갛고 화를 잘 내는 것이 빨간 머리 마이클, 금빛 수염을 기르고 늘 태평스런 것이 텁석부리 그레고리다. 둘이는 늘 싸움만 하고 있지만 사실은 마음 맞는 친구로, 일도 언제나 같이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번 제 2차 수성 탐험대의 대원으로 뽑혀 멀리 수성까지 온 것이다. 2005년에 제1차 탐험대가 처음으로 수성에 착륙했다. 그리고 수성에는 소중한 광물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구정부는 곧 수성에 광산 스테이션을 만들고 로봇을 사용하여 그 광물을 파낼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데리고 간 로봇은 수성의 지독한 더위에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제 1차 탐험대는 로봇을 스테이션에 남겨놓고 철수해 버렸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로봇을 만드는 기술은 급속히 발달되어, 어떠한 더위에도 견디어 낼 로봇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제 2차 탐험대의 임무는 그 로봇을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제 1차 탐험대가 남겨 놓고 간 스테이션은 무사했다. 발전기와 무전기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테이션의 준비는 하루만에 끝나고 오늘부터 스피디의 일이 시작되었다. 스피디의 최초의 일은 셀렌을 파 오는 일이었다. 빨간 머리 마이클은 스피디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스피디, 셀렌의 언덕에 가서 셀렌을 파 오너라." 스피디는 차려 자세를 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나간 것이었다. 스피디의 걸음이라면 30분만에 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빨간 머리 마이클은 연방 시계를 보고 있었다.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마침내 다섯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텁석부리 그레고리가 말했다. "무전으로 조사해서 있는 곳을 알아냈어. 자, 이걸 보라고.“ 빨간 머리 마이클은 한 장의 지도를 내밀었다. "이 빨간 X표는 셀렌의 언덕이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까만 점은 스피디가 걸어간 자국이야." "흐음, 그렇다면 스피디는 셀렌 언덕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지 않아?“ "그렇지. 그러나 어째서 돌고 있을까? 내가 무전으로 스피디의 뒤를 쫓고 있는 동안에도 벌써 네 바퀴나 돌았단 말이야.“ "스피디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큰일이다. 우리들의 생명이 위험해.“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스피디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째서 두 사람의 생명이 위험한 것일까? 그 까닭은 이렇다. 수성은 태양에 가장 가까운 행성이다. 표면 온도는 섭씨 340도나 된다. 섭씨 100도라고 하면 물이 끓는 온도다. 340도라는 온도가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그러니까 지하의 스테이션도 냉방 장치가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다. 냉방을 하는 데는 태양열을 이용하지만 거기에는 셀렌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셀렌이 없으면 냉방을 못 한다. 냉방을 못 하면 인간은 더위 때문에 죽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불고기가 되는 건 싫어." 텁석부리 그레고리가 서글픈 목소리를 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좋은지 생각해야 하는 거야. 너처럼 머리를 움켜쥐고 있어 보았자 스피디는 돌아오지 않아.“ "그럼 어쩌잔 말이야. 로봇은 한 대면 된다고 말한 건 너야. 한 대만 더 가져왔으면 스피디를 대신할 수 있을 텐데.“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말다툼을 시작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스피디를 데려올 수 있을까 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후, 빨간 머리 마이클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창고에 제 1차 탐험대가 두고 간 로봇이 있어. 그 로봇에게 스피디를 데려오도록 하자." "10년 전의 낡은 로봇이야. 쓸 수 있을까?" 그레고리는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쓸 수 있고 말고.“ 빨간 머리 마이클은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독가스의 언덕   로봇은 지하 창고에 늘어서 있었다. 높이가 5미터, 허리 둘레가 3미터나 되는 커다란 로봇이다. "와아, 굉장히 큰 로봇이군. 이게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근심스러운 것 같았다. "아무튼 옛날의 구식 톱니바퀴가 붙어 있으니까 몸뚱이가 이렇게 큰 거야." 빨간 머리 마이클은 로봇의 앞가슴을 열고, 원자 에너지 상자를 안에 넣었다. "자, 이젠 됐어." 마이클은 로봇을 쳐다보았다. "움직이지 않잖아.“ 그레고리는 그것 보라는 듯이 말했다. "명령을 하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 거야." 마이클은 로봇을 향해, "이봐, 내 말이 들려?“ 그러자 괴물과 같은 큰 로봇의 머리가 느릿느릿 움직이며, "예, 주인님." 이라고 했다. "와아, 지독한 목소리군. 귀가 째질 것 같아." 텁석부리 그레고리가 불평했다. "너는 밖에 나갈 수 있나?“ "예, 주인님.“ "그럼 이제부터 너는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알겠어?“ "예, 주인님.“ "북쪽을 향해 7킬로미터를 가면, 너보다 작은 로봇이 있어. 발견하면 돌아오라고 명령해. 만일 명령을 듣지 않으면 강제로 끌고 오라고. 알겠나?" "예, 주인님.“ "그럼 내 뒤를 따라와. 출구까지 안내할 테니까." 마이클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으나, 로봇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주인님. 당신이 저의 어깨 위에 타시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뭐, 네 어깨에 타라고?“ 마이클은 어이가 없었다.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한숨을 쉬었다. "아아, 내가 말한 대로야. 이런 고물 로봇이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어. 우리들이 이놈을 타고 밖으로 나가면 그 자리에서 불고기가 돼 버릴 거야." "불고기, 불고기 하지 말아." 마이클은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은 낙심하여 창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잠시 후, 빨간 머리 마이클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지, 지하도로 가면 돼. 그리고 셀렌 언덕에 가장 가까운 출구로 나가는 거야. 이렇게 간단한 일을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이클은 즉시 지도를 펼치고 조사했다. 지도에 의하면 셀렌 언덕에 가장 가까운 출구는 제13호 지하도의 제 25호 출구였다. 거기서부터 셀렌 언덕까지는 약 5킬로미터. 저 로봇까지라면 20분에 왕복할 수 있다. 내열복은 뜨거운 열을 20분간은 막아준다.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와 곧 내열복을 입었다. 준비가 끝나자 두 사람은 각각 로봇의 어깨로 올라탔다. "25호 출구로 전진!“ 마이클이 소리쳤다. 두 대의 로봇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좁은 지하도는 곧게 뻗어 있어, 저 멀리 25호 출구가 바늘귀만큼 보인다. 출구까지 5분 걸렸다. 빨간 머리 마이클은 로봇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출구의 문을 열었다. 눈부신 빛이 확 하고 지하도에 비쳤다. 두 대의 로봇은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순간, 마이클과 그레고리는 앗 하고 놀랐다. 눈앞의 바위들이 온통 눈부신 빛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바위 표면에 하얀 결정이 붙어 있어, 그것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굉장하다, 마치 눈에 덮인 것 같군."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내열복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에 필터가 붙어 있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눈이 멀었을 것이다. 출구에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시꺼멓게 커다란 바위가 솟아 있었다. "이봐, 저 바위 그늘로 가라고. 거기서 정찰한다.“ 마이클이 말했다. 두 대의 로봇은 성큼성큼 바위 그늘로 갔다. 마이클은 팔목에 찬 온도계를 보았다. "이봐, 바위 그늘에서도 100도나 돼!“ "아유, 사람 죽겠네!" 하고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얼빠진 비명을 질렀다. 마이클은 망원경으로 셀렌의 언덕을 정찰하였다. "뭐가 보이나?“ "으음, 저게 셀렌의 언덕이군. 그런데 스피디의 모습이 안 보이는데." 마이클은 좀더 똑똑히 보려고 로봇의 어깨에서 일어섰다. "앗, 저건 뭐야. 어? 스피디 같은데." 마이클이 손가락질하는 쪽을 보니, 아득히 먼 곳에 까만 작은 점이 보였다. "이봐, 저기로 가!“ 마이클은 로봇에게 명령했다. 두 대의 로봇은 침착하게 걷기 시작했다. 바위 그늘에서 나서자 태양 광선이 마치 스콜(남양의 소나기)처럼 내리쬐었다. 두 사람은 무의식중에 목을 움츠렸다. "어쩐지 후끈해지는데.“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한심스런 목소리를 냈다. "아직 울기는 일러, 그레고리. 이제 점점 더 뜨거워질 거야.“ 마이클은 그레고리를 보고 히쭉 웃었다. 5분이 지났다. 스피디의 모습이 이젠 똑똑히 보인다. 은빛의 날씬한 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스피디는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를 누비며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두 사람은 갑자기 힘이 솟아올라 로봇의 어깨를 발로 찼다. "빨리 전진해!“ 그레고리가 소리쳤다. 로봇은 또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마이클은 문득 생각난 듯이 손목 시계를 보았다. "이봐, 벌써 10분이 지났어. 이 이상 더 가면 안 돼." "그렇지, 바위 그늘로 돌아가려면 10분이 걸릴 테고, 내열복은 20분밖에 유지하지 못하니, 이크 안되겠다.“ 사람은 로봇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스피디는 빨리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3백 미터. 그 때, 두 사람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스피디의 뛰는 모습이 이상했던 것이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다.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스피디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사람 쪽을 보았다. 마이클은 이젠 됐다고 생각했다. "자, 스피디. 이리로 와." 마이클이 명령했다. 스피디는 멍청하니 마이클을 보았다. "이봐, 스피디. 돌아오라고." 이번에는 그레고리가 명령했다. 그러자 스피디는 훌쩍 뒤돌아서, 먼저 오던 길로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야아, 스피디. 돌아와!“ 두 사람은 목이 터지도록 불렀다. 그러나 스피디는 뒤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셀렌의 언덕을 향해 굉장한 속력으로 달려간다. 두 사람은 낙심하여 로봇의 어깨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제 꾸물거릴 때가 아니다. 빨리 바위 그늘로 돌아가지 않으면 두 사람은 태양열로 새까맣게 타 버릴 것이다. 두 대의 로봇은 뒤로 돌아 바위 그늘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로봇 법 3대 원칙   바위 그늘로 돌아온 두 사람은 땅 위에 내려앉아 한숨 돌렸다. "스피디란 놈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마이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취한 건 아니겠지." "로봇이 어떻게 취하나. 틀림없이 어딘지 기계가 고장이 난 거야.“ "왜 고장이 났을까?" "그걸 알면 걱정을 안 하게." 마이클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바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위 너머는 여전히 눈부시게 번쩍이고 있다. 그러자 그 때, 마이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봐, 저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하얀 결정체가 뭐라고 생각해?“ "글쎄.“ "어쩌면 저것이 해결의 단서가 될는지도 모르겠어." 마이클은 힘차게 일어섰다. 그레고리도 일어섰다. "저 결정체는 무엇일까? 어쩌면 액체가 냉각돼서 된 것인지도 몰라. 수성의 이렇게 뜨거운 온도 속에서 냉각돼서 굳어지는 결정체란 무엇일까?“ "화산의 분화구에서 흘러나오는 용암이야." 텁석부리 그레고리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 어쩌면 저 셀렌의 언덕 지하에선 가스가 분출될는지도 몰라.“ "가스라고?“ "응, 이산화유황, 탄산가스, 일산화탄소와 같은 가스가 무진장 분출되는 게 틀림없어." "그건 큰일이다. 그런 가스가 닿으면 스피디의 몸은 썩어 버린단 말야." 그레고리가 말했다. 마이클은 깜짝 놀라며 그레고리를 응시했다. "그거야! 그것이 원인이야. 이젠 알았다!“ 마이클이 큰 소리를 쳐서 그레고리는 깜짝 놀랐다. "자넨 로봇 법 3대 원칙을 알고 있지?“ "그런 건 바보라도 알고 있어." 그레고리는 분개하여 쏘아붙였다. 로봇 법 3대 원칙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제 1조 로봇은 인간을 위험에 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제 2조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제 3조 로봇은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   이 3대 원칙을 로봇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이 3대 원칙과 스피디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레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스피디에게 셀렌을 캐 오라고 명령했지?“ "그렇지.“ "그래서 스피디는 제 2조의 규칙에 따라 셀렌을 캐러 갔어. 그런데 셀렌의 언덕에 가니까, 뭔가 위험한 것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 제 3조의 규칙에는 로봇은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거든. 그러니까 스피디는 언덕에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어.“ "위험한 것이란 무엇일까?“ "그러니까 그게 가스란 말이야. 셀렌의 언덕 지하에서 뿜어 대는 일산화탄소야." "으음, 과연......” "언덕에서 도망쳐서 위험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면, 이번엔 자네의 명령이 생각나는 거야. 그래서 또다시 셀렌의 언덕으로 다가간다. 다가가면 위험한 가스가 대기하고 있다. 그래서 또 도망친다.“ "과연 그렇군. 그래서 그 곳을 빙빙 돌고 있군." "그렇게 빙빙 돌고 있는 동안에 기계가 고장이 나서, 저렇게 술에 취한 사람처럼 된 거야." 이것으로 원인은 알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스피디를 데려올 수 있을까? 마이클은 다시 로봇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망원경으로 보니 스피디는 여전히 셀렌의 언덕을 휘청거리며 돌고 있었다. "이 로봇들을 이용하여 어떻게든 스피디를 쫓아가 보세.“ 텁석부리 그레고리가 말했다. "이런 느림보 로봇한테 스피디가 붙잡히겠어?“ 마이클은 바보 같은 소리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열복 속이 차츰 더워지기 시작했다. 바위 그늘에서도 100도나 되니까 무리도 아니다. 두 사람의 이마에는 비지땀이 흘렀다. 별안간 마이클이 소리쳤다. "이봐, 좋은 생각이 있어." "뭐야?“ "알겠나, 제 1조의 규칙을 인간을 위험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이것은 세 가지 규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이야. 로봇은 제 2조, 제 3조의 규칙을 지키기 전에 우선 제 1조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맞았어.“ 만일, 마이클이나 그레고리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면 스피디는 어떻게 할까? 즉시 마이클들을 구하러 달려올 것이다. 그 때 붙잡으면 된다고 마이클은 생각한 것이다. "과연, 그것 참 멋진 생각인데, 내가 로봇에 타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그리고 불고기가 될 지경이면 스피디가 구해 주러 달려온다, 이거지?“ "응, 그렇지만 제대로 안 되면 저승 행이야." "좋아, 그럼 갔다 오겠어." "이봐, 기다려. 자네가 간다고는 정하지 않았어. 제비뽑기로 정하자.“ "제비뽑지 따위는 귀찮아. 68곱하기 95면 얼마야? 먼저 대답하는 사람이 가기로 하자."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그렇게 말하고 마이클이 눈을 끔벅이며 계산하는 것을 곁눈질로 보면서 즉석에서, "6460.“ 하고 말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바위 그늘에서 튀어 나갔다. "자식, 미리 계산해 두었구나!“ 마이클은 발을 구르며 분해했다. 텁석부리 그레고리는 울퉁불퉁한 바위 위를 조심조심 걸었다. 하얀 결정을 바라보며 걷고 있노라니, 눈이 따끔따끔 아팠다. 발바닥은 프라이팬으로 볶아대는 것 같았다. 5분이 지났다. 셀렌의 언덕 위에 콩알만한 흑점이 보인다. 스피디다. 뒤돌아보니 마이클의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10분 걸었다. 이마에서 구슬땀이 줄줄 흐른다. 숨이 가쁘다. 스피디는 여전히 셀렌의 언덕을 돌고 있다. 뒤돌아보니 마이클은 콩알만해졌다. 15분 지났다. 이젠 자기 혼자서는 저 바위 그늘까지 돌아갈 수 없다. 스피디가 구해 주지 않으면 도중에서 새까맣게 타 버린다. 머리가 타는 듯이 뜨겁다. 눈이 돈다. 가슴이 답답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어어이, 스피디, 살려 줘. 죽을 것 같다.“ 그레고리는 필사적으로 스피디를 불렀다. 스피디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아들은 것일까? 20분 지났다. 내열복은 이 이상 더위를 막아 주지 못한다. "스피디, 살려 줘. 빨리, 빨리!“ 그렇게 말하자, 그레고리는 푹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 때, 스피디가 화살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알아차린 것이다! '인간이 위험에 처해 있다. 빨리 구해야 한다.' 스피디는 그렇게 알아차린 것이다. 순식간에 달려오자 그레고리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리고 바위 그늘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다. "이봐, 괜찮겠어?“ 그레고리가 눈을 뜨자 마이클이 근심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어느 새 그레고리는 바위 그늘의 지면 위에 뉘어져 있었다. "위험한 찰나였네. 까딱하면 불고기가 될 뻔했어." 마이클이 웃으며 말했다. "스피디는 어디 있어?“ 그레고리는 머리를 쳐들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네한테 혼날 것 같아 숨어 있네." 스피디는 마이클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근심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스피디는 뒤통수를 긁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무사히 스피디를 데려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스피디는 남쪽 언덕으로 셀렌을 캐러 갔다. 남쪽에는 위험한 가스가 솟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마이클이 조사한 것이다. 30분이 지나자 스피디는 셀렌을 걸머지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마이클과 그레고리는 후유 하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마이클들은 즉시 이 대성공을 지구에 보고했다.     거짓말쟁이 로봇 하비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정성환 옮김/ 김완기 그림   비밀 회의   "뭐, 하비가 인간의 마음속을 읽을 줄 안다고?“ 하얀 수염을 기른 러닝 박사는 눈을 부릅떴다. "예, 검사실에 가는 도중에 하비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모두 알아맞혔어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슈 기사는 얼굴이 창백해 있었다. '큰일났구나. 만일 이런 소문이 퍼진다면, 그런 기분 나쁜 로봇을 만드는 회사의 로봇은 사지 않겠다고 고객이 외면을 할지도 모른다. ' 하고 박사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해 주게. 그리고 보가드 기사장과 캘빈 박사를 불러오게."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US 로봇 회사의 회의실에서는 즉시 비밀 회의가 시작되었다. 모인 사람은 러닝 박사, 보가드 기사장, 심리학자인 캘빈 박사, 그리고 아슈 기사 등 중요 인물들이었다. 먼저 러닝 박사가 입을 열었다. "아슈로부터 이미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실은 하비에게 사람의 마음을 알아내는 묘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회사로서는 이런 이상한 로봇이 두 번 다시 만들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돼서 하비 같은 로봇이 만들어졌는지 여러분의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보가드 기사장이 일어섰다. "조립 방법에서 어딘가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아슈 기사는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 "글쎄, 그럴까? 아무튼 한 대의 로봇을 조립하는 데는 7만 5천 2백 34번의 손질이 필요한데 그 중의 한번이라도 잘못되면 로봇은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기사장은 눈알을 굴리며 아슈를 노려보았다. "그럼 내 잘못이라는 말씀입니까?“ 아슈가 반박을 하고 맞선다. "자네의 잘못이라곤 말하지 않았어." 기사장은 못마땅한 듯이 입을 비죽이 다물었다. "여러분, 싸움을 하기 위해 모인 건 아닙니다.“ 캘빈 박사가 두 사람을 말렸다. "그렇지, 그 말이 옳아. 모두 힘을 합쳐서 하루라도 빨리 원인을 찾아내야 해." 러닝 박사는 모두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먼저, 아슈. 자네는 하비를 조립한 순서에 잘못이 없었는지 조사를 하게." 다음은 여성인 캘빈 박사를 향하여, “당신은 하비의 심리 상태를 관찰해 보시오“ 마지막으로 보가드 기사장에게, "자네는 하비를 설계할 때, 계산을 잘못하지 않았나. 조사해 주게. 물론 나도 돕겠어." "그럼 곧 시작합시다.“ 젊은 아슈 기사가 맨 먼저 방을 튀어 나갔다. 러닝 박사와 기사장이 타협을 하는 사이에 캘빈 박사도 일어서서 방을 나갔다. 하비는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문에는 라는 쪽지가 붙어 있다. 캘빈 박사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문을 열었다. 하비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안녕, 하비. 원자력 모터 책을 가져왔어. 읽어봐요.“ 박사는 하비에게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하비는 그것을 받자 페이지를 훌훌 넘겨보고, "예, 알았습니다. 읽어 두겠습니다." 그리고 캘빈 박사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저의 지능을 시험하기 위해서죠?" 캘빈 박사는 한숨을 쉬면서, "그래, 맞았어. 당신은 무엇이나 알아 버리는군요." "저한테는 숨겨도 소용없어요. 저에게는 당신의 마음속이 훤하게 보입니다. 지금 당신이 마음속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볼까요?" 박사는 삽시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어머나, 알고 있었어요?“ "예. 당신은 언제나 그분 생각만 하고 계시죠. 나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도 말했어요?“ "아뇨, 그런 말을 왜 합니까." 하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비는 도대체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좀 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신은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그래요. 보다시피 내 얼굴은 조금도 예쁘지 않아서." "인간의 가치는 얼굴이 아름답고 미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이는 나하고는 좀처럼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아요.“ 캘빈 박사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그분은 너무 바쁩니다.“ 하비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분은 틀림없이 예쁜 부인을 맞이하겠지?“ "그렇지 않아요.“ 하비가 큰 소리로 말하자 캘빈 박사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슈 씨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그분이란 아슈 기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분의 마음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아요. 나 같은 건 싫어할 게 뻔하니까." 박사는 모기 소리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숨기셔도 소용없어요. 당신은 알고 싶어하고 있어요. 그럼 가르쳐 드리죠. 아슈 씨는 당신을 아내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옛, 뭐라고요?“ 캘빈 박사는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입니다. 아슈 씨는 당신처럼 마음이 고운 사람을 좋아합니다.“ 캘빈 박사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고마와요, 하비. 진심으로 사례하겠어.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박사는 그렇게 말하며 하비의 갸름한 손가락을 꼭 쥐었다. 그리고 들뜬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러닝 박사의 노여움   아슈 기사는 벌써 사홀 동안이나 한잠도 자지 못했다. 7만 5천 2백 34번의 순서 중에서 조사가 끝난 것은 3만 8천 7백 26가지 분이었다. 아직 잘못은 발견되지 않았다. 눈은 빨갛게 충혈 되고, 수염은 터부룩하고, 머리털은 헝클어져 있었다. "아아, 이건 못 할 짓이군." 아슈는 책상에서 얼굴을 들고 크게 하품을 하였다. 거기에 보가드 기사장이 들어왔다. "어떤가? 뭔가 단서를 잡았나?“ "아직 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일만 해야 합니까? 차라리 하비에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요?“ "로봇한테 가르쳐 달라고 한단 말야?" 기사장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보가드 기사장은 수학자인데 매우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르는 문제를 로봇이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슈는 개의치 않고, "캘빈 박사의 말을 들으면 하비는 수학의 천재라던데요.“ "설마 그럴 리가 있어.“ "의심나시면 직접 하비를 시험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아. 그 로봇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 리가 없을 거야.“ 보가드 기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갔다. 하비는 기사장의 발소리를 듣자 뒤돌아보았다. "잘 오셨습니다. 그럼 보여 주십시오, " 하비가 손을 내밀었으므로 보가드 기사장은 완전히 당황했다. 기사장의 양복 주머니에는 한 권의 노트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기사장이 조사한 수학 공식이 가득히 기록되어 있다. 기사장은 그것을 하비에게 보여서 시험해 볼 작정이었다. 기사장은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하비에게 건네주고, "이 공식에 잘못이 없나 확인해 보게." 하비는 공식을 차근차근 살폈다.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의 계산은 저는 못 합니다. 당신과 같이 우수한 분이 모르는 문제를 저 같은 게 알 리가 없잖습니까?“ 기사장은 그 대답을 듣자 만족스러운 듯이 끄덕였다. 그리고 하비에게서 노트를 돌려 받자 곧 나가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하비를 돌아보았다. "잠깐, 자네한테 물어 보고 싶은데." "아, 러닝 박사의 일 말씀이군요. 그거라면 걱정 없습니다.“ "걱정 없다고?“ "예, 다음 소장은 당신입니다.“ 하비는 기사장의 마음을 곧 알아차리고 그렇게 대답했다. "응, 그야 그럴 테지. 나같이 우수한 인간이 소장이 되는 게 당연하니까." 기사장은 하비를 힐끔 노려보고 훌쩍 나가 버렸다. 하비는 다시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기사장은 몹시 기분이 좋아져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어려운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끔 책상에서 얼굴을 쳐들고는 싱긋 웃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나는 마침내 소장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계산에도 열성이 생겼다. 그 날 밤은 끝내 자지도 않고 계산을 했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기사장은 아침 식사도 하지 않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전 9시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러닝 박사였다. 박사는 들어오자 온통 휴지 투성이인 방을 힐끔 둘러보았다. "단서는 발견됐나?“ "아뇨.“ 기사장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일전에 드린 보고서는 읽으셨습니까?“ 하고 거만스럽게 물었다. "응, 읽었네. 자넨 거기서 미첼의 방정식을 쓰고 있는데, 그건 잘못이야." "그럴 리 없어요. 미첼의 논문을 읽어보면." "내 계산에는 틀림이 없어. 하비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 "하비라고? 그런 로봇이 뭘 안단 말이오. 어제 시험해 보았는데, 적분 계산 하나도 제대로 못 해요." 러닝 박사는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 쪽지를 끄집어냈다. "이걸 보게. 하비가 한 계산일세." 기사장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그 종이 쪽지를 밀어 버렸다. "당신은 내가 한 계산보다 로봇이 계산한 걸 더 믿는 겁니까?“ "내 답도 하비의 답과 같으니까." 러닝 박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기사장은 불끈해서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당신 같은 돌대가리가 뭘 알아. 이 빼빼 마른 미라 같으니!“ 그 말을 들은 러닝 박사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보가드? 상관에게 반항할 작정인가. 그런 놈은 파면이야." 기사장은 히죽이 웃고, "그렇게는 안 될걸요. 당신은 이제 곧 소장을 그만두쟎소?“ 러닝 박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 뭐라고?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자, 자, 침착하시라고요. 노인네가 너무 흥분하면 몸에 해로우니까. 다음 소장은 젊고 씩씩한 바로 나라고 하던데요.“ "누, 누가 그런 말을 했어?“ "하비가 그랬어요. 하비는 당신의 마음을 읽은 겁니다. 내게 분명하게 말했어요." 러닝 박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당치도 않은...... 나는 그런 일을 생각한 적이 절대로 없어. 그러니까 하비가 그런 말을 할 턱이 없지." "아니, 확실히 말했어요." 기사장은 큰소리 쳤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하비한테 가서 확인하자고. 함께 가세. 하비에게 물어 보면 알 테니까." "좋습니다. 하비에게 물어 보면 알 겁니다.“ 둘은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서 지하실로 내려갔다.     거짓말쟁이   마침 그 무렵, 캘빈 박사는 아슈 기사의 방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요즘 캘빈 박사는 매우 명랑해졌다. 아슈 기사와 대화를 할 때도 매우 즐거운 것 같았다. 아슈는 지금 한 장의 스케치를 캘빈 박사에게 보이고 있는 참이었다. "저는 그림이 서툴러서 부끄럽습니다만, 이것이 이번에 산 저의 집입니다. 어떻습니까?“ 캘빈 박사는 그 스케치를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훌륭한 집이군요." "시내에선 좀 떨어져 있지만 아주 조용한 곳입니다. 언덕 위에 있어 전망도 좋고, 근처에는 깨끗한 냇물도 흐르고 있습니다.“ "근사하군요. 빨리 가보고 싶어요." 그러자 아슈는 부끄러운 듯이 웃고, "예, 꼭 와 주십시오, 여러분에겐 아직 비밀입니다만 단연코 말씀드리겠어요. 실은 저는." 캘빈 박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틀림없이 내게 결혼 신청을 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은 저는 내달에 결혼을 합니다.“ 캘빈 박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하고 무의식중에 되물었다. "내달에 결혼합니다. 시골의 이웃집 아가씨죠." 아슈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캘빈 박사는 앞이 캄캄해졌다. 방금 까지도 하비의 말을 믿고, 아슈의 아내가 될 사람은 자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아슈는 캘빈 박사가 창백해졌으므로 깜짝 놀랐다. “아뇨, 잠깐 어지러웠어요. 실례하겠어요." 캘빈 박사는 그렇게 말하자 정신없이 방을 뛰어나왔다. 그리고 하비의 방으로 달려갔다. 하비는 박사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하비, 당신은 분명히 말했지. 아슈는 나를 아내로 맞이할 작정이라고. 확실히 그랬지?“ “예, 그랬고 말고요. 아슈 씨의 아내는 당신입니다.“ “그런데 아슈 씨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단 말이야." 하비는 흠칫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한 듯이, “그런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지금 꿈을 꾸고 있어요.“ "그렇지만 방금 아슈 씨가 그렇게 말했는데." “그럴 리가 없어요. 그건 꿈이어요. 아슈 씨는 당신을 아내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거짓말쟁이!“ 캘빈 박사는 큰 소리쳤다. 하비는 겁을 먹은 듯이 뒤로 물러섰다. "너는 어째서 거짓말을 했어?“ "당신을 구해 주려고.“ "구해 줘? 거짓말을 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비는 발간 눈을 슬픈 듯이 내리깔았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다는 거야?