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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현대시의 이해 / 심상운 댓글:  조회:932  추천:0  2019-03-02
현대시의 이해   『世界 戰後問題 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독일 편에서   이 글은 독문학교수 이동승 님이 1961년『世界 戰後問題 詩集』에 발표한 오래된 글이지만 내용의 첨단성과 강렬함이 21세기의 현대시의 이론을 능가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글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현대시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재발표한다. 현대시를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글 속의 한자는 단어의 느낌에서 생기는 미묘한 변화나 차이와 상관되어서 그대로 싣는다.- 심상운    시    알베트 아아놀드 숄 (Albert Arnold Scholl) 이동승(李東昇) 역          시는  내용이 끝나는데서 시작된다.    신비로운 장미는 피어난다 황금의 언어의 피안에서 성곽의 저 바깥에서 논의되는 형태의 피안에서 思考體系의 바깥에서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壁紙의 白馬 무늬에서 제단의 背面에서 生起하지 않는 것의 焦點에서,    母音으로 된 시는 分子模型 名詞로 된 교회의 창문 회상으로 된 거미줄 理想鄕에서 온 分光器 버려진 것으로 된 星座圖    太陽系 너머의 태양계    무상하기에 무상하지 않고 일시적이기에 결정적이며 시간적이기에 무시간적이고 단편적이기에 완전하며 무방비이기에 강력하며 모방할 수 있기에 반복할 수 없고 非論理的이기에 논리적이며 비현실적이기에 현실적이고 포착할 수 없기에 포착할 수 있다.    가까이 있기에 宇宙船으로도 도달할 수 없고 다치기 쉽기에 전술적, 전략적 무기로도 다칠 수 없다.    사람들은 시를 조그마한 사슬에 달아 내복 밑 발가벗은 피부 위에 달고 있다.           李東昇에서 발췌    (전략)   詩는 인간의 與件에 대한 地震計이어야 하고 시 이외의 아무것도 代置될 수 없는 생명의 有機體이어야 한다. 현대시인은 급격히 진척되어 가는 현대인의 의식의 범위의 확장을 命名해야하고 核分裂이라든지 宇宙旅行이 爐邊에 불꽃이나 家庭事들과 마찬가지로 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知性의 尖端에 서고 蓄積된 지식의 總動員이 요구된다.  현실을 한 개의 單一體로 잡으려면 통합이 요구된다. 內面世界와 外的世界가 시 속에서 同時에 反影되어야 한다. 이런 통합은 자주 瞬間의 竝列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分裂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을 하기 위해 언의의 최고도의 凝固가 요구된다. 이것은 일종의 瞬間을 수단으로 한 시간성의 극복을 뜻한다. 이런 과중한 부담 앞에 현대시인은 과거의 언어를 수단으로 造花를 만들어 낼 수 없게 됐고, 현대시인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고 새로운 언어의 表現可能性을 모색하고 있다. (중략) 적어도 1920년대 이후에 출생한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시란 이제는 사상의 표현도, 교훈적인 언어의 나열도, 재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調和의 추구도, 우주관, 인생관의 표현이나 탐색도 아니며, 감정의 솔직한 流露도, 자연의 謳歌나 形而上學的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魅惑의 曲藝를 전제로 하는 언어의 遊戱인 것이다. 시는 표현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서 사용되는 시어는 그가 지니는 역사성을 無視 내지는 輕視하고 所用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언어에 대한 狂躁曲을 형성한다. 언어는 현대회화에 있어서의 色彩나 현대음악에 있어서의 音과 같은 뜻을 갖게 된다. 詩中의 단어는 그 의미 내용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音響에다 더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오스카 뢰르케(Oscar Loerke)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의미의 전달이 아닌 이미지의 전달 밖에는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다만 자기자신을 통해서만 論證되는 旣存하는 모든 詩形態에 대한 항의가 되고 극히 自律的인 것이 된다.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내용에 先行하는 것이다.  현역작가이며 문예학자인 훨레러(Walter Hollerer)는 을 수단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시인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幻覺을 예리하게 오려내서 언어를 수단으로 모자이크한 벽처럼 한 편의 시를 組立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은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이 극단으로 나가면 순수상징에 의한 감각적 경험의 파괴에 도달한다. 이 수단으로 현대시는 時空의 한계를 극복해서 한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려고 하고 이른바 에까지 가려고 한다. 이 태도가 재래의 시와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현대시에는 언어에 대한 신앙이 그 근저에 놓여 있고 언어가 그 綜合的機能을 발휘하지 못할 때 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게오르게 (Stefan George)는 고 한 말이 이런 입장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純粹象徵으로서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 벌써 역사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차원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시는 몽타주의 방법을 통해 조립되는 것이다. 이른바 을 시인은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琢磨해서 꿰어 맞춤으로써 현대시는 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서 絶對的 自律性에 도달하려는 피나는 시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가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공간, 시를 위한 새로운 차원을 찾기 위한 도상에 오른 현대시는 과거와의 訣別을 선포했고, 소재의 선택에서도 과거의 것과 판이해서 古典的詩에서 있어서의 調和 대신에 不調和를, 정상적인 것에 대신해서 非正常的인 것을, 자연적인 것 대신에 人工的인 것을 표방하고, 否定을 통해 긍정에로 도달하고자 하고 언어의 幾何學的 조립을 통해 불협화를 구성하고자 하고, 종합 대신에 解剖를 통해 재래의 형태의 파괴를 기도하는 까닭에 현대시에서는 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현대시에서는 논리가 아닌 幻想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언어를 수단으로 한 暗示力의 최고의 驅使를 통해서 성립되는 상징을 매개로 旣存限界의 突破가 試圖되고 있다. 보다 큰 협화음은 不協和音까지도 그 자신 속에 내포하는 것이다. 현대시는 否定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려고 하고 不調和 너머의 조화를 추구한다. 현대시는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는 과거와의 斷絶의 시이며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며 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라고 命名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현대시가 성립되는 까닭에 현대시는 어떤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魔術師이며 자기 언어가 가져오는 이미지의 空間에서 절대적 고독과 대결하게 된다.     현대시는 릴케가 『두이노의 悲歌』를 쓸 때 겪었다고 하는 靈感의 폭풍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意識的인 知識의 동원을 요구한다. 현대시인에게서는 詩作과 自己觀察 및 批評의 과정이 竝存한다. 感性的인 孕胎를 전제로 하지 않고 바로 頭腦의 소산인 것이다. 골프리드 벤에서 자주 언어의 曲藝라는 말이 나오는데 현대시는 이 언어의 曲藝로써 성립된다고 했다. 이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라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와 內容은 분리할 수 없고 형태가 바로 내용임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는 독자의 理解可能與否에 아무런 介意도 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시가 성립하는가 하는 것을 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 했다. 이런 까닭에 시는 써지기 전에 시인에게 內在하고 創作過程은 이 내재하는 것을 언어라는 실마리를 통해 표현하는 과정이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 있어서 시의 각개의 단어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 할 수 없는 것이며 飜譯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또 그를 구성하는 각개의 단어의 槪念의 外延을 거의 無視 내지 輕視하는 까닭에 意味以前의 것이며 형태와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는 라고 極言하고 있다. 外界의 대상들은 시인의 창작의 욕구를 자극하는 誘引에 불과하고 시는 외계의 具象的 세계의 再現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자신 외의 아무 것도 眼中에 없다. 라고 벤은 말한다. 고 호프만슈탈도 일찍이 말했었다. 이리하여 알베트 아아놀드 숄(Albert Arnold Scholl)의 말을 빌리면, 현대시는 내용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고, 시는 존재하는 것이고 太陽系 너머의 太陽系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란 신앙도 희망도 안중에 없고 누구를 위한 시도 아니며 시인이 매혹되어 조립하는 언어에 의한 시라고 벤은 말하고 있다. 언어가 지니는 시간적 制約性의 무시를 통해 현대시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고 논리적 체계에 대한 체념으로서 절대적 자유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모두 限界의 擴張을 위한 피나는 기초공사이다.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한 것처럼 바로 현대시에서는 언어가 인 것이다. 라고 크로이더(Ernst Kreuder)는 말하고 있고 라고 로마노 구바르디니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論述은 戰後獨逸詩의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벤을 鼻祖로 하는 超現實派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후략)   
10    시뮬라크르 (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심상운 댓글:  조회:981  추천:0  2019-03-02
시뮬라크르 (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심 상 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플라톤(Platon)의 동굴비유를 예로 들면서  실체를 비추는 빛과 벽에 나타나는 실체의 그림자의 관계를 실재와 시뮬라크르 (simulacra)의 관계로 설명한다.  (플라톤의 동굴비유)  이데아의 빛→실체→(시뮬라시용)→ 그림자(시뮬라크르)   여기서 벽의 그림자는 시뮬라크르이고 실체에서 벽까지 가는 그림자의 이동형태를 시뮬라시옹이라고 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작용을 의미한다. 이 동굴비유에서 플라톤은 이데아(ideal, 영원한 실재의 세계)의 빛에 반사된 그림자(복제의 세계)만 보고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실재를 보는 것 같지만 인간의 눈에 비치는 현실세계는 실재의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복제된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는 이데아의 기준에서 가치가 없는 복제의 복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는 실재의 주위에서 감도는 신령스런 아우라(aura 靈氣)가 사라진 세계라는 것이다. 철학에서도 시뮬라크트(이미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의미한다.      장보드리야르는 이 책에서 플라톤과 달리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이를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현상을 근거로 하여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이론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시뮬라크르는 실재가 아닌 것이 더 실재 같이 행세를 하는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내세우면서 현대사회에서 이미지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1,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다. → 2, 이미지는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3, 이미지는 실재와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 4, 이미지는 스스로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된다.→5. 순수한 시뮬라크르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가 된다. 이것을 3단계로 요약하면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실재의 왜곡→이미지 자체로의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미지가 형성하는 실재의 왜곡과 그 자체의 독립성은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를 생산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 예로 성형수술을 들 수 있다. 성형수술은 실재의 왜곡을 위한 투자(소비)이지만 자기 얼굴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면에서는 생산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인들은 자기의 본래 얼굴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실재의 왜곡은 '이미지는 기호화 되고 모든 실재는 기호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남미 쿠바의 혁명가로 알려진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들 수 있다. 남미의 젊은이들이 그의 얼굴이 찍힌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그의 얼굴은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로 미화되어 있다. 그 미화된 이미지(기호)는 젊은이들에게 그의 잔혹성이나 무자비한 살인 행위를 감추는 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사진에 멋지게 찍힌 유명 인물들의 이미지는 실재의 인물이 아닌 상징화되고 스스로 독자성을 드러내는 변형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예는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의 네트워크 방송인 CNN이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에 대한 무차별 야간공습을 전자오락 이미지로 유통시킨 사건이다. 컴퓨터 게임의 이미지 같은 이 야간공습 장면에는 이라크인 들이 당한 전쟁의 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참혹함은 감춰지고 전쟁이 가상공간 속의 게임과 같은 이미지로만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가 이미지의 기호 속으로 사라지는 매우 충격적인 실재의 은폐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은 현대사회에서 언론 매체들이 대중들에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실재를 감추고 변형시킨 이미지를 보도하기도 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 예가 되는 것이 2003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바탕으로 감행된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이다. 침공 후 미국의 조사팀이 무력해진 이라크에 들어가서 대량살상무기의 실체를 조사하였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사건이 보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도가 사건을 만드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언론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보도의 내면에 숨어있는 실상(진실)을 통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재가 부정되고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에서 현대인들이 살고 있다는 ‘현대의 상황’을 깨우쳐주고 있다.
