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3월 2019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31      

방문자

검색날짜 : 2019/03/01

전체 [ 18 ]

18    하이퍼시와 형이상시의 결합을 위한 시론試論/심상운 댓글:  조회:923  추천:0  2019-03-01
하이퍼시와 형이상시의 결합을 위한 시론試論                                                                                      심 상 운    1. 현대시에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요소는 예술적 감흥을 고양시키는 효과를 드러낸다. T. S.엘리엇은 문학평론
17    <시작노트>의식의 흐름이 들어있는 옴니버스(omnibus) 기법 /심상운 댓글:  조회:861  추천:0  2019-03-01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는 옴니버스(omnibus) 기법                                                                                        심 상 운       21세기 현대시의 이미지는 의미意味나 심상心象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호記號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상상은 유추類推의 끈을 매달고 있지만 공상은 유추의 끈을 끊어버리고 무한한 미지의 영역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런 현상을 문덕수의 시론 「내면세계의 미학」에서는 ‘대상에서의 해방’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세계의 공간과 시간의 질서가 혼란해진(anarchy) 내면세계의 무의식無意識의 표출이라고 한다. 월간『시문학』을 중심으로 한 의 ‘하이퍼시 운동’도 이런 이미지의 세계를 원천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 넘는 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 언어작업의 산물産物이 된다.   그 작업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관념의 제로(zero) 지대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기호의 세계’가 초현실의 새로운 예술적 공간으로 탄생한다. 그 공간은 현실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율적自律的인 순수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객관적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언어의 박제剝製가 되어 허무虛無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노출한다.  현대시가 언어유희를 ‘무목적의 목적’, ‘쾌락적 공간’으로 허용하고 가치를 부여하지만 독자들은 의미의 소통이 단절되는 공간에서 오래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의미의 단절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영감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여도 하이퍼시가 극복해야할 과제로 부상浮上한다.   나는 그런 점을 해결하고 허무를 생명生命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하이퍼시에 ‘현실적 이미지와 비현실적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결합’하는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법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으로 형성되는 다선구조多線構造 속에 넣었다. 그 구조의 내면에는 시인의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어서 그 흐름이 영화의 옴니버스(omnib us) 기법으로 표출될 때, 서사적敍事的 동영상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자연스런 교접공간交接空間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움직이는 이미지의 공간은 기존의 시형식과 차별화差別化를 이루는 바탕이 되고, 독자들에게 의미유추意味類推의 즐거움도 안겨주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월간 2012년 10월호 '집중 이 시인'에서  
16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심상운 댓글:  조회:852  추천:0  2019-03-01
                하이퍼시와 포스트구조주의                                           심 상 운 1, 롤랑 바르트의 이상적 텍스트와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해체 비평으로 넘어가는 접점에 위치한『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 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langue)를 말하면서‘저자(著者)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記意)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의 이론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 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가 아닌‘기표(記標)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단위(unit)들로 형성된‘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산발적으로 퍼져있는 이미지들은  ‘의식의 링크(link)’에 의해 연결된다. 이 링크는 하이퍼텍스트의 용어이지만 하이퍼시에서도 사용된다. 그 단위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단위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땅속줄기들의 연결과 같은 개념으로도 인식되는 이 흐름은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想像)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공간도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구조(경계)를 고수하지 않는다. 그것이 하이퍼시 구조의 특성이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전통적인 시에서 중요시하는 메시지(주제, 관념)의 전달보다 상상이나 공상(空想) 속의 현상(現象)에 대한 감지(感知)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고정된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과 결합이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에서 찾게 된다. 이러한‘무경계(無境界)의 기법’은 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어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경계를 만드는 분절선(分節線)들의 감옥으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층(層)이나 영토(領土)를 만드는 선(線)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은 인간의 전통적 의식에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무의식(無意識)의 사고(思考)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자연(自然)에 더 가깝게 접근된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위계적(位階的)이고 계층화, 영토화된 철학적 사고를 수평적 사고의 구조로 개혁하기 위해서『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이다.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앞에서 언급한 탈-경계의 상상과 사유의 이미지로서 땅속줄기 즉 리좀(Rhizome)의 이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15    21세기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심상운 댓글:  조회:1070  추천:0  2019-03-01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젊은 시 운동-‘하이퍼시’ -기존관념에서 해방, 자유로운 상상력의 발현, 우주적 개안開眼                                                                                     심 상 운   「시문학」에서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 4회에 걸쳐 특집으로 엮은 김규화, 오남구, 심상운의 60편, 2009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3회에 걸쳐 기획특집으로 발표한 57편(참여시인 19명)을 비롯하여 하이퍼시 운동의 추진력으로 작용한 이슈의 숲길 과 , , 등은 21세기의 감각과 문화현상에 대응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젊은 시 운동의 치열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의 틀을 다선구조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 이미지를 동적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로, 고정된 관념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하고 사유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이런 개혁성으로 인해서 하이퍼시는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일부 시인이나 독자들에게 당혹감과 거부감을 안겨주고 ‘소통疏通의 단절, 자기들만의 만족’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인들과 독자들의 호응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 추세趨勢다. 이 호응에는 젊은 감각을 선호하는 독자들과 시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밀착된 사실적인 이미지와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의 뒤섞임을 즐기고자 한다. 이 뒤섞임은 그들에게 관념이나 의미를 넘어선 비약飛躍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경향傾向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환상적인 디지털의 감각을 선호하는 현대시의 변화로 파악된다.    변화는 하이퍼시의 생명이다. 이제까지 하이퍼시는 영화의 몽타주 기법과 같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시구조의 바탕으로 하였다. 그래서 장면을 연결하는 링크를 당연한 기법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링크를 답답하게 여기고 링크를 클릭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과격한 성향의 텍스트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하이퍼 시의 현장이다. 나는 ’상상의 클릭‘이라는 개념을 하이퍼시에 넣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하이퍼시의 기법은 컴퓨터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현대시의 기법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텍스트를 빼고 하이퍼시로 명칭을 정한 이유의 일부도 거기에 있다.    2006년 나는 라는 시론에서 ‘디지털 감각’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모듈(module)’, ‘샘플링(sampling)’ 등의 용어를 검증절차 없이 과감하게 디지털 시의 이론에 도입하여 시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보여주기(showing)의 ‘디지털 감각’이나 ‘가상현실’은 개념의 일반화 과정에 들어간 것 같으며, 모듈 이론은 하이퍼시에서 리좀 이론으로 언어만 바뀌었을 뿐, 그 중심개념은 그대로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샘플링 즉 견본추출이라는 개념도 ‘시와 현실의 관계’를 논의할 때 쓰일 수 있을 것 같다. 탈관념, 링크, 클릭 등의 용어도 현대시의 이론 속에 흡수되어서 새로운 기법의 용어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탈관념은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자는 것이지, 시에서 관념을 아주 없애자는 무관념이 아니다. 기존관념에 집착하지 않을 때 더 큰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살아 움직이는 탈관념의 세계이며, 현실과 상상이 결합된 새로움으로 가득한 하이퍼(hyper)의 세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관념으로부터 과감한 탈출과 창의적인 상상력의 발현이다. 거기에는 우주적인 개안開眼이 들어있다.  
14    “시인도 알 수 없는 시, 그저 한때 소나기였으면 … "에 대한 반론/심상운 댓글:  조회:813  추천:0  2019-03-01
  “시인도 알 수 없는 시, 그저 한때 소나기였으면 … ”에 대한 반론  『시가 있는 아침』 출간회 모인 시인•평론가 30여 명 말하다                                                                                        심  상  운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시단의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진단하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보았다. 먼저 짚어본 것이 “시가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명제(命題)다. 시에 대한 이런 견해는 너무 당연한 것 같다. 시는 언어예술이고 감동은 예술이 존재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 감동(感動)은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풀이 하고 있다. 이 말을 분석하면 먼저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서 느낌이 발생하고 그 느낌에 의해서 마음의 움직임이 생기는 것이 감동이다. 따라서 감동에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 따라 형이하학적 감각으로부터 오는 즉물적(卽物的)인 감동, 가슴으로부터 오는 정서적(情緖的)인 감동, 형이상학적인 지적(知的)인 감동, 종교적인 영혼(靈魂)의 감동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 느낌은 주관적인 지각(知覺)이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 “나는 느낌이 오는데 너는 왜 느낌이 오지 않느냐?” 라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가 된다. 느낌은 강요나 관념적인 당위성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느낌은 과거의 경험을 재생해주는 대상에서도 오지만, 새로운 현상이나 경험에서 더 강하게 분출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선한 느낌’과 ‘감동’은 과거시제보다 현재시제의 것이 된다. 과거시제의 느낌을 상투적, 구태의연한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가슴의 정서’ 속에만 갇혀있는 서정파(抒情派) 시인들이 “시는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새로운 시대의 지성, 감각, 정서, 영혼을 담고자 하는 ‘미래파(未來派)’ 시를 폄하하는 무기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둔감한 것만이 아니라, 현대시의 즉물적 이미지가 주는 신선한 감동을 비롯하여 독자들에게 정신적 전율을 주는 수준 높은 지적감동과 영혼의 감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의 좁은 울타리에서 활개 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시를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쓰자는” 것은 18,19세기의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경향의 시 쓰기이다. 낭만주의 시는 당시에 금기(禁忌)였던 구어체(口語體)의 시어를 사용함으로써 영국의 시단을 혁신하는 새로운 시운동으로 부상하였다. “콜리지와 워즈워스의 서정민요집(抒情民謠集, Lyrical Ballads,1790) 제2판(1800년)의〈서문 Preface〉에는 시가 '강렬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넘쳐흐름'이라는 워즈워스의 유명한 정의와, 시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쓰여져야 한다"는 그의 이론을 담고 있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     이 운동은 당시 귀족적인 고전주의(古典主義) 시의 틀을 부수는 강한 동력이 되었으며, 시를 귀족의 언어에서 평민들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성과로 해서 낭만주의 시는 영국에서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시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의 “자연, 사랑, 인생의 안일한 가정생활과 전원풍경, 소박한 시어와 운율형식”(안영수, 「형이상학시와 모디니즘 시: 신비평읽기」, 2009,8월호)과 정서과잉의 상투적인 언어는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주어서 이를 혁신하려는 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이 20세기 대표적인 시인 T.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 등이 중심이 된 모더니즘 시 운동이다. 이 모더니즘 시 운동은 정서위주의 주관적인 서정시를 ‘객관적이고 지적(知的)인 사유(思惟)의 시, 이미지의 시’로 바꾸는 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의 유물론과 관계 깊은 사실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라는 측면에서 배격하고, 시의 영역을 인간의 의식세계에 한정하지 않고 내면의 무의식(無意識) 세계로 확장했다. 이와 함께 초현실(超現實)이라는 개념을 포용하여 시를 의미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의 영역을 시에 부여하였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모더니즘(초현실주의 포함)으로 변화해 온 시의 역사에서 변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과거의 시에 대한 개혁(改革)이다. 이 개혁 속에는 시대정신과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고,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시의 독자적인 생명력이 들어있다   20세기 초엽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구의 시를 받아들인 한국 현대시 100년의 역사도 서구시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한다. 정지용, 김기림, 이상, 조향, 김춘수, 문덕수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계보가 그것이다. 그것은 현대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과거의 조선시대로 회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한국 현대시의 변화도 19세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한국 현대시는 신준봉 기자가 기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구충돌’의 와중에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는 젊은 시인들이 시단의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일부의 실험적인 젊은 시인들은 김남조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해부칼로 인체를 갈라 보여주는 것 같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혁신적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실주의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 있다.      디지털적인 감성(感性)은 가상현실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하기도 한다. 가상현실은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같이 현실과 비현실을 통합하는 제 2의 새로운 공간이다. 그래서 19세기적 자연발생의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적 공간의 시는 구시대의 관념에 안주하는 보수적인 서정시인 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시가 되기도 한다.     ‘시의 난해성(難解性) 문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에서 ‘서정파 시인들’이 새로운 형식, 표현, 사유의 시를 공격하는 무기의 하나다. 난해성 때문에 독자와의 소통이 단절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서정시인 들이 사용하는 난해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시는 ‘해석의 대상’이라는 시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들어있는 것 같다.     시를 해석한 다는 것은 시를 분해하여, 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시를 그 의미의 망(網) 속에 가두는 것이다. ‘이 시의 소재는 무엇이고 형식은 어떠하며, 주제가 무엇이라고’, 시를 지식화(知識化)하여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식을 시험문제로 출제하여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발랄하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정답 아닌 정답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왜 난해성을 시의 본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가? 시는 해석(解釋)의 대상이 아니라 감상(鑑賞)의 대상이며, 의미보다는 상상력(想像力)이 우선되는 언어예술(言語藝術)이라는 것을 왜 외면하려고 하는가?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의 대표작 「동천(冬天)」은 현대시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暗示)하고 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공간은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은 실체와 관계없는 언어 기호일 뿐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해석보다는 감상에, 의미보다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따라서 의미의 난해성이 이 시의 생명력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가 산문처럼 명백한 논리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시의 예술성(藝術性)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예술성은 난해성 속에 들어있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시를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쓰자는”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한국의 서정시인 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주관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독백적인 시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을 거부하고, 매스컴의 비예술적 대중영합주의의 옹호를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매스컴은 대중성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매체다. 그러나 이런 매체가 앞장서서 시의 무한한 가능성과 예술성을 무시하고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를 공격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그것은 매스컴의 횡포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2010년 1월 18일자 “시인도 알 수 없는 시, 그저 한때 소나기였으면 … ”은 시의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답답함을 안겨 주는 독선적이고 편향적인 기사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3    하이퍼 시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정서의 문제/심상운 댓글:  조회:803  추천:0  2019-03-01