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캘빈 박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하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윽고 박사의 눈에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눈망울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앗, 알았어! 네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았어! 심리학자인 내가 어째서 좀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하비는 눈을 들어 박사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바보였어. 네가 말하는 것을 믿었으니.” 박사는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하비는 어째서 거짓말을 했을까? 그 까닭은 잠시 뒤로 미루고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키자. 그 때, 문 밖에서 쿵당쿵당 발소리가 들렸다. 박사는 흠칫 하며 일어서자, 급히 커튼 뒤로 숨었다. 들어온 사람은 러닝 박사와 보가드 기사장이었다. 러닝 박사는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하비를 노려보면서, "알겠나, 하비. 이제부터 사실대로 대답해야 해." 하비는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예.“ "너는 보가드에게 내가 소장을 그만둔다고 했나?" "아뇨.“ 하비는 겁에 질려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 기사장의 얼굴이 확 달라졌다. "뭐라고. 너는 어저께 분명히 그렇게 말했잖아. 어제 내게 한 말을 다시 한 번 여기서 해 봐." "어제 나는-” 하며 하비는 말을 꺼내다가 러닝 박사 쪽을 힐끔 보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비의 몸뚱이 속에서 부릉부릉 하고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이봐, 어째서 말을 안 하는 거야. 어제 한 말을 해 보라고!“ 기사장은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둘러 하비를 때리려고 했다. 러닝 박사는 황급히 기사장을 말렸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자네는 하비를 위협해서 거짓말을 시킬 작정인가?" "거짓말이 아니오. 사실대로 말하게 하는 거요. 말리지 마시오.“ "좋아, 이번엔 내가 물어 보겠어." 러닝 박사가 하비를 향하여, "알겠나, 하비. 정신 차려서 대답하라고. 내가 소장을 그만둘 생각을 했나?" 하비는 대답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거야. 벙어리가 됐나?“ 그 때, 방 한구석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캘빈 박사가 서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가?" 러닝 박사가 물었다. "여러분같이 높은 사람들까지 속은 게 우스워서요." "속았다고?“ 두 사람은 여우한테 흘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예. 하지만 하비가 나쁜 건 아닙니다. 우리들이 나빴던 거여요. 여러분은 로봇 법 3대 원칙의 제 1조를 알고 계십니까?“ "로봇은 인간을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 기사장이 즉시 대답했다. "위험이란 모든 위험을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위험입니다. 인간의 희망을 짓밟는 일도 위험입니다. 그렇죠?" “물론 그렇지. 하지만 로봇이 인간의 마음속을 알게 뭐야.“ 하고 러닝 박사는 무심코 말을 꺼내다가, 아차 하고 숨을 죽였다. “하비는 인간의 마음속을 아는 로봇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죠. 가령 보가드 씨." 박사는 기사장 쪽을 향했다. “당신이 마음속으로 러닝 박사가 빨리 그만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합시다. 만일 하비가 러닝 박사는 그만두지 않는다고 하면 당신은 낙담하셨겠죠?" "으음,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기사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비는 그것을 알고 당신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한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물었을 때, 하비는 어째서 잠자코 있었나?“ “그건 옆에 러닝 박사가 계셨기 때문이죠. 만일 지금 하비가 당신에게 러닝 박사는 그만둘 결심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 러닝 씨는 어떤 기분이 들까요? 매우 언짢은 기분이 들겠죠." “흐음, 그래서 하비는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있었군.“ 러닝 박사가 감탄했다. “하비는 천재입니다. 무엇이든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조립 방법 중에서 어디가 잘못되어 있는지도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캘빈 박사는 하비를 향해 물었다. “당신은 자신의 조립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나요?“ "예.“ 그럼,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일러 주셔요." 그러나 하비는 머리를 숙인 채 대답이 없다. "왜 잠자코 있는 거지?“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러닝 박사도 기사장도, 나 같은 로봇 따위한테서 배우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 일은 없어." 러닝 박사가 말했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내게는 당신의 마음속이 환하게 보입니다. 내가 가르쳐 드리거나 하면 당신 마음이 상할 겁니다.“ 캘빈 박사는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박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박사는 하비의 어깨에 손을 얹고 빨간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주문이라도 외듯이 중얼중얼 지껄이기 시작했다. 박사는 도대체 무엇을 할 작정일까? “하비, 당신은 알고 있으면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군요. 그렇게 되면 러닝 박사의 마음이 상할 거야.” "예!“ “그렇지만 만일 당신이 가르쳐 주면 역시 마음은 상할 거야." "예, 예!“ 하비는 박사의 손을 뿌리치고 슬슬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되지.가르쳐 주면 러닝 박사의 마음이 상하니까. 그렇지만 가르쳐 주지 않으면 러닝 박사의 마음이 상하지. 그러니까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예, 예, 예!“ 하비는 비틀거렸다. 가슴속에서 부릉부릉 하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렸다. 그러나 박사는 똑같은 말을 서서히 반복했다. "그렇지만 가르쳐 주면 러닝 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그러니까 가르쳐 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르쳐주지 않으면 러닝 씨의 마음은 상한다. 그러니까 가르쳐 주어야 -.“ "아아, 그만, 그만두셔요!“ 하비는 괴로운 듯이 소리쳤다. 부릉부릉, 부릉부릉. "그렇지만 당신이 가르쳐 주면 상처를 입어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면 안 돼요. 하지만-." 별안간 탕 하고 피아노 줄이 퉁겨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하비가 바닥 위에 쓰러져 있었다. "죽었다!“ 러닝 박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뇨, 로봇은 죽지 않습니다. 전자 두뇌가 고장난 것뿐이어요. 가르쳐 주느냐, 주지 않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에 걸려서 망가졌어요." 캘빈 박사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일부러 고장을 냈군?" "예, 그렇습니다. 로봇이 인간의 마음속을 알아보았자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혀 재난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러닝 박사도 기사장도 얼굴이 붉어졌다. 서로 추잡한 싸움을 한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캘빈 박사는 무릎을 꿇고 하비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불쌍한 하비. 얼마나 괴로웠어? 이번엔 정상적인 로봇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해요." 그 때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며 아슈 기사가 뛰어들어왔다.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아슈 기사는 숨을 헐떡이며, "5만 3천 6백 85번째 조립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저의 잘못이었습니다. 면목없습니다.“ "잘됐어!“ 세 사람은 이구 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서로 손을 잡으며 기뻐했다. 어느 얼굴도 지금까지의 고생을 모두 잊은 듯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전자 두뇌 머신 X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정성환 옮김/ 김완기 그림   머신 X를 타도하라!   "별일 없었나?“ 바이어리 지구 대통령은 대통령 실에 들어오자 곧 비서관 로봇에게 물었다. "아아무 것도 다른 일은 어없었습니다.“ 비서관 로봇은 이상하게 억양을 붙여 대답했다. 20년 동안, 매일 아침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대통령은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번쩍번쩍 빛나는 네 개의 스위치가 나란히 있었다. 이것은 비상 전화의 스위치로, 이것을 누르면 네 개의 지구 지구(Earth Section)의 구장실로 연결된다. 그러나 20년 동안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었다. 대통령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맛있게 빨았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대통령은 태평스럽게 생각했다. 지구는 평화로와 아무런 분쟁도 없었다. 그러니까 대통령은 한가했다. '이것도 다 머신 X의 덕택이다.' 대통령은 매일 아침 머신 X에게 감사했다. 머신 X는 훌륭한 로봇이다. 머신 X가 풀지 못하는 없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반드시 인간이 행복할 수 있도록 생각하여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니까 머신 X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행복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 세계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머신 X의 말대로 했다. 덕택으로 지구는 완전히 풍요해졌다. 20세기 무렵,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던 지방에도 지금은 남아돌 만큼 먹을 것이 풍부했다. 매년 태풍으로 피해를 입던 지방에서는 태풍을 쫓아 버리는 장치가 이루어졌다. 일거리가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똑같은 인간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도 없어졌다. 대통령은 책상 위의 전송 신문을 펼쳤다. 새빨간 오렌지의 사진이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사하라 사막에서 처음으로 수확한 오렌지였다. 사하라는 옛날에는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이었으나 지금은 오렌지나무가 무성해 있다. '으음, 맛있어 보이는 오렌지군.' 대통령은 음식에 욕심이 많아, 먹는 거라면 사족을 못쓴다. 당장이라도 군침이 흐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로 넘긴 순간, 대통령은 얼굴을 찡그렸다.   머신 X를 타도하라! 머신 X는 인간의 적이다! 인간은 머신 X의 노예가 아니다!   커다란 글씨가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다. 그것은 인간동맹의 광고였다. 인간 동맹이란 머신 X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머신 X의 말만 듣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동지를 모아서 머신 X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나 바보 같은 사람들인가! 지구가 이렇게 평화스러운 것은 모두 머신 X의 덕택인데.' 대통령은 창가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무성한 숲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몇천 미터나 되는 하얀 빌딩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은색의 에어 카가 잠자리 모양으로 날쌔게 푸른 하늘을 날고 있다. 이것이 지구의 수도였다. 뺨이 빨갛게 상기된 아이들이 푸른 숲을 뛰어다니고 있다. 20세기 무렵, 이 부근은 회색 빛 빌딩이 꽉 차 있었다. 어두운 빌딩 골짜기에서 사람들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살고 있었다. 스모그 현상으로 하늘은 언제나 검게 흐려 있었다. 무서운 자동차가 땅 위를 달리고 있어 사람들은 언제나 조마조마하며 길을 걸어야 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이것도 다 머신 X의 덕택이다.' 대통령이 가슴을 폈을 때 별안간, "삑삑삑."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래졌다. 책상 위의 비상 전화의 부저가 울리고 있는 것이다. '20년 동안 한 번도 울린 일이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가?’ 대통령은 황급히 책상으로 달려왔다. 비서관 로봇은 곧 스위치를 누르고 활발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여기는 지구 대통령실.“ 그러자 벽의 스크린이 밝아지며 검은 얼굴의 사나이가 환하게 나타났다. "여기는 열대 지구의 느고마 구장입니다. 대통령을 시급히 뵙고 싶습니다.“ 뭔가 급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다. 대통령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즉시 책상 위의 스위치를 눌렀다. "나, 바이어리요. 무슨 일이죠?“ 대통령은 정중하게 물었다. "아, 대통령 각하.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상한 일?“ "예, 멕시코 운하의 터널 공사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뭐, 사고라고? 그럴 리가 있나!“ 대통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정말입니다. 터널이 허물어져 인간이 다섯 명이나 크게 부상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대통령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쨌든 사고란 20년 동안 일어난 일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돼서 터널이 허물어졌나?“ 대통령이 물었다. "터널의 높이를 정하는 계산이 틀려 있었습니다.“ "머신 X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일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느고마 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머신 X도 틀리는 일이 있는 모양이죠." 하고 덧붙였다. 대통령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빨갛게 되며 소리쳤다. "당치도 않은!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느고마 구장은 대통령의 노한 소리에 놀라 급히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열대 지구는 20세기의 옛날, 아프리카 대륙, 남아메리카 대륙이라고 부르던 지방이다. 정글과 사막뿐이었는데 지금은 거기에 농장과 과수원이 만들어지고, 지구에서도 가장 젊고 활기에 찬 지방이었다. '그것도 모두 머신 X의 덕택이 아닌가. 머신 X가 틀리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다. ' 대통령이 혼자서 분개하고 있는데, 또다시 책상의 부저가 울렸다. "여기는 지구 대통령실." 비서관 로봇이 원기 있게 응답했다. 그러자 스크린에 하얀 수염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여기는 아시아 지구의 링 구장입니다. 대통령을 급히 뵙고 싶습니다.“ 링 구장은 똑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대통령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바이어리입니다. 무슨 일이오?“ "실은 우리 지역에 사고가 일어나서 보고 드립니다.“ 링 구장은 침착하게 말했다. "사고라고요?“ "예, 농장 하나가 망해서 많은 사람이 직업을 잃었습니다.“ 대통령은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왜 망했습니까?“ "예, 근처에 새로운 농장이 생겨서, 그 농장에서 만든 효모가 안 팔리게 된 겁니다.“ "머신 X가 하라는 대로 했겠죠?“ "예,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이상해서 보고하는 겁니다.“ 링 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머신 X와 같이 훌륭한 로봇도 잘못되는 수가 있군요.“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통령은 얼굴이 뻘겋게 되며 소리쳤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링 구장은 기겁을 해서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공손히 절한 다음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20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지내 왔는데 하루에 두 건이나 사고가 나다니.' 대통령은 우울한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 책상 앞 벽에 붙여 놓은 세계 지도를 바라보았다. 아시아 지구에는 옛날에 중국, 한국, 일본, 인디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의 나라가 있었다. 먹을 것이 모자라서 사람들이 배를 굶주리는 나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효모를 만드는 농장이 여기저기 만들어져, 먹을 것은 부족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효모에서 비프스테이크도, 아이스크림도, 맛있는 건 무엇이든 다 만들 수 있다. 그러니까 아시아 지구 사람들은 옛날처럼 소를 키우거나 밭을 갈지 않아도 되었다. '일전에 먹은 그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이 있었지.' 대통령은 순간 근심을 잊었다. 그 때, 또 책상 위의 부저가 울렸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제 놀라지 않았다.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도 있다는 옛말이 있었지.' 대통령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기는 지구 대통령실.“ 비서관 로봇이 응답하자 이번엔 푸른 눈의 여성 한 사람이 스크린에 비쳤다. "여기는 유런 지구입니다. 대통령을 급히 만나 뵙고 싶습니다.“ ‘아이고, 이번엔 또 무슨 사고일까?' 대통령은 지겹다는 듯이 책상 위의 스위치를 눌렀다. "예, 바이어리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안녕하셔요, 대통령 각하. 실은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난처한 일이라니?“ "예, 알마덴 수은 광산의 지배인이 그만두었어요." "왜 그만두었습니까?“ "일이 제대로 안 되니까 면직 당한 겁니다.“ "머신 X와 의논했습니까?“ "예, 물론 했죠. 이상한 일도 있군요. 그 머신 X도 틀리는 일이 있는 것일까요?“ 구장은 대통령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잠자코 있었다. ‘어쩌면 머신 X가 고장났는지도 모르겠다. '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일 머신 X가 고장이라면?' 대통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만일 머신 X가 고장났다면, 지구는 틀림없이 또 20세기의 옛날로 되돌아갈 것이다. 식량이 부족 되고 실업자가 거리에 넘칠 것이다. 지구의 어디선가 또다시 추악한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지구는 파멸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대통령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건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지, 캘빈 박사에게 의논해 보자.' 대통령은 즉시 캘빈 박사를 불러냈다.   음 모   캘빈 박사는 세계 제일의 로봇 심리학자이다. 로봇의 일이라면 자기 자식의 일처럼 소상히 알고 있다. 로봇의 신이라고 모두가 일컬을 정도다. 그러니까 대통령도 그녀 앞에선 꼼짝 못 한다. 머리털은 하얗게 세고 허리도 약간 굽었지만 아직 건강해서 US 로봇 회사의 연구소에 다니고 있다. "이 할멈을 일부러 불러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큰일인 모양이군요.“ 캘빈 박사는 스스럼없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발 놀라지 마십시오. 머신 X가 고장이 난 것 같소." 캘빈 박사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잠꼬대 같은 고리를 하는 거요? 머신 X는 절대로 고장나는 일이 없어요. 만일 어딘가가 고장이 나도 머신 X는 자신이 즉시 고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실지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대통령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무튼 세 개의 지역에서 한꺼번에 사고가 일어났으니까요. 머신 X가 고장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대통령은 캘빈 박사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박사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는 뭔가 깊은 까닭이 있는 것 같군요." "머신 X가 고장난 거죠?" 대통령은 끈질기게 고장을 주장한다. "아뇨, 머신 X는 절대로 고장이 나지 않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캘빈 박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겨, "이 사고는 머신 X가 일부러 한 짓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일부러 라고요? 당치도 않은! 머신 X는 로봇입니다. 로봇이 인간을 위험에 빠뜨릴 리가 없습니다. 로봇 법 제 1조에는-." 캘빈 박사는 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히는군. 당신한테서 로봇 법을 교육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아참, 박사는 로봇 심리학자였죠. 로봇 법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아실 테니까." 대통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머신 X가 어째서 일부러 이런 짓을 했을까요? 그렇지, 그렇지, 사고를 일으킨 사람의 신상을 조사해 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요." 캘빈 박사는 대통령에게 부탁했다. "예, 알겠습니다.“ 대통령은 즉시 비서관 로봇에게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비서관 로봇은 곧 방을 나갔다. 캘빈 박사는 눈을 감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10분도 채 되기 전에 비서관 로봇이 돌아왔다. 그리고 한 개의 테이프를 대통령에게 내밀었다. 대통령은 테이프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리고 얼굴빛이 변했다. "이건 큰일입니다, 박사님. 사고를 일으킨 세 사람은 모두 인간 동맹의 임원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캘빈 박사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대통령은 박사가 침착하게 앉아 있자 초조했다. 그리고 책상 위의 신문을 가리켰다. "이걸 보십시오, 박사님. 인간 동맹의 인간들은 머신 X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틀림없이 머신 X가 지시한 대로 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사고가 일어난 겁니다.“ 박사는 눈을 뜨고 신문을 힐끔 보았으나 곧 다시 눈을 감았다. 대통령은 안절부절못했다. "박사님, 이건 인간 동맹의 음모가 분명합니다. 자기들이 제멋대로 사고를 일으켜 놓고 그것을 머신 X의 탓으로 몰 작정입니다. 그렇게 해서 머신 X를 쫓아내려는 음모지요. 이거 보세요, 박사님. 듣고 계십니까?“ 박사는 마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놓아두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겠어요. 곧 인간 동맹의 인간들이 아무 짓도 못 하도록 법률을 만들지 않으면 큰일나겠어." 대통령은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좀 조용히 해요. 뭔가 알 것 같으니까." 캘빈 박사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박사는 눈을 뜨고 일어서자, 방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 때, 또 책상 위의 부저가 울렸다. "여기는 지구 대통령실." 비서관 로봇이 곧 응답했다. '여기서 더 이상한 일이 생기면 못 견디겠는데.' 대통령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벽 스크린에 금발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여기는 미국 지역의 마켄지 구장입니다. 대통령을 급히 뵙고 싶소." 대통령은 스위치를 넣었다. "바이어리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인간 동맹의 데모대가 이제 곧 구장실로 몰려온다고 합니다. 급히 응원을 부탁합니다.“ 대통령은 캘빈 박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 보세요, 역시 인간 동맹입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머지 않아 정말로 머신 X를 파괴할 겁니다.“ 캘빈 박사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캘빈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째서 입니까?“ 대통령은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 소동은 곧 가라앉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머신 X에게 맡겨 둡시다. 머신 X가 모든 것을 잘 처리해 줄 겁니다.“ "머신 X가?“ "예, 그래요- 내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하며 캘빈 박사는 의자에 앉았다. "머신 X는 로봇입니다. 로봇은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일을 첫째로 생각합니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보다도 인간 동맹의 데모대가 -.“ "좀 잠자코 계셔요." 박사의 핀잔을 받자 대통령은 그만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시겠어요, 대통령 각하? 만일 머신 X가 없어지면 인간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야 물론, 인간은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못하겠죠. 틀림없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불행하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머신 X는 인간 동맹이 자기를 파괴하려는 것을 알고, 이건 큰일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흐음, 그래서요?“ "그래서 머신 X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한 겁니다.“ "그렇게 하다뇨?“ "인간 동맹의 임원들이 사고를 일으키도록 꾸민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임원들은 직업을 잃고 활약을 못 하게 되겠죠? 그러다가 인간 동맹도 사라질 것이다. 하고 머신 X는 생각한 거여요." 캘빈 박사는 조용히 대통령의 얼굴을 응시했다. "흐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머신 X는 정말 굉장한 로봇인데.“ 대통령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정말인지 아닌지 이제부터 머신 X한테 가서 물어봅시다.“ 캘빈 박사는 그렇게 말하자 재빨리 일어섰다.   또다시 평화가   머신 X의 방은 정확히 지구 연방 정부 건물의 한복판에 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하얀 벽에 빨간 램프 한 개가 오도카니 켜져 있었다. 로봇 같은 건 없잖아, 하고 누구나 처음에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방 전체가 머신 X인 것이다. 머신 X는 생각하는 것이 일이니까 보통 로봇처럼 손과 발이 필요 없다. 캘빈 박사는 안에 들어가자 대통령을 뒤돌아보았다. "자, 물어 보셔요." 대통령이 빨간 램프 앞에 서서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머신 X, 당신은 인간 동맹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잘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동맹이 당신을 파괴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럼, 당신은 인간 동맹의 임원을 내쫓기 위해서 일부러 사고를 일으킨 겁니까?" 대통령은 머신 X가 예, 하고 대답하느냐, 아뇨, 하고 대답하느냐,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러나 머신 X는 일언반구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빨간 램프가 깜박깜박 깜박였을 뿐이다. 대통령은 캘빈 박사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머신 X는 대통령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는 거여요.“ 캘빈 박사는 갑자기 엄숙한 얼굴로 머신 X에게 물어 보았다. "머신 X, 당신은 대통령의 마음이 상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번엔 머신 X가 즉시 대답했다. "그렇지만 꼭 대답해 주어야 하겠어요. 대통령은 인간동맹의 일을 매우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모든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어요." 캘빈 박사는 열심히 말했다. "그럼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인간 동맹의 임원을 내쫓기 위해서 일부러 사고가 일어나도록 한 겁니다.“ 머신 X가 말했다. "흐음, 그럼 역시 박사님이 말씀하신 대로군." 대통령은 머리를 감쌌다.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르고 떠들어 댄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캘빈 박사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아무 것도 부끄러워하실 건 없어요. 그보다도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하세요." "어째서입니까?“ "인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머신 X와 같은 로봇이 이것저것 알아차려서 인간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면, 인간은 틀림없이 자신을 잃게 될 겁니다. 조금 전에 머신 X가 당신의 질문에 대답을 못한 것도 그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으음.“ 대통령은 감탄한 듯이 신음 소리를 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머신 X가 일부러 사고를 일으키게 한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대통령은 눈을 크게 떴다. "구장들은 이번 사고가 머신 X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었죠?“ "예, 정말 괘씸한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통령은 화난 듯이 말했다. "아뇨, 그것으로 만족한 거여요. 머신 X 따위는 보통의 로봇이잖아, 잘못되는 일도 있을 거야, 하고 모두가 생각하게 되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들 머신 X는 인간의 적이다. 인간은 머신 X의 노예가 아니다. 하고 떠들어대는 일도 없어지겠죠?" "흐음, 과연 그렇군. 하지만 진짜로---” "로봇과 60년이나 함께 살아 온 내가 말하는 겁니다. 틀림없어요.“ 캘빈 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로봇이냐.“ 대통령은 빨간 램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뇨, 훌륭한 로봇입니다. 우리들 인간을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캘빈 박사는 주름 투성이의 얼굴을 밝게 폈다. “그러면 대통령 같은 건 아무나 해도 되는 셈이군요." 대통령은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캘빈 박사가 말한 대로 인간 동맹의 소란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인간 동맹도 임원이 모두 일자리를 잃고 활동하지 못하게 되자 자연 해산해 버렸다. 이제 아무도 머신 X를 내쫓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은 또 한가해졌다. "뭐 별다른 일은 없나?“ 오늘 아침도 대통령은 비서관 로봇에게 물었다. “아아무것도 다른 일은 어없습니다.“ 비서관 로봇은 여전히 길게 억양을 붙여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사하라의 오렌지 밭이라도 보러 갈까? 그 오렌지를 빨리 먹어 보고 싶은데." 지구의 일은 머신 X에게 맡겨 놓으면 걱정 없다고 대통령은 이제 완전히 안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품 해설   여러분은 로봇을 본 일이 있습니까? 실물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진이나 영화에서는 보았을 줄 압니다. 로봇은 사람이 아닌 기계로서 사람이 할 일을, 더구나 사람이 해 내기에는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리는 일도 척척 해냅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러한 기계가 생겨서 우리들이 하기 힘드는 일을 해 주게 되고, 그래서 사람은 적은 노력으로 편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봇은 그 사용 목적에 따라 특별한 기계 장치를 하여 만들어집니다. 