9    아이러니(irony)의 효과/심상운 댓글:  조회:1145  추천:0  2019-03-02
아이러니(irony)의 효과                                                                                        심 상 운   아이러니는 에이로네이아(eironeia)에서 파생된 말로 "은폐" 즉 감추는 것을 뜻 한다. 이 말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 희곡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허풍선이 알라존(alazōn)을 패배시키는 영리한 인물 에이론(eirō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를 세부적으로 분류하면 ‘언어 아이러니’와 ‘상황 아이러니’로 크게 나누어진다. 언어 아이러니는 수사적 아이러니, 반어적 아이러니, 풍자적 아이러니로 분류되고, 상황 아이러니는 극적 아이러니와 일반적 아이러니로 분류할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는 언어 아이러니 중 수사적 아이러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무지와 겸손을 가장한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아테네의 여러 사람과 토론할 때, 토론의 끝 부분에서 어리석은 듯한 말로 반박할 수 없는 의미의 질문을 함으로써 상대편이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드러내는데 성공한다. 이런 사례에 의해 아이러니에는 '아닌 척 하는', '모른 척 하는"이라는 의미가 더 붙었다고 한다.    반어적 아이러니를 반어법(反語法)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엉터리로 하거나,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오히려 "아주 잘 났어"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말 속에는 ‘잘 났다’는 의미와는 정반대가 되는 ‘못났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렇게 겉으로 나타나는 표현(외연)과 실제 속내의 의미(내포)가 정반대인 경우를 반어법이라고 한다.    이런 반어적 아이러니는 1920년대 한용운의「님의 침묵」의 끝 부분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송혁(宋赫)은『현대불교시의 이해』에서 이 구절을 “객관적인 현실로는 님은 갔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결코 보내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님은 없는 것이 아니라 님은 실제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의 해설을 인정하면서 시의 끝부분을 음미하면 이 시의 핵심어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의 노래가 절실하게 다가오고 의미가 확대되는 근원이 반어적 아이러니에 있음을 알게 된다.    김춘수는「시와 아이러니」에서 “소월의 시 「진달래 꽃」의 끝 행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 외연과 내포(감추어진 의도)의 긴장상태가 시적밀도를 빚어내고 있다. 이 대목이 이 시의 전체 내용에도 뉘앙스를 주고 있다.”라고 했다. 김춘수의 지적대로 이 끝 구절의 외연과 내포가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반어적 아이러니를 통해서 시적효과를 상승시키고 있다고 해석된다.   풍자적(諷刺的) 아이러니는 어떤 현상이나 사실에 대한 발언을 슬며시 돌려서 말하는 조소적인 표현. 직설적인 화법이 아닌 기지 넘치는 우회(迂廻)로 현상을 분해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만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의 의 일부 이 시에는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독자들에게 소시민적(小市民的)인 사고방식의 생활에 대한 반성을 유도하고 있다. 사회적인 강자들(땅주인, 구청직원)에게는 한 마디 저항의 말을 못하면서 약자인 이발쟁이나 야경꾼에게 돈 몇 푼에 반항하고 있는 화자 자신의 옹졸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진술이 풍자시의 아이러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는 언어보다는 작품의 구조에서 드러나는 아이러니이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희곡「아가멤논 Agamemnon」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의 수의(壽衣)가 될 자줏빛 융단 위를 걸어가는 주인공 아가멤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장면은 등장인물은 알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을 관객들이 알고 있을 때 생기는 극적구조의 아이러니이다. 이런 극적 아이러니는 미국의 소설가 O. 헨리의 단편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기치 않은 결말로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살리기 위한 무명화가의 숭고한 예술혼이 아름답게 그려진「마지막 잎새」의 구성은 극적 아이러니의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 아이러니에는 평범한 독자들의 눈에는 잘 발견되지 않는 진리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숨은 의도가 들어있다. 그 예가 김소월의 「금잔디」에서 발견되는 아이러니이다.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深深) 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봄이 왔네, 봄빛이 왔네. 버드나무 끝에도 실가지에. 봄빛이 왔네, 봄날이 왔네. 심심산천에도 금잔디에 -김소월 「금잔디」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가신님과 봄이 되어 소생하는 금잔디를 대립시킴으로써 가신님의 ‘부활의 불가능’을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시인의 의도성이 보이지 않지만 부활의 불가능은 생동하는 봄의 이미지 속에 숨어서 가신님에 대한 그리움을 더 절실하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의 진실을 표출하고 있다. 그래서 숨어있는 것과 겉으로 드러난 것의 대립적 관계로 구성된 이 시의 구조는 진리나 진실을 드러내는 일반적 아이러니로 인식된다. 이 대립적 구조 속에는 독자들의 사고력을 확장시키는 에너지가 들어있다.    영국 낭만주의 시대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는 워즈워드의 시「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에도 대립적인 구조의 일반적 아이러니가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 있으랴: 그냥 지나쳐가는 자의 영혼은 무디어라 이처럼 감동적인 장관을 두고: 이 도시는 지금 옷을 입고 있구나 아침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드러내놓고, 선박, 탑, 원형지붕, 극장, 교회들이 누워 있다 들판과 하늘을 향해,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태양은 일찍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첫 햇살로, 골짜기, 바위 혹은 언덕을 비춘 적 없고;  나는 이같이 깊은 정적을 보지도 느낀 적도 없나니! 강물은 제멋에 유유히 흘러간다; 오 하나님! 집들마저 잠든 듯 하네요; 그리고 저 힘찬 심장은 고요히 누워 있고! ----- 워즈워드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전문 , 김철교 번역 이 시의 화자(워즈워드)는 이른 아침 템즈 강의 웨스트민스트 다리 위에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의 도시를 보고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낭만적인 영탄의 언어를 터뜨리고 있다. 그 영탄의 언어 속에는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에 대한 예찬이 들어 있다. 그래서 C. 브룩스는 해설에서 “이 시는 아이러니를 내장하고 있다”고 했다. 깨어나서 활발하게 북적대는 도시가 실은 가장 죽은 상태이고 오히려 죽은 듯 고요한 순간의 도시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C. 브룩스의 해설을 받아들일 때 이 시는 문명비판의 시로 읽힌다. 그리고 이 시의 아이러니는 문명(죽음)과 자연(삶)의 대립적인 구조가 들어있는 진실추구의 일반적 아이러니로 인식된다.   아이러니와 유사성이 있는 역설(paradox)은 넓은 의미의 반어적 아이러니에 포함된다. 모순구조의 언어는 표면적인 부조리한 진술 속에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강렬한 인상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역설의 수사법이다. 역설은 언어적 역설과 구조적 역설로 나누어진다. 언어적 역설은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의 봄’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 ‘어둠의 빛’ 등 수사의 언어로 표현되는 역설이다. 이 역설의 수사법은 외연의 표현이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언어를 보인다는 점에서, 겉과 속의 의미가 정반대이지만 언어표현에서는 모순구조가 없는  반어법과 차이가 있다. 구조적 역설은 작품 내부의 구조가 형성하는 역설이다. 대립적인 사건이나 사물을 영화의 몽타주 방식으로 결합시켜서 거기서 발생하는 이미지가 삶의 진실과 연결될 때 구조적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일반적인 서술형식에서 벗어난 극적인 연출의 역설법이라고 할 수 있다.  
8    선(禪)과 시 (詩)_ 낯설게 하기를 중심으로/심상운 댓글:  조회:921  추천:0  2019-03-02
선(禪)과 시(詩) -낯설게 하기를 중심으로   심 상 운                                                                                                                                                                                     현대시에서 ‘낯설게 하기’는 일상적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인식에 충격을 가하고 시의 표현을 새롭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1916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어연구회와 모스크바 언어학회에서 평범한 언어를 예술적 언어로 변모시키기 위한 기법으로 제시한 형식주의(Formalism)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인식능력을 신장하여 철학적 형이상학적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시인은 선승(禪僧) 같은 투명한 눈으로 대상을 응시하고 새로운 관점과 감성의 언어로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잠시 그는 땅에서 솟구쳐 오른 암흑의 빈 탑이었다. 날개를 잃은 학이었다. 어느 날 그는 발 밑을 들석들석하더니 죽죽 몸을 펴 뻗었다.   불룩하다간 꺼지고 또 불룩하는 잉태와 유산流産의 흥분에서 조용히 육신肉身의 붕괴를 다스렸다     -----------문덕수 1,2연 말 오양간 냄새가 나는 이에스 크리스도의 머리에서 빛난 기적처럼 너는 전쟁의 계단을 포복하는 군단의 불면이 겹싸여 탄피와 같이 굳어진 나의 눈시울 속에 살았다. 어느 날 아침 장미와 인간을 위한 하늘처럼 별처럼 노오랗게 새파랗고 또 무슨 여러 가지 샛말간 색깔의 과실들과,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이는 들과 바다처럼 부드러운 나래처럼 음악이여 ------------------전봉건 1,2연 두 편의 인용시는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1950년대 전후의식(戰後意識)의 시다. 문덕수(文德守)의「항아리 1」은 항아리를 ‘암흑의 빈 탑’ ‘날개를 잃은 학’으로 비유하여 일상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이미지는 전후(戰後)의 폐허 속에서 생존하며 희망을 열어가는 시인자신의 존재성과 연결되면서 항아리를 ‘잉태와 유산’이란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갈망의 그림자가 내면적으로 시의 이미지와 결합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전봉건(全鳳建)의「음악」은 전쟁 속에서도 잃지 않은 시인의 내면의식의 세계를 이질감을 주는 언어로 표현하면서 ‘전쟁과 음악’이라는 대립적 상황을 통하여 인간이 지향하여야 할 것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시의 공통점은 시인의 시선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과 ‘일상성과 타성’에서 벗어난 시인의 사유와 이미지가 시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선(禪)의 첫걸음도 일상성과 타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선에서는 본질적으로 진리를 표현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승들은 입을 여는 순간에 진리는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불입문자(不立文字)라고 했으며, 진리를 전하는 방법으로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깨달아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라는 말을 통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진리를 전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묵언(黙言)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실천한다. 그러나 선에서도 깨우침을 전하는 방법으로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언어를 떠난 방법이 너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선승들이 전하는 오도송(悟道頌)은 고도의 언어로 표현된 선시(禪詩)가 된다.  달빛 비친 강산 고요한데  내 스스로 웃으며 터뜨리는 한 소리에  하늘과 땅이 놀란다 孤輪彼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에서     이 시는 서산대사의 오도송으로 알려져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터뜨리는 사자후(獅子吼)가 들리는 듯하다. 이 시에서 달을 고륜(孤輪)이라고 ‘무한 허공에 떠 있는 외로운 바퀴’로 표현하고 있는 데, 이는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와 상통하는 면이 보인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불 속에 옮겨다 심었다 새봄의 비를 가져오지 않아도  난만하게 핀 붉은 꽃. 一樹無影木, 移就火中栽 不假三春雨, 紅花爛漫開1)  - 소요 태능(逍遙 太能,)의 선시에서    서산대사의 제자 소요 태능(逍遙 太能,)의 선시는 일반적인 상식과 언어의 경계를 초월하는 언어감각이 현대의 초현실주의 시외 비견(比肩)된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불 속에 옮겨 심었다”는 이 시에는 태능 자신의 깨달음의 경계와 불법의 묘지(妙旨)가 숨어있는 듯하다.    다음 글은 김석 시인의「조향의 초현실주 문학의 이론과 기법」에서 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글이다. 이 글은 선의 언어와 초현실주의 시(언어유희)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생각하게 한다. 선의 언어 속에는 ‘깨달음의 자명종’이 숨겨있는 데 반해서 언어유희에는 ‘논리적 사고로부터의 해방’이 들어있다. 둘의 공통점은 상투적인 언어로부터의 도피(逃避)이다.  마치 눈가림한 사람이 숲 속에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 부딪히는 것처럼, 指導도 방향도 없이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에로, 의식이 흐르는 대로 생각을 맡겨두고 쓰는 일이다. 동양식으로는 東問西答式 시의 놀이이다. 이런 면에서 선시나 偈頌과 맥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는 억눌림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한 ‘정신적 사냥’으로 동문서답식 시의 기교인데 반하여 동양은 법통을 잇기 위한 ‘진리파지’의 큰 주제 아래 그 한 방법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래 보기의 시는 조향 선생님이 서울의 某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실험했던 단어와 단어 사이, 시행과 시행 사이에 의식의 단층을 만들었던 합작 시로 『아시체』의 한 시 놀이다.  B__태양을 향한 한 마리 山羊의 갈망은?  J__프로이드가 씹어 먹는 날개란 말야,  K__그 사람은 언제 떠났지?  S__철도 연변의 들국화야,  J__여름 얼굴 위에 흐르는 지렁이는?  K__고양이 생일이었어,  B__연못 옆에 있는 것은 뭐지?  J__전등 속에 든 베레모 같은데,(이하 생략)  1950년대의 시인 조향(趙鄕)은 아무런 연관성이 전혀 없는, 동떨어진 사건들이 서슴없이 한 자리에 모여서 현실로부터 해방과 일탈을 추구하는 언어행위를 데뻬이즈망(depaysement) 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질적인 언어(사건)들 사이에서 발생되는 ‘차이(差異)의 작용’을 새로운 창조적인 시의 미학으로 상승시키려고 한 초현실주의의 시의 기법이다.    