하이퍼 시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정서의 문제                                                                                                             심 상 운             1. 상상과 공상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Fancy는 상상(imagination)에 비해 문학 창작의 능력으로서 낮은 평가를 받아 왔다. 19세기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리지(Coleridge)는 그 이유를 “Fancy는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된 기억의 한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문학작품이 갖추어야 할 의도적 질서(목적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들어 있다.     상상력은 이성적인 사고능력의 한 부분에 속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의적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을 보유한다. 따라서 상상은 기억의 재생,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감각적 생기, 연상 작용, 등으로 시의 영역을 확대하고 시를 습관적인 관성에서 이탈하게 하지만 실재성에 기초를 둔 엄숙한 사상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공상은 이성적 사고능력의 밖에서 해방된 공간을 형성한다. 그래서 공상은 자의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허황하지만 상상이 안고 있는 엄숙한 사상성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어서 유희성, 변화성, 경쾌성이라는 매력을 시에 부여하고 새로운 감각을 독자들이 즐기게 한다. 이것이 상상과 공상의 차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공상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발명하게 한 상상의 시초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고 자유로운 공상을 펼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베른 (Jules Verne 1828. 2. 8 프랑스 낭트~1905. 3. 24)이 고안해낸 잠수함 노티러스 호는 당시에는 공상과학(空想科學) 소설 의 소재였지만 20세기에는 원자력에 의해서 현실화된 잠수함이라는 것도 공상과 상상의 연관성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공상이 상상의 원천이 되는 이유는 공상이 상상보다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나 관념의 굴레에서 훨씬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위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고(思考) 작용으로서의 상상력과 아무런 의도성이 없이 아무 것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가지나 줄기가 자유롭게 이어지고 벋어나게 내버려두는 공상이 현대시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활용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적인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Coleridge)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假想空間)을 제공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 추리 작용(推理作用)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자율적 공간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함으로써 시 속에 새로운 자유의 공간을 형성한다.      인조수지나무에 종이컵이 난쟁이 고깔처럼 조랑조랑 과일들 맺어 풍성이 영글면 다 따서 담아 주스라도 빚을 듯이 종이컵 하나 따서 길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꾹 밟고 눌러 본다 빈 알루미늄 깡통처럼 쭈그러지면서 한마디 꽥소리 없다 이리저리 굴리고 뭉쳐 손아귀로 꼭 쥐어 본다 오렌지 커피 녹차 혹은 그런 갈증과는 아예 관련이 없다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 -문덕수 「종이컵」전문     문덕수의「종이컵」은 시인의 창조적인 상상의 밑바탕에 자유분방한 공상의 영역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조수지나무의 종이컵에서 “이 빈 기도 속에/ 지구地球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에 이르기까지의 자유롭고 유희적인 시인의 행위에는 현실적인 어떤 목적의식이나 논리적 인과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변화 속에서 미적 쾌감과 충격적인 의미가 살아나고 있다.   하이퍼시는 한국현대시를 오래 동안 지배해온 단선구조(單線構造)의 틀을 다선구조(多線構造)의 틀로, 시인의 독백적 서술을 객관적 이미지로, 정적(靜的) 이미지를 동적(動的) 이미지로, 시인을 시의 주체에서 이미지의 편집자(編輯者)로, 고정된 관념(觀念)에서 다양하게 확산되는 상상(想像)으로, 읽고 생각하는 시에서 보고 감각(感覺)하는 시로 바꾸어보려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개혁운동이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중심은 연상을 매개로한 창조적 상상일 수밖에 없다. 이 창조적 상상의 밑바탕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공상이 들어있다.      높은 빌딩 위 전광판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가 운반되고 있다. 경례하는 미국 대통령의 확대된 모습     사이에서 나는 짙푸른 오이를 꺾어 한 입 힘차게 베어 문다. 입안에 푸른 피가 철철 흐른다. -신규호 「풍경․1」2 전문     신규호의 하이퍼시「풍경․1」2에는 두 개의 풍경이 병치되어 결합돼 있다. 이 두 풍경에는 어떤 유사함도 없다. 오히려 대조적이다. 따라서 두 이미지의 충돌 감각이 미적 쾌감을 일으킨다. 그것은 죽음을 대하는 시 속의 캐릭터의 행위에서 찾아진다. 엄숙한 의식(儀式)의 공간을 보는 장면에서 입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를 보여주는 행위는 공상에서 솟아나는 퍼포먼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유희성의 표출이다. 그것은 하이퍼 시가 감각적 순수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정서와 암시적인 사유공간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재서는「문학원론」에서 상상을 문학 작품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공상을 배척하지 않고 옹호하고 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실재성에 기초를 두니까 엄숙하지만, 공상은 자의적이나까 비현실적이다. 문학에서 상상이 존중되고 공상이 매양 배척을 받는 것은 그럴 법도 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상상적이고 무엇이 공상적이냐 하는 문제는 무엇이 실제적이고 무엇이 비현실적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비평의 가장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여기서는 그런 논쟁적인 문제를 불문에 부치고, 다만 공상이 문학에서 차지할 수 있는 정당한 지위를 지적해 두려한다. 첫째로 공상은 그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으로 말미암아 문체의 장식적 요소가 된다. 인생은 엄숙한 것이지만, 이런 것까지도 버린다는 것은 퓨리턴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로 극이다. 희극에서처럼 공상의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과 같은 상상의 문학을 존중하는 반면에 같은 공상의 문학도 즐겨할 줄 안다. 심지어 이나 에서처럼 상상과 공상이 교착하는 문학에 대해서도 우리는 매력을 느낀다. 이들 작품은 현실과 이상을 대조하고 상상과 현실과 이상을 교체함으로써 실재감을 더욱 감명 깊게 하기 때문이다. -최재서「문학원론」14장 상상(2) 3. Fancy와 Wit에서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과 공상이 뒤섞여서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을 즐기고 거기서 다른 갈래의 실재성의 근원을 발견한다. 여기에 하이퍼시의 공상이 형성하는 다양한 이미지 세계의 당위성이 있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에 더 기울게 된다.          2. 정서의 문제     공상을 하이퍼 시의 바탕으로 삼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관념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공상이 시인의 정서와 어떻게 결합되느냐 하는 것이다. 정서는 시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공상과 정서의 결합여부는 시의 생명을 좌우하게 된다. 그 예는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서의 결핍이다. 초현실주의 시들은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점에서 새로움을 주지만, 시인의 내적의식의 흐름이 시 전체에 혈관조직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동일성이 결여되고, 한 편의 시가 파편화된 이미지의 나열 또는 집합형식에 머물고 말기 때문에 시적 감동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비합리적이고 무목적의 순수공상(탈-관념)으로 형성되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속에 시인의 정서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시인의 무한한 공상 속에 축축한 수분의 정서를 넣어서 시의 이미지를 수목처럼 싱싱한 생명체로 만들어 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정서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다. 독일의 미학자인 게르노트 뵈메(Gernot Bohme)는 “정서를 대상과 주체 사이에 발생하는 분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전의 해석을 빌리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부딪쳐 일어나는 온갖 감정”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비교적 약하고 장시간 계속되는 정취(情趣)와 구분한다. 정서는 마음이 움직이고 감동된다는 점에서 정동(情動)이라고도 한다. 희노애락(喜怒哀樂)•애증(愛憎)•공포•쾌고(快苦) 등이 정서이며, 의식적으로는 강한 감정이 중심이 되며, 신체적으로는 내장적(內臟的)인 생활기능의 변화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정서는 인간이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인간의 내적감정이 일으키는 심리적인 에너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게르노트 뵈메의 분위기(atmosphere)라는 정의는 정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였다고 보기가 어렵다. 그는 정서에는 분위기만 아니라 행동의 직접적 계기가 되는 심리적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정서의 심리적 현상은 강한 폭발력을 내재하고 있으며, 그 내재된 폭발력은 서정시에서 감동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정서가 제거된 이성적인 주지시보다 이성이 약화된 정서 위주의 서정시가 독자들을 더 유인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지성을 중시하는 현대시에서도 정서가 사물이나 지적 사유보다 강하게 인식되는 이유다. 그것은 대중가요의 흡인력과 같다. 특히 이성적인 논리성보다 인정과 눈물에 더 치우치는 감성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시에서 이성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것이 더 평가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서의 발생은 주체의 내적감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집단적 감정도 정서 발생의 원인이 되지만 정서의 대부분은 대상과 주체의 심리적인 상태의 관계에 의해서 발생한다. 따라서 서정시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감정이 표현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서정시의 시점이 1인칭시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주체인 ‘나’ 또는 ‘우리’의 감정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의 특성을 하이퍼 시에서 어떻게 담아내어야 하는가? 하이퍼 시는 주체(화자)의 일방적인 정서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서정시가 아니기 때문에 새롭고 독특한 방법이 요구된다.      다음 글은 월간 「시문학」2009년 3월호 신진과 조명제 시인의 대담 ‘하이퍼 시의 가능성’에서 발췌한 것이다.     신진: 하이퍼 시는 원칙적으로 허구를 제시하되 그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현실을 재구성하게 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전제와 확신에도 갇히지 않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양식이며 이 논리의 골격은 리좀(rhizome)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쉬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사물의 상호연관성이란 뜻으로 쓴 리좀은 원래 식물학적인 용어로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땅속으로 뻗어나는 줄기를 뜻하며, 스스로 뿌리이기도 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시작도 끝도 아니고, 언제나 중간에 있으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차원과 접속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연관성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재생하는 반계보학적 네트워크입니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시학을 포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2차원의 종이텍스트를 언제나 유동적인 4차원의 사이버 공간까지 확대한다는 하이퍼 시 동인의 논리에 부합합니다. 심상운 시인의 시를 한 편 들겠습니다.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심상운 「녹색전율」     인과(因果)의 틀을 벗어나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상호 연계되면서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7월 아침의 비와 6월의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사투,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씹는 방울토마토, 휴대폰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오남구 시인의 시도 한 편 들어봅시다.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 불그스레 실눈을 뜬 쪽달이 베갯잇 속으로 미끄러진다. 베갯잇의 조각보에 꿈오라기 오락가락 청-백-적-흑-황 지금 신행 온 딸아이가 베고 있다. 꾸륵 꾸륵 흑두루미가 철원하늘을 날아간다. 오르르∼ 신부가 떠는 입춘에 나뭇가지에서 오락가락 햇살 따뜻한 에너지가 스민다. 꿈틀 꿈틀 망울이 가렵고 겨드랑이가 가렵다. 거울 속에 팝콘 같이 흰 철쭉 꽃망울이 터진다. ―오남구 「입춘詩」전문     서두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에서부터 표준 어법을 이탈하고 있고, 한 마디의 서술 없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연결함으로써 입춘의 추상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시의 길이에 비해 움직임이 큰 동사와 형용사,‘오락가락, 꾸륵 꾸륵, 오르르∼, 꿈틀 꿈틀’ 등과 같은 의성어, 의태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특히 오남구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명제: 김규화의「매미소리」의 방법적 특질은 화자가 강의를 듣고 나오면서 ‘미륵론’의 환청처럼 들리는 매미소리와 그 울음의 유사성으로 하여 연상되는 염소 울음소리, 심지어 기차를 놓친 과거 어느 날 떠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마저 맹랑한 매미소리로 환치 혼융된 감각적 변용에 있어 보입니다.‘미륵’과 ‘매미’는 ‘미’라는 기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기의에는 유사성이 전연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강의의 잔상효과와 ‘미륵’/‘매미’ 두 말이 지닌 기표의 유사성만으로 그 관련성을 맺어 줍니다.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사정한다   염소에게서 배웠나,매해해 얌얌 염소 입술을 뾰죽이 내밀어 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 매 하는 미,매미이이이를   플랫폼에 혼자 두고 가는 기차가 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의 「매미소리」 전문     매미소리는 매미의 언어로서 어떤 의미신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귀에는 그저 카랑한 울음소리의 기표만 들릴 뿐이지요. 우리가 노승의 독경소리를 들을 때 그 의미는 전연 알지 못하면서도 그 유려한 독경소리 자체에 매료되어 열복(悅福)을 느끼는 절대 순수의 순간처럼 매미소리의 시니피앙 속으로 빠져들어 추억과 환상의 절대적 세계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지요.     하이퍼 시는 일반적 서정시들의 대상과 주체의 밀착에서 벗어나 대상과 주체와의 간격을 중요시 한다. 그 간격은 하나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것이 링크(연결고리)다. 링크로 연결된 이미지의 내면에는 어떤 의도성이나 목적성이 가미되지 않은 시인의 ‘순수한 의식의 흐름’이 들어 있으며, 그 의식의 흐름 속에는 주체의 정서가 들어 있다. 이 정서는 기계 속의 윤활유와 같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사물을 서로 부드럽게 연결하여 이미지의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그 흐름의 정서 속에서는 신선한 감각의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캐릭터의 퍼포먼스 같은 행위는 주체의 정서를 드러내는 감각적 행위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신규호의 풍경․1」2에서 보여주는 캐릭터의 입 안에 철철 흐르는 오이의 푸른 피, 심상운의「녹색 전율」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우쩍우쩍 씹는 행위,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가 환기시키는 감각적인 이고 원시적 본능의 정서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오남구의「입춘詩」에서 무의식 속에 잠재되었던 이미지의 돌출, 의태어와 의성어가 빚어내는 동적인 감각, 김규화의「매미소리」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순수한 청각 시니피앙은 대상과 주체(시인) 사이의 공간과 시인의 내면 의식의 흐름이 어우러져서 형성된 감각적인 정서의 표출로 인식된다.    정서는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감성의 현상이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시인의 주관을 제로상태로 줄일 때 객관화 되어서 드러난다. 따라서 하이퍼 시의 정서는 일반적 서정시의 정서와 같이 어느 한 쪽으로 경도된 주체의 정서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는 탈-관념된 정서가 된다. 그 정서는 노출된 정서가 아니라 이미지 속에 내장된 정서라는 데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하이퍼 시에서 주체의 정서를 담아내는 방법은 이미지의 병치와 대립, 연상적 이미지의 전개, 무의식 속의 환상, 자유분방한 유희적 퍼포먼스, 불연속적인 시간과 공간의 결합, 펀(pun)의 삽입을 통한 변화 등 엄숙한 사상성에서 벗어난 정서의 다양한 감각화와 순수한 의식의 흐름을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시 전체에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2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심상운 댓글:  조회:938  추천:0  2019-03-01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 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  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               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             락을 추적해 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             으로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                     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                    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                    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reterritorialization)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1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대담 -김규화/ 심상운 댓글:  조회:814  추천:0  2019-03-01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대담     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  김규화 / 심상운     아무리 아니라고 머리를 저어도, 우리는 인터넷, TV, 핸드폰 등의 IT기기들로 둘러싸인 환경, 즉 하이퍼텍스트의 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위아래(상하), 앞뒤(전후), 좌우라는 3차원의 공간에서만 살고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을 초월한(hyper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만,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오늘의 삶과 시가 변화된 리얼리티를 추구하며 하이퍼텍스트로 가고자 하는 노력은 시대의 불가피한 한 흐름으로 생각됩니다. 시대에의 맹목적 예속보다는 시읽기와 시쓰기의 새로운 리터라시(literacy)를 정립해 보고, 소외된 삶의 모습을 조명하는 비판적 시각도 시인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이 시대의 한 자원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오남구(吳南球) 시인의 제의로 심상운(沈相運), 김규화(金圭和), 오남구 세 시인이 『하이퍼텍스트 시』 동인지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IT시대를 선도할, 에콜 있는 동인지가 출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심상운 시인은 오남구와 더불어 디지털 시와 그 이론을 양역(兩役)해 왔고, 김규화는 이번 동인 운동의 동참으로 변신과 더불어 새로운 하이퍼텍스트를 지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 동인의 영입도 있겠지만, 우선 심상운, 김규화 두 분께서 다음 토픽으로 새 동인운동의 계획과 포부에 대한 기탄없는 의견을 교환해 주기 바랍니다.  ― 편집자    1. 동인지 운동에 앞선 소감은?    심상운:문학에서 에콜 활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문학적 특성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나는 오남구와 몇 년 동안 동인 아닌 동인활동을 해왔습니다. 「2004년의 한국시단의 동향」(한국현대시인협회의 연간 사화집, 2005)의 평문을 쓸 때, 오남구가 제창한 「디지털리즘」에 대해 퍽 흥미를 느끼고, 그 방법론에서 시대적인 당위성과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오남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고민하였습니다. '탈관념 시'와 '디지털 시'를 주창하는 오남구를 동인이라고 서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김규화 시인의 시에서 디지털의 기법이 보이고, 그것이 신선한 감각으로 느껴졌습니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있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관념이 아닌 언어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는 김규화 시인이 시에서 디지털 시의 언어기법이 생동하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고 동인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감각은 21세기에 와 있는데, 많은 시인들의 의식은 아직도 20세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동인운동은 시대적 중요성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시 창작의 기본이 되는 언어, 정서, 사물, 관념, 상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한 표현방법에 대한 모색과 실험은 현대시의 길을 여는 작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우리 시(한국현대시)는 계속하여 2천여년 전의 예수나 석가 시대의 비유, 상징의 기법으로 정서와 관념을 표현해 왔습니다. 이제 형식과 내용면에서 조금은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21세기는 전자 테크놀로지 시대입니다. 이러한 변화한 시대에 맞는 변화한 시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인터넷 인구가 날로 증가해 가고 있습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구분할 정도로 종이책(시)이 안 읽히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대신 인터넷 속의 하이퍼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쓰는 사람들의 인성을 즉흥적.도발적.비선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비판적 시각에서 여기에 상응하는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연유로 오남구와 심상운 제가 하이퍼텍스트시를 쓰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앞으로의 시문학은 동인지 운동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문학은 한 지역 안에서 10명 내외의 그룹이 모여앉아 읽고 감상하는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없이 쏟아지고 있는 경향 각지의 문학지들도 동인지적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남구 시인은 처음부터 실험시의 깃발을 들고 써왔고, 심상운 시인은 근년에 와서 디지털 시에 대한 이론과 시작품을 쓴 사람입니다. 여기에 신입생인 내가 합류한 셈입니다.    2. 