요즘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기계로 전자 계산기란 것이 있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계산을 이 기계는 당장 정확하게 답을 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판이나 필산으로 하기 힘든 복잡한 계산을, 간단히 전자 계산기로서 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계의 힘이 수학적인 계산에 그치지 않고 여러 방면의 일을 해낼 수 있게 됨으로써 로봇이라는 것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집안에서 청소를 하는 일,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 어려운 공부로서 해낼 수 있는 학문의 문제까지도 해내는 등, 로봇은 참으로 사람을 대신해서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편한 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온전히 기계에게 일을 다 맡겨 놓으면 그 때에는 생활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만들어 낸 여러 가지 기계로 편리한 생활을 해 오지만, 한편 그 기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 많은 자동차 때문에 죽고 다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계 때문에 생기는 공기의 오염으로 우리들의 건강에 미치는 해가 또 얼마나 큽니까? 이 밖에도 기계에게 일을 맡김으로써 사람의 생활이 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차츰 불건강한 몸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로봇이 생겨서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해주는 일에도 어떤 한계가 있어야 하고, 기계만으로 살아가는 데서 받는 불행도 알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로봇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 책의 이야기들은 적지 않은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이야기는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20세기를 옛날로 하는, 미래의 일을 여기서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20 세기의 지구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괴로웠던가를, 식량 부족과 전쟁 등으로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생각하는 미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가진 로봇. 그들이 만든 로봇. 그것은 미래 사람들을 위해, 인간의 생활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일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로봇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바른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과학의 힘이 첫째로 필요합니다. 전자 과학의 발달은 지금 이미 오롮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꼭 필요한 것은 인간의 착하고 바른 정신입니다. 이것 없이 만들어진 로봇은 자칫하면 인간에게 화를 입히는 기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로봇들을 보면 로비, 스피디, 하비, 머신X...... 그 모두가 사람을 위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사람에게 해가 미치지 않게 하려고 힘쓰고, 만일에라도 사람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면 자기 몸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구하려 듭니다. 그것은 여기 나오는 로봇들이 누구나 로봇법의 세 가지 규칙을 절대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착하고 바른 마음에서 만든 로봇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봇법의 3원칙   첫째, 로봇은 사람을 위험한 지경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둘째, 로봇은 사람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째, 로봇은 자기 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 가지 규칙은 로봇의 전자 두뇌의 기억 장치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로봇이 만일 이 규칙을 어기게 될 경우에는, 전자 두뇌가 부서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 로봇은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규칙을 생각해 낸 것은 이 책을 쓴 아이작 아시모프입니다. 이 규칙은 요즈음 나오는 로봇의 이야기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사람보다도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고 힘을 가지고 있는 로봇에게 이 규칙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규칙이 없게 만들어진 로봇이 있어서, 불시에사람에게 대항하여 덤벼드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그 로봇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만든 기계 때문에 파멸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 3원칙을 내놓기 전에 씌어진 공상 과학 이야기에는 로봇에게 지구가 정복당하는 이야기와, 로봇 때문에 많은 인간이 죽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규칙이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규칙 -- '로봇은 사람을 위험한 지경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를 지키기 위해, 로봇은 사람에게 뺨 한 대도 때리지 못합니다. 더구나 사람을 죽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해 로봇들은 엉뚱한 일을 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로봇이 규칙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가 일으키는 갖가지 사건들입니다.   작자 아시모프는 미국의 유명한 SF 작가입니다. 대학에서는 생물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보스턴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소설뿐 아니라, 훌륭한 과학 해설의 책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로봇 머신X 아이디어회관 과학 문고 174p. 19cm (SF 세계명작 7)   인 쇄      1975년 5월 1일 발 행      1975년 5월 5일 삼 판      1978년 7월 5일 역 자      이 원 수 오프셋     장원 정판사 인 쇄      일 신 사 제 본      영지 제책사 발행인     박 훈 발행처     아이디어회관    
1084    도망친 로봇 -델 레이 댓글:  조회:407  추천:0  2021-03-19
도망친 로봇 델 레이   지구에서의 뉴스················· 3 아버지와 아들의 다툼·············· 11 팔려간 로봇··················· 18 빼앗긴 바지··················· 26 도망친 로봇··················· 34 사막의 동굴··················· 42 가나폴리스를 향하여··············· 47 화물 우주선 드라베라호············· 56 화성에로의 여행················· 63 밀항 소년···················· 72 선장의 노여움·················· 78 체포된 폴···················· 87 화성 도시···················· 96 모래 폭풍우·················· 104 푸른 지구··················· 112 다시 만나다·················· 120   지구에서의 뉴스   오늘은 아주 기쁜 날이다. 폴의 아버지가 지구에서 우주선으로 돌아온다. 나는 폴을 따라 아침부터 우주 공항으로 갔다. 여기는 목성의 제 3위성 가니메데-. 폴의 아버지 로저 심프슨은 가니메데의 총독이다. 집은 가니메데에서 가장 큰 도시, 산발레이에 있다. 식구들은 아버지, 어머니 16세의 소년 폴과 9세의 누이동생 제인. 그리고 나는 폴을 경호하고 장난 상대를 하는 가정용 로봇이다. 내 몸통은 튼튼한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얼굴에는 큰 눈이 하나, 머리 위에는 안테나가 있다. 특히 내 자랑은 사람처럼 바지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정식 이름은 'Q=5=7=356'이라는 번호인데, 보통 '렉스'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렉스, 조금 천천히 걸어라." 폴은 마을에서 공항까지 가는 동안, 몇 번이나 쉬었다. 기압복(氣壓服)이 무거운 모양이다. 가니메데는 공기가 희박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밖에 나갈 때, 공기가 들어 있는 기압복을 입지 않으면 죽어버린다. 그러나 로봇인 나는 공기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다. "안아 줄까요?"   하고 내가 말하자, 폴은 화를 냈다. "난 이제 16살이야. 8킬로 정도의 길은 내 힘으로 걸어." 이 대답을 듣고 나는 기뻤다. 폴은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할 수 있을 만큼 크게 자랐으므로-. 내가 폴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폴이 아직 3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폴의 아버지가 가니메데 총독이 되어 지구에서 산발레이로 올 때, 폴을 위하여 나를 샀던 것이다. 그 때부터 나는 계속 폴과 함께 살아 왔다. 폴은 해마다 성큼성큼 커 갔어도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 "너는 왜 조금도 크지 않고 그대로니?" 하고 폴은 곧잘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폴을 돌보아줄 뿐만이 아니라, 어릴 때는 가정교사의 역할도 했다. 폴에게 옛날 이야기 책을 읽어 준 일도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고급 가정용 로봇이다. 가니메데의 농장이나 산에서 일하는 노동용 로봇과는 다르다. 전자 두뇌의 덕분으로 사람과 말도 할 수 있으며, 글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영리한 로봇이라도 역시 사람에 따를 수는 없다. 요즈음에는 폴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공부한 것을 나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쳐도 준다. 우리들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우주선이 착륙할 때였다. "봐라, 저기다!" 폴이 상공을 가리켰다. 안개에 쌓인 하늘 한 쪽에 파란 불길이 힘차게 튀어 오르고, 이어서 은빛의 거대한 선체가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말해도 나는 색깔을 모른다. 무엇이든 검거나 흰 색깔로 보인다. 다른 색깔은 폴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야, 굉장하구나!" 폴은 눈을 빛내면서 우주선의 착륙을 지켜보았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가겠어." 3살 때까지 지구에 있었던 폴은 지구에 대해서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지구의 로봇 제조 공장에서 태어난 모양이지만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러므로 별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사히 착륙한 우주선에서, 기압복을 입은 아버지 로저가 맨 먼저 나타났다. "폴, 이쪽이야!" 하고 손을 들고 있는 서류를 흔들면서 외쳤다. "빨리 집으로 가자. 모두에게 알려 줄 뉴스가 있어." "어떤 뉴스, 아버지?" 폴은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집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듣는 게 좋아요." 아버지는 제트카에 오르며, "너희들도 빨리 타거라." 하고 말했다. "네, 타겠어요." 폴은 힘차게 제트카에 뛰어오른다. 나도 폴의 뒤에 올라탔다. 제트카는 유선형의 오픈카다. 밑바닥은 평평하며, 뒤에 3개의 제트 분사 장치가 달려 있다. 거기서 가스를 내뿜으며, 지면에서 30센티 정도 떠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아간다. 공항에서 마을까지 8킬로의 사막도 눈 깜짝할 사이에 뛰어넘는다. 산발레이의 마을은 플라스틱의 돔으로 완전히 싸여 있다. 돔 안에는 지구와 같은 공기가 넣어져 있다. 그러나 마을에는 그다지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집들이 지하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로저와 폴은 큰 아파트의 입구에서 기압복을 벗고, 지하의 방으로 뛰어 내려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니와 누이동생 제인이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빨갛고, 몹시 상기되어 있다.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무슨 일이 있었어요?" 하고 물었다. "우리들은 되돌아가게 됐어. 지구로 돌아간다." 하고 로저는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모두 말이 없었다. 폴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버지,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이야, 폴. 우리는 지구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폴의 어깨를 꽉 쥐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다툼   "언제 여기를 떠납니까?" 어머니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10일 후." 하며 아버지는 다시 한 번 모두를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스타퀸호로 지구로 간다." "뭐, 스타퀸호로? 야, 신난다!" 폴은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스타퀸호는 혹성 여행 연맹에서도 가장 큰 최신형의 우주선이다. "안에서 지구의 과일을 먹을 수 있죠. 바나나도 오렌지도……." 제인도 한 마디 거들었다. "어머, 그렇게 먹고 싶은 것이 많니?" 어이가 없다는 듯 어머니가 웃었다. 나도 스타퀸호에 대해서는 그 전부터 폴에게서 들어 알고 있었다. 많은 관광객을 태우고, 금성이며, 화성을 도는 우주선이다. 긴 우주 여행 도중에 손님이 지루하지 않도록, 스포츠나 게임 등의 설비까지 마련되어 있는 호화로운 우주선이다. "굉장하지, 렉스?" 폴은 나의 손을 잡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10일밖에는 여기에 있지 못해. 그 동안에 할 일이 무척 많아. 이리 와라, 렉스." 갑자기 폴은 나를 방에서 끌어내려고 했다. "잠깐만." 아버지가 우리들을 불러 세웠다. "렉스를 버섯 공장에 심부름을 시켜야겠어. 그 동안에 우리들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자."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나에게 하얀 봉투를 주었다. "이것을 공장장 카아겐에게 갖다 드려라. 회답은 필요 없어." "네, 알겠습니다." 나는 곧 집을 나와서 공장으로 향했다. 역시 나도 기쁘다. 폴과 함께 훌륭한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구는 어떤 곳일까? 폴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가니메데와는 매우 다른 모 양이다. 가니메데의 하루는 100시간인데, 지구의 하루는 겨우 24시간이란다. 더욱이 지구의 밤은 어둡고, 낮 동안은 태양이 비치어 눈부실 만큼 밝은 모양이다. 그 점에서도 좀 다르다. 가니메데에서는 큰 목성이 하늘 가득히 떠서, 언제나 태양의 빛을 반사하고 있으므로 밤도 캄캄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니메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시계를 지구의 시간에 맞춰서 생활하고 있다. 밤의 시간이 오면, 밖이 밝아도 모두 침대에 들어간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는 사이에 나는 벌써 공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공장장은 사무소에 있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기다리기로 했다. 농장에는 많은 노동 로봇이 일하고 있었다. 농장에서 만든 가니메데 버섯으로 주스를 생산하여 지구로 보낸다. 30분 가량 되었을 때, 겨우 공장장이 나타났다. "심프슨 총독으로부터입니다. 회답은 필요 없습니다." 나는 봉투를 전하고 곧 공장을 나왔다. 붉은 모래 뒤를 나는 크게 발을 떼 놓으며 달렸다. 그래도 마을까지 1시간은 충분히 걸렸다. 지하의 아파트로 들어갔을 때, 방안에서 몹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폴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드문 일이다. 아버지는 조용한 사람이어서 절대로 소리 높여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는 사람이다. 또 폴도 아버지께 말대꾸를 하는 소년은 아니다. 나는 문 밖에서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 너무하세요…… 팔아치우다니, 너무해요……." 폴의 흥분한 목소리. "알아듣지 못하는 애구나. 아버지의 말대로 하는 거야." 엄하게 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 "싫어, 절대로 싫어요!" 폴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나의 귀를 쨍하고 울렸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 궁금했지만, 엿듣는 것은 좋지 않는 일이다. 나는 폴의 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나 폴은 자기가 한 일을 무엇이나 내게 이야기해준다. 이윽고 폴이 방에 돌아왔다. "아니, 너 돌아왔었니?" 이렇게 말했을 뿐, 시무룩한 얼굴로 내 앞을 지나 그대로 침대 있는 데로 갔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몰라, 말없이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런 곳에 언제까지나 버티고 서서 말야!" 무뚝뚝한 폴의 말이다. 이런 일도 처음이다. "나는 지쳤어. 이제부터 낮잠이나 자겠어." 하고 폴은 침대로 들어갔다. 나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노동용 로봇은 사용 시간이 끝나면 보통 배터리의 스위치를 끄고 잠재운다. 그렇지 않으면 배터리가 아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가정용 로봇이다. 폴은 잠자리에 들 때에도 나의 스위치를 끄지 않고 그대로 둔다. 이윽고 폴은 잠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서 있었다. 그렇게 폴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나도 차츰 졸음이 왔다. 이 10일 동안 나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배터리도 거의 없어지고 있다. 몸에서 힘이 빠지며 눈앞이 어두워지고 있다. 그 때이다. 폴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의 가슴에 붙어 있는 배터리의 스위치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팔려간 로봇   얼마만큼 잤을까? 나는 폴의 방에서 눈을 떴다. 바로 옆에 폴과 아버지, 또 한 사람 알지 못하는 남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확실하게 들려왔다. "이 로봇은 지구의 그렌우드 공장에서 만들어진 최고급의 Q=5=7형입니다. 글자도 읽을 수 있고 쓰기도 합니 다. 간단한 수학도 풀며, 노동 로봇이나 기계의 수리도 할 수 있지요……." 상대 쪽의 남자는 농부이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손이랑 가죽 저고리를 보고서 곧 알 수 있었다. "이 놈은 어떤 말을 할 수 있나요?" 하고 남자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거칠고 차가운 목소리다. "영어만 하지요." 하고 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테이프만 갈아넣으면, 어느 나라의 말도 할 수 있지요. 나는 이 로봇을 아들의 친구로 하기 위해서 샀던 건데, 무엇을 시켜도 하나 나무랄 데가 없어요. 더욱이 성질이 매우 좋습니다." 로봇은 성질이 중요하다. 성질이 나쁜 로봇은 조그마한 일로도 '미치광이 로봇'이 되기 일쑤이고, 미쳐서 물건을 깨뜨리거나 사람을 다치게도 한다. "알겠습니다. 로봇의 운임이 아까워서 팔겠다는 거군요." 하고 농부가 말하자, 아버지는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비싼 운임을 물면서 지구로 운반하는 것보다는, 지구에 가서 다른 로봇을 사는 편이 훨씬 싸게 먹힐 테니까요." "그럼, 이 로봇을 얼마나 팔 생각입니까?" "5천 달러." "그런 좀 비싼데요……." "이건 고급 가정용 로봇입니다. 보통 노동 로봇보다 비싼 것은 당연합니다." "좋습니다. 사지요." 농부는 결심한 모양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모든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러나 움직이지도,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렉스, 이 사람이 너의 새로운 주인이 될 헤닝스 씨다. 헤닝스 씨는 가니메데에서 가장 큰 농장의 주인이다." 나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헤닝스 씨." "안녕, 렉스. 모두가 너에 대해서 머리가 좋은 고급 로봇이라고 칭찬하고 있어." 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헤닝스는 나를 보았다. "네, 폴이 모두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배운 것은 그다지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농장에서 사용할 작정이니까." 라고 헤닝스는 말했다. "렉스는 노동 로봇의 감독도 할 수 있습니다." 하며 아버지는 나를 위하여 고급적으로 사용해 줄 것을 권했으나, "아니, 농장에는 나의 조수가 둘이나 있어요. 로봇의 감독은 그 둘에게 맡기고 있답니다." 하고 헤닝스는 거절했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의 아들은 이 로봇을 파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헤닝스는 더욱 다짐하려는 듯 이렇게 물었다. "물론 알고 있지요. 아들과 의논해서 결정했지요." 하고 아버지가 말하자 헤닝스는, "그렇다면 렉스로 하여금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합시다." 라고 제의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향하여 부드럽게 말했다. "폴은 밖에 제트카에 있을 거야. 작별 인사를 하고 와라." 시키는 대로 나는 밖으로 나왔다. 폴은 제트카 안에 앉아서,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오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라고 해서 이렇게……" "렉스, 너는 내가 너를 팔고 싶어했다고 생각하니?" "아니, 이번 일은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나를 지구에 데리고 가는 데는 많은 돈이 드니까요." "그래, 그러나 나에게서 너를 빼앗다니 정말 너무해!" "아닙니다, 폴. 당신은 컸습니다. 이제 로봇 친구는 필요 없어요." 나는 단념해야 한다. 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좋은 놈이야. 너와 같은 훌륭한 로봇에게 농장에 일을 시키다니. 풀을 베게 하거나 버섯을 딸 것을 생각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아닙니다. 이번 주인도 상냥한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라고 권하기까지 했어요." "나는 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아!" "알아요. 나를 남겨두고 지구로 가는 것을 슬퍼하는 당신의 마음을……." "그러나 너를 두고 가는데도 너는 조금도 슬퍼 보이지 않는다." "나는 로봇이기 때문에 제멋대로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할 뿐입니다." 나는 생각한 그대로 말했다. 그러자 폴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렉스, 여기 타라!" "왜요?"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이미 헤닝스의 로봇이다. 이제부터 헤닝스의 농장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괜찮으니까 올라와라. 잠깐 사막으로 가자." 하면서 폴은 억지로 나를 자리에 앉혔다. 차는 둥둥 떠오르며 놀라운 속력으로 마을을 빠져 나왔다. 폴의 마음을 나는 잘 안다. 폴은 헤어지기 전에, 다시 한 번 나와 함께 사막이 보고 싶은 거다. 사막은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터였다. 숨바꼭질을 하기도 한…… 가벼운 모래를 휘날리면서 제트카는 달렸다. 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저 산, 이 골짜기, 캄캄한 동굴……어느 것이나 그리운 것뿐이다. 오늘까지 13년 동안의 일을 나는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폴은 동굴 앞에서 제트카를 멈추었다. "여기서 나는 길 잃은 아이가 된 일이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그 때 6살 2개월이었지요. 정말 그 때는 몹시 찾았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만 가자. 이젠 이런 곳도 싫어." 일어설 때, 폴의 눈에 반짝 눈물이 빛났다. 다시 제트카는 모래를 날리며 마을로 되돌아왔다. 아파트의 앞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인과 헤닝스네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렉스, 이제 떠나도록 하자." 하고 헤닝스는 재촉했다. "여러분, 안녕. 그 동안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나는 심프슨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헤닝스의 제트카에 올라갔다. 제트카는 곧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을 나올 때, 뒤돌아보았더니 아버지, 어머니, 제인 세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빼앗긴 바지   헤닝스의 농장에서 나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농장의 감독은 녹색의 몸을 한 화성인이었다. "농장에서 일하는 데 이런 것은 필요 없어." 하면서 화성인은 나의 바지를 벗기고,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 바지는 가정용 로봇의 표지이다. 그것이 벗겨진 순간부터 나는 노동 로봇의 한 무리가 된 것이다. 일은 농장의 풀을 베어 공장에 운반하는 간단한 것이다. 일이 끝나면 감독은 곧 배터리의 스위치를 끊고, 다음 일이 시작될 때까지 로봇들을 자게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으며, 책을 읽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로봇에게 쓸데없는 일은 시키지 말 것. 배터리가 빨리 닳는다." 하고 헤닝스는 언제나 화성인 감독들에게 엄히 명령했다. 그래도 6대의 노동 로봇은 말없이 일만 했다. 노동 로봇은 처음부터 공장이나 농장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모두 대형으로 힘도 강하다. 모양은 직사각형의 큰 몸통에다, 긴 강철 손이 2개 붙어 있다. 그 손으로 마구 풀을 베어서는 몸통 속에 가득히 넣어서 운반한다. 그런데 나는 다르다. 나는 가정용 로봇이다. 아주 자질구레한 일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손발은 가늘고, 몸통에는 여러 가지 기계가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풀을 베는 것이 느리며, 베어놓은 풀도 한 번에 많이 운반하지 못한다. "이 놈은 쓸모가 없는 로봇이야." 감독들은 번갈아 가며 나를 걷어찼다. 다음 날, 나는 헤닝스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헤닝스는 적이 놀라며 "아니, 무슨 일이야?" 하고 나를 보았다. "내게 다른 일을 시켜 주십시오…… 말하자면 이 사무소의 청소라든지……." 하며 나는 열심히 부탁했다. "시끄럽다. 나는 너를 농장에서 일을 시키려고 사왔단 말야." "그러나 나는 책을 읽거나 사람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에이, 말하는 것이 싫다. 특히 로봇과는. 네가 말을 하면 배터리가 빨리 닳아서 그만큼 돈이 든단 말야. 썩 물러가라!" 헤닝스는 무서운 얼굴로 나를 쫓아냈다. "알겠습니다." 나는 얌전히 사무실을 물러 나와, 로봇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오두막에서는 화성인 감독이 로봇들의 배터리를 끄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갑자기 벗고 있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로봇이 바지를 벗었다고, 부끄러워하다니,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지는 우리들 가정용 로봇의 자랑이다. 그것을 빼앗긴다는 것은 가정용 로봇의 수치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헤닝스의 농장에서는 좀처럼 행복하게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다. 바지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책도 읽지 못한다.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쓸쓸하다. 폴이 없어서 쓸쓸하다. 폴은 나를 버렸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폴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다. 나는 심프슨 일가와 함께 지구에는 돌아갈 수가 없다. 나는 어디까지나 로봇이다. 이따금 사람과 같은 기분이 되는 일은 있어도 사람은 아니다. 로봇은 사람의 손으로 사람에게 서비스를 하도록 만들어지고, 사람의 손에 의해 마음대로 부서진다. 본디부터 사람을 원망할 권리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쓸쓸하다. 폴이 없어서 쓸쓸하다. 이렇게 생각한 순간, 화성인의 손이 나의 몸에 닿으면서 가슴의 상자에 있는 배터리의 스위치를 껐다. 그리하여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다. 다음날도 폴의 일을 생각하니 쓸쓸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쓸쓸했다. 나는 일을 하면서 폴과 함께 지내던 즐거운 날들의 추억에 잠기곤 했다. 사막의 동굴로 가서 하루종일 우주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일, 폴의 제트카로 넓은 땅을 횡단하던 일, 그 때 함께 간 제인이 기뻐서 와와 떠들었기 때문에, 나는 제인이 차에서 떨어지지 않게 잡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폴과 지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폴의 성장을 지켜보았고, 폴이 말하고 싶은지 조용히 있고 싶어하는지 그 기분까지도 알 정도로 되어 있었다. 폴이 없어서 쓸쓸하다. 폴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1주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그 날, 나는 일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하여 화성인의 감독에게로 갔다. 감독은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나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우주선 스타퀸호는 지금 하늘에서 우주 공항을 향하여 내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훌륭한 행성간 우주선이 목성의 제3위성 가니메데를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붉고 은빛으로 빛나는 선체는 가니메데의 사람들에게, 지구에 돌아갈 날의 꿈을 안겨 줄 것입니다. 이 우주선으로 지구에 돌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싣고 스타퀸호는 내일 공항을 출발하여, 지구의 푸른 언덕을 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독은 내가 간 것을 알아차렸다. "너 뭐하고 있어?"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습니다." 하고 나는 로봇들의 일의 진행에 대해서 보고를 했다. 감독은 보고만을 듣고는 귀찮은 듯 나를 내쫓아버린다. 나는 로봇의 오두막으로 향하면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리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농장에서 도망칠 결심을 하고 있었다.   도망친 로봇   다음날 아침, 나의 가슴에는 새로운 배터리가 넣어졌다. "너는 동쪽 농장으로 가라!" 하며 감독은 나를 발로 찼다. 다행히 동쪽 농장에는 다른 로봇이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몰래 농장을 빠져 나왔다. 나는 뛰었다. 전속력으로 뛰었다. 나는 시속 30킬로의 속력으로, 배터리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 달릴 수 있었다. 뒤돌아보니, 이미 농장은 거친 사막의 저쪽에 까마득히 보일 뿐이었다. 마음이 놓이는 동시에 나는 슬퍼졌다. 헤닝스는 틀림없이 나의 전자 두뇌가 고장을 일으켜, 농장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가니메데 총독에게 보고할 것이다. 총독은 나를 '미치광이 로봇'으로 지명 수배를 할 것이 틀림없다.만약 붙잡힌다면 그 즉시로 나는 분해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항 쪽을 향해 계속 달려갔다. 폴의 모습을 다시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분해되어도 두렵지 않다. 이윽고 제트카가 나를 앞질렀다. 몇 대가 지면을 스치면서 날아갔다. 모두 공항으로 스타퀸호의 출발을 보러 가는 것이리라.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도 특별히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나와 같은 가정용 로봇은 종종 심부름을 가기 때문이다. 4시간 정도 달렸더니 겨우 지평선에 공항이 나타났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하늘 높이 솟은 스타퀸호의 선체였다. 그것은 참으로 거대한 것이었다. 공항에서 가장 높은 관제탑도 선체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러자 스타퀸호의 주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선의 2개의 문이 열리고, 거기에 로봇들이 짐을 마구 싣고 있었다. 지구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물건일 거다. 나는 우주선의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 사이에는 나 말고도 로봇이 몇이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우주선 주위를 한 바퀴 돌았을 때, 한 군데서 나는 나도 모르게 우뚝 서버렸다. 저쪽에 한 대의 제트카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헤닝스와 농장의 감독이 아닌가! 두 사람 모두 초조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들은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서 안전하게 숨을 장소를 찾아보았다. 저쪽에서 3대의 로봇이 우주선을 보면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대가 모두 나와 같은 모양의 가정용 로봇이다. 나는 로봇들에게로 가까이 가서 몰래 그 뒤에 서 있었다. 이젠 혹시 헤닝스가 나의 모습을 본다 할지라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형의 로봇은 가슴 판에 새겨진 번호를 조사하지 않으면 구별할 수 없다. 3대의 로봇들은 갑자기 헤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우주선으로 가까이 가는 1대의 로봇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알몸이었다. 다른 로봇들은 바지를 입고 있는데, 나만은 벗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바로 옆에 짐 상자가 많이 쌓여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당황하여 미끄러져 들어갔다. 