선시와는 다르지만 선문답(禪問答)도 ‘일상적인 타성의 인식을 깨뜨리는 언어’를 도구로 삼고 있다.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라는 말로 유명한 운문(雲門) 스님에게 하루는 제자가 물었다. “무엇이 ‘참나’입니까?” 운문스님이 대답했다.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는 자이지” 어느 날 동산(洞山) 스님에게 제자가 질문을 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동산스님이 대답했다.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 선문답에는 제자에게 깨우침을 주려는 스승의 마음이 들어있다. 그러나 선은 지식의 전수 같은 가르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정신의 경지이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고 가리키는 것’으로 방법을 삼는다. 그래서 제자가 스스로 체험을 통해서 마음 속 자명종의 울림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선문답에는 설명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설명의 생략’은 선문답의 답을 화두(話頭)로 만든다. 제자들은 선정(禪定)을 통해서 그 화두의 의미를 탐구하고 해결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설명의 생략’은 시의 구조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설명이 들어가는 순간에 시는 사라지고 산문(散文)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문답이 퍼포먼스(performance) 같은 행위와 결합될 때 그 구조가 다양해지고 상상력의 폭이 확장된다.    조주(趙州) 스님은 어느 날 스승 남전(南泉)에게서 제자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끊어버리기 위해 고양이를 칼로 두 동강이 낸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다 들은 뒤 아무 대꾸도 않고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남전이 말했다. “그때 만일 자네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려주었을 텐데”. -오경웅(吳經熊) 지음 유시화 옮김 『禪의 황금시대』에서 발췌정리    신발을 머리에 이고 가는 조주의 행동은 몇 가지의 의미를 유추하게 한다. 구도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뒤바뀐 가치관과 인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신발을 머리 위에 이고 걸어가는 것은 그들의 시시비비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행위라는 것. 진리에는 머리와 발의 경계가 없다는 것.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부하면 우스꽝스런 행동으로 스승의 마음을 풀어드리려고 했다는 것 등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일상에서의 일탈(逸脫)이라는 유희성(遊戱性)과도 연결된다. 조주스님의 행위는 현대시의 퍼포먼스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21세기 현대시의 현장에서 시인들은 단순한 시낭송에서 탈피하여 시에 음악과 영상, 시인의 연기를 부가하여 공연무대에서 언어문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운동을 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는『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에서 그가 인식한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詩)는 순간의 형이상학이다. 하나의 짤막한 시편(詩篇) 속에서 시는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과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을 즉석에서 삶으로써만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때서야 시는 가장 산만하고 가장 이완된 존재가 그의 통일을 획득하는 근원적 동시성(同時性)의 원칙이 된다. 다른 모든 형이상학적 경험들은 끝없는 서론(緖論)으로 준비되는 것인 데 비하여 시는 소개말과 원칙과 방법론과 증거 따위를 거부한다. 시는 의혹을 거부한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떤 침묵의 서두(序頭) 정도이다. 우선 시는 속이 텅 빈 말을 두드리면서, 독자의 영혼 속에 사고(思考)나 중얼거림의 어떤 계속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르는 산문(散文)과 서투른 멜로디를 침묵시킨다. 그러고 나서 진공(眞空)의 울림을 거쳐서 시는 자기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선도 순간의 언어로 표현된다. 대상에 대한 직관적인 총체적 인식이 한 순간에 터져 나온 것이 선의 언어이다. 직관적이고 총체적 인식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시와 선은 같다. 그리고 일상에 대한 전도(顚倒)와 비약(飛躍)이라는 점에서도 상통한다. 따라서 시가 ‘대상에 대한 해방(解放)’을 추구한다면 선은 구도자 자신의 ‘해탈(解脫)’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라는 말이 기존의 관념이나 인식방법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비해 해탈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유무(有無)를 초월하는 제 3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에서 “진공(眞空)의 울림”은 미당(未堂) 서정주(徐定柱)의 시「동천(冬 天)」같이 일상이나 기존관념으로부터의 해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초월하는 시의 궁극을 표현한 말로 인식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의「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는 실체와 실질적 관계가 없는 시인의 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언어’다. 이런 언어를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erd  inand de Saussure)의『일반 언어학 강의』를 근거로 ‘기호’라고도 한다. 이 시속에는 미당이 일생동안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한 ‘사랑의 진실’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 진실은 선의 진리와 상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시는 조주 스님이 신발을 머리에 이고 걸어 간 행위에 대입할 수 있을까? 현대시의 낯설게 하기와 선의 관계를 통해서 그 해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7    나의 시를 말한다/심상운 댓글:  조회:791  추천:0  2019-03-02
나의 시를 말한다   심 상 운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현실에서 해방된 대상의 이미지 시 나는 이 시에서 하나의 운동 이미지 속에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시적 현실’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시를 언어예술로 인식하고 새로운 창조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가상세계에 대한 무한긍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는 현실에서 해방된 대상의 이미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시의 대상은 아무런 현실적 의미가 없는 순수성을 가진다. 그 순수성은 무한한 상상과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세계를 열어 주는 바탕이 된다.  독자들은 이 시에서 푸른, 빨간, 하얀, 노란 등 오토바이 앞에 붙은 색채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이 시에서는 ‘의미’보다 이미지라는 시각적(예술적) 영역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 시는 ‘보여주는 시’ ‘연출된 시’ ‘또는 ’사이버성의 이미지의 시’ 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의미는 진리로 들어가는 문틈이 되지만, 니체가「힘에의 의지」에서 말한 것같이 ‘예술은 진리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발명의 영역이 되고 진리는 발견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오토바이’가 일상적인, 합리적인 목적에서 해방된 초현실주의 시의 오브제(objet)와 같은 예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런 오브제를 통한 ‘자유연상’의 방임된 시상은 시의 영역을 확장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이 시의 첫 연 바그다드는 현실과 연결되지만, 둘째 연부터는 점층적으로 현실에서 이탈하는 ‘현실이탈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끝 연 “그때 그는 손에서 리모컨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다”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방임상태의 표현이 된다. 이 방임상태는 현실에서의 해방(자유정신)이라는 관점에서 21세기 현대시에서 새로운 감성적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새로운 감성 영역의 시인들은 소크라테스적인 이지적 경향의 시인들과는 대조적인 위치에서 전위적인 시 창작을 하고 있다.   
6    나의 시 쓰기 여정-자작시 해설/심상운 댓글:  조회:913  추천:0  2019-03-02
나의 시 쓰기 여정-자작시 해설    현실문제에서 존재의 의미 찾기와 순수서정 그리고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                          ------2015년 4월 3일에서 발표                                                                                                                                                심 상 운 (시인, 문학평론가)       내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21살까지 살았다. 내가 태어난 낙원동 그 터에는 지금 춘천관광호텔이 서있다. 1950년대의 춘천은 6, 25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시장을 중심으로 복구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생산 시설이 없는 군사적인 소비도시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춘천의 인구는 2만을 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소양강(북한강)이 휘감고 흐르는 봉의산, 삼악산, 대룡산의 빼어난 자연 풍광은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소년의 가슴에 안겨주었다. 어린 시절 헤엄치고 물고기 잡으며 놀던 공지천(곰짓내), 대밭이의 물소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는 문학보다는 미술에 더 마음이 끌렸고 화가(畵家)를 동경하였다. 그래서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1958년 춘고(春高)에서는 소풍 갈 때 스케치북을 가지고 가서 풍경화를 그리게 했다. 미술 시간에도 도회지의 거리에 나가서 자유롭게 스케치를 하게하고 그때 그린 그림들을 뽑아서 교내에 전시했다. 내 그림도 뽑혀서 몇 달 동안 교실 벽에 붙었던 기억이 있다. 그림그리기와 함께 독서도 내 마음을 붙들었다. 라디오도 TV도 없던 시절, 문학에 대한 동경에서가 아니라 그냥 재미에 빠져서 독서삼매에 몰입했다. 책은 주로 헌 책방에서 밑돈을 깔아 놓고 빌려보았다. 이때 헤르만헷세, 톨스토이 등 외국의 유명작가들을 만났으며, 이광수, 방인근, 나도향, 김동인, 김말봉 등의 소설도 남포등을 밝히고 밤을 새워 가며 읽었다. 이런 폭풍 같은 독서가 훗날 내 문학적 토대를 이루었으며 문학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시는 대학에 들어와서 쓰게 되었는데, 내 시의 길잡이는 박목월의 『보라빛 소묘』, 유치환의 『구름에 그린다』, 장만영의 『이정표』 등 당시에 발간된 시인들의 자작시 해설집이었다. 나는 장만영의 『이정표』에 매혹되었다. 시를 언어의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그의 시작 방법이 그림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문리대 학회지 등에 시를 발표하던 나는 1963년 대학 4학년 때 에서 당선이 되어 학생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조병화 시인이 당선시를 2편 뽑았는데, 함께 당선된 학생은 영문과 4학년 노향림(시인)이었다.    1964년 대학 졸업 후, 10년간은 문학의 공백기가 되었다. 군대, 취직, 직장생활 등 시 창작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공백기를 지나 1973년 11월 월간 에 조병화 시인의 첫 번째 추천을 받고, 1974년 2월에 완료추천을 받아서 등단하였다. 완료 추천인은 문덕수 시인이었다. 완료추천작 「목공환상(木工幻想)」은 관념을 배제한 사물성의 이미지 감각의 시로서 평가를 받았다.    1981년에 첫 시집『고향산천』을 상재하였는데, 이 시집에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분단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의식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발간되자마자 5공 정권에 의해 이념서적으로 분류되어 판금(販禁)이 되고, 금서(禁書)가 되었다. 당시 금서가 된 시집은 양성우의『겨울공화국』김지하의『타는 목마름으로』조태일의『고여 있는 시와 움직이는 시』와 내 시집『고향산천』이었다. 그 후 1985년 6월 8일 해금 조치가 있을 때까지 나는 노량진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의 요시찰인이 되었다. 그들은 수시로 학교에 들려 나의 언행을 점검하고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교장은 시와 관계가 먼 법과 출신이지만『고향산천』을 탐독하였고, 내 시에 감동했다며 중국음식점에서 조촐하게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이 시집으로 인해 발행처인 와 발행인 김규화 시인은 문화공보부로부터 압박을 당했고, 그로 인해 나는 정신적인 고통과 불길한 위험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발간 후 서평이나 평론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1981년 12월 22일자 분야별 평론가 5인이 선정한 의 후보로 올라가서 문학적인 면에서는 뜻밖의 보람을 남겼다. 그리고 에서 발간한 1995년 봄『펜 문학』의 특집 에서 박철희 교수(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시의 경향을 거론하면서 “정치적인 폭력, 빈부의 격차, 계층의 갈등, 공동체 파괴와 이에 따르는 인간관계의 왜곡이 이 시대 시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소재로 나타났다.”고 했고, 시인으로는 “김지하, 고은, 신경림, 이성부, 황동규, 김명수, 강은교, 조태일, 양성우, 심상운, 이시영, 정희성 등의 이 시기의 시를 먼저 거론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중요한 한국 현대시사(詩史)의 정리 즉 사초(史草)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은『고향산천』이 남긴 귀중한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에는 31편의 연작시 있다. 그 중 2편을 소개한다.    고향산천 . 12 -싸리꽃    이른 여름 강원도 산비탈엔 살내음 환한 싸리꽃    스물 두 살의 나는 小銃을 버리고 한 아름 싸리꽃과 함께 땅바닥에 누웠다.    여름은 온통 치마폭 가득 푸른 불길    나는 방금 불속에서 새로 태어난 청록색 풀잎이었다.    「고향산천 . 12-싸리꽃」은 81년 봄 시문학 출신들의 모임 사화집에 발표한 작품이다. 나는 이 시의 시상을 어느 해 여름 강원도 원통 골 산비탈에서 무더기로 피어 있는 싸리 꽃 속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소총을 들고 포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앞에 발그레한 빛과 향기를 뿜으며 피어있는 싸리 꽃. 나는 무릎이 벗겨져 뻘겋게 번지는 혈흔의 아픔도 잊고 싸리 꽃 무더기 속으로 내 온 몸을 던졌다. 나는 이 시에서 역사 속의 나와 자연본래의 나를 결합시켜 새로운 생명적 창조의 나로 그려 보았다. 스물 두 살의 나는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다. 