동인지는 '하이퍼텍스트 시'(또는 '하이퍼 시')로 할 예정인 것 같은데, 동인지의 방법이나 에콜로서 '하이퍼텍스트'라는 방법적 지표를 세운 이유나 동기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동인지의 명칭은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생각되지만 '텍스트'와 '시작품'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하이퍼 시'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쉽게 이해하기 좋게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디지털 시'의 가장 발전된 상태를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의 에콜로서의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하이퍼텍스트에는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3차원 세계를 뛰어넘은 자유연상의 이미지 등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흔히 버추얼 세계라고도 일컫는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세태를 가진 현실입니다. 이것은 21세기적인 상상의 공간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를 동인지의 지표로 세운 이유가 되겠습니다.  김규화:앞서도 말했지만, '혁명'이라 할 만큼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 속에 사는 우리는, 문학 작품도 변화를 하지 않고는 살아 남지 못할 시대에 와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의 선형적∙순차적 질서, 구문론적 선조성, 서론∙본론∙결론 식의 글쓰기의 틀을 지켜야 한다는 시대를 지나, 지금은 디지털 시대의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를 외면하는 시(글)쓰기는, 현재에 살면서도 현재에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직선적인, 즉 리니어(linear)시대가 아니라 '넌 리니어,(non-linear)' 시대라는 인식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3. 하이퍼텍스트란 무엇인가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 또는 定義를 말씀해 주세요.    심상운:『IT용어사전』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자, 그래픽, 음성 및 영상을 하나의 복잡한 비연속적인 연상의 거미집(web of associations)과 같이 서로 연결시켜, 제목의 제시 순서에 관계없이 이용자가 어떤 제목과 관련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 제공 방법. 이와 같이 연상을 연결하는 링크는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의도(목적)에 따라 종종 하이퍼텍스트 문서의 작성자와 이용자 둘 다에 의해 생성된다. 예를 들면, 어떤 화제 또는 제목에 들어 있는 '쇠(iron)'라는 단어와 연관된 링크들을 조사하여, 이용자는 철기시대의 연대표를 찾거나 철기시대 유럽에서의 야금술의 발달∙이동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를 찾을 수도 있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1965년 넬슨(Nelson)이 책, 필름, 연설 등의 선형 구성(linear format)과는 대조적으로 비선형 구조(non-linear structure)로 컴퓨터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었다. 최근에 도입된 하이퍼미디어라는 용어는 하이퍼텍스트와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하이퍼텍스트의 비문자적 구성 요소 즉 애니메이션, 녹음된 음성 및 영상 등을 강조하는 용어다. "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넬슨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됩니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집니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를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텍스트의 유동성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닙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세계로서,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流動性)의 문학형태가 됩니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합니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 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입니다.    김규화: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넬슨(Nelson)이 처음 쓴 용어입니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서 그림이나 밑줄 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떠오르는데,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해 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고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텍스트입니다. 기존의 모든 정보(텍스트)가 평면 형태, 즉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이었지만 하이퍼텍스트 구조는 이러한 선조성, 고정성, 유한성을 파괴한 한편, 하이퍼텍스트는 매체를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하이퍼미디어라고도 합니다.    4. 시에서 말하는 하이퍼텍스트는 종이에 손으로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컴퓨터나 TV에서의 '전자 하이퍼텍스트'와 전자장치가 없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시 하이퍼텍스트, 또는 하이퍼텍스트 시)와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심상운: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된 시입니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 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납니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를 기록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기록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숨어 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됩니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됩니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립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됩니다.    김규화:하이퍼텍스트 문학이라고 하면 하이퍼링크가 적용된 문학으로서, 링크에 의해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존의 문자 텍스트는 텍스트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작가(또는 시인)가 정해놓은 한 가지 주제나 한 가지 이미지가 형성하는 문맥의 시간적 순서로(순차적으로) 이어나가는 데 반해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독자가 마우스로 선택적 링크를 하여 갈라져나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건이나 이미지를 만들고, 한 문장 중의 단어나 어구에서 문맥의 가지가 파생하여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장들이 종합된 하나의 복합 네트워크로 구성된 것입니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발달된 컴퓨터 기술의 특성을 종이 위의 문자면에서 최대한 활용하여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형태입니다.    5.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시 인용도 무방함)    심상운: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됩니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합니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합니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입니다.    김규화:종이 위의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 화면이 아니면 입력할 수 없는 그림, 소리, 동영상, 그래픽, 음악 만을 제외한 모든 특성을 종이 시에 이용한 것을 말합니다. 하이퍼텍스트에서 보이는, 순차적 질서나 위계적 시스템 구조를 안 지킨, 혼란스럽기까지 한 비선형성, ―어쩌면 인간의 사고과정이나 뇌세포의 덩어리(의식의 흐름)를 닮은―, 어떤 논리적 체계가 있는 수목(樹木)과 같은 시스템이 아니라, 감자의 알뿌리 같은 근경(根莖)처럼 사방으로 마구 이동하여 중심이 없이 그물 상태를 만들어내는 리좀(rhizome)성, 그로 인한 일방향적이 아니라 다방향적, 혹은 쌍방향적인 네트워크를 하이퍼텍스트시에 이용하여야 합니다. 하이퍼텍스트(시)를 이루는 마디(node:단어, 행, 연)들은 동시적으로 공존하거나 나열하여 존재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키거나 초월하거나 평준화시켜 닫힌 코드가 아닌 열린 코드로 무한한 상상력(공상∙환상)의 세계를 만들 수 있게 합니다.    6. 구체적인 작품을 들어 설명해 주세요.    심상운:다음은 내 시에 대한 자작시 해설입니다. 나는 나름대로 하이퍼텍스트 적인 시를 구현해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시문학』 2007년 6월호)    이 시의 기법은 첫째, 사물어의 사용(탈-관념), 둘째, 가상현실, 셋째,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넷째, 영화의 몽타주 기법(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등입니다. 그래서 자연풍경+사회 및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의 결합은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이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 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욕망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회를 먹습니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생명현상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기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입니다. 그래서 연극적인 기법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입니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입니다.  나는 현대시론, 「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모듈 이론도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점이 많습니다. 기존의 문장에서 낱말, 문장, 문단과 같은 구성단위의 전후 관계를 바꾸게도 하고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틀을 깸으로써 독자에게 재구성의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연결 관계의 논리성이 아니라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입니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입니다. 그것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을 아무리 치밀하게 전개하여도, 다양한 상상의 집합, 그 집합의 내면으로 흐르는 시인의 의식, 동적인 이미지, 해방감 등을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를 어떻게 종이 위에 '문자시'로 구현하느냐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로 남습니다.    김규화:설명하기 쉬운 졸시 「한강을 읽다」를 들겠습니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우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리다가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지른다    이 시는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강과 한강가에 늘어선 고층 아파트들의 '현실'과, 한강 물속에 비치는 아파트와 그 속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환상)'을 병치시켜 놓고,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이 모든 것(현실과 환상)을 지워버리는 가상현실(?)을 표현해 본 것입니다.    7. 앞으로의 계획은?    심상운:디지털 시의 이론을 더 충실하게 연구하여 가다듬고 그 이론에 부합되는 시를 모아서 '하이퍼텍스트 시집'을 상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동인활동을 통해서 한국 시문학사에 남을 유파를 형성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서 벗어나서 길 없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은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난 공상(空想) 또는 몽상(夢想)으로 번역되는 환상(Fancy)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성적 사고를 넘어서는 해방된 공간을 나름대로 시로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 속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떤 창의적 생각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상상과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즐거움을 줍니다. 언어는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김규화:이 시에 공감하는 시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 시는 더욱 다듬어서 좋은 동인지를 만들 계획입니다. 특히 덧붙이고 싶은 점은, 부분이나 작은 단위를 자유연상에 의해 연결하는 '링크'는 어떤 정해진 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연상에 의한 '무한 링크'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링크 작업이 어느 지점에서 스톱하여 한 작품의 전체로서의 네트워크의 형태나 스타일을 형성하는가도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의 모색 과제입니다. 
10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심상운 댓글:  조회:717  추천:0  2019-03-01
  2007, 11,17 사단법인 현대시인협회 주최 제1회「전국 공연시 경연대회」주제 발표문         공연시의 특성과 전망                                                심 상 운  1.  현대는 사회의 곳곳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시대다. 이 상상력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물고 서로의 존재성을 높이면서 다양한 가치의 세계를 열어준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현대예술의 첨단에 위치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다. 그는 이전의 예술가들에게는 전혀 예술의 재료가 되지 못했던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최초의 ‘테크놀로지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실험적인 시인들은 언어문자의 틀을 넘어서, 시가 음악과 영상, 시인의 연기를 포함하고, 연극의 무대로 진출하여 독특한 시의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시에서 시가 언어의 의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무의미시, 탈관념시). 시가 사물화 되려는 것(사물시). 시가 순수 이미지의 집합만으로 만족하려는 것(디지털 시, 기호시)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이다. 이런 변화는 언어(문자)를 유일한 표현매체로 삼는 전통적 시의 기능에서 벗어나는 창조적인 변화의 양상으로서 그 속에는 현대의 특성인 ‘경계 허물기’ 와 ‘통합하기(퓨전)’가 들어있다. 그들은 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시인의 사상, 감성, 상상, 영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시의 공연화(公演化)는 시와 연극, 시와 무용, 시와 회화, 시와 음악 등이 융합하는 현대시의 혁신적 변화로써 독창적인 표현영역을 확립해야 하는 미래지향적 과제를 안고 있지만, 영상매체에 위축된 현대시의 독자(관객)를 향해 새로운 소통의 문을 여는 ‘열린 시 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의미가 평가된다.    2. 공연시(公演詩)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르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공연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의 낭송언어를 공감각적 이미지에 조화시켜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시(perfomance poetry)는 글자 그대로 ‘공연+시’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시와 다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공연시를 창작할 때에는 첫째로 ‘공연을 위한 시’의 요소(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둘째로 무대에서 연출되기 위해 시인, 연출자, 배우 등의 역할분담(분업화)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셋째로 공연시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해서 연극, 음악, 무용 등 기존의 예술들과 융합되면서 ‘시의 언어감각과 이미지와 상징성’을 살려나가는 독창적인 표현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연을 위한 시의 목적에 부합되는 새로운 장르로서의 공연시가 정착되고 창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창작된 기존의 작품들은 ‘각색(脚色)’의 과정을 거치거나 창조적 연출의 기능에 의해서 공연시(각색시)로 재탄생할 수 있다.   현재 무대에서 공연되는 공연시는 ‘1인 낭송시’, ‘합송시’, ‘무용시’, ‘퍼포먼스’, ‘영상시’ 등으로 분류된다. 1인 낭송시의 경우에는 도우미가 캐릭터의 역할을 하고, 배경음악, 효과음, 소품사용 등을 통한 시인의 낭송연기로 문자시의 한계를 벗어나는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일반적인 시낭송(詩朗誦)과 차별성을 갖는다. 그리고 녹음된 시의 낭송을 곁들이는 무용시(舞踊詩)는 언어의 시를 몸의 시로, 퍼포먼스는 간단한 무대 장치를 갖춤으로써 언어의 시를 극적인 연출의 시로, 영상시(映像詩)는 노래나 해설과 함께 사이버 공간에서의 영상과 시의 결합이라는 방법으로 시의 이미지를 표현하여, 문자를 유일한 매개로 하는 ‘종이 속에 갇힌 시’와는 차원이 다른 전달성을 드러낸다. 이런 공연시의 표현 효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평면성을 입체성으로, 청각이나 시각을 공감각으로 바꾸는 이미지의 다양한 변화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영상시를 제외한 공연시에서 이루어지는 시공연자(시인)와 관객(독자)의 직접적인 만남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객(독자)들에게 문자시에서 맛보지 못하는 즐거움을 주고 독자와 함께 시의 호흡을 나누는 것이다. 오늘날의 관객(대중)들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공통적 특징인 비유적, 상징적 표현이나 문맥 파괴적인 현대시의 공연을 충분히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3. 공연시는 시의 커뮤니케이션에서만 아니라 시의 창조적인 이미지 면에서 현대시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 예상된다. 공연시는 언어와 문자를 기본으로 하지만 무대의 공연을 통해서 시인(배우)의 연기와 무대장치, 조명, 소리 등의 효과로 전달되는 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로,그 변화의 양상에 일반적인 현대시를 대입해보면  영상시를 지향하는 시에서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통한 복합적인 이미지의 세계(하이퍼택스트)를 구현하는 시가 더 확산 될 것 같고, 짧은 서정시에도 극적인 요소를 넣어서 입체적인 표현을 하는 시가 일반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전망이 가능한 것은 공연시가 확산되면 그것이 전통(일반) 서정시의 표현 방법에 도미노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시의 주체는 시인(창작자)이라는 고정관념의 변화다. 시를 무대에서 행위예술로 표현하는 배우나, 시를 각색하고 연출하는 연출자도 시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독창적 해석에 의해 시의 의미와 감각이 여러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다.  셋째로는 시의 표현에 사용되는 음향과 영상기기와 시의 만남이다. 악기와 전자기기들이 시의 표현양식 속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언어를 대신하는 매체로 자리를 잡게 된다. 따라서 물리적인 기기(機器)와 시의 합성은 새로운 감각의 시를 탄생하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이외에도 시가 한정된 종이의 공간에서 무한정한 사이버의 공간으로 확산되어서 시의 대중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예상이다.   공연시의 이론을 세우고 실제적 공연에 앞장서서 새로운 시의 영역을 개척해온 신규호 시인(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은 이제까지 벌여온 공연시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현대사회에서 구현가능한 공연시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2007, 4,27) “실제로,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무대 위에서 직접 창작시를 합송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하거나,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노래시), 또는 시극이나 무용시, 퍼포먼스 등을 시청각 매체를 이용해서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청중들에게 몸으로 다가가고자 시도하는 ‘공연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2000년 1월부터 현재까지 ‘좋은시 문학회’가 총 88회에 걸쳐 실험하고 있음.)  무대 위에서 ‘공연’되는 시는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나 카메라 폰 등으로 녹화하여 다시 사이버 공간이나 DMB, TV 등에 재생하여 감상하게 함으로써 ‘공연시’의 재생산, 재활용도 가능하다고 본다. 더구나, 최근에 새로 등장한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나 'SECOND LIFE'와 같은 콘텐츠 제작 방법을 ‘공연시’가 앞으로 잘 활용하면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전망은 현대 영상매체의 기기와 공연시를 밀접하게 연결하고 있다. 이는 백남준이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든 것과 유사한 독창적인 비전이다.   4 공연시를 창작하고 발표하는 시인은 ‘시인, 연출가, 배우’의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종합예술인의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시를 언어(문자)에서 해방시켜서 온 몸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전문가적인 정신과 열정이 있다. 그래서 “ ‘공연시’는 보다 ‘인간적’이다. 시인과 청중이 시를 가지고 직접 서로 만나서, 면대 면으로 호흡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발표해 보여줌으로써, 창조적인 시적 상상력을 통한 감동을 서로 공유한다는 데에 참뜻이 있다. 비인간화 시대에 시적 정서를 직접 교환함으로써 인간적 유대감을 증진함은 실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신규호 시인의 글(「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하여」)은 더욱 공감을 준다.    예술작품을 비롯한 문화 현상들에서 형식이 내용의 대부분을 만들어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근거가 되는 예(例)는 집의 형태에 따라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이 달라지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고, 환경이나 제도가 사람의 생활 형태와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용기(容器)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공연시의 앞날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오늘 열리는 ‘한국 현대 시인협회 주최 제1회 ’는 이제까지 검토한 여러 가지 사실에 비추어볼 때 매우 의미 있는 행사라고 생각된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시인과 도우미(조연)는 전문적인 연기자가 아닌 순수한 아마추어들이지만 그들은 자기가 창작하는 시에 대한 애정과 신념이 있으며 열정이 넘친다. 따라서 어설픈 장면도 많겠지만 전문가를 넘어서는 재치와 상상력의 싱싱함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이 보여주는 몸의 시, 행위의 시를 받아들이고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말자.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한 몸이 되어 보자. 그러면 ‘종이’에서 해방된, 뜨겁고 빛나는 새로운 시의 혼(魂)과 만나게 될 것이다.  