빈 상자에 강철의 손을 올려놓고 살짝 엿보았더니, 헤닝스와 감독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사람들 속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 대의 제트카가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모두 4명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일까? 폴은 지구로 돌아간다는 데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누이동생 제인은 활짝 웃는 얼굴로 어머니의 손을 당기면서 자꾸만 무엇인가 묻고 있다. 아버지 심프슨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으로 우주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나 폴은 웃지 않았다. 홀로 뚝 떨어져서, 공항에 모인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헤닝스와 감독이 다가와서 심프슨씨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얼굴을 붉혀 가지고 자꾸만 손을 내흔들고 있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아마도 내가 농장에서 도망친 것을 말하는 것일 거다. 아버지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헤닝스는 폴에게 무엇인가 물었다. 내가 폴한테로 도망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폴은 몸을 움츠리며 머리를 내저었다. 헤닝스가 아무리 떠들어보았자 소용이 없을 거다. 나를 도망치도록 소홀히 한 것은 헤닝스의 책임이다. 본래의 주인과 이미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윽고 출발의 시간이 다가왔다. 승객들은 이동 플랫폼에 올라가 차례로 우주선의 높은 입구로 들어갔다. 폴의 모습도 가족들과 함께 은빛의 선체 속으로 사라졌다. 하는 나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마침내 입구가 소리도 없이 닫히고, 이동 플랫폼이 우주선에서 떨어져 간다. 드디어 출발이다. 나는 나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로봇의 주제에 너무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오히려 폴이 없는 가니메데에서 일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폴이 있는 우주선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을 때였다. 우주선의 화물용 입구에 작은 모습이 나타났다. 그것은 화물용 입구에서 지상에까지 내려온 로프에 매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작은 모습은 사람이었다. 우주선에서 도망치려고 하는 소년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전송하는 사람들은 반대편에 모여 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상자 뒤에서 나오면 곧 헤닝스에게 발견되고 말 것이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 폴은 마침내 땅 위에 내려서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갑자기 전송하는 사람들이 우주선의 옆을 떨어지며 물러섰다. 우르릉 우르릉! 거대한 우주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분사의 흰 연기를 땅 위에 내뿜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틀렸다. 만약에 폴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이미 늦었다. 지금은 아무도 우주선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우주선은 상승을 시작했다. 점차로 속력을 내면서 순식간에 하늘 한 구석으로 빨려 들어간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남자가 내가 있는 빈 상자의 산더미로 걸어오고 있다. 헤닝스와 감독이다. 나는 공항 구석에 내밀고 있는 바위 그늘로 달려들어갔다. 위험했다. 헤닝스들은 내가 있던 빈 상자더미를 자꾸만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윽고 단념한 모양으로 제트카로 되돌아갔다. 두 사람의 차가 공항으로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폴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폴은 혼자다. 폴에게는 내가 필요한 것이다.   사막의 동굴   공항에서 10킬로 정도 떨어진 사막에 비상 대피용의 동굴이 있다. 폴과 내가 곧잘 놀러갔던 곳이다. 돌아갈 집이 없는 폴은 아마 그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 동굴에는 피난 장소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비상용의 식품도 저장되어 있다. 나는 사막을 날 듯이 뛰어가서, 동굴의 어두운 입구로 들어갔다. 여기서 기다리면 반드시 폴이 올 것이다. 마음을 놓은 탓인지 나는 내 몸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끼끼끼…끼끼……… 가슴의 조종통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우리들 로봇에게는 모두 조종통이 붙어 있다. 이것은 로봇이 반드시 사람의 명령에 따르도록 조종하는 기계이다. 만약 명령을 배반해서 행동하면, 조종통이 위험 신호의 소리를 낸다. 그래도 그만두지 않으면 기계가 부서져서, 미치광이 로봇이 되고 만다. 나는 걱정되었다. 그러나 조종통의 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나는 사람의 명령을 반대했으나, 미치광이는 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그러나 몸이 노곤했다. 배터리의 에너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눈도 희미해지고, 귀도 멀어졌다. 예비용의 에너지를 배터리에 넣으면 좋겠으나 그것은 내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장치로 되어 있다. 나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이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 때, 입구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우주복을 입은 소년이다. "폴!" 나는 그 모습을 붙들고 힘껏 껴안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나는 강철의 로봇이다. 사람을 힘껏 안으면, 사람의 몸은 터지고 뼈가 부서진다. "오오, 렉스!" 폴 쪽에서 나에게 매달렸다. "어쩌면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 왜 헤닝스의 농장에서 도망쳤니?"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그래, 나도 너의 일이 걱정되어 스타퀸호에서 도망쳤어." 폴은 기쁜 듯이 주먹으로 나의 단단한 가슴을 쿵쿵 때렸다. "그러나 지금쯤 스타퀸호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큰 소동을 벌이고 있을 거여요." 나는 그것이 걱정이 되었다. "나는 이젠 아이가 아니야. 아버지나 어머니도 나를 걱정하지는 않을 거야." 폴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결심했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당신이 없어진 것을 알고 곧 가니메데의 경찰에 연락을 취했을 거여요. 이미 당신의 수색이 벌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머리에 붙어 있는 무선 수신기의 안테나를 가니메데 방송국의 파장에 맞추었다. 삐삐삐-삐삐. 처음에는 잡음이 들어오더니 그것이 없어지자, 아나운서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가니메데 총독 심프슨의 장남 폴 심프슨이 출발 직전의 스타퀸호를 탈출하여 숨어버렸습니다. 가정용 로봇 '렉스'가 유괴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렉스는 헤닝스 농장을 도망쳐 나온 미치광이 로봇입니다. 렉스를 발견한 분은 즉시로 광선총으로 파괴해 주십시오. 말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겁이 났다. 광선총은 무섭다! "폴, 나와 함께 있으면 위험합니다. 헤어집시다. 당신은 곧 공항으로 가서 사정을 말해요. 그러면 공항의 사람이 아버지에게 연락해 줄 겁니다. 나는 헤닝스 농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어떤 곤란을 당해도 좋다. 그러나 폴만은 구해주고 싶다. "렉스, 나는 물론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그러나 너와 함께가 아니면 싫다. 너를 지구에 데리고 가기 위하여 나는 스타퀸호를 도망친 거야. 혼자서 지구로 가기보다는 너와 함께 이 가니메데에서 사는 쪽이 더 좋아." 하며 폴은 나의 말을 도무지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알았습니다. " 그래서 나는 폴의 명령대로 하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의 일을 의논해 봐." 하고 폴은 바위 위에 앉았다. 그러나 나는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만약에 수색대에 발견되면 나는 끝장이다. 번쩍, 광선총이 빛남과 동시에 나의 조종통은 녹은 철의 덩어리가 되고 말리라.   가나폴리스를 향하여   우리는 동굴의 입구를 막았다. 폴은 동굴에 있는 비상용 음료수 탱크에서 물을 먹고, 되살아난 듯 기운을 내었다. 다행히 식료품도 있었다. 쿠키가 3상자, 더욱이 건빵이며 치즈도 발견되었다. 폴은 마구 먹었다. 먹고 난 나머지는 내가 자루에 넣었다. "자,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3일 동안 여기 있자. 3일이 지나면 수색하는 것도 약해진다." 배를 채운 폴은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합니까?"내가 묻자, 폴은 크게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졸려서 견딜 수가 없어. 한잠 자고 나서 뒷일을 생각해보기로 하지. 너도 좀 쉬는 게 좋을 거야." 하고 폴은 나의 가슴에 손을 내밀어 번호판 밑에 있는 문을 열고, 배터리의 스위치를 껐다. 그 끄는 방법이 불완전했던 모양이다. 배터리가 약간 작용하여 나로 하여금 꿈을 꾸게 했다. 무서운 꿈이었다. 나는 혼자서 사막을 걷고 있었다. 뒤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손에는 광선총을 들고 있었다. "미치광이 로봇이다! 미치광이 로봇이 있다!" 사람은 외치면서 광선총을 발사했다. 슛! 눈부신 빛이 나의 몸을 덮자 조종통이 점점 녹아간다…… 이 때, 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라, 렉스!" 어느 사이에 나는 배터리의 스위치가 넣어져 있었다. "얼마만큼 잠잤습니까?" 나는 폴에게 물었다. "12시간 정도야. 나는 배가 고프다." 쿠키 상자를 열면서 폴이 말했다. "우리들은 빨리 여기서 나가는 편이 좋을 거다." "어디로 갑니까?" "가나폴리스다." "거기를 어떻게 갑니까?" 하고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나폴리스는 여기서 160킬로나 떨어진 먼 거리이다. 걸어서 가면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그것도 그렇구나." 폴은 생각에 잠겼다. 이 때, 갑자기 나의 귀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동굴의 밖에서다. 몇 사람의 사나이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둘을 찾아다니는 수색대일 것이다. 폴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 희미한 소리이다. 나는 듣는 힘을 최대로 발휘하여 사람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동굴로 가까이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폴에게 쓸데없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제트카로 가나폴리스에 가면 된다!" 하고 폴은 눈을 빛냈다. "제트카는 어디서 구합니까?" "나는 마을을 떠날 때, 이웃 사람에게 제트카를 팔았어. 그것을 몰래 빌리자. 가나폴리스에서 내버리면 누군가가 발견하여 임자에게 되돌려 줄 거다." "그건 도둑질이 아닙니까?"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빌어 타는 삯을 주면 되잖아?" "그러나 임자는 누가 타고 갔는지를 모릅니다. 역시 도둑질입니다." "그건 너의 지나친 생각이다." "아니,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나의 말에 폴은 주춤해진 모양이었으나, 다시 생각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가나폴리스로 갈 방법은 없다." 하고 나중에는 성난 것처럼 말했다. 할 수 없다. 나는 로봇이다. 아무리 말로 다투어 봤댔자 최후에는 사람의 명령을 듣도록 만들어져 있다. "가나폴리스로 가서 대체 무엇을 합니까?" "먹을 것과 네가 필요한 배터리에 넣을 에너지를 산다. 그리고 바지도……" 폴은 나의 몸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가정용 로봇이 벗고 있으면 이상하니까 말야."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나도 반대하지 않았다. 가나폴리스에는 여러 가지 가게며 식당이 있다. 또 화물 전용의 큰 우주 공항도 있다. 수색대도 가나폴리스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렉스, 아버지는 너를 판 돈을 모조리 내게 주었어. 이 돈을 쓰는 것은 내 자유다." 폴은 또 제트카를 손에 넣을 방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폴, 제트카를 훔치고 돈을 두고 가는 일은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폴은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건 왜?" "당신은 사람입니다. 남의 것을 훔치면 마음이 아프지요. 나는 로봇이기 때문에 마음이 없습니다. 부정직한 일을 해도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렉스!" 폴은 내 손에 손을 얹고, 나를 지켜보았다. "너는 로봇이지만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보다 훌륭한 마음을……" 이렇게 하여 우리들의 의논은 결정되었다. 동굴에서 꼭 3일을 지낸 후, 우리들은 계획대로 산발레이의 마을에서 제트카를 손에 넣었다. 그러자 곧 가나폴리스로 향했다. 운이 좋게 도중에서 수색대를 만나지 않았으며, 무사히 가나폴리스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은 산발레이를 더 크게 한 것과 같았다. 지상에는 투명한 돔에 덮인 사무소며 가게의 건물이 줄을 이었고, 지하에는 사람들의 주택이 있었다. 폴은 차를 돔의 입구에 세웠다. "이제부터 너의 에너지를 사러 가자." "잘 될 것 같아요?" 나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수상하게 보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틀림없이 광선총을 겨누어 나의 머리를 날려버릴 거예요. 라디오의 뉴스를 들었음에 틀림없을걸요." "그러나 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배터리에 에너지를 넣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게 돼." "네. 확실히 나는 에너지 부족으로 몸이 나른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나 마을은 위험합니다. 그보다도 공항에 갑시다. 아까 화물 전용의 낡은 우주선이 보였습니다. 3급 화물 우주선입니다." "그거로 어떻게 하지?" "그런 화물 우주선은 마을의 뉴스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과연, 화물 우주선의 선장에게 너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거지." "그런 것을 불쑥 부탁하면 의심을 받습니다." 나는 나른해지는 것을 참으며, 폴에게 작전을 이야기했다. "응, 좋은 생각이다." 폴은 제트카를 몰았다. 차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의 배터리는 거의 없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최후의 힘을 짜내면서 폴과 함께 화물 우주선까지 걸어갔다. 낡은 선체에는 '드라베라호'라는 이름이 똑똑히 보였다.   화물 우주선 드라베라호   "세 놓은 로봇이 있습니다. 필요 없으신지요?" 폴은 '드라베라호'의 승강구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뭐라고?" 남자는 의아스러운 눈으로 폴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까 짐을 싣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로봇이 더 필요하시지 않을까 해서요. 당신은 선장님이시죠?" 내가 가르쳐 준대로 폴은 말했다. "물론이지. 내 이름은 버커. 혹성 무역에서는 가장 우수한 화물 우주선, 드라베라호의 주인이지. 그리고 파일럿이며 승조원이다. 이 우주선은 어떤 물건이건 보내고 싶은 별에 운반해 준다." 버커 선장은 몸짓은 작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칼은 하얗고, 얼굴이나 손에는 깊은 주름살이 가득하다. "선장님, 세 놓는 로봇이 필요 없어요?" 또 다시 폴이 재촉하듯 말했다. "글쎄다." 하며 선장은 손으로 우주복 위의 턱 근처를 쓰다듬었다. 생각할 때의 버릇인 모양이다. 드라베라호의 짐 싣는 문에서는 노동 로봇들이 한창 짐을 싣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선장을 말했다. "나는 짐을 잘 싣는 로봇을 3대나 가지고 있다." "그 정도 갖고는 부족해요. 이만큼 큰 우주선에는 보통 5대는 필요할텐데요." "흥, 넌 꽤 자세하구나." 선장은 놀란 듯이 폴을 보았다. 그러나 놀랄 것까지는 없는 일이다. 폴은 우주선을 몹시 좋아한다. 틈만 있으면 우주선의 모형을 만들기도 하고, 공항에서 진짜를 보기도 했다.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다." 선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 생각이 없으시다면 다른 우주선에 가서 물어 보겠어요." 폴은 실망한 듯 말했다. "딴 데서도 빌릴 사람은 없다고 생각된다. 너는 정말로 이 로봇을 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니?" 그러자 폴은 사실대로 말했다. "실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나의 로봇의 배터리가 거의 없어지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가 필요하냐?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것이지." 하고 선장은 우주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에 폴이 내게 속삭였다. "이 우주선은 화성에 들렀다가 지구로 가는 모양이다. 좋은 기회다. 우리, 이 우주선으로 밀항하자." 폴은 내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명령했다. "알았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밀항 계획을 세울 사이도 없이 선장이 되돌아왔다. 충전한 배터리를 나의 가슴에 넣으며 선장은 말했다. "공연히 시간을 보내고 말았구나. 출발까지 이제 몇 시간 안 남았다. 이 로봇이 일을 도와주었으면……" "무엇을 시킬까요?" 폴은 눈을 빛내며 힘차게 물었다. "짐 싣는 일이다. 저 상자를 우주선에 싣도록 해라." "네." 폴은 산더미 같은 짐을 가리키며 딱 하고 손가락으로 소리를 냈다. "렉스, 일을 시작해라!" 에너지가 들어갔으므로 기운을 차린 나는 즉시로 우주선의 뒤로 돌아갔다. 3대의 짐꾼 로봇이 선 내로 짐을 운반하고 있었다. 어느 것이나 짐을 싣는 일밖에 못하는 하급 로봇이다. 드라베라호의 승조원은 선장 한 사람과 로봇들뿐이다. 선체의 크기는 지름이 약 25미터, 높이 30미터의 뚱뚱한 모양이며, 키가 낮은 수직 안정판과 우주 통신용 안테나가 붙어 있다. 나는 다른 짐꾼 로봇들과 함께 짐을 운반하면서, 그것만 생각했다. 폴은 선장과 이야기를 하면서 조종실 입구로 들어갔다. 선 내를 보고, 밀항 계획을 짜고 있는지도 모른다. 짐을 거의 실어가고 있을 때, 조종실 입구에서 폴과 선장이 나왔다. 선장은 공항 사무소 쪽으로 걸어갔고, 폴은 나의 옆으로 왔다. "어떻게 했지요?" 하고 나는 물었다. "배가 고프다고 했더니 선장이 먹을 것을 주었어. 참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밀항하지요? 좋은 방법을 발견했습니까?" "짐 상자에 숨겠어." "뭐라구요?" 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짐을 싣는 곳에는 난방장치가 없습니다. 우주에 나가면 기온이 마구 내려가서 영도 이하가 됩니다. 우주복을 입고 있어도 우선 당신은 얼어죽습니다." 하며 나는 필사적으로 말렸다. 폴이 입고 있는 우주복은 기압복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사람이 공기가 없는 곳에서 호흡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추위는 막을 수가 없다. "출발하면 얼어죽기 전에 네가 나를 상자에서 꺼내면 되지 않아." "그건 안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말리려고 했다. 너무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폴은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렉스, 빨리 나를 상자에 넣어라!" 그것은 명령이다. 나는 상자 하나를 열었다. 안에는 마른풀이 들어 있었다. "빨리, 빨리……" 폴은 마른풀을 부서진 상자에 옮기고, 힘있게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재빨리 상자의 뚜껑을 닫고 못을 박았다. 그 때 선장이 왔다. 아슬아슬했다. "빨리 실어라!" "네." 나는 폴이 숨어 있는 상자를 들고 선실로 운반했다. 하며 나는 망설였으나, 폴의 명령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다른 로봇들은 짐 싣는 일을 거의 끝내고 있었다. "작업이 끝나면 너희들은 선 내로 들어가 있어라. 나는 출항 허가증을 받아 오겠다." 선장은 로봇들에게 명령하고, 공항 사무소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선장은 두세 걸음 걷고 나더니 갑자기 뒤돌아보았다. "렉스, 짐 하나를 잊어버렸다. 공항 사무소에 있다. 나와 함께 가서 운반해 와라." 싫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선장과 함께 공항 사무소로 향하면서 내 정신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드라베라호에 숨어 들어가지 못한다면, 폴은 화물실 상자 속에서 얼어죽고 만다.   화성에로의 여행   나는 버커 선장과 함께 공항 사무소로 들어갔다. 짐은 계원의 책상 위에 있었다. 그것을 나는 단단히 들고 선장의 용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나에게 주의를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버커 선장과 함께 짐을 가지러 온 로봇이 설마 '헤닝스의 농장에서 도망치고, 전 총독의 장남을 유괴한 로봇'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일보다는 나는 폴의 일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드라베라호에 숨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겨우 선장은 이야기를 끝내고, 나에게 말했다. "자, 가자." 공항 사무소를 나와 드라베라호의 옆으로 돌아왔을 때, 선장은 폴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나를 기다리다 못해 지쳐서 집에 돌아간 모양이야. 너도 돌아가라. 용무는 끝났다." 이렇게 말하면서 선장은 나에게 빌린 값을 내주었다. 여기서 되돌아서면 폴을 살리지 못한다. 나는 얼른 이렇게 말했다. "선장님, 드라베라호는 로봇이 부족하죠?" "그렇지. 2대는 수리 공장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는 못 데리고 왔다." "그럼, 그 대신 나를 데리고 가 줄 수 없을까요? 나는 로봇이나 선체의 수리도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너는 수리도 할 수 있느냐?" "네, 그리고 나는 로봇의 감독도 할 수 있습니다. 라디오도 갖고 있습니다." "폴은 나에게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선장님이 묻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데리고 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본의 아니게 나의 능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너는 폴에게 말도 하지 않고 우리 우주선을 타도 괜찮으냐? 그 아이를 찾아가는 게 좋을 거다." "아닙니다. 폴은 나를 당신에게 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너는 정말로 폴의 로봇이냐? 그 아이의 아버지 로봇이 아니냐?" 선장은 폴이 아버지의 로봇을 몰래 가지고 나온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나는 폴의 로봇입니다. 폴의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지구로 갔습니다." "글세, 나중에 시끄러운 일이 생기면 싫은데…… 너 정말로 수리도 할 수 있지?" 한참 동안 망설인 후, 선장은 결심한 듯이 말했다. "좋아, 데리고 가마. 너는 조종실에 타라." 나는 얼른 조종실로 들어가서 선장이 기계 점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코코코코콩. 드디어 드라베라호는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고, 점점 속력을 더하여 가니메데와 목성의 중력권에서 탈출했다. 선장이 화성으로 향하는 코스를 정하고 기계를 점검하는 사이에, 나는 선 내를 돌아보았다. 조종실 뒤에는 6개의 선실이 있었다. 몇 달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은 듯 어느 방이나 먼지투성이였다. "여기는 공기도 있고 난방도 되어 있구나. 폴을 감추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나는 선실에서 복도를 빠져나가 화물실로 들어갔다. 화물실은 짐으로 가득 찼으나, 폴이 들어가 있는 상자는 내가 놓은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강철의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끼끼끼낏. 뚜껑이 열리고, 폴의 기압복이 보였다. 폴은 상자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이미 화물실의 온도는 영도 가까이 내려가고 있었다. "기운을 내요." 나는 폴을 안고, 서둘러서 따뜻한 선실로 돌아왔다. "여기는 기밀실로 되어 있습니다. 기압복을 벗어도 괜찮을 겁니다." "고맙다, 렉스" 기압복을 벗고서 겨우 폴은 떨지 않게 되었다. "2,30분만 더 상자 속에 있었으면 얼어죽을 판이었다." 폴은 나의 활약을 칭찬하고 나서 힘없이 말했다. "배가 고프다. 무엇인가 먹을 걸 찾아줄 수 있겠니?" "잠깐만 기다려 줘요." 나는 선실을 나와서, 선장실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선장의 식료와 물이 있다. 나는 큰 빵과 치즈와, 컵 가득히 물을 가지고 선실로 돌아왔다. "물은 이뿐이에요. 많이 쓰면 선장이 눈치챌 테니까요." 내가 준 빵을 폴은 마구 먹고, 꿀꺽꿀꺽 물도 마셨다. 목성의 제3위성 가니메데에서 화성까지의 여행은 길다. 이제 며칠이 걸린다. 나는 매일 선장의 눈을 피해서는 폴에게 먹을 것을 운반했다. 선장실에 있는 책도 말하지도 않고 꺼냈다. "밀항도 꽤 좋은 거다. 이대로 화성에서 지구로 가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폴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나는 걱정이었다. 만일 선장에게 발각되면? 아마도 선장은 화성에 도착했을 때, 나와 폴을 화성 경찰에다 인계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헤어지게 된다. 만약에 화성에 폴은 발견되지 않고 지구에 도착한다고 해도, 나는 헤닝스의 농장에서 도망친 미치광이 로봇으로 체포되어 파괴를 당하지 않을지? "시시한 생각은 하지 말아라. 잘 될 거다. 아버지도 내가 잘 말하면 반드시 알아주실 거야. 그리고 이 돈을 헤닝스에 게 보내면, 너는 또 정식으로 나의 것이 된다."하고 폴은 주머니에서 돈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폴의 아버지가 나를 헤닝스에게 팔고 받은 돈이었다. 과연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았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일은 모두 사람이 정하기 때문에……. "렉스 커피를 마시고 싶구나. 한 잔 갖다 주지 않겠어?" "좋아요." 나는 선실을 나와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우주선에 있는 식료 중에서도 커피는 선장이 특히 귀중해하는 물건이다. 너무 적어지면 의심을 받는다. 나는 얼른 커피를 끓였다. 그 때, 운수 나쁘게도 선장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렉스, 누가 커피를 만들라고 했어?" "아무도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선장님께 드리려고…… 나는 가정용 로봇이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때는 주인에게 커피를 드렸습니다." 하고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어디 보자." 선장은 컵을 집어들더니 한 입 맛을 보았다. "음, 이건 맛있구나. 그런데 너는 보통 요리도 만들 수 있느냐?" "네. 요리책을 두 권 읽고 내용을 기억 뱅크에 옮기고 있습니다." "놀랐는데. 네가 요리사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나에게 커피를 한 잔 더 다오."두 잔 째의 커피도 선장은 맛있게 마셨다. 이리하여 이제 폴의 식사는 걱정이 없게 된다. 선장의 식사를 준비할 때, 조금 더 만들어 폴에게 가져가면 된다.   밀항 소년   드라베라호의 주위는 언제나 암흑의 공간이었다. 언제가 낮이고 밤인지, 시간의 흐름을 전혀 알 수 없다. 어느 날, 버커 선장이 나에게 명령했다. "착륙용의 날개가 고장이 나 있어. 수리해라. 할만하냐?" "맡겨 주십시오." 나는 자석 신발을 신고, 우주선 밖으로 나갔다. 이러한 작업은 로봇에게 제격이다. 인간은 우주복을 입기 때문에 몸이 자유롭지 못해 일이 잘 안 된다. 나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서 수리를 끝냈다. 이리하여 우주선은 어디에 착륙해도 좋게 되었다. "너는 정말 쓸모가 있구나." 하고 선장은 크게 기뻐했다. 그리하여 나는 선장의 시계며, 선 내의 전기 난방 수리도 맡았다. 그리고 선 내를 깨끗이 청소를 했다. 너무 물을 많이 쓰지 말라고 꾸중을 하기 전까지 어디나 깨끗이 했다. 하루에 3번 식사를 만들어 선장을 기쁘게 했다. 나도 기뻤다. 그 때마다 폴의 것도 함께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틈을 보아 나는 짐꾼 로봇들의 손질도 했다. 좀 더러워진 몸통을 번쩍번쩍 닦기도 하고, 부서진 곳은 모두 수리를 했다. 이러한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선장과 아주 친하게 되었다. 때때로 선장은 나를 선장실로 불러 말동무도 시켰다. 선장은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 테이프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틈만 있으면 몇 시간 동안이나 그것을 듣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장실에는 라디오가 없었다. 나는 식당 구석에 뒹굴고 있는 낡은 라디오를 수리했는데, 그다지 듣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선장은 나를 보고 물었다. "너 음악의 리듬을 알 수 있어?" "아닙니다. 어느 것이나 같은 음의 연속으로 들릴 뿐입니다." "안 되겠는데, 리듬에는 빛깔이 있는 거야. 밝은 색깔의 리듬, 어두운 색깔의 리듬……" "나는 색깔을 모릅니다." "아니, 너의 시력 밸브는 검은 것과 흰 것밖에 느끼지 못하는가?" "그렇습니다." "좀 기다려." 하며 선장은 예비 부속품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새로운 시력 밸브를 꺼냈다. "이 컬러 밸브를 너에게 끼워 줄게." 낡은 밸브 대신 새로운 밸브를 끼었을 때, 나는 흥분했다. 나의 눈앞에는 갑자기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 나의 놀라는 모습을 선장은 만족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는 색깔을 알게 되었다. 나의 셔츠는 파란색, 의자 위는 빨강이야." 선장은 색깔의 이름을 하나씩 내게 가르쳐 주었다. "굉장합니다!"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바깥을 봐라!" 그리하여 나는 우주선의 최전방에 있는 조종실에 들어갔다. 창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별도 전혀 달라져 있다. 암흑의 공간에 떠 있는 노란 별, 푸른 별……모두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색깔, 나는 지금까지 색깔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동안 나는 아름다운 바깥 경치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느 사이에 선장이 없어졌다. 틀림없이 또 선실에서 음악 테이프를 듣고 있을 것이다. 나는 폴에게 보고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폴이 숨어 있는 선실로 급히 갔다. 폴은 내가 갖다 준 잡지를 읽고 있었다. 나의 모습을 보자 그것을 내던졌다. "이제 우주 무역의 잡지는 싫증이 난다. 선장은 음악이라든지 우주 여행의 책은 갖고 있지 않나?" "찾아보지요. 그건 그렇고, 당신의 셔츠를 세탁하지 않으면 안되겠어요. 빨강 색깔이 꽤 더러워지고 있어요." "뭐라구, 렉스! 지금 뭐라고 했어?" "파랑 침대 커버도 세탁하는 것이 좋겠어요." "렉스, 왜 그래? 너는 색깔을 알지 못할 텐데 말야." "알도록 되었어요. 아까 버커 선장이 컬러의 시력 밸브를 내게 끼워줬어요." 나는 폴을 기쁘게 해주려고 생각했는데, 폴은 시무룩해졌다. "컬러의 시력 밸브라면 내가 사줄 것이었는데 안됐구나." 폴은 다른 사람이 나의 몸을 매만지는 것이 싫은 것이다. "물론 당신이 사준다면, 선장이 준 것은 빼내고 대신 그 밸브를 끼겠어요." 하고 나는 폴의 환심을 사려고 이렇게 말했다. 이 때, 갑자기 선실의 문이 열리면서 버커 선장이 들어왔다. 그리고 멍하니 폴을 지켜보았다.   선장의 노여움   "이건 어떻게 된 일이야? 여기서 뭘 하고 있었니?" 버커 선장은 나와 폴에게 계속 질문을 했다. 움푹 들어간 두 눈이 번쩍번쩍 빛나면서 얼굴은 새빨개졌다. 미칠 듯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저는 밀항하기 위해서 이 우주선을 탔습니다." 폴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게 뭐람, 출발 전에 너를 발견하지 못한 내가 큰 바보였어." 선장은 신음 소리를 냈다. "발견될 수 없게 탔습니다." 가슴을 내밀고 폴은 말했다. "흐흥……" 선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너는 대단한 로봇이다. 이 아이보다 머리가 좋다." 이 말을 듣자, 폴은 화를 냈다. "나보다 로봇인 렉스가 머리가 좋다구요?" "아니야. 똑똑히 말하면 어느 쪽이나 잔꾀라는 거다. 밀항 같은 것이 될 수 있어! 덕분에 나는 유괴범이 되었다." "유괴? 그건 무슨 말입니까?" "아직 모르느냐? 혹성 경찰에서는 내가 너를 유괴하여 소행성군에 노예로서 팔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선장님은 렉스가 나를 유괴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까?" 폴은 놀라며 소리쳤다. 나도 물어 보았다. "어디서 들었습니까?" "어디서 들었던지 그건 내 마음대로야!" 선장은 분한 듯이 폴은 노려보았다. 문득 나는 생각이 났다. 며칠 전 나는 선장을 위하여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 주었다. 나는 라디오를 고친 것을 후회했으나,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뉴스 방송은 사실인가? 렉스가 너를 유괴했느냐?" 선장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아닙니다. 제가 스스로 스타퀸호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가니메데에서 렉스를 판 사람으로부터 도망친 렉스를 훔쳤습니다." 필사적으로 폴은 설명했다. "과연." 선장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가 너를 우주선으로 유괴했다고 생각할거란 말야." 선장의 노여움은 점점 심해 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폴이 불리해지기만 하겠다. 나는 폴을 돕기 위하여 말했다. "선장님, 행성 경찰에서는 우리들이 이 우주선에 탄 것을 알지 못합니다. 