그런 내가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소총(증오심, 적대감)을 버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고향산천에 환히 핀 싸리꽃(순수한 사랑)을 가슴으로 껴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원형적(原形的)인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는 정신적으로 분단(分斷)의 역사를 극복한 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산천 . 18 -어느 소년병의 잠    그는 이제 눈 감고 풀잎에 내리는 흰 눈을 보고 있다. 새소리도 마침내 맑은 이슬로 내리고 질경이 뿌리에 닿는 볕이 손등의 눈을 녹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소총 멜방에 끌려 청솔 돋는 마을을 떠나갔을 뿐 죽은 것 같지 않다.    눈감고 편안히 누워 산천의 흰 눈 맞으며 언 땅 밑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소년병의 잠    「고향산천 . 18-어느 소년병의 잠」은 어릴 적 기억의 재생이다. 6,25 때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춘천에서 30리쯤 떨어진 시골 ‘곰실’이란 곳으로 피란을 갔다. 시내에서는 식량도 없고 횡포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후퇴하는 한패의 인민군 병사들을 보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그들은 패잔병으로 기진맥진한 몰골이 처참했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다리를 절며 걸어와선 쓰러지던 그들의 모습. 그 중에는 총신을 질질 끄는 소년병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시화하며 그들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죽음은 언젠가 깨어나야 할 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봄이 오면 그들은 깨어나리라. 그들은 잠을 자면서 비로소 산천의 햇빛과 만나고 맑은 새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리고 언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의지를 그려 보았다    『고향산천』이후 나는 20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을 광풍 같이 휩쓸고 간 1980년대의 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내 존재에 대한 탐구와 순수서정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시절 내 시의 표현이 지향하는 것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구현하는 방법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선한 감각의 시어가 빚어내는 이미지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지는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시의 의미를 싱싱하게 지속시켜주는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이미지는 그 자체가 언어의 투명한 보석이 되어 자율적(自律的)인 독립적 가치를 지니면서 언어의 한계를 돌파하고 시의 세계를 무한히 넓혀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나에게 고민이 되는 것은 이미지의 객관성과 주관적인 정서의 적절한 조화(調和)와 현실의 문제였다.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영혼, 생명, 그리움, 신적(神的)인 존재 등 ―을 중시하여도 현실의 문제들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현실의 문제들도 문제의 원형(原形)속으로 들어가서 이미지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나는 또 시각적(視覺的)인 이미지와 함께 들리지 않는 소리를 시속에 담아보려고 시도하였다. 이 소리는 시속에서 의미를 감각화(感覺化)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시의 리듬을 돋구어주고 신명을 불러들이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3편의 시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서 두 번째 시집『당신 또는 파란 풀잎』에서 골라 본 것이다.     아직 개발開發되지 않은  컴컴하고 습한 지역을 아시나요     눈 내리는 날 우리 그곳으로 가요  그곳에는 아직도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  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  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  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인가人家와는 멀리 떨어져  마을의 길은 이미 끊어지고  컴컴하고 습한 진흙 벌만 계속되는  미개발의 그 곳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 저녁이면  자연의 거대한 사원寺院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  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  젊은 신神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  -------- 전문     이 시의 제목을 처음에는 “신神들의 마을”이라고 했는데 너무 직선적인 것 같아서 이라고 고쳤다. 그리고 시 전체의 이미지는 흰 색과 검은 색을 대조시켜 시의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도록 하였다.     나는 이 시에서 생명의 고향이 어디에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면서 개발(開發)이라는 인위(人爲)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컴컴한 잡목림(雜木林)속에서 벌어지는 생명들의 움직임과 그들의 환희를 동적(動的)인 이미지로 그려보려고 하였다. “고생대古生代의 신神들이 살고 있어/이렇게 눈 내리는 날 저녁엔/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가지 사이에 집을 짓고/웅웅 벌떼처럼 날아다니며/소리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하얀 잡목 넝쿨 사이사이/얼굴 비비며 히히덕 히히덕 너풀춤 추는/젊은 신들의 환한 노래 소리가 들려요”라고 시의 앞뒤에 시청각(視聽覺)이 서로 한 데 어울린 동적인 이미지를 넣은 것은 생명의 움직임과 환희의 감정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그려보려는 의도였다. 윤강원(尹江遠)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월평(月評)에서 “성스러운 것, 활달하고 자유로운 것. 평화스러우면서도 원형적(原形的) 생명감이 충만한 것에 대한 열망이 일종의 복귀의지의 꿈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 시를 깊이 이해하고 시에 담긴 의미를 높은 정신세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나는 이 시에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기운을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신(神)을 등장 시켰다. 이 신은 생명의 원형을 은유적(隱喩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독자들은 원시적인 에니미즘(animism)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각적인 이미지에 중점을 둔 시로 또 「수부水夫의 꿈」과 「벼랑 위의 꽃」을 들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검은 꿈의 바다를  떠도는 수부水夫  한밤중 달의 은사시빛  밧줄이 부서진 내 배의  동체를 끌고 간다.  나는 저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곁으로 가고 싶다.  그것이 항해의 끝이 되어도  설령 내가 영혼만으로  떠돈다 할지라도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나는 얼마나 황홀한 빛의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인가.  그 곳에는 악惡도 선善도,  오직 순수한 신神들의 소리만 살아  고생대古生代의 바다가 아직도 파도 친다.  아아, 나의 첫 항해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차디찬 꿈의  빙산氷山을 지나 더 멀고 먼  푸른 바다로 떠나가야 한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그 모래밭까지  --「수부水夫의 꿈」전문     앞의 시 「흰 수염 달린 떡갈나무 숲- 신神들의 마을」이 외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데 반해 「수부水夫의 꿈」은 시인의 내면의식을 시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시다. 두 편의 시에 공통점이 있다면 생명의 원적지(原籍地)를 찾는 의식의 흐름이다. 나는 이 시에서 내 존재의 고향을 찾아 항해하는 수부(水夫)가 되었다. "북해北海의 빙산氷山, 사시사철 하얀 풀잎으로 덮인 지구地球의 지붕, 황홀한 빛의 침대, 고생대古生代의 바다, 내 시간時間의 바닥이 환히 보이는 해변" 등은 내 의식을 객관화하여 드러내기 위한 은유의 언어이고 상상(想像) 속의 그림이다. 나는 불교의 선(禪)이 지향하는 세계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 세계는 선(善)과 악(惡), 죽음과 무(無)의 세계를 넘어선 푸른 바다와 같은 생명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시는 관념적(觀念的)이고 사색적(思索的)인 내용이 중심이 되는 시다. 나는 벽돌같이 딱딱한 관념을 부드럽고 신선한 상상의 언어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어는 관념어와 구상어(具象語)의 조화를 시도하였으며, 객관적인 이미지와 주관적인 정서를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친근감과 시적인 감흥(感興)을 주기 위해서 "나"를 시의 화자로 삼아 독백조(獨白調)의 어조로 시를 구성하였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들을 아시는가     우리들이 산을 오르다  잠시 바위 위에 앉아 땀을 들일 때  그 꽃들 만나고 가는 바람이  우리들 머리나 가슴을 향기롭게 스치고 지나가고  그 때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란 가슴을 드러내곤 하였지     높은 산 까마득한 벼랑 위  바위틈에 뿌릴 박고 피어 있는 꽃     햇볕 따뜻한 날이면  누군가 그 꽃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을 거 같다     이 세상과는 영영 이별을 해버린 모습으로  한평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찾은 듯한 모습으로  속살까지도 빨간 꽃 옆에서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그 곳이 먼 옛날 떠나온 제집인 양 누워 있을 거 같다  ----「벼랑 위의 꽃」 전문     이 시는 어느 봄날 산행 중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갈무리한 시다. 높은 산 벼랑 위 바위틈에 피어 있는 속살까지 빨간 꽃은 실제의 꽃도 될 수 있지만 상상 속의 꽃으로도 확대된다. 저 신라시대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유혹했던 절벽 위의 철쭉꽃으로, 아니면 이승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피어있는 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산행(山行)을 할 때 우리들의 가슴을 더 향기롭게 해주는 것은 그 상상 속의 꽃들을 만나고 가는 바람의 향기라고 차원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햇볕 따스한 봄날 그 꽃 옆에 누군가 잠을 자고 있으리라고 상상의 세계를 넓혀 보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영원한 생명 속에 잠들고 싶어 하는 내 존재의 본래적(本來的)인 모습일 수도 있고, 떠나온 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존재의 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속의 “속살까지도 빨간 꽃”은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상징(象徵)하는 꽃이 되는 것이다.     나는 시의 기능 중에서 이 세상의 허무(虛無)를 극복할 수 있는 기능을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벼랑 위의 꽃」은 그런 면에서 내가 아끼는 시가 되었다. 나는 이 시에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시속의 빨간, 파란 등 색채언어(色彩言語)는 회화적인 효과를 높이고 또 의미를 상승시키는 구실을 하면서 미적 감각과 서정성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시의 표현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의 속뜻을 짚어보면 시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는 존재로 만드는 존재의 암시와 발견, 존재의 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요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나는 내 시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모색하는 시간을 갖고 새로운 시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문덕수 시집『선․〮 공간』(1966,12 성문각)의 시편들을 다시 읽었다.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동영상으로 표출된 초현실의 이미지 세계를 다루었는데, 아쉬운 것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이 시집의 시편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시인이나 평론가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시편들은 40여년이 지난 2008년에 거론되기 시작한 ‘하이퍼 시’의 근원이 되는 시가 되었다.)    나는 2005년 한국현대시인협회 사화집『새는 휘파람소리로 난다』에 게재할 2004년 시단의 총평을 의뢰받고, 「2004년 한국 현대시의 동향과 새로움의 모색」을 집필했다. 그때 현대시의 기법에서 이미지를 중시하는 내 눈을 놀라게 한 것은 오남구 시인을 중심으로 들이 시도하고 있는 ‘디지털리즘 시’ 운동이었다. 그들의 시운동은 넓고 깊은 디지털의 이론을 포괄하지 못하고, 대상에 대한 시인의 직관적인 감성과 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지만 언어에 대한 인식(탈관념, 기호성)과 대상의 생생한 현실을 사진 찍기(염사, 접사)를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이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들의 ‘디지털리즘 시’를 21세기 새로운 시의 모델로 설정하고 집중적인 조명을 하였다. 그들의 시가 나에게 준 영감은 현대시가 의미의 세계(관념)에서 영상의 세계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개인적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한 지식을 쌓고, 오남구 시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생각을 토대로 하여「디지털 시의 이해-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시론을 집필하고, 2006년 11월 금요포럼에서 이 시론을 발표하였다. 당시 포럼에서 돈키호테 같은 내 디지털시의 이론을 지지하고 격려해준 시인은 문덕수 선생님뿐이었다.     2008년 오남구 시인의 제의로 김규화 시인과 함께 3인이 최초의 이 되었다. 나는 2008년 4월호 『시문학』 ‘이슈의 숲길’에서 김규화 시인과의 대담을 통해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시대적 당위성과 미래지향성에 합의를 하고, 하이퍼시의 창작에 몰입했다. 처음엔 하이퍼텍스트 시라고 명명했던 것을 하이퍼시라고 개명한 이유는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를 전제로 한 명칭이라는 점에서 종이 위에 전개하는 하이퍼텍스트시의 명칭은 하이퍼시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현대는 영상 시대이고 인테넷을 통한 수평적인 네트워크 시대다. 따라서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시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디지털 시는 21세기의 감각에 부합하는 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영상 시대의 언어미학과 가상현실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로서 컴퓨터 공간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에서 생성된 ‘하이퍼 시’의 모태가 되는 시가 되었다. 디지털시에서 이미지의 집합적 구조의 바탕이 되는 모듈(Module) 이론은 하이퍼시에서 리좀(Rhizome)의 이론으로 바뀌었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정신의학자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가 합동으로 저술한 『천개의 고원』에서 말한 리좀은 수직적 선형(線形)을 탈피한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이루어졌으며, 서로 대립적인 독립관계를 갖는 세계지만 서로 연결되고 결합함으로써 다양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연출한다는 점에서는 모듈 이론과 부합되었다. 