9    시와 기호(記號)/심상운 댓글:  조회:820  추천:0  2019-03-01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발음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2007,7,30, '시문학사')에 게재한  대담형식의 시론「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化)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에는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생략)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비슷하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오늘의 시작법』2004, 개정판 )-   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8    최동호 시인의 <디지털 시대와 시의 독자들>에 대한 반론/심상운 댓글:  조회:675  추천:0  2019-03-01
엘리트시 100선   2007년 봄호 (25)에 게재   *시사랑 문예대학 학술 세미나 (2003,8,13)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 -최동호 시인의 에 대한 반론                                                                                      심 상 운    1. 최동호 시인은 에서 주관한 학술세미나[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환경과 글쓰기의 방법론](2003.8.13)의 기조발표문 에서 “디지털 시대를 대변하는 음유시인(吟遊詩人)이 출현한다면 대중적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폭발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우고 21세기 영상성의 시대에 오히려 서양의 고대나 중세에 활동하던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 음유시인의 출현을 기다리는 이유는 일부시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빌어서 현대시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시의 내적 방법론보다는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을 선택한 그가 현대시의 미래에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현대시의 시론을 탐색해야 할 입장의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세우는 가설에는 그의 실증적 체험이 들어있지 않고 막연한 예언 같은 추상성만 들어 있어서 어리둥절하였다.   그는 그 가설의 근거를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김소월이 민요 시인으로 불리면서(본인은 그 명칭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20세기적 정서를 대변하는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김소월과 대극점에 이상의 시가 있고, 김수영이나 김춘수 같은 시인은 관념의 세계를 파고들어 그 나름의 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앞으로 노래와 결합되지 않는 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예견된다.” 라고 한국현대 시사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어디에도 오늘의 현실에 입각한 실증적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변화와 다양한 취향의 독자들을 외면하고 21세기에도 김소월과 같은 민요조의 시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백남준 같은 세계적인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한국 현대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1980년대 한국시단을 휩쓸고 간 베스트셀러의 열풍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베스트셀러의 시집들이 지금도 인기가 있고 문학적 가치가 있는 시집으로 존재하는가를 한번이라도 냉정하게 검토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방법을 디지털 시대의 매체의 기능에서 찾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여러 매체들을 종합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이 시의 쟝르적 특징이고, 이를 살려 시와 음악, 시와 무용 등이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시와 음악, 시와 무용의 결합을 현대시의 한 방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시의 연구”라는 말을 통해서 음악과 무용과 결합할 수 있는 시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의 결합방식에는 현대시의 독자성을 포기하고 현대시의 언어를 종합예술의 형태 속에 넣어서 음악이나 무용의 힘을 이용하여 대중의 인기를 얻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 같다. 이때 시가 음악이나 무용에 붙어서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가를 숙고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그러면 먼저 그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돌파구로 내세우고 있는 그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 대안인지 검토해보자. 그가 거론한 음유시인은 중세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각지에서 봉건 제후의 궁정을 찾아다니면서 스스로 지은 시를 낭송하던 시인이나 고대 그리스에서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오랜 동안 전승되어 오는 서사시를 간단한 악기의 운율에 실어서 대중들에게 들려주던 형태와 같은 시인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본뜬 현대의 음유시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공원이나, 카페나, 다방에서 자기가 지은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거나 낭송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시인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구조 속에서 음유시인의 일반적인 형태는 시인이 쓴 시를 작곡가의 곡에 붙여서 가수가 노래하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정지용 시인의 시 에 곡을 붙여서 대중들에게 가수가 들려주는 것처럼. 그럼 그때 '음유시인'은 누가되는 것일까. 시인일까? 작곡가일까? 가수일까? 이런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세밀하게 구상되어 있지 않은 채, 단순히 대중에 영합하는 시를 말하기 위해서 ‘음유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그의 은 매우 즉흥적이고 아마추어적 발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현대는 그가 말한 대로 디지털의 여러 매체를 종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다. 그래서 시인이 대중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활자매체’ 한 가지 만은 아니다. 활자매체에 영상 이미지를 넣고 음악과 시인의 음성을 담아서 컴퓨터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에서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가 인터넷 가상공간의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음유시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의 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하지만 현대성을 획득하는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다음은 두 번째로 음유시를 위한 시의 연구가 현대시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론으로 성립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검토해보자. 음유시가 되기 위해서는 현대시가 대중가사의 노랫말같이 읽고 노래하기에 적합한 운율적인 언어로 조직되어야 하고 시인의 정서를 대중들이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탄형의 구문이 되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속요에도 음악성을 나타내는 후렴구가 들어 있고, 시조에도 4음보와 3,4 4,4 조의 운율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가사에도 3,4, 4,4 조의 가락이 있다. 정지용 시인의 에도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이런 비슷한 운율을 현대시에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런 시가 진정으로 대중과 가까워지는 현대시의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이때 현대시와 대중가사와의 거리는 또 어떤 기준으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이제까지 쌓아온 한국 현대시의 언어적 성과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의 인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만 든다.    그러나 시와 음악과의 결합은 근래에 산문화 되고 있는 현대시의 ‘음악성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과 함께 현대시의 새로운 운동으로, 일부의 시인들이 독자(관객)와 호흡을 함께하는 나 의 시가 매스컴의 외면으로 대중화에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라는 주제를 논하고, 음유시인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그냥 지나쳐버린 것은 편향된 시각이나 좁은 안목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       2. 이상으로 디지털 시대의 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최동호 시인의 음유시인의 등장에 대한 검토를 나름대로 해보았다. 다음은 왜 최 시인이 디지털의 시대에 사는 세대들이 선호하는 영상 이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짚어보자. 그는 의 도입부에서 갑작스런 사이버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이버 세계에 의한 독서 인구의 감소를 지적하고 있다. 이 독서 인구의 감소 문제가 가상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온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에서 ‘문학의 이해’ 수업시간에 경험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박목월의 시 ‘청(靑)노루’를 다루면서 우선 전혀 다른 이질적인 반응에 놀라게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론이 붕괴되고 해체시와 정신주의가 충돌하던 90년대 초반에 이 시에 대해 학생들은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세계가 이미 자신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이 시에 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 전문       60년대 이후 회화적인 구도를 가진 자연시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어온 박목월의 ‘청노루’가 젊은 세대들에게 이처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필자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젊은 학생들에게 유행하던 시들은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이거나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작품들이었다. 물론 많은 시인들에 의해 전통적인 서정시가 쓰여지고 있었지만 그런 류의 시들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작품으로 치부되는 듯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학생들에게 박목월의 ‘청노루’를 다시 읽혀보고, 종전과 유사한 반응을 기대했었는데, 의외로 2000년대 초의 학생들은 이 시에서 그들 나름의 시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고 답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크게 부정될 줄 알았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에서 필자는 일단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최근의 학생들이 이 작품에 공감을 보인 것은 이미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에서 흥미를 느끼는 그들이 ‘청노루’ 정도의 표현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것은 그만큼 인터넷의 가상현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     최동호 시인의 현실진단은 정확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진단에 대한 그의 해석은 한마디로 부정확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거기에 대응하는 시적 방법론을 새롭게 찾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해답이 되는 시적 방법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그의 진단 속에 들어있었다. 1990년대 초에 “박목월이 그리던 자연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있지도 않은 현실을 그린 시에 어떻게 시적 공감을 느낄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반응이었다.”던, ‘청노루’가 2000년대 이후의 독자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그 해답의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감각이었다.“는 학생들의 반응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까닭은 세대 차이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그의 마음이 활짝 열려 있지 않았다는데, 근본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현실에 대한 풍자나 야유, 기성의 작품을 모방하는 패러디적 시들은 현실에 대응하는 참여시로서의 가치는 있었지만, 시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예술적인 본령에서는 멀리 떨어진 시의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2000년대의 학생들은 직감한 것이다. 컴퓨터 인터넷을 생활의 일부로 삼는 그들은 시에서 의미보다 영상성(이미지)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가스통 바스라르와 같이 철학적 명상에는 잠겨보지 않았겠지만 ‘가상현실을 이미지의 세계’로서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현대시에 대한 이런 감각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얼마나 건전하고 바른 접근인가 거듭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이 단지 사이버의 가상세계에 빠져서 독서를 등한시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감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몰아간 것이 과연 현대시의 강의 현장에서 현명한 판단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원하는 방향이든 원하지 않는 방향이든 필연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시대의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그들에게 그들이 선호할 수 없는 시만 보여주고 “왜 시를 읽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고집일 뿐”이라는 말을 그에게 되돌릴 수밖에 없다.      3.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영상 언어의 세계를 제시한 운동은 아날로그와 대칭되는 디지털이라는 관점에서 ‘기계의 시’ ‘반인간적인 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외면하는 시인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의 그런 자세는 현대의 물질주의적 상황에서 인간의 정서를 옹호하고 시의 생명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태도라는 점에서 공감이 가는 행위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이 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어처구니없는 태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도 이제까지 현대시를 이끌어온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와 같이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 가상세계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의 존재 이유가 첫째,‘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시의 서정성을 근본적인 바탕으로 한다는 것. 둘째, ‘모더니즘의 절제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 슈르의 반지성적인 ‘상상의 확대’,‘자유연상’, ‘창조적인 이미지에의 유혹’은 물론 리얼리즘의 ‘현장성’ 까지 모두 포함하는 시의 큰 그릇이라는 것. 셋째,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직관을 통한 염사와 접사’,‘무의미(탈관념)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의 공간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선결과제가 된다. 그것은 현대시의 문제의 해결 방법을 외부가 아닌 현대시의 언어내부에서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적 지향점을 안고 있는 는 과학적인 사실주의(실증주의)도 중시하지만 인간 내면의 심리적 현상에도 깊이 있는 시선을 던진다. 그것은 가 ‘언어의 의미’에서 탈출하여 ‘이미지의 세계’를 시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슬라르는 과 에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가스통 바슬라르의 과 을 강의 하는 김용희는 그의 강의 노트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요약․정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가스통 바슬라르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은 ‘‘청노루’의 자연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적일 수 있다“고 하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인 학생들의 시적 인식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실제로 행하여졌던 이미지의 실재성을 인정한 것일 뿐, 그가 새로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실증적 관찰을 통한 이미지의 실재성은 현대시에서 ‘상상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이 되고 있으며, 미래지향의 가치를 창조하는 동력을 공급고 있다고 생각된다. 는 상상력의 확대와 새로운 이미지의 창조라는 면에서 가스통 바슬라르의 상상의 시학과 맥을 같이 한다.      4. 그가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로 떠나간 신감각의 새로운 종족” 들은 어떤 상상력을 가진 세대이어야 하는가? 그들에게 기성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중심이 되는 이슈가 ‘창조적 상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2007년 2월 16일자 기사에는 2007년 주요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 주제가 ‘창조교육’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을 최대한 동원한 신제품 만들기다. 그 제품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것이어야 한다. 제품은 실제 물건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제도나 시장ㆍ금융상품ㆍ마케팅 아이디어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런 미래지향적 연수의 결과물 중에서 '아이-라이크(Eye-Like)‘라는 제품이 있다. 콘택트렌즈처럼 이 제품을 눈에 착용하고 일상생활을 하도록 한다. 집에 들어와 아이라이크를 빼내 별도 플레이어(재생기)에 장착하면, 그날 일상에서 본 모든 영상이 아이라이크에 담겨 있다. 플레이어를 통하면 그날 하루 일과가 그대로 재생된다. 눈에 끼는 캠코더를 연상케 하는 제품이다.'루미트리(Lumi-Tree)'란 제품도 이와 같다. 반딧불이의 발광 DNA를 식물의 DNA와 합성해 나무나 꽃의 잎(또는 줄기)에서 발광물질을 발산하게 한다. 식물 자체에서 나오는 빛으로 가로등을 대체할 수 있다. 이런 상상의 제품은 미래 시장을 향한 제품이다. 과거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가상세계의 현실화에 도전하는 자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꾸는 꿈은 현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는 꿈이라는 점에서 의 꿈과 같다. 따라서 현대시의 전위적인 실험시도 그들의 신제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감성과 상상력의 조화와 확대로 새로운 시의 원천이 되는 아이템을 찾아내는 일이다. 상상은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모태가 된다. 그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이지만 실재(실상)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실제적인 이해타산과 인과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이미지’에 의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즉 심리적 이미지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적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현대시에서 이미지를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한 것은 이미지의 범위를 좁힌 점은 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단어로 존재성을 갖는다. 그 심리적 이미지는 오랜 옛날부터 예술의 동력이 되어서 사람들을 움직여왔지만 실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그 이미지의 비중이 커지고 비약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시에서 상상력의 확대를 추구하는 는 가상세계를 포함한 인간의 심리적 이미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 변화 속에 디지털 시대에 시가 존재하는 방식이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7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심상운 댓글:  조회:678  추천:0  2019-03-01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                     -------문제 시집과 시와 시론을 중심으로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     현대시의 도전 양상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시인들의 자세와 젊은 의식에서 발견된다. 시의 숙명은 언어의 한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갖기 때문에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고뇌하고 도전하고 변화를 꿈꾸는 시인들의 의식은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면서 새로운 현대시를 낳는 모태가 되어왔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현대시의 역사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1930년대의 박용철・ 김영랑 등의 순수시 운동이나, 이상李箱의 심층심리와 초현실주의, 김기림 ・정지용의 모더니즘 시운동 등은 외국의 문예사조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과 당대의 현실을 외면한 것을 지적하여 비판할 수 있지만, 한국 현대시의 준거를 마련하고 시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공적을 남긴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시에 대한 개념을 확대시켜 현재까지 한국 현대시의 다양한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국 현대시의 회화성과 내면의식의 표현, 사상의 감각화 등은 전통적인 서정시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서정시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IT, DIGTAL, DNA 등이 주도하는 빠른 변화의 21세기에도 20세기의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방법으로 인간과 자연과 생명의 문제에 대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지각知覺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사물인식事物認識과 표현기법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될 수 있는 시론과 시집과 시편들을 중심으로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을 예시하고 새로운 시의 모습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한국 전통적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시인들과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서정시인들의 시편들. 