선장님이 말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자 폴은 용기를 되찾았다. "선장님, 우리들을 지구로 데리고 가 주십시오. 지구의 공항에 도착하면, 드라베라호에서 감쪽같이 빠져나겠습니다." "어느 공항이나?" "미국의 캔자스 시입니다." 폴은 이렇게 말하고, 숨을 죽이며 선장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헛일이었다. "안 된다. 혹성 경찰이 너희들을 발견하면 어느 우주선을 타고 가니메데에서 왔느냐고 곧 조사를 한다. 그러면 내가 유괴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내가 경찰의 의심을 받지 않는 길은 단지 하나, 화성 공항에 도착하면 너를 화성 경찰에 넘기고 사실을 이야기하는 일이다." 역시 선장은 시끄러운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실망했다. 화성 경찰은 아마 우리들의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폴은 곧 지구로 보내지고, 나는 또 가니메데의 헤닝스 농장으로- 그것은 폴도 알고 있었다. "선장님,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나와 렉스의 운임을 물 테니까요." 하고 주머니에서 꺼낸 돈 뭉치를 폴은 선장에게 주었다. "5천 달러입니다." "5천 달러? 이렇게 많은 돈이 어디서 났느냐? 로봇을 훔친 것과 같이 은행에서 훔친 돈이 아니냐?" "천만에요!" 폴은 몹시 화를 냈다. "이건 아버지가 내게 준 돈이에요. 이만하면 지구로 가는 일등표를 4장은 살 수 있죠?" "그러나 내가 겪어야 할 위험의 대금으로서는 그렇게 많은 돈도 아냐." "대체 선장님은 얼마면 좋겠습니까? 부족한 것은 지구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물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너의 일로 해서 돈벌이를 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은 화성 경찰이 알아서 잘 해 줄 거다." 완고한 선장은 아무래도 우리들을 경찰에 넘길 작정인 모양이다. "화성 경찰은 반드시 렉스를 파괴해 버리거나, 가니메데의 농장에 되돌려 보낼 겁니다." "그러면 너의 아버지가 또 다른 로봇을 사 줄 것이다." "렉스 같은 로봇이 또 있는 줄 알아요? 선장님, 당신은 렉스를 좋아하죠? 컬러 밸브를 렉스에게 끼워 주었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도 렉스를 산산조각이 나게 하고 싶으신가요?" 나를 구하려고 폴의 열과 성의는 마침내 선장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나 역시 렉스를 부서지게 하고는 싶지 않다. 렉스는 훌륭한 로봇이니까." "감사합니다, 선장님!" 하고 나도 모르게 나는 인사를 했다. "렉스도 이렇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선장님, 부탁입니다. 우리들을 지구로 데려다 주십시오." 폴은 선장의 손에 억지로 5천 달러의 돈 뭉치를 쥐어 주었다. "너한테는 지고 말았다. 어떻게 해보자." 선장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선실을 나갔다. "버커 선장은 좋은 사람이다. 이제 우리도 지구로 갈 수 있다." 안심한 폴은 내게 지구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식구들은 트레드의 집에서 살 예정이다. 캔자스 시에서 꽤 떨어져 있으나 걱정 없어. 지구는 교통 기관이 발달되어 있으니까 말야." "제트카도 많이 있죠?" "물론이지. 그러나 우리들은 콥터로 가는 거다." "콥터라니요?" "여객기의 일종이다. 제트카보다 훨씬 빠르다. 캔자스 시에서 트레드까지 45분이면 날아간다." "지구란 굉장한 곳이구먼요. 컬러 밸브를 끼기를 잘했어요. 아름다운 색깔을 많이 볼 수 있겠어요." "우리들은 모노레일도 탈 수 있어. 모노레일은 공중의 철길에 매달려 있는 제트카의 일종이고, 콥터처럼 빨리 달린다." "로봇도 많이 있습니까?" "있지. 로봇은 모두 지구에서 만드니까. 너 기억하고 있지 않니?" "아니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시에게 나를 사주었을 때부터의 일뿐입니다. 나는 여러 가지 모양의 로봇과 함께 가게에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당신의 아버지가 나를 골라서 가니메데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도중 폴은 손뼉을 쳤다. "그렇다!" "뭡니까?" "이 우주선에는 로봇용의 새로운 배터리가 있을 거야." "네, 버커 선장은 혹성 무역으로 긴 우주 여행을 하기 때문에 많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하나 여분으로 너의 가슴에 넣어 둬." "그러나 그건 도둑이 됩니다." "걱정 말아. 나는 선장에게 네 사람 치의 운임을 지불하고 있어. 네가 배터리를 두 개 사용해도 괜찮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장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라." 왜 폴은 선장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지 나는 알 수가 없었 다. 그 후 10여일의 여행이 계속된 끝에, 드라베라호는 겨우 화성 공항에 착륙했다. "화성 경찰의 검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숨어 있어요." 나는 폴의 선실을 굳게 잠근 다음, 조종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선장은 나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렉스, 폴을 불러오너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나는 또 선실을 열고, 폴과 함께 조종실에 들어갔다. 선장은 갑자기 돈 뭉치를 폴에게 내밀었다. "돌려준다." "예? 선장님은 돈이 필요 없으신 가요?" "응, 잠깐동안 빌었을 뿐이다. 나는 좋지 못한 일로 돈을 벌고 싶지는 않다. 너도 법을 지키고 바르게 사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하며 선장은 폴과 나에게 말할 여유도 주지 않고 우주선의 입구를 열었다. 그러자 녹색의 몸을 한 화성인의 경찰 두 사람이 우주선에 올라왔다.   체포된 폴   화성 경찰은 사무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당신이 버커 선장입니까?" "그렇습니다." 선장이 대답했다. "우리들은 당신의 연락을 받고, 행방불명의 소년을 인계하러 왔습니다." "이 아이입니다." 선장은 폴을 가리켰다. 그러자 경찰의 한 사람이 폴의 팔을 잡으며 선장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당신도 함께 경찰에 가 주셔야 겠습니다.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선장은 나에게 여기 있으라고 말하고서 경찰들과 함께 우주선을 나갔다. 그러나 폴은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네 사람이 떠난 후, 나는 조종실에 선 채로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알 수 있다. 알 수가 없다. 나는 또 계속 생각했다. 문득 그 까닭이 머리를 스친다. 이윽고 수수께끼가 풀렸다. 폴이 경찰에 끌려갈 때, 내 쪽은 보지 않은 이유도 알겠다. 다시 말해서 폴은 나를 지켜준 것이다. 1시간도 못 되어, 버커 선장은 우주선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물었다. "선장님은 왜 폴을 경찰에 넘겼습니까?" "그것이 폴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다. 경찰은 폴을 지구의 아버지에게로 잘 보내준다." "그런데 나에 대해선 왜 경찰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폴을 로봇의 도둑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 만하냐?" 선장을 폴을 위하여 나를 경찰의 눈으로부터 숨겼던 것이다. "본디부터 폴은 혼자서 스타퀸호를 도망쳤다. 폴이 로봇하고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경찰은 네가 농장에서 도망친 후, 가니메데의 황무지에서 배터리가 모두 닳아버리고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드라베라호에서 일해라. 이 우주선은 지구에 가서 또 가니메데에 돌아온다. 그러면 헤닝스의 농장으로 되돌아가는 거다. 걱정 말아. 내가 헤닝스에게 너를 잘 쓰도록 말해 주겠어." "부탁합니다." 나는 그렇게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좋아. 이것으로 밀항 사건은 끝났다. 빨리 짐을 내리자. 너도 도와 줘." 선장은 앞서서 조종실에서 나갔다. 이 때, 나는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종이를 보았다. 나는 선장의 뒤를 따라가며, 몰래 그 종이를 쥐었다.   - 폴은 마아즈 시의 시장 집에 두기로 하다.   스타퀸호에서 도망친 소년이 왜 이처럼 우대를 받는 것일까? 이유는 곧 알았다. 폴의 아버지가 지구에서 가장 큰 우주 무역 회사의 중역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3대의 로봇들이 짐을 열심히 내리고 있었다. 나도 그 속에 들어가서 상자를 운반했다. 이젠 도망칠 기운도 없다. 모든 것은 끝났다. 나와 폴은 이번만은 정말로 헤어지게 된다. 그것이 폴을 위하여 좋을지도 모른다. 폴은 성장했다. 벌써 16살이다. 로봇과 놀 나이가 아니다. 폴은 지구에서 사람의 친구를 얻어 지낼 것이다. 지구는 가니메데와는 다르다. 가니메데에서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같은 나의 친구는 좀체 없다. 그러나 지구에서라면 얼마든지 있다. 또 가니메데는 황폐한 위험한 위성이다. 아이들은 사고나 다른 재난에서 몸을 지키기 위하여 힘이 강한 로봇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구에서는 그러한 걱정은 없다. 나는 짐을 내려 땅 위에 쌓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러나 폴이 없으면 역시 쓸쓸하다. 선장이 말한 것처럼 나와 폴은 정말로 헤어지는 편이 좋은 것일까? 의아심이 솟아났다. 선장은 거짓말쟁이다. 폴과 나를 지구로 데려다 준다고 일단 약속하고서도 경찰에 알렸다. 신용이 안 된다! 나는 어느 사이에 드라베라호에서 도망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화물실로 들어갔다. 또 내릴 상자가 꽤 남아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한 대의 로봇이 짐을 내리려고 들어왔다. 나는 그 놈에게 명령했다. "이 상자는 맨 나중에 내리고, 상자를 쌓은 바깥쪽에 놓아라.": "알았습니다." 노동 로봇은 다른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서둘러서 상자를 비도록 한 후, 상자 속에 들어가서 안으로 뚜껑을 단단히 닫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노동 로봇은 내가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 명령한대로 그 위치에 운반했다. "그걸로 끝이지?" 선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아니, 렉스가 없는데. 렉스, 어디로 갔어? 선실이냐, 나와라! 아직 일이 있어." 점점 선장의 소리가 멀어져 갔다. 선 내로 들어간 것일 거다. 어물거리고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운 좋게 바로 옆에 공항의 창고가 줄지어 있었다. 나는 짐 뒤로 창고에 다가갔다. 그 뒤쪽으로 하여 공항을 빠져나갔다. 지금쯤 틀림없이 버커 선장은 내가 도망친 것을 깨달았을 거다. 그러나 화성 경찰에 알릴 수는 없다. 나는 드라베라호에는 타고 있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화성 도시   나는 퍽 전에 폴의 책에서 화성에 대해 읽었다. 화성 도시는 3개의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하나는 드라베라호가 착륙한 화물 전용의 화성 공항, 사막의 한가운데이므로 항상 모래먼지가 날아올라 사람의 옷을 더럽히고, 로봇의 몸에 붙어서 곤란을 받는다. 더욱이 사람은 화성 헬멧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화성의 대기는 사람이 호흡하기에는 희박하다. 물론 가니메데에서 입는 기압복보다 훨씬 가벼운 것이지만. 화성 공항에서 이어진 고가 도로를 30킬로 나아가니, 마아즈 시로 나간다. 거대한 플라스틱의 공기 돔에 덮인 훌륭한 마을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공항이다. 여기는 여행객 전용으로 '마아즈 포인트'라고 부른다. 매일같이 최신형의 아름다운 우주선이 발착하여 번창한다. '마아즈 시와 2개의 공항을 잇는 삼각형 속에 화성의 인구가 약 절반 살고 있다.' 폴의 책에는 확실히 그같이 씌어 있었다. 나는 화물 전용 공항에서 마아즈 시로 향했다. 넓은 길에는 트럭과 사람과 로봇의 행렬이 길게 계속되었다.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않게 나는 다른 로봇과 보조를 맞추어서 빨리 걸었다. 몇 시간 후에 마아즈 시에 이르렀다. 공기 돔의 에어 로 크를 지나서 마을로 들어섰을 때, 우선 나는 텔레비전 전화통을 발견했다.시장의 주소는 전화번호부에 나와 있었다. 레트와인 81이다. 처음이라 마을의 사정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주위에는 나와 같은 형의 가정용 로봇이 몇 대나 걷고 있었다. 나는 그중 한 대를 불러 세웠다. "레트 와인 81은 어디쯤이야?" "몰라." 불친절한 대답이었다. 혼자서 바깥을 걷고 있는 로봇은 모두 주인이 명령한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그 밖의 장소는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단념하고 혼자 찾기로 했다. 마을을 빙빙 돌면서 겨우 '레트 와인'이라고 쓴 마을의 표지판을 발견했다. 다음은 간단했다. 시장의 집은 5분도 걸리지 않아서 알았다. 나는 현관 문 앞에 서서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숲 속을 빠져나가 집 뒤로 돌아갔다. 초인종을 눌렀더니 로봇이 나오며,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여기 있는 지구의 소년에 대해서 묻고 싶다. 너는 알고 있지?" "알고 있어." 나와 같은 형의 가정용 로봇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나를 만나게 해 줄 수 없어?" "안 된다. 아무에게도 만나게 하지 말라고 명령되어 있다." 할 수 없이 나는 폴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물어 보았다. "지구의 소년은 잘 있어?" "아주 건강해." "지금 어디 있어?" "방에서 자고 있어." "소년이 이 집에서 잘 대우를 받느냐?" "물론 아주 잘 대우하고 있어." "고맙다. 그것만 알면 되다." 나는 얌전하게 문 앞에서 물러났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내가 없어도 폴은 행복하게 될 것 같다. 버커 선장의 말대로 나는 가니메데에 돌아가서, 또 헤닝스의 농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컬러 밸브를 빼내고, 흑백 밸브로 갈아치울 것이다. 한 번 맛본 자유와 색깔의 세계를 잊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시장집 모퉁이를 돌아 거리로 되돌아 나왔다. 이 때였다. 나의 눈에 폴의 모습이 비친 것은! 폴은 유리로 둘러싸인 방안에 있었다. 커튼을 열고 유리를 쿵쿵 두들기고 있었다. 나는 유리벽으로 달려가서 듣는 힘을 발휘해서 폴의 소리를 들었다. "이 유리는 너무 두텁다. 렉스, 이걸 깨뜨리고 여기서 나를 꺼내다오!" "알겠습니다." 나는 강철의 주먹을 둘로 모으고 유리벽을 때렸다. 쨍그 랑! 유리는 쉽게 깨졌고, 폴이 빠져 나오기에 안성맞춤인 구멍이 뚫렸다. 폴은 헬멧을 들고 구멍으로 빠져 나왔다. "네가 꼭 와 주리라고 생각했어. 나는 기다리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습니까?" "숨자. 경찰이 곧 뒤쫓아올 거다. 그들로부터 숨을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여기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치는 것이 좋을 겁니다." 우리는 길과는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시장 집의 뒤에는 숲이 있었다. 나무가 우리들을 숨겨줄 거다. 다행히 아무도 우리들의 모습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부주의했다. 시장 집은 마아즈 시를 완전히 덮는 공기 돔의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앗, 막혔다!" 이윽고 폴은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공기 돔의 거대한 벽이 나타났던 것이다. 공기 돔의 저쪽에 끝없이 펼쳐지는 화성의 사막이 보였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의 힘이라면 공기 돔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행하지 못했다. 공기 돔을 부수면 마아즈시의 공기가 마구 밖으로 도망친다. 많은 사람을 죽음의 위험에 부닥치게 하는 중대한 범죄를 나는 저지를 수가 없다. "어떻게 하지?" 하고 폴은 나를 쳐다보았다. "땅을 파고 숨읍시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공기 돔의 안쪽도 부드러운 모래땅이다. 나는 두 손으로 모래를 파헤쳐서, 잠깐 동안에 나와 폴이 들어갈 만한 굴을 팠다. "됐어!" 폴은 헬멧을 쓰고 굴로 들어갔다. 이어서 나도 미끄러져 들어가서는 우리들 뒤에 모래를 덮었다. 마지막으로 팔을 내릴 때 모래가 오므라들었다. 틀림없이 위는 울퉁불퉁할 거다. 누군가가 가까이 에서 보면, 아래에 무엇인가 숨어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뒤쫓는 사람들은 분명히 다른 쪽을 찾을 것이다. 우리들이 설마 공기 돔에서 숨이 막힐 장소로 도망을 치고, 굴을 파서 숨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모래 폭풍우   우리는 굴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네가 반드시 찾으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당신이 있는 곳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버커 선장이 가지고 온 보고서의 사본을 읽었던 겁니다." "나는 경찰에는 잠시 있었을 뿐이다. 곧 시장 집에 옮겨졌던 거다. 그런데 덥구나. 언제까지 모래 속에 박혀 있어야 하나?" 폴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2,3시간쯤 어두워질 때까지 여기 있는 편이 안전합니다." 하고 나는 달랬다. "곤란한데. 헬멧 속에 모래가 들어와서 껄끔껄끔하구나." "좀 옆으로 해봐요." "응, 이제 됐다." 모래가 나온 모양으로 폴은 또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아즈시의 시장은 될수록 빨리 나를 제1급의 행성간 우주선으로 지구로 보낸다고 했어. 틀림없이 아버지의 회사에 잘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야."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너를 여기 둔 채로? 바보 같은! 너하고 함께 돌아가고 싶어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 폴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조용히 해주세요. 움직이면 또 헬멧에 모래가 들어갑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기뻤다. 폴은 목숨을 걸고 나를 지구로 데리고 가려고 결심하고 있는 것이다. "폴, 곧 이제부터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아요." "나는 돈을 가지고 있다. 굴에서 나가면 마아즈 포인트 공항에 가서 지구 행의 우주선을 타자."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당연하다. 내가 나의 돈으로 너를 지구에 데리고 가면, 아버지도 뭐라고 하시지는 않을 거다." "잠깐만, 당신은 중요한 일을 한 가지 잊고 있어요." "어떤 일?" "헤닝스의 일 말입니다. 당신이 지구 행의 표를 사는 돈은 나를 판 대금이죠? 지금 나는 헤닝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를 훔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돈은 표를 사고도 절반이 남는다. 그걸 헤닝스에게 되돌려 보낼까?" "절반 가지고는 헤닝스가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지구에 가서 아버지에게서 얻으면 돼. 아버지는 아무래도 새로운 로봇을 살 작정으로 있으니까 말야."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에게 준 돈으로 새로운 로봇을 살 작정이 아닐까요?" "그것도 그렇겠군." 폴이 대답이 막히자, 나는 다시 말했다. "또 한 가지 걱정되는 일이 있습니다. 지구에 돌아가서 헤닝스에게 돈을 전부 보내도, 경찰은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벌금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나를 훔쳤다는 이유로……" 질서정연한 이야기는 사람보다 로봇이 낫다. 폴은 나의 말에 대답이 궁해지자, 드디어 화를 냈다. "렉스, 네가 말하는 것 같은 일은 지구에 돌아가서 해결하면 된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걸 심각하게 생각해!" "알았습니다." 결국 나는 사람에게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드디어 밤이 왔다. 우리들은 모래를 파헤치고 어두운 지상에 섰다. 다행히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렉스, 너 마아즈 포인트 공항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어?" "대강은 압니다. 우리는 여기서 돔 밖으로 나가서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마을의 출입구에는 경찰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또 굴을 파기 시작했고, 폴은 감시를 했다. 이윽고 나는 땅 아래로 들어간 공기 돔의 벽 아래를 넘어, 바깥 사막으로 빠지는 터널을 팠다. 우선 폴이 모래를 헤치면서 터널을 지나고, 다음에 내가 나간 다음 곧 터널을 막았다. 이리하여 마아즈시의 공기는 새지 않게 되었다. "멀리 돌아서 마아즈 포인트 공항으로 가는 길로 나갑시다." 나는 앞서서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았을 때, 굉장한 폭풍이 불고 어두운 하늘에서 모래의 비가 내렸다. "앗, 모래 폭풍우다!" 폴이 비틀거렸다. 화성의 모래 폭풍우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닥쳐온다. 사막의 끝까지 바라볼 수 있는 좋은 날씨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1분 후에는 하늘 가득히 날아 올라갔던 모래가 맹렬한 힘으로 내리퍼붓는다. 모래가 헬멧을 날리고, 사람을 질식해서 죽게 하는 일도 있다. "나를 꽉 잡아요!" 나는 두 손으로 폴을 끌어당기려고 했으나, 이미 폴은 거기에는 없었다. 모래 폭풍우가 폴을 어둠 속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폴, 폴!" 나는 힘껏 외쳤다. 듣는 힘을 최대로 발휘하여 폴의 대답을 들으려고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어둠 속에서 불어닥치는 바람과 모래의 소리뿐이었다. 어느 사이에 내 몸통도 무릎까지 모래에 파묻히고 있었다. 모래 속에 깊이 파묻히면 다시 찾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빨리 발견하지 못하면…… 빨리 발견하지 못하면……" 스스로에게 외치며, 나는 주위에 생긴 모래산을 모조리 팠다. 얼마쯤 파 보았을까, 나의 손에 무엇인가 부딪쳤다. 살그머니 잡고 모래에서 꺼냈더니, 바로 폴이 아닌가. "잘 됐다……" 나는 폴의 헬멧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이젠 괜찮습니다. 내 몸에 꼭 붙으세요." 나는 폴을 끌어당기며 모래 폭풍으로부터 지켰다. 그러자 폴이 말했다. "큰일났다! 모래 폭풍우 때문에 방향을 알 수 없게 됐다!" "괜찮아요. 나의 안테나는 공항 라디오의 전파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파를 의지하고 가면 됩니다." "그렇구나. 나는 아주 잊어버리고 있었어." 폴 뿐만 아니라, 사람은 무서운 일을 당하면 생각하는 힘이 둔해진다. 그러나 로봇은 다르다. 로봇은 어떤 경우에도 최대의 힘을 발휘하여, 기계가 고장날 때까지 자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나는 한쪽 손으로 폴을 안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머리 위의 안테나를 공항 방송의 전파에 오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장치했다. 또 바람이 심해져서 폴은 걷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두 손으로 폴을 가슴에까지 안아 올려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복사뼈까지 푹푹 모래에 빠졌다. "렉스, 네가 움직이는 것은 드라베라호에서 배터리를 두 개 넣었기 때문이다." 폴은 헬멧을 나의 가슴에 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나는 다 닳았습니다. 지금은 두 개째 배터리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 공항 라디오의 전파를 잡았습니다……" 머리 위의 안테나를 전파로 향하게 하면서, 나는 두 발에 힘을 주어 나아갔다. 모래 폭풍우는 점차로 약해지다가 드디어 그쳤다. 맑게 갠 하늘에는 화성의 위성 데이모스와 포보스가 둥실 떠 있었다.   푸른 지구   전파는 우리들을 무사히 마아즈 포인트 공항으로 이끌어 주었다. 공항의 일부는 마아즈 시와 같이 공기 돔에 덮여 있었다. 공항 앞에서 나는 폴에게 말했다. "나와 당신이 함께 공항에 들어가면 눈에 뜨입니다. 내가 두 사람 치의 표를 사지요. 그 동안에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부탁해." 폴은 주머니에서 메모 용지와 연필을 꺼냈다. "내가 책상 대신을 하지요." 나는 모래땅에 벌렁 누웠다. "지구행 1등 2장……" 나의 가슴 위에서 폴은 메모를 썼다. 그 메모와 돈을 가지고 나는 공항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드라베라호가 착륙한 화물 전용의 공항과는 달리 번창했다. 낮과 밤의 구별이 없이 대형 우주선이 발착하고, 많은 승강객이나 로봇으로 언제나 법석거렸다. 녹색의 화성인. 키가 2미터를 넘는 눈이 큰 금성인. 바삭바삭 마른 내화성의 몸을 가진 수성인. 그러나 여행자의 대부분은 지구인이었다. 지구인의 모습이 남자도 여자도 역시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표를 파는 창구에서 메모와 돈을 냈다. "오클라호마호에 타십시오. 15분 후에 출발합니다." 화성인의 계원이 1등표를 주면서 말했다. 나는 2장의 표를 꼭 쥐고, 창구 위에 나붙어 있는 시간표를 쳐다보았다. 시간표 옆에 혹성 여행 연맹의 주의서가 나붙어 있었다. -이 공항에서는 당분간 로봇의 승선을 금지함. 로봇은 화물 전용의 화성 공항에서 화물 우주선에 승선할 것.   나는 힘없이 폴에게로 돌아갔다. "잘 됐어. 렉스! 우리들의 계획은 끝내 성공했다!" 뛰어오르며 기뻐하는 폴에게 새삼스럽게 주의서를 말할 수는 없다. 말하면 폴은 오클라호마호에는 타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당신이 먼저 타십시오. 나는 시간이 다 됐을 때 뛰어오르겠습니다." "응, 탈 때까지 따로 있는 편이 좋을 거다." 폴은 기분이 좋았다. "오클라호마호에 승선하실 분은 서둘러 주십시오. 이제 5분 후에 출발합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우리들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그럼 먼저 타겠어." 폴은 나에게 손을 흔들며 우주선의 입구로 사라졌다. 드디어 출발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승선구의 문이 조용히 닫히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으르릉…… 오클라호마호는 오렌지 색깔의 불길을 내뿜으며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금쯤 폴은 내가 타지 않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로봇은 승선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폴의 성난 얼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마아즈 포인트 공항을 나와서 황폐한 사막을 터벅터벅 걸었다. 어디로 갈 목적지도 없다. 절로 발길이 화성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라베라호는 내가 도망쳤을 때와 같은, 여전한 모습으로 땅 위에 있었다. 나는 조종실의 입구를 똑똑 소리냈다. 문이 열리면서 버커 선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불량 소년처럼 불쑥 내뺐다가 불쑥 나타났구나, 지금까지 어디를 헤매 다녔어?" "미안합니다. 폴을 찾으러 갔으나 잘 안 되었습니다. 그 전처럼 나를 써주지 않겠습니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조심해서 말했다. 폴을 시장의 집에서 빼내 왔지만, 폴과 함께 지구로 돌아가는 계획이 잘 되지 않았다고 말해버렸던 거이다. "좋아, 너는 일을 잘 하니까 도움이 돼." 버커 선장은 나의 제멋대로의 행동을 깨끗이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않는다고 약속하겠느냐?" "약속합니다." 나는 똑똑하게 말했다. "자, 출발! 너는 노동 로봇의 손질을 해 줘!" 버커 선장은 나에게 명령하고 조종석에 앉았다. 이렇게 하여 지구에로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나는 매일 열심히 일을 했다. 어느 날, 선장은 나를 선장실로 불렀다. "너는 체스(서양 장기)를 둘 줄 알아?" "네, 합니다." "그럼, 나하고 해 보자." 선장과 나는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 1회전은 내가 이겼다. "너 로봇인 주제에 제법이구나. 다시 한 번 더 해 봐." 선장은 안타까워했으나, 2회전도 내가 이겼다. 3회전, 4회전, 5회전……8회전까지 계속 이기자, 선장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너 누구에게서 체스를 배웠어?" "체스 책을 읽었을 뿐입니다. 나의 기억 뱅크에는 4백 승부 1만 1천 2백 24수가 정확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체스의 세계 챔피언도 너를 이길 수는 없지." 선장은 신음 소리를 냈다. 화성을 떠나서 3주만에 선장은 조종실에서 나에게 말했다. "저게 지구다!" 암흑의 공간에 푸른 색깔로 빛나는 천체가 점점 다가왔다. "아름답구나!" 나도 모르게 외쳤다. 지금까지 본 어느 별보다 지구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난 곧 서글퍼졌다.   다시 만나다   드라베라호는 예정대로 캔자스 시의 공항에 착륙했다. "렉스, 지구를 출발하기까지 너의 배터리를 뽑아 둔다. 또 도망치고 싶어하면 곤란하니까." 선장은 나의 가슴을 열었다. "그 대신 폴에 대해서 조사해 주십시오. 무사히 집에 돌아왔는지, 부탁합니다." 나는 선장에게 부탁했다. 그 때였다. "미치광이 로봇이 미쳐 날뛴다!" 하고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선실의 창 너머로 공항 빌딩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나보다 훨씬 큰 로봇이 뛰어나왔다. 로봇은 확실히 미쳐 있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히고 밟아 버렸다. "위험하다! 모두 도망쳐라!" 두 명의 경관이 광선총으로 로봇을 겨누었다. 그러나 로봇이 소녀를 옆구리에 끼고 있기 때문에 발사할 수도 없었다. "살려줘요!" 소녀의 비명이 내 귀에 울렸을 때, 나는 선장을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렉스, 어디로 가냐!" 선장이 불렀으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나는 곧바로 미치광이 로봇을 향하여 달려갔다. "이 봐, 그 소녀를 놓아라! 사람을 해치지 말아라!" 그러나 나의 말이 미치광이 로봇에게 통할 리가 없다. 대형 로봇은 소녀를 낀 채로 내게 대들었다. 딱! 강철의 손이 나의 어깨를 쳤을 때 불꽃이 튀겼다. 나는 얻어맞으면서 소녀를 끼고 있는 한쪽 팔을 비틀었다. 이윽고 팔이 늘어지며 겨우 손이 빠질 수 있었다. 이제 안심이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상대방의 팔을 비틀었다. 찌지직!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미치광이 로봇의 팔이 어깨에서 떨어졌다. 그 때, 두 사람의 경관이 달려왔다. 광선총의 광선을 받은 미치광이 로봇은 픽하고 땅에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나자 나의 눈앞은 캄캄해졌다. 배터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잠들었는지 모른다. 나의 눈에 다시 빛이 되돌아왔다. 새로운 배터리가 넣어진 것이다. 처음으로 소년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이 점차로 확실해져 왔다. "렉스, 알 만해? 나야." 소년은 폴이었다. 이젠 만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 폴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침 지구에 도착하여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어. 그리고 뉴스로 네가 미치광이 로봇을 때려눕힌 것을 듣고 달려온 거다." "미안해요. 폴 당신을 속이기도 해서요." "좋아, 나를 위해서 한 것이지? 알고 있어."   폴의 뒤에는 아버지, 어머니, 누이동생 제인, 버커 선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남자와 여자도 서 있었다. "렉스, 이 사람들은 너를 만든 그렌우드 로봇 제조 회사의 기사다. 즉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다." 하고 폴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는 세계 첫째의 로봇이다. 너를 이 세상에 내보낸 우리들은 코가 높아진 느낌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렌우드의 기사들은 번갈아 가며 나의 몸을 쓰다듬어 주었다. 폴의 아버지는 헤닝스의 돈을 보내고 정식으로 다시 사들였다. 경찰에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제 도망칠 필요는 없게 된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트레드의 집에서 나와 함께 사는 거다. 이젠 놓치지 않는다. 자, 너의 새로운 바지를 사러 가자." 하고 폴은 나의 팔에 매달렸다. "폴, 폴!" 나는 폴을 끌어안고 실컷 울고 싶었다. 그러나 로봇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로봇은 울지 않는다.   --   작품 해설   인간적인 로봇   이 공상과학소설의 작자 래스터 델 레이는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여행을 몹시 좋아하여,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여름 휴가나 겨울 휴가에는 미국 국내는 물론 멀리 캐나다나 멕시코까지 갔습니다. 여행이라고 하여 번들번들 놀기나 한 것이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일을 했습니다. 목수, 호텔의 종업원, 기자, 잡지의 외교원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소설을 쓰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책을 낸 것은 22세 때였습니다. 그 후, 소설의 비평이나 잡지의 편집에 손을 대며 그는 공상과학소설을 계속 써서, 오늘날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공상과학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델 레이는 학생 시대에 원자 물리학, 의학, 전자공항 등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 과학적인 지식과 각지에서 일한 경험이 잘 융합되어, 인간미가 가득한 공상과학소설을 쓴 것입니다. 델 레이가 쓰는 로봇은 기계이면서도 모두 인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망친 로봇」의 주인공인 렉스는 눈이 하나, 몸도 딱딱한 모습만은 인간을 닮지 않았으나, 사물을 생각하는 것은 인간과 꼭 같습니다. 사물을 바르게 판단하며 언제나 자기를 희생하여, 주인인 폴 소년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 우정과 용기는 보통 인간보다 훌륭할 정도입니다. 렉스가 주인의 사정으로 팔려 가는 장면은 스토우 부인의 유명한 소설「엉클 톰스 캐빈」을 생각하게 합니다. 새로운 주인에게 학대를 받아도 본래의 주인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만나려고 생각하는 렉스의 애처로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겹게 합니다. 델 레이는 로봇의 모습을 빌려, 우주 시대에 사는 이상적인 인간을 그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로봇을 쓰는 공상과학 작가는 많이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에드먼드 쿠퍼 등은 유명합니다. 다만 특히 델 레이의 로봇은 인간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공상 과학 소설이라고 하면 우주 시대의 모험이나 과학 만능의 세계를 쓴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소원이나 기도가 들어 있지 않으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보아서 「도망친 로봇」은 단지 우주 모험 소설로 끝나지 않고 문학적인 깊이를 가진, 소년 소녀를 위한 공상과학소설의 명작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델 레이는 「사랑하는 헬렌」, 「신경 섬유」 등 어른을 위한 우수한 공상과학소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수는 소년 소녀를 위한 것이 훨씬 많습니다. '나는 어른보다 소년 소녀에게 공상과학소설을 읽히기를 바란다. 공상과학소설은 소년 소녀를 즐겁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우주 시대에 사는 소년 소녀의 마음에 끝없는 꿈과 희망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라고 델 레이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도 소년 소녀를 위하여 많은 공상과학소설을 써 주실 것입니다.