그래서 기존의 시를 수직적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시라고 하면 하이퍼시는 수평적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하이퍼시(디지털 시)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의 수직적 논리적 사고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은 내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2010년 5월 푸른 사상사)에 들어 있는 하이퍼 시의 조건과 특성이다. 그러나 이 조건과 특성은 굳어진 틀에 갇힌 고착적(固着的)인 것이 아니라는 데서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하이퍼시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내 하이퍼시(디지털시) 초기의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공간의 시 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4개의 단위(unit)로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에 흐르는 의식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이 시의 내면에는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갈구는‘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려는 설득적 표현과는 전혀 다른 암시적인 보여주기(showing)의 기법이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은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에서 이 시에 대한 평가로‘특이성이 없는 범용성’의 시라는 지적과 함께 “그 주제에 속할 수 있는 장면을 누구라도 계속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시가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특이성이 없는 범용성(凡庸性)이라는 그의 지적은 하이퍼시의 일반화(난해성의 해소와 독자와의 소통)를 위한 방향제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 같다.    한국 현대시는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현대시의 시대정신이다. 언제까지 과거의 언어에 갇혀 있을지 답답하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 시나 하이퍼 시는 이 시대의 시 현장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의 길은 다양하고 모두가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쪽만 고집하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현대시인협회 기관지 『한국현대시』12호 에서 “현대시의 전통과 변화를 그 대립적인 면만 강조하면 현대시는 시대정신의 범위에서 이탈 되고 말 것이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할 때,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다양한 에너지가 충만한 시가 탄생하리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끝으로 위에서 서술한 나의 시 쓰기의 방법을 요약하면 197,80년대의 현실문제의 시⟶1990년대의 존재의 의미 찾기와 순수서정시⟶2000년 이후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의 3단계로 나누워진다. 이 3단계의 밑바탕에는 이미지즘(imagism)이 들어있다. 자연발생적이고 관념적 표현에서 벗어나 하나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려는 이미지즘은 내 시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중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지로 형성된 내 시편들의 내면에 끊임없이 ‘생명의식’이 흐르고 있기를 염원한다.  
5    시와 생명/심상운 댓글:  조회:895  추천:0  2019-03-02
  시와 생명                                             심 상 운                  그리움, 사랑, 이별, 고향, 어머니, 아버지, 당신(임), 만남, 세월 등의 단어를 벌려놓고 보면 한국현대시에서 서정시가 위치하고 있는 영역을 조감(鳥瞰)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이 단어들은 이성(理性)보다는 감성(感性) 쪽에 더 가까운 단어들로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추출한 단어들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의 서정시에는 이성이 자리 잡기 힘들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사유(思惟)의 시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시가 주관적 정서의 배출구가 되고 대부분의 시인은 새로운 세계를 기피하는 안일(安逸)에 젖게 된다. 그러나 그런 소재(素材)의 시들도 사물(事物)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실제경험이 시어와 정밀하게 교직(交織)될 때, 시의 차원(次元)이 상승되고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각과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시가 되기도 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향수」1,2연  이 시에서는 “지즐대는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등의 세밀하고 감각적 표현이 신선한 생동감(生動感)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반복적인 구절이 만들어내는 음악적 리듬을 음미하게 한다. 정지용 시인은 1930년대의 시단에서 주관적 관념, 영탄적인 서정의 언어와 대립되는 객관적이고 사실(사물)적인 이미지의 시를 보여줌으로써 ‘서정시의 혁신(革新)’을 몰고 온 모더니즘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물과 정서와 언어를 냉정하게 이어주는 이성이 숨어있다.   이성보다 감성과 정서를 중시하는 경향의 시풍은 18세기~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浪漫主義)와 같은 계열로 인식된다. 대표시인 W.워즈워스는『서정민요시집(抒情民謠集)』에서 “시란 힘찬 감정의 발로이며, 고요함속에서 회상되는 정서에 그 기원을 둔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엄격한 규율이나 규칙, 정형화되고 교훈적인 고전주의(古典主義)의 틀을 깨고 인간의 상상력(想像力)과 감정을 최고조로 높이는데 시의 중심을 두었으며, 무의식적(無意識的) 정신작용, 꿈과 환상(幻想), 초자연적 세계, 순수하고 원시적인 세계관을 크게 강조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진지하고 강렬한 시는 기본적으로 창조적 상상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서 발췌정리) 지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 있으랴: 그냥 지나쳐가는 자의 영혼은 무디어라 이처럼 감동적인 장관을 두고: 이 도시는 지금 옷을 입고 있구나 아침의 아름다움을; 말없이, 드러내놓고, 선박, 탑, 원형지붕, 극장, 교회들이 누워 있다 들판과 하늘을 향해,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태양은 일찍이 이보다 더 아름답게 첫 햇살로, 골짜기, 바위 혹은 언덕을 비춘 적 없고;  나는 이같이 깊은 정적을 보지도 느낀 적도 없나니! 강물은 제멋에 유유히 흘러간다; 오 하나님! 집들마저 잠든 듯 하네요; 그리고 저 힘찬 심장은 고요히 누워 있고! ----- 워즈워드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김철교 번역  이 시는 시인의 객관적인 관찰(觀察)이 보이지만 감각적인 언어의 이미지보다는 낭만적이고 개인적인 감성과 영탄이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워즈워드)는 이른 아침 템즈 강의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아직 잠에서 깨어나기 전의 도시를 보고 “모두들 매연 없는 대기 속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문명과 대립되는 원시적 자연을 찬양하는 시인의 정신이 빛을 내고 있다. 그것은 낭만적인 시에도 깊은 사유가 들어있으며 그 사유는 개인적인 범주를 벗어나서 인간의 본성과 일치되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한국의 서정시와는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브룩스 (Cleanth Brooks) 는 해설에서 “이 시는 아이러니를 내장하고 있다”고 했다. 깨어나서 활발하게 북적대는 도시가 실은 가장 죽은 상태이고 오히려 죽은 듯 고요한 순간의 도시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현대시에서 1936년에 간행된 서정주(徐廷柱) 주재의 시 동인지『시인부락(詩人部落)』과 유치환(柳致環)이 주재한 시 동인지『생리(生理)』(1937)를 중심으로 서정주, 오장환, 함형수, 유치환 등이 ‘생명파(生命派)“란 시의 한 그룹을 형성한 것은 높은 가치를 갖는다. 그들은 일상적인 서정에서 탈피하여 가장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인간 생명의 탐구라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시적가치를 삶 자체의 여러 현상에 두고 있다. 그 중에도 서정주의「화사(花蛇)」와 유치환의「생명(生命)의 서(書)」가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麝香) 방초(芳草)ㅅ길  저놈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석유 먹은 듯……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드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스며라, 배암! ----서정주 「화사(花蛇)」전문       이 시는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의 표제가 되는 시로서 그의 초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배암’은 이 시의 바탕이 되는 토속적 원시(原始) 생명주의(生命主義)의 관능적 세계를 상징하는 존재로 ‘원초적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순녀에 대한 시적화자의 육체적 욕망이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입술……스며라, 배암!”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관능을 통한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세계라는 독창적인 미적(美的)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19세기『악의 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샤롤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퇴폐적 관능미와 저항정신이 한국의 토속적 원시 생명주의와 결합하여 생긴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성적욕망의 예술적 드러냄이라고도 해석된다. 따라서 이 시는 구약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뱀의 유혹을 중심소재로 하고 있지만, 인간을 타락시키기 전의 원초적 생명의 신비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생명(生命)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나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처럼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의 서」전문    이 시에는 시적 화자가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번민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현실의 삶을 떠나 아라비아 사막의 불모지대로 가서 생명의 본질을 치열히 추구하겠다는 열망이 들어있다. 그래서 시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고민, 좌절, 절망의 끝에서 허무의식(虛無意識)을 극복하고 일어서려는 강인한 의지가 뜨거운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열렬한 고독”의 길을 가고자 하는 시적 화자의 의식에는 참된 '나'를 깨닫지 못한다면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는 죽음의 비장한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참된 '나'란 세사(世事)에 집착하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넘어서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초인(超人)’과 맥을 같이하는 허무를 극복한 근원적 생명과 순수성의 자아라고 해석된다.     서정주의「화사(花蛇)」와 유치환의「생명(生命)의 서(書)」는 ‘생명’을 대상으로 한 시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화사(花蛇)」는 ‘뱀’이란 소재를 통해 원시적 생명력을 감성적으로 포착하여 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반면,「생명(生命)의 서(書)」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이성적이고 의지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對照)를 이루는 시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는 생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탈색되지 않는 강렬하게 생동하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김규복의 시「설거지」,「청소부」도 개인적 서정에서 벗어나서 생명의식을 시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라는 점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잘 가거라, 너희들 꽁치뼈 명태살 젖은 상추도 갈 때는 탁 트인 큰길로 함께 가거라 살 주고 피 주고 머리 잘리고 마지막 남은 뼈로 어깨동무해 잘 가거라, 너희들 주인집 등불 꺼진 다 저녁에 밑둥 잘려 바스라져 흐느적해도 뜯겨진 옆구리를 서로 껴안고 마지막 남겨진 붉은 눈으로 엉키고 안겨서 함께 흘러라 손 없고 입 없는 그 몸으로 지하에서 지하로 끝없이 가서 인도지나 반도 그 어느 해안가 같이 살 따순 마을 이룰 때까지 서로 부벼 다정히, 부디 너희들. --------김규복 「설거지」전문 나는 바퀴벌레의 아버지 기인 아파트 맨 밑구멍 쓰레기 하치장 문을 열고 자루마다에 폐기더미를 담을 때 다정한 그 놈들 내 어깨와 등을 타고 올라와 입 맞출 때 수백 마리 바퀴벌레로 옷 입은 나는  흡사 갑옷과 투구를 쓴 위대한 병사 가득가득 자루에 담아놓고 잠시 도시락을 풀으면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흰밥을 까맣게 덮으며 달려드는 그 놈들 묵중한 기중기를 앞세워 내가 쓰레기 정글 속을 빠져나갈 때에도 끈질긴 한 놈 장화 속을 파고드네 그래, 같이 가자 이다음 이다음에 땅속에 함께 들어박힐 때까지 우리 껴안고 썩는다면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리 ------김규복 「청소부」전문   나는 1991년 이 시편들이 들어있는 김규복 시인의 시집 『줄 타는 사내』의 을 쓰면서 이 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설거지」는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으며 삶의 본질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어 독자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사실적인 서술이 갖는 객관성과 냉혹성이 시인의 뜨거운 모성애에 의해 용광로의 쇳물처럼 녹아 감동적인 울림을 전해 주고 있다. 흡사 지장보살의 말씀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다. “손 없고 입 없는 그 몸으로/지하에서 지하로 끝없이 가서//인도지나 반도 그 어느 해안가/같이 살 따순 마을 이룰 때까지/서로 부벼 다정히, 부디 너희들.”이라는 끝 부분의 구절에 들어있는 이 시인의 모성적인 마음이 이 시를 얼마나 따뜻한 생명의 시로 만들어 주고 있는지 거듭거듭 음미하게 한다.「청소부」에서도 이러한 시인의 마음이 짜릿하게 감전되어 온다. 미물 중에서도 사람의 미움을 받는 바퀴벌레를 노래하는 이 시인은 첫 연에서 “나는/ 바퀴벌레의 아버지”라고 선언하고 “그래, 같이 가자// 이다음에/ 땅속에 함께 들어가 박힐 때까지// 우리 껴안고 썩는다면/ 너와 내가 무엇이 다르리”라고 끝 연을 맺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중생이요, 중생의 마음은 모두 같으며 그 마음을 포용하는 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생명의 보편성과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 생명존중의 근본 마음으로 대상을 관조하고 그것을 절절한 감동의 언어로 승화시킬 줄 아는 이 시인의 건강한 정신세계의 깊이를 독자들은 이 시를 통해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으로 가늠하리라고 생각한다. 