언어의 감각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서정시.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한 주지시.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언어의 유희적 기능을 내세우는 초현실적인 시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 현대시의 시편들의 모습을 나름대로 살피면서 변화의 징후를 발견해보려고 한다.   먼저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21세기 시에 대한 대안으로 문덕수가 제시하는 사물시事物詩에 관한 시론이다.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의 후기 시론에서 “21세기에는 언어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어야한다”고 전제하면서, 라는 새로운 아이템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국 모더니즘 시를 대표하는 원로시인이 젊은 시인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끊임없는 탐색의 정신에서 솟아나는 사고思考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다.   두 번째는, 현대의 언어는 인간의 존재 상황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인간의 사유思惟를 담고 있는 언어는 지식知識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그것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갖고 태어난 것을 얼마나 잘 담고 있는가, 하는 언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오진현(필명 오남구) 시인을 중심으로 IT 시대에 고뇌하고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젊은 시인들이 벌이고 있는 탈관념과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이다. 오진현은 90년대 중반에 탈관념의 시적 방법론을 제시한 이후 2002년에 과감하게 디지털리즘을 선언하고, 2년 만에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시를 시발점으로 하는 「디지털리즘 선언」 3집(2004, 9, 11)을 내놓고 있어서 그 열정과 힘이 더욱 강하게 감지된다.    세 번째는 산업사회의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의 존재를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는 환경문제에 대응하여 생태시(녹색시, 환경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군一群의 시인들도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보여주고 있는 건강한 시인들로 분류된다. 신진, 송용구 등 이 분야의 시인들은 시작詩作에서 방법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있어서 현실 참여시의 폭을 넓히고 그 분야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운동은 모두 2004년 한국 현대시에 젊고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어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변화의 시대에 과거의 틀에 안주하는 시인과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며 새로운 시를 꿈꾸는 시인들을 구분하고 그들의 시사적 위치를 가늠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21세기 새로운 시의 모색       가.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사물시事物詩      문덕수는 「오늘의 시인 총서- 문덕수시 99선」( 2004,7,5)의 후기 시론 에서 21세기 시의 키워드로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세 가지 전제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DIGITAL, DNA, DMZ”의 공통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가 아닌 사물事物이야 말로 21세기 시의 모든 문제를 내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중적 리얼리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시학'으로 심화된 김지하의 시론, 이상李箱의 심층심리를 기점으로 출발한 탈관념의 실험, 에콜로지즘에 의한 녹색시학의 시도, 그리고 분단현장의 새로운 관찰과 전망 등은 모두 적나라한 사물의 실제에 대한 직접적 체험에서의 출발로 볼 수 있다.'사실''생명''현장'이라는 전제를 일관하는 밑바닥에는 '사물事物'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리얼리티를 찾고자 하는 시인들의 오랜 방황의 길목에서의 불가피한 만남이다. 21세기 시는 언어 이전 또는 모든 사유를 벗어난 사물 그 자체의 날것에서 출발한다. 21세기의 시는 모더니즘의 모든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를 초극하고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 그대로의 적나라한 '사물'에서 새로운 시의 원점(제로지점)을 찾으며, 시의 내재적 특징과 지향적 특징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하고 있다. 그 말 속에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허구성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언어의 숙명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해보고자 하는 시인의 치열한 도전의식이 들어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시인의 주관적인 감성이나 사상,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의 본질과 만나는 방법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또 시속에서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인내심과 내공內空의 힘을 드러내게 하여 시를 도道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려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는 사물시의 특성을 안고 있는 시다. 두 편의 시를 살펴보자. 이솔의 시집 「수자직繻子織으로 짜기」(2003, 10, 30)에서 사물시의 구체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큰집 마루에 앉아서 꽈리를 분다/아랫입술에 구멍을 대고 부풀린 다음 윗니로 살짝 누른다/뽀르륵 꽈리소리에 빠져서 자꾸 불어댄다//햇빛이 가득한 큰집 마루에 혼자 앉아 꽈리를 분다/원추형의 치마를 들치면 동그란 꽈리가 매달려 있다/아주 조심스럽게 만져가며 말랑말랑하게 만든다/심지가 만져지고 씨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꼭지를 살살돌리면서 천천히 심지를 뺀다/바람을 불어 넣고 햇빛을 담으니 동동 뜰 것 같다//꽈리 속에는 소리가 많다/입을 오므리고 불면 개울물이 굴러 흐른다/돌틈으로 비비대며 흐르는 개울물소리/바람을 잔뜩 부풀리고 서서히 불면 굴렁쇠소리가 난다/맨발로 마당을 빙빙 돌며 굴리던 둥근소리/입을 옆으로 하고 누르듯이 불면/칭얼대는 아기소리가 난다/돌사진 한번 찍어보지 못한 아기/입안 가득히 흐르고 구르는 소리//큰집 마루기둥에 기대앉아/꽈리를 부는 일은 지치지도 않는다//  -----------이솔 전문    이솔의 시에는 사물을 직접 보고 만지고 체험하는 시인의 독특한 사물인식의 양식이 보인다. 이러한 사물인식의 방법은 사실성과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여 시를 언어 이전의 사물세계에 접근시키고 있다. 그래서 시를 모더니즘의 언어주의(특히 언어유희)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시는 또 사물시에서 지향하는 순수직관의 방법도 보여주고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언어감각을 감지하게 한다. 최진연의 「여름시편․4-소나기」에서도 사물시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해열제를 먹고 누워서 듣는 이웃집의 피아노소리/갈매기한두 마리 끼룩거리며 날고 있을뿐/아직도 비어 있는 바다가 보임./시골에도 비가 온다는 조카의 고추밭 고추들처럼/얼굴이 환해지는 아내/방안에서도 비를 맞는 행운 목 잎들이 길게 늘어져 있음./비를 받아 먹느라 쳐들었던 그간에 마른 얼굴의 꽃들/보나마나 이젠 고개 숙이고 있을 것임./해열제를 먹은 내 몸에서도 소낙비는 쏟아지고/자면서도 나무들 지절거리는 소리는 들을 수 있음.//  ---최진연 「여름시편․4-소나기」 전문    이 시에서는 시인과 사물과의 관계가 '사물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시인의 시편들은 시인의 위치가 중립적인데 비해 이 시는 시인이 사물 쪽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내면(혼)까지 드러내려고 한다. 사물이 시의 원점(제로지점)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시인이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사물과 만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솔, 최진연의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물시의 모습은 문덕수가 제시하고 추구하는 사물시의 한 부분이다. 언어 이전의 사물인식은 “DIGITAL, DNA, DMZ”의 시편에 내재된 공통개념이다. 모더니즘의 언어주의(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 관념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사실과 생명과 현장 체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시운동으로서의 '사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나, 디지털리즘의 선언과 디지털리즘의 시    오진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디지털리즘 시운동은 사물시의 연장선상에서 더 구체화되고 세밀화 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실, 생명, 현장”이라는 사물시가 지향하는 전제前提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를 포함하는 다른 측면을 실험시의 형태로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 1집(2003,3, 15)에서 선언한 디지털리즘의 핵심 내용을 인용해보면, “지금까지 아날로그 시대의 시가 '기술記述' 또는 '자동기술自動記述 '하는 것이라면, 미래의 디지털 시대의 시는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염사 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로 구분 짓기도 한다. 그래서 ”인체人體의 신비전神秘展“에서 보듯 '진열된 세계'의 시신屍身을 종으로 갈라놓거나 횡으로 갈라놓아 진실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그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 '디지털리즘'을 실험하였다. 마치 이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생명의 절편切片'으로서 일찍이 초현실주의 작가 부르통이 몸에 유리관을 끼워서 내장을 들여다보았던 '상상의 세계'가 실제 시신의 절편을 통해서 충격적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선언문의 내용을 찬찬히 짚어보면 디지털리즘의 표현방식은 염사念寫'또는 '찍는다'는 행위이고, 충격적인 사실을 직접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여주는 것은'생명의 절편切片'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시의 전제 조건 “사실, 생명, 현장”을 구체화한 것으로 사물시의 공통 개념에 부합된다. 그런데 “현란한 색깔의 무늬를 보고 황홀해 하는'디지털리즘'”이라는 말에서는 언어 이미지나 언어유희의의 세계가 발견된다. 이것은 사물시가 벗어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언어주의 세계와는 다르지만 디지털리즘의 언어유희와 언어감각의 모양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언어 이미지, 언어유희, 찍어서 보여주기의 방법에서 디지털리즘은 사물시와 별개의 시로 나누어 진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단순히 읽히는 시가 아닌 사실 또는 현상을 보여주는 시, 언어 그림의 시이면서 시인의 내면적 의식을 떠올리는 시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아침바다, 나의 첫 말言들이 꽃과 섹스를 시작한다./ 오늘/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 미끄러지기/ 탈관념脫觀念이, 해日에서 「꽃」 꽃에서 「춤」으로 미끄러지기, 유쾌히 말이 미끄러진다./--수평선에 이쁜 눈썹 같은 민족이란 언어가 기우뚱하다. (단, 민모 또는 민족시인*이 내말을 못 알아/ 들어도 어쩔 수 없다.)/창가에서 언어와 꽃의 고독한 섹스,이미지 미끄러지기. 힘차게 꽃대 뽑아올리고 있는 제주 한란寒蘭, 뚝 뚝 피멍울이 져버리는 한란寒蘭, 순백이 일순간 흔들리면서, 오르르르...... . 전 신경이 떤다./ 꽃아,/ 달 하나 반짝이며 떨어진다/천 개 만 개 별들이 쏟아진다/간밤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선한 자식듣,/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아-.                              ---오남구 < 해맞이 첫 언어- 디지털리즘 ①> 전문   * 민족시인:큰 고정관념을 상징. 참고로 나는 신(神)을 고정관념의 대표선수로 노래한 적이 있음      이 시는 「디지털리즘」 1집에 수록된 첫 실험시다. 이 시에서 먼저 발견되는 것은 “-시작한다, -미끄러지기, -미끄러진다 , -신경이 떤다, -쏟아진다” 등의 현재형 종결어미가 보여주고 있는 어떤 사실(현상)의 순간적 변화다. 의식의 흐름이 아닌 의식의 깜박임(단절과 이어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 시계의 깜박이는 영상과 흡사하다. 여기엔 지나간 사실은 순간순간 지워지고 현재의 사실만 보인다. 모더니즘의 언어유희, 언어 이미지와는 다른 디지털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새로운 언어유희, 언어감각이다. “연속적 흐름”이라는 아날로그 세계의 개념을 넘어서 시간時間이 아닌 시각時刻이 지배하는 디지털 세계의 현상이 담겨있다. 첫 행, 에서는 “해맞이 첫 언어”의 신선한 감각적 이미지가, < 「미역국」 「미끄러졌다」는 탈脫의 이미지>에서는 탈관념 언어유희의 한 부분이 보인다. 한 언어로부터 연상되는 이미지가 해→꽃→춤으로 이어지고, 이'이미지 미끄러지기'는 제주 한란寒蘭→꽃→달→별→이슬방울→모어母語의 첫 언어 아- 아-로 맺어지는데, 어떤 의미나 관념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독자는 관념에서 해방되어 시의 언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시의 전개는 순수하게 시인의 내면적인 염사念寫의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디지털리즘 선언」 2집(2003,12,15)에서 시 한 편을 또 읽어보자.    비,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편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닥팔닥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남구 「부드러움의 단상」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디지털리즘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대상(사물) 그 자체에 의식의 촉수를 넣어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의식의 집중에 전념해야하고 의식의 힘으로 건저올린 사물(대상)의 본질을 순간적으로 순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이 때 대상에 대한 표현 방법을 염사念寫와 접사接寫로 나누고 있는데, 염사는 내적인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여 순간적으로 사진을 찍듯이 표현하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적인 대상을 순간적 감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는 방법이다. 그래서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사진을 찍는 듯한 언어표현의 방법을 현대과학의 용어인 디지털의 개념에 융합시켜 만들어 낸 “디지털리즘 시”라는 용어가 새로운 문학 언어로 성립된 것이다.  이 디지털리즘의 시론은 탈관념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 시론과는 다르다. 무의미시는 대상이 없이 언어를 유희적으로 사용하여 만들어낸 단순한 언어 이미지인데 반해 디지털리즘 시는 눈에 보이는 대상(또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상)을 어떻게 포착하여 표현하느냐 하는, 대상의 표현 방법에 관한 시론이다. 따라서 이 시론은 어떤 관념의 표현을 위해 사용되는 비유적인 이미지의 기법과도 다르다. 보통의 시들이 의식→대상→관념→ 비유적인 언어(이미지)→의미의 표현이라는 방식인데 반해 디지털리즘의 방법론은 의식→대상→이미지다. 이것을 순수 직관적 표현이라고 한다. 이 직관적 표현은 불교의 선시禪詩와도 차이가 있다. 선시는 하나의 분명한 관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리즘의 시에는 어떤 뚜렷한 의미(관념, 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의식→대상→이미지로서 최종적인 것은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독자의 판단과 해석에 의해 재창조되는 소재로 탄생한다. 그래서 디지털리즘 시는 독자에게 일정한 역할을 맡기는 시, 즉 독자참여의 시로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리즘의 시는 독자들에게 기존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경험과 맛을 느끼게 해준다. 디지털리즘의 시는 또 '사진 찍기의 기법'이라는 측면에서 시인에게 종합적인 사고와 예술적인 다양한 기법을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디지털리즘의 시가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처럼 TV화면에 영상화 될 수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디지털리즘은 현대적인 감각과 시대의 조류에 잘 어울리는 시론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진 찍기’의 기법이 안고 있는 가벼움과 차가움(비인간적인 면)은 문제로 남는다. 디지털리즘 시의 종결어미가 대부분 현재형 이라는 점이 그런 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의 복잡다기한 의식과 관념, 인간정서의 은은한 맛, 강렬한 감정 등을 표현하는 데에는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한 부분이 오히려 특징으로 남는다. 남과 다른 면이 있을 때 이것이 장점이 된다. 디지털리즘의 시운동은 현대와 미래사회에서 요구하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을 내포하고 있어서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리즘선언」3집(2004,9,11)에 실려 있는 박유라, 송시월, 이낙봉, 심언주, 김서은, 이인선, 류기봉, 김병휘, 박햇살, 고종목 등 동인들의 시편들이 풍기는 디지털리즘의 참신한 감각과 독특한 표현양식은 실험시의 범위를 넘어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한 유파流派를 형성할 수있음을 보여준다. 그 중 한 편의 작품을 읽어보자.    아침, 나무사이/은색 자전거가 싱싱하게 지나간다/파란 산소 초록을 흘리며 간다/바짝, 4차선 쪽으로 촘촘히 걸어나오는 햇빛/물오른 캔버스를 한획 한획 푸르게 덪칠하며 걸어온다/초고층 아파트에서 졸고 있던 낮달이/슬며시 횡단 보도를 건너/하늘 파란 울음 한 조각 옆구리에 끼고서/빠르게 차창 안으로 날아든다./-누군가 내 핸드폰에 보내온/초록 문자 멧세지/전철안이 푸릇푸릇하다./누-구-세-요-?//---김서은 전문     김서은의 은 어느 여름날 전철 안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풍경(사물)이다. 이 영상은 한 순간에 마음(염사)과 눈(접사)을 통과하면서 어떤 관념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하고 선명한 형태의 감각(디지털 감각)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싱그러운 향기까지 풍기면서.    다. 현실 참여와  생명 사랑의 생태시      생태시의 바탕에는 생명의 근본 사상이 깊이 간직되어 있다. 그래서 환경시, 녹색시 등 인간의 환경파괴를 고발하고 무분별한 인공人工과 비자연성非自然性, 공해에 저항하는 사회참여의 시에서 출발한 생태시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중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의 근본 세계를 포함하는 보다 상승된 세계를 지향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위한 환경보존만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삶을 보존하기 위한 생태계의 문제가 들어있다. 그래서 생태주의 시는 환경시보다 더 적극적으로 생명세계를 지향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시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환경시, 녹색시와 생태시의 차이점이다.   생태시라는 용어는 생태학生態學과 시의 합성어로 환경에 대한 생태학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송용구는 “자연환경과 생명체의 질적 변화를 생태학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 및 생명의식에 근거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고발하는 현대시의 한 장르”라고 생태시를 정의하고 있다. 그가 소개한 「직선들의 폭풍우 속에서-독일의 생태시 1950-1980」 (송용구 번역)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서 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 사화집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주제, 내용, 관심에서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21세기 한국의 생태시에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고 있다. 신진의 시집 「녹색엽서」(2002)도 산업화이후 파괴되고 훼손된 한국의 환경문제에 정면 대응하는 생태시로 평가 받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한 「시문학」의 생태주의・생명주의 시운동, 「문학사상」,「현대시학」,「녹색평론」 등의 생태시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생태시의 위치를 확고하게 정립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시정신 운동으로 한 단계 높이고 있다. 2000년 10월 호 「시문학」에 발표된 의 「환경선언문」은 인간과 예술과 환경의 인과관계를 지적하면서 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되고 황폐화 되는 환경과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정신의 황폐화와 정서의 궁핍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 인간과 자연을 똑같이 존중하는 생명사랑의 시정신을 천명闡明하고 있는데, 이 생명사랑의 시정신은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핵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생태시의 언어에도 문덕수의 사물시가 전제로 내세운 “사실, 생명, 현장”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초여름 아침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져 초록숲을 뒤흔든다// (황금꼬리를 낚아야겠다)//산수유 골진 잎사귀와 산벚꽃나무 팔랑팔랑 까불어대는 숨구멍 사이에다 초록그물을 친다 그물코에, 하루살이 작은 몸뚱이가 걸렸다//_ 작다고 얕보지마!// 이래뵈두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생이야/ 어디, 하찮고 떫은 생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그 누가/여름날 하루해가 너무 길다고 했던가?           -------- 이춘하 전문 (시문학, 2004, 8)     이춘하 시인의 는 파괴된 생태계의 문제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신음하며 죽어가는 인간의 운명을 저항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기존의 환경시, 생태시와는 전혀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언어 이미지나, 주장, 고발, 당위적인 관념 등에서 벗어나 생태계의 모습을 세밀히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독자들에게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하잘 것 없는 미물이지만 천일동안 물속에 잠겼다가 스물다섯번이나 허물을 벗은 후에 태어난 하루살이의 생. 그 하루살이를 포획하는 초록그물. 이런 생태계의 사슬 관계를 시인의 미시적인 눈이 자연스럽게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생명존중, 생명평등의 열린 마음이 포옹抱擁한 생명세계의 현장이다. 이 말은 하루살이의 항변만이 아닌 시인의 항변이다. 이 세상에는 가치 없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명존중 의식. 