1083    27세기의 발명왕 / 휴고 건즈백 Hugo Gernsback 지음 댓글:  조회:506  추천:0  2021-03-19
27세기의 발명왕 Ralph 124C41+   휴고 건즈백 Hugo Gernsback 지음   랄프 플러스··················· 3 텔레비전 전화의 혼선··············· 8 눈사태····················· 15 빛으로 된 탑·················· 21 방문객····················· 25 27세기의 뉴욕················· 30 축 제······················ 39 유 괴······················ 46 대추적····················· 54 페르난은 어디로················· 57 함정에 빠지다·················· 65 우주에서···················· 69 악마의 술책··················· 82 아리스, 죽다·················· 97     랄프 플러스   젊고 재기에 넘쳐있는 청년 랄프는 기쁨에 넘친 눈으로 유리 용기 안에 들어있는 한 마리의 모르모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귀여운 눈을 반짝이면서, 완전히 죽어있던 그 모르모트가 24시간만에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청년 랄프는 실험대 위에 놓여있는 둥근 유리 용기를 바라보면서 기쁨의 함성을 올렸습니다. 놀랄만한 대성공을 이룩한 것입니다. 오늘, 2660년 9월 1일, 달력이 가리키는 이 날은 인류를 위하여 하나의 획기적인 기념일이 될 것입니다. 랄프는 넓은 방의 모퉁이에 있는 대형 텔레비전 전화 앞에 우뚝 멈추었습니다. 복잡한 버튼과 스위치가 빽빽하게 장치되어 있는 텔레비전 전화 앞의 조종대에는 또 미터 자동계기와 신호등이 붙어 있었습니다. 랄프는 재빠른 솜씨로 스위치들을 조작하고는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 순간 벽 중앙에 있는 가로 세로 1미터의 정사각형 모양을 가진 스크린이 환해지면서 밝게 웃는 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랄프는 명랑하게 그 청년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잘 있었나? 에드워드.” “물론 잘 있었지. 자네는 어떤가, 랄프.” 랄프는 에드워드라고 불린 청년에게 연구실에 꼭 들러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가 궁금해하는 에드워드에게 랄프는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실험대 위의 유리 용기를 가리켰습니다. 입체 텔레비전이기 때문에 몸을 내밀어 용기를 보려고 하는 에드워드의 몸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올 것같이 보였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용기를 바라보던 에드워드는 감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오, 랄프! 자네는 기어이 그것을 완성하고 말았군.” “그렇다네.” 랄프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난 죽은 것을 다시 살려냈네.” 에드워드는 들뜬 목소리로 축하를 했습니다. “과연 랄프. 자네는 훌륭한 천재야. 아니 어떻게 죽은 것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을 거야. 자넨 인류를 위해 훌륭한 발명을 했어! 어쨌든 축하하네. 자네야말로 우리들의 랄프 124C41 플러스군 그래.” “고맙네, 에드워드 350B11.” 랄프는 기쁨에 찬 얼굴로 말했습니다. 지구에는 전쟁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고, 각국의 국민들은 세계 정부를 세우고, 그 지배하에 세계 전체가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서기 2600년대는 그 옛날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아주 놀라운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이 없어지자 어떤 군비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한 나라 국민처럼 서로를 사랑하며 인류를 위하여 과학을 발달시키고 기술을 연구하여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없어졌으므로 군비에 소요되던 지금까지의 엄청난 돈과 연구, 그것들을 위해 일하고 있던 많은 과학자들이 이제는 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편리해진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단 한 가지의 곤란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각국의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람의 이름도 나라마다 달랐습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을 없애기 위해 200년 전부터 세계 각국의 언어를 통일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에게도 알맞은 공통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오랜 시일을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노력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한결같이 먼저 ‘랄프’라든가 ‘에드워드’라든가, ‘민수’ ‘영수’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그 밑에 살고 있는 땅이나 자기의 직업 등으로 서로 다른 번호와 기호를 붙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랄프 C41’이라든가 ‘에드워드 11’이라는 이름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단, 이름 맨 끝에 붙어있는 +(플러스)라는 기호는 아무에게나 붙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 기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계 정부의 수상을 비롯하여 단 10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호는 인류를 위하여 아주 특별히 위대한 공적을 남긴 사람에게만 내리는 영광스러운 기호이기 때문입니다. 랄프는 여러 가지 위대한 발명을 함으로써 인류에게 봉사했으므로 그 명예로운 +기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텔레비전 전화의 혼선   에드워드는 아직 흥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네는 정말 훌륭해. 이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닌가. 앓고 있는 사람, 그 모든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거네.” 랄프는 에드워드에게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너무 그러지 말게. 아직은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야. 이제 겨우 동물을 실험해서 성공한 것 뿐이야. 사람에게 적용시키려면 많은 실험과 연구를 거듭해야 돼.” “난 자네를 믿어. 빠른 시일 내로 성공하고 말 거야.” 대화 도중 갑자기 텔레비전 스크린이 마구 흔들리다가 곧 어두워지면서 꺼져 버렸습니다. 이 텔레비전 전화는 세계 어느 곳이라도 통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혼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스크린을 바라보면서 랄프는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고장이 난 것입니다. 랄프는 고장난 곳을 고치기 위해 스위치를 이리 저리로 돌려보기도 하고 버튼을 눌러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사리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랄프가 중계소의 교환수를 부르기 위해 스위치에 손을 댔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스크린이 밝아졌습니다. 랄프는 스크린을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랄프는 깜짝 놀랐습니다. 스크린 속에는 에드워드가 아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랄프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가씨는 프랑스 투의 말씨로 랄프에게 물었습니다. “누구세요, 당신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시골의 어느 집에 아가씨는 혼자서 있었습니다. 랄프는 정중하게 그 아가씨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텔레비전 전화가 혼선이 된 모양입니다. 친구와 함께 얘기를 하다 도중에 갑자기 끊어져 버렸어요.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곧 중계소에 연락을 해 고치도록 해야겠어요.” 아가씨는 의외로 상냥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에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인가요? 당신 방은 온통 기계로 꽉 차 있군요. 무슨 연구실 아니면 우주선의 조종실 같아 보여요. 거기 어디죠?” “아, 여기는 뉴욕입니다. 그쪽은 프랑스인가요?” “아니에요. 여기는 스위스에요. 알프스 산 중턱이랍니다.” 아가씨는 랄프를 자세히 바라보고는 이상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어디서였을까요?” “텔레비젼에서 보셨겠죠!” 라고 랄프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 아가씨는 지금 텔레비젼 전화에 비치고 있는 사람이 그 유명한 발명왕 ‘랄프 124C플러스’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랄프는 그 아가씨를 향해 겸손하게 웃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가씨는 귀여운 눈을 반짝이면서 훌륭한 분과 이야기를 직접 나누게 된 것이 꿈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기쁜 얼굴을 하며 자기를 소개하였습니다. “전 아리스 212B423이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아리스.” 랄프 역시 아가씨와 알게 된 것이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아리스는 알프스의 로잔산 중턱에 아버지, 언니와 같이 살고있는 아가씨였습니다. 5일 전에 가족들이 반중력 비행차로 파리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아리스는 5일 만에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셈입니다. 아버지와 언니는 곧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심한 눈보라로 인하여 도저히 로잔산 근처까지 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리스는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더군다나 그 유명한 랄프 124C41플러스라는 것에 흥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좀처럼 흥분은 가라앉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리스가 있는 곳에는 눈 때문에 텔레비젼 전화 안테나까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안테나를 간신히 응급 수리하여 파리와 연락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혼선이 되는 바람에 랄프의 텔레비젼 전화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아리스는 계속 예쁘게 웃었습니다. 아리스는 의지가 대단히 강한 아가씨였습니다. 알프스 산중에서 5일 동안이나 눈 속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직접 자기 손으로 안테나를 수리할 정도였습니다. 랄프는 조금 화가 났습니다. 이 시대는 세계의 기후도 과학의 힘으로 완전히 조종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비나 눈을 필요로 할 때는 그것들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리게 할 수 있었고, 필요 이상의 큰 눈, 비는 보통 때에는 내리지 않게 하고 있었는데 아리스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 그럼 스위스의 기상 조정 센터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랄프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스위스의 기상 조정 센터는 낮잠을 자고 있는 건가요? 5일 동안이나 눈보라가 계속 되고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그것은 기상 조정 센터의 기사들이 스위스 지사와의 불화 때문에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아리스가 랄프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자 랄프는 몹시 노했습니다. 남들이 당하는 피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를 랄프는 무척 싫어합니다. 사람의 안전을 지켜야 되는 기상 조정 센터의 기사들이 파업을 했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괘씸한 일이었습니다. “잠깐 기다려요, 아리스. 제가 파리에 연락하여 눈이 멈출 수 있도록 해보죠.” 랄프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습니다. ‘리리리리리리. 리리리링. 리리리리링’ 하는 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아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 벨 소리는 사태를 알리는 경보였던 것입니다.   눈사태   로잔산에서는 무시무시한 눈사태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리스, 내 말에 침착하게 대답해요. 안테나를 이동할 수 있겠어요?” “예, 할 수 있어요.” “됐습니다. 그럼 빨리 지붕으로 올라가서 안테나를 정확히 눈사태가 일어난 방향으로 돌려놓아요.” 아리스는 침착한 모습으로 웃음까지 웃어 보였습니다. 아리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방에서 나갔습니다. 아리스의 뒷모습이 텔레비젼 전화에서 사라지자 랄프는 곧 다음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자기의 책상에 돌아가서 라디오의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긴급 연락, 긴급 연락! 랄프 연구소 부근의 10 킬로미터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급히 금속성의 물건에서 떨어져 주시기 바랍니다. 3분 후에 약 15분간 강력한 전파가 연구소에서 흘러나갈 것이므로 금속 옆에 있으면 감전될 위험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랄프는 세 번을 연달아 방송하고 난 후 다시 텔레비젼 전화 옆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리스도 돌아와 있었습니다. 아리스에게도 랄프는 유리로 만든 의자에 앉아 감전을 피하도록 일렀습니다. “감전이라뇨? 그게 무슨 소리죠?” 의아해서 묻는 아리스에게 랄프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유리로 만든 의자에 아리스가 앉자 아리스 방 창으로부터 대단한 눈사태가 엄청난 힘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이었습니다. 랄프는 벽에 있는 조정대의 버튼을 재빨리 눌렀습니다. 그리고 핸들을 돌렸습니다. 연구소의 초발전기를 움직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순간에 우레와 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조종대에서는 번쩍번쩍하는 파란 불꽃들이 튀어 올랐습니다. 연구소 지붕 위의 거대한 원형 로우프 안테나에서 불꽃이 마구 튀어 올랐습니다. 그러다가 달아오른 안테나는 번갯불처럼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났습니다. 그 커다란 소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뚝 그쳐 버렸습니다. 소리에는 사람의 귀에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무섭도록 큰 소리라도 사람의 귀에 들릴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면 초음파가 되기 때문에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안테나로부터 파란빛이 도는 흰 번갯불이 스위스의 로잔산 방향으로 소리도 없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랄프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텔레비젼 전화만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리스는 파랑게 질린 얼굴로 계속 떨고 있었습니다. “아리스, 나를 믿어요. 안심해요.” 랄프는 아리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눈사태가 밀어닥치면 집과 아리스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파묻혀 떠내려갈 것입니다. 그 죽음의 그림자가 바로 눈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무서운 진동 소리가 귀를 울렸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눈사태가 흰김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랄프가 보낸 강한 전파가 열의 파동으로 바뀌어져 눈사태를 녹인 것입니다. 눈은 증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증발하기 시작하자 눈은 뜨거운 물로 변하여 산 아래로 폭포같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그 끓는 듯한 물도 눈 깜짝할 사이에 흰 연기로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그 무서운 눈사태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리스는 일어섰지만 비틀거렸습니다. 아리스는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휘청거리며 창문을 붙잡았습니다. 아리스는 눈사태가 깨끗이 없어진 것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랄프를 바라보았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눈사태가 깨끗이 없어지다니?” 아리스는 중얼거렸습니다. 랄프는 발전을 정지시키기 위해 스위치에 손을 대며 아리스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습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리스!” 그때 마침 아리스의 방문이 후닥닥 열렸습니다. 동시에 머리가 하얀 백발 노인이 뛰어들어왔습니다. 노인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아리스를 부르며 아리스를 품에 안았습니다 “아리스, 어디 보자. 네가 살아있다니!” “예, 아버지. 살았어요. 제가 살았어요!” 부녀의 기쁨에 찬 모습을 보고 랄프는 가슴이 뿌듯해 졌습니다. 랄프는 텔레비젼 스위치를 껐습니다. 그는 피로를 느꼈지만 우연히 알게 된 소녀의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웠습니다. 모처럼 즐거운 기분이 되었습니다. 랄프는 쉬기 위해서 연구실에서 나와 계단 바로 밑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방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는 곳으로서 밖의 경치를 환하게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밖에는 뉴욕 시가가 펼쳐져 있고, 높고 큰 빌딩들이 바로 눈앞에까지 우뚝우뚝 솟아올라 있었습니다.   빛으로 된 탑   랄프의 집은 지름 10미터, 높이 20미터의 바늘 같은 뾰족한 탑으로서, 수정 유리와 스틸 알루미늄이라는 특수 금속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햇빛을 받으면 번쩍번쩍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랄프의 집은 이 도시의 명물로서 뉴욕 사람들은 이 집을 빛의 탑이라고 불렀습니다. 랄프는 미국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몇 년에 걸쳐 완성한 몇 가지 발명들은 모두가 인류를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생활을 풍요하게 하고 세계 문명을 빛내는 데 이바지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전 인류에게 그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돈도 발명의 대가로 받은 것들이 남아 돌만큼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명한 사람이면 다 그렇듯이 랄프도 너무 유명했기 때문에 조금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자기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항상 곁에는 누군가가 붙어 있었고,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연구실에 틀어박혀 일에 몰두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마음에 편했습니다. 발명왕 랄프! 그것은 언제나 사람들이 랄프 곁에 몰려들 듯이, 항상 랄프에게 붙어 다니는 칭호였습니다. 랄프는 자동조리기의 버튼을 눌러 커피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그가 발명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습니다. 심부름하던 피트의 모습이 벽의 텔레비젼이 켜지면서 나타났습니다. “박사님, 텔레비젼국의 직원이 텔레비젼에 좀 나와 주셨으면 하고 부탁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죠?” 잠시 동안의 휴식의 즐거움이 또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난 쉬고 싶어, 피트. 도대체 무엇 때문이야?” “전 세계 사람들은 방금 박사님께서 생명을 구하신 훌륭한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자 박사님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랄프는 유리 용기 안에 들어있던 한 마리의 모르모트의 귀여운 눈을 생각해냈습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것은 ‘플러스’라는 명예로운 기호를 받은 사람의 의무이기도 하였습니다. “좋아, 면회실로 가겠어.” 랄프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방 모퉁이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잠시 후에 48층에 있는 면회실 앞에서 멈췄습니다. 방에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랄프가 면회실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은 함성을 질렀습니다. 둥근 방에는 사방 벽에 수십 개의 텔레비젼 스크린이 장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텔레비젼국 스튜디오가 비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랄프의 모습은 그 텔레비젼국의 전파를 타고 전 세계 가정의 텔레비젼에 비쳐질 것입니다. “랄프 124C41플러스. 랄프는 우리들의 발명왕, 발명왕 만세!”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외쳤습니다. 랄프는 손을 번쩍 들고는 환호에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겸손하게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찬사를 해주시다니 오히려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그저 위험에 직면한 한 사람의 생명을 과학의 힘으로 구조했을 뿐인데 이렇게 환영을 해주시다니……. 그렇지만 여러분의 찬사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랄프가 이렇게 인사에 답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로 환영했습니다.   방문객   그러나 이런 랄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그림자가 지구상에 두 곳이 있었습니다. 발명왕 랄프도 그런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랄프와 비슷한 나이에 키가 훤칠하게 큰 청년으로서, 대단히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컬러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그의 눈길은 사나왔습니다. 개다가 그 청년은 야릇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엔 화성으로부터 지구에 유학 온 화성인이 많았는데, 화성에서 온 유학생 한 사람이 또 랄프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키가 2미터가 넘었고, 얼굴은 초록빛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소처럼 커다란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이야기에나 나오던 도깨비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이 유학생은 왜 랄프를 미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잠시 후에 랄프는 연구실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내 랄프는 연구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구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방해받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피트가 연구실의 텔레비젼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랄프 박사님이세요?” “피트, 자넨 잘 알고 있으면서 일 도중에 방해를 하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던가.”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일 도중에는 어떤 손님도 면회 사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하지만 특별한 손님 같아서요.” “괜찮으니까 적당히 돌려보내도록 해요.” 피트는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어떻게 돌려보내냐는 얼굴로 난처한 듯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랄프는 더 이상 말하는 것이 귀찮아졌으므로 그대로 텔레비젼 스위치를 꺼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피트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스위스에서 일부러 이곳까지 오신 분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지요.” 피트 쪽에서 전화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랄프는 놀라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가려는 피트를 불러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뭐라고 했지. 피트? 스위스에서 오신 손님이라고?” “그렇다니까요. 이름은 아리스, 아버지와 함께예요. 그러나 박사님 연구에 방해가 될 테니까 되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피트는 빙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피트는 일부러 비꼬듯이 말하고는 또 나가려고 했습니다. “잠깐, 피트!” 랄프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만약에 그 손님을 돌려보내면 넌 파면이다!” 피트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벌써 짐작을 하고 응접실에 모셔 놓았습니다.” 랄프는 하던 모든 일을 중지하고 급히 응접실로 내려갔습니다. 응접실의 창 옆 의자에 아리스와 그의 아버지가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랄프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랄프를 맞았습니다. 아리스의 아버지는 랄프를 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랄프 124C41플러스 씨, 반가워요. 저는 제임스 B42라고 합니다. 제 딸의 생명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그런데 스위스에서 무척 빨리 오셨는데, 대륙간 로켓으로 오셨나요?” “아니에요. 새로 건설된 대서양 해저 전자 지하철로 왔어요. 실은 제가 그 지하철의 설계 기사랍니다.” 전자 지하철이란 새로운 교통 기관으로, 땅 밑 수백 킬로미터에서 통하고 있습니다. 터널 안은 완전한 진공 상태로 되어 있고, 땅 밑의 높은 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하철은 강한 전자석의 힘으로 운전되는데 시속 1000킬로미터 이상의 속력을 냅니다. 따라서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에도 불과 2,3시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 기술이 낳은 훌륭한 교통 기관인 것입니다. 랄프는 4,5일을 예정하고 모처럼의 미국 여행을 온 아리스와 그 아버지에게 빛의 탑에 머물면서 뉴욕을 구경하도록 권했습니다. 랄프는 그 안내역을 자청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임스 212B42’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습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박사님처럼 바쁘신 분에게 그런 수고를 끼치다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러나 랄프는 귀한 손님을 다른 사람에게 접대시키는 것이 무척 싫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접대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제임스와 아리스 부녀의 기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랄프는 아리스를 데리고 뉴욕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아리스와 랄프는 빛의 탑을 나섰습니다. 아리스의 아버지는 급한 볼일이 생겨 같이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랄프는 비서 피트에게 모터코스터를 두 켤레 가져오게 하여 아리스에게도 신겼습니다.   27세기의 뉴욕   모터코스터는 마치 롤러스케이트와 같이 바퀴가 달려있는 신인데, 신의 바닥에는 전기 모터 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속도도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달릴 수 있는 아주 편리한 물건이었습니다. 도로는 절대로 갈라지거나 떨어지지 않는 스틸알루미늄 판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뉴욕의 넓고 아름다운 거리를 시속 40킬로미터, 아주 기분 좋은 속력으로 달렸습니다. 길에는 모터코스터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교통 규칙을 잘 지키면서 달리고 있었고, 그 가벼운 소리는 마치 벌들이 윙윙하며 나르는 소리처럼 부드러웠습니다. 시가에는 자동차의 운행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통사고 같은 것은 일어날 염려가 없었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차는 전기 에너지로 달리는 버스뿐이었습니다. 아리스는 보는 것마다 신기하여 여러 가지를 랄프에게 물어 왔습니다. 도로 위에는 코일 같은 전선이 있는데, 그것은 야간 조명이었습니다. 밤이 되면 그것은 흰빛을 발해 마치 낮과 같이 거리를 환하게 했습니다. 뉴욕의 기상 조정 센터에서는 하루 한 번씩 공기 중의 먼지를 완전히 빨아들이는 시설이 되어 있어, 뉴욕은 무척 큰 도시인데도 먼지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리스에게는 모든 것이 놀랍고 신기한 것 투성이었습니다. 랄프는 아리스의 질문에 정성껏, 즐거운 마음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랄프, 저쪽 둥근 건물은 뭐지요?” “그게 과학 식당이지요, 마침 잘 됐군요. 그리로 가서 점심을 들도록 해요.”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저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 걸요.” “염려 말아요. 곧 배가 고파질 겁니다.” 아리스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과학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드럽고 기분 좋은 공기가 풍겨 나왔습니다. 빈 의자에 두 사람은 앉았습니다. 테이블도 보통 것과는 달라 마치 전자 계산기의 조종대와 같이 앞으로 많은 버튼이 죽 장치되어 있었습니다. 테이블의 중앙에는 미끄럼대 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앉았을 때, 옆벽에 아름다운 컬러슬라이드 신문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은 전부 읽고 나면 저절로 페이지가 바뀌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신문을 읽고 있는 동안 아리스는 조금씩 배가 고프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에는 배가 몹시 고파졌습니다. 아리스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갑자기 배가 몹시 고파졌어요. 조금 전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 그건 들어올 때 마신 공기 때문입니다.” 랄프는 재미있다는 듯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식당의 출입문에는 식욕을 북돋우는 특수 가스가 섞여있는 공기가 흐르고 있지요.” “어쩜!” 순간 아리스의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러면 식사도 매우 다르겠군요.” “물론입니다. 그 메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눌러 보도록 해요!” 아리스는 랄프가 시키는 대로 메뉴라고 쓰여진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테이블의 일부가 갈라지는 동시에 여러 가지 요리의 입체 사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어머, 아주 신기해요!” 아리스는 감탄을 하였지만 요리가 모두 마시는 것뿐이었으므로 곧 눈을 찌푸렸습니다. 과학 식당의 요리는 모두가 액체로 되어 있습니다. 채소, 육류, 비타민, 칼슘 등 여러 가지의 영양소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맛있고 영양가 있는 액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온도나 분량이나 시간을 맞추어 그 사람의 성미에 따라 버튼으로도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액체 식사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누구나 액체 식사는 씹을 맛이 없어서 처음에는 싫어했습니다. 