라고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그때 나의 해설이 빗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 저 새와 나무와 짐승들과 사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면 생각의 폭이 무한해지고 세상이 새로 보이게 된다.    십여 년 전 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인터뷰기사를 보고 스크랩을 하였다. SBS 자연다큐 전문 PD 윤동혁씨가 한 말이다. 그는 생명의 소중함을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저절로 나온다면서, “결국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로 모아져요.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가 핵심이죠. 관심을 기울이고 집요하게 추적하면 좋은 프로가 나오게 됩니다.” 이 말은 시에도 해당됨은 물론이다.    다음 시는 『세계명작 동요동시집』(계몽사 1977년 4월 9일)에 실려 있는 영국 시인 월터 드라 메어의「살려주」라는 시다. 일상생활 속에서 특히 주부들이 늘 경험하는 주방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충격적인 울림을 준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잘 전달해 주고 있는가를 거듭 생각해보았다. 에그 에그 어서 빨리 와 봐요 기름에 튀기는 빵 속에서 생선이 뭐라고 하는 것 같애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기름 속에서 주둥이를 불쑥 내밀고 “살려주” 그랬어 울상이 되어서 나좀 살려 달랬어 그러면서 보글보글보글 기름 속으로 갈아 앉았어 ----월터 드라 메어「살려주」전문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에게 묻더라도 생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생명은 사람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의 우월성을 내세워서 인간의 생명만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간중심주의(humanism)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현대철학자들 사이에서 현명한 인간이란 의미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자연과 문명을 공존시키는데 실패한 인간이라는 의미로 추락하고, 공생인간(共生人間)이라는 호머심비우스(Homo symbious)가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사고(思考)의 전환을 의미한다.   끝으로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 좋은 시는 우리들의 생각을 열어주는 시, 고정관념을 허물게 해주는 신선한 상상과 감각이 들어 있는 시, 깊은 사유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시. 그리고 독자들의 마음속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심어주는 시라고 결론을 지어본다. 이런 시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영속적인 힘을 스스로 안고 있으며, 그 자체가 약동하는 정신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  
4    하이퍼시의 소통 공간/심상운 댓글:  조회:883  추천:0  2019-03-02
하이퍼시의 소통 공간                                                                                    심  상  운   21세기 현대시의 이미지는 의미나 심상(心象)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표(記標)가 생동하는 하이퍼(hyper)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상상은 유추(類推)의 끈을 매달고 있지만 공상은 유추의 끈을 끊어버리고 무한한 미지(未知)의 영역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런 현상을 문덕수 원로시인은 그의 시론「내면세계의 미학」에서 ‘대상에서의 해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외면세계의 공간과 시간의 질서가 혼란해진(anarchy) 내면세계의 무의식(無意識)의 표출이라고 하였다.  의 하이퍼시는 이런 이미지의 세계를 원천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하이퍼시는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 언어작업의 예술적 산물(産物)이 되었다. 따라서 그 새로운 이미지의 공간은 현실과의 만남에서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자율적(自律的)이고 창의적(創意的)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현대시로서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하이퍼시의 시론이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젊은 시인들의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표현양상을 포용하는 시론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은 시의 공간을 확대하고 시적영감(詩的靈感)의 원천이 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하여도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서 극복해야할 과제가 남는다.  그래서 기존 관념의 해체와 단절을 소통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기법으로 하이퍼시는 다선구조(多線構造) 속에 ‘현실과 초월의 결합’이라는 구조를 정립하였으며, 서사적(敍事的) 이미지 속에 의식과 무의식의 자연스런 합성공간(合成空間)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이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과 초월’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합성’을 계기(契機)로 하여 새로 열리는 의미의 공간은 기존의 시와 차별화를 이루는 바탕이 되고, 독자들에게 의미유추(意味類推)의 즐거움도 안겨주는 시적 소통의 공간이 되고 있다.      발간사  2016년 7월   
3    한국현대시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 이미지의 생산적 활용/심상운 댓글:  조회:942  추천:0  2019-03-02
한국현대시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 이미지의 생산적 활용                                                                        심 상 운 어떤 시든 시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의 모사(模寫)가 될 수밖에 없다. 현대시에서 관념을 배제한 사물시(事物詩)도 현실의 모사(simulacre)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대상이라도 그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인식과 표현에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는 현대시는 대상의 내면을 투시하려고 하지만 주관이 개입된 감성적이고 객관적인 관점과 언어의 상징성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진실추구’라는 현대시의 명제이다. 진실 또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문제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ideal)와 연결되는 문제로서 신(神)이나 절대적 또는 영원한 존재 아래에 인간의 현실이 위치한다는 위계적(位階的) 사고(思考)에 머물게 되기가 쉽다.  그래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진실이니 진리니 하는 관념에서 탈출하여 이미지의 결합을 중심으로 ‘이미지의 다양성과 평등성과 독립성’을 통해 시의 예술성을 중요시하는 하이퍼 시(hyper poetry)의 시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의 평등성과 독립성은 현실의 모사나 반영을 모두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과 공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시에서 시뮬라크르의 이미지가 새롭게 생명력을 펼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예로 필자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아침 10시, 그녀는 파란 의자에 앉는다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TV 속에서는 굶주린 하이에나 두 마리가 뚝뚝 뻘건 피 떨어지는 누우 새끼의 허벅지를 입에 물고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다) 그녀는 파란 의자 위에서 구름이 만든 아이스크림을 한 입 넣어 물고 무거운 가방을 든 검은 외투의 사내에게 손을 흔든다 사내도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짓한다 버스 안은 침묵들이 움직이고 있는 빈 악보 속 같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표들이 투명한 물방울로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녀는 그 방울들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터뜨린다 그럴 때마다 방울 속에서 나온 노란 알몸의 소리들이  쪼로롱거리며 버스 안에서 뛰어놀다가 바람에 실려서 도시의 하늘로 줄지어 날아간다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출렁이는 바닷물이 그녀를 덮친다 그때 그녀의 가슴 속에서 뛰쳐나온 물고기 한 마리가 은빛 지느러미를 퍼들거리며 튀어오른다 순간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빌딩 눈부신 유리창 속으로 날아 들어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는 은빛 비행기 (그 은빛 비행기에는 검은 외투를 벗어버린 알몸의 사내가 타고 있었다고?) 아침 11시, 빨간 버스는 아마존 숲 위를 날아가고 그녀의 파란 의자는 더 반짝이기 시작한다 -심상운의「파란 의자」 전문  
2    변화하는 시의 현실과 하이퍼시 / 심 상 운 댓글:  조회:835  추천:0  2019-03-02
 변화하는 시의 현실과 하이퍼시 심  상  운                                                                                            1.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젊은 시들의 변화는 필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기성세대가 관념시, 낭만적이고 독백적인 서정시, 사회적 이념의 시를 고수하려고 해도 젊은 시인들은 과거의 인습적인 사유나 관념에 대한 거부와 함께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것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남조 시인이 부정적으로 지적한 “실험적인 젊은 시인들이 해부칼로 인체를 갈라 보여주는 것 같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것”(2010,1, 18)과도 연관된다. 이 ‘보여주기(showing)’는 과학적인 관찰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에 접근하여 시를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으로 이해된다.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구체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혁신적 표현의 중심에는 대상을 실제의 상태로 인식하고자 하는 사물시(事物詩)의 객관적 시각과 디지털적 감성(영상성, 현재성, 정밀성)이 들어 있다. 디지털적인 감성(感性)은 하이퍼 시에서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가상현실은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같이 현실과 비현실을 통합하는 제 2의 공간이다. 그래서 그 공간은 이미지들이 관계를 맺는 순간의 상황에 따라  변화가 이루어지는 창발적(創發的)인 공간이 된다.  21세기 현대철학에서 ‘창발론(創發論)’을 제창한 승계호 인문학 석좌교수(미국 택사스 대학교)는 2007년 대우재단과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한 에서 그의 논문「마음과 물질의 신비」를 발표하였는데, 그는 그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분자는 분리 불가능한 속성을 가지므로 창발적 존재자이다. 분자들이 결합하여 세포를 형성할 경우, 이 또한 창발적인 작용이다. 단세포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할 경우에 다세포 유기체가 창발한다. 그런데 창발은 물리적이거나 유기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동차나 시계도 창발적인 생산품이다. 이들 기계는 그 부분들이 분리되어 작용할 경우에는 수행할 수 없는 기능을 수행한다. 모든 예술 작품들 또한 창발적이다. 아름다운 그림은 그 부분들의 단순 합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음악은 그 음악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소리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속성을 갖는다. 모든 사회적인 조직도 핵가족이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간에 창발적이다.”    이 글에서 단세포를 보통 시의 단선구조의 이미지로 다세포를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의 이미지로 바꾸면 창발적인 구조의 하이퍼 시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단절된 이미지들의 집합적 결합과 연결을 시의 기본 구조로 하는 하이퍼 시는 창발론과 연계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 이미지들이 지향하는 사고(思考)의 공간은 20세기 프랑스의 사회 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 철학자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가 말한 ‘야생적 사고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그 연결은 디지털 시의 모듈(module) 이론을 대신하여 질 들뢰즈((Gilles Deleuze) 가 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 )와 함께 저작한『천개의 고원』에서 큰 줄기가 잘못되면 전체가 위험한 수목형의 반대 유형으로 제시한 뿌리 형의 사고-땅속에서 부단히 증식하면서 다른  뿌리줄기와 마주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식물의 뿌리-를 의미하는 리좀(rhizome) 이론을 중심이론으로 설정한 하이퍼 시의 이론과 미리 정해진 목표가 없는 미지(未知)를 지향하는 야생적 사고와의 만남이다. 야생의 사고는 경험을 중심으로 한 감성적 표현으로 세계를 조직화하는 ‘구체성의 논리적 사고’이면서도 기호적(記號的)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적 기법에서 구체적인 재료를 사용해 매번 새로운 의미나 관계를 만들며 어떤 질서를 창조해내는 기법이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는 그런 예술기법을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한다.    따라서 문명적이고 과학적 사고가 추상적(抽象的)인 논리의 틀 속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길들여진’ 사고라고 한다면, 구상적(具象的)이고  야생적 사고(신화적인 사고)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시인들이 이미 길들여지고 정해진 관념에 기대지 않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길들여지지 않은 고도의 암시성(暗示性)의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시적 경향은 하이퍼 시가 지향하는 다선구조의이미지 세계와 동반적(同伴的)인 관계(關係)가 된다.  2. 이런 변화의 양상은 2015년 신춘문예 당선시의 심사평에서 드러난 현대시의 난해성(難解性)에 대한 이해에서 발견된다. 일부 심사위원들은 시의 완성도(完成度)를 중요시하면서도 신인들의 시가 개척하고자하는 새로운 시의 공간과 미개지(未開地)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암시(暗示)의 매력에 대한 평가도 인색하지 않게 하고 있다. 그들은 시의 서정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난해성을 인정하고 젊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두운 사회현상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를 상상의 언어로 암시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의미보다는 자유로운 상상 쪽으로 시를 유인(誘引)하는 언어감각의 시편들에 대한 인정이다. 