여기서 새로운 생태시 모습이 발견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 생태시의 미래를 예시해 주는 단서라고 한다면 지나친 예단일지도 모르지만.    라. 변화의 징후徵候를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    진헌성의 연작시(시문학, 2004,9)은 물성物性이 본래 가지고 있는 비의를 우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여 시화詩化하고 있다. 신神보다 앞선 물질계의 본성을 직관적인 감성과 과학적인 추리로 통찰하고 있다. 관념적인 면이 강하지만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우주적 신비세계를 추적하는 시인의 의지와 상상력이 뜨겁게 감지된다. 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물성의 본질을 이만큼 추적하고 드러낸 시는 아직까지 없었다고 생각된다. 문덕수의 '사물시'시론과 원초적인 면에서 조화調和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샤머니즘 계열의 대표적인 시인 박재릉은 시집「삭발하고 분바르고」(2002) 이후에도 신작시 특집 등을 통해 활발하게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 (시문학, 2004,9)에서, 아직도 시속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에너지는 여전하지만, 무속巫俗 세계의 뜨거운 인간적 욕망에서 벗어나는 탈속脫俗과 관조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을 넘어선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바다같이 출렁이는 생명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또 풍자와 역설로 관념의 속살을 드러내며 흥겨운 시의 판을 벌이고 있는 안수환의 시집 「하강시편」(2004,2)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감성과 관념 너머의 세계. 그리고 언어 놀이도 새로운 변화의 징후를 감지하게 한다.   이 밖에도 내적(정신적) 시선의 이동으로 시의 의미(상징)를 확장하고 놀라움을 주는 박찬일의「모자나무」, 독자들을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의 언어를 즐기게 하는 양준호의 「포크」, 디지털리즘의 언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내면찍기를 보여주고 있는 박유라의 「겨울 X-Ray」, 봄에 산에서 꽃이 피는 평범한 사실을 감각적이고 우주적인 발상의 이미지로 순간적인 언어자극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는 이종현의 「우주가 하혈하는 희한한 풍경」, 사물과 사물의 연결을 통한 비유 속에(허물어진 �달의 그림자, 쭈그러져 누운 단화 등) 자신의 꿈과 현실을 함축하고 이를 “다시 피는 들꽃”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송문헌의 「소리의 넋-자화상」, 대상(나무)과 시인의 관계가 일체가 되어서 시인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인식만이 감지되는 정유준의 시집「나무의 명상」(2004,6,30) 속에 들어 있는 시편들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개성적인 언어기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로 평가된다.      3. 맺는 글     이 글에서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융합하는 문덕수의 '사물시', 탈관념을 바탕으로 사실과 현상을 순간적인 생각의 속도에 실어 사진 찍듯 찍어서 보여주는 오진현의 '디지털리즘의 시론과 실험시,'사회참여의 저항성에서 출발하여'생명사랑으로 변화하는 생태시', 그 밖에 개성적인 언어 기법과 변화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시들을 대상으로 하여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변모를 모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1년간 상재된 시집을 열거하고 사족蛇足을 붙이는 일보다는 젊고 발랄한 정신을 뿜어내는 시인들의 참신한 의식과 언어를 추적하면서 새로움을 모색해보는 것이 더 즐겁고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법의 변화에는 생각의 변화가 수반隨伴되고 생각의 변화는 새로운 기법을 탄생시킨다. 이 둘의 관계는 인과因果를 만들면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사실・생명・ 현장을 전제로 하는 사물시, 디지털리즘 시, 생태시 등의 시들은 현대인들의 변화하는 생활과 사고思考와 환경과 행동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당위성當爲性과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사실(사물)의 본질과 직접 만나고 싶어 하는 감각과 순간적인 변화를 즐기는 현대인들의 생활과 사고와 감성과 행동양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물시와 디지털리즘의 시는 20세기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통합하는 21세기 새로운 현대시의 모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시는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내면의식의 서정시나 풍자나 역설, 사상의 감각화를 중시하는 주지시나 사상이나 메시지 전달을 강조하는 관념시 등 다양한 모습의 현대시들도 그 존재가치를 지속시키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시대적 흐름을 수용受容하는 새로운 시로 변모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의 한국 현대시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    디지털 적 관점과 특성으로 해석한 이상(李箱)의 시 /심상운 댓글:  조회:673  추천:0  2019-03-01
* 이 글은 에서 발췌한 글로서, 이상의 시에 대한 새로운 디지털 적 접근을 시도한 글입니다.     디지털 적 관점과 특성으로 해석한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 와(詩第十一號)                                                                                                                                                  심 상 운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해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 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 "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산산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5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상운 댓글:  조회:664  추천:0  2019-03-01
이 글은 월간 2006년 8월호에 발표한  글로서, 탈-관념에 대한 논쟁을 잠재우고 탈-관념의 이론을 새로 정립한 글입니다. 이 글의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아방가드르의 시론이 성립됩니다.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 상 운             1. 인지의 본질과 인지과정        관념의 개념을 정리하고 탈관념이라는 새로운 단어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지認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지의 본질 및 인식하는 정신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논의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기관인 근根(6근), 대상세계인 경境(6경), 식별작용인 식識(6식)의 세 범주로 분류하고, 그것을 인간의 존재문제로까지 확대․심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지認知를 인식 혹은 인식행위와 관련된 과정으로 본다. 인지는 인식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정을 포함하는데, 인식은 감정이나 의지와는 구별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는 감정과 의지를 제외한 지각•재인再認•상상•추론推論 등 지식을 구성하는 모든 의식적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지의 본질은 지각과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고 그 대상을 어떤 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으로 특징짓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의미형성의 전단계가 된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몸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은 감각기관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을 통과(감지)하는 6식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감지작용은 지각知覺의 초기과정이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을 6경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식識 중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은 다섯 감각기관을 총괄하고 모든 감각을 식별하는 식識이다. 이 의식意識에는 인식認識하는 것과 인식認識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契機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의식意識 속에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다섯 가지의 식識이 모두 장애를 일으켜도 이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에 의해서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식識의 작용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인지와 구별된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 행위를 하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이 6식과 함께 인지과정을 정리하면 ①감지(6식의 초기작용)→②인지(의식의 분별작용)→③의미형성(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그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순수인지는 ②항까지를 말한다.), ①감지(의식작용)→②직관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직관直觀(intuition)은 선禪의 핵심이 되는 불교의 독특한 사유방법이지만 서양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유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직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직관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들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와 규칙은 명백한 직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직관은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직관을 통해서 보는 상像을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다. 직관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있거나 상像의 배경 구실을 하는 표면만을 보면서도 마치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고 몇 분, 몇 날 또는 몇 년이 지난 후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직관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원래의 대상은 색깔, 모양, 외관상의 크기, 공간상의 위치, 세밀성 및 다른 많은 특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이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직관상의 성격•원인•의미에 대해 거의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직관상은 현대시에서 관념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꿈의 현상과는 다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담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 정리     국어사전에서 관념觀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다. 관념(觀念)[명사] 1.(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2.《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3. 심리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내용의 총칭. 철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형상의 총칭. 선악의 관념, 죽음에 대한 관념 같은 것.   1번 항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라는 풀이는 관념이 인식과 사유와 판단을 통해 “(어떤)의미”를 표시하는 인간의 의식내용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3번 항의 “대상을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 (선악의 관념, 죽음의 관념 따위)”에서도 관념은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관념은 대상에 대한 감지와 인지의 과정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라고 풀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그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는 관념이 아닌 사실인식(감각)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다. 현상에 대한 느낌,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은 그 속에 배경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등은  관념이다. 그 말 속에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어 중에서 가장 관념적인 말들은 속담이나 잠언이나 명언들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기호다. 따라서 언어를 형성하는 기의와 기표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조건만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내용을 모두 “관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다음은 “탈관념脫觀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3. 현대시에서의 관념과 탈관념의 문제     이상으로 인지의 본질과 과정, 관념과 탈관념에 대한 개념정리를 마치고,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 작품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관념과 탈관념의 철학적 심리학적 탐구는 계속 천착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 성과에 의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시에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에서 관념은 시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배경이 되어서 주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시인이 의도한 형이상의 세계로 유인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를 포함한 전통적 서정시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현대시에서 관념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관념이 없는 시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시인들은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고정관념들이 안고 있는 인생론이나 과거 지향적 향수, 누적되어 있는 때 묻은 지식은 거부의 대상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의식 속에 고약같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관념들을 지우고 직관直觀을 통해서 대상과 직접적인 내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로 탐색의 눈을 돌리기도 하고, 사물성의 이미지를 시의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언어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의 모습을 보고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의 출발점을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인 대상의 인지영역에 두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탈관념을 지향하는 시는 언어유희의 무의미 시, 초현실주의 시,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를 비롯하여 21세기 아방가르드의 맨 앞에 서 있는 디지털리즘의 시 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탈관념의 실험은 김춘수 시인이 시도한 무의미시의 원천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가 내세운 무의미시에서 언어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긍정과 부정의 충돌을 통한 의미 없애기, 정서나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언어의 사용, 순수한 단순 이미지의 창출 등 언어유희의 방법을 동원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피 흘린  그 사람은  가고 없다    가을 벽공에  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  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  흙으로 갔다    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  유리같이 차다    가버린 그를 위하여  돌의 볼에 볼을 대고  누가 울 것인가     -----김춘수 전문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전문    두 편 모두 김춘수 시인의 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를 시의 의미면에서 비교할 때 전혀 영역을 달리하는 시로 분류된다. 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의 시인데 반해 는 김춘수 시인 한 사람 외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의 시다. 그 이유는 의 내용 “가을 벽공에/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흙으로 갔다//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유리같이 차다”는 이미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지식들이 굳어져서 만들어낸 “죽음의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공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의 시의 내용,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개인 체험과 인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관념)도 형성되지 않는다. 또 이 시의 자연현상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사실) 외에 어떤 배경의미도 없다. 그래서 무의미의 시는 어떤 의미(관념의 틀)가 형성이 되기 이전의 인지단계의 시라고 판단된다. 이런 인지단계의 시는 관념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이나 사실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 수없는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유희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다. 유희는 예술의 전단계로서 자기만족에 충실한 예술정신의 원천이다. 의미(관념)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김춘수 시인은 순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언어예술의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렇게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탈관념의 무의미시는 1950년대 조향 시인의 시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를 읽어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              ------조향 일부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이 구절은 통사적인 면에서 문장구조가 불완전하다. 따라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미가 모호하다. 그리고 시행의 독특한 나열은 형태면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이질적인 사물의 대립적 배치로 언어충돌을 일으킨다. 바닷가 모래밭과 수화기受話器는 자연과 물질문명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연상하게 하고 수화기受話器는 여인의 허벅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룬다. 끝부분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 어떤 성적性的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관념(의미)의 틀로부터 해방된 언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그림으로 남는 시가 된 것이다. 다음은 문덕수 시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치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전문     이 시도 어떤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사고(사유)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이 시는 객관적인 눈으로 빨간 저녁노을이 반쯤 담긴 유리컵, 그 유리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위치, 한 사나이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 속으로 시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충실한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에서 사물성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행위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 시가 시도하고 있는 탈관념의 언어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서 있는 한 사나이,/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컵/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그 금 밖으로 밀려나/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는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탈관념과 디지털리즘 시를 주장하고 있는 오진현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 화  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  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  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  서 내 앞에 선다.             ----------오진현 전문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만약 하나의 시점으로만 해석되고 감상되는 시가 있다면 그 시는 가장 불행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보는 이의 지식과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탈관념을 주장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 속에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라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살다가 그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관의 장면을 견성見性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런 견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와 사물(대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고思考의 표현기호다. 