식사라고 하기보다는 음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화가 잘 되고, 위나 장의 탈이 없을뿐더러, 영양이 잘 흡수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즐겨 액체 식사를 찾곤 했습니다. 아리스는 맛있게 마셨습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모터코스터를 신은 채 거리를 달렸습니다. 여러 곳의 건물과 공원을 두루두루 구경한 다음 거리에 나왔을 때입니다. 키가 대단히 큰 한 청년이 그들의 뒤에 나타나더니 랄프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아리스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비웃는 듯한 냉소를 머금은 얼굴로 아리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리스 양, 뉴욕 구경 재미있어요?” 이 사나이는 어제 랄프의 세계 텔레비젼 방송 도중에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보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아리스는 그를 돌아보며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물론이죠 페르난 씨.” 그러자 페르난이라고 불린 청년은 갑자기 사나운 얼굴로 변하였습니다. “물론 재미있었겠지, 아리스. 좋아. 난 끝까지 따라다니며 골탕을 먹여줄 테다.” 말을 마치고도 페르난은 오랫동안 아리스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랄프는 페르난이라는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순간 아리스는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습니다. 아리스는 물론 그 사내가 무척 못마땅했지만 랄프를 말렸습니다. 상대할만한 가치를 가진 사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둬요, 랄프. 상대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걸어갔습니다. “좋아, 어디 두고 보자.” 사나이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뒤에서 소리쳤습니다. 그 사람은 전부터 아리스에게 결혼하자고 조르고 있는 프랑스의 과학자 ‘페르난 600D10’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아리스는 그 사람을 무척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페르난은 아리스가 피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끈질긴 사람이었습니다. 랄프는 아리스가 하는 말을 듣고 몹시 불쾌하였지만, 아리스는 이미 그런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리스는 랄프를 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런 일은 잊어 버려요. 뉴욕이나 좀 더 안내해 주세요.” 두 사람은 모터코스터의 속력을 더욱 내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축 제   이윽고 랄프와 아리스는 반중력 비행차를 타고 국립 스포츠 센터로 갔습니다. 국립 스포츠 센터는 모든 종류의 운동을 할 수 있는 넓고도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놀 수 있는 스포츠 시설과 도구가 갖추어져 있고, 밤과 낮이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밤에 야구나 축구, 그리고 테니스 경기를 할 때는 큰 태양등을 비추었으므로 전혀 그늘이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낮보다 경기하기가 편할 정도였습니다. 랄프는 아리스에게 국립 스포츠 센터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어때요, 아리스. 테니스를 해볼까요?” “좋아요.” 아리스는 원래 테니스를 좋아했고, 스위스에서는 선수였습니다. 두 사람은 테니스 코트로 가서 라켓을 집어들었습니다. 아리스는 랄프에게 2회전을 거뜬히 이겨버렸습니다. 랄프는 유쾌해진 기분으로 아리스를 칭찬했습니다. 테니스를 끝내고 두 사람은 또 다시 반중력 비행차로 뉴욕의 중앙에 위치한 태양 발전소로 갔습니다. 여기는 낮 동안에 태양열을 전기 에너지로 변하게 하는 발전소였습니다. 뉴욕의 동력은 모두 이 발전소가 맡고 있습니다. 그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랄프는 아리스의 아버지인 제임스를 빛의 탑 밑에 있는 텔레비젼 극장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입체 컬러 텔레비젼의 발달은 일부러 극장까지 가지 않아도 될 만큼 편리했습니다. 다이얼만 돌리면 어떤 극장의 오페라도 집에 앉아서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텔레비젼에서는 국립 극장에서 공연하는 오페라를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입체 칼라 텔레비젼은 진짜 사람이 눈앞에서 연극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같이 생생하게 보였습니다. “정말 굉장해요. 유럽에도 컬러 텔레비젼은 있지만 색깔이 이렇게 아름답지 못할뿐더러 채널도 적어요. 뉴스가 많아서 오페라를 구경하는 것은 힘들지요.” 아리스가 말했습니다. 랄프는 시계를 보며, “뉴욕의 명물인 공중 축제를 보여 드리죠. 그걸 안 본다면 뉴욕에 온 보람이 없어요. 자, 빛의 탑 위로 돌아가시죠.” 아리스 부녀는 랄프의 뒤를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눈 깜짝할 사이에 200미터 높이의 빛의 탑으로 올라갔습니다. 200미터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27세기 뉴욕 밤 경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빛의 홍수와도 같았습니다. 갑자기 그 빛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뉴욕은 암흑의 도시로 탈바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리스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놀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정전인가 봐요! 어찌된 일이죠?” 랄프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제임스가 멀리 지평선의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아니……, 저것은 또 무엇입니까?” 밤하늘에 엄청난 크기의 미국 국기가 펄럭이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공중 축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국기는 600대의 반중력 비행차 편대에 실려오고 있었습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반중력 비행차의 대집단이었습니다. 반중력 비행차는 각기 동체 밑에서 푸르고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그 빛들이 서로 어울려 멋지고 큰 미국 국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제임스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미국 국기가 밤하늘에서 한 바퀴 빙글 돌고 난 뒤, 색색으로 바뀌면서 빛의 쇼가 계속 이어져 나갔습니다. 그 빛은 아름다운 오색 빛깔이 아로새겨진 레코드처럼 하늘을 빙빙 돌기도 했습니다. 붉은 빛을 중앙으로 하여 태양의 형태를 취하고 그 둘레에 흰빛의 수성, 금빛의 금성, 초록색의 지구, 오렌지색의 화성, 푸른색의 목성, 보라색의 토성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태양계의 형태를 보는 것처럼 실로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제임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굉장해요, 정말. 이렇게 훌륭한 쇼는 이제까지 본 일이 없어요.”       유 괴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랄프는 여러 곳을 안내해 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바시토라늄에 관해서도 랄프는 자세한 설명을 했습니다. 바시토라늄이란 25세기에 완성한 일종의 만능치료기입니다. 이것도 또한 전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전자기계인데, 이것으로 치료하면 몸의 안팎에 있는 모든 해로운 박테리아를 송두리째 살균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미국 국민은 반드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바시토라늄 병원에 가기로 되어 있어요. 그 결과 전염병이란 전염병은 모조리 전멸되었지요.” 모든 것이 아리스 부녀에게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또 랄프는 아리스 부녀를 과학 농원으로 안내했습니다. 과학 농원은 아주 크고 넓은 유리의 온실로 되어 있어 그 내부는 항상 따뜻했습니다. 특별히 만든 과학 비료를 사용하고 있어 채소나 곡식이나 과일 등을 보통 것보다 몇 갑절 빠른 속도로 재배할 수 있습니다. 과학 농원의 혜택으로 식료품을 지금까지의 몇 배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무섭게 늘어나는 세계 인구 때문에 식료품 부족 현상이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 곳에서는 채소나 밀뿐 아니라 콩, 담배 등의 농산물로 인하여 놀라운 수확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아리스 부녀는 과학 농원에서 금방 익은 포도와 사과를 대접받았습니다. 그것들은 싱싱했고, 대단히 맛이 좋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랄프와 아리스는 빛의 탑 가까운 고속도로로 나가서 모터코스터를 타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주 좋은 날씨였습니다.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상쾌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나게 달렸습니다. 이때 랄프는 바로 뒤에서 모터코스터로 씽씽 바람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따라오는 듯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뒤돌아보았으나 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낮이었으므로 고속도로에는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데!” 랄프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잘못 들은 것이려니 생각하며 계속 달렸습니다. 곧 빛의 탑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고팠으므로 빨리 돌아가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의 모터코스터 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달렸습니다. 고속도로의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랄프는 아리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뒤돌아본 순간, 너무 놀라 발의 중심을 잃고 길 위에 쓰러질 뻔했습니다. 아리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리스가 행방불명이 된 것입니다. “아리스, 아리스! 어디 있어요?” 외치며 랄프는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랄프는 쭈뼛 머리끝이 곤두섰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어디로 갑자기 사라졌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도 들려 오던 모터코스터 소리는 이미 들려 오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아리스는 사람의 힘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악마의 마법에 의하여 납치 당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랄프는 과학자로서, 악마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냉정한 과학자의 자세로 되돌아왔습니다. 악마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27세기의 뉴욕에 악마라니,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리스는 조금 전까지도 랄프의 곁에 있었는데, 돌연 사라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 사람의 짓이 틀림없어!’ 그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증거다. 유리가 그렇지 않는가! 잘 닦은 유리를 통해서 보면, 마치 유리가 없는 것같이 느껴진다. 유리는 빛을 반사하지 않고 모두 통과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이던 물체를 갑자기 투명하게, 보이지 않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 그 물체를 유리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바꾼다면, 될 수도 있을 지 모릅니다. 랄프는 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파는 빛과 같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파가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파와 같이 심하게 진동시키면 어떤 물체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는 높은 주파수의 전파를 내는 기계에 의해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 유괴를 당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조금 전까지 바로 뒤에서 들려오던 씽씽 소리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특수 전파 발생기로 모습을 감춘 범인이 모터코스터를 타고 뒤따라오던 소리였습니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범인은 틀림없이 기회를 노렸을 겁니다. 아리스가 조금 뒤떨어졌을 때, 전파 발생기로써, 아리스의 모습을 투명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랄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범인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페르난! 페르난 600D10이 아리스를 유괴한 범인일 거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랄프는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시가 급했습니다. 전 속력으로 빛의 탑에 돌아왔습니다. 랄프는 범인이 가지고 있는 고주파 전파가 발생한 곳을 찾아내기 위한 연구를 하기 위해,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범인의 기계에서 발생하는 전파는 특별히 높은 주파수를 발생시킬 것입니다. 그 주파수의 전파를 발견해서 따라가면, 범인과 아리스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랄프는 전부터 이 ‘투명 이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왔습니다. 그 연구가 지금에 와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1시간 가량 걸려서 그 장치를 완성했습니다. 그 장치는 한 개의 로프 안테나와 리시버가 달려있는, 휴대용 무전기 같은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안테나를 돌리면 고주파 전파가 발생하는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안테나가 그 전파를 발생하는 장소로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크게 납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기계가 있는 곳을 알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랄프는 탐지기를 손에 들고 급히 두 조수를 불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랄프는 달리면서 탐지기의 스위치를 누르고 안테나를 돌렸습니다. 색다른 소리가 리시버를 통하여 들려 왔습니다.   대추적   ‘뿌, 뿌, 뿌뿌, 뿌.’ 세 사람은 들려오는 방향을 쫓아, 바람처럼 거리를 전 속력으로 질주했습니다. 랄프는 계속 리시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과학자가 두 조수를 데리고 무섭게 달리자, 무슨 큰일이 난 것으로 알고 한결같이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뉴욕의 시가를 벗어났습니다. 어느 양복점 앞에서 소리가 멈추었습니다. 리시버의 소리는 고막이 터질 정도로 크게 울렸습니다. “여기다! 이 가게가 틀림없어!” 랄프 일행은 가게로 뛰어들어 수색을 시작했습니다. 양복점 주인은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 있었습니다. 랄프 일행은 이유를 설명할 틈도 없이 수색에만 열중했습니다. 양복점 주인은 그대로 멍청하게 서 있었습니다. 랄프가 가게 구석 쪽에 있는 마네킹 인형 뒤를 살폈을 때였습니다. “아앗!” 그는 깜짝 놀라며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의 두 손목이 마치 잘려나간 것처럼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랄프는 떨리는 손을 서서히 끄집어 내 보았습니다. 그러자 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자기에서 빠져 나오는 것처럼,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랄프는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랄프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모든 걸 알게 됐어!” 랄프는 마네킹 인형을 넘어뜨리고 그 뒤를 손으로 더듬었습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어떤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더듬었습니다. 그것은 발에서 머리끝까지 보자기를 덮어쓰고 단단한 끈으로 칭칭 감겨져 있었습니다. 끈을 풀기 위해 랄프는 노력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노끈을 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조수는 기계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랄프는 스위치를 끊으려고 손을 더듬어,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돌렸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아무 곳에도 없던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희미한 모습은 말할 것도 없이, 머리에 보자기를 덮어 쓴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보자기에서 조금 삐져 나온 발은, 분명 여자의 것이었습니다. 랄프는 끈을 풀고 보자기를 벗겼습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아리스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습니다. “아리스, 정신 차려요!” 아리스는 겨우 눈을 떴습니다. 랄프는 아리스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리스는 힘없는 눈으로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이 랄프를 쳐다보았습니다. 랄프는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쁜 놈에게 유괴 당한 거요. 그렇지만 이제 안심해요. 이대로 갈 수 있겠어요?” 아리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지만,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갈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랄프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페르난은 어디로   랄프 일행은 빛의 탑으로 돌아왔습니다. 랄프는 오자마자, 그 초고주파 전파 발생기를 조사했습니다. 그것은 놀랄 만한 솜씨로 만들어진, 아주 훌륭한 장치였습니다. “대단합니다. 이렇게 정밀하고 교묘한 기계는 나도 본 적이 없어요. 지구상에 이런 기계를 만들어낼 인간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오.” 감탄을 연발하며, 랄프는 아리스에게 물었습니다. “혹, 당신을 유괴한 사람이 페르난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틀림없어요. 유괴 당할 때, 몸부림치며 보이지 않는 상대방의 가슴을 마구 떠밀었는데, 그때 이 쇠줄이 끊어졌나 봐요. 이 엷은 녹색 메달은 페르난의 가슴에 달려 있는 것이에요. 한 번도 이것을 뗀 적이 없어요. 그땐 정신이 없어서 이것이 손에 왜 있었는지 몰랐지만 나중에야 알았어요.” 랄프는 이상했습니다. 페르난에게 그렇게 훌륭한 기계를 만들어낼 재간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화성인밖에 없습니다. 랄프는 페르난이 지구에 있는 화성인에게서 입수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제임스는,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증거품이 있잖아요. 이 메달이 훌륭한 증거품이 될 테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귀중한 기계를 손에 넣은 페르난이, 경찰에 붙잡힐 정도로 허술하진 않을 거예요.” 랄프의 생각은 들어맞았습니다. 미국은 물론 유럽, 아시아까지 동원된 세계의 경찰이 눈을 부릅뜨고 찾았지만 일 주일이 지나도록 페르난의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랄프와 아리스 두 사람에겐 평화롭고 즐거운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랄프는 바쁜 중에도 아리스에게 여러 곳을 안내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리스를 감동시킨 것은 랄프가 건설한 공중 도시였습니다. 사실 이 공중 도시야말로 랄프의 그 많은 발명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것이었습니다. 반중력 장치에 의한, 지상 6,000미터의 하늘에 떠 있는 도시였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 공중 도시는 푸른 하늘 한가운데 떠 있는 한 톨의 콩알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2 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반구형이 하늘에 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반구형 밑에는 아담한 집들이 죽 들어서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위는 밝고 투명한 특수 유리로 만들어진 반구형의 지붕이 덮여 있었습니다. 반중력 비행차는 이 공중섬의 둘레에 모자의 차양처럼 나와 있는 플랫폼에 착륙했습니다. 사람들은 도움의 여러 곳에 있는 출입문을 통하여 왕래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이윽고 출입문을 통하여 도시의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마을 안에서는 일체 기계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 들어선 것 같은 아늑한 느낌을 주는, 평화롭기가 그지없는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모터코스터나 비행차의 소리뿐만 아니라, 그 밖의 소음도 거의 들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에서는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신바닥은 모두 고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공중 도시는 사람들의 휴양처로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현대 사람은 항상 바쁘고, 더구나 어떤 일에도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늘 신경이 피로해 있었습니다. 안정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바다나 산을 찾았습니다. 그건 옛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요즈음은 그런 곳도 이미 휴식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구상된 곳이 이 마을입니다. 마을에서는 일체 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몇 천년 전, 옛날의 평화로운 마을처럼 조용합니다. 지상의 대도시 소음도 랄프가 발명한 이 마을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 이 마을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기계라는 것을 잊게 됩니다. 여기서는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자신의 발로 걷고 있으며, 공기는 말할 수 없이 신선합니다. 며칠 동안만 휴양하면 피로한 신경과 몸은 회복되어 버립니다. 새 힘이 솟아납니다. 랄프는 이러한 공중 도시를 세계의 대도시 상공 여러 곳에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과연 랄프의 발명은 위대했습니다. 아리스는 지금까지의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긴장도 풀려 아주 상쾌한 기분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상으로 되돌아와, 랄프는 명물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무중력 서커스를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공중도시를 띄울 반중력 장치와 다른 사용 방법이었습니다. 무중력 서커스는 뉴욕 중앙 공원의 특별한 건물 안에서 열립니다. 그 건물의 한가운데 무대 밑에는 무중력 장치가 되어 있어, 스위치를 누르면 무대 위는 완전히 무중력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물론 무게가 없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할 재미있는 서커스였습니다. 서커스의 곡예사는 공중에서 옆으로 드러눕기도 하고, 조금만 뛰어올라도 천장까지 도달하는가 하면, 몸을 돌리면 무대까지 천천히 내려옵니다. 마치 한 마리의 조그만 새처럼, 무대에서 뛰고 놉니다. 맨 밑에 한 사람이 서고, 그 위에 두 사람, 그 위에 세 사람……, 연달아서 거꾸로 된 인간 사다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아리스는 너무 즐거웠습니다. 랄프와 매일매일 재미있고 즐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랄프와 아리스는 마치 옛날부터 사귀어온 친구처럼 다정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랄프는 결심했습니다. 아리스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임스에게 아리스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제임스는 물론 찬성했습니다. “아리스만 좋다면 나는 물론 찬성이지요. 아리스, 네 생각은 어떠냐?” 아리스는 부끄러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그 길로 세 사람은 신문사로 찾아가서 약혼을 발표했습니다. 신문사에서는 대소동이 일었습니다. 슬라이드 신문은 제 1면에 가장 큰 활자로 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세계 제일의 발명가 랄프는, 세계 제일의 미녀 아리스와 약혼하다!’ 세계는 이 기사로 떠들썩했습니다. 또한 입체 텔레비젼은 랄프와 아리스가 회견실에서 활짝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중계 방송했습니다. 세계 정부의 수상도 몸소 와서 랄프에게 축하 인사를 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단 두 사람만이 그 뉴스를 듣고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그 한 사람은 페르난, 또 한 사람은 지구인이 아닌, 무섭게 큰 키에 눈이 툭 불거진, 녹색의 얼굴을 한 유학생 화성인이었습니다.   함정에 빠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보름달이 하늘에 걸려 있는 환한 달밤이었습니다. 랄프와 아리스는 공중 택시를 타고, 유쾌한 밤하늘의 드라이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눈 아래에는 끝없는 대서양의 바닷물이 출렁거렸습니다. 랄프와 아리스는 이 세계에 둘만이 있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두 사람은 정답게 속삭였습니다. 그때 조종석의 운전사가 통화기로 알려 왔습니다. “가까운 하늘에서 고장난 비행차가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떡하죠?‘ 이 말을 듣고 랄프는 라디오를 돌려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운전사는 라디오를 좌석 쪽으로 돌려놓았습니다. 당황한 남자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 왔습니다. “엔진이 고장이 났어요. 이대로 가면 바다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곧 좀 구조해 주십시오!” 랄프는 마이크를 쥐고 대답했습니다. “알았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고장은 어느 정도입니까?” “예비품만 있으면 고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지의 고장입니다.” 운전사는 전속력을 내어, 그 쪽으로 갔습니다. 2,3분쯤 후, 한 대의 비행차가 위험하게 바다 위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운전사는 비행차를 향하여 접근하였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가까이 오시오!” 운전사는 그쪽 비행차의 남자에게 소리쳤습니다. 그 남자는 비행차를 움직여 다가왔습니다. 두 대의 비행차는 공중에서 나란히 섰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랄프는 아리스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을 죄며 걱정하고 있던 아리스도, 그제야 안심이 된 듯, 빙긋 웃어 보였습니다. 그 순간, 랄프는 갑자기 가슴이 벅차 오르고, 달콤한 냄새가 강하게 풍겨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현기증이 나고 목이 막혀 오면서, 정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잃어 가면서도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랄프는 있는 힘을 다해 아리스 쪽으로 몸을 돌려, 아리스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아리스의 손은 벌써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랄프는 잠시 후에 완전히 정신을 잃고 좌석에 쓰러졌습니다.   우주에서   의식을 잃고서 얼마쯤이나 되었을까? 랄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달이 벌써 수평선 저 너머로 기울어지고, 사방은 캄캄하였습니다. 몸은 무겁고 손발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쓰러진 채 창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바다가 보였습니다. 넓은 바다에는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순간, 아리스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운전사도 핸들 위에 엎드려 있었지만, 비행차는 자동 조정 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추락을 면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아리스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랄프는 창 밖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바다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리스는 이미 바다에 떨어져 가라앉았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랄프는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서도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리스는 바다에 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리스는 다시 유괴된 것입니다. 랄프는 꼼짝없이 적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을 알았습니다. 그 고장난 비행차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습니다. 비행차를 옆에 갖다 대었을 때, 강력한 마취제 같은 것을 던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을 때, 페르난은 아리스를 유괴한 것입니다. ‘좋아, 페르난 녀석! 두고 봐라!’ 랄프는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시 빨리 페르난의 뒤를 추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랄프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막상 어디로 추격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빛의 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랄프는 있는 힘을 다해, 마비된 몸을 이끌고 조종석으로 다가갔습니다. 쓰러진 운전사를 조수석으로 옮기고는 핸들을 잡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분 후, 랄프는 빛의 탑 꼭대기에 비행차를 착륙시켰습니다. 그는 맨 먼저 경찰에 이 사건을 알렸습니다. 경찰은 전력을 다하여 페르난과 아리스의 행방을 찾아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곧 텔레비젼 방송을 통하여 전 세계의 항공 관제탑으로 하여금, 현재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차를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찾고자 하는 페르난의 비행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상에 착륙했을 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지상까지 샅샅이 조사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페르난은 아리스를 납치하여 안전한 장소를 향해 가고 있을 것입니다. 랄프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습니다. 문득 한 생각이 번갯불처럼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랄프는 이제 무엇인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곧 우주 교통 관제 본부에 물었습니다. “현재 지구를 떠나 우주 공간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는 우주선이 없는지요?” 약 한 시간 전에 ‘리자놀 AK42’라는 이름의 화성인이 우주선을 타고 화성을 향해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랄프의 추리는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습니다. 1시간 전이라면 랄프가 그 고장난 비행차를 만나기 30분전이 됩니다. 페르난은 화성인 리자놀 AK42의 우주선을 우주 공간에서 기다리게 하고, 아리스를 유괴한 즉시, 그 우주선으로 달려가서 화성을 향해 날아갔을 것입니다. 랄프는 급히 빛의 탑 천체 관측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이것도 그가 발명한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랄프는 곧 운석 발견용의 레이더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레이더는 우주 공간을 샅샅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리자놀의 우주선 같은 것을 지구로부터 약 60만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공간에서 찾아냈습니다. “됐어. 