이런 경향의 시편들은 언어의 유희성(遊戱性)을 발판으로 언어의 연상(聯想)이 펼쳐내는 신선하고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담은 다선구조의 이미지 창출(創出)을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나)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는 황지우, 이문재, 남진우의 심사평과 “시라는 이름의 관행적 작문방식에 갇혀 오히려 생과 세계의 피 흐르는 실상으로부터 시 자체가 유리되는 자가당착을 돌파하는 패기의 글쓰기, 한국어의 갱신과 재구성이 그로부터 시발될 글쓰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것은 무조건 정당한가. 바로 이 오래된 물음을 또한 고통스럽게 치르는 가운데 일종의 시적 윤리성을 확보한 글쓰기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희망의 새로움이지 ‘새것 흉내’가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문정희, 김사인의 심사평은 한국현대시의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의 흐름에 어울리는 평문(評文)으로 주목되었다. 나는 쌈을 즐깁니다  재료에 대한 나만의 식견도 있죠  동굴 속의 어둠은 눅눅한 김 같아서 등불에 살짝 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낱장으로 싸먹는 것들은 싱겁죠  강된장, 과카몰리* 등 다양한 봄철, 입맛이 풀릴 때 나는 구멍이 송송, 뚫린 배춧잎을 새로운 쌈장에 찍어먹습니다 달콤한 진딧물 감로를 섞어 만든 장 어떤 배설물은 때로 훌륭한 식재료가 되죠 두꺼운 것들은 싸먹기 곤란합니다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에도 누명과 모함은 숨겨 있죠  적에게 붙잡히면 품속의 기밀을 구겨 한입에 삼켜요 무덤까지 싸들고 가는 비밀도 있습니다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 구멍 난 방충망은 경계가 소홀합니다 누군가 달의 뒷장에 몰래 싸놓은 알들 나는 긴 혀로 나방을 돌돌 말아먹는 두꺼비를 증인으로 세웁니다 사각사각, 저 달을 갉아먹는 애벌레들 수줍은 달을 보쌈해간 개기월식  삼킬 수 없는 과욕은 역류되기도 하죠  보름달을 훔쳤다는 나의 누명이 시간의 부분식으로 벗겨지고 있습니다 --- 조창규「쌈」전문 *아보카도를 으깬 것에 양파, 토마토, 고추 등을 섞어 만든 멕시코 식 쌈장  의 당선작 조창규의「쌈」에는 ‘쌈’ ⟶ ‘동굴 속의 어둠’⟶ ‘스치면 베이는 얇은 종잇장’ ⟶‘어둠의 봉지에 싸인 이 밤’⟶‘구멍난 방충망’⟶‘달의 뒷장’,⟶‘긴 혀’⟶‘보쌈’으로 이어지면서 쌈장 속에 사물과 자연 현상을 포괄하는 다양한 상상의 다선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도 구속되지 않는 시적 화자의 유머가 일상적인 관념을 깨뜨리고 있다.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 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두레박으로 소문을 나눠마신 자들이 전염병에 걸린 거목의 마을 레드우드 꼭대기로 안개가 핀다, 안개는 흰개미가 밤새 그린 지하의 지도 아이를 안은 채 굳은 여자의 왼발이 길의 끝이었다 끊긴 길마다 우물이 피어났다, 여자의 눈물을 성수라 믿는 사람들이 물통을 든 채 말라가고 있었다 잎 떨어진 계절마다 배설을 끝낸 평면들이 지하를 채워 나갔다 부풀지 못한 뼈들을 눕혀 물길을 만들면 사람들의 발목에도 실뿌리가 자랄까 안개가 사라진다 흰개미가 우물 입구를 닫을 시간이다 우물은 떠나지 못한 자의 피부다 ---- 최은묵 「키워드」전문   의 당선작 최은묵의 「키워드」는 우물을 상상의 키워드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죽은 우물을 건져냈다//우물을 뒤집어 살을 바르는 동안 부식되지 않은 갈까마귀떼가 땅으로 내려왔다” 는 1,2연만 읽어보아도 이 시의 우물은 실제의 우물과는 전혀 다른 감성과 상상의 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의 ‘우물’ 이미지는 이 시대의 우울한 상황과 결부된 암시적 비유(譬喩)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발상(發想)의 측면에서는 구체적인 재료를 사용해 매번 새로운 의미나 관계를 만들며 어떤 질서를 창조해내는 브리콜라주(Bricolage)의 예술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 ‘죽은 우물’을 중심으로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를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모호해서 소통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고도의 암시성은 시에 있어서 결함보다는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나희덕, 정호승의 심사평이 신선하게 감지된다.   12월,눈발에 꺾여 소리가 유턴한다 시비월 시비시비 걸면서 월월월 개들이 짖는다 노을을 향해 짖는다 철도노조 위원장 코스닥판 김선달 갓 삶은 행주로 흘러내리는 붉은 해를 닦아내야 하는지 검푸르게 녹스는 수평선 청동거울을 내버려야 하는지 是非是非是非 月月月 동굴이다 개기일식이다 묵은 친구 묵은 체증 묵은똥을 갈무리한다 일단 그냥 가자 正正正 정월이 온 뒤에 U턴을 해야겠다 -김예태 「U턴」전문  
1    하이퍼시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심상운 댓글:  조회:932  추천:0  2019-03-02
하이퍼시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해명      심 상 운                                                                              1. 독자와의 소통문제에 대한 해명    하이퍼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독자와의 소통이다. 독자들은 논리와 감성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비순차적이고 비논리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을 골간으로 하는 하이퍼 시의 ‘의미의 불확정성(不確定性)’에 당황하게 된다. 그 근본원인은 현대시의 대부분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의미의 발굴’을 시의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하이퍼 시는 기존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전혀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을 중심개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의 창출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불확정성은 하이퍼시에서 이미지 사이에 인과관계가 직선적으로 형성되지 않고 서로 굴절되고 단절됨으로써 독자들의 머릿속에 이미지만 떠다니고 의미의 형성이 분명해지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현실과 초월, 무한한 상상을 통한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결합과 확장은 기존의 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시의 미개지(未開地)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언어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의식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보다 더 깊고 넓고 모호(模糊)한 무의식(無意識) 속에서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융합된 제3의 세계를 시를 통해 경험하는 것은 독자들의 입장에서 매우 신선하고 새로운 시적 개안(開眼)의 경험이 될 것이다.    다음의 글은 2015년 2월호 월평에서 발췌한 양병호(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의 평문(評文)이다. 이 평문을 인용하여 김석규의「저녁 귀가」와 심상운의 시「빛 또는」의 시적구조의 차이와 두 편의 시가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줄곧 젖어 있는 일에 이력난 가난은 죄가 아니다 꾸부정한 비애의 어깨 너머로 물드는 잿빛 도시 건너 동네에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간다 솔기 터진 일상의 피댓줄에 꼬여 사정없이 돌아가버린 허리 아픈 하루도 이렇게 속절없이 저물고 마는 것을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꾸려들고 돌아가는 저녁 변두리 백일장 나가서 장원하고 온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김석규, 「저녁 귀가」 전문    이 작품은 일상의 시간 특히 저녁 무렵의 시간을 섬세한 묘사를 통해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 여기서 시간은 시인의 전경화 된 인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배경화 되어 있다. 예컨대 시간은 이 작품의 정서를 얼비쳐주는 배경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화자의 생은 가난하고 피곤하다. 그러나 가난은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죄’가 아님을 확인한다. 이는 가난한 삶에 대한 보호적이며 위안하는 심리이다. 화자가 생활하는 공간 역시 ‘잿빛 도시’로서 우울하고 권태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이러한 도시 공간에서 우울과 비애에 젖어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생활은 “어둠이 오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상황으로 표상된다. 말하자면 ‘어둠’이 앞장서고 그 뒤를 ‘불빛’이 따라가는 암울한 삶의 과정이 은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후반 생략)    검은 옷을 입은 빛이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서 부르르 부르르 떨기 시작하는 시간    성난 개들이 어둠 속 4차선 도로를 횡단하며 번쩍이는 빛을 향해 컹컹 짖어대고    한여름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선 배구를 하고 있는 맨발의 30대 비키니 여자들의 번들거리는 붉은 살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가 푸른빛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한껏 팔을 벌리고 있다 ―심상운, 「빛 또는」 전문    이 작품은 시상 전개 혹은 이미지 결합 층위에서 의도적으로 완결성을 방해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대상은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설정 역시 인과성이 나 논리성을 자의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예컨대 임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의미의 불확정성을 강화하고 있으며, 시상 전개 과정에서도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를 배치하고 있다. 우선 시제에서부터 “빛 또는”이라는 불완전한 어구 제시를 통해 미완의 의도성, 여백의 판단정지를 강조하고 있다. 1연은 이 작품의 시간 배경에 대해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시간 표상을 목표하고 있지는 않다. 우선 1행의 ‘검은 옷을 입은 빛’이라는 역설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하여준다. ‘빛’과 ‘검은’은 서로 친밀성이 희박한, 아니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러나 ‘옷’이라는 매개물과 ‘입은’이라는 매개 속성의 개입으로 의미성을 획득한다. 예컨대 ‘빛’은 ‘검은 옷’을 ‘입어서’ 발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빛’이 ‘검은 옷’에 차단 유폐되어 자신의 진실 혹은 본질을 발현하지 못하는 왜곡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은 현재 시간 “무표정한 아파트 유리창에 매미처럼 붙어” 있다. 이 구절에서 부각되는 의미소는 ‘무표정한’이라는 감정의 노출 억제 상황이다. 또한 ‘매미’라는 사물의 속성이 환기하는 짧은 생애라는 시간성이다. ‘붙어’있는 상황 역시 고정된 상태가 아니어서 위약한 접합성을 드러낸다. 결국 ‘빛’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떨기’시작한다. 따라서 시간 배경을 형상화하고 있는 이 1연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암시적으로 재현한다.  2연은 ‘개들’의 행위가 집중적으로 중첩되어 표상되고 있다. 개들은 우선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이 난 상태이다. 하여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표출하는 상태인 것이다. 여전히 개들은 ‘어둠’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그 개들의 지향은 길을 따라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4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나아가고 있다. 동시에 개들은 ‘번쩍이는 빛’을 향해 짖어대고 있다. 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거부하는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즉 이 시의 1, 2연은 암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시간 공간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그런데 3연에서는 장면이 급격하여 전환되어 환한 여름의 바닷가로 장소 이동을 한다. 시간은 ‘빛’의 절정기인 여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공간은 해변으로서 완전하게 개방되어 자유로운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시공 속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 인지 대상인 ‘여자들’역시 ‘맨발’과 ‘비키니’차림으로 육체를 완전하게 노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폐쇄되고 차단된 시공 때문에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1,2연과 달리, 3연은 개방되고 자유로운 시공의 특성으로 인하여 밝고 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4연은 ‘흰옷을 입은 장발의 50대 남자’의 모습과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인물 ‘남자’를 묘사하고 있는 이 구절에서, ‘흰옷’은 ‘검은 옷’과 ‘장발’은 ‘맨발’과, ‘50대 남자’는 ‘30대 비키니’와 각각 대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실내 즉 임시로 가설된 ‘무대’에서 외부의 ‘하늘’을 향하여 팔을 벌리고 있다. 예컨대 이 남자는 폐쇄 차단된 어둠의 공간에서 무한한 빛의 공간인 ‘하늘’을 수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주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 작품의 시상 전개를 의미 부여를 통해 재구축하여 보았다. 이 시는 서로 대립되거나 이질적인 요소 혹은 사물 특성을 자유연상으로 처리함으로써 빛과 어둠의 혼성이 주는 추상적인 감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간과 공간은 현실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 혹은 심리에 내재한 관념적인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 「시간, 관념과 실재 속에 유랑하는」(양병호) 『시문학』 2015년 2월호 에서 발췌 인용    김석규의 「저녁 귀가」에 대해 “일상 시간의 순차성에 따라 시상이 질서 있게 전개되고 있다. 서정시의 특징인 단일한 정서 혹은 순간적 서정을 압축하여 제시하는 전범을 보인다.”는 평문과 심상운의 「빛 또는」에 대해 ‘의도적으로 완결성의 방해’ ‘의미의 불확정성’ ‘의도적인 절연을 통해 공소의 배치’ ‘몽타주 기법’, ‘시인의 내면심리’, “이 작품은 독자가 시인 혹은 화자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 시적 정조에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등의 비평언어는 일반적 서정시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집어낸 것으로 인식된다.    김석환 (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은 이런 한국 모더니즘 시의 현상을「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에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는 양립관계의 개념으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다. 