그런데 그 기호가 역전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사물과 사고를 지배한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언어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 즉 고정관념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화자는 “나무”와 “꽃”이라는 언어의 기호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고思考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시는 그런  배경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탈관념의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어(기표․기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가 말하는 탈관념의 첫 걸음이 된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진현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접사)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지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전문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지각작용은 직관이다. 그래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이다. 그 직관상 속에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의식의 내면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어(염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준호 시인의 시에서도 탈관념의 한 장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  간다. 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  럼 설레고 간다.                     ----------------양준호 전문    양준호 시인은 고정된 사고思考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짓밟고 가는 어느 날 한 찰나의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의식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한 영상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만 그의 무의식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월 시인의 시 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의 전문    이 시는 오진현의 같이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낸 시다. “그려낸”이 아닌“찍어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눈에 들어 온 풍경이 언어의 구문 조직상 순차적 연결로 되어 있지만 “물웅덩이,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멧새 한 마리가”가 눈에 포착되는 순간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영상이 이렇게 질서화 된 것은 직관을 통한 의식의 작용이 선택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물리적인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일시점單一視點이 아닌 다시점多視點의 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마음)은 외부의 것을 기억의 그릇에 선택적으로 담는다. 그것을 마음의 눈이라고 한다. 이 선택적인 시각視角 즉 마음의 눈에 관해서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는 라는 수필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시는 송시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카메라가 되어서, 비 그친 후 물웅덩이에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지나가는 동動․정靜의 한 순간을 찍어낸 사진 즉 인식의 그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리즘이 주장하는 탈관념이며 직관을 통한 염사 또는 접사의 기법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의 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물과 직접 만남, 즉 인간과 사물(물에 비친 영상)과의 내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솔 시인의 을 읽어보자.    욕조 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  거품 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  거울 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  구석구석 비누거품을 벗겨낸다  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    텃밭에서 갓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  옥수수 수염색깔  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  청심환을 싸고있는 금박지  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 속에 넣는다  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 하기도  캔디맛인지, 색깔맛인지  욕조 가득 넘치는 맛과 색  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 솔 전문    이 시는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로 독자들의 감각을 끌어들인다. 그 빛과 맛은 시인이 감지하고 상상한 사물성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과 사물의 순수한 교감交感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인과 사물의 직접적인 내통과 상상은 독자들에게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자기소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관념(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무의미의 시(김춘수), 초현실주의의 시(조향, 양준호), 사물성의 감각과 이미지 중심의 사물시(문덕수, 이솔), 디지털리즘의 시(오진현, 송시월)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서 창작된 탈관념 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탈관념의 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 형성의 이전, 감지와 인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어떤 의미도 형성되기 이전의 감지와 인식의 단계는 관념시와 탈관념 시의 경계가 된다. 따라서 관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인간의 의식 활동 전체(생각)를 관념이라고 모호模糊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면(관념의 지나친 확대는 거대한 고정관념의 형성이다), 한국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는 가능하고 그런 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언어의 관념에 시달려온 우리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고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끝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하는 가장 기본적 관점觀點의 자세를 산문체로 풀어쓴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인다.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時時刻刻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데,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觀念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魂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交感하라,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原始記憶까지 모두 지울 수 없나,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이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形象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背景 없는 순수인식純粹認識,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                               --------심상운 전문   
4    현장과 시--- 디지털 시의 현장성/ 심 상 운 댓글:  조회:690  추천:0  2019-03-01
이 글은   2006,1월호 에 발표한 를  2008, 1,21 대폭 수정한 글임                      현장과 시                                 --- 디지털 시의 현장성                                                                                                                심 상 운(시인)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은 시의 예술적인 면에서 풍성한 암시와 반짝이는 상상의 언어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잃어버렸던 신화를 되돌려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중세의 허풍장이기사騎士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상상 속에 살아 있는 것은 그의 비현실적인 꿈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 때문이다. 모더니즘도 우리들의 시에 언어의 꿈을 담아주었기 때문에 현실주의자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다.  만약 시인들이 현실과 역사의 진보에만 매달려서 싸웠다면 시인들은 전사戰史에 기록될 수 있는 영웅은 되었을지 몰라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상상력이 고갈된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의 주권을 일제日帝에 침탈당한 국권상실시대에 일제에 직접 저항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1930년대 이육사李陸史의 시편들 속에서 발견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아름다운 만남이 명징하게 증명해주고 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絶頂」전문      이 시의 끝 구절 에서 강철+무지개가 던져주는 죽음을 초월하는 희망의 경이로운 상상과 암시는 지금도 생생한 모습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더니즘의 이미지, 즉물적卽物的 감각이 우리의 현대시에 수놓은 금싸라기 같은 수사의 미학을 귀중한 재산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이 시인과 독자들을 자연발생적인 시들의 고식적인 감상感傷과 영탄성詠嘆性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딱딱한 관념어의 굴레에서 시를 해방시켰다는 공적만이 아니라,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모더니즘의 긍정적인 생명력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한 개 벽돌이나 되겠다. 이 살덩이를 흙가루로 빻고 썩기 전에 이 피로 곱게 물들여 1천도의 시뻘건 불 속에서 다시 벽돌로 태어나고 싶다. 그리하여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여 백 층이나 삼백 층의 빌딩이 되거나 반월형半月形 의 만리장성이 되거나  원수의 포탄이 우박처럼 박혀도 끄덕도 않는........ 구름을 피우던 일은 그만두고 인제는 단단한 벽돌이나 되겠다. ----------문덕수의 「벽돌」전문      이 시에서 비유와 상징으로 쓰인 과 , 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또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 또 사물어事物語의 쓰임이 이 시에서 어떤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어디까지 자극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 시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80년대의 사나운 현실 속에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모더니즘 언어의 바른 자세와 당당함이다.  이 시의 앞부분 는 사회적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정신과 함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시 속에서 결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예술)과 리얼리즘(현실)의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더 이상 넓게 확산되지 못 했다.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들이 삶의 현장의 뒤쪽으로 물러서서 스스로 존재영역의 범위를 축소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몇 가지 면에서 더 검토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한국의 모더니즘 시가 안고 있는 현실회피와 현장성(사물)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일부 모더니즘의 시인들이 현실과 예술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언어의 건강한 긴장감과 조화를 외면하고, 현장에서 발생하는 생동하는 이미지나 환상과 상징을 잃어버린 편협偏狹한 언어 관념의 시로 변질되면서 모더니즘 시의 한계가 노정露呈된 것이다. 그것을 간단히 압축하면 모더니즘 시의 언어 관념주의는 모더니즘 시의 함정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과 꿈을 담은 시의 탄생을 기다리게 하는 원인이 되고, 병든 모더니즘(포스트 모더니즘)을 치유하고 개혁해야하는 당위성의 원천이 되었다.        주지적 모더니즘의 시를 ‘언어 관념의 시’라고 하는 것은 시인의 정서, 직관, 관찰, 순수한 상상력에 의해서 시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표출하기 위한 시인의 수사적인 언어작업에 의해서 시가 제작되기 때문이다. 이 수사적인 언어작업은 어떤 관념을 중심에 세우고 그것을 비유, 상징, 우유(allegory)로 포장하여 시인의 감정까지 관념이 만들어내는 의도성과 논리성으로 휘감아버린다. 이런 기법을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의 기법이라고 한다.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한국 현대 시인들은 이러한 시의 기법에 익숙하고 그것을 정통적인 시의 기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시인은 아주 엄밀하고 냉랭하게 계산된 논리적인 비유, 상징의 언어를 시의 중심에 넣고 감정까지도 객관화하여 독자들의 반응을 계산하면서 시를 제작한다.       난 해질 무렵 몽상가 소부르주아 시인 세상엔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의자, 작은 방, 개미 , 염소    피와 이슬로 된 술 난 현실 따윈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지만 난 현실을 모르는 국문과 교수 허리띠를 헐렁하게 매고 거울을 연구하는 교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감기엔 맥을 못 춥니다 30년 전부터 어디론지 떠나고 싶었지만 --------------이승훈 「오토바이」 전문       이승훈의 시는 비록 시인의 관념이 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지만 시인은 현장(현실)에서 벗어나서 시라는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인과 독자들이 갈구하는 낯 설음, 새로운 기법의 언어, 경쾌한 감각의 현대성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 등의 언어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존재의 탐구에만 전념하는 시인의 모습을 통해서 ‘또 다른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현실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환상적인 이미지에 대한 강한 집착이 모더니즘 시의 원형인 것처럼 독자들을 유인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  삶의 현장감이 생동하는 시의 실체는 사라지고 관념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 시인의 의식만 드러내게 된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결 어른이 된 소리로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김춘수 「처용단장 제1부의 1의 4」전문         김춘수의 시는 이승훈의 시와는 달리 실제의 현장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장의 사실성을 무화無化 또는 추상화抽象化시키는 것으로 시적 효과를 달성하려고 한다. 그 근거는 이 시에서 의 구절에서 찾아진다. 이 구절에서 시인은 실제의 바다 풍경을 비현실의 바다 풍경으로 전환시키고 있음을 알게 한다. (서해 갯벌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이다.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에서도 ‘죽은 물새’가 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 물새는 문맥상으로 보아 여름에 본 물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실제를 비실제로 변환시키는 실체적 대상의 무화 또는 추상화의 근거가 된다. 이 추상화의 그림은 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상식적인 의미의 세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인의 몸부림이 개척한 세계로 이해된다. “바다는 가라앉고”나 “물새는 죽은 다음에도 울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는 현실적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시적인 상상의 세계에서는 전혀 모순성이 없는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김춘수는 논리의 단절이라는 기법으로 일상의 의미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는 김춘수의 이런 기법을 그의 「시론」에서 ‘무의미의 심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시도한 ‘무의미’는 사실적인 현상現象을 추상적인 현상으로 상태를 전환시켜 ‘또 다른 세계의 의미’를 창조하려는 언어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대상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태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을 무화 또는 추상화하는 기법의 남상은 한국의 고전시古典詩에서 발견된다. 이규호(李圭虎 대구대학 인문교수)는「한국고전시학론」에서 그런 표현방법을 ‘정석가식鄭石歌式 표현’이라고 한다.의 작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제시하여 현실적 시간을 무화無化시키고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다.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므쇠로한쇼를디여다가 철수산鐵樹山에노호이다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그쇠철초鐵草를머거야 유덕하신님여아와지이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인 조작으로 무의미를 추구하던 김춘수는 논리 단절의 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절망하여 관념(의미)의 세계로 회귀하게 된 것 같다. 논리적인 ‘모순어법’만으로는 의미(대상)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기호성과 가상현실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의 세계는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졌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무의미의 언어실험’은 삶의 현장에 대한 이탈, 단순 이미지의 나열에 그치고 있어서 그가 목적으로 한 "관념이 장차 거기서 태어날, 관념의 제로 지대地帶"(事物詩와 觀念詩의 問題- 1981년 12월호 「시문학」)에 도달하지 못하고, 현대시의 현장에 난해성만 남겨놓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그의 무의미시는 한국 모더니즘 시에 대한 성찰의 근거가 되고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찾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극단적인 언어논리주의 시에 대한 성찰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는 현장 속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향기 나는 생명체를 모셔놓은 언어의 집이라는 시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한다. 그래서 오히려 모더니즘의 언어예술로서의 시보다 자연발생적인 서정시가 더 본래적인 시에 가깝게 인식되기도 한다.    비오는 날 묵밭에 소를 먹이고 있으면 어디서 깊은 소리가 들리네.    온 天地가 共同墓地같은데 오동나무만 저승의 길잡이처럼 서 있네.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도 푹 빠졌을까. 안개사이로 인업이 꼭 걸어올 것만 같네.    喪輿를 놓고 그렇게 울던 곳. 그 곳엔 이상한 불빛이 서려 있었네. -------이성교「비오는 날(1)」 전문      자연발생적인 서정은 시인의 언어조직만으로는 만들어내기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자연스럽고 순수한 서정의 시에는 이성(지성)보다 감성이 주류를 이루어서 때로는 원시적인 야성의 감성이 시의 생명력을 키워내는 원천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에서 관념과 비유, 상징을 떨쳐버리고 직관의 눈으로 직접 대상과 만나자는(의식→대상→이미지) 디지털 시 운동은 시의 현장성과 내재적인 생명성에 의해서 자연발생적인 서정시와 연결된다. 그것은 내면의식의 흐름 위에 자리한 디지털 시가 논리적인 관념의 시나 언어조작의 시보다 시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디지털 시는 현장과 상상의 예술적 언어융합을 시의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북한산 비가 오락가락, 찜통 더위 속 , 땀을 흘리고 확 터진 능 선에 올랐다. 앞에 서 있는 봉우리들 얇은 구름이 그림이다. 주저 앉아 상상하며 가슴쯤 산의 옷을 벗기면서, 이렇게 시에 빠져들고 있는데, 한 시인이한다. 나는 내색을  못하고 하고 이성理性을 말 했다. 그 때 지나가는 등산객이 했다. 멍! 모두 몽둥이로 한 대씩 맞은 기분이었다.    이 날 산행은 흰수염을 휘날리고 아슬히 바윗서리에 걸터앉은 내가 희죽이 웃으며, 리모콘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비밀한 얇은 비단을 밀어 올리고,                ---------오진현 「산행」 전문       오진현 「산행」은 때 묻은 감각과 지식을 뛰어 넘는 디지털 시대의 감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맑은 현장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관념도 미리 들어가 있지 않은 탈-관념의 빈 마음은 새로운 감각이 모여드는 맑은 못이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새로운 감각을 거부감 없이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 디지털 시대의 시인의 마음이다. 그 마음에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숨을 쉬고 지느러미를 펄떡이면서 움직이는 자신의 심리적 현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직관(초논리超論理, 비논리非論理)의 눈이 살아 있다. 따라서 그 현상을 언어 카메라로 찍어내는 디지털 감각(염사念寫, 접사接寫)의 이미지 시와 어떤 관념을 솟대같이 중심에 세워놓고 언어의 수사에 의해서 만들어 내는 모더니즘의 이미지 시와는 선명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한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밤비」전문       직관적인 염사의 시에서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런 에너지가 흐르는「밤비」는 시인 자신의 내면이 시의 현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적 의식의 흐름 속에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보이지 않는다. 직관의 눈이 의식의 현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할 뿐이다. 의식의 집중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자동기술과 구별된다. 그리고 디지털 감각은 시인이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  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 무장한 미 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엎은 40대의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 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흰 거품을 토하며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들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상운 전문     이 시에는 현실과 가상현실이 결합된 디지털시의 현장성(하이퍼 세계)이 들어 있다. 이 디지털 시의 현장은 시의 구조에서 다선구조를 형성한다. 다선구조는 ‘선택과 집중’ ‘설득’을 중시하는 단선구조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상상의 결합과 연결’, ‘현실과 가상현실의 세계’를 시 속에 구축한다. 이 시에서는 눈 덮인 12월의 숲 속에 들어가서 북소리를 듣고 있는 그와 벽에 붙은 여름바다 사진, 식탁에서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TV를 켜는 나, TV화면 속의 이라크 아이들과 달래강의 풍경 등의 이미지 결합이 그 원천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시의 시점도 평면적인 단일시점에서 입체적인 다시점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다선구조의 이미지는 시를 어떤 목적의식과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고 시에 입체성과 현장성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이 다선구조는 우리들의 일상이 단일시점이 아니고 다시점(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이라는 점에서 더 자연스럽게 총체적인 실존의 모습을 형성한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우리들의 삶이 논리성보다는 심리적인 이미지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시 속에 흐르는 내적 의식의 흐름이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이러한 이미지 결합의 디지털 시는 또 문명적 사고(객관적이며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와 대립되는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구체적 사고)에 맥이 닿는다. 문명이전의 야생의 사고는 구체적이고 주술적이고 감각적이다. 이는 다른 표현으로 신화적 사고라고 한다.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에게는 표상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고 레비-스트로스는 주장한다.” 이런 면을 중심에 두고 생각할 때, 디지털 시는 비인간적인 기계의 시가 아니라 언어적인 면에서 모더니즘의 이미지를 확장하고 현장의 긴장감을 내포한 매우 인간적인 직관과 감성에 의해서 탄생하는 탈관념의 새로운 감각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사실, 생명, 현장을 바탕으로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을 중시하는 21세기적인 감수성(디지털 감각)과 인간의 내면에 잠겨 있는 야성적 감각이 만나서 순수 직관의 이미지(탈관념, 시공간 초월), 즉 신화적인 언어 표상(image)으로 탄생되는 시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것은 문명적인 면에서 볼 때, 과학적 사고(문명)와 야생의 사고(문명이전)의 융합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과 언어의 수사修辭에 의해서 제작되는 정통적 모더니즘의 시에 비해서 시의 일반화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의식이 전제가 되고 이제까지 사용된 익숙해진 언어(비유, 상징)로부터 벗어나서 때 묻지 않은 원초적 현장언어와 디지털 감각(염사, 접사,가상현실)의 세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더니즘 시의 한계를 넘어서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신화 만들기”는 매우 어려운 도정이 예상된다. 그러나 21세기는 도처에서 새로운 변화(IT, DNA 등)의 구름을 계속 몰아오고 있어서 시인들도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3    나의 시 나의 방법-자작시 해설/심상운 댓글:  조회:741  추천:0  2019-03-01