페르난, 기다리고 있거라. 곧 붙들어서 목을 비틀어 주마.” 그는 이렇게 외치고 나서, 빛의 탑을 나와 곧장 뉴욕 우주 공항으로 달려갔습니다. 뉴욕 우주 공항에는 랄프의 전용 우주선 카시오페이아 호가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카시오페이아 호를 발사장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랄프가 카시오페이아 호의 조종석에 앉아 조종탑 출발 허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대의 지상차가 질주해 왔습니다. 그것은 세계 정부 수상의 승용차였습니다. 일 초가 아까운 시간이어서, 랄프는 초조해진 눈으로 지상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우주선의 트랩까지 나와, 지상차에서 뛰어내리는 젊은 세계 정부군 장교 한 사람을 맞았습니다. 장교는 랄프에게 경레를 하면서, ‘수상 각하로부터의 연락입니다. 박사님.“ 하면서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친애하는 랄프 124C41플러스씨. 이번 사건은 참으로 불행한 일로써 어떻게 위로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 6 우주 경비대를 당신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출동시켰습니다. 뭐든지 명령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나는 세계 정보의 수상으로서, 당신이 그런 위험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은 인류를 위하여 꼭 있어야 되는 귀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생긴다면 큰일입니다. 범인의 추격은 우주 경비대에 맡기십시오. 나는 당신이 지구를 떠나는 것을 막겠습니다.   제 18대 세계 정부 수상 켄트리지 K4플러스   랄프는 그 편지를 계속해서 두 번이나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장교를 바라보았습니다. 랄프는 생각했습니다. 수상의 명령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랄프는 장교에게 말했습니다. “수상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 그만두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장교가 랄프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우주선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랄프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주사를 놓아 잠재웠던 것입니다. 한 15분이 지나면 일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랄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리자놀과 페르난을 추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이분을 데리고 떠나 주십시오. 잠시 후에는 깨어날 테니까요. 전 지금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놀라면서 쓰러져 있는 장교를 안아 일으켰습니다. 드디어 랄프는 우주로 향했습니다. 랄프는 사람들이 안전 지대까지 물러서는 것을 본 후에 발사 버튼을 눌렀습니다. 우주선 카시오페이아 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우주 공간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카시오페이아 호는 시속 12만 킬로미터의 속력으로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서 진공의 우주 공간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리자놀과 페르난이 탄 우주선은 이미 70만 킬로미터 저쪽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우주선의 속력은 카시오페이아 호보다 느렸습니다. 카시오페이아 호는 12시간 정도만 달리면 충분히 그들을 뒤쫓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랄프는 진로를 정한 후 우주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력을 내어 날았습니다. 우주 비행에서 일단 진로만 정해 놓으면 별로 할 일은 없습니다. 랄프는 초조한 마음으로 레이더를 바라보며, 스크린 속에 하얗게 빛나는 리자놀의 우주선 모습만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페르난이 혹시나 아리스를 괴롭히지나 않나 하여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페르난을 돕고있는 리자놀이라는 화성인 역시 나쁜 놈임에 틀림없을 것이었습니다. 랄프는 아리스가 무사하기를 빌었습니다. 초조한 가운데 시간은 흘렀습니다. 랄프의 우주선과 리자놀의 우주선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 가고 있었습니다. 접근하는 몇 시간 전에 랄프는 라디오로 페르난을 불렀습니다. “페르난,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어떠냐? 나의 뒤에는 우주 경비대의 우주정이 수십 척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란다. 도망쳐도 넌 곧 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라. 그리고 아리스를 돌려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가 세계 정부 수상에게 부탁해서 처벌은 받지 않도록 해주겠다. 어떠냐? 페르난, 알아들었다면 대꾸를 하라!” 그렇지만 페르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랄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페르난의 우주선을 뒤쫓을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카시오페이아 호의 망원경에 페르난이 타고있는 우주선의 모습이 10시간이 흐른 후에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후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입니다. 랄프는 정확하게 우주선을 추격했습니다. 이윽고 페르난의 우주선은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랄프는 카시오페이아 호에 장치되어 있는 강력한 자석 장치를 가동시킬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기가 막힌 멋진 솜씨로 조종하여 페르난의 우주선 진로를 가로막아 가면서 거리를 좁혀 갔습니다. 마침내 가까워진 적의 우주선 모습을 응시하면서 랄프는 자석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강력한 자석의 힘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두 척의 우주선은 서로 당겨져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맞붙어 버렸습니다. 그때 이미 랄프는 우주복을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권총을 들고 적의 우주선에 뛰어들어갈 태세를 갖추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창문을 통하여 페르난의 떨고있는 모습이 또렷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권총을 쏘았습니다. 권총 광선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고 있었습니다. 녹색의 광선이 번쩍였습니다. 페르난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성공이었습니다. 랄프는 우주모를 쓴 채, 급히 우주선의 문을 열어 젖히고 적의 우주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적 우주선의 문에 손을 댔을 때, 그것은 이상하게도 잠겨 있지 않았으며, 쉽게 열렸습니다. 이상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랄프는 긴장을 풀지 않고 권총을 바로 잡았습니다. 그런 다음 랄프는 얼른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리자놀이라는 화성인이 우주선의 어딘가에 있으리라. 아마 조종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럼 아리스도 틀림없이 함께 있을 것입니다. 랄프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종실로 다가갔습니다. 와락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페르난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인력이 없는 세계이므로 바닥에 쓰러져 있지 않고 공중에 붕 떠 있었습니다. 랄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당황해서 다른 방들을 차례차례 뒤져보았습니다. 오랜 시간을 뒤졌지만 어느 방에서도 화성인과 아리스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분명 이 우주선 안에는 없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악마의 술책   랄프는 일그러진 얼굴로 페르난을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랄프는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광선이 나오도록 권총을 조절하고 페르난의 얼굴을 쏘아댔습니다. 그러자 페르난은 눈을 뜨고 랄프를 바라보았습니다. 랄프는 페르난의 목덜미를 잡고 아리스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페르난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나도 모... 모르겠습니다.” 페르난 역시 화성인 리자놀에게 이용당했던 것입니다. 리자놀은 페르난을 기절시킨 다음 아리스를 유괴해 갔습니다. 리자놀도 아리스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화성인은 페르난이 아리스를 우주선으로 데리고 오기 전부터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랄프는 페르난에게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는 날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소리쳤습니다. 페르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유괴는 모두 리자놀의 음모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최초로 행했던 그 초고주파 전파 발생기를 빌려준 것도 리자놀이었습니다. 이번의 유괴 계획도 그가 꾸민 것이었습니다. 페르난이 랄프를 교묘히 속이고 기절시킨 다음, 아리스를 유괴하는데 성공하자 리자놀은 그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페르난을 광선 권총으로 쓰러뜨린 다음 아리스를 납치하여 다른 우주선으로 갈아타고 그대로 달렸던 것입니다. 페르난은 랄프의 우주선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페르난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랄프는 분하여 몸을 떨었습니다. 페르난의 우주선은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이 우주선에 랄프가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리자놀은 아리스를 데리고 여유 있게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랄프는 또다시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리자놀은 도대체 아리스를 어디로 데려간 것일까? “페르난, 리자놀이라는 놈 아리스를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저어……, 아마 화성일 거예요. 틀림없을 거요. 그가 최후로 중얼거린 말이 희미하게 기억이 나요. 아무리 랄프가 추격해 온다 해도 화성에 먼저 도착해서 아리스와 결혼해 버리면 그만일 거라고요. 잘은 모르지만 아리스는 화성의 시민이 되고 말 거에요.” “뭐? 화성의 시민이? 결혼을 한다고?” 랄프는 노여움에 불타는 눈으로 창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창밖에는 하나의 별이 특히 깜박이고 있었습니다. 화성은 우주 공간에서 이상한 붉은 빛을 띠고 있는 별이었습니다. 랄프는 리자놀이 화성에 도착하기 전에 추격해서 붙잡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랄프는 화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습니다. 랄프가 카시오페이아 호로 되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 페르난이 붙잡았습니다. “랄프, 부탁이오. 나를 이대로 두고 간다면 나는 곧장 우주 끝까지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리자놀이란 놈은 아리스를 데리고 갈 때, 이 우주선의 조정 장치를 파괴해 버렸어요. 단지 일직선으로 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내버리고 가지 말아요. 제발 살려 주시오.” 페르난은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습니다. 페르난의 괘씸한 소행을 생각하면 용서해 줄 생각이 없지만, 랄프는 그가 다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랄프는 그를 살려주기로 했습니다. 랄프의 뒤에는 우주 경비대의 우주정이 따라오고 있었으므로 카시오페이아 호로 돌아와 연락을 해주었습니다. 페르난은 곧 체포될 것이지만, 생명은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성을 향하여 날아가면서 랄프는 리자놀의 우주선과 카시오페이아 호와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레이다로 보니 리자놀의 우주선은 10만 킬로미터 정도 앞서 있었는데, 1시간에 13만 6천 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랄프의 우주선은 최고 속력을 내면 14만 4천 킬로미터의 속력을 낼 수 있습니다. 즉 1시간에 8천 킬로미터를 더 따라붙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 결과, 따라붙을 자신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화성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리자놀의 우주선을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랄프는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자동 조정 장치를 갖추고 우주 미사일의 발사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물론 적의 우주선에는 아리스가 붙잡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미사일을 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리자놀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미사일 준비를 끝내고, 랄프는 레이다와 전자 계산기를 사용하여 리자놀의 우주선과 카시오페이아 호의 거리를 측정했습니다. 랄프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리가 좁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랄프는 급히 계산을 다시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리자놀의 우주선은 현재 1시간에 14만 킬로미터 이상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속력차는 불과 4천 킬로미터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래서는 화성 영공에 들어가기 전까지 추격할 수가 없겠는데…….” 랄프는 혼자 외쳤습니다. 화성의 영공으로 들어서면 랄프는 리자놀의 우주선을 공격할 수 없게 됩니다. 그곳은 화성인의 영토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화성 정부의 우주경비대에 붙잡히게 됩니다. 랄프는 정신없이 우주선의 엔진을 조절해 보았지만 속력을 더 낸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랄프는 2,3일 동안 힘없이 조종석에 앉아, 골똘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생각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랄프는 힘없이 조종석 옆의 창문을 통하여 우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반짝이는 별들 사이로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마녀의 지팡이 같은, 빛나는 긴 꼬리를 가진 천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혜성이었습니다. 그 순간 랄프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오, 그렇지!”너무 기뻐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혜성이다! 카시오페이아 호를 마치 혜성처럼 보이게 하여, 화성을 향하여 날아가는 거다. 화성에 충돌할 것 같은 각도로 날아가는 거다.” 랄프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리자놀은 화성을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혜성이 화성에 충돌한다고 생각하면 일단 화성으로 가는 것을 중단하고, 혜성의 방향을 돌리려는 노력을 할 게 틀림없습니다. 혜성은 대체로 얼음과 가스로 되어있는 가벼운 기체입니다. 우주미사일을 혜성의 머리부분에 2,3발 쏜다면 산산조각이 나거나, 아니면 진로가 바뀔 것입니다. 틀림없이 리자놀은 그렇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방법은 단 한 가지일 뿐입니다. 리자놀의 우주선을 붙잡아서 아리스를 구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방법뿐이었습니다. “이젠 됐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걸.” 랄프는 급히 인공 혜성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곧 카시오페이아 호는 흰 가스로 뒤덮였습니다. 연료 탱크에 가득 차있는 수소를 우주 공간에 조금씩 뿜어냈습니다. 진공의 우주 공간에 내 뿜어진 수소는 즉시 맹렬하게 증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흰 가스는 카시오페이아 호가 날아가고 있었으므로 그 뒤를 흰 꼬리처럼 되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카시오페이아 호 안에 있는 종이와 다른 재료를 잘게 만들어서 수소와 함께 우주 공간에 뿌렸습니다. 그것들은 태양 광선을 반사하면서 번쩍번쩍 빛이 났습니다. 먼데서 보자면 카시오페이아 호는 진짜 혜성처럼 보일 것입니다.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만하면 대 성공이었습니다. 남은 일은 단지 이 인공혜성이 리자놀의 눈에 띄어 자신의 우주선 방향을 돌리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랄프는 기다렸습니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리자놀의 우주선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랄프의 인공 혜성과 리자놀의 우주선은 서로의 레이다에 나타날 만큼 가까워 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리자놀이 화성을 향해 방송하는 것이 들려 왔습니다. “화성으로 향해 날아가는 혜성 발견. 폭파하겠음.” 여태까지 최고 속력으로 가던 리자놀의 우주선이 속력을 늦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혜성을 폭파하기 위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혜성처럼 꾸민 랄프의 우주선을 향하여 그 방향을 바꾸어 질주해 오고 있었습니다. 랄프가 파 놓은 함정에 마침내 걸려든 것입니다. 랄프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리자놀의 우주선은 랄프의 우주선 카시오페이아 호로 점점 접근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인공 혜성의 머리 부분을 향하여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혜성은 머리 부분만 폭파시켜 버리면 소멸되어 버립니다. 혜성의 머리 부분은 무겁지만 그 바깥은 대개가 가스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랄프는 재빨리 카시오페이아 호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맞으면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미사일이 날아왔습니다. 그러더니 미사일은 저 넓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리자놀은 쉬지 않고 계속 미사일을 발사시켰습니다. 랄프는 그때마다 재빨리 피했습니다. 리자놀은 그 순간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습니다. 혜성이 스스로의 진로를 바꾸다니……. 리자놀의 미사일을 잘 피하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아마 중력의 법칙이 잘못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한 모양입니다. 리자놀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약간 틈을 두었다가 계속해서 미사일을 쏘아댔습니다. 리자놀의 미사일은 한 발도 적중하지 못했습니다. 리자놀은 미사일을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다 발사시켰습니다. 그러는 사이 혜성은 점점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리자놀은 혜성을 파괴시키기 전에는 화성에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리자놀은 전기포를 발사하기 위해 랄프에게로 30킬로미터까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를 위해 랄프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안전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준비해 두었던 특별 장치의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그 순간, 우주 공간은 별빛도 보이지 않고, 마치 빛이 어둠에 삼켜져 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카시오페이아 호를 중심으로 지름 60킬로미터의 우주 공간은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장치는 빛과 같은 주파수의 전파를 내어 빛을 중화시킨 후에,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랄프가 리자놀의 초고주파 전파 발생기에서 암시를 받아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리자놀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에 기절할 듯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랄프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였습니다. 랄프는 날카로운 육감을 발휘하여 리자놀의 우주선으로 접근해 갔습니다. 거의 가까이 까지 다가갔을 때 중화기의 스위치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깜깜하던 우주 공간은 갑자기 밝은 빛으로 빛나 눈이 부시어 뜨지 못할 정도로 되어 버렸습니다. 조종석의 창을 통하여 무슨 일인가 내다보던 리자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랄프는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광선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무서운 보랏빛 광선이 우주 공간을 가로질러 리자놀의 우주선 상으로 스며들어갔습니다. 순간 리자놀의 모습은 창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주선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으므로 아리스는 안전할 것입니다. 리자놀을 기어코 쓰러뜨린 랄프는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다.   아리스, 죽다   급히 카시오페이아 호를 리자놀의 우주선에 갖다대었습니다. 랄프는 우주모를 쓰고, 리자놀의 우주선으로 뛰어들어가 조종실 문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2미터가 넘는 리자놀의 큰 몸집이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리자놀은 죽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랄프는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습니다. 아무 일 없으리라고 믿었던 아리스가 피투성이가 되어, 가슴에는 화성인의 단검이 꽂혀 있는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리스, 눈을 떠 보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리스!” 랄프는 부르짖었습니다. 랄프는 아리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 늦어 있었습니다. 아리스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고,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아름답던 눈은 다시 뜨지 않겠다는 듯이 꼬옥 감고서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노력과 고생은 보람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랄프는 온몸의 힘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리자놀은 무서운 복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빠져 나올 수 없는 함정에 빠져 들어갔음을 느꼈을 때, 최후의 안간힘을 써서 아리스를 단검으로 찌른 것이 틀림없습니다. 랄프는 절망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어졌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이제 랄프에게는 없습니다. 그 빛나던 희망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발명도, 인간도, 그리고 세계를 위한 봉사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리스가 없는 세상을 살아서 무엇한단 말입니까? 랄프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랄프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아리스를 안았습니다. 아리스의 시체를 안고 카시오페이아 호로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아리스를 자기의 침대에 눕혀 놓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슬퍼한다고 다시 살아날 리는 없습니다. 랄프는 생각했습니다. 아리스는 죽었지만 아직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닙니다. 상처는 단지 단검에 의한 것뿐이었습니다. 아리스가 죽은 이유는 단지 그 상처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에는 모르모트의 실험으로 성공한 그 수술이 효력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아리스는 살아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랄프는 흥분이 되었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냉정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단지 실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첫 실험이었고, 실험 상대는 모르모트였습니다. 사람에게 성공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습니다. 그렇지만 랄프는 실망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해보는 것이 우선은 제일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랄프에게는 결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랄프는 모든 슬픔을 뿌리치고 서둘렀습니다. 랄프는 카시오페이아 호를 지구 방향으로 향하도록 자동 조종 장치를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리스의 몸이 부패하지 않도록, 그리고 변화하지 않도록 보존 처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음같이 차가와진 아리스의 몸을 전기 보온기로 따뜻하게 했습니다. 그런 후에는 아리스의 대동맥을 끊었습니다. 피를 완전히 뽑아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피가 혈액 안에서 응고되어 버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대동맥의 피를 완전히 뽑아내고는 방부제가 들어있는 특별한 링겔 액을 혈관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몸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허파에는 그가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완성한 미르마가톨이라는 가스를 집어넣었습니다. 그 가스는 호흡조직을 파괴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수술은 극히 작은 실패만 따르더라도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므로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많은 시간이 소리 없이 흘러갔지만 랄프는 시간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있는 동안 붉은 화성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그 대신 녹색의 보석처럼 아름다운 지구에 카시오페이아 호는 점점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3일, 5일, 그리고 일 주일, 또 10일. 날짜는 점점 흘러갔습니다. 랄프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아리스의 시체는 썩지도 변화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거기까지는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랄프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행이란 예고도 없이 뜻밖에 나타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드디어 2주일 째에 들어섰습니다. 랄프는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긴장하고 과로했었기 때문에 우주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그처럼 훌륭한 발명가도 병에는 어쩔 수 없이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그는 아리스의 침대 옆에 쓰러진 채로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며칠이나 시체를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니 이제는 절망이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뜬 랄프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습니다. 우주선 안에는 많은 의사들이 랄프와 아리스의 시체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시오페이아 호가 되돌아오는 것을 본 세계 정부의 우주선이 의사와 약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가벼운 치료로 랄프의 우주병은 곧 완쾌되었습니다. 창밖에는 아름다운 달을 거느린 지구의 모습이 바로 옆 가까이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지구에 돌아온 것입니다. 랄프는 용기를 되찾았습니다. 잠시 후에 카시오페이아 호는 뉴욕의 빛의 탑 지붕 위에 착륙했습니다. 빛의 탑 수술실에는 이미 수술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세계의 이름난 의사들이 수없이 랄프의 조수가 되기를 희망하고 달려 왔습니다. 아리스의 시체는 곧 수술대로 옮겨져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동맥을 다시 열어서 링겔 액을 뽑아 내고는 따뜻한 증류수로 씻어 냈습니다. 그러자 전국에서는 피를 바치겠다는 지원자가 속출했습니다. 그들이 바친 소중한 피가 곧 아리스의 혈관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와 동시에 산소 흡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뇌에는 자극을 주기 위하여 특수 전류를 보내 주었습니다. 수술을 하는 동안 랄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길고 긴 시간이 말없이 흘렀지만 아리스는 다시 살아날 가망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랄프는 심혈을 기울여 아리스의 생명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징조도 나타나 주지 않았습니다. “아아, 나는 결국 실패하고 마는구나!” 절망감이 랄프의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져 옴을 느꼈습니다. 랄프는 그만 어지러움을 느끼고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떨어뜨렸습니다. 아무것도 랄프는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습니다. 랄프는 힘없이 옆의 조수에게로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 조수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조수의 목소리가 랄프의 귀를 울렸습니다. “랄프, 이것을 봐요. 아리스의 심장이 점차 뛰기 시작했어요.” 쓰러져 있던 랄프는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리고 번쩍 뜬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습니다. 기적이 아리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끝내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아리스의 심장이 가냘프게 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가냘펐지만 아주 규칙적인 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예쁜 입술에서는 숨쉬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랄프는 기쁨에 넘쳐 쓰러졌습니다. 이제 안심해도 좋습니다. 랄프 124C41플러스는 드디어 과학의 힘으로 아리스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냈습니다.  
1082    악수 (외 3수) 댓글:  조회:1247  추천:0  2021-03-05
악수 (외 3수) – 강려   팔 쏙 내미는 봄비 안녕 마주잡는 버들개지 손등엔 초록빛이 방울방울 맺힙니다   친구 해줄게 꽃잎 펴들고 감싸주는 꽃망울 이슬의 조막손엔 향기가 노랗게 물듭니다   패랭이꽃   조그만 입술 달알 흰자위 묻은걸 시치미 뚝 떼고   파란 주먹 펼치면 분홍 별빛 캐득캐득   바람개비 후 부니 하얀 향기도 뱅글뱅글   봄비   단물 먹고 버들개지 웃음 통통 살 찌네   옴찔 일어서는 할미꽃 고마워요 고마워요 하얀 허리 굽히네   비탈길   비탈린 팔 내밀어 빗줄기 안아 줍니다   쪼르르 미끄럼 타는 가랑잎의 등도 밀어줍니다   2021년 1월 22일 중국조선족소년보 겨울방학합본 실림
1081    미안해 (외 2수) / 강려 댓글:  조회:1633  추천:0  2021-02-26
미안해 (외2수 ) / 강려 아뿔싸 나비의 발등 밟아놓고 귀 붉히는 해살   발에 걸려 넘어진 이슬 보고 미안해 꽃망울 볼이 익는다   늦봄   늦을가봐 하늘하늘 해살 잡고 앗싸 꽃잎이 냇물 건너뛴다   뒤서질가봐 외다리 실비의 어깨에 솔바람 팔 얹으며 같이 가 ! 초록 숨 할딱이며   지각할가봐 달음박질하는 5월 겨울밤   "손 차거워졌네" 구름이 별한테 하얀빛 장갑 쏙 끼워준다   "귀 빨개졌구나" 흰눈이 가로등한테 털실모자 꼭 씌워준다   2021년 ”연변문학” 2월호 연변작가협회 제2회 “중국조선족청년문학상”수상작 특집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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