위에 예시한 시를 김석환의 이론에 대입하면 김석규의「저녁 귀가」는 구축적 구조의 시이고, 심상운의 「빛 또는」은 탈구축적인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에서    구축의 시는 유기적 관계로 전체성을 형성 하는 시적 구조를 형성하고, 탈구축 시는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모호한 의미, 암시적이며 다의적이라는 그의 해석은 하이퍼시의 탈구축적 특성의 한 부분을 적시(摘示) 것으로 이해된다.     현대철학에서도 구성(구축)과 해체(탈구축)라는 개념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분류하고 있다. 철학자 김형효(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조성택(고려대 교수), 한형조(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도흠(한양대 교수)과의 에서 동서양의 철학사를 관통하는 관점에서 철학을 구성주의 철학과 해체철학으로 양립시키고 있다. 구성주의 철학은 인간의 이성(理性)을 기반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는 철학이고 해체철학은 진리를 구성하는 인간주의(人間主義)의 이성을 부정하고 자연 본래의 면목을 드러내고자 하는 철학으로 이해된다. 이런 철학적인 관점은 시의 내용과 주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다음 글은 인터뷰의 일부다.    “철학이란 동서고금에 너무 많고 철학사를 보면 너무 복잡해서 진리가 무엇인지 회의가 들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철학은 대단히 간단해서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구성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해체철학입니다. 구성주의는 자연의 인간동형론(人間同形論)이죠. 다시 말해, 인간을 설명할 때 자연과 비교하여, 즉 인간만 얘기하면 동어반복에 그치니까 변증법적으로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여서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의 모든 이성주의(理性主義) 철학과 동양의 주자학(朱子學)을 들 수 있습니다. 구성주의 철학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형이하학적인 구성주의로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그런 의미의 형이하적인 구성주의가 있고, 형이상적인 이성주의가 있는데 도덕형이상학적(道德形而上學的)으로 정의의 입장에서 세상을 재편하겠다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명사에서 보면, 편리의 진리는 자본주의와 직결되고 정의의 진리는 사회주의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지만 철학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둘 다 이성(理性)에 의해서 세상을 구성하고 지배하겠다는 의도에 있어서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해체주의는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의 철학적 한계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물론 해체주의가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도 해체주의적 전통이 있었는데 에크하르트, 스피노자, 과거 독일의 심미주의 시인들, 예를 들어 하이데거가 대표적이고, 동양은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佛敎)가 해체주의를 대변해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해체주의는 인간이 진리를 구성하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보편적인 자아(自我)든 이기적인 자아든 간에 인간의 자아에 의해 생각된 진리로 세상을 구성하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세상은 이미 여여(如如)하게 있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무명(無明)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괴롭습니다. 세상엔 여여한 법이 있는데 그 법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세상에 자기의 생각을 덮어씌우려고 하니까 더 괴로운 것입니다.”    김형효 교수가 분류한 구성철학과 해체철학에서 구성주의 철학의 유위(有爲)는 현대시의 관념(觀念)에, 해체철학의 무위(無爲)는 현대시의 탈관념(脫觀念)에 이어진다.   철학은 시인들에게 사유(思惟)의 나침반역할을 하고 시의 내용과 언어형식에도 관여한다. 독자들도 자기가 읽는 시가 어떤 철학과 연결되느냐 하는 것을 인식할 때 더 흥미롭고 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래야 구성주의의 상투적인 대중적 서정시, 사상의 권력화를 형성하는 ‘사회적 의식의 시’ 형이하학적 사유의 ‘교훈적인 시’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옹호하는 ‘관념시“의 틀에서 해방될 수 있고, 하이퍼시의 난해성(難解性)이 또 다른 시의 영역을 여는 문(門)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성주의와는 다른  사물성(事物性)의 탈관념의 세계, 모호한 의미와 암시성의 이미지가 떠도는 가상의 공간, 다의적 감각의 이미지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현대시의 심층을 탐색하는 언어 탐험가가 되어 현대시가 제공하는 독특한 정신적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현대음악, 현대회화를 감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 분야를 집중공부해서 얻는 즐거움과도 같다.         2. 하이퍼시의 탈관념에 대한 해명     관념이 지배하는 시는 시인의 사상, 주장, 감상 등이 노출되는 시다. 이런 시는 시어 사이의 유사성과 논리적 관계로 인해 구축적(構築的)인 기존 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하이퍼시의 가상공간이 만들어 내는 시적 현실과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가 떠도는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하이퍼시에서 탈관념의 완강한 고수(固守)는 하이퍼시를 현실과 유리된 언어유희의 시로 몰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필자는 이런 점을 예측하여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의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53쪽 ②에서 “디지털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관념에 대한 지나친 배척은 자칫하면 황당성과 미로, 미궁 그 자체에 머무르고 말 확률이 사뭇 크다. 따라서 독자들에게서 외면당할 수 있는 확률도 그만큼 크다.”는 김몽의 견해와 (「절대적자유와 무변의 공간 ㅡ감각하고 사유하는 시」연변 조간신문 2014,6,26) 최진연이「하이퍼시의 이해」에서 제시한 “일체의 관념을 배제한다면 유희성만 남을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살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가치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모두 수용할 여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관념어의 노출과 설명적, 개념정의적(槪念定義的) 언어는 하이퍼시가 중심요소로 삼는 이미지의 형성을 방해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배제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결합과 확장을 통해서 시적 정서와 감성과 의미를 암시하는 이미지의 덩어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퍼시의 탈관념은 무관념이 아니라 기존 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개념정리도 매우 조심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3. 하이퍼시의 비판에 대한 해명   새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문화관광부의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기획 프로그램으로 정과리가 주도한 「언어의 새벽」, 2004년 11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최동호‧이성우 등이 구현한 「팬포엠 Fan Poem」 프로그램 제작 프로젝트 등은 하이퍼텍스트의 기법을 시의 창작에 응용(應用)함으로써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국현대시의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정부와 민간의 자금으로 시도한 이 작업은 그 기획의도가 시대성에는 부합되었지만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여 시장성에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였으며 작품의 완성도도 미흡해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사이버 공간 속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는 실험이었다는 데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실패의 원인은 여러 측면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텍스트(작품)가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보다 독자의 몰입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에 독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여 기존의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허물어버리고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는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의 ‘이상적 텍스트’의 개념도 독자들에게 창작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함으로써 독자들의 입장에서 흥미 없는 작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좌절의 환경 속에서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종이에 인쇄된 시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시적 공간을 구현해 보자는 시적 방법론을 제창한 것이 하이퍼시 탄생의 모태가 된 심상운(필자)의 시론 「디지털시의 이해」(2006년 12월『시문학』에 발표)이다. 이 시론에서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탈관념  (사물성의 언어)의 언어들이 디지털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디지털시가 '의미의 예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시의 공간 확장이다. 그것은 한 편의 시 속에 하나만이 아닌 몇 개의 언어단위(이미지)가 결합될 수 있으며, 그 언어단위(단어, 문장)들은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디지털시의 기법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하이퍼시에는 탈관념, 언어의 기호성과 영상성, 가상현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등 디지털시의 원리가 깔려 있다. 디지털시의 모듈은 하이퍼시의 리좀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혁(문학평론가)은「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에서 “문제는 하이퍼텍스트 시스템의 ‘통치기계’로서의 일면을 억제하고 그 시스템이 지닌 긍정적인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데에 있으며, 그래서 하이퍼텍스트 환경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그 환경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시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심상운( 필자)의 시론집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에서 내세우는 하이퍼시의 시론을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한국 현대시의 대응 태도’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시’의 한 예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라는 자신의 시를 들고 있다. 이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 ‘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가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인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로 되어 있지만 ‘하이퍼시’는 다선구조로 이루어진다면서, 위의 시를 그 예로 들고 있다. 그는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①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② 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③ 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④ 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되었고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의 공간의 시”며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와 관련된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고 한다.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는 나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 시적 화자가 “푸른 야채를 먹는” 방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가구들, 회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모두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즉 이 시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이 자연풍경, 사회, 실내의 식탁, TV 화면에서 포착되어 ‘다선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각 연은 ‘본능적인 갈구’를 따라 링크되어 ‘하이퍼’하게 연결된다. " ---- 「한국 현대시에서의 하이퍼텍스트 문제 고찰」(이성혁)에서 발췌인용   그는 이렇게 심상운(필자)의 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를 하이퍼텍스트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1930년대 김기림의 장시「기상도」와 비교하면서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허를 찌르는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거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의 시는 그 주제에 속할 수 있는 장면을 누구라도 계속 이어붙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시가 하이퍼텍스트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시는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만을 보여주고 있어서 독자의 의식에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질적인 이미지들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하이퍼시의 특성에 대한 그의 긍정적인 이해와 인식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하이퍼시가 풍자나 위트 전복적인 표현이 가지고 있는 현실참여적인 비판과 이념(理念)의 구축적 시와는 대립되는 탈관념의 언어, 의미의 불확정성, 다의적이고 암시적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탈구축적 시라는 점에서 비교의 잣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가 비판한 ’특이성을 성취하지 못한 범용성‘은 하이퍼시와 독자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시의 하이퍼성은 이미 초현실주(超現實主義) 시에서  시도하고 구현하였으며 하이퍼시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현대시에서도 구현되고 있다는 그의 지적에 동의한다. 따라서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자생(自生)한 하이퍼시는 이미 잠재되어 있는 현대시의 하이퍼성에 의해 이해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일반화되어 한국현대시 담론의 중심에 오를 것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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