 나의 시 나의 방법-자작시 해설 / 심상운       시의 언어는 고정관념과의 싸움에서 획득한 뜨겁고도 선연鮮姸한 빛깔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감각과 생명을 얻은 시가 탄생한다.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좋은 시들은 모두 이러한 언어로 표현된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황진이의 시조 이나 1930년대 미당 서정주의 등을 읽어보면 그 언어의 싱싱한 기운이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바로 그 시에 담긴 시어가 뿜어내는 힘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를 쓸 때 내가 제일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의 시어다.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소박한 생각도 시어의 신선한 감각과 생명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시인이면 누구나 하게 되는 정통적인 시의 일반론一般論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반론이 안고 있는 방법론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서 방향을 바꾸면 “비대상非對象, 무의미無意味, 탈관념脫觀念, 초현실超現實” 등 여러 가지 현대적 기법들과 만나게 되는데, 이 기법들은 일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시적 피안彼岸을 보여준다. 시작과정에서 그것들의 깊이를 헤아리고 응용하는 것은 시인의 정신과 시를 젊게 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어떤 방법에 들어가든 그 중심中心에 자리잡고 있는 샤먼의 우주목宇宙木 같은 시인의 개성적인 시어가 좋은 시를 탄생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많은 시인들이 그러했듯이 언어와 관념을 안고 뒹굴며 밤잠을 설치는 운명을 감수甘受하는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으로 만들어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시작과정에서 시의 이미지image를 중시하였다.  이미지는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의 의미를 싱싱하게 지속시켜주는 힘을 발휘하고,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의 투명한 보석이 되어 자율적自律的인 독립된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스스로 돌파하고 무한히 넓혀준다. 그런데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적인 정서의 적절한 조화調和와 현실의 문제였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생명, 그리움, 신적神的인 존재 등 ―을 중시하여도 현실의 문제들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의 문제들도 문제의 원형原形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현실문제에 대한 시들은 첫 시집 「고향산천故鄕山川」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는 또 시각적視覺的인 이미지와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시속에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리는 시속에서 의미를 감각화感覺化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시의 리듬을 돋구어주고 신명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한다. 다음에 소개하는 세 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두 번째 시집「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서 골라 본 것이다.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 전문     이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했는데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서 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시 전체의 이미지는 흰 색과 검은 색을 대조시켜 시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시에서 생명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개발開發이라는 인위人爲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컴컴한 잡목림雜木林속에서 벌어지는 생명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환희를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 라고 시의 앞뒤에 시청각視聽覺이 서로 한 데 어울린 동적인 이미지를 넣은 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환희의 감정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의도였다.     이 시는 단순한 환경문제에 관한 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명이 지향하는 근원적인 삶의 모양을 환상적幻想的인 언어의 그림으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윤강원尹江遠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월평月評에서 고 하였다. 그는 이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神을 등장 시켰다. 이 신은 생명의 원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자들은 원시적인 에니미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시류성時流性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의미와 미감美感을 가진 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로 또 과 을 들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검은 꿈의 바다를  떠도는 수부水夫  한밤중 달의 은사시빛  밧줄이 부서진 내 배의  동체를 끌고 간다.  나는 저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곁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항해의 끝이 되어도  설령 내가 영혼만으로  떠돈다 할지라도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나는 얼마나 황홀한 빛의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인가.  그 곳에는 악惡도 선善도,  오직 순수한 신神들의 소리만 살아  고생대古生代의 바다가 아직도 파도 친다.  아아, 나의 첫 항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차디찬 꿈의  빙산氷山을 지나 더 멀고 먼  푸른 바다로 떠나가야 한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그 모래밭까지  --전문     앞의 시 이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데 반해 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두 편의 시에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의 원적지原籍地를 찾는 의식의 흐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내 존재의 고향을 찾아 항해하는 수부水夫가 되었다.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황홀한 빛의 침대, 고생대古生代의 바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등은 내 의식을 객관화하여 드러내기 위한 은유의 언어이고 상상想像 속의 그림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선善과 악惡, 죽음과 무無의 세계를 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생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최진연崔進淵 시인은 이 시의 앞부분 를 인용하여 "검은 꿈의 바다"를 불교에서 말하는 고해苦海로 해석하고, “은 불자로서 그가 도달하기를 꿈꾸는 정토淨土라는 관념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라고 이 시의 내용을 불교의 구도 행위로 풀이하고 있다. 나는 그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어떤 고정된 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에서 의 의미를 절망적인 상황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꿈이든 꿈속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가득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관념적觀念的이고 사색적思索的인 내용이 중심이 되는 시다. 나는 벽돌같이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고 신선한 상상의 언어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는 관념어를 배제하고 구상어具象語를 사용했으며, 객관적인 이미지와 주관적인 정서를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시적인 감흥感興을 주기 위해서 "나"를 시의 화자로 삼아 독백조獨白調의 어조로 시를 구성하였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들을 아시는가    우리들이 산을 오르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들일 때  그 꽃들 만나고 가는 바람이  우리들 머리나 가슴을 향기롭게 스치고 지나가고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란 가슴을 드러내곤 하였지    높은 산 까마득한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릴 박고 피어 있는 꽃    햇볕 따뜻한 날이면  누군가 그 꽃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거 같다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을 해버린 모습으로  한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찾은 듯한 모습으로  속살까지도 빨간 꽃 옆에서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그 곳이 먼 옛날 떠나온 제집인 양 누워 있을 거 같다  ---- 전문      이 시는 어느 봄날 산행 중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갈무리한 시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은 실제의 꽃도 될 수 있지만 상상 속의 꽃으로도 확대된다. 저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유혹했던 절벽 위의 철쭉꽃으로,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피어있는 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산행山行을 할 때 우리들의 가슴을 더 향기롭게 해주는 것은 그 상상 속의 꽃들을 만나고 가는 바람의 향기라고 차원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햇볕 따스한 봄날 그 꽃 옆에 누군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상상의 세계를 넓혀 보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 속에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존재의 본래적本來的인 모습일 수도 있고,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속의 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상징象徵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시의 기능 중에서 이 세상의 허무虛無를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끼는 시가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시속의 빨간, 파란 등 색채언어色彩言語는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또 의미를 상승시키는 구실을 하면서 미적 감각과 서정성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을 짚어보면 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드는 존재의 암시와 발견, 존재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이다.                                 (월간 2003,년9월 호 발표)   
2    시의 자유의지와 자연 / 심 상 운 댓글:  조회:730  추천:0  2019-03-01
시의 자유의지와 자연 / 심 상 운                                                                        세상의 모든 시들은 자유를 꿈꾼다. 이미 태어난 시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들도 영혼을 가진 생명체들처럼 자유를 꿈꾸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꿈틀거린다. 존재의 형태로부터 또는 내용으로부터. 그래서 정형에서 벗어난 자유시(自由詩)가 태어났으며 이 자유시는 가장 보편적인 현대시로 인정받고 있다.   지식과 교양이 만들어 낸 시의 틀은 시의 미적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하지만, 시가 일부 교양인들에게 향유되고 시를 사회의 계층에 고정시키는 구실을 하게 하였다. 자유를 지향하는 시의 내적욕망은 그런 언어의 틀로부터 분출하여 언어의 운율형식을 파괴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형태의 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시의 욕구는 시의 심장 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그래서 현대시의 생명적인 움직임은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목표로 형이상학의 영역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절대 권력의 군주시대에는 군주의 권력을 칭송하고 복종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세속으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의 자유를 노래하고 향유한 시들이 있었다. 그 시들은 자연을 지향하면서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꿈꾸는 것으로 시의 자유공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시들은 동양사상의 원류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거점을 두고 들꽃처럼 피어나서 그 향기를 천 년의 세월 너머로 보내오고 있다. 그런 시들 가운데 중국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의 시는 질박한 여운을 풍긴다. 그의 오언고시(五言古詩)「귀전원거(歸田園居)」는 관계(官界)의 그물에서 벗어나 전원으로 돌아와서 자신이 농부가 되어서 사는 사실적인 생활을 읊고 있다. 種豆南山下(종두남산하) 草盛豆苗稀(초성두묘희) 侵晨理荒穢(침신리황예) 帶月荷鋤歸(대월하서귀) 道狹草木長(도협초목장) 夕露沾我衣(석로첨아의) 衣沾不足惜(의첨부족석) 但使願無違(단사원무위) 콩을 남산 아래 심었더니,  풀이 무성해 콩 묘종이 드물다. 이른 새벽 기심을 매어 밭을 손보고,  달빛을 몸에 받으며 괭이를 메고 돌아온다. 길은 좁은데 초목들은 자라서  저녁 이슬이 내 잠방이를 적시누나.  옷이야 젖더라도 아까울 것 없으나,  다만 농사나 잘 되기 바라는 것이 절실한 소원이다. -최인욱(崔仁旭) 역(譯) 『고문진보(古文眞寶)』에서  이 시속에서 달빛을 몸에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정경(情景)은 자연에 가까이 다가간 시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정신의 자유로움 즉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실적인 표현이다. 이런 자연으로의 귀환은 동양에서 시의 자유가 거처하는 공간이 되었다. 어떤 무거운 관념도 사상도 정치도 침범할 수 없는 그 자유 공간은 현대시에서도 매우 소중한 정신의 안식처를 제공한다. 현대인들의 공해에 찌든 심신도 그 속에 들어가면 화평해지고 사색의 세계가 열린다.    한국의 서정시인 김소월(金素月)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거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가를 그의 짧은 시 「엄마야 누나야」에 담고 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걍변 살자 인공적인 거대한 구조의 공해(公害)와 물질의 욕망 속에 빠져서 미래의 밝은 청사진을 펼치기 어려운 21세기에도 자연은 변함없이 인간의 정신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그리고 인간성의 회복은 물론 인간의 존재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21세기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정립(正立)해야 하는 시대이다. 상처입고 파괴된 자연이 언제까지 인간의 의지처(依支處)가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의 자유의지를 자연 속에서 꽃 피워온 오랜 전통을 이어받은 동북아 시인들의 역할이 기대되는 것이다.  2006년 사단법인 한국현대시인협회 발간『한중시집(韓中詩集)』1집 에서  
1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6) 댓글:  조회:1180  추천:0  2019-03-01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6)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뮤리엘 루카이서(Muriel Rukeyser)     대화     제게 말을 걸어 주세요. 제 손을 잡아 주      세요. 당신은 이젠 어떠세요?   전 이 말씀을 드리겠어요. 아무 것도 숨기지      않겠어요.   제가 세 살 때, 한 꼬마애가 토끼 이야기를      읽어 줬댔죠.   그 토끼는 이야기 가운데서 죽었는데 전 의      자 밑으로 기어들어 갔댔죠.   색  토끼였어요. 그때 모두들 울지 말라고 타      일러 줬구요.     제발 절 이해해 주세요. 전 행복      하지 못해요. 전 다 털어놓겠어요.   전 지금 음악같은 하늘을 인 하얀 돛대를      생각하고 있어요.   즐겁게 우는 고동같은, 살처럼 나는 새같      은 하늘을. 그리고 절 끌어안는 팔뚝을      생각하고 있어요.   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인 배      를 타며 살고 싶어했습니다.     제게 말을 걸어 주세요. 제 손을 잡아 주      세요. 당신은 이젠 어떠세요?   제가 아홉 살 때, 저는 과일마냥 감상적이      었죠.   기분이 변덕을 부렸구요. 그리고 홀로 된      아주머니는 을 연주했는데   전 칠을 칠한 나무벽에 고개를 숙이고 울었      었지요.   전 이제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전   제 인생의 모든 시간을 당신의 인생에 바짝      이어놓고 싶어요.     전 행복하지 못해요. 전 모두 털어놓겠어      요.   전 저녁에 구석에 놓인 등(燈)불을 좋아했댔      죠. 그리고 조용한 시(詩)도.   제 인생엔 두려움이 있었답니다. 이따금      전 생각해 보죠,   그이의 인생은 정말 무슨 비극(悲劇) 위에 놓여      져 있었던가 하고.     제 손을 잡아 주세요. 제 마음을 당신의      손 안에 꼭 쥐어 주세요. 당신은 이젠      어떠세요?   제가 열네 살 때, 전 자살(自殺)의 꿈들을 꾸었      었지요.   그리고 일몰(日沒)엔 가파른 창(窓)가에 서서 죽음      을 바랐었지요.   빛이 구름과 들판을 아름답게 녹이지 않      았던들,   빛이 그 날을 바뀌게 하지 않았던들, 전      뛰어 내렸을 거예요.   전 불행해요. 전 외로워요. 말을 좀 걸어      주세요.     전 모두 털어놓겠어요. 그이는 하나도 절 좋      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이는 햇빛이 부서지는 해안을, 자그만 파      도를 타는 예쁜 입술같은 거품을   좋아했었죠. 그이는 방향을 돌리는 갈매기      를 좋아했었죠.   그이는 명랑하게 말했답니다. 난 그대를 사랑      한다구요. 저를 이해해 주세요.     당신은 이젠 어떠세요? 우리가 서로 접      촉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이 나누어진 육신(肉身)이 맞잡게 될 수만      있다면   중국의 수수께끼처럼 엉키어--- 어제   저는 사람으로 들끓는 번잡한 거리에 서 있      었어요. 그리곤 아침은 빛났구요.   모두들 말없이 움직이고 있었답니다. 제      손을 잡아 주세요. 말씀 좀 해주세요.     (민재식 번역)       천공무한(天空無限)     가축 떼가 강기슭을 비켜 지나간다. 아      침을 하얗게 뒤흔들며,   어둠을 울음으로 깨뜨리면서. 우유차가      거리를 내닫는다.   차가운 우유병을 배달하면서. 대형 트럭      이 모퉁이를 질러간다.   씻기운 아스팔트 위에 바퀴를 잉잉거리면      서. 맑은 하늘이      트이고 이어 밝아 온다.              천공무한 시야무변(視野無邊)     부부는 배개 위에서 부시럭거린다. 아내는      다리를 움직여 얼굴을 창쪽으로 돌린      다.   아직도 잠결에 멍하니, 비치는 햇빛에 또      렷이 드러난 채. 남편은 검은 머리를   아내의 포근한 팔과 가슴 사이에 묻고 느      긋이 꿈결에 잠겨   옛말을 중얼거리며 영 깰 줄을 모른다. 부      부는 다시 조용해진다.               창가엔 가로등이 찰깍 꺼진다.     남편은 고개를 돌려 묻는다. 아내의      대답이다.        서북쪽에선 가벼운 강풍. 내일은 비.     거리는 길다. 쓰레기들이 즐비하고. 거지      들이   바나나 껍질과 종이곽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한다.   아내는 창으로 다가간다. 밝아오는 하늘      앞에 흐릿하고 거뭇하게,   무르익듯 완연히 임신 육개월의 배가 부      른 채.          서 있다. 공허한 하늘을 바라보면            서.     그러자 아내 남편은 말한다.   아내는 남편을 향해 두 손을 배 위에 얹      어 내밀며   말없이 그를 쳐다본다. 아내는 그의 소망      을 잘 간직하고 있구나.           해 뜨는 시각은 오전 여섯 시 삼십분.               해 지는 시간은---            풍속은 19에서 30으로 변하고.     남편은 웃는다.          기상대의 정보는 정오까지 맞음.            뉴욕과 보스톤 사이엔 단운(斷雲)이 뻗쳤          다.       남편은 천천히 말을 잇는다.         워싱턴 방면은 조각구름이 뼏쳐           가고 있